하늘영광교회 영적각성집회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녹취자: 김경애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에 대해서 관심을 갖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 분명하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경배도 모든 열심도 헛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은사는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에게 소중한 은사는 지식의 빛입니다. 즉 진리의 빛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믿으며, 믿는 우리는 누구인지를 아는 참된 지식이 있고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성립합니다. 하나님께 올바르게 예배하게 되고 그렇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그 안에서 우리는 경건을 소유하게 됩니다. 경건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사는데 그 핵심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 경건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에 잇대어 살아가는 인간의 참 존재의 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 세상에 보여주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단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참 본질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삼위 하나님 안에 있던 사랑과 생명이 그들에게 흘러들어갈 수 있는 도구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결국 하나님은 이 땅에 당신 자신을 확장하십니다.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끊어졌던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에 공급을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인간들에게 나아가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확장하심으로써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이 가지셨던 의도대로 온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시는데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창조주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우리들의 즐거움과 행복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위대한 일의 처음 시작은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내용이 없는 참된 신앙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그 모든 우주 삼라만상의 진리의 핵심입니다. 올바른 방식으로 지식을 탐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지식을 많이 얻으면 얻을수록 그리스도 예수의 빛이 희미해져갑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이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은 그 진리를 올바르게 탐구하면 탐구할수록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함, 그 존재의 탁월함과 그 성품의 아름다움과 그리고 그분의 선하심에 마음이 끌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계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물 가운데 그 모든 사물이 휘돌고 있는 중심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진리들은 원래 하나님 안에 있던 것들인데 그것들이 쪼가리, 쪼가리 흩어져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직 우리들이 영혼의 어두움과 지성의 눈멂 속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감각적인 이 세상에 살면서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지성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우리로 하여금 참되고 영원한 것들을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혹은 이 세상의 학문에 의해서 지성 안에 난 이 많은 인식론적인 상처들을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말해서 우리들이 복음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깨닫게 되면 이 세상의 쓸데없는 모든 어리석은 이 세상의 견해들이 우리의 마음에서 씻기게 되고 그리고 모든 진리의 핵심이시고 모든 진리의 총화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탁월함을 우리들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믿는가 하는 내용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알고 있느냐 이것도 믿음의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설교 속에서 소위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역사적인 신앙을 가지고 야고보서를 유장하게 풀었습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귀신들도 믿고 떠드느니라.’ 그랬습니다. 18세기의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휫필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마 18세기에 있었던 설교자 가운데 가장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소수의 사역자 가운데 한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이 만약에 알기만하고 그것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칼빈주의자가 되던 아니면 펠라기우스주의자가 되던 마귀도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시대의 조국교회에서 복음의 가치를 알고 복음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알고 있습니다.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알고 그리고 복음으로 모든 교회가 돌아가야 한다고 굳게 믿는 여러분들에게 나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여러분과 같이 복음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동료로서 여러분들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만약에 단지 아는 것, 집착하는 것이 전부라면 우리가 율법주의자와 복음주의자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언젠가 우리 교역자들이 모이는 곳에서 우리 교역자들이 들으면 충격을 받을만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 찾아오는 사람들마다 저에게 하는 이야기가 ‘목사님은 청교도를 사랑하신다면서요? 청교도에 대해서 좀 가르쳐주세요.’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나는 청교도를 좋아하지만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나는 청교도는 좋아하지만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나는 누구보다도 청교도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청교도의 시대가 가장 복음으로 가까이 돌아간 시대중 하나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청교도의 믿은 그 내용만을 우리들이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믿었던 그 방식을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도전합니다. 청교도를 몰랐을 때에는 율법주의자였는데 그래서 사람들에게 ‘왜 주일을 그따위로 지킵니까?’ ‘주일을 성수했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의 잘못을 보면 정죄를 하고 그리고 자신은 그런 것들을 이미 준수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보다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하는 자긍심 속에서 살았습니다. 마치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그 바리새인처럼 말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저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그리고 박하와 혜향과 채근채의 십일조를 주님께 드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 세리와 나는 질적으로 다른 인간이라서 참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뻐겼습니다. 그중에 바리새인이 하는 말 중에 거짓말이 있습니까? 모두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나는 복음주의자다. 이러는 사람들이 단지 믿는 내용이 복음이라는 사실만 바뀌었을 뿐 그 복음을 알고 이해하는 방식이 율법주의자가 율법을 알고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그것은 율법주의적인 복음주의자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서 누가복음 18장의 기도를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시대의 많은 교인들과 나는 다른 사람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율법보다는 복음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저는 교리를 많이 압니다. 청교도를 사랑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청교도 누구누구를 사랑하지만 그 사람이 청교도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고 있고 청교도가 믿는 내용을 자신도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청교도의 위대함은 믿음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믿음의 내용을 경험하는 방식에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위대한 생명의 원천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질병이 많고 고통이 많은 시대 어느 책에 보니까 청교도시대 때에 남자들의 평균수명이 34세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수많은 기근과 핍박과 고난 속에서 수없이 피를 뿌리며 죽어갔으면서도 그렇게 이 땅의 위대한 성자들로서 꿋꿋하게 연단된 꿋꿋함과 성숙한 경건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위대한 힘은 단지 그들이 복음이라는 믿음의 내용 그것 하나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두 손으로는 자기가 믿는 내용을 굳게 붙들고 있었지만 교회는 파리하던 시대가 많이 있었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깡마른 정통, 말라깽이가 된 복음주의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복음에 대한 지식과 그 위에 덧붙여야할 오늘 이 설교 속에서 다루고자하는 아주 중요한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 복음의 내용이 우리의 영혼과 인격 깊은 곳에서 경험되어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복음주의자가 되는 길입니다. 세뇌된 복음주의와 경험된 복음주의의 차이는 하늘과 땅입니다. 경험되지 않은 세뇌된 복음주의자는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그리고 남의 중생 여부나 따지고 모든 인간들을 회심하지 못했다고 비난하고 자신은 회심의 증거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모든 지식은 그 지식이 비록 복음에 대한 지식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을 교만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저는 13년 동안의 목회의 과정 속에서 그런 속임수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습니다. 교리를 잘 알고 있다는 뻐김, 그리고 자신이 신앙의 중심이 복음이라는 것에 대한 자만심, 그리고 자신과 동일한 시각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아주 하찮게 여기는 마음의 태도, 그런 것들은 경험된 복음주의자의 삶의 실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잠시 전에는 율법을 붙들고 살면서 율법을 지킨 자신 때문에 우월감을 가지고 그것을 못 지킨 사람들을 하찮게 여기며 살더니 이번에는 무슨 계기가 있었는지 복음주의자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복음지식을 붙들고 사는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고 신앙이 복음이 무엇인지를 똑바로 모르기 때문에 믿는 내용이 희미한 사람들을 아주 하찮게 여깁니다. 섞이려고 하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복음을 알지 못하는 무지 속에 있는 그 영혼들에 대한 눈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입에다 호두를 하나 넣어보십시오. 깐 호두 말고 알갱이 통째로 말입니다. 입에서 수없이 굴려보십시오. 그러고 나서 한참 빨아먹고 뱉은 사람에게 호두의 맛이 어땠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그 호두의 맛은 말할 수 없이 감미롭고 기름지고 달콤하다는 말을 한 사람에게 매우 실망하면서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 껍질 속에서 무슨 맛이 나겠습니까? 차갑게 냉장된 수박을 주면서 먹으라고 말할 때 그것을 어떻게 먹는 것인지 몰라서 혓바닥으로 그 표면을 핥은 사람에게 수박이란 시원한 물방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깨뜨려져서 그래서 그 속에 있는 과육이 자신의 치아 사이에서 꽉 씹혀 입안 가득히 번지는 그 호두의 기름기와 감미로운 견과의 맛, 이것이 입안 가득히 퍼질 때 침샘에서는 침이 솟아오르고 하얗게 짓이겨진 호두의 과즙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 온 입안에 가득히 번지는 호두의 향, 그 속에서 호두의 참맛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점에 있어서 굉장히 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들 속에 있는 아주 미묘한 그런 오류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평신도들 중에 청교도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을 별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교역자들 속에서 많이 만났습니다. 늘 청교도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치열한 비판과 그 다음에는 모든 사물들을 보고 판단하는 데에 있어서 항상 무엇이 나와 다른가를 주목하는 그런 탐색하는 눈, 그리고 자기와 같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그 탁월한 우월감, 그러나 그들 중에 청교도의 향기가 느껴지는 사람은 아주 소수였습니다. 청교도의 Spirituality가 무엇이냐고 내게 물으면 나는 Melting Heart 라고 말합니다. 청교도의 영성의 핵심은 녹아내리는 마음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무한한 질적 차이를 경험하면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아주 비천한 인간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Melting Heart’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녹아내리는 마음 이것이 청교도적 Spirituality의 핵심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 무한한 임재 앞에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끼는 그 녹아내리는 마음, 찬란한 진리의 빛 아래 피할 수 없게 티끌까지 드러나는 그 찬란한 복음의 빛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주 미세한 자신의 죄악까지도 볼 수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이 악함과 그리고 불결함을 인해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청교도들이 새롭게 만들어낸 신앙의 유산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이래로 더 확장하자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던 믿음의 조상들의 모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모든 사랑스러운 사람들은 Melting Heart의 세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다윗을 기억해보십시오. 저는 그 사람을 말하기를 구약에서 광대한 우주 속에서의 하나님을 발견했던 최고의 철학자인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시편을 남겼고 청교도 존 오웬의 지적과 같이 구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도 없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녹아내리는 마음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제왕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승리하는 위대한 장군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셔서 충만한 성령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찬란한 우주의 세계를 보면서 사유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찬양하고 봉사를 해야지만 겨우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영성은 기독교적인 영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찬양)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밤하늘에 펼쳐진 우주를 보면서도 그는 가슴 벅찬 눈물로 찬양을 올렸습니다. 궁창까지 미치는 여호와의 신실함, 그분의 진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당신 자신의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여정에 있어서 성경 속에 나오는 최고의 모델로 삼은 사람이 둘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는 다윗이었고 신약에서는 바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후일에 자신의 모든 정신적인 방황을 회상하던 고백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수많은 철학자들의 글들을 읽으며 인생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그러나 누가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줄 수 있는가? 누가 나에게 참회의 눈물을 가르쳐준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위대한 영혼을 가지고 있음에도 참회하는 눈물, 돌이키는 회개, 하나님을 향한 그 불변하는 뜨거운 사랑, 이런 것들을 가르쳐주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 인류의 지성사 속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믿음의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그래서 열린 교회 교인들에게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기독교를 선택했다는 더 넓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선택하셨지만 어쨌든 종교로써 기독교를 선택했다는 이것에 대해서 무한한 지성적 자부심을 가져라. 당신들은 최고의 종교인 동시에 최고의 철학을 택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의 모든 지혜, 그리고 그 모든 위대한 능력, 하나님의 이 창조의 세계를 향한 그 모든 선과 아름다움 가운데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진리의 엑기스가 복음입니다. 그러니 어떤 철학이 그 복음의 내용을 능가할 수 있겠으며 사실 그 철학과 복음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복음에게는 견딜 수 없는 모욕이고 사실 그 철학에게는 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그렇게 천사들도 흠모할만한 그 훌륭한 내용을 믿음의 내용으로 붙들지 못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 세상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과연 이 땅에 복음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500여 년 전에 마틴 루터가 이야기했듯이 돼지우리의 새끼들 같습니다. 자신이 왜 교회에 다니는지 거의 모릅니다. 믿음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그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인지 교회에 봉사하는 것인지 자기의 클럽에 헌신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믿음의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차이입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믿음의 내용을 아는 방식이 요즘 젊은이들의 하는 말로 너무 까칠합니다. 그러니 그 복음을 올바르게 믿음의 내용으로 삼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이 까칠하니 그 복음을 안다는 것은 입안에서 호두를 돌리는 격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신앙의 위대한 힘은 복음 이데올로기의 힘이 아닙니다. 복음신앙의 위대한 힘은 생명의 실제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바로 이 삼위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을 인간의 영혼 속에 전달해주고 그 본성의 변화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삶과 인격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실제로써 흘러넘치는 것처럼 그 사람을 통해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 속에 스며들고 넘쳐 새로운 생명과 사랑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조국교회의 희망이 되는 소수의 사람들은 그래도 복음의 착념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심리학, 마케팅, 엔터테인먼트, 이런 것으로 뒤범벅이 되어서 교회와 세속 사이의 구별이 거의 없는 시대에도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복음의 내용을 붙들려고 합니다. 조국교회의 희망도 그러나 내용을 교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은 돌아가는 것인데 생각이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으로 돌아가자고 부르짖는 것은 생각만 돌려보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 우리의 전 자아와 삶이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러기 위해서는 그 복음이 경험되어야하는데 이게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아닌 것을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는 영혼의 허함이 있습니다. 영혼의 허함이 반복되면 지성이 자신의 가던 길을 의심하게 됩니다. 이것이 참으로 맞는 것일까? 그때에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또 다른 방식의 설득에 의해서 복음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고 그것이 참 신앙의 본질일 수 있겠다고 생각이 바뀔 수 있습니다. 또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이 ‘귀신도 믿고 떠드느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복음에 가깝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무슨 커다란 안전이라도 보장되는 것처럼 스스로 위로합니다. 그러나 거기는 시작일 뿐이고 끝이 아닙니다. 그 증거를 한번 말해보겠습니다. 과연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은 율법주의자들보다 더 많이 기도하고 있습니까? 기도하고 있습니까?
복음의 내용은 지성의 설득을 통해서도 우리의 마음속에 수납될 수 있지만 그 복음 안에 있는 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오직 성령 안에서 인간들에게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복음의 실제를 호두를 깨뜨리듯이 그 안에 있는 충만한 생명의 능력이 경험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며 기도해야하고 또 만약에 우리들이 그런 능력을 경험한 사람이며 세뇌된 복음주의자가 아니라 경험된 복음주의자라고 한다면 우리의 열렬한 기도생활을 통해서 우리가 과연 그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렇게 많이 기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아주 없지는 않지만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교역자들은 늘 설교하기만 좋아하고 그리고 청교도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 복음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월감을 가집니다.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본문은 보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게 되셨는지에 대한 배경을 소개하는 가운데 나오는 장면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한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라고 말입니다. 누가 기도하셨다고 되어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누가 복음 3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더군다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이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아들이신 동시에 성령을 Without limited 한량없이 받으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존재는 처음부터 죄를 지으시려고 욕망을 가지실 수도 없지만 지으실 수도 없는 분이셨습니다. 교리적으로 볼 때 그런 분이 기도해야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많은 죄 때문에 기도로 그것을 씻어내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설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한량없이 받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왕년에 받은 은혜는 금년까지 가지 않기 때문에 기도해야합니다. 끊임없는 난관과 어려움을 만나는데 우리는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자녀이기는커녕 근심시켜드리는 자녀가 될 때가 많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를 회복해야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 예수께서 진리 자체이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셨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분이었으며 죄는 없는 분이었고 지을 수도 없으신 분이신 성령의 능력을 한량없이 받으신 그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습니다.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혼자 기도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시각은 깊은 밤과 아주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한 20년 전에 왜 예수님의 기도의 시간은 왜 하필이면 깊은 밤 그리고 꼭두새벽이었을까? 그래서 우리도 그 본을 본받느라고 이렇게 고달픈 것일까? 왜 예수님은 그렇게 불편한 시간에 기도를 하셨을까? 거기에 무슨 심오한 뜻이 있을까? 여러 날을 지혜를 구하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습니다. 결론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새벽에 심오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시편에 나오는 밤중에 기도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러면 무엇이냐? 새벽 미명의 시간과 깊은 밤에는 이 세상에 있는 불쌍한 죄인들을 섬기실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병든 자들과 무지한 자들을 내버려두고 그들은 고통을 받든지 말든지 나는 한적한 기도의 세계를 누려야 되겠다고 그들을 피하여 사라지신 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날도 틀림없이 예수님께서는 밤늦게까지 사역을 다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잠드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수종하느라고 지쳐서 잠든 제자들이 아직 이 새벽에 곤하게 잠이 곯아떨어져 있을 때 예수님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발뒤꿈치를 들고 제자들이 깰세라 문을 살며시 열고 아직도 별빛이 총총한 그 새벽 미명의 시간에 들판이나 산으로 나아가셨을 것입니다. 바로 그즈음 마가복음 1장을 읽다가 학교 교수실에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예수님이 새벽 미명에 일어나셨다고 되어있고 그리고는 그 오랜 기도 끝에 복음을 전하시고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으시고 베드로 장모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 심방을 가시고 그리고 저녁 늦은 시간에 숙소로 돌아오시니까 각색 병든 자들이 가득했습니다. 근무시간이 끝났으니까 돌아가라고 그러지 않으시고 일일이 다 기도해서 고치셨습니다. 기도만 해주셨겠습니까? ‘다시 가서는 죄를 짓지 말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라. 은혜를 유지하여라.’ 가르쳐주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일하신 그 다음에 나오는 기록이 이런 기록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새벽 미명에 기도하시러 한적한 곳으로 가서.’ 나옵니다. 책상에 엎드려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뼛속깊이 배인 이 게으름, 삶의 모든 시간에서 나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 잘못된 우선순위,
(찬양)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만 섬기며 따르기로 한 나 세상이 주는 이 모든 괴로움 이기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제 생애에 가장 풍부한 기도의 은혜 속에서 살던 시기였습니다만 그 구절을 읽으면서 한없이 무너졌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존귀하신 그분의 그 고결한 손으로 죄를 짓기 위해서 다니던 악한 인간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들의 헌데를 싸매시며 자신의 육신으로 모든 섬김의 제물을 삼으셨는데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그런 생애를 살게 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며 살려고 하는 우리 같이 연약한 인간들에게 참으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인간의 삶, 이 죄 많은 세상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 복음의 진리를 붙들고 사는 신자의 삶에 실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하나님이 생생하게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엎드려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자신을 남김없이 우리를 위해 다 주셨습니다. 나는 말을 너무 아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이 마음속에 아주 간절한 소원이 생겼습니다. 누가 나더러 한 번의 설교로 수많은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위대한 설교자가 되겠느냐? 한 번의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기도의 사람이 되겠느냐고 물으면 30초도 망설이지 않고 후자가 되겠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름 있는 설교자가 되기보다는 무명의 기도자가 되고 싶다고 가슴속에 깊이 새겼습니다. 13년의 긴 세월 험한 파도와 같은 목회의 삶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내안에 있는 더러운 욕망과 그런 욕망을 함께 가지면서도 신자의 길을 가려고하는 주님들에게 에워싸여 살면서 이 소망은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떠오르기도 하고 흐려지기도 했지만 결코 완전히 없어질 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속에 계속 살아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녹아내리는 마음 하나님이 그 마음을 아주 아름답게 보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녹아내리는 마음의 본질이 다른 마음과는 다르기 때문에 그 마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모든 의지를 받아들이고자하는 자기 포기의 마음입니다. 모든 능력과 모든 자비를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고자하는 그런 절대 의존적인 마음이 하나님의 사람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글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온 우주 안에서 보다 당신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성도의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당신 자신의 살을 깎고 뼈를 쪼개며 우리에게 어떻게 복음을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야할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Melting Heart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오늘 여기에 모이는 복음을 사랑하는 형제자매들 우리 모두 한번 자신에게 불어봅시다. 지금 앉아있는 자리에서 성경이 눈물에 흠뻑 젖도록 얼마나 시간이 흘렸는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신 십자가의 사랑과 그런 사랑을 받기에 전혀 합당하지 않은 추루하기 짝이 없는 나 자신의 더러움을 발견하면서 내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나 같은 인간의 죄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소진하신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마음이 녹아내리며 눈물로 그 자리를 흠뻑 적셔본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가 그렇게 둔감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깊이 찌르는 것은 그 다음 대목입니다.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이 ‘마치시매’ 라는 희랍어 단어는 ‘에파우사토’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휴식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 동치어가 ‘샤바뜨’ 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창세기 1장에서 예수께서 창조하시고 쉬셨다고 할 때에 처음으로 쓰인 그 단어입니다. 쉬다, 안식하다. 라는 뜻의 단어이고 이 히브리 단어 샤바뜨에서 ‘샤바뜨데인’ 이라는 안식일이 나온 것입니다. 이 번역은 만족스럽지 않은 번역입니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예수께서 어떤 곳 안에서 기도하시고 쉬시매’ 라고 번역해야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 간단한 단어 하나가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 기도가 공중전화를 하는 것 같은 간단한 기도가 아니라 장시간의 기도 즉 너무나 많이 육체의 힘을 소진하신 오랜 시간의 기도였기 때문에 그 기도가 끝나고 나서는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쉬시지 않으시면 안 되는 커다란 육신의 노고를 동반한 헌신적이고 열렬한 기도였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짧고 간단한 기도생활은 경박한 삶을 가져오는 지름길이며 복음을 알기는 해도 그 복음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주된 원인입니다. 이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청교도를 흠모해도 그들의 삶의 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기도를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읽은 지가 오래되어서 이름을 잊어버렸습니다. 목회자들이 모여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큰 성령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청교도시대의 일입니다. 얼마나 유장한 기도를 드렸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었을까? 아닙니다. 그중의 한 목회자가 기도하도록 지정을 받았고 그 목회자는 기도하도록 지정을 받았는데도 기도하지 못하고 끙끙거리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토한 한마디는 ‘오호 주님’ 그때 성령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탄식하는 것 같은 찢어지는 영혼의 고통이 담긴 한마디 앞에 모인 모든 기도자들이 함께 그 마음이 찢어졌고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청교도 목사들이 모였습니다. 유명한 잔 긴레스핀 목사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앙고백의 작성을 위해서 그가 대표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가 모두 끝난 후에 기도 자들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중의 한사람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새롭게 신앙고백을 작성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방금 긴레스핀 목사가 하나님을 찬송하며 드렸던 그 기도의 전문을 신앙고백으로 삼으면 딱 맞겠습니다.’ 그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말쟁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바로 그들 속에 있었던 기도의 질을 배워야합니다. 그들도 예수께 배운 기도의 질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짧고 큰 능력을 불러오는 기도의 예를 말입니다. 그러나 짧은 기도속에서도 큰 능력을 불러 내리는 위대한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도 그런 기도는 위대한 능력을 불러올리지 못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누가 믿느냐하는 것입니다. 짧고 간단한 기도로 큰 능력을 불러오던 사람들은 모두 평소에 장시간 기도로 헌신하는 기도의 세계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이 기도하십시오.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하루에 한번쯤은 마음이 모두 녹아내리는 기도,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는 기도, 나의 생애가 여기에서 끝나도 좋은 기도, 내가 사랑하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과 지금 이별을 하더라도 아쉽지 않은 그런 기도, 그런 기도를 드려도 우리는 온전히 힘써야합니다.
예수님께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면서 새벽 미명에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온 시간은 먼동이 훤히 튼 아침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예수님께서는 외로운 들판에서 광야를 벗 삼아 그 외로움과 함께 이웃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온 마음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온 마음을 다 찢으며 영혼들을 위해,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성취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분의 미완의 뜻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도 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깊이 자기를 소진하며 얽매이기 쉬운 모든 것을 뿌리치고 영혼의 눈을 들어 보좌에 고정시키고 그분 앞에 완전히 부복하며 조국의 교회에 부흥을 위해서, 나의 온전한 삶을 위해서, 주님이 오시기 위해 길이 필요하다면 나의 육체를 가르고 그 사이에 핏길로 걸어오시도록 기도해야합니다. 수없이 많은 구호를 내걸고 새로운 사상을 말해도 역사는 그것들에 의해서 새벽이 밝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어두운 교회의 역사에 여명은 기도의 사람들의 통곡하는 그 몸부림에 찬 기도, 지금은 어둡지만 반드시 새벽이 올 것이라고 믿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찬란한 복음의 빛이 온 땅에 가득할 때까지는 그 기도를 멈출 수 없다는 불퇴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헌신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이 보내실 새로운 시대의 여명의 징조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그렇게 부르고 계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