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사랑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지난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세계의 위대한 경륜을 이루시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바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크고 작은 삶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이 성취되는데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나오는 가정에 관한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정 안에서 바로 그런 하나님의 원대한 우주적인 계획에 이바지하면서 사는 사람들로 성장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가정의 질서의 회복을 위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질서와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말하고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나옵니다. 순종이 복종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만 ‘순종하라’는 말은 희랍어 성경에 ‘아쿠오오’라고 되어있고 ‘복종하라’는 것은 ‘히포타소’로 되었습니다. ‘아쿠오오’라는 것은 히브리어에서 ‘샤마’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일체의 복종심을 가지고 그 말에 단지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마음으로 부복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히포타소’는 질서에 있어서 하나님이 정하신대로 낮은 자리로 위치를 정하라는 뜻입니다. 요점은 복종이라고 하는 말속에는 노예적인 복종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가정을 설계하신 그 의도에 맞게끔 질서 지워진 제 자리를 찾아가라는 뜻이 담겨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덕목이 두 가지가 나옵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괴롭게 하지 말라.” 시간이 없어서 두 개의 덕목 중 “괴롭게 하지 말라”는 설교는 못하고 “사랑하라”는 하나의 덕목만을 설교하려고 합니다. 아내의 남편을 향한 덕목은 “복종하라” 하나인데 아내에 대한 남편의 덕목은 두 가지나 됩니다.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라’는 희랍어의 명령이 ‘아가페테’라는 동사형입니다. 단어는 ‘아가파오’ ‘사랑하다’는 말에서 나왔고 여기의 명사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가페’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이라는 말이 그저 하나이지만 당시 로마사람들, 특별히 그리스사람들에게는 사랑이 어떤 관계에서의 사랑이냐에 따라서 크게 네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즉 남녀 간의 이성적인 뜨거운 사랑은 ‘에로스’라고 불렀고 형제가운데 나누는 사랑은 ‘필리아’의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면에 부모와 자식같이 혈육으로 맺어졌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은 ‘스톨게’라고 불렀고 ‘아가페’는 인간에 대한 신의 맹목적적인 사랑을 가리켜서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아가페’의 사랑으로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명령보다 사실 훨씬 더 가혹한 명령인 것입니다.
당시에 최초의 편지를 받아보았던 골로새교회 교인들에게는 이 ‘아가페’라는 명사의 동사명령은 ‘아가파테’, “네 아내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하는 이 말씀은 굉장히 생경스러웠을 것이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더욱더 생경스럽고 충격적이까지 하였을 것입니다. 왜 그런지 이 문제를 알기위해서는 우리가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서 로마의 시대의 사회가 가정과 어떤 관계를 가졌는지를 잠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로마 사회는 가정의 중요성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사회였습니다. 로마사회는 확신하기를 건전한 가정의 수립 없이는 건강한 제국의 수립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사회는 작은 단위의 가정들이 벽돌처럼 쌓여서 피라미드를 형성하면서 엄청난 제국을 떠받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가정에서 제국의 미래를 책임질 사람들이 생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도 가정은 로마의 제대로 된 시민들을 길러내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짐나지움’이라는 말이 ‘짐노스’, ‘벌거벗은’이라는 형용사에서 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짐나지움에 가면 어린 학생들이 제일먼저 웃통을 벗고 올리브유를 잔뜩 바르고 체육을 합니다. 거기서는 체육이 굉장히 중요한 교육이었습니다. 체육, 음악, 수학, 이런 것들을 공부해 나갔습니다. 이런 것들을 나라에서 건설하는 게 아니라 로마사회의 돈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돈을 벌어서 그것으로서 짐나지움을 만들고 거기에 미래의 로마를 책임질 훌륭한 귀족의 자제들을 데려다가 교육을 시켰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학교교육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정교육은 로마 제국을 건설해 나가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인 로마사회 연구에서 로마시대의 가족은 대가족단위이고 공동체적인 생활을 중시하는 가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대의 연구들은 그와 다른 여러 가지 많은 양상들을 로마의 역사 속에서 찾아냅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의 사회와 가정의 관념들이 절대로 옛날에 생각하는 것처럼 획일적이지 않고 아주 다양한 관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가족제나 공동체적인 생활이 아니라 핵 가정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도 상당수가 있었고, 이러한 제도나 관습을 떠나서 남녀 간의 사랑을 아주 중시하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현대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가운데 남녀들이 만나서 가정을 이룬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하나는 이 편지가 써지고 있던 때 로마제국 전체에서 여성에 대한 깊은 존중 사상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남녀가 평등하다는 사상은 최근에 생긴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유럽이나 미국을 막론하고 19세기까지 사상이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심지어는 예술에 있어서까지 걸출한 여성들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여성들에게 천재성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런 천재성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사회가 허락하지 않은 것입니다. 르네상스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천재적인 예술가들을 배출했지만 여성을 본적이 있습니까? 미국에서도 여성의 참정권이 허락이 된 것이 1920년대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여성들이 로마제국 전체에서 남존여비사상에 의해서 무시당하고 있었고 덕스러운 여성이라고 하는 것은 가정을 잘 돌보고 가족들을 잘 돌보고 성적인 순결을 지키고 남편에게 복종하고 가부장 체제 안에서 자녀들을 잘 건사하는 여성을 높은 덕목을 가진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의견을 다수의 사람들에게 발표하는 것은 남편을 매우 모욕하는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한다고 하여도 확실한 것 하나는 이당시 여성은 남편의 사랑의 대상이라고 보기보다는 남편이 통치하는 질서와 규율 속에 들어와야 할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에로스’의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의 사랑으로 너희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는 이 명령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아주 충격적인 명령이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1세기에 로마시민의 평균 연령이 25세였습니다. 그 절반은 25세 이전에 죽고 절반은 25세보다 조금 더 살았습니다. 그런데 로마시민 전체 평균 연령이 이렇게 뚝 떨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여성들의 죽음이었습니다. 가임기의 여성들이 아이를 낳다가 난산하면서 죽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평균수명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의 사람들은 빨리빨리 성장하고 빨리빨리 공부하고 빨리빨리 장가가서 빨리빨리 애를 낳고 빨리빨리 죽는 사회였습니다. 그런 사회를 염두에 두면서 “너의 아내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라고 명령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아내는 아가페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얕잡아 보고 위협과 강박으로 다스려서라도 남편의 가부장적 질서아래 복종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질서를 부정하면서 오히려 아내와 남편이 인격적인 관계에서 서로를 깊이 사랑하며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속으로 돌아오는 사랑을 나눠야한다는 것을 지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서, 성경은 “남편들아 너희의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사랑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눈만 뜨면 찬송가에는 매일 사랑에 관한 내용들이 나오고, 성경을 펼치면 어디든지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랑은 형이상학적으로 타자와 선한관계를 맺고자하는 영혼과 정신의 경향성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그 자체가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사랑은 상대가 있어야 됩니다. 성경은 요한일서 4장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에이가 비다.”라고 말하려면 언제나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에이는 비이다.”라는 논리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이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들기 전에도 사랑이셨을까? 사랑이셔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해야할 대상도 없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이실 수 있었을까?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셨고, 세인격간에 관계가 있었고, 성부는 성자를, 성자는 성령을, 성령은 성부를, 이렇게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사랑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할 대상이 이 세상에 없을 때조차도 하나님은 당신 자신 안에서 사랑이셨던 것입니다. 그 사랑의 성향이 타자를 원했고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다른 사람과 선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영혼과 정신의 경향성입니다. 그래서 이 힘이 매우 강한 사람은 사랑이 많은 사람이고, 힘이 적은 사람이 사랑이 적은 사람입니다.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영혼의 경향성이지만 현상적인 측면에서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성향이 바로 사랑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은 아내와 선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거가나 없었던 관계를 새로 맺고, 이미 있는 관계는 더욱 돈독케 하는 일을 아내에게 하라는 뜻입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사단칠정론’이나 ‘이기론’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분은 상식으로나마 들었을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인간에게 꼭 필요한 덕목을 ‘인의예지’로 요약을 합니다. 그렇지만 유교에서는 인간을 자기 안에 인의예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교에서는 인간을 인의예지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고 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이라고 하면 감정이 요동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동양철학에서는 사랑의 위치를 감정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사단’, ‘인의예지’는 이성의 기능에 속하고, ‘칠정’, ‘희로애락수오욕’, 이것은 인간의 감정의 기능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어떻게 만나게 되는지를 들으면 우리도 이러한 생각들을 구체화시킬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은 ‘인의예지’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인간의 마음에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참 가엾다.’라는 생각이 드는 게 ‘측은지심’입니다. 자기가 무슨 부끄러운 짓을 하면 ‘아, 창피하다.’ 하는 ‘수오지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혹은 ‘이것은 나에게 너무 분에 넘치는 거다.’라고 할 때 “저는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는 ‘사양지심’이 있습니다. 옳고 그른 것이 섞여 있을 때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시비지심’이 인간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의예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인간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태를 만났을 때 인간의 이성의 맨 끄트머리, 그것이 ‘단’입니다. 그 끄트머리에서 ‘측은지심’을 느껴서 ‘아, 너무 가엾구나. 내가 이 사람을 그냥 두고 지나가면 안 되겠다.’ 그리고 이성의 맨 끝에서 의지가 발동하고 감정이 터지면서 무엇인가 이 사람을 위해 슬픔을 느끼며 기쁨으로 그를 돕습니다. 그러면 ‘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인’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 다음에 내가 잘못한일이 생각나면서 수치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이성의 맨 끄트머리에서 불이 붙으면서 ‘이건 내가 정말 잘못한 것이다.’라는 생각하면서 그 때 자기가 무엇인가 속죄하는 행동을 한다든지 아니면 유혹 받던 것을 접고 올바른 판단으로 돌아설 때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분수에 넘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면 맨 끝에서 ‘나는 이럴 수 없어.’라는 마음이 터치면서 결단을 내리고 올바른 일을 하게 될 때 ‘예’를 이루는 것입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이성의 마지막 끝에서 이것들이 불꽃처럼 터치면서 시비의 판단에 따른 용감한 행동을 하게 될 때 ‘지’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이 맹자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 후에 한나라 시대에 와서 ‘동중서’라는 인물이 ‘인의예지’ 가지고는 모자라고 거기에 ‘신’, ‘믿음’을 덧붙여야 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삼강오륜’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과 감정 모두를 아우르고 우리의 영혼과 정신, 마음전체를 아우르는 인격적인 자유입니다. 우리 부부가 만나서 처음 연애하던 시절이 있습니다. 사랑하려고 노력을 안 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아침에 보고 저녁에 헤어졌는데 밤에 들어가면 또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에 만나면 또 보고 싶습니다. 앉아서 잠깐 이야기하다 보면 7시간 8시간이 흘러갑니다. 그것은 저절로 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부부가 일생을 살면서 항상 이렇게 사랑이 되지는 않습니다. 수반 물리학에서는 사랑의 원인을 도파민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도파민의 유효기간은 18개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내의 임기를 18개월로 할 수는 없습니다. 저절로 되는 사랑은 언젠가 멈추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젊은 사람들은 안 믿겠지만 반드시 옵니다. 그리고 와야지만 그 인간이 비로소 성숙한 인간이 됩니다. 우리교회에서도 보면 결혼한 지 15년이 지났는데도 자기 남편 목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뛰고 멀리서 모습을 보면 설렌다는 자매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남자는 한 명도 못 만났습니다. 결혼한 지 15년 되었는데 저기서 아내가 걸어오는데 설레고 얼굴이 붉어지는 사람은 한사람도 못 보았습니다. 결국은 사랑이 되니까 할 때도 있지만, 결혼해서 사는 부부의 경우,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사랑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품과 인격의 문제가 나옵니다. 그래서 불같이 뜨거운 사랑 하나를 믿고 결혼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젊은이들이 어떤 사람에게 시집을 가야할지 물으면, 제가 항상 하는 말이 첫째는 신앙이고, 두 번째는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사람, 최악의 상황에도 소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없어도 사랑이 생깁니다. 저절로 하는 사랑이었던 적도 있겠지만, 30세에 결혼해서 80세까지 살고 죽는다면 50년인데, 50년 중 상당한 시간은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나무를 심고 함께 가꾸는 것과 같은 과정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일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사랑은 에로스의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이라는 것은 근원자체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내려와서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져야지만 그것을 자원삼아서 아가페의 사랑을 실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맨 처음에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십자가 사랑을 통해 감화시켜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그로 하여금 자기중심성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자기가 만난 모든 사람을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인류를 휘돌아 하나님 자신으로 돌아가는 자기회귀적인 사랑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우주와 세계를 바라보면 하나님은 정말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이 나와서 사람들을 휘돌아서 마지막에 모든 인류를 하나의 사랑으로 묶으시려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계획입니다. 사랑을 모르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까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없이는 그 사람이 아내라고 할지라도 결코 그 사랑은 줄 수가 없습니다. 온 인류를 한 사람으로 묶어 하나의 하나님의 가족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하나의 사랑에서 모든 인류가 갈가리 찢어졌습니다. 찢어진 인류의 사랑을 한 사람 한 사람씩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감화시켜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한 사람이 한 사람이 돌아와서 한 교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 보면 남편이 아내를 어느 정도로 사랑해야 되는지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기를 주심과 같이 사랑하라” 가혹하지 않습니까? 어떤 남편이 나는 아내를 사랑했노라고 감히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한 높은 표징으로 부릅니다. 사랑했어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 표징이 예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못 박는 로마의 병정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아버지, 저희의 죄를 용서하여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한 인간으로 태어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도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생명을 다 바쳐서 살았던 사람들보다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사랑을 하면 많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 항상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랑을 하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훨씬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제일먼저 덕을 보는 사람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랑을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신 사랑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실 때 그냥 주신 것이 아니라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정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셔서 흠도 티도 없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는 교회가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물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도 주님이 명령하셨으니까 사랑하지만 그것이 최종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남편의 사랑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왜 사랑을 받고 싶은 것입니까? “네 소원대로 남편이 지극히 사랑해줬다고 하자, 그러면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 거기에 대답할 수 있습니까? “하긴 뭘해? 남편이 나를 여왕처럼 떠받들고 섬기며 사랑해주면 좋지.” 그러면 그 여자는 하나님이 있어야할 자리를 자기가 대신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랑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남자가 한 여자를 노예처럼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습니까? 그런 사람 데려오십시오. 당장 그러지 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게 누굴 행복하게 하겠습니까? 사랑은 자기 소비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도 사랑 때문이지만, 알고 보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미움이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불행해집니다.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을 사랑하고 잘못된 질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기를, “악이란 잘못된 질서를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유추를 해봅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셨다. 그렇게 하나님은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맞습니까?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그렇게 사랑하셨는데 그게 끝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원대한 목적과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결하게 되고 거룩하게 되어서 흠도 티도 없는 빛나는 존재가 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이 자기를 다 찢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이 있습니다. “그렇게 네 아내를 사랑하라” 마지막에 끝까지 사랑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내를 참사랑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정결하고 거룩해져서 흠이 없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살다가 대개 이혼하거나 헤어지거나 사랑이 끊어지는 이유는 아내에게서 맘에 안 드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 이 여자가 이런 여자였어?’ ‘어, 한 성질 하네. 위아래도 없네. 이렇게 나쁜 사람이었어?’ ‘어럽쇼, 예뻐서 데려왔는데 머리는 텅 비었네. 이런 여자였어? 생각해 봐야겠는데.’ 이것은 결혼의 계획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 신중의 신중을 거듭해야 합니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좋아해도 결혼을 안 할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국 사회처럼 파트너도 사는 것을 권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은 결혼을 결정하고 실행했으면 그 다음에는 무한책임을 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성격이 거칠고 못돼 먹었습니다. 그러면 ‘아, 이 여자가 이런 여자였구나. 혼자 살았으면 계속 이렇게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다가 죽었겠구나. 하나님이 이 여자를 나한테 오게 하신 것은 이렇게 망가진 여자를 나를 통해서 고치고 흠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다.’ 이 사람이 나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한없이 가엾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실 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고 그러는데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항상 그것을 실천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다가 사랑하기 힘든 요인을 발견할 때 ‘그래서 이 여자를 나한테 보내셨구나. 이것이 나의 소명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한테 소명을 왜 이렇게 많이 주실까? 그러니까 잘 생각을 하고 가야 합니다. 이제 일수불퇴입니다. 무를 수가 없습니다.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결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뭔가 나쁜 게 보이면 사랑을 안 합니다. “아내가 왜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거야?” 그러면 하는 이야기가 “고치고와. 그러면 내가 사랑해줄게.” 그렇게 하는 거였다면 둘이 결혼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혼자서 고치지 왜 둘이 만나서 힘들게 죽을 고비 살 고비를 넘기면서 고치게 하시겠습니까? 문제는 이 인식을 갖게 되어도 실제로 이 인식을 따라서 사는 일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뭔가 결점이 발견 되었을 때 모든 인간은 사랑이 식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컴퓨터나 전자기기를 돈을 많이 주고 사서 너무 좋아서 맨날 품에 안고 잤는데 써보니까 이게 후진 것입니다.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한 석 달 지나면 그 다음에는 무를 수는 없으니까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걸 산다고 하면 절대 사지 말라고 쌍지팡이 들고 말리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단점이 발견이 될수록 더 뜨겁게 사랑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국에 갔을 때 새까만 후배들이 좋아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건강진단을 떼어오라고 하더랍니다. 요즘 그런 집은 별로 없잖아요. 중매도 아닌데. 하라니까 둘이 가서 건강진단을 떼어보니까 20대 젊은 청년인데 덜컥 암으로 판명이 된 것입니다. 처갓집에서는 안 된다고 그러는데 그렇게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오히려 더 사랑이 솟구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 속에 자기 남편 될 사람을 향한 사랑이 진짜 많으니까 뭔가 잘못된 것이 발견되었을 때 가여운 마음에 사랑이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매일 솟구치겠습니까?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속죄를 위해 화목제물로 주신바 된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 사랑을 부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와를 창조하셔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했는데 바로 뒷장에서 부부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둘이 싸운 게 아니라 각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니까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셔서 함께 하신 이 여자가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요약하면 “하나님, 왜 이딴 여자 만들어 날 주셔서 이 골탕에 빠지게 하십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이 끊어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불행해질래야 불행해질 이유가 없는 남녀를 주례서본 적이 많습니다. 예쁜 자매들은 아무리 안보낸다고 해도 다 시집을 갑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갑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선택을 하니까 그중에서 고릅니다. 그러나 외모 때문에 생기는 사랑은 얼마나 가겠습니까? 신혼여행에서 대판 싸웠습니다. 유효기간이 6개월이라지만 5박 6일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앉아서 “자네 올해 결혼 20주년을 지나지 않았어?” “어 맞아. 그랬지.” “그래. 아내한테 뭐 좋은 선물 해줬어?” “그냥 다이아반지 큼직한 거 사줬어.” “왜 그랬어? 너희 부인은 우리 모일 때마다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지프차를 선물로 받고 싶다고 그랬잖아. 아내가 원하는 거 해주지 그랬어?” 그러니까 “이 사람아, 지프차를 어디서 가짜를 구하겠니?”
“부인한테 무슨 선물을 해줄 거야” “호주 여행을 시켜주기로 했어.” “와 세다. 대단하다. 어떻게 그런 결심을 했어?”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10년 동안 아내가 정말 고생만 했어.” “와 그럼 그 다음 10년 후에는 뭐 해줄건데?” “데리고 와야지.”
웃어넘기는 것입니다. 이런 가십들이 우리에게 와 닫는 것은 부부가 함께 살다보면 항상 한계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결혼한 남자보다 독신으로 사는 사람이 통계적으로 5년 먼저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혼 안하거나 이혼하고 혼자 살면 빨리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을 빨리 죽는데, 결혼한 남자들 중에는 죽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관계를 계속 하다보면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랍니다. 더 이상은 힘들다는 것입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둘 중 하나가 현실적으로 무관심하든지 이혼을 하든지 또는 신앙으로 하나님을 우러러 보면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내의 예쁨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자기 안에 있는 미움을 죽이고 사랑을 다시 솟아나게 해야 합니다.
다툼이라는 게 10대0으로 잘못한 다툼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7대3도 별로 없습니다. 대게 5대5 아니면 6대5입니다. 아침에 다퉜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문을 확 닫고 나갑니다. 자기도 화가 이만큼 나서 애들한테 소리 질러서 학교 보내고 덜그럭 거리면서 설거지하고 빨래방망이를 쿵쿵 두드리고 나서 할 거 다하고 큐티 시간에 큐티를 하고 나니까 후회가 되는 것입니다. ‘아침에 그러지 말아야 되는데.’ 하고 자꾸 핸드폰을 봅니다. ‘문자가 오나?’ “여보, 미안해.” 그러면 “아니야. 여보, 내가 잘못했어.” 그러고 싶은데 ‘띵’ 하고 문자가 왔기에 보니까 “인터넷 가입하세요.” 하고 온 문자뿐입니다. 자기가 먼저 문자를 보내려고 핸드폰을 켭니다. “여보...” 그리고는 못 보냅니다. 불편한 마음으로 하루 종일을 보냅니다. 한편 남편도 오전을 정신없이 보내고 점심시간이 되니까 허망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사소한 일 가지고 다퉜는데. 조금만 참으면 될 텐데.’ 그리고 핸드폰을 열다가 ‘아니, 남편이 이렇게 고생하는데.’ 그러고는 핸드폰을 다시 덮습니다. 하루 종일 계속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퇴근길에 걸어가면서 자기수양의 시간을 갖습니다. 선물가게에 들러서 선물을 고릅니다. 그러는 가운데 감정이 정화됩니다. 선물을 살 때는 고무장갑, 앞치마, 비누, 이런 살림에 필요한 것을 사면 안 됩니다. 아이들이 선물을 받았을 때 제일 썰렁한 게 학용품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한 부모밖에 없는 아이들에게 아빠를 대신해서 선물을 사주라고 했습니다. 운동화, 크레파스. “크레용은 때 되면 엄마가 저절로 사주는 것아니냐? 학교 가는데 크레용 안 사줄 엄마가 어디 있느냐? 아빠가 살아서 옆에 있으면 엄마 몰래 사줬을 그런 것을 사줘라.” 그랬더니 그 다음에 아이들한테 진짜로 무엇을 갖고 싶은지 전화로 물어보았습니다. 인형, 뽀로로, 장난감. 피천득 씨가 ‘인연’이라는 수필에서 선물은 아내가 집안에 있는 돈을 가지고 살 수 없는 물건이라고 그랬습니다. 용돈의 감퇴를 감수하고 선물을 삽니다. 포장하는 시간도 자기를 수양하는 시간입니다. 수양하면서 포장을 합니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는 “여보, 당신 왔어?” 성질내던 그 얼굴이 아닙니다. 아예 현관 앞에서 “절대적으로 내가 잘못했어.”라고 합니다. 미안한 마음이 밀려옵니다. “정말 잘못했어. 내가 나쁜 아내였어.”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선물을 사온 것입니다. 열어보니까 자기가 너무너무 갖고 싶은 거였습니다. 너무 좋은데 창피하고 미안한 것입니다. 어쩔 줄을 모르겠더랍니다. 자기가 한 개념 없는 행동과 남편의 자애로운 행동, 거기에다 선물까지 준 모든 것을 생각을 하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정도로 너무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게 복수입니다.
(찬양)
평생 사는 동안 주 위해 살리라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한 인간으로서 완성해 가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내게 있는 것을 퍼주고 내가 손해를 보는 사랑이 아니라 그렇게 사랑함으로써 불완전한 내가 완전해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