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을 위하여Ⅳ
(200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가정의 기초, 부부(창2:24) 2000.4.30 주일오전 1
2. 네 부모를 공경하라(엡6:2-3) 2000.5.7 주일오전 13
3. 아비들아 자녀를 노엽게 마라(엡6:4上) 2000.5.14 주일오전 24
4.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下) 2000.5.14 주일오후 38
5. 남편과 아내 (엡5:24-25) 2000.6.4 주일오전 52
1. 가정의 기초, 부부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2:24)
오늘부터 5월 한달 동안 가정에 대해서 시리즈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고 단란하고 좋은 가정을 이루어 가고 싶어하지만 실제로 그런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정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이 가정에 대해서 무엇을 의도하셨는지를 바로 할 때에 비로소 우리들이 가정을 바르게 세워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 세상의 전문가들이나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가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많은 것보다는 오히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가정의 기초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한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데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본문은 하나님께서 인류 최초로 가정을 만드시던 때에 우리에게 주신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빚으셔서 아담을 창조하셨고 이어서 그가 홀로 있는 것이 하나님의 보기에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성을 만드시고 그를 아내 삼으셔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말씀이 “이러므로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니라” 이고 이것이 결혼의 원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러므로’라는 말 뒤에는 결혼의 기초가 나와있고 그 앞에는 사랑의 고백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이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에 아담이 그 하와를 보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 고백이 있고 난 후에 바로 구체적으로 가정을 이루어 나가는 가정의 기초에 대한 원리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24절 본문을 들어가기 전에 우선 우리들이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 기초가 되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가정의 이야기를 하면서 결혼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모든 주제를 접근하면서 먼저 잊지 말고 기억해야할 바는- 가정의 근본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나 자식과 부모와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자식과 부모와의 관계는 천륜이라는 말로 표현했고 아내와 남편이 둘이 만나 결혼을 하는 관계는 인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대신 인륜 중에서는 제일 큰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혼식을 ‘일륜지 대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전통적인 유교적 사고방식이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모순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사상들 가운데 비성경적인 것들을 타파해서 우리의 사상적인 기초를 그런 전통 속에 두지 말고 성경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옳을 때에는 거기에 두어야겠지만 옳지 않을 때는 여지없이 그것을 버리고 성경의 기초를 다시 세워야지 만 기독교 사상이 서는 것입니다. 그것을 먼저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적인 가정의 기초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화) 여자가 결혼을 해도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는 한국의 제도가 여성을 존중하는 것이라는 견해에 대하여.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회에서 시집 온 여자에게 자기의 성을 사용하도록 한 이유는, 두 사람이 일평생 함께 산다 하여도 영원히 자기 식구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부부의 촌수가 무촌인 것도 그렇게 이해됩니다. 여자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남편과 천륜일지라도 남편과 아내는 죽을 때까지 인륜인 것입니다. ‘이 여자는 영원히 우리 집 식구가 아니다’를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체가 전통적인 우리의 사회에서 가정의 기초를 철저하게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화) 홍수가 나서 임금과 아버지와 아내가 빠져 떠내려가고 있는데 한 사람밖에 구할수 없다면 누구를 구할 것인가?- 임금을 구해내고 아버지를 구하다가 죽는 것이 답이라고 합니다. 아 내는 처음부터 구할 생각을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이 들어와도 이러한 잘못된 사상적인 틀들이 완전히 뒤집혀서 깨트려지지 않으면 성경적인 가정의 기초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설교가 어떤 의미에서는 여러분들에게 충격적이 될 지도 모르고 생애적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깊이 듣고 이제껏 까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을 성경의 가르침으로 칼질을 하는 그런 새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정의 기초는 부부의 관계라는 말씀을 드렸고 그런 부부와의 관계가 가정에서 성립하려면 결혼의 시작부터 바르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결혼이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을 해도 결혼할 수 없는 사이가 있습니다. 이미 결혼한 남자나 여자를 사랑한다든지, 이교도를 사랑한다든지, 믿지 않는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든지 하는 경우에는 아무리 뜨겁게 사랑을 해도 결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결혼이 성립한다고 할 경우에는, 인격적으로 서로 깊이 사랑하는 것으로써 결혼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성경적인 기초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결국 사랑에 의해서 확인되지 않고 사랑이 근거가 되지 않은 정략적인 결혼 -서로 사돈 관계를 맺으면 얻게 될 좋은 점을 기대하며 출발된 결혼, 상대방의 많은 소유나 높은 명예, 혼자 사는 것보다 저 사람과 결혼했을 때 누리게 될 반사적인 이익에 대한 기대 같은 것들이 결혼을 하게 하는 중대한 동기가 될 때-은 처음부터 불행을 불 보듯이 보면서 시작하는 결혼입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많은 부나 재산을 노리면서 하는 결혼과 같이 사랑이 기초가 되지 않고 뭔가 다른 것들이 동기가 된 결혼은 모두 참된 가정의 정상적인 기초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되는 결혼은 반드시 불행해 집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기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세우신 결혼 제도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고 모욕입니다. 그것이 ‘이러므로’의 의미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 권고하고 싶은 것은 사랑은 결혼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할 계획이 없으면 사랑에 빠지지 마십시오. 사랑에 빠지면 반드시 신앙적으로 손해를 봅니다. 좋다고 다 연애하면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사랑하니까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이고 결혼은 결혼이라는 것은 쓸데없는 잘못된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할 계획이 서면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기초가 되는 결혼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원리는 ‘부모를 떠나’는 것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히브리말로 ‘아자브’라는 동사를 썼는데 정확히 말하면 ‘부모를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결혼의 참된 기초는 남자가 부모를 버림으로서 결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효막심하다는 이야기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독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결국은 가정의 참다운 기초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아니라 부부와의 관계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것은 좋은데 너무 사랑하지 마십시오. 쓸데없이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다 커서 품안에서 하나씩 떠날 때 그 때 부부는 가슴에 공허한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심리적인 공황 상태가 찾아옵니다. 그것은 자식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부사이에 인격적인 진정한 애정과 결합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상적인 부부관계는 자식들이 장성하여 시집장가 가고 나면 시원하게 느낍니다. ‘이제는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누구에게 얽매이지 않고도 마음껏 서로 사랑하고 둘이서만 오붓하게 살 수 있겠구나’하는 감정이 다가와야지 만 진정으로 가정의 기초가 무너지지 않은 부부의 모습입니다.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남자가 그 부모를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니셔티브를 남자가 쥐고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가장이 가정의 원리를 바로 이해하고 그런 방향에서 가정을 이끌어가려고 하는 의지와 지식이 없으면 올바른 가정의 모습이 되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과도기적인 모습이지 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궁극적인 가정의 모습은 아니다는 이야깁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모를 버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자식이 태어나게 되면 처음 경험하게 되는 사회가 어머니의 품입니다. 어머니가 아이가 대면하는 첫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오는 인간이 있는데 아버지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회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독자적인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도 없고 부모를 밀치고 직접적으로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힘도 없습니다. 환경 자체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부모와의 만남을 최초의 사회로 해서 그 부모와의 만남을 렌즈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로로 해서 세상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어떤 부모인가 하는 것이 이 아이의 일생에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 아이가 정말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되지 않는다면 하나님보다 더 강력한 영향이 미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식 능력이 있다고 해서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은 동물들이 하는 것입니다.
‘결혼의 소명’에 대해서 이야기 하니 충격 받았다고 하는데, 결혼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결혼을 하는 것이지 생식능력이 있다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녀를 낳는 것도 자기 자신을 그 아이에게 최초의 사회로 삼음으로써 그 아이로 하여금 이 세상과 하나님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정상적이고 올바른 이해를 갖게 해줄 자신이 있을 때 아이를 낳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응답 받고 아이도 낳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태어나게 되면 부모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자녀가 성장을 해서 적어도 성인이 되었을 때 그들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가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부모로서 하나님 앞에 80%이상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절대적인 책임을 저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자녀에 대해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를 바르게 낳아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회복해 갈 수 있는, 그리고 여러분 손을 떠나 보내서 가정을 이룰 때에는 이런 성서적인 기초를 놓을 수 있는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 신성한 의무를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잘 하지 못하면 밖에서 아무리 훌륭한 일을 많이 해도 그 인생의 반은 실패한 것입니다. 아이 낳고 학교 보내고 글 가르치고 사람되라고 훈계하는 일을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됩니다. 더군다나 세속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심각하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아이들이 자랄 때까지는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기대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게되면 그렇게 절대적으로 기대었던 그 부모로부터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와 어느 정도는 관계가 끊어진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자녀에게는 부모를 사랑하고 효도해야 할 의무도 있고 결혼했다고 해도 결국 자기 자식입니다. 그러니까 그 자녀가 결혼을 했어도 바르게 살지 못하면 찾아가서 야단쳐야 합니다. 그렇게 책망도 하며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숙의적인 것입니다. 찾아가서 그 가정에 개입해서 ‘직장을 어디로 옮기라고 하고 아이를 몇을 낳아라 과외를 시켜라...’하는 얘기는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살아가는 삶이 좀 못마땅하다고 하더라도 자기 작품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기가 낳아서 자기가 기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특별한 예외적 경우가 아니면 결혼을 하면 부모로부터 도움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이면 아직 결혼을 할 수 있을 만치 성숙한 것이 아니니 참아야 합니다. 부모들도 도와주지 말아야 합니다. 결혼한 다음에 부모님 유산을 넘겨다보면서 껄떡거리는 모습들은 모두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결혼할 때 부모가 적절하게 능력껏 챙겨주어서 보내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리고 굶더라도 자기들끼리 사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처음부터 부모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천륜이니까 남편을 속여서라도 자식들에게 갖다줘야 합니다. 이런 태도들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참다운 가정의 기초를 파괴하는 행동들입니다. 부모로부터 도움을 기대하거나 유산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자기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유산을 남겨줄 것이 있으면 아이들이 자기 품에 있을 때 더 양질의 교육을 시키고 인간다운 사람으로 존재를 바꾸는 데 투자하십시오. 고액과외 시키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사라져도 존재 그 자체 속에 남는 무엇인가를 아이에게 남겨주는 것으로서 부모가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결혼을 할 때 서로의 지참금에 대해서 눈독을 들이는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결혼제도를 더럽히는 사악한 행동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형제 자매들이 결혼할 때 부모님이 그 결혼에 대해서 간섭하는 정도를 넘었다고 생각되면 저는 칼같이 끊습니다. “부모님이 참견하실 영역이 아니므로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합니다. 그러니까 부모들이 그런 것들을 정리해야 합니다.
부모를 떠난다는 이야기는 정신적으로 독립하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은 부부의 연합을 기초로 해서 이루어지는 가정이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예화: 아내를 제쳐두고 어머니와 의논하는 마마보이, 월급봉투를 시어머니께 갖다주고 아내는 타 서 쓰게 하는 것, 가정의 경제권을 남편이 쥐고 쓰는 것, 부부싸움하고 친정으로 가는 것) 잘못된 것입니다. 결혼을 하면 부모님과 떨어져서 사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할 경우에는 경제나 가계의 모든 생활은 독립적이어야 합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부모님이 가끔 밥을 해주실 수도 있고 부모님께 용돈을 드릴수도 있지만 그 부모님이 살림의 지출과 수입을 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같이 살되 독립된 가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독립적으로 살아가면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뭔가 집안의 어렵고 중대한 일을 결정할 때 부모에게 자문을 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결정은 자식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옳고 그름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자식에게 충고할 때 항상 그저 충고할 따름이지 자기 뜻대로 안 따른다고 해서 자식을 향해서 서운한 감정을 품고 분노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의 무덤을 파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아이를 결혼시켰는데도 끌어안고 같이 살고 싶어서 애를 쓰는 중요한 이유는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자식이 모두 떠나가고 남편과 단둘이 마주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두렵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을 자기 부부 사이에 가족관계로 끌어넣어서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느낄지도 모르는 두려운 감정이나 실망 같은 것들을 다른 복잡한 인간관계로 희석시키려고 하는 사회적인 요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가정의 기초가 충분하지 않은 부부일수록 자녀들을 자꾸 움켜쥐고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환경을 보건대 자식과 함께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도 훌훌 떠나보내는 사람들은 부부의 관계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몸져눕는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건강하고 수입이 있다면 자녀들을 다 떠나보내고 가고 싶은데 가며 사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그럴 자신이 없기 때문에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식들도 그렇게 부모를 떠나보내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과 갈등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불효가 아닌가 하며 갈등을 느끼고 그 사이에서 아내는 너무 괴로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결혼제도는 부모를 떠나는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고 정신적으로 독립함으로써 가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다 자식을 길러서 결혼시켜 놓고 이런 가르침을 받을 때 피해자가 된다고 생각할 정도까지 늦게 가르침을 받으면 안되고 아예 결혼을 해서 아직 아이들이 어렸을 때 혹은 아직 아이를 낳지 않았을 때 그 때 이런 가정의 기초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하고 배워서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도 나에게는 이 아이를 잘 기르고 양육해야할 의무는 있지만 성인이 되면 이 아이를 주님의 손에 의지해서 이 세상으로 떠내려보낸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로부터 지나친 것을 기대하지를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투자하고 사랑해서 어떻게 만들어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모두 자기의 가정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가정을 망치는 사고방식입니다.
극단적인 경우이기는 합니다만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부모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를 파괴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면 냉정하기는 하지만 부모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를 택하고 남편을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식과의 관계를 유지함에 있어서 문제가 있기 때문에 부부간의 관계를 파괴하지 않고는 자녀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자녀와의 관계를 정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예화) 한 목회자 아내의 상담 내용- 남편이 교회의 일을 어머니와 의논하여 결정하고 자기는 모 른다는 이야기.
그 남편은 결혼은 했지만 아직 부모를 못 버린 것입니다. 오랜 세월 자기 하나만 바라보신 어머니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다 보니까 점점 깊이 빠져 들어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한 경우입니다. 돌아서지 않으면 이혼은 하지 않더라도 불행한 것입니다. 결혼의 두 번째 원리를 안 지켰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자녀를 기르면서 항상 너무 지나친 집착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들은 결혼할 때까지 잘 길러주겠다. 그것으로 족하다’ 자녀를 향하여 ‘너희들이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냐’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우리에게 그렇게 했고 또 우리의 부모님에게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렇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보존하게 하시는 창조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너희들이 나에게 해준 것이 뭐 있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윗대를 향해서 효도하는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자녀들은 깊이 사랑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성인이 될 때까지 우리가 길러주는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로부터 뭔가를 받아서 누리고 본전을 뽑겠다는 식의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원리입니다.
세 번째 원리는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하였습니다.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성경에 보면 ‘다바크’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자기의 아내에게 붙어있으면 둘이 하나의 육체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결합입니다. 영적인 결합을 먼저 설명하고 정신적인 결합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영적인 결합은 결혼의 제도에 대한 이 고백과 말씀이 아담에게 하와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가 없는 시대에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적절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잘 믿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두 사람의 결합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담이 하와를 보는 순간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의 몸의 뼈가 모두 필요하기는 하지만 중요성에 있어서는 모두 똑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뼈는 잘라져도 삽니다. 팔 없이도 살고 손가락이 잘라져도 삽니다. 그런데 골수가 흐르는 척추의 한마디를 잘라내고 살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살도 조금 베어졌어도 흐르는 피를 닦아내면 살 수 있으나 같은 살이어도 간이나 심장같이 내장의 중요한 기관을 형성하고 있는 살은 한 점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뜻은 너 없이는 내 존재가 확인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인류 최초의 사랑의 고백치고는 극단적인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보다 훌륭한 고백이 없습니다. 남인데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있음으로 내 존재가 확인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결혼하기 전에 어떤 정신적이 연합을 이루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정신적인 연합이 영적인 연합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렇게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는데 바로 뒷장에 넘어가니까, 하나님께서 “아담아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실과를 왜 먹었느냐”하셨더니 아담은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그 여자가 제게 주었습니다”라고 고백해야 될텐데,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내게 주므로 먹었나이다” 하였습니다. 아무리 말을 빙빙 돌린다고 하여도 느낌이 있는 것인데,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라는 말속에는 자신이 원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함께 하시게 한’ ‘지금은 그 여자와 내가 같은 공간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아야하는 상황 자체가 내게는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아까는 ‘한 몸이 될지니라’했으니까 ‘우리가 먹었습니다’해야 하는데 ‘그 여자’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한 몸이 아니라 그는 그, 나는 나인 것입니다. 연합이 깨진 것입니다. 감정적인 연합이 깨진 것입니다. 정신적인 연합이 깨진 것입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부부싸움 했습니까? 아닙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에게 줄 때까지만 해도 광경이 아름다운 부부사이였습니다. 성경 이외의 다른 자료에 보면 아담이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하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이미 잘못된 것을 아담이 알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은혜 받다가 은혜만 떨어져도 얼굴이 변하는데 무죄 상태에 있었던 그 아름다운 피조물인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명령에 범죄 하여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사단과 교통을 하게 되었는데 하와의 모습 속에서 그런 심각성이 안 나타났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뭔가 잘못된 일이 일어났음을 아담도 알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문헌에 의하면 아담이 ‘어찌 하와 혼자 죽는 것을 내가 보리요 죽어도 같이 죽자’하며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의 진실성을 우리들이 웃으면서 넘기기는 하지만 어떻든 둘 사이에는 어떤 갈등이나 다툼이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선악과를 두고 먹자, 먹지 말자 하며 싸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일어났습니다. 둘 사이에는 전혀 다툼이 없었는데,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이 오고 가던 사이가 지금은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그 여자’로 완전히 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차가운 고백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둘 사이에는 갈등이 없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각자 파괴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즉각적으로 부부와의 관계가 파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도 능히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다 속히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시급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혼자 교회에 나오는 여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인이 끝까지 안 믿어서 남편 혼자 나오는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절대적인 다수가 여성만 교회에 나오는 경우입니다. 여러분들이 애를 쓰고 노력하고 있지만 참다운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남편이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두 사람 사이에 성경적인 부부의 결합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모판이 되어서 그 위에서 우리의 후세들이 그 양분을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성경적인 가정으로 돌아가야 할 첫 번째 중요한 요건입니다.
(예화) 남편이 교회 안나온다고 “그 인간이 돌덩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인간이 변하려면 이 인간이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
남편이 인간으로 보이는 한 전도는 없습니다. 영혼으로 보여야 합니다. 부부가 함께 교회에 출석해서 좋은 신앙 생활을 하려고 애쓰는 자체가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채로 살아가면서도 돈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입증이 됩니까? 하나님 없이도 자기 둘이 서로 열심히 이해하고 노력을 하면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입증이 됩니까?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혼자 예수를 믿고 남편은 아직 예수를 안 믿는데도 그래도 그 가정이 유지되고 뭔가 하나님의 은총이 남아 있는 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고 여러분 자신이 많이 깨트려지고 있는 한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언제가지 그렇게 살겠습니까? 속히 그 남편, 믿지 않는 아내가 진실한 신앙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구원은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 문제가 그렇게 절박하냐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내 아내의 영혼, 믿지 않는 남편의 영혼, 교회는 나오지만 영적인 변화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는 내 남편, 혹은 아내의 영혼에 대해서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있고 자라나는 자녀들과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라도 이 남편, 이 아내가 정말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강한 사모함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절히 눈물로 남편이나 아내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의 영혼의 운명이 자신의 영혼의 운명인 것처럼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갑자가 안 변했으니까 벌써 여러 해가 지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려는 말이 아니라 가정이 그런 기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가정의 기본 단위이고, 가정의 기본 단위인 두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조건이 되어야지 만 겨우 행복한 가정의 기초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안 믿는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는 신앙이라는 것이 그렇게 결혼 생활에 있어서 가정 전체의 행복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주님을 먼저 믿고 오늘 이 하나님의 진리를 듣고 있는 여러분들은 이제 그렇다는 사실을 알았고 눈을 떴습니다. 그러면 누가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겠으며 누가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해야할 일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그렇게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내 남편이나 아내가 진정으로 주님을 믿고 변화 받고 신앙의 세계로 들어와서 참된 가정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귀를 기울이면서 함께 그 기초를 놓아가고 그 속에서 우리 자손들은 믿지 않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우리와 같은 고통스러운 신앙의 이력을 가지지 않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 진짜 하나님의 자녀 되고 진짜 하나님이 누구시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우리들의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그 일을 위해서 물론 여러분들이 기도하고 이런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마음에 무거운 짐을 느끼겠지만 무거운 짐을 느끼고 마음에 부담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보다 필요한 것은 실제로 그 영혼들이 주님께로 나아와서 구원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렇게 함께 주님을 믿을 때에 영적인 결합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이 우리를 낳았습니다. 그 부모님에게서 피와 살을 물려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지만 우리 부모님이 주신 살과 피를 받고 태어났습니다. 예수님과는 살도 안 섞이고 피도 안 섞였습니다. 옛말에 ‘부부는 등돌리고 돌아누우면 남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는 적용되고 통용되는 이치입니다. 신앙의 세계에 있어서는 그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부모로부터는 살과 피를 물려받았지만 아내와 남편 사이에는 결혼한 것밖에 아무 것도 없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믿는 사람의 결혼의 경우에는 다릅니다. 제가 여러분과 피가 섞였습니까, 살이 섞였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성도의 교통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내가 살을 받았습니까, 피를 받았습니까, 성이 같습니까? 그런데 부모님과 느끼는 결합보다는 그리스도 예수와 느끼는 결합이 훨씬 더 강합니다. 영적인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이것은 살과 피를 가지고 따질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부부의 영적인 결함이 그런 결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과 결혼 할 때 서로가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신앙을 가지고 결혼하는 것은 정상적인 결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화) 불교 신자와 천주교 신자가 결혼해서 각자 절과 성당을 다니며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가 잡 지에 실렸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부부관계에 대한 사고방식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이 같으냐, 살이 섞였냐, 피가 섞였냐’하는 말은 신앙의 세계에서는 안 통하는 이야깁니다. 살과 피가 섞였느냐고 묻는 것은 바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향해서 묻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과 피로 접근할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중요하게 좌우되는 것입니다. 속히 남편이나 아내들이 신앙 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여러분이지 않습니까? 여러분만큼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으며, 여러분만큼 남편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깊이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그 사랑을 신앙적인 사랑으로 승화시켜서, 아가페의 사랑으로 승화시켜서 그래서 그 남편이 구원받지 못한 영혼의 상태에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 부부 사이에 진정한 영적인 결합이 있기를 하나님도 갈망하신다는 것, 그런 것들을 깊이 지각하면서 속히 해결되어야 할 일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 남편의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그를 깊이 사랑하고 그의 편에 서주고 ‘저가 구원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내가 모든 것을 다 양보할 수 있겠다’고 하는 그런 신앙,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가정의 기초를 다지는 일입니다.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은 몰랐고 여러분들은 알았으니 여러분들이 그 일을 해야되지 않겠습니까? 구원받지 못한 남편을 위해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그런 기도의 생활, 영혼을 위한 간절한 간구 속에서 살아가고 아직까지도 주님을 모르는 아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노심초사하며 하나님 앞에 근심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영혼처럼 근심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먼저 해결되어서 가정의 기초를 놓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의 결합은 정신적인 결합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다보면 가끔 너무나 좋은 사람,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화) 학창시절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지각하고 학교에 가니 노트 한 페이지 가득 내 이름을 쓰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25년의 간격을 뛰어넘을 수 없기 에 추억으로만 간 직하고 만나지는 않는다.
이렇게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마음이 통하는 관계는 남녀간에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에로스적인 사랑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결혼하고 나이가 들면서 사랑이라는 기초는 변하지 않지만 그것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느냐하는 것은 계절이 바뀌면 자연이 옷을 갈아입듯이 사랑도 그렇게 갈아입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에는 예쁜 꽃을 내밀며 표현해도 나이 먹으면 고깃국을 떠 넣어 주는 것이 같은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렇게 옷을 갈아입어도 근본적으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신적인 결합입니다. 곤고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누가 생각납니까? 누구에겐가 소외 받는 것같고 외롭다고 느껴질 때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견디기 힘든 고통과 말로 할 수 없는 아픈 일들이 엄습할 때 누구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까? 그것이 남편, 아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신적인 결합입니다.
그것이 깨트려지면 기초 자체가 무너져버리는 것입니다. 집만 남고 가정은 없는 것입니다. 부부생활은 있는데 결혼생활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적인 결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지 열심히 살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 한사람을 사귀려고 해도 얼마나 공이 많이 들어갑니까? 젊은이들이 연애에 빠지고 나면 모든 에너지가 그 한 사람 관리하는데 다 들어갑니다.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시간과 돈,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파괴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 겨우 사랑이 무르익고 인격적인 결합이 이루어져서 결혼에 골인합니다.
그러면 그것으로서 다 되느냐면 그것은 아닙니다. 미완성입니다. 계속 가꾸어져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무 하나를 심어놓고도 돌보면 잘 자라는데 돌보지 않으면 형편없어집니다. 정신적인 결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들을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 용서하고 화해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먼저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안 사람들이 이런 점에 있어서 더 많이 양보하고 더 많이 희생해서 그런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 에너지는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에서 받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그 은혜를 받아서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허물을 뛰어넘으면서 살아가는 삶이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가정의 기초를 다시 회복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신적인 결합입니다. 그리고 인격적인 결합입니다. 그것이 바로 연합한다라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와 살도 섞이지 않고 피도 섞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느낄 때마다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이 느껴지고 그분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사랑에 우리 자신이 감격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부부와의 관계가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그런 관계가 서로를 깊이 존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서로의 인격적인 결합을 파괴하면서 까지 뭔가를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잘 유지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재산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보고 싶어지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상적인 부부관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화: 결혼 20주년에 아내를 호주여행 시켜주고 30주년에 데려오겠다는 우스개이야기)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깊이 그리워하고 보고 싶은 인격적인 결합을 유지하며 살도록 하나님이 세상에 딱 한사람을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그 사람과의 관계에 실패하면 다시는 그런 관계가 없습니다. 특별한 예외적인 관계를 제외하고는 그 관계가 없습니다. 한번입니다. 이미 선택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장애 요인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결혼하기 전에 미리 하고 피해갔어야 합니다 지금은 너무 늦었습니다. 대안은 그것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고 신앙 안에서 그것을 소화하고 주님이 주시는 그 은혜를 힘입어서 그런 갈등들을 극복하고 부부와의 결합을 유지하면서 살든지 아니면 그 관계를 모두 파괴하고 하나님도 없는 관계로 살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 없는데 두 번째는 사실 선택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런 결합을 유지하고 사셔야 합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화) 부부싸움을 한 가정에 한 목사님이 찾아가 칼 두 개와 오이, 사과를 내놓으셨다. 결합을 위 해서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희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부부관계라는 한 나무가 자라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부관계가 고목처럼 되어있을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다시 가지를 잘 손질하고 거름을 주면 고목이 다시 묘목으로 변할 수는 없지만 고목에도 잎이 돋고 꽃이 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새롭게 우리의 가정을 창조하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연령에 관계없이 시대에 관계없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런 결합을 잘 유지하고 둘이 한 몸이 되어서 -육체적이고 성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육간의 완전한 결합을 이루면서 사십시오.
저는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사는 사람들이 무척 부럽습니다.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우리 어머님 아버님은 하나님을 모르는 분이셨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전도해서 하나님을 믿게 되셨습니다 그것도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정말 믿는 가정에 태어나서 아주 어렸을 때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을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면, 성인이 다 된 후에도 ‘인생이 무엇인가’ ‘도대체 하나님은 계신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며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며 소중한 젊은 시절을 방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불행한 일은 이제 우리의 대로 종식되어야 합니다. 짐승처럼 아무렇게나 살고, 신령하고 경건한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지 못해서 너무나 긴 세월을 인생의 어두움 속에서 헤매이다가 복음의 도리를 발견하게된, 인생이라는 광야에서 미아와 같이 헤매던 이 불행한 인생살이는 우리로서 끝이 나야 합니다. 우리 후손들에게서는 이런 일들이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신앙의 인격을 우리를 통해서 보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고, 부부가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고 정신적인 결합을 이루고 영적인 결합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가정이 무엇인가 하는 도리를 자녀들이 깊이 깨우치고 그것 이외에는 가정이 없는 것 같은 생각을 갖도록 만들어 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하고 서로 사랑해서 그 부부사랑의 모판에서 자기들이 신앙적으로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 이외에는 어린아이가 가정에서 자라는 또 다른 대안이 없다는 느낌을 갖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우리의 가정을 본받아서 그런 가정을 이루면서 또 경건한 부모가 되어서 자기의 자녀를 길러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오늘 우리들이 이 가정의 기초를 회복하고 부부가 이 정신적이고 영적이고 육체적인 결합을 유지하면서 결혼의 대의를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이 삶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이것을 바르게 회복하지 못하면 이 재앙이 우리 자녀들에게 계속 물려지는 것입니다. 망가진 인간들이 그 모판에서 무수히 태어나고 그 인간들이 그런 인간들을 만나서 또 그런 인간들을 만들어 내어서, 우리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고통을 주는 근원이 되고 그렇게 결과가 된다면 우리의 결혼 생활은 축복된 결혼이라기 보다는 인류의 불행의 시초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것들을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가 정말 믿지 않는 남편과 아내들이 속히 주님께로 돌아오고 이제는 어두운 생활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서 살게 되는 것이 여러분 마음속에 깊은 그리움과 뼈에 사무치는 기도의 제목이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금년 가정의 달이 지나가기 전에 이런 아름다운 가정의 기초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복된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2.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2-3)
내일이 어버이 날입니다. 이런 때가 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명절이 되어서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고 자기 집을 찾아가는데 텅 빈 교회당에 와서 성경을 읽거나 기타를 치거나 찬송을 부르면서 명절을 보내는 지체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명절이면 우울해지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깨어진 관계의 사람들을 그 명절에 만나야 되기 때문입니다. 깨어진 동기간의 관계, 그런 가운데서 형제들을 만난다는 것은 결코 즐거움일 수 없고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를 하는 부모와 대면해야 하는 것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떠한 토도 달지 않고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명령합니다. 바울이 이 명령을 우리에게 주고 있지만 사실 이 계명의 기원은 십계명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공경하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할 때 쓰여지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공경은 단지 어버이날이라고 해서 고기나 몇 근 끊어 가지고 봉투나 하나 들고 덜렁덜렁 찾아가서 휙 던져주고 카네이션 하나 달아드리고 오는 연례행사로서 공경하라는 의미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절기나 주일에 하나님께 모여서 예배하고 경배하지만 일주일 동안 하나님을 잊었던 사람들의 주일날의 경배는 하나님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1년 내내 하나님이 생각나지도 않던 사람이 축제로 모여서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 지킴은 하나님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공경하라는 이 명령은 하나님의 계명이니 순종해야 되겠는데 이 공경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무를 행함으로서 공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의 세계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이 뒷받침될 때 그것이 공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공경하라는 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서 먼저 해결되어야할 문제를 안은 부모 자식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속에서 부모를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데 무슨 공경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마음 한 구석에 하나님을 향해 섭한 마음을 품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향해 독한 마음을 품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의무를 이행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한 사람의 인격 안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미움의 마음과 공경하는 마음은 공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앙케이트 내용을 보니까 한국 젊은이들의 80%가 자기 아버지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지금의 청년들의 아버지이니까 그 아버지 때에는 세상 즐거움을 모르고 미친 듯이 고생하며 근대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밤낮 없이 일해서 자식들을 기른 아버지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식들이 대부분 아버지가 싫답니다. 이것을 놓고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느냐고 혈기를 부려봐야 소용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것은 현실이고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계명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와 맺힌 것을 풀어야 합니다.
물론 어느 자식이 부모와 머리가 터져라 멱살을 잡고 싸우겠습니까만 그렇지 않아도 얼마든지 우리 속에는 부모를 용납하지 못하는 마음이 많습니다. 확실히 이 세상에는 자식에게 상처를 받아서 마음에 못 박혀 고생하는 부모보다는 부모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입어서 가슴앓이를 하는 자식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자식들이 부모에게로부터 상처를 받는 원인도 여러 가지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은 우리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를 어떻게 공경해야 하는지 도리나 가르치지 상처는 무슨 상처인가?’ 라고 말할 지 모르지만 그런 분은 이 세상에서 매우 선택된 몇 안 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상처가 있습니다. 그 부모가 패륜아처럼 인생을 살았어야만 자식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자기도 어쩔 수 없이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의 일그러진 모습이 자녀들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자식을 한없이 사랑하지만 약간의 편애를 하는 것들이 자녀들의 가슴속에 일평생 못이 되어서 부모를 향해서 상처를 받은 감정이 치유되지 못한 채 부여안고 사는 멍에를 지워주기도 합니다. 때로는 착하기도 하고 돈도 벌어오지만 왠지 모르게 우유부단하고 남자답지 못한 성격이나 좀스러운 성격 때문에 자녀인 우리들의 마음에 한없이 아버지가 무능하게 비쳐서 리더로서 존중할 수 없기에 아버지에 대한 그림자들이 가슴속에 깊은 상처로 드리워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일그러지고 부패한 인간의 본성은 상처를 주는 데서도 나타나지만 받는 데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는 그렇게 둔감한 인간들이 걸핏하면 상처를 받는 것도 역시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부패한 인간의 본성의 결과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안타까운 어떤 가정들은 이것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때로는 폭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식들을 폭행하고 자기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주먹질해서 피 흘리게 만들던 폭력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세월이 오래 흘러갔는데도 흑백사진처럼 가슴에 남아서 생각만 떠올리면 그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게 되는 상처의 덫에 걸린 사람도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아야될 나이에 춤바람이 나서 가정을 버리고 외간 남자의 품으로 훨훨 날아가 버린 어머니를 가지고 있는 자식들의 마음에 드리워진 상처와 깊은 아픔은 일평생이 가도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무조건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한다고 해서 공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로봇입니까, 기계입니까? 하나님이 명령하셔도 못하는 것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뭐가 망가졌는지를 살피고 그것을 고친 이후에 토대를 세워서 주님의 명령을 성취해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본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식들이 자라면서 부모의 그런 모습을 봅니다. 아버지가 폭력을 행사하는 난폭한 모습을 보면서 이를 갈며 그 아버지를 증오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자라서는 또 자기 아내를 그렇게 폭압적으로 때리고 자식에게 폭력을 휘두릅니다. 어머니가 정절이 바르지 못해서 가정을 혼탁하게 만들고 자기들에게 한없는 고통을 준 것을 경험한 딸이 그 어머니의 외도의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깨트려진 가정의 장본인이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심리학에서는 보복적 모방심리라고 합니다. 잠재의식 속에 부모로부터 피해를 받은 것을 자기가 그대로 모방을 해서 부모의 마음에 아픔을 주고 싶어하는 잠재 의식적인 인간의 심리가 존재합니다.
확실히 이 세상에는 못된 자식들도 많지만 도저히 부모가 될 자격이 없는 인간들이 자식을 낳아 놓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개 같은 자식들도 많지만 짐승 같은 아비 어미도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세상이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망가진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 앞에 세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그러시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이 아이가 이 세상에 외서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아가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 중 많은 사람들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의 말씀 사역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놀라운 신앙의 변화가 두 가지 일어날 텐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 중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일이고 또 하나의 변화는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자식의 마음이 아비에게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떠나고 사회가 부패하게 되면 인간 속에 마지막으로 남아야 할 부성, 모성이 모두 이기심으로 대치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식이 무어냐, 나는 내 인생이 있다’ ‘너희를 위해서 이렇게 수고하고 남편을 위해서 고생했는데 내 인생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는 모든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입니다. 그런 인생들을 하나님이 보시면서 요한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부모로부터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서 상처를 받고 마음속에서 부모가 깊이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이 계명을 준수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너의 존경할만한 아버지와 정숙한 네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인격적인 네 아버지와 너를 사랑한 네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라”말합니다.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는 자기를 낳은 그 아버지 그 어머니입니다. 혹은 새로운 가족관계를 통해서, 결혼관계를 통해서 자기의 어머니 아버지가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흔히 ‘낳기만 하면 아버지입니까, 낳기만 하면 어머니입니까?’ 묻지만 성경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낳기만 하면 아버지이고 낳기만 하면 어머니입니다. 우리의 깊은 고통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낳기만 했는데 우리 어머니일 수 있고 낳기만 했는데 우리 아버지일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가만히 내버려 둔 것도 아니고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주어서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망가트려 놨는데 어떻게 그 아버지 그 어머니가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낳았으면 어머니, 낳았으면 아버지입니다.
여러 해 전에 이 문제를 깊이 묵상하면서 큰 충격과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자식들이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아서 깊이 고생하는 모습이 사실 어떻게 보면 부모의 죄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지만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삼 사대까지 하겠노라”말씀하십니다. 어떤 한 사람의 인성이 매우 굽어있고 상처투성이이고 망가진 성품을 가졌을 때, 문제가 그 사람 때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부모로부터 시작된 것을 봅니다. 그 윗대까지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생존했을 가능성이 없고 기억에 남은 사람이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꼬리를 물고 올라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미워하고 공경하지 않는 자의 이름을 기억하시면서 ‘이 인간들에게 저주를 퍼부어야겠다’고 결심하지 않으셔도 자연스럽게 망가진 부모를 통해서 망가진 자식들을, 망가진 자식들을 통해서 또 망가진 자식들이 태어남으로서 고통과 상처가 가득한 가정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그렇게 깨트려진 가운데에서 정상적인 부부의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기적적인 일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굉장히 슬픈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간단하게 말하기를 그런 이유를 댈 것 없이 “네 부모니까 사랑하고 공경하라”고 간단하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공경하고 사랑하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간단하게 말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공경할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를 접근하기 위해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이 명령을 세상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부모를 공경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공경이라고 하는 것은 동정이 아닙니다.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나’ ‘병들어서 기력도 없으신 데’하는 것은 동정이지 공경이 아닙니다. 공경은 인격적인 존중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존재 전체를 끌어안는 포용과 용서가 동반된 공경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계명이 주어진 시점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고 홍해를 건넌 후에 시내 산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시는 가운데 이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왜 모세가 호렙산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 타지 않는 불꽃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애굽으로 가서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하려고 하신다고 말할 때 첫 번째 계명으로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왜 하필이면 거기에 와서 그 계명을 주셨을까요? 쉽게 얘기하면 그 때는 그 계명을 주셔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다가오지도 않고 그 계명을 준수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그 애굽의 종살이하던 자기를 구원해내기 위해서 열 개의 위대한 전무후무한 기적적인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시면서 상천하지에 하나님 한 분뿐임을 보여주시는 기적을 그들이 모두 체험했습니다. 홍해가 갈라졌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도 없고 앞으로 들을 계획도 없었는데 홍해가 갈라지고 마른땅이 드러나고 물이 절벽처럼 선 그 사이를 지나가면서 자기들이 지나가고 나자 애굽의 뒤따라오던 군병들이 수장 당하는 광경을 보고 시내 산에 가서 빽빽한 구름 가운데 찬란한 영광과 엄위로 하나님이 어떻게 거룩하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보여주신 그 현장에서 선포되었던 말씀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과 은혜와 거룩한 능력, 그분의 성품을 충분히 알게 하신 후에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계명을 말씀하신 후에 인간의 계명에 관해서 말씀하신 첫 번째가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첫 번째가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왜 오늘 여러분들이 이 설교를 이렇게 심각하게 듣게 되었나요?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다시 들춰내고 싶지 않게끔 외면해버렸던 이 문제를 오늘 다시 끄집어내셔서 여러분들에게 고통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접어두지 말고 그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직면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상처를 준 부모가 견딜 수 없이 밉고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일그러지게 만든 장본인이었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사실 그분들도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 어머니는 집사님이었고, 권사님이었고, 우리 아버지는 장로님이었고, 목사님이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 부모들은 십년이상 교회를 다녔고 우리는 대대로 기독교 집안이고 .... 해도 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참다운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 그 부패한 인간의 내면 세계가 새로워지는 본질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빛 가운데 살지 아니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생활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 증인이 아닙니까? 진리도 모르고 하나님의 복음이 어떻게 부패한 우리 인간을 파헤쳐서 우리를 수술하고 고쳐서 새로운 인간을 만드는 지에 대해서 아무런 경험이 없이 그저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생활하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렇게 저렇게 직분이나 받은 그것이 뭐가 대단합니까?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생명과는 거리가 먼가 하는 것을 여러분 자신들이 경험한 장본인이 아니냐는 겁니다. 심령의 변화가 없고 하나님을 만나는 인격적인 만남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가 되어서 여러분 속에 있는 각양 더러운 죄와 부패한 본성들을 고치고 치료하는 새로운 갱신의 역사에 대한 경험 없이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이 여러분들을 그렇게 많이 바꿔 놓아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상처 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도록 여러분들을 그렇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 알지 않습니까?
주님을 모르고 불신자로 살았던 우리의 부모들이 일찍부터 주님을 잘 믿는 경건하고 신령한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손때묻은 할머니의 성경책을 보며 경건을 배우고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들을 읽으며 눈물 흘리던 할머니의 무릎에서 눈물을 머금고 신앙을 배우고 자랐더라면 경건하고 신령한 할아버지 밑에서 가슴을 찢는 중보 기도 속에서 양육을 받고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할아버지를 통해 배우고 자랐더라면 우리의 부모들이 왜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겠습니까? 복음의 참된 의미를 알고 자기와 같은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알았더라면 자신들이 낳은 자식인 우리들의 마음에 왜 이런 고통과 상처를 주었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어떻게 예수와 함께 살아가고 어떻게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의 다스리심을 머금고 주님 닮은 사람으로 변화되어 갈지를 고민하고 성화의 길을 간 진리의 성도들로서 살았다면 우리들도 이렇게 부모님들을 미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지금 여러분들이 감격하고 있는 이 포도나무의 감격을 우리의 부모들이 알았더라면 우리의 부모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아끼고 우리에게 어떤 상처도 남겨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그런 주님의 참사랑을 몰랐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분들은 주님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 방식대로 인생을 살았고 그 중에 어떤 분들은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가슴아픈 일이지만 그런 일들은 일어났고 이제 그 과거는 누구도 바꿔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부모들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으로서 오늘 여기에 있어서 우리의 깨어진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직면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너는 네 부모를 공경해야 하느니라” 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음성을 우리들이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는 각자 사랑을 담아야 할 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장하면서부터 마지막 죽을 때까지 그 인간은 사랑을 받아야지 만 정상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기에 따라서 누구의 사랑을 받느냐는 각각 다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 유통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흙으로 사람을 빚으사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주 하나님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대한 암시를 줍니다.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외면의 세계는 하나님의 손의 터치에 의해서 만져졌고 내면의 세계는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서 숨이 불어넣어졌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모습을 최대로 근사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이가 수태되는 그 순간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시체가 되어서 땅 속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그렇게 사랑에 의해서 터치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상적인 인간이 안됩니다.
특별히 과학적인 증거를 들지 않더라도 부부사이가 나빠서 아기가 생긴 것을 원망하면서 아이를 낳으면 망가진 아이가 태어난다는 사실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도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 때에는 친구도 필요 없고 엄마 아빠만 있으면 됩니다. 엄마 아빠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전폭적으로 사랑해주고 그 사랑에 의해서 터치되면서 진흙과 같은 인간의 유년시절이 빚어집니다. 그러다 자라면 부모의 사랑과 함께 형제들의 사랑이 가미되면서 청소년기를 맞아 이성에 눈 뜰 나이가 되고 시집 장가를 갑니다. 그러면 부모를 떠나서 여자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니까 어떤 여자를 만나고 어떤 남자를 만나서 남편과 아내로부터 무조건 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시겠지만 그것은 실제의 문제이고 원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부관계에 의해서 그 사람의 장년시절이 빚어지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아져서 남편과 아내가 떠나고 홀로 남으면 자식들의 사랑에 의해서 빚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하나가 결핍되고 어느 하나가 넘친다고 해서 그 넘치는 것이 모자라는 것을 채워서 평균을 이루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장성한 나이가 되어서 열렬하게 사랑하는 남성을 만나서 폭포수처럼 쏟아 부어지는 남편의 사랑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어린 시절에 부모의 사랑을 못 받은 것은 망가진 채로 그대로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도움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뛰어난 남편과 아내를 만나도 부모로부터 사랑을 못 받으면 망가진 상태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노년에 자식으로부터 눈물겨운 사랑을 받는다고 해도 그리고 어렸을 때는 부모의 탁월한 사랑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가 망가져서 폭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가정이 깨지고 상처와 한이 맺혀있으면 지금 받고있는 자녀의 뜨거운 사랑 옛날 부모로부터 받았던 넘치는 사랑이 융화를 이루어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죄가 들어오고 난 후에 인간 세상이 이렇게 철저하게 망가진 것은 결국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으로 나타납니다. 결혼해서 아이를 가졌으면 감사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아이를 떼버릴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으니 인간의 고통이 물려지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다 망가진 사람이 되었으니까 사랑해야할 관계 속에 미움과 원망과 고통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받은 상처를 저기에다 쏟아내고 저기에서 받은 상처를 여기다 쏟아내면서 망가진 세상이 되고 있는데 그것이 오늘날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 세상을 고쳐놓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단 하나 예외가 있습니다. 만약에 그것으로 끝난다고 할 것 같으면 내 부모가 나에게 상처를 준 것은 내 의사와는 상관이 없는데 어찌하겠습니까? 그런데 다행히도 예외가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해서 텅 비어 있는 것도 가득 채워서 정상적으로 만들 수 있고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못 받은 것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질 수가 있습니다. 자식들에게 홀대를 받는 것도 하나님의 큰사랑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가 장성해서 시집 장가 갈 때가 되면 이성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갖는 것이 순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의 관계 속에 빠지니까 혈기 왕성한 젊은이여도 이 세상에 여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사랑은 상당히 배타적입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여럿이 같이 있는 것은 같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 둘이만 있어야 같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개입하는 것이 싫습니다. 내 마음이 나뉘어져서 누구에게 주어지는 것도 싫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은 그처럼 우리 인간이 채움 받지 못한 모든 사랑의 결핍을 치료하고 고치는 놀라운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 이유 때문에 상처투성이인 여러분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자신 있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네 부모를 공경해야 하느니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하지만 내 마음은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대한 기억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도 내 고통을 아시지요?”하며 통곡하고 슬퍼하고 마음 아파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 아파하고 슬퍼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런 상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너를 거듭나게 하고 너에게 다른 사람은 발견하지 못한 나의 참 사랑을 주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결코 행할 수 없는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한 상처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지만 우리들이 생각을 조금만 돌려보면 우리 중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부모로부터의 깊은 상처가 아픔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찾은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 피난처로 도망친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왜 여기 모이셨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아는 것은 여러분들이 여기 모여서 그래도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려고 하는 이유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안 믿고는 살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들을 당신의 사랑으로 품으로 우리를 부르신 데는 우리들이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섭리들이 작용하면서 여러 가지 것들이 사용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도망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상처와 한없는 고통 그 자체를 주목하지 말고 그것을 통해서 알게 하신 상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기억들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에게 깊은 상처와 고통을 주고도 본인이 그랬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여러분들의 부모보다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알았습니다. 원래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의 가슴에 난 면도칼 자국만한 상처는 기억해도 청룡도를 휘둘러서 다른 사람들의 목을 친 기억은 나지도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들이 우리에게 그런 고통과 많은 아픔을 안겨주었지만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그분들은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불러주셔서 어두움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도록 새롭게 하나님의 복음과 그 십자가의 사랑과 그 부활의 영광 가운데도 우리를 불러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우리의 부모보다 배나 더 악랄하게 우리 자식들의 가슴에 칼집을 냈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하나님이 우리 할아버지도 아니고 우리 아버지도 아니고 우리 할머니 우리 외할머니도 아니고 바로 나에게 이러한 놀라운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복음의 참된 의미를 느끼게 하셨습니다. 아무리 오래 교회에 다녀도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깨닫게 하시고 우리 부모님이 나를 교회에 끌고 갔지만 우리 부모님이 들어가지 못한 신령한 신앙의 세계에 우리들이 들어가게 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만드셨고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 수 있는 실제적인 능력을 중생과 은혜체험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 속에 주입해 넣어 주셨습니다.
혈통으로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 조상이지만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받은 나는 새로운 영적인 가문을 일으키는 시조가 되는 지도 모릅니다. 숙명적으로 전수되어 내려왔던 그 상처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나의 대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우리 부모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렇게 살수밖에 없었던 그분들의 모든 삶을 이해하고 죄와 불순종과 허물 속에서 우리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 수 밖에 없었던 어둠 속에 있었던 그 부모의 칙칙한 나날들을 모두 끌어안고 그 분들이 주님을 모르는 어둠 속에 흘렸던 그 눈물들을 닦아주고 용서하고 주님이 깊은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그분들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제는 더 이상 조상을 타고 내려오는 그 구정물이 내 자식의 대에 미치지 못하도록 모두 정리하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녀들을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가 나에게 못 다한 사랑까지 모두 담아서 어린 시절로부터 마지막에 우리의 품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그들의 모든 삶 구석구석에 사랑의 손길이 깃들게 하고 자비와 애정의 터치가 그들의 인성과 성품을 빚어가도록 만드는 그런 삶을 살게되는 것이 우리 자녀가 천대에 이르도록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우리에게 상처를 준 우리의 부모는 용서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자식들을 사랑합니다. 여러분들의 자식에게까지 이 고통스러운 상처와 아픔들이 전수되고 그 자식이 또 자식에게 숙명적으로 그런 고통을 물려주는 그러한 뼈아픈 인생이 이어지도록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는 결단을 하고 여기에서 끝내야하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과 은혜를 못 받은 것 때문에 여러분들이 얼마나 힘겹고 상처뿐인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 것입니다. 여러분의 어머니는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신 그런 어머니가 아닐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는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쓴 적이 한번도 없는 짐승 같은 아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것을 이야기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찬송: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우리에게 상처를 준 우리의 부모들은 그것이 죄인 줄도 몰랐고 강퍅함인지도 몰랐습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기도할 줄도 몰랐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치료해주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배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집안이 대를 물리면서 어두움과 상처 속에서 사는 것을 보실 수 없어서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헐고 폭포수처럼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증거 해주셔서 우리의 허물과 수많은 죄, 상처와 고통 속에 응어리 진 일그러진 우리의 인간성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빛을 비취게 하셔서 우리 부모가 몰랐던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 때문에 우리의 부모님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시고 수많은 허물과 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갚아주신 하나님 때문에, 미움과 원망과 질투로 죄악으로 응어리진 우리의 가슴에 자기의 아들을 찢으셔서 그 피를 발라 구속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시키십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 예수 자신이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할 수 있게 하시기에 오늘 주님께서는 이런 상처 속에서 자라온 수많은 자녀들인 우리를 향해서 네 아버지 네 어머니를 단지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이유 때문에 공경하라고 잔인할 정도로 수준 높은 명령을 하시면서 우리를 그 거룩한 성도의 삶으로 부르십니다.
누가 피해자입니까? 누가 가해자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와 어두움들이 부모와 우리 사이를 에워쌌고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배워야할 나이에 상처와 눈물 속에서 자라게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잊어버려야 합니다. 잊어버릴 뿐 아니라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그분들을 깊이 용서하고 그분들이 자신들의 부모를 통해서 못 배운 하나님의 사랑을 자식인 우리를 통해서 배우도록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분들의 부모는 그렇게 하실 능력이 없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을 향한 공경함은 결코 동정이어서는 안됩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나는 그대를 사랑하노라’ 식의 왕이 신하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과 같은 그런 건방진 은혜 베풂이 되어서는 안되다는 것입니다. 주께 하듯이, 인생을 살면서 때로는 주님이 우리가 원하시는 대로 해주시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나중에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나면 주님의 사랑이 없었던 그 때가 가장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때였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경험하게 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부모님들을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들이 마치 주님이신 것처럼.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과거에 대한 추억이나 상처에 대한 기억들이 부모와 우리와의 관계를 방해하지도 말아야 하고 더 이상 그런 기억들을 떠올려서 그분들의 마음에 고통을 주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언제나 당당하게 자녀인 우리들로부터 섬김을 받으실 수 있도록 마음에 자유함과 너그러움을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성심껏,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부모님을 며칠 뵙지 않으면 보고 싶어지기까지 거짓말 같은 일들이 관계 속에서 경험되도록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들을 부단히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게 해서 우리 부모들이 우리를 통해서 치료하시고 고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한 인간의 가슴속에 가시나무와 같이 처절한 떨기들이 돋아나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다 보았을 텐데, 그 속에 난 가시나무 같은 것들이 그 인간의 인생을 망쳐놓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대신에 놀랍게 변화되어서 상처밖에 없는 관계들을 끌어안아서 사랑의 관계로 바꾸고 미움과 원망이 있는 가슴 아픈 관계들을 모두 치료해서 하나님 앞에 세워주는 아름다운 도구로 우리들이 쓰여지는 것을 본다면 그분들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종이나 자유인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 없었던 것처럼 주님을 모르는 이 세상 속에서는 가해자도 있고 피해자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 모든 얽어 맨 것들을 벗어버리고 찬란한 복음의 빛 가운데에서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자기의 가슴을 쥐어뜯고 상처와 고통에 대해서 말한다고 하더라도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자기의 자녀들에게 저주를 내리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모든 계명들을 주실 때 약속이 없이 그냥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당연한 의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공경에는 현상금이 붙어있습니다. ‘네가 부모를 공경하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내세에만 축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뒤집어 이야기하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단명할 것이며, 거리에서 비명횡사하고 요절할 것이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이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셨는지 가정을 통해서 이것을 바르게 세우시려고 현상금까지 거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살면서 열심히 일하고 애써도 별로 모아지는 것이 없고 되는 일이 없는 사람들은 부모님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마음에 그런 식의 상처를 부여안고 살아가는 한 뭘해도 돈 통은 빈털터리가 되기 쉽고 언제 어떻게 비명 횡사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축복들을 받을 자격이 근본적으로 결핍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부모 공경의 첫 번째 대의는 명절에 찾아가서 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카네이션을 한 박스 드리고 해마다 하나씩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
(예화)5월 8일 음식점이 만원이다.
통장에서 자동으로 이체되는 그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내게 무슨 유산을 남겨주고 옛날에 나를 어떻게 사랑했고 어떻게 교육을 시켰다는 것들 때문에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만족하고 깊이 사랑할 수 있는 것, 심지어는 우리가 상처가 있었고 고통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으로 모두 극복하고 이제는 그것을 뛰어넘어서 ‘부모님이 이렇게 살아 계신 것이 제게 너무나 감사하고 너무나 기쁩니다’며 모두 용서하고 진심으로 사랑하고 진심으로 공경하여 우리 모두 찬란한 진리의 빛 가운데 살면서 이 풍진 세상에서 부모는 자식에게 기대고 자식은 부모님을 기대면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그렇게 살아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의 삶 속에 이루어지는 천국을 보여줄 수 있다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3. 아비들아 자녀를 노엽게 마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엡6:4上)
사도가 “네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라‘고 말한 후에 자식을 향한 부모의 대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순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양사회에서는 자식의 부모에 대한 의무만을 강조했지 부모가 자식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책임과 중대한 의무들에 대해서는 소홀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격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러한 우리의 태도는 매우 잘못된 것이고 이러한 사상들이 우리의 가정을 지배하는 한 우리의 가정은 망가진 채 계속 대물림을 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가정 속에 있는 구성원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각각 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덕목들이 있습니다. 그 주도적인 덕목들이 먼저 준수되지 않으면 나머지 부분에 있어서 상당히 잘 한다고 하더라도 가정이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내의 남편에 대한 우선적인 덕목은 순종이고, 남편의 아내에 대한 우선적인 덕목은 사랑입니다. 자녀의 부모에 대한 우선적인 덕목은 공경함이고, 부모의 자식을 향한 덕목은 노엽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4절을 보는 순간 여러분들은 즉각적으로 이런 의문을 갖게 될 것입니다. 왜 사도는 바로 앞 절에서 “네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라”고 효도를 받을 때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같이 말했는데, 자식을 향한 의무에 대해서 말할 때는 왜 “아비들이여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함으로써 마치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 있어서 모든 책임을 아버지가 지고 있는 것처럼 말할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렇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어머니를 자녀 교육에 있어서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머니를 제해 버리고 “아비들이여”라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사도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머니 아버지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의무이고 자녀의 교육을 향한 의무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모두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아버지는 가서 돈만 벌어오면 되고 자식들의 교육은 어머니가 시킨다 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성경적으로 볼 때 대단히 무책임한 사고방식이고 그런 사람들은 자식을 아니 낳은 것만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가정을 세워 가는 원리에 있어서 혼잡스러운 사상들이 가정을 세워 가는 원리에 보태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생각의 기초를 성경 속에서 찾아오려고 노력을 해야지, 이 시대 속에 흐르고 있는 사고에 동화되거나 그런 사상을 섞어 넣어서 뭔가를 건축해보려고 하면 바른 가정이 되기 어렵다는 이야깁니다. 그래서 사도가 “너희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한 로마서 12장에서의 그 권면이 가정을 세워 가는 데 있어서도 중요하게 작용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여기에서 “아비들이여”라고 말하면서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당부를 했느냐 하면, 어머니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을 제외해 놓고는 심성이 여리고 자비로운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표독스러운 어머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여성의 성품은 자비롭고 부드럽고 포용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가 자식을 노엽게 하는 것은 덜 문제가 되고 또 노엽게 할 가능성이 좀 적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쩌다 한번 만나더라도 아버지가 자녀들을 대할 때에 자녀를 대하는 원리가 성경적으로 정립되지 않으면 자식의 마음에 노여움의 상처를 많이 주기 쉽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자녀가 어머니로부터도 상처를 받는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는 별로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손톱자국정도의 상처입니다. 많이 잔소리를 하고 책망을 하고 때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언제나 어머니와 자식간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떼어놓을 수 없는 살붙이적인 사랑 때문에 언제나 지워집니다. 그래서 상처가 남아도 자디잔 손톱자국 같은 상처가 남을 뿐인데 아버지와는 매일 살 부딪히고 사는 사이가 아니라도 어느 한 순간에 상처가 가해지면 깊은 칼자국처럼 되어서 남는 것이 남자가 가지고 있는 대담함, 몰인정함, 폭력적인 성격 등과 맞물려서 그런 상처를 남긴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임상적으로 조사를 해봐도 어머니로부터 상처를 받은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는 밥을 해 먹이고 함께 끌어안고 자고 아프면 끌어안고 우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상당히 많이 희석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아버지의 경우에는 상처를 주기는 하는데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관계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회사 가고 없고, 자면 그 때 들어와서 아침 먹고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아버지의 모습일 경우에는, 더더욱 상처가 오기는 하지만 그것이 씻겨지는 것은 힘듭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우선적으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버지만 해당된다기 보다도 남편과 아내의 대표자로서 그 아버지를 부르면서 사도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주도적인 덕목이 ‘노엽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소극적인 노엽게 하지 않는 것으로 오전에 설교하고 오후에는 적극적인 덕목인 ‘주의 교양과 교훈으로 그들을 훈계하고 양육하는 것’에 대해 설교하겠습니다.
노엽게 하는 것은 언어적인 의미로 보면 분노하도록 자극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분노하도록 자극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말하면 이 자녀들을 부모가 돌봄에 있어서 무엇과도 양보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는 자녀들과 인격적인 사랑이 흐르는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에 의해서도 양보할 수 없고 양보될 수 없는 관계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더욱이 아버지들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자꾸 분노할 수밖에 없도록 어떤 자극이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계속 주어wu서, 그것이 밖으로 표출이 되든지 되지 않든지 그런 것들이 계속 쌓이면, 부모를 통로로 해서 하나님께서 뭔가 자녀에게 흘려 보내려고 하는 교양과 훈계, 양육의 기능이 단절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녀들도 부모를 분노하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사실은 부모들이 자녀를 분노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부모들이 자녀를 분노하게 하는가 하면,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요인으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그 부모의 비윤리적이고 본이 되지 않는 잘못된 삶이 자녀를 분노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굉장히 심각합니다. 자식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부모를 통해서 배웁니다. 세상이 믿을만한 세상인가 못 믿을 세상인가도 부모를 통해서 배웁니다. 세상이 희망을 가져도 좋은 세상인가 그럴 수 없는 세상인가 하는 것도 부모를 통해서 배웁니다. 소망과 좌절과 인내 등의 추상적인 단어들을 자녀들은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서 일차적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모가 아주 상식 밖의 사람입니다. 부모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결혼을 해서 생물학적으로 자녀를 낳아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방탕하게 살고 폭력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으로 가득찬 존재인 경우에 자녀는 정말 불행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을 때에는 좀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가 되어 짝을 찾고자 하는 그리움이 있어서 시집장가 가고 부부생활을 하니까 자식이 생겨서 그냥 낳아버렸다. 그 이외에는 나는 모른다’고 하면 동물이지 사람입니까? 부모가 될 자격이 있는지 심사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성찰을 해서 자녀를 낳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의무를 지워주는가 하는 것을 깊이 성찰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막가파 식의 인생을 사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대책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말 한마디로 아이에게 야단을 친 적도 없고 용돈을 달라고 해서 안 준 적도 없고 좋은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물질을 아낀 적도 없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삶이 부도덕하면 그것 자체가 강한 정신적인 폭력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삶의 모습이 절제가 없고 방탕한 삶을 보는 것은 차라리 그 아이를 발가벗겨놓고 채찍질하면서 짐승처럼 키우는 것보다도 더 심한 정신적이고 영적인 폭력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그렇게 살면 안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가 되었고 자녀를 낳아서 한 아이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아버지 어머니가 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그 인간을 하나님 안에서 잘 자라게 하도록 우리들이 신성한 의무를 지고 태어난 것이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항의하지 못한다고 해서 자기가 아무 삶이나 자식에게 보여줌으로서 그 아이의 영혼에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신으로 혼자 살 때에 부도덕하고 방탕하게 사는 것은 자기 한 사람에게 죄를 짓는 것이지만, 자녀를 가진 사람이 그렇게 사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동시에 자기가 낳은 자식을 구둣발로 밟으면서 사는 것과 똑같은 삶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그런 삶을 산다고 할 것 같으면 무엇으로서 자식에게 준 피해를 보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구둣발로 짓이기는 삶을 살아놓고 무엇으로서 그 아이에게 보상을 해주겠습니까? 그것이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을 위해서라도 절대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어디 이것이 아버지뿐이겠습니까? 방탕한 어머니나 부도덕한 어머니, 자식을 지극히 사랑해야 하는 기본적인 모성이 결핍된 성격적으로 잘못된 사람들은 모두 삶 그 자체로서 자식에게 무언의 폭력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으로서 자녀의 형상이 파괴되고 있고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끊임없이 분노하는 가운데 한 인간의 인성이 돌이킬 수 없이 굽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런 부모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자식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은 삶을 사는 모든 부모들의 모습이 이렇게 자녀들을 진노하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드는 그런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속에서 쉼 없이 일어나는 분노는 상처가 되고 그 상처는 그 사람의 인간성 자체를 형성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과 융합될 경우에는 돌이키기 힘든 강퍅함과 패역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그러진 모습을 가진 사람들로 태어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전부터 시집 장가를 보낼 때 가문을 봅니다. 그것을 비성경적이고 쓸데없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정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가정이 상처 투성이의 집안이면 일단 경계를 해야 합니다. 상처투성이의 집안에서 자란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정신적이고 영적인 폭력을 받으면서 자란 자식들은 그런 정신적인 장애를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예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충분한 사랑의 경험에 의해서 그런 상처가 극복되었을 경우에는 괜찮습니다.
(예화) 깨트려진 가정의 믿지 않는 남녀가 결혼하려고 할 때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들의 세계에는 망가진 것만 있지 치료와 회복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헤어질 수 없다면 예수 믿고 상처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유를 받은 후에 결혼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경험하면 됩니다. 망가진 가정과 부모로부터 받은 수많은 상처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고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는 자리가 되어서 분명한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 속에서 붙잡혀 살면 오히려 그 연약함이 강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첫 번째의 경우에 해당되는 사람보다는 상식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식들이 우리 나라 사회에 아직은 훨씬 더 많습니다. 더더군다나 이러한 충고를 듣는 대상이 신자들의 경우에는 더더욱 전자에 해당되어서 짐승처럼 살면서 자식들을 짓밟아버린 인간 이하의 상처를 준 부모보다는 그래도 뭔가 하나님 의지하며 살면서 자식을 바르게 길러보겠다고 애를 쓰는 부모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는 부모들이 믿는 사람들 가운데는 훨씬 더 많습니다. 물론 믿는 사람 가운데도 내 인생은 내 인생이라며 자식들을 내팽개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 하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렇게 막 나가는 부모들은 거의 없고 소수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녀들의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고 어떻게 하든지 자기가 이 자녀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좋은 사람으로 교육시키고 길러내는데 유용한 도구가 되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마다 가장 우선적인 기도의 제목이 자녀를 위한 기도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로부터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충고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불신자가 아니라 에베소교회 교인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19장의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고 에베소 교회가 섰는데, 그런 풍성한 은혜의 복음을 경험하고 말씀의 풍부함과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성도들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자녀들을 노엽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일까요? “부모님을 노엽게 하는 적은 있어도 자식들을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는데 왜 노엽게 하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이야기이고 자식들이 부모로부터 받는 노여움을 어린 나이에 밖으로 드러낼 정도가 되면 인간도 아닙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에게 안하무인격으로 대드는 아이를 보면 그 부모가 너무 불쌍해 보입니다. 자식이 더 나이가 먹는다면 인간대접을 받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이를 낳을 때는 깊이 생각하여 자녀들에게 그런 무시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바르게 길러야 합니다.
왜 자녀들을 노엽게 할까요? 그 문제를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다. 자녀들이 잘못할 때 부모에게는 자녀들을 책망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부모로서 직무유기입니다. 아이를 향해서 어렸을 때에 부모가 책망과 징계를 마다하면 결국 이다음에 그 아이가 성장했을 때 하나님이 직접 징계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안되지 않겠습니까? 성인이 된 다음에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징계를 받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여러분 자신들이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향해서 부모가 징계를 하고 잘못을 고쳐주는 자체가 자녀를 노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당연히 해야할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부모의 징계를 통해서 복잡한 생각을 하기 전에 아이들을 책망하고 징계해서 좋은 일에 대한 부모의 호의와 나쁜 일에 대한 부모의 불쾌감을 선명하게 의식할 수 있도록 아이들의 가슴에 심어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요즘은 하나나 둘의 자녀밖에 낳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없이 아이들을 위해주고 귀여워 해줍니다. 가정의 전권을 자녀들이 쥡니다. 텔레비전 채널 선택권에서부터 외식하는 장소까지 자식들이 절대적인 권한을 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우대하면서 기릅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고 어떤 행동이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하고 어떤 것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준다라고 하는 선명한 인식을 못 가진 채 아이들이 성장해 갑니다. 아이들을 많이 사랑해 줘야 한다는 명분으로 아이들을 마음대로 자라게 내버려둡니다.
(예화) 엄마 따귀 때리는 아이.
자기 자신만 그런 자식의 태도를 이해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 대한 그런 태도를 가지고 그 아이가 결혼을 해서 시부모, 장인, 장모를 대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사회적인 문제이지 개인적인 문제이겠습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게 유치원을 버릇없이 지내고 초등학교 시절을 지냅니다.
(예화) 목사님에게 아이를 야단 쳐 달라는 부모.
그렇게 마음대로 자라게 내버려두었는데 아이가 점점 마음에 안 들게 됩니다.
(예화) 중학교 들어간 아이 가방을 뒤져보는 이야기.
그러면 아이를 바로 잡아보기 위해 오랫동안 발휘되지 않았던 만용이 확 솟아오르게 됩니다.
(예화) 아이를 때리게 되는 이야기.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아주 어렸을 때, 아픈 것이 무엇인지 알고 부모가 분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바로 그 나이에 아이들을 야단치고 때리기 시작해야 합니다. ‘부모가 이런 행동을 하면 싫어하는 구나’ 까지만 생각하는 훌륭한 기회를 내버려두고 멋대로 키워버린 다음에 꺽어 보려고 합니다. 비스듬히 자란 향나무는 어렸을 때 똑바로 잡아야지 다 자란 후에 일으켜 세우려고 하면 부러져 버립니다. 교정하는 과정이 교정 그 자체보다 더 큰 상처를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악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을 그 때에, 선을 행하면 아주 기뻐하고 악을 행하면 아주 슬퍼하거나 분노하거나 징계를 받는 것을 자식들이 경험하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때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몹시 불쾌한 표정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이 되게되면 인격적으로 감화시켜서 사람을 만들려고 해야 합니다. 인격적으로 감화를 시키려면 부모가 인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부모 자신이 부단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감화를 받으면서 ‘내가 인생을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하는 반성과 성찰의 세계가 없는 부모들은 단언컨대 자식을 낳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가정에서 일어나는 번식이라고 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번식일 뿐입니다. 인격적으로 설복하게 해서 안 된다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첫 번 째로 말씀드린 것처럼 윤리적으로 타락하고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말씀도 들으려고 하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자식을 노엽게 하게 되겠느냐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부모가 그런 나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좋은 부모가 되려고 애를 씀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자녀에 대한 비뚤어진 기대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녀들에게 노여움을 촉발합니다. 그리고 그런 분노를 통해서 이 자녀들이 억압을 받으면서 그 속의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고 굽어진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종종 부모님의 믿음은 나무랄 데 없이 뛰어난데 그 가정에서 망가진 패륜아들이 태어나는 것들을 볼 것입니다. 그것은 자녀 교육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부모가 경건하고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자식을 향해서 얼마나 삐뚤어진 기대를 갖게되기 쉬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삐뚤어진 기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아이에게 기대하시지 않는, 하나님이 그것이 필수적이라고 부여해 주시지 않은 것들에 대한 과다한 요구, 그리고 그대로 살지 못하는 자녀에 대한 분노들이 자녀를 노엽게 만들고 그 노여움들이 계속 쌓이면서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기초를 허물어버리는 것입니다.
(예화) 결혼한 지 7년만에 아이를 낳은 후 마음속에 그리는 자식에 대한 기대가 아이를 낳으면서 점점 구체화 되어갔다. -그것은 대부분의 부모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 역시 그런 기대대로 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외모, 절약정신, 발표력, 시험점수, 독서......그러 나 5학년 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었던 꿈들을 허물어버려야 했다. 아들이 정리 정돈 안하는 것을 고쳐보려고 했던 일. 그러나 나중에 그 것이 뭐가 중요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정리 정돈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렇게 아버지와의 관계에 공포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쪽으로는 얻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화) 요즘 아이들은 학원에 많이 보내는데 어떻게 모두 피아니스트, 수영 선수...가되겠는가?
과도한 기대를 갖고 자식들이 그렇게 못해주었을 때 강한 반발심을 갖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에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삐뚤어진 기대입니다.
(예화) 자식이 고3, 중3인 40대 자매님의 이야기-아이가 원해서 바이올린을 300만원 주고 사줬 는데 1년 되자 그만 둬 버린 이야기-아이의 불성실함으로 인해 큰 상처를 받았고 실망했 다.
아이들에게는 장난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간성을 평가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자신도 못간 길을 자식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과도한 기대입니다.
무엇을 하라고 줬는데 그것을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끝까지 매달리는 것이 별종이지, 하다가 하기 싫어서 집어치우는 것은 별종이 아닙니다.
(예화) 집집마다 쓰지 않고 내버려둔 피아노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자식들의 살아있는 모습입니다. 한번씩 해볼 기회가 있으면 해보지만 못한다고 다그치지는 마십시오.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은 고개를 끄덕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다음에 말씀드리는 대목에 와서는 쉽게 긍정하기 힘드실 것입니다. 그런 너그러운 마음의 태도를 공부에 대해서도 가지라는 것입니다. 교육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치고, 태만하면 타이르기도 하고, 인격적으로 대화를 해서 공부 잘 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기도 하는데, 자식에 대해서 과다한 기대를 갖고 그 기대를 강요하면 사랑의 관계가 깨트려지고 노여움과 분노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실망하거나 상처받았다고 말할 때, 그 사람에 대해서 과다한 기대를 가지고 살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해서 실망한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처받은 것은 사랑을 기대했는데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상처받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상처는 사랑을 기대하는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애할 때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에게 사랑을 기대하니까 상처를 받습니다. 남편과 아내, 기대하는 사랑이 크니까 상처를 많이 받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사장에게 ‘일도 못하니 죽어버리라’는 말을 들으면 상처 안 받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이것도 못하니 죽어버리라고 하면 상처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장으로부터는 사랑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남편으로부터는 사랑을 기대합니다. 학원 선생에게 문제를 못 푼다고 욕을 얻어먹으면 상처를 받지 않으나, 아버지에게 ‘너는 아무래도 돌 같다’는 말을 들으면 상처가 됩니다. 왜냐하면 부모로부터는 기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기도해주고 도와줘야 하지만 그 아이의 능력을 벗어나는 과도한 기대를 갖으면 안됩니다. 공부도 하나의 기능입니다. 바둑을 잘 두는 사람도 있고 못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성 자체를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어렸을 때 구슬치기하면 유난히 잘 따서 구슬을 부대에 담아 가지고 다니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매일 그 아이에게 구슬 사서 보태주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생의 무게가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확률적으로 삶의 양식을 많이 바꿔놓기는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뛰어난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기를 바랍니다. 할 수만 있으면 수십만명 가운데 한 명 나오는 귀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식을 향해서 그런 기대를 갖고 그 기대를 과다하게 절대시해서, 그 모습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식을 보면서 분노하는 마음을 갖고, 결국은 자식을 향한 사랑이 일그러지게 만들고 자녀들을 노하게 만들어서 관계 자체가 파괴되도록 만드는 것들이 과연 성경이 부모들에게 자식을 향해서 요구하고 있는 양육의 태도입니까? 아닙니다.
심리적으로 자기가 뛰어나게 공부를 많이 했던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최소한 너는 이 정도는 해야한다’는 편견을 가질 수도 있고 공부를 못했던 부모들이 ‘내가 못했으니까 자식을 통해서 한번 한을 풀어봐야겠다’고 하는 생각을 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 다 병적인 것입니다. 자식들 중에서도 뛰어나게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소수이듯이 옛날 우리들이 학생일 때도 뛰어나게 공부 잘하는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린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내가 뛰어난 사람이었으니까 너도 나 같아야 한다’라는 이유 때문에 자녀들에게 노여움을 주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자녀들이 공부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분노와 책망, 도전들이 자신이 살 수 없었던 삶을 자식을 통해서 살아서 자식이 아니라 자기가 좀 행복하고 대리 만족을 누리고 싶은 심리적인 욕구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제가 이 교회를 목회 하는데 옛날에 직장 생활할 때 말단만 했기 때문에 목회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 위에 군림하는 꿈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목회를 하면 그 목회가 올바른 목회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정직하고 청렴하게 교회를 이끌어간다고 할지라도 동기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올바른 목회가 아닌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내가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뼈빠지게 직장 생활하겠느냐’고 이야기 할 때마다 아이들은 속으로 역겨워합니다. 교육은 그런 신파조의 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말은 조금이나마 부모를 존경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무너져 버리게 합니다. 자식을 향해서 과도한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버려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원론적인 관계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목사가 교인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진리를 정직하고 올바르게 선포하는 것일 겁니다. 그것이 대의입니다. 그것을 희생하면서까지 여러분들에게 만족을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을 때 그렇다고 대답을 하면, 묻는 사람도 목사가 아니고 그렇다고 대답하는 이들도 성도가 아닙니다. 자식은 부모를 깊이 공경해야합니다. 그런데 그 공경해야할 의무를 파괴하면 서까지라도 부모와의 관계에서 집착해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부모에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이유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것은 안돼는 것입니다. 그것은 파괴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향해서 공부 잘하기를 바라고 정리정돈 잘하기를 바라고 신중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기대를 부모가 갖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한 것이고 그런 기대를 안 가지고 있으면 자식을 버린 부모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가지고 있음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기대가 근본적으로 부모와 자식 속에 흘러야 할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그따위로 하려면 다 집어 치워”라고 하는데, 이런 모독적인 언어 폭력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폭력입니다.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아이가 뭐가 되겠습니까?
저 자신도 목사이지만 부모로서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저도 예쁘장한 아이를 보면 참 예쁘구나 생각되고 공부 잘하고 훌륭한 학교 다니는 아이를 보면 우리 아이들도 저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재능이 뛰어난 아이들을 보면 저 집 부모는 참 좋겠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부모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가 못하면 속에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기대하던 것과는 너무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러면서 생각되는 것은 ‘왜 저런 아이가 태어났을까?’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 작품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책망하고 꾸짖고 가르치기는 하는데 그 가르치는 자체가 아이를 향한 과다하고 일그러진 기대들을 가지고 아이를 보니까 자꾸 지적해야할 문제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물론 항상 폭력을 휘두르면서 지적하는 것은 아닙니다. 타이르기도 하고 야단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아들과 진지하게 대화를 하는데 자존감이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화) 아빠처럼 생각을 깊이 할 수도 없고, 그 생각을 말로 할 자신도 없고, 글을 잘 쓸 자신도 없고, 목회를 잘할 자신도 없다는 아들의 이야기. 음식점에서도 자기의 원하는 것이 없었 다.
그 때 이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자기 주장을 강력하게 펼칠 수 있는 자존감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아이를 억누르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예화) 책에서 읽은 내용-아이들에게 정리 정돈을 하라고 시키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글-정리 정 돈하지 않는 것은 창의력이 뛰어나다는 것.
책이 그 자리에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옷은 반듯하게 각을 지어서 개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계속 쌓이면, 세상에는 옷을 벗어서 차곡차곡 개놓는 사람보다는 던지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이 있는 사회 속에서 살 때 그 아이가 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부모니까 자식을 폭력을 통해서라도 고쳐 놓았는데 그 아이는 그 사람들을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는 사람들끼리는 행복할 수 있고 평안을 누릴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못사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하니 공부가 뛰어나고 모범생이었지만 쓸모 없는 사람들을 만났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들이 잘못된 것은 모범생이었고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쓸모 없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그런 틀에 짜여지도록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다양하나 사람들의 사고와 생각들을 수련해서 살 수 있는 적응력들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화) 그 후에는 어질어진 것을 보고도 참을 수 있었다.
(예화) 아이가 집중력이 없는 것에 대한 갈등.
(예화) 말씀에 집중하지 않는 교인들에 대한 생각.
(예화)집중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상상력이 떨어진다는 책의 내용이 위로를 주었다-집 중력이 뛰어난 사람은 외곬이고 산만하나 사람은 동시에 두 세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이 있다.
여러분과 저 같은 막돼먹은 인간들이 어떻게 이런 효심을 갖게 되었습니까? 때때로 주어지는 인생을 온통 휙 뒤집는 무서운 징계를 통해서 이런 철든 생각을 갖게 되었나요? 지금이라도 뛰쳐나가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누가 막겠습니까? 그런데 창칼로 하나님께서 막지 안으셔도 매 주일이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나의 부족한 삶을 고백하고 수많은 결함과 불순종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정말 주님의 자녀답게 살고 싶습니다’라고 뺨에 눈물이 흐르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동력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이렇게 참된 마음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반 죽이실 거야’하는 공포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내가 이렇게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나면 하나님이 나에게 물질적인 복을 주실 거야’하는 알량한 상급의식들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이렇게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 되기를 원하는 소원을 품게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교회를 뛰쳐나가 보기도 했습니다. 방탕하게 살아도 봤습니다. 세상에서 죄를 짓지 못하고 신앙 생활한 것을 한풀이하듯이 방종하게 자기자신을 쏟아 부으면서 개판 같은 인생을 살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세상으로부터도 버림받은 것이 느껴지고 그렇게 뜨겁게 사랑했지만 세상이 나의 영원한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가슴속에 잔잔하게 생각이 났습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도저히 면목은 없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고 말할 자신은 없었지만 교회에 돌아오니까 여전히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주님의 사랑을 멀리 떠나서 상처받은 세월의 한을 품고 지냈는데 내가 하나님을 떠나서 겪은 슬픔과 고통보다도 더 많은 아픔 속에서 집을 나간 자식과 같은 나를 기다리시면서 주님이 오랜 세월 참으신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돌아왔을 때 오히려 그 집안 안에서 매일 하나님을 섬기며 살던 사람들도 흔히 경험하지 못하는 뜨거운 사랑을 당신의 품속에서 경험하도록 만들어주시는 그런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늘 반복되면서 우리같이 막돼먹은 인간들이 그 사랑에 마음이 녹아져서 ‘하나님 아버지’하면서 그 이름 석자에 마음 깊이 가슴이 녹고 ‘하나님이 내 아버지 신데 내가 이렇게 살수는 없지’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지’하는 효성스러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중의 어떤 사람들은 천재와 같이 뛰어나게 공부도 잘하고, 정리정돈도 잘하고, 발표력도 좋고, 수많은 재능도 가지고 있어서 예술에도 뛰어나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나요? 주님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았나요?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고 용납해줄 수 없는 단점들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었는데 그런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 가지 점에서는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한없이 부족하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사랑 받는 자녀로 살고 싶습니다. 주님의 나라에 소용되는 인물들이 되고 싶습니다’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 무엇을 통해서 입니까?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용납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불효했어도 한번도 우리를 분노하게 만들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과 충분한 사랑이 진흙과 같은 우리를 빚어서 이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길러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생각 없이 기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정결한 신앙을 갖기를 원했고 인내하기를 원했고 시련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기를 원했고 세상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했고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이 세상에 대한 꿈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며 사는 진실한 성도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지 않을 때 하나님은 슬퍼하시기도 하고 책망하시기도 하고 혹은 징계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하나님의 슬픔, 하나님의 징계, 하나님의 분노, 하나님의 마음 아픔, 책망 등 모든 것들이 있었지만 그런 것들 보다 더 뛰어난 것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든지 확인할 수 있는 일방적으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우리들이 어떤 부끄러운 모습으로 인생을 살았든지 세상의 모든 사람은 나를 용납할 수 없지만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용납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갖게 하심으로서 늘 우리들이 인생의 막다른 길목에서 하나님을 택하고 그분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주신 수많은 사랑과 인내의 날들이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면서 위로와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그분 뜻대로 살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피할 수 없이 불순종하며 범죄 했던 그런 연약한 신자들까지도 모두 그 하나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았던 사람들은 그렇게 살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신 아버지를 사랑하고 찬양하고, 그렇게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은 더더욱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님께로 피할 마음을 하나님께서 갖게 하십니다. 그런 관계가 자식과 아버지, 자식과 부모의 관계 속에서 경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깨달은 것은 ‘내가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내가 물질적으로 많이 봉사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는 동안에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수 있다’가 아닙니다.
(예화) 얼굴도 못생겼고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님이 오빠만 너무 사랑하는 것에 대한 복수로 공부했다는 한 자매 이야기.
그렇게 해서 훌륭한 학교는 들어갔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망가진 그 자매의 인성은 하나님이 아니면 치료하실 분이 없는 것입니다. 그 자매는 그래도 하나님을 만났으니 치료될 가능성이 있지만 하나님 못 만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간혹 우리 주위에는 자녀를 위해서 온통 헌신하고 모범적인 자식을 길러냈는데 자식으로부터 차가운 냉대를 받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들은 모두 자식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는데 그렇게 간단하게 볼 문제가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모든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항상 자기 자식이 부모인 자기들을 보면서 ‘나는 내 아버지의 아들로 내 아버지의 딸로 존재한다는 자체가 우리 아버지 어머니에게는 기쁨이다’를 인식시켜줄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공부를 잘하고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모든 자기 결심, 욕구 등이 부모로부터 받는 한없는 사랑과 이해, 일방적으로 쏟아 부어지는 아버지 어머니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 그런 것들에 의해서 빚진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랑에 부응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 자신은 자식만을 위해서 살았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자식에게는 부모인 여러분들이 존재하는 자체가 인생에 있어서 뼈아픈 고통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향해서 갖는 모든 기대는 복음 안에서 거듭난 기대여야 하고 신앙으로 걸러진 기대여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다 살고 난 후에, 부모라고 하는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소원은 어떻게 하든 공부 잘하고 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존재만 되면 부모가 한을 푸는 날이었다고 생각된다면, 부모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출세하려고 하고 이를 악물고 부모의 욕구에 만족을 주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일그러진 사람들이 태어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부모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요 뼈아픈 범죄를 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죽어 가는 그 순간까지 사랑 받는 관계에 의해서 빚어지는 영원히 완성되지 않은 흙덩어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나님이 지금 빚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만들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 드리고 싶습니다. 자식이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자식 분만 아니라 인간이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부모로부터 받은 그런 상처들이 있는 사람들인 경우에는 더더욱 자식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한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용납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나를 통해서 치료하고 용납하시고 용서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충분히 느끼면서 자라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부모가 하나님 앞에 해야할 중요한 일입니다.
저를 보십시오. 뛰어나게 공부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예술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문학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고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 지를 알게 되니까 수많은 결점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여러분과 함께 손잡고 아버지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기 원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고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천재로 태어나서 몇 세기에 한번씩 기독의 역사를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아직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런 사람이 안되어도 저는 그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에 그런 사람이 못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차별대우 받았다는 느낌을 한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나의 공로나 나의 의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폭포수처럼 쏟아 부어지는 사랑, 나도 용납할 수 없는 나 자신의 한없이 부족하고 비천한 모습, 만일 내가 내 자식이었더라도 벌써 실망해서 버렸을 것 같은 그 완고함, 고쳐지지 않는 그 집착, 그런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매일 쏟아 부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의 구속의 사랑
다른 사람이 손가락질하고, 우리 아버지가 몽둥이를 들어도 고칠 수 없었던 잘못된 것들을 치료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내가 잘못된 길을 걸어갈 때 피눈물을 흘리시는 십자가의 사랑 속에서 고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님께 효도하면서 살고 싶은 영적인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에게도 이런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지금도 자식에 대한 과도한 기대나 거듭나지 않은 가치관을 자식들에게 강요하면서 깨어진 부자의 관계, 깨어진 모녀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 앞에 모두 내려놓아야 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 깊이 회개하고 나라는 존재를 통해서 자식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었는지 깊이 기억하고 여러분들 속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쏟아 부어지는 폭포수와 같은 사랑이 여러분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충분히 흘러 들어갈 수 있었는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충분히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꼭두각시나 도구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그 자녀들을 향해서 부모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의무는 한없이 그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권리는 그 자녀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러한 사랑을 맛보고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배우고 부모는 자식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한 자녀로 서있는 자신을 배우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부모를 통해 부모의 사랑이 자식을 통해 하나님과 부모와 자식이 혼연일체가 되는 그런 행복한 삶을 살아 나가는 것이 부모인 여러분들을 향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기대인 것입니다.
4.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下)
오전에는 거듭나지 못한 가치관에서 비롯되는 강요된 기대들이 자녀를 얼마나 상처받게 만들고 황폐하게 만드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어디 생활 습관이나 공부 같은 것들 만이 자녀를 노하게 하는 방편이 되겠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자녀를 완전히 자기 수하에 두려고 하는 그런 관계적인 측면에서의 과도한 기대, 이런 것들도 자녀를 모두 굽어진 사람으로 만들고 본질적으로 아버지와 자녀, 어머니와 자녀 사이에 흘러야 할 인격적이고 사랑의 관계를 노예적인 관계로 전락시킬 위험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모범적으로 자란 아이들, 부모를 거역하는 것을 모르고 자란 아이들 가운데 망가진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범생을 길러내는 것이 목표시지요? 그런데 몹쓸 모범생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도 근원을 더듬어 가보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을 위해서 자식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해서 가장 좋은 것을 주는 방식으로 자녀를 기른다는 미명하에 인간성을 모두 억눌러서 억압하고 말살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인생 전체가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부속물처럼 그렇게 성장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녀들은 새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새는 영원히 새장에 가둬두고 거기서 죽게 할 수 있습니다. 새는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자유를 포기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화) 병아리 가둬 놓는 소쿠리에 있는 병아리가 몇 주 동안 나오려고 애쓰다가 처음에는 바구 니를 치워도 나가려 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심스럽게 흩어진다.
자녀들도 우리들이 한동안은 가둬둘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대대로 자라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육이 성공하면 결국은 아주 기계적인 인간 하나를 만들어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서 사랑이 흐르는 부모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경험하지 못한 채 파괴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복수하는 심정으로 공부했다는 자매의 말을 들을 때 섬뜩했습니다. 여러분들 중 어떤 사람들은 우리 자식도 나에게 복수 좀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남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성이 파괴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예화) 어린 시절 늘 맞고 다니던 아버지가 잠재의식이 발로되어서 자기 아이를 투사처럼 만들려 고 하는 경우, 외모로 컴플랙스를 가졌던 어머니가 빚을 내서 수술을 시켜서라도 미모의 딸을 만들려고 하는 집착.
그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자녀에 대한 정제되지 않은, 가치관 적으로 복음 안에서 거듭나지 않은 빗나간 욕망들로 자녀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소질이나 자녀의 희망과는 상관없이 교육의 틀을 만들어서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돌리는 것들은 범죄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충분히 자율적으로,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 모든 것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와 자식 간에 흐르고 있는 충분한 자기 용납, 사랑, 이런 것들을 주고받고 느낄 수 있는 관계를 갖게 만들어 주는 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예화) 프레스토를 몰고 데리러 오기 때문에 아버지가 싫다는 아이)
어느 한 편만 망가진 것이 아니라 다 망가진 사람들끼리 사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이렇게 망가트려 놓아서 고통스러운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망가졌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만 똑바르면 회복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자식을 부모가 용납해주든지, 부모가 막 나가는 사람이면 자식이 용서해 주면 됩니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깨트려져도 한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면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면 영혼이라고 보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쪽 다 보통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세상이 된 것은 그런 망가진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의 예에서 말씀드린 아이처럼 그런 것들을 통해서도 아이들이 상처를 받고 억압을 받습니다. 아버지가 가난하다는 것 때문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것들 때문에도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보통 아이들인데 그 보통아이들이 자기 아버지가 구두닦이 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프라이드를 갖겠습니까?
(예화)구두 닦는 아버지가 빗나간 청소년기의 아들을 휴학시키고 남쪽 경상도부터 시작해서 백 두대간을 타고 국토를 종주 한 이야기-오직 자연밖에는 없는 곳에서 부자가 단둘이 진정 한 대화가 이뤄지게 되었고 아버지에 대한 자랑스러운 마음과 호연지기를 키워주게 되었 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원리가 필요합니다. 우리들이 자녀들과 나누는 대화가 있습니까?
(예화)부부간의 대화가 있냐는 질문에 늘 얼굴 마주보고 이야기한다는 슈퍼마켙 하는사람이야기.
“성적표 가져와 봐” “국어는 왜 이렇게 떨어졌니?”...... 이런 것은 대화가 아닙니다. 일이나 성취를 확인하기 위한 매개체로서의 대화 말고 진정한 인간 속에 있는 마음속에서 이끌어져 나오는 대화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빠, 공부하기 너무 힘들어” 이런 것은 오히려 대화입니다.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대화가 시작되려면 “여보 왜 그렇게 한숨을 쉬어?” “인생사는 것 참 힘들다” “뭐가 그렇게 힘든데?”하며 흘러나오는 것이 대화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이끌어져 나오는 자기 생각과 고민이 담긴 언어를 이끌어 내는 것이 대화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들이 자식들과 대화가 있습니까? “성적표 가지고 와봐라. 성적이 왜 이렇게 안 올랐니?” “그렇게 잠만 자고 책은 언제 볼꺼니?” 그런 대화가 아닌 것들을 다 빼고 마지막에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끌어 올려서 아빠에게 전달해야 되고 엄마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부모가 그렇게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이끌어 내어서 자식에게 전달하는, 그런 종류의 대화가 있습니까? 그런 것들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에 우리 부모들은 우리에게 하는 만큼 했지만 우리 중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훌륭한 부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음에 늘 부모로부터 억눌림을 간직한 채 오랜 세월을 살아오다가 다시 시집 장가가서 아이 낳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대화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여러분들을 통해서 충분히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까? 언제든지 자신이 고통스럽거나 오류에 빠졌거나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에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하면 ‘어디에서도 용납 받지 못하는 나의 이러한 모습을 그분들은 용납해 줄 것이다. 그리고 내편이 되어줄 것이다’하는 기대를 자식들이 가지고 있습니까? 이런 것에 대해서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삶이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게끔 그렇게 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야할 일은 이제 막 자라나는 묘목에게 구리 같은 것을 칭칭 감아 분재를 만들려고 하는 프레임으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따뜻하게 햇살이 비쳐지게 하고 통풍이 되게 하고 적당한 온도를 맞추어 주는 온실과 같은 존재가 되어서 아이가 부모의 부어지는 충분한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소신껏 무럭무럭 자라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부모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 아이들이 자유스럽게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 충분한 자비와 용납함을 확신하면서 소신껏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자율적으로 자라는 가운데 아이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창의성들이 개발되는 것입니다.
(예화)똑똑한 사람은 장남이 아닌 차남 중에 나온다는 이야기-장남에게는 짐이 너무 많다.
뭔가를 도전해보고 싶고 자기가 해보고 싶은 삶, 걸어가 보고 싶은 길을 걷기에는 책임이 너무 막중하고 자기 인생을 다른 사람이 너무나 많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장남이 든든히 서서 살면 그 밑에서 차남이 재주를 부립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묘목시절부터 구리 같은 것으로 휘어 감아서 자기 원하는 대로 하게 하는 것은 안됩니다. 햇빛이 가렸으면 햇빛이 비치게 하고 통풍이 안되면 통풍이 되게 하고 메말랐으면 물을 주고 하면서 ‘엄마 아빠가 이 세상에서 너희를 제일 사랑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관계 속에서 그런 것들이 느껴지지 않는데 그런 말을 하면 속에서 닭살이 돋을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이 고생을 하는 줄 아느냐” 하지 말고, 아이들 앞에서 자긍심을 지키십시오. 그런 식으로 호소를 해서 아이에게 감화를 주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밖에서 눈물 젖은 돈을 벌어오더라도 자식이 ‘아빠가 상관에게 구박받고 눈물보이면서 타온 월급이다’고 느끼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당하게, 모든 아이들 속에서 구김 없게 뛰어 놀도록, 그렇게 자라도록 해주는 것이 부모가 해야될 역할입니다. 더군다나 자기가 원하는 프레임을 걸어놓고 그대로 안되면 자식을 향해 분노하고 자식을 바꿔놓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실망을 느끼고 좌절하는 생활 속에서, 정말 자기에게 주신 여호와의 기업이 바로 자기 자식들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자식들을 키울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 자식이 자기 기대대로 자라주면 되겠지요. 그런데 자기도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기대대로 살지 못하지 않습니까?
충분한 사랑을 부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잘못했을 때에도 제일 먼저 풍성한 용서를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가끔 아이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선생님, 우리 엄마 아빠가 그것을 알면 나 죽어요. 비밀로 해주세요” 굉장히 슬픈 일입니다. 무엇을 잘못해도 부모에게 오면 용납될 수 있을 것 같은, 죄는 용납해주시지 않지만 자기가 잘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관계 그 자체가 붕괴되고 파괴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자식이 갖고 있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방종이 아니라 마음껏 자라도록 충분한 사랑을 공급해주고, 자녀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런 사랑들이 표현 되야 합니다.
(예화) 아버님이 한번도 안아주신 기억이 없다- 그 때 아빠는 다 그랬다고 대답하셨다.
늘 안아주고 늘 엄마 아빠의 체온을 느낄 수 있고, 그런 관계를 늘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이 한 주 두 주 지방에 출장 가 있는데 홀가분하고 시원하다는 느낌을 갖는다면 벌써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충분한 사랑을 부어주는 삶, 그것이 결국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삶입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에 이어서 성경은 “오직”했습니다. 헬라어로 ‘알라’라고 쓰여졌는데 강한 반의어입니다. 번역을 제대로 하자면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라 오히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가 됩니다. 그러니까 ‘상처를 주고 노엽게 하는 삶을 택하는 대신에 전혀 다른 것을 택해라 그것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이다’입니다. 여기서 교양이라는 말과 훈계라는 말은 언어적으로 볼 때 교양이라는 말은 ‘파이데이아’라고 하는 단어인데 훈육입니다. 훈계는 ‘누데시아’인데 충고, 권면입니다.
하나씩 풀어보자면 주의 ‘교양’은 훈육인데, 훈련입니다. 야단칠 것은 야단치고 상줄 것은 상주고 하면서 아이가 체질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서 선명하게 인식하면서 사람이 되어 가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훈육입니다. 그러니까 훈육은 아이들을 앉혀 놓고 칠판에서 강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포괄하는 교육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라는 말은 두 단어에 모두 걸린다고 봐야 합니다. ‘주의 훈련과 주의 훈계 혹은 책망, 교훈으로 자녀들을 양육하라’ 그런데 ‘양육하다’라는 말은 원래 소아과에서 잘 쓰는 용어입니다. 아주 갓난아이 상태에 있는 아이를 잘 돌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자기의 편지를 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 아버지 어머니들이 젊은 부부이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가 어린아이 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만 이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너희 자녀들아’에서 이 자녀는 ‘테크나’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것은 법적인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의 자녀입니다. 연령이 고려된 것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자녀를 의미하는 말로서 우선적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듣고 있는 부모들의 자녀들이 어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자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양육한다(nurse)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자녀 교육에 있어서 제가 말씀드린 중요한 원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는 사람 중에는 자녀가 청소년이 다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아이는 ‘테크논’에 해당되지 않느냐면, 결국은 모두 다 포함한 것입니다.
자기의 자녀들을 양육하는데 노엽게 하지 말고 충분한 사랑으로 보살피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그 아이들을 양육하는데, 양육이라고 하는 말은 그 아이들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돌봄의 소극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유모가 아이를 양육한다고 할 때 그 그림이 어떻습니까? 또 유모가 아이를 양육한다는 말과 군대에서 조교가 신병들을 훈련시킨다 할 때 두 그림의 차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유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가 잘 자라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제거해주는 역할입니다. 아이에게 제때 젖을 먹이지 않으면 영양공급이 안 되어서 아이가 안 자라니까 제때 젖을 먹여주는 것입니다. 아이가 놀고 싶다고 하면 놀 수 있게 해주되 놀다가 다칠 위험이 있는 것들을 제거해 줍니다. 아이가 자고 싶다고 하면 아이를 잘 수 있게 해주되 잠자는데 방해가 되는 위험한 것들을 치워서 보호해 주는 것, 이것이 양육입니다.
조교가 신병을 훈련시킨다는 것은 훈련병 마음이 아니라 조교 마음입니다. 재우고 싶으면 재우고 깨우고 싶으면 깨우고 마음을 독하게 먹고 굴려서 험하게 훈련을 시키고 싶으면 피 흘리기까지 심하게 훈련을 시키는 것이 마음입니다. 이것이 훈련과 양육의 차이입니다.
자녀들을 군사들 조련시키듯이 훈련시키라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군대의 개념을 가지고 훈련시키려는 의지를 부모가 갖기보다는 양육시키려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더군다나 인간성이 형성되어가고 있는 중요한 시기인 어린아이와 청소년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무에 철사 줄을 얽어매어서 자기 원하는 대로 자라게 하는 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양육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어렸을 때 어떻게 양육하는 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자겠다고 칭얼대며 우는 아이는 업고 재웁니다. 자겠다고 우는 아이에게 ‘이렇게 해서 어떻게 인생의 승자가 되겠느냐’며 깨우지 않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우는 아이에게 ‘한끼 굶었다고 이렇게 난리를 치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느냐’며 참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자라려고 하는 그대로 아이가 자랄 수 있게끔 장애물을 치워주는 것이 양육입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가 울며 칼을 집어 들 때 그대로 놔둘 부모가 있겠습니까? 손목을 쳐서 빼앗습니다. 울어도 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대로 놔두면 어떤 결과가 올 지 뻔하기 때문입니다. 전기코드에 젓가락을 집어넣는 아이를 못하게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아이를 내버려둬서 자라게 해야한다는 말씀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불경건 하고 아주 잘못된 습관이 몸에 배려고 할 때는 따갑게 책망을 해서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유자재로 하게끔 둬야합니다. 피아노를 배우러 다니다가 서너달 치고 그만 두려고 하면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삼 개월 후에 확인 한 것입니다. 수영을 몇 달 해도 물에 뜨지도 못하면 수영이 적성에 안 맞는 것이 확인 된 것입니다. 여러 가지 해보다 보면 어느 한가지를 매우 좋아하는 것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것에 재능이 있고 달란트가 있다는 것이 확인 된 것입니다. 많이 해봤는데 하나도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 재주 없어도 잘 살아갑니다. 아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에 생명 걸듯이 매달려서는 안됩니다. 그런 것들을 벗어버리고 아이가 소신껏 자라도록 해 줘야합니다.
(예화)하나님을 만난 것도 아니고 소명이 있는 것도 아닌데 독실한 어머니의 강요로 신학교에 오는 18-19세 된 아이들이 있다.
이것이 신앙심이 있는 사람들이 갖기 쉬운 독선입니다. 자유스럽게 열어 주면서 자발적으로 아이들이 자라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예화)아들이 어른 예배에 나와서 눈물 흘리며 감동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인격적이고 하나님 앞에서 자라나는 인간성들이 억압되지를 말아야 합니다. 칼을 쥔 것같이 위험한 상황에서는 빼앗지만 자라보도록 둬야 합니다.
(예화) 그 나이에 아들처럼 착실하게 주일을 지키지도 않았지만 나중에 목사가 되었다.
문제는 자녀들을 훈련시키는 조련사와 같은 사람으로 부모가 부름 받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유모처럼 양육하는 자로 부름 받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없이 사랑해 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 하면서 부모로서 충분한 사랑과 용서, 은혜, 인격적인 관계를 해 주었는데 바람직하지 않은 아이로 자란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돌연변이 같은 인간이 태어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방종의 기회로 삼고 어머니의 너그러운 자비를 타락의 발판으로 살아서 멋대로 인생을 산다면 눈물로 기도하며 사랑해준 부모는 못 말려도 하나님은 말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식은 마음에 별로 안 드셨어도 그 자식을 그런 신앙의 원칙 하에서 길러온 부모의 눈물을 봐서라도 하나님께서 그 자식을 돌이키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향한 교육이 너무 공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부모들이 위험합니다. “이번 학기의 목표는 학교에서 공부는 몇 등 하는 것이고 피아노는 어디까지 마스터하는 것이다. 약속할 수 있지? 이것을 성취하면 이러한 상을 주겠다” 이러한 부모를 통해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무엇을 잘한다고 돈을 주고 갖고 싶은 것을 사주고 못하면 줬던 것을 빼앗는 야비한 부모 밑에서 아이들이 무슨 교육을 받겠습니까?
(예화) 세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표를 벽에 붙여두고 옳지 못한 언행을 하면 바를 정자 획을 하 나씩 그어서 용돈에 반영한다는 집 이야기
그런 식으로 훈련받은 아이는 부모의 허를 찌를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빗나간 교육입니다. 그런 것은 양육이 아닙니다. 양육이라고 하는 것의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예화)남의 아이를 돌보며 생계를 이어가는 한 성도가 그 일을 그만두게 되자 아이가 그리워서 잠을 못 자고 아이는 그 돌바주던 이가 생각나서 잠을 못 잔다는 이야기.
아이는 엄마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인격적인 사랑을 느낀 것입니다.
양육이라는 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양육하는 대상에 대한 인격 깊이 끓어오르는 진실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먹을 것을 주고 키우는 데에서 사랑을 빼버리면 사육이 됩니다.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사육을 하는지 모릅니다. 개나 돼지는 어디 가지 않고 한 우리에서 사육을 받지만 자식들은 아침마다 책가방 매고 학교를 간다는 것만 다를 뿐 사육인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아빠의 인격을 관계 속에서 느낄 수 없고,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 자체로서 우리 부모의 사랑을 받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자체가 우리 부모에게는 참된 그리움이요 기쁨이라는 것들을 확신으로 느끼지 못하는 자식들이 그 속에서 무슨 자존감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양육하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여러분들의 자식들이 부모인 우리들을 생각하면서, 지난주의 설교 같은 것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고통받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정들이 이런 식으로 되어가야 합니까?
아이들은 양육되어야 합니다. 훈련되어져야 할 존재라기보다는 양육되어야 할 존재들입니다. 어렸을 때가 이런 원칙이 심겨지기 가장 좋은 때입니다. 그런데 그 어린 시절을 다 놓치고 중간에 이런 적용을 해보려 하니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부모가 이런 것들을 깨달으면 부모의 힘으로 됩니다. 그러나 청소년기에 접어든 어느 날 설교를 듣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내가 망가진 부모로서 잘못된 인생을 살아서 우리 자식들을 망가트렸구나’생각할 때는, 스스로 교육의 방법을 바꿔보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결국 그 자식을 직접적으로 만져주시는 하나님의 전폭적인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합니다. 물론 어린아이라고 해서 부모가 따뜻하게 사랑만 베풀면 하나님의 만져주심이 필요 없느냐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자녀를 양육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만져주시는데 그렇게 살지 못했을 경우에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양육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자식이 자기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갑갑하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참으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들을 향해서 참으셨던 것처럼 좀 참으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자녀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를 하는지 반성해 보십시오. 자녀에게 분노하고 자녀를 향해서 화가 나는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이 왜 우리 자녀를 안 도와주시는지 열렬하게 호소합니까? 자식들을 향해서 마음을 끌이고 분노하고 화내고 짜증을 내는 정신적인 수고의 반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녀를 위해서 노심초사해 보십시오. 그러면 자신이 못 고치는 자식을 하나님이 고치십니다.
양육은 소아과에서 많이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양육의 도구는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원어적으로 보면 ‘주님의 그 교양과 그 훈계 안에서 자녀들을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교양은 훈육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삶을 바르게 하는 돌봄입니다.
(예화)옛날 학교에서 제일 불쌍한 아이들이 키가 큰 아이들이었다-책상의 크기 구분이 없어서 몸에 맞지 않는 책상에 앉아 공부했다.
훈육이라고 하는 것은 삶 전체를 포괄하는 훈련입니다. 작은 의자에 앉은 아이가 고통스러웠던 것처럼 아이들을 전인적인 삶의 훈련을 통해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은 가정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과목 가정교사를 다 부른다고 하더라도 착한 아이 만드는 교사를 돈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책임을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돈이 많이 있어서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를 부르고 학원에 보내는 것은 성경 적으로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불러서 자기 자식을 사람 만들어 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모의 고유한 사명인데 그럴 수 없습니다.
(예화) 목사인 내가 다른 사람에게 사례비를 떼어주며 우리 교인을 성도 만들어 달라고 하면 이 해할 수 있는가?
대리로 될 수 있는 것이 있고 안돼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학교 선생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아이들이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심지어 책을 통해서도 참된 인간의 길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그러나 모두 보조적인 것이고 아이를 사람 만들도록, 주의 교양으로 그 아이를 훈련해서 전인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게 만들도록 부름 받은 사람은 아버지 어머니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해야 할 것은 훈계입니다. 잘못했을 경우에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옳을 경우에는 이것이 바르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해 주는 것이 훈계이고 책망이고 권면입니다. ‘이렇게 살아라’고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포함하면서도 역시 그 원리는 훈련이나 틀 속에 집어 놓고 국화빵을 굽듯이, 자녀를 물로 만들어서 주전자에 넣고 흔들어서 허연 국물을 만들어서 기름 바른 틀 속에 넣어 구워 내는 것처럼 아이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녀가 그 모습 그대로 자랄 수 있도록 양육하되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전인적인 훈련, 전인적인 실습이 필요하고, 인생을 살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렇게 살면 되는지 안 되는지, 또 주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고 어떻게 믿으면 안 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교훈이 있어야 합니다. 그 교훈으로서 자녀를 양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의 교훈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부모가 자식을 향해서 아무리 진실한 사랑을 가지고 있고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서양의 철학의 이치를 모두 파악한 대단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자신의 마음과 삶 속에 주의 교양과 교훈을 몸에 배도록 지닌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아니고는 자녀를 훈련하고 가르칠 수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가 아는 한도 내에서 가르치는 것이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그대로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부모들이 자식을 훈련시키면 공부도 더 많이 시키고 인간 도리를 하게끔 자녀들을 책망하고 훈련시켜서 바른 길로 가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결국은 창조 시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우리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회복되게 하는 데에는 아무런 기여도 못하는 것입니다. 단지 이 사회에 보편 타당한 원칙을 따라 살아가는 이 사회 속에서의 한 인간으로서 자라게 할뿐이지 하나님의 창조의 이상을 회복시키는 일들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가정의 회복을 아무리 이야기하고 아무리 이것을 가지고 기도해도 가장 기본적인 전제 조건은 모든 식구가 주님을 믿는 사람이어야 됩니다. 그것도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진 집안이 되어야지 만 접촉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효도는 그분들을 빨리 예수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부모를 데려가실 지 모릅니다. 느긋하게 마음먹고 있으면 안됩니다. 속히 전도하고 영혼의 무거운 부담을 느끼면서 그분들이 이제는 더 이상 망가진 삶을 살지 않도록 속히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으로 들어오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들에 대해서 설교를 들으면서 수많은 자녀들을 가르치는 방법들을 터득하고 이치를 터득했다고 하더라도 그 자녀가 주님을 믿고 진실로 거듭난 신앙의 길속에서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자녀가 되는 것이 이 모든 교훈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급선무입니다. 성적표 한번 받아오면 몇 달 동안 잠을 못 자면서 지옥의 벼랑 끝에 서있는 여러분의 자녀의 영혼을 위해서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몇 주에 한번씩 용돈을 미끼로 교회에 끌고 나오는 것으로 아직도 여러분들이 만족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정말 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경건한 부모의 모습이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는데, 교양은 전 삶을 포괄해서 그를 돌보는 전인적인 경건한 훈련입니다. 그리고 전인적인 돌봄입니다. 훈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을 재고 그 삶 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 하는 것을 판단해서 아이에게 가르쳐주고 바른 길을 권하고 잘못된 길을 경계 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잘 안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자녀들을 정말 전인적으로 돌보고 있습니까? 그렇게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나의 전인격, 전 삶을 포괄하는 나의 생애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삶이 될까를 가지고 고민하면서 자기를 부단히 고치는 사람,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끊임없이 깨닫고 인간의 참다운 삶과 인격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터득해나가는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자녀를 주의 교양으로 양육하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새사람 되는 과정이 속에 없는 사람이 어떻게 전인을 터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부모도 문제가 아니고 우리 자식도 문제가 아니고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가정을 이루고 있는 우리 자신이 문제의 핵심부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말 바른 사람되는 길을 모르니까 자녀들을 전인적으로 터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목양을 할 때 목양을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하나님을 분명히 만나고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목양이 풍부해지기 위해서는 목양을 하는 사람이 목양받는 사람들이 고민하는 문제를 가지고 풍부한 고민 속에서 해답을 찾은 영적인 순례의 삶을 오래도록 풍부하게 많이 살수록 목양이 풍부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에 대한 진지한 고뇌는 하나도 없고 오직 이런 사역을 통해서 뭔가를 성취해야겠다는 의욕에만 불탄다고 할 때 성도들은 위로 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예화) 한 목사님이 몸이 몹시 아프셔서 몇 년간 강단에 서시지 못한 그 교회 부교역자의 말-목 사님이 연약한 자를 향한 넘치는 긍휼의 마음을 갖게 되셨다는 이야기. 그 동안 건강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약한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최근에 인간이 약해지는 것을 경험 하면서 하나님께서 다른 방향으로 생각할 기회를 주셨다.
육체의 건강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지만 심리적으로 연약한 죄인들에 대해서는 자신이 그러한 연약함으로 인해서 깊이 번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고치시고 붙들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 어찌할 수 없이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죄인들을 향한 한없는 안타까움, 그러면서도 죄에 대한 양보가 아니라 죄를 미워하면서도 그 죄인에 대한 한없는 연민, 그런 것들을 풍부하게 갖는 사람은 자기가 그런 것으로 인해서 깊이 전인적으로 고민해본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체질적으로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눈물을 흘리면서 인생을 사는 것이 너무나 괴롭고 자기가 당한 이 불행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하소연할 때,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인생은 다 가시밭길이 아니겠어요?”하면 화가 납니다. ‘내가 어쩌다 이런 녀석들에게도 놀림을 받나’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연세가 지긋하고 반백이 다 되어서 산전 수전 겪으면서 신앙을 지키고 살아온 선배가 눈물을 흘리며 고통하고 있는 성도에게 “자매, 너무 슬퍼하지 마시게. 인생은 어차피 가시밭길이 아니겠는가? 주님의 위로를 바라보고 걸어가세”한다면, 자신이 고뇌하고 아파하는 문제를 자기에게 충고하는 사람이 깊이 체험했기에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전인적인 터치와 전 삶을 포괄하는 가르침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교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모라는 사람들이 교회는 다녔는데 교회에 덜렁덜렁 다녔을 뿐이지 하나님 앞에 자기의 모습을 가지고 깊이 고민하는 것도 없고 또 거기에서 진전을 보는 것도 없고,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지 만 우리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존재가 될까?’ (찬송: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이러한 자기 성찰, 자기 부서짐, 그리고 오래 동안 지녀왔던 나의 거짓된 자아가 신앙으로 허물어지고 치료하고 고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빚어지고 새로워지는 것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교양입니다. 그렇게 훈련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교훈에 합당한 사람으로 전 삶이 빚어지는 것, 이것이 교양입니다. 그런 종류의 목양을 자녀들에게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제 때 밥 먹을 수 있도록 돈벌어주고 잠자리 제공해주는 것 가지고 너무 시위하지 마십시오. 자기도 자기 부모에게 그런 혜택을 받았습니다. 어마어마한 눈물나는 희생인 것처럼 말하지 마십시오. 부모로서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성경이 타락한 남자의 얼굴에서 땀이 흘러야지 만 식물을 먹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 자식도 그렇게 해서 먹여 살리게끔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싫으면 장가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을 하고도 충분히 취업할 수 있는데 취업 안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땀이 흐르는 것이 정상적인 삶입니다. 직장에 가서 때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집어치우고 싶은 분노가 생겨도 너무 서러워하지 마십시오. 다 아담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땀을 흘리며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류 모두가 다 하는 일입니다. 벌여 먹여 살리는 것을 가지고 아이들 눈물나게 하지 마십시오. 그런 식으로 자식들을 교육하니까 아버지 은혜 하면 생각나는 것은 고달픈 직장생활, 돈버느라고 애쓰는 모습인데 아버지의 모습이 그렇게 비춰지는 것이 좋습니까? 그래서 효도해야겠다는 마음을 자녀들이 갖게 된다면 그것은 효도가 아니라 동정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동정을 사려는 의식을 가지지 마십시오. 자식들에게도 자긍심을 심어주십시오.
(예화)회사의 말단 직원일지라도 지구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장엄함이 있어야 한다. 방위인 아빠 를 둔 아이가 비행기만 지나가면 사람들에게 아빠가 그 비행기에 탔느냐고 묻는다는 이야기.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훈련하시는 것을 자신의 영혼과 삶 속에서 깊이 느끼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의해서 훈련받는 세계가 없는 사람이, 그런 교양의 세계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자녀의 전 삶을, 전인격을, 전 포괄적인 생활을 교육하고 훈육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자녀를 위한 최상의 교육은 여러분들이 좋은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내 신앙의 세계를 이해 못한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해를 못하겠지만
(예화) 아버지가 시골에서 목회 하면서 어렵게 산 아들이 무능한 아버지를 미워하며 그 집을 뛰 쳐나왔는데, 나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참된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고 난 후에 아버지가 사명 때문에,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깊이 이해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가 자녀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참된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고 부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 길이 하나님께서 주신 길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런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자식들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지만 이해하지 못해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신앙의 길을 내가 걸어가는데 내 부모가 이해 못해도 할 수 없고 내 자식이 이해 못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들에게 참된 신앙이 들어가면 부모가 바르게 살았던 삶은 사후에라도 재평가하고 깊이 이해합니다. 그래서 감화를 받습니다. 새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가정의 기초가 무너지고 자식을 하나님께서 양육하라고 하신 대로 바르게 양육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부모인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풍부한 말씀과 은혜 속에서 좀더 변화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온전한 신자가 되어야 겠다는 고뇌가 없거나 있어도 너무나 간헐적이고 천박할 정도로 박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풍부한 사랑이 되어서 자녀를 돌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의 문제를 가지고 깊이 고뇌하면서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쳤던 부모들은 자녀들이 거짓을 행하는 것을 보면서 ‘때가 되면 깨닫겠지’하며 방치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녀의 삶 속에 깊이 파고 들어가서 그 모든 삶을 포괄하는 그런 방식의 양육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를 주신 것입니다.
훈계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는 신앙의 도리에 대한 훈계이고 또 하나는 삶에 대한 훈계인데 이 모든 것의 뿌리는 결국 성경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조금 낫지만 너무나 많은 부모들이 가슴속에 자녀를 가르칠 지식이 있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된다고 하는 성경 적인 지식들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낮에는 새처럼 밤에는 쥐처럼 시시각각으로 변신하는 박쥐와 같은 이중 인격적인 삶을 살고 진리로 인해서 하등의 고민해야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는 그런 기회주의적인 삶을 살아가는 부모들에게서 어떤 지식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신앙생활 하는 것이 자녀들에게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성도이고 가정에 돌아가서는 평범한 아버지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성적표 한 장에 치를 떨다가 선심을 쓰다가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이런 저런 선물을 해보면서 자식을 자기의 마음대로 한번 조각을 해보려고 칼을 들이대고 반항을 하면 실망을 하고 미워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상처를 주고받는, 안 믿는 부모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삶의 현장들을 연출해내고 있습니다. 자녀를 주의 교양으로 훈련하려면 자기가 먼저 하나님께 교양을 받고 목양의 관계 속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어떤 것들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고 자신의 삶을 고치고 자신의 인격이 온전하지 못함을 인해서 깊이 고뇌해야 합니다.
저도 목양을 받아보기도 했고 목양을 해보기도 했지만, 동일하게 느끼는 것은 한 사람의 성도가 목회자를 보고 실망했다고 말할 때,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하나는 그 사람의 기대가 쓸데 없는 기대일 경우입니다. 또 하나는 목회자의 행동이나 말 때문에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아무리 부족한 것이 목회자에게 많이 보여도 우리 목회자가 하나님 앞에 늘 깨어지는 세계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경우에는 여러 가지 부족한 점들이 다 용납되고 이해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왜 그러실까? 또 내일 새벽시간에 통곡하시겠구나’하는 기대를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한은 그 목회자를 몹쓸 사람이라고 치부하지 않습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 어느 정도 자라면 부모의 환상이 다 벗겨지게 됩니다. 아버지가 평범한 인간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후에 자녀들이 부모를 통해서 받는 감동은 완벽주의 부모에 의해서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 잘했던 아버지가 예전 성적표를 보여주면서 기죽이는 훈련을 통해서 자식이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그런 것을 통해서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신데 내가 그 기대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고 사는 자식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오히려 자식들이 깊이 감동을 받는 것은 아버지 속에 자기 갱신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하고 난 후 그것을 깊이 깨닫고 자기 자신을 고치고 갱신해서 끊임없이 변해 가는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처음에 엄마 손에 이끌려 교회에 가서 졸고 오실 때는 형편없었는데 은혜 받고 나니까, 아직도 내 마음에 상처와 고통을 주기는 하지만 예전의 모습과 비교하니 정말 놀랍게 변하셨다’고 자녀들이 생각할 수 있는 자기 깨어짐의 세계가 아버지 속에 있는 것들을 늘 보면서 자란 자녀들은, 그 부모를 보다 더 온전하게 교양해 가시는 하나님을 그 부모의 삶 속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부모의 권위를 더해주는 것입니다. 완벽한 부모가 없다는 것은 이미 포기했는데 그렇게 끊임없이 변해 가는 부모를 보면서, ‘우리 부모의 근본은 뛰어나지 못하지만 우리 부모의 속에는 내게 없는 그 누군가가 와서 일하고 계시다. 그리고 그분이 일하시는 동안 우리 부모는 점점 더 존경할 만한 분이 되어 갈 것이다’는 인상과 깨달음을 깊이 받게 됩니다. 그 때 자녀로서는 그 부모 앞에 승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자녀들 앞에서 정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허세와 거짓과 가식을 벗어버리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십시오. ‘아빠도 너만 할 때는 공부를 못했다 그런데 살고 보니까 이러이러한 실수를 통해서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는 아이 앞에서 우리 부모가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예화) 링컨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아이에게 하자 아이가 링컨은 아빠 나이에 대통령이 되었다고 대답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내 너만 할 때는...’ 식의 권면이 아닙니다. 우리 때는 우리 때입니다.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지금은 모두 이렇게 사는데, 내 아이가 특권을 누리고도 의무에 불충실한 것처럼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된 고민입니다. 자식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진실에 호소하고 거짓의 옷을 벗어버리면 자녀들이 언젠가 철이 들면 그 진실이 호소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교양을 받는 세계가 없이 어떻게 자녀를 교양하고 가르치겠습니까? 그러니까 가장 좋은 아버지가 되는 비결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좋은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자식을 향해서 가장 좋은 아버지가 되는 비결입니다. 자식을 향해서 가장 좋은 어머니가 되고 싶으면 하나님 앞에서 먼저 좋은 딸이 되기 위해서 충분히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고 그 삶의 고뇌가 깊이 담긴 것을 가지고 영혼들에게 가르쳐 보십시오. 그러면 그 아이가 감화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 가르침을 가지고 아이를 양육하라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 양육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뇌도 없고 기회주의적인 발상을 가지고 이런 저런 편법들을 동원해가면서 신앙은 신앙이고 삶은 삶이라는 유리된 삶을 살아가는 부모를 통해서, 그 부모가 자식에게 공부 못한다고 피아노 안친다고... 이것저것 안 한다고 그릇된 기대를 가지고 아이에게 강요하고 밀어붙이는 것이 인간적으로 보이겠습니까? 기독교 가정에서도 우리의 얼마나 많은 자녀들이 양육 받아본 적이 없이 사육되고 있는지 아십니까? 비인격적인 가정에서 사육되고 있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은 지 아십니까? 그렇게 자라는 동안에 그들은 분노하고 그들 속에 고통이 쌓이면서 사회에 대해서 반항하고 부모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런 깨트려진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까지도 영향을 미쳐서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버지로부터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단어 속에서 아버지의 성품을 체험할 수 없는 망가진 자식들로 만들어지는 상황이 얼마나 많은 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속에서 자녀를 위해서 무엇을 기도합니까? 한 손으로 허물어버리면서 무엇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가? 그렇게 해서 성적이 좀 더 오르고 이런 저런 재주가 있어서 상장을 받아오는 것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아직까지도 풀고 싶은 진리들이 많이 있지만 여기에서 접겠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섬김은 풍부한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 속에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경험하면서 살 수 있도록, 자유스럽게 자랄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허락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자녀들을 훌륭한 사람을 만들려고 고민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인가를 가지고 깊이 고민하고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교양 받는 세계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자녀를 가르치고, 그 가르침은 인격 속에서 나오는 가르침이 되어야 합니다. (예화: 엄마가 많은 것을 먹은 후 가슴에 젖을 가득 담아서 아이에게 먹인다)
우리는 자녀를 놓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이 무엇인지 삶 속에 깊이 녹아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며 살아가는 삶, 이런 것들을 자녀들이 충분히 볼 수 있고, 그런 관계 속에서 부어지는 분명한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 내 아버지라는 사실이 감격스럽다는 마음을 자녀들에게 심어줄 수 있게끔 우리들이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저는 이런 원칙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핏물이 흐르게 하면 할수록 자식들이 우리에게 눈물을 줍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복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끔 만들 정도로 망가진 삶을 살면 우리는 주의 교양을 받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주의 훈계가 우리 속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를 양육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순환논리로 계속 잘못된 틀, 거듭나지 않은 가치관을 가지고 자녀들을 억압합니다. 자녀들은 분노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사악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눈물이 흐르도록 만듭니다. 자동으로 이런 일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몽둥이로도 다스릴 수 없고 채찍으로도 다스릴 수 없었던 아들을 하나님 앞에서 눈물의 기도로 다룬 부모의 기록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해주시기도 했지만 변화되는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녀들이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양으로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입니다. 교양으로 자녀들을 훈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정의 달, 이제는 우리 가정 속에 구조적으로 흐르고 있는 이 총체적인 무지, 그리고 가족 구성원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패역한 기질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 데서 오는 처참한 죄의 끔직한 영향력들, 이런 것들이 우리의 가정 속에 깊이 파고들어서 심지어 핏덩이에 지나지 않는 어린아이의 마음에까지도 역사하고 있어서 우리의 가정을 허물고 있습니다. 누가 이 모든 것들을 개혁하고 고칠 수 있을 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도 우리의 부모들처럼 의식 없이 인생을 살고 아무렇게나 살면 우리 때문에 우리의 가정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가족과 다시 가족관계를 맺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까지 고통을 받는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당장 우리들의 자녀들이 그런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맡겨진 그 자녀들 앞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다운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본 적이 없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각양 좋은 은혜와 참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경험들을 기대하면서 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세월들을 무지 속에서 살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 채 아버지의 사랑과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은혜를 늘 거절하면서 배척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불효하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채찍으로 때리고 몽둥이로 후려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치료하시고 우리를 녹이시는 아가페의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 이만큼이라도 철든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죽어도 영원히 삽니다. 여러분은 죽었는데 여러분의 모습은 자식들 속에 살아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있겠습니까? 돌이킴이 없이 지금 우리들이 하고 있는 방식대로 계속 살아가고 자녀들을 대한다면 자녀들의 모습 속에 어떤 사람으로 우리들이 조각되어 남아있을까요? 여러분 자신이 주의 교양의 사람입니까? 주의 훈계의 사람입니까? 정말 하나님의 사랑의 사람입니까? 주님께로부터 자녀로서 받은 그 사랑을, 그 관계를 그대로 여러분의 자녀들과의 관계에 도입하고 있는 사람들로 여러분의 자녀에게 비춰지고 있습니까? 주의 교양이 있습니까? 주의 훈계 속에 살고 있습니까? 말씀이 여러분들의 삶을 주장하고 그 말씀의 비췸을 받으면서 여러분의 인격을 고민합니까?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정말 여러분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을 읽으면서 많이 눈물 흘리던 어머님이 생각날까요? 옛날 용맹스럽던 다니엘의 경험과 유대임금 다윗 왕의 역사를 들려주며 그들처럼 살기를 바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자녀들의 마음속에 생각날까요? 우리를 치열한 입시지옥, 공부의 세계, 그리고 끊임없는 경쟁의 세계로 몽둥이를 들어서 내몰고 우리의 인간성의 고양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신앙은 더욱 관심이 없고 그저 세상의 부모와 똑같은 기준 이외에 우리의 것을 강요해본 적이 없는 부모로 기억에 남지 않을까요?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둡고 칙칙했던 날들은 우리 대로 충분합니다. 우리로서 그것이 끝나야 합니다.
생애적인 깊은 자각을 말씀을 통해서 경험하고 난 다음에 교회에서 아이들을 만나면 좋은 것만 눈에 자꾸 들어왔습니다. 전에는 인사도 안하고 복도를 뛰어 다니는 꼴도 보기 싫고 버릇없는 모습들만 눈에 들어왔는데, 이제는 마음속으로 ‘얘들아,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들 같이 마음껏 자라라. 부모인 우리들이 너희들을 많이 사랑하고, 나도 한 때는 하나님 앞에 나쁜 아들이었지만, 한없는 사랑과 그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입고, 결국은 칼과 채찍이 아니어도 주님께 매어서 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살기로 결심한 것처럼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들 같이, 그리고 푸른 하늘을 향해서 날아다니는 새들처럼, 마음껏 뛰놀고 자유롭게, 하나님이 금하시고 싫어하시는 것 말고는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하면서 마음껏 자라라. 우리가 너희들을 돌보아줄게. 하나님이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던 것처럼 이세상 모든 사람이 용서할 수 없어도 나는 너희들을 용서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너를 왕따 시켜도 아빠의 품, 엄마의 품에 피하면 그 속에서 우리는 친구도 만나고 엄마 아빠도 만나고 심지어는 하나님도 만날 수 있는 그런 부모가 되도록 우리가 너희를 보호해줄게. 마음껏 자라라’라고 기도합니다. 제 기도에 동참할 용의는 없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좋은 아들 좋은 딸이 되어본 적이 없는데 우리 자식을 향한 빗나간 기대, 그리고 그릇된 거듭나지 않은 욕망들로 하나님의 형상을 억압하고 자녀들을 분노하게 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않는 삶을 고민하며 교양을 받는 사람들이 되지 못하면서도 단지 세상의 기준으로 자녀들을 기르려고 했던 것들을 용서해 주시고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도구가 되도록 도와달라고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5. 남편과 아내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5:24-25)
우리는 종종 탈선 사고를 봅니다. 기차가 탈선했기 때문에 큰 사고를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의 인명을 앗아간 참사가 일어나는 것을 종종 봅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성경이 이야기하는 길로 들어서서 그 길을 걸어가고 있기만 하다면 어려운 일이 생겨도 탈선 사고와 같은 대형참사는 일어나지 않는데, 때때로 우리는 인생과 신앙에 있어서 그런 이치를 무시하고 마구 탈선하기 때문에 가정도,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인생도, 부서진 채 발견되기가 쉽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가정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있어서 순종과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항상 우리에게 각 가정이 정말 하나님 앞에 복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강조되어야 할 덕목에 가족 구성원들이 충실할 때 그 가정이 바르게 세워진 가정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녀의 부모에 대한 가장 우선적인 덕목은 공경이고, 부모의 자녀에게 대한 가장 우선적인 덕목은 깊은 사랑입니다. 자녀들을 분노하지 않도록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향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성경 적인 덕목은 순종이고, 남편이 아내를 향해 가져야할 우선적인 덕목은 사랑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존경과 사랑, 순종과 애정, 이 두 가지만 제대로 지켜진다고 하더라도 가정이 미숙할 수는 있지만 탈선된 가정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시간에 가정에 대한 시리즈 중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더 드리고 오후에는 동기간들에 대한 덕목을 말씀드림으로서 5월부터 시작된 가정 시리즈를 일단 맺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는 오늘 여기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말하면서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남성들은 기가 삽니다. ‘역시 성경은 참 좋은 것이야. 아내에게 말하기를 주께 순종하듯 하라 했으니 정말 아내들이 남편된 우리들에게 온전히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성경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생각하는 순종과 성경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가르치는 순종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유교전통 속에서 커왔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순종에 대한 도리가 있습니다. 특별히 여자가 남자에 대해서 순종해야한다는 도리는 굉장히 오래 동안 공기처럼 마시고 숨쉬어온 도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비슷한말이 나오면 표현은 성경에서 파악했는데 의미는 우리들이 자라온 유교 문화권과 결탁해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들을 만들어내곤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어떤 분이 창세기를 푸는 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창세기의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는 광경에 특별히 아담을 잠들게 하셔서 갈비뼈를 뽑으시고 하와를 만드시는 장면을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신 후에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그에게서 갈비뼈를 뽑아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어떤 분이 이런 식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일은 보조적인 역할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을 위해서 살 때에 진정으로 보람이 있는 것이다’ 특히 요즘과 같은 시대에 이런 해석을 깊이 공감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해석할 때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는 성경을 잘 살피면서 거기에서 어떤 신앙의 결론을 이끌어내지 않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결론을 가지고 성경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의견에 맞는 성경 내용만 보이고 그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들은 안보입니다. 아까 그분도 남성주의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창세기를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남성주의적 사고에 맞는 성경만 보인 것입니다.
우선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되어있는데 ‘위하여’라는 말속에서 그분은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된 근거를 읽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위하여’라고 되어 있는 부분은 ‘케네게도’라는 단어인데 영어로 번역하자면 ‘corresponding to’입니다. ‘무엇과 무엇에 상응하는’의 뜻이지 종속적인 의미에서 ‘누구를 위해서 봉사하는’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남성인 아담을 창조하셨는데 그가 홀로 있는 것이 적합하지 못하여, 다시 말해서 아담이 홀로 있어서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간을 창조하신 본연의 가치를 드러내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또다른 사람 하와를 창조하실 텐데 이 사람은 아담에게 상응하는 사람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대칭관계에 있으면서 한 사람으로서는 온전한 사람됨을 이룰 수 없는 것을 하와가 창조됨으로서 둘이 함께 이 지상에 사람이 존재하는 가치와 목적을 이루어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돕는 배필’이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시편에서 하나님을 향해 많이 쓰여지던 단어입니다. ‘에제르’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며’할 때 쓰여진 그 ‘도움’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쟁이 일어날 때 완전히 패배한 전황을 뒤엎을 수 있도록 달려와주는 응원군들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배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아담 홀로 존재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간을 만드신 가치를 구현할 수 있었는데 양념을 치듯이 하와가 창조돼 들어와서 아담이 이 땅에 존재하는 가치를 더 드높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만드셔서 인간이 다스리는 참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시고자 했는데, 아담 혼자를 두어서는 도저히 인간을 이 세상에 두셔서 이루고 싶은 가치를 성취하실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와를 만드셔서 둘이 함께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보람을 하나님께 안겨드리도록 그렇게 창조된 것이 바로 여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혹 성경에 보면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아내로 취하든지 혹은 여자를 하찮게 생각한다든지 하는 것, 그리고 히브리 사람의 전통에 의하면 여자가 인구 조사할 때 숫자에 안 들어가는 것, 그리고 여자가 구천구백명 있고 남자가 한명 있으면 명령을 내릴 때 남성형 동사를 사용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이라기 보다는 사람들이 가지고있는, 그 시대의 사상에 깊이 물든 연약함의 표출입니다. 사실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주신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와를 창조하셔서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셨는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순복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복종하라’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의 질서를 이야기 할 때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의 질서입니다. 그것이 잘 이해가 안 간다면 교회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정과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매우 유사한 모델이고 가정을 통해서 교회를, 교회를 통해서 가정을 보기가 아주 쉽습니다. 여기에서도 교회와 신랑 신부의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에 ‘사도는 깊도다 이 비밀이여’ 라고 말하다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화) 예수 믿은 지 5년만에 장로가 되니 그 교회는 승진을 빨리 시켜준다고 말했다는 이야기.
그러나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직분들은 계급이 아닙니다. 계급이 아니라 하나님을 함께 섬김에 있어서 각자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될지를 주님이 정해주신 것입니다. 한 교회에 목회자가 있는 데 목회자는 계급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목회자를 회사의 사장이나 단체의 회장같이 생각하는 것은 세속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습니다. 정상적이고 건강한 교회에서 어떻게 질서를 유지해 가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정상적인 교회에서는 억압과 폭력, 아니면 두려움이나 공포, 이런 것들을 안겨주어서 성도들로 하여금 복종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식의 질서 유지 체제를 갖지는 않습니다. 한 교회의 건강함은 얼마나 인격적인 교회인가에 달려있습니다. 인격적인 교회는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도록 세운 하나님의 말씀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교인들에게 잘 가르치고 그 가르침을 받은 교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을 알고 깊이 깨달은 다음에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더 온전한 삶으로 살까를 생각하고 애쓰는 중에 목회자를 존경하게 되고 교회의 질서를 따라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가장 편하고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건강하고 인격적인 교회의 참된 모습입니다.
교회가 인격적이 되기 위해서는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살아 역사 해야 되고 그 말씀에 대해서 깊이 반응하고 그것이 진리라면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나의 도리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성숙한 성도들이 함께 존재해야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인격적인 관계들이 인격적인 승복을 통해서 교회가 교회 되어 가는 것입니다. 어떤 좋은 것이라도 공포와 얽매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작용을 해서 목회자에게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목회자가 조직폭력배의 우두머리이지 목사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있어서 한 사람의 성도가 주님을 진실로 만나고 그분의 인격적인 사랑을 깊이 알지 아니하고는 그는 결코 그 교회에서 목양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감화를 통해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게 되는 진실한 신앙의 체험 없이 한 목회자를 열렬히 따라 다니는 것은 똘마니가 조직폭력배의 우두머리를 따라 다니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추종하는 사람은 목회자를 범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리켜 질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교회가 너무 무질서하다고 하는데 그것이 안 되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것을 좋아하면 특공대에 들어가면 됩니다. 그런 속에서 자기가 있어야할 자리를 터득하고 자기가 어떻게 함께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파악하면서 함께 성숙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런 것이 인격적인 목양의 질서가 있는 교회이듯이 가정에서도 질서라고 하는 것은 폭압적인 억압의 질서나 계급의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목회자를 통해서 교회를 인도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남편을 통해서 가정을 이끄시는 원리를 말하면서 오늘 사도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끔 아내에게 막 대하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폭력을 행사하거나 아니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그런 남편들에게 왜 그렇게 아내에 대해서 악한 감정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으면 자기 아내가 말을 안 듣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순종의 개념은 노예적인 복종의 개념입니다. 그런 것이 좋으면 백년 전에 태어나서 아프리카에 가서 노예 하나 사서 살지 왜 하필이면 지금 태어나서 결혼을 해 가지고 교회까지 다닙니까? 그렇게 기계적으로 복종하는 아내를 만나서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하는 것이 좋으면 노예와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에게는 모두 제왕콤플렉스가 있습니다. 황제처럼 되어서 모든 사람들을 호령하며 살고 싶어하는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건전한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수립하는데 매우 독소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복종은 질서 상에 있어서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이 강조하기를 범사에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남편과 아내 모두 교회에 나오는 사람 가운데도 범사에 남편을 꺾고야 마는 아내들이 많습니다. 왜 심사가 꼬였는지는 모르지만 남편 알기를 하찮게 알고 그 남편이 말하고 남편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남편이 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것을 꺾고야 마는 빚나간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식으로 믿음생활을 해서 그 여자가 거룩에 이를 줄로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진실한 신자인지 아닌지는 목사가 봐서도 알지만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입니다. 신자 중 어떤 사람은 멀리서 봤을 때는 너무 훌륭한데, 그 사람과 관계가 먼 사람에게 물어보면 너무나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요 은혜 받은 여자 성도라고 말하는데, 좀더 가까이에 있는 구역의 식구들에게 물어보면 그저 그렇다고 합니다. 좀더 아는 목사에게 물어보면 문제가 좀 많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가족들에게 물어보면 ‘우리 엄마는 내놨다’고 합니다. 남편에게 물어보면 인간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성공한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껍데기밖에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오히려 멀리서는 오해가 있고 평가가 상반되어도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사람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정말 진실하고 좋은 그리스도인이다’ 하는 고백이 나올 때에 그 사람은 정말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내가 되어 가지고 남편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 정말 거룩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장 가까이에서 여러분의 전 삶을 지켜보고 마음속에 일어나는 작은 생각과 떨림까지도 모두 파악하는 남편의 마음에 만족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남편이 볼 때에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낙인찍혀진 여자 성도가 정말 신실한 하나님의 딸일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에는 신앙이 없는 아내를 위해서 가슴앓이 하는 남성도 많지만 일반적으로 이 남성은 어떻게 된 사람들인지 가슴에 철판을 깐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죄는 자기가 대표로 짓고도 회개할 줄 모르고, 가정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도 항상 아내 타령만 하는 남편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는 남편, 교회는 나와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껍데기밖에 없는 남편의 연약한 신앙을 위해서 가슴앓이를 하고 눈물을 흘리는 여성들이 훨씬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먼저 아내인 여러분들이 남편에게 깊이 복종하는 삶을 살아서 남편이 볼 때에 주님을 믿는 저 사람 속에 저 사람 아닌 누군가가 살아있어서 정말 자기가 원하는 삶을 자기 부인을 통해서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것이 느껴지도록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들을 간과하기 때문에 여러날 동안 남편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그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의 성질머리를 이기지 못해서 남편을 거스르고 남편에게 대들고 질서를 스스로 파괴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남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남편에게 맞고 사는 아내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아내에게 맞고 사는 남편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런 막돼먹은 삶을 살아가면서 남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것은 가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막돼먹은 삶을 살면서 남편이 아내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와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예화) 비행기를 타면 빨리 달릴 때는 초속 삼백미터로 날아가고 창밖에는 초속 삼백미터의 바람 이 불고 있다. 그러나 바람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실감 나지 않는다. 겨울 에 차가운 바람이 불어도 방음장치가 잘된 거실에서는 바람이 부는 것을 알 수 없으나 빨 래가 날리는 것을 보면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안다.
하나님도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은 깊은 기도와 말씀의 은혜 속에서 그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다는 것을 파악하지만 거듭나지 못했거나 신앙이 매우 어린 사람들은 육적인 상태에 있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이 거기 계심을 알지 못합니다. 바람은 보지 못해도 빨래가 펄럭이는 것을 보면서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알 듯이 하나님은 못 보지만 아내인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진실 되게 변화되어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모습을 보면서 누군가가 계신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 목사님의 아들이 거의 불신자처럼 산다.
가족들의 영혼의 변화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가정에 가서 폼을 잡지 말고 진실과 인격으로서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셔서 여러분들을 변화시켜 가시는 과정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비록 부족하지만 여러분들을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남편들이 자신의 망가진 인생도 저런 하나님이라면 고치실 수 있겠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도구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은 노예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아내에게 주신 자리를 지키는 모습입니다. 거듭나지 못하거나 신앙이 어린 남편들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다양한 요구들을 모두 순종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으니 남편 앞에서 남편의 자기에 대한 태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내게 이 남자의 아내로서 세워주신 자리가 어디인가를 알고 그 자리에 서있는 모습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남편이 거듭나지도 않고 신앙도 어린 남편이라면 여러분들에게 하는 요구는 말도 되지 않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또 순종해서도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남편이 하나님을 잘 믿고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남편이라면 여러분들은 아내로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에는 인간 속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배우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서 말씀의 빛 안에 들어오는 신앙생활을 하면 그 가정은 무한하게 변화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아내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되기를 깊이 사모해야 합니다.
주일이면 도살장에 소 끌려가듯이 보채고 채근하는 아내의 손에 이끌려서 마지못해서 교회에 나와 한 구석에 쳐 박혔다가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아내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남편의 진실한 변화, 심지어는 아예 교회에 나오지도 않는 남편들이 있을 경우에는 그 심령이 너무 많이 찢어지고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 부인들은 그 남편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인생의 최대의 목표인 것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사십 몇 평 형 아파트나 자동차나 남편의 승진이 목표가 아니라 그 영혼이 하루 속히 구원에 이르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먼저 하나님이 있으라고 하신 아내의 자리에, 남편의 태도와는 상관이 없이, 있을 수 있는 모습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까다로운 남편에게 순종하고 그 남편에게 온전히 복종하고 그 남편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오래 참음과 인내로서 그 영혼이 열매 맺을 때를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삶은 너무 어렵습니다.
가끔 믿지 않는 남편이나 신앙이 어린 남편을 위해서 큰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잘 합니다. 그러나 며칠 못 가서 다 뒤집어 버릴 것입니다. 여러날 동안 폭발하지 못하고 억눌렀던 성질들이 한 쪽 구석에 차곡차곡 저장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이 다가오면 더 격렬하게 폭발을 해서 그 동안 쌓았던 좋은 행실들을 한번에 물거품이 되게 만듭니다. 결심은 늘 하지만 늘 실패합니다. 그 가장 커다란 이유는, 그 모든 것들이 영적인 자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인간적인 결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부부의 문제도 성화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결심과 노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자기 자신이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결단하고 순종하려고 하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복음적이 아닙니다. 베드로서를 보면 베드로 사도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들에게 온유함과 내면의 평정을 통해서 남편에게 순복하는 것들을 가르칩니다. 즉, 아내된 사람들이 남편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세워두신 아내의 자리를 잘 지키기 위해서는 그 아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그런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힘과 은혜, 능력들을 공급받는 세계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입증하듯이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말씀하시면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그렇게 아내도 남편에게 복종하고 가르치라고 하십니다. 늘 은혜를 받으면서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할 때 얼마나 행복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시는 것을 얼마나 잘 보여주시는 지를 경건한 삶 속에서 깊이 체험하는 사람이 될 때에 남편에게 주께 하듯이 순종하고 복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주께 하듯이 순종한다는 것은 남편과 주님을 대등한 자리에 놓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렇게 남편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면서 아내가 있어야 될 자리에 있는 것이 사실은 남편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성도들을 섬기며 이런 저런 일을 하는 것은 굉장히 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집안 일은 세상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의 전 삶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빛 아래 있고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은 하나님을 섬기는 영역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한 남편의 아내가 되어서 그 남편에게 깊이 순종하고 복종하며 하나님이 아내에게 있으라고 명령하신 그 자리를 지키면서 가정을 깊이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는 것은 남편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그렇게 잘 섬기면 섬길수록 여러분들은 남편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툭하면 남편에게 대들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질, 독한 말들을 쏟아 붇고 남편을 모욕하기를 쉽게 생각하는 여성들의 가정에 참된 복음화의 날이 있을까요? 남편의 영혼을 위해서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위해서 무슨 십자가를 졌습니까? 그들의 영혼의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어떤 눈물을 흘렸습니까? 어떤 고난을 받았습니까? 어떤 희생을 했습니까? 여러분들이 바라고 남편이 교회에 나오고 진실한 신앙을 갖기 원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그를 위해서 고난을 받고 희생을 하는 삶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것은 요행에 대한 기대에 불과한 것입니다. 반말이나 하고 주위 사람들의 모습 속에 대접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비굴한 남편의 초라한 모습이 늘 만나는 사람의 눈에 비치게 만드는 것은 범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들이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섬겨도 마지막에 두 가지 죄는 하나님께서 책망하실 텐데 교회를 망친 죄와 가정을 망친 죄입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는 방식을 배우고 그 앞에서 남편을 도구로 해서 여러분들을 거룩한 부녀자들로 만들어 가는 성화의 의지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매들은 나이 찼다고 결혼하려고 애쓰지 말고 잘 생각하십시오. ‘정말 결혼을 해야 하는가? 그만큼 결혼에 소명이 있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가정의 이런 기본적인 질서가 서지 않아서 가정이 계속 고통스럽고 남편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막돼먹은 아내가 살아가는 가정에게 아이들은 독버섯처럼 자랍니다. 또 다른 망가진 가정들이 아이들 속에서 잉태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라는 환경은 여러분이 만들어 줄 수 있지만, 거기서 자란 망가진 아이들은 하나님도 쉽게 못 고치십니다.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시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경건하게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그리스도인들 속에서도 이렇게 남편을 깊이 존경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성경이 이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빠지는 범죄이기 때문에 이 사도가 이렇게 상세하게 자주 반복해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들에게 말합니다. 얼마나 성경이 여러분들에게 명하는 아내의 자리를 지킵니까? 남편을 깊이 사랑합니까? 깊이 존중합니까? 그리고 그에게 범사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까? 남편이든 집안 살림이든 모두 한 손에 넣고 뒤흔들어서 모두 자기 원하는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은 한가정의 아내가 되기에는 적합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정말 그런 순종하는 모습들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인간적인 결심에만 호소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이 세워주신 아내의 자리를 지속적으로 지키고 그렇게 살 수 있게 하는 그 무엇인가를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있습니까? 무엇으로서 그 망가진 남편들의 일그러진 욕구에 부응하고 무엇으로서 그러한 잘못된 인생의 모습들을 바로 잡고 그러면서도 남편을 거스르지 않고 그 남편 앞에서 하나님이 지키도록 명령하신 아내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알량한 인격 속에서 그런 힘들이 나옵니까? 여러분들에게 정말 어떠한 어려움 들이 와도 여러분들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그 무엇인가 영적인 세계가 여러분들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거의 기도도 하지 않고 직장으로 가정으로 이렇게 저렇게 바쁘게 돌아 치다가 주일날 예배라고 빠끔히 드리고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도 모르고 황급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그런 정도의 신앙생활을 통해서는 가정이 복음화 안됩니다. 그렇게 살다가 결국 마지막에 남편은 지옥으로 가고 아내는 천국에 갔다고 치면 그것이 성공한 인생입니까?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지위에 오르고, 스스로를 얼마나 대견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가장 가까이 일생을 함께 살아온 그 남편에게 단 한번도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를 보여주지 못하고 결국은 그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여러분들의 조잡한 인격으로 모두 막아버리고 사망에 이르게 하고 나서 들어가는 천국이 어떻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 중요할까요? 저는 여러분들이 이런 사실에 대해서 정말 눈떴으면 좋겠습니다.
(예화) 교회에서 상당히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고 좋은 직장도 가지고 있던 한 자매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지방으로 내려갔다.-아버지를 구원하기 위해서.
얼마나 훌륭한 생각입니까? 죽어 가는 그 아버지의 영혼, 죽어 가는 그 남편의 영혼, 그 가족들의 영혼을 생각하면 자신의 인생의 모든 꿈들은 상대적으로 덜 가치 있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남편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구원에 이를 수만 있다면 여러분들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베드로가 “너희들이 남편에게 순복하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들이라고 하더라도 너희의 그런 순종하는 모습을 보면서 구원에 이르게 되리라는 기대를 갖기 때문이다” 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 곳에 나가서 피땀 흘리는 선교 사역이나 교회를 목회하기 위해서 생명 걸고 수고하는 목회자의 희생만 희생이 아닙니다. 주님이 남편보다 먼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남편의 영혼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남편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성경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러면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사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길입니다. 내가 주님을 몰랐더라면 남편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지만 주님을 믿기 때문에 내가 아니라 주님 욕먹이는 것이 싫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배우고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자원을 건강한 교회 생활과 경건생활을 통해 공급받고 그런 사랑과 은혜를 하나님께 많이 받고 남편에게 쏟는 것입니다. 그렇게 희생하고 순종하고 그 영혼을 위해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교회에 옵니다. 그러면 남편에게 상처를 받았어도, 남편은 못 받는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들이 충분히 받고 고통보다도 더 큰 위로를 맛보면서 다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가정을 섬길 힘을 얻게 되는 것이 정상적인 신앙 생활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범사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명령이 명백하게 그것을 순종하지 말라고 지시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한 번 해보시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그런 태도로 하나님께 불복종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 생활을 통해서 그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복음적인 가르침을 깊이 묵상하면 우리 자신이 정말 성화 되어 갑니다. 남편을 통해서 아내가 거룩하게 되어가고 아내를 통해서 남편이 거룩해집니다. 아내나 남편이 자기의 분수에 맞지 않도록 너무 훌륭한 사람이면 그 훌륭함 때문에 감화를 받아서 거룩을 배우고 자기보다 훨씬 비열하고 못돼먹었으면 그 못돼먹은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깎이는 방법을 배우면서 거룩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모두 생명의 유업을 하나님 앞에 함께 받는 것입니다. 범사에 순종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범사에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는 모습들을 배워가십시오.
아내에 대한 남편의 가장 우선적인 덕목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몸을 내어주시기 까지 하신 그런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아내에게 베풀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은 아내의 사랑을 안 받아도 됩니까? 아내가 만일 남편에게 복종만 할 뿐 사랑하지 않으면 하녀이지 아내가 아닙니다. 노예나 시녀이지 결코 아내가 아닙니다. 남편도 아내에게 사랑을 받아야 되는데 유독 이렇게 하나님은 남편들을 향해서 아내를 사랑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교회가 서가는 원리는 남편의 사랑을 통해서 아내가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과 같은 원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는 상처받고 주님 앞에 길 잃은 양처럼 돌아와서 진실된 눈물을 흘리는 양떼도 많지만, 못돼먹은 양들도 많습니다. 목자의 생각에도 저런 인간을 하나님이 자기의 양이라고 불러주시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양떼들도 많습니다. 그러한 다양한 양떼들이 섞여 있는 양무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느끼는 것은 다양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당장 기도하며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사람이 있고, 갑갑한 사람도 있고,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조금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상태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함께 모여있는 교회라는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참 신기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목회를 안 했더라면 전혀 배우지 못했을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통해서 성도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나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성도들에게 베풀어주신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들을 목양하고 기르는 목회자인 내가 볼 때 시기가 날 정도로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들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항상 맑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일주일에 세 번 설교하는 것이 너무 적다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주일이 다가오는 것이 두렵게 느껴질 정도로 말씀이 고갈되는 것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갈됨을 느낄 때마다 항상 고갈된 설교를 하느냐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면서도 마음에 왠지 흡족하지가 않고 고갈된 것을 느끼고, 설교를 준비해도 왠지 흡족하지 않아서 반쯤 포기하고 단상에 올라갔는데, 철저하게 열심히 준비한 날보다도 하나님이 더 크게 은혜를 쏟아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때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양떼를 많이 사랑하시는구나’를 느낍니다. 그런 사랑은 어떻게 보면 정말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제가 자녀들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서 부모가 자녀들을 무한히 용납하고 한없이 사랑하는 것, 그것이 부모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으면서 해야할 가장 주된 의무라는 말씀을 드렸지만 바로 그런 사랑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계속 쏟아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남편들이 아내를 향해서 베풀도록 요구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특별히 하나님께서 남편들에게 아내를 깊이 사랑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이유는 여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성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결혼 생활을 했던 베드로는 아주 예리하게 간파했습니다. “지식을 따라서 그와 함께 동거하며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귀히 여겨라 이는 너희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 함이라” 다시 말하면 아내를 깊이 사랑하도록 남편에게 강력하게 촉구하시는 이유는 여성은 독특한 인격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연약함’입니다.
(예화) 어느 집에서 포도주를 대접받았는데 그 잔이 한 쌍에 15만원이라고 했다.
연약하기만 하면 그렇게 귀하게 안 다룹니다. 곰탕 담는 뚝배기는 질그릇이기 때문에 쌉니다. 그런데 아내는 연약할 뿐만 아니라 귀합니다. 그러니 잘 다뤄야 합니다.
(예화) 어릴 때 가난한 동네에 살았는데 어떤 부부가 늘 싸우면 남편이 물건을 집어던졌는데 안 깨지는 것만 던졌다.
만일 아내가 연약한 그릇이 아니면 막 집어던져도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연약한 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남편들은 이 말씀을 들으며 “우리 부인은 연약함과는 거리가 멉니다”라고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남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그대의 부인도 한 때는 연약하였다”입니다. 생존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비극적으로 강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가 강해지는 것은 굉장히 불행한 것입니다.
분명히 남편도 아내의 깊은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유독 남편에게 아내를 깊이 사랑하도록 요구하시는 이유는 -이 글의 1차적인 수신자는 하나님을 믿는 남편이었다- 여성이 가지고 있는 독특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루소는 교육에 있어서 자연주의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에 있어서 자연에 대한 생각들을 굉장히 많이 끌어들였습니다. 우리들이 수용할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인간보다도 자연이 훌륭한 선생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사상을 우리들이 전부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현대에 있어서 그것이 상당히 입증되는 생각들입니다. 예를 들면 편리한 교육환경, 엄청난 정보, 바쁘게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몰아치는 이 입시 위주의 치열한 경쟁, 그리고 그런데서 건강을 지탱하기 위해서 고칼로리의 식품을 자녀들에게 쏟아 붇는 것, 이런 것들을 하면 경쟁 사회에서 이기고 이기면 인간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 열매들을 서서히 우리들이 따고 있습니다. 학식은 가췄고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는 했는데 인간다움이 없는 것입니다. 처절하게 살아남았는데 그런 경쟁과 몸부림의 와중에서 인간성이 어떻게 파괴되고 적절한 시기에 어떤 식으로 자연으로부터 재충전되어서 사람으로서의 온전한 성품을 이루어 갈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완전히 도외시 된 것입니다.
(예화) 아들을 대안학교에 보내고 싶었다.
좋은 음식, 좋은 교재, 좋은 학문, 여러 가지 시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무형의 교육적인 자료들도 많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좋은 공기, 늘 자연과 접할 수 있는 전원적이 생활,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모를 통해서 부어지는 충분한 사랑, 친구들 속에서 왕따되지 않고 자기를 잘 용납해 주는 좋은 우정어린 관계, 이런 모든 것들이 함께 어울리면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예화) 초등학교아이들이 왕따 시키는 것은 자기가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이야기.
정신적으로 불구가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한 가정에서 남편도 미완성된 존재이고 자녀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럴 때 인간은 남편이 밥벌이 해오고 양식과 땔감을 갖다 주고 적절한 문화 설비를 해주면 저절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짐승입니다.
남편들은 ‘뼈빠지게 돈벌어 오는데’ ‘이것 받으려고 내가 한 달을 일했나?’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여자들은 그런 얘기를 가장 역겨워합니다.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누가 남자로 태어나라고 했습니까? 왜 자기를 그렇게 비참하게 비하합니까? 월급봉투 가져다주면서 ‘한달 동안 당신 먹이려고 고생했더니 사장이 이것 줬어’하는 사람과 왜 삽니까? ‘여보, 세계 평화를 위해서 한달 동안 일했더니 하나님이 주셨어’하는 호연지기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정에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사랑, 섬세함, 우아함, 정신적이 보호, 이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아내의 인격 속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를 막 굴리고 폭력을 하고 상처가 가득 맺히게 되면 그 샘이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아파트 한 채에 가전제품 몇 개 가져다 놓고 돈몇푼 주면서 자녀들이 그 속에서 정상적인 인간으로 자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돼지우리에서 인간이 나오리라고 기대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인격 속에서 솟아나는 사랑과 관용, 어머니의 자애로움, 부드럽고 섬세함, 우아함, 이런 것들을 알게 모르게 마시면서 남편인 자기도 자라고 자녀들도 함께 자라면서 인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빵 몇 덩어리와 가전제품 몇 개 사다 놓는 것이 큰일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육체적인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성들에게는 남성들에게는 없는 섬세함, 부드러움과 우아함, 자애로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 심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아내는 돈 한푼 안 벌어오고 안방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그 자체로서 존재의 가치를 다한 것입니다.
폭력을 하소연하는 여성들이 있는데 그에 대한 제 입장은 단호합니다. 용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외국에서는 부모가 아이를 때려서 아이에게 상처를 입히면 즉시 구속입니다. 그리고 아이와 부모를 계속 만나게 할 것인가는 나라가 결정합니다. 우리는 남편에게 맞아도 나중에 화해한다고 각서 쓰면 남편을 풀어 줍니다. 외국에서는 어림없습니다. 응분의 대가를 치르기 전에는 풀려날 수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과 다시 살고 싶어도 이 사람이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본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살 수 없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향해서 폭력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강간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그가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자비하고 우아한 샘물을 마시면서 정신적으로 순화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것들을 신앙 안에서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패역을 따라서 막사는 인간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끊임없는 형벌과 저주가 있을 것이고 죽어서도 그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청소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야단치기 위해서 자녀의 종아리를 걷어놓고 회초리를 때리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비하게 폭력을 행하는 부모가 있다면 당장 고발하라고 말합니다. 계속 참으면서 얻어맞는 것은 그 아버지의 영혼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질식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는 당장 집어넣어 쇠고랑을 차게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길입니다. 더군다나 자매들을 부모가 작대기로 두들겨 패고 주먹으로 때린다고 하는데 맞고 사는 것은 범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야기가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는 것은 나중 문제이고 당장 고발해야 합니다. 용서가 없는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가정 속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대해서 불만이 많습니다. 법이 너무 너그럽습니다. 엄벌에 처하고 이런 것들이 몇 차례에 걸쳐서 반복되면 아예 그 사람은 낙인을 찍어서 결혼도 못하게 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그럴 권리가 어디 있습니까?
아내가 진심으로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남편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운 줄 아십시오. 폭력을 휘두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산 사람들의 말로가 참 비참합니다. 그런 식으로 폭력을 휘두르며 산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불행합니다.
결혼생활 자체가 망가지고 깨트려졌기 때문에 샘물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자체가 격렬한 투쟁과 몸부림의 연속입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공급받으면서 충만해 진다고 하더라도 이 싸움은 확실히 만만한 싸움이 아닙니다. 그러고 가정에 돌아오면 그 거칠어진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아내의 사랑, 그 우아함, 섬세함, 그런 것들이 향기처럼 느껴져서 자기를 끊임없이 주안에서 순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정상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내와의 관계가 깨트려져서 섬세함과 우아함을 맛보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남편은 성격파탄자가 되었거나 거리의 여자를 찾아서 개처럼 헐떡이며 헤매는 두 가지 중 하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거리에는 그런 사랑의 샘이 없습니다. 곧 자기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연약한 그릇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볼 때마다 정말 목이 메입니다. 그 사랑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입니다. 수시로 하나님을 거스르고 막돼먹은 인간처럼 살아가는데 그 하나님이 오래 참음과 용납하심으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쏟아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 하나님의 그 크고 넓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같이 막돼먹은 인간들이 이만큼이나 착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귀기울일 수 있는 부드러운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만큼이나 된 것입니다.
가정에서 역시 똑같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무자비하게 대한다면 여러분들 가정에 있는 섬세함과 자비로움, 그런 사랑의 샘들이 모두 말라버립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있어야 할 것들이 고갈되고 나면 기형의 인간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사라진 교회에서 오래 동안 살아남은 교인들을 보셨습니까? 망가진 사람들입니다. 남편의 사랑이 없는 가정 속에서 오랜 세월 혼자 몸부림치면서 가정을 이끌고 살아온 여자를 보십시오. 반쯤은 망가진 사람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없이 눈칫밥을 먹으면서 몸부림치면서 성장기를 보내온 아이들은 반쯤 파괴된 인간이 되어있습니다.
남편들이 아내를 깊이 사랑하는 것이 자기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는 길이고 자녀들의 정신의 생명을 보호하는 길입니다. 너무 거칠어지지 않도록, 존재의 위협을 받으면서 생존하기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아도 되도록, 여러분들이 보호자가 되십시오. 거기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얼마나 강퍅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려운 것처럼 아내와의 관계가 힘듭니다. 마음 한편으로는 주님의 복음의 빛을 따라서 살고 싶지만 또 한쪽에는 억눌린 자아들이 패역이 되어서 내 성질대로, 내 본성대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시 이러한 관계 속에서도 승리하기 위해서는 아내와 마찬가지로 남편들에게도, 아내 한사람만을 바라보는 투쟁을 통해서는 그런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잔악하고 악랄한 인간들인데 아내가 아니라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그런 사람을 향해서 그렇게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 같이 오래 참는 것을 흉내낸다고 하는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을 그렇게 가망성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하나님의 평화, 거기에서 오는 온전한 평화, 그런 은혜가 남편인 우리의 마음속에 넘칠 때, 그런 샘이 되고 싶고 그런 우아함과 섬세함을 가져서 가정의 정신적인 맑은 공기가 되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기 안에 남아있는 패역을 고치지 못해서 충분히 그런 우아함과 섬세함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아내를 고쳐져 가고 있는 존재로 생각하면서 용서하고 감싸고 기다려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들이 기도를 열심히 합니까? 은혜 생활 열심히 합니까? 부인에 의해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처럼 억지로 나와서 쭈그리고 앉았다가 예배 끝나자마자 돌아가는 그런 종류의 신앙생활로서는 아내라고 하는 가정의 샘이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교회 한번 나온 것을 커다란 부조한 것처럼 일주일 내내 유세하는 그런 거만한 모습 속에서는 안됩니다. 여러분들이 망가뜨린 샘입니다. 여러분들의 아내가 섬세함을 잃어버렸습니까? 대부분 여러분이 거칠게 만든 것입니다. 태어날 때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환경 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한때는 여자였습니다 한 때는 우아했습니다. 한 때는 섬세했습니다. 한 때는 인자했습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절박하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가정에 맑은 샘만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집에서 사느냐, 얼마나 넓은 집에서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어떤 지위를 누리며 사느냐 보다 어떤 사람과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이 적절하게 망가져 있지요? 언제까지 그냥 가지고 가시겠습니까? 샘을 다 망가트렸더니 망가트릴 때는 속이 시원했는데 이제는 그 대가로 우리는 썩은 물을 먹으면서 살게되었습니다. 썩은 물을 내는 그 아내는 계속 하나님과 가정을 향해 범죄 합니다. 그 남편인 우리들과 자녀인 우리들은 그 물을 먹기 때문에 더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망가지는 가정의 모습을 보면서 박수를 칠 존재는 마귀밖에 없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고리를 풀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깊이 용납하십시오. 사랑하십시오. 쉽게 깨어질 그릇처럼 연약하게 여기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따라서 함께 살아가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오랫동안 내려오던 여러분들의 가정의 불결하고 상처받은 삶을 종식시키고 여러분들의 가정을 통해서 여러분의 자녀와 세상을 치유하며 맑은 물들이 흘러나갈 것입니다. 이것은 결혼한 사람들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 가정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무거운 무게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이 거룩한 일들을 이루는 도구이기도 한 것입니다.
가정을 위하여Ⅳ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