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을 위하여Ⅶ
(200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남편과 아내①(창 2:18) 2002.6.2 주일오전 1
2. 남편과 아내②(창 2:23) 2002.6.9 주일오후 15
3. 부부와 하나님(창 3:12) 2002.6.9 주일오후 29
4. 가족을 돌아보라①: 육적 형편(딤전 5:8) 2002.6.12 수요예배 40
5. 가족을 돌아보라②: 영혼의 구원(딤전 5:8) 2002.6.19 수요예배 53
6. 가족을 돌아보라③: 풍성한 삶(딤전 5:8) 2002.6.6.26 수요예배 65
7. 불신남편을 구원하는 길①(고전 7:14) 2002.6.30 주일오후 74
8. 불신남편을 구원하는 길②(고전 7:14) 2002.7.3 수요예배 82
1. 남편과 아내Ⅰ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죄가 들어온 이후로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은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가장 먼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영향을 받은 관계는 바로 부부관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아담과 하와가 주님의 의해서 창조되고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갈등이 없었지만 범죄하고 나니까 두 사람이 서로 이 세상에 관계를 가지고 사는 것이 한없이 힘겹고 버겁게 느껴지는 그런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이런 부부와의 관계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끼는 것이 인생을 사는 불행에 중요한 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몇 시간에 걸쳐서 이 부부의 문제를 다루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 기초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아니고 동기간의 관계도 아닙니다. 모두 중요한 관계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가정을 이루는 기초적인 관계는 아닙니다. 가정을 이루는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남녀의 결합을 통한 이 가정의 제도는 죄가 들어온 이후로 많이 변질되었고 그리고 제도가 무엇인지를 안다고 하더라도 그 제도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이 인간들에게 없었기 때문에 가정의 제도는 많이 파괴되었고 기초는 허물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에서 하나님을 자신의 부모들보다 더 많이 거스르는 그런 반 하나님 적인 많은 인간들이 양산되고 있어서 그래서 세상은 이처럼 혼탁하고 어지러운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들이 알기 원하셨고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주님이 누구인지를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특별계시와 일반계시의 차이가 있을 수 없었고 풀꽃하나 그리고 코끝에 스쳐 가는 바람 하나 속에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말해주는 아름다운 계시가 충분히 전달되었고 에덴 동산은 바로 그런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이후로는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는 파괴되었고 하나님의 행복한 임재는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꽃피고 열매맺던 아름다운 동산은 가시와 엉겅퀴로 뒤덮이게 되었고 이제는 땀을 흘리고 수고하여도 겨우 먹고 살수 있을 그런 고달픈 노동에 종속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 속에서 처음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정의 원래의 대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하는데 우리에게는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가정의 대의가 어떠하든지 간에, 그리고 그 가정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든지 간에 그것과 상관없이 과연 죄 가운데 이렇게 모두 파괴되어버린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망가진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철저히 무능력한 우리들에게 그런 가정의 원래의 모습을 보고 또 사모하는 것이 우리에게 그 가정을 회복하게 하는데 정말 도움이 되겠는가, 정말 우리에게 그렇게 무너진 관계들을 회복시켜서 하나님의 원래 세워놓으신 그 가정의 대의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믿지 않은 자들에게는 그들 가운데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니 그들은 극복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는 그들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바꾸어가게 하시는 거룩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렇게 망가진 관계들을 회복시켜가고 주님 앞에서 바르게 세워갈 소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도 역사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도 동시에 역사하고 있고 하나님이 적절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은혜의 수단을 따르기만 하면 그 은혜가 죄를 누를 것임을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에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들이 그 길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항간에 요즘 유행하는 소위 이야기하는 부부 행복의 비결이라든지 이런 책들을 볼 것 같으면 수기 형식의 글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가 많이 갈등을 하고 고통을 했는데 어느 날 남편이 이 인간과 지지고 볶고 살아봐야 뭐하나 그래서 에이 지자. 그리고 졌더니 행복한 가정이 되었더라. 못되고 괴팍한 남편과 살며 매일 부딪치고 싸우고 이혼 직전까지 갔는데 어느 날 아내가 마음을 확 돌려서 불쌍한데 한번 봐주자. 내가 죽어서 지내면 온 가정이 편안한데. 그리고 죽어지냈더니 그러니까 가정이 평화롭게 되었더라. 그런 유의 간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종류의 가정의 대한 행복을 회복하는 일에 있어서 그런 식의 접근 방법에 대해서 저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믿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통용될 수 있는 가정 행복의 비결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가정에서는 적용될 수 있는 원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내는 남편을 위한 사람도 아니오, 남편이 아내를 위한 사람도 아닙니다. 아내의 최종적인 목표는 남편이 아니고 남편의 최종적인 목표도 아내의 행복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남편이든 아내든 변해서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는 사람으로 변해갈 때 그들의 가정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지, 아니 아내가 못되었는데 남편이 한풀 꺾어서 그래, 뭐 데리고 살아보니까 쓸만하데. 그리고 모든 것을 양보하고 살아서 만족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네 아내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었단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자기가 그렇게 참고 산 것이 무슨 희망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들이 신본주의 적인 논리를 가지고 이 가정의 문제도 다루어가고 상황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대응해서 둘이 만족한 가정생활을 이루어 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하는 인본주의적인 발상들을 철저히 배격하지 않으면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밝은 진리의 빛 아래서 은혜로 회복되는 가정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몇 시간에 걸쳐서 여러분들이 따라올 수 있든지 없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부부의 대의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정직하게 여러분들에게 선포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본문에 의하면 결혼 제도의 유례에 관한 보도를 시작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여기서 “가라사대” 라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에게 말했다 라는 말씀도 되지만 하나님이 속으로 말씀하신 것도 모두 포함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의 심중에 있는 것을 어째든 사람에게 표현하셨든지 자기 스스로 가지고 계셨든지 어째든 인간에게 전달이 된 것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아담이 독처 하는 것이...” 다시 말하면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해서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외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특별히 결혼하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며 살도록 부름 받은 거룩한 사람들이 있음을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안나와 같은 사람들, 그리고 또 혹은 예수님도 독신이셨고 세례 요한도 그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뒤로 넘어가 보면 사도 바울도 독신이었고 뿐만 아니라 교회사 속에서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순결한 생애를 살면서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을 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런 독신의 아름다운 생애를 보면서 저 사람이 만약에 결혼을 해서 시집가서 애 낳고 남편 섬기고 또 아내를 돌보고 아이들을 부양했더라면 저렇게 하나님만을 위하여 온전히 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박수를 보내고 싶은 그런 아름답고 거룩한 독신들을 우리는 종종 만납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그런 부르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부름을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성경 적으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수 있는 삶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 속에는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저들이 저렇게 아름답게 하나님을 섬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갖게 만들어주는 그렇게 아름답고 거룩한 부부들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든지 나옵니다. 교회사 속에서 걸출했던 하나님의 사람 탁월한 영성을 소유하고 한 시대를 뒤흔드는 위대한 일에 쓰임 받았던 사람들이 모두 독신이 아니었음은 이 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한 사람들은 아내를 사랑하고 그러면서도 아내를 사랑하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갈리지 않고 자녀를 부양하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게으르지 않고 그러면서도 가정에 무책임하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많은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하지만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산 사람도 지어야 할 십자가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하게 독신도 우리들이 하나님 섬기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삶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자신을 개방하고 인정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신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피치 못하게 독신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월에 떠밀려서 그저 그렇게 독신이 된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하지 않은 형제 자매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결혼을 해야 할 부르심을 느꼈으면 우선 결혼을 해야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 불러주시는 그 독신으로 날 부르셨나 그것을 확인을 해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해서 그리고 그 다음에 결혼을 하도록 하나님이 부르셨다 그러면 그 결혼을 위해서 열렬히 기도해야지 됩니다. “너희들이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하나님 열심히 바라보고 주님께 열렬히 기도하고 그래서 주님이 자신에게 적절한 배우자를 주셔서 그래서 결혼에 이를 수 있도록 그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이렇게 떠밀리듯이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성경이 그렇게 거룩한 독신에 대해서 예외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일반적인 많은 사람들에게는 결혼이라고 하는 이 제도가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뜻하신 제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독처 하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아서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어떤 점들이 아담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안 좋아 보이셨을까? 사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살았을 때 하와가 없어서 뭐 못한 일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그 창조의 세계를 그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다스렸습니다. 거기에 무슨 하자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짐승들을 주님이 데리고 오시니까 아담이 그 하나 하나의 이름을 붙였는데 정말 그 이름은 아주 적합하기 그지없는 그런 이름을 붙였을 것입니다.
사실 그 이름 붙이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저는 가끔 가다가 ‘우리 아기 이름을 지어주세요’ 그리고 오는데 그게 보통 숙제가 아닙니다. 설교 한편 준비하는 것보다 더 힘듭니다. 며칠씩 생각해야 합니다. 뭐라고 지어야 하나. 그래도 한번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만 우리 전도사님이 딸을 낳아서 이름을 져달라고 해서 고민하다가 아빠에게 한자 따고 엄마에게 한자 따서 그래서 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불려지고 있으니 그 이름하여 ‘이성은’ 그런데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품을 만들어놓고 그 이름을 붙이지 못해서 고민하다가 결국 이름을 붙이는 회사에 의뢰했는데 제품 하나에 이름을 붙이는데 싸게는 천 만원에서 비싸게는 오 천 만원, 일억 가까이 받는다고 하니까 얼마나 이름짓는 것이 어려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들었을 때에 그 사물의 본래의 특징을 반영할 수 있는 그런 이름을 짓는데 아담이 그것을 다 붙인 것입니다. 누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았는데도 다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왜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하나님보시기에 적합하지 않았을까, 좋지 않았을까? 왜 그러셨을까? 성경은 뭐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는지 그것을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좋지 않았다는 것은 악했다기보다는 온전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석을 해야지 될 것입니다. 온전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셨지만 그것으로서 아담과 하와에게서 태어나는 그 후손들에게 그것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아담과 하와는 창조되었을 때 기저귀 차고 창조된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엄마 아빠가 없었습니다. 아담의 엄마는 누구입니까?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흙으로 사람을 빚으사 그 코에 생기를 훅 불어넣으신 주 하나님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는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창조하시지 않으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러면 그 애들이 산과 들과 사자와 호랑이 그런 것을 먼저 보겠습니까, 엄마 아빠를 먼저 보겠습니까? 아무리 야외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가 눈을 뜨면 엄마 아빠가 먼저 들어오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아이가 엄마 아빠를 보면서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 자연을 보면서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보다 영향력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혼자 살아서는, 물론 어떤 식으로든지 아이를 하나님이 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아담 혼자밖에 없었더라면 아담은 완전한 인간으로 하나님이 만드셨지만 아담을 완전한 하나님으로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담 한 사람이 아이에게 하나님을 충분히 보여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와와 둘이 보여주어도 충분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균형 있게 보여줄 수가 없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뭐라고 합니까? ‘우리의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런데 그 아버지는 영원히 이해되기 어려울 단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아버지는 아랫목에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수염을 쓰다듬으며 담배 대를 탕탕 두드리면서 네 이놈 이리 오너라 하는 그런 2-300년 전의 그 아버지와는 사실 거의 거리가 먼 그런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 속에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그 속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그 성품은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 아버지만의 성품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부성과 모성이 공존하는 그런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하다가 여러분은 안 느꼈는지 모르지만 나는 많이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많습니다. 아버지는 섬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섬세합니다. 물론 섬세하지 않은 엄마도 많습니다. 그것은 다 죄가 들어와서 그렇습니다. 아빠보다 더 와일드한 엄마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섬세합니다. 진짜 성경을 가만히 놓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성품들을 묵상해보면 진짜 아버지라는 단어가 오히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우리가 알고 있는 아버지라는 단어에 대한 이해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많이 제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짜 오늘날 우리들의 아버지에게 자기의 재산을 반을 털어서 허랑 방탕하기 위해서 외국으로 떠났다가 다 털어먹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오는 그 아들을 수많은 날 동안 눈이 짓무르도록 기다리면서 아들 사랑에 가슴앓이하며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매일매일 눈물로 기다리는 그런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아버지들에게 정말 있는지 내가 묻고 싶습니다. 있습니까? 사실 거기서 어머니가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빠는 일하러 가고 엄마가 기다려야 하는데 엄마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서 성경이 그런 아버지로 등장을 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모습을 아무리 타락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담 혼자 태어나는 세대에게 그것을 보여주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하나님이 결론을 내리신 것입니다. 남자의 전통적인 덕목은 지혜, 용기, 결단, 힘 이런 것들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남자면서도 이런 것 하나도 없는 남자들이 있습니다. 성질만 낼뿐 아무 것도 없는 남자들이 있습니다. 용기 있는 대신 비겁하고, 결단을 내리는 대신 우유부단하고, 힘이 있는 대신 그냥 무거운 것 아내보고 메고 가라고 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혜가 없고 오히려 우둔해서 그 사람 쫓아가면 곤두박질하는 그런 불행한 가정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남성들에게 그런 지혜, 결단, 용기, 힘 이런 것들을 주셨다면 하나님은 여성을 창조하심으로서 그들에게 섬세함, 아름다움, 관용, 그리고 자비로움 이런 것들로 인해서 결단은 항상 무자비함을 어느 정도는 내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도자들은 고독한 것입니다. 결단은 어느 정도의 무자비함을 내포합니다. 힘은 어느 정도의 거친 것을 내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용기는 항상 어느 정도 감정을 절제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그런 용기를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보안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성을 창조하셔서 그를 아내가 되어서 그 남편과 함께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하나님의 이 부성과 모성을 함께 가지신 그 독특한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를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서 남성은 자기가 아무리 지혜와 힘과 결단과 용기가 있어도 항상 자기 자신이 자기의 자녀들에게 자기가 아무리 그렇게 훌륭하게 살아도 자기만으로는 하나님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다는 한계를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내가 아무리 아이들에게 사랑스럽게 섬세하게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우아하고 자비하게 그렇게 아이를 가르쳐도 자기 자신의 그 온전해지려는 그 성품만으로는 하나님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자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언제에도, 죄가 들어오기 이전에도 입니다. 죄가 들어온 다음에는 그런 필요성들이 더 많이 증가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르쳐주어야 할 엄마 아빠도 망가졌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망가졌고 또 태어난 아이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망가졌고 그들 모두가 자연에 대해서 가진 관계도 망가졌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와의 관계도 깨트려졌기 때문에 더더욱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세상이 파괴되어 가는 것입니다. 죄에 의한 그 놀라운 파괴력이 역사 하는 그런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아담이 혼자 거하면서 하나님을 모자람이 없이 섬겼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여성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특별히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제외하고 평범한 많은 사람들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며 그렇게 주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이제 죄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서부터 이 관계는 굉장히 어렵고 복잡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투명하고 분명했고 거기로부터 능력을 공급받으면서 아담과 하와의 관계가 정말 최상이었지만 죄가 들어오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지고 나니까 그러면서 심각한 죄의 영향력 등이 두 사람의 관계에 파고 들어온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뿌리가 병들면서 열매와 잎사귀들이 병드는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하나 더 이상 이야기를 확산시키지 않고 우선 한가지를 정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불안전한 존재로 창조하셔서 남성과 여성의 결합을 통해서 온전해지도록 하나님이 의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성은 남성에게 남성은 여성에게 서로 매우 필요한 그런 존재가 되도록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결혼생활의 대의입니다. 뜨겁고 불붙는 사랑 그 이전에 자기 자신이 아내가 있어야 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고 아내가 남편이 자기 옆에 존재해야 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는 그런 관계, 그것이 하나님이 결혼 제도를 처음 세우실 때에 겨냥하셨던 의도라고 정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여러분들은 남편에게 여러분들이 꼭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느끼게끔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아내에게 여러분들의 존재가 꼭 필요한 존재로 느낄 수 있게 그렇게 움직이고 활동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남편이 아내를 생각하면서 나 혼자 살았더라면 내 삶은 없었을 것이다. 아내가 남편을 생각하면서 저 남자가 없었다면 내 삶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뜨거운 사랑 이전에 우리가 함께 살아감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가고 있다라고 하는 그런 관계들을 확인할 수 있는지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자신의 어느 부분이 망가졌는지 살피고 고쳐져서 서로에게 그렇게 꼭 필요한 존재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가정의 회복을 위한 첫걸음입니다.
크게 두 번째로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성적인 우열을 겨냥하시면서 결혼의 제도를 수립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본문은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니” 이렇게 말씀하신 성경 구절을 토대로 해서 많은 남성 우위론 자들은 여성은 남자를 위하여 지은바 되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이 성경에 기초해서 내세우는 두 가지 중요한 증거가 있는데 하나는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니” 할 때에 “그를 위한다”는 표현과 그리고 “돕는” 이라는 표현을 가지고 여자는 남성보다 못한 존재이고 보조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방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성의 우열을 암시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손으로 빚으셔서 그래서 그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생기를 훅! 불어넣으셔서 창조했지만 하와는 이미 존재하는 그 아담을 잠들게 하셔서, 히브리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깊은 잠을 아담 위에 떨어트리셨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잠은 피곤해서 잔 그런 잠이 아니라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권적으로 개입하셔서 우리로 말하자면 마취같이 그렇게 떨어지게 만드셔서 거기서 갈비뼈를 취해서 그것을 가지고 하와를 만드셨다는 점에서 아담은 바로 하나님이 직접 흙을 빚으셔서 만드셨지만 하와는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서 만들었으니 그의 몸이 창조의 연장이 아닌가. 그래서 결국은 창조의 소재 면에 있어서도 흙과 삶은 관계없지만 아담과 하와는 서로 소재 면에 있어서 예속된 관계이기 때문에 남녀와의 관계를 그렇게 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게 동양이나 서양이나 할 것 없이 남성 우위론 적인 사고방식이 오랜 역사를 지배해왔습니다. 역사 속에서 예외로 여성들이 제국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그런 지역이 있었다는 것을 가끔 보도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에 묻힌 이야기고 인간의 역사는 역시 남성들이 우위를 차지하면서 지배해온 그런 역사였고 그래서 그 남성들은 어느 시대에는 여자 그 자체를 하나의 제물, 재산이나 물건 중 하나처럼 취급하면서 그렇게 자신의 소유의 일부라고 생각하던 시절들이 있었고 그것은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간 데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에서 여성들이 참정권을 갖게 된 것이 20세기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래된 기독교 전통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참여는 철저하게 배제 당했고 여성들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남성들이 일을 잘하도록 밥하고 빨래하고 거드는 그 일이 여자의 모든 할 일인 것처럼 그렇게 되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에 보면 결혼생활에 변형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는 한 남자가 여러 부인을 거느리는 일들이 성경에도 나오는데 그것들을 보면서 결혼생활의 모습 그 자체가 남성과 여성 사이에 차별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우리들이 여기서 분명히 해야할 것은 이것입니다. 성경은 항상 좋은 믿음의 본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전체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매우 귀중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았다고 할지라도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옳지 않았다는 부분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어느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든지 간에 한 시대에 태어나면 아무리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그 시대에 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은 필연적이었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어느 정도는 그 시대에 아들이 되어서 그 시대를 정확히 알고 그 시대에 맞게끔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필요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그가 비록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의 아들이 되어서 세상의 영향 아래 놓여있는 것을 원하시는 대신에 하나님에게 신령한 영향을 받으며 그 시대의 자녀들이 흔히 빠지는 이 죄악 된 문화를 거스르면서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지 그것을 따라서 사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지는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이었던 요셉, 그 사람은 구약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아주 샛별같이 빛나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안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점치는 도구들이 있었으니 그가 그런 신령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 시대 애굽의 사람의 풍습을 따라서 점을 치기도 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가 그 아름다운 요셉의 신앙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는 역시 티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고 하나님의 신이 충만했던 그 아름다운 요셉이 누구와 결혼을 했습니까? 애굽의 이방 종교의 제사장의 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고 그 일까지 모두 잘한 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시대와 거슬려서 싸웠던 요셉의 한계를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해석을 해야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기로 성경에서 유명한 다윗과 같은 경우도 여러 여인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해주신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넓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묵인하신 것이고 더 좁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존재해야 할 한 남편과 한 아내의 아름다운 관계에 집착하면서 살지 못하고 세상의 풍조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던 그런 다윗의 신앙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말라기를 비롯한 마지막 선지자들이 활동하던 때는 아직까지도 구약이었고 에스라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렇게 심지어 이방 여인들까지 취해서 시집가고 장가드는 그런 폴리감이 일부 다처제에 방식이 유행했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선지자의 청진한 목소리는 시대를 꿰뚫고 들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유효하실 지라도 한 남자를 위해서 한 여자를 지으시고 그렇게 해서 가정을 이루어가게 하셨다 라고 하는 그 선지자의 메시지는 그 시대에 하나님이 새롭게 주시는 음성이기보다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이 원래 가지고 계셨던 의도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일부 다처제가 보기 좋은 제도였다면 하나님이 왜 갈비뼈 하나를 뽑아서 하와를 만드셨습니까? 양쪽 갈비뼈 다 뽑아서 수십 명 만들어서 그래서 다 가져라. 그러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누르면 갈비뼈가 없이 허파가 만져지는 그런 인물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것들을 아주 분명하게 해야지 됩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훌륭한 믿음의 조상들이 그러했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더더욱 그분들보다 연약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더 많이 세상에 영향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주 혼란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으로는 남존여비의 사상이 있어서 아버지 말이라고 하면 꼼짝 못하고 무슨 성경의 질서, 그런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잔인할 정도로 아버지가 폭압적으로 가정을 군주처럼, 폭군처럼 군림하면서 지배하고 엄마는 그저 꼼짝도 못하고 가정의 자녀들은 말할 것도 없이 그런 것이 전통적이었는데 이제 거기에 대해서 자식들도 반발하고 아내도 반발하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다 반발하는 시대가 되었고 그래서 남편들도 이제는 도저히 그런 식으로 가정을 이끌어가기 힘든 그런 한계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면 무슨 남녀 평등의 새로운 지평들이 열렸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나는 오늘날의 이 가정의 문제를 영적인 춘추전국시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식은 자식대로 아버지 어머니의 권위로부터 해방되려고 하고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으려고 하고 그리고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에게 더 이상 억눌려 살기는 싫다. 그리고 무슨 가정에 충실한 것이 밥 먹여주나.
어느 백화점에 가서 부인이 그랬다고 합니다. 직업을 쓰는데 아무 것도 없고 가정 주부인데 나는 여기 표시할 때가 없는데 어떻게 하는가 하고 물으니 뭘 하는데요? 그래서 ‘가정주부’라고 하니까 거기 있잖아요. ‘프리랜서’ 거기다 쓰면 됩니다. 보니까 가정주부가 프리랜서라고, 프리랜서가 뭔지 아십니까? 일거리 있으면 가서 돈 조금 받고 없으면 다른 데로 가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 프리랜서인가 봅니다.
그렇게 하는데 가치관이 정립이 안되어 있습니다. 그게 다 제 각각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딪히다가 나는 자원하는 공처가가 되기로 했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집안이 평화로워지니까 거봐. 잡혀 살면 행복해지잖아. 그리고 수기도 쓰고 연설도 써서 내보내서 팔리고 또 그것도 쫓아 하겠다고 하고 그렇게 하는 속에서 또 한편에서는 무슨 쓸데없는 소리인가 하면서 그리고 막 폭력을 휘두르면서 그러면서도 꼼짝 못하게 휘어잡고 사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옛날에 ‘북어하고 부인은 때려야 맛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사상을 아직까지도 가지고 진짜 그렇게 짐승과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말 이것은 혼란한 시대를 만난 것입니다. 선이 없습니다. 분명한 선이 없습니다. 그런 속에서 아직까지도 많은 남성들이 남성 우위론 적인 사고방식이 성경의 지지를 받고 그 사상이 유교와 통한다라고 하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게 참 문제입니다.
지금은 다 교회를 떠났습니다만 옛날에 어느 남자 성도님이 오셨는데 날 찾아왔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니까 사과를 하려고 왔는데 자기 부인이 목사인 저에게 결례한 것에 대해서 사과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희 집 사람이 너무 생각이 짧아서 목사님에게 결례한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아 괜찮습니다. 그렇게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 말이 충격적이었습니다. 목사님, 모든 면에서 원래 여자라는 사람들은 이 생각이 짧고 모든 판단이 남자들과는 도저히 안되지 않습니까? 여자이니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이해하십시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그 부인이 와서 그 남편에 대해서 대신 사과하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때 들었던 생각이 그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사상을 변화시키는가. 그렇게 은혜 받고 펑펑 울고 수십 년을 신앙생활을 해서 교회의 중직이 되었다는 사람 속에 들어있는 게 어떻게 그렇게 쓰레기들이 들어있는지, 어디서 배웠는지 모릅니다. 모든 면에서 여자는 처진다. 생각이나 모든 판단이 남자에게 미칠 수가 없다. 그래서 여자와 함께는 선한 일을 도모할 수가 없고 제켜나야지 만 뭔가 일이 된다. 이런 사고방식이 성경에서 언제 가르쳐주었는지, 만약에 그런 것을 배웠다면 그것은 성경에서 잘했기 때문에 보여준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살지 말아라 그리고 보여준 본을 잘못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날마다 뜨거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번 이 머리뚜껑을 들어내고 쓰레기 같은 뇌를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으로 씻어내야 합니다. 아멘 안 하는 것 좀 봐. 여자만 아멘 해. 벌써 타락의 놀라운 영향력을 보여줍니다. 남자들이 아멘을 해야지 여자들이 아멘을 하면, 여자들은 뭐 안 그런 줄 아는지 기다리십시오. 뚜껑을 열어서 복음의 말씀으로 빨아내야 합니다. 쓰레기를 다 건져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상적인 세탁작업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권위의 근거는 두 가지인데 진리와 사랑입니다. 하나님 편에 선 것과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우월한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권위 있는 사람입니다. 침범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따라서 살기를 해, 아니면 무슨 사랑이 많아서 가족들을 끌어안기를 해. 조금 난 것이라고는 가서 돈 몇 푼 벌어다가 먹여준다는 것인데 사람이 밥으로만 삽니까? 여자들 늘 말합니다. 밥만 먹고사나. 계속 국수도 먹습니다. 그렇게 해서 안됩니다.
그래서 나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난 처음에 교수가 되어서 들어갔는데 아주 열심히 봉사해서 생활비를 줘야 하는데 얼마가 나왔는지도 모르고 집사람 통장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서 일주일에 얼마쯤 달라고 타서 다니는데 아니 뭐 세상에 이런가, 그런데 어떤 회사가 있습니다. 그 회사는 아직도 월급을 돈으로 준다고 합니다. 빳빳한 만 원 짜리로 매월 말일 날 딱 주는데 그 회장이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원시적인 방법입니까? 그 분 주장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남성으로서의 모든 권위는 월급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30일쯤 되면 셀러리맨들은 15일쯤부터 돈이 달립니다. 여보, 월급날 언제야. 뭐도 떨어지고 뭐도 떨어지고 기다려. 그러다가 그날 디데이가 되어서 딱 가지고 와서 여기서 이렇게 꺼내서 300만원 탄다면 3뭉치인데 탁! 꺼내서 내놓을 때, 그것이 그 가장으로서의 존재가 확인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나도 아직 세탁이 덜되어서 그래서 ‘그것도 참 일리가 있다. 나도 그랬으면 참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까 그야말로 쓰레기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얼마나 내세울 것이 없으면 그 봉투를 낚시처럼 이렇게 하면서 자, 집안에 돈버는 사람이 나밖에 없지. 그리고 그 다음에 권위를 인정받으려고 하는가.
진리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 있고 아내가 볼 때 나는 가끔 미끄러져서 하나님 편에서 이탈되지만 내 남편은 항상 하나님 편에 서 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을 때는 내 남편 옆에 서 있으면 하나님 옆에 서 있는 것이다. 아멘 안 하는 것 좀 봐. 그렇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그래도 사랑이 있어야지. 나는 하나님 편에 섰잖아. 뭐야! 그렇게 하면 심판밖에는 없어.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이 훌륭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누가 그 권위에 승복을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 잘났다. 그래 나는 못났다. 그래 나는 하나님 편에 못 있다. 어쩔래. 그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권위가 오는 것이지 아직까지도 집에 가서 아내를 폭력으로 제압하려고 그러고 그렇지 않으면 또 더 치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 받아서 조금만 주는 것, 그래서 자기가 갖고 있고 조금만 주는 것입니다. 생활할 수 없을 정도로, 그래서 수시로 와서 매달리지 않으면 일이 안되게끔 만들어서 그래서 종속관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모두 다 쓰레기입니다. 이렇게 뚜껑을 열고 세탁을 해야 합니다. 복음의 물에 씻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제 비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니” 할 때 “그를 위하여”라는 말을 가지고 자꾸 이야기하는데 사실 히브리 성경에는 “위하여”라는 말이 ‘케네게드오’라고 되어 있는데 킹 제임스 버전에서는 이 말을 ‘콜레스펀딩투’라고 번역을 했는데 직역을 하자면 ‘상응하는, 대응하는, 맞먹는’ 대칭을 이루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리고 NIV 성경에서는 ‘to suit him’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suit’라고 하는 것은 적합하다, 그에게 적합한, 그와 어울리는 이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 ‘케네게드오’ 라고 하는 뜻은 ‘네게드오’는 이렇게 전면적인 방향을 지시하는 것이고 ‘케’는 전치사고 오는 남성 단수 꼴입니다. 그래서 그 남자와 맛 대응하는, 상응하는 그 남자와 대칭을 이루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종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대등하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소재가 종속되었다고 생각을 하는데 사실은 그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실 때에는 사랑이 없었으니까 흙으로 빚으셔서 그 사람을 만드셨고 하와를 만드셨을 때 하나님이 다시 흙이 아니라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서 만드신 것은 그 남자와 여자가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으로 연합되어서 살아가야 한다라고 하는 결혼의 대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갈비뼈를 취하신 것이지 흙으로 만든 아담보다 하와가 못하다는 의미로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서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오히려 메튜윌리 같은 사람은 뭐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남성을 지배하도록 머리의 뼈에서 여성을 취하지 않으시고 남성에게 짓밟히도록 발바닥의 뼈에서 취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를 받도록 팔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 사랑 받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서 그렇게 하나님이 여자들을 갈비뼈에서 취하셔서 하와를 만드셨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창조의 몇 가지 사실들을 보면서 그것을 해석을 해서 그 속에서 어떤 남성 우위론 적인 사실들을 입증하려고 하는 그런 것들은 잘못된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지으셔서 남성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성을, 여성 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성을 함께 이렇게 조화롭게 자기의 자손들에게 보이고 그 남자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부성은 여자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모성에 영향을 받고 여자의 모성은 남자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부성에 영향을 받으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함께 알아 가는 동시에 그렇게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온전한 가정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남성과 여성을 결합시키신 것입니다. 그런 결합을 보면서 우리는 성에 있어서 성의 그 관계 자체를 어떤 우열의 관계에서 본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명백한 도전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 남성들이 지난 날 이조시대를 비롯해서 특히 이조 시대 때 심했습니다. 이조 시대 때 여성들을 거의 노예처럼 취급하고 그리고 성도 안 바꿔주고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취급하면서 일부다처제의 삶을 살고 여성들이 자신의 소유물 중에 하나인 것처럼 이렇게 하대하면서 살았던 날들에 대해서 조상들을 대신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뉘우치고 그리고 우리가 그런 비성경적인 창조질서에 대한 도전들을 답습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겸허하게 무릎을 꿇고 참회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쓸어내 버리고 그리고 오늘날에 있는 경박한 여성 우월 주의나 아니면 남녀 평등주의 사상, 거기서 대안을 찾아서도 안됩니다. 오히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진정한 가정의 질서가 무엇이고 하나님께서 가정을 세우셔서 그 가정을 통해서 당신을 알리고 싶어하셨는데 그런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만들고 싶어하셨던 그 가정의 참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고민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살아가야 됩니다.
나는 남성들이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아내들에게 아부하는 그런 처신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구태의연하게 가부장적인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싫지만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아내에게 쥐어서 사는 그런 가정도 성경적인 가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겠다는 식의 이런 타협과 하나님이 주신 각 가정들의 질서가 거래 관계 속에서 논의되는 이런 풍조들도 나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가정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되 아담의 몸에서 그 신체의 일부를 떼어내어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러므로 그와 보완적인 관계를 가지고 그런 존재로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이런 것입니다. 남성들은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남성 우위론 적인 사고방식을 절대로 타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성들을 자신의 소유물이나 아니면 자신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복종하는 기계정도로 생각하는 대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이 땅에 사는 모든 남성들의 피 속에는 일종의 강력한 패역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부터 계속되어온 여성들을 하찮게 알고 자기의 아내를 하찮게 아는 그런 안하무인의 그런 지배욕 같은 것들이 우리 속에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존재해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널리 유포되어 있는 대중적인 환경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향을 받으면서 삽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정직하게 자신을 살피고 복음에 의해서 자신의 가정에 대한 일그러진 구절 된 상들을 털어 내려고 하는 그런 정직한 자기 성찰이 없으면 십중팔구 그런 사상에 영향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자기의 생각이 고쳐지는 것보다 훨씬 쉬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모든 일에 첫걸음은 서로를 충분히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인정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부가 이 세상에 있는 남녀가 경제적인 능력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육체의 힘이나 사회적인 지위와는 관계가 없이, 그리고 학문적인 수준이나 교육의 수준과는 관계없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외모의 아름다움이나 젊음과는 관계가 없이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그리고 누구도 억압할 수 없고 누구도 억누를 수 없고 하나님 앞에서 각자가 주님의 성품을 물려받은 아름다운 피조물로서 자라 가는 그런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여성도 총을 메고 군대에 가야 하거나, 아니면 직업전선에 오히려 필리핀이나 동남아에 있는 나라처럼 여성이 뛰어들고 남성이 집에서 애들을 봐야 한다거나, 국회의원의 비율을 오십대 오십으로 해야지 된다거나, 무슨 여성에게 특혜를 주어야 한다거나 그런 이야기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제도적이고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사람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안에서 아내들을 무시하고 심지어 폭력을 휘두르던 사람들은 자기가 폭력 하는 그 아내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고 주님의 형상에 대한 파괴적인 행동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깊이 참회하지 않으면 아내가 죽는 대신 남편인 여러분 자신들이 죽습니다.
더욱이 남편을 향해서 모든 질서를 무시하고 독한 말들을 아낌없이 퍼붓고 가정의 질서를 안하무인격으로 허물면서 도전하는 자기의 자리를 잊어버린 아내들의 경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세우신 자리들을 이탈하고 도전적인 삶을 살고 파괴적인 삶을 사는 가운데 여러분들의 영혼이 고사되어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한번의 부부싸움이나 부부간의 미움이 얼마나 오랫동안 쌓아올린 기도의 세계를 무참하게 허물어버리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 분투했다면 경험했을 것입니다. 실제적인 영혼의 파괴력은 그것보다 훨씬 더 크고 놀랍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면서도 이렇게 가정에 하나님이 세우신 대의들을 지키지 못하고 서로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많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주님이 슬퍼하시는 부부 관계로 하나님이 세우신 은혜들을 단번에 허물어버리고 짐승같이 어두운 삶 속으로 뛰어드는 부부들이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도 많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정말 가슴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되 동등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에 보면 ‘에제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 나오는 ‘배필’이라는 말이 ‘돕는다’는 말이 에제르인데 이것은 전쟁이 위기에 몰렸을 때 먼 지평선에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뿌연 흙먼지를 날리면서 달려오는 대규모의 응원군을 가르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이 ‘에제르’라고 표현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노래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에제르시오, 주는 나의 에제르시니 번역하자면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오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니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며 나의 도움은 여호와에게로소이다 라는 고백들이 모두 이 에제르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성들에게 그렇게 남성 혼자서 싸울 수 없는 인생의 싸움을 뒤집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그런 응원군처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한 군대로 이 어두운 세상을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분투하며 사는 그런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가정을 세우실 때 부부의 대의가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 남편과 아내를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면서 서로의 모습 속에서 고쳐지지 않은 부분, 망가진 부분들을 보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형상을 가지고 이 세상에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면서 주님이 당신 앞에서 세우기를 원하시는 그런 아내의 모습, 남편의 모습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서로를 포기하시지 않는 한 남편과 아내들도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의 손으로 그들이 새롭게 세워지기를 오래도록 인내하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그런 가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전제 없이는 다음 시간부터 이어질 부부에 관한 모든 교훈들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처럼 이 관계는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남편과 아내Ⅱ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오후의 설교는 오전의 설교에 이어진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신 하나님의 그 뜻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만약에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왜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그렇게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손수 이끌어서 아담에게로 데리고 오셔서 한 가정을 이루게 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을 이제 아담의 고백에서 찾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제가 실수만 하면 그렇게 좋은지, 못생겼다고 만 하면 그렇게 좋아하고, 그런데 사실 이게 인류 최초의 어떤 사랑의 고백인데 사랑의 고백치고는 너무 빙빙 돌리는 것도 아니고 아주 정곡을 찔러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뼈들 가운데 한 뼈요 살들 가운데 한 살이라” 이렇게 나옵니다. 이게 히브리 사람들의 문학적인 표현인데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왕 중 왕’ 그러면 무슨 뜻입니까? 많은 왕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최고다 그런 뜻인데 히브리에도 똑같은 문학적 표현이 있습니다. ‘뼈들 중에 뼈다’ 그 이야기는 무슨 뜻인가 하면 베스트의 의미입니다. 살들 중에 살이다. 베스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 살들이 많이 있습니다. 표현이 참 이상합니다. 살들이 참 많습니다. 전혀 대답을 안 하시는데 살들이 많이 있는데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살도 있습니다. 어렸을 때 할머니 품에서 참 잘 지냈는데 저희 할머니는 집안 내력인가 봅니다. 이게 쥐 젖이라고 합니다. 이 목에 연세가 드시면서 이렇게 늘어진 고드름같이 비슷한 것이 달립니다. 그것을 할머니 목에 그게 작게, 성냥개비 한 삼분의 일 사 분의 일정도 되는 게 몇 개가 달려 있어서 재미있어 만집니다. 저거 딱 떼어버리면 정말 좋겠다 하면 할머니 말씀이 아프다 그것도 살이다. 그러더니 요즘 저에게도 나옵니다. 이렇게 서금서금해졌으니, 그런데 그런 살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배에 나온 배 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주고 막 깎아냅니다. 얼마나 아프고 힘들텐데 눈 꼭 감고 떼어내고 몇 달 있다 다시 찌고 삽니다. 그것은 중요한 살이 아닙니다. 발뒤꿈치에 계속 늘어나는 각질, 그런 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막 깎아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살들 중에 살이라 그것은 아주 치명적이고 매우 소중한 그런 종류의 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뭐 사람 몸을 몇 센티쯤 찔렀다고 해서 사람이 죽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장은 칼끝만 닿아도 생명이 위독합니다. 그런 종류의 살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렇게 고백을 하는데 인류 최초의 사랑의 고백이고 그 고백과 함께 이제 결혼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결혼하고는 좀 다릅니다. 뭐 그렇게 해야 주례 서 줄 사람도 없고 축하객도 없고 피로연해줄 사람도 없고 둘밖에 없으니까 할 수 없이 하나님이 직접 주례를 서시고 그렇게 해서 이끌어와서 그래서 둘이 같이 사랑을 고백하면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이제 결혼의 제도로 수립되는 과정입니다. 뭐 이 본문을 가지고 많은 부부간의 관계에 대한 진리들을 풀어나갈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오늘 아주 핵심적인 것 두 가지만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이 아담의 고백은 크게 결혼 생활에 있어서 두 가지 치명적인 여건을 말해주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는 사랑, 두 번째는 연합입니다. 먼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이 고백은 아담의 고백이었습니다만 우리들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이 그 둘을 결합시키실 때에 아담에 의해서 이 고백이 흘러나왔지만 심정적으로 하와도 아담의 고백에 동참했다고 봐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를 떼어서 여성인 하와를 만드셨을 때 그 갈비뼈를 내어준 장본인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느꼈으면 그 뼈와 살을 통해서 빚어진 새로운 인간인 하와가 자기의 원 출처에 대해서 공감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고백은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그대는 나에게 나는 그대에게 대해서 우리 서로의 뼈들 중에 뼈요 우리 서로의 살들 중에 살이라는 그런 고백으로 봐야 합니다.
흔히들 우리는 단선적으로 가정에 있어서 아내의 의미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고 그리고 남편의 의무는 아내를 사랑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들이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각 가족관계 속에는 주된 덕목이 있고 그 주된 덕목이 성취되지 않으면 그러면 나머지 것들이 성취된다고 하더라도 가족들간의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가 힘들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부모가 자식에게 모든지 잘해줍니다. 좋은 환경에서 자라게 해주었고, 돈도 많이 주었고, 그 다음에 먹고 싶다는 것 다 사주었고, 좋은 옷 다 사주고, 타고 다니고 싶다는 차 다 사주고, 날라 다니고 싶은 비행기 다 사주었다고 하더라도 수시로 이 자녀의 가슴을 피멍을 들게끔 노엽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나머지 것들이 모두 성취되었다고 하더라도 안됩니다. 그 나머지 것들이 그것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는 다릅니다.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고 그리고 자녀를 정말 사랑하면서 그 자녀가 주님 안에서 잘 자랄 수 있도록 해주었다면 아버지가 조금 능력이 모자라서 가난하게 살고 그리고 좋은 차 타고 다니지 못하고 좋은 집에서 못살고 그런 게 그렇게 뼈저린 상처는 안됩니다. 그 애가 건강하게만 자란 아이라면, 이상하게 자란 놈이면 소용이 없지만 건강하게 자란 아이라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덕목 하나는 나머지 두 번째, 세 번째에 덕목을 다 모아도 이게 회복하기 힘든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갈 것입니다. 저 뒤에는 아직까지도 영 이해가 안가는, 특히 어두움 가운데 있는 분들은 이해가 안 가시는데 거기 캄캄해서 참 잠자기 좋은 자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만 더 예를 든다면 아내가 남편에게 너무 잘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막 연초에 한번씩 새차를 바꿔줍니다. BMW 벤츠에 막 사주는 것입니다. 막 양복 한 달에 한번씩 그냥 사주고 그리고 기분만 내키면 용돈 막 주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 순종을 안 합니다. 항상 남편을 깔아뭉갭니다. 그래도 살수는 있을 것입니다. 살수는 있는데 그 관계라고 하는 것이 성립이 안됩니다.
재미있으니 하나 더 하겠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참 잘해줍니다. 생활비도 많이 갖다주고 그리고 옷도 사다주고 그리고 아프다고 그러면 약을 한 보따리 사다주고 그리고 핸드폰 해주고 모든지 다 잘해줍니다. 그런데 여러 여자에게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성립이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러니까 우선적인 덕목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선적인 덕목이 어떤 것이라고 했습니까? 일차적인 덕목이 아내는 남편에 대한 순종이고 그리고 남편이 아내에 대한 우선적인 덕목은 사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할 의무는 아내에게만 있는가. 그래서 어느 분은 이 성경을 해석하면서 참 기묘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사모할 것이오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다스릴 것이니라” 그 구절을 해석하면서 선악과를 먼저 따먹은 형벌 때문에 남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데 참 그 벌로서 남편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그럼 벌 좀 참 많이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사실은 그것은 오히려 그렇게 보기보다는 보십시오. 이게 참 재미있습니다. 사랑을 하는데 그 대가가 왜 지배입니까? 이게 죄가 들어오면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아침 설교하고 연속선상에서 보면 이해가 잘됩니다. 그러니까 죄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완력과 힘으로 사람들을 누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지배적인 욕망이 여성들을 향해서도 작동을 한 것입니다. 벌써 예고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는데도 그 대가는 지배하는 것입니다. 다스리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것을 우리들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선적인 덕목이 존재한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꼭 지적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기만 하면 되고 여자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만 하면 가정이 성경적인 기초를 가진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우리는 결단코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럼 공통된 그 기초는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고백하는 것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처음 결혼할 때에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니까 결혼합니다. 뭐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도대체 정신이 없습니다 라고 하는데 싫으면 결혼하고 싶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랑하니까 결혼합니다. 물론 사랑의 정도도 그냥 만났는데 만난 지 며칠만에 꿈속에 그리던 그런 동화 같은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은 특수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랑의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서서히 자랍니다. 그런데 그것이 충분히 자라지 않았는데 결혼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우리 청교도들은 이것을 어떻게 보았는가 하면 결혼할 때에 느끼는 그 사랑의 감정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이 사랑을 그런 어떤 결혼하기 전에 느끼는 연애 감정의 그 사랑보다는 사랑 이 자체를 고상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의 일생동안 자신의 성품을 통해서 형성되고 상대방으로 흘러나가야 할 그런 어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흘러나오는 그리스도인의 어떤 성품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런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를 합니다. 왜냐하면 결혼하기 전에 열렬한 사랑 그것을 신뢰할 수가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많은 카운슬러들이 그런 제안을 합니다. 뭔가 하면 결혼하기 전에 교제의 기간이 짧은 사람들이 결혼이 깨트려지는 경우가 훨씬 많을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교제하는 기간을 갖는 것이 결혼 후에 안정성을 확보하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분적으로는 거기에 대해서 제가 동의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것이 사람을 안다는 것이 뭐 요즘으로 말하자면 하도 장가를 갈 수가 없어서 중국에 있는 사람 사진만 보고 중국 한번 건너가서 중국 집 가서 음식 먹으면서 여자 얼굴 이렇게 한번보고 한 두 번 그렇게 하고 나서 결혼을 하는데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압니까? 어디서 살다가 온 여자인지, 뭐 하는 사람인지 서로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결혼을 해보니까 저 여자가 한국에 와서 국제 결혼을 미끼로 해서 돈을 벌려고 한국에 온 여자인지, 아니면 자기를 진짜 좋아하는 사람인지, 살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한국의 지리나 익힌 다음에 도망가려고 하는 여자인지 그 속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교제를 오래 가져보면 그런 속도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이 깨질 가능성이 그만큼 적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부분적으로 제가 인정을 하고 동의를 합니다.
그러나 결혼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결혼하기 전에 갖는 그 관계와 결혼 후에 들어가게 되는, 진입하게 되는 그 관계가 너무 판이하고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주위나 목회에서도 보면 정말 연애 때 너무 열렬했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결혼을 계기로 해서 아주 급속하게 냉냉해 져서 그래서 그렇게 연애기간동안 열렬하게 연애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하던 그 사람들이 결혼 생활의 파탄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굉장히 많습니다. 반대도 성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거의 다 알아버렸기 때문에 결혼 후에 별로 기대감도 없고 이렇게 된 경우도 있고 그 다음에는 결혼을 했는데 그 후에 진입하게 되는 그 세계는 결혼하기 전에 아무리 연애를 많이 했어도 경험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동거를 하면서 살기 전에야 낮에 만나서 좋다고 그리고 이야기하고 떠들고 그리고 헤어지고 며칠만에 또 만나고, 또 만나고 그러면서 살다가 어느 날 살을 맞대고 매일 살다가 보니까 이게 완전히 결혼하기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그런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하고 나니까 남편이 깔끔하게 차려입고 나오고 그래서 상당히 사람이 단정한가 보다 했더니 왠걸 매일 먹고 노는 것만 좋아합니다. 그리고 자기 돈벌어올 때만 기다리고 그렇게 건강한 사회 생활을 잘 안 하는 것입니다. 또 결혼하기 전에는 뭔가 사람이 가끔 성질도 팍 내고 그럴 때 ‘터프 하다’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이게 사실 터프 한 것이 아니라 매일 때립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낮에 만나기로 해서 저녁때 만나는데 예쁘게 차려입고 나오는 모습을 보니까 정말 착하구나 그랬는데 결혼을 했는데 이게 뭐 아침도 안 해주고 퍼질러 자고 말이지 이상하게 생활습관이나 이런 것들이 엉망입니다. 그런 것들이 결혼해서 살아보기 전에는 발견이 안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경제문제나 돈 문제나 이런 것들이 얽히고 수많은 결혼과 함께 진입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아니 잠깐 자기들끼리 만나서 연애할 때 시아버지가 괴팍하면 어떻고, 시어머니가 유별나면 뭔 상관이 있고, 시누이들이 까다로우면 뭔 상관이 있고, 시동생들이 경우에 없으면 뭔 상관이 있습니까? 일년에 한번 만날까 말까 하는 사이인데,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에 일시에 돌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가정에 관해서 처음 설교할 때 말씀에 성품에 있어서 다듬어지지 않은 것, 그 다음에 성화 되지 않은 것, 사랑 없음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한꺼번에 밀려드는 그 엄청난 관계들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연애를 많이 해본다고 그것을 충분히 알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시험적으로 결혼을 해본다고 요즘들 그런 풍조들이 나오는데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따라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가 하면 이 사람은 순간에 한 사람을 보고 푹 빠져서 눈에 콩꺼풀이 씌우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완전한 사랑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순간에 상대방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들도 결혼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관계에 이르도록 노력하는 동안에 서로가 성숙될 수도 있고 또 지금부터 이야기하려고 하는 그런 사랑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좋은 훈련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연애감정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갈까요? 지금 결혼한지 최소한 한 10년 정도 지난 분들 가운데 연애감정을 가지고 가정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때는 비로소 결혼생활이 5년도 되기 전에 결혼생활에 진입하고 나서 1-2년 지나고 나서 아이 낳고 경제문제 현실 생활로 펼쳐 들어가면서 비로소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부부를 굳게 붙들어주는 것이 연애할 때 가슴에 충동적으로 치밀던 그런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톨스토이 같은 사람은 그의 ‘결혼의 행복’이라는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나이마다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르다. 저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연애할 때 자기 눈에 드는 형제를 보고 느끼는 치밀어 오르는 그런 애정, 얼굴 좀 곱게 생긴 자매를 보고 확 솟구쳐 오르는 어떤 그 뜨거운 사랑, 그것은 대부분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통제되지 않은 사랑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순간적으로 느끼는 충동적인 사랑의 감정을 여러분들이 자신 있게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감정이고 그것이 아가페의 사랑과 직통으로 연결된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도록 요구하는 이런 사랑은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인격화된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느 순간에 충동적으로 솟아나는 연애 감정 그것을 뛰어넘어서 인격으로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그런 사랑이 부부로서 남녀간에 느끼는 사랑 위에 그런 것들이 더해져야지 만 비로소 부부간의 온전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하와를 보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할 때 이 사랑의 고백의 마음은 이미 우리는 죄가 들어온 상태 속에서 살고 있고 여기는 죄가 없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들이 결혼하기 전에 연애할 때 누군가를 보고 금방 사랑에 빠지는 어떤 충동적인 연애감정에서 오는 그런 사랑의 고백은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순수하고 깊이가 있고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어떤 지식과 그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에 맞닿아 있는 그런 사랑의 고백일 것이다. 그래서 이 여자가 이렇게 있는데 “내 뼈 주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고백을 하면서도 아담은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손해나는 어떤 고백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하더라도 그 고백 한가운데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 계신 그런 종류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이성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을 잊어버린 그런 종류의 고백이 아닙니다.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에 불후한 인생을 마쳐야 했던 성경에 인물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다윗 같은 사람도 그랬고, 그 다음에 또 삼손이 대표적인 경우고 거기서 만난 그 여자가 누구입니까? 그 데릴라에서 영어의 딜라일라가 온 것입니다. ‘요부’라는 단어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데릴라를 향해서 이 삼손의 마음은 솟구치는 것과 같은 애정과 열정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또 그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이방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심리적으로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그런 데릴라를 향해서 가지고 있는 솟구치는 그런 마음,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통제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이 고백 속에는 그렇게 하나님이 짝지어주실 자기 여자에 대한 그 뜨거운 사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뜨거운 사랑 한복판에 하나님이 엄연히 살아 계셨습니다. 그런 고백입니다.
그러나 데릴라를 사랑한 그 삼손의 고백 속에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가정에 남편이 아내에 대한 덕목이 사랑이고 아내가 남편에 대한 우선적인 덕목이 복종, 혹은 순종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아버지와 아들이든, 아들과 아버지이든, 어머니와 딸이든, 동기간이든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공통된 기초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특별히 이 부부간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아담의 원시적인 고백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봅시다. 자, 어떤 충동적인 연애의 감정이 그 관리를 하도 잘해서 10년 갔다고 칩시다. 그런 사랑의 감정이 그들 부부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내인 우리가 남편에게로 받아야 할 사랑은 그런 어떤 마치 삼손이 데릴라를 향해서 고백했던 것 같은 그런 하나님을 배제한 뜨거운 연애감정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혼한 후에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부인들이 자기 남편에게 연애감정 같은 그런 것들이 식은 것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데 그 사람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혼하고 나서 세월이 흐르면 제거되어야 할 거품의 감정입니다. 그리고는 정말 새로운 아담이 지금 고백한 것과 같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하는 이런 하나님이 그 고백 가운데 계신 그런 고백을 받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행복한 사랑입니다. 그것은 제거되어야 할 감정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구분을 못합니다. 저도 사실은 한때 그런 혼란에 잠시 빠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탐구하고 많이 묵상하면서 그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을 보니까 청교도들은 남편들이 자신의 아내, 그리고 아내가 남편을 생각할 때 일생 연애하면서 살아야 할 로맨스의 대상으로 서로를 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뭐라고 봤는가 하면 좋은 신앙의 동지를 구하는 마음으로 아내와 남편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아주 정확하게 이 결혼생활에 있어서 핵심을 간파했다고 나는 봅니다. 그렇게 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자기를 로맨스의 대상으로 봐주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상심하고 남편을 의심하고 혹은 남편이 이제 더 이상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로맨스의 대상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다 쭈글쭈글하고 늙어 가는데 배 살도 나오고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을 일구어가면서 거쳐져야 될 감상입니다.
아담의 고백을 보십시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런데 지금 이 고백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오! 그대는 팔등신이구려’ 아닙니다. 하와가 어떤 여자였는지 우리는 사실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 애들 그림책에 보면 이렇게 예쁘게 나오지만 사실 누가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그러니까 현재 하와의 후손들 중에 여러 종류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면 다양한 감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하와가 한참 못생겼겠구나. 또 어떤 사람을 보면 하와가 참 잘 정돈된 사람이겠구나. 그런 다양한 감성들을 봅니다. 그런데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아담은 지금 그 여자의 예쁜 머리카락 찰랑찰랑한 생 머리, 그 다음에 무슨 촉촉한 눈, 쭉 찢어진 입술, 오뚝한 코, 뻥 뚫린 귀 그런 것을 본 게 아닙니다. 오뚝한 콧날, 호리호리한 몸매, 그런 것을 본 게 아닙니다. 뭘 본 것입니까? 그녀는 나로부터 취해졌고 우리의 관계는 한 몸이라고 하는 본연적인 그 관계에 주목하면서 깊은 애정과 사랑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결혼을 해서 자기 아내의 외모나 남편의 외모 때문에 뭔가 거북스러운 마음을 느끼는 사람들은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원래 못생겼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꾸 안 먹어도 배가 나오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이처럼 본질적인 관계에서 그 사람과 부부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얼마나 그런 점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여전히 정말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오가야 할 사랑이 그런 어떤 연애 적인 열정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아담의 고백 속에서 우리는 연애 적인 열정, 그 이상의 무엇을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연애 적인 열정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사랑을 충분히 반영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빚어진 그 심령 속에서 스며든 그 사랑은 하나님의 그런 마음까지 함께 반영하는 그런 사랑일 수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충동적인 연애 감정에서의 사랑은 그것이 한 남녀를 묶어서 그들을 부부 관계로 데리고 가는 하나님의 한 수단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제가 느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결혼을 하기 전에 남자가 여자를 보면 여자로 느끼고, 여자가 남자를 볼 때 남자로 느끼는 일이 있어야지 그 결혼이 성립하는 것이지 남자를 만났는데 그냥 한없이 목사처럼만 느껴지고 여자를 만났는데 불쌍한 길 잃은 양처럼 보인다고만 하면 아니 집사하고 목사로 만나야지 뭐 하러 부부로 만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내 목회 하면 우리 교회에 와서 아니면 내 구역에 와서 내 양떼가 되라. 그렇게 하지, 그러니까 전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결혼 생활에 있어서 사랑에 전체적인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많은 오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결혼생활을 해서 살아보시면 여러분 모두 경험하는 바이지만 순간적으로 느끼는 어떤 연애의 감정이라든지 그런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일생을 수십 년을 살면서 만나는 많은 시련과 어려움,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살아야 하는 관계에 많은 고통, 한 사람을 택하는데 그 사람과 함께 딸려 들어오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운 수많은 상대방의 가족들과의 관계, 이런 것들을 모두 헤치면서 이겨가게끔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그럴 정도의 힘이 아닙니다. 세상의 유행가에서는 남자와 여자 둘이서 뜨겁게 연애감정을 느끼고 충만해지면 그 사랑의 힘으로 이 세상의 온갖 것들을 극복해갈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극복해서 오랫동안 시련과 고난의 파도를 넘고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 남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충동적인 연애의 감정만을 가지고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반드시 인격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연애할 때 진짜 열렬하게 연애를 해도 사람의 성품이 워낙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불행해지는 경우가 있어도 결혼하기 전에 진짜 소설에 나오는 불같이 뜨거운 사랑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이 성품에 있어서 안정적이고 사람을 사랑하고 용납할 수 있는 신앙적인 성품을 가진 사람들과 결혼을 하면 그 사랑이 오래 계속되면서 그 사랑이 성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랑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성취되어 가야 할 한 과정이라는 사실이 부부간의 관계에서도 적용되어야 할 진리인 사실을 나는 오늘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실 죄가 들어온 이후로 사람들과의 관계는 화해하고 사랑하면서 살기보다는 깨지고 상처 나는 것이 일반적인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녀간의 사랑에 있어서도 항상 이기적인 욕망들이 그런 관계를 위협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담과 하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불화도 없었고 둘이 사이좋게 선악과를 따먹었을 뿐이지만 그러나 죄가 들어오게 되자 아담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던 하와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그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고 무거운 그런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함께 있게 하신 그 여자가” 라고 하와를 표현함으로서 자신에게 하와를 주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는 것 같은 그런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지니까 그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아주 소원해지고 서로가 서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관계 자체가 무거운 짐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후로 인간은 훨씬 더 악해졌고 죄는 더 기승을 부리면서 가장 사랑하며 살아야 할 부부관계 사이에도 이런 이기적인 욕망과 갈등들이 깨고 들어와서 망가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하면서 서로가 그렇게 사랑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깨트려진 관계들이 연속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들의 지평은 부부뿐만 아니라 양가의 가족들까지 모두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까지 환경과의 싸움까지 모두 번져가면서 심지어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까지 망가진 그런 사람들로 살아가는 것이 일반인적인 모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된 상황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실 때 그 가정을 버티게 만들어주는 그 힘, 부부간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여전히 하나의 중요한 결혼 생활의 행복의 조건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사람들 속에 사랑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래 인간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이 원래 그런 존재이고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들이 어떻게 그렇게 망가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해갈 수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포악하고 악하던 사람들이 이만큼이라도 사람들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고 가슴아픈 일들을 만났을 때 슬퍼하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자비로운 마음을 요만큼이라도 갖게 되기까지 우리들이 얼마나 긍휼한 그 고통 속에서 성화의 과정을 거쳐오게 되었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깨트려지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쓸모 없는 죄인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아서 자신이 다 무너지고 나면 요만큼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주어집니다. 그렇게 하면서 변화되는데 그것이 한번 얻은 것이 영원히 우리 수중에 있습니까? 시간이 지나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잠깐 내 마음속에 깃들였던 사랑은 사라지고 다시 포악하고 짐승처럼 완악한 옛 성품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부단히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자기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그칠 줄 모르는 집념 어린 사랑과 그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랑을 외면하면서 사는 집념 어린 자신의 완고함, 고집 사이에서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고 좌절하고 깨트려지면서 사랑할 줄 모르고 사랑 받을 줄도 모르던 그 막대 먹은 성품이 서서히 변화되어 가면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게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지 않는 사람들의 가정은 우리 희망이 없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물론 개중에는 하나님은 못 만났지만 일반 은총에 의해서 성품이 비교적 온화하고 원만하고 사람의 사는 이치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원만한 가정생활을 이루어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신앙 안에서 우리들이 생각해본다면 그렇게 어려운데 아내와 남편이라고 해서 저절로 사랑할 수 있는 감정이 폭포수처럼 쏟아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면서 살아가기로 기대되는 관계에서 그 사랑의 체험을 받지 못했을 때에는 사랑보다 배나 치열한 미움이 싹트는 것입니다. 부부가 살다가 갈라서면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친구로 돌아간다는 것은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것이지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사는 그런 세계가 없다 그러면 망가지면 망가진 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의 이혼율이 점점 높아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진지하고 심각하게 하지 않고 그리고 언제든지 갈라설 수 있다라고 하는 그런 생각들이 크리스천 사이에서도 아주 일반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말 문제가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슴아픈 이야기지만 여러분들 가운데도 깨트려진 가정을 가지고 있으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떻게 하든지 지난날의 아픔과 상처들을 딛고 정말 새롭게 하나님 앞에 살고 싶어하는 눈물겨운 노력을 하는 지체들이 여러분들 가운데 있는 것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저는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할 사실 하나는 그것은 옳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사랑과 은혜의 힘이 만약에 있었다면 우리는 극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힘은 무한합니다.
그래서 내가 아는 어떤 자매도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회자의 아내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책을 쭉 읽고 은혜를 받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이 책을 제가 이혼하기 전에 읽었더라면 저는 생명을 걸고 이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께로부터 공급받았다면 그 불같은 시련을 이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련도 너무 치열했지만 주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그 사랑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남편이든 아내든 유일한 희망은 그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자기 자신이 부단히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것도 성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서로를 사랑하려고 많이 노력하고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남편이 아내를 자기의 의도대로 꺾어서 이런 저런 존재로 만들려고 하고 아내가 남편을 짓눌러서 자기가 원하는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보려고 하는 이런 시도들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두 사람은 끊임없이 부부로서 서로 사랑하고 연합되어 가는 그 과정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깨트려지고 주님을 찾아가는 그런 과정과 맞먹어가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실제로 우리들이 아내로서 남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남편으로서 아내를 아프게 하는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에서는 피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제 나쁜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아프게 만들고도 반성이 없는 것, 이것은 결혼생활에 있어서 모든 희망을 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돌이키고 아내와 남편에게 각각 대한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 사랑 없음에 대해서 뉘우치고 깨트릴 줄 모르는 완악함을 가진 사람들은 영혼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정에서의 폭력을 행하는 것은 이것은 정말 옳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에서 파악되면 치리 해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것이 그 사람의 영혼을 건지는 길입니다. 그런 폭력 속에서 자신의 영혼이 철저하게 죽어갑니다. 절대로 하면 안됩니다. 그런 일들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우리는 부족하기 때문에 아내가 나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것처럼 나도 아내에게 만족을 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즉시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아내를 마음 아프게 하면 안됩니다. 이렇게 아내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로 남편에게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데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할 때 주님의 성령께서 너희 남편이 부족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타이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때문에 자기 자신이 변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 깨어짐의 세계가 있어야지 이런 결혼생활에 있어서 사랑의 관계가 지속되는 것이지 나에게 복종해. 사랑해주면 복종하지. 평생 그렇게 해서 사랑 받게 해야지 사랑하지, 그런 소리나 하면서 삿대질하며 살아가는 동안에 편안히, 자기도 군대식으로 말하는 한마디에 사람이 변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안 변합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에서 이런 식의 폭력 같은 것들이 계속 존재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사람의 영혼을 거의 살인자의 마음으로 강퍅하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은혜가 떨어지면 죄를 짓지만 죄를 지으면 은혜가 떨어진 마음이 더 강퍅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뻥 뚫린 은혜의 세계를 못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과 교제하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수종을 들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열다가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똑같이 마음이 강퍅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노래방에 가있고 한 사람은 기도회에 참석했다면 누구의 마음이 움직일 가능성이 많습니까? 노래방이요? 두말할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 충만할 때만이 아니라 은혜가 떨어졌을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말씀드리는 것이 그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그래서 결국 가족의 모든 문제를 다루다가 보면 뼈저리게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모든 문제가 나의 사랑 없음입니다. 아내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변해갑니다. 그러면 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면 변합니다. 남편이 이제 하나님을 만나고 서서히 변해갑니다. 기다려주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주 지독할 정도로 완악하게 천천히 변하면서도 상대방은 단숨에 ‘우 향 우’ 하면 단숨에 돌아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못하면서 그것을 원합니다. 그것이 맞지 않으면 폭력을 휘두르고 폭언을 하고 싸움을 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니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이 그렇게 폭력과 싸움, 이런 것으로 뒤범벅이 될 때 사람들이 여러분의 가정을 보면서 하나님을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그런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주 정확한 말씀입니다. 제자 훈련을 열심히 하는 교회 목사님인데 그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손잡고 제자 훈련을 하러 나온 사람들 중에는 이혼하는 부부들이 많이 있는데 아침에 손잡고 새벽기도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이혼하는 부부들을 못 봤다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그분이 하시고 싶으신 것인가 하면 공부도 중요하고 훈련도 중요하지만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남편은 앞에서 아내는 뒤에서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하며 깨트려지는 은혜의 세계가 있는 사람들은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이 그들을 갈라서지 못하게 만드신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남편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오직 하나 그 남편이 은혜 받기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여러분들의 남편이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이것은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안 믿는 사람이 무슨 깨어짐의 세계가 있겠습니까? 나 너 마음에 안 드는데 교회 가지마. 그래, 자꾸 가지마, 가지마 그러면 결혼한 것 무를 거야. 이런 식으로 협박을 해서 성경에서 생각하는 이 가정의 기초를 회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남편이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남편에게 무슨 남편의 의무 같은 것을 기대하면 안됩니다. 무조건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도록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그것을 하라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먼저 예수님 믿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이 남편을 주님께로 인도하면 내가 이 집안에 노예처럼 살아도 좋다는 마음까지, 그럼 나만 억울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면 여러분의 최고의 실수는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받은 것입니다.
한 부인이 은혜 받기 전에는 몰랐는데 은혜를 깊이 받고 보니까 이 남편이 영혼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너무 불쌍합니다. 보십시오. 이게 가정의 기초를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여러분 단순히 연애감정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남편이 불쌍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런 지체가 있습니다. 내가 다 듣고 있습니다. 새벽기도에 부인이 갔다와서 남편이 퍼지게 자면 손을 꼭 붙들고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 남편이 이렇게 고단하게 살아가는데 정말 주님 믿게 도와주십시오. 그런데 이게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점점 인내를 시험하는지 덧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인이 하도 남편이 교회에 나와서 주님을 믿고 변화되는 것이 마음의 포원이(?) 지니까 하루는 새벽기도에 남편 신발을 들고 왔답니다. 그래서 옆에 놓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 신발 먼저 왔습니다. 사람이 와서 이 신발 좀 신게 만들어주십시오. 새벽기도 때마다 남편의 구두를 들고 다닌 것입니다. 그리고 옆에다 놓고, 우리는 남의 일이니까 웃지, 얼마나 가슴에 못이 되고 사모하면 그 새벽 기도가 끝나면 양쪽에 신발을 들고 갈 때 성경은 또 어떻게 옆에 끼고 가니 사람들이 볼 때 얼마나 웃겼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신발을 들고 와서 옆에 놓고 하나님, 제 평생에 소원이니 남편 손잡고 교회 한번 오고 남편이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 깨어진 그런 은혜의 삶을 사는 것을 원합니다. 하나님 내 원한을 풀어주십시오. 하고 6개월을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그 남편을 회심시켜서 신자로 만드셨습니다. 여러분은 믿지 않은 남편을 위해서 무엇을 하십니까? 더 많은 눈물이 필요합니다. 그 남편은 여러분들이 남편의 도리가 무엇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경이 그들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쟁이들이 들고 다니는 검정 교과서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까지 여러분들이 죽어야지, 나는 아직까지 남편이 주님께 돌아오지 않은 자매들이 그 부인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얼마나 다급하면 남편의 구두를 품에 안고 와서 새벽기도에 옆자리에 놓고 하나님 신발 먼저 왔습니다. 이 신발의 임자가 여기에 나와서 이 신발을 신고 주님께 예배하도록 도와달라고 그런 것이 필요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런데 여러분의 남편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그래도 훌륭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어째든 말씀에 은혜를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서 이상하게 그 말씀이 남편의 마음을 움직여서 남편을 깨트립니다. 그래서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새사람을 만들어갑니다. 아침에 부부싸움을 하고도 저녁때 퇴근할 때는 남편이 그렇게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자존심 때문에 망설이다가 결국은 미안하오. 여러분들의 남편이 그런 남편이라면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감지덕지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어.
여러분들의 아내가 여러분들에게 가끔 불순종하고 여러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주님께로부터 다스림을 받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면서 깨트려짐의 세계가 있다면 아내를 붙들고 사람되라고 책망하기보다는 그 시간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가서 우리 아내 사람 만들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훨씬 빠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다스리면 토를 다는데 은혜에 잠기면 하나님이 가르치실 때 토를 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해라. 예, 주의 여종이 듣겠나이다. 그렇게 하고 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일러서 하나님이 고치시게 하는 게 훨씬 빠른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여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면 안됩니다. 나는 하나님과 직통으로 상관하는 사람이니까 뭐 할 이야기가 있으면 하나님 거쳐서 이야기해. 그러면 안됩니다. 그러면서 부족한 사람을 용납하고 허물이 있는 사람을 받아주고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정 시리즈를 쭉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내리게 되는 아주 중요한 결론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관계에 대한 해답이 무엇인가 하면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우리들이 변화되어 가면 까다로운 시어머니 앞에 이길 수 있습니다. 엉터리 같은 동서들 사랑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가정의 기초로서 회복되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로다”
두 번째 마지막으로 연합입니다. 특별히 이 사실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그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개체로서 둘이 존재하지만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뒤에 보며 결혼의 제도의 대의에 대해서 나오는데 “그럼으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연합하여....” 정신적이고 영적인 결합입니다. 그것을 이루면서 살아가야 될 것이 가정의 기초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많이 부어지면 교제도 풍성해집니다만 은혜가 그치고 나면 교제도 척박해집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가 없는 가운데서 교제를 도모한다고 하면 항상 세속적인 교제가 되기가 십상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모여서 계하고 먹으러 다니고 심지어는 노래방도 가고 1구역 2구역 같이 골프도 치러가고 그런 현상들이 벌어집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많이 부어지면 같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끼리 나눌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저 지체가 다 해. 그래서 저 지체의 마음속에 있는 게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지, 그렇지 하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여러분들 경험했을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그 은혜를 전하고 싶고 누군가에게 그 은혜에 함께 동참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교제가 그렇게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의 연합입니다. 우리가 같은 보혈의 피로 구속받았으니 우리 서로 뜨겁게 사랑해야지 된다고 하는 그런 의무감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 함께 공유된 연합의 감정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가정의 기초입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공유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남편이 깊이 괴로워할 때 이 세상의 사람은 그 괴로움을 다 털어 내도 이해를 못하는데 아내는 그 눈빛을 보고 남편 속에 있는 그 마음의 갈등과 고통들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내에게도 시어머니한테도 말못하고 시동생들에게도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남편이 읽을 수 있는 그런 연합의 관계, 그래서 공통된 관심사를 가지고 함께 서로의 존재가 자신들에게 매우 귀한 것을 느끼며 의탁한 감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연합의 감정이 세속적인 연합의 감정과 다른 이유는 왜 우리 주위에 보면 하나님보다 사람을 많이 의지하고 신앙보다는 세상을 많이 의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도 사람들과의 연합된 감정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진 연합의 감정은 다른 사람과의 연합을 느끼면 느낄수록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자매의 연합의 관계에 그리고 또 부부의 연합의 관계는 연합을 느끼면 느낄수록 하나님이 더 선명하게 느껴지고 풍성하게 느껴지는 그런 종류의 연합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사랑의 감정을 일부는 찢어서 하나님께 드리고 일부는 찢어서 남편에게 주고 일부는 찢어서 자식들에게 주는 것 같은 그런 식의 사랑에 대한 논리는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사랑 받으시는 분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의 유일한 사랑의 대상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깊은 사랑을 경험하라’에서도 상세하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우리의 사랑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 기초한 사랑이어야지 그것을 이탈하는 사랑의 감정은 세상입니다. 연애의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거의 잘하지 않은 형제 자매들이 이성의 관계에 빠져서 연애에 빠지고 나면 신앙은 간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보고 연애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직까지도 이해를 못할지 모르지만 책에도 다 썼습니다. 저는 그것이 저의 목회적인 소신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저는 분명하게 확신합니다. 안됩니다. 그렇게 해서 불같은 연애 감정에 빠져서 누구를 좋아하고 나면 하나님이 거기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 와서 만나고 교회에서 함께 손잡고 다니면서 연애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보십시오. 청년들도 보면 벌써 신앙생활 착실히 하다가 연애감정으로 빠져 들어가면 다행히 신앙이 성숙해서 신앙으로 그것을 적절하게 통제하면서 살아가면 모르는데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 신앙에 결정적인 손해들을 많이 입고 심하면 영적으로도 아주 깊이 손해를 받는 그런 처지로 가게 됩니다.
보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많이 연애하고 다닌 형제 자매들이 제때에 시집 장가가면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보십시오.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서 와서 21-22살 연애할 필요도 없는 때에는 막 관계가 많아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그렇게 하다가 결혼할 때는 사람이 없어. 그래서 27,8.9 그러다가 30이 넘고 그게 무엇입니까? 도대체, 아니 제때 딱 가서 그냥 찰카닥 이렇게 되어야지, 그게 무엇입니까? (생략)
3. 부부와 하나님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가정 시리즈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미 앞서 두 시간에 걸쳐서 부부의 생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없는 부부관계는 없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부부생활과 관계를 이야기할 때 우리들이 이 아담과 하와를 주목하면서 많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담과 하와는 주님이 만드신 처음 가정인 동시에 또한 죄가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아내 남편 자연 이렇게 함께 완전한 화해를 이루면서 살아갔던 복된 경험과 그 다음에 부부와의 관계가 깨트려지고 가정의 관계가 부서진 그 실패의 경험을 한 가정 안에서 동시에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모든 관찰의 과정을 통해서 가정을 가정되도록 지키는 중요한 요소들이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되고 또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들이 무너지고 또 그런 것들이 어떻게 하면 회복될 수 있을까 하는 것까지 우리는 이 속에서 모두 보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부부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시는 바와 같이 아담의 갈비뼈 중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고 그들을 짝지어주셨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어떤 갈등도 없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서로를 향한 사랑이 완전한 조화와 연합을 이룬 가운데 그들은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 어두운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바로 유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혹은 바로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할 것을 아담과 하와에게 기대하는 유혹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이 세상에 창조하시고 온 세상을 맡겨두셨을 때 아담과 하와는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넘나들 수 없는 분명한 선이 있어서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손으로 빚어진 인간일 뿐이라고 하는 자기 위치에 대한 정확한 고백을 잃어버리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아담과 하와에게 그 세상을 위탁하시고 그들이 온 세상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통치하고 다스리고 관리해나가기를 주님이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속에 완전한 질서와 균형이 있었고 그 속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사실은 그 피조물을 다스리고 잘 관리하도록 부름을 받은 같은 피조물이지만 피조물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창조의 면류관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도 아담의 그런 지위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게 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선악과의 사건을 통해서였습니다. 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까? 경건한 사람은 이렇게 고민하지만 불 경건한 사람은 왜 그 따먹을 선악과를 하나님이 주셨을까? 이렇게 고민을 합니다. 그런데 벌써 질문의 방향이 그 사람의 속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도 한때는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 이게 큰 걸림이 되어서 사실 성경을 더 믿을 수가 없는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시라면 만들어놓으면 따먹을 것도 뻔히 아셨을 텐데, 사람도 위험한 물건이 있어서 아이가 그것을 손을 댈 것 같으면 아예 집안에 들이지 않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데 왜 하나님은 시한폭탄 같은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에게 주셔서 그것을 따먹게 하셨을까?
그런데 사실 하나님이 선악과를 주신 의도는 나쁜 의도가 아니라 훨씬 좋은 의도였습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주신 이유는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위탁받은 인간으로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어떤 선을 아주 분명하게 인정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자기에게 복종하는데 동산에 한 나무가 있었는데 그것은 선악과였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선악과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한다’라고 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자기의 세상이 보시기에 좋았으니까 그 선이 바로 여기 선악과라고 할 때 그 선입니다. 그러니까 선악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선은 그렇게 원래 있는 것이니까 악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음으로서 악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하는 나무, 엄밀하게 말하면 이 나무는 선악과라기보다는 악의 지식에 나무라고 불러야지 만 옳은 그런 종류의 나무였습니다.
그 나무를 보면서 그 앞에 서서 아담과 하와가 신앙이 있었을 때는 아주 분명하게 그 선악과를 보면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는 건널 수 없는 간격,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그분의 손으로 지어진 인간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 선악과가 그것을 말해준다. 왜 그 선악과는 바로 먹을 수 없는 나무였고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그것을 취할 수 없는 그런 나무였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것을 금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맡겨주셨지만 이처럼 금지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거기에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뚜렷한 피조물과 창조주로서의 선을 읽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은 아담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모두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마음,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실제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우리 기도는 하나님이 모르고 계십니까?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기도가 있는지를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면서도 마음속에 있는 것만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적으로 기도해서 그것을 우리가 몸밖으로 마음 밖으로 그것을 하나님 앞에 기도로 토해내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역시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원하시는 분이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이제 원하시는 것입니다. 원하셔서 하나님이 선악과를 두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신뢰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더 순종하면 혹은 하나님 이외에 것들에 더 마음을 빼앗기고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는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기에 만들어놓으셨던 것입니다.
왜 그러면 이 선악과를 따먹었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했을 것이지만 우선 첫 번째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유혹에 쉽게 굴복한 불 신앙이 선악과를 따먹은 가장 커다란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뱀은 간교하게도 아담이 아니라 하와를 타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하와를 통해서 하와와 아담 사이에 이루어진 인격적이고 연합된 관계를 통해서 자기의 궁극적인 범죄의 유혹을 아담에게 도달하게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간교하게 그렇게 접근한 것입니다. 이것을 미루어볼 때 뱀은 아담과 직접 대면했더라면 자신의 이런 유혹이 실패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와에게 접근해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는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유혹하면서 하와에게 접근했고 하와는 그 유혹에 넘어가서 이제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그렇게 쉽게 유혹에 굴복한데에는 분명히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은 교만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선악을 아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아지리라고 하는 그 말에 하와가 마음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동산 안에 거하며 살아가는 이 삶보다도 훨씬 행복한 어떤 삶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기대가 하나님과 같아지리라고 하는 이 유혹의 말에 넘어가게 하였을 것입니다.
항상 유혹은 이런 식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한없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고 그 행복 속에서 남편과 아내가 행복하게 사는 동안에는 문제가 없지만 어느 순간에 이 행복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 교묘하게 유혹은 가정을 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세 번째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건전하지 않은 호기심입니다. 건전하지 않은 호기심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즉시 그 선악과를 옆에 있는 아담에게 건네주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런 느낌을 받게 하는 묘사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경 밖의 문헌에 보면 이 부분이 어떻게 해석이 되어서 나오는가 하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으니까 그것을 보고 아담이 이제 죽었구나. 하나님이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는데 네가 그것을 먹다니 죽었구나. 그 다음에 말이 재미있는데 너 없는 세상 뭐 하러 내가 사나. 같이 죽자. 그리고 먹었다고 합니다. 참 사랑이 충만했습니다. 주안에서 사랑해야지.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건전하지 않은 호기심이 이제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게 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하와로 하여금,
(예화: 어느 목사님이 선악과 사건을 설교하시며 인간의 부패성에 대해 설명하시자 연 세 드신 분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시고 따라서 장로님까지도 이해를 못하시자 목사님이 그분들을 식사에 초대해 드시게 하면서 당신이 자리에 오기 전까지 한 접시에 있는 것은 손을 대지 못하게 하시고 오랜 시간을 지체하시고 오지 않자 드시던 분들의 호기심으로 열어보니 참새가 있다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목사님이 이제 하와가 왜 따먹었는지 이해가 되느냐고 물었다는 이야기)
선악과를 따먹고 나자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정말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악이 들어오면서 이제 아담과 하와 자신의 영혼 속에 악이 들어오면서 자신도 변했고 그 다음에 세상도 변했고 모든 게 변한 것입니다.
제가 몇 달 전에 병원에 가서 눈을 진단을 했습니다. 한쪽 눈이 하도 안 보여서 진단을 했더니 정밀 진단을 받아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시력이 안 좋을 수가 없다고 해서 정밀 진단을 받는데 조금 고통스러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사를 놓는데 무슨 주사인지 아주 토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쓰레기통을 들고 몇 번을 토하다가 몇 분 있다가 눈을 떴는데 아니 세상에 말이지 무슨 약을 집어넣었는지 한참 토할 것 같이 씨름을 하다가 눈을 뜨니까 시뻘건 선글라스를 쓴 것과 똑같습니다. 온 세상이 전부다 빨갰습니다. 사람도 다 빨갛게 보이는데 하얀 옷은 빨갛게 보이고 빨간 옷은 보라색으로 보이고 그러더니 그렇게 해서 동공에 약을 집어넣어서 빨갛게 보이게 해서 핏줄에다가 색소를 타서 확 열고 그것을 이제 엑스레이를 찍어냅니다. 그렇게 해야지 만 엑스레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때 그것을 그렇게 토할 듯이 진단을 받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순간에 주사 한방을 맞으니까 그냥 눈이 새빨개지면서 온 세상이 전부다 빨간색으로 보이는데 순간에 이럴 수 있을까?
인간의 영혼은 마음의 창입니다. 마음의 눈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변화되면 보는 게 변합니다. 여러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어느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 심령이 변화되면 눈에 보이는 게 무엇인가 하면 은혜 받은 사람,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 믿음이 훌륭한 사람, 또 반대로 영혼이 거의 죽어 가는 사람,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방탕하게 사는 사람, 불쌍한 이웃 이런 사람들이 보입니다. 영혼이 변화되고 나면 사람들의 영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생각이나 살아가는 삶이 왜 이렇게 육적인지 아십니까? 자기 자신의 영혼이 변화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육적인 것입니다. 변화를 받고 나니까 그게 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을 찬미하고 하나님과 연합된 삶을 살고 부부 사이에 연합된 삶을 살던 이 사람들이 범죄하고 나서 순간에 그의 영혼이 죄로 물들기 시작하면서 자신 속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감각이 모두 바뀐 것입니다. 그것만 바뀐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끊어졌습니다. 그것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도 즉시 그 창조의 아름다운 영광을 잊어버리고 온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피조 세계 속에 죄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살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어느 한순간에 제방이 무너지는 것처럼 그렇게 물밀 듯이 죄가 밀려와서 창조세계 속에 깃들여있던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을 철저히 파괴해서 이제 온 세상이 창조 당시에 드러냈던 그 아름다운 창조의 영광과 그 아름다운 광채를 잃어버리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왜 성경이 인간을 그렇게 나쁜 존재로 묘사를 하고 하나님의 그 철저하고 무서운 진노 아래 놓여있는 존재라고 묘사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바로 인간이 범죄 함으로서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서 죄가 물밀 듯 들어오게 되었고 그 죄는 자기만을 망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해놓으신 이 전 우주를 모두 못쓰게 망가트린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창조해놓으신 창조의 아름다운 모든 작품들을 한순간에 전부다 걸레로 만든 사람이 누군가 하면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 아담은 그 모든 인간의 대표자의 지위로서 이렇게 범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인간을 그렇게 심각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는 존재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 이 대목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확실히 이 아담이 하와를 깊이 사랑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늘 하와와 함께 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없기는 했지만,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산을 섬기는, 창조 세계를 섬기는 일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늘 함께 했습니다. 범죄 하는 그 순간에도 아담은 거기에 있었고 그리고 아담은 범죄를 하는 그 순간에도 아내와의 그 연합을 깨트리기 싫어서, 물론 순수하게 자기는 싫었는데 아내를 생각해서 범죄 했다고 그렇게는 표현할 수 없지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만약에 뱀이 아담에게 직접 겨냥했더라면 그 유혹은 실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의 이 아름다운 연합을 통해서 흘러 들어왔기 때문에 아담은 죄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고 그것을 받았습니다. 범죄 한 즉시 자신들 속에 뭔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창조의 아름다운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 때 자신의 영혼 속에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어떤 매우 특별한 변화가 일어나서 그래서 뭔가 자신의 영혼 속에 경험하지 못한 매우 큰 변화, 그러면서도 위험하고 무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때 그들이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그래도 그 두려운 순간에 그들은 둘이 같이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에 자신이 벗은 몸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그 수치를 깨닫는 순간에도 둘은 같이 있었고 그래서 주님이 그들을 향해서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부르시는 그 음성이 들릴 때까지도 아담과 하와는 일심동체가 되어서 함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일심까지는 몰라도 같이 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 같이 있었는데 사실은 그것이 이미 벌써 첫 시간에 말씀드린 부부의 연합이 깨트려진 상태에서의 동거였다 라고 하는 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입증이 되는가 하면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그 언약의 대표자였기 때문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책망하는 음성이 아니라 아주 부드러운 하나님의 사랑과 염려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때 아담은 하와가 깜짝 놀랄 발언을 바로 그 옆에서 하나님에게 합니다.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네가 정녕 선악과를 먹었느냐. 그때 아담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하와도 깜짝 놀랄 정도의 특별한 발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이 표현 속에는 나도 피해자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아내가 내 스스로 취한 아내, 내가 선택한 아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억지로 주셔서 이 여자와 같이 살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주신 바로 그 여자입니다.
이 부부 관계라는 게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는 누가 중매를 섰어도 중매선 사람이 생각나는 게 아니라 내가 너를 선택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셨다 그럴 때에도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셨다고 하는 것을 고백할 때에도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서 내가 저 사람을 선택한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다 라고 하는 찬송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부부간의 관계가 깨트려지고 나면 정반대의 결과가 생겨납니다. 자기가 선택했는데도 이렇게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 그가 내게 주므로 범죄 한다. 그러니까 시집 장가가고 나서 내가 가기 싫다고 했는데 엄마가 억지로 가라고 했다고 하는 말은 제일 바보입니다. 아니 그런 이야기하면 뭐합니까? 그렇게 기도하면서 정 아니면 죽어도 안가면 되지. 마지막에는 자기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싫다고 그러면 그렇게 해주지 마십시오. 왜 그렇게 해줘서, 잘될 때는 내가 그렇게 가기 싫다고 그랬는데 엄마가 가라고 그렇게 두들겨 패서 보내더니 내가 엄마 이렇게 잘살아 그렇게 하는 딸을 봤습니까? 절대로 안 그렇습니다. 잘 살 때는 다들 자기들이 잘산다고 하지만 못살 때는 내가 그래서 가기 싫다고 그렇게 하더니 무슨 빚 청산하는 것처럼 나를 그렇게 시집보내더니 이 꼴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자녀들을 시집장가 보내는 것도 부모가 어떤 면에서 이 일은 내 일이 아니라 네 일이라고 개관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사고의 폭을 좀 가져야 합니다.
물론 사랑합니다. 그렇게 귀하게 기른 아들과 딸이 가서 이상한 사람 만나서 평생 눈물을 흘리며 고생하고 시집간지 얼마 안되어서, 장가간지 얼마 안되어서 사네 못사네 하면 그 불행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러니까 물론 마음으로는 그렇게 원하지만 그렇지만 사람의 눈, 사람의 판단이라는 것이 그렇게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식들이 좋은 신앙을 가지고 살아서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선택하게 하고 부모인 자기 자신도 많이 기도해서 가게 하는 것이지 그렇게 좋다고 목매는데 왜 그것을 막아서 무슨 엄청난 일을 보겠다고, 물론 하나님이 뜻이 명백히 아닌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그런 자료들이 있으면 못하게 해야 합니다. 부모에게 그런 권한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으면 뭐 키가 좀 작다는 것 때문에, 월급이 작다는 것 때문에, 학교를 좋은 학교 못나왔다는 것 때문에 이런 이유들 때문에 결혼을 가로막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째든 지간에 사실 하와가 아담의 아내 되는 데 있어서 사실은 아담의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입니까, 틀린 이야기입니까? 맞는 이야기입니다. 여러 명을 만들어놓고 하나만 골라라. 다시 흙으로 만들 테니까. 그래서 하나만 딱 골랐는데 한 3,000개 만들었는데 하나 골랐더니 나머지 2,999명을 다시 흙으로 돌아가라. 그래서 다시 흙으로 만들었다면 사실 아담이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딱 하나만 만드셨습니다. 선택을 하고 말고 할 수 없고 벌써 하나님 각본에 다 있고 여자 만들어서 아담을 안주면 누구를 주려고, 사람이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아담을 또다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이야기가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틀린 이야기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아담이 하나님이 만드셔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그 여자를 데리고 갔더니 아담이 즉시 하는 이야기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수 천명을 만들어났어도 나는 이 여자를 택했을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이면 그것은 절대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처럼 그런 절대성은 없지만 그러나 절대적인 성격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연합니다.
아니 남녀가 사랑에 빠졌는데 너무 사랑해, 조금 있으면 결혼하는데 이 여자를 너무 사랑해. 집에 가면보고 싶고 밥 먹으면 아침이라도 챙겨먹나. 몸집을 보면 잘 챙겨먹는 것 같아도 아침이라도 챙겨먹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힘도 자기보다도 센 데도 연약한데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되는 사람이 여러 명이 있다면 그것은 정신병자입니다. 저 여자도 불쌍하고 이 여자도 불쌍하고 말이지, 저 여자도 연약하고 이 여자도 연약하고 그러면 정신병자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그 순간에 어느 한순간에 남자가 진정으로 사랑해서 여자를 택하고 나면 이 세상에는 모든 여자는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일뿐이지 한 여자와 수많은 여성이라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지 여자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반대를 자꾸 기다리는 눈빛인데 마찬가지입니다. 한 여성이 남성을 너무 사랑하게 되면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 순간에 이 세상에 남자는 한 명만 남고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한 남자와 많은 남성의 사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바로 사랑이 가져다주는 순결의 효과입니다. 순결이라는 자체가 사람 사이에서든지 하나님을 향해서든 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 꽉 차 있는 충만한 상태가 이게 순결의 상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순결하다고 그럴 때 그것은 주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 잘 드리고 그런 게 순결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 사람의 마음이 완전히 지배된 나머지 다른 어떤 것도 그 사랑을 빼앗아갈 여지가 없는 상태, 그게 순결한 상태입니다. 불결이 무엇입니까? 그런 사랑을 찢어서 나누는 것이 불결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만드신 것은 하나님이 만드셨지만 그러나 선택도 하나님이 하셨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아담에게 주셨지만 그러나 아담은 더 이상 좋은 선택을 자기가 할 수 없는 그런 아내가 자기 앞에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고백한 것입니다. 아담의 이야기가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그 여자 그가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 먹었다는 이야기는 맨 뒤에 나옵니다. 그리고 먹기 전에 주는 여자가 있었고 주기 전에 함께 한 여자가 있었고 함께 하기 전에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의 창조주는 하나님이시고 그 모든 결혼의 주역은 하나님이셨다.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범죄 이후에도 계속 동거했지만 아담의 이 이야기는 범죄 이후에 하와에 대해서 아담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 속내를 다 드러내 보여준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게 되었는데도 이 두 사람에게는 어떤 분열이나 다툼이 없었습니다.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끝까지 폭풍우와 같은 그 범죄의 현장에서도 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지고 나니까 이들 사이의 연합은 동거는 하고 있었지만 연합은 물 건너 가버렸고 그리고 이 남편의 마음속에는 여자를 향한 강력한 원망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하와는 할말이 없었고 고백할 기회가 없기는 했지만 그러나 하와의 마음속에도 아담이 가지고 있는 거의 동질의 그런 고백이 있었을 것입니다. 결코 아담은 하와와의 연합이 깨트려졌는데 하와는 아담을 향해서 완전한 연합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 두 사람은 사실상 이제 부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연합이 깨트려졌고 그 여자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라는 그 사실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는 너무나 커다란 고통이 되고 짐이 되는 그런 느낌을 이제 아담이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은 궁금할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아담과 하와는 오래도록 같이 살았는데 어떻게 되었을까? 거기에 대한 대답은 여러분들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순간에는 처음 죄가 들어오기 전에 부부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지만 그 죄가 들어와서 이제 이 세상은 굉장히 험해졌습니다. 자연은 조화를 잃어버렸고 그리고 이제는 땀을 흘리며 일해야지 만 겨우 먹을 수 있는 정말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신과 친하고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던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는 자기를 거스르기 시작했고 애써서 수고해도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저항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이제는 친교하고 화해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저항하고 대항하는 거대한 자연의 세력과 맞서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얼굴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모두 사라지고 피곤과 고통으로 가득 찬 얼굴로 잠자리에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 두 사람은 같이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열렬하고 뜨겁게 사랑해서 “이는 내 뼈 주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그 연합과 사랑은 이제 회복할 수 없게 날라 가버렸지만 그래도 주님이 은혜를 주실 때에는 사랑을 느꼈고 그리고 소중한 사랑이었습니다.
한번 묵상을 해보십시오. 아담이 가서 하루종일 땅을 팠는데 곡식이라고 되는 것도 없고 생고생을 하다가 주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죄 없이 거할 때에는 그렇게 행복했는데 이 무슨 생고생인가. 이놈의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를 꼬여서 이 지경으로 만들었구나. 이걸 그냥! 그리고 집에 들어왔더니 아내 역시 피곤하게 일하다가 잠들어 있습니다. 얼굴을 이렇게 보며,
생각해보십시오. 창조의 아름다운 영광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그 독특하고 영광스러운 지위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그 여자를 볼 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담에게 함께 하는 동안에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 그래 순간의 잘못으로 이렇게 무거운 짐을 해산의 수고를 하며 살아야 하는구나. 우리 둘이 마지막에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부부구나 라는 마음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고 은혜 받았을 때 여러분들이 집에 가서 그렇게 하는 것처럼 은혜가 떨어지면 역시 내 생애 있어서 최고의 비극은 하나님이 내 갈비뼈에 손을 대실 그때부터 시작이 되었구나. 그랬을 것입니다. 똑같이, 그러면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세월을 인간들이 살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조차도 말입니다.
그래서 흔히 이 결혼에 있어서 행복을 환경에서 많이 찾습니다. 맞습니다. 사실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아무리 사랑해도 환경이 도저히 말이 아니면 정상적인 결혼의 상태를 유지하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더군다나 수 십 년을 결혼생활 하고 난 다음에는 부부의 생활에 있어서 부부의 관계가 성장이 되어서 이렇게 나무처럼 견고해지지만 처음 결혼했을 때에는 이제 부부의 관계들이 착상되는 때입니다. 말하자면 어린 나무를 심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 환경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너무 좋은 환경을 만나면 정말 잘 자라는 것입니다. 아주 신앙이 독실한 양가의 부모, 신앙이 독실한 사람들은 또 독실하다는 말을 뒤집으면 고집이 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도 이해심이 있고 며느리를 자기 딸처럼 깊이 사랑하고 그리고 부부관계에 자기가 갈라서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성경적인 시부모의 도리를 알아서 자기를 절제할 줄 아는 그런 부모가 있고 또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우면 원만한 생활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고 그리고 안정적이고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성품이 다 원만하고 자라온 배경도 두 사람이 그렇게 굴곡이 별로 없고 구겨진 구석이 없이 밝게 자라왔으면 그만큼 결혼에 있어서 좋은 부부의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 것도 바쳐주는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그저 사랑에 빠져서 이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말도 안 되는 집안에 시집을 갔습니다. 그래서 시아버지 시어머니라는 사람 자체가 사람이 안된 사람들입니다. 신앙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게다가 핍박까지 하고 거기에다가 밤이면 며느리와 아들이 자는 데 어머니가 들어와서 사이에서 자겠다고 그렇게 하고 남편은 월급 타서 안방으로 건너가서 어머니 앞에 다 내놓고 용돈 타서 오고 이렇게 되면서 모든 게 구겨지기 시작하면 사실은 정상적인 결혼생활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경도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아는 형제 자매들 중에는 둘이 정말 사랑했고 그리고 성격이나 모든 것으로 봐서 어려움이 웬만했다면 극복하고 결혼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을 텐데 주위의 환경이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깨트려진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정말 믿음이 있는 형제 자매들인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그만큼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환경도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개중에 보면 환경이 좋아도 환경만으로도 좋은 가정을 이루고 살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자기의 자녀들의 가정을 향해서 의도하시는 바가 부부가 싸움 안하고 편안하게 살고 잘먹고 살다가 죽는 그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동물의 우리지 어떻게 가정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그것보다도 훨씬 고상합니다. 우선 자기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살고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성화 되어 가면서 좋은 가정을 이루어서 그 집안에서 태어나는 자녀들이 엄마 아빠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성과 부성을 함께 배워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그렇게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로서 성품을 닮은 사람들로서 살아가고 그 속에서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으로 익혀가면서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가정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스르는 이 세상과는 맞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함께 부름 받은 사람들이 연합해서 살수 있는 수많은 믿음의 자손들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공장, 공장이라고 하면 이상하지만 그 하나님의 자녀들을 생산해내는 하나의 전진 기지가 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과 가정의 문제를 너무 오늘날은 그저 행복이 너무 많이 깨트려지니까 결혼생활 하면서 가정으로 말미암아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너무 없으니까 어떻게 하면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 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서 이제 좋은 가정의 문제를 다루고 설득을 하는데 방향이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가정들을 통해서 창조의 질서들을 새롭게 세우고 그래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헌신된 삶을 통해서 이 창조의 질서를 구속으로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그것이 궁극적인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교회와 가정을 같은 맥락의 선상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안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성도입니다. 성도가 매일 술이나 먹고 가서 싸움이나 하고 마약이나 하고 그렇게 살면 어디 그 아버지를 목회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누군가는 그들을 돌봐주어야 하는데 그런 의무가 부모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축복이 없이는 결코 이 부부 관계에 완전한 행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내가 남편에게 고분고분 순종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려고 한다고 할지라도 두 사람이 각각 하나님 앞에서 한사람의 신자로서 진실하고 충만한 삶을 살지 않으면 서로를 향해 의무에 충실하고자 하는 그 노력만으로는 이런 부부 사이에 마땅히 존재할 완전한 정신적인 연합, 그리고 그 가정을 통한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회복 같은 것들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 사이에 무슨 부부 싸움이 있었습니까? 아담이 너 그것 왜 따먹었는가 하고 너 때문에 내가 생고생한다고 머리를 잡고 뒤흔들었습니까? 무슨 엄청난 부부 싸움이 있어서 그렇게 커다란 갈등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둘은 선악과를 따먹고 각각 하나님 앞에 범죄자가 되었고 그리고 그 범죄 속에서도 두 사람은 눈물겹게 손을 꼭 잡고 영혼 속에 일어난 무서운 변화와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그 엄청난 변화의 가정들을 모두 경험했고 그러면서도 둘이 꼭 손을 붙들고 그리고 이제 축복의 동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그 두려운 동산에서 같이 있었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는 그런 신앙의 위기에까지 도달했을 때에도 두 손을 꽉 붙들고 같이 있었지만 동거했지만 연합은 깨트려진 것입니다. 둘이 싸우지 않았어도 연합은 없었습니다. 연합은 아주 분명하게 신앙을 통해서 오는 연합입니다. 각 부부 남편과 아내가 각각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깊이 알고 그리고 그 분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연합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남편이 아직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일 수 있고 아내가 아직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그런 결혼생활은 불가능합니다. 임시적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때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은 내가 더 많이 희생해서 그래서 그를 위해 많이 기도해서 어떻게 하든지 그를 하나님과 관계를 가진 사람으로 세워주고 그래서 주님의 말씀과 그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께 기도하면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으로 세워주는 것이 사실은 가정 선교의 첫 번째 과제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부부가 함께 알아갈 때, 그때 가정의 행복이 보장되는 것이지 결코 두 사람이 손을 꼭 잡고 이렇게 함께 동거한다고 해서 그들이 완전한 결혼생활의 행복을 이룰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없이는 부부의 관계도 없다는 것을 이 처음 실패한 가정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정의 파괴는 두 사람의 부부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가 가져다주었습니다. 남편이 아직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닐 때 아내가 더 든든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며 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끌어안을 수 없는 사람을 끌어안으면서 많이 희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반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것 말고는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비록 잘 모르지만 여러분들이 많이 눈물로 기도하고 남편을 위해서 많이 헌신하고 그리고 그 감화를 통해서 남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주님과의 관계를 갖고 경건한 신앙의 사람으로 서게 되면 그때 비로소 그들이 여러분들을 오랫동안 괴롭힌 날들을 회개할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그 사람은 모자라는 것이 많아도 하나님이 부어주신 사랑 때문에 부부의 연합을 이루면서 살려고 했던 상대방의 처절한 노력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자신이 아마 몸소 경험하면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라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가정은 간 곳이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정말 주님 앞에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갈등도 없지만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나니까 부부의 관계를 깨트려졌습니다. 그렇게 깨진 관계들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치유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고 정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경적인 영성을 소유하게 되면 그 영성에 가장 확실한 표가 무엇인가 하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자기가 외면하고 살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사람들과의 관계를 그렇게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러면서 교만한 자기를 버리고 사랑이 없는 자기 자신을 죽이면서 그러면서 고통스러울 때마다 주님이 사랑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고난받으신 것을 기억해서 자기 자신 속에 일어나는 많은 고통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승화하면서 그러면서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은혜 받은 사람들이 지어야 할 십자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부부가 다행히 신앙생활을 잘 한다면 부부가 더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남편이 기도 많이 하니까, 우리 아내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니까 그 바지자락이나 붙들고 치마 자락이나 붙들고 신앙생활 하려고 하는 그런 아내나 남편에 대한 의존적인 신앙을 벗어버리기 전에는 여러분들이 사람구실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아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여러분보다 현저하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이 가정을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셨는데 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내에 비해서 현저히 부족해서 시시각각으로 아내에게 충고를 받으면서 살아야 한다면 부끄럽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반대로 아내가 남편을 보면서 남편이 훌륭하다고 생각이 되면 아내는 그 남편을 존경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도 그런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하는 적극적인 몸부림이 있어야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믿음이 좋은 아내의 남편이었다는 것, 믿음이 좋은 남편의 아내였다는 것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상 받을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갚아야 할 일들이 더 많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은 아내와 함께 살면서 그 내조를 받으면서 날 섬긴 게 뭐가 있는가, 그렇게 신앙이 좋은 남편과 살면서 온갖 섬김을 다 받으면서 너는 아내로서 나를 섬긴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고 주님이 그렇게 물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오히려 그런 것에 대해서 더 부채의식을 느끼면서 하나님을 더 많이 섬기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가족을 돌아보라①육적 형편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5월은 벌써 지났습니다 만은 어쨌든 봄이되면 가정에 관한 설교를 들을 때 결국 우리는 그 긴 가정 시리즈를 설교로 들으면서 그 관계가 남편이든 아내이든 혹은 부모든 동기간이든, 누구든지 간에 결국 궁극적으로 마지막에 우리들이 도달해야될 목표는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진실한 백성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내가 잠시 자존심을 꺾고 남편을 기쁘게 해준 들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일수 없습니다. 또 믿지 아니하는 아내를 남편이 많이 참아서 그를 위해서 기쁘게 해준다고 할지라도 그것도 남편으로서의 궁극적인 의무가 아니고 또 그 아내를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동기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참고 많은 것을 양보하며 산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일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도달해보면 정말 가족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이 우리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리고 거기로부터 신령한 은혜를 공급받아서 내가 정말 패역하고 더럽고, 이기적이고 못된 죄인이었지만 예수님 만나고 날마다 깨뜨려져서 그래서 내 마음의 강팍함을 깨뜨리고 더러움을 씻고 내 자신의 완고한 고집을 꺽으면서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서 결국은 나에게 상처를준 부모도 용서하고 나에게 너무나 이기적으로 대하는 형제들도 사랑하고, 나에게 예수믿는다고 박해하는 내 남편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던것처럼 우리 가족들도 주님을 만나서 그렇게 변화되는 것이 정말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비결이다는 것을 깨닫게됩니다.
그런데 그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한지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쉽게 예수를 믿고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빨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는데 어쩌면 그렇게 우리의 가족들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지 모릅니다. 강팍함이 이를데가 없고 그렇게 오랜세월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점진적으로 무슨 소망의 증거도 보여주지 않는 하나님이 섭섭하게 느껴질때가 많습니다. 가족들이 믿지않기 때문에 그렇게 아파하고 괴로워해본 사람들은 지금 제가 무엇을 어떤 심정으로 말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것입니다. 가족들의 마음이 그렇게 굳어서 예수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고 예수 믿는 것은 그만두고 교회한번 같이 가주는것도 그렇게 힘이들고, 이루어질수 없는 목표인것처럼 요원한데 거기에다 한걸음더 어려운 고통은 뭐냐하면 내가 한없이 그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가족들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나역시 간절히 그것을 사모하면서도 나 스스로 가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된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몇일전에 설교하면서 말씀드렸던 것과같이 우리의 가족들을 포함해서 이 세상의 모든 불신자들은 우리가 주님의 은혜안에서 많이 참고 용서한 것은 쉽게 잊어버리고 우리가 혈기를 부리거나 혹은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준것에 대해서는 실로 지루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그것을 기억하고 있고, 그것을 자기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중요한 구실로 삼는 것이 이 세상의 불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아무리 온전한 삶을 살려고 애를쓴다고 하더라도 그 불신자들의 변덕과 주님을 믿지않기 위해서 구실을 찾기에 혈안이 된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해줄수는 없을것입니다. 또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일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할수있는대로 주님이 주시는 모든 은혜와 힘을 동원해서 그분신자들을 향해서 오래참고, 그리고 때로는 손해를 보고 때로는 그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으면서도 이존절함과 그리고 성도로서의 거룩한 은혜의 자세들을 결코 잊어버리지 말아야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구절은 예수를 열심히 믿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가슴에 깊이 찔리는 구절입니다. 자기의 친족, 특히 자기의 가족들 돌아보지 아니한 자는 불신자보다도 더 악한 자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주님의 은혜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우리의 가족들과는 멀어지는 그런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여러해동안 청년들을 지켜보면서 명절이면 우울해지는 청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시골에 내려가고 싶지가 않은 것입니다. 자매들은 내려가 봐야, “금년에도 시집 못가냐?”부터 시작해서 “니게 예수 안믿는 사람 중매해준다고 그렇게도 예수 믿는 사람만 찾아가겠다고 그래서 너 스스로 해결해보라고 맡겨뒀더니 니네 하나님은 너 시집가는 것도 안도와주시든” 심지어는 “너희 목사는 그렇게 능력도 없냐?” 능력을 주시옵소서, 거기부터 시작해서 “예수 믿는다고 뭐가 나오냐”부터 시작해서 시골의 차례에 가서 절안하고 서 있으면 “이놈의 자식, 너는 조상도 없냐하며 뒤떨미를 때리는 시골의 차례상부터 시작해서 다 깨어진 가족들과의 관계를 다시 직면해야하는 그 명절에 신자들이 얼마나 무기력해집니까? 서울 올라가면 그래도 남들은 나보고 성령충만하다고 하고 은혜생활 잘한다고 하는데 이상하게 집에만 내려가면 영력도 다 딸리고, 그냥 있어서는 안되는 술집에 온것처럼 구석에 꾸그리고 앉았다가 그저 명절 아침상 받으면 바쁜일 있다그리고 오후에 차타고 휙 올라와 버려서 해방되어 보려고 하는 것이 그런 아픔속에서 사는 젊은 지체들이 얼마나 많은지모릅니다.
그런데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서 그렇게 돌아온 길에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돌아오면서 정말 “하나님 우리에게는 언제나 가정의 복음화를 주시렵니까?” “언제나 우리 가족들은 모두 모여서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께 예배한 날이 오겠습니까?” 그러면서 너무 가슴이 아파서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수 있다면 그래도 그는 아직 살아있는 신자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부담은 가지고 있지만 헌신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족의 구원은 일반적으로 꼭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의 성화의 훌륭한 수단입니다. 그렇죠. 교회에서는 아무게집사 펄펄날고, 아무게 권사, 아무게 장로, 충성하기로 이름나서 펄펄날지만 한번 가족과함께 모여서 자기 외에 예수믿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자기를 말하자면 왕따시키는 그런 상황들을 보면서 그러면서 그렇게 괴로워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부담은 느끼지만 헌신하는 것은 너무 없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의 구원은 먼저 믿은 신자가 자기가 아니면 이 영혼들은 결코 구원받을수 없다라는 그런 정신을 가져야합니다. “누군가를 통해서 하시겠지.“ 아닙니다. 내가 아니면 이 사람들이 구원받을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 사람들 앞에 선교사다.라는 그런 마음의 자세를 일단 가져야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정을 선교지라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그 가족들을 구원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많은 이유가있겠죠.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적기 때문에 가족들을 구원하지 못한다거나 가족들의 마음이 너무 강팍해서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말씀드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설령 그들의 마음이 강팍하다고 할지라도 가족이라는 사람이 자기의 가족들의 마음의 강팍함을 하나님 앞에 고자질하는 것이 고작 자신의 일이어서는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네 엄마, 네 아버지는 내가 손좀 봐야되겠다. 너무 강팍하다.” 그래도 “아닙니다."그리고 막아서야된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의 마음이 강팍한 것 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세상의 염려와 근심 때문에 마음이 갈라져서 그렇지 그들의 마음속에는 곤고한 영혼으로 인해서 눈물이 가득 고여있습니다. 제가 주님의 손에 붙들린 바늘이 되어서 제게 능력을 주시면 그 눈물주머니를 터트려서 오랬동안 돌아오지 않던 우리 엄마, 우리 아빠를 돌아오게 하겠사오니 1년만 더 기회를 제게 주시옵소서, 그러면 내가 두루파고 거름을 주고 또 비료를 주고 물을 주고 가꾸어서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겠으니 주님 나에게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라고 막아설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가족들의 복음전도에 대해서 여러분 거의 포기하고 있는 사람들, 너무나 많은 것 여러분 알고계십니까? 하나님께 모두 맡겼다고 말하는데 자기가 그 영혼들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기도하며 어떻게 하든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맡겼다고 하는 것은 자기는 그 의무와 상관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하나님께서 직접역사해 주시겠다.라고 하는 것은 나말고 아무나 하겠지, 라고 마음을 놓아버리고 있는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정말 깊이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순간마다 여러분들이 정말 살아있는 심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인지를 가족들을 위해서 어떤 마음을 쓰고 있는지를 보면서 여러분 자신을 확인해야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부모님이 아직까지도 주님을 믿지않았는데 하나님이 불러가시면 우리는 그날에 얼마나 서러울까요. 회심도 못하고 하나님께로 가지도 못하고 죽은 그 내 아버지 내 어머니를 보면서 우리의 마음은 찢어질 것이고 주님 앞에 섰을때에 “너희 아버지, 너희 어머니는 지옥에 갔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 우리의 눈에는 눈물이 비오듯 흐를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우리의 가족들의 영혼을 보면서 구원받지 못한 우리 가족들의 영혼을 보면서 무덤덤할수 있다면 만약에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눈물 흘릴수 없다면 우리가 바로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울어주어야할 그런 병들고 불쌍한 처지에 있는 영혼이 아닐수가 없는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깊이 찌릅니다. 때로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팔과 손에 모든 힘을 빠지게 만들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말 무지력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해서 심하면 어떤때는 우리를 영적침체속에 몰아 넣을수도 있습니다. 변화되지 않는 내 남편, 내 아내를 보면서 낙담하며 그러면서 우리자신이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잠시 기도하고 시험에 들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가족들의 구원이 요연하게 느껴질 때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이외에는 기대할바가 없다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이나 하듯이, 하나님께 더 집중하고 매어달리고 그리고 더많이 기도하고 스스로 울수 없는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울어주면 그들이 돌아오리라고 하는 확신을 갖는 사람들이 바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자기가 골육지친중 몇이라도 구원할수만 있다면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져서 저주를 받을지라도 자기가 원하는 바로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자기의 그 골육지친들을 향한 뼈저린 마음을 하나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가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것인가?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수 있습니다. 넓게보면 하나님의 섭리가운데서 가족들의 구원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럴수 있습니다. 혹은 가족들의 부패한삶과 죄악된 생활이 그들의 마음을 무디어지게 만들어서 은혜의 복음에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경우도 있을수 있습니다. 기타 여러 가지 많은 근심과 염려와 걱정들이 그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서 신앙에 대해서 관심은 가지고 있지만 자기를 다 기울여서 그 신앙을 추구할 그런 힘, 그런 용기는 잃어버린체 살아가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을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런 일들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것들은 어떤의미에서 우리의 힘으로 쉽게 해결할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이 강팍하다면 우리는 기도할수 있을뿐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기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제한되어 있거나 거의 없습니다. 그들의 염려와 근심이 있어도 대부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정적인 능력이나 우리의 지식, 우리의 사회적인 지위로는 해결할수 없는 그런 문제들로 인해서 걱정하고 근심할때가 많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해결할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오늘 성경을 통해서 볼수 있는 사실 하나는 우리의 가족들을 돌아보는 것이 신자로서 우리의 의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믿는 가족이든 믿지아니하는 가족이든,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가족들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믿지 않을 때 오히려 더많이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살면, 정말 시간내기 힘듭니다. 얼마나 바쁜지모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자신에게 손해를 많이 끼치는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을 쓸데없이 빼았는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느 청교도는 이렇게 생활하다가 누가 찾아와서 자기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으면 일정시간이 지나면 단호하게 일어서면서 “당신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간을 도둑질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내 할 일을 하고 주님을 섬겨야하니 당신은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는 이야기가 그렇게해서 자기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관계를 계속하지 않는 신자라면 더 이상 만날필요가 없다라는 신조속에서 살았다고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은 일생을 낭비하지 아니하고 살수있었다고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이 그렇게 힘듭니다. 더군다나 가족들은 그저 늘 이해심이 많으니까 그 가족들을 돌아보기 위해서 스스로 시간을 낸다라고 하는 것은 정말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해해줄수 없는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이해해줄수 있는 가족들에게 많이 손해를 입히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가족들이 믿지아니하는 가족들일 경우에는 우리들이 더더욱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딸린 가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예수의 생명을가진 사람들에게 인품과 삶을 통해서 예수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복된지를 보여줄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더 정말 인격적이고 사랑이 많고 여유가 있고, 그리고 진실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그들이 쉽게 인정하기는 싫어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사람들의 삶에 비해서 자신의 삶에는 무엇인가 결핍되어있다라고 하는 마음을 갖게끔 만들어줄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서 사도도 자기의 가족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 의무가 중요한지, “친족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불신자보다 악한자다.” 여기에다 이런 말을 첨가시키고 싶습니다. “신자이면서 친족, 더욱이 자기의 가족들 돌아보지 아니하는 사람은 아무리 충성하고 아무리 열심히 섬기고 아무리 믿는 사람들에게 잘하고, 아무리 풍부한 교제속에서 지체들을 섬기면서 산다고 할지라도 불신자보다 악하니라.” 그러면 무엇을 돌아보아야 하느냐? 첫째, 가족들의 육적인 형편을 돌아보아야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금 사도가 무엇을 이야기하다가 친족, 곧 자기의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불신자보다 악한 사람이다.“ 그렇게 표현했습니까. 사도가 이런정도로 강하게 표현한적이 자기의 글속엣서 그렇게 흔치않습니다. 무엇을 이야기하다가 이런 이야기를했습니까? 과부를 돌아보는 문제였습니다. 그당시에 사회적으로 가장 커다란 문제가 고아의 문제와 과부의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이 단명했기 때문에 아직 어린아이들을 두고 죽어버리는 부모들이 많았고, 그것은 그 어린아이들에게 있어서 곧 죽음에 가까운 절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라가 가난하고 형편이 어려울수록 자녀들의 부모에대한 의존도는 훨씬 높고 생존에있어서조차 부모가 있고없고는 그들에게는 너무 결정적인 영향을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래서 이제 과부가 있는데 사람들이 돌아보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가족이 있는데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교인들이 거둔 구제비를 가지고 그 과부들의 먹고, 입고, 쓸 것을 공급하면서 그 과부들의 생활비를 대어주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보니까 그렇게 해주었는데 보니까, 그중에는 자식도 손자도 아주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런 과부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이유때문인지 가족들에게 말하자면 타절을 당해서 절교를 당해서 그래서 그 가족들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지못하고 교회에 자기의 의식주생활을 의탁해야하는 그런 불우한 처지에 놓이게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그들의 자녀들이 불신자가 많았겠죠. 불신자인데도 사도는 이 디모데에게 무엇을 가르치느냐하면 “네가 가서 그 자녀들을 잘 타일러서 인생을 사는 도리가 그런 것이 아니니 너희들이 부모를 잘 돌보아야하지 않느냐”그렇게 해서 신앙을 떠나서 효를행하게끔 일단 그들을 그렇게 해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뭐냐하면 교회가 그 과부에게 보태주는 그 돈이 아까와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렇게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것이 교회가 해야할 중요한 일중에 하나라고 생각한것입니다. 그렇게해서 과부가된 어머니가 자식들의 도움을 받아야하는데 교회에 돈을 아낄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서 가족들과의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과부가된 어머니를 자식들이, 손자들이 십원한푼 도와주지 않는다 그랬을 때 걱정이 되는 것은 그 과부의 생계보다도 걱정이 되는 것은 이미 그러한 인정머리없는 관계를 통해서 단절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입니다. 그것을 겨냥한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족들과의 관계가 형성되어야지만 그 경건한 과부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 가족이 하나님께로 돌아올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렇지않습니까.
우리들이 예수믿는다고 모두 집안으로부터 탈출해서 기도원으로 모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소금이라는 것이 세상에 뿌려져야지만 그것이 간이되고 썩지않는 것이지 소금끼리 모아서 항아리에 담아놓으면 나중에 소금끼리 녹아서 소금물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등불이라고 하는 것이 어두운 거리에 하나둘 밝혀둘때에 그것이 길을 지나가는 거리의 행인들을 실족하지 않게하고, 나그네로 하여금 갈길을 보여주고 길잃은 배로하여금 도달하여야할 항구를 표시해주는 것이지 그 등불들이 잔뜩 모여서 한곳에 있으면 그것이 조명기구상회지 그것이 교회입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래서 여러분들이 생각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직장생활하는 젊은이들이 회식하러 간다. 그러는데 자기는 안가고 교회로 도망왔다고 그래서 왜그러느냐 그랬더니 거기에 가면 시험에 든데요. 그래서 왜? 그러니까 매일 술먹고, 뭐 분위기가 불경건하고,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의 표현대로 따르면 지구밖으로 가야합니다. 지구를 떠나야합니다.
그런 것이 정말 싫으면 자기 사업을 하든지. 그래서 저는 젊은 사람들에게 웬만하면 내가 만나서 장래성이 보이면 내가 얘기를 합니다. “야, 너 오래 직장생활하지 말고 기도많이 하면서 사업을 배워서 니 사업을 해라. 니 사업하면 너처럼 그렇게 고통받는 직장생활 안하게 할수있지 않느냐.” 옛날에 어느 형제하나는 와서 아주 비통해 하면서 직장을 그만두어야 되겠데요. 그래서 왜그러느냐? 그랬더니 술먹어라. 그래서 안먹는다 그랬더니 오비맥주병으로 머리를 뻥 때리더래요. “목사님 나 이러면서 직장 다녀야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술병으로 골통을 얻어맞고 말이죠. 술안먹는다고 이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되면 안됩니다. 또 예수믿는 사람이라고 가서 일차 술먹고 그냥 바람잡으면서 2차 가자고 내가 사준다고 그래도 안되고,
저는 직장생활 하면서 그런 이유 때문에 한번도 회식의 자리에 빠져본적 없습니다. 오히려 술자리에 가면 더 나빠지지 않도록 자꾸 이 세속적인 흥을 돋울때에 초를치면서 경건한 분위기로 유화시킵니다. 그때는 그런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만은 술먹고, 항상 2차, 그리고 단란주점, 거기가면 안됩니다. 거기에가면 성적인 타락들이 기다리고있습니다. 재미있게 회식자리에서 놀고, 노래도 부르라그러면 한두곡 불러주고 부를 것 많잖아요.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볼 때” 그것도 싫으면 또 옛날의 복음송 있잖아요. “술마시고 장구치고 죄만짓다가 오늘밤에 죽으면 어찌하리요.” 뭐 그런 것을 부른 것은 아니지만 예를들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너무 유격적이고 그런 노래 부르는데 아주 상큼하게 자연에대한 아름다움이라든지. 이런 노래들을 불러서 분위기를 중화시키는 것입니다. 뭘 시켜도 사회를 볼려고말이죠.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잘 흥겹게 놀고, 그런데 그런데 갈때는 기도많이 하고 가야합니다. 그리고 이제 “2차 단란주점 가자.” 그러면 가족들이 기다리고있습니다. 한두사람이 그러면 동조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나와서 흩어집니다. 그날밤에 범죄하는일 막는 것 아닙니까. 직장에 가면 지옥에 나온 것 처럼 그냥 먹고살려면 어쩔수가 없어서 그런것처럼 죄지은 사람처럼 귀못펴고 그럴 것 없다는 것입니다. 할 얘기 다 똑바로 하고말이죠. 그렇게 하면서 떳떳하게 신앙생활하고 누구보다도 유능하고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뇌물한푼 주지 않아도 사람들이 나 없으면 이 직장이 멈추지. 할정도로 필요한 인물이 되고 말이죠. 필요할 경우에는 자기가 생사를 가리지않고 자신의 몸을 던지고말이죠. 그런 어떤 희생, 봉사, 그리고 철저한 프로정신, 이런것들을 가지고 그렇게 생활해야합니다. 사람들이 직장생활 하는 것을 보면 답답합니다. 그래서 요셉을 보면서 많이 배워야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돌아본다.“ 그랬는데 사실 그 돌아보는게 제일먼저 가족들의 육적인 형편들을 돌아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이렇게 얘기하면서 ”불신자보다 악한 자니라.“ 그러니까 이것은 화법상으로 볼때에 불신자를 겨냥하고 한 말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수있지않습니까. 누가 불신자보고. ”너 부모를 돌아보지 않으면 불신자보다도 더 악한놈이다.“ 그렇게 문학적으로 그렇게 표현할수 없지않습니까. 수사법상으로, 그러니까 이 신자를 염두해둔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들 중에서도 자신의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그런 인간들이 그때부터 많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자녀들에게 상처를 받고, 낙담해서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거나 신앙에 대해서 반항적이된 이 노인네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여러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우리집은 예수 믿는 며느리 들어오고 나서 망했어, 망했어” 그러는 할아버지들 여러분 보셨을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목회를 크게 하시는데 매주 목요일날 길거리에 있는 모든 거지들을 불러다가 예배를 드리고 그리고 맛있게 점심을 해주고 그리고 봉투에다가 돈도 한 5000원씩 10000원씩 넣어서 주고, 겨울이 오면 새로 산 따뜻한 내복을 한벌씩 주고 여름이면 여름 내복을 한벌씩 주고 그렇게 한답니다. 돈 많으면 잠바도 하나씩 사주고, 그런데 그중의 한 할아버지가 그러더래요. 아니 그냥 서로 사랑하고 살아라고 한참 설교를 하고 눈물로 기도해주고 내려왔는데 거기하고 같이 밥을 먹는데 그러더래요. “목사님, 잠바를 만지면서 이런 잠바는 얼마나 갑니까?” 목사님 잠바를 만지면서 “목사님 이 잠바 참 좋네요.” 속까지 만지작거리면서 “뜨뜻하겠네요“ 달라는거지 그래서 할수없어서 그 자리에서 벗어서 이렇게 입혀주면서 ”잘 어울리네요. 입고 가세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그 왜 자녀들은 없습니까“ 그러니까 ”목사님 우리 아들 이름을 대면 목사님도 알지도 모릅니다.“ 그럴정도로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돌아보지를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그 사람이 아들이고 아버지가 자기를 돌아보지 않을 것 같으면 당장 그 목사님에게 당장 “목사님 우리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세요? 박, 아무게 장관도 지내고 교수한다고 하는 그 인간이거든요. 그런데 저를 길거리에 버렸어요. 등록금도 안대줘요. 가서 혼좀 내 주세요.” 그럴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궁금한데 들어나봅시다. 내가 아무에게도 말안할터이니 얘기나해보세요.“ 그랬더니 끝까지 입을 안열더래요. 그러면서 그 잠바 하나 얻어입고 가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믿는 사람들중에도 그런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이 옛날에는 안그랬는데 장가가던니 아주 나쁜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흉악한 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향해서 흉악해지면 흉악해질수록 교회는 열심을 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결심했데요. “그놈이 믿는 하나님은 내가 죽어도 안믿는다.” “내가 죽으면 죽어도 내 딸들이게 저놈이 믿는 하나님은 믿지말라고 유언하고 죽을 것이라고말이죠. 이것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화입니다. 이것이 논리가 이해가 안되서 예수를 못믿는 사람들은 말을 기가막히게 하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돌아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자기 가족에게 실망해서 이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장 커다란 원인이 뭐냐하면 뭐가 있겠습니까? 가족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마음아파하고 그러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무엇때문이겠습니까? 80%이상은 모두 경제적인 문제입니다. 제가 틀린얘기했습니까? 경제적인 문제입니다. 우리 형하고 나하고 사이가 나빠진 것은 그런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래.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형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할려고 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많고 이제 죽을려고 껄덕거리는 노인네의 사랑을 많이 받으려고했다는 이야기는 무슨이야기입니까? 이유는 여러 가지여도 캐고캐고 들어가보면 반드시 경제적인 문제에 걸립니다. 거짓말인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도 지금 그 부모님에 대해서 자유롭지 않는 사람들 있죠. 가장 커다란 것은 무엇입니까? 경제적인 문제아닙니까? 결혼하기 전에는 그렇게 효성스러웠는데 결혼하고나서 그렇게 부모의 마음에 섭섭함을 드리고 하는 가장 커다란 원인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무엇때문입니까? 노인네가 왜 그렇게 섭섭해하고 그래도 자기 자식은 타절하기 싫어서 며느리 핑계를 대면서 그러면서 그렇게 마음아파하는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자주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서 그렇다고요. 노인네들이 자식의 집에 찾아가면 얼굴먼저 보는 것이 아니라. 손부터봅니다. 사실입니다. 돈 한푼 안보태주고 일주일에 한번씩 꼬박꼬박 가서 얼굴을 내민다고 해서 그것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그 부모님들의 마음이 ”그래 돈 없어도 너는 하여튼 한번 올때마다 5만원씩 까면서 그렇게 한달에 네 번씩 다섯 번씩 다녔고, 돈 안보태줬지만 하여튼 많이 다녔기 때문에 너는 돈 보태준 것 보다 나는 더 좋다.“ 그것은 말로만 그렇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 아닙니까.
동기간에 인심을 잃고 그리고 동기간 서로 얼굴 안보고 살고 그러는 것 뭐 뻔한 것 아닙니까. 빌려준돈 제때 안 갚는다고 다구치다가 틀어져버리고, 이자가 어쩌니 저쩌니 하고 말이죠. 빚 제때에 안갚는다 그러고, 심지어는 자기 집을 잡혀주었는데 동생이 가서 털어먹고 자기 집을 날리게 되었다라고, 물론 동생이 잘못했고 형이 잘못했을수도 있겠지만 캐고 들어가보면 누가 옳고 그르고는 나중문제이고 얽히고 설혀있는 문제들은 모두 경제적인 문제입니다. 재정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말에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에 각별한 애정이 없어도 만나는 동기간들 후히 퍼주고, 그리고 뭐 각별한 애정이 없이는 그럴수도 없지만 예를들자면 부모님께 그저 풍부하게 그렇게 해드리고 그러면서 자기가 조금 궁핍한 삶을 사는 사람치고 동기간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사람있습니까? 그런사람 없습니다. 특별히 말에 있어서 문제가 많아가지고 조금 보태주고 가슴을 후벼놓기를 크게 후벼놓는 그런 사람만 아니면 상식적인 선에서만 행동하면 넉넉히 베풀면서 살면 누가 싫다고합니까. 요즘 애들이 나만보면 “목사님, 목사님”하고 따라오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내가 꼬챙이 사탕을 이만큼을 사서 서랍에 넣어두는 사람입니다. 주머니에 넣고 지나가다가 다 주면 그것을 다 댈수가 없으니까 이제 하나씩 돌아가면서 주는 것입니다. 엊그제는 목사인 나에게 인사도 안하던 애인데 내가 이렇게 가니까 “목사님 안녕하세요” 그래 “이리 와봐라. 목사님 보고싶었냐?” 그러니까 딱 안기면서 보고싶었데요. “얼만큼 보고싶었냐?” 그랬더니 “하늘만큼 땅만큼 보고싶었데요” 뽀뽀한번 하자 그러니까 뽀뽀까지 해요. 그리고 내려놓으니까 “아이, 사탕이 있으면 참 좋겠다.” “나 사탕 좋아하는데. 목사님 방에 가자” 애들도요 자꾸 줘보세요. 싫다그러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아주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는 아이들을 회심키켜 놓았습니다. 나만보면 날개짓을 하면서 쫓아옵니다. 주머니에 항상 사탕을 넣고다닙니다. 그런데 부모들은 별로 싫어해요. 사탕주는 것을 그런데 어떡합니까. 사탕이 제일 싼데.
정말 자기하고 그런 관계가 아닌 사람인데 어느날 선물을 들고와요. 그런데 평소에는 그런 사람 싫었습니다. 좀 싫은 사람인데 그 사람이 선물을 들고와요. 갖다놓으면 솔직히 얘기해서 제가 교수생활할 때 그런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스승의 날이면 한구르마씩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맨 쓸데없는 것, 경제적인 능력이 안되니까 맨 쓸데없는 것, 무슨 그런것입니다. 그런데도 뭐 고맙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어떤때는 보면 강의시간에 똑바로 앉아서 듣고 성적도 잘 나오고 그런 애들이 선물을 가져오면 얼마나 귀여워요. 그래 와서 차도 한잔 타주고 그러는데. 사사건건 별로 그렇게 만나고싶지 않은 사람이고, 그리고 수업시간에 꼭 졸지않으면 엉뚱한 질문하고말이죠. 그러는데 선물을 들고와요. 그래 처음에는 “아, 싫다. 너무 싫다.” 그리고 어떤때는 몇일씩 풀어보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어떤때는 풀어보면 속에서 다 썩었어요. 썩는 그런 것이 있을수 있지않습니까. 인삼이라든지, 그다음에는 좀 미안합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또 들고와요. 그러면 미안한감이 들고 세 번만 들고오면 마음이 “제가 나를 진짜 좋아하나보구나” 그래서 선물은 자고로 사람의 마음을 풀어줍니다. 정말입니다. 여러분 원수같은 사람이라도 가서 선물 갖다주고 한번은 집어던질지 모릅니다. 두 번 또 가요. 세 번가서 일단한번 받으면 그다음에는 두 번째는 쉽게받습니다. 세 번만에 마음이 풀어지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캐고들어가면 가족들과의 말하자면 그런 관계가 막 얽혀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러하지만 이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 시간을 빌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데 지금 지지난주에 나온 기독신보에 보면 국민일보에도 그렇고 특집으로 다룬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교회안에서의 다단계판매입니다. 그런 것은 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해서 교인들이 지체들이 가지고온 다단계판매 물건에 의해서 부담을 느낀다는 이야기가 담임 목사에게까지 들어오고 어떤때는 너무 힘이든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온다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이 기독교적인 신앙윤리상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안됩니다. 그런데 가족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저는 동생들이 많이 있지만 저는 동생보고 우리 교회가 있어야되니까 너희집 잡히고 돈좀 얻어달라. 그런적은 있습니다. 지금은 집도 없지만 옛날에 집이 있을 때라도. “형 집잡히고 돈 얻어줘” 그러면 “나는 우리 집사람이 반대해. 우리는 아직 등기가 안되서” 나는 그렇게 안합니다. “안돼” 그러면 끝입니다. “꿈도꾸지 말아라. 그것은 안된다.” “왜? 나는 집보다도 너를 사랑하니까 안된다.“ 안해줍니다.
왜? 그것은 만약에 가지고 가서 문제를 일으켰을 경우에는 나도 스스로 회복할수 없고 자기도 책임질수 없습니다. “틀림없는데” “틀림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가서 얘기해” 안된다. 돈좀 꿔죠. 그러면 꿔주죠. “얼마” “50만원, 100만원, 뭐 그렇게 작은 돈을 꿔달라는 동생도 없지만 선 듯 꿔줍니다.” “뭐 꿔준적있습니다.” 안갚아도 신경쓰지 않아요. 딱 꿔줄 때 내 마음속에는 저것은 날아간 돈이다. 이생각을 하는것입니다. 갚으면 “아이고 공돈이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접어야합니다. 그렇게해서 분명하게 해야지 “뭐 우리 집사람이 안된다고해” “안돼” 그리고 끊어야합니다. 두세번만 끊으면 그 다음에는 그것이 자기 동생, 자기 형이 살아가는 삶의 원칙이라는 것을 알게되면 감정적으로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족들에게 잘해주라. 그런다고 남편몰래 가서 집 넘겨서 자기 친정식구들에게 넘겨주고 그렇게해서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집이 서너채가 되어서 한채쯤 동생이 갖다 먹어버려도 뭐 몇일 속쓰리다가 낫겠지, 남편도 충분히 이해할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러면 하세요. 남편이 괜찮다. 그러는데 뭘그래요. 그냥 주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캐들어가면 모두 경제적인 문제들이 개입되어있습니다. 거의 다 경제적인 문제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상처의 문제 아니면 경제적인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상처의 문제도 경제적인 문제가 많이 개입되어있고, 그러니까 그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지금 믿는 집안의 자식들이 자기 엄마가 교회에서 밥을 얻어먹고 옷을 얻어 입는데도 돌아보지 않는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그것은 왜그렇습니까? 왜 자기 엄마가 과부되었는데 그 자기 엄마를 돌아보지 않고 그 엄마가 교회에 가서 교회에서 보태준 돈으로 사는데 돌아보지 않는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무엇때문입니까? 한마디입니다. 돈이 아까워서입니다. 뭘 그렇게 생각을 많이하십니까. 돈이 아까워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하면 불신자보다도 더 악한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자기들은 말이죠. 먹을만큼 먹고 살고, 그렇게 살면서 쉽게 얘기해서 부모에게 자식에게 해주는것의 절반만 해줘보라는 것입니다. 그 부모에게 그럴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지금 과부 문제를 다루다가 그렇게 되었지만 사도는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불신자보다 악하니라“ 그랬잖아요. 예수의 복음은 믿는사람들일 경우에는 더더욱 안되는 것입니다. 그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부흥사도 많이 하시고 능력 많으신분이 자기 자식의 회심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해도 안되니까 오죽했으면 사석에서 그랬다지않습니까. ”우리 아들만 예수 믿어서 착한 사람 만들어주면 난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 모든 것을 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면 다른데 가서는 한번 설교하면 수천명이 뒤집어지고 회개하고 하나님 만나는 사람이 많은데, 집에와서 다른데가서 손얹고 안수기도 해주면 벌렁벌렁 나자빠지면서 그렇게 하면서 이 신비한 은혜를 체험하고 변화받고 그러는 사람도 많고 강팍한 심령들도 그저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 그저 회개가 터져나오고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만나고 그러는데 자기 가족들 앞에서는 그것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도 보세오. 사도바울이 자기 가족을 마음대로 할수있었습니까? 마음대로 할수있었습니까? 그것이 그렇게 쉽지않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훌륭한 신앙인이고, 깊이 있는 영적인 사람이었습니까? 자기 마음대로 할수있었습니까? 할수없었잖아요.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족을 위해서 많이 희생하고 물질적으로 가족들에게 마음을 열고 많이 섬긴다고해서 그것 받아서 쓰고 여러분에게는 너무 고마워서 예수 믿어주는 사람 있습니까? 그런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몇푼 도와주고 경제적으로 지원해주면서 이것 전해주는 것을 대가로 해서 저들이 예수 믿어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그들이 예수 안믿을 때는 본전 생각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든지, 안 믿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이고 그것은 이 돈이 그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내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이 그 강팍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믿고 내가 주께로부터 받았으니 내가 받은 것을 내 동기간들에게 그리고 내 가족들에게 베풀면서 산다.라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극단적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 가족밖에는 모릅니다. 그냥 주의 일도 안중에 없고, 고통받는 지체들도 없고 그냥 내자식 벌벌벌, 우리 부모님, 그다음에 우리 남편, 우리 아내, 전부다 다 자기에게 있어서 하나님보다도 소중한 사람인것처럼 그렇게 벌벌벌떨어요. 그런 사람들은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담대함을 갖지말라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님 안기뻐하십니다. 가족들을 사랑하라. 그랬지 가족밖에는 없는 인생을 살아라고 누가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보세요. 그렇게 해서 가족들을 돌아보면서 그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제일먼저 해결해야될 것은 뭐냐하면 경제적인 이득의 문제를 가지고 가족들과 다툰적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해야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늘 말씀드리지않습니까. 우리 엄마, 우리 아빠를 부모라고 생각하면 이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내 동기간들을 내 형제라고 생각하면 이런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선교지에 와서 내가 만난 그저 내가 사랑해야할 영혼들이라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 때문에 손해보는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도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손해나는 것보다도 더 많잖아요. 그렇죠. 그런것들을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가족들과 이런 이익의 문제를 가지고 다투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돈을 잘 벌었으면 좋겠습니다. 뭐 너무 깜짝 놀랄만한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생계에 궁핍함이 없이 좀, 넉넉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보다는 모두 좀 다 잘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야지 밥이라도 한 그릇 얻어먹을 것 아닙니까. 밥 얻어먹으면서도 “저 주머니에 돈이 있나?“ 그렇게 되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고 그것을 그냥 움켜쥐고 살지말고, 부모가 어려우면 부모님 도와드리고 동기간들이 어려우면 여러분보다 훨씬 어려우면 동기간들을 돕고,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섬기라고 주신 물질은 움켜쥐고 있으면 다 녹아버리고 그리고 섬기면 많이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손해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보세요.
제가 아는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무슨 선교헌금인가를 위해서 헌신하는데 어느 시간에 아주 선명한 마음속에 이만한 액수를 헌금하면 참좋겠다. 하면서 기쁨이 확 오더래요. 그래서 이제 열심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한 3개월안에 그만큼 헌금할수 있는 금액을 채워주시더래요. 그래서 이제 그것을 다음달 초쯤에는 그 헌금을 낼수있겠구나. 꽤큰 액수였다.그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돈이 몰리는 일이 시작하면서 그것이 시험이죠. 그리고나니까 처음에 자기가 하나님 앞에 드리고싶었으면, 그분의 고백으로는 그것이 성령이 정해주신 금액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까지는 표현하고싶지 않지만 하여튼 자기는 성령께서 자기에게 그렇게 일러주셨다고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닦아섰데요. 자기가 급하니까. 그리고 “애이, 목사님이 늘 설교하시는데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라 그러셨는데 내가 이렇게 많은 돈을 헌금하고 나는 선교헌금을 얼마했다. 이러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자기 합리화입니다. 그렇게 써버리고 그러니까 어려운 형편이 풀렸죠. 그런데 그리고나서 1년지나고나서 결산을 해보니까 자기가 헌금해서 절약한돈 보다는 주식투자해서 날린돈이 훨씬더 많더라는 것이었습니다. 헌금 잘하면 주식이 오르고 성공한다는 것을 가르쳐줄려고 여러분들에게 이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시죠.
그러니까 움켜쥔다고해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로 흩어준다고 해서 사라지는 돈이 아닙니다. 그렇게살면 안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믿지않는 가족에게는 믿지 않는 가족에게 그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더많이 누리면서 쓸수있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부모님을 돌아보고 그리고 동기간들을 돌아보고 이렇게 하면서 여러분들이 산 그 비용은 그것은 지출이 아니라. 선교헌금입니다. 믿지않는 가족들을 위해서 그렇게 선교헌금할 때 하나님께서 많이 갚아주십니다.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아이고, 우리 형은 예수 잘 믿으니까 도와줄 필요가 별로 없겠네요. 아니,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것이지 돈가지고 사는것입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믿는 형, 믿는 동생을 물질로 어려울 때 도와주면 그것은 성도를 섬긴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뭐라그랬습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되 믿음의 가족들에게 더욱 할지니라.” 그랬습니다. 믿음의 가족들에게 더 많이 베풀면서 살아야합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동기간 뿐 아니라. 믿음의 형제니까 더더욱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말 이렇게 우리에게 가족들을 돌아보면서 살도록 명령해주셨는데 사소한 이기심으로 충돌할때가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우리는 믿는 사람들로서 절대로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 어떤 교인이 그런 간증을 한번 했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은 아니었습니다. 벌써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이런 비슷한 설교를 듣고, 가족들에게 잘못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찔리는데 가족들에게 쥐뿔이나 도와줄 것이 있어야죠. 남편은 가난한 공무원이고, 그저 박봉에 그저 간신히 바듯하게 생활하는데 어느 날 이런 설교를 들었는데 시골에서 가난하게 사는 자기 동생, 그리고 그 동생의 아내가 너무 불쌍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얘기했더니 아내의 마음이 감동이 되어서 자기네 생활비중 부식비를 쪼개서 그때는 다들 어렵게 살때니까 겨울이면 내복이 꼭 필요했잖아요. 내복을 뜨뜻한 것을 두벌사서 묶어서 소포로 붙이면서 못쓰는 글씨로 깨알같이 써서 평소에 피붙이라고 하면서 돌아보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아내도 편지한장 써서 보냈더니 이 동생이 그것을 받아보더니 깜짝 놀란 것입니다. 이것이 수십년을 형제로서 같이 살았는데 이 형의 씨알머리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말이지. 형하고 형수하고 약을 먹었는지 총에 맞았는지 뭐 보따리에가 깨알같이 참회의 편지를 써서 보낸 것입니다. 처음에는 불안하다가 나중에 형에게 연락을 해보니까 그래도 인간이니까 잘 받았다고 연락을 했더니 형, 형수가 그렇게 좋아하면서 니 생각 늘 하는데 우리가 살림이 어려워서 너를 돕지 못하는데 시골에서 날도 추운데 그거라도 좀 따뜻하게 입고 지내라. 그리고 형이 울먹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생이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고추 농사를 짓는 사람인데 뭐 형에게 보내줄 것이 있어야지. 밭에 나가보니까 고추 말려놓은 것 밖에 없어요. 그래서 야, 담아라. 그래가지고 자기도 그렇게 준 적이 없었는데 큰 부대로 두 개를 담아서 서울로 보냈는데 고추가 무슨 30근이 왔데나, 20근이 왔는데 그 때에 1976년도인가 7년도 였는데 고추 한 근에 그때에 일반 회사 다니는 월급이 10만원쯤 할 때에 고추 한 근에 12000원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것이 날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동네사람들에게 싸게파니까 동네사람들은 인심사고 그렇게해서 돈을 챙겼더니 내 복 사준 값의 서너배는 되더라. 이렇게 장사하라는 이야기를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건이 그렇게 오고갔지만 정확하게 1976년도인가, 77년도입니다. 그래서 시내에서 갈비탕집에 가면 김치를 안주던 때가 있었습니다. 단무지를 주고, 김치를 먹을려면 돈을 내라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춧가루가 귀하던 시절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물건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마음이 오가면서 물질을 헐고 털어버리니까 마음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이 형으로 느껴지고 동생이 동생으로 느껴진 것입니다. 제일 희망없는 집안이 결혼해서 뭐 돈몇푼 남은 것 가지고 대판거리 싸우고 계하다가 깨뜨려져서 싸우고 말이죠. 의절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가장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얘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기간들에게 돈은 꿔줬는데 떼먹힐 것 같으면 먼저 찾아가요. 그래서 “줄게” 그리고 줘버리세요.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너무 돈이 없어서 도저히 갚을 희망이 없어요. 그러면 찾아가서 “너 가져라.” 그리고 좀 없는 말이기는 하지만 “줄때도 받을생각은 안했다.” 속은 쓰리지만. 가족관계를 떠나서 이 세상에 불신자들이 어디서 사랑을 받습니까. 어디에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 전에 여러분들이 한번 분에 넘치는 사랑, 분에 넘치는 관용, 그리고 얼토당토 않는 그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받아본적이 있었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감격적일수가 없습니다. 그렇죠. 아무 쓸모없는 인간인데, 주님의 사랑을 우리같은 사람들을 받아주시고 집떠나 탕자처럼 모두 말아먹고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며 산 날, 밖에 없었는데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고 맞아주시지 않았습니까. 그 주님께 진 빚을 생각하면 우리의 물질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귀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달에 다 퍼주고 다음달에 형네 집에 쌀 얻으러 가라는 이야기 아닙니다. 규모있게 살면 도와줄 여유가 생길 수 있습니다. 많으면 많고, 적으면 적게, 그렇게 하면서 정말 가지의 가족들의 육적인 필요를 돌아보고, 가족들이 만약에 병들었다든지 그럴 경우에는 더없이 예수를 알릴 좋은 기회가 아닙니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 제 친구한 사람이 있었는데 장가도 못하고 마흔이 좀 넘어서 암으로 죽었습니다. 어느 날 직장을 다니는데 찾아왔습니다. "야, 나 너에게 부탁이 하나있다.“ 자존심이 아주 굉장히 강한 친구였습니다. 뭐 곧 손가락을 죽어도 누구에게 십원한장 꿔달라는 소리를 못하는 그런 형제였는데 예수도 안 믿는 형제였습니다. 찾아왔어요. ”왜 그러냐?“ 그러니까 ”야, 우리집 쫓겨나게 생겼다. 월세를 못내서 3일 안에 쫓겨난다. 어떡하면 좋겠니?“ 가난한 직장 샐러리멘이 그 돈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래서 일단 ”너무 걱정하지 말라. 길이 없겠냐?“ 그리고 열심히해서 대부를 얻어서 그집에 가서 그 쫓겨나는 그 집을 달동네에 월세를 하나 얻어서 그래서 보증금을 지불해주고 첫달치 월세를 내줬나 그랬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금액도 얼마 안되고 나중에 다 값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어머니가 그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도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결국은 제가 그집에 가서 그 어머니 병문안 매일가서 기도해드리고 액자까지 써서 침상에다 걸어두고 한 석달을 따라다니고 마지막에는 돌아가셨을 때 3일을 휴가내서 제가 장례까지 다 치루어주었습니다. 결국은 주님을 영접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도 나중에 주님을 영접했고, 후에는 멀리 하나님의 나라로 가버렸지만
무엇인가 희생을 할 때 사람들은 놀랍게 마음을 엽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그렇게 너그러운 대접을 받아본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싫은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 복음을 잘못받아들이고 있는 그 사람들이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살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 사랑 가지고
예수 사랑 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들 실망하도다.
아프기라도 가서 열심히 수요예배도 좀 빠져도 되고 금요철야 기도 빠져도 됩니다. 가서 열심히 거기에서 예배드리고 거기에서 기도하면서 헌신적으로 도와줘야 합니다. 그래야지 마음의 문을 엽니다. 그리고 마지막 우리 손 잡고 주님 영접합니다. 그런 일들을 위해서 보내준 것입니다. 우리 가족들이 잘나가고 도움이라고 줄수 있을 때는 우리의 가족들이 많이 그에게 매달렸지만 정말 그가 필요할 때 그 옆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 그것이 예수 사랑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어려움에 처하면 도와줄 기회라고 생각하고 곤궁하면 섬길 수 있는 달란트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힘닿는 것보다 넘치게 살수는 없지마 힘닿는 대로 돕고, 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뿌리면 반드시 열매를 거두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내가 내 가족들을 섬기기 위해서 본 손해를 주님이 오히려 좀더 갚아주시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나는 조금 불편하고 그리고 우리 가족들은 좀더 편하게 지낼수있도록 그렇게 배려하면서 살아가는 그러면서도 하나도 손해난 듯한 박탈감을 느끼지 않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그 사랑과 위로를 만족을 삼으면서 살아가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가족을 돌아보라 (2) 영혼의 구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특히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니라.”
가정의 복음화를 위해서 그 이전에 먼저 선결되어야 할 일이 가족들을 돌아보는 일이다. 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이 본문을 가지고 첫 번째로 가족들의 육적인 형편을 돌아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선 우리는 육적인 형편을 잘 돌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보고 그리고 자신이 섬길 수 있는 한 힘껏 그들을 섬겨서 먼저 눈앞에 있는 작은 이익보다는 그들을 더 많이 사랑한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 자신이 삶으로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결국 알고 보면 가족들을 결국 물질로 잘 섬기고 물질만이 아니라 심정적으로 그들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애쓰고 무엇인가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그러한 섬김을 다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사실은 궁핍하거나 시간이 없거나 바쁘거나 그렇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경제적인 이익의 문제의 날카로운 대립이 가족들을 이렇게 잘 돌아보지 못하게 하는 그런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는 가족들과 화해하지 못하는 그 불화의 마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 뭐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자기를 편해 해 온 어머니에 대한 미움 그 다음에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오빠나 언니에 대한 미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제일 먼저 여러분들이 그 물질적인 문제에 있어서 가족을 향해서 열려진 사람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가족과의 관계에서의 복음전도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정말 인격정도 입니다. 어느 날 술 먹고 그 망난이 같이 생활하는 남편한테 가서 철야기도 시간에 영역 잔뜩 받아가지고 가서 술 먹고 골아 떨어져 자는 남편머리에다가 손을 얹고 안수 기도를 하면 180도 훨떡 뒤집어져서 교회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거의 코메디에 가까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가까이 있는 가족들은 인격적인 전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잘못된 삶을 살고 있고 여러분들을 박해한다고 하더라도 쉽게 대결구도로 탁 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예화) 누가 그러더군요. 자기 남편에게 자기가 그렇게 눈물로 전도하고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하여튼 지긋지긋하게 말을 안 듣고 자기를 괴롭히고 핍박하고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 저 신발의 먼지를 털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러 어느 동리에 들여보냈는데 그 다음에 너무너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거기서 신발을 털고 나오라는 것이죠.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전파해도 듣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그 동네는 특별히 손보시겠다. 그런 얘기 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말씀을 듣고 하도 기가 막혀서 그랬습니다. 세상에 희생을 하면 얼마나 했을까? 참았으면 얼마나 참았을까? 섬겼으면 얼마나 섬겼을까? 그게 자기 남편 같이 살면서 몇 번 교회가자 그러고 조금 잘해 보았겠죠. 몇 달. 그렇다고 남편이 벗나간다고 신발을 들고 먼지를 털면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쉽게 대결 구도로 몰고 가는 것 이것도 하나의 성품의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절대로 가족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전도는 그렇게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나 같이 사는 가족이 정말 패륜적인 삶을 살고 매일 와서 여러분들을 작대기로 들고 패면서 핍박한다고 하더라도 아 저 자식은 사탄의 자식이다. ....... 그렇게 하고 그 사람을 사단의 사주를 받는 마귀의 사촌쯤이라고 생각을 하면 그러고 마귀와 늘 짝하고 다니는 그렇게 정도로 생각을 해 버리고 나면 그러면 그게 인격적인 전도가 되겠습니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엊그제도 제가 아는 어느 자매하고 통화를 했는데 시집가서 애를 났다고 이제 전화 연락이 됐습니다. 그러더닌 이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옛날에 어느 집회에 와서 자기가 그 집회에 참석을 했는데 너희 젊은 자매들 처녀 적에 펄펄 뛰는 신앙 난 안 믿는다. 애를 둘만 나 봐라. 그것도 연년생으로 그때 네 믿음이 그 믿음이다. 그랬는데 둘은커녕 하나를 났는데 그 말이 그렇게 새록새록 다가오더랍니다. 진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더랍니다. 그게 진짜 우리의 믿음을 입증하는 것은 결국은 평안할 때가 아니라 섬김이 필요하고 희생이 필요할 때입니다. 많이 섬겨도 사람들이 몰라줄 때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죠.
저는 태생적으로 제가 예수 믿고 나서 정말 힘들었던 제 자신과의 싸움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유리그릇 같았습니다. 그게 뭐 맑고 순결하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게 잘 깨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누구 자리를 건너서 너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 그러더라. 아니면 네가 뭐 잘못한다고 어떤 사람이 그렇게 너를 비난하더라. 그런 이야기 들으면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잤습니다. 그러고는 새벽에 그 집에 달려가서 내가 잘못했으면 용서를 빌든지 아니면 저가 잘못했으면 사과를 받아내든지 둘 중에 하나하고 어떻게 풀어야지만 내가 밥도 먹고 생활을 하지 진짜 거의 생활을 하기 힘들 정도로 마음이 유리그릇 같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요즈음은 뭐 강퍅해져서 누가 뭐라 그래도 마음 아프기도 하지만 그래도 뭐 꾹 참기도 하고 그런 것도 배웠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힘듭니다.
한번은 가까이 하는 동역자들과 함께 모여서 아침을 함께 먹는데 한사람이 아주 그렇게 나에 대해서 오해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년 육 개월 동안을 기도를 했습니다. 마음이 아파서 용서하는데 일년 육 개월 걸렸습니다. 그리고 진짜 용서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형제처럼 잘 지내는데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제 마음속을 얼마나 아픈지 내 본심은 그게 아닌데 저 사람을 왜 나를 그렇게 생각할까? 너무너무 아팠습니다. 그런데 대개 웬만하면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즉시 평강을 주시는데 하여튼 참 너무 아팠습니다. 일년 육 개월 동안 그랬습니다. 뭐 매일 견디기 힘들 정도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팠습니다. 뭐 사람마다 말의 실수가 있으니 잘못 들을 수도 있습니다. 당장 달려가서 한판 하고 싶은데 그것도 뭐 외국에 있으니 비행기 값 내고 갈 수도 없고 그러더니 한 일년 반 정도 지나니까 마음을 하나님께서 다 이렇게 풀어 주셨습니다.
이게 참 어렵습니다. 가족들과의 관계는 이런 것들을 모두 나누면서 사는 것이 가족들과의 관계거든요. 그래서 사실은 너나할 것 없이 믿음생활 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잠재 적으로 신앙에 있어서는 가족들과 그 관계를 회피하고 싶은 마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조금씩은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안 그렇다면 정말 훌륭합니다. 두 가지지 점에서 그렇겠지요. 신앙이 워낙 좋기 때문에 정면으로 그 가족들과 맞서서 나처럼 안 살면 사람도 아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워낙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 것에 개의치 않고 난 나대로다 그럴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에게 그런 것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한번 질문해 볼까요? 여러분들의 안 믿는 남편이나 뭐 남편에게 늘 교회 갑시다. 그런 말을 하지만은 여러분 가족들하고 진지하게 한번 신앙의 이야기를 해 본적 있습니까? 믿지 않는 가족들하고. 참 쉽지 않습니다. 그걸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는 조금씩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모든 것이 인격적인 관계를 타고 흘러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집안에서 인증해 주는 신앙이 교회에서 인증해 주는 신앙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일주일에 한번 보지만 그리고 집에서는 매일 보는데 그 엄마가 딸을 볼 때에 우리 애 교회 나가서 완전히 새사람 됐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진짜 신빙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끔 보면 교회에서 신앙생활 할 때에는 백점에 가까운데 집에 가서는 사십 점도 안 되는 충격적인 발견을 가끔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그렇게 은혜 많이 받은 형제가 그렇게 집에 가서 패역 할 수가 있는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많이 깨달은 그 지체가 집에 가서 그럴 수가 있는가?’ 그런데 그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가족들에게 인증 받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복음이 흘려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는 쉽게 대결 구도로 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무슨 이야기냐 하면 쉽게 타협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해를 하지 마십시오. 타협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쉽게 대결 구도로 딱 들어가서 적대적인 마음을 갖게 되면 그때는 복음 전도가 힘들어 지는 것이라는 거죠. 거의 힘들어 집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그렇게 지속적으로 관계를 가지면서 그 신앙의 영향력이 흘러들어 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평소에는 언니가 와서 늘 예수 믿어라 그러는데 그렇게 가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고 또 시집에서는 불교 믿는다고 그러니까 새삼스럽게 그 반대를 무릅쓰고 가서 무슨 복을 받을까? 그런 생각도 하고 그렇게 삽니다. 그런데 늘 와서 그렇게 섬기고, 희생적이고 사랑이 많고, 늘 마음속에 평화가 흐르고 넉넉합니다.
그런데 시련을 만납니다. 그러고는 마음에 막 풍랑이 일어납니다. 그러고 인간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하는 혹독한 정체성의 위기를 만납니다. 그랬을 때 뭐가 생각이 나냐 하면 그 평안한 언니의 얼굴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면서 그렇게 평안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받기만 했지 베풀어 준 것이 없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런 삶을 살까? 그러면서 그런 삶 배후에 있는 그런 삶을 살게 하는 궁극적인 힘이 뭘까? 이런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이제 신앙의 관심이 촉발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시련과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말하자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인을 생각하고 그런 삶을 살게 하는 그 내면의 실제에 대해서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생각을 하게끔 만들어 준다고 하는 것이 그게 한 순간에 보여주는 희생적인 한번의 행동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에 축구하잖아요. “대한민국” 그러면서 박수 치고 어느 교회에서는 아예 본당에다가 틀어 놓고 한 꼴 넣을 때 마다 통성기도 한다고 그러더군요. 그런데 다 좋습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사람의 생각이 다 다르니까. 그냥 참 정말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한 꼴이 덜어가니 막 펑펑 울어요. 그런데 사실을 저도 막 이렇게 치 받치더라구요. 어떻게 그런 역전 드라마가 있습니까? 정말 대단합니다. 어제 우리 열린 공간이 뒤집어졌다는 것 아닙니까? 텔레비전을 보고. 그런데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눈물을 펑펑 흘리고 태극기를 두르고 막 그릅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가면 쓰레기가 25톤이 나온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속으로 ‘그 왜 그러나 펑펑 울고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그랬으면 쓰레기도 쓰레기 그러고 주어 나가야지.’ 그 도대체 왜국이 삶으로 좀 구체화 된 왜국이어야 되지 않습니까? 뭘 좀 반듯하게 살아가서 나라에 보탬이 되는 삶을 좀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것이 있는 가운데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대한민국을 외쳐야지 그런 건 없고 그렇게 외치는 것은 하나의 패닉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은 어쩐지 심정적인 오늘날의 국민들의 공허감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 그리고 주님께 은혜를 받았다. 그러면 그것이 좀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 속에 좀 파고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좀 사랑하고 희생을 하는데 힘이 들면 거기서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베푸신 그 희생을 기억하고 이러면서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똑같은 원리가 우리 가족들에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족들 때문에 가족들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도저히 엉터리 억지 부리는 가족에게 경제적인 부담까지 지면서 그들을 돕고 그렇게 하는 것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가족들의 인품이나 가족들의 자기를 향한 베품을 보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가족이라고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가족이라고 보지 말고 그 사람들을 내가 사랑해야 할 선교지의 영혼들이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육적인 형편들 돌아보는 그런 크리스찬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아보아야 할 것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육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럼 뭐냐 하면 영적인 것들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가족들의 영적인 것들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선 첫째는 구원의 문제를 돌아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풍성한 삶의 문제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우선 구원의 문제는 얼마나 심각합니까? 만약에 구원 받지 못했다면 그러면 정말 그 영혼이 어디로 가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족의 장래식에 가서 그 영혼이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죽었다면 죽는 그 영혼의 울부짖는 소리를 우리가 영적으로 만약에 명백하게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들이 누구를 원망하며 죽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누구를 원망하며 죽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화) 저희 할아버지가 제 나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제 나이가 일곱 살인가 그랬습니다. 할아버지 돌아가시는 광경을 제가 다 보았는데......그리고 이제 저희 큰 고모님도 계시는 큰 고모님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살아생전에 언젠가 그 회개하는 마음으로 저한테 그런 간증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가(저에게는 할아버지입니다.) 시골에 계시는데 어느 날. 멀리 떨어진 시골이니까 그렇게 찾아갈 수 있는 상항이 아니었었겠지요. 그 당시에 버스로 한 열 시간 가는 거리이니까. 그런데 며칠 동안 계속해서 꿈을 꾸는데 당신은 그게 하나님이 꾸게 해준 꿈이라고 아주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계속해서 넌 편지를 쓰라 네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라. 그러고는 계속 편지 쓰는 꿈을 꾸게 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급하게 그렇게 그게 아주 여러 날 계속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너희 아버지에게도 복음을 전하라. 예수를 믿게 하라. 그런데 뭐 다들 벌어먹고 살기 바쁜 상항이고 뭐 병세가 안 좋으시기는 했지만 그러나 늘 그러셨으니까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시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셨습니다. 예수 안 믿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전 물론 주일 학교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아버님 그렇게 돌아가시고 나서 평생을 살면서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때에는 그것이 그렇게 마음의 눌림이 된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나보고 너희 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하라. 하나님이 데려 가시기 전에 마지막 한번의 기회를 주시고 그 기회를 위해서 자기를 택하셨는데 자기가 게을러서 그기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아버지가 지옥에 가셨다. 라고 하는 그 짐을 신앙이 있는 동안에는 늘 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저도 그 때 주일 학교 다녔는데 하나님께서는 저한테는 그런 편지를 안 쓰셨을까요. 그러니까 먼저 은혜 받은 사람들에게 가족을 위한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들이 가족들의 영혼을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그 아버님, 혹은 시 아버지, 어머님 혹은 동생, 더군다나 한집에서 같이 사는 할머니, 예수 믿지 않고 돌아가시면 그 마음이 얼마나 비통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복음에 의하면 복음으로 보자면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지옥 밖에는 기다리는 것이 없고 정말 절망적인 하나님의 심판 이외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고자 우리를 그들의 가족인데 그 가족들 중에서 우리를 먼저 믿게 만드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영혼에 부담도 갖기를 원하시고 그랬을 텐데 그런데 우리들은 그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증거 없이 가족들이 죽었을 때 사실 그것은 그 얼마나 비참한 것이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결국은 마지막에 앞에 자르고 뒤에 자르고 다 뛰고 나면 마지막에 예수 믿는 것과 마지막에 죽는 것밖에는 남는 것이 없는데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만약에 하나님도 모르고 이 세상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다. 그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가슴 아픈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상가 집에 가도 믿지 않고 죽은 사람 집에 가서는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 뭐 어떻게 하겠습니까? 왜 안 믿고 돌아가시게 내버려 두었냐? 고 책임추궁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무슨 좋은 이야기를 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누구를 어떻게 데려 가시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 돌아가실지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금주에 우리 교회에서도 모두 연세 드신 분들이고 숙환에 계신 분들이기는 했지만 세분이나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데려 가시는 것이 우리의 예증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데려 가시잖아요. 금방 죽을 것 같은 사람이 오래 사는가 하면 오래 살 것 같은 사람이 어느 날 금방 죽어서 그래서 고인이 되어 버리는 일은 언제나 있고 우리들도 또 예외가 아니거든요.
그러면 복음을 전하고 영혼들을 구원받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희망사항일 뿐이지 실제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러한 모든 일들을 너무 가슴 아픈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가족들의 영혼에 대한 깊은 부담을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그 영혼들이 구원 받지 못했다면 그 영혼들을 위해서 정말 무엇이든지 해서 내 가족들이 구원 받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영혼의 부담이 없다면 우리는 사실은 누군가에게 그런 부담을 주면서 중보기도를 받아야 할 그런 처지에 있는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서 애타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서 애타도록 간절히 빌고 그렇게 몸부림치도록 주님 앞에 매달리고 기도해서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야 되지 않습니까? 물론 눈물로 우리가 많이 기도해도 결국은 그 완악함과 강퍅함이 극에 다다릅니다. 결국은 주님을 안 믿고 외면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 주님 앞에 할 말은 있지 않습니까? 힘을 다 하고 애를 써서 우리 가족의 영혼을 위해서 가슴 아파하고 눈물로 기도하고 몸부림 쳤지만 그러나 끝까지 복음을 외면하고 죽었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태만해서 우리들이 그 일에 게을렀고 그리고 가족들이 지옥에 갔다고 할 것 같다면 우리는 정말 그 가족에게 해서는 안 될 몹쓸 짓을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뭔가 선한 일이 안 한 것이 아니라 해서는 안 될 아주 나쁜 일을 그에게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힘을 다해서 어떡하든지 애를 씁니다. 물론 우리 가족들의 마음이 때로는 너무 굳어지고, 너무 강퍅하고 때로는 너무나 오랜 세월을 신앙과는 상관이 없는 타종교나 혹은 이방신에 매어서 살았기 때문에 쉽게 복음이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그러한 상태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힘을 다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시간이 있는 대로 그들에게 참 예수의 복음을 전해서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과 그리고 우리가 죄인인 것과 그 죄인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또 다시 살아나신 것과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이 복음적인 진리를 그들에게 전하려고 애를 써야 되는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한번 전하고 나면 두 번 조롱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우리들이 가족들로부터 멸시를 당하고 모욕을 받고 혹은 우리를 우습게 조롱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복음을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전하고 있는 동안에는 엄마의 딸도 아니고 아빠의 아들도 아닙니다. 남편이나 아내도 아니고 동기간도 아닙니다. 그럼 누구냐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메신저로서 거기 서 있는 것입니다.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열심히 그를 사랑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많이 베풀고 희생하고 그렇게 해서 가족들에게 사랑을 많이 베풀고 그 영혼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억 눌을 수 없는 그 사랑을 가지고 영혼을 보니까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불쌍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살려 달라고 간절히 빌고 기회가 주어 질 때 어느 한 순간에 정색을 하고 앉아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그렇게 간절히 전할 때
예수사랑 가지고 예수사랑 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들 실망하겠네.
그러고 간절히 전하고 결과를 주님께 맡깁니다. 안되면 기도하다 또 다시 도전하고 성공하면 영혼을 구원하니 기쁨이요. 멸시와 핍박을 받으면 우리에게 상급이 있으니 하나님 앞에 기쁜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 가정을 선교지라고 생각하고 오래 참고 인내하면서 그 가족들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런 깊은 몸부림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 일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사명입니다. 쉬우면 은혜 받은 여러분들에게 그런 사명을 주셨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가족들의 영혼에 대해서 할 의무를 못하고 있는 여러분의 전도자로서의 불충함을 깊이 느끼고 가슴 아파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은혜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은혜 받지 않았다면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결코 가슴에 찔릴 수 없습니다. 그 인간들 지옥 가든지 말든지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았다면 말씀에 깊이 찔리면서 물론 그들이 강퍅하지만 내가 더 많이 기도했다면 내가 더 많이 이기심을 포기하고, 그들을 더 많이 섬기고 예수 사랑 나타냈다면 내가 좀 더 온유한 사람이 되어서 내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단정한 삶을 살고 평온을 누리면서 살았더라면 저 사람들이 저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하면서 여러분들은 뼈저리게 후회가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여러분들은 주님을 잘 믿어서 아버지 하나님께로 갔다고 칩시다. 그 때 분명히 주님이 너희엄마, 너희아빠는 그리고 네 동생은 네 동서는 혹은 네 형은 네 아들은 네 자녀는 하나님이 물어 보실 때 우리 가족 모두 다 잃어버리고 우리 혼자 하나님 앞에 섰다면 우리는 무슨 면목으로 주님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가족들을 구원하고 전도하라고 남들이 모르는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고 힘을 내면 그것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하리라고 생각하시면서 이것저것 간구할 때 다른 사람 기도 안 들어 주셔도 우리기도 들어 주시고 그러면서 이제껏 우리를 인도해 오신 분이 바로 하나님 아니십니까? 그 때에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한 것이 별로 없지만 가족들에게 정말 한 게 있습니까?
오늘 아침에도 기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야! 이렇게 살다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갈까? 한 게 뭐 있나? 아주 너무 마음이 비관 했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 매이나
우리가 낯설고 물 설은 동네에 가서 교회를 세우지는 못해도 언어가 다르고 풍습이 다른 곳에 훈련까지 받고 가서 피 뿌리며 순교하는 선교사의 삶은 살지는 못해도 주님이 은혜를 주셔서 함께 있게 하신 우리의 가족 얼굴만 보면 마주 보이는 내 가족들에게 예수의 사랑 전하고 살지 않으면 그래서 그들이 참 복음을 듣지 못해서 그래서 그들이 누구도 울어 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 수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불 충성 때문에 지옥으로 갔다면 벼랑에 서 있는 가족들의 등을 밀어서 불속에 던진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부산에 가면 자살 바위라는 것이 있습니다. 몇 번 갔는데 진짜 거기에는 심리적으로 자살하고 싶은 충동이 생길정도로 그렇게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보면 다시 한번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나오는 문구가 써 있습니다. 자살하지 말라는 권고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떨어지면 참 자살하기 좋은 곳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면밀히 관찰을 했는데 뛰어내릴 때에는 시야에 바다가 들어옵니다. 그래서 뛰어 내릴 때에는 바다에 뛰어 내릴 것 같은 착각을 느끼는데 실제로 투신하면 바위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동네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래서 거기서 뛰어내린 사람치고 자살이 미수에 그친 사람들이 없습니다. 모두 완수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법에 의하면 옆에 있는데 한 사람이 자살하려고 뛰어 내리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뛰어 내리지 않을 경우에 삼년 이하의 징역에 처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해야 할 의무를 다 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가족들이 영혼이 아직 구원 받지 못했는데 우리들이 그 가족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가족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지만 그 가족의 영혼을 보면서 믿지 않고 죽었을 때의 그 미래를 생각하면서 가슴 아파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될 일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주님이 이미 알고 계시지만 마치 주님이 모르시는 것처럼 주님 앞에 그 이름을 부르며 우리엄마 우리아빠를 속히 구원해 달라고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그들이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 신자가 될 수 있다면 내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노라고 그렇게 자기를 전부 걸고 그 영혼의 생명을 주심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 스스로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사도 맡기지 않은 일을 맡기셨는데 그것은 바로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해서 그들을 구원하는 그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이면에는 항상 주님 앞에 영혼의 가치를 알고 주님을 믿지 않고 죽는 그 하나님 없는 죽음의 위험을 깊이 직시했기 때문에 헌신적으로 수고한 그러한 복음 전도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론 오랫동안 죄악 가운데 살아온 우리의 가족들의 영혼이 강퍅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해도 가족들이 그 기도에 대해서 본을 보여주는 그 냉소 적인 반응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오그라들게 만들어 버릴 때가 너무나 많고 그래서 구원 받지 못한 가족들은 골리앗처럼 보이고 자신은 물맷돌 하나 들고 있는 다윗처럼 느껴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가서 열심히 예수의 사랑을 전하면 그렇게 눈물 흘리고 회개도 잘하고 그리고 설교하면 그들이 예수 믿고 그들이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게 되었다고 회심의 간증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우리의 가족들의 심장은 무엇으로 만들어 졌는지 정말 강퍅합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우리의 가족의 영혼을 구원하기에는 내가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 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소중한 것은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가족들의 영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염려하면서 신앙생활해서 나 하나의 신앙생활이 나 하나의 생명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족의 생명이 달린 것이라고 생각하고 신앙생활 하며 가족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도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성화의 커다란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족이 강퍅하고 그 가족이 완악하기는 하지만 완악한 것보다 더 많이 우리의 마음이 가족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녹고 우리의 가족들이 죄악 되고 하나님 앞에 완고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 사람들의 완고한 것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이 값 절이나 주님께 더 순종하고 그리고 어떻게 해서 어떻게 우리를 나추든지 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가족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만을 갈망한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역사합니다.
여러분들은 심장이 심령이 무슨 연약한 사람들이 아니라 무슨 연한 고깃살 같은 사람들이었습니까? 강퍅하기라면 우리도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그렇게 완고하고 못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믿고 이렇게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구원 받지 못한 가족들의 영혼을 보면서 눈물 흘리는 그 눈물은 정말 아름다운 눈물입니다. 그가 깨어 있지 않고는 그렇게 영혼을 위해서 애달프게 울 수 없습니다. 더욱이 매일매일 마주치는 가족을 보면서 그렇게 아파하고 눈물을 흘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해야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은혜 받기만 하면 이거 우리 가족들에게 더 많이 섬기라고 주신 하나님의 은혜다. 주님이 물질의 복을 주시면 이 중에 상당 부분은 하나님이 베풀라고 주신 것이다. 그래서 정말 베풀어야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주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죄인들을 용납하고 불쌍히 여기시는 그 큰 용서가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사랑을 받을 때가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 제가 한번 물어 보겠습니다. 정말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구나! 누가 여러분들을 사랑해 주어서 그렇게 감동 받아 본적 있습니까? 진짜 없네. 그러데 또 줘 본적은 있습니까? 다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노래만 불러 주면 뭘 해요. 진짜 사랑해 주어야죠. 노래 불러주는 것은 힘이 별로 안 들지만 진짜 사랑해 주는 것은 얼마나 힘들어요. 그래서 저는 그렇게 정의 합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가시나무를 뜨겁게 끌어안는 것이다. 이게 사랑입니다. 한 뭐 10센치씩 돋아난 팔레스타인의 그 가시가 커다란 공처럼 뒤엉켜져 있는데 그걸 한번 맨몸으로 뜨겁게 끌어안고 볼을 부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번 끌어안고 나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피투성이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사랑입니다.
(예화) 요즈음 유행하는 소설. 물고기를 주제로 하는 소설이 많이 유행 했잖아요. 홍어, 연어, 가시고기, 그러잖아요. 그런데 가시고기가 어디서 나온 것이냐 하면 그 알을 놔 놓으면 이제 수정난이 되어서 알들이 깨어 날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걸 어미는 어디로 도망을 가 버리고 아비가 거기서 알들이 부화 할 때까지 십 몇 칠이 걸린다는데 거기서 그 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알을 지키는데 그냥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 자연의 위치가 참 신묘 막clr 합니다. 이 부활을 하기 위해서는 하도 짐승들이 많으니까 그 물고기들이 많이 와서 먹으니까 돌 틈 같은 데에다가 놓아두고 그리고 거기서 그걸 지키는데 적군이 오나 요러고. 뭐 가시고기가 별로 커지도 않답니다. 그게 뭐 적과 싸워 얼마나 힘이 있겠습니까만은 그래도 지키는데 그냥 그렇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새끼를 거기다 놔 놓고 꼬박 팔일 내지 십 며칠 동안을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이 지느러미 질을 해 가지고 그 속에 있는 산소가 떨어진 물을 끌어내고 새 물을 들여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쉬지 않고 그 한자리에서 그 한자리에서 그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팔일인가 십 며칠 동안을 그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그마한 고기들이 이제 깨어납니다. 깨어나는데 깨어나면 또 못나오게 하느라고 또 날개 짓을 하는 것입니다. 나오면 다 잡혀 먹으니까. 그런데 팔일 내지 십 며칠 동안에 그렇게 미친 듯이 24시간 쉬지 않고 지느러미 질을 하던 끝에 아비는 빼짝 마르고 지느러미는 전부 다 너덜너덜하게 걸레가 되는 것입니다. 다 너덜너덜하게 떨어져서. 그래서 그 타임이 그 고기들이 이제 상당히 어느 정도 커서 자기 힘으로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 딱 되면 이 가시고기 아버지가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쭉 떨어지면서 끔벅거리면서 딱 죽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새끼들이 뭔 데를 가지 않고 그 아비의 살점을 뜯어 먹으면서 거기서 한 칠일 내지 십일 정도 있으면서 활동하기에 적합한 크기의 고기가 되어서 이제 물로 다시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가시고기의 일생입니다.
전 그걸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예수님의 사랑이 그런 것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하늘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33년 동안 사셨지만 생애 전체가 자기를 섬기신 생애가 아니라 우리 같은 사람을 섬기신 생애였습니다. 그러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말하자면 그 살과 피를 다 찢어 우리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남김없이 그분의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 강퍅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잘난 자기지식 버리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 예수의 복음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댔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정말 복음이 과학적이기 때문에 우리를 무릎 꿇게 만들었습니까? 복음이 과학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어디서도 받아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하나입니다.
그러니 그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존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주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힘으로 하나님을 우리를 굴복 시키셨고 어쩌면 우리 가족들보다도 훨씬 완악한 우리를 하나님이 예수의 복음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미친 사람들로 만들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계속 이 세상에 하고 싶은 일입니다. 우리의 가족을 위해서 계속 하고 싶은 그런 일입니다.
아직까지도 남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거나 아내가 돌아오지 않거나 자식들이 부모님이 돌아오니 않는 사람들의 그 뼈저린 아픔을 여러분들은 압니까? 은혜를 받아도 늘 마음에 죄책감이 있고 그 마음에 견디기 힘든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중에서 온 가족이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입이 백 개가 있어도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안 주셔도 그냥 감사만 하면서 일평생을 살아도 그것은 가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주일이면 한마음으로 교회 나와 함께 예배드리고 한 하나님 기뻐하고 한 교회에서 더욱이 생활하고 아내는 아내대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남편은 남편대로 진실한 신자가 되려고 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참 신앙을 가지려고 하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다 주신 것과 다름없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날들이 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그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무엇인가 우리들이 할 수 없어서는 못 한다고 할지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려고 애를 쓰고 자기를 다 드리는 그런 그 희생 그거 하라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저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들을 위해 특별기도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평생을 특별기도 할 수는 없지만 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여러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 이번 여름 수련회 와서 정말 은혜 받게 해 주십시오. 이번 전도대원들이 가는데 그 복음 받아들이고 주님 영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라든지 어떻게 라든지 해야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열심히 청해야 됩니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예수 믿는 복음의 도를 전해 주어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그렇게 힘쓰고 애쓰는 삶을 여러분들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가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데 우리에게는 근본적으로 희생이 너무 부족하지 않습니까? 그들을 위해서 정말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합니까? 그들의 이름이 정말 우리의 마음 갈피에 있어서 언제든지 그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마음으로 가족들의 영혼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아무도 모르게 그들을 위해서 금식하고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작정하며 새벽기도하고 사람을 그것을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모두 기억합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서 흘리는 그 눈물의 눈물을 씻어 주시고 그 간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그 가족들이 하나님 앞에 반드시 돌아오게 하십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먼저 주님을 믿고 은혜 받은 지체들 가운데 남편을 위해 부모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래서 와서 은혜 받은 지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상상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정말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어느 자매는 그런 답니다. 자기 어머님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러더랍니다. 열린교회 와서도 예수 믿게 해 달라고 그러면서도 항상 마음 한구석에 걸렸다고 그러더랍니다. 설교가 너무 길어서 처음 예수 믿고 예수의 예자로도 모르는 우리 엄마가 교회에 와서 그래도 뭐 좀 재미있게 하고 그러고 볼 것도 좀 있고 그러면서 그저 설교는 짤막해서 아쉬운 듯이 다음에 다시 오고 싶은 그런 교회가 오히려 은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한 번 데리고 왔는데 그날이 또 장날이라고 90분 95분 이러니까 그거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렇게 기도하다가 엄마 딴 교회 가 그럴 순 없으니까 엄마 딴 교회가. 그럴 순 없으니까 데리고 나왔는데 자기는 설교가 길어서 조바심을 하는데 그날 와서 엄마의 마음을 하나님이 활짝 열어 주시고 그러고 예수의 복음이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고 자기가 해야 할 모든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불은 하나님이 내리시고 장작을 벌려 놓는 것은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구원 받지 못한 가족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냥 마냔 내버려 두어서 세월이 흐르면 해결이 되겠지. 십년이 지났는데 해결이 되지 않지 않습니까? 웬 해결. 그렇게 안 됩니다. 반드시 영혼의 구원은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서 울어 주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하도록 간절히 사모하도록 하나님이 믿는 집안의 구원을 지향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무언가를 해야 되지 않습니까? 물론 올해도 안 될지 모릅니다. 그래도 무언가는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연로하신 부모님을 예수의 복음 듣기 전에도 데려 가시지 말라고 그렇게 기도하면서 올 한해도 우리에게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에 있는 가족들의 영혼을 향한 사랑을 보여 주고 그 가족들을 위해서 눈물 흘리며 매달리는 우리의 무언가를 보여 줘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주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렇게 기적과 같이 구원의 은혜의 역사가 우리의 가정에도 일어나기를 여러분 고대하고 또 그 일을 믿는 여러분들이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기도하다가 가족들을 구원한 지체들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십시오. 모두 그럴 줄 알았다고 그러는 사람 없습니다. 신기하게 기적과 같이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가족들의 마음의 문을 여시고 예수 믿게 만드시고 변화 받게 만드시고 새 사람 되게 만드시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서 가족들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그런 섬김의 사람이 되기를 그래서 여러분들의 마음에 맺힌 깊은 한을 푸는 그런 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 가족을 돌아보라③풍성한 삶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들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지난 시간에는 가족들의 영혼을 돌아보아야한다. 라는 말씀 가운데 첫 번째 가족들 안에 구원받은 생명이 있는지를 돌아보고 그들을 위해서 섬겨야 한다. 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 받지 못한 가족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그들의 영혼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절박한 섬김은 없고, 어떤 의미에서 다른 모든 섬김은 바로 이 목표를 겨냥하고 있는 섬김이어야 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로 가족의 영혼을 돌아본다. 그럴 때에 우리들이 오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았지만 신자답게 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가족을 돌아볼 수 있는 그런 교인들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들은 두 가지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목사님 나도 신자답게 못 사는데 우리 가족보고 내가 어떻게 예수 똑바로 믿어라.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여러분들이 첫 번째로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되 여러분들의 가족에게 무엇인가 나누어줄 수 있을 만큼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의 가족이 모두 탁월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런 속에서 생활하는 여러분들은 더더욱 탁월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할 그런 상황에 놓여있고, 여러분들의 가족이 비리비리 말라가는 신자 같은 사람들로 여러분들의 가족이 그런 영적인 상황이라면 여러분들이라도 신앙생활을 잘해서 예수 안에 있는 풍성한 삶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통로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두 번째 여러분들은 이렇게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면 됐지. 그래서 다 주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그러면 각자 다 자기 좋은 대로 신앙생활 하면서 살아가면 되지. 그것을 뭐 불신자도 아니고 그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믿어라. 저렇게 믿어라. 이 교회를 가라. 저 교회를 가라 내가 그럴 수 있습니까. 꼭 그렇게만 해야 합니까? 거기에 대한 답은 이것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여러분들은 정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풍성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까? 제대로 믿을 때에 그 삶의 풍성함과, 신통치 않게 믿을 때의 그 삶의 비참함의 그 좁힐 수 없는 격차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이해하고 있습니까? 신자가 은혜 안에서 살고 풍성한 삶을 누리면 주님의 성품을 본받아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아름다운 성도의 삶을 구현하지만 만약에 그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고 죄와 정욕 되로 살게 되면 신자는커녕 짐승과 방불한 삶을 살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가능성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믿고 있습니까? 정말 그런 것을 믿는 사람들이냐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처음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을 때에는 이 세상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게 불쌍해 보일수가 없었습니다. 야, 예수 안 믿고 저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사나? 예수 안에 생명이 있는데 왜 저렇게 사나? 그런데 그 후에 제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고 정말 변화되고 나니까 제일 가슴 아프게 밀려오는 고통은 무엇이냐면 사실상 예수를 믿는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믿는 사람같이 살지 아니함으로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도 기쁘시지도 않고 주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자기도 행복하지 않은 그런 사람들, 복음은 들었고 하나님의 말씀은 배웠지만 영혼에는 어떠한 온기도 없고, 그리고 영혼에는 어떠한 따뜻한 기운도 존재하지 않는 싸늘한 시체와 같은 교인들, 그 사람들이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난 다음에 보니까 믿는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 할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이야기 하는 기독교 신앙은 단지 천당 가는 티켓 하나를 손에 거머쥐는 것이 신앙의 목표요 마지막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천국에 간다. 만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부여된 그 생명의 은혜를 누리면서 산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그런데 정말 여러분, 사는 것이 다 사는 것입니까? 믿는 것이 다 믿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는 정말 껍데기만 있는 그런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과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거룩한 희생의 마지막 목표가 겨우 저런 것을 위해서 죽으셨나? 위선과 거짓의 탈을 쓰고 환경과 그리고 상황에 쉽게 굴복하며 그렇게 자기의 썩어져갈 옛 욕심을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의 마음에 끝없이 고통을 주고 반역의 길을 걸어가는 그런 삶을 살면서 겨우 교회 다니는 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까? 성경은 우리의 구원의 장엄함을 그런 식으로 축소시켜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질제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족들 중에 어떤 사람이 여러분의 가족들 중에 여러분의 아버지가 장로이고 어머니가 권사고, 뭐 형님이 목사이고, 동생이 집사고, 그런 교회에서 그 사람을 얼마나 인정해 주느냐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얼마나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누리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양면적인 목적, 즉 생명과 그리고 풍성한 삶을 얼마나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그 어떤 영적인 실재와 신앙의 아름다운 실재가 어떻게 그 사람 속에 역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풍부하게 깨닫고 그렇게 우리들이 살아가지 아니하면 그런 것들을 깨닫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없는 신앙생활이면 그가 교회에서 아무리 인정받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나나 여러분이나 모두 그런 경험 있죠? 사람들은 다 나보고 저것은 예수 밖에 모른다. 그러고 예수에 비쳤다. 저것은 교회에 가서 매일 산다고 그러는데도 정말 마음속에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때, 사람들이 재는 예수 밖에 몰라. 예수에 미쳐서 교회 일에 미친 애야. 그랬을 때 정말 속에서 소리치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예수에 미쳤으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내 안에 예수가 계셔서 내가 정말 예수 때문에 돌아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내 안에 하나님이 계셔서 그 하나님 때문에 교회에 미친 사람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때가 여러분들에게 있죠? 그렇죠.
여러분들에게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경험이 더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정말 영성이 있는가? 한 사람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가? 하는 것은 무슨 방언을 하고 뭐하고 이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어떤 영적인 능력이 있고, 그런 것 아닙니다. 생각에 목사님이 방언도 못하니까 저런 식으로 말하지. 나도 합니다. 나는 혼자서 조용히 기도하다 방언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새벽시간에도 와서 보면 우리 교회 교인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 교인은 나에게 훈련을 받아서 안 그러는데 남의 교회 교인인 모양입니다. 길이길이 책상을 두드리고 새로 사다놓은 의자 막 흔들고, 아니 가슴이 철렁합니다. 새 의자인데 저것을 왜 저렇게 두드리나. 그냥 두들기고, 그 판자는 왜 두드려요. 의자는 막 흔들어서 앞에 사람 기도하는데 덜렁덜렁 하게 하고 그리고 뭐 쏼라. 쏼라. 그러면서 소리소리 지르고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탄원, 그리고 물론 너무 하나님이 가슴이 찢어지도록 고통스럽게 하면 의자 다 부실 수도 있습니다. 데굴데굴 구를 수도 있고, 눈물로 카펫을 손바닥 만하게 적실수도 있고, 코가 범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영성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영적이다. 한 사람이 정말 영적으로 생명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생명이 없는 사람들을 대하는 그의 대토에서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아직 잊혀지지도 않습니다. 아주 오래된 일입니다. 교회 개척하기 전의 일입니다. 교인 중에 장례가 났습니다. 그래서 이제 갔습니다. 아유, 어떻게 얼마나 상심이 많으십니까? 뭘요. 호상 이죠. 수를 누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과일도 각고 북어 대가리도 올려놓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예수 안에 죽은 사람입니까? 마지막까지 안 믿고 돌아가셨데요. 그런데 예수 믿는 아들이라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가 예수를 안 믿고 80넘어 까지 사시다가 어느 날 새벽에 갑자기 죽으셨는데 그것이 어떻게 호상입니까. 그것은 남들이 덕담으로 하는 이야기지, 안 믿는 사람이. 슬퍼하면 위로하려고 아이, 뭘 그래 살만큼 사셨는데 그렇게 평안하게 갔으니 그것이 복이 아닌가? 다 똥오줌 받아내고 자네들 십년씩 고생시켰으면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호상이지, 호상이야. 시골 같으면 춤추고 꽹과리 칠 그런 호상이야. 너무 슬퍼 하지마세요 그것은 천국과 지옥도 모르는 그 믿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위로를 하는 것이지. 집사라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 예수 안 믿고 죽었는데 호상이라. 거기에서 내가 따지면 뭐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한 사람이 영적으로 살아 있느냐 하는 것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에 대해서 어떤 느낌을 갖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죽은 시체들을 서로 끌어안고 있어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한 10분 동안만 시체를 꼭 끌어안고 있어라. 그러면 여러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영적으로 생명이 있고 살아 있는 사람의 증거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확장해 오시는 그 선교의 역사라고 하는 그 자체가 바로 영혼이 개인적인 부흥을 누리면서 예수 안에 있는 참된 생명과 은혜가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사람들 때문에 너무 가슴 아파 하기 시작한 것이 선교의 원동력이 되어온 것입니다. 선교 단체들도 있고 교회들도 있지만 장기적인 선교의 프로젝트들이 열매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그렇게 예수 안에 있는 참 생명을 알고 나니까, 예수 생명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마음 아파하는 것, 그리고 예수 안에 있는 참되고 풍성한 삶을 누리면서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 속으로 들어가고 나니까 무지와 어두움 속에서 단지 주님을 믿고 구원 받았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으면서 그것이 사실은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 아닌 것처럼 살아가는 그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서 가슴아파한 것이 교회의 변역과 그리고 선교의 원동력이 되어온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후딱 하면 주일도 지키지 못하고 사업이 바쁘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몇 주에 한번 교회에 나와서는 풀 주무시다. 가는 여러분의 아버지를 보면서 여러분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영적으로 그분처럼 잠자고 있는 영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만약에 정말 하나님 믿었지만 주님을 아는 지식이 거의 없어서 무지목매하게 신앙생활 하는 여러분들의 가족을 보면서 무엇인가 그들을 돕고 싶다. 어떻게 하면 저들에게 참되게 예수 믿는 길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저들이 신앙생활 하지만 저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참된 신앙이 아니라고 깨우쳐 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어떤 타는 듯한 마음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지 않으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해서 그렇게 생각해주어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러느냐면 복음은 항상 자랑의 경험을 통해서 전파되는 복음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면 사도 바울이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맛보고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과 나사렛에서 태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유대인들을 섬긴, 그 나사렛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분 때문에 생명을 누렸고, 오랫동안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유대교 속에서 누릴 수 없었던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거룩한 삶의 비결을 배웠고, 하나님과의 변함없는 친교 속에서 살아가는 영광스러운 특권을 맛보았습니다. 그런 모든 것을 맛보면서 결국은 사도의 마음속에는 그 자기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이전에 자기가 목숨을 걸고 찾으려고 했던 그 하나님을 자기의 종교를 통해서는 만날 수 없었는데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복음의 도리를 통해서는 만날 수 있었다. 라고 하는 이 뼈저린 경험을 체험하고 나서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이 생명을 많은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었고, 자기 안에 있는 이 풍성한 삶을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자랑의 경험을 통해서 그래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여러분들이 정말 핍절한 삶을 살아가면서 겨우 교회 다니고 있는 여러분들의 가족을 보면서 무엇인가 그들을 돕고 싶고 어떻게 하든지 그들이 변화되기를 바란다. 라고 하는 그런 안타까운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없다. 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진짜 예수 안에 있는 참 생명과 풍성한 삶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일단 예수 안에 있는 참 생명의 복음, 풍성한 삶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고나면 그러면 그 풍성한 삶의 그 은혜 그 뼈저린 경험 속에서 그런 삶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향한 걷잡을 수 없는 연민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그들을 도와주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부터 한 18년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신학대학원 다닐 때 인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는데 그런데 좀 교회일 때문에 신경을 많이 쓰고 그랬습니다. 아, 머리가 터지는 것처럼 아픈데 게 보린을 한 움큼씩 먹어도 이 통증이 가시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아픈지 뇌를 면도칼로 찢는 것 같이 그렇게 아팠습니다. 그런데 무시로 아팠습니다. 더군다나 무엇을 생각하기 시작만 하면 통증이 오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너무 아팠습니다. 그리고 한참 젊을 때인데도 한 500미터만 걷고 나면 쓰러질 것같이 기운이 없었습다. 그래서 잠옷 바람으로 대낮에도 집에 드러누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사니까 처음에는 이까짓 것, 그랬는데 시간이 점점 흐르니까 그렇게 낙심이 되고, 그렇게 힘이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기도를 해도 안 나았습니다. 그리고 극도로 아팠습니다. 여러분, 머리를 싸매고 공부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이야기했죠. 많이 해보셨죠. 그런데 두 번을 경험했는데 한번은 대학원 시험 공부할 때, 그 때 한번 경험했고, 한번은 지금 말씀드린 그 때 경험했는데 머리가 터지는 것처럼 아프지 않습니까. 그 때에 얇고 단단한 끈으로 머리를 여기를 통과하게 만들어서 꽉 동여매면 신기하게 잠깐 동안 통증이 사라집니다. 무슨 제압의 원리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싸매고 무엇을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공부해 보실래요. 도서관도 생기는데.
그래서 어떻든 꽉 동여매고, 그리고도 어떻게 비비적거리면서 해야 할 일들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아도 신통치 않고,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면 다 신경성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별 진전이 그런데 나중에 물어보니까 신경성이라는 것은 의사도 잘 모른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또 주사는 맞고 가랍니다. 전혀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런 고통을 받으니까 그러던 끝에 동네 약국을 찾아 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약사가 진맥을 이렇게 집어 보더니 약사인데도 한약을 좀 다루는 모양입니다.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딱 하는 말이 뭐냐면 내가 고쳐 주겠대요. 그래서 자기 시키는 대로 하래요. 그러니까 눈이 훤했습니다. 그러더니 뭐라고 하느냐면 한 열재만 약을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100첩입니다. 그러면서 약을 지어주는데 7만원이었습니다. 그 때 생활비가 뭐 12만원인가 15만원 받을 때인데 열흘에 7만 원짜리 약을 먹으라는데 기가 막히더라고요. 그래서 한제를 지어서 먹었는데 이상하게 차도가 생겨요. 그랬는데 7만원을 어디에서 돈을 마련하나? 그랬더니 마침 우리 교회에 있는 자매 한명이 약사인데 한의원에 근무했습니다. 큰 한약방에 근무를 하면서 그 약 봉지 한 봉지고 가지고 가더니 정 량 리 에서 근무를 하는데 12000원에 지어왔습니다. 12000원에 지어서 70000원을 받은 것입니다. 조금 넉넉히 남기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다음에 12000원씩 내고 시키는 대로 열 제를 먹었습니다. 100첩을 먹었습니다. 우리 집 사람이 열심히 다려서 그것을 주어서 먹었는데 다섯 제, 여섯 제 정도 먹고 나니까 몸무게가 7킬로그램 정도 빠진 느낌이 들고 나서 통증이 싹 사라지면서 몸이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이것이 왜 그런 것이냐? 그랬더니 약은 좀 비싸게 파는데 다 알아 맞추었 습니다. 어디가면 우산 깜빡 깜빡 잊어버리고 두고 오죠. 뭐 차 안에다 뭐 두고 내리죠. 뭐 그러면서 건망증부터 시작해서 증세를 다 얘기하는데 딱 맞았습니다.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그것이 콩팥의 기운이 떨어져서 그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이 산소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고 걸러주지를 않으니까 그 탁한 피가 머리로 올라가면서, 그 때는 가난하니까 고기를 먹어서 지방질 때문에 그럴 리도 없는데 그렇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매일 삼계탕 같은 것 먹으면 힘 나는 줄 알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더 피가 탁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열 제를 먹고 나서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그다음부터 가만히 만나고보면 사람들이 나와 똑같은 증상에 시달리는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그 무슨 특별한 병은 없는데 그렇게 머리가 아프고 온몸이 무겁고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열심히 이치를 설명해 주면서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내 돈을 가지고 가서 약을 지어다가 주었습니다. 이것 먹으면 틀림없이 낫는다. 안 나으면 내 손에 장을 지져라. 그렇게 해서 제가 그 집약을 열 제를 먹었는데 한 30제는 팔아 주었습니다. 거기에다 이름 적어주고 그다음에는 내가 당신네 약국에서 먹고 잘 나았는데 나하고 똑같은 사람이 가니까 잘 좀 해주라고 해서 제가 알기에도 7,8명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지금도 누가 그런 증상을 소개하면 내가 붙들고 아주 그 사람이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 말해주고 싶습니다.그 이치가 어떻게 된 것이고, 그 치료법이 얼마나 간단한지를 말입니다. 그런데 자꾸 기운 없고 자꾸 머리 아프다고 막 개나 삶아서 먹으려고 하고 몸보신 하려고 하면 안 된다. 더 아프다. 그 얘기까지 다 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아니 약 하나를 먹고, 이 자기 몸이 건강해져도 그 약을 그렇게 자랑하고 싶고, 사람들에게 그런 똑같은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데 우리와 정말 약을 먹어도 단단히 먹었지 신약과 구약을 제대로 먹은 사람들 아닙니까.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은혜를 누리고 그 풍성한 삶의 맛을 보았다면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정말 전해야합니다. 그것이 가족들의 영혼을 돌아보는 두 번째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나 하나가 예수의 생명을 맛보고 그 풍성한 은혜의 삶,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주님을 섬기면서 그분의 눈빛 앞에서 살아가는 기쁨을 우리들이 만약에 누리고 있다. 라고 하면 그것은 나만의 축복이 아니라. 우리 모든 가족들의 복입니다. 정말 축복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은 최근에 창년 한분이 우리 교회에 등록하셨는데 가정 예배를 드리면 그 딸이 대표기도 할 때에 아버지를 위해서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더래요. 그 아버지도 그래도 이만큼 신앙생활 하느라고 해 오셨고, 대대로 예수 믿는 집안에 태어나서 교회 섬긴 것 밖에는 아는 것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살아온 분인데. 이 딸은 그 가정 예배만 드리면 아빠를 위해서 그렇게 눈물로 아빠를 위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한 두 번이지 매일 그러니까. 아빠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예수 안에 있는 풍성함의 삶의 은혜가 무엇일까?
여러분, 정말 가족들의 영혼을 돌아본다. 라고 하는 것은 아, 우리 집안은 다 복음화 되었어요. 진정한 복음화가 무엇입니까?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복음화입니까? 그러면 나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더 이상 할 일이 없습니다. 다 복음화 되었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겨우 복음을 들을 수 있는 현장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 교회에서 복음이 울려 퍼져야지. 그런 이야기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제까지 예수 믿으면서 이만큼 신앙생활 해 오는 동안에 여러분 정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변화되고 난 다음에 여러분들의 지난 날 중에서 교회를 다닌 날 중에서 신앙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는 날들이 얼마나 적은지 여러분 깨닫게 되었죠. 그렇죠.
저는 어제도 그 생각을 하였습니다. 도대체 내가 이렇게 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에 정말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긴 날들이 몇 일이나 될까? 열심히 섬겼어도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과 영광을 받아서 하늘의 상급을 가불한 것 빼고, 열심히 해서 사람들에게는 감동을 주었지만 마음의 동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비롯되지 않았던 것 빼고,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지 않은 것들 빼고, 다 빼고 나면 정말 어린 아이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 섬겼던 때가 얼마나 될까? 그래서 어떤 때는 할 수만 있으면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의 모든 과정을 지우개로 한번 깨끗이 지우고 출생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아니면 회심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그런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이치조차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만약에 우리의 가족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우리의 가족들에게는 이런 인식을 가져야할 필요성이 우리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누가 그런 정도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진정으로 주님을 믿는 신앙일 수가 없다. 그렇게 살아가는 결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 아래서 사는 삶이 아니다. 가는 길을 막아서고 그들에게 이것이 주님을 믿는 길이며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으신다. 라고 가는 길을 막아서며 복음의 선명한 진리를 가르쳐 줄 사람들이 있어야 됩니다. 누군가 그 일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먼저 예수님 믿게 만드신 것은 여러분들이 선교사의 마음을 가지고 아직 예수 모르는 여러분들의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아파하게 하시려고 먼저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것이고 여러분들이 먼저 풍성한 삶의 은혜를,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고 그 지식의 빛 아래서 사는 행복을 맛보게 하신 것은 그런 은혜와 지식의 빛을 여러분들의 가족들에게 나누어주어서 그 무지와 어두움 속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그런 도구가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먼저 예수 믿고 변화 받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는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우리의 가족들의 마음은 오랫동안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마른 땅과 같이 강퍅할 수 있습니다. 바리세인과 같이 그런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자기의 의에 빠져서 살아왔기 때문에 쉽사리 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으려고 하는 그런 진실한 결단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모자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 풍성한 삶의 행복이 무엇이고, 주님을 섬기며 사랑하며 살아가지 않는 그 삶의 마지막 결국이 어떤 것인지를 그 진실을 여러분들을 통해서 듣고 배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먼저 여러분들을 예수 믿게 만드셨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그 풍성한 삶의 은혜를 맛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 안 믿는 가족에게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도 더 힘든 것은 은혜로운 삶을 살고 있는 가족이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가족을 깨워서 참 신앙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 더 힘든 것입니다. 왜?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다르다고 하는 것을 믿는 사람도 인정하고 안 믿는 가족도 인정합니다. 그래 넌 신자고, 난 아니다. 넌 주일날 교회에 가고 난 낚시하러 간다. 그래 넌 하나님의 아들이고 난 세상 자식이다. 이렇게 자기들도 선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게에는 이러한 은혜를 하나님이 주신다. 그러면 그것이 남의 얘기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왜? 안 믿는 사람에게 약속된 형벌이든, 믿는 사람에게 약속된 축복이든지 간에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불신자라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자각하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에 선이 분명한 싸웁니다. 다시 말하면 전쟁을 하는데 안 믿는 가족을 먼저 믿는 가족이 전도하는 것은 경계선이 분명한 싸움입니다. 그러나 함께 이미 교회에 다니고 믿는 사람보고 엄마 신앙생활 똑바로 해. 그러면 엄마 생각에 자기가 신앙생활을 안 하고 있는데 딸이 와서 엄마 신앙생활 똑바로 해. 그러면 아니 내가 벌써 교회에 안 나간 지 육 개월 이니까. 제가 저런 말 하는구나.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오늘도 교회에 갔다 왔는데 그런데 수요 예배 갔다. 왔는데 구역 예배에 가서 헌금도 하고 그랬는데 매일 아주 부드러운 음성으로 엄마 그렇게 신앙생활 해서 되겠어요. 예수님이 보시면 얼마나 슬퍼하시겠어요. 정신 차리고 사세요. 똑바로 신앙생활 해요. 처음에는 듣지만 두 번, 세 번하면 무슨 생각이 드느냐면 그래 네가 나보다 뭔가 열심을 낸다는 것은 내가 인정한다. 그런데 너만 잘하냐? 그런 판단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엄마 신앙생활 똑바로 잘해요. 그러면 너나 잘해라. 혼자 예수 잘 믿는 척 하지 마라. 예수님도 그런 사람 싫어하셨다.
얼마나 힘들어요. 그리고 또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 결점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면서도 마음에 안 들어 했는데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간다고 하지만 부족한 인간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의 인생은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 살아가는 예증도 아닙니다. 어떻게 누가 우리를 다 좋다고 하겠습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다 좋다고 하는 것은 다 우리를 나쁘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경우가 어떻게 있습니까. 그래 우리도 결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 하나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엄마 은혜생활 똑바로 해. 잘해 그래 너는 은혜 생활 잘해서 F맞았냐? 지난 학기 한 과목 펑크 내고 섬머스쿨 간다고 집에서 돈 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거든요. 그래 너는 은혜생활 잘해서 공부 시간에 땡땡이나 치고 F나 맞아서 돈도 없는데 섬머스쿨 듣는다고 돈 가지고 가냐? 그렇게 이야기하면 할 말이 없죠. 진짜 F 맞아서 섬머스쿨 들어가서 낙제생들과 함께 턱걸이 한 것이 사실이니까. 뭐 할 말이 있겠어요.
옛날에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평소에는 절대로 저 보고 우리 할머니께서 굉장히 인격적이셨거든요. 정말 인격적이신 분이셨습니다. 제가 살면서 평생을 우리 어머니 흉보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우리 아버지 흉보는 것도 못보고, 그렇게 인격적이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치사하게 저 예수 믿는다고 할머니는 교회에 안 나가셨어도 너 예수 믿는 게 그게 뭐냐?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딱 한번 딱 한 경우에는 언제나 합니다. 그때가 언제냐면 제가 교회에 다니면서도 술을 먹었거든요. 술을 먹고 들어오면 그렇게 싫어하셨습니다. 할아버지 술을 너무 많이 하셔서 인생을 거의 망치다시피 하셨기 때문에 할머니가 술이라면 냄새, 술병도 싫어하셨습니다. 그런데 손 주가 먹고 그러면 이제 그러시는 것입니다. 야, 임마 예수 믿는다는 녀석이 얼굴이 벌개가지고 집에 들어 오냐? 꼴좋다. 누가 너보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겠니? 나는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었습니다. 성경에 무슨 술 먹지 마란 이야기가 어디 있나? 할머니는 성경도 모르고 맨 날 나만 욕해
그러니까 무슨 삶을 살아가든지 신자에게 약점이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약점이 없으면 자기 깨어짐도 없습니다. 자기 깨어짐이 없을 정도로 완전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뭐 그런 사람이 많다면 예수님이 오셨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깨뜨려지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가족들이 그것을 기가 막히기 집어냅니다. 아이고 그래 넌 은혜 받아서 매일 걸핏하면 우리 집에 돈 꾸러 오냐? 이런 식으로 우리를 찌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사실은 불신자의 가족을 전도하는 것보다 더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진짜 예수 안에 있는 풍성한 삶을 누려서 주일이면 교회 왔다. 갔다. 하는 난 도저히 누릴 수 없는 어떤 삶의 질을 저 사람이 누리고 있다. 마치 바로가 요셉 앞에서 요셉을 앞에 두고 모든 사람에게 고백한 것과 같이 우리가 어디서 이렇게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을 찾을 수가 있겠느냐? 하나님의 신이라고 표현했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하나님의 사랑에, 그리고 하나님의 그 마음에 감동된 그 사람이 바로 이 사람에게는 있는데 같은 가족이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없다. 그런데도 항상 그것을 의시대거나 자랑하거나, 자기를 무시하거나 그러지를 않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어느 집에를 갔는데 우리 교인은 아닙니다. 딸이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엄마와 스스럼없이 지내기는 합니다. 그런데 엄마는 진짜 신앙생활이 별로입니다. 그런데 착합니다. 세상 적으로 그 딸이 항상 그 어머니가 그렇게 신통치 않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불만입니다. 내가 그 집을 심방 갔는데 딸이 엄마를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너무 싫었습니다. 그렇게 자극하는 것이 엄마 그 따위로 신앙생활 해봐, 하나님께 매 맞는다. 봐라. 이제 내가 지난번에도 그래가지고 계 깨져서 다 물어냈잖아. 진짜 하나님 앞에 매 맞는다. 내가 매일 얘기하지. 똑바로 해 엄마. 뭐야, 내가 하나님이라도 가만히 안 나두겠다. 그런데 옆에 있는 내가 너무 싫었습니다. 저것이 무슨 잔소리도 아니고 장사군의 야지 놓는 것도 아니고 왜 기앙이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저렇게 맥없이 파나 그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그 삶의 풍성한 질, 내 안에 있는 생명의 놀라운 진리, 이런 것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번은 제가 아는 형제에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 형제가 지독한 구두쇠입니다. 구두쇠라면 조금 미안하지만 그래서 꼭 교회의 지체들에게 밥을 먹으러가도 얻어 먹을 때는 아무 식당이라도 따라가고 사 줄때는 꼭 라면 집으로 가는 그런 형제였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돈을 열심히 모았는지 대학 다닐 때부터 거금을 모았습니다. 직장생활하면서도 모으고 그런데 별종입니다. 월급을 타서 총각인데도 집에 안 갖다 줍니다. 왜 안 갖다 주냐. 그러면 우리 엄마는 너무 헤프게 쓴데요. 그래 자기가 꼬박 꼬박 모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장가도 안든 노총각인데도 돈을 상당히 모았습니다. 꽤 큰 돈입니다. 5,6천만 원 이상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모았습니다. 그래서 집에서도 포기했습니다. 저 놈은 완전히 구두쇠다. 그래서 누구도 안 도와준다. 그래서 그냥 집의 부모들도 아이, 기대도 안한다. 우리도 우리끼리 해서 먹고 사니까. 지나 열심히 모아서 그 대신 장가 갈 때 그것 가지고 가서 훨훨 날아가서 살면 그만이지 그런데 진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면 진짜 치사하리만치 그렇게 가족들에게 찍히고 또 찍히고 또 찍혔습니다. 돈 문제에 관한한. 그런데 그 형제가 어느 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깊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 있는 그 생명의 풍성한 삶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 그리고 부요하셨지만 자기를 위해서 가난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가족이 큰 어려움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집이 날아가고 빚쟁이 들이 오가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 형제의 살아온 일생을 가족들이 모두 보았기 때문에 그 형제가 저금통장을 넘겨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중 고등학교 때부터 모은 돈이라고 하니까 대단 합니다. 그런 형제에게 시집가면 고생 무지하게 한다. 월급도 안 갖다 준다. 봐라. 그런데 어느 날 그것을 내 놓은 것입니다. 아버지 이것이 저의 전 재산입니다. 이것으로 빚을 갚으십시오. 아버지가 야, 네 돈을 쓰면 이 애비는 이것을 다시 돌려줄 계획도 없다. 그런데 되겠느냐 어차피 시달리는 김에 더 시달리고 이것은 네가 챙겨라. 아닙니다. 아버지 때문에 경제적으로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 사람들을 눈물 흘리게 놔두고 우리 가족들이 이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건을 통해서 모든 가족들이 그 사람 안에 있는 주님을 본 것입니다. 그것이 단순히 뭐냐면 결단하고 저렇게 나를 도와주었으니 나도 제 말마따나 예수를 잘 믿어주어야 되겠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가르쳐도 바꾸어 놓을 수 없었던 애였는데 저렇게 우리를 위해서 다 주고 토큰 몇 개 가지고도 다시 직장생활 하면서도 넉넉하게 만들 수 있었던 그 힘이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는데 자신들 안에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형식적인 신앙생활 하는 우리의 가족들이 우리를 통해서 정말 보고 싶어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받고 또 신통치 않게 신앙생활 하는 가족들을 인도해야할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것을 가지고 줄다리기를 하고 다투고 이러는 것은 너무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향해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들은 이미 예수 믿는 사람들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신앙이 많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자기가 복음 안에서 낳았는데 많이 잘못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이제도 저희를 위해서 말하는데 내가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내가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노라. 살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그런 아픔과 고통을 내가 다시 한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탄식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이 형식적인 신앙생활 하고 있는 우리의 가족들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뭘 했습니까? 정말 우리가 저렇게 믿는 것은 도저히 신앙이 아닌데 생각되는 우리의 가족들의 영혼에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 우리가 기도했습니까? 간절히 기도하고, 눈물로 기도하고, 작정하며 기도하고, 변화 받도록 간구하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했습니까? 하다못해 좋은 책 한 권이라도 그들의 손에 들려줘 보았습니까? 정말 어떻게 하든지 예수 안에 있는 이 참 생명의 비밀과 은혜의 풍성함을 그들도 누리면서 살기 전 까지는 우리 가족이 진정으로 복음화 된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그런 의식 속에서 가족들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일들을 하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에게 먼저 하나님이 그 은혜의 복음의 비밀들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안에서 이런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행복 하느냐면 그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깊이 사랑해주고 끌어안으면서 그 예수 안에 있는 새 생명과 은혜, 그 풍성한 삶을 그들에게 전해주고 싶어 할 때에 그들에게는 그런 것들을 간절히 바라는 욕구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어느 순간에라도 그것을 터뜨리고 깨뜨려서 그래서 주님 믿고 하나님이 새 삶을 살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주님이 기대하시고 바라시는 그런 섬김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7. 불신 남편을 구원하는 길①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전 7:14)
이제 고린도 교회에서만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닌데 초대 교회에 복음이 전파되고 보니까 신앙과 가정과 관련해서 중요한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부부가 함께 나와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고 신자가 되었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불행하게도 외짝 믿음의 가정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남편이 홀로 복음을 접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 되든지 혹은 아내가 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신자가 되고나면 그 다음에 중대한 문제가 생기는데 남편과 아내 사이에 신앙의 일치가 없습니다. 한 사람은 세상 사람이고 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고, 한 사람은 땅의 것을 위해 살고 한 사람은 하늘의 것을 위해 살게 되니까 두 사람 사이에 일치가 없습니다. 이것은 이제 단순한 편견의 문제가 아니라 아주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에서 이 문제를 본다면 사실 그렇게 문제가 되기는 되지만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 중에서도 아직 믿지 아니하는 남편을 두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도 많고 또 믿지 아니하는 아내를 두고 혼자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저 커다란 문제 없이 한쪽은 믿고 한쪽은 안 믿는다는 것 자체가 큰 문제이지만 어째든 그것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저 신앙은 신앙이고 생활은 생활이다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제 이 당시의 문맥에서 보면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의 문맥에서 본다면 예수를 믿는 이것은 이렇게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그런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오늘날은 우리들이 다양하고 많은 종교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긍정을 하는 분위기고 그리고 기독교가 이미 교세를 많이 얻어서 이 사회에 일반화된 종교 가운데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예수 믿는 아내나 남편하고 산다는 것은 그렇게 커다란 흉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이 전해지는 처음에는 성경에 아무리 복음이 전파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 어마어마하게 넓은 로마 제국의 영역에 비하면 그 복음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초창기에는 아주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순절의 성령 강림사건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유대 지방안에서 일어난 일이고 그 후에 사도행전 10장을 넘어오면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는데 여전히 그것은 국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고린도 지방 같은 경우에는 이제 멀리 떨어진 이방인들이 사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니라, 그런 곳에서 더더욱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낯설기 짝이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게 잘 이해가 안가면 우리 초기 한국의 선교시대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지금은 안 믿다가 예수 믿기로 하는 것이 그렇게 큰 뉴스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에 조상대대로 모시고 섬기던 신주단지들을 내다불태우고 한 집안에 한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집안에서 완전히 쫓겨나고 가족공동체로부터 완전히 단절을 의미하는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부부가 같이 그 가족에 붙어서 그 가족공동체 일원으로 둘이 한마음을 가지고 같이 살아가는데 한 사람이 바로 그 예수를 믿겠다고 그렇게 하면서 나를 잘라도 나는 예수와 살지 너희와 못살겠다고 하면서 신자가 되어버리니까 이제 중대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사도 바울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그럼 어떻게 하는가. 가정은 지켜야 되겠고 그 다음에 남편은 혹은 아내는 내가 예수 믿는 것을 박해하고 의합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고민을 하게 되니까 사도 바울이 한 선을 제시해주는데 그 선이란 네가 만약에 같이 믿지 못하고 혼자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남편이 너 때문에 너 예수믿으면 너하고 살수가 없다. 그렇게 단절을 선언하고 부부의 관계를 끊자고 그렇게 하면 그러면 갈라서라 그것이고, 그런데 믿지 않는 남편인데 이상하게 어째든 당신이 예수 믿는 것은 좋든지 안 좋든지 내가 당장 따라가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그것 때문에 너하고 갈라설 이유가 없다. 내 옆에 있어다오. 너는 신앙생활을 해도 좋으니까 우리 같이 부부로 살자 그러면 그냥 같이 살아라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에 접하면서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예수를 끝까지 안 믿는데 내가 예수를 믿고 남편이 구박하고 그렇게 하면 내가 갈라설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저는 실제로 봤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주위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야 된다는 뜻인데 그러니까 남편이 싫은데 예수 믿는 사람이 그렇게 쉽게 이혼하고 갈라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헤어질 구실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이서 의견이 안맞고 그러니까 갈라서서 결국 이혼을 하는데 형식적으로는 자기가 신앙생활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그래서 갈라섰는데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게 아닙니다. 내가 교회에 나가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못 나간다고 한 것도 아니고 신앙생활 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시비를 한 것도 아닌게 내가 문제로 삼는 것은 교회에 나가고 신앙생활하더라도 아내 노릇을 하면서 똑바로 살면 내가 왜 살기 싫어하겠는가.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접어두고 그냥 단순한 대결구도로 확정을 지어서 자기 편의대로 그런 식으로 해서 이혼을 하고 갈라서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복잡한 개인적이고 그 다음에 여러 가지 부부간의 복잡한 그런 문제를 다 끌어안고 그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신앙이 안맞는다 혹은 신불신의 이유로 갈라지는 그런 것을 정당화하는 성경구절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이 문제를 적용하는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남편이 혹은 아내가 신앙에 있어서 너무나 치명적인, 다시 말하면 뭔가 이렇게 배교에 가까운 그런 결단을 하도록 강요를 하고 이런 것 이외에는 사실 단지 남편이나 아내가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갈라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그저 가끔 술먹으면 한번씩 소리소리 지르면서 교회에 나가지 말라고 하는 그 정도 가지고 이혼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어째든 여기에서는 사도 바울이 그 당시에 고통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런 정도의 선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알고 보면 얼핏 보면 모순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믿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는데 믿지 아니하는 남편 혹은 믿지 아니하는 아내와 가정생활을 해나갈 수 있다면 확대해서 생각하면 불신결혼도 할수 있는 것이 아닌가. 결혼식만 올리고 나면 마찬가지 상황이 아닌가. 내가 믿는데 안 믿는 남자와 만나서 결혼을 해서 한 가정을 이룬것이나 둘이 안 믿고 있다가 혼자 믿어서 남편이 아직 안믿는 상황이 되어 있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문제도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과도기적으로 이런 상황을 사도 바울이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과도기적이란 무슨 뜻인가. 이런 이야기입니다. 믿지 않는 남자나 여자하고 결혼을 하겠다고 선택하는 것은 자기가 그만둘 수도 있고 할수도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가 선택할 여지가 있는데 결혼은 선택의 여지가 있지만 예수 믿는 것은 선택의 여지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예수를 믿는데 예수를 안 믿는 상대방을 만나면 그것은 내가 아무리 사랑에 빠졌더라도 이렇게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면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이 같이 안 믿고 사는데 어느 순간에 예수를 믿어야지만 네가 진짜 참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이렇게 제시할 때에는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초청이기 때문에 결혼보다도 더 소중한 부르심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이렇게 쉽게 자기가 거절하고 그래도 되는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필연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과도기적인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왜 원래에 믿는 사람과 믿지 않은 사람이 영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함께 의합하여서 함께 멍에를 메고 한 공동체 안에서 가족이라고 하는, 부부의 공동체라고 하는 것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인데 원래 영적으로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이룰 수 없는 것인데 상황이 그렇게 되었으니까 과도기적으로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 과도기적이란 무엇인가 하면 순수하게 선교적인 고려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뒤에도 나옵니다만 부부가 있는데 그 중에 한편이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고 신자가 되었고 한쪽이 전혀 예수를 믿지 않고 반신앙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한 집안 안에 맑은물과 탁류가 함께 흐르는 것입니다. 그 집안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모습은 사실 성경에서 그리고 있는 회복되어야 할 가정의 참된 모습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과도기적으로 그 상황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 과도기적인 상황을 인정하는 것은 아주 순수하게 선교적인 고려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다 같은 원리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신자들로 모여서 주일이면 바글바글거려도 그들이 영적으로 변화되고 진실한 신자가 되어가지 않으면 예배당은 있지만 교회는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이 사실상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더더욱 예배당은 있지만 교회는 없습니다. 뭐는 안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목양의 관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느 교회에 간들 목자가 없습니까? 그렇지만 많은 교인들이 모인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모두 목회자의 양떼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진리와 성령으로 그가 참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성도의 본분이 무엇인가 깨달아서 복음의 빛 아래서 살아가고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목회자가 부름을 받았고 목회자를 통해서 영혼의 유익을 얻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가는 영적인 변화가 있을 때에 두 사람이 모여서 오늘부터 목자와 양 하자고 손가락 걸지 않아도 두 사람은 목자와 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제도적으로 한 사람이 어느 교회에 소속되어서 교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영적으로 변화되고 새 사람이 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생애에는 목자가 없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세상에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며 방황했지만 이번에는 교회 안에서 방황할 뿐 무대가 달라졌을 뿐이지 영적인 상황과 형편은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은 매 한가지입니다.
그러면 부부관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회복시키려고 하는 가정은 단지 그저 돈벌어서 아파트나 좀더 큰 것 사서 넉넉하게 배불리먹고 좋은 차 타고 다니면서 그렇게 여유로운 삶을 살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그것이 가정의 회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가정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그런 외적인 환경들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러나 그것들이 영원히 본질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정말 가정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부부와 그 다음에 그 자녀들이 모두 주님을 만나고 참된 신자가 되고 그리고 그들이 서로 신앙으로 동지의식을 가지면서 그렇게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족구성원들이 노력을 하고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로서 자기 정사의 삶을 살아가고 자기 깨어짐의 삶을 살아서 계속해서 참된 아빠가 되어가고 참된 어머니가 되어가고 참된 자녀가 되어가고 참된 부모가 되어가고 하면서 점점 가정공동체 전체가 성화의 완성을 통해서 좀더 주님이 원하시는 그런 창조시대의 그런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세계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가정은 가정이지만 진정한 영적 가정은 아직 안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성경에서 허락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선교적인 고려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아니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부인 때문에 어떻게 거룩해집니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 때문에 어떻게 거룩해집니까?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남편이 예수 믿고 아내가 믿으면 상대방들이 예수 안 믿어도 모종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그런 선교적인 고려로 주어진 과도기적인 인정을 어떻게 열매 맺어가는가 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여기에서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해지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져간다.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거룩하여진다 라고 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일차적으로는 예수를 믿어서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그가 믿지 아니하는 사람이었는데 믿은 후에 그 남편과 아내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점점 더 신앙과 행실이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도록 이렇게 변화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과 성화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똑같이,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들이 알수 있는 사실이 남편이나 아내가 한쪽이 믿지 않는 경우에 하나님이 혼자 믿게 하신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주 여기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뜻이 있습니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을 두고 아내가 먼저 주님을 믿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 때문에 마지막에는 남편이 거룩해지는 것이 선교입니다. 그럼 어떻게? 우선 그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아내를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런 이의를 제기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남편을 전도하다가 하다가 포기했는데- 물론 처음부터 노력도 별로 안 한 사람도 있습니다만 - 의외로 그 남편이 다른 사람의 전도를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믿지 아니하는 남편을 구원함에 있어서 아내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이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나갈수 있는가. 이것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아내가 열심히 복음을 전해서 남편에게 예수를 믿게 만들고 남편의 신앙생활이 참된 신앙생활이 아니면 거룩한 행실로 모범을 보여서 그에게 정말 하나님을 믿는 참 자녀의 신앙과 삶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 세상에서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을 경우에는 그 믿지 아니하는 남편의 영혼에 대한 무거운 짐을 아내가 져야 될 것을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남편이 만약에 믿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그를 구원하실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구원하실 수도 있지만 그러나 제일먼저 선교적으로 그 사람의 영혼의 운명에 대해서 무거운 짐을 지어야 할 사람이 아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내가 믿지 아니할 경우에는 그 믿지 아니하는 아내를 향한 무거운 선교적인 짐을 져야 할 사람이 바로 남편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그 아내나 남편들이 담대하게 예수의 복음을 말하라고 여러분들에게 늘 가르칩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정말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깝고 가족관계 속에 있으면 있을수록 대놓고 설교를 하는 직접적인 전도보다는 삶으로 모본을 보이고 감화를 주어서 복음을 향해 문을 열게 만들고 그래서 예수의 복음이 전해지게 하는 그런 일들이 더 많이 요구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을 정해서 하루 이틀 사이에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을 때로는 요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기하게 우리 가족들은 왠만하면 가족들 중에 이야기하는 것은 별로 권위있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을 잘 못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거운 짐을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서든지 사용하실 수 있지만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남편, 믿지 아니하는 아내를 향한 무거운 선교적인 부담감을 느끼면서 살아야 한다라고 하는 것을 여기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한 자매들 만나면 제일먼저 물어보는게 남편이 예수 믿는가 물어봅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참 정말 너무 너무 불쌍합니다. 더군다나 선교적인 짐을 지도록 하나님이 남편과 아내에게 명하셨는데 그런 선교적인 부담감없이 신앙생활을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에 대한 믿는 아내의 그 마음이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가 정말 하나님 앞에 참 신자의 삶을 살고 하나님 안에 있는 예수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이고 그리고 이런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신자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잘 모른다고 할 것 같으면 믿지 아니하는 남편에 심각한 영혼의 형편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예수를 믿고 변화되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정말 새사람이 되고 햇볕처럼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빛 아래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쁘고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의 마음속에는 구원받지 못한 남편을 향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무치는 마음이 있을 것이며,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지 못한 자기의 아내를 인해서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는 함부로 언젠가는 하나님이 구원하시겠지, 세월이 지나면 해결이 되지 않겠어,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같은데 하나님이 직접 행하시겠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지금 말씀드린 그런 마음으로 가득찼기 때문에 뭐라고 말했습니까? “내 골육지친 중 몇이라도 구원얻을 수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저주를 받아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로다” 그랬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지옥을 우습게 보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소중하지 않아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만큼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사랑과 은혜 안에서 사니까 그런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서 걷잡을 수 없는 불붙는 부채의식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나는 알았고 저들은 모르고 있고 나는 구원받아서 거룩한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저들은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서 죄짓고 주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더러운 죄인들로 살아가는데 내가 어떻게 할것인가, 내가 저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내가 저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주어야 하나. 그러니까 실현가능성도 없는 것을 내걸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구원받지 못한 동족, 친족을 인해서 찢어지는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구원받지 못한 아내나 남편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정말 아무런 거리낌이 없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마음에 거룩한 부담이 없이 행복할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정말 무엇인가 영적으로 중요한 것을 결핍한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변화되었다는 이야기는 참 많이 들리는데 막상 내 가족이 계속 그런 기적과 같은 일이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어느 가정이든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느 가정의 가장이나 혹은 아내가 혹은 아이들이 갑작스럽게 회심하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라고 하는 그런 놀라운 소식들이 들리지만 그러나 그런 소식들이 들린다고 해도 그것이 갑작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주위의 가족들이 그를 위해서 오래도록 기도하고 눈물로 구원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내 아내 혹은 내 남편,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내 아들 내 딸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이라도 할수 있다는 마음으로 그들의 영혼의 상태를 위한 무거운 짐을 지고 오래도록 기도했고 그 무거운 짐을 지고 하나님 앞에 많이 매달리면서 부르짖는 삶을 살았고 그 눈물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꽉 차니까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그런 놀라운 역사를 일으켜주어서 변화받은 사람들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에게도 언제나 이런 일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말 주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참된 신자가 되었다면 구원받지 못한 남편과 아내의 영혼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눈물로 그 잔을 채우고 그 영혼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희생의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많은 은혜는 다만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고난도 받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고 정말 변화되었기 때문에 그나마 가끔씩이라도 구원받지 못한 남편의 영혼을 기억하면서 홀로 가슴을 지어뜯으며 울고 그리고 그 남편을 예수 믿게 만드는 것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목표라고 하는 사실을 가끔 깨닫지, 여러분들이 만약에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할 것같으면 누가 여러분들의 남편의 영혼을 위해서 그렇게 울겠으며 누가 여러분들의 아내의 영혼을 위해서 그렇게 가슴아파하며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기 전에는 자신의 마음속에 이 맺힌 원한이 풀리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아파할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먼저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정의 복음화 결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가정에 기적적으로 한 사람이라도 전도해서 예수믿게 만든 사람들의 간증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정말 그들 중에 대다수는 험하게 그 전도의 길을 걸었습니다. 손해나는 일을 자처했고 그리고 자기 죽임을 실천했고 그리고 아내와 남편 앞에서 단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다는 이유 때문에 죄인처럼 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에 있는 그 구원의 열정을 자기의 가슴에 담고 그리고 마치 그것밖에는 당장 필요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커다란 집 다 내어던지고 지하실 단칸방에 빛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실에서 살아도 내 남편과 함께 손잡고 주님을 찬양하고 신자의 길을 걸어가고 신앙의 동지로 서로 겪려할 수만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기꺼이 하리라고 하는 마음 갖고 그렇게 많이 기도한 아내의 눈물이 그 남편을 예수 믿게 만들었고 변화되게 만들었습니다. 그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네가 예수를 믿었다고 할지라도 남편이 너와 헤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지지 말아라. 그리고 선교적인 각오를 가지고 기왕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으니 그 남편을 복음화해서 그래서 너희 둘이 연합된 한 가정을 이루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창조시에 세우려고 하던 그 가정의 원래의 모습을 복원하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함께 좋은 신앙의 동지가 되어서 살아가는 부부의 가정생활은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물론 신자가 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아닐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얼마나 놀랍습니까? 남편은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고 싶어하고 가정이 참된 가정이 되기를 소원하고 아내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남편에게 순종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남편을 영혼으로 보고 사랑하지 못한 것을 고백하고 자기를 죽이고 성격이 맞지 않은데도 그 남편을 사랑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가정이 온전히 하나됨을 위해서 노력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누가 그런 많은 희생을 하면서 그렇게 걸어가겠습니까? 그러나 함께 신앙을 가지고 그 길을 걸어가는 부부들은 그렇게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게 되면서 그 가정은 점차 변해가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이루어가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세월은 자꾸 흘러갑니다. 그리고 내일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믿을 수 없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또 다시 내년 후년으로 미루어두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실제로 어머니가 불신자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불신자이기 때문에 너무 괴로워한 나머지 밤마다 와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기도하고 때로는 작정기도를 하고 때로는 철야기도를 하고 때로는 금식기도를 하면서 정말 기적적으로 그 예수 믿지 않는 어머니 마음속에 교회온 첫날 복음이 심겨지고 전혀 마음이 열리지 않는 돌덩이같은 아버지의 마음이 열려서 이교를 버리고 불신앙의 오랜 삶을 청산하고 신앙의 빛 아래로 들어오게 된 가정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무관심하기 때문에 우리의 남편, 우리의 아내를 복음화시키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간절한 기도의 헌신, 그리고 말하자면 생사를 건 각오, 내가 만약에 내 사랑하는 남편을 버려두고 나 홀로 하나님께 불리워져 그 분 앞에 선다면 거기가 어떻게 천국이 될 수 있을까! 사랑하는 내 아내가 주님을 모르는채 저렇게 병상에서 죽는다면 나 혼자 가는 그 하늘나라가 어떻게 낙원이 될수 있을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마치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인 것처럼, 아내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사는 지체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불신 남편을 구원하는 길②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고전 7:14)
믿지 아니하는 아내나 혹은 남편과 함께 사는 사람이 상대방이 이혼하기를 원하지 않으면 그러면 같이 사는 것도 좋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믿는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해지고 또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진다. 그래서 그 뜻에 대해서 설명을 지는 시간에 쭉 드렸습니다. 지난번의 설교의 요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아내가 믿는다고 해서 남편이 반드시 믿는다고 하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일단 아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자로서 아주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러면 그로부터 거룩한 감화와 영향력을 받아서 그래서 남편이 거룩해 질 것이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불신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음으로 거룩해지고 또 하나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고 그 아내를 통해서 감화를 받으면서 이제 주님의 사람으로 성화되어져 가는 그런 구원 이후의 과정까지를 내다보면서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해질 가능성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 반대인 믿지 아니하는 아내와 함께 사는 남편의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우선 토대에 두고 또 한 가지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혹은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지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좀더 연장해서 이야기하자면 그러므로 먼저 믿은 남편이나 아내가 아주 분명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 그러면 상대방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감화를 받아서 구원받고 그리고 거룩한 백성이 될 가능성이 많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로서의 확실한 삶을 살아야 하고, 그리고 남편이나 믿지 아니하는 아내의 구원을 위해서 힘써야 된다. 이것이 지난주의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을 이제 충분히 염두 해 두고 이제 이것을 미래적으로 지금 우리들이 해석한 것처럼 생각하면서 또 한편으로 이것을 현제 적으로도 우리들이 적용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해진다. 라고 하는 것은 미래에 그렇게 감화를 통해서 구원을 통해서 그래서 그가 거룩해지는 그런 가능성도 열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100%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죠. 그래서 뒤편에 보면 사도바울이 네가 남편을 구원할지 어떻게 아느냐? 그것은 말하자면 그럴 가능성도 있고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라고 하는 것을 동시에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먼저 믿은 배우자가 보다 분명하고 확실한 신앙생활을 하면 그러면 믿지 아니하는 상대방이 구원을 얻을 가능성이 많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미래에 속한 이야기이고,
그런데 그것과 함께 현제 적으로는 뭐냐면 두 사람 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한 사람이 즉, 예를 들자면 남편과 아내가 불신자로서 살았었는데 어느 한 순간에 아내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거듭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분명한 신앙을 갖게 되니까. 이제 갈등이 생겨나겠죠. 이 불신자와 함께 살아야 하는가? 그런데 그 불신자인 남편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기를 원하는데 그냥 무조건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아내의 신앙을 존중하면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아내가 믿는 신앙의 도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수긍하고 그것을 배척하지는 않겠다. 라고 하는 내면적인 약속과 함께 묵시적인 약속과 함께 아내와 같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거든요.
이제 이렇게 될 경우에 그 당시의 사람들이 굉장히 커다란 혼란이 있었습니다. 무슨 혼란이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서 이제 완전히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영혼이 완전히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할 것 같으면 겉에 껍데기 육체만 그래도 있는 것이지 이 속의 알맹이는 전부다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는데 이렇게 하나님께 속한 새 사람이 된 내가 본질상 불의의 자식이요.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저 불신자와 함께 몸을 섞으면서 사는 것이 정결한 것인가? 그 당시의 사람들이 그렇게 반문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결혼의 문제를 가지고 그런데 까지 확대해서 자꾸 문제 제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보면 이제 사도 바울의 이야기에도 보면 믿지 않는 자와 멍 애를 같이 할 수 없다. 윤리적이고 그다음에 정신적인 공동체적 결속이거든요. 그것을 부부만큼 그 결속이 확실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럴 수 있는가? 나는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내 남편은 아직까지 불신자인데. 이렇게 몸을 섞으면서 살고 이러는 것이 정말 정결한 것인가? 그리고 이렇게 부부로서 멍 애를 함께 매면서 살아가는 이 공동체적인 이 삶이 하나님 앞에 정말 죄 된 것은 아닌가? 그런 반문들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이제 사도가 어떻게 다루느냐면 이런 논리를 갖는 것입니다. 뭐냐면 믿는 자의 집 안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직까지도 자력으로 신앙을 선택할 힘이 없거든요. 그런데도 그가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면 은혜 언약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과 한 공동체 속에 있는 한 회원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유아 세례도 그런 말씀에 근거해서 아이는 신앙이 없지만 부모의 신앙을 보고 주는 것입니다. 물론 유아세례 받는 아이들이 모두 구원 받는다. 라는 그런 보장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자기 스스로 그 신앙을 배척하고 배교의 길을 걸어가지 않는 한, 그가 중생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기대를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불신 남편과 아내가 같이 살다가 한 쪽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그것은 불가항력 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는데 그래서 이제 완전히 걸어가는 길이 다르게 되었는데도 그 남편이 자기는 적극적으로 그 신앙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러나 아내의 그 신앙을 깊이 존중하고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그 신앙생활 하는 것을 깊이 용납하면서 함께 살기를 원한다. 라고 할 때에 이미 그렇게 함으로서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믿는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의 관계 속으로 들어온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나오는 거룩하여지고 라고 하는 이 히랍어 단어가 그 근거로 완료형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도 택하고 이렇게도 택하고 해석들을 하는데 저는 이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고 또 하나는 이미 그렇게 믿는 아내와 갈려지기를 원하지 않으면서 그 아내와 함께 살기를 원하고 그 아내를 신앙생활 하게 함으로서 그가 일종의 은혜 언약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그가 아직 거듭난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되지는 않았지만 그와 맺은 아내의 그 부부관계가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그 관계가 거룩해져서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은 그런 마치 나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저 사람은 아직 믿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 둘 사이의 이 결혼은 불가한 것이고, 더러운 것일 것이라고 하는 그런 사상을 여기에서 격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여러분들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진실한 신자로 여러분들이 살아가기만 하면 여러분들의 남편이 아주 현저하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는 한 상당히 거룩의 은혜 속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맺은 혼인 관계에 대해서 이 당시의 사람들이 고민했던 것 같은 그런 종류의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믿는 사람이고 우리 남편은 믿지 않는 사람인데 우리가 이렇게 멍 애를 메고 같이 사는 것이 성경적인가? 이렇게 하면서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몸을 섞으면서 살아가는 이런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결한 것인가? 이런 생각은 안 해도 된다. 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여러분들이 이런 의문을 가지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그렇다면 불신자와의 결혼도 그렇게 열면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남편 될 사람이나, 아내 될 사람은 상대방은 아직 예수를 안 믿는데 내가 믿는 믿음에 대해서 별로 반대할 의사가 없다고 치고 내 신앙을 자유롭게 내버려둔다고 치고 그리고 서로 결혼 하면 그러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저 사람은 안 믿지만 부부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거룩하게 하신다. 그 논리를 그대로 가지고 가면 그러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이제 반박되어야합니다. 우선 첫째는 뭐냐면 관계가 거룩하여진다. 라고 하는 말이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관계가 거룩하여진다. 라고 하는 것이 그래서 어느 정도 거룩의 은혜 속에 들어온다. 라고 하는 것이 구원에 대한 절대적인 보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전히 내가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로 말미암아 내 남편이 어느 정도 거룩의 은혜 속으로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저절로 그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런 논리가 성립할 수 없고, 또 하나는 뭐냐면 지금 성경 여기에서는 관심이 불신자와 결혼한 것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로 같이 살다가 한 사람이 불가항력 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의 자녀가 되었을 때, 이것은 선택의 문제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그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는데 이것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 안에 들어오게 된 사람들의 문제를 지금 다루고 있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불신자를 선택해서 결혼할 수 있다. 라고 하는 이런 이야기는 성경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해서 믿는 아내가 믿지 아니하는 남편과 함께 살 때에 그 남자가 어느 정도 거룩의 은혜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을 깊이 인정해서 결혼생활 그 관계 그 자체는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서로의 결혼은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 관계 자체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그런 불결하다. 라고 하는 그런 논리를 가지고 들어올 필요도 없고 불신자와 함께 살아도 되느냐는 그런 논리를 가지고 들어올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 가운데서도 신자답게 살아가는 것, 이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러나 불신자로서 언약 공동체 안에서 빠져 나가버리는 사람들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렇죠. 그리고 반대로 피로 말하자면 혈통적으로 말하자면 택한 백성의 피가 아닌데도 하나님을 믿고 신앙으로 이제 하나님의 택한 공동체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경우도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열려져 있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뭐냐면 신앙고백입니다. 믿음의 집안에서 약속 아래 태어났는데도 신앙이 없으면 한참 살다가 밖으로 빠져나가서 택함을 받지 못한 자처럼 멸망으로 가고, 또 그런 혈통적으로 그렇게 믿음의 자손으로 태어나지 않았는데도 신앙고백을 통해서 그 혈통 속으로 들어와서 그 혈통 속에 섞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육신적인 핏줄보다도 이 신앙의 핏줄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그 핏줄에서 태어났는데도 빠져나가고 신앙이 있는 사람은 그 핏줄에서 태어나지 않았는데도 그 핏줄 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러니까 보세요.
여러분들이 믿는 가정에서 여러분들이 자녀를 낳아서 어려서부터 교회에 잘 데리고 다니고 유아 세례도 받게 하고 그래서 그 자녀들이 잘 그렇게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그렇게 해도 그 아이들이 정말 참된 신자가 되고 주님을 닮아서 날마다 거룩한 신자가 되어갈 것이라고 하는 것을 저절로 보장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현실 적으로도 보면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아주 못되게 살다가 불신자처럼 인생을 마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린 시절에는 교회를 잘 다녔고 훌륭하게 살았는데 어른이 되어서 믿음이 파산한 자로서 그렇게 불신자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런 것을 고려하면 이 남편의 문제도 배우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서 어느 정도 거룩의 은혜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의 곧 구원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그 사람이 구원받은 이후에 그렇게 주님을 믿고 풍성한 삶을 살면서 주님의 진실한 사람으로서 살아간다. 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더더욱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여전히 이 구원의 문제는 숙제로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뒤에 나오는 너의 자녀도 거룩하지 못하리니. 하는 이야기도 똑같이 이런 맥락에서 봐야 됩니다. 그 부분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너희 자녀도 거룩할 수 없다. 어떻게? 남편이 아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고 아주 분명한 신앙을 고백하고 나는 이렇게 기독교 신앙으로 살아야 되겠다. 그리고 구원의 신앙의 고백을 아주 분명하게 했는데 그 남편이 그것을 깊이 수긍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적극적으로 주님을 믿지 않아도 그것을 깊이 수긍하고 그리고 아내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방해하지 않도록 자기가 허락하고 그리고 심정적으로 이미 신앙에 많이 기울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의 은혜 속으로 어느 정도 들어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녀가 거룩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면 엄마 아빠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예수를 진실하게 믿고 아버지가 그 신앙을 못 갖도록 집요하게 박해하는 경우만 아니면 그러면 아이에게 유아세례를 줘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요하게 박해하면 곤란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주면 어떻게 되느냐면 아버지로부터는 이 불경건한 영향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미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은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남편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불신앙의 영향은 현저히 줄어들고 경건한 어머니의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흘러들어가는 이 신앙의 교육, 경건의 교육은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과 똑같은 두 가지 방면을 똑같이 봐야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거룩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미래적인 기대와 또 하나는 그렇게 함으로서 그 아이가 이미 거룩의 은혜 속으로 들어오게 되어서 은혜 언약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래에 거룩해질 것이고 또 지금 이미 거룩해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더 좋은 어떤 경우입니까? 더 좋은 경우는 아내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룩한 영향력을 아이에게 미치는 것이 아니라. 남편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참된 신자가 되어서 그 가정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믿음으로 구원을 경험하고 그리고 그들이 부모가 한 마음이 되어서 동일하게 그 아이에게 어떻게 살고, 어떻게 믿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아이에게 가르칠 때에 그 때에 그 가정이 정말 정상적이고 아름다운 가정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절대로 남편이 단지 기독교 신앙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위로를 삼으면서 안도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을 방해하지 않고 신앙의 자유를 준다. 라고 하는 정도 가지고 만족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너무 이기적인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렇게 되면 남편 자신의 영혼은 물론이고 자기 슬하에서 자라나는 어린 아이 에게도 반드시 신앙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칠 수가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가족을 전도하는 이 일은 가정의 토양 자체를 완전히 갈아엎는 일입니다. 여러분 개토라고 하는 것 아시죠. 논을 오래도록 같은 논에 벼를 심어서 추수를 많이 거두고 오래도록 쓰면 지력이 다합니다. 그래서 그럴 때에는 비료를 줘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땅 자체에 영양분을 거의 완벽하게 빨아 먹었기 때문에 그럴 경우는 어떻게 되느냐면 한 30센티에서 50센티 정도 삽으로 그 넓은 논을 다 퍼냅니다. 요즘은 장비가 많아서 장비로 퍼냅니다. 그리고 다른데서 흙을 갔다 붙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다른 흙으로 만들어버리고 지력을 완전히 새롭게 돋우어서 그래서 그 땅이 거기에서 여러 가지 좋은 미생물들이 생겨나서 거기가 전부 좋은 논이 되게끔 그렇게 만들어서 그래서 거기에다가 곡식을 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원래 제대로 하려면 밭이나 논이나 6년 정도 쓰고 1년 정도 안식년을 주어서 쉬게 하면 그 동안에 생태계가 다시 복원되면서 지력을 회복하게 되면 그 땅에다 다시 농사를 짓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많은 소출을 거두려고 하다보니까 그렇게 자연에 순응하는 방법으로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전부 개토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반드시 가족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 혼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냥 죽으면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아서 그대로 있는 것 같지만 만약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남편과 아내를 비롯해서 우리의 가족들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되고 그들이 정말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되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가족들이 얼마나 강퍅한지 몇 번을 복음을 전하려고 남편이나, 그리고 부모님들에게 도전해 보았는데 씨도 안 먹히고 말만 꺼내면 뼈도 못 추릴 정도로 거기에서 사람들에게 공박을 받고 부끄러움을 당하니까 마음을 접었습니다. 그리고 나만 가만히 있다고 그냥 시집을 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 가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 하고 그렇게 해서 끝난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남아있는 가족들은 결국은 그 딸이 시집 가버렸기 때문에 그 집안에서 누구도 심각하게 그들의 구원의 문제를 지적하고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가르쳐 줄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면 그 부모님은 여전히 변화지 않는 생각, 신앙이 없는 분신자로서 남은 동생들을 교육하고 양육할 것이고, 그러한 세속적인 가치관에 의해서 주입되면서 자란 그 아이들이 다시 자기 같은 생각을 가진 남편이나 아내를 만나서 다시 밭을 만들어서 다시 거기에서 그 씨가 태어난다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물론 그런 과정에서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복음이 전해지게 해서 또 그를 사용하셔서 그 가정의 터를 완전히 고쳐놓으시려고 그러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들이 경험하듯이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그런데 그런 일들이 잘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결국은 처음에는 단순한 이것이 우리 아버지와 나의 문제이고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느냐 하는 작은 문제였는데 거기에서 내가 실패하고 거기에서 뒤로 물러나면 그 밭에서 수많은 불신앙의 열매인 씨들이 맺어져서 어마어마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흐름이 되어서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안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을 그 마음속에서 정말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알기 원하는 마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전해주는 사람이 없고, 그리고 그런 것들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아주 철저하게 가르쳐서 그래서 결국은 그 복음을 전하지 못하지 못하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에 교수로 있을 때 교수들이 같이 점심을 먹으로 부패에 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 하고 친한 미국인 교수가 한 사람 있었는데 나를 참 좋아했습니다. 나도 좋아하고, 그런데 같이 이야기를 하면서 식사하는데 그날 아주 맛있는 생선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뭐 구워 놓은 것도 있고, 부쳐놓은 것도 있고, 날 것도 있고, 찐 것도 있고 별게 다 있는데 절대 안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도 궁금해서 이제 같이 밥을 먹으면서 왜 피쉬는 안 먹느냐? 싫어하느냐? 그랬더니 싫어한데요. 왜 싫어하게 된 동기가 있느냐? 왜 맛이 없느냐?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먹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맛이 어떤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그 피쉬는 못 먹는 것이다. 그렇게 가르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물고기는 먹는 것 아니다.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래 무슨 이론이 있고 논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물고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야, 무슨 물고기를 먹느냐? 소고기를 먹지. 그러니까 자기가 싫으니까 애들이 먹는 것도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야, 먹지 마라. 그것 맛도 없다. 우리로 말하자면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감수성이 예민한 때에 몇 번 그 얘기를 들은 것입니다. 이것이 딱 박혀서 어른이 되었는데도 그것은 못 먹는 것이다. 이 잡힌 것입니다.
인식 하나 가지고도 그런데 하물며 사상 자체가 얼마나 잘 전달되겠는지 한번 보세요. 그러니까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이치를 너무 잘 압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어느 여성을 며느리 맞이할 때 그 여성이 자기네 집안에 시집와서 어떤 사람일까? 보려면 그 어머니 찾아가 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밭에서 나는 것이지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은 그것은 전설에서 나오는 것이고 개천에서는 미꾸라지가 살아요. 밭에서는 도라지가 있고 아주 험한 산에서는 산삼이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 속에서 계속 똑같은 사람이 나오는 것입니다. 똑같은 인물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심각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의 복음화라고 하는 것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집안에 있는데 큰 딸이 예수를 먼저 믿었습니다. 믿고 보니까 정말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 너무 놀랍고 기뻐요. 그리고 주님 안에 있는 이 풍성한 삶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요. 모르는 사람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코앞에 있습니다. 내 동생,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예수를 몰라요. 그래서 열심히 예수를 전합니다. 그리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런데 그것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이 그렇게 한심한 싸움처럼 보였습니다. 온 가족들이 예수 믿는 자기를 조롱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멸시와 모욕을 받으신 것을 생각하고,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며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오래 참으면서 어떻게 하든지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정말 도저히 깨질 것 같지 않던 그 불신앙의 바위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동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요. 엄마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빠가 예수를 믿어요. 그러다가 더 기도했더니 온 집안 식구들이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면서 정말 진실한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그러다가 동생이 장가가고 그 밑에 동생이 시집가고, 그 밑에 동생 시집가고 그 밑에 동생이 장가가고 그 밑에 시집, 장가 그리고 다 갔습니다. 육남매니까. 그리고 가서 엄마 아빠도 너무 많이 변해서 시집가기 전 장가가기 전부터 자기는 출가를 했는데 그 동생들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고 신앙으로 바르게 살도록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들이 엄마 아빠에게 신앙의 감화를 많이 받아서 각기 믿는 사람 만나서 시집장가를 갔습니다. 그 가정에서 또 그렇게 믿음으로 살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한번 생각해보세요. 어마 어마한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 가정에서 먼저 예수 믿은 사람들이 자기의 가정에서 살아갈 때 선교사의 마인드를 가지고 살아가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도 급하고 아빠도 급하고 모두 급하지만 이 결혼한 상태에서 함께 불신 상태에 있다가 먼저 예수를 믿게 된 아내 남편에게 있어서 가장 빨리 해결해야할 숙제는 뭐냐면 배우자의 구원입니다. 왜? 이것은 자녀의 문제까지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엄마 아빠가 계시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결혼해서 부모를 떠나서 부부가 한 몸이 되고나면 이제 그 엄마 아빠로부터는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죠. 또 그것이 물론 좋은 인생의 경륜이나 신앙의 충고 같은 것은 받아들이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또 그렇게 되는 것이 어느 정도는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남편은 안 그렇습니다. 이것은 매일 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함께 부부가 일구어내는 그 관계 속에서 자녀들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 토양 안에서 아이들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저 사람이 내가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묵시적으로 인정하고 그래서 신앙생활 하도록 내버려두지만 언제 마음이 변해서 내가 믿는 그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백번 양보해서 그런 일이 죽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남편의 구원을 보장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직까지도 예수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나 혹은 아내의 구원을 위해서 깊이 기도하고 그리고 시급히 풀어야할 문제인 것처럼 안타깝게 매달려야 됩니다. 세월이 흘러가면 되겠지 그러는데 5년 10년 20년이 흘러가도 해결이 안 되고 그대로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먼저 믿은 우리들이 그 배우자의 구원의 문제를 아주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부부가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그 여자와 합하여 한 몸이 될 찌니라. 고 한 그 성경의 결혼에 대한 정의처럼 그들이 그렇게 해서 정말 한 몸이 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구원받지 못한 남편이나 혹은 아내의 문제를 남편이나 아내의 문제, 그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인생이 걸린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고 아파하고 그리고 그가 아직 구원받지 못해서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것을 마치 자신의 영혼이 진노아래 있는 것처럼 괴로워하고 그가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이방인처럼 살아가는 것을 자신이 그 하나님의 은혜에서 소외된 것처럼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그런 뼈를 녹이는 것 같은 그런 아픔 속에서 그 배우자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그런 간절한 선교사적인 그런 부르짖음, 그리고 선교사적인 그런 희생, 이런 것들이 없기 때문에 우리 배우자의 남편이나 아내의 구원이 지연된다고 우리는 적어도 그렇게 봐야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말해야합니다. 저도 최선을 다하지 않지만 하나님도 언제 최선을 다해주셨습니까? 우리들이 그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대드는 식의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전이나 오늘이나 언제나 동일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당신을 믿고 구원을 얻어 생명에 이르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영혼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그리고 그 사람들을 어디에서 부르짖든지 간에 그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면 하나님께서는 응답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들이 아무리 애쓰고 몸부림쳐도 사람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인데 그렇다면 그렇게 하나님의 손에 달린 그 구원의 문제를 가지고 그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렇게 하나님이 남편이나 아내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도구로 쓰고자 하시는 사람들은 우리니까 우리는 마치 그 구원이 우리 자신이 간절히 매달리면 하나님이 긍휼과 은혜를 베푸셔서 그를 구원하실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그 영혼을 위해서 그가 아직 몰라서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못하는 그것을 우리가 대신 해 줄 수 있어야합니다. 그가 구원 받지 못했고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속으로 들어오지 못했다면 무엇을 해야 됩니까. 이제 겨우 그 관계가 거룩해진 것 가지고 만족하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는 오히려 그렇게 관계가 하나님의 은혜의 관계로 새로워지고 나서도 결국은 구원의 은혜를 잃어버릴까봐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이 은혜의 관계가 구원의 거룩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고 성령의 은혜를 힘입도록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하지 않습니까? 그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그것을 정말 그의 구원받지 못한 아내나 남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깨달은 내가 먼저 기도할 수 없는 그것을 대신 기도하고 울부짖을 수 없는 그것을 내가 대신 울부짖어주고 하면서 그렇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정말 이 세상의 모든 귀한 일들이 그러하지만 특별히 가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 오랫동안 불신 상태에서 함께 살아온 그 남편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이 일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깊은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구원 받지 못한 내 아내, 그리고 내 남편의 영혼을 위해서 깊이 아파하고 그리고 그들이 정말 내가 먼저 주님을 믿어서 나와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거룩의 은혜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을 계기로 해서 그들이 다시 뒤로 물러서지 말고 그것을 계기로 해서 오히려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 깊이 믿고 그 아름다운 신앙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매달려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해의 반이 지났습니다. ( ? ) 년 초에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서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죠. 특별히 작년 5월에 우리들이 구원 받지 못한 가족에 대해서 시리즈로 설교를 들으면서 우리들이 얼마나 많이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우리의 가족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까. 가족들의 복음화를 위해서 가장 무서운 것은 믿지 아니하는 가족들의 완악함이 강퍅함이 아닙니다. 아무리 완악하고 강퍅해도 하나님이 구원하시려고 하면 강퍅한 곳에 완악한 곳에 죄악이 큰 곳에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는 더 크게 나타납니다. 가장 두려운 적은 먼저 믿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의 태만, 우리 자신의 안일함, 우리 자신이 영혼에 대한 소중한 가치, 그것에 대해서 애착을 잊어버리고 그리고 껍질처럼 살아가는 신앙 속에서 정말 기도해야 할 것들을 기도하지 않는 것, 이것이 사실은 가정의 복음화를 위한 가장 커다란 걸림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중에도 아직까지도 남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서, 그리고 아직까지도 아내가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아서 혹은 자녀들이 하나님께로 아직 돌아오지 않거나, 혹은 부모님들이 아직 예수를 믿지 않아서 마음에 무거운 부담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들이 만약에 그 부담을 느끼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정말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생각하면 여러분들의 마음이 아프다면 여러분들은 정말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견디기 힘들도록 고통스럽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통증을 느낀다면 여러분들의 영혼은 정말 건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픔은 여러분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바로 하나님이 구원받지 못한 여러분들의 남편과 아내, 그리고 가족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그 아픈 마음이고 성령은 그 마음을 성령의 은혜 안에서 여러분들에게 전달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산다. 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결국은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 아닙니까? 주님의 마음을 붙들고 사는 것 아닙니까.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에 의해서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의 사람의 삶이 아닐까요?
보십시오. 언제까지 우리들이 이런 싸움을 지루하도록 계속 해야 되겠습니까. 뜻을 정하고 하나님 앞에 한번 모든 것을 걸고, 그리고 우리의 가족을 구원해 주시지 않으면 내 인생에 참 기쁨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내 골육지친 중 몇이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입니다. 그런 과격하다 싶을 정도로 원색적인 그런 깊은 몸부림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많이 울어야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많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그들은 예수 못 박은 자신의 잘못을 주님 앞에 많이 자복해야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대신 해 주어야합니다. 먼저 믿은 여러분들이 대신 해 주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영혼들을 건져내기 위해서 그 영혼들을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기만 한다면 내 아내, 내 남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의 자녀가 되기만 한다면 나머지는 모든 것을 양보할 수 있다. 아무래도 좋다. 그런 고백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단순히 한 아내, 남편을 향한 사랑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안에 있어야합니다.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향해서 그렇게 오래도록 아파하시면서 눈물로 참으신 그 예수님의 인내, 그리고 내가 당신을 믿고 주님의 그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양보해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처럼 그렇게 예수님께 자기 자신의 모두 드리는 그런 마음으로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번 허물어지기가 힘이 들지 정말 견고한 성과 같이 그렇게 완고하던 불신 가정도 무너지기 시작하면 정말 삽시간입니다. 문제는 그 때까지 너무 많은 인내와 희생, 눈물과 기도, 헌신을 요구합니다.
오늘 오다가 라디오에서 뉴스를 들으니까 축구 선수들 훈장도 주고 돈도 주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들으면서 가슴이 물클 했습니다. 뭐냐면 휴게소에서 오다 신문을 보니까 히딩크가 매달을 하나 걸고 꽃다발을 하나 들고 있는 모습이 나왔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다른 남의 나라에 와서 한 2년 동안 정말 사고방식이 보통 차이가납니까? 그런 나라에 와서 욕도 많이 먹고, 5:0 감독이라고 놀림도 당하고, 갈아 치워야 된다고 매일 신문에 나오고 말이죠. 그래도 그냥 대꾸한마디 안하고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갔습니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그런 것을 다 지나고 나서 승리의 순간을 다 겪고 나니까 마지막에 상지 주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야, 우리도 그렇겠구나. 우리도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렇죠. 그 축구 선수들 하는 이야기가 그 사람들도 다 장정들인데 눈만 뜨면 그 아침이 그렇게 힘들었데요. 오늘은 또 무슨 훈련을 하면서 죽을 고생을 해야 되나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만만한 사람들이 아닌데 죽도록 고생한 것입니다. 코에서 단 내가 나도록 그런데 그렇게 피눈물 나도록 훈련하는 동안에는 그것 가지고 누가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기고 나니까. 알아주는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제가 중동 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축구를 아주 잘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감독이 한분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지독한 악발이 감독이었는지. 하루는 학교가 종로에 있었기 때문에 운동장이 없어서 학교는 종로에 있고 운동장은 미아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미아리에 돌산을 깍아서 운동장을 만들었는데 가서 선수들이 뛰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모래주머니 두개를 달고 뛰는 것이었습니다. 멀리서 보니까 뛰는 것이 비실비실 했습니다. 왜 그러느냐 했더니 모래주머니를 두개씩 다리에 매달고 뛰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느냐면 시합하기 전날까지 혹독하게 시키고 시합 때 모래주머니를 풀어주면 선수들이 날아간다는 것입니다. 야구선수가 타자석에 들어오기 전에 베트를 두게 새게 들고 휘두르다가 하나 가지고 들어가는 이유도 그런 이유입니다. 심리적으로 막 날아갈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지독하게 고생을 했습니다. 일본 전국 대회에서 우승한 팀이라고 해서 왔는데 11:0으로 이겼습니다. 그날 아주 만세 삼창 불렀습니다. 그렇게 고생하고 치열하게 그렇게 몸과 모든 것을 불사르면서 그렇게 고생하고 눈물을 흘리니까 영광스러운 상급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요. 사람이 다 똑같이 뭐가 다릅니까. 아이, 난 체질적으로 불편한 것은 힘들어 다 사람들이 체질적으로 편한 체질이지 고난이 좋은 체질은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없습니다. 피땀 흘리면서 무릎이 시리도록 매달리면서 기도하는 것보다 퍼질러져서 자는 것이 다 좋고, 금식하고 비실비실 하면서 하나님 앞에 피를 말리는 싸움을 하기 보다는 잘 먹고 좋은 그늘에 누워서 편히 쉬는 것을 다 좋아 한다는 것입니다. 다 다른 사람이 칭찬하고 잘했다 하고 말이죠. 당신 같은 사람 없다고 입에 바른 소리 할 때에 다 좋지 아, 저 사람은 안돼, 왜 저 사람은 사람이 저 모양이야. 왜 저렇게 판단력이 없어. 저렇게 바보 같아, 도대체 뭘 하는 거야. 이런 소리 들을 때에 신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은 그것을 참고 견디고 어떤 사람은 못 견딘다는 것 뿐 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목사님은 자꾸 그렇게 설교를 하고 부담을 주는 것 보니까 내가 뭐 그렇게 잘못되었습니까. 내가 먼저 예수 믿은 것 밖에는 죄가 없는데 그것이 큰 것입니다. 제가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은혜 많이 받은 사람이 죄인이라고, 사도바울이 은혜를 많이 받고 나니까. 뭐라 그랬습니까?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빛, 사랑의 빛이 찬란하게 비취니까 자기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죄를 많이 지었다. 라는 의미보다는 은혜와 사랑의 빛이 너무 컸기 때문에 자기가 얼마나 그 은혜의 사랑의 빛 앞에서 쓸모없는 존재이고 나쁜 짓만 하면서 살아온 죄인인가 하는 것을 아주 뼈저리게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죄인 중에 괴수 로라. 고 하는 그 고백은 그것은 단순한 과거 지향적인 고백이 아닙니다. 미래지향적인 고백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난 죄인 중에 괴수 로라. 그러니까 그것은 뭐냐면 나는 정말 구원 받을 수 없는 인간인데 하나님이 하필이면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오래 참으심과 그 풍성한 긍휼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셨구나. 그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러니까 다른 사람보다 더 쓸데없는 나를 하나님이 이렇게 구원하셨으니까 나는 다른 사람처럼 살면 안 돼. 그래서 몸이 부서지도록 살고,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라고 하는 그런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이 우리 같은 인간을 위해서 베풀어 주신 그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내가 예수의 이 사랑에 빚진 자인데 그 빚을 구원받지 못한 내 남편, 내 아내, 아직까지도 예수 모르는 우리 가족들에게 갚으라고 주신 빚인데,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앞에 결의를 다져야합니다. 그래서 한번 작정 기도도하세요. 하나님 뭐 올해 아니면 내년이라도 뭐 세월이 좀 먹습니까. 천천히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우리의 인생이 너무 짧은데 여러분 아직까지도 남편이 예수를 안 믿으면 몇 년이나 앞으로 같이 살겠습니까. 50넘었으면 이제 많이 살아야 한 30년, 30년도 드물죠. 한20년, 늦게 시집장가 갔으면 그만큼 또 줄어들잖아요. 한번 정말 주님 믿고, 그리고 함께 신앙의 동지로 아름다운 신앙생활 하면서 그렇게 한번 살아봐야 되지 않습니까.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있고
기쁨과 설움도 함께 하니
한간의 초가도 낙원이라
좀 가난하면 어떻습니까. 좀 불편할 뿐이지. 그렇죠. 저금할 것 가지고 사람 노릇하면서 살면 어떻습니까. 그렇죠. 또 무자면 어때요. 다른 사람보다도 수가 짧아서 좀 일찍 죽으면 어떻습니까. 또 다른 사람처럼 탁월하게 건강하지 못해서 조금 연약하면 어떻습니까. 그래도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어떻게? 예수의 사랑으로 고인다는 말 아시죠. 사랑해준다는 말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신앙 안에서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그리고 동기간들이 예수의 사랑으로 하나로 뭉쳐있어서 가장 어린 동생에게 일어난 가슴 아픈 일이 온 가족에게 가슴 아픈 기도의 제목이 되고, 아빠에게 일어난 작은 기쁜 일이 온 가족에게 즐거움이 되는 그런 가정, 신앙 안에서 가능합니다. 우리 한번 정말 그런 회복을 우리들이 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아내, 내 남편, 믿지 아니하는 우리 엄마, 아빠 우리 동생, 예수 믿어야 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보험하나 팔고, 냉장고 한대 팔고, 자동차 한대 팔기 위해서 그렇게 오래도록 간이라도 빼어줄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따라 다닙니다. 우리는 한번 우리의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서 그렇게 무제한의 희생을 해 본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다만 몇일 동안만이라도 구원받지 못한 우리의 가족들을 향한 그 주님의 마음을 깊이 우리들이 알기만 하면 주님이 정말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더 늦기 전에 정말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온 가족을 복음의 빛 안으로 들여오는 여러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가정을 위하여Ⅶ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