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2)
녹취자 : 김세나
지난 시간에는 우리들이 이 세상의 악과 많은 고통들이 있는데 그것은 궁극적인 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질병이 바로 죽음입니다. 인간의 많은 악과 고통의 현상들은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린 증상들이 바깥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살펴볼 것은, 그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이 그러한 죽음이라는 증상을 몰고 왔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마지막으로 살펴본 것이 이러한 나무입니다.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린 나무가 있는데 여기에서 악과 고통이라는 열매가 많이 맺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따 내어도 또 다른 고통의 열매가 맺히고, 또 다른 고통의 열매가 맺히고, 끝이 없습니다. 이것을 하나 해결 하였는가 싶으면 이게 해결되었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던 또 다른 B라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서 계속 고통이 그치지 않는 이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은 생명이 끊어지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확실히 이 죽음이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지난 시간에 살폈습니다. 육체가 죽으면 말이 안 되는 것이, 살아있기에 지금 고통을 경험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답이 육체의 죽음 때문에 이러한 질병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인가, 영혼의 죽음 때문입니다.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제품을 볼 때 이 제품이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것을 놓고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뭐다, 뭐다 말하는 것 보다는 공장에 가서 만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속에 스펀지가 들었는지 솜이 들었는지, 헝겊이 들어있는지는 저도 여러분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 보다는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져 보니까 스펀지는 아닙니다. 그러면 확실한 것 하나는 이것을 뜯어보든지, 아니면 공장에 가서 여기 이 지우개를 만드는데 필요한 자제들을 쌓아놓고 작업되는 과정을 보면 이 지우개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하는 것을 알 수 있겠고, 그렇게 파악된 결론은 누구에 의해서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합니다.
그러면 인간이 만들어 질 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인간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에 보면 ‘아파르’라고 되어 있는데 ‘티끌’입니다. ‘먼지’, 혹은 ‘티끌’입니다. 여기에서 먼지, 흙에서 빚어서 사람의 형상을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이것이 육체가 되고, 육체 속에 후하고 생기를 불어 넣으셨는데, 후 불어 넣으시는 과정은 하나님이 이 속에 이 사람의 영혼을 담으시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육체와 영혼이 만나서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동물의 창조와 인간의 창조는 어떻게 다릅니까? ‘동물들도 영혼이 있는가?’ 이러한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기를, 하나님께서 흙으로 육체를 빚으시고 거기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영혼을 주입시키심으로 이 육체와 영혼이 만나서 산 사람이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람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도 살아있습니다. 그러면 동물도 이러한 육체가 있고 영혼이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 동물들은 하나님이 육체를 주셨지만, 육체 속에 영혼이 아니라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혼’이라고 이름 짖는 어떠한 기능을 주셨습니다. 생명적인 기능, 육체의 삶이 이 세상에서 육체로 살아갈 때 환경과 상황에 반응할 수 있는 어떤 기능, 그래서 일정한 부분에 있어서는 생각도 하고 느끼기도 하고 무엇인가 결정하기도 하는 그러한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 자체를 인격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하등한 혼적인 기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죽음과 함께 그 자체가 사라져 버립니다. 실제가 있어서 육체가 사라져 버리면 혼적인 기능만 따로 존재해서 어디로 가고 안가고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이것이 작용을 하다가 육체가 죽으면 이것도 함께 소멸되어 없어지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창조될 때부터 인간의 창조와 동물의 창조는 다릅니다. 동물들은 하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셨습니다. 바다에는 고기가 다니고 하늘에는 새가 날고 땅에는 육식들이 있으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니까 바로 생겨나 그렇게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창조 때부터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아주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특별하겠습니까. 우선 만드는 방법부터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말씀 하나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방법으로 창조하실 수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있어라’ ‘빛이 있어라.’ 식물들, 동물들 모든 것들이 다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행동이 없이 말씀으로만 창조하셨습니다. 이것도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후에 인간들이 창조된 세계를 보면서 이 창조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된 것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세 가지 사실은 확증해 줍니다. 창조된 세계를 보면서 적어도 세 가지 사실은 입증이 됩니다. 첫째는 주인이 있다, 창조하신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것을 만들어 놓고 가셨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과 두 번째는 하나님이 다른 것도 아니고 말씀 한 마디로 명령하시니까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확실히 그 ‘하나님은 강력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조의 세계를 이야기 할 때마다 성경에서 특히 시편에서 많은 시인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능력에 대한 찬송이 울려 퍼졌던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입증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은 확실히 이루어지는구나, 보증이 된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시인이 이런 노래를 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눈을 들리라” 어디를 향하여?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왜 입니까? 그 산을 향해 눈을 드는 순간에 이것을 지으신 분이 계시다는 사실과 그분이 능력이 한없이 많으시다는 사실, 그분이 말씀 한마디로 이 산이 생길 수도 있고 사라질 수 있구나, 이렇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바로 내가 의지하는 아버지가 그분이시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떤 환란과 어려움이 와도 낙심하고 좌절하지 않을 수 있다는 그 관계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자신은 얼마나 행복하고 염려할 것이 없는 사람인가, 이것을 회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다른 것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오늘날 여러분들이 성경을 펴면 읽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충분히 전달하기 위해서 풀어서 전달해주는 것이 지금 여러분들에게 들려주는 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하나는 우주에 울려 퍼졌고, 하나는 성경에 기록되어 내 마음에 울려 퍼진다고 하는 차이가 있는 것이지, 그것의 저자, 그 저자의 능력과 신실함은 동일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이고 그러한 신앙을 갖고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다른 수단이 아닌 오직 말씀을 가지고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말씀을 가지고 창조를 하셨는데,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도 있어라.’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찬양)
흙으로 사람을 빚으사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주 하나님
찬양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의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먼 거리에 있는 끝도 없는 어마어마한 우주의 세계는 영어로 이야기 하면, ‘Be there! 거기 있어라!’ 말씀하심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왜 인간은 하나님이 직접 흙을 떠서 그것을 빚으시고 형체를 만드셔서 거기에 후하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이렇게 창조에 있어서 다른 피조물들의 창조와 구별된 행동을 하심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을까? 물론 우리가 그 깊은 뜻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고 싶으셔서 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면 하나님이 똑같이 창조하시지, 인간만 그렇게 유별나게 그러한 특이한 방법으로 창조하셨을까, 그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 땅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하는 피조물이라는 면에 있어서는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동창생이지만, 그러나 존재의 의미에 있어서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보다 훨씬 더 힘이 센 커다란 공룡이나 맹수보다도 인간은 존재의 의미가 다르고, 인간은 자기 힘으로 먼 우주에 있는 별 하나로도 갈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지만 그러나 그 모든 우주, 끝도 없는 어마어마한 우주 속에, 침묵 속에 흩어진 파랗고 빨갛고 하얀 수많은 별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독특한 의미를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기 위해서 인간을 다른 방법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의미가 바로 누구를 향한 의미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 그때에는 인간이 존재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빚으셨을 때, 그때에는 인간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의미는 뭐냐 하면 당신 자신을 향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끝도 없는 어마어마한 우주와 인간을 빼놓고 존재하는 아름다운 창조된 이 세계에 모든 것들, 그것이 당신을 향해 가지고 있는 의미와는 다른 아주 독특하고 특별한 의미가 당신이 빚으시는 그 한 사람 속에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미 성경을 잘 몰랐던 어느 철학자들도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많은 피조물과 구별된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물론 자연의 일부라고 보았지만, 자연은 인간에 의해서 파악되지 않습니까. 자연이 인간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주체가 있기 때문에 철학도 가능한 것이고, 인간이라는 주체가 있으니까 우주에 대한 탐구도 가능하고, 자연이라는 존재의 의미도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 인간 존재에 대해서 특별하고 탁월한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뭐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에 대한 면류관’이라고 표현합니다. 왕이 근엄한 비단옷을 입고 황금으로 빛나는 의자에 앉았다고 하더라도 맨머리라고 한다면 왕의 영광이 없습니다. 왕의 머리에는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보석으로 꾸며진 왕관이 그 머리위에 씌워져 있을 때, 차려입은 비단옷과 황금 의자와 많은 신하들이 빛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그가 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 같은 민주주의 시대에 실감이 안 날지 모르겠습니다.
더 실감나는 비유를 드리겠습니다. 건물을 하나 지었습니다. 여기에 건물 안에 전기를 설치하고 전구를 달았습니다. 네온사인 간판을 달고 축하하는 전기장치를 해 놓았습니다. 캄캄한 밤중에 건물건축을 축하한다는 행사를 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사람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스위치를 딱 올리니까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와’ 하는 것처럼 인간의 창조는 불을 켜는 사건과 같겠습니다. 그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서 그 인간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의 세계가 불이 들어오는 것 같은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그 빛이 뭐냐 하면 말하는 빛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라 말하는 빛인가 하면, ‘아,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작품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단다.’ 말하는 찬란한 빛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창조됨으로써 가능하였습니까? 인간이 창조됨으로써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면류관이라 불러질 정도로 아주 소중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을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보셨는가에 대해 궁금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바로 인간이라고 하는 육체 속에 하나님이 영혼을 넣어주신 것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만약 영혼을 주시지 않았다면 짐승과 마찬가지로 여기에 육체라는 껍질이 있고, 육체가 창조될 때 동물들이 창조된 것처럼 육체라는 껍질이 있고 이 육체라는 껍질 속에 하나님이 육적생명기능을 주어서 동물들이 움직이고 생활하는 것처럼 만들어 주셨을 것 같으면 똑같이 피조세계 중 일부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피조물도 가지고 있지 않은 영혼을 인간에게 넣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순결하신 영이십니다. 하나님을 봤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눈에 보일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혹시 당신을 나타내 보여주시기 위해서 매개체로 어떤 것을 사용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것을 본 것이지,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닙니다. 비유로 하자면, 바람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비행기타고 만 미터 상공에 올라가면 초속 53미터의 강풍이 붑니다. 그런데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까. 땅에서는 5미터만 불어도 보입니다. 왜 입니까? 빨래가 펄럭거리고, 잎사귀가 흔들리면서 “아, 바람이 지나가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도 “바람을 보았니?”라고 이야기 하면 바람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람을 본 것이 아니라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매개물들을 본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람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도 바로 그러한 분이십니다. 순결한 영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영을 닮은 그러한 특성을 영혼이라고 이름을 지으시고 인간 속에 넣어 주셨습니다. 인간 속에 있는 이 영혼과 하나님 안에 있는 영이 질적인 면에서는 다르지만 어느 정도의 동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통할 수 있습니다. 의사가 소통되고 하나님이 자기의 생각도 이 교통을 통해서 보내시고, 당신의 마음도 보내시고, 당신의 결단하고자 하는 의지도 보내시고, 인간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하나님께 보내기도 하고 서로 교신할 수 있는, 교통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영혼을 주어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독특성, 인간이 모든 피조세계에 있는 존재들과 구별되는 단 하나의 유일한 이유가 바로 이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하면 두 가지 생각을 함께 가져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과 동창생입니다. 그래서 동창생끼리는 잘 지내야 합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만물의 영장이라는 것을 잘못 해석해서 인간이 폭군처럼 군림해서는 안 됩니다. 환경을 파괴하고, 모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할 뿐이라고 하면서 파괴하는데, 이러한 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한 예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려라 할 때, 그 때 다스시라고 하실 때 하신 그 동사가 히브리말로 ‘라다’라는 동사입니다. ‘라다’는 뭐냐 하면,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성경에서의 의미는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임금이 가서 심심하다고 백성을 칼로 찔러 죽이고, 왜 죽이냐고 하면 “심심하니까.” 하고, “저자가 살던 집을 부수어 버려라.” “왜 그렇습니까?” “우울하니까.” 그렇게 하면 그게 왕입니까? 왕이 아니라 침략자입니다. 진정한 왕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왕은 잘 다스려서 백성들이 그 땅에서 자기를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을 행복하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 진짜 왕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땅을 다스리라고 할 때 하나님이 왕이시지만, 하나님께 위임받은 지배자로서 이 세상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선량한 관리자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 자연을 파괴하는 행동들이 얼마나 창조섭리에 어긋나고 어리석은 행동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육체와 영혼으로 창조되었는데, 육체가 왜 죽게 되었는가는 다음 시간에 설명 드리겠습니다만, 육체는 죽게 됩니다. 그래서 육체가 흩어집니다. 자연스럽게 흩어져 죽을 때 영혼은 남습니다. 영혼은 죽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존재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이 썩어서 흙에서 왔으니까 흙으로 다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왔으니까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천국으로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이 이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숨이 끊어지고 생명의 기능이 다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알겠는데 영혼의 죽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죽음은 영혼이라는 존재의 성격이 육체라는 존재의 성격과 다릅니다. 양식이 다르니까, 죽음의 의미도 육체는 멸절을 의미한다면 영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혼은 멸절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육체가 있는데 이 육체가 생명기능과 연관되어 있을 때 이 육체를 가리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숨도 안 쉬고 어떠한 생명의 기능도 없고 죽어 있은 지 며칠 된 시체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을 가리켜 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생명 기능이 떠나갈 때 그것을 가리켜 죽었다고 말하고 생명 기능과 연결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살아있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은 육체에게 있어서 육체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을 생명 기능이라고 말한다면, 영혼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아직까지 연결을 맺고 있고 그 하나님께로부터 이 인간 영혼으로서 기능하게 하는 그 어떤 영혼의 생명적 기능이 흘러들어오고 있는 동안에는, 공급되고 있는 동안에는 그래서 교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은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이것이 끊어져 버리고 그래서 이것이 단절되어 버리게 되면 이것을 죽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육체는 죽으면 아무 행동도 못하고 아무 것도 못하지만, 영혼은 죽었는데도 아직까지 육체가 감싸고 있고 이 안에 생명 기능은 살아있습니다. 생명 기능은 살아 남아있으니까 육체가 생각도 하고 냄새도 맡고 밥도 먹고 돌아다니고 이 것 저 것을 행합니다. 이것은 아직 살아있음입니다. 영혼은 죽었어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떤 공식이 나오는가 하면, 동물은 죽은 것은 죽은 것입니다. 산 것은 산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살아 있는데도 죽어 있을 수 있고 죽었는데도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영혼이 죽어있으면서 육체는 살아있을 수 있고, 또한 육체는 죽었는데도 영혼이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생명 기능은 육체와 연결되어 있어서 육체가 소멸되어서 생명 기능도 함께 사라집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육체가 죽었는데 팔을 움직이는 기능이 남아있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물은 죽으면 죽은 것이고, 살면 산 것인데 인간은 살아도 죽어있을 수 있고 죽었어도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이것을 가리켜 죽음이라고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을 그러한 끊임없는 악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그 궁극적인 원인이 바로 이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 있는 상태가 바로 악과 고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더욱 궁금한 것은 뭐냐 하면 ‘무엇이 이러한 죽음을 몰고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없으면 간단한 것인데 무엇이 죽음을 몰고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의학적인 설명과 유비의 관계에서 이야기 하면 쉽습니다. 병의 징후는 질병의 원인이 있는 것이고, 질병은 근본적으로 병원체에 원인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폐병 환자는 결핵균을 가지고 있고 암 환자는 암 세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원인이 되어서 질병을 가져다주었고 그 질병이 징후와 증상들을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악과 많은 고통이 있는데 이것은 현상일 뿐이고 궁극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이 바로 죽음입니다. 오늘 들은 설명에 의하면 이렇게 죽음이라고 말을 하지 않고 영혼의 혹은 영적 죽음이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죽음 때문에 악과 고통이 오게 되었구나, 그러면 이 죽음이 가져다 준 것이 또 무엇 때문에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리게 되었는가, 할 때에 이것에 대한 답이 바로 죄입니다. 죄. 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흔히 죄라는 말을 이야기 할 때, 악이라는 말과 함께 왔다 갔다 하면서 사용합니다. 비근한 예가,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죄’와 ‘벌’을 영어로 적었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벌’은 ‘Punishment’가 됩니다. 이 ‘죄’는 지금 무엇이 되겠습니까? ‘죄’라고 할 때,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Sin’입니다. 그런데 『죄와 벌』의 영어 번역본을 보면 모든 책에 ‘Crime’이라고 나옵니다. 『The Crime and Punishment』. 그러면 이제 우리가 흔히 죄라고 사용하기도 하고, 악이라고 사용하기도 하는 말은 영어에서 보면 sin과 crime으로 나누는데, 이 crime은 뭐냐 하면, 법적으로 잘못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행동을 하거나 안 한 것입니다. 그렇게 법적으로 범법자가 되게 하는 행동을 했거나, 혹은 해야 하는 것을 안 했기 때문에 범법자가 되게 하는 그러한 행동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악행입니다. 악행. 그런데 sin은 훨씬 더 깊습니다. 뿌리입니다. 정확히 묘사하면 sin의 뿌리에서 crime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죄와 악을 흔히 이렇게 사용하는데,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죄는 뿌리이고 거기에서 악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죄악이라고 할 때, 악한 행동의 내면과 외면을 모두 포괄하는 총체적인 실체를 지칭하는 말로서 죄악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면 악은 죄의 결과라고 결론을 질 수 있겠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성선설의 입장에서 인간의 존재를 보는 것입니까? 아니면 성악설의 입장에서 보는 것입니까? 인간의 근본 성품이 기독교 입장에서는 선하다고 보는 것입니까? 악하다고 보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이 나옵니다. 성선설로도 볼 수 있고, 성악설을 따르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이러한 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도덕적인 악이 열매를 맺는다는 점에서 보면 기독교의 관점이 성악설과 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가 들어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처음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상당 기간 동안에는 죄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을 때 그 상태에서 인간은 완전히 깨끗하고 완전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때를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가 없는 깨끗한 상태에서 죄가 있는 인간이 되었고, 거기에서 죄 때문에 악이 나오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그 사이에는 타락이 있었다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관점은 성선설과 성악설의 관점과는 조금 특이한 차이점이 있는 그러한 관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죄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이번 시간과 다음 시간에 걸쳐서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 이것이 죄다 혹은 아니라고 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나라마다 남의 나라에서 아무리 가져와도 문제가 안 되게끔 개방된 물건이 있고, 이만큼만 가지고 들어와도 문제가 되는 물품이 있겠습니다. 그러한 물건을 가지고 오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을 때에는 아무리 가지고 들어와도 그것을 밀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금지가 되어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들어왔을 때 밀수가 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성립이 되겠습니까. 죄가 성립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기억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외국산 담배를 양담배라고 하였습니다. 이 양담배를 피우면 간첩행위 한 것 다음으로 무서운 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전매청에서 양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제가 듣기로는 얼마나 전문가인지 100m 밖에서 올라오는 연기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국산 담배인지, 양담배인지 파악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걸리면 굉장히 큰 벌을 받았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왜 그것이 그렇게 큰 죄인가 하는 것입니다. 양담배를 피워서 무슨 문제가 생기냐 하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피우는 담배를 한국 사람들이 피우면 갑자기 죽는다든지, 에이즈 같은 전염병을 옮긴다든지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큰 죄인가 하는 것입니다. 법이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법이 왜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까? 나라고 가난하니까 그 담배는 싸게 만들어서 비싸게 파는 것이니까, 세금을 많이 매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흡연자들의 돈으로 나라 살림을 할 텐데, 다른 나라 담배를 피우면 국산 담배가 팔리지 않고, 그렇게 되면 전매수입이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이게 사실은 도덕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양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가리켜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가르치고, 애들한테 양담배 못 피우는 포스터도 그리게 하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누구 아버지는 양담배만 피운다더라, 나쁜 놈! 매국노! 이렇게 인식되는 때였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미국 가서 물론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인이어서 안 그러시겠지만, 양담배를 양쪽에 두둑하게 넣어 왔다고 해서 누가 밀수라고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큰일 날 일이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달라진 것입니까? 기준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라고 하는 것이 성립하려면 최소한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죄라고 하는 기준이 필요하고, 두 번째는 이것을 위반한 자들, 즉 범법자들이 필요하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범법자는 인간이 됩니다. 판단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다만 죄를 지었는가, 안 지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라집니다. 또한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이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무엇입니까? 다른 기준입니다. 늘 변하는 사회의 법도 될 것이고, 또한 자기의 인생관이 될 수 있습니다. 다 용서하는 것입니다. 가끔 자기에게 욕하는 것도 용서하고 나한테 밥만 얻어먹는 것도 용서하고 가끔 돈을 꿔달라고 하는 것도 용서하고 오밤중에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하는 것도, 개기면서 술에 취해 들어오는 것도 용서하는데 약속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를 못합니다. 그러한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다른 것을 다 잘한다 하고, 약속을 어기면 완전히 쓰레기 같은 인간이 됩니다. 기준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세 가지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야기 할 때 그 기준이 분명히 있다. 판단자도 계시고 기준이 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어떤 기준을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 기준이 있었는데 이 기준을 어겨 버리는 것입니다. 어기는 이것이 죄이고, 두 번째는 이렇게 하라고 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여기까지 도달을 해야 하는데 거기까지 도달하다가 떨어져 버립니다. 모자라는 것이 결국 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기대하셨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관계입니다. 관계. 당신 닮은 성품을 인간에게 나누어 주심으로 인간에게 기대하셨던 바가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존재가 인간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잘나서 이러한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교통할 수 있는 자원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영혼입니다. 그래서 이때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관계는 가족관계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가깝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여망이 나중에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하면, 당신이 구원한 백성을 가리켜 ‘자녀’라고 부르신 것에서 나타나겠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창조하시고,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늘이라고 할 때 이것은 눈에 보이는 하늘이 아닌 영적인 세계, 천사들이 거하는 영적인 하늘 세계를 가리킵니다. 영적 세계를 창조하시고 지상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하늘은 천사들에 의해서 다스리게 하시고, 땅은 하나님이 인간을 주셔서 인간이 이 땅을 다스리게 하셨는데 이 하늘과 땅의 유일한 왕은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천사들이 하늘나라를 다스리고, 이 하나님을 향해 전적으로 순종하는 인간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다스릴 것처럼 그렇게 다스려서 완벽한 두 세계가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셨을 때 의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성경에 의하면 천사들이 인간보다 우수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나, 미래를 아는 것에 있어서, 도덕적인 면에서도 인간보다 우수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죄가 들어온 다음에 나타난 현상이고 여기 천사는 이렇게 다스리는데, 인간이 이렇게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인간이 천사보다 훨씬 더 고상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보이는 물질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만드셨을 때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똑같이 아름답게 다스리게 하시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창조된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이것을 해 나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하면, 인간이 하나님과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가족관계가 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가족관계인데, 대등한 가족관계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기대어져 있는, 예를 들자면 갓 철이 들려고 하는 세 살짜리라고 보고, 아버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라고 볼 때, 그 아이가 부모 밖에 모르고 부모를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절대의존의 관계가 되게 하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의도하셨던 관계입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친밀성으로 보자면 가족관계라고 비유할 수 있다고 이야기입니다. 절대의존입니다. 그래서 이 절대의존이라는 말이 앞으로도 많이 나오는데, 이 절대의존의 마음이 바로 무엇인가 하면 신앙에 대한 정의입니다. 신앙이 무엇인가 할 때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절대 의존의 마음입니다. 신앙적인 삶이 무엇인가 할 때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절대 의존적인 삶입니다. 신앙적인 사고가 무엇인가 할 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절대 의존적인 사고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이렇게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인가 하면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절대순종이 나타납니다. 의존하는 경우에는 순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비유를 들고 오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어떤 아이가 산에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혼자 산길을 잘못 들어서 길을 잃어버렸는데 아무래도 집을 못 찾습니다. 시간이 지나 캄캄한 밤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이가 이제는 내려갈 수도 없고 올라갈 수도 없이 지쳐서 울고 있는데 거기에 마침 산을 오르고 있는 한 아저씨가 나타났습니다. “왜 우니?” “길을 잃어버렸어요.” “걱정하지 마라. 아저씨가 산 두 개를 넘어서 동네로 가는 길인데 나를 따라가자.” 그러면 이 아이가 얼른 따라 나설 것입니다. 이리로 와라 했을 때 “싫어요.” “왜 자꾸 이리 와라 저리 와라 해요?”라고 하겠습니까? 아저씨가 “손을 꽉 잡아라.” 하면 아이는 땀이 흐르도록 그 아저씨 손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왜입니까? 거기에서 혼자 떨어지는 것이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게 절대 의존의 마음이고 ‘잡아라.’ 할 때 꼭 잡고 놓지 않는 이것이 절대 순종의 (51:55) 여기서 끊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