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결과와 하나님의 은총
녹취자 : 조원정
오늘 이 시간에 지난 시간에 이어서 우리가 왜 구원 받아야 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작년 여름 수해가 나서 엄청난 피해를 봤습니다. 최근에 제가 강원도를 갔더니 그때 입었던 피해가 아직도 복구가 안 되었습니다. 큰 다리들이 무너지고 도로들이 유실되었던 것들이 간신히 복구는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수마가 할퀴고 간 파괴의 자리들이 남아 있습니다. 파괴는 우리를 굉장히 불편하게 만듭니다. 도로가 파괴되면 사람들이 차를 두고 걸어가야 되고 엄청난 거리를 돌아가거나 아니면 다리가 끊어져서 가고 싶은 다리를 못가거나 하는 것이 파괴된 상황입니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서 모든 것들이 파괴되었습니다. 파괴가 된 것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고립된 존재로 갇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잠깐 말씀 드렸는데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적어도 네 가지 관계가 파괴되었는데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을 가지고 와서 인간이 하늘로부터 공급돼는 자원은 없고 하나님 혼자 살아야 되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과의 관계가 파괴가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미워하게 되었고 이 미움은 자식 대에 와서 더 극력하게 나타나게 되었는데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쳐서 죽이는 사건에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자연과의 관계입니다. 자연과 인간이 서로 갈등하는 관계가 되었던 것입니다. 자연을 보호하자고 인간들이 애를 써는데도 한쪽에서는 엄청난 파괴 행위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다 죄로 말미암아 찾아오는 결과입니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서 한 하나님 안에서 함께 연합된 가운데 서로 소통(communication)하며 살 수 있었던 관계가 엄청난 갈등이 밀려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연은 말을 못하지만 인간들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인간만 들어오면 다 망가지는 것입니다. 또 사람 입장에서는 자연이 굉장히 두려운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죄로 말미암아 찾아온 결과입니다.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고 함께 의사소통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과의 관계가 형성되는 주변은 자연이라는 것이 환경을 제공해줍니다. 다 깨어진 것입니다. 남은 거라고는 자기 자신 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 속에서도 자기 자신이 통일된 하나가 아니라 엄청난 혼란입니다. 인간이 일관성이 있습니까? 인간 하면 여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 자체가 변덕스러움의 대명사입니다. 모순율이라고 합니다. 모순율이 인간 속에 존재합니다. 이건 이랬다가 이건 이랬다가 이건 또 이랬다가 살아갑니다. 나중에는 자기도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가 들어오기 전 이렇게 안 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봅시다. 인간의 구성 요소가 이성이 있고 감정이 있고 의지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되었는가하면 이건 생각이고 이건 느낌이고 이건 행동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느끼는 것보다 앞서고 느끼고 나면 행동을 하고 이렇게 서로 사이의 균형과 조화가 잘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깨어졌습니다. 이성은 A라고 생각하는데 행동은 B라고 생각합니다. 하지 말라고 지시하는데 감정은 하고 싶어서 해버립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자중지란이라는 것입니다. 인간내부에서 모순이라는 것들이 생겨나서 인간 자신이 모두 고립되고 홀로 있게 되었는데 홀로 있게 되니까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이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나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지탱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이 꿈꾸던 알량한 독립선언의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이 혼자 독립해 살고 싶다고 그렇게 난리를 쳐서 독립을 한 결과 이런 존재가 되어서 자기 자신도 혼란에 빠진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오늘날 번져가는 엄청난 정신병들은 점점 시대가 흘러갈수록 이런 것들이 계산이 안 됩니다. 점점 심각합니다. 심화됩니다. 정신질환이나 이런 병들이 선진국이 된다고 좋은 자연환경 속에 살고 물질이 많고 사회보장제도가 잘 된다고 해서 이런 것들이 없습니까? 더 심해집니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이런 증상에 더 심각하게 빠져서 그렇게 됩니다.
저는 21세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크리스천이 되었는데 그때 혹독하게 사춘기를 거치고 사상적으로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제일 힘든 것이 누가 나보고 몇 번씩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때에 너 왜 그렇게 힘드냐고 물으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딱 하나였습니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도 나 자신을 추스르고 행복하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죄의 결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이런 혼란 한 번도 못 느껴 봤습니다. 그건 무뎌서 그렇습니다. 정상적으로 느끼면 때리면 아프고 꼬집으면 아파야지 못 느낀다고 하는 것은 무뎌서 그런 것입니다. 죄의 결과입니다. 죄는 독립선언입니다. 하나님 절대 의존하지 않고 살겠습니다. 나도 한번 살아 보겠습니다. 그랬더니 뱀이 유혹할 때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긴 뭐가 하나님처럼 되었습니까? 똥처럼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죄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를 관계의 측면에서 본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본 것입니다.
이 죄의 결과를 자신과의 관계에서 본다면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이것이 이후에 이어지는 후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그 질문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 자신이 아니라 그 후손들이니까 그럼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죄의 결과, 아까는 관계에서 그랬는데 여기서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되느냐 인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죄가 아담이 인간을 대표함으로 범죄 함으로 두 가지 결과를 가지고 왔는데 하나는 죄책과 오염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죄책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책임입니다. 오염은 더러워졌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책임, 죄를 지었으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도망 다니는 이유는 무엇을 감당하기 싫어서 그럽니까? 죄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기 싫어서 도망을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붙잡히는 것입니다. 이런 죄책이 있고 이것은 이거랑 분리 될 수 없는 것인데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 깨끗했는데 범죄 하게 되니까 여기에 대한 책임도 지게 되는 동시에 실제로 인간이 죄의 더러움에 물들어 버린 것입니다.
죄를 나눌 때 죄의 종류를 나눌 때 두 가지로 나눕니다. 타고난 죄라고 해서 원죄와 자기가 살아가면서 직접 짓는다고 해서 ‘본죄’라고도 하고 ‘실행죄’라고도 하고 ‘자범죄’라고도 하고 여러 가지 말을 씁니다. 스스로 죄를 범한 것이라고 해서 이것은 자기 스스로가 한 것이 아니라 조상이 한 것이라고 해서 원죄라고 합니다. 모든 죄 안에는 원죄 안에 죄책과 오염이 있습니다. 원죄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죄입니다. 그 죄는 선악과를 따먹은 그 처음 범죄에 대한 죄에 대한 책임과 이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자식을 낳으면서 죄에 뒤따르는 부패성들이 전가가 된 것입니다. 더러워진 상태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것을 ‘오염’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어차피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납니다. 증거를 한번 대보겠습니다. 아이들이 뭐든지 가르쳐줘야지만 배워서 하게 됩니다. 젓가락질부터 시작해서 응가하고 엄마를 엄마라고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는 것, 거울 앞에서 머리 빗는 것, 모든 것 배우지 않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은 안 가르쳐줘도 합니다. 신기합니다.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인간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옛날에 제가 교회를 개척하고 얼마 안 될 때인데 전도사님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주 귀여워서 온 교인 사랑을 독차지 했습니다. 그런데 얘가 몇 살 쯤 되었을까? 네 살? 천진난만하고 우리가 알던 세상 죄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하루는 껌을 여러 개 들고 있습니다. 한번 어떻게 하는가 하면, 어떻게 하는가 보려고 “진석아 목사님 하나 줘야지?” 이렇게 쳐다보더니 “응.” 합니다. 껍데기를 막 깝니다. 껌은 자기가 먹고 껍질을 주는 것입니다. 또 한 애가 있었는데 고만했는데 사탕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랬습니다. “목사님 사탕 하나 줄래?” “응.” 두 개를 들고 있었는데 하나를 땅에 떨어트렸습니다. 얘가 또 깝니다. 아 이게 땅에 떨어져서 더러우니까 새것을 까서 주려나보다 했는데 깐 것은 지가 먹고 “응.” 땅에 있는 것 주워 먹으랍니다. 이게 어디서 배웠습니까? 누가 가르쳐 줬습니까? 인간이 이렇게 자기중심적이고 아주 이기적인 거짓말 잘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기독교에서 인간을 본성을 선하다고 보느냐 악하다고 보느냐? 타락한 이후를 보면 악하다고 보고 타락하기 이전까지 올라가면 선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독특한 인간관입니다. 이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면 이런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죄인으로서 죄의 뿌리에서 ‘죄책’과 ‘오염’이 있습니다. 이것을 계속 올려 보내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수액 삼아서 여기서 열매가 맺히는데 이것이 두 번째 본죄라고 합니다. 자기가 직접 짓는 죄입니다. 이 밑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원죄의 영향력과 계속해서 짓는 자기 자신의 죄의 결과가 함께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서 인간을 점점 더 절망적인 죽음이라는 질병 상태에 들어가도록 풍성한 병원체를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한없이 끝없이 달라고 하면 언제든지 공급해 주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처참한 질병 상태에 들어가게 만들고 순환적으로 더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시 또 죄의 본성을 자극해서 더 많이 더 많이 해서 여기서 나온 죄가 자기를 얽어매고 얽어 맨 죄가 다시 자기 속으로 들어가서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인간의 모습으로 진전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고통스러운 연결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구원받지 않고는 어떤 것이 바뀐다고 해도 그 이상의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시대 철학자 가운데 ‘세네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세네카의 문헌에 보면 어떤 이방인을 이야기하는데 그 이방인이 철학적으로 스스로를 수양하면서 바르게 살아가려는 그런 사람입니다. 세네카의 문헌에 보면 그 이방인이 하루에 저녁마다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내가 오늘도 잘못된 어떤 것을 안 하려고 했는가?’ ‘내가 명백한 악과 더불어 오늘 하루 얼마나 싸웠는가?’ ‘내가 얼마나 더 선하고 도덕적인 인간으로 변화되었는가?’ 매일매일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짓는 끔찍한 죄를 덜 짓습니다. 덜 지어도 무슨 차이인가 하면 뿌리는 살아 있고 열매가 못 매달리도록 이것을 괴롭혀서 안 맺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나무가 죄의 나무라고 하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과가 매달려야만 사과가 아니라 뿌리가 사과나무면 사과나무입니다. 큰 사과가 매달려도 사과나무고 이만한 사과가 매달려도 사과나무입니다. 사과가 매달려서 떨어져도 사과나무입니다. 본질 자체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 본성 자체가 변화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구원 받지 않고는 변화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책은 죄에 대한 책임인데 오염은 죄책의 영향으로 더러워져서 죄를 좋아하는 죄를 짓도록 이후에 사람을 이끌어가는 그런 영향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염이라고 하는 것이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째는 선천성입니다. 거짓말 가지고 이기심 가지고 잠깐 예를 들었는데 선천성입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처음부터 타고납니다. 그런 점에서 선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도덕적 부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둘로 나누어지는데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입니다. 도덕적으로 인간이 부패해 버렸는데 부패한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조금 부패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부패한 것입니다. 조금 부패한 것은 그 부분만 도려내고 쓸 수 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여러분 생각나실지 모르지만 옛날에 냉장고도 없던 시대에 이런 생선 궤짝이 있습니다. 여기에다 꽁치나 이런 생선을 담으면 냉장고에 제대로 보관을 못해서 여름 되면 막 썩는 것입니다. 몇 번 들치고 하면 생선이 막 짓이겨집니다. 나중에는 생선가게 주인이 팔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썩기 전에 소금이라도 절여놨으면 말려서 건어물이라도 해서 먹는 건데 시간이 없어서 못했습니다. 파리가 새까맣게 달라 들어서 다 빨아먹었습니다. 고기가 다 이렇게 짓이겨졌습니다. 이렇게 보고 이것은 고기라는 형체도 없을 정도로 짓이겨졌습니다. 이런 것의 상태가 부패하고 다 짓이겨진 상태가 인간의 상태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처음 만들어 놓은 인간관은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부패성 때문에 전적으로 타락하고 전적으로 무능합니다. 이제는 독립선언을 하고 이렇게 죄를 지은 존재가 되었는데 아는 일에 있어서는 창조주 하나님조차도 못 알아봅니다. 우리가 아무리 못 알아 봐도 자기 부모는 알아봐야 됩니다. 생각에 있어서 아는 것에 있어서는 얼마나 무능해 졌는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도 못 알아봅니다. 다른 영적인 사물의 이치를 어떻게 알아보겠습니까?
두 번째로는 느끼는 일에 있어서는 인간에게 본래에 부여하셨던 인간으로서 마땅히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느껴야 하는 것들, 하나님이 살아 계심,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피조물로 지은바 된 빚진 인간이라는 사실, 자기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일개의 피조물이라는 사실, 이런 것들을 도저히 느끼지 못하는 그런 존재가 되었습니다. 행함에 있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행하려는 마음도 없고 할 수도 없고 하려고도 들지 않는 완전히 빗나간 무능한 인간으로 타락하고 전략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독립선언을 하고 뛰쳐나갔는데 자기 자신으로서는 독립선언을 하고 뛰쳐나간 결과 찾아오게 된 어마어마한 불행과 고통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범죄 할 능력은 있는데 그 죄를 처리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건을 통해서 인간은 아담 이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미래에 태어날 인간을 포함해서 모두가 죄는 지었지만 그 죄에 대해서 전적으로 무능한 상태가 되어서 자기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가 없는 그런 존재가 되었고 따라서 인간은 그런 상태에서 구출받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외부로부터 팔을 내밀어서 그 어려움 속에서 끌어 올려주지 않으면 아무 희망이 없는 비참한 존재로 전략하게 되었는데 그 비참한 상태와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인간의 영광스러운 두 상태를 비교해 보십시오. 죄가 얼마나 파괴를 가지고 온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안 믿으시는 분들은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무엇으로도 그렇게 죄라는 병원체에 의해서 죽음이라고 하는 질병에 걸린 인간의 절망적인 고통의 상태에서 사람을 다시 건져낼 수가 없습니다. 원래 행복하던 상태로 인간을 돌아가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인간 안에는 절대로 그런 자원이 없습니다. 그래서 외부로부터 구원과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은총입니다.
인간이 범죄 하게 되었습니다. 약속에 따르면 범죄 하면 하나님이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반드시 죽는다. 말하는 화자의 사람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반드시 내가 죽게 하겠다. 그런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범죄 하는 날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였는데 이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인간 자체가 하나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과 속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겉 사람은 육체고 속사람은 영혼입니다. 둘 다 죽으리라 할 때 양자 다 의미하는 것입니다. 겉 사람의 죽음은 육체의 사망이고 영혼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버리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속사람은 떡이나 밥이나 물, 포도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하늘자원이 있는데 그것을 힘입어서 인간이 살 때 비로소 이 속사람이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을 죄가 뚝 잘라 버린 것입니다. 죽음은 즉시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약의 성격을 가진 약속대로 하신다면 인간을 즉결 심판해서 즉사시켜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도 죽고 이것도 죽어서 인간이 완전히 생명이 끝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겨냥한 죽으리라고 할 때의 심판입니다. 문제는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인간을 죽였습니다. 인간이 존재를 안 합니다. 창조세계는 존재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느낌이었겠습니까?
(예화) 제가 아는 장로님이 계셨는데 아들을 스물한 살까지 키웠습니다. 고등학교 다 졸업하고 대학 다니는데 학교도 좋은 학교 다니고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잘 생겼습니다. 키도 크고 신앙도 좋습니다. 그렇게 잘 사는데 가정도 넉넉하니 방도 잘 꾸며주고 없는 것 없이 다 해주고 부족한 것 없이 큰방을 쓰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물에 빠져서 죽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이 방의 존재는 아버지에게 방을 없애지는 못했고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하구한날 그 방 가서 우는 것입니다. 아들은 없지만 아들이 쓰던 물건, 아들의 방 이것을 다 볼 때마다 아들 생각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너무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이 죽었을 때 무엇을 자꾸 남겨 놓으면 그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기가 힘이 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그대로 존재하는데 인간은 하나님이 다 죽여 버리셨다. 그럼 창조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설명을 안 해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그 이유뿐만 아니라 구원에 관한 이유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즉시 인간을 죽여 버려도 마땅하신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한시적인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죽으리라고 한 이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히브리서 9장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반드시 죽습니다. 대신 이 사람을 죽기 전에 자손을 남기게 하셨습니다. 죽기 전에 또 다시 자손을 남기게 하는데 이때는 자손이 더 많아집니다. 자손이 점점 많아지게 됩니다. 인간을 이 세상에 대대적으로 대를 물려주어서 이 세상에서 살아남게 합니다.
그 의미는 두 가지인데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와 관련해서는 당신의 창조의 세계를 무의미하게 버려두고 싶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렇게 함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죄책과 오염을 물려받은 가운데 숙명적으로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생명을 연장시켜주심으로써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인간을 이 세상에 살아있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당신과 끊어져서 참 인간답게 살지 못했던 모든 비참한 관계에서 복원시켜주실 수 있는 기회를 인간에게 제공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삶의 영적인 의미입니다.
이런 생명의 시간 동안에 인간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해서 뭔가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이런 것들을 가지고 문명을 일궈 나갑니다. 비록 옛날에는 몇 백 년 지금에는 백년도 못 살다 가지만 길거리를 방황하다 죽고 싶지는 않은 것입니다. 집을 짓고 싶다. 그 다음에는 창문을 내고 싶다. 창문 만드는 기술이 발달합니다. 밤이면 피아노를 치고 싶은데 악기 만드는 기술도 발달합니다. 밥도 편하게 해 먹고 싶다고 해서 밥하는 기술도 발달합니다. 밥만 먹지 말고 반찬도 먹고 싶어 반찬 만드는 기술도 발달합니다. 이런 것, 저런 것 먹고 나니 예쁜 옷 입고 살고 싶습니다. 옷 입으니까 물을 들이고 싶으니까 염료 기술이 발달합니다. 그런 것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하니까 학문이 발달합니다. 이러면서 세워져 가는 나라가 이 세상 나라입니다. 이 세상의 문화입니다. 문명, 이건 정신적인 문제이고 이건 물질적인 문제입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자기가 피조물인 줄 알고 자기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살려 두시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사람들이 이런 문화와 문명의 활동에 그 정신을 가지고 참여해서 문명과 문화를 보고 아 우리는 피조물일 따름이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구나. 이런 것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이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중요한 사명 중에 하나입니다.
이렇게 해서 겉 사람과 속사람이 모두 죽임을 당해야 하는데 속사람은 즉시 죽었지만 겉 사람은 살아서 하나님을 믿을 기회를 얻게 된 것이고 얻게 된 인생의 시기 가운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로 못 돌아오는데 그것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 자체가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들 가장 중요한 일 하나는 해결하신 것입니다.
범죄 한 인간에게 베푸신 은총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육체의 생명을 연장시켜 준 것이고 두 번째는 메시아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메시아’라는 뜻은 ‘마사’라고 하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마사’는 ‘기름 붓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피동명사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고 이건 희랍어로 하면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와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신다.’라는 뜻도 되고 ‘하나님이 특별히 능력을 부으셨다.’라는 뜻도 되고 ‘하나님이 특별한 자리에 세우셨다.’ ‘세움’, 이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갖는 존재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죄라는 병원체가 들어와서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렸을 때 사람이 몇 사람 안 되었지만 아담도 하와도 맞아 죽은 아벨도 가인도 그 후에 태어난 셋도 가족입니다. 죄가 얼마나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아담과 하와 범죄 한 본인 자신들의 때부터 뼈저리게 경험한 것입니다. 아주 철저하게 죄가 엄청나게 무섭다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자기 자신이 거기에서 죽음이라는 질병 상태에서 오는 견딜 수 없는 고통, 거기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담과 하와의 속에서 낳은 아이들이 있는데 여기에서 메시아 이런 죄에서 건져내게 해주는 어떤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타락하자마자 주어지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 이하에 나오는데 타락을 하니까 죄를 지으니까 뱀은 저주하시고 하와, 아담, 차례대로 형벌을 약속하시는 가운데 형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약속이 주어지는데 뱀과 뱀에 대해서 “너는 이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일평생 배로 기어 다니고 흙을 먹는다. 너는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서 너의 머리를 부술 것이요, 너는 발뒤꿈치를 물리라.” 여기에서 ‘여자의 후손’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처음 하나님께로 이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면 여자의 후손이다. 여러분 아이를 엄마가 낳습니까? 아빠가 낳습니까? 우리말에도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우리 성경에도 보면 사람을 낳을 때는 낳은 것이 아버지가 나옵니다. 허리에 있다고 하는 것은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허리 속에 기운으로 생식을 해서 아이가 태어난다고 할 때 그게 아버지가 낳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기르는 것입니다. 족보도 아버지 이름이 나오고 아들 이름이 나오고 아들을 아버지 삼아서 아들 이름이 나오고 또 후손이 나오고 계속 내려갑니다. 똑같이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해서 계속 태어나는데 여자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면 풀리는데 마태복음 1장에 족보가 나옵니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에서 한 사람이 태어나는데 “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 1:16) 마리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약속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중요합니까? 뭔지는 잘 몰랐지만 우리가 예전에 있었던 그 복된 상태에서 이탈해서 죄라는 병균으로 인하여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서 나, 우리의 힘으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 모두 깨어진 상태에서 고통 가운데 사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이 건져 주실 것이라고 하는 기대와 약속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때부터 말입니다. 그렇게 건져 주실 것이라고 하는 기대에 대한 약속이 아들이 태어나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동침해서 아들 가인을 낳았는데 가인의 이름이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아들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던 조상들이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혹시 그 아이인가 하면서 아이에 대해서 자신의 구원을 기대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런 기대는 가인뿐만 아니라 그 후에 태어났던 모세도 마찬가지이고 노아도 마찬가지이고 아들이 태어나면 우리를 비참한 절망적 상태에서 구원해 줄지 모른다는 강력한 기대를 갖게 되었는데 그게 결국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였고 그런 기대를 믿음으로 소유했던 사람들이 구약에서는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치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하나님이 메시아를 약속하는 것을 통해서도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 하나님이 인간이 스스로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도 단절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이것을 영원히 내버려 두지 않고 무엇인가 이것을 다시 이어가려고 한다는 계획이 하나님께 있었음을 처음부터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게 만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었던 것이고 이런 사랑이 인간에게 입혀진 것을 가리켜서 은총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범죄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간에게 다시 당신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 수 있는 그러한 길을 제시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구약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여러 가지 제사가 구약에 나오는데 제사의 근본적인 의미는 한 가지 인간의 고민에 대한 해결입니다. 인간의 고민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께서 자원을 공급받고 살아야 하는데 끊어진 것입니다. 끊어진 것이 문제입니다. 이 끊어진 것을 다시 잇고 하늘 자원을 부분적으로나마 공급을 받으면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인간이 범죄 한 인간이기 때문에 죄인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결국 무슨 문제가 나오는가 하면 여기에 하나님이 계신데 이 하나님이 근본적인 문제가 죄라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 때문에 자기가 이렇게 비참한 상태에 떨어지고 인간으로서 본래적인 영광을 잃어버렸는데 이 죄 때문에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자원이 끊어졌다고 다시 이것을 공급받기 위해서는 일단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인간이 도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이렇게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끊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끊어졌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해결책도 인간이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죄를 범할 수 있는 능력은 있는데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러 놓은 것입니다.
(예화) 마치 아이가 제가 어렸을 때인데 그때는 시골에서 김칫독 같은 것을 이렇게 만들어가지고 거기에다 김치도 담그고 짚으로 사서 했습니다. 우리 막내가 있었는데 네 살쯤 되었습니다. 애들하고 성냥 가지고 놀다가 김치 광에 불이 났습니다. 어른이 그랬으면 불 끄자고 했을 텐데 아이가 그러니 도망갔습니다. 방에 온 식구가 추운 겨울인데 누워 있는데 뭔가 타다닥 하며 타는 소리가 납니다. 이거 아무래도 장작이 타는 소리인가 보다. 너희들 한번 나가 보라. 나가 보니 불이 벌써 다 타가지고 울타리를 향해 지붕으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얘는 어떻게 했습니까? 도망갔습니다. 이미 감당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한번 슬쩍 불장난 해본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아진다고 하니 치직 하고 한 번 해봤는데 펑해서 다 태운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끊어진 관계를 인간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다시 이을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영원히는 안 되고 잠깐이라도 이어줘서 가끔씩이라도 하늘 자원을 공급받으면서 처음 창조되었던 인간처럼 못 살아도 그것이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하는 것이라도 느낄 수 있도록 살아가게끔 만들어 주셨는데 이것이 제사입니다. 제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죄가 있는데 이 죄를 일시적으로나마 없애기 위해서 죄를 짊어진 제물이 있어서 그 제물이 이 죄를 지고 하나님 앞에 형벌을 받고 죽음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진노를 잠시 푸시고 하나님이 인간과 더불어 다시 사귀실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것입니다.
제사를 우리들이 은총이라고 부른 이유는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해서 하나님이 만나주셔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지 하나님이 인간 없이 살 수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 인간들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너무 불쌍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일시적으로나마 만나서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하지 못하고 죄에 얽매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최소한 하나님이 너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라, 반드시 나 여호와가 약속대로 여자의 후손을 보내어서 너를 구원하리라는 믿음 속에서 계속 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제사라는 제도를 만드셔서 타락한 인간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일시적으로나마 하나님이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제도입니다.
제사제도는 타락한 인간,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는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제사 제도 속에 인간을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버리시지 않는 하나님의 섬세한 구원의 계획의 씨들이 이 속에 들어있습니다. 이 씨들이 역사가 자라면서 줄기가지가 뻗어 올라오며 잎과 가지가 무성해지면서 열매를 맺어서 온 세상을 뒤덮는 구원의 효과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