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녹취자 : 허혜숙
누가복음 11장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주기도문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단서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한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고 왜 그런지 늦게 예수님을 찾아온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자 가르쳐주신 기도가 바로 주기도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약 27년 전 만 서른두 살에 교수가 되어서 그 이듬해에 교수실에서 혼자 누가복음 11장 1절을 읽다가 감동을 받아서 세 시간 동안을 누가복음 11장 1절을 한글 성경과 희랍어 성경을 오고가면서 읽고 생애 잊혀 지지 않은 도전을 받았고 그 말씀이 오늘 여기까지 살아오도록 저를 붙들었다고 감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평이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1절에서 무슨 그런 큰 감동을 받았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저는 이 1절에서 깊이 감동을 받고 당시 교회로 돌아와서 한 달 동안을 11장 1절을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는 20분 동안에 농축해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제일 먼저 도전을 받은 것은 ‘예수께서’ 라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기도를 하신다면 도대체 그 기도는 하나님 말고 누가 들으시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우리들이 한 번 귀 기울여 들어야할 중요한 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양성에 관한 교리입니다. 그 분은 참 하나님이시지만 참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고 오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이시기 위해서 인간성을 완전히 버리신 것도 아니고, 참 인간이 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파 버리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참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지만 하나님의 본성을 인간의 본성 아래 겸손히 감추시고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 모든 죄는 일체 없으시지만 사람으로서 짊어져야 할 모든 유한성과 그리고 연약함을 그대로 짊어지시면서 예수님도 고난에 가득 찬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죄 있는 인간들이 경험하는 육체의 연약한 한계를 모두 겪으셨습니다. 잡수시지 않으면 시장하셨고 마시지 않으면 목마르셨고 많이 걸으시면 행로에 피곤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보면 기도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 기도하신 이유는 첫 번째는 제한된 인성 안에 계신 분이었기 때문에 겸손하게 모든 인간처럼 기도의 방식으로 삶을 사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러한 연약함을 통해서 우리 인간에서 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기에 기도의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되셔서 ‘파도야 잔잔하라’ 명령하시기도 하고 ‘귀신아 내가 너를 명하노니 나오라’ 그렇게 병자를 치료하기도 하셨지만 예수님은 하루의 양식을 위해서도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바라는 것처럼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셨고 하나님의 뜻을 당신의 손으로 이 땅에 이루실 수 없는 분인 것처럼 아버지께서 이 땅에 당신의 뜻을 이루어지게 도와 달라고 빌면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높으신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는데도 아버지 하나님을 이렇게 의지하며 몸소 기도하고 사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스스로 기도를 실천하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보기도’ 사실은 이 말은 신학적으로 잘 못 된 말입니다. 예수님 이외에는 중보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기도의 중요성을 우리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기도해야 될 필요성을 덜어주거나 감소시켜 주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초창기에 한국에 선교사들이 와서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테니스를 열심히 치고 있었더니 은혜를 받은 양반이 도포를 입고 와서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를 치고 있는 선교사에게 말했습니다. ‘선교사님, 그 힘든 일을 왜 몸소 하십니까? 아랫것들 시키시지요’ 그랬답니다. 기도는 그런 운동과 같아서 아랫것들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통해 받는 섬김 기도의 위대한 능력은 자신이 기도의 사람일 때 바로 그런 위대한 능력도 나타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충격처럼 다가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빈들에서, 산에서, 강에서, 혹은 광야에서 엎드려 기도하고 계신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얼마나 기도하고 계십니까? 기도하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그리워서, 내가 가지고 있는 기도의 소원이 너무 간절해서 중심을 토하며 눈물로 기도하던 적이 언제입니까?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간절히 하나님의 얼굴을 고하며 중심을 쏟아놓는 그리스도인의 그 마음은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일까요? 이 세상에서 인간의 영혼이 아주 아름다울 때가 두 번 있습니다. 한 번은 마음 깊이 하나님만 사랑할 때이고, 또 한 번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용서를 구할 때입니다. 몸소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신 장소가 표명되어 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엔토포티니’라고 나옵니다. 영어로 직역을 하자면 'in certain place' 혹은 'in a place' 성경은 예수님이 기도하는 장소를 고정해서 제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일생동안 여행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병들고, 굶주리고, 진리의 말씀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와 요단 건너편까지 다니시면서 그들을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성경 누가복음 3장 21절에서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곳이 강이라고 말합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곳이 광야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산이라고 나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냐 하면 환경이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전투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의 삶은 홈그라운드에서의 축구경기가 아닙니다. 외국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서 우리와 싸우는 선수들을 열심히 응원하고 우리가 너무 경기를 잘 하면 맥주병 콜라병들이 날아오는 경기입니다. 여러분이 이러이러한 상황과 형편 때문에 기도를 못한다고 하지만 그런 환경이 좋아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시간과 여건은 마련이 됐는데 마음이 기도하기 싫어서 못합니다. 마음이 기도 하려고 하면 상황이 도와주지를 않습니다. 결국은 일생동안에 내 밖에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환경과 싸우게 할 것이냐 아니면 기도하기 싫은 내 마음과 싸울 것이냐의 차이는 있지만 기도는 수많은 전투 속에서 나오는 마지막 선택입니다.
저도 신학교 다니던 시절을 이렇게 돌아보면 제가 생각하기에도 기도를 정말 많이 했습니다. 다시 7년을 되돌려 놔 주셔도 그 이상은 살 수가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교수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정말 기도할 만한 환경일 때 기도를 많이 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외부적으로 도저히 기도할 수 없는 환경, 시련과 고난, 역경, 수많은 고뇌가 있어도 마음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차고 오를 때 많은 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환경에 굴복하지 않는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환경에 굴복하지 말고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있습니다만 마지막 세 번째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시간, 혹은 기도의 몰입의 정도를 암시하는 단어가 여기에 실려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라고 되어있는데 ‘마치시매’라고 번역된 희랍어 단어가 ‘에파우사토’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의 히브리어 동치어가 ‘샤바트’이고 이 단어가 맨 처음 쓰인 곳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고 쉬셨다고 할 때 그 1장 30절에 나와 있는 그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고 쉬시매’라고 번역할 수 있는 구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결국 예수님의 기도에서 두 가지 요소를 보여줍니다. 하나는 그 기도가 너무 장시간의 기도였기 때문에 기도를 마치고 난 후에는 너무 육체의 힘이 쇠약해져서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한 가지 가능성은 시간과는 상관이 없이 짧았다고 하더라도 온 마음을 쏟으며 기도했기 때문에 결국은 예수님의 육체의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기도 속에서 들어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말 금식을 하며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을 하고 온 힘을 쏟아서 기도를 하면 육체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땀이 피가 되도록 쏟아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땀이 피가 되는 것을 경험하지는 못했는데 그렇게 기도할 때 소변에 피가 섞여서 나오는 것은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진실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에게 이제는 환경을 이기느냐의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정말 기도에 온 마음을 쏟아 붓는 충분한 기도를 실천하면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육신의 정욕, 그리고 이 세상의 유혹,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파도와 같은 현실들, 우리를 낙담하게 하는, 우리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삶의 사태들, 이 속에서 어떻게 이것들을 이길 수 있을까요? 세상에 있는 자원을 사람들이 집착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짧은 기도로 하나님의 능력을 불러내는 위대한 사건들이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짧은 기도로 하늘의 해와 달을 멈추게 한 사건이라든지 귀신을 내어 쫓고 명하여 병든 자를 고치던 바울의 사건이라든지 등등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흉내 내어 보면 대부분 응답이 안 됩니다. 이런 기도로 이 땅에 위대한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렸던 위인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평소에 깊은 열정으로 오랜 시간 기도에 헌신해 오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짧게 기도할 때 위대한 능력이 이 땅에 불러들였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도를 차별대우 하십니까? 'Yes, Yes absolute.' 모든 사람의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영혼의 시선이 당신께 고정되고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모든 가치가 하나님의 영광에 있는 사람,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정신으로 일생을 살아서 자신이 살아서 숨 쉬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기도는 한 발은 세속에 한 발은 신앙에 발을 담그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투덜거리는 기도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에 더 강력한 시선을 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을 하던지 여러분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을까요? 세 가지를 충고하고 하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