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도 십자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8下
녹취자: 백지영
오늘 편지를 받고 있는 이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두 번째 전도 여행을 하는 가운데 주후 50년 가을에 이 지방에 도착한 바울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고린도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항구도시였습니다. 돈이 많고, 술이 많고, 그리고 향락이 많은 도시였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서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 후에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로부터 내려와서 힘을 합해서 복음을 전하여 고린도교회가 우뚝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방탕하고 음란하고 그리고 돈을 사랑하는 이런 세속적인 도시에 하나님의 교회가 섰다고 1장 2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도시는 타락했으나 교회는 거룩했습니다. 시민들은 부패했으나 그러나 성도들은 경건한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무엇이 같은 도시에 함께 어울려 살던 사람을 그렇게 거룩한 사람들로 구별해 놓고, 또 같은 도시에 어울려 먹고 마시며 타락한 사람들로 하여금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의 성도가 되어서 그 시대를 본받지 않는 경건한 사람들을 만들어놓았습니까? 바울은 이 지방에서 교회를 세울 때 인간의 철학이나 사람의 변론을 사용하지 오직 꾸밈없고 솔직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아덴에서 그 뛰어난 에비그로우스 학파와 철학적인 논쟁을 통해서 그들을 제압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고린도에 이르러서 복음을 전할 때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꾸밈이 없고 솔직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으로 증거되는 복음을 통해서 가장 타락한 한 도시 한 복판에 그 타락한 물결을 먹고 그 속에서 즐거워하고 육체를 좇아 욕심을 따라가고 있었던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성도라 불림을 받는 거룩한 무리들로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역시 이 시대가 아무리 타락했고 아무리 이 도시가 하나님을 떠나고 방탕하고 타락했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현실을 바라보며 비관하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은 소돔과 고모라나 그리고 에덴동산이나 그리고 여리고 성이나 그리고 가나안 땅이나 그리고 이스라엘이나 두로와 시돈이나 그리고 벨리게나 이곳이나 서울이나 강남이나 어느 도시나 동일했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며 주님께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자기의 육체를 섬기며 살아가는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모습이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런 세상이 결코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면 오직 하나인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으로 증거되는 이 충실한 복음과 꾸밈없고 솔직한 하나님의 능력의 복음, 이것을 통해서만 타락한 도시 한 복판에 거룩한 교회가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잃어버린 교회는 반드시 그 도시의 물결에 휩쓸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패를 오늘 이 고린도교회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한 때 이 세상에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 있고 세상이 도무지 돌이킬 수 없는 완고한 죄악 가운데서 살아가는 도시라고 하는 사실 때문에 절망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쓰러져 가고 타락하고 부패해 가는 세상과 사람을 보고 절망하는 대신에 우리는 더 크고 놀라운 정도로 능력의 이 복음을 바라보며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그 세속 더러운 물결에 잠들어 있던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마음에 부딪치자 영혼들을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룩한 무리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소유한 타락한 하나님의 도시에 경건한 하나님의 교회가, 타락한 사람의 도시에 경건한 하나님의 교회가 서는 역사를 복음이 가져왔던 것입니다.
바울은 1년 반이나 2년 정도 여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다시 이 교회를 떠나서 에베소와 가이사라 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능력 있는 복음에 붙잡혔던 고린도교회의 신앙이 식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거기에 도시의 정신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도시는 뭐하는 곳이었습니까? 현자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학문께나 한다는 사람들은 서울에 모여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인텔리들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저마다 자기 잘났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나는 누구의 문화생이라는 사실을 자랑했습니다. 문벌을 자랑하고, 학벌을 자랑하고, 그 학벌과 문벌은 서로 당을 짓고 파쟁을 가르고 우리 무슨 파, 무슨 파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바다에서 원하지 않는 금욕생활을 한 다음에 항구에 돌아온 남자들은 그 항구에서 육체적인 쾌락을 즐기며 회포를 풀었습니다. 도시는 자연히 성적으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돈이 많고 하나님이 없는 도시, 필연적으로 성적으로 타락하는 도시인 것입니다. 돈이 많고 신앙이 없는 그리스도인, 필연적으로 가는 그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이런 식으로 살아가게 되자 교리에 대해서도 의심이 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부활? 정말 그럴까?" 의심이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과 그리고 그가 살아나신 것과 그를 믿는 자를 다시 살리실 줄을 믿는 이 부활과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을 때 '아멘'으로 화답함으로 세워졌던 교회가 이제는 그 부활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이 자신들에게 전해주었던 이 놀라운 복음의 위대한 교리는 버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묘하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정말 사도냐?” 그렇게 묻는 이야기는, 바울이 가르쳐준 그 복음이 정말 우리들이 붙들어야 되는 가르침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파쟁을 짓고 서로 나뉘는 일의 그릇됨을 지적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관심을 십자가로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후에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기억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사람은 이미 이 편지를 받기 약 5년 전에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구원을 체험한 성도들이 모여 있는 교회들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새삼스럽게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이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십자가의 도'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오늘 왜 고린도 교회에 이미 믿어서 성도가 된 이 사람들에게 사도는 '십자가의 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바울이 이렇게 십자가의 도를 말하여 복음이 무엇인지를 상기시키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서로 파쟁하고 육체로 자랑하는 그러한 삶, 그래서 타락한 도시에 가득 차 있는 나뉘고 갈라지는 당파정신의 풍습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참으로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십자가가 자기를 위해 해 준일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너희가 그렇게 편을 가르고 나누어서 서로 싸우고, 세상의 법정에서 성도들끼리 송사하고, 음란한 세상의 풍속으로 교회를 더럽히는 그런 일들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지점에서 넘어지고 있습니까?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최대의 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복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복음을 나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최고의 거침돌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십자가를 내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서 분명한 태도를 취합니다. 복음을 거절하거나 아니면 복음을 아멘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놀라운 도가 펼쳐질 적마다 그들은 복음의 원시림과 진리의 밀림 속에서 환호성을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우심과 그의 광대하심과 복음 앞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의와 그 놀라움에 대해서 할 말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스스로 이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를 완전히 마스터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진리의 내용만 많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안다고 하는 것은 다른 이 세상의 것들을 안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안다'는 말을 사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이미 5년보다 훨씬 전에 예수를 믿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땠습니까? 생명의 놀라운 능력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방언과 영들을 분별하는 것과 지혜의 말씀과 병 고침의 은사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늘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예배 시간이 혼잡할 정도로 방언이 쏟아져 나오고, 신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 영들을 분별하고 예언하는 이런 일들은 고린도교회 예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생명의 능력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 아느냐 묻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까? 교회 처음 들어온 사람에게 십자가에 대해서 들어보셨느냐고 말하는 것이지 귀신을 내어 쫓고 영들을 분별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고 방언을 말하고 통변의 역사가 일어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바울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너희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고린도교인들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말한다면, 너희가 그런 식으로 아는 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지점에서 속고 넘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아는 사람, 구원의 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그리스도의 구원의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를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설명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 사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정말 주옥과 같은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것과 그것을 붙잡는 것이 고린도교회처럼 이런 식으로 분리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은사가 넘치고 능력이 넘쳐도 분리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 말을 믿으십시오. 은사가 넘치고 능력이 넘쳐도 십자가를 아는 것과 십자가를 붙드는 것이 이렇게 분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해 아래 있는 어느 교회가 고린도의 교회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자랑할 수 있는 교회가 흔하겠습니까? 내노라는 교회 많이 다녀 보았습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생명의 능력이 사라져가고 있지 않습니까? 고린도 교회는 예배시간에 성령의 역사가 강해서 절제할 수 없을 정도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사도의 예리한 눈은 십자가를 놓치고 있는 것이 보였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 아느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런 식으로 자존심이 자꾸만 상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식으로 말씀의 지적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자존심이 상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요,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아니요, 이것을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부요한 것이 아니요, 내가 참으로 많은 것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식의 내용에 붙잡히지 않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진리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로 아는 것은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참으로 십자가를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말하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묻는 것입니다. "네가 나에게 붙잡혀 있느냐?" 말하는 것입니다. 네게 나에게 붙잡혀 있는 그 붙잡힘에서 놓임을 받는 그 순간 네가 아는 그 십자가는 그 십자가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조리 있게 사영리를 설명할 수 있어도 그것이 너를 붙잡고 있지 않는 한 고린도교회 실패는 얼마든지 되풀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서는 것을 보면서 쉼 없이 다짐했습니다. 또 다짐했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말하리라, 복음을 말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참으로 알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이 이 십자가의 도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십자가가 우리의 온 마음과 삶을 사로잡고 있습니까?" "아멘", 이것이 십자가를 아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는 여전히 주일이면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모이면 사람들은 찬양을 불렀습니다. 헌금을 했습니다. 구제를 했습니다. 선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배와 찬양과 헌금이 타락한 도시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죄악의 물결로부터 고린도교회를 지켜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높은 뾰족탑도,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치장한 교회 건물도, 그 탄탄하고 치밀한 교회 조직도 세상의 물결을 그런 것들에 걸리지 않습니다. 넘어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치밀해도 세속의 물결은 그 조직을 뚫고 들어옵니다. 교회의 담벼락이 아무리 높아도 세상의 물결은 그것을 비웃으며 넘어 들어옵니다. 아무리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해도 세상의 물결은 끊임없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알고 있었을지라도 복음은 이미 그들에게 능력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십자가에 사로잡힌 그들의 삶과 마음과 믿음이 속박을 벗어버리는 그 순간, 십자가에 사로잡혔던 십자가의 속박을 벗어버리는 순간부터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아는 참된 지식은 희미해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나뉘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나는 능력 있는 설교자 바울에게 속했어.” “그래, 나는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바울보다 훨씬 말 잘하는 박사와 같이 유식했던 아볼로 편이다.” “나는 예수님의 생애를 처음부터 목격했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게바파다.” "아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파다." 이는 모두 십자가가 그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진 증거였습니다. 십자가의 사로잡힌 신앙이 식어지자 찬란하게 느껴졌던 십자가의 광채는 빛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사람이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십자가가 위대해보이던 신앙이, 그런 시절이 이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급격한 회심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것만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구원을 받았다면 한번 좀 극적인 회심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에 있어서 이정표가 될 만한 뚜렷한, 말하자면 변곡점을 확 찍을 수 있어야 합니다. 깊이 회개하고 진심으로 뉘우쳤을 때 뭐가 보였습니까?
(찬양)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 세상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그 십자가 하나만 보이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십자가가 나를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사로잡힌 신앙이 식어지자마자 찬란하게 비쳤던 십자가의 광채는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크게 보였던 십자가는 사라지고, 아볼로가 대단하게 보였고 바울이 크게 보였고 게바가 위대해 보였습니다. 이윽고는 예수 그리스도도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와 함께 어깨를 다투는 일개 종파의 우두머리로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잃어버리면 그리스도도 함께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러한 일들은 너무나 흔하게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되새겨본다는 말 가지고 적합하지 않습니다. 매일 확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에게 십자가에 붙잡혀 있는 것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알 뿐 아니라, 그 십자가가 내 삶을 붙잡고 내 마음과 내 심령을 사로잡아서 그 십자가 속에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십자가를 생각할 때 놀라운 감격을 맛보았기 때문에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매일 매일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나이가 많이 들어 아들이 목사가 되었을 때, “아들아, 세상에 있는 목사들은 자기 아들의 갈 길을 위해서 여러 모로 힘을 쓰고 백을 쓴다마는 나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열심히 구하라! 하나님 저에게 설교할 강단을 주시옵소서. 아들아 이제 설교시간이다. 외쳐라. 너는 힘껏 외쳐라. 그리스도,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외쳐라. 소리쳐 전하라.”고 고함쳤습니다. 매일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붙잡혀 있는지 자신을 검증해야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를 뚫어지게 알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기를 잃어버린 까닭은 왠일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참으로 아는 사람들은 생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아니라 그 생명의 능력에 붙잡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늘 사도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십자가의 도가 두 가지로 이해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인데 그 십자가가 어떤 사람에게는 이렇게, 어떤 사람에게는 저렇게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하는 능력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비쳐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우선 여러분들, 우리들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구원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형편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가까이 갈 수도 없는 지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이 아니라 이미 ‘죽어버린 자들’이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이 십자가는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또한 그런 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따라서 그 십자가를 바라는 사람들이 맹숭맹숭한 마음으로 그 십자가 앞에서 고개를 끄덕거릴 수 없게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십자가는 네가 바로 하나님 앞에 그런 심판이 임박한 죄인이라고, 아니 이미 심판을 받은 죄인이라고 말해주는 동시에, 그리스도가 그렇게 가치 없는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에서, 인간의 죄 됨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앞에서 그 인간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뉘우치고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부당한 일이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은혜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내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나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의 인생과 나의 영혼과 나의 영원을 향한 나의 모든 삶의 주인이 오직 하나님 당신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아니요,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자유케 되었으나 나는 스스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의 종이 되는 길을 걷겠노라고 그렇게 자기 인생을 하나님 앞에 붙들어 매는 사람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단지 미련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믿고 그것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들도 그들의 눈에는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십자가의 도를 즐겁게 여기던 때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20세기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은 언제나 그랬던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이 끊임없이 구하고 사모하던 바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무엇입니까? 능력으로 오시는 메시야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모든 압박을 단칼에 처단하고 다윗의 그 놀라운 왕국을 새롭게 건축하는 그러한 정치적인 메시야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깊숙이 뿌리박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인자는 죽어야 하리라, 인자가 못 박혀야 하리라, 인자는 고난을 받으리라, 죽으면 살아나리라." 말씀하셨어도 끝까지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렇게 친절하게 설명을 했는데. 그것은 제자들이 이해력이 떨어지거나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선입견이 그렇게 강하게 뿌리박혔던 것입니다. 반드시 그분은 힘없이 죽을 수 없으며 능력으로 와서 싹 쓸어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깃발을 세우는 정치적인 지도자여야 된다는 힘을 가진, 파워를 가진 그런 권력자이어야 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생각이 없이 살아가는 것 같아도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관해서만큼은 아주 독자적이고 양보할 수 없는 견해를 다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불투명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확실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세세하게 우리처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난 싫다, 좋다를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싫은 데는 나름대로 분명한 이유가 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교회는 이래야 하고, 그리스도는 이래야 하고, 구원자는 이래야 된다고 하는 생각이,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은 이런 세상이어야 된다고 하는 선입견이 유대인들처럼 그들에게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힘없이 죽어야만 수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는 이 역설이 말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힘이 있는데 왜 죽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능력의 왕이기를 원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능력의 왕으로서 세상을 통치하지 못함으로 십자가가 걸림돌이 되었던 것처럼 오늘날은 수많은 걸림돌의 이유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나서 살기를 원하는 인간들의 교묘한 술수인 것입니다. 교활한 마음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1200만이나 믿는데 세상이 뭐 이따위냐고, 예수가 살아있다면 그리고 교회가 참된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면 세상은 이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도덕이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데도 어떻게 사회가 이렇게 공평해 지지 못할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공평한 의라고 하는 걸림돌이 그들로 하여금 십자가 앞에 넘어지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 그랬습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을 보든지 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민족이고 모든 헬라인이 아닌 나라 사람들은 미개하므로 자기들의 철학의 전도를 받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앞에 "죽으면 살리라"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죽었는데 살아난다?”, 불가능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그것은 아무런 종교적인 의미도 없었고 단지 죄인을 못 박아 죽이는 형틀이었고, 구약에서는 오히려 저주받아 죽은 표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온 세상의 죄인을 죄로부터 구원할 수 있으며 죽음을 상징하는 이 형틀이 어떻게 생명의 근원이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도 동일한 질문 앞에서 수많은 죄인들은 넘어지는 것입니다. 큰 죄인이나 작은 죄인이나 십자가에서는 모두가 죽일 놈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지금도 이 세상의 인생을 향해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의 최고의 질문이고, 우리 신앙 최대의 질문인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네게 있어서 십자가 나는 무엇이냐 묻는 것입니다. 더 파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확실한 대답을 주지 않으면 십자가는 더 이상 우리를 상대해 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지혜로 판단하면 미련한 것밖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견해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지금도 이 세상에 나아가서 그리스도 예수가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누구든지 자기의 죄를 이 십자가 앞에 회개하는 자는 구원을 얻고 영생수가 흐르는 천국으로 너희 영혼을 인도하시리라고 말해보십시오. 세상의 반응이 어떠한지 시험해 보십시오.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 이외에는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전하는 이 십자가의 도는 언제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를 할 때 사람들이 우리의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세상의 본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가서 "그리스도 예수가 여러분을 위해 죽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당신은 죄인입니다. 생명을 얻으십시오" 할 때 "아, 그렇습니까? 아멘"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을 벌써 이상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복음과 십자가가 선포되었을 때 사람들의 마음이 우리와 성경이 바라는 바대로 반응하는 것은 이변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전부 다 이변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아니, 그게 어떻게 믿어집니까? 2천 년 전에 피 흘려 죽은 십자가가 오늘 날 구속했고, 나에게 생명의 능력을 주고, 오늘도 살아갈 맛을 주고 그리고 바람이 부나 풍파가 일어나나 그 십자가 튼튼히 붙잡고 날마다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기며 살아가는 이 십자가의 현재적인 신앙, 이변 아닙니까?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복음에 배척받으리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뿌릴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직하게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죄인입니다. 십자가 이외에 소망이 없습니다." 복음의 진수를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복음 속에 깃들여 있는 신비인 것입니다. 사람의 속에 깃들여 있는 참된 영혼은 선명한 복음을 원하는 것입니다. 가감되지 않은 선명한 복음이 주어져야지만 선명한 결단의 촉구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시킬 때 죽든지 살든지 이것을 하든지 말든지 하라고 해야지, 이것을 해도 좋지만은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안 하면 또 안 되고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사람들이 헷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뭘 해야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예정하셔서 구원하기로 한 백성과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마음이 강퍅하여 멀어질 심령들이 구분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웃음거리였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를 전하는 사람들도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는 말하기를 그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에 법정에서 이런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까? “바울아,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 그러나 오히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미쳤어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미쳤고 정신이 온전하여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정신이 온전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그의 것이로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세상에 의해서 거부되고 취급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 이외에는 길이 없고 이것 이외에는 참된 생명이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시험해 보십시오. 저는 아주 온 몸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근원을 알 수 없는 깊은 영적인 늪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십자가에 대한 감격을 느껴본 적도 없고 지금도 거의 없습니다. 관념 속에 있을 뿐입니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강물과 같이 밀려오는 놀라운 성령의 은혜와 폭포수와 같이 쏟아지는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 앞에 어린아이처럼 입을 벌리고 떨면서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그 은혜의 감격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저보고 여기에서 이렇게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에서 말씀으로 수종드는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간단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되게끔 하나님이 만들어주시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진정코 일할 수 있습니다. 그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이 세상을 향하여 생명의 밧줄을 던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만이 참되고 이 어두운 시대 속에 선지자의 목소리를 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며 어그러지는 세대 가운데서 참된 진리의 자녀들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금이나 은같이 썩어질 것들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위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매일 물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하실까? 묻기 전에 주께서 여러분을 위해 하신 일이 얼마나 크고 놀라우며 이후로 아무 것도 안 해주신다고 해도 우리는 주 앞에 입을 벌리고 할렐루야,
(찬양)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주 예수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내 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입이라면 나를 구속한 그 은혜를 한없이 찬송할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을 행해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께 우리의 영혼이 접붙인 바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는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행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뭔가 하나님을 위하여 섬기고 일하고 불사르게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로 변화되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십자가가 교회 속에서도 이 세상의 지혜로 십자가가 판단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이 세상은 세상의 지혜로 십자가를 판단하기 때문에 이 십자가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도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향해 너희는 가망 없는 부패한 죄인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에게 다른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너희는 아직 선하다, 너희는 아직 스스로 잘 살아갈 수 있다, 노력하면 소망이 보인다, 아주 훌륭하게 잘 될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고 사망을 선고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너희 스스로 애를 쓰고 지혜를 짜내면 인간성이 회복되고 세상도 천국과 같아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힘을 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선언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인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죄 가운데서 구원을 필요로 한다고 선언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십자가와 상관없이 말합니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신학적인 견해가 아닌 것입니다. 설교자의 견해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인간들이 또 여러분들이 십자가와 상관없이 살아간다면 진지하게 살아도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울고 웃으면서 살아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저희 죄는 쌓여져 가고 마지막에 진노의 불꽃은 더 맹렬하게 타오를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너희 스스로 행복하게 할 수 없으며 영혼도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그 하나님께 접붙인 바 되고 그와 더불어 하나 되어 살지 않는 한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아니함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삶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를 미련하다고 판단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망을 얘기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선 이미 체념했습니다. “아,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이상해.” 그러는 사람 보았습니까?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장사하든 사람들이 시체를 땅에 묻을 때까지는 눈물을 글썽거리지만 흙을 덮고 돌아서서는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껄껄대는 이유는 바로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체념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다시 살 기회를 얻지 못하는 크고도 두려운 영혼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십자가는 또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인 것입니다.
세상이 이 십자가의 심각한 도를 미련하게 여기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기독교 신앙은 결코 인생살이를 윤택하게 하는 장식품이 아닌 것입니다. 영원을 향하여 죽느냐 사느냐 하는 선택입니다. 신앙을 선택할 때서부터, 아니 태어날 때서부터 심각한 것입니다. 결코 장난처럼 다른 사람들이 말해주는 가이드를 따라서 낄낄대며 웃으며 웃고 살다가 마지막에 그 심판을 떠맡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나 무섭다는 것입니다. 영원을 향하여 죽느냐 사느냐 하는 선택인 것입니다. 예수를 이미 믿은 신자는 그러면 이런 심각함이 사라지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 해서 이런 심각함은 살아남아서 우리의 인생을 붙들고 그리고 방향을 짓고 영향을 짓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러한 심각함에 대해서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우리의 몸에 행한 대로 따라 받으려 함이라.”
오늘 예배드리는 것, 이것은 잠시 있다가 스쳐갈 인생들이 드리는 예배지만 영원을 향한 결단인 것입니다. 영원을 향한 의미인 것입니다. 영원한 영원을 향한 가치인 것입니다. 오늘 사도는 고린도교회, 영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고, 생명의 역사가 풍부하게 나타나고 있던 지혜로운 자들이 수없이 많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뚫어지게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너희가 십자가를 아느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를 향하여 하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전서는 불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의 도가 무엇이냐고 다시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십자가는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는 매 순간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매 순간마다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네게 무엇이냐? 내가 참으로 네게 알려지고 있느냐? 내가 참으로 너에게 알려지고 있느냐? 네가 참으로 이 십자가를 알고 있느냐? 그렇다면 나에게 사로잡힌바 된 너의 삶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만 붙잡힌바 된 그 붙잡힘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이 교회가 늘 사람들의 십자가를 향한 감격의 눈물로 바닥이 적셔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마다 십자가의 감격 속에 흐느껴 울며, "하나님 아버지, 이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이루신 일들이 우리에게 족하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가 없사옵나이다. 오히려 나를 받으시옵소서."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발을 들여놓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인생이 분명히 뭔가 잘못된 지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으며 자기가 십자가를 아는 그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와 그 십자가를 판단하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는 한 십자가의 바른 실체는 가리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여러분, 예수를 믿는 사람들 속에도 이러한 인간의 지혜로 이 십자가를 판단하고 생각하는 일들은 얼마든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기준으로 해서 우리의 삶은 두 가지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즉 내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그 앞에는 누가 나옵니까? “그들은 육체를 자랑하려 함이니라.” 십자가를 자랑하든지 부끄러워하든지, 십자가를 자랑하든지 다른 것을 자랑하든지 둘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 속에서도 놀라운 능력으로 역사하지 못하는 또 다른 증거가 무엇입니까? 십자가가 자랑되어 지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십자가가 참으로 무엇인지를 알고 거기에 붙잡혀 있다면 이 십자가는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입을 봉하고 십자가를 말하지 말라치면 돌들이 소리를 치리라.” 하나님이 만드신 내 입으로 십자가를 말할 수 없다면 차라리 나를 죽이라. 왜 그렇습니까? 참으로 십자가를 알고 그 십자가에 붙잡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는 신앙고백 속에서 살아오면 내가 믿는 것인지 거기에 익숙해진 것인지 구별이 안 될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체험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릅니다. 자기도 스스로 믿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동의하는 것인지 자기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은 받아들이는데, 그 다음에는 십자가가 펼쳐지고 나면 십자가를 중심으로 놀라운 복음의 세계들이 원시림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십자가를 알고 있어도 그것이 참으로 느끼고 체험하고 그리고 영혼 속에서 십자가와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대해서는 익숙해도 십자가가 펼쳐지면서 우리 앞에 전개되는 장엄한 복음의 원시림으로 인도되어 들어갈 때 거부감을 갖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서 분명한 확증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될 때 교회가 가장 거북살스러워한다는 이런 느낌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십자가를 참으로 알고 있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들도 세상의 미련함으로 가리어져 있는 것입니다.
(찬양)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을 받은 것이 아니요, 흠 없는 어린 양의 보혈로 속죄함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가 무엇인지 모르니까 속죄함을 받은 그 놀라운 은혜의 특권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을 보십시오. 모두 이 감격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그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 그 놀라운 십자가 구원의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인생 그 자체는 지푸라기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세상은 지푸라기가 되었습니다. 아이작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나 항상 생각할 때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옵소서".
그러면 여러분 마지막으로 어떻게 이 미련함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간단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 세상의 지혜로 말미암아 구원과 생명에 대하여 미련한 자가 되기 쉬운 세상, 그리고 그 세상에 물들기 쉬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지혜로운 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 십자가를 바로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에 대해서 하나님과 동일한 견해를 갖고 있지 않는 한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대해서 하나님과 바른 견해만 가지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교파를 초월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세상의 지혜로 말미암아 구원과 생명에 대해 미련한 자가 되어버린 세상, 그 세상의 영향을 받기 쉬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지혜로운 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것과 똑같이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정보를 듣기 전에 사람의 지혜를 버리십시오. 인간의 선입견을 버리십시오. 십자가는 이래야 하고, 그리스도는 이래야 하고, 기독교 신앙은 이래야 된다는 선입견을 다 쓸어버리십시오. 강물에 떠내려 보내십시오. 모두 쓸어 청소하십시오. 그리고 스스로 미련하고 지혜 없는 자가 되어 고요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말씀이 십자가에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아멘' 하십시오. 말씀이 십자가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우리에게 증거하든지 '주는 참되시다.' 고백하십시오. 이렇게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세상의 그 지혜로부터 자유롭게 해방될 때 미련함은 사라지고 하나님이 지혜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세상에서 총명하고 지혜가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히 베일에 싸인 것입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우리는 죄인이요 우리의 눈이 어두워졌고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바로 보지 못하고 우리는 들리는 주님의 음성이 아니면 깨달을 수 없고 우리 눈을 여시는 하나님의 만져주심이 아니면 우리는 바로 볼 수 없는 인생입니다." 주님의 지혜를 의지하고 어린 아이와 같이 될 때 주님이 그 눈을 여시고 귀를 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잡고 십자가의 밀림, 복음의 원시림 속으로 들어갈 때, 아! 울고 웃고 눈물을 닦고 그 다음에 뒹굴며 웃고 하면서 우리는 기독교의 놀라운 진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배는 장엄하게 됩니다. 말씀의 선포는 언제든지 심각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주일을 기다리고 예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은혜, 도저히 지고 살아갈 수 없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내가 이미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소식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영혼들을 향해 눈물 흘리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생명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 십자가가 여러분에게 이것을 준다고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 그 참된 지식의 깊이로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