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Ⅲ 10 (1995.11.1 수요예배)
십자가를 지기까지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펑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마27:29-31)
녹취자:김백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 읽은 본문까지 한 번 더 설교를 하고 싶습니다. 지난주부터 다루고 있는 본문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시기 전에 광장에서 흉악한 심문을 당하시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서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했다는 그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낮아 지셨는가하는 것을 지난 시간에 상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제 그 다음입니다. 그렇게 무릎을 꿇고 희롱하면서 그들이 한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찌어다.” 하는 그 희롱의 말이었습니다. 제대로 한다면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하소서.” 하는 그러한 하소연이었을 것입니다. 이 말은 로마황제 가이사에게 쓰는 인사말입니다. 우리말로 말하자면 “폐하, 만수무강 하옵소서.” 하는 그런 정도의 말입니다. 그것을 ‘유대인의 왕이여’ 예수를 이들이 이렇게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렀다는 그 말 앞에는 괄호가 하나 붙어 있을 것입니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자여, 만수무강 하거라.” 하는 앞뒤가 맞지 않는 희롱의 말을 오늘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것도 무릎을 꿇고 희롱하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 하라.” 하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고난을 받으실 때에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높이는 것조차도 이렇게 장난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희롱하였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또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성취하기 위한 일이었습니까? 빌립보서 2장은 바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만물로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으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리고 부활하게 하시고 승천하게 하시고 보좌에 오르신 그 사건은 한 사건, 한 사건 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구속 역사적으로 이 사건은 모두 일련의 함께 묶여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그 처음 임하신 초림의 그 사역은 결국 그가 마지막 승천하시고 후에 재림하셔서 영원한 왕으로, 만세에 뛰어난 왕으로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경배와 찬송을 받으심으로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왕이신 예수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 평안하옵소서.” 하는 경배와 찬송을 드리는 그런 세상을 꿈꾸시면서 하나님은 아들을 이 땅에 보냈고 아들은 그 꿈을 꾸면서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해 “아멘”하고 낮고 천한 이 땅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은 혈통적으로 유대인의 혈통에서 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또한 선택받은 백성의 왕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요즈음으로 말로 하자면 하나님을 믿는 자의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믿는 자의 왕만 되시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관계가 없으신 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 믿는 자의 왕, 하나님을 믿는 자녀의 왕 이렇게 우선적으로 묘사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으면서도 오늘 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왕이신 것을 세상을 보고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각기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고 자기의 사리와 사욕을 따라 살아가는 이 죄로 가득한 세상을 아무리 눈을 뚫어지게 직시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의 하나님을 떠난 삶을 보면서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세상의 왕이고 또한 이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의 임금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 속에 왕이 되시고 그때에 또한 사람들이 직감적으로 그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 가운데 왕으로 다스리시는 그분이 단지 그 자신의 통치권을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나 교회에 한정시키실 수 없는 분이시고 모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바로 이렇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세상이 되는 것이 세상을 지으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 속에서 그리스도가 왕이 되시는 일들을 보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왕이 되시고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의 왕이 되심을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내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희롱하며 무릎을 꿇고 예수를 희롱하고 조롱하는 말로 “야! 유대인의 왕아, 만수무강 하여라.” 하며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이후에 그리스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던 자들이 이렇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과 상관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왕이신 그리스로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이름을 높이게 될 미래를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들은 이런 행동을 하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이 사람들이 희롱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경배하는 마음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홍포를 입히고 멸시하는 마음으로 가시 면류관을 엮어서 머리에 씌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예수의 고난인 동시에 또한 앞으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던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여김을 받을 미래의 믿음의 일들을 우리에게 보이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도 복음은 이 일을 해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이 없고 예수를 전혀 모르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옷을 벗기시는 수치와 치욕가운데서 홍포를 입으시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그리고 갈대를 손에 들고 모든 사람들 앞에 웃음거리가 된 그 모든 잘못된 그 모습들이 바로 우리의 자유와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고 우리를 죄로부터 구속하기위한 그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곳에서는 이렇게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이름을 높이는 일들이 오늘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단 한분 구속의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들이 비록 무릎을 꿇고 입술로 주님을 경배했다고 하나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한 행동만 하나님께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이제는 장난이나 농담이나 그리스도 예수를 희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충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고 삶으로 무릎을 꿇고 신앙으로 무릎을 꿇는 이 사람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희롱을 받으시면서 드디어 골고다 언덕을 향해 끌려가게 될 시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침을 뱉었습니다. 침 뱉는 것은 바로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침을 뱉어서 흙을 이기신 것과 인간들이 침을 뱉는 것은 같은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인간들이 침 뱉는 것은 모두 저주받은 것들에 대한 욕설이고 또 저주가 임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행동하는 표시였습니다. 어느 나라건 침 뱉는 것이 환영과 감사의 표시로 통용되는 나라는 없습니다. 치욕과 그리고 멸시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그렇게 홍포를 입고 가시 면류관을 쓰고 갈대 홀을 드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어 경배하고 난 후에 그에게 침을 뱉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이렇게 침 뱉으면서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그 길은 저주의 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부터 저주를 받았고 잠시 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 한 번도 떨어져본 적이 없는 아버지로부터 인간의 죄를 위해 저주를 받았고 자기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인간의 저주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인간으로부터 저주를 받고 멸시를 받았고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았고 징벌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길은 철저한 고독의 길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 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세상부귀 안일함과 명성을 원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기를 원한다면 여러분들은 외로워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버림받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이렇게 모욕과 멸시와 천대를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에 세상부귀 안일함과 명성을 원하는 대신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의 뒤를 따라가기를 원한다면 여러분들은 기필코 세상 속에서 외로워지는 일들을 경험할 것입니다. 여러분, 즐겁게 지고 가는 십자가는 없는 것입니다. 즐겁게 십자가를 진다는 이야기는 십자의 고통이 사라진다는 의미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십자가를 졌다는 이유 때문에 남다른 대우를 받는 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쉬운 길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예수를 위해 가는 고난보다 넘치는 하나님의 위로와 그리고 고통을 능가하는 큰 기쁨이 시련을 능가하는 자유로움이 이렇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있다는 의미이지 십자가의 고통이 사라지거나 없다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기 전에 이렇게 침 뱉음을 당하므로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천대를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고 외로워지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세상의 대접이요 대우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멸시와 천대와 절대적인 고독에 직면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는 이러한 침 뱉음과 고통을 받으면서도 여기에 멈추거나 아니면 이것 때문에 좌절하거나 자기의 가던 길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이렇게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가시 면류관을 써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은 십자가를 지게 하시기 위함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시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기 전까지 이 고난의 사건을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의 관장에서 이렇게 심한 모욕과 멸시와 시련을 당하신 것은 그러면서도 참으신 이유는 십자가를 질 수 있게 되기 위하여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서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 채찍에 맞으시면서 채찍에 맞는 순간 까지만 참았다면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 질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옷이 벗겨지시고 가시 면류관으로 머리에 씌움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는 멸시의 순간까지만 참았더라도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까?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아마 예수의 그 모든 고생은 쓸 데 없는 헛고생이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우리의 사명이 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깨닫고 우리가 알게 되었고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음성을 듣게 되었으면 그 십자가를 지고 그 의가 이루어 질 때까지 우리는 그것을 져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그 많은 수고와 인내를 참고 견딤을 지불하면서 여기까지 걸어왔으니 우리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고 우리는 모든 우리의 인내를 온전히 성취하여 마지막에 우리에게 메인 그 십자가를 마지막까지 지고 승리할 그 때에 우리가 걸어온 모든 인내와 그리고 고난과 수고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한 때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하고 성령과 눈물로 자신의 사명의 길을 출발했지만 그러나 마지막까지 인내하고 하나님의 의를 십자가를 지고 이루기까지 성취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수고와 고통과 고난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고 마는 사람들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렇게 침 뱉음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시고 철저한 멸시를 받으시기까지 참는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앞에 있는 십자가 그것 밖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성취될 하나님의 계획 그리고 죽음의 십자가를 지나고 나가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상급을 그리스도 예수는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예수를 믿으며 이렇게 살아가는 인생이 진정한 목표와 사명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깨달아야 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로 또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만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고달프고 그리고 신앙을 이어가기 어려운 유혹과 시련이 가득한 세상에서 눈물을 머금으며 참고 입술을 깨물며 견디고 그리고 잠시 실패하면서도 다시 허리띠를 동이고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뜻대로 살아보겠다고 이 바쁜 수요일 날 이렇게 모이는 여러분들은 과연 무엇을 여러분들이 이루어야할 하나님의 의로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침 뱉음을 당하며 철저한 멸시를 받으셔도 기꺼이 참으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뛰어난 인내의 은사를 받으신 분이었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인내에 있어서 뛰어난 재능이 있으셨기 때문에 이런 것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침 뱉음을 당해도 견딜 만 한 가치가있는 사명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그 십자가 속에서 자신의 죽음 속에서 태어나는 수많은 새 생명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이래 목마르게 그리워하던 하나님의 완전한 구속이 이루어지는 그 거룩한 날을 꿈꾸고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푯대를 분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잠자는 나의 옆구리를 치고 일어나서 오밤중에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 일을 위해서 산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이루신 이 구원의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 세상에 이전에는 군병과 같은 악랄한 유대인들이 무릎을 꿇고 장난을 치며 예수 그리스도 앞에 조롱했지만 이제는 장난이나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왕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여주는 그런 세상이 되기 위하여 산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치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을 위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견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목표가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치욕을 견디고 외로워지는 것을 견디면서 그렇게 처참하게 사는 것이 가능한가? 고등학교 한 1학년 때서부터 시작해서 벌써 대학을 갈 녀석하고 적당히 졸업을 하고 어디 가서 취직이나 해서 그렇게 살아가려고 작정을 한 사람하고 학교 다니는 폼이 벌써 틀립니다. 예외가 없진 않겠지만 일반적으로 틀립니다. 목표가 있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몸부림으로 매달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치가 있고 목표가 있기 때문에 잠시 잃어버리는 것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렇게 침 뱉음을 당하는 모욕 속에서도 견디신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의의 아들이시면서도 불의한 재판의 결과를 말없이 승복하시고 가장 말을 많이 해야 될 그때에 오히려 침묵하시면서 수많은 사람이 뭐라고 말하던지 고요히 눈을 감고 혼자 생각하시며 골고다 언덕길로 오르시는 것은 바로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신앙적인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길을 가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진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태어난 이유를 더 분명히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절한 정도로 깨달아서 내가 살아있는 것이 내 인생의 그 목표를 성취하지 않는다면 물론 그 목표는 하나님이 주신 목표입니다. 성취하지 못한다면 내 인생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앞에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손에 갈대를 드셨습니다. 임금들은 금으로 만든 홀을 들고 그 홀을 뻗쳐서 지시하기도 하는 지시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팔레스타인 시궁창 같은 데서 나는 갈대였습니다. 손에 들려주었습니다. 그것을 바보처럼 들고 계셨는데 사람들은 그것마저 빼앗아버렸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때렸는데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 계셨습니다. 두들일 때마다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마를 더 깊이 찔렀을 것입니다. 하다가 하 다가 희롱을 다한 다음에는 다시 홍포를 벗겼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조차도 네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벗겨버리고 그 이전에 평복을 입히고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끌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철저하게 치욕을 당하시고 그리고 수치와 멸시를 당하시는 그 과정을 오늘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앞에 십자가를 두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예수야, 이래도 참겠니? 사람들이 너보고 네가 왕이냐? 묻고 있다. 한번 하늘을 향해서 명령해서 하늘을 향해서 명령해서 천군 천사를 불러내려서 이 사람들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한번 보여 주어라.” 주께서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를 통해서 십자가를 지지 말도록 간청했던 사단의 역사는 이때도 계속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순간은 오히려 육체로는 고통스러웠지만 더 이상의 갈등이 없는 평온한 시기였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높이 달린 후에는 이제 죽기만 기다리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기 전에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이라도 참을 수 없는 그 치욕과 모욕을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그 손, 하늘의 높은 보좌위에서 손을 펴서 온 세상을 다스리던 그 손에 갈대가 웬 말입니까? 고귀하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이 가당키나 한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고귀하신 몸에 솔로몬이 입었던 홍포를 둘러도 어울리지 아니할 텐데 사람들에게서 취한 헌 옷감 같은 넝마를 고귀하신 몸에 둘러서 도리어 그분에게 침 뱉고 모욕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고통보다도 더 커다란 마음의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가 서있는 이 땅이 누구의 땅입니까? 오늘 예수 그리스도 앞에 이렇게 홍포를 입히고 옷을 벗기고 그리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희롱하고 있는 이 사람들이 누가 만든 사람들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해 이 치욕과 수치를 당하고 계신 것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것들은 그대로 인내하고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가 하나님이 인정하는 자에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는 자에게는 형통함과 평안함이 있고 그리고 못난 사람들이 지는 것이라고 말은 안하지만 은연중에 생각은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도록 예수님이 허락해주신 사람이 아니면 십자가를 질 사람이 없고 십자가를 지도록 허락을 받는 것은 세상에서 명예와 권세를 누리도록 받는 것보다 더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을 각오로 살았던 사람들만이 예수를 위해서 정말 죽을 기회가 허락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살지도 못하는 자들이 어찌 나를 위해 죽겠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빌라도의 관장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이 모든 치욕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외쳤을 것입니다. “네가 구름을 타고 인자의 오는 것을 보겠다고 말한 네가 아니냐?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위세당당하게 하늘의 비밀을 말하고 모세와 엘리야와 마주섰었던 그러한 영광스러운 모습은 어디가고 사람들이 침 뱉고 그리고 사람들이 널 주먹으로 치는 데도 그것 하나 말리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단 말이냐?” 사람들은 예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실오라기처럼 남아있었던 혹시나 하는 예수에 대한 신앙에 대한 기대를 얼마나 쉽게 버렸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고요히 그 모든 치욕을 참으셨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지고 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지고 갈 자격이 되는가하는 시험에 자꾸 떨어지고 계십니까? 여러분, 하나님께 제사로 드려졌던 수많은 제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엄격한 검사에 합격한 흠 없는 것들이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처럼 내 몫에 때운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며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야지만 우리의 인생을 통해 이루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지지 않고 이리저리 도피하고 회피하면 여러분들을 통해 이루어져야하는 하나님의 뜻은 지연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루어지지 못 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눈을 들어 여러분의 가정과 주위에서 나를 통하여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십시오. 깊이 묵상하고 나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계획을 여러분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주위를 깊이 관찰하면서 내가 변하면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들을 바라본다면 어느덧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의 중심자리에 서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해 태도가 변하지 아니하고 예수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는 죽어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나는 망해도 하나님의 뜻이 흥하여야 하리라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모함이 없을 때 하나님의 계획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오로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하나의 십자가를 온전히 지기위해서 모든 멸시와 천대를 기꺼이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만 질 수 있다면 모욕을 받는 시험, 그리고 참아야 하는 시험, 그리고 고통을 받아야 하는 시험, 인격적으로 짓밟히는 시험,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을 농락당하고 있었습니다. 자존심 다 세우고 자기체면 다 살리고 자기 스타일 다 안구기고 자기 얼굴 다 내세우고 여러분, 이런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십자가를 지러 가는 길에서 계속 낙방할 것입니다. 고달픈 인생을 살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못나서 당한 고난이었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진정으로 한번 예수의 뜻을 이루기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이런 삶은 거의 살아보지 못하고 인생을 마친다면 그가 어떻게 정말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십자가는 선택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기 합당한지 지금 하나님이 나를 테스트하고 계신 것이다. 깨닫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참는 것입니다. 오늘 재미있는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셔서 이렇게 비참하게 모욕을 당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가끔 살아생전에도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고 욕을 먹었지만 이렇게 철저하게 비참하게 인격적으로 파산당한 자처럼 유린당하시던 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갈 그 때까지 예수님은 한마디도 없으셨습니다.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고 쓰러지고 그리고 구레네 시몬이 예수의 뒤를 좇을 때에 수많은 여인들이 통곡을 하며 따르니까 그때 비로소 입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홀로 그 모든 말도 안 되는 그 송사와 그 치욕을 다 당하면서 침묵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할 말 다하고 십자가 질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지러 가는 길에 말이 많다는 것은 간단합니다. 지기 싫다는 말을 그렇게 복잡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뭘 잘못했니? 왜 날 때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군병들을 향해서 대들었다면 십자가를 지기 싫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지러 가는 길은 원래 준비가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할 말 다하고 싸울 것 다 싸우고 따질 것 다 따지고 인정받을 것 인정 다 받고 체면 살릴 것 다 살리고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버리기 전에 십자가가 여러분들로부터 도망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그런 자격 없는 사람들에 의해 억지로 들러 메어지는 쉰 떡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누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기에 합당할 것인가?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정말 합당한 사람이 나타났다고 해봅시다. 그 사람의 인생이 평안하고 고속도로 달리고 출세하는 길입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늘부터 생각을 바꾸십시오. 그 사람 앞에는 쓰라린 가시밭 길, 고난의 발자국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한번 “야, 이놈 기가 막힌 놈이다!” 찍히기만 하면 그 인생 고달픈 것입니다. 그래도 가겠습니까? 가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내 마음에 합하다.” 그리고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주신 그 거룩한 뜻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 아무것도 개의치 않고 그 십자가를 내게 지어 주실 때까지 참고 견디고 수치를 이기고 입을 봉하고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750년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러 갈 때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그는 마치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과 같아서 침묵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갈 것을 이미 750년 전에 예언했습니다.
(예화)양을 기르는 목장에서 털 깎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발소에서 머리 깎는 것처럼 똑같이 깎습니다. 양을 갖다 놓고 그리고 가위로 깎습니다. 이것을 처음 경험한 양들은 겁이 나서 도망을 갑니다. 그러나 해마다 양털을 깎았던 양들은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태도로 십자가의 고난을 당했던 것입니다. 말로 깨 박치고 참지 못해서 깨 박치고 따지다가 깨 박치고 아니면 머리 굴리다 깨 박치고 언제 십자가를 지겠습니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십자가를 지기 합당한 사람을 만날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십자가를 지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에게는 그 고난도 다 탁월하지만 그러나 고난 가운데서도 고난을 고난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그런 놀라운 은혜를 주신 다는 것입니다. 이놈을 데려다가 옥에다 집어넣고 두들겨 패고 착고를 씌워 놓았더니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난을 능가하는 은혜가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십자가를 진 사람들이 단지 십자가를 지고 견디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지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야 할 것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십자가를 지기에 합격 받으시기 까지 예수님은 그 모든 고통스러운 빌라도의 관중에서 그 장시간의 희롱과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을 침묵으로 견디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을 해야 될 때와 말을 할 필요가 없을 때를 잘 분별하셨습니다. 침묵 속에서 그 모든 것을 견디셨습니다. 모욕을 당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을 열어서 조목조목 너희가 나를 향해 하는 이 못된 짓이 합당한 것이냐고 반론을 한다면 수천 페이지 논문을 써도 다 못 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이제는 고요히 침묵하고 내가 이 모든 것을 다 당해야 한다고 침묵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러한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내가 내 가정을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교회를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 되지 않겠는가? 나 아니면 우리 집안을 위해서 누가 십자가를 질 것인가? 나 아니면 누가 저 이방의 땅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죽어가는 자들을 위해 십자가를 질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고 있다면 이것은 축복입니다. 보통 축복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무에게나 그런 부담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 부디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치욕 속에서 인내하심으로 합격 증서를 받고 십자가를 어깨에 메신 것처럼 여러분들도 그렇게 합격 받으시고 십자가 메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