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모범이신 예수님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1)
녹취자 : 장미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주기도문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를 가르쳐 주는 본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아야할지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11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라고 말입니다. 이 짧은 구절 속에서 우리는 기도에 관한 매우 풍부한 교훈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우리의 마음을 때리는 첫 번째 교훈은 예수께서 기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으나 그는 본체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기도하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하나님이신 그분이 만약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당신 자신께 드리는 기도였을 터이니 어떤 의미에서 그분은 기도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죄를 짓고 회개하여야할 일이 있기 때문에 기도가 꼭 필요합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능력이 모자라고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으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기도를 몸소 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분은 비록 하나님이셨지만 그 하나님의 본성을 인간의 본성 아래 감추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죄는 없으셨지만 스스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연약함에 자신을 복종시키기로 하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품으로는 모르시는 것이 없으신 분이셨지만 그러나 사람의 성품으로는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가셔서 우리가 어떤 조건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지를 몸소 터득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신앙적인 많은 의무 가운데는 때로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재능이 없을 때는 빌어서 쓰기도 하고 재정이 모자랄 때는 융통해서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대신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직접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중보기도’가 있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쓰는 중보기도라고 하는 말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용어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보면 그 용어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에게만 쓸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기도해 주는 것은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는 중보기도이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는 그 신학용어를 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섬김기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무튼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기도해주는 그런 기도가 있지 않습니까?’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남을 위해서 아무리 많이 기도해준다고 할지라도 그 기도가 그 사람 마음을 움직여 변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에 그 기도가 응답될 때에는 언제나 그 사람의 마음을 때리고 움직여서 그를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아무리 많이 기도해도 물건을 옮겨 놓는 것처럼 그의 마음이 바뀌어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복음을 듣고 자신의 마음이 움직여 감화를 받고 회개 기도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강조하고자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기도는 영원히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수 없는 우리 스스로 해야 할 의무요, 거룩한 특권 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사람의 모양으로 사시는 동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모든 속죄사역이 충분히 완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끝나지 않는 사역은 하늘나라에서도 계속 됩니다. 그것은 바로 그 분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이 땅에 있는 교회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기도하신 것은 한편으로는 당신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기 위함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땅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하며 살아야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당신이 몸소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한 편으로는 그 분은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셨고 또 한 편으로는 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바로 두 진리를 찬란하게 비쳐주는 그러한 광선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 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죄와 흠도 없는 분이심에도 그렇게 일생을 기도로 사셨다면 죄 있고 주님보다 더 연약한 우리는 얼마나 더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아야하는지 우리가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한 곳에서” 라고 하였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엔토포티니’라고 나오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떤 장소에서’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이 기도의 삶을 사신 것은 맞지만 예수님의 생애 그 전체는 여행하시는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은 일정한 거처가 없이 동가숙서가식 하시면서 당신의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당신의 섬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그 곳이 갈릴리든 유대 땅이던 사마리아든 마지않고 넘나들며 그들에게로 찾아가 말씀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당신의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는 생애였습니다. 금빛 보좌에 높이 앉아 “진리가 여기 있으니 필요한 인간들은 여기로 모여라.”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장소가 아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26장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곳이 ‘산’으로 나오고 누가복음 3장 21절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곳이 ‘광야’로 나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장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곳이 ‘한적한 곳’이었다고 나옵니다. 이 이외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서로 다른 장소들이 예수님이 기도하신 곳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의 생애는 이처럼 정처 없는 생애였고 주거에 있어서 일정하지 않은 변화무쌍한 삶을 사셨음을 보여줍니다. 그 분의 일생은 아주 고단한 노역의 연대기였습니다. 아침부터 시작된 사역은 때로는 밤, 혹은 새벽까지 계속 되었고 인산인해를 이루는 수많은 병든 자들이 예수님의 숙소 앞에 모이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밟힐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가 모여 예수님의 도움을 바라기도 하였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종교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책잡고 논쟁하고자 했고 심지어는 목숨을 노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렇게 주거가 불안정한 생애를 사시면서도 변하지 않는 일정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든지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찬양)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만 섬기며 따르기로 한 나
세상이 주는 모든 괴로움 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예화) 우리의 인생은 수많은 연약함에 에워싸여 있습니다. 저는 50세가 될 때까지 간절히 바라는 것이 병원에 한 번 입원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하얀 침대에 아주 연약하게 누워서 사랑하는 교우들의 문병을 받고 싶었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습니다. 그렇게 강인했습니다. 한 4만권 이상 팔렸던 책 가운데 제가 쓴 『새벽기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서 저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새벽에 기도하러 가기 싫거나 힘들 때 훌륭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두 발로 이불을 뻥 차고 충성하고 벌떡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이후로 10년 동안 11번을 입원하고 10번을 수술했습니다. 몸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저는 그때서야 비로소 내 건강했던 젊은 날 연약한 사람들을 얼마나 얕잡아 보았는지에 대해서 깊이 회개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연약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환경이 바뀌고 변화되면 그 기도의 줄을 계속 붙들고 사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우리는 환경을 보지 아니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분이 어떻게 사셨는가? 얼마나 고생을 하셨으면 30이 갓 넘은 예수를 보면서 종교지도자들이 “네가 50이 안 되었거늘.” 그 뜻이 무슨 뜻입니까? ‘50살쯤 되어 보이는데.’ 그 뜻입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주 뜻대로 하소서
장로가 되었다고 목사가 되었다고 저절로 그 기도생활이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주었던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라고 하는 영국의 목사님은 설교와 기도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설교는 항상 쉽고, 기도는 항상 어렵습니다. 그게 두 개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모든 환경을 극복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전투입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경기장에서 이루어지는 스포츠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홈구장에서 이루어지는 경기가 아닙니다. 하늘에서는 그리스도와 구름 같은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를 응원하지만 아직 우리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전투적인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마치 다른 나라에 가서 경기를 하는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이 들립니다. 경기를 잘하면 야유를 퍼붓고 골인을 시키면 콜라병이 날아오는 남의 나라 땅에서 그 나라 선수와 하는 경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에 적합한 여건이 되리라는 생각을 이 세상에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때 쯤 되면 기도하기에 적합한 환경이 될까요? 또 환경이 그렇게 갖추어진다면 그때도 우리의 마음이 기도하기를 원할까요? 결국 이 마음과 현실은 끊임없이 어긋나면서 우리는 기도를 잃어버린 삶을 살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에서든지 전심으로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세 번째는 기도의 길이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마치시매 번역된 이 단어의 희랍어는 ‘에파오 사포’ 라는 단어인데 이 희랍어의 동치어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히브리어 ‘샤바뜨’입니다. 거기서 영어의 ‘안식일’을 뜻하는 ‘sabbath’ 라는 말이 나옵니다. 결국 이 ‘에파오 사포’ 는 ‘마치다’ 라기 보다는 ‘쉬시다’ 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쉬시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시간의 길이를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11장 1절을 만약에 우리가 주기도문이 유래된 또 다른 복음서의 기록과 대조를 하고 마가복음 1장의 내용과 종합을 한다면 이런 그림이 거의 나옵니다. 그 전날도 열심히 수고하며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은 어느 한 숙소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다른 방을 쓰셨는지 같이 주무셨는지 노숙을 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주무셨습니다. 아침에 제자들이 일어나보니 예수는 어디로 가시고 안 계셨습니다. 이유는 새벽 미명에 예수 그리스도는 조용히 먼저 일어나셔서 제자들이 깰 새라 살그머니 숙소를 떠나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았습니다. 그 한적한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동이 트고 날이 밝을 때까지 온 마음을 쏟아 부으며 평소처럼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이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순간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이 패턴을 따라 이미 일생동안을 기도해오던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가 안 계신 것을 알고 그 분을 찾아 나섰고 먼발치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신 모습을 봤습니다. 가까이 가서 말을 걸고 싶었으나 주님은 이미 깊은 기도 속에서 아버지와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한 분위기를 느끼며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도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랫동안 기도하고 그로 인해서 지친 자신의 육신을 잠시 쉬어야만 했습니다. 오늘 성경의 이 짧은 구절은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줍니다. 공중전화를 거는 것 같은 짤막한 기도는 하늘의 깊고 신령한 것들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기에 적합한 기도생활이 아닙니다. 긴 기도가 반드시 깊은 기도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 반대 깊이가 있는 기도는 반드시 긴 시간을 요하는 것입니다. 길이는 깊이를 보장하지 않지만 깊이는 길이를 요청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관한 진실입니다.
성경을 오해한 어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기도하는 그 순간 우리가 강하게 믿으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실험을 해보십시오. 그런 일들이 쉽게 일어나는가 말입니다.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옮기기는 쉽지만 실제로 자신의 삶 속에서 그런 것을 경험하는 것은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도대체 비결이 무엇일까요? 또 어떤 사람은 반문할 것입니다. 성경에도 아주 짧은 기도로 하늘의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렸던 위대한 기도의 예들이 나타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을 정복할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진멸하도록 명하셨고 그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원주민들을 추격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달은 떠오르고 해는 기울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땅의 지리에 밝고 자신들은 땅에 처음 들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두워지고 나면 그들을 추격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늘을 향해 명합니다. “태양아 거기 멈춰라. 달아 너도 거기 서라.” 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변형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가 사물을 향한 명령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랬더니 정말 태양이 멈추고 달이 거기에 멈추어 그들을 추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는 신약성경에서 풍부하게 반복됩니다. 특히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은 후, 권능을 받은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변형된 기도로 귀신을 내어 쫓고 병든 자를 고치고 수많은 기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때 일어났던 놀라운 기적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짧은 기도로 순간에 위대한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렸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평소에 많은 시간을 하나님께 기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입니다. 많은 증거가 있지만 하나를 여러분들에게 답하고 싶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범죄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사건이 출애굽기 32장, 33장에 걸쳐서 나옵니다. 모세가 기도하러 올라간 사이에 그들은 우상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께 범죄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쓸어버리시려고 했으나 모세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주님이 그를 용서해 주시기로 하자 그는 더 큰 은총의 표징을 구하며 성막이 떨어진 곳에 천막을 치고 그것을 ‘회막’ 으로 명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거기에 모여서 영적인 위기의 때에 하나님께 매달리게끔 만들어 주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기도하고 돌아가고 최고의 지도자 모세조차도 자신의 처소로 돌아간 때에 홀로 남아서 회막을 지키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여호수아였습니다. 그러므로 긴 기도는 깊이 기도하고 있다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마음을 쏟아 붓는 간절한 기도 속에서 우리는 시간을 초월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은혜와 기쁨을 누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환경 속에 살아가지만 오늘 이 말씀 앞에서 다짐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시간을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매달리셨으니 우리도 하나님께 더 오랜 시간을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많은 시간을 기도의 바치십시다.
마지막 네 번째는 예수님의 이 기도는 감화력이 있는 기도였음을 보여줍니다. 기도가 끝났을 때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께 여쭈었습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준 것 같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이 홀로 하나님을 찾는 간절히 기도하시는 모습은 그 자체가 보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에 커다란 감화를 끼친 모습이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기도하는 방식과 기도의 내용을 배우고 싶어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진지하고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내용으로 기도해야 되는지를 배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사업을 하고 공직에 있고 학문을 하고 또 선교를 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인생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한 양태일 뿐입니다. 정치를 하던 사람도 그만 둬야할 때가 있고 공직에 있는 사람도 물러나야 될 때가 있고 사업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할 때가 있고 목회도 은퇴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한 사람의 신자입니다. ‘정말 그가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는가?’ 하는 것은 이 땅에서 모든 일이 끝나고 그 다음이 아닐까요? 한 사람에 대한 진정한 평가가 그 사람이 남긴 화려한 업적 때문에 올바르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는 우리는 자주 봅니다. 주님은 이렇게 당신 생애 전체를 통해서 기도의 감화를 끼치신 생애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신 몸소 기도하셨기 때문에 환경을 이기고 극복하셨기 때문에 오래 시간 자신을 바쳐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그 분은 갯세마네 동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땀이 피가 되도록 당신의 진액을 모두 쏟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닥쳤기 때문에 기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생을 기도 속에 사셨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자연스럽게 자신을 하나님께 다 내드리며 기도를 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5장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입었느니라” 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영혼들을 위해 수고하시면서 자신의 땀을 모두 쏟으신 생애였습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으로 통곡의 눈물을 쏟으신 생애였습니다. 예수 우셨다는 기록은 성경에 3번이나 나오지만 웃으셨다는 기록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울한 생애를 사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눈물의 생애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분의 생애는 피의 생애였으니 그렇게 땀과 눈물로 일생의 길을 다 가신 후에는 죄 있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죄 없는 자신의 옥체를 깨뜨려 십자가에 못 박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종 같이 수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그 분이 당신의 육체를 깨뜨려 찢으신 휘장 사이를 지나 보좌로 이르는 피 길을 걸어갑니다. 나는 많은 죄가 있고 늘 넘어지지만 자기 의의 신발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피 길을 맨발로 걸어가면서 우리는 죄인이나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액체의 생애를 사셨고 당신의 그 생애의 마지막을 피로 발라버리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되었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이전에 살았던 모든 삶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아 임금으로 삼아 살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기도생활입니다. “내 아들 예수가 너희를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있을 때에 죄 없는 하나님의 본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다 드려 기도했으니 너희도 기도하라.”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만큼 세월이 흘렀고 늙었습니다. 그 중학교 담장을 넘어 다니고 이웃 학교 아이들과 주먹을 휘두르고 싸우고 학생부 앞에 무릎을 꿇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벌써 45-46년의 세월이 흘러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세월은 침묵 속에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면 결국 이렇게 긴 생애를 살고 나면 결국은 주님 앞에 갈 날이 가까워옵니다. 나는 여러분들과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죽고 나면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요? 집에 들어오면 열심히 금고 앞에 현금을 세던 우리아빠, 집에만 들어오면 가족들과의 대화도 끄고 텔레비전만 보던 아빠, 등산만 다니던 아빠, 누구로 기억할까요? 자녀들의 마음속에 여러 가지 많은 모습은 잊혀 져도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그렇게 기도하던 아빠의 모습, 젊고 활기차던 날에도 자녀들은 알지 못하는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하나님 앞에 울던 아빠, 반백이 지나 백발이 성성해지던 때에도 조용히 빗기는 저녁노을 받으며 부산하지 않은 채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으고 시간 날 때마다 중심을 쏟아놓던 우리 아빠, 이런 모습으로 자녀들에게 기억될 수 있다면 비록 우리가 큰 교회의 장로가 아니더라도 수 만 명이 모이는 교회를 목회하던 사람들이 아니어도 우리의 인생은 결코 실패한 인생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 인정받지 않겠습니까?
30대 시절, 제가 열렬하게 좋아하던 제 마음에 스타와 같은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18세기에 살았던 미국의 목사였던 E. M. 바운즈입니다. 모든 목회사역이 끝난 후에도 남들이 모두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 그 분은 하루에 8시간씩 하나님 앞에 나라와 교회와 생각나는 수많은 사람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E. M. 바운즈 목사님보다도 더 열렬하게 제 마음을 불 질렀던 또 다른 기도의 스타가 있었는데 18세기 선교사였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였습니다. 21살에 회심하고 25살에 선교사에 헌신하고 29살 꽃다운 나이에 피를 토하고 죽었습니다. 지나친 과로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신대원 졸업을 하던 해에 그분의 일기를 읽으면서 한 6개월 동안을 울고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그의 일기 중 한 토막은 이것입니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나는 오늘 하루 종일을 하나님께 기도하며 바치기로 했다. 아침 일찍 나는 숲으로 들어갔다. 마음을 다해 생각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열렬히 기도했다. 모든 기도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밤하늘의 별이 총총히 빛났다.” 눈 덮인 언덕길에 올라 폐결핵 4기의 몸을 이끌고 그는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기도했습니다. 애끓는 기도가 끝나고 나면 그 눈밭은 붉은 선혈로 물들었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그렇게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와 꼭 같이 연약하고 질병에 걸리고 가정의 염려를 짊어지고 살아가야하는 똑같은 조건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우리 주님을 사랑해서 그렇게 자신을 다 드리는 기도의 삶을 살아냈습니다. 우리 모두 변함없는 마음으로 그렇게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