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따르자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눅 23:26-27)
녹취자 : 조 원 정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사형당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는 광경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당시 사형 집행의 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이 사형집행이 성립하려면 이 사람이 죽어 마땅하다는 법정의 판결이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법을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이 재판은 엉터리였습니다. 원래 재판이라는 것은 죄 있는 사람을 잡아 그의 죄를 밝히고 그에 해당하는 형벌을 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죄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재판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죄 없는 사람을 법정에 세울 수는 있다 하더라도 법의 정의는 재판을 통해 그의 무죄를 밝히고 그를 혐의에서 벗겨주는 재판이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고소하는 고소도 일치하지 않은 증거가 없는 재판이었는데 빌라도는 백성들이 데모를 할까 두려워서 사형언도를 내린 재판이었습니다. 더욱이 유월절이 오면 죄수 한 사람을 풀어주는 유대의 관례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한 이 재판장은 예수님을 풀어주기 위해서 가장 흉악한 강도요 민란을 일으킨 바라바와 예수 중에 누구를 풀어주어야 하느냐고 유도 질문을 하였을 때에 죄를 지은 자 바라바는 살려주고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게 했다는 점에서 이 재판은 잘못된 재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셨을 때에 가르치신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정의였습니다. 올바르게 살고 올바르게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은 이렇게 불법하고 공정하지 않은 재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왜 그런지 순순히 이 형벌을 감당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재판은 불법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유대인의 고함소리는 불법한 것이었지만 인간의 이 불법과 무법을 사용하셔서 그들이 결코 알지 못하는 놀라운 일들을 이 세상에 이루실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계셨기에 예수님은 조용히 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이 지혜는 무엇입니까? 이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에게는 매우 미련하게 보이는 지혜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이 주신 영광에 미치지 못하게 되어 그 누구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 생명과 사랑을 받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랑과 생명이 없기에 이 세상에 사는 인간들이 본래의 아름다운 지위를 잃어버리고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생명과 사랑을 우리에게 다시 주실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이 공의로 심판하셔야 됐습니다. 그 심판을 우리에게 직접 내렸으면 우리 모두 멸망해야 될 텐데 인간이 모두 멸망해버린 이 세상이 하나님께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 안에서 우리 인간의 무한한 죄에 대해서 형벌하시려는 공의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살려두시려고 다시 당신과 교제함으로 생명과 사랑을 누리게 하시려는 사랑이 공존하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흠 없으신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게 하시고 우리는 그 덕분에 용서를 받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만족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가 이 십자가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놀라운 지혜를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 모든 사람을 당신 안에서 용서하여 다시 하나님 앞에 생명과 사랑을 누리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기 위해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당시 이 십자가는 매우 끔찍한 형벌이었습니다. 원래 이 십자가는 그리스어로 ‘스타오루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서있다 라고 하는 동사에서 나왔고 이것은 막대기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형벌은 로마 제국시대에 만들어진 형벌이 아니라 로마 민족이 야만적인 시절에 만들어 놓은 인류역사상 가장 잔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사람을 사형 언도한 다음 커다란 가로 막대기에 두 손을 못 박고 그를 묶어서 세로막대기에 도르래로 올리고 거기에 낀 다음 가로 막대기에 팔을 박고 끌어 올린 다음 세로막대기에 두 발을 박았습니다. 처음에는 손바닥 가운데에 기차 레일에 박는 커다란 못을 박았고 사람들은 그 몸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자꾸 손가락이 찢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손목에 못을 박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의 극단적인 잔인성은 목숨이 붙어 있는 최후의 순간까지 최고의 고통을 느끼게 한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로마 사람들은 ‘스타오루스’라고 하는 말 자체를 아주 불쾌하게 생각했고 그 단어를 대화 속에서 떠올리는 자체를 아주 터부시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당시의 예비적인 규례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를 지기 전에 매를 맞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자기가 지고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규례를 따라 예수님께서도 브라이도리온 이라고 하는 왕궁 수비대에 끌려가셔서 옷을 모두 벗기시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신약시대에 채찍을 연구했던 어느 고고학자의 진술은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당시 죄수들을 처형하는데 사용하던 이 채찍은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한 가닥으로 된 말 채찍이 아니라 아홉 가닥으로 되어 있고 그 가닥 끝에 쇠붙이나 혹은 뼈를 깎아서 만든 낚시 바늘 같은 재질들이 달려 있어서 벗은 몸에 후려치면 살점을 물고 확 뜯어지는 그런 무서운 채찍이었다고 합니다. 죄수들은 십자가를 지기 전 채찍을 맞으면서 절명하는 사람들도 속출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심하게 채찍에 맞으셨고 사람들로부터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가시관을 씌웠고 길이가 약 7센치에서 10센치 되는 매우 커다란 가시관을 눌러서 씌웠고 홍포를 입혀 마치 광대처럼 만든 다음 예수님의 손에 갈대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모습은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폭소를 자아내는 그런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네가 평소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였으니 자 이제 왕 노릇을 해보라 하고 예수님에게 그렇게 행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예수님이 규례를 따라 당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형장까지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130키로에서 150키로는 족히 되었을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것은 예수님께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날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가 땀이 되도록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온 밤을 새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야바에게 빌라도에게 헤롯에게 다시 빌라도에게 밤새도록 끌려 다니시고 매 맞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피투성이가 된 채 골고다 언덕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꾸 쓰러지셨기 때문에 이 십자가를 지워 따라오던 구레네 사람에게 매워 주어 예수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그때의 광경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는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최고의 명절로 지키는 때이었고 이때에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나아와 제사를 올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유월절 명절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간악한 종교 지도자들은 이때에 예수님을 처형하면 평소 예수님을 지지하던 수많은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킬까 두려워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처벌하지 말자고 다짐을 했습니다만 이미 예수님 오시기 1500여 년 전 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어린 양들이 죽어가던 때가 유월절이었고 바로 이 모든 어린 양들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그 때는 유월절만큼 정확한 때가 없었기에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 예수그리스도는 유월절에 십자가를 지게 되셨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최고의 뉴스거리였습니다. 바다 위를 걸어가고 죽은 나사로를 냄새나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그 놀라운 기적의 행자가 이번에도 자기를 구원할까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예상을 깨고 고요히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수많은 인파가 예수그리스도의 뒤를 따랐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기 때문에 따라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을 따라가던 두 인파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백성과 및 슬피 우는 여자들의 큰 무리였습니다. 첫 번째로 백성들이라고 이름 지어진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경하러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48절에는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들도 그 된 일을 보고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 백성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죽는지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었고 이들의 대부분이 무리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구경하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팔복산에서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시던 그 때에 그 떡과 물고기를 먹고 배불렀던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믿게 되었다고 말하니 이 사람들 중에는 죽은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느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적의 현장을 직접 본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노래하던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 싸늘하게 등을 돌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는지 구경하기 위해 따라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영했던 예루살렘 온 성이 소동하게 되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예수님은 이 백성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게 되었습니까? 이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메시야가 따로 있었습니다. 기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먹이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기를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하였고 예수님은 처음에는 그렇게 하실 것 같은 능력을 보여주었으나 오히려 사랑을 말씀하시고 영적인 나라를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왕국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는 백성들로부터 버림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십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을 대적합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나쁜 일을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하나님이 아닌 것을 자기들이 미워하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렇게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과 선생님의 지도하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영원히 여러분들이 그렇게 신앙생활 할 것이라고 자신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여기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혹은 착실하게 신앙생활 하는 그것이 혹시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구경하기 위해 따라가던 사람들이 팔복산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같은 경험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기적을 많이 보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들었고 예수에 관한 소문도 들었지만 진실하게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때가 왔을 때에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구경하며 따라가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회심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깨닫고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죽으신 끔찍한 죽음이 바로 나의 죄 때문임을 깊이 깨닫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내 힘으로 이루어 보려 했던 구원의 개념들, 고 3들에게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일지도 모르고 이성교제에 일찍이 눈 떤 사람들은 좋은 형제자매를 만나서 이성교제에 빠지는 것이 구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구원이 아님을 깨닫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생명과 은혜를 공급받으며 사는 것이 나의 참되고 유일한 소망이라고 하는 그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나를 이 죄와 사망에서 건져낼 분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만 내가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기적도 보았고 기적의 떡도 먹고 신령한 말씀도 듣고 예수님의 얼굴도 직접 보았지만 이들은 예수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구경하기 위해서 따라가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 백성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다름이 아닌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저 멀리 갈릴리로 온 사람들도 있었고 이 여인들 속에는 예수님의 육체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데서 온갖 욕을 당하시고 피투성이가 된 채 밖으로 끌려 나와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실 때에 여자들은 백성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왜 가슴을 치는지 아십니까? 너무 슬프면 혈관이 응축되면서 폐가 호흡이 고통스러워집니다. 두드리면 혈관이 확장되면서 통증이 감해집니다. 너무 원통하고 가슴이 아플 때 반사적으로 가슴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너무 안타까우면 가슴을 두드리게 되는 겁니다. 여자들의 슬픔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저 사람들은 구경하며 따라갈 수 있는 십자가를 이 여자들은 가슴을 치며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가슴이 깊은 통증을 동반했을까요? 이 여자들에게는 백성들에게 없는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입니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자기의 구원 여부가 불분명 하다고 종종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분명히 구원받긴 한 것 같은데 뼈저리게 회개한 기억은 없습니다. 우리친구 누구 이웃의 누구는 하나님 앞에 눈에 뛸 정도로 뼈저리게 회개하는데 나는 그게 별로 없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회심의 경험은 이 세상의 꽃들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합니다. 얼마나 뼈저리게 회개했는지가 구원받은 증거가 아니라 그보다 더 훌륭한 증거는 지금 현재적으로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있는지 그 사랑이 뼈저린 회개의 기억보다 더 확실한 구원의 증거입니다. 많이 회개해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증거도 있지만 그 회개는 진실한 회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이 슬퍼해도 그것이 꼭 진정한 회개는 아닙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얼마나 슬펐으면 밖에 나가서 목메어서 죽어 버렸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구원 받지 못했습니다. 그 회개는 성경이 말하는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아닙니다.
그리스 성경에서 신약성경이 그리스어로 씌어졌는데 ‘회개하다’라는 단어가 두 단어가 있습니다. ‘메타노에오’라는 단어인데 회개하다입니다. ‘메타멜로이’라는 단어는 후회하다입니다. 여러분들이 ‘멜란꼬이’라는 단어가 거기서 왔습니다. 감상적으로 슬퍼하는 것입니다.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뼈저린 회개의 기억보다는 더 확실한 구원의 보증이 증거가 있는데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어린 아이에게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합니다. 이 여인들에게는 바로 진정한 회심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정으로서가 아니라 영적인 정으로서 진실하게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위해 골고다 언덕을 올라갈 때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이것이 이 여자들의 마음에 큰 고통이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 몸에 상처를 입어 흐르는 피를 보는 내 마음의 슬픔은 내 몸의 상처가 나서 흐르는 피를 보며 느끼는 아픔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그렇치 않다면 진정으로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예화) 내가 우리 목사님처럼 고등부 전도사 할 때인데 목사님도 여러분들한테 그렇게 친절하고 상냥한 목사는 아니죠? 나는 저 목사님보다 두 배쯤 나빴습니다. 나는 학생들을 심하게 다뤘습니다. 유명한 사건이었는데 여름 수련회를 갔는데 한 달 후에 알려진 소식인데 안 알려졌으면 끝났을 텐데 한 달 후에 알려진 사실이 있었는데 수련회 가서 담배를 피웠답니다. 수련회 갔다 와서 엎어놓고 대걸레를 가지고 웅웅 소리가 날 정도로 붙잡고 팼습니다. 전부다 피가 시뻘겋게 맺힐 정도로 반 죽였습니다. 그중에 목사님 아들도 있었습니다. 가서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워 팬 거라고 말입니다. 너네들은 맞아야 된다. 가서 몽둥이 가져와 했더니 남자 선생님이 요만한 꼬챙이 같은 거를 가지고 오길래 여선생님이 거기 있다가 확 뺏어서 집어 던지더니 선생님 이것도 몽둥이라고 찾아옵니까 하며 저벅 저벅 걸어가더니 주방에 있는 대걸레에서 걸레를 확 뽑아가지고 가지고 왔습니다. 열렬한 자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우리는 사랑했습니다. 하루는 목사님 아들이 병원을 다닌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그게 뭐냐 그랬더니 고 2때 하도 공부를 안 하고 그러니까 목사님이 따귀를 한 대 때린 겁니다. 고막이 터져 버린 것입니다. 병원을 다니면서 몰래 치료를 받는데 집에서 돈을 받을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아들 때리셨어요? 하니까 깜짝 놀라시는 겁니다. 왜요 하니 아니 목사님 애를 때려도 요령껏 때리셔야지 어떻게 때려서 고막이 터져가지고 그게 금방 낫지 않습니다. 병원을 다닙니다. 목사님이 너무 슬퍼하시고 눈물이 맺힐 정도로 슬퍼하십니다. 그러더니 나는 의사도 아닌데 나보고 전도사님 혹시 내 고막을 뜯어서 걔한테 주면 안 되겠습니까? 하는 겁니다. 그게 사랑인 것입니다. 통증이 없는 사랑은 가짜 사랑입니다.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초딩들, 중딩들 연예인 사진 가지고 다니면서 까부는데 그건 사랑 아닙니다. 거기에는 고통이 없습니다. 사랑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여자들은 진심으로 회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실 때 처음에는 흐느끼며 예수님께 다가갔지만 로마 병정들이 예수께 다가오도록 이 여자들을 내버려 둘리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여자들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는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올수록 통곡으로 변했고 마지막에는 피어린 울부짖음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이 여자들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울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천년 전에 나같이 더러운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의 고통 때문에 그리고 오늘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우리 고등부 속에 재현되고 있는 아픔 때문에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형제의 고통을 자매의 아픔을 내 것처럼 느끼면서 이렇게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습니까? 여자들이 통곡하며 울었습니다만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일평생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제자들의 헌 데를 어루만져 주시던 굶주리던 자에게 떡을 떼어 주시던 예수님의 그 손에 사람들은 굵은 못을 박았고 복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걸어가 사마리아도 마다 않고 찾아가셔서 복음을 전하시던 그 발에도 간악한 병정들은 못 박았습니다. 지금도 우리들이 조용히 눈을 감으면 그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찬양)
망치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마지막 피 한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로 이 십자가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도 치워지고 구경하던 유대인들도 다 돌아갔고 슬피 울며 통곡하는 여자들도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골고다 언덕에는 이름 모를 집들이 들어섰고 다만 여기 저기 예수님이 쓰러졌다고 전해 내려오는 표식만이 몇 개 남아 있을 뿐입니다. 눈에 보이는 십자가는 사라졌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십자가는 여전히 있고 골고다 언덕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바로 보이지 않는 골고다 언덕 볼 수 없는 이 십자가를 뒤따라가는 생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장난치듯이 교회에 다닙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 속에서 가정 속에서 학교 속에서 친구들 속에서 이 사회 속에서 곳곳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아픈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자기가 사랑하는 예수님이 바로 그 삶의 현장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바라보며 그 아픔에 동참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기뻤던 때가 정말 기뻤던 때가 아니라 눈물이 많았던 때가 가장 기쁜 때였습니다. 세상에 정서는 슬픔을 다 몰아내지 않고는 기쁨이 깃들 수 없지만 거룩한 영의 정서에는 기쁨과 슬픔이 한 인격 안에 공존합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아파하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와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 고난에 고통스러워하는 눈물이 있었던 그때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쁨도 가득한 때였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여러 형제 자매들만 했을 때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죽음을 생각하고 잠들 때마다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자살도 시도했습니다. 왜? 사는 것이 너무 두렵고 인간으로 살아 있는 것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렇게 방황했고 여러분들은 이렇게 교회에 나와서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 가운데 소수는 아직까지 정신 못 차리고 까불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이제 철이 들면 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모순되고 고통스러우며 여러분들이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훨씬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작은 웅덩이에 모여 있는 작은 물고기와 같습니다. 이제 어미 아비의 보호가 끝나고 넓은 하천으로 나가 보십시오. 거기에는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거기서는 정말 누구도 나를 도울 자가 없고 독일의 속담에 모두들 혼자다 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때에 여러분들을 붙들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렇게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고 자기 아들을 보내어 여러분들이 아직 주님 앞에 하나님께 원수 된 자였을 그때인 조차도 예수님이 먼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여러분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진실하게 회심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나고 회심했다면 그 은혜를 불꽃처럼 자신 안에 간직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불러 이 구원을 받으라고 너희가 나에게 와 나와 함께 영원히 함께 먹고 마시며 내 안에서 살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부르십니다. 이 백성들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경하며 따라 가는 사람들 되지 말고 진실로 회심하고 이 백성들처럼 구경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여자들처럼 진실하게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끝까지 따라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