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속의 십자가 (마16:21-23)
이때로부터 예수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기도하시겠습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들을 날이 되매 모으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예배케 하시고 경배케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난 일주일 동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아니하시는 삶을 살고 그런 생각을 따라서 행할 때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검은 파도와 같이 밀려드는 이 죄악의 물결 앞에서 하나님 우리들이 한없이 연약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보혈의 피로 정결케 하사 다시 한 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하시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할지를 하나님 앞에 깨닫는 시간이 되도록 주님 은혜를 내려 주시고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머리를 숙이고 기도합니다만 오늘도 사랑하는 성도들 가운데 알 수 없는 죄로 말미암아 심령이 곤고해지고 고통 하는 자들에게는 주께서 이 시간을 통해서 죄 사함의 확신을 주시기를 소원하면서 빕니다. 또한 주님 오늘 이 시간에도 머리를 숙여 기도하며 곤고하며 어려운 가운데 영적인 회복을 갈망하는 사람들 가운데 오늘도 말씀으로 영혼을 새롭게 살리시는 은혜로운 시간에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시간에도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며 주님에 관하여 알기를 원하나 알 리가 없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살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고 확신 있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지만 무엇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할지를 알 지 못하는 사람들이 신앙의 푯대를 굳게 붙들도록 하나님 도와 주시옵소서 오늘 머리 숙여 기도하지만 마음속에 사람을 향한 원망이나 사람을 향한 미움이 우리 속에 독한 마음이 되어서 우리의 인격과 삶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도록 도와 주셔서 우리가 이런 무지와 이런 악함으로부터 자유케 되고 사함을 얻는 시간이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무엇보다도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 바다를 먹물삼아 기록해도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음을 깨닫고 감격하며 그 사랑을 인하여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기로 결심하는 귀한 시간들이 되게 하옵소서 유아실에 있는 어린 아이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셔서 온유한 마음을 주셔서 예배를 드리게 하시고 사랑하는 부모들에게 집중된 마음을 주시고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도록 역사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한 때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외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자랑한다고도 말하지 않고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30여년 넘게 만났고 섬기면서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러한 하나님과의 사귐, 그리스도 예수와의 놀라운 경험 속에서 바울은 이전에 자기가 쫒고 살아가던 유대교 종교에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놀라운 특징들이 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들을 발견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로 하여금 다메섹 도상에서 거꾸러지게 만들었던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자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에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주님의 생애를 돌아볼 때 자랑할 만한 것이 많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을 열어서 천국의 교훈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셔서 그들로 하여금 기이한 놀라움에 사로잡히게 했던 팔복산을 자랑할 수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비어있는 그 무덤을 사도는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어디에 이렇게 죽었다 다시 사신 이를 우리의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는 종교가 있습니까 주님이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나팔 소리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이런 모든 자랑거리를 치워 버리고 오히려 말하기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고 말했습니다.
이 형이 로마에서 유래했거든요. 로마의 군인들은 십자가라는 얘기만 들어도 아주 기분 나쁘고 불쾌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왜? 그 형벌이 너무 저주스럽기 때문에. 적대자들로부터는 가장 심한 공격과 박해와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십자가를 최고의 자랑거리로 선택하고 자랑할 뿐만 아니라 지금 온 몸과 마음을 다해 그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알려 주었던 한 사람 위대한 바울의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바울과 초대교회 선포로 돌아가야 됩니다. 이때는 사도라 불러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딱 한 번만 이 세상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직접 보고 교훈을 받고 직접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에 의해서 기독교의 초석이 놓이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이 사람들에 의해서 기독교는 짧은 시간에 기초가 놓여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tm도께로부터 받은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주제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번 주부터 4주 동안 사순절을 맞이하게 되는 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고 다시 부활하신 사건은 3일 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정확히 말해서 무덤 속에 들어간 이후의 일에 대해서 성경은 기록하지 않고 있으니까 정확하게 말해서 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고난은 하루도 될까 말까 한 사건에 시기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복음서 전체에 열 세장에 걸쳐서 생생하고 자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의 핵심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어떤 말씀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관계라고 말하고... 여러 가지 말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핵심이 이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잘 살고 도덕적으로 살고 윤리적으로 살고 그리스도인답게 사느냐 하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기독교의 교회가 서면서 사도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 가장 중요한 진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너희들이 나무에 달아 못 박아 죽인 예수가 곧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죽으심과 부활이야 말로 사도들의 설교였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해설해 놓은 이야기 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사실을 먼저 선포했습니다. 그가 죽었다 죽으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죽은 것은 모든 다른 죄인들의 죽음과 같지 아니하니 이것은 바로 너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으신 것이 그래서 이미 그 시체도 사라지고 그 무덤도 치워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너희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관계가 있는 것이었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 사건이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의 효력이 오늘도 우리에게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해석을 통해서 그 십자가를 인정한 모든 사람들은 여태까지 살아오던 모든 삶의 방향을 대 선회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가 말하는 이야기가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육체를 위해서 심는 사람이 있고 성령을 위해서 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이 정직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든지 사는 그대로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생각보다 공평한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해결이 안 되지만 뿌린 그대로 사후의 세계에서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상당히 많은 부분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거두게 됩니다.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나이 먹어서 그 열매를 거두게 되지요. 오늘 성실하게 살고 참된 가치를 찾아서 살았던 사람들이 지금은 비록 고난을 당하나 나중에는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도가 왜 이렇게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까 왜 이렇게 가슴 벅차도록 사람들에게 형틀로 밖에 알려지지 않는 이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해 전에 사형을 집행했던 사람의 수기를 읽어 봤어요. 어떻게 사람이 사형을 당하는 지 잘 모르시지요. TV에서 가끔 나올 때가 있지만 사람을 한 사람 누군가가 사형 받을 죄를 짓고 복역을 하다가 사형을 당하면 엄청난 국고를 손실낸다고 그래요. 한 사람을 사형 시키는 데 비용이 그렇게 많이 든다는 거지요. 호화스럽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형시키는 데 수당이 그렇게 많이 나온대요. 그 사람들의 불문율은 그 날 사형 시키고 받은 돈은 집에 안 가지고 들어가고 그 날 다 써버리는 거래요. 술을 먹든지 아니면 뭘 하든지... 죄를 지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유언을 합니다. 사법부에 있는 사람들-집행하는 사람들이겠지요.- 다른 사람이 대신 죽으면 안 되니까 이름 사진 생년월일 다 대조를 한 다음에 본인이 맞냐고 물어보고 마지막에 남길 유언을 얘기하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한 대 피고 싶다고 그런대요. 담배를 한 대 주면 담배가 다 타들어 가도록 이걸 덜덜 떨면서 놓지 못하는 거예요. 죽음 앞에서 인간이 그런 거예요. 살아있을 때는 생선회칼을 휘두르며 싸우던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벌벌 떠는 거지요. 마지막에 의자 위에 올려놓고 위에서 -외국에는 전기로 죽인다는 데 우리나라는 교수형이에요- 밧줄이 이렇게 내려오고 목에 걸고 스위치를 누르면 덜컹 하고 마루 밑바닥이 빠지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매달려서 30분 후면 뒤편으로 관에 실려서 나오는 거예요.
만약에 누군가가 죄수를 목매달아 죽인 오랏줄과 그가 올라가 있었던 의자와 그런 것들을 갖다 대면서 나는 내 평생에 이 오랏줄과 이 의자를 자랑하노라 오늘 우리가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사도들이 초대교회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할 때 바로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라는 표식이 종교의 핵심에 들어와서 표상이 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서대문 교도소에서 사용하던 오랏줄과 죄수들이 올라갔던 의자를 자랑해서 그것을 이 뒤에 걸어놓은 것과 똑같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이 십자가는 기독교 교리의 중심부에 들어오게 되었고 기독교 신앙을 알리는 표가 되었습니다. 사도는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거치는 것이요 미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십자가를 산상수훈이나 다른 모든 것들을 떨쳐버리고 이 십자가를 자랑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들이 우습게 여기든지 말든지 그 십자가를 자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십자가가 바로 자신들을 구원했다라고 하는 놀라운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대속의 교리입니다. 남이 지은 죄를 대신 해서 그 죄의 대가를 받음으로 원래의 죄인을 용서받게 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펄젼의 설교에서 보면 미국에서 실제 있었던 일을 들고 있습니다. 옛날 얘기겠지요. 어떤 판사가 범죄자를 재판하기 위해서 재판정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죄인은 아주 젊은 시절에 둘도 없이 가깝게 지내던 친한 친구였습니다. 한 사람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판사가 되었고 그래서 명망 있는 법조인으로 부상했습니다. 한 사람은 사업을 하다 망해서 빈털터리가 되고 마지막에는 국제적인 죄까지 짓게 되었습니다. 그가 지은 죄는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만 상당한 액수의 벌금을 물어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판사는 둘도 없이 친하게 지내던 그 옛날 친구를 재판하면서 법정에서 선고할 수 있는 최고 금액의 큰 액수의 벌금형을 선고했습니다. 방청객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역시 대쪽 같은 친구다. 한 쪽에서는 어떻게 둘도 없이 친하게 지내던 친구를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사람이 학교 다닐 때 학비도 대 주었다며?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인정머리 없이 판결을 내릴 수 있는가 저 사람은 그런 거액의 벌금을 물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걸 뻔히 아는 데 저런 재판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재판이 끝나고 이 판사는 재판석에서 내려와서 친구를 끌어안고 포켓에서 자기가 선고한 거액의 벌금을 수표에 긁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기의 친구를 대신해서 벌금을 납부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에 대해서 심판을 행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오늘 우리들이 정직하게 우리 자신들을 돌아볼 때 우리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모든 잘못된 열정들 - 불의에 대한 유혹, 솟아나는 죄에 대한 경향들,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모든 것과 의식하는 것들이 죄로 가득 차 있는 삶- 그래서 어떤 심리학자가 얘기를 해요. 인간이 하루에 10만 가지 생각을 한답니다. 우리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대요. 그런데 만약 100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데 99가지가 선한 생각이 한 가지가 나쁜 생각이라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도덕적이고 선한 사람일 거예요. 그렇죠? 그래도 하루에 약 1천 가지의 악한 생각이 스쳐가는 것이지요. 1천 가지의 생각이 스쳐갈 때 다시 99가지는 절제를 하고 한 가지만 악을 행한다고 해도 그는 제법 절제된 인간이에요. 그렇게 따져도 결국은 10입니다. 열 번의 범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런 죄의 지배 속에서 살아가는 데 그 많은 계명과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범죄하고 하나님은 끝까지 찾아내서 심판하시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바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당하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초대교회 교인들과 복음을 전했던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에 압도당했던 거예요. 나 같은 죄인이 받아야 할 그 끔찍한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못 박혀 죽으셔서 내가 거룩한 하나님과 비참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교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에 대해 감격했던 거예요.
오늘 읽어드린 이 성경이 바로 이 점에 있어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이사라 빌립보 지방 한적한 곳에 이르렀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드디어 제자들에게 이전에 묻지 않았던 새로운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느냐 라고 물었던 것은 너희들 안에는 그런 많은 사람들이 내게 대해서 생각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이에요. 세례요한이라 불렀습니다. 권능에 있어서 그랬습니다. 엘리야라 그랬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데 있어서 그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많이 우시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예레미야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엘리야나 예레미야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정확한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때로부터 비로소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할 것을 가르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 지 못하고서는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한 사람으로만 안다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종교적인 신념을 위해서 죽은 것과 다름이 없는 죽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 사실을 제자들로부터 고백을 받고 자기가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즉 이렇게 자기가 죽는 이 죽음은 보통 사람들의 죽음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그러면 안 됩니다. 어떻게 주님이 죽을 수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너는 대속의 죽음을 모르는 구나 하나님의 아들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외아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권세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너희를 구원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에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너희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은 그럴 리가 없다는 그 십자가의 죽음을 내가 당하고 너희가 당해야 할 그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내가 감당함으로써 너희에게 구원의 길이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대속에 대한 진리에 대한 이해 없이는 십자가에 대한 사랑을 나타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게 되었는지 충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했는데 그 고난을 보시고 오늘 나를 용서하시는 지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는 죄인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고난을 당하실 때 하나님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대한 모든 진노를 푸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화해할 마음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셔서 무한히 영광스러우시며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죄인들 가운데 하나로 자기를 낮추고 많은 사람들과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사이에 난 휘장을 여시고 우리와 다시금 사귀는 이러한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었는지 다 설명할 수 없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앞에 참된 회개 하고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참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은 이 시간에도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과 사귐의 길을 여셔서 이전에는 없던 영적인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이 신앙의 경험이 우리의 모든 것들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비참한 죄인이요 아무리 소망 없는 죄악 가운데 살아갈 지라도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왔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렇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이것으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의롭다 함을 얻어서 십자가를 의탁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대속의 십자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하게 그 십자가가 나를 구원하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고난을 바로 나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들이 입고 있었던 모든 더러운 옷들을 벗겨 주시고 새로운 의의 옷을 입히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옷은 우리들로 하여금 전과의 낙인이 찍힌 죄인이 아니라 죄를 범한 적이 없는 사람으로 서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과 많은 사도들이 그토록 멸시와 혐오의 대상인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옛날에 노예들을 노예뿐만 아니라 소나 말 같은 것을 대규모로 사육하고 있는 곳에서는 목장끼리 소들이 도망가서 잊어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엉덩이나 머리에 혹은 등에 도장을 불을 시뻘겋게 달구어서 불도장을 찍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털이 빠지고 흔적이 생겨나는 데 그 흔적이 바로 어느 목장의 소라는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그런 것들을 새겨 놓는 거지요. 영원히 그 사람의 소유라는 것이지요. 이 바울의 시대에는 노예들의 등에다가 이런 것들을 새겼어요. 도망가도 등을 벗겨보면 새겨진 불도장을 보고 어느 집안에서 도망쳐 나온 노예인지를 금방 알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걸 몸에 새겼습니다. 그게 새겨진 종은 평생 그 도장을 찍은 주인을 위해 살아야 하듯이 사도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 예수로부터 그런 도장을 받은 사람이다. 어떤 해석가들은 아마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고난을 받아서 칼에 찔리거나 돌에 맞아 상처 난 자국을 본인이 그렇게 표현을 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도장 찍힌 죄수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께 기꺼이 매여 살기를 원하는 것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그 사랑에 사로 잡혀서 일생을 십자가의 깃발 아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의 보혈이 사도의 영혼을 적셔올 때 그는 또다시 영적인 승리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대적을 향하여 진군하며 싸워야 할 자신의 삶의 목표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상과 죄악을 이기는 모든 힘이 바로 이런 십자가에 대한 깊은 깨달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묵상할 때마다 사순절 기간 동안 고난주일을 향해 서서히 갑니다. 그리고 그 고난 주간과 부활 주일을 향해 우리들이 나아가면서 계속해서 그렇게 날짜가 십자가 부활로 가까이 갈수록 우리의 신앙도 십자가로 더 가까이 다가가서 마지막에는 이 세상에서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 홀로서서 내가 얼마나 그 그리스도의 보혈의 십자가의 공로를 덧입은 사람인지 깊이 깨닫고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