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단편설교모음 (2012.04.01 주일오전설교) 십자가, 생명의 길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0) |
I. 본문해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당한 고난을 앞부분에 진솔하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4장에 와서 자신들의 직분이 하나님의 복음을 순수하게 전파하기 위한 직분이며 복음은 모든 죄인들의 영혼에 어두움을 밝혀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빛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 부름을 받은 사도바울과 일행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복음을 증거하며 생명력 있는 삶을 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대한 진리입니다.
II. 기독교와 십자가
A. 그리스도의 십자가
기독교와 십자가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된 이유는 십자가가 기독교의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중심적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많은 계명들은 십자가로 향하고 있고, 신약의 많은 계명들은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인간은 자신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죄와 죄의 결과인 환경의 비참함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신실하지 못하여 하나님을 버렸으나 하나님은 불변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인간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품을 멀리 떠난 죄인들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은 그들에게 구원하실 계시를 주셨고 메시아를 약속하셨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많은 제사의 제도와 봉헌의 역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우리를 위해 대신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하고 비참한 죄에서 건져주실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예고는 이루어지고 성취되어 결국 그리스도 예수께서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고, 온 마음을 다하여 인간들을 섬기시다가 마지막에 자기의 생명을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사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모든 경륜이 집약된 곳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향한 모든 계획이 바로 십자가로 수렴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후로는 누구든지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희생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전심으로 믿는 사람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용서해 주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으니 그 분이 베푸신 은혜를 잊지 않고, 지상 생애에서 그가 보여주신 믿음과 삶의 발자취를 따르기를 힘쓰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커다란 죄는 십자가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구원을 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하나님 앞에 위험한 생각은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마음에는 십자가가 살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데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향해 냉담한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한때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자기가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십자가 구원의 감격이 언제나 살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십자가가 자신의 자랑이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십자가를 자랑하는 대신 세상의 번영을 자랑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십자가의 감격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천년 전의 십자가로만 알고, 오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처럼 감격이 없는 종교의 상징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B. 우리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를 우리가 대신 진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대신 지지 않더라도 똑같은 십자가를 우리도 진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지금도 필리핀에 가면 1년에 한 차례씩 고난주간이 되면 사람을 끌어다가 나무에 실제로 못 박고, 가시관을 씌우고 피를 흘리며 거리를 행진하는 행사가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패역하기 그지없는 행동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나서는 다음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것은 이런 식으로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말하기 전에 우리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칼빈 선생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자가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성숙시키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고난과 시련, 환란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십자가는 예수의 십자가도, 나무로 만든 십자도 아니고 정신적인 십자가입니다. 해석된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모든 고통이 다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가 그것을 대응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서 시련과 환란과 고통이 그냥 고생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십자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1. 절대적 십자가
저는 십자가를 절대적인 십자가와 상대적인 십자가로 나누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가 말씀 드리는 절대적인 십자가는 성경에서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나의 이웃을 사랑하였지만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나를 미워하고 핍박하고 나에게 고통을 줄 때에 그것은 절대적인 십자가입니다. 나는 가족을 지극히 사랑하는데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이유 때문에 가족이 나를 냉정하게 대하고 의절하고자 할 때에 그것은 절대적인 의미의 십자가입니다. 이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견디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커다란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2. 상대적 십자가
상대적인 십자가는 모든 것들이 섞여 있거나 혹은 순수하게 우리의 죄와 잘못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난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잘못과 허물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통이라고 할지라도 또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들이 바르게 하지 못하고 혹은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고통스러운 결과가 찾아오게 되는데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상대적인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이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갈 때에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성숙시키시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만나게 되는 시련과 고통, 모든 괴로움과 환란은 정말 나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십자가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믿음과 복음을 아는 지식으로 대면해야 합니다. 시련을 만날 때에 집요하게 시련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찾아내서 그 인간을 향해 이를 갈고 미워하고 심지어 복수를 꿈꾸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며 또한 십자가를 지는 삶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결과는 더 많은 죄와 죄의 비참한 결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C. 십자가를 지는 방법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모든 고난과 시련, 고통과 괴로움들을 통하여 우리의 죄와 악함을 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내가 당하게 된 모든 시련이 사람에게 원인이 있지만 그것은 궁극적인 원인이 아니라 자신의 죄와 약함 때문에 당하게 된 시련이요, 환란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원인을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지만, 어떤 때는 왜 이런 시련과 환란을 만나야 되는지 판단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계시는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고, 섭리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입니다. 믿음으로 살다보면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 알게 될 것이고, 세상에서 다 깨닫지 못한다면 하늘나라에서 발견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많은 시련과 환란을 당하면서 인간은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지 깨닫게 되고, 모든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며 그 계획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시고 자신의 인생의 모든 삶들을 주관하시는 그분의 권위 앞에서 자기가 티끌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를 의지하던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로 의존하고자 하는 신앙심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고통이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고, 시련이 괴롭지 않은 것도 아니고, 환란이 마음을 쓰라리게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십자가로 받아들였을지라도 그것은 자신에게 끊임없는 고통과 괴로움으로 남고 많은 에너지를 빼앗아 갑니다. 그때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실 때의 고통과 괴로움이 지금 내가 이 시련과 환란을 참는 것과 유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정도와 깊이에 있어서는 무한했겠지만 종류에 있어서는 자신이 지금 경험하는 것과 유사한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 예수의 시체를 짊어진다는 것도 아니고 예수의 죽음은 이미 끝났고 예수의 죽음은 추상 명사인데 그것을 어떻게 등짐 지듯이 짊어질 수 있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몸과 상관없이 위에 어떤 짐을 얹어서 다른 것으로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 우리의 몸의 흉터도 간직하고 있고 마음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기억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우리의 몸에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죄 없으신 그 분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왜 아무런 잘못도 없으신 그 분이 비참하게 능욕을 당하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육체의 목숨이 끊어지셨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예수님이 그런 종류의 죽음을 당하여야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오늘 복음 사역을 위해 힘쓰고 있는 사도 바울과 그들의 일행, 나아가서는 오늘 그의 성경을 읽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 흔적을 우리의 몸에 짊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틈만 나면 처음 사랑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마치 모든 좋은 것을 다 한 것처럼 교만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이며, 예수의 죽음이 자기의 끔찍한 죄를 위하여 대신 지불하신 화목 제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의 상식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체험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모든 고난을 만나게 될 때 사람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불평하는 대신에, 고통을 견디는 과정을 통해서 예수께서 바로 나의 죄 때문에 끔찍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묵상하며 예수의 죽음이 우리의 몸속에 스며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신비로운 교리 가운데 하나이며, 사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나를 항상 버리고 그리스도를 붙들며 살게 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중요한 지식, 우리의 목숨을 주고도 사야할 중요한 지식을 거의 모르는 체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신 목적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고 물질과 명예와 세상에 번영을 주셔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무엇인지를 자신이 고난을 받으며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예수가 이천년 전에 죽으셨던 고통이 성령을 통해서 이천년 후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마음속에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끔찍하게 고통을 당하고 계신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끔찍한 고통을 당하고 죽으셔야 했던 이유가 바로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스며들어온 예수의 죽음의 기운이 교만하게 하나님보다 나를 낫다고 여기는 것, 내가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는 것, 내가 모든 것들을 판단함에 있어서 유일한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정욕은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고자 하는 모든 총체적인 욕망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무엇에 의해서도 죽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짊어짐으로써 그 속에서 그것들이 모두 죽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여러분이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체험하면서도 그것의 정체가 뭔지를 몰랐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이 어렸을 때이든지, 좀 성숙했을 때이든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깊이 애통하게 될 때에 가슴을 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맨 처음 기도할 때에는 내가 살기 괴로워서 기도했는데 마지막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고통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게 됩니다.
제가 총각 집사였을 때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고난 주간이면 매일 저녁에 모였습니다. 환기통도 없는 지하실에 아이들이 굉장히 많이 모였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심지어는 유치부밖에 안 되는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웁니다. 그 아이들이 뭘 알겠습니까? 그것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때 아이들이 즐겨 불렀던 찬송이 있습니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어린 아이의 마음이든지 어른의 마음이든지 똑같습니다. 그 마음은 모든 죄에 대해서 죽고 싶은 마음, 모든 죄에 대해서 나는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죄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회심을 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회심하기 전에는 아주 정욕적이고 방탕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천재였기 때문에 느끼는 것도 굉장히 많았을 것입니다. 특히 사람에 대해 느끼는 생각도 예사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회심한 이후에 이전에 그를 정말 좋아했던 여자를 만났습니다. “어거스틴, 저예요” 하고 그 여자가 그를 불렀습니다. 그 여자를 보면서 어거스틴은 “그대는 예전의 그대이지만 나는 예전의 어거스틴이 아닙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여자를 향한 마지막 대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예수의 죽으심 때문에 깊이 아파하는 것은 주님의 죽음이 오늘 나의 정신 속에 스며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진심으로 애통할 때, 그 마음은 모든 죄에 대한 미움이며 그 죄의 원인인 자기 사랑에 대한 거절이며 순결한 하나님의 신부로 살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III. 예수의 생명에 참여함
A. 예수의 생명이란?
둘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예수의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먼저 예수의 생명이라고 할 때에 예수라는 소유격이 붙은 이유는 생명의 원인은 성령이시고 성령은 성자를 통해 오고, 그 성령은 성자 그리스도의 일을 계승하기 때문에 생명을 예수의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닌 사물의 생명을 다루는 것이 생물학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식물학, 동물학, 미생물학 등등으로 분류가 됩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것은 의학입니다. 인간의 생명 현상을 연구하는 것은 생리학이지만, 그 이치를 이용해서 인간의 생명을 증진하거나 연장시키거나 북돋우는 기술로 사용하는 것을 의학기술, 의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풀 한포기는 인간에 비하면 너무 간단하고 하찮아 보이는 사물이지만, 인간의 생명을 모르는 것이나 잡초 한 포기의 생명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인간의 사유와 인간의 이성적 추론의 범위를 넘어서 있는 것입니다. 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나 사물의 생명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나 거의 마찬가지로 캄캄한 지역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공부한 사람에게 생명이 무엇인지 물어봤더니 그것은 생물학의 연구대상이 아니랍니다. 똑같이 의사들도 생명을 다룰 줄은 알지만 생명 그 자체가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그리스에서 초기에는 생명이 무슨 가느다란 실 줄기 같은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보면 ‘칼로 등을 찔렀더니 그 칼끝에 생명이 묻어나왔다.’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등에 생명이 있어서 생명이 실처럼 온 몸에 퍼져있어서 그것을 꽉 잡아당기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끊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실이 툭 끊어진 것처럼 몸이 확 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명이라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주 물질적인 생명관입니다. 그런데 생명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생명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 생명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살아있게 하는 초월적인 힘이라고 하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명에 대해서 성경에 입각해서 정의를 내려 봅니다. 생명은 생명체로 하여금 가장 생명체답도록 존재하고 기능하게 하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힘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정의입니다. 생명이 충만하면 가장 좋은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십대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는 이십대, 이십대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도 이십대, 삼십대가 좋아하는 여자도 이십대, 사십대가 좋아하는 여자도 이십대, 오십대가 좋아하는 여자도 이십대, 육십 대가 좋아하는 사람도 이십대라고 말입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이십 때가 생명이 가장 충만한 때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이십대도 스물세 살 이전까지만 생명의 기운이 충만합니다. 스물세 살부터는 늙기 시작하고 죽음의 기운이 침투합니다. 생명의 기운이 빠져 나간 자리에 죽음의 기운이 채워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로 보면 이십대 초반이 가장 예쁜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덜 먹어도 이상한 곳에 살이 모입니다. 그래서 실망스러운 형체가 됩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기운이 침투해서 몸의 변형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에 생명이 가득할 때에는 인간은 활동하고 움직이고 심지어는 사고하기에 가장 적합한 몸이 됩니다. 그리고 몸의 건강한 상태는 마음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육체의 생명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영혼의 생명입니다. 육체의 생명이 충만하게 부어졌을 때 그 생명체답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생명이 충만하다는 것은 영혼다운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에 아무리 생명이 충만하게 부어져도 인간의 영혼이 천사의 영혼이 되거나 하나님 자신의 영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영혼이고 나의 개별적인 영혼입니다.
영혼의 상태가 좋은 상태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울로 달수도 없고 부피를 잴 수도 없는데 가장 좋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영혼을 주신 목적에 맞게 작용하고 기능을 하면 그것이 바로 훌륭한 영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영혼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영혼을 주신 것은 그 안에서 작용하는 지성과 감정, 의지를 가지고 육체를 올바로 지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으로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옆으로는 사람을 알고, 아래로는 자연의 모든 사물들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지식들을 다 엮어서 하나님을 공경하는데 사용하고 하나님이 인간으로 이 땅에 우리를 만드신 목적에 합당하게 우리의 몸을 사용하라고 우리에게 영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육체적인 젊음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세대가 사랑하고 부러워하는 이십대라도 영혼에 생명이 거의 사라지고 나면 그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지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죽어있는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서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의 영혼에 당신의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B. 우리 몸에 나타난다는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고난 속에서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나의 삶 속에 실제화 됩니다. 그것이 신비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정욕과 죄가 죽습니다. 죽는 곳에서 죽는 것만큼 생명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죽음은 무엇인지를 알았는데 생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살리셨습니다. 생명을 부여하심으로 살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몸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셨기 때문에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예수님에게 생명을 주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주신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시면서 그 마지막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인간들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고, 이것을 하나님은 너무 기뻐하셨고 아들의 순종을 향해 하나님이 상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나님이 살리신 것입니다. 그 생명이 바로 예수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고난을 당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하여 우리의 정욕과 죄가 죽으면, 그 속에서 예수의 부활의 능력과 생명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부활하게 되는 것은 영화 때의 일이겠지만 이렇게 죄 많은 세상에서 살면서 날마다 새롭게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바로 예수의 생명에 참예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몸에 나타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생명이 없을 때에는 우리의 영혼이 죽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갑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 육체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을 하면서 죄의 열매를 맺으면서 불순종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더 많은 시련과 환란을 만나면서 괴로움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환란과 시련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십자가를 묵상하며 자기가 죽는 것을 경험할 때에 예수의 생명이 자신에게 나타나면 이것이 나를 움직여서 예전에 살지 않았던 방식의 삶을 살면서 우리의 인격과 생활에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사경회를 준비하러 광림 수도원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둘 다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두 주 만에 350쪽 정도를 썼습니다. 제일 많이 쓴 날은 하루에 280쪽까지 썼습니다. 지금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속편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책을 쓰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쓰다 보니까 제가 신학교 다닐 때, 맨 처음 목회를 할 때의 이야기들이 나와 그때의 기억이 났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릴 때, 어떤 것은 괴로움 때문에 어떤 것은 기쁨 때문에 눈물이 났습니다. 신대원 다닐 때 주님께서 훈련시켜야 할 모든 훈련을 저에게 시키셨는데 온갖 괴로움을 다 당했습니다. 그때는 지독하게 가난했습니다. 학교 등록금이 사십오 만원인데 교회 월급이 칠 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슴 아픈 일들이 계속 생겼습니다. 교회에 가면 변화되지 않는 돌덩이 같은 영혼을 보면서 괴롭고, 학교에 오면 학생이니까 공부를 해야 하는데 공부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 시절에 담임목사님이 일이란 일은 몰아서 저에게 붓는 것 같았습니다. 주일학교, 고등부, 청년부, 구역 네 구역, 토요일 성경공부 두 클래스, 교회 청소, 새벽이면 기숙사 생활도 못합니다. 새벽이면 에누리 없이 4시 반에 일어나서 여섯 개 갈탄 난로에 불을 지피고 새벽기도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항상 청량리에서 스쿨버스를 타면 용인에 8시에 도착합니다. 수업은 8시 반이었습니다. 30분의 시간이 남기 때문에 항상 유혹을 받습니다. 특히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답고 공기가 좋아서 커피 한 잔을 들고 학교 옆에 있는 산을 산책하면서 묵상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한편으로는 주님께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대부분 두 번째 생각이 이겼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삼십 분 동안 족구도 하고 먹으러 내려가고 가는데 저는 채플 실에 들어갑니다. 사람도 별로 없고 가끔씩 몇 명의 학생이 와 있었습니다. 앞자리에 가서 앉자마자 마치 봇물이 꽉 찼다가 툭 하고 터지는 것처럼 눈물이 확 쏟아집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진 십자가입니다. 잘 감당하고 싶은데 힘이 너무 없습니다. 마치 네가 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지 팽개치는지 보자고 내기를 하듯이 시련과 고난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삼십 분 동안 한 없이 울고 나면 기쁨이 밀려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기도가 끝나고 나면 아무 생각도 없고 이 찬양이 흘러나왔습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눈물이 확 쏟아지면서 다시 주님을 위해 살 용기가 나고 기쁨이 밀려옵니다. 그런데 기쁨이 왔다고 괴로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쓴 한약 먹고 사탕 주는 것처럼 쓴 고통은 그대로 있고 그 위에 크림을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밑으로 내려가면 괴로움이고 위로 올라가면 달콤함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는 이 두 가지가 공존하게 됩니다. 그런 체험을 하면서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교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경험했습니다.
IV. 결론
누구든지 모든 사람의 비극은 바로 생명이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에는 제가 한 주간 아픈 환우들을 심방을 합니다. 병원에 가보면 임종을 기다리는 환자가 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깨닫는 것은 육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임종을 앞에 둔 사람이 링거 맞으면서 성형수술 받으러 간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생명이 충만하지 않아서 죽어 가는데 얼굴이 못나고 코나 못난 것이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살아만 있으면 됩니다. 가족들은 생명이 있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체의 생명의 우월성입니다.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될 때 기쁨과 은혜가 부어집니다. 이 세상에 예수와 함께 동행 하며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산 생명의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미워했던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고난과 시련을 이기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고난 주간을 맞아서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것도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은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이것을 고백을 하면서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생명력이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영원한 사랑(고린도전서 13장강해) / 1
1 / 영원한 사랑(고린도전서 13장 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