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내 아들아! 내 아들아!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아들아 하였더라”(삼하 18:33)
녹취자: 백지영
가슴에 꽃을 달아준 것을 보면 이번 주가 우리 교회적으로 지키는 어버이주일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게 됩니다. 진부할 정도로 그 어버이의 사랑에 대해서는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수없이 많이 듣고 있고, 또 우리는 이 시대에 참 부모를 공경하는 아름다운 이 풍토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한탄하는 많은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을 많이 경험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던 다윗의 생애에 일어났던 그 한 가지 사실을 오늘 우리에게 보도해 주고 있습니다.
이 다윗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우선 여섯 명의 부인의 이름과 함께 또 여섯 명의 자녀들의 이름이 거론이 됩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그 여섯 명 거론되는 부인 말고 또 다른 부인, 불륜의 관계에서 후일 정식으로 아내로 맞이한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있고 그 이외에 또 다른 자녀들이 있는데 무려 밧세바에게서 난 소생이 넷이고, 물론 거기에는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들은 포함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제 암논 그 다음에 길르앗, 압살롬, 아도니야, 스바댜, 이드르암 그 다음에 그 이외에도 역대상에서는 열아홉 명의 아들이 있다고 했으니까 성경에 언급된 것만 보아도 29명의 아들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예언 가운데 하나가 “칼이 너의 집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네 원수들이 백주에 너의 처들과 함께 동침할 것이다.”라고 하는 이런 끔찍한 심판의 징계의 말씀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 중에 오늘 성경의 이야기는 다윗이 그 아들이었던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해서 도망을 가고 그리고 다윗의 부하들이 마지막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을 토벌하고 압살롬을 살해하고 난 다음에 다윗이 슬퍼하는 장면을 오늘 우리들이 읽어보았습니다.
이 압살롬은 그술의 왕 달매의 딸 마아가 공주에게서 난 소생이었습니다. 그 압살롬에게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다말이라고 하는 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장자가 있었는데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 가운데 아히노암의 소생 암논이라고 하는 큰 아들이 배다른 동생 다말을 아주 매우 좋아하였습니다. 그래서 뜨겁게 좋아하다가 결국은 속임수를 써서 이 아이를 자기의 방에 들어오게 해서 겁탈을 해 버립니다. 그렇게 해 놓고는 끝까지 사랑을 하면 좀 나을 텐데, 그렇게 자기의 육체적인 욕망을 채우고 나니까 갑자기 이 여자가 신비감이 없어졌는지 그 다음에 이 아이를 내버립니다. 이것을 보면서 같은 배에서 태어났던 오빠였던 압살롬이 분을 품고 언젠가는 이놈을 쳐 죽여야 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어쩌면 이 암논이 큰 아들이니까 큰 아들을 처치해 버리고 나면 둘째를 건너서 셋째인 자기에게 왕위가 오지 않겠는가 하는 그러한 생각 때문도 작용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슬피 우는 동생에게 “누이야 지금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라” 하였으니, 그러니까 이 압살롬은 그 이후로부터 원한의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암논이 배 다른 누이동생을 겁탈하고 나니까 다윗이 암논을 매우 싫어하고 멀리 했습니다. 그때를 이용해서 압살롬은 서서히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왕의 마음이 암논에게서 완전히 멀어진 것을 보고 드디어 암논을 연회장에 초청해 다가 결국은 살해를 하고 맙니다. 살해를 하고 나니까 비록 다윗이 그 암논이라는 아들을 미워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 아들은 맏아들이 아닙니까? 자기 눈앞에서 아들들끼리 칼부림을 하고 한 놈이 쳐 죽임을 당한 것을 보니까 압살롬을 향한 다윗의 마음이 고울 리가 없었습니다. 다윗이 심히 마음 아파하고 진노해서 이 압살롬은 도망을 가서 살게 됩니다. 한참 동안 살다가 그러면서도 이 아버지의 마음이 이 아들을 그리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왕의 마음을 읽은 부하들이 압살롬을 데려다가 이제 다윗에게 화해를 시킵니다. 그래도 이 다윗의 마음의 분노는 풀리지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여전히 이 압살롬을 멀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압살롬은 이제 서서히 대권을 향한 도전을 시작을 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마 가시지 않는 아버지의 미움을 보면서 자기에게 왕위가 계승될 가능성이 없고, 나아가서는 아버지에게 계속 미움을 받다가 자기의 신변의 위험이 올지도 모른다고 하는 불안한 정치적인 위기감도 작용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어쨌든 그는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했습니다. 우선 사병을 길렀습니다. 그래서 오십 명 가량 되는 개인 호위대를 두고 그리고는 성문에 나아가서 성문에 재판을 받기 위해서 들어오는 백성 하나하나를 만나서 따뜻한 말로, 네가 무슨 일로 재판을 받으려고 하느냐 그래서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면 아이고 그 안 됐구나 내가 이제 너를 봐주어야 하겠다고 하면서 서서히 선거운동을 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나 이것을 가르쳐서 압살롬이 성문 앞에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왕인 다윗이 잘못 정치하고 있다는 마음을 이 백성들에게 넣어주는 동시에 그러한 정치적인 박해와 압제와 모순으로부터 자기가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온 은혜의 사람이라는 백성들에게 많이 보여 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헤브론에서 정식으로 수많은 비류들을 모아서 이제 추종하는 세력을 결집한 다음에 압살롬이 왕이 되었다 하고 크게 나팔을 불게 됩니다.
왜 하필이면 그 장소가 헤브론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헤브론에서 다윗이 그렇게 왕이 되었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자기가 헤브론에서 그렇게 나팔을 불고 왕이 됨으로 말미암아서 정식으로 범죄한 다윗을 하나님이 폐하시고 자기를 기름 부어 세우신 것 같은 이러한 신앙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이스라엘은 이제 다윗이 겨우 두 번째 왕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집안에서 왕이 나와야 할 것은 분명하였지만, 사울은 다윗과 같은 집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왕이 되었는데 사울의 집안에서 왕위가 계승되지 않고, 하나님이 그를 폐하시고 다윗을 왕위에 올리심으로 말미암아서 한 집안에서 왕이 나와야 된다고 하는 전통이 서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의 생각에는 다윗이 왕이 되었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이 또 다윗을 폐하고 다른 사람이 왕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백성들이 어리석으니까 생각했을 수 있고, 또 하나는 장자가 왕위를 계승해야 된다고 하는 철저한 전통이 아직 세워지지 아니하였던 때였습니다. 더욱이 다윗은 일찍부터 솔로몬을 왕위에 올리기를 원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사람들에게는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도 나이가 어리고 정치적인 기반이 약한 이 솔로몬과 그 어머니 밧세바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압살롬이 왕이 되려고 한 이 도모에 많은 비류들이, 다윗을 추종하지 아니하고 반발하는 많은 세력들 특별히 사울의 집안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동조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압살롬이 그렇게 했을 뿐만 아니라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은 이제 그 압살롬의 반역군의 모사 가운데 아히도벨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아히도벨이 말하기를, “왕의 아버지가 머물러 두어 궁을 지키게 한 놔두고 도망간 그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을 하옵소서. 그러면 왕께서 왕의 부친의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듣지 않겠습니까? 왕의 후궁과 동침하면 결국은 다윗이 그 소식을 듣고 당신을 미워하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날 텐데, 그렇다면 이스라엘과 당신을 추종하고 있는 백성들이 왕을 미워하는 다윗을 보면서 그 다윗을 물리치는 일에 더욱 더 반기를 들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사악하고 부도덕한 꾀를 내게 되었습니다. 이래서 압살롬은 지붕에 장막을 치고 그 장막을 친 속에서 왕이 동침하던 인연으로 보면 자기의 어머니뻘 되는 후궁들과 함께 백주에 백성들 앞에서 동침하는 불륜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니 그 이야기를 다윗이 들었을 때 그 다윗의 수치가 얼마나 컸겠으며, 마치 그것은 아들 앞에서 자기의 옷을 발가벗기는 것과 같은 깊은 수치를 느꼈을 것입니다. 인간 유사 이래 흔히 있지 않은 이런 커다란 불륜으로 커다란 패역함으로 이 아비의 마음에 아픔을 주었는데 그것은 다윗의 마음에 커다란 못을 박는 것과 같은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누리게 하신 왕위를 버리고, 법궤를 버리고, 성전을 버리고,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덤벼드는 악한 무리들의 칼날을 피해서 발까지 벗고 재를 무릅쓰고 감람산으로 도망가던 이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들 하나 때문에 그는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손으로 기른 부하와 그리고 자기의 손으로 양육한 자기의 친척이나 그런 사람들이 반역을 일으켜도 통탄할 일인데, 자기 손으로 낳아서 자기 손으로 안아주고 업어서 기르고 그런 그 아들이 아비의 목을 자르고 자기가 왕위에 오르겠다고 칼을 들고 덤벼드는 이러한 전대미문의 끔찍한 살인적인 반역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왕위가 탐이 나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왕위가 생각이 나서 슬퍼했던 것이 아닙니다. 자식이 아비인 자기를 죽이고자 칼을 들고 반역의 무리들과 함께 자기를 향해 돌격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물리칠 수가 없어서 도망할 때에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를 욕했습니다. “사울의 집안을 말아먹은 그 죄를 하나님이 이제 비로소 너에게 갚으시는구나.” 한 때는 기름부음을 받고,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다윗을 노래하던 수많은 백성들의 민심이 이반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졸지에 아들을 비롯한 수많은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대적으로 변하는 놀라운 민심의 이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이 다윗은 하나님만 바라보았던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압살롬이 다윗의 마음을 한없이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의 반역을 기뻐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다윗의 토벌군이 반역의 무리들을 소탕하고 마지막에는 아들 압살롬을 결국은 죽이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구스 사람 하나가 달려와서 반군이 토벌되기를 기다리는 이 왕에게 기쁜 소식을 들고 왔습니다. 말하자면 반군의 괴수가 살해되고 결국 반군이 평정되었다고 하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때에 이 다윗은 즉시 물어보았습니다.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다윗에게 있어서 이 압살롬은 소년이었습니다. 영원한 소년, 히브리말로 ‘나알’인데 이것은 소년, 어린아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갓난아이라는 말로도 쓰였습니다. 그래서 내 아이는 잘 있느냐 그렇게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 압살롬이야말로 반역의 괴수요 적장으로 보였으나 그러나 아버지 다윗에게는 장군이나 장수나 반역의 무리가 아니라 오히려 어린 아이로 보였던 것입니다. 철없는 어린 아이, 소년과 같은 내 아들이 잘 있느냐 물을 때에 구스사람이 아버지의 면전에서 당신 아들이 죽었다고 대답할 수 없으니까,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완곡한 말로 압살롬의 비참한 죽음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이 왕은 마음을 심히 아파하며 문루로 올라가서 거기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올라갈 때에 오늘 본문을 말한 것입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아 내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성경이 내 아들아를 다섯 번이나 부르고 있으니까 이때에 다윗의 울부짖음이 얼마나 비통하고 얼마나 안타까웠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인 다윗의 마음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는 그럴 수 없었으나, 그러나 왕보다도 그 아들의 죽음 앞에 발동된 것은 왕으로서의 본성이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부모로서의 본성이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갈 때 각박하고 고통이 많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를 어디서 발견하느냐 하면 바로 부모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들이 똑바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올바른 곳에서는 그 속에서는 자녀들이 천국을 느끼면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들이 올바르지 아니하면 참 하나님을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이 부모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사랑을 부어 주셨으니, 그래서 그 부모를 통해서 자녀들에게 베풀어지는 이 사랑은 피조세계에 공통된 특징인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놀랍도록 그렇게 이 세상에 있는 인류를 보전하고 인류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동물들을 보전하시는 것입니다. 피조세계를 보전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부모라고 할지라도 자녀들을 향해서는 그런 깊고 맹목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자기를 향해서 칼을 들고 덤벼드는 이 압살롬, 그가 칼을 들었을 때의 소원은 자기의 아버지 다윗의 목에다가 그 칼을 꽂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다섯 번을 부르며 마지막 하는 말은 차라리 내가 죽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하며 이 압살롬과 하나님과 그리고 모든 백성들 앞에서 슬피 우는 모습이 되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사악한 인간들의 마음속에서는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사악한 인간들 속에 불어 넣어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같은 그런 마음으로 이 세상에 있는 자녀와 또 부모를 사랑하도록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사랑하지 않거나 자식을 버리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스스로 파괴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자녀를 버리고, 자녀를 유기하고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한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노력을 해야 할 성질의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음 바 되어서 그 하나님이 주신 그 마음이 자녀들을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그 자녀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갖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 하나님의 자연스러운 창조의 원리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 사랑은 너무나 크고 놀라워서 자기가 자식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고 고난을 당할 때에도 그 마음이 오히려 더 불같이 뜨거워지는 그런 사랑, 그 사랑은 불꽃같이 타 올라와서 누구도 끌 수 없고 그리고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끌 수 없게끔 자식을 향해서 타오르는 그것이 바로 이 피조세계의 보존을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들 마음속에 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세계에서도 이것은 통용되는 원리입니다. 특별한 신앙심과 각별한 은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연적으로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 속에 솟아나는 사악한 욕심과 죄악된 욕망과 자기만을 위하는 철저한 이기심들이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기본적인 우리 속에 있는 자연적인 사랑을 모두 파괴하고 그래서 자신만 불행해 질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도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식을 이렇게 사랑하는데 부모의 진정한 행복이 있고, 부모의 인생은 이렇게 자식을 위해서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데서 자기의 인생이 구현되는 것입니다. 마치 자식이 자기 인생의 걸림돌이 되는 것 같고 행복을 가로막는 것 같은 그러한 모든 생각들은 하나님이 주신 생각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풍조와 이기적인 자기의 육신의 생각이 준 것입니다. 부모의 참된 인생은 이 자녀들을 사랑하고 이 자녀들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자신의 인생이 비로소 구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압살롬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 압살롬의 사건을 통해서 부모의 사랑이 자식들의 태도와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음 바 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만약에 압살롬이 아들이 아니었다면 다윗은 이 압살롬을 향하여 철천지한을 품어야 될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눈과 귀로 자기와 함께 지내던 후궁들과 더불어 백성들 앞에 동침했다고 하는 소문을 몸소 들어야 했습니다. 부하들 앞에 그 소식을 듣게 될 때 그 다윗의 수치와 부끄러움이 그 얼마나 컸겠습니까? 끊임없이 전쟁 통에 참모들이 모여 지도를 놓고 작전회의를 하고 있을 때에 최종적인 목표는 자기 아들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쟁을 말릴 수도 없고 후원할 수도 없었던 다윗의 처지가 어떠하였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아들 많은 다윗의 집안에 아마 이 다말은 다윗에게 있어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귀여운 딸이었을 것입니다. 그 귀여운 딸이 어느 날 자기의 뱃속으로 낳은 다른 오빠에 의해서 겁탈을 당하고 그렇게 비참하게 울부짖는 처지에 내려가게 되었을 때에 아들의 타락과 그리고 몹쓸 짓을 당한 딸로 말미암아 당하는 그 아버지의 마음의 고통이 어떠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자식들끼리 서로 쳐 죽이는 살인의 사건을 경험하게 만든 것도 바로 이 압살롬이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이 아들 압살롬은 단숨에 쳐 죽여야 마땅한 그런 대적이요 원수였습니다. 다윗이 비록 하나님 앞에 범죄했지만 그 범죄한 다윗의 징계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도록 만들어 준 장본인이 바로 이 압살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압살롬, 이름 뜻은 참 좋습니다. 아부 샬롬, 평강의 아부입니다. 이름값도 못하고 죽은 그런 놈이 되었습니다. 부모의 마음에 샬롬 대신에 커다란 고통을 안겨 주는 도구로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압살롬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심히 통곡했습니다. 이 눈물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압살롬이 그렇게 죽임을 당했을 때에, 할렐루야 주께서 내 앞에서 대적을 물리치셨도다 노래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의 범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집안에서 칼이 떠나지 아니하리라, 백주의 너의 대적이 너의 아내들과 동침하리라.”고 한 하나님의 징벌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윗은 이 압살롬의 죽음을 보면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를 보았던 것입니다. 압살롬의 죽음을 기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슬퍼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안 죽일 수도 없었던 이 압살롬의 죽음을 보면서, 다윗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오는 이 끔찍하고 처참할 정도로 아픈 이 고통을 보면서 다윗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징계하시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이라고 하는 이 끔찍한 사건 앞에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새롭게 돌아보며 슬퍼하고 통곡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통해서 더 많이 고통 받았던 원인도 되었고, 또 하나는 이 압살롬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틀림없이 다윗은 압살롬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을 찢고 슬퍼하니까 그러니까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군사들은 뭐가 되는 것입니까? 죽어라 하고 생명 바쳐 왕을 위해서 싸웠더니 왕이 적장을 죽였다는 소식 때문에 엉엉 울면서 그 놈 왜 죽였느냐고 내가 대신 죽어야 될 놈이라고 그리고 울고 있으니까, 그래서 성경은 “그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들에게 슬픔이 된지라.”고 16장 2절에서 말했습니다. 그 날의 승리가 그 백성들에게는 큰 슬픔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슬퍼하고 울 때에 다윗은 그 인생의 고통 속에서 무엇을 느꼈을까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범죄했을 때에, 이전에 하나님을 알던 믿음의 사람 다윗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죽었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느끼시던 그 마음을 다윗도 느끼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사람이던 다윗이 죽으니까 그 죽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고통을 이번에는 다윗이 육신의 아들이 죽어가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느꼈던 동일한 아픔을 한없이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녀들로서 하나님께 효도하면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서 신앙의 자녀로 하나님 앞에 살아 있을 때 그 때에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눈에 보이는 충성보다 더 훌륭한 것입니다. 그 자식의 존재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 손에 들고 오는 선물이 아버지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속 썩이는 아들이 고기를 사들고 명절 날 오면 부모가 뭐라고 합니까? “그래 너나 잘 살아라 제발, 돈 빌려서 이런 것 안 사와도 좋으니까 너나 좀 잘 살아라.”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곧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죽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가 범죄하고 우리가 실패하고 우리가 신앙에서 떨어질 때 하나님은 죽어가는 우리를 보고 “내 아들아 내 딸아 내 아들아 내 딸아 네가 어찌하여 죽었느냐.”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원주인이시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새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효도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이 속에서 우리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인간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한 세대가 있으면, 부모가 위에 있고 자식은 밑에 있습니다. 중간에 내가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는 잊혀지지 않는데 자식들로부터 받은 상처는 잘 잊혀집니다. 더 쉽게 표현하면 내가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받은 상처는 그것이 상처로 남아서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식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아주 쉽게 잊혀집니다. 그래서 자식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는 부모는 부모에게서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는 자식보다 더 부끄러운 것입니다. 자식에게서는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이 이전에 어떻게 나쁜 짓을 했던지 돌아와서 요만큼만 부모에게 잘해주면 부모의 마음에는 주먹만 한 상처가 잊혀지는 것입니다. 커다란 상처를 부모에게 남겨 주었어도 작은 효도를 하면, 그 작은 것을 보면서 자식으로부터 받은 커다란 상처를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이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받는 것 같은 그런 상처와 원수맺음과 이런 것들이 부모와 자식 간에 똑같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의 역사는 이어지지 않고 파탄이 될 것입니다. 집에서 아마 칼 들고 부모와 자식이 결투하는 사건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옛날 시대 때 서부영화에 보면 총 들고 나와서 결투하고 그 다음에 또 장갑을 던지고 날짜를 정해서 보름달 뜨는 어느 날 풀밭에서 칼싸움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도 자식과 아버지가 장갑 집어던지고 결투하는 적은 없습니다. 자식과 아버지가 총질하는 적은 없습니다.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집안은 특이한 집안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는 기억에 많이 남는데 자식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잊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 주위에 연세 드신 부모들 이렇게 보면 참 속이 없습니다. 그렇게 자식들로부터 속 썩고, 얼마나 속을 썩었는지 내가 다 아는데, 조금만 잘 해주면 금방 속이 풀어져서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자식 자랑하느라고 정신을 못 차립니다. 맨날 자식이 속을 썩여서 입이 댓발 나와서 우리 아이 때문에 속 썩어 죽겠다 그러다가도 조금만 잘하면, 상 하나라도 받으면 동네방네 다니면서 자식을 자랑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의 마음에 여러분들이 이제껏 불효하며 살았다 할지라도 조금만 잘 해드리면 그것은 모든 상처가 기쁨으로 바뀌어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은 자녀들이 아멘을 많이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렇게 이만한 상처를 주고도 요렇게 작은 기쁨만 주고 효도를 하면 그 상처가 잊혀지는 부모의 마음에 계속 칼 꽂고 살아가게 만들면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5계명을 강의하면서도 말씀 드렸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누가 그럽니다.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한 박스 사다 드리면서 아버지 길이 멀어서 자주 올 수 없으니까 매년 하나씩 다시라고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리듯이, 참 부모들의 사랑은 맹목적적일 정도입니다. 절대 상처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으로 늘 기도하는 기도제목이 그것입니다. 내가 목회자가 되어서 한 교회의 영적인 아버지로서 내가 자녀들인 교인들에게 상처를 받지 않는 목회자가 되게 해 달라고. 그러니까 교인들이 내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 일은 그것은 천국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이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있을 수 없지만 그러나 내가 한 교회의 영적인 아버지로서 자녀들이 어떻게 내 마음에 상처를 주든지 내 마음에는 상처를 받지 않는 그런 아버지와 같이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을 달라는 것이 저의 마음속에 늘 있는 기도입니다. 이 세상의 부모들은 자녀들이 아무리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어도 그것이 잊혀지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어머님하고는 길게 살아보지를 않아서 솔직히 말해서 오늘 부른 찬송 같은 것들이 마음에 탁 떠오르지 않습니다. 저는 이제 40이 좀 넘었습니다만 어머니와 같이 산 것이 5년도 채 안되고 그 중에서 갓난아이 적을 빼면 의식이 있는 것은 한 1년이나 2년 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어머니날이면 꽃을 달아드리고 그러던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완전히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대신 저는 할머니 손에서 양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학부모들이 모이는 날이 있으면 고민이 되었습니다. 애들이 전부 다 네 엄마는 왜 이렇게 늙었냐고 그래서 우리 할머니다, 할머니가 늘 오시니까 다른 집 엄마들은 다 젊은데 우리 할머니는 할머니니까. 거기다 꽃을 또 달아드리니까 애들이 와서 놀리는 것입니다. 야, 쟤네 엄마는 할머니다. 그래 진짜 우리 할머니다. 그것이 어린 시절에 늘 못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그렇게 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다닐 때는 저의 집이 무슨 문제가 있고 사연이 있는 집안처럼 찍혔는데, 부모가 안계시고 꼭 무슨 회의 한다고 하면 잘 모르는 할머니가 오시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기억이 납니다.
(예화) 중학교 다닐 때인가 친구들이 캠핑을 가자고 하는데 가겠다고 하니까 안 보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돈이 있어야지 보내 줄 텐데, 그래가지고 심통을 부리고 보따리를 들고 나왔습니다. 나와 가지고 이틀을 캠핑을 가기로 했는데 돈이 모자랐는지 어쨌는지 하루는 역 근처 풀밭에다가 텐트를 치고 하루저녁을 지냈습니다. 딴 애들은 다 회비를 가지고 와 가지고 가겠다고 하는데 나는 회비도 못 내고 그래가지고 애들이 너는 깍두기로 봐주겠다고 그래서 거기에 꼽사리 끼어서 밥을 해 먹고 그러고 있는데, 크게 야단을 엄청 맞았습니다. 그리고 새벽녘이 되었는데 그 텐트에서 잠을 자고 막 일어나서 부스스 눈을 부비고 있는데 할머니가 멀리서 걸어오시는 것이었습니다. 대판 할머니한테 대들고 왔는데 걸어오시더니 이 추운 데서 어떻게 잠이나 제대로 잤느냐 그러시면서 어디서 빌려오셨는지 어쨌는지 그때 백 원짜리 지폐 4장을 접어가지고 손에다가 쥐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불순종하고 대들고 그럴 때는 밉지만 그러나 돌아서고 나면 그 자식이 긍휼히 여겨지고 불쌍히 여겨지는 이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상처 받지만 그러나 작은 사랑에 감동을 받으면서 너무나 쉽게 마음의 아픔과 고통을 잊어버리는 그래서 자녀를 향해 좋은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을 낳아서 길러주신 부모를 고통스럽게 하고 불효하는 것을 신앙의 차원에서 중대한 문제로 다루고 싶어 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이 자식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도록 만들어 준 것은 이 세상의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어 준 것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사람들은 한번 상처를 받으면 상처받아 몇 배나 더 큰 사랑과 그 다음에 용서를 가지고 그 앞에 빌어도 그 상처가 치료되지 않습니다. 커다란 위로를 삽으로 퍼서 들어부어도 상처로 남는 것이 이 세상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마음의 커다란 상처가 작은 위로로 씻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녀가 부모에게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예화) 고등학교 다닐 때인가 언제인데, 무릎에 종기가 났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기가 가시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한참 잠을 자는데 그 종기 난 곳에 치큰치큰하게 뭔가 와서 닿았습니다. 그래서 눈을 뜨고 보니까 할머니가 그 종기에 침을 바르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옛날에 옛날에 이르기를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 말 하지 않고 첫 번째 입을 벌려서 발리는 그 침에는 약효가 있어서 모든 종기가 낳는다고 이것이 우리 조상들의 비방이라고 그러면서 그 헌 데 고름이 덕지덕지된 거기에다기 혓바닥으로 침을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놀라운 사랑을 입으면서 여기까지 이렇게 살아 왔습니다. 자식들로부터 수많은 고통과 아픔이 마음속에 남아 있어도 자식들의 작은 사랑과 애정으로 말미암아 눈 녹듯이 풀어지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고 부모의 심정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인 우리들이 그 부모의 마음을 그렇게 시원하게 해 드리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이것은 또 반대가 성립이 되는데, 자식에게 해 주는 것 천분의 일만 해도 상처를 안고 죽을 부모들은 없을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퍼붓는 그것의 백분의 일만해도 부모의 마음에 아픔을 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에게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 주신 것입니다. 다른 네 계명은 약속이 없습니다. 그냥 지킬 뿐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 땅에서 잘 되고 너희가 장수하리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교훈인 것입니다. 그만큼 하느님이 우리가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며 상처 없이 자녀들을 바라보며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윗이 오늘 죽어간 이 압살롬을 보며,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다섯 번을 부르짖고 울부짖고 있는 것은 마치 압살롬 없는 자신의 인생은 인생도 아니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은 이 압삽롬의 죽음에 직면하면서 다윗 속에 있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우리의 부모들 속에 두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부모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게끔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렇게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자신의 혈족들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을 믿음에서 파선한 자라고 선고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힘입어서 살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을 우리 부모의 마음속에 부어서 오늘날 우리가 있게끔,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고 우리를 그 부모의 사랑의 생명싸개 속에 싸게 하여서 우리들로 하여금 이제껏 살아오도록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다윗이 자기 앞에서 자기의 목에 칼을 겨누다가 죽어간 이 압살롬을 소년이라고 부르며 마치 그가 한 모든 행동이 철없어서 행한 것이기 때문에 그를 죽음으로 형벌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탄식하고 있는 것처럼, 바로 우리의 육신의 부모들도 우리를 이와 같이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 있는 날 동안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또 이웃 앞에 그리고 우리의 부모 앞에 이런 사랑을 부모들로부터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압살롬아, 압살롬아라고 다섯 번이나 부르는 다윗의 마음을 통해서 우리의 육신의 부모뿐만 아니라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우리 속에 생각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의 부모들이 사라지고 나면 마음에 그렇게 한이 되고 슬픔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희 할머님은, 아버님 어머님은 생존해 계십니다만, 할머님은 고생을 많이 하시다가 비로소 손자에게서 효도를 받으실 만할 그 때가 되자 돌아가셨습니다. 11월에 돌아가시고 제가 1월 달에 대학의 교수로 들어갔습니다. 그 후로도 늘 생각하는 것은 한 3년만 더 사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마음이 그럴 수 있는 사랑을 깨닫고 삶이 그렇게 해 드릴 수 있는 여유를 찾게 되었을 때 돌아보니까 우리를 그렇게 길러주었던 부모들은 우리의 곁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잃고 나서야 비로소 아, 그때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계신 부모가 우리 곁에 계실 때는 구속처럼 느껴지다가 세월이 흐르고 나니까 그 그늘이 그리워지고 그 울타리가 한없이 생각나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정이요 그리고 우리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보여 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들의 부모들에게 부어진 것을 기억을 하면서, 이 어버이 주일에 다시 한 번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러나 가장 사랑하고 섬겨야 할 그 관계 속에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우리가 깊이 깨달으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이 세상에 살아 계시다고 하는 것은 달란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요즘 일본에서 신종으로 유행하고 있는 직업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부모를 빌려주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할아버지가 누구고 할머니가 뭔지를 관계를 체험을 하지 못하니까, 돈을 주면 그 할머니, 할아버지 생전의 모습하고 유사하게 차림새를 하고 와서 하루나 이틀 혹은 일주일을 함께 살아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 관계가 그립고 그 관계가 이 땅에서 성립하고 있을 때 바르게 섬기지 못했던 지난날들이 후회스러우면 돈 주고 사람을 사다가라도 그렇게 부모에게 효도를 해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겨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님이 여러분들 곁에서 살아 계신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 주신 달란트인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영원히 살아계신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날 동안에 우리의 마음에 한 없이 마음을 주고 사랑을 드리고 섬기고 그렇게 해서 우리의 자녀들의 이름으로 인하여서는 그분들의 마음에 상처가 없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들로 말미암아 때로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할지라도, 부모에게로부터 받은 상처가 자식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 것은 그것은 이 세상의 순리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그렇게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자신도 자녀들에게 완전한 부모가 되지 못하지 않습니까? 부모의 마음은 작은 위로와 작은 효도에도 감화를 받고 태산처럼 큰 상처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자식에게 상처를 준 것보다 부모에게 상처를 준 죄는 더 크고 아픈 법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부모님들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사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