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심장으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녹취자: 원수연/최원정
저희는 9절부터 11절까지 네 번에 걸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 네 번의 강의를 간략히 다시 한 번 요약하고 오늘 마지막 설교 8절을 하겠습니다.
이 편지를 쓸 때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에 기쁨의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무엇을 기도했을까요? “사랑을 …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이것이 첫 시간에 배운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목회는 기도다. 그리고 목회는 성도들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을 풍성하게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간에는 이 사랑이 어떻게 풍성해지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과 사랑은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은 지식과 총명 때문에 점점 더 풍성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한 그림을 그려드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입니다. 그 불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의 불길은 지식과 총명이라는 나무를 태우며 더욱 거센 불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시간은 목회의 세 목표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첫째의 목표는 그렇게 성도들을 돌보아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지극히 선한 것’이라고 번역되었지만 희랍어 단어는 ‘디아페론타’, ‘다른 것들’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비슷해 보이는, 진리와 유사해 보이는 많은 것들을 올바로 분별해내는 것, 그런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목양의 목표입니다.
두 번째는 진실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목회의 두 번째 목표였습니다. 진실하다는 말은 객관적인 진리인 도에 한 사람의 마음과 정신이 삶과 더불어 일치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 중에는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은 있지만 신 앞에 진실해지는 것은 없습니다. 위선자는 마음에 없는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종종 마음에 없는 악을 행하는 사람을 위악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누구도 지어낸 행동을 일관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삼투압 현상처럼 한 사람 마음 안에 있는 인격과 생활은 결국 낮은 쪽으로 일치를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목표가 허물없이 되는 것입니다. ‘아마무스’라고 하는 이 희랍어 단어는 티나 흠집이 없는 상태입니다. 아무리 좋은 과일이라도, 배가 아주 크고 좋고 맛있어도 겉에 흠집이 생기면 가격이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죄인인데 완벽하게 흠 없이 되는 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치 그렇게 살 것처럼 그렇게 목표를 정하고 살 때 비교적 흠이 적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에게 한 비유를 들어드렸습니다. 인간은 어느 때도 완벽한 원을 그릴 수 없으나 그러나 원을 그릴 때는 어차피 완벽한 원을 못 그려도 마치 완벽한 원이 그려질 수 있는 것처럼 머릿속에 생각하며 그려낸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의 세 목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을 풍성하게 해서 분별하고, 진실하고, 허물없고, 이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시간에는 그렇게 해서 어떤 목적에 도달하고 싶은가를 두 가지로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의의 열매가 가득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디카이오시네’(의, δικαιοσύνη)였습니다. 그리고 이 의의 개념이 구약에서는 율법에 합치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고 신약에서는 이 율법이 사랑으로 완성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율법을 통해 복음을 보고, 신약에서는 복음을 통해 율법을 본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율법이 지시하는 바를 참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최고의 율법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야기를 의에 대해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열매가 가득하게 한다고 그랬는데 그것이 바로 인류가 모든 사람을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생각하는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류의 연합의 완성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질 나라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이미 침투했고 그것을 선취적으로 누리고 있는 공동체가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이상은 우선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확장되는 것이 전도인데 전도는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들, 가인처럼 살인하고 싶도록 미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가족과 이웃을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며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 공동체는 종말에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사회의 이상을 먼저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목표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고 찬송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영광에는 크게 세 가지 영광이 있는데 본질적 영광, 발산적 영광, 효과적 영광인데 여기서는 세 번째 효과적 영광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그분을 인정한다는 뜻이고 찬송이 된다는 말은 그분을 모르던 사람들이 의의 열매를 통해 그분을 알고 그분을 높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지난 한 주간 동안 여러분들에게 전했던 말씀의 가장 짧은 요약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은 8절을 보려고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심장’이라는 단어가 희랍어로 ‘스프랑크나’(σπλάγχνα)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심장으로 번역이 되어있지만 원래 심장이라는 단어는 따로 있습니다. ‘카르디아’(καρδια)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cardiology라고 하면 심장학, cardiographer는 심장 박동계입니다. 그래서 ‘카르디아’라고 하는 단어가 따로 있습니다. 이 ‘스프랑크나’라고 하는 단어는 놀랍게도 ‘창자’라는 뜻입니다. 복수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일까요?
중국어 성경에도 아마 심장(心腸)으로 되어 있을 겁니다. 마음 심과 창자 장. 굉장히 절묘한 번역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영혼이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여러분의 생각을 얘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의 평균적으로 생각하는 것 말입니다. 마음에 있다고 보십니까? 마음은 실재(實在)가 아니라 기능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은 마음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너는 내 생각 속에 있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네가 있는 게 아니라 “너에 대한 생각이 내 정신 안에 있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영혼은 실재입니다. 그러니까 마음 안에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국인들은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중국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이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혹시 유물론 때문에 그런 관심사가 사라져 버린 건 아닙니까? 장자, 맹자, 공자와 같은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애간장에 있다고 흔히들 이야기한다구요? 여러분 모두 동의합니까? 어쨌든 창자에 있는 건 똑같네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노장사상에서도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고 그런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굉장히 미신적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국사상의 영혼학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모르겠지만 조선의 유학에서는 인간의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라는 것은 민간신앙에서니 믿는 것이지 정통 유학자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쨌든지 그 단어는 창자를 가리킵니다. 창자의 일부가 아니라 위 아래 있는 전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왜 이 창자를 심장으로 번역을 했을까요? 이게 소위 이야기하는 문화적 등가번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나라 사람들이 인간의 영혼은 심장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맹세를 할 때에도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를 합니다. 또 왕이나 높은 사람에게 경의를 표할 때도 심장에다가 손을 댑니다. 일리아드, 오디세이를 쓴 호머의 문학에 보면 인간의 영혼이 등 척추뼈 중간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영혼이 등뼈 중앙에 있어서 사지로 뻗쳐진 낚싯줄 같은 것을 영혼이 꽉 쥐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혼이 떠나가면 줄이 탁 풀리면서 온몸이 통제할 수 없이 풀어져버린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칼로 등을 찔렀다. 그리고 다시 칼을 뺐을 때에는 실처럼 영혼이 묻어나왔다.”
아프리카 콩고의 지도자 가운데 1925년부터 2003년까지 살았던 사람 가운데 이디 아민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엄청난 독재자였습니다. 하사관 출신이었는데 나라를 쿠데타로 장악하고 엄청난 독재를 행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서 시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주동자를 죽여서 배를 갈랐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간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간을 회로 먹었습니다. 그 광경을 사람들이 보면서 경악을 했습니다. 그것이 영혼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것을 내버려두면 이 영혼이 다시 부활해서 자기를 해칠 것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그 사람들은 영혼이 간에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영혼이 다시 부활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가 씹어서 그것을 먹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그를 가둔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버전(KJV)을 보면 “in the bowels of Jesus Christ”라고 번역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창자들 안에서”라고 번역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명사는 복수인데 이게 동사로 사용이 됩니다. 그게 뭐냐면 바로 마태복음 9장 36절에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라고 나오는데 이 단어가 ‘에스플랑크니쉬데’(ἐσπλαγχνίσθη)라는 단어입니다. 수동태 과거형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면 ‘창자까지 흔들리도록 감동을 받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애절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마음이 되는 것, 그게 바로 ‘에스플랑크니쉬데’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말로 번역을 한다면 이러지 않을까요?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애간장이 녹는 것처럼 괴로웠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한국 문화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상대가 어려움에 처해있는데 자기가 도울 수 없을 때에 가장 고통스러운 마음의 상태를 ‘애간장이 녹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얼마나 근심을 하고 마음 아파했는지 창자가 녹아서 내리는 겁니다.
중국어에는 그런 절실한 표현이 있습니까? (마음이 녹는다는 표현을 씁니다.) 더 강렬한 표현이 있습니까? (간장이 토막이 난다. 끊어진다.) 그런 표현은 우리도 씁니다. ‘애간장이 끊어진다.’ 제가 알기로는 중국 고사가 있는 걸로 아는데 단장(斷腸)인 것 같습니다.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데리고 왔는데 어미가 멀리까지 따라와 죽은 것을 보고 그 배를 갈랐더니 창자가 토막토막 다 끊어졌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공감하겠습니까? 그런 의미라고 보시면 정확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애간장이 그렇게 녹는 것처럼 그런 뜻으로 “예수의 심장”이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그 사랑이 자기에서 스스로 자가발전된 것이 아니라 예수 때문에 생겨난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이 소유격은 주격적 소유격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통해서 너희를 사랑하시는 것’ 그런 뜻입니다.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연애라도 절실하게 했든가 실패를 해본 사람들은 잘 압니다. 혹은 자식을 사랑해본 사람이나 하다못해 강아지라도 사랑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아실 것입니다. 어렸을 때 강아지를 잃어버리고 나서 제가 3일씩 밥도 못 먹고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제가 아이들에게 개를 못 기르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가슴 아픈 기억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별로 좋은 기억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극대화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사도바울이 그런 심장을 가지고 너희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면서 가지셨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왜 민망히 여기셨을까요? 많은 영혼이 유리하고 고생했기 때문에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한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렇게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건져서 주님의 애가 끊어지는 마음을 덜어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섬김이고 목양입니다. 전도와 목양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혼을 돌보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찬양)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 물으셨네
그런 심장을 가진 사도바울의 모든 관심은 자신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향하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은 곧 죽을지도 모르는 사형당하는 죄수였지만 그의 관심사는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예수님께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to die is to gain)고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죽는다면 자신이 온전히 예수의 품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염려되는 것은 교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말했냐면 ‘이 고통이 많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내게 정말 좋은 것이다.’ 그 다음 말이 가슴을 울립니다. ‘근데 너희를 생각한다면 내가 좀 더 있는 게 좋을 것이다.’ 이러한 고백은 사도바울의 삶의 이유가 -삶의 동인이- 예수 그리스도가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나는 나만을 생각한다면 현실의 고생과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미래의 행복 그 사이에서 더 많이 괴로움을 당하지 말고 죽는 게 좋을 것이다.’는 말입니다.
저도 심히 험한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21살에 회심하기 전까지 그랬고 그 후에도 그랬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만약에 주님이 여러분의 머리가 하얗게 되고, 죽을 때가 다 되어서 “얘야. 내가 너에게 한 번 더 삶의 기회를 주겠다. 다시 태어나거라.”라고 말씀하신다면 다시 태어날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찬성표를 들어도 제가 주님께 말씀드릴 것입니다. “주님, 됐습니다. 한번 산 것으로 충분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봐. 이번에 더 좋은 부모님을 만나봐. 더 예쁜 자매를 만나고 영화와 같은 사랑을 해봐. 네가 하고 싶은 공부도 더 하고 더 유명한 사람이 되고, 그리고 한번 여행도 맘껏 해보고 부자도 되어봐.” 그러나 저는 그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고 해도 “다 괜찮습니다. 한번이면 충분합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느 청년하고 대화를 했습니다. “쟤들 부럽지 않니?” 너무 어린, 당시 19, 20살이었습니다. “아니요.” “왜 안 부럽니?” 힘이 있고 모든 남자들이 좋아하고 총미하고 진짜 어린 자매들이 지나가면 냄새도 다릅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들어가면 이상한 냄새가 납니다. “그렇지 않냐?” 싫다고 합니다. “왜?” “내가 왜 그 예쁜 얼굴 하나를 위해 죽을 것 같은 20대로 돌아갑니까?” “싫다.” 그 청년들이 그러니 나는 오죽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게 하는 것, 그렇게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일단 한번 자신이 힘든 인생을 산다고 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은 너무 가벼운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나만 부당하게 다루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비교의식이 생겨나고 나면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회심하기 전 불신앙이어도 한 가지 생각은 분명했습니다. ‘너무 행복하고 신나는 인생이라고 해도 남의 인생을 살다가 죽고 싶지는 않다. 눈물이 나고 피를 토해고 다 못가고 죽어버리더라도 내게 부여된 인생을 살고 싶다. 나의 삶의 주체가 되고 싶다.’ 그런데 그 주체를 그리스도 밖에서 찾았습니다. 이상한 것은 끊임없이 주체가 되려고 노력하고 노력할수록 삶에 있어서 무지무지한 ‘소외’를 경험했습니다. 나중에 신앙을 갖고 보니까 설명이 되었습니다. 한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자신 안에 참 자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께 돌아가고 난 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자기가 지속적으로 있을 때 그때 자신이 진정한 삶의 주체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에서 한 인간이 가장 훌륭하게 누구에 있어서도 노예가 되지 않고 자기의 삶의 완전한 주체가 된 표현이 나옵니다.
(찬양)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그 구절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게 바로 가장 완전한 자기 주체성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인간관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인간은 최고의 휴머니즘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이 창자에 이르기까지 가슴이 저미도록 성도들을 사랑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이 돈을 주셔서 그렇습니까? 직분을 주셔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를 사랑하게 만든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였습니다. 자기 죄를 대신해서 예수가 죽으셨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대속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사도바울로 하여금 할 말을 잃어버리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그런 사고가 안 나는데 예전에는 기차 건널목 사고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돈이 없으니까 기찻길이 따로 있고 도로가 넘어가야하는데 돈이 없어서 기차가 이리로 지나가고 차가 이리로 지나갔습니다. 어린아이가 딴 데 정신을 팔다가 기차가 오는 것을 모르고 기차 건널목으로 들어섰습니다. 건널목을 관리하던 관리사가 그 아이를 구하려고 뛰어들어서 그 아이를 밀쳐내고 자기는 무참하게 깔려서 죽었습니다. 그 사람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그 구출하려던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의 엄마가 왔습니다. 그리고 한 없이 울었습니다. 그 엄마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이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 아들이 죽는 게 더 좋았을텐데.’ 이러지는 않습니다. 죄 없는 그 관리요원이 죽었기 때문에 그 엄마는 죽은 남자의 부인, 부모님, 자식 앞에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를 죽인 것은 아니었고, 죽기를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아의 엄마는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이 자기 가정 때문에 죽었다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고, 그렇다면 만약 그것에 대한 부채의식을 떨쳐버릴 수가 있을까요? 떨쳐버릴 수 있다면 너무 철면피한 사람 아닙니까? 그게 바로 대속입니다. 그것 때문에 목회를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위증이라는 것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위증을 한다면 돌로 쳐 죽임을 당합니다. 오늘 TV에서 청문회를 하는 것을 보면 다 돌에 맞을 사람들입니다. 입을 열었다 하면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이란 것을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위증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십계명을 어긴 죄가 됩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위증이 불가능합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사도바울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다.’ 이러한 고백은 자신의 양심의 부끄러움이 없이 영혼을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목회는 -영혼을 돌보는 일은- 사람들이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한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자기와 그리스도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목회에서 겪는 모든 일들이 상처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를 통해서 자기가 떠받들어지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하는 목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창자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목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마지막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목양을 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예수의 심장이 있느냐, 예수의 창자가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정말 영혼들이 미끄러지고 주님을 멀리 떠날 때 그 창자가 원숭이처럼 끊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렇게 목회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이야기는 안 나오고 우셨다는 이야기는 3번이 나옵니다. 그리고 우는 자들을 위해 함께 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목회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모두 연약한 인간인데 어떻게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유지할 수 있을까.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런 사랑이 우리 안에서 자가발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님이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사랑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본국에 돌아가서 여기 청년들은 모두 한사람 앞에 50명 내지 100명씩 돌보는 목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 돌아가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게 목양의 사명을 배반하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사랑이 없습니다. 주님이 붙들고 계실 때만 주님의 사람이지 놓아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께 꼭 붙들려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