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 밝기 전에 하신 일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계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막 1:32-35)
녹취자 : 홍연주
물론 예수님의 공생애가 3년밖에는 안되기는 했지만 예수님의 생애는 거의 휴식이 없는 생애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오늘 성경에 보아도 예수님의 그와 같은 분투하는 노역의 연대기적인 삶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내어 쫓고 그리고 시몬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들려있는 것을 고치시고 숙소로 돌아오시니까 날이 저물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병자들이 귀신들린 사람들이 예수님 만나고 한번 고쳐보겠다고 숙소에 잔뜩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을 하나씩 하나씩 고쳐서 치료해주시고 아마 그 사역이 언제 끝났는지는 모르지만 깊은 밤에 끝나거나 아니면 새벽까지 계속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제 아마도 이튿날 새벽에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가신 장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의 일이긴 하지만 그것도 일인지라 열심히 하다보면 요령이 생기고 잘 하게 됩니다. 그게 일의 이치입니다. 그렇지만 종종 보면 못했던 때가 오히려 그리워지는 때도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 모두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교사 처음 해서 아이들에게 뭘 가르칠지 몰라서 열심히 준비는 했지만 떨리는 마음으로 아이들 앞에 서던 첫 번째 공과공부, 그리고 전도사 때 설교 한번 할 기회가 주어지면 온 일가친척 사돈에 팔촌까지 전화를 돌려서 나 수요예배 설교하니까 기도해달라던 기억이 날겁니다. 그때는 우리들이 잘 못하던 때입니다. 못하던 때지만 못하는 것을 자기가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던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잘 하는 사람이 할 수 없는 그 무엇을 하나님이 기도하던 때에 보충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번에 3일 동안 합신총회 교직자 수련회를 인도하고 왔습니다. 그래봐야 저녁 시간에 두 시간 정도씩 설교 한 것이 제 임무였지만 말씀을 전하면서도 깊이 마음속에 자각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마음을 담궈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이 없다면 얼마나 피상적인 것인가. 그래서 우리가 일 하면 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 하는 것만큼 항상 하나님을 그 크기만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우리 자신 이 깊이 잠기는 신령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아는바와 같이 오늘날은 점점 기도와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이 유행하고 있고 또 오히려 그렇게 간절히 매달리며 마음을 쏟는 그런 신앙생활 자체가 사실은 보편적인 신앙생활이 아닌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가 변하여 새 나무가 되어서 열매를 맺는 것과 그저 나무 자체가 변화되지 않고도 열매를 맺는 도덕적인 개선 사이의 구별들이 흐려지고 있죠. 이런 것 들은 하나님의 교회에 서서히 밀려오는 재앙의 그림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들을 이끄실 때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믿을 뿐만 아니라 치열하게 탐구하는 그런 지적인 노력도 현저히 부족하고 그 위에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갈망하는 부흥에 대한 몸부림도 현저히 사라진다면 마지막에 그 교회가 이 세상의 정신과 사주에 잠식당하는 것 말고 무슨 다른 길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목회와 선교적인 상황은 무엇인가 이 세상을 바꾸어 놓고 변화시켜서 도전하고 하는 그런 것 이라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렇게 흘러가는 사주 속에서 교회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관심의 초점이 가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그것이 살아남는 것이겠지만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교회의 생명이 과연 그런 것일 수 있을까요. 생명은 끊임없이 죽음에 항거하는 모든 기능입니다. 그런 설명할 수 없는 생명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새로운 시대가 되었으니 새로운 목회의 방법이 필요하고 우리가 목회하는 사람이 1세기의 교인들이 아닌 21세기의 현대인들이니 현대인들을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은 백번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을 변화시켜 죄인에서 의인으로, 부패한 인간에서 거룩한 성도로 변화시키고 인간의 삶의 동기를 세상에서 하나님으로 정화하는 거룩한 능력은 하나님의 영의 충만한 부어짐과 함께 일어나는데 이것은 인간이 만든 제도나 방법 기술 요령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식이나 경영의 지혜 같은 것 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닌 이 충만한 기름 부으심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갈망하는 한 사람의 영혼 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 높이 계시지만 이 땅에서 당신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의 중심을 하감하시고 통촉하십니다. 그래서 누가 어떠한 마음으로 얼마만큼 하나님을 추구하고 갈망하며 주님을 섬기는지를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 사람이 유능한 사람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일수도 있고 학식이 뛰어난 사람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인격이 고상하고 훌륭한 사람일 수도 있고 덜 다듬어지고 거친 사람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자연적인 조건보다는 한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당신을 향한 타오르는 열정, 그리고 당신을 향한 타오르는 마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영혼의 시선이 고정된 가운데 주님의 뜻이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마음. 그것이 가장 소중하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으셔서 능력이 모자라면 능력을 주시고, 돕는 사람들이 필요하면 돕는 손길들을 주셔서 자기의 일을 감당해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기도해야 할 필요가 없으셨지만 이것은 성육신의 겸손이 가져다준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하나님이셨지만 그 신성을 인성아래 감추시고 육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신성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린 자를 위해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지만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한 번도 그런 기적으로 당신의 떡이나 물을 공급 받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모든 기적의 능력과 하늘의 큰 권능이 종노릇하며 섬기는데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간절한 기도 속에서 죄는 없으시지만 연약한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지를 배우고 고난을 통해서 그 일을 익힘으로서 마음 깊이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버려 재물이 되시는 일의 의미를 더 깊이 터득하시는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마다 전망하는 바가 다르겠지만 아마 20년 후에 젊은 목회자들이 목회 할 때쯤 되면 아마 기도라고 하는 은혜의 수단 자체를 신학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오히려 아마 기도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신비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교회는 그런 기도의 열망을 채워지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는 오히려 극단적인 신비주의를 찾아가게 될 가능성이 참 많습니다. 이런 때에 목회자가 건전한 지성을 가지고 많이 기도함으로서 교인들에게 기도하는 사람의 안정감 그리고 삶의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평안을 기도 속에서 누리며 사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선교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날 하루 그렇게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음으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은 여러분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실천함으로서 그것들이 베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많이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리셔서 당신의 뜻 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기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