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신학함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녹취자: 백지영
I. 들어가는 말
아마 기독교 역사상 로마서만큼 교회에 영향을 많이 끼친 책이 흔치 않을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도 아이들의 동요소리를 들으며 펼쳐 읽은 로마서의 한 구절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이신칭의의 교리를 발견하고 종교개혁을 하게 된 것도 로마서를 연구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18세기의 전설적인 설교자 요한 웨슬레의 회심도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으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로마서는 위대한 변화를 교회에 가져왔고 지금도 우리가 이 로마서를 올바르게 연구한다면 같은 변화를 경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은 신학 함에 대한 오해가 만연한 시대입니다. 파편적인 지식이 총체적인 지혜를 대신하고 사상적 깊이대신 사역의 기술을 습득해서 세상과 같은 경영의 논리로 사역의 성공을 도모해 보려는 시대에는 더더욱 어떻게 신학 해야 할지 방향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17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는 자신의 이론실천신학이라는 책에서 이 신학을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결국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신학이고 우리의 신학 공부는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과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살게 하기 위한 지혜의 공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학의 중심은 ‘다트 엘로힘’, 소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신약에 넘어와서 기독론적인 전환을 거쳐 ‘그노시스투 크리스투스’, 즉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환치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핵심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에 대해 기록한 호세아 4장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이때의 ‘지식’, ‘다아트’는 곧 ‘다아트 엘로 힘’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 지식을 소유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속성의 시행방식에 대한 앎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소위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꾸비드’ 혹은 ‘꾸비디따스’에 대해서는 별로 큰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 털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설명은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 “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에흐야 아쉐르 아흐예’ 정도이고, 신약으로 넘어오면 요한복음 4장 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구절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성품 내지는 속성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소위 하나님의 ‘꾸발디따스’라고 하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증언이 성경 속에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인지는 우리들이 우리의 이성으로 알 수 없지만 그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과 관계 하면서 하나님의 다양한 무지갯빛과 같은 성품을 드러내시는데 그 성품에 대한 경험적 이해를 통해서 그 하나님의 속성이 나 자신과 인간의 삶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아는 지식의 깊이가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입니다. 그리고 이 지식의 깊이가 그의 삶의 깊이를 결정하고 그의 목회사역의 깊이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풍부하게 드러내어 보여주신 방법이 성경 속에서 흐르는 하나님의 구원행동, 즉 그 구원행동이 이어진 구속의 역사였습니다. 이것이 신약에 와서 소위 이야기하는 기독론적인 전환을 경험하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환치되는데 하나님의 모든 아름다운 속성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구원 사역을 통해서 우리 인간 세상에 계시되었다라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에 있어서 이 지성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 가지 만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누구든지 신학자가 되려면 누구든지 목회자가 되려면 누구든지 복음을 위해 헌신된 사람이 되려면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야 한다는 이 명제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에 관해서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신학을 위해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II. 복음, 세계 경륜의 중심
복음은 이 세계 경륜의 중심이고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육신으로는 참 사람이 되시기 위해서 다윗의 혈통으로 태어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을 받으셨다고 했는데, 이 성결의 영은 희랍어 성경에 의하면 곧 “거룩함의 영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즉 거룩함의 영인 동시에 곧 성령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성과 신성의 대조를 보여주고 결국 성령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입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남으로써 진정한 목회자가 될 수 있고 신학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III. 바울의 신학적 혼란
알다시피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유대지도자의 길을 걸어가던 전도양양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커다란 신학적인 혼란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혼란은 바로 역사적인 두 사건이 주는 모순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마가복음 15장 13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빌라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장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싫으면 죽여 버리라고 소리치면 그만일 텐데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방법까지 지정하여 요구했으니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이었습니다.
A. 십자가의 처형
원래 십자가 처형은 로마가 제국시대 때에 만든 것이 아니라 변방의 야만인이었을 때에 만든 인류가 고안해 낸 가장 야비한 사형제도였습니다. 가로 막대에 사람의 손에 못을 박고 그리고 줄로 엮어서 도르래 같은 것으로 끌어올려 이미 땅에 세워진 세로막대에 끼우는 방식으로 십자가는 조립이 되었고 올린 후에는 다리도 역시 커다란 대못으로 박아서 그를 나무에 고정시킨 채 서서히 죽게 하는 형벌이었습니다. 몸무게를 지탱하기 위해서 상당히 커다란 못을 박아야 했고 초창기에는 손바닥에 못을 박았지만 자꾸 찢어지면서 시체가 떨어졌기 때문에 그 다음서부터는 손목에다가 못을 박았다고 합니다. 손목에 못을 박을 때 십중팔구는 동맥을 건드리게 되어 있고 동맥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면서 이 죄수는 심한 갈증과 커다란 통증 그리고 출혈로 말미암아 지옥을 넘나드는 두통을 경험하여야 했습니다. 뜨거운 팔레스타인의 태양 볕 아래서 죄수들은 죽어갔고 십자가 형벌의 잔인함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최고의 고통을 겪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교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굳이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했을까요? 이것은 하나의 종교적인 음모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인자가 죽은 후에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고 하는 가르침이 있었고 그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가 죽은 다음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감추고 예수가 부활했다고 소문을 내면 나중의 혼란이 처음보다 훨씬 클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신명기 21장 23절의 율법을 따라서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율법 사상이 합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순한 정치적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죽은, 신의 저주를 받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각인시킴으로써 어떤 이후의 소문에도 동요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고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B. 부활사건
a. 저주의 죽음
그리고 종교지도자의 길을 가고 있는 사도 바울도 바로 그런 종교적인 설명에 깊은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스데반을 죽는 데 가편투표 하였고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메섹 가는 그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직접 뵈었고 그의 음성을 들었고 그분께 아뢰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커다란 혼란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남으로부터 들었을 때에는 부인할 수 있었는데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했기 때문에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죽은 것이 사실이라면 부활하여 살아났다는 이 사실이 거짓일 것이고, 부활해서 살아날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을 리가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b. 다시 살아남
여러분은 기억하시겠습니다만 구약에서 부활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에 올라간 이야기들은 종종 등장합니다. 창세기 5장 24절에 나오는 65세의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간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열왕기하 2장 11절에 나오는 엘리야가 병거를 타고 하나님께 올라간 것도 역시 그 하나님이 그를 부활체로 바꾸어 하늘나라로 올리신 사건이었고 이런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 각별힌 인정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주후 1세기에 기록된 위경인 모세의 승천기는 유대인들의 보편적인 모세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이 모세를 다시 살리시고 그를 부활시켰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IV.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러면 사도 바울의 혼란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그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하신 그 사람을 특별히 인정해서 다시 살리실 수 있을까? 살리셔야 할 분이라면 없고 저주하실 리가 없고 저주한 것이 사실이라면 사셨을 리가 없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커다란 혼란이 시작되었고 잠시 후 그의 어두운 영혼을 찢고 들어오는 커다란 회심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A. 회심과 십자가 깨달음
이 회심과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회심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는 사건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저주 받으신 것도 사실이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다시 살려낸바 되신 것도 사실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기의 죄 때문에 당한 죽음이 아니라 당신이 구원할 하나님의 사랑하는 인류를 위한 대신적인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오히려 그렇게 대신 인류를 위해 죽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어두운 지성을 찢고 하늘로부터 찬란한 광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 바울의 소명과 신학, 기독론과 구원론, 세계 그리고 창조론과 신론 종말론 이 모든 신학적 시야를 열어주는 위대한 종자 씨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예전에 220볼트와 110볼트의 전압을 함께 공용으로 쓰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110볼트의 전압이 흐르는 곳에 220볼트용 전구를 사다 끼우면 백 촉광짜리를 사다 끼웠는데도 아주 희미해서 5와트도 안 나올 정도의 희미한 빛입니다. 그런 전구가 여기에 2000개쯤 끼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아마 성경을 읽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에 이 건물 전체의 전압이 110볼트에서 220볼트로 승압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에 20만 촉광의 찬란한 빛이 떨어집니다. 그러한 지성의 놀라운 변화가 다메섹 사건에서 일어난 것이고 여기서 그는 세계와 이스라엘의 역사와 교회와 자기의 인생과 인류의 미래를 볼 수 있는 관점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경험을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그의 옥탑에서 경험했습니다. 비텐베르그에서의 그의 경험을 가장 상세하고 아름답게 묘사한 책은 여러 권이 있습니다만 그중에서 롤란드 베인톤(Roland H. Bainton)의 마르틴 루터의 생애라는 책이 가장 탁월합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어두운 하늘이 찢어지고 찬란한 복음의 빛이 내 마음에 비추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영광과 천국의 아름다움이 찬란하게 비쳤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도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에 깊이 붙들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체험을 통한 신적인 강제력을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사도 바울도 마틴 루터도 이 복음을 전하고 이 복음대로 살지 않으면 안 될 종교적인 숙명을 느꼈고 그 질서에 의해서 그의 모든 세상에 대한 관점과 학문과 인생에 대한 모든 견해는 재편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보름스 의회에 서서 종교개혁에 관한 견해를 철회하라고 요구하였을 때 남긴 유명한 말, “힐스 데 이히 이히 칸 니흐트 안들스”,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달리는 내가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그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기억하십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와 부활의 의미에 대한 체험으로부터 이렇게 자기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나오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목회의 시작은 건물이나 훌륭하게 높은 사람의 추천서나 기도 많이 해 주는 장인 장모님의 후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는 외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어떤 진리가 내 안에서 불타오르는 것으로서 목회사역은 시작되는 것이고 교회의 가장 큰 불행은 그렇게 외칠 것이 없는 사람이 이 자리에 매주 서는 것이 교회의 불행입니다.
B. 새로운 자원을 소유함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체험함으로써 사도 바울은 새로운 자원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볼 수 있는 지혜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깨닫게 되었고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자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거룩한 성령의 은혜가 그에게 임하였던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 파괴되고 생명과 성령의 법이 심겨졌으며 자기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죽으면 죽을수록 2000년 전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내 안에 실제화 되어서 내 안에 있는 죄와 하나님을 향한 반역을 파괴하고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재현되는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성령의 생명을 따라서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삶이었던 것입니다.
V. 적용과 결론
오늘 올라오다가 한 교수님 말씀 들으니까 학생들이 공부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고 밤늦게까지 리포트를 쓴다고 하는데 리포트를 쓰는 것이 꼭 공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해야 합니다. 더욱이 내가 학교 다닐 때는 학생들이 책을 읽지도 않고 기숙사에서 200여 페이지를 점프하면서 베껴내고 있는 그 속전속결의 리포트 작성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여러분은 학교에서 공부를 많이 시킨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상식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상의 공부에 헌신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느 정도 공부해야 되느냐에 대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여기 와서 말했습니다마는 나의 경험에 의하면 7년 정도 그리고 건강한 사람이 생명을 위협을 느낄 정도까지. 이렇게 나의 이야기에 웃고 있는 사람은 아직 그 경지에 들어가 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까지 공부에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지식이 있다고 해서 진실해 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없이 진실해 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교회의 가장 큰 재앙은 가르칠 내용이 없는 목사가 가운을 입고 매 주일 예배당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공부를 해야 합니다. 치열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덜 자고 덜 놀고 덜 먹고 덜 쉬어야 합니다. 몇 해 전에 여기 와서 그 이야기를 하면서 저의 간증을 자극 삼아서 했습니다. 신대원 다닐 때 제 기록이 22시간을 책상에 앉아서 에세이를 쓴 것이었습니다. 책상 아래 오강 놓고 책상 위에 물 한 통과 땅 한 덩어리를 놓고 정확하게 22시간 만에 에세이를 끝내고 일어섰습니다. 두 번째 기록은 똑같이 해 놓고 앉은 자리에서 히브리 성경을 17시간을 읽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고 갔더니 그날 여러분 보다는 훨씬 마음이 덜 강퍅한 사람들이 모였었기 때문에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도전을 하고 그것을 따라 하다가 몇 사람이 병원에 실려 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그랬답니다.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처음 했으니까 몸이 놀래서 병원에 실려 갔지 그냥 계속 하면 됩니다. 그랬더니 어떤 학생이 묻습니다. 목사님도 공부하다가 쓰러져 보셨습니까? many times, 여러 번. 그때 공부를 열심히 해서라기보다는 너무 가난해서 먹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교수실 조교였는데 한 일곱 여덟 시간씩 공부하고 일어나면 바닥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여러 번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했습니다. 공부하면서 죽으면 순교다. 아주 확실하게 순교다. 그리고 만약에 준비하다가 죽는 것이 나의 인생의 분깃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준비하다가 죽자.
여러분 절대 옆에 있는 친구들을 보면서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아주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비교하지 말고 눈을 높이 들어서 세계의 유수한 신학교의 학생들과 비교하십시오. 경쟁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도 겨우 평균밖에 안 됩니다. 나중에는.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여기 올 때마다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목숨을 다해 공부하라.” 어쩌면 그렇게 무지한 설교가 강단에서 선포되고 있고 무책임한 설교들이 이루어지고 있느냐 말입니다. 공부를 안 했으니까 아예 이 강단 자체를 설교단이요 신학을 선포하는 강단이 아니라 혜민 스님의 힐링캠프 같은 곳으로 만들고 있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일생의 설교는 자신이 하나님을 만난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그것을 사상을 선포하다가 죽는 것이 바로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시련도 있고 괴로운 일도 있을 것입니다. 학교에 들어오면 항상 눈물이 납니다. 나는 다시 이 학교 다니고 싶지 않습니다. 다니는 동안에 너무 고생을 했기 때문에 추억은 아름답지만 재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온 마음을 다해서 여기 머무는 동안 공부해야 합니다. 리포트 쓰느라고 새벽 1시까지 쓴다는 것 가지고 자랑하면 안 됩니다. 우리 학교가 전국에서 제일 숙제가 많은 신학교입니다. 그것 명예 아닙니다. 그 이상을 해야 됩니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공부를 철저히 하고 그 이외에 평생의 신학 공부에 대한 거대한 프레임을 가지고 저기 어학부터 시작을 해서 인문학과 역사 철학 문학 과학부터 시작을 해서 의학과 천문학과 이 모든 것들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 많은 사람에게 철학자들이 보여 주다가 실패한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전파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친구를 사귀어도 공부를 하지 않는 학생들과는 사귀지 마십시오. 그냥 격려하는 의미에서 가끔 놀아주십시오. 그리고 무엇을 해도 가서 배울만한 학생들하고 교제를 하면서 무엇인가라도 하나 더 자극을 받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많이 만나는 사람은 무엇인가 신학을 가지고 고민하고 아파하면서 학문을 추구하는 사람과 교제를 가지려고 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학교 도서관에도 가끔 있었습니다마는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나오고 또 목회하면서 연구실에서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신학적인 문제로 씨름을 하고 혹은 책을 쓰고 나오면 밤하늘의 별들이 빛납니다. 날씨 좋은 청명한 날은 여기 공기가 좋으니까. 그러면 어제보다 내 지성의 키가 한 뼘 커진 것이 느껴지고 일 년 전에 나를 향해서 정중하게 충고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성숙이 매일 매일 경험되면서 그것이 수십 년이 쌓여서 설교자다운 설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가끔 나한테 이메일을 보내서 신학 공부하는데 자료 좀 보내달라고 하는데, 그게 뭡니까? 도사가 될 사람이 그런 것을 물어보면 안 됩니다. 항상 답장을 씁니다. “너 자신을 알라.”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해서 한 학기에 자기 키 만큼의 책을 읽어내야 합니다. 리포트 쓰느라고 날아가면서 베낀 것 말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한 가지가 없으면 그 지식은 쓸모가 없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을 깊이, 아주 깊이 만나야 합니다. 나만의 느낌은 아니겠지만 설교는 오래 들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10분만 들어보면 저 설교자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인지 아니면 그저 그런 사람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공부는 이성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면 다 할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것은 그런 지성의 깊이와 관련이 적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삶의 모든 방면에서 진실해 지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살려고 하는 진지한 고민과 몸부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시로 마음을 모두 모아서 주님께 쏟으며 주님을 알기를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찬양)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제가 신뢰하지 않는 교역자들이 있습니다. 참된 예배자였던 적이 없는 예배인도자, 훌륭한 청중이었던 적이 없는 열려한 설교자, 기도자였던 적이 없는 통성기도 인도자, 당회의 치리에 복종해 본 적이 없는 당회장, 이런 것들은 모두 자기가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직업적으로 해야 돼서 그냥 하는 일일 뿐입니다. 그러한 것은 바로 주님을 얼마나 깊이 만났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학우들이 모두 잠든 밤에 고요히 홀로 채플 실에 돌아 올라와서 흐느끼면서 오랜 시간동안 하나님 앞에 그 중심을 토하는 것, 알아주는 사람 없고 그리고 기억해 주는 사람 없어도 종강을 하면 표표히 짐 하나 싸들고 삼일 씩 일주일씩 기도하러 한적한 기도원으로 떠나는 마음, 그리고 모두 들 먹고 마시고 즐거워 는 때에 교회 안팎의 가슴 아픈 일들을 끌어안고 그것이 모두 자신의 죄인 것처럼 아파하며 어느 산 속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비는 마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몸부림입니다. 이런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신학 공부는 항상 눈물에 젖은 신학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매순간 세상에 대한 자랑과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이 좋아서 그 길을 가신 것이 아니라 당신도 아프셨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신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끊임없이 가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