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201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4년 5월 4일-6월 29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4년 8월 8일
목 차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1 (2014.5.4 주일오전)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2 (2014.5.11 주일오전)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3 (2014.5.18 주일오전)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4 (2014.5.25 주일오전)
1. 네 자녀를 낙심케 말라(골 3:21) 2014.5.4 주일오전 1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5 (2014.6.8 주일오전)
2.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골 3:20) 2014.5.11 주일오전 11
3. 아내와 남편(1)(골 3:18) 2014.5.18 주일오전 28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6 (2014.6.22 주일오전)
4. 아내와 남편(2)(골 3:19) 2014.5.24 주일오전 40
5. 아내와 남편(3)(골 3:19) 2014.6.8 주일오전 50
6. 이혼을 생각하십니까?(마 19:3-6) 2014.6.22 주일오전 60
7. 네 가족을 돌아보라(딤전 5:8) 2014.6.29 주일오전 69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2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1 (2014.5.4 주일오전)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2 (2014.5.11 주일오전)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3 (2014.5.18 주일오전)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4 (2014.5.25 주일오전)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5 (2014.6.8 주일오전)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6 (2014.6.22 주일오전)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7 (2014.6.29 주일오전)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1) 2014. 05. 04 주일오전
< 네 자녀를 낙심케 말라 >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 (골 3:21)
I. 본문해설
- 위대한 기독론을 담고 있음
- 로마의 1차 투옥기간. 62년경 기록
- 영지주의 반박: 우주적 기독론임
- 주의 형상, 교회 머리이신 예수님
- 교회와 신자의 삶에서 예수 중심성
- 모든 삶을 주님께 하듯 함으로 구원의 우주적 목적을
이루게 하심
II. 가정의 질서를 세우심
A. 가족 구성원들의 덕목
- 아내⇒남편: 복종(주 안에서 함)
- 남편⇒아내: 사랑(급부가 아님)
- 자녀⇒부모: 공경(가치가 아님)
- 아비⇒자녀: 노엽게 하지 않음
B. 가정을 주신 경륜
- 참 사람이 되게 하심: 하나님 형상
1. 바르게 알게 하시려고
- 하나님, 인간, 세계에 대한 지식
- 믿음과 이성 필요: 성경+학문
2. 참되게 살게 하시려고
-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려고
- 키케로 "의무론": 기술과 덕
- 기술은 삶의 수단이지 목표 아님
- 진정한 삶은 "사람됨"과 일치함
III. 네 자녀를 낙심케 말라
A. 낙심하는 자녀들
- "낙심하다" a(부정)+adumosin(열정갖다)
- 의미 "절망하다, 정신없어지다"
- 완전한 자기 기대를 투사함으로써
- 사랑 없는 집착과 미움으로 발전함
a. 폭력과 폭언
b. 방치와 무관심
c. 그릇된 모본
- 부모와의 인격적 관계를 상실함
B. 자녀를 노엽게 말라
- "노엽게 하다" erethizete 화나게 하다, 격노케 하다
- 마음의 비이성적 야수성을 일깨움
- 지성 따르지 않는 의지로 분노에 쉽게 굴복(본성화됨)
IV. 사랑으로 양육하라
- 부모는 마땅히 철학자가 되어야 함
- 어떤 삶+사람 될지에 대한 견해임
- 하나님, 이웃, 자연, 자신과 관계
- 인문학 열풍의 두 얼굴: 긍정+부정
- "아비들아": 그럴 위험이 비교적 아비에 있음(어미도)
-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라
- 편견과 인습 강요치 않음: 분재
- 말씀 안에 한없는 자유와 사랑을‥
V. 적용과 결론
- 네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라
-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심같이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2) 2014. 05. 11주일오전
<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골 3:20)
I. 본문해설
- 우주적인 기독론을 담고 있는 책임
- 창조된 세상의 완성과 신자의 생활
- 하나님이 세우신 신적 기관인 가정
- 부모에 대한 자녀들의 덕목을 다룸
II. 부부, 부모와 자식
A. 부부: 가정의 기본단위
- 대등한 사랑과 생육의 질서
B. 부모와 자식: 인류의 보존방식
- 일방적 사랑과 보존의 질서
- 부모에 악한 자도, 자식에게 선함
- 부모공경: 후천적, 자식사랑: 본성적
III. 부모 공경의 표현: 들음
- 가정 통해 신지식 보존하고 전수함
A. 자녀들을 부르심
- ta tekna: 자녀, 자식, 새끼 tikto
- 인성 형성기의 얘들+모든 자녀들
- 주 경외하며 지혜인 아는 부모 전제
B. 부모에게 순종함
- hypakuete: "under"+"listen"
- 낮은 자세로 배움: 초월적 진리+가치 배움
- 국가+스승+친구+부모: 인간성숙
- 타락 이후에도 이런 질서 흔적남음
- 선과 악, 인간의 도리, 선한 습관을 배움
IV. 부모와의 관계
A. 사랑과 공경
- "네 부모를 공경하라" yareh 경외
- 부모와의 깨어진 관계: 인성파괴
- 자녀와의 관계를 바르게 하지 못함
- 참자녀된 사람이 참부모의 역할 함
B. 상처와 용서
- 최고의 기대: 배우자+부모+자식
- 폭력/폭언, 배신/실망, 그릇됨
- 아무도 알 수 없는 상처 속에 고통 줌
- 사과와 고백 없는 부모들을 용서함
- 자식 대한 부모의 보이지 않는 사랑
- 들어난 것 전부× 있는 것 다 표현×
- 미움 속에서 삶: 용서보다 어려움
V. 적용과 결론
- 부모 자식 간 상처와 고통의 대물림
- 마음에 맺힌 것 풀어야 영혼이 산다
-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
- 순종함과 배움⇒사랑과 관계회복
- 빛 가운데 행복한 가족으로 살아감
- 관계의 고침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 상처를 능가하는 사랑으로 돌아감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3) 2014. 05. 18 주일오전
< 아내와 남편(1) >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 (골 3:18)
I. 본문해설
- 가정에 주는 권면 중 첫 번째 교훈
-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닌 주의 명령
- 이하의 가족관계 질서의 기초임
II. 아내와 남편의 관계
A. 남자와 여자를 만드심
- 흙으로 사람을 만드심(창2:7)
- "흙"(육체)+"생기"(영혼)
- 육체의 필요와 영혼의 필요를 가짐
B. 서로의 필요를 채워줌
- 남녀를 서로 다른 개체로 창조하심
-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신앙요구
- 다름이 온전함의 원인 ⇒ 갈등이 됨
- 타락한 인간사랑: 발산 아닌 흡수
III. 남편에 대한 아내의 덕목
- "복종하라" (hypotasesthe)
- "hypo"(under)+"tasso" 배치, 정리, 결정하다
A. “복종한다”는 의미
- 아담의 타락 후 무너진 가정의 질서
- 무질서 속에 양산된 불신앙과 반역
1. 여기서 상정하는 남편
- 하나님 경외하고 교회 사랑한 성도
- 인간의 힘의 우위로 세워지는 질서
- 폭압과 강제 아닌 존엄과 가치 인정
2. 사랑의 결합과 질서
- 개별적으로 창조된 두 사람의 결합
- 결합의 본질은 사랑임: 육체+영혼
- 서로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읽음
- 사랑이 그러한 인식을 가능하게 함
- 인간 존엄가치 존중 않는 사상 거부
- 인격적 존중과 신적 질서 따른 복종
B. 하나님 사랑으로 복종함
-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보다 앞섬
1. 깨진 가정 회복의 길: 질서+사랑
- 사랑 없는 질서의 강요: 인성파괴
- 신적 질서의 존중: 사랑의 통로임
- 까리따스만이 신적 질서 기뻐함
2. 남편에게 복종함
- 노예적 복종과 인간적 아부 아님
- 복종은 사랑에 대한 보상이 아님
- 신적질서와 사랑 아는데서 출발
- 남편에 복종하게 하는 은혜 필요
- 낮은 자리에 자신을 두는 질서임
- 신적질서에 확고히 선 아내 필요
- 남편의 소명: 개척과 도전, 모험
- 사랑 안에서 존중하고 복종하라
IV. 적용과 결론
-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19)
-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기 때문‥"
- "aneken" 적합, 꼭 맞음, 어울림
- 세상정신과 성경정신 사이에서
- 가정통해 하나님 안의 행복 보임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4) 2014. 05. 25 주일오전
< 아내와 남편(2) >
- 아내를 사랑하라 -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 (골 3:19)
I. 본문해설
- 그리스도와 세계의 완성 위한 계획
- 가정의 질서 회복을 위한 부부 관계
- 남편과 아내의 관계: 질서와 사랑
- 둘만 사는 것이 아님: 자녀와 사회
- 로마시대 사회 고려: 복종과 사랑
II. 아내에 대한 남편의 덕목 1: 사랑함
- 사랑하라 (agapete)
A. 로마사회와 아내
- 당시 로마사회에서는 충격적 명령
- 에로스+필리아+스톨게+아가페
- 당시 아내는 아가페의 대상이 아님
- 얕잡아봄, 위협, 강박으로 다스림
- 그런 질서 부정: 복종과 순종-설명
B. 사랑: 성향과 행위
- 본질적 측면: 영혼의 경향성-감정
- 현상적 측면: 인간의 관계성-이성
- 인의예지신 vs 희노애락수오욕
- 되니까 하는 사랑과 해야 하는 사랑
C. 아가페와 까리따스
- 사랑의 원천, 하나님: 회귀적 사랑
- 하나님께 받은 사랑 없이 줄 수 없음
- 온 인류를 한 사랑으로 묶음: 가족
- 인류 찢어짐과 사랑의 회복: 부부
-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엡 5:25)
- 누구도 충분히 사랑했다고 말 못함
- 자신을 주심: 정결-거룩-무흠 (티, 주름×)
- 구속의 희생⇒돌보심⇒온전케함
- 완전한 성자 아니기에 사랑이 힘듦
- 사랑의 과정 통해 신적 의존을 배움
- 그 사랑 실천 통해 하나님 사랑 받음
- 사랑하기 힘들 때: 선물과 복수
III. 적용과 결론
- 인류를 창조 목적으로 돌아가게 함
- 그 시작을 부부에게서 봄⇒교회로
- 사람의 완성은 사랑의 완성에 있음
-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사랑 필요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5) 2014. 06. 08 주일오전
< 아내와 남편(3) >
-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 -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 (골 3:19)
I. 본문해설
- 세계 목적 완성의 기초: 그리스도의 구속
- 구속 목적이 가정을 통해 완성 되어감
- 가정과 인류의 확산: 질서+사랑
- 남편의 첫째 덕목: 아내를 사랑함
- 남편의 둘째 덕목: 괴롭게 하지 않음
II. 아내에 대한 남편의 덕목 2: 괴롭게 하지 않음
- 괴롭게 하지말라(pikrainesthe)
- 사랑의 소극적 측면을 가리킴
- 괴롭힘, 격분하게 함, 쓰라림, 씀
A. 일반적 고난이 아님
- 세상과 인간의 불완전: 고난이 있음
- 남녀의 결합과 일반적 고난의 가능성
- 이것은 남편의 포악함으로 인한 고난이 아님
B. 하나님 뜻 따름이 아님
- 하나님 뜻에 순종할 때: 고난이 있음
- 이것은 남편이 사과해야 할 고난이 아님
- 예화: 아내 길 들이는 법 “공상과학소설 코너는 저쪽...”
- 아내 성질에 죽어사는 행복을 간증하는 남편들
- 예화: 좋은 금슬 “큰 일은 남편이, 사소한 일은 아내가”
- 아내 억눌러 복종시킴: 관계의 파괴를 가져옴
- 진리조차도 그런 식으로 역사하지 않음
- 하나님 뜻이라는 이름 아래 폭력을 정당화 하지 말라
- 예화: "목회의 소명과 아내의 불순종"
- 신자의 다른 소명: 하나님의 영광
- 예화: 아내의 기질을 운명으로 알라:
“아내 사진 늘 품은 남자”
- 결과 뿐 아니라 과정도 주를 섬김임
C. 사랑 없음에서 나옴
- 아내 괴롭힘 원인: 자기 결함+사랑 없음
- 사랑은 자기 실존에 대해 용서를 빎
- 결함을 앎: "sorry for what I am"
- 사랑못함: 아내결점이 아닌 자기결함을 보라
- 부부관계의 파괴: 자기 결함+사랑 없음
- 상대 결점에서 부부로 맺어진 소명 발견
- 자기 부족에서 소명 방해 요인을 찾음
- 사랑할수록 불완전한 인간임을 자각함
- 자신을 위한 하나님 은혜를 구하게 됨
- 믿음으로 살면 아내의 호의와 결함 모두 은혜 수단
- 아내의 나쁜 점도 선하게 사용하심
III. 적용과 결론
1. 아내가 “연약한 그릇”임을 기억하라
2. 아내를 자기 뜻에 맞게 빚으려 하지 말라
- 하나님의 형상을 대함: 존중+사랑
- 진리보다 자기 뜻 추구: 자기이익
- 분노로 억압함: 권력과 관계의 파괴
- 지식+동거+생명의 은혜(벧전 3:7)
3. 아내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말라
- 생명의 은혜, 기도의 은혜를 유지함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6) 2014. 06. 22 주일오전
< 이혼을 생각하십니까? >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마 19:3~6)
I. 본문해설
-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함
- 말의 모순을 트집 잡아 도전함
- "어떤 이유"+"아내 버림"
- 혼인의 본래 정신을 말씀하심
II. 사람을 지으심
A. 세계와 사회의 계획
- 한 사람을 지으셨으니 과정임
- "좋았더라": 세계와 인류의 구별
- 자연 세계+인류 세계에 대한 계획
- 남녀로 만드심: 신적 성품의 분광
- 치밀하고 복잡한 사랑과 질서의 망
B. 혼인의 원리
- 세 차원의 결합: 육체/정신/영혼
- 이혼이 허락되는 유일한 경우
III. 이혼, 관계들의 파괴
A. 하나님과의 관계
- "이혼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 누구의 허물이 더 큰지가 문제아님
- 부부 관계 파괴+정신적 관계 파괴
B. 자녀들과의 관계
- 부부는 이혼으로써 남남이 된다
- 누구도 개인의 행복 짓밟을 수 없다
- 결혼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임
- 아이들의 상처: 김⇒이⇒박씨로!
- 사랑은 함께 있어주는 것 관계지킴
C. 자신과의 관계
-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 이혼 이해함
- 희망 있을 수 있고 또 바라며 살아감
- 은혜 있어도 사라지지 않고 남는 것
- 과연 그리 헤어진 자들이 가족인가
IV. 결혼의 십자가를 지고
- 사랑으로 고난을 이기라
A. 은혜가 필요함
- 용서와 인내를 위해 은혜가 필요함
- 아프지 않은 관계가 어디 있는가?
- 만난 자가 아닌 만남 주신 분 생각함
- 그리 온전치 않기에 나를 배우자로
B. 은혜로써 이김
- 이혼을 생각하기까지 무수한 고민
- 번민과 시련의 시간들 속에 아파함
- 하나님의 섭리 실수와 패배가 없음
- 단, 믿음과 은혜 안에서 순종할 때
- 허무한 인생 잠시 사라질 것 연연×
V.적용과 결론
-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 어느 순간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심
- 비록 그 길 몰라도 사랑하며 살아감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7) 2014. 06. 29 주일오전
< 네 가족을 돌아보라 >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딤전 5:8)
I. 본문해설
- 바울이 62년경 로마 출옥 후 기록함
- 목회자에게 준 권고: 교회의 질서와 생활
- 성도의 생활지도지침 중 가정생활
II. 가족이란 무엇인가
A.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
- 국가는 소극적 허락으로 세워짐
- 가정과 교회는 원래 하나였음
- 교회: 사랑+국가: 정의+가정: 조화⇒인간으로 삶
B. 인간됨과 삶을 배움
- 참된 인간의 행복: 참 인간 되는 것
- 타락과 함께 깨어진 질서의 파괴성
- 창조 질서의 희미한 흔적을 따라 삶
- 대물리는 인생의 불행은 가정에서
- 특히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법 배움
III. 가족을 돌아보라
- pronoeo "예견, 미리 준비, 공급~"
A. 영혼의 형편을 돌아봄
- 곤고한 상태를 확인하라
- 관계를 돈독히 하도록 노력하라
- 그의 말을 경청해주라
B. 물질적 형편을 돌아봄
- 궁핍할 때 나눔이 마음을 연다
- 불편을 기쁨으로 감수하라
- 동정과 자선이 아닌 사랑으로 하라
C. 매일 기도하라
- 기도함으로써 가족관계 신앙화함
- 기도는 내적사랑을 불러일으킨다
IV. 적용과 결론
- 예수의 향기와 편지로 우리 부르심
- 용서하고 사랑할 힘은 하늘로부터
-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섬긴 것처럼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2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1 (2014.5.4 주일오전)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2 (2014.5.11 주일오전)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3 (2014.5.18 주일오전)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4 (2014.5.25 주일오전)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5 (2014.6.8 주일오전)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6 (2014.6.22 주일오전)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7 (2014.6.29 주일오전)
네 자녀를 낙심케 말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 3:2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 골로새서는 성경 66권 가운데 가장 위대한 기독론을 담고 있는 서신입니다. 아마도 이 서신은 사도바울이 로마에 1차로 투옥되었던 62년경에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쓴 편지로 이해됩니다. 당시에 일어나고 있었던 영지주의라는 이단을 반박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창조와 우주의 중심이시고, 그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이 구원받은 교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교회의 머리가 되셨고, 그리고 교회와 신자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중심이 되셔야 하는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이 우주적인 기독론으로 시작되는 서신서는 마지막에 와서 신자의 세세한 삶에 대한 충고로 끝납니다. 즉, 신자의 모든 삶이 주께 하듯 하는 삶이 될 때에 우리의 작은 모든 삶이 엮어져서 이 하나님의 구원의 우주적인 성취에 이바지하게 된다는 것을 거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II. 가정의 질서를 세우심
A. 가족 구성원들의 덕목
그러면서 주께 하듯 하라는 이 명령을 이제 가정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가정의 질서를 올바르게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 보면 이제 가족 구성원들의 덕목들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아내가 남편에게 보여야 할 덕목은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노예적인 복종이 아닌 인격적인 복종이고, 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특별히 맹목적인 복종과는 구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남편의 아내에 대한 덕목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덕목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기 때문에 비로소 베푸는 시어적인 혜택으로서의 사랑이 아닌 인격적인 관계에서 나오는 참 사랑이라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또한 자녀가 부모에게 대한 덕목은 공경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부모의 사회적인 지위나 재산, 그리고 심지어는 인격의 높고 낮음에 의해서 좌우되는 그런 종류의 공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가정의 질서를 따르는 공경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하는 아비의 자녀에 대한 덕목이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저희가 낙심할까 함이라”고 말합니다. “아비들아”라고 말한 것은 아비들만 자녀를 노엽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어미도 아비도 모두 그런 일을 할 수 있지만 특별히 이럴 위험성이 많은 사람이 아비들이라는 점에서 사실은 아비들이라고 거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부모가 모두 귀 기울여 들여야 할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B. 가정을 주신 경륜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경륜을 생각해 봅시다. 처음 사람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산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그와 동등한 여성을 창조하시는 것이었는데 다시 흙으로 빚어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남자의 갈비뼈 하나를 떼어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이후로부터는 다시는 흙으로 사람을 만들거나 갈비뼈를 떼어서 또 다른 사람을 만들지 아니하시고 남녀의 결합을 통한 생식으로 사람이 생산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계속해서 추적해 올라가면 결국은 인류는 한 몸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온 세계를 살과 피로 하나로 만든 것은 모든 인류가 서로를 향해 온전한 자신의 몸인 것처럼 서로 사랑하며 사는 세계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이러한 경륜으로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었을 때에 처음 결혼식에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이 나온 것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만 있어야 할 고백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이 고백을 하며 한 몸의 사랑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인간은 범죄했고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때서부터는 이제 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죄에 오염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런 온전한 사랑을 간직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이런 불후의 아름다운 고백을 남긴 아담과 하와가 바로 그 뒤에 나오는 3장에서 결혼 생활이 파경에 이른 것을 보게 됩니다. 서로 싸운 것이 아니라 각자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더니 인간과의 관계도 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깨어짐은 결국 사랑의 결핍과 미움, 시기 등으로 나타났고 그 후에 태어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은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기관은 가정과 교회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인간이 타락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사후에 세우신 제도이지만 가족은 타락하기 전에도 타락한 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으로 남아있습니다. 국가는 하나님이 마지못해서 허락하신 기관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가정과 교회, 이 두 기관만이 하나님께 직접 신적인 기원을 둔 기관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이렇게 사람을 가정을 두셔서 가정에서 태어나고 가정에서 양육되게 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커다란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참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미 죄에 오염이 되어서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는 망가진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께 본래적으로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유지하게 하기 위해서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셨고, 타락한 다음에는 가정이 이 일을 다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온전한 가정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온전한 교회가 될 수 없고, 온전한 교회의 도움이 없이는 온전한 가정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 인간의 인생은 이 하나님의 교회와 가정과 어떻게 올바른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좌우되고 이웃과의 관계도 좌우되고 자신과의 관계도 좌우되고 이 관계에 의해서 인간의 행복과 불행이 규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참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가정을 주셨는데 이것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바르게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것입니다. 즉,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그 부모의 한없는 사랑과 돌봄을 받으면서 그 부모로부터 하나님과 인간, 세계와 자신에 대한 지식을 터득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부모의 한없는 사랑을 받으며 아이는 엄마의 얼굴을 보면서 선악을 배우고 아빠의 얼굴을 보면서 사랑과 정의를 배웁니다. 그리고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고 또 인간이 누구인지를 배우고 또 이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를 터득하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자각해 가는 모든 일들이 일어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아이를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이 이렇게 눈에 보이는 사물들의 경우에는 이성으로 지식을 전달해 줄 수 있지만 하나님, 천사, 인간의 영혼, 전능한 하나님의 천지창조, 그리스도의 구속,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예수님, 장래의 심판, 부활, 하늘나라의 영광, 이런 것들은 이성적인 지식으로 가르쳐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초월적인 진리들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지식의 수단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 혹은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들은 부모로부터 잘 물려받은 신앙으로 지식을 획득하고 또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세계에 대해서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학문적인 지식으로 습득을 해서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과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을 함양해 가도록 하나님이 가정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 믿음은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믿음이고 이성의 활동은 이미 인류가 찾은 그 지식들을 습득하는 이성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부모가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준비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이 모든 자신에 대해서 올바른 지식을 갖고 이 지식을 얻기 위해서 온전한 믿음과 그리고 이성적인 지식을 함양하는 것이 부모가 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격 조건인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런 하나님과 인간과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이 무지몽매한 채로 시집가고 장가가서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태어나자마자 그 아이는 매우 커다란 인생의 짐을 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참 행복을 좌우할 수 있는 네 가지 대상에 대한 지식을 거의 올바르게 가르쳐줄 수 없는 부모의 슬하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수많은 오류와 편견, 무지와 그 모든 억견들을 극복하고 이제 진리의 도움으로 이 네 대상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습득해 가야 하는데 그가 진정으로 그 지식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또 하나의 경륜은 참되게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것입니다. 올바로 아는 지식과 함께 올바르게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시기 위해서 가정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선과 악에 눈을 뜨고 부모들을 통하여 공경 받으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그러면서 그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 되고, 그 하나님 앞에서 사는 부모의 삶의 방식을 보며 인간이 마땅히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아야 할지 아이들이 어렸을 적부터 터득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은 가정에서 아이가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부모가 만약에 하나님을 모르고 인간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부모라고 한다면 이 아이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무거운 노예의 멍에를 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삶에 대한 올바르지 않은 견해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를 가르쳐 주지 않는 부모 밑에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통을 겪으면서 스스로 그것을 깨우쳐 가야 되는데 그가 진정으로 깨우침에 도달하게 될지 못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올바른 지식과 올바른 삶의 방식을 터득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키케로라고 하는 로마의 사상가는 그 자신의 유명한 책 ‘의무론’에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기술은 사물을 사용하여 인간의 몸을 이롭게 하는 것이고 덕은 자신을 사용하여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요새 건강을 위해서 제가 열심히 걷고 있고 어제도 아마 13km 정도를 걸었습니다. 아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끊임없이 인사를 하면서 길을 걷습니다. 모른 척하고 가도 될 텐데 교회에서는 예의 안 바르신 분들이 산책길에서는 어떻게 예의 바르신지 달려와서 인사를 하십니다. 그런데 그 밤공기를 마시면서 부지런히 걷는 것은 참 좋은데 방해꾼들이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달립니다. 따르릉, 따르릉 그러면서 비켜달라고 달립니다. 큰 길로 다니지 그러고는 막 달려갑니다. 조금 있으면 산에 올라갔다가 그 자전거들은 쏜살같이 내려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나는 그냥 다리로 걷고 그들은 기술이 동원되어서 만든 자전거를 타기 때문입니다. 고무와 쇠, 철사, 전구, 플라스틱, 이러한 물건들을 사용해서 사람의 몸을 이롭게 하는 자전거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기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기술은 우리의 물질생활에 끊임없는 진보를 가져오고 우리의 육신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우리 몸의 자원들을 빠져 나가지 않도록 잘 저장하는 훌륭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게 기술이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그러나 덕은 함양되기도 하고, 덕은 함양되어 북돋아지기도 하고 혹은 유실되기도 합니다. 덕이라는 말을 라틴어로 ‘비르투스’라고 하는데 ‘비르’라고 하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덕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영혼의 힘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덕이 풍부한 사람은 좀 박덕한 사람을 만나도 항상 그의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면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덕이 모자라는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으로부터 덕을 입어야지만 그 사람과의 관계를 계속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덕입니다. 그래서 이 덕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이웃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그 사랑 때문에 영혼의 힘이 발휘되어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 바로 덕입니다. 그리고 덕의 원인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 덕은 영혼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우리의 정신을 선하게 만들고 그리고 덕을 베풀면 그 덕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의 정신을 고양시켜 선한 삶을 살아가도록 북돋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향한 진정한 사랑은 바로 이런 덕에서 나오는 사랑이어야 하고, 이 덕에서 나오는 사랑의 궁극적인 근원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먼저 받은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결국 기술은 삶의 수단이지 목표가 아닙니다. 야비한 사람이 걸어 다녀도 야비하고 외제 승용차를 타고 거만하게 뒷자리에 앉아있어도 야비합니다. 식인종은 걸어갈 때도 식인종이고, BMW를 타고 영어책을 읽으면서 거리를 다녀도 그 사람 머릿속에는 인간 생살 사시미에 대한 생각이 가득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식인종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문화 주택은 45평에 고급 건축 자재로 지어진 주택이 문화주택이 아닙니다. 거기 사는 사람이 식인종이면 문화주택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기술이 아니라 덕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은 결국 사람됨과 일치합니다. 비겁한 사람이 한 순간은 용기를 낼 수 있고 그리고 경솔한 사람이 한순간은 신중해질 수 있지만 그 지어먹은 마음이 지나가고 나면 그 사람의 본성과 살아가는 삶의 행동은 삼투압의 원리처럼 일치를 이루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되게 살기 위해서는 그 사람 자신의 본성이 변화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덕 입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사람이 그렇게 되도록 도우려고 하나님이 만드신 기관이 바로 가정이고 죄 때문에 가정이 그 일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 서로 도움으로써 한 사람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III. 네 자녀를 낙심케 말라
A. 낙심하는 자녀들
이런 가정의 경륜에서 자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주님께서는 부모들에게 강력하게 경고하시는데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자녀를 낙심하게 하지 말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낙심하는 자녀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것은 인간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에게 상세하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낙심하다’라고 하는 이 성경 번역의 희랍어가 ‘아듀모신’이라는 단어인데 ‘아’는 ‘없다, 아니다’라는 부정 접두어고 ‘듀모신’이라는 동사가 뒤에 붙은 것인데 이 ‘듀모신’은 ‘열정을 갖다, 욕망을 소유하다’ 이런 뜻입니다. 그것이 없어진다고 했으니까 이 의미는 ‘절망하다, 그리고 낙심하다, 심지어는 열정이 사라지다, 정신이 없어지다.’ 이런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자, 여러분,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큰 사상의 분기점을 만든 철학자요, 사상가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데카르트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 유명한 자신의 말, ‘꼬기또 에르고숨’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남긴 주인공입니다. 이 말은 아주 혁명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런 뜻입니다. 왜 이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냐 하면 이제까지 중세까지 계속되어온 사물의 관점을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바꾸어 놓는 언표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생각한다’라고 하는 이 말은 그냥 일반적인 생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판하고 비판하면서 의심하면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은 가짜일지 모른다, 이제까지 나의 편견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강요된 인습, 그리고 몸에 익숙한 사고방식, 이런 것 때문에 잘못된 것들이 나에게 주입이 되어서 이런 저런 판단을 내리는데 거기에 휘둘려서는 참 진리에 도달할 수 없고, 그 편견을 하나씩, 하나씩 걷어 버림으로써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나면 마지막에 의심할 수 없는 사실 하나가 남는데 의심하고 있는 내가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가 없다. 그게 바로 ‘꼬기또 에르고숨’이라는 태제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설은 이제 소위 데카르트가 말하는 영원진리 창조설과 관계가 있습니다. 즉, 의심하고, 의심하고 끝까지 의심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명석하고 판명하게 이것은 참된 것이라고 하는 결론을 내가 인식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곧 진리로 받아들여도 된다, 왜냐하면 영원 전에 하나님이 그러한 진리를 사물과 사물 사이에 만들어 놓았고 우리 이성이 모든 오해와 편견을 벗어나서 거기에 도달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곧 진리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자, 그렇게 되면 데카르트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참으로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동안에만 참 자기를 소유한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다 가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동안에만 자신이 존재한다고 보았고 결국은 육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정신에 딸린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어서 이원론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이렇게 인간을 규정하고 나니까 이제 예전에는 모든 완전한 지식을 하나님만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인간이 무엇을 생각하고 발견했어도 항상 의심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도움을 받으려고 했던 생각을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을 밀어내고 하나님이 계셔야 될 자리에 인식하는 인간을 중심에 놓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이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블레이즈 파스칼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여러분이 고등학교 다닐 때 읽으셨던 팡세의 저자입니다. 팡세는 아이디어라는 뜻인데 이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유명한 변증설을 쓰기 위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들을 채집하는 방식으로 메모를 모은 책이 팡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데카르트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사고를 가진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자, 당신이 말하듯이 인간은 그렇게 비판적으로 계속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집요하게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시간이 일생의 몇 시간이나 되겠느냐? 그러면 대부분은 인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 아니다. 그렇게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눈뜨면 아침이 밝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는 그렇게 비판적인 사고에 의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있느냐, 어떠한 욕망을 가지고 있느냐에 의해서 삶이 결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하고 올바른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 지식이 좀 모자라도 선하고 올바른 삶을 살고, 지식이 많아도 악한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 악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인간이고 인간은 그런 점에서 인생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는 사유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이 인간에게는 당면한 문제다.’라고 하는 훨씬 현실적인 인간관을 내놓으면서 기독교를 변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다음 세기에 일어나게 될 이제 낭만주의나 이런 것들을 이미 예고해 주는 표지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B. 자녀를 노엽게 말라
제가 이야기를 왜 드리냐 하면 오늘 이 성경 구절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부모인 당신들이 자녀를 어떤 방식으로든지 막 분노하고, 격노하고, 말하자면 노여워하게 만들면 ‘아듀모신’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참된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열정이, 그것이 고갈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고갈이 되어 버리면 그러면 에너지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는 그러한 열정이 ‘아듀모신’이 없어져 버리고 나면 아무 기력이 없는 무기력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비이성적이고, 야수적인 충동에 의해서 인간이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려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지금도 그렇습니다. 10대 아이들이 폭주족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토바이를 하나 사 가지고 미친 듯이 밤 12쯤 차 없을 때 거리를 달립니다. 그런데 경찰들도 그 애들을 잘 잡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우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대적인 단속이 벌어집니다. 특별히 SNS같은데 올려서 ‘어디로 모여라 우리 폭주한다.’ 그러면 애들이 잔뜩 모입니다. 한번은 교통 기자가 잡았습니다. 기자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125cc 오토바이가 제일 위험한데 저도 옛날에 타봤습니다. 지금은 더 잘 나올 것입니다. 속도 엄청나게 나옵니다. 그거 한 120km달리다가 충돌하거나 쓰러지면 죽거나 병신 됩니다. 그렇게 미친 듯이 달립니다. 그래서 기자가 붙들고 보니까 둘 다 이 헬멧을 안 썼습니다. 뒤에는 여학생이 타고 있었습니다. 여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위험하지 않냐?” 그러니까 “뭐 어때요.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이러다가 너네 사고 나서 목숨이라도 잃으면 어떻게 하냐?” “아저씨 놀다가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대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열정이 사라지고 나면 빈 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비이성적이고 야수적인 충동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야말로 막 살아버리게 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그렇게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부모들이 때로는 자녀들은 도저히 그 능력이 안 되는데 높은 기대감을 가지고 자신도 못 올라가본 그런 일들을 하라고 자녀에게 투사시키는데 그것은 자기 사랑을 자녀에게 확대한 것입니다. 어떤 애가 엄마가 하도 공부 못한다고 쥐어박고 야단을 치고 흉을 보니까 외할머니 집에 갔습니다. 그리고 외할머니 안마를 해주면서 마음을 풀어드린 다음에 엄마가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말도 마라. 그 애 고등학교 졸업시키느라고 혼났다. 죽어도 공부 안하던 애였다.” 돌아와 가지고 엄마가 또 공부하라고 하니까 “엄마보다는 내가 낫잖아. 그러면 됐지”
그 뿐만이 아닙니다. 자녀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빼놓고 이 세상 누구도 그 사람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그렇게 되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게 남편이라도 세상에서 볼 때에는 아름다운 사람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기를 원하시지 그렇게 목숨을 걸고 저 사람한테 내 일생 전체가 달린 것 같은 그런 관계를 하나님 하고만 그렇게 해야지 다른 관계에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게 사람이어도 안 되고, 자기 욕망이어도 안 되고 천국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어린 시절에 폭력과 폭언, 특히 자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주 치욕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폭언, 무관심과 방치, 그리고 올바르지 않은 모본을 보이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은 자녀에 대한 비인격적인 폭력이고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파괴입니다. 결국은 이로 인해서 부모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상실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모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상실하고 공부를 잘했다고 칩시다. 그게 뭐가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이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라고 하는 이 경고를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노엽게 하다’라는 이 단어는 부정 명령어가 사용되었는데 화나게 하다, 격노하게 하다, 진노하게 하다, 이런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아이들이 권력이 없기 때문에 이 속에서 가슴이 불붙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폭력을 당하면서 어마어마하게 화가 나는데 이것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덤벼들 수 있는 권력이 없습니다. 결국은 이것이 안에서 파멸이 일어나면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선한 열정들이 상실되어 버리고 비이성적인 폭력과 야수성들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존 오웬 목사님이 죄의 광기와 무모함, 그리고 맹렬함으로 설명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마음에 비이성적인 야수성을 일깨웁니다. 그래서 존 화이트라는 신학자가 우리 모든 인간은 자신 속에 우리에 갇힌 맹수를 하나씩 기르고 있는 사람들이다 라고 했습니다. 언제 이것이 뛰쳐나와서 폭력적인 비이성적인 야수성을 발휘할지 모릅니다. 결국은 그래서 지성을 따르지 않는 의지의 성향이 굳어져서 분노에 쉽게 굴복하고 이것이 본성화 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그렇게 새로운 천성으로 걸어가는 악한 길은 정말 주님을 만나서 깊이 변화되기 전에는 고쳐질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일평생 자신이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불행의 짐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자녀들을 노엽게 하고 사랑하는 대신 관계를 파괴하는 여러분 부모에게 달린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IV. 사랑으로 양육하라
저는 어제도 가슴이 뭉클한 가운데 아이들의 편지에 사인을 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 교회에 있는 엄마나 아빠나 한쪽이 없는 아이들, 꽤 됩니다. 한 50여명 됩니다. 그 아이들을 이제 대부분 아빠가 없는 아이들입니다. 그러면 어린이날이 되면 교회에서 학용품이나 책가방 이런 것이 아니라 아빠가 있었으면 사달라고 졸랐을 그러한 자기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를 미리 다 연락을 해서 하나씩 다 개인별로 사서 편지를 써서 내가 아빠대신 사인하고 보내주는 게 한 7-8년 되었습니다. 사인하면서 가슴이 그렇게 뭉클했습니다. 이 아이들이 비록 아빠가 없지만 엄마가 멀리 갔지만 이 모자라는 사랑을 교회와 하나님께서 채워주셔서 이 아이들을 온전하게 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의 아이를 생각해 보면 여러분 가정은 그래도 행복한 가정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자녀에게 수시로 관계를 파괴하고 형상을 파괴하고 아이들을 노엽게 하고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모욕하고 하는 폭력과 폭언 등으로 여러분의 자녀의 마음속에서 참다운 인간의 삶을 위한 열정이 상실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진지하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여러분은 깊이 회개하고 그 자녀들을 하나님 앞에 올바로 기르도록 부여받은 신성한 소명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고 새끼를 낳았는데 그 자식들이 나의 삶을 따라가는 인간이 되었다면 사람으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다 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자녀를 어떻게 대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으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는 제일먼저 이렇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나님과 인간과 세계와 자기 자신이 어떤 관계를 맺어야 되는지를 아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리스도를 힘입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참되게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구도자여야 합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 갈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요즘의 교육은 모두 쪼가리, 쪼가리 찢어진 교육이고 그래서 모두 물질 중심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문제점들을 보면서 출세에도 많은 지장이 있다는 반성을 하면서 요즘들은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인문학을 배운다고 난리이고 어딘가에서는 교회에서까지 인문학을 강의한다고 합니다. 거기에 뭔가 긍정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인문학의 뿌리는 하나님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인간을 갖다 놓은 그 가치체계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참된 인도주의, 참된 인문주의는 기독교의 올바른 신앙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주체성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인간 자유를 따라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아비들아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라고 하는 것은 그럴 수 있는 폭력적인 위험이 아버지에게 많이 있다는 것이지 어머니는 예외라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 속에서 주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내가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해도 되는 소유물이 아니라 독립적인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존재이며 그는 존중되어야 하고 존엄성과 가치에 있어서 인정받아야 하고 그의 육신의 장애나 정신의 수준의 높고 낮음, 성격의 호불호와는 상관없이 모든 인간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존귀히 여김을 받아야 하고, 존중되어야 하고 사랑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편견과 인습을 강요하지 않고 아이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라면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사랑 속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그렇게 아이를 품어주는 것이 부모가 하여야 할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관심사는 마땅히 이 아이가 하나님 앞에서 참된 사람이 되고 그리고 기술보다는 덕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서 어디에 있든지 인류에 이바지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에 보탬이 되는 사람으로 길러내는 것이 여러분의 의무인 것입니다.
V. 적용과 결론
제가 제일 싫어하는 선물이 분재라는 이야기를 작년에도 말씀을 드렸을 것입니다. 선물 들어오자마자 복도에다가 나는 내놓습니다. 왜 살아있는 생물을 그렇게 못 자라게 성장 억제제로 못 자라게 만들고 구리철사로 칭칭 감아서 자기가 원하는 모습이 되게 할까요? 더 잔인한 것은 작은 새장에 예쁜 새들을 가두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그렇게 가두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나는 말합니다. 정말 새를 기르고 싶으면 마당 전체를 철망으로 싸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새가 자유롭게 다니도록 그리고 물고기도 기르고 싶으면 벽면 전체를 어항으로 만들어서 걔네들이 평생 살면서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까지 만들어 주기 전에는 제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제가 태어나서 가장 사랑한 분은 우리 할머니였습니다. 그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한테 유언 하나 하자.” “무슨 유언이에요?” “그래도 하자. 나 죽으면 절대 염하고 베보자기로 싸지 말고 그냥 편안한 옷을 입혀다오.” “왜요?” 그랬더니 “얘 나는 평생 속박 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마지막 가는 길은 자유롭게 가고 싶구나.” 그게 제 마음속에 각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셨을 때 시신만 깨끗이 닦아 드리고 그 다음에는 하얀 인조견으로 치마저고리를 만들어서 속옷까지 모두 입혀드리고 장의사는 그래도 묶어야 된다고 그래서 내가 절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관에 눕혀 드리고 이제 흔들리지 않도록 솜뭉치를 구석구석에 가득 채워서 편안한 모습으로 땅에 안장해 드렸습니다. 자유라는 말을 생각할 때마다 그 할머니가 편안한 모습으로 하얀 옷을 입고 그 관에 누우신 광경이 언제나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얘야 사람은 자유로워야 한단다.” 얼마나 평생에 속박을 받으셨으면 자신은 마지막에 가면서 묶여 가시기 싫다고 그렇게 평안히 눕혀 달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래서 내 마음속에 울컥 울컥 누구를 속박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할머니의 마지막 시신을 생각합니다. ‘그래 맞아.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한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고 그리고 그 자유는 서로의 사랑 속에서 존중되어야 하는구나.’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분재처럼 기르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를 있는 모습 그대로 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그것은 아마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자녀를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자유롭게 하시고 그리고 여러분이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당신께 돌아올 때까지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용서하고 오래 참으시고 사랑했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그 사랑으로 여러분의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고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라도록 그 자녀들을 돕고 섬기는 사랑의 부모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골 3:2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지난주에 우리 교회에서 여러 해 동안 간사로 일하던 자매가 인사를 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결혼을 하고 이제 아이를 낳아서 한 18개월 정도 아이를 길렀습니다. 그래서 반갑게 만나서 대화를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오늘이 어버이 주일인데 어버이 날인데 눈물의 어버이 날이었습니다.” “왜?” 그러니까 아침에 이제 친정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엄마 18개월 기르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30년 동안 나 어떻게 길렀어?” 그러는데 눈물이 펑펑 쏟아지더랍니다. 그래서 내가 “이제 네가 구원을 받기 시작하는 구나”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 뜻은 애만 낳으면 하늘나라 간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간다 그 뜻입니다. 자식을 낳아서 길러보니까 부모 마음이 어떤지를 알고 자기는 홀로 컸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부모의 수많은 희생의 터 위에서 이루어진 성장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II. 부부, 부모와 자식
A. 부부: 가정의 기본단위
성경을 통해서 볼 때에 부부와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나오는데 가정의 기본 단위는 부부입니다. 그래서 남녀가 서로 만나 사랑을 하고 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가정이 있기 때문에 자손들이 생겨났고, 자손들이 생겨나니까 부모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맨 처음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 아마 청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늙음도 없으니까 이제 가장 완성도가 높은 남자를 창조하고 이어서 여자를 만드신 다음에 한 가정을 이루게 하신 것으로 미루어볼 때에 가정의 기본 단위는 부부입니다. 이 부부는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사랑이어야 하고 그 속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이 있게 됩니다. 다만 하나님이 남자를 창조하신 목적과 여자를 창조하신 목적, 두 가지를 합해서 인간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에 가정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질서가 있다고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충분히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질서 속에서 남녀가 대등한 사랑과 존경을 가지고 그 사랑의 열매인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이 이게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신 원리입니다. 그래서 그 자손들을 퍼트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을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통해서 완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B. 부모와 자식: 인류의 보존방식
그런데 이제 가정의 기본 단위가 부부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이제 부모와 자식으로 이어지면서 가족이 형성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류를 보존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부부의 사랑은 결코 일방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성격 차이 때문에 부부가 헤어졌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아버지와 아들, 혹은 어머니와 딸이 성격 차이 때문에 서로 결별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매우 드뭅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태어나면 의사가 얘기하는데 36시간을 돌보지 않으면 아이는 죽음에 이른다고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36시간도 안 갈 겁니다. 한 열 몇 시간만 내버려 두면 아이가 죽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추운 길거리에 내버려두면 몇 시간도 안 걸릴 것입니다. 태어날 때서부터 인간만큼 오래 돌봐야 되는 존재는 없습니다. 송아지는 태어나면 금방 걷기 시작합니다. 강아지도 태어나자마자 눈은 못 뜨지만 그러나 이제 움직이고 꾸물꾸물 가서 엄마 젖을 빨아먹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게 그 정도가 되려면 최소한 1년도 안되고 자기가 찾아먹고 그러려면 다섯 살까지는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두 놈을 낳으면 10년을 그렇게 봉사를 해야지만 겨우 인간으로서 자립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녀들을 향해서 거의 일방적으로 사랑을 퍼붓고 사랑하는 것이 거의 동물적인 본성이 되게 하셔서 그것으로서 개체들을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짐승들을 보면 우리 어렸을 때는 처마 끝에 제비들이 많이 와서 집을 지었습니다. 굉장히 지저분합니다. 배설물 떨어지고 진흙 떨어지고 그래도 혹시 또 박씨라도 하나 물어올까봐 어쨌든 정성껏 돌봅니다. 그러면 엄마가 가서 어떻게 벌레를 하나 잡아옵니다. 두 마리도 한꺼번에 못 잡아오고 한 마리를 잡아옵니다. 얼마나 날라 왔는지는 엄마만 압니다. 가지고 오면 애들이 그 둥지 속에서 한 여섯 내지 여덟 마리의 새끼가 엄청나게 크게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엄마가 얼마나 그게 먹고 싶겠어요? 자기도 벌레 좋아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물고 와서 주는데 절대 순서를 어긋나는 법이 없습니다. 입 크게 벌린다고 주는 것이 아니라 차례대로 심지어는 옆에 있는 애가 밀치고 들어가도 주었다는 것을 알고 그 옆에 애한테 딱 줍니다. 아주 정확합니다. 그래서 편애하는 것도 인간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줍니다. 암탉이 달걀을 품고 한 20여일 되면 이제 알을 깹니다. 그런데 일단 알을 품기 시작하면 물 먹을 때 이외에는 안 내려옵니다. 딱 올라가서 이것을 한쪽이 차가운데 계속 닿게 되면 기형아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계속 날개로 알을 굴립니다. 그래서 자기의 체온을 최대한 자식들이 받게 해 줄 때 바짝 말라서 뼈만 남습니다. 그리고 병아리가 깨어납니다. 제비가 그렇게 받아먹었으니까 “이제 엄마가 연로해 지셨으니까 우리가 물어다 드리자.” 제비는 그런 것 모릅니다. 그리고 병아리들이 깨어나면 그 엄마의 애틋한 사랑을 알고 효도를 하는 병아리 본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게 어미들이 그렇게 지성으로 하는데 예외도 있습니다. 가시고기는 알만 낳아놓고 어미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수정란을 자기가 뿌려놓고 아빠가 그 알 지킴이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상한 놈들이 와서 알 먹으려고 그러면 막 대들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좁은 공간에 놓고 물이 막 흘러가는 곳이 아니라 이렇게 움푹진 곳에 놉니다. 그러니까 알이 거기에서 부화를 합니다. 조그마한 놈들이 깨어납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있습니다. 뭐냐 하면 안전한 곳을 택하니까 물이 잘 안 흘러서 산소가 모자랍니다. 그러니까 이제 아이들이 충분한 산소를 못 먹으니까 아빠가 걔네들 그 알이 태어날 그때부터 크지도 않은 이 두 개의 지느러미를 가지고 물질을 해서 새 물을 그리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것을 며칠씩 계속합니다. 그러면 이제 조그만 아이들이 깨어납니다. 못 나가게 하고 나가면 금방 죽으니까 거기에서 덩치를 키우는 것입니다. 계속 물질을 합니다. 그래서 플랑크톤 같은 것들을 먹으면서 애들이 점점 커집니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계속 물질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물질을 했는지 먹지도 못한 채 물질을 해서 온 몸이 너덜너덜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말하자면 박테리아 같은 것들이 먹어 가지고 온 몸이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상태서 결국은 하다하다 지쳐서 죽습니다. 그때에 이제 자기 몸을 아이들을 위한 식량으로 제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거기 와서 아빠 살을 뜯어 먹으면서 덩치를 키우고 마지막에는 다 뜯어먹고 가시만 남고, 그 정도가 되면 물속을 돌아다닐만한 개체가 돼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시고기 아빠의 일생입니다.
이러한 자연의 법칙을 형성하셔서 이 모든 피조세계의 동물들이 보존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도 하나님이 그런 자기에게서 태어난 개체들을 보존하려는 그런 본능 같은 것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빠에게는 매우 약하게 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자기 자식들을 그렇게 막 뜨겁게 보호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입니다. 인간이 동물적인 본성만 가지고 움직이는 거라고 그러면 최소한 자기 새끼를 보존하는 일은 할 텐데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지성과 의지와 도덕적 판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자기 몸에서 태어나는 새끼도 밥만 먹여주면 동물처럼 사는 존재가 아니라 그 정신도 영양분을 공급받아서 지성과 의지가 성숙하게 자라서 인간다운 판단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이제 문제가 발생을 하는 것입니다.
개 중에서 훈련을 잘 시켜서 탁월한 개도 있고 비싼 개도 있고 또 그렇지 않으면 별로인 개가 있어도 우리는 그것을 다 개라고 부르지 너는 개만도 못하다 이런 말은 안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개만도 못한 인간이 충분히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에게 주신 지성과 의지, 판단력들을 올바로 발휘하지 못할 때에 인간은 동물적 본성까지 거슬러서 악하게 살 수 있는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부모에게 악한 자도 자식에게는 선한 사람은 많지만 부모에게는 너무 선한데 자식에게는 아주 악한 부모는 없습니다. 물론 부모에게 악하고 자식에게 악한 사람도 많이 있지만 성경을 보면 부모 공경에 대한 이야기가 부부 사랑이나 자녀 사랑하라는 이야기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본성적으로 상당히 그럴 가능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는 그 인간의 본성에 잘 어울리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III. 부모 공경의 표현: 들음
오늘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 공경의 표현을 들음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A. 자녀들을 부르심
제일 먼저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먼저 부르십니다. ‘타 테크나’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성경에서 자녀, 자식, 새끼 이렇게 번역이 됐는데 나이가 어린 아이들을 가리킵니다. 지난주에 설교했던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럴 때 우리 마음속에 드는 생각은 90먹은 아버지가 70먹은 아들을 화나게 하는 그런 그림이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아직 권력이 없고 힘이 없어서 부모를 의존하고 있는 상태에 있는 어린이들을 “부모가 노엽게 하지 말아라. 그러면 낙심한다.” 그 얘기를 경고하듯이 똑같은 그런 맥락에서 어린 자녀들을 향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부모에게 순종하여야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어린 아이들은 부모에게 순종할 의무가 있지만 일정 나이가 되면 부모에게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말이 성립될 수 없다는 점에서 보면 1차적으로는 어린 아이들이지만, 2차적으로는 그 부모를 가진 모든 자녀들에게 하는 이야기라고 확대해서 생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테크나’라고 하는 단어는 ‘티크토’라고 하는 동사, ‘아이를 낳는다’라는 말에서 유래된 명사입니다.
유아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아이들이 3-4세, 넉넉잡아서 5세까지 되면 그의 인성의 80%가 이미 형성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어렸을 때의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대학 교육에 돈을 많이 퍼붓고, 고등학교 교육을 무상으로 하기 위해서 막대한 예산을 들이는 일도 바람직하지만 순위로 볼 때에 먼저 신경을 써야 될 것이 조기교육입니다. 영재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성을 형성하는 이 교육이 프랑스처럼 2년 6개월 정도가 되면 의무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에서 2년 6개월짜리부터 나라에서 모든 돈을 대서 의무 교육을 하고, 의무 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부모가 처벌을 받습니다. 2년 6개월이 되면 이제 아이를 말하자면 유아 교육 학교에 보내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아이들에게 선과 악, 도덕관념, 그 다음에 공동체를 위한 책임, 자기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들을 아이들에게 인생을 위한 기본 가치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유치원 교육은 너무 늦습니다. 그렇게 하고 그리고 초등학교 교육을 조금 더 당기고, 그리고 그 다음에 이제 위의 단계들을 신경 썼으면 좋겠다. 그냥 위의 대학 교육 같은 것들은 인성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산업 사회에서 어떻게 공부를 하고 자기 나름대로 말하자면 경쟁력이 있는 자신으로 개발해서 사회발전에 기여하고 경제활동에 참여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지 인간이 참으로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할까를 탐구하는 데에 기본적인 정신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교육을 받으면서 인간의 본성이 변하는 것은 기대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그 교육이 내려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은 학교에서 해결을 해줄 문제라기보다는 가정에서 잘 가르쳐서 해결을 해 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성 형성기에 있는 아이들, 그리고 부모를 둔 모든 젊은 자녀들을 부르면서 그러면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직까지 인성 형성기에 있는 아이들은 특히 주님을 경외하고 참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알고 있는 부모로부터 그 교육을 받아야 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에 상정하고 있는 부모는 아주 분명했습니다. 그러니까 집에서 폭력과 폭언을 일삼고 술주정뱅이 노릇하고 그 다음에 가정을 파괴하는 그런 부모를 생각하면서 “너희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렇게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은 완전한 신자라고 말할 수 없지만 기본적으로 주님을 경외하고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야 될지를 고민하면서 그 이치를 터득하고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려고 애쓰는 표준적인 성도의 가정을 염두에 두면서 그런 아버지들을 생각하면서 “자녀들아 그런 부모에게 순종하라.”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B. 부모에게 순종함
그러면서 이제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순종한다’라는 말이 사실은 희랍어로 ‘휘포쿠에테’라고 하는 명령형인데 ‘휘프’는 ‘휘포’라고 하는 전치사인데, ‘아래에서, 밑에’ 이런 뜻이고 ‘아쿠오오’, ‘듣다’라고 하는 단어 그 말의 히브리어가 ‘샤마’입니다. 사무엘이 거기에서 나오는데 그래서 위에서 무엇인가 판단하면서 듣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세로 부복하여 권위에 복종하면서 자기의 마음을 기울여 듣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듣고 기꺼이 순종하고 그것을 받들려고 하는 마음이 동반된 들음, 그것이 바로 ‘휘포쿠에테’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두 가지 지식이 필요한데 하나는 기술에 대한 지식이고, 하나는 덕에 대한 지식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기술은 사물을 사용해서 사람의 몸을 이롭게 하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덕은 자기를 사용해서 남을 이롭게 하고 인류를 행복하게 하고, 그 안에서 자신도 행복해지는 것이 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사회의 교육이 피교육자의 연령이 높아질수록 기술을 교육하는 데에 치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가서 이제 나름대로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는 사회 속에서 수많은 사람과 경쟁하면서 살아야 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런 기술에 관한 지식을 부지런히 습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지식들을 습득한다고 해서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비결을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로봇을 만드는 기술이 아주 탁월하다 그러면 집에서 재택근무를 해서 컨설턴트만 해도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가장 기가 막힌 인간과 흡사한 로봇을 만드는 기술이 있다 해서 그 기술을 갖지 못한 사람보다 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자,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은 아직 나이가 어린 아이들의 상태일 경우에는 낮은 자세로 배우면서 초월적인 진리, 그리고 인생의 의존하면서 살아야 될 항구적인 가치를 부모로부터 배울 때에는 반드시 낮은 자세로 경청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순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은 첫째 안 태어나는 거다. 두 번째는 일찍 죽는 거다. 그래도 계속 살아있다면 다음 네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면 비교적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첫째는 좋은 국가를 만나는 것입니다. 국가의 가장 탁월한 가치는 무엇에 있습니까? 정의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의를 희생하지 않는 가운데 나머지 국가의 기능을 수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국가가 추구하는 정의는 법으로 구체화됩니다. 법으로 구체화된 정의는 법을 집행할 수 있는 의지와 힘을 요구합니다. 그러면 그 만들어진 법이 모든 그 나라의 국민 백성들을 향해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정의에 대한 관념이 나라에 확고하게 서서 그 법을 따라 산 사람들은 대접을 받고, 최소한 존경을 받고, 그 법을 어긴 사람은 최소한 손가락질을 받고 그 나라 사회에서 도태되거나 손해를 보게끔 법이 법대로 집행되는 국가에서 태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의 모든 문제는 몇 사람 가지고 막 욕하고 죽일 놈, 죽일 놈 그랬는데 그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 거기 있어도 그렇게 됐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구조적으로 법이 법대로 안 되는 사회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여러분, 그것을 보면서 깜짝 놀라지 않으셨습니까? 법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20년인가로 되어있는 선령을 30년으로 늘려서 할 수 있도록 국회의원들이 법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을 가진 재벌과 실력 있는 장사꾼들이 어마어마한 로비를 동원해서 자기에게 맞는 법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의가 문제가 아니라 이익에 의해서 정의가 굽는 것입니다.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본이나 이런 선진국들은 바보기 때문에 그런 걸 몰라서 그렇게 30년, 40년 타고 다니게 법을 안 만들었겠습니까? 수없이 경험해 보니까 위험하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손해를 무릅쓰면서 하는 것입니다. 15년 전에 동경을 갔는데 동경에서 춘천 거리쯤 되는 전철을 탔습니다. 그냥 우리나라 전철하고 똑같은 전철입니다. 그때 교통비가 셋이 탔는데 6만원을 주고 티켓을 끊었습니다. 15년 전에. 우리나라는 아마 그때 그 6만원 가지고 부산까지도 거의 내려 갈 수 있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나 교통요금이 비싼지 너무 놀랐습니다. 무엇인가 비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전동차 사고 난 것도 보니까 20년까지는 쓰게 되어 있기 때문에 19년이 되도 무조건 법적으로 쓰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위험할 것 같으면 1년 밖에 안 썼어도 갖다 버리고 새 차를 들여와야지 그리고 1년 밖에 안 써서 그렇게 망가지게 한 사람은 처벌을 하고 그것을 납품한 사람들은 책임을 지게 만들어야 되잖습니까? 그런 게 안 되어 있습니다. 보면 뇌물 주고 뇌물을 받고 수없는 공생 관계에 얽혀서 사회 전체적인 비리가 세월호 참사 같은 것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니까 정직하지 않고 정의롭지 못한 나라는 궁극적으로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한계까지는 되고 그것을 사회학자들이 20000불이라고 봅니다. 사회가 좀 부패하고 해도 20000불까지는 올라갑니다. 그런데 20000불 넘어서 30000불, 40000불 가는 것은 절대로 사회가 정의롭지 않으면 안 된답니다. 그 관념을 가지고 말하자면 세계의 선진국의 지도를 한번 그려 보십시오. 제가 알기로는 국민소득 40000불 넘어가는 나라에는 이렇게 부패한 나라가 없습니다. 30000불 넘어가는 나라에도 없습니다. 모르겠지만 아프리카 몇몇 재벌들이 석유를 퍼 올려서 선진국이 된 그런 나라 말고 없습니다. 그게 이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하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거지같은 나라가 되어 가는데 이게 정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내면화시켜가지 고 다 우리 죄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풀이 하듯이 기도하고 눈물 씻고 가서 그 구조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그런 정도 가지고는 사회가 개혁이 안 됩니다. 차라리 기도를 좀 덜 하더라도 맨날 회개 하는데 안 변하지 않습니까? 고쳐야 합니다. 자신의 온 몸으로 이 거짓된 질서에 항거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라고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입니다. 나라를 이 꼴로 만든 게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부모를 만나는 것입니다. 부모가 참 인간되기를 갈망하고 그 구도자의 길을 걸어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인간답게 사는지를 터득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덕스러운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그렇게 살았지만 그 살아가는 삶의 원리에 대해서 모두 지식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런 부모도 있겠지만 그래서 필요한 것이 스승, 선생님입니다. 그 선생님은 부모처럼 그렇게 살아갈 뿐만 아니라 어떻게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논리와 지식으로 잘 정돈된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 선생님 만나서 마지막 네 번째가 그런 나라에 태어나서 그런 부모와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자신도 그분들처럼 되고 싶어 하는 친구들과 어울려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러면 그래도 비교적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봅니다.
어디 그 네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이 있느냐?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눈물 나도록 고맙습니까? 그리고 이 땅을 떠나서 어디서 정의를 보리이까? 그런 생각이 듭니까? 안 듭니다. 부모님이 그렇습니까? 생각만 하면 무릎을 꿇고 눈물을 쏟고 싶은 그런 선생님이 있습니까? 그 다음에 내가 좀 신앙생활 게을리 하고 인간답게 안 살 때에 고개가 숙여지고 부끄러워지는 친구들이 옆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게 이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조건들이 파괴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이것을 추구했지만 자기는 그런 사람 만났나? 결국은 자기도 박해를 받아가지고 도망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상 속에 그리는 거지 일단 인류가 죄를 짓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이후에는 국가도 국가다운 국가가 없고, 부모도 참된 부모가 될 수가 없고, 스승도 그런 스승이 없고, 그런 진리의 동지들도 찾기가 힘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국가가 되고 그런 스승과 부모,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참 사람이 되어야 하고, 참 사람으로 이루어진 참 사회가 형성되어야 하는데 이미 죄에 의해서 그럴 수 있는 가능성들이 대부분이 파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파괴된 것이 아니라 일부가 남아 있기 때문에 아직도 이 세상에는 정의롭고 법과 정신이 통하고 있는 나라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나라를 우리들이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타락 이후에도 인간 사회를 올바르게 작용하게 만드는 원리와 질서에 대한 흔적을 부모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이 악할지라도 그 부모에게서 어려서부터 선과 악에 대해 배우고 인간의 도리를 배우고 참 사람으로서의 덕스러운 선한 습관들을 함양하는 일에 있어서는 부모를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은 부모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는 것이야 말로 인생을 바르게 살 수 있는 최고의 길인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태어났는데 전혀 부모가 그런 부모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 아이는 어렸을 때에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기초를 못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행해질 수 있는 가능성의 십자가를 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보니까 28개월 된 아이를 죽여 버린 비정한 아빠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울어서 어떻게 하다가 죽었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너무 부담스러우니까 그냥 죽여 버리고 자기는 PC방에 게임하러 갔습니다. 그 애가 만약에 돼지로 태어났다면 죽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돼지 엄마가 그 아이를 돌보았을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말하자면 인간이 될 길을 모르는 부모를 만나니까 그렇게 불행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부모에게 구타당하는 아이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구타가 구타 정도가 아니라 신문에 뭐 갈비뼈 16개 부러졌으니 이렇게 나옵니다. 미국 같으면 2급 살인죄입니다. 이렇게 자녀 폭행에 너그러운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현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국가가 부모로부터 아이를 빼앗아야 하고 친권을 박탈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불행하지 못하도록 하고 아이는 별도로 누군가가 돌봐야 합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내가 태어났는데 그런 나라가 아니야, 그런 가정이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것을 후회할 수가 없습니다. 국가야 바꿀 수도 있겠지만 이민을 가든지 귀화를 하면 됩니다. 좋은 나라에서 잘 받아주지 않아서 그렇지 가면 됩니다. 그런데 부모는 못 바꾸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뭐냐 하면 이것은 내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부모에게서 내가 태어난 사실은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현실을 현실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가 젊었을 때 실존주의에 심취하면서 배웠던 좋은 점 가운데 하나가 그것입니다. 실존주의에서는 그것은 철저합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런 말을 합니다. ‘곱사에게서 곱사의 등을 떼어버리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을 박탈하는 것이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장애가 있는 사람을 치료해 주는 것이 못된 것이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것이 후회스러운 과거이든지 혹은 자기가 태어난 운명이든지 간에 자기와 함께 할 수 없는 그 운명은 자기가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함으로써 진정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지 이게 왜 여기에 있을까, 왜 하필이면 내가, 왜 나만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서는 불행해지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 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을 자아가 강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못 받아들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 한 순간도 인생에 있어서 행복한 날이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삶이 아닙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영적 침체’라고 하는 그 유명한 책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면서 그러면서 영혼의 침체 속에 들어가는데 그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 아니다. 그것들이 극단화 되면 내면화가, 내면화가 되면서 막 집착하는데 빠져들면서 우울증이나 편집증으로 전락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앞에서 설교하고 있는 나는 어떤 것 같습니까? 늘 행복하고 기쁜 날만 있는 것 같습니까? ‘왜 이것이 나의 인생의 일부가 되었을까?’ 이런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갖게 되면서 참 많이 배웠습니다. 굉장히 불행하고 어려운 데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누군가 하냐 하면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현실을 인정한 사람입니다. 사랑부 부모 가운데 하나는 아이가 장애가 있는데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온전한 가정의 아이들을 이렇게 볼 때에 자기만 박탈당하는 마음이 들더랍니다. 교회에 나왔는데 그날 설교가 ‘현실을 받아들여라’ 였답니다. 이 양반이 너무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생각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마지막에 뭐라고 고백을 하냐하면 이 아이가 자기의 가정의 축복의 통로였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 때문에 겸손해지고, 이 아이 때문에 자기가 사랑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 아이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지 깨닫게 되고 그래서 결국은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의 과거와 운명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받아들이는 속에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살아감으로써 그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안드레아 보첼리라는 한때 제가 좋아했던 가수가 있는데 맹인입니다. 파바로티 콩쿨에서 1위를 하면서 유럽에서 뜨게 되었습니다. 굉장히 지금은 중견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사고로 눈을 잃었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기억이 안 나는데 ‘난 시력을 잃었다. 그리고 의사로부터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 눈을 뜨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데 나는 1시간 반 밖에 걸리지 않았다.’ 1시간 반 만에 자기 현실을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일반 은총의 차원에서 그런 삶의 자세를 가져야지만 더 큰 불행이 더 큰 불행으로 이어지지 않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IV. 부모와의 관계
A. 사랑과 공경
그런 부모와의 관계를 순종이라고 이야기 했지만 그러나 성경은 이 순종을 덜렁 순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의 맥락에서 순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다’라는 단어가 구약 성경에 수없이 나옵니다. ‘야레’라는 단어인데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할 때 사용되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더 나아가서 인류에게 주신 진정한 온전한 인간의 삶을 살 수 있는 규칙이 있는데 그것을 펼쳐 놓은 것이 성경입니다. 그것을 더 요약할 수 없을 정도로 뭉쳐 놓은 것이 뭐냐 하면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지 그런 삶입니까? 라는 것이 십계명에 나옵니다. 이 십계명은 보상을 물고 들어오는 계명이 아닙니다. 네 앞에 다른 신이 있게 하지 말라 순종했으면 순종한 것입니다. 잘 한 것입니다. 끝입니다. ‘네 앞에 다른 신을 있게 하지 말라. 그런다면 내가 한 달에 100만원씩 입금시켜주마.’ 그것 아닙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 그리고 거기에 절하지 마라.’ 순종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만약에 네가 우상을 만들지 않으면 한 개 안 만들 때마다 너희에게 금 한 덩어리씩 주마.’ 그게 아닙니다. ‘살인하지 마라. 한번 살인 하는 것 참을 때마다 집 한 채씩 주마.’ 이것 아닙니다. ‘살인하지 마라.’ 순종했어요. 그러면 순종한 것입니다. 그러면 끝입니다. 그런데 예외적인 계명이 하나가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장수하고 이 땅에서 잘 되리라.’
우리는 그렇게 크게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수없는 사람들이 전쟁과 기근, 질병으로 죽어갔습니다. 매일매일 그런 사람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장수를 약속하시는 것은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주 강력한 인상을 갖는 호소력이 있는 상급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잘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더더욱 그런 강력한 말하자면 소원을 갖게 하는 상급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한 번 심지어 하나님이 ‘나 말고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그런데도 상급이 없는데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그러면 내가 상을 주노라’ 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느낌을 줍니까? 두 가지를 보여줍니다. 첫째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것보다 더 기본적인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네 아내를 사랑하라. 그러면 너를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해 주마’ 하나님은 그렇게 약속 안하셨습니다. 부모만 거기에 딱 들어갔습니다. 자식도 안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얼마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국의 질서를 이루는데 있어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또 하나는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는 본성적으로 부모를 공경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대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여야 되겠는데 문제는 부모와의 깨어진 관계가 문제인 것입니다. 부모와의 관계가 깨지니까 사랑도 없고 공경도 없는 것입니다. 누가 어버이날 소포로 카네이션을 부쳤답니다. 10개를 부치면서 매년 하나씩 다시라고 10년 치라고 그건 아닙니다. 실제로 전 목회를 하면서 엄마, 아빠가 돌아가셨는데 절대로 울지 않는 자녀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 얘기는 무슨 뜻이냐 하면 오랜 세월동안 죽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우리 한 집에 갔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자식들이 안 웁니다. 자식들이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친구들이 막 찾아오고 하니까 인사를 하고 앉아서 이제 술도 마시고 그러다 보니까 껄껄껄 이야기를 하는데 시골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올라오신 것입니다. 상황을 보니까 개판인 것입니다. 엄청나게 화가 나셨습니다. “야 이놈들아. 네 아비가 죽었다. 다시 못 살아난다. 그럼 슬프지도 않냐? 너희가 인간이냐?” 그때 죽 섰습니다. 문장을 이렇게 하는데 문장을 하니까 가만히 서 있으니까 이 할아버지가 지나가면서 자식들 등짝을 이렇게 어루만지는 게 아니라 ‘짝’ 소리가 나도록 때리는 것입니다. “이놈들, 네 아비가 죽었는데 눈물도 안 나오냐? 좀 제발 울어라. 이놈들아.” 그때서야 “아이고, 아이고” ‘왜 나를 이렇게 들볶나.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내서 곡을 했습니다.
부모와의 깨어진 관계를 방치하면 자기 인성이 파괴됩니다. 그리고 그 대가가 자녀와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여기 형제들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녀들을 며느리를 맞이할 분들 있습니다. 제가 하나만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하나만 조건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외모 그 다음에 집안, 학벌, 다 보세요. 어차피 볼 것 아닙니까? 보지 마란다고 보지 않을 거니까 보세요. 2세도 너무 못 생기게 태어나는 거 별로 안 좋잖아요. 보세요. 보는데 다음 말씀 드리려는 한 가지보다는 중요하게 여기지 마세요. 그게 뭐냐 하면 누구를 보냐 하면 엄마가 이 딸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며 기른 집안의 아이이어야 됩니다. 그러면 최소한 그 며느리가 집안에 들어와서 자기 새끼들을 버리고 도망가는 일은 못합니다. 90%는 못합니다. 사위를 고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형제를 만났을 때에 다 보십시오. 어차피 보지 말라고 해도 볼 거니까 끌리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 가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정말 가정에 대해서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었는가? 그런 아버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들이 아버지하고 아주 나쁜 관계이면 신뢰하지 마십시오. 아버지는 그래도 아들은 완전히 별종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와 인격적인 관계가 좋으면 그 형제는 절대로 가정 못 버립니다.
그러면 목사님 지금 순혈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우리 아버지도 그런 아버지가 아니고 나도 우리 엄마한테 그런 사랑을 못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소용없는 것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신앙입니다. 신앙에 의해서 깊이 변화되어서 그런 사랑을 못 받았어도 그런 사랑을 부모에게 베푼 사람은 치료받은 놀라운 흔적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그런 사랑을 엄마로부터 못 받았어도 그 엄마와의 관계를 고치고 그 엄마에게 사랑과 공경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면 부모로부터 일방적인 사랑을 받은 사람 못지않은 놀라운 변화된 본성의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그 자녀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형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명심하세요. 그러니까 보면 엄마로부터 새끼밖에 없는 것같이 엄마가 딸을 기르면 그게 자신의 운명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볼 때에 그렇게 밖에 생각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학습이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학습이 된 것입니다. 못 고칩니다. 대게 석 달 정도면 습관이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한 10년 정도 지나고 나면 그게 거의 자기 자신의 운명처럼 성향화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것들이 본성화 되는 비결이 아까 얘기했듯이 가정에서 그런 교육을 받고, 그 다음에 신앙 안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두 개가 둘 다 다 온전하게 이루어진 사람이 최고입니다. 절대로 자기 가정을 배반할 리가 없고 자기 자식들을 절대로 버릴 사람이 아닙니다.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식을 사랑해야지, 사랑해야지 매일매일 결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속에서 흘러 내려옵니다. 이런 자매들은 아이를 많이 낳아도 괜찮습니다. 기를 수 있는 에너지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가 아기를 또 낳게 되니까 주위 사람들이 전부 다 걱정하니까 “목사님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걔는 여태까지 낳은 애들하고 다른 애들 아닐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리 낳아도 다 다른 아이입니다. 그래서 이제 부모로부터 그런 것들을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이제 자녀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못하는 것입니다. 그게 상처가 대물림이 되는 것입니다.
B. 상처와 용서
그래서 이제 부모와의 관계에서 사랑과 공경을 드려야 되는데 문제는 상처와 용서입니다. 우리는 이제 대게 부모가 폭력, 폭언, 자신이 보는 앞에서 엄마를 구타하고 가족을 배신하고 실망시키고 그릇된 모본을 보여주면서 살아갈 때에 그렇게 살아가는 자신은 거의 의식을 못하지만 그때마다 자녀들의 가슴에는 피멍이 드는 것입니다. 애들이 권력이 없으니까 그것을 왜 이런 식으로 살아가느냐고 어린 아이들이 어떻게 항거를 하겠습니까? 성인이 된 다음에야 가끔 아버지 그러시면 안 된다고 얘기를 할 수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거지 우리 성격 차이니까 이제 헤어집시다. 그렇게 못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어떻게 할 것이며 엄마는 엄마인데 그런 속에서 막 한없이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 기대와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기대가 뭐냐 하면 사랑과 자비를 기대하는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는 것이지 처음서부터 그런 기대가 없는 사람 속에서는 상처도 안 받습니다. 그런 최고의 기대가 무엇입니까? 배우자에 대한 기대입니다. 세상에서 엄마 아빠도 이해를 못해줬는데 형제를 만났는데 이해를 해주는 것입니다. 자매를 만났는데 자기 이야기를 이해를 해줍니다. 그런데서 사랑이 싹 틉니다. 사람들은 착각이 뭐냐 하면 그 속에서 기대를 최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그 이성과의 만남에 완전히 결합을 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 조언 드리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부부가 서로 만나서 사랑하고 또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를 의지하고 자식을 낳고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에 의해서 내 인생이 통째로 행불행이 좌우될 정도로 그렇게 지배를 받는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연애하는 자매가 누구인지 거의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금방 찾아내는데 연애할 때는 좀 나은데 결혼을 할 때 어떤 자매들은 종종 있는 일인데 너무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제 얼굴의 근육이 다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평화로운 얼굴이 됩니다. 별로 안 좋은 조짐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온전히 그 형제에게 의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한 번도 그렇게 해 본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후회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해결하는 길이 뭐냐 하면 무엇을 사랑하든지 도덕적으로 허락된 정당한 사랑의 관계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사랑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고 그 사랑의 동력이 하나님일 때에 그 목표가 하나님일 때 그때에 사람은 우리를 배신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언제나 거기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 근원이신 나의 사랑의 궁극적인 이유이신 하나님은 나를 실망시키시고 배신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그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위로와 용기를 얻으면서 그 사랑의 관계에서 이탈되어 가려고 하는 사람들을 우리들이 계속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자원들이 그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들은 결혼할 때쯤 되면 무슨 백성공주와 왕자이야기 같은 것, 미녀와 야수에서 나오는 그런 드림을 갖습니다. 그런 것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해도 자기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너무 어마어마한 사람을 만나서 그냥 자기 인생을 온전히 의탁하는 그 소설 속에서 나오는 그런 사랑을 꿈꾸지 말고 그냥 쿨 하게 결혼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택시 합승하는 것처럼 결혼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제 쿨 하게 결혼을 해서 너무 큰 기대 아닌 가운데 결혼을 해서 살아가면 이게 문제는 뭐냐 하면 기대감이 너무 크고 쿨 하게 결혼을 안 하니까 이유가 뭐냐 하면 남편이 잘해줄 때는 그게 평균입니다. 그리고 조금만 못해주면 이것은 변심입니다. 여자도 처음에는 그렇게 순종적이고 복종하고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고 막 이러는데 그게 평균입니다. 조금만 안 해주면 사랑이 식었나 그러고 근본적인 관계의 회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일생을 살아도 감사한 날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부부가 마지막으로 다툰 게 18년 전, 19년입니다. 다툰다고 해서 막 삿대질하고 그런 것 없고 “내가 이랬잖아” “내가 뭘 언제 그랬는데” “하지 말래니까 자꾸 그런 걸 하고 그래” 이 정도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18인가 19년 되었습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어떻게 바꾸었냐 하면 이렇게 조금만 잘해주면 이게 막 엄청난 보너스라고 여겨야 합니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너무 감사하다.’ 이렇게 하고 무언가 좀 에너지가 떨어져서 잘 안 될 때에 ‘이게 평균이구나.’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형제가 결혼을 해서 아침에 아내가 밥을 차려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까지 안 해도 되는데 이틀씩이나 연속 밥을 차려 줘서 너무 감사하다.’ 그러다가 출근할 때가 되었는데도 아내가 안 일어나고 무엇에 삐쳤는지 이불 뒤집어쓰고 움직이면서도 안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아 이게 결혼생활의 기본이구나.’ 그렇게 하고 컵라면이라도 끓여먹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나 감사가 넘칩니다.
목사들도 만나면 자기 교회 교인들 얘기 많이 합니다. 저는 사실은 비교적 안하는 편입니다. 특별히 할 얘기도 없고 그리고 우리가 결혼 생활 비슷한 건데 무슨 내가 가서 결혼생활 얘기를 다른데 가서 하겠습니까? 그냥 혼자 느낍니다. 그런데 얘기를 하다가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아무개 장로 믿었는데 배신당했다고” “아 우리 교인들에게 건축헌금 하면서 너무 실망했다” 그래서 “왜?” 그러니까 “분명히 그렇게 은혜 많이 받고 헌금 많이 할 줄 알았는데 죽어도 안한다고. 너무 실망하고 상처받았다고.” 내가 그랬습니다. “아이고 왜 그렇게 상처받고 그러냐?” “당신 어떤데?” 나는 여러분에게 단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습니다. 뒤에는 못 알아들으시는 것 같습니다.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습니다. 기대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은혜를 많이 받고 말씀 깨닫고 봉사 잘하고 그러면 ‘야 정말 놀랍다. 저 인간이 저럴 사람이 아닌데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구나’ 그리고 시험에 슬슬 들고 목회자 흉이나 보고 다니고 교회도 잘 안 나오고 그러면 ‘기본은 하는구나. 그게 양떼들이구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서 외로움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떼는 사랑의 대상이지 자기를 사랑해 주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사랑해요. 그렇지만 매일 밥 먹으러 오고 같이 차 마시지 않아도 여러분 좋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시간에 여기에 와서 이 긴 설교를 듣고 있는 것입니까? 이게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것도 지난주에 이어서 두 주씩이나 연속해서 얼마나 놀랍습니까? 항상 마음속에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아들이 장가를 간다고 집을 얻어 주었습니다. 열쇠를 뜯고 새 자물통을 달았습니다. 엄마가 물어본 것입니다. “여기 잠금 번호가 몇 번이냐?” “엄마가 그걸 알아서 뭐하게?” 너무 상처를 받고 와 가지고 쓸어내리는 것입니다. “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난 하나도 실망 안 되네. 접어요. 접어. 무슨 기대를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걸어?” 그때 말했습니다. 가르쳐 달라고 그러면 가르쳐 주고 그 다음날 바꾸면 되지 그거 뭐 그렇게 야박하게 안 가르쳐 주고 그래서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여보. 그럴 수가 있어. 그게 뭐 그렇게 영원한 거라고 그렇게 생각을 해?” 그래서 이제 자식을 끔찍하게 사랑하면 하나님이 헤어질 때 그 자식한테 결정적인 실망을 몇 번 맛보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자식을 뜨겁게 사랑한 것은 좋은데 불량 이상으로 사랑한 것에 대해서 자각을 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가보내고 시집보낸 아들이나 딸에게 쿨한 마음을 갖게 해 주는 것입니다. 원래 돌아가라는 그 마음입니다. 쿨한 마음을 갖게 해 줍니다. “너는 네 인생을 사랑해라. 사랑한다. 그러나 네가 이렇게 찰떡궁합처럼 나에게 의존하고 나도 너에게 의존하고 이것은 이제 끝났다.” 딱 정리를 해줍니다. 사랑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것은 집착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와 그런 관계를 극복하고 사랑과 공경으로 나아가면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기도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인간성의 개조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사회에서는 우리들이 사과를 많이 하고 사과도 받습니다. 직장 다니면서 상사가 굉장히 인상이 안 좋아 가만히 생각하니까 며칠 전에 자기가 좀 결례를 했으면 “부장님 제가 오늘 냉면 사 드릴게요. 같이 가실래요? 며칠 전에 제가 생각이 났는데 그때 정말 제가 너무 건방졌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부장님께 정말 결례한 것 같은데 부장님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 아래 직원에게도 이야기 할 때 “야, 그때는 내가 위에서 하도 쪼아가지고 정신이 좀 없어서 너희들에게 심하게 얘기했는데 사실 그 말이 전부 내 마음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미안하다. 오늘 내가 그런 기념으로 생선회를 사 주마” 이렇게 하면서 사회생활이 돌아갑니다. 가족들은 절대 안 합니다. 이게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가족들 안에서 활발하게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자녀로서 부모님에게 가장 최근에 정중하게 “아빠 이러 이러한 것들은 생각해보니까 정말 내가 잘못했는데 아빠 미안해요. 용서해 주실 거죠?” 이런 말 해본 마지막이 언제입니까? 또, 부모는 “야, 내가 요새 가만히 이제 늙어서 옛날 생각하다가 보니까 네가 어렸을 때 너 공부 못한다고 쥐어박고 욕하고 그랬는데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정말 미안하다.” 그렇게 부모가 용서를 비는 것을 본 적 있습니까? 더 안하는 것은 남편과 아내 사이 “여보 내가 이렇게 일을 했는데 당신이 화를 낸 것은 아니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니까 당신 기분이 참 안 좋았겠더라. 내가 정말 사회할게. 미안해. 내 본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어. 미안해.” 이렇게 사과하는 것을 가족들 속에서 최근에 본 것이 언제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가족들 사이의 사랑의 유대 관계가 다 깨지는 것입니다. 그냥 기숙사처럼 모였다가 각자 흩어져서 가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소위 얘기하는 가정으로서의 결속력이 다 약화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젊은이들은 뭐냐 하면 희망은 둘 밖에 없습니다. 부모님이 빨리 죽는 것과 그 다음에 시집가든지 장가가서 가정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떠나가 봤자 자기가 망가진 사람인데 거기 가서 온전한 관계를 수립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가서 만나는 사람이 똑같은 사람 만나고 가정은 이게 하향평준화가 되지 상향평준화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 가지고 상처투성이의 여자가 시집을 가서 좀 괜찮은 남자를 만났어도 수없는 상처를 내면서 결국은 비슷한 인간을 만들어 가고 그 안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그렇게 되어갈 아주 확률이 높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현상금을 걸면서 까지, 상금을 걸면서 까지 솔직히 얘기해서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계명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이 더 중요하겠습니까? 당연히 전자가 더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사회를 생각하시면서 다섯 번째 계명에다가 거액의 상금을 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와의 관계에서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부모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다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게 될 때 첫 번째 가장 큰 유익을 보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자기 자신의 영혼이 다시 살아남입니다. 거기에서 유익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하면서 자식들이 모르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애를 낳아서 길러보면 그때의 부모의 마음에 대해서 많은 자각을 하게 됩니다. 그 전까지는 미성숙한 인간입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이 먹어도 애를 낳아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부모가 되어 보니까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중 자식들에게 파악된 것은 일부입니다.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니고 맘에 있는 것을 부모는 모두 표현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식과 부모 간에 논리적인 다툼이 되면 결국은 그 논리를 포기하는 쪽이 부모가 먼저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부모 속에는 자식은 부모의 마음에 그런 것이 없을 거다 라고 생각을 해도 부모의 마음속에 남아있습니다.
이번에도 세월호 이야기는 신문 넘기면 하도 눈물이 나와 가지고 이제는 그만 좀 보도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메이커 있는 운동화 신고 다니고 싶어 합니다. “엄마 애들이 다 메이커 운동화 신고 다니니까 나도 메이커 운동화 사줘” 메이커 운동화 가보면 알지만 여러분 비싼 것은 꽤 비쌉니다. 엄마가 사줄 형편이 안 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지 마라. 말표나 신고 다녀라.” 그랬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이스를 신든지, 아디도스를 신든지. 그런데 자식이 세월호에 빠져서 죽었는데 못 건진 모양입니다. 그게 마음에 너무 배겨서 그 메이커 운동화를 사다가 그 부두에 놓고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우는 것입니다. 제가 그 기사를 읽으면서 눈물이 막 났습니다. 자식은 그렇게 생각했겠습니까? “엄마 이것 좀 사줘.” “얘야, 난 너무 사랑하고 사주고 싶은데.” 눈물이 줄줄 흐르면서 “돈이 없어.” 우리 부모들이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야, 이 자식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헛바람 들어가지고 허영에 차서 아무거나 신고 다니지. 운동화가 무슨” 그러고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의 마음은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엄마가 그 순간 그렇기 이야기하며 돌아서서 얼마나 울었을까? 자식을 낳아보면 이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안합니다. 그러니까 사 달라고 간절히 원했는데 엄마가 “no” 하고 안 사줬다. 욕만 실컷 남았다. 이 기억만 남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그 마음속에 한이 됩니다. 그래서 죽었을 때에 그것을 사다가 놓고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우는 것입니다. 그런 감추어진 사랑이 여러분에게 상처만 준 것 같은 부모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도 자녀를 길러보면 알게 됩니다.
V. 적용과 결론
부모 자식 간의 상처와 고통은 대물림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마음에 맺힌 것을 풀어야지 영혼이 살고, 그런 측면에서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부모에게 순종할 때 주 안에서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번역이 잘못됐고 그냥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이 의미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불행과 시련이 와도 세상이 결코 꺾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이 세상이 그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뭐냐 하면 그 은혜가 하나님의 나라의 소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신 것을 무엇에 비교하면 되냐 하면 전쟁 나가는 군인에게 공급되는 군수품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옷부터 시작해서 별의별 군수품을 다 줍니다. 이게 뭐냐 하면 그것 받아가지고 어느 한 구석에 가서 까먹으라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은 왕국의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거꾸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은혜를 많이 받아서 가정에 갔는데 가정이 너무 상처투성이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엄마를 사랑할 수 없고 공경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쪽에서 보면 너무 불행한 환경 속에 여러분이 놓여있는 거지만 여러분을 문 삼아서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가 여러분의 가정에 밀고 들어간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여러분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희 가정이 제가 예수를 믿었을 때에 아무도 안 믿고 나만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동생을 전도했고 그러다가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예수 믿는데 15년 정도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쪽에서 생각 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막 지겹고 너무 힘든 불행한 환경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고 그것을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하시려고 은혜를 계속 부어주시려고 나에게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셨구나 라는 소명의 눈을 뜨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서 그런 가정에 시집을 가서 혹은 그런 가정의 자녀로 태어나서 예전에는 몰라서 못했습니다. 그냥 하고 싶은 모든 것은 뭐냐 하면 더 이상 이 상태가 악화되지 않고 부모와의 관계도 더 이상 기대도 안하니까 더 상처받지 않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뜻대로 안됩니다. 그래서 이제 시집갈 날, 장가갈 날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것은 분가입니다. 제가 26살 될 때까지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내 인생의 걸어온 모든 날들이 부모에 의해서 막 짓밟힌 날들처럼 기억이 되었습니다. 인생이 좌절을 느낄 때 깊은 고통,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난제 속에 들어가서 고통을 받을 때에 항상 나의 인생에 대한 내 기억은 영상처럼 백스크린으로 쭉 이렇게 페이드아웃 되고 그 다음에 이제 과거에 부모로부터 상처받은 일들이 이제 말하자면 클로즈업 되는 것입니다. 매일 똑같은 구도입니다. 그게 나는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생각을 안 하고 인간의 행과 불행의 문제가 부모와의 관계로 그것도 아주 어렸을 적 기억으로 되돌아간다 라고 하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을 영접하고도 한 2년, 3년 동안 그랬습니다. 제가 21살에 영접했으니까 한 5년 이상 그랬습니다. 은혜도 많이 받고 그랬는데 그 벽을 못 넘었습니다. 27살 되던 2월 달이었는데 겨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직장 휴가를 내고 집에 있다가 아침에 교회당을 찾았습니다. 아주 추운데 마루가 쭉 되어 있는 조용한 예배당이었습니다. 거기서 그 추운데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을 했습니다. 그 기도하러 간 것이 아닌데 갑자기 부모에 대한 생각을 마음속에 먹 물 붓듯 부어주셔서 떠오르는 게 뭐냐 하면 그것입니다. “얘야 네 부모는 너를 버렸다고 치자. 내가 너를 영접했잖니? 그것으로 보상이 안 되니? 무한한 사랑. 네가 잃어버린 사랑은 유한한 사랑이고 내가 너에게 대신 준 사랑은 무한한 사랑인데 보상이 안 되니?”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얘야, 네 엄마 아빠도 지금 너처럼 나를 알았더라면 너에게 정말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었단다. 낙심하지 말아라.” 그러면서 갑자기 마음이 녹아내리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냐 하면 태어나서 생전 처음으로 엄마, 아빠가 영혼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받은 상처만을 생각을 했는데 나의 그 어린 나이에 하나님도 모르는 체 그렇게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느라고 우리 엄마 아빠는 얼마나 고달픈 인생을 살았을까? 그러면서 부부싸움 하던 장면, 갈등하던 장면, 이게 카트, 카트, 카트 떠오르면서 그게 결국은 그 사람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더 이상의 삶을 살 수 없었던 비극에서 오는 당연한 삶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까 나도 계속 하나님 모르고 산다면 우리 아빠보다 절대로 더 나은 아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때는 결혼했을 때니까 막 밀려왔습니다. 그 후로부터는 한 번도 아버지를 미워한 적이 없습니다.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정말 황당한 일 많이 저지르셨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귀여웠습니다. 언제나. 너무 황당합니다. 경쟁적으로도 막 엄청난 손해를 입히고 나의 물질생활을 뒤흔들어 놓으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는데도 한 번은 25년 넘었는데 25년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교회에서 받는 월급이 30만원도 안될 때였는데 1700만원을 한꺼번에 빚을 갚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항상 귀여웠습니다. ‘아, 정말 예수님은 믿으시지만 정말 아버지가 철이 없으시구나.’ 그냥 그 정도지 상처가 되고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리고 행복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차피 망가진 세상에서 태어나게 하셨고, 우리 중 누구도 온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제 가족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 부모를 향해서 자기 상처 때문에 부모에게 더 이상 사랑과 공경을 하지 못한다는 변명은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마음에 안 드는데 부모도 똑같이 여러분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누가 뭐 어쩌고저쩌고 그럴 때 내가 항상 ‘너는 누가 마음에 든 적 있냐? 나도 솔직하게 얘기해서 너하고 친하지만 나도 너 마음에 안 든다. 거울을 쳐다봐도 나도 내 마음에 안 드는데 이 세상에 누가 그렇게 내 마음에 드는 게 있겠냐? 원래 인생이라는 것은 그런 거다. 그런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쿨 하게 인생을 살아야하지 이게 뭐 내 마음대로 안 되면 무슨 요절이 나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소명 이외에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원래 안 되는데 인생의 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예전에는 내가 그럴 수 있는 자원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그런 것을 주십니다. 한번 기도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니까 26년 동안에 받은 상처를 싹 지우고 떠오르기도 싫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보고 싶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고 실수를 했을 때에는 가슴에 한이 맺혔는데 이제는 귀엽게 느껴지고 하나님의 사랑의 자원이 불신자 때에는 그런 자원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래서 어떡하든지 부모님와의 관계를 극복하고 부모님 속에 감추어진 사랑이 여러분이 느낀 사랑보다는 훨씬 많다 생각을 하면서 그러면서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으로 공경하시기 바랍니다. 그 관계가 고쳐질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축복이 쏟아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고 할 때에 여러분이 비로소 하나님께 정말 간절히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부모와의 관계를 고치고 부모를 진정으로 공경해 보려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은 신앙적인 에너지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선택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정말 다시 한 번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상처를 좀 입고 인간이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고 그래서 하나님은 나에게 더 많은 용서와 자비의 은혜를 베푸셨는데 하면서 마음에 없는 일부터 먼저 해보십시오. 내가 얘기했습니다. 누군가가 밉고 보기 싫어질 때면 나는 그 사람을 위해 선물을 준비합니다. “나 좀 미워해줘.” 그래서 이제 아케이드에 가서 사고, 뭘 살까 막 이렇게 고르면서 스스로 치유의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 이 사람이 있어서 좋지.’ 그리고 이제 갖다 줍니다. 그러면 자기도 한 짓을 아는데 갖다 주니까 너무 부자연스러워하고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게 복수입니다. 그렇게 복수를 해서 막 쥐구멍을 찾게끔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이 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만 특별히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그 관계를 잘 극복해서 아빠가 며칠 안 보면 그립고 보고 싶고 엄마가 생각나는 그런 가정으로 여러분을 회복시키려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내와 남편(1)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골 3:1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장엄한 우주적 기독론을 담고 있는 골로새서의 마지막에서 사도는 가정에 관한 교훈을 적고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이 계명은 가정에게 주는 모든 권면 중 첫 번째 교훈입니다. 아내의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라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교훈이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교훈 뒤에 오는 것은 이 가정의 질서의 회복이 바로 이하의 모든 가족 관계의 형성에 기초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과 다음 주 두 번에 걸쳐서 아내와 남편,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설교하려고 합니다.
II. 아내와 남편의 관계
A. 남자와 여자를 만드심
그러면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써 산 사람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는 흙으로부터 왔고,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영혼 창조의 행위를 통해서 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육체와 영혼이 결합됨으로 그는 온전히 살아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흔히 말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흙이 아니라 히브리어 성경에 ‘아파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티끌’이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 전체에서 이 티끌은 존재의 미천함, 아무것도 아닌 무에 가까운 존재를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티끌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너희 인간은 위대하고 높으신 하나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연약한 육체를 지닌 인간임을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위대함은 육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그 육체의 생명, 곧 육체의 주인으로 삼으신 영혼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육체로서는 자연의 질서에 속해있고 영혼으로서는 천상의 세계와 맞닿아 하나님을 알고 이해할 수 있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자원들로 그 필요를 채우고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또한 천상의 자원들로 그 필요를 채움으로써 사람다운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는데 여자를 남자를 만든 방법과 꼭 같이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남자는 흙으로 빚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는 방법으로 창조하셨습니다마는 여자를 창조하실 때에는 다시 흙으로 또 다른 사람을 빚으신 것이 아니라 남자의 몸에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남자를 지배하도록 머리의 뼈가 아니라 남자에게 짓밟히도록 발바닥의 뼈가 아니라 남자의 보호를 받도록 품 가까운 곳에서 사랑을 받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서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남녀가 본래 한 몸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여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자의 몸에서 덕 입어 창조되었기 때문에 열등한 존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릅니다. 원재료로 말하자면 흙보다야 인간의 갈비뼈가 훨씬 고급 품질이 아닙니까? 더욱이 신제품은 구제품보다 그래도 뭐가 나아도 낫지 않겠습니까?
B. 서로의 필요를 채워줌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남자와 여자는 공통적인 인간의 본성을 소유하면서도 남자는 남자에게 고유한 특성을, 여자에게는 여자의 고유한 특성을 주어 둘이 함께 결합하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질서를 이루도록 의도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두 가지 명령과 관련이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그들에게 두 가지 명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종교 명령이고 또 하나는 문화명령 혹은 노동 명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종교 명령은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순종하며 살아야 할지를 규정하는 명령이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남녀의 구분 없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여야 할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화명령 혹은 노동명령은 좀 다릅니다. 이 명령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입니다. 첫 번째 나오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계명이 인류의 육체적인 번식에 관한 명령이라면 뒤에 나오는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는 것은 이 세계에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의도하셨던 질서를 구축하는 일입니다.
우리 남성들은 여성들을 신비한 눈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외모가 뛰어난 사람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도 신비한 눈으로 볼 필요가 있으니 이는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놀라운 특성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자들은 그 몸 안에 생명의 터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은 아담으로 부르셨지만 그의 아내를 하와라고 부르신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와는 곧 생명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자, 아무것도 없는 인간의 몸에서 남자의 생식을 통해 여자의 몸은 한 아이를 잉태하고 온전한 인간을 출산합니다. 이런 능력은 오직 여자에게만 있습니다. 물론 여자는 홀로 그 일을 할 수 없고, 남자의 생식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놀랍지 않습니까? 그 인산의 생식을 통해 이 안에서 거의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거기서 조직된 인간이 만들어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세계를 알고 인간을 돌보고 섬길 수 있는 의지와 지성을 가진 또 다른 개체가 생산됨으로써 인류의 번성을 이루어가는 놀라운 과정을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이런 놀라운 힘과 작용을, 특성을 여성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주신 이 명령은 남녀의 생식을 통한 인류의 번성을 명령하시는 것이었다면 뒤에 나오는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계명은 정확하게 남성성과 여성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정복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자신의 지배권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을 확장해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정복입니다. 이 일은 모험과 개척정신, 용기와 투지, 결단과 희생, 이런 것들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남성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뒤에 나오는 다스리라는 이 명령은 정복하라는 명령과는 좀 다른 명령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 단어가 ‘라다’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바로 자기의 나라를 덕으로서 다스리고 통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왕은 어떻게 해야지만 성군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모든 백성들에게 역사의 추앙을 받는 임금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그는 끊임없이 국민의 생명과 안정을 위협하는 적들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때로는 구군을 건 일전도 불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왕국의 안전을 위해서는 다른 나라를 침략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불가피한 경우에는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커다란 모험심을 가지고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고 그리고 미개척의 분야에 개척의 깃발을 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과감한 결단과 용기, 그리고 희생, 분투하는 노력, 그리고 위험을 무릅쓰는 도전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군주에게 요구되는 남성성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의 한 왕은 진정으로 남자이어야 합니다. 진정한 남성성을 가진 사람이어야지만 국가를 보호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 하나만으로는 성군이 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백성들에게 추앙을 받은 임금은 여성성을 함께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잠행입니다. 왕의 옷을 벗고 평범한 선비의 옷을 입은 다음 왕을 보호할 수 있는 무예가 뛰어난 몇 명의 종자들을 거느리고 그리고 대궐문을 나서서 저자거리에 가서 백성들이 어떤 일로 고통을 받고 아파하는지를 헤아리고 그 민심을 청취해서 그들의 흐르는 눈에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어머니와 같은 마음을 가질 때, 잘못된 나라의 질서들이 백성들을 끊임없이 아프게 할 때 그것들을 올바로 바로 잡을 수 있는 다스리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어머니의 심성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부성과 모성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탁월한 지혜와 사랑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 그 임금이 뛰어난 임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이 모든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사랑과 어머니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있어서 우리들을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시는 동시에 사랑과 자비로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인간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어떻게 하면 돈을 벌어서 큰 집, 넓은 땅을 소유할 것이냐에 관심이 많지만 여성은 작은 집이라도 앞뜰에는 무슨 꽃을 심고 그리고 건넌방에는 어떤 커튼을 두고 아이들 방은 어떻게 장식할 것인가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갖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남성성과 여성성을 완벽하게 갈라 놓으셨다면 아마 남편과 아내, 남성과 여성은 서로를 이해하고 교통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놀라운 의학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남성들에게서도 여성 호르몬이 나오고 여성에게서도 남성 호르몬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여자가 유난히 드세고 그리고 한가닥 하면 의학적으로 남성 호르몬이 많이 나오는 여자입니다. 남자가 곰살 맞고 뭔가 용기와 결단이 부족하고 아무리 나이가 많이 들어도 머리가 빠지지 않는 사람은 여성성이 풍부한 사람입니다. 이 두 가지를 절절히 비율을 맞춰서 하나님이 주셨는데 여성에게는 압도적으로 많은 여성 호르몬을 남성에게는 압도적으로 많은 남성 호르몬을 주셔서 그러나 각각이 서로 이성의 호르몬을 소유했기 때문에 여자에게도 성취와 도전, 의욕과 용기, 이런 것들을 주시고 또 남성에게도 그렇게 관계를 맺고 다스리고 돌보고 하는 그런 성품들을 아울러 주셨기에 둘은 서로 교통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B. 서로의 필요를 채워줌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이 처음 창조될 때부터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이기심과 죄가 없을 때에는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이 정말 재미있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충분히 사랑으로 교통하면 서로 다른 것이 서로에게 놀라운 만족을 주고, 그리고 그 사람과의 관계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재미와 도전 그리고 자신을 향한 반성을 서로를 통해서 촉진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랑이 부족하게 되면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은 서로에게 커다란 짐이 되고 갈등의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남녀를 다르게 창조하신 것은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의 다름을 깊이 인정하는 신앙이 요구됩니다. 특히 타락한 이후에는 서로의 다름을 용납할 수 없는 편협함과 이기심이 그들의 본성 속에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것을 통해서 상대방을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섬기는데 보람을 느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하기 전에는 다름이 온전함을 이루는 원인이었지만 그러나 타락한 후에는 그것이 갈등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연애할 때는 생각이 똑같은 것, 성향이 꼭 같은 것이 아주 즐겁습니다. “자, 오늘 우리 기분도 그런데 좋은 호텔에 가서 우아하게 식사를 하자.” 그리고 남자가 손을 내밉니다. 여자의 마음이 일치합니다. 그리고 하이파이브를 하고 호텔로 직행을 합니다. 물론 돈은 남자가 내니까 여자는 그 돈이 어디서 왔는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방금 현금 서비스를 받은 돈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나서도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여보, 오늘 기분도 그런데 최고급 호텔에서 저녁을 먹고 펜트하우스 최고 방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면서 하룻밤 자는 거야. 오늘이 결혼한 지 3년 2개월 되는 날이잖아.” 그리고 손을 듭니다. 이 여자가 하이파이브를 합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열심히 굶어야 합니다. 오히려 결혼생활을 하고나면 이런 사람이 훨씬 더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여보, 오늘 결혼기념일인데 어때 여보. 우리 밥하지 말고 저 한강이 보이는 호텔에 가서 우리 한 번 우아하게 식사를 하자. 내가 오늘 당신 호강 시켜줄게” 그러고 남자가 막 들떠 있을 때 “된장찌개나 먹어.”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지만 가정이 오래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하기 전에 사랑은 되니까 하는 사랑이지만 결혼한 후의 사랑은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사랑인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서로의 다름을 깊이 인정하고 그 다름을 받아들여서 ‘무엇인가 저 사람에게 결점이 보이면 저 결점을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인 내가 보충하라고 하나님이 나를 짝지어 주셨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지가 못난 걸 왜 내가 보충을 하지. 나도 모자라는데.’ 물론 자기는 모자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겁니다.
III. 남편에 대한 아내의 덕목
그래서 가정이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사랑 하나 가지고 안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너무 모릅니다. 그러면 뭐가 필요하냐 하면 사랑보다 더 필요한 것이 질서입니다. 그래서 질서와 사랑이 이 두 가지가 같이 있어야지만 이 가정의 진정한 행복이 오래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그 질서를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덕목을 복종하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희랍어 성경에 ‘휘포타쎄스테’라는 단어는 ‘휘포’, ‘under, 아래’라는 말과 ‘타쏘’ ‘배치하다, 정리하다, 균형을 이루다, 결정하다’ 이런 의미를 가진 동사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복종한다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남편 아래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밑에서 자신을 복종시켜 그 질서에 맞게끔 배치하고 정리하여 온전한 질서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A. “복종한다”는 의미
‘복종한다’라는 의미는 어떤 의미입니까? 아담이 타락한 후에 가정의 질서는 무너졌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고 이 유혹에 감염이 된 순간부터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가정의 질서는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언약을 맺은 종교 명령의 대상은 아담과 하와를 포함하는 모든 인류이지만 그 인류의 대표자는 처음 사람 아담이었습니다. 그런데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보았을 때 보암직하고 먹음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어야 되겠다고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질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물론 남편과 의논하고 남편의 허락을 받았다고 해서 범죄를 이룬 그의 행위가 정당화 될 수 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와는 아담과 한 몸이며 자신들이 하나님이 속한 가정의 질서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유혹받는 동안 망각했고 그리고 그는 독단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고 그것을 동일하게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이후로부터 이들은 타락하게 되었고 가정 속에는 질서가 허물어진 무질서가 도입되게 되었고, 그 가정의 무질서 속에서 수많은 불신앙과 반역의 마음을 품은 인류가 양산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은 그렇게 됨으로써 여성들은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동안 치욕스러운 억압과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여러분, 여성들이 인간으로서 겨우 대접을 받기 시작한 것이 20세기 와서의 일입니다. 민주주의에서 탁월한 발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미국조차도 여성이 참정권을 가진 것이 1936년의 일이었습니다. 실로 헤아릴 수 없는 긴 세월동안 남성 우월주의자들의 폭력과 억압 속에서 여성들은 박해를 받아왔고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아왔고, 심지어는 여성들을 노예와 같은 수준에서 집안의 물건처럼 취급하는 역사를 이 세상의 여러 나라에서 가지고 있었고 아직도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정해준 가정의 질서가 깨졌을 때에 그 결과가 얼마나 커다란 불신앙과 반역을 도입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이 명령은 우리에게 거부감을 주고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감히 여자들에게 남편에 대해 복종하라고 명령할 수 있냐 이것은 오늘날 시대정신과 전면적으로 배치된 것이라고 해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역사 속에서 보아온 남성에 의해서 여성들이 억압된 상황 속에서 여성들이 굴종하면서 살았던 그 비극적인 역사를 되풀이 하라는 명령이 아닌 것입니다. 이 복종은 노예적이고 인간의 폭압적인 완력에 의한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 이 복종하라는 명령을 하나님이 누구에게, 또 누구에 대하여 그렇게 말씀하시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하나님 없이 사는 막되 먹은 여성들 아닙니다. 그리고 집안에서 폭력을 행하고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그런 무지막지한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명령은 골로새 교회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의도하신 인간으로써 살아가려고 애쓰는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인 여성에게 그런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남자 성도들인 남편에 대하여 복종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기준이 교회의 질서와 가정의 질서를 세우는 역할을 하지 못할 때에 인간의 힘과 완력의 우위로 사람 중심의 질서들이 세워지게 되고 이렇게 될 때에 인간은 폭압과 강제에 시달리게 되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철저히 유린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남성 우위론자들에 의해서 이제까지 지탱되어온 역사인 것입니다.
늘 교회에서 결혼예식 순서지를 부교역자들이 만들어 주었고, 저는 그것 가지고 결혼 예식을 진행했었습니다. 어느 날 교역자 시간에 제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거 한번 서약문을 읽어봐라.” 그랬더니 교역자들이 “뭐가 잘못됐습니까?” “신랑 아무개는 신부 아무개를 아내로 맞이하여 일평생 가난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사랑하며” 이렇게 되어 있는데 뒤에 신부에게 물어볼 때는 “사랑하고 존경하겠느뇨?” 하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거는 뭐냐? 존경을 빼려면 둘 다 빼고, 넣으려면 둘 다 넣지 왜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기만 하면 되고 여자는 남자에게 사랑하는 것 같고 모자라고 존경까지 해야 되냐 그러니까 이게 구조 자체가 이미 남성 우월주의에 젖어있기 때문에 이게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남자 교역자만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여성 교역자들에게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남성우위론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있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스트가 보면 나 같은 사람은 사꾸라로 보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할 수 있는 한 성 평등주의자입니다. 그런 게 어디 있냐? 그래서 다 집어넣어서 오늘의 서약문이 나온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모든 것들을 고려하면서 성경 본문을 보면 의미심장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가정도 예외 없이 타락한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가정입니다. 거기에서 수많은 가정들의 균열과 깨어짐이 있었을 것입니다.
B. 하나님 사랑으로 복종함
그런데 하나님은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말하기 전에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먼저 명령하십니다.
예수 믿는 두 젊은 부부가 싸우는 것입니다 “당신 나한테 그렇게 밖에 못해? 성경에 뭐라고 되어 있냐? 만날 교회에 가서 울면서 기도하면 뭐하냐?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잖아.” 아내가 하는 말이 “아이고, 사랑만 해봐. 복종 안하나?” 남편이 발로 휴지통을 차면서 하는 말이 “복종부터 해 보래니까 사랑 안하나?” 사람 싸움이 아니라 개싸움입니다. 18절은 남편 읽으라고 쓰여진 성경이 아닙니다. 19절은 여자가 읽으면서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는 변명을 하라고 쓰여진 성경 구절이 아닙니다. 각자 여성들은 18절만 읽고, 19절은 없는 것처럼 하고 20절로 넘어가야 되고 남편은 18절은 없다고 치고 19절로 먼저 들어가야 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복종이라고 하는 것은 남성 우월주의자들이 폭압적으로 여성들을 다스리는 방식의 그런 식의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사랑의 관계에서 복종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얘기합니다. “남편이 존경할 만 해야죠.” 그러면 남편은 다니면서 뭐라고 그러냐면 “아내가 어디 사랑해줄만 해야죠.” 그렇게 말합니다.
가끔 젊은 자매들이 그럽니다. 얼굴색 하나 안 붉히고 “목사님 저는요. 학벌 같은 것 안 바래요. 돈 없어도 괜찮아요. 학교 좀 후진데 나왔으면 어때요? 고졸이어도 괜찮아요. 의사나 변호사면 충분해요.” 그것도 웃기는 거고 또 뭐라고 그러냐면 “목사님 저는 좋은 직장 그런 거 바라지 않아요. 제가 정말 존경할 수 있는 형제하고 결혼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이야기 했잖아요. 위인전의 전기를 읽으며 혼자 살던가, 30년 연상 중에서 한번 찾아보시던가, 30년 연상에서 찾아보면 가끔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한번 해 보시든가 그런데 그 사람이 좋아한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그런 훌륭한 사람이 그렇게 개념 없는 자기 같은 여자를 또 만나려고 하겠어요? 무슨 고생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600만 명이 나치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실은 더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끝난 후에 독일은 일본 같지 않았습니다. 물론 거기는 독일이 경제적으로 부강하고 산업을 다시 일으키면서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화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역사적이고 사회 경제학적인 요인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어쨌든지 간에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의욕이 없으면 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철저하게 사죄를 했고 지금도 용서를 비는 독일의 태도는 끝난 것이 아니라 진행형입니다. 그리고 천문학적인 액수의 배상금을 이스라엘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10원도 국민들에게 나눠주지 않았습니다. 그 돈을 오직 한 가지 사업에 모두 투자했습니다. 그 한 가지 사업이 무엇인지 아세요? 이스라엘은 농업을 할 수 없는 건조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그 천문학적인 액수의 배상금을 가지고 바둑판 모양으로 수로시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땅에서든지 씨를 뿌리면 농작물이 정말 잘 자랄 수 있는 말하자면 수리사업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스라엘의 재건과 부흥을 가져와서 오늘날 선진국이 된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가정의 질서를 세울 때 여성을 남성에게 복종하도록, 노예적인 복종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신앙적이고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신 커다란 경륜을 성취할 수 있는 방식의 질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질서에 복종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 끝없이 논과 밭이 평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는 비가 안 왔는데 그 위에 산에 비가 쏟아졌습니다. 자, 그러면 어떤 결과가 올까요? 어마어마한 비가 쏟아져서 충분히 이 논과 밭에 물을 댈 수 있는 양의 강수량이 내렸는데 그런데 물길이 없다면 그것은 홍수가 되어서 어마어마한 토사를 실어 나르며 상당한 양의 논과 밭을 파괴하고 저 아래에는 아예 물 한 방울 맛보지 못한 땅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관개 수로가 잘 되어 있으며 엄청난 양의 비가 내려도 그 물이 온 평야에 바둑판 모양으로 된 수로를 따라 흐르면서 모든 땅을 두루 적시지 않겠습니까?
남편과 아내가 만날 하는 타령이 사랑타령입니다. 그것 백날 해봐야 원한에 사무쳐서 죽는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죽으면서 아내를 불렀습니다. “여보, 내가 아무래도 못 살 거 같아. 금방 갈 거 같아.” 아내가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여보 왜 그러세요?” “마지막 유언을 남길게.” “뭐든 말해보세요.” “여보 나 죽으면 수절하지 마. 굳이 그렇게 외롭게 살 필요 없어. 나 죽으면 바로 시집가서 행복하게 살아” 여자는 막 너무 감동을 받습니다. 전혀 평생을 개념 없이 살았던 남편이 마지막에서야 철이 드는구나 하고 생각을 합니다. 남편이 손을 잡고 누구하고 결혼해야 될지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무개랑 꼭 좋은 가정 이루고 살아.” “여보 그 사람은 당신 사업을 망가뜨린 그런 나쁜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그래. 여보. 당신과 그 사람을 맺어주는 것이 내가 그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야.”
한 5년이나 7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여성도 한 분이 너무 곤고하게 사는 자기 친구를 불러서 일요일에 우리 점심이나 같이 먹자 그러고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기습적으로 우리 교회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때가 가정 시리즈를 설교할 때였고 이 여자는 남편하고 살다가, 살다가 지쳐서 이제 이혼을 결심하고 이혼 서류에 사인을 하고 남편에게 도장을 찍으라고 계속 요청하는 중이었습니다. 와서 중간에 앉았는데 하필이면 그날 설교 제목이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였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자매인데 그날 정말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펑펑 울면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갔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보지 못했으니까 모르지만 어쨌든 상황은 뻔 하지 않겠습니까? 남편을 부르니까 남편이 벌레 씹은 얼굴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마누라가 또 도장 찍으라고 부르는구나.’ 둘이 마주섰습니다. 아내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하더니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편도 몸을 이렇게 낮추었을 것입니다. “여보, 정말 내가 잘못했어. 모두 우리 불화의 원인이 나 때문이었어. 당신 너무 괴롭혀서 미안해”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이 뭐라고 그랬겠습니까? “여보 모든 게 내 부족 때문이야” 그럴 때 남편이 뭐라고 그랬겠습니까? “내가 얘기했잖아. 너 결혼할 때부터 부족한 여자였어. 그걸 이제 깨달았냐? 내가 맨날 그랬잖아. 니가 잘못한 거라고” 설마 그랬겠습니까? “아니야. 여보. 정말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당신을 너무 괴롭게 했어. 미안” 그리고 이혼 서류를 찢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사랑으로서는 그렇게 한 여자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갈등이 생기고 나면 그 다음에는 미움과 원망이 고개를 들게 되는 것입니다. 교통사고를 조사해 보면 100대 0의 사고는 거의 없습니다. 그 사고는 어떤 사고냐 하면 중앙선을 건너가서 마주 오는 차를 들이받아 버리거나 신호 정지 중인 차를 가서 쫓아와가지고 와서 들이박아 버리거나 그런 사고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고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8대 2, 7대 3, 4대 6, 5대 5 이런 식으로 판결이 납니다. 그래서 가정이 깨어졌을 때 여자들이 와서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물론 결정적인 잘못은 남자가 했을 수도 있습니다. 외도를 했다든지 아니면 폭행을 했다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엇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일들을 하게 만들었을까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으로부터 아내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결혼한 남자가 어둠 속에 외로워서 흘리는 눈물은 발등에 떨어지는 칼입니다. 왜 그렇게 만들어 두었을까요? 왜 그렇게 내버려 두었을까요? 무관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먼저 이 질서로 돌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아내들에게 이 질서로 돌아가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깨어진 가정이 회복되는 길은 사랑의 회복만이 아니라 질서의 회복이 필요하고 그 위에 사랑을 더하여야 합니다. 사랑 없이 질서를 강요하는 것은 인성의 파괴를 가져오고 질서 없는 사랑은 온전한 정신적인 일치를 이루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도,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것도 서로의 아름다움이 원인이라면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갈까요?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저는 외모의 아름다움보다도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하고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과 연애하고 싶다면 추천할 만한 사람이 있지만 그런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하면 중매를 설라고 해도 접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을 하려면 최소한 50년을 살아야 되는데 50년 동안 계속 영혼의 아름다움과 정신의 향기를 보여줄 수 있는 남자가 어디 그렇게 흔하겠으며 또 그런 탁월한 사람이 있다면 왜 저 같은 사람한테 장가를 가겠습니까? 더 나은 사람에게 갈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내가 실망시켜도 아내를 사랑하게 만들었던 하나님은 남편에게 실망을 끼치시는 법이 없습니다. 남편을 사랑해서 때로는 남편의 아름다움이 끝나는 그 지점에서도 남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어 주셨던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무궁하게 계속됩니다. 그래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 재물로 주셨음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만이 신적인 질서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가혹하게 악을 행했고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인간인 것처럼 짓밟고 폭압적으로 대했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시계추는 이제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가게 되었고 그래서 이제는 남편이 아내에게 박해를 받고 폭압적으로 타박을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많은 가정 속에서 이 불행한 일들이 계속되고 있고 엄청난 폭력과 폭언에 시달리는 여성들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사는 가정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결혼하는 형제자매들에게 늘 말합니다. 특히 자매들에게 “형제가 폭행을 하면 일단 감옥에 집어넣고 그 다음에 목사님과 상의해서 결정하자.” 일단 감옥소에 집어넣어야 됩니다. 그리고 콩밥을 먹이면서 그 다음에 다음 일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러한 폭력을 참는 것은 아주 더러운 굴종이고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입니다. 그런 남편은 벌을 받아야 됩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그런 것들이 정신적인 습관이 되어서 가정을 파괴하고 짓밟는 것은 그것은 정신적인 질병이고 청교도들은 그런 사람들의 이혼을 관대하게 허락했습니다. 형제들도 잘 들으십시오. 그런 폭력을 포기해야 됩니다. 차라리 폭력을 끊을 수 없으면 손을 댓돌위에 놓고 도끼로 끊어버려야 합니다. 어디서 그런 행동을 합니까? 더군다나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반대의 시계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여성들의 힘이 의외로 강해졌습니다. 특히 젊었을 때에 남편에게 권력이 많았습니다. 젊음도 있고 돈도 있고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힘도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하나씩, 둘씩 다 잃어버립니다. 그러고 나면 그런 것들을 가지고 아내에게 폭압적으로 군림했던 대가를 치르게 되는데 그게 바로 보복입니다. 남성들이 너무 불쌍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는 이달 월급이 얼마인지도 모릅니다. 사장님이 아내의 통장으로 보내줍니다. 그러면 가서 용돈 좀 달라고 손을 내밉니다. 그러고 대부분의 남자들이 삽니다. 그런데 젊어서부터 자기가 언제인가는 이 권력도 잃어버리고 힘을 상실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아내와의 관계를 사랑으로 돈독하게 해서 아내가 나 없이 살 수 없는 그리움의 사람이 되게 하면 최대의 보험을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험료를 이 남자 인간들이 잘 안냅니다. 특히 젊었을 때에는 안냅니다. 젊어서부터 내야지만 이 보험료가 저렴한데 이게 늙어서 한꺼번에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복을 당합니다. 어느 날 남편이 아주 너그럽게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결혼기념일인데 내가 뭐 해줄까?” 약간은 거만한 기가 섞여있었습니다. “뭐. 뭐해줄까? 바라는 게 뭐야? 차 바꿔줘? 다이아반지 하나 큰 거 사줄까?” “여보 나는 그런 거 싫어” “뭐야 그럼. 다이아반지도 싫고, 차도 싫고. 뭘 줘? 외제차?” “싫어. 나는 꼭 하나 원하는 게 있어. 이혼” 남편의 말이 걸작입니다. 한참 생각하다가 “안 돼. 그건 너무 비싸.”
50대 60대, 70대, 80대 남성이 노인 요양 병원에서 만났습니다. 전부 타박상을 입고 심각한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당신들 같이 넷이 모여서 당신 왜 그랬냐 그랬더니 모두 아내에게 폭행당했습니다. 왜 그랬냐 그랬더니 50대가 나는 잘못한 것도 없고 아침에 아내가 예쁘게 화장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하도 궁금해서 “여보 오늘 어디가?” 그랬더니 때리더랍니다. 60대 먹은 사람이 “맞을 짓을 했구만. 어떻게 감히 그 나이에 아내가 가면 가시나보다 하지 그것을 물어볼 수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왜 맞았냐고 그러니까 “나는 그러지도 않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밥을 안 주길래 여보 아침 좀” 했더니 줘 패더랍니다. 70대가 하는 말이 “정말 당신들은 개념이 없구나. 어떻게 아침에 일어나서 아내가 밥을 차려줄 생각을 하냐? 주면 먹고 안 주면 굶어야지.” 그러면 그렇게 착한 당신은 왜 맞았냐? 그러니까 나는 아무것도 안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냐고 그러니까 아침에 눈을 떴는데 그냥 때리더라는 것입니다. 80대 먹은 노인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럼 할아버지는 왜 맞았어요?” 그러니까 “아니 당신도 정말 개념이 없다. 어떻게 아침에 아내가 옆에 있는데 아내 보는데 눈을 뜨냐? 나는 아내가 완전히 바깥에 나간 다음에 눈을 뜨고 나온다.” 그런데 왜 맞았습니까? 그랬더니 왜 아내가 아침에 일어나더니 갑자기 자기 코에다가 귀를 대더랍니다. 그러고 숨 쉬는 소리를 들은 다음 때리기 시작하더랍니다. 영어에 조크(joke)와 가십(gossip)은 다릅니다. 조크는 그냥 웃고 끝나면 아무것도 없는 게 조크입니다. 그런데 가십은 막 뱃살을 잡고 웃다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 가십입니다. 이것은 조크가 아닙니다. 막 웃다가 우리 모두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한 2년 전에 50대 아주머니들 사이에 카카오 톡을 통해서 광범위하게 전파되던 남편 세일즈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그 시리즈 중에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남편을 팝니다’ 입니다. 그 중의 하나를 읽어보았습니다. ‘남편을 팝니다. 구입한지 30년 됐는데 아직 쓸 만합니다. 월수입은 4000만원인데 알코올 값이 2000만 원정도 들어갑니다. 아직은 수리비가 크게 들지 않고 있습니다. 이게 병원 안 다닌다는 뜻입니다. 일주일내에 사 가시는 분은 사은품도 드립니다. 사은품 시어머니.’ 자기들끼리 돌리면서 깔깔 대고 웃는 것입니다. 그것을 들으면서 무엇인가 우리가 이렇게 가슴속에 흐르는 어떤 눈물 같은 것을 느낍니다. 나는 그 아주머니들과 한 짝도 아니고 우리 아내가 어디다 매각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남편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사회 전체 속에 흐르고 있는 슬픔을 봅니다. 그래서 먹먹해집니다.
어느 날 송호근 교수의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라는 책을 사서 한 번에 끝까지 다 읽었습니다. 읽으면서도 역시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이것이 50대를 지나는 우리들이구나.’ 권력의 사용은 허무한 것입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에게 무엇인가 남에게 없는 힘이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서 보복을 한다고 쳐도 잠시 후면 그들도 그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에게 대한 복종은 남편의 사랑이나 남편의 위대함 때문에 복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질서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낮은 자리에 자신을 두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발견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확고히 설 수 있는 아내가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는 너무나,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밤 잠들어 있는 남편을 혹은 젊은이들은 아버지를, 특히 딸들은 아버지를 가서 보십시오. 자, 이미 벌써 40대가 다 넘었고 50대가 지납니다. 자는 그 모습이 평화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저녁 남편이 집에 와서 괜히 짜증을 내고 일찍 들어가서 이불 뒤집어쓰고 잔다고 하는데 하루 종일 기다린 가족들에게 저 따위 태도밖에 못하나 하고 섭섭한 마음이 들지만 어쩌면 그 남편은 오늘 오전에 해고 통보를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해고의 위협에 직면하고 어느 정도 지위를 가진 사람은 아랫것들이 치고 와서 이리저리 시달리고, 실적 때문에 고통을 받으면서 퇴사의 압력을 받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모든 것들 중에 집에 와서 30%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선하게 해석하게 하는 경향성입니다. 사랑을 하면 그 해석이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자면서 이빨도 갈고 잠꼬대도 합니다. 그리고 이제 서서히 죽음의 기운이 남편의 육체 속에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친구들이 하나씩, 둘씩 떠납니다. 그때에 느끼는 말할 수 없는 고독감, 아이들도 아빠에게 그렇게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아빠는 구걸하듯이 애정 표현을 해 달라고 매달리고 다니다가 결국은 끝납니다. 사회에서도 능력이 없으면 차갑게 거절당합니다. 그리고 아내와의 관계도 서먹합니다.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묻는데 답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을 견디면서 가족들에게 한없이 사랑해 줄 수 있는 남자가 어디에 있을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더욱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지도 않습니다. 가정의 질서는 다 깨졌고 그 속에서 무능하고 의사소통이 안 되고 기계 하나 만질 줄 모르고, 현대 생각에 한없이 뒤쳐진 인생의 패배자 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자신은 일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가족 중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화되면 그런 남편을 재해석 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아내인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상처도 많고 시련도 있을 것입니다. 또 아버지를 둔 딸들에게, 그리고 아들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 남편의 슬픔이나 고독, 그런 거 모릅니다. 또 여러분은 아내로서의 외로움과 고독을 몰라준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계속 평행선을 달리는 인생의 태도입니다. 누군가가 한번 그것을 허물고 ‘난 괜찮아, 난 아무래도 좋아.’ 그렇게 허물고 자기를 부정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 남편이 이런 속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힘들고 마음 둘 곳이 없었을까? 그리고 직장에서도 짓밟히는 자존감이 가정에 와서도 짓밟혔으니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 찾을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남편을 긍휼히 여기고 가족들이 품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한번 관계가 깨지고 서먹했으면 한번 다가가 보십시오. 무릎을 꿇을 정도로 잘못한 것이 없다면 따뜻하게 사랑을 표현하고 그리고 섭섭하게 한 것이 있다면 시간이 지났지만 사과한다고 용서를 빈다고 사랑한다고 한번 말해보세요. 그것이 질서로 돌아가는 일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실 때 그 질서의 물길을 따라 사랑은 흐르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성경은 오늘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고 말합니다. “아네켄”이라는 단어인데 “적합하다, 꼭 맞다, 어울린다, 일치한다” 이런 뜻입니다. 무엇에 어울리고 무엇에 적합하다는 뜻입니까? 하나님이 가정을 만들 때에 그 가정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목적이 성취되는 그 일에 어울린다. 무엇이?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그 일이 노예적이고 폭압적인 복종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이 세우신 가정의 질서로 돌아가는 것, 세상의 정신은 우리에게 독립하라고 요구하고 너의 행복을 위해서는 자식도 버리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젊은 날에 남편에게 당했으면 늘그막에 남편에게 보복하며 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때로는 남편은 나에게 상처를 주었어도 하나님은 상처를 능가하는 사랑을 아내들에게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에게 지은 죄보다 더 큰 허물을 매일매일 용서해 주심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가족들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그 안에서 누구도 소외되고 외롭지 않도록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그 가족을 아버지를 혹은 남편을 칼로 조각해서 자기가 원하는 모습을 만든 후에야 사랑하고 존경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사회적인 지위나 소유의 유무에 상관없이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서 존귀하고 가치 있으며 소중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안 성도들의 삶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 인간이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를 이웃에게 보여주면서 사는 그것이 최고의 선교이기 때문에 이런 가정의 질서와 사랑이 회복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사랑의 질서로 돌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내와 남편(2)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어서 사도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덕목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골로새서는 어떻게 인간의 죄 때문에 망가진 세상이 그리스도를 다시 머리로 하여 창조시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타락한 인류의 우주적인 회복과 세계의 완성을 위해서 오늘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남편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아내, 아내와 올바른 관계를 맺는 남편, 부모와 올바른 관계를 맺는 자녀, 자녀와 올바른 관계를 맺는 부모, 피고용인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고용주와 또 반대편에 서 있는 고용인의 삶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이바지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질서와 사랑으로 요약이 됩니다. 이런 질서와 사랑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각각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자리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 때에 이것을 통해서 자녀들은 아내의 역할과 남편의 역할을 배우는 것과 더불어 참 인간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익히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사회를 형성하게 되고 이렇게 함으로써 이제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세상을 완성하는 일에 종자 씨로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이바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저는 두 주에 걸쳐서 이 짧은 본문을 설교하려고 합니다. 남성들은 불평할 것입니다. 왜 앞 절은 한 주에 끝내고 뒷 절은 두 주에 걸쳐서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내 맘입니다.
II. 아내에 대한 남편의 덕목 1: 사랑함
아내에 대한 남편의 덕목을 사랑함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사랑하라고 번역된 이 성경 본문의 희랍어 원문입니다. 희랍어 원문에는 ‘아가페테’라는 명령형 동사가 사용이 되었는데 ‘아가파오’라는 동사에서 온 것이고 여기에서 온 명사가 바로 ‘아가페’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사랑이라고 번역되는 이 말이 당시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로마 사람들에게는 어떤 관계의 사람이냐에 따라서 네 가지 단어로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남녀상열지사를 이르는 사랑은 에로스라고 이해했고, 형제간의 사랑은 필리아라고 이해했으며, 부모 자식 간의 혈연적인 사랑은 스톨게라고 사용했고, 아가페는 신에 대한 인간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아가페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한 인간에 대한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에로스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했으니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이 명령은 대단히 의미 있는 것이었을 것이고, 교회 밖에 있는 당시 로마 사회의 불신자들에게는 더더욱 이 명령형은 생경스럽거나 충격적인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A. 로마사회와 아내
이해를 위해서 잠시 여러분을 데리고 로마 시대의 사회와 아내의 위치로 데려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는 기본적으로 가정을 단위로 하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일찍부터 가정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그 가정이 견실하고 확고한 질서의 토대 위에 놓여질 때에 그 가정들이 집합체로 모여서 피라미드와 같은 안정된 국가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이들의 교육과 그리고 부부사이의 질서를 확고히 하는 일에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제까지 로마 사회에 대해서 이루어진 전통적인 연구에서는 로마의 가정을 기본적으로 대가족 사회이고 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이해를 하였습니다마는 현대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획일적인 구조로 로마의 가정들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핵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그런 풍조들도 꽤 많이 있었고 커다란 공동체가 아닌 남녀 간의 사랑을 중심으로 뭉쳐진 그런 작은 단위의 가족에 대한 관념들이 로마 사회에도 상당부분 존재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서신이 쓰여지던 주후 1세기경에는 골로새 지방만이 아니라 모든 로마 전역에서 철저한 남존여비의 사상이 제국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이해라든지 가정의 질서라든지 사회의 구조라든지 하는 모든 것들은 남성 중심의 이해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남성은 힘과 권력, 그리고 외부적인 힘을 가지고 가정을 규율로 통제하고, 그리고 자녀들을 복종시키고, 그리고 올바른 시민 교육을 시키는데 이바지하고 아내를 그 철저한 규율 속에 복종시킴으로써 가부장적인 체제를 가정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 이상적인 가정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의 역할은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자녀를 생산하고, 가사를 돌보고 그리고 청결하고 그리고 말이 많지 않고 침묵하고, 그리고 겸손하고 무엇보다도 순결을 지키는 여성이 높은 덕목을 가진 여성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 아내가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서 공공의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 거기에서 자기 의견을 발표하는 것은 남편을 매우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과학의 역사나 예술의 역사 혹은 문학의 역사를 보더라도 유럽 사회에서 19세기까지 천재적인 여성들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여성들에게 그런 천재성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가정 바깥에서 그것을 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성들은 남성보다 열등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는데 이 모든 것들이 로마 시대에 있었던 여성 인식을 계승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것입니다. 학계에 의하면 주후 1세기 경 로마시대에 로마시민의 평균 연령은 25세였습니다. 대부분 25세면 세상을 떠났고 그보다 일찍 떠나는 사람이 절반, 그보다 늦게 더 사는 사람이 절반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여성들, 가임기에 있는 여성들이 많이 죽었는데 아이를 낳다가 죽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속에서 여성들의 위치는 매우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할 때에 아내도 여성이니까 사랑의 대상이 되었겠지만 그러나 이런 모든 사회의 당시 배경을 살펴볼 때에 로마의 평균적인 시민들은 아내를 아가페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내는 남편에 의해 얕잡아 보이고 그리고 위협당하고 강박을 당하며 때로는 폭력에 의해 피해를 받으며 다스려져야 하는 존재로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사도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할 때에 “아가페테”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로마 시대의 사회적인 정신에 저항하며 무엇인가 로마 사회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가정의 새로운 질서와 모습을 이루도록 소명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보면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번역되었고, 아내에 대해서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되었기 때문에 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이 자녀의 부모에 대한 복종보다 훨씬 더 강압적이고 위협적인 것이라고 이해를 합니다마는 희랍어 성경으로 보면 전혀 다른 반대의 해석이 나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할 때에는 ‘아쿠오오’라는 동사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잔말 말고 복종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여자인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할 때에는 ‘휘포타쏘’라는 동사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어떤 질서 속으로 들어간다는 어떤 의미에서의 순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볼 때에 이제 아내를 깔보고 얕잡아 보고 위협하고 강박으로 다스리던 당시의 사회의 분위기에 저항하면서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세계의 완성을 향해 살아갈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정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사도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B. 사랑: 성향과 행위
그러면 남편들을 아내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할 때에 그 사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사랑은 성향과 행위에 있어서 어떤 것을 뜻하고 있을까요?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랑은 타자와 끊임없이 관계를 갖고자 하는 영혼과 정신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사랑은 영혼의 경향성이고 그리고 이 경향성이 마음에서 나타날 때에는 성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현상적인 측면에서는 끊임없는 인간의 관계성과 연관되는데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이성에 속한 문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을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고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감정으로만 보는 것은 그리스적인 사유의 산물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은 그리스 철학에서도 사랑을 단순한 감정의 산물이라고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정적인 요소를 훨씬 중시하는 것은 사실인데 그것도 철학자에 따라서 각각 다릅니다. 오히려 성경적으로 볼 때 이 사랑은 이성과 감성 전체에 걸쳐있는 전인적인 영혼의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유교에서 이루어진 사단 칠정론 혹은 이기설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설교 시간에 이 많은 내용들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이 성경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필요한 만큼만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단칠정이라고 하는 것은 일곱 가지의 정과 네 가지의 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단이라고 할 때 단은 끝을 가리키고 칠정이라고 할 때 정은 인간의 정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유교에서는 인간을 인의예지의 덕 자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인간은 인의예지를 이룰 수 있는 가능태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고 사랑하고 사느냐에 따라서 인의예지를 이룰 수 있는 위대한 존재가 될 수도 있고, 짐승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타락한 존재도 될 수 있다는 것이 유교의 사람관입니다. 사 단은 이성의 속하는 작용이고 칠정은 인간의 감정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성만 있고 감정이 없는 인간도 삶을 영위할 수 없고, 또 이성이 없이 감정만 출렁거리는 인간이 영위하는 삶은 진정한 의미에서 삶이라고 말할 수 없는 동물적인 생존입니다. 사 단은 네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불쌍한 사람을 보며 가엾게 여기는 측은지심, 수치스러운 일을 만났을 때에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수오지심, 그리고 분에 넘치는 무엇을 받았을 때 그것을 사양할 수 있는 사양지심, 그리고 옳고 그른 것이 혼재할 때에 그것에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시비지심, 이것이 사 단입니다. 단은 끝이라는 의미인데 이러한 측은지심과 수오지심, 염치를 아는 사양지심과 시비지심이 이성의 맨 끝에서 불이 붙듯이 그것이 터쳐서, 불이 피어서 실제로 불쌍한 자를 측은히 여기는 자비로운 행동을 할 때,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판단이 섰을 때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행동으로 보일 때, 염치를 아는 자기 자신의 교양을 무엇엔가 사양하면서 그것을 실제로 실천할 때, 오류와 진리 사이에서 올바른 것을 실제로 구별하여 용기 있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 이때에 측은지심은 인을 이루게 되고, 수오지심은 의를 이루게 되고, 사양지심은 예를 이루게 되고, 시비지심은 지를 이루게 되어서 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이 맹자에 나오는 이론입니다. 이 인의예지가 따라서 인류를 참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대의라고 보았고, 한 나라 시대에 와서 동중서는 이 네 가지로 부족하니 신 하나를 더 붙여야 된다 라고 해서 오상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 후에 삼강오륜 같은 윤리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바입니다. 자, 그러면 동양철학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사랑을 이성의 작용에다가 두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인간의 삶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이 어떤 방향으로 자신을 설정하는가에 따라서 이 아래에서 인간의 희로애락 수오욕의 감정이 출렁거리면서 그를 이런 삶으로 이끌기도 하고, 저런 삶으로 이끌기도 하는 것입니다. 자, 이런 통합적인 측면에서 사랑을 본다면 결국은 사랑은 이성의 작용만도 아니고 감정의 작용만도 아니고 이성과 감정 사이에 걸쳐있는 영혼 전체를 포괄하는 작용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놓고 본다면 사랑은 단순히 마음이 움직이니까 하는 사랑이 그것만이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랑을 감정 측면에서만 본 것이고, 그런 것이 없어도 사랑을 해야 된다는 것은 그것은 이성의 측면에서만 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결혼을 하기 전에 사랑에 빠져 연애를 할 때에는 서로를 사랑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침에 깨고 나면 그 사람 생각이 나고, 만나고 돌아서면 보고 싶고 저녁에 되면 낼 아침에 만날 텐데 그립습니다. 그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즐거움이고 망설여지지 않습니다. 이런 사랑은 되니까 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후에 남편과 아내가 살아갈 때에는 이렇게 되기 때문에 저절로 사랑이 되는 때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많은 경우에 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만난 여성도들 가운데는 결혼한 지 10년, 15년이 넘게 흘렀는데도 남편의 목소리만 들리면 가슴이 설레고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 얼굴이 붉어진다는 여성들을 여러 명 만났습니다. 남자는 한 명도 못 만났습니다. 사랑의 원인이 수반 물리학에서 도파민이라고 본다면 도파민의 유효기간은 18개월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의 임기를 18개월로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되니까 사랑을 해야 되는 때도 있지만 해야 하니까 하는 것도 사랑인 때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바로 결혼할 때 그렇게 꿈꾸지 말고 쿨하게 하라는 이유입니다. 반쯤은 사랑이 되는데 그것도 괜찮은 남자를 만나야 그게 가능한 것입니다. 반쯤은 사랑이 되는데 태반은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면 여성만 그렇겠습니까? 남성은 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여기에서 우리는 결국 이 사랑의 원천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라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연 상태로 인간을 내버려 두면 수반 물리학자들은 그것을 겨우 18개월 정도라고 보는데 그것도 예민도가 떨어지는, 민감도가 떨어지는 사람은 그 이하일 수도 있고 나은 사람이라야 좀 더 길어질 수도 있는데 결국 권태기라는 것은 그렇게 해서 찾아오는 것입니다.
부부가 살아가는 것이 참 재미있는 게 18개월, 난 그래도 18개월은 더 갔습니다. 그러다가 권태기가 느껴집니다. 아주 후하게 잡아서 한 3년, 4년 정도 쯤에 권태기가 슬슬 온다고 칩시다. 이제는 서먹해지는데 아이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아이 태어나면 사실은 아내하고 같이 있을 시간도 없고 아내는 모든 정신을 아이에게 다 빼앗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아이를 가운데 놓고 대화가 이루어져서 이 애가 징검다리 역할을 해 주는 것입니다. “여보 얘가 웃었어, 아니면 얘가 걸었어.” “오 그래?” 그러면서 아이를 징검다리로 해서 부부간의 소통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가 자라면서 모습을 보면서 너무 예뻐. 이제는 예쁜 기운이 사라질까 하면 둘째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럼 또 재미있습니다. 그러다가 세 번째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면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에로스 사랑의 어떤 뜨거운 가슴 설레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그냥 친구 같은 그런 감정이 흐르고 진짜 식구가 된 것 같은 가족과 같은 관계들이 흐르게 되는 끈끈하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말은 이렇게 쉽지만 수많은 갈등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때에 어떻게 이렇게 결함이 많은 아내를, 결점이 많은 아내를 될 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되지 않을 때도 사랑하며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고민을 하면서 우리는 아가페와 까리따스에 대한 이해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C. 아가페와 까리따스
성경은 사랑의 원천이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자기 독생자를 화물재물로 주셨음이라”고 말입니다. 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셨으니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안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셨기에 사랑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사랑으로 인류를 창조하셨고, 창조된 인류와 영적인 관계를 맺고 가족과 같은 사랑 속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이유였습니다. 온 인류를 하나의 사랑으로 묶으시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래서 하나님이 한 사람만 흙으로 만드셔서 당신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질적인 격차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후로는 모두 그 인간의 몸의 일부를 취하거나 혹은 생식을 통하여 한 사람 안에서 모든 인류가 태어나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향하여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 고백은 남녀의 사랑의 고백이 아니라 온 인류가 그런 사랑을 하나님 안에서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누면서 공존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인류는 타락했고 이로 말미암아 사랑하여야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찢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찢어짐은 극단의 미움과 시기심으로 나타났고 그래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대신 서로는 서로에게 찌르는 칼이 되었고 화살이 되었습니다. 이런 관계를 고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자비와 사랑, 용서를 베푸셨고 하나님의 이 사랑을 더 이상 인간에게 보여줄 수 없는 찬란한 방법으로 보여주셨으니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도성 인신인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을 통해서 그리고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사시고 마지막에 십자가 못 박혀 죽으셔서 그들을 대속하기까지 희생하심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현현이 되셨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되 그 기준이 어떠해야 할지를 절망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너희도 아내를 위하여 그렇게 하라”고 말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가능하기나 한 명령입니까? 여성들은 앞 구절을 보면서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남편들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느냐고 투덜댈지 모르지만 남성들은 더 가혹한 명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별로 되지 않을 때에도 마는 인간을 사랑하되 체면을 치레하는 정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자기의 생명을 버리신 것까지 그렇게까지 아내를 사랑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는 남편이 가련하지 않습니까? 누구도 어떤 남편도 이 기준 앞에서 아내를 충분히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담대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자신을 주셨고, 그리고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정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고, 그리고 그 교회를 온전하게 하기 위하여 무흠한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하여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서 재물로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이런 사랑의 계획과 의도를 생각하게 되면 남성들은 자신이 부름 받고 있는 이 높은 아내 사랑의 기준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속을 위해 희생하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한 우리들을 돌보시고, 돌본 우리들을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용서한 우리들이 온전케 되기까지 지금도 교회를 사랑하기를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진정한 결혼의 정신은 이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만나 아내의 희생을 딛고 자신의 꿈을 성취해야 되겠다거나 혹은 아내의 희생을 발판삼아 자신의 비전을 성취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결혼관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편은 아내를 만나 그의 허물과 잘못, 그리고 그의 나쁜 것을 발견할 때마다 ‘아 저 사람이 나를 만나지 않고 저런 상태에서 일평생 살았을 사람인데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만나게 해 주셔서 저 아내의 모자라는 것들을 나로 하여금 보충하게 하기 위해서 이 여자에게 붙여주셨구나’라고 생각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무한히 사랑하시는 것이 가능했지만 우리는 그런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아내의 결점과 결함, 심지어 오류와 악을 발견하면서 그것이 바로 나를 이 여자의 아내로 붙여주신 이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남편의 희생을 요구하는지를 생각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랑으로 그것을 성취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깨달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남편들에게 결함이 많은 아내를 붙여주시고 아내들에게는 또 결함이 많은 남편을 붙여주셔서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참되게 아내를 사랑한다면 아내의 결점과 결함을 볼 때에 가엾은 마음이 들 것이고, 바로 이런 결점을 보완하여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갈 수 있다면 내 아내가 그런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항상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결점들을 잘 이해하고 약점으로 알고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으로 약점을 지적하면 자신을 비난한다고 반격하기 일쑤이고, 또 자신을 향한 사랑이 식었다고 비난을 일삼습니다. 이런 속에서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향해 베푸신 사랑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가 이 결함이 많은 이 여자를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아무리 어렵고 많은 희생을 동반한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대역의 죄를 지은 나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당하신 고난보다 크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기 어려운 아픈 아내를 발견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시는 고난을 기억하면서 오히려 아내와의 관계를 통해서 생겨나는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경건의 기회로 삼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못된 아내들도 많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어떤 교육을 받으며 살아왔는지 한 번도 그놈의 성질 머리를 죽여본 적이 없는 여자들도 있고, 시집오기 전에 자기 집안에서 버릇없이 자란 그것을 가정에서 남편이 모두 받아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못된 아내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일 좋은 것은 첫 번째 고를 때 신중하게 선택하셔야 됩니다. 그러나 일단 선택한 다음에는 유효 기간이 없습니다. 반품 기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운명이라고 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정말 아내를 향해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더군다나 그 아내가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을 때 그리고 아프게 하였을 때 그리고 폭언으로 혹은 폭력으로 자신에게 수치심을 안겨주었을 때 그때 남편은 외로움을 느끼게 되고 이제 이 여자와의 관계를 여태까지 붙들고 있던 이 관계의 끈을 놓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의 특별한 도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남자들이 그런 갈등 속에서 아가페의 사랑으로 끝까지 아내를 사랑하기를 포기하면서 사는 남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남자들이 모여서 서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중의 한 친구에게 다른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아참 지난주가 자네 결혼 20주년 아니었어?” “아 그랬지.” “그래 참 아내에게 선물을 좀 해줬어?” “어 해줬어” “뭐 해줬는데?” “그냥 다이아반지 웬만한 거 하나 해줬어.” 친구들이 “와” 그랬습니다. 그 중의 한 친구가 이야기했습니다. “왜 그랬어? 너의 아내는 몇 번씩이나 우리 있는 데서도 결혼 20주년 기념으로는 지프차를 선물 받고 싶다고 그랬잖아.” 그 친구가 대답했습니다. “맞아. 그랬지. 그렇지만 이 사람아, 어디에서 지프차를 가짜를 구하겠니?” 아직 무슨 소린지 저 뒤 쪽에서는 이해를 못했습니다.
결혼 10주년을 맞은 친구에게 또 다른 친구가 물어보았습니다. “결혼 10주년 때에 자네는 아내에게 무엇을 해줄 거야?” “늘 아내가 집에서 살림하느라고 고생만 했기 때문에 호주 여행을 시켜줄 거야.” “와, 10년 선물치고는 너무 센 거 아니야? 와 대단하다. 그럼 20주년에는 무슨 선물할건데?” “데려와야지.”
이런 가십을 들으면서 우리들이 웃습니다. 이렇게 돌아서면서 그냥 마음이 개운하지 않고 뭐가 부유물 같은 것이 마음에 남습니다. 그게 가십입니다. 골프를 치던 어떤 사람이 정말 못 칩니다. 이번에도 공이 저 수풀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짜증을 내면서 투덜대며 걸어갔는데 요정이 나타났습니다. 딱 나타나서 “내가 하늘에서 당신을 봤는데 당신 참 괜찮은 사람이더라. 그래서 내가 감동을 받았고 당신의 소원을 세 가지 들어주기로 결심했다. 지금 말해라. 그 대신 네가 자신에 대해서 무슨 복을 빌든지 아내는 두 배로 받는다.” “좋습니다.” “그래 뭘 원하니?” “요정님 골프 좀 잘 치게 해 주세요” “왜?” “오늘도 보세요. 친구들하고 다 부부가 편먹고 우리가 꼴찌인데 만날 때마다 꼴찌입니다. 정말 창피합니다.” “그래? 그러면 타수를 내려줄게. 너 잘 치게 해 줄게. 그 대신 네 아내는 너보다 두 배 잘 친다.” “문제없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합산하는 거니까” 그래서 골프를 잘 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소원이 무엇이냐 그랬더니 “저를 백만장자 만들어 주세요.” “그래? 너는 백만장자가 되고 네 아내는 이백만 장자가 된다.” “문제없습니다.” 그 다음 요정이 기절할 질문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니?” 한참의 침묵을 깨고 숲속에서 이 남자는 요정의 귀에 속삭였습니다. “약한 심근 경색을 주세요.” 무슨 뜻인지 예배 끝나고 똑똑한 사람들한테 물어보세요. 이해 못하셨죠? 자기가 약한 심근 경색에 걸리면 아내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강한 심근 경색에 걸려서 죽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뭔가 부유물처럼 이야기 끝난 다음에 우리에게 떠다니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냐 하면 우리 사회가 부부관계가 그렇게 피상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니까 그것을 극복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그런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고, 독신으로 살면서 그런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 이상한 남자를 만나서, 괴상한 여자를 만나서 무한히 자기를 희생하면서 이 관계를 지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런 사랑의 관계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복구될 수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거기로부터 나타난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서 끊임없이 아가페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그 사랑 때문에 사랑할 힘을 공급받으며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아내의 결함을 보면서 그것을 자신의 섬김의 이유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드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으로 살아가다가 때로는 마음이 갈리고 관계가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소한 일로 다투거나 아주 현저하게 남편으로서의 자존심이 상해서 이 여자를 다시 보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비결 하나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선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돈으로 주는 선물은 안 되고 휴가를 내든지 퇴근 후에 거리를 다니면서 혹은 백화점을 돌아다니면서 아내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터벅터벅 선물을 사러 길을 걸어가다가 갑자기 역한 감정이 막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 인간이 나한테 해 준 것이 뭐가 있다고 내가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 이렇게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선물을 사야 돼?’ 그러면서 앞에 있는 애꿎은 깡통을 발로 뻥 차고 그것도 모자라서 쫓아가서 발로 확 밟아버립니다. 그러면서도 선물을 사러 다니는 것입니다.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은 ‘인연’이라는 수필 속에서 선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물은 자기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그래서 선물은 때로는 사치스러워도 좋다” 기껏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선물이라고 갖다 주었는데 아내가 반색을 하고 뜯어보니까 고무장갑과 수세미가 나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제일 썰렁한 것이 학교 다니는 애들한테 학용품 선물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선물 아닙니다. 돌아다니면서 선물을 삽니다. 이 속에서 수많은 감정이 교차합니다. 저 인간에게 선물은커녕 이혼 통보를 해도 시원치 않은데 그런데 그 선물을 사러 다니면서 그 괴로운 모든 번뇌의 순간, 그것을 누리면서 선물 가게를 두루두루 다니는 그 모든 시간을 통해서 자기 수양의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가 결코 살림하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그런 선물 하나를 삽니다. 이 속에서 분이 안 풀립니다. 그 선물을 예쁘게 포장을 합니다. 그래도 이 속에서 극복이 안 됩니다. 그러면 아내를 향한 원망하는 마음으로 불붙는 이 붉은 마음을 예쁜 꽃 한 송이에 담아서 이글거리는 미움을 빨간 장미꽃에 담아서 그 마음이 크면 한두 송이 담지 말고 한 다발을 만들어서 그래서 이제 집으로 들어갑니다. 아내는 아침에 그렇게 다투고 나서 좀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몇 번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습니다. “여보 점심 먹었어?” 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여보 미안해” 솔직히 이야기해서 자기가 100% 잘못한 것은 아니고 6:4정도 잘못했는데 이게 10:0으로 굴복한다는 것은 너무 자존심이 상해. 여보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내려놨습니다. 그러고는 이게 남편이 오는데 창문을 내다보니까 저기서 남편이 걸어옵니다. 손에 무엇을 들고 옵니다. 띵동하고 문을 두드립니다. 들어오더니 남편이 사실은 아내가 6:4 정도로 명백히 잘못했거든. 남편이 선물을 들고 옵니다. “여보, 아침에 정말 내가 미안했어. 당신을 위한 선물이야.” 그리고 이야기하면 아내가 자기 잘못한 것이 막 생각이 나면서 미안합니다. “뜯어봐. 뜯어봐” 뜯어보니까 정말 놀라운 선물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아내의 마음은 너무 창피하고 아침에 자기가 한 행동이 너무 유치하고 쥐구멍이라도 막 숨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게 복수입니다. 그렇게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남편은 멀리서 바라보면서 통쾌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 내가 복수했다. 정말 창피하지, 미안하지, 어쩔 줄 모르겠지. 선물이 과분하지. 이게 못된 너에게 안겨주는 나의 복수다. 받아라.’
복수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원한을 남기는 복수와 원한을 남기지 않는 복수가 있습니다. 원한을 남기는 복수는 끊임없는 원한에 원한을 불러일으킵니다. 원한을 남기지 않는 복수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먹은 대로만 되는 인생은 아닙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마음에 완벽하게 드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내 아내도 그렇게 결함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결함을 발견하면서 이렇게 원한을 남기지 않는 복수의 삶을 살아갈 때 한번 깨졌던 관계는 이런 복수를 통해서 아주 견고한 사랑의 관계고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남녀가 있는데 고운 정만 들었던 사람들이 못 헤어질까요? 미운정과 고운정이 함께 든 사람들이 못 헤어질까요? 전자예요? 후자예요? 후자입니다. 왜냐하면 수없이 극복을 하면서 맺어졌기 때문에 끊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그 시작을 깨어진 부부의 관계에서 시작하십니다. 그것은 교회로 이어집니다. 한 사람의 완성은 높은 지위에 도달하는 것이나 엄청나게 많은 재물을 소유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완성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완성입니다. 한 사람의 성숙의 정도는 그가 다른 사람과 어떻게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수준에 의해서 판단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수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면서도 외로움을 느낄 수 있지만 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바쳐서 사랑할 사람이 있는 그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에 있어서 주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할지니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아내로부터 누적된 상처를 경험하고 지금도 관계에 어려워하고 있는 남편들에게 나는 말합니다. 그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겠습니다 마는 그래도 아내의 결함이 여러분이 완전하신 그리스도 앞에 가지고 있는 그 결함보다는 작지 않습니까? 여러분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랑하시고 어떻게 불쌍히 여기셔서 어떤 자비하신 사랑으로 이곳까지 인도하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모자란 것이 많아 보이는 여러분의 아내가 바로 여러분의 기업이고 그렇게 모자라는 것을 여러분이 채워서 여러분의 아내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그 아내의 남편으로 붙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는 얼마나 많은 사랑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사랑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한 인간의 그렇게 지대한 영향을 미쳐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는 그 소명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부르심인지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피 흘리시면서 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셨는데 그런 사랑을 충만히 받은 우리에게 그런 사랑의 일부로서 아내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내의 결함이 크고 부족한 것이 많아도 그것은 여러분의 기업입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영원한 유업을 함께 누릴 연약한 그릇이 바로 여러분의 아내입니다. 그 아내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일 없이는 여러분도 자신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비록 여러분의 작은 희생과 헌신, 그리고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해 그를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견디는 많은 인내들을 지금은 아내가 잘 몰라준다 할지라도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는 아내의 아름다움 때문만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그 아가페의 사랑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기로 다짐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비록 많은 순간 여러분의 이런 진지한 노력과 헌신이 아내에 의해 무시되거나 혹은 가볍게 평가된다고 할지라도 또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언젠가는 아내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부모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우리 홀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그때에 우리 앞에 서 계신 분은 우리 아내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오래 인내하며 모든 것을 참고 가끔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해 주신 때부터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여자가 나를 남편으로 맞이하여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으로 성숙될 수 있다면 하나님, 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내 아내가 온전한 주님의 사랑이 되는 것이 내가 온전한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라고 매일 고백하면서 살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젠가 그 아내도 더디기는 하겠지만 그 진심을 알고 참 사람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자신에게 신앙이 있고 양심이 있다면 말입니다.
아내와 남편(3)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아내에 대한 남편의 덕목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은 오늘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라고 말입니다.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완성되는 기초가 그리스도의 구속이라면 그리스도의 구속은 가정을 통해서 세계의 완성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바로 그 가정 안에서 인류는 잉태하고 태어나고 양육되고 생육하며 번성하게 됩니다. 이 속에서 모든 인간들은 참다운 가정의 질서와 사랑을 배우게 되고, 남편과 아내가 이러한 가정의 질서와 사랑을 자녀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앞으로 이 세상에서 어떤 질서를 따라 가정을 이루고, 어떤 사랑을 가지고 그 가정 속에서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 갈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II. 아내에 대한 남편의 덕목 2: 괴롭게 하지 않음
아내에 대한 남편의 덕목 두 번째는 괴롭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괴롭게 하지 말라”라고 하는 ‘피크라이데스네’라고 하는 이 희랍어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 어떤 분이 나서 격분하게 하는 것, 쓰라린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 혹은 실제로 어떤 음식 같은 것들이 입에서 매우 쓴 것,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 말인데 아내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남편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 나온 아내를 사랑하라 라고 하는 이 명령과 별도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 적극적인 측면이라면 아내를 괴롭게 하지 않는 것은 이 사랑의 소극적인 측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A. 일반적 고난이 아님
그러면 여기에서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당하게 되는 괴롭힘, 괴로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선 첫째로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고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는 세계도 완전하고 인간도 온전했지만 그래서 고통이 없는 낙원이었고 인간은 불멸할 몸을 가진 존재였습니다마는 죄가 들어온 이후는 세상도 인간도 불완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죄 때문에 도입된 불완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과 인간이 그렇게 불완전해졌기 때문에 그런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불완전한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언제나 고난이 있게 마련입니다. 더욱이 이렇게 불완전한 세상에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 인간과 한 인간이 남녀로서 만나 함께 운명 공동체가 되어서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언제든지 현실적인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홀로 살아도 홀로 져야 하는 십자가와 같은 고난이 있지만 남녀가 함께 결합을 하여 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도 역시 거기에는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남편의 포악함이나 아내의 결점 때문에 생기는 고난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과 인간의 일반적인 불완전함 때문에 생겨나는 인간의 당연한 고난입니다. 이런 고난은 선한 사람이라도 당하고 악한 사람이라도 당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심지어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도 혹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피할 수 없는 일반적인 고난인데 이런 종류의 고난을 의미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괴롭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B. 하나님 뜻 따름이 아님
더욱이 여기에서 남편에게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 라고 할 때 이 아내가 겪는 괴로움은 하나님을 따르는데서 겪는 그런 괴로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희생과 고통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의 불완전함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꺾는 희생이 필요하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무엇을 하나님 앞에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부가 만나 한 가정을 이루고 좀 더 흠 없고 티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온전한 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가정 속에서 남편과 아내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꺾고 하나님 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항상 고난이 따르게 마련인데 바로 이런 종류의 고난과 아픔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남편이 아내에게 사과하거나 용서를 빌어야 할 그런 종류의 고난이 아니라 아내도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난이기에 이것은 여기에서 남편이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 라고 할 때에 그때 당하는 그런 괴로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살 때 서로가 다투고 서로가 경쟁하게 되면 서로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인간은 일반 은총 차원에서도 많이 경험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극단적인 방법을 택합니다. 즉, 아내와 남편을, 남편이 서로 다투어서 서로를 굴복시켜 서로를 이기려고 하는가 하면 그래서 결국은 아내 중심으로 살아가는 남편, 혹은 남편 중심으로 살아가 버리는 아내, 이렇게 함으로써 가정의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그런 종류의 가정의 질서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남편으로서의 모든 권위와 고집을 꺾고 아내에게 거의 죽은 듯이 복종하며 살면서 가정의 행복을 이루게 되었다고 간증하는 남편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책들이, 이러한 간증들이 신앙이라는 미명 하에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가정의 질서가 아닙니다. 흔히 사람들 가운데 그런 말이 있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6개월이 중요하다. 6개월 동안 기 싸움에서 누가 위에 서느냐에 따라서 일생 동안 그 가정의 질서가 세워진다고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정말 일생동안 맛있는 식탁을 대하고 싶으면 결혼하고 나서 3개월만 조심하라. 3일에 같은 국이 반복되면 멀리 밀어놓고 반찬이 마음에 안 들면 조용히 숟가락과 젓가락을 내려놓고 두 번만 출근하면 아내는 열심히 음식을 배우기 시작할 것이고 그러면 일평생 맛있는 식탁을 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 이러한 것들은 모두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그런 가정의 질서에 대한 교훈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아니고 아내는 남편의 종일 수도 없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섬기는 사람이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고 하나님 앞에 살도록 부름 받은 한 사람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에게 맞추고 혹은 남편에게 맞추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에게 맞춰 함께 여러 가지 연약한 부분들을 서로 짐처럼 짊어지고 결혼을 통해 서로가 온전해져서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그럴 수 없는데 결혼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마음에 더 합한 사람들이 되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아파트에 노부부가 살고 있는데 60년 결혼생활에 한 번도 다툰 적이 없는 부부가 있다고 해서 그래서 아파트에 있는 사람들이 그 집을 한번 일부러 탐방을 갔답니다. 그래서 이제 그 집에 가서 그 연세 많으신 영감님께 여쭤 봤답니다. “영감님, 그 부인 성격도 보통이 아닌데 어떻게 60년 동안을 그렇게 한결같이 아내를 사랑하시고 다툼이 없이 그렇게 온전한 가정의 평화를 이룰 수 있었습니까? 뭐, 지혜가 있으면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랬더니 이 할아버지가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남편과 아내의 다툼은 원칙과 원리가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랬더니 “우리는 결혼하기 직전에 가정생활의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게 뭐죠?” “큰일은 남편이 결정하고 아내가 순종한다. 사소한 일은 모두 아내가 결정하고 남편은 아내의 결정을 존중하고 따른다. 이것이 우리가 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평생 이렇게 이 원칙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다투지를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물어보았습니다. “정말 그렇게 아내가 결정하는 모든 사소한 일에 대해서 남편으로서 조금도 화내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아내를 따라 주셨습니까?” “그럼요.” “그러면 할아버지가 결정할 때도 부인께서 그렇게 잘 따라 주셨나요?” 그랬더니 “60년 동안 내가 결정할 큰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것도 성경적인 가정의 모습은 아닙니다.
아내에게 하도, 아내의 기에 치여서 성질이 하도 괴팍하고 억세서 늘 아내에게 치여서 사는 남자가 하루는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다른 남자들은 어떻게 아내를 좀 어떻게 길들이면서 살까 그런 사람들이 주위에 친구들 중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대형 서점에 가서 거기에 있는 직원에게 물었답니다. “아가씨, 혹시 이 넓은 매장에서 아내를 길들이며 사는 법, 이런 거 어디 적어놓은 책이 없습니까?” 이 아가씨가 이상한 표정으로 한번 그 남자를 쳐다보더니 “공상과학 소설 코너는 저쪽이에요.”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내를 억눌러서 복종을 시키려고 합니까? 그런 것 아닙니다.
어떤 형제가 면담을 왔습니다. 그러더니 저한테 그럽니다. “목사님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래 왜?” “주님의 뜻과 가정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제가 기도를 많이 했더니 하나님께서 신학교 가서 목사가 되라고 하시는데 아내가 안하겠답니다. 절대 안 된답니다. 이럴 경우에는 제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내를 택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됩니까?”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내가 뭐라고 합니까?” “신학교 가지 말라 그럽니다.” “그게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한 것은 하나님의 응답 아니고 당신이 기도 많이 해서 신학교 가야된다는 감동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기도 안하고 성질부리는 아내가 ‘가지 마’ 이렇게 말하는 게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좀 혼란스러워요.” 그래서 내가 보탰습니다. “하나님께 응답 받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신들을 어차피 한 몸으로 부르셨으니까 아내가 당신을 바라보며 정말 그런 소명이 진실이겠구나. 우리 남편은 그런 길을 가야할 사람이구나. 라는 걸 당신 자신에게서도 느끼고 그 여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느끼는 그것이 바로 당신이 목회로 부르시는 응답입니다. 아무 소리 하지 말고 가서 아내의 신앙을 위해서 더 열심히 기도하고 아내를 인격으로 삶으로 설득하십시오.” 보냈습니다.
아내를 억눌려서 복종을 시키려고 할 때에 어느 정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것도 사람 잘 보고 해야지 이기지도 못할 사람에게 까불었다가 본전도 못 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아내를 복종시키는 것은 반드시 관계의 파괴를 가져옵니다. 남편으로서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 아래 아내를 향한 억압의 폭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당신의 말씀이 사람들에 의해서 짓밟히는데도 내버려 두십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마음을, 머리통을 드릴처럼 뚫고 들어와서 씨앗을 심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떨어져서 감동을 주어서 스스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속에서 씨 뿌려지고, 뿌리를 내리고, 줄기 가지가 뻗어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만듭니다. 이것이 진리가 인격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한 인간의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젊은 시절에 권력이 있다고, 힘이 있다고 아내를 억압하고 짓밟고 폭압적으로 대해서 그 위에 군림한 사람들은 노후가 불행합니다.
사회적으로 황혼 이혼이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그게 80% 이상이 나이 먹은 황혼의 남자가 여자에게 이혼을 하자는 게 아니라 평생 동안 남편 아래서 고분고분하게 살던 할머니들이 이혼을 하자고 제시를 하는 것입니다. 남편들이 종종 이러한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일평생을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회사를 그만둘 때가 되었습니다. 본인이 그만 두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돌아다보니까 자기가 일생을 사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관계라고 생각했던 모든 관계들이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고 그냥 어느 날 회사를 떠나니까 다 잘려버리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가정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때 생각하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결국은 마지막에 남는 것이 가정 밖에 없었구나.’ 그리고 반성을 합니다. 젊은 시절에 아내를 막 대하고, 아이들을 거의 돌아보지 않고, 폭압적으로 군림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정말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간도 있고 여유도 있으니까 이제는 한번 그 동안에 못해줬던 것 아내에게 잘 해주고 애들하고 같이 잘 지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변혁을 시도합니다. 가부장적인 그 사람이 요리학원에도 다니고 그 다음에 가사를 어떻게 돕는지도 배우고, 생전 안하던 진공청소기도 돌리고, 아내가 어디 갔다 오면 집안도 청소할 줄 알고 그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많으니까 아내와 늘 함께 있으면 아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굉장한 착각입니다. 애들도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소홀했으니까 애들을 보고 싶어 하고 같이 있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아빠가 1층으로 내려오면 애들은 2층으로 올라가고, 2층으로 올라가면 애들은 1층으로 내려옵니다. 두 번만 반복하면 애들이 자기 방에 들어가서 문을 탁 잠그고 안 나옵니다. 문을 자꾸 두드리면 애들이 외출복 입고 나가버립니다. 언제든지 그렇게 자기가 좋은 생각을 가지고 지난날의 삶의 방식을 뉘우치고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접근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항상 자기에게 목 말라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 아내에게 잘 하는 것은 아직 자원이 남아있고 권력이 남아있을 때에 아내에게 잘하는 것은 보험입니다. 젊어서 평생 보험료 안내니까 막판에 탈게 없는 것입니다. 아내의 마음속에 보험료가 적금이 안 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젊은 시절에 자기가 힘이 있다고 아내를 짓밟고 억눌려서 복종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쁜 것입니다. 진리조차도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인간도 인간의 존엄을 폭력과 폭압으로 다스릴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아무리 반성하고 깨달아도 내가 변화되고 반성하는 것처럼 그렇게 아내가 나의 변화를 인식하고 감격하면서 자신도 바뀌어 주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아내들 가운데 독특한 기질을 가지고 남편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깊은 우울질이라든지 혹은 남자처럼 아주 억세서 어디서도 여성 나름대로의 부드러움, 남편인 자신이 아내에게 받아들여진다고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없는 그런 기질을 가진 사람 혹은 그 여자 앞에 서기만 하면 언제나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외성적이고 결단력이 있고 남성성이 충만한 그런 여자들, 그런 사람들하고 같이 사는 남자들은 참 쉽지 않을 것입니다. 또 기질적으로 말하자면 씀씀이가 크고 대범해서 그래서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아내의 소비생활 같은 것들도 기질에 속하는데 이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단 아내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기질이 ‘저 인간이 왜 저렇게 태어났을까? 왜 저런 여자를 내가 만났을까?’ 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이제 해결의 길이 없이 불행의 늪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결혼하기 직전에 해야 됩니다. 결혼할 때 그러니까 신중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의인불용 용인불의(의심스러운 사람은 결코 쓰지 말고 쓴 사람은 의심하지를 말라)” 이러한 인사의 원칙은 결혼 생활에도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하고 결혼을 좀 미루면서라도 온 실험을 해보세요. 그런데 그 남자가 그런 시험을 다 받고도 자기를 끝까지 선택할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매력도 없는 여자, 남자가 선택해줄까 말까하고 그렇게 있는 여자가 온갖 시험을 한다고 까불다가는 남자가 오지도 않고 가버리니까 결혼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 한 충분한 검증의 시간을 갖고 살아야 됩니다. 제가 목회 처음 할 때에는 청년들을 지도할 때 6개월 이상 연애하지 말고 결혼할 계획이 없으면 연애를 하지 말라 이렇게 가르쳤는데 요즘은 생각이 좀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좀 오래 연애를 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왜냐하면 이 사람의 기질이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분별하면서 자기에게 맞는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서로에게 적응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쨌든 부부가 안 깨지고 같이 살려면 남편들에게 내가 말합니다. 자기 아내의 기질과 이런 것들을 그냥 자기 운명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저런 운명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데에는 심오한 뜻이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지, ‘왜 내가 저런 여자를 만났을까? 저 인간은 왜 쓰레기 같은 저 기질을 당장 버리지 못할까’ 그렇게 대하기 시작하면 해결의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단 아내가 자신에게 시집을 왔으면 그 사람의 장점만 자기가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질과 모든 것들을 자신의 운명처럼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서약입니다.
어느 날 아내가 남편의 지갑을 한번 궁금해서 꺼내봤습니다. 돈이 얼마나 있나 한번 펴볼 마음으로 꺼냈는데 깜짝 놀란 게 지갑을 탁 열자마자 가운데 자기 얼굴이 큰 사진으로 천연색 사진이 거기에 끼어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줄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한번 물었습니다. “여보 내 사진 항상 가지고 다녀?” “그럼” “얼마나 됐어?” “10년 훨씬 넘었어.” “그래. 그럼 결혼하고 나서 얼마 안 되면서부터 내 사진 가지고 다닌 거야?” 활짝 웃으면서 아내가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그래서 내 사진 자주 봐?” “그럼” “하루에도 몇 번씩 당신을 묵상해.” 여자가 행복했겠습니까? 불행했겠습니까? 말을 해보십시오. 행복하겠습니까? 불행했겠습니까? 너무 행복해 한 것입니다. “여보 그래서 당신이 내 사진을 볼 때 어떤 마음이 들어?” “당신 사진을 볼 때마다 인생을 살아갈 힘과 용기가 생겨.” 이게 뭐 감동의 쓰나미가 밀려와서 아내가 쓰러질 지경입니다. 그래서 “좀 더 자세히 말해봐.” 그랬더니 남편이 “여보 난 당신 사진 늘 보지만 사업을 하거나 일을 하다가 너무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날 때마다 당신 사진을 봐.” “그래서?” 그랬더니 “이런 여자도 데리고 사는데 내가 뭘 못 이기랴. 이 운명도 감당하는데 이까짓 어려움쯤이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둘이 만나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이든지 그저 실용적으로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또 다른 소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둘이 함께 부족한 사람들끼리 만나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성품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둘이 행복했다더라 그것뿐만이 아니라 정말 행복할 것 같지 않는, 기질상으로 서로가 맞지 않고 생각도 서로 다른 남편과 아내가 어떻게 자기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고 받아들이며 남편과 아내로 살아가게 되었는지를 결과 뿐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 주님의 성품을 드러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결국 남편이 아내를 괴롭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 없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C. 사랑 없음에서 나옴
남편들은 자신이 아내를 괴롭게 하는 원인이 아내의 자격 미달 때문에, 아내가 가지고 있는 결함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언제나 자신의 부족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자기가 그런 사람밖에 못되는 실존에 대해서 용서를 빌게 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경험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너무너무 죄송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바로 가장 큰 죄송한 이유입니다. 영어로 말하자면 “Sorry for what I am.” 내가 나인 것이 하나님께 정말 미안하다. 내가 더 많은 은혜를 받고 변화되었다면 지금 이 모습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내가 지금의 나밖에 안됩니다. 그것이 제일 죄송합니다. 내가 죄도 짓고 불순종하고 하나님 마음 아프게 해 드린 많은 것이 있지만 그것은 결국 나의 나됨이라고 하는 원천에서 흘러나온 것들입니다. 내가 한 많은 잘못과 부족, 죄와 불순종도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이런 인간이었기 때문에 흘러나온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이정도 밖에 안 되는 자기 자신의 전 존재에 대한 미안합니다. 그래서 아내를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 자신이 아내에 대해서 이 정도 인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무한히 미안한 마음을 갖고 용서를 빌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내의 결점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마 아내를 자기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더라면 그 결함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더 큰 사랑을 받았을 것입니다. 또 자신도 아내를 그렇게 사랑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도 그 인간에게 그런 결점이 있었는데도 안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모든 허물을 덮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아내는 원래 그런 여자였는데 지금 자기의 사랑이 식었기 때문에 예전에 사랑했던 아내를 지금은 사랑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결국은 부부관계가 파괴가 되는 것은 상대방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결함 때문이고 상대를 끝까지 용납하지 못하는 사랑 없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마음속에 가득차면 아내의 결점을 볼 때에 ‘아, 저런 약점과 결점이 있었기 때문에 혼자 살면 하나님 앞에 늘 쓴 뿌리가 될 것 같아서 하나님이 나 같은 남자를 만나게 해 주셔서 우리 아내의 약점과 결점을 보충하여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이 나를 짝지어 주셨구나. 내 아내가 저런 약점 때문에 좋은 친구도 없이 특별히 사랑해 주는 사람도 없이 일평생을 외롭게 살았구나. 이제 내가 내 아내의 약점과 결점을 용납해 주는 첫 번째 사람이자 마지막 사람이 되라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구나. 우리 하나님만큼은 우리 아내의 약점과 결함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신실하게 사랑으로 대해 주신 분이시구나. 나도 아내를 그렇게 대해주도록 하나님이 나를 이 여자의 남편으로 삼으셨구나.’ 그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할수록, 사랑할수록 그 사랑은 이렇게 사랑해 주면 어떤 대가가 돌아오고 반응이 나타나리라고 하는 기대를 담보삼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신을 사랑해 준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도 베풀고 그렇지 않은 때에도 베푸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니 이렇게 부족한 아내를 사랑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남편은 자기가 그렇게 한 인간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완전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깊이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을 받음으로써 자기가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좋은 가정에 태어나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자기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자기를 완성하지는 못합니다. 자기의 완성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완성되는 것은 그렇게 사랑을 받음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부족한 한 인간을 남편으로서 끝까지 용납하고 사랑하고 주님이 자기를 위해 참으셨던 것처럼 그렇게 끝까지 참고 사랑함으로써 자기를 완성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음란하기로 소문났던 음탕한 여자, 고멜에게 장가를 들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유가 아니라 실화였습니다. 놀랍게도 이 선지자 호세아의 마음속에는 고멜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강물처럼 밀려왔고 그래서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강제 결혼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 여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아가페의 사랑이었고, 꺼지지 않는 불꽃같이 타올랐습니다. 고멜이 우상을 섬기는 곳에 가서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고 아이를 낳아가지고 돌아와도 호세아의 마음속에는 그런 식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아내가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아내를 향한 사랑의 불길은 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불행을 보면서 더욱 불꽃처럼 타올랐으니 이는 범죄 해서 하나님을 멀어질수록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녹아내리는 그 헤세드의 사랑을 본 딴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호세아는 자신을 완성해 갔습니다. 한없이 남편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은 고멜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지 못했지만 방탕한 그 아내를 그렇게 끝까지 사랑하며 긍휼히 여겼던 이 남편 호세아는 자신을 완성해 갔습니다. 단연코 나는 구약의 모든 성경의 기록자들 중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신약의 사도들처럼 보여준 단 한 사람의 인물이 있다면 바로 호세아라고 말하고 싶고 그 점에 있어서 누구도 호세아가 하나님의 헷세드를 아는 깊이만큼 도달한 사람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결함으로 가득찬 아내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자신은 그렇게 한 인간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무한한 사랑의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매일매일 깨닫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은 소명과 그런 사랑의 능력이 자신 속에 없는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게 됩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자신이 그렇게 사랑할만한 인간이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사랑이 매일매일 부어지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이전에 그런 아내를 그렇게 끝까지 사랑한 것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깊이 자각했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어떤 일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신에게 순종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명하는 것을 제게 주옵소서. 그리고 원하시는 것을 나에게 명하시옵소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기뻐하시는 것을 아무리 나에게 명령해도 나에게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내게 말씀하시기 전에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은혜의 능력을 먼저 달라고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매달려 간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내는 우리를 종종 실망시킬 때가 있지만 그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고 용납하도록 부르신 우리 하나님은 어떤 때에도 우리에게 실망을 주시지 않으시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아내를 만나게 해준 우리의 과거도 그랬기 때문에 후회해서는 안 되고 그런 아내와 살고 있어서 지금 힘들어 하는 이 순간도 우리의 믿음이 없어서이지 사실은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려고 그 아내와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III. 적용과 결론
우리 남편들이 정말 믿음으로 살면 아내의 좋은 점도 우리에게 선이 되고 아내의 결함도 우리에게 선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 아내에게 있는 그 모든 것들 중 영원히 모자라는 것, 영원히 나쁜 것,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 그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실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저 사람을 끝까지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이 나의 운명인 것처럼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그 여자와 함께 일생을 같이 할 수 있는 은혜의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남편들이여, 오늘 이 시간 자신의 아내가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바로 그것이 여러분을 그 아내의 남편 삼으신 이유라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일에 있어서 아내를 잘 섬겨 온전하게 하기 위해 지혜와 사랑이 필요하니 나에게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그 기도를 통해 가장 좋은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아내가 연약한 그릇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아내를 진흙처럼 생각하고 스스로 형체를 만들 수 없는 흙덩어리처럼 생각하며 자기 뜻에 맞게끔 빚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당신의 형상을 따라 빚어 당신 닮은 사람 만들 권리가 있지 인간 누구에게도 인간 다른 사람을 자기의 마음에 맞게끔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고 짓밟고 억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은 그 누구라도 존중 받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진리보다는 자기의 뜻을 추구하기 위해 아내와의 관계를 파괴하고 아내를 폭압적으로 다루는 것은 이기심의 발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력을 남편들은 그렇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권세를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마는 한 번도 그런 권세를 그렇게 사용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핍박하는 자들에게는 박해를 받으시고, 말씀을 전해도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그저 그 불순종을 감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완고한 자들을 폭압으로 다스리는 대신 교만한 자들을 권력으로 다스리는 대신 오히려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를 덧입히고자 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자기를 희생하심으로써 어떤 권력과 폭력으로 우리를 지배한 임금들보다 더 오랜 영향력을 인류에 미치게 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들을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내와 그렇게 용납하지 못하는 불편한 관계를 가지고 살 때 우리의 기도는 사라집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은혜의 불씨는 꺼집니다. 은혜의 불씨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사랑의 샘이 마른 채로 우리들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이 무엇이겠습니까? 거짓과 위선, 그리고 불법한 삶 이외에 가능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압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아내는 정말 못됐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극복하기에 너무너무 힘든 기질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것을 모르고 당신 아내를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이실까요? 그런 것을 모르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 사람 만나서 사랑하게 해 주셨을까요?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데도 하나님이 그 사람 만나게 해주셨고, 사랑하게 해 주셨고, 둘이 결혼하여 한 부부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여보, 남편, 사랑, 아내, 이렇게 부르면서 살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이제껏 치열하게 살아온 여러분 자신의 진지한 인생에 대한 예의입니다. 다른 모든 일에 성공했어도 아내와의 관계에서 포기한 사람은 성공한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와의 관계, 생명의 은혜를 받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렸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어떻게 끝까지 사랑하고 오래참고 용납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자기를 주신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아내와의 관계를 감당하기 어렵고 아내의 결점과 결함을 극복하기 힘들 때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고 구원해 주신 순간부터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그리고 내 아내가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 우리 하나님 마음에 기쁨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괜찮습니다. 주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십자가의 사랑, 아내 모르게 나에게 주신 그 많은 은혜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것인 것을 제가 압니다. 나를 그렇게 아내를 위해 하나님과 우리 아내 사이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그리고 우리 서로 사이에 평화의 도구로 써 주십시오. 나는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나는 충분합니다.”
(찬양)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때로는 힘든 날도 있고 아픈 날도 있고 외로운 날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아내는 남편인 우리의 마음을 몰라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남편인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아내를 주님 의지하며 어찌하든지 영생의 유업을 함께 누리며 살고자 몸부림쳤던 가슴 아팠던 그 많은 날들은 그를 위해 그 일을 위해 흘렸던 눈물이 하늘나라에서 아름다운 수가 될 것이고 우리의 눈물은 반짝이는 보석이 될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섬김은 이 세계를 바꾸는 거대한 일들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여러분을 아내 만나게 해 주셨고 이제껏 살 수 있게 해주셨으니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사랑함으로 여러분을 아내와 만나게 해주신 주님의 경륜을 성취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이혼을 생각하십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 19:3-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날은 이혼이 폭 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 개인의 행복과 그리고 평안이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것이라고 교육 받아온 이 시대의 정신도 많이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이혼에 대해서 한번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의 모순을 트집 잡아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려고 이런 시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질문한 내용이 이것이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아내를 버리는 것이 가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이미 두 개의 함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버리는 것이 괜찮다’라고 말씀하면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에 관한 가르침에 전면적으로 위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읽은 이 본문이 들어있는 19장 첫 머리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 건너 유대지경에 이르니” 라고 말입니다. 그때 무슨 말씀을 마치셨을까요? 바로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용서의 중요성을 언급하신 후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말씀도 듣고 20장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18장의 말씀도 들었고 19장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19장 2절에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 왔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버리면 안 된다.’라고 말씀하시면 모세가 그렇게 허락을 해 준 율법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모순되기 때문에 종교 지도자들과 모세를 율법 수여자로 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에 부딪힐 작정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예수님께서는 혼인에 관해서도 본래의 정신을 말씀하심으로 그 원리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함정을 피해가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II. 사람을 지으심
A. 세계와 사회의 계획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라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옳다, 그르다를 말씀하시기 전 먼저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세계와 사회를 지으신 계획을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모두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았다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순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계 모든 만물을 창조하고 인간까지 지으신 다음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한 말씀이 더 이상 인류와 인간에 대한 계획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2장에 다시 창조의 과정을 설명하는 가운데 인간 창조를 끄집어내서 다시 2장에서 상세히 설명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셨을 때에 이 모든 자연의 세계는 아름다웠지만 이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정말 창조의 의도에 맞게끔 꾸며 가시기 위해서는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그런 인간을 더 많이 이 세상에 지으셔서 그들로 사회를 형성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좋은 인류 사회를 만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한 사람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한 것은 인간의 존재와 함께 창조된 자연 세계에 대한 만족을 표시하는 것이라면 2장에서 전개되는 아담을 잠들게 하셔서 하와를 만들고 후손들을 낳게 하시는 과정은 이제 사회를 만들어 가시는 과정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셔서 하나님 한분 안에 있는 아름다운 성품이 남자와 여자, 남자와 여자의 결합,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을 통해서 인류 모든 사회의 퍼져 나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아주 많이 생겨나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 사회가 형성되고 아주 치밀하고 복잡한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거기에서 사랑과 질서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기쁨을 얻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러한 인류 사회의 위대한 출발이 혼인의 원리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사람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혼인의 원리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B. 혼인의 원리
이 결혼은 크게 세 차원의 결합을 가지고 있는데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결합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맺어주시는 것으로서 영원히 끊어질 수 없고 이혼이 허락되는 유일한 경우가 오늘 성경에 음행이라고 나오는데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에 비춰서 보면 이혼할 수 있는 사유가 된다는 것이지 만약에 그것도 용서하고 둘이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더 좋은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혼은 하나님이 남녀를 만드시고 인류 사회를 만드시는 위대한 계획과는 어긋나는 것이며 현실적으로 이혼은 많은 관계들의 파괴들을 가져옵니다. 제일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를 가져옵니다.
II. 이혼, 관계들의 파괴
A. 하나님과의 관계
교회를 개척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새벽마다 우리 교회에 등록한 신자는 아닌데 자매 한 분이 나와서 늘 새벽기도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믿음이 좋구나.’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거의 기도를 못하고 매일 새벽마다 돌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설교가 끝나고 이제 혼자 기도하고 있는데 와서 저를 툭툭 쳤습니다. “목사님 저를 위해서 좀 안수 기도를 해 주십시오.”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그랬더니 “이혼할 수 있도록 기도 좀 해 주세요.” 그러고 이제 거기서 이야기 자락을 펴면 한없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들은 다음에 안수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안수 기도를 해주면 이게 직감적으로 오는데 있는데 거의 기도를 못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제 우리 교회에 등록을 하고 만나서 면담을 했는데 얘기를 다 듣고 보니까 제가 그 자매라도 남편하고 정말 살기 싫겠더랍니다. 직장은 다녀서 그래도 먹고 살만큼 월급은 받아오는데 허구한 날 술 퍼마시고 집에 오면 아주 그 아내를 발톱의 때만큼도 안 압니다. 그리고 아주 무능하게 보고 그리고 욕하고 폭언을 퍼붓고 그러는 상황이 1-2년이 된 것이 아니라 결혼하고 나서부터 평생을 그렇게 산 것입니다. 자매 마음속에는 항상 자신이 무능하다고 하는 자격지심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어쨌든 여러 가지 과정이 있었지만 은혜를 받기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많이 깨뜨려서 은혜를 많이 베풀어 주시니까 사람이 참 얼마나 놀랍게 변하는지 남편이 정년퇴직하기 아직 시간이 좀 있을 때였는데 뇌졸중이 와서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중풍이 온 것입니다. 그러니 평생 못 마땅하고 그렇게 구박만 받다가 남편이 그렇게 되었으니 정말 기회 아닙니까? 보복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버리고 가면 그것 완전히 진짜 누가 거두겠습니까? 그런데 마침 그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반신불수가 되니까 그게 한 순간에 그렇게 가엾게 여겨지면서 자신도 영적으로 저렇게 반신불수 같은 존재로 살았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해 주셨다는 감동이 오는 것입니다. 부부관계가 회복이 되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심방을 갔는데 그 사람이 아내에게 사랑을 좀 받고 이제 아프니까 교회도 출석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대로이지 갑자기 태도가 변합니까? 수염도 못 깎고 기르고 할아버지하고 사는데 그것을 심방을 갔는데 사랑스럽다고 내 보는 앞에서 볼을 비비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때 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야, 인간의 마음속에 상처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은혜를 이기지 못하는구나.’ 그래서 끝까지 그 자매는 승리를 했습니다. 남편은 돌아가시고 엊그제 한번 편지가 왔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는데 무슨 영업을 하는데 그렇게 집에서 남편한테 구박만 받고 그러던 자매가 액수는 내가 이야기할 수 없는데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연봉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편지 온 내용이 뭐냐 하면 프랑스 파리로 영업 담당자들을 교육시키러 자기가 강사로 가는 길이라고 그렇게 편지가 왔습니다. 사실은 열심히 살아보기 전에는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자매의 편지 속에 고백이 “하나님이 자기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것이 참 감격스럽습니다.” 그러고 편지가 왔습니다.
사람들은 부부 관계가 깨질 때에 누구 책임인지를 따집니다. 그런데 이 사람 얘기 들어보면 저 사람 책임이고 저 사람 얘기 들어보면 이 사람 책임입니다. 그리고 아마, 법적으로 판단을 하면 원인을 제공한 사람 책임이 더 많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혼할 때에 재산 분할할 때나 소용이 되는 것이지 신앙의 세계에서는 결국 가정이 깨지면 그건 두 사람 모두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원인을 제공한 사람도 있겠지만 일방적인 피해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관계가 이혼할 정도로 파괴되기 전에 부부의 정신적인 결합들이 와해되는 일이 있었고, 결국은 가정이 깨지고 이혼을 하게 되면 누구의 허물이 더 큰 가와는 상관이 없이 깨진 가정이라고 하는 결과물은 두 사람 모두가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게 이혼을 결정하게 되면 벌써 그 결정 있기 이전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혼의 어두운 시기를 지나게 마련이고 이혼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에 여성이든지 남성이든지 심리가 누구도 외부의 사람을 만나고 싶지를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오히려 이혼하기 직전의 우울증이 더 악화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결국은 그 후에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매우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혼하기 전에는 그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부부와의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고통 받는 모습이 강력하게 부각이 되면서 여기에서 이 관계를 청산하면 살길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이혼을 결심하기 전까지는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고, 그리고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남편도 아내에게 다 말할 수 없고, 아내도 남편에게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관계 속에서 그런 고통을 서로에게 주지 않는 것이 이런 불행을 피하는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서로에 대해서 참아준다고 해서 계속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처럼 남의 사랑과 용서를 폭력의 기회로 삼는 것은 아주 더러운 것입니다. 이 똑같은 설교를 2006년도에 한번하고 2010년도에 한번 했습니다. 첫 번째 설교 했을 때 일인데 부부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남편이 그랬답니다. 짜증을 내면서 우리 목사님은 도대체 교인들 중에서 이혼을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런 제목을 가지고 그 긴 시간, 첫 번째 설교가 두 번째 설교보다 한 20분 정도 길었습니다. 80분 가까이 그렇게 긴 설교를 했는데 나는 짜증나서 혼났어. 믿음으로 살려는 사람들이 누가 이혼을 생각한다고 설교 제목도 기분 나쁘게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쭉 차를 타고 가는데 아내가 옆에 있다가 아주 진지하게 “여보, 난 생각 많이 했거든.” 남편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요? 상대방이 인내하고 견뎌준다고 해서 일평생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결국은 아내나 남편에게 함부로 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함부로 하는 것이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정에서의 생활을 잘하고 나서 남편이 나이가 많이 들고 혹은 아내가 병들 수도 있습니다. 먼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도 배우자에게 깊이 사랑을 많으면 그게 진짜 성공한 인생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목회를 하면서도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여기에 이렇게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도구가 되고 어떤 사람은 그 말씀에 변화되지 않아서 싫어서 떠나는 사람도 있지만 변화 받고 한 사람들은 하나님 사랑하는 것만큼 저도 좋아할 것입니다. 잠시 병원에 입원했는데도 여러분이 격려의 편지도 보내고 그랬습니다. 찾아오시기도 하고 그렇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진짜 제가 목회를 잘했다면 제가 설교할 기운이 없을 때에, 다시 설교할 수 없을 때에 그때도 여러분에게 사랑을 받으면 그것은 진짜 사랑 받을 만하게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산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생각을 참 많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남자들이 외롭다, 외롭다 그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젊었을 때에 자기가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힘 있고 권력 있을 때에 자기 맘대로 하면서 산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가족들이 할 수 없이 참아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퇴직하고 아내랑 같이 있으려고 그러면 “나 좀 혼자 있게 내버려 둬” 그러고 애들하고 좀 어울리려고 그러면 애들이 2층에 있어서 올라가면 1층으로 내려오고 1층에 텔레비전 보고 있기에 옆에 앉으면 애들이 슬그머니 올라가서 핸드폰으로 자기네 방에서 문 잠그고 텔레비전 본답니다. 그리고 가족은 나를 버리고 외톨이가 되게 하냐 그러는데 뿌린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대게 이러한 것들은 젊은 시절에 잘 못 깨닫습니다.
B. 자녀들과의 관계
두 번째는 자녀들과의 관계가 파괴가 됩니다. 부부는 이혼함으로써 남남이 되고 이혼할 때쯤 되면 남남이 될 각오가 충분히 된 것입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도 있지만 다른 속담도 있습니다. 부부는 돌아누우면 남이다 우리의 지혜로운 선조들은 이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함께 살 의지가 있고 사랑이 있는 동안에는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과 결별할 수 있다는 결심이 서게 되면 돌아누우면 남이 되는 것입니다. 수십 년을 살아도 돌아누우면 남이 되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자기들은 그렇게 결정을 해서 서로의 행복을 찾아간다고 칩니다. 그리고 또 누구도 다른 사람들의 행복 때문에 개인의 행복이 짓밟힐 의무가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음행한 연고 이외에 버리면 안 된다 이랬는데 역사상 가장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썼던 청교도들도 사실 어떤 점에서 청교도들이 종교 개혁가보다 더 철두철미한 삶을 고집했던 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역사의 문헌을 찾아보면 사실은 이혼의 폭을 상당히 넓혀주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상습적인 폭력 같은 것, 물론 그런 사람은 교회로부터 그 당시에 치리를 받았을 것이고 거의 출교에 가까운 치리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 그 다음에 남편이나 여자가 음행이 없어도 심한 정신병으로 도저히 정상적인 결혼 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경우, 교회의 절차를 걸쳐서 이혼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을 이야기 해 볼까요? 남자와 여자 중 한 사람이 성적 불능자일 경우에도 교회는 심사를 통해서 이혼을 허락을 해 주었습니다. 굉장한 휴머니즘적인 그 요소가 사실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기독교인으로서 남편과 아내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이조시대 같이 그렇게 그 여성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해서 열녀의 상을 투상 시키거나 이런 남존여비의 사상 그런 것들을 기독교의 개념인 것처럼 색칠해서 그렇게 강요하는 것은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의 원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항상 여러분의 아내든지 남편을 대할 때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 저 사람의 행복과 자유를 하나님이 꼭 필요해서 그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명령하시는 경우에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성경과 건전한 이성에 기초하지 않은 다른 근거로서 그렇게 억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사실이라도 그 자존감을 심하게 손상시키는 언어와 태도, 예를 들면 남편이 돈을 잘 못 번다. 그러면 무능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을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자주 아주 야비한 방법으로 말해서 남편에게 지속적인 상처를 주는 것 같은 것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중대한 파괴입니다. 못 생겼다, 아내가 못 생긴 게 사실, 팩트이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자꾸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젊어서는 안 그랬다고 뭐 그 판이 그 판이니까 다 알면서 자기가 짝을 고른 것이니까 또 젊어서는 하도 예뻤는데 나이 들면서 좀 못 생겨졌다 그래도 자기도 마찬가지로 변했습니다. 그것을 자꾸 사실이라도 자꾸 말하면 안 됩니다. 그냥 너무 못 생겨진 것을 예쁘다고 말할 수 없으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지 그것을 자꾸 말이지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좀 이렇게 서로를 존귀히 여기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일본말로 기마이 쓰듯이 그냥 어느 순간에 확 신이 나면 보석 사주고 돈 주고 막 차 사주고 옷 사주고 이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그를 존귀한 사람으로 여겨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입니다. 존귀히 여겨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무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능한 자신은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남편이 그렇게 무능하니까 그런 무능이라도 좀 보태라고 자기 같은 사람 짝지어 줬는데 그 남편이 유능하기까지 했더라면 늘 내가 얘기하지만 자기 같은 사람에게 차례가 왔겠습니까? 다른 여자에게 갔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항상 영적인 침체 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자꾸 후회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것을 후횐 한다든지 아니면 내가 이 가정에서 태어난 것을 후회한다든지 이런 것들은 다 성령의 음성이 아닙니다. 현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내가 믿음으로 살면 이 현실이 변해서 내가 상상치 못했던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런 신앙을 가지고 사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을 사는데 의식은 과거로 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 시를 썼습니다. 시가 아주 짧은 시인데 그대로 외우지는 못하겠는데 이런 이야기입니다. “당신과 다투고 헤어졌습니다. 아,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싶다. 당신과 다투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을까? 아니야. 당신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절묘했습니다. 그것을 자꾸 현실을 살면서 시계추는 거꾸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왜 내가 이 남자를 만났을까? 이 여자 말고도 따라다니던 여자들이 꽤 있었는데’ 그러고 비교를 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보면 그 인간이 그 인간입니다.
결국은 결혼이라는 것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연애하고 다른 점입니다. 그러면 그 관계는 두 사람만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결혼하면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을 부모님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형제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들이 아플 때 함께 아파해야 할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혼을 하고 나면 남편이나 아내하고야 헤어질 준비가 충분히 되었지만 자식들을 어떻게 할까요? 제가 아는 형제도 만났고 자매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자매는 성을 세 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김 씨였다가 아주 어렸을 때 김 씨였는데 엄마가 이 씨한테 시집을 갔습니다. 얘를 데리고 가니까 호적에 올려야 되니까 얘 성을 이 씨로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다닐 때 엄마가 이 남자하고 끝내고 다른 남자한테 갔는데 그 사람은 박 씨였습니다. 이 아이의 이름이 다시 박 씨로 바뀐 것입니다. 엄마는 권력이 있으니까 어린 아이에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느끼는 혼란이 어느 정도였겠습니까? 자기가 누군지에 대한 정체성에 대해서 한없이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발설하지 않지만 이미 그러한 상처와 고통 자체가 이 아이를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이 없으면 망가뜨리고 있는 중입니다.
세 살, 네 살 된 아이가 집에 있다가 어느 날 엄마가 산후조리원에서 갓난아기를 데리고 할머니와 함께 집에 들어올 때 그 아이를 보면서 받는 충격이 아내가 집에 홀로 있는데 남편이 첩을 데리고 와서 이제 오늘부터 같이 살 거야 할 때의 아내가 받는 충격의 2.5배랍니다. 그래서 심지어 그 아이를 죽이려는 시도까지 합니다. 그래서 요즘 의식이 있는 집에서는 생각이 바뀌어서 배가 커지는 모든 과정을 다 보여주고 엄마와 같이 목욕을 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이를 낳는 과정을 아이를 데리고 와서 다 보여주는 것입니다. 집에서 조산원의 도움을 받아 출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충격을 절반 이상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 철모르는 아이가 동생이 와도 그런 충격을 받는데 이 철이 다 든 아이가 김 씨에서 이 씨로, 이 씨에서 다시 박 씨로 이렇게 옮겨가는 과정 속에서 받았던 그 충격은 충격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너무 인간성 자체를 짓밟아서 짓이기는 것입니다. 아이가 그것을 다 표현 못할 뿐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행복이 존중 받을 가치가 있으면 관계 속에서 들어온 사람들의 행복도 존중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들과의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이렇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녀들이 이제 일평생 지고 살아가야 하는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한 사람이 가정을 향한 태도가 어떨까 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도 봐야 하지만 그 사람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면 거의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예외가 있는데 주님을 만나서 신앙적으로 깊이 변화되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녀들과의 관계가 깨지고 자녀들이 기적적으로 주님을 만나서 새사람이 되기 전에는 이런 망가진 인간성을 가지고 그들이 만드는 가정에서 자기가 겪은 모든 것들이 재현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아주 농후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이혼할 때가 되면 복잡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또렷하게 하나의 초점으로 모아져서 이 사람하고 관계를 끝내고 헤어지면 편안할 것이라는 생각 하나로 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C. 자신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가 그 다음 문제입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 내려진 이혼의 결정이니까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는데 40일 금식하고 이혼을 결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혼을 이미 결심했을 때에는 하나님께 묻고 도움을 받고 인도를 받고 뭐 그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내적인 힘을 상실한 상태에서 내리는 결정입니다. 한번 이혼한 사람은 아무 희망이 없으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희망이 있을 수 있고 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헤어진 남편은 남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녀들은 그렇게 이혼을 한 아내나 남편의 가족이에요? 아니에요? 대답하기 참 어렵습니다. 어떻게 가족일 수 있겠습니까? 관계를 끊고 이미 헤어졌는데 이런 속에서 이제 믿음으로 살아도 깨어진 가정의 결과를 끝까지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그 고통은 현실적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런 많은 것들을 생각을 하면 이혼이 얼마나 많은 관계들의 파괴를 가져오고 그리고 우리의 인간성을 파괴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V. 결혼의 십자가를 지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결혼을 달콤한 꿀 덩어리로만 생각하지 말고 그저 우리가 우리 일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많은 삶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는 비결은 다름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고난을 이기는 것이고, 고난을 받을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투영하며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A. 은혜가 필요함
그래서 제일 먼저 우리에게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용서와 그리고 인내를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어차피 인간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모두 아픔을 동반해야 합니다. 아프지 않은 관계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달 때 빨고 쓸 때 뱉어버리는 관계를 어떻게 진정한 관계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가족은 무엇인가 나에게 도움을 주는 어떤 것을 해주기 때문에 가족이 아닙니다. 가족은 그 자체가 그냥 가족이고 그래서 가족은 그가 가지고 있는 허물과 잘못까지도 함께 나누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되도록 부름을 받은 회피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만난 자가 아니라 만남을 주신 분을 생각하면서 이기고 하나님 의지하는 것인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배우자로 보내 주셨다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그 사랑으로 관계를 이어가다가 보면 하나님이 믿지 않는 남편도 믿게 만들어 주시고 변하지 않는 아내도 변화 받게 해 주셔서 그래서 새로운 인생의 장을 써가게 하시고 그것이 바로 가정에서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신다는 놀라운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B. 은혜로써 이김
은혜로써 이겨야 합니다. 한 사람이 숙명처럼 생각하던 결혼을 깰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혼을 생각하기까지는 무수한 고민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고 번민과 시련의 시간들 속에 겪어야 했던 고통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실수와 그리고 실패가 없습니다. 짧은 안목으로 보면 고통과 모순 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져도 믿음으로 긴 안목을 가지고 살아가면 우리는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당신의 나라를 건설해 가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설명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신실하고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사람을 만나게 하셔서 살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또한 나를 가꾸어 다듬으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한 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 믿음과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은 불행해 보이는 우리 가정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더 큰 뜻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애착과 허무한 것들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나면 이 세상에서 잠시 있다 사라질 것에 연연해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관계들에 헌신할 마음이 새롭게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가졌기 때문에 실망했다면 기대를 좀 접으십시오. 아내에게 너무나 많은 것, 다른 사람에게는 흔히 기대할 수 있지만 아내의 성품과 기질 상 요구할 수 없는 것들을 바란다면 그것 없이 사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런 여자를 만나게 해 주셨나보다 생각하고 마음 한편에 접고 그 대신 내 아내에게도 다른 사람에게 없는 좋은 것이 무엇일까 한번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사랑할 이유를 발견하고 그러면서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 이기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V.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어느 순간도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비록 우리는 그 길을 잘 몰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며 따르는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또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남편으로부터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랑을 하나님께 기대하고 아내가 모두 이해해 줄 수 없는 마음을 하나님께 토하며 살 때에 어떻게 보면 아내와 남편의 부족이 우리를 경건의 세계로 인도하는 도구가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매우 분명하게 아내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잠시 실망을 느낄지라도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게 하신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혼을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오늘 이 말씀을 깊이 숙고하면서 하나님께 그 마음의 심정을 토하고 주님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지혜를 가진 남편과 아내가 되어서 어떻게 하나님이 결혼을 통해서 주신 이 관계들을 아름답게 유지해 갈 수 있을 지를 생각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네 가족을 돌아보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쓴 디모데에게 쓴 목회적인 서신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에 두 번 투옥이 되는데 62년경쯤 첫 번째 투옥이 되었다가 풀려나고 그 후 한 5년 뒤쯤 다시 투옥이 되었는데 디모데 후서는 두 번째 투옥되었을 때 쓴 것이고, 디모데전서는 아마도 62년경에 로마의 감옥을 나와서 빌립보에서 이 편지를 쓰지 않았을까 학자들이 추정을 합니다.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목회적인 권고가 담긴 이 편지 속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의 질서와 성도의 생활에 대해서 상세하게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5장에서는 성도들의 가정생활에 대해서 지도하면서 그 지침 중에 가족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는 바와 같이 이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가정에 커다란 분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아마 이 편지를 받는 디모데가 돌보고 있었던 많은 지체들이 아픔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함께 모든 가족이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또 가족과 찢어져서 홀로 신앙생활하고 있는 사람들까지를 모두 포괄해서 가족들에 대해서 어떤 의무를 이행하며 사는 것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의 태도인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II.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이란 그러면 무엇일까요? 아마도 오늘 성경에서 친족, 가족이라는 이 두 단어는 이런 구분을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친족은 혈육을 나눈 가족보다는 약간 넓은 의미의 친척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면 가족은 아마 고유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한 단위로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식구들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이 가족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가정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이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 가족이라는 구성원들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A.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
인류 역사에서 아마 우리에게 가장 영향을 주는 세 개의 기관이 있다면 국가와 그리고 교회와 가정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교육이 시작된 이래로 학교를 들 수 있습니다. 국가는 이스라엘 역사를 볼 때에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세우신 기관이라기보다는 소극적으로 허락을 해 주셔서 세워진 나라입니다. 원래 그 나라는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신정 국가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나라처럼 왕이 통치하는 국가를 이루기를 원하셨고, 이 왕을 하나님이 허락해서 주신 것은 당신이 기뻐해서라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진노의 표현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어쨌든 국가는 하나님의 소극적인 허락 속에서 세워졌고 그래서 이 국가가 우리 인간에게 정말 행복을 주었느냐 하는 문제는 많은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국가가 백성들을 보호하고 민중들의 질서를 바로 잡음으로써 국민의 행복에 이바지한 측면도 있지만 때로는 이 국가는 괴물처럼 등장해서 전체주의라는 폭력으로 개인의 삶을 짓밟고 억압하고 파괴하는 일들을 다반사로 행했기 때문에 국가는 우리 인간의 행복을 위해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국가는 그렇게 세워졌고 가정과 교회는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유일한 두 기관입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이 가정이 곧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타락하고 난 뒤에는 이제 이 가정과 교회는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가정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경외심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람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거대한 사회를 이루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선택한 가정과 나라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에 관한 지식을 보존하고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가정을 택한 것이었고 이스라엘 나라를 택한 것이었고 이것이 신약 시대에 와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존재 가치는 그 나라 안에서 태어난 인간들에게 정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르지 않은 국가는 정말 제대로 된 국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법도 짓밟고 정의를 짓밟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들이 국가의 지도와 감독 하에서 법률을 통해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불의인지를 배우면서 살아가도록 국가는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국가가 불의를 행하고 악을 저지를 때에 백성들은 그 국가에 대해서 항거할 수 있고 항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합법을 가정한 법을 통해서 정직과 정의와 신의를 배신한다면 그 법은 지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국가가 정의를 저버릴 때에는 혁명을 일으켜서라도 그 국가를 전복하여 그 국가가 정의로운 국가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들의 의무요 또 권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B. 인간됨과 삶을 배움
그처럼 국가가 정의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고 백성들에게 올바름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의무를 가졌다면 교회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정의를 통해서 사랑으로 가고 교회는 같은 정의를 추구해도 사랑을 통해서 정의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감화를 주기보다는 법을 제정해서 그 법대로 사는 사람들이 이익을 받게 하고 그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손해를 보고 징벌을 받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정의를 구현하지만 교회는 사랑으로써 그 사랑의 일치를 이루면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어떻게 모든 이웃의 행복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신의 행복에도 이바지하는 지를 보여주어서 사랑으로 정의를 완성하도록 가르치고 살아가는 삶의 모본을 보여주는 것이 교회의 존재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종종 국가에서는 사랑이 무시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교회에 와서는 정의가 존중받지 못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진정한 정의는 사랑을 완성하고 참된 사랑이라면 정의를 이루는 것이어야지 둘을 서로 배반하는 정의와 사랑은 진정한 정의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가정은 이러한 정의와 사랑을 골고루 가르쳐 주어서 어떻게 이 두 개의 일치와 조화를 도모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 주는 것이 가정의 존재의 목적이고 가치입니다.
이러한 정의와 사랑에 대한 교육이 가정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돼지우리하고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와서 밥 먹고, 자고, 가고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가족은 그냥 혼자 살면 외로우니까 군집 생활을 한 결과가 아니라 바로 가족이란 그 안에서 인간됨과 참다운 인간의 삶을 배우는 곳이 바로 가정이요, 가족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참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을 때 의도하셨던 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고 성화되고 목양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이 모든 과정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참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입니다. 정치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행복은 대통령이 되는 것일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비전은 이 나라에 제일 큰 재벌의 회장이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최고의 영광은 아마 최고의 석학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인간의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정치인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사람으로서 참 행복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그는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가 없고, 또 부유해서 많은 재물을 손에 넣고 사람들을 자기 수하에 부릴 수 있는 경제 권력을 갖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한 인간으로서 행복하지 않으면 그는 진정한 성공한 삶을 산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이러한 삶의 외형적인 껍질과 상관이 없이 참 인간이 되는 것, 그것입니다. 그 참다운 인간이 되는 길이 무엇인가를 가정에서 가족 관계 속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인류의 타락과 함께 이 깨어진 인간의 질서는 결국 가정의 파괴를 가져왔고 가족 관계의 파괴를 가져왔습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던 가족 관계가 그 다음에는 서로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관계가 되었고, 자식들에게 와서는 살인을 벌이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을 창조하고 가족들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참된 인간됨을 배우는 질서를 완전히 폐기해 버리셨다면 인간은 약육강식 속에 살아가는 짐승의 세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비록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창조 질서의 희미한 흔적을 남겨두었고, 그 흔적을 따라서 인간들이 살아가게 함으로써 그 속에서 그래도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인간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없어도 인간의 참된 도리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를 일반 은총을 통해서라도 어느 정도 깨닫고 덕스럽게 살아가는 집안에서 태어나는 자식들이 비교적 행복한 삶을 사는 것도 그 때문인 것입니다. 부모가 이렇게 인간의 참된 도리와 그리고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모를 때 자식들은 그 불행을 대물림하게 되고 그래서 인간의 대부분의 불행의 씨앗은 가정에서 싹이 트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그 가정을 보면 알 수 있고 가족관계에서 심한 갈등과 상처로 뒤범벅된 사람들이 대부분 불행한 삶을 살게 되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진 가정에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그러면서 그 사람이 가정 밖의 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관계를 맺고 용납하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온전히 터득하지 못했기 그렇지만 상처가 많고 불행한 가정에 태어났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 모든 불행의 근원을 찾으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참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를 고민하고 신앙을 터득한 사람들은 오히려 더 훌륭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인정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가족은 자기의 성공을 위해서 이용하거나 혹은 자기의 이 세상에서의 생존을 위해서 그렇게 도구로 사용하는 그런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끔 가족들이 나한테 해 준 것이 뭐가 있냐고 그러는데 그런 말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은 무엇을 해 주기 때문에 가족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면 자기는 가족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똑같은 사람입니다. 가족은 운명 공동체입니다. 무엇을 해 주기 때문에 가족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서로의 불행과 행복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지 이익을 위한 단체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III. 가족을 돌아보라
오늘 성경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경건한 신앙이 어떻게 보이는 이 세상에서 구체화될 수 있을지를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풀어내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악한 자니라”고 말합니다. 즉, 가족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 ‘돌보다’라고 하는 이 단어가 희랍어로 ‘프로 노에오’라는 단어입니다. ‘프로’는 미리, 앞으로 이런 뜻이고 ‘노에오’는 알다, 보다 이런 뜻입니다. 이 단어하고 뜻이 거의 일치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있는데 그게 바로 ‘라하’라는 단어이고 그 단어는 여러분이 모르지만 이 단어를 미완결형으로 사용해서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신다’라고 한 ‘여호와 이레’라고 하는 단어가 바로 이 단어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라는 단어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았습니다. “100세에 낳은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나에게 재물로 바쳐라.”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했고 그래서 이제 이 이삭을 하나님 앞에 죽여 재물로 바치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말리셨고 그리고 하나님께 드릴 재물을 대신 예비하신 것을 보았고 그때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미리 돌아보신다’라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족을 위해서 미리 예견하는 사람, 미리 준비하는 사람, 공급해 주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A. 영혼의 형편을 돌아봄
그러면 가족들의 무엇을 돌아보아야 할까요? 제일 먼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가족들의 영혼의 형편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영혼이 영혼의 곤고한 상태를 헤아리고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끼려고 노력을 하면서 어떻게 그 곤고한 영혼의 상태에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어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족을 영혼으로 보기 시작하면 사랑할 마음이 생겨납니다. 가족의 영혼의 형편을 돌아보면서 눈물 흘리며 그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은 은혜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족들 속에서 받은 상처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불쌍하고 곤고한 가족들의 영혼, 심지어 구원받지 못해 고통 하는 가족의 영혼을 향해 눈물 흘릴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가 그를 위해 대신 눈물을 흘려주어야 할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들의 영혼의 형편을 돌아보며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라보셨더라면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시고 어떻게 그 영혼을 도우셨을 지를 생각하며 가족의 영혼에 대한 경건한 부담을 느끼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라고 여러분을 먼저 구원해 주셔서 여러분의 가족들의 영적인 지도자로 삼으셨고, 또 모든 가족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 할지라도 여러분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신 것은 바로 이렇게 여러분의 가족의 영혼의 형편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해서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도록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 그 분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가족들을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이유 하나로 자신의 인생에 도움 안 된다는 이유 하나로 그 가족들에게 무관심이라고 하는 복수를 하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 가족을 정말 영혼으로 생각하고 그 가족들이 곤고한 영혼으로 신음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고 자신에게 주신 그 모든 진리와 성령의 은혜로서 그들을 섬겨 그들을 그 곤고한 영혼의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는다면 아무리 깨어진 가족들과의 관계도 고치지 못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여러분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B. 물질적 형편을 돌아봄
두 번째는 가족들의 육체의 형편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궁핍할 때에 나눠준 사람들을 잊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가족들과의 관계가 깨졌다면 대부분은 이기심 때문입니다. 용서와 이타적인 사랑은 바로 그 모든 깨어진 관계를 치료하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도 제가 쓴 주기도문을 읽었습니다. 한 열댓 번 정도 읽은 것 같습니다. 읽으면서 또 마음이 아팠던 대목이, 1994년도 북한의 고난의 행군 때 그때 많이 보는 사람은 약 200만 명이 굶어죽었다고 봅니다. 국제적으로 알려진 통계만 약 133만 명이 북한에서 굶어죽었을 거라 그렇게 봅니다. 그런데 15번이나 넘게 읽은 것이고 쓰기 전에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만 다시 한 번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때 우리는 IMF도 나기 전이었고 정말 경기 좋을 때였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 들으니까 동네 곳곳에서 시체 태우는 냄새가 북한 전역의 코를 찔렀답니다. 너무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때 우리가 정말 도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보수냐 진보냐 싸우지 말고 어떤 사람이 들으면 미친 소리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제발 이 쌀 좀 받아달라고 한 번 북한에 인사하면서라도 도와줘서 그 사람들이 죽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말입니다.
키케로라고 하는 로마의 철학자는 의무론이라는 책 속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설득하고 싶었냐 하면 네가 인간으로서 어떤 이웃에 대한 의무를 다해라 그렇게 하면 당장은 네가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결국은 그렇게 함으로써 마지막에 그 이익이 너에게도 돌아온다. 그 책 전체에서 그것을 설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 별로 안했는데 그 어떤 의사가 의사이면서 또 우리나라 의료보험 체계의 복지 전문가가 있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지금은 북한 사람들이 잘 못 먹고 해 가지고 지금 군인이 북한을 가보니까 나라를 지키고 있는 군인의 키가 우리나라 중학교 1~2학년 학생들 키밖에 안됩니다. 최근에 북한에서 병역법을 바꿨는데 142cm만 되도 군대에 갈 수 있다고 바꿨습니다. 이전에는 더 큰 키였는데 그 보다 큰 애들이 별로 없으니까 기준을 낮춘 것입니다. 142cm면 제 키에서 30cm가 내려가야 됩니다. 초등학교 4학년, 5학년 키입니다. 안 믿어질 것입니다. 휴전선만 넘어가도 이게 실감이 납니다. 그런데 그 전문가 얘기는 뭐냐 하면 이게 지금 못 먹고 특히 영양실조가 되어서 자라는 아이들이 이제 통일이 되면 어마어마한 노후 의료비와 그 다음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 돕는. 북한에는 장애인이 없습니다. 아이를 낳을 때에 장애인이면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립니다. 그래서 엎어 버립니다. 아이를 낳으면 산모가 맨 먼저 물어보는 것이 ‘우리 아이 괜찮습니까?’ 그러면 조산원이 ‘예, 괜찮습니다.’ 그러면 다행인데 대답이 없습니다. 언청이로 태어난다든지 그 다음에 기형이 태어나면 그러면 그냥 부모 스스로 ‘이 아이 어떡할까요? 언청이로 태어났는데요.’ 그러면 부모가 ‘일 없습니다.’ 하면 딱 엎어놓는 것입니다. 잠시 후면 죽습니다.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현실들을 이렇게 보면서 가슴이 정말 아침에도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동포라도 이런 마음을 갖는데 가족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게 한번 내가 물질을 도와주면서 ‘이것 때문에 우리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고 그 가족들을 정말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 그를 돕게 하고 도왔다는 사실 자체도 자신은 망각해야 하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90년대에 터키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정말 비참했고 3만 명인가가 죽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구호물자가 왔고 한국에서도 구호물자가 왔습니다. 터키에서 터키는 또 우리나라를 형제의 나라라고 자꾸 그럽니다. 그래서 이제 구호물자를 받았는데 그 중에 한국 교회에서 온 것이 있었습니다. 컨테이너가 와 가지고 박스가 수없이 들었는데 거기에 의료품, 식량, 의복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나눠주니까 기뻐서 그게 동네에 다 분배가 되고 다 뜯어보니까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성경책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이슬람 지도자들하고 학자들하고 사람들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토크쇼를 했답니다. 하면서 하는 얘기가 뭐냐 하면 한국이 이런 물자를 우리가 고통을 받을 때에 보내 준 것은 너무 감사한데 뜯는 그 순간 성경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서 자기네는 그런 말을 했답니다. “우리가 지금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은 종교를 팔아서 도움을 받을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선교의 역효과가 난 것입니다. 물론 이제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보고자 하는 복음 전파의 열정은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그런 식으로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많은 물자를 도와주고도 기독교에 대한 아주 나쁜 인상을 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가족들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속에서 동정과 자선이 아닌 사랑, 한 번의 도움을 주면 저 사람이 깊이 감동을 받고 예수를 믿어줄 것이라고 하는 거래의 관계로 보지 말고 가족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마음이 동기가 되어서 그 일을 행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C. 매일 기도하라
마지막으로는 이 일을 위해서는 매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죄에 대해서 죽고 천국을 묵상함으로써 상처가 많고 고통이 있는 이 가족 관계 속에서 그 모든 상황을 영적으로 해석하면서 하나님이 이런 가정에서 자기를 예수 믿게 불러주신 섭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 기도 속에서 자기의 이기심을 죽이고 자기의 잘못된 가족 섬김의 동기를 정화하고 가족을 위한 희생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게 하고 하는 일들이 바로 이 기도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가족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은 절대 가족과 이익의 문제를 가지고 싸우거나 분쟁할 수 없습니다.
IV. 적용과 결론
주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라고 불러주셨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아도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냄새가 나시는 분인지를 알게 되고 비록 예수님은 몰라도 우리를 통해서 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상처가 많은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여러분이 그 상처 많은 가정을 어두운 밤하늘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를 받은 여러분은 그 밤하늘의 빛나는 별이 되기로 결심하십시오. 용서하고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한없이 용서하고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에게 배신을 당하시면서도 우리를 섬기신 것처럼 그렇게 가족들을 섬길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힘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줄 믿고 그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사랑으로 세워지는 가정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