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와 권세를 못 박은 십자가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 3:15)
골로새서 2: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아멘 지금이 4번째 십자가에 대해서 증거할 때 그것은 십자가는 우리에게 위대한 승리를 가져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가슴 벅차 오르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은 원래 이기고 승리하고 지배하고 개가를 부르는 일에 익숙해져있기 보다는 지고 패배하고 제압을 당하고 갈등을 하는 일에 종속되기가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골로새 교회는 지금의 터키 지방에 자리하고 있는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 도시가 점점점 쇠퇴해서 이제는 조그만 상업도시로 전락되어졌어요. 그런데 이 도시가 왜 신약 성경에서 다시 중요한 도시로 등장하게 되냐하면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에바브라 하는 사람이 복음을 듣고 회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에바브라가 복음을 이 지방에 전하게 됨으로써 그 골로새에는 골로새 교회들이 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때부터 신약의 도시 중에서 아주 중요한 선교적인 산업으로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근데 이 어린아이와 같이 연약한 형편에 지나지 않는 골로새 교회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시련의 폭풍이 불어왔습니다. 이 폭풍은 이단의 폭풍이었습니다. 어떤 이단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는 안 나와 있지만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런 것 하지 말라 이런 것 하지 말라 라고 얘기하는 것을 봐 가지고 이 어린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이단은 음식이나, 할례 이런 것들을 잘 지키라고 고집을 하는 율법주의 의식주의, 그 다음에 몸을 괴롭게 하는 금욕주의, 천사들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 그리스도의 신분을 깎아 내리는 것, 그 다음에 신비한 지식을 강조하는 것, 인간의 지혜와 내려오는 그 전통들을 신뢰하는 이런 것들로 되어 있습니다. 이 이단적인 가르침에 핵심적인 문제는 사람의 구원에 있어요. 구원이 어떻게 해서 받는 거냐 하는 것에 대해서 이단적인 교리를 전파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에는 별 관심이 없고 율법주의와 당시의 철학과 신비적인 사상들에만 관심이 매여 있었다는 것이 골로새 교회의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이단적인 가르침이 허망한 것이라고 꾸짖으면서 그리스도로 그리고 그 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것만이, 구원은 오직 그 분의 십자가로만 말미암을 수 있다는 것을 못 박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율법을 지키지만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의 증서를 도말하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그리고 정사와 권세 악한 영들과 귀신들을 벗어 버리고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 승리하셨느니라! 이 말을 들을 때 공통적으로v스쳐가는 영화의 화면들이 있을 거에요. 승리하셨느니라! 그럴 때 우리들은 아름답게 호화로운 궁궐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황량한 벌판 싸움터, 시체들이 널려져 있고 깃발이 나부끼고 사람들은 죽어가고 아직까지도 포연이 자욱한데 그 속에서 군인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이런 것들이 바로 승리하셨느니라! 라는 말을 들을때 우리 마음속을 오가는 화면들입니다.
승리는 반드시 싸움을 전제로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십자가에 나타난 위대한 승리를, 그것이 곧 우리들의 것인 것을 여러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싸움은 반드시 이긴 자와 진 자를 만들어 주고 그 싸움 속에서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싸움을 자기의 손으로 이기고 상대방을 진자로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달력을 보면 1년 치 달력에는 약 52회의 월요일이 있죠, 화요일은 몇 번 있을까요? 거의 비슷하겠죠, 거의 차이가 안 나가겠죠? 금요일도 역시 52회 정도 되는 금요일이 있습니다. 후라이데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후라이데이 중에서 어느 후라이데이는 그냥 후라이데이라고 부르지 않고 거기에다 good라는 말을 붙여 줍니다. 그 후라이데이를 성 후라이데이라고 합니다. 무슨 날일까요? 수난주간 속에 들어 있는 금요일만 good 후라이 데이 라고 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금요일을 우리들은 성 금요일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서양사람들은 그 후라이데이를 뭐 그렇게 거룩하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좋다, 좋은 금요일... 기쁜 금요일, 좀 이상한 일이죠, 예수님이 죽으신 금요일이 원통한 날이던지, 베드후라이데이, 비터후라리데이라고 하면 좋을텐데 왜 좋은 후라이데이라고 부를까요? 이 문제를 여러분들에게 설명해 드리겠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승리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이 예수님이 죽으신 수난을 결코 우리들에게 있어서 슬픔이 되지 아니해요. 기쁨과 승리와 행복의 깃발을 높이 드는 승리의 쾌거였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증거해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들지 않습니다. 영적인 세계, 뭐,.. 영혼의 세계.. 이런것들은 인간의 지성이 깨이기 이전에 시대의 미신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눈부신 과학의 발달이 비로소 영들의 세계 같은 것들이 없음을 폭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귀신, 마귀, 영적인 싸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막 떠벌이는 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의 색깔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만들어 버리고 또 현대인들에게는 무지한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깨이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는 인식을 가져다 줍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태도는 교회 속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이 가장 강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관심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은 사탄이에요. 사탄, 악령, 마귀, 악한 귀신, 악령들과의 싸움, 전쟁 이런것들은 점차 잊혀져버려가는 낱말들이 되어버렸어요. 언제부터인지 강단에서도, 혹은 성경공부시간에서도 이런 낱말들을 거침없이 쓰는 것은 왠지 쑥스러운 생각이 드는 이러한 시대가 되었어요. 그리고 가능한 이런 자극적인 원색적인 발언들을 삼가는 풍조가 교회 속에서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우리들은 이 세상의 합리주의적인 시대 정신이나 과학이라고 하는 이러한 학문들에 있어서 설득당하는 입장에 서서 이 문제를 보면은 큰일나게 됩니다. 과연 영적인 세계가 있는가, 없는가. 과연 악령들이 도전하고 있는가, 없는가 하는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은 너무나 중요한 겁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끝까지, 천국에 가는 그 순간까지 마지막 질문 그 직전까지, 우리들로 하여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방해하는 세력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오직 우리가 이 세상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서서 이 문제를 살펴보아야 된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으로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하는지를 깨닫지고 못하면서 심한 고통을 받습니다.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심리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친구가 그렇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영향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부수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빕니다.
성경은 분명히 악한 영들의 세력이 존재한다고 증거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강력하고 역사하고 있음을 밝히 가르쳐줍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영적인 세력과의 싸움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의 어두운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고 에베소서 6장 12절은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사단의 지배를 받는 악령의 세력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받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마음이 안 내켜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의 세력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고린도후서 4장 4절은 밝히 말합니다. 고린도 후서 4장 4절은 말합니다 ‘이 지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그들의 영혼 속에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라’ 악령의 세력들이 있다 없다 논쟁하는 어리석은 현대 지성인이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 요한의 증거는 시비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라’ 요한일서 3장 8절 말씀입니다. 만약에 마귀의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오심은 허황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의 오심의 중요한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는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분명히 확신합니다. 마귀가 없다는 사실이 입증된다면 우리들이 믿는 이 신앙은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악한 영의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존재도 거짓말입니다. 만약 악령의 세력이 있지 않다면 예수님의 오심은 허황된 것이요, 우리의 믿어온 신앙의 모든 내용들도 한낱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의 거듭되는 증언은 사탄도 있고 마귀도 있고 정사와 권세도 있고 귀신들이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영적인 세계, 그것도 무서운 싸움이 치열하게 계속되는 영적인 세계가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세계가 그렇게 안 믿어질까요? 믿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그것이 또렷이 보이는데 순간순간 그것을 의식할 수 있는데 왜 이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 )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이 세계가 죽어도 믿어지지 않아요. 바울은 이와 유사한 형편에 처해 있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며 또 깨닫지 못하나니 이런일들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하느니라’ 따라서 영혼이 거듭나고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면 이 영의 세계는 분별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어도 분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악령의 세력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성경의 증거를 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신약 성경 전편에 널려져 있습니다. 신약 성경 어느 한 곳을 찾아봐도 악령의 세력들의 언급을 증언한 성경은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펴져 있습니다. 신약의 첫 책은 마태복음은 하늘에 속한 영적인 피조물인 천사의 등장으로 시작이 되고 마지막 계시록은 악한 마귀 곧 사탄이 심판을 받음으로 새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신약 성경은 마치고 있습니다.
구약 창세기는 인간의 구원의 역사를 악한 세력인 사단의 조정을 받는 뱀의 유혹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을 하고 있고 신약의 ( )은 그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록하기 위해 첫장을 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와 더불어 짝을 이루는 성경의 중대한 관심은 사단이 마귀의 세력이라는 것입니다. 사단이 없다면 마귀의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십자가의 승리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싸울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관심은 세상의 구원이고 세상은 근본적으로 악한 영의세력들에게 지배받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 십자가는 곧 이 짝을 이루는 성경의 중요한 관심은 사단과 마귀의 세력들의 존재들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제가 지금 증명하려고 하려는데 이러한 악령의 세력들은 어떤 추상적인 관념으로 선, 악 뭐 어디 만져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에 있다, 악에 있다 이런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체로서 행동하며 역사하며 세상이 돌아가는 데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는 것이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히 두개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고 또 다른 하나는 사탄과 그의 졸개들이 곧 정사와 권세라는 이름이 붙은 악령의 무리들이 지배하는 영역입니다. 궁금한 것은 사탄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명백하게 얘기할 수는 없어요. 이사야서에 암시적으로는 나올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 였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사탄이 원래 천사였다는 거에요. 그것은 분명합니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이 사탄은 천사들 중에서도 우두머리에 속하는 그러한 천사장이었다는 그리고 이들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지음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어떤 방식으로든 하여튼 대적했고 그 원인은 그들이 교만해 있었다는 것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와 그들을 따르던 타락한 천사들과 함께 악령의 세계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죽으면 120년 동안 떠돌아다니면서 귀신이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이단적인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천사들과 인간의 창조를 구별합니다. 타락한 천사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이름과 그 분의 영광을 더럽히고 욕되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같은 그들의 욕망은 온 세상을 다스리도록 책임을 맡은 첫 인간 아담과 하와를 유혹함으로써 나타났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계를 더럽히고 욕되게 하기 위해서는 이 온 세상을 다스리도록 책임 맡은 창조의 면류관인 이 인간들을 타락시키면 자기의 종이 될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욕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이 생각을 가지고 행동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졌습니다. 이후로 죄를 짓게 하는 사단의 능력과 사망의 권세는 공중의 세계를 넘어서 이 땅에 까지 영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니까 죄의 대한 형벌로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사탄은 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것을 미끼로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고 사람들은 허망한 일에 굴복하게 되었어요. 그러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공통적인 감정이에요. 그런데 이것은 바로 사단이 가지고 있는 이 카드가 바로 죽음이에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사단에게 속한 권세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만 그러나 그 죽음을 가져오게 하는 자는 사단인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원시인들로부터 20세기의 이 과학 문명한 발달한 현대인들까지 사람들이 얼마나 이 죽음의 공포에 두려워하며 그것 때문에 얼마나 허망한 일들을 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원시인들은 이 사망이 두려워서 해에게 빌었습니다. 달에게 경배했습니다. 별들을 섬겼죠, 우상들과 생명이 없는 목석들을 두려워하며 그 목석들 앞에 귀한 생명을 드려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그들은 도무지 하나님이 이 땅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기대하셨던 정상적인 인간의 삶을 영위할 수가 없었어요.그러나 사단의지배는 이러한 인간의 종교 생활에만 미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역사와 이 세상의 지금의 이 세상의 악한 형편과 이 상황을 가져오게 하고 우리들의 이러한 온전치 못한 삶을 가져오는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회고해 보십시오.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싸움은 자기의 육체의 연약함과 싸우는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을 박해하는 로마인들과의 싸움도 아니었습니다. 제사장들과의 싸움도 아니었고 서기관들과의 싸움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대적은 그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당당하게 맞서고자 하셨던 최대의 적은 사탄이었습니다. 악한 영들의 세력이었습니다.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였죠. 목동들이 지팡이에 기대어서 졸고 양떼들이 우리에서 땅을 비비며 깃들고 있는 밤이었습니다. 평화로운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마굿간에는 잠자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마굿간에는 이제 곧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 짐승들의 부수럭거리는 소리들이 들렸습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예물을 드렸고 천사들은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날아다니던 때였습니다.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정경입니까? 그러나 이처럼 아름다울 때에 사탄은 헤롯대왕을 도구로 택해서 베들레헴에 있던 2살 미만의 어린아이들들 무참하게 학살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야에 대한 악령들의 세력의 첫 번째 반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인된 예수님을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내어보내시고자 세례 요한에게 나아가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것은 메시아로서 공식적인 취임식을 갖는 장면이었습니다. 요한은 메시아를 경배하며 맞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세례를 베풀었으며 예수님은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 겸손히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에게 비둘기 같은 성령을 보내셨고 사람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 받는 장면을 고개를 숙이며 경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진 것은 평화롭고 한가한 요단강 강가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러나 이 취임식이 끝나고 우리 예수님을 제일 먼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메시야의 오심을 환영하는 환영의 인파가 아니라 그의 구원 사역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고 하는 광야의 마귀고 곧 사탄의 세력이었습니다. 그의 구원사역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기 위해서 40일간의 금식으로 기진한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하고자 사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분이 항상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을 행하셨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셨으나 항상 대적들에게 둘러 싸이셨어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시간도 제사장과 그리고 서기관들의 시험과 모함과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위협에 둘러싸이지 않고 살아가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 무리를 충동질하고 있는 것은 마귀의 세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안에 욕심을 너희에게 행하고자 함이니라’ 명절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거리는 축제의 분위기로 가득찼고 성인 남자만 100만 명에 가까운 인파가 모여서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조용한 2층 다락방에서 저녁 회식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양고기가 식탁에 올라왔고 떡과 포도주가 오고갔습니다. 제자들은 저마다 식사를 했고 제자들은 평화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어떤 제자들은 예수님의 품안에 포근히 안겨 있었습니다. 희미한 등잔불에 아래 이야기꽃을 피웠고 예수님이 바로 진리이셨습니다. 얼마나 평화로운 저녁 식사시간입니까? 그러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그 자리에 또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단이였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고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이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공모하여 그 사람들에게 예수를 넣는 방책을 의논하며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였다.’ 이 평화로운 만찬 석상에도 사단은 어김없이 등장해서 예수를 죽일 일에 넘겨줄 유다를 택했습니다. 가야바와 안나스를 선택해서 종교 재판을 하게 했으며 사형을 선고하게 만들었습니다. 빌라도를 택했습니다. 수많은 유대 백성들이 소리지르고 충동질함으로 예수님의 사형을 확정짓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해 달라고 소리치던 이 사람들은 얼마전 까지만 해도 그 분이 축복하심으로 떼어주시던 떡과 물고기를 먹고 배불렀던 사람들입니다. 얼마 전 그들은 ( )전만 하더래도 예루살렘 성 앞에서 입성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외치던 백성들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어김없이 일제히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 분을 향하여 돌을 던지고 등을 돌릴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조금전까지 호산나 찬송을 부르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찬송을 부르던 그 사람들이 닷새 만에 그렇게 차갑게 얼굴을 돌리고 그 분을 향해 돌을 던질 뿐만 아니라 못 박게 하고 그리고 흉악한 강도 바라바는 놓아 달라고 일제히 소리를 지를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이 일을 위해서 이렇게 조금도 의견의 분쟁이 없이 일제히 만장 일치로 소리를 지르며 빌라도를 위협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결코 인간들의 성품이 악해서였기 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단의 세력은 집요하게 지금도 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그는 대단히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노리고 속이면서 자기의 세계를 지키고 있습니다. 사단이 유혹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던져주는 미끼에 입을 벌리며 그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은 바로 그 손아귀의 장난감으로 떨어지는 인생인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인생들의 운명에 대해서 말합니다. ‘너희가 그 가운데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사탄과 그를 따르는 악령들의 그들은 ( ) 원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를 ( ) 하는데 이들은 결코 자기네 나라를 확장하고 자기네 나라의 지배권을 확장하기 위해서 쉬는 법이 없습니다. 졸때도 없습니다. 놀 때도 없습니다. 자기의 자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이것들을 위해서 최대한의 전심을 다해서 투쟁합니다. 이를 통해서 사탄의 역사를 배워야 합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인류의 평화에 대해서 가장 많은 논의가 오고가는 20세기에 지금은 두 번의 처참한 세계 대전을 경험했습니다. 원자폭탄이 떨어지는 상처를 경험했습니다. 우리 동족의 강토가 화염에 휩싸이는 6.25를 겪었으며 적어도 400백 만 명의 동족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지금도 세상은 전쟁의 위협아래 살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물질의 문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지금도 1년에 2,500만 명 이상이 이 지구상에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30,000명 이상이 에이즈의 위협적인 병마의 공포가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50년 전에 비해서 오늘날 우리 국민들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저희들 시대에는 국민윤리가 필수 과목으로 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흥청거리는 이 도시의 꼴을 보십시오. 국민 정신을 바로잡다던 무수한 구호가 남고 잘살아보고 바르게 살아보자고 수많은 가르침들이 강조되고 방송이 쉬지 않고 떠드는대도 오늘 우리들의 삶은 이러한 노력과 수고를 비웃는 듯이 우리들 중에 누구도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학교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두가 잘해 보려고 애를 씁니다. 선생님들도 잘해 보려고 애를 씁니다. 학생들도 잘해 보려고 애 씁니다. 정부도 애를 씁니다. 그러나 왜 그런지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학교의 모습은 우리들 중에 누구도 원하는 모습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조국의 정신은 말 할 수 없이 황폐해져가고 물질적이고 쾌락을 위해서는 어떤 짓도 서슴치 않는 병적인 현상이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시대 속에 지금 우리들의 ( )
해마다 흉악한 범죄가 급증하고 그리고 마약이 날개돋친 듯 팔려나가며 백주의 대낮에 강도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함니다. 청년의 범죄가 급증하며 폭력이 가장 많고 날로 난폭해져갑니다. 흉악해져 갑니다. ( ) 어디라고는 얘기하지는 않겠어요. 학교 얘기까지는 할 수 없어요. 여학교입니다. 미션입니다. 80년 전통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심에 있습니다. 매일 같이 하루에 5,6개씩 여자 화장실에서 주사기를 발견합니다. 히로뽕 주사입니다. 중 고등학교 입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대요. 인간은 모두 타락한 존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성이 착하지를 않고 아주 악합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가꾸어 가기에는 ( )합니다. 악한일을 행하기에는 능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등지고 타락으로 치달아가는 이 세상의 이 비참한 형편은 단지 인간들만의 탓이라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인간들아, 이 모든 타락이 전부다 너희들 책임이다’ 라고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라고 악을 행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소수에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육체적으로 정결하게 살아가고 있고 히로뽕을 맞고 마약에 미친 사람들 보다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 사회에서 부동산 투기를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그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 ) 이렇게 생각하는 학생들보다는 내가 이 모든 욕심들을 누르면서 내가 성실하게 노력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해야 된다는 착한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이렇게 잘해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짜내고 애를 쓰고 노력을 함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노력이 항상 그렇게 시시하게 끝납니까? 왜 이런 노력들은 열매를 못 거두고 항상 실패로 끝납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입이다. 하나님, 대충 믿어보자 결심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항상 그런 것은 순간이고 우리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어찌든지 나는 하나님의 자녀도 그 분을 바로 믿자 내가 이러면 안 되지, 내가 이렇게 유혹받으면 안 되는데 그분이 싫어하시는데.. 도리질을 칩니다. 이럴 때가 훨씬 더 많고 이런 형제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잘해 보려는 노력은 왜 항상 비참하게 실패로 끝납니까? 그런 열심있는 잘해보려는 이런 결심들은 왜 그렇게 결과를 그렇게 작은 결과 밖에 못 가져오는 것입니까? 그리고 왜 우리들의 실패는 엄청난 재앙을 가져와서 우리들로 하여금 신앙의 모든 기쁨들을 송두리째 앗아갑니까? 이런 것들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선한 일들을 위해서 뿌린 이런 결심들은 너무나 싼데 비유하고 악한 일들을 위해서 잠시 실수한 것들은 그 댓가가 너무나 크게 다가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결코 우리인간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들이 지금이라도 당장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일에 옮겨보십시오. 여러분들의 그 선한 결심을 방해하는 세력들을 금새 느껴 보게 될 것입니다. 한번 여러분들의 삶의 죄악을 벗어 버리고 악령의 세력들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이 되도록 몸부림쳐 보십시오.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 강하게 억압해 오는 세력들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사실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몸부림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겠다고 비장한 결심을 하지 마십시오.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실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주 안에서 그 시련의 능력으로 강건해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쓰러지지 않고 서기 위함이라’ 우리의 싸움은 육체의 싸움이 아니라 영들과의 싸움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영들과의 싸움은 우리의 육체로 맞서는 싸움이 아니라 우리의 영이 맞서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똑같은 이 세상, 우리들이 지금 영적으로 당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어려움 속에서 몸부림치던 바로 그 사단의 세력들과 대적하며 동일하게 살아보려고 했던 사도 바울은 감격에 찬 어조로 말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드러내셨느니라” 정사와 권세 악령의 세력들과 악령의 정사와 마귀의 권세들을 정사란 이름을 가진 마귀의 세력들과 권세라는 이름을 가진 악령의 세력들 이것들과 함께 이 모든 것들이 십자가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보여드릴 것입니다.
지금 읽어드린 그것에 헬라어 원문에서 읽습니다. ‘그가 정사와 권세를 무장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시며 십자가 안에서 그들을 위해서 승리하셨느니라’ 이것이 바로 바울이 그토록 이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다음에 사탄은 자기의 왕국에 끊임없는 도전을 느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결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예수님이 따로 오신 다음에 마귀들이 가가지고 열심히 노력을 해서 어떤 사람을 간질병이 들게끔 만들어 놨어요. 얼마나 수고를 많이 했겠어요. 어,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더니 귀신아! 나가라 하니까 자기들이 그렇게 애써서 만들었던 간질병이 쫓겨 가버리고 그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었어요. 온전한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어버렸어요. 그리스도인이 됐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자기의 지배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힘입어서 대항하겠다는 단호입니다. 마귀가 강하게 역사해가지고 미친자로 만들어버렸어요. 가족을 떠나게 만들고 이제는 무덤가에서 쇠고랑을 차고 생활을 하게끔 만들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귀신아! 물러가라, 하니까 물러갔어요. 자기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애 써가지고 미친자로 만들었는데 단 순간에 정상적인, 온전하게 돌아왔어요. 이제 자기 지배권에 엄청난 이상 전쟁이 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막 무너지기 시작하는 거에요. 자기가 죽어버렸어요. 죽여 버린 사람을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 한마디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세의 가장 큰 권세의 큰 칼을 사망이라는 칼을 말씀으로 뿌려 뜨려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셨어요. 이러한 사실을 보면서 사단은 예수님이야 말로 앞으로 자기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 치명적인 적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회당에서 날이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베껴 쓰던 사람들은 마귀의관 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자기들에게 도전하는 인생은 아니었기 때문이기에, 날이면 날마다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달콤한 말로 율법을 가르쳐주던 율법사들이 있었는데 마귀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그들 속에는 자기들과 더불어 싸우기 위해 다가오는 성령의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이 예수를 처단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택했습니다. 가야바가 예수를 죽인 게 아닙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죽인 게 아닙니다. 백성들이 죽인 게 아닙니다. 그들은 다만 사단의 도구일 뿐이였어요. 배후에는 사단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예수를 죽여 없애버리고자 결심한 이것이 사단에게 있어서는 지상 최대의 실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실수는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예수를 죽임으로써 예수와의 싸움은 끝내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이 세상에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원의 승리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 주님의 지혜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말미암아 사단들은 자기에게 영원한 승리가 확보된 것으로 기뻐하였지만 그들이 박수치고 있을 때 사실은 위대한 승리의 나팔소리가 사탄의 왕국 한 복판에서 울려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권세는 폐하여졌으며 정사의 귀신과 권세의 악령들은 무장해제 되고 멸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왕국은 산산이 조각이 났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 버렸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셨는데 그것은 영적인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한편 구석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고 백주 대낮에 일어났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이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났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언덕 위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겨지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졌습니다. 무덤이 열리고 죽었던 성도들의 몸이 부활됨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행세했던 그 사망이 이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효력이 없는 줄 믿었습니다. 세상이 창조된 이래 이 같은 일은 없었습니다. 사단의 왕국은 괴멸되고 그들의 마지막 쥐고 있던 권세의 사망의 카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능력 앞에 휴지조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승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승리의 물결은 계속해서 밀물과 같이 밀려 나갔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사단의 권세가 허망한 것을 드러내셨고 그의 권세는 산산히 부숴져서 파산되어버렸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사단의 능력은 상실되었고 그의 권세는 물뭉치에 시작되었습니다.
권세를 행사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래요. 그것은 뭐냐하면 인간들이 죄를 짓지 않는다면 곧 사단의 먹이가 될 수가 없어요. 죄를 짓기 때문에,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 죄의 사슬로 묶어 놓고 계속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들로 끌고 다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언어의 표현이 아닐지라도 구체적인 것들을 봅니다. 어려서 우리는 다 한번씩 거짓말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 거짓말을 해 본적이 없다 라고 하는 사람은 지금 거짓말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근데 우리는 종종 경험이 항상 거짓말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번 거짓말을 하면 다음에는 그 거짓말을 피하기 위해서 좀더 큰 거짓말을 해야 하고 다음에는 그것들을 은폐하기 위해서 또 엉뚱한 거짓말을 해야 하고 이것이 바로 죄가 인간들을 사슬에 묶어 놓는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떠나 있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요연한 처지입니다. 심지어는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사하심을 입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끊임없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난 다음에 딱 마음속에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무슨 느낌입니까? 어떤 느낌이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난 다음에 다가옵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유로운 해방일 것입니다. 그렇죠, 이 권세에서 벗어날 한 길을 그리스도께서 여셨습니다. 우리가 사단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그의 손아귀에서 해방되는 것은 그가 우리를 붙잡고 있는 그보다 더 큰 해방의 능력을 우리가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 지배와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 길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그 악령의 세력들보다 더 큰 능력을 우리들이 힘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강한 능력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한 결코 사단의 세력들이 우리를 범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분명코 사단을 이기시는 유일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들이 어떤 생각을 갖게 되냐면 그러면은 나는 왜 구원을 받았는데도 순간순간 악령의 세력들에게 눌리고 혹은 도전 받을 때에 왜 힘이 없는 것들을 느끼게 되느냐 하는 것들입니다. 거기에 답을 드리겠습니다. 이 십자가는 우리들에게 승리를 약속해 주셨지만 그렇지만 이 십자가는 단순히 우리들을 죄에서 용서한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그 정도 차원으로만 보기가 일쑤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는 십자가에 보면서 눈물을 많이 흘리지만 그 십자가에 대해서 많이 이해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있습니다. ‘주님이 아프셔서 어떻게 하셨을까? 내가 대신 졌으면....’ 뭐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근데 그것은 십자가의 아주 초보적인 것입니다. 더 큰 ( )은 뭐냐하면 이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우리가 그 십자가를 믿었다고 하는 의미는 단순히 나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의미는 그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에게 그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그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의 삶 속에 뜨겁게 용솟음치며 역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능력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죄짓기를 원하는 육체를 이길 능력이 있고 죄악 세상을 이길 능력이 있고 우리들을 도전해오는 세력들을 꺽을 권세가 우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다만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그런 죄를 용서받았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힘입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받은 사실은 평생가도 지워지지 않고 고정되어 있지만, 그 보혈로 말미암은 능력은 커졌다 작아졌다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를 관계를 가지고 그 십자가를 가지고 주님과 온전한 관계를 가지고 살 때 그 때 우리들은 십자가를 통한 보혈의 능력이 우리 속에 계속해서 살아서 역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십자가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고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우리들의 신앙적인 노력을 할 때 우리들은 끊어진 교제 때문에 우리들에게 십자가의 거룩한 능력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끊어지는 그 순간 우리들은 사단의 지배를 또 받게 됩니다. 영생은 앗아 갈 수는 없습니다. 사단이 아무리 공격해도 우리를 다시 지옥갈 수 있는 죄인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로 하여금 용서받지 못한 사람처럼 똑같이 만들 수 있습니다. 왜 거듭남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악하게 살아갑니까? 왜 거듭났고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이 계신 것을 믿는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조차도 상상할 수 없는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면서 살아갑니까? 왜 교회에 끊임없이 발을 들여놓음에도 불구하고 악한 일에 앞장서는 일을 하게 될까요? 왜 우리들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한때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 아닌 사람들과 조금도 차이가 없을 정도로 육체적인 방탕에 흐르고 그리고 그 죄악에 사슬을 끊지 못하고 살아갈까요? 그것은 용서받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고 구원받았지만 그 죄와 더불어 싸워갈 수 있는 보혈의 능력이 그 심령 속에서 역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를 끊임없이 바라보고 그 십자가로부터 내려오는 그 능력을 사모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그리스도안에서 여러분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사단과 더불어 싸워서 이길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의 육체와 더불어 인간의 승리를 가져올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를 의롭게 하고 이 세상의 정욕과 더불어 싸워서 승리의 깃발을 끝까지 붙잡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으며’ 라고 성경은 우리들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어느 한 사람도 예외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는 한 그 분의 보혈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는 한 죄악을 이길 힘이 그리스도인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입니다.
구원 받은 그 사실이 우리 속에 저절로 죄악과 더불어 커다란 무기들을 준비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구원받을 때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그것은 그 십자가의 구원은 하나님이 지켜 주세요. 우리들이 아무리 타락하려고 해도 하나님이 딱 구원의 도장을 찍은 사람은 죽어도 천국은 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이 속에서 내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살고 죄악과 더불어 싸울 수 있는 그 능력, 이 속에 그것과 더불어 싸울수 있는 무기들이 계속해서 역사할 수 있기를 바라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바른 관계에 서 있을 때에 하나님께로 부어지는 것이에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한 때는 헌신되고 십자가의 사랑의 눈물을 펑펑 쏟던 사람들이 요만한 죄악에 퍽퍽 넘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악한 세력들은 그리스도의 영생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고 우리의 손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앗아갈 수 없고 우리의 가슴속에 찍혀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 도장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고서 신앙생활의 마감을 폐허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두려워해야 합니다. 한 때 하나님을 찬양하고 새 소리가 들리고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며 개울의 아름다운 물소리가 들리던 방초동산의 아름다운 신앙의 동산을 까마귀 날고 잡초 우거지고 돌멩이들이 흩어져있는 폐허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사단이 ( 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것들과 싸워서 다시 동산을 회복할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 여기에 이러한 것들을 대적해서 싸워서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라고 하는 확신에 도전해오고 있는 악령의 세력들과 이들 앞에 서있는 연약한 골로새 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은 다시 한 번 진리를 선포합니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의 귀신들을 무장 해제시키시고 밝히 공개적으로 드러내시며 십자가 안에서 그들 위에 승리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지키지 못하는 이 율법의 능력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들, 율법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이 사단의 권세에 도구로 쓰여 지던 이 율법을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못 박으시고 그리고 이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부여되던 죄악을 늘 이길 수 있는 커다란 능력, 이것은 먼저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진 다음에 부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다면 어떤 능력도 받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혹시 능력이 임하다면, 임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한 능력을 부여해 주시기 위해서 먼저 주님이 우리와 해결하시기 위한 것은 화목입니다. 그런데 이 화목의 길을 십자가로 열어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에 쌓여 있던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지금도 싸여져 가고 있는 담을 허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과 소원해져있는 이 높은 담장, 이것들을 헐어버릴 수 있는 이 능력이 이 십자가에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들과 화목하기를 원하셨고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을 수 있게 만드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주님은 이 십자가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계속되고 있는 한 당신의 자녀들에게 능히 사단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고 계십니다. 그리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만 십자가에서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린 것이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똑같이 우리들도 역시 지금도 똑같이 그분처럼 정사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권세를 벗어버리며 그들을 무장해제 시키며 우리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다가오는 감추어진 은밀한 사단의 세력들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며 그 십자가 안에서 그들을 밟고 승리할 수 있는 승리의 개가를 우리로 하여금 부르게 만들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룩된 하나님과의 화목을 지키라고,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화목되기를 힘쓰면서 그 분 앞에 설 때에 비로소 주님과의 교제가 열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할 때 주님은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리고 1500여년 이상 계속되던 율법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던 위대한 십자가의 능력이 오늘 우리들의 신앙 속에서 용솟음칠 수 있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로 돌아갈 때에 우리들의 삶 속에는 승리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