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 매인 삶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지고(고후4:10) 2001.4.15 주일오후 1
2. 예수를 위해 죽음에 넘기움은(고후4:11) 2001.4.22 주일오후 18
3. 기도의 사람 안나(눅2:37) 2001.5.2 수요예배 30
4. 그리스도께 묶인 사람 시므온(눅2:25-26) 2001.5.9 수요예배 42
5. 영혼을 살게 하는 고난(고후4:12) 2001.5.16 수요예배 59
6. 과거를 잊지 않는 소명(고전15:9) 2001.5.30 수요예배 73
7. 죄인됨의 현재적 체험(딤전1:15) 2001.6.6 수요예배 87
8. 긍휼과 오래참으심 때문에(딤전1:16) 2001.6.13 수요예배 101
9. 성도 중 지극히 작은 자(엡3:8) 2001.6.20 수요예배 117
10.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인식(엡3:8下) 2001.6.27 수요예배 128
11.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엡3:8下) 2001.7.4 수요예배 139
12. 예수: 가난해 지신 것을 짊어지고1: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고후8:9) 2001.7.18 수요예배 152
13. 예수: 가난해 지신 것을 짊어지고1: 버림받고 누릴 것이 없이(고후8:9) 2001.7.25 수요예배 160
1.예수 죽인 것을 짊어지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이 고린도후서는 구약으로 말하자면 예레미아와 비교할 수 있는 책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교회의 도덕적인 문제와 교리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다고 할 것 같으면 고린도후서는 분투하며 주를 섬기는 삶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린도후서를 신약의 예레미아서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여러분들은 예레미아의 편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그 충격적인 사건을 앞두고 슬픔 속에서 예언하다가 결국은 민족과 함께 예루살렘의 멸망을 지켜보아야 했던 예레미아의 애절한 기록들과 분투하면서 주의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몸부림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의 고난과 삶에 대해서 생생하게 듣고 또 보셨을 것입니다. 오늘 이 장면이 바로 그런 장면입니다. 예레미아가 자기에게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증거하다가 시위대 뜰에까지 갇혔고 그래서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하였지만 중심이 불붙는 것처럼 견딜 수 없어서 다시 주의 말씀을 전파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여기에 나오는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동일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 죽인 것을 우리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함이라”고 한 이 고백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분투하는 헌신적인 삶에 대해서 말하다가 불쑥 이 놀라운 고백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이 내용이 계절적으로 부활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신앙의 근본이 되는 놀라운 즐거움들을 거의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심이 없이 복음서를 비롯해 신약성경을 곰곰이 살펴보면 그 신약의 성도들은 고난을 많이 당하는 성도들인 동시에 우리들이 알 수 없는 신령한 기쁨에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신령한 기쁨들이 고난받는 성도들로 하여금 충만한 희락 속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게 했을까요? 예를 들자면 종말을 기다리는 소망의 기쁨 아닐까요? 우리를 위해 죽고 다시 사셔서 하늘로 올리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반드시 곧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이요 그 때에 다시 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 앞에 우리 모두 서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 기쁨이 성도들로 하여금 잠시 있을 세상의 유익을 버리고 저 영원한 세상을 위해서 사는 원동력이 되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 우리들이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신약의 성도들의 놀라운 기쁨의 원천 한가지는 고난을 받는 기쁨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은 사도들이 매를 맞고 끌려가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로 여김을 받게 된 것을 인해서 기뻐하였다고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 자체가 인내하고 참아야 할 수치가 아니라, 자신이 주님께 인정받고 있다고 하는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고난을 허락해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고난 자체가 인정하시는 자들에게 주시는 특권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 고난을 받는 것이 선택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중 오늘 설교하고자 하는 이 기쁨은 부활의 기쁨입니다. 사실 복음서에는 이 부활의 기쁨에 사로잡히는 장면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간간이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령이 오시고 나서 쓰여진 사도행전부터 이후에 나오는 서신서에는 이 부활의 찬란한 영광과 기쁨에 사로잡힌 것이 제자들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게 하는 아주 중요한 능력의 원천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시 사시다’뿐만 아니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표현을 쓸 때 ‘에게이로’라는 희랍어 단어를 쓰는데 거의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장면을 묘사할 때는 ‘에게게르타이’라고 하는 현재 완료동사를 사용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지만 그 사건을 진술하고 있는 화자에게까지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하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굳이 어느 주석가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아도 사도행전 12장에서 야고보의 목이 떨어진 다음에 베드로가 형 집행의 날만을 기다리면서 옥 속에 갇혀있을 때에 곤하게 잠들 수 있었던 것도 역시 부활에 대한 소망이 죽음의 절망을 이겼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도들이 핍박의 위험으로 가득 찬 거리로 뛰어나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고 하는 이 놀라운 부활의 소식을 증거하고 그렇게 살아나신 그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너희들이 못 박아 죽인 그 예수시며 그 예수를 그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너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유일한 구주로 삼았다는 사실을 담대하게 전파했습니다. 그들에게 어떤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잠시 전까지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도 어느 거처에 들어가서 문을 꼭 잠그고 두려움에 오돌오돌 떨던 그 사람들을 그렇게 놀랍게 바꾸어 놓은 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이 바로 부활의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는 말로 ‘죽기 밖에 더하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이야기는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받고 그렇게 죽으면 부활로 들어가는 영광의 문을 여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상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이 다음에 천당에서 받을 상급에 눈이 멀어서 죽을 각오를 하고 두려움을 떨치면서 나가서 외친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는 오히려 현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성령으로 계시며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다시 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는 현실적인 소망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그들의 담대한 복음 전파, 이 헌신된 삶을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 복음은 우리들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를 믿는 자들은 다시 살 것이라고 하는 부활의 선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순환적인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충성되고 헌신된 삶을 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 반대로 그렇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 사랑 밖에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강력한 소망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초대교회라고 해서 모두 불붙는 심장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헌금하려고 땅을 팔아서 다시 감추는 그런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많은 혁혁한 복음 전파의 역사를 보면서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은 모든 성도들이 만약 그렇게 불붙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도 바울과 그 일행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그 부활에 대한 강력한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이 세상에 대해서 사심을 다 버리고 오직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헌신된 주님의 사람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 비밀을 우리가 터득할 때 우리들이 정말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부활하시고 우리도 다시 부활할 것이라고 하는 이 소망에 불붙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니까 “예수 죽인 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진다”고 했습니다. 사도가 이것을 쓸 때에 머리에 그리고 있었던 사람들은 거의 노예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히브리인으로서는 종교지도자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에게나 혹은 유대인들에게 무시당할 이유가 없는 최고의 시민이었습니다. 그런 지체가 있는 사람이 무거운 짐을 지고 종처럼 봉사하는 삶을 살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짐은 노예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자기를 포함에서 우리들이 노예처럼 예수 죽인 것이 어떤 짐이 되어서 그것을 짊어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 짐을 짊어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바로 사도 바울 자신이 자기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요”라고 우리에게 소개한 자기 소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소개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이라고 했습니다. 어쨌든 자기를 가리켜서 ‘둘로스 크리스투’ 즉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표현을 많이 썼는데, 요즘은 종이라는 표현을 지체 높은 사람들에게 하도 많이 사용해서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뉘앙스가 다 퇴색했습니다. 그래서 ‘종’이라고 할 때 가슴에 다가오지가 않습니다. 심지어 ‘종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여기에서는 그 당시에 볼 수 있었던 ‘노예’입니다. 자기의 소유가 없고 자식을 낳아도 자기의 자식이 아닌 노예였습니다. 그런 노예로서 짐을 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사도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짊어진다’고 하는 것은 사역에 있어서는 자신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나, 이것을 표현할 때 그 마음속에 있었던 그림은 틀림없이 당시 무거운 짐을 지고 노예로서 살아가는 소망이 없는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 죽인 것을 자기의 몸에 짊어지는 것은 예수의 생명도 자기의 몸에 나타나게 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씩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예수 죽인 것을 자기의 몸에 짊어진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예수님께는 좀 섭섭한 말씀입니다만 예수님은 어차피 죽으셔야 되었습니다. 그래야지만 속죄의 길을 여실 수 있었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신앙의 신비는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그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그 순간,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우리에게 객관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차피 자기의 사명이니까 십자가를 지신 것이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엄밀하게 말하면 맞는 이야깁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그 사건이 주님을 믿는 믿음이 생겨난 모든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객관적인 사건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첫 번째 커다란 대비적인(?) 견지에서 보면 하나님의 진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에 하심으로서 우리 인간들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대역을 천사를 시켜서 이루시지 않으시고 인간을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악함을 어찌하든지 자신의 삶을 통해서 드러낼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 죽인 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진다고 하는 고백이 첫 번째로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에 대해서 책임을 느끼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자기 때문이라고 하는 깊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그의 놀라운 사랑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했던 자기의 옛 신앙의 방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하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천하에 구원을 이룰만한 이름을 주신 적이 없고 그 예수 그리스도롤 믿는 믿음 하나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하나님을 시종일관 찬송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십자가의 보혈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이 간단한 교리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가 느낀 해방감과 그가 느낀 신앙의 놀라운 감격은 우리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그렇게 억압받는 종교인으로서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냥 세상에 떠밀려서 살다가 예수를 붙잡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일평생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하나님을 찾는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고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어떻게 쳐서 복종시켜서 하나님의 영예를 위해서 살아야 할 것인가에 집중된 삶을 살아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자신이 알고 있는 많은 것들이, 심지어는 자신이 존경하는 경건한 유대인들조차도 그 문맥을 못 넘어서고 그 속에서 구원을 얻고자 몸부림을 치면서 살다가 인생을 끝내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천국의 문이 열리면서 찬란한 복음의 빛이 그의 종교적인 편견을 찢고 선명하게 내리비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찬란하게 비친 빛, 바로 그 앞에 피 흘리며 매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섰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결국은 하나님이 구약에서 그렇게도 말씀하시던 그 의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성취하시고 우리는 죄를 지은 장본인이지만 그 죄 값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루시고 우리는 그의 의에 근거해서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는구나 하면서 눈뜨게 된 하나님의 그 놀라운 ‘헤세드’ 즉 하나님의 그 놀라운 자비하심, 하나님의 그 아가페, 하나님의 그 은혜에 대해서 깊이 눈뜨면서 개안을 하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서 느꼈을 그 놀라운 해방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진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책임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이런 것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을 때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사실이 평면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예수님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그렇게 다 준비해 놨으니까 십자가와 관계가 없는 너희는 이제 여기 와서 관계를 맺어라라고 하는 것은 마치 음식을 다 차려 놓고 우리를 부르는 것 같은 그런 정도의 초청밖에는 느끼지 못합니다. 물론 입술로 그렇게 고백을 안 해도 그가 받는 것은 거의 그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 그 사람의 마음을 파고 들어오는 놀라운 고통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이 바로 자기의 죄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개인적으로 십자가의 사건과 함께 경험하는 그 순간에는 어차피 많은 사람들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셔야 되었는데 나의 죄도 거기에 보태졌다라고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한 사람의 죄를 인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라고 하는 십자가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구원이 가능한 것이지 집단적인 죄악을 위해서 예수께서 죽으셨고 자기는 얼마든지 그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경험을 통해서는 그가 진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선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을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십자가의 사건과 은혜를 경험한 다음에 우리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한번도 예수님이 부어주시는 그 사랑을 ‘이 세계에 사는 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서 내가 그 사랑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했을 때에 그 의미가 바로 이 십자가의 사건의 의미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는 그 사랑은 내가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구원의 대열에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격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나고 나면 그 사랑에 대한 경험은 절대적인 사랑의 경험입니다. 그러니 시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이 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해 주셨는데 누구를 시기하겠습니까?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내가 받은 사랑이 절대적인 놀라운 사랑입니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은 주님이 나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은 모든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주시고 싶어하신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개인적인 사랑의 관계를 경험하듯이 똑같이 그것이 십자가 사건에 대한 책임감으로 대입될 때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을 대면하면서 그분이 마치 나 한사람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고난 중 수백억분의 일이 내 책임이라고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분명히 나 한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하는 절대적인 죄책감을 십자가 앞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사랑을 느끼는 것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도 바울 자신이 한 로마서의 진술을 보면 이런 식의 고백이 정상적이지는 않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 속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얼핏보면 사도 바울의 논증은 ‘구원받았으면 이제는 죄에 대해서 싹 잊어버려라. 우울하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니 싹 쓸어버리고, 우리에게는 오직 행복하고 기쁜 날만 있을 뿐이다’라는 말로 이해하기 쉬운데, 이는 사도 바울이 성경 속에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논지가 다릅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사도 바울은 강력하게 고백했습니다. 예수 죽인 것을 자기의 몸에 짊어진다는 고백이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를 위해서 채운다거나, 이미 구원받고 훌륭한 사도가 되었는데도 자기의 옛 과거를 기억하면서 부끄러워한다거나 하는 것들은 우리들이 언뜻 보면 사도 바울의 믿음이 식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의도적으로 진지한 고민과 거룩한 슬픔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경박한 기쁨으로 다 바꿔 끼우는 것입니다. ‘나는 기쁘다. 나는 즐겁다. 항상 즐겁다. 월요일도 즐겁고 화요일은 신나고 수요일은 기분 좋다’하는 찬송가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진지함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이것은 정죄 받은 느낌의 가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에 대해서 책임을 느낀다는 이야기는 정죄 받는 의미에서의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책임감을 느낀들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의 신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였습니까? 이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도 상기시켰습니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들”이라고 상기시켰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가책감을 느낀다는 것이 정죄 받고 있는 듯한 가책감이 아니라 자기 신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구원하실 때에 자기에게 거셨던 기대를 따라서 살아가는 자기에게 아주 중요한 제어장치가 되는 것입니다.
(예화: 달리는 말의 브레이크는 재갈을 물리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렇게 예수 죽인 것을 자기의 몸에 짊어진다는 즉,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신 십자가의 고난의 사실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언제나 이렇게 재갈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많이 베풀어주시고 나면 자신의 본분을 아주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선악과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악과 사건에 대해서 성경이 규정하는 것은 교만이 그렇게 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빚으셔서 동산에 두시면서 “너는 여기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면서 내가 창조한 모든 것을 다스려라”고 맡겨주셨을 그 때에 아담의 마음에는 어떤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차이가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만물을 비롯해서 자기를 지으신 분이시고 자신은 그의 손에 의해서 빚어진 피조물에 불과했습니다. 주님의 손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점에 의해서 보면 이런 풀이나 꽃, 길 위에 구르는 돌멩이와 동기동창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하나님인 것 같은 착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다스리고 통치하는 과정에서 주님이 자신에게 맡겼고 자신은 피조물 중 하나일 뿐이라고 하는 생각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심지어 동산 중앙에 있는 하나님 이외에는 손댈 수 없는 그 하나님이 지정하신 나무의 실과도 자신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인류에 죄가 들어오도록 만든 것입니다.
무죄 상태의 아담조차도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인간이었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구속은 -죄악 된 환경과 악한 세력들에게 에워싸여서 공격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이 불완전한 상황만 빼고 말한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 이 복된 구원의 행복은 에덴 동산의 행복과 비교할 수 없이 완전하고 안전한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받았을 때에 인간들이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면서 아담에게는 없었던 심각한 부패성까지 존재하고 있습니다. 환경 자체가 그렇게 교만하고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선을 모르고 살아가는 오만한 인간들에게 에워싸여서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때에 자기의 본분을 잃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 안됩니다. 오늘날도 만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자신의 본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오로지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라고 하는 깊고 진실한 고백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여러분들도 동의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한 번 그런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인정할 수 있는데 그 정신에 의해서 지금도 통제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 죽인 것을 자기 몸에 짊어진다고 하는 것은 어떤 때 한번 지는 것이 아니라 늘 지고 있는 것입니다. 노예가 일생을 그 주인의 짐을 지고 종살이하는 것과 같이 항상 짊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죽인 사람이다’하는 것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고난받고 핍박을 받을 때에 우리는 얼마든지 ‘왜 나만 이렇게 고난을 받아야 됩니까?’라고 항의할 수 있습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도 저렇게 하나님께서 복 주시고 승승장구하면서 인생을 사는데 왜 내 인생은 이렇게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으면서 견디기 힘든 시련을 겪어야 합니까?’라고 얼마든지 투덜댈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면 자기가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원래 자기는 하나님께 범죄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피 묻힌 사람입니다. 그 피 값이 하나님에 의해서 찾아진 바 되고 자신은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인데 자기와 같은 사람을 들어서 영화롭게도 주님의 명예를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위해서, 고난받을 수 있게 해 주셨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감옥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었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노래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잘 될 때는 얼마든지 교만해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에게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육신의 병이 있었는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번번이 “네 은혜가 족하다”시며 거절하셨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 자신의 뼈저린 고백은 ‘내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가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의 재갈을 삼으신 것입니다.
승승장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믿음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당신이 없었더라면 기독교 신앙의 골격이 설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아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사도 바울이 한 가지를 생각하면 분명해 질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곤 하였습니다. ‘그래도 나는 단지 예수를 죽인 죄인일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비록 지금은 힘에 넘치도록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지만 그러나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주님을 위해서 섬기는 이 일을 내가 해나간다고 해서 예전에 내가 하나님 앞에 누구였는지를 바꿔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신앙입니다.
여러분, 누구십니까?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는데 왕 같은 제사장이 되기 전에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들이고 의인이고 천국의 백성이고 하늘나라의 전투 병사이고 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누구였습니까? 단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죄인과 나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세상의 불신자들은 아직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고 나는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 받은 죄인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용서받은’이라는 말이 붙었어도 결국은 우리 원래의 신분은 죄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자기 확인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지는 가책이 있습니까? 이 가책은 절망하게 하는 가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그 모든 영적인 생활의 한 복판에 바로 이것, ‘나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흉악한 죄인일 뿐입니다’는 이 고백이 없는 모든 영적인 것 같은 모습들은 다 허위이며 가식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진정한 영성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늘 입이 닳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좋은 신자되기를 원합니다” “Real Christian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할 때,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진실하지 않은 그리스도인과 모든 합의할 수 없는 마지막 결정적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실수와 실패는 있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모두 진실한 길을 걷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는 실패도 있고 실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도 가끔 진실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히 결별할 수밖에 없는 차이점은 Real Chriatian에게는 이러한 자기 확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주의 일을 많이 하고 몇 살에 주의 종이 되어서 젊은 시절을 주님밖에는 모르고 인생을 살았습니다. 주의 일 하는 것 밖에는 모르고 일생을 살았습니다’하는 고백을 많이 해도 그것으로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깊은 영적인 영향 아래 살아가는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철저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고백, 거기에서 ‘나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일 뿐이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로 나를 용서하셨도다’는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용서의 참된 의미를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자기가 무엇을 용서받았는지를 잊어버린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용서의 의미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 속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옛일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와 결별하지 못하기에 한없이 불쌍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어떻게 다 올바른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제가 내년 5월에 베트남에 갑니다. 제가 거기 가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은 그 베트남 땅에 무릎을 꿇고 거기에서 지은 한국인의 죄를 참회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까? 전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라이따이한’문제 같은 많은 문제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짐승처럼 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의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싸고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이 민족 공동체로서 그러한 잘못을 했는데 그 사람들은 우리의 피붙이 이지만 그 사람들에 의해서 자행된 역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칼날 같은 단절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만 그 민족이 발전이 있는 것입니다. 아주 치졸하고 옹졸한 모습들을 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누구도 독일의 나치 시대에 저질렀던 만행에 대해서 돌을 던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이 범죄 하였던 자기의 백성들은 자기의 피붙이로 끌어안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 의해서 자행되었던 모든 더러운 역사들은 단절하고 결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조상들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한 나라로 발전하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민족적으로도 이러한 원칙이 적용될 진데 하물며 희미하지 않고 아주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보십시오. 왜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생명을 버리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순결하신 그분이 왜 거룩하신 옥체를 십자가에서 다 찢으셔야 했습니까? 그분 자신에게 무슨 과오가 있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바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악랄한 죄인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의 역사는 조작을 해서 다시 쓰는 경우도 있지만 성경의 역사는 한번 기록된 일이 수정 없이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우리를 향해서 전수해 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고 하는 자체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할 고백입니다.
만일 그것이 옳지 않은 신앙이라면 그 옳지 않은 신앙의 기수는 사도 바울입니다. 인생의 말년이 가까운 때에도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에 대해서 깊이 고뇌하고 슬퍼하였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괴수라는 말이 ‘푸로토스’인데, 첫 번째라는 것입니다. 그 사도 바울의 고백이 지금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그 죄책감에 대한 절대적인 인식과 맥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내 죄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십자가 앞에 서는 모든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십자가 사건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이것을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영적 생활의 한 복판에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일 뿐인데 주님이 한없는 긍휼과 은혜로 나를 용서해 주셨도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었다’라는 고백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예수의 십자가를 내 몸에 짊어진다”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모든 것이 자신에게는 은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보면서 깨닫는 사실은 자기는 예수를 죽인 죄인인데, 그 죄인이 예수 죽인 것을 계속 가책을 느끼면서 그 앞에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데, 주님이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 죽인 것을 자책감으로 자신의 몸에 짊어진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지은 어떤 잘못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자책감을 느끼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는 상담학적으로 자책감을 많이 느끼면서 사는 것은 정신 건강에 결정적인 해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옛날에 실수해서 잘못한 것 때문에 일평생 어두운 그늘에서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없이 느끼는 자책감은 시작은 있는데 탈출구가 없습니다.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끝없는 자책감, 끝없는 정죄 의식, ‘너는 몹쓸 인간이야. 그 짓을 하고도 네가 어떻게 살 수 잇느냐’는 것만 계속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짓밟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는 신자의 자기 확인은 탈출구가 있습니다. 끝이 있습니다. 그 끝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는 분명한 자기 확인에 의해서 도 다른 자기를 확인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들의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할 때 사람들이 ‘그런데요’하는 이유는 자기가 얼마나 절망적인 죄인인가 하는 인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아무리 가르쳐줘도 그들은 감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챨스 피니는 말하기를 “죄인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의 율법의 심판정에서 정죄함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말 비참한 죄인이다. 나는 예수를 죽인 장본인이고 나에게는 아무 희망도 없으며 나에게는 오로지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만 있을 것이라는 자책감,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찾게 됩니다. 하물며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의 빛 앞에서 예전의 자기는 그리스도 예수를 훼방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고 손에 피를 묻힌 죄인이라고 하는 그 자기 확인을 하게 되었을 때 그런 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랑의 짐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한없는 고통 속에서 이 무거운 가책의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 이 가책의 짐을 통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데, 처음에는 그 가책을 느끼면서 확인하게 되는 자기는 하나님 앞에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이었지만, 그 가책을 통해서 두 번째로 받게 되는 자기 확인은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신를 용서하셨다고 하는 확신이 강하게 들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는데 이제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신앙의 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 누구도 이 신앙생활의 짐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 외의 방법으로 신앙생활의 짐을 지는 것은 일시적으로는 질 수 있지만 영원히 그 짐을 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번 여러분 자신의 신앙생활의 경험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깊이 체험하고-구원의 경험이어도 좋고- 여러분 자신의 지은 죄를 진실하게 고백할 때에 주님이 용서해 주시는 은혜를 놀랍게 체험하고 그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사랑, 나는 아무 쓸모 없고 주님의 그 큰사랑을 깨닫고 이렇게 바보 같은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아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주님의 그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며 다시 하나님과의 화해를 회복하게 되었을 때에, 그 때에 가슴에 밀려오는 그 짐에 대해서 느껴 본적이 없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느끼는 독특한 체험입니다.
소위 사명감이라고 하는 것의 출발이 바로 이런 식으로 출발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 불러다가 ‘너 아니면 내가 누구를 믿으리'하며 밀실에서 머리 속에 집어넣는 사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조직 폭력배의 세뇌와 비슷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떠돌면서 신앙생활 하다가 이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용서받은 죄인이라고 하는 깊은 자책감, 그리고 거기에서 주님의 용서의 은혜를 경험한 인격적인 사랑의 기초, 이런 것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주위의 사람들이 ‘너는 사명 받은 사람이라고’ 꼬시는 것입니다. 턱도 없는 삶을 꿈꾸면서 특공대처럼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들으면서 견디기 힘든 것은 여태까지 자기가 쌓아 올린 모든 주님을 위한 꿈들이나 비전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고백해야 되는데, 그것이 무너지고 나면 자기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못 만나 뵈었는데 그것을 무너뜨리면 자기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겠습니까?
그런데 허물어뜨리는 사람들은 다 부숴 버리고 다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명이라고 하는 것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살다가 ‘뭘 하고 살면 제일 신날까?’ ‘그래도 주님 편에서 볼 때 좋은 것이 뭘까?’를 생각하고 ‘나는 이것이라도 하면서 살아야겠다’하는 것은 사명감이 아닙니다. 이 자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증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나서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그가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삶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 무너졌는데 무슨 계획이 있었겠습니까?
문제는 이렇게 십자가 앞에서 허물어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바벨탑처럼 자신의 꿈을 쌓는 것입니다. ‘비전을 가지고 살아라’고 주위에서 막 충동질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도 확인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해야 되겠다고 마음먹는 그 비전이라는 것이 정말 얼마나 정확하겠습니까?
이렇게 십자가 앞에서 용서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면서 사랑의 짐을 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드는 공통적인 고백은 그저 편안하게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을 하고 난 후 하나님 앞에 깊은 영적인 변화를 받으면서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깊이 가슴을 파고 들어왔던 감화는 이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이신 그분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내 손에 피 바르시고 죽으셨을까? 그리고 아무 쓸모 없는 이 비참한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고결하신 생명을 버리셔서 그 피로 나를 구원해 주셨을까?’ 그것을 체험하게 되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주님이 이 쓸모 없는 인간을 사랑했습니다. 구원받고 나니까 내가 굉장히 대단한 인간인 것처럼 생각되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정말 쓸모 없는 인간인데 주님이 구원하여 주시고, ‘왜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나였는가?’ 그것은 영원히 숙제로 남습니다. 정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이제 이 놀라운 사랑을 받고 보니까 나는 결코 이 세상에서 평범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일을 하다가 죽어야 된다든지 아니면 대 교회를 만들어야 되겠다든지 돈을 많이 벌어야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이야기는 이런 놀라운 사랑을 받았는데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사는 날 동안에 적당히 나도 위해 살고 시간 나면 주님도 위해 살고, 주의 일도 하고 내 일도 하는 식의 인생을 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형벌 받아 마땅할 쓰레기만도 못한, 여름날의 더러운 오물덩어리만도 못한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고 나를 주님의 자녀 삼으셔서 무엇인가 이 세상 사는 동안에 당신의 영예를 위해서 살게 하시려고 여기에 살려 두셨는데 어떻게 적당히 살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에 불붙고 사모하는 심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면류관을 쓰고 제왕의 노릇을 하면서 자신의 육체의 만족을 위해서 살라고 하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고문입니다.
내 마음에 주님이 계시고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데 자기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육신의 욕심을 따라서 살라고 말하는 것은 안일이 아니라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 살고자 가슴에 소원이 있는 사람들의 행복은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경험했고 그 사랑이 시키시는 일이라면 그것이 비록 조국의 교회의 한 귀퉁이에서 쓰레질을 하는 일이라도 기쁨으로 감당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노예처럼 종처럼 학대받으며 사는 것이 그 사람에게는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고백하기를 “우리가 정신이 온전하였어도 또 미쳤어도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다.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우리들이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로라”했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 속에 역사하고 있었던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으니 나도 주님만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이 모든 사명의 핵심부라는 것입니다.
(예화:인도 지방의 부흥 때 어린아이들이 모여 앉아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많이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이렇게 조금밖에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슬퍼요”하며울고 있었다는 내용)
어린아이들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 속에는 사랑의 짐, 사랑에 대한 부채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어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정도는 모두 다르겠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 중의 그 누구도 그 사랑에서 소외시키신 적이 없으십니다. 여러분들의 지난 모든 날들은 무엇에 빚진 날들이었나요?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날들이 아니었나요? 주님을 모르고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서 죄를 먹고 마시며 어둠 속에 방황하던 짐승과 방불한 사람들, 복음의 빛을 비춰서 주의 자녀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빚졌고, 복음을 알고도-십자가의 은혜를 알고도-자기 안에 있는 부패한 성품의 지배를 받으면서 하나님만 섬기며 살기를 거절했던 방탕한 우리들을 불러 회개시키시고 주의 은혜 안에 살게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닙니까? 그분의 사랑이 아닙니까? 그 분의 사랑에 빚지면서 오늘날까지도 주님의 사랑에 빚지면서 살도록 만들어 주신 분이 주님이고 주님의 사랑이 그것을 시켰습니다.
우리는 그 존재 자체가 부채 덩어리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빚진 사람입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내가 너에게 준 사랑의 빚을 탕감하라”고 하시면 우리는 파산해 버리고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랑과 부채의식을 입으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도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도리를 깊이 깨닫고 나면 마지막에 결국은 이 십자가에 대한 응답은 우리 머리도 아니고 가슴으로도 아닙니다. 이 십자가에 대한 응답은 우리의 전 존재적입니다. 우리의 실존 자체가 전체적으로 이 십자가라고 하는 사건 앞에서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 하는 죄책에 대한 무거운 가책의 짐을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위해서 살다가 곤고하고 힘든 일이 생겨나게 되면 항상 기억하는 것은 ‘이전에 나는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었던 소망이 없는 죄인이었는데 그런 죄인에게 이렇게 주님을 섬기며 살게 해주신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가’입니다. 생각을 바꾸고 나면 우리가 곤고한 것은 곤고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자기의 죄책의 짐을 지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자기가 용서받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짐을 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무엇을 바쳐야 되겠습니까?’하는 고백은 ‘이 벌레만도 못한 날 위해 주께서 고난을 당하셨구나’하는 거룩한 가책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사도 바울이 주님 앞에 졌던 짐은 바로 이런 종류의 짐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승에 의하면 그는 천성적으로 성격이 아주 강하고 급하고 불같은 성격의 사람이었지만 주님을 만나고 그 사랑의 짐을 지면서 사는 동안 자기가 원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손에 피 묻힌 흉악한 죄인이라고 하는 자기 확인 속에서 거룩해져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갔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루에 한번쯤은 십자가 앞에서 ‘왜 이 벌레 같은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을까?’ 깊이 통곡하고, 또 한번은 ‘그렇게 희망 없는 죄인을 왜 예수님이 살려두셨을까?’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 빚덩어리가 되어서 오늘도 이 부채의식 속에서 살게 만들어 주셨는데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이제 나의 남은 인생은 내 것이 없고 다 주님의 것이라고 하는 이런 사랑의 짐을 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예수 죽인 것을 자기의 몸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나는 없고 주님은 계시며 나는 낮아져도 주님은 높아지고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져 가도 나를 통해 증거 되었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서 나는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주님은 기억되는 그런 생애를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들, 부활의 영광이 우리 앞에 곧 나타날 줄을 믿는 사람들의 전망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보면 너무 힘겹고 고단한 삶입니다.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통곡하며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내 손에 망치와 못을 들었던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자책감이 그를 경쾌하게 만들어 줄 리는 없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별로 그렇게 부자도 아니고 이 세상에서 금시발복(今時發福)을 한 것도 아니고 예수 믿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복 터진 사람도 아닌데, ‘나 같은 죄인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용서해 주시기까지 내가 사랑을 받았는데 내가 이제 어떻게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살고도 그 주님의 사랑에 합당한 삶을 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는 끊임없이 자기를 많이 드리지 못함으로서 오는 이 고통 속에서 아파하는 이 삶이 경쾌한 삶은 아닙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러한 두 가지 고민 속에서 예수는 우리 안에 풍부하게 사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도 바울의 불후의 아름다운 고백이 생각나십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를 생각해보십시오. 자기가 뭐든 잘하는 것 같고 굉장히 훌륭한 것 같고 주님의 일에 자기가 굉장히 요긴하게 쓰임 받는 것 같은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서보면 자기가 확인됩니다. ‘나는 예수를 죽인 죄인일 뿐이로다’는 고백입니다. 그 고백 속에서 펑펑 울 때 인간의 모든 교만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살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보니까 자기도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사는 것 같습니다.
그 때마다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사람, 주님이 자기 같은 인간을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내려오신 그 도성인신의 사랑,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깨트려 주신 모든 것을 바친 사랑에 비하면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살아왔다고 하는 그 날들은 그 순전한 사랑에 비하면 너무나 불순물들이 많이 묻어있는 삶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 자신의 교만도 못 박고 자신의 우월함도 못 박고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깊이 경험하면서 겉으로는 주님을 위해 살아간다고 하면서 세상에 있는 자랑을 위해서 살고 세상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서 충성된 삶을 마다하면서 살아가는 자신의 악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거룩의 진보는 결코 율법으로는 안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겨우 그것밖에 못하냐’는 이야기를 아무리 해봐야 성공하면 외식입니다. ‘집사가 되가지고 말이야. 다른 교회 집사들 봐’ 나도 누구처럼 해야지 하고 턱걸이하면 성공하면 외식입니다.
사랑의 감화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저의 목회 사역에서 한가지만 들어주겠다고 말씀하시면 교회당도 필요 없고 좋은 동역자도 다 필요 없습니다. 오직 하나 ‘여기에 모인 모든 지체들이 모일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에 한없이 감격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 사랑에 감화를 받는 것이 모든 삶과 섬김에 유업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죽인 것을 자기의 몸에 짊어지면서 사는 것은 곧 자기를 계속해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보면서 죄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화:남미의 어느 도시에서 범죄가 많이 일어나니까 예수님 상을 많이 만들어서 범죄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한복판에 세워놨더니 범죄가 50%이상 사라졌다는 이야기)
생명이 없는 석상 하나를 세웠는데도 사람들이 거기에서 죄 지을 마음을 버리게 되는데 하물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현재적으로 내 안에 역사하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이라고 하는 거룩한 가책감이 우리에게 들 때 우리가 또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죄죽임의 교리에 있어서 죄를 죽이는 핵심적인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반복적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성령이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죽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네가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현재적인 경험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를 알고 그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 속에 예수의 생명이 역사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것입니다. 어떤 특별기도나 안수 기도나 또는 특별한 일들을 통해서 불일 듯이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의 은혜를 솟아나게 하는 수도 있지만 모두 예외적인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짐이 없는 사람들이 내면의 세계 속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며 산다고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자아가 죽을 때 우리 안에 주님이 살고 우리가 살 때 우리 안에 우리 주님이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예수의 생명을 탐합니까?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충만히 있어서 기쁨으로 가득하고 은혜로 충만하고 능력으로 가득 채워져서 평범한 그리스도인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이루어 가면서 살고 싶어합니까? 또 하나님과의 그 친밀한 교제 속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면서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지 않으면 이런 삶은 모두 우리의 꿈일 뿐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는데 내가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지고 그렇게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 십자가 앞에서 내가 하나님의 용서받은 -사랑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과 이것을 깊이 경험하면서 끊임없이 그 십자가의 현재적인 경험 앞에서 자기의 악하고 더러운 것들을 버리며 그 십자가의 도에 자기를 굴복시킬 때 예수의 생명은 우리 안에 놀랍게 역사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딜 수 없는 고난을 견디고 기뻐할 수 없는 중에 기뻐하며 소망 중에 인내하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못 박혀 죽으실 때에 우리에게 거셨던 한가지의 인생의 사명을 향해서 그것을 우리의 삶의 목표로 삼아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유일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 가슴속에는 끊임없이 ‘언젠가는 이 고단한 인생의 무대 위에 죽음의 휘장이 드리워지고 그 휘장을 지나고 나면 우리는 죽음을 통해 영광의 부활로 나아가게 되리라’는 소망에 불타고 그날을 사모하면서 순간을 살되 영원을 향해서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잠시 머무는 세상에서의 섬김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상급에 이르도록 분투하는 삶을 살아서 삶 전체가 주님의 명예를 위해서,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이 기대하시는 삶입니다.
2.예수를 위해 죽음에 넘기움은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11)
얼마 안 되는 신앙의 경험이지만 우리 신앙생활의 경험을 돌아보면, 우리들이 정말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할 때가 언제였는가 돌아보면, 무엇인가 목표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생활하던 그 때가 가장 살아있었다는 회고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주께로부터 부름을 받아서 자기의 고유한 사명에 있어서 ‘내가 아니면 이 일을 누가 하랴’하면서 주님이 거기에 자기를 세워주신 줄을 알고 전심으로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애쓰며 분투하면서 살던 그 때에는 우리들이 영적으로 깨어있고 충만한 은혜 가운데 살아있던 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의 경험은 우리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성경을 기록한 사도 바울과 그 일행들이 여기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부활할 약속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그 부활이 실현될 때까지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오늘 사도 바울과 그 일행들의 생애가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산 자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운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산 자’라고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은 성도가 되어서 아직 주님이 생명을 거둬가지 않고 이 세상에 살아있는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고 아직까지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이 죽음에 넘기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핍박을 받고 그 일행과 함께 선교를 위해서 수고하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는 그 긴 기록들이 1장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런 커다란 고난과 시련,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박해와 전도자로서의 그 헌신된 삶 속에서 오는 모든 충성스러운 삶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고난들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안 받으면 안 받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도 인격적이듯이 고난도 인격적입니다. 왜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이 “우리 산 자가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기움은” 그랬습니까? 살았다고 하는 것이 이 세상에 살아있다고 하는 의미이지만, 이 땅에 살아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기우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받는 고난이 싫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는 핍박이 싫어서 세상에 투항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전도 여행 중에 바울을 버리고 도망갔던 데마와 같은 사람들처럼 얼마든지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기우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기우는 사람은 반드시 세상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선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위에 정말 신앙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기웁니다. 육로의 위험과 해로의 위험과 여행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 정말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그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던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의 모든 삶들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들이 선택한 삶이었습니다. 억지로 강요된 삶이 아니라 자신들이 선택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들의 영혼이 살아있고 신앙이 살아있고 믿음이 살아있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살아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아는 이 신앙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들이 스스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택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위한 고난은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된 고난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 신앙이 살아있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살아있고 인격적인 믿음이 살아있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에 참예하도록 오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히 배려하시고 은혜로서 그들이 고난에 참예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정말 영적으로 살아있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이 일생을 살 때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법이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나는 성령 충만한 적도 없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 적이 없어도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게 봉사했습니다”고 말할 것입니다. 늘 말하지만 그것은 자기 좋아서 한 일이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다 보면 우리의 마음이 잠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릴 때도 있고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진정한 충만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인격적인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런 죽어있는 영혼의 상태에서 그저 꾸준히 이것이 자신의 일 인줄 알고 살아온 그런 삶들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삶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분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산 자가 예수를 위해서 죽임에 넘기움은”은 수동태입니다. 누군가가 그들을 예수를 위해서 죽으라고 넘겨줬다는 것입니다. 팔아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입니까? 누가 팔았습니까? 누가 이 사람들을 예수를 위해서 죽으라고 팔았습니까? 자신들이 선택한 것입니다. 그 정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영광에 참여할 약속을 가진 우리의 강력한 소망이 우리를 사로잡아서 주님을 위해 죽음에 넘기우도록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자기를 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문학적인 표현일뿐 자신이 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을 위한 보람있는 생애를 살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다 할지라도 참되고 진실한 의미의 신자가 몸부림치고 그렇게 살아있지 않는 한 우리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주를 위해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이렇게 이방인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은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라면 만세 전에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입니다. 만세 전에 선택했다고 고백을 했으니 서슬이 시퍼래서 다메섹으로 가면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던 그 일을 할 때에도 주님이 주신 사명은 바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은 사랑과 똑같아서 하나님이 아무리 뜨겁고 열렬히 사랑해도 그가 그런 하나님의 지고한 사랑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그 사람의 인생이 변하는 것처럼, 아무리 그에게 사명을 주셨어도 자신이 그 사명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고 그 사명에 대해서 깊은 무게를 느낌으로서만이 비로소 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만세 전에 주님이 바울을 택했는데 만세 전에 바울이 한 게 뭐 있습니까? 만세 전은 그만 두고 예수님 만나서 복음 전파의 도구로 사용되기 전까지 그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사명을 주셨는데도 자신은 그 사명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사명과는 반대되는 일을 하면서 살았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독특한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에 대한 강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 언제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자신의 영혼이 살아날 때입니다. 그 때 비로소 사명에 대한 인식이 뚜렷해집니다.
여러분들이 자신의 사명이 무엇이며 왜 이 세상에서 주님을 믿고 살아가고 하나님은 아직까지도 나를 안 데려가시고 나를 여기에 내버려두시는가에 대해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사실상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십시오. 정말 예수의 생명이 그의 안에 있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화가 그 사람의 인격 속에 있을 때 그 사람의 인생의 목적은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명한 인생의 목적을 깨닫고 나면 자기가 왜 이 세상에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너무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사명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식만큼이나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나 사랑하시는데 그 사람들 중 내가 하나이지’라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지상 최대의 위대한 사건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사건이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일인데. 내가 없으면 누가 하겠지’하는 생각은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제대로 산 자가 되지 못한 사람의 변명입니다.
“우리 산자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닫고 우리의 영혼이 소생의 은혜를 경험할 때 그 때 사명에 대한 사랑이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 은혜에 대해서 생생할 때에는 사명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에 대한 영혼의 감각이 무디어지기 시작하면서 자기가 받은 사명에 대한 인식들도 흐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에 대한 증인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명을 이야기 할 때마다 항상 함께 나타나는 것은 예수 죽인 것을 우리 몸에 짊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과 그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고 하는 그 감격 속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찾은 인생 안에서 발견하게 된 사명, 거기에 대한 인식이 함께 살아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어제 ‘섬김 영광의 날’ 어느 목사님의 설교에서도 교회가 이만큼 빠른 시간에 성장하기까지 수많은 성도들의 헌신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다.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여기를 떠나가서 여러분들은 이름도 기억할 수 없는 사람들의 눈물겨운 헌신도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그 은혜를 사람을 통해서 베푸시면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많은 지체들을 보내어 주실 때 그 때 그 지체들을 신앙으로 잘 돌보고 그들을 자라게 하는 것은 교회의 사명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저는 한번도 교회를 크게 해야 되겠다는 야심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아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내게 오는 많은 양떼 네게 맡겨 줄 터이니
사랑하는 내 친구야 나의 양떼를 부탁한다
어떻게든지 교회에 온 사람들은 술주정뱅이든, 거렁뱅이든 빈털터리든 부랑 무식한 사람이든 하다 못해 귀에 구멍 뚫고 고리를 서너 개씩 매달고 바지를 길게 늘어뜨려서 길거리를 청소하고 다니고 노랑머리를 하고 코에 구멍가지 뚫은 젊은이들이 와도 주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그 영혼이라면 그는 사실 주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그를 진실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자라도록, 모르는 것은 가르쳐주고 잘못 아는 것은 빼내어 주고 마음 깊이 박혀있는 잘못된 사상들은 고쳐주고 은혜가 없으면 그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부어주시도록 그를 위해 기도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헌신하는 것 이외에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얼마나 많은 헌신이 필요한 지 모릅니다. 늘 섬김의 손길이 부족합니다. 더더군다나 정서장애아들을 가르치는 교회에는 아동들의 숫자보다 선생님들의 숫자가 더 많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듯하게 신앙이 잘 들어가고 성령 충만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교회 가라고 하십시오. 그러나 가다가 가다가 갈 데가 없어서 교회의 문을 두드리면서 문을 열자마자 피를 흘리며 엎드려지는 그 영혼을 보듬기 위해서는 많은 섬김의 손길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만한 교회가 영혼을 돌보는 사역에 있어서 건강함을 유지하며 성장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생명 있는 사람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교회답게 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혼자 그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천사들을 통해서도 그 일을 하지 아니하시고 사람들을 통해서 이 일들을 행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명감을 충만하게 느껴야 하는데 사명의 기원이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도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도 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사명감은 ‘내가 이 일을 하면 저 사람이 나를 인정해 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일을 하면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 주겠지’하는 것들은 모두 사람으로부터 출발한 인본적인 사명감입니다. 그런 것들은 자기가 기대하는 것들이 없을 때 모두 함께 사라집니다.
(예화:우리 나라 대통령들이 물러나기만 하면 된 사람은 옛 사람 욕하고 물러난 사람들은 지금 된 사람을 욕하는 저질스럽고 유치한 풍토가 너무 괴롭다)
(예화:캐나다 옛 수상이 장기간 정권을 잡다가 물러나면서 “여러분들은 이제 제가 이 캐나다의 훌륭한 시민이 되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명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영혼들이 계속 살아나는 역사가 나타나야합니다. 다시 말하면 산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기울 각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 신자’를 이야기하는데 문제는 새 신자가 아니라 있는 사람들이 예배 중에 말씀을 통해서 깊이 은혜를 받고 새로운 사람들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면서 섬길 종 된 자리에 내려가고 싶을 만치 산 자가 되어서 예수를 위해 죽음에 넘기우고 싶은 마음이 될 때 교회는 문제없습니다.
우리들이 경험하는 많은 교회들-우리 교회도 물론 그런 위험을 당연히 가지고 있습니다-은 어떻습니까?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는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부류의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그들이 교회의 의사를 결정하는 중심자리에 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장로교 제도의 허점입니다. 오랫동안 성경과 장로교의 제도 사이에서 갈등을 하다가 마지막에 벼락치는 것 같은 깨달음을 얻으면서 손뼉을 진 것이 교회가 초대교회의 영성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장로교제도는 기가 막힌 제도이고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최악의 제도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많은 중대한 결정을 몇 사람에게 모두 위임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사람이면 술 취한 사람에게 비행기 조종을 맡기고 타고 가면서 기도하는 승객을 태운 여객기와 같습니다.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겠지만 믿음으로 아무리 기도해도 조종사가 술을 먹었는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어디엔가 박힐 것입니다. 더군다나 술 먹은 사람끼리 조종실에서 싸움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다가 못 보겠으니까 조종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면허증도 없는 사람이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도 안되면 몸통과 꼬리를 자르자고 하는데 그래서 교회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풍자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화: ‘섬김 영광의 날’에 많은 지체들이 눈물을 흘리며 안수를 받았다-저 눈물이 30년은 가야 될텐 데 하는 생각을 했다)
목사가 안수 받을 때의 눈물을 30년만 간직할 수 있다면 조국 교회의 형편이 엄청나게 바뀔 것입니다. 장로로서 안수를 받을 때에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들어서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쓰시려나보다’하며 눈물을 펑펑 흘리는 어린아이 같은 감격과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산 자로서의 눈물을 마지막 은퇴하면서 드리는 은퇴 예배 순간까지 이어진다면 교회의 형태가 엄청나게 달라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을 받고 예수 죽인 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우는 삶 이전에 우리의 영혼이 진정으로 산 자의 영혼이 되어야 합니다. 거의 기도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거의 없는 침체된 상태에서 사는 사람들이 누가 누구를 위해서 봉사하고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대신 결정하고 누구를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을 왕으로 세워놓고 하나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얼마나 박수를 치면서 좋아했습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결정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그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의 왕을 더 신뢰했고 그에게 더 많이 기대를 걸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일꾼들을 세워놓고 그 사람들이 ‘잘 해주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실망하게 만드십니다. 이것은 산 자의 마음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기우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당회가 회의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녹아지고 제직회가 그러하고 교사들이 모여서 그렇게 하고 심령이 산 자가 됨으로서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고 예수 죽인 것을 자신 안에 짊어지면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정말 살아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어제 임직한 여러분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사명지는 자기 자신입니다. 살아있는 사람, 하나님 앞에서 자기 깨트려짐과 은혜에 대한 사모함 인격적인 사랑에 대한 순전함에 있어서 하나님 밖에 모르는 그런 사람들, 그리고 산 자가 될 때 비로소 예수를 위해서 죽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음에 넘기어져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경에 보니까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기운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죽음은 일차적으로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 저기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순교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이 같은 시기에는 더더욱 사도와 일행이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기웠다고 할 때의 이 죽음이 육체의 죽음인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순교의 위협이 늘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또 한 종류의 죽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미 경험하신 죽음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 예수님 자신은 고백하기를 “이제 내가 죽게 되었으니”하셨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십자가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범죄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경험하고 있는 그 영혼의 깊은 고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살 소망이 끊어진 데까지 갔다고 말하고 만물의 찌끼와 같이 여김을 받았다고 고백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육체의 죽음은 순교를 지향하는 육체의 죽음이기도 했지만 또 하나는 주님을 위해서 자신에게 맡겨준 고유한 사명을 지고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가운데서 경험된 고독과 단절, 거기에서 오는 죽음에 대한 경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고유한 사명과 목표를 깨닫고 그것 때문에 몸부림쳐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 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죽음에 넘기움’ 주님을 위해서는 이 일이 꼭 성취되고 이루어져야 되는데 모든 환경과 상황은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없도록 단결을 해서 그 일의 성취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을 이루는 도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자기를 돕는 그 상황에 희망을 걸고 그 희망 속에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그 사명이 성취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몹시 고통스럽습니다. 그 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어림도 없지만 최선을 다하면서 몸부림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 몸부림을 쳐도 결국은 몸부림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처절히 매달리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 때 그 마음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사명의 요구와 그 일을 이룰 수 없는 상황적인 현실 그 사이에서 그 장본인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없이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기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기우는 경험들이 없습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정처 없이 떠도는 것과 같은 식의 섬김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기우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경험이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거기에 생명을 걸고 사명을 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화:옛날에 절벽과 절벽 사이에 다리를 놓을 때는 활 끝에 가는 실을 매달아 이쪽에서 저쪽 으로 쏜 후 낚싯줄을 잡아당기며 점점 더 굵은 줄과 장비를 옮겨서 다리를 놓았다)
이 다음에 선교 나간다고 하면서 전도 안 하는 사람이 제일 우습습니다. 미래에 하나님께서 주실 사명만 사명이고 오늘은 그저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명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과 같아서 사명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정해놓은 사역의 스케줄을 따라서 하늘로부터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날짜를 정해놓는다고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채워주셔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그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지금 자신에게 맡겨진 낚싯줄과 같이 적은 사명을 위해서 그것이 전부인지를 알고 온 힘을 기울여서 활을 쏠 수 없는 사람은 그 줄 끝에 매달린 수많은 장비들을 끌어올리는 미래도 그에게는 보장되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화:신학교 교수시절에 학생들이 찾아와서 좋은 목사가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묻는다 -좋은 전도사가 되려면 좋은 교사가 되고 좋은 목사가 되려면 좋은 전도사가 되라고 말 한다. 그리고 부목사는 좋은 교회에서 하라고 한다)
(예화:항상 하나님의 사역은 가불의 원리가 통한다고 한 선배목사님께서 말씀해 주셨다-전도사 시절에 눈물을 많이 흘리면 담임 목회는 웃으면서 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항상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기우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진수들을 사역의 생활을 통해서 많이 보게끔 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항상 기억해야될 것은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자리에서 정말 주님을 위해서 죽음에 넘기우는 것과 방불한 삶을 살 때에 그 사람에게는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들은 항상 미래를 위해서 준비한다는 미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신학교 간다는 미명에, 신학교 들어가고 난 다음에는 사역을 준비한다는 미명에 사역을 하고 나서는 선교 간다는 미명에, 선교사가 되고 나서는 무슨 핑계를 댈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의 일생은 모두 좋게 말하면 미래를 지향하면서 꿈을 가지고 산 생애였지만 한번도 자기의 현실에 자기를 쏟아 부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결국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를 결정합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가 무엇을 하느냐를 결정합니다. 이 두 개는 어디가 시작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계속 맞물리며 순환적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기회주의적이고 야비한 사람들은 그렇게 기회주의적이고 야비하게, 이기적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정확히 말하면 섬긴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산 자가 되어서 예수를 위해서 사명 때문에 죽음에 넘기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부실한 섬김 때문에 죽은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부활할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 언약은 정말 주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광된 부활의 소망은 예수를 위해서 이 세상에서 죽음을 넘나들며 사는 사람들 가슴속에서만 애절한 소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부활에 대해서 열렬한 소망을 갖고 예수의 부활을 자기의 부활처럼 기뻐하며 썩어질 육체의 바깥에서 뵈올 거룩하신 그리스도 예수와의 대면의 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그들은 세상에서 무슨 특별한 즐거움이 없는, 신령한 목표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거룩하게 살고자 하면 세상은 너무나 속되고 사명을 위해서 살고자 하니 그들은 찢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생애를 살아야 했습니다. 물론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은밀한 기쁨을 주시고 자기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성취의 기쁨들을 주시지만 부활의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된 모습으로 나타날 것에 비하면 그것은 예고편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런 부활에 대한 가득한 소망을 품으면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자주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기울 기회를 주시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죽으면 주님이 우리 안에서 사실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죽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매 주일마다 교회 일을 생각하고 돌아가는 것을 볼 때마다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람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안 하는 사람이 교인들 중에는 많이 있으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자신은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기울 준비가 되었다고 고백하며 사명의 완수를 위해서 자기를 다 버릴 수 있도록 자기의 남은 모든 것까지 다 주님이 쓰시도록 양보하는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시는 지 모릅니다. 더욱이 애쓰고 노력을 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이 영적인 싸움의 영역에 있어서, 복음 전파의 영역에 있어서 인간의 영혼의 참된 변화에 있어서 얼마나 필요한 지 모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여러분들이 전도를 해봐야합니다. 유치부 교사들이 모자라다는데 놀면 뭐합니까? 교회에 와서 주일 예배나 달랑 드리고 나서 무슨 낙에 삽니까? 무슨 신앙의 재미가 있겠습니까? 여기 앉은 사람들만 다 봉사해도 차고 넘칠 것입니다. 수많은 영혼들이 자신들을 돌보아줄 일꾼들을 기다리는데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할 것 없이 다 사람들이 모자랍니다.
(예화: 7만명 모이는 교회에 집회하러 갔는데 일꾼들이 부족하다고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명감 없이 교회나 다니니까 섬기는 손길들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뭐하십니까? 깊은 가책을 느끼십시오. 산 자로서 예수를 위해서 나는 죽음에 넘기울 준비가 됐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게 베풀어주신 그 위대한 사랑과 그 사랑을 좇아 사는 사람들에게 주신 부활의 언약과 그 약속을 생각하면 내가 산 자로서 죽음에 넘기울 준비를 하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하는 그러한 고백을 가진 사람들이 소수이기 때문에 그런 결과들이 빚어지는 것입니다.
교사가 없습니다. 깊은 가책을 느끼십시오. 영혼들이 자신들을 돌보아줄 손길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 손길이 없어서 한 반에 열 명씩 심지어는 열 다섯 명씩 집어넣고 교육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도록 되어 가는데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고 고백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 추호도 헌신이 없이 주일마다 나와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그것이 무슨 눈물입니까? 감상입니다.
신앙의 원리는 항상 이것입니다. 눈물은 항상 피를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놀라운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에 눈물을 흘리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생각합니다. 예수의 사랑에 감격하며 그 눈물에 젖은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십자가의 은혜요, 이것이 부활의 약속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영혼들이 ‘나를 섬겨달라’고 하는데 말이 됩니까? 정말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가,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에게 성경이 제시하고 기대하는 삶은 어떤 삶인가, 하나님을 한없이 영화롭게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닌가, 예수 죽인 것을 자기의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이 자기 몸에 나타나기 위해서 자기는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기울 준비가 된 그런 삶을 십자가의 사랑에 힘입은 사람들에게 기대하지 않는가’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산 자로서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를 위해서 언제든지 죽음에 넘기울 준비가 된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그만 알았습니까? 이런 십자가의 은혜를 그만 알았습니까? 피 떨어지는 십자가 앞에서 예수께서 그렇게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죄와 악함을 인함이라고 하는 것을 사도와 이 일행만이 알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도 알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다른 악한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존귀한 그분을 우리를 위해서 죽음에 넘겨드렸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과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고 있는 예수 죽인 것을 자기의 몸에 짊어진 고백들은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기울 각오를 하게 만들었는데, 우리가 안 사랑은 우리가 깨달은 그 십자가의 은혜는 종류가 다른 것인가요? 아닙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우리가 조금 헌신하기 싫어서 게으름을 피우고 주일날 한 두시간 더 자고 편하게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서 사는 동안에 수많은 영혼들이 여기 저기서 일꾼들을 부르는 주의 일들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외면하면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 기대하는 은혜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 하는 은혜입니까?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속에도 언제든지 삶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엔죠이 하려고 하는 부패한 정신들은 언제든지 살아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가져다 주겠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합니까? 아직까지 건강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젊습니다. 영혼을 위해서 섬길 시간이 있고 주님의 사랑을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주님을 위해서 섬기고 그 자신에게 주신 섬김의 사명을 자신의 목숨처럼 사랑하고 그것을 통해서 주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 깊은 보람을 느끼면서 살지 않는 사람에게 꿈꾸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미래에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는지 한번 두고 봅시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위대한 일에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지 보십시다.
모세를 가르쳐서 하나님의 집의 사환처럼, 종처럼 충성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다음에 받은 자기 인식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사환으로 불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깊이 깨달은 자기 인식이 그리스도의 종, 예수의 노예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유명해지고 자기가 고귀하고 큰 일에 쓰임을 받는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였습니다. 아라비아의 광야에서 혼자 있을 때 거기에서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회심을 의심받을 때에도 그는 복음을 전하고 살았습니다. 거대한 조직을 만들어 놓은 다음에 비로소 수많은 추종자들을 데리고서야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혈혈단신으로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고 그를 어떤 위대한 일꾼으로 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거기에서 다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변화된 사람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다못해 양동이를 들어도, 우리에게는 그 직분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이전에는 외인이요 이방이요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함을 얻어 주의 자녀가 된 사람들 아닙니까? 놀지 마십시오. 무엇이든지 하십시오.
(예화:근처에 있는 어느 교인이 손으로 긁어 쓴 전도편지를 받고 목사로서 부끄러웠다-하나님 이 자기를 어떻게 죽음 가운데서 건져주셨는지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나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이 편지를 나눠주는 것이라는 내용)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화를 입었으면, 죽음에서 자기를 건져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고마웠으면, 그 사랑을 잊지 않고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눈총을 받으면서 이단으로 의심을 받으면서 그 조잡하게 긁어 복사한 전도지를 하나씩 나눠주겠습니까? 우리는 절대로 그냥 있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예화:길에서 차를 부딪힌 어떤 사람이 급한 일이 있어서 처리를 못하고 헤어졌는데 여러 해가 지났어도 그 사람에게 연락이 오지 않아 양심에 괴롭다고 신문에 낸 내용)
자동차를 찌그러트린 것을 용서해 주었어도 그렇게 부담이 되어서 물질로 보상하지 않으면 매일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고백인데, 십자가의 사랑을 알았다는 사람, 예수의 그 놀라운 사랑, 그 은혜에 감격했던 사람, 주님의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하는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그냥 살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라면 토요일에 나와 화장실 청소라도 하겠습니다. 아니면 이 넓은 교회당의 유리창이라도 닦겠습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그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 마음이 편합니까? 마음에 진정한 평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괴롭지도 않으십니까? 주님이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사랑, 그 은혜를 입고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겨지는 것은 고사하고 이렇게 이런 이유 전런 핑계로 자신에게 부가되는 의무들을 회피하면서 안일한 삶을 살아가고 하나님의 일은 아주 사소한 일처럼 생각하고 육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기의 세상 일들을 아주 어마어마한 일들로 생각하면서 마치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교회에서 섬긴 사람들은 한가하고 할 일없는 실업자들이나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도 않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담대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있습니까? 한번 양심에 질문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그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여러분들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고 아들을 죽음에 넘겨주신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은총 덩어리인 여러분들을 향해서 제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있는지 한번 말해보십시오. 늘 피곤하고 힘들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 피곤하고 힘들게 만드는 것이 부활하신 우리 그리스도 앞에 나타날 때에도 의미가 있는 그런 일들인지 한번 되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화: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여전도사를 안 쓰시겠다고 하던 목사님께서 “주님을 만나면 무슨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말씀하셨다)
주님이 여러분을 부르셔서 여러분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은혜를 상기시키시면서 “이런 놀라운 사랑을 네가 받았는데 너는 무엇을 하다 왔니?”하시면 뭐라고 말하시렵니까? “잘한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지만 2-30년 세월동안 주일 학교 영혼 몇을 붙들고 애를 썼습니다. 어떤 영혼들은 구원의 은혜를 받았고 어떤 영혼들은 구원에 이르지 못했는데 그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다가 졸지에 부름을 받아서 지금 주 앞에 있나이다”고 말할 그 무엇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특별한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저는 지금도 그렇습니다. 요즘은 더 살아야겠다고 하는 생명에 대한 애착이 생겨납니다. 왜냐하면 지금 죽으면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를 위해서 산 날도 별로 없고 또 사는 것 같은 날 중에서는 불순한 동기를 빼버리고 나면 순수하게 산 날이 별로 없습니다. 순수하게 산 날 중에서도 최선을 다하지 못한 날을 빼버리고 나면 손에 잡히는 것은 불과 몇 일이나 몇 개월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니 생명이라도 연장을 받아서 기회를 가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화: 어제 설교해 주신 목사님은 한 교회에 33년을 계신 분이신데 “오라는 데가 없어서 할 수 없이 계속 있었는데 33년이 3주일쯤 지난 것 같다”고 말씀했다)
그것이 소설이나 문학 작품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생을 산 모든 사람의 고백입니다. 이제 주님이 여러분들을 부르시면 주님 앞에 무엇을 보여드리려고 합니까? 그냥 살 지 마십시오. 무엇이든지 하십시오.
언제든지 주 뜻대로 사용하여 주소서
그렇게 살아서 주님을 섬기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3.기도의 사람 안나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눅2:37)
여기서는 예수님이 결례를 받기 위해서 올라가시던 때, 그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의하면 아이를 낳으면 사내아이는 33일 여자 아이는 66일 동안 그 아이를 낳은 엄마가 불결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결례를 행하고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아기를 데리고 성전에 올라갔을 때에 성전에서 두 사람을 만나는데 시므온과 안나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 전체에 볼 때 이 두 사람은 별로 그렇게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지 않지만 그러나 구속사적으로 볼 때에 결례를 행하러 성전에 올라간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이 사람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에 참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구원자이신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이 성전에서 처음 보았고,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들을 구원하실 구세주이신 것을 알아보았고 그리고 더욱이 그들은 오랫동안 그 성전에서 기도하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구속사적으로 이 사건은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시므온이나 안나나 모두 아기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에 올라와서 결례를 받을 때에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는데 이 두 사람 모두 공통점은 기도의 사람이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중에 오늘은 이 안나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 오셨을 때에 거기에는 기도하는 안나 라고 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안나는 시집을 몇 살에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집가고 7년 동안을 남편하고 살다가 과부가 되었는데 과부가 된 것이 84년이니까. 결혼 후 91년이 지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니 100세가 훨씬 넘었다고 봐야지 옳겠죠. 오랜 세월동안 잠깐의 성장기와 그리고 아주 잠깐 동안의 결혼생활을 제외하고는 84년동안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살았던 이 여인에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의 성전에서의 첫 모습을 보여주셨다고 하는 것은 의미 깊은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만나야할 필요가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생애적인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찾으시면서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기를 기뻐하신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안나가 어떤 기도의 사람이었기에 다시 말하면 안나의 기도의 세계는 어떤 세계였기에 그렇게 예수님게서 구속사적으로 의미 깊은 순간인 바로 이 성전에 올라온 때에 그 때에 당신 자신을 처음으로 보여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이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간단하게 교회를 떠나지 않았던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 보다는 좀더 추가된 설명이 필요합니다. 우선 여러분들이 이 기사를 이해할 때 그 때에 예수님이 오셨지만 사실상에 있어서는 아직까지 구약시대였다라고 하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백성들의 의식은 아직 구약이었고 또 실재로 성령님이 아직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볼수 있는 이 교회 제도에 모습이 생겨나기 훨씬 전입니다. 예수님도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역시 그들은 제사를 드리는 구약의 그런 습관에 익숙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교회라는 개념보다는 훨씬더 구약적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성전의 개념은 오늘 우리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개념보다는 교회와 개념과는 훨씬 다르다는 사실을 생각해야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제 성령님이 오셔서 은혜의 시대가 된 다음에 성도들이 모이는 그곳에 어디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그곳에 주님이 계시죠. 또 교회론 적으로 말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다가 부득이하게 다른 교회에서 예배드릴 수도 있고 이사를 가면 다른 교회로 갈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당이 여럿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는 성전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도 다른 곳에 또 성전이 있다고 이야기하면 그것은 중대한 이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만이 하나님의 약속이 깃든 도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만 하나님을 제사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들에게 있어서 이 성전은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예배를 드리기 위한 처소 설교를 듣기 위한 처소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유일한 장소라는 신앙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약속된 처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선택된 장소라고 하는 그 개념이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이 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보다는 훨씬 더 강력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바누엘의 딸 안나의 기도생활의 특징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였다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던 그의 기도생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기를 원했던 그의 기도생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기도가 다 기도가 아닙니다. 그렇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을 때에 짧은 시간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기도 하고, 주님의 응답을 이 땅에 불러 내리기도 하고, 하늘의 불을 이 땅에 떨어기게 만들기도 하지만 주님의 임재 밖에서 드리는 기도는 장시간의 기도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적은 감화밖에 끼쳐드리지 못합니다. 짧은 기도로 순식간에 큰 응답을 불러와서 기적의 역사를 일으키고 현격한 능력의 역사를 볼수 있었던 능력 있는 기도의 비결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사는 사람들이 드린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을 어떤 사람이 기도하느냐 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사는 사람, 그 사람의 기도냐 아니면 그렇지 않은 기도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에 대한 축복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의 신령한 임재 앞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영광스러운 삶의 비밀을 함께 터득해 가야지만 기도의 진수에 도달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삶은 하나님의 임재와는 상관없고 자기 멋대로 살면서 기도하는 순간에 열렬하게 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응답을 불러낼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이 몸에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면서 자신의 신들의 이름을 부른 이교적인 행동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렇죠. 기도에 대해서 진진해 지기 전에 먼저 삶에 대해서 진진해져서 그래서 정말 내 영혼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그의 충만한 임재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깊이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임재가 무엇일까? 많이 쓰니까 여러분들이 대충 다 이해가 되시겠지만 아직도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임재가 도대체 무엇인가? 비유를 들어 드릴께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쉬워질 것입니다. 그렇죠. 여러분이 살아오면서 아주 존경하는 스승이 있었습니까. 아주 너무너무 존경하는 선생님이 계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존경할만하니까 자기처럼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선생님과 우연한 기회에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생님과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셔도 그분과 함께 있는데서 오는 만족감. 그리고 무엇인가 그분이 내 곁에 아무 말 없이 계셔도 그분이 계신 것 때문에 나의 삶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참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스승이 없으니까. 그것이 임재입니다.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주하지 않았으면 느낄 수 없는 그 현재적으로 그분이 내 옆에 계시다고 하는 그 현재적 존재의 영향아래 들어가는 것, 그것이 임재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 안나가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기를 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교제할 수 있었던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베드로의 출옥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던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였다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하죠.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였다라고 하는 그 의미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기도하였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한없이 느껴지는 상태에서 기도드린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앞에 있는 것 같은 합일된 그 임재의 상태에서 기도하면서 살던 사람이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그러기를 사모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언제부터 기도하면서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하여튼 홀로 된지 84년이 지나는 그 긴 세월동안 그 대부분의 세월을 살아계신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 하나님의 약속을 묵상하면서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찬 가운데 그 임재 앞에서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에 있어서 제일 필요한 것은 바로 이렇게 영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아래서 살아가는 그 비결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의 기도에는 열렬함이 깃들게 되고 그 때에 우리의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마음아파 하는 기도의 제목들을 위해 기도할 때 신음소리가 토해져 나아오게 됩니다. 기도에 있어서 이 열렬함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외적인 열렬함이 아닙니다.
기도에 있어서 그 열렬함은 심령 깊은 곳에서 나오는 열렬함입니다. 소란스럽게 의자를 흔들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내면서 부르짖는 통성 기도 속에도 냉랭한 기도가 있을 수 있고 거의 소리 내지 못하고 흐느끼지만 이따금 토해져 나오는 신음소리 속에 열렬한 기도가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에 있어서 어떤 외형적인 습관에 익숙해지는 것은 굉장히 나쁜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죠. 막 북을 치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고 ‘주여 삼창’을 하지 않으면 기도가 터지지 않는 사람들, 또 어떤 사람은 새벽기도 때마다 의자를 덜거덕 덜거덕 흔들지 않으면 그 의자가 소나무인줄 아나 봐요. 나왕입니다. 그것을 흔드는 사람, 그리고 무엇인가 자기도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하는 방언 기도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기도가 열리지 않는 그런 사람들은 잘못된 기도의 습관들입니다.
기도의 큰 힘은 역시 기도에 있어서 커다란 힘과 능력도 누가 공급해 주시느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공급해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공급해 주시는 분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비유가 금방 생각이 났습니다. 시골에 가면 우물이 있는데 우물에 무엇이 자꾸 들어가니까 함석으로 뚜껑을 해서 덮어놓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기다란 줄이 달린 두레박이 두어 개쯤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것을 덜컹하고 열어서 두레박을 내리면 능숙하게 길든 사람은 그저 두레박을 쭉 던지면 슈욱 내려가서 물에 첨벙 떨어지는데 별로 그런 것 해보지도 않은 사람이 던지면 덜거덕 덜거덕하면서 우물벽에 부딪히면서 이끼까지 깎으면서 거기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문제는 얼마나 뚜껑을 멋있는 뚜껑을 놓고 두레박을 얼마나 반짝반짝한 스덴 두레박을 만들어 놓고 이것을 두레박을 내릴 때 얼마나 요란스럽게 꽹과리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게 하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깊은 곳에서 물을 길어서 올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가 안 될 때 일수록 진심으로 기도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러면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무슨 소리인지 아십니까? 기도가 안 될 때일수록 단 일분을 기도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내 깊은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언어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것인가 그런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첫걸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어떤 외적인 기도의 모습을 갖느냐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이 깊은 기도의 은혜 속에서 그 물을 길어 올리느냐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아가는 영적생활입니다.
참 신기한 것은 말이죠. 우리 속에 있는 이 기도의 깊은 샘은 우리가 참 정성껏 관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지하수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우물, 그래서 패기 된 우물을 보신 적이 있죠. 그 우물이 일단 패기 되고 나면 거기에다가 두레박을 던져서 물을 길으면 그 물은 차라리 도랑에 흘러 다니는 물보다도 더 더럽습니다. 장구벌레, 모기 되는 벌레. 그런 것이 잔뜩 나오고 거기에다 이끼까지 껴서 나옵니다. 토할 정도로 더러운 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는 이 기도의 세계는 아주 세심한 관리가 필요합니다. 그 관리가 뭐냐면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임재 앞에서 사는 삶이 부단히 계속되어야합니다. 일주일동안 기도가 무엇인지 다 팽개치고 있다가 은혜나 한번 받아보자 그러면서 일주일을 굶은 사람 잔치 집에 몰려들 듯이 교회에 몰려드는 그런 것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기도의 불씨는 받았으면 일주일 동안 그 불씨를 잘 불어서 불을 일으켜야합니다.
언젠가 한번 잡지에 보니까 참 그런 집안의 며느리들은 고생일 것입니다. 그 집의 불씨가 전해져 내려온답니다. 불씨. 그런데 그 불시를 지금 500년째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시겠죠. 예전에는 성냥이 없었기 때문에 여자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중에 하나가 뭐냐면 밥을 하고 마지막 저녁때 군불을 정리하면서 그것을 불씨를 재속에 깊이 묻어두어서 사당같이 생긴 곳이 있는데 거기에다 그 불씨를 저장했다가 그 다음날 아침에 떠내서 재를 다 털어서 불씨를 가지고 후 불어서 아침밥을 지었단 말입니다. 그것을 전해 내려오면 시집오면 시어머니가 제일먼저 넘겨주는 것이 그것입니다. 꺼뜨리면 어떻게 되죠? ‘고향 앞으로 가!’입니다.
그것이 500여년이 내려왔다니까 대단합니다. 기도를 그렇게 한 집안에서 계속했다면 아마 무슨 일이 일어나도 벌써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주워 담으면서 그 집 할머니가 하는 이야기가 “이것도 나 죽으면 끝이지 언제까지나 이 불씨를 간직할지 모르겠다.” 하면서 그저 살아생전에 한다. 그러면서 그것을 담는 이야기가 잡지에 쭉 나왔습니다. 보세요. 이 세상에 있는 불씨하나. 이제는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맨 성냥이고 이제 성냥도 필요 없습니다. 라이터에다 스위치만 누르면 다 불이 들어오는 그런 세상에 심지어는 인터넷으로 클릭을 하면 전자렌즈에 불이 들어오고 가스렌즈에 불이 들어오는 그런 세상에 무슨 그 불씨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래도 그 사람들이 500년 가까이 그 불씨를 이어온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들이 주일날 어떤 감화를 받고 기도의 작은 불씨라도 옮아 가지셨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그것을 일주일 동안 잘 간직하고 그리고 그것으로 불을 일으켜서 그래서 자신도 더 많은 불씨를 가진 기도의 불씨를 간직한 그런 사람이 되기를 힘쓰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막 살면 건강하고 견실한 영적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 중에 힘써야 할 것이 뭐냐면 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사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하고 예배를 드릴 때뿐 아니라. 어두운 뒷골목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거기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무엇인가 부정한 방법으로 일들을 처리해서 이익을 도모하는 그 자리에도 주님이 계시고 어느 한순간 신앙의 정조를 꺾고 세상과 야합하며 손잡는 그 순간 거기에서도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 그것을 깊이 기억하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살피면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계속 살아가기를 힘써야하는 것입니다.
이 바누엘의 딸 안나가 성전을 떠나지 않던 신앙은 바로 이러한 신앙이었습니다. 늘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살고 싶어하는 사람, 그 사람의 기도가 이렇게 위대한 응답을 받고 결국 그가 메시아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성전에서 처음 뵙는 이 위대한 역사적인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살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난주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 바누엘의 딸 안나의 기도가 얼마나 집중된 기도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집중은 한편으로는 죄의 유혹을 받는 자기를 이기기 위한 집중이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의 집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규례를 따라서 금식을 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으니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밤이든지 낮이든지 자신의 영혼이 필요로 하는 그 때에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그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믿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게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필요하다 믿어지고 감동되는 그 때에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그렇게 집중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 앞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이 신앙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결국은 기도의 응답을 따라 뵈옵게 만들었던 그런 강력한 힘이 되었다는 사실을 볼수 있습니다. 물론 이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이 여인이 그리스도 예수의 오심과 관련되어서 어떤 약속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여인이 오늘 성경에 기록된 것 보다는 훨씬 더 구체적으로 이 하나님 앞에 어떤 기대를 가지고 기도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므온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분명한 응답을 받았는데 이 여인도 그런 것들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렇게 긴 세월동안 기도하며 변함없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면서 메시야의 오심과 그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기도했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분명히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여인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약속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쉽게 단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여인은 이처럼 주야에 금식하며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집중은 바로 메시야이신 우리 주 예수의 오심과 관련된 집중된 기도였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주목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오심을 기도제목으로 삼고 그분의 오심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더니 결국은 그분을 떠나지 않는 그 예루살렘 성전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타겟으로 놓고 기도하겠습니까? 이 여인이 오시기를 간구하며 기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이미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이 여인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오심을 위해서 기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여러분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계획이 있으시죠. 그 일들을 성취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사용하고 싶어 하시죠. 그 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무엇을 위해서 어디에 초점을 놓고 주야로 집중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겠습니까? 주야로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이연이 기도했던 것처럼 아침이든지 깊은 밤이든지 여러분들이 홀로 하나님을 앙망하기 좋은 그 시간에 주님께 집중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기도할 터인데 여러분들은 무엇을 그 초점으로 삼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렵니까?
사실 우리는 초점으로 삼아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의 쉽게 흔들리는 믿음 생활을 위해서는 더더욱 그것이 초점이 되어야하겠고,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생각하면 항상 마음속에는 그들의 구원받지 못한 것이 그들의 영혼들에 대한 운명이 우리의 기도의 초점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기도하실 때를 기다리면서 구원의 때를 연기시키고 계신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 더더욱 부담이 되게 마련입니다.
현실적으로 여러분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안타까운 여러 가지 환경과 그 환경을 위한 기도 제목들은 더더욱 여러분의 피부에 다가오는 기도의 초점이 될 수 있습니다. 뿐 만아니라 여러분들의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교회를 위한 기도의 제목도 또한 초점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기하게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목회자를 위한 기도에 집중하게 됩니다. 언젠가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잊지 않고 물으실 질문이 있으신데 “너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얼마나 너희 영혼의 목자를 위해서 기도했느뇨?”라고 하는 질문일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상황에 놓여있는데 교회의 여러 가지 이전과 여러 가지 문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초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기도생활은 안하면 안할수록 할 것이 없고 하면 할수록 이 기도의 세계는 끝이 없습니다. 그렇죠. 공부 못하는 애들은 늘 다 했다고 합니다. “공부 좀 해라.”“다했어. 뭘 또 하라고?”“공부 열심히 하는 애들은 끝이 없습니다.”“그만해라.”“아직 멀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는 어떻습니까? “다했어. 다해 놨단 말이야.”기도의 세계가 그렇습니다. 이렇게 기도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기도를 하면 할수록 호수에 퓨~욱하고 돌맹이를 던지면 퐁 떨어지면서 파문을 쭉 그리듯이 기도를 하면 할수록 그 기도가 우리 안에 있는 기도의 영의 파문을 딱 던지면 던질수록 기도의 범위가 점점점 넓어집니다. 그리고 항상 그 기도가 부족하다고 하는 것을 느낍니다. 기도 할 때는 몰랐는데 눈을 뜨고 그 문제에 접하고 곤고한 영혼들에게 접하면 저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 못했는데 막 고민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고민은 했지만 그 상황을 위해서 거의 기도못했는데...’ 이런 가책이 옵니다.
그런데 기도를 안 하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그 파문이 점점점 줄어들어서 돌을 던져야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기도 안하고 살수가 있어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에요, 안하는 사람이에요? 그것까지도 잊어버렸습니까? “아니 어떻게 기도 안하고 살 수 있어요? 하나님의 홍해를 가르신 기적보다도 더 신기한 시적은 그리스도인이 기도 안하고도 살아가는 것입니다.”누가 하는 이야기입니까? 기도하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면 할수록 자기가 얼마나 보족한지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기도 하면 할수록 박력이 사라지는 것 아세요. 인간적인 박력은 죽고 신앙적인 믿음은 깊어지는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해보세요. 인간적인 박력이라는 것이 혈기입니다. “유혹? 걱정 마! 내가 할게. 나한테 맡겨!” 이것이 전부다 혈기입니다. 깊은 기도 속에서는 그것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면서 자기 자신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집중해서 기도하면 할수록 집중된 기도는 우리의 기도의 영에 던진 돌멩이와 같아서 파문을 일으킵니다. 그러면서 점점점 기도의 세계를 넓혀갑니다. 몇 시간을 기도해도 모자랍니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의 기도생활은 얼마나 광범위한 기도생활이었는지 그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축약해놓은 것은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습니까? 주기도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교회의 역사적으로 볼 때에 주기도문과 십계명, 사도신경 이 세 가지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뼈대입니다. 그래서 이 주기도문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할 수 있으면 ‘주기도문 시리즈’를 전부 들어야합니다. 한 20개 됩니다. 그것을 들으면 복음에 대한 이해가 생겨납니다.
그것을 보세요. 그러니까 얼마나 방대한 기도의 틀입니까? 그 틀을 채우시면서 기도생활을 해오셨으니 예수님의 기도가 얼마나 많은 기도였겠느냐는 것입니다. 늘 부족하게 느끼시면서 사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총체적으로 ‘어떻게 헌신하라.’ 이렇게 가르쳐 주신 것은 없는데 우리에게 총체적으로 이렇게 기도하라는 것은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기도의 틀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거기에 집중된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말 우리들이 집중된 기도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그저 거의 기도하지 않고 하루 종일 살다가 저녁때 잘 때에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그저 몇 분 중얼거리는 것으로서 우리의 영적생활을 대처할 수 없습니다. 영적생활은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에게 어려운 상황이 있겠죠. 그렇죠.
늘 기도 얘기만 나오면 청산유수죠. 말도 마십시오. 새벽에 출근해서 밤 10, 12, 1시에 옵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직장이고 또 넓은 의미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니까 성실히 해야죠. 그러나 이 젊음 다 가도록 도저히 직장 때문에 기도하지 못할 것 같으면 진지하게 “하나님 내가 할 다른 일 좀 없을까요? 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삶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그러더라고요. 목사님 아무래도 제가 기도생활을 잘 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넉넉한 직업을 갖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얘기는 맞습니다. 그런데 의사나 변호사가 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공부는 못하는 애가 그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뭐 그 사람들도 다 한가하겠습니까? 다 바쁘지? 결국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누가 집중된 삶을 살아가느냐 입니다.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삶의 바쁜 스케줄, 삶의 상황에 자기 통제를 잃어버리고 삶의 상황에 이끌려가는 것은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과 똑같습니다. 소를 이쪽 손에 세 마리 이쪽 손에 세 마리 이렇게 고삐에다 매달고 쭉 줄을 해서 이렇게 끌고 가다가 도망 갈까봐 손에다 양쪽에 세 마리씩 묶었습니다. 그리고 갑니다. 그리고 앞에서 끌 때는 늦게 오면 양쪽을 잡아당기면 콧구멍 12개가 채이면서 앞으로 소들이 옵니다. 저쪽으로 가려고 하면 딱 채이면 콧구멍 6개가 “아야!” 하면서 이쪽으로 옵니다. 이렇게 하면서 소를 끌고 가야합니다. 그러다가 뭐가 잘못되어서 사람이 뒤에 쳐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가 막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런 밑에는 모래바닥입니다. 거기에다 막 뒹굴면서 왜 끌려가는 것과 똑같습니다.
나는 이렇게 비유를 잘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생생합니다. 방금 생각났는데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죄를 지어서 소나 말에게 이렇게 매달려서 막 먼지를 일으키면서 끌려가는 사람 보지 않습니까? 그런 것과 똑같습니다. 그렇게 살면 마지막에는 죽는 것밖에 없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살다가 죽을래요? 여러분들이 바쁜 것을 제가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저도 바쁘게 살아온 삶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입니다. 제가 직장 생활을 떠난 지 20여년이 넘었지만 ‘김남준’ 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어도 ‘뛰어 다니던 사람’그러면 사람들이 다 기억했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뭐냐면 한가하게 살면서도 그렇게 소에 매달려서 먼지를 일으키면서 막 피투성이가 되어서 끌려가는 사람이 있고, 바쁘게 살면서도 말이 달려오는데 자기는 날아가면서 말을 자기 가고 싶은 데로 채면서 달려가면서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아멘좀 하면 어디 덧나요? 그렇단 말입니다. 그런데 말에 묶여서 막 달려가고 막 먼지를 일으키면서 거기에서 피투성이가 되어서 까뒤집혀지면서 막 뒹굴면서 끌려가는 그런 식의 생활을 해서는 이미 그런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이미 영적생활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이 여러 달 계속되고 있다면 이미 영적생활은 고갈되고 없는 것입니다. 저의 얘기가 틀렸습니까? 그런 사람이 기도에 집중하는 때가 있다고요? 어떻게 집중하겠습니까? 실제 생활할 때는 그렇게 끌려 다니느라고 못하고 한가하게 있을 때는 그 끌려 다닌 기억을 되살리느라고 머리가 복잡해서 못합니다. 그리고 또 내일 끌려 다릴 생각을 하니까 참 어렵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그 말을 별로 실감하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정말 어려운 것은 기도생활이다.’ 그리고 목회에 있어서 크게 성공한 사람은 덜 존경스러워도 기도에 있어서 정말 승리한 사람들은 존경스럽습니다. 훨씬더 존경스럽습니다. 그만큼 부단한 자기와의 싸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울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야, 이 세상이 성도들을 진짜 죽이는구나.’7시에 눈비비고 밥도 못 먹고 심지어는 잠자는 가족을 뒤로 돌아보면서 출근을 해서 그리고 잠들어 있는 가족을 보며 퇴근을 하는 것입니다. 세수하고 쓰려져서 잠자고 눈비비고 일어나면 다시 직장으로 달려가든지 사업장으로 가든 지합니다. 그런데 또 안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눈물이 나옵니다. ‘저렇게 살면 아무것도 없는데 전도도 그렇게는 하지 말아야 되는데 전도생활도 그렇게 하지는 말아야 되는데 돈벌이를 저렇게 하나?’
직장생활을 통해서 자기를 구현하고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 간다라고 하는 그 보람도 아니 자기가 뭐 살아있을 때 보람이니 뭐고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참 안타깝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이, 일찍 퇴근시켜주는 직장이 있는데 그쪽으로 가보라고.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사업에 대해서는 쥐뿔도 알지 못하는 목사가 그것 때려치우라고 누구 말마따나 기도하다가 내가 계시 받았는데 곰탕집 내라고 내가 그럴 영력도 없거니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한없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주일날 와서 깊이 은혜를 받고 하면서 밤톨만한 불씨라도 하나 붙들고 그래도 이거라도 금주에는 불어서 그래도 불씨를 만들어야 되겠다고 가는 사람들은 그래도 뒷모습을 보면서 기대가됩니다. 그래요.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
그런 생각이듭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합니다. 그래서 그 기도가 집중된 기도가 될 때에 결국은 잠자던 여러분들의 기도의 영위에 파문을 불러 일으켜서 처음에는 작은 기도였지만 넓혀지고 넓혀져서 그래서 여러분들이 교회를 끌어안고 지체를 끌어안고 이 민족을 끌어안고 세계의 선교의 지도를 끌어안고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으로 변해갈수 있는 것입니다. 집중된 기도가 그런 역사를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기도로 섬겼다.”라고 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상식을 깨뜨립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간에 기도먼저 하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간에 예배드리고 시작을 합니다. 그것을 뭐 비판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준비운동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이 기도는 어떤 일들을 위한 준비운동이고 그리고 중요한 주된 내용은 실지로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상식을 여기에서 깨는 것입니다.
뭐냐하면 “기도로 섬기더니”그랬으니까 섬겼는데 섬김의 방법이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뭐 이 사람이 누구인지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까 알 수 없겠지만 뭐 시집 간지 과부가 되어서 84년을 직업도 없이 기도하는 일에 자기를 바치면서 살아왔을 터인데 뭐가 가진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죠. 아마 이 여인에게는 섬길 물질도 없었겠죠. 그렇죠. 시집 간지 91년이나 되는 여인이었으니 뭐 건축할 때 벽돌을 옮겨 놓을 수 있겠어요? 땅을 팔 수 있겠어요?. 그렇죠. 그에게는 기력도 거의 없어서 육체의 힘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시집 간지 91년 100세가 넘는 나이가 되었을 테니 노쇠하여 무슨 남다른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그 여인이 해온 일은 주님을 앙망하면서 기도해온 그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여인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섬길 것이 없었을 터인데 오늘 여기에 보니까 “기도로 섬기더니” 그랬습니다. 지상에서 하던 일들 가운데 천국에 가면은 대부분 다 끝납니다. 그렇게 공부하던 성경공부, 끝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렇게 설교를 듣는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는 가장 무식한 교인이 저보다 훨씬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저보다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서 주님의 성품에 대한 이해가 탁월하게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필요 없습니다. 교회도 없습니다. 교회 와서 청소하고 화장실 바닥 닦고 토요일이면 여기저기 걸fp질 하는 것도 여기에서 끝입니다. 거기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심지어는 거기에 가면 전도도 안합니다. 그렇죠. 천국에서도 또 전도 해야 되요? 하는 사람은 누구이며 전도 받는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천국에서는 그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일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죠? 기도입니다. 예수님도 거기에서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시고 그분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도 거기에서 계속되는 섬김이 하나 있는데 그 섬김은 다름이 아니라 기도의 섬김입니다. 그러니까 거기 가서도 말이죠. 교회를 위해서 이 땅에 충만하게 임하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하는 것은 섬기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그 자체가 훌륭한 섬김입니다. 그래서 어느 책에서 보니까. 어느 목사님이 방에다 “사역 중.” 이렇게 써 붙여 놓았더래요. 그래서 목사님이 누구와 상담을 하시나? 회의를 하시나? 문을 열어보니까 혼자서 소파에 앉아서 기도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역은 사역인데 무슨 사역? 기도사역 중이었다는 것입니다.
섬김입니다. 특별히 영혼을 섬기는 사람들, 하나님의 위해 수종 드는 사람들에게는 이 기도의 섬김이 섬김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역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섬김 그 자체였습니다. 만약에 기도가 단지 섬김을 위한 준비였더라면 이 안나라고 하는 여인은 전혀 중요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계속 준비만 하고 실재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여인이었을 테니까 말이죠.
그러나 성경은 놀랍게도 기도 밖에는 거의 한 것이 없었을 이 여인을 가르쳐서 ‘기도로 섬기더니’ 그랬습니다. 그의 오랜 세월동안의 기도 많은 물질, 건강, 뛰어난 재능, 활동적인 힘이 없어서 다른 것으로는 아무것도 섬길 것이 없었지만은 그러나 84년동안 홀로된 이후로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늘 기도하던 이 여인의 생애는 성경에 나와서 헌신하면서 살았던 수많은 헌신적인 사람들 누구 못지않은 섬김의 사람으로 오늘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전에서 제일처음 뵈옵는 영광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돈이 없으면 물질로 섬길수 없고 건강이 없으면 몸으로 헌실 할 수가 없습니다. 재능이 없으면 꼭 필요해도 발을 구를 뿐 헌신할 마음이 있어도 나를 써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에는 따로 달란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섬기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기도로 섬기지 못하는 것에 있어서 그들은 무엇이 없고, 무엇이 없고 무엇이 없기 때문에 라고 핑계 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무엘이 고백했듯이 기도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P풀어 주신 은혜는 정말 크죠. 그렇지만 우리가 사실은 기도도 하지 않고 받은 은혜가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서 그 은혜가 더욱 빛나던가요? 아닙니다. 기도 많이 하고 응당 그런 은혜를 하나님이 주실만한 사람들에게 은혜가 임했을 때에 그 은혜는 더 찬란하게 빛납니다.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는 법이 없어도 많은 기도의 헌신 끝에 가까스로 응답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그 일이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고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의 모든 은총일 따름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법입니다. 기도의 섬김이 이래서 우리에게 훌륭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컸습니까. 우리의 교회에, 우리 개인적인 영적생활에 우리의 가족에 모든 생활의 분야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컸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주님이 그렇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그 자리자리 그 감사의 제목 하나, 하나마다 그저 우연히 받은 은혜가 아니라 우리가 그 모든 것을 기도의 제목으로 삼고 더 많이 기도로 섬겼더라면 아마 지금 맛보는 것보다 더 큰 축복과 은혜를 우리들이 경험하지 않았겠습니까?
적은 마음을 드리고 조금밖에 기도하지 못했는데도 이렇게 큰 은혜를 주셨다면 우리가 마음을 드리고 더 많이 간구했더라면 더 큰 은혜를 하나님이 부어주시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늘 기도 속에서 이기고 승리하는 주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을 늘 섬기는 사람들로 주님 기억에 남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4.그리스도께 묶인 사람 시므온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눅2:25-26)
우리는 지난 시간에 그리스도에게 매여서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로 하나님을 섬기며 금식하던 안나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스도께 매인 삶과 기도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여기에는 안나와 함께 결례 받으러 나아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뵙게 되는 영광을 얻은 시므온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나이가 든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의 기도 속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로 볼 때에 이 사람은 상당히 노년에 들어있는 그런 나이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몇 년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가 꽤 길고 오랜 세월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살아갔던 사람이라는 사실은 쉽게 누구든지 동의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영광스러운 약속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교회의 역사를 뒤흔들어 놓은 위인도 아니었고 사도행전을 누비고 다니면서 우리에게 선교의 감명을 주는 그러한 혁혁한 일꾼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런 평범한 노인네였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약속을 그것도 미리 받았던 이 사람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람이었을까요?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사람과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님의 눈앞에 살아가던 사람들은 용기와 격려를 얻게 되고 사람의 눈앞에 살아가던 사람들은 실망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이 시므온 같은 사람을 보면서 이 사람이 세상에서는 주목받지 못하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이 사람이 얼마나 존귀하고 훌륭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길래 주님께서 그에게 교통하셔서 그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도 그리스도를 보기 전까지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신령한 약속을 주게 하셨는지를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새삼 하나님의 그런 놀라운 은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어느 정도나 매인 사람이었을까 입니다. 우선 그 뒷부분에 보면 아기를 안고 오는 예수의 부모를 만나고 그 아기 예수를 보면서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을 찬송하며 기도했습니다. “주제여 이제는 종을 놓아 주시는도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말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이제는 종이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습니다.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그러면 그로 하여금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게 만들었던 인생의 가장 커다란 숙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구약에서 이미 그렇게 오래도록 약속된 메시야를 뵈옵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 우리들이 잘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사람의 일생을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그리스도 예수 한분만을 기다리면서 그 소망에 매여서 죽을 수도 없이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죽을 수도 없는 사람으로서 그 소망 하나에 매여서 일평생을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자 그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사명이요 숙제가 이루어진 것처럼 “주제여 이제는 종을 놓아 주시는도다.” 하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 찬송하며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선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거론하기에 앞서서 오늘날과 같은 이런 시대에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내가 죽을 수도 없다.’라고 하는 믿음, 다시 말하면 이렇게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지만 지금도 여전히 우리들에게는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녀도 영적으로 방황하고 정리되지 않은 사람들, 무엇인가 마음에 풀어지지 않은 갈증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해결을 보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 이런 많은 사람들이 곤고하고 방황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만약에 이 시므온과 같이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그분을 만나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다는 그분을 향한 사모하는 갈망을 갖는다면 그들의 영혼의 변화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면서도 삶의 초점이 분명하지 않은 그런 생활을 해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존재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왜 죽지 않고 오늘도 살아있습니까? 오늘 다 아프고 병나면 치료를 해서라도 고쳐서 좀더 살아보고자 하는 삶의 욕구를 갖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 더 살아있기를 원합니까?
시므온에게 있어서 그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보아야 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구원자. 그분을 내가 보아야 하리라. 내가 믿음의 조상들로부터 성경을 통해서 수없이 약속받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인류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을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학인해야 하리라.”하는 것입니다. 그 소망하나가 이 시므온으로 하여금 죽을 수도 없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메시야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기다림은 단지 ‘오시면 만나겠지.’라고 하는 희망이나 막연한 기대가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그 약속을 붙들고 그는 매일 매일을 그분을 만나는 날인 것처럼 살았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신앙입니다. 좀 어려운 말로하자면 ‘종말론적 신앙의 현재화’라는 것입니다. 그분을 뵈올 그 종말의 날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뵈올 것입니다. 멀리는 우리가 죽으면 그분 앞으로 다가갈 것이요. 우리가 죽기 전에 그분이 오시면 우리는 영광 중에 오시는 그분의 그 재림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그분과의 영적인 만남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곤고한 사람들은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서 충만한 은혜를 얻고 삶이 곤고하고 핍절한 사람들은 그분과 만남으로 말미암아 곤고한 삶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삶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무지 가운데 살아서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알지 못하던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서 무엇을 어떻게 행하고 걸어가야 할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은 우리들로 하여금 곤고함을 이기는 열쇠이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중요한 관건이 됩니다.
사실 우리의 인생에 많은 문제가 있지만 결국 우리의 인생의 모든 곤고함의 궁극적인 원인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모르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따지고 보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사실 우리가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들이 아니라 보다 더 궁극적으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의 만남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가장 커다란 숙제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인생의 숙제들, 신앙의 길에서 경험하고 있는 수많은 방황들과 가치에 대한 모든 혼돈들, 정함이 없는 마음들의 흔들림, 이 모든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답은 여러분들이 구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게 됨으로서 모두 사라져버릴 그런 근심이요, 그런 염려인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시므온과 같이 일생을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그분을 만나기 전까지는 죽을 수도 없을 것 같은 그러한 마음의 각오와 결단을 가지고 그분을 만나려고 하는 진지한 마음의 결심, 그리고 자기의 뜻을 정하고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고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할지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이처럼 나타나셔서 자기를 보이시고 우리를 만나주겠다고 하신 그 약속들을 친히 이루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신 사실을 오늘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처에 가득 찬 냉담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지만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만남으로서 자신의 영혼에 참된 변화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숙제이며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기도로 간구로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시므온을 보십시오. 이 사람은 언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단 한가지의 약속, “그리스도를 네가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그 약속, 그 약속하나만을 믿고 일평생을 기다렸습니다. 그의 영혼의 시선은 오실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에게 고정되어있었고 그 약속 하나를 붙들고 그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일관된 기다림의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생략하고 있지만 믿음 하나로 살아온 그 사람, 자기의 생애에 자기의 두 눈으로 메시야를 볼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 해주었을 때에 누가 얼마나 그 이야기에 동의해 주었을까요?
그는 아마 홀로 그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진지하게 몸부림치며 살았을 것입니다. 알 수 없는 긴 세월의 기다림 속에서 그는 유혹도 받았을 것입니다. 기다려도 뵙지 못한 그리스도, 현실은 그를 실망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기다려서 결국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두 눈으로 보는 영광스러운 축복을 안나와 함께 누렸습니다.
그 만남이 얼마나 복되었을까요? 아기 예수에게 축복하며 하나님을 송축하며 기도하고 이제 그 눈으로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후로 약속된 그 긴 언약을 따라서 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 이제 이 세상을 구원하고 자기의 백성들을 죄에서 건져내실 것이라고 하는 이 놀라운 사실들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는 아마 기다리면서 살아온 지난 날들의 많은 서러움과 유혹과 싸우기 위해서 힘겹고 지쳤던 날들을 모두 잊을 수 있으리만치 충분한 보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소중한 것은 항상 간단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생애적인 변화를 받아 정말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 하지만 그러나 그런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 지불해야할 기다림의 고통들 그런 것들을 쉽게 참아 내지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약속은 분명히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받았던 것보다 더 분명한 약속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는 오실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우리는 이미 오시고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우리를 구속하시고 이제는 자기를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를 보여주셔서 자기의 친구와 같이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는 복된 그리스도 예수의 초청을 약속으로 받고 있습니다.
그분이 인색하시거나 혹은 사랑이 없으셔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주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고정된 마음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라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경험하기를 원하는 마음은 있지만 그러나 단지 원하는 것과 갈망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단지 자기를 찾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진정으로 만나기를 원하고 그리고 갈망하는 마음으로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하나님과의 관계와 영혼의 내면의 모든 세계를 삶의 참다운 변화가 오기를 갈망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오늘도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좀더 진지한 신앙생활이 필요합니다. 일상적으로 교회를 오가는 교회 출석으로 만족하는 그런 신앙의 생활, 예배 참석을 의무라고 생각하고 이제 예배에 참석하거나 얼마간의 헌금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나면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다했다고 생각하는 외면의 삶의 어떤 모양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 가지고 만족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그런 갈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한번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 보시기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수많은 쓴 뿌리들과 패역들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와의 인격적인 만남과 그분으로부터 받는 신령한 영향보다는 죄악된 여러분들의 옛 습관,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받는 영향이 훨신 더 크기 때문에 패역은 고쳐지기는커녕 교회에 다니면서도 점점 더 그 패역은 자라갑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악한 죄와 악한 경향성들은 형식적인 교회생활로 결코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다운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진리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근본적인 변화를 여러분들이 경험하지 못한다면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은 그저 껍질뿐일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여러분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시면 여러분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께 혼날 것입니다.
잊지 말고 기억해야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한 변화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그리고 우리가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는 것, 그분과의 인격적인 만남 속에서 무지함이 깨뜨려지고 우리 자신의 육신에 속한 혈기로서는 다스릴 수 없었던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옛 성품과 그리고 타락한 경향성들을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신 고난의 의미와 부활의 뜻을 새롭게 앎으로 날마다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신앙의 참된 변화를 통해서만 우리는 그러한 옛 자아를 극복하고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우리의 삶, 우리의 뼈 속까지 익숙해졌던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버릴 수 있을까요. 결코 우리의 육신적인 노력만으로는 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이 필요하고 그것을 통해서 이제껏 우리들이 알지 못했던 그분의 성품과 십자가의 교리들을 새롭게 아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전에 우리들이 알았지만 그러나 그 진리를 새롭게 경험하고 경험된 진리 속에 깃드는 성령의 놀라운 능력으로 우리들이 끊을 수 없었던 옛 삶과 결별하는 참답고 진실한 내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변화는 결코 생각 없이 뜻 없이 다니는 교회의 출석생활로서는 접근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교회의 생활로 여러분들의 영혼 속에 그런 복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 여러분들이 참답고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하는 기대는 꿈에도 꾸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 세상에는 진실하게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간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도 헤아릴 수 없지만 그러나 일평생 인격적으로 주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채 짐승과 다름없는 삶을 살다가 인생전체로 하나님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죽은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이 세상이 이렇게 변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시므온을 봅니다. 그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자기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것을 기다리면서 살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갈증을 가지고 그는 헤아릴 수 없는 긴 세월을 그 약속 하나를 붙들고 기다리면서 자신은 그분을 뵈옵기 전에는 죽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의 삶의 처지를 규정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뜻을 세우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은 고대하고 기다렸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아름다운 모습 중에 하나는 죄인이 진실하게 참회하는 모습니다. 지체들이 참회하는 모습을 보면 왜 그런지 눈물이 납니다. 그 속에서 그가 예전에 아무리 악한 죄인이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속에서 은총을 구하는 간절한 마음을 읽게 됩니다. 예전에 그가 많은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흐느끼면서 진심으로 참회하는 그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완전하고 완벽한 삶을 살 수는 없는 사람들이니 우리는 수시로 하나님 앞에서 참회하는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살아가야되겠죠. 사람보기에도 그렇게 아름다우니 완전하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참회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너의 죄 사해주사
너의 죄 사해주사
기억 아니 하시네
기억 아니 하시네
참 참회는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으로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진실한 결심입니다. 설령 결심을 했지만 인간 안에 내재하는 연약함으로 인해서 그 결심을 지키지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가식이 없는 진실한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그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희망을 읽어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빛으로 나아올 소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무기력하던 사람들이 능력을 덧입을 약속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뜻을 세우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에 왕 앞에서 나오는 진수성찬으로 먹을 것을 제의받았을 때에 하나님 앞에 한 처음이 무엇이었습니까? 뜻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죄 때문에 나라가 망했으니 이제 우리가 다시는 하나님 앞에 불의한 삶을 살지 않겠노라고 뜻을 세우는 것, 그것이 결국은 바벨론에서의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뜻을 세우지 않았더라면 아마 바벨론에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해서 바벨론의 뒤치닥거리나 하면서 거액의 연봉이나 받으면서 호위호식 하다가 아마 이국의 땅에서 쓸쓸히 죽어갔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없는 지푸라기와 같은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뜻을 세웠습니다. 이 시므온도 그렇게 긴 세월동안 인내함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뜻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약속에 기초해서 뜻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뵙기 전까지는 죽지 아니하리라 약속하셨으니 나의 가장 큰 소망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뵈옵고 그분께 경하하고 그리고 그분을 하나님 앞에서 보내주신 그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는 것이라.’ 어떤 의미에서 그의 긴 인생은 이 한순간을 위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 순간 안에는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뜻을 세우세요. 수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여러분들이 삶이 변하지 않는 것은 여러분들이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고 순종하지 않는 것은 뜻을 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성적으로 죄 가운데 살아가기를 즐거워하는 인간들은 뜻을 세우기를 매우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뜻을 세우면 잃어버리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새벽기도를 하기로 결심을 하면 새벽에 편안한 수면을 포기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헌금생활을 하기로 작정하면 물질들을 잃어버릴 결심들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고 영혼들을 위해서 애쓰기로 뜻을 세우면 이제 그의 시간은 주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영혼들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자신의 재능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결심하면 그는 많은 돈벌이와 그리고 자기 혼자 즐길 수 있는 시간들을 포기해야합니다.
보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정반대의 이야기도 성립한다는 것 아닙니까? 뜻을 세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님의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늘 ‘기도해야지. 해야지.’ 하고 아무 뜻도 세우지 않은 사람들은 입으로만 그렇게 말할 뿐이지 하나님 앞에 기도로 바친 아무시간도 없습니다. ‘모든 물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니 우리는 청지기지. 청지기지.’ 하고 실제적으로 헌금생활에 대해서 결단하지 않은 사람들은 1년이 지나고 나도 아무것도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이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따져가 보면 뜻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기 위해서 그 자신의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알리는 깃발을 꼽는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더우기 그 복중에 복인 그리스도 예수와의 깊은 영혼의 만남이 이렇게 뜻을 세우는 일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지 일반적인 일이 아닙니다.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들린 예배시간에 변화를 받아서 새사람이 된 사람도 있고, 돈 받으러 교회에 갔다가 빚쟁이 찾으려 예배에 참석했다가 나가지 못하고 들은 그 설교 속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맛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적인 것이고 하나님을 이미 믿는 여러분들에게는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고 시므온과 같이 오랜 인내심을 가지고 그분을 뵈옵기 전에는 내가 죽을 수도 없노라고 하는 그런 인내의 결심들이 필요합니다. 뜻을 세워야합니다. 안될 때 안 되더라도 뜻을 세워야합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겠노라.” “이제 나는 새벽기도의 사람이 되겠노라. 내가 내 일평생에 기도하며 살리라. 내가 내 하나님께로부터 얻은 소득의 일부를 반드시 하나님께 헌금으로 드려서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을 섬기겠노라.”무엇인가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주님이 쓰셨던 믿음의 모든 사람들, 이렇게 역사의 변곡점마다 주님이 만나주셨던 이 전환기에 서있는 놀라운 믿음의 사람들, 역사를 움직이는 지래점과 같았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뜻을 세운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안나를 생각해보십시오. 과부 된지 84년 동안을 기다렸습니다. 틀림없이 그는 아주 젊고 어린 나이에 홀로되었습니다. 수많은 유혹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조용히 인내하고 기다리며 성전을 떠나지 않고 오직 기도로 하나님을 섬기겠노라고 다짐한 사람이었습니다. 뜻을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을 통한 성령의 감화 앞에 여러분들이 아무 뜻도 세우지 않고 단지 듣기만한다면 그것은 말씀을 엔조이 하는 것이지 실재로 진정한 의미에서 그 말씀을 청종하는 삶이 아닙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고 성령은 여러분들에게 감화와 은혜를 주시고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 정직한 말씀의 은혜 앞에서 뜻을 세우는 것입니다. ‘아, 좋다.’가 아닙니다. ‘아, 그러면 이제 나는 저 말씀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할까?’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시므온을 보십시오. 이렇게 뜻을 세우고 일평생을 살더니 주님을 만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초점이 없는 삶이 아닙니까? 뜻이 있습니까? 세워졌습니까?
이 회개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삶을 성찰한다. 돌아본다.’ 그런 말을 쓰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정사에 대해서도 배웠죠. 그렇죠. 그런데 그런 정사, 자신의 삶을 꼼꼼히 살피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이 정직한 반성과 성찰, 이런 것들이 오늘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뜻을 세운사람들만이 그 성찰이 가능합니다. ‘아 이렇게 사는 것이 나의 삶의 목표였는데 아 이렇게 내가 못살았구나. 어떻게 해야 되는가?’
뭔가 세워놓은 뜻이 있어야지만 거기에 미쳤는지 미치지 못했는지 자신의 삶을 성찰할 것 아닙니까?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파도가 밀면 미는 대로 형편껏 그냥 살아간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뭐 성찰할 것이 있어야지 성찰을 하지.
누가 병원을 갔다 나오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 병원이 만족스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 병원 어때요? 여기 진료잘해요.?” 그러니까 “낫는 것도 없고 안 낫는 것도 없어요.” “무슨 소리입니까? 낫는 것도 없고 안 낫는 것도 없다. 약이 낫는 것도 같기도 하고 안 낫는 것 같기도 하다는 것인가? 그렇죠.
그냥 말씀이 주어지면 ‘아, 좋다. 그런 것이구나. 어, 그렇구나.’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뜻을 세운 적이 없으니까 삶을 막 살고 나서 성찰을 하려고 해도 어떻게 보면 하나님 뜻대로 하나도 안산 것 같은데 또 어떻게 보면 안 산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성찰할 것이 있어야죠. 그렇게 애매모호한 삶을 사니까 회개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고 하나님과의 풍부한 교제 속에서 살 때는 회개가 풍부합니다. 그 때는 내가 하나님 앞에 살아야하는 것들이 대게 또렷합니다.
'정직해야지.' 또렷하니까.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서는 하루를 성찰할 때에 그 거짓말하지 말고 정직하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푯대가 또렷하니까 거짓말 하는 것이 즉시 들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직에 대한 성찰이 금방 나옵니다. 새벽기도 빠지지 말고 나와야지 그러면서 뜻을 세웠습니다. 안나갔으니까 어떻습니까? ‘아, 못나갔구나. 아, 이 게으른 육신, 어떻게 할까?’ 그리고 반성이 되는 것입니다.
아침에 실컷 자고 나서 저 멀리 몇 번을 두들겨서 팽개쳐져 있는 자명종을 보면서 그러면서 왜냐면 끄다가 잘못하면 아예 침대에서 떨어져도 다시 올라가서 자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후회를 하는 것입니다. ‘왜 잤을까?’ 그리고 하나님 ‘내 힘과 결심 약하여...’ 그리고 회개합니다. 그러면서 성찰하지않습니까? 그러니 뭐 뜻을 세운 것이 없습니다. 새벽기도, ‘깨면 가지.’ 안 깼어요. ‘아, 안깼구나.’ 그것으로 끝입니다. 어떻게 하느냐고요? 뜻을 안 세웠는데 없는 것입니다. 죽은 생활입니다.
여러분 참 이것이 지나가는 이야기가 아니고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 살 때에는 뭘 자꾸 결심하고 싶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한번 의사표시를 해보세요. 그러면 아멘하고 안그러면 가만히 있어보세요. 자꾸 결심하고 싶어집니다.
주님의 서신 발 앞에
나꿇어 엎드렸으니
그 형상대로 빚으사
날 받으옵소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온전히 깨뜨려졌을 때에는 무엇인가 자꾸 결심하게 됩니다. ‘아.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믿어야 되겠다. 이렇게 기도해야 되겠다. 이렇게 선교해야 되겠다. 이렇게 싸워야 되겠구나. 이렇게 이겨야 되겠구나.’ 자꾸 결심이 생깁니다. 실패하는 사람들을 보면 더 결심을 하고 승리하는 사람들을 보면 더 강력한 결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꾸 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시키는 것입니다.
보세요. 우리가 이제 사랑에 깊이 빠지게 되면 자꾸 결심을 하게 됩니다. 뭐에 대해서 ‘아, 저 사람이 이런 것을 좋아하는구나. 내가 불편해도 이것을 해주어야지. 아 저 사람이 이것을 싫어하는구나. 내가 이것을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지.’ 이런 식으로 자꾸 뜻을 세우게 됩니다. 사랑이 식으면 막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을 막 싫어하고 힘들어합니다. “왜 싫어? 살려면 나한테 적응을 하고 살아. 싫으면 말고. 내버려둬 이대로 살거야.” 그러면서 계속 가는 것입니다. 부딪치면 말고, 그러면서 가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무슨 자기 성찰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당신 같이 사는 사람한테 뭔가 당신이 반성할 것 없습니까?”“아, 그 사람 적응력이 많이 떨어지죠. 수십 년이 지났는데 아직 나라는 인간을 잘 몰라요. 적응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자기 길대로 가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런 것입니다. 사랑하는데 어떻게 뜻을 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습과 우리가 주님 앞에 보여드리는 그 모습 사이에 이렇게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고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뜻을 세워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은 아픈 것입니다. 아주 아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냥 듣고 지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코미디입니까? 아니면 연속사극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뜻을 세워야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선포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어떻게 했습니까. 피를 뿌리면서 “아멘. 아멘.”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시니 우리는 피 흘리기 까지 주님의 그 말씀을 지키겠습니다.”하고 뜻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언약갱신’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시므온이 기다리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뵈올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무슨 뜻을 세우시렵니까? 이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께만 매여서 일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너무나 엄격한 의미에서는 그리스도께 매였다기 보다는 그리스도를 뵈올 소망에 매인 사람이었습니다.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그는 죽을 수도 없는 처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뜻을 세우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만나고 그분을 뵈옵기 위해 한없이 기다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무슨 뜻을 세우시렵니까? 그동안에 들었던 여러분의 마음에 감화를 끼쳤던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들이 만약에 그 말씀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뜻을 세우면서 그 말씀을 들었더라면 여러분들은 실패했던 그 많은 실패들을 인내로 극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고난이 두려워서 중도에 물러섰던 그런 뒤로 물러갔던 후퇴한 신앙생활들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보십시오. 바로 이 시므온이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산 사람이었습니다. 약속하나 붙들고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기다리며 일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로 들어가서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그의 삶이 어떠했을까 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그렇죠. 한 사람의 소망의 진실함의 여부는 그의 삶에 의해서 입증됩니다. 이 사람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뵈올 것이라고 하는 약속을 받은 후로 그분만을 앙망하면서 살았던 그 소망이 진실인 것은 오늘 이제 그의 삶에 의해서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첫째는 의롭고 경건한 삶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의롭다’라고 하는 것은 외면적인 그의 삶을 본 것이고 ‘경건하다’라고 하는 것은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그의 내면세계에 대한 지적입니다. 의로움과 경건, 의와 경건. 이 두 가지는 그래서 떨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외면적인 삶으로서의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율법의 요구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의 그 외면적인 모습을 가리켜서 성경은 의로운 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만날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결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뜻을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갈 결심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킬 수 있는 작은 말씀부터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고 할 때 깨닫지 못한 말씀은 아직 알지 못해서 지키지 못하거니와 이미 깨달은 말씀에 대해서는 그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마땅한 도리라고 굳게 믿으면서 매일매일 살아가는 실천적인 순종의 삶, 이것이 주님을 만날 뜻을 세운 사람들이 견지하여야할 삶인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강력한 소원을 품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순종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는 결코 아름다운 그의 소망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시므온은 바로 이렇게 의로운 생활,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에 부합하는 삶으로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 가진 자신의 소망이 진실함을 입증하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그저 ‘언젠가 예수님께서 오시겠지.’ 하며 막연히 기다린 삶이 아니라 오시지도 않은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며 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남편들이 돈을 벌러 중동으로 많이 갔습니다. 그렇게 하고 하여튼 할 수만 있으면 한국에 안 들여보내려고 일 년 동안 안가면 보너스를 더 주고 또 이년동안 안가면 더 주고 이런 식으로 해서 한국에 못 들어가게끔 많이 유도를 했습니다. 그것 몇 백 만원이라도 더 벌 욕심에 보고 싶은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을 억누르고 있다가 참다가 참다가 한 이년 삼년 지나서 한번 그 남편이 자기의 집으로 돌아온다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부인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을까요? 뭐 때가 되면 오겠지 하고 퍼 자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겠지요. 아마 비행기가 늦게 노착해서 심야의 공항에서 돌아온다고 할지라도 온 집안에 불을 환하게 켜놓을 것이며 며칠 전부터 집안을 청소하고 깊은 밤이지만 그 밤은 특별히 부인이 화장도 예쁘게 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가족들과 함께 남편이 오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주님을 정말 뵈옵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 사람이 준비하는 것 때문에 주님이 만나주시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러나 중심에 주님을 뵈옵기를 원하는 사람이 아무 준비 없이 주님을 만날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시므온도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뵈옵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소망이 진실한 것이기 위해서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게 비록 산을 옮길만한 기도의 능력이 없고 그리고 커다란 능력이 있는 믿음이 내게 없어도 다만 주님을 뵈올 그 약속을 간직하고 정말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서 새로워지기를 원하는 그 갈망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언젠가는 주님이 나를 만나주시리라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고 그분과의 만남을 간구하며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므온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삶을 가능하게 했던 그의 내적인 요인이 있었는데 그것은 경건이었습니다. 이 경건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그분에 대한 두려움의 복합체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면서 그분을 높이기를 원하는 그러한 마음입니다. 시므온은 바로 그러한 내면의 세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긴 세월 언제 오실지도 모르는 메시아를 눈으로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분명한 계시가 있었지만 언제오실지도 모르는 그 메시아를 마냥 기다리는 동안 아마 그는 외톨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정말 외톨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나는 이 신앙에 있어서 외로움이라는 것이 참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외로움. 진짜 영적으로 뭔가 변화 받을 때가 되면 아무것도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도 그리고 건강도 젊음도 그리고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들이 밉거나 싫은 것은 아닌데 그러나 ‘나 혼자 하나님 앞에서 건너 가야할 강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한 외로움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 미루지 않고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외로움은 신기하게도 하나님을 더 찾게 만들어줍니다. 그런 과정에서 시므온과 같이 이런 주님을 만날 야속을 가졌지만은 실재로 주님과의 만남이 언제 주어질지도 모르는 이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그 약속을 붙들고 계속 살아가게 하는 그런 놀라운 힘이 어디에서 나오느냐하면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경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을 눈으로 뵈옵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영적인 인격체이신 그분이 시므온에게 수시로 오셔서 그분만을 구하면서 사는 그를 위로하시고 그리고 그에게 확신을 주시고 그리고 그에게 끊임없이 말씀해 주시면서 그렇게 자신의 주님을 향한 기대를 계시의 기대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고 그분을 향한 두려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 시므온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갔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세 번째로 이 사람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에게 무슨 위로가 필요했을까요? 확실한 사실 하나는 시므온이 생존해 있던 이때에 이스라엘은 정말 위로가 필요한 시대에 살았습니다. 오래전에 나라는 잃어버렸고 그리고 실로 긴 세월동안 아마 600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 땅에 주인만 바뀌었지 계속 식민지 생활을 해왔습니다. 식민지 생활보다 더 비참한 완전히 그 나라에 복속된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해왔습니다. 나라의 주권은 잃어버렸고 왕도 세울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신앙의 본질적인 제도들도 수시로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정말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위로가 이스라엘에게 진정으로 필요하다고 믿었으니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시므온이 생각하기에 이스라엘의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그분이 오셔서 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그분을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과 그리고 육신적인 이스라엘은 무너졌지만 그리스도를 왕으로 하여 세울 영적 이스라엘의 왕국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씨앗에서 ( ? )되어 그래서 결국은 왕성하고 무엇으로도 흔들 수 없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나라가 되리라고 하는 이 복음의 전망이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는 가장 필요한 위로였고 또 이스라엘은 그런 위로를 필요로 했습니다.
시므온은 바로 그런 위로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기 전에는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그 약속을 받았을 때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까요? 이제는 그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셔서 고통 받고 상처 난 이스라엘의 위로해 주시고 그를 통해서 흔들리지 않은 영원한 왕국, 다윗이 그렇게 꿈꾸고 바라보았던 영적인 왕국이 건설되는 것, 그 왕국을 건설하실 그리스도 예수의 오심이 이스라엘에게 위로라고 굳게 믿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날 희망을 가지고 그 갈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에게만 그리스도 예수가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성전미문에 앉아서 기도하러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에게 무엇을 얻을까하여 손을 내밀던 그 거지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너무너무 주고 싶어 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그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주고 싶었던 것은 금도 아니었고 은도 아니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그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되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뵈올 약속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정한 위로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로마 나라가 망했다고 하는 소식을 듣는 것, 이것이 위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모두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만 그리스도 예수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핍절한 가운데 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 무엇이 그들을 다시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의 물질이나 평안한 환경일까요. 당분간은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결코 그것이 그들을 세워줄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우리의 삶의 근원이 되시고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십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들이 위로를 얻고 어두움 속에서 빛을 발견하고 절망 가운데 소망이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처럼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이 땅에 살아가는 내 백성들도 역시 그리스도 예수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 그것이 곧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기대하는 사람의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성령이 그 위에 계신 사람이었습니다. 자 성령이 그 위에 계신 사람, 어떤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성령을 보내셔서 그 위에 있게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희년을 선포하시면서 은혜의 해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사야서를 인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자기의 기뻐하는 자에게 성령주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을 열든지 신약을 열든지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께서 요단 강변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할 때에 하늘로부터 들렸던 그 음성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한없는 기쁨을 주는 사람들, 당신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사람 그 위에 성령을 보내어 머물게 하심으로 그를 향한 당신의 기쁨을 보여주십니다.
반대로 자기가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거두어 가시는 것이 성령의 은혜입니다. 고갈됩니다. 심령은 건조해집니다. 영적인 아무것도 느낄 수 없습니다. 신령함이 사라집니다. 영적인 분별력들이 사라지고 혼란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회하고 자기의 죄를 뉘우쳐 다시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사람들 위에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그래서 그 충만한 성령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인정해주신다는 사실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니까 이 시므온은 결국 이 묘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 때 그 이후뿐만 아니라 만나기 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산 그의 삶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기쁨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삶이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덧입고 싶어서 애를 쓰고 기도하면서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얘기치 못하게 불시에 충만한 성령의 은혜와 능력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이가 무엇일까요? 아무리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고 원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성령의 은혜를 갈구하고 갈망하는 그 과정전체를 통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변해가지 않으면 그 기도만으로 결코 그 풍성한 성령의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구하고 간구하는 가운데 그 기도가 그 사람을 바꾸고, 바꾸어진 그 사람 속에서 바뀐 기도가 흘러나와 기도와 그의 삶, 그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기쁨이 될 때 하나님이 그런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주시고 그리고 시므온이 그랬던 것처럼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뵈올 수 있도록 허락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엇을 위해서 부르시던지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선교의 역사를 다시 쓸 위대한 선교사로 여러분들이 부름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께 근심스러운 존재들로 되면 그렇게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헌신적인 여러분들의 삶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의 기쁨에다 두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 살아있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계획하는 그 일도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과 나 자신의 존재가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된 그런 삶, 그런 생활,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생활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커다란 일을 함으로서 인생의 가치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일만으로서 하나님을 감동시킨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을 하는 하나님이시니까 왜냐면 천지를 말씀한마디로 창조하셨는데 누가 일로서 그분을 감동시키실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해 놓은 일을 보면서 하나님이 “야. 너희들은 나도 못하는 일을 해놓았구나.” 그럴 일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야. 네가 나보다 낫다. 야. 이 어마어마한 일을 어떻게 해놓았느냐?” 그럴만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 꼭대기까지 탑을 쌓아도 하나님은 조금도 놀라시지 않습니다. 바벨탑을 허무신 것은 놀라서 허무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쌓는 동기 자체가 너무 악하니까 하나님이 허물어버리신 것입니다. 까짓것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입니다.
나 주님의 기쁩되기 원한데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하여 주사
주님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아무튼 저는 이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교회의 역사를 다시 썼다. 선교의 물줄기를 돌려놓았다.’ 수많은 사람이 박수를 쳐도 마지막 날에 주님이 “잘하였도다. 이제 네가 왔구나. 그렇지 않아도 네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나는 너무 마음 아프고 괴로웠다.” 우리의 인생이 있는 것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이 세상에서의 수많은 영광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슬퍼하시고 아파하셨는데 말이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지구 어느 한구석에 숨어있더라도 주님의 시선은 그 사람에게 향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꽃으로 꾸며 쓴 왕관을 머리에 쓰고 권좌에 오르는 왕들을 주목하고 이 사람에게 눈길한번 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꽃으로 왕관을 꾸며 쓴 그 사람을 하찮게 여기시고 이름 없이 초라한 일에 종사하는 그 사람을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를 통해서 당신이 하시고 싶으신 그 일을 당신의 마음을 그에게 주셔서 그를 통해서 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이런 소원을 가져야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저는 진짜 아주 솔직한 고백인데 내가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지를 깨닫고 생애적인 변화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살아야 되겠다고 했을 때 꿈꾸었던 인생이 이런 인생이 아닙니다. 무슨 인생을 꿈꾸었느냐? 무슨 엄청난 일을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슨 어떤 일의 규모나 그런 것이 아니라 일생동안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된다면 좀 오래살고 싶고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지 않는다면 내가 사라져서라도 하나님의 근심을 덜어드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들이 와서 목양을 받고 교회가 커지고 사역들이 막 늘어나고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요즘도 지금도 변함없이 내 마음에 가장 커다란 소원이 하나님의 기쁨인가. 주님의 기쁨인가? 정말 주님의 기쁨인가? 일과 사역, 이런 것들에 대한 관심은 많고 하나님 앞에 이 세상의 구속의 은혜를 입은 한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하는 내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있는가 하는 이 질문은 아주 사소하게 구석으로 밀려나버린 그런 것은 아닌가? 신앙의 참된 가치가 무엇일까?’
신앙의 참된 행복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과 그의 사랑의 고결함에 눈뜬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인생에 대해서 새롭게 가질 수 있는 생각이 무엇일까요? 인생 그 전체를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이 기쁨을 계속 드리기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좀더 살아야하고 하나님께 슬픔을 드리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또 더 살아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여태까지는 그렇게 살았어도 앞으로라도 좀 잘 살아서 담은 얼마동안만이라도 주님이 나를 구속하신 그 보람을 느끼실 수 있도록 그분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곤고하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는 크고 주님을 위해서 해드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해야합니다. ‘이제껏 까지 주님의 마음에 근심을 끼쳐드리고 주님을 욕되게 하고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배반으로 갚았던 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그래서 주님 앞에 배은망덕하게 살았던 날보다 더 많은 날 동안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고 주님의 마음에 근심을 끼쳐드렸던 날보다는 훨씬 더 많은 날을 나 같은 죄인을 구속하신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드리면서 주님께 기쁨을 드리면서 살 기회를 한번더 주십시오.’라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살아야합니다.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말 이것일세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그리스도를 믿는 이 기독교 신앙의 참된 가치는 행복과 세상에서의 영광이 아닙니다. 그것은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내가 여기 이렇게 살아서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 때문에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 때문에 주님은 기뻐하시고 우리는 나 때문에 기뻐하시는 주님을 보며 즐거워하고 그런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충만한 성령의 은혜 안에서 살게 하십니다.
주님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주님의 목표를 내 삶의 목표로 삼고 주님이 우리 안에 사시는 그런 삶이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우리의 삶에 계셨더라면 하실 그 일들을 해나가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면서 일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가 비록 초라한 소시민으로서 누구에게도 박수갈채를 받지 못하고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의 삶은 위대한 삶입니다. 왜냐하면 위대하신 하나님이 그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너무나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잃고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므온이 이런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에 올라왔을 때 이 시므온은 그 거룩한 아기 예수를 뵈옵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신령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의로운 생활 거룩한 경건을 소유한 사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을 뵈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터질 듯한 감격으로 그분을 송축하며 이제는 이 생명을 거두어도 좋습니다.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에게 매인 사람이 아닙니까?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사람이 아닙니까? 일평생동안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받은 것을 기억하며 살아가야할 우리의 삶도 이러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영혼을 살게 하는 고난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4:12)
이 설교는 몇주전 설교의 후편이 되겠습니다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앞부분을 잠시 설명을 드리자면 이런 것입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은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하려함이라는 이 사도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들이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을 배울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믿는 순간에 주님이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셔서 온갖 하늘의 신령한 복과 하나님 자녀답게 사는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서 이제는 공중권세잡은 자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 되었고 이제는 죄에 대해서 질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패배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죄를 이기고 시련을 극복하며 살아갈수 있는 놀라우 능력과 은혜들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신 축복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너무나 크고 놀랍기 때문에 우리는 자칫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축복들을 주시기 위해서 어떠한 희생을 치르셨는지에 대한 이해가 소홀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고난에 대한 생각은 이러한 은혜의 축복으로 들어오기 전에 잠시 거치는 출입문 정도로 생각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세계속에서 살고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는 구원 받았으니 이제는 항상 즐거운 것 밖에는 우리에게 없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만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다.라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도리를 잘 깨달았던 사도바울은 오히려 그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은 놀라운 이 신앙의 도리를 우리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예수 죽인 것을 자신의 몸에 짊어진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이루신 용서의 은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하면서 죄의식 속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단번에 이루신 구원을 기뻐하면서도 모든 은혜를 다 받아들이면서도 항상 잊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가 이런 놀라운 은혜를 받게된 것, 하나님과 원수된 존재인데 하나님께서 자기와 화평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셔서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이 은혜의 분복들이 그리스도의 철저한 희생에 기초하고 있으며 영원히 자기는 그 사랑에 빚진 자라고 하는 그 의식속에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당하셨고 그리고 그의 철저한 희생 그 위에 오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이 모든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다라고 하는 이 사실은 급기야 사도바울로 하여금 이제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면서 살아가는 삶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죄의식 속에서 몸부림치는,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를 확실하게 믿지만 내가 받은 은혜가 크고 놀라우면 놀라울수록 이 놀라운 은혜를 주기 위해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보면서 자신이 비록 하나님 앞에 의인이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자요. 이제는 성도의 모든 기업과 하늘의 거룩한 축복을 한몸에 받아 누리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러나 실상은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하다.라는 자기 인식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우울한 것을 질색으로 여기는 시대입니다. 뭔가 우울하고 따분한 것들을 아주 싫어합니다. 뭔가 마음 깊은 곳에서 생각들을 불러일으키고 그렇게 깊이 깨달아진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해아리고 참 진리와 거짓 사이에 자신의 신앙과 양심, 그리고 마음과 삶까지 올려놓고 자신을 달아보며 진리를 인해 기뻐하고 거짓을 인하여 괴로워하며 양심의 가책과 그리고 성령의 위로를 잘 해아리고 양자를 모두 경험하면서 참다운 신앙의 길을 찾아가는 구도자로서의 모습이 성경에서 그리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싫어합니다. 그저 즐겁고 유쾌하고 쾌활한 것을 좋아합니다. 감각적입니다. 노래부르기나 좋아하고 무엇인가 교회에 와서도 자기를 만족시킬수 있는 그런 즐거움, 소일거리들을 찾습니다. 이런 것들은 성경이 그려내는 구도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대부분 자신들의 상식과 편견에 기초하고 있고 따라서 그들은 부지런히 열심히 교회생활 하지만 그러나 참다운 영적생활의 기반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매우 부족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와의 인격적인 만남이 결핍되어 있는 것은 말할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이 고난에 대한 생각입니다. 아주 그냥 모든 것들, 다 제해버리고 다 껍데기를 하나씩 떼어내고 마지막에 핵심적인 복음을 이야기 하라고 하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네가 그리스도의 그 희생의 십자가로 그 죽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기까지 살아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그리고 이런 뼈대가 되는 진지한 삶에 대한 고뇌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기뻐질수 없습니다.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이 우상이 되었습니다. 먹는 것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도 온통 관심은 행복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복에 거침돌이 되면 가정도 깨뜨리고 교회도 깨뜨립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해야합니다. 무엇인가 자신을 불쾌하게 하고 무엇인가 자신을 자극해서 고통을 주는 것, 자기를 무엇인가 진리를 가지고 행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무엇인가 자신을 벗기고 자신의 모습과 실체를 들어내게 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보게하는 이런식의 일들은 누군가가 자기에게 함부로 할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이 우상이 되었고 자신이 모든 가치척도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런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를 안 사람들의 삶의 초점은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자기 중심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같이 아무 쓸모없는 죄인을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속하셔서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무엇을 위해서일까. 생각하고 그 뜻에 부합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가 행복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의 최고의 삶의 가치는 행복이 아닙니다. 행복이 아니라. 거룩입니다. 그는 성화의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그는 자신의 인격과 존재에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고 하나님의 성품을 물려받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그렇게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물려받는데 방해가 되는 악한 자신의 부패한 성품들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죽이고 그것을 제거하는 일을 위해서 헌신하는, 아픔 보다는 그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기쁨, 그리고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인정하심, 그런 변화된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광, 이런 것들에 대해서 더 큰 소망과 기대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어찌하든지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많이 벌어서 잘 먹고 그리고 돼지처럼 살다가 죽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을 안합니다.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그것만으로는 행복할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서 제왕처럼 사는 것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노예처럼 살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아무리 이 세상에서 즐겁고 기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수 없다면 그 기쁨은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신령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될 때에 그 구도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라보게 될 때에 그렇게 되면 무수한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죠. 저는 지금도 잊을수가 없습니다. 이제 깊이 영적으로 변화를 받고 결혼을 하던 그 무렵, 하고 나서도 한참인데 신학교 막 들어가고 다니고 뭐 그러던 즈음입니다. 그런 생활은 대학원 다닐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만 하나님의 참 특별한 은혜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교사생활도 하고 사역도 하니까. 기도제목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래서 쭉 적어가지고 갑니다. 오늘 새벽에 가서는 이런 기도를 해야지. 그리고 또 뭐 누가 가르쳐주었는데 기도도 계획성 있게 해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쭉 손꼽아서 했는데 그것은 내 계획이고 새벽기도 시간에 동네에 있는 교회에 가서 "하나님" 하고 하나님을 부르고 주님을 부르면 그저 다 생각나는 것이 뭐냐하면 전부 나의 못된 성품, 그 성질머리, 그리고 나쁜기질. 그리고 사랑 없음, 이런 것들이 생각나는 것이었습니다.
빨리 기도하고 학교가고 또 직장도 가고 그래야 되는데 그것과는 상관없이 기도가 계속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은혜는 큰데 나는 왜 이것밖에 못살까. 나를 미워할 수는 없는데 하여튼 너무나 원망스러웠습니다. 한 3분의 2이상은 그런 기도로 지냈니다.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동안에 농축해서 나머지 기도제목들을 막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 못하고 이제 출근 하면서 하기도 하고. 보세요. 거룩해 질려고 마음을 먹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려고 하면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인해서 그렇게 많이 아파합니다. 자기가 선택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늘 익숙하게 하던 것 한가지만 오늘부터 안할려고 마음을 먹어보세요. 그러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지 모릅니다. 그것이 인간인데 거룩해지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니고 단지 인생에 있어서 그저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적인 사람들에게는 그런 고뇌가 없습니다. 오늘도 돈 잘벌고 건강하고, 가족들 잘 지내고, 그리고 나 하고 싶은 것 하면 그러면 오늘은 행복한 날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런 종류의 고민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를 알고 주님 안에서 온전하게 되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보든지 그렇게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심지어는 실패를 통해서 나의 허물을 보게하시고 그리고 그것을 아파하게 하시고 남이 모르는 그런 고뇌와 아픔들이 있습니다. 그렇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정말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모두 이런 아픔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주님 앞에 설 때마다 늘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게하는 그 중요한 이유는 대부분 우리 자신의 부족입니다.
나는 한번도 내가 돈 없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해본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가난한데, 없는데 그것을 회개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돈 못벌어서 미안합니다. 용서해주세요. 그것은 집에 가서 부인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그렇게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부분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너무 죄송하고 마음 아픈 것은 우리의 부족 때문입니다. 그냥 고개를 쳐들고 "어, 나 이만하면 괜찮지." 그리고 살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나면 우리의 눈에 꺼풀이 벗어지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이 배풀어 주신 은혜는 크고 우리가 받은 변화는 너무나 작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주님의 은혜는 너무나 큰데 내가 하나님 앞에서 보여드릴수 있었던 변화는 너무 미미합니다. 그러니까 아픕니다.
더더군다나 자기의 변화되지 않은 성품, 자신의 변화되지 않은 이 성질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난 다음에는 후회가 더 뼈에 사무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도 시원치 않은데 저의 못된 성품, 변화되지 않은 저의 육신의 본성으로 인해서 주님의 영광을 가리고 지체들에게 누를 끼쳤습니다. 막 아픕니다. 그뿐입니까. 또 하나님 앞에 섯을 때 한없이 죄송스러운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주신 은혜는 참 큰데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이 없습니다. 뭐하고 살았습니까.
내 주 예수 주신은혜
한없건만 나 주위해
갚은 것은 참 적으니
주 예수여 너그럽게
보옵소서
어제가 스승의날 아닙니까. 그래서 이제 올해부터 나는 이래서는 안되겠다. 이제까지 그저 한두분께만 보냈는데 그러지말고 진짜 내가 깊이 나를 사랑해주고 그리고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들을 좀 찾아보아야 되겠다. 그래서 몇분께 편지도 정성껏 써서 그래서 선물하고 보내드렸습니다. 그래도 제가 많이 신세지고 저를 많이 사랑해주신 은사님 한분은 아직도 못찾았습니다. L.A에 계시다는 것 까지만 확인을 했는데 올해는 좀 찾아보아야 겠습니다. 존경하던 은사님 한분을 최근에 세미나에 갔다가 같이 강의 나오셔서 만나뵙고 같이 점심을 나누는데 그렇게 반가워하고 좋아하시는데 그렇게 눈물이 날수가 없었습니다.
신학교 들어갈 때 우리에게 신학이 무엇인지를 천천히 설명해 주시던 그 교수님이 이제 거의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지나가고 난 뒤에 이렇게 뵈니까. 이제는 말씀은 하시는데 음성을 잘 알아듣기가 힘겨울 정도로 그렇게 노쇠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무나 뵙고 싶어서 저희 교회에 오셔서 설교한번 해 주십시오. 그랬더니 안나가신데요. 너무 연로하시니까. 제가 그것을 보면서 그렇게 가슴속에 눈물이 날수없었습니다.
이유가 뭐냐하면 저렇게 빨리가는구나. 신학교 맨처음에 들어갈 때 아마 그 교수님이 50대였을 것입니다. 정정하시고 카랑카랑하시고. 그러시던 분이 이제 이만큼밖에 세월이 안흘렀는데 거기에서 뵈니까. 등도 꼬부라지시고 머리도 하얗게 세시고 수척하시고, 그리고 음성을 알아들을수 없게. "야, 저렇게 인생이 빨리 가는구나."
제가 몇주전에 중년의 연약함에 대해서 설교했죠. 나는 전도사 때 제일 싫어하는 목사님이 사우나 다니시는 목사님이었습니다. 내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은 월요일이면 사우나에 10시에 가셔서 3시에 오셔요. 그런데 천천히 이해가 가기 시작합니다. "아, 인간의 연약함." 그러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한 선생님하고 통화를 했는데 당신은 옛날 그대로인데 나이가 들으니까 강의하던 신학교에서도 그만하라고 하고, 뭐하던 대서도 이제 그만하라. 하고 역사의 의자에서 밀어내는 것입니다. 인생 살것이 없습니다. 20년전에 신학교의 문을 두드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순식간에 세월이 흐르는 것입니다. 한번만 더 그렇게 흐르면 내가 거의 그분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거의 그쪽으로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이 저 할아버지 언제나 그만두나. 그러는거죠. 어디 좋은 후임자 없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한 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저는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면 참 정말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 여러분과는 비교도되지 않을 특별한 은혜를 저는 받았습니다. 여러분 모두다 그렇게 말해도 괜찮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니까.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며”라는 이유가 뭐냐하면 한 남자를 놓고 두 여자가 사랑하면 질투 안할수 있습니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 하나님을 놓고 수십억의 인구가 서로 사랑해도 서로 질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사람, 한사람이 상대적인 사랑이 아니라. 절대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투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항상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 당신들은 보통으로 살아라. 나는 보통으로 살수 없다. 왜 내 주 예수 주신 은혜 한없기 때문에
특별한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특별하니까. 특별한 사랑을 받았으니까. 한없이 감사합니다. 너무 특별하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받고 주님의 한없는 은혜를 받은 것을 생각하면 살아온 삶,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이 너무 초라합니다. 그 사랑에 비하면 면목이 없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아프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데도 기쁜 것이 아니라. 아픕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할수록 아파옵니다. 주님이 어떻게 나를 어둠가운데서 건져 빛의 나라로 데려오셨는데 주님을 모르고 주님을 홰방하며 사상적으로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유혹하며 그렇게 교만하게 살아왔는데 주님이 그렇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믿은 이후로도 하나님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가슴시린 그런 감동으로 한걸음 한걸음을 동행하면서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는데 뭘 한 것이 있나. 생각하면 너무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삶의 목표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대로 물결이 치면 물결이 치는대로 정처없이 떠도는 나그네라고나 할까.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아픔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오늘 하루 잘 먹고 잘쉬면 그저 감사하다. 뭐 감사한데 감사를 비는 대상은 없죠. 그냥 좋다. 그렇게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놓은 것이 있는가. 정말 이렇게 살아온 긴 날중에 주님을 몰랐던 때에는 주님을 위해서 살았을리 더더욱 없고 주님을 믿은 이후로도 변화받기 전까지는 그렇게 산때가 별로 없을 것이고.
변화받은 이후에도 주님을 위해서 살았다고 그러는데 뭐 이것떼고 저것떼고 다 떼어보라 이거죠. 자기멋에 겨워서 신앙생활 한 것, 사람들에게 외식하기 위해서 섬긴 것, 잘못된 동기에서 봉사하고 희생한 것, 자기 즐거움에 취해서 봉사한 것, 경건이 뒷받침 되지 않아서 섬기노라고 하나님께 불명예를 안겨드린 것, 이런것들 다 빼고나면 뭐가남겠습니까.
옛날에 장호익 목사님 있었죠. 어느날 오후가 되었는데 가슴이 터져 죽을 것 같아요. 그래서 나하고 같이 바람이나 쐬자. 그리고 차를 타고 대공원에를 갔습니다. 저수지가 있는 뚝길을 걸으면서 내가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너무너무 괴로워 죽겠다." 이제는 벌써 중년의 연약함을 느끼는 상황이 되었는데 싸우나가 좋은 시기가 되었는데 나는 무엇을 한 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고 그리고 벌써 슬금슬금 연약함의 그림자들이 나를 잠식해 들어오는 것이 느껴지는데 내가 이렇게 살다가 하나님을 만나겠느냐. 그리고 너무 괴로워하니까. 이사람이 옆에서 한숨을 더쉬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교회라도 개척을 해놨지. 자기는 뭐냐고. 그래서 둘이 같이 한숨을 쉬는데 그 관리인이 호르라기를 막 불면서 빨리 내려가라고. 그래서 쫓겨났습니다. 더 서글펐습니다. 이것도 좀 걷겠다는데 그것도 못 걷게 호르라기를 불면서 소리소리 지르면서. 너무너무 마음이 아파요. 이것이 어디 나만의 고백이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의 고백아닙니까. 주님의 사랑은 큰대 살아가는 삶은 너무 악합니다. 주님의 명예를 높여드리고 영광을 돌려드리기는커녕 손해만 안나게 했으면 참 좋겠는데 그런데 가는 곳마다 실패,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하고 그리고 심지어는 내가 섬기는 지체들의 마음에 고통을 줍니다. 어떤 때는 정말, 정말 내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이 바퀴벌레 한 마리 보다 좀 나을까. 사실 바퀴벌레가 사람의 눈에 띄지만 않으면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것이 뭐가있습니까. 눈에 띄어서 기분나빠서 그렇지. 그렇게 괴롭습니다.
이것이 나만의 고백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주님 섬기면서 살아갈려는 사람들은 모두 느끼는 고뇌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그는 예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고민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보다 천배나 불쌍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썩을 이 몸과 우리가 존귀하게 영광을 돌려드려야할 하나님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을수 있으며 부패한 본성을 인해서 살아가는 이 숙명적인 실패의 삶과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름을 받은 소명 사이에서 괴로워 하지 않을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가슴아파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산 사람이 아닙니다.
뭐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우울하냐고.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 그러는데 뭘좀 알고 이야기를 해야지. 누가 인터넷에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다 죽으시고 우리에게 놀라운 구원과 기쁨을 주셨는데 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종입니까“ 절 빗대고 하는 말입니다. 책마다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썼으니까. 하나님의 아들인데 왜 노예냐. 확 지워버렸습니다. 짜증이 나서 대답하기도 싫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에게 가서 물어봐야지 바울이 자기 편지마다 자기는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쓸라고 하다가 그것도 쓰기가 싫어서 확 지워버렸습니다. 내가 좀처럼 안지우는데 짜증이 나서 확 지워버렸습니다. 그것이 없는 사람들은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것을 진심으로 느껴본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괴롭고 힘든지 여러분 알죠. 그렇죠. 그런 것을 깊이 아는데 그것이 얼마나 괴롭게 힘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괴롭고 아파하면서 낙담하고 쓰러지지 아니하고 그것을 자신 안에서 생명으로 바꾸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하면 자기가 변화되지 못한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동안에 고뇌하고 아파하는 그것이 많이 아픈데 자기가 아플때마다 항상 무엇을 생각하면서 새힘을 얻느냐하면 예수님의 고난, 그것이 우리에게 새힘을 주는 것입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고통스러운 생활인데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자신의 육신의 나태하고 안일한 삶과 타협하려고 하는 자신의 불신앙의 본성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 죽인 것을 자신의 몸에 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섬기면서 살아가는 삶이 너무 힘듭니다. 모두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지만 나는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살아요.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요. 그것이 너무 힘이들어요. 그 때에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위해서 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분을 닮아가고 그분이 하신 희생을 생각하면서 그분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삶에 새힘을 얻습니다. 이렇게 될 때에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생명이 살아있습니다. 변화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인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고뇌하고 기로워하며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그분의 성품에 대해서 말할 때, 그분이 자신에게 행하신 위대한 변화에 대해서 간증할 때, 놀라운 생명의 힘이 있습니다. 그는 변호자로서가 아니라 증인으로서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단지 본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경험한 사람으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역자로서 섬기는 일군으로서 고뇌하며 하나님 앞에 아파하는 그 사람들에게는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이신지를 모릅니다. 섬기고 또 고난을 받고 시련을 당하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지 못하게 하는 환경과 더불어 싸우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그런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생명으로 나타나게 하라." 그런데 이어서 사도가 오늘 읽은 이 본문속에서 고백하는 것이 뭐냐하면 "사망은 우리 안에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 역사한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앞에서 이야기 한 것과 정반대입니다. 자기에게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 예수 죽인 것을 날마다 짊어지고 사니까 예수의 생명이 나타난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하면 "사망은 자신들속에 역사하고 생명는 너희들속에 역사한다." 그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앞절에 나오는 생명과 뒷절에 나오는 사망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어느 각도에서 보았는냐.
즉 이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섬기기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면서 살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면서 이 사람이 막 고뇌하고 괴로워하죠. 그럴 때에 그것을 통해서 주님과 더 가까워지고 하나님과의 친교속에서 살아가는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생명인데 반대의 측면은 그런 생명이 우리 안에 역사하고 나타나기까지 당해야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진지한 고뇌와 고통. 앞에서 말한 것을 그대로 끌어와서 예를 들자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부족을 알고 "주님이 주신 은혜에 비하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은 턱없는 삶이다."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괴로워하고 막 아파하고 가슴아파하고 한참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몸부림치고 나면 하늘로부터 뭐가 있어요. 위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내가 한없이 부족하지만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하나님과의 친교가 느껴집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느껴지기 전까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인해서 한없이 괴로워 하고 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망입니다.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데 주님이 주신 은혜는 큰데 섬긴 것은 너무나 없습니다. 그래서 괴로워하고 마음 아파하는 그것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 밖에 의지할분이 없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그래 너는 부족한 것이 많지만 그러나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이것은 생명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사망이 앞에서 이야기하는 생명입니다. 다른 각도에서 본것입니다. 그래 사도바울이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면 특별히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진다."라고 말할 때에 결국 이 문맥을 보면 그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진 고난은 어디에서 구현되고 있었느냐하면 영혼을 섬기는데 있어서 구현되고 있었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가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든지 그 은사와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그의 심령에 강하게 역사할 때 그는 영혼을 섬기지 않고는 배길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물론 그 사람이 모두 목사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설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모두 주일학고 교사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모두 청년들을 가르치는 구역장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복음 전도자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여튼 무엇인가 영혼을 위해서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강한 하나님의 강제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뭔가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자신도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강제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다른 방면에 있어서 신앙생활을 반듯하게 잘한다고 할지라도 영혼에 대한 연민을 느껴보지 못했다면 여러분들의 변화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나면 즉시 그 사랑으로 인한 기쁨가운데 밀려오는 것이 뭐냐하면 이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입니다. 내 아내가 이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는데, 우리 남편이 내가 아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그리고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모두 주님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막 스쳐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하지 않고는 배길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보세요. 이 십자가의 사랑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혼들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동안에 사도바울이 경험한 것은 뭐냐하면 사망입니다. 사망은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실감이 안나죠. 죽음이 무엇인지. 죽어 보신분? 아무도 없죠. 한번 우리모두 죽어보지는 않았지만 죽음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 초등학교 때는 저는 월곡동에 살았는데 뭐가 많았느냐면 유괴범들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유괴범이 노리는 초등학생들이나 유치원 아이들, 그 때는 유치원도 별로 없었지만 초등학교 저학년들이 대게 타겠이었는데 어떤 학생들이 유괴범들의 표적이었느냐하면 뚱뚱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뚱뚱하다는 것은 부자집이라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뚱뚱한 애들은 없었습니다. 그 때는 아이들에게도 이 뚱뚱한 것이 거의 흉이 아니었습니다.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뚱뚱하기 때문에 왕따를 당한다든지 그런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기세에 눌리는 일은 종종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어렸을 때도 저희 할머니 매일 드러누워있으면 저의 배를 만지면서 "너는 언제나 사장배가 되냐" 매일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목욕탕집 아이였습니다. 동네에서는 꽤 잘사는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실종이 되었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는데 아무튼 목욕탕 앞에 사람들이 새카맣게 모였습니다. 경찰들이 오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보니까. 그 아이를 유괴해 갔던 범인은 잡히고 그 아이는 살아서 돌아왔는데 지금도 수십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무슨 끈으로 동였는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선명하게 죽일려고 목을 조른 흔적이 있었습니다. 아주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이 아이는 완전히 파랗게 질리고 파랗게 질리다 못해 얼굴이 새카맣게 되다시피 하면서 땀을 뻘뻘흘리면고 울면서 겁에질린 얼굴로 오고 그러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한번은 그 아이의 입장을 생각했습니다. 평화롭게 공부를 마치고 공장들이 늘어서 있는 그 길을 걸어서 자기네 집으로 가는데 어떤 사람이 그를 납치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 아이를 죽이려고 그리고 밧줄을 목에다가 매고 발로 목을 밟으면서 그것을 막 잡아당겼습니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없습니다. 소리를 지를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불과 몇분 사이에 자신은 죽음을 눈앞에 두게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 가족들도 모두 끝입니다. 아무도 도울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숨을 조여옵니다. 의식이 몽롱해지기 시작하는 것, 그것이 죽음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런 것,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죽을 것 같은 느낌이 아니라. 실재로 자신의 생명을 끊어질것 같은 고통을 자기에게 압박처럼 가해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경험한 것입니다. 무엇을 보면서? 섬기는 영혼들을 보면서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보면서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사랑이 여기 있는데 저들이 도저히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고 하지를 않아요. 죄인이 피할수 있는 단 하나의 피할수 있는 길을 주셨는데 그 길로 돌아오려고 하지를 않아요. 힘을 다해 외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모습으로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의 모습으로 그렇게 몸부림 치면서 자기를 소진하며 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이외에 구원의 길이 없다고 전하지만 사람들이 그 말을 받아들이려고 하지를 않아요.
그 때에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 사랑을 거절하고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는 영혼들 사이에서 몸이 찢어지는 것 같은 그런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바울이 편지를 쓴 교회들 가운데 특별히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도시의 정신에 침투당한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도시는 항구였습니다. 이기심, 그다음에 자신의 주위 주장을 따라서 편을 가르고 파당을 일삼는 논쟁의정신, 도덕적인 타락, 물질사랑, 그리고 우상숭배, 이런 것들로 뒤범벅이 된 교회였습니다.
그들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예전에 형편없는 불신자들이었는데 그래도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근심시켜 드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질서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복음의 뜻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는 교만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사도가 정말 사도일까? 심지어는 사도바울의 가르침이 싫으니까. 사도바울의 이 사도직까지 의심하면서 불신앙의 길을 가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사랑했고 자기를 다 허비하고 싶을 정도까지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전하지도 않고 알지도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충성되게 섬겼고, 매도 수없이 맞고, 감옥에 갇히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영혼들을 위해서 살았는데 영혼들이 돌이키지 않고 냉담합니다. 그 사이에서 어떻게 합니까. 무엇이든지 다 주어서라도 저 영혼들을 변화되게 하고 싶은데 내 힘으로서는 도저히 안되는 그 때에 저들이 마땅히 되기를 원하는 성도의 모습과 지금 그 성도의 모습과는 거리가먼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모습, 그 사이에서 그들을 위해 섬기도록 부름받은 섬기는 사람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막 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사가, 구역장이, 전도사가, 목사가 하루에 단 한번씩이라도 자신이 섬기고 있는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수 없다면 그는 누군가가 그 사람을 위해서 울어,주어야할 정도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내게 맡겨주신 영혼들, 그 영혼들의 비뚜러진 신앙, 돌아어지 않는 패역한 믿음생활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아파하지 않는다고 할것,같으면 그것은 자신속에 주님의 생명이 과연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것을 보면서 괴로워했습니다. 그것이 곧 사망의 경험이었습니다. 죽을 것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자기가 죽어서 이 사람들이 주님을 알수 있다면 자기가 십자가에 못박혀 이 영혼들이 구원을 얻을수 있다면 좋다. 그랫습니다. "골육지친중 몇이라도 구원 얻을수 있다면 자기는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저주를 받아서 끊어질지라도 나는 진심으로 원하는 바로라." 그랬습니다. 이것이 사망의 경험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을 안 사람,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사망의 경험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것이 있습니까. 이런 것이 있는 사람들은 아주 분명한 기도제목이 있겠죠. "네 기도제목이 뭐냐?" "단 하루를 살아도 주님 닮은 사람으로 살고싶습니다. 내 인생의 날들이 얼마 남지 않아도 내가 정말 많은 재물을 누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는 영광의 삶이 나를 기다리지 않아도, 내 생애에 단 한번 만이라도 주님을 주님답게 섬기고 내가 주님의 그 십자가로 구원의 은혜를 얻었으니 내가 정말 주님의 노예답게 단 하루라도 살수있다면 내가 정말 원하는 바입니다." 그런고백. 그것이 정말 필요합니다.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것이 죽음의 경험입니다. 이 죽음을 경험한 사람, 이런 죽음의 경험속에서 생명은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보니까 재미있는 것은 뭐냐하면 자신들이 그렇게 죽으니까. 영혼들은 산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원리는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보면은 하나님 안믿고 거스르면서 사는 사람이 죄인이고 가족 중에서 하나님 신실하게 믿으면서 사는 사람이 올바른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원리에서 보면 은혜 많이 받은 사람이 죄인입니다. "내가 은혜를 많이 받았고 가족들이 은혜 못받았으니 내가 죄인이다. 그래서 사망은 내 안에서 역사하고 내가 가족들을 위해서 깊이 죽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저주를 받아 끈어질지라도를 의미하는 아나데마의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고 내가 죽음으로 저 영혼들에게 유익을 주시기를 원합니다."라는 진실한 신앙의 고백속에서 자기를 죽일 때, 그 때에 가족들이 사는 것입니다. 정말그렀습니다.
자존심 강한 교사, 그 목회가 될 리가 없습니다. 대접받기를 원하는 구역장, 그 구역이 될 리가 없습니다. 대접이나 받으려고 하고 하는 목회자가 있는 교회는 영혼들에게 유익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영혼을 위해서 섬기는 사람들이 죽을 때에 그 때에 섬김을 받는 영혼들이 살아납니다. 이 원리입니다.
5월이 되면은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인해서 가슴아파하는 지체들이 늘 눈에 밟힙니다. 그래서 5월27일에 하는것도 그것입니다. 진짜 제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제가 교인수 불리기 위해서 하는 것 아닙니다. 저것 안해도 열심히 기도하면서 전도하면 올사람들은 옵니다. 그런데 너무너무 힘듬니다. 왜냐하면 내가 죽음으로서 결국 가족들이 구원받는다고 하는 진리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받기 전에 식구들과 대들고 싸우던 사람들, 그 성질 그대로 가지고는 절대로 가족들이 예수 안믿습니다. 절대로 안믿습니다. 더더군다나 가끔이라도 “네가 그렇게 믿는데 내가 왜 교회에 나가냐.”이런 소리를 듣는 그리스도인들은 누가 잘했든 잘못했던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은혜받은 사람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주님이 은혜를 많이 주셨지않습니까. 많이 주셨잖아요.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함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많이 주신 것은 주님을 위한 고난을 많이 경험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의 특별한 보호와 사랑을 많이 배풂을 받은 것은 주를 위해서 많이 손해보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내가 죽음으로 가족들이 돌아옵니다. 정말입니다.
내가 죽음으로서 우리 반 아이들이 살고, 내가 고난을 당하고 죽는다는 정신을 가짐으로서 구역의 식구들이 삽니다. 멀리 떠났던 영혼들이 다시 돌아오고 그리고 주저앉았던 영혼들이 다시 일어납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사망이 내 안에 역사하는 경험을 통해서 교회가 살고 지체들이 사는 것입니다. 영혼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그들이 변화되지 않은 이유를 모두 그들에게서만 찾고 자신에게서는 도저히 찾아보려고 하지 않는 그 사람들 속에 정말 죽음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누구나 죽기 싫어합니다. 변화되지 않은 영혼을 보면서 “저것은 심장에 철판깔아서 저래” "저것은 어디 가도 변화되나 봐라." 사도바울을 만나도 변화안될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는 나는 할 일이 없습니다. ”저 인간만 부서지면 해결이 되는데” 그러나 저 영혼이 변화되지 않은 것은 결국은 내가 저영혼을 위해서 내가 더 많이 죽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아파하면서 죽기까지 섬기신 그리스도 예수의 본을 보면서 자기를 볼때에 그 때에 하나님께서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교사는 십자가에 매달린 교사입니다. 죽은 교사입니다. 산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린 선생. 십자가에 매달린 구역장, 십자가에 매달린 목사. 나는 죽고 주님은 사신 구역장, 나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예수는 내 안에 역사하고 있는 일군들,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영혼들이 살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설 때에 주님께서 상주시지 않을수 없는 고귀한 날들이 무엇일까요?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행한일에 대해서 박수를 치고 흥분해 하는,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많은 업적과 성취가 아닐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서있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보상해 주시지 않을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게 자기는 죽고 자기가 죽음으로 영혼을 살렸던 그런 발자취들, 누구도 인정해주는이 없이 캄캄한 교회당 한구석에서 부서지지 않은 자기를 부둥켜안고 아파하고 그것 때문에 영혼에 유익을 받지못하는 불쌍한 지체들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자기를 못박는 기도로 아버지 앞에 나아갔던 사람들, 누구에게 그것을 자랑할수 있겠습니까. 나는 죽고 주님은 살기 원했던 그리스도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섬김은 주님이 보상해 주시지 않을수 없는 섬김이 될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참된 목자,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 그리고 정직한 영혼을 섬기는 봉사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이런 것을 간직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내가 죽음으로 영혼이 살것이다."라는 그 믿음을 가지고 영혼들만 살수 있다면 자기는 죽음에 내어줌을 당해서 기뻐하는 사람들, 날마다 자기가 죽음으로 영혼들이 사는 것을 보면서 죽음을 경험한 아픔대신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대해서 찬양과 영광을 돌릴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정말 상받을 사람들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나 아니면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은 지체들의 얼굴 하나 하나를 떠올리며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의 영혼의 변화를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들이 변화되지 않은 영혼의 상태를 인해서 아파하는 사망의 경험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기가 그렇게 죽음으로 영혼이 살수있다면 그 길을 짐심으로 사랑하고 택해서 자신의 끊임없는 죽음을 통해서 영혼들이 끝없이 살아나는 소생의 역사를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는 교회는 얼마나 복받은 교회일까요. 초막이나 궁궐이나 거기가 바로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될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면서 날마다 날마다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서 죽는 그런 사람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러한 삶이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지는 삶입니다. 예수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진다는 것은 단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보면서 삶이 없는 감상의 눈물을 흘리는 값싼 은혜의 경험을 가르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가 역사하여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지고 이번에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못박혀 죽으신 그 사랑을 내가 받았으니 이번에는 주님을 알지못하고 알아도 주님 앞에서 변화되지 않은 지체들을 보면서 내가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의 고통을 느끼는 내가 죽고 영혼들이 사는 것이 사능하다면 기꺼이 그 길을 택하겠노라고 결심하는 그 믿음. 그것이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는 믿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살아온 날을 아무렇게나 살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도 없이 내키는대로 살고, 또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불순종하면서 살아온 온전하지 못한 날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제는 남은 날들이 얼마 없습니다. 언제 주님이 우리를 거두시든지 거두시는 그날까지 나는 죽고 영혼은 살고, 그래서 내 안에 예수의 생명이 역사하고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하는 이 일만 보다가 죽어도 우리의 지나온 헛된 날들이 너무나 서럽습니다.
이제는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온 마음을 하나님께 모으고 예수께서 오로지 우리의 죄를 구속하셔서 하나님께 이르는 구원을 여시기 위해서 그일 하나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외길을 걸어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처럼 우리도 또한 우리가 죽음으로 섬기는 영혼들에게 생명나타나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의 그 계획을 보면서 우리는 죽고 우리는 사망을 경험하고 섬기는 영혼들에게는 생명과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서 역설적으로 우리도 그 생명에 참여하는 이런 복된 역사를 보면서 살라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들이 그렇게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6.과거를 잊지 않는 소명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전15:9)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의 장이라고 불리우는 성경입니다. 여기에서 부활에관한 교리를 영광스럽게 설파하고 있고 그리고 이 부활의 교리를 이야기 하기에 앞서서 사도바울이 자기의 개인적인 소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가 쓰여질 당시 고리도 교회는 비록 바울에 의해서 세워졌지만 이 편지를 받을때쯤 교회가 많은 문제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는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권위있는 가르침으로 받아들려고 하지 않은 그러한 태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가 12사도도 아닌데 그가 정말 권위있는 사도냐? 그의 사도직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이론을 제기하며 사도바울의 말을 거절했으나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기 위한 한 수단으로서 그리 했던 것을 우리는 짐작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고린도전서에서 어느 서신서에서 보다도 자기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부름받은 사도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와같은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서신서에서 그러하듯이 확신에 넘치는 필치로서 자신을 부르신 분이 그리스도이고 그리고 자신은 그 복음을 전하도록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위탁된 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전해주신 것이요. 그들이 또한 들어야할 마땅한 복음이라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했으니 이것은 자신에 대한 구차한 변명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린도 교회에 가르치실려고 했던 그 모든 신앙적인 교훈이 이 사도바울이 사도라고 하는 그 사도직을 토대로 해서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입증하는 것은 곧 복음을 입증하는 것에 대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소명이라고 말할 때에 그것은 무엇인가 아주 분명하게 자기가 해야할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강력하게 느끼고 그것을 도저히 포기할수 없고 그 기원자체가 인간의 열심히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을 가르쳐서 우리들은 부르심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마음을 가르쳐서 소명감이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따라서 이 소명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소명이 아니라. 자신의 전생애를 들여서 복음과 그리스도께서 맡겨주신 영혼들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전도자 내지는 선교사, 내지는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부르심이 아니라. 자기가 알아서 사는 것이냐.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주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거역할수 없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도록 부르심을 느끼는 그 일, 순간의 감정이나 순간의 느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자신의 가슴속에 다가와서 그 일을 하는 것이 곧 자신의 본분이고 그 일을 할 때에 자신이 기쁨을 느낄수 있으며 그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다.라고는 말할수 없으나 가장 보람되다.고 말할수 있는 그런 것, 그렇게 느끼면 모두다 소명감입니다.
그런데 이 소명감을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 할 때 단순히 하나님이 자기를 강력하게 부르시는 그 부르심만 있으면 그것이 곧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소위 이야기 하는 목회자로서 소명을 받았다는 사람들에게 늘 권고하는 말이 있습니다. “소명을 시험해보라. 소명감을 느꼈다고 즉시 무엇을 하지 말고 소명을 시험해보라.”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즉시 순종해야지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때리신다.”고 그러는데 불순종을 하는 것과 시험을 하는 것은 다릅니다. 불순종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소명을 하셨는데 자기의 안일과 편안함을 위해서 그 길을 안가겠다고 하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그러나 시험에 보는 것은 다릅니다. 그것은 자신을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 느끼는 그 부르심이 혹시 나만의 느낌일지도 모르고 그래서 내가 섣불리 하나님이 소명하신 그 일에 뛰어들었다가 하나님께 손해를 끼쳐드리면 어떡할까? 하는 충정에서 우러나오는 시험입니다. 10월달에 은혜받고 12월달에 신학교 가는 것은 신뢰할수 없습니다. 그렇죠. 소명감을 대학 2차시험 발표난 후에 느끼고 3차로 신학교 가는 것은 우리들이 신뢰할수 없습니다. 소명감이라고 하는 것은 시험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할수만 있으면 목회자가 되기 위한 신학교는 특히 신학대학원 같은 경우에는 세례 받은후 한 7년쯤 정했으면 좋겠어요. 그 안에는 입학을 받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신학교에 있을 때도 보면 4월에 은혜받고 4월은 무슨 4월이에요. 여름 수련회에 은혜받고 그다음 겨울에 시험봐서 신학교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밀려 닥치면은 신앙이 아예없는 것으로 들어납니다. 술먹고, 패싸움하고 경찰서 잡혀가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되고 시험을 해보아야합니다.
그리고 그 시험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더잘 시험될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이 소명을 받았는지를 느낄수 없다면 그 소명은 대부분이 거짓입니다. 소명을 받았다면 복음사역자로서 특별히 선교사로서, 목회자로서 소명을 받았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아주 명확히 느낄수 있습니다. 그런 검증의 시간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검증이 되었다고 하더라고 우리들이 흔히 소명감을 확인해서 “나는 부름받은 것이 확실하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사람들이 그 판단하는 기준이 대게 무엇일까요.? 아마 대부분이 열심히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열심일 것입니다. 교회에 착실히 나와서 열심히 봉사하고 그래서 어때요. 좀 젊은 청년이라도 좀 열심히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 하면 예외없이 자칭 기도꾀나 한다는 사람들이 불러서 “당신 신학교 가야되겠다. 내가 기도해보니까. 신학교 가라. 그러더라.” 아니 신학교에 자기가 기도하고 가는 것이지 왜 남이 기도해보고 가라그래요.
그러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도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냥 신앙생활 조금만 열심히 해도 그것이 겨우 정상적인 생활인데 정상이 특별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신학교 가라고 무조건 그러는 것입니다. 제발 좀 그러지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가고 싶으면 본인이나 가세요. 남이 가라고 말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엉뚱하게 해서 들어오는 사람이 수없이 많은데 그들이 실패하면 가라 그런 사람도 어느정도는 책임을 져야합니다. 가라. 그래놓고 등록금을 대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그렇죠. 어쨌든지간에 그런 외형적인 모습을 보면서 느낀다는 것입니다.
물론 소명의 심장부에는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 “그들을 복음으로 전도해야 되겠다.”라는 사명감, 그런 것들이 핵심에 있습니다. 중심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소명감은 그것 이상의 또하나 무엇이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간과되고 있는 소명감에 또다른 요소에 대해서 오늘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영혼에 대한 불붙는 사랑, “그 영혼을 구원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열심,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야되겠다.”라고 하는 그러한 헌신된 동기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그 이외에 또 무엇이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그렇게 영혼을 위해서 헌신되고 영혼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되겠다.라고 하는 간절한 열심, 그리고 그 영혼들을 전도하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섬기는 것, 이외에 자신에게 참 흥미있는 일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소위 소명받은 사람들이 많은데 실재로 많은 영혼들이 많은 돌봄을 받는 그 현장은 정말 그 사람의 소명에 대해서 별로 말해주지 않은 것 같은 아주 악하고 척박한 그러한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이런 시대에서 흔히 간과되기 쉬운 또하나의 소명의 측면은 이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그러면 그 오늘날 간과되고 있는 또 하나의 체험이 무엇이냐. 그것은 예수죽인 것을 짊어지는 체험입니다. 사도바울이 여기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나는 사도다.” 사도라는 사실을 강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하면 사도들과 비교되기를 마다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도들이 있다. 그런데 그 사도들 중에 역시 나도 사도이나. 그 사도들중에 나는 가장 작은자이다. 그리고 내가 교회를 핍박하였기 때문에 내가 사도라 칭함을 받음이 전혀 합당하지 않다.”
사도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미 끝났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아침에도 인터넷을 보고 전화를 했는데 예수를 믿고나서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 그랬는데 죄에대한 보응은 어떻게 되느냐.? 그랬는데 보응은 무슨 보응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함은 받은 사람들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아니 이 사람은 자기가 이신칭의의 교리를 이야기놓고 왜 이제와서 또 다른 소리를 하는지 몰라요. 아니 교회를 핍박했으면 어때요. 주님이 다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어서 용서해 주셨는데 그리고 또 이렇게 교회를 핍박한 것에 대해서 그것이 아직까지 문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할수없지 않습니까. 옛날에 이루어진 일인데 어떻게 하느냐고요. 돌려놓을수도 없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또 모르고 한 일인데 그 때 예수님 믿었으면 안그랬지. 그렇지 않습니까. 왜 쓸데없이 이 얘기를 하고 있느냐고요. 교회를 핍박한 죄, 예수님이 용서해 주셨어요? 안 용서해 주셨어요? 교회를 핍박한 죄를, 사도바울이 교회를 핍박하지 않았습니까. 좀 악날하게 핍박하지 않았습니까. 그 죄를 예수님이 용서하셨어요? 안하셨어요.? 용서하셨어요. 우리는 흔히 설교중에 옛날에 무슨 부흥회 같은 것 하다가 보면 그런 비유를 많이 들었지 않습니까. 죄를 많이 가지고 와서 다 꺼내놓고 용서해달라고 울고불고 회개하고는 그리고 다시 그 보따리를 짊어지고 간다. 뭐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그런 논리에서 보면 이 사도바울은 아주 쓸모없는 일을 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렇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아니 소명에 살고 비젼에 죽어도 지금 될까말까인데 이미 다 끝난일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에 주님을 몰라서 바리세인일 때 교회가 이단일줄 알고 교회를 핍박했는데 뭐 계속한것도 아니지않습니까. 그러다가 다메섹 가는 길에서 주님 만나서 다 회개하고 그리고 이제는 일평생을 주님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서 전도하며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뭘 그것을, 교회를 핍박한 것을 또 이야기 하느냐고요.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도 아닌데 뭘 그것을 또 이야기하느냐고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뭐냐하면 여러분들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뭐 죄에 대해서 조금만 이야기하면 율법적이다. 자기네들이 조금만 힘들기만 하면 무조건 율법적이래요. 그저 편하고 좋고 그저 듣기좋은 소리는 모두 복음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를 안하니까 그것이 문제지. 우리가 이런 논리를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습니까. 아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지 않았을 때 자기가 행했던 모든 것에 대해서 완전히 깡그리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때는 주님 몰랐을 때니까. 다 잘라버립니다. 그것은 좀 낫습니다. 한것음 더 나아가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의 과거의 죄나 우리의 회개하는 죄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아닙니다. 그렇죠. 현재, 과거, 미래 이런 것이 우리한태나 의미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한번에 다 내려다 보시는데 그분에게 영원히 현재도 없고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다 보이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끝나고 나면 누가 전철을 타고가고, 누가 승용차를 차플로 타고가고, 누가 택시타고 가고, 누가 걸어갈지 예수님께서는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누가 열린 공간에서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갈지. 그것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현재와 과거와 미래와 상관없이 한번에 내려다 보시는 것이기 때문에 속죄도 역시 인간적인 시각에서 시간의 순서를 가지고 과거의 죄냐, 현재의 죄냐, 미래의 죄냐. 이렇게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고보면 무슨 논리가 생기느냐하면 예수 믿고 지은죄도 주님이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짓고 있느죄, 한걸음 더 나아가서 앞으로 내가 지을죄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이신칭의의 교리를 잘못 이해한 나머지 이제 “신자는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면 오늘 이 사도바울의 고백을 보면서도 지지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사람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다 용서해 주셨는데 우리보다도 믿음이 없는거죠. 과거에 대해서 심지어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바리세인이었을 때에 예수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한 것에 대해서 지금 가슴아파 하면서 가책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죠. 나는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사도바울의 고백을 반복했다면 오늘날과 같이 잘못된 복음주의가 유행한 시대에서는 틀림없이 율법주의자라고 낙인이 찍혔을 가능성이 많았을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형제 하나가 수련회에 따라갔는데 제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설교를 듣고 복음에 깊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가서 지체들을 만나는 사람마다 죄와 그리고 그 죄의 무서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해서 막 가르쳤더니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제를 대리고 정신병원에를 가보라고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그가 깨달은 복음과 그가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 이 복음의 인식이 격차가 있었으면 “제가 여름에 어디를 갖다 오더니 돌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돈것이라면 나는 만나는 모든 사람이 돌기를 바랍니다. 진짜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뭐냐하면 그런 이신칭의의 교리나 이런 것들을 몰라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소명의 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전진적으로 전망으로 내가 이 일을 해야지만 가장 기쁘리라. 이 일이 가장 보람있다. 내가 이 일을 위해서 헌신하리라고 하는 전망적인 것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소명은 항상 회고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회고가 뭐냐하면 예전에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연하게 아는 회고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내가 예수 믿기 전에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기 전에 주님을 핍박하던 사람이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요. 핍박자요. 포행자요. 정말 쓸모없는 죄인중에 괴수였다.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명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에 대한 확인이 안되고 단지 “내가 이 일을 하고싶다.” 이일을 하여야 하리라고 하는 회고적인 것들은 무시하고 전망적인 것들에 대해서만 기준을 세워서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니까. 소명 받았다. 그러는데 그의 가르침이나 그의 행함이나 이런 것들이 전혀 소명받은 사람이 살아야할 그 목표와는 거리가 먼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권고하는데 여러분들이 강력하게 소명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그 소명감을 구성하는 요소가 단지 열심뿐이라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의 소명은 완전하지 않거나 아니면 그열심이 무엇인가 잘못된 것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진정으로 소명된 사람은 소명하신 주체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의 분명한 경험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의 경험은 무작정적으로 우리에게 미래의 비젼이나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욕망만을 불어넣으시는 분이 아니시라.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은 그와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연하게 보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자기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고 있는줄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하는 사실도 알지 못했을 것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가 죄인중에 괴수라고 하는 사실은 더더욱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소명을 받았는데 그 소명이 참 진실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 아주 분명하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정확하게 볼수 있었습니다. 십자가가 우리보고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의 형상이 우리보고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일평생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피흘리며 고난의 길을 걸어온 선교사와 이제 막 주님을 믿기 시작한 사람을 향해서 각기 다르게 말합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 형상이 심지어는 신자와 불신자들에게도 똑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신자든지 불신자이든지 너희의 모든 죄를 위해서 내가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니라.”는 그 외침이 바로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외침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그 체험이 소명의 핵심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평범한 사실 하나만을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한다고 할 것 같으면 오늘날과 같이 소명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목회사역에 헛된 발을 들여놓는 이런 우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자기 일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집념이나, 열심, 그것만을 가지고 소명을 말하는 것은 불완전한 판단입니다. 한 사람이 정말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르신 소명된 사람이라고 할 것 같으면 자신의 일에 대해서 열심이 있고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당연하죠. 그러니까 소명 받았다면서 뺀질거리고 사는 사람들은 그것 소명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빨리 돌이키세요.
내가 늘 이야기하지만 저의 평생에 사명감이 신학생들 밖으로 내 보내는 것이 사명감이었는데 오늘 설교 듣는 사람들 중에서도 무슨 복음사역을 위해서 자신이 “소명을 받았다.”라고 이렇게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깊이 돌아보세요. 그리고 상당히 지속적으로 오랜 시간동안 게으르고 나태하고 목표가 없이 살면서도 가책을 느낄지 모른다면 여러분들의 소명은 거짓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굉장히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하루빨리 돌이켜서 가서 만두장사라고 해서 먹고사는 것이 낫습니다. 굳이 이 길을 갈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하게 입증이 됩니다. 충성에 대해서죠. 우리가 충성 시리즈를 한참 했습니다. 이 십 몇 주했지 않습니까? 그것을 들어보세요. 그러면 그것을 통해서 소명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있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일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지만 그 소명된 사람이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종사하는 그 열심은 단지 일을 사랑하는 사람의 열심과는 그 기원이 다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 ? )관계,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은혜의 경험,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에게 있는 결정적인 인격의 특징은 바로 예수죽인 것을 자기의 몸에 짊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에 죄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자기를 용서하셔서 이제는 자기를 의롭다 부르시고 지난 과거의 죄를 묻지 아니하시고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주님을 위한 일군으로서 살아가게 하셨다는 사실은 굳게 믿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가슴이 깊이 새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할 때 그것을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언제든지 자기가 매일매일 영혼으로 만나는 그리스도 예수 그분의 십자가의 고난이 자기의 죄와 자기의 불순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날마다 경험하면서 예수 죽인 것을 인해서 아파하는 것, 이것이 소명의 진정한 또하나의 측면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저는 지금 말씀드린 것을 통해서 전자를 확인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이 오늘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미 다 지난 일인데도 그는 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는 커다란 죄를 지은 죄인처럼 하나님과 그리고 교회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예전에는 핍박자요. 포행자여서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도 문제삼지 않으시고 교회도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회개하고 돌이켜서 이제 주를 위해서 죽는 일군이 되었다는데 누가 그것을 문제를 삼겠느냐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도 그것을 문제로 삼지않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 자신을 그것을 문제로삼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세계를 두루다니며 복음의 위대한 역사를 일으킨 사도인가.? 아닙니다. 죽은자를 살리고 귀신들린자를 내어쫓는 천국의 권능을 한손에 움켜쥔 이 시대의 교회의 아버지인가? 아닙니다. 나의 편지와 나의 가르침을 통해서 기독교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신학자인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도가 한 자기 인식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맡겨준 일이니까. 헌신적으로 일했고 주님이 축복하시니까.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뛰어난 지성이 있고, 자기가 만난 주님을 성경적으로 설명하다보니까 기독교 신학의 토대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하고 있는 자기 인식은 설교자도 아니고, 사도도 아니고,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도 아니고, 신학자도 아니고, 어느 교회의 큰 목회자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고 있는 가장 일차적인 자기 인식, 그것이 무엇일까요.? "나는 예수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진 사람입니다.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수 있습니까. 그러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보고 그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할 때마다 자기는 위대한 사도도, 위대한 신학자도, 대목회자도 아닌 그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했던 아주 흉악한 죄인이라는. 주님이 모두 용서해 주셨는데도 분명한 자기 인식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정말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교만해집니까. 주님이 우리를 조금만 사용하면 주님의 무등을 탈려고 하는 것이 우리 아닐까요.? 주님 자랑은 오히려 감추고 자기를 드러내고 모든 성공이 자신의 능력에서 온 것처럼 모든 성취가 자기의 유능한 타고난 뛰어난 재질이나, 그리고 타고난 천부적인 능력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모든 성공과 성취의 주체는 자기이고 주님은 뒤에서 후원해 주신 것 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의 눈에는 눈물이 말랐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잘 것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없이 우리의 눈에 눈물이 흘를 이유가 있습니까? 나는 다른 이유때문에는 별로 울어본 적이 없습니다. 누구에게 두들겨 맞고 눈물이 나면 그것은 기도할 것이 아니라. 그냥 경찰서에 가서 울어야지.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다만 죄인이라는 사실은 두가지 점에서 우리에게 한없이 우리를 슬프고 눈물 흘르게 만듭니다.
하나는 "나의 그러한 죄 때문에 완전하시고 선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인해서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셨다."라고 하는 가슴아픈 사실과 또 하나는 "그런 쓸모없는 죄인에게 하나님의 용서의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라고 하는데서 오는 은혜에 대한 감사가 주는 눈물입니다. 그렇죠. 이 두가지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울일이 있느냐고요. 울 일이 없습니다. 하나는 가슴아파서 울고, 또 하나는 감사해서 우는 것입니다. 그것 이외에 우리들이 그렇게 뭐 그렇게 하나님 앞에 울어야할 일이 있느냐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사도를 보십시오. 대 사도도 아니고, 기적을 일으킨 사람도 아니고, 그가 위대한 일꾼으로서 갖는 자기 인식은 위대한 일군, 이시대의 기독교의 역사를 책임진 사람, 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하던자, 그것을 끊임없이 짊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만할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을 대면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았을 것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아주 엄연하게 들어나는 자기 정체, 자기 인식은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진 자였습니다. 어떻게 그가 교만해 질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가 오만해 질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정죄감에서 오는 죄인이라는 자의식과 이렇게 복음 안에서 확인되는 자기 인식은 다릅니다. 정죄감에서 오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이 생각은 그를 자신을 계속해서 절망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복음으로 말미암은 정확한 자기 인식에서 오는 자기의 죄인됨을 아는 이 확인은 그러므로 "내게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 밖에는 없다."라는 그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 죄의식이 파괴적인 죄의식이 아니라. 더 큰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한 목마름을 가져오고 자신의 모든 생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쓸모 있게 된 모든 것들이 다 한결같이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로라 하고 하는 고백을 불러오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자랑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기가 뭐 무엇도 체험하고 무엇도 보고, 그러면서 자랑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는 일들이 많지 않은 것은 바로 이 같은 정확한 자기 인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이라고 생각할 때 그의 사역에 하나님의 아무리 많이 축복해 주셔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고 업적을 이룬다고 할지라도 그는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라는 자기 인식, 그 앞에서는 자기의 자기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라는 고백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핍박자가 어떻게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까? 그렇게 포행자가 어떻게 사도가 되었습니까? 죄인중에 괴수가 어떻게 영혼들을 위해서 죽도록 헌신하는 사랑의 사도가 될수있었습니까? 무엇으로서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사도바울 안에 있는 어떤 재능, 아니죠. 사도바울을 추종하는 어떤 사람들의 추대, 그것도 아닙니다. 도저히 좁힐수 없는 이 양쪽의 간격, 핍박자요. 포행자요. 죄인중에 괴수인데 하나님의 일군이요. 사도요. 그리고 목회자로 이렇게 좁힐수 없는 간격을 건너뛰게 만든 것은 오직 한 단어로밖에는 설명이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왠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으나.
벌레와 같이 아무쓸모 없는, 쓸모없다기보다는 해로운, 그런 더러운 죄인이 변하여 주님의 자녀가 되기까지 우리의 의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죄인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그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건져내서 주님을 송축하고 찬양하고 경배하면서 사는 이 자리에 주님이 우리를 데려다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아무리 우리의 구원의 확신이 분명해지고 아무리 우리들이 은혜가 충만하고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의 하는 일에 복을 주셔서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 업적을 이룬다고 할지라도 그 업적과 성과는 잊어버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그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며 그 죄인을 주님이 은혜로 용서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흔히 교사들이나 교역자들을 만나면 너희 반에 애들이 몇 명이냐? 그러면서 물어봅니다. 그러면 명수를 못댑니다. 기도안하니까.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죠. 교역자들에게 물어봅니다. 그러면 다 압니다. 그것을 모르고 있으면 무관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잊어버려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그러나 한가지
잊지는 말아라.
죄인된 너희를
구원하신 여호와를
모세의 손에 이끌려 광야의 길을 지나고 여호수아의 손에 이끌려서 요단을 건너고 가나안을 정복한 사람들은 끝까지 잊지 말아야 되었습니다. 심지않은 포도 나무에서 포도 열매를 먹고 짖지 않은 집에서 살면서도 잊지말아야될 사실이 있는데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했습니다.
단지 땅을 주신 그 은혜도 그들이 그렇게 잊어서는 안된다고 할 것 같으면 궁극적으로 그 땅의 실체인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있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우리가 안다면 우리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우리가 바로 예전에 그리스도 예수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잊는다는 것은 있을수가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앞을 향하여 순수한 동기에서 주님의 영광과 영혼들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 사명감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과거에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회고적인 경험을 통해서 온다고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바울이 자기는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달음질하며 나아간다고 빌립보서에서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앞에 있는 푯대를 가지고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아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앞에 그러한 푯대를 세울수 있었던 것은 뒤에 푯대가 있었기 때문에 출발하는 푯대가 분명했기 때문에 앞에 푯대를 세울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푯대는 다름이 아니라. 자기는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사람과 함께 어울려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보탬을 준 사람이라기보다는 자기 한 사람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기 확인이 필요합니다. 아침마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훌륭한 하나님의 일군도 아니요. 열심이 있는 목회자도 아니요. 열린교회의 교인들이 인정해주는 충성된 일군도 아니요. 주님을 위해서 집도팔고, 논도 팔고, 많은 헌금을 드린 헌신된 사람도 아니요. 나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은혜로 용서해 주신 죄인일 뿐이다. 그 고백이 우리에게 매일매일 반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은혜의 경험을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무엇을 움직일 때 정말 남은 생애를 어떻게 하든지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어집니까?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복주셨는데도 뺀질거리며 불충성하고 살다가 댄통 얻어 맞아서 병원에 기부스라도 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내가 이렇게 살면 안되지“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들을 정말 하나님 앞에 진실되고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살아가게끔 만들지 못합니다. 그렇죠. “왜 주님이 나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을까? 내가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고 그리고 나는 단지 그분의 은혜로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하구나.” 그 사실을 깨달을 때 아주 현저하게 이제 남은 생애를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는 결심이 가슴속에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여기에서 나는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요. 그것을 회상함으로서 누구에게 이렇게 주눅이 들거나 아니면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좌절에 빠지게 하는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찬양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를 핍박하고 교회를 박해했던 핍박자요. 포행자요. 죄인 중에 괴수인 내가 오늘 이렇게 교회를 세우고 영혼들을 위해서 진력하면서 살수 있게 되었는데 이 원인은 내가 제공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놀라운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와의 이 놀라운 격차는 오직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왔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런 은혜가 필요했고 지금 사도가 된 다음에도 그런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하는 정직한 자기 인식과 고백은 더더욱 오늘도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그 은혜가 오늘도 필요합니다. 그 은혜를 갈구하고 그 은혜에 매달릴 수 없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소명입니다.
사도바울이 “나는 핍박자요. 포행자요.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다.”라는 고백을 하고 그리고는 정말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반드시 그 뒤에 오는 결심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그러므로 이제는 사나 죽으나 내가 주님의 것이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인격적인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 비롯되는 충성심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자신의 영혼 안에서 우러나오는 복음적인 헌신의 동기, 그렇게 사무치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헌신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누군가에 의해서 안일하게 인생을 살도록 강요를 받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주님의 그 사랑을 알고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교회를 박해했던 쓸모없고 가치 없는 자기와 같은 죄인이 살려주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목 매이는 이 사람이 어떻게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의 마음을 움직이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로 하여금 영혼을 위해서 일하게 하신 분은 예수님 자신이시고 그로 하여금 헌신된 삶을 살게 만들었던 것은 자기의 비전이나 야망이 아니라. 인격적인 주님 자신이신데 어떻게 그가 성결하게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예전에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그렇게 소망이 없는 자기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었는가? 그것을 깊이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주님의 자녀된 것이 얼마나 우리에게는 가슴 벅찬 일이고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님 앞에 옳다함을 얻은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정말 늘 울어도 눈물로는 다 갚을 수가 없고 그래서 예전에 내가 죄인이었던 사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사실은 내가 돌이켜 놓을수 없지만 과거는 나의 것이 아니었지만 이제 앞으로 남은 것, 내 몸을 내 마음을 내 온 소유를 드려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이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주셔서 쓸모없는 죄인을 구속하셔서 용서받게 하셔서 주님의 훌륭한 사람으로 다시 세워주신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드려서 주님을 주님답게 섬기고 나를 통해서 주님의 주님 되심을 드러내 보여주도록 소망하는 마음에 사로잡히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가져야할 성도로서의 소명인 것입니다.
복음사역자로서의 위대한 소명도 이 성도로서의 소명이 기초해서 흘러나오는 것들입니다. 보십시오. 그 위대한 사도가 자기의 행한 아무것도 자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네가 진짜. 사도냐?”라는 조롱어린 비난과 반론을 받으면서도 사도는 주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자신의 인식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나는 핍박자요. 포행자요. 예수님을 따라 다닌 그래서 예수님을 섬겼던 제자들도 아니고 성령세례 받을 때 참여하여 처음부터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던 주의 신실한 제자들도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에도 우리의 죄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그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유대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교회를 박해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며 살아온 나입니다. 그런 고백, 그것이 오늘 이 사도 속에 있는 고백입니다.
그렇게 쓸모없는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그 죄인 중에 괴수인 흉악한 나를 구속하셔서 주님의 자녀를 삼으시고 한걸음 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훌륭한 사도로 나를 세우셨는데 이것은 나보다 더 악한 사람들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 사도의 일관된 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자신이 자기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 복음을 전해도 돌아오지 않은 수많은 죄인들에게 희망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깊고 검붉은 죄악가운데서 그 죄로 인해서 주 앞에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도자신이 훌륭한 교제였습니다.
주님이 용납하실 수 없는 죄인이 없고 주님이 사해주실 수 없는 큰 죄인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사도바울 자신이 용서, 그리고 그 구원의 은총을 통해서 들어내기 위함이라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틈만나면 자신의 과거를 말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교회를 핍박했는지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게 행했는지, 어떻게 철저하게 예수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거스리는 외식에 빠진 쓸모없는 가련한 바리세인이었는지를 언제나 말합니다.
그렇게 수없이 반복해서 간증함에도 불구하고 그 간증이 언제나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것은 그 간증에서 끝나지 아니하고 그런 나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은혜로 살리셨도다.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이지만 주님은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셨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정말 한번 우리의 기도제목을 한번 잊어버리면 어떨까요. 앞에 있는 수많은 기도제목을 좀 접어두고 그리고 한번 뒤에서 잊고 지내는 기도의 제목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야했으며 정말 내가 그렇게 주님이 당신 자신의 피를 흘려 구원해 주실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였습니까? 그렇게 구원해 주신 후에는 제가 그 구원의 의미와 그 구원의 고귀한 의미에 부합하도록 살았습니까? 여전히 일평생 나는 예수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지고 다른 사람들이 내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박수를 치고 너와 함께 하셔서 하나님이 위대한 일을 이루셨다고 나에게 갈채를 보내도 나의 인식은 시종일관 마지막 한 가지 나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이로라는 그 고백, 그 고백이 일평생 우리의 고백이 되어서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누리고 있는 모든 좋은 것, 우리들이 소유하고 있고 또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주님의 은혜요.
지금처럼 우리를 후대해 주시고 끝없이 참고 용서하시고 사랑을 베푸시고 우리가 아주 소중한 자녀인 것처럼 대접해 주시는 그 모든 대우들이 항상 분에 넘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쏟아지는 은혜에 면역이 되지 아니하고 아침마다 새롭게 늘 새롭게 느끼며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에 만족이 되지 아니하고 날마다 부어주셔도 날마다 새롭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의 은혜요. 어제의 은혜요. 우리도 아직 알지 못하던 때에 받은 은혜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롭습니다. 날마다 “아 내가 정말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았다. 전혀 쓸모없는 죄인인데 예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구원의 길을 여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구나.” 그 은혜를 그 사랑을 내가 무엇으로 갚을까? 이런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 더 넘치도록 주님을 위해서 살아서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 주신 그 은혜를 갚을 수는 없지만 주님이 그렇게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구원받을 나를 향해서 기대하셨던 삶의 단 10분의 1이라도 살려고 몸부림치며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하는 자기를 미워하며 그렇게 주를 위해서 살다가 죽는 것, 이것이 이렇게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은혜를 경험하고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같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한 사람의 소중함을 재려고 하는 시대에는 더더욱 복음의 이러한 측면들을 이해하는 일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모두들 성공과, 성취, 성장, 업적, 바벨탑처럼 자신의 삶을 쌓고 훌륭한 업적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던 사람들이 가득 찬 이 때에 정말 새롭게 내가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에 불과하고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이 그런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용서받고 은혜 받은 그 은혜의 덩어리일 뿐이라고 하는 고백, 그래서 내게는 무엇인가 선하고 신령한 것이 있으면 그것은 모두 주님의 은혜일뿐이라고 하는 고백, 그래서 나라고 하는 자랑거리는 없고 오직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고 쓸모없는 죄인을 용서하셔서 주 앞에 유용한 사람들로 세워주신 우리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하게 될 때 우리는 넘치도록 주를 위해 일해도 주의 영광을 가리우지 않을 것이며 수없는 성취와 승리를 주셔도 그 승리와 성취 때문에 사울이나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교만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나된 것이 오로지 죄인을 후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라고 하는 우리에게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룩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내면의 세계 속에는 항상 주님이 아무리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리고 주님이 아무리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러주셔도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우리의 분수를 아는 정직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한없는 사랑을 쏟아 부어 주셔도 한번도 그 사랑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죽인 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나로 인해서 못 박히신 주님 때문에 속죄함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나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을 가슴에 새기면서 나는 단지 주 앞에 용서받은 죄인 일뿐이며 나 때문에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일을 인해서 오늘도 눈물을 흘린다고 하는 고백을 가진 사람이 그런 그림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내면의 세계 속에 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는 죽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를 원합니다. 세상과 세상에 대한 염려와 애착은 못박히고 그리스도 예수만이 사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기 전에 살았던 자기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고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못박히신 그리스도는 자신 속에 다시 살아나셔서 당신이 원하시는 삶을 마음껏 사실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의 세계 속에 있는 생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바로 이렇게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주님을 믿기 전에 단지 하나님을 거스리던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았던 핍박자요. 죄인 중에 괴수였다는 사실을 가슴에 생각하면서 일평생 여러분 자신이 아니라.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예수만을 자랑하고 그분을 위해서 사는 것을 본분으로 여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죄인됨의 현재적 체험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사도바울이 성경을 통해서 한 자기 고백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복음적인 고백 하나가 여기에 나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세상을 구원하려 이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내가 죄인중에 괴수로라.”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그 앞장에서 불법한 사람들의 행실에 대해서 말한 다음에 문득 자기가 생각이 났던 모양입니다. 어떤 악한 사람들의 죄들을 지적 하면서 문득 자신이 예전에 그런 사람이었던 사실에 대해서 인식을 하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내가 전에는 핍박자요. 훼방자요. 포행자이었으나.” 그러면서 내가 지금 지적하고 있는 이 모든 죄들을 사실은 나도 예전에 행하던 사람이었단다.라는 고백을 서슴없이 하면서 그러면서 다시한번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서 죽으신 십자가의 의미 앞에 자기를 세우고 거기에서 아주 뚜렷한 평소에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살아 있어서 그로 하여금 사울이 아니라. 바울의 삶을 살게 만들었던 자기 인식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죄인중에 괴수니라.” 하는 이 고백입니다. 히랍어 성경에 “괴수니라.”하는 이 구절은 ( ? )라고 되어 있는데 문장 상으로 보면 도취입니다. 그래서 제일먼저 괴수라는 말이 나오고 그 다음에 비동사가 나오고 일인칭 대명사가 나오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뒤의 1인칭 대명사는 생략을 해도 될터인데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강조적인 용법입니다.
그래서 “괴수니라.” “바로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이 바울이 죄인중에 괴수니라.”하는 그런 고백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도바울의 고백을 보면서 우리들이 수요일마다 살펴보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지녀야할 자기 인식이 무엇인지. 그것을 살펴보고 있는데 오늘도 또한 동일한 선상에서 이것에 대한 사도바울의 간증을 우리들이 엿볼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죄인중에 괴수니라.”했습니다. 만약에 사도가 “나는 죄인중에 괴수였단다.” 라고 표현을 했다면 우리는 하등에 의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정말로 칼을 들고 사람들을 죽이고 강도질을 하고 살인을 한 이런 불한당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교묘하게 의로운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의로운 사람,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동참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니까 만약에 그가 “나는 죄인중에 괴수였노라.” 라고 과거사로 표현을 한다면 우리는 하등에 이 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걸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도 하나님도 우리도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제는 그것은 모두 옛일이 되었고 지금은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이후로 이 사람이 정말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몰라서 그렇게 살았지만 주님을 만난 후에는 쏟아지는 복음의 빛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지상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성도의 모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지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게 선교사가 누구인지를 보여준 사람이었고 목회가 무엇인지를 알려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역자로서 그리고 선교사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주님 다시만날 약속을 가진 성도로서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를 가장 잘 보여준 성도요. 사역자의 모델이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한은 우리는 그의 생애에서 어떠한 미끄러짐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살펴도 그가 물러가 침륜에 빠져서 사도의 직을 팽개치고 세상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생애에서는 물질이나, 이성, 명예를 둘러싼 어떠한 추문도 읽을 수 없습니다. 자기의 고백대로 자기는 오직 그리스도의 것이었으며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의 전 생애를 드리며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는 고난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일평생 부귀와, 영화, 번영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산 초인적인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현재형으로서 “나는 지금 바로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괴수라는 이 프로투스는 영어로 퍼스트입니다. 죄에 죄를지은 사람들을 죄질의 순서대로 세운다면 자신이 맨 앞에 와야 되는 사람이다. 옛날에가 아니라. 언제? 지금.
우리는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보더라도 사도바울의 이 같은 고백이 전혀 사실이 아니고 동의할 수 없는 자기 고백이라고 하는 확신을 떨칠수가 없습니다. 사도는 지금 우리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내가 이렇게 겸비하게 말을 하면 사람들이 “내가 너무나 겸비하기 때문에 존중히 여길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외식하는 바리세적인 생각 때문에. 사실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겸비해진 적이 많습니다. 이것은 정말 우리들이 굉장히 큰 악입니다.
저는 많은 은혜 받은 지체들을 만나면서 목회자를 만나고 혹은 지체들을 만났을 때 습관적으로 자기 자신이 엄청난 고뇌에 쌓여있는 사람인 것처럼 자신을 압박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평소에는 거의 고민하지 않은 문제들을 대화 중에 자신이 엄청난 고뇌의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역겨운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평소의 삶 속에서 사람이 보든지 아니 보든지 하나님 앞에 깊이 고뇌하고 있는 사람은 사실은 사람에게 말할 것이 많다 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할말이 더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고도의 위선입니다. 은혜의 체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위선을 정말 조심해야합니다.
사도는 지금 그런 얄팍한 외식으로 자기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철저한 삶을 산 이 사람이 “오늘 내가 죄인 중에 지금 괴수입니다.”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자기의 겸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주기를 원하는 이런 정도의 내적인 고민을 안고 있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는, 깊이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말 조심해야합니다. 우리 마음에 일어나고 있는 그 이상을 부풀려 말하는 것이 우리의 영혼에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갔지만 나는 여러분들에게 참된 신앙과 외식이라는 시리즈를 적극 권합니다. 처음 믿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도 오래 신앙생활 하고 자기 나름대로 신앙의 많은 체험을 쌓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말 그 시리즈를 꼭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시리즈에서 우리는 아주 분명한 한 진리를 결론으로 얻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뭐냐하면 외식이 있는 곳에는 참된 영적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에 의해서 영성이 파괴되는 것은 알지만 경건하고 의로운 행동이나 말 때문에 자신의 영성이 파괴된다고 말한다면 누가 그것을 쉽게 믿을 수 있겠으며 또 그것이 자신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서 어떻게 놀랍도록 역사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외식은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 군사와 같은 적입니다.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아무튼 사도바울은 지금 그런 면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이 지금 이전부터 확신하고 있는 바를 현재적으로 느끼면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이것이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을 알기 전에 우리에게 이러한 자기 고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누구인지를 깨닫는 자기 인식이 앞으로 그 사람이 살아가야 할바를 결정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인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미래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설계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거에 대한 생각이 현재를 결정하고 현재의 자기에 대한 인식이 미래에 자신이 살아야할 바를 결정하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또 무엇 때문에 자기가 이렇게 헌신된 삶을 살고 죄인으로 사는 대신 하나님의 의로운 군사로서 진실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살면서도 마지막에는 결국 자기를 “죄인 중에 괴수로다.”라고 고백을 하게 만들었던 그 이유는 무엇이냐. 저는 이것을 3가지로 설명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자기가 누구였는지를 아는 과거에 대한 인식이 이 사람을 자기 스스로 이렇게 헌신되고 정결한 삶을 살면서도 “죄인 중에 괴수로라”는 고백을 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거기에서 매달려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회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외치고 있는 그 의미를 회피할 수가 없었는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렇게 죽으신 그 죽으심의 의미는 바로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과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 체험은 모두 절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성도가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할 때 그는 “지금내가 받고 있는 사랑이 누가 받는 사랑보다 클까? 작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가 그 성도의 마음을 움직여서 주의 사랑에 목매이게 할 때에 그는 다른 사람이 받는 사랑의 크기와 지금 자신을 감동시키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그 크기를 비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사랑이 가장 크다고 믿는 확신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받는 그 사랑과 자기가 받고 있는 그런 사랑을 비교해야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지금 받고 있는 이 사랑이 가장 놀랍고, 가장 크고, 그리고 그 자체로서 충분히 만족하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은 절대적인 성격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투기하지 않게 됩니다.
또 하나 이제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체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선명한 진리의 빛 앞에서 자기가 철저하게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 줄 때에 그는 흐느끼며 자기의 죄를 뉘우치면서 “아무개는 나보다 죄가 클까? 작을까? 내가 그래도 누구보다는 좀더 의롭겠지.” 이런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니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고 느끼는 그 경험도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오늘 의로운 삶을 살고 하나님 한분을 사랑하며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서 일생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이처럼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옛날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했던,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이 절대적인 경험, 이것 때문에 오늘 그가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십자가 경험과 관련을 짓는다면 이런 식으로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실재적인 경험을 볼 것 같으면 우리 안에 있는 자기의 죄인 됨의 확신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만큼이나 가변적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가시죠.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확 밀려오면 내가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한분만을 위해서 살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사랑에 대한 경험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늘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발동 걸리면 몇 달 쯤 가요? 몇 달은 무슨 몇 달이에요. 내가 얘기했지 않습니까? 철야 기도시간에 눈물 펑펑 흘리면서 기도하고 새벽별 보면서 구멍 뚫어진 변소에서 담배피운 이야기했지 않습니까? 그것이 한번 경험했다고 해서 그렇게 계속 그 여력이 남는 것이 아닙니다.
교도소에서 청소년들을 전도하고 있는 어느 사역자가 있었습니다. 교도소에서는 소년원들을 대상으로 여름수련회를 한다, 그러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데요. 안 믿는 교도관들이라도 왜냐하면 여름수련회를 해서 은혜를 흠뻑 받으면 한주일 동안은 교도관들이 아주 편안해진대요. 애들이 은혜를 받아서, 한달을 안갑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으면 한번 깊이 하나님을 만난 그 체험 하나에 달렸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땡입니다.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것만 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한 영향은 있지만 그런 사랑의 경험이 계속되는 것은 한번 경험한 강도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매일매일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을 새롭게 새롭게 경험하는 현재적인 은혜의 경험이 그를 계속해서 그런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 속에서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보고 당신 어떻게 이런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 속에서 살게 되었냐 그럴 때에 “오늘 아침에 기도를 열심히 해서 그렇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더듬으면 그 옛날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밖에 은혜 받은 것이 없어서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만큼 자기의 인생에 있어서 무엇인가 전환점이 되는 기억에 남는 중요한 하나의 회심의 사건이라고 일컬어 질수있기 때문에 기억 상으로 그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성령 충만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그 덕분이 10년 전에 회개를 똑 부러지게 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이 평범한 사실을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이 영적인 변화들에 대해서 적절한 진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을 동의할수 있겠죠. 그렇죠. 한번의 사랑에 어떤 생애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도 물론 필요하지만 그것 하나가 있었기 때문에 일평생을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오셔서 하나님께서 어루만지시는 그런 변화입니다.
그러니까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데 하나님을 깊이 만나서 한번 뒤집어졌다. 그래도 뒤집어진 것 또 뒤집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얼마든지 뒤집어집니다. 신락규 왔어요? 손들어보세요. 얘기해도 되지? 저 형제가 말이죠. 진짜 연구대상입니다. 저 형제가 절에서 법복을 입고 설교 테잎을 듣고 열린교회에 온 친구입니다. 하나도 안 놀라네? 그래서 진리가 무엇인지 온통 헤매다가 절로 간 것입니다. 절로 가서 예법도 배우고 뭐도 배우고 그랬는데 중들에게 진리가 무엇이냐? 물어보니까 교회하고 똑같더래요. 소위 이야기하는 교역자라는 사람들인데 자기가 보기에는 아무도 이 속에 무엇을 알고 스님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서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물어보았을 때 대답 못해주는 것과 아주 유사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그리고 나서 마을로 내려와 서점에 가서 테잎을 하나 샀는데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였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가서 절에 너 중만 되면 우리가 법복 맞춰 줄께 하고 후견인이 5명이나 등록했는데 방 한 구석에서 귀에다 꼽고 그것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들을려면 나와서 듣지 왜 거기에서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거기에서 듣고 회심을 하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듣다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정신병자 취급을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설교를 왜 절 에와서 듣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녀석 정신병자가 아니냐? 그래서 교회로 말하자면 담임 목사라고 할 수 있는 주지스님이 부르더래요. “이리와라. 너 어떻게 된 거냐? 사실 제가 이만저만 해서 이렇게 이렇게 해서 신학에 뜻을 두고 이렇게 이렇게 왔는데 방황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 목사님 말씀을 듣고서 내가 회심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주지스님 하는 이야기가 “네가 그 길을 결정했으면 그 길을 가라. 나도 다 안다. 나도 옛날에 주일학교 선생이었다.” 그것 보세요. 어느 정도의 주일학교 선생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절에 가면 예수 믿다 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아는 교수 한사람이 설악산으로 등산을 너무 좋아해서 돌밖에 안 된 아이를 업고 그 설악산 꼭대기에 무슨 절이하나 있데요. 신흥사 말고. 아주 높은 곳에 무슨 암자가 하나있데요. 올라가니까. 뒤에서 중이 따라오면서 “아유, 불심도 지극하시지 내가 여기에서 오랫동안 살았지만 돌도 안된 아기를 업고, 하나를 안고 하나를 걸리고 그렇게 다섯 식구가 이렇게 높은 암자를 오르는 것은 처음입니다.” 그래서 그 교수님이 “나는 사실 불자가 아니라. 목사입니다.” “아, 그러시냐고. 그러실 수도 있겠다고. 혹시 루돌프 불투만이라고 하는 신학자를 아시냐고. 유명한 신학자입니다.” 그러면서 신학 이야기를 쭉 하더래요. 아니 스님이 불경을 이야기해도 놀랄 터인데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하느냐 그랬더니 “내가 전도사로서 신학교까지 다니다가 중이 되었습니다.” 안 믿어지죠? 없을 것 같죠? 많습니다.
분명하게 알아야할 사실은 한번에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에 대한 어떤 강력한 체험이 일생의 어떤 방향을 제시해줄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 하나로 “일생동안 계속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똑같은 논리로 사도바울이 오늘 여기에서 ( ? ) 괴수니라. 바로 지금 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이것은 십자가 사건의 현재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오늘날 교만해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옛날에는 한번도 자기가 쓸모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애통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 교만해지는 것입니까? 그것 아닙니다. 절대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이전에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죄 없이 죽은 그리스도 예수, 어린양의 십자가의 보혈을 보면서 체험했지만
그러나 그런 동일한 십자가 사건에 대한 체험이 지금 이 고백을 하고 있는 이 사도바울의 말년에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자기가 현재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현재적으로 말하는 것은 뭐냐하면 지금 죄를 짓고 있느냐 안 짓고 있느냐. 그것을 떠나서 우선 십자가 사건 앞에 설 때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이 현재적으로 경험될 때 그분이 지금 흘리시는 그 십자가의 보혈과 처절한 그 희생이 현재적으로 경험되니까. 그렇게 경험되는 현재적인 경험이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 그로 하여금 오늘 이렇게 자기가 예전에 죄인이었던 사실을 오늘 거기를 기초해서 자기가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오늘 여기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진짜로 예전에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이 오늘 현재적으로 경험되는 십자가 사건 앞에서 다시 체험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경험과 자기가 그렇게 처절한 하나님을 훼방하고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그런 악한 죄인으로 살았던 그것 역시 십자가 사건의 은혜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과 같이 자기의 죄인됨의 체험도 현재적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 어떤 사람들은 “야, 그것 예수님이 다 죄를 용서해주셨는데 매일 죄인이라고, 죄인이라고 그러지 말고 이제는 죄에 대해서 말할 때가 아니라. 이제는 은혜에 대해서 말할 때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진짜 묻고 싶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중요한 원인이 자기가 너무 죄인이라는 자책감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소수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자책감 때문에 하나님께 못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인됨을 모르고 자기의 죄를 뉘우칠 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못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현실에 비추어볼 때 그런 충고는 일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현실과 많이 동떨어진 것이고.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깊이 깨닫고 자기의 죄인됨을 알아서 십자가의 은혜만을 의지해야할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 안에 있는 가능성을 십자가만을 의지하며 살아야할 내적인 필요성보다 훨씬 더 과분하게 생각한 나머지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기 보다는 자기의 의를 신뢰하는 사람으로 만들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해서 우울하게 신앙생활 하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울과 명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리와 그 진리에 대한 참된 반응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사도바울이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은 현재적인 십자가의 경험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가지만 여전히 자신의 죄인됨을 현재적으로 경험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죽인 것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 살면서도 자기의 의를 의지하지 않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로는 사도바울이 과거에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처럼 자기를 “죄인중에 괴수로라”고 현재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 속에서 체험되는 죄에 대한 경험 때문입니다. 첫 번째 이유로 지적한 것이 과거의 죄된 생활, 죄인으로서의 생활, 삶, 이런 것들 때문이었다면 두 번째는 이미 신자가 되고난 다음에 경험하는 죄에 대한 체험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 중에 괴수로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바울은 성경 여러 곳에서 죄와는 거의 상관없이 살아가는 아주 최고도로 고조된 그런 소위 이야기하는 mortify된, 죄를 거의 완전히 죽인, 죄의 영향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것처럼 온전히 그 하나님의 은혜에 에워싸여 있는 그런 영혼의 상태를 암시해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는 그런 고백 같은 것, 이런 것들이 여러 차례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도바울의 영적 경험의 밝은 면만을 말한 것이고 어두운 경험도 많이 말합니다. 살 소망이 모두 끊어진 것 같아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한 것을 암시하는 그러한 고백과 그리고 또한 혈기와 분노로서 격분하는 그런 경험과 그리고 로마서 7장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처럼 어찌할 수 없이 자기를 죄악 가운데로 끌어가는 이 내적인 더러운 욕망과 죄에 대한 욕구들, 거기에서 곤고해진 자신의 모습, 이런 것들을 ( ? )
그러니까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아무도 모릅니다. 누구만 알아요? 오직 하나님과 그리고 부분적으로 나만이 압니다. 하나님 다음에 잘 아는 사람은 아마 나일 것입니다. 그것도 그 나가 어떤 나이어야 하느냐면 신앙과 은혜의 경험이 있고 그다음에 말씀의 밝은 빛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경우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속에 일어나고 있는 엄청난 이 죄와 이런 것들을 오히려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 더 잘 보여주어서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두 그렇게 잘 알 수 있으면 목회자도 필요 없고, 설교자도 필요 없고, 말씀의 빛도 필요 없죠. 그렇죠. 양심은 망가지고 이런 죄를 인식하는 모든 기능들이 고장 났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합니다. 어쨌든지 간에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은혜에 대한 경험이 있고 말씀의 빛이 있고 정직한 신앙의 양심이 있는 사람일 경우에는 하나님 다음으로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입니다.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처절한 투쟁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뿐만 아니라.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서 일어났던 모든 생각을 글로 써서 모두 공개한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우리는 서로를 보고 살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죠.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내가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키느라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실망하느라고 그러면서 아마 우리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누가 아느냐고요?
사도바울이 성경을 쓸 때에 이것은 일기도 아니고 간간이 자기 고백이 나오지만 무슨 참회록을 쓴 것도 아닙니다. 교인들을 신앙으로 권면하기 위해서 쓴 편지입니다. 그런 어떤 형식의 한계에서 오는 그런 한계 때문에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를 다 보여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속에 우리들은 그가 훌륭하게 주님을 사랑하고 전심으로 주를 위해서 살려고 몸부림 쳤고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라는 사실은 우리들이 확신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사람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영원히 비밀입니다. 우리 속에 그러했던 것처럼.
그런데 영적으로 깊이 깨어있고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이런 소멸되지 못한 자신 속에 있는 죄들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이죠. 거룩하고 신령한 삶을 살고 완벽한 삶을 살면 살수록 그러한 죄에대한 인식이나, 거기에서 오는 고통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늘어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비유는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급비밀인데 이야기 하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런지 모르겠는데 아, 저는 신경이 예민해서 그런지 특히 미국 동부 쪽으로 날아가면 스케줄 안 맞으면 22시간 쯤 갑니다. 대합실에서 완전히 노숙자처럼 뒹굴고 그러면서 가는데 갈 때마다 “웬만하면 오지 말아야지. 오지 말아야지.” 그러면서 가는데 부를 때는 할 수 없이 또 갑니다.
그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좁은 의자에 삐지고 앉아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하면 허리가 원래 안 좋으니까 그 조그만 의자에 앉아서 가면 막 15시간 날아가면 허리가 쪼개지는 것 같이 아픕니다. 사람이라도 없으면 좀 옆에 기대어보고 누워보는데 그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다가 한번은 양복 정장을 입었는데 이것은 진짜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몇 번을 가다가 요령이 생겼는데 비행기 안에서 파자마를 입고 있으니까. 그렇게 편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다음에 비행기 탈 때는 파자마를 하나 가지고 갑니다. 그런데 거기에 런닝 입고 있으면 국제적인 망신입니다. 그래서 짙은 색의 파자마, 그리고 양복처럼 비슷하게 보이는 그런 파자마있죠. 곤색 같은 것, 그것을 가지고 가서 살짝 속에다 입고 가서 거기 가서 살짝 바지를 벗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면 하늘하늘한 고급양복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티셔츠는 이렇게 널널하게 해서 이렇게 내려놓고 그리고 앉아서 갑니다. 아, 그런데 정말 한30%는 피로감이 덜했습니다. 혁대도 안차고 그리고 가니까 아주 책 읽으면서 그러면서 아주 은혜롭게 가서 그다음에서부터는 긴 비행기를 탈 때는 아주 필수품입니다. 진한 색 파자마 잊지 마세요. 짧은 것은 안 되고 길수록 좋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입고 윗도리만 걸친 다음에 복도를 걸어가도 아무도 사람들이 시선을 주지 않습니다. 양복인줄 아니까. 그런데 그런 차림으로 공항구내로 나올 수는 없습니다. 그렇겠죠. 그러면 이제 거기 트라이 상표까지 다 보일 것 아닙니까. 뒤에 꼬리에 붙은 것까지 왜? 환하니까. 비행기는 좀 어둡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영적으로 신령한 생활을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우리들의 많은 죄악들이 있고 이렇게 오염된 것들이 있어도 자신의 내면에( ? )밖에 많이 있어도 모르고 씩씩하게 삽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조금 들어오면 “아니, 이것 더럽잖아.”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들어오면 “아이고 이것 더럽네.” 그다음에 환하게 들어오면 그다음에는 수없이 닦아내고 정결한 옷을 입었는데도 어쩜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한번 사진관인가 예식장인가를 갔는데 라이트를 100개는 넘는 것 같아요. 하여튼 1 키로 짜리 그것을 확 때리는데 사진 찍을 때만 그 예식장에서 쓰는 것입니다.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밝은 빛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란 것이 뭐냐면 거기에 그렇게 하고 얼굴을 쳐다보니까 내가 어쩌면 그렇게 점이 많아요. 기대한 것도 없지만 다시 한 번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용모에 자신 없는 사람들은 선을 보거나 그럴 때에 환한 한식집이나,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좀 침침한 레스토랑 같은데서 만나야합니다.
그렇게 빛이 좌우합니다. 똑같습니다. 신령한 생활을 하면서 그 하나님의 밝은 말씀의 은혜의 빛을 받게 되면 아주 작은 죄와 내적인 어두운 동기 같은 것들도 찬란한 빛 앞에 너무 또렷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해서 괴로워하는데 그것은 현재적인 것입니다. 신령한 삶을 많이 살면 너무나 많이 살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서 거의 완벽하게 양심에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 사람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정신병자이든지 외식주의자이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항상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런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살아간다.”라고 하는 것은 한순간의 객기가 아닙니다. 무엇인가 그렇게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내게 있을 때 그런 삶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밝은 말씀의 빛 앞에서 거룩의 빛 앞에서 자기의 오염된 성품과 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이야기하는 “정사”라고 하는 자기 성찰이 없는 신앙생활은 영적으로 깊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그리스도인이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상태에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상태로 딱 넘어가고 나면 제일먼저 찾아오는 놀라운 변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름이 아니라. 자기를 성찰하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의 빛 앞에서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그 자기 안에 있는 죄악된 요소와 경향성들을 그 거룩의 빛 앞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룩의 빛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단순히 옛날에 지은 죄, 그것만을 가지고 지금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 속에서 그런 고백입니다. 남들이 볼 때에는 반듯합니다. 예전에 그렇게 방탕하더니 이제는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우고, 세금도 잘 내고, 법규도 잘 지키고, 외도도 하지 않고, 가정을 사랑하고, 뭐 다 모든 것을 잘합니다. 흠잡을 것이 없습니다. 또 막되어먹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이니까 모두 “저 사람처럼 살면 정말 모범답안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모범답안이고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빛 앞에서는 자기가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 앞에서 정결타고
자랑치는 못하리라.
물가지고 혹 씻든지
불가지고 사르든지
내 안과 밖 다 닦으사
내 속의 죄 멸하소서
고백입니다. 지극히 회개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도 정결타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끊임 없이 끊임 없이 발견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엄청난 둥치를 타고 자신의 밑바닥 속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오는 자기의 죄에 대한 인식 때문에 사도가 오늘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세요.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사모하기 전에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죄의 깊은 밑바닥의 그 뿌리가 어디에 닿았는지를 보세요. 여러분들은 분명히 “깊도다. 우리의 죄악의 심오함이여.” 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들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은 무엇입니까? “아, 바로 이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구나. 그리고 이렇게 나의 죄를 위해서 순결하신 자기의 옥체를 십자가에서 찢으셨는데도 한편으로는 그 사랑과 그 은혜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내가 이 죄와 결별하며 살 수 없는 사람이구나.”
그런 양쪽 두 사이의 긴장, 거기에서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 고백은 “나에게는 가장 커다란 은총이 임했으며 또 가장 커다란 은총이 필요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남보다 더 큰 용서, 다른 사람보다 오래 참으시는 사랑,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베푸신 값없는 자비가 자신에게 필요하다.”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인식과 참회가 있는 그곳에 항상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사유하심의 은혜가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사도바울이 오늘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로라.”라고 고백을 하는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서 경험하는 절망에서 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 앞에 속속들이 썩은 죄인이고 심지어는 그리스도 예수의 용서하시는 그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는 파렴치하기 이를 데 없는 죄인인데 그런 죄인들에게 주님이 은혜를 베푸시잖습니까.
그러면 마지막에 자기가 그런 자기의 죄인 됨과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사이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보일수 있는 어떤 의미에서 유일한 출구는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런 고백을 많이 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
왜? 우리같이 쓸모없고 주님을 대적하는 죄인들을 용서하셨고 지금도 이렇게 죄의 경향성과 결별하지 못하고 사는 인간들에게 은총을 베푸시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 자신이 모두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고 그리고 사나 죽으나 내가 주의 것이니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그것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매우 뛰어난 성도이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경험들은 우리와 함께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그 은혜에 대해서 깊이, 정말 놀라운 은혜라고 느끼는 것만큼 우리들이 그렇게 충성되게 살아가고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죠. 우리가 죄인이라고 확신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두려움과 뉘우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참된 회개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죄 속에서 고통하고 괴로워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대가를 치루셨다.”라고 하는 복음적인 사실을 믿고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머리로는 우리가 정말 쓸모없는 죄인이었고 죄인 중에 괴수였는데 그리스도께서 일체의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데 이것은 순전히 우리의 의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와 구원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철저하게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그것을 철저하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철저하게 느끼고 깨닫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에 발견하게 되는 자신의 소명이 뭐냐면 “이 쓸모없는 죄인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렇게 구해주셨으니 이제는 내가 이렇게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한다.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나 같은 죄인이 거룩하신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감격만큼 실재로 우리들이 그렇게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 때에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 우리들의 마음에 비쳐오게 되면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의 이중적인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죄에 대한 고백도 진실하고, 죄인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고백도 진실합니다. 그것이 정말 넘치는 하나님의 고백도 진실하고, 그래서 이제는 주를 위해서 사는 것 밖에 소망이 없다는 고백도 진실합니다. 고백은 그렇게 진실한데 자신의 삶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많은 사역을 하면서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면서 그는 승리에 도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무엇 때문이냐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말 유능하고 훌륭하게 헌신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훌륭하게 해 나가고 있다.”라고 자만심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수종들지 못한다고 하는 그러한 자기 인식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오늘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 우리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건져주신 십자가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 그리고 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이 신실하고 아름다운 헌신적인 하나님의 자녀의 삶, 그것을 하나님 앞에 요구받고 있는데 그것을 살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는 정말 우리로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하는 그 죄의 뿌리를 발견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역시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면서도 너무나 소망이 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자기 인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많이 입고 주님의 그 크신 구원의 은혜를 입었고 그리고 우리의 많은 악과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들을 주님께서 긍휼과 은총으로 갚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정말 우리들이 살았던 삶을 충성된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정말 우리들의 살았던 그 삶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구원과 십자가의 은혜에 어울리는 삶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 넓고 비할 데 없이 아낌없이 주시는 사랑인데 우리는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섬기셨던 것 같은 방식으로 주님을 섬기지를 못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끼는 것이 너무나 많았고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 것을 챙겨두신 것 없이 모든 것을 쏟아 부으셨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챙겨둔 것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포기할 수 없는 선을 긋고 주님을 위해서 충성한답시고 살았습니다. 우리의 생애 가운데 “아낌없이”라고 하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주님을 섬긴 적이 얼마나 있을까요.
주님이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죄인들을 구하시려 이 세상에 임하시는 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감격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말하지 않고 오히려 죄인들을 구하려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감격하며 찬송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성육신, 도성인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하늘의 영광을 비천한 육신 속에 감추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사시는 동안에 예수님이 세상의 생애에 계시는 동안에 마지막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까지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사신 그분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을 한다면 “아낌없이”의 생애였습니다.
그분의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것이었고 우리를 위해서는 그분 안에 아까운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그리고 풍성한 삶만 주실 수 있다면 그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가 있었고 우리에게 소유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던 장면과 포도주잔을 따라주시며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던 그 광경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떡을 찢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무엇이라고 말씀 하십니까.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사실이었습니다. 주님의 생애는 비록 30여년을 이 세상에 사셨지만 자기 자신의 생명에 대한 애착으로 그 긴 세월을 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33년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를 대속 제물로 주시기 위해서 자기를 준비하시기 위해서 사신 생애였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도 사람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을 때에도, 배척을 받을 때에도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아낌없이’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식후에 또한 잔을 가지사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 자기의 피를 따라서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아낌없이“의 생애였습니다. 그 찢어진 떡과 따라진 한 잔의 포도주는 결국 예수님의 전 생애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찢어지는 떡과 마시움을 당하는 포도주의 정신으로 예수님께서 아낌 없이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놀라운 구원의 사랑을 입은 우리들이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의 대안은 많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우리의 죄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생애라고는 오직 한 가지 선택 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기를 아낌없이 주심과 같이 그 구속의 사랑을 입은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 아낌없이 드리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유일한 대안입니다. 이렇게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아낌없이 자기를 주셨던 것처럼 십자가에 나타난 구속의 사랑을 가슴에 부둥켜안고 내게 있는 모든 소유, 우리에게 있는 건강, 우리의 생명, 우리의 인생의 날수들, 심지어는 우리의 마음까지라도 오로지 주님 한분께 모두 드리면서 주님 한분을 향해서 아끼는 것이 없는 생애를 사는 그런 생애를 삶으로서만 성도다운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실 때에 그분의 자유하시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일평생 그분은 얼마나 많은 욕설을 들으시고 반대로 칭찬을 받으시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임도 당하셨지만 그분이 그렇게 초연하실 수 있는 것은 자기를 우리를 위해서 아낌없이 드린 생애를 사셨기 때문에 자유인으로서 일생을 사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낌없이 자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항상 마음 한 구석에 두려움과 가책이 있습니다. 자기의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자기의 것을 너무나 많이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이 그의 마음의 어두운 그림자로 드리웁니다. 그러나 자기를 훌훌 벗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자기를 다 드리심 같이 그렇게 아낌없이 자기를 바치는 생애의 고귀함을 알고 주님을 위해서 자신을 모두 드리면서 사는 사람들의 인생은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주님이 우리를 향해 베풀어 주셨던 그 놀라운 사랑의 깊이를 알아가는 영적인 지식에 진보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실로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놀라운 아낌없이 바치신 그 사랑의 은혜를 입어 속죄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이제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우리도 주를 위해서 아낌없이 드리는 그런 인생을 살아야하는데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그 섬김에 자기를 다 드리지 못하는 아끼는 것이 너무나 많은 생애를 보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를 모르는 파렴치한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정말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재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 중에 괴수요.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한번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은혜로 돌아오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8.긍휼과 오래 참으심 때문에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1:16)
이어서 사도는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였다는 사실에 대조되는 하나님과 밎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죄인 중에 괴수일 수밖에 없는 자기가 지금 이렇게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서 구원받은 주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된 이 놀라운 변화는 어떻게 일어났는가? 여전히 자신이 죄인임을 현재적으로 끊임없이 확인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로 대하지 아니 하시는 이 놀라운 은혜가 나타난 방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제일먼저 사도는 긍휼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래 참으심에 대해서 말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러한 긍휼과 오래 참으심을 자기에게 베푸신 궁극적인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제일먼저 사도는 긍휼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긍휼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 그리고 그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하나님의 모든 행동까지 긍휼이라고 말합니다.
긍휼을 느껴보셨습니까?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일단 사람이 누구를 볼 때 어떤 감정을 강하게 가지면 그 감정이 그 사람의 지식까지 지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두 가지 기능을 주셨는데 하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판단하고 아는 이지적인 기능과 또 하나는 그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의 끌림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서 사물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두 가지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래서 둘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만 그러나 일단 마음으로 강하게 어떤 끌림이나 거부감이 오게 되면 그것이 지적인 활동에 굉장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첫눈에 너무 좋은 것입니다. 이제 노골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빙빙 돌리지 말고, 자매들이 이제 오래도록 시집을 안 갔다가 막판에 누구한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첫 번 만난 그 순간에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이 그렇게 충격을 받고 하나님 말씀에는 그렇게 충격을 안받던 사람이 어느 총각하나를 보고 아주 강력하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래서 본 그 순간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면서 사랑의 마음이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에 사랑이 자라면서 눈에도 콩 꺼풀이 같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상도 출신 어느 자매하고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우리는 서울에서 눈에 콩 꺼풀이 씌었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눈에 찌짐이 붙었다. 그런데요. 그런데 찌짐이 뭐냐하면 빈대떡입니다. 빈대떡이 눈에 팍 씌어서 안 보이는 것입니다. 찌짐이 붙었든 콩 꺼풀이 붙었든 다 좋은데 찌짐이 더 뜨겁겠죠?
콩 꺼풀은 그냥 조용히 씌워졌는데 그러니까 그것이 아주 진리입니다. 콩 꺼풀이 씌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마음에 끌림이 워낙 강한 나머지 이것이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판단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막 좋다. 그러는데 “그 사람이 과거에 여성 편력이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그래도 신경을 안 쓰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 사람의 유일한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뭐도 어떻다, 뭐도 어떻다는 등의 정확한 정보가 외부로부터 들어와도 전혀 입력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것이 정확한 것인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그것이 정욕이든 사랑하는 마음이든 확 끌리는 마음이 생기니까 모든 이지적인 판단이 거의 멈추는 것입니다.
사랑뿐만 아니라. 정반대의 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 사람이 나에게 해롭게 한 것도 없고, 내가 그 사람에게 무엇을 빌려준 것도 없는데 괜히 미운 사람이 있죠. 그렇죠? 그거 고개를 끄덕이면 되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왜 미워해요? 준 것도 없고 가져간 것도 없는데 가지고 간 것이 있어도 미워하면 안 되는데 “괜히 미운 사람 있죠?” 그러니까 아주 여러 사람이 고개를 아주 끄덕이는데 회개하세요. 예전에 예수님 믿기 전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겠죠. 그렇죠? 요즘은 없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일단 그 사람이 그렇게 미운 감정이 들거나 배척하는 감정이 들고나면 그 사람의 장점은 객관적으로 하나도 안보이고 마음에 안 들고 잘못된 것만 눈에 확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들어오는 이유는 뭐냐면 그런 것들이 자기 속에 있는 미움의 감정과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막 미워하는데 “야, 저사람 정말 훌륭한 사람이구나. 남을 위해서 저렇게 희생적이구나.” 그런 정보가 들어오면 마음하고 정보하고 안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 안에서 심리적으로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마음은 그런 것들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변동이 되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가는 눈치인데.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자기 마음의 움직임에 대해서 꿰뚫고 있어야합니다. 내 마음이 막 움직이면 “야, 내가 너 어디로 흘러가는지 안다.” 한 수 위에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잘 보세요. 그것은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느냐면 미워하던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그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은 완전히 나쁜 사람이냐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부부들이 무슨 문제를 가지고 부딪쳐서 상담을 하지 않습니까? 아내 얘기를 들으면 남편은 죽일 놈입니다. 남편 얘기 들으면 아내는 인간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한번 들었을 때 흥분하면 안 됩니다. 양쪽 이야기를 다 들어야합니다. 듣고 보면 둘 다 그렇게 좋은 사람도 아니고 둘 다 그렇게 나쁜 사람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느냐하면 미움의 감정이 딱 있으니까 다른 사람은 다 보는 그 사람의 좋은 점이 이 사람 속에 입력이 안 되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면 나쁜 것이 입력이 안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그래서 사물을 보고 인지하는 능력과 마음속에 끌리고 배척하는 마음의 경향,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사물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이야기가 오늘 긍휼을 이야기하면서 필요하냐 하면 이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속에 일어나는 작용이 하나님 마음 안에도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하나님의 완전하고 거룩하신 성품에 비추어서 볼 때에 인간이 누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결점이 안 보인다든지 누구를 미워하기 때문에 장점이 안 보인다든지 하는 것은 다분히 아주 부도덕한 면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타당하지 않은 면을 많이 가지고 있고 그리고 그런 작용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누군가를 이렇게 인간적인 사랑으로 뜨겁게 사랑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미워하는 것은 더더욱 자기를 위한 것이고 이런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는 점에서는 하나님의 그런 작용과 인간의 작용이 똑 같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도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긍휼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이야기할 때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 이것은 진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아주 굉장히 풍부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탕자의 비유는 이렇게 한 시간에 설교를 들을 것이 아니라. 6개월 내지 1년을 찬찬히 들을 때 그 속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이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커다란 세계를 하나 볼 수가 있는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나중에 하고 어쨌든지 간에 거기를 보세요. 아버지가 동구 밖에서 아들을 기다린 것입니다. 나간 날부터 기다린 것이라고 보아야합니다. 집을 찾아오기로 결심한 것은 아들이었는데 아버지가 먼저 발견했습니다. 아버지가 완전히 알거지가 되어서 몰골을 알아볼 수 없게끔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아들은 모습이 변했고. 아버지는 옛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런대도 아들이 아버지를 먼저 알아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아들을 딱 보는 그 순간 이 아들에 대한 모든 객관적인 판단이 스톱한 것입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확신이 없네? 자기네 편이라서 편드나? 잘못한 것이 있어요? 없어요? 잘못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엄밀하게 말하면 잘한 것이 하나도 없죠. 아버지가 살아계시는데 유산을 달라 그랬으니 불효막심한 인간이죠. 제산의 반을 달라 그래서 간 놈도 나쁜 놈이죠. 그것을 갖다가 허랑방탕하게 다 털어먹은 놈도 나쁜 놈이죠. 털어먹었으면 거기에서 죽어버리지 먹고 살 ep가 없으니까 밥이라도 한술 얻어먹겠다고 아버지 집으로 지금 다시 오고 있죠.
이렇게 많은 이것은 누군가의 감정적인 판단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초라한 몰골로 고개를 숙이고 쓰러질 듯이 걸어오는 아들을 보는 순간에 이 모든 객관적인 지식과 판단이 스톱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만 본 것입니까? 왜 그렇게 되었는가? 무엇이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들었는가? 그런 모든 이유와 판단은 스톱하고 '지금 현재 내 아들이 헐벗고 굶주렸으며 버림 받았고. 그리고 내 아들로서 몰골이 말이 아니고 심히 지친 가운데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오는구나.' 그것을 딱 보는 그 순간에 왈칵 솟아나는 그 감정, 이것이 긍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재산을 반을 나누어간 것도 잘한 것이고 허랑방탕한 것도 잘한 것이고 와서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반마저 가지고 가서 또 허랑방탕하게 살라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아버지에게 도덕적인 판단이 스톱된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있습니다. 살아있는 나에게 유산을 나누어달라. 그런 것도 잘못한 것이다. 그것을 돈으로 바꿔서 먼 나라에 간것도 잘못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허랑방탕하게 쓰고 그렇게 한 것도 잘못한 것이다. 그렇게 다 하고 마지막에 아버지의 집으로 그런 몰골로 돌아온 것도 잘못한 것이다.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힌 것도 다 잘못한 것이다. 이 객관적인 판단이 아버지에게 다 살아있어요? 안 살아있어요? 그대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데 그것이 스톱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마음의 강력한 끌림이 그 아들을 향해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 끌림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불쌍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배가고플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헐벗고 추웠을까?’ 그것이 아픔으로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긍휼이 있는 사람의 태도가 바로 그 아버지의 태도입니다. 확 달려가서 끌어안고 입맛추고 기뻐하면서 눈물도 흘렸겠죠. 그러면서 “이는 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온 아들이라”
긍휼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확 끌리고 불쌍히 여기는 감정이 없으니까 객관적인 판단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논리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결핍되었습니다. 보세요. “아이고 꼴좋다. 저렇게 거지가 된 것은 천벌을 받아서다. 그렇게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서 가더니 허랑방탕하지만 않았어도 저렇게 저 꼴은 되지 않았을 터인데” 그러면서 논리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하는데 그 사실의 진술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빠진 것은 뭐냐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버지가 그렇게 그 아들을 끌어안고 다시 맞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긍휼의 마음입니다.
사도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로서 핍박자요 포행자였다는 사실은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잘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 모든 지적인 판단을 잠시 멈추게 하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든지 간에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영생의 세계로부터 소외되어 있든지 간에 무엇 때문에 죄 가운데 살든지 간에 물론 그것은 바울 자신의 문제이겠죠.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든지 간에 그 판단을 스톱하고 유보하고 그렇게 핍박하는 자요. 포행자요.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요. 이렇게 살아가는 그 사람, 그러면서도 마음에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그 사람의 모습, 더군다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자기의 잘못을 회개할 때에 그 때에 그가 너무 불쌍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이 사도로 하여금 죄인 중에 괴수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게 만든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서 긍휼, 오래 참음이 나오는데 이것이 하나로 합치면 사랑입니다. 사랑을 그렇게 나누어서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세요소가 있는데 은혜와 그다음에 자비와 긍휼, 그다음에 오래 참음 이 세 가지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런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자기와 같이 아무 쓸모없는 죄인, 예수를 믿기 전에도 죄인이었고 예수 믿은 다음에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자기의 죄는 반복되면서 하나님 앞에 비참한 죄인이라는 것을 현재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자기를 하나님이 긍흉히 여겨주시어 그것 때문에 자신이 지금 그렇게 죄인 중에 괴수요. 그리고 아무 소망이 없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으로 또 사도로 예전에 핍박자요. 포행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놀라운 하나님의 일군으로서의 삶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긍휼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자격 없는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고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까? 물질적인 면에서 가난한 사람이 부자에게 찾아가서 “아이고 요즘 사업이 어려우시다더니 갈비밖에 못 드시고...” 이렇게 불쌍히 여길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긍휼은 항상 자기보다 훨씬 못한 사람들에 대한 그런 슬픈 사랑입니다. 그것이 긍휼의 마음입니다. 물론 그럴 수는 있죠. 물질이 아니라. 다른 면에서 내가 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내가 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 사람이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이 돈이 많고 부요해도 그 사람을 너무 불쌍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보세요. 하여튼 무엇이든지간에 가진 자가 없는 자게에 베푸는 그런 의미의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긍휼이라는 말 자체가 높으신 하나님, 완전하신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불쌍히 여겨주셔야 할 의무가 없는 가치 없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애정, 이것이라는 것을 벌써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가슴 아픈 애정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깨닫는 것이 뭐냐하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인식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향이 있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았다. 라고 하는 것이 마치 한번 통과하고나면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그런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 주님을 믿고 구원을 경험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자기의 죄인 됨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이 있었을 때에는 그것이 정확한 고백이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사라지고나면 무엇만 남느냐하면 “내가 왜 죄인이야.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인인데 나는 왕 같은 제사장인데, 나는 이제 정죄함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그러죠. 그래서 자기가 그렇게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는 것은 좋은데 내가 하나님 앞에 의인이요. 정죄함이 없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 강한 확신과 자부심은 그렇게 자기가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버리셨기 때문이라고 하는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는 확신은 그것은 확신이 아니라. 자만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성도의 축복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들을 우리에게 상기시켰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나서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일컬음을 받고 그리고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의 자리로 옮기게 된 이런 모든 신분과 모든 변화들은 오직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 은혜 때문에 가능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두 개를 같이 느껴야지 지금 믿고 있는 이 확신이 진정한 확신이지 이것은 없고 내가 이것만 확신하고 있는 그것은 하나의 자만입니다. 그런 자만을 누가 가졌느냐하면 바리세인들이 가졌습니다. 그들이 어떤 확신을 가졌습니까? ‘이스라엘은 선택된 백성이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확고한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은 안 되었습니다. 로마에게 짓밟혀서 구박을 받고 있는 주권을 잃어버린 상황인데 객관적으로 그런 것들을 입증할만한 어떤 역사적인 사건이 있느냐 하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것은 없어도 선민이라고 하는 큰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음입니다. ‘우리는 역사의 주인공이다. 하나님이 우리만 사랑하신다. 이방의 사람들은 모두 지옥의 땔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랬는데 문제는 뭐냐하면 그들이 결핍하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선택된 백성들을 위해서 베푸시는 구속의 은혜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강한 확신이 누구에 의해서 질타를 받습니까? 세례요한에 의해서 질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메시지와 예수님의 메시지가 동일합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등장하시면서 그것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도대체 이것이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자기네들이 천국 안에 살고 있는데 가까워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네들은 지금 천국밖에 있다는 것 아닙니까?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천국이 다가오면 기쁨이 되어야지 마치 커다란 무슨 돌덩어리가 굴러 내려오는 것처럼 “회개하라!” 그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돌이켜라. 안 돌이키면 하나님의 나라가 굴러 와서 너희들 모두를 깔아뭉갤 것이라는 그런 논리가 이 사람들의 생각에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심판이 될 수 있는가? 이렇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그릇된 확신이었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확신 때문에 유대인들이 누구를 못 보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못 본 것입니다.
그러한 사상적인 구도에서 희생된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면 바울이었습니다. 그러나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이 오래된 이 생각, 그 시대에 모든 유대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느냐 하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메시아 고난과 영광” 에서 몇 과인지는 지금 기억이 안 나는데 구속에 대해서 다루면서 상세하게 거짓된 메시아 사상 때문에 왜 그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는지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을 아주 깊이 이해하고 있으면 그렇게 예수님이 오셔서 기적을 보여주시고 말씀을 가르치고 그런 자비와 긍휼을 베푸셨는데도 그들이 왜 예수님을 못 만났는지에 대해서 아주 확연하게 이해할 수 있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러한 생각들이 어떻게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못 만나게 하는데 우리에게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느냐 하는 문제들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문제를 신앙과 은혜체험 Ⅱ라는 시리즈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라는 설교집이 나옵니다. 2-4개나오는데 거기에서 아주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필청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박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요. 그리고 자기가 돌아온 탕자와 같은 사람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자기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이 자기를 긍휼히 여겨주심으로 객관적으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모든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고 하는 깊은 은혜의 감격이 있고난 후에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는 정죄함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확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서 더욱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얼마나 경박한지 한번 보세요. 벌써 한 십 몇 년 지났는데 어느 수련회를 갔는데 청년들이 티셔츠를 입고 왔습니다. 왕관을 하나 그려놓고 “나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그렇게 써놓았습니다. 그 티를 입고 어디를 돌아다닐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하여튼 그것을 입고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티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예배시간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그리고 구호삼창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사실 그 말씀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제사장 나라의 백성이요.” 좋아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강한 확신과 자의식을 갖는 것은 좋은데 이전에 우리가 누구였는지 이전에 하나님을 거스르던 진노의 자식이었고, 마귀의 자식이었던 우리가 어떻게 거기에서 벗어나서 왕 같은 제사장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 거기에 대한 깊은 감격, 그것이 없이 내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갖는 그 자부심, 그것이 믿음일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똑같이 바리세인들이 가지고 있던 그러한 생각과 거의 유사한 것입니다. 그렇게 죄인 중에 괴수요. 마귀의 자식이요. 진노의 자식이었던 우리들이 왕 같은 제사장의 족속이 될 수 있는 그 중간에 있는 설명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곤고해진 것, 우리 자신의 잘못 때문이죠. 구원받지 못하고 계속해서 어그러진 길로 걸어갔던 것, 우리가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기 싫어했죠. 또 누군가가 정확하게 전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복음을 배척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지 못했던 우리들 안에 있는 이 많은 이유를 보시는 대신에 구원의 은혜가 필요한 우리의 핍절한 영혼, 주님 없이 살아가는 비참한 우리의 영혼,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정말 꼭 해야 되는 일이 많지만 그중에 하나가 뭐냐하면 윤락가에서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전도입니다. 여기에서 저쪽으로 심방 갈 때 차타고 밤에 지나가보면 꼭 가게를 푸줏간처럼 새빨갛게 불 들어오게 하고 (기분나빠서도 가겠어요?) 여자들이 이상한 잠옷 같은 것 걸치고 거기에 앉아서 담배도 피우고 그러면서 사람들을 유혹하는 아마 사창가인 모양입니다. 아직까지도 그런 것들이 이런 동네에도 남아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안 들어갑니다. 믿기 싫어서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복음이 접근이 안 됩니다. 거의 감금된 생활을 하고 그러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접근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웬만해야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지 복음을 받아들이면 근본적으로 자신의 삶에 기본적인 틀이 흔들린다고 생각할 때에는 사람들이 ( ? )자신뿐만 아니라. 그런 직업의 구조자체가 복음을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열린교회 맨 처음에 개척할 때 이쪽이 아니라. 저쪽, 오산당병원 쪽에 거기에다 하나 보고 왔는데 지하입니다. 어차피 자하로 갈 각오를 했으니까, 각오를 했다기보다는 현실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가서 가게를 막 들여다보니까 옆에서 여자애들이 둘쯤 나와서 너무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이런데 와서 될까?” 내가 그랬더니 “아, 무엇을 하실지 모르지만 잘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장사를 하실거냐고 물어서 우리는 멈칫멈칫하니까 꼭 이사 오라고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빨리 오라고 막그래요.
그러다가 나중에 교회가 오려고 한다고 그랬더니 막 펄펄뛰는 것이었습니다. 거기가 뭐하는 곳이었느냐면 퇴폐 이발소였습니다. 퇴패이발소 앞에 십자가가 불이 들어오면 썰렁한 거죠. 들어오면서 십자가가 이렇게 보이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밥맛이 있겠느냐고요. 옆에 무슨 달란 주점쯤 들어온다고 하면 아마 쌍수를 들고 환영했죠. 결국은 그 사람이 주인에게 전화해서 교회주면 우리 나가버린다고 해서 결국은 못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차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그러느냐면 우리들이 그러한 음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복음은 전할 때 그 사람의 도덕성이나 아니면 그 사람의 제산의 유무나 교육의 정도나 그런 것들을 봐서는 안 됩니다. 전도자의 마음은 그가 음부라고 할지라도 그가 사기꾼이요. 방금 손에 피를 묻히고 나온 살인자라고 할지라도 자기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멈춰서 객관적인 그런 사실들이 자기 안에서 스톱되게 만들어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런 것이 정말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키가 작달막하고 목이 짧고, 그리고 이마가 벗어지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인물이 아주 없고 저 같은 사람하고는 비교가 안 될정도로 인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배는 나오고 그리고 말은 잘 못하고 그리고 고집이 아주세고 독선적이었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진짜 사랑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 그렇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심지어는 로마의 황제까지도 불쌍히 여기면서 십자가의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목매이게 전할 수 있었던 그 원천적인 감화가 어디에서 나왔느냐하면 자기가 그 하나님께로부터 긍휼을 받아본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를 바라보실 때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순전히 고집쟁이요. 이 못되먹고 교회를 핍박하고 이런 모든 객관적인 사실이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사울을 보시는 순간 불쌍히 여기시는 그 긍휼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확 일어나는 순간 이것이 모두 스톱하는 것입니다. 누가 바울에게 복음을 전해주었습니까? 없잖아요. 사람이 전해보았자 워낙 아집이 강하고 독선이 강하고 이 사전에 자기에게 들어와 있는 그릇된 사상이 뿌리 깊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으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찾아 오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렇게 찾아오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객관적으로 사도바울이 그런 사랑을 입을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예수님이 그를 너무 불쌍하게 여기시니까 이 모든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지식이 스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긍휼의 삶입니다.
전도자들에게는 이런 마음이 필수적입니다. 그런 마음이 강하게 밀려들어오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로부터 자기가 경험한 마음입니다. 이것이 긍휼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긍휼의 마음이 사라지면 차가운 논리만 남습니다. “그렇게 가출하고 공부도 안하고 못된 짓 하더니 팔려가서 그딴 짓이나 하고 있구나. 인간쓰레기들.” 하면서 딱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체험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긍휼에 넘치는 사랑의 삶을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삶을 그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삶을 헌신적으로 살면서도 그가 자기가 그렇게 사람들을 사랑한 것에 대해서 조금도 자기가 자랑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죠. 죄인 중에 괴수인 자기를 긍휼히 여기셔서 자기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성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는 그 현제적인 긍휼의 체험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만든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능하게 하신 것, 주님이 나를 용서해 주신 것, 주님이 나를 능력 있게 하신 것, 주님이 나를 복음전파하게 하는 사람으로 삼으신 것, 죄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으로 삼으신 이 모든 것이 현재적으로 넘치는 주님의 긍휼이라는 그런 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도 삼으신 것도 당연한 것이 없고 나에게 능력을 주신 것도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고, 내게 이런저런 기회를 주시고 달란트를 주신 것도 내게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은 하나님의 긍휼에 넘치는 은혜가 자기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자기인식입니다. 자기 의가 설 수 있습니까?
특별히 교회를 열심히 섬기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채 말씀이 심겨지지 못한 채 열심히 일만하면서 신앙생활 해온 사람들에게는 항상 이런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고 은혜 속에 살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정말 쓸모없는 죄인이요. 그렇게 쓸모없는 죄인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주님이 자기를 구해주셨다고 하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체험이 없기 때문에 그 사이에 무엇이 쌓여 가느냐하면 자기 의가 쌓여가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도 했고. 무엇도 했고, 그러니까 아주 신앙의 세계에서는 정확한 것입니다. 자기가 크게 보이면 그리스도 예수가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크게 보이면 자기가 거의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죄인 중에 괴수처럼 산 것만은 아닙니다. 성자의 삶을 살았죠. 그렇죠? 결혼도 안했죠. 자기 재산도 없었죠. 자비량해서 자기와 자기 동행들의 먹고 입을 것을 대면서 사심 없이 영혼들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자기를 바치면서 섬기고 일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면서 살아온 것이 엄연한 사실인데 그런데 그것이 자기의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에 들어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왜? 자기와 같이 쓸모없는 죄인에게 넘친 하나님의 긍휼이 너무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똑같은 이치입니다. 뭐냐면 하나님의 마음이 긍휼에 넘치니까 우리의 죄에 대한 인식이 스톱되었듯이 주님이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감격에 넘치니까 자기가 일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아왔는데도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인데도 그것들에 대한 생각이 멈추고 자신의 인생은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빚 덩어리이며 하나님의 베풀어 주시는 모든 긍휼 때문에 지금의 자신이 있다고 하는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이나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것이나 거의 똑같은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면서 긍휼에 넘치는 마음을 가지시니까 우리가 그렇게 악한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는데도 그것에 대한 생각이 멈추면서 지금 곤비하고 곤고한 영혼, 고통 받는 영혼에 대한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한없이 넘치는 것이고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인 중에 괴수인 우리를 구속해 주신 십자가의 현재적인 긍휼을 경험하고나면 우리들이 열심히 주만을 위해서 살면서도 그것은 모두 멈추고 오직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그 긍휼에 넘치는 구속의 은혜, 그것만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긍휼에 넘치십니다. 그래서 “아, 불쌍한 나의 자녀”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현재적인 체험을 통해서 일생을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살면서도 주님을 위해서 살아온 내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오직 보이는 것은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 아무 쓸모없는 죄인을 그런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구나.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오로지 그 예수님의 또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에 넘치는 불쌍히 여기심을 입은 그 긍휼 덩어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두 사랑의 빚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인 쓸모없는 인간을 이렇게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 주님을 믿기 전에 오랜 세월동안 그렇게 살았는데도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우리의 아주 명백하고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입증할 수 있는 죄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그런 긍휼을 간직한 사람이 자기의 의를 버리고 자기의 의에 대한 자부심을 버리고 매순간마다 자기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밖에 의지할 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본다고 할 때에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이러한 것 정도는 하나님께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긍휼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네
그러니 어떻게 교만해 질수가 있겠습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고, 지금도 내가 살아가고 행하는 것으로 본다면 주님 앞에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없지만 주님이 거미줄 같은 믿음이나마 붙들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그래도 살지 못하지만 그래도 살려고 애를 쓰는 나의 몸부림을 보시면서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그 마음 때문에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의 모든 나 된 것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라는 고백 속에서 살아갈 때 그에게 십자가 이외에 무엇이 보이겠습니까? 정말 나는 쓸모없는 죄인이요. 그리고 내게 있는 모든 좋은 것은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요. 그리고 내가 주님 안에서 누리고 있는 이 영생도 주님을 통해서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긍휼 때문에 온 것이라고 하는 그 고백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긍휼의 빛 앞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사랑에 사로잡혀서 일평생 무릎이 닳도록 주님의 나라와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손발이 닳도록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가진재물을 다 드려서 하나님을 섬기고도 우리는 자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가 우리를 그렇게 살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 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인데도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속에 살 수 있다고 믿었던 두 번째 근거는 뭐냐하면 오래 참음입니다. 이 오래 참음은 두 가지 영역에서 사도에게 경험되었습니다. 하나는 구원의 역영이고 또 하는 성화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우리도 경험하는 바입니다.
우선 첫째로 구원의 영역에 있어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고 진짜 강권적으로 꺾어져서 굴복하고 주님을 받아들이고 나서 비로소 자기의 인생의 참 모습을 정직하게 성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예수님이 오래전부터 자기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자녀삼고 예수님의 일군 삼으시기 위해서 오래전부터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역하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는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아까 바울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람이 없다고 했지만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한사람 있었죠. 그것이 누구입니까? 그렇죠. 스데반. 스데반의 그 구원의 역사를 관통하는 장쾌한 설교, 제목을 붙이자면 “예수는 그리스도라” 이름할 수 있는 그 장쾌한 한편의 전도설교를 들은 것입니다.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들으면서도 예수님을 인정하기에는 충분한 내용의 설교였습니다. 그것마저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가편투표를 해서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는데 일조를 한 것입니다. 그렇죠. 그리고 그 사악한 피의 잔치에 의인을 피 흘려 죽이는 데에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참으신 것입니다. 그 때에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밀려오는 감격은 뭐냐하면 오래 참음의 감격이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의로운 사람, 스데반의 피 흘리는 증인이 되기까지 그리스도 예수를 거스렸는데.'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왜 스데반이 죽는데 가편투표를 하고 그 사악한 일에 증인이 되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스데반이 미워서가 아니라 누가 싫어서? 예수가 싫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왜? 예수를 알면서도 그 예수를 배척한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오래전에 사도바울을 부르셨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그 직전까지만 참아주셨다면 스데반의 죽는데 가편 투표하는 피의 잔치에 증인이 된 것을 보고는 예수님께서 보복의 칼을, 심판의 칼을 그에게 대셔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그렇게 안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안하시고 참으신 것입니다. 그 정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오래도록 참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 믿고 구원을 받고나면 가장 가슴 아픈 것이 뭐냐면 예수님이 그렇게 오래도록 우리를 기다리셨는데 기다리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그렇게 부르고 찾으셨는데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두 번만 기회를 주신 것이 아니라 ( ? )그래서 우리들이 이 하나님의 긍휼을 충분히 알기 전에는 심판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이 그 하나님 앞에 받은 그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오래도록 참으시는 그 하나님의 긍휼을 보세요. 우리는 모두 어떻게 착각하느냐하면 그런 특별한 긍휼은 나만 받았다고 착각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들 보기에는 정말 희망이 없는 그런 비참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 정말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원수처럼 행동하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그런 긍휼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이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단죄하겠습니까? 누가 그들에게 감히 희망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겨야합니다. 내게 임한 그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이 구원의 놀라운 은혜가 내게 그렇게 역사했던 것처럼 그렇게 오래 참으시는 것은 불타는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사랑하니까 오래 참는 것입니다. 그래 사랑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그것이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경험하면서 가장 강력하게 사랑의 속성을 체험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강해하면서 말씀드렸죠. 아직도 안 들으셨습니까? 그것을 13장을 알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들이 생소하게 들리는 것도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맥락입니다. 비교해서 관찰해보면 정확하게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그것이 곧 사랑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사도바울은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죄인 중에 괴수로 살아가던 자기 자신에게도 이런 구원의 은혜가 주어진 것입니다.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나는 저 사람보다 더 이 하나님을 애먹이면서 주님을 거절한 사람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면 낙망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누구입니까? 바로 그런 하나님이 오래도록 참으셨다, 하나님이 내가 구원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내 인생 속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사람들을 보내시고 양심에 가책을 주시고 영혼의 곤궁함을 경험하게 하셔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를 부르셨지만 내가 거절하면서 인생을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번의 거절로 마다하지 아니하시고 두 번의 거절로 마다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오래 참으시면서 우리에게 구원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인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 자기가 하나님을 찾은 것에 대해서 장황하게 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나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위해서 찾아오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수없이 구원에 이를 기회를 주셨지만 거절했던 패역함, 이런 것들이 대조를 이루는 간증이 훌륭한 간증입니다. 사도바울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어떻게 이런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을까? 요는 내가 하나님을 잘 찾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너무나 오래도록 참아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배운 성도들이 그렇게 오래 참으면서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정신을 가지고 영혼을 섬기고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자기 자신의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성화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오래 참음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제가 지난시간에 사도바울이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라”고백할 때 예전에 구원받기 전에 자기가 행했던 악한 삶을 보면서도 자기의 죄인 됨을 체험했지만 또 하나는 성화의 영역에서 자기의 죄인 됨을 경험했다. 그런 고백을 말씀드렸죠. 그렇죠. 여기에서도 똑같은 것입니다. 주님이 오래 참으시는 것, 한번 생각해보세요.
패역에 대해서 설교를 쭉 들었을 때에 “아, 진짜 내가 패역한 죄인이구나.” 많이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지 않습니까? 고친 사람도 있지만 안 고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전에는 몰라서 못 고쳤지만 다 가르쳐주었는데 왜 안 고치냐? 이제는 칼밖에 남은 것이 없다.” 그러면서 말씀 하나 들려주시면서 칼을 목에다 대시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서 모르기 때문에 지키지 못했을 때와 잘 알게 하셨는데도 지키지 아니할 때 주님이 우리를 각기 다르게 다루신다고 하는 것을 알아요. 그러나 이 성화의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렇게 뺀질대고 기도 안 해도 살아가지 않습니까? 기도 안했다고 갑자기 사업이 무너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잘라지고 애들이 머리가 터지고 그러면 그것 겁나서라도 어떻게 자겠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여러분 담대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이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이 주는 담대함이 아니라 그분의 오래 참음을 이용하려는 담대함입니다. ‘뭐, 어제도 손 안보셨는데 오늘도 넘어가시겠지. 그러면서 사는 거지.’ 하면서 게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심하세요. 그것도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으시면 또 우리가 변화가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영원히 참으시면 변화가 되겠습니까? 변화가 안 되지. 어제도 제가 병상세례를 주고 왔습니다. 부인이 교회 다닌다고 그렇게 핍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덜컥 아프고 드러눕고 말도 잘못 하고나니까 그 다음에는 세례 받고 싶다, 예수 믿고 싶다 그러더니 아멘, 아멘. 하면서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지만 그것을 믿고 담대해지면 안 됩니다. 오히려 “오래 참으시니 참 면목이 없구나. 왜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오래 참게만 해주는 사람일까? 내가 정말 주님의 뜻대로 돌이켜 서야지.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지.”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거스리면서 계속 불순종하고 주일도 지키도 않고 막 살아갈 때 하나님이 단번에 요절을 내리시면 세상에 두 사람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나가서 노는 사람하고,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사람하고, 믿는 사람은 아마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인격을 갖추지 않은 피조물에게는 이 오래 참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강아지에게 오래 참음을 기대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가진 도덕적 피조물들에게만 있는 본성입니다. 이렇게 오래 참음은 구원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성화의 영역에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면 굉장히 경건에 도움이 됩니다. 뭐냐면 우리는 성격이 불같지 않습니까? 한번 저사람 아니다 그러면 “어, 끝났어. 내 장부책에 그어놨어” 그러지 않습니까? 저도 좀 그런 악한 기질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1학년 애들이 들어와서 컨닝하다 걸리잖아요? 그러면 4년 동안 수첩에다 써놓았습니다. 그래가지고 학교에서 뭐라고 소문이 났느냐하면 “김남준 교수에게 걸리면 너희들 졸업은 꿈도 꾸지 마라. 결국은 찍어놨다가 네가 하나님 만나고 놀랍게 변화되기 전에는 그분을 전혀 기쁘시게 할 수없다.”고 났습니다.
그래서 1학년 때 컨닝하다 걸렸는데 3학년쯤 만나서 또 걸렸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덜렁덜렁 와서 자기도 잊어버렸죠. 그런데 수첩을 보면서 “너, 임마, 1학년 1학기 때도 한번 컨닝하다 걸렸지? 몇 월 몇 일 몇 째 시간에..” 참 백보좌의 심판도 아니고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나는 참 잘한다고 생각하고 했는데 세월이 흐르니까 별로 안 좋은 것 같았습니다. 물론 바르게 키우려고 그랬지만 그러나 그것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많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그렇습니까? 사람을 딱 찍어 놓지 않습니까? “야, 너는 나에게 찍혔어. 너는 이거야(/). 그어졌어.” 그렇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안그러셔요.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가 영혼을 위해서 일 하더라도 그 영혼이 도저히 우리의 섬김을 안 받아들이고 빗나갈 때에는 인간이니까 울컥하는 감정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아이고 잘났다. 그러고 왜 사냐? 인생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다분히 포기의 감정도 들어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그렇게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돌이킬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어떤 경우에는 이렇게 보면 “야, 진짜 저러면 안 되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저럴 수가 있을까?” 그냥 마음에 원하는 바는 하나님이 그냥 본대를 보여주어서 주위에 있는 비슷한 많은 사람들이 통회자복하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인간의 사악한 마음입니다. 진짜 부흥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아, 그 인간을 하나님이 한번 손 좀 보셨으면..”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오래 참으십니다. 일체의 오래 참으심으로 그러니까 어떤 영역에서 한두 군데에서는 오래참고 어떤 데서는 안 참으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을 거스리는 영역에서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영역에서뿐만이 아니라. 성화의 영역에서도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 빨리빨리 안자라신다고 하나님이 두들겨 패시는 것 보셨습니까. 여러분들이 믿음이 빨리 자라지 않는다고 여러분들이 회개 빨리 빨리 안한다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두들겨 패시는 것 봤느냐고요? 물론 그러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적이십니다.
오늘 수요예배에 모든 사람들이 집중해서 말씀의 은혜를 받고 있는데 뒤에서 계속 졸거나 만화책이나 보고 간다고 해서 하나님이 오늘 밤에 데려가시는 것 아닙니다. 왜? 이번 수요일은 그렇게 게겼지만 다음 수요일은 와서 회개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지를 알면 하나님을 그렇게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사랑하고 하나님 의지하면서 십자가 사랑하면서 주님의 그 눈빛 앞에서 살아가는 것 말고 다른 인생에 대안이 있다면 모를까 없는데 그렇게 주님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내일도 기회가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짜 그에게 티끌만큼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아는 지식의 빛이 있다면 그럴 수가 있느냐고요. 그 사랑을 빙자하여 하나님 앞에 더 불순종하고 주님을 거스리는 기회로 삼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껏 기다리게 해드린 것도 마음이 아픈데 이제는 열심히 잘 살아드려야지요.
저는 요즘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습니다. 요즘 어떻게 그렇게 세월이 빨리 가요? 너무너무 세월이 빨리 가요. 눈 깜짝하면 주일이고 눈 깜짝하면 한 달, 눈 깜짝하면 두 달, 그리고 지나가는데 이제 이 인생의 남은 날은 얼마나 될까? 그렇게 빨리빨리 지나갑니다. 빨리빨리 변화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성화의 영역에서 언제까지 우리 주님을 기다리게 할까? 그렇죠?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오래 기다리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속히 돌이키게 하시기 위한 그래서 주님의 인내를, 주님을 거스리는 기회로 삼지 말고 오히려 주님이 그렇게 오래도록 우리를 기다리셨으니 이제는 탕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가 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리라.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주님을 기다리게 하지 않는 그런 신앙, 그런 은혜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중적으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렇죠. 사도바울을 보면 그렇게 주님을 크게 만났는데도 자기 안에서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인간적인 옛 성품들이 자기 고백 말고도 언뜻언뜻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바나바가 자기의 회심을 입증해 주지 않았으면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바울의 회심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나바하고 대판 싸우지 않습니까? 아직 다음어지지 않은 신앙의 인격입니다. 그런 모난 모습들을 주님이 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변해서 주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으로 변해가기까지 주님이 오래 참으심을 경험한 것입니다. 주님이 오래 참으신, 즉 그리스도의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그 그리스도를 통해 발견한 하나님의 사랑이 오래 참으시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그는 속히속히 하나님 앞에 변화되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면서 더 많이 더 빨리, 더 속히, 그분의 성품을 닮으면서 살아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성화의 요구입니다.
주님을 욕보이고 우리의 부족한 행실, 우리의 불결한 행실, 그리고 우리의 짐승과 같은 삶으로 주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온 날들은 지난날로도 충분합니다. 너무너무 많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인생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더 순도 높은 삶을 살아야합니다. 옛날에 살아온 삶이 거짓으로 가득한 삶이었으니까 지금은 배나 진실하게 살아야합니다. 옛날에는 입을 열면 모두 거짓말만 하면서 그렇게 살아온 생애였으니까 이제는 고난을 받더라도 더 배나 갑절이나 정직하게 살아야합니다. 옛날에 주님을 거스리면서 야비하게 살아왔으니까 이제 성결하게 살아야합니다.
지난날들의 우리의 잘못된 행실로 주님께 입혀드렸던 불명예와 손해, 그분의 이름을 업수이 여기는 세상에 주님을 거스릴 빌미를 주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이 그렇게 오래 참으셔서 우리를 여기까지 두셨으니까 이제는 속히속히 변화되어서 정말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를 보고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예전에 주님 사랑하지 않고 세상 사랑했으니까 이제는 배나 더 주님을 사랑해야합니다. 예전에는 나만을 위해서 살았으니까.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합니다. 그렇죠. 예전에 주님섬기면서 사는 날이 거의 없었으니까 이제 이렇게 오랫동안 참으시면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하셨으니까 일체의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에게 긍휼을 보이셔서 이만큼이나 하나님 앞에 살게 하셨으니까 이제는 더 많이 주님 섬기고 주님밖에 우리의 인생에 소중한분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살아도 우리의 남은 날들이 얼마나 짧은지 모릅니다. 나이가 먹고 세월이 흘러갈수록 우리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려고 충만해도 우리의 몸이 우리의 마음을 실천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그래서 젊은 날 더 주님을 위해서 살고, 그렇게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이든 사람들은 더 나이가 들어서 기력이 쇠하기 전에 더 이상 주님을 기다리게 하지 말고 정말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로 성화되어서 주를 위해서 살아야합니다.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긍휼을 입은 사실은 죄인이요. 오래 참으심을 입은 사실은 주님을 거스리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면서 그러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예수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는 성도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9.성도 중 지극히 작은 자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3:8)
고린도서에서 사도가 자기가 모든 사도들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을 한 것을 우리가 몇 주전에 설교를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에베소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를 사도들과 비교하기는커녕 성도들과 비교하면서 모든 성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자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사도바울의 겸손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그의 겸손의 덕성을 드러내준다기보다는 그가 가지고 있는 소명의 한복판에 있었던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의, 또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인식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대목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어떻게 사도로서 소명을 받게 되었죠. 어떻게 해서 잘래의 전도가 유망한 유대인 종교 지도자의 길을 가던 젊은이가 선회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전파하고 증거하는 증인이 될 수 있었죠? 이런 소명을 주님께로 받은 것은 그리스도 예수와의 직접적인 만남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자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나니까 이제껏 알고 있었던 모든 신앙의 지식에 새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리고 구약의 모든 역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한분을 향해서 달음질쳐 오고 있었고 이후에 이어질 놀라운 인류 구원의 역사가 그리스도 예수 한분을 통해서 달음박질을 할 것은 예수님께서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나처럼 알지 못하면 예전의 나처럼 하나님을 거스리고 대적하며 살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고 이제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속히 사람들에게 이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인 것을 증거하여 그리스도가 예수신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스리고 대적하면서도 그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인 것 처럼 오해하고 사는 많은 사람들을 건져내야 되겠다고 하는 사명감에 불붙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불붙는 사명감을 느끼는 그 핵심부에 무엇이 있었느냐하면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과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가 바로 이 세상의 인류의 유일한 구주시라는 것 그래서 내가 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복음을 전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신적인 강제력에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소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주 자기가 둘인 것처럼 말합니다. 자기 안에 자기 말고 누군가가 또 있어서 그 누군가가 바로 이 소명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자기를 촉구하고 그리고 격려하고 그리고 자기를 몰아가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다른 누군가가 사도바울 안에 자리하고 있다기 보다는 사도바울의 모든 삶을 통틀어볼 때 그 속에 있었던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 하나님 자신의 구원의 은혜가 그를 움직이고 있는 강한 신앙의 강제력입니다. 그것이 그의 소명의 핵심부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 자기가 철저하게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그 깨달음이 바로 자기를 ‘모든 사도’가 아니라. 이번에는 ‘성도’들과 비교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선 사도는 모든 성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기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사도가 그렇게 훌륭게 되었고 그렇게 훌륭한 일군이 되어서 지금도 에베소에 있는 많은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이 때에 에베소 교인들이 대부분이 사도바울의 전도로 말미암아서 주님을 믿게 되었는데 왜 자기가 복음 안에서 낳은 그 성도들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나는 너희들만도 못한 사람이다. 정말 못한 사람인데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아무 쓸모없는 그러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면서 모든 성도들과 비교해도 정말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낮고천한 사람이 바로 자기라고 고백하고 있을까요? 왜 지금 이 사람이 그렇게 고백을 하게 되었을까요?
사실 이 고백이 적합한 고백이라고 할수있습니까? 우리가 이 사도가 자기가 모든 사도들보다 자기가 정말 낮고천한 자라고 고백을 할 때에는 우리들이 그래도 들어줄 수 있었습니다. 정말 사도바울이 우리만 못한 사람입니까? 우리보다도 더 작은 사람입니까? 우리보다도 더 모자란 사람입니까? 사도바울은 이 지상에 살았던 모든 성도들의 모델입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죄인으로서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성도의 모델입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사람들, 그것도 자기가 복음을 전해서 신앙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만들어준 이 에베소서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모든 성도들이 있는데 그 너희 모든 성도들 앞에서 나는 제일 적은자다. 사도가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큰 능력을 가진 사람, 귀신들린 자를 내어 쫓고 병든 자를 일으켜 세웠죠.
에베소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아십니까?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커다란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면서 그러면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때 하나님이 쓰신 도구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사도바울 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주님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적인 생애를 사셨습니까? 결혼도 하지 않고 주님만 사랑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죽도록 얻어맞고 죽도록 배고프면 죽도록 고생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모두 그리스도와 및 그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은 순교의 길을 갈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가 복음 안에서 낳은 에베소서 교회 교인들에게 자신이 그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아도 사도바울의 이 이야기가 맞는 것 같지 않죠?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하게 된 것일까요? 사도바울이 이렇게 그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훌륭한 삶을 살고, 그들과는 비교도 안 될정도로 헌신적인 삶을 살고,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주님의 일을 많이 하면서 산 이 사도바울, 그래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 옥에 갇히기도 하고 죽음의 위협을 맞이히기도 했던 이 헌신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그 모든 성도들 가운데 자기가 가장 작은 자라 그러는데 여기에서 ‘작다’라고 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치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확실히 주님을 믿고 난 후에 바깥으로 들어난 자기의 객관적인 삶의 업적이나 사역의 크기나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었을까? 첫째는 사도바울은 디모데전서 에서도 그랬듯이 여기에서도 자기가 성도가 되었지만 성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첫째는 예수 믿기 전에 행한 자신의 악한 일들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시겠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모든 죄를 용서하셨는데 어떻게 또 옛날에 예수 믿기 전에 잘못되었던 것 그것을 가슴에 쓸어안고 그렇게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들이 유의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조심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거룩의 빛 앞에서 즉 하나님의 영광의 은혜의 빛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나아가도록 만들어주고 자기가 그런 신앙적인 빛에서 자기를 본 것이 아니라 자기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자기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자학하는데서 오는 자기가 잘못된 인간이라고 하는 자기 인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학증세에 빠진 사람들도 자기를 아주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도 자기가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학증세에 빠져서 “난 쓸모없는 인간이야.”하고 자학하는 사람은 그렇게 자학하기 때문에 자꾸 쓸모없는 삶을 살아가요.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의 빛 앞에서 자기가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쓸 모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더 쓸 모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 밖에서 사회에 있는 교육학자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자녀들에게 자꾸 이렇게 자존감을 길러주라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이제 무엇 때문이냐면 그런 것들을 자꾸 꺾으면 아이들이 자학증세에 빠집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하면 다른 사람들하고 모였을 때도 자기는 항상 죽어지내야 하고 굴복해야하고 그렀습니다. 그런데 그런 증상이 계속되게 되면 나중에는 이 사람이 진짜 쓸모없는 일만 하는 사람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음식점에 가서 무엇을 시키지 않습니까? 음식점에 가서 무엇을 시키는데 그것도 참 보면 외국에 가서 밥을 먹어보고 여기에 와서 밥을 먹어보면 참 사람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한번 미국에 집회를 가서 식사를 하는데 한 20명이 앉아서 식사를 하는데 스테이크 집에를 들어갔는데 스테이크 요리도 팔고 생선 요리도 팔고 하는 그런 양식당입니다. 그런데 주문을 받는 데만 20분이 걸리더라고요. 한 아가씨가 와서 주문을 받는데 그 주문이 고기는 어떻게 구워주랴, 다 익혀주랴, 겉만 익혀주랴. 뭘 해주랴, 많이 구워주랴 부터 시작해서 감자는 튀겨주랴, 삶아주랴, 구워주랴, 이렇게 썰은 것을 주랴, 으껜 것을 주랴, 그리고 막 계란은 이렇게 부쳐서 완전히 익혀주랴, 아니면 위만 살짝 익혀주랴, 그 익힌 것도 그냥 오븐에 익히랴, 아니면 돼지기름에 익히랴..?
아니 아무거나 먹으면 되지. 그것을 다 물어 보는데 20분이 걸려요. 우리 같으면 “너 뭐먹을래?” “갈비탕.” “넌 뭐 먹을래?” “곰탕.” “야, 하나로 시켜.” 그러면 주인이 와서 그러죠. “아저씨 통일하면 빨리 나와요.” “난 갈비탕.” “난 곰탕.” “난 육개장.” “아, 빨리 나온다잖아. 곰탕.” “난 설렁탕 먹을 건데..” “색깔도 똑같은데.. 아줌마, 곰탕 10개, 통일! 끝.” 미국에서 그러면 아마 맞아죽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가지고 옵니다.
그러니까 내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자기생각과 주장이 자꾸 주위 사람에 의해서 꺾이는 것을 (너무 유별나게 살아서도 안되겠지만) 꺾이고 밟히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너는 그래, 무엇을 먹겠다고 주장도 못하냐?” 그랬더니 하는 이야기가 “돈도 안내는데 뭘 자꾸 그래? 사주는 사람이 주권을 가지고 있지.” 허긴 그래요. 그래도 먹는 것은 나인데 이렇게 억눌려서 자꾸 짓밟혀서 지내면 자존감을 잃어버린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꾸 짓밟히면 나중에는 진짜 쓸모없는 사람이 됩니다. 우유부단하고 결단도 없고 자기주장도 없고 언제든지 가기가 하는 일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이 나아보이고 항상 이런 비교의식과 열등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세계에서는 다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깊이 깨닫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전혀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그다음에는 예전에 자기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보다도 더 많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자기는 너무 쓸모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 생각을 따라서 살면 안 된다고 하는 확신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는 쓸모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생각을 따라서 살면 안 된다는 확신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 성령님의 뜻을 좇아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자기가 쓸모없다고 생각하니까 쓸모 있는 삶을 살아가고 이쪽은 자기가 쓸모없다고 생각하니까 쓸모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절대적으로 기억해야합니다. 아이들이 자랄 때 절대로 억압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망아지새끼 낳아 기르듯이 막 말 갈 데 소 갈 데 그렇게 가게해선 안되지만 아이들이 그렇게 잘 자라도록, 억압하지 말아야합니다. 시험 성적 잘못 맞았다고 작대기 가지고 반쯤잡고 그러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고 뭐 좀 잘못했다고 해서 막 이놈의 자식. 해가지고 어마어마한 폭력을 가해서 납작 엎드려져서 아버지 소리만 들으면 벌벌 기게 만들려고 그러는 가족이 있는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 집 애들은 내말이라면 꼼짝 못한다고 그러는데 사실 그 부모말만 꼼짝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는 다른 사람이 이야기 도 꼼짝 못합니다. 그렇게 기르면 안됩니다. 그것은 인간성을 억압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공부를 잘하게 하고 싶으면 공부를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자기를 예를 들면서 다보여줘서 그래서 그러면 안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해야지. 웃으시는 분들은 상당히 적용이 뛰어나신 분들입니다. 저 뒤에는 아직 무슨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가 스스로 이것을 갖게끔 만들어야합니다.
더군다나 이제 아이들이 커지면 절대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해서 공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갖다가 인간성을 거의 바보로 만들다시피 해서는 안됩니다. 자기 주위 주장을 가지고 살게끔 만들어야합니다. 그리고 존중해주고 잘못된 것은 그것을 설득해서 그것을 버리게 만들고 이렇게 하면서 아이가 논리를 따라서 사고를 따라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이제 자존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앙의 세계에서는 사도바울이 오늘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자기가 왜 그렇게 많은 성도들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라.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옛날에 자기가 한 것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세요. 우리들이 확실히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셨는데도 그것을 용서받지 못했다라고 생각하는 자책감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우리의 올무가 되어서 우리를 올바르게 신앙생활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자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예전에 흉악한 죄인이요. 죄인 중에 괴수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자기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 사실을 못 믿기 때문에 지금 자꾸 옛날에 한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 용서해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옛날에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을 잊지는 않는 것입니다. 거기의 얽매여 있지는 않는데 잊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으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상기시키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너희가 원래는 떠돌아다니던 그런 족속들이었는데 그런데 너희들이 애굽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많은 민족이 되었고 그 때에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너희를 구원하도록 말씀하셨고 그래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땅으로 너희들을 데려오셨다.”
지금은 유리하는 백성들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족속도 아니고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는 민족도 아닙니다. 이제는 가나안 땅에서 정착해서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나게 할 때마다 옛날에 그 가나안에 들어오지 못했을 때 살았던 이스라엘의 비참한 형편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유리방황하는 비참한 압박받는 소수민족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지금은 이렇게 강대한 나라를 이루었지만 옛날에 너희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형태라 그래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자의 삶 속에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용서하셨습니다. 내가 옛날에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것에 대해서 지금도 막 괴로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왜 옛날에 예수님을 핍박했을까? 아, 슬프다.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인생을 살고 예수님을 박해한 인간이 내가 어떻게 예수님의 얼굴을 뵈올수 있겠는가?” 그리고 신세타령 하면서 술이나 마시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이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리스도 앞에서 누구였는지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은 수많은 사람이 영적인 아버지라고 불러요. 지금은 이 사람을 사도중의 사도라고 불러요. 이방인의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러요. 이 사람이 생각하고 가르치는 내용이 신앙의 표준이 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장본인이고,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며 그리고 동족을 죽는데 까지 내어준 그런 아주 못된 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지않 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 속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이전에 하나님 앞에 자기가 누구였는지 그 모습조차 새카맣게 잊어버린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 속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나는 이제 정죄함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입니다. 그 확신 속에서 살지만 여전히 동시에 예전에 자기가 누구였었는가 하는 것에 인식은 잊어버리고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구원의 확신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전혀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를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확신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 한번주신 구원의 은혜가 불변한다는 것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또 믿고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구원해 주시기 전에는 자기는 그리스도 예수를 심히 거스리는 그런 일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나게 그리스도를 박해하고 교회를 핍박하고 주님의 영광을 훼방하면서 살던 막 되먹은 인간이었다라고 하는 인식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자기가 복음은 전해서 구원을 얻게 된 성도들과도 비교를 하면서 너희들 중에서도 나는 가장 작은 성도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사도바울이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역시 성화의 도상에서 깨닫게 된 정직한 자기 인식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무슨뜻이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을 사도 중에 사도라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을 이방인 선교의 아버지ㅇ오. 라고 사도중의 사도요. 일군중에 일군이라고 불러요. 그런데 이 사람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추앙을 받고 존경을 받고 그들의 신앙의 모델로서 인정을 받고 있었지만 사도바울의 시선에는 자기를 그렇게 추앙하는 사람들의 평가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자녀로서 자기가 살아가야할 삶에 한 목표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뭐에요? 성화의 목표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붙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삶, 인격과 성품이 주님을 닮아가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삶이 온전히 하나님 섬기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사도바울이 지향하고 있는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그 목표가 자기가 가야할, 도달해야할 고을이라고 생각하고 가다보니까 그 ( ? )보고 있는 동안에 자기가 전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고 자기가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아가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 불가능할까요. 살아가면서 사람들의 박수갈채에나 귀를 기울이고 자기를 칭찬하는 소리 아첨하는 사람들이나 옆에 두고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굉장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한분만 깊이 의식하면서 그분의 거룩의 빛 앞에서 자기의 죄를 보고, 그분의 영광 앞에서 자기의 비천함을 보고, 그분의 능력 앞에서 자기의 무능함을 보고, 그분의 진시하심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될 때에 사람들의 박수 소리하고 자기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 사람들 앞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 자기를 십자가에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입니다. 더군다가 자기와 같이 그런 인간을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 그것을 볼 때에 그런 성화의 도상에서 자기가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의 눈 빛앞 에서 자기를 비춰보면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할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비교가 없습니다.
사랑이 절대적인 것처럼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투기하지 않으며 그것을 제가 두 시간 동안 길게 설교를 하면서 왜 진정한 사랑이 왜 투기하지 않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골자가 무엇입니까. 인간에 대한 사랑은 상대적일 수 있는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경험은 모두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쉽게 이야기하면 한 여자가 생각하기에 내가 저 남자로부터 한없이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똑 같이 그렇게 자기처럼 사랑해주는 사람이 또 하나 있다면 완전히 다 깡그리 날아가는 것입니다. 칼 들고 좇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여태까지 자기를 사랑해 준 것이 자기에게는 모욕이 되는 것입니다. 아주 더러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람도 다 사랑해주시고 이 사람도 다 사랑해주시고 그중에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할머니도 있고, 할아버지도 있고, 심지어는 내 원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요즘에 하나님이 김 집사에게 은혜를 많이 주신다고 그래서 박 집사가 소외감을 느낄 수 있습니까? 느낀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진짜로 혈기가 있고 육적일 때는 누가 은혜를 받는 것 보면 심사가 틀립니다. 그렇죠? “은혜 받았데. 은혜, 그것 건전한 걸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디 가서 이상한 것 해온 것 아니야?” “아니래. 진짜 제대로 받았데.” “그것 뭐 어쩌다 받았겠지.” “아니래. 하나님 말씀을 잘 깨달았데.” “그것 오해한 것 아니야. 그것 순 감정적인 것 아니야.” 이러죠. 그것은 왜 그래요? 사람 자신이 그러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은 우리가 불쌍히 여겨야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다 들어야합니다. 그래야 이야기가 됩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그것은 그만두고 투기하지 않는 것처럼 똑같이 똑같은 원리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의 빛 앞에서 자기를 비춰볼 때에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깊은 인식은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그런데 옆에서 누가 더 울면서 “하나님 내가 정말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러면서 회개를 한단 말이죠. "그러면 내가 제일 죄인이 아니네?"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아니, 죄인 중에 괴수가 많네? 그러면 난 좀 낫네?" 그렇게 생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이 성격이 두 개가 사랑에 대한 경험과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죄인된 인식의 경험이 똑같습니다. 이것이 성화의 도성에서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인식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도바울이 고백한 것입니다. 물론 자기는 회개했습니다. 물론 자기는 주의 일을 많이 했습니다. 물론 자기는 헌신적으로 살았습니다. 물론 자기는 주님을 위해서 죽을 각오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각오가 되어있는 것과는 상관없니 아직까지도 자기 안에 있는 죄를 봅니다. 생명도 버리고 목숨도 주를 위해서 바치고, 이 복음 전하다가 피 뿌리며 죽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여전히 자기 안에 있는 부패한 욕망, 주님을 거스리고자 하는 대적하는 본성을 봅니다.
주님이 오셔서 “어떻게 나를 위해서 죽겠다는 네놈이 네 속에 나를 거스리는 마음이 있느냐?” 그러면 할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사실이고 저것도 사실입니다. 그 때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 때 누가 자기를 향해서 박수를 치고, 칭찬하고 그러는 것이 눈에 들어와요. 안 들어옵니다. 절대적인 인식입니다. 그 인식을 하고나니까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성도들이 자기보다는 낫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적절한 칭찬은 모르지만 지나친 칭찬은 우리의 영혼에 아주 위험한 독이 됩니다.
부산을 제가 갔다 왔습니다. 3일 동안, 선생님들이 많이 모여서 거기에서 강의를 했는데 나를 세미나에 불러간 목사님이 계신데 젊은 목사님입니다. 외국에서 유학도 하고 오고 교회를 열심히 개척해서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매우 월요일마다 인터넷에 들어와서 우리교회 설교를 거의 다 듣는데요. 그래서 자기가 개인적으로 인터넷을 하면서 예배를 드린다 그래요. 그래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하면 “목사님, 저 사실은 목사님 대게 사랑합니다.” 징그럽게 무슨 목사가 목사를 사랑해요? 그리고 뭐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결론은 “실망하지 마시고 기대를 접으시오. 나중에 또 ‘아, 실망했다.’ 그러지 말고 기대를 접으시오. 주님 바라보며 삽시다.”
우리에게는 말이죠. 이런 생각이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이 만약에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자기를 생각했더라면 누구하고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제일 낫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그렇지 않습니까? 선교를 위해서 희생한 것을 생각하면 누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는 이 고백은 그런 비교에서 온 인식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의 그 은혜와 거룩의 빛 앞에서 자기의 옛 존재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그리고 지금 주님이 그 큰 은혜와 사랑을 주셨는데도 자기 안에 주님을 거스리는 수많은 악들, 그리고 부패한 욕망들,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악한 본성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해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에 비친 선교의 아버지, 능력있는 사도, 헌신적인 일군, 수많은 제자들과 교인들을 길러낸 목회자, 선교사 이런 주위의 수많은 사람의 평판을 통해서 자기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홀로 무릎을 꿇고 있을 때 떠오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 그 빛 앞에서 자기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성도들 중에 나는 지극히 작은 자라는 이런 고백이 나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과 비교해서 성도들과 서로 키 제기를 해서 자기가 가장 작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부패를 깊이 깨닫고 나니까. 나 같은 죄인이 어디에 또 있을까.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성도들이 나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크게 두 번째로 사도바울이 그러면 이런 인식, 성도 중에 자장 작은 자라고 하는 이 인식,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주님을 믿기 전에 자신의 삶, 그리고 두 번째는 성화의 도상에서 경험하는 이 자기인식을 통해서 자기가 그렇게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을 했다면 그러면 크게 두 번째로 그런 고백이 사도바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그것은 바로 그런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안 그 고백이 그로하여금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무슨뜻입니까?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주님을 인정한다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죠? 그렇죠? 자기는 그렇게 철저하게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인식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빛 앞에서 가졌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절망하는 대신에 그렇게 쓸모없는 인간을 주님이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자기는 주님을 위해서 살뿐이고 주님을 위해서 자신이 산다고 하더라도 역시 자기를 그렇게 살게 하시는 분은 주님 자신이셨다고 하는 고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것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보면 주님 만났습니다. 헌신적입니다. 주를 위해서 재산도 버리고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열성적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죽을 각오도 되어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결핍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종처럼 낮아져서 섬기는 자세 이것은 헌신이 자동적으로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감이 자동적으로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가 이 맡은 사역에 있어서 성공을 해야되겠다고 하는 집념이 가져온 것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 한분 앞에서 자기가 홀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그 죄인 됨에 절망한 나머지 주님의 은혜밖에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하는 철저한 그리스도 의존적인 사고, 그리스도를 의존하는 철저한 의존적인 신앙, 그것만이 그로 하여금 제자들의 발의 씻기신 그리스도 예수의 본을 따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주님께 은혜를 받아서 사명을 받아서 열심히 주를 위해서 일할 때에 사실 얼마나 신이 납니까? 신앙이 조금만 있으면 얼마나 신나요? 주님이 나를 쓰시는데? 그런데 신기한 것이 주님이 그 사람을 많이 쓰시는데 그 사람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철저한 자기 인식이 계속 확인되지 않으면,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 앞에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자기의 원래의 모습에 대한 인식이 반복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주님이 많이 쓰시면 나중에는 주님이 자기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주님을 사용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뀌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생애를 보면 지금 사도바울의 이 고백을 보면 사도바울 선생님 뭐 좀 자랑할 것이 있으세요.? 어디 좀 한번 내놔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을 내놓겠습니까? 아하, 좀 보여줄까? 세계선교는 내가 했지. 이방인에게 전도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그래. 내가 기도할때처럼 성령이 쏟아져본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보라그래. 베드로 계도 나한테 한수 배워야되. 이렇게 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넓은 땅덩어리 누가 다 십자가 깃발꼿았어. 그렇게 이야기 할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니 성도중에 자기는 지극히 작은 자라면서 내가 죄인중에 괴수로라. 그러는 사람이 그것을 이야기 할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나 사역에 있어서 우리들이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그 근원자체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이 자체도 엄청난 교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나는 성도들 중 가장 작은자다. 그렇게 고백을 하면서 그 작은자만도 못한 그런 자신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고백할 때 이 사람에게서 어떤 자랑거리를 발견할수 있습니까. 없죠. 그러니까 어떻게해요. 더더욱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속에서 주님이 자기를 훌륭하게 쓰셔도 자기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자기 고백이 철절하게 있어서 사도는 고사하고 성도들중에 나는 가장 작은자이며 성도는 고사하고 나는 죄인들 중에 나는 괴수일뿐이로라.고 하는 고백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가 쌓일수가 없습니다. 물론 자기 일 많이 했죠. 많이했는데 자기가 많은 일을보면서 희망을 갖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한사람의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앞에서 자기가 누구인가를 깨달으면 스며들어오는 절망감이 훨씬 큰데 어떻게 자기의를 느낄수 있겠습니까. ”내가 그래도 어떻게 해서 주님을 섬겼는데. 나만큼 열심히 살아온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그래.“ 언젠가 부산에 집회를 갔는데 어떤 장로님이 자기를 소개하는데 ”목사님 나는 이러 이러한 사람입니다. 부산에는 나만큼 주의일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속으로 ”잘났다.“ 이 사람이 지금 참 장로맞아. 속으로 정말 장로맞아. 부흥회가 3일다 끝나고나니까. 아주 굉장히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날 걱정이 되더라고요. ”목사님 부산에서 나만큼 은혜받은 사람, 없는기라요.“ 이럴까봐 겁나더라고요. 마지막에 ”목사님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야 되겠습디다.“ 그래서 내가 맞다. 자기의가 그렇게 쌓이는 것은 주님의 일 할수 있습니다. 진짜로 그 사람 일 많이 할 수 있습니다. 할것입니다. 아마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살것입니다. 딴짓안하고, 정말 물질도 많이 드리고 헌신적으로 살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살아도 하나가 결핍되어있으면 그렇게 잘사는 삶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못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현재적인 경험을 통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직하게 깨닫는 자기 인식, 그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를 못만납니다. 사도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히브리인중에 히브리인이요.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한 사람입니다. 그것 때문에 정작 그것보다도 훨씬 더 귀한 예수님을 만날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열심도 기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뭐냐하면 주님을 위해서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서 일을 조금하는 사람보다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이 더많이 반복되고 더커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위험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독선적이고 아주 위험한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기억해야합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깊이 기억해야합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십자가 앞에서 그분이 우리를 위해 베푸신 사랑과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돌아가시게 한 우리 자신의 죄를 인하여 흘리는 깊은 눈물이 없이 단지 열심있는 일군으로서만 사는 것은 정말 위험한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일을하지 말아라. 뭐하라. 그것이 아니라. 하여튼 그 자체가 매우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필연적으로 교만해집니다. 그는 필연적으로 주님의 손에 의해서 겸비하게 사용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수 없습니다. 주님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셔야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통해서 증거되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만을 사랑하고 그분에게만 경의를 표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자기에게 영광을 돌려야합니다. 자기를 인정해 주어야합니다. 그를 높여주어야합니다. 수건을 들고 발을씻기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런 속에서 찾아볼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귀하다.“말씀하시면 자기가 ”하나님 나 굉장히 귀한 사람입니다.“ ”야, 이것좀 해서 섬겨라.“ ”귀한 사람이라니까요. 이 고급인력을 어디 그런데다 쓰실려고“ 그러면 안됩니다. 자기 인식이 없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렇게됩니다. 사도바울을 보세요. 예전에 자기가 누구였는지를 알았습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주님의 은혜에 목마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종처럼 노예처럼 지체들을 섬기고 영혼들을 섬기면서 그것이 자신이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해놓은 일 하나님이 자기를 사용하셔서 이루신 일들은 엄청나기 때문에 그것을 보면 자신이 존귀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러나 예전에 그리스도를 믿지않을 때, 자긱 행한일,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오늘 성화의 도상에 서있는 자신속에 경험되는 이 절망, 이것들을 보면 자기는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고백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를 섬겨도 그들은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들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섬길수 있었더 것입니다. 종노릇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종노릇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그들의 종이되는 것도 자신에게는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죄인들을 무시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들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긍휼히 여기면서 무릎을 꿇어 그들의 종처럼 섬겨서 그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알릴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살아서 이렇게 주님께 많이 쓰임을 받으면서도 넘어지지 않고 오히려 주님께 더깊이 붙들리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하나님의 은혜와 자기인식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3:8下)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였습니다. 이제는 정죄 아래 있는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가와 그리고 우리의 부정한 것들을 멀리 치우셨으며 그의 피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다시 우리 자신을 죄인으로 정죄 하거나 죄인인 것처럼 살아 가지는 않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전에 죄인이었던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버린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그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 고난의 의미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단지 예수를 믿을 때에 처음 통과하는 의례절차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대해서 낯선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의미를 새기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 십자가는 우리가 누구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전에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말해주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라는 사실을 그 십자가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장본인이 바로 자기였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그곳에 언제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속의 감격속에서만 우리는 진짜로 이세상에서 중요하지 않는 것들은 버릴수가 있고 소중한 것들은 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가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내용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내게 이런 은혜를 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의 풍성함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려 함이라.“ 우선 사도는 여기에서 예수 죽인 것은 자기의 몸에 짊어진 그러한 삶이 무엇인지를 오늘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진 삶은 은혜를 자랑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간증이라는 것을 보게됩니다. 간증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위험성은 자기를 자랑하는 기회가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변화시키신 그리스도보다는 변화를 받은 자신을 강조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많은 어떤 사람들은 예전에 예수님을 믿기전에 혹은 예수님을 믿고난 후에도 변화받기 전에 자기가 굉장히 부끄러운 삶을 살다가 급격한 회심을 경험한 다음에 자기가 새로운 신앙을 갖게된 것에 대해서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뭔가 우월한 의식을 느끼면서 간증을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마 보신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혼자 맛본 것처럼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전에 자기가 살았던 삶을 사실보다도 훨씬 더 과장해서 하나님 앞에 죄악되게 살았던 사실을 과장해서 말하면서 그러면서 지금 이렇게 변화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그런류의 간증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항상 잊지말아야할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고 지금은 구속받은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가슴에 새기고 산 사람들은 그렇게 흉악한 죄인이라는 사실과 오늘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런 죄인을 용서하셔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받은 사람으로 살게하신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실만을 강조해야합니다.
그래서 그 간증을 모두 듣고나서 간증을 한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쓸모없는 인간을 들어 쓰셔서 변화시켜서 새바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그러니까 그런 쓸모 없는 죄인들을 구속 하셔서 새사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면서 가장 자신이 쓸모 없다고 생각하며 낙담하던 패배자들 조차도 그 간증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을 갖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를 자랑하는 간증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어쨌든 사도바울은 오늘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는 무엇입니까? 베풂을 받을만한 사람을 향해서 배푸는 것, 대가를 받을만한 사람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것, 이런 것들은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자격없는 사람에게 배푸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호의입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 그런 것을 받을만 하지 못한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베푸심, 그것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그 은혜를 누리면서도 이것이 자신의 의로움이나 자신의 공로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몸둘바를 모르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를 아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생각은 항상 한쪽으로 달려갑니다. 무엇인가 불만스러운 것이 있어서 깊이 생각하면 이것도 못받고 저것도 못받았고, 그리고 이런 고난도 있고 저런 염려도 있고, 심하면 하나님이 나를 차별대우 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어느 지체가 한번은 간증을 썼는데 “하나님이 뭐 나같은 사람 관심이나 가지세요.” 그리고 신앙생활을 열린교회에 와서 시작을 했다. 그러면서 자기를 비유하기를 귀엽다고 안아주면 주님 얼굴을 확 발톱으로 할퀴고 도망가는 그 검은 고양이 네로, 그런 앙팡진 마음을 품고 그리고 열린교회에 발을 디뎌놓았다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되었다는 그런 간증을 한번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우리 마음이 그런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자신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은혜로 알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아마 오늘날에 우리가 짓는 커다란 죄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잘못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까. 우리가 생활하고 먹고 마시고 건강을 유지하고 적절한 삶의 기력과 동역자들과 교제와 이런 모든 것들을 주신 것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아닙니까?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기뻐하십시오. 우리 교회가 버스를 샀습니다. 그래서 교사들이 어디를 갈려고 해도 12인승 가지고 되지도 않고 그래서 어디 기도원 간다. 그리고 댓대씩 가는 것을 보면 너무 불안하던 차에 어떻게 사자. 그래서 한 대 샀습니다. 25인승인데 바닥에도 앉으면 한 30명은 앉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 타면서 그랬어요. “야, 참 좋다.” 미리 제가 선경지명을 가지고 우리 관리간사 대형면허를 따놓았습니다. 그래서 시운전을 하면서 쫙돌면서 남패령에 차가 꽉 막혔는데 전용차선으로 들어오니까 시속 60킬로 70킬로로 총알같이 달려갔습니다. “야, 이것 참 좋다. 집회있을 때 차 막히면 이것 타고 가야되겠다.” 그런데 타고 오면서 “야, 참 좋다. 야, 진짜 하나님의 은혜 감사하다.” “야, 정말 좋구나.” 전국에서 그것 딱 한 대가 남아있더래요. 그래서 그것을 금방 가지고 왔습니다. “야, 참 좋다.” 어쩜 색깔도 우리가 원하는 그 빨간색, “너무 좋다.” 좋다. 소리를 몇번도 더하고 탄 사람마다 “야, 참 좋다.” 그리고 가만히 있는 사람보고 “좋지, 좋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너무 감사합니다.
지난주간에도 이번 주간에도 얼마나 감사한 일들이 많았는지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들어보세요. 그런 것도 그렇게 감사합니다. 이따가 가서 한번 보세요. 한번씩 올라가 보세요. 신발벗고, 참 감사한데 그것 모두 그런 감사의 조건을 모두 몰고온 맨꼭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무슨 은혜일까요? 구원의 은혜입니다. 내가 예수믿고 하나님의 자녀되지 않았으면 아니 방배동에 있는 교회가 버스 샀는데 내가 거기에 올라타서 뭐 그렇게 감사할 일이 뭐가있느냐는 것입니다.
1300억짜리 비행기를 타도 감탄을 안하는 사람이 그것 무슨 버스를 한번 타고 감탄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모든 것들이 보면 이런 은혜 감사 하고 저런 은혜 감사한데 쭉 몰고가면 마지막에 그런 모든 감사의 조건은 감사는 관계를 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무슨관계?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안믿는 사람도 버스도 사고 트럭도 사고, 뭐도 다 사지, 그러나 그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에게 주셨다고 그렇게 생각을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합니다.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와의 관계를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뭐 하나도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와의 관계를 생각나게 안해주시는 것이 없습니다. 뭐하나 교회의 어려운 일들을 해결해 주셔도 “야, 정말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사랑받을 자격이 있을까?” “없어.” “야, 참 하나님의 은혜구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 모든 관계들을 가져온 그 처음 은혜가 뭐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그 구원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바로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자녀가 되었고 그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들이 내려왔습니다.
그런 좋은 것들을 다 받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예전에 구원을 통해서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우리가 구원받을만 하지 못한, 구원받을만한 전혀 자격이 없는 죄인이요.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으며 본성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흉악한 존재들이었다.라고 하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에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은혜로 생각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오늘 내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성도중에 지극히 작은자 보다도 더 작은 그러한 아주 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자의식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주님을 믿기 전에 자기가 얼마나 악독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거스리고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얼마나 악날하게 핍박하고 그리스도를 훼방하였는가.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기가 정말 모든 성도들 보다도 너무나 작은자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자기를 구원해 놓으셔서 이제는 거룩의 삶을 살아가도록 당부하셨는데 주님을 위해서 일평생 눈한번 돌리지 않고 외길을 걸으면서 살았지만 사도는 아직까지도 자기안에 있는 수많은 부패한 죄악들을 보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일어나는 그 죄의 투쟁들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들어오면 들어 올수록 하나님의 말씀의 광채가 비치면 비칠수록 자기안에 드러나오야마는 그 뿌리깊은 패역과 그리고 외면할수 없는 부패성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자기의 그 십자가에 대한 감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성도들중에 가장 쓸모없는 자라고 하는 인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불러서 구원을 해주시고 자기에게 사명을 주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셔서 자기를 하나님 섬기면서 살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자기가 밉고,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이 정말 가망성이 없는 죄인인데 무엇때문이지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그렇게 호의를 베푸시고 그리고 그렇게 주님을 대적하였던 쓸모없는 죄인이었던 자기를 꼭 들으셔서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 성령의 감화를 입으면서도 도말되지 않는 자기속에 있는 옛자아의 악한 경향성과 부패의 직면에서 절망하는데도 무엇때문인지 하나님이 ”나는 너를 쓰고싶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라고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설명하게 있겠습니까. 희기하기는 합니다만은 제가 가끔 전철을 타면 그날 그 전철 안에 구걸하러 오는 사람은 수지 맞는 날입니다. 왜요. 만원이나 오천원을 준비했다가 줍니다. 두사람을 만나든지 세사람을 만나든지 사람들이 전부다 다 100원짜리 500워짜리 다 이렇게 놓고 가는데 한 사람이 거기에다 만원짜리를 놓고 갔을 때, 그 때에 그 무슨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냥 고맙다고 절을 몇번합니다.
그런데 그가 저 사람이 나에게 왜 다른 사람보다 백배 혹은 오십배나 되는 이 큰 돈을 나에게 주었을까?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수 있겠끔 일목요연하게 설명할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죠. 그것이 은혜의 성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아는 사실은 오직 하나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에게는 가당하지 않은 하나님의 특별한 배푸심이라는 것, 그것만을 알뿐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오늘날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까? 백화점에 갔는데 매일 천원씩 주고 사오던 물건인데 막 마이크로 떠들면서 “오늘은 특별한 날입니다. 그러면서 두 개 사시는 분 하나 더드립니다.” 그리고 그것만 사가지고 집에 돌아오면서도 기분이 좋은데 이렇게 아무 쓸모없는 죄인에게 배푸신 구속의 은혜,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의 빛앞에 비춰보면 나도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더럽기 짝이없는 죄인인데 주님이 그 순결한 주님이 우리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어디엔가 쓰시려고 하십니다. 이것을 설명할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날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이 있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도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몸부림 치는 것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이런 이런 일들속에 있는데 나좀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자신의 아픈 사연에 대한 호소도 하나님 앞에 필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누구를 의지하며 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좀 자주자주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바라는 것이 없을 정도의 그 은혜에 대한 감격기 젖어본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게는 충분합니다. 제게 베푸신 은혜만으로도 저는 감당할수 없습니다. 저같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시기 위해서 너무 마음을 많이 쓰시지 마시고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시옵소서. 하나님 제게는 충분합니다. 주님 은혜가 내게는 넘칩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값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그것이 사도의 가슴속에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바라고 원하고 찾고 조바심 하는 것들이 일순간에 모두 사라져버릴 것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 “맞아, 지금은 내가 고난을 당하고 이런 저런 어려움이 있지만 주님이 이전에 그렇게 쓸모없는 죄인이고 주님 거스리며 살던 마귀의 자식인데 나같은 인간을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아 구원해 주셨는데 내게 임한 그 은혜, 그것을 생각하며 지금의 내가 격고 있는 이 불편함과 신앙으로 말미암는 고난,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은혜에 대한 감격, 그것이 사라져버리는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두가지 때문인데 하나는 예수님의 구원을 받기전에 자기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이었는지 그리고 왜 죄 없으신 주님이 우리의 질고를 지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우리의 평화를 위해서 채찍에 맞으셔야 했는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은혜에 대한 감격이 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때 그 구원을 처음 느꼈을 때 우리 마음속에 있었던 구원의 놀라운 감격들을 오늘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그후에 우리에게 배푸신 주님의 은혜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정말 이전에 누구인지를 너무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 자신을 정확하게 들여다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인이 자기에게 많이 배풀어 주면 많이 배풀어 줄수록 자기 자신은 그 주인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이고 주인도 나 없으면 쓰러진다는 사고방식을 갖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비록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자녀요. 주의 종이라고 부르지만 우리 자신의 밑바닥을 들여다 보지를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삶이 주님의 구원의 은혜에 어울리는 삶입니까? 늘 주님을 거스리고 주님을 대적하며 살고 그러면서도 주님이 우리에게 배푸신 은혜에 대해서 뻔뻔스럽게 감사할줄 모르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진 삶이냐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그에게 나타나는 삶이냐는 것입니다. 그럴수가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노예로 살수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그랬고 모든 서신서에서 자기를 그리스도의 노예, 즉 그리스도의 종, 이라고 표현했는데 누가 그를 노예로 만들었습니까? 주님이 그 십자가의 피로 그 구속의 사랑으로 그를 구원하셨을 때, 이제 그 삶이 누구 것입니까. 자기 자신의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그를 노예로 만들었습니까? 주님이 그를 칼로 그를 다스리셨습니까? 노예로 다스리셨습니까?
가끔 신학교에 오면서 “이 길을 안가면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을 것 같아서 왔다.” 그러는데 그것은 소명아닙니다. 무슨 그런놈의 소명이 있어요. 성경을 보세요. 어디 그런 소명이 있는가. 그러니까 그 사람은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소명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소명은 자기 자신이 어떤 노예됨을 느껴야합니다.
다시 사도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가 그렇게 사도가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고백할 때 누가 그에게 노예라고 강요했습니까“ 교회에서 시켰습니까” 집에서 시켰습니까? 예수님이 “너 오늘부터 나의 노예다.” 그렇게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도망가면 너는 죽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은혜에 대한 감격이 그를 노예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런 것입니다.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이것이 너무나 과분하기 때문에 불편해 하면서 사는 것이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자 예를 들어봅시다. 아주 보기 좋게 쉽게 예를 들어드릴께요.
추운 겨울날 집안에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거지거지 산 거지가 얻어 먹겠다고 왔습니다. 왔을 때에 이 사람 생각은 너무 배가고프니까 마당에서 끌이는 국이라도 한사발하고 그저 반찬도 따로 필요 없이 큰 그릇에다 찬밥이라도 한덩이 얹고 국이라도 따뜻하게 얹어서 위에 김치나 놔주면 저 댓돌에 앉아서 한술 먹고 가면 여한이 없겠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주인이 내려오더니 “이 우리 아이 장가가는날 이 경사스러운날 아무리 신분이 거지이시지만 우리가 어떻게 손님을 이렇게 대접할수 있겠습니까. 오십시오.” 해놓고 아녀자들이 앉아서 밥을 먹는 마루를 지나고 그다음에 여러 식객들이 와서 밥을 먹는 사랑방, 건넌방을 지나서 안방으로 대리고 와서 비단 방석이 깔린 자기의 이 처지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곳에 앉히고 그리고 아주 생전 보지도 못한 깨끗하고 어마어마하게 큰 상에 지체 높은 사람들과 함께 자리를 했을 때에 여러분들이 그 처지라면 어떤 마음이 들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불안하지 않겠어요. 나는 소화가 안된 것 같습니다. “마루정도 올라와서 먹어라.” 그러면 그저 눈치보면서 먹고 가겠는데 그렇게 오라. 그러면 그것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생전 가난한 전도사로 사니 부패가 뭐 음식이나 썩어야지 부패하는줄 알았지 부패가 뭔줄압니까. 그러다가 그래도 좀 큰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많이 사랑하셔서 명색이 교육전도사 밖에 안되는데 구역을 하나를 떼어서 주시면서 거기 구역예배를 한달에 한번밖에 안드리니까. 부담이 안되었습니다. 주시면서 “이구역만큼은 내가 부목사에게도 안 맡기고 내가 직접했다. 왜냐하면 교회의 중직들이 모두 모여 있어서 누가 가서 한번 쑤셔놓기만 하면 교회가 어려움이 올 것 같아서 내가 바쁜데도 이 구역을 혼자 이 한구역만 맡아서 내가 이제껏까지 한번도 누구를 준일이 없는데 자네한테 맡기니까. 이 구역을 돌보아라.”
그래서 그 구역예배를 한달에 한번씩 드렸습니다. 그런데 대심방 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교육전도사지만 목사님 옆에서 가방 못질을 하면서 한집 한집 심방을 다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날 좀 괜찮게 사는 집에서 점심을 먹으러 가자는데 호텔같이 생긴데를 가서 그 때 난생처음, 생전처음 부패가 뭔기를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를 언제 가보았습니까. 그런데 나는 음식을 다 먹지도 않았는데 그릇을 빼앗아요. 뼈좀 더 발라먹을려고 하는데 그리고 처음에는 모르니까. 그것 먹던 접시하고 숫가락을 들고 또 얻어 먹을려고 부패는 자기가 갖다 먹는거라 그러니까. 알고 가지고 갔더니 그 웨이터가 “거기에 놔두세요. 거기에 놔두세요.” 그래서 그만 먹으라고 하는줄 알고. 그런데 익숙해지기 까지는 몇번의 연습이 필요했습니다. 뭐 전도사가 호텔에서 부패한번 먹었는데도 그런 부자연스러움을 느끼는데
거지거지 산 거지가 대감집의 비단 방석에 앉아서 대감을 비롯해서 재상급에 해당되는 사람과 함께 앉아서 거기에서 그 받은 국밥을 가지고 오니까. “아, 그런 질낮은 음식을 어떻게 드시냐고 하면서 금사발을 열고 은냄비를 열어서 쫙 펼쳐서 식탁을 놓고 드십시다.” 그럴 때 어떻겠습니까? 나는 소화를 못할 것 같습니다. 몸둘바를 모르고 어찌할바를 모를 것입니다.
그러데 먹다가 국을 쏟았어요. 그러는데도 하인들을 시켜서 “예야 닦아드려라.” 그래서 깨끗이 닦아주셔요. 그리고 “계속 식사하십시다.” “풍악을 울려라.” 그럴 때에 그 마음이 어떻겠느냐고요. 어쩔줄을 모르겠죠. 이것이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그 정도는 해주셔야지 내가. 그래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나아 놓으셨으면 책임을 지셔야지.” 완전히 이것은 개배짱입니다.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네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대한 깊은 감격 때문에 어쩔줄 몰라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주님을 위해서 희생을 하고 고난의 길을 걸어가고 내가 무엇인가 손해를 보면서 주님을 섬기지 아니하면 그 은혜를 받은채 가만히 살아 있는 그것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편하지 않은 그것이 진짜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삶입니다.
어디에서 얼핏 읽은 내용이니까. 그렇게 가치있는 것은 아니겠습니다만은 주나라 어느 왕때 중궁의 일이래요. 왕이 주연을 배푸는데 거기에 왕비는 물론이고 빈이라든지 왕비만 못한 사람들까지 왕이 아끼는 궁녀들가지 이렇게 다 있었습니다. 한참 잔치를 하는데 바람이 획 불더니 그 잔치하는 그곳에 불이 한꺼번에 다 꺼져버렸습니다. 그 사이에 이 장군들이 술을 한참 거나하게 먹었으니까. 그 장수중에 하나가 왕이 아주 총애하는 그 여자를 말하자면 성희롱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너무 지혜로운 여자니까. 그렇게 희롱을 한 그 남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때에 모자에 뭐 달린 것을 하나를 뗀것입니다. “너 나를 감히 이랬으니까. 너는 혼난다.” 그리고 나서 조금있다가 다시 “불을 가지고 와라.” 그래서 켜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어둠속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이 장수는 지나가려니 술김에 또 담대해지지 않습니까. 술을 먹으면 사람이 담대해지지 않습니까. 또 고개를 끄덕끄덕 하기는 그것도 아주 힘차게 끄덕거려요. 담대해지니까. 불을 환하게 켰는데 이 여자가 울고불고 난리가 난것입니다. “패하. 패하” “무슨일이냐?” “이 어두움 속에서 어느 장수 한사람이 자기를 성희롱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저는 지금 알수 없지만 그 사람의 이 끈하나를 떼었습니다. 아마 그들이 쓰고 있는 장식을 살펴보면 누가 범인인지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흑빛이 됐죠. “야, 이제 내가 황제의 애첩을 건드리고 어떻게 살아나겠습니까. 그것도 황제가 보는 면전에서
그런데 뜻밖에 이 황제가 뭐라그러느냐면 ”우리 모두 그것을 머리에서 벗어서 내려 놓고 나머지 술을 마십시다.“ 모두다 벗어내려 놓았습니다. 불문에 부치고 넘어간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다음에 소위 이야기 하는 친전이 있었습니다. 북에서 오랑캐들이 쳐내려오니까. 왕이 군대를 직접 거느리고 전쟁에 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사태가 불리해서 이제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몰리게 되었는데 그 때에 생명을 걸고 온몸에 화살을 밤송이 처럼 맞으면서 왕을 보호하던 장수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제 전세가 역전 되어서 물리치고 그리고 이제 그 장수가 임금 앞에서 쓰러져서 죽어가는데 그래서 이제 임금이 “네가 나를 구했구나. 나를 구하기 위해서 날아오는 화살을 이렇게 맞았구나.” 이제 뭐 손을 쓸수도 없는 것은 뻔하니까. 그랬더니 이 장수가 하는 말이 “패하 제가 바로 그날밤 패하의 애첩을 희롱한 그 장수입니다. 패하께서 나를 용서해준 이후 저는 그 긴 세월을 빚진자로 살았습니다. 오늘 제가 패하에게 진 빚을 용서의 빚을 이렇게 갚으니 저는 지금 죽으면서도 너무나 행복합니다.” 이것이 은혜를 아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배푸신 구속의 은혜, 십자가의 사랑, 예전에는 전혀 쓸모없던 죄인중에 괴수와 같은 인간들을 위해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박아 피흘려 죽으셨는데도 오늘도 우리속에 아직까지도 부패와 더러움이 있고 주님이 우리의 마음에 푸근히 거하실수 없을만큼 우리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들과 악한 가시들이 가득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속해 주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용해 주셔서 우리를 주님의 도구로 써주시는 이 하나님의 큰 은혜 앞에서 이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할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랑의 빚진 사람은 항상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 장수가 그 애첩이 그렇게 난리를 치면서 “어느 놈인지 당장 나오렸다”. 그 상관들의 추상같은 호령이 떨어진 그 앞에서 이제 자기는 죽는구나 할 때에 왕이 그것을 용서해 준 것입니다. 긴 세월동안 “제가 그 사람이었습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고, 견디기 힘들 정도의 부채의식을 가지고 산 것입니다. “나는 언젠가 기필코 그 이후에 살아 있는 것은 내목숨이 아니다. 왕의 목숨이다. 언젠가는 내가 기필코 그 왕을 위해서 죽어야하리라”. 이것이 바로 은혜의 감격으로 사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은혜는 말이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감격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부채의식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예수 죽인 것을 내몸에 짊어진다.”라고 하는 것은 과거로 보면 자기가 예수 믿기 전에 그렇게 비참한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설명하지만 미래로보면 자기가 그렇게 살아야만 되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무리 나를 “너는 의로운 사람이요. 이제 정죄함이 없고, 너는 이제 더 이상 나 믿기 전에 예전에 지은 죄로 인해서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고 예전에 지은 잘못으로 인해서 네가 나에게 다시 뉘우칠 필요도 없다.” 주님이 아무리 그렇게 말씀 하셔도 자기는 “하나님이 나에게 그렇게 사랑을 배푸시는 군요. 아, 좋습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배푸십시오.” 그렇게 살수 없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감격은 우리를 그렇게 살수 없게 만듭니다. 주님의 은혜의 감격이 있는 사람에게 일평생 단지 행복하게 그냥 행복하게만 살아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짐승처럼 살아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에게 빚진자 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십자가에 구원해 주셨는데도 더 이상 이전에 지은죄를 불문에 붙이심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예전에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며 나같이 쓸모없는 죄인의 구속을 위해서 부당하게도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살과 피를 찢고 흘리셨다.”라고 하는 그 인식 때문에 부채의식을 느끼는 사람,
그래서 물질이 있으면 그분을 위해서 쓰고, 건강이 있으면 그분을 위해서 소진하고 젊음이 있으면 그분을 위해서 허비하고 시간이 있어도 그분을 섬기는데 쓰고,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드려서 어찌하든지 그분을 섬기고 싶어하는 마음, 그런 마음 속에서 사는 사람이 바로 은혜의 은혜됨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를 주님이 사도바울에게만 배풀어 주셨나요?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알기전에는 바울보다 훨씬 의로운 사람이었나요? 그렇게도 말할수 없습니다. 주님을 이미 믿고난 후에 그러면 지금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내면의 모습들은 사도바울이 그렇게 절망했던 자기의 그 모습보다는 훨씬더 훌륭한 모습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울보다 더 많이 예전에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고, 사도바울이 자기의 모습을 보면서 절망했던 것보다 더많이 절망해야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은혜의 감격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이 절망적인 죄성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도 주님이 우리를 그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 주셨죠. 우리는 아무런 공로가 없는데도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구속 하셨고, 예전에 우리가 죄인이었는데도 이제는 처음부터 의인이었던 사람처럼 우리를 대해주십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죄와 부패들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같은 사람이라도 사용하셔서 자기의 일을 이루시려고 하는 우리 주님의 눈물어린 쓰심이 바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은혜가 아닙니까? 우리에게 정말 은혜의 감격이 있습니까? “주님, 저를 위해서 주님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구원해 주시면 오늘 내 자신을 들어다봐도 지옥에나 떨어져야 마땅할 것같은 이 가치없는 죄인을 그래도 사용하셔서 이 세상에서 쓸모없게 하지 아니하시고 소중하게 사용하시는 이 하나님의 은혜면 저는 족합니다. 폭풍을 지나고 고난의 불길을 지나고 시련의 파도를 넘어도 주님이 내게 배푸신 그 은혜면 충분합니다.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런 은혜의 감격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이런 은혜의 감격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고는 뱃길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랑의 인격적인 강제력이 그를 사로잡아서 그로 하여금 주님은 의로운 자녀라고 부르셨는데도 노예처럼 살아야지만 마음이 편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의롭다 불러주셨는데도 늘 우리안에 있는 죄를 보면서 더 정결하게 더 바르게 살려고 나같은 죄인을 용서해 달라고 성화를 향해서 몸부림 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은혜의 감격속에서 살아가는 삶,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이 있다고 사도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 주님이 주시는 생명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놀라운 은혜 속에서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서 예수 죽인 것을 짊어졌지만 주님의 생명이 여러분 가운데 나타나는 그런 은혜의 감격 속에서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1.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3:8下)
지난 시간에는 십자가를 아는 경험과 그리고 은혜를 아는 경험이 같은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로 자기를 구원 하셔서 의로운 사람을 삼으시고 심지어는 주님을 섬기고 봉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일꾼으로 말들어 주셨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을 짊어지고 사는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할 필요는 그렇게 함으로서만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낼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리고 자기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와 그리고 그렇게 자기의 몸을 버리셔서 구원해 주셔야할 가치가 전혀없는 인간인 자기 사이에 존재하는 그 하나님의 은혜, 거기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고 살아가는 그 삶이 바로 십자가 아래서의 삶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렇게 은혜를 주신 것이 어떤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사도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을 이방인들에게 알게 하려고 자기와 같은 죄인, 성도중에 지극히 작은 자를 주님의 일군삼으시고 사도로 삼으신 하나님의 그 은혜가 바로 이런 일들을 위함이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리스도의 풍성입니다. 그리스도의 풍성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풍성, 풍부함, 많은 것, 꽉 찬 것, 넘치는 것,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 이 풍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결합되었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선 두가지로 크게 설명할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에베소서 1장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에서 풍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풍성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그 기업,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며 살아갈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그 모든 신령한 특권들, 그것이 영광스러운데 그 영광이 아주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려고 자기와 같은 미말의 찌꺼기와 같은 인간을 구속하셔서 주님의 자녀 삼으시고 사도 삼으셨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뭐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풍성이라는 것은 무엇이냐하면 풍성한 삶을 살게하시는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풍성한 삶을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축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풍성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씩 나누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그리스도의 풍성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업의 영광의 풍성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풍성이라고 말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풍성하다는 의미도 알겠고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도 알겠는데 도대체 영광이 무엇이냐? 영광을 그 만족스럽게 설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관심이 있어서 제가 영광을 도대체 무엇이라고 설명했는가. 찾아보았지만 아주 짤막한 말로 영광이 무엇인지를 그것을 설명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만큼 그 그리스도의 영광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은 사도바울을 배울 때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빛으로 보면서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죠.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찬란한 영광을 빛으로 보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보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속에서 자신의 영혼의 온몸이 심히 떨리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엄위하신 임재 앞에 서 있는 그런 것을 체험할수 있지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다양하게 개인에게 영적인 존재이신 영적 인격자이고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경험될 때에 체험되는 그 영광에 관한 체험들이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그 영광을 사람들이 경험한 형상을 통해서 그 영광이 무엇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마치 바람을 정의하는 것과 같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어떤 식으로 그 영광을 경험하든지간에 그 영광이 의미하는 바는 아주 분명한데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그 곳에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그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수 없는 승복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좀도 쉬운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모든 육체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라.” 그 영광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 영광을 본다.라고 하는 의미는 그 영광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도록 승복하게된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광을 외형적으로 영광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형식으로 경험될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획일적으로 말하기 힘들지만 그러나 이 영광이 우리에게 주는 효력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때. 그것은 하나님 한분만을 승복하게 하는 힘이다. 그런 결과를 가져옵니다. 영광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거룩하심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도록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하고 소망을 주기도 하고 또는 힘을 주기도 합니다. 죄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회개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죄의 은혜를, 그리고 의롭게 살려고 분투하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그리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가까이 계신 그 복락을 느낄수 있게 만들어서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게 만들어 주는 그 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라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교회의 존재를 통해서 사람들이 그 교회를 보지 않고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않거나 확신할 수 없었는데 그 교회의 존재를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안에 계시다는 사실에 대해서 승복하지 않을수 없도록 만들어주는 그 모정의 힘을 갖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라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서 봉사할수 있는 최고의 섬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교회가 진실로 교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정확하게 볼수 있고 귀를 귀울이면 들을수 있고 깨달을수 있는 그 존재와 목소리를 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세상을 위해서 교회가 할수 있는 최고의 섬김입니다.
아무튼 이 영광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리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게 만들어주는 그 힘이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이 자기와 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로 구속하여 자기를 하나님의 일군으로 삼으신 것은 바로 이렇게 자기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풍성함을 나타내심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가 자기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이시라고 하는 그 사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을 대하여 사람들이 승복하지 않을수 없게 만들려고 자기를 하나님의 일군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도바울이 교만해 질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지 않았을까요. 그가 세운 엄청난 전도여행의 기록들은 아마 지금도 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그 위대한 선교의 족족들, 기독교가 이미 있었던 곳이 아니라. 이교도, 그리고 이방세계, 이방의 신상과 종교에 사로잡혀 있고 허망한 철학에 붙들려 있던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외인에게는 힘이 없어 보이고 그리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처럼 보이는 그 어리석은 도, 십자가 하나로 그 진리하나로 로마를 무릎꿇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생의 사역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자신의 존재의 이유로 생각하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죄가 들어온 이후로부터는 거역할수 없는 강력한 욕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는 그 끊임없는 욕심의 그 마지막 끝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욕망이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종된 삶보다는 자신 스스로 영광을 받는 영화의 삶을 택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강력하게 나타난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라는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높아지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며 자기가 그의 손가락으로 지음바 된 흙덩이에 불과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고 그분보다 더 영광스러워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영광을 받으려고 한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뜻입니까?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곳에는 항상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궁극적인 희망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영광에 대해서 증거하는 자기는 잊어버려도 자기가 사랑하고 그들이 마땅히 사랑하여야할 하나님 아버지 앞에는 무릎을 꿇고 그분의 살아계심과 하나님 되심과 그분의 거룩하심을 인정하기를 바라는 소원, 그 열망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망입니다.
반대로 자신이 영광 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을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인정해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무한대로 확대시키면 그 욕망은 결국 사람들에게 열열히 숭배받고 싶어하는 그런 종교적인 욕심의 발로라고 할수 있는 것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하나님과 같아질 것이라고 하는 사단의 유혹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엄중한 명령을 아담처럼 하나님께 직접 받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 계명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는 정도가 아담만 못했기 때문에 그럴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핑계가 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 처럼 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고. 그리고 그 하나님 처럼 되어서 모든 만물들을 ( ? )로부터 하나님을 대신해서 경배를 받고 그리고 하나님과 대등한 혹은 하나님을 능가하는 그 위치에 있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모든 피조물과 모든 것들에게 자기의 주인됨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그런 갈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그를 관리자로 세워주셨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위탁하셨지만 위탁받은 사람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창조주의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인간의 마음의 발로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러나 모두 사람들이 이러했습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통치권을 한손에 쥔 이후에는 대부분의 모든 통치자들이 자기를 신격화 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자기가 단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아들이라고 칭하거나 혹은 자기가 곧 신이라고 칭해서 자기에 대한 인격적인 예우나 존경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신에게 바치는 경배를 군주인 자신에게 바치도록 요구하면서 그렇게 나라를 다스리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를 다스릴수 없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그렇게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그 욕구가 그런 역사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군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예수죽인 것을 내몸에 짊어지고 나는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하다.라고 하는 자기 죽임의 인식이 없으면 그는 하나님의 영과을 가로채기 쉽상인 위치에 놓여있는 사람입니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미 유명해 졌는데 어떻게 이름 없이 섬길수가 있겠습니까. 자기를 칭찬하고 자기를 열열히 환호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있는데 어떻게 빛도 없이 섬길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려분들은 유명하지도 않고 자기에게 감화를 받는 사람도 없으면 그럴수 있겠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돈을 누가 사랑하나요? 돈을 있는 사람들이 사랑합니까.? 없는 사람들이 사랑합니까? 누가 사랑해요.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없기 때문에 또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있어도 사랑을 안하는 사람이 있고 없어도 사랑을 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소유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속에서 솟구치는 욕구의 문제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아세요. 얼굴이 예쁘게 생긴 사람이 예뻐질려고 합니까?. 못생긴 사람이 예뻐질려고 합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얼굴이 예뻐도 예뻐질려고 안하는 사람이 있고 얼굴이 못생겨도 아주 예뻐질려고 몸부림을 치는 사람이 있고 또 예쁜데도 더 예뻐질려고 하는 사람이 있고 못생겼는데도 아무 상관없이 살아가는 나같은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 ? )거든요.
어떤 사람은 운이 좋아서 좋은 부모님을 만나서 그래서 운좋다. 그러면 좀 이상하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이렇게 좋은 부모님을 만나서 넉넉한 환경속에서 쭉 살아요. 그러니까 그 그다음은 뭐냐하면 늘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어떤 돈에 대한 탐심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정 반대로 늘 넉넉하게 살았기 때문에 목회를 하면서 쪼들릴 때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또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자기의 분수를 잘 알고 낭비를 안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가난하게 살면서 오랫동안 굶주렸기 때문에 조금 여유가 있으면 한풀이 하듯이 돈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가지고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속에 있는 경향성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이미 유명해 졌는데 어떻게 이름없이 섬기겠습니까. 수많은 사람의 박수 소리가 있고 자기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빛도 없이 섬길수 있겠습니까. 또 유명해지지 않았으면 유명해지고 싶은데 어떻게 이름없이 섬기기를 희망할수 있겠으며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자기를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데 어떻게 빛도 없이 섬길 소망을 가질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서 그렇게 이름없이 빛도 없이 섬기면서 살아야 되는 것은 틀림없는데 그렇다고 우리가 이름을 감추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안하고 산속에 숨어서 살수는 없지않습니까. 성형수술하고 이름을 바꿔버릴까요. 또 이름이 나면 얼굴을 뜯어고치고 또 바꾸고, 아니면 퀘걸조로처럼 가면을 쓰고 나타날까요. 베트멘같이.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속에서 그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자기에게 돌리는 그 영광, 자기를 인정해 주는 모든 것, 이런 것들은 다 필요없고 하나님 한분이 그 풍성한 영광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 자신이 인정을 받으시기를 원하는 그 갈망이 어디에서 생겨날까요. 아까 부른 찬송.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그렇게 찬송할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자기 인식이 없이는 그런 종류의 찬송이 신앙고백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예수를 죽인 것을 자기의 몸에 질어지고 일평생을 예수 죽인 것을 자기에게 짊어지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너 왜 날 죽였냐?” 그리고 욕하셨습니까. 아니거든요. 죄 용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기억조차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주인 바울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진실하게 살고 영혼을 위해서 자기를 허비하면서 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도요, 복음의 일군이요. 그리스도의 종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 주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인식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용서해주신 것은 백화점에 가보면 이렇게 십만원에 팔고싶다는 의사표시를 십오만원을 써놓고 작대기를 쭉 그어놓고 밑에다가 십만원 이렇게 써놓지 않습니까. 왜 그어놓느냐는 것입니다. 십만원이면 십만원이라 그러면 되지 원래는 십오만이었던 것을 기억을 해라. 그 얘기 아닙니까. 비유를 하자면 그리스도께서 그피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은 “죄인” 하고 작대기 쭉 긋고 이젠 “의인” 그것이 아니라. 표현을 하자면 싹 지워버리고 우리를 “의로운 사람” 이렇게 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이렇게 써주는 것입니다. “진노의 자녀” 작대기 쭉쭉긋고 “바겐세일” 해놓고 “하나님의 자녀” 이렇게 해준 것이 아니라. 그 과거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잊으시면서 그러면서 우리 앞에 걸려있는 이 명판을 새롭게 갈아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도바울은 항상 자기가 예전에 누구였는지를 기억하며 절망하고 또 그런 놀라운 사랑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찌거기들을 보면서 절망하며 자기가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만 그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게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묻고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역사속에서 혹은 글속에서 혹은 실재로 여러분들이 오늘날 살아가는 삶속에서 정말 자기를 아낌없이 드려서 자기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영광을 받고 대접을 받는 것은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 한분께만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만 영광을 돌려드리고 그분만 자랑하면서 살았던 순수한 섬김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학벌이나. 아니면 경력이나 가문이나 혈통이 아니었습니다. 기질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뿐만 아니라. 예수를 못박아 십자가에 죽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서 이 사람이 그런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것을 분명히 ( ? )하나님께서 성도들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도 못하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자만도 못한 자기같은 인간을 은혜로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원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았어야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았어야 했고,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뼈속 깊이 새기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종이라.” 표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들이 가져야할 자기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자기의 죄인 됨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 없는 가벼운 자신의 의인 됨에 대한 확신은 믿음이 아니라. 자만입니다. 성화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일평생 자기가 단지 용서받은 죄인일 뿐임을 잊지 않는 것이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데서도 가장 커다란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만약에 진실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그 일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누리고 어떻게 살든지 그것은 모두 세상에 속할 따름인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말하기를 “세상도 지나가고 정욕도 지나가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영원히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수많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그런 일에 기여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제왕이 되든지 아니면 돈을 많이 버는 사업가가 되든지 그리고 그가 많은 학문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지를 밝혀주는 학자가 되든지간에 그것은 놓여진 삶의 자리일 뿐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제왕을 누렸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상주셔야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는 대학자였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보상해주셔야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들이 살았던 인생에 대한 참된 보상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지위에서 무엇을 소유하며 살았느냐가 아니라. 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든지 얼마나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게 만들어주는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제왕이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갈채와 박수와 꽃다발을 받으며 영광을 누리면서 살았고 그의 그러한 통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게 만들어주는데 아무 기여도 하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차라리 가난한 시골 농부로 살면서 존절한 삶으로 이웃에게 감화를 끼쳐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었던 이름모를 그 농부가 훨씬더 하늘나라에서는 상급이 큰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며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며 살든지간에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거기 있음으로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존재를 통해서 우리 주님의 주님 되심을 인정하게 되고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되는 그러한 삶을 살면 그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입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으면서 무슨 직업을 가질지 그리고 얼마나 전도가 유망한 직장에 취직할수 있을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고민하는지. 우선 직업이 품위도 좀 있어야 되겠죠. 그리고 가서 인격적인 대접을 받을수 있어야 되겠죠. 그리고 장래도 보장되어야 되겠죠. 그리고 급료도 다른 사람보다 많아야 되겠죠. 왜냐하면 이것은 신앙이 없는 직장인에게는 급료의 정도는 자존심의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청년들은 생각을 좀 달리해야합니다. 내가 어디에 가서 서 있을 때 그 때에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가장 하나님을 많이 인정할수 있을까 그것은 자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 캐고 들어가면 자기 자신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절대적인 명제와 연결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일생을 드려서 무엇을하며 살까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가치를 찾고 가치를 느낄수 있어야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는 철저하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기전에 단지 전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쓸모없는 죄인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해 주시고 난 다음에도 우리의 마음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전혀없는 그 막되 먹은 죄인일 뿐이라고 하는 그 인식이 십자가 앞에서 살아 있어야합니다. 나같이 쓸데없는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그분이 나를 구원하셨으니 나의 나된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은 바로 나의 죄와 악함 때문이라고 하는 이 인식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 와중에서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는 비결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두 번째로는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풍성은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삶을 살게하는 성도의 기업의 풍성함입니다. 사실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를 볼 때에 그분에게서 우리가 처음에 무엇을 발견할수 있었습니까. 아마 누군가가 여러분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아마 산타클로스를 제일먼저 만났지 예수님을 제일먼저 만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아마 예수님을 사회 교과서에서 겨우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일류의 역사를 움직인 사대성인 가운데 한사람 정도라고 말입니다.
그렇죠. 그렇게 여러분들은 배우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배우게 된 그 예수 그것을 통해서 발견할수 있었던 것은 겨우 무엇이었습니까. 고통받는 이 세상의 인류를 위해서 자기를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던져버린 희생적이고 모범적인 사랑이 많은 인류의 한 선생님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삶이 무엇인가 의미는 있다고 어렴풋이 생각은 했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직접적으로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고 보니까.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표피적인 진술은 너무나 피상적인 것이었고 주님을 믿고보니까. 그 안에는 말로 형언할수 없는 수많은 축복과 은혜들이 있었습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었고 안타까운 인생의 길에서 부르짖을 때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인격적으로 우리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곤고할 때 부르짖으면 우리에게 위로와 화평을 주셨습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이 묵묵히 따라가야할 움직이지 않는 무생물의 가치가 아니었습니다. 실재로 지금도 살아계서서 자기 안에 그들을 두시고 그들안에 들어가시는 분 생명적인 연합을 이루시고 말할수 없는 친교속에서 함께 살아가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그래서 그 그리스도 예수를 예표하고 있는 그 성막을 생각합니다. 그렇죠. 성막은 이동식 성전이지 않습니까. 구름기둥이 쭉 가다가 스톱을하면 거기에 진을 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일먼저 이제 하나님의 법궤와 성막의 제구들을 메고가던 그 사람들이 성막을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그 성막을 주위로 해서 사람들이 쭉 지파별로 포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막은 위에 덮개가 해달의 가죽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광야의 길을 지나면서 햇빛도 받고 비도맞고 그러면서 그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죽을 그렇게 태양볕에 계속해서 두었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멀리서 보면 거무틱틱한 사람의 눈에 확 들어오는 화려한 성막이 아니라. 그냥 이렇게 낡은 빛바랜 탠트를 쳐놓은 것같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들어가면 어땠습니까. 금색, 청색, 은색, 홍색 실로짠 휘장이 있었고 그리고 각종 금으로 만든 그런 화려한 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소를 지나서 지성소로 들어가면 그러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러 계시는 여섯평 정도 되는 크기로 기억이 되는데 그런 작은 크기의 방이 나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밖에서 보는 모습하고 안에서 보는 모습하고 너무나 달랐습니다. 등불이 있고 그리고 순금으로된 속죄소 위에 그릅들이 있고 거기에 말하자면 이렇게 화려한 그런 내용들이 거기에 있으리라고 하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죠. 제사장들이 거기에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주님의 임재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당신의 찬란한 영광을 그 성막에 가득히 채우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 성막에 가득할때면 그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사람들이 볼수 있도록 그렇게 영광의 징표들이 그 성막 주변에 나타났습니다. 그런 것을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보면서 도저히 이해할수 없었을 것 아닙니까. 다 빛바랜 가죽 그것으로 만든 낡은 탠트같은 그 속에서 그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줄 그리고 그렇게 아름다운 구조들을 가진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장소인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우리 주님이 그런 주님인줄 알았습니까?. 그래서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믿기 싫어하고 그랬기 때문에 주님을 하찮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님께로 돌아오고 나서 주님을 믿고난 후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정말 가죽 엎어놓은 것같은 허름한 천막인줄 알았던 그리스도안에 들어와서 보니까 거기에 비할수 없이 아름다운 보석들과 진귀한 보배들이 가득하고 그런 정도가 아니라. 거기에서 예전에는 경험할수 없었던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광스러운 만남을 거기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풍성을 이방사람들이 어떻게 알수 있겠습니까. 먹어봐야지 맛을 알지 어떻게 알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가르쳐주게 하기 위해서 바울을 택했고 그것을 가르쳐 주게 하려고 우리를 먼저 주님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죠.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와의 교제의 비밀, 그리스도 예수 앞에 자기가 깨트려지고 그분의 임재를 통해서 경험하는 하나님과의 만남과 그 영광의 경험 없이는 우리는 복음 사역자가 될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로서의 삶도 우리는 지극히 일부분의 제한된 삶을 살수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보여줄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누가 그 예수를 보여줄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예수 안에 뭐가 있으랴.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말처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30에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역사의 수레바퀴에 자기를 던지고 죽어버린 그 선생이 훌륭한 것은 사실이지만 2000년전에 죽은 그 선생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오늘 이 분주하고 바쁜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삶은 2000년전에 죽은 스승을 반추할 정도로 여유가 없다. 그분을 믿는 것이 오늘 내가 살아가는데 무슨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수 있겠느냐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편견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그 십자가가 우리를 부르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풍성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놀라운 은혜, 인격적인 연합에서 오는 그 놀라운 기쁨, 비할데 없는 그 영광의 충만함, 거기에서 오는 풍성한 진리와 은혜로 말미암는 영광스러운 삶, 이런 것들에 대해서 모두 낯선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그 은혜 안에서 살아온 우리의 삶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인정할수 있겠습니까. 주님과 만나고 그분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그 사랑 안에서 인생의 시련의 골짜기 골짜기를 지나온 우리의 인생의 긴 여정을 그리고 그분과 함께 하면서 걸어왔던 그 순례의 오랜 길과 발자취들을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알수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아무것도 아닌 죄인중에 괴수와 같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이후로 우리는 수많은 역경의 가시밭 길을 헤치고 들판을 지나기도 하면서 우리의 인생의 여정을 걸어왔지만 그러나 길마다 길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걸어온 삶이었습니다. 종종 우리의 신앙이 침체 되어서 그분을 느끼지 못하는 때는 있었지만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셨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부인할수 없습니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이것이 풍성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우리의 삶으로 그것을 보여줄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들 앞에 서서 그리스도 예수를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자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베푸시고 비할데 없는 기쁨의 삶과 은혜의 삶, 고난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 하는 인도해 주시는 삶, 은혜로 우리를 이끄시는 도움의 삶을 살아갈 때 사람들은 우리를 특별한 사람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잘사는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잘살게 하시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모두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이렇게 살게하신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에게 ( ? )필요합니다.
제가 알고있는 코미디언 한분이 있었습니다. 집회를 와서 직장에서 만나면서 알게되었습니다. 이름만 대면 여러분들이 다 알수 있는 여류코미디언이 한 30년전 사람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하여튼 인기가 절정에 치달았는지 텔레비 프로도 그 사람이 마이크를 잡으면 시청률이 막 토끼뜀 뛰듯이 뛰는 것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디 가나 그 사람 이름 석자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크리스챤이었습니다. 그런데 속담에 어느날 자고보니까. 유명해졌다고 그러는데 이 사람은 어느날 자고보니까. 인기가 폭락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으면서 살던 사람들은 비유를 하자면 구름에 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구름이 사라지면 그다음에는 추락이 있는데 인기를 누리면서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자기가 찬밥이 되고나니까 그 크리챤인데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는 것이 무섭고 괴로운지 그리고 예전에 자기를 향해서 그렇게 열광의 박수를 보내던 사람들이 차갑게 눈길을 돌리고 다른 사람을 향한 열열한 열광하는 팬들이 되었을 때 그 때에 그 절망감은 이루 표현할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스타가 되어본적이 없으니까 모르지만 하여튼 그렇다고 합니다. 그럴 것 같습니다. 딸이 매일 아빠, 아빠 하고 따라다니다가 어느날 갑자기 토라져서 나는 엄마가 더 좋아 몇일만 붙어 살아도 상심이 되는데 아니 수많은 사람이 막 누구, 누구 하고 연어를 하다가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대할 때 그리고 자기를 그렇게 따르던 수많은 사람이 이제 누군가 다른 사람의 열열한 숭배자가 되었을 때 그 때에 그 느끼는 절망감은 이루 말할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자기가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잘 살게 해주시고 그래서 우리들이 축복을 누리며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수 없으니까 우리들을 봅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칭찬합니다. “아, 어쩜 그렇게 나는 태어나서 당신같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처음보았다. 나는 당신을 만난 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충격이다.” 또 뭐 그렇지 않으면 “ 어쩜 그렇게 헌신적으로 살아갈수 있느냐. 당신은 정말 예수에 미친사람 같다. 나도 어떻게하면 그렇게 미칠수 있겠느냐” 그런 이야기 아니면 “야, 이 교회 너 아니면 쓰러지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그 때 “아니 뭐 쓸데 없는 얘기를” 하지만 속으로는 “사람 잘 보았네” 그렇지 않습니까. “목사님도 나 없으면 안고없는 찐빵이지“ ”콩가루 안 묻힌 인절미지“ 그렇게 생각할수 있지않습니까. 아 물론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이 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내가 낮아지고 나를 통해서는 단지 그 사람들이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대면하고 복음을 대면하면서 자신들이 누구인지, 그런데 왜 주님께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셨는지, 구원받은 내가 단지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를 이렇게 구원해 주신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풍성한 삶을 살게하는 그런 자원을 자원으로서의 그리스도 예수를 보여주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렇게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수록 우리가 이전에 얼마나 악한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지금도 우리 안에 얼마나 악한 것들이 있어서 진실해 보이는 이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내적인 투쟁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오히려 그들에게 많이 자랑함으로서 그들이 우리를 향해서는 실망하고 오히려 우리 같은 인간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를 인해서는 소망을 갖도록 만들어 주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실재로 우리들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서 위로를 받을수 있어야합니다. 여러분 그 찬송가 405장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은혜 놀라와 그 작사 쓴사람이 아프리카에 가서 노예를 사냥해서 파는 노예상인 선장이었답니다. 그러다 주님을 만나고 놀랍게 변화되어서 자기를 구속해준 주님의 그 은혜를 거기에서 깨달은 것입니다. 나와 같이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에게 임한 ( ? ) 놀라운 그 은혜.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주님되심과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사람들에게 소망을 갖게할수만 있다면 자기가 수많은 사람에게 아무리 낙인찍혀도 자기는 관계없다고 생가하는 마음, 나는 죽고 내 안에 주님은 살아서 승리하고 나는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나같은 사람을 구속하셔서 용서하신 우리 주님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결코 잊혀지지 않는 주님이 되시기를 원하는 그러한 일을 하게 하실려고 주님이 우리같은 사람을 불러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영광의 주님을 알아서 풍성한 삶을 살게 해줄수 있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뭐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 피를 손에 묻인 죄인이며 아직도 망치를 들고 있는 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이라는 하는 자기 인식,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그 못박힌 손과 가시관 씌워진 그 얼굴을 어루만지며 예수 죽으심이 나 때문이라고 고백할수 있는 그러한 현재적인 경험 속에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자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가슴에 새기면 샛길수록 그는 영광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괴로워 할 것이며 오히려 자기는 잊혀져도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주님 때문에 사람들이 풍성한 삶을 사는 것을 인해서 만족히 여기는 삶을 살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기를 내어주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2.예수 가난해지신 것을 짊어지고①: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8:9)
사도바울이 헌금에 관한 이야기를 이 고린도교회에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있어서 이제 거기를 돕는 일에 마게도니아 교회가 참여한 놀라운 헌신에 대해서 고린도 교회에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경쟁을 시켜서 헌금을 많이 거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사도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마게도니아 교회가 낸 헌금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게도니아 교회에게 주신 은혜가 너무 놀라워서 그것을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목회자는 원래 자기네 교인들이 은혜를 받으면 막 자랑하고 싶어지는데 그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심성입니다. 그런데 이 사도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어떤 교회였느냐하면 환란에 많은 시련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또 가난이 있는 교회였는데 가난한 것도 그냥 적당하게 가난한 것이 아니라. 극한 가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하자면 아주 찢어지게 가난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넘치는 헌금을 하나님께 드려서 주의 나라를 위해서 쓰게하였을까. 그렇죠. 환란의 많은 시련, 하나도 아니고 무슨 시련인지는 알수없지만 하여튼 환란의 많은 시련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개인이 사업을 하다가 망했다든지, 부부싸움을 했다든지 그런 시련이 아니라. 교회적인 시련입니다. 마게도니아 교회의 교인이라면 누구든지 다 당하지 않을수 없었던 그런 강력한 시련이 많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환란을 동반한 많은 시련입니다. 그런 환란의 많은 시련을 이 교회가 당하였는데 그것이 무슨 헌금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지않습니까. 일반적으로 사람이 뭐 편안해야지 헌금을 하든지 헌신을 하든지 뭘하든지 하지 자기가 지금 환란에 휘말려서 정신을 차릴수 없고 뭐 사업이 망하고 부도가 나서 감옥을 들어가니 마니 하는데 무슨 헌금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교회는 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하면 극한 가난입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헌금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돈이 있어야지 한다. 그런데 맞는 이야기입니다. 없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두 헌금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예수님을 처음믿고 자녀가 되었는데 처음 은혜를 받지 않았겠습니까. 아주 그냥 너무 기쁘고 감사한데 그 때 백수였거든요. 뭐가 있어야지 하나님께 드리지 일정한 수입이 없는데 오죽했으면 안팎을 다 봐도 바칠것이 없어서 닭한마리를 교회에 갖다 바쳤습니다. 왠닭인가 그러는데 친적집에를 갔는데 이것은 아직 우리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리입니다. 집에 갖다 끌여먹으로 생닭을 한 마리 사서 비닐봉지에 넣어서 주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오는 길에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이것을 하나님께 바쳤으면 참 좋겠는데 그런데 뭐 하나님이 닭을 드시는분도 아니고 실화입니다. 그런데 고민고민하다 그 때 번득 머리를 스쳐가는데 그 때 교인한 30명 모이던 교회였는데 형제하나가 있는데 지금 자세한 내막은 기억이 안나는데 좀 신앙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니고 술퍼먹고 매일 가난한 동네에서 사고치던 그런 젊은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어렴풋한 기억에는 윈가 먼가가 술을 많이 먹어서 뭐가 고장이 났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을 하고 수술을하고 그랬는데 그 집이야말로 마게도니아 교회 하고 비슷합니다. 신앙이 비슷한 것이 아니라. 찢어지게 가난한 것만 비슷합니다. 그 형제 생각이 번득났습니다. 결혼한 형제인데. 그래서 그 닭을 들고 그리고 교회로 갔습니다. 예배끝난 다음에 닭도 닭집에서 이상하게 잡아주었는지 봉지를 쌓는데 봉지가 작아서 노란 닭발이 이렇게 튀어나왔습니다. 그것을 들고 예배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목사님 제가 이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봉지를 꺼내니까 “그것이 뭐냐” 그래요. 닭발이 이렇게 나와있는데 “목사님 이것 닭입니다.” 이것을 우리 교회에 아픈 그 형제에게 보내주십시오.“ 참 그 목사님이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수요일 저녁인데 예배끝나나까 벌서 9시가 넘었는데 그 목사님이 그것을 전해주러 밤에 할수없이 심방을 간것입니다. 나는 안가고 목사님만 가셔서 ”이것 김남준이라고 청년이 너줄라고 사왔다“ 사온 것이 아니라 사실 가로챈것입니다. 하여튼 갔습니다. 그것이 제가 하나님께 드린 그 당시로서는 최고의 헌신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노란 닭발이 생각나는데 그런데 그 때나 이때나 그 때나 제가 고기를 좀 좋아합니까. 진짜 먹고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갖다 바치는데 돌아오는데 말이죠. 그렇게 기쁘고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여튼 은혜를 받으면 정말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를 드리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가난한 교회였는데도 드릴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냐하면 넘치는 기쁨이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신앙의 기쁨, 그러니까 극한 환란과 가난속에서도 뭐가 있었느냐하면 넘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쁨이 그들로하여금 많은 환란의 시련가운데서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바치게 만들었는데 그것이 굉장히 큰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받고있는 고린도 교회는 항구도시에 있는 교회였고 비교적 잘사는 동네였습니다. 항구도시에 비교적 돈이많습니다. 아세요. 여수에 가서 돈자랑 하지 말아라. 벌교에 가서 주먹자랑 하지 말아라. 그곳은 깡패가 많은 곳인데 그리고 또 어디가서 무엇을 자랑하지 말아라 그러는데 하여튼 항구도시에는 옛날부터 돈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여기가 돈이 많은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점에 있어서 이 고린도교회가 사실 이기심으로 많이 뭉쳐진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마게도니아 교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뭐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넘치는 기쁨,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의 미래를 주님께 의탁하게만들고 그 주님께 의탁된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헌금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왜 갑자기 오늘은 헌금하는 이야기냐 그러는데 그 이야기를 하다가 사도가 누구를 이야기했느냐하면 항상 그러듯이 윤리적인 교훈을 하는 것 같다가는 마지막에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하면 부요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해지신 것은 너희로 하여금 이제 그리스도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게 하려하심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부요하신분으로서 가난해지심으로서 그런데 여기 가난하다. “프토케이아”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명사입니다. “가난” 그런 뜻이고 프토코스는 형용사입니다. “가난한” 프토코스가 어디에 나오느냐하면 나태복음 5장 3절에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있나니“ 히브리어에 구약성경에 보면 나는 가난하오니 가난하오니 그러면서 쭉 나오는데 ”에비온“이라는 단어인데 대게 그 단어들을 번역한 것입니다. "에비온” 그다음에 “프토코스” 프토케이아“ 특별히 ”프토케이아“라는 단어는 뭐냐하면 가난한 것은 가난한데 가난한 것도 여러종류입니다. 상대적인 것 아닙니까. 가난한 것은 한번 미국인가 어디를 가다가 비행기를 탔는데 우리는 항상 3등석인데 사람들이 빽빽한데 자리를 주었는데 양쪽에 미국인이 앉아있는데 백킬로가 넘는 이런 사람이 둘이 앉았는데 그 사이에 내가 끼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외소해요. 그렇죠. 이렇게 빼짝 마르고 외소한 사람이 두 사이에 쌘드위치가 되었는데 숨을 못쉬겠어요. 그런데 화장실 가려고 커튼을 걷고보니까. 저기에는 사람들이 누워서 가는데 자리가 많이 비었어요. 그래서 그것이 아마 1등석인가보다. 그랬습니다. 거기 남자 승무원 한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데 그래서 이제 거기가 마치 앞자리가 터진 자리였습니다. 승무원이 왔다 갔다. 하다가 거기 잠깐 앉더라고요. 그래서 둘이서 얘기를 했습니다. ”저 자리는 얼마요.“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이러고 쳐다보더니 ”비싸요“ 그래요. 그래서 저런 것은 얼마나가요. 그러니까 당시에 미국을 가는데 왕복에 480만원이라고 하더라고요. 승용차 한 대값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깜짝놀랬죠. 나는 110만원엔가 끈어서 지금 가는데 ”그렇게 비싼데 사람들이 타요." 그러니까 이 사람 하는 이야기가 재미있었습니다. "선생님 손님들 중에는요. 비행기 삯이 얼마나 비싸든지 별로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요“ 그것이 퍼스트클라스인데 요즘은 프리미엄 퍼스트클라스라는 것이 새로 나왔데요. 일등석 위에 제가 듣기에 왕복에 650만원이라고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약소해서 너무 놀라지를 않는군요. 그런 사람들과 만나면 갑자기 너무 가난한 것 처럼 느껴집니다. 그렇죠. 오늘 저녁때 저녁을 먹는데 우리 집사람이 전국 어린이 글짓기 대회에서 일등한 이야기를 해주면서 인터넷에 올라왔다. 그러더군요. 너무 바빠서 보지 못했는데 그런데 그냥 벌집같은 쪽방에 살면서 누가 50만원만 나를 주면 예수믿겠다고 그러던 알콜중독자인 엄마를 둔 아이가 글을써거 감동을 시키고 그 글을 보고 심사했던 사람인가 누가가 동화책을 갖다주고 속에다가 봉투하나를 넣어서 주었는데 엄마가 이렇게 동화책을 보다가 툭하고 떨어졌는데 50만원짜리 봉투가 떨어졌데요. 그것을 보고 눈물을 펑펑흘리면서 매일 아들붙들고 우리 죽어버리자 그러더니 이번에는 교회가자 그러더래요. 그래가지고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아이가 글짓기를 써서 1등을 했단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참 우리는 너무 부자입니다. 뭐 50만원이 큰돈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생사를 걸정도는 아니고 적어도 벌집같은 쪽방에 그렇게 살지는 않고 오늘도 올라가면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저 두다리 뻗고 잘 수 있는 집이있고 배불리 먹을수 있는 음식이 있으니까 굉장히 부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다 뭐냐하면 절대적인 가난이 아니라. 어떤 가난입니까? 상대적인 가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프토케이아 이 단어는 원래 파산선고받을 정도로 가난한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파산선고를 받고나면 이제 금치산자가 되고 자기 모든 소유를 잃어버리고나면 그다음에 어떻게되요? 제산을 모으고나면 즉시 남의것이 되어버립니다. 법적으로 그렇습니까. 안그렇습니까. 그래가지고 쫄닥망한 사람이 차도 다른 사람의 명의빌려서 사고 신용카드도 다른 사람의 명의 빌려서 내고 집을 사도 자기 동생이나 형의 명의를 빌려서 사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만약에 자기 이름으로 했다. 그러면 사는 즉시 다시 차압입니다. 차 사는즉시 차압이고 왜냐하면 마이너스 인생이니까. 그러니 그 가난은 무엇입니까. 상대적인 가난이 아니라. 그런 종류의 가난은 절대적인 가난입니다. 그것이 프토케이아의 가난입니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해지셨다. 좀 무엇을 못누리고 사셨다. 좀 대체로 중산층 이하의 생활을 하셨다. 그것이 아닙니다. 프토케이아의 가난입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가난입니다. 주님을 누구와 비교하면서 "아, 이사람보다는 내가 가난하지만 아, 이사람보다는 예수님이 훨씬더 부자로 사셨구나.” 이렇게 비교될수 있는 성질의 상대적이 가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이 경험하신 가난과 우리가 경험한 이 가난은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바로 그런 단어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실 때 사용하신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막 자기보다 부자를 만나면 열을받죠. 머리가 끓고 “야, 내가 이렇게 이렇게 살았는데 야,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면서 막 주저앉아서 “야, 나는 정말 너무 비참하다.” 세상에 나이 50이 다먹도록 야, 이제 겨우 코구멍만한 아파트 하나에 자식 새끼들하고 이렇게 살고 차도 덜덜 거리는 옛날차나 끌고다니고 그것몰고 딸 데리러 학교가니까 챙피하다고 나오지도 않고 말이지. 야, 내가 이러고 사나“ 그러고 있다가 친구를 만났는데 쫄딱망해서 콜록콜록 기침하는 친구가 찾아와서 "여보게 10만원만 빌려주게” 이런 친구들을 만나고 눈물을 뚝뚝흘리고 도와주고나면 상대적으로 이 부한 느낌을 받지않습니까. “아, 그래도 나보다도 비참한 사람이 있구나.” 그러면서 살지않습니까. 이런 것은 모두다 상대적인 가난입니다. 예수님의 가난하게 되심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의미의 가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심령이 가난해진다.라고 하는 것이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상대적인 가난은 마음을 돌리면 자기가 가난하지 않다.라고 하는 확인을 하게되고 다시 심정적으로 “아, 나는 그래도 희망이 있어” 이런 생각을 하게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절대적인 가난은 앞을보든 옆을 보든 어디를 보든간에 똑같습니다. 왜 상대적인 가난이 아니고 절대적인 가난이니까. 그러니까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런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프토코스의 가난이고 그것을 명사형으로해서 여기에서 프토케이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해가됩니까. 자, 그러면 이제 두 번째로 설명에 들어가겠습니다. 자, 그렇다고 할것같으면 예수님이 이렇게 부요하신 분으로서 가난해지셨다. 그랬는데 어떤점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어떤 정도로 가난해지셨는가? 우리는 우선 몇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수 있겠는데 우선 첫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성품에 있어서 가난해지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가져” 그랬습니다. 여기에서 종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율법의 종, 율법의 지배아래 있는종,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볼때에 종, 죄아래 살아가는 노예된 인간의 모습으로서의 종, 그러한 모습을 취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죄의 종이되신적은 없습니다. 율법보다 크신 분입니다. 그렇지만 율법아래 태어나셔서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지음바된 인간의 모습으로 그리고 죄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죄는 없으신 분이셨지만 그런 모습으로 가난해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이셨는데 근본 하나님의 본체셨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만 계셔서는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실수 없었기 때문에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분을 그렇게 성육신 시키셨지만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도 강제로 그 일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순종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반응, 예수 그리스도와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게 하신 것입니다. 참 하나님이고 참 사람이신 그분이 참 하나님의 성품만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완전히 하나님이셨고 또 하나님으로 존재하실수 있었고 하나님 자신이셨는데 스스로 여기에다 죄는 없지만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의 성품을 취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성품을 취하시고 인간의 성품 그릇속에 신의 성품을 담으신 것입니다. 담으시니까 자연적으로 참 하나님이심에는 틀림이 없는데 그 참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으신 참 하나님이 되셔서 스스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육체적인 한계에 하나님이신 자신이 스스로 갖히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가운에 잘못알고 말씀하시더나 틀린 것은 없으셨지만 육신이 입으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다 알고계신 것은 아닙니다. 예를들자면 인자가 다시 올 그 심판의 날, 아들인 당신 자신은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죠. 예수님이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우셨을까요? 안배우셨을까요? 배우셨습니다. 자연적인 인간의 성장의 과정을 거치신것입니다. 왜그랬느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참 하나님이신데 그 참하나님되신 성품을 사람된 성품에 이렇게 담으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도 육체에 계실 때에는 많이 걸어다니면 피곤하고 잡수시지 못하면 시장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이런 한계를 느끼신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의 성품이 인간의 성품이라는 그릇에 이렇게 담기셨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여전히 참 사람이신 동시에 참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성품에 있어서 낮아지신 모습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난하게 되신 모든 것 가운데 이것만큼 예수님에게 있어서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은 없으셨을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전에도 하나님이셨고 그 때에도 하나님이셨고 그후에도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성품에 자기의 신성을 감추셨습니다. 그리고 오류는 없으시지만 스스로 신의 성품을 인간의 성품에 담으심으로 그 사람의 성품을 가진채로 여러 가지 육체가 가지고 있는 연약함에 죄는 없으신 순결한 상태였지만 육체가 가진 여러 가지 연약함에 자기를 복종시키셨습니다. 목이 마르시면 목이 마르는 것을 경험함으로서 인간들의 고통을 체험하셨고 시장하시면 시장하신대로 누군가가 보고싶으면 그리워하시는대로 인간들의 모든 고통을 죄는 없으셨지만 그 육체의 한계속에 스스로를 가두심으로 체험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난하게 되신 첫 번째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성품의 가난을 누가 이해할수 있을까요.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그 육체안에 하나님의 성품을 감추심으로 스스로 하나님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되심을 감추시고 사람되심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주님, 그분의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분의 절대적인 가난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랑하고 당신이 복음을 전해야할 그 영혼들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자신의 성품까지 가난해지시면서 내려오셨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이신 그분의 찬란한 광채를 사람의 성품으로 감추셨기에 오늘도 죄인인 우리들이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주님의 얼굴을 뵈올수 있는 그런 우리에게 친근한 구주가( ? )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낮아지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그 은혜를 깊이 깨닫고나면 항상 우리의 사명의 자리에서는 우리보고 단지 열심히 일하라고만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무릎을 꿇고 영혼들을 섬기고 사명이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취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사명이 있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까지 낮아지기를 그 사명이 있는 그 자리는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그렇게 낮아지기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과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을 받았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그러한 성품의 낮아지심을 통해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처럼 낮아지심으로서 자기를 구원하셨다고 하는 이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깨닫기만 하면 그는 그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지 않고는 그는 결코 그렇게 낮아질수 없는 것입니다. 벨지움의 반 뉴벤이라고 하는 선교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소록도처럼 어떤 섬에다가 문둥병 환자들을 모두 모아놓고 그리고 그들을 격리수용해서 생활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선교사가 그들의 영혼이 너무 불쌍하니까 그들을 위해서 선교하겠다고 떠났습니다. 전도다 양양한 젊은이가 여러 가지 좋은 길을 버리고 저주받은 환자들이 살고있는 땅이라고 믿어지는 그 섬에 도착했을 때 모든 사람들은 그 젊은이가 얼마나 버틸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거기 가서 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데 아주 굉장히 대담하게 생활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악수도 하고 껴안기도 하고 같이 식사도 하고 그러면 안됩니다. 고름을 통해서 그 문둥병이 전염됩니다. 그런데 이 젊은 선교사에게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무슨 확신이냐하면 하나님이 이 질병으로부터 자기가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이 질병으로부터 자기를 지켜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환자들을 꺼리거 멀리해서는 도저히 선교할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알고 이 세상에 누구도 해본적이 없을 정도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렇게 선교했습니다. 여러해를 섬겼지만 성과가 거의 없었고 진짜 기적같이 이 젊은이는 그 나병에 전염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역의 성과가 너무 없어서 괴로워하며 교회당에서 기도하다가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는데 어느날 밤에 그 나병환자들이 모여서 살고있는 그 마을, 골목을 지나가다가 창문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여봐 여봐, 벌써 그 젊은 목사님이 오신지 오래되었지” “그럼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데” “참 열심이지” 좋은 이야기들을 쭉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에 한 사람이 얘기했습니다. “다 소용없어 그만큼 안하고 간 사람이 누가 있어? 그 사람과 우리는 영원히 남일뿐이야. 그가 아무리 목사라고 한든 매순간 죽음을 앞에 두고 이 문들어지는 손가락 발가락을 보면서 살아가는 우리와 하나가 될수있겠어 정말 우리가 누구인지를 그가 알수있겠어?” 그 때 이 선교사는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자기가 전염되지 않는 건강한 사람으로서의 정체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 것은 저들과 하나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돌아와서 교회당에서 하나님께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습니다. 무엇이었느냐하면 “이제 내가 믿음으로 기도했던 것들을 취소하고 아주 빠른시일내에 나에게 저들과 똑같은 질병을 주셔서 성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저들과 함께 죽어가는 한 사람으로서 내가 어떻게 저들처럼 절망하지 않고 내 안에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지를 보여주게 해 주시옵소서” 그랬더니 그 기도에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이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즉각적으로 전염되기 시작했고 나병의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참 신기한 것이 뭐냐하면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변함이 없었는데 그렇게 나병 이상의 것이라고 걸릴수 있을정도로 사랑했지만 더 오래 이땅에 남아서 그들을 돌보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의 기도로 건강한 사람으로서 살면서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눈물로 설교할 때는 냉담하던 사람들이 비로소 이 문개진 손가락으로 성경을 들고 분명하지 않은 발음으로 설교하기 시작할 때 그 나병환자들이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뭐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사랑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줄수있었는데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영원히 그 선교사를 이 나병환자들이 타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꼭 그렇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셔야지만 우리에게 무엇인가 복음을 전하실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지금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지 않으셨으면서도 성령님을 통해서 병든 사람도 고치고 그리고 사람도 변화시키시고 또 우리 같이 부족한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의 사랑도 알게 하셔서 미미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앞에 참회하고 돌아오게 하시는 그런 일들을 하시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않하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그 거룩한 신성을 이 연약한 인성속에 감추신 것 그 자체가 들리지 않는 설교였습니다. 우리들이 신앙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인데 왜 마굿간에 태어나? 그래도 무슨 싯다르타처럼 절반왕의 아들쯤 되어야지. 그리고 왜 그렇게 가난하게 살아? 살아있을 때에는 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지 못하고 왜 그렇게 버림을 받아? 신앙이 없었을 때에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는 것 때문에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안믿어집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복음이 내 마음속에 믿어지기만 하면 우리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 모습을 우리들이 볼 때 그분이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 때문에 그 주님을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고 그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 자체만으로 우리의 질병을 고쳐주시지 않고 우리에게 놀라운 은사를 주시지 않았어도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가슴을 뒤흔드는 함성입니다. 외침입니다.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제물 되실 때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그것 때문에 주님을 너무 사랑하게됩니다. 신앙이 없을 때에는 주님을 못믿는 이유였던 것이 신앙이 생기고나면 주님을 사랑하는 이유가됩니다. 왜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존재, 즉 성품에 있어서 그토록 가난해 지시는 길을 택하셨을 까? 그렇게 하심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실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품에 있어서 예수님을 그렇게 낮추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가난을 비교할대게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한 나라의 제왕이 청소부로 전락하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가난한 말구유간에 오신것과 비교할수 있을까요? 비교할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높은 자리에 올라갔더 제왕이 아무리 비참한 자리로 낮아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신 그분이 존재에 있어서 혹은 성품에 있어서 가난해 지셔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종의 형체를 가져 가난해지신 그 그난과는 비교할수 없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낮아지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러니까 항상 그것을 생각해야합니다. 쓰레기같이 짐승과 같이 살다가 버림을 받아야할 그 쓸모없는 인간들이 이렇게 주님의 형상을 가진 자녀들이 되어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수 있는 죄많은 세상에서 참 인간이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깨닫고 걸어가는 그런 은혜받고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어서 사람다운 삶을 살수있기 까지 짐승같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여 사람같이 성도와 같이 만드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나님이신데 사람처럼 이 세상에 내려오시기까지 그 성품에 있어서 가난해 지셔야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우리의 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게된 이 아름다운 지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십자가의 피로 획득하게 된 비할수 없는 이 성결한 신분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할 때마다 항상 우리를 이렇게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당신은 종의 모습으로 낮아지신 어처구니 없이 낮아지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겸비한 가난은 기억해야합니다. 그리고 항상 그것에 대해서 부채의식을 가져야합니다. 나같은 짐승과 같은 죄인을 성도 삼으실려고 구원하셔서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게 하실려고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살가죽을 입으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당신이 창조하신 가장 불결한 피조물 가운데 하나인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신자가 진실하고 깨끗하고 그리고 온전한 삶을 살면서도 교만해지는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뭐냐하면 온전하게 되어가고 있는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깨끗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기 자신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보다도 자기를 그렇게 살게 하시려고 자기가 처음 하나님이신 그분을 인간의 살가죽을 입어 이 세상에 내려오게한 장본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나의 부요하게된 모든 것이 주님의 가난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게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몸에 짊어지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성결하게 살아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왜? 내가 이렇게 성결해진 것은 내가 이렇게 주님 앞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기업을 누리는 부요한 사람이 될수 있었던 것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광의 축복을 누릴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성품에 있어서 그렇게 하나님이신대도 사람의 부끄러운 모양을 입으시고 낮아지셨기 때문에 그 낮아지심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것이다. 생각하니 나의 나된 모든 것이 자기를 버리고 가난해지신 예수 때문이다. 라는 고백이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날마다 날마다 성화의 삶을 통해서 진실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우리를 보면서 “아, 정말 당신은 내가 만난 그리스도인중에 너무 아름다운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당신이 나의 신앙의 모본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말해야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나를 그렇게 보지 마십니오. 나는 바로 하나님이신 그분으로 하여금 부끄러운 인간의 모습 종의 형체를 입어 이 세상에 내려오도록 그렇게 가난하게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렇게 고백할수 있어야합니다. 예수 죽인 것만 몸에 짊어지신 것만 아니라. 예수의 사람되심도 몸에 짊어져서 우리가 구속못한 그 죄를 속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참 하나님이신 그분이 부끄럽게도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짐승같은 나를 성도로 만드셨으니 나의 성도됨이 모두 주님의 가난하게 되심 때문이라는 고백을 해야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날마다 한순간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대견하게 여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큰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못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우리 자신의 잘못이고 무엇인가 패역하고 죄가운데 있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향기를 풍기는 그 어떤 삶을 티끌만이라도 살고 있다고 한다면 그분이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시나 그가 동등됨을 취할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내가 그리 될수 있었습니다.라는 고백이 우리 안에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그분앞에 무엇을 자랑할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믿기전에는 말할 필요도 없이 죄인이었고 우리의 모친은 우리를 죄가운데 잉태하였습니다.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안 다음에도 우리는 기껏해야 용서받은 죄인일뿐이고 주님이 그렇게 용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의 죄된 욕망을 하나님보다 더 많이 잡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주님의 사랑 갈망하고 주님의 은혜의 빛 앞에서 사는 진실한 성도들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시오. 모든 능력과 권능을 한몸에 가지신 창조주이신 하나님 자기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종의 모습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기까지 가난해지셨기에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구원도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되신 것이 모두 우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주님의 사람되심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열린교회 오래다니신분들 여기 계시죠. 우리는 성탄절을 떠들석하게 지내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성탄절은 한편으로는 주님이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셨다는 점에서는 너무 기쁘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은혜가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왔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기뻐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신 그분이 비참할 정도로 낮아지셔서 성품에 있어서 한없이 낮아지셔서 종의 모양, 사람의 모습으로 내려오신 그 날이 바로 성탄대강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사람되심으로 주의 자녀됨을 얻을수 있었던 우리들은 그분이 사람의 몸으로 내려오셔야 했던 그 비참한 낮아지신 그 절대적인 가난의 절대적인 복종의 이유가 우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사람으로 낮아지셔서 인간의 형체를 입으시고 걸어 다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서 속에서 뵈올때마다 한없이 죄송한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이 구원이니 우리의 이 구원이 부끄럽지 않도록 주님의 그 도성인신의 정신을 가지고 우리도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3.예수 가난해지신 것을 짊어지고②:버림받고 누린 것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8:9)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그리스도 예수를 소개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모든 부요함들이 사실은 낮아지고 가난해지신 그리스도의 희생에 기초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사는것도 실재의 삶에 있어서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는 한 방법이다.라는 말씀을 드리면서 지난시간에는 특별히 예수님께서 어떤면에 있어서 가난해지셨는지를 말씀드리는 가운데 첫 번째는 성품에 있어서 가난해지셨다. 말씀을 한가지를 가지고 지난 시간에 저희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되풀이 할 수는 없지만 요약을 하자면 예수님은 우리를 이 땅에 얽매어 사는 형벌받을 짐승과 같은 자리에서 주님의 존귀한 자녀로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내려오셔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라고 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예수 사람되신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놀라운 복음이며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분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죄송스러운 일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예수 사람되심을 몸에 짊어지고 살아갈 필요가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의 사랑을 안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두 번째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가난하고 낮아지신 것이 또한 방면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신 또 하나의 방면은 관계에 있어서 가난해지심을 경험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냐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때에 물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셨고 또 예수님 주위에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상에 사시는 동안에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는 사랑과 그리고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또 믿으며 따르는 많은 사람들의 신앙의 고백과 그 친절한 복종 그리고 사랑, 이것이 예수님에게 적잖이 위로가 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 위로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만약에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고 할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잃어버리실 것이 없었고 그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에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으셨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이 죄많은 세상에 내려오시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계셨더라면 그분이 거기에서 누렸을 그 친밀한 하나님과의 교제와 그리고 성도들과의 그 교통의 행복은 바할데없이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탁월한 믿음과 그리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속에서 사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도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죄가 많은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그 관계에서 맛보는 그 만족과 충만함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누렸던 것과 동일하지 않았을 것이니다. 그 한증거가 무엇이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하나님과 한없이 친밀한 교제속에서 사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전에 드린 요한복음 17장에 나와있는 대제사장의 이 기도는 읽을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에이는 것같은 간절함이 담겨져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은 그러나 그것이 천국에서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와는 비교할수 없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에 남기신 네 번째말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한 그 울부짖음의 기도에서 더욱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죄가 없으셨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죄많은 이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고뇌하시며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나누신 그 교제의 깊이는 하늘나라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누린 그 영광의 교제에 비하면 매우 적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볼때에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친밀하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를 하나님과 하늘에서 누릴수 있는 그런 탁월한 교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죄와 슬픔, 인간적인 연약함, 혹은 사람의 죄를 짊어진 대가로 인해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을 느끼며 고통하는 울부짖음의 기도를 드리기까지 그렇게 파란만장한 생애를 선택하셔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마지막에는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기까지 관계에 있어서 가난해지심으로서 이른바되심으로서 결국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담을 헐고 우리를 하나님 가까이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조차도 버림을 받는 가난함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가난해지신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교제속에서도 나타납니다. 물론 예수님의 생애에는 변함없이 사랑하고 따라다니던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소수였는가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당신이 사랑하던 12제자들 조차도 당신을 버리고 도망간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행히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인들이 그 부끄러운 고난의 자리에서 가슴을 치고 슬피울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으나 그러나 예수님이 사랑하시고 싶어하셨던 사람들에 비하면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생애는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사람들로부터 욕을 당하시고 혹은 오해를 받으시고 사람들로부터 대접 당하신 그런 생애였습니다. 육신으로는 마리아와 요셉의 집에 태어났지만 그의 어머니나 아버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아주 분명한 목적, 그리고 그 목적을 성취해 가는 예수님 나름대로의 독특한 방법에 대해서 확실히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정도로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가족들에게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고 심지어는 자기가 지극히 사랑하던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조차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했습니다. 이른 새벽서부터 기도하시고 깊은 밤까지 고쳐주시던 자기의 피와 살과같이 사랑하시던 목자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던 영혼들, 주님께서 그 품으로 모두 거두셨지만 그들중에 주님의 참 사랑을 알고 이해해서 주님의 마음에 위로와 기쁨이 되어준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인 것입니다. 만약에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지 않으셨다고 할 것 같으면 그분은 천국에서 천군과 천사들의 경배와 성도들의 찬양을 한몸에 받으실 분이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누가 하나님이신 그분을 거스리겠으면 하늘에서 하나님이신 그분을 대항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자 하나님으로서 그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수 있는 모든 관계의 복된 특권들을 거의 포기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모양으로 사람 가운데 한 형제로 사실 때 누가 그를 하나님이라고 알아볼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천국에서 누리던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상태에서 이 세상에서 사시고 자기가 사랑한 사람들에게 조차도 경배와 찬송을 받으시는대신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신 그분이 창조주이신 그분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그런 대접을 받으시면서 그러면서까지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그렇게까지 가난해지셨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낮아지셨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천국에서 하나님으로서 경배와 찬양을 한몸에 받으시기를 포기하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시기까지 가난해지시고 낮아지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영영 그분에게 버림받으실 수밖에 없고 다시 그분과의 복된관계로 돌아갈수가 없는 우리들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장을 허물며 우리를 그 무너진 담장의 잔에 의해서 끌어안고 우리에게 화목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주님과 원수된 우리들을 불러 주님과 화목케하시고 주님을 대적하며 살 수밖에 없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던 우리들을 불러 하나님의 참 사랑받는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낮아지심으로 우리는 높아졌고 주님이 가난해지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하고 부요한 사람들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머리에 가시 멸류관
어찌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흘리심은]
누구의 죄 값인가
어린양 보혈의 피
어이해 흘렸는가
채찍에 피흘리심은
누구의 죄 값인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하나님이신 그분으로서는 차마 받으실수 없었던 멸시와 욕, 그리고 천대와 수모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신데도 사람들은 그분을 죄수처럼 여겼습니다.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는데도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무슨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나사렛에서 태어난것도 아니고 거기에 잠깐 사셨을뿐인데 그분의 태생이 나사렛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롱하며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나오는 법이 없다고 그분을 멸시했습니다. 더욱 참을수 없는 것은 자기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시고 계셨는데도 사람들은 그분은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 징벌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지 아니하였더라면 상상할수 없는 더러운 대접을 받으시면서 비참한 노예보다도 못하게 낮아지셨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제자가 당신을 은30에 팔았으니 그것은 당시 노예의 몸값이었습니다. 그렇게 멸시를 당하면서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는데 만약에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지 않으셨다고 할것같으면 그분이 하늘에서 어떻게 그런 대접을 받으실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우리 주구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멸시와 천대, 욕과 수치를 한몸에 당하시리만치 가난해지셨습니다. 가난해 지셨다기 보다는 오히려 비참해졌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내려가실수 없는 자리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분이 그렇게 가난해지시고 그렇게 철저히 버림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버리신바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고난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성도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정말 아는지 묻고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얼마나 크고 고귀한 특권인지를 알고 있는지를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흔히들 모여서 말하면 “아, 예수믿기 전에는 친구도 많았지. 예수믿고 나니까 이제 다 끊어졌어.” 그런데 그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끊어진 것을 생각하면서 지금 오늘 외로워하고 있다든지 그 친구들이 그리워진다든지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문제가 있는 영적인 삶을 살아아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 세상사람 버렸네
나 주님만 사랑하네
보십시오. 세상친구 있었겠지. 누구는 왕년에 세상에 안 살아본 사람있나요.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많았죠. 그런데 그 친구들이 우리의 외로움을 정말 달래줄수 있나요? 옛날에 이 예화가 기독교 정신이 딱 맞는 것은 아닙니다만은 옛날에 돈이 많은 아버지 한분이 있는데 아들이라고는 외아들 하나밖에 없는데 공부를 안해요. 그리고 할량이에요. 매일 돌아다니면서 술퍼먹고 놀고 그런데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 뭐냐하면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보면 불경건의 중요한 요인이 친구입니다. 그런데 친구를 사귈때에 잘 사겨야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입니다. 그래서 하루를 아버지가 불러놓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때려도 안되고 야단을 쳐도 안되고 이제는 나이를 많이 먹고 장가를 갔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얘야 이제 너 나이가 30이 넘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하고 살거냐.” 그랬더니 이 아들 하는 이야기가 재미있어요. “아버지 세상을 저는 저 나름대로 사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뭐냐?” “돈보다도 명예보다도 때로는 가족보다도 소중한 것이 있는데 친구의 우정입니다.” “그래 그러면 네가 정말 그렇게 친구들을 사랑하느냐” 그랬더니 “자기는 자기 친구들을 너무 사랑한데요.” “그래 네 친구들도 너를 그렇게 사랑하느냐” 그랬더니 “아니 그것을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모르기는 몰라도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친구들이 열댓명은 될것입니다.“ 아버지가 ”정말 15명이나돼?“ 그러니까 한참 생각하더니 ”아무리 줄이고 줄여도 대여섯명은 됩니다.“ ”그래 그러면 너 나를 따라오너라.“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어느날 지개를 지웠습니다. 그리고 지개에다 가마니대기를 둘둘 말은 무엇을 턱 얹어서 그래서 이제 가지고 갔습니다. ”네가 네 친구중에서 다섯명 여섯명 된다는 친구중에서 제일 찐하게 너를 사랑하는 애는 제일 나중에 가고 비교적 너를 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순서대로 거꾸로 해서 5순위부터 1순위까지 올라가보자 제일먼저 5번을 먼저 가보아라.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 내가 시키는대로 이야기를 해보아라.“ 그랬더니 갔습니다. 밤중에 문을 두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저 뒤에서 망을 보고 ”여보게 여보게“ 그러니까 ”누구야“ ”아, 나 자네 친구 누구야“ 그러니까 ”어 반가우이 그러면서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밤에 왠일이야” 지개를 하나지고 가마니데기를 둘둘말아서 지고 “아니 이 밤에 어쩐일이야 들어와 들어와” 그러니까 “아니야 내가 지금 들어갈 마음의 여유가 없어” “뭔데” “큰일났어” “왜” “아, 내가 말다툼을 하다가 사람을 실수로 죽였어 지금 여기 있거든 나 무서워죽겠어 나 어떻하지” 그랬더니 “빨리 자수하는 것이 좋을걸” 그러면서 문탁닫고 들어가더래요. 두 번째 친구, 세 번째 친구, 네 번째 친구, 제일 자기를 사랑한다는 친구에게 갔는데도 다 자기 얘기를 들어주다 마지막에 나를 좀 어떻게 도와달라고 그랬더니 “나는 자네일에 게입하지 않은 것으로 해주게” 그리고 문을 꽝 닫더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것을 짊어지고 “얘야 나는 일평생에 친구라고는 하나밖에 없단다. 아버지 친구에게 한번 가보자.” 그리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오두막집에 살고있는 친구의 집에 가서 사정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보게 내 이 나이에 실수를 했네 이웃집 사람하고 다투다가 실수를 했는데 떠밀었더니 이 사람이 그만 넘어져서 죽었네 너무 무서워죽겠는데 나는 어떻게 하지 나좀 도와주게” 그랬더니 이 사람이 “잠깐 기다려” 그러더니 광에 가서 삽하고 곡괭이를 가지고 나오더니 “여보게 일단 시체를 묻고 다음일을 생각하세 내가 거들어주지” 그리고 가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삽하고 곡괭이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는데 뒤에서 아들녀석이 졸랑졸랑 쫒아갔습니다. 그래 산에 가서 땅을 팔려고하니까 이 아버지 하는 말이 “됐네 이 사람아” 그리고 가마니 데기를 내려놓고 쫙 펼치니까 통돼지 삶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펼쳐놓고 셋이 앉아서 그 고기하고 술을 먹으면서 인생사는 이야기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국민학교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보세요. 이것이 우리들이 주님을 만남으로 잃어버린 친구들을 그렇게 소중한 친구들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것만 생각하지 말고 그것 잃어버리고 예수 때문에 얻게된 것들을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몰랐더라면 지금쯤 세상에서 그런 친구들하고 어울리면서 지금 이 시간에 퇴근하고 어느 술집에 걸터앉아서 술이나 마시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하고 밤늦게 터덜터덜 들어가다 아침에는 머리를 움켜쥐고 골이 아파서 일어나는 이런 생활이나 하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친구들이 주님 믿기 전에 사귀었던 여러분들의 친구들이 우정을 나누고 신앙 때문에 헤어져야했던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잘 해주었다고 할지라도 글쌔 그것이 어느정도의 사랑이었을까요? 어느정도의 깊이 있는 사랑이었을까요? 정말 여러분들이 기대에 어긋나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자신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때에 조차도 여러분들을 사랑할만큼 그렇게 헌신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이었을까요?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우리는 주님을 믿기로 결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해 돌이켜서는 순간 저나 여러분이나 결별해야 했던 것들이 많이 있을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주님을 향해 돌이켜설때에 세상에 있으나 우리와 함께 주님을 향해 돌이킬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 중에 많은 것들을 우리는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렸을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렇게 한 공동체에서 만났습니다. 형제보다도 더 고귀한 그리스도 예수 안의 지체들을 만났습니다. 피를 나눈 형제들과 나눌수 없는 대화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형제된 이들과 함께 나누며 눈물흘리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아름다운 아가페의 교제를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과연 그런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맺어준 많은 관계들은 우리들을 한없이 용납하고 사랑하는 경우가 많이있습니다. 교회가 여러분들을 돈이 없다고 멸시하던가요? 써먹을만하지 않다고 해서 여러분들을 하찮게 취급하던가요? 교회에 있는 지체들이 여러분들의 외모나 여러분들의 소유나 여러분들의 재능을 보고 많이 사랑하고 적게 사랑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미성숙의 문제이지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에게 가르쳐주신 신앙의 교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님의 뜻을 좆아 온전해지고자 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그 가르침을 본받으며 따라가며 살려고 하고 그렇게 살지못하는 자신을 위해 늘 괴로워하며 거룩과 성숙의 진보를 향해 다름질치고 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시기까지 낮아지시고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물론이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평화를 누릴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게 되었습니다. 고통과 아픔이 있으면 그 사람을 위로하고 위로를 받으며 살수있게 되었습니다. 인생길을 살아가는 동안에 만나는 모진 풍랑과 고통속에서 잠시 쉬며 사랑하는 지체들과 대화를 나누고 이미 앞서 우리의 고통받는 길을 걸어갔던 신앙의 선배의 경험을 들으면서 위로를 받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분투를 시작할수 있게 만들어주는 재충전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눈에 보기 좋은 경치를 수없이 보고나도 가슴이 부듯하면서 무슨 신령한 기쁨으로 차오르는 것은 없습니다. 저 외국에 가서 우리 지방에 오셨으니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좀 올라가시죠. 자유의 여신상을 한번 가보시겠습니까? 그것 보면 뭐해요. 어차피 내것도 아닌데. “혼자 올라가시오 나는 올라가서 쉬겠소” 진짜 어떤때는 자연속으로 우리를 데려가면 감탄할정도로 자연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우리나라 보다 아름다운 나라도 참 많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데 그것이 눈에 보이는 동안은 “야, 저 호수, 저숲, 저하늘 저구름, 저바다, 야 아름답다” 눈에 보이는 동안만 다 끝나고나면 끝나고났는데 뭐가있겠습니까. 아니 무슨 코미디나 아니면 아름다운 풍경만 보고 은혜받을 일 있습니까. 그냥 볼때에 “좋다”지 다 끝나고나면 끝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경치좋은데만 찾아 다니는 그것도 일종의 쾌락입니다. 약간 좀 수준높은 쾌락에 불과하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몇백만원을 내고 세계여행을 해보세요. 그 볼때만 “와” 그러지 보고나면 뭐 그냥 피곤하고 지친 것 밖에는 뭐가 남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생산적인 투자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좋은 신앙의 지체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세요. 그것도 만나서 매일 돈버는 이야기, 무슨 부동산 투자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 말고 신령한 대화를 하세요. 신앙이 어린 사람은 신앙이 좋은 사람과함께 대화를 하면서 처음에 갈때는 안그랬는데 한참 만나고 돌아올때는 “아! 정말 내가 주님 뜻대로 살아야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아!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는 하나님의 자녀구나“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함께 교제하는 것은 끝났습니다. 이제 다 이야기도 끝났고 밥먹는 것도 끝났고 헤어졌어요. 사람이 떠나갔는데도 계속해서 마음속에 밀려오는 것입니다. 뭐가 밀려와요? 신령한 기쁨, 거룩한 은혜가 이 속에서 계속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교제의 부요함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오히려 버림을 받으시는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한 교회안에서 함께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 생활이 정말 기쁘고 감격스러울 때마다 우리의 길에 이런 교제의 부요함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시는 생애를 사셨다.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이40이 넘어서 ”직장 어디 다녀요?“ 그럴 때 ”직장이라기 보다“ ”노세요.“ ”논다기 보다“ 이것도 부끄러운거죠. 그러나 그것보다 더 부끄러운 것이 있습니다. ”교회에 어디 다니세요?“ ”뭐 다닌다기 보다“ ”어느 교회에 출석하고 계시다며요?“ " 출석은 했는데” “그 교회 교인이세요?” “뭐 아니라고 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할수도 없고” “신앙의 동지가 계세요?” “동지라기보다.” 그것은 전자보다 훨씬 더 불쌍한 것입니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어려울 때도 있고 전도서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다 때가 있지않습니까. 직장을 잃을 때가 있고 얻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죠. 또 성공할때가 있는가 하면 실패할 때가 있죠. 모을때가 있는가 하면 흩을때가 있습니다. 그렇죠. 뭐 다시 하나님 안에서 시작하면 되죠. 그러나 10년 20년 넘게 신앙생활 했는데도 자기의 몸을 의탁할 영적인 가장이 없습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교회 밑에가 쌀가게가 있어요. 그 아저씨가 성격이 아주 괴팍한 아저씨인데 그 교회가 거기에 가서 1년반쯤 지났는데 뭐 열심히들 전도하고 신앙생활 잘하고 늘 교회에 가면 찬송가 소리가 울려퍼지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루는 이 쌀집 아저씨가 술을 먹고 교회에 올라 왔더래요. 정신이 나갈정도로 취한 것이 아니라. 약간 취해서 올라왔어요. “이 못된 것들 같으니라고” 그러면서 소리를 막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기겁을 하고 놀랐습니다. 쌀가게에 있는 아저씨가 쌀 푹찌르는 거, 그것 가지고 올라와서 “못된 것들 같으니라고” 그러니까 술주정 하는줄 알았는데 “예수 믿는 것 좋아?“ 그러고 물어보더래요. 뭐라 그러겠어요. 여러분들보고 ”예수믿는 것 좋아?” 그러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좋다고 대답하죠. 몇 사람이 좋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좋은 것을 1년반이 되도록 한번도 나보고 믿어보라고 말도 안해” 그러면서 하는 말이 더 재미있어요. “믿어보라고 그러면 자기는 싫다” 그럴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도 그럴 기회를 안주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층과 위층에서는 막 그렇게 찬송부르고 기도하는데 너무 너무 교회가 가고 싶더래요. 그런데 체면이 있으니까 맨 정신에 못올라오고 술김에 올라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아니 술을 먹어야 예수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아시죠.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해요. 사람들이 교회에 잠깐 예배드리러 나왔는데 막 쫓아오면서 뒤에 옷 붙잡고, 손 붙잡고 심지어는 어떤 사람은 혁대도 붙잡는다. 그러는데 적극적인 교회에서. 혁대 붙잡는 것은 사실 도망가는 범인 체포하는 것인데 아니 그렇게 붙잡는다고 되요. 그런 것을 사람들이 귀찮아해요? 안귀찮아 해요? 귀찮아 하죠. 비인격적이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어느 형제가 저에게 직접 고백해준 고백입니다. 자기가 생전처음 교회에 나갔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사람은 많지, 어디서 등록인지 뭐 그런 개념도 없고 이 교회에 계속 나오고 싶은데 누가 자기를 좀 이렇게 잡아 당겨주면 막 뿌리치는척 하면서 그냥 따라갈려고 그랬는데 잡아주는 사람이 없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다 그런 마음이 우리 각 사람마다 다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이 우리 각자 각자 한사람에게 다 있는 것입니다. 그 관계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해요. 이제는 나이가 30, 40이 넘고 심지어는 50이 넘어서 머리가 허해져서 정해진 교회도 없고 사랑해 주는 사람도 없고 뭐 어느 정신 나간 교인이 강남에 있는 어느 내가 아는 목사님의 교회에 등록을 하면서 그러더래요. 등록은 하겠는데 조건이 있다고 하더래요. 그래서 뭐냐고 그랬더니 집으로 찾아오지 않고 전화하지 않는다고 약속해주면 등록을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아세요. 안나왔는데 전화해서 “왜 못나왔어요?” “무슨 일이 있어요?”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아세요. 그렇게 자기가 교회를 안나와도 돌보아 줄 사람도 없고 자기가 아프거나 병들거나 영혼의 고통을 받아도 눈물 흘려줄 사람이 없이 살아가는 그것은 직업이 없이 떠돌아 다니는 것보다 훨씬 비참한 것입니다. 예순미을 알고 예수님의 은혜안에 있으면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월이 많이 흐르도록 그런 교제의 축복,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맺어진 형제의 아름다운 우애의 기쁨을 모르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은 얼마나 비참한 사람들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에게 낙이 뭐가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매일 몰려다니면서 먹는다고 욕하는데 욕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할게 뭐가 있어요. 그거라도 좀 하겠다는데 왜 그렇게 욕해요. 보태주지도 않으면서 괜찮습니다. 예수님도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셨지 않습니까. 물론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목표가 분명했죠. 그렇죠. 우리도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되겠죠. 그것을 매게체로 해서 연약한 사람을 붙들어주고 그렇죠. 곤고한 형제들을 위로하고 그렇죠.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며 그리고 모이기를 힘쓰고 이렇게 하면서 예수님의 참 사랑을 알아가도록 붙들어주는 것,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아니 집사하고 권찰하고 모여서 화투를 칠거에요. 아니면 포카를 할거에요. 아니면 당구300을 치러 갈거에요. 포켓볼을 치러갈거에요. 그거 못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노래방을 갈거에요.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가면 안됩니다. 단란 주점을 갈거에요. 실로암 단란주점. “주일도 영업합니다.” 그렇게 써붙여 놓았다고 하더라고요. 단란주점 이름이 실로암 단란주점 밑에는 “주일도 영업합니다.” 실로암이라고 써 있어도 안됩니다. 못가지 않습니까. 극장 구경. 갈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것도 잘 보고 가야합니다. 보세요. 얼마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형제들과 맺어진 이 관계의 놀라운 비결은 그런것들 없어도 사람 자체가 행복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고 연애하다가 푹빠진 남녀들, 오락기구가 있어서 둘이서 그렇게 재미있게 놀아요? 아무것도 윷놀이 한번 안해도 둘이 앉아서 손잡고 구름만 쳐다봐도 구름이 다 없어져도 별나올 때 까지 가많이 있는데도 시간이 잘가는 것입니다. 왜? 존재 자체가 기쁨이고 사랑이니까. 그런 무슨 매개적인 놀이기구가 필요없습니다. 그런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정말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생의 구비구비 시련의 고통스러운 길을 승리하면서 걸어올수 있게 만들었던 몇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는 시편이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그렇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 시편에 보면 내 삶이 새로운 삶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시편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을 통해서 위로를 많이 받았습니다. 또 곤고할 때 부르는 찬양은 어때요? 그렇죠. 찬양을 부르면서 깊이 그 가사에 내 마음을 담아서 부르고나면 새힘이 얻습니다. 그리고 나서 또 하나가 뭐냐하면 성도의 교제로부터 받는 힘이 우리로 하여금 이 고난과 시련의 길을 이기는데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지 모릅니다. 요즘도 교육자회의 이렇게 하면 구역장들이 어떻게 구역원을 챙기는지 교역자들을 챙기는지 제가 훤히 보고를 받습니다. 주일학교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러면 그런 생각이듭니다. 한사람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서 걸음마라도 떼면서 제 길을 걸어가기 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헌신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를 위해 울고, 그를 사랑하고 그가 기억하고 있든지 못하고 있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어쨌든 그 관계를 기뻐하고 그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며 그를 위해서 희생할 때 누군가가 있었단말입니다. 그런 관계, 어떻게 생길수 있었습니까. 피도 살도 섞어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고 사랑하고 가지고 있는 소유를 주고 그러면서 섬기면서 살아올수 있었던 그렇게 할수있게된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이러한 교제의 기쁨, 교제의 유익, 관계의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으시기까지 가난해 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유익을 주님의 그 고난을 통해서 받을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사랑할 교회가 없는 사람들, 곤고하고 고통스러울 때에 찾아갈 지체가 없는 사람들, 쓰러질 것 같을때에 울면서 매달릴 목자가 없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사람들에게 멸시와 욕을 받으시고 버림을 받으시기까지 그렇게 철저하게 배척받으시면서 가난해지신 것은 자기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를 그렇게 화평을 이루고 하나가 되고 그 안에서 관계의 기쁨을 맛보며 자기는 가난해도 그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섬기고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통해서 부요한 인생을 살아가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그렇게 버림받기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분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성도는 지체가 얼마나 소중하다라고 하는 것을 알게됩니다. 그리고 다른 그 무슨 죄보다도 지체들을 실족시키거나 혹은 지체를 미워하거나 혹은 지체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이것이 얼마나 돌이키기 힘든 범죄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교인들이 잘못했을 때 교회가 내릴수 있는 최종적인 형벌이 하나있는데 그것이 출교입니다. ( ? ) 커뮤니언은 성도의 교통이고 익스는 끊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하면 그런 사람에게 너무 죄가 악날해서 개전의 정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익스커미뉴언은 뭐냐하면 네가 그렇게 죄를 짓고도 개전의 정이 없어 그러면 우리가 너에게서 가장 중요한 행복 하나를 빼앗으리라. 그것이 너에게 줄수 있는 최대의 형벌이다. 그 형벌이 무엇입니까. “너는 이제 성도들과 교제할수 없다” 그러면서 잘라냅니다. 그런데 요즘에 그렇게 이야기 할 때 “아이고 무서워” 그럴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순복음 교회에서 짤리면 감리교회로, 감리교회에서 잘리면 장로교회로, 장로교회에서 잘리면 성결교회로 그렇게 돌아다니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커니뉴언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행복을 힘입어서 우리들이 곤고하고 고단한 인생의 길을 이제껏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두가지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 내리는 신령한 은혜, 그리고 우리 가까이 에서는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의 위로와 도움, 이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이런 교제, 관계의 부요함을 주시기 위해서 버림받으시기까지 낮아지신 가난해지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모본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그래서 자기 주위를 돌아보아야합니다. 누가 곤고한가. 누가 아파하는가. 누가 고통스러워 하고, 누가 결핍한가 하는 것을 돌아보아야합니다. 그래서 이전에 내가 나보다 은혜많이 받은 사람들에게 그런 섬김과 도움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다시 일어설수 있었던 것처럼 또한 우리들도 그래서 주위에 있는 지체들의 연약함을 돕고 그들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을 위로하고 붙들어 줄수 있는 그런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다음 지난주부터 시작하는 세 번째 이번주부터 시작하는 두 번째 또 하나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이 가난해 지신 것은 여기에서 직접적으로 말하고 싶으셨던 것은 바로 물질적인 가난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은혜라고 기록된 것들은 대부분 헌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 마게도냐의 교회에 주시는 은혜를 상기시키면서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이자식들 말이야. 돈은 많고 돼지처럼 처먹으면서 헌금은 안내는 놈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부끄럽게 할려고 이 마게도니아교회의 이야기를 예를 든 것이 아니라. 이 문맥으로 볼때에 사도가 가만히 보니까. 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은혜를 받기는 받았습니다. 그 풍성한 은사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알수있지않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 죄나 여러 가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때 보면 그 은혜를 받았고 그리고 아데네에서 전도에 실패하고 고린도에 들어갔을 때에 사도바울이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십자가의 복음만 가지고 들어갔거든요. 그러니까 전도한 선교의 행전의 역사가운데 이 고린도교회에 들어갈 때 처럼 그렇게 떨리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들어간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하나님이 복을 안주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아직도 간직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헌금을 안해요. 그러니까 사도가 돼지같은 놈들“ ”나쁜놈들” 그런 악감정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뭐냐하면 이 성도 섬기는데 모자라는 이 일은 하나님이 채워주실터인데 사도가 너무나 간절히 바라는바가 있는데 뭐냐하면 너희들이 받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거짓이 아니고 진짜 은혜를 받았는데 그 은혜받은 사람같구나. 하는 인정을 내가 전도한 모든 교인들로부터 고린도교회 너희가 받을수 있었다면 내가 얼마나 기쁘겠느냐 그까짓거 돈때문이 아니라. 나에게로 복음을 전함받고 그리고 진실된 은혜를 받은 너희들이 진실된 은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 물질적인 헌신을 통해서 입증할수 있다면 너무 행복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심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의 입장에서도 보면 벌써 이렇게 헌금을 거두는 동기다 돈자체에 고정되기 시작하면 나오지도 않거니와 나오고나면 항상 문제가됩니다. 돈은 지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나올까요? 마음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기관총을 쏠때에 그것을 돈지갑을 향해서 쏘면 안됩니다. 구멍뚫어지면 손으로 막습니다. 어디를 겨냥해요? 그렇죠. 통장을 겨냥해서 두두두두하면 몇발 맞았습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이 지금 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마네도냐 교회는 너무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시련을 많이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극도로 가난했습니다. 우리 표현으로 하자면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그러니 뭐가 헌금이 나오겠습니까. 그런데 넘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할렐루야,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그 기쁨이 넘치게 헌금을 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 생각에 보니까 고린도교회 교인이 예전에 받은 그 은혜가 이 마네도니아 교회가 받은 그 은혜못지 않습니다. 정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 은혜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왜 근심이 되는 것이 뭐냐하면 이들이 만약에 물질로서 잘 헌신해서 성도들이 고통받는다고 할 때 그들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들이 받은 은혜를 사람들이 쉽게 평가하면서 “그 사람들이 난리를 쳤지만 별로 은혜받은 사람들이 아니야” 이렇게 될 때에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이 받을 불명예, 그리고 고린도교인들이 몸담고 있는 교회가 받을 불명예, 교회와 함께 연합되어 있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받으실 그 불명예를 생각하면서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이 마네도냐교회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신분이셨지만 우리를 위해서 가난해지신 것을 기억하라. 그러니까 너희도 지금 예루살렘에서 흉년을 만난 그 성도들을 위해서 지금 너희들이 부요하지만 가난해져야 하지 않겠느냐. 왜?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렇게 가난해지심으로 너희가 부요해졌으니까. 너희도 그렇게 해야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제 사도가 우리 주님이 부요하신 분이었지만 가난해지셨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그 왜 예수님께서 물질적으로 부요하신 분이셨는데도 가난해지셨을까? 우선 첫째는 뭐냐하면 그분이 이타적인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생애를 이렇게 더듬을 때 사실 그분은 인성속에 신성이 감추어져 있기는 했지만 언뜻언뜻 그 신성을 드러내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믿을수 있게끔 만들어주셨습니다. 많은 기적들이나 이런 것들이 증거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 기적을 베푸신적은 없습니다. 굶주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물고기와 보리떡으로 기적의 떡과 반찬을 먹이셨지만 당신 자신은 사람들에게 얻어드시거나 아니면 무화가 나무라도 열매를 당신 자신이 직접이렇게 취하고 싶어하실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런 정도의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가롯 유다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돈통을 맡은 것으로 보아서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적적인 방법에만 의지하면서 사신 것은 아니었다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랬는데도 예수님의 돈통에 언제나 돈이 별로없었습니다. 많이 있었으면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생각을 안했을지도 모르죠. 그렇죠. 왜 그렇게 없었을까요? 어떤 사람은 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러는데 주는 사람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예수님이 많이 쓰셔서 그렇습니다. 핍절한 자들을 위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그 공동체가 많이 나누어 준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사신 그 생애는 철저하게 이타적인 생애였습니다. 자신의 유익과 물질적인 누림에 관심이 없고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당신자신의 건강까지 허비하시며 사신 것이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부요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게 사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어떤 섬김을 받아서 여유가 있으셨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그것을 늘 고통하고 병든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쓰시면서 이타적인 인생을 사셨기 때문에 그분이 부요한 자였지만 가난한자가 되어서 일생을 사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매달릴 때 자기몸에 감은 옷한벌 이외에는 남겨놓은 것이 없는 그런 생애를 사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돈 많이 벌어서 남주어야합니다. 그래서 돈 많이 벌어서 돈 없는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도움을 입게하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공부를 못한 사람들을 멸시하지말고 자기가 공부한 사람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공부못한 사람이 동무을 받을수 있게끔 그렇게 만들어주어야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삶입니다.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우리들이 돈을 벌어서 돈이 없는 사람을 멸시하고 높은 자리게 있어서 낮은 사람들을 하찮게 여기고 그리고 공부많이 해서 못배운 사람들을 아주 천대하고 하면 예수믿는 사람으로서의 삶이 믿지 않는 사람으로서의 삶과 무엇이 다를바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로부터 조금이라도 부채의식을 우리들이 느끼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럴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 우리가 교육받을수 있었던 많은 기회들 그리고 실재로 그 기회를 활용할수 있도록 허락된 모든 환경들, 모두 나 자신의 분투한 노력의 결과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런 은혜를 받고 그런 은혜를 하나님께 어떡하든지 보답하는 사람되게 하실려고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구속의 은혜를 입은 우리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예수님께서 한없이 낮아지시고 물질적으로 가난한 삶을 사신 그 희생의 토대위에서 우리들이 이런 구속의 은혜와 사랑을 입게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께로 무엇을 얻고 누릴수가 있었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을 정말 예수님의 생애를 기억하면서 그분이 모든 것을 가질수 있는 부요한분이셨지만 이타적인 삶을 사시기 위해서 가난해지실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지금은 다 은퇴하신 할아버지 의사 한분이 계신데 널리 알려지신 분이시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한번 어느 잡지에서 나와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 그렇게 오랬동안 의사생활 하시고 90이 넘으셨으니까 뭐 그 때 의사야 하늘이 낸 사람들 아닙니까. 돈도 많이 버셨겠네요.“ 그러니까 이 할아버지 ”많이 벌었지“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없어“ ”어쪄셨어요?“ "다 줬어” 그래서 내가 옆에 부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젊었을 때는 우리 마누라에게 구박도 많이 받았지“ 그런데 지금은 없어 다 줬어. 없어.”그러면서 의사들이 막 파업하니까 환자들은 보면서 대모해야지 보지도 않고 대모하면 어떻게 하면서 막 야단치시더라고요. 복잡한 사상이나 이런 것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내게 준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주님이 각양 축복을 주시지 않습니까. 그렇죠. 예수믿고 나면 기회도 열리죠. 그렇죠. 예수믿고 나면 이상하게 공부도 잘하게 해주신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믿고 나면 아주 놀랍게 사업의 길을 여셔서 하나님이 축복해주시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을 경우에는 예외겠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복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그렇게 해서 많은 축복과 은혜들을 그것을 항상 빛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예수 사랑에 나는 빛졌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철저하게 이타적인 삶을 사셨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가지실수 있는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누리면서 사실 여유가 없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우리를 위해서 자기를 버리신 생애를 사셨지않습니까. 우리가 우리같이 속속들이 썩은 죄인이 예수님의 생애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낸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꿀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혼자 우리의 힘으로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면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지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주님을 힘입어서 우리는 살 수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기전에는 수전노처럼 살았던 사람들은 생각을 철저하게 바꿔야합니다. 그리고 깨뜨려져야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 물질적인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제권을 인정한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누가 이의를 달수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왜 가난해지셔야했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가지신 그분이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모든 것을 한손에 누리고 소유하실수 있는 그분이 사도의 마음에 고토을 주기까지 이렇게 가난한 생애를 사셨던 것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허비하셨기 때문에 가난해지신 삶이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 누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영혼이 죽습니다. 그러니까 물질에 대해서 탐닉하고 그 물질에 대한 향락속에 빠져들어가고 그것뿐만 아니라. 향락속으로 안빠져들어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대신에 물질을 쌓아서 자기를 보호할수 있을 것 같은 이런 생각에빠지면 영성이 죽습니다. 말라갑니다. 고사되어갑니다.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이타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물질이 있어도 물질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모든 것을 가지실수 있었던 그분이 이타적인 삶을 사시면서 자기의 것을 다 나누어주어 이렇 비참해지시기까지 가난하게 이 세상을 하직하셨던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이 어찌하든지 그분처럼 완벽하게 흉내낼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끊임없이 예수님의 그 생애의 모습을 보면서 자극을 받으면서 이타적인 삶을 살려고 애를써야 하는 것입니다. 많이 누리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그리고 곤고하고 고통받는 형제가 있는 것을 마음아파하면서 그런 마음과 정신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가난하게 되신 것을 짊어지고 사는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이렇게 부요하신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가난한 것이 예수님에게도 얼마나 불편하셨겠습니까. 그렇죠. 이것은 당신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데리고 다니는 이 제자들과 그리고 말씀전하실때에 따라 나오는 많은 사람들과 연관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예수님이 “얘들아 저녁먹자.” "밥이 없는데요“ ”모여라. 밥 나와라“ 그래서 ”먹어라“ 그러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런 생애를 안사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세금도 내라고 하고 물질이 없는 것이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얼마나 불편하시겠어요. 그렇죠. 그런대도 예수님께서 그런 삶을 철저하게 사실수 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무엇때문이냐하면 이 세상을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고 보신 영원에 대한 생각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의 제산을 좀 나누어 달라고 예수님께 호소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그래! 그 형 나쁜놈이구나. 자가 내가 힘으로 안되면 기적으로 해결해서 갈라주지“ 그러지는 않으셨습니다. ”삼가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는 것이 아니란다“ 그러면서 무엇에 관심을 가지셨습니까? 생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네가 오늘날 형에게서 나누어 달라고 아둥바둥 한다만은 사실은 그렇게 말하면 너의 영혼은 죽어있는데 죽은 영혼으로 몇 년더 그 물질을 누리면서 살다가 죽으면 네 영혼에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너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영혼의 생명이다.“ 예수님이 그러한 영혼에 대한 시각을 가지셨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가난한 생애를 사실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날 우리를 부르실 때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세계 방방곡곡 돌아다니면서 세계여행 실컷했는지, 뭐 얼마나 잘먹고 건강 관리를 잘해서 배가 날씬하고 힘이좋은지 그것 예수님께서 관심이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세상도 지나가고 정욕도 지나가고 다 지나갑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기며 살았던 그 날들만 남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혼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나머지는 영혼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다 끊어져서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그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길에서도 사역의 길을 걸어가면서 죽도록 헌신할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그가 그런 삶을 살수있었던 가장 중요한 비결 그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세상은 잠시 지나가고 그리고 여기에서 주를 위해 진실하게 고난을 받으면 영원한 세상에서 행복이 있다라고 하는 그런 영원한 세계에 대한 ”내세사상“ 이것이 이 세상을 하찮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작은 물질을 가지고 그렇게 의가 상하고 아등바등하고 그렇게 미친 듯이 심지어는 살인까지 하면서 덤벼드는 그런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에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점에서 가치가 다른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시면서 거기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누릴 영광을 바라보시면서 잠시 세상에서 가난하게 되어지는 것에 대해서 게의치 않는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가난해지신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이 배워야할 인생관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도 지나가고 정욕도 지나가고 내가 누리는 안락한 생활도 지나가고 내가 누리는 물질적인 부요함도 지나가고 영원히 남는 것은 주님을 진심으로 섬기고 사랑하고 영혼들을 위해서 희생하므로 섬겼던 그런 날들, 그런 섬김, 그런 봉사의 수고, 그것만 하나님 앞에 남는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들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낮아지셨던 가난해지셨던 지상의 생애를 보면서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생애를 본받아야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 매인 삶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