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201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1 (2010/01/1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2 (2010/0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3 (2010/0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1. 그리스도의 머리되심(골1:15-20) 2010.1.11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
2. 타락과 만물의 흩으심(롬8:19-21) 2010.1.12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6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4 (2010/01/14새해말씀사경회 저녁)
3. 구속과 머리되심(엡3:9-11) 2010.1.13 새해말씀사경회(저녁) 34
4. 완성과 만물의 머리되심(엡1:8-10) 2010.1.14 새해말씀사경회(저녁) 49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5 (2010/01/1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5. 그 날의 영광을 바라는 순례자들(엡4:13-15) 2010.1.15 새해말씀사경회(저녁) 64
6. 신의 성품에 참여할 때(벧후1:4) 2010.1.17 주일오전 83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3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1 (2010/01/1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2 (2010/0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3 (2010/0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4 (2010/01/14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5 (2010/01/1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6 (2010/01/16 주일오전설교)
새해말씀사경회저녁집회(1) 2010. 1.11(월)
창조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5-20)
I. 본문해설
II. 하나님의 창조
A. 두 세계를 지으심
B. 두 세계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III. 창조의 중보자, 그리스도
A. 하나님의 창조
1. 그리스도를 통하여
2. 성령 안에서
B. 그리스도의 성육신
1. 하나님의 자기전달
2. 인간과 그리스도의 연합
IV. 교회의 머리, 그리스도
A. 창조의 머리되심
1. 창조된 만물의 으뜸이심
2. 인간들의 머리되심
B. 교회의 머리되심
C. 재창조의 머리되심
V. 결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
새해말씀사경회저녁집회(2) 2010. 1. 12(화)
타락과 만물의 흩으심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19-21)
I. 본문해설
II. 인간의 타락과 결과
A. 언약관계 안에 있는 인간
B. 천상의 반역과 지상의 타락
1. 타락의 본질을 말해줌: 반역
2. 천상과 지상 타락의 동일한 성격
3. 신자들의 삶이 본질적으로 천상적임
a. 신자들의 안에서 영적 전쟁; 지각함
b. 불신자들 안에서 영적 전쟁; 지각못함
C. 타락의 결과
1. 본질적으로: 의존관계를 떠남
2. 관계의 파괴; 신, 인, 자연, 자아
III. 창조질서와 만물의 흩어짐
A. 흩어짐의 본질
1. 영광을 거두심
2. 질서의 흩어짐
a. 자연적 만물: 통치질서→사랑질서
b. 도덕적 사물: 사랑질서→통치질서
B. 흩어짐와 하나님의 아름다움
1. 흩어짐을 통해 보이시는 것
a. 질서의 아름다움: 생명, 통치
b. 질서 안에서의 인간과 만물의 행복
2. 흩어짐은 신미를 보여주는 배경
IV.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새 질서의 나타남
A. 창조세계: 지혜+사랑+능력
B. 구원사역: 새 질서를 보여줌
1. 머리되심 속으로 돌아감
2. 구원사역을 통하여 드러남
a. 영원한 지혜를 보여줌
b. 영원한 사랑을 보여줌
c. 영원한 능력을 보여줌
V. 결론: 꺾이지 않는 창조목적
새해말씀사경회저녁집회(3) 2010. 1. 13(수)
구속과 머리되심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 3:9-11)
I. 본문해설
II. 구속의 긍극적 목적
A. 흩어진 만물을 모으심
B. 구속의 중보자, 그리스도
1. 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목적이 동일함
2. 동일하신 중보자
3. 창조 중보직과 구속 중보직의 차이
a. 창조: 지혜-그리스도, 사랑-성령
b. 구속: 지혜-그리스도, 사랑-성령
1) 구속 통해: 창조계획을 더 잘 드러냄
2) 구속 위해: 인간들과 관계해 낮은 자리 취하심
3) 구속 안에: 만물의 머리되심
-1차적: 신자 개인
-2차적: 교회 전체
-3차적: 우주 전체(but 인간, 만물 구별)
C. 구원지식에 있어서 천사의 의존성
1. 천사들도 구속 전개를 통해 우주계획을 봄
2. 천사도 복음사역의 직분을 흠모함
3. 천상의 미래도 교회에 달려 있음
III. 교회와 만물의 모으심
A. 그리스도를 보내심
1. 그리스도의 자기전달
2. 그리스도의 성육신
a. 성부도 성령도 아니신 이유
1) 성부: 누구에 의해 보냄 받지 않으심
2) 성령: 성자에 의해 보냄 받으심
b.성육신이 성자에 합당한 이유
1) 성부와 성령 사이의 중보자이기에
2) 성자께서 우리를 양자 삼으시고 함게 후사되기에
3) 성자가 창조하셨기에, 재창조도 담당하시므로
3. 성육신을 통한 이중적 보이심
a.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이심
b. 창조 목적에 부합한 인간을 보이심
4. 십자가 죽음: 모으심의 기초
a.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림: 화목
b. 인간을 돌이키게 하심
c. 십자가로 율법의 정죄와 죽음을 도말하심
B. 교회를 이루게 하심
1. 개인 구원의 교회론적 지평
a. 개인의 구원은 처음부터 교회론적 지평을 바라봄
b. 개개인의 영혼의 구원은 교회론적 구원성취의 과정
2. 교회의 확장과 성숙의 세 유비
a. 천상세계와 지상세계:
1) 천상세계: 반란단죄, 영향지속, 영원한 뜻을 이루심에 사
용됨
2) 지상세계: 성육신, 구원과 교회의 형성, 영향지속, 영원한
뜻 이루심에 사용.
b. 교회와 우주
c. 영혼과 육체: 내적 생명과 외적 생활
IV. 교회의 확장과 머리되심
A. 교회의 머리되심을 통해 만물의 머리되심을 보이심
1. 교회의 확장은 만물의 머리되실 계획을 보여줌
2. 그러나 그것은 크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질에 의하여 보
여짐
a. 보편적 통치는 지향하지만 이후로 미루어짐
b. 교회적 가치는 생명을 통해 통치와 섬김을 보여주는 것
1) 교회: 보이지 않는 생명이 보이는 통치와 섬김으로 나타남
2) 세상: 보이는 통치와 섬김을 통해 보이지 않는 생명을 생각
함
B. 만물의 머리됨을 보여주는 교회의 머리되심
1. 비가시적: 유기체적 생명의 머리되심
2. 가시적:
a. 유기체적 통치의 머리되심
b. 유기체적 봉사의 머리되심
C. 그리스도와 교회의 생명적 관계
1.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2.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통로로서의 인간의 영혼
3. 우주적 교회의 영적인 성격
4. 교회 안에 주신 영적 생명
a. 하나님의 자존성과 관련됨
b.생명의 두 작용
1) 자기 유지 작용
2) 외부에 대한 반응
V. 교회와 세계, 그리고 성육신
- 창조의 우주적 계획은 성육신으로 수렴됨
- 구원의 우주적 계획은 성육신에서 확장됨
- 그 수렴은 교회에서 성육신으로
- 그 확장은 성육신에서 교회로 나아감
VI. 결론: 교회는 우주적 재창조를 위한 경륜이다
새해말씀사경회저녁집회(4) 2010. 1. 14(목)
완성과 만물의 머리되심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8-10).
I. 본문해설
A. 창세 전의 뜻:
(1)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
(2)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심
(3)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녀들이 되게 하심
(4)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심
B. 우리의 처지: 그 뜻의 펼침 안에 있음
(1)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음
(2) 이 구속은 그 창세전의 뜻의 비밀을 위한 것임
(3) 이것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주심으로
써
(4)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 - 만물의 머리되심: 하늘+땅
II. 타락으로 흩어진 세계를 구속함
A. 흩어진 세계의 본질
1. 그리스도를 통한 의존을 떠남
2. 성령 안에서의 교통을 떠남
B. 흩어진 세계와 사랑
1. 신적 교통으로서의 사랑이 아닌 자기사랑으로 대치됨
2. 자기사랑은 흩어진 자아에 대한 사랑임
a. 자기가 흩어진 것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지 아니하기
때문임
b. 하나님 사랑은 총체적 신적 질서에 대한 사랑
c. 이 사랑으로써 신적 사랑의 질서를 만들어감
d. 자기 사랑은 흩어진 자아의 부분적 질서에 대한 사랑임
e. 이 사랑은 궁극적 통일성이 없는 충동적 사랑임.
3. 영원한 것들이 아닌 사라질 것들에 대한 사랑임
(공간+시간)
III. 세계의 완성과 교회의 완성
A. 교회의 완성과 영원
1. 그리스도의 오심과 영원의 도입
2. 도입된 영원과 실현되지 않은 영원 사이에 있음
3. 과연, ‘종말’은 있는가?
B. 교회,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 계획의 절정
1. 아들에게 신부를 주심: 교회
2. 인간과 세계를 향한 사랑이 교회에 부어짐
a.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b. 모든 성도들이 몸으로서 사랑을 받음
c.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그 사랑을 경험함
1) 원리적 연합
2) 실제적 연합
C. 재창조의 표본으로서의 교회
1. 그리스도 구속은 부활로써 교회를 형성함
a. 부활은 작정 안에 있는 교회에 실제적으로 머리를 주심임
b. 성령 강림의 선교와 부흥은 바로 이 일의 중요성을 보여
줌
2. 교회의 확장과 내적 성숙
a. 확장: 강력한 부흥과 전도의 소명, 헌신
b. 성숙: 말씀과 성령의 역사 안에서의 목양
IV.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보여주어야 할 교회
A.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의 신비적 성격
1. 경건의 비밀을 터득함으로써 이를 알게 됨
2. 교회에 있어서 중생과 회심의 영원한 중요성
3. 신앙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신비
a.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택하심에 대한 믿음
b.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임에 대한 믿음
1)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경험과 비례함
2)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교회에 대한 사랑이 나뉘지 않음
3) 신론적 기독론과 교회론적 기독론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
필요함
B.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보여주는 두 지평
1. 신자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의 lordship을 인정함
a. 의무가 아닌 사랑에서 비롯됨
b.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공경함
1) 그 분이 지상에서 이루고자 하시던 일을 뒤 이음
a) 계승 불가한 사역과 가능한 사역
b)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생활로써
c) 성령이 힘 주시려는 삶:
- 인간의 내면이 욕망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 그리스도 사랑으로 일치시키심
- 그 통일된 사랑의 원리에서 우러나오는 진리에 합당한
삶
2) 그리스도의 사랑이 동기가 되고 목적이 됨
2. 교회의 지평에서: 함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복종함
a. 신자 개인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보이지 않음
b. 그 사랑의 유무를 스스로 확인하도록 공동체의 지평을 주심.
1. 참된 공동체의 지평에서 실현됨
a) 지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경건을 확인함
b) 하나님 안에서 행복은 순간이 아닌 사랑하는 과정임
c) 사랑의 일치를 이루어 가는 것이 영적 생명을 누리는
것과 합치됨
2. 공동체적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개인 경건과 하나
됨
a) 서로를 섬김으로써 교회를 세움
1) 진리를 가르치고 배움
2) 진리에 합치된 삶을 진작함
b) 서로를 돕는 방편: 나눔과 용서
c. 이 일을 위하여 고통을 겪게 하심
1. 하나님의 무능력과 무관심 때문이 아님
2. 영원한 지혜 속에서 그리스도를 의존하게 하심
a) 회고적으로: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1) 받으신 고난의 크기를 생각하게 하심
2) 받은바 구원의 가치를 생각하게 하심
3)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게 하심
- 과거의 신분과 상태를 기억하게 하심
- 자신의 존재적 무가치함을 기억하게 하심
- 자신의 도덕적 더러움을 기억하게 하심
4) 자신의 존재와 삶을 다 바치게 하심
b) 전망적으로: 미래의 영광에 대하여
1) 이루어진 구원을 통하여 완성될 영광을 바라보게 하
심
2) 소망을 지상이 아니라 천상에 두게 하심
3) 세상에 붙은 욕심을 버리게 하심
4) 교회를 통해서 하늘 가치를 위하여 살게 하심
C. 세상을 위한 최고의 섬김: 그리스도를 보여줌
1. 보편성과 세상적 동의가 아니라 순수성의 문제
2. 참됨이 효율성 보다 중요한 가치임
3. 교회의 참됨의 사중적 증거
a. 참된 신앙 고백
b. 참된 영적 변화
c. 참된 말씀 선포
d. 참된 생활 실천
D. 교회가 하나님을 보여주는 방식
1. 지식으로써: 그리스도의 지식
a. 진리를 앎으로써
b. 진리를 사랑함으로써
c. 진리를 조직함으로써
2. 사랑으로써: 성령의 교통
a. 겸손함으로 하나님 앞에 부복함으로써
b. 온전함으로 자기의 무가치함을 인정함으로써
c. 이타심으로 타인의 행복을 위하여 삶으로써
3. 생활로써
a. 진리에 합치한 삶으로써
b.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이 성향이 됨으로써
c. 거룩한 지식과 생활의 일치를 보임으로써
VI. 다시 머리되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순례자들의 삶
A. 자신의 구원을 두 지평에서 바라봄
1. 교회론적인 구원론의 지평에서
2. 우주론적인 교회론의 지평에서
B. 성도의 고난은 교회를 위한 고난임
1. 신자의 모든 섬김과 봉사는 교회의 지체로서 교회와 세
상을 위한 봉사임
2. 세상을 위한 봉사도 회복될 미래적 교회를 세상 안에서
바라보는 사랑으로 하는 것임
3. 그러므로 교회에 뿌리박은 경건과 거룩함이 모든 섬김과
봉사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
4. 교회와 세상을 섬기위해 경건의 뿌리는 강화되고 교회는
확장되어야 함
a. 사도 바울도 교회를 위한 고난을 가장 강도 높고, 현실적
인 것으로 받아들임.
b. 그의 고난은 대부분 선교적 고난이었는데, 교회적 고난으로
이해함.
c. 교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인식함.
VI. 결론; 영광스러운 교회의 지체됨에 감사하며
새해말씀사경회저녁집회(5) 2010. 1. 15(금)
그 날의 영광을 바라는 순례자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 13-15)
I. 본문해설
-교회를 세우신 목적
-성도를 온전케 함-그리스도의 몸을 세움
-그러한 계획 안에서 요구되는 삶
II.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순례자들
A. 과연 종말이 있는가?
B. 교회의 완성과 온전한 성도
1.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
a. 역망적: 창조의 목적에 적합한 사람이 됨
b. 전망적: 실현된 나라에 적합한 사람이 됨
2. 온전한 교회가 되는 것
a. 그리스도 성육신 안에서 계시된 인간의 목표
b. 성화로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라 지향점이 됨
1) 우리로 소망을 갖게 함
a) 우리를 그렇게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을 보여줌
b) 거룩한 목표를 갖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게 하심
c)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게 하심
d) 성령을 통하여 보증을 받게 하심
III.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자질
A. 지성적 성숙
1. 믿음에 있어서: ‘믿는 것과’
a. 초자연적 진리를 받아들임
b. 명제적 진리를 앎에 있어서 하나님만 의존함
c. 다른 지식을 획득함에 있어서 이러한 절대적 의존을
유지함
d. 진리를 확신하는 유순한 지성을 소유함
2. 지식에 있어서: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a.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식
b. 자유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 영적 지식
c. 그 지식과 믿는 바의 일치를 이루는 지식
B. 인격적 성숙: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1. 지식과 성품의 결합
2.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함
3. 존재와 성품이 그리스도를 반영하는 거울이 되게
함; 편지와 향기
4.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함에 이름
IV. 영적 성장의 필요성;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며’
A. 어린아이 같을 때
1. 미숙함: 판단력, 이해력, 의지력
2. 흔들림: 세상 교훈의 풍조에 요동함
a. ‘요동한다’는 의미: 유행하는 현대 사상에 동조함
1) 옛적 길에 대한 확신과 경험의 부족
2) 자기 세대에서 외톨이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3) 신앙을 자기 세대에서 높이 인정받는 기회로 삼고자 함
b. 두 가지 위험
1) 궤술에 빠짐 - 지성의 미숙함을 겨냥함
2) 유혹에 빠짐 - 애성의 미숙함을 겨냥함
c. 요동치 않게 하는 두 요소
1) 현재적 경험의 요소
2) 사상적 체계의 요소
a) 사상은 그 안에서 숨 쉬는 공기이며 호흡임.
b) 그것을 떠나 사는 것은 곧 죽음이며 행복하지 않음, 행복
하다면 자기 사상이 아님
c) 사상은 그것과 함께 죽고 살 수 있는 신념이며, 삶의 기예
임.
B. 영적 성장의 길
1. 사랑 안에서 살아감: ‘사랑 안에서’
- 앞에서 언급한 모든 것들의 자리를 제공함: 사랑
a. 이 사랑의 정체
1)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데서 비롯되는 사랑임
2) 이 ‘사랑 안에서’ 라고 함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짐
a) 객관적으로: 신자는 이미 그러한 사랑을 받고 있음. 그것
을 아는 가운데.
b) 주관적으로: 성령의 은혜 안에서 사랑하고 사랑 받는 연
합 속에서
b. 사랑의 감화는 은혜를 통하여
1) 은혜는 성령의 작용을 통해서
2) 성령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심
2. 참된 것을 행함; ‘참되며’
a. ‘참됨’이란 무엇인가?
1) 마음의 움직이든, 행위의 표현이든 진리에 부합하는 것
들임
2) 참됨은 진리가 인간의 영혼과 마음 안에 부합된 상태이
고, 거기서 비롯된 것은 이를 지님
3) 이는 부패한 세상의 끝을 바라고 사는 자들의 정체를
보여줌
a) 객관적 기준으로서의 진리와 함께 고민함: 하나님의 의지
와 정동
b) 주관적 적용으로서 자신의 존재와 인격이 진리에 부합하
는지를 고민함
c) 진리의 가치는 인간을 참되게 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살
도록 vivere ad Deum 하는 것임
b. 은혜로부터의 부패: 삶의 적용 없는 지식
c. 객관적 진리는 주관적 적용을 통하여 능력이 나타남
3. 범사에 그리스도에까지 자라감
a. ‘범사에’:모든 삶의 표준이신 그리스도
1) 육체와 물리적 변화만 아니라, 마음과 정신 안에서의 의
지행사를 포함함
2) 특히 선택하는 의지행사의 자유로움을 배제하지 않음.
그러나 은혜가 이를 완성함
3) 이는 신자의 이러한 삶이 지속적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4) 하나님께 선한 일이 자신에게 성향이 되기까지(‘선한 일
을 위하여 지음 받았으니..’)
b.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람
1) 영적 성숙에로 부름 받는 성도들의 신분을 확인시켜 주
심
a)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지체임
b)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또 다른 지체들이 있음
c) 그가 신자의 생명의 원천이심: 육적 생명과 영적 생명에
있어서
d) 그의 통치에 복종하여할 것과 그의 성육신의 본을 따라
섬길 것을 보여 줌
2) 그리스도가 참된 삶의 유일한 본임을 보여 줌.
3) 자라갈 것을 명령하심
a) 최종적 완성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것임(영화시)
b) 그 때에는 모든 아는 일에 완전할 것이며 점도 흠도 없
게 하실 것임
c) 그러나 그 때까지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사모하며 거기
에 이를 것처럼 살아감
d) 현실적 불가능성 안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의존을 배
우고 사랑하게 됨
e) 그러한 성숙에의 몸부림만이 우리를 모든 부패로부터 우
리를 지켜줄 것임
V. 결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지체로 살아감
그리스도의 다시머리되심(6) 2010.01.16.
신의 성품에 참여할 때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
I. 본문해설
II. 신화(神化)의 교리
A. ‘신화’란 무엇인가?
- recapitulatio: 하나님 닮아감의 마지막 성취
- catharsis-theoria-theosis(sainthood)
- “God became man so that might become god.”
이레네우스
- 그리스도가 성육신 하신 목적
B.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뜻
1. 그릇된 이해:
- 신의 본질의 참여
- 영지주의, 중세후기신비주의
- 후기근대주의, 뉴에이지사상
2. 올바른 이해:
- 신의 본질의 참여가 아님
- 하나님 형상(Imago Dei)의 온전한 회복
- 신적 본질을 제외한 모두에 있어 하나님 닮음: 불에 달
은 쇠- 빛, 열
- 그러나 이 땅에서가 아님: 완전주의자들의 오류
- 신의 성품의 효과에 참여하게 하심: 그리스도와의 연합
을 통해서
- “그리스도가 인간처럼 되셨으므로 인간은 그리스도처럼
되어야 한다” Athanasius
C. 인간을 구원하시는 계획
1.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전 상태로 회복하는 것
이상임
2.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이룬 것은 이것을 보여줌
3. 구원을 통해 더욱 친밀한 사랑과 연합의 교제
4. 타락하기 전보다 더욱 높은 정도로 하나님 닮게 하심
III. 신화(神化)에 이르는 길
A.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함
1. 세상의 썩어질 것
a. 시간 속에서 사라짐
b. 욕망이 그것을 썩어 사라지게 하였음.
c. 그것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 욕망임
B. 7중(七重)의 덕목으로 나아감
- 믿음에 덕, 덕에 지식, 지식에 절제
- 절제에 인내, 인내에 경건, 경건에 형제 우애
-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함.
C. 그리스도를 아는 은혜와 지식이 필요함
IV. 결론: 신의 성품에 참여할 자로서 살아감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3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1 (2010/01/1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2 (2010/0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3 (2010/0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4 (2010/01/14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5 (2010/01/1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6 (2010/01/16 주일오전설교)
1.그리스도의 머리되심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15-20).
I. 본문 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탁월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된 이 세계와 어떤 관계가 있는 지를 보여주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교회를 주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선포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매일 매일 지루하게 반복되는 우리의 사사로운 삶에 코를 박고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우리의 신앙의 시작은 알지만 이렇게 주님을 믿을 때에 우리의 이 신앙은 마지막에 무엇으로 끝나는지 그리고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단지 영혼의 구원을 받고 하늘나라 가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것인지 우리들이 바로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기독교 역사 속에서 위대하게 전해 내려왔던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화려하게 다시 부활하였던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이라고 하는 이 교리를 여러분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Ⅱ. 하나님의 창조
제일 먼저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는 우리들이 평소에 생각하지 않는 충격적인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 그것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과만 관계가 있으신 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의 표이고 그 십자가의 찢으신 살과 흘리신 피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는 바와 같이 우리는 어찌하든지 그리스도 십자가의 현재적인 감격 속에서 살아가려고 애를 써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그리스도 예수의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여러분을 데려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가 구속 만큼이나 그리스도 예수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창조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하나님을 거울로 비춘 것과 같은 존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에 관해 오늘 성경에서 말하기를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 라고 말합니다. 이 세계가 지어지기 전에 성자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유명한 삼위일체의 교리입니다. 한 하나님의 본질에서 또 다른 인격이신 예수가 나오셨으니 성부와 성자는 한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두 인격으로 서로 교통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영원 전에 먼저 나시고 그리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 이 삼위 하나님에 의해서 이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A. 두 세계를 지으심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두 세계를 지으셨습니다. 하늘나라를 지으시고 또 하나는 지상 나라를 지으셨습니다. 하늘나라는 천사를 창조하셔서 그 나라를 돌보고 다스리게 하셨고 지상의 나라는 인간을 창조하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닮은 영혼과 지성을 갖게 하셔서 이 모든 창조 세계를 위로는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아래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모든 인간들과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사귀면서 이 창조세계를 하나님의 마음에 맞도록 돌보고 다스리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두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두 세계는 따라서 영원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때가 되면 이 지상의 나라는 모두 없어져 버리고 불태워져 버리고 하늘나라만 남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이 세계는 모두 불태워 없애져 버리고 하나님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 것이라고 주장을 하는데 이것은 모두 역사적으로 잘못된 교리입니다. 하늘나라가 그렇게 영원히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처럼 이 땅에서는 또 다른 인간들의 나라가 이루어져서 그래서 이 지상의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밤하늘의 폭죽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팡 하고 쏘아 올리면 그것이 하나의 대포 속에서 나간 포탄인데 어느 것은 빨간 색으로 불타고 어떤 것은 파란색으로 빛나며 불꽃을 퍼뜨립니다. 그것은 불이 각각 다른 불이 아니라 불타는 그 폭탄 속에 들어 있는 금속의 소재에 따라서 각각 다른 빛깔을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지만 천상의 세계를 통해서 받으실, 천상의 세계를 통해서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의 빛깔이 다르고 지상의 세계를 통해서 드러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의 빛깔이 각각 달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으신 이 두 세계를 통해 각각 다른 빛깔을 찬란하게 드러내심으로서 당신 자신의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두 세계를 지으셨는데 오늘 성경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결국은,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하늘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고 땅은 보이는 것들이겠죠.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이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 영혼의 지성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나라이게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창조세계를 둘로 구분하여 하늘나라는 보이지 않는 나라이고 땅의 나라는 보이는 만물들의 나라예요. 여기에 등장하는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 이런 것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와 영적인 피조물들의 각각 다른 명칭들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이것을 보기를 천사들의 등급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많은 천사들이나 혹은 땅에 있는 모든 만물들이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즉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섰느니라’ 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서 천상의 세계도 창조하시고 지상의 세계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B. 두 세계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두 세계의 머리이신 하나님이시요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우주세계의 머리이신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모든 피조물들이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창조되었고 하늘나라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존재하고 앞으로도 하늘나라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영원히 하나님의 덕을 입어 존속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도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창조되었고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더더욱 그리스도의 중보로 창조되었고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말하기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창조되어 세계는 두 세계이지만 두 세계 모두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 예수께 매달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는 창조주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의 빛깔을 각각 다르게 나타냄으로 주님은 천상의 세계를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고 지상의 세계를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Ⅲ. 창조의 중보자, 그리스도
그러면 도대체 오늘 처음 듣는 창조의 중보자, 그리스도시라는 것이 도대체 교리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한 번 여러분이 배워보아야 되겠습니다. 창조의 중보자, 그리스도. 이 분이 어떤 의미에서 창조의 중보자이시냐 하는 것입니다.
A. 하나님의 창조
우선 하나님의 창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미 교리 속에서 배우신 바와 같이 아무렇게나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고대의 바벨론 사람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에 의하면 이 세계는 신들이 정신없이 싸우다가 우연히 툭 튀어져 나온 것이 세계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미치광이와 같은 마음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고 하나님 자신을 아는 지식 안에 이 모든 세계와 그리고 이 모든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과 계획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실 때 바로 당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2세기에 위대한 교부 가운데 이레네우스 라고 하는 교부가 있습니다. 이 교부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이 사경회 기간 중 연구하려고 하는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의 교리를 장엄하게 완성합니다. 그래서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을 대항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 땅은 더러운 것이고 구원을 위해서는 고도의 영적인 지식과 신비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는 썩어서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향하여 이원적인 신앙을 가져야 된다고 믿었습니다. 세상은 더럽고 속박 받는 삶이고 영적인 세계는 고상하기 때문에 우리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스러운 것이라고 그렇게 교리를 내세웠던 것입니다. 이러한 초기의 형태가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인 것입니다. 이런 이단 사상이 이미 그 전부터 있었습니다. 이 이레네우스라고 하는 위대한 교부는 바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갑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그 제자였습니다. 그가 이 위대한 교리를 완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교리는 그 후에 교부들에게 부분적으로 계속 계승되다가 그러다가 결국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이 교리들이 서서히 냉대가 되면서 그리고 중세에 와서는 이 교리가 거의 자취를 감추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 교리를 완전히 부인해버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 교리가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다시 성경을 통해서 새롭게 발견하면서 이 위대한 교리를 다시 재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유는 이러한 것입니다. 이 위대한 교리는 결국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고난과 핍박을 받지만 마지막에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모든 만물들의 머리가 되셔서 그래서 이 모든 세계의 구원을 완성하시고 악을 모두 도말하셔서 영적인 왕국을, 하나님의 통치를 확립한다고 하는 사상입니다. 이런 사상은 박해를 받고 초대교회처럼 이단에게 압박을 받고 고통을 받는 시대에는 아주 환영받는 교리일 수 있지만 이 땅의 나라가 하늘나라와는 상관이 없이 전부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소망을 이 땅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환영받을 만한 교리가 아닌 것이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복음을 위해서 이 중세의 왜곡된 것을 바로 잡고 사도적인 신앙을 올바로 세우려고 했던 종교개혁자들은 바로 이렇게 주님께서 친히 오셔서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세계를 통치하시고 당신의 아름다운 창조와 구속의 질서를 완성하실 위대한 전망에 불탈만한 환경 속에서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교리는 수많은 사라들을 담대하게 만들었고 땅에 살고 있으나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는 사자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 내고 교회로 하여금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순결을 잃지 않고 마지막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시는 그 날에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들리움을 받는 영광스러운 날을 꿈꾸며 용사와 같이 이 어두운 세상에 비진리와 다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전투적인 교회로 만드는데 이바지 하였던 영광스러운 교리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너무나 세속주의에 물들어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든 내용은 천상을 바라보고 하늘의 위대한 영광을 묵상하는 일보다는 예수의 도움을 얻어서 이 땅에서 어떻게 번영하고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영을 받는 설탕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인가를 오히려 고민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시대에 이 치유할 길 없는 깊은 질병에 들어 있는 현대 교회에 이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의 교리는 위대하고 확실한 양약이 될 것임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우리 교인이신 여러분에게 복용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많이 먹으시고 속히 나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위대한 교부 이레네우스는 창조를 이렇게 그림같이 설명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 세상을 두 손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한 손은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시요 또 한 손은 하나님의 사랑이신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께서 이 두 손으로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제가 여러분에게 가르쳐드린 하나님이 이 세계를 영원한 지혜와 영원한 사랑 속에서 창조하셨다고 하는 바로 그 말씀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바로 창세기 1장에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 창조된 세계는 하나님의 신이 그 모든 수면 위를 운행하고 있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보내어졌습니다. 그러자 그 말씀과 함께 빛이 생겼고 뭍이 드러났고 이 모든 땅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이던 영원부터 성자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든 지혜와 계획의 보고였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관한 모든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인격 안에 저장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꽃이 이렇게 활짝 피지 않습니까. 꽃집에서 사올 때에는 핀 꽃을 사왔지만 농장에서 기를 때에는 누군가가 먼저 씨를 뿌렸겠지요? 아니면 뿌리를 심었겠지요? 그때에는 이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씨 안에 이미 작은 씨 안에는 이런 파란 큰 잎사귀도 없고 빨간 꽃 이파리도 없지만 그러나 없다고 말하면 안 되지요. 그 씨앗 안에 이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형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씨의 형태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온도와 습도, 햇빛이 모두 맞을 때 누가 거기에다가 일부러 빨간 꽃 이파리와 파란 줄기를 매달아 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발현이 되면서 주욱 아름다운 꽃나무로 자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되어질 것들이 씨앗 안에 씨의 집약된 형태로 있는 건데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펼쳐질 때 이렇게 펼쳐졌는데 아주 아름다운 모습이 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이 모든 창조세계의 될 위대한 계획들이 씨앗처럼 담겨져 있어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시간과 공간을 도입하신 후에 이것들이 펼쳐져 나가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세계로 천상에 대한 창조와 지상에 대한 창조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창조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요체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추운 날씨에 여기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마음을 기울이는 이유도 바로 이렇게 집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우는 목적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우리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그 기술이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우리 하나님아버지를 위하여 사는 길이 무엇인가 그것을 터득하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들이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살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인 동시에 또한 하나님을 진정으로 위하는 신앙일 때 그것이 우리 자신의 행복에 가장 이바지 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이 올바른 지식이 없이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어둠 속을 헤매는 것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신앙의 대의에서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향한 모든 계획을 그리스도 예수에게 두셨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 예수가 어떤 분이신가를 잘 연구하면 마치 우리 맨 눈으로는 천체를 볼 수 없으나 망원경을 통해서는 천체의 아름다움을 관측할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탐구하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배우면 그 그리스도라는 망원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계획과 교회를 지으신 목적과 그 안에서 나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사랑하는 지체들과 이웃과 가족과 함께 아직 여기에 살아 있도록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고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목적과 이유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올바로 살 수 있는 큰 길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것을 창조하게 하셨으니 그리스도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렇게 창조되어서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천상의 세계의 모든 것들도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어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천상에 있는 것들이 하나님과 어떤 교통을 이루려면 그것은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서 천상에 계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러한 상태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는 몸의 상태와 흡사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께 무엇인가 교통하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통해야 되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는 것만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될 때에도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만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헌신, 봉사, 주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을 바칠 때도 우리가 바치는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불결하기 짝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통해서 그래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각양 봉사를 하고 주님을 사랑을 해도 이것들은 모두 나의 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으로 수렴되어서 한 통로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위격 안으로 바쳐지게 되고 그리스도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의 머리가 되시는, 특별히 모든 인간과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창조된 것들은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고 창조될 때만 성령이 역사하셨던 것이 아니라 창조된 후에도 성령 안에서 있게 하심으로서 이 모든 것들이 통일을 이루어 그리스도 예수 머리이신 그분께로 집중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 성령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이고 그 안에서 모든 만물들은 질서를 이루며 그리스도 예수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창조의 사실들이 구속의 과정에서도 아주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시면서 내가 가면 너희에게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병을 고치고 방언을 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너희의 죄를 위해 죽으신 성자이시라는 사실이 성령이 오셔서 증거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령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을 경험하게 하시고 성령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께로 다시 통일되게 하셔서 교회를 만드시고 그리고 그들로 모두 사랑 가운데 거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신비는 정말 장엄하고 놀라운 신비에요. 이 교리를 저는 알고 있었지만 얼마 전부터 본격적으로 탐구를 하기 시작을 했고 지난 한주간은 기도원에 있으면서 이 교리를 집중적으로 연구를 했어요. 설교를 준비하러 올라가서 이것을 하는데 막 끝이 없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준비할 것 가지고는 안 되겠어요. 그래서 책을 쓴다면 얼마나 될까 그러고 목차를 쭈욱 적었는데 A4용지 열일곱 페이지의 목차가 나왔어요. 그중에서 이번 사경회에서 여러분에게 전해주는 것은 가장 핵심적인 엑기스만 다섯 개를 뽑아서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늘에 있는 것들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창조되어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게 되니까 그 천사들과 있는 모든 것들이 성령 안에서 연합을 이루면서 서로 사랑하고 교통하는 가운데 그리스도 예수,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이렇게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이 맨 처음 창조하신 사람들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특별히, 모든 만물들도 그러하지만, 특별히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당신 자신의 머리에서 나와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성령 안에서 창조가 되어서 그래서 그 창조된 사람들을 성령 가운데 있게 하셔서 아주 뜨겁고 아름다운 사랑 속에서 그들이 한데 묶어져서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와 사랑으로 연합된 가운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 위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사랑함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통 속에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증거 하나만 대볼게요. 시간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죠. 그 사람이 바로 아담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갈비뼈를 취해서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와를 이끌어 데리고 오셨습니다. 그랬더니 아담이 첫눈에 보고 요즘에 애들이 좋아하는 말로 뿅 하고 가버렸어요. 그래서 뭐라고 그랬어요?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히브리 문학에서 무엇 중에 무엇이라고 하는 것은 더 베스트 최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부를 데리고 왔는데 더 좋은 신부를 상상할 수 없는, 마치 여러분의 남편이 여러분을 얻을 때처럼. 아니, 왜 웃어요? 그렇게 자존감이 없습니다. 그래. 더 베스트, 최고. 당신만 여자이고 나머지는 다 인간일 뿐이야. 요즘도 그러잖아요. 그렇게 최고의 상태의 여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애를 낳아도 가끔 예쁜 애를 낳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얼마나 아름답게 창조하셨겠어요? 그죠. 내면과 외면 모든 것을 일체로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아담이 가졌는데 그런데 거기서 단순히 얼굴만 탤런트처럼 얼굴만 예쁘다 그런 상품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라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그게 뭐냐면 요즘의 애들이 텔레비전 보면서 뭐, 가수들 보면서 오빠 그러고 꺄악 하고 그런 감정이 아니야. 그런 감각적인 감정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뜨거운 사랑. 그러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새끼를 낳았어도 또 그런 사랑을, 또 그 새끼가 새끼를 낳아도 또 그런 사랑을, 그래서 또 그 새끼가 새끼를 낳아도 또 그런 사랑을, 모든 새끼들이 그런 뜨거운 사랑을 함께 나누면서 그런 사랑의 연합을 이루면서 천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성령 안에서 뜨거운 사랑으로 그리스도께 붙어 있듯이 이 지상에 있는 인간들도 그렇게 붙어 있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교회에 대한 계획이 가정에 대한 계획보다 훨씬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그걸 읽어낼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이 세계에 두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B. 그리스도의 성육신
자, 그러면 여기에서 이제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셔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그리스도는 왜 성육신하셨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은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우리는 이제껏 배우기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무엇을 위해서였다고 배웠죠? 그렇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오시지 않으셨다면 죽으실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같은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여기서 이런 사실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이레네우스를 비롯해서 이후에 종교개혁자들과 많은 개혁파 정통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성육신하신 것은 결과적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은 맞지만 예수님이,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은 과연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까 아니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안내려오셨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결국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지만 만약에 인간이 타락하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때가 차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러면 더러운 세상에서 핍박과 고난을 받으시고 치욕적인 죽음을 당하시고 하시질 않고 오히려 가장 영광스러운 방법으로 마치 재림하시는 것처럼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으신 순수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영광 가운데 하늘에 오르셨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이것을 여러분에게 논증할 수는 없고 한 가지 사실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어요. 이 세상에 펼쳐진 모든 위대한 구원의 계획들은 그것들이 펼쳐진 것들을 추적해 올라가면 씨앗처럼 접혀진 것들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접혀진 것들이 자연스럽게 펼쳐진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고 계획인데 만약에 그런 계획이 없었는데 하나님도 몰랐는데 인간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엉겁결에 이걸 어떻게 하나 할 수 없이 예수라도 보내서 땜방을 해야 되겠다 그리고 계획에 없이 “너 지금 빨리 가라” 그리고 가셨다면 그분이 어떻게 영원하신 하나님이실 수가 있느냐 이 얘기에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이 세상에 내려오는 계획은 인간이 타락하지 않더라도 있었을 계획이라 이런 얘기에요. 그러면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이유가 그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냐, 우선 제일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자기 전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에게 당신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직접 내려오심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전달해주고 그리고 당신 자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도대체 어떤 존재가 되고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지 보여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이런 의문이 들 겁니다. “아니, 그러면 목사님,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어도 예수님이 오신다고 했는데 타락하지 않았으면 인간이 살았을 그 삶을 인간이 이미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고 있었을 텐데 또 다른 모범이 필요했을까요?” 이런 질문이 떠오르죠? 왜? 완전하고 타락하지 않은 인간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인간은 타락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살면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식대로 인생을 살 수 있었겠죠. 그러나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삶을 살았다면 그것은 죄짓지 않은 방법보다는 훨씬 더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방법으로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는바 보다도 훨씬 더 찬란하고 완전한 모습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가 없다고 하더라도 죄를 지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지을 가능성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은 분이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 자체가 하나님의 자기 전달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이제 이 세상의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이고 그리고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가 되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아주 찬란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같이 사셨을 그 삶은 죄를 짓지 않은 아담의 수많은 후손의 삶과 같았을까요? 달랐을까요? 당연히 달랐겠죠. 그래서 찬란하고 아름답게 빛나서 그래서 결국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을 보면서 자기들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자기들은 예수처럼 살 수 없어도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찬송하기를 우리가 날마다 묻는 ‘만약에 지금 내 자리에 예수가 계시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라고 생각할 때에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 대답을 받고 감격해 하는 것처럼 그런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보았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 그 목적은 무엇이었냐 하면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혀 이 땅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와 접붙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말하기를 하나님께 가장 큰 기쁨은 자기의 아들 그리스도에게 그의 신부를 짝지어 주시는 것인데 그 신부는 바로 교회였다 이런 얘기에요.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가 성육신해서 오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주 아름답게 보여주고 인격과 삶에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가 얼마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신지를 나타내 보여주셨는데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를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여 그분께 연합시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참 인간으로서 아름다운 본을 드러내셨던 것처럼 이번에는 그분께 매달릴 모든 인간들을 창조 때 했던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시고 성령 안에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붙드심으로서 그들이 사랑의 아름다운 연결을 이루어서 그들이 예수 안에 충만한 하나님처럼 그렇게 온전하고 충만한 인간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숙연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타락하고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비록 낮은 물질세계 이기는 하지만 완전한 세계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이 모든 세계의 경배를 받으시면서 숭앙할만한 방식으로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시며 모든 사람에게 성육신하신 예수 안에 있는 우리 아버지의 영광을 보여주시는 삶을 사셨을 텐데. 우리가 죄를 짓고 이 세상이 진리를 떠나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에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지만 사람들은 창칼로 그를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그분의 삶은 가난과 시련 핍박과 고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임에도 무지하기 때문에 핍박과 멸시를 받으신 생애였어요. 삼십 삼년을 그렇게 고난을 받으시고 마지막에 그렇게 찬란한 영광 가운데 모든 사람에게 경외함을 받으셔야 할 그분이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배신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을 생각할 때마다 그분의 성육신의 마지막인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숙연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원래의 창조의 목적에서 멀리 떨어져 그분의 성령 안에서 연합된 삶을 사는 대신 생명적으로 단절되고 그래서 결국은 하늘의 자원과 이 땅의 자원 두 가지로 살아야 할 인간이 갈등과 고통 속에서 영적 생명이 끊어진 가운데 미워하고 시기하고 죽고 죽이고 물고 뜯는 이 아비규환과 같은 이 세상을 그 속에서 죽어가는 당신의 형상 닮은 우리 인간들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으시는 대신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래서 우리의 죄를 모두 대속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로 거저 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하지 못한 순종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하심으로 우리가 치르지 못한 우리의 죄 값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지불하심으로 마지막에는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찬송)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 보다도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동시에 묵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해. 그게 하늘의 모든 위로야.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나를 위해 죽으신 고난을 생각할 때 우리가 주님을 위해 잠시 고난을 받을 때 우리는 관계치 않을 담대한 용기와 헌신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찬송)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난 관계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이렇게 해서 인간 하나 하나를 깨끗이 만들어 그리스도 예수 닮은 사람으로 하나님이 재창조하셔서 그래서 그들이 사랑 안에서 연합을 이루며 살아가는 그 아름다운 지상의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찬란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이 그리스도를 이 원대한 재창조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교회의 머리로 삼으신 것입니다.
Ⅳ. 교회의 머리,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것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세 가지의 머리되심에 대해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0절에 보면 ‘만물을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 나와요. 이 단어가 희랍어의 ‘아나까뻴레오오’ 라고 하는 동사예요. ‘아나’ 는 ‘다시’ 라고 하는 뜻이구요. ‘까빼르’ 는 ‘머리’ 라는 뜻이고 ‘오오’는 동사의 끝 접미사에요. 그러니까 이것을 우리들이 다시 머리되심의 교리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다시 머리가 되신다는 뜻은 언젠가는 머리이신 적이 있었다는 뜻이고 다시 머리되시기 전의 상태는 머리가 아닌 것 같은 때가 있었다는 뜻 아니에요?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번 사경회 기간 중에 펼쳐서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다시 머리 되실 영광스러운 나라를 바라보면서 어떤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삶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공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생각하기 전에 제일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머리가 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A. 창조의 머리되심
이렇게 하늘에 있는 것들도 그분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고 지상에 있는 것들도 그분을 통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단 하나도 창조된 것이 없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기 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하나님을 빼놓고 하나님과 성령을 빼놓고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머리가 되신다 이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된 만물의 으뜸이 되시는 그리스도 그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리스도 예수의 창조의 머리되심이 이것으로 끝난다고 할 것 같으면 인간과 다른 모든 피조물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겠죠? 그죠? 그러면 여러분이 돌멩이 보고도 형제라고 부르고 쇳덩어리 보고도 자매님이라고 불러야 될지 몰라요. 그래서 이것은 ‘다시 인간의 머리되심’의 개념은 이것보다 훨씬 더 좁고 고유한 개념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상에 있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도덕적인 피조물들이 아닙니다. 창조라고 하는 면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그 모든 것들의 머리이시기도 합니다. 자, 예를 들면 이런 뜻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세 차원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요. 우선 첫째는 성부, 성자, 성령 위격 들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요. 그것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고 성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셨기 때문에 삼위일체 안에서 부르는 아버지 되심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창조된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사람의 아버지도 하나님이시고 들에 구르는 돌멩이와 풀들도 기원을 하나님께 두고 있기 때문에 만물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비를 내리시고 햇빛을 주심으로 모든 것들은 살고 의지하며 기동하기를 인간이 하나님께 기대어 사는 것과 유사하게 아버지를 의지하며 산다 이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주로서의 아버지 되심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성경에서 훨씬 더 고유하게 사용되는 것은 뭐냐 하면 주님이 선택하시고 구원받은 백성들의 아버지 되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 믿게 만들어 당신의 양자로 삼으시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이신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불신자도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과는 달라요. 그 사람들은 아직 법적인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우리는 법적으로도 하나님의 자녀이고 우리 안에 성령으로 너는 내 아들이라고 인 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은 만물의 머리이시기도 하고 인간들의 머리이시기도 하다 이것입니다. 맨 처음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엄밀하게 말하면 신자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미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충만한 믿음과 사랑 안에서 이 세상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고 또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는 사랑의 연합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아담으로 하여금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다 라고 한 것은 정욕이 시킨 것이 아니라 성령이 시킨 것이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결혼 할 때 이런 성령의 고백이 있게 해야 돼 그런 거 없고 그냥 이렇게 보면서 얼굴 예쁘다고 갔다가는 큰일 나죠. 그게. 그래서 혼돈하면 안 됩니다. 이미 결혼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지만. 창조의 머리이시고.
그 다음에 그런 창조의 머리가 되셨는데, 잘 들으세요.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돼. 결국은 인간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 죄는 자기를 창조하고 사랑 가운데 있게 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모두에 대한 반역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야 될 인간이 그 하나님을 등지려고 하는 의지였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아야 될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살겠다는 의지였고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고 성령 안에, 즉 사랑 안에 있어야 될 인간이 이제는 이기심 속에서 살겠다는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자마자 아담과 하와의 그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관계가 쫙 하고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뭐가 가져지게 된 거죠? 성령의 사랑의 교통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미모가 그대로 살아있었을 텐데 옆에 있어서는 안 될 그런 여편네가 된 것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 여편네. 옆에 있어서는 싫은 그런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애를, 새끼를 낳아요. 그런데 결국은 이놈과의 관계도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었는데 ‘이 아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속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런 뜻에서 가인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동생을 낳는데 그 둘의 관계도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어디서 미워하는 것을 배웠겠어요? 어디서 살인을 배웠겠어요? 가르쳐 주는 사람 없어도 충분히 미워하고 충분히 살인해서 하나님이 가인에게 묻죠.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내가 내 아우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소리를 친다” 이후에 모든 일어날 인간들의 사회가 어떻게 될지를 그 타락 속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 인간이 하나님을 등지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된 인간이 독립하겠다고 그리스도를 밀치고 성령 안에서 교통을 이루어야 할 인간이 그런 것 필요 없고 자기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그런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뭐에요. 여전히 그리스도는 머리되셨는데 이 모든 연결들이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며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겠죠. 에이 뭐 하나님의 능력도 별 거 아니네. 인간이 끊으려고 하니까 다 끊어져 버리네. 그게 아니라 인간이 죄를 짓고 악을 행하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모든 가지고 있었던 이 관계들의 전부는 아니고 대부분을 하나님이 거둬가 버리시는 것입니다. 성령도 거둬 가시고 그리스도 예수의 이 모든 중보의 연결들을 대부분 하나님이 거둬가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은혜의 영적인 실재이거든요. 그런데 이것들을 하나님이 확 하고 거둬가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조 세계에서 하나님이 이런 연결들을 확 거두시니까 창조의 아름답고 찬란한 영광이 쇠해져 버려서 그래서 저주와 그 다음에 가시와 엉겅퀴만 남은 세계가 되었듯이 인간들 속에서도 하나님이 이것들을 확 거둬가 버리시니까 그 다음에는 이를 악물고 죽이고 죽고 물고 뜯고 하는 무시무시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렇게 묻겠죠.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확 거둬가 버릴 수 있느냐. 그거는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양립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둬가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여러분이 계속해서 술 퍼먹고 악을 행하면서 왜 나를 이 상태에서 성령 충만하게 못하시냐고 하나님께 대드는 것과 똑같으다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못하시는 게 아니라 안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계는 질서가 모두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어떻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여전히 머리이신데 그것을 이룩하던 이런 연결들이 다 끊어진 것입니다. 그 끊어진 비참함이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가 뭐 재밌는 동물의 세계 그러는데 틀어봐요 재미 하나도 없습니다.
잠잠한 곳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먹고 먹히는 치열한 전쟁들이 물속에서도 땅 속에서도 미세한 곤충의 세계에서도 미생물의 세계에서도 평화라고는 아무데도 없기를 이 세상과 꼭 같애요. 난 진짜 하나두 재미없더라구. 원숭이가 나는 바나나만 먹고 사는지 알았어. 동물들을 때려 가지고 잡아 가지고 그걸 뜯어 먹고 아구 그걸 막 피가 줄줄 흐르고 드라큘라 같이. 원숭이에 대한 모든 인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뭐가 평화로와요. 사람들의 사는 세상도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이탈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졌을 때 자신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경험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항상 열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종들을 보내어서 캄캄하고 어두운 시절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을 주시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외치고 신앙을 가진 사람을 주시고 그 사람들을 엮어서 가정을 만드시고 그 가정을 불려서 나라를 만드시고 그 나라 속에서 경건하게 주님을 섬기는 그루터기들을 그대로 두셔서 타락하고 더러워질만하면 끊어내셔서 정화하시고 끊어내시고 정화시키고 하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시고 구원하시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계속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와 능력으로 어두운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이 구약의 성도들입니다. 근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궁극적으로는 재창조의 머리가 되시기 전에 교회를 먼저 택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심으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 중 주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죽은 영혼을 살리셔서 영적으로 다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게 하시고 다시 그렇게 예수 믿은 사람들을 접붙이셔서 그들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한 성령 안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맨 처음에 신앙이 없다가 예수 믿고 회개하고 은혜를 충만히 받아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감격할 때 그 때에 교회 오는 것이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항상 나 같은 죄인이 이런 공동체 속에 발을 들여놓고 저런 성도들하고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감격스럽고 두렵지 않았어요? 놀랍게 그런 사랑 안에 있으니까 사람들의 그런 결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오히려 사람의 결점이 들어오는 게 아니고 누가 미끄러지고 잘못된다는 이야기가 들려지면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어서 그렇다고 느껴지는 게 아니라 내가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영혼을 위해서 중심으로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어서 남의 기도 제목이 내 기도 제목으로 공동체의 기도 제목이 나 개인의 특별기도 제목으로 다가오게 되어서 나 개인을 위한 기도 제목들은 저리 밀려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사글세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옆집으로 옆집에서 큰 집으로 이렇게 가는 거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고 오히려 그렇게 교회 안에서 미끄러지고 아파하는 지체의 그 기도 제목들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게 제가 전도사를 할 때 청년부를 할 땐데 누가 감사헌금을 했어요. 취직 감사 헌금을 드립니다. 그래서 아우, 제가 놀더니 취직했구나 그랬더니 지는 계속 노는 건데 밑에다가 내 친구 아무개 취직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짜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너무 좋은 거야. 지는 백수인데 내 친구 취직 시켜 주셔서 감사하다구. 나는 지금도 그 봉투가 기억이 나요. 파란 봉투에. 얼마 전에 그 사람을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자기 친구 아무개 취직 시켜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구. 그 없는 돈에 수시로 감사헌금을 하는 거야. 아무개 건강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구. 그렇게 저 사람의 개인적인 기도 제목이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내 마음 속에 특별기도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너무 너무 놀라워요. 그게 결국은 아들의 새끼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는 그때에는 볼 수 없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잖아요. 어떻게?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졌을 때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다시 접붙여졌을 때 그래서 성령의 은혜 안에 있을 때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요.
B. 교회의 머리되심
그래서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무슨 문제가 나오냐 하면 예수님께 접붙여졌지만 옛날의 아담처럼 그렇게 완전히 순결해진 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일시에 순결해져버리면 아담처럼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여전히 순결할 수는 있는데 항상 기도하고 말씀의 은혜를 받고 자기를 성찰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면 날마다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주셔요. 그러니까 우리를 날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형상을 닮아 주님 안에 있었던 꽉 찬 하나님의 완전하심으로 우리를 인간답게 이 꾸겨지고 흠 있는 것들을 지우시면서 아주 아름답게 펼쳐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지방의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갔는데 목사님을 오랜만에 뵈었습니다. 저보다 훨씬 연배이신데요. 얼굴이 굉장히 예뻐지고 고와지셨습니다. 나보다 더 예뻐지셨습니다. 그래서 어쩐 일이세요? 그러니까 교회에 성형외과 하는 교인이 있는데 교회를 리모델링을 다했는데 그러더래요. “목사님, 이제 얼굴도 리모델링 하시죠” 그래서 계속 안 갔는데 하도 그러지 말고 리모델링 하시자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갔대요. 갔더니 주름은 펴주고 점은 뽑아주고 좍 해가지고 뽀샤시하게 좌악 만들어준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형외과 의사가 없어. 그 목사님은 아주 뽀샤시하고 나는 유적지처럼. 둘이 서 있으니까. 내 얼굴은 고풍스런 자연산이고 목사님은 완전히 뽀샤시하게 이렇게 해서 그렇게 하셨더라구. 그래서 우리 교회 성형외과 의사 없는 것도 나는 감사합니다. 얼마나 좋아. 나는 자연산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셔서 하나하나 하나님 말씀으로 주름을 펴주시고 점도 뽑아주시고 지방도 뽑아주시고 해주셔서 뽀샤시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까 회심하기 전에 혹은 회심하고 나서도 은혜 안에 살지 않을 때 막 가시야. 여기 가면 쿡 하고 찌르고 그래서 이 사람 피 쏟고 저기 가면 저 사람 피 쏟고 그 사람 한 번 굴러가면 온 사람이 으악 하고 피해. 그렇게 해서 가서 여기에서 피를 쏟게 하고 그러던 사람이 어느 날 말이지 그게 다 무엇 때문에 그래. 말하자면 영혼의 막된 자연산들이 있어서 그런거잖아요. 여자들도 나와서 자기가 자연산이라고 할 때 어느 정도 예뻐야 지 그 말이 돋보이지. 이게 완전히 그런 거 이게 아니지. 차라리 양식이 좋지, 자연산보다. 그렇게 하나님이 깨끗이 펴주시면 그 사람이 어디에 가서도 환영을 못 받던 사람이 어디에 가서도 그렇게 요긴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긴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제 경험해보셨겠지만 떠나는 사람도 있고 오는 사람도 있잖아요. 어느 교인이 떠나려고 그러면 온 교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 멀지도 않은데 이사 가는데 고속버스 타고 와서 같이 신앙생활하자고 막 그러는데 어떤 사람은 이제 떠나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정말 잘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뭘 인도 해죠. 헤어지길 너무 바라는 거지. 정말 응답해주셨네요. 얼마나 저 사람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면. 정말 잘하셨습니다. 어, 그래도 다시 있어볼까요. 어, 그냥 처음 주신 마음 주님 마음, 두 번째 먹는 마음 인간 마음, 세 번째 먹는 마음 마귀 마음.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깨끗이 펼치셔서 예수 닮은 모습으로 만들어 가는데 내 힘으로 안 되잖아. 그래서 매이 매일 주님 앞에서 말씀의 빛 앞에서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은 너무나 큰데 나는 아직도 내 모습이 부끄러운 거야.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깨뜨려지고 변화되고 하면서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면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흠 없기를 사모하면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힘이 없을 때도 있지요. 더 이상 못갈 거 같은 때도 있지요. 그런데 지체들을 만나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 보면서 나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저렇게 이기는구나 아멘 하고 다시 믿음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주욱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교회에요.
C. 재창조의 머리되심
이것이 끝나고 나면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모든 역사를, 이 타락의 역사를 종결시키셔요. 그때 하나님이 일시에 이 모든 것들을 종결시키시고 우리를 모두 완성시켜서 그래서 구원하기로 예정된 모든 사람들을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연결시키시고 완전한 성령 안에 충만히 거하도록 하셔서 흠이 없고 천상에 있는 천사의 무리보다도 아름다운 그런 연합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한 자들을 모두 정리하시고 이 땅에는 하나님을 순결하게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사랑 안에 교통하며 거룩한 하나님을 향하여 살 그런 사람들로 재창조된 세상을 만드시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흐느끼고 탄식하면서 우리들이 그렇게 주님께 구원을 얻어 한 무리가 될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V. 결론 :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
그래서 결론은 이 교회는 영광스런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이 교회에서 바로 그렇게 머리되신 주님께로부터 갈가리 다 찢겨진 인간과 그리고 이 모든 세계와 모든 우주들의 분열을 봐요. 그리고 하늘나라에서도 그런 분열이 있었죠.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치료되고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히 접붙여질 때에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창조의 본래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더욱 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찬란하게 드러내 줄 반드시 그 날은 오고야 말거든요. 다가올 필연적인 그 날을 바라보면서
(찬송)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그렇게 고백을 하면서 손에 손을 붙잡고 쓰러진 지체들은 일으켜 세우고 상처 난 지체들은 싸매주고 힘 있는 지체들은 넘어진 지체들을 매고 그리고 서로를 격려하며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가 반드시 무너진 이 모든 질서들을 회복하고 그 창조시의 아름다운 영광 그 이상의 상태로 우리를 돌아가게 해주시고 우리는 그에게 접붙여져서 그 찬란한 영광에 참여할 것이라는 것을 바라보고 기대하면서 그러면서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죽음이여 와라, 시련이여 와라. 환난과 핍박이여 내가 너를 두려워하지 않겠노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주님이 고아와 같이 홀로 두시지 아니하시고 시시때때로 싸매시고 어루만지셔요. 실패한 자들에게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죄지은 자들은 다시 용서해 주셔서 다시 하나님의 사랑에 부합하는 삶을 살도록 미끄러진 사람들은 다시 일으켜 세워주셔요.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힘을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그 지극한 사랑과 그 아름다운 지혜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좋으신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당신에게 접붙여주신 사실을 기억하면서 소망을 갖는 여러분 되기길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3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1 (2010/01/1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2 (2010/0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3 (2010/0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4 (2010/01/14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5 (2010/01/1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6 (2010/01/16 주일오전설교)
2.타락과 만물의 흩으심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로마서 8:19-21).
I. 본문해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본문은 사도바울이 고난과 핍박을 앞두고 있는 그리고 이미 핍박을 받고 있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 속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고난을 받는 그들을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후사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되겠다 라고 위로하면서 이 말씀을 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신앙을 따라 산다는 이유 때문에 고난과 시련을 당하지만은 그러나 지금 당하는 이 고난은 미래에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큰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사도는 분명히 하면서 그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광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인간들을 구속하시고 피조물의 최종적인 머리가 되셔서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를 모두 통합하는 머리로서 당신 자신의 통치를 구현하실 그때에 그가 바로 우리를 당신께 붙은 몸으로서 또한 영화롭게 하실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주님의 그 큰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오늘 사도는 그 날이 이를 때까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탄식하며 고통 한다는 것입니다. 넓게는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이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모든 만물의 머리가 되셔서 성령 안에 있게 하시는 그 완전한 사랑의 교통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그 날을 생각하며 탄식하면서 그 날을 기다리고, 좁게는 모든 구원받을 인간들이 자신의 영혼의 상태,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성령으로부터 이탈된 채 살아가는 자신의 영혼의 고통을 아파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우리를 당신께로 말미암아 한 몸을 만드시고 성령께서 그들 모두를 포괄하심으로 한 사랑 안에 있게 하실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이 이를 때까지 지금 그렇지 않은 현실 속에서 탄식하며 신음하며 그 영광스러운 날을 전망하고 있다 그런 뜻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약 만물을 다시 통일 시켜 머리가 되신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 전에는 만물이 흩어져 있는 상태일 것임에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머리가 되시고 모든 만물들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성령 안에 있게 되어서 아름다운 사랑의 교통과 질서의 연합을 이루게 되었는데,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들이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져 흩어져 버린 상태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타락과 만물의 흩어짐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오늘 알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II. 인간의 타락과 결과
우선 인간의 타락과 그 결과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A. 언약관계 안에 있는 인간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언약관계 안에 있는 인간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세계를 지으시고 그리고 인간을 맨 나중에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인간을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세상 만물을 알 수 있어야 했고, 혼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만물을 다스려야 했기 때문에 또한 사람을 알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고, 돌보아야 했기 때문에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있어야 됐습니다. 이렇게 인간을 하나님이 지으시고 영혼을 주셔서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옆으로는 인간을 알고 또 아래로는 이 모든 피조물들을 알고 이런 지식을 가지고 이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서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돌볼 책무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제일 먼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알려주신 그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을 맨 처음 흙으로 창조하시고 나서 그 모든 인간을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어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를 맺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지만 그러나 인간은 특별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어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결을 갖게 된 것입니다. 매우 특별한 영적인 연결, 교통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한 사람의 갈비뼈를 떼어 또 사람을 지었을 때 아담은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이 여자도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또 남편과 연결되고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도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또 부모와 연결되고 이렇게 해서 인간들이 이 세상에 번식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면 만물과 그리스도가 연결되어 있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핵심은 인간들이 그리스도와 인간이 연결되고 불멸하는 그 인간들이 번식하면서 끊임없이 연결되는 그 연결 안에서 그들은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복종하고, 그들은 성령의 교통 안에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가운데 함께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을 향해 펼치실 하나님의 지혜의 펼쳐짐을 위해 이바지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하나님이 정말 만드시고 싶었던 것은 교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교회와 가정이 이게 완벽하게 일치되는 그런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의 사건이었죠. 이 선악과는 특별한 과일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과일이었고 하나님이 거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고 하는 아마도 이 죽음의 의미를 아담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지만 만약에 먹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다면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원히 누리게 될 생명의 성질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들이 부여받은 이런 종류의 영적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면서도 지금 우리들이 받은 거 보다는 훨씬 더 어떤 의미에서 완성도가 높은 종류의 생명이겠죠. 왜? 우리는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았어도 죄짓고 불순종하면서 끊임없이 우리들이 그 은혜로부터 멀어지잖아요. 아담은 그렇지 않았겠죠. 죄 짓지 않았더라면. 바로 그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행동했더라면 영생을 누리게 되었을 그 의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성취하신 바로 그 의예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인간 하나 하나를 그냥 개별적으로 아무렇게나 창조해서 마치 콩을 확 뿌리듯이 그렇게 인간을 창조하시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하나를 연결하여서 사랑으로 연합을 이루고 성령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아름다운 몸으로서 인류를 창조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그 아름다운 영적인 연결로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근대 결국 인간은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이 범죄가 뭐 그렇게 대단하냐고 말합니다.
실제로 어떤 신학자는 죄지으면서 살아도 아무 문제없다. 왜?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넓어서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태평양 바다에서 오줌 한번 누는 거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대단히 위대하게 보는 것 같지만 그러나 정직한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하나님 성품에 대한 심각한 무지와 왜곡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과일 하나가 몇 푼어치나 하겠느냐 그거는 가격의 문제가 아니죠.
어떤 사람이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는데 파리 큰 게 한 마리가 들어와서 계속 빨아먹더래요. 그래서 이렇게 손을 흔들어도 파리가 안 나가더래요. 그래서 웨이터를 불러 가지고 ‘이게 도대체 뭐냐고, 파리가 아직까지도 여기서 빨아먹고 있지 않냐고, 이런 음식을 가져왔냐’ 그랬더니 웨이터가 하는 말이 ‘아이 손님 그거 쪼잔 하게 왜 그러세요. 파리가 그걸 먹으면 얼마나 먹겠어요.’ 의미의 문제예요. 그래서 결국은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게 되는 것입니다.
B. 천상의 반역과 지상의 타락
이런 지상에서의 타락은 천상의 반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상의 반역과 지상의 타락이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천상의 반역은 지상의 타락의 한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죄를 지은 것은 인간이지만 결국 천상에서 천사들이 이 반역을 일으키는데 그 천상의 반역이나 지상에서 인간의 타락이나 똑같은 본질을 말해 주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 대한 말하자면 대적이요, 그리고 배반이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자들의 삶이 결국 본질적으로 천상적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 자체가 그냥 이 세상에서 때가 되면 밥 먹고, 똥 싸고 그러면 사는 게 인간인거 같아도 그거는 하나의 물리적인 육체의 현상일 뿐이고, 그로 하여금 참으로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것은 그런 육체의 작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안에 그 육체를 움직이는 영혼과 정신의 작용에 의해서 똑같이 생긴 사람이 아주 흉악한 악인의 삶을 살기도 하고, 이웃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아주 선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결국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 것이겠어요? 결국 그의 육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보다도 그 사람의 삶의 방향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과 정신에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에 의해서 이 삶 자체의 방향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종종 잘 드는 비유가 뭐냐 하면 부두에서 어떤 사람이 모터보트를 탔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달려가는 거야, 그런데 예쁜 색을 칠한 배든, 녹이 슨 배든, 큰 모터보트든, 작은 모터보트든지 간에 그 바다를 달리는 것은 다 달려요. 근데 이게 핸들이 망가졌어요. 시속 70km 정도로 돌진을 하는데 앞에는 커다란 절벽입니다. 그러면 어차피 그렇게 질주하게 되면 예쁘게 칠한 보트나, 녹이 슨 보트나 결국은 마찬가지로 그 절벽에 부딪쳐서 폭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육체에 관한 문제들은 그렇게 칠을 하는 것과 같은 외장이라면 그렇게 파멸할 수밖에 없는 배가 이 고쳐져서 핸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이것은 미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거는 본질적인 방향의 문제예요. 성경은 우리를 그 인간의 배에다가 비유한다면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다른 색깔을 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는 방향을 바꾸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거라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이 우리에게 바라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 방향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우리의 영혼과 정신, 그리고 마음속에 정해진 방향입니다. 그것이에요, 바로. 그런데 이렇게 천상에서 커다란 타락이 있고 나서 거기에서 변절한 악마들은 끊임없이 인간의 이 지상에 영향을 끼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하늘의 주관자들과 이런 것들을 우리가 진정으로 대적해야할 적’이라고 묘사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건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끊임없이 이 지상에 영향을 미친 그 한 가닥이 바로 아담과 하와를 타락하게 만들었던 그 뱀의 유혹입니다. 뱀, 그 자체가 그 일을 했다기보다는 뱀은 사단의 도구로서 그렇게 하늘에서 이미 일어난 반역의 세력들이 이용이 되어서, 도구가 되어서 인간 속에 그런 유혹을 집어넣고 결국은 인간을 파멸을 시키는 이런 일들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자 여기에서 이제 우리들이 그러면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삶, 우리 믿는 사람들만이 영적인 측면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아요. 이런 영적인 전쟁은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모두 있어요. 이러한 하늘의 악한 세력들이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게 될 때 다만 이 세상 불신자들은 자기가 그런 식으로 조정을 받고 영향을 받으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뿐이고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아는 차입니다. 또 알 수 있는 사람들도 신앙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되면 이런 영적인 안목이 사라져요. 그래서 마귀의 사주를 받고 마귀가 기뻐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자기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악을 행하고 잘못 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C. 타락의 결과
결국 이러한 인간의 타락의 결과로 결국은 만물들의 흩어짐이라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이렇게 타락함으로 말미암아서 그 본질적으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야 할 그런 인간의 삶이 깨뜨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자기가 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웠던 관계들이 파괴되는 단절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사물들은 정의가 있어요. 꽃은 무엇인가? 아니면 차란 무엇인가? 뭐 사전을 찾아보면 어디인들 정의가 안 나와 있겠어요? 눈으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사랑, 용기, 정의, 덕, 이런 것들에 대해서 왜 정의를 내릴 수 없겠어요? 그러나 인간이 누구인지를 아무도 정확히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만을 떼어내서는 그게 어떤 존재인지 알기가 어려운 존재예요.
그래서 인간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내가 누구인가를 살피려고 할 때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들여다보는 것만큼이나 끝없는 세계가 펼쳐져서 자기도 자신을 이해하기 어려운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 그 자체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물처럼 짜여진 관계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겠다 그러고 혼란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죠. 그 사람들 보면 대부분 친구도 없고, 이웃도 없고, 그 다음에 사랑할 가족들과의 관계도 없고, 외톨박이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아요. 물론 종종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 고독해지는 시간이 꼭 필요하고, 경건에 있어서 그런 시간들은 꼭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앎으로써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알기 어려워지죠. 그뿐만 아니죠. 사람들과의 관계도 끊어졌어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의무와 권리를 갖게 되면서 저 사람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나는 이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가늠하면서 내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죠. 자연과의 관계를 보면서 결국은 내가 누구이고, 이 자연의 위치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자연의 모든 만물들은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사용하도록 주신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하나님 보이시기에 아름답게 잘 가꿈으로써 자기가 하나님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들이 다 차단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런 관계들이 모두 끊어지고 나니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고 나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완전히 흩어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흩어짐이 인간 혼자만이 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자연과의 관계가 깨뜨려지면서, 자아와의 관계가 파괴되면서 이렇게 하나님이 아까 설명한대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에게서 나와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면서 그것들이 서로 연결을 이루어 사랑 안에서 성령 안에 있게 하시고자 했던 그 계획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이 거두어 가 버리시고,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고, 그 다음에 모든 피조물들끼리 떨어지고, 성령 안에 있지 아니함으로 사람들끼리 떨어지고 하는 이런 존재가 되면서 막 흐트러져 버린 것입니다. 그런 흐트러져 버린 상태 속에서 바로 이제 인간은 서로 갈등하고 악을 행하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짓밟는 일을 서슴없이 하는 그런 존재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거침없이 흘러내려오는 이 모든 타락상과 악과 고통, 그리고 죽음 이런 것들이 범람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감기에 걸리면 기침을 하고 열이 나고, 콧물이 나는 증상이 발생하는 것처럼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영적인 죽음이 들어오게 되니까 죽음의 수많은 증상들이 이렇게 악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III. 창조질서와 만물의 흩으심
이렇게 결국은 만물이 갈가리 찢어져 흩어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창조의 질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한번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만물들은 그리스도에게로 떨어져서 다 찢겨 나가고 그리고 인간들도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 있으면서 인간들끼리 연합을 이루고 아름다운 연결을 이루어야 했던 그 모든 관계가 다 잘라지고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들이 끊어지고 잘라지게 되는 이러한 모든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서 결국은 만물들이 산산이 흩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인간이 타락한 것이 이 모든 만물에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우리들이 보게 되는데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맨 처음에 하나님이 천상과 지상의 세계를 창조하실 때 그 모든 사물들의 머리로서 모든 사물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중보자가 되셨던 사실을 생각하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의 모든 연결이, 하나님과의 모든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느냐?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죠. 왜냐하면 지금도 하나님은 정한 시간에 해가 뜨게 하시고 달이 지게 하시고, 만물에 필요한 기후를 주시고, 사시사철의 변화를 주시고 또 지금도 하나님께서 그런 연결들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법을 떠나 악을 행하게 될 때에는 마음의 가책을 느끼기도 하고 고통을 받기도 하는 이러한 질서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그래서 완전히 거두신 것이 아니라 희미하게 이런 것들이 남아있어서 하나님이 이 모든 만물들을 여전히 흩어졌지만 맨 처음 창조된 상태에 비하면 갈갈히 찢겨졌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질서를 유지하고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우주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똑같은 일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원래 인간의 마음은, 인간의 영혼과 영혼의 기능인 마음, 사랑, 의지, 정서, 감정, 그리고 지성, 생각, 이 모든 것들이 아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면서 질서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큰 형은 지성입니다. 사물을 보면서 ‘이것은 이런 것이다’ 라고 전달을 해 주면 그 다음에 감정이 그것을 보고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아름다운 것인가 추한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의지에게 전달해 주면 취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고, 가만히 있기도 하고, 행동도 하고 하는 일체의 아름다운 질서들이 인간의 정신과 내면의 속에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쾅’ 하고 부수어지면서 산산이 부수어져서 이런 질서들이 뒤엉키게 되는 것입니다. 희미하게는 여전히 질서가 남았기 때문에 국가도 유지되고 가정도, 사회도 이런 모든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원래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셨던 죄 없는 상태에서의 인간의 내면의 올곧고 깨끗한 것들은 다 뭉개져 버린 것입니다.
A. 흩어짐의 본질
이러한 흩어짐의 본질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만물들 속에 있었던 당신의 영광을 거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신성한 충만한 영광으로 모든 피조물들과 특별한 연관을 맺으시면서 그것들을 하나 되도록 쭉 묶으셨는데 그렇게 연결되어 있던 연결들을 자연 사물 속에서 거두시고 인간에게서 대부분을 거두어 가시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이 질서들이 모두 흐트러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질서는 자연의 세계에서도 흩어진 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보는 기상의 이변들, 그렇죠? 그리고 녹아내리는 그 수많은 얼음들, 그리고 이 환경의 변화들 이런 것들은 결국 인간이 타락한 결과예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위탁하셨을 때 그것은 모든 자연이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고 다스리려고 하는 한도 안에서 온전히 순종하면서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성난 바다를 향하여 잔잔하라 고 명령하신 그것이 그 당시로서는 모든 인간 아무도 할 수 없는 하나님 홀로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바로 그렇게 바다와 산들과 자연을 명하여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이바지하도록 그렇게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영광스럽게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참 하나님이자 사람으로 오셔서 그것들을 그렇게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이 세상의 자연 모든 만물들 속에 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이것들이 깨뜨려지게 되자 만물들은 흩어지고 수많은 부조화들을 만들어 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음식을 섭취하지 못해서 질병에 걸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이 먹어서 질병에 걸리고, 어떤 사람은 어떤 특정기관의 분비물들이 많이 나와서 질병을 일으키고, 어떤 사람들은 안 나와서 문제를 일으키고 이 환경과 접촉하면서 인간이 끊임없이 육체가 망가지고 정신이 파괴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질서의 흩어짐입니다. 이런 것들이 파괴된 것들을 우리들이 온전한 질서로 돌려놓는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환경을 보호하는 일에 있어서도 이바지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노력으로 이 모든 세상이 완벽할 정도로 아름답게 변한다고는 믿지 않지만, 그러나 주께서 우리의 구속을 완성하시고 이 모든 피조물들을 아름다운 질서로 되돌려 놓으실 때까지 그날을 꿈꾸면서 그렇게 주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가 다시 그 아름다움과 선함을 회복하도록 이바지하면서 사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아주 훌륭한 표가 되는 것입니다.
B. 흩어짐과 하나님의 아름다움
이러한 흩어짐, 이러한 창조만물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흩어짐과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관계를 우리들이 생각하게 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이 타락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모든 것이 아주 아름다운 질서로 이루어져 있었겠지만 타락함으로 이 모든 질서들이 깨뜨려지고, 망가지고, 파괴된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실은 인간들이 더 놀라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런 뜻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이 되겠죠. 오늘도 영국에서 온 젊은이를 만났어요. 그래서 이제 한국에 와서 잠깐 있으면서 ‘당신 나라하고 우리나라하고 다른 게 뭐냐’ 그랬더니 ‘자기는 한국이 참 좋다고 생각한다’ 그게 뭐냐 그랬더니 ‘이 나라에는 도덕적으로 훨씬 자기네 나라보다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요. 그래서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냐?‘ 그랬더니 그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이 나라에는 어른을 향한 공경이 있다. 그리고 개념 없는 행동을 할 때 어른들이 하지 마라 그러면 안하더라, 자기네 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다‘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사실 지금은 길거리를 나가보든 어디 가든지 간에 우리가 옛날에 어렸을 때 살았던 그 사회보다는 훨씬 더 뒤로 쳐진 그런 예의 없는 세계인데도, 세상인데도 그 사람들 눈에는 그것이 아주 놀라운 질서로 보이는 것입니다. 저희 중학교 때만 해도 젊은 사람은 버스 탈 때 앉을 생각을 안했어요. 앉으면 저기 어른이 올라오면 그저 벌떡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해 드렸고 그렇지 않으면 무거운 가방을 들고 타면 가방을 무릎에다가 올려놔 주었잖아요. 그 정도가 아니라 연세 많이 드신 분들 중에 성격이 못되신 분은 젊은이 앞에 가서 꺼떡꺼떡 졸고 있으면 소리를 병력같이 지르면서 젊은 것이, 어린 것이 거기에 앉아서 ‘일어나, 임마’ 그러면 벌떡 일어났고, 하도 점잖으신 분이 서 있으면 같이 서 있는 어른들이 ‘아이고 젊은이, 일어나, 이 사람아 조는 척 하고 있어’ 그러면 얼른 일어나서 뒤로 갔거든요. 지금은 어림도 없습니다.
어떤 남녀가 전철에서 둘이서 뽀뽀를 하더래요. 거기에 있던 어느 나이 드신 분이 ‘야 그거 창피하지 않냐, 여기서 왜 그러냐 하지마라’ 그랬더니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네가 내 뽀뽀하는데 보태준 거 있냐’ 그러더래요. 그래도 그 사람들 눈에는 그나마 그래도 대단하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요? 그렇게 사회가 질서가 없을 때에는 누구 한 사람이 아주 예절 바르게 행동하면 아주 아름답게 돋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돋보이는 것입니다. 다 예절 바른 사람이 있으면 그게 그렇게 대단하게 돋보이지 않아요.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온전히 순종하며 그렇게 살았더라면 그러면 인간 그 질서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 잘 몰랐을 것입니다. 근데 그 질서가 다 깨졌어요. 그래서 자연의 만물도 질서가 깨지고, 그래서 재해가 오고, 자연의 재난이 오고, 흉년이 들고, 먹고 마실 것을 위해서 평생 수고해야 하는 땅에 메인 그러면서도 가시와 엉겅퀴만 내는 그 땅을 부둥켜안고 노동을 해야 하는 슬픈 인간이 되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다 깨뜨려지고 그래서 결국 미움과 시기, 질투, 원망, 복수, 경쟁 이런 것들이 가득 들어오고 어려서부터 생각하는 것들이 인간의 마음에 악밖에는 없는 그런 존재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만물의 흩어진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런 흩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남겨놓은 질서들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속으로 들어와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되고 이런 사람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이, 어느 부모가 있는데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을 했대더라 그건 당연하잖아요. 이제는 당연한 게 아닙니다. 그게 너무나 돋보이는 것입니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엊그제도 신문에 보니까 뭐 70년을 부부가 같이 산 사람이 나오더라구요. 그런데 계속 둘이 같이 살았대요. 그게 뉴스거리예요. 뉴스거리예요. 이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그게 뉴스거리예요. 그러니까 세상이 타락하게 되면 그런 너무나 신앙을 떠나서도 어떤 사람이 사람됨에 합당하게 살아가기만 해도 우리에게 정말 커다란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교회 한번 집회에 갔는데 그 어머니가 계시는데 그 무슨 중풍 병인가 병에 걸리셨습니다. 그런데 치료를 해 보려고 그러는데 툭하고 쓰러지더니 결국은 의식이 없는 식물인간이 된 것입니다. 근데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이 그 정도 됐으면 치료해 보다 병원에서 가망이 없으면 죽든지 아니면 뭐 간병인을 달려서 뭐 어떻게 하든지 해야 되지 않겠어요? 대학원을 다니는 총각인데 어머니가 툭하고 쓰러지셨습니다. 근데 어머니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돌봐드린 것입니다. 8년 동안을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데 어머니 얼굴이 애기같이 하얗고 등에 한 번도 욕창이 난 적이 없대요. 그러니까 지극 정성으로 하는 거야, 장가도 안 가면서 그렇게 1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고, 10년이 넘은 거 같은데, 그래서 세월이 다 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돌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8년 됐다고 했는데 그게 벌써 그 책이 나온 게 벌써 2005년 인가 그랬으니까 지금 10년이 넘었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식물인간 된 어머니하고 끊임없이 대화를 하면서 엄마는 말이 없죠. 그래서 어머니 앞에서 재롱도 떠는 거야. 그러면서 그 어머니를 지극한 사랑으로 결코 그 곁을 떠나지 않고 그렇게 돌보는 거야, 그러면서 자기는 이제 막 중년으로 늙어가는 거야. 그러는데도 자기의 삶에 대해서 후회를 안 하고 그 어머니를 그렇게 사랑하는 거야. 그게 모든 사람들 눈에 너무 기이하게 보여 가지고 김영사에서 아예 책을 내게 해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죠? 그게 너무나 당연한 건데 그렇게 사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질서에 가깝게 살 때에 그 자체가 아주 아름다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타락해서 만물을 흩어지게 하신 것은 다시 그리스도를 만물의 머리로 삼으셔서 이 모든 것들을 자기의 질서로 돌리시는 이 과정 자체가, 과정 자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서 타락했는데 인간의 타락의 결과로 만물이 흩어진 그것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당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우시고 아름다우신 영광의 주님이신지를 보여주는 기회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들뿐만 아니라 만물들이 흩어지도록 허락을 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단기적으로는 죄를 지음으로 이 세상을 창조 목적으로 떠나게 한 것 같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을 사용하셔서 오히려 당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들을 더 훌륭하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통해서 당신의 신성의 충만한 영광을 이 땅에 보여주시는 것인데 이 일을 훌륭하게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당신의 놀라운 계획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흩어진 만물들 속에 당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셔서 결국은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 하도록 인간의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만약에 여러분이 죄가 없고 깨끗한 인간이었다면 예수님이 여러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할 때 그것이 나를 위한 일이라고 느껴졌겠어요. 그런데 우리 모두 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들로서 악을 행하고 마음에 기뻐하는 바를 따라 행하면서 중심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패역한 족속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 때에 우리 맘에 어두움과 두려움 그리고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이 모든 것들이 끊어진 가운데 인간은 방황하고 그리고 고통하면서 결국은 괴로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과 나 자신을 신뢰할 수 없는 방황과 괴로움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복음의 소식이 들렸을 때 우리의 마음에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찬란한 구원의 빛으로 다가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마음이 하나님 앞에 낮아지고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서 자신이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올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타락하여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들이 흩어졌지만 흩어진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 이 우주와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시는 기회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타락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본래의 그 질서도 돌아갈 수 없는 절망적인 인간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한 번도 멈추신 적이 없이 그렇게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흩어진 만물들을 다시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모두 모으시고, 다시 통일시키셔서 그래서 성령 안에 있게 하심으로 모든 인간들을 다시 하나의 인류로 모으시기를 원했고, 이 지상의 세계에서 인간들의 머리가 되신 그분은 천상의 세계에서 천사들의 머리가 되어서 그래서 그것들이 함께 영적인 연결을 이루며 두 세계의 위대한 머리가 되심으로서 모든 세계를 통치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더 넓게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피조물, 타락한 천사와 사단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당신과 당신의 머리되심 아래 있게 하시고, 이 땅에는 피조된 모든 만물들도 그렇게 원래 상태로 돌아와서 그리스도 예수와 연결을 이루며 성령 안에 있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만물의 회복의 상태가 올 날을 기다리면서 이 땅에 있는 모든 자연 만물들조차도 탄식하고 고통하며 우리 몸이 구속받을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오늘 사도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부터 떨어져 그런 모든 아름다운 연결을 상실하게 된 것이 인간의 죄였고 그로 말미암아 자연 만물들이 피해를 봤기 때문에 자연 만물들은 스스로 그렇게 머리되신 그리스도 위로 통일 될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 인간을 구원하여 당신이 예정하신 백성들을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 한 몸을 이루실 때까지 자연 만물은 그렇게 끊어진 가운데 탄식하고 고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몸의 구속이 완성이 되어서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구원의 무리들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게 되는 영화로운 그날에 이 피조물들이 탄식하고 흐느끼는 그 고통을 끝내고, 본래의 영광스러운 상태로 돌아가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함을 드러내 보여 주는 도구가 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IV.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 새 질서의 나타남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다시 이 모든 창조 세계의 만물을 삼으시고, 그리고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모두 연결 지으시고 통일을 이루실 날을 바라보시면서 제일 먼저 그리스도 예수를 이제 새로운 질서의 나타남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 삼으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A. 창조세계 : 지혜 + 사랑 + 능력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지혜와 그리고 성령의 사랑과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으로 창조된 세상입니다. 그래서 성자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이신 성자와 하나님의 사랑이신 성령과 성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모든 세계가 창조되었는데 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아름다운 연결들이 흩어지게 되었을 때 바로 구원사역은 이 새로운 질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B. 구원사역 : 새 질서를 보여줌
이 구원사역이 바로 새로운 질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구원사역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리고 모든 만물을 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모으시기 위해서 먼저 인간을, 제일 먼저 인간을 모으시는 것입니다. 창조 때와는 반대죠. 창조 때에는 자연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을 심으셨는데, 구속하실 때에는 이제 타락한 그 인간이 이 모든 흩어진, 질서가 흩어진 것의 궁극적인 원인이기 때문에 그 근본적인 원인부터 치료하시기 위해서 타락한 인간을 먼저 부르셔서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이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접붙이시고, 그 다음 구원 받은 사람을 또 거기에 접붙이시고, 그 다음 구원 받은 사람을 또 거기에 접붙이고, 접붙이고, 접붙이고 접붙여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하시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함께 지체를 이루게 하시고 성령 안에 있게 하심으로 그들이 죄가 아직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교통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랑이 교통할 때 이 사랑의 교통을 통해서 나눔과 그리고 용서가 흘러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이 그 사랑의 교통을 통해서 부한 자에게서 가난한 자에게로 흘러가고, 더 넘치도록 있는 사람에게서 모자라는 사람에게 이동합니다. 이 사람이 저 사람을 용서해 주지만 내일은 저 사람이 이 사람에게 용서를 받게 되는 이렇게 용서와 나눔을 통해서 이렇게 인간의 탐욕과 욕망으로 이렇게 어긋나도록 균형을 잃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평등하게 흘러가게 하심으로서 결국은 사랑 안에서 주님이 이 교회에 주신 것들을 재능과 은사와 모든 것들을 함께 나눔으로 그들을 활짝 펼쳐지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흠이 있거나 주름진 것이 없이 펼쳐져서 어떤 사람이 지식의 은사를 받으면 그 지식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도 그 사람을 통해서 교통되는 지식으로 유익을 얻고 어떤 사람이 물질을 많이 받으면 다른 사람은 그것을 통해서 덕을 보면서 도움을 받고, 이렇게 하면서 굽어지고 모자라는 것 없이 사랑으로 쭉 펼쳐져서 그들 안에 사랑으로 연합된 가운데 주님이 교통하시는 것이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나게 될 때 인간들이 그렇게 교통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움과 행복을 보면서 그런 속에서 하나님과 단절되고, 인간과 단절되고, 자연과 단절되고, 자아와 단절된 채로 살아가는 자기 자신의 불행한 모습을 그 공동체의 모습에 비춰보면서 그러면서 자신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교회를 두신 이유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제 이런 구원 사역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교회는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교회가 나타날 것이 펼쳐졌다면 이제 이 교회의 펼쳐짐을 통해서는 이 세상의 역사가 마지막에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펼쳐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가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을 때 결국 교회는 이 세상과의 구분이 없어지면서 그 자체가 하나의 가족처럼 연결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천상과 지상의 세계가 한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에게 접붙여 인간이 육체와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연결을 이루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도록 만드신 것과 같은 구도를 교회와 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쫙 펼쳐짐으로써 그 자체가 세상이 되어 버리는,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왜 창조하셨고, 그리고 인간은 왜 지음을 받았고, 인간은 누구로 말미암아 누구 안에서 누구를 향하여 살아야 할까를 보여주는 유일한 정보를 교회를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는 영적인 연결로서의 영적인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바깥에서는 구원을 찾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구원의 사역을 통해서 세 가지를 보여 주셔요. 그게 뭐냐 하면 영원한 지혜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 지혜가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구하는,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을 통해서 이 세상의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에게 진정한 지혜는 그리스도시다 라고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또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모든 지혜는 교회와 이 세상을 향한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와 미래의 비밀에 관한 모든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 예수, 그 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고 그 분 앞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말을 예수 믿는다고 그렇게 간단하게 이야기 하는 말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향한 모든 지혜의 보고이고, 교회에 필요한 모든 진리와 인간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모든 은혜와 모든 지식의 원천이고, 보고예요. 그래서 그분이 누구인가를 탐구하는 그 안에 창조 세계의 비밀과, 교회의 비밀과, 인간에 관한 비밀과 미래에 관한 비밀과 하늘나라에 관한 비밀들이 모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가치는, 한 사람의 아름다움은 육체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그거는 불과 몇 년 가지 않는 것입니다.
V. 결론 : 꺾이지 않는 창조목적
가끔 심방을 해보면 꽃같이 그렇게 고왔던 자매들이 좀 있으면 권사님 시키면 되겠더라고 그렇게 늙어가요. 말은 그렇게 안하지만 그러면서 보면 ‘아 그렇구나, 잠시 머무는 세상이구나’ 그렇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저도 가끔 사진 보면 서른 몇 살 때 서른 아흔 살 때 교회를 개척할 때 보면 청년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경로우대 해 주겠다고 그럽니다. 경로 우대도 되는데. 세상에 말이지 그렇게 모두 잠깐 지나가고 그래서 인간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그렇게 날로 쇠잔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흘러갈수록 우리의 영혼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시키고 그래서 이 세상에 창조의 지혜, 교회의 비밀,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삶의 모든 비밀이 그리스도 예수에게 있다는 것을 발견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그리스도의 영광과 아름다우심을 생각하면서, 또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배워가는 것, 그것이 인간의 본분이고 진정한 행복인 것입니다.
(찬양)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한 해 동안 나는 여러분이 부자됐으면 좋겠어요. 심방을 하거나 그럴 때 보면 이제는 좀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교회는 부자가 없습니다. 부자는 있어요. 아버지하고 아들이 나오는 사람은 많이 있는데 부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주셔도 그거는 안 주시더라구요. 부자가 없습니다. 근데 그게 참 마음이 편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자 의지하지 아니하고 주님 의지하면서 사니까 얼마나 좋아요.
여러분도 좀 잘 살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한 해 동안 재산이 얼마나 늘었는가, 헬스클럽에 다녀서 얼마나 뱃살을 뺐는가, 화장품을 발라서 얼마나 주름이 없어졌는가 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는가? 그래서 10년 5년 전에 내가 써 놓은 글, 그 다음에 내가 간증했던 거, 내가 기도했던 거 생각하면 얼굴이 뜨듯해져서 부끄러워지리만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때 그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는 너무너무 소중한 것입니다. 뭐가 남겠어요.
우리의 육체도 쇠잔하고, 기억도 희미해져 가고, 그렇게 될 때에 마지막에 우리 가슴에 품어 남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사랑, 그 분에 대한 은혜의 기억, 그거 아니겠어요.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주기 때문에 예수를 아는 것만큼만 신앙은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서 꽃꽂이 배우고, 골프 배우고, 종이학 접는 거 배우고, 무슨 별거 다하더라구요. 또 청국장 만드는 법도 배우고 수없이 배워도 영혼이 예뻐지지는 않아. 그래서 나는 그런 거 교회에 하는 거 별로 취미가 없습니다. 교회는 주님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누구신가 하는 것을 매일매일 배워가요.
배워갈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분을 사랑해야 되겠죠. 매일매일 그 분을 사랑하면서 그러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이 세계에 살면서 요동치고, 고난이 오고, 사랑하는 친구들이 나를 떠나고, 때로는 외롭고, 오해 받고, 고통 받고, 때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시련을 당해야 되는 때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접붙였고, 이 접붙여진 것은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것이며,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날까지 영광가운데 우리를 붙드시고 마지막에는 복종하지 아니하는 모든 이 세계의 만물들을 변화시키셔서 그리스도 예수께 다시 돌아와 만물 가운데 있는 이 탄식을 종료시킬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때 그러나게 될 찬란한 그 영광이 오늘의 이 고난과는 비교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그때 우리는 이상하게 바보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도 이기고, 시련도 견디고, 그리고 핍박 속에서도 원수를 축복하고 나에게 가장 고통을 주는 사람을 마음 깊이 불쌍히 여기며 그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자신의 영혼을 위해 비는 것처럼 그렇게 매달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 영광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모든 만물의 머리로 다시 이 창조세계의 영광을 회복하실 그때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될 그 영광의 깊이와 넓이가 지금 잠시 당하는 이 고난의 시련과는 비교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먼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시고 한 인간, 한 인간을 성령으로,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그에게 접붙이시는 이 모든 교회의 확장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끊임없이 뻗어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 뻗어나가는 확장이 무엇의 확장이냐면 사랑의 확장입니다. 사랑의 확장입니다.
금년에 제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제목이 있다면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 모든 사람들이 영혼에 대한 연민을 가슴에 품는 것입니다. 사실 솔직히 얘기해서 우리가 처음 열린 교회 세워질 때 참 전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모이는 회중들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은 전도하고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결국 뭘 보여 주냐 하면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이 현저히 식은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저히 식은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굳게 붙어있고 머리되신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분께 매달려 있게 되면 고난도, 아픔도, 슬픔도 모두 함께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들을 지도할 때 일인데 누가 감사헌금을 냈어요. 취직 감사헌금, 그래서 내가 ‘아 쟤가 백수로 저렇게 놀더니 결국은 취직을 했구나’ 그랬더니 그 밑에 보니까 ‘내 친구 취직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기는 백수인데 기도해 주던 친구가 취직된 게 너무 감사하니까 엄마가 준 용돈 일부를 낸 모양입니다. 그게 바로 은혜 안에 있는 성도의 표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있는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는 더 많이 아파요. 은혜에서 멀어지고, 이기심에 붙잡히게 되면 옆에서 누가 피를 흘려도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가난해서 추위에 떨어도 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곤고해서 신음해도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밀려들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은혜의 삶이 영적인 연합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실제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게 될 때, 그때 피도 살도 섞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들려오는 크고 작은 슬픔과 고난, 고통의 이야기가 공동체의 지평 속에서 내 마음에 스며들어서 내 기도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그 지체들에 대한 기도가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기뻐하는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마음에 희락과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찬송이 울려 퍼지고, 고난 받는 지체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은 눈물 흘리지를 못해도 나는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가슴이 에이는 것처럼 쓰라린 일을 당하는 지체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가 어둠 속에서 아파하고 있는 그것이 그대로 내 가슴속에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은 슬픈 사람입니다.
근데 신기한 게 뭐냐 하면 그런 쓰디쓴 슬픔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슬픔이 없었더라면 경험할 수 없는 신적인 위로를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확 물 붓듯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좁게는 내 영혼이 성령 안에 있기 때문이고, 넓게는 내가 사랑하는 지체들과 함께 실지적인 연합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성령의 교통이 있기 때문에 그 교통의 본질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막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요.
그런 마음으로 연약한 지체들을 섬기고, 용서하고, 공궤하고, 그의 약점을 자기의 약점인 것처럼 짊어지고, 그가 무엇인가 부족한 결점이 발견되었을 때 그 사람 곁에 나를 두신 이유가 바로 저런 것을 받아주라고, 저런 것을 감싸고, 그리고 저렇게 저런 것들을 결함을 채우게 하기 위해서 나를 그 사람 옆에 두셨구나 하고 생각하고 그를 섬기는 그것이 성례전적으로는 그리스도 예수를 섬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든 일을 행할 때 힘없이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어 주님을 의지하며 이렇게 용서하고,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구원사역의 통로로 살아갈 때 하나님은 놀랍게 정말 크고 위대한 능력을 약한 자를 통해서 베풀어 주시고 나타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위대한 능력이 폼 잡는 사람들을 따라 다니는 게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따라 다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찬양) 시시때때로 주 만 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타락하고 만물은 흩어지게 되었지만,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이 꺾이지 않는 창조의 목적은 오히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만물이 흩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상의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답고 탁월하신 분이신지를 인간의 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만물들 때문에 찬란하게 마치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고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는 불꽃처럼 그렇게 찬란하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어 주셔서 교회를 한줄기 빛처럼 주님 앞에 살게 하시는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을 향하여 살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고, 또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부디 주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의지하면서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지체로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여러분 속에 충만히 채워서 밤하늘의 별처럼 드러내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3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1 (2010/01/1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2 (2010/0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3 (2010/0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4 (2010/01/14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5 (2010/01/1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6 (2010/01/16 주일오전설교)
3.구속과 머리되심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 3:9-11).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에베소서 전체의 핵심구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구절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모든 온 우주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사상의 핵심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자 된 바울은 감옥 속에 갇힌 죄수의 몸으로써 이 편지를 에베소교회에 보냈던 것입니다. 왜, 그가 무엇 때문에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또 옥에 갇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신념을 포기할 수가 없었는가하는 가를 오늘 이 성경구절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 옥 속에서 고난을 받던 이 사도가 복음의 진리를 더 깊이 깨달으면서 그리스도 예수야 말로 하나님의 지혜이시며,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와 우주의 장대한 계획이 펼쳐진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분을 구주로 붙들고 믿고 의지하는 신앙을 더 공고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왜 우리는 기독교를 그리스도교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바로 한분 그리스도 예수께 우리의 모든 신앙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의존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져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지를 드러내시는 분이시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면서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던, 교회와 이 모든 세계에 하나님의 위대하고 원대한 계획이 펼쳐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구속의 궁극적인 목적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II. 구속의 궁극적 목적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창조하신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 속에 모든 만물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창조되게 하시므로, 그 분을 머리로 하여 모든 만물들이 그분의 통치에 복종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이암아 이 모든 만물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흩어진 만물들이 되었습니다.
A. 흩어진 만물을 모으심
구속은 바로 이렇게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천상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만물들을 모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늘에서는 천사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이 땅에서는 인간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두 세계의 반역이 서로 통하게 되었고, 이로써 이제 만물들은 그리스도의 와의 아름다운 연결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생명적인 교통을 누리던 관계에서 각각 이탈하게 되었습니다. 이 만물들을 모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대드라마를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구속의 중보자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B. 구속의 중보자,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이미 계셨던 분이었습니다. 다만 그때는 순수하게 하나님으로 계셨고, 사람의 몸은 입지 않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실 때,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어떤 신학생이 저에게 “목사님,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하늘에서 이 세상에 내려 오셨으니,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는 하늘의 보좌가 비워있었겠네요?” 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데, 두 번째 위이신 성자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니, 당연히 하늘에는 당연히 그 자리는 비워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역사상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이단이 이었습니다. 케노시스주의자라고 하는 이단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교리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을 해줄 터이니,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천국에 갈 때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다면, 경건에 도움이 될 것 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아버지와는 구별된 인격이긴 하지만,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신이십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물질과 달라서 어느 장소에 국한되어, 끝이 있거나 혹은 사물들이 그것을 벗어나거나 혹은 이 세상의 물질과 하나님의 본질이 섞이거나 하는 일없이 존재하는 매우 특별한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신성만을 가지셨던 그분이 인간의 구속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자신을 사람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창조세계에 전달해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찬란한 신성한 영광의 충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보여주시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으로서 인성의 본질을 함께 취하셔서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 되셨던 것입니다. 사람되신 인성은 단지 이 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성품, 성질입니다. 그 인간으로서의 성질은 보좌위에 계신 지금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인성은 장소에 메여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이 몸까지는 예수님의 몸이고 여기는 허공이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인성은 장소에 메여서 국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성은 이 우주 무엇보다 뛰어나게 충만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여전히 계시면서도,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갈릴리와 유다와 베들레헴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목적은 완전히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당신 자신의 신성한 영광의 충만한 것을 보이는 물질세계 속에 창조하셔서 당신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셨던 목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단지 인간이 타락하므로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방해하던 시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오히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시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오히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드러나실 수 없었던 하나님의 찬란한 광채가 드러나게 하심으로써 지금도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실현해 나가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도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였던 것처럼, 구속하실 때에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셨고, 이 구속도 창조처럼 그리스도 혼자 이루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사랑이신 성령과 함께 더불어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의 영광이 오히려 더욱 찬란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눈부시게 드러났고, 악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롭고 선하신 분이신가 하는 것이 눈부시게 드러났던 것입니다. 어두움을 가르는 한줄기 빛처럼 그렇게 찬란하게 타락한 인간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만약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깊은 감격, 죄를 용서해 주셔서 우리 같은 인간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그 가슴져미는 사랑, 그것을 깨닫고 우리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큰 감동 같은 것들은 우리가 맛볼 수 없었던 사랑이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도전하기 위하여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속하는 과정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의 본래의 목적인 당신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훌륭하게 이루셨던 것입니다.
다만 창조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중보되실 때에는, 하나님으로서 피조세계에 직접 관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이 모든 피조세계를 태어나게 하시는 초월적인 중보자이셨지만, 이제 인간을 구속하심에 있어서는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죄인의 형체로 이 세상에 오시고 그래서 인간들과 똑같이 관계를 맺으며 지극히 낮은 자리를 취하셔서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고 목자가 되신 것이 창조에 있어서 중보자 직과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구속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이 모든 지상만물의 머리를 삼으시고, 나아가서는 천상세계의 머리를 삼으셔서, 두 세계 모두가 그리스도께 메달린 한 몸을 이룬 세계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제일먼저 일차적으로 신자 개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 믿게 만드심으로써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 그들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에게 있어서 머리라는 사실은 내가 개인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이렇게 함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멀리 떠나서 여러날 볼 수 없을 때, 매우 보고 싶습니다. 특히 얼굴이 많이 보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목만 잘라서 소포로 보내기를 원하는 건 아닙니다.
나의 머리가 그리스도시라고 하는 것은 ‘이미 내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이 온 몸에 다른 지체들과 함께 예수께 매달려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신앙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올챙이 신앙이라고 합니다. 올챙이 어렸을 때 모습을 보면, 머리하나에 꼬리만 달랑 붙어있습니다. 지체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머리시고 나만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올챙이 신앙입니다. 낙지신앙도 있습니다. ‘너희는 이 신앙을 본받지 말라’고 했는데, 낙지는 컵에다 두면 컵모양, 접시에 두면 빈대떡모양이 되어, 그 어디에 있든 잘 적응하여 살아갑니다. 요즘 기독교를 교회론과 관련지어 신앙의 모습을 보면 지체가 없는 올챙이 신앙입니다. 요즘은 올챙이 신앙이 많습니다. 교회에 가면 올챙이 들이 난리들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주님이 이렇게 된 사람들을 하나씩 하나씩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에 접붙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하는 이유입니다. 여기서는 흑인이나 백인, 황인도 없고, 서울교회, 지방교회, 영국교회, 미국교회도 없고, 북한교회 남한 교회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모든 지체들이 하나씩 하나씩 붙여서 교회 전체를 이루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 이것들을 꽉 채우고 완성하신 후에,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영원히 형벌에 처해야 할 것들을 전부다 구별해내셔서 영원한 심판에 쳐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남아있는 모든 것들과 하늘에 있는 것들의 머리가 되시고 땅에 있는 것들의 머리가 되셔서, 하나는 보이는 세계로 하나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이 두 세계가 존재하기를 마치 영혼과 육체가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드러냅니다. 그러면서 이 우주 속에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의 머리로 홀로 영광을 받으시면서 그리스도께 연결되고, 성령 안에서 이 모든 것이 묶여진 가운데,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영원히 무한이 끝이 없는 그날까지 영원히 드러내는 그 행복 속에서 사는 것이 바로 마지막 만물의 머리되심입니다.
C. 구원지식에 있어서 천상의 의존성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지식에 있어서의 천사의 의존성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천사들은 상당히 많은 부분에 있어서, 인간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완전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너무 착하면, 천사와 같다고 합니다. 천사는 그렇게 완전성에 있어서 뛰어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천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지만, 어떤 부분은 우리보다도 모르는 지식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하면 천사들도 자기 세계의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될지 잘 모릅니다. 그러면 천상이 어떻게 될지는 어디에 달려있을까요? 바로 지상에 달려있습니다. 왜냐하면 천상과 지상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타락한 천사들이 일단은 구별되었지만, 여전히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종말이 언제일지 희미하게 밖에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교회가 역사 속에서 흘러가고 변해가고 있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펼쳐져서 전개가 됩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 지상세계의 운명이 바뀌는 것이 교회의 펼쳐짐 속에 있고 이 세상의 운명이 펼쳐짐과 천상의 운명이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조차도 구속의 역사를 통해서 천상의 세계를 포함한 우주전체의 계획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이 직분이 천사도 부러워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천사에게도 이 일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화목케 하고 그 화목 안에서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과 화목하라는 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사역의 직분이 오직 인간에 의해서만 수행되기 때문에, 천사들도 이 복음 사역의 일을 천사도 흠모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사명인 것입니다. 내가 열린교회 성도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이일에 있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심각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이 장엄한 우주적 계획에 내가 동참하는 일이 어마어마한 일인가를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인구가 줄고 있다”, “교회가 점점 쇠퇴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복음에 대한 반응이 싸늘하다”고 말만합니다. 실제로 ‘이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고 한 도시와 동리를 끌어안고 그 영혼들을 가슴에 품으며 이 복음을 전해야하겠다.’는 그러한 간절한 복음과 구령의 열정이 식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다가 물을 잔뜩 타서 “우리의 이 복음은 당신 보고 무엇을 고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새로운 것을 내놓고 요구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의 옛 삶을 포기하라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런 새로운 종류의 삶이 있다는 것도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라고 겸손하다 못해 비굴할 정도로 세상에 아첨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아첨에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 일들은 천사들이 보면 더더욱 통탄할 일입니다. 자신들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이 크고 위대한 그리스도의 몸을 채워 그리스도께서 만물이 되시는 그 시간을, 역사를 앞당기는 이일은 천사들 흠모하는 직분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에게 허락된 직분이 아닙니다. 오직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그리스도 몸에 일부가 된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아주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그래서 화요일마다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복음전하러 나오는데, 그 추운겨울에 이 골목 저 골목 누비며, 아파트마다 벨을 누르면, 경비원들이 괄시를 하고 심지어는 욕을 하며 위협을 하는 불량배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전도지를 들고 남의 집 아파트에 경비원들의 눈을 피해 벨을 누르며 “계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만물들을 회복할 우주적인 계획을 성취할 동역자로서 그 문 앞에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을 전도하러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사랑을 받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사람을 뽑아서,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특사로서 그리스도의 모든 권위를 대신해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도 마음에 안타까운 것을 전도사님들께 말합니다. “생업에 많이 바쁘시겠지만, 더 많이 바라지도 않고, 화요일 여리고전도에 400명은 나와야한다”고 말입니다. 직장인을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올 수 있는 사람의 수가 그 배는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를 이루어가는 역사에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 시간에 꼭 여기에 와서 이 동네의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이 일이 유일한 일은 아니지만, 그 일이 중심이 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고 저 사람들도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되신 몸에 접붙여져 그분의 생명을 누리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만물의 머리가 되실 때, 그 몸에 붙은 자들이 되어서 형벌받지 않도록 그 생명의 은혜 속에서 사는 참인류가 되게 하기위해 안타까워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안 성도들의 마음가짐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구원역사의 전개를 통해서 하늘나라의 운명도 거기에 메이게 하시고, 천사들도 이 교회가 어떻게 역사 속에 전개될 것인가를 지대한 관심을 갖고 바라보고, 또 천상의 성도들도 이 지상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이 세상에서 구속을 위한 모든 일을 이루셨지만, 아직까지도 미완성한 일이 있으신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교회는 만물을 모으는 역할을 수행해 냅니다.
III. 교회와 만물의 모으심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인간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전달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제2위이신 성자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왜 성부가 오시거나 성령이 오시지 아니하시고, 하필이면 아들 성자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A. 그리스도를 보내심
성부는 그 자신이 하나님이시고, 누구에 의해서도 명령을 받고 보내어 지거나 보냄을 받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다면 성부를 제외하면 성령이 남는데, 성령은 아버지가 아닌 성자에 의해서 보냄을 받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성령도 당신 자신이 성육신하여 이 세상에 오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저는 어제 여러분에게 창조를 설명하면서, 성부하나님이 두 손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한, 위대한 교부 이레네우스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성부하나님이 두 손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한분은 성자이고 곧 말씀이며 또 한분은 성령이니 곧 사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한 지혜와 사랑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똑같이 하나님은 두 손으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여, 만물을 하나로 만드사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으셨어야 했습니다. 그분이 바로 육신을 입고오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셨고, 그렇게 구원받은 자들을 구원할 때도 성령으로 구원하시고, 구원받은 후에도 성령 안에 있게 함으로써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하셨으니,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제2위 이신 성자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성육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는 성육신이 성자에게만 합당했던 이유는 성자가 성부와 성령 사이의 중보자로서 이미 삼위일치 위격 안에서도 성자가 성부와 성령 사이의 중보자 이셨기 때문입니다. 또 성자는 하나님의 아들로써 우리를 양자삼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가장 적합한 분이셨습니다. 아들을 통해서 우리 모두를 그의 형제로 만들어, 함께 후사되어 아들이 아버지의 후사가 되어 누린 것을 우리도 또한 누리게 하셨기 때문에, 성자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기에 가장 적합하셨습니다. 또 이 모든 세상이 성자가 하나님이 모든 계획의 씨앗으로서 이세상의 창조에 관여하셨던 것처럼 또한 그 성자가 모든 구속의 씨앗으로서 그 계획을 픔은 채, 인간을 구원하고 세계를 재창조해야지만, 창조에서의 영원한 지혜와 구속에서의 영원한 지혜가 일치를 이룰 수 있었기에, 성부 성자 성령 중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기에 적합하신 분은 오직 그리스도셨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람의 몸을 입지 않고 계셨을 때 성자는 본질상 하나님 아버지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에게 사람의 성품을 주셔서, 인간의 몸을 입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무한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볼 수 있도록 한 뼘의 크기로 축소되어 우리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성육신을 통해 이중적인 보이심을 우리에게 허락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시기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인간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자 하셨고, 또 사람이셨기에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어 참 창조에 부합한 인간이 어떠해야하는 지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태양과 같습니다. 우리들이 눈부셔서 태양을 맨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 태양이 어떠한 존재라고 하는 것은 얼음이 녹아내리는 봄철의 따뜻한 기운을 볼 때 태양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됩니다. 죽은 것 같은 나무에서 새싹이 돋고 움틀 때 우리는 태양의 위력을 보게 됩니다. 이글거리는 태양아래 가뭄이 계속될 때, 우리는 그 태양이 어떤 성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은 보이시지 않지만, 피조물들과 끊임없이 관계를 가짐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십니다. 신앙이 있다고 하는 것은 내 인생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것 같은 수많은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와 맺으시는 관계들을 통해서, 그 관계를 더듬어 추적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이 땅에 있는 다른 인간들이 맺어본 적이 없는 매우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며 하나님 자신으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계셨기 때문에, 이것을 통해서 우리 인간에게 참된 인간이 어떤 존재이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경에 기록으로 남기시고, 우리가 그 성경을 대할 때마다 성령께서 이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상 세계에서 사셨을 때, 당시의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하셨던 그 은혜의 감동을 우리에게 전해주셨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오셨던 그 사실 자체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흩어진 모든 인간들을 바라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마치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하신,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요.“라는 고백을 남자와 여자사이 뿐 아니라, 모든 인류들 사이에서 종류는 다르지만 같은 고백을 남기며 한 몸처럼 그렇게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인류의 연합을 이루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산산이 끊어지고 성령 안에서 그들을 연결하고 있던 사랑의 아름다운 교통들은 철저히 단절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있어야할 곳에 미움이, 감사가 있어야 할 곳에 불평과 원망이, 화합과 연합이 있어야할 곳에 단절과 고립이, 풍부함이 넘쳐야할 곳에 결핍과 모자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산산이 흩어져있는 인간들의 모습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도 불쌍한 모습이었습니다.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왔고, 그리고 무엇을 향하여 가고 있고 위로는 어떤 분과 아래로는 어떤 사물들과 옆으로는 어떤 인간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 아무 의식이 없는 존재들이가 되었을 때, 그들은 허무한 것에 굴복하고, 육신의 잠시 즐거움을 위해 자기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하루하루 순간순간 만족을 위해서 사는 것이 마치 이성 없이 살아가는 존재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런 속에서 인간은 말로다 할 없는 영혼의 고통과 깊은 괴로움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한 30년이나 50년 전에 비하면, 비교도할 없을 정도로 물질적으로 풍요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러이러한 물건, 이런 편리한 기계들이 없었던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없었던 때들이 더욱 평화로웠습니다. 차가 없고 핸드폰이 없었을 때는 연락이 안되면 포기하고, 갈 수 없으면 가려는 시도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50년 60년 전에 과로사라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지금은 이런 모든 기구들을 가지고 미친 듯이 일합니다. 그 결과 돌아오는 것은 좀더 풍요로운 물질생활인데, 여러분!! 그 물질적인 생활과 함께 우리의 영혼도 함께 부요하게 되었습니까? 그렇치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허무한데 굴복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참인간이 어떠해야 되는지를 찬란한 빛으로 인간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그러한 인간, 그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아도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갈 능력이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을 내버려둔다면, 두발이 다 장애가 있어서 스스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사람 들앞에서 우시아인 볼트처럼 100m를 9초대에 주파하는 운동선수를 보여주는 것과 똑같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친히 하나님으로써 참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며, 인간이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할 것을 가르쳐 주었을 뿐 아니라, 그렇게 본대로 흉내내며 살아갈 수 있게 하시기위해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별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인간이 지은 죄는 그 크기가 무한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지은 대상이 무한하신 하나님이었기 때문이었고,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이 세상을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온 우주의 아름다운 연결들을 모두 끊어놓고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드러나는 이 세상에서 거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거두어 지도록 만든 장본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형벌을 당할 수는 있어도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댓가를 치르고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킬 수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없으신 순결한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 중 아무것도 범하지 아니하심으로써, 인간으로서의 당신의 깨끗한 인성을 추오도 더럽히지 않으시면서 순결하고 완전한 제물로 구원받을 인류의 모든 죄를 한 몸에 짊어지셨고,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의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십자가를 지고 멸시와 욕을 당하고, 저주를 받으심으로써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셨으니,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가 ‘속죄’라고 부릅니다. 영적으로 머리이신 당신께 붙어 완전한 교회의 몸을 이룰 구원받기로 되었는 모든 인간들을 당신자신이 끌어 앉으시고, 그들의 죄를 자기 죄되게 하셔서, 당신 자신이 형벌을 받고 죽으심으로써 그렇게 죄의 댓가를 치른 속죄의 공로가 믿는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도록 만들어주셔서 당신의 육체는 죽으시고 형벌을 감당함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로써 우리의 죄로 인하여 진노하시던 하나님의 마음을 풀어드렸고, 그리하여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가 없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 흘리신 거룩한 공로를 보면서 완악하고 가장 강팍했던 죄인의 마음을 성령으로 녹이셔서 그 인간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보면서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와 죽음을 도말하셔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시 그리스도 예수 머리이신 그분께 접붙여져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버지의 생명을 함께 누리면서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B. 교회를 이루게 하심
이것이 바로 ‘교회를 이루게 하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를 이루게 하신 비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개인구원은 교회론적인 지평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어떤 의미에서 이 교리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참된 기독교신앙이라고 할 수 없는, 이런 영광스럽고 중요한 교리적 사실들을 성경을 통해 숙고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있고 거기에 매달린 자는 나밖에 없는 그리고 나머지는 나와는 상관이 없는 그런 올챙이 신앙을 가지고 우리들이 믿음 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올챙들이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며, 이교회에서 상처를 주고, 저 교회에 가서 저렇게 상처를 주며 다닙니다. 그리고 마치 그리스도는 자기 혼자만의 머리인 것처럼 교만해지고, 그리스도 예수 머리에 붙어있는 그것이 무슨 세상적인 벼슬이나 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자기홀로 그리스도 예수의 대리자요 그와 독점적인 교통을 누리는 인간인 것처럼 교만을 떨며 살아갑니다. 이런 신자의 모습을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이 아픈데, 교회의 머리인 그분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진짜 이 조국 교외에 넘쳐나는 이 하나님에 대한 진리에 대한 무지는 가슴을 찢고 통탄할 지경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20년이 지난 후에, 열렬한 믿음으로 종교개혁의 신앙을 받아드린 시골에 있는 많은 교회들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20년 전에 그렇게 뜨거운 기쁨으로 개신교 신앙을 받아드렸던 교회들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라고 탄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교인들은 모두 사랑스러운 돼지새끼였습니다. 우리 안에 주둥이를 박고 죽만 먹는, 사랑스러운 돼지 새끼들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그런 돼지새끼들이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고민하면서 만든 것들이 ‘교리문답’입니다. 탤런트 이름과 드라마 이름은 줄줄 외우면서도 이 교리들은 하나도 아는 게 없이 살면서, 올챙이 신앙을 가지고 이 교회 저 교회 떠돌며 살다보면 검은 머리가 인생의 황혼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뭘 한일이 있어요?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라.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개인의 구원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으나, 이것은 처음부터 교회론적인 지평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만물의 머리가 되실 전망을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그 구속의 무리를 채우기 위해서 오늘도 하나씩 하나씩 당신의 몸에 접붙이십니다. 결국은 복음이 전해진 것도 교회를 통해 전해졌고, 그 복음을 듣고 회심하고 중생했을 때도 몸에 접붙이신 것도 마치 창조시처럼 그렇게 하셨고, 접붙여진 즉시 성령 안에 있게 하셔서 그래서 성령 안에서 연결을 이루어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날 올챙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창세기 2장의 문맥으로 들어가 그림을 그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서 하와를 창조하셨는데, 하와가 걸어오니깐, 아담이 “넌 어디서 굴러온 인간이냐?”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성령을 주셔서, 성령이 올바르게 그 사람을 세우는데 사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심지어는 그 성령으로 기도를 했더니, 금니가 낫다는 등의 이야기를 합니다. 더 한심한건 그것의 진위를 묻는 신자들입니다. 얼마나 허무한데 이르는지 모르겠습니다.
IV. 교회의 확장과 머리되심
그래서 결국은 교회가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한 영혼 한 영혼이 붙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도되어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생되어 회심하여 접붙여지면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미친 듯이 전도만하면 세상의 종말이 오겠죠. 그러나 그렇게 되는게 아닙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것처럼, 애 낳아놓으면 다 되는 게 아니죠? 한 아이를 낳아 장가까지 보내는데, 2억 이상이 든다고 합니다. 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아이들 낫는 것은 너무도 쉽습니다. 하룻밤 만에 임신이 될 수 도 있고, 아홉 달만 지나면 태어납니다. 애낳는 것이 힘들다고 하지만, 가소롭습니다. 그건 예고편입니다. 이제 본편이 됩니다. 그래도 셋은 낳아야합니다. 예수 믿고 그리스도에 접붙여졌는데, 식물이 자라듯이 가만히 붙여놓으면 그냥 쭉쭉쭉 자랍니까? 그 올챙이 같은 신앙을 갖고 까불기도 하고 온갖 시험에 들어 미끄러지기도 하고 방황하기도 하고 까불며 대들기도 하며 어린아이처럼 온갖 사건을 다 만듭니다. 온갖 난리를 칩니다. 그것을 똥치우고 씻기고 퍼먹이면서, 때로는 말 안 들으며 볼기를 때리기도 하면서 사람이 되도록 길러 놓으려고 하니, 얼마나 힘듭니까? 참 많이 고생시켰습니다.
A. 교회의 머리되심을 통해 만물의 머리되심을 보이심
그렇게 교회의 모습이 성숙되어 가는데, 이것이 세계와 유비를 이룹니다. 이 지상의 세계와 천상의 세계처럼 짝을 이루고 교회와 우주처럼 영혼과 육체처럼 짝을 이룹니다. 그래서 마치 이 세계가 짝을 이루는데, 천상의 세계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지상에도 계속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이루시는데, 천상 세계의 반역이 사용됩니다. 지상세계에서는 성육신, 구원과 교회가 형성되고, 이런 것들을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이 끊임없이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이루는데 그러한 사단의 기교들이 이용이 됩니다. 교회는 결국 점점 더 확장되어 가면서 우주의 완성을 바라보며, 그리고 영혼은 내적생명을 하나님과 함께 누리게 되고 육체는 외적 생활을 나타내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내부적으로 확장되어 가면서, 우주가 완성되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이 주님을 만나고 육체에 영향을 미쳐 온전한 사람을 만들어가는 이러한 방식으로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의 확장과 교회의 머리되심’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교회의 머리되심을 통해 만물의 머리되심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교회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전도하여 예수 믿게 만들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서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게 될 때에 결국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세계를 완전히 예정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이 교회의 완전한 시련을 통해서 결국은 마지막 때에 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천상세계와 지상세계의 머리가 되실 위대한 계획을 교회의 머리되심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크기가 아니라 본질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즉,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였다고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영혼이 중생하고 회심하여 머리이신 그 영적 생명에 참예하게 된 것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모여도, 실제로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인간이 별로 없다면, 그 교회는 아주 작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아주 작아도 모인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들이라면 작아도 큰 교회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 교회를 이루어갈 때,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접붙여서 예수 몸에 영적인 연결을 이룬다면, 그런 의미에서의 교회의 성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세상과 천상의 세계에서 이루시려고 하는 원대한 우주창조의 계획을 이루어드리는 충성스러운 삶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위해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바울과 같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고백을 가지고 기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의 복음을 전해야하고 누구도 우리가슴에 구원받아야할 영원들을 품지 않고 있는 사람이 없어야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바로 그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고,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잃어버린 영혼이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질 때에,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진정한 확장은 모이는 사람들의 수의 형식적이 확장이 아니라, 실제로 모인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상태의 확장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상적인 것은 열심히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리가 없겠죠. 열심히 사람들을 교회에 데리고 오지 않는다면, 이러한 우주의 영광스러운 계획과 인간의 참된 본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해야하는 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복음을 전하고 가족들로부터 시작해서 이 인간들이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진정한 우리의 지체인가 하는 것을 보면서, 바로 그 일을 위해 내가 이 불신 집안에 태어났고, 안 믿는 가정에 시집을 왔고, 불신자들이 가득한 이 직장에 파송되었다는 생각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없다면, 그는 진정으로 예수의 구속하신 사랑을 안 사람이 아닙니다. 가슴이 그 영혼들을 품고 기도할 때, 어리석어 보여도, 하나님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씀을 통하여 감동시키고 변화시켜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회심을 누가 예상이나 했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그렇게 놀랍게도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돌아가신 저희 아버님은 철저하게 조상을 섬기는 분이셨습니다. 조상 섬기는 일에 얼마나 대단한 열심히셨냐 하면, 일 년에 6번인가 8번 되는 제사를 꼭 드립니다. 사업이 망해서 집이 가난할 때는 온 집안이 졸도할 일을 하셨습니다. 일수통장을 찍으면서, 8대조 할아버지 묘를 고치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합니까? 제가 신학교 갈 때, 호적을 파가라고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부부가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마음으로 빌고 기도할 때, 주위 사람들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어도, 너희 아버지만은 절대 안 믿을 거야 ” 그런데 어느 날 명절 때 오셔서, “얘들아! 내가 너희들에게 뭐하나 보여주마.”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싸게 사온 과일 같은 실망스러운 것만 보여주셨습니다. 아버님께서 품에서 종이 쪽지를 꺼내서 보여주시는데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발행한 7주간 새가족 공부 수료증명서였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도저히 믿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 인간이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마음을 바꿔서 예수님을 알리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전했는데 끝까지 안 믿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강퍅해서 예수를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위해 마음이 녹도록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구령의 역사가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는 역사를 봤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질 때,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데리고 와져야 합니다. 그리고 참된 복음을 전하고, 뜨거운 사랑으로 그를 섬기고 충만한 성령으로 그가 신앙을 갖도록 우리가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을 경주할 때, 그 사람이 한 사람 한 사람 예수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집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붙여진 것이 끊어졌던 세상의 측면에서 보면 거기가 완성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구원받을 인간들을 다 접붙여서 완전하고 아름다운 인간을 만드셔서 이 세상에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아름답고 흠 없는 그 영광의 교회를 만드시려는 계획에서 보면 이것은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이 사람들을 데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삶을 보여주고 기도해주고 사랑해주고 함께 있는 것을 나누고, 용서해주고, 개념 없는 행동을 해도 오래 참고 인내하기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용납하신 것처럼 그렇게 사랑으로 끌어안고 아파하는 가운데, 긍률히 여기는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를 낮추시고 변화시키고 또 새롭게 하셔서 예수 믿는 사람처럼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수를 믿다 보면, 인격이나 이런 것들이 신앙은 있는 거 같은데 그렇게 험했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변해갑니다. 올챙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왔다고 왼발로 차고 오른발로 차고 축구하듯이 박대하면 안 됩니다. 왕년에 올챙이 아니었던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저도 교회론에 있어서는 예전엔 올챙이 신자였습니다. 그렇던 사람들이 이렇듯 깨트려지고 변화되어서 주님의 교회의 영광스러운 한 지체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들도 그렇게 되어갑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양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진실한 중생과 회심으로 예수께 접붙여질 뿐만 아니라, 접붙여진 그들이 신앙 안에서 잘 자라도록 사랑으로 양육하고 돌봐야합니다. 한때 한국교회에서 이단시비가 나서, 시끄럽게 하던 한 집단이 이었습니다. 그 집단은 지옥, 십자가, 예수믿는 전도설교만 설교고, 전도하지 않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대해서 매우 무지함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한사람이 전도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도된 사람이 목양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품안에서 젖을 먹으면서 자라다가 기어 다니면 이유식을 먹고, 걸어 다니면 밥을 먹고, 좀더 성장하면 갈비도 먹이고, 삼계탕도 끓여 먹이고, 생선도 먹이면서 정상적인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들을 하기위해 교회는 전도하러 세상에 나갈 뿐만 아니라, 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일체의 오래 참음과 인내로 주님이 제자의 발을 씻기시던 그 사랑의 마음으로 모나고 상처받고 깨트려지고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한 지체들을 그 지체가 나를 인정해 주기 때문에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 받은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쏟아서 주신 그 사랑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자기의 수고를 몰라주는 지체도, 자기가 사랑해주는 것을 원수로 갚아도, 그 사람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기에 변함없는 주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기에 참고 또 참고 원수를 사랑으로 갚고, 그는 나를 저주해도 나는 축복하고 싸매고 인정해주고 돌보며 그렇게 인생을 살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받은바 십자가의 사랑이 만물 가운데 쪼개지고 흩어져 지푸라기처럼 주님을 안믿고 악을 행하며 심판 불에 던져질 그런 지지꺼기 같은 인생을 이렇게 고귀한 그리스도 몸의 한지체로 삼아서 주님을 찬송하며 인생을 살아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섬기며 살아가야하는지를, 예수님께서 이 지상생활을 통하여 선명하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하셨네. 주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는 눈물 흘리네.”
감사합니다. 나같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주님을 위해 참고 고난을 당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워주시고, 지체들을 위해 썩는 한 알의 밀알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그래서 낮아지고 또 낮아지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B. 만물의 머리됨을 보여주는 교회의 머리되심
그래서 교회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 예수와 접붙여진 생명을 통치와 섬김으로 자기 안에서 나타내 보여주고, 세상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섬김과 그리스도의 통치를 지체들의 섬김을 통해 그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가 만물의 머리되심을 보여주는 것은 교회의 머리되심입니다. 만물의 머리되심을 교회의 머리되심으로서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것이 세 개의 지평으로 설명됩니다.
그 첫 번째가 예수님은 구원받은 교회, 구원받은 신자들의 유기체적인 생명의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이신 예수께 쭉 연결되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 생명적인 연결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을 살게 하는 영적인 힘이, 은혜가 생명이 우리의 영혼 속에 부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에게 부여해주는 주된 통로가 교회입니다. 이렇게 함께 예배하며 살 때, 위로와 소망, 고난을 이길 용기와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는 결단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만약, 죽음이 여러분을 기다린다면 마지막 1시간 동안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 무엇입니까? 저는 예배를 택하겠습니다. 지상에 있는 이 마지막 1시간 동안에 주님을 예배하겠습니다. 이런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성도들이 함께하는 찬양의 시간은 우리에게 고난과 슬픔을 이기게 만들어 줍니다. 은혜 안에 있는 지체들과의 교제는 어그러지고 비뚤어진 우리의 마음을 바로 잡아줍니다. 퍽퍽하고 메마른 광야를 지나는 것 같은 우리의 마음에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는 통로가 됩니다. 곤고하고 궁핍할 때 지체들이 건네주는 물질을 통해서 우리는 그 물질 너머에 있는 우리 각자의 영혼 속에 함께 흐르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의 교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면서 내안에 있는 기쁨이 슬픔에 처한 지체에게 흘러 들어가고, 궁핍한 지체의 삶속에 여유 있는 나의 물질이 흘러 들어가 서로를 영적으로 육적으로 북돋아 주며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게 합니다. 오늘은 내가 저 지체에게 기대지만, 내일은 저 지체가 나에게 기대도록 든든한 지체가 되어, 물질은 저지체가 나의 신세를 지지만, 영적으로는 내가 저 지체의 신세를 지게 됩니다. 이러면서 남은 것이나 모자라는 것이 없도록 모두 흘러 들어가서 모든 지체들이 하나님 앞에 꽃처럼 피어나는 향기로운 아름다운 꽃밭처럼 되어서 주님을 머리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정한 행복과 영광이 무엇인지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게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이렇게 복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런 유기체적인 생명의 놀라운 머리가 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은 곤고할 때, 어디에 갑니까? 근심에 휩싸일 때 어디에 갑니까?, 시련과 고난에 잠시 후 인생의 앞길을 알 수 없을 때, 누구를 찾습니까? 그리스도 그분께 나아가십시오. 그 분은 당신의 생명을 여러분의 심령 속에 부어주십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유기체적인 통치의 머리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서 이런 유기체적인 통치를 드러내어, 사랑하면서 사람들이 각자 다양하게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의 질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워주신 각 자리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면서 주님 앞에서 살아갑니다. 즉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면서 통치의 질서를 이루어갑니다. 목회자, 장로, 집사, 권사, 구역장, 교사,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각자 주님의 은혜의 통치를 받으며 교회의 아름다운 질서를 이루는 한 사람 한 사람 아름다운 가락이 되어서 심포니처럼, 교향곡처럼 모든 것들이 어우러지면서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찬양의 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유기체적인 봉사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섬김을 필요로하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분신으로 열심히 일하며 봉사해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종 교회가 일만 많이 하고 주님을 잘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걱정되도록 일을 많이 하는 교회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개인으로 말해도, 일을 열심히 하는 교인들이 온전한 신앙을 못가는 것은 일을 해서 신앙을 못갖는 것이 아니라, 신앙없이 일하기 때문에 그 모양이 되는 것입니다. 중심이 그리스도가 되어보십시오. 게으를 수가 있겠습니까? 애들이 연애만 해도 얼굴빛이 변하는데, 예수와 사랑에 빠졌을 때, 어떻게 게으를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지 하지, 무위도식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면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생명적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C. 그리스도와 교회의 생명적인 관계
그리스도와 교회의 생명적인 관계 속에서 이 하나님의 생명이 이 세상으로 끊임없이 전해집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고 진리가 살아 있을 때는 사람들이 딱와서 접붙여지면, 아름답게 쭉~ 자랍니다. 접붙여지면 아름답게 자라고, 아름답게 자라고, 계속 접붙여지고, 접붙여지고 하면서 교회가 매우 아름다운 모습으로 되어 갑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V. 교회와 세계 그리고 성육신(시간부족 안 하신 듯 함.)
VI. 결론 : 교회는 우주적 재창조를 위한 경륜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결론적으로 교회는 우주의 재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접붙여진 그 영혼이 진실한 신자가 되도록 희생하고 눈물을 흘리고 여러분이 접붙여진 신자로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을 살고 아름다운 신앙을 가지며 이웃들에게 빛된 삶을 살아가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이 모든 것이 교회속의 경륜이 펼쳐져 우주의 위대한 완성을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계획에 동참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깊이 사랑하며 그리스도 몸에 붙여진 것을 한없는 영광으로 알고 남을 생애를 우리 같이 예수를 위해 삽시다.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3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1 (2010/01/1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2 (2010/0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3 (2010/0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4 (2010/01/14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5 (2010/01/1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6 (2010/01/16 주일오전설교)
4.완성과 만물의 머리되심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8∼10).
Ⅰ.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중에 맨 마지막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 속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아나까펠레오오’ 라는 단어가 쓰인 희랍어본문에 나온 것입니다. 이 단어는 ‘아나’ 즉 ‘다시’라는 뜻과 ‘까페르’ 즉 ‘머리’라는 뜻이 합쳐져서 ‘오오’라는 동사의 접미사가 붙어서 ‘다시 머리가 되시다’라는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머리와는 상관없고 무엇인가를 요약하고 모아서 이렇게 재 진술 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하지만 그러나 크리소스톰 같은 저명한 교부는 오늘 저의 해석을 지지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분명하게 이것은 머리와 관계가 있는 것이고 에베소서 전체의 사상을 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되심과 다시 머리되심의 교리를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에 에베소서 전체에 대한 선언적 성경구절인 이 에베소서 1장 10절의 이 동사를 우리와 같이 해석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세우신 창세전의 뜻이 있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뜻은 크게 네 가지였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사랑 안에서 우리를 함께 교통하며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는데 네 번째로 그것은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과는 상관없이 타락하지 아니하였다고 할지라도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기대하신 바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창조되었고 창조된 그 인간이 타락하지 아니하였어도 서로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교통하며 하나님을 보여주는 거룩한 인간들로 흠이 없이 이 땅에 살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다스리도록 위임받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도록 그렇게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고자하는 계획을 통해서 원래 인간을 창조하셨던 이 계획을 구속이라는 하나님의 구원방편을 통해 그대로 그 목적을 계승해나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처지는 무엇인가? 바로 교회와 구원받은 우리의 처지는 창세전에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 뜻의 펼침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택하여 다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아래로 모으시고자 하셨고 이 구속은 결국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그들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사랑의 교통을 이루며 거룩하고 흠이 없는 인간들로 하나님을 이 세계에 보여주기 위한 그 뜻의 비밀을 이루어드리기 위한 계획의 전개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은 타락한 이후로는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누구도 그러한 하나님의 위대한 비밀들을 사람의 생각으로는 추적해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것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라운 지혜와 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간도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오늘 이 교회당에서 울려 퍼지는 이 하나님의 세계와 우주, 인간에 대한 이 장엄한 계획의 진실보다는 신문에서 오르내리는 경제의 현상과 그리고 정치의 상황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두며 그것에 자기의 인생의 행복이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 이렇게 소수의 사람들이 이 설교를 듣고 있지만 여기에서 울려 퍼지는 이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의 이 진실은 이 세상에 있는 인류의 모든 행복과 그리고 교회의 미래와 세계와 우주의 장래가 달려있는 어김없는 진실인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신이 그 총명과 그 지혜를 가리므로 그들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우리도 한때는 그렇게 무지한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의 은혜로 알게 되었으니 이 계획을 이해하고 이 계획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이루시기 위한 것인데 그 경륜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하늘과 땅 이 모든 두 세계를 통합하는 가운데 만물의 머리가 되실 그 경륜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잠시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관입되었던 이 타락한 시대는 끝나고 다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지셨던 그 원대한 계획은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하늘나라를 지으신 목적이든지, 이 보이는 온 세계 우주를 지으신 목적이든지, 그 안에 있는 교회를 지으신 경륜이든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태어나게 하신 경륜, 이 세 가지가 모든 한 방향으로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한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하나님이 교회를 이 땅에 주신 목적과 같고, 교회를 주신 목적은 궁극적으로 이 온 우주와 세계를 주신 목적과 같고, 그것은 하나님이 하늘나라를 주신 목적과 동일할 것이란 말이죠.
Ⅱ. 세계의 완성과 교회
이렇게 해서 세계의 완성과 교회의 완성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져요. 이렇게 긴 내용인데 정한 시간에 끝나야지 내일 마지막으로 듣잖아요. 더 자세한 것은 나중에 하고요. 그래서 이제 세계의 완성과 교회의 완성이 그러니까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완성은 교회의 완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교회의 완성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의 완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완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수의 완성, 이것을 계량적 완성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택하신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전까지는 끝은 오지 않을 것이 아니에요? 그런 계량적 완성과 그렇게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온전히 본받게 되는 그런 성질적 완성, 이 두 가지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과 우주를 창조하신 목적이 이루어지는 이것이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A. 교회의 완성과 영원
그래서 교회의 완성과 영원의 문제를 우리들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때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는 말씀을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외치시기 시작한 그때부터 지금까지가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마지막 때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생각에는 그 마지막 때가 왜 그렇게 길까?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그래서 신약을 연구하는 어떤 자유스런 사람들은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예수가 다시 곧 오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대가 매우 지연되었기 때문에 이제 종말을 뒤로 멀리 내보내는 신학적인 작업을 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영원이 도입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제 미래의 이 모든 세계가 끝나고 완성된 후에야 누리게 될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그리스도 예수의 다시 머리되심의 상태의 큰 복들을 미리 앞당겨서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충만한 복음의 역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령의 강림을 통한 놀라운 구원의 역사인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던 우리의 경험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이천년 전이었는데 오늘 주님을 사랑하고 그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경험하는 십자가는 이천년 전의 십자가가 아니라 지금 나를 위해서 지금 바로 내 눈앞에서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고난의 현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이 오늘 이 시간 속에 도입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종말이 너무나 먼 분이시지만 믿고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는 너무나 가까이 계시고 종말은 매우 가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이미 이루어진 도입된 영원과 그리고 아직은 실현되지 않은 영원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입된 영원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됨으로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미리 앞당겨졌고 이 모든 것들이 완전히 완성되어서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되실 그때에요.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신 때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되실 이 중간의 시기를 우리들이 살고 있고 바로 이 중간의 때에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B. 교회의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 계획의 절정
여기에서 교회는 바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있어서 가장 이 세계와 관련하여 위대한 순간은 하나님이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만물을 창조하신 시간도 아니고 또 이 세계에 종말이 오게 하는 그 시간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에게 있어서 이 피조세계 속에 나타난 가장 크고 영광스러운 사건은 자기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신부를 주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신부는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이 사건은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가슴 아픈 사건이지만 이러한 인류의 구속의 대업을 이루심으로써 하나님은 이 아들에게 신부를 주시는 기쁨을 누리고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천상에서도 늘 우리의 주님이셨고 또 말구유간에 오셨던 어린아기시절에도 우리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은 그가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그리고 부활하신 후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심으로 영적으로 이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모든 것들로 무릎을 꿇어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만드셨고 그리고 거기에 모두 영적인 연결을 이루며 하늘의 생명을 죄로 말미암아 전달될 수 없었던 끊어졌던 하나님의 생명을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교회를 그리스도께 하나님은 신부로 주셨습니다. 그러한 결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셨고 인간과 세계를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그 뜨거운 사랑이 이 모든 대지위에 동일하게 부어지고 우주위에 동일하게 쏟아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위에 물 붓듯 쏟아 부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 모든 사랑을 아들에게 부을 그 사랑을 당신의 아들의 신부인 이 교회에 물 붓듯 부어주신 것인데 이 첫 번째 것이 바로 성령의 강림사건입니다.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흩어졌던 모든 인간들을 다시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이시고 또 성령을 물 붓듯 부어주심으로 그들이 사랑의 교통을 이루며 하나님께서 기대하셨던 인간의 사랑스러운 연합을 형성하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저는 아직 경험을 못했습니다만 저의 친구들은 저보다 훨씬 늦게 결혼을 했는데도 다 며느리들을 보았어요. 왜 웃어요? 그렇지요. 저는 결혼하고 7년 만에 아이를 낳았으니까 벌써 손자들을 보고 그랬지요. 그런데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사람이 잘못 들어와서 개념이 없어서 속상해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겠지만 아들이 장가를 가서 예쁜 며느리가 들어와서 착하게 살아주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아마 그럴 것 같아요. 어쩌면 자기가 직접 낳은 딸같이 그렇게 예쁘지 않겠어요? 하나님의 마음에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고난을 당하셨는데 그 아들에게 짝을 지어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신부인 교회에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니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가 되는 것은 올챙이 신앙의 입장에서 보면 나와 주님과의 개인적인 결혼이지만 진정한 교회론적인 신앙에서 보면 우리 모두 함께 접붙여져 교회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전체를 향한 사랑, 더 나아가서 말한다면 지상의 세계뿐만이 아니라 천상세계를 향한 사랑까지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물 붓듯 쏟아 부으심으로써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올챙이 신앙의 입장에서는 자기만 자기가 제일 그렇게 하나님께 편애를 받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여러분이 받는 개인적인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게 부어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일체를 이루는 가운데서 받는 그런 종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심하게 얘기하면 교회가 없으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데 여기에 놀라운 신비가 있어요. 정신 차리고 들어보세요. 그러면 자,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이 놀라운 영적인 사랑이 교회가 신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가 그 사랑받는 것과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해 가지는 태도가 밀접한 관계가 있겠지요? 그러면 생각해보세요. 자, 며느리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아주 탁월합니다. 신앙이 좋으면 대개 가난하잖아요. 그런데 돈도 많은 집안의 자녀에요. 대개 돈이 많은 집 애들이 머리가 나쁘잖아요? 아주 똑똑해서 공부도 잘했어요. 그렇게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고 그러면 대개 인간성이 잘못됐잖아요? 그런데 인간성도 아주 탁월하고 사근사근하고 너무너무 예뻐요. 그렇게 모든 것이 나무랄 데 없으면 얼굴이 좀 못생겼잖아요. 그런데 얼굴도 달력에 나오는 사람처럼 그렇게 예뻐요. 그래서 시아버지가 그 아이가 들어오는 날부터 정말 사랑에 빠졌어요. 그래서 모든 것을 주고 그렇게 아들을 사랑한 것 못지않게 며느리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교양도 똑똑함도 외모도 집안도 불변한데 그런데 아들을 사랑하지 않고 바람을 피워요. 그래도 그 며느리를 사랑할까요? 아니겠지요.
그래서 결국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부어주시는 그 큰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사랑으로 연합된 것에 비례해서 우리들에게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분과 온전한 연합을 누리며 그분을 자신의 신랑이라고 생각하고 신앙의 정절을 지키고 그분을 가장 위하는 삶을 살 때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참된 교회의 일원이 될수록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람에게 물 붓듯 더 많이 쏟아 부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그리스도를 의존하고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섬기고 사랑하며 사는 것만큼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끔 만들어주시고 또 그렇게 하는 가운데 성령의 교통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신비한 것입니다.
C. 재창조의 표본으로서의 교회
그래서 이제 이 교회가 재창조의 표본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결국 교회 안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우리는 무조건 개인적인 사랑의 차원으로만 해석했어요.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교회론적인 이해, 다시 말해서 교회론적 하나님의 사랑의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의 사랑하는 교회가 아들의 신부이기 때문에 그 물 붓듯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과 기쁨을 쏟아부어주셔요. 그리고 성도가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아들을 사랑하고 신랑 되신 주님과 아름다운 실제의 연합을 누리며 살 때 하나님은 더 많은 사랑을 이 신자에게 쏟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원하시는 바는 무엇이겠어요? 우리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고 또 그리스도와 온전한 사랑의 연합 속에서 아주 아름다운 부부관계가 되기를 원하시지 않겠어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될 때에 전체로서의 신부인 이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가장 아름다운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참되고 순결하고 흠 없는 아내인 교회의 결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왜 창조하셨는지?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들이 하나님의 어떠한 계획 속에 각각 태어났는지를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 모든 사람과 만물에게 심지어는 천사들에게까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교회에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비록 그가 아무리 하찮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를 멸시하고 하찮게 여기고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고받는 것은 하나님께 매우 악한 것이지만 특별히 주님이 한 신부의 몸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이러한 갈등과 그리고 미움, 서로를 향한 시기와 그리고 고통은 하나님이 더 중대하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교회 안에서의 모든 지체들과의 관계를 인간관계라고 자꾸 이야기하는데 인간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한 몸의 관계에요. 그래서 이것은 단순히 이 세상 속에서의 인간관계는 자기가 출세하고 성공하고 뻗어나가는데 있어서 인간관계를 잘못하면 방해를 받을지 모르지만 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지체들끼리의 갈등과 서로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이 모든 혼란과 괴로움들은 더 커다란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교회를 참된 신부가 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함으로 하나님께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가 속해있는 신부인 교회 자체를 향해서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교회에서 끊임없이 질서를 흩트리고 하나님의 통치에 반항하고 하나님이 주신 이 복음적인 사랑의 원리들에 어긋나는 행동들을 하게 될 때에 인간적으로는 아무도 사람들을 제재하는 이가 없어도 자신의 영혼은 끊임없이 고통을 받으며 하나님의 참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교회를 잘 정하고 정한 후에는 그 안에서 주님의 아름다운 신부가 되도록 그렇게 주님 앞에 매일 매일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아직 성취되지 않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이 성취되어가고 있는 교회와 전혀 거기로부터 멀어진 교회 사이에는 그것은 반딧불과 찬란한 조명탄과의 차입니다. 반딧불도 빛을 내요. 그러나 그것을 볼 수 있는 거리가 얼마나 되겠어요? 하늘로 솟아오르는 조명탄을 생각해보세요. 그 엄청난 차이를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간 삶의 궤적은 그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부와 지위를 누렸는가에 의해서 주님께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두운 칠흑 같은 이 세상 속에서 그렇게 찬란한 불꽃으로 주님 앞에 빛을 드러내며 산 그 인생의 가치에 비례하는 평가를 주님 앞에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자, 교회가 어떤 교회는 아직 여전히 결함이 있고 부족한 것이 많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교회가 결함과 오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아무 교회나 다 똑같은 것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인간이 정말 개념 없는 인간이 있고 나쁜 인간이 있는데 그도 죄가 있는 인간이고, 선량하고 순전한척 살아가도 역시 그 사람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기는 하지만 그 두 사람의 삶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처럼 교회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보면 그리스도의 몸은 피부색깔과 위치에 상관없이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지만 그러나 인간의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교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교회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보이는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교회를 바라보았고 오늘날 사람들은 이루어진 교회를 통해서 이미 부활승천하신, 지금은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제 아주 온전하게 되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래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머리이고 거기에 매달려있는 모든 지체들이 서로 진리와 성령 안에서 깨끗한 신부가 되어가고 그래서 그 교회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의 아주 사랑스러운 신부가 되었다고 칩시다. 그 교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굳게 붙어있고 신랑이신 그분을 사랑하는 머리이신 그분을 깊이 섬기는 그러한 교회의 모습일 것이고 충만한 성령은 사랑의 아름다운 연합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성령은 이 세상에 계시며 다양한 일들을 수행하시고 또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이 이 세상에 오신 주된 목적이 아닙니다. 성령이 이 세상에 오신 중요한 목적은 창조 시에 성령이 창세기 1장에서 모든 수면 위를 운행하시던 목적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세계의 질료를 함께 당신의 품안에 품고 감싸심으로 그 모든 것들을 만물의 연결을 이루게 하시고 그 연결이 사랑의 교통을 이루게 하셔서 처음 사람, 그 사람의 갈비뼈에서 나온 그 여자 사이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하게하셨던 것처럼 그런 교통 속에서 온전한 사랑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뜻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진실한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은사를 능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께 붙어있고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 된 교회의 모습이 바로 이 모든 세계에 다시 머리되시는 그 때에 인간들이 함께 누리게 될 아름다운 연합을 보여주는 하나의 그림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되기 위해서 교회는 결국 확장과 성숙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숙제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확장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교회가 커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커진다는 것은 외형적으로 건물이 커지고 모이는 숫자가 많아진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이 진실한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거듭남을 통해서 진실한 회개와 믿음을 갖게 되고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참된 신자의 수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교회가 아무리 커져도 참된 중생과 회심이 없는 교회의 성장은 하나님이 보실 때 이것은 진정한 교회의 성장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교회의 확장을 위해서 강력한 부흥과 전도의 소명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누가 전도하는지 알아맞히어 보십시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그래도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한 5년 전에 일 년 동안 전도된 사람들이 누구를 통해서 왔는지 교역자들이 통계를 내본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66%의 등록신자가 새가족반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전도되어 온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은 전도를 별로 못합니다. 그러면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은 전도를 거의 안하느냐? 그것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누가 전도를 한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신부들이 열심히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오래 나왔고 오래 다녔고 뭐 새로 등록한 것과 상관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신랑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알고 성령 안에서 자기 같은 인간이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사랑하고 사랑받는 한 지체가 된 것에 대해서 감격하는 사람들이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심령 속에 일어난 부흥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화요여리고 전도에 나와서 열심히 전도하는 교인들 가운데는 열린 교회 나온 지 10년 넘는 교인들도 많아요. 그런가하면 이제 등록한지 몇 주 안 되는 교인들도 있어요. 그것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과의 연합 속에 사는 성도들은 이러한 강한 교회가 참되게 확장되는 것만이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지고 성령 안에서 멀어짐으로 흩어진 그래서 갈 길을 잃고 자기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목적하게 살아가는 그 방황하는 수많은 인간들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고통의 종류는 수없이 많고 다양해도 이 세상의 모든 고통에 대한 유일한 답은 그리스도 예수뿐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가 크게 되는 것 모두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주일날 아무리 많이 모여도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정말 예수의 생명에 접붙여진 사람인가? 그리고 주님의 그 큰 사랑에 사무쳐서 그래서 오늘도 잃어버린 인간을 향한 눈물을 가진 사람들인가? 이렇게 교회가 참되게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서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영적 생명의 성장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인이 많은 것 같아도, 교회가 이 세상에 많은 것 같아도 사실은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으니까 교회가 많은 것이지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믿겠다고 주의 신실하고 순결한 신부가 될 테니 나를 인도해달라고 교회에 매달리게 될 때에 이 교회는 절대 많은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는 내적 성숙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들은 저절로 자랍니까? 사람들은 시장에서 농산물을 사다먹으면 그게 저절로 컸다고 생각합니다. 볍씨 하나가 뿌려져서 마지막에 밥상에 올라오기 위해서 싱크대에서 세척될 때까지 80번의 손이 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있는 낟알하나도 그렇게 돌보아야 되잖아요. 언젠가 어느 기도원에 갔습니다. 그랬는데 저 뒤뜰에 산 쪽으로 과수원이 있어요. 여기저기 사과가 맺혔더라고요. 그래서 그 기도원에 있는 집사님께 ‘저기 사과가 맺혔네요?’ 그러니까 ‘목사님 따시겠으면 가서 몇 개 따서 드세요.’ 그래서 가봤는데 나무가 줄지어서 빼곡히 들어서있는데 여기저기 사과가 맺혔는데 먹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너무 작고 여기저기 병들고 그랬어요. 그래서 하나 따서 씻어서 입에 넣어 봤는데 꽉 씹는 순간 거기서 과즙이 나와서 입안에 퍼지는데 하여튼 혀를 두르고 눈이 감길 정도로 시고 맛이 없습니다. 이게 왜 이러냐고 했더니 ‘목사님, 사람이나 사과나 돌봐야 되지요.’ 여기에 있는 사람이 이 사과밭을 오래도록 했었는데 나무도 늙고 땅도 지력이 다해서 갈아엎고 나무도 바꾸고 그래야하는데 나이도 많고 돈도 없고 힘이 드니까 그냥 버려두고 서울로 가버렸대요. 그때 내가 깊이 깨달은 것이 있어요. ‘아 그렇구나! 이게 저절로 맺는 것이 아니라 과일 하나도 돌보고 또 돌보고 그래야 맺어지는구나!’ 여러분이 친환경 과일 파는데 가보면 시장에 있는 것처럼 크고 아주 예쁘고 튼실한 과일이 별로 없습니다. 다 이렇게 비비 말려 틀어진 것들이지요. 약주고 비료주고 잘 돌보고 가꾸어야 그것이 되는 것입니다. 되지 않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몇 번 예화를 들었습니다만 그 아마라 와 카마라의 이야기를 아시잖아요? 그런 일들이 이 세계의 역사에 몇 번 있었습니다. 인도 지방에서도 한번 그런 일이 있었고 프랑스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마라 와 카마라의 이야기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죠. 사람들이 산에 갔다가 짐승처럼 뛰어다니는 애 둘을 잡았어요. 사람이 분명한데 이게 기어다는 것들입니다. 낮에는 밤을 안 먹고 마루 밑창 속에 들어가서 눈에 불을 키고 으르렁거리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을 사람으로 돌리기 위해서 세계의 교육학자들이 많이 노력했지만 결국은 둘 다 죽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돌보지 않으면 짐승입니다. 오기 전에 자료를 잠깐 봤는데 미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멀쩡한 대낮에 웬 청년이 총을 들고 버스에 난사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6명이 다치고 1명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붙잡혔지요. 체포되었지요. 그래서 경찰서에 끌려가서 ‘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왜 그렇게 버스에다가 총질을 했느냐?’ 그랬더니 이 아이의 답이 황당한 것입니다. 감옥에 가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다른 사람을 감옥에 다 안 가려고 하는데 너는 돈도 목적이 아니고 그냥 쐈는데 화나는 일이 있었느냐?’ 화도 안 났다는 것에요. ‘왜 그랬느냐?’ 또 물어보니까 지금 자기가 성병을 앓고 있고 여러 가지 질병이 있는데 지금 돈이 없어서 고칠 수가 없는데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감옥에 가면 거기서 다 거저 치료해준다고 하더라. 그래서 웬만해서는 감옥에 안보내줄 것 같아서 내가 총질을 했다. 그것을 놓고 어느 목사님이 평가를 했는데 이 티끌만큼의 양심도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이 세상의 목표는 뭐냐 하면 우리 모든 인간을 전혀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양심이 화인을 맞은 존재로 만들어서 충동대로 하나님을 향해서 악을 행하며 이웃을 향해 악을 행하며 살게 하는 것이 이 세상의 마지막 목표에요. 그게 바로 말하자면 짐승과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삶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이려는 그것과 정반대의 삶이고 성령 안에서 인간들이 서로 사랑으로 교통하며 살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와 완전히 정반대의 삶입니다. 그런 삶들을 천상의 반역하는 마귀의 세력들이 그것을 조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한없이 자유를 주면 마지막에 가는 것이 자유를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선악의 판단까지도 반납해버리고 충동을 따라 사는 인간으로 변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그런 세상 속에 있다가 주일이면 이렇게 오고 사경회라고 그러면 이렇게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교회에 붙어있는 지체들을 단지 교회에 접붙여졌다는 이유 때문에 내버려두는 것은 씨를 뿌리고 뒤돌아보지 않고 여행을 다니는 농부나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그게 곡식이 되겠느냔 말입니다. 물론 살아남겠지요. 그렇지만 살아남으니 오죽한 모습이 되겠느냔 말입니다.
어떤 예수 안 믿는 사람이 그러더라고요. 이상한 사람들은 교회에 다 모였다고 하더라고요. 왜 그래요? 교회에서 예수를 믿겠다고 결심한 것은 혼자서는 도저히 살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목양이 아니라 사육하듯이 내팽개쳐지게 될 때에 그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은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빗나간 모습이 되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은 진정으로 교회는 다니지만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여기에 붙이고 다니면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위해서 결국 무엇이 필요하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 시집갔을 뿐만 아니라 시집온 그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잘 목양해서 그를 그리스도의 참된 신부가 되도록 교양이면 교양, 지식이면 지식, 남편을 향한 예절이면 예절, 자녀교육이면 자녀교육 이 모든 것에 대해서 그렇게 아름다운 주의 교훈과 훈계로 그 양떼들을 하나씩 돌보고 돌볼 뿐만 아니라 좋은 행실로 꽃단장을 시켜야 되잖아요. 그래야 신랑한테 가지……. 본바탕도 별로인데 화장이라도 예쁘게 해야 되잖아요. 그렇게 화장까지 예쁘게 시켜서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을 갖추게 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덜컥 등록을 하고 목양을 받지 않는 것은 시집와서 그 개념 없이 제멋대로 날뛰는 바보 같은 며느리나 마찬가지에요.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이 교회는 재창조의 표본이 되기 위해서 오늘도 진정한 의미에서 확장되어야하고 또 내적으로 성숙되어서 그래서 참답고 아름다운 그런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Ⅲ.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보여줘야 할 교회
A.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의 신비적 성격
이렇게 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이제 스스로 누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에 대한 신비적 성격을 이해해야 됩니다. 자,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 빌딩을 가진 교회에 등록함으로써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의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서 그가 진실로 거듭나고 그리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인생에 유일한 목적이요. 그리고 유일한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그런 구원의 체험을 통해서 그게 진정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되심에 접붙여진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이 경건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떨리는 두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이 이끌리는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과 그리고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고난이 자기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 저미는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음으로써 거기에서 자기를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역사는 하나님이 우리의 캄캄한 어두움으로 가득한 우리의 영혼에 지성의 빛을 주시고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도록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일을 우리의 영혼 안에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예전에 거듭나기 전에는 결코 가질 수 없었던 두 가지 강력한 변화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지성의 변화와 또 하나는 자기밖에는 사랑할 줄 몰랐던 사람이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는 성향의 변화에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를 진실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 모든 우주세계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 심지어는 자신의 마음의 움직임을 통해서 자기와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집약해놓은 엑기스에요. 그래서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연애편지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성경이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보내신 연애편지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는 길이 이 책속에 모두 기록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있어서 이 중생과 회심은 영원한 중요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리적인 사실을 이렇게 안타깝게 수없이 외쳐도 심지어 여러분 중에도 전혀 개념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교회에 나온 지 2년씩이나 된 사람들이 왜 세례를 안 받아요? 무엇 때문에 그래요? 심지어 교회에 등록하고 4년 5년이 지났는데 교회가 인격적으로 대해준다는 이유 때문에 그거 4주 정도 제직교육을 받으면 되는데 아직까지도 집사직분도 못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요. 여러분이 정말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인지 자신에게 되물어보세요. 어떻게 그런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요? 정말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가 여러분의 신랑이라는 사실을 믿고는 있는 것입니까? 너무나 무지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입니까? 그러는 속에서 여러분의 신앙이 건강해질 수 있겠어요? 저는 교회를 하기 전에 비인격적인데 질린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뜻을 세우고 여러분이 원하지 않는다면 안 시켜요. 그런데 심지어는 어떤 때에 보면 교회에 등록한지 집사로 우리교회에 온지 5년, 6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도 직분을 안 받은 사람이 있어요. 직분을 안 받아도 우리는 아무것도 겁나지 않아요. 그리고 직분을 받는다고 해도 그 사람이 갑자기 무슨 어마어마한 일을 교회를 위해서 할 것입니까? 내가 문제로 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교회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 그리스도의 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와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에게 보여주고 있진 않아요?
자,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번도 시집가본 적이 없는 그 아름다운 처녀에요. 그러면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면 그러면 결혼을 하고 모든 사람의 축복 속에서 그렇게 웨딩드레스를 입고 그렇게 가정을 시작하고 싶겠지요. 아무렇게나 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겠어요? 결혼했냐고 물어보면 결혼을 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안했다고도 말할 수 없게 그렇게 개념 없이 행동하면서 살겠어요? 그러면 도대체 무엇입니까? 신앙을 가졌고 또 은혜도 받았다는 사람들이 2년씩 3년씩 세례를 받지 않을 때 그때에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것이에요? 안되겠다는 것이에요? 더 기가 막힌 것은 부모로서의 의무를 태만히 해서 자기 자식들에게 유아세례 받을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해서 추호도 반성하는 빛이 없습니다. 그것은 거의 반배교적인 행동입니다. 여러분의 뱃속으로 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인한 여러분의 아이가 아닙니다. 주님의 아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은 그 아이들이 주님과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수종을 들어야하는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소유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아이에게 올바르게 행하지 않은 하나가 그리스도께 올바로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행하고 있습니까? 그런 속에서 교회의 질서는 공공연하게 얼마나 우습게 압니까? 그 질서에 대해서 반항하고 불복종하고 아니면 복종하는척해도 마음속으로는 존중함이 없는 그런 개념 없는 일들을 하고 다닐 때에 여러분의 영혼은 끊임없이 피폐해져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여러분이 자부심을 느끼는 그리스도께 사랑을 받고 신앙을 가진 과거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여러분 개인에게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이신 교회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부어주시는 그 사랑 덕에 혜택을 입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몰라서나 그런다고 하지만 참 걱정이지요.
B. 머리되심을 보여주는 두 지평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보여주는 두 지평을 우리들은 여기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의 지평은 신자 자신 안에서입니다. 그래서 신자 자신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뭐냐 하면 이제까지는 자기를 주인 삼는 삶이었지만 이제부터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시고 그리고 자기는 그리스도의 노예이고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생각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무가 아닌 주님을 만난 그 십자가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그리스도가 나의 주시라는 인정입니다. 그 사랑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내가 주님의 주되심 앞에 복종하고 교회의 한 모퉁이에서 주님을 섬기고 공경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내 인생의 진정한 기쁨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주님은 주인이시고 나는 주님의 노예에 불과합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공경할 때 소극적으로는 신앙의 정절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해서 정절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자기의 마음속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전의 모든 혼란스러웠던 삶,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통 속에서 방황하던 모든 생활은 그분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신앙 안에서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신부된 우리의 본분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 앞에 정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적극적으로는 그분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꾸 자기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죄를 짓지 않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분을 위해서 무엇인가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단지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은 뭐냐 하면 ‘자, 내가 당신 아내로서 못한 것이 무엇이 있어? 내가 바람을 피웠어? 외간남자를 만났어? 나는 철저히 정절을 지켰어! 그런데 나는 당신을 사랑한 적도 없어!’ 그게 뭐에요? 정절이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생겨나는 의무에요. 그런데 뭐에요?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았는데 정절이 무슨 필요가 있어요? 그게 바리새인들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까? ‘나는 살인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간음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도둑질한 적이 없습니다.’ 안한 것 말고 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어요?
그렇게 공경하면서 이제 그분이 이 지상에서 살아계셨더라면 이루고자 하셨던 그 일을 뒤이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 지상에서 이루고자했던 일들 중에는 계승이 가능한 사역과 계승이 불가능한 사역이 있어요. 계승이 불가능한 사역들을 계승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에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가 계승할 수 있는 사역이 아니죠. 중보자 되심, 그분이 일으키신 기적은 우리가 계승할 수 있는 사역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분이 이 땅에서 보여주셨던 사랑의 삶, 주님을 향한 온전한 삶, 이웃을 향한 철저한 섬김, 그리고 자기를 버리시고 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하고자했던 착한 삶, 이 모든 것들은 우리들이 똑같이 흉내 낼 수 없지만 바라보며 나아가야할 하나의 사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힘든 일이지만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려고 하는 삶 그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일치하고 그 사랑의 원리에서 나오는 진리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개인적인 경건한 생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 온전히 정신을 집중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 그리고 그것을 깊이 묵상하고 숙고하고 적용하는 것, 그 가르침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 이 모든 것이 바로 개인의 지평에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의 지평 속에서 이렇게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께 전적으로 헌신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신자 개개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보이지를 않아요. 그래서 우리 자신이 주님을 정말 사랑하는 좋은 신자의 길을 가고 있는데도 자기를 아주 평가절하해서 끊임없이 좌절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는가하면 사실은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살인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도둑질한 적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자고하고 교만해서 자기가 주님을 엄청나게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사랑의 유무를 확인할 수 있도록 공동체의 지평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도 올바르게 평가내리지 못하는 주님을 사랑하는지의 여부를 공동체 속에서, 교회 속에서, 다른 지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주님이 세우신 질서 안에서 그것들을 보고 깨닫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경건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기도할 때만해도 자기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낮에 이웃들과의 관계, 교회지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험한 말을 쏟아놓고 다툼을 한 후에 비로소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아직도 부서지지 않은 자아가 충만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는 눈물을 흘릴 때에는 자기가 진실한 신자인줄 알았는데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자신 안에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로 말미암아 행복해지려고 하는 그런 자신의 이 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공동체적인 사랑의 일치를 이룰 때에 자기 안에 경험되는 경건이 참된 진실한 경건이라는 것을 확인하도록 하나님께서 교회의 지평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공동체적인 사랑의 일치를 이루고 그것이 자신의 경견과 합치되는 것만큼 그 경건이 참으로 주님의 신부된 자의 경건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서로를 섬김으로써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 배우는 사람, 또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통해서 서로 서로가 진리에 합치하는 삶을 살자고 서로를 격려하고 그리고 서로를 힘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제의 유익이지요. 그렇죠? 마음이 갑갑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너무나 멀어져서 어떻게 돌아갈 기력이 없는 것 같을 때에 ‘우리 같이 예배합시다.’ 그리고 구역에서 예배를 드리고 또 사랑하는 목회자나 지체들의 심방을 받았을 때 우리는 그들 안에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을 보면서 그 사랑이 그들과 함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져있는 것이 나에게도 흘러들어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에게 다시 진리에 합치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서로를 돕는 두 방편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눔과 용서에요. 내게 있는 것들을 없는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는 이들에게서 그 도움을 받고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끊임없이 용서해주어서 그들의 악이 내 안에서 용해되어 없어지고 그리고 내가 숨 쉬도록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사극이나 그런데서 보면 진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왕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화살이 날아올 때 자신의 몸을 던져 대신 맞고 죽는 무사들을 보잖아요. 그렇게 누군가에 의해서 악의 화살이 날려졌을 때 그것을 자신이 그대로 맞으면서 자신은 고통을 느껴도 그 악이 더 이상 번지지 못하도록 자기가 그리스도의 신부인 몸 전체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희생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할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주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그 일을 하기에 기꺼이 합당한 사람인지 우리들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하고 오히려 그렇게 개인적으로 혹은 공동체의 지평 속에서 하나님의 참된 자녀로서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모신 신부로서의 온전한 삶을 살아가려고 애쓸 때에 자신의 힘으로는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게 하셔서 끊임없이 기도 속에서 그리스도를 의존하게 하시기 위함임을 깨달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고적으로는 자신이 받은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며 나를 위해 받으신 주님의 고난의 크기를 기억하고 그 고난을 통해 받은바 나의 구원의 가치를 생각하고 또 고난을 받을 때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이렇게 공동체의 지평 속에서 섬기며 살아갈 때에 고난의 아픔과 시련의 눈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악을 행하는 지체들을 보면서 자신의 과거의 신분과 상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고 고난을 받아 아플 때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자기가 그보다 더 큰 죄에서 하나님께 용서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심으로 고난을 통해서 오히려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이천년 전에 죽으신 그분의 고난이 오늘 공동체 속에서 섬기면서 살아가는 가운데 끊임없이 재현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좋으신 주님 앞에 자신의 존재와 삶을 다 바치며 살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자기가 중심이었고 목적이었는데 이제 간절한 소원은 예전에는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아갔지만 이제는 자기도 자기를 미워하며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행복하게하고 자신도 그 행복의 그늘 아래서 기뻐하시는 주님 때문에 즐거워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바대로 흘려보내는 하나님이 사랑이 통과하는 한 통로가 되기를 소원하고 그렇게 통로가 되어서 자기는 고난을 받아도 고난 받는 자신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는 사랑, 그 사랑의 강물을 마시고 다시 사랑하는 영혼들을 보면서 기뻐하며 사람들에게 오히려 잊혀 사람들이 자기는 잊고 그리스도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그것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그것이 바로 신자의 교회의 지평 속에서 확증되는 개인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받을 때마다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이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상에 있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붙은 욕심을 버리게 합니다.
(찬양)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그 교회가 주님 앞에 자기를 포함해 순결한 신부가 되기를 갈망하면서 잠시 머물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가치를 위하여 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면서 이 안에서 하나님의 큰 사랑과 기쁨은 쓰디쓴 고통과 그리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아픔을 통해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C. 세상을 위한 최고의 섬김: 그리스도를 보여줌
이렇게 해서 결국은 교회는 세상을 위한 최고의 섬김을 감당하는 공동체가 되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이 교회에도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세상의 관심을 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말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것은 진리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적용된 진실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세상교육에서는 모두 사라졌지만 오늘도 우리 교회에서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참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참되어라. 바르거라. 사랑의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이 참됨이 최고의 가치에요. 이것을 위해서 교회는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자신의 참됨을 입증하며 주님 앞에서 아름다운 신부로 이 세상이 어두울수록 빛나고, 더러울수록 깨끗하고, 타락할수록 순결한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보여줄 때 그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 안에서 이루고자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들은 성취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되실 그날은 더 가까이 다가온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참됨에 4중적 증거가 있는데 그것이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고, 참된 영적인 변화를 받는 것이고, 참된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고, 참된 생활이 실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운 삶을 통해서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는 우리의 인생이 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 교회의 한 모퉁이를 섬기며 주님을 사랑하며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어간다면 그가 주님을 섬기며 당하는 고난은 미래에 모두 보상될 것이고 겉 사람은 늙어 후패해가도 속사람은 주님이 보시기에 날마다 순결하고 아름다운 신부가 되어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아름다운 교회의 한 지체가 되어서 여러분이 이 세상에 살아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웠노라고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고백하고 주님이 인정해줄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3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1 (2010/01/1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2 (2010/0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3 (2010/0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4 (2010/01/14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5 (2010/01/1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6 (2010/01/16 주일오전설교)
5.그 날의 영광을 바라는 순례자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에베소서 4:13-15).
I. 본문해설
오늘 이 시간에는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이제 교회를 통하여 만물 위에 머리가 되실 영광스러운 재창조의 날을 바라보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13절에서 15절 앞에 보면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나옵니다. “사도와 복음 전하는 자들과 그리고 목사와 교사를 세우신 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온전해진 성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고 우리가 읽은 15절 이하 부분에서는 그러한 계획 안에 있는 성도들이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II.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순례자들
결국은 이러한 모든 본문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되실 날을 바라보면 살아가는 성도의 정체성은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순례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이 본향이 아니고 마지막에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머리되실 그 나라가 자기의 진정한 본향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머리되시는 위대한 새 시대는 어쨌든 오늘날 우리와 같은 이 모순과 죄로 가득찬 시대가 끝남으로써 도래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A. 과연 종말이 있는가?
여기서 우리들이 궁금한 것은 과연 정말 종말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대목을 여러분은 귀담아 들어서 종말에 관한 우리의 성경적인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 종말이 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결함이 많은 세계는 불타듯이 순식간에 모두 사라져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실 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가 이제껏 경험하고 보았던 이 세상은 완전히 불타서 없어지듯이 사라져 버리고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상이 창조되어 우리는 바로 그 세상에서 거하게 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의 이 세상은 종말이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결국은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완전히 종결되어 그래서 모두 사라지고 그리고 완전히 이 세상은 재창조된 가운데 우리도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이 되어서 그렇게 새로운 천지에 살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참된 개혁주의 신앙에서는 이러한 종말관을 거부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제일먼저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상을 죄가 있고 흠이 있기 때문에 완전히 쓸어버려 불태우듯이 없애버리시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신다면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이 완전함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완전하고 의로운 것이었는데 인간이 거기에 죄를 묻힘으로 하나님이 그 세계를 만약에 완전히 멸하여 없애버리셔야 한다고 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인간에 의하여 폐기되었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는 것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는 것과 유사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완전하고 선한 사람으로 창조하셨지만 타락한 후에 죄가 들어오게 되어서 불완전하고 더러운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모두 쓸어버리고 새사람을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을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속하시기를 인간은 그대로 남겨두시고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죄를 깨끗이 씻어주심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셨고 그것은 바로 미래에 완전히 새로워질 그러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 되실 세상에서의, 새로운 세계에서의 인간의 모습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죄와 더불어 싸우다가 여전히 완성에 이르지 못하는 인간들을 영광스러운 날에 주님이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하심으로써 그렇게 우리를 완전히 새사람이 되게 하셨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혼과 우리의 육체 모든 것을 고치고 바꾸시는 과정이었고, 원래 창조된 그 사람은 여전히 완성을 향하여 구속의 과정을 지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도 결국 인간에 의해 망가뜨려지고 더럽고 타락한 것들을 깨끗이 씻어내셔서 다시 그리스도를 만물의 머리가 되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영광과 생명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머리되실 그 때에도 오늘 날에 있는 이 세상은 계속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우리 개혁파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인간의 타락에 의해 잠시 더럽혀졌으나 그러나 하나님에 의하여 다시 깨끗이 씻겨지고 그래서 맨 처음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보다도 더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의 아름다움을 뿜어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세계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죄와 그 모든 더러운 것들의 영향으로부터 깨끗이 씻겨서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아름다운 세계가 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은 사실은 요즘 유행하고 있는 영화 ‘2012년’과 같은 이런 종류의 종말, 그래서 부분적으로야 그런 것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세계 전체가 완전히 파괴되고 사라져버리고 멸절되어 버려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다시 창조되는 그런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되실 그 때를 재창조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은 전에 있던 세계가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의미에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사람들을 향하여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는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재창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우리는 그런 점에서 지구가 멸절되는 것 같은 그런 종말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고 바라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 되셔서 이 모든 세계를 영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하는 그리스도 예수께 연합을 이루고 만물이 그 분에게 연결되고 성령 안에서 인간과 모든 사람들이 한 그리스도의 머리에 붙어있는 지체를 이루며 성령 안에서 사랑하고, 모든 피조물들이 흐느끼며 탄식하는 그 탄식에서 벗어나 피조물이 영광에 함께 참여하게 되는 그 날을 우리들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B. 교회의 완성과 온전한 성도
이렇게 본다면 이제 이렇게 완전한 세상이 다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때까지 교회의 완성과 온전한 성도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감추어진 주님의 뜻이 펼쳐져 교회가 나왔고, 교회 안에 감추어진 그리스도 예수의 뜻이 끝없이 펼쳐져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이 모든 창조세계의 머리가 되시는 위대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길 위해서는 교회가 주님이 정하신 분량까지 계량적인 완성을 이루어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게 작정된 모든 무리들이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과정이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가는 그러한 성질적 완성의 분량에 이르게 될 때에 그것이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머리되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끊임없이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 완전하게 완성될 것을 바라보면서도 그날이 이를 때까지 이 세상에서 비록 죄가 남아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하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사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고 또 교회를 지으신 목적이고 또 세계를 만드신 이유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제 단지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 때문에 만족하지 말고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셔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 만드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자를 만드신 것은 참으로 인간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구원받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게 하셔서 이제 주님의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기대하셨던 온전한 사람이 되는 비결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비결입니다. 그것이 바로 온전한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품으로 불러 예수 믿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회고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기대하셨던 창조 목적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타락과 죄는 그 목적에 어긋나도록 잘못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회개시키시고 예수의 생명을 주셔서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전망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 되실 그 나라에 살아가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감으로 교회는 온전한 교회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말끝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시기를..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등등” 한 사람 예수께 집중된 설교를 듣고 또 그분에게서 삶의 교훈과 믿어야 할 규칙들을 배우게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어떤 사람이어야 되는지를 잘 보여주셨고, 동시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명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통로가 되셨을 뿐만 아니라 또 우리 인간들에게는 참사람이 어떤 존재가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그림처럼 생생하게 보여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사람이 되어감으로 우리들이 사랑의 연합을 이루며 온전한 교회가 되도록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처럼 살고 그리스도 예수처럼 되는 것은 성화로써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지향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밤바다를 항해할 때 북두칠성을 향하여 가면 된다.”라고 말할 때 배가 바다 위에서 떠올라 구름을 지나고 별들을 지나서 북두칠성에 도달할 것을 꿈꾸면서 북극성을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사공은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좌표상으로 북극성 쪽에 있으니 그것을 바라보며 가면 바로 거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어렸을 때에는, 요즘 잘 안하는 교육이 있는데 위인전을 많이 읽혀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어려서 감수성이 예민할 때에 신앙의 위인들,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았던 위대한 인물들의 아름다운 삶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줘요. 그러면 그것을 바라보고 자기가 살려고 할 때에 그 때 그 아이의 삶의 방향은 현저하게 다른 방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진실한 신자가 되도록 간절히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믿기만 하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고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것을 마치 100미터 달리기에서 골인하는 걸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신앙의 참된 도리에서 한참 멀어진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애굽을 떠나 도망을 쳤습니다. 그때에 애굽의 병사들이 추격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드디어 홍해를 건너고 뒤따라오던 애굽의 병사들이 그 물이 합쳐지면서 모두 나뭇잎처럼 가랑잎처럼 수장되었습니다. 자 이제 홍해 건너편에서 물결에 뒤엉키면서 수없이 떠내려가는 애굽의 병사들의 시체를 보면서, 저 멀리에 있는 열 번의 대재앙을 받아 혼란스럽게 된 애굽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이제 살았다, 끝났다”라고 했을지 모릅니다. 애굽에서 보면 그들은 지겨운 애굽 생활을 끝냈기 때문에 완성이지요. 그러나 가나안에서 보면 이제 겨우 가나안을 향해 출발하기 시작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죄와 사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미 얻은 구원이지만, 재창조의 영광스러운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점으로 놓고 본다면 이제 겨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고난과 시련을 이기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과 은혜 속에서 믿음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감으로써 충성스럽게 가나안을 정복할 때까지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구원받은 성도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굉장히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처럼 부족하고 힘없는 연약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중보자가 되신 것과, 인간이 타락한 것과, 그 인간을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고난으로 구원하신 것과, 그리고 교회를 세우신 것과, 그 교회의 아름다운 일치와 연합을 통해서 마지막 만물의 머리가 되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세상과 전망을 보여주고, 그런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 속에서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요 또 편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셔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지체로 삼으시고, 그리고 그들을 마지막 재창조될 그리스도 예수의 다시 머리되시는 영광스러운 때를 바라보며 사는 날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는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궁금합니다. 오늘 성경은 이러한 우리의 궁금증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며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이 염두에 두시는 그리스도인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다 이거야. 절대적인 의미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주님이 그렇게 완전하게 만드실 때까지 생명 있는 날 동안에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사랑이신 성령님을 의지하여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는 것, 그것이 바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방법이고, 어두운 세상에 교회를 통해 찬란한 빛을 드러내시는 방법이며, 또한 우리가 그 안에서 요동치는 이 세상 속에서 안정되고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III.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자질
그러면 도대체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자질이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이것을 나는 오늘 본문에 실려 있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하여 여러분에게 어떤 사람이 우리들이 되어야 할지, 어떤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A. 지성적 성숙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지성적인 성숙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자질은 지성적인 성숙과 인격적인 성숙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즉 이것은 제일 먼저 믿음에 있어서의 성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
믿는 것은 우리가 이성으로는 도저히 알기 어려운 초자연적인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저는 한때 무신론자였습니다. 무신론자라고 나를 스스로 자리매김을 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없는 증거는 도처에 많아요. 누가 하나님이 있다고 말해도 그 사람이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하는 증거는 매우 미약하고 내가 하나님이, 신이 없다고 내세울 수 있는 증거는 너무나 많았어요. 이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가 버선목을 뒤집듯이 이성적으로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고 아멘하고 나서 보니까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증명해 보일 수는 없지만 내 눈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가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이 보였습니다. 이게 바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한번 오셨었는데 어느 집사님인데 이분이 굉장한 분이었습니다. 강원도 불교도 연합회의 회장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이제 중책을 맡았는데 그 강원도엔가 어디다가, 거기까지 제가 가 봤습니다, 큰 절을 짓기로 하고 그게 아마 자기 땅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절을 짓기로 하고 그리고 계획을 세우고 모금을 하고 그랬었는데, 이 사람이 한순간에 전도를 받고 그만 그리스도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절을 세우기로 한 그 자리에다가 이 사람이 기도원을 세우고 십자가를 높이 올렸어요. 그래서 간증 많이 하러 다니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너무 황당하니까 이제 뭐 돈이야 다 돌려줬고, 재산은 있으신 분 같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땅을 내놓으려 그러다가 아마 거기에다가 기도원을 지은 것입니다. 지금도 그 기도원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너무 황당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이 나쁜 놈이라고 사기꾼이라고, 그리고 막 엄청나게 높은 사람들이 와서 항의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폭력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그랬어요. 그런데 참 그 믿음이라는 것은 참 대단하더라고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그게 뭐냐면 죽으면 주님의 나라에 가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냐? 그래서 사람들이 와서 이제는 뭐 싸우고 그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그러면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소란을 떨면 “가만히 좀 앉아봐라” 그래서 앉으면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신실한 심정으로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그대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이걸 내가 원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내게 이 일이 일어났다.” 다 얘기하면서 “만약에 당신들도 나와 똑같은 일을 겪었다면 당신들도 똑같이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중에 교양이 있는 불자들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이해할 수 있겠다고 그러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2년 동안 시달리면서도, 그걸 기도원이라도 없애라는 것을 절대 안 없애고 버텼어요. 그래서 결국은 승리했어요.
그런 것은 뭐죠? 이성으로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갖는 일에 있어서 성숙해가는 것, 그래서 예전에는 믿어질 법한 것들만 골라서 믿으려고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굳센 믿음 속에서 나는 인간의 이성을 믿지 않고 오히려 권위를 가지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서 성경의 진리를 믿겠다는 이러한 믿음에 있어서 성장해 가는 것 이것이 지성적인 성숙의 첫 번째 요소예요.
또 하나는 지식에 있어서의 성숙입니다.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그랬죠? 이 지식은 무슨 지식이냐 하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식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어느 순간 번쩍하고 은혜의 빛이 들어오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또 여러분 가운데는 아주 놀라운 기적의 체험 같은 거 하신 분들 있죠? 그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제가 신학교에 있을 때 공부를 가르쳤던 학생이었는데, 조직 폭력배의 두목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그 사람이 간증하는데 믿기가 굉장히 어려운 간증이었습니다. 뭐나면 폭력배 조직을 이끌면서 사행산업 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뜯으러 다니는 그런 일을 하고 있었는데, 다 술도 먹고 거나하게 취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불현듯 교회에 가고 싶더라는 것입니다. 어려서 주일학교를 다녀서, 그래서 주일학교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니 진짜예요. 주일학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술을 먹고 그리고 어느 동네에 있는 조그만 교회당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는데 무슨 신앙심에서 그런 게 아니라 이제 술김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는데 갑자기 번쩍하는 빛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문을 열자마자 거기에 주저앉았는데 갑자가 입에서 코에서 그냥 막 피가 한없이 쏟아지더라는 거예요, 귀에서까지 피가 쏟아지더라는 것입니다. 난 의학적으로도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피가 쏟아지면서 회개가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결국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들어왔어요. 그러면서 자기가 그런 소굴에 있었고, 그러면서 지금도 신문에 자주 내려오는 서방파 두목 김태촌 그 사람이 자기 밑에 있던 하수였다고 그 얘기를 하면서, 나는요 진짜예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이 사람이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기적적으로 예수 믿는 것을 경험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그런 식의 경험을 여러분도 한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은근히 뭐가 있냐면 자기는 평범하게 구원받지 않았다는 자부심 같은 게 있어요. 그게 결국은 하도 못돼서 하나님 그렇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대표적인 사람이잖아요. 아니 믿으라 그럴 때에 흐느껴 울면서 “아멘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하고 믿으면 그 사람의 이후의 믿음 생활은 시시껍절할 것 같죠? 절대 그렇지 않아요. 보면 그렇게 기적을 체험하고 믿었어도 그 다음에 그런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하나씩 하나씩 배워가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식이 그 사람 안에 형성되어서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일치를 이루지 않으면 그런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거듭난 것도 아니고, 또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그런 기적적인 체험 속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이후에도 견고히 산다는 보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얘기예요. 날마다 날마다 날마다 날마다, 생애적으로 한번 번쩍하고 믿는 거 그러지 말고,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설교를 들으며 믿음이 자라가고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씩 하나씩 배워 가면서 진리를 알아갈 때에 그렇게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될 때 그 사람이 미래에 재창조되는 위대한 나라를 바라보면서 사는 교회의 아름다운 일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학교에 가면 말이죠, 공부를 잘 하는 애들은 불평이 별로 없습니다. 근데 공부를 못하는 애들이 그렇게 “뭐 어렵니.. 수업시간이 기니.. 선생이 엄격하니.. 재미가 없느니..” 그런 것입니다. 공부하는 내용 자체에 은혜를 받으면 안 그러죠. 제가 고등부 전도사로 있을 때 설교를 열심히 했는데 그때는 제가 제일 많이 할 때에 180분을 설교했어요. 3시간을. 그런데 이렇게 안 움직였어요. 180분 동안 석고 깎아 놓은 것처럼 그대로 앉아서 180분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뭐냐면 어떤 애가 나중에 그래요 “전도사님”, “왜요?” 하다보니까 하도 길어지니까 예화도 해야 집중되잖아요. 몇 명이 그래요 “전도사님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설교시간에 예화 좀 하지 마세요, 자꾸 한길로 가다가 헷갈려요.” 참 그래서 내가 “아 그렇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빨아들이는 그것이 정말 다르구나!” 그러니까 집에 갔는데 설교 내용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설교 시간에 뱃살 잡고 웃은 그 예화만 그것도 왜 그 얘기가 나왔는지는 앞뒤는 전혀 생각이 안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신앙 안에서 지성적인 성숙이 안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에서 책을 놓지 말아야 돼. 성경책은 물론이고, 그 저 쓸데없는 책 그런 거 읽으면 안 되고, 퓨리탄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꾸준히 읽는 것 그것이 성도의 의무라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일반 스포츠는 묵상을 넘어서 거의 암기 수준으로 하려고 그러고 말이지. 무슨 얘기하다 탤런트 이름 나오면 사생활서부터 출신까지 막 그 친구까지 줄줄 꿰고, 성경 인물 나오면 이게 구약인가? 신약인가?
하도 교인들이 성경을 안 읽으니까 어느 목사님이 심방가서 놀렸대요. “자, 집사님 교회 나오신지 얼마나 됐습니까?” “10년 됐습니다.” “애 많이 쓰셨습니다. 성경은 좀 읽으십니까?” “아 예 잘 못 읽지만 그래도 연초에는 꼭 읽어 보려고 결심을 합니다.” “자 우리 모두 이 가정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히스기야서 2장 8절입니다.” 이 사람이 히스기야서 찾느라고 정신이 못 차려요. 지금 왜 웃는지 몰라요 저쪽에서는. 아이고 참 그렇죠. 지성적인 성숙이 되려면 그냥 읽어야 됩니다. 리처드 백스터 목사님이 굉장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실천적으로만 훌륭한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최고의 기독교 형이상학자였고 기독교 철학자였습니다. 그런 면모에 대해서는 잘 안 알려져 있죠. 설교가 하도 어려우니까 어느 농부가 그랬어요. “목사님 아무래도 목사님 설교는 나 같은 농부가 듣기에는 너무 어렵습니다. 어떡해야 될까요?” 그랬더니 그 사랑이 많은 목사님이 이렇게 까칠하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래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천국은 당신이 가기에는 너무나 먼 곳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네가 곡식을 잘 가꾸기 위해서 애쓰는 것의 10분의 1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애써 보거라 어떻게 되는지.”
저희 할머니가 한글을 잘 모르시다가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한글을 깨치셨습니다. 걸리버 여행기하고 그리고 성경입니다. 성경. 돋보기를 놓고 성경을 이렇게 읽으시면서 한글을 깨치셨습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해야지요 공부를.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씩 하나씩 배워가는 가운데 잘 믿고, 또 한편으로 잘 할 때에, 우리의 지성적인 성숙이 이뤄지고 그럴 때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2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머리에 아무것도 든 것 없이 무슨 신앙생활을 하겠어요? 개장수를 할레도 오랏줄이 있어야 되고, 군불을 땔 레도 나뭇가지가 있어야 군불을 때지 그렇지 않아요? 그냥 교회에서 집사가 됐네, 안수집사가 됐네, 그러고 아무 것도 가슴에 든 것 없이 덜렁거리고 다니면 쓸모없는 사람이 됩니다. 교회에서는 그런 사람을 높여줬을지 모르지만 지옥에서 함께 만나 동창회 하기 십상입니다.
B. 인격적 성숙 :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두 번째 그리스도인의 자질은 인격적인 성숙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랬습니다.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아는 것과 사람 됨됨이의 결합입니다. 지식과 성품이 결합된 사람 이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득 찬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무슨 지식이 있던지 그 지식이 그 사람이 되게 하고 그 사람 됨됨이는 자기 됨됨이에 어울리는 지식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돈만 아는 사람은 그 사람이 돈만 아는 사람답게 사람이 변해가고, 그리고 또 돈독이 오른 사람들은 돈에 대해서는 비상하리만치 움직이는 그런 예민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지식과 사람 됨됨이는 같이 끊임없이 회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름날에 장마철이 되어서 비가 막 쏟아지잖아요. 그러면 그저 양동이에도 세숫대야에도 물이 잠깐 사이에 하나 가득 고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장독 뚜껑 위에 물 고이는 것 보았습니까? 처음부터 덮어 놓을 때에 물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아래로 엎어 놓습니다. 폭포수처럼 비가 쏟아져도 그 물이 모두 밖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수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쏟아져 나와도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교리반을 지도할 때 마지막 시간인가 했는데 “교리반을 공부하며 뭘 느꼈냐?” 그랬더니 어떤 남자 성도가 그런 고백을 했어요. 자기는 평생을 공부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사법고시도 공부하고 했었기 때문에 책하고 늘 가깝게 지내왔는데 하여튼 이 신앙은 정말 자기가 왜 이렇게 안자라나 그러고 궁금하게 생각했단 것입니다. 아마 열렬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종자가 틀린가보다 이렇게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리반을 공부하면서 가만히 돌아보니까 솔직히 말해서 자기는 이 신앙이 무엇이고 기독교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애쓰기를 2종 보통 자동차 면허 시험 보는 것만큼도 공부를 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인가 깨달으려고 했다는 것 자체, 종자가 어떠니 저쩌니 한 것 자체가 자기가 정말 부끄러운 것이라고 고백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해 동안 성경을 얼마나 읽으셨습니까? 그렇게 읽으라고 도서관에 이제는 꽂을 데가 없을 정도로 책이 8천권 가까이 모였어요. 처음에 한 2천권도 안됐었잖아요. 그런데 이용하고 빌려가는 사람은 몇 백 명입니다. 그래서 내가 오죽했으면 당회할 때 그랬어요. 다음에는 집사시킬 때 반드시 집사나 안수집사나 볼 때 도서관 이용기록을 보자. 서점에서 책 사간 것까지야 조사 못하겠지만 도서관 이용기록을 보자. 도서관에 빌려간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면 둘 중에 하나지 열심히 책을 직접 샀던가, 아니면 그저 맹탕맹탕 교회를 다녔던가 둘 중에 하나 아니에요?
그러니 지식이 들어와도 그것을 마음에서 가공을 해야지만 온전한 사람이 되는데 아예 기계방아를 돌릴 방아 속에 집어넣을 곡식조차도 없고 빻을 곡식이 없는데 기계를 왜 돌리겠어요? 그러니까 예수 믿고 교회 오래 다닌다 그럴 때에 그저 사람은 멀끔해가지고 뭐 그래도 교회 오래 다니니까 집사도 되고 무슨 여집사도 되고 이것저것 직분도 주잖아요? 열심히 나오는데 뭐 어떻게 안 줘? 뭐 도토리 키재기지 그사람 뭐 다 비슷비슷한 사람들이지. 그러면 허우대 멀쩡해가지고 사람들 명함 내밀면 내가 무슨 열린교회 집사고, 무슨 위원장이고, 내가 무슨 안수집사고 내가 무슨 몇 년째 되는 교사고 그렇게 명함만 내놓는데, 온전한 인격적인 성숙이 없잖아요. 그러면 이제 그 사람을 보면서 1년이고 2년이고 지나가면 사람은 완전할 수 없지만 변해간다는 느낌은 들어야 되잖아요.
요번에도 사경회 기간 중에 점심때마다 몇 가정을 같이 심방하고 식사도 했는데 그 중에 몇 가정은 확실하게 자기 남편이 변화된 것을 아내인 자기가 보증한다는 것입니다. 뭐 그 정도는 되어야 되잖아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도 자기만 변화됐다고 우기지 가장 가까이 있는 아내가 “글쎄요?” 그러는데 그래서 어느 집은 남편은 자기는 “회심했다” 그러고 아내는 “절대 회심했을 리가 없다”고 그러니 그게 무슨 인격적인 성숙이 되겠어요? 그러니 그런 사람이 전에는 그래도 대놓고 “난 예수 안 믿는다” 그러고 살았으니까 그저 대충 냄새나는 삶을 살아도 세상 사람 냄새 그러려니 했지만 또 거기에 표는 하나 딱 붙여서 예수님 믿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어디서 명함을 내놓고 사니, 그가 인격적으로 성숙되지 않았을 때에 그 사람이 교회에 끊임없는 아픔이 되고, 상처가 되고, 그리고 얼룩이 되어서,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머리되실 세상을 보여주는 교회가 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하게 되잖아요? 그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우리가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지성적인 성숙과 인격적인 성숙이다 그런 이야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한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며 살았던 주님 없었던 날들의 모든 불행을 자기의 탓으로 돌리고 그리고 다시는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기를 꿈꾸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잖아요?
오늘날 우리 기독교가 욕을 먹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바로 이런 지성적인 성숙과 인격적인 성숙이 없기 때문입니다. 매일 사람들이 수시로 모여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잘해보자고 그러는데 그거 백번 해봐야 그런 구호를 가지고 잘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올바르고 온전하지 못할 때에 어떻게 그 사람이 바뀌어서 그렇게 온전한 인격적 성숙을 이룬 사람들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은 정말 열심히 자기를 채찍질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는 일과 믿는 일, 그리고 그 배우고 익힌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가 온전하고 착한 사람이 되어가는 그것을 통해서 지적인 영적인 인격적인 성숙이 이뤄진다는 것을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IV. 영적인 성장의 필요성: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며’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영적인 성장이라고 한다면 이 영적인 성장의 필요성은 어린 아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A. 어린아이 같을 때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어린 아이와 같이”라는 말이 나와요. “어린 아이와 같이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생각해봅시다. 어린아이 같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한번 보십시오. 우리가 신앙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어린아이는 미숙합니다. 판단에 있어서 이해에 있어서 의지의 힘에 있어서 미숙하지요. 그래서 아직 미성년자 어린 아이는 부모와 보호자의 따뜻한 사랑과 돌봄 속에서 자라야 합니다. 판단력이 미숙하고 이해력이 모자라고 의지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상태를 내버려두면 아이들의 인간성이 굽어버리고 망가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그들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 될 때에 우리는 흔들린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이것은 명백히 바닷가를 연상하게 하잖아요. 그죠? 바닷가에 어떤 물건이 떠 있을 때 자기 스스로 방향을 제어하며 갈 수 있는 추동력을 갖지 못할 때에 물결이 치면 물결이 치는 대로 바다 위를 부유하다가 걸리기도 하고, 다시 쓸려가기도 하고, 또 바닷가로 올라오기도 하고.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움직이지 못하고 세상의 물결에 의해서 쓰레기처럼 떠도는 처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대의와는 정반대잖아요. 신앙의 대의는 확신을 가지고 세상이 모두 뒤흔들리고 바뀌어도 자기가 믿고 배우고 확신한 바를 따라서 걸어가는 것이 신앙의 길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너는 어려서부터 배우고 확신한 바에 거하라”고 강권하였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요동한다는 의미는 유행하는 현대의 사상에 동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아 목사님 그 무슨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하십니까? 어차피 성경도 안 읽고 세상의 학문하고도 담쌓은 사람인데 무슨 내가 현대 사상에 요동을 합니까? 현대 사상을 알아야지 요동을 할 거 아닙니까?” 알면 덜 요동을 합니다. 모르니까 요동을 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지난해에 광림수도원에 가서 “세계와 사회와 기독교 진리의 전달자”라는 특강을 2시간 반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은 그 당시에는 나름대로 충격을 받았고, 이후에도 복음주의의 동향이나 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사람들은 눈이 열렸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우리가 같은 시대에 살고 있으면 그 시대의 자식이 되어서 자기의 눈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끔 영화에서 추석이나 설날 같은 때 보면 생뚱맞게 70년대의 추억의 한국 영화 그러고 나오는 적이 있어요. 별로 추억을 상기시켜 주지도 않는데, 넥타이는 이만 해가지고 이렇게 되고, 이 깃은 이렇게 되고, 바지는 뭐가 그렇게 바람이 필요한지 나팔바지를 만들어 가지고 그러고 그것이 최신 스타일이라고 거리를 휘저으며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그 영화를 볼 때 창피하고 굉장히 스스로 촌스럽게 느껴지잖아요? 머리를 이렇게 기르고 다녀서 아주 난리를 치고 경찰이 바리캉을 들고 머리를 깎으러 다니던 적이 있었구요, 길거리에 여자들이 걸어 다니면 세워놓고 30센치 자로 정강이부터 몇 센치 스커트가 올라가는 지를 재서 딱지를 끊어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찰이 뜨면 머리 긴 애들이 전봇대 뒤에 숨고, 골목으로 도망가고, 경찰은 그걸 또 쫓아가고, 쌩쇼를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럼 지금은 딱지도 안 끊는데 왜 그렇게 머리를 길게 기르고 다니지 않을까요? 길게 기르고 다니지 않는 이유는 그게 다른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안 그래서 그래요.
어렸을 때에 여러분은 잊어버린 단어겠지만 “시세”라는 게 있습니다. 아세요? “야 너네 동네 무슨 시세냐?”하고 초등하고 애들이 물어봐요. 무슨 소리 냐면 “우리 동네 딱지 시세야” 그러면 거기는 딱지놀이만 하는 거야. 그 동네에서는 문방구에서 구슬이 안 팔려. 그래서 학교에 가서 다른 동네 애들을 만나면 저기 평촌동에 사는 애들한테 “너네 동네 무슨 시세야?” “우리는 다마 시세야” 거기는 그냥 구슬치기만 하는 거야. 딱지는 소용이 없습니다. 딱지도 또 여러 가지 종류예요. “너 네는 무슨 시세야” “우린 딱지 시세야”, “무슨 딱지”, “우린 껌 딱지 시세야” 껌 껍질만 하고 다른 건 딱지로 안 쳐줘요. 또 딴 데는 그림 찍힌 딱지만 하고, 또 딴 데는 그런 거 두개 하나도 필요 없고 무조건 두툼하게 말아갖고 와서 바람 일으키면서 두드리는 거 그 시세야. 그래서 뭐나면 거기서 어떤 애들이 딱지 시세여서 전부 다 집에 있는 형 책까지 뜯어가지고 전부 다 이만한 딱지를 갖고 나와서 박스를 지고 나와서 딱지치기를 하는데 얘가 구슬가지고 나오면 걘 완전히 왕따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당히 이 세상하고 타협하면서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난 요즘 참 웃기는 게 난 아직까지도 그런 일을 안치러 봤습니다만 교인들 보니까 애들 시집 장가 보낸 다음에 돈 봉투를 들려서 사돈집에 보내더라고요? 그러잖아요? 그것도 삼백 오백 어떤 사람은 천만 원 그러는데 그거 족보도 없는 일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젠 사람들이 다 따라가. 왜나면? 딴 사람이 다 이렇게 하니까. 그러니까 더 재미있는 것은 저쪽 집에서 오백만원 보내면 이쪽 집에서 한 이백만 원 떼고 삼백만원 보내고, 그것도 아들가진 집이 오백만원 받고, 딸 가진 집은 삼백만원밖에 못 받으니까, 그 돈 온 거 거기서 그냥 이백 떼고 삼백 또 보내더라구. 그거 쓸데없는 짓을 왜 합니까? 그런데 왜? 그거 안했다간 왕따 당할까 봐.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 세상 자체가 이렇게 출렁거리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 밖에 모르는 세상의 풍조들, 부모도 몰라보고 동기간도 몰라보고 저 밖에 모르는 거 그런 풍조 아니에요?
여러분 보면 뭐가 그리 복잡해요? 관양동에 있으면 관양동 아파트, 안양에 있으면 안양 아파트 그러면 되잖아요? 무슨 힐스테이트, 무슨 펜테리움, 무슨 쏠로키움.. 그거 왜 그런 줄 아세요? 시골에 있는 시어머니가 못 찾아오게 하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게 세상의 풍조예요, 세상의 풍조. 뭐 그렇게 복잡하게 해? 무슨 힐스테이트 쓴다고 관양동에 있는 아파트가 뉴욕으로 날아가요? 또 무슨 캐슬? 웬 놈의 또 캐슬?
이런 게 유행처럼 막 번져나서 거기에 요동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생겨난 풍조는 신앙을 갖는데 도움을 주는 풍조라고 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신앙을 갖는데 도움이 안 되는 풍조예요. 이렇게 우리 믿는 사람들을 흔들어 놓기 위해서 2가지를 사용하는데 그게 뭐냐면 궤술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 궤술이 뭔가? 말이 어렵죠? 궤짝에 담긴 술인가? 고개를 끄덕끄덕 그러시는 분도 있는데, 궤술은 술이 아니라 이게 뭐냐면 사기 같은 것입니다. 원래 이 궤술이라는 희랍어가 ‘뀌베이아(kubeiva)’라는 단어인데 이 ‘뀌베이아’에서 영어의 큐빅(cubic)이 나왔습니다. 큐빅은 여러분 알다시피 사각형으로 된 것입니다. 그것이 영어에서 ‘주사위’라는 뜻으로 쓰여집니다. 뭐 주사위를 가지고 이렇게 돌리면서 돈내기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 단어가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기라는 뜻이죠, 사기. 이게 사기 치는 거잖아요? 요즘은 그런 거 좀 많이 없어지고 더 고등한 방법으로 발달했지만 옛날에 보면 동네마다 엿을 만들어놓고 그리고 엿을 팔면서도 거기서 노름을 또 합니다. 그래서 기다란 끈하고 짧은 끈하고 몇 개를 놓고 막 엿에 밀가루를 묻혀서 이렇게 돌려놓고 3개쯤 놓고 “그중에 하나를 뽑으면 두 배를 주겠다” 그러는 것입니다. 참 사람들이 참 어수룩한게, 뻔하잖아요 그거? 그렇게 복잡하게도 안합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보면 어느 것인지 금방 알아. 그래서 어느 것인지 안 거예요 그래서 “저거” 그러니까, 이 엿장수 하는 얘기는 “돈을 꺼내서 걸고 해라. 돈 놓고 돈 먹는 건데.” 그러니까 돈을 꺼내기 위해서 이렇게 보는 사이에 탁 돌리는 거야. 그래서 틀림없이 그거라고 생각을 하고 탁 놓고 탁 집었는데 웬걸 그건 벌써 저쪽 뒤로 넘어간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다 알지요. 그런 게 뀌베이아예요. 그건 뭐 때문에 그렇죠? 지성의 미숙함을 겨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단에 빠지고 이러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사람들이잖아요? 그렇게 해가지고 지성의 미숙함을 겨냥합니다.
또 유혹에 빠지게 하죠. 이것이 결국은 사랑의 미숙함을 겨냥을 해서 결국은 그리스도를 견고하게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자빠뜨리는 이런 일들이 이 세상의 교훈의 풍조 속에서 막 충만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갈 때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은혜 안에서 살고, 교회 안에서 목양을 받고, 성도들과 함께 예수 안에서의 교제를 누리며 살아가지 않을 때, 그 자기의 거미줄 같은 신앙으로 세상에서 밀려오는 이 엄청난 파도, 또 그런 세상이 자기 안에도 있잖아요? 욕망. 이런 것들이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결국은 감당할 수 없는 신앙의 미끄러짐으로 떨어지게 되는 거란 말이죠.
이럴 때에 요동치 않게 하는 비결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뭐나 하면 내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언제 찾아오십니까? 어떤 사람은 "인생의 벼랑 끝에 찾아옵니다.". 물론 제가 “인생의 벼랑 끝에서”라는 시리즈를 설교한 적도 있어요. 그러나 벼랑 끝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다면 떨어지는 사람이 없게요? 그런데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벼랑 끝에서 떨어져요. 고난과 시련을 만난다고 거기가 모두 예수님과 은밀한 교제를 나누는 장소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럼 뭐냐?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님은 고난 받을 때에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늘 찾아오시는데 고난을 받을 때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마음의 문이 열리기 때문에 그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한다면, 우리가 이런 세상의 풍조에 요동하고 흔들리지 않으려면 현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혜의 감격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감격 속에서 살게 될 때에 그 때에 충만한 믿음을 갖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요번에 심방하면서 아주 은혜로운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제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을 우리 교회에서 그래도 열심히 교육을 시키잖아요? 뭐 최고라고 까지는 말을 못하지만은, 그래도 하여튼 여러분 같은 까막눈은 안 만들려고 어려서부터, 여러분 까막눈이었죠. 솔직히 얘기해서. 그래서 그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안에서 엄마 아빠가 물어봤대요. 절반은 아이를 시험해 보고 또 절반은 자기도 잘 모르니까 물어본 것 같아요. “얘야” “왜 엄마” “내가 너한테 하나 물어 볼게 대답해 봐” “뭔데요?” “야, 옛날에 하나님이, 너 아브라함에 대해서 배웠다 그러는데 그때는 하나님이 막 불길로도 나타나시고 모세에게도 큰 기적 속에 나타나시고 막 그러셨는데, 요즘은 왜 하나님이 그렇게 안 나타나실까?” 물었더니 얘가 그런 질문을 하는 엄마가 이상하다는 듯이 “성경이 있잖아요? 성경이 있는데 성경을 믿으면 되니까 하나님이 오늘날 그렇게 안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알고 그분을 만나게 해 주는 아주 좋은 다리가 있는데 그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그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과의 교제는 나의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그러면서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첫째는 현재적인 경험이 은혜 안에서 계속되어야 하고, 두 번째는 뭐냐면 내가 부분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 이렇게 저렇게 주워들은 지식들이 잘 연결이 되어서 기독교 사상의 체계를 형성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 사상은 그 안에서 우리들이 숨 쉬는 공기며 호흡입니다. 그것을 떠나 사는 것은 죽음이며 행복하지 않아요. 행복하다면 그것은 자기 사상이 아니죠. 그러려면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체계적으로 그것을 건축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들이 아주 견고하고 튼튼한 집을 지어 주님 앞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을 올바로 알려고 하는 깊이 있는 노력 속에서 우리가 요동치 않는 신앙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B. 영적 성장의 길
이렇게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요약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사랑 앞에서 참된 것을 행하며”, “사랑 앞에서 참된 것을 하여”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앞에 나오는 그 모든 것, 유혹에 빠져 교훈의 풍조에 요동치 않는 것, 그 모든 것, 그런 모든 삶이 지성적인 성숙이던지 인격적인 성숙이든지 이 모든 것들이 사랑 안에서 살아감으로써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사랑 안에서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엮어질 때에 그 사랑을 머금음으로써 지혜는 주님을 위한 지혜가 되고 열정도 주님을 위한 열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정체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데서 비롯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이는 방법이 아주 초월적으로 생애적으로 쏟아 부어지는 부흥 속에서 우리를 압도하도록 그런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경우에는 우리가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때 하나님은 그 말씀 속에서 깨달음을 주시면서 자기의 모습을 비춰보게 하시고 주님의 그 아름다우신 성품 앞에 자기를 회개하고 돌이켜 그 말씀을 꼭 붙들고 살려고 할 때에 메말랐던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매일 읽고 묵상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주일 예배 하나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걸고 나오는 것은 훌륭하지만, 그런 주일 예배가 여러분을 은혜의 강가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붙들면서 사는 신실한 신앙생활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정말 복된 사람들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주님께 갔을 때 다른 시대나 다른 나라 사람보다는 배는 더 잘 살아야지 주님께 인정받을 것이다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손만 뻗으면 성경, 성경을 해설한 것, 모든 것들이 지천에 널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잘 배우고 사랑하며 살아가야할 이유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10여 년 전에 극동방송에서 새벽시간마다 낭독자가 나와서 성경을 천천히 읽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 극동방송 그 중에서 아세아 방송 같은 것은 정부에서 어떻게 허가를 잘 내주어서 그런지 어째서 그러는지 전리층이 잘 형성되는 날이면 유럽까지 전파가 떨어진답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것입니다. 그 방송을 통해서도 제가 한번 내보내 본 적이 있는데 새벽에 그 방송으로 설교도 아니고 성경공부도 아니고 성경 읽는 사람이 천천히 천천히 성경을 읽어주어서 그 북한과 그리고 중국 여기에 있는 사람이 받아쓰기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성경을 손에 넣을 수 없던 시절에 그것을 어두운 골방에서 새벽에 리시버를 꽂고 그 누런 종이에다 성경을 받아썼고, 그 사람들을 만난 목사님 얘기를 들으니까 그것을 노끈으로 묶어서 이렇게 두꺼운 것을 짊어지고 다니며 성경이라고 손때가 묻도록 그렇게 읽는답니다. 여러분 중에 성경을 그렇게 해서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누가 성경을 읽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결국 이 사랑은,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올바로 하나님을 알려고 할 때에 여기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감화는 은혜를 통해서 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매일매일 은혜를 받기 위해서 애를 써야 된다는 것입니다.
난 이번에 추울 때도 옛날에 가난하던 시절이 그렇게 생각이 났어요. 그냥 날이 살이 에이는 것같이 추울 때 초등학교 때에 동네 어귀에 서 있으면 아줌마 아저씨들이 하루 장사를 끝내고 봉지쌀 하나 들고 연탄 구멍탄 새끼 끄는 거 2개씩 들고 이렇게 와요. 그러면 그것을 끓여서 저녁하고 아침을 먹고, 그걸로 떼고, 그 다음엔 불을 끄고 그 다음에 가서 들어오면 저녁때 와서 다시 그걸로 숯으로라도 해가지고 불을 펴서 저녁때 덥히고 사는 거예요 돈이 없으니까? 그러면 생각해보세요. 그날 만약에 장사를 허탕쳤다 그러면 그날 저녁과 그 다음날 아침에 애들을 굶겨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 생활을 할 때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오늘 아니면 내일 받지 뭐 그까짓 것, 아니면 인터넷에 들어가면 다 나오는데, 아니면 책으로 나온 다음에 보지, 그까지 것 한번 은혜 못 받는다고 큰 일 생기나, 그렇게 사니까 우리의 영혼은 매일 매일 핍절한 상태를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에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알고 믿는 것에 하나 된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는데, 그 은혜는 또 성령의 작용을 통해서 오는 거잖아요? 그러니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을 깨끗케 하게 마련이잖아요? 주님의 성령을 나에게 부어주시기에 적합하리만치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그의 피로 씻김을 받고 날마다 자기 안에 불결한 것들을 버리며 주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랑 안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아주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성장의 비결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지체들을 사랑하고 심지어 자기에게 고통을 준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그런 안에서 우리의 영적인 성장이 지속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마지막으로, 참된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참된 것을 하여” 그래서 참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희랍어 원문에는 그냥 “참되며” 라고 나옵니다. 그럼 도대체 “참됨”이라고 하는 것이 뭘까요? 오늘 날에는 다 잊혀진 단어잖아요? 그래서 오늘 잘 배워서 가서 아이들을 하루에 한 번씩 쓰다듬어 주면서 잊혀져버린 옛날의 교훈을 아이들에게 주어 보세요. 이게 부모들이 이 뜻도 무엇인지 모르니까 아이들에게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도 더 탁월한 가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게 뭐나면 “참되거라. 참되거라. 참된 사람이 되거라.”
“참되거라 바르거라” 스승의 날 학교가면 아이들이 불러주잖아요. 그런 거 부를 때마다 닭살이 많이 돋아요. 그러나 마음 한 편으로는 반성을 합니다. “진짜 ‘참되거라.’ 얼마나 가르쳐 주었을까?” 신학생들 가르치면서도 “목회에 성공하거라, 승리하거라, 이기거라, 공부 왜 그렇게 안하냐, 머리에 뭐가 들었느냐? 공부 잘하는 사람을 봐라” 뭐 그렇게 족쳐대지만, 그러나 그거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참되거라. 참된 사람이 되거라.” 우리 아이들에게 거는 가장 간절한 기대는 “참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람. 비록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와 그리고 아름다운 학식이 부족해도 그래도 참된 사람이 되는 것. 그래서 오늘부터 우리 모두 가서 아이들을 한 번씩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면서 우리 그럽시다. “참 되거라.” 그럼 “엄마 그럼 참된 것이 뭐야?” 그 대답을 이제 가르쳐 줄게요.
참되다는 것은 뭐냐 하면 진리에 부합한 상태예요. 그래서 진리는 객관적이지만 이 참됨 이게 진실이잖아요, 그죠? 참됨은 진리에 부합된 주관적인 상태예요. 그래서 그것이 마음의 움직임이든 행위의 표현이든지 간에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 참됨입니다. 이 참됨은 진리를 우리가 배울 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마음으로 그 진리를 굳게 붙들어 그 진리에 영향을 받아 그 진리에 합당한 사람 됨됨이가 된 것을 가리켜서 여기에서 이 참됨이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참됨은 아름다움이야. 그리고 이 참됨은 아름다움이고, 아름다움은 선함입니다. 그리고 선함은 탁월함입니다. 그래서 그런 참된 사람이 될 때 비록 그 지위가 높지 않아도 그는 어둠 속에 비취는 한줄기 불빛처럼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갈 길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기도원을 간다고 헤매고 산을 오르다가 길을 잃어버렸는데 저 멀리서 불빛 하나가 보여요. 그 때에 그 기쁨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몰라요. 바로 주님이 여러분을 만드시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물론 지위도 있고 영향력이 있으면서 참됨도 있다면 하나님이 귀히 쓰는 사람이 되겠죠. 다니엘처럼, 요셉처럼, 에스라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겠죠. 그러나 여러분, 높은 지위나 부요한 삶과는 바꿀 수 없는 것이 참됨입니다. 참됨. 그런 참됨을 우리 자녀들이 소유하고 살도록, 근데 이것은 참되라고 사람들에게 외친다고 해서 가르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 중에도 학교에서 선생님 하시는 분들이 있잖아요? 그것을 성직자의 소명으로 여기고 잘 하셔야 됩니다. 왜냐면 여러분만큼 사람들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대통령보다도 여러분이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내 경험을 보더라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에 대해서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감동을 못 받는데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 울먹이면서 기도하는 선생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보면서 “야 이건 진짜구나. 있었던 일이구나. 지금 그 사실이 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으니까.” 그러한 표본을 우리 아이들에게 참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가, 그리고 비록 높은 지위와 아름다운 명예가 없어도,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하게 살아가는 삶인가 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줄 때에 쓰다듬으면서 “참되거라.” 그래야 돼. 괜히 또 남편한테 가서 그래가지고 싸다귀 맞지 말고. 남편한테 가서 “제발 참되거라.” 그러다가 “이 여자가 부흥회 갔다 오더니 돌았나?” 하지 말고.
그래서 결국 이것은 부패한 세상의 끝을 지나며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을 바라보고 사는 신자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많이 알았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배부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배고플 때에 시장가서 실컷 물건 봐놓고 냉장고에다가 다 집어넣은 다음에 “어이 배부르다” 그러고 침대에 가서 드러눕는 거나 똑같죠. 해 먹어야지. 냉장고에 아무리 반찬이 많으면 뭔 소용 있어요? 그것을 잘 요리를 해서 자신의 삶이 그 진리와 합치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기에 오늘도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죄인이라고 고백을 하고 그리고 진리의 참된 가치는 우리로 지식을 통해 교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참답게 살도록 만들어서 결국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임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끔은 이런 때가 있습니다. 마치 자동차가 눈밭에 푹 빠져서 아무리 엑셀을 밟아서 미터기에 180킬로라고 나와도 자동차가 요동도 안하고 안 빠져 나오는 적이 있는 것처럼 말씀도 듣고 봉사도 하고 그저 뭐 기도도 하고 별거 다 하는데 도저히 신앙이 마치 개골창에 빠진 것처럼 거기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요란하게 바퀴 타는 냄새만 나는 때가 있어요. 그래서 뭐냐면 이성적으로 따지면 설교도 수없이 듣고, 성경도 듣고, 학교란 학교는 또 다 가방 들고 따라다니고 다 배우고, 모르는 게 없습니다. 근데 도저히 이게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진리가 이 속에서 겉도는 것입니다. 진리가 계속해서 겉도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 뭐냐면 삶에 적용이 없는 지식입니다. 그거는 하나님 사랑하고 아무 상관이 없고 그런 사람이 잘 배우면 날카롭게 칼 갈아서 남의 목을 칩니다. 왜? 사랑이 없는 진리는 칼날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진리를 잘 배우고 그 진리로 남을 해하기에 앞서서 자신에게 그 칼을 겨누어 그리고 진리가 자기를 칭찬할 때만 진리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자기를 꾸짖고 나무랄 때에도 아파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자기가 그 진리에 부합한 삶을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깨뜨리십니다. 그리고 진리로부터 멀어졌던 우리의 삶을 진리에 합치시키십니다. 그 때에 우리는 영혼에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심방을 하니까 유익이 많더라고,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듣고 회심하고 난 다음에 “기분이 어떠냐?” 그랬더니 “엄마 개운해.” 그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그 모습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애들이나 어른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모두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게 되었을 때, 그리고 “내가 이제는 비록 힘이 없지만 주님의 이 십자가의 사랑을 알았으니 거기에 부합하는 참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그렇게 될 수 없으니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할 때 그 때 우리가 영적으로 죽죽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V.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지체로 살아감
그래서 결국 우리들은 잠시 지나는 나그네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개척할 때에 꽃 같던 자매들이 이제는 중년부인을 지나서 아이들이 다 컸어요. 한 15년 지나면 더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늙어 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때 우리의 삶의 영광이 무엇이겠어요? 육체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아서 이 세상의 임금들이 꽃으로 꾸며 쓴 그런 왕관과 같아요.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영화로 입은 옷도 들풀 하나 들국화만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가장 큰 영광은 이렇게 미천한 죄인인데, 이렇게 쓰레기 같은 인간인데도 날마다 내 영혼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은혜의 감동 아래서 살아갈 때에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교회를 보여주고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그래서 만물에 다시 머리가 되실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복주시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행복하고, 주님은 우릴 통해 영광을 받고, 참된 성도가 되어서 어두운 밤하늘에 별과 같이 빛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갈 때에, 그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생을 헛되게 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인 이 교회에서 날마다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지체들을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영광된 몸으로서 찬란한 불꽃처럼 사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3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1 (2010/01/1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2 (2010/01/12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3 (2010/0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4 (2010/01/14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5 (2010/01/1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6 (2010/01/16 주일오전설교)
6.신의 성품에 참여할 때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 베드로가 흩어진 교회의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특별히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계실 때에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뼈아픈 신앙의 실패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을 때에 수신자들은 이미 핍박이 시작되었거나 임박한 박해로 인해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믿음과 소망을 굳건히 하고 환란 가운데 신앙을 지키도록 강권하였습니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성도들을 격려하는 사도의 방식을 보십시오. 그는 제일 먼저 우리에게 주신 이 구원이 무엇인지를 다시 설명하고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이 어떤 것인지를 상기시킴으로써 우리가 더욱 믿음의 도리를 굳게 붙잡을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정욕을 인하여 썩어진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게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말입니다. 이 구절은 교회 역사에서 두고두고 논란이 되어 왔던 구절이고, 또 한 편으로는 기독교의 영광스러운 교리를 입증하는 아주 탁월한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화’의 교리입니다.
II. 신화(神化)의 교리
A. ‘신화’란 무엇인가?
‘신화’라고 하는 것은 ‘신이 되어간다’라는 뜻입니다. 많은 초대 교회의 교부들을 비롯해서 많은 신학자들이 이 구절을 탐구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살피고자 하였습니다. 특별히 이 신화의 교리는 서방교회보다는 동방교회에서 우주적인 전망을 가지고 발전해왔습니다. 이 신화의 교리를 동방교회에서는 ‘deification’의 교리라고 가르치고, 서방교회에서는 ‘divinization'의 교리라고 하는데, ’deification'은 ‘신성화되어간다’는 뜻이고, ‘divinization'도 역시 유사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을 신이라고 불렀고, 오늘 베드로사도는 우리의 구원의 결국이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라고 불렀다는 구절을 토대로 이 신화의 교리를 수립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신화‘란 무엇일까요? 이 ’신화‘는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그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닮음이 극도에 달하여 마치 우리 인간이 신처럼 된다는 교리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만물들의 머리가 되시고 창조세계의 계획이 완성되어 더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게 될 때에 인간이 도달하게 될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감의 마지막 성취입니다. 이것은 오늘 날 우리 개혁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영화‘의 상태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 ’신화‘의 교리에서 고대의 교부들은 세 가지 단계를 거쳐서 신자는 신화에 이르게 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catharsis'(카타르시스)라고 불리는 이 ‘정화’는 ‘육체의 정화’라기보다는 ‘영혼과 마음의 정화’입니다. 성령의, 그리고 진리의 영향으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깨끗이 씻겨져 거룩한 상태가 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theoria’(테오리아)의 상태인데, 이 때의 인간은 하나님을 뵈옵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고 하는 구절에서도 입증됩니다. 이것은 어떤 신비한 체험 속에서 주님을 뵈옵는다기 보다는, 우리의 영혼의 머리인 지성이 온전히 순수해져서 모든 이 지상의 사물들로 인한 방해와 욕망으로 말미암은 억견에서 해방된 상태에서 주님을 순수한 지성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이 지상에서도 성취될 수 있는 것이지만, 마지막에 이루어질 ‘theosis’(테오시스)의 상태, 즉,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이 상태는 이제 예수께서 이 모든 교회에 관한 경륜을 성취하고 만물의 머리가 되셨을 때에 그 분께 연합된 인간이 도달하게 될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의 교리'를 수립하였던 위대한 교부, 이레네우스(Irenaeus)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참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 앞에 있는 God은 대문자 God이고, 뒤에 있는 god은 소문자 god입니다. 그래서 직역을 하면, ‘참 유일하신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와 같은 신적 존재가 되게 하시려고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B.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뜻
1. 그릇된 이해
그러면 이렇게 해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먼저 우리는 그릇된 이해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인간과 신의 연합을 통해서 인간의 가장 행복한 상태를 설명해 보려고 하는 시도는 이미 그리스 철학자들에게서도 시작된 것입니다. 고전 그리스어로 ’행복‘이라는 말은 ’유다이모니아(eudaimonia)‘ 라는 단어입니다. ’유‘는 알다시피 ’좋은‘ 이라는 뜻이고, ’다이모니아‘라고 하는 것은 신이 들려있는 상태입니다. 여기에서 영어의 단어 ’demon' ‘귀신’ 혹은 ‘마귀’라는 단어가 온 것입니다. 물론 이 희랍사람들이 그런 우리가 이야기하는 잡신에 사로잡힐 때에 인간이 행복한 상태가 된다고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비록 단어는 ‘다이모니아’지만, 그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신은 당시에 유행하던 잡신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높고 고상한 그런 일자의 신이었습니다. 이렇게 신이 인간의 본성에, 본질에 연합되어진다고 하는 사상은 끈질기게 기독교의 진리의 체계를 도전하고 괴롭혀 왔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초기에는 이러한 희랍철학의 영향을 받은 이단 종파들이 수없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게 바로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영지주의’의 이단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과 신의 영은 일치를 이루는 것이고, 인간의 영은 형체가 다를 뿐 그 신의 본질의 일부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껍질을 벗고 상승하게 될 때에 인간의 영혼은 자기가 돌아 온 본질적으로 같은 본향인 신에게로 회귀하게 되는데, 회귀되고 나면 인간의 영혼과 신의 영 사이에는 구별이 없는 혼연일체를 이룬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마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지만 그 떨어지는 빗방울과 커다란 바다는 다른 것이지만 일단 그 빗방울이 떨어져 바다로 돌아가고 나면 나뉠 수 없는 하나의 물이 되는 것처럼, 우주의 충만한 그 신에게로 회귀할 존재가 인간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영지주의의 사상’은 건전한 이 ‘신화의 교리’와는 별도로 중세 후기 ‘신비주의’로 이어지게 되고, 여기서는 이것들이 아주 발달된 형태로 나타나서 결국 인간의 본질은 신이요, 그리고 인간은 육체의 껍질에 있는 동안에만 신과 구별되고 그리고 이것을 털어버리고 난 다음에는 인간의 영혼이 신과 합일을 이룬다는 이러한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후기 근대주의에 발견되는 인간의 신화의 교리나, 혹은 뉴에이지 사상에서 말하는 인간과 신의 합치와 같은 이 모든 사상들은 바로 이 신화의 교리가 이방의 철학, 미신들과 함께 엮어져 그릇된 형태로 발전되어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의 사고에 맞게끔 그렇게 정착이 된 것입니다.
2. 올바른 이해
그러나 올바른 이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러한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의 심오한 교리를 세운 이레네우스(Irenaeus)에게 있어서도, 그리고 이레네우스(Irenaeus)에게 영향을 받은 아다나시우스(Athanasios)라고 하는 정통적인 교부에 있어서도 이러한 식의 신화에 대한 해석은 기독교의 근간을 흔드는 배교적이고 위험한 사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즉,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을 가장 닮았고,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생각나게 하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 인간의 영혼을 능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고, 또 죄로 타락한 이후에 그 인간의 더럽혀진 영혼이 세례와 중생과 하나님의 진리와 성령의 작용으로 깨끗하고 청결하게 되어 주님을 지성으로 보는 단계에 이르고, 마지막에는 신의 성품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사실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신의 성품에의 참여는 본질로서, 존재론적으로, 신의 본질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피조물과 창조주 하나님 사이의 존재의 질적 차이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이교적인 교리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변모해도 하나님의 본질과 같아질 수 없고, 하나님은 본질과 존재에 있어서 인간의 영혼과는 구별되는 전적인 타자라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정통적인 교부들은 이 사상을 신의 본질 속에 함께 섞여 들어가는 참여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시 인간에게 부여하신 인간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참 형상을 완전히 회복한 상태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신적 본질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을 완전하게 닮은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영혼을 볼 때마다, 그 인간의 존재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는 결코 바라볼 수 없는 그러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이 바로 이 신화의 교리에 대한 정확한 해석입니다. 죽을 때까지 절대 잊혀지지 않을 비유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것을 가슴에 새기면 이 교리가 명쾌하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쇳덩어리가 있어요. 추운 겨울날 바깥에 시커멓고 차디 찬 쇳덩어리가 있어요. 그런데 이 쇠를 방 안에서 큰 용광로에 넣고 불을 지폈어요. 그랬더니 이 쇠가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합니다. 그 상태에서 더 뜨겁게 열을 가하면 이 쇠가 거의 흰 빛을 내기 시작하면서 녹아내리기 시작합니다. 이게 섭씨 1250도입니다. 여기에서 녹고 드디어 이것이 흑연그릇에 담긴 액체가 되었습니다. 출렁 거리면서 시뻘겋다 못해 하얀 빛깔을 띄면서 열을 내요. 어떤 물건들을 가까이 대기만 해도 확 불이 달아서 사라져버려요. 자, 그러면 여기에 액체 상태로 이글거리는 이 쇠는 바깥에 있는 차갑고 딱딱한 쇠가 갖지 못한 새로운 속성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즉, 뜨거운 열과 눈부시게 쏟아내는 빛입니다. 이 눈부신 빛과 무엇을 갖다 대어도 불타버리는 이 뜨거운 열은 바깥에 있는 이 쇠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는 이글거리며 출렁거리고 하나는 시꺼멓게 굳어있어도 ‘쇠’라고 하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는 것처럼 우리의 신화의 상태가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오늘날도 성화에 있어서 이 지상에서 완전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완전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완전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후, 두 번째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완전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죄와 모든 정욕에 대해서 완전히 초극한 상태를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두 번째 축복인 성령의 세례를 못 받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교리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표현에 의하면 고약한 교리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우리에게 이렇게 인간이 완전하게 되는 상태는 이 지상에 우리가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 이루어 질 것이 아니라 영화의 날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실 그 때에 우리의 모든 육체가 부활하고 우리의 영혼이 완전하게 될 그 때에 덧입게 될 영광의 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덧입어 완전한 존재가 될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서 말하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한다’고 하는 이것은 본질적으로, 질료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신의 성품과 혼연일체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의 효과에 참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있는 교회의 지체된 상태에서도 부분적으로 누리고 있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살아가던 때의 인간과 거듭나고 그리스도 예수를 뜨겁게 사랑하는 온전한 영적인 연합의 상태에서의 우리의 모습과는 비교될 수 없는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진리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이 진리와 성령으로 말미암는 그 변화가 너무나 놀랍기에 사도바울은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미래의 영화의 상태에서 이루어질 신화에 비하면 겨우 시작에 불과하고 그것의 맛보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다나시우스(Athanasios)는 이러한 교리적인 사실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인간처럼 되셨으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입니다.
C. 인간을 구원하시는 계획
그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계획은 바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의 극치는 신화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창조된 상태였고, 그의 지성은 총명하여 하나님과 자신과 그리고 이 모든 세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고 그의 정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피조 만물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정서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의 의지는 올곧고 하나님의 모든 뜻을 기쁘게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께서 이 구속을 통해 우리를 마지막 신화되게 하실 때에 인간이 도달할 상태는 타락하기 전 아담과 하와가 누리고 있었던 그 완전한 상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 높은 정도로 하나님이 우리를 완성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은 인성과 신성의 연합이지만 한 인격으로 이 세상에 사셨으니 그분의 성육신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께 신화의 은혜를 입게 될 때 마지막에 어떤 영광스러운 모습이 될 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가장 찬란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 부활의 몸을 입고 제자들을 찾아오신 그 광경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인격으로서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으심으로 우리에게 완전한 인간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었다면 영화의 상태에서 신화되게 될 우리 성도는 인간의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하나님의 신의 성품의 효과에 참여하게 될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예수 닮은 사람으로 바꾸어 놓아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모시킬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 타락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여전히 우리들이 유지하고 있을 그 상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찬란한 신의 성품의 효과에 참여하는 자로 만드시기로 작정하셨는데, 이것은 오히려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구원하는 은혜의 사역을 통해 우리를 더 찬란한 영광으로 변모시킴으로써 당신의 연합과 사랑의 교제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 지를 구원의 경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하신 완전한 이 세상에 반역하고 죄를 지은 것은 인간이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짓고 반역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죄가 들어오지 않았을 경우보다 더 찬란하게 드러내심으로 구원하시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름다움을 창조하신 이 세계를 통하여 더욱 보실 수 있게 되셨으니 이것은 천상의 세계에서나 지상의 세계에서나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머리가 되실 때에 또한 아주 특별하게 인간들의 머리가 되어서 당신에게 모든 인간들을 영적으로 연합시키시고 성령 안에서 그들을 사랑으로 교통하게 하실 터인데, 그 때까지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두셔서 당신 자신이 선취적으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그 미래에 나타나게 될 영광스러운 상태의 일부를 이미 앞당겨 경험하고 맛보고 삶으로서, 미래에 도래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의 상태를 미리 누리게끔 작정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믿는 자의 특권이고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교회의 특권인 것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 세상의 인간들에 대한 쏟아 부어지는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신랑되신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이 혼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의 신부이신 교회에게 쏟아 부어졌고 거기에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바로 그 사랑의 효과를 누리게 되었으니 우리가 개인적인 지평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과 영적인 은혜는 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어주신 그 신비적인 연합 속에서 쏟아부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의 결과인 것입니다.
III. 신화(神化)에 이르는 길
이렇게 영광스러운 상태가 신화의 상태라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이 신화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요? 그래서 오늘 이 신화에 이르는 길을 사도는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신화는 점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한 순간에 주님의 능력으로 들어가는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영화의 상태에서 신화되게 하시는 일에 있어서는 우리가 주님께 보태어 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 때가 이르기 전까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렇게 신화될 자기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그러한 영광스러운 존재로 나타날 것을 소망하며 그 미래의 운명에 합당한 삶을 삶으로써 아직까지도 죄가 남아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가 될 것을 우리에게 지정하셨습니다.
A.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함
이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라고 하였습니다. 노력을 함으로 신화에 이른 것이 아니지만 그런 영광스러운 운명이 하나님에 의해 작정된 신자는 이 세상에서 그 소망을 바라보며 살 부르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운명에 참여하게 될 성도는 반드시 그렇게 살고자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썩어질 것’이라는 표현은 결국 이 세상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들은 완전했고 이 세상은 썩고 망가지고 불완전하고 파괴되어 가는, 그런 결핍이 있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이후로 이 만물들은 시간에 종속되어 원래의 완전성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육체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래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저작 속에서 이러한 위대한 말을 남겼습니다. ‘공간은 우리에 인간에게 끊임없이 사랑할 것을 제공하지만 시간은 그것을 빼앗아 가버린다’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할 대상을 제시해 주지만 시간은 그것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바로 썩어지는 것들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그 썩어질 것들을 향하여 우리가 사랑을 바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찢어져서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적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이 사랑의 성품은 영원하고 가치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그 가치 있는 것들을 따라서 합당하게 사랑해야 하는 질서를 따라 종속적으로 사랑하도록 주신 능력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잠시 있다 사라져 갈 것들을 영원히 있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사랑하게 될 때에 그 모든 불행이 바로 그런 그릇된 사랑의 질서에서 시작되고 인간의 영혼에는 어두움이 내리고 지성은 눈멀게 되고 마음은 찢어지고 의지는 분열현상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들이 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사랑하지만 아직은 우리의 사랑이 남아있는데 시간은 사랑하는 것들을 소멸하여 없는 것들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에게 사랑은 남았는데 사랑할 대상은 사라졌을 때 그 사랑은 없는 것들을 향한 사랑이 되는 것이고 그 없는 것들을 향한 사랑이 바로 인간의 악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서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는 이 인간들의 쓰레기 같은 삶과 여기에서 비롯되는 피비린내 나는 경쟁과 물고 뜯는 그 아비규환의 비극은 바로 이러한 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피하지 않고 찾아가는 인간이 빚어내는 끔찍한 광경인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런 삶에서 돌이켜야 할 존재들이라는 것을 사도는 오늘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세상의 썩어질 것’이라는 의미는 결국 완전한 이 세계를 파괴한 장본인이 ‘정욕’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정욕은 자기를 중심으로 살게 하는 모든 욕망의 근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이 ‘정욕’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넓은 의미로는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게 하는 욕망의 뿌리이고, 좁은 의미는 성적인 욕심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는 전자의 뜻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아가는 그 삶은 결국은 끊임없이 이 모든 세상의 것들을 썩게 만들었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의 뿌리였으니 다시 그 사랑으로 돌아가면 그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도전을 두 번 세 번 자신의 삶 속에서 되풀이 되게 되고 이것은 집요하게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람, 요한 칼빈 선생은 자기의 글 속에서 이런 마음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떠함을 가장 잘 압니다. 만약에 우리의 마음이 순수하지 않다면 우리는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알고 우리의 양심이 우리의 마음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잘 될 때에는 언제냐 하면 환란을 당할 때도 아니고, 주님이 축복을 물 붓듯 쏟아 부으실 때도 아닙니다. 마음이 찢어지지 아니하고 하나가 되었을 때는 죄악에 뒹굴다가도 기도가 되고 하늘의 은혜 속에 살다가도 기도가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마음이 하나가 된 상태에요. 염려와 근심과 욕망으로 갈갈이 찢어지게 되면, 마치 찢어진 악기로 나팔을 부는 것처럼 그렇게 소리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또 다르게 선택할 수 있는 삶은 없는 것입니다. 그 다른 것이 있고, 쉽게, 편안하게 세상에서도 설탕이 되고 하나님께도 빛이 되는 그런 제 3의 희생이 없는 신앙의 길이 있다고 가르칠 때 그 때부터 그것은 우리를 거짓된 길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옳게, 곧게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까? 왜 그 분이 33년이나 결핍과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 오셔서 종 취급을 받으며 가난과 결핍 속에서 수치스러운 삶을 사셨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결국은 우리 모든 사람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를 그냥 버려두어서는 이렇게 이 세상에 썩어질 것들을 좇고 자기를 주인 삼는 정욕을 따르는 이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에, 친히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나를 주인 삼은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이 근본적인 욕망의 뿌리는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뼛 속 깊이 박힌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이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 은혜의 보좌로 향합니다. 아직 죄 짓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살 수 있는 견인의 은혜를 부어주시고 죄를 짓고 실패한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방식으로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데 지난 죄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해 주시는 것과 다시 성령의 은혜로 힘을 주셔서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의 주인된 삶을 버리고 주님을 주인 삼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신자의 타락 중 가장 본질적인 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 이 은혜의 구원을 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신앙의 모든 타락과 물러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되실 때에 그런 영화의 상태에서 신화 될 존재들이 여러분이니 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피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정욕으로 가득 찬 마음을 주님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이 세상에서 단 하루를 살아도 세상의 유혹 속에서도 나를 조롱하는 모든 소리를 들으면서도 주님 앞에서 이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도록 그 영광스러운 다시 머리되심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B. 7중(七重)의 덕목으로 나아감
그리고서 사도는 칠중의 덕목으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믿음의 덕을, 덕을 가지고 있는 그 위에 날카로운 지식을, 지식을 가지고 있는 그 위에 절제를, 절제 위에 인내를, 인내 위에 경건을, 경건 위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 위에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더함으로써 모든 교회의 지체들이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붙어있고 또한 우리는 그 안에서 사랑의 연합을 누리며 사는 존재들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C. 그리스도를 아는 은혜와 지식이 필요함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신화의 길로 나아가기 까지 이 땅에 아직 순례자로 머물고 있는 동안에는 그리스도를 아는 은혜와 지식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 교회의 한 지체로 남아있는 동안에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목양을 통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는 은혜와 그리고 지식에서 계속 자라가야 하고, 자기가 알게 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나누어 주어 그들의 마음의 어두움이 물러나고 빛이신 그리스도가 그들의 마음에 살아있게 되도록 그렇게 여러분이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화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성도의 삶입니다.
IV. 결론: 신의 성품에 참여할 자로서 살아감
근본적으로 이 세상은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이고, 세월이 흐르며 인간의 풍조가 수없이 바뀌어도 본질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하고 두 손에 못과 망치를 들고 그리스도를 못 박았던 이 세상의 정체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렇게 이 세상에서 썩어질 모든 것들을 죽는 세상에서 썩어질 것들을 피하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되실 그 날을 바라보며 사는 우리의 순례자의 삶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본질적으로는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참 교회의 지체로, 신화의 영광스러운 상태를 바라보며 살아갈 때에 우리는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때 보다는 핍박과 조롱을 받을 때가 더 많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아들의 신부되신 교회를 향하여 마지막 때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신화될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종종 힘겹고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때까지 우리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현재적으로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은혜를 주심으로 주님과의 아름다운 연합의 관계 속에서 신화의 영광 중 일부를 미리 맛보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신앙의 정절을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서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그대들은 이 진리를 가슴에 깊이 새기고 신의 성품에 참예할 자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