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의 품격
(아삽의 마스길)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시78:1)
I. 본문의 배경
마스길은 샤카르라는 동사에서 나왔고 마스길은 지혜롭게 된다는 뜻이다. 이 시는 수많은 사람들을 자기에게 초청하는 내용이고 여기서 말하는 만민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까지 포함한다. 신앙생활을 하는 지혜가 아니라 인생을 사는 지혜이고 이 지혜는 신앙에서 얻어진다. 이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허락하신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신 목적은 사람을 사람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타락한 인간이 참된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만 창조의 목적이 부합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지평이 인생 전체에 확장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신앙에서의 인생과 세상에서의 인생이 다르다면 이중적인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II.그리스도인의 사명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는 것이다.
1. 사랑의 사람으로
인간이 경험하는 사랑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까리따스(caritas) 즉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이다. 이것은 교통적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꾸삐디따스(cupiditas), 곧 인간의 육욕적 사랑이다. 이 사랑은 자기 안에 갇혀서 사랑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미움이 나간다. 사랑은 의지적 헌신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향해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어 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게 된다. 인간이 많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지만 한 사람이라도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이것은 사랑의 교통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이 고통가운데 있는 궁극적인 원인은 죄 때문이고 이 죄에서 나타나는 증상이 고통인 것이다. 이러한 죄에 대한 궁극적인 처방은 하나님의 구원이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어두움에 잠겨있고 우리의 지성은 눈 먼 상태가 되어 결국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알지 못하고 허무한 다른 것에 몰두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 모든 것을 깨어나게 하기 위해 빛이 필요하다.
2. 가장 큰 사랑: 지혜의 빛을 나눠 줌
그러므로 지혜자의 삶은 이 빛을 나누어주는 삶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양식이 사랑이고 현자의 삶인데 현자의 조건은 그가 무엇을 하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빛의 소유의 유무이다. 지혜의 빛이 비추게 되면 지식으로 말미암아 길이 보인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사명은 빛을 비추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현자이다. 기독교는 모든 철학의 완성이다.
III. 현자로서의 품격: 교양(doctrina)
현자에게는 현자로서의 품격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품격은 교양이다. 즉 지적 품격이다.
지혜가 많아도 학문과 지식이 없을 수 있다.
1. Sapientia
지혜는 시간을 초월해서 통용되는 가치이다. 그래서 3500년 전에 씌어진 성경을 지금도 읽고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가 계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학습, 끊임없는 사유, 실천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신앙이 교회 안에 묶이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게 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바로 이것이다.
2. Scientia
이것은 지혜에 도달하기 위한 도구이다. 정보와 같은 지식이 아니라 소화된 지식을 의미한다. 지식은 경험을 동반한 앎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 백성다운 정체성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 지식을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3. Sapientia 와 Scientia의 목표
a. 하나님을 사랑
하나님은 지적인 동의 뿐 만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기를 원하신다.
b. 이웃을 사랑
사랑이 교통적이라는 면에서 보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이웃을 향한 사랑을 할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영성의 핵심이다. 이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에 반영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통해서 사랑을 발견했고 그 사랑을 여러 사람에게 펼쳐 보여주었다. 이것이 그의 삶의 핵심부에 있었다. 왜냐하면 성경의 핵심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다면 그는 진리를 안다고 할 수 없다.
IV. SAPIENTIA의 보고: 성경
성경은 금이 나는 광산이고 이 땅의 흙과 먼지에도 금이 섞여 있다. 강바닥에도 금을 머금은 모래가 있다. 만약 금을 캐러 간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마찬가지로 지혜의 보고가 성경인 것이다.
1. Veritas룰 통해 sapientia를 얻음
성경 속에 있는 진리가 사람들에게 이해될 때 우리는 지혜를 갖게 된다. 진리를 통해서 지혜를 얻게 된다. 인간이 타락한 이래로 많은 지혜를 주셨고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었으며 지혜의 최고봉이 예수님인 것이다. 그는 진리요, 생명이요, 길이다. 이 모든 모본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이다.
2. Ratio를 통해 Veritas를 인식함: 성령의 역사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성과 총명을 주셨다. 이성을 통해 인식함으로 총명을 얻게 된다. 인식하고 이해하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 필요하다. 우리의 영혼에 세 기능이 있다. 성령의 역사의 은혜가 있으면 지적 활동이 순수하고 활발해지고 애성 즉 사랑하게 되고 의지로 나타난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의 광명이다. 이 광명은 원초적인 광명이 아니다. 원초적인 광명은 진리이다. 이성의 추론하게 하는 것은 기능일 뿐이고 지혜가 있을 때 총명에 불을 켜는 것이다.
3. 성경을 배우는 목적
a. mens: 지식
구약은 여호와 경외를 강조하고 있다. 신약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사랑을 포함한다. 경외사상의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그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다.
b. amor: 사랑
생명, 즉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알고 그를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다. 그것이 지식이고 사랑인 것이다. 성화는 저를 아는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는 것이다. 영화는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이다. 지식의 완성이며 사랑의 완성이다. 종말은 지식과 사랑이 가득한 것이다.
c. uoluptas: 실천
선지자로 오신 예수님은 죄 많은 백성들을 사랑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는 사랑으로 통치하셔서 사랑의 질서를 만들어 낸 것 이다. 지식을 가르쳐주시고 사랑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이것이 선교이며 목회이다. 이것은 에베소서 4장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 지면서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고 사랑에 자라가는 것이며 예배가 바로 그것이다.
V. 성경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는 7 자세
1. Timor(두려움) cognoscere eius uoluptatem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성경은 자연적 표지가 아니라 상징적 표지로 이루어져 있으니,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원저자이신 하나님 자신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누구도 그분의 도움 없이 성경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성경은 진리의 보고이며, 이것을 통해서 인간은 영원하고 무한한 지혜에 접하게 된다. 성경해석자는 먼저 이러한 진리가 자기 안에 있어 사고함으로써 자신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의 영혼이 거기로 인도되지 않고서는 진리를 파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일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을 연구하는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두려움을 갖는 것이다. 이 두려움은 두 가지로 나뉘어 진다.
첫째로는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생명이며, 자신은 단지 사멸할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은 완전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며 자신은 단지 비천하고 부패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더욱이 자신의 모든 존재와 행동이 그분 앞에 낱낱이 드러남으로 그분의 낯을 피하지 못하며 자기가 행한 바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하나님 앞에서 성경을 연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다만 지극히 하찮은 존재일 뿐임을 지각해야 한다.
둘째로는 성경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보이신 기록으로서 거기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이 성경 연구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성경 연구는 여타의 학문 연구와 유사한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성경 연구는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높은 상위의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 그렇게 발견한 진리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욱 알아가고 그의 뜻을 이해하는 데 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욱 잘 알아가야 할 이유는 그분을 단지 지적인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고 그의 뜻을 잘 알아서 그분을 섬기기 위함이다. 성경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의지를 더욱 잘 알기 위해서는 그러한 뜻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일이 필수적이다. 이 두 가지는 항상 함께 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알아가는 것은 그의 행동이나 의지를 이해함으로써 촉진되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사람됨을 이해하면 어떤 상황에서 그의 뜻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런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언제나 그에 대한 책임이 뒤따른다. 따라서 어차피 그렇게 순종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나 보자고 하는 것은 경건한 신앙심이 아니라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런 자들에게는 성경 속에 담긴 진리가 잘 깨달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인 성ㄱ셩을 대할 때는 그 뜻을 알기만하면 그리 행할 것이라는 복종의 자세와 그 뜻을 알았을 때 그것을 행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진리를 대하여야 한다.
2. Pietas(信心) mitescere et credere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을 동반한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선하심에 대한 경건한 신뢰이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지만, 우리의 연구를 통하여 성경에 담긴 모든 진리를 다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성경의 원저자이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무리 많이 성경을 연구할지라도 결코 그것을 통하여 진리를 아는 지식에로 인도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부지런한 연구와 성경 진리에 대한 사랑은 단지 그것을 깨닫게 하는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지 아니하면 진리를 알 수 없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신심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 이 성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이 신심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로, 성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 앞에 마음이 온순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때에는 그것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아직 잘 알지 못할 때에는 잘 모르겠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성경을 더 연구하여 그것을 다르기보다는 자기 생각을 따르는 것이 더 분명하고 쉽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쉽게ㅐ 떨어지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경솔함은 항상 어느 정도의 단호함을 내포하는데 이는 불경건한 고집이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얕잡아 보는 경거망동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성경을 접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쉽고 명백하게 기록하셨다. 그러나 성경의 의미들을 모두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은 아니니, 만약 모든 진리를 너무나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인간들은 성경이 더욱 깊고 심오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쉽게 얻은 지리이기 때문에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경멸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좌절하기에는 쉽게, 오만하기에는 어렵게 성경을 기록하셨으니 부지런 히 성경을 연구함으로 그 의미를 깨닫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성경에서 분명한 의미가 발견되면 즉각적으로 거기에 순종하지 못하면서 살아온 자신의 죄를 참회하여야 할 것이며, 새롭게 발견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그렇게 행하며 살 수 있도록 순ㅌ종하여야 할 것이다. 혹시 왜 하나님이 그런 명령을 하시는지 이성적으로 모든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으로 그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믿고 신실하게 따르는 것이다.
R더 ㅓ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다. 주님이 말씀하실 때 양순해 지는 것이다. 성경이 이해가 안 될 때에도 이것을 통해 말씀하시는 존재와 선함을 알기에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을 말씀하실 때에도 그 말씀 안에 무릎을 꿇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 책망을 받을 때 자신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진리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3. Scientia(知識) praeccepta vivendi et regulae ceredendi
객관적인 소화되지 않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소화가 된 지식을 말한다. 이 지식은 선한 의지를 이끌어 낸다. 이 지식은 삶의 교훈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인가를 아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살아가고 있음 혹은 살아감의 교훈이다. 삶의 방식을 아는 것이다. 지식을 가지고 실제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이것이 삶의 양식인 것이다. 우리가 좋은 교사가 되려면 모든 삶의 방법에 대해서 가르침의 풍부함을 가져야 된다.
4. Fortitudo(勇氣) reddere ae sunt Dei, Deo
하나님을 것을 하나님 자신에게 돌려드리는 것이다. 부자 청년에 대한 비유를 보라. 마땅한 도리임을 분명히 앎에도 용기가 없어서 돌려드릴 수 없다면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그 의지를 보여주셨고 내 자리를 찾을 수 있다면 더 깊은 진리 가운데 나갈 수 있으며 만약 그 가운데 갈등이 있다는 것은 정리되지 않는 부단한 욕망 때문이다. 난관을 만난다는 것은 그것에서 예수의 생명을 깊이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용덕을 잘 발휘한 대표적인 사람이 삭개오이다.
이러한 자세가 없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서도 진리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5. Consilium(勸告) consilium misercordiae
하나님으로부터 자비의 권고를 받게 된다. 용기를 내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나면 하나님이 자신을 권고하시는 음성을 듣게 된다. 이때 지식으로 추구하던 것이 용기로 실천되고 삶의 교훈들을 보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 가를 이해하게 되고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보게 될 때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 은혜를 사모하게 되고 거기에서 용덕이 나오게 된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비참함에 이르게 되고 주님의 자비와 음성에 의지하게 될 때 사랑의 경험을 동반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한다. 그 후 죄인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6. Purificatio(淨化) purgere oculum et uidere deum
다 돌려드렸음도 불구하고 여전히 욕망에 붙잡힐 여지가 남아 있으므로 정화가 필요하다. 소명은 내적으로 솟아내는 심적 강제력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이러한 소명을 느끼고 사역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욕망은 여전히 남아 있고 욕망을 품게 되면 진리를 볼 수 없게 된다. 죄를 품으면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영안을 소유할 수 없다. 정화는 진리를 볼 수 있는 영혼의 지적 자극이다. 모든 것을 알고 보시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모두 드러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할 때 자신 안에 죄악이 있지만 그 죄악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몸에 암 세포가 있다면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발견하여 떼어내고 싶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것이 하나남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이다.
7. Sapientia(叡智) pacatus trinquillusque perfruitur
이것이 실로 사람을 지혜롭게 하는 것이고 지성인이라고 한다. 고상한 덕목을 따르는 사람이다. 이것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 성경을 공부하는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완전한 평화로운 평정을 누리게 되고 그것을 즐기게 되는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쉼이 바로 평정이다. 성경을 통해 마지막 누리는 특권이 바로 평정이다. 힘닿는 데로 주님의 일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주님이 부르시면 기쁨으로 주님께 가는 것이 신앙의 유익이다.
VII. 결론과 적용
오늘날은 성경을 배우고 가리키는 것 자체가 사역을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 사역의 궁극적인 목표는 진실한 신자로 만들어 참으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참된 사람으로 세워주는 것이다. 창조의 목적에 대한 깊은 소명감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살게 하는 것이다. 무엇을 하며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그 삶 가운데 빛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수에 달려 있지 않고 진리를 굳게 붙잡고 세상 곳곳에서 빛으로 살아가는 것에 있다. 빛이 그리스도에게는 어두움이 기회인 것이다. 시대를 보면서 원망하거나 좌절할 것이 없이 그것을 기회로 보고 빛으로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이 길이요 목표인 진리를 향해 나아갈 때 생명을 충만히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진리를 깨달아 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수단이다. 우리가 진리를 사랑하며 살아가지 않는다면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고 이것의 최대 적은 자기 사랑이다. 참된 지혜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진리는 성경 안에 있고 진리를 소유함에 있어서도 빛으로 나타나지 못한다면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것을 들고 있다고 진리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화하여 빛으로 나타내야 한다.
<질문 1. 삼위 일체>
맨 처음에 하나님이 계셨다. 이 성부에게서 성자가 나셨다. 나시는 방식은 피조물을 창조하는 것처럼 만드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신비이다.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나신다. 이 세 위(位)는 인격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격은 셋이다. 그러므로 3 persona in Uno이다. 인격은 서로 교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기도 나눌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영원 속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네모 안에 다시 한 번 네모를 그릴 수 있을까? 나중에 그린 네모는 어디에 있는가? 두 번 그렸다면 두 개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2차원 밖에 상상이 안 되는 사람에게 3차원을 설명해도 이해 할 수 없다. 영원은 시간 세계가 없다. 성자는 성부에게 나셨고 성령은 성자와 성부에게 나셨지만 성자 혼자 계신 때도 없었고 성부 혼자 계신 때도 없었다. 처음부터 함께 계신 것이다. 삼위 하나님은 셋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자가 홀로 완전하신 하나님이다. 3 신(神)이 안 되는 이유는 항상 동떨어져서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함께 운행하신다. 신적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시다. 일하고 역사 하실 때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일체가 된다. 창조하실 때 삼위 하나님이 창조하시는데 성부가 주로 관여하시고 구원에 대해서는 성자가, 믿음을 주실 때는 성령이 주로 관여하신다. 우리가 사랑을 많이 느낄 때에는 성부의 위와 교통하고 있고 은혜를 많이 느낄 때에는 성자와, 위로를 많이 느낄 때에는 성령의 위와 교통하고 있다.
문 2. 성경 공부를 할 때 지식으로는 알아가지만 가슴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느끼게 해주어야 할까?
교사 리바이벌을 참조.
진리를 잘 가르쳐주는 것은 이성적으로 알게 할 수 있지만 회심은 성령의 역사이다. 지식으로 연마해서 잘 가르칠 뿐만 아니라 주님을 끊임없이 의지하고 확신가운데 나아가야 한다.
문 3. 예수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과 예수 죽음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죄와 은혜의 지배를 참조.
문 4. 은혜는 의지를 초월하지 않나? 말씀 중의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그의 의지를 초월하지 않으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바울이 신적인 강제력을 느꼈을 때 바울이 가진 의지력을 부셔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끌어 낸 강력한 은혜라는 뜻이다.
문 5. 선교사들의 약한 부분은?
지성적인 부분
성경을 사유하는 부분
선교사에 의해 씌어진 깊이 있는 영적 서적들의 부재
고집
분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