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보내심은
2005.12.25 성탄절 예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4:9-11)
I.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배경은 참된 기독교 신앙을 버린 사람들을 경고하는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어느 때에든지 하나님께서는 종종 교회가 진리가 아닌 것들도 듣게 하셔서 참으로 하나님을 믿게 하시고 그 진리 안에 속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그 기회에 골라내시기도 합니다. 그런 그릇된 이단의 가르침이 교회에 다가올 때면 진리를 붙들고 믿음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진리의 소중함을 알고 더더욱 주님을 붙들게 되지만 진리의 싫증이 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들은 자신의 그런 마음과 영혼의 상태를 여지없이 드러내게 되어 이단에 빠지게 되는 것이니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피해자라기보다는 진리이신 주님을 끝까지 붙들고 애착하는 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과 사랑이 없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교회의 큰 해를 끼쳤던 이단은 영지주의, 그노시스주의라고 하는 영지주의의 이단이었습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올 때부터 참 사람이시며 또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그냥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인간이었을 뿐이며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 계신 성자가 잠깐 그 육체와 합쳐졌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예수는 다시 떠나가셨으니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계셨던 예수는 참 성자가 아니라 성자처럼 보이는 인물이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의 믿음이 정말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사랑하는 신앙일 수가 없었으며 눈에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과 삶을 통해서는 그 진리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혼란이 있었고 이 이단으로 말미암아 입은 교회의 피해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이단을 통해 더더욱 복음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사랑하게 되었지만 주님을 믿는 일에는 싫증나고 주님을 아는 지식에 피곤해진 사람들은 이단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이 요한 사도는 자신이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듣고 만져본 증인으로서 예수님은 참 사람이신 동시에 참 하나님이셨으며 그분의 가르침과 그분의 행하신 모든 흔적들은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진리였다고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호소하면서 이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논증하는 바는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시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그릇된 가르침으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니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사람을 향한 사랑과 달라서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게 되면 그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것들을 모든 사람들을 그의 합당한 질서대로 사랑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라는 논리가 바로 거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형제를 향한 사랑이 참 하나님의 가르치시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서 비롯된 사랑이고 따라서 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교통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사도의 논리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모든 형제를 향한 사랑이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박고 있으며 그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에 의해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났다고 하는 것을 오늘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가슴 벅찬 언어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통해서 가장 잘 드러나게 되었다고 논증하고 있습니다.
II. 아들을 보내심은
A. 살리려 하심
사도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세 가지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우리를 살리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혀 보내신 것은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들이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죽어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인생을 살다가 너무 힘든 시기를 지날 때 내가 지금 살고 있지만 사실은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하고 있을 때 그래서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 때 이렇게 말합니다. 또 우리가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래서 비참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이렇게 말합니다. 요즘 내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지. 요즘 내가 살지만 사실은 사는 게 아니야. 우리도 흔히 그런 말을 사용합니다. 인간이 사는 것은 짐승이 사는 것과는 다릅니다. 정말 목숨이 붙어있음으로 그것이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무엇을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자신이 이 세상에 창조된 목적인지를 알고 그리고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공급받으며 사는 그것이 정말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이 목적 없이 창조된 것은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종이 소리를 내기 위해 존재하고 이 시계는 시간을 알리기 위해서 존재하며 컵에 이 뚜껑은 컵 안에 먼지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수건은 몸에 묻은 것을 씻어내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인간이 사물을 만들 때도 무엇인가 의도한 목적을 가지고 사물을 만든다면 그런 사물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이 아무런 의도와 계획이 없이 창조하셨다는 것은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동의할 수 없는 허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다면 그 목적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소중하고 귀하게 생각하시고 좋아하실 것이고 그런 의도와 목적을 따라서 살지 않는 사람은 싫어하시고 마음아파하시고 고통스러워하실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종을 치게 하기 위해서 이 종을 만들었는데 소리가 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이것을 여기에다가 올려놓지 않을 것이고 의도를 가지고 소리를 내기 위해서 종을 만들었는데 종이 소리가 나든지 안 나든지 개의하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보다도 더 하나님이 깊은 뜻을 가지고 만든 인간이 목적과 의도가 없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논리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었다면 그 목적과 의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나 그렇게 안 산 사람이나 하나님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신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류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난 후에 많은 사람들은 인생을 참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여러분 앞에 서있는 이 목사도 언젠가는 불신자였습니다. 저는 전혀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고 한 시대에 태어난 그냥 평범한 젊은이에 불과했습니다. 내년이면 제가 회심한지 30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30년 이전에도 한 번도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높은 지위를 누리면 진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철들고 난 후 청소년 시절 이후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인생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참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를 가지고 저도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저와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고민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찾았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진리를 모르고 그래서 참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모르며 사는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사유하는 것이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렇게 고통스러우면서도 그런 참된 인생의 뜻을 찾으려고 몸부림쳤던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죽어있는 행복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살아있는 불행한 사람이 되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산다고 하는 것은 먹고 마시고 목숨을 유지하는 동물적인 삶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 일을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면 아마 우리가 이 세상에 가장 어리석은 자들 중에 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수많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현자와 그리고 지혜를 찾는 철학자들이 고민했던 문제는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했던 이유는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참으로 눈에 보이는 이 가시적인 세상의 유한함을 딛고 잠시 살지만 어떻게 하면 인간이 영원을 향해 살 수 있을까? 그 고민이 그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가 무엇인지를 찾게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진리를 소유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을 인해서 우리들이 이렇게 기뻐하는 이유는 그렇게 사람들이 정말 살아있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알고 싶어 했던 그 진리를 하나님이 직접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치이면서도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이치를 탐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뛰어난 지성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장 단순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으니 철학자들이 맞먹는 뛰어난 지성이 없는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어린아이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그분에게 비추는 진리의 빛을 통해 참 인간이사는 길이 무엇이고 자신이 왜 태어났으며 어떻게 살아야지만 행복할 수가 있는지를 모두 쉽게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예수님이 오신 것을 그렇게 기뻐하는 이유는 그 진리 때문에 우리 모두가 이제 살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렇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눈에 보이는 진리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이제는 뛰어난 지성이 없다고 할지라도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마다 진리를 따를 뿐 아니라 생명 안에 거하고 그 길 가운데 걸어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지성적으로 뛰어나고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지성적으로 모자라도 주님을 신실하게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 훨씬 더 살아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이 성탄절에 가슴에 새길 때 우리는 두 가지 현실이 우리의 마음을 에워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진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헛된 욕망과 이 세상에 바란들 뿐 그들은 진리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인하여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님을 더 많이 알고 그 진리에 합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자유에 있고 그 자유는 진리를 아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니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지라” 하셨던 것입니다. 왜 그러면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아는 것이야말로 참 자유를 누리는 길이고 그래서 참으로 인간답게 행복하게 사는 길인데도 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이 진리를 아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진리를 알려고 노력하는 것만 가지고는 진리를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진리를 열애하는 사람은 지식에 대한 열망에 마음이 뜨거워지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기를 원하는 지성의 욕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끊임없이 그 진리에 합치시키는 자기 복종의 순종을 통해서만 이 진리에 대한 앎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지만 자신의 삶을 복종시켜 그 진리에 합치시키려는 실제적인 삶의 실천은 많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추루한 자기 사랑에 붙들린 많은 신자들이 얼핏 주님의 진리의 빛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더 깊이 진리를 알려고 하지 않고 더 그 진리를 알지 않기 때문에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진리에 합치시키려고 하는 실천적인 헌신이 없기 때문에 마음으로 진실을 사모하지만 삶으로는 진리를 붙드는 희생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거짓과 허위의 삶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됨으로서 신자가 되었는데도 이상하게 불신자 때보다 더 마음에 갈등이 많은 모순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진리가 우리를 살리게 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진리를 알려고 하면 알려고 할수록 우리가 이미 알게 된 진리에 우리의 전 삶을 합치시키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모두 드려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진리를 점점 더 알아갈 것이고 그 진리로 인하여 우리는 자유로움을 누릴 것입니다.
또 하나 마음에 에이는 것은 아직도 이 세상에는 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 때문에 이 기독교가 이 세상에서 유일한 종교가 되었고 이 기독교라고 하는 이 종교는 인류역사가 참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추구해왔던 모든 지성적인 몸부림에 최종적인 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신앙을 통해서 인생의 이치를 배우는 것이 없는 종교생활도 의미가 없고 인생의 이치는 부지런히 탐구하려고 하지만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존경의 경배의 정신, 즉 종교의 정신이 없는 그 모든 지혜의 추구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힘써야 할 것은 아직까지도 이 빛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참으로 인간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모르고 방황하는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인간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들을 위한 최고의 섬김은 한 끼의 식사나 그리고 한 벌의 의복이 아니라 진리를 그들에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그들이 인간으로서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그들의 어두움을 밝혀 우리와 같이 그 어두움 속에서 빛으로 나오도록 만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니 이 일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하신 일이며 우리는 바로 예수님의 그 사역의 일을 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더 많은 교회들이 세워져야 하고 교회는 거기에 다가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 모든 지식들이 제공할 수 없는 진리의 참 빛을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당에 이런 진리가 울려 퍼질 때 이 교회당 안에는 더 많은 영혼들이 가득 차서 그래서 참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살았으나 죽은 자처럼 살기보다는 죽었으나 산자처럼 사는 비결인지를 무엇인지를 이 진리의 말씀 속에서 깨달을 수 있도록 더 많은 사람을 교회에 데려와서 이 복음의 진리를 듣게 하여야 합니다. 바로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B. 화목케 하심
두 번째는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셨느니라” 하고 말합니다. 이 화목제사는 이스라엘의 제사 가운데 가장 의미 깊은 제사 중 하나입니다. 속죄제는 자기가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토설하고 죄를 용서받는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관계를 새로 정립하는 제사입니다. 번제는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자기를 헌신하겠다고 바치는 자기희생의 표였습니다. 결례는 불결해진 자신을 깨끗이 씻어내는 성결의 예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화목제 안에는 이 모든 정신이 한꺼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화목제는 먼저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과 제사를 드리는 헌제자 사이에 불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사랑하시던 백성들 사이에 불화가 생기게 되면 거기에는 거리감과 그리고 낯섦이 존재하게 됩니다. 무한한 거리감, alienation과 그리고 낯섦 un acquaintedness가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 무한한 거리감과 낯섦이 존재하게 되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힘이 되실 수가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뒤에도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이 느껴지지를 않습니다.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 응답된다는 느낌이 없고 설교를 들으면 주님의 음성이 내 마음을 찌르지 못합니다. 열심히 섬기지만 섬기는 동안에 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기쁨으로 내 마음이 충만해지는 은혜의 경험들이 없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거리감을 느끼게 되고 그렇게 친근하고 친밀하던 하나님과 사이에 낯섦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생소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조차 의심이 가기 시작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과 우리가 불화한 상태가 바로 이런 상태입니다. 화목제는 바로 이런 불화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고백하며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불화가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긴 세월을 방황하고 돌아와서 떠났다가 돌아온 것은 우리이지 언제나 하나님은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변함없는 분으로 언제나 하나님은 거기에 계셨습니다. 화목제는 바로 그렇게 불변하도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그 모든 불화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고백하며 주님 앞에 드리는 화해의 제사입니다. 그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가지셨던 아프고 그리고 상한 마음을 푸시고 우리를 향해 다시 화해의 손을 내미시고 우리는 그 제사를 통해 다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갈 마음을 갖게 됩니다. 잠시는 하나님보다 더 좋은 것이 있는 줄 알았지만 겪어보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뜨거운 화목의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고 낯섦과 거리감은 모두 물러가고 다시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뜨거운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밀물처럼 들어오게 되고 하나님과 우리는 다시 사랑으로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다시 화목이 이루어져서 하나님께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고 주님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보이시는 동안에 거기에는 반드시 그 둘을 화목 시키기 위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죽어간 인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제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거친 보자기에 싸여 말구유에 누이신 것도 바로 진리를 보여주시고 마지막에는 진리이신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도록 그 진리를 드러내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화목제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하나님과 누리는 모든 화목과 친밀함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고난의 중보적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지은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아버지께 싫어버린바 되셨고 그래서 그분이 우리가 당해야할 멸시와 고난을 다 당하심으로 그분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죽으시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유명한 자가 되어서 그분과 화해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 시켜주셨으니 이제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이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너희들이 사랑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한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이라.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화목제물로 보내셨음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이 화목제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 화목제의 사랑을 안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께 부름 받는 삶이 있습니다. 나 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 그 인간이 하나님과 무한한 거리감과 낯섦 속에서 불안하게 사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예수 친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한 마리의 어린양의 제물이 되어서 화목제로 죽으셔서 하나님과 나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으니 이제 그 사랑을 깨달은 내가 이제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깨트려져서 그래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예수 믿게 만들고 그들을 참 빛 속에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사람들은 다 보는데 부모는 그 자녀의 허물을 보지 못합니다. 언젠가 형제, 자매 둘이서 이혼을 하겠다고 날 찾아왔습니다. 왜 그러는가? 3년 반인가 4년을 연애를 했는데 먼저 자매에게 얘기를 들으니까 그 인간이 그런 인간인줄 몰랐다고 합니다. 얘기를 다 듣고 나니까 인간도 아닙니다. 그 다음에 형제를 불러서 야단을 치려고 해서 일단 불러서 들어보니까 3년 반인가 4년을 연애를 했는데 그 자매가 그런 인간인줄은 꿈도 못 꾸었다고 하는데 남편으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아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부모는 그것을 모릅니다. 우리 딸이 어때서, 그리고 애지중지 길러서 보냈는데 시집에서는 제품이 불량품이라 도저히 데리고 살수가 없다고 합니다. 자기는 잘 길러서 보냈다고 하는데 인류평화에 기여하기는커녕 한 여자도 만족을 못시킵니다. 그게 왜 그렇게 자식들의 허물이 우리 눈에 안 보이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원래 사랑은 그 허물을 보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좋은 의미에서도 그렇고 나쁜 의미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자식을 더 많이 사랑하겠습니까, 우리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겠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 가끔 사랑이 식으면 자식의 허물은 눈에 보인다고 할지라도 자기를 향한 사랑은 식는 법이 없으니 우리가 스스로 우리 자신의 허물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또 자기편입니다. 그러니 허물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두둔하게 되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고쳐질 가능성이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깨트려서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자기 사랑은 곧 그 사람의 영혼의 죽음입니다. 신자의 자기 사랑은 그 신자의 영혼에 대한 죽음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 되신 진리를 끝까지 사랑하게 될 때 비로소 자기를 객관적인 눈으로 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제 예수님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죽으셔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행복을 누렸던 것처럼 이번에는 우리가 그 예수 때문에 죽고 또 깨트려지고 또 버림받아서 우리의 깨어짐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고 그들을 행복하게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불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죽으심으로 자신의 고난의 죽음을 통해 얻게 될 수많은 씨를 보고 즐거워하였다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한바와 같이 또한 우리도 그런 정신으로 우리를 깨트려서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주고 우리를 다 깨트려서 우리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긴 도구가 되고 우리 때문에 많은 다른 사람들이 유익과 행복을 얻게 되는 그 일을 하라고 주님이 자기의 고유한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거친 보자기에 싸여 이천 년 전 말구유간에 그 아들을 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우리를 깨트려지셨던 것을 깊이 기억하고 그 사랑을 우리에게 주심은 이번에는 우리가 깨어져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고 그들을 섬기고 그들을 참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이 사랑을 주신 것이라고 믿고 주님이 희생을 통해 주신 이 화목을 선용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이 교회에 내려와서 기도하는데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이제 한주만 지나가면 제가 하나님 앞에 회심한지 30년이 됩니다. 그리고 이제 늙어갑니다. 기도가 끝나고 마당을 걸어가면서 가슴이 깊이 그리움이 밀려왔습니다. 하나님, 이제 제가 회심한지 30년이 되었습니다. 아마 남은 생애가 회심한 시간보다 짧을지도 모르는데 하나님 내가 이 세상에 한 사람으로 태어나 이제 이렇게 늙어 가는데 내가 참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것일까요? 우리의 남은 생애를 어디에 서서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지만 참 사람답게 살 수 있겠고 그리고 나의 생애 전체가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시는 진리이신 예수님께 합치된 삶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알듯하면서도 아직도 나는 모르겠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만 섬기며 따르기로 한 나 세상이 주는 모든 괴로움 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날이 갈수록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그분이 나를 위해 화목제물로 버리신 희생 때문에 쓸모없는 인생이 주님 앞에 값지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고백하며 자기를 많이 깨트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고 자기를 많이 죽여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 자신은 많이 버려 다른 사람들이 많이 거둘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가 남은 생애를 살아가야 합니다.
C. 사랑케 하심
마지막 세 번째는 사랑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을 때 그 외아들은 세상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셨으니 경배와 찬송을 한 몸에 받으시기에 합당하실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온 세계를 지배하고 그 백성들을 자기의 소유로 누리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 세상에 오셔서 아무 것도 누리지 아니하셨으니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누리기 위함이 아니요 사랑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한 해 동안 우리가 많은 근심과 걱정, 고통과 후회가 우리에게 있었지만 만약 우리가 이런 화목제의 정신으로 우리를 사랑하지 아니하고 주님만 사랑했다면 육욕적인 자기 사랑에 매어서 영혼이 추루해지는 실패가 없었다면 우리의 지난 한해는 훨씬 행복하고 빛 가운데 살아가는 한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의 추루한 욕심과 그리고 결별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들은 적지 않은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그것을 2005년 이 저무는 마지막 주일에 모두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약속의 땅같이 펼쳐진 2006년에는 이런 실패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사랑에 관한 움직일 수 없는 진리가 여기에 있으니 한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지만 한 사람의 비천한 인간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바쳐 사랑할 수 있는 외로울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한 자기희생이라기보다는 자기완성의 길이고 그 인간을 그렇게 사랑하는 그것이 바로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완성하는 방법이니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은 이렇게 온전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분투할 때 가장 기뻐하고 충만한 생명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루어놓은 많은 업적을 자랑하지 말고 그대들이 하나님 앞에 받은 그 십자가의 놀라운 화목제의 정신을 기억하며 사람을 사랑하도록 힘쓰십시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사랑할 수 없을 때마다 주님의 무한한 사랑,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힘들게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아마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다 깨트려 그 사랑을 완성하는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그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낮아진들 그분의 낮아짐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으며 우리가 사랑을 위해 자기를 많이 깨트린다고 할지라도 어찌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깨트려 우리를 위한화목제로 오신 예수의 희생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많이 사랑해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우리의 사랑이 그 사랑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우리가 설령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랑이 우리자신이 베푼 사랑이 아니라 예수 사랑의 감화가 미치게 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모든 사랑의 영광을 우리 주 예수께 돌려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서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