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aplitulatio Christ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이 에베소서는 사도바울이 쓴 서신서 가운데 가장 철학적인 골로새서와 함께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로마서가 신학적이라면 여기에 있는 이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철학적이면서도 신학적인 것이에요. 그리고 골로새서에서는 중심이 그리스도이고, 그 다음에 에베소서에서는 역시 중심이 그리스도이긴 한데 그리스도와 함께 몸이 된 교회가 중심 주제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1장, 2장, 3장, 4장까지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에베소서를 올바로 이해하면 사실은 사도바울의 신학 전체가 보이고, 그리고 좀 더 나아가서 말한다면 그 신약 전체, 신구약 전체의 하나님과 이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그 요해가 드러나게 된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주석을 쓰게 된다면 제일 먼저 쓰고 싶은 것이 이 에베소서 주석이에요. 물론 우리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아주 훌륭하게 설교집을 내셨지만, 지금 말씀 드리는 이 부분도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1장 10절에서 꽤 상세히 해설합니다. 근데 한번 정도의 설교로 풀어가셨으니까 충분히 설교됐다고 말할 수 없죠. 그래서 이제 이렇게 상세하게 이것을 공부하려고 하는 거죠.
근데 이제 그런 점에서 이제 이 에베소서는 아주 굉장히 중요한 자료고 사도 바울의 신앙이 아주 굉장히 원숙해진 인생의 말년에 쓴 거예요. 알다시피 이 사도바울은 세 가지 배경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종교적으로는 Judaism, 유대주의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로마주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학문적으로는 문화적으로는 헬라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단 말이죠. 이 세 가지가 어우러지면서 아주 우주론적인 교회론을 길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러한 것들을 발견하면서 과연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에 진짜 교회론이 있는가 할 정도로 우리는 너무 무지한 상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까지 자라나는 세대에게 예수 믿고 어떻게 구원을 얻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회심 중심의 교육이었다면 이제 그 회심과 중생을 가르치는 구원론의 교육이 교회론적 구원론의 틀 안에서 가르쳐져야 되고 기독론도 교회론적 기독론의 틀 안에서 이것들을 가르칠 때에 진짜 올바로 된 교육이 될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됩니다. 그러면 이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만물을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이 나와요. 히랍어로 ‘아나카펠라이오오’라고 하는 단어에요.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아나’는 접두어인데 ‘Re’ 그런 뜻이에요. ‘다시’ 그런 뜻입니다. ‘카펠’은 희랍어로 ‘head’ ‘머리’예요. 이건 동사의 꼬리에 오는 말이에요. 직역을 하면 ‘다시 머리가 된다’ 이런 뜻이잖아요. 이것을 이제 라틴어로 ‘리카피튜라티오’라 그래요. 그러면 요건 뭐냐면 ‘카피투’ 인데 라틴어에 ‘카프투’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거는 ‘머리’입니다. 이게 이격이 되면 ‘카피티스’가 되요. ‘카프투’, ‘카피티스’ 이렇게 변화를 해요. 그래서 이 이격을 끌어다가 동사화시킨 거예요. 이건 다시라는 뜻이고 카피투는 머리라는 뜻이고 이건 동사니까 머리가 된다는 뜻이에요. 이거를 놓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아나카펠라이오오’라고 하는 이 희랍어 단어 이거나 이거나 마찬가지로 이게 “머리와는 상관이 없다”라는 그런 주장이 있어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생각하면 되죠. 이렇게 사람들이 글을 많이 썼다고 쳐요. 이렇게. 이거를 요약을 하잖아요. 그래서 요약을 하면 여기에다가 헤드라인의 기사가 이렇게 오겠죠. 그리고 이거에 대한 설명이 죽 따라오게 되잖아요. 요렇게 뽑아내어서 summarize 하는 것을 ‘아나카펠라이오오’ 라 그랬어요. 이렇게 되면 캐피탈하고 관계가 있죠. 캐피탈이 원래 대문자이잖아요.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끌어내어서 다시 정리하는 것, 그래서 여기에서 summarize라고 하는 그런 동사가 나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거는 머리와 상관이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실은 “그렇지 않다”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 보면 이제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이야기가 쭉 나오는데 특별히 크리소스톰같은 교부가 있었어요. 크리소스톰은 히랍의 유명한 교부이구요, 4~5세기 경을 살았던 그런 교부였습니다. 히랍의 교부였구요, 이 사람의 이름이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아주 말에 능통한 대 설교자였죠. 그리고 이 어머니가 앙투안 사람의 여자였는데, 19살에 이제 이 아이를 유복자 상태였었나? 그리고 아무튼 과부가 됩니다. 하여튼 절세의 미인이었다 그래요. 수없는 귀족들의 청혼이 이어지고 그랬지만 오직 신앙 하나로 이 외아들 크리소스톰을 키워요. 그래서 결국 최고의 훌륭한 교부로 만들죠. 이 사람이 설교하던 데가 어디냐 하면 여러분 터키를 여행하셨거나 혹은 정보를 보신 분 있겠지만 소피아 성당 알죠? 소피아 성당 그 자리가 바로 크리소스톰이 목회하던 자리였습니다. 이 사람이 변방에서 지낼 때 이 사람을 로마의 귀족들이 데리고 왔는데 그렇게 훌륭한 분이 있으면 우리가 설교를 들어야지, 그리고 납치해 오다시피 데려왔는데, 오자마자 도시의 타락과 귀족들의 부패한 생활을 탄핵하고, 교회에 걸려있던 금, 은 이런 것들을 떼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식 사서 나눠주죠. 그러고나서 결국은 이 사람을 목회자로 초빙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를 당하게 됩니다. 어쨌든 뛰어난 분이구요. 이 분이 희랍 교부이니까 희랍어는 너무 잘하시잖아요. 이분이 단언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아나카펠라이오오’라는 단어는 반드시 머리와 관계가 있다”라고 설명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받아들이고 이것이 전체적인 에베소서의 사상이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러면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이거는 번역이 완전히 뭐라고 그럴까 원래의 뜻으로부터 상당히 벗어난 거죠. ‘리유나이트’라고 번역을 하는데 상당히 많이 빗나간 것이라고 봐요. 그러면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 되신다’라고 하는 것이 이게 그럼 뭘 뜻하는 거냐? 그러면 여기에 ‘다시’ 라는 말이 함축하는 것을 보면 처음 머리되신 적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죠? 그러면 그 처음 머리 되신 것이 있었는데 어떤 이유로든지 간에 처음 머리되신 것이 와해되든지 뭔가 결합이 풀어지든지 해서 다시 머리되시기 때문에 ‘리카피튜라티오’ ‘아나카펠라이오오’라고 부르는 거라 얘기예요.
그러면 정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창조론으로 넘어가야 되는데 창조론이 있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계시죠. 그 하나님이 삼위의 하나님으로 계시는 거예요. 이게 성자고, 성부고, 그 다음에 성령이 되겠죠. 그죠? 그러면 성부, 성자, 성령이 이렇게 교통하시는데, 그래서 이 성부 성자 성령은 삼신이 아니라 세 신이 아니라, 혹은 똑같은 한 신이 여기에 있고, 이 신이 각각 변모한 것도 아니고 - 이것은 양태론이에요 - 세 신이 아니고 - 이건 삼신론이에요 - 하나의 신적 본질이 있는데 그것이 각각 성자, 성부, 성령에게 나누어 주어서- 이것은 사신론이 되는 거예요 - 이것이 아니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의 신적 본질이신데 그 하나의 신적본질이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이 본질의 면에서는 다름이 없지만 다른 인격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상호 교통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이것이 우리가 견지하는 삼위일체 교리에요. 그러면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사랑하고 교통하는 이 본질을 우리들이 사랑이라고 보는 거거든요.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은 이걸 생명이라고 본 거예요. 사실은 생명이 사랑이고 사랑이 생명이에요.
이런 교통 속에서 성자를 통해서, 'thru' 그 다음에 성령 안에서 성부에 의해서 이 세계가 창조된 거예요. 창조된 세계는 하나의 세계가 아니에요. 우리는 천상 세계에 대해서는 창조론에서 관심이 없잖아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두 세계를 창조하십니다. 그래서 여기의 세계가 바로 천상의 세계,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이 세계가 지상의 세계예요. 근데 이 천상의 세계든지 지상의 세계든지 간에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돼요. 지상의 세계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가 됩니다. 이 천상은 하나님이 천사를 두어서 당신이 다스리시고, 그리고 이 지상의 세계는 인간을 두어서 당신이 다스리세요. 그런데 천상을 다스림에 있어서 천사의 위치는 하나님 자신에게 전적으로 복속된 심부름꾼으로서의 역할이에요. 그러나 지상의 세계에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역할은 이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하나님의 대리자 개념이에요. 대리자 개념. 그러니까 인간의 지위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두고 볼 때 훨씬 더 뛰어나다는 거죠. 영적인 능력이나 이런 것에 있어서는 천사가 유한한 인간보다 탁월할지 모르지만 지위에 있어서는 인간이 아주 탁월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천사의 존재를 놓고도 아우구스티누스같은 사람은 천사도 나중에는 폐기된다고 봐요.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를 깊이 존중하고 따르던 루터 같은 사람도 그렇게 보구요.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죠. 영원히 계속 된다 이렇게 보는데, 어쨌든 두 세계가 창조가 되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 세계가 창조되는 거죠. 우리가 보기에는 이 세계가 이렇게 다르게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 두 세계는 놀라운 질서를 갖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는 뭐냐하면 가직이야.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에요. 지성으로서만 볼 수 있는 그런 가직이에요. 여기에는 어떻게 되죠? 가식이에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의 감각을 가지고 볼 수 있는 세계라 이거죠. 그러면 이 두가지 세계가 완전히 떨어져 있느냐? 그렇지 않아요. 왜냐하면 가시적인 세계 속에도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떠한 힘과 통치와 작용에 의해서 이 세계가 운행되고 그 다음에 지속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두 세계는 따로 떨어져 있지만, 끊임없이 이 세계는 여기에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이렇게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또 이 세계는 이 세계와 더불어 끊임없이 교통을 하게 되는 거죠. 어떤 의미에서 변화를 주는 거죠. 왜냐하면 여기에서 성도들이 기도해서 사단의 세력을 묶기도 하고 결박하기도 하고 그리고 또 어떻게 해요? 성도들이 하늘나라로 가기도 하고. 이렇게 영향을 주고받는 것인데, 그래서 마치 이것이 만약에 이것이 우리의 육체라면 이것이 우리의 영혼과 같은 아주 놀라운 껍질과 내포와 외연의 관계를 이루고 가지와 가시의 관계를 이루면서 두 세계는 아주 밀접한 연관 속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전체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존재의 효과를 현시하는, 드러내는, 드러낼 목적으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거예요.
조금 더 덧붙여서 설명을 하자면 이렇게 되지 않겠어요? 우리 인간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감각만을 가지고 사물을 볼 수 있죠. 믿음이 있지만 그래도 대부분 감각에 의존하잖아요? 이런 감각만을 가지고 보니까 이 세계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예요. 영이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러면 이 두 세계를 이렇게 바라보실 때에 이 인간의 육체의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이 세계 안에서 당신이 창조하신 이 천사를 비롯한 하늘의 만물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 자신의 존재의 효과는 이것이 드러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빛깔의 것들을 드러내지 않겠어요?
이해되세요? 이해돼요? 이런 거 아니겠어요? 어떤 사람이 있는데 성형수술을 하고, 화장을 하고, 해가지고 얼굴이 예뻐졌다고 칩시다. 그거는 이렇게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거잖아요. 얼굴은 하나로 안 변했는데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나쁜 의미에서, 더 서금서금하던 사람이 더 이뻐진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아서 영적으로 변화되었어요. 그럴 때에 그 사람을 통해서 비춰오는 변화의 모습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감동이라 그럴까? 기쁨이라고 그럴까 하는 것은 얼굴이 예뻐지는 거하고는 종류가 다른 거잖아요. 이제 이해되죠?
그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영이신 하나님이 볼 때 이 두 세계는 각각 다른 빛깔들로서 드러나야 되는 거죠. 이렇게 생각하면 좀 쉽지 않겠어요? 이게 뭘까? 명패? 프리즘이에요. 프리즘. 여기에 이렇게 빛이 들어오잖아요. 여기는 빛이 통일되어 있어서 하나야, 그렇지?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이 들어오잖아요. 프리즘을 통과하면 빛이 분광이 되잖아요, 이렇게. 그래서 빨간 것부터 시작해서 분광이 되잖아요. 그렇듯이 한 하나님이 당신의 존재와 성품의 영광을 이 창조된 세계라고 하는 이 프리즘을 통해서 이거를 이렇게 드러내시는 거죠. 그런데 이 창조를 통해서 여기에서는 천상의 세계를 통해서 이런 빛깔이 드러난다면, 지상의 세계를 통해서는 이런 빛깔이 드러난다 이거예요. 적절한 예죠? 그렇게 해서 이 세계가 찬란하게 쫘악~하고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는 거죠.
그런데 말이에요. 굉장히 중요한 얘기에요. 잘 들어보세요.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는데 무슨 문제냐 하면 어떤 절대적인 능력에 있어서나 아니면 항구적이고 불변한 성격에 있어서 본다면 천상세계가 지상 세계보다 훨씬 우위에 있잖아요. 그런데 놀랍게 천상 세계의 변화와 지상 세계의 모든 변화를 이 천상세계의 변화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 세계에서의 변화가 이 두 세계의 모든 변화를 주도하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기획을 하신 거예요. 그러면 그런 지상세계에서의 변화라는 것이 뭐냐 이게 뭐냐 하면 구속사예요. 구속사. 구속사란 말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보자면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창조의 영광을 이 모든 세계 속에 드러내셨지만, 인간의 죄는 그 창조의 영광을 구속사건을 통해서 드러내게 해 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거예요. 그래서 이러한 창조와 구속의 사건을 구속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창조의 영광이에요. 그런 것들이 드러나면서 이 천상의 운명도, 천상 세계의 운명도 지상 세계의 구속 역사의 발전과 숙명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게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는 거예요. 놀랍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계의 구원사건을 중심으로 자기 세계 자체에 영향을 끼치고 천상에 영향을 끼치고 이것들이 색깔과 빛깔이 계속 변화되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영광을 이 두 개의 세계에 찬란하게 드러내 보여주시는데 이게 바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다 이 얘기예요.
자 이정도로 놓고 그 다음에 얘기를 하겠습니다. 이 지상세계를 하나님이 다 창조하시고 맨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십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아담이에요. 아담이라고 지으셨는데 이 아담이 왜 아담이냐에 대해서 두 가지 학설이 있는데, 하나는 이것이 에돔과 관계가 있다고 봐요. 그러면 에돔은 뭐냐 하면 ‘붉다’ 그런 뜻이에요. 그리고 또 하나는 이게 그게 아니라 ‘아다마’ 에서 왔을 것이다 라고 보는 것이죠. ‘아다마’는 뭐냐하면 땅, 흙이에요.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나님이 이 사람을 아담이라고 지으셔서 그 다음에 흙이 ‘아다마’가 된 거다 이렇게 본 거죠. 어느 쪽인지 잘 모르겠어요, 저도. 근데 이쪽이 더 가깝지 않을까 심정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런데 여기에서 보면 우리가 참 기이한 게 있다 이거죠. 뭐나면 이 아담이라는 사람을 하나님이 창조하시는데 흙으로 창조하세요. 근데 더 정확히 말하면 ‘아파르’로 만드셔요. 모든 흙이 아니라 이거는 티끌을 이야기하는거예요, 티끌, 흙먼지라고 할까 그렇게 생각하면 돼요. 그걸로 하나님이 사람을 빚으셔서 그래서 사람을 만드셔요. 그래서 원 재료는 ‘아파르’이고 여기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네페쉬’라고 하는데 ‘네페쉬’를 불어 넣으셔서 그래서 이 사람이 됐는데 이것을 ‘네페쉬하야’ 라고 해요. 요걸 갖다가 우리말 성경에서 ‘생령’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사실 이것은 말도 안되는 번역이고 ‘산 사람’이예요, ‘산 사람’. 산에 사는 사랑이 아니라, 생사람. 냉동 사람도 아니고, 생사람이에요. 산 사람. 그래서 ‘Living Man’ 혹은 ‘Living Creature’ 혹은 ‘Living Soul’ 그런 뜻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산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인간 존재라고 하는 것은 두 개가 통합이 되어 있는 거죠. 어떻게 되냐면 육체와 영혼, 이것이 통합된 상태가 이게 인간 존재이고, 구속의 대상은 이거나 이거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가 구속의 대상이에요. 육체나 영혼 하나만이 아니라 이 두 개가 결합된 통일된 인간의 존재가 구속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재미있는 게 뭐냐 하면 이 사람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이 사람의 배필을 지으세요. 그게 누구냐면 하와에요, 하와. 이 하와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여러 가지 얘기가 나오는데 이것도 역시 ‘하야’에서 왔을 것이다. ‘생명’ 이런 뜻으로 봐요. 그런데 문제는 제조과정이에요. 제조과정이 이 사람은 ‘아파르’에서 만들고 ‘네페쉬’를 부어서 만드는데 이 하와는 이 사람의 갈비뼈를 취해서 그래서 하와를 만드세요. 그러니까 이거는 질료가 ‘아파르’가 아니라 갈비뼈예요. 그래서 이걸 놓고 매튜 헨리라고 하는 목사님은 하나님이 여자를 갈비뼈를 취해서 만드셨는데 남자를 지배하도록 머리뼈가 아니라, 짓밟히도록 다리뼈가 아니라, 보호를 받도록 품 가까운 곳에서 사랑을 받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 있는 그 뼈를 택하셨는데 그것이 갈비뼈다. 그래서 택하신 거다. 그래서 이 여자를 만드세요. 그러면 이제 만드시면 그러면 이 사람의 존재는 이 사람의 존재와 어떻게 되겠냐? 이것은 흙에서 만들었으니까 이게 원조예요. 인간의 원조예요. 이거는 파생됐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남성우위론자들은 이것을 존재론적으로도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고, 여자가 나중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열등하다 해석을 하려고 하죠. 사실은 관점에 따라 각각 틀리죠. 왜냐하면 신제품이 더 좋잖아요? 훨씬 낫죠? 뭐가 달라도. 또 하나 원재료를 보더라도 감히 흙덩어리 보다야 인육이 훨씬 비싼 거죠. 고급 재료로 만들어진 거죠.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많은 식물과 동물들을 창조하실 때는 ‘땅은 낼지어다’ 해서 땅으로부터 모든 것들이 나오는데, 인간 역시 땅으로부터 나오는데 방식 자체가 다른 거예요. 이 지점이 굉장히 중요한 시사점을 우리에게 주는 거야. 그게 뭐냐 하면 이 ‘아파르’라고 하는 것은 ‘아다마’의 일부야. 이 ‘아다마’에서 온갖 동물과 식물, 심지어는 곤충들까지 여기에서 나오게 되잖아요. 그러면 이 ‘아파르’가 ‘아다마’에서 왔다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이들과 공통된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존재의 기반을. 동의 되죠? 그게 뭐냐 하면 우리의 육체 이런 것들은 이런 질서에 속하는 거예요.
최근 생물학자들이 20세기에 들어와서 충격을 받고 놀란 것이 뭐였죠? 인간은 탁월하기 때문에 유전자의 개수가 동물에 비해서 무지하게 많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거의 똑같은 거예요. 심지어는 동물하고 식물도 세포가 차이가 거의 없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개수 가지고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육체적으로 보면 공통된 기반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이걸 만드실 때에는 하나님이 ‘낼지어다’ 하고 자연 발생적으로 쏟아져 나오게 만드시고, 이건 하나님이 빚으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넣으시는 독특한 방법으로 만드셔요. 그러니까 육체를 이야기 할 때도 이것들과 공통된 기반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두 개를 같이 생각을 하게끔 만들어주는 거죠. 흙에서 나왔다는 점에서는 공통된 기반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 정제된 ‘아파르’이고 하나님이 직접 빚으셨다는 것은 공통되면서 다른 면을 보여준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생기를 불어 넣으신 그 점에서는 비교가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이 여자를 갈비뼈를 취해서 만들어요. 그것은 뭘 말하냐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두 사람은 육체로 결합된 존재의 근원이 동일한 사람이예요. 그러면 이후로 이 사람에 의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게 됩니다. 그럼 여기에서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인간들이 태어나게 돼요.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요. 태어나게 되는데 이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게 되는데 이렇게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것은 이 사람 딱 하나고, 그리고 이 두 번째 창조된 사람은 이 사람의 갈비뼈를 취하여 창조가 된 거죠. 그래서 이 사람이 아담이 하와를 이끌어 나오게 하실 때 뭐라 그래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아참’이라고 하는데 그 다음에 ‘살 중의 살이라’ ‘바사’ 그래서 뭐냐 하면 자기와 이 여자가 ‘한 뼈’, 그 다음에 ‘한 살’이다 그렇게 묘사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이 둘이 완전한 결합을 이루는데 이것이 최고적인 사랑의 표현이라 이거예요.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다 이런 종류의 생식의 결합을 통해서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식을 통해서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 이 자체가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아니에요. 해산에 따른 고통이 죄의 결과이지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이런 생식의 방법에 의해서 사람들이 태어나는 거예요. 정상적인 관계라고 보면 이렇게 되잖아요? 남자와 여자가 있으면 이 두 사람이 사랑을 해요. 정신적인 최고의 결합 속에서 육체의 결합이 이루어지고, 거기에서 두 사람 사이에 생식에 의해서 한 사람이 태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다음에 태어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고 누구도 예외가 아닌 거예요.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뭐 사랑하지 않는데 뭐 아이가 태어나고 그런 거 없을것 아니에요? 그거는 다 타락했으니까 그런거고,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그렇지 않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그런 식으로 이렇게 다 결합이 된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것들을 이렇게 하나의 동아리로 묶으면, 이렇게 되면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인류가 태어날 거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니까 이 모든 것을 이렇게 한꺼번에 보실 수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한꺼번에 하나님이 보신다면 저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판 속에 이렇게 들어가는 거예요. 잘 들으세요. 이런 연결을 이루는 거죠.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을 보면.
자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어떻게 하냐 하면..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요. T- T0 T1 T2 이렇게 시간이 흘러간다고 봐요. 여기에 이렇게 사람이 있어요. 여기도 있고, 여기도 있어요. 이 사람 태어나기 전에 이 사람이 죽어요. 이 사람 태어나고 나서 이 사람이 죽어요. 이런 식으로 된다 이거예요. 그러면 이 시간 속에서 보면 이런 시간 속에서 보면 한 사람만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시간을 초월해서 이 판에다가 그린다면 이 사람은 이점으로 들어오고 이 사람은 이 점으로 들어가면.. 이 놈이 이 놈 아버지고 이 놈이 이 놈 아버지고.. 이렇게 될 거 아니에요? 그러면 다 짤라버리고 요것만 갖다 놓으면 이런 그림이 나올 거 아니에요? 이렇게? 이런 그림이 나오잖아요?
이게 뭐냐면 시간을 초월해서 평면에 놓고 각 존재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연결하는 거라 이거예요. 이해되죠? 그럼 온 인류를 놓고 보면 무수한 점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이 이런 연결을 이루고 있을 것 아니에요? 이 연결의 정체가 무슨 연결이에요? 사랑과 생명의 연결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무슨 얘기냐 하면 이후에 이루어지는 이 모든 인류들의 연합체 이 자체를 하나의 체로 보셔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질문할게요? 이 계획이 먼저 있었겠어요? 아담 창조가 먼저 있었겠어요? 어떻게 그런 결론에 도달해? 여태까지 잔뜩 설명을 했는데. 이 계획이 먼저 있었겠어요? 아담 창조가 먼저 있었겠어요? 아니 이 계획이 없이 아담을 먼저 창조했다면 하나님이 생각이 없는 분이지. 응? 아니 점심 시간에 종이 울려서 신발을 신고 계단을 내려갈 때는 밥 먹을 요량으로 신발을 신는 거 아니야. 그러면 당연히 아담의 창조라고 하는 것이 있기 전에 이 하나님 안의 이 계획은 영원히 이 하나님의 지성 안에 들어 있는 거 아니야? 이해 안되면 안된다고 하세요. 되죠? 이제?
그러니까 그런 계획이 있는 속에서 아담을 창조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시간을 초월해서 보면 이 아담은 창조될 때부터 한 몸 안에서 몸의 일부를 이루는 구성 요소로서 창조된 거예요. 그래서 그것들을 처음 실현한 것이 하와의 창조예요. 그래서 이것이 사랑의 관계가 되는 거죠. 여기서 자식들이 나와. 그러면 이 자식을 또 사랑의 관계로 이어주자는 거에요. 그러면 이 자식은 부모를 사랑해. 사랑의 관계가 되잖아요? 그런데 이 자식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야. 그러면 동기간에 서로 사랑을 해. 이러면서 이것들이 계속 사랑으로 연결되고 이 안에서 생명으로 연결되는 그 생명의 연결 자체가 사랑의 연결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이 전체가 하나의 몸을 이루는 거예요. 그래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하는 것을 남녀상열지사의 고백이라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 이거예요. 그게 아니라 거기에는 이중적 측면이 함께 담겨있는 거예요. 남녀간의 사랑의 결합이라는 측면과 더불어서 모든 인류가, 쉽게 말하면 아담과 하와가 동침해서 아이를 낳을 때도 그 아이에 대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런 고백이 나오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인류의 모습이었다 이 얘기에요. 실제로 가능하잖아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아내에 대해서 그런 고백을 할 수 없을 때조차도 애들에 대해서는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물론 속 썩일 때는 그 고백에 ‘어찌하여’라는 말이 붙겠죠? ‘어찌하여 니 놈이 내 살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냐’ 그런 고백이 나오겠지만 말이죠.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문제가.
그러면 무슨 얘기가 되는가?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해서 인류를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그 자체가,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하나님이 염두에 두신 관계가 뭐냐 하면 가족관계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그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모든 인류의 구성원들이 한 가족처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완전한 사랑의 고백 속에서 그 구성원 각자 각자가 서로를 사랑하는데, 이 서로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이것이 결국 뭐예요?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느니라” 이게 결국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가지셨던 본래의 사랑의 계획이고, 이 죄가 들어온 다음에 이 원리를 완전히 망각하고 살아가는 개념없는 인간들을 규율하기 위해서 주님이 주신 것 바로 십계명이다 얘기에요.
자, 이렇게 되면 창조론부터 확 깨게 되죠. 우리가 본래 이해하고 있던 그런 창조론하고는 다른 종류의 해석이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이러한 관점에서 창조론을 볼 때에 교회론과 기독론이 아주 자연스럽게 열리게 된다. 신론까지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뿐만 아니에요. 성경론도 마찬가지죠. 결국은 이런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이 비참한 인간을 위한 치유책으로서 하나님이 이들에게 성경을 주신 거다 이런 식으로 이해해야죠.
저는 이런 부분들이, 이번에 깨달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부분들이 다가오게 될 때, 신학 전체의 아주 굉장히 강렬한 빛이 들어오는 그런 인상을 받았어요. 한 9년 전인가 10년 전쯤 되었는데 굉장히 강렬한 빛이 들어오는 인상이었어요.
그래서 존 오웬의 저작의 1권 “그리스도의 영광, Glory of God, 기독론” 이것이 사실은 이런 얼개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작품 속에 이런 얼개를 정확하게 그려내지는 않았는데 이런 얼개를 가지고 그 작품이 써내려 간 거예요. 이런 얼개를 가지고 그 작품을 보면 굉장히 새롭게 다가오는 거죠. 그러면 조금만 더 진전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나죠. 무슨 문제가 생겨나게 되냐 하면, 타락한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인간이 타락을 하게 된 거예요. 이 타락은 최소한 네 개의 관계의 파괴를 가져와요. 첫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 관계에서 파괴를 가져와요. 두번째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파괴를 가져온 거예요. 세번째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파괴를 가져온 거예요. 결과적이기 하기는 하지만 자아와의 관계에서도 파괴를 가져와요. 그래서 아주 혼란스러운 존재가 되는 거예요. 이렇게 될 때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뭐냐 하면 이 관계들이 다 깨뜨려져 버린 거예요. 이것들이 관계가 깨져버린 거예요. 이 관계들이 깨지는 것이 왜 그렇게 심각하냐 하면 우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면 이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만드시고, 육체를 만드시고, ‘아파르’로 사람을 만드시고, 거기에다가 생기를 불어넣어서 그래서 산 사람이 되게 하셔요. 그렇게 불어 넣은 영이 바로 ‘르아후’예요. 영이라고도 하고 바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자 그런데 뭐가 문제냐 하면 인간의 몸을 하나님이 만드셔서 이 몸은 동물, 식물, 곤충, 이 많은 것들이 하나님의 이 자연세계를 창조하신 법칙과 법칙 안에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일반적으로 복종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거거든요? 똑같이 인간의 몸도 그러해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할 때 제가 말씀 드릴 때 인간의 몸조차도 동물이나 식물이나 이런 것들이 만들어진 것과는 약간 다른 이변성을 가지고 창조되었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영혼과 정신에 의해서 받는 인간의 몸의 상태예요. 더 이상 설명안하겠어요. 너무 길어질까봐.
이렇게 인간의 몸을 만드셨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인간의 몸을 인간의 영혼이 이 속에서 들어있어서 그래서 이 몸을 제대로 창조목적을 따라 작용하고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거죠. 그러니까 당연히 여기에 나와 있는 이 영혼은 두개의 영혼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영혼 안에서 상위적 기능과 하위적 기능을 가져요. 이 하위적 기능이 뭐냐 하면 감각적인 기능이에요. 이런 기능을 갖는 거예요. 상위적 기능이 지성의 활동이에요. 그런데 이런 상위적인 활동을 제대로 할 때에 이 인간이 이런 계획을 이해하면서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옆으로는 사람을 알고, 아래로는 세계를 알면서 자신의 입지가 어떠한가를 알고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을 힘입어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대리자다운 대리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몸의 주인은 영혼이 되고, 그런데 이 영혼은 몸처럼 법칙을 따라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을 계속 의지하면서 존재하게끔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신 거예요. 그래서 타락한 후에는 이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생명과 모든 사랑이 끊어진 상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다시 복구해 주시고, 복구한 다음에 끊임없이 현재적으로 이런 생명과 사랑을 누리도록 만들어 주실 때에 부분적으로나마 이 인간이 몸의 주인으로서의 영혼, 영혼의 주인으로서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면서 그런대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거라 이거죠.
그러면 이렇게 이 모든 인간의 창조가 이런 연결을 이루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국은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 자아와의 관계가 모든 끊어진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야 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에요. 왜냐면 이분은 약이시기 때문에, 인류를 고치는 약이시기 때문에 이 몸 전체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약이 이 몸 속에 투입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야만 했던 거예요.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도 한 편으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육체로는 모든 인간 속에 함께 있어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인간과의 관계에서 모두 끊어진 하늘의 자원을 하나님께서 다시 맺으시는 관계 속에서 하늘의 자원을 부어주시는 통로로 그리스도를 사용하시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서 이게 결국은 속죄와 밀접한 관련을 이루게 되요. 속죄와. 속죄와 밀접한 관련을 이루게 되요. 그래서 이것이 두 가지 전통이 있는데, 하나는 동방교회의 전통이 있고 서방교회의 전통이 있어요. 서방 교회의 전통은 구속을 객관화 시키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설명을 하면 이해가 될 거에요. 자 어떤 거냐하면
자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손해를 입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이것에 대해서 응당하게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인간은 그 벌을 감당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인간의 죄값을 치루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객관화의 작업이에요. 그래서 뭐가 객관화 되었다는 거예요? 인간이 지은 죄가 하나님에게 대한 도전이요. 손해를 입힌 것이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공의로 이 모든 것을 판단하실 때 당신이 입은 손해에 대해서 인간에게 그거를 똑같은 댓가로 갚아주셔야 하는데 인간이 그렇게 되면 멸망하는 것 밖에는 길이 없으니까, 멸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갚아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잖아요? 그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오셔서 죽으셔야 됐다라는 소위 얘기하는 속죄의 객관화를 이루는 거예요. 이게 여기에서 무슨 얘기냐면 사법적인 전통이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사법적 해석의 전통이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이런 해석을 아주 좋아했던 사람이 누구냐면 칼빈이에요. 왜요? 전공이 법학이었거든. 법을 꽤 공부했어요. 오를레앙에 공부를 하게 됩니다. 알키아트라는 사람을 만나서. 우리로 말하자면 새로운 시대의 법학도 배우고 고전적인 법학도 배워요. 그래서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이 우주적인 공평함과 거룩함을 아주 기가 막히게 드러내는 역할들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희미했던 속죄론이 이 사람에게 와서 아주 잘 드러나죠. 또 루터도 마찬가지에요. 루터도 이런 사법적인 관점에서 해석을 해서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이 새로 만드는게 아니라 중세 철학자들속에서 면면히 이어져오던 이런 속죄관이었다 이거예요.
그에 비해서 동방교회는 이것과는 다르다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서방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중요한 게 뭐예요? 죄 값을 담당하고 죽으시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왜냐면 몸을 입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이 죽임을 당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러면 죄값을 치루실 수 없기 때문에 오신 거라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동방교회에서는 이것을 다른 측면에서 보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이 사람들(서방교회)의 전통은 사법적 해석에 뿌리를 박고 있는데, 동방교회의 속죄의 전통은 히브리서에 뿌리를 둬요. 히브리서는 그럼 뭐죠?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거죠? 구약의 제사 제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적인 뿌리를 가지고 이 속죄를 이해하려고 해요. 그래서 어떻게 보냐하면, 인간이 계속 타락했는데, 인간이 평면적으로 이렇게 계속해서 인간들이 사랑으로 연결을 이루면서 살아야할 인간들이, 어떻게 그려야 ... 쟁반을 옆에서 봤다고 치고 평평하게 연결이 된 거예요. 이렇게 연결이 되어서 평면으로 연결이 되는데 쟁반 같은데 눕혀놓고 봤다고 합시다.
여기에 예수가 오시는데 이게 바로 성육신의 사건이예요. 성육신의 사건을 인간이 지은 죄를 위해서 형벌을 받고 죽는다는 개념을 도입을 안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기서도 인정을 해요. 그런데 그것은 우선적 관심사가 아니야. 히브리서와 제사의 관점에서 보니까 그런 속죄의 개념 소위 얘기하는 대속의 개념이 없을 수는 없잖아요. 그렇지만 이것이 주된 관심사가 아니야. 주된 관심사가 뭐냐면 인간은 죄지은 이후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이 땅에서 태어나서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가운데서 계대적으로 이어가는 거야. 그러니까 신적 생명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이 죄로 말미암아 끊어진 것하고는 상관이 없이 내려오신 분이에요. 인성으로는 모든 무리들과 수평을 이루시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신성으로는 삼위 하나님과 맞닿아 있는 분이예요. 같은 본질로 연결이 된 분이예요. 여기에서 보는 이러한 집합의 관점에서 보면 이분 성육신을 통해서 도입된 하나님의 본질이 모든 것 속에 침투할 수 있는 가능성의 길을 열어주는 유일한 통로가 되는 거야. 이게. 여기에서 신화의 교리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레네우스가 이러죠.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 인간을 당신처럼 되게 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이다” 그 말의 의미가 바로 이런 의미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건은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단순히 이 사람들 입장에서는 서방의 속죄, 성육신 관을 보면 좀 뭐라 그럴까 장엄하고 그렇게 안보이는 거예요. 뭐 죽기 위해서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오신 것이 다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본질이 이렇게 들어온 거다. 이 그리스도가 다시 부활하신 거죠. 부활하시면서 그러면 당신 자신이 주신 이런 신적인 본질과 생명이 타락한 세상으로의 도입을 유지하는 길을 만들어 놓고 주님이 보좌에 오르신 건데, 그게 뭐예요? 교회죠. 그래서 이 사람들이 보기엔 성령 세례도 이렇게 만들어 놓으신 이미 주조해 놓으신 그리스도의 몸에 부으신 거예요. 주조된 몸이라고 하는 게 뭐예요? 열두사도를 비롯해 모든 것들, 더 멀리 보면 구약의 이스라엘 언약백성들까지 만들어 놓기를 마치 ‘아파르’를 가지고 아담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이렇게 만들어 놓으시고 오순절에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듯이 성령을 확 불어 넣어서 산사람이 되게 하신다.
그래서 결국은 성령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받은 성령도 이렇게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게 부어진 성령에 내가 참여하는 거예요. 우리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사랑도 그리스도의 신분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쏟아 부어지는 사랑이 교회에 부어짐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그 몸의 일부로서 거기에 참여하여 교회에 쏟아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들이 부여받는 거야. 그러니까 그런 개념없이 하나님이 널 사랑하고 널 사랑하고 해서 그렇게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를 이루어볼까 하고 모였다고 생각한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관이라면, 이제 성경적으로 보면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거예요. 이걸 이렇게 부어주시는데 그것도 예루살렘에 부어주신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처음에 생명을 받을 때 개개인이 받게 하지 않으시고 함께 모여 있는 가운데 하나님이 부어주셔서 성령의 경험, 사랑의 체험 이 모든 것들이 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몸에 접붙여 있는 교회적 연합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부여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뭔가 새롭게 탁 하고 스파크가 안와요? 별로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개인의 구원론, 그 다음에 이런 모든 기독론 이런 모든 것들의 관점을 이러한 교회론적인 관점에 놓고 이해를 할 때, 그때에 상당히 성경적으로 올바른 이해가 생겨나게 되고 이러한 설명의 구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적합한 자리를 가지시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놓고 보면 사실 오늘날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있어서 교회에 대한 태도나 교회의 생활 이런 것과 관련지은 이런 생활들이나 이런 것들이 얼마나 개념 없고 막되 먹은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저도 사실 그런 거를 많이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위험들을 많이 보게 되요. 소위 이야기하는 그 설교를 즐겨듣는 사람들의 그 위험성, 예를 들자면 지금도 그 개혁주의적인 측면에서, 돌아가셨지만 계속 책이 나와서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그 책이 있어요. 그 분이 굉장히 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 그것들을 펼치셨는데 교회는 크지 않았어요. 문제는 그 분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문제예요. 그 분이 은퇴하시고 나서 미국인가 캐나다인가 어디에 가서 사셨는데 그 사람들이 자기 목회자가 떠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일체에 다른 교회 안 나가고 주일이면 성도들의 집에 모여 앉아가지고 그 목사님의 설교테이프를 틀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이건 뭐가 잘못된 거죠? 이런 설명에서 보듯이 뭐가 잘못된 거예요? 교회론이 잘못된 거예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물론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설교 안에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어 간다고 하는 것은 너무 소중한 것이고, 그 진리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바꾸어 놓을 정도의 그런 가치가 있는 거예요. 그렇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받는 유익 그 자체도 하나님이 교회와 맺으신 이 관계 속에서 성도들이 그것을 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 이 교회 다니고, 그 다음에 별로 입맛이 변했다고 그리고 그 다음에 다른 교회로 가고, 이런 식으로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을 마치 자기가 진리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미련이 없다는 듯이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의 교회론적인 구원론, 그 다음에 교회론적인 기독론, 교회론적인 성화론의 입장에서 보면 주님이 오신 뜻에 대해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는 거죠. 그 다음에 아주 극심한 개교회주의, 여기에서 이런 것들은 결국은, 극심한 개교회주의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창조정신에 전반적으로 어긋나는 거예요.
근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이렇게 인간이 타락하고 나서 관계가 다 끊어지는데, 이런 끊어진 관계들을 만약에 하나님이 그대로 방치하신다면 맨 처음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인류가 구원해 내는 것은 완전히 실패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구속이라는 조치로 여기에 들어오시게 되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여기에서 택한 사람들을, 구속한 사람들을 이렇게 이으시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서 실패한 몸 안에서 또 하나의 몸을 만들어 가셔요. 이렇게 만들어 가셔요.
이 안에 몸에 들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 이 사람들은 결국은 지금 현재는 이 사람들이 함께 있지만 그래서 역사를 이루어가지만, 두 세계가 있어서 이거는 세상만, 이거는 하나님의 나라, 신국이지요. 이건 인국이구요. 여기는 사람은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사랑의 질서를 그리면서 자기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거예요. 이렇게, 이렇게 이루어 가는 거예요. 그래서 신국에서는 하나님 한분밖에 없는 거예요. 동일한 사랑의 질서를 이루어 가는 거죠. 타락한 인간들은 각각 반기를 들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참회시키고 꺾으셔서 그래서 포기하고 다시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게 되는 거예요. 여기에는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를 얻을 수가 없어요. 이 세상의 나라의 역사는 이 껍질을 타고 들어오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가시적인 거예요. 이거는 가지적인 거예요. 이렇게 이렇게 해서. 세상 나라 역사가 이렇게 움직이고 돌아가요. 이렇게 해서 이렇게, 그래서 모두 보여요.
근데 이것들과 아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 보이지 않는 구속의 역사가 움직이는 거예요. 이게 바로 신국이에요. 이렇게 해서 이렇게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 끝 날에 이 두 나라는 완전히 분리가 되는 거예요. 분리가 될 때에 여기에 속한 요소들은 떨어져 나가고 여기에 속한 요소들은 남아서 완전한 연결을 이루게 되는 거예요. 이것도 이제 루터파하고 입장이 달라요. 루터파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모두 다 종식시키면서 결국은 마귀와 사탄까지도 다 본래의 선한대로 다시 창조하셔서 한 세계를 이루신다고 보는 거고, 그런데 개혁주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안보죠.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영원한 형벌에 처하셔서 그래서 당신 자신의 창조세계에서 당신을 거스렸던 자들의 영원한 형벌과 영원한 복락을 대조시킴으로써 하나님이 영원히 창조된 세계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그리고 이 세계는 영원하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문제가 뭐냐 하면 만약에 루터파의 의견대로 그렇게 만약에 된다면 그럼 무슨 문제가 나오냐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손해였다고 하는데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이 그 세계를 없애버리시면 당신 자신의 창조의 불완전함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들이 이어져 오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이어져 오면서 결국은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게 되는, 초림하시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예수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 성육신은 결국은 이렇게 들어오게 되어서 이후에 이루어질 모든 교회와 더불어서 이 전체가 하나의 바디를 이루는, 몸을 이루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거예요. 이렇게. 그래서 일체의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은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될 때에 결국은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이 문제인 거죠. 이제. 이 안에 있는 사람들, 이 안에 있는 무수한 사람들을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나라에 속해 있으면서도 아직은 이 나라와 함께 공존하는 사람들이 되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이 땅에 살면서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고 이 경계가 어디인지 하나님은 알고 계시지만 우리에게는 감추어져 있어요. 그래서 이것은 역사가 흘러가면서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그때까지 우리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정하셨는지는 우리의 이 선교를 통해서 드러난다라고 생각을 하면서 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 통치를 받는 이러한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참된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존재론적으로 드러내고, 말로 선포하고 살아가는 이 모든 역사의 전개 속에서 결국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결말을 향해 가게 된다 이 얘기에요.
그럼 마지막 결론을 내겠어요. 여기에서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여기에 아담과 하와가 들어간다고 치고 그러면 결국은 세계는 어떻게 되겠어요? 이렇게 되지 않겠어요? 제일 좁게는 인간이고, 그렇죠? 그 다음에 동물들도 있고, 식물들도 있고 이 모든 세계가 다 있을 거 아니에요. 이렇게.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관계를 맺으셔요. 근데 이게 머리의 관계예요. 머리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첫째는 일차적으로 생명과 통치를 보여주는 거예요. 교회가 들어온 다음에는 여기에 섬김의 문제가 들어오게 되는 거죠. 생명과 통치예요. 그러면 결국은 그리스도께서 인간뿐만 아니라 이 모든 동물과 식물과 모든 존재하는 창조하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고, 그 분의 생명과 통치를 힘입고 있다는 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의 머리가 되시는 거예요. 만물의 머리가 되는 거예요.
여기에서 주의해야 될 것은 있어요. 만물의 머리가 되었다고 해서 인간과 다른 모든 피조물 사이의 구분점이 사라진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물질 사상이 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인간과 그리스도는 독특한 관계를 가지고 머리가 되시고, 나머지 모든 것들과는 통치하시는 점에 있어서 이 모든 것들의 머리가 되신다 이렇게 보는 거죠. 머리가 되었던 것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머리의 관계가 깨뜨려진 것이 모든 피조물들과의 관계가, 신과의 관계, 인간, 자연, 자아와의 관계가 깨진 걸로 나타나는 거예요. 이 모든 관계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정립될 수 있는 것이에요.
이러한 모든 것들이 완성되고 난 다음에, 종말에,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다 정리하시고 그리고 이 땅을 하나님이 멸절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자체를 새롭게 하신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영혼이 거듭났을 때에 우리의 외모가 변한 게 아니라 속사람이 변해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가져서 주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듯이, 이 세계를 육체라 보고 이것들 속에 추악하고 죄된 요소들, 그 다음에 타락의 결과로 말미암아 부패한 이 세계의 환경적이고 병적인 증상들, 이런 것들을 완전히 구속의 완성과 함께 치료하셔서 창조시의 본래의 찬란한 영광을 이 자연 만물에게서 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이 문명적인 요소에 있어서도 이 오염과 죄의 부패한 요소들을 제거해 놓으면 그것도 아름다운 것이 될 것이라고 보는 거죠. 그렇게 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들과 다시 이런 관계를 맺으시는, 여기에서, 그게 바로 이제 그리스도의 ‘아나카펠레오’예요. 이거예요. 그러면 교회는 결국은 뭐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구체적으로 세워지잖아요. 그러면 이 나라가 될 때까지 이 교회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이렇게 이루어질 세계를 향하여 자기의 구성원이 살도록, 그리고 이 사람들이 이렇게 구속의 목적대로 돌아오게 되도록 그렇게 희생하고 봉사하면서 살다가 마지막에, 지금 현재는 교회를 통해 이뤄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에 있는 나라가 이렇게 분리되었지만, 나중에는 이 모든 것들이 망할 것 망하고 통합을 이뤄서 하나님의 교회 자체가 이 세상과 일치를 이루는 그때에 ‘아나카펠레오’가 이루어진다 이거예요.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으로 온다 이거예요. 그래서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시고 다스려 나가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해서 인간은 문명과 이 모든 그것을 통해서 발전된 가운데 이 두 세계는 물리적으로 부셔지거나 합쳐져서 그렇게 통일된 세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장소적으로는 따로 있으면서도 이것이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통일을 이뤄서 아까 프리즘에 비유해서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의 찬란한 이 세계에 대한 통치의 아름다움을 끌어내줌으로써 본래의 목적에 이바지 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