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마음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
I. 본문의 배경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하셨던 사역은 세 가지였습니다.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는 것과 하늘나라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잘 가르쳐 주시는 것과 병들고 약한 자들을 고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 사역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는 바로 이런 예수님의 삼중 사역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이런 예수님의 섬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당신 혼자 섬기시기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많은 일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데리고 있던 예수님의 12제자를 사도로 삼으셔서 이 세상에 파송하셨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이 이 사랑하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신 그 목적이 바로 예수님의 이 삼중 사역을 뒤잇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II. 사도 파송의 동기
예수님이 이 제자들을 사도삼아 이 세상에 파송하셨을 때 예수님이 어떤 마음으로 이들을 보내셨는지 그것이 오늘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을 파송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하늘 아버지께 추수할 일군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시면서 사도들을 파송하셨으니 사도들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일군들이 이 세상에 보내어 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예수님의 기도에 힘입어서 이 땅에 태어났고 예수님이 우리를 당신 믿게 하셔서 이 세상에 두신 것은 우리를 이 세상에 파송하신 것입니다.
1.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
우리를 이 세상에 파송하시는 그 마음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시고’라고 번역된 단어는 희랍어에 이돈(ίδών) 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보는 것은 육신의 두 눈으로 보는 것도 있고 정신이나 마음의 눈으로 보는 그러한 바라봄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당신만이 가지시는 영적인 통찰로서 무리들을 바라보셨고 그때에 예수님의 마음에는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났기 때문에 사도들을 파송하신 것이고 지금 우리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이유입니다.
‘민망히 여기다’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우리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잘못 된 번역입니다. 민망하다라고 하는 것은 보지 못할 것을 보았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번역될 한 40년 전에는 무슨 뜻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지금 의미로서는 이 의미가 전달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매우 어려운 단어입니다. 희랍어 성경에 에스플랑크니쉬데(έσπλαγχνίσθη) 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수동태형입니다. 원래의 이 단어의 의미는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의 자리가 배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배에 손을 얹고 양심에 맹세를 해야 하는 그런 맥락에서 이 단어를 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혼과 정신의 가장 깊은 자리가 뭔가 어떤 광경을 보고 거기에서 받은 느낌 때문에 흔들리기까지 감동을 받으시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민망히 여기시니라고 된 이 단어를 오늘 한국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는 문맥에서 번역을 하자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셨으니’라고 번역을 하면 정확하게 맞는 번역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으니’라고 하는 바로 그 단어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었습니다. 이 긍휼은 어떤 비참한 상태를 보고 느끼는 슬픈 사랑의 감정입니다. 그들이 오늘 목자 잃은 양같이 여겨졌기 때문에 예수님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습니다.
2. 목자 없는 양같이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양으로 묘사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언약백성들을 자기의 양떼 혹은 양무리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짐승가운데 하나님이 양을 택하여 그것을 우리의 모습이라고 비유하신 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각각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신체적인 장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빠른 다리, 날카로운 발톱, 뾰족한 이빨, 날카로운 뿔, 어둠속에서도 사물을 볼 수 있는 좋은 눈 이런 모든 것들은 바로 자기를 지키는 훌륭한 무기가 됩니다. 그러나 양은 아무런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양으로 비유한 것은 이 세상에 내가 너희를 창조할 때 너희는 처음부터 나 없이는 살 수 없는 피조물로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양들은 많이 모여 있어도 그것으로 자기를 보호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목자가 필요합니다. 그 목자아래서 목자를 의지하며 목자를 따라갈 때 그 양은 참된 양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목자 없는 양이 되었다고 하는 이 말은 매우 큰 위험에 처해있고 실제로 목자가 없기 때문에 그 양들이 늑탈당하고 있는 비참한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논리는 누군가가 고통을 당했을 때에 왜 저 고통을 당하게 되었는지를 따지지만 긍휼의 마음은 그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그 고통의 결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긍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금 바라보고 계신 이 목자 잃은 양같이 되어있는 이 백성들의 상태를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던 것입니다. 교회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이 마음으로 교회가 가득 차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장 큰 재산은 큰 빌딩이나 많은 교인들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이 마음을 가슴에 깊이 품고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이 마음으로 교회가 가득 찰 때 그것이 정말 복된 교회이고 그런 작은 교회는 그런 마음이 없는 큰 교회가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을 하나님 앞에 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이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양무리를 보시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는데 목자를 잃은 이 양들의 형편이 어떠하였길래 예수님의 마음이 이렇게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을까요?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저희가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함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 단어는 양들이 목자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면서 좀 힘들어 하는 것을 묘사하는 번역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단어도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리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전혀 그런 번역이 아니고 스퀼로(σκύλλω) 라고 하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유리하고 고생하다’라고 하는 이 단어는 하나는 누군가에 의해서 끊임없이 고통당하고 있는 수동태를 보여줍니다. 누군가가 와서 아주 괴롭게 고통을 주니까 힘이 없어서 그냥 당하고만 있는 그런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뒤에 나오는 한 단어는 ‘내동댕이치다’라고 하는 데서 온 수동태입니다. 누군가가 확 집어던져 버려서 내버려져 버린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영적인 안목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실 때 느끼셨던 마음이었습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언제나 변함없이 그 백성들이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신의 시각으로 보실 때 이들은 정말 누군가에 의해서 견딜 수 없이 고통을 당하면서도 저항하지 못하고 그 괴롬을 다 받아야 하고 누군가에 의해서 집어던져 버린 가운데 내동댕이쳐져서 아무 희망도 없이 버려진 그러한 존재들임을 예수님이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목자로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비롯해서 선지자와 제사장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늘 안식일을 지키게 해 주고 절기를 따라 하나님 섬기게 해 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혼의 처지는 내동댕이쳐져서 버려진 것처럼 되었고 유리하고 고생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처지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들을 바라보시던 마음이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마음을 품은 사람이 아니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늘도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고 불쌍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시는 방법은 사람들에게 이런 십자가 사랑의 은혜를 주셔서 이렇게 무리를 보시고 유리하고 고생하는 양떼들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마음을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부어진 사람들은 도저히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고통, 영혼의 목마르고 신음하는 괴롬을 내버려둔 채 자기 혼자, 자기 사랑에 빠져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같은 부족한 사람을 불러서 오늘도 하늘을 열고 은혜를 부어주시는 이유입니다.
우리도 한때는 예수님의 그 마음을 가슴에 가득 담았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저 좋은 대로 살았고 그 길로 가면 행복인 줄 알고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사랑했습니다. 그때까지는 몰랐는데 어느 한 순간 눈을 떠보니 우리는 가시덤불 속에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고통을 느끼며 헤어 나오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그 가시는 우리를 찌르고 우리의 온 몸을 피로 물들게 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가시덤불에 빠져 헤어 나오려고 울며 엄마를 부르고 휘저으면 휘저을수록 그 가시가 그의 얼굴을 찌르고 가슴을 찔러 이 어린아이가 핏덩어리가 되듯이 우리가 바로 그렇게 이 세상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앞을 볼 수 없는 캄캄한 영적인 어둠속에서 그렇게 슬퍼하고 피 흘리고 있을 그때에 우리가 주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먼저 찾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그 비참한 가시덤불 속에서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었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그 곳 가시밭길에 길 잃은 양한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우리는 그렇게 캄캄한 가시덤불 속에서 그 길에서 그 고통과 버림받은 외로움을 이기지 못할 때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를 그렇게 건져주셨습니다. 돈 많고 모든 것이 평안할 때에는 친구도 많았고 우리를 생각해주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벼랑 끝에 섰을 때 누가 우리 옆에 있었습니까? 그때 깨달은 지극히 평범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만 영원하십니다.
[예수 내 친구 나를 버리지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않네]
III.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깨달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우리에게 당부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이 마음을 우리들이 계속 품고 살아야지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우리를 남겨두신 그 분부를 따라서 주님 섬기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보내셔서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주님과 이 세상에 있는 영혼들을 섬길 그때에만 우리는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한 것 보셨습니까? 주님이 주신 사명의 자리를 팽개치고 도망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사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잘 변하는 존재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새벽에는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눈물을 흘러도 오후에는 죄짓지 않습니까? 13년 동안 여러분들이 앉은 이 자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앉았었고 여러분들과는 비교되지 않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때 발견한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도 있지만 처음에 주님께로부터 부음 받은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미끄러져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여러분보다 주님을 못 만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여러분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사랑, 더 큰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 중에도 미끄러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중에도 어떤 분들은 마음에 깊이 찔리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어둡고 캄캄한 길, 가시밭 골목에 그렇게 몸부림 쳐서 핏덩어리가 될 때 주님이 건져주셨던 신앙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것은 한번 하나님을 생애적으로 만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후에 끊임없이 주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 앞에서 사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번 육체를 미워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육체를 따라 생각하지 않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는 또 다른 책에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빛으로 멀어지기만 하면 우리는 어둠 속에 빠져 부패한 우리의 자신 밖에는 사랑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찬란한 진리의 빛 아래서 내가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지를 깨닫고 내가 예전에는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 유리하고 방황하던 가시밭길 한가운데 있던 불쌍한 양이었고 주님이 어떤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 가시덤불에서 이끌어 내셔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 십자가 진리의 빛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창자가 흔들리기까지 감동을 받는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로 우리의 심령이 찢어지는 것같이 아파, 주님 앞에 다시 돌아오는 일들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아직도 섬기고 계셨을 사람들을 섬기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아직 안 불러 가시고 이 땅에 남겨두신 것입니다. 인생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하신 목적을 따라 흘러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1. 육체를 섬기심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전인으로서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만 사랑하고 영혼은 버리시거나 영혼은 사랑하지만 육체는 돌보지 않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육체도 섬기고 영혼도 섬기셨으니 이는 그 둘이 합하여져 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오늘 성경 본문이 보여줍니다. “저희의 병든 것과 약한 것을 고치시고” 또 제자들에게도 그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영적인 권세를 덧입혀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치유사역은 예수님 안에 있는 신적인 능력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사도들도 바로 이 일을 이어서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병을 고치고 병든 자를 돕는 것은 오직 신유의 능력으로서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고쳐주실 때에 신적인 능력으로만 고쳐주셨지만 사도들도 그 일을 이었으나 병든 자들을 위해 기름을 붓기도 하고 포도주를 사용해서 병든 몸을 치료하도록 권고하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서 병든 일을 고쳐주는 그 일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다른 방편들을 사용해서도 병들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쳐주신 것은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인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서의 위대한 능력을 그 치유를 통해 보여주시므로 그들을 예수 믿게 하시기 위해 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더 큰 동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병든 자 앞에서 좋은 기회로구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보여주어야지. 이것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들을 고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병들고 약하기 때문에 고통 받고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그들의 비참한 육체의 상태가 너무 불쌍해서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병든 자를 일으켜 주셨던 것입니다.
교회가 한편으로는 많이 기도하고 이런 병을 고치는 능력으로 사람들을 섬겨야 하지만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병들고 약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제가 꼭 하고 싶은 사역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의사나 간호사를 고용해서 지역을 두루 돌며 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푸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의료혜택이 폭 넓게 주어지는 시대에 아프면 병원에 가면 그런 도움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하고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제가 어느 의료인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하는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사람들은 병든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의료체계가 잘 되어있기 때문에 아프면 제 발로 걸어와서 주사도 맞고 약도 타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망가졌기 때문에 어떤 병에 걸려도 스스로 병원에 오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고 그 사람들은 나라에서 아무리 의료비를 싸게 해 주어도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인데 생각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전 이런 힌트를 독일교회에서 얻었습니다. 독일 교회에서는 교회가 이렇게 간호사들을 고용해서 지역을 두루 돌며 그들의 의료적인 필요를 파악해서 교회와 연계하여 의료혜택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우리보다 훨씬 의료 보장이 잘 되어있는 나라이고 국민소득은 우리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사역이 교회에 필요한 이유는 병들어도 스스로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야말로 도와야 될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도와야 합니다. 저는 여러 해 전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다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라가 통일이 되었을 때 역사가 우리에게 너희 동포들이 그렇게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을 때 ‘너는 무얼 했느냐’고 물을 때 나는 ‘무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김정일씨가 미워서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라는 말 한마디로 그 역사는 수긍할까? 북한이 문을 안 열어주었기 때문에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핵무기를 만드는데 왜 도와줍니까? 이런 대답하나로 과연 그 역사의 물음에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제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탈북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에 의해서 장시간 동안 생생하게 어떻게 북녘 동포들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지를 간증 들었을 때 그때 제 마음 속에서 그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그들도 도와야 합니다. 여러분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하게 모든 좋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6월에 북한에 들어갑니다. 갔다 오고 나면 아마 교회가 좋은 결심을 해야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오늘이 장애인 주일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 장애를 입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독일이나 일본 같은 데서 인간들을 청소했던 것 기억하십니까? 특별히 독일은 히틀러 치하에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모아서 죽여 버렸습니다. 사회악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의 지체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누군가에게 악을 행하면 악 때문에 해를 입은 사람보다 더 손해를 보는 사람은 그 악을 행한 사람입니다. 그의 영혼과 마음에 더 나쁜 악덕들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이 왕따 시키고 이지매를 주어서 자기 친구를 그렇게 고통을 줍니다. 진짜 해를 입는 사람은 왕따를 당하고 학생들에게 버림을 받는 아이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일행한 아이의 마음에 있는 이 악함은 일평생이 가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진짜 주님을 만나는 기적이나 일어나기 전에는 그 악한 경향성을 가지고 일평생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애를 입고 태어난 사람들을 향한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해 지난일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읽고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해외에 입양을 갔는데 그때에 한국에 있는 두 쌍둥이를 입양했던 어떤 독일 젊은 부부의 간증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둘 다 교사로서 비교적 독일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자신들에게 전해진 입양 정보를 보고 아이를 입양하려고 한국을 뒤졌는데 그때 한국에서 아무도 데려가지 않은 쌍둥이를 발견했습니다. 눈멀고 귀 먹고 말도 못하고 몸도 부자유스러운 정신 장애아였습니다. 두 아이를 놓고 부부가 일주일을 뜬 눈으로 새웠다고 합니다. 마지막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은 ‘너희들이 아니면 아무도 이 아이들을 입양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부가 이 두 아이를 자신의 자녀로 입양했습니다. 불과 4-5살 밖에 안 된 아이들을 데려다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 다 가르쳤습니다. 이 아이들이 4-5학년 되었을 때 고국에 한번 가게 해 주기 위해서 앞도 못 보는 아이들을 데리고 고국에 왔습니다. 그 부모가 일정보다 빨리 짐을 싸서 남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아이들을 위해서 한국에 왔는데 정말 이 아이들을 위해서였다면 여기 오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냉대를 한 것입니다. 장애를 입었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의 죄일까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지만 예수님의 이 찢어지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고통 받고 있는 상태가 먼저 들어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누구의 잘못 때문에 장애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보면 9장의 처음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중풍에 걸려 침상에 누워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다 버린 그를 예수님이 고쳐주시고 소경 된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데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귀신이 들려서 벙어리가 된 사람도 예수님이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선을 행하면 그 선으로 말미암아 이익을 받는 사람은 그 선을 베풂을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베푸는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과 영혼 안에 좋은 덕이 더 많이 생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로 변해가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위해 섬기는 것을 마음에 큰 기쁨으로 알고 그들을 위해서 우리 가진 사람들이 포기하고 모든 것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받은 사람들이 희생을 해서 없는 자와 있는 자가 균등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애를 모자라거나 결함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하나 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깊이 끌어안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한 지체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한 가정은 물론 한 교회는 물론 이 사회 전체가 배우는 것이 바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 가까이 오시면 어떻게 받아주셨을까요? 그런 마음을 우리에게 깊이 품고 살아가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이렇게 육체만을 위하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2. 영혼을 섬기심
예수님의 더 큰 관심은 그들의 병들고 고통 받는 육체 속에 담긴 영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괴롭힘을 당하고 내팽개쳐져 있었지만 그 배후에는 그들을 만든 영적인 세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귀신을 제압하는 능력을 가지고 그들을 치료하셨고 그런 당신의 권능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 세상에 파송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사실 제 목회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때는 교인이 150-200명 쯤 모일 때였습니다. 어제도 누군가와 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때 가장 행복했습니다. 아이들의 이름까지 거의 외우고 돌집에 가서 예배드려주고 시집장가 가면 신접살림에 가서 예배 드려주고 부부가 싸우면 찾아가서 혼내주고 부모에게 잘못하면 타일러주고 가정을 세웠습니다. 지금도 간절한 소원은 그런 목회를 하다가 그런 사랑하는 성도들 보는데서 눈을 감는 것입니다. 정말 어떤 때는 너무 간절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가 큰 것 하나도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점을 나에게 고정시키지 말고 주님이 바라보시며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던 세상을 향하여 관점을 이동하게 되면 그런 바람은 너무 마음 아픈 사치입니다. 언젠가도 제가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가 시골로 outreach 갔을 때 복음을 전하니까 할머니가 빗자루를 집어던지고 부지깽이를 던지면서 재수 없다고 가라고 하는 데도 웃으면서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중에 이 할머니가 쭈글쭈글한 손으로 꼭 붙들고 그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중얼거렸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예수 왜 이제야 전해주는 거야. 아무도 나에게 그 예수님 전해준 사람이 없었어.”라고 말입니다. 지금도 기억납니다. 성과가 있느니 없느니 하지만 가가호호 방문하는 이 축호 전도는 영원한 가치를 전하고 있습니다. 골목을 누비면서 지하실 교회 시대 때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집 식구들이 주님을 영접했고 제가 그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댓돌에서 떨어지면 뼈가 부러질 것처럼 지하실로 곧추 내려가는 깊은 굴속 같은 집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주님을 만나고 감격하는 그들에게 복음 전해주면서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없습니까?”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지하실 방에서 거의 안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십자가 깃발을 올려서 전단지를 돌려서 나오라 할 때 나오는 사람들은 그래도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자신이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의 크신 사랑을 아무리 스피커에 외쳐도 거기 나올 수 없는 무너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 사람을 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하던 그 예수님의 마음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동네에도 그런 사람들이 아직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너무 사치스런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 우리는 괴롭고 그가 원하지 않고 가족적인 교회 생활을 원해도 그렇게 고통하는 수많은 영혼들 진리의 빛이 비추기만 하면 부끄러운 어둠의 일을 버리고 예수를 사랑할 사람들, 우리보다도 더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가슴이 찢어지는 그 마음을 가슴 속에 품고 예수님처럼 이 어둔 세상에 섬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알도다]
이 땅에 있는 내 동포들뿐입니까? 이북에 있는 내 사랑하는 골육들, 먹지 못하고 헐벗어 죽어가고 아무 희망 없이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 복음의 소식을 듣지도 못하고 공허하게 살아가는 그 사람들에게 우리들이 복음을 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먼 나라에 있는 영혼들, 멀고 가기 힘든 곳이기 때문에 예수 만난 많은 사람들 중 누구도 가지 않은 그곳에 우리들이 보내어 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그 큰 사랑, 피부 색깔과 혈통, 장애의 유무와는 상관이 없이 남녀와 신분의 구별의 상관없이 누구든지 당신을 찾는 사람을 만나주시는 예수님 그들이 누구이든지 고통 받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그 사랑을 전해주기만 한다면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할 것이고 그 마음속에 주님을 품고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outreach 동영상을 보면서 저는 마음으로 참 많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렇게 피부색갈도 다른 저 사람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동일한가? 그 검은 피부에 뜨겁게 흐느끼는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것이 오늘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 앞에 녹아내리는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더 멀리 나아가서 예수의 크신 사랑, 우리를 위해 생명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영혼들을 주님 앞에 건지는 길이 됩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말하기를 교회의 본질은 사람들을 회심하게 하고 회심한 사람들의 그 회심을 보존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편으로 이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교회 다니는데 정말 할 일이 많습니다. 정말 감사하십시오. 그렇지 않았더라면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죄와 짝하다가 죽었을 사람들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주님이 은혜를 주셔서 이 세상을 보며 찢어지는 자기의 마음을 여러분들에게 나누어 주셔서 잠시 있다 스러질 이슬 같은 목숨들을 영원한 나라와 행복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만나는 사람들이 주님 만나고 행복해 하는 것을 보십시오. 여러분 섬긴 사람들이 하나님 만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예수님 이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었던 그 일을 여러분들이 예수님 대신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은 약한 자를 불러 하늘 뜻을 전하십니다. 한때 가장 죄인이었던 사람, 한때 주님을 멀리 떠나 죄악의 가시밭길에 있던 사람들을 불러서 다시 한번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덧입혀서 예수님의 마음을 보여주게 하십니다. 그들로 약한 것을 고치고 그들의 잃은 영혼들을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십니다. 주님의 그 큰 사랑, 비할 데 없는 큰 은혜를 입었어도 우리들이 시종 여일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쓰러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아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쓰러지고 넘어진 그 곳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 그 소망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
Ⅳ. 결론
하나님 앞에 온 마음을 다해서, 그렇게 주님 앞에 온 마음을 다해서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서 예수님이 자기를 그 어둔 가시밭길에서 건지셨던 그 마음을 품고 힘 있는 대로 나보다 고통하는 영혼을 섬기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며 자기를 바쳐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약한 자를 부르셔서 다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이유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큰 사랑을 힘입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993년도 11월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잘 나가는 교수였습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좋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아내와 함께 잠자리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아요. 그래서 침대 밑에 내려와서 아내 발밑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간절히 기도를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피곤해서 다시 올라가면 잠이 오지 않아서 내려와서 침대 밑에 꿇어앉아서 기도했습니다. 밤을 새웠습니다. 그때 주님이 나에게 들려주는 메시지가 이것이었습니다. “얘야, 이 세상에는 고생하며 유리하는 영혼이 많단다. 나를 대신해서 그들을 도울 수 없겠니?” 3일 밤을 그렇게 기도를 시키셨습니다. 메시지는 동일했습니다.
[내게 오는 많은 양떼 내게 맡겨줄 터이니 사랑하는 내 친구야 많은 양떼를 부탁한다]
그리고 한 달 후에 열린교회가 문을 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이 설교를 다시 읽으면서 제 마음에 깊이 다가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 맞아 그때 그렇게 내 마음을 찔렀던 예수님의 찢어지시는 것 같은 마음이 오늘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지. 변치 말아야지.” 여러분들은 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맨 처음에 주셨던 이 교회를 세우신 그 마음, 고통당하고 버림받은 사람들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시던 예수님의 그 마음을 물려받아서 우리들이 이 교회의 섬기는 사람들로 한 지체로 불림을 받았으니 이 마음을 가슴에 깊이 품고 짧은 세월을 지나는 동안에 가슴에 주님의 사랑을 두 눈에 주님의 눈물을 가득 담고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다면 친구가 되어 주셨을 그 영혼들을 예수님 발을 씻기는 마음으로 잘 섬기고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은 그들을 위해 주라고 허락하신 것처럼 생각하며 그렇게 우리 모든 마음을 드려서 섬기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