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하나님의 능력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고속도로를 쫙 타고 오면서 안개가 쫙 펴졌어요. 그 안개가 좋긴 좋지만 차를 점점 안 보이게 하는 어려움이 있었어요.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린 이 본문을 가지고 십자가에 대해서 10번 계속될 설교 중에 2번째 설교를 하기 위해서 이 강단에 섰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십자가가 기독교의 핵심 진리라는 사실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못 박힌 곳임으로 구원을 얻는 우리는 마땅히 이 십자가를 자랑을 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십자가는 아주 무한한 하나님의 지혜의 보고입니다. 십자가를 잠시 생각하고 금방 이해함으로 완전히 깨달을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대단히 생각이 얕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비밀을 가질수록 이 십자가란 주제가 얼마나 무한한 신앙의 금광과 같은 것인지 이해가 갈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의 진리를 묵상할수록 우리는 십자가가 뿜어내는 눈부신 진리의 빗줄기 앞에 자신조차 잃어버리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제가 오늘 십자가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증거하지 않고 견딜 수 없는 또 한 가지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모든 사람들은 오직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서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이 세상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구원을 받은 성도들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 속에서 이 같은 사실을 증언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린도 시는 지도상에서 보면 여러분들이 그리스를 찾을 수 있는데 그리스 남단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였습니다. 선박들이 많이 드나드는 항구도시였고 여러 민족이 모이며 흩어지며 아주 무역을 많이 하는 상업도시였습니다. 항구도시는 부산에서 오신 좀 죄송한데... 항구도시는 지금이나 그 때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렇게 건전하고 그렇지 못한 면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들고 돈이 많이 왔다갔다 하고 선박들이 왔다가고 하니까 자연히 여러 가지로 타락한 현상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요. 이 고린도 교회가 처음으로 복음을 접하게 된 것은 주후 50년경 바울이 2차로 전도 여행을 했을 때입니다. 회당에서 열심히 그리스도를 전했지만 핍박을 받아서 그는 쫓겨나게 되었어요. 약하여 두려워 심히 떨면서도 그는 복음을 끝까지 전했습니다. 주님께선 여러 고린도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 떠는 사도바울에게 말씀하셨죠,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으니라’ 말씀하시면서 바울을 격려하시며 그의 어깨를 붙잡아 주셨습니다. 바울이 이 말씀에 힘 입어서 여기서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함으로 고린도 교회가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지 얼마 안 되자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1장에서 인사와 함께 바울을 근심케 하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교회의 심각한 분열 현상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그 교회를 설립한 바울에게 속했다 하고 자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능통한 아볼로에게 속한 파라고 뽐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열 두 제자 중의 수제자인 사도 베드로에게 속했노라고 자신의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우리는 그리스도파라고 주장하면서 마치 예수님이 교회의 일개의 파당의 우두머리가 되실 수 있는 분인 것처럼 그는 행하였습니다. 이 때 바울은 다시 한번 자기가 누군인지를 밝히면서 그리스도에게로 그들의 신앙의 관심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시게 하심이 아니요 혹시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바울파라고 그럴까봐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신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파케 하려 하시게 함이니 나를 지혜로 하지 아니 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아니하니라.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18절부터 2장 16절까지 무려 30여절에 걸쳐서 갑자기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을 3장에서 다루기 전에 문득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분쟁에 대해서 얘기하다가 3장에서 다시 분쟁에 대해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갑자기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냅니다. 바울의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바울은 불신자를 전도하기 위해서 고린도 전서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처럼 긴 시간을 할애해서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설명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본문은 말합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어서 31절은 말합니다.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성도라 불리우는 무리들 이였습니다. 이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었으며 그들은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고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린도 교회는 부끄러운 실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심각한 파당이 생기고 심지어는 계모와 근친상간에까지 이르는 패륜의 도덕적인 타락이 교회 속에서 일렁거리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문제는 그들이 육체를 자랑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애타나는 심경으로 필을 들자말자 ‘너희는 육체를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려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면서 육체를 자랑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랑거리가 아니라 육체와 및 그 육체에 속한 것들이 그들의 자랑거리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어째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의 무리로 불리어지는 고린도 교회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기독교인들처럼 실패를 경험하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교회 그리스도인들처럼 육체를 자랑하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요? 어쨌든 그들은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이처럼 나뉘어져 분쟁하며 그렇게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음란하고 죄악된 타락과 부패한 탈선으로 어둠의 자식들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때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수다한 무리가 되어서 빈손 들고 나아가 세례를 받았다고 사도행전 17장 7절은 말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이처럼 소중한 복음의 경험을 가졌던 고린도 교회 그리스도인들을 이렇게 무지하고 몽매하고 패역하고 음란한 죄악에 무뎌진 사람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탈선한 채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요? 이들의 실패는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이들의 실패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었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실패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한때는 이 십자가를 믿었으나 지금은 더 이상 십자가의 정신이 고린도 교회를 지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 때는 그 십자가를 이해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이기를 다루기에 앞서서 그토록 길게 이 십자가에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그는 부패한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지적하면서 다루기에 앞서 자신의 개인적인 결단을 그들에게 밝힙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결심하였노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내가 결단하였노라, 이 얼마나 놀라운 진술입니까?
이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사람밖에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비웃고 조롱하며 배척하는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비웃고 배척하는 사람들은 왜일까요? 오늘 읽어드린 성경은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나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못하는 자의 눈에는 이 십자가가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가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 십자가가 어리석게 보일까요? 그들이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지혜있는 자들의 지혜를 폐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멸하리라’ 이들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총명은 세상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를 믿지 못하는 이유가 대개 이런 겁니다. 첫째 사람의 죄를 위해서 누군가가 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허무 맹랑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이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누군가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죽음으로 자기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현대인의 사고방식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세상 방식들이 이 십자가를 믿지 않는 이유는 십자가가 얘기하고 있는 이 교리가 너무 미신적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떤 공부를 많이 한 분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그분이 우리의 의로움을 위해서 3일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아, 그래요, 그건 멕시코에 어떤 신화에도 그런 얘기가 나오데요. ‘ 그것은 자기가 아는 기독교가 여러 종교의 신화를 받아들여서 그렇게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 태도가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2000년 전에 흘려 죽은 한 평화주의자인 예수,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의 그 피가 2000년을 뛰어넘어서 살고 있는 우리의 삶과 우리의 영혼에 관심이 있다라고 하는 것들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또 십자가를 믿지 않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 모든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고난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이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죄의 용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 십자가는 온갖 죄악을 저지르면서 살아갔던 전과 10범의 살인범이나 오늘 도덕과 윤리를 논하면서 고상하게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살아보려고 노력한 모든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동일하게 죄인으로 취급합니다. 모든 사람이 질적으로 똑같이 만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한 이들의 모든 의로움은 결코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께 돌아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불평합니다. 이 십자가의 교리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착하게 살려는 동기를 뺏어 간다고 말합니다. 어쨌든 이 사람들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십자가를 비웃고 조롱하며 배척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울 사도의 표현대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이들의 운명과 그 실체 속에서 말하기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럼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말합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와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한 그리스도인으로 바울은 그들에게 말하기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실 수 있는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는 이 약속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이 두부류의 사람들 말고 또 한 부류의 사람이 있음을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같은 십자가를 대적하거나 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제 3의 사람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 제3의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십자가가 아닌 육체를 자랑하는 불행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구원이 없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가 구원받았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해서 그들의 믿음의 대상이 십자가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는 것처럼 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알지만 그 십자가가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지 못합니다. 그 십자가를 믿기는 하지만 그 십자가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자랑거리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그 십자가가 그들과 상관이 있을 줄 모르지만 오늘 죄악의 세상을 이기고 살아가는 이 믿음의 삶 속에서 이 십자가가 그들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죄와 사망과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위대한 생명의 능력을 불어넣어주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어떤 사람들이 십자가를 비웃거나 배척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2000년 전의 사건이 오늘 나와 관계있음을 인정하지요? 이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들이 구원받은 사실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십자가가 기독교의 표적이 되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자들, 교회 안에 있으나 이들은 결코 십자가가 자랑거리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육체를 자랑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할까요? 그리스도인이면서 어떻게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영적인 상황과 그로 말미암아 비롯되는 신앙의 실태를 차례대로 살펴보면 답변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고린도 전서를 시작하면서 누가 그 편지를 받을 지에 대해 씁니다. 우리가 얘기하면 ‘사랑하는 친구.....에게’ 하는 것처럼 오늘 사도 바울은자기의 편지를 받을 대상이 고린도 교회임을 먼저 편지의 첫머리에서 밝히고 있지요. 근데 그 첫머리에 뭐라고 했는가 하면 1장 1절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이 문구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이 문구는 양립할 수 없는 두 단어를 함께 엮어 놓은 것입니다. 이 문구는 서로 반대되는 형상을 담은 두 폭의 그림을 함께 겹쳐 놓은 것과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교회 그것은 하나님의 일에 협력하고 그리스도를 드리도록 서로 공경하며 서로 사랑하며 하나 되며 주님의 뜻에 의해 지배되는 성결한 그리스도 예수의 공동체를 표명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고린도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자아가 주인노릇 하며 하나님을 대항하며 가장 타락한 도시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멋대로 방탕하고 살아가는 가리켜서 ‘고린도에서 사는 것처럼 사는구나!’ 라는 속담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형편없이 살아가고 있는 개판 같은 인생을 가리켜서 ‘고린도에 사는 것 같은 인생이다’ 할 정도로 ( ) 지녔습니다. 고린도시의 타락과 범죄와 방탕아적인 이 비참한 타락은 고린도로 하여금 타락의 대명사로 만들었습니다. 오죽하면 고린도라는 말에서 온 헬라어 동사 ‘고린티미아어즈’ 라는 동사가 있었는데 이 동사는 헬라어 사전에 ‘내친 행위를 하다’, ‘동성연애를 하다’라는 동사가 되는 거였습니다.
이 고린도 교회가 자리 잡고 있는 이 고린도 도시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 째로 아주 학문이 많은 다양한 식견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한창 철학자들이 활동하던 그 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얼마나 현란한 철학과 자기 나름대로의 식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의견이 많으면 말이 많은 법이죠. 그래서 고린도에는 논리학과 수사학이 극도로 발달했습니다. 각 학파의 사람들은 자기의 주장을 고집했으며 그들은 자기의 학설을 따라서 파당을 형성해 나가고 서로 대적하고 미워하는 일들에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논쟁하는 버릇이 생기고 지식에 ( ) 자만심에 빠져있었습니다. 도시의 이 같은 정신이 교회에 파고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바울파 아볼로 파 게바 파 그리스도 파로 갈라놓게 되었습니다.
둘째로는 도덕적인 방만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음란한 것이었습니다. 한때 미국에서 활동하는 가수 중에 아폴로디테라고 하는 팝송 그룹이 있었습니다. 기억하시죠? 아폴로디테, ‘레이엘 티엘’이라고 하는 노래를 불러가지고 크게 히트를 했죠. 그런거도 다 암기하고.... 그 아폴로디테 아주 굉장히 좋은 이름인줄 알았는데 그게 사실은 뭐냐하면 사랑의 여신이었습니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바로 고린도에 있었습니다. 이 신전에는 거대한 신전인데, 거기에서 아폴로디테를 섬기는 축제 의식이 항상 벌어졌는데 거기에는 그 축제의식 속에서 간음을 행하도록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그 예배 순서를 맡은 사람들 가운데 창녀들이 동원들이 동원되는데 약 1000명 정도가 아폴로디테 신전 주위에서 몸을 팔고 있었어요. 예배가 시작되면 그들이 가가지고 예배 행위 속에서 그들이 매춘 행위를 하는 겁니다. 도시는 온통 도덕적인 불결에 발목을 잠그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전서 5장에서 지적하고 있는 죄악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함을 들었으니’ 이 죄악의 지적이 바로 고린도 시의 불결한 방탕한 죄악의 물결이 교회 속에 스며 들어온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도시는 저마다 자기만을 위하는 욕심에 사로잡힌 상업도시였습니다. 마치 서울같이 어떤 따뜻하고 훈훈한 인정이 잇는 것이 아니라 각박하고 어떻게 하던지 저만 잘 살아보겠다는 이런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그토록 간절한 호소로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에 대해서 그토록 길게 고린도 전서 13장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그 도시의 정신이 교회를 침몰시켜서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랑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러주실 때 그것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교회가 다 이처럼 도시의 고린도 도시의 교만하고 분쟁하고 육체로 방탕하며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심에 물들어가는 대신 오히려 하나님은 이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을까요? ( ) 나뉘어지는 고린도 도시를 하나로 묶어주며 방탕하고 음란한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순결한 삶을 살도록 변화시키며 자기만을 위하는 도시로 하여금 자기의 몸을 드려서 그들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도록 신비한 영향을 끼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겠습니까?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일찍이 개인적으로 이런 일들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 많은 무리가 되어서 나아갔습니다. 세상을 거스려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려고 결심하며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받을 적도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오늘 고린도 교회가 육체를 자랑거리고 삼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도시의 정신에 물들었기 때문에 그들이 십자가를 자랑하지 못했습니다. 육체를 자랑할 수밖에 없는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십자가을 이미 잃어버렸습니다. 교회는 도시의 한 복판에 화려하게 우뚝서있었으나 그들은 세상을 향해 외치며 자랑할 십자가를 그들의 신앙 속에서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은 모이나 이제는 더 이상 십자가가 그들의 모임의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고 흩어지나 십자가가 예배 가운데 들리워지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오늘 이 고린도 교회의 실패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들여다봐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교회 속에서 십자가가 중심이 되지 않을 때 그들은 비록 성도라 불리워지는 무리였지만 고린도 도시의 교만한 말 재간꾼들과 다름없이 분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입으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었지만 그들의 삶의 중심에서 십자가가 사라지자 그들은 거룩한 교회 안에서조차 방탕한 고린도 도시의 음행이 재현되는 부끄러운 일들의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까지 경험했지만 온 신념으로 십자가를 붙드는 일에 실패하자 삭막한 도시 속에서 사랑을 베푸는 작은 예수가 되는 데 실패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간혹 신문 지상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혹은 목사님들이 엄청나게 타락하는 이런 보도들을 접하면서 마음 아파합니다. 심지어는 교회 전체가 타락하는 이런 현상들에 대한 소식들을 들으며 마음 아파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고린도 교회와 마찬가지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거기에 머무르기를 실패하면 지금도 넘어집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실패했던 것처럼 우리들이 십자가를 붙들지 못하면 우리들도 실패합니다.
이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견고히 붙잡고 지속적으로 있는 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가슴 속에는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숨쉬고 계셔야 되지 않았습니까? 그들 속에 소망에 관한 것에 묻는 자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다가 갑자기 십자가를 이야기 하는 이유가 바로 이때문 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부패와 타락, 그리고 신앙의 실패를 이 십자가를 통해서 말해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세상, 고린도시에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악의 낙을 좇기 원하는 자신들의 육체의 욕심도 바로 십자가에 매달아야 됐습니다. 오히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처럼 ‘그러나 내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 일에 실패하자 고린도 교회는 밀려드는 죄악의 물결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려가는 신앙의 침륜을 경험했습니다. 십자가를 붙드는 일에 실패하자 성도에 이름은 더럽혀졌고 세례는 무색케 되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 가운데 떠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불행한 것은 주님께서 교회를 그곳에 세우신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함인데 교회는 고린도 시를 향해 외치는 구원의 목소리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고린도 교회의 실패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십자가는 우리를 구했고 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피 흘려 죽어 주셨습니다. 그 때 찔림으로 그의 심장은 터졌고, 그의 찢겨진 심장으로부터 흘러나온 물과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2000년 전 피로 물들어 갈보리 언덕에선 그 보혈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회개하는 여러분을 당신의 품에 안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당신과 우리 사이에 높은 담을 무너뜨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그 피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진 죄악의 담을 무너뜨리고 피 묻은 ( ) 탕자와 같은 우리들을 용납하시고 화목케 하시는 일이 일어났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찬송을 기억합니다.
노래)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우리가 바로 이와같은 화목함을 입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려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에서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게 하려 하였음이라.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아직 거듭나지 못한 형제 자매들에게 내가 그리스도의 간절한 사랑으로 말합니다.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이 사랑으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 분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은 당신의 죄악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을 죄악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서 버림받게 하신 것은 당신을 구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버려두신 것은 여러분들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그 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을 하나님의 멸망으로 지옥으로 위협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그 분 외에는 아무도 당신의 영혼을 구원할 자가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만이 여러분들을 죄악의 사슬에서 끊고 영원을 향해 자유롭게 나아가도록 만들 것입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인생의 절망스러운 모퉁이 길에서 스스로 자살을 기도하던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물었던 그 질문이 오늘 당신의 심령 속에 동일하게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어찌하여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까?’
오늘 성경은 당신의 그 복된 질문에 응답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주 예수의 십자가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구원은 받았지만 오늘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실패한 채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여러분의 마음 한 구석에 밀쳐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다시 한번 심령 한 가운데 우뚝 세우시게 되도록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해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교회는 십자가가 성도들의 삶 중심에 서는데 실패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새기며 그것을 끝까지 붙드는데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고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처럼 육체를 자랑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삶 속에 굳건하게 세워지는 일이 없으면 결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있게 될 수 없다는 것이 고린도 교회의 이 현상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이 온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될 때에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자랑스런 존재들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기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갈라디아서 2장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편지를 쓸 때에 , 이 갈라디아서를 쓸 때에 바울은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난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였습니다. 젊음과 패기가 넘치던 청년 시절이 지나고 검고 윤기 있던 머리칼은 이미 반백발이 되었던 때입니다. 인생의 황혼 길에 선 백발의 노 사도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뚝 서 있었고 30년 전의 못 박은 그리스도가 여전히 십자가에 달려있었습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여졌으나 그의 속사람은 날마다 십자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육체 가운데 사나 육체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자랑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이 30년의 세월동안 세상이란 세상이 줄 수 있는 것들을 위해 사는 고린도 교회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삶을 걷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의 중심에 십자가가 우뚝 서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 십자가를, 그 십자가 아래서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과 작별하기 위한 순교의 종소리가 서서히 들려오는 인생의 석양에서 조용히 비껴오는 노을을 받으면서 그는 다시 한번 확신에 찬 음성으로 다시 한번 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여러분들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