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세상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녹취자 : 김세나
질문1)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믿고 신앙의 열정을 경험하고자 자신의 삶과 행실에 공을 들여야 할 때,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정사(精査)에 관한 역사적인 자료나 지침들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1) 저는 오 목사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정사’에 관한 지침을 가지고 자기의 삶을 살핀 적 없습니까? 정기적으로 매일 혹은 매주?
(오우진 목사님 – 어떤 지침서라고 알려진 것들을 확인해 본 적은 없습니다.)
아니고, 역사적인 자료나 지침들이 있는지 알고 싶다고 말하기 전에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저렇게 지침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른 사람 것을 갖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갖고 싶은 것입니다.
역사적인 자료는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우선 조나단 에드워즈의 resolution이 한번 써 놓고 다락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매주 점검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만 그것을 한 것이 아니라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그것을 했습니다. 조지 윗필드의 매일 점검표는 제가 「게으름」에 이미 수록하였고, 한국 교회사를 보니까 한국교회의 신앙에 들어와 순교하였던 어느 여전도사 그 사람의 생애를 보니까 그 여성도 그러한 매일 매일 점검표를 놓고 그렇게 자신을 점검표대로 살아가려고 몸부림 쳤습니다.
저도 젊은 시절 은혜를 받았을 때 매일 점검표가 있어서 그래프까지 그렸습니다. 나의 기도시간, 성경 읽기, 묵상, 전도 등등. 그리고 제레미 테일러도 이미 그러한 것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사람들이 은밀한 경건 생활이니까 막 공개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한 것이 생기는가 하면, 이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대로 “하나님을 열렬하게 사랑하게 되면” 무엇이 그리워지게 되는가 하면, ‘iustitia, 유드띠띠아’ ‘의’에 대한 그리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이 의를 완성합니다. 제가 한번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인용하였습니다. “사랑은 정의를 완성하고 정의는 사랑을 완성한다.” 두 개가 모순이 아닙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연애를 한다고 칩시다. 마르다 지연 자매가 연애를 한다고 칩시다. 그런데 저 사람과 여기서 헤어지면 죽어도 결혼을 못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진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다음에 지연 자매의 소원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남자의 마음에 드는 게 소원이 됩니다. 그 이상의 소원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드는 것,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안 들어도 그 남자의 마음에는 들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그것이 결국 ‘iustitia, 유스띠띠아’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말입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면, 티끌만큼도 하나님의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살을 베어내고, 살을 깎아 내서라도 자기가 사랑하는 그분에게 자기를 맞추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해 봤습니까? 왜 대답을 못 합니까? 해 봤나 봅니다.
결국 사랑하면, 자기를 사랑해주는 그 사람에게 완벽하게 맞추고 싶어 합니다. 그때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희열을 느끼게 됩니다.
학교에서, 우리 때는 남녀 공학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뭐 어렸을 때 크게 여학생들과 접촉할 것도 없었습니다. 학교에 가서 유일한 보람은 무엇이었는가 하면, 선생님이 자기를 칭찬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부하고 의도하지 않았는데 칭찬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가 존경하지 않는 선생님이 자신을 칭찬해 주면 기분 나쁩니다. ‘애들이 저 선생님과 나와 한 팀인 줄 알까?’ 그것이 싫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존경하는 선생님이 자기를 칭찬해 주면 그것도 자기를 보는 데서 칭찬해 준 것이 아니라 자기 없는 곳에서 칭찬해 줘서 그 칭찬해 줬다는 이야기가 나에게 친구를 통해서 돌아올 때,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되지 않습니까. 사랑과 철저한 삶에 대한 일치가 나오는 것입니다.
청교도가 가지고 있는 삶의 precision, 삶의 정확성이라고 하는 것을 타인을 정죄하고 율법주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니라, 물론 율법주의적인 청교도들도 있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복음주의적인 청교도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현재적인 사랑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삶의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도 하나님 앞에 살려고 그렇게 몸부림쳤던 그것이 결국 정확성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너무 많습니다. 찾아보십시오. 쌔고 쌨습니다. 다음 하겠습니다.
질문2) 도덕적인 성품의 변화는 자연적인 성품에 영향을 끼친다고 하셨습니다. 변화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와 성령님의 은혜의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더 자세하게 알고 싶습니다.
답변2) 저런 질문이 그냥 질문을 툭 던져 놓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저것은 한 학기를 해결이 안 될 정도로 방대한 분량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인간의 의지와 성령의 은혜의 작용에 대한 기독교에서의 본격적인 논의를 촉발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저 주제에 대한 논의를 촉발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아무나 말해 보십시오. 어거스틴입니다.
맥락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기본적으로 이미 대가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대가가 누구인가 하면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인데, 각각 철학하는 방향과 출발점이 다르기는 하였지만 둘 사이의 일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성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도 그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내가 그릇 행한다면, 나는 모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똑같이 “안다고 하면서 잘못 행하는 것은 그것은 제대로 알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인간이 제대로 알게만 된다면, 똑바로 행할 것이라고 하는 신념이 광범위하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경험 신학적은 요소가 아주 많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았는데도 그것이 안 되는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특히 어거스틴을 괴롭혔던 것은 ‘정욕’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 여사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깨겠지만, 내가 볼 때는 상당히 세속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였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고 부인할 수 없는 것이지만, 여전히 그 당시 로마사회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집안의 지위와 출세에 대한 욕망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거스틴이 아프리카 출신의 한 여자를 사귀었습니다. 그 당시 총각인 상태에서 그 여성과 동거를 하였습니다. 동거를 하고 그 여자의 이름은 밝히지 않지만, 아프리카로 돌아갔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아들을 하나 낳고 갑니다. ‘아데오 다투스’라는 아이였습니다. 아데오 다투스는 라틴어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아이가 대화록에서 상대자로 나옵니다. 어거스틴의 말로는, 아버지 말이다 보니 사실 신뢰할 수 없지만 엄청나게 총명한 아이였다고 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 아이가 소년 시절에 16, 17살까지 대화를 하다가 죽습니다. 죽고 유명한 일화가 있었는데 어쨌든 그 여자가 가면서 참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 여자가 가면서 무슨 말을 남기는가 하면, “나는 이제 하나님만 위해서 살겠습니다.” 그러면서 갑니다. 그러면 그 여자와 살아야지, 그 여자를 왜 버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여자를 버린 것은 상당히 모니카 여사의 압박이 있었던 것 같고, 그 뒤에 좋은 혼처를 구합니다. 혼처를 구했는데 혼처가 로마 시대의 법정 결혼 기준의 2년 미달이었습니다. 그때 나이가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법정 결혼 나이의 2년 미달이었습니다. 법정 결혼 가능한 나이가 14살인가, 16살인가 그랬는데 2년 미달되었습니다. 2년 동안 결혼을 못 하고 찜해 놓은 상태에서 기다렸습니다. 그 사이에 어거스틴이 또 바람이 납니다. 이러한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도저히 아는 것으로서 해결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철학사에서 최초로 의지의 문제를 들고나온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그의 도덕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가 지성이 전체를 좌우하는 것처럼 생각하던 거기에서 의지의 문제를 들고나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잘 알다시피, 어거스틴이 의지가 지성 위에 있다고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식으로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러나 의지의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킨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철학자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어거스틴이 이야기 한 의지의 문제의 부각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결국 그 의지는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에 의하면 의지 자체가 뭘 하고자 하는 욕구이고, 뭘 하고자 하는 욕구는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어려운 철학적인 문제가 등장하는데, 예를 들어서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 여러분을 사랑한 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여러분을 향한 사랑을 사랑해야지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모영보 강도사를 사랑합니다. 그것만 가지고 안 되고, 모영보 강도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내가 사랑해야 합니다. 그 둘은 나누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내가 너무나 모영보 강도사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죽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러면 나는 그 죽은 그 순간 내 안에서 모영보 강도사를 향한 사랑이 싹 사라집니까, 아니면 남아 있습니까? 남아 있으니까, 사람들이 그리워하고 남녀 간에는 자기도 뒤따라가겠다고 자살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결국 사랑했을 뿐 아니라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거스틴의 독특한 논법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그 사람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의지가 그 사람에게 가득 차게 되면 선으로 가게 되고, 의지가 선이 벌레 먹듯이 상실되면 그 상실된 것만큼 인간의 의지에 무능과 불능이 생기면서 능력과 힘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악에 대해서 말입니다. 악에 대해서 강한 힘과 강한 능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의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악에 대한 인간의 영향은 부재하는 능력입니다. 선의 부재의 능력, 힘이고 선이 부재하는 효과입니다. ‘프리바치오 부니’, 선의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자유의지론」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유명한 비유로 칼빈이 그대로 베꼈습니다. “성령님과 우리의 의지의 관계는 잘 훈련된 말과 그 말을 너무나 잘 다루는 기수와 같다.” 기수들과 말 사이에는 애정의 관계가 놀랍습니다. 동물들 중 눈이 아름다운 짐승 두 가지가 있는 게 그것이 말과 개입니다. 말의 눈빛을 보고 있으면 빠져들어갈 것 같습니다. 큰 눈망울에 구슬픈 무엇이 있습니다. 눈동자 전체가 검은 눈동자인데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우리 코코 눈을 쳐다보면 마음이 정화됩니다. 어쩌면 그렇게 해맑을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쭉 봅니다. 그리고 교감을 깊이 나눕니다. 그리고 기수는 자격이 45kg 미만이어야 합니다. 말 타는 기수는 현재 규정으로 45kg 미만 가벼운 사람이 탁 타서 쫙 말과 붙어 달리는데, 말이 기수를, 그리고 기수가 말을 모순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일체가 되어 달립니다. 계림에 갔을 때 마사를 보여주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이 달리는데 사람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잠깐 사이에 떨어졌나 했더니 말 배 밑에 붙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활을 쏘고 말 배 밑으로 들어가,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말 배 밑에 딱 붙어 있었습니다. 역시 뚱뚱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말 옆에 붙어 있고, 이렇게 하면서 말을 타고 달립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거대한 철학적인 논란 속으로 들어가는데,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우나 성령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성령은 완전히 자유로우시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중요한 논의는 선은 은혜의 작용을 필요로 하나 악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했을 경우에는 작용인이었던 성령님께 빚진 것이고, 악을 행했을 때는 우리에게 고유한 것은 무엇 뿐이라고 하였습니까? 그렇습니다. ‘죄’ 때문에 악을 행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공부를 많이 하십시오. 이것 가지고 3년 공부하였습니다. 3번 하겠습니다.
질문3) 하나님을 섬기게 된 후 새로운 가치질서로 동성애의 문제를 보면 분명 그 일은 창조의 질서를 거스르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관해 교회가 해야 할 선한 행실은 무엇이며, 교인 중 동성애자가 발견되었을 때, 교역자로서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3)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선한 행실은 이성애자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동성애자들이 시기할 정도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다음 두 번째로, “교인 중 동성애자가 발견되었을 때 교역자로서 가장 우선시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하였는데, 동성애자가 발견되었을 때 첫째는 동성애의 나쁜 영향이 교인들에게 미치지 않도록 다른 교인들과 동성애자를 보호하는 조치를 취해야 하고, 두 번째는 그 동성애자가 쉽게 이야기하면, 내가 「마음지킴」에서 표현하였듯이, 인간은 모두 이성 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남성 안에도 여성성이 있고 여성 안에도 남성성이 있는데 그것은 혼인이 입증합니다.
최근에 그 사람이 살해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수인데 그 사람이 동성애가 결코 유전적인 요인이 아니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혔습니다. 그런데 실종되었다가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것은 내가 신학적으로 판단하기에는 인간 안에 있는 양성성이 있는데 그것이 두 개가 조화를 이루면서 인간이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젊어서는 남성들이 남성 호르몬이 콸콸 쏟아져서 그렇게 못되게 굴고 친절하지 않고 가부장적으로 하다가, 나중에 나이가 들면 전세가 바뀝니다. 맨날 “어디가? 가지마. 어디 있어?” 마치 초등학생 아이들이 엄마 찾아 전화하는 것처럼 전화를 붙들고 삽니다. 젊었을 때는 거들떠도 안 보다가 말입니다. 왜 그러는가 하면 남성 호르몬이 서서히 사라지고, 여성 호르몬이 많아져서 눈물도 많아지고 아내를 의지하는 마음이 점점 생겨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내는 남성 호르몬이 점점 많아집니다. 점점 거칠게 대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어디 가는지 물어봤는데 막 때리고, 능력도 없는데 왜 살아있냐고 때리고, 그러한 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러한 것이니까 충분히 교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성애에 빠졌다고 해서 그 사람을 마치 괴물 보듯 하면서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죄에 빠진 것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하든지 도우면서 치료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하겠습니다. 다음 하겠습니다.
질문4)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곳이고 성도는 교회가 어떠한 곳인지를 보여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성도의 신앙 수준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18세기의 미국교회의 세례관습을 오늘날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겠지만 오히려 이런 기준들을 강화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에 대한 목사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 궁금합니다.
답변4) 좋은 생각입니다. 기독교를 보면 한국교회에서도 교회에서 집사나 장로를 세울 때 실제로 그 동네에 가서 동네 사람들에게 탐문 조사를 했던 기록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 집사를 세워야 하겠다고 할 때, 아무도 모르게 가서 동네 가까이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의 평판은 좋은지, 등등 물어봅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러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회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누군지 모릅니다. 옆집 문을 두들겨도 한 명이 사는지 두 명이 사는지 교회를 다니는지 안 다니는지 모릅니다. 한 라인에 25층에서 40층 되어서 쭉 엘리베이터를 타고 갔는데 사람들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을 파악하기가, 직접적으로 파악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직장에 가든지 하면 가능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 때에는 농업 중심의 사회이고, 그리고 지역 중심의 사회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이 가능하였는데, 지금은 도시에서 과연 조사가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지금 이야기 한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굉장히 어렵겠지만, 그러나 도덕적인 기준들을 고려하는 방안을 많이 만들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결혼했다가 이혼한 사람이 권사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답을 못 합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장 담임목사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지금은 하늘나라 갔지만 고 김자옥 씨가 그런 케이스였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던 사람들과 계속해서 악에 빠져 살던 사람들을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복음이 아닌가. 그러한 것까지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가면 ‘아이호프(IHOP)’라는 아침 식사를 많이 먹는 집이 있습니다. 물론 점심때도 하고 저녁때도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아침 먹으러 가기에 아주 좋습니다. 음식 질이 아주 좋습니다. 그리고 맛있습니다. 물론 칼로리가 높습니다.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왠지 그 집에 가 있으면 마음이 굉장히 편안합니다. 지난번에 미국에 갔을 때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뭐냐 하면, 우리나라가 프랜차이즈를 할 때는 위치가 location이 어디이고, capital, 자본이 얼마나 있고, 그리고 경영능력이 있고, 그다음에 이제 사람이 그것을 잘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면 프랜차이즈를 내주지 않습니까. 프랜차이즈를 내주면 내줄수록 원자재부터 시작해서 자기 사업체를 키워주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이호프’는 다릅니다. 물론 장소, 위치, 자본 다 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다른 프랜차이즈 기업들이 안 보는 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회사 사람들을 풀어서 그 사람 지인들을 다 찾아다니면서 평판을 묻습니다. 그 사람이 신용이 있는가, 인자한가, 성격은 어떠한가, 묻습니다. 인간성이 탈락되면 허가를 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이호프’가 좋은 평판을 받습니다. 적어도 ‘아이호프’를 열려면 동네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었다든지, 지인들의 돈을 떼어먹었다든지, 동네 사람들과 치고 박고 싸웠다든지, 그러한 기록이 있으면 안 받아줍니다. 그게 이제 장기적인 관점에서 ‘아이호프’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방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미국은 아주 극단적인 자본주의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부작용들을 해소하기 위하여 굉장히 많은 노력을 합니다. ‘공정무역’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스타벅스 같은 데서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너무 어린아이들을 커피 밭에서 노동시키는 농장에서 나는 커피는 안 파는 것입니다. 임금을 후려치는 농장은 스타벅스의 납품업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 기준이 굉장히 많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기준을 가지고 조사를 해서 실사를 나가서 다 맞춰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정무역이 예를 들어서 섬유 같은 것으로 가면 베트남이나 제3세계 국가들, 아랍의 카펫 짜는 국가들에 가서 미성년자들을 고용해서 카펫을 만든다고 하든지, 옷을 만들고, 근로시간을 너무 가혹하게 하고 임금을 박하게 주고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한다든지, 작업장의 모든 보건환경이 암에 걸리고 위해요소들이 있는 것을 방치한다든지… 그럴 경우 그러한 제품이 들어오는 것 자체가 불공정무역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격의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회사와 장기적으로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인류복지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하고 끊는 것입니다. 그것을 회사의 간판처럼 내거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정무역을 하는 회사입니다.” 그 회사의 제품의 퀄리티를 믿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비인간적으로 학대받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 심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휴머니즘적인 배려들이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더욱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교회’라고 하는 하나의 단체의 도덕적인 가치를 유지하는 중요한 현실적인 비결 가운데 하나가 세례받을 자격이, 세상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기보다 성경적인 가치를 보더라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지 말고, 그 집을 맡을 만한 도덕성과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직분을 주면 안 됩니다. 현실은 교회가 굉장히 많이 그러한 것들을 타협하면서 마지막에는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화해야 하는데, 18세기 방식을 그대로 본뜨는 것은 문맥에서 잘 안 맞습니다. 다른 방식에서 얼마든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끝입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고 저희들이 이 맡겨진 사명들을 잘 감당해 나가면서 우리들이 공부하도록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다음에는 무엇을 합니까? 다음에는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해왔다」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아니면, 「영원 안에서 나를 찾다」를 하든지,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해왔다」구역공과로 가르쳤다고 하지만, 내가 가르쳤으니까 여러분들이 더 꼼꼼히 읽어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동안 고생했다 생각되면 한 2-3주 쉬고 충전해서 다시 해도 좋습니다. 오 목사님이 알아서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