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이기는 기도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세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 오니 온 동리가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색 병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더라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막 1: 21-35)
녹취자: 손지애
오늘 성경은 예수님의 생애 중 한 토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1절부터 31절까지의 일들이 하루에 일어났는지 또, 31절까지의 일과 32절까지의 일이 같은 날인지 우리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사셨던 생에가 얼마나 치열하고 고단한 노역의 연대기와 같은 생을 사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데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마름을 설교하셨고, 그리고는 더러운 귀신 들린 자가 있어서 그를 꾸짖어 잠잠하게 하고 귀신을 내어 쫓으시는 역사는 베푸셨습니다. 그리고는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 걸려 누워있는데 주님이 그를 고쳐주셨고, 그래서 열병에서 떠나자 여자가 저희를 수종들었습니다. 저물어 해질 때에 숙소에 돌아와 보니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 각색병 걸린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을 일일이 고쳐 주셨습니다. 이 사역이 끝난 시간을 우리에게 명시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 깊은 밤이 되어서 아니면 이른 새벽이 되어서야 이 모든 사역이 끝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35절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아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렇게 고단한 노역으로 하루에 삶을 보내시고 그 이튿날 새벽에는 어김없이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거기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 예수님은 죄는 없으셨지만 참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와 꼭 같은 육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는 없으셨지만, 그러나 노쇠하지 않는 완전한 아담의 몸을 가지신 것은 아니고,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는 없으셨지만 인간이 그 아래 복종해야 하는 모든 결핍과 고난, 육체의 쇠약함 속에서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먹지 아니하시면 배고프셨고 마시지 아니하시면 예수님은 목마르셨습니다. 그리고 긴 길을 걸으면 피곤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지상 생활이었습니다. 30이 갓 넘으신 예수님을 보고 대적자들이, ‘네가 50이 되지 않았거늘 어찌하여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하느냐’ 라고 비난하였으니, 예수님이 얼마나 늙어보이셨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연약함에 싸여 있는 예수 그리스도이셨기에 오늘 예수님이 그 고단한 사역, 그 이튿날 새벽에 기도하러 한적한 곳에 나가셨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많은 자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에서 미끄러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그러나 그 미끄러지는 순서는 아주 기가 막히리만치 일치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사람들은 미끄러집니다. 그 미끄러지는 것이 뭐냐 하면, 지성이 제일 먼저 미끄러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생생하게 들리던 하나님의 말씀, 감격이 있는 예배, 그 다음에, 은혜가 있는 성경 읽기,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맛을 느끼던 묵상 생활 이런 것이 해체되고 물러나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진리의 밝은 빛이 예전처럼 명료하게 그의 지성을 비추고 마음을 자극하는 일들이 그칠 때에 이어서 그는 기도에 있어서 물러나게 됩니다.
제일 먼저, 예전에는 언제든지 기도할 상황이 벌어지면 용수철처럼 힘차게 튀어 올라 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의 준비가 갖추어지고 있었는데, 그런 준비가 해체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정전대란이 일어날 때 우리가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리는 스위치만 넣으면 발전소가 바로 돌아가서 전기를 생산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다섯 시간 이상을 예열을 시켜야지만 겨우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어떤 것은 3일 전에 예열을 해야지만 전기를 생산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깜짝 놀랐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 기도의 은혜가 살아있을 때에는 기도할 상황이 벌어지면 마치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신앙에서 물러나고 말씀의 은혜가 사라지게 되면 제일 먼저 기도에 있어서 이러한 준비가 해체됩니다. 그래서 기도할 상황이 생겼는데도 기도를 하는 게 아니라 머릿속으로 생각은 계속 나고 고민은 하는데 탁 튀어 올라 하나님 앞에 아버지 하고 자신의 사정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죄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도에 있어서 준비된 마음을 해체시킨 다음에는 기도의 열렬함을 앗아갑니다. 늘 언제든지 상황이 생기면, 솟구치듯이 기도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기도의 은혜가 남아 있을 때에는 다시 예열을 시키고 간절히 기도하면 기도의 열렬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는 열렬하게 기도하다가 저녁때는 냉랭하게 기도하고 그 다음 날은 열렬하게 기도하고, 물론 상태에 따라 그렇게 되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평균적으로 보면 열렬함은 상당한 기간 동안 우리의 영혼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런데 죄는 기도에 있어서 이렇게 열렬하게 기도할 수 있는 마음 자체를 앗아가 버리게 됩니다. 나아가서 죄는 그 정도로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은혜가 살아 있을 때에는 비록 기도의 열기가 좀 식었다고 하더라도 불이 꺼졌다고 금방 식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열기가 남아 있을 때에는 기도를 하지 않으면 기도 안했다는 것 때문에 마음에 갈급함을 느끼게 됩니다. 아침서부터 열심히 일하고 살아서 게으르지 않았지만, 한 낮이 되면 왜 그런지 마음이 건조해지고 심령이 생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이 건조해지는 것 같고 심령이 상하는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 제때에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를 누리지 못한 것 때문이고 또 그 은혜를 그리워하는 마음의 성향입니다. 그런데 죄는 계속해서 기도하지 않게 되면 이것마저 우리에게 거둬가 버립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것이 은혜가 남아 있을 때에는 불편하고 곤고하고 괴롭고 하루만 기도 안 하면 마음이 건조하고 이랬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다음에 그런 기도생활 안 하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고 이때쯤 되면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는 것이 매우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죄는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라는 그 생각조차도 우리에게서 해체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완전히 기도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데, 이것은 마치 성벽이 모두 철거된 성과 같은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들은 혹시 고대의 전쟁 역사를 읽어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전쟁도 치열하기 짝이 없지만 대부분 첨단 무기들로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직접 전쟁터에 나가는 정쟁보다는 많은 물자와 첨단 무기를 동원해서 미사일로 폭격을 하고 하면서 전쟁을 하게 됩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 아직 군인들이 상륙하기 전에 그 바그다드에 퍼부은 미사일이 1500발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미사일은 모두 한 발에 20억에서 30억씩 나가는 미사일이라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어마어마한 양의 미사일을 자신들이 파괴시키기를 원하는 그 목표를 향해 발사하고 그리고 거의 초토화되었을 때에, 군인들이 상륙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전의 전쟁은, 물론 원거리 병기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먼 거리를 날아가는 발로 쏘는 화살이라든지 혹은 신기전 같은 거라든지 혹은 화염 같은 것들을 건초더미 같은 데 화염을 붙여서 그래서 원거리를 쏘아 올리는 그러한 투척기 같은 것들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전쟁에서의 승패는 들판에서 마주 싸우지 않는 한, 성을 공략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은 적군이 싸우다가 마지막 패배했을 때, 도저히 적군을 벌판에서 싸워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성으로 들어가 문을 굳게 잠그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후의 저항 수단입니다. 왜냐하면 성에서 싸우게 되면 시가전이 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국가의 도시들이 심각하게 파괴될 것이기 때문에 대게 전쟁을 힘이 있는 한, 들판에 나아가 광활한 대지에서 혹은 산에서 이렇게 적군들과 싸웠던 것입니다. 적군이 들어가서 성에 숨어버리면 그 다음에 그 성을 넘어가거나 허무는 것이 이제 공격하는 군대에게는 가장 시급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아주 흔히 사영되던 무기가 공성추 혹은 공성퇴라고 하는 기계였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기중기처럼 생긴 큰 기계에 엄청나게 커다란 나무나 쇳덩어리가 매달려 있고 이것을 보신각 종 치듯이 수많은 군사들이 그 성벽을 흔들어 때리기 시작하면 결국은 성벽이 지속적인 공성추에 맞아서 돌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고 성은 돌멩이 하나하나를 쌓아 올린 것이기 때문에 몇 개만 빠져서 그 돌멩이를 어그러뜨릴 수 있으면 위에 있는 돌멩이들은 저절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벽 하나가 무너지면 그 다음에 그리로 물밀 듯이 적군들이 들어와서 성을 공략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성 위에 모래성을 한 없이 쌓아서 그렇게 해서 결국은 성과 똑같은 높이를 만들어서 그리로 다리를 놓아 군인들을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마사다라고 하는, 이스라엘이 마지막까지 로마에 저항하던 곳이 있었는데, 거기엔 로마군이 도저히 점령할 수 없는 깎아 지르는 절벽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을 점령하기 위해서 로마의 군인들이 3년 동안을 흙을 퍼다가 흙더미를 쌓아서 마사다 높이만큼 만들고 거기에 사다리를 놓아서 거기를 군인들이 들어가서 결국 마사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게 됩니다. 이만큼 성벽은 도시를 보호하는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하고 성벽이 무너졌다라고 하는 것은 도시가 함락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마지막 시도는 하나님을 믿는 자녀인 여러분들로 하여금 삶의 모든 형체에 종교적인 삶의 형체는 남아있을지라도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의 기도 생활을 모두 다 파괴해서 성벽을 모두 해체시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속살이 마귀와 죄에 그대로 노출되게 만드는 것이 사단이 목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닫고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쪼끔 깨닫고 그 말씀을 붙들고 많이 기도하는 사람이 훨씬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해 나간다는 사실을 오늘 기억하셔야 됩니다. 물론, 더 좋은 것은 많이 깨닫고 많이 기도하는 사람은 쪼끔 깨닫고 많이 기도하는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높은 품질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한 번 여러분들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루의 일과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어느 날 여러분들의 하루 동안의 삶의 질서들이 과연 가치 있는 순서대로 여러분들이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지 한 번 깊이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옛날 단순하게 믿음 생활하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복잡한 시대에 옛날보다 더 많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농사를 짓는 시대였고 저도 옛날에 시골에 있었던 생활을 이렇게 돌아보면 사람들이 9시만 되면 집집마다 불이 꺼집니다. 왜냐하면 9시만 되면 온 사면이 캄캄하고 길에는 가로등하나 없고 신작로에는 비포장도로이기 때문에 다니는 차가 없습니다. 그러면 캄캄한 밤중에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 불을 켜놓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가난했기 때문에, 그나마 석유라도 키고 기름이라도 켜서 불을 밝히려면 다 돈 들어가기 때문에 그냥 해 떨어지면 모든 식구들이 자는 것이 경제에 도움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단순하던 시대를 살아가던 동안에는 우리들의 시선을 빼앗는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이나 또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 생각은 하지만 소통이 끊어지는데 지금은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핸드폰 하나갖고 어디서든 통화를 하고 인터넷으로 만나고 심지어는 아이폰의 영상으로도 국제전화를 하면서도 얼굴을 볼 수 있는 이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눈을 가득 채우는 볼거리들과 그리고 우리의 욕심을 자극하는 많은 사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 속에서 신앙생활을 한다 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정신이 찢어지고 분산되기 쉬운 그런 때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그 때에도 모든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평균적으로 보면 20년의 여러분만한 나이대의 선배들의 여러분보다 훨씬 더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밤에는 아주 늦은 시간까지 일하거나 혹은 생업이 종사하고 아니면 공부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밤늦게까지 놉니다.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모으고 자신에게로 향할 수 있는 시간이 없을 정도로, 인터넷과 텔레비전 ,영화, 매스미디어 특히 아이폰 같은 데에 몰입되어 있습니다. 어제도 차를 타고 이렇게 오면서 보면 차 속에서 사람들이 다 아이폰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넷이 차를 타고 가는데 뒤에서 두 사람이 그걸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얘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요새 동창회 나가면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다가 밥 먹고 온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몰입하고 가치도 없는 정보 속에 자신을 소비하면서 살아가는 동안에 더군다나 그 속에서 게임에 빠지고 이렇게 한다는 것은 그것은 거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가끔 노트북이나 이런 걸 가지고 게임 잘하는 청년들을 이렇게 쳐다보면 걱정이 됩니다. 저렇게 잘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저기다 쏟아부었을까하고 말입니다. 그러다가는 후회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멀리 해야 합니다. 필수적인 경우에 분명한 목적이 있을 때에만 사용하고 그것을 아주 멀리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기도생활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얼마나 우리들이 악조건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뭐냐 하면, 예수를 위해서 사는데 아무 것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새벽에 늦게까지 자는 게 싫은 삶이 어디 있습니까. 특히 여러분같이 젊었을 때에는, 아침에 깨워도 안 일어날 정도로 완전히 곯아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건강의 증거입니다. 그렇게 깊이 잠든다는 것은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늦게까지 그냥 퍼질러 자려고 하는 그 자신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내버려두면 죽을 때까지 그 습관을 고치질 못하는 것입니다. 누가 싫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침 늦게까지 푹 자고 자기 싫을 때까지 드러누워 있는 게 싫은 사람 여러분 중에 한 번 얘기해보십시오. 눈을 부비고 잠자리가 유혹을 하는데도 떨치고 일어나는 것이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난 목사인데도 그것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어떤 날은 정말 좀 30분만 더 잤으면 좋겠습니다. 너무너무 자고 싶습니다. 그래도 원칙을 딱 세웠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일날은 뭐 거의 파짠지가 되다시피 하니까 그것도 처음에는 막 결심을 했습니다. 여러분들 제 설교 들은 기억이 날 것입니다. ‘충성!’하고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힘들어지니까, ‘충성’ 그러고 일어나면 그 다음에는 낮에 충성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힘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월요일을 양보를 했습니다. 그래서 월요일은 잡니다. 그래도 많이 자지도 못합니다. 평소보다 한 30분 더 잡니다. 그리고 6시 15분에는 일어나서 7시 전에 교회 도착해서 마당에서 설교를 다시 묵상하고 그리고 8시에 예배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하고 이제 말씀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나는 아주 목사가 됐는데도 그것이 힘듭니다. 그래서 어느 목사님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자기에게서 천국은 잠 실컷 자는 나라라고. 마음껏 자는 나라. 얼마나 고단했으면 그렇게 얘기를 했겠습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는 우리의 육체가 하자는 대로 타협하면서 살아가면, 그러면 결국은 우리의 육신적으로는 유익할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손해를 보고 신앙에 있어서는 마이너스가 될 각오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거 행복한 사람 없습니다. 밤늦게까지 그 예배당에 와서 그 추운 겨울날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뭐 난방도 안 해 놓지 않습니까, 겨울에는. 우리 교회가 겨울이면 굉장히 춥습니다. 그 추운데 눈이 펄펄 날리는데도 와서, 평소처럼 새벽기도 못하니까 밤에 와서, 그 추운 때에 퇴근하고 오면 8시 8시반 이 쯤 되는데 빨리 집에 들어가서 씻고 파자마라도 입고 소파에 좀 누워서 티비를 본다든지 아니면 따뜻한 물이 목욕하고 침대에 느긋이 기대어 책을 읽는다든지 그게 그 직장인들이 저녁 휴식 아닙니까. 그것도 집에서 식구들이 기다리는데 거기 와서 그 추운데 교회 안에서도 입김이 헐헐 나는데 거기서 손을 오그리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 좋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젊었을 때에는, 아까 말한 대로 너무 건강해서 잠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것과 더불어 싸웁니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 직장에 다니고 열렬하게 살면 이다음에는 내가 기도하고 싶어도 이 세상의 일이 나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경쟁에서 그렇게 해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 나이 더 들면 일에 대한 일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생겨나고 성취욕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드디어 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이 되어서 노년이 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뭐냐면 새벽에 잠은 깨는데 기운이 없어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게 죄 많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도 많고 준비하고 헌신해야 할 일도 많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은 자유로운 몸이지 않습니까? 결혼만 해도 하룻저녁 교회에 가서 기도하려고 마음을 먹어도 아내의 눈치를 봐야 되고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 됩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유롭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시간을 내어서 기도할 수 있고 말입니다. 못하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도 피곤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새벽기도에 습관이 있다고 그러는데,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 시간이 되어서 눈이 깬다 라는 점에서는 습관이 될지 모르지만, 열렬히 기도하는 것은 습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달엔 그렇게 했는데, 한 달 동안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잘못 살면 이번 달에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일매일 새로운 싸움을 하나님 앞에서 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젊은이 때에 여러분들은 괴롭히는 것 중 하나가 정욕입니다. 나이가 들면 기질이 어느 정도 다스려지고 사리분별도 있기 때문에 절제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젊었을 때는 잘 절제가 안 됩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여러분들을 되게 힘들게 합니다.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하고 경건한 척 해도. 안 그런 것입니다. 그런 고통 속에서 살면서 그러면서 정신은 계속 분산됩니다. 거기에 또 탐닉하는 것들이 있어서 또 분산됩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모으고 말씀을 조용히 읽을 시간도 없고, 그래서 그 말씀에 영향을 받으면서 그 말씀의 진리의 빛이 내 마음에 하루 동안에 새겨진 그릇된 사물들에 대한 인상을 깨끗이 지워서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기능도 없습니다. 어쩌다가 가끔 아주 한 조각의 작은 빛들이 내 마음에 떨어지긴 하지만, 열렬히 그 말씀을 붙드는 기도생활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거칠고 메마른 땅에 뿌려진 씨앗과 같아서 뿌리를 내리지도 못하고 그냥 날아가 버립니다. 그런 생활이 한 달 두 달 세 달 네 달 계속 반복될 때 결국은 여러분들은 절대로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껍질은 교회에 나와서 신앙을 고백하는데 삶은 실천적으로 무신론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날 기독교가 욕을 먹는 가장 커다란 문제입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기독교인 가운데서 무슨 악하기로 소문난 사람들, 평소에 무슨 범법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이 그런 끔직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 떨어진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서 솟아나는 정욕대로 살다가 저지른 잘못들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워낙 많으니까 눈에 안 띄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표딱지가 붙었기 때문에, 어디 가든지 그것이 따라다녀서 욕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잠재적으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는 사람들이라는 차이밖에는 없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육체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측정이 가능합니다. 달리기를 시켜 보든지 팔씨름을 시켜 보든지 아니면 아까처럼 족구를 시켜 보든지 농구를 시켜 보면 강하고 기술이 있는 청년과 그렇기 않은 사람은 아주 현저하게 구분됩니다. 자매들도 달리기를 시켜 보면 정말 삐쩍 마르고 날씬한데도 1키로, 2키로 뛰어도 끄떡도 안하는 자매들이 있는가 하면, 굉장히 근육이 강하고 튼튼해 보이는데 한 200미터만 뛰어도 헉헉거리고 주저앉아서 숨을 몰아쉬는 자매들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있는 건 있는 거고 없는 건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꾸준한 기도생활은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끊임없는 노력과 투쟁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대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반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연민에 빠집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만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원망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역경과 고난을 만날 때 위로를 경험하면서 그 역경과 시련을 이기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역경과 시련 속에서 상처투성이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지지난 시간에 설교했지마는, 한 해에 천편의 설교는 들은 사람도 봤습니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한번만 해보십시오, 가능한가. 거의 불가능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게 열심을 내는 사람도 미끄러지지만, 그렇게 천개까지 설교를 듣지 못했어도 새벽에 매일 매일 와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은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도 똑같은 얘기를 했었습니다. 열렬하게 제자훈련 받는 사람 가운데 이혼한 사람들 많이 봤답니다. 부부가 손잡고 제자훈련 받으러 와도 이혼하지만, 새벽에 손잡고 기도하는 부부는 이혼하는 사람을 못 봤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생활 뿐 아니라 기도생활이 얼마나 실제적으로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한 사람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간다 라고 하는 것은 기도하기 싫어하고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과 더불어 싸워서 승리해가는 사람이 되는 것과 동일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실제로 충고하고 싶은 게 뭐냐 하면 삶을 정리하지 않으면 기도생활은 안됩니다. 안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삶을 정리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규칙적인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밤중에 비디오 보고 싶으면 밤늦게까지 비디오 보고, 새벽에 퍼질러 자고 싶으면 퍼질러 자고, 남는 시간에 기도가 안 됩니다. 결국은 기도의 은혜는 삶의 은혜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삶속에서 하나님을 앙망하던 사람들은 기도하려고 할 때 기도가 잘 되고,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앙망하던 사람들은 삶이 참 잘 됩니다. 삶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게 늘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안 하면, 삶이 무질서해지게 되면, 마음에 정신자체가 무질서해지기 때문에 결코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부 자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부에 있어서 탁월한 진전을 보이는 사람들 한 번 보십시오, 특징이 뭐냐면 마음에 평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막 들뜨고 까불리고 이러는 사람들 어려움을 만나서 곤두박질치고 이러는 사람들이 학업에 진전을 보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매우 특별한 천재이면 모를까 불가능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군다나 이 기도생활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대화이고 영적인 사귐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과 말씀, 우리의 마음에 작용하시는 하나님의 그 섭리,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에 깊이 느껴질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삶이 개혁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들이 몰두하는 그 인터넷과 아이폰을 좀 끊으십시오. 아주 사용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쓸데없는 것들에 대한 정보에 자신을 노출하지 말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아야 합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자기의 글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묵상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신성모독이다’ 라고 말입니다. 애인이 만났습니다. ‘자기 나 사랑해?’ ‘그럼 사랑하지’ ‘나 보고 싶었어?’ ‘아니’ ‘내 생각했어?’ ‘아니’ ‘나 생각나지 않았어?’ ‘응’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사랑은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있으면 있어서 생각을 하고 생각할 수 없을 때에는 그 사랑의 성향 때문에 이매지네이션.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의 증거입니다. 상사병이라는 건 그 실체와 상상 속에 있는 존재를 혼돈하는 게 상사병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속에 눈을 딱 감으면 인터넷이나 영화, 영상, 핸드폰, 이런 것들이 계속 상상의 작용을 불러일으킬 때 예수님이 거기 계실 자리가 있겠는지 말입니다. 난 단호하게 말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망가뜨리는 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더구나 게임이 몰두하는 사람은 그냥, 그것이 하나님 앞에 매우 크게 인생을 낭비하는 거라는 생각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물론 그 게임도 어학 프로그램의 게임이라든지 이런 경우에는 조금 그래도 낫습니다. 어린이 영어 교육 프로그램을 한 번 몇 년 전에 한 번 봤는데, 상상할 수 없게 됐더군요. 게임을 하면 영어가 저절로 계속 습득이 됩니다. 성인도 그렇게 만들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좀 예외입니다. 목적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 쓸데도 없는 게임이 몰두해서 밤을 새고. 모르겠습니다. 치매에는 안 걸리겠죠. 치매에는 도움이 될 겁니다. 아마. 그렇지만 지금 치매를 염려할 나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날 젊은이들 이렇게 보면, 용서하고 들으세요. 자매들 이렇게 보면 열 명을 만나면 세 명은, 목사인 나의 판단으로 결혼생활이 불가능한 자매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매들 중에 얼굴이 예쁜 자매는 형제들에게 집중 공략을 받는데 독이 든 사과를 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거는 친구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혼 생활은 이제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누가 그러더군요. ‘목사님 그래도 저는, 못생긴 자매하고 만나서 평탄한 인생을 살기 보다는 예쁜 자매랑 만나서 연단을 받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살아봐라, 그 소리가 나오나. 살아봐라’ 그러더니 어느 자매가 그랬습니다. 신혼여행 갔다 와서, ‘목사님 다녀왔습니다’ ‘그래’ ‘그런데 목사님 틀린 게 있어요’ ‘뭐가?’ ‘목사님이 결혼할 때 외모는 유효기간 6개월이라 그랬잖아요.’ ‘그랬지’ 제가 그런 말 자주 했었습니다. “4박 5일이에요.” 참 그 자매는 지혜로움 자매입니다. 금방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뭐가 있냐면 결국 이러한 사물들에 대한 이러한 것들에 우리의 마음이 다 노출되어 버렸기 때문에 절제하지 않으면 절대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나는 아마 통계를 내보면 이 중에서 우리 교회는 그래도 조금 나을 겁니다. 아까 그 얘기 하다 말았는데, 세 명 정도는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형제들의 경우에도 보면 비율이 좀 더 높습니다. 세 명 내지 네 명 정도는 절대로 결혼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결혼생활이 안 되느냐, 물론입니다. 그럼 희망이 없냐,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교회를 다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희망이라는 게 유일한 게 뭐냐 하면 몇 가지가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기가 계속 깨뜨려지고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기도의 은혜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자기가 인성이 굳고 삐뚤어졌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일이지 모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감당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한테 맞춰주는 사람하고 만나야 되는데 그러려면 하인을 만나야 됩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거꾸로 돌아가서 대가 집에 태어나거나, 아니면 그냥 엄어마한 귀족의 집안에 태어나서 아주 미천한 여자, 평생 남편 발만 닦이면서 살아도 할아버지 할 그런 여자랑 만나서 살아야 됩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요즘 시대에 그런 여자가 어디 있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그런 꿈을 버리십시오.
그 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목양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존경하고 인생의 지혜를 가진 전도사님이나 목사님을 만나서 어려울 때마다 그분을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생각하면서 이렇게 가이드를 받으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런 교인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을 정도의 심성을 가진 교인은 대부분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설교 듣고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도 웬만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잘 목양을 받는 사람들은 사실 혼자 살아도 살만한 사람들이 그런 것입니다. ‘공부할 사람 좀 미진한 사람들 좀 남아 선생님이 가르쳐 줄게’ 그러고 남는 애들은 대게 혼자해도 되는 애들이 남습니다. 그리고 진짜 남아야 될 애들은 공부 자체가 재미가 없어서 그냥 가버립니다. 회심 집회하면 꼭 회심 안 한 애들이 안 나옵니다. 아주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그런 원인이 어디서 생겨나는 것입니까. 즐거움을 그런 기계, 인격이 없고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것들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면서 살면 사람은 굶는 것입니다. 그 즐거움은, 첫째는 인격적으로 우리의 본 형상이신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아야 하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데서 즐거움과 기쁨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즐겁고 기쁜 사람이 없습니다. 왜. 다 맘에 안 들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자신의 마음이 보편적인 인간성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사람이 그렇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어느 자매가 그런 얘길 했습니다. 애를 셋을 낳는대도 하나 더 낳고 싶다고 말입니다. 나는 사실은 그 애를 많이 낳는 것을 적극 권장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넷을 낳으면 5백만 원인가 천만 원을 준다고 하고, 셋을 낳으면 동남아 항공권을 준다고 하더랍니다. 사실은 그 정도는 아니지마는, 교회가 여유가 있으면 그런 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섯째 아이의 대학 등록금을 졸업할 때까지 교회에서 대준다는 정도라면 말입니다. 넷째를 안 낳고는 다섯째가 혜택을 못 받으니까, 그런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대신 낳아놓기만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잘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남들은 하나를 낳고도 죽겠다고 몸부림을 치고 둘을 낳고도 하나 더 낳으라고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셋을 낳고 그 고생을 하고서 또 하나 낳고 싶냐 그랬더니 그 자매가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목사님 재밌잖아요. 네 번째 아이가 새로 태어나면 셋하고는 전혀 다른 아이가 또 태어날 거 아니에요.’ 그런 것을 감당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게 사랑이고 힘입니다. 무슨 얘긴지 이해가 갑니까. 사랑의 힘이 있기 때문에, ‘또 하나 낳으면 재밌잖아요’ 하는 것입니다. 똑같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자!’ 그러면 촥 자겠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그런 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쌍둥이 기른 집 자매 얘기를 하는데 죽을 지경이라고 합니다. 울면서 키운다고 말입니다. 지난번에 왔던 마이클 호튼 교수는 세쌍둥이의 아버지입니다. 세쌍둥이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셋을 눕혀 놓으면 이 놈이 울어서 재워 놓으면 저 놈이 깨는 것입니다. 저 놈 재우고 나면 이 놈이 깨고, 이 놈 먹으면 저 놈은 벌써 배고프다고 또 달라 그러고, 밤잠을 거의 못자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그것을 기쁘다고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충고하고 싶은 게 뭐냐 하면, 비인격적인 문명과 친해지지 말고, 인격적인 사람과 친해지라는 겁니다. 아주 못된 인간하고도 사귀어 보십시오. 그래서 인간이 얼마나 못될 수 있는 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대해야지만 되는가 소명을 주시면 그런 사람들을 잘 섬겨서 그 우그러진 사람을 올바른 하나님의 형상으로 펴는 일에 이바지 하면 여러분들의 상급이 하늘에서 별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체들과의 사귐 속에서 기쁨이 있지 않습니까. 없을 순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쁨만 맛보려고 하지 말고 때로는 힘들고 아픈 것도 마보면서 인생의 다양한 맛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지 마십시오. ‘아, 그 인간 이해할 수 없어! 도저히 상종 불가능한 인간이야. 그런 인간은 난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해!’ 이렇게 생각을 하면 그를 통해서 배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정말 망가지고 이상한 사람들과 가까이 해서 대화를 하십시오. 그래서 사랑이 있으면 그것이 측은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어떤 때에는 은혜를 많이 받아도 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오랫동안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사랑해주면 서서히 서서히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교회라는 제도 속에서 우리를 다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람들이 사랑스럽고 기쁘고 알록달록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그들의 나의 부족한 것을 그들을 통해 채우고 그들의 부족한 것을 나의 남는 것을 통해서 채우고 하는 속에서 기쁨을 누리면서 중 고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살아오면서 26,7세 되어서 성장을 해서 사회생활 하다가 결혼한다면, 그 때는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래서 보면, 우리 친구도 보면 유명한 장관이나 대사, 비서하고 결혼한 우리 친구가 있는데, 정말 잘 훈련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별의 별 사람들을 다 상대하면서 살아오는 가운데 사람들로부터 너무나 많이 배우고 훈련되어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는 심성의 폭이 넓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이 이렇게 딱 요런 성격이어서 자기 성격하고 딱 아삼륙이 맞는 사람들만 줄로서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다양한 사람들이 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라고 하는 느낌을 받고 쉼을 얻게 해 주는 폭넓은 포용성을 가진 사람이 되어 갈 때 여기에서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모든 만민이 너로 말미암아’ 히브리어 성경에 베카라고 나오는데 ‘네 안에서’ 라는 뜻입니다. 네 안에서 복을 받으리라 라는 말씀이 실현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최고의 신랑감이고, 최고의 신부감입니다. 좋은 학교 못 나왔으면 어떻습니까. 자기도 그렇게 좋은 데 못나왔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서 같이 살아가면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또, 젊은 시절에 돈이 좀 없으면 어떻습니까. 고생하면서, 하나님 앞에 시련을 이기면서,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도 얘기했습니다만, 저는 결혼하겠다고 결심할 때 주머니에 300원 있었습니다. 통장에는 물론 없었습니다. 그래도 살았습니다. 굶지 않고 하나님 은혜로 삽니다. 중요한 건, 사람 됨됨이입니다.
그러면 기도를 이야기하다가 왜 갑자기 사람 됨됨이를 하게 하는가, 그게 결국은 뭐냐 하면,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물질문명에 너무 많이 빼앗기지 말고 책과 가까이 하고 정신적인 것과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마음의 평정을 가져야 하는 갓입니다. 그래서 생활을 정리해야 됩니다. 그래서 쉽게 이야기 하면, 소모적인 일에 자기를 쏟아 붓는 시간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생산적인 일에 헌신하면서 자기의 몸과 마음을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기에 적합하도록 자기 자신을 준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할 생각을 해야 되는 거죠. 접을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려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야 됩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육체가 게으름을 뿌리치고 이겨야 되고, 그 다음에 영혼이 싫증을 떨치고 열렬함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게으름은 어떤 것입니까. 아까 얘기한 것처럼 지나친 수면, 불규칙한 생활, 그리고 뒷순으로 밀리는 기도생활 이런 것들입니다. 영혼의 싫증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을 간절히 앙망하지 않으려는 마음. 그리고 또 어떻습니까.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해하는 마음도 기도하기에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외로운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깊고 은혜가 깊어지게 되면 헐떡이듯이 외로운 시간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혼자 있으면 참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조용히 홀로 묵상하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그런 시간을 갖는데 그렇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항상 무엇인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이래야지만 겨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 관계에서 이 세상에서는 정말 버림받고 이해될 수 없는 사람이 교회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용납해 줘야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용납해 주기 위해서는, 그 사람도 각자 자기의 삶의 무게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인데, 용납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런 것들을 용납하고 그 사람들을 받아들이게 만들어 주는 어떤 정신의 힘이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혼해서 결혼한 부부들을 이렇게 보면, 가정생활의 위기가 오는 적은 언제냐 하면 둘 중에 한 사람만 열렬히 기도해도 위기가 안 옵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이 확 밀리면 기도하는 사람이 잡아당기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밀면 나도 밀어야지만 싸움이 시작이 되는데 한 사람이 분노하면 한 사람은 용서를 빌고 그리고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딪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기가 올 때가 되면 둘 다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모든 힘이 완전히 고갈이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불신과 오해가 생겨나고 원망이 생겨나면서 결국은 결혼생활이 파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기도생활은 개인적으로 경건을 이어가게 만들 뿐만 아니라 어제 말씀드린, 우리가 삶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소명의 목표를 따라 살아가게 하는 모든 일을 위한 하나의 에너지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예화) 바다에 떠 있는 항공모함은 7만 톤 9만 톤 10만 톤 가까이 되는 어마어마한 배입니다. 그 배에서 쓰는 전기가 작은 도시 하나에서 쓰는 전기의 양만큼 5천 명 내지 6천 명의 승무원이 그 속에서 생활을 하는데 누가 거기서 도망을 가면 그 사람을 잡기 위해서 6개월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샅샅이 수색을 하는데 3개월에서 6개월이 걸린답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큰 배가 주먹만 한 우라늄으로 에너지원을 삼아서 가는 것입니다. 20년 동안 교체하지 않고 그 에너지로 세계 어디든지 다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생활 우리의 영적인 생활, 주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이 모든 소명 받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평탄한 길로 인도하신다고 하는데, 아닙니다. 기도 많이 했는데도 어떤 때에는 가보지도 못한 고난의 길로 하나님이 우리를 데려가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는 고난과 시련의 길이 와도, 그것을 이겨냅니다. 왜냐하면, 시험을 당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시험을 극복하게 하시는 방법이 세 가지 있는데, 하나는 피할 길을 주시든지, 아니면 감당할 힘을 주시든지, 아니면 맞서 싸워서 그것을 이겨버리든지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그 세 가지 모두의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게 결국은 에너지입니다. 영적인 에너지입니다. 그런 에너지를 끊임 없이 주님께로부터 충전을 받는 비결이 그게 결국은 기도생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 같은 그러한 일들을 참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고 그리고 견딜 수 없는 갈등과 괴로움들이 잠잠해지고, 불안과 두려움에 싸였던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다른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정하십시오. 무너지지 말고 시간을 정하십시오. 그냥 아예 이게 나의 운명이다 라고 생각을 하고 열한시쯤 잠들어서 다섯시 반쯤 벌떡 일어나서 일평생 새벽기도에 헌신하면 최고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렵다면 어느 시간이든지 하나님 앞에 성경을 조용히 묵상하고 자신에게 적용하며 하나님을 찾는 시간과 간절히 마음을 쏟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그 두 가지 시간은 결코 잃어버리지 말고 여러분들이 반드시 붙들고 살아야 할 시간입니다. 거기에서 여러분들의 심령이 점점 더 강하여 지고 하나님 앞에서 아주 튼튼한 삶이 되어 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실 때 쓰실만한 사람으로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셔서 그 분께 영광을 돌릴 사람들은 다릅니다. 다르게 태어날 필요는 없는데 똑같은 인생의 길을 걸어서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고 좀 멀리하십시오. 가치가 없는 일에 시간을 소비하는 것을 깊이 후회합니다. 여러분, 로버트 머리 맥체인이라고 하는 영국의 청교도는 결국엔 31살에 죽었는데, 그가 설교를 하러 올라가면 설교가 시작되기도 전에 성도들이 흐느껴 울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얼굴에서 나타나는 찬란한 광채가 주님을 만나고 온 사람 같아서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울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로버트 머리 맥체인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우유 배달부보다 늦게 일어난 시간에 나는 회개한다. 내가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보다 더 부지런하지 못하다니!’ 하고 회개하면서 하루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게 새벽 4시입니다. 그러니까 깊이 삶을 정리해야 합니다. 단호하게 용기를 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지엄한 소명을 받는 사람이다. 나는 이런 사소한 일에 나 자신을 낭비하며 살기에는 하나님이 너무 소중하게 불러 준 사람이다.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정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치 있는 일에 매달리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간구해야 합니다.
이제는 들을 만큼 들었으니 결단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결단하고, 바둑을 두다가도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생각하면 깊이 각오하고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