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기도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시 5:1)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어느 때 이 시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표제에는 다윗이 저자로 되어 있고, 우리는 의심할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아마도 다윗이 가장 곤고하고 악인들로 인해서 고통을 받던 날에 쓴 시일 것 같습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탄원으로 가득 차 있고 특별히 앞부분의 몇 절은 기도에 관해서 보석과 같은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래서 저는 몇 번에 걸쳐서 1절과 2절, 그리고 3절을 설교하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큰 경륜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을 모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게 됩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너희들의 이 모든 있어야 할 것들을 아시느니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항상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이 기도 속에는 하나님의 보다 깊은 경륜이 있으니, 그것들 중 가장 큰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기도라는 수단을 통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살아야 할 자신을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통하여서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새롭게 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가치를 바라보고 살 수 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Ⅱ. 언약 관계를 믿음
제일 먼저 성경은 언약 관계를 믿음으로써 기도를 시작해야 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라고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도 아니고 주님도 아니고 하나님의 가장 거룩한 존함, 여호와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여호와)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특별하게 계시된 당신(하나님)의 본명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이름이 거룩하지만 다른 모든 존함보다 이 ‘야훼’라고 하는 존함은 비교할 수 없이 높고 아주 존귀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시인은 말할 수 없는 큰 고통 속에서 기도하기 전 영혼으로 하나님을 응시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 위에 뛰어나셔서 자기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종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불순종하고 때로는 하나님을 떠나지만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에 언제나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붙든 손을 놓지 않으십니다.
기도하는 자의 소망은 자기가 아닙니다. 기도는 자기를 향하고 세상을 향하던 영혼의 눈을 들어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먼저 기도하기 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온 땅과 하늘 위에 지극히 높고 위대하시며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며 그 모든 피조물들을 향하여 인자하시며 선하시며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 이것이 기도의 출발입니다. 그래서 평소 하나님에 대한 깊고 풍부한 묵상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기도가 잘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충분한 묵상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필요할 때 기도를 터져 나오게 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들의 기도가 잘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하나님에 관해 많이 묵상하십시오. 그분의 뛰어난 존재와 성품, 그리고 나 같은 인간을 대해 오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 나의 어떠한 인생길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나에게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 보셨는지 묵상하는 것이야말로 기도를 위한 가장 훌륭한 마음의 준비입니다.
Ⅲ. 기도자와 하나님
이어서 생각할 것은 기도하는 자와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입니다.
A. 귀 기울이심
오늘 성경의 표현을 따르자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한정된 사물이 아니실진대 그분의 무슨 형상이 있겠으며, 그 형상이 어찌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이겠으며, 또 그 형상이 어떻게 인간이 가진 그 외적인 형상과 동일하겠습니까? 그분이 어떻게 코가 있고 입이 있고 귀가 있고 손과 발이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우리들의 이해의 한계를 생각하셔서 시인을 통해 우리같이 연약한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아주 유아기적인 표현으로 눈높이 교육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같은 모양을 하신 분이 아니지만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의 형상을 빌어서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설명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성품은 잘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손을 대고 귓바퀴를 크게 만들어서 (우리의)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듣고자 하는 분이십니다.
사랑의 가장 뛰어난 속성은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을 정말 즐거워합니다. 그가 말하는 말의 내용뿐만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자기 앞에서 무엇을 열심히 표현하고 토로하고 있다는 것을 그 자체를 즐거워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하며 일생을 살았던 이 시인이 하나님에게서 발견한 성품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자기에게 인자하신 하나님이고, 선하신 하나님이고, 당신과 언약을 맺은 자기를 버리지 않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자기가 무엇을 하나님께 말하든지 하나님은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위로의 말씀입니까. 누가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만 있어도 그리고 듣는 그가 자신의 말을 느끼면서 들어주고 자신도 그렇게 말을 함으로써 이해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런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그는 자살하지 않습니다. 자살하기 직전의 인간의 마음은 완전히 고립되어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남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죽기 직전 그 순간에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오면서 모든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집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니
시인은 자기가 무엇을 당신께 말하든지 주님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였습니다.
구약에서 ‘귀를 기울인다.’ 는 이 표현은 하나님의 귀에 단순히 들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마음을 다하여 들으시는 것이고 그 의미를 이해하시는 것이며 사안에 따라서 당신이 뚜렷이 간섭하고 개입할 의지를 가지고 들으시는 것이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당신에게 간구하는 그 기도자를 배반하지 않으시는 언약에 충실한 마음으로 그 기도를 들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할 수 없이 큰 위로가 됩니다. 왜 입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받을 수 없을 때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는 그 하나님은 자신을 친근히 하며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친구들이 자신을 다 버려도 그는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마음을 다해 드리는 간절한 기도 속에서 사랑하는 친구도 자신에게 팔꿈치를 들고 자신을 멀리 떠났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셔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간절히 기도하는 것만을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 세상이 무엇인가 질서가 깨지고 막 고통을 받을 때 그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렬히 기도하지 않아도 그 모든 땅의 고통은 하나님이 들으신바 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사람이 별로 없어도, 너무 말도 되지 않는 일이 일어나서 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상심하고 고통을 받으면, 그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들린바 되고, 주님은 땅에 내려오셔서 이 땅의 고통을 살펴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출애굽에 오르게 된 가장 큰 동기가 그 백성들의 부르짖는 고통소리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땅이 너무 고통을 받으면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고통을 제거해 주시고 피를 흘려 땅을 고통스럽게 한 사람들의 핏값을 되갚아주십니다.
(예화) 저는 여러 해 전 캄보디아에 갔을 때 그런 역사의 교훈을 얻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킬링필드의 비극이 발생하고 2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그 킬링필드에 가면 발로 툭툭 차기만 해도 땅에서 40년 전에 거기에서 죽은 사람들의 옷가지들이 수없이 나옵니다. 심지어 거기는 부르주아의 어린 아이들을 공중에 던져 옆에서 군인이 던져 올린 어린아이의 머리통을 총으로 맞혔다고 하니 말할 수 없는 살육의 비극이 자행되었습니다. 거기에서 마음속으로 정말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말도 되지 않는 고난을 당하며 죽어갈 때 세계는 무엇을 하였는가 말입니다. 구해 주는 사람(도) 별로 없었지만 결국 정권은 무너지고 그렇게 범죄한 많은 사람들은 처단을 당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는 시국도 그러한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어떠한 정권도 백성들을 그렇게 눈물 나게 하고 가슴 아프게 하고 정의에 대해서 의심하게 만들고 고통 받게 만들면, 그러한 정권을 심판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은 개입하셔서 당신의 정의를 보이십니다.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그러한 시국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은 한 정권의 막을 내리십니다. 전두환 정권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고통을 받고 원한 맺힌 가족들이 생겨났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놀랍게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으십니다. 때로 우리는 여러 이해관계로 이 땅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하지 못해도 공평하신 하나님은 그 모든 백성들의 신음소리와 분노의 함성을 들으시고 당신이 역사에 개입하셔서 때로는 모든 사람들이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것, 여전히 진리는 시퍼렇게 살아있어서 이 세상을 재고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나 특히 당신의 자녀들이 마음을 기울여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가 범죄한 자이면 가까이 오셔서 그에게 사죄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가 고통 가운데 있는 상황이면 가까이 오셔서 그 고통의 원인을 제거해 주시거나 고통에 담긴 심오한 뜻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그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갈 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가까이 오셔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그의 오른손으로 그의 가야 할 길을 손끝으로 가리켜 보여주십니다. 그가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세상에서 버림받은 그 사람을 주님은 가까이 오셔서 당신의 옷깃으로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그 볼에서 씻어 주십니다. 간절히 기도할 이유가 없으면 마음속에서 너무나 쉽게 당신을 잊어버릴 수(밖에) 없는 죄인들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아무리 많이 사랑하는 자녀라 할지라도 기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한가한 인생길을 걸어가도록 놔두시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도할 수 있게끔 해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기도가 안 될 때는 안 되기 때문에 힘들지만 기도가 될 때에는 기도가 되기 때문에, 기도가 되지 않을 때에는 기도제목 같지도 않은 것들이 떠올라 가슴을 저미며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렇게 주님은 마음으로 당신을 간절히 찾는 모든 사람들 가까이에 가십니다. 그리고 귀를 기울여 그들의 기도에 당신을 가까이 하시고 어떠한 상황이든지 당신이 개입할 준비를 다 갖추시고 그리고 언제든지 우리를 어떤 경우에도 당신께 기도하는 우리를 배반하지 않으실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꾸며서 말할 필요가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많이 말해주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감출 필요가 있지만 그러나 하니님께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미 하나님 앞에 감춰질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 앞에서 우리의 모든 마음의 무장을 해제합니다. 모든 경계심을 풉니다. 그리고 거짓과 가식의 허울을 벗어버립니다. 그리고 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섭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나같은 사람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실 리가 없다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차피 기도의 찬란한 빛은 수많은 의심과 허탄한 생각의 구름을 뚫고 지나가야 그 빛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마음에 맺힌 원한을 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용납하지 못하였던 자신이 주님께 용납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우는 교리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친근한 하나님이십니다. 간절히 기도하셔서 이렇게 주님을 가까이 하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기도는 언어임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기도가 언어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기울이사.” ‘말’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에메르()는 아마르()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말하는 것’ 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해도 똑같이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기도에서 언어를 빼버리려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저 멀리 초대교회부터 언제나 이러한 시도는 있었습니다. 그런 시도를 가진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께 언어로 기도하는 것은 기도의 아주 초보적인 형태이고, 그 기도가 고급한 상태로 올라가게 되면 거기에서는 오히려 언어를 상실하고 기도하는 그 사람이 자기가 관상하는 하나님 속으로 몰입되는 신비의 체험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저도 오래 전에는 이러한 이론에 약간 마음이 끌리기는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사실 좀 더 연구하고 보니 이것은 기도에 있어서 매우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관상기도라고 하는 것이 널리 퍼지면서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인지를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언어를 삭제한 모든 것은 고유한 의미에서 결코 기도일 수 없습니다. 기도는 반드시 언어를 가지고 하나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에메르’라는 단어, 그 단어가 오게 되었던 히브리어 동사인 ‘아마르’라는 동사는 지금 말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어나 영어나 불어나 독일어로 ‘말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으로 하는 말도 말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제일 먼저 쓰인 것이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할 때 그 ‘하나님이 이르시기를’ 하는 그
단어가 처음 쓰인 것이 창세기 1장입니다. 하나님이 한국말로 말씀하시겠습니까. 히브리어로 말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들 누가 당신의 말을 듣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관념 속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엄격히 말해서 그 말이 입으로 나오는 것이든 마음속에서 행해지는 것이든 반드시 그 기도는 언어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어떤 깊은 영적 체험 속에서 그러한 탁월한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흉내 내고자 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예외적인 결과이지 그 체험 자체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고 더욱이 그런 방식을 기도에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그러한 방식의 인간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권장하지 않습니다.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역사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방에도 선지자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 안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방 선지자들이나 거짓 선지자들이 종종 영적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러한 경험을 할 때 공통점은 모두 이성의 활동이 중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참선지자 전통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신비한 경험을 그에게 하게 하셔도 하나님이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을 마비시키시거나 무력화시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신비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성을 통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이해하게 하시고 또한 우리를 이해하시면서 당신이 가지고 계신 어떤 계시를 지성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지성에게 말을 건네시고 또 우리는 지성을 통해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우러르며 그분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마음 안에서 언어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가 구할 것을 모르기 때문에 기도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렇게 격려하심으로써 마치 우리가 간절히 기도해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처럼 이해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매일 매일 새로워지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기도하도록 초청하십니다. 자, 그렇게 살면 안 되는데 (우리는) 불순종하고 이 세상 것에 정신을 팔고 하나님 의지 하지 않고 주님께로부터 멀리 떠나 살았습니다. 신앙의 형식은 살아있지만 마음에는 어두움이 가득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을 뵈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어디에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인식이 별로 없고 그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고 매우 가까이 계시다는 인식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기도합니다. 그러나 기도해도 그 마음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화가) 일어나다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기도하시게 해야지 내가 기도하지.’ 너무 마음이 곤고해서 새벽에 기도하러 왔다가 그냥 엎드려 오만가지 생각과 씨름하고, 그날따라 옆에 있는 사람이 하도 소리소리 질러 기도하는 바람에 기도 줄이 잡히지 않아 한 두 시간 씨름하다가 피곤한 몸으로 돌계단을 내려가는 그 비참한 마음을 여러분들은 아마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절당했다고 하는 차가운 거절감, 무엇인가 내 안에 있는 은혜가 박탈되었다고 하는 상실감, 나 같은 사람이 기도해야 들어주실 것 같지 않다고 하는 패배감, 이러한 것들이 밀려오는 가운데 그 기도의 자리를 떠나면서 ‘다시 기도 하러 와야지.’하는 마음이 불타지 않습니다. 이러한 방법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안수를 받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신비 체험을 구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소리소리 육체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많은 시간을 공허한 싸움으로 허비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기도 안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기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지, 충분히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기도를 안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기도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감격과 기쁨, 감사, 하나님께 대한 갈망, 이런 것들로 차 있는 사람이 기도를 안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화) 저녁에 뭐 좀 먹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처음에는 조금 들었는데- 시간이 가면 점점 들면서 아이스크림을 너무 먹고 싶습니다. 냉장고를 뒤져 보았는데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 추운 날에 바지 입고 내려가 결국 사다 먹습니다.
(이처럼) 마음에 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으면 합니다. 그러나 기도 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할 수 없는 상태는 가만히 내버려 둔다고 해서 개선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그럴 수는 없는 것 같지만- 3년, 4년, 5년씩 기도하지 않은 채 세월을 흘려보내는 일이 뜻밖에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것에 대한 가장 훌륭한 처방이 무엇인가 하면 언어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또렷한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지 명료히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나는 몇 가지 사례에서 그러한 치료의 경험을 하였습니다. 때로는 범죄로 때로는 여러 가지 많은 비 영적인 틀에 매여 있기 때문에 기도가 안 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 했습니다. “책을 읽어라. 기도 먼저 하려고 하지 말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책을 읽어라.”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책을 읽거나 설교를 듣거나 하면서 마음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그러한 은혜를 느끼라고 하면서 그 다음에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 아이디어를 주었습니다. 새벽에 나와도 한 마디도 기도를 못 하고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녁에 일찍 들어와서 새벽에 나와 하고 싶은 기도를 글로 쓰게 하였습니다. 편지지 한 장 두 장 글을 쓸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새벽에 나와서 조용히 무릎을 꿇고 마음을 다해서 읽으라고 했습니다. (그 때) 기도가 터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먹구름과 같은 것들이 잔뜩 끼어서 혼란스러울 때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어떤 초월적인 힘이 자기에게 와서 확 거두어가고 열렬한 기도가 나오게 할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그러한 마음의 구름을 뚫고 마음 깊은 곳에 내려가 언어를 길어 올립니다. (기도의 내용이) 길지 않아도, 화려하지 않아도 복잡한 문장이 아니어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언어를 길어 올리고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주어, 동사, 목적어, 다 만들어야 합니다. 만들지 않으면 기도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만들어야 합니다. 마음이 계속 활동하지 않고는 언어를 만들어 낼 수 없으니까 마음이 계속 활동하면 언어를 만듭니다. 그 언어가 우리의 마음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마음속에서 자신의 언어가 나오면서 변화가 됩니다. 정말 자신도 그 사람이 싫습니다. 만나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이야기를 계속 하다보면 그것이 진심이 됩니다. 그것이 고백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힘입니다.
제가 자주 이야기 하는 것이 있습니다. 두 남녀가 서로 좋아하고 밥도 먹고 가끔 만나 차도 마시고, 그런데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둘 중 한 사람이 ‘내가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면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도 보통 일이 아니지만 한 사람의 마음은 엄청난 힘으로 그 마음이 그 사람을 사랑하기로 정동이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 신앙고백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생각 없이 외우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헌신으로 드리는 이 고백은 마음을 다시 돌려놓는 놀라운 힘을 가집니다. 자동차나 혹은 오토바이나 혹은 잔디 깎는 기계는 오래 안 쓰면 발동이 안 걸립니다. 덕크덕 하고 걸었는데 툴툴툴툴 툴툴툴툴 소리를 내며 꺼집니다. 어느 한순간 시동 거는 것이 성공합니다. 붕 하고 돕니다. 한번 돌고나면 5분에서 10분 정도 엑셀을 밟고 돌고나면 엔진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끄고 탁 걸면서 부르릉 하고 걸립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기도에 있어서 그 기도가 말, 곧 언어여야 한다고 하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묵상기도라는 이름 아래 마음과 영혼의 상태가 가지런히 튜닝 된 사람들은 그러면 하나님 앞에 어느 때에든지 눈을 감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마음속에서 수많은 언어가 떠오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수많은 언어가 떠오릅니다. 어느 때와 비슷한가 하면 열 받을 때와 비슷합니다. 열 받을 때와 똑같습니다. 열 받으면 ‘나는 저 인간에게 이렇게 이야기 할 거야,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 하겠지?,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해야지, 그러면 틀림없이 이렇게 대꾸할 거야, 그때 내가 이렇게 퍼부을 거야.’ 실제로 상대방이 그렇게 대꾸를 할지 안할지도 모르는데 혼자서 소설을 막 씁니다. 왜 입니까. 열 받으니까 속에서 부글부글 끌면서 언어가 창조됩니다. 어쩌면 그렇게 말하자면 격한 말들이 창조가 되는지 모릅니다. 사랑할 때도 똑같이 마음 안에서 언어가 생산이 됩니다. 그 언어를 정확하게 또렷한 이성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그들 조직에 나아가 기도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마음이 그 말을 못 따라 오는 때도 있습니다. 익숙해지면 안 됩니다. 항상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 보게 해야 합니다. 가끔 어떤 사람이 개척 교회 했을 때 많이 썼던 방법인데 ‘나는 아무리 해도 하나님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즐겨 하는 대답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당신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증명해 보일 수는 있지만 당신이 그것을 받아들일지는 내가 확신이 안 간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당신이 나한테 졌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님이 절대 당신 마음속으로 들어오시는 법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냐고 묻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직접 여쭤봐라, 하나님께서 계신지 안 계신지. 하나님, 없죠? 차라리 그렇게 물어봐라. 그러면 하나님이 더 빨리 응답해 주실 것이다.’
언어는 그렇게 중요합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있는 것을 그대로 건져 올리면서 대신 하나님을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그 믿음을 가지고 그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토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마땅히 자신이 가져야 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하나님께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지 여쭤보고 그 마음을 자신에게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놀랍게 그렇게 언어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 오르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바로 이러한 과정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바꿔 놓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오래 전에 들었으나 잊어버리고 있던, 혹은 마음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있던 하나님에 관한 성품을 다시 경험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도록 만들어 주셔서 그 다음에는 자신이 그렇게 기도를 시작했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난 후에는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당신이 기도를 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기도하게끔 바꿔 주십니다. 실험을 해 보십시오. 당장 오늘 실험해 보십시오.
(예화) 외국에서 어느 교회에 갔는데 새벽에 나와 기도를 하는데 옆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조용합니다. 어떤 사람은 깊은 기도에 들어갔겠지만 어떤 사람은 여기에다 진한 자국을 남기면서 새벽기도를 걸어 나옵니다.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말이 아니면 하지 않으리라는 마음을 먹고,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 제가 정말 오늘 기도가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자신의 진심을 따라가며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그래서 모든 기도의 언어가 마음에 닿도록 그래서 허망한 기도가 뭐냐 하면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떠드는데 언어는 막 생산이 됩니다. 그런데 언어와 마음이 상관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울려 펴지고 이 마음은 마음대로 다른 길을 갑니다. 이게 바로 외식하는 기도입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이 그런 기도를 들어주기를 원할 때 외식하는 기도이고, 듣는 사람이 없으면 그것이 바로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기도는 언어여야 한다는 것, 그 언어는 항상 마음을 두드리는 언어, 마음과 일치되는 언어이여야 합니다. 사람을 만나서는 마음에 없는 이야기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기도할 때는 마음에 없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말하든지 그것을 진심으로 내 마음을 두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건드려야 합니다. 두드리고 건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기도가 나의 마음에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내 기도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것은 이론으로는 안 되고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런데 말 그 자체에 놀랍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남의 마음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도 움직이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소리를 내어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이 시인이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라고 할 때 이 말은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언어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가장 높은 수준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아하실 그 일이 우리에게도 가슴 저미는 소원, 기도제목이 됩니다. 그것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도달하는 높은 수준의 기도의 언어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십시오. 졸거나 엎드려 자다가 가지 말고 가서 오늘 저녁에라도 침대에 누워서 종이 한 장 꺼내서 쓰면 되지 않습니까. 핸드폰에 찍어도 되고 문자에 찍어도 되고 그것을 보내기 퉁 누르고 수신인은 ‘하나님’. 그러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읽습니다.
(예화) 외국에 처음 갔을 때 툭하면 외국 교수님들이 “목사님, 우리를 위해서 기도 좀 해 주십시오.” 하는데 얼굴이 하얗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갈 때 기도하라고 하면 써 먹어야지 생각하며 적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해도 진심으로 기도를 하는데 방해되지 않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에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선하신 하나님을 굳게 붙드십시오. 기도하는 곳은 여러분들의 입술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도가 나오기를 바라시는 장소는 여러분들의 혀가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의 밑바닥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언어를 길어 올리십시오. 그러한 마음의 언어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깊이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이 기도가 끝나고 나면 기도하기 전의 나와는 다른 마음이 될 것이라고 믿고 마음과 영혼의 변화를 갈망하며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들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또한 여러분들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