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께 드리는 기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시 5:2)
녹취자: 원수연
지난 몇 시간을 통해서는 우리들이 심정을 토하는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2절에서는 시인이 기도하는 대상이신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시인이 이렇게 심정을 토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왕이라고 믿었습니다. 다윗이 이 시를, 틀림없이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 5편의 시는 왕이 된 다음에 쓰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시점에서 다윗이 자기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은 나의 왕입니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첫 번째로 이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 속에서 자기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왕으로 이해한 것을 보여줍니다. 왕이 누굴까요? (다윗은) 자신이 이미 왕이 되어봤으니까 왕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왕은 나라를 통치하는 주권자인데 자기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일정한 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이 통치철학입니다. 그 철학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면서 나라가 모두 그 질서를 구현하도록 다스리는 사람이 왕입니다. 하나님을 왕이라고 고백을 하는 이 속에는 왕의 뜻대로 이 모든 일들이, 나라가, 세상이 움직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인은 진심으로 심정을 토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이 마음에 그리고 있는 그 모든 질서들에 자신이 역행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 이루고 싶어 하시는 그 일이 시인 자신에게도 말할 수 없는 즐거움과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즐거워하고 그 통치를 기뻐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자세로 시인은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하고, 돌보고, 가꾸시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정을 토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한마음이 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슬프고 눈물이 쏟아져도 기도가 안 되는 때가 있고 그렇게 쏟아지는 눈물과 감정은 없지만 기도가 되는 때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입니다. 기도를 시작했을 때는 내 생각, 내 뜻이 있어서 시작을 했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거기에 자신을 복종하고 맞추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시인이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던 이유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꺾어서 자기의 계획을 이루는 과정이 아니라 미숙하고 어려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시작했지만 간절하고 깊은 기도 속에서 오히려 자기 깨트려짐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겸손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은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공통적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신학을 공부해도 자신의 육이 펄펄 살아있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지식이 조금 부족해도 자신이 죽어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냐면 생생한 기도로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의 왕이심을 고백하고 그분 앞에 꺾어지는 훈련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온전히 하나님께 겸손하게 사는 것이 최고이지만 만약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마음으로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는 삶을 살 것인가, 적은 지식을 가지고 온전히 주님께 복종한 겸손의 삶을 살 것인가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망설일 필요가 없이 후자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고통 속에서 이 기도를 시작했지만 결국 나의 고통스러운 이 모든 현실을 한 손에 붙들고 운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 속에서 주님의 주권을 받아들일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오늘 시인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카라’인데 소리치는 것을 말합니다. 음성으로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지르는 것이 ‘카라’입니다. 사람의 이름을 불러서 혹은 위험을 알리거나 기쁜 소식을 알릴 때도 이렇게 부릅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기도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우리들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리로 변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억제하지 못하는 그 소리, 그것은 결국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그것은 자기 앞에 펼쳐진 현실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지 자기 맘대로 되게 해달라는 그런 부르짖음이 아니라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둘러싼 수많은 대적들을 생각합니다. 대적들만 잘못했는줄 알았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기도해보니까 자기도 잘못한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악인들도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질서로 돌아오고 그 뜻을 멀리 떠난 자신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로 돌아오고 그렇게 하면서 나와 나를 둘러싼 악인과 모든 세상의 만물들이 지금 하나님의 그 질서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 자신은 똑바른데 하나님이 안 도와주신다거나 나쁜 놈들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면서 부르짖는 것은 진정한 부르짖음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시작했지만 욥과 마찬가지로 간절히 고난을 받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보면 자신이 순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으며 용서와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호소하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일이 바뀌었으면 하고 매달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아, 내가 바뀌지 않는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크고 무거운 짐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기가 깨트려지게 됩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이 부르짖음 속에 녹아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우리 자신은 얼마나 깨트렸을까요? 오늘 이 시인이 고백하고 있는 대로 처음에는 악인이 주는 고통 때문에 기도를 시작했지만 간절히 부르짖으면서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는 아픔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었던 적이 언제인지 한번 생각해봅시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을 깊이 의지하며 주님을 붙들고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