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 하나님 앞에
2020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 | 2020년 6월 28일 – 7월 19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0년 12월 31일
목 차
1. 네 자녀를 위해 울라(눅 23:28) 2020.06.28. 주일오전 7
2. 불변하는 계명을 따르라(마 15:3-6) 2020.07.05. 주일오전 13
3. 경건한 아내와 남편(엡 5:24-25) 2020.07.12. 주일오전 21
4. 네 형제와 화해하라(창 33:1-4) 2020.07.19. 주일오전 29
<설교 프레임>
우리 가족 하나님 앞에1 2020. 6. 28 주일 낮 예배
< 네 자녀를 위해 울라 >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8)
I. 본문해설
예수 그리스도의 체포와 심문 및 재판의 광경을 보도하고 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言渡) 받고 형장으로 끌려가게 되셨다.
사랑하던 제자들은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으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十字架)의 행렬을 따라가고 있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눅 23:27)
그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고 있었다고 보도한다. 그것은 “백성과…여자의 큰 무리”였다(눅 23:27).
여기 나오는 “백성(百姓)”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이었다(눅 23:35, 48). 그리고 여자(女子)들은 “예수를 위해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밤새도록 땀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신 후(눅 22:44), 끌려다니며 심문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몸소 십자가를 지셨다.
II. 네 자녀를 위해 울라
침묵하시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따라오는 여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A. 눈물이 있는 신앙
첫째로, 눈물이 있는 신앙(信仰)에 대한 가르침이다. 무엇 때문에 그 여인(女人)들은 슬피 울며 눈물을 흘렸을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정(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분은 죄인들의 구원자시며 여자들의 보호자셨다. “죄 지은 한 여자”는 죄 용서(容恕) 받은 것이 크기에 주님을 더욱 사랑했다(눅 7:47).
백성들은 구경했으나, 여인들은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면서” 십자가를 따라갔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참된 눈물은 사랑의 감격(感激)과 슬픔의 고통(苦痛)을 함께 보여준다. 신앙은 예수 사랑이며 예수 슬픔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액체(液體)의 생애였다. 땀과 눈물과 피의 생애였다. 참된 신앙(信仰)은 그분의 길을 따른다. 자기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운다.
은혜(恩惠)를 받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눈물 흘리고, 그분이 당하신 고통(苦痛) 때문에 슬퍼하게 된다.
그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관한 신학적(神學的) 의미를 아직 몰랐다. 그러나 백성들처럼 구경하며 따라갈 수는 없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라.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을 회복하자.
B. 자녀를 위한 눈물
둘째로,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유언(遺言)과 같은 당부였다.
침묵하시며 형장(刑場)으로 향하시던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슬피 우는 여인들의 눈물에 답(答)하듯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1. “나를 위해 울지 말라”
먼저 당신을 위해 울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두 가지 때문이었다.
하나는, 당신의 죽음이 결코 비참한 패배(敗北)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어차피 인류의 구원을 위해 대속(代贖)의 십자가를 지셔야 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또 하나는, 그녀들의 사랑이 가진 육신적(肉身的)인 면 때문이었다. 예수를 위해 통곡하는 그녀들의 사랑은 다분히 육신의 정(情)에 매인 사랑이었다.
여인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구원(救援) 계획을 더 깊이 알아, 인간 예수와의 정(情)을 넘어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어야 했다.
2. “네 자녀를 위해 울라”
이어서 예수께서 그 여인들이 진심으로 울어주어야 할 대상(對象)이 따로 있음을 말씀하신다.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28절)
이는 예루살렘의 역사적 멸망(滅亡)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한 세대 안에 일어날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탄(痛歎)이었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눅 23:29)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성”(city of peace)이라는 의미(意味)이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평화를 누리는 도성이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향한 사랑이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평화(shalom)를 누리기를 바라는 데까지 확장되기를 바라셨다.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는 여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바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겪게 될 장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곧 죽으실 예수 자신보다 자기의 자녀들을 위해 울기를 바라셨다.
신자인 부모의 가장 큰 의무는 자녀(子女)들을 회심(回心)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녀들을 위해 울지 않을까? 그들에 관해 걱정은 하지만 울지는 않는다. 무엇 때문일까?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a. 자녀(子女)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b. 예수(Jesus)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c. 자신(自身)을 위해 울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영혼을 위해 울 수 있는 사람이 자녀를 위해서 울 수 있으니, 이는 그 슬픔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자기가 고통을 겪으면서도 기도하지 않는데, 어떻게 자식의 신앙(信仰)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겠는가? 죄(罪)를 지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데 어떻게 자녀의 영혼(靈魂)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겠는가?
부모는 자식을 위해 두 번 해산(解産)의 고통을 겪는다. 육신(肉身)의 출생을 위해서, 또한 영혼(靈魂)의 출생을 위해서다. 영혼의 출생으로 영적 생명을 얻어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하여야 한다.
자식(子息)이 자신의 영혼을 위해 울 수 없을 때, 하나님을 모르고 불순종할 때 부모가 대신 울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부모의 사랑(love)이 아닌가?
솔로몬(Solomon)의 재판에서 아이를 칼로 반씩 나눠주라는 판결이 있었을 때 진짜 어미의 마음은 슬픔과 고통에 불붙었다.
“그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청하건대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왕상 3:26)
쫓겨난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Hagal)은 광야에서 물이 없어 목말라 죽게 되었을 때에, 불쌍한 자기 자식을 위해 통곡했다.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창 21:15-16)
삯꾼 부모와 참된 부모가 있다. 삯꾼은 양이 자기 양이 아니므로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는다. 삯꾼 부모도 그렇다.
그러나 참된 부모는, 선(善)한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듯이(요 10:11), 자녀를 위해 목숨을 주기까지 사랑한다.
애굽에 인질이 된 베냐민과 아버지 야곱에 대한 유다의 말을 기억하라.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창 44:30)
아직 하나님을 몰라서, 혹은 세상의 즐거움에 들떠서 자기사랑(self love)에 완고한 자녀들을 부모가 어떻게 바꿀 수 있겠는가? 그러나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
자녀가 세속(世俗)에 빠질 때, 그에게 불행(不幸)이 겹칠 때, 그들이 시련을 만나고, 가정(家庭)이 위기에 처할 때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너희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28절)
사랑은 눈물이다. 그 사랑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 살아가는 자신(自身)을 위해 울게 하고, 그만큼 사랑하는 자식(子息)을 위해 울게 한다. 당신의 자녀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라.
III. 적용과 결론
우리를 너무나 많이 진심(眞心)으로 사랑하기에 눈물로 기도(祈禱)해준 부모가 있었더라면 우리 인생(人生)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우리는 그런 부모(父母)를 둔 사람들을 얼마나 부러워하였던가? 여러분은 어떤 부모인가? 당신의 자녀를 위하여 울라.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누리게 될 인생의 행복(幸福)과 그분을 멀리 떠나 어둠 속에서 방황하게 될 불행(不幸)을 대조해 보라.
아직 기회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 자녀를 돌아보라. 그들을 위해 울라!
우리 가족 하나님 앞에2 2020. 7. 5 주일 낮 예배
< 불변하는 계명을 따르라 >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3-6)
I. 본문해설
본문은 예수의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았다는 이유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시비를 걸었던 사건을 보도한다. 장로들의 전통(傳統)에 위배된 행동이라는 주장이었다.
여기서 “장로들의 전통(paradosin)”이라는 것은 저명한 랍비들로부터 전수된 성경 해석과 실천적 적용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성문율인 율법(律法)과 더불어 구전(口傳)으로 전하게 한 율법을 따로 받았다고 믿었다(마 15:2).
구전율(Oral Law)은 성문율(Written Law)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문율이 물이라면 구전율은 포도주와 같다고 주장했다.
이 구전법(口傳法)은 모세가 아론에게,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또한 12지파의 대표들을 통해 70인의 장로들에게, 또한 각 종족의 우두머리에게, 이어서 회중 모두에게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구전을 마지막으로 성문화한 것이 미슈나(Mishna)이다. 탈무드(Talmud)는 본문인 미슈나와 이에 대한 토론인 게마라(Gemara, A.D. 5세기경)로 구성되며 히브리와 아람어로 기록되었다.
전체가 63권 6,200쪽이 넘는 분량이다. 그러나 이 구전(口傳)은 대부분 바리새파 사람들이 만든 것이며 B.C. 66–A.D. 70년 경에 유대인들에게 통용되는 전통을 확립한 것이다.
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따르는 그들의 이중성(二重性)을 지적하셨다. 그리고 이때 정곡을 찔러 지적하신 것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불변하는 계명이었다.
II. 불변하는 계명을 따르라
A. 전통과 계명
예수는 장로들의 전통을 따름으로 하나님의 계명(誡命)을 거스르는 것이 옳으냐고 반문하셨다. 이때 증거로 제시하신 것이 부모(父母) 공경의 계명이었다.
“장로들의 전통(傳統)”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해석(解釋)에 불과한데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물으셨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 15:3)
이것은 그들의 위선(僞善)을 드러나게 한 질문이었다. 부모 공경(恭敬)의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당시 그들의 태도가 신앙(信仰)이 아니라 이기심(利己心) 때문임을 드러내셨다.
선(善)한 전통이라면, 그것을 배울수록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게 해주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율법(律法)을 버렸다. 그것은 부모 공경의 본분을 버린 것이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중시함으로 경건한 척 했으나 사실은 하나님의 큰 계명(誡命)을 어기고 있었다.
B. 말씀을 폐한 이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무엇 때문에 기껏해야 사람이 만든 전통으로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十誡命)을 폐하려고까지 했을까?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6)
여기서 “폐하다(parabainete)”는 신약에서 “범죄하다”(마 15:6), “버리다”(행 1:25), “지나쳐 버리다”(요이 1:9)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이 그토록 사람의 전통에 집착했던 의도(意圖)를 드러내심으로써 그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4-6)
그들에게는 자기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없었다. 효도(孝道)의 의무를 회피하고 싶었다. 이때 면피하는 요령이 하나님께 서약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드렸나이다”(마 15:5). 이때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것이 바로 “고르반(qorban)”이다.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막 7:11)
그들은 부모 공경의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 부모에게 신앙을 가장하며 말한다. “당신들께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을 내가 이미 하나님께 드렸기에 당신에게 섬길 것이 없나이다”.
초대 교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렇게 하나님께 바치는 서약을 함으로써 부모 공경의 의무를 면탈하게 해주는 대가로 뇌물(賂物)을 받기까지 하였다고 한다(Origen, Jerome, Theophylact).
이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공경해야 할 의무(義務)를 이기심으로 저버린 불신앙은 이미 구약시대에도 있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결국 그들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았던 것은 실제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헌신(獻身)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모 공경의 의무를 면탈(免脫)하고자 하는 탐욕 때문이었다.
이들의 죄(罪)가 가증스러운 것은 부모를 공경(恭敬)하라는 십계명 중 큰 계명을, 사람의 가르침에 호소하면서 하나님께 헌신(獻身)했다는 핑계로 저버렸기 때문이다.
말씀의 가치는 그 사람을 진실(眞實)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 세우는 데 있다. 말씀을 빙자해 사욕(私慾)을 채우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는 자에게만 진리(眞理)의 말씀은 지혜(知慧)의 빛이 되고, 사랑의 불이 된다.
C. 불변하는 계명
부모(父母)를 공경하는 가르침은 불변하는 계명이다. 여기에 나오는 “너희의 전통(傳統)”이 과연 지금도 있는가?
그런 전통은 없어도 자신이 하나님께만 바쳐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을 합리화한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막 7:10)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오늘날 신자들 중에는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더욱 뻔뻔한 사람들이 많다. 노골적으로 부모 공경의 도리를 무시하고 자기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 반려견과 쾌락 위한 소비.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을 따른 도덕관념이 사라질 때 가족관계는 파괴된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부모 공경(恭敬)의 도리를 회복할 것인가?
a.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라.
b. 인격적 관계를 회복하라
c.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
III. 적용과 결론
참된 회심과 그 증거인 사랑(love)은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에서 나온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家族)을 사랑하게 한다.
참된 신앙(信仰)의 열매는 사랑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보이는 가족(家族)을 향하여 나타난다.
부모 공경은 불변하는 계명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부모를 공경할 것이며, 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받을 것이다(엡 6:3).
우리 가족 하나님 앞에3 2020. 7. 12 주일 낮 예배
< 경건한 아내와 남편 >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 5:24-25)
I. 본문해설
바울이 로마에 수감(收監)되었을 때였다. 유대인과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교훈하고자 했다.
이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經綸)과 교회(敎會)에 관한 가르침이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서로 분열(分裂)하지 않도록,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한 몸이 된 것을 가르쳤다.
교회는 하나님의 우주적 경륜의 성취를 위한 종자(種子)씨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의 비전(vision) 안에서 아내와 남편이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할지를 보여준다.
II. 경건한 아내와 남편
이 서신은 에베소교회의 경건한 성도(聖徒)들을 위해 쓴 것이다. 결혼에 있어서 성도인 아내와 남편의 도리는 무엇인가?
A. 아내의 도리
1. 남편에게 복종함
남편에 대한 아내의 도리는 복종(服從)이다. 본문은 두 사실을 강조한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head)라는 것과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엡 5:22,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4)
이러한 사실에 쐐기를 박듯이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서 많은 남편(男便)들은 우월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사실을 숙고(熟考)해야 한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됨에 비(比)할 수는 있으나, 제한적 유비(類比)다.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첫째로,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은 존재(存在)의 원천이지만 남편은 그렇지 않다.
둘째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인격(人格)이지만 남편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기능적인 질서다.
셋째로, 그것은 보다 상위에 있는 질서(秩序)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 권위는 남자이기 때문에 갖는 것이 아니다. 가정보다 더 높은 우주적인 질서를 이루기 위함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0-11)
구원 받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자원(自願)하여 창조 목적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함이니, 그 구원(救援)의 첫 열매인 사회가 교회이다. 신자의 가정(家庭)은 교회의 일부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0-21)
“복종하다”(hypotassetai)는 원어적으로 “∼아래에 두다, ∼뒤에 두다”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노예적(奴隸的) 복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피차 복종하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 사랑의 질서는 창조 시의 두 명령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게 하려 하심이다. 문화(文化)명령과 종교(宗敎)명령이다(창 1:28, 2:17).
2.. 하나님의 뜻을 위함
이처럼 아내와 남편의 도리에 대해 교훈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 경륜(經綸)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形狀)을 본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가정은 그 훈련의 현장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1-2)
결국 이 질서는 사랑(love)이라는 내용물을 지키기 위한 껍질과 같다. 결코 남편에게 아내를 억압할 권리를 주신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경륜을 이루는 데에 이바지하는 한해서만,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服從)할 의무가 있으니 남편도 마찬가지다.
첫 인류(人類)를 창조하실 때에 잘 나타났다. 한 몸으로 두 사람을 만드셨다. 이는 사랑의 사회를 만드시고자 하는 뜻을 보여준다.
한 몸에서 두 사람을 만드심은 서로를 자신의 일부로 여겨 자기를 사랑하듯이 서로를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창 2:23-24).
인류를 창조하심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한 사랑 안에서 서로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한 하나님의 우주적 계획 안에서 아내와 남편은 서로 인격적(人格的)으로 연합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질서(秩序)를 따라 서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여야 한다.
사랑은 상대방의 부족(不足)함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기게 한다.
거기서 서로를 온전하게 하며 자기도 완성되어 가는 것이 결혼 제도를 주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 사랑의 과정을 통하여 서로 완성되어 가는 것만큼 자기도 하나님 안에서 행복(幸福)을 누리게 된다.
또한 가정을 통해서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며, 사람을 사랑할 도리(道理)를 배우며 살게 하신 것이다.
B. 남편의 도리
아내에 대한 남편의 도리는 사랑(love)이다. 아내도 사랑해야 한다.
남편(男便)은 보이는 아내를 사랑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사랑은 증명(證明)된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교회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도 교회를 사랑하시지만, 교회에 비교할 때 그리스도의 사랑은 선도적(先導的)이다. 남편도 이처럼 아내를 선도적으로 사랑하여야 한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아내는 연약할 뿐 아니라 생명의 은혜를 함께 받을 자임을 알라.
남편은 아내를 사랑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교회(敎會)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것을 모본(模本)으로 삼기까지 사랑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아내와 남편이 서로 사랑하고, 피차 복종하여 거룩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룸으로써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6-27)
아내를 “사랑하라”(agapate)는 “아가파오(agapao)”의 현재 명령형이다. 이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남편은 아내가 그 안에서 평화, 기쁨, 안식을 누리며 살게 해 주어야 한다.
이 사랑의 모본을 그리스도(Christ)께서 보여 주셨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지복(至福)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분의 사랑은 죄인을 구원(救援)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며, 함께 거룩한 교회(敎會)가 되어 가도록 돌보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교회를 온전(穩全)하게 하시는 사랑이다. 단지 교회를 세우실 뿐 아니라 돌보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6-27)
자기에게 행하는 모든 일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몸을 학대(虐待)하면 고통으로 돌아오고 선대(善待)하면 편안함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아내에게 행한 바도 그러하다.
세상에서 아내와의 관계만큼 특별한 관계(關係)는 없다. 아내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사랑함으로써 자기를 완성(完成)해 가며 살게 하셨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죄(罪)스럽고 거짓된 자신(自身)과 싸우며 참된 자기를 완성해 가도록 부르셨다.
III. 적용과 결론
이기심(利己心)을 가진 인간에게 이런 사랑이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자기를 이기고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은 순종하기를 간구하는 자들에게 진리(眞理)로 사랑의 길을 가르치시고 성령(聖靈)으로 사랑할 힘을 주신다.
한 인간의 자아(自我)의 완성은 소유나 지위, 업적이 아니라 자립적 주체로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데에 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이니 그렇게 사람이 된 것만큼 서로 사랑하게 된다.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라.
우리 가족 하나님 앞에4 2020. 7. 19 주일 낮 예배
< 네 형제와 화해하라 >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창 33:1-4)
I. 본문해설
야곱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자기의 인간적인 꾀대로 잘 살아 보려고 했지만 고난을 통해 은혜를 받음으로 성화(聖化)되었다.
어머니와 함께,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를 속이고 형(兄) 에서가 받아야할 축복을 훔쳤다. 부모와 이별하여 메소포타미아로 도망가야 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아버지와 형에게 하듯이 자기를 속이는 외삼촌을 만났고 20년 동안 젊음을 바쳐 종처럼 봉사해야 했다(창 31:38).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 없었더라면 빈털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福)을 주셔서 큰 재물(財物)을 얻게 하셨다.
식솔(食率)들과 가축을 이끌고 도망하는 야곱을, 외삼촌과 그 형제들은 원한을 품고 추격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막아 주시고 그들과 극적으로 화해를 하게 하셨다(창 31:43-44).
그러나 야곱에게 가장 큰 일생의 숙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원한을 품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에서(Essau)를 만나는 것이었다.
II. 네 형제와 화해하라
하나님은 야곱에게 신실(信實)하셨다. 이 큰 위기 앞에서 그를 크게 만나주심으로써 형제가 기적적으로 화해(和解)하게 하셨다.
A. 얍복강에서 입맞춤
아버지로부터 받을 장자의 축복을 동생에게 빼앗긴 에서는 긴 세월동안 원한을 품고 복수(復讐)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창 27:41)
이 위기는 이제껏 넘어온 인생의 다른 고비들과는 달랐다. 이것은 결코 자기의 힘으로 해결(解決)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야곱은 먼저 에서에게 사자(使者)들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한 상황은 충격적이었다.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창 32:6)
이십여 년 만에 만나는 동생이 반가웠다면, 그는 무엇 때문에 400여명의 장졸(將卒)들을 거느리고 오고 있겠는가? 그것은 분명히 야곱의 집안과 전쟁(戰爭)을 염두에 둔 것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야곱은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분부 곧 “전에 네 고향 네 족속에게 돌아가라”고 하신 말씀대로 하는 것이니 형 에서의 위협에서 건져주시기를 간구하였다(창 32:9-11).
평생 자신의 얕은꾀로만 살아오던 그는 인생 최대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간절히 매달렸다(창 32:12). 이는 이미 이전에 벧엘에서 받은 말씀이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야곱은 형 에서의 보복으로부터 구원(救援)해 주시기를 간구하면서 이미 주신 약속(約束)에 호소하였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창 32:12)
거기서 야곱은 모든 식솔들과 가축들을 두 떼로 나누어 강(江)을 건너가게 하였다(창 32:7,22). 그리고 형(兄)에게 보낼 예물(禮物)로서 짐승들의 떼를 먼저 강 건너편으로 보냈다.
이후에 사랑하는 아내들과 열한 아들까지 얍복강 나루를 건너게 하였고 야곱은 홀로 남았다(창 32:22-23).
그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했을 것이다.
홀로 남은 밤에 그는 거기서 무엇을 했을까? 거기서 그는 천사와 씨름하였다. 천사가 야곱을 이기지 못하자 그의 허벅지 관절을 쳤고 위골(違骨)되었다(창 32:24-25). 이때 야곱은 울며 매달렸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한 것은 믿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껏 자기가 살아오던 인간적인 방식을 고집한 것이었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
그러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면서 온 몸과 허리의 힘을 잃어 버렸고, 그러자 야곱은 울며 회개(悔改)하였다. 그것은 그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恩惠)의 역사였다.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호 12:4-5)
하나님께서 형(兄) 에서와 화해하게 하시려고, 먼저 야곱을 만나주셨다. 먼저 야곱의 교만을 꺾으시고 깊이 회개하게 하셨다. 그리고 에서의 마음을 변화시키셨다.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먼저 하나님과의 화목(和睦)한 관계를 회복하라. 하나님께 회개하고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은혜(恩惠)를 구하라.
B. 형제 관계를 생각함
1. 겸비한 마음을 가짐
비록 야곱은 이제껏 자기 술수(術數)대로 살아왔으나 수많은 인생의 위기들을 겪으면서 조금씩 거룩한 성도(聖徒)로 변화되어 왔다. 이 사건을 통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야곱이 형 에서와 화해하기 전에 먼저 깊이 겸비(謙卑)해지게 하셨다.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자기의 무력(無力)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매달리게 하셨다. 먼저 영적으로 쇄신시키셨다.
사람을 보고 사랑하지 말라. 사랑할 수 있으면 자기의(自己義)에 빠지고 사랑하지 못 하면 상대방을 원망(怨望)하게 된다.
먼저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罪人)인지를 깨달으라. 하나님 앞에서 받은 사랑을 생각하라.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깨달으라. 그리하면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알게 될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 사랑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2. 십자가를 생각하라
힘으로는 천사도 이길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육신의 꾀와 힘이 아니라 회개(悔改)의 눈물이었다(호 12:4).
천사가 야곱을 긍휼히 여겨 그의 이름을 물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회개하며 당신을 의지(依支)하는 마음을 보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특별히 복 주시려는 뜻에서 물으신 것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7-28)
여기서 “이스라엘”(israel)이라고 한 단어는 “하나님과 겨뤄 이겼다”는 뜻인데 이것은 육체의 완력(腕力)으로써가 아니라 믿음과 회개로써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게 된 것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신자(信者)임에도 형제와 반목하며 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직도 형제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자기(自己)가 깨어지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깊이 만났다. 그랬더니 자기를 미워하던 형과 기적적으로 화해(和解)를 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창 33:3)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깨어지고 변화되자 하나님은 복수심에 불타던 에서의 마음을 녹이셨다. 하나님께서 에서를 변화시키셨다.
긴 세월 쌓였던 미움이 변하여 긍휼이 되게 하셨다.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창 27:41) 다짐하던 마음이 변하여 야곱을 끌어안고 입 맞추며 함께 울게 하셨다. 운명(運命) 같은 미움은 없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 앞에서 깨어지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게 하신다. 다시 화목(和睦)을 회복하여 살게 하신다. 십자가 사랑으로 돌아가라.
III. 적용과 결론
연로한 부모(父母)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 있다. 그것은 자기 앞에서 자녀들이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맺힌 것을 풀어야 영혼(靈魂)이 산다. 이제껏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자. 형제와 다시 화목(和睦)하라.
우리 가족 하나님 앞에1 (2020.06.28._주일오전)
1. 네 자녀를 위해 울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체포와 심문 및 처형에 관해 보도하고 있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言渡) 받으신 예수님은 십자가(十字架)를 지고 형장을 향하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던 제자들은 모두 당신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많은 사람이 서로 다른 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행렬을 뒤쫓고 있었습니다. 본문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가는지라”고 했습니다. 35절과 48절을 염두에 두고 이 백성(百姓)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면 그들은 십자가의 행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구경하기 위해 따라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女子)의 큰 무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에 슬퍼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밤새도록 땀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올리셨고, 끌려다니며 심문을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몸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와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언과 같은 당부를 남기시는데 그것은 바로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체포되신 후 심문을 받으셨고, 또 십자가 지시기까지 시종일관 침묵하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윽고 입을 열어 자기를 따르는 여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II. 네 자녀를 위해 울라
A. 눈물이 있는 신앙
여기에서 오늘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눈물이 있는 신앙(信仰)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구경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갔는데 이 여인(女人)들은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무엇 때문에 남들은 구경하며 따라가는 그 길을 이 여자들은 너무 마음이 아파서 가슴을 치지 않으면 통증을 느낄 정도의 고통을 겪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 여자들에게 예수님은 죄인들의 구원자이시며 자신들의 보호자였습니다. 누가복음 7장 47절에는 죄지은 한 여자가 나타나는데 죄 용서(容恕)받은 것이 컸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했고,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향료를 부었습니다. 백성들은 서서 구경했으나 여인들은 가슴을 치며 슬피 울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는 이 여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참된 신앙과 눈물을 배우게 됩니다. 참된 눈물은 사랑의 감격(感激)과 슬픔의 고통(苦痛)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예수 사랑인 동시에 예수 슬픔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액체(液體)의 생애였습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우리를 섬기기 위해 땀을 흘리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눈물의 생애였습니다. 불쌍한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통곡하신 눈물의 생애였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그럴 이유가 없었지만, 우리 같은 죄인들을 하나님 앞에 용서 받게 하기 위해 피를 모두 쏟으신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위해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예수님이 사셨던 액체의 생애를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섬기는 땀과 사람들을 위해 흘리는 눈물, 하나님 영광을 위해 마지막에 자신을 바치는 피의 생애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恩惠)를 받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사랑은 눈물을 부르게 됩니다. 그분이 당하신 고통(苦痛) 때문에 이 놀라운 사랑을 아직도 모르는 영혼들에 대한 가엾은 마음 때문에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여자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와 이후에 부활이 이어질 것이라는 신학적(神學的)인 사실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처럼 구경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는 없었으니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눈물을 잃어버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생활은 언제나 사랑과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는 그렇게 큰데 자신은 하나님 앞에 갚은 것이 너무 적기 때문에 그 슬픔이 눈물을 부르고,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듯이 가족들과 많은 사람을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직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흐르는 눈물입니다. 예전에는 탐욕과 욕심이 가득하여 감사한 줄을 몰랐으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이렇게 놀라운 사랑으로 돌보아 주시고 아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여인들처럼 예수를 사랑하십시오. 그래서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을 회복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자녀를 위한 눈물
마지막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자녀를 위한 눈물입니다. 예수님은 둘째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유언(遺言)과 같은 당부를 하셨습니다. 침묵 속에서 형장(刑場)을 향하시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슬피 울며 따른 여인들의 눈물에 대답(對答)하시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당신을 위해서 울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하나는 당신의 죽음이 결코 비참한 패배(敗北)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믿음이 모자라는 이 여인들이 보기에는 예수가 힘이 없어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로마 병정에게 끌려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죽음은 이미 영원 전에 계획된 것이고, 어차피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지셔야 할 대속(代贖)의 죽임을 당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1서 4장 9절은 이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는 것은 단지 오신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니 그분의 죽음은 실패의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고 하신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녀들의 사랑이 가지고 있는 육신적(肉身的)인 면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를 위해 통곡하는 그녀들의 사랑을 나무랄 수는 없었으나 그 사랑은 다분히 육신의 정(情)에 매인 사랑이었습니다. 여인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더 잘 알아 인간 예수와의 정을 넘어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녀들이 진심으로 울어주어야 할 대상(對象)이 따로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 일어날 예루살렘의 멸망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때 이후로 약 40년 흐른 때에 기원후 70년쯤 되었을 때 로마의 디도 장군은 끊임없이 저항하는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임무를 가지고 도착합니다. 마침내 전쟁에 패하고, 예루살렘은 미증유의 파멸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역사적인 예루살렘의 멸망이 예수님에게는 오늘 일어나는 일처럼 펼쳐졌던 것입니다. 이는 한 세대에 일어날 일들로서 바로 그 고통을 당하게 된 장본인들이 바로 그 여자들과 그 여자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 멸망이 얼마나 비참할 것인지 예수님은 29절의 말씀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바라보실 때는 이미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져 버렸습니다. 예루살렘은 원래 그 이름이 평화의 도성(city of peace)이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shalom)를 누리고 그 평화 때문에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예루살렘 그 이름을 기억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미 예루살렘은 타락했고, 그 하나님과의 평화는 깨졌고 심판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눈물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하고, 또 그들의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녀들이 자기 세대에 예루살렘의 멸망(滅亡)을 겪게 될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곧 죽으실 예수 자신보다 자기의 자녀(子女)를 위해 울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신자인 부모의 가장 큰 의무는 자녀들을 진실한 회심에 이르게 하고, 회심에 이른 자녀들은 그 은혜를 간직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자녀들을 위해 울지 않을까요? 그들에 관해서 생각은 하고 때로는 걱정을 많이 하지만 눈물 흘리지는 않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녀(子女)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곤고한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자식보다 자기를 더 많이 사랑하기에 자녀를 위해 흘릴 눈물이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Jesus)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의 자녀 사랑은 자식에게 직접 향하는 사랑이지만 신앙 안에서 자식을 향한 사랑은 예수님께 갔다가 자식에게로 향하는 사랑입니다. 주님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없는 사람이 주님 안에서 주신 자기 자식을 위해 어떻게 울 수 있겠습니까?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눈물이 많지만,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눈물이 없고 그래서 자식을 위해 울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자신(自身)을 위해 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불쌍한 영혼을 위해 울 수 있는 사람만이 자녀의 영혼을 위해 울 수 있으니 이는 그 슬픔이 모두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고통을 겪으면서도 기도하지 않는데 어떻게 자식의 신앙(信仰)을 위해 기도하겠으며 자기가 죄(罪)를 지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데 어떻게 자녀의 영혼(靈魂)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눈물을 흘릴 수 있겠습니까? 부모는 자식을 위해 두 번 해산(解産)의 고통을 겪습니다. 한번은 육신의 출생을 위한 해산의 고통이고, 또 한 번은 영혼(靈魂)의 출산을 위한 해산의 고통입니다. 자녀는 영혼의 출생으로 영적 생명을 얻고 하나님을 향하여 사랑으로 살게 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자식(子息)이 자신의 영혼을 위해 울 수 없을 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잘 모르고 끝없이 불순종하여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갈 때 부모가 대신 울어주지 않으면 누가 그 자식을 위해 눈물 흘리겠습니까? 이것이 부모의 사랑(love) 아닐까요? 바로 부모는 그렇게 자식을 위해 눈물을 흘리도록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Solomon)을 당신의 마음에 합당하게 여기신 이유는 그가 왕국의 번영과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대신 지혜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일천 번제로 주님 앞에 매달리는 그에게 응답하신 후 첫 번째 사건이 아이 하나를 두고 싸우는 두 엄마를 재판한 사건이었습니다. 창기였던 두 여인은 사흘 차이로 각각 아이를 낳고 같이 자다가 한 엄마가 잠결에 아이를 깔아 죽였습니다. 죽은 아이는 다른 여자의 품으로 보내고 다른 여자의 품에 잠들어 있는 아이를 자신에게 가져와 자기의 아이라고 우겼습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받은 솔로몬은 신하에게 칼을 가져오도록 명했고, 살아있는 아이를 반씩 나누어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엄마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이 판결을 들었을 때 진짜 이 아이 어미의 마음은 슬픔과 고통으로 불붙었습니다. 그래서 열왕기상 3장 2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청하건대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다른 여자는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눈물로 간청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참 부모의 마음인 것입니다.
쫓겨난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Hagal)은 광야에서 물이 없어 목말라 죽게 되었을 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불쌍한 자기 자식을 위해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창세기 21장 15절과 6절에서 말합니다. “가죽 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 덤불 아래에 두고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라고 했습니다. 목회자에게 삯꾼 목자와 선(善)한 목자가 따로 있는 것처럼 자식을 낳았다고 모두 부모이겠지만 그 이유 하나로 모두 참된 부모는 아닙니다. 그냥 동물들이 새끼를 낳듯이 그렇게 낳은 부모가 있고, 마음으로까지 그 아이를 낳은 부모가 있으니 삯꾼 부모와 참된 부모의 차이입니다. 삯꾼은 자기 양이 아니므로 그들을 돌보기는 하나 목숨까지 버리지는 않는데 삯꾼 부모도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부모는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듯이 자녀를 위해 목숨을 주기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요 10:11).
야곱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요셉과 베냐민이었습니다. 모두 사랑하는 자기의 여인에게서 낳은 아들들이었습니다. 양식이 없어 애굽까지 내려간 그 자녀들은 맹세까지 했는데 결국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서 그 주인의 잔이 나옴으로 애굽에 인질이 될 처지에 놓인 베냐민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베냐민이 인질로 잡혔을 때 유다는 통탄해하며 제발 그 아이만은 풀어달라고 간청하는 가운데 아들 베냐민과 아버지 야곱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창세기 44장 30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라고 말입니다. 즉, 야곱은 베냐민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이 아이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은 곧 아버지의 생명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아직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혹은 세상 즐거움에 들떠서 자기의 사랑에 고집스러워 하나님을 멀리 떠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부모가 무엇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나이가 어리니 아이를 회초리를 들어서 때리겠습니까? 나이가 아직 어리니 용돈을 주며 아이를 달래겠습니까? 사실상 부모가 그런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자신이 신앙이 없어서 하나님보다 세상이 더 좋고 그리스도 보다 죄를 더 사랑해 멀리멀리 떠나간 그 자식을 위해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 그것은 그 아이의 인생을 붙들고 계신 우리 주님께 한없이 눈물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유산을 물려준 자식은 망해도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녀가 세속(世俗)에 빠져서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 그에게 불행(不幸)이 겹쳤을 때, 심지어 그들이 시련의 시련을 당하고 어렵게 이룬 가정(家庭)이 위기에 처했을 때 부모는 그 자식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유언처럼 남긴 예수 그리스도의 이 당부를 가슴에 새기는 일 말고 부모가 자식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자기의 자식을 위해 눈물 흘리지 않는 것은 그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그만큼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자식을 바라볼 때 그 아이의 행복보다 부모에게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호의호식하고 세상의 영광을 누려도 자식이 불행하게 되고, 시련 속에서 살고 어렵게 이룬 가정이 깨뜨려지고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행복일 수 있겠으며 천구에 왔다고 하더라도 내려다보면서 자식이 그렇게 불행한 인생을 사는 것을 본다면 거기가 어떻게 천국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슬피 우는 이 여인에게 너희 자녀를 위해 울어달라고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사랑은 눈물입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아가는 자신(自身)을 위해 울게 하고, 그렇게 눈물 흘리는 것만큼 사랑하는 자식(子息)을 위해 통곡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진 자원이 부족하고 그 자식의 불행을 대신해줄 능력이 없기 때문에 때로는 무력감을 느끼지만, 우리의 눈물을 기억하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자녀를 돌보신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어제 여러분들의 자녀를 위해 우셨습니까? 신앙 없는 여러분들의 자녀를 위해 눈물을 흘리셨습니까? 하나님을 멀리멀리 떠난 여러분들의 자녀를 위해 흐느끼셨습니까? 여러분들의 자녀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를 너무나 많이 진심(眞心)으로 사랑하기에 눈물로 기도(祈禱)해준 부모가 있었더라면 우리의 인생(人生)은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요? 우리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준 부모(父母)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우리는 그런 부모를 둔 사람들을 얼마나 부러워하였습니까?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은 어떤 부모입니까? 자신을 위해 스스로 울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가 대신 울어주어야 할 만큼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울어주어야 하고, 부모인 여러분들이 그 눈물을 흘릴 수 없다면 여러분들은 누군가 남이 대신 울어주어야 할 가엾은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다다르게 되었을 때 주님이 여러분들을 기쁘게 맞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녀에 대해 물을 때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주님이 주신 나의 자녀는 지금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며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으며 잠시 후 당신 앞에 뵐 것입니다 라고 말할 수 없다면 오늘 여러분들의 자녀를 위해 눈물 흘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녀를 위해 눈물 흘리지 않는 부모는 나쁜 부모입니다. 선한 부모가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누리게 될 인생의 행복(幸福)과 그분을 멀리멀리 떠나 어둠 속에서 방황하게 될 불행(不幸)을 대조해 보십시오. 아마 여러분들의 자녀를 위해 눈물 흘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부모의 눈물이 모자라기에 자식이 부모 모르게 눈물 흘리는 줄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나 아직 기회가 있으니 여러분들이 살아있고 자녀들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 부모가 되십시오. 자녀를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탄식하는 영혼의 고통 소리를 들으며 그들 대신 울어주는 부모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가족 하나님 앞에2 (2020.07.05._주일오전)
2. 불변하는 계명을 따르라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3-6)
녹취자 : 장소연
I. 본문해설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었다는 이유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시비를 걸었던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장로들의 전통(paradosin)에 위배되는 행동이라는 것이 시비의 요지였습니다. 여기에서 장로들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저명한 랍비로들로부터 오랫동안 전수된 성경 해석과 이에 따른 실천적인 적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믿기를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을 때 쓰여진 계명인 성문율과 함께 하나님이 말로 전해주신 율법(律法)을 따로 받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마 15:2). 그래서 소위 구전율이라고 하는 것은 성문율(Written Law) 즉, 십계명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성문율이 물이라면 구전율(Oral Law)은 포도주와 같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이 구전법(口傳法)은 모세가 아론에게 전해주고, 다시 그가 두 아들에게 전승해주고, 그 두 아들이 열두지파의 대표자들에게 또 그들이 70인의 장로들에게, 그 장로들이 각 종족의 우두머리에게, 그 각 종족의 우두머리들이 회중 모두에게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구전을 문서로 마지막으로 정리한 것이 미슈나(Mishna)라고 하는 책인데 탈무드(Talmud)는 이 미슈나와 이에 대한 토론인 게마라(Gemara, A.D. 5세기경)를 합쳐서 가리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고 전체가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서 다루는데 63권의 6,2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이 구전(口傳)들은 5세기까지 덧붙여지고 덧붙여져서 이룩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전은 대부분 바리세파 사람들이 만든 것이며 주전 66년에서 주 70년 사이 경에 유대인들에게 통용되던 전통을 중심으로 확립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전통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따르는 그들의 이중성(二重性)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정곡을 찌르듯이 지적하신 것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불변의 계명이었습니다. 사람의 전통을 따르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그들에게 변할 수 있는 인간의 전통 대신 불변하는 계명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II. 불변하는 계명을 따르라
A. 전통과 계명
그러면 정통과 계명의 관계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장로들의 전통(傳統)을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명백한 계명(誡命)을 거스르는 것이 옳으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이때 증거로 제시한 것이 바로 부모(父母) 공경의 계명이었습니다. 즉,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는 것을 정죄하는 것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전통이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계명인데 사람이 세운 것도 그렇게 중요시한다면서 너희는 왜 하나님이 세우신 계명은 버리느냐는 뜻이었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것은 말씀에 대한 사람의 해석(解釋)에 불과한데 그 해석과 말씀 자체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5장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위선(僞善)을 드러나게 한 질문이었습니다. 부모 공경(恭敬)의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당시 그들의 태도가 신앙(信仰)이 아니라 이기심(利己心) 때문에 부모 공경의 의무를 저버린 것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선(善)한 전통이라면 그것을 배우면 배울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지키게 해주어야 했을 텐데 전통에 집착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게 되었으니 그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사람의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율법(律法)을 버렸습니다. 부모 공경이 그 대표적인 예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경건한척하며 사람의 전통을 내세웠으나 사실은 이기심 때문에 하나님의 큰 계명(誡命)을 어기고 있었습니다.
B. 말씀을 폐한 이유
그러면 그들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을까요? 기껏해야 사람들이 만든 전통일 뿐인데 그것 때문에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十誡命)을 폐하려고까지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들의 본심에 대해 본문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폐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파나바이레테’(parabainete)라는 말인데 신약에서 ‘범죄하다’ 사도행전 1장 25절에서는 ‘버리다’ 요한 2서 9절에서는 ‘지나쳐 버리다’라는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이 그토록 사람의 전통에 집착했던 의도(意圖)를 다시 한번 보여주심으로 그들을 부끄럽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4절과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자기 부모를 공경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너무 헌신했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부모 공경의 의무를 면탈(免脫)하고 싶었습니다. 이때 그 의무를 회피하는 요령이 사람의 전통에 의해 주어졌으니 하나님께 서약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모두 하나님께 드렸나이다라고 서약하기만 하면 이제 부모에게 공경할 의무가 없다 이런 뜻입니다. 이때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 바로 고르반(qorban)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카라브라고 하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나온 것인데 카라브라는 동사는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 제물을 차리다, 혹은 바치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고르바는 바쳐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마가복음 7장 11절이 상세하게 보도합니다.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그들은 부모 공경의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 부모에게 신앙을 가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님, 어머님 저도 부모님께 공경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드렸으니 그래도 나보고 당신들을 공경하라 하시면 저는 하나님 것을 훔쳐다가 여러분들을 공경해야 되는데 설마 그런 것까지 원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미 당신들께 드리면 유익하게 될 것을 내가 이미 하나님께 벌써 다 바쳤기 때문에 당신들을 섬길 것이 없나이다.”
오리겐, 제롬 그리고 페오 펠락토스(Origen, Jerome, Theophylact)라고 하는 7세기의 교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렇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는 서약을 함으로써 부모 공경의 의무(義務)를 면탈해주고, 그들로부터 종교 지도자들이 뇌물(賂物)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인륜이 땅에 떨어졌는지를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해야 할 의무를 이기심으로 저버린 불신앙은 이미 구약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29장 13절에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이들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았던 것은 실제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헌신(獻身)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거짓 서약을 함으로써 부모를 공경할 물질을 자기를 위해 사용하고자 하는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무엇으로도 부모에게 봉사하고 싶지 않은 이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의 죄가 가증스러웠던 것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 중 큰 계명을 사람의 가르침에 호소하면서 하나님께 헌신했다는 핑계로 짓밟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는 그 사람을 진실(眞實)하게 하는 것이며 그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빙자해서 사욕을 채우는 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매우 모독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그런 식으로 자기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진실해서 그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삼위일체 제8권에서 이런 인상 깊은 말을 합니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그의 논리는 이런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 자체를 사랑하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니 그 사랑은 곧 하나님이시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요, 사랑을 사랑하면서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 아니다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면 부모를 공경하게 된다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말씀에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진리(眞理)의 말씀이 지혜(知慧)의 빛이 되게 하시고, 사랑의 불꽃이 되게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의 욕심으로 폐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신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음으로 그 말씀에서 지혜를 얻고 사랑을 발견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불변하는 계명
그러면 마지막으로 불변하는 계명은 무엇일까요? 부모를 공경하라는 가르침은 불변하는 계명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너희의 전통(傳統)이 과연 지금도 있습니까?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전통이 없어도 자기가 하나님께만 바쳐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러면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7장 10절은 말합니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디모데전서 5장 8절은 이 부모 공경과 가족 사랑을 신앙의 본질과 연결시킵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은 그런 전통 같은 거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신자들 중에는 당시에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보다 더욱 뻔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전통이라도 핑계를 대었지만 이제는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부모 공경(恭敬)의 도리를 무시하고 자기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라는 기치 아래 자기를 위해서는 많은 소비를 하고,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는 많은 것을 아끼지 않아도 부모를 향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명백한 하나님의 계명인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죠.
대부분의 학자들은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돌판이 두 개인데 십계명 중 일계명부터 사계명까지 한 돌판에 기록되고 또 오계명부터 십계명까지 한 돌판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일계명부터 사계명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고, 오계명부터 십계명까지는 사람에 대한 계명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서 결국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종교와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 열 개의 계명이 모두 그냥 하나님의 단순한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너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을 만들거나 절하지 말라,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그냥 단순한 명령입니다. 사람에게 대한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그게 다입니다. 살인 안하면 내가 모두 주고, 모두 주고 이렇게 말씀 안 하십니다. 간음하지 말라, 안 하면 내가 이런 복을 주겠다 말씀 안하십니다. 그런데 그 열 계명 중 유일하게 하나님이 현상금을 거신 계명이 있습니다. 그 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는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 계명을 맨 처음에 받았던 그 1차 청중들이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과는 다른 느낌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질병과 전쟁, 기근, 그런 것에 시달리면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그 광야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땅에서 잘 되고 복을 받는다는 것은 지금처럼 잘 사는 사람이 더 큰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의학의 도움으로 120세까지 사는 그런 개념과는 다른 개념으로 그 계명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주시는 계명 중 첫 번째 자리에 올라간 것이 부모 공경의 계명이었습니다. 이것은 인륜에 있어서 부모 공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것이 인간의 본성으로 저절로 잘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대체 확률적으로 볼 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본성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확률적으로 볼 때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자기가 낳은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우리말로 말하자면 자기 새끼를 예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부모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구하라라는 연예인이 있었습니다. 갈등을 못 이기고 자살을 하게 됩니다. 30여 년 전에 자기 딸을 버리고 간 엄마가 생전 처음 나타나서 내가 구하라의 엄마이니 법에 따라 얘가 남겨놓은 유산에서 내 몫을 달라고 말한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확률적으로 부모가 자기 낳은 새끼를 사랑하는 것은 확률적으로 높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본성적으로 자식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 자식이 부모를 위로 사랑하게 되는 것은 저절로 본성이 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해야 될 확률이 더 높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모를 섭섭하게 하고 외롭게 합니다. 그런데 불과 20년도 지나지 않아서 자기도 똑같은 처지를 당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에 대한 저의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너희들의 공경을 받지 않아도 괜찮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공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너희는 이 세상에서 잘 되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를 위해서라도 너희는 나를 공경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적인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따른 도덕 관념이 사라질 때 가족관계는 파괴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부모 공경의 도리를 회복할 것인가 크게 세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부모가 훌륭하거나 혹은 그 부모가 물려줄 유산 때문에 부모에게 잘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식이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것입니다. 가족으로 살아온 그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를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도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좀 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인데 그것은 옆으로는 사람들과 온전한 관계를 맺어가면서 그렇게 되고, 아래로는 자연의 모든 만물을 선한 마음으로 대하면서 그렇게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음으르 위로는 하나님이 기쁘시고, 옆으로는 사람들이 기쁘고, 아래로는 자연의 모든 만물들이 내가 여기 살아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 참 인간이 되어가는 길입니다. 그 길을 철학과 종교와 학문이 많이 가르치고자 했지만 그 길이 참된 길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그렇게 사람이 되는 참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을 물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기가 얼마나 힘들고, 사람 앞에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고, 심지어는 자연 만물들을 잘 대해서 그들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요구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 그렇게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면서 그는 비로소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행복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 행복으로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특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큰 행복이고, 하나님의 뜻을 안 것이 행복인 이유는 그 하나님께 순종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분에게는 남이 모르는 가족사가 있을 것이고, 거기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많은 상처들과 사연들이 있을 것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존경할만하고 무릎을 꿇게 되는 부모를 둔 자녀들을 그 부모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고, 갑절이나 부모에게 효도(孝道)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명백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간음하고 살인하는 것보다 더 위에 있는 계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계명에 첫 번째 자리에 그것을 주셨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니 여러분들이 반드시 그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비결이니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가까이하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 부모가 저절로 사랑스럽고 저절로 공경스러운 분이 얼마나 되겠으며 그 공경하는 마음을 자기 자식에게 하듯이 행동으로 모두 표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격적인 관계가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981년도 2월 매우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다니던 직장을 하루 휴가를 내고 저는 동네에 있는 교회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마루가 깔려 있는 1층 교육관에 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는 내 나름대로 해야 할 기도의 제목이 따로 있었습니다. 얼마를 그 추운 예배당에서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불쑥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얘야, 이제 너는 너의 아버지를 용서하고 공경하거라” 그도 너처럼 일찍이 나를 만났으면 훨씬 다른 아버지가 되었을 텐데 그 아버지 대신 내가 너를 사랑했으니 너는 이제 너의 아버지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언어로 들린 것은 아니지만 기도 속에 아주 분명한 마음이 전해졌고, 저는 거기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가지고 온 기도 제목은 땅바닥에 내려놓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한없이 울었습니다. 이미 그때로부터도 오래전에 예수를 믿었고 구원을 받았지만, 아버지를 공경하는 마음을 회복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하나 변한 것이 있다면 아버지에 대한 표독스러운 미움은 거두고, 그냥 그분이 예수를 믿으셨으면 참 좋겠다는 그런 생각만 막연히 가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하나님 앞에 깊이 눈물로 회개할 때에 제 마음을 회칼로 저미는 것처럼 그렇게 갈라놓았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너희 아버지도 너처럼 젊어서 나를 믿었더라면 훨씬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었을 것이고, 네가 여전히 나를 믿지 않고 있었다면 너도 앞으로 나쁜 아버지가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한없이 눈물을 흘리고 그 마룻바닥에서 저는 부모 공경에 대하여 회심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내 마음속에 밉기만 했던 아버지가 얼마나 쓸쓸한 인생을 살아왔고, 누구 하나 보듬는 이 없이 외로운 인생을 살아왔는지가 가슴이 저미도록 다가왔고 이후로는 아버지께 효도만 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미워한 적이 없었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공경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러왔는데도 그 기억이 너무나 또렷한 이유는 결국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그 부모를 대하는 자식으로서의 지난날들이 떠올랐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서로 물 흐르듯이 부모는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통곡과 눈물로 울어주고 그 자식은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여 공경하고 살면 될 텐데 왜 우리는 부모가 되어서 자식에게 소외되기 전까지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는 늦게 깨닫는 아둔한 자들이 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겠으며 그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형제 사랑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는 부모를 공경해야 자신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그러면 거의 포기해 버린 이 부모 공경의 도리를 어떻게 할까요? 중요한 것은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있는 영혼이라는 개념 없이는 인격을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분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한 사람, 혹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나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내가 그를 직접 사랑하지는 못해도 내가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나보고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으니 하나님을 향한 내 사랑이 진실하다면 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어찌 마땅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아직 부모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면 회복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면 눈물로 회개해도 그 관계를 바꾸어 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모님이 살아있는 것은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잘못했어도 다시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부모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모 대신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셔서 어머니 같은 아버지로 우리를 아끼고 고여 주셨으니 그 사랑으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부모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부모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생애적으로 부모에 대한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고 부모 공경에 대해 회심을 했습니다마는 우리 아버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천진난만하셨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셨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한 번도 ‘아들아 네 어린 시절에 이렇게 무심하고 내가 너를 이렇게 막 대해서 미안하다.’ 단 한마디 못 듣고 아버님과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들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니까 ‘아, 사랑은 사과 없이도 용서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알고 싶은 것도 없었고, 아버님께 듣고 싶은 이야기도 없었고, 안 들었어도 그것이 하나도 섭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찬양)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의 구속의 사랑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용서하고 부모는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생각하면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의 심판받을 운명을 근심하시며 아버지께 저희를 용서해 달라고,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저렇게 한다고 빌었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부모를 공경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참된 회심과 그 증거인 사랑(love)은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家族)들을 사랑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부모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부모를 사랑하는데 부모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면 올바르게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信仰)의 열매는 사랑이니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보이는 가족(家族)들과 그리고 부모를 향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영적인 가족을 사랑하고 육적인 가족을 사랑합니다. 부모 공경은 불변하는 계명이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부모를 공경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3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렇게 하면 그들은 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부모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진심으로 부모를 공경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가족 하나님 앞에3 (2020.07.12._주일오전)
3. 경건한 아내와 남편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4-2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혔을 때 쓴 편지입니다. 이때 그의 사상은 원숙해질 대로 원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을 함께 권고하고자 이 편지를 썼습니다. 이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웅장한 우주적인 계획(經綸)과 그 계획을 이루어드리기 위한 종자(種子)씨로서의 교회(敎會)에 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달라도 너무나 다른 두 부류의 사람, 유대인과 이방인이 분열(分裂)하지 않도록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몸이 되었다는 것을 집중적으로 가르쳤습니다. 1장부터 4장 16절까지 이러한 하나님의 웅장한 구원의 계획을 교회론과 함께 가르친 후에 그 이후 2부로서 5장과 6장에서 그러면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바로 그 2부의 가르침 속에 본문이 나옵니다. 남편과 아내가 이런 우주적인 경륜 안에서 구원받은 신자로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에베소 교회의 경건한 성도들을 위해 쓴 것이었습니다.
II. 경건한 아내와 남편
이 편지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에베소 교회의 경건한 성도들을 위해 쓴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결혼에 있어서 성도인 아내와 남편의 도리가 무엇이라고 가르쳐지고 있을까요?
A. 아내의 도리
1.남편에게 복종함
제일 먼저 성경은 아내의 도리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도리는 복종(服從)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두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head)라는 사실과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5장 24절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많은 남편들은 우월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을 접하면서 남편(男便)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숙고(熟考)하여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됨에 비(比)교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제한적인 유비(類比)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된 것은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된 것과 같지만 그것은 부분에 있어서 그런 것이고, 모두 무제한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유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그러합니다. 첫째로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은 원천적인 관계입니다. 즉, 머리이신 그분이 없었더라면 교회가 생겨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에 대해서 그러하지는 않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인격(人格)이시지만 남편은 그저 연약하고 허물이 많은 인간의 인격일 뿐이라는 점에서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기능적인 질서입니다. 셋째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머리 되신 것은 최종적인 질서이지만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된 것은 보다 상위에 있는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권위는 결코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보다 우월하여 갖는 권위가 아니고, 오히려 그렇게 가정이 남편과 아내가 일정한 질서 안에 있으므로 더 높은 우주적인 질서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이런 비밀에 대해서 에베소서 1장 10절에서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즉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고, 구원하기로 예정하시고, 또 그렇게 구원받은 우리들을 교회로 만드시고, 모든 만물을 회복하시는 것이 최종적으로 하나의 완전한 질서를 이루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경륜이 시간 속에 펼쳐진 것이 바로 구원으로 나타났고, 교회로 나타났고, 가정으로 나타났고, 남편과 아내 사이의 질서로 나타났다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구원받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이 원래 인류를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살게 하기 위하여 이 질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구원(救援)의 첫 열매인 사회가 교회이니 신자의 가정(家庭)은 교회의 일부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세우신 목적은 교회를 세우신 목적과 충돌을 일으키거나 모순되지 않아야 하고, 가정과 교회를 세우신 그 목적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목적과 일치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20절과 2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들에게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복종하다’ 그리스어로 ‘휘포타세타이’(hypotassetai)라는 단어는 ‘휘포’ 아래에, ‘타세’ 두다 뜻입니다. 무엇 무엇 아래에 두다, 무엇 무엇 뒤에 두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보다 더 높은 목적을 위한 질서를 가리키는 것이지 사람의 우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니 당연히 이 단어는 여기에서 노예적(奴隸的)인 복종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결코 피차 복종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 사랑의 질서는 하나님이 창조시에 첫 인류에게 주신 두 명령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두 가지 명령을 인류 대표자의 자격으로 받게 하십니다. 첫째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입니다(창 1:28). 이것을 흔히 우리가 문화(文化) 명령, 혹은 인간이 일함으로써 이렇게 된다는 뜻에서 노동 명령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신 계명은 선악을 알게 하는 이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을 종교 명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창 2:17). 종교(宗敎) 명령이 하나님 앞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올바른 관계를 갖게 하는 것이라면 문화 명령은 자신 앞에 있는 이 인류 그리고 자연의 세계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할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은 가정에 질서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되 아내의 도리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뜻을 위함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形狀)을 본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남편과 아내는 가정 속에 하나님이 주신 질서를 지키게 되고 그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교회의 질서와 가정의 질서가 보다 높은 상위의 목적을 위해 이바지하는데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은 바로 그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한 훈련의 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1절과 2절에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말합니다. 결국, 이 질서는 사랑(love)이라는 내용물을 지키기 위한 껍질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복종은 의미도 없거니와 그렇게 할 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이 명령은 결코 남성의 우월성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남편에게 아내를 억압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를 주신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이 아내에게 복종하라는 이 명령은 그리스도의 경륜을 이루는 데 있어서 그것이 꼭 필요한 한에 있어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服從)의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남편도 아내에 대해서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첫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러한 성경을 읽었을 때는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거나 혹은 남편이 아내에게 복종을 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오해했고, 또 초창기에 만난 많은 목회자가 저에게 그런 그릇된 사상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경륜을 이루는데 이바지하는 경건한 남편을 상정하고 그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할 경우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 이는 아내에 대해서 남편도 같은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첫 번째 인류(人類)를 창조하실 때에 한 사람은 당신이 흙으로 빚어 직접 사람을 만드셔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사람이 태어나고 두 번째 사람인 여자는 남자의 그 신체의 일부를 떼어내어 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행동 요점은 남자와 여자의 우월성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신학자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남자는 원재료가 흙이었고, 여자는 사람의 몸의 일부였으니 원재료로 따지자면 여성이 훨씬 더 좋은 재료로 만들었다고 말입니다. 핵심은 그런 우열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흙으로 빚어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이 두 번째 사람은 귀찮아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렇게 따지면 그 사람을 재워 고통을 받지 않고 그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로 만드시는 것이 더 번거롭지 않았을까요? 한 사람을 빚으실 수 있는 하나님은 두 사람도 빚으실 수 있으실 거고, 천명도 빚으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오직 한 사람만 그렇게 만드시고 두 번째 사람부터는 그 사람의 몸에서 만들어지게 했고, 세 번째 사람부터는 그 두 사람의 살과 피와 뼈를 물려받아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결국은 두 사람이 한 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자손이 사실은 한 몸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타락했지만, 인간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자기의 자식을 살처럼 뼈처럼 여기는 그 사랑의 본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인류가 생육하고 보존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한 몸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아내의 마음이 천국일 수 없고,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의 마음이 결코 천국일 수가 없게끔 하신 것입니다. 인류를 창조하심은 바로 모든 인간이 이렇게 한 사람으로부터 창조되어 서로를 자신의 일부로 여겨 자기를 사랑하듯이 서로를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처음 혼인이 이루어졌을 때 고백이 선행하였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이니 아마 이 표현을 능가하는 사랑의 고백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고백을 아담 한 사람에게 주시거나 하와와 아담, 두 사람에게만 누리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후로 태어나는 모든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그 두 부부에 의해 태어난 가인도 아빠를 향하여 당신은 나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했을 것이고, 나머지 두 사람도 그러했을, 것이니 온 인류가 땅을 뒤덮일 만큼 번성하였다 할지라도 모두를 그렇게 사랑하고 긍휼히 여겼을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그런 우주적인 인류 사회를 당신에게로 향하는 한 사랑 안에 묶여진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이것은 깨지게 되었고, 아내와 남편이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미워하는 사이가 되었고, 인간의 본성 속에 깃들여 있는 자식의 사랑이 빛을 발하게 되었고, 더 이상 자식들은 부모를 향하여 그분은 나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인류의 수많은 고통과 비참히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행복한 사람은 대부분 물질이 많아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행복하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이고,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사람들도 대부분 사람과의 관계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지옥과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랑의 결합이 깨어지므로 인류는 미워하고 미움을 받으며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쟁하고, 말로는 평화를 원하지만 실제로는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제거하는 노력까지 서슴지 않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하나님이 다시 하나님 사랑 안에서 서로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처럼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시고자 했는데 그 사회가 완성된 모습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사회를 다시 만드실 종자씨로 소수의 사람들을 선택해 하나님의 사랑에 묶으시고 그 사랑으로 서로를 자기의 몸처럼 사랑하는 사회를 시범적으로 만들기 위해 모판처럼 가꾸시고 있는 곳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안에서 아내와 남편은 서로 인격적(人格的)으로 연합하고 사랑 안에서 질서(秩序)를 따라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부족(不足)함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기게 만들어 줍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졌을 때는 남편의 부족한 점이 자신에게 고통이 되고, 내가 왜 이 사람을 만나 결혼했을까 하는 후회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남편을 사랑했을 때 남편의 부족한 점을 보면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일평생 저렇게 부족한 부분을 가지고 살았을 저 사람을 나를 만나 보충 받게 하기 위해서 나를 이 사람의 아내로 세우셨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도 똑같습니다. 이렇게 서로의 결점을 자신이 그 사람의 아내와 남편으로 부름을 받은 소명으로 여기며 그 사람을 완성해 가는 것이 곧 자기를 완성해 가는 보람을 안겨주도록 가정을 설계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과정을 통해서 서로 완성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가정이라는 제도를 세우신 것입니다.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어차피 인류가 존재하지 않는 추상명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여자와 남자를 아내와 남편으로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로 자신이 직면해야 하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해서 그렇게 자기 안에 있는 사랑의 한계를 느끼기 전까지는 자기가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인지를 모릅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 남편으로 사랑하기 어려움을 느끼게 될 때 비로소 그 여성은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가 신앙이 있다면 그런 가엾은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힘으로 사랑할 수 없는 남편을 사랑하고, 복종할 수 없는 남편에게 복종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동안에 자기가 아닌 거짓된 자기들이 깎이어 나가게 되고 그러면서 자신도 또한 한 사람으로 완성되어 가며 하나님 안에서 행복(幸福)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에게 복종하는 일은 결코 상대방에게 좋은 일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살아야 할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남편과 아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가정을 통해 자녀들이 태어나고 그 자녀들이 보이는 부모의 모습을 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그 도리(道理)를 배워 그 자손 대대로 복을 누리게 하심이 바로 이 혼인 제도를 주신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아내인 여러분들은 오늘 남편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주 안에서 그에게 복종할 수 있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주님께 빌어야 할 것입니다.
B. 남편의 도리
두 번째는 남편의 도리입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도리는 사랑(love)입니다. 아내도 남편을 사랑해야 하고, 사랑이 없는 복종은 의미가 없으며 당연히 남편도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유독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데에는 보다 깊은 뜻이 있습니다. 남편(男便)은 보이는 아내를 사랑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명(證明)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사랑할 수 있고, 아내를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남편에게 특별히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을까요? 더욱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심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교회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도 교회를 사랑하시지만, 교회의 사랑과 비교할 때 그리스도의 사랑은 선도적(先導的)입니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를 받아야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으나 그리스도는 그냥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사랑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기를 아내에게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당신 자신이 선도적으로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함에 있어서 선도적인 사랑의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베드로전서 3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가르칩니다. 즉, 만약에 남편인 너희들이 그 아내를 연약한 그릇으로 여기고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대할 때 하나님은 너희 남편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육체적으로 남편보다 연약할 뿐만 아니라 또 금세와 내세에 생명의 은혜를 함께 받을 자임을 기억하고 아내를 자신의 몸처럼 선도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둘이 함께 다투는 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남편이 먼저 관계를 풀고 혹시 섭섭한 것이 있어도 남편이 먼저 그 오해를 해소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일에 선도적인 모본을 보이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예를 드신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것을 모본으로 삼기까지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까요? 나 하나를 사랑하며 사는 일도 힘겨운데 어떻게 때로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고 때로는 복종도 하지 않고, 때로는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아내를 이렇게 무제한으로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이 놀라운 일을 은혜를 가지고 하시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아내와 남편이 서로 사랑하고 피차 복종하여 거룩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룸으로써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신자의 가정에 담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26절과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성경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하는데 이 단어가 그리스어로는 ‘아가파테’(agapate)입니다. ‘사랑하다’라는 ‘아가파오’(agapao)의 현재 명령형인데 이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아가페 사랑의 모본은 하나님을 통해 나타났으니 자기의 이익에 연연해하지 않으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할 인류가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남편은 아내가 그 사랑 안에서 평화와 기쁨과 안식을 누리며 살게끔 해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모본을 그리스도(Christ)께서 보여주셨으니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랑하며 삶으로 지복(至福)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을 구원(救援)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며 함께 거룩한 교회(敎會)가 되어가도록 돌보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교회를 온전(穩全)하게 하시는 사랑입니다. 단지 한번 사랑하셔서 교회를 세우실 뿐 아니라 자기 때문에 교회가 흠도 티도 없는 온전한 교회가 되도록 돌보시며 사랑하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엡 5:26-27). 자기에게 행하는 모든 일은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몸을 학대(虐待)하면 결국 질병의 고통으로 돌아오고, 자기 몸을 선대(善待)하면 건강과 평안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아내에게 행한 바도 그러하니 둘이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불가능한 명령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혹은 아내를 너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여기라는 가르침 같은 것 말입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 일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매일 매일 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항상 우리 자신에게 좋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몸에 해로운 습관인데 그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음주와 흡연, 혹은 운동 부족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를 사랑합니다. 분명히 우리가 우리의 육체에 나쁜 일을 했는데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행한 우리를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육체에만 나쁘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는 더 나쁜 일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영혼을 훼방하며 가로막았습니다. 그래서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겪으며 하는 수 없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돌이킨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우리의 영혼에게 더 나쁜 일을 많이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과 불화하지 않습니다. 무한히 용서하고, 무한히 봐주고, 무한히 그의 편에 서서 그와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이 놀라운 일들은 오늘도 우리에게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배신하여 나를 대적하는 자들이 된다 할지라도 나는 항상 내편에 서 있기를 충성되게 계속해 왔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며 이러한 자기의 사랑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욕심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랑을 이웃에 대해서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이렇게 무한히 용서하고, 무한히 용납하고, 무한히 사랑하고, 무한히 긍휼히 여길 수가 없습니다. 아내도 예외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가 완전무결함으로써 남편의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완전무결해도 남편의 마음이 아내에게서 돌아서 그릇된 즐거움을 취하게 되면 까닭 없이 아내를 버리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듯 그렇게 끔찍이 하는 사랑이 남에 대해서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힘으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야 할 필요성이 동일하지만 그러나 아내를 향해 이런 선도적인 사랑으로써 실천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은혜를 남편들은 하나님께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내와의 관계만큼 특별한 관계(關係)는 없습니다. 아내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사랑함으로써 자신을 완성(完成)해 가며 인생이라는 직조물을 짜아가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죄(罪)스럽고 거짓된 자신(自身)과 싸우며 참된 자기를 완성해 가도록 주님이 부르셨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리스도 예수를 뵈면서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참된 형상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아내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 남편이기 전 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얼마나 다른지를 깨닫습니다. 이 형상을 회복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고 자기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그분께로부터 받은 이 구속의 크신 은혜에 비해 자기가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 아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며 남편을 사랑하고 복종하고, 남편은 교회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며 아내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선도적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니 결국 그리스도를 중매자로 삼지 않고는 아내와 남편은 서로를 자신의 뼈와 살처럼 여기며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이기심(利己心)을 가진 인간은 이렇게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이기고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기를 간구하는 자에게 진리(眞理)로 사랑의 길을 가르치시고 성령(聖靈)으로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내가 받은 상처를 생각하고 내가 겪은 고통을 생각함으로써는 누구도 자신의 아내와 남편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그 하나님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남편을 사랑하는 부부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완성되는 것은 그가 이룬 업적이나 그가 도달한 지위, 그가 모은 재물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립적인 주체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얼마나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았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박수와 갈채를 보내는 수많은 군중들은 내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하고, 그릇되게 경배하거나 혹은 잘못된 방식으로 깎아내립니다. 그러나 나의 숨소리까지 들었던 내 가족과 내 아내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나의 결점까지 곁에서 보아왔던 남편은 나의 사람됨이 어디에까지 도달했는지 가장 잘 아는 목격자입니다. 비록 많은 것을 소유하지 못했고, 높은 지위에 도달하지 못하고, 눈부신 업적을 이루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는 남편이 참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인정해주는 아내, 그리고 또 그런 남편이 되었을 때 그는 사람 앞에서는 사소한 사람일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는 큰 사람이라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풀잎에 이슬 같으니 젊었던 우리는 만나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어 부부로 살았고, 그리고 세월이 흘러가면 우리는 늙고 늙으면 죽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한 인간이 소멸하는 과정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꽃피고 향기 날리는 풍경은 사람들에게 그 나무의 절정처럼 보이나 그것은 열매를 맺기 위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남기고 나무는 깊은 동면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동면하듯이 이 세상을 떠나 부활의 영광의 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때 한번 허락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 중에 그 남자를 만나 그의 아내가 되었고, 모래알처럼 많은 여자 중 그 사람을 만나 그의 남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끝없는 사랑과 한없는 진리의 빛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한 번 되새겨 보십시오. 그렇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신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한 가지를 명령하십니다. 너를 네 남편을 사랑하고 복종하라. 너는 네 아내를 사랑하되 사랑받음으로써만 사랑하지 말고 선도적으로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기 육체를 주심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렇게 하고 싶다고 주님 앞에 매달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니 이것이 바로 하늘의 생명입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이 말씀을 받는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남편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 됨으로써 여러분들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이 세계가 아름다운 세계가 되어 주님 앞에 영광을 돌려드리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네 형제와 화해하라
“야곱이 눈을 들어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창 33:1-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야곱은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자기의 인간적인 꾀대로 잘살아 보려고 했지만, 끊임없이 고난을 당했고, 그 고난을 통해서 천천히 거룩한 성도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가 받아야 할 축복을 훔쳤습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부모와 이별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도망가야 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자신이 아버지와 형을 속였듯이 자기를 속이는 외삼촌을 만났고, 20년 동안 젊음을 바쳐 그 집에 종처럼 일해야 했다고 창세기 31장 38절에서 증언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 없었더라면 그는 빈털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간섭하셨습니다. 야곱에게 복(福)을 주셔서 큰 재물(財物)을 얻어 그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식솔(食率)들과 가축들을 이끌고 도망하는 야곱을 외삼촌과 그 형제들은 원한을 품고 추격하였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간섭이 없었더라면 그들의 칼에 야곱의 집안은 멸절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타나셨고 막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외삼촌 라반의 마음을 녹이셔서 극적인 화해를 이루게 하셨습니다(창 31:43-44). 그렇지만 야곱은 여전히 가장 큰 일생의 숙제를 앞에 두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자기가 속였기 때문에 원한을 품고 기다리고 있는 형 에서(Essau)를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기의 형제와 화해하는 아름다운 장면을 보게 됩니다.
II. 네 형제와 화해하라
A. 얍복강에서 입맞춤
하나님은 야곱에게 신실(信實)하셨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잔꾀로 살아가려고 애썼지만 하나님은 변함없는 신실하심으로 야곱을 돌보셨습니다. 이 큰 위기 앞에서 하나님은 그를 크게 만나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형제가 원한에 사무쳤던 사람이 아니라 반가운 사람으로서 기적적인 화해(和解)를 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얍복강에서 그들은 입 맞추었다고 오늘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을 장자의 축복을 동생에게 빼앗긴 에서는 긴 세월 동안 원한을 품고 복수(復讐)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27장 4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하였습니다. 이 마음을 품고 긴 세월을 기다렸을 형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태중에서부터 야곱을 선택하셨고, 그에게 복을 주시기로 이미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야곱에게 복을 주셨을 텐데 어리석게도 신앙으로 살기보다는 자신의 방법대로 잘 살고 싶어 하는 어머니 리브가와 그리고 이 얕은 뼈로 살아온 야곱의 합작으로 이러한 인생의 고비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위기는 이제껏 넘어왔던 다른 인생의 고비와는 매우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이 원한을 품고 자기를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형을 만나는 일은 자기의 힘으로 해결(解決)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먼저 에서에게 사자(使者)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한 상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32장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라고 하였습니다. 20여 년 만에 만나는 동생이 단지 반갑기만 하였다면 형은 무엇 때문에 400여 명의 장(將卒)졸을 거느리고 오고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분명히 야곱의 집안과의 전쟁을 염두에 둔 것임이 틀림없었습니다. 야곱은 형에게 맞설 양심도 없었지만, 형처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형과 전쟁을 할 정도의 능력도 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분부 곧 창세기 32장 9절 이하에 나오는 전에 내 고향 내 족속에게 돌아가라고 하신 말씀대로 하는 것이니 형 에서의 위협에서 자기를 건져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습니다(창 32:9-11). 자기의 얕은꾀로 살아오던 야곱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경건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평생 자기 지혜로 살아오던 그는 인생의 최대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자신 사랑하던 부모님의 곁을 떠나 어디인지도 모르는 메소포타미아 지방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는 길에 그가 벧엘에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였습니다. 28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의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도 그의 마음은 가난해질 대로 가난해져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보복으로부터 구원(救援)해주시기를 간구하면서 벧엘에서 자기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約束)에 호소하며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그래서 32장 12절에서 말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라며 매달렸던 것입니다.
거기서 야곱은 모든 식솔과 가축들을 두 떼로 나누어 강을 건너가게 하였습니다(창 32:7,22). 그리고 형 에서에게 보낼 예물(禮物)로서 짐승들의 떼를 먼저 강 건너편으로 보냈으니 이것은 어떻게 하든지 형의 마음을 풀어보려고 하는 일종의 뇌물이었던 것입니다. 이후에 사랑하는 아내와 열한 아들까지 얍복강 나루를 건너게 하였고 야곱은 홀로 남았다고 22절과 23절이 말합니다. 자, 가족들까지 모두 떠나보내고 얍복 강가에 홀로 남았고 말할 수 없는 두려운 밤에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홀로 남겨진 그 밤에 두려움이 엄습하고 어쩌면 이 얍복 강물이 피로 물들어 자신과 사랑하는 아내와 그리고 어여쁜 자녀들이 모두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극한의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무엇을 더할 수 있었겠습니까? 마침 천사가 나타났고, 그 천사야말로 자기를 구원해줄 유일한 구원자라고 생각하며 천사를 붙들고 매달렸습니다. 씨름하였습니다. 천사가 야곱을 이기지 못하자 천사는 그의 허벅지 관절을 쳤고 뼈가 어긋나게 되었습니다(창 32:24-25). 이때 야곱은 울면서 매달렸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야곱이 천사와 씨름한 것은 결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제껏 자기가 살아오던 인간적인 방식대로 그렇게 천사를 붙들고 매달리는 일종의 고집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32장 26절에서 그 안타까운 심정, 자신의 육신에 호소하는 간절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러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게 되었고, 그러면서 온 힘과 허리의 힘을 일시에 잃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천사를 붙들 힘도, 천사와 씨름할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드디어 울며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야곱을 기억하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침묵하고 있지만 호세아서 12장 4절과 5절에서는 이 야곱이 천사를 붙들고 매달리고 마지막에 회개하였던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결국 이 천사에 의해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천사를 붙들고 매달린 씨름의 결과가 아니라 얻어맞고 모든 힘을 잃어버리자 자신도 어찌할 수 없어서 울며 회개(悔改)하며 그에게 간구하였을 때 하나님이 은총을 입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껏 자기가 살아왔던 인간적인 방식에 대한 자기 깨어짐이었고 사람의 꾀와 능력으로 믿음을 앞세워보고자 했던 모든 육신적인 방법에 대해 깨뜨려지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 에서와 화해하게 하실 수 있었으나 하나님은 먼저 야곱을 인생의 벼랑 끝에까지 몰아붙이시고 거기서 깊은 두려움과 고통을 겪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게 만들었고, 그러면서 그는 자기만을 의지하며 살아왔던 교만한 방식의 삶을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뉘우치게 하셨고, 그래서 이 야곱은 자기를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거기서 저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간절한 절규와 부르짖음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없겠습니까? 그분에게 어려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능력이 모자라서 하실 수 없는 일이 하나님에게는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20년 동안을 부모와 결별하고 외삼촌의 집에서 온갖 사기와 설움을 당하고, 그리고 거기서 종처럼 뼈 빠지게 일했으나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돌아보지 않으셨다면 그는 젊음을 모두 낭비한 채 빈털터리로 돌아와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야곱과 한 약속을 지키셨고, 그는 신실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약속하신 모든 복을 주셔 많은 재물을 얻게 하셨습니다. 홀로 떠났으나 이제는 아내들과 열한 아들을 거느린 가장이 되게 하셨고, 많은 식솔들과 짐승들을 거느린 부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형 에서의 마음 하나 움직여 야곱을 용서하게 해 주는 일 따위를 하실 수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먼저 야곱을 깨뜨리셨습니다. 이제껏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방식대로 살아왔던 교만을 회개하게 만들고, 자기가 믿었던 육체의 힘도 영원한 것이 아님을 깨닫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의지할 수 없는 상황까지 데려가셨고, 거기서 자신이 쓸 수 있는 모든 인간적인 꾀의 패를 포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눈물로 매달리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깨어진 그의 마음을 받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형은 안 보고도 살 수 있었을 야곱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족을 잃어버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그 가족들을 자기가 덜 사랑하는 순서대로 앞에 세우고 가장 사랑하는 라헬과 요셉은 제일 뒤에 세워놓고 형에게 종처럼 신하처럼 일곱 번을 엎드려 땅바닥에서 절하면서 형에게 은총을 간구했겠습니까? 그렇게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재물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야곱이 그렇게 깨뜨려져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기를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거기서 형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에서의 마음을 변화시키되 야곱의 마음이 변화되기를 기다리시며 하나님은 그 일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화목(和睦)한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하나님은 짐승의 재물보다 상한 심령을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 회개하고 형제를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은혜(恩惠)를 구한다면 하나님이 왜 주시지 아니하겠습니까?
B. 형제 관계를 생각함
겸비한 마음을 가짐
여기에서 우리는 형제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제일 먼저 겸비한 마음을 가질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제껏 야곱은 자기의 술수(術數)대로 살아왔습니다. 수많은 인생의 위기를 겪으면서 자신의 술수대로 되지 않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거기서 하나님을 찾았고 조금씩, 조금씩 간교한 성품이 변하여 거룩한 성품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형 에서와 화해하기 전에 먼저 깊이 겸비(謙卑)해지게 하셨습니다.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자기의 무력(無力)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이제껏 자신이 몸부림치며 붙잡아보려고 했던 모든 것들 중 아무것도 자신을 보호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당신 앞에 매달리는 야곱을 먼저 영적으로 쇄신시키셨습니다. 사람을 보고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사랑할 수 있으면 그를 사랑한 자신을 뽐내게 되고, 만약에 사랑하지 못하게 되면 상처를 주었던 상대방을 원망(怨望)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너무 크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누구나 문제가 있게 마련이고, 모든 사람에게 생각만 하면 가슴이 막히는 그러한 기가 막힌 사연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 앞에서 문제가 너무 크다고 생각한 나머지 주저앉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자신이 할 수 없을 그때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약한 자신을 의지하던 마음을 버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극복해가기 위해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문제 앞에서 야곱이 놀라운 지혜를 발휘하여 피해가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큰 문제에 직면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를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그에게 베푸셨고 얼마나 신실하셨는지를 깨닫게 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껏 자기를 믿어왔던 삶을 버리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며 매달리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4주째 가족에 관한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가족들과의 모든 관계를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볼 것입니다. 불행해지고 가정이 깨지고 경제적인 위기를 만나고 신앙적으로 미끄러지는 자식을 보면서 지 자식이 그따위로 사니 불행해지지 라고 말한다면 그는 부모도 아닙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자녀가 겪는 고통과 그 깨어짐의 아픔을 보면서 믿음이 있는 부모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약속의 자녀인 내 자식이 왜 저렇게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왜 저렇게 가정이 깨어지고 고통 속에서 시련으로 가득 찬 인생을 보냅니까? 하나님 내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잘못하였습니까? 하나님 나에게 복을 주셔서 나를 행복하게 하지 마시고 내 자녀에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매달리며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면 내 자식이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나님을 찾지 않겠습니까? 남편을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돌아보는 것 없이 그 남편을 용납할 능력이 생길까요? 아내를 끝까지 사랑할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생각하고, 내가 이 가정 속에서 겪는 모든 어려운 일들을 통하여 결국 하나님이 나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없이 우리가 어디에서 답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잔재주에 능했던 야곱도 이 지점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속이는 삼촌도 자신은 자기의 꾀로 이겼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거기서 우리보고 망하라고 그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너는 이제껏 그렇게 살았으니 거기에서 죽어버려라하고 하나님이 밟으시는 것일까요?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정말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이 빗나갈 때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자식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돌아오면 용서를 빌지 않아도 용납해 줍니다. 그 자식이 그 어미와 아비의 마음에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머니 같은 아버지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당신 앞에서 해결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2. 십자가를 생각하라
야곱은 힘으로 말하자면 천사를 이길 수 있었으나 하나님이 천사로 하여금 그에게 복을 주게 하신 것은 그 완력이 아니었습니다. 육신의 힘이 아니라 회개의 눈물이 하나님을 이기게 하였던 것입니다(호 12:4). 천사가 야곱을 긍휼히 여겨 그의 이름을 물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회개하며 당신을 의지하는 야곱의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당신에게 매달리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 야곱에게 복을 주시려는 뜻에서 물으신 것입니다. 27절과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israel)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그 말은 하나의 문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이겼다 그런 뜻입니다. 이러한 불경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인간이 이길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아무리 야곱이 노동으로 잔뼈가 굵었다 할지라도 그 힘으로 꺾여서 패배하고 말 하나님이라면 과연 우리가 믿을 가치가 있는 분이겠습니까? 그러니 이것은 보다 더 영적인 의미로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간절히 자녀들이 자신에게 뭘 해달라고 매달립니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고 하다가 자녀가 하도 불쌍하고 간절하게 매달리고 혹은 애교를 부리면서 ‘아빠 한 번만 해주세요’ 라고 매달리면 흔히 말합니다. ‘에이, 그러면 내가 졌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감동하셨다는 것을 이러한 은유적인 방법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육체의 완력으로 하나님이 꺾였다는 뜻이 아니라 평생을 잔꾀로 살아왔던 야곱이지만 뼈가 어긋나고 모든 힘을 잃어버리자 호세아 12장에서 해석한 것처럼 눈물로 회개하며 매달리자 하나님의 마음이 감동을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렇게 인생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 회개함으로 그분과의 관계를 고치고, 진실한 눈물로 그분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인생의 이 시련의 위기에서 건져주실 정도로 하나님이 스스로 감동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일찍이 간음의 죄를 범하고 무엇으로도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었던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에게 제사장이 없었겠습니까? 많은 제물이 없었겠습니까? 해봤습니다. 그러나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때 가슴을 찢으며 그는 복음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은 바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야곱 한 사람이 자신의 이제껏 살아왔던 모든 인간적인 술수를 내려놓았습니다. 생명처럼 사랑하는 아내들과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인간적인 방법으로 매달려 보려고 했지만, 허리뼈가 어긋나게 되자 그가 마지막 의지했던 자기의 힘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복받쳤던 설움이 터져 나오며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눈물의 회개가 터져 나왔습니다. 야곱의 마음은 깨뜨려졌고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가장 향기로운 제물이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갈까, 천천의 짐승이나 만만의 수양으로도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이 제물로 받으시나니 이것은 자기가 깨뜨려지지 아니하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상처가 많은 가정에서 자랐어도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아버지를 위해 영혼으로 품고 눈물로 기도한다면 사랑할 수 없는 아버지가 없을 것입니다. 형제들 간에 아무리 골이 깊었어도 하나님 앞에 이렇게 눈물로 회개하고 그분을 만나고 나면 다시 화해할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단어는 이렇게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주는 의미를 제대로 가슴에 새겼을 때에는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하던 때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조상이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자기를 깨뜨리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을 이겼고, 그 이름을 자기 민족들이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 말 자체가 자신들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크리스찬이라는 이름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수리아 안디옥에서부터 크리스티아노이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멸시하는 이름이었고, 예수께 속한 자, 예수의 소유물, 예수를 추종하는 자, 예수께 예속된 자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노예들을 그 주인 이름을 붙여서 이렇게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나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구원의 은혜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협박과 억압에 못 이겨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 사랑에 감화를 받아서, 그 사랑에 사무쳐서, 예수 죽인 것을 스스로 자기 몸에 짊어진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가 예수의 것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의 이름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신자임에도 형제와 반목하면서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아직도 형제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한 사람에 대한 미움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마음 중심에 진정으로 바쳐져야 할 제물은 여전히 살아있는 채로 우리는 겉모습으로 주님을 경배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가족들과의 관계가 모두 찢어져 있고, 형제들끼리 반목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커다란 죄입니까?
한 15년 전 바로 이 설교를 했을 때였습니다. 예배를 끝나고 이 건물 2층 제 방에 잠시 가서 소파에 쉬고 있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더니 나를 붙들고 서서 펑펑 우시면서 하소연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너무 괴로워서 죽고 싶습니다. 아들들이 그렇게 서로를 미워하며 물고 뜯고 살아가기를 원수처럼 하는데 걔네들이 보내오는 명절 선물이 하나도 반갑지 않습니다. 제가 얼마나 죄가 많으면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아야 할까요.’ 하면서 펑펑 우셨습니다. 나는 거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내 형도 사랑하고, 내 동생도 사랑하고, 우리 언니도 사랑하고, 누이도 사랑하는 하나님인데 그들이 그렇게 찢어지고 미움과 원망으로 복수의 칼을 품은 채 살아갈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실까 하고 말입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그 밤에 절대적인 외로움을 겪었고 자기가 깨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이제껏 자기를 미워하던 형과 기적적인 화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본문 4절은 말합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 맞추어 그와 입 맞추고 서로 우니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다고 봅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만약에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기로 되어 있는 유언장 상의 상속자인데 동생이 그 서류를 조작해서 아버지의 재산을 남김없이 빼앗아 가고 여러분들은 사글셋방을 전전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이 에서의 마음이 그런 정도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복수의 칼을 갈았겠죠. 그런데 멀리서 오는 동생을 보았습니다. 자기를 속이고 그렇게 부자가 되었다고 하더니 저거는 또 무슨 광경입니까? 걷지를 못해서 다리를 질질 끌고 늙은이처럼 절뚝거리며 겨우겨우 걸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신하가 임금에게 하듯이 땅바닥에 일곱 번을 엎드려서 그렇게 절을 하며 형에게 용서를 빈 것입니다. 그때 단순했던 이 에서의 마음은 한 번에 녹아내렸습니다. ‘야, 이거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렇게 복수의 칼날을 갈았더니 잘 돼서 올 줄 알았더니 꽃가마를 타고, 금수레를 타고 올 줄 알았더니 다 늙은이가 되어서 다리를 절뚝거리고 저러고 오는구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한순간에 솟아났습니다. 그리고는 에서가 먼저 달려왔습니다. 그를 맞이하여 목을 어긋 맞추며 뜨겁게 끌어안았고 입을 맞추면서 서로 큰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방식의 화해를 가져오셨고, 에서의 마음을 녹이셨습니다. “야곱을 죽이리라”(창 27:41) 다짐하던 에서의 마음은 변하여 뜨겁게 끌어안고 사랑의 입맞춤을 나눴습니다. 운명(運命) 같은 미움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운명과 같은 불신앙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 앞에 깨어지는 사람을 사용하셔서 형제와 화해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다시 하나님을 이렇게 만나고 형제와 화목(和睦)하여 삶으로 복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연로한 부모(父母)님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 있으니 그것은 자기 앞에서 자녀들이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맺힌 것을 풀어야 영혼(靈魂)이 삽니다. 이제껏 받은 하나님의 사랑만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형제와 다시 화목(和睦)해서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복을 받고 사는 그런 은혜를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