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의 목적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천지를 창조하셨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뜻을 찾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를 앎으로써만 인간의 영혼과 마음의 자질이나 경향성, 그리고 행동들에 대하여 선악을 판단하는 도덕적 기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 밖에 있는 다른 무엇 때문에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스스로 완전하시고 충족(充足, self-sufficient)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비록 당신의 존재에 부족을 느끼지 않으시지만 당신이 존재하시는 효과는 나타내십니다. 그분의 의지와 지성은 당신 밖에 있는,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에 끊임없이 넘치도록 전달됩니다.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 그 모든 창조계획의 원인이시며 원천이십니다. 존 오웬(John Owen)의 지적과 같이 하나님은 ‘당신 밖에 존재하여 당신을 움직이는 어떠한 원인도 없이’ 당신 자신의 지혜(知慧)와 의지(意志)를 그 모든 계획의 원천으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세상 만물의 제일원인(第一原因, causa prima)이십니다. 그분은 아무 것도 없는 ‘무(無)로부터’(ex nihilo) 인간을 비롯한 천지만물을 지으셨습니다.
I. 창조와 하나님의 충족성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 자체가 하나님이 창조된 세계 없이 지내던 시간과 비교해서 무엇인가 부족을 느끼신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그래서 창조는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충족하신 존재가 아님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반론에 의하여 그것이 억견(臆見)임이 드러납니다.
A. 창조 행위에 대한 반론
첫째로, 창조행위와 관련해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진술하면, 이는 하나님이 천지 없이 홀로 존재하시는 것에 대해 하나님 자신이 부족함을 느끼신 것이니 하나님과 함께 만물이 영원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고 진술해야만 하나님께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성적인 판단이 아닙니다.
세계의 창조는 하나님이 스스로 무엇이 부족하시므로 실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창조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존재이기 때문에 생겨난 효과입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다.”는 교리적인 진술은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 이외에 아무 것도 산출하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사랑하시고, 당신 자신 안에 있게 하시려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조나단 에드워즈는 전통적인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불변성(不變性, immutability)이 단순한 의미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불변성이 문자 그대로 ‘절대적인 불변성’이라면, 하나님 안에는 어떤 새로운 행동이나 노력이 없을 텐데, 세상에는 언제나 새로운 결과들이 생기기 때문에, 모순이 발생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불변하신다고 할지라도, 세계에는 하나님 자신 때문에 일어나는 새로운 효과는 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의 존재 효과를 시공간의 세계 안에 드러내심으로써 세계 안에 존재하십니다.
그분이 세계를 존재케 하신 것이 그분의 불완전성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의 원천적 본성은 ‘현실태’(actuality)일 뿐 아니라, 또한 ‘영원한 경향성’(eternal disposition)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경향성에 있어서 불변하십니다. 지상세계와 천상세계의 창조는 하나님 자신의 존재적 완전성으로부터 비롯되는 역동성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영원히 완전하시지만, 시간 안에 있는 세상을 통하여 당신 자신의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확장시키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으로서 존재하시는 효과입니다.
B. 창조 시간에 대한 반론
둘째로, 창조시간과 관련해서 입니다. ‘시간’(時間)은 사물이 존재함으로써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고 ‘만물이 없이 존재하던 시간’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만물은 언제나 존재하였고, 만물 없이 존재한 시간은 없습니다. 이것은 그 모든 만물이 창조된 시점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과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만물이 창조되지 않고 하나님 홀로 계셨던 ‘시간’(時間, time)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거기는 영원(永遠)입니다. 그리고 그 영원은 시간을 초월한 세계이니 거기에는 ‘있음’과 ‘없음’으로 이어지는 시간적이고 계기적인 발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께서 시간 자체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시간을 만드시기 전에는 시간이 흘러갈 수 없었습니다. 만일 천지 이전에 어떤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 때 당신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셨느냐는 질문을 어떻게 던질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을 적에 ‘그 때’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시간을 시간으로 앞서지 않으십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당신은 모든 시간을 앞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항상 현존하는 영원의 높음으로 모든 과거를 앞서시고, 모든 미래를 넘어서십니다.”
시간은 세계창조와 함께 존재합니다. 천상세계도 초시간적 세계는 아니지만, 시간의 의미는 한시성을 가진 사물들의 세계인 가시적 지상세계에서 더 잘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시간은 무형의 질료를 하나님의 지성 안에 있던 형상을 따라 존재로 전환하심으로써 도입됩니다. 시간은 ‘무’(無)의 상태로부터 존재가 나오기에 존재하고 또한 존재가 ‘무’(無)로 돌아가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시간으로써 영원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치 평면으로 이루어지는 2차원이 공간을 구성하는 3차원을 수용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무한차원의 존재이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은 시간으로 시간을 앞서는 분이 아니시며 시간적인 개념을 가지고 시간을 아시는 분도 아니시며 또 시간적 운동을 가지고 시간적 사물을 움직이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II. 창조와 하나님의 경향성
하나님은 천상나라와 지상나라를 창조하셨습니다. 천상나라는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고 천사들로 수종하게 하셨으나, 지상나라는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대리하여 통치하게 하셨습니다(창 1:28). 이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의 지위가 얼마나 존귀한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천사들의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영광스런 지위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천상과 지상의 두 나라를 창조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을 세계 안에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은 ‘있음’(esse)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로서의 ‘있음’은 당신만의 경향성으로서의 ‘있음’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充足)하심에도 그 충만하심을 창조세계를 통하여 증대하시는 성향을 가지십니다. 내재적(內在的)으로는 삼위일체 안에서 서로 교통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행사하시고, 외출적(外出的)으로는 하나님 스스로 당신의 영광이 밖으로 넘쳐흐르도록 행사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 교통하시려는 경향성을 가지고 계시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교통의 본질을 ‘사랑’(愛, amor)으로 보았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것을 ‘생명’(生命, life)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기 부족에서 오는 새로운 행동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성향 자체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불변성’(immutabilitas Dei)은 하나님의 본질로서의 ‘있음’의 경향성의 불변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오히려 하나님 자신의 존재의 완전함과 충만함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존재의 완전성에서 비롯되는 창조적 역동성은 희미하게나마 인간 존재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인간이 만든 많은 도구들은 그것 없이 지내는 인간 존재의 완전성의 한계를 설명해 주지만, 재화의 생산 활동이나 의식주와는 상관이 없는 인간의 많은 예술행위들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모든 동물들로부터 구별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예술 창조행위는 인간 존재가 무엇을 결핍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밖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 안에 있는 상대적인 완전성, 곧 창조를 위한 역동성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술작품의 창조로써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완전성을 입증합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지성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시공간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피조물들과 함께 나누심으로써,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로 하여금 당신의 존재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시공간 안에서, 세계가 그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의미를 주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하지 않은 지상세계 안에서 이 세계의 영원한 존재의 창조목적을 관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된 모든 세계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과 교통하시려는 속성의 결과입니다. 삼위의 교통은 곧 하나님 자신의 교통이시며, 모든 피조세계 안에서 나타나는 만물의 ‘상호 교통’(communication)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교통의 모상(模像)입니다. 도덕적이고 지성적인 피조물로서, 영혼을 가진 인간 사이의 교통은 삼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질로서의 상호 교통의 모상이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존재의 완전성으로 말미암아 창조세계 안에서 당신 자신을 확장하시고, 시공간 안에 있는 피조물들과 교통하심으로써 궁극적으로 당신 자신과 교통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것이 세계창조의 고유하고 ‘궁극적 목적’(窮極的 目的)이라면, 이러한 창조목적 안에서의 피조물의 행복은 결과적이고 ‘의존적 목적’(依存的 目的)입니다.
III. 창조와 하나님의 아름다움
청교도 신학자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는 하나님의 창조를 ‘능동적인 창조’(active creation)와 ‘수동적인 창조’(passive creation)로 구분하였습니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사물들을 직접 창조하신 행위를, 후자는 이미 창조하신 생물들의 변이(變移)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지혜안에 있는 형상(形相)을 만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어떠한 사물도 스스로 자기를 형성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만물은 이미 정해진 형상을 통하여 만들어지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의 형상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셨습니다.
A. 존재의 원리: 아름다움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물의 존재원리는 ‘아름다움’(美, pulchrum)입니다. 그 아름다움은 존재(存在)와 선(善)의 일치입니다. 창조된 세계는 하나님 자신의 지혜와 사랑 안에서 고유한 아름다움을 갖게 되는데, 이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개별적 사물들이 하나님의 창조적인 선과 일치하는 데서 나오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은 거기에서 나오는 그 빛 이외에 다른 모든 것은 어둡게 만들어서 보이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가지는 영광의 효과입니다. 그러므로 세계가 하나님의 신성(神性)의 영광의 충만함으로 가득 찼다는 것은 곧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것을 의미합니다.
1.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와 조나단 에드워즈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존재와 선의 일치’가 아름다움이라고 할 때, 존재에 선이 일치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저는 사물이 두 가지 조건을 갖춤으로써 그 사물의 존재가 선에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아름다움의 두 요소로 지적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즉, ‘개별적인 사물의 완전성’과 ‘보편적인 질서 안에서의 완전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물은 그 사물로서의 자기에게 한정된 ‘있음’(esse)을 충만히 소유함으로써 개별적인 완전성을 지니게 되고, 다른 것들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보편적 질서 안에서의 완전성을 소유합니다. 이것을 통하여 사물은 고유한 아름다움을 갖습니다.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은 신미(神美), 곧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이 투영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원천적 아름다움이며, 모든 다른 사물들의 아름다움은 파생적 아름다움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만물이 참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존재를 의존하고 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존재하도록 덕 입히시는 한에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있음’의 덕(德)이며 아름다움은 바로 ‘있음’의 본질(本質)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독립미’(獨立美, independent beauty)이며,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의 아름다움은 ‘의존미’(依存美, dependent beauty)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아름다움이 의존적 아름다움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는 그 피조물의 아름다움이 원천적인 아름다움이신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된다는 점입니다. 둘째로는 어떤 사물의 아름다움은 질서 안에서 그것과 어울리는 다른 사물들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아름답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아름다움의 본질은 완전성(完全性)입니다. 그것은 자연적 아름다움에 있어서도, 그리고 도덕적 아름다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조세계 안에서 인간에 의해 지각되는 두 아름다움, 곧 자연미(自然美)와 도덕미(道德美)는 원래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은 개체로서 완전성을 소유하고 또한 하나님이 지정하신 자리에 있음으로 선함을 갖게 되는데, 이에 대한 미학적 평가가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 사물은 탁월함(excellency)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선하지 않은 것들 중 아름다운 것이 없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뛰어난 것일 수 없습니다. 아름다움을 이루는 두 완전성을 좀더 상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a. 개별적 사물의 완전성
첫째로, ‘개별적 사물’(個別的 事物)의 완전성입니다(약 1:11).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보편적으로 유지되어야 할 미학적 목적에 기여하기에 충분한, 개별적 사물들 안에 있는 존재의 완전성입니다. 꽃은 그것이 봉오리로 있을 때에도, 활짝 피었을 때에도, 또 거의 시들었을 때에도 꽃입니다. 하지만 그 꽃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언제입니까? 그 꽃이 활짝 피었을 때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가 그 꽃이 ‘꽃임’으로 가득 차 있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꽃이 ‘꽃임’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가 꽃으로서 개별적인 완전성을 소유한 때입니다. 이처럼 사물이 그 자신을 그 존재가 되게 하는 ‘있음’(esse)으로 가득한 상태를 가리켜 ‘전일성’(全一性, integritas)으로 충만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물이 완전성을 소유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인간에게 적용하면 더욱 잘 이해됩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구원받고 성화되어 가는 과정은 곧 죄로 말미암아 상실한 인간으로서의 참된 ‘있음’, 곧 전일성을 회복해 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사람이 되기 위해 참된 신자가 되어 갑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 위함입니다.
b.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
둘째로, ‘보편적 질서’(普遍的 秩序)의 완전성입니다(창1:31, 시133:1).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의 요소는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절제’입니다. 조화(調和)는 다른 사물들과의 어울림을 의미하며, 균형(均衡)은 다른 사물들과의 대칭을 뜻합니다. 또한 절제(節制)는 어떤 존재가 본래의 자기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성향입니다. 모든 존재는 홀로 다른 사물과 관계없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한 단절 속에서는 아름다움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개개의 사물들은 다른 사물들과의 연관 속에 존재하고 어울리는 것을 통해 아름다움을 갖습니다. 이러한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은 ‘위치(位置)의 완전성(完全性)’으로 나타납니다. 자연세계 안에는 물리학적 위치의 완전성과 미학적 위치의 완전성이 있습니다. 창조된 자연세계의 만물은 자기에게 지정된 위치에 있을 때, 그의 고유한 작용을 함으로써 다른 존재들의 작용과 어울려 자연세계 안에서 아름다움을 이룹니다. 또한 만물은 거기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자리에 위치하는데, 이것을 저는 ‘미학적 위치의 완전성’(perfection of aesthetical place)이라고 부릅니다. 물리학적으로 완전한 위치는 곧 미학적으로도 완전한 위치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주의 질서입니다.
창조세계는 그저 겉으로 보기만 해도 아름답지만 그 만물의 작용을 깊이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각할 수 있습니다. 온 우주는 미학적 디자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율, 색깔, 빛, 그리고 위치 등으로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인간의 디자인 능력은 이러한 보편적 질서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본뜨는 능력에서 온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은 물질세계에서뿐 아니라 정신세계에서도 나타납니다.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능력과 경향성,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정신세계의 작용을 생각해 보십시오. 영혼의 경향성들이 마음에 작용하고, 감각하는 만물에 의하여 발생하는 마음의 정동(情動, affection)을 보십시오. 그 많은 작용들은 너무나 심오하고 은밀하지만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 사람은 자신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심오하고 아름다운 질서, 곧 영혼과 마음 안에서의 다양한 작용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2. 창조의 미학적 질서
자연세계 안에서나 도덕세계 안에서나 모든 존재의 원리는 ‘아름다움’(美, pulchrum)입니다. 그 아름다움은 곧 ‘존재(存在)와 선(善)의 일치’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심으로써 존재하게 된 모든 것들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 안에서 함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질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연역될 수 없는 우연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세계는 반드시 거기 있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 없이 그냥 거기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우연성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들의 존재의 무근거성(無根據性)을 의미합니다. 자연세계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자연스럽게 세계의 도덕적 필연성에 대한 거부로 이어집니다.
자연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움은 이 세계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창조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가시계(可視界)의 이러한 자연적 질서의 아름다움은 가지계(可知界)의 도덕적 질서의 아름다움의 모상입니다. 이처럼 존재와 선의 일치는 아름다움의 본질을 이루고 이것이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따르는 질서입니다. 이 질서는 화이트헤드(A. N. Whitehead)가 언급했듯이 ‘미학적 질서’(美學的 秩序, aesthetic order)입니다. 그는 창조세계의 모든 질서는 미학적인 질서이며, 인간세계에서 구현되는 도덕적 질서 역시 이러한 미학적인 질서의 한 국면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창조세계 안에 있는 이러한 미학적인 질서는 만물 안에 계신 하나님의 ‘내재성’(內在性, immanence)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칸트(Immanuel Kant) 같은 사람은 자연적 질서가 도덕적 질서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의견에 대하여는 거부하였습니다.
B. 영원한 하나님의 아름다움
자연세계 안에서나 도덕세계 안에서의 모든 아름다움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神美, pulchrum Dei)입니다. 이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존재원리이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성삼위 안에서 각 위의 개별적 완전성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각 위는 개별적으로 완전한 인격을 가지신 완전한 존재이시기에, 한 위가 다른 두 위 때문에 비로소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으시며, 한정이 없으신 무한한 완전성을 가지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름다우십니다. 둘째로, 성삼위 안에서 삼위의 통일적 완전성입니다. 삼위는 개별적으로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각 위(位)는 삼위 안에서 질서를 가지고 존재하시며 일하십니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이 계심으로 삼위로서 아름다운 하나님이시며 나머지 두 위(位)도 각각 그러합니다.
이러한 삼위의 아름다움은 위격 간의 사랑의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삼위의 완전성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근거가 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아 사랑이 되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심을 보여 줍니다(요일 4:16).
C. 창조세계의 아름다움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은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모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성부에 의해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창조하심으로 당신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만물에 새기셨습니다.
1. 창조세계의 아름다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선하고 아름답고 탁월하였습니다. 모든 개별적 사물들은 그 각각의 존재에 있어서 아름다울 뿐 아니라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상호 교통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은 다음과 같이 설명됩니다. 첫째로,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은 개별적 사물의 완전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당신이 한정하신 대로 완전하게 창조하셨으며, 각각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부합하는 존재의 위치와 적합한 기능을 갖게 하셨습니다. 둘째로,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은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입니다. 이 보편적 질서의 아름다움은 ‘최종적 아름다움’(最終美, the final beauty)이며, 개별적 사물의 아름다움은 그 궁극적인 아름다움에 이바지함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으니, 저는 이것을 ‘기여적 아름다움’(寄與美, contributory beauty)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의 질서와 가치의 질서가 하나인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일치할 때, 미학적 질서를 형성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만물 가운데 계시다는 증거가 됩니다.
학문을 통해 발견되는 진리나, 예술을 통해 구현하는 아름다운 것들 중 단 하나도 하나님 안에 없었던 것은 없으며, 그분이 보여 주시지 않은 것들 가운데 인간이 보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름다운 모든 것은 신미(神美)의 반영이며, 하나님은 최고의 심미안을 가지신 궁극적 미학자로서 무엇이 아름다운지 결정하셨습니다. 미학적 아름다움은 도덕적 아름다움과 일치를 이룹니다. 창조목적을 지향하는 자연적 질서 안에서 만물은 자연적 아름다움을 가지며 도덕적 질서 안에서 도덕적 아름다움을 갖습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미학적 완성으로써 창조세계를 영광으로 충만하게 하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인간은 창조목적을 따라 모든 사물들을 사용하며 살아감으로써 그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2. 심미적 경험: 정동과 경향성
하나님은 세계를 아름답게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인간이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있도록 인간을 심미자(審美者)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상세계에 창조하신 피조물들 중 인간만이 유일하게 아름다움을 알게 하셨으니, 아름다움을 아는 것은 곧 영혼에 속한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러한 심미능력(審美能力)을 주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주이신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들을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의 의지행사나 경향성은 정동(情動, affection)에 있고, 이러한 정서의 변화는 인간의 감각(感覺, sensibility)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동의 반복적인 경험은 인간의 영혼과 마음 안에 그와 일치하는 경향성을 갖게 합니다.
인간이 육체의 감관(感官)으로 어떤 사물을 접하게 될 때, 그 사물을 존재하는 것으로서 인식하는 것은 지성에 관계하고, 선한 것으로서 인식하는 것은 의지에 관계합니다. 따라서 아름다움의 감정은 사물 자체에 대한 이해와 함께 의지적인 결정을 하도록 정서를 움직입니다. 정서의 움직임이 의지행사(volition)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볼 때, 정서는 이성처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기능이라기보다는 지성과 함께 작용하는 의지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성과 정서,’ ‘마음과 머리’는 구분되지만,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동(情動) 경험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인간의 정신 작용을 지(知)․정(情)․의(意)로 설명하던 전통적인 설명방식을 버리고 지성과 의지로 설명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지성과 의지로 설명하는 것에서의 일치를 도모하였습니다.
사물에 대한 인간의 판단작용은 두 가지 정신작용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물에 대한 ‘인식’과 ‘마음의 기울어짐’(mindedness)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좋아함과 싫어함 없이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원이 둥글다고 인식하거나 선이 삐뚤어졌다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물에 대한 단순한 인식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성에만 관련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나 그것의 움직임을 보고 마음이 좋아하는 쪽으로 기울 수도 있고, 싫어하는 쪽으로 배척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정동(情動, affection)에 의한 작용으로서 인간의 의지에 관련됩니다. 이러한 정동의 결과로서의 감정의 움직임은 곧 의지행사(volition)의 근거가 됩니다. 정동의 발생은 객관적으로 인식한 정보와 인식하는 인간 주체 안에 있는 마음의 경향성에 의하여 방향과 크기가 결정됩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 거룩한 것들에 대한 지성의 인식으로 신령한 정동경험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그의 영혼과 마음에 거룩한 경향성을 강화할 것이며, 속된 것들에 의한 정동경험이 반복된다면 세상을 사랑하는 경향성들이 심겨질 것입니다. 이 둘은 서로를 파괴하고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 안에서 이루어지는 죄의 경향성과 은혜의 경향성 간의 갈등입니다.
아름다움이 ‘존재(存在)와 선(善)이 일치’라는 에드워즈의 설명은 새로운 철학적 개념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그의 저작을 공정하게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성실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학생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신세계의 반대편에 있는 존재로서의 물질세계를 악한 것으로 보던 플라톤주의를 배격하고, 존재와 선을 아름다움의 본질로 보았습니다. 그는 ‘존재와 선’이라는 틀을 사용함으로써 미학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을 종합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유의 틀을 이용해 마니교의 ‘선악 이원론’(善惡 二元論)을 극복할 수 있었으니, 악을 ‘선(善)의 결핍’(privatio boni)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악의 가원에 대한 기독교의 난제를 풀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조나단 에드워즈의 미학적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와 18세기 영국 캠브리지에서 신플라톤주의자(neo-platonist)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던 도덕심미주의(道德審美主義)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아름다움을 감각하게 될 때, ‘미학적 정동’(美學的 情動, aesthetic affection)을 경험합니다. 인간이 이러한 아름다움을 감각하게 될 때, 내면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정동들은 인간의 의지행사와 경향성 형성에 영향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름다움을 창조세계에 새기신 것은 그 자연적 아름다움을 통하여 창조주이신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심미’(審美)를 통하여 도덕적 아름다움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적 사물의 개체적인 완전성과 보편적 질서 안에서의 완전성을 보면서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의 아름다움을 관상하게 됩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의 경험을 통하여, 인간은 ‘종교적 정동’(宗敎的 情動, religious affection)을 경험하고 그 모든 아름다움의 원저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창조의 목적을 따르는 영혼의 경향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러한 미감(美感)으로 인해 생겨나는 정동의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경향성의 정체는 ‘사랑’(amor)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유일한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미학적 정동의 경험은 인간으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존재를 사랑하게 만들어 줍니다. 사랑은 ‘어떤 대상을 최종적인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에 고착하여 누리려고 하는 영혼과 마음의 경향성’입니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면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고, 세상이면 세상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아름다움의 정동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사랑의 경향성이니, 이러한 정동의 경험이 반복될수록 더욱 강한 사랑의 경향성이 자리 잡게 됩니다.
인간의 참된 덕은 영혼의 올바른 힘, 혹은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덕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목적을 사랑하는 영혼의 경향성입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의 아름다움과 도덕세계의 아름다움을 감각함으로써 거룩한 정서의 변화를 경험할 때, 그런 덕(德)을 소유할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름다움을 지니지 못한 사물들을 인식의 착오로 인해 아름답다고 여겨 정동을 경험할 수 있는데, 이런 경우에도 그것을 감각하는 인간의 내면에는 사랑이 불러일으켜질 수 있습니다.
타락 후 인간은 죄의 경향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신자라 할지라도 그것이 잔존하고 있기에 그러한 인식론적인 착오와 타락한 경향성이 일치하여도 사랑의 정동을 가져옵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창조목적을 떠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창조목적을 따라 사는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순의 사랑, 곧 까리따스(caritas)로써 가능한데, 그렇게 정동된 사랑은 육욕적인 자기 사랑, 곧 꾸피디따스(cupiditas)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IV. 창조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창조주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성의 충만함을 피조물들을 통하여 드러내심으로 창조세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고 피조물들과 교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시간세계 안에서 더욱 점증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창조되었고, 특별히 인간은 이 일에 주도적으로 이바지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A. 영광이란 무엇인가?
창조세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관하여 논의하기 전에, 먼저 ‘영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간략히 말하자면, 영광(榮光, gloria)은 하나님 자신이 존재하시는 효과입니다. 이러한 교리적 사실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1. 영광의 의미
성경에서 영광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로, 어떤 물질적 소유나 신분, 혹은 기타 무형의 장점 자체를 가리킵니다(삼상 4:21, 왕상 3:13, 대하 18:1, 32:27, 시 49:16). 즉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특징이나 사물 자체를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구약성경엥서 히브리어로 ‘카보드’라고 불렀는데, 이는 원래 ‘무겁다’라는 의미를 가진 상태동사 ‘카베드’에서 나온 것입니다.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 사람들의 주의를 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이 단어는 그것들을 가진 인간이나 사물이 중요한 존재로 대우받는 효과를 가리킵니다(출 33:18, 대상 16:29, 에 8:16, 욥 19:9, 시 108:5, 계 21:13) 이것은 사람들이 중요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소유함으로써 그것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 소유자, 그의 다른 담지물(擔持物)까지 중요하게 생각하는 효과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후자의 영광은 전자의 영광에 의존하는 영광입니다. 이런 경우에도 성경은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2. 세 종류의 영광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본체적 영광과 발산적 영광, 그리고 효과적인 영광이 그것입니다. 첫째 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임재와 도덕적 통치로 말미암는 영광입니다.
첫째로, ‘본체적인 영광’(本體的 榮光, essential glory)입니다. 이는 하나님 존재자체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지성과 의지를 가지신 하나님의 존재가 지니는 영광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영광은 피조물들의 도덕상태에 의해 영향 받지 아니하니, 이는 마치 땅에서는 눈비가 오고 안개가 끼고 우박이 내려도 구름 위에는 언제나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것과 같습니다. 즉 창조하신 세상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불변하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둘째로, ‘발산적 영광’(發散的 榮光, radiatory glory)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장소적 임재가 주는 신성(神性)의 효과로서의 영광입니다(출 3:1-5, 19:16). 그것은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거기 있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광을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거기 계신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본체적 영광은 아닙니다. 본체적 영광은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영광입니다(출 33:20).
셋째로, ‘효과적 영광’(效果的 榮光, effective glory)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을 비롯한 지성적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받아들임으로써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러한 영광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정하게 한 결과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받아들이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효과적 영광’이라 칭할 수 있습니다.
B. 창조의 영광
하나님은 천지를 당신의 지혜(知慧)와 능력(能力)으로써 창조하셨습니다. 무한한 능력으로 창조된 만물은 그분의 탁월한 지혜 아래 상호교통(communication)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완전히 선하게 창조하셨으며, 창조된 모든 것들의 전체도 선하고 아름답게 질서 잡혀 있었습니다. 그 피조물들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스러움에 적합하도록 완벽한 조화와 균형과 절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모든 만물은 개별적으로 완전하게 창조되어 자기의 실체와 거기에 부합하는 고유한 작용(作用)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다른 모든 피조물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탁월함과 아름다움을 이룸으로써 창조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충분히 기여하고 있었습니다. 그 탁월함과 아름다움을 통해서, 그것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형언할 수 없이 놀라운 지혜와 능력, 곧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가 찬란하게 드러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인간을 비롯한 만물은 그렇게 자신의 고유한 자리에 배열되어 우주의 질서(秩序)를 구성하며, 그 질서에 맞게 작용하여 창조주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영광은 너무나 찬란하여, 인간은 모든 사물들을 통해 만물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 창조세계가 그러하였습니다.
창조된 세계는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움, 선함, 그리고 탁월함을 찬란하게 드러내고 있었으며, 인간은 그 안에서 점증하는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기쁨을 누렸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자신의 존재의 본성에 부합하는 복된 상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창조된 피조물들은 서로의 존재를 위해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해 의존적으로 작용하면서도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단일한 계획 아래 창조되었고, 하나의 목적을 향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만물의 존재와 작용들은 모두 이러한 목적을 향하여 기여하는 경향성(傾向性)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최종적 목적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세계창조의 원인론적 동기인 동시에 목적론적 동기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충만한 신성의 영광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확장하려는 경향성이 세상을 창조하는 동기가 되었고, 또한 그렇게 창조된 세상과 만물이 당신 자신과 교통하게 하심으로써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창조된 세계의 영광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본래의 광휘를 잃었지만,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알고 사랑해야 할 인간의 본분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눈에는 여전히 찬란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영광의 빛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높이고 사랑하게 하여, 나아가 추루한 자기사랑을 버리고 지순의 사랑으로써 그 창조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도덕적 질서를 따라 살게 합니다.
참고문헌
사전류
Johannes, G., Bottenrweck, Ringgren, Helmer, Fabry, and Heinz-Josef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Old Testament, vol.7,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5).
Jones, Lindsay. ed., Encyclopedia of Religion, vol. 1, (Michigan; Thomson Gale, 2005 second edition).
학술논문
성염. “창조개념의 철학적 난제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패러독스해법-신국론 제 12권을 중심으로”, 중세철학연 구소, 『중세철학』제4호, (서울; 분도출판사, 1998년 초판).
Wayne, Daniel Richard “‘Great is the mystery of godliness’: The Christology of John Owen,” (Philadelphia; Ph. D. Dissertation,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90).
단행본
김남준.『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서울; 부흥과개혁사, 2004).
김남준.『자기 깨어짐』(서울; 생명의말씀사, 2006), p.45.
김남준. 『죄와 은혜의 지배』,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5).
Ames, William. The Marrow of Sacred Divinity, Drawne Out of the Holy Scriptures, and the Interpreters thereof, and Brought into Method, (London; Edward Griffin for Iohn Rothwell at the Sun in Pauls-Church-yard, 1642).
Avgvstinvs, Avrelius. Confessiones, in Corpvs Christianorvm Series Latina, XXVII: Avrelii Avgvstini Opera, (Tvrnholti; Typographi Brepols Editores Pontificii, 1996)
Avgvsinvs, Avrelivs. De Libero Arbitrio, II.17.45, in Corpvs Christianorvm Series Latina: Avrelii Avgvstini Opera, (Tvrnholti; Typographi Brepols Editores Pontificii, 1970).
Christian, William A. “The Creation of the World,” in A Companion to the Study of St. Augustine, ed. by Roy W. Battenhous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55).
Delattre, Roland André. Beauty and Sensibility in the Thought of Jonathan Edwards: An Essay in Aesthetics and Theological Ethics, (Oregon; Wipf & Stock Publishers, 2006).
Edwards, Jonathan. Concerning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 in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 8, ed. by Paul Smith,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7).
Edwards, Jonathan. Freedom of the Will, in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8, ed. by Paul Ramsey,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57).
Edwards, Jonathan. Miscellaneous Observation on Important Theological Subjects, in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 2, revised and corrected by Edward Hickman,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5 reprint).
Edwards, Jonathan. “The Miscellanies”, in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 13, ed. by Thomas A. Schafer,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4).
Edwards, Jonathan. The Miscellanies Entry Nos. 1153-1360, in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 23, ed. by Douglas A. Sweeney,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4).
Henderson, Jeffery. ed., Plotinus; Enneades, V., 1.6., in The Loeb Classical Library, vol. 444, (Massachusetts; Havard University Press, 2001 reprint).
Hick, John. Evil and the God of Love, (Basingstoke; Palgrave Macmillan, 1985).
Kant, I. The Critique of Judgement, I. §17, trans. by J. C. Meredith, (New Hampshire; Digireads.com, 2006).
Knuuttila, Simmo. “Time and creation in Augustine,”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Augustine, ed. by Eleonore Stump and Norman Kretzman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Lee, Sang Hyun. “God's Relation to the World”, in The Princeton Companion to Jonathan Edwards, ed. by Sang Hyun Le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5).
Lee, Sang Hyun. The Philosophical Theology of Jonathan Edward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8).
Luibheid, Colm. trans., Pseudo-Dionysius: The Complete Works, (Mahwah; Paulist Press, 1987).
Murray, Paul D. and David Wilkinson, “The Signification of the Theology of Creation within Christian Tradition: Systematic Considerations”, in God, Humanity and the Cosmos: A Companion to the Science-Religion Debate, foreword by J. Wentzel and Huyssteen, (London; T & T Clark International, 2005 second edition).
Owen, John. Christologia, in The Works of John Owen, vol. 1, ed. by William H. Goold,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5).
Smith, John E. “Religious Affections and the ‘sense of the Heart,’” in The Princeton Companion to Jonathan Edwards, ed. by Sang Hyun Le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5).
Sorabji, Richard. Time, Creation, and the Continuum; Theories in antiquity and the Early Middle Ag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6).
Whitehead, A. N. Religion in the Making,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1996).
신학 이외 도서
네일 R. 카슨.『생리심리학의 기초』김현택외 옮김, (서울; 시그마프레스, 2006)/
변광배. 『존재와 무: 사르트르의 자유를 향한 실존적 탐색』 (경기; 도서출판 살림, 2005).
이정우.『개념-뿌리들』(서울; 철학 아카데미, 2006).
장 폴 사르트르. 『구토』 김희영 옮김, (서울; 학원사, 1983).
탈레곤 외 역,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대우고전총서 12, 김인곤 외 옮김, (서울; 아카넷, 2005).
Crombie, I. M. An Explanation of Plato's Doctrines,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