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모범이신 예수님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1)
녹취자 : 조원정
사복음서 전체에 기도의 사건을 다루는 이야기가 51회가 등장합니다. 그중에서 22회가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누가복음을 기도복음이라고 부를 정도로 기도에 관한 풍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주기도문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배경에 대해서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이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셨을 때 제자들이 나아와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해서 탄생하게 된 것이 주기도문입니다.
이 짧은 본문은 최소한 다음 네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예수께서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주체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죄가 있기 때문에 때때로 회개가 필요하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하나님께 도움을 얻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고 그분 자신이 본성상 신의 본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왜 기도하셨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지만 당신의 신성을 인성아래 감추고 내려오신 성육신의 신비를 봅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인간에게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고 싶었고 또 한편으로는 당신이 참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으니까 참 인간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모든 인류에게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본체를 가지셨으나 그와 동등하게 여김 받을 것으로 취하지 아니하셨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갖고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사셨습니다. 죄가 없으셨지만 죄인들이 겪는 굶주림과 추위, 고통, 외로움 모든 것을 겪으시면서 당신이 대속할 백성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몸소 체험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써 당신 스스로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웠다고 할 정도로 당신이 인간이 겪는 모든 것을 겪고 나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신 이유는 바로 이렇게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지를 모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당신이 기도의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예수와 하나님 사이에는 어떠한 막힘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었고 그분 자신이 하나님께 사랑 받는 아이들이셨습니다. 청교도들은 바로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받으신 음성,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것을 이중의 인침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인치심이시고 또 한 가지는 그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인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당신 자신이 몸소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기도는 남이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중보기도의 능력을 이야기합니다. 과소평가할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중보기도라고 하는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에게만 해당 될 수 있는 용어입니다. 왜냐하면 중보기도는 중보자만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도 중보자가 아니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성도들이 남을 위한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우리가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섬김 기도라고 부릅니다. 남을 위해 대신해주는 이 기도의 위대한 능력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야기하고 우리가 목회하면서 경험해온 20년 30년 혹은 3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경험들이 이렇게 섬김 기도를 한 속에서 응답되어 성도들이 삼 겹줄처럼 얽혀지면서 우리는 간증을 쌓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될 사실은 남이 나를 위해 해주는 섬김 기도가 내가 기도해야 할 것을 대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섬기는 기도의 위대한 능력은 최종적으로 그 기도를 받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놀라운 영적인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그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까지 당신 자신이 몸소 기도하셨습니다. 목회하면서 없으면 모두 남의 것 빌려 할 수 있습니다. 재능이 없으면 재능 있는 사람 빌려오고 돈 없으면 은행가서 차입해서 교회 꾸리면 됩니다. 그러나 기도는 누구를 데려다가 내 대신 시킬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것을 모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이 뒤를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친히 우리가 몸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첫 번째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기도의 환경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나옵니다. 히랍어 성경에는 엔토포티니라고 나옵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어떤 곳에서, 그런 뜻입니다. 이것을 기록한 누가도 그 장소를 어디라고 특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장소를 아예 몰랐을 수도 있고 아예 이름조차도 안 붙은 곳일 수도 있는데 더 중요한 사실은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 생활에 매우 중요한 국면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에 등장하신 이후에 마지막 십자가에 죽으시는 날까지 일정한 거처가 없으셨습니다. 동가숙 서가식 하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높은 왕의 의자를 만들어 놓고 여기 진리에 달인이 있으니 필요한 인간은 여기에 와서 받아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대 땅에서 갈릴리로 유대인기 가기 꺼리는 사마리아까지 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고 무지한 자를 깨우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 들 곳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노라.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가 아주 다양하게 제시가 됩니다. 마태복음 26장 30절에서는 감람산에서 기도하셨다고 하는데 마가복음 1장 35절에서는 한전한 곳이라고 나오고 누가복음 6장 12절에서는 산에서 기도하셨다고 하는데 누가복음 3장 21절에서는 강에서 기도하셨다고 나오고 마가복음 9장 12절에서는 변화산에서 기도하셨다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일정한 거처가 없이 끊임없이 여행하는 생애인데도 그분은 어디가든지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장소를 찾으시고 그 기도에 당신 자신을 몰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시간이 언제입니까? 성경 복음서를 다 뒤져보면 대개 두 가지로 집약이 되는데 깊은 밤 아니면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저는 한 20년 전에 왜 그러셨을까? 이렇게 새벽에 기도하는 전통을 만드셔서 한국 교회 목사들 이렇게 고달프게 하실까? 왜 예수님은 그렇게 깊은 밤에 기도하셨을까? 며칠을 생각하다가 마지막에 도달한 결론은 그러한 시간의 선택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새벽시간이어야지만 밤 시간이어야지만 낮 동안에 굶주린 영혼들을 섬길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밀려와 말씀을 듣고 싶어 하고 병을 고치고 싶어 하고 하는데 예수님이 문 닫아 걸고 나는 기도시간이다. 하고 올라가 버리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에 환자들이 자는 시간에 예수님은 기도를 시작하셨고 지쳐서 돌아가는 시간에 예수님은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찬양)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만 섬기며 따르기로 한 나
세상이 준 이 모든 괴로움 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우리는 끊임없이 불안정한 목회의 환경, 많은 출장, 어느 시기 집중되는 사역들로 건강을 잃어버릴 때도 있고 고통 받을 때도 있습니다. 저는 50중반 약간 전에 53세에 이를 때까지 소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병상에 누워서 힘없이 성도들의 근심어린 눈빛으로 건네는 위로를 받고 싶었습니다. 전 월요일 날 쉰 적 없습니다. 어떡하면 끈질기게 새벽기도를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저는 새벽기도라는 책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기도하러 가기 힘들 때 새벽에 이불을 뻥 차며 충성하고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할 수 있다. 그렇게 글을 쓰고 얼마 있다가 10년 동안 열한 번을 입원하고 아홉 번을 수술했습니다. 약 20키로라는 몸무게를 잃었습니다. 성도들이 비로소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 인간이 저렇게 연약한 존재구나.
미국에 집회를 하고 갑니다. 집회를 못해도 고생을 합니다. 두세 번 영어로 강의합니다. 돌아와서 바로 샤워하고 일정을 강행했습니다. 그렇게 강골이었습니다. 지금은 매우 연약합니다. 자꾸 물러나기 쉽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말하기를 조지휘필드를 인용하면서 썩어서 죽느니 달아서 죽겠다. 제 가슴을 뛰게 하는 격언이었습니다. 실제로 65년 가까이 살아오니까 인간의 몸은 썩거나 닳거나 둘 중의 하나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지푸라기와 같이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보여주는 것이 뭔가 하면 어거스틴이 우리에게 말했듯이 우리가 우리의 몸을 보호라고 관리하는 것과 우리가 욕망으로 우리 자신이 이기적으로 편하려고 하는 것 사이에 구분을 짓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모든 환경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겨내시면서 사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보다 절반 정도 젊으실 때이지만 그분은 우리와 비교될 수 없는 노역의 연대기를 쓰며 사셨던 분입니다.
두 번째 내리는 중요한 결론은 이것입니다. 환경은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 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영적 전쟁입니다. 이것은 홈그라운드 경기가 아니라 어웨이 경기입니다. 선수들이 바깥에 나와서 싸울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싸우는 상대편 선수들을 응원합니다. 그림 같은 슛을 넣으면 욕설이 터져 나오고 콜라병이 날라 올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언제쯤 되면 기도하기 좋은 환경이 생깁니까? 살아보니까 그런 환경이 안 생깁니다. 젊었을 때 힘이 있고 건강할 때에는 기도할 마음이 없고 나이가 들어 기도 좀 하려고 하니까 관절이 아파서 교회를 오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기도하고자 하는 열정이 모자랐고 열정이 있을 때는 몸이 그것을 받쳐주지 않습니다. 이런 어긋나는 악순환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윤동주 시인은 쉽게 씌어 진 시라는 제목의 한편의 시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생 살기가 어렵다고들 하는데 시가 쉽게 쓰여 지는 것은 너무 부끄럽다. 나에게는 왜 이렇게 시가 쉬울까?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바늘로 콕 찌르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로 사는 길이 어렵다고 하는데 설교는 왜 이렇게 쉬운 걸까? 정말 부끄럽다. 혹시 내가 살지도 못하는 것을 설교하는 것은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모든 한계를 치열한 인내로 뛰어 넘으며 당신을 기도에 바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서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는 목사들이 됩시다.
세 번째는 이 본문이 놀랍게도 예수께서 기도하신 시간의 길이를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한 25년전 이 본문에 대한 간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제가 총신을 졸업하고 학위도 없는데 놀랍게 안양대학교 전임강사로 취업을 했습니다. 제가 그 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혜택이 좀 주어졌을 것입니다. THM을 다니고 박사과정을 다니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그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화장실에 앉으면 피를 한 컵씩 쏟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붙들고 살았는데 오전에 학생들이 왔다가 공부를 하고 빠져 나가고 야간 학생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두 시간 동안 캠퍼스가 조용합니다. 그때 아주 조그마한 손바닥만 한 연구실이 있었는데 창문을 열고 성경을 읽는 것이 저의 낙이었습니다. 차례대로 성경을 읽다가 오늘 설교하는 11장 1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11장 1절을 정확하게 세 시간 동안 읽었습니다. 저는 제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하나님의 큰 손을 마음속에 받았습니다. 그때 히랍어 성경을 옆에 펼쳐 놓고 이 본문을 읽었는데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라고 했는데 히랍어 성경에 에파우사토라고 나옵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동치어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샤바트입니다. 샤바트라고 생각하는 그 단어가 여기에서 에파우사토라고 기록이 된 것입니다. 그 샤바트는 하나님이 천지를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쉬셨다고 할 때 나오는 그 단어이고 거기에서 영어 샤바트데이가 나온 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번역한다면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쉬시매, 이렇게 번역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공중전화를 거는 것 같이 간단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장시간 당신 자신을 쏟아 부은 자신의 진액을 쏟아 내는 그런 간절하고도 긴 기도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기도가 끝난 후에는 육체의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자신의 힘이 들어간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기도의 길이가 곧 능력이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길게 늘어놓으며 기도하는 것을 경고하기도 하셨습니다. 성경은 짧은 기도에도 하나님의 충천하는 화염과도 같은 능력이 깃들 수 있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는 그 사람만큼 카리스마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실 예수의 모형으로 지극한 겸손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정복이 시작되었습니다. 적군들은 도망갑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진멸하라고 하셨는데 해가 떨어집니다. 어두움이 내리고 나면 지리에 밝은 원주민은 잘 도망갈 것이고 자신들은 그들을 추격할 수 없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완수할 수 없을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태양아 거기 멎어라, 달아 너도 거기 멈춰라. 이것은 교만한 명령이 아니라 변형된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그것들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명령하는 것인데 이것은 변형된 권능의 기도였습니다.
이런 놀라운 기도의 형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 아주 풍부하게 나타납니다. 권능을 받은 사도들이 병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내어쫒고 이런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도 하나님 앞에 귀신들린 자를 명하여 귀신이 나가고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긴 기도가 아니라 짤막짤막한 기도들이 위대한 하늘의 능력을 이 땅으로 불러 내렸던 것입니다. 우리도 흉내를 내봅니다. 놀랍게 성경에서 됐는데 우린 잘 안 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 짧은 기도로 위대한 하늘의 능력을 불러 내렸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한결 같이 평소에 그 짧은 기도를 하기 전에 오랜 시간을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치며 기도하던 사람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위해 모세가 올라간 사이에 우상을 지어 놓고 범죄를 합니다. 하나님이 쓸어버리려고 할 때 그때 모세가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매달릴 때 자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그때 모세는 회막을 세웁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와서 조용히 하나님 앞에 매달려 회개하며 기도하기 위해 특별기도처소를 세운 것입니다. 모세가 떠나도 여전히 기도로 회막을 지키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여호수아였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은 예수님 자신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기도에 쏟아 부으시며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내어 쫒았는데 제자들은 못 내쫒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가 없느니라. 그 유는 귀신의 등급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귀신은 쉽게 얘기해서 너희들 기도수준으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말씀입니다.
죄는 없으셨지만 예수님이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참 사람으로 오셔서 당신 자신이 온전히 복종하며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장시간의 기도에 헌신하셨기 때문에 짧은 시간의 기도가 위대한 하늘의 능력을 불러내려 기적의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모든 길게 하는 기도가 깊은 기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과 우리 경험에 의하면 깊은 기도는 반드시 긴 시간을 요구합니다. 아무리 깊어도 짧게 끊어지는 기도는 더 이상 깊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 모든 사람들의 경험입니다.
우리 학교 다닐 때 회상해보면 학파가 몇 개 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관악파가 있었습니다. 도서관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교회학파가 있습니다. 교회 가서 노동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원파가 있었습니다. 금요일마다 기도원 올라가서 그 다음 주에는 목이 잠겨서 내려왔습니다. 소요학파도 있었습니다. 하는 일 없이 족구나 하면서 슬슬 다니는 소요학파입니다. 놀랍게 동창들 중에 일부는 기도학파가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 말씀을 드리는데 울컥하는데 솔직히 양지캠퍼스가 볼 것도 없고 그때는 들을 것도 없다고 데모하던 시절 아닙니까? 아침에 가을에 학교에 도착하면 스쿨버스 도착하고 수업 시작하는 것 까지 30분 차이가 납니다. 그때 어린 나는 매일매일 유혹을 받았습니다.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뽑아서 뒤뜰을 걸으며 단풍이 허드러지게 피어있는 양지 빨간 건물 뒤뜰을 거닐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무슨 소리냐? 새벽기도도 충분히 못하고 왔는데 채플실에 들어가서 기도하라. 마음속에서 늘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감사하게도 늘 두 번째가 이겼습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서 5분쯤 10분쯤 지났을까 보면 수업하러 가는 학생들의 소리들이 웅성웅성 들립니다. 길게 하는 기도가 반드시 깊은 기도일 수는 없지만 깊은 기도는 반드시 시간을 요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신대원 다닌 시절에 제 가슴에 불을 지른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여러분도 많이 알고 있는 이엔바운즈 목사님이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기도의 능력이라는 책을 어림잡아서 열다섯 번 넘게 읽었습니다. 백이십 번을 읽은 고백록 다음으로 많이 읽은 책 중 하나입니다. 그 책 속에서 한없이 은혜를 받았고 했는데 그분이 비록 남군에 속한 종군 목사이긴 했지만 정치적인 견해를 떠나서 본받을 만한 것은 은퇴하고 난 후에도 당신이 몸소 하루에 여덟 시간씩 기도의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세계에 대해서 우리에게 심금을 울리는 경구들을 줬습니다. 책도 길게 쓰지 않습니다. 짤막짤막하게 쓰는데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말이었습니다.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분 자신이 그런 기도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나옵니다. 아직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시더니 그 앞에는 복음 전하시고 핍박을 받으시고 베드로의 장모를 심방하시고 돌아오시니까 각색 병 걸린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마 취침시간이 최소한 새벽 두시쯤은 되셔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제자들은 퍼졌습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나오셔서 문을 열고 아직 먼동이 트지 않은 한적한 곳으로 가서 당신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가셨습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하나님을 위해 고역의 연대기를 쓰시면서 땀을 흘리신 생애였고 자신은 죄가 없으셨지만 가엾은 죄인들과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흘리신 눈물의 생애였습니다. 당신의 소유가 아무것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지고 마지막에 그분에게 몫으로 돌아간 것은 호지 않고 통으로 짠 옷 한 벌이었습니다. 그것마저 뺏기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거의 벌거벗은 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죽으시는 마지막 순간에도 그분은 하나님께 일곱 마디의 기도를 남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땀의 생애였고 눈물의 생애였고 피의 생애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서는 좋은 차타고 다니고 멋있는 양복을 입고 큰 사택에서 사는 것이 자랑이 될지 모르겠지만 주님 앞에 갈 때는 피 묻은 전투복을 입은 것이 주님 앞에 가장 훌륭한 복장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당신 자신을 다 쏟아 붓는 기도의 삶을 사셨습니다. 어느 주석가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당신의 속죄 사역을 위해서 아들의 피가 필요했지만 눈물을 모두 쏟기 전까지는 그 피를 받지 않으셨다. 히브리서 5장 17절은 말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구원하실 자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하고 적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한 토막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예수님이 우셨다고 하는 기록은 세 번 등장하지만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보실 때 가슴 아픈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분은 당신의 이 세상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액체의 생애에 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처럼 살 수 없습니다. 절대로 그분처럼 똑같이 살 수 없습니다. 허셀푸드 목사님이 자신의 설교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종이 묻습니다. 어디로 배를 몰까요? 저 북극성으로 가거라. 그 이야기는 배가 하늘로 떠서 북극성에 안착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그 별을 보고 가면 목적지에 도달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목사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갈 때 풍랑과 폭풍이 와도 항로를 잃지 않는 길입니다. 그 예수님이 오랜 시간을 당신의 기도로 쏟아 부으셨으니 우리도 새로운 마음을 가집시다. 우리의 육체의 힘이 30대 초반 같지 못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뜨거운 열정이 30대 만큼 못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이 그때보다 못해야 되겠습니까? 주님 앞에 장시간을 매달려 목회의 꽃을 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감화력이 있는 기도였습니다. 여기에서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는 있지 않지만 그려지는 그림은 이런 것입니다. 그 전날에도 고단하게 사역하셨을 것이고 어딘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룻밤을 묵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지쳐서 아침에 못 일어났는데 예수님은 조용히 일어나셔서 어디엔가 가셔서 마음을 쏟으며 어떤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일어나보니 예수님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찾았는데 그땐 이미 해가 훤하게 밝았을 때인데 저기서 이미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거룩하고 진지해서 예수님을 두드리면서 그 기도를 끊을 수 없을 정도의 엄숙한 분위기였습니다. 제자들은 그 옆에서 같이 기도했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끝나고 쉴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와서 제일 먼저 한 것이 예수님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요한도 그렇게 가르쳐 준다는데 주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주기도문이 나옵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예수님의 그 기도가 제자들에게 깊은 감화를 끼쳤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느덧 불타는 마음으로 세계를 다 누빌 것처럼 목회를 시작했는데 어느덧 떠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40주년 동창들 모임 만났을 때 거의 모두 은퇴한 후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아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우리가 역사속의 의자를 비워주고 떠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누가 이 세월의 흐름에 항거할 수 있습니까? 떠날 겁니다. 그때 우리 목사들이 교인들이게 우리 집에 있는 자녀들에게 어떤 아버지, 어떤 목사로 기억되겠습니까? 만날 감투만 쓰러 다니던 우리 목사님 그렇습니까? 아니면 늘 먹는 것 좋아하던 우리 목사님 그렇습니까? 늘 등산 다니던 우리 목사님입니까?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어떤 사람은 목회만큼 재밌는 것이 없다고 하는데 난 동의가 안 됩니다. 누군가가 목회에 대해서 묻기에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는 나에게 영원한 이국의 언어이고 목회는 내가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다. 왜 여기 서있나? 주님이 시켜서 서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국의 언어이지만 떠듬떠듬 배워서 매주 설교를 하고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 하지만 이렇게 가슴아파하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기에 주님을 대신해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목회라고 생각합니다. 긴 목회 생활에 왜 기쁨이 없고 보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잠시이고 언제나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며 고난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 목회자의 의무입니다. 난 후배목사들에게 말합니다.
(찬양)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건 성도들에게 불러주고 목사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해라. 왜 우리는 그 성도들이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본 사람이고 그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매였기 때문에 부자가 되는 길도 아니고 편한 길도 아닌데 이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신적인 강제력을 주어서 이 자리에 서 있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정확하게 교회를 개척하고 25년 목회를 했는데 정말 너무 감사하게 20년 동안 아무 일도 교회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나의 리더십에 도전한 적이 없고 누가 찾아와서 목사님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뒤에서야 욕을 했을 수도 있지만 없었고 장로들은 모두 제 설교를 듣고 회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꿈꾸는 것 같은 세월을 보냈는데도 저는 하나님 오늘 저녁에 눈을 감고 잡니다. 내일 아침에는 하늘나라에서 눈을 떴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렇게 기도드리고 잠자리에 든 날이 아주 많았습니다. 이것은 누가 나를 괴롭히고 안 괴롭히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지고 가는 우리와의 삶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속에 자녀들의 가슴속에 남는 마지막 우리의 성공한 모습은 건물을 지어놓고 수천 명의 교인들을 모아놓은 목회의 업적이 아닙니다. 후임자가 와서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교인들에게 오해를 받고 고통을 받을 때나 가정에 괴로운 일이 생겨서 힘들어 하실 때나 언제나 기도하셨던 우리 목사님, 목회는 마음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입니다. 한번 건드리면 확 터져서 물같이 쏟아 놓을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이 목회입니다. 목사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만약에 누군가가 나에게 전 세계를 뒤 흔드는 위대한 설교자가 되고 싶으냐? 아니면 위대한 기도 자가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전 3초도 망설이지 아니하고 후자를 택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설교하는 사람에 의해서 쓰여 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일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써가는 역사이고 그는 도구에 지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떠날 날이 점점 다가오는 데 떠나고 난 다음에 비록 내 교회가 수백 명 수천 명 모이는 교회가 아니었어도 남들의 눈에 화려한 업적을 이루지 아니었더라도 이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었을까요? 그런데 마음속에 그 목사님이 살아 있습니다. 늘 어린아이처럼 매달려 눈물로 기도하던 목사님, 자신도 늘 회개하며 예수를 본받고 싶어 하던 그 목사님, 세월이 흘러가도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의 마음에 우리 교인들의 마음에 이렇게 남는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이룬 업적의 크기에 연연해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중심을 보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실패한 인생을 산 사람이 안 될 것입니다.
말씀드리려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예수 몸소 기도하셨으니 우리도 친히 기도하자. 환경을 이기고 기도하셨으니 우리도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기도의 줄을 놓지 말자. 그분이 깊은 기도로 장시간을 매달리셨으니 우리도 더 많은 시간에 기도에 헌신하자. 마지막으로 기도에 감화를 끼치는 목회자가 되자. 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