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04. 외부강의
기도, 신학의 질료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녹취자: 박은희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하나님 자신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보여주신 모본 중에 하나가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읽은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무엇 때문에 기도하여야 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결하지 못한 존재이고, 끊임없이 죄와 갈등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고 죄와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은혜가 요구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질상 하나님이셨고, 죄가 없으신 분이었으며, 죄를 지으실 가능성조차도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 하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가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거나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이셨고 그리고 인간의 인격 없이 하나님의 인격으로 사람의 몸을 입으신 분이셨습니다. 소위 우리가 이야기하는 ‘안휘포시스타스’의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셨다고 누가복음 3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릴 정도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기도하셔야 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간절한 기도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무지와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지복자의 신학도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신학도 아닌 순례자의 신학의 도상에 서있는 우리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무지와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고 이성을 하나님께 바치는 끊임없는 탐구가 신앙과 함께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이셨고 그분은 모르는 것이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왜 기도할 이유가 없는 완전하신 그 분이 생애 전체를 기도로 물들이며 사셨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할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최근 웨스터민스터의 교수 마이클 호튼은 최근에 자신이 쓴 조직신학 책속에서 신학을 정의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살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정의 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비록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었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인성 아래 감추시고 연약한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사심으로 우리 모든 인간에게 어떻게 우리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바라며 살아야 될지를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시보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기도의 생애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 앞에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심지어는 히브리서 5장에서는 “그는 육체로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라고 그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전체는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요약하면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기도의 눈물이 있는 생애였고, 수고의 땀을 흘린 생애였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당신의 살을 찢어 피를 흘리신 생애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신학의 길을 들어선 여러분들은 무엇보다도 기도의 학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이 신학공부는 형상입니다. 이 형상은 질료에 부여될 때에 질료로 하여금 독특한 형태를 갖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질료가 없다면 이 형상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신학이 형상이라면 주님의 성품에 대한 풍부한 경험은 그 신학의 형상의 부여를 기다리는 질료와 같은 것입니다. 이 신학을 위한 질료는 신학의 탐구 그 자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20세기에 3대 칼빈주의자의 한사람이었던 ‘헤르만 바빙크’를 기억할 것입니다. 저의 판단으로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신학을 공부한 마지막 학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속에서 그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학문이 아니라 신앙으로 구원을 받는다.”라고 말입니다. 신앙이야말로 모든 학문의 형상을 기다리고 있는 질료입니다. 작은 신학자는 남이 해놓은 신학을 복습함으로써 생겨나지만 큰 신학자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의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모든 사람이 위대한 신학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위대한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이 모든 학문들을 해석하고 성경의 질료들에 형상을 부여할 수 있는 지적인 준비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정말 치열하게 공부하고 마치 공부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신명을 바쳐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형상을 부여하는 일에 불과하고 신앙의 질료가 마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질료는 신앙의 실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7세기의 위대한 개혁파 전통주의자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휘스페리투스피치우스’라고 하는 화란의 신학자는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기도야말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최고의 표현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간절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기도를 실천함으로써 풍부한 신앙의 질료를 갖게 되고, 그 신앙의 질료위에 신학이 부여될 때 그 신학은 사람들을 살리는 생명이 있는 신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들은 어떤 기도의 자세를 배울 수 있을까요? 오늘 평범해 보이는 이 성경구절에는 기도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침을 제공하는 몇 가지 단서가 제공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에 대한 언급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한 곳에서”라고 되어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 ‘엔토포티니’라고 되어있는 이 구절은 ‘어떤 곳에서’라고 번역될 수 있는 본문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서 ‘in a certain place’라고 많이 번역을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많은 기록들이 나오지만 독특한 점은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가 일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곳에서는 산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고, 어떤 곳에서는 강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고, 또 어떤 곳에서는 광야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삶이 매우 바쁘고 정착된 생활에 기반한 삶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공생애에 들어선 이후로 3년 동안 사셨던 예수님의 생애는 매우 고단한 노역의 연대기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곳이 어디든지 죄인들이 있는 곳에 찾아가셨고 무지한자들이 있는 곳을 방문하셔서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시고 병든 자를 친히 찾아 가사 그 병든 자를 치료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신 채 끊임없는 여행 속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감당하셔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는 이 누가도 특별히 어느 장소라고 지정할 수 없는 이름 없는 곳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셨던 사실을 여기에 적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자신에 관해서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견고한 기도생활을 이어가게 하지 못하는 이유로 우리의 환경의 핑계를 많이 댑니다. 학교의 과중한 공부, 그리고 교회에서의 많은 사역들, 그리고 그 이외에도 하나님위해서 해야 할 많은 섬김들, 가정에서 일어나는 복잡다단한 많은 걱정거리들, 이 모든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적인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언제 환경이 우리가 기도하도록 도와준 적이 있습니까?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주관자들과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입니다. 이세상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홈그라운드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차피 이 낯선 땅에서 순례자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환경이 아주 평안하고 좋았을 때에 열렬히 기도하기 보다는 부패한 마음에 복종되어 오히려 우리의 열렬했던 신앙생활과 기도를 잃어버린 경험들을 회상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시련과 역경이 있고 시간이 없고 고통스러운 환경들로 에워싸일 때 그 속에서 우리의 혼자 힘으로 살아가기 어려울 때에 하나님을 의지할 간절한 희망이 생기고 그때에 우리의 마음은 모아져서 하나님께 간절히 올리는 기도의 향불을 피울 수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신학교 오기 전 하나님께 소명을 받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될까를 고민하며 입시준비를 하며 기도하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열렬히 기도했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우리의 생명도 바치고 싶은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신학공부는 우리에게 많은 지식을 가르쳐주기는 하지만 기도의 은혜의 깊이 잠기자 않으면 고린도전서 8장에서 사도바울이 경고한 것같이 모든 지식과 꼭 같이 우리를 교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환경이 우리에게 도와 환경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될 날이 있다고 믿지를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이 기도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응시하고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의 집중을 통하여 이 기도는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리고 이 기도는 환경과 상관없이 우리의 마음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되는 것입니다.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목회방법이 필요하고 새로운 신학을 모색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 죄인을 회개시키는 거룩한 말씀의 능력, 그리고 동토와 같이 얼어붙은 땅을 빗장을 깨고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선포되게 만드는 이 놀라운 영적인 기름 부으심은 학문과 제도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인할 수 없이 명백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30년 전 제가 처음 신학교에 들어왔을 때와 비교해볼 때에 지금은 현저히 기도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r그래서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들어도 피를 토하듯이 성도들에게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치는 설교를 듣기 어려운 때가 되었던 것입니다. 영혼을 살리고 복음을 선포하는 영적인 일들은 거대한 비즈니스처럼 변모하고 있고 성령의 능력을 끊임없이 어린아이처럼 의지하며 눈물로 매달려야할 이 십자가 목회의 길을 오히려 거대한 사업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보다는 시스템을 더 믿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밝은 빛보다는 인간의 지혜를 더 신뢰하고, 불변하는 성경의 말씀보다는 이세상의 정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들이 목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한번 여러분 저와 함께 가슴에 손을 얹고 정직하게 물어봅시다. 정말 기도다운 기도를 언제 했습니까? 여러분들이 앉아서 예배드리는 그 자리가 눈물로 흠뻑 적시도록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나의 마음이 모두 찢어져 그 분 앞에 물같이 쏟아져서 그 분의 얼굴을 갈망하는 간절한 기도로 자신을 녹였던 때가 언제인지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찬양)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생각해요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단호하게 예고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다음에 목회를 하면서의 기도생활은 신학교의 기도생활보다 못 미칠 수는 있지만 능가할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신학교 때에 기도 안하고 탱탱히 놀던 학생이 목회의 길에서 어떤 계기가 있어서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경험으로는 1% 미만입니다. 지금 간절하고 뜨겁게 기도하던 사람이 목회사역에 길에 들어서고 자기의 사역이 팽창되고 그다음에 정치에 발을 들여놓고 교계에 발을 들여놓고 하면서 활동범위가 넓어지면서 기도를 거의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는 자주 발생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기도생활을 여러분들이 안한다면 앞으로 치열한 목회사역에 들어섰을 때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못 미치는 기도의 열정으로 목회사역을 힘겹게 이어갈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내가 장담하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저의 신학대학원 3년은 정말 최선을 다할려고 몸부림치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것은 많지만 내 개인의 양심으로는 부끄럽지 않게 3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시 한 번 3년을 돌아가도 그 이상으로는 더 잘살 수 없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신학교 3년 동안 하나님은 저에게 치열한 기도의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래서 간절한 기도 속에서 신학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도 나의 생애에 가장 커다란 영적인 자산으로 남아있습니다. 한 학기를 마치면 거의 예외 없이 기도원으로 일주일 금식기도 하러 들어갔습니다. 절체절명의 어떤 기도제목이 있었다기보다는 한 학기동안 신학을 탐구하면서 묻었던 영혼의 때를 씻어내는 작업이었습니다. 때로는 홀로 조용하 가기도 하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금식기도 하러 가기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올렸던 간절한 기도는 나의 신학의 질료가 되었습니다. 일주일동안 기도원에서 묵으며 금식기도 하는데, 여름에는 공교롭게도 여름 성경학교가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기도를 위해서 더욱 불을 붙일 수 있었고, 겨울에는 한해의 목회사역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해의 나의 목회사역에 복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빌 수 있었습니다. 금식기도하고 내려오는 길에는 육신은 한없이 지쳤지만 영혼을 망가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솔직히 털어놓을까요? 저 신학교 때만큼 기도 못합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열린교회를 개척하고 매달렸을 때에는 하루에 기본이 3시간이라고 나 자신과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지금은 세 시간을 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세 가지가 그것을 못 하도록 가로막습니다. 우선 첫째는 체력이 받쳐주질 않습니다. 두 번째는 하고 있는 일이 그때에 비해서 3배 4배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교회가 커지면서 목회사역의 중압감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까지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한 번도 ‘내가 이렇게 기도해서는 안 되는데, 나는 기도가 정말 부족해’라는 이 자책감에서 19년 동안 벗어나 본적이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신학교 다닐 때에 그 기도생활에 표준을 맞춘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기도를 아는 사람인지 되물어야 합니다. 기도는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이번 고난주간에도 오랜만에 하나님 앞에 뜻을 정하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랫동안 마음에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던 기도를 그 집중하고 간절히 드리는 기도 속에서 다 이루어주셨습니다. 목회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건강합니다. 시간 널널합니다. 공부하는 게 얼마나 바쁜데 그래도 여러분 생애 중에서 지금처럼 한가한 때가 없습니다. 은퇴하기 전까지는. 더군다나 여러분이 하는 목회의 하나님의 큰 축복이 있으면 그건 더 큰 형벌을 만나는 것입니다. 지금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목회는 낙관을 할 수 없습니다.
돌아가신 박윤선 목사님이 화란에서 공부하는 자신의 제자에게 늘 편지를 써서 보내셨습니다. 대개 자료를 구해달라고 하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거기에다가 가끔 쓰시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아무개 목사, 기도 많이 하세요. 기도 안하면 자유주의자 됩니다. 기도 많이 하세요. 기도 안하면 자유주의자 됩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이 기도안하면 자유주의자가 되고, 공부 안하는 사람이 기도를 안 하면 세속주의자가 되고, 둘 다 못하는 사람이 기도를 안 하면 그야말로 이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골통 보수가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죽은 보수가 됩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싫은 소리 한번 할까요? 나는 아까 예배당에 들어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여기가 ‘고신’인가 했습니다. 예배 시작하기 3분 전인데 극장 분위기지 예배당 분위기가 아닙니다. 잠시 후 만나 뵐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마음을 하나님께 간절히 모으고, 기도하며 예배를 기다리는 것이 이것이 신학교의 모습이 아닐까요?
세 번째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시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하시고 마치시매”라고 했습니다. “마치시매”라는 희랍어 단어는 ‘에파오 사토’라는 단어입니다. 이 ‘에파오 사토’의 히브리어 동치어가 ‘싸바트’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싸바트데이’가 왔고 그것이 안식일입니다. 그러니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께서 기도하시고 쉬시매”라고 번역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자체는 예수님의 그 기도의 시간의 길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다시 한 번 이 문맥을 재구성 한다면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복음전도여행을 다니시다가 어느 숙소에 드시게 되었습니다. 새벽미명에 예수님께서는 잠자는 제자들을 내버려 둔 채 조용히 일어나서 평소 하시던 대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아직 어두움이 도망치지 못한 새벽미명에 마음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느지막이 일어난 제자들이 예수님이 안 계신 것을 발견하고는 예수님을 찾아나셨고 한참을 찾다가 햇살이 훤히 퍼지는 아침에서야 아직도 기도하고 계신 예수님을 모처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기도의 분위기가 너무나 엄숙하고 거룩하였기 때문에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느꼈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도록 여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에 있어서 이 시간의 길이를 무시합니다. 그러나 깊은 기도는 반드시 오랜 기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도에 바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종종 성경에는 짧은 기도로 하늘의 위대한 능력을 불러 일으켰던 위대한 기도에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가나안정복의 영웅 ‘여호수아’같은 사람입니다. 원주민을 추격하다가 해가 지자 그는 변형된 기도로 하나님께 소원을 올렸고 그리하여 해가 멎으며 가나안 정복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도 마찬가지고 병든 자를 고쳐주던 바울의 변형된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공통점이 있습니다. 평소에 하나님 앞에 많은 시간을 기도로 바치던 기도의 사람들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지금 이 신학의 도상에서 아무리 정교한 개혁신학을 공부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하루에 단 30분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신학으로 무엇을 하겠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빵틀은 준비되었지만 거기에 부을 밀가루반죽이 없는데 그 빵틀을 무엇에다 쓰겠느냐는 것입니다.
목회는 개혁신학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닙니다. 개혁신학은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이 내게 주신 신앙의 질료를 개혁신학의 틀에 넣어 빚어서 비로소 사랑하는 성도들의 입에 넣어줄 수 있는 생명의 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질료가 공급되는 기도의 세계가 그렇게 빈약하다면 그렇게 정치하게 신학을 공부해서 무엇에 쓰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아마 기껏 그렇게 개혁신학을 공부하면 큰 칼을 갈아서 복음주의 목구멍에 겨눌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신학의 본질적 사명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신학교 다닐 때에 여러분들이 하루에 한 시간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소명을 정말 받은 사람인지 신앙의 차원에서 원점부터 진지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하나님을 무엇 때문에 사랑하겠으며, 자기가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하나님을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고 싶은 열정이 생겨나겠습니까? 간절한 기도, 깊이 있는 기도는 장시간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붓는 간절한 기도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칼빈은 자기의 ‘기독교강요’에서 우리를 성숙시키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섭리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숙시키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우리의 모든 시련과 역경, 환난과 고통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라고 정의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에게나 모두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고단한 교회의 섬김 속에서 공부할 시간을 내지 못해서 고통 하는 것도 십자가이고, 지적인 능력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데 과중한 공부에 시달려야 하는 것도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시간도 있고 지적인 능력도 있는데 건강이 받쳐주지 않아서 최선을 다하지 못 하는 것도 십자가입니다. 크고 작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걱정과 근심거리들, 그리고 아직까지 가족들이 모두 예수를 믿지 않아서 받는 고통과 마음의 괴로움도 십자가입니다. 이 모든 십자가가 우리에게 진정으로 우리의 죄를 죽이고 은혜를 살리는 그 십자가가 되기 위해서는 기도 속에서 이런 모든 고뇌들을 녹여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매일 매일 일정한 시간을 떼어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두 쏟고 그 거룩한 기도의 지성소에서 우리 주님과 만나는 은혜의 기쁨을 누려야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얽매인 것을 모두 풀고 우리의 영혼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향하여 날아오르는 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들이 알 수 없는 그 은혜의 세계 속에서 주님과 만나는 달콤함과 자비로운 사랑, 그 아름다움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신학의 형상을 이 질료에 부여하여 오늘 내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신앙의 경험과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체험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목회와 우리의 설교를 살아있게 만드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상적인 기도뿐만 아니라 매우 커다란 어려움을 만나거나 중요한 기로에 놓여 있을 때에 우리는 종종 목숨을 걸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자기봉헌의 기도를 올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내가 이 시점에서는 ‘내가 온 마음을 다 쏟아 부어 기도하다가 여기에서 죽어도 참 좋겠다.’라고 할 정도로 기도에 자기를 쏟아 붓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학대학원 졸업이 가까워오던 3학년 여름이었습니다. 민주화의 물결이 일면서 끊임없는 데모가 일어나서 학교는 휴교상태에 들어갔고, 그때에도 저는 아랑곳 하지 않고 학교에 나와서 하루에 15시간 내지 18시간을 공부했습니다. 휴교한 것이 그때 나에게는 매우 다행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신학교에서 가르칠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나는 공부하여야 했습니다. 온 마음을 쏟아 부어서 공부했는데 사실은 그때가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가슴 아픈 고통스러운 시기 중 하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은 최루탄가스를 먹고 사경을 헤맬 정도로 고통을 받고 있었고, 직장퇴직금을 가지고 학교 옆으로 와서 얻은 전세방은 사기꾼들의 사기를 당해서 길거리로 쫒겨 나는 상황이 되었고, 나를 지극히 사랑하던 나의 할머니는 암선고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이제 오늘 내일 죽음을 앞두고 계셨습니다. 찢어지는 듯한 가난 속에서 저는 넉 달 동안 사역지도 쉬게 되었고, 8년 동안 정들었던 교회를 퇴직금 한 푼 없이 그냥 나왔고, 새로운 사역지는 아직 구해지지 않은 상태 속에서 저의 몸은 영양실조로 야위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10시간씩 공부하다가 일어서 몇 번을 주저앉았습니다. 그 때는 그게 뭔지 몰랐습니다. 영양실조였습니다.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그랬습니다.
사면을 다 돌아보아도 의지할 곳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때 결심을 했습니다. ‘기도해야 되겠다.’그리고는 5층 채플실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오후4시쯤 올라가서 많을 때는 3시간, 적을 때는 1시간 반 정도 기도했습니다. 저는 원래 시끄럽게 기도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워낙 상황이 급하니까 기도를 시작하면 항상 눈물만 나왔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예배당에 어떤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간절히 부르짖었고 그렇게 두 세 시간 기도 하고나면 땀이 얼마나 흘렀는지 런닝, 티셔츠, 바지, 속옷, 양말까지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벗어서 짜면 한 컵의 물이 나올 정도로 땀이 흠뻑 젖었습니다. 매일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환경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평화가 넘쳤습니다. 그러면서 어둑어둑한 채플실에서 내려와서 계단을 걸어 내려갔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왔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가다가 ‘내가 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도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시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서 다시 계단에 앉아서 눈물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잔인한 여름이 다 지나가던 어느 날, 여러분들에게 결코 말해주고 싶지 않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을 바로 그 채플실에서 나 혼자 경험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나는 우리의 신학이 얼마나 엉성한지 그리고 그 위대한 신학자들이 자기의 신학적인 진술을 통해서 말해고 싶어 했던 그 하나님의 앎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영광스럽게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 나의 삶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성령체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조국교회의 산하의 이 신학교들을 다시 한 번 간절한 기도로 가득 채울 수 있을까요? 물질만능의 시대를 살면서 하나님 앞에 정결하길 원하는 통절한 기도, 고난과 역경을 딛고 하나님 앞에서 살고 싶어 하는 종교개혁가의 정신을 물려받은 ‘꼬란대오’의 정신을 가진 그런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는 통절한 간구, 이 끓어오르는 기도의 화염이 충천하여 하늘을 찌르고 그리하여 영적인 세계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간절한 기도의 폭풍과 같은 기도의 영이 어떻게 하면 이 신학교위에 임할 수 있을까요? 여기가 모든 영적인 경건의 요람이 되어야하고 원천이 되어야 할 턴데 비상하리만치 신령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그는 훌륭한 설교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도 기도하지 않았던 것들을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시간을 많이 가지며 어떤 때에든지 주님과 교통하는 순발력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물같이 녹아 주님의 보좌에 스며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험하기까지 여러분들이 배운 신학 책들과 신학지식들을 시뻘건 기도의 물속에 깊이 담가 그 신학의 지식들을 기도의 피로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생명 있는 신학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