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기도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5:1-3)
녹취자: 김미영
찬송을 지을 정도로 5편은 애송되는 시입니다. 여기에는 시인이 정말 간절한 탄원으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그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는 종종 하나님이 뭘 모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알려드려야만 주님이 관심을 가지실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기도의 원래 하나님이 기도를 정해놓으신 목적은 사실은 우리의 자기 훈련을 위한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했듯이 하나님이 우리 모르는 것이 무엇이 있으시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우리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모르시는 것이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기도를 만들어 놓으신 목적은 이 기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단련시키고 우리의 의지를 올곧게 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도라고 하는 은혜의 수단으로 주님을 의지하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피치우스라고 하는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는 그의 아스케티카라는 책에서 열렬한 기도야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장 뚜렷한 표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오늘 설교를 듣기 전에 마음에 손을 얹고 생각해봅시다. 우리의 기도가 정말 간절하고 열렬하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고, 만약에 그런 기도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도 분명한 것입니다. 오늘날 관상기도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그 많은 논란들의 고리는 무엇이냐면 기도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정의와 관련돼 있습니다.
지난번 화란 방문 때 기밍크 박사를 만나서 아침에 한참동안 이야기를 했는데 요즘 새롭게 연구하는 작업이 있느냐 물어봤더니 지금 기도에 대해서 책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벌써 구라파에서는 기도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변질되어서 원래 우리들이 정통적으로 생각하던 하나님께 올리는 간절한 마음의 기도라고 하는 것들이 이미 변질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다원주의를 포괄할 수 있는 형태의 명상의 형태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 보편적인 추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는 이러한 간절한 부르짖음이나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참회의 눈물이나 하나님 앞에 자기 깨어짐의 고통 같은 것들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기도의 내용조차 끊어버리는 침묵의 기도가 고통스럽다고들 이야기 하는데 뭐가 고통스럽다는 겁니까? 어떤 고통입니까? 결국은 이 세상의 번뇌와 많은 것들과 접촉하던 우리의 정신이 일체 그것을 멀리하고 나니까 거기에서 오는 안달하는 것이 그게 고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기도의 내용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쏟아 부어서 한 인격자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주시하고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린 처절한 기도 속에서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에 대해서 집중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참회의 눈물과 의지의 깨어짐과 우리의 생각의 변화들이 일어나고 그래서 우리의 전 본성 깊은데 까지 성경이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변화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빛이 없이 열렬하게 기도한다 라고 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부르짖음이 간절해질 때에 그런 경건의 경험이 그치게 될 때에 이렇게 황당한 그러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우리의 상상 속에서 전개되어서 복음신앙을 흐트러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심사를 통촉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의 기도의 내용 중 어떤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모르신다 라고 하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알고 계시다고 하는 것을 나에게 나타내 보여 주시옵소서라는 간절한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을 하면서 아주 중요한 이치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뭐냐 하면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증표를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사역을 하는 것을 기뻐하고 하나님이 내가 이곳에서 섬기는 것을 기뻐하신다면 나에게 표징을 보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매우 기쁘게 여기시고 표징을 보여주십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시지 않겠다고 하니까 모세가 하나님을 못 믿기라도 하는 듯이 ‘하나님이 그 말씀을 지키실 것을 내가 무엇으로 알겠습니까?’ 그러면서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나에게 표징을 보여주십시오. 사인을 보여주십시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내가 믿을 수 있는 증표를 보여주십시오.’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믿음이 적다고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칭찬하시듯이 당신의 형상을 그에게 보여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역을 잘 할 때도 있고 못 할 때도 있습니다. 또 우리의 신앙이 돈독해져서 주님께 가까이 할 때가 있고 그러지 못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신앙은 항상 표징을 구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직분으로 이 일을 맡도록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여기서 내가 이렇게 주님을 섬기는 것을 기뻐하시는 표징을 보여주시옵소서.’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시인이 여기서 심사를 통촉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그 기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기도를 믿음의 기도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기도가 그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불러오는데 사람들이 그런 기도를 못 드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마음이 하나님을 ‘오로지’ 하면서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영혼들을 맡겨주셨으면 ‘내 영혼들이 변화되도록 도와주십시오.’ 목숨을 걸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변화를 주십니다. 몇 백 년에 한 번 일어나는 부흥을 내게 주시진 않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반드시 표징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너무 많이 분산되어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마음을 ‘오로지’ 하는 것,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는 그런 것들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목숨을 건 기도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현실은 무한한 경쟁사회에는 우리의 감각을 끄는 수많은 감각들이 영화, 영상, 컴퓨터, 기술 그 다음에 우리의 눈길을 끄는 수많은 제품들, 형언할 수 없이 많은 것에 에워싸여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더 많이 분산되기 때문에 앞으로도 거의 기도하지 않는 시대가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말세에 ‘너희 중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 할 때에 그 ‘믿는 자’가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럴 때가 오겠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세상의 가치를 좀 멀리하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더 많은 시간을 헌신하고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을 수 있는 그러한 은혜의 비밀스런 시간들을 우리들이 살아야 합니다. 즐길 것을 다 즐기고, 자고 싶은 시간을 다 자고, 가고 싶은 곳을 다 다니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다 만나고 그러면서도 자기의 갈 길을 훌륭하게 달려가는 사람들이 아주 드물게 있습니다. 그들은 뛰어난 정신과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붇지는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자라고 좀 부족해도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붇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달라고 말합니다. 위기 속에서 살려달라고 간절히 외치는 것입니다.
언젠가 보트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진 사람이 살려달라고 유원지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봤는데 내성적인 성격, 외향적인 성격 그게 상관이 없더군요. 그렇게 한 사람의 목구멍에서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큰 소리가 나오는 지를 처음 알았습니다. 그게 바로 ‘부르짖는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마음을 모두 실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안타까운 울부짖음입니다.
저는 원래 통성기도를 싫어합니다. 성격이 그래요 그렇지만은 중요한 것은 심정적으로 하나님 앞에 피를 토하는 것 같은 그런 간절한 울부짖음이 60년대 말, 70년대, 80년대 초까지 그런 기도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그런 기도들이 거의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가 자기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기도의 실천 속에서 쇄신하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은 ‘아침에 나의 소리를 들으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보케르’라고 하는 아침은 우리가 생각하는 아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래도 8시는 되어야지 아침이라고 생각합니다. 밤이 끝나면 아침이다. 그러니까 새벽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제 생각에는 두 가지 근거에 의해서 이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침에 구원 역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예를 들면 홍해의 물이 갈라진 것도 새벽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도 아침이었고 하나님이 그렇게 놀라운 일들을 하나님께서 이루실 때에 이렇게 시간을 사용하십니다. 이런 구원의 역사들을 회고하면서 아침에 일어나는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아침에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들을 들어줄 것이라고 이야기 한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히브리사람들에게는 아침이 새로움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합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로소이다. 또 시인은 저녁에는 울음이 계속할지라도 아침에는 은총이 깃들리라 라고 노래합니다. 그래서 아침은 언약백성들에게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겁니까? 죄가 관영하고 고난이 많은데도 하나님이 변함없이 또 다시 아침을 주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시간에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간절한 기도로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그리고 모든 생활에 절제해야 합니다. 즐거움과 그리고 마음의 분산을 최대한 억제하고 하나님을 향하도록 그래서 이 경건한 생애를 우리의 영적생활의 자원으로 알고 하나님 앞에 간곡히 매달리는 기도생활과 이 경건생활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온 마음을 다해 매달리고 간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