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다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눅19:41-46)
녹취자: 백지영
오늘 읽어드린 이 본문은 연이은 두 개의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나타난 사건은 예수님이 호산나 찬양소리를 들으시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이고 또 하나의 사건은 그 뒤이어 나타나는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두 가지 사건이지만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한 맥락 안에 있는 사건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오늘날 날짜를 기준으로 하면 주일날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본 바 예수님이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찬송과 환영이 얼마나 대대적이었는지 마태복음21장에서는 온 성이 소동하였다고 보도를 할 정도로 커다란 사건이었습니다. 실로 이들의 찬양은 대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고 불렀고 ‘하늘에는 평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겉옷을 벗어서 양탄자처럼 깔고 밭에서 베어온 종려나무들 가지를 길 위에 펼쳤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서 이처럼 열렬한 환영을 받으신 거의 없었습니다. 얼마나 온 성이 열광을 했는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렇게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하나님께 대한 찬송과 더불어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이때는 마땅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이러한 찬송과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할 때였기 때문입니다. 이날이 바로 그 유명한 유월절이 시작되는 첫날이었던 것입니다. 비록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와 그 효과에 대해서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통해 이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구원사의 맥락에서 이렇게 백성들로부터 찬송을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죽으시는 이 날에, 이 주간에 예수 그리스도는 백성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오셨던 것입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를 지나 예수님의 행렬이 예루살렘 성 가까이 이르렀을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직도 환영의 기쁜 소리들과 찬양이 성곽 앞에 가득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들이 수다한데 예수님께서 갑자기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그것도 그냥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 성경은 이 ‘우시며’를 ‘에클라우센’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냥 흐느껴 우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어서 큰 소리로 통곡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소리를 내서 슬프게 우시는 장면은 성경에서 흔한 장면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열렬히 환영을 받으시다가 갑자기 통곡하듯이 그렇게 흐느끼며 엉엉 울면서 이 예루살렘 성으로 가까이 다가가시는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는 항상 긴장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핍박과 논쟁이 그치지 않았고, 안으로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말씀으로 섬기시고, 치료로 봉사하시기에 쉴 틈 없는 생애를 사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은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백성들의 찬양에 둘러 싸여 환영을 받으시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시자 돌연 안색이 변하시면서 통곡을 터트리셨습니다. 주위에는 찬양소리가 그치고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백성들이 의아해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이 날은 분위기로 볼 때 함께 기뻐하고 하고 웃으셔야 할 시간이었지 통곡하고 우실 비극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폭력을 행사하시지 않는 분이었지만 결코 연약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강철같이 강한 분이셨습니다.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복음을 전하다가 이 동리에서 저 동리로 쫓겨나셔도 조금도 두려워 아니하시고 사랑하는 제자에게 팔려 체포당하시던 그 배신의 때에도 상심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의 순간에 조차도 보이시지 않던 그 눈물을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과 큰 비탄 속에서 오늘 통곡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 가까이 오셔서 목 놓아 우신 것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지만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통곡하셔야 했던 이유인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우신 사건에 대해서 이처럼 강렬한 울음을 뜻하는 단어 ‘에클라우센’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이곳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늘 예수님이 우신 이유를 가리켜서 ‘성을 보시며 우시고’ 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우신 것은 성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더 이상하지요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을 예수님 혼자 보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두 함께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았지만 예수님 따르던 많은 무리들 특별히 그 중에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이 통곡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그 성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우셔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수많은 세월처럼 그러했던 것처럼 어제처럼 견고히 서 있고 성문으로는 지난 주처럼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이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을 받은 성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성을 보셨습니다. 여기에서 ‘보시고’라고 되어 있는 이 부분을 희랍어 성경은 ‘이돈’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것은 그냥 본다는 뜻이 아니라 정신으로서 사물의 배후를 통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눈으로 보는 사물과 같이 대하는 쳐다봄이 아니라 사물의 배후를 꿰뚫어 보는 직관적인 통찰의 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외관상으로는 어제와 다름없는 편안한 성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랑하는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이 깃들여 있는 유서 깊은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도성을 영적인 통찰로 꿰뚫어 보셨고 이때 우리 주님은 목 놓아 우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목 놓아 우신 것은 어제와 다름없이 견고하게 서 있는 이 성, 천년의 언약이 깃든 이 도성이 무너질 심판을 미리 보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큰 소리로 우시던 예수님께서 울음 섞인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내 눈에는 숨겨졌도다”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선포가 아니라 차라리 홀로 되 내이시는 독백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등진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도 돌아서기에는 너무나 강퍅해진 종교적인 도시, 예루살렘을 사랑하시는 예수님도 이 성을 향해 40년 후에 다가오게 될 예루살렘의 역사적인 멸망을 바라보시면서도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뜻이기에 어찌할 수 없이 목 놓아 우시면서 독백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이름이 무슨 뜻이냐에 대해서는 구약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지만 대부분이것은 ‘우루 샬라임’이라는 말에서 왔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루’는 히브리서에서 ‘이르’가 되었고 그리고 ‘샬라임’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샬롬’이에요. 평화의 도성이라 이런 뜻이란 말이지요. 예루살렘은 문자 그대로 평화의 도성이었습니다. 이 도성은 무려 당시를 기준으로 볼 때 1500여 년의 언약이 깃든 하나님의 도성이었습니다. 모세시대로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하나님을 만날 장소를 예정하십니다. 이백성들이 모여 가나안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이 도성은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곳이었습니다. 이곳을 중심으로 하나님은 왕을 세우시고, 이곳을 중심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여호와의 통치를 행사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거룩한 언약의 성전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 유서 깊은 성 뒤편에서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영적인 통찰로 꿰뚫어 보셨습니다. 말씀하십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심판의 예언이 그 후로부터 정확히 40년 뒤에 얼마나 무섭도록 정확하게 예루살렘 속에 역사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아십니까? 예루살렘이 포위를 당하기 전 그 때는 마침 유월절이었습니다. 이 성에는 백만 여 명의 유대인이 모여 있었습니다. 로마의 장군 디도에 의해 포위당한 예루살렘은 보급이 끊기자 극심한 기근의 고통을 받았습니다. 주후 70년의 일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어 나갔고 급기야는 어린아이를 잡아 삶아먹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유대역사가는 전합니다. 주후 70년 6월 24일 아토니우 요새가 점령되고 7월 6일에는 항상 드리던 성전의 희생제사가 그쳤습니다. 8월 27일에는 예루살렘 성전의 위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문이 불에 타버렸고, 9월 24일에는 전 도시가 로마의 디도 장군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이날이 바로 예루살렘 최후의 날이었습니다. 그들의 점령에는 무자비한 약탈이 뒤따랐고 약탈을 위해서는 무자비한 살육이 이어졌습니다. 약탈의 거리 이곳저곳에서는 겁탈을 당한 부녀자들의 비명소리로 아비규환을 이루었습니다. 예루살렘성은 지옥을 방불케 하는 살육의 도성이 되었고 거리마다 유대인들의 피로 도랑을 이루었습니다. 형식적인 제사 속에서 위안을 제공했던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혀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수많은 동족들의 시체가 거리거리에 쌓여있고 살아남은 자들은 노예로 검투사로 개처럼 끌려갔습니다. 유서 깊은 종교도시였지만 그들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회개치 아니할 때 그곳은 결국 저주받은 묘지의 도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별고 없이 서 있는 예루살렘, 이 성이 머지않아 당하게 될 비참한 심판의 종말을 미리 보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등진 교회의 역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인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 비하면 이스라엘은 제법 도덕적인 민족이었고 그때에도 성전에서는 제사가 그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입술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오르내렸고 그들은 그렇게 종교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은 지금껏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끝까지 자신들이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고 회개치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눈앞에 다가온 하나님의 심판조차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너도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이라고 예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희랍어 성경은 오늘 이 부분을 이렇게 읽고 있습니다. “이 날에 너라도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라고 말입니다. 조국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등진 것을 몰랐습니다. 이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은 많은 종들을 보내고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치셨지만 그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40년 후에 다가오게 될 민족의 멸망도 몰랐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의 영적인 비밀을 사마리아가 모르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갈릴리가 알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갔습니다. 다가올 민족의 위기를 유다가 깨닫지 못하는 것도 납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도시가 다가올 민족의 멸망을 몰라도 예루살렘 너만은 그것을 알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백성들과 성읍들은 이것을 몰라도 예루살렘은 이렇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며 사는 민족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큰 재앙에 대해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공생애에 등장하시자마자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고 외치셨습니다. 일평생 예수그리스도는 바로 이렇게 그 백성들을 회개하고 사랑의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셨는데도 이 성은 깨닫지 못합니다.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 성은 눈앞에 다가온 심판의 운명을 철저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예루살렘성이 이처럼 눈 뜬 소경이 된 이유에 대하여 말합니다. “네 눈에 숨겨졌도다” 이 부분을 희랍어 성경은 ‘에클리베’라고 읽고 있습니다. 이것은 수동태입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보지 못하도록 감추어버림을 당한 상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백성들 그분과의 평화를 등진 교회의 비극적인 특징이 영적인 무지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그 사람들에게는 비록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드리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진리가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의 역사를 다루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이해가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압니까? 이 민족을 향해 목 놓아 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에 관심이나 있습니까? 저마다 예수를 믿고 복 받고 자기를 실현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방신상 앞에서 구하는 탐심과 부패한 욕망을 그대로 가지고 나아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기독교에 대해서 아는 바 없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에요. 믿는 것이에요. 이처럼 뜻밖의 통곡을 그친 예수님께서 방문하신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목 놓아 우시던 예수님이 격렬하게 행동하시는 분으로 변하셨습니다. 이변을 맞으신 것처럼 마구 분노와 흥분에 가득 찬 모습으로 변하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사람들을 내어 쫓고 상과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진노하시는 모습을 가르쳐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분(義憤)이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은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성질의 장면이 아닌 것입니다. 그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지요. 예전처럼 지난 절기처럼 사람들은 성전에 찾아왔고 작년에 하던 일을 올해도 되풀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전에서 제사에 쓸 동물들을 팔았다고 하지만 이 전통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과 바벨론, 로마에서 수난을 겪으면서 많은 동족들은 흩어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유대인들은 구약의 규례를 따라서 제사드릴 동물을 가지고 장소까지 와야 했는데 이것은 많은 어려움이 뒤 따랐습니다. 특별히 어려운 것은 이 동물들을 이동하는 데 따른 식량과 사료 그리고 배변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성전 가까운 동네에 와서 구입을 해 가지고 올라왔는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예 성전에서 이것을 구입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지요. 돈 바꾸는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돈 바꾸는 상을 둘러 엎으셨다고 했지만 당시 이 유대에서는 세 나라 돈이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헬라 돈, 로마 돈, 히브리 돈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헬라 돈과 로마 돈은 명복가치가 실질가치보다 훨씬 높은 일종의 악화(惡貨)였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돈을 이런 식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 앞에 가증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돈 ‘세겔’이 있었는데 이것은 명목가치와 실질가치가 거의 일치하는 표준 중량을 가지고 있는 화폐였습니다. 이 ‘세겔’만이 흠 없는 하나님의 예물로 이해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헌금의 편의를 위해서 이처럼 성전에서 돈을 바꾸어주는 전통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도 어느 날 갑자기 무슨 포고령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닌 듯싶습니다. 천천히 진행된 역사 속의 일이었지요. 많은 성경학자들은 재물을 팔고 돈을 바꾸어서 엄청난 이득을 제사장들이 착복했다고 주장하지만 F.F. 부르스같은 신약 학자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해서 증거가 별로 없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환영인파도 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들도 성전에서 별다른 하나님의 분노를 살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을 보십시오. 징그러운 뱀을 보시가나 한 것처럼 흥분하십니다. 오랫동안 전통적인 인습에 따라 매매하던 자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커다란 죄악의 현장을 목격하기라도 하신 것처럼 상과 의자를 마구 둘러엎으시면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본문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나는 여기서 이 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런 본문을 대할 때 큰 교훈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앞에 있게 된 거대한 기독교 그리고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종교적인 습관 그리고 오늘날의 현실, 이것을 대하면서 문제를 별로 못 느낀다는 것이지요. 커다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기도 그 한 물방울이 되어서 함께 흘러가기 때문에 자기의 시대를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고 그것을 비판하면서 옳은 길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치 격정에 들떠서 예루살렘에 예수님 입성을 환영하기는 했지만 이 성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못 느낀 백성들처럼 예수님께 헌신을 맹세하기는 했지만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한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그토록 거대한 기독교가 그리고 오랜 전통 속에서 계속되어온 교회가 많은 교회들이 그렇게 행하고 있는 그런 일들이 하나님 앞에 진노를 살만한 일이라고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도 거기에서 하나님이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교회의 역사가 흑암을 향했던 시대일수록 그리스도인의 의식은 그러했던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 예루살렘은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수천 년의 약속이 깃든 이 거룩한 하나님의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전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종교건물보다 성자 예수와 친밀해야 할 성전이 쏟아지는 하나님의 분노를 감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미 이 성전은 거룩한 약속의 전당이 아니라 진노의 굴혈이 되어 버렸던 것을 발견합니다. 이 시대의 교회와 우리들이 지금 그리스도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면 칭찬보다는 심판이 많을 것입니다. 문제는 도대체 누가 이러한 하나님이 보시는 시각을 우리에게 전달해 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시각에서 교회를 바라볼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하나님의 시각으로 교회를 바라보는 일이 없이는 교회는 변화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시각을 회복하게 될 때 우리는 교회를 바라보시는 주님과 같은 마음을 갖게 되고 그리하여 교회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할까 예수를 믿음으로 내 인생이 어떤 행복을 성취할까 보다 하나님이 이 시대 그리고 우리들의 교회를 바라보시는 마음이 어떤 마음일까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일 먼저 기도해야 할 것은 우리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역사는 항상 이러한 영적인 각성과 함께 새벽이 왔던 것입니다.
미국의 각성운동의 지도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18세기를 살았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천재에 가까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3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고, 6살 때는 자연철학에 관한 논문을 쓰고, 9살 때는 유물론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글로 밝혔습니다. 12살 때에는 자연철학에 관한 문제를 분석 평가하는 글을 썼습니다. 1716년 그가 13살 되던 해에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라틴어를 마스터한 채 고전을 섭렵하며 예일대학에 입학하고 4년 후에는 그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졸업식 때 축사를 라틴어로 말하였습니다. 2년 후에는 대학원을 마치고 예일대학의 교수가 되었는데 약관 19세였습니다. 그는 그 같은 예리한 지성이 불타오르는 복음의 열정과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화려한 학벌과는 어울리지 않게 뜨거운 가슴을 지닌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영광스러움을 회복함으로써 교회가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는 처절한 열망에 짓눌린 가슴을 가지고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1729년 창창한 학자의 길을 접고 메사츠세츠주 노스엠톤에 있는 교회에 부임하면서 끊임없이 외쳤던 것은 지옥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말씀을 그에게 주셨기 때문이지요.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신대륙으로 찾아왔지만 이제 이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영광스러운 신앙의 유산들은 다 사라지고 백여 년의 역사동안에 그들은 부패하고 타락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기도할수록 하나님이 타락한 교회와 방탕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의 외치라는 경고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주신 말씀은 지옥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는 6년 동안이나 무려 6년 동안이나 한 교회에서 이 지옥의 심판에 대한 설교를 계속하였습니다. 많은 교인은 교회가 그런 설교와 열정을 비난했고 자기 교인들도 단순한 위로와 심방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1735년 어느 날 지옥에 대한 설교를 들은 후 한 젊은이가 자살함으로써 교회는 큰 곤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주위의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동역자들의 태도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 열정에 사로잡혀서 외치는 고독한 설교자를 더욱 괴롭혔습니다. 많은 핍박과 회유에 직면하던 그는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기를 거부하고 23년 동안이나 정들었던 교회를 사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설교자의 예언적인 심판의 설교는 그 영광스러운 제1차 대각성 운동이 1741년 이후에 일어났을 때 왜 하나님이 이 순전한 사람 조나단 에드워즈를 설교자를 들어 사용하셨는지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조지 윗필드가 그 시대에 대해 이런 시각을 가지고 열정을 외쳤을 때 이 영광스러운 대각성에 함께 쓰임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1740년 8월 어느 주일로 기억합니다. 엔필드라고 하는 마을에서 도저히 교인들이 아무리 설교해도 변화되지 않는 교회의 목사가 이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를 강사로 초빙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와서 신명기 32장을 기초로 하나님의 심판을 설교했습니다. 이게 역사적으로 그 유명한 지금까지 설교 원고가 남아있는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죄인들’이라는 무서운 설교였습니다. 이 설교가 울려 퍼질 때 그는 지독한 눈이 나쁜 설교자였기 때문에 안경을 쓰고 그리고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한 손에는 설교 원고를 들고 읽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중간쯤 설교가 계속되었을 때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울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된 인간이고 오늘날의 교회가 얼마나 비참하고 슬픈 상태에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려움에 떤 목사님은 자기가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기어와서 에드워즈의 바지자락을 붙잡으며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달라고 탄원했고 냉정한 조나단 에드워즈는 “제발 좀 조용히 하십시오. 내가 이 설교를 계속 해야 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설교가 끝났을 때 폭탄이 떨어진 것 같은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고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수처럼 주님의 영광을 훼방하는 인간들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성력의 강력한 역사가 회중을 두루 뒤덮었고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미국의 제1차대각성운동의 시발이 되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몰라주셔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는 상관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본질이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고 세상의 사람의 마음속에는 세상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진정한 기독교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이제는 세상을 거스려야 할 뿐 아니라 교회의 일반적인 유행까지 거스르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토록 상상을 뛰어넘는 진노 끝에 주신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이 말씀은 이사야56장에서 인용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사야에 나오는 히브리어 원문은 이렇게 읽습니다. “왜냐하면 내 집은 그 모든 백성들을 위한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53장에서 메시야의 수난을 예언한 후 54장부터는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을 말씀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말씀이 인용된 이사야서 56장이 바로 이 문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영적으로 새롭게 깨어나는 은총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 때 이런 영적상황과 연결된 놀라운 변화가 성전에도 있을 것인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전이 그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집,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구원 받을 그 민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집,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이셨고 오늘 예루살렘 성전이 이 같은 하나님의 열망에서 떠나 잠들어 있는 것을 예수님은 목격하셨던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과 희랍어 원문은 이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 말하지 않고 모두 기도의 집, 소유격을 사용해서 기도의 집, 기도하는 것이 특징이 되어 버린 집, 구원받을 백성을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하나님의 집임이 잘 드러나지 않을 그 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시대 조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열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와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중심적인 일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섬김, 구원받지 못한 백성들을 위한 제사장적인 애끓는 중보의 기도가 없이는 교회가 결코 그 존재의 목적을 다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이 성전에 이처럼 진노하는 이것은 바로 이 집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동시에 몇 가지 점에서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무슨 뜻입니까? 매매하고 돈 바꾸는 일과 기도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더구나 이 매매하는 일과 돈 바꾸는 일이 갑자기 생기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위해 매매했으며, 무엇을 하려고 그들이 돈을 바꾸었습니까? 바로 그들이 제사하고 또 헌금하기 위해서 바꾸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기도는 교회에서 가장 중시되어야 할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둘째는 이런 매매하는 일과 돈 바꾸는 일이 기도하기 위한 교회의 영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많이 기도하면서 좀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해 고민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해도 왠지 그 기도가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는 현실을 느끼십니까? 먼저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돈 바꾸는 상을 둘러엎으십시오. 매매하는 자들을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몰아내기 전까지는 여러분의 기도는 불붙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자리 잡은 탐욕과 심령에 뿌리박은 더러운 것들을 몰아내기 전에는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도의 능력을 결단코 경험해 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기도하는 모습을 잃어버렸다면 여러분들의 특징이 단지 기도하는 사람, 아니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있지 않다면 오늘 이 유서 깊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고함치며 진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대면해 보십시오. “회개하라. 네 삶 속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들을 몰아내고 너는 기도의 사람이 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오늘날 이 시대의 교회와 그리고 초라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보입니까? 영광을 잃어버린 시대의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일이 중심 자리에 있습니까? 지금도 교회는 끊임없이 주님이 보내시는 성령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참으로 기도를 하는 일에 있어서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까? 우리가 참으로 기도를 압니까? 기도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단순한 언어가 아닌 것을 압니까? 마음을 다해 하는 기도, 이것 이상의 기도의 세계가 있는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기도의 진수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요? 기도 속에서 영적인 세력들이 맞붙고 그리고 칼날과 같은 세력들이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기도가 깊어지면 언어가 기도의 신음 소리로 바뀌어가는 것을 이해합니까? 피할 수 없는 영적인 전쟁 앞에서 우리는 기도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땀이 흐르도록 기도해 본 적이 언제 있습니까? 앉아있던 자리가 눈물로 흥건하게 젖을 정도로 그렇게 자신을 쏟아 붓던 기도의 때가 여러분들에게 있었습니까? 혹시 이러한 기도생활보다는 교회의 교제를 즐기고 신앙을 토대로 하나님 앞에 번영해 보려고 하는 욕망의 도구로 신앙을 이용하지는 않습니까? 이런 모습으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스런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고 우리 각자 각자가 변화되지 않고는 교회는 더더욱 변화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일에 충실할 수 없는 이유는 이 기도가 영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영적인 일인 것과 동시에 투쟁입니다. 육적인 교회, 잠들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무리하게 영적인 일에 자신을 헌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는 그분의 성품을 생각합니다. 우리의 죄악을 봅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우리의 마음을 교차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피상적으로 살아오던 모든 문제들 앞에 서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엄격한 일들은 잠들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잠잠히 기도로 섬기기보다는 몸으로 때우는 육체적인 노고를 택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가 이 세상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살고 좋은 꿈을 꾸는 것만으로는 하나님께 얼마나 헌신된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오직 그의 기도의 생활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보이지 않는 골방에서 드려지는 그의 깊은 기도의 세계만이 그가 하나님께 진정으로 헌신된 사람인지, 마음이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인지를 보여 줍니다. 기도, 그 세계를 생각할 적마다 나는 드넓은 바다를 기억합니다. 푸르고 끝없는 넓은 기도의 바다, 그 바다보다 하나님을 확실하게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깨닫게 만들어주지만 기도는 깨달은 그분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게 만들어 줍니다. 성경을 읽을 때 문자 이상의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는 일도 기도와 성령을 통해서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기도의 드넓은 바다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고 대양 한 가운데로 나아오기를 원합니다. 언제까지나 오랜 신앙생활이 지났는데도 바닷가에서 모래성이나 쌓는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도로 이 신앙의 바다 한 가운데로 나아오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기도의 바다로 나아갈 때 우리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파도를 경험합니다.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폭풍과 같은 소리를 듣습니다. 넓은 기도의 바다로 나아갈 때 우리는 그 바다에서 이 시대와 조국의 교회를 향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교회를 향한 애통하시는 주님의 눈물을 봅니다. 때로는 그 잔잔한 바다 속에서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교회는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얽매이고 있는 모든 닻줄을 끊고 기도의 바다로 나아가야 할 때인 것입니다. 특히 여러분과 같은 젊은이들이 이 마음에 모든 묶인 사슬들을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매여야 할 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고 춤추는 나라가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모두들 태평하다고 노래하며 춤출 때 그들은 금식하고 주리며 하나님께 통회하였습니다. 알지 못하는 수많은 백성들의 죄를 자신의 죄인 것처럼 짊어지고 나아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탄원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교회에 이런 깨우침과 영적인 각성을 주도록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아무도 보지 못하는 예루살렘의 다가오는 멸망을 미리 보시고 잠들어 있는 성전을 영적으로 통찰하시기까지 백성에게 싫어버린 바 되어 잠시 후에 십자가에 못 박히러 올라가시는 그 시간까지 예수님께서 살아오셨던 삶의 방식을 보십시오. 그분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피의 생애였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쏟으시는 땀의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생애는 눈물의 생애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생애가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려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다 쏟으신 피의 생애였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이 드리는 십자가의 보혈을 받으시기 전에 먼저 겟세마네동산에서 쏟으시던 땀과 눈물의 기도를 받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한 번도 아버지와 떨어져 본 적이 없이 동행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분이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면서 사셨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그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그분의 생애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기 이전까지 기도의 눈물로 얼룩진 생애였습니다. 광야의 40일의 기도는 그에게 얼마나 많은 굶주림과 희생을 요구했습니까? 바쁜 일과 수많은 논쟁, 봉사 속에서도 새벽 미명과 깊은 밤을 하나님의 것으로 따로 떼어 놓으시던 예수의 삶이 우리의 메마른 가슴에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겟세마네 동산을 올라보십시오. 잠들어 있는 제자들 곁에서 하나님께 매달리시는 우리 주님의 신음어린 기도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교회의 역사가 성령이 역사한 히스토리라면 이 성령의 역사 뒤에는 보이지 않는 기도의 역사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를 기록하고 선교의 역사만 전해도 하나님은 그런 권능을 가져오게 하였던 기도의 역사를 기록하고 계십니다. 선교의 역사 속에서 구원 얻은 무리들과 함께 천국에 설 때 우리는 비로소 이름 없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위해 목 놓아 기도하였던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가들이 기록하기를 빼놓았던 기도의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을 보게 것입니다. 무릎이 약대다리처럼 굳어지고 아직도 그 뺨에 눈물 자국이 지워지지 않은 교회와 역사를 움직였던 하나님의 기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여러분의 교회와 공동체가 이 민족을 이끌 영적인 지도력을 회복하기를 원한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에 이때에 여러분들의 관심사가 이 세상에 성공하고 부자가 되어 행복하게 사는 것에 있고 연애하는 것에나 마음이 팔리고 그리고 좋고 값비싼 장신구를 모으는 것에만 마음이 팔리고 이 세상에서 스펙을 늘려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승승장구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소원의 전부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너무 불쌍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미국의 2차 대각성 운동에 사용되었던 찰스 피니의 생애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인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어쨌든 19세기 미국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복음전도자입니다. 그러나 그를 위해 기도하던 사람은 아벨 클러리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는 찰스 피니를 위해 기도로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루 14시간 이상 계속되는 살인적인 기도로 피니의 각성운동과 전도사역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가 병약한 몸으로 자신을 기도의 싸움에 드렸을 때 1830년 로체스터 시에서 피니가 복음을 외쳤을 때 교회는 각성되었고 교회 밖의 사람들은 교회 안으로 회심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세 교회에서 피니가 집회하기로 계획 되어 있는데 그 중 한 교회는 목사를 내어 쫓으려고 궁리하고 있었고 나머지 두 교회는 목사끼리 서로 고소해서 법정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해 피니가 그 도시에서 6개월 동안 복음을 외치자 잠들었던 교회들은 깨어났고 10만 여명이 넘는 잃어버린 영혼들이 회개와 각성의 물결에 떠밀려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1613년 아일랜드에서는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 일곱 사람이 무릎으로 헌신할 대 그 유명한 얼스터의 대각성운동이 부패 속에 잠들어 있던 죽음의 땅 아일랜드를 강타하였습니다. 병들어 쇠약한 제임스 그랜들링이라는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의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고 그리스도인을 깨우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병이 많은 몸을 이끌고 예수의 심장으로 잠들어 있는 교회와 부패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부르짖을 때 때 올드 스톤의 집회에서는 그의 선포 앞에 12명의 악한들이 졸도해서 들 것에 실려 나가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무명의 그리스도인인 요한 웰치, 그가 그의 사위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가 낙스(Knox)를 위해서 하루에 8시간 씩 기도하며 3000여 명의 영혼의 중보기도자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타락한 땅 스코틀랜드 위에 역사적인 장로교회가 서게 하셨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한 시대를 깨우고 하나님의 교회를 영광스럽게 한 사람들은 운동가이기 전에 설교가였고, 설교자이기 전에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시대를 깨우고 교회가 영광스러움을 회복 하는 데 있어 하나님이 사용하신 사람들은 너무나 다양합니다. 요한 웨슬레와 같이 60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난 90이 넘도록 살았던 탁월하게 건강한 사람을 사용하시는가 하면 한번 설교하고 한 사발의 피를 쏟고 쓰러져야 했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와 같이 쓰러지려 죽을 듯 연약한 사람들도 사용하셨습니다. 에드워즈와 같이 백년에 한번 날까 말까 한 천재도 사용하시는가 하면 드와이트 무디처럼 초등학교를 중퇴한 무학자를 사용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무명한 목사를 사용하시는가하면 무명한 평신도를 전도자로 사용하시기도 하셨고 한 시대를 일깨우기도 하셨습니다. 질그릇같이 연약한 사람들을 사자처럼 사용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하던 루터, 바쁠 때 더 무릎을 꿇기로 결심하던 기도의 사람 마틴 루터를 들어 독일과 유럽의 교회를 일깨워 성경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얼어붙은 땅, 눈 덮인 숲 속에서 폐결핵의 3기의 몸으로 버림받은 인디언들의 영혼을 위해 피를 토하며 기도하던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를 통해 수백 년 동안 우상숭배로 잠들었던 아메리카의 하늘 아래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세우셨습니다. 화영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기도하던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가 보헤미아의 요한 후스를 칠흑같이 어둡던 중세 암흑의 교회사를 밝히는 종교개혁의 새벽별이 되게 하셨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오직 기도에만 바쳤던 보스톤 신학교의 수재 아도니람 저드슨을 들어서 생명이 없는 죽음의 땅 불교, 불교에 잠들어 있던 미얀마를 일깨워 6만여 명의 가슴 속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집으로 회복되는 일이 없이는 세상을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일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부탁하시는 바입니다. 여러분들의 공동체가 이민족을 향해 아무리 많은 비젼을 품고 이와 유사한 집회를 수없이 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이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고 교회를 위하여 예수의 마음으로 눈물을 흘릴 때 여러분들은 연약하지만 갈대 같은 여러분들을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이 위대하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그분의 손에 붙들려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교회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이 치욕스러운 시대에서 교회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으로 나타나기를 소망한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 합니다. 교회가 기도의 집이 되게 하는 일에 여러분들의 기도의 헌신을 보태십시오. 기도가 여러분들의 신앙의 인격의 특징이 되게 하십시오. 여러분들이 다시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할 때 여러분의 공동체는 깨어날 것이며 교회는 영광스러움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조국의 교회들이 그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될 때 이 강퍅한 불신앙의 시대, 이 시대의 사조에 의해서 굽어진 이 백성들의 가슴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강철같이 굳은 이 백성의 뺨에도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는 감격의 눈물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역사의 새벽은 밝아올 것입니다. 깨어있는 소수는 잠들어 있는 다수보다 위대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을 하나님은 부르고 계십니다. 얽매이기 쉬운 모든 죄를 떨쳐버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돌아와 이 민족과 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곡히, 간곡히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