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닮은 기도생활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고 마치시매”(눅 11:1).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몸과 마음에 익숙하게 붙어서 처음하는 사람보다는 잘 하게 되는 것들이 쾌 많이 있습니다. 전 맨 처음 교회 나갈 때 제일 힘든 것이 찬송이었습니다. 남들 다 부르는데 그것을 몰라서 어디 쭈그리고 앉아 있어야 한다는 그것이 굉장히 자존심 상하게 만들었어요. 가보니까 아는 찬송도 있더라고요. “손들고 옵니다 ” 올드랭자인이었어요. 그런 것은 가곡집에서 들어서 아는데 아주 재수가 좋아야 어쩌다 한번씩 부르지 모르는 거요. 그런데 한 5년 10년 다니고 보니까 이제 가사 일절만 보아도 줄줄줄 나와요. 예배시간도 마찬가지죠. 그렇게 신앙생활하면서 익숙해지는 것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신앙생활을 해도 절대로 저절로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뭘까요? 그것이 기도생활이죠. 다른 것은 잘 하다가 못하게 되는 것이 거의 없어요. 성경을 잘 찾던 사람이 은혜가 떨어졌다고 구약을 신약에서 찾고 신약을 구약에서 찾는 경우가 있습니까? 찬송을 잘 부르던 사람이 은혜가 떨어졌다고 가사가 생각나고 곡조를 까먹는 적이 있습니까? 안 그러거든요. 그런데 이 기도는 전혀 틀려요. 기도는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 없어요. 잘 될 때가 있는가 하면 꽤 오래 예수를 믿었는데도 오늘 처음 회심한 사람보다도 기도를 못할 때가 있는 것이예요.
그래서 우리는 기도에 익숙해지는 비결이 없을까 생각하는데 사실은 기도의 비밀은 사랑에 있어요. 사랑. 그리고 사실은 기도가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익숙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통이고 교통의 문을 여는 것은 거래관계가 아니고 사랑의 관계가 그 문을 열기 때문이죠.
제가 오늘 이 얼굴에 TV 출연하고 왔습니다. 갔더니 분장실에서 화장을 잔뜩 해줘요. 근데 너무 많이 발라. 그래서 내가 자매보고 그랬어요. 이것은 분장이 아니라 변장의 수준이네. 아, 그래도 별로 안 바른 것입니다. 그래서 출연을 했어요. 도덕적 통치라는 새책 인터뷰를 하는 장면인데 그 두 사람이 한 사람은 연출자이고 한 사람은 저와 대담하는 아나운서로 나오는데 그 어려운 책을 열심히 읽었더라고요. 읽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회자는 감격을 하면서 자기 생애에 이렇게 은혜를 받은 책은 없다고 그러면서 자기 교회에서 자기가 많은 평신도를 훈련시키고 있는데 이번에 이 책을 전부다 레포프로 내 주어야겠다고. 그 사람들은 참 괴롭겠죠? 그런데 너무 감격을 한 것이예요. 난 그런 것도 모르고 이렇게 스튜디오를 들어가는데 두 사람이 활짝 웃으면서 나를 맞이해 줘요. 인사성 치고는 참 분위기가 좋다 그랬는데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나와 정신이 일치되는 것을 느꼈던 것이죠. 그러면서 책을 읽으면서 그 하나님의 은혜에 세계, 이 우주의 무한함, 그 속에서 하나님이 이 만물을 붙들고 통치하시는 그 위대한 능력, 이런 것을 자기가 경험했다는 것이죠. 그 책 나오고 나서 이런 이야기를 별로 들은 적이 없었거든요. 아무도 끝까지 읽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웃는 사람은 모두 찔리는 사람들이죠. 그러더니 인터뷰를 하는데 적절한 질문은 하면서 연출자가 감독이 그만 끝내라고 사인을 계속 내보내는데도 우리는 계속 수다 떨다 왔어요. 편집하거나 말거나.
그런데 그런 것들이 뭐냐면 사랑이예요. 인터뷰가 다 끝나고 이제 나도 가야하는데도 이야기 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나도 만약 한 시간 정도 시간이 있었다면 마치 그분이 치과 의사예요. 아마 그랬더라면 탁자를 놓고 마주앉아 이빨에 대해서는 내가 별로 할 말이 없지만 인간의 몸과 그리고 우주의 이치를 가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는데 아마 우리가 굉장히 은혜 속으로 들어갈 만한 상대였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게 뭐냐면 사랑이예요. 사랑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많이 교통하고 싶은 거요. 내가 가장 하기 싫은 것이 모르는 사람과 밥 먹는 것이었어요. 처음에 목회할 때 제일 힘든 것이 새로운 사람 신방가서 밥 먹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예외가 있어요. 이 사람이 이미 은혜를 많이 받았을 경우에는 하나도 어색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벌써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고 우리가 진리 안에서 서로 교통하고 있기 때문에 너무 편했어요. 우리 집사람이 이제 그만 심방 끝내고 가자고 자꾸 다리를 툭툭쳐요. 그래도 계속 할 이야기 하는 거요. 그래서 어떤 집에 가서는 7시에 심방 가서 한 11시 쯤에 되서 나온단 말이예요.. 그게 뭐냐면 사랑의 교감이 있으면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교통이 저절로 와요.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이 속에서 말을 만들어 내려고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이것은 높은 사람 의무적으로 만나는 사람 하옇튼 할 이야기 없어서 여기서 계속 말을 만들어 내야 돼요.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그러면 저 사람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저렇게 말하면 내가 이렇게 받아쳐야지. 이속에서 계속, 그러니 피곤하죠. 이걸 하면서 밥을 먹으니 100% 체하죠.
그러니 주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으면 언어가 쭈욱 하나님을 향해서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거죠. 계속 흘러가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기도에 익숙해지지 않는 것은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순일의 사랑이, 순전하고 하나인 그 사랑이 변함없이 계속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이 기도의 통로는 수시로 막히게 되는 거죠. 회개했을 때 기도가 잘되죠. 또 성령의 은혜를 흠뻑 받았을 때 새 술에 취한 사람처럼 기도가 막 쏟아져 나오죠. 둘 다 은혜를 받았을 때 성령의 강한 임재가 있었을 때 둘 다 우리에게 똑같은 효과를 불러 일으켜요. 그게 뭐냐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불러 일으켜요. 그러니까 두 번 반복할 테니까는 가슴에다가 새기세요. 그러니까 삶 속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없는 사람들이 기도만 잘 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예요. 다시, 삶 속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없는 사람들이 기도만 잘 하려고 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라 이거죠. 되지도 않는다 이거죠. 그러니까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기도가 그 속에서 한없이 마음과 영혼 안에서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오는 그 열렬함이 만약에 있다면 그 사람은 기도의 자리로 나오기 전에 삶 전체에서 최고의 관심을 자기의 영혼과 마음 안에 유지하고 산 사람이예요.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것이예요. 그래서 기도가 나오는 것이예요.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와요. “예수께서.... ”. 그랬거든요. 기도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셨다는 이런 얘기죠.
사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면에서 기도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었죠. 우선 첫째는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셨어요.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우리의 죄를 씻고 하나님과 화목을 회복하기 위한 기도예요. 대부분이.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시작할 때는 고백부터 먼저 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어요. 만약 죄가 없으셨다고 하더라도 죄를 지을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계시다면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예수님도 열렬하게 기도하셔야 되겠죠. 그런데 예수님은 죄를 지을 가능성도 없으신 분이셨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셨기 때문이예요.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 모순된 행동을 하실 수 없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모순된 행동을 해요. 건강이 안 좋은 줄 알면서도 담배 계속 피잖아요. 자신의 영혼에 해가 되는 줄을 알면서도 계속 죄를 짓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행동 안하신다 이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으신 분일뿐만 아니라 죄를 지으실 가능성도 없는 분이셨어요. 그러니까 우리와는 비교가 안되잖아요. 그런데도 기도하셨어요.
두 번째는 누가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은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신 분이셔요. 이것은 두 가지로 언급이 되죠. 성령은 우리에게 은혜를 가져다주고 또 성령은 우리에게 능력을 가져다주어요.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자꾸 은혜가 떨어지기 때문이예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은 무한하시지만 우리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유한해요 무한해요? 무한한 것이 아니라 무안한 것이겠지? 다 까먹어서. 주일날 실컷 받고 5일 동안 다 까먹었으니까 무안하지. 하나님은 무한하시지만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하지 않아요. 무한하다면 무엇 때문에 와서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려요? 그런데 예수님은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그 은혜가 그분의 인격 안에 무한했어요. 또 능력도 예수님은 무한했어요. 우리의 능력은 무한하기는커녕 정말 없어서 무안할 지경이예요. 그래서 매 순간 우리의 약함을 봐요. 우리의 능력 없음을 봐요. 우리가 얼마나 초라한 인간인지를 발견해요. 그러면 우리가 주님 앞에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근데 예수님은 기도하실 필요가 없으셨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실 필요가 없었는데도 그렇게 기도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우리를 위한 것이었어요. 아주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만약에 예수님이 기도를 안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기도를 안하셨다면 사단에게 하루종일 끌려 다니셨을까요? 만약에 예수님이 기도를 안하셨다면 사단이 나타나서 “야 이 돌맹이를 떡이 되게 한 번 만들어봐라” 그럴 때 예수님이 배 고프셔서 하나님을 시험하면서 돌맹이로 떡을 만들어서 꿀꺽 잡수셨을까요? 그런 실수가 없다 그랬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기도는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셨어요. 주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주 연약한 인간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유한한 인간으로서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의자하며 사는 것처럼 꼭 같이 그렇게 일생을 사셨어요. 그것이 바로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예수님의 모습이예요. 하나님이신데 그 신성을 파 버린 것이 아니라 신성을 감추시고 스스로 겸손하게 인성을 취하셔서 인간과 같은 연약함을 그대로 가지신 자인 것처럼 죄는 없으시지만 연약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사심으로써 우리를 위한 중보자로서 자신이 중보하여야 할 우리 인간의 약함을 이해하고 또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고 죽으실 수가 있었던 것이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사랑을 받고 어떻게 능력과 은혜를 공급받으며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생명과 사랑을 누리고 넘치도록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는지를 배워가는 그 비결로서 예수님께서는 깊은 기도의 생활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예요. 기도의 생활을 보여주신거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연약한 육신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주님과 교통하고 그 능력을 받으며 살 수 있는지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셨던 것이예요. 그래서 오늘 예수께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기도하셨으니 우리 같은 인간들은 기도해야할 필요가 얼마나 많이 있겠어요? 얼마나 많겠어요? 성경지식은 한번 배우면 좀처럼 잊어버리지 않고 많은 종교적인 의무들을 행하는 것도 오래도록 행하면 그것이 몸에 붙어서 버릇이 되지만 기도의 심오한 세계는 매일매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으로 주님 앞에 깨끗이 씻겨 다시 태어나는 신생의 반복이 없이는 결코 열렬하고 풍부한 기도의 광맥 속에서 살 수가 없는 것이에요. 없는 것이예요. 그러니 우리가 많은 사람에게 중보기도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할 의무가 감퇴하는 것은 아니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하셨으니 우리도 기도하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예요.
두 번째는 예수님이 어디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나요? ‘한 곳에서... ’라고 되어 있죠. 사실 이 한 곳은 1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예요. 그것은 너무 당연하잖아요. 한 곳에서 기도하시지 예수님이 두 곳에서 기도하시겠어요? 이것은 원래 희랍어 성경에서 보면 어떤 장소예요. ‘도포티미’라고 되어 있는데 ‘어떤 장소에서’. 그래서 어떤 영어 성경에 보면은 ‘in a certain place'라고 나와요. 어떤 한 곳에서 이렇게 나온다 이거죠. 어떤 곳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것이죠. 예수님의 생애는 일생동안 머리 둘 곳 없는 생애였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가리켜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가 어느 곳에서는 들판이라고 되어 있고, 어느 곳에서는 광야라고 되어 있고, 어느 곳에서는 한적한 곳, 어느 곳에서는 강, 어느 곳에서는 감람산 이라고 되어 있어요. 이렇게 예수님이 기도하는 장소가 다양한 이유는 예수님의 생애가 대부분 여행하시는 생애였기 때문이었죠. 죄인들과 치료가 필요한 병자들을 찾아다니며 섬기신 생애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주거는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어디를 가시든지 기도할 장소를 찾으시고 그 어떤 곳에서 항상 하나님 앞에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하셨어요. 그 시간이 새벽과 깊은 밤이었어요. 그 왜 하필이면 새벽에 기도를 하셔서 우리를 그 본을 따라가느라고 이렇게 고달프게 하실까? 어제는 제가 집회를 두 군데나 하였거든요. 마지막 집회는 하늘영광 교회란 곳에서 했는데 얼마나 힘을 쏟아서 설교를 했는지 집에 들어와서 자리에 누우니까 12시가 좀 넘었어요. 새벽에 도저히 못 일어나겠어요. 온 몸이 쑤시고 머리는 이상하고 토할 것 같았어요. 그래도 요새 교인들이 기도하는데 대게 게을러지는데. 그리고 힘들게 일어났어요. 그 한 시간만 더 자면 편할 텐데 왜 새벽기도란 것이 있어가지고 외국에는 새벽기도 있는 나라가 없어요. 이것은 초유의 사태요. 그래 어떤 목사님이 새벽기도를 만든 사람을 원망하면서 그 시대는 노인들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원래 새벽이 되면 무릎 팍에서 바람이 나오고 잠이 안와, 그래서 새벽기도를 만들어서 후대의 사람을 고달프게 한다고 투덜거리는 것을 보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고 예수님이 새벽에 기도를 하셨던 거예요.
지금으로부터 한 7~8년 전에 성경을 읽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셨을까? 신체적으로 제일 힘든 시간인데 왜 그러셨을까? 심오한 뜻이 있는 줄 알고 며칠동안 고민하면서 탐색을 했어요. 어느 책을 찾아보아도 안나와요. 마지막 많이 생각하고 내린 결론은 예수님이 이 새벽의 시간에 기도하신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무슨 뜻이냐 하면 새벽의 시간에 무슨 심오한 뜻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낮에 기도하면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 생기겠어요? 예수님한테는 참 좋지만 이 병든 사람들은 예수님 좀 만나서 고쳐보려고 왔더니 예수님 기도시간이라고 그러면서 문 닫고 산으로 올라가버렸단 말이예요. 그 피고름이 나와서 쩔쩔매는 사람, 진리를 몰라서 무지막지한 사람, 이 얼마나 갈 곳이 없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당신께 나올 수 있는 시간에는 그들을 섬기시고, 그리고 그들이 잠들어 있는 시간 새벽 미명과 깊은 밤에는 예수님이 기도로 당신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셨던 것이죠. 그러니까 당연히 예수님께 치료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잠을 많이 잤겠어요? 예수님이 많이 주무셨겠어요? 그렇죠. 두말할 필요 없죠., 그것이 예수님이 희생하신 생애였어요. 한 15년 전인가 마가복음 1장을 읽다가 펑펑 울었어요. 예수님이 안식일에 행하신 일들이 쭈욱 나와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그리고 병자를 고치시고, 그리고 베드로의 장인의 집에 심방을 가셔서 그를 고쳐주시고, 숙소로 돌아오셨더니 병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이었어요. 내가 너무 피곤하니 내일 보자 그렇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 다 기도해서 고쳐 주셨어요. 기도만 해 주셨겠어요? 어떻게 똑바로 살아야 되는지 한 사람 한 사람 다 가르쳐주셨어요. 그리고 잠자리에 드셨으니 새벽 아니겠어요? 근데 그 다음 성경구절이 무엇이예요.? 이튿날 새벽 미명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한적한 곳에 가셨다
♬ 머리 둘 곳 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 그렇게 하루 종일 고단한 일과를 보내시고도 이튿날 새벽에는 제자들이 아직 잠들어 있는 사이에 홀로 조용히 숙소를 빠져나와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 아직까지도 새벽의 별들이 총총한데 엎드려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어요. 그렇게 기도하시는 그 모습을 생각하면서 나의 삶이 얼마나 게으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참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나요 . 나이가 드니까 이제 이런 싸움에 있어서 점점 더 불리해지는 거죠. 부패한 성품도 늘어나지만 진짜로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조금 무리하면은 건강에 이상이 올 것 같은 두려운 생각이 드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젊어서 육체의 힘이 남아 있을 때에는 마음이 부패해서 그렇게 못살고, 후에 많이 성화되어서 마음이 순수해져도 이번에는 마음이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져서 잘 못사는 거죠. 그러니 우리의 이 약함을 얼마나 해야 되겠습니까? 환경을 능가하는 예수님의 기도의 생활을 보여주시는 것이죠? 우리들이 핑계를 대기 시작하면 그러면 우리는 계속 무한히 뒤로 물러갑니다. 악한 마귀의 우리를 공격하는 목표는 우리를 단숨에 끌어다가 죄 가운데 몰아넣은 것이 아니예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예요. 그래서 제일 먼저 서서히 우리를 무장해제 시키는 것이예요. 서서히 서서히 무장을 해제시켜요. 그렇게 놓고 능력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 우리를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우리를 제압하는 것이죠. 그래서 분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육신이 마음 먹은대로 움직이면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반드시 무장해제를 당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예요.
마지막 세 번째는 ‘예수께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라고 나와요. 여기에 예수님의 기도의 비밀이 숨겨져 있어요. 원래 이 ‘마치시고’라는 희랍어 단어는 ‘에파오사토’ 라는 단어인데 그 말은 ‘쉬다’ 그런 뜻입니다. 이것의 히브리어 동치어가 ‘샤바트’라는 단어예요. 여기에서 ‘샤바트 데이’라는 안식일이 온거죠. 창세기 1장에 보면 예수께서 천지를 창조하고 쉬시니라 할 때에 그 단어예요. 그러니까 정확히 번역하면 예수님이 기도하시고 쉬시매 이렇게 되는 거죠. 예수님의 기도가 공중전화를 거는 것 같은 아주 간략한 용건만 아버지 앞에 드리는 가벼운 기도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육체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 마음으로 쏟아 부은 장시간의 기도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런 장시간의 헌신적인 기도 속에서 예수님의 몸과 마음은 녹아내렸어요. 그래서 너무나 많은 육체의 기운을 소진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연약한 인간의 육신을 가지신 인간의 몸이었는고로 쉬시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는 것이죠.
기도는 많이 해야 합니다. 기도는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짧은 시간에 기도해서 하나님을 움직이는 큰 능력을 불러오는 기도의 사람들은 모두 그 짧은 기도가 있기 전에 평소의 기도 생활이 깊고 장시간을 헌신하는 기도의 세계를 가진 사람들만 짧은 시간 기도해서 위대한 능력을 이 땅에 불러내릴 수가 있는 것이예요. 여호수아를 생각해보십시오.. 가나안을 정복하던 여호수아는 가나안 족속을 따라서 추격전을 벌일 때 해가 지는 것을 보았어요. 날이 어두워지고 나면 지형지물에 익숙한 가나안 원주민들은 이스라엘 군사들을 따돌리고 도피할 수 있잖아요. 그때에 그는 하늘에 있는 달과 그리고 태양을 향해 명령했어요. 거기 멈추라는 것이었죠. 이것은 변형된 기도죠. 한순간에 외쳤는데 그 일이 그대로 이루어졌어요. 그러면 평소에는 탱탱거리고 놀다가 위기가 닥치니까 ‘태양아 멎어라’고 소리를 쳤다면 여호수아는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니겠습니까? 믿음으로 하면 된다고 그러지만 믿음은 영혼과 정신의 작용이게 때문에 평소 하나님과 친근하게 그 기도의 능력을 경험했던 사람들만 필요한 시간에 믿을 수 있는 것이지 평소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믿습니다’를 계속 연발해도 이 속에서 안될걸, 될까, 안될 거야. 안될 거야 자기가 부인해도 계속 연상이 떠오르는거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했을 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지도하는 지도자의 자리에 있을 때 그를 돕던 조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회막을 만들고 하나님 앞에 중보 기도하는 사람을 그 회막으로 모이게 했을 때 모세는 피곤해서 떠났어도 이 여호수아 중보자는 그 회막에 남아서 온 밤을 밝히며 하나님 앞에 장시간에 기도로 헌신했던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전화 걸듯이 주님을 호출하는 식의 그런 기도는 물론 신앙이 어리니까 하나님이 그런 계기를 통해서라도 기도의 세계로 불러들일 수 있지만 그것이 기도의 세계의 전부 다라면 기도는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기도를 통해서 하늘의 위대한 능력을 경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예요. 우선은 깊어지기 위해서는 시간적으로 긴 기도여야 합니다. 근데 그것이 우리의 몸과 영혼에 모두 어려운 일이예요. 새벽에 몸이 좀 좋지 않은 상태에서 서너시간 엎드려 있으면 일어나면 온 몸이 막 쑤시는 거요. 그것도 기도가 아주 잘돼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올 때는 우리의 영혼의 자유함이 있고 은혜 때문에 이 육체의 힘도 이기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모두 피곤하게 되는 것이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끊임없이 싸워야 되는 거요. 왜 오늘날 예수님의 사람들이 자기반성 없이 사는 줄 알아요? 기도를 안하기 때문에 자기의 기도가 막혔다는 것을 몰라요. 막혔다는 것을 알면 내가 하나님 앞에 뭘 잘못했을까 하나님이 나를 왜 슬퍼하실까 이러면서 하나님 앞에 고민할 텐데. 뚫려봤어야 막힌 걸 알지. 원래 계속 막혀 있었기 때문에 인생사는 것이 이런 가보다, 신앙생활이란 것이 원래 이런 건가 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아예 기도를 안하고 사는 거죠.
우리의 죄가 기도를 막는 것이죠. 기도가 죄를 막는 것은 몇 가지 단계를 거쳐요. 첫째는 기도가 필요할 때에 준비되어있지 못한거죠. 군인들이 보면은 특별한 경계근무를 서는 사람은 모두 군화의 끈을 풀지 않은 채 완전 군장을 해서 옆에 놓고 그리고 모자까지 손에 들고 잠이 들어요. 호르륵 하고 호각이 불거나 비상벨이 울리면 5분 안에 사건이 발생한 지역에 도착하는 것이 목표예요. 그래서 3분대기조, 5분 대기조라고 부르는 거죠. 기도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이 기도의 은혜로 꽉 차 있으면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 상황이 발생하면 그 자리에서 기도가 막 쏟아져 나와요. 그런데 죄는 우리에게 이런 것을 허물어버리게 만드는거죠. 그것이 첫 번째 단계에요. 거기서 시작을 해서 그래서 서서히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잠식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끔 만드는거죠. 그 다음에는 기도의 의무에 게으르게 만드는 거죠. 그리고 그 다음에는 기도하기를 싫어하게 만드는 거죠. 그 다음에는 기도하지 않는 자신을 합리화 시키게 만들어요. 이렇게 해서 점점 기도의 세계 속에서 멀어지고 그의 삶속에서 기도를 실천하는 이 다급함과 열렬함은 거의 모두 사라진 채 껍데기만 살아가게 되는 것이예요. 그래서 많이 애쓰고 수고하는데 영적인 열매가 없어요. 늘 보따리 들고 바쁘게 교회 다니는데 인격은 변화가 안돼. 어려운 일이 생겨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기기보다는 인간의 술수와 방법을 고안해내느라고 마음은 온통 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 차고 평강이 없어요. 이런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세상을 향해 자신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는 하나님이 함께 하셔셔 위대하고 큰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하는 이 창조적인 믿음 이런 것이 없어요. 환경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죠. 믿음에 도전을 하지 못하는 것이죠. 그것에 대한 치유책이 바로 장시간 엎드리는 것이예요. 장시간 엎드리는 것이예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기도할 시간이 안나요. 저도 그런 것이 제일 안타까와요. 그런데 역으로 많이 일하는 사람은 더 많이 기도해야 돼요. 배에다가 물건을 실었어요. 많이 물건을 싣기 위해서는 많이 물건을 실은 배는 더 많이 물에 잠겨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죠? 훌러덩 뒤집어 지는 거지.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도 배 밑창이 물 속으로 쑤욱 들어가지 못하게끔 배를 만든다면 판자데기 위에 바다위에 짐을 쌓아놓은 격일 것 아니예요? 그러니 훌러덩 넘어지지. 그러니까 배에 짐을 많이 실은 배일 수록 배는 깊이 바다 속에 잠겨야 돼요. 그러고 항해를 해야 돼요. 일을 많이 하려면 더 많이 기도해야 돼요. 더 거룩해 질려면 더 많이 기도해야 돼요 더 능력 받으려면 더 많이 기도해야 돼요. 예수님이 기도하신 이 모범을 본받아서 여러분도 이렇게 기도하며 --하시는 주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