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과 관상기도 1
(A Study of Contemplative Prayer in Reformed Perspective)
녹취자: 김경애
제 1장 관상기도의 의미와 배경
Ⅰ. 관상기도란 무엇인가?
오늘 우리들이 공부해보고자 하는 것이 ‘관상기도가 무엇이냐?’ 그리고 ‘관상기도가 우리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어떤 것인가?’ 하는 이 문제를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관상기도라는 것은 최근에 한국에 도입이 되어서 여러분들은 지금 시골의 외딴곳인 평촌에 모여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지만 한양에 가면 그쪽에는 상당히 많이 보급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관상기도라는 것을 하는데 그 관상기도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들이 여태까지 알고 있는 기도는 그저 무릎을 꿇든지 앉든지 혹은 신체가 너무 불편하면 드러누워서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나의 사정은 이렇고 이런데 하나님 이렇게 저렇게 저를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거나 아니면 ‘내가 이러이러한 것들을 생각해보니까 잘못했는데 나를 정말 용서해주십시오. 내가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우리들이 기도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기도의 전통적인 개념들을 깨고 그리고 명상을 통해서 하나님과 직접적인 대면을 경험하는 그런 신인교통 혹은 신일 합일의 관조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자면 언어가 없는 침묵의 기도 속에서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먼저 관상기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들이 관상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하는데 여기서 관상이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점쟁이가 보는 그 관상하고 비슷한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논리를 초월해서 무엇인가를 딱 응시해서 한 번에 그 본질 같은 것들을 파악하고 의미들을 찾아내는 것을 가리켜서 관상이라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관상이라는 말을 라틴어로는 ‘콘템플라치오’(contemplatio) 그리고 희랍어로는 ‘테오리아’ 라고 그러는데 ‘콘템플라치오’ 즉 ‘콘’=무엇과 무엇이 함께 라는 단어와 ‘템플’=성전 말하자면 제사를 지내는 신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신전에서 신과 함께 교통을 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이제 어떤 직관, 체관, 아니면 관조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고 테오리아도 뜻이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일찍이 플라톤의 철학부터 시작되어서 이 세계는 인간이 볼 수 있는 가지적인 세계, 이것은 인간의 보고, 듣고, 하는 이런 오관을 통해서 접촉해서 정보를 날라다 줄 수 있는 세계입니다. 그런 세계가 아닌 이제 영적인 세계 지성으로만 이해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세계, 이런 세계가 더 상부에 존재하고 그리고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물질세계 이런 것들은 하부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 하부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서 연결을 찾아내는 이것이 인간이 참으로 사물의 이치와 본질을 깨닫는 가장 중요한 비결이라고 보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상부에 있는 이 세계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니고 냄새가 맡아지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 하부의 세계를 보는 것 같은 감각을 가지고는 상부의 세계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지성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지성은 인간의 지성은 물론 이것이 칸트 이후로 내려오면서부터는 지성의 개념 자체가 다 밭을 갈아엎듯이 다 뒤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개념에서 보면 이 지성은 오성과 이성으로 나뉘게 되는데 이성은 그야말로 원인과 결과를 추론해서 사물의 힘의 관계들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구름이 끼면 비가 온다. 비가 오면 땅이 젖어서 미끄럽다.’ 이런 것은 전부다 이성의 추론에 의해서 일어나지 않았어도 예상을 하고 사라졌어도 거꾸로 추측을 해서 찾아내는 이런 기능들을 우리들이 추론의 기능이라고 그러는데 이것을 이성의 기능이 담당하는 것이고 이런 이성이 오늘날 우리들이 일반적인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는 가장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뛰어나면 공부를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성의 기능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라 오성의 기능은 크게 둘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이런 감각적인 사물들이 확확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나는 노란색이 참 좋아 그런데 왜 좋은지는 자기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확 하고 찍히는데 나는 노란색 옷, 그 다음에 노란빛깔 그러면 굉장히 편하고 좋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들어올 때는 이성을 통해서 ‘너는 이러니까 노란색을 많이 섭취해야 돼.’ 이런 식으로 들어오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무슨 영양분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렇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인식하는 것이 오성의 기능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기능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들이 감각적인 사물들을 통해서는 전달될 수 없는 이 상부세계, 소위 이야기하는 우리들이 하부세계는 가시계, 상부세계는 가지계 라고 그러는데 그렇게 우리들이 순수한 지성으로써 생각함으로써만 알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인식은 우리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믿음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플라톤을 비롯한 이런 사람들 속에는 이런 하나님에 대한 이런 생각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 안에 그러한 신적인 세계로부터 인간이 왔기 때문에 그런 세계를 논리를 초월해서 직접 바라볼 수 있는 어떤 영적인 감각들이 있다고 그렇게 인간을 규정한 것입니다. 그런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인간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성은 어떤 것이냐 하면 사물을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없는 세계를 접촉해서 지식을 받아들이는 지성의 기능이고 동시에 똑같은 기능에 논리와 상관없이 우리의 감각 속에 확확 찍혀 들어오는 것들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것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잘 들으십시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라도 우리의 기능이 두 가지로 나눠지는 것입니다.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혹은 교리를 공부할 때 이치적으로 그렇게 당연히 동의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들이 굳이 믿음이 없어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증명될 수 없는 사실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은 존재하신 다든지 아니면 우리 손에 들려진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초월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논리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것은 믿음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성의 기능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오성의 기능이 그렇게 높은 세계를 바라보아서 초월적인 진리들을 받아들이는데 우리들은 그 초월적인 진리를 아무렇게나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계시되었는데 우리가 이성으로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에 믿음이 오성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이 진리와 접촉하고 우리들이 진리를 믿음을 통해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무엇에 대한 믿음이냐하면 이런 것을 믿으라고 주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위대하심에 대한 신뢰에서 오는 믿음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니까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들은 우리가 상대하는 그 하나님이 너무 선하시고 위대하시서 나를 사랑하셔서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이라는 그 인격적인 신뢰 때문에 ‘이것이 내 말이니까 믿어라.’ 그러면 ‘아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믿음의 기능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똑같은 기능에 이런 이 세상의 감각적인 사물들이 꽂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절제하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다 개방해서 이 세상에 크고 작은 호기심 같은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려고 하고 새로운 감각적인 것들 이런 것들을 사랑하면서 그런 것들에 탐닉하려고할 때 이 믿음은 현저하게 방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완전히 떼어놓는 것은 방법이 아닐지 모르지만 절제 있게 살지 않으면 이런 믿음의 기능들이 현저하게 방해를 받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 이런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 하느냐하면 관상이라는 것이 원래 기독교적으로는 오성과 관련이 있는 것을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자기 자신이 신적인 세계에 접촉하고 신적인 세계와 관련을 맺으면서 그러면서 신과 더불어 합의를 이루는 교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고 인간은 규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접촉은 언어를 초월하는 신비한 경험으로 침묵을 통해서 접근하는 것으로 설명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심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생활의 여유가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상당히 많은 매력을 끌면서 그러면서 교회들이 이제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80년대 미국에서는 70년대, 80년대에 일어난 일이고 우리 한국에서는 90년대에 마케팅교회들이 떴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교회들이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서서히 한계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편리하고 그리고 마치 편의점처럼 그렇게 교회에 가면 편리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교회에 매력을 느꼈다면 이제는 그런 것 가지고는 안 되고 인간의 내면의 고독과 그 다음에 혼란 같은 것들이 훨씬 깊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좀 더 다른 차원의 종교적인 서비스를 원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이 이야기들은 나중에 파헤치면 되고 그러면 이런 식의 관상기도가 들어와서 이렇게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 있고 앞으로도 이런 영향력들은 상당히 깊게 파급될 것이라고 예상되고 아직까지는 초창기라고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교회에서 대형교회를 목회하시는 목사님들이 나름대로 마케팅교회나 기존의 교회를 하면서 한계를 느꼈다가 이런 운동에 매력을 느끼고 대형교회가 이런 것들을 적극 받아들이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굉장히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Ⅱ. 관상기도운동의 사상적 배경
A. 뉴에이지 사상
이런 식의 관상기도의 사상적 배경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그리고 아주 많은 충격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이런 관상기도의 사상적 배경이 크게 한 6가지 정도 되는데 우리들이 제일 먼저 뉴에이지 사상을 들 수 있습니다. 뉴에이지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새로운 시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뉴에이지라는 이 개념은 그냥 우리들이 사회학적으로 이야기하는 새 시대라는 것이 아니라 점성학에 기원을 둔 개념입니다. 점성학에 따르면 이 뉴에이지는 물병자리 시대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태양이 이렇게 있고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돕니다. 태양이 있고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데 이 도는 것을 구체로 생각하고 그것을 구체로 만들어버리면 태양을 중심축으로 하고 지구가 공전하는 이 궤도를 가장 넓은 바깥둘레로 하는 구체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이해됩니까? 그것을 우리들이 천문학에서 황도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그 별자리들이 그 하늘에 떠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그 황도를 기준으로 360°가 되는 것을 12개로 나눕니다. 그것을 12개로 나누면 30°씩 됩니다. 그 30°씩 새로운 별자리들이 있게 되는데 그 30°의 한 별자리의 각도가 2000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현재는 물병자리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물병자리 시대라는 것은 결국은 이런 물병자리 시대가 오게 되면 하늘의 징조와 이 땅의 운명은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런 물병자리 시대가 되면 인간을 위한 유토피아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의 자리들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황소자리, 양자리, 쌍둥이자리, 게자리, 사자자리, 처녀자리, 천칭자리, 염소자리, 궁수자리, 전갈자리, 물고기자리 이런 것들의 12개의 자리가 있는데 그중에서 지금 시대는 약 2000년 동안 물병자리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물병자리 시대가 뉴에이지시대인데 물병자리 시대에 접어들게 되면 이때가 되면 새로운 유토피아의 시대가 오는데 그 시대는 인간을 위한 유토피아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의 신은 인간세상을 초월하여 있는 신이 아니라 이 신이 물병자리 시대에 인간과 함께 내통하면서 신인사이의 합일이 이루어지고 그리고 신이 내재함으로써 인간이 신과 동일하게 되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유토피아의 시대가 온다고 하는 사상이 뉴에이지사상입니다. 그래서 뉴에이지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외계인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그 다음에 외계를 향해서 계속 전파를 쏘아 보내고 그 다음에 별자리에 대한 생각들을 숭배하고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와 관상기도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하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제 이러한 원래의 관상기도는 기도라기보다는 기도를 띈 일종의 명상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뉴에이지 사상에서 신과 인간이 새로운 뉴에이지의 일체를 이룬다는 이 사상의 후원을 받으면서 그러면서 명상을 실천하게 되는데 이러한 인간의 뉴에이지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이 명상의 목표는 자아의 고양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의 원래의 고향은 신인데 그런데 너무나 오랫동안 그 신과의 합일에서 떠나서 살았기 때문에 고향을 잃어버렸는데 그것을 자기 안에 일깨워서 그래서 자기를 고양시킴으로써 신적인 세계와 합일을 이룬다고 하는 이런 사상입니다. 그래서 관상기도는 이런 뉴에이지의 이런 신과의 교통 사상들을 받아들여서 이것을 기독교적인 조작을 통해서 그래서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지성적인 교통이 아니라 내적인 관조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영혼이 상승하여 신과 본질적으로 접촉하게 한다고 하는 이런 사상, 신접한 상태에 들어가게 된 자아를 관상기도운동가들이 고양된 자아라고 부르게 되는데 이것이 또한 그리스도의 본질과 일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굉장히 혼란스러운 생각을 갖게 됩니다. 왜 뜬금없이 기독교가 갑자기 뉴에이지 사상에 충격을 받으면서 그렇게 뉴에이지 사상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신과의 합일이라는 엉뚱한 사상으로 넘어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역사를 좀 이해를 해야 하는데 교회의 역사에 보면 사실은 이런 것을 받아들일만한 요소들이 상당히 많이 작용하고 있었던 시대들이 엄연히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에는 아직까지 기독교 교리가 정확하게 확립되지 못했고 상당히 많은 부분을 희랍철학에 의존하면서 기독교의 교리를 형성해오던 때였기 때문에 지금처럼 이렇게 ‘개혁교리’ 해가지고 뚜렷하게 세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통적인 것과 정통적이지 않은 것, 심지어는 이교적인 것과 성경적인 것까지 여러 스펙트럼들이 함께 들어오게 되면서 출렁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출렁거림 속에는 우리에게 상당히 널리 알려진 초대교회의 유명한 교부들에게도 이렇게 오히려 성경으로부터 멀어지고 오히려 이 플라톤의 사상이나 혹은 신비주의에 가까운 이런 쪽으로 출렁거리면서 아직 모든 것이 확정되지 않던 시대들이 있었고 이런 것들을 고려하면 지금 생각하고 있는 뉴에이지 사상을 받아들이는 그런 종류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초기기독교사상가들이 엄연히 존재했던 것입니다. 또 거기에는 이단으로 분류되었거나 이단으로는 분류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잘못된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여전히 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기독교의 그런 뿌리가 유사한 뿌리를 찾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결국은 관상기도는 제일 먼저 뉴에이지 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것들이 선교적으로도 의미를 가지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뉴에이지사상은 뉴에이지에 대한 전적인 신봉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들이 뉴에이지적인 사상에 광범위한 영향을 자본주의 사회의 제품의 생산, 광고, 언론매체 그 다음에 문학, 예술, 이런 문화들을 통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광범위하게 접촉하면서 뉴에이지적인 이런 생각들을 상당히 많이 수용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코드에 맞추어서 제시될 때에 그때 교리적인 판단, 기독교적인 사상판단이 없는 사람들은 숨 쉬듯이 자기 시대의 문화로써 사람들에게 스며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열광하게 되는 것입니다.
B. 중세의 신비주의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중세의 신비주의입니다. 관상기도의 뿌리가 사실은 수도원주의 운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기독교 학자들의 대체적으로 일치된 의견입니다. 그 맨 처음에 이 수도원운동이라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하면 안토니우스라고 하는 아주 고명한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이 안토니우스의 제자가 바로 여러분들이 역사 속에서 잘 아는 정통적인 희랍교부인 아타나시우스였습니다. 그는 정통교리를 수호한 인물이었습니다. 특별히 기독론과 관련하여 정통교리를 수호한 인물이었는데 아타나시우스 이런 사람이 굉장히 존경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그리고는 속세를 떠나서 저 외딴곳에 수도원을 지었는데 ‘모노토리’라는 수도원이었는데 모노스 즉 혼자 있다고 하는 희랍어에서 온 것입니다. 외딴곳에 집을 짓고 그리고 높은 곳에 집을 짓고 그리고 거기에서 일평생 수도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속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만 잠깐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는 곧바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안토니우스를 붙들고 더 머물면서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쳐달라고 하면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 살 수 있어도 수도사는 수도원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며 떠납니다. 이 사람의 철저한 복음중심적인 삶 이것이 감화를 깊이 끼친 인물이 누구냐 하면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세기의 유명한 회심을 경험하게 된 것이 바로 폰티치아누스라는 로마의 관리로 있던 사람이 함께 만나서 대화하는 가운데 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전혀 알지 못했던 인물인 안토니우스의 생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정결하고 하나님 한분을 향한 철저한 헌신적인 금욕생활을 보면서 이제 이 사람이 자기의 모습을 거기에다 비춰볼 때 너무나 짐승같이 방탕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생애적인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게 유명한 ‘톨레 레게’입니다. 그리고 밖에서 아이들이 막 노는데 톨레 레게 톨레 레게 그럽니다. 집어라, 읽어라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서 성경을 펼쳐보다가 로마서를 보면서 회심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수도원주의는 처음부터 이런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중세에 들어오면서부터 사실은 훨씬 더 심각해집니다. 사막의 시리아 교부들이나 그 다음에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은둔수도사들 이런 사람들이 추구했던 것은 인간이 모든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서 근심과 걱정에 방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기를 추구해야한다고 하면서 침묵과 관상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지어진 수도원을 보면 문이 없습니다. 그러면 문이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쪽문도 없습니다. 그러면 먹고 살아야하는데 이쪽 성 밖에 있는 사람이 먹을 것을 갖다 주면 두레박으로 달아서 올려서 먹고 문을 만들어놓으면 그 문으로 세속과 자꾸 접촉이 이루어지게 되니까 할 수 없이 수도원 밖으로 나가려면 수도원에서 그 두레박 같은 것을 타고 내려와서 가고, 올라가야하니까 한번 외출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예 안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거기서 죽어서 마지막에 수도하다가 사람들이 거기서 죽으면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보관하고, 보관하고 해서 두개골을 전부 모아서 수도만을 하다가 죽은 사람들을 쭉 책꽂이 같은 곳에 배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비주의는 이미 초대교회의 교부인 오리겐이라는 사람에게서도 잘 나타납니다. 이 사람은 기독교의 초대교회의 아주 중요한 교부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 사람은 신학보다는 철학에 훨씬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신플라톤주의인 플라톤사상에 대한 부흥이 약 2세기 3세기경에 부흥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에 플라톤주의를 다시 일으켰던 인물이 플로티노스라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에게 여러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제자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포르피리라는 제자와 또 하나는 오르겐 이라는 제자입니다. 오르겐 이라는 제자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포르피리는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래서 포르피리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포르피리는 플라톤 철학에 있어서 회의주의를 대표하는 그런 인물이 되었고 그 다음에 오리겐은 어떻게 하든지 플라톤의 철학을 기독교에 흡수해서 플라톤 철학을 사용해서 기독교를 설명하여 철학과 기독교신앙의 조화를 꾀하고자한 인물이었습니다. 지금도 도서관에 가면 찾아볼 수 있는 ‘원리에 관하여’ 라는 조직신학 책이 있습니다. 물론 라틴어로 되어있고 그리고 영어로는 번역되어있습니다. 우리말로는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아주 신비주의적이고 아주 시적이고 그리고 조직신학 책 같으면서도 무엇인가 신비한 사상을 가르쳐주는 그런 철학적인 책처럼 느껴지는 그런 것들입니다. 당연히 이 사람들은 관념론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의 가르침을 따라서 최고의 이성을 아는 영들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있는데 이 영들은 인간이 육체에서 죽는 것과 함께 해방되고 불로 정화됨으로써 이제 영혼들은 깨끗하게 되어서 신에게 합치되어서 일치를 이룬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리겐은 바로 이런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의 초기교리들을 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휠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생애가 주전 20년경부터 주후 50년경까지 약 70년간 살았던 인물인데 아주 탁월한 학자였습니다. 대학원 다닐 때 이 사람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서 아주 깊이 놀랐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인데 유대인들이 디아스포라로 흩어져서 왜 유대교의 진실한 신앙을 간직하지 못하고 버리는가하고 보았더니 이게 헬라철학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의 헬라 세계 속에서 흩어져 살면서 그 사람들이 자기들의 최고의 유산으로 생각하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이런 사람들의 철학을 중심으로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비하면 성경의 기록들을 갖다놓고 들여다보니까 너무 철학의 빛으로 비추어보면 문체도 너무 조잡하고, 사상도 논리가 없고 엉성하다고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이 사람들이 철학적으로 개명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냐 하면 한국 사람들이 옛날에 미국 것이라면 똥도 좋아했듯이 헬라 것이라면 똥도 좋아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기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유대교 신앙 자체가 조잡하다고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때에 알렉산드리아에 휠러라는 사람 또는 파일러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이것들을 치밀하게 연구하면서 그러면서 얼마나 이 기독교의 모세의 율법과 성경의 진리가 구약성경의 진리가 희랍의 철학을 능가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또 공통적인 것이 있는가 하는 것들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그러면서 유대교 신앙이 종교적으로뿐만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매우 위대한 최고의 지혜라는 것을 아주 능란한 필체로 그리고 박학한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을 넘나드는 박학한 지식으로 이것들을 설파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뭐라고 결론을 내리느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이런 사람들 전부 다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깨닫고 그런 철학을 세우게 된 것이라고까지 주장하게 되었는데 많은 학자들이 그 가능성에 대해서 상당히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뭐 그런 문헌을 읽었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의심할 여지는 없습니다. 모세는 주전 15세기의 사람이고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런 사람들은 주전 3세기 4세기 5세기로 내려오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아주 디아스포라들을 유대교 신앙으로 돌아오게 할 그런 목적으로 말하자면 저작들을 써서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기독교를 플라톤 사상으로 재해석했던 이런 파일러와 같은 선배들의 사상을 따라서 이 기독교를 재해석 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 설명은 못하겠습니다만 김용옥 씨가 나와서 무슨 도마복음서를 해설한 것 등등 있습니다. 그것도 전부 다 ‘나도 한마디 사본’ 이런 것들도 전부 다 영지주의의 소산입니다. 기독교 초기에 기독교가 직면했던 대표적인 이단 가운데 두 개의 이단이 있었는데 지성을 무시한 이단과 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강조했던 두 이단을 만나는데 하나가 도나투스주의자들이고 그 도나투스는 자기 자신이 성령이라고까지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또 한쪽은 영지주의로써 그런 성령의 신비적인 체험 이런 것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높고 뛰어난 지식에 의해서 우리들이 구원을 받고 신과 일체가 되는 것이라는 동양의 신비적인 사상과 서양의 플라톤 철학, 기독교의 사상 이 세 가지를 전부다 합쳐서 만든 독특한 영지주의 사상이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상당히 오랫동안 영향을 끼치면서 그런 도마복음서를 만들어내고 나도 한마디 사본 같은 것에 보면 영지주의에서 통용되었던 해석이나 공동생활의 종교적인 모습들이 나타나는데 공통적인 것은 아주 신비적인 것들이 그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지라는 그 자체가 영적인 지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노시스’라는 것인데 이것을 통해서 높은 차원으로 고양되면서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보았는데 이래서 이런 영지주의자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면서 모든 만물은 하나의 신적 이성이 있고 신적 이성으로부터 만들어지고 만들어진 이 모든 것들이 다시 중간 과정에서의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과정을 거친 후에 마지막에 물질이 모두 사라지면서 본래대로 회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만물의 우주적인 순환과정이고 이것이 바로 모든 만물이 가야될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은 필연적으로 이런 사상은 범신론적이고 범신론이라는 것은 이 모든 만물들이 신의 분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만물들이 신 안에 있다. 혹은 모든 만물들이 신적인 요소를 가지고 교통하고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자, 예를 들어보십시다. 바다가 얼은 적이 있습니다. 워낙 추우면 바다고 업니다. 얼면 파도가 막 치는 꺾어진 그 모습대로 물이 얼어붙습니다. 그러면 얼음으로 되어있을 때에는 날카로운 칼처럼 얼어있지만 전부다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고 따뜻한 봄이 와서 다 녹아 버리고나면 그러면 모두 물이 되어서 하나가 되는 것처럼 그런 것처럼 지금은 소, 고양이, 닭, 돼지, 이런 식이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다 해체되어서 다 분해되어버려서 원소로 돌아가 버리게 되면 원소 그 위로 상승하게 되면 그것은 신적인 본질과 일체를 이루게 된다는 이런 것들이 바로 범신론 사상입니다. 불교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범신론 사상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하찮은 짐승들을 우대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저것이 우리 조상의 분신일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다음세대에 저런 쥐로도 태어날 수 있고 고양이로도 태어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다 동료들이니까 잘 대우해주어야 합니다.
C. 유대교의 까발리즘(Kabbalism)
또 하나 세 번째의 관상기도의 배경이 유대교의 까발리즘입니다. 이 까발리즘은 여기서는 K자로 썼고 뒤에 가면 C자로 썼는데 이 까발리즘이 유대교와 관련되어서 쓸 때는 K자로 쓰고 기독교와 관련될 때에는 C자로 씁니다. 그래서 오타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 까발리즘은 스페인과 프랑스 프로방스에서 시작된 중세유대교의 신비주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원래 유대교는 그렇게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나라를 잃어버리고 디아스포라 상태에서 계속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박해를 받고 고통을 받던 전통적인 유대인들이 유대교교리를 통해서는 신종론이라는 것에 답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종론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Theodicy 라고 그러는데 Theos 라는 신을 의미하는 것과 Dikee 라는 정의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Theodicy 혹은 신정론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신데 어떻게 악을 허용하실 수 있는가? 라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악의 원인이 되실 수 있는가? 라는 문제가 바로 신정론의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그들이 답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사람들이 현재 자신들이 겪고 있는 이 끔찍한 고난, 이런 것들의 원인의 답을 신정론에서 찾지 못하고 그러다가 이 사람들이 신비주의적인 사상들이 발동하면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이러한 범신론적인 해석을 통해서 이제 확장하면서 결국은 전생이라는 개념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불교의 윤회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조상들이 지은 죄 때문에 오늘 자신들이 이런 업보를 지고 죄에 대한 신적인 징벌을 받는다. 그러면 성경에 이런 문제들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조상들이 죄를 지었는데 알지도 못하는 조상들이 죄를 지었는데 그런데 지금 내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현실적으로 나라를 잃어버리고 고난을 당하는 현실들을 내가 당하게 되었다면 그렇게 오래전에 있었던 조상과 나 사이에는 어떤 일체와 연대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을 우리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에서는 어떻게 보느냐하면 언약적 관점에서 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런 언약적인 관점보다는 이렇게 조상이 지은 업보에 대해서 우리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현실 자체를 하나의 덩어리로 보고 그러면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연합되어있는가 하는 것이 언약의 개념을 뛰어넘어서 어떤 실체적인 존재론적인 연합이 있지 않을까? 하는 개념을 생각하면서 거대한 윤회의 개념을 고안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이제 유대 신비주의 문헌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 속에서는 이제 하나님이 온 땅을 통치하시는 단일한 구조가 아니라 선과 악이 공존하는 마니교적인 사상의 구도를 가지고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유대교의 신비주의인 까발리즘이 결국은 플라톤 철학이나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이런 것들의 영향이 이제 기독교 까발리즘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교 안에 있던 것들이 기독교의 까발리즘으로 들어오게 되고 이러면서 관상기도는 이런 사상들 속에 관상기도가 신비적인 요소들을 발견하면서 실천의 근거가 되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까발리즘이 있는 그곳에 항상 이런 관상기도가 유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D. 종교개혁 시대로부터 근대 이전의 신비주의
그 다음에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우리의 피부에 와 닿는 역사로 들어가게 되는데 종교개혁시대로부터 근대이전까지의 신비주의입니다. 근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대부분 데카르트가 등장하기 이전까지를 가리키는데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14세기 말 넓게 잡으면 15세기부터 시작해서 16세기, 17세기까지 그 3세기 동안 유통되었던 신비주의가 이 관상기도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14세기, 15세기에 우리들이 알다시피 르네상스 운동이 있었습니다. 이 르네상스 운동이라는 것은 결국은 중세시대 때에 교회가 권위적으로 민중들을 지배하던, 사상까지 통제하던 구시대에 대한 반발로써 르네상스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인간다움을 회복하고 교회의 권위와 압제에서 눌려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함으로 인간의 참된 인간됨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운동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르네상스라고 합니다. 그 르네상스는 대부분 이제 옛 시대를 연구하면서 이 르네상스는 부흥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럼 역사 속에서 가장 인간이 인간다움을 영위하던 시대가 언제였느냐 보면서 그들이 찾아간 것이 그리스시대였습니다. 그것도 그리스시대는 마케도냐에 의해서 제국이 만들어지던 그런 시대가 아니라 폴리스국가로 존재하던 소위 플라톤의 이상 국가 폴리테리아의 모델이 되던 인구 만 명 내지 이만명이 모여 사는 작은 도시국가로써의 국가 속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존중히 여김을 받고 이렇게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사람이 사람다움을 누리고 살았는가 하는 것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같은 이런 작품들이 호모의 작품들이 읽히기 시작하고 그것들을 직접 읽기 위해서 고전어를 공부하는 운동들이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어의 부흥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옛날 문헌들을 연구하면서 기독교에 의해서 단절되어왔던 참된 인간의 자유를 추구하던 옛날에 대해서 향수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거대한 인문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문주의 운동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중심이 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이루어놓은 정신문명들이 존중을 받고 중심이 되는 시대 이것이 인문주의 시대입니다. 이것이 가치체계와 관련되어서 인용될 때는 인본주의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해서 역사, 철학, 문학, 예술 이 모든 방면에 있어서 신 중심이었던 학문의 체계들을 허물기 시작하면서 사람 중심의 체계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다 설명을 못하겠지만 예술사적으로 보면 중세까지는 대부분 사람들이 그림을 그려도 모두 성화를 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교회, 그 다음에 신께 복종하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는 것입니다. 르네상스로 오면서는 완전히 달라지며 인간이 인간 안에 있는 아름다움 그 자체를 탐구하는 운동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르네상스 운동입니다. 이런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런 르네상스 운동은 근본적으로 이성주의적인 운동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고 그리고 인간의 이성에 부합하는 진리의 체계들로 고전적으로 내려오던 기독교의 체계들을 대치하려고 했던 시도입니다.
이런 이성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또 신비주의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신비주의 운동들은 르네상스적인 성격을 띤 사람 중심적인 신비주의 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운동들은 14세기, 15세기에 새롭게 일어난 운동이 아니라 이미 12세기, 13세기에 있었던 중세 말기의 가톨릭 안에서 일어났던 개혁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무슨 개혁운동이 일어났느냐하면 이제 10세기 이후로 접어들면서 기독교는 급속하게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심각할 정도로 타락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로 타락하느냐하면 교권을 돈을 주고 매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톨릭의 사제들이 첩을 거느리고 사생자를 낳고 그 사생자들을 교회의 한자리를 주기 위해서 암투와 그런 거래들이 이루어지고 하는 그런 상상할 수 없는 타락들이 교회에 의해서 자행될 때 그래도 교회는 가톨릭 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교회는 하나이기 때문에 찢어질 수 없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그중에서 깨달은 사람들은 교회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이제 개혁을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개혁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이제는 지식보다는 삶의 운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특별히 신약성경 중에서 복음서가 최대의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습니다. 말하자면 가장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로서의 그리스도의 단순하고 청빈하고 그리고 헌신적인 그 삶을 가난, 복종, 충성, 금욕 이런 것들을 가치로 삼으면서 수도원 운동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단체에서는 아예 내일 양식을 준비하는 것 자체를 죄악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들어오면 그날 먹고 나머지는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버리고 내일은 주님께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원운동을 하던 사람들 중에 수도원운동을 하면서 초창기에는 많은 수도원들이 이런 재산 같은 것들을 전혀 소유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탁발수도사들은 다니면서 사람들이 주면 주는 것으로 먹고 안주면 안 먹고 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그렇게 하면서 사는 개혁운동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기독교의 아주 진실하고 깊은 사상의 체계에 대한 공부가 없이 무조건 이 역사적인 간극을 뛰어넘어서 복음서를 보면서 예수를 본받고 하나님과 교통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그런 금욕과 절제, 충성스런 그런 삶을 살면서도 결국은 사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비주의적으로 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비주의가 상당한 부흥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말기에 그런 운동에 헌신했던 사람 중의 한사람이 여러분들이 잘 아는 아시시의 프란시스 같은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페오나르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끌레르보 페오나르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운동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운동들이 계속해서 활발해지면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 예수회의 인물이 되었던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 그리고 두란노에서 책으로 나오는 로렌스 형제, 조지 폭스, 그 다음에 잔느 마리 귀용의 자서전이 나옵니다. 그 인물이 전부 다 바로 그런 시대에 신비운동가들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이제 관상기도의 명맥이 이어져오고 확산하는데 현대적으로 그런 운동이 확산되는데 뿌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E. 범신론과 내재신론의 확산
그리고 범신론과 내재신론의 확산입니다. 이것은 르네상스 이후에 확산된 범신론과 내재신론의 영향입니다. 르네상스 이후에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일자 즉 온 만물의 근원이신 일자, 철학자들은 일자라고 부르고 우리는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철학자들이 부르는 일자는 인격이 없는 일자입니다. 일자 즉 하나는 ‘토온’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런 일자가 어떻게 세계와 관계를 맺는지에 대해서 범신론적이고 내재신론적인 주장들의 아주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운동의 지지를 받으면서 관상기도 운동은 이러한 신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아주 어울리는 종교적인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러한 사상들이 철학, 역사해석 이런 데에 커다랗게 영향을 미치고 헤겔 같은 사람도 이런 것 아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신비사상 위에 촉진되게 되었는데 이런 것들이 르네상스 이후 이제 17세기, 18세기의 낭만주의 시대까지 널리 유행되게 됩니다.
여러 학자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여러분들이 알 만한 사람은 딱 한 사람이 있습니다. 스피노자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스피노자 이 사람은 1632년에서 1677년까지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람을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고 구둣방을 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수공업을 하면서 벌어먹고 살고 그저 틈날 때 취미로 철학을 해서 세계적인 철학자가 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상은 조금 설명을 하고 지나가는 것이 이후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좋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결국은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신성모독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화란교회에 의해 파문을 당합니다. 바뤼흐 스피노자라고 그러는데 그 바뤼흐가 복 받은 자라는 바룩이라는 성경의 인물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렇게 파문을 당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아주 파격적인 하나님에 관한 견해를 내놓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젊은 사람들은 잘 알 텐데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가운데 해체주의로 유명한 질 들레쥬 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스피노자의 사상에 대한 평전을 씁니다. 그 평전 속에서 질 들레쥬는 이 스피노자의 사상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신이 있는데 본질적으로 신은 자연과 일체를 이루고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신이라는 존재가 있는데 이 신이라는 존재가, 신의 본질이 시간과 공간속에 들어오면서 다른 모습으로 변형이 됩니다. 그 변형이 된 것이 자연입니다. 그리고 인간도 그 자연의 일부입니다. 그럼 변형이 되었다는 것은 임시적인 것인데 그 임시적인 것이 결국은 다 해체되어서 사라지고 나면 그 마지막 본질은 신의 본질과 일체가 되어서 다시 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의 설교를 오랫동안 들으신 분들은 제가 설교를 하면서 질료라는 개념을 이야기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제가 창세기를 설교하거나 또 레카프릴라치오의 교리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의 교리를 설명하면서 질료라는 개념을 이야기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서 나오는 개념인데 모든 물체들은 없는 것에서부터 창조되었는데 물질은 원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없는 무에서 하나님이 유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이시라는 것이고 ‘엑스히로우’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단서는 사실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들의 지위를 구분하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없는 것으로부터 창조된 것들이 모든 존재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이야기 가운데 유명한 표현이 이것입니다. ‘모든 사물은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또 다른 이유 때문에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곱씹어보면 굉장히 감동적입니다. 모든 사물은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여기서 존재한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크기와 모양을 가지고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인데 그것은 있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한다. 시간과 공간에서 크기와 모양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것 말고 또 다른 이유 때문에 사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해됩니까? 왜 이해가 안 됩니까?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에서 형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사물이 존재한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니까 시간의 관점에서만 보지 말고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심지어 우리의 육체도 이렇게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죽음의 기운이 우리를 삼키면서 다 늙고 찌그러지고 변형되고 마지막에 딱 숨을 거두고 나면 이 모든 것이 부패하면서 모든 것이 사라지면서 원소가 되어서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 안에서 형체와 모양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이유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왜?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없었었는데 왔고, 왔는데 사라지니까 전체적으로 보면 결국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왜? 진정으로 있는 것은 영원에 걸쳐서 존재해야지만 그것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영원에 걸쳐서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한분 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아멘을 할 대목이 아닙니다. 거기가 아닙니다. 그 대목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부흥회 때에는 거기가 아멘을 할 대목인데 여기는 부흥회가 아니기 때문에 거기가 아멘을 할 대목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세미나를 들으면서 어디서 아멘을 해야 되는지만 찾아내도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만이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다시 말해서 무시무종 즉 시작이 없고 끝이 없이 계속 계시기 때문에 유일하게 하나님 한분만이 진정으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같은 존재는 그래도 좀 낫습니다. 왜냐하면 영원 전부터 있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이 영혼을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영혼이 계속 있게 만드셨으니까 유시무종한 존재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감각적이어서 시작도 있고 끝도 분명히 있는 것들은 물론이거니와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이 영원히 있는 것까지도 모든 존재의 이유를 영원 전부터 계시고 영원 후까지 계신 하나님 한분과 관련이 있는 가운데만 그 존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해가 됩니까? 그런 것을 이해하고 들으면 아주 굉장히 아름다운 말입니다. ‘모든 사물은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이 아닌 또 다른 이유 때문에 사실은 없는 것이다.’
그런 사상을 이 사람 질 들레쥬 라는 사람은 스피노자를 설명하면서 어떻게 보느냐하면 이것들을 신의 본질이 세계의 본질과 똑같다고 봅니다. 이 모든 세계는 하나의 본질 밖에 없는 것인데 신의 본질이 시간과 공간 속에 들어와서 다른 다양한 형체로 만들어지게 되는데 여기에 지금 형제, 자매, 형제, 자매 이렇게 섞여서 앉아있는데 사실은 형제도 없고 자매도 없고 사람도 없고 그가 깔고 앉아있는 돌멩이가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 다 시간과 공간속에서 분해되고 나면 하나의 본질로 합쳐지는데 그 하나의 본질이 신의 본질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까? 이것은 안 됩니다. 말도 안 되는 큰일 나는 사상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질화’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하나의 물질세계 속에서 감각적인 사물들로써 나타나고 또 하나의 세계에서는 영적인 사물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사물들인 천사나 인간의 영혼이나 이런 것도 결국은 인간의 영혼, 영으로써의 천사, 이런 것들 모든 것들이 하나의 우연적인 존재일 뿐이지 이것들이 다 해체되어서 궁극적으로 본질을 파고들어가 보면 하나님의 한 본질로 회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 본질이 시간세계 속에 들어오면서 이것이 물질적인 존재로, 그 다음에 영적인 존재로 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추적해서 올라가면 신의 본질 하나로 모두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이런 사상들을 가지고 있으니까 결국은 무엇입니까? 나 자신이 신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 자신이 존재론적으로, 실체적으로 신의 일부이면 내 안에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내가 육신의 감옥을 털어버리고 상승되고 나면 나는 신과 일체를 이룬다는 사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사실은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근대주의 사상이 들어오면서부터 이런 것들이 전부 다 도외시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오면서 다시 인간을 중심의 자리에 놓고 인간을 신화하는, 인간이 신적인 존재와 동일선상에 놓고 인간을 격상시키려고 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사고방식이 자신들의 사상들의 근거로 삼기에 아주 좋은 철학자를 만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바로 바뤼흐 스피노자라는 사람입니다. 바뤼흐 스피노자뿐만이 아니라 이런 사람들이 조르나도 브르노, 고트홀트 레싱,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그 다음에 여러분들이 잘 아는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같은 이런 인물들이 이제 이 영향을 받으면서 기독교의 하나님에 관한 생각들을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들은 관상기도 자체가 나 자신이 신의 일부니까 사실은 기도라기보다는 나 자신 안에 있는 신적 본질을 일깨워서 또 다른 신의 본질 속에 합치시킨다는 것은 합리적인 것입니다. 왜? 내가 신의 본질의 또 다른 하나의 질화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특히 19세기 이후에 이러한 내재신론들이 확산됩니다. 내재신론은 영어도 파엔데이즘 파=모든 것, 엔=그 안에, 데이=신, 이즘=사상입니다. 신 안에 모든 것이 있다는 사상이 파엔데이즘입니다. 그러면 이제 범신론은 판데이즘이라고 합니다. 내재신론 이 둘 사이에 만유재신론이라고도 하는데 이 둘 사이의 차이는 뭐냐 하면 범신론은 기독교와 합치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비인격적인 신입니다. 그런데 그 범신론에다가 인격적인 신의 개념을 입힌 것이 내재신론입니다. 그래서 이 내재신론은 아주 기독교 속에 깊숙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이런 것들이 내재신론에 붐이 일어나면서 관상기도에 대한 강조도 함께 상당한 호소력을 갖게 되는데 여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과 이 세계를 초월적으로 구별된 존재라고 보는 고전적인 유신론은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러면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런 세계를 다스리신다면 악의 원인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 다음에 ‘그러면 신이 통치하시면 인간은 과연 자유로운 존재인가?’ 그리고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면 인간은 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하는가?’ 그리고 ‘영원과 시간은 과연 그렇게 단절되어있는 것인가?’ 이런 것들에 대한 설명을 고전적 유신론이 충분히 해주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이제 내재신론을 받아들이면 순식간에 해결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시간은 영원의 변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시간은 영원의 변형이라고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과 영원이 단번에 두 개가 전에는 시간은 시간이고 영원은 시간을 초월한다고 보았는데 이것들이 영원의 또 다른 변형이라고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인간의 자유의지의 문제도 해결이 훨씬 간단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이 세상에 실행하시는데 고전적인 유신론은 통치를 통해서 실현하신다고 보는데 신 자체가 와서 그것들을 실현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런 사상들이 어떻게 발전하느냐하면 그러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악과 모든 문제는 어떻게 보느냐하면 이것은 인간의 몸에 상처가 나듯이 전 세계를 포괄하고 있는 신의 본질 자체가 침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개념에서는 신의 본질 자체도 완성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는 신입니다. 그 신을 신답게 만드는데 인간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선하고 올바르게 살면 이 하나님의 본질이 아주 아름답게 세계를 포괄합니다. 그런데 저항하고 까불면 이것들이 무너지고 상처를 입고 깨뜨려지고 부패합니다. 신의 본질에 이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우리도 신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충격적입니다.
그런 사상들을 가톨릭에서는 상당히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신으로서의 일자와 세계의 정신 인간 영혼 사이의 역동적인 수난을 주장하면서 이러한 공식으로서 세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신의 본질도 세계와 함께 형성되는 과정에 있으며 인간이 그 형성에 참여함으로써 인간과 신은 같은 운명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되는 것과 신이 어떻게 되는 것은 동일한 말하자면 운명을 가지고 거기에 같이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인간을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인간의 자율, 인간이 자유롭게 살고 움직이는 것이 곧 신의 통치의 일부분이라는 주장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따르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여러분들이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라도 설명이 나올까봐 두 사람만 예를 들자면 테이야르 드 샤르댕이라는 사람입니다. 가톨릭 사제입니다. 그리고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같은 이런 사람들이 하버드대학의 철학자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제 이런 사상들을 현대에 전파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되고 특히 이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사상은 과정철학이라는 형태로 만들어져서 이것이 기독교에 영향을 주어서 과정 신학이라는 신학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때 70년, 80년대에 아주 상당히 환영을 받았던 신학가운데 하나였습니다.
F. 레노바레 영성운동
그 다음에 사실은 이런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오늘날 우리들이 지금 심각하게 직면하고 있는 관상기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원인이 있습니다. 이것이 레노바레 운동입니다. 그래서 이 레노바레 운동을 여기서 그냥 간략하게 언급했는데 이 부분은 나중에 보충을 해서 여러분들에게 설명해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 레노바레 영성운동은 리처드 포스터라는 인물에 의해서 아주 널리 세계적으로 전파됩니다. 여러분 리처드 포스터라는 인물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리처드 포스터의 ‘기도’라는 책이 두란노에서 나와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이 리처드 포스터라는 인물이 상당히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때부터 사실은 한국에 레노바레 운동이 도입되었습니다. 사실은 그 리처드 포스터의 기도라는 책을 읽어보면 흠잡을 데가 별로 없습니다. 사실 그 책이 나왔을 때만해도 사실은 이렇게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무엇인가 전통적인 기독교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눈치 챈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언론매체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신학자들까지도 그의 책에 대해서 적극 추천하고 그리고 칭찬일색이었습니다. 그리고 책이 엄청나게 팔렸습니다. 수십만 부가 팔려나갔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퀘이커교도입니다. 이 퀘이커 교도라는 것은 신비주의의 계보를 가지는 아나벱티스트 재세례파 운동의 후신입니다. 퀘이커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진동한다, 덜덜 떤다. 그래가지고 퀘이커교도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레노바레 영성운동이라는 것을 제창하고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운동이고 여기에서 Spiritual Formation, 소위 영성운동의 형성훈련들을 하게 됩니다. 이 퀘이커 교도들의 전통적인 믿음은 무엇이었느냐 하면 계시된 말씀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내적 광명, 이런 것들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신비주의적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퀘이커 교도들이 우찌무라 간조에 의해서 한국에까지 상당히 널리 영향을 끼쳤던 무교회주의 운동과도 관련이 있고 그리고 침묵기도운동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이런 내적인 광명이 있다는 것과 자아의 체험을 통해서 진리의 영의 인도를 받는다고 하면서 그러면서 레노바레 성경까지 내놓습니다. 여러분들이 레노바레 성경은 사지 마시고 레노바레 성경을 잘 읽어보면 거기에 각주들이 쭉 달려있고 그 다음에 성경을 스터디 바이블로 만드는데 중요한 것은 자기가 성경을 이렇게 보면서 깨닫게 된 느낌 이런 것들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거기에 적고 그리고 그것들을 파악하고 묵상해나가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 자체로 보면 별 이상한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레노바레 운동이 무엇이고 왜 사람들이 그런 성경을 만들어서 보급하려고 했는지를 생각해보고 전체적인 그림을 보면 그 성경의 의도가 아주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성경을 한국에 있는 모든 신학대학의 총장들이 적극 추천했다는 것입니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막론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요즘 추천서를 써달라고 그러면 될 수 있으면 사양합니다. 사절합니다. 사실 저는 추천서를 써달라고 그러면 읽지 않고는 안 쓴다는 원칙을 세웠는데 사실 어떤 때는 추천해달라는 책이 1000페이지 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는 좀 더 신중해져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추천자가 누군가인가를 너무 신뢰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추천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저는 심각하게 생각하고 추천하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 레노바레 운동에 있어서는 관상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단순한 정적으로써의 침묵이 아니라 관조적인 신비의 상태로써의 침묵을 통한 기독교적 만트라의 실천을 추구합니다. 만트라 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불교의 대표적인 만트라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단순한 단어나 구절들을 반복해서 외우고 특별히 이것을 강조해서 요가 같은 데서 나오는 호흡의 원리와 결합시켜서 이것들을 어떤 영적인 효력이 있는 것으로 자기 암시를 주는 그런 종류의 단순한 기도와 그런 외침의 실천입니다. 작은 소리로 반복적으로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관조적인 신비의 상태에서 침묵을 통해서 호흡기도, 무념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추구, 이런 것들을 겨냥하면서 관상기도운동을 계속해서 확산해나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 레노바레 운동이 관상기도의 확산에 환상적인 배경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에서 관상기도운동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리처드 포스터를 중심으로 하는 레노바레 운동에도 함께 가입하여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Ⅲ. 관상기도운동의 사회문화적 배경
이렇듯이 우리가 보기에는 황당해 보이는 이런 관상기도운동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광범위한 관심을 끌면서 흡인력을 갖게 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이것은 사실은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차원에서뿐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신비주의 운동중의 일부인 관상기도운동은 우리가 조금만 교리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신자라면 금세 이것들이 사실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기도의 개념과는 현저히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이렇게 광범위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은 문화적으로 그런 것을 필요로 하고 있는 현대인의 코드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어떤 요소들을 관상기도 운동 속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날은 물질주의를 구가하는 시대인데 기독교인으로서 기회가 닿으면 여러분들에게 제가 한번 강의해드리겠습니다만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시대를 꿰뚫고 있는 이 사상들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자기가 전도해야할 사람들이 그 속에 있고 무엇보다도 교회가 그 속에 있기 때문에 사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지만 우리들이 진정으로 싸워야할 대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우리들이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오늘 보다시피 아주 굉장히 과학주의적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과학이라는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한 과학이겠습니까? 다른 것 아닙니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재화들을 효과적으로 더 많이 생산해서 소비하게 하기 위하여 과학이 필요한 것이고, 그리고 인간이 불안해하는 미래를 위해서 과학이 필요한 것이고, 역시 그것도 재화의 문제와 관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이 국가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이유는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과학기술이 앞서는 나라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해서 승리할 수 있고 나아가서는 과학기술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나라들이 더 좋은 재화를 생산해서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물질생활입니다. 심지어 과학기술이 발전해야지만 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2차 대전 때에 독일의 U-Boat 이야기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독일은 잠수함을 만드는데 첨단을 달리던 나라였고 이미 1940년대에 오늘날의 미사일을 세계 최초로 만들어서 런던을 공습했던 나라입니다. 아마 조금만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셨으면 독일이 먼저 핵폭탄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아인슈타인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빨리 핵폭탄을 만들라고 재촉했겠습니까? 만약에 독일이 먼저 만들면 세계의 역사는 바뀐다고 그랬습니다. 그때에 U-Boat들이 이제 잠수함을 만들어서 공격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영국은 전쟁에서 대륙은 이미 벌써 독일이 차지해서 물자공급이 안되었고 이 영국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결국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들을 대서양을 건너서 미국에서 상선들이 물건을 싣고 오면 그것들을 받아서 사용해야했습니다. 그런데 물자가 계속 보급된다는 것은 적군들이 힘을 얻는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것을 어떻게 차단해야 할 것인가? 비행기를 띄우면 저쪽도 비행기를 띄우니까 이번에는 잠수함을 한 달에 30대씩 만들어서 바다 밑에 깔아서 완전히 말하자면 포위선을 형성하고 상선이 수많은 물자를 싣고 수십 척의 배들이 구축함의 호위를 받으면서 오는데 가는 배는 수십 척이고 호위해주는 구축함은 한척이나 두 척이고 많아봐야 네 척밖에 안되는데 따라가는 배는 수십 척입니다. 일직선으로 거리를 두고 바다 속에 있다가 나타나서 상선의 한가운데도 들어가서 어뢰를 쏘아서 공격해서 다 무너뜨리니까 영국이 잠깐 동안에 잃어버린 물자가 250만 톤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물자를 바다 속에 다 집어넣고 캐나다와 영국 사이를 오가면서 먹고 살던 그 수송선원들이 삼만 명이나 대서양 바다에서 수장되었습니다. 그러니 결국은 당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전세가 뒤집혀서 이제 U-Boat들이 하나씩 차례차례 박살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독일은 그것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모르게 영국이 10년 동안 연구해서 레이더를 최초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물속에만 있으면 안 잡히는데 이게 밖을 보고 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이것들이 물위로 올라와서 파도가 높이 치니까 2, 3미터쯤 올라와봐야 사실은 별것 아닙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이 레이더가 그 살짝 올라온 쇳덩어리를 잡아내는 것입니다. 거리까지 정확하게 잡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두운 밤바다에서 공격을 하니까 저쪽에서는 이쪽을 못 보는데 이쪽에서는 레이더를 통해서 정확하게 어느 위치에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이 정확하게 포착하게 되고 공격을 하니까 하나씩 하나씩 다 깨져서 결국은 독일의 U-Boat의 꿈들이 다 해체되었습니다. 무엇이 결정하게 된 것입니까? 과학기술이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이 이긴 이유가 두 가지 때문이라고 그러는데 하나는 레이더이고 하나는 트랙터 때문이라고 그럽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비행장이 한번 폭격을 당하면 복구하는데 삼년이 걸렸는데 미국은 두 달 만에 복구를 했답니다. 그러니까 과학기술은 미래의 국가의 운명까지도 결정합니다. 그러니까 치열하게 싸우면서 제품들을 생산해내고 사람들은 그 제품에 익숙해지면서 더 많은 제품을 누리지 않으면 결핍감을 느끼기 때문에 치열하게 경쟁해서 더 많은 돈을 벌어야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돈을 벌고 그 다음에 생활이 나아지게 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 치열하게 다투어야하는 것입니다.
A. 현대사회의 자아 상실감
그런데 결국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미친 듯이 헌신해서 자기가 기여하는 곳이 어디냐 하면 자기 자신의 몸뚱어리를 위해서 기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현대 속에서 살기 때문에 그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니까 우리들이 이것들을 전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서 이 세상이 굴러가는 대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로 막 생각 없이 따라가면서 살아가면 기도할 시간도 없고, 성경 공부할 시간도 없고, 예배에 참석할 시간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주님께 바쳐야할 마음과 뜻과 성품을 이 세상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자기의 물질들을 획득하게 되는 일들에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이것을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들! 한국 국민 모두가 어느 날 ‘이것이 진짜 허무한 일이구나!’ 하고 깨닫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 모두 법정스님처럼 산다면 나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나무 의자 빠비용 의자 하나를 놓고 그리고 죽이나 먹으면서 모든 문명의 도구들을 다 버리고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일 먼저 삼성이 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엘지부터 차례대로 망하게 될 것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런 속에서 현대인들이 자아를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대량생산, 극단적인 자본주의의 발달, 치열한 경쟁, 물질주의 속에서의 인간 현대인은 과학과 이성으로는 만족되지 않는 내적인 공허함을 느끼며 종교적인 욕구를 갖게 되었는데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는 싫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너무 간섭을 많이 하십니다. 그리고 혼도 많이 내고 말입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러는 것은 많은지 그래서 하나님께는 가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해서 치열하게 살아가는데 이런 속에서 결국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도시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우리들이 시골에 살면서 관계를 보더라도 학교에 가면 교장선생님, 선생님, 그리고 선배, 후배들이 있고 집에 오면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삼촌, 고모, 이모, 누나, 친구 이렇게 있고 그 다음에 밖에 나가면 친구들 중에도 학교친구, 동네친구, 사회친구 이렇게 그물망처럼 되어있는 것에서 전통적으로 유교를 우리들이 유교문화를 받아들인 속에서는 항상 우리의 의무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나라에 충성해라.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들 사이에는 신의를 지켜라. 아랫사람들에게는 관대하고 너그러워지고 윗사람은 존중해야한다. 너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잇속을 챙기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 속에서 우리들은 안정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이 바뀌면서 윤리 도덕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은 나의 행복을 약탈해서 결국은 다른 사람들을 배불리게 하는 것이 윤리이고 도덕이 아닌가? 여자에게 요구하는 정절의 관념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남자의 독점력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닌가? 국가에 충성하라고 그러는데 결국 그 국가라는 것은 왕을 비롯한 대통령을 비롯한 몇몇 인간들을 잘 먹여 살리려고 자기들이 그렇게 조작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그러다가 심지어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이것도 결국은 부모라는 인간이 주도권을 쥐고 자식들을 착취하는 수단이 아닌가? 실제로 그런 이의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존경하라고 그러는데 결국 선생, 그 작자들은 그럴만한 가치도 없는 인간들이 거기에 걸치고 앉아서 결국은 우리보고 자기의 예속물처럼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가? 그런 속에서 우리의 인간성은 짓밟히고 폭력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 바로 나입니다. 나는 각자 다 틀립니다. 그러니까 이제 무정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웰스가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삶이 점점 더 풍족해지기는 했지만 훨씬 더 얄팍해지고 왜 사는지에 대한 이유도 모호해졌다. 사람들은 삶이 그 실재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자기 느낌을 점점 더 뚜렷이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의 해체주의입니다. 언제 건축학자를 만났는데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건축에도 해체주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건물이 둥그렇거나 네모나거나 뭔가 이렇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가지고 지었습니다. 그래서 소피아성당 같은 데를 보면 똑같은 지붕들이 여러 개가 뭉쳐있는데 8개가 뭉쳐서 하나의 교회당이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것이 십자가 모양입니다. 십자가는 십자가이고 동그란 모양은 교회의 지체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고딕은 하늘을 향하여 치고 올라가는 신앙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네모난 사각형으로 된 것은 모양이 어떨지 모르지만 좁은 땅에 제일 많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네모난 상자니까 그렇게 하자 이렇게 나름대로 무엇인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요즘은 건물을 지어도 별로 아름답지도 않은데 이상한 격식으로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물을 네모나게 지은 다음에 한쪽 벽면을 양초가 녹아내린 것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건축비가 많이 들어갑니다. 하여튼 건축은 곡선이 들어가면 돈이 계속 올라갑니다. 그런데 초가 녹아내린 것처럼 만들었으니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갔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만드는 데는 사람도 못삽니다. 그리고 예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기존의 격식들은 인간을 억압하는 것인데 그것을 파괴함으로써 그 속에서 미를 찾자는 것이 아니라 미라는 고정적인 개념이 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르트르의 고백을 생각나게 합니다. ‘나의 평생의 과업은 진리라고 믿는 것들을 허무는 것에 헌신하는 것이었다.’ 나하고 이름이 똑같아서 기분은 좀 안 좋았지만 죽은 백남준이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데뷔작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방가르드의 예술을 한다고 하고 그랜드피아노 위에다가 방금 머리를 자른 소대가리를 올려놓았습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 백남준이 도끼를 들고 나타나서 소대가리도 부수고 그랜드피아노도 다 때려 부수는 것이 그것이 데뷔작품이었습니다. 구라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렇게 두드려 부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려치면서 피도 튀고 피아노도 부서지고 그 다음에 현도 때리면 그 끊어지는 소리가 날것이 아닙니까? 그 자체에 어떤 조화된 아름다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런 것 자체를 피아노는 피아노대로 있어야한다는 개념을 그 위의 소대가리를 자른 것을 올려놓으면서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 격식들을 다 파괴해서 그런 규범이라는 것 자체는 미학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인간은 결국은 기준들을 다 거부하고 해체시켜놓고 나니까 그 다음에 그러면서 물질주의 속에는 몰입해서 빨려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산자로서 기여해야하고 소비자로서 그것들을 누려야하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누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재화를 벌고 그러면서 결국은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가 불분명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인간이 이름 모를 두통, 불면증, 신경성 위장장애, 특히 우울증 이런 정신적인 질환들이 광범위하게 몰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서 생겨나는 엄청나게 많은 질병들 이런 것들입니다. 사실 곡식을 생산해서 먹고 그리고 자기가 기르는 닭이나 돼지를 잡아먹고 그리고 열심히 노동을 하고 살면 결코 걸리지 않을 이상한 병들이 막 어마어마하게 현대사회에 일어나서 인간들을 괴롭히고 과학이 발달해서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고쳐준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삶의 질 자체를 현저하게 개선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계속 연장시키기는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속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인간은 굉장한 그런 자기 소외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요새 템플스테이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사실은 불교에 귀의하고 불교에 호감을 느껴서 가기 보다는 이게 무엇인가 도시적이고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데로부터 자기를 좀 떼어놓으면 어떤 평안이나 이런 것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여기는 기도원입니다. 수도원이라고 썼지만 기도원인데 제가 자주 올라옵니다. 여기서는 저를 단골로 취급합니다. 자주 올라오는데 그래서 방이 없을 때도 어떻게 해서든지 주려고하고 단체들이 왔을 때도 제가 미리 예약하면 그 방을 빼놨다가 주시고 참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와서 한 3, 4일만 일체 밖에 안 나가고 여기만 왔다 갔다 해도 마음이 좀 가라앉습니다. 평화로워집니다. 교인들의 얼굴을 안보니까 마음이 평화로워지나 봅니다. 농담입니다. 아주 편안하게 됩니다. 그리고 TV도 없고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이폰을 가지고 매달리는 사람도 아니니까 그것도 없고 조용히 기도하고 책 읽습니다. 열렬히 기도하고 열렬히 성경을 파지 않아도 그냥 가만히 있으면서 독서만 해도 마음이 쫙 가라앉습니다. 육체에도 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관상기도를 실천하면 정신적으로는 템플스테이를 가면 훨씬 나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효과는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독교에서 깊은 영성으로 나아가고 하나님과의 보다 깊은 관계 속에서 자기가 깨어지기 위해서 관상기도를 한다기보다는 관상기도에서는 깨어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원래 고유한 관상기도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맞먹는 인간인데 어디서 깨지겠습니까? 내가 깨지면 하나님이 깨지는 것인데 말입니다. 안됩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 그 자체가 깊은 관상을 통해서 묻었던 때들을 벗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순수한 자아가 신과 접촉하게 된다는 사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B. 신비주의에 대한 동경
그 다음에는 신비주의에 대한 동경입니다. 물질문명의 발달과 과학만능주의는 현대인에게 염증을 불러일으키고 그리고 원시에 대한 동경과 자연적이고 신비적인 것들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참 이상한 것이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속일 수 없는지 초가집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쁜 집을 설계는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 지어보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솔직히 살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살고 싶은 집은 어떤 집이냐 하면 초가집이거나 초가집까지는 아니더라도 70년대 지었던 함석지붕으로 얹은 집이 있습니다. 그런 집을 깨끗이 속을 개조해서 현대식으로 바꾼 다음에 마루도 고급원목이 아니라 옛날의 거칠거칠하면서도 그러나 잘 사포질 된 그런 나무의 마루로 고택 같은 분위기의 집인데 지체가 높은 집안의 고택이 아니라 서민들이 살던 주택인데 현대적으로 다듬어져있는 그런 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지저분하지만 않으면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런 것들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되는 것도 극단적인 물질주의 그 다음에 복잡한 도시생활 이런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그런 향수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저만 느끼는 것이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그런 종류의 향수입니다. 이런 것들이 신비주의에 대한 동경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지금은 사실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도원에 와있어도 문자는 봐야합니다. 교회에서 무슨 보고가 올지도 모르고 외부에서 무슨 연락이 올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사실은 홀로 있는 그런 시간이 없이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전부다 우리 자신을 자아를 상실하고 사람과 사람 속에 내가 원하는 사람과 같이 관계를 맺는 데는 이것이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이렇게 쳐다보고 전화를 안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런 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단절되어도 괜찮은 관계를 계속 유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이런 속에서 인간은 사실상 홀로 있고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현저히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정보들의 교환이 촉진되고 그러지만 그럴수록 인간들이 사람들과 바람직한 관계를 맺는 것이 힘들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사람들이 굉장히 신비주의적으로 기울 수 있는 환경들이 조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신비주의의 몰입에 대한 한 표현이 어린 아이들이 게임에 몰두해서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잘 못하면서 그런 통신기기에 매달리고 오락기기에 매달리는 것도 신비주의의 일종입니다. 심리적으로 말입니다.
결국은 인간의 지식의 두 출처는 학문과 종교를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시상과 신앙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동경하는 신비주의는 신에 의해서 제시되고 ‘야 너 이 종교를 믿어라. 나는 하나님이다. 네가 믿을래?’ ‘네.’ 믿는 그 순간 ‘너는 이것, 이것 2800가지는 하지 말고 3000가지는 네가 해야 한다.’ 인간은 그런 것이 싫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그런 모든 규범의 근거가 되고 싶지 그런 규범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종속적인 인간이 되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발적으로 밖으로 강요된 신비가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신비에 대한 욕구를 발견하고 그것을 극대화하고 분출함으로써 종교적인 만족을 얻고자하는데 이러한 현대인의 심리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어쨌든 그것이 자기 안에 있는 세계이든 자기 밖에 있는 세계이든 그가 네게로 오든 아까 그분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내게로 오든 내가 신에게로 올라가든 어쨌든 영적인 세계와의 접촉이 있어야지만 신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상기도를 비롯한 신비주의 운동들은 현대인의 이런 종교 심리적인 욕구에 아주 어울리는 매력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보면 헬스 있지 않습니까? 헬스도 그냥 이렇게 뛰어라, 들어라, 드는 것 이것, 뛰는 것 이것만 하라고 그러는데 그것을 하면서 나름대로 매력을 느끼고 계속 하는 사람도 있지만 거기에 깊이 사람들을 몰입시키기 위해서는 건강과 육체의 행복이라는 개념을 종교와 연결시켜야합니다. 그것이 무슨 단의 훈련이라든지 그 다음에 초월 명상이라든지 그 다음에 요가라든지 이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운동하는 시간 그 자체 안에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까지 함께 집어넣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육체훈련 프로그램과 정신의 평안을 주는 프로그램들을 결합시킨 형태의 산업들이 각광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한 매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사회 속에 사는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비주의에 대한 동경들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되고, 발달되고, 발달되는데 사실 폭발적으로 대박을 낸 많은 영화들은 과학적인 영화들이 아니라 신비주의적인 영화들이었습니다.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과학적으로는 말도 안 됩니다. 무슨 기차역의 기둥으로 돌진을 하니까 출입구가 나오고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무슨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말입니다. 아바타, 이런 영화들이 대박을 터뜨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현대인들 속에 있는 물질중심적인 시대에 살면서 염증을 느낀 인간들이 신비적인 세계를 향해 가지고 있는 동경이 얼마나 큰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상당기간동안 그런 영화들이 대박을 낼 것입니다.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판타지가 아주 유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SF와 결합시킨 그런 종류의 판타지들이 계속 앞으로도 돈벌이가 되는 문화산업입니다.
C. 자아 중심의 실용적 사고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아 중심의 실용적인 사고가 이러한 관상기도를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게 하는데 아주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됩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인간 자신입니다. 아침에 프란시스 쉐퍼의 말을 인용했습니다만 프란시스 쉐퍼에 따르면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중요한 것은 이제는 개인적인 풍요와 평안입니다. 개인적인 풍요와 평안입니다. 대의명분 같은 것들은 이제 중요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풍요와 평안입니다. 누구든지 이것을 해치면 사람들은 거기에 도전할 것이고 그리고 이것들이 사람들의 우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시간에 간간히 여러분들에게 강조를 했습니다만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보면 1960년대 70년대까지 우리에게 소위 세속적 번영주의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물질의 축복을 받는다는 그런 번영주의 말입니다. 이런 운동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순복음주의 운동도 그런 운동중의 하나였습니다만 그래서 이런 것들이 일어났고 그리고 지금 다시 새롭게 번영주의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나는 신번영주의 라고 그러는데 미국을 기준으로 보면 조엘 오스틴은 긍정의 힘을 쓴 저자 조엘 오스틴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몇 년 전만 해도 12,000명이 모인다고 그랬는데 요번에 통계가 나왔는데 45,000명으로써 미국의 제 1위 교회가 되었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미국 방송에 들어가서 그 사람 설교를 한번 들었는데 정말 대단합니다. 정말 환상적인 연설가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소리도 어쩌면 그렇게 곱습니까? 얼굴은 배우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사실은 제가 굉장히 소외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교인들은 얼마나 자비로운 사람들인가? 이렇게 갑갑한 예배당에서 이렇게 못생긴 설교자의 쉰 목소리 같은 설교를 들으면서 귀를 기울이고 듣는다는 것 자체가 정말 놀랍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있는 이런 신번영주의는 사실은 70년대의 번영주의와는 다릅니다. 70년대에 우리나라에 일어났던 번영주의는 생계형 번영주의였습니다. 너무 가난하니까 잘살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 주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교회들이 금요기도 때에 주일 낮 예배 때보다 많이 모인 교회가 많습니다. 거기에 와서 금요일까지 고달프게 시달리면서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거기에서 울음을 터뜨리면서 자기의 원통함을 쏟아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생계형 번영주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생계의 문제는 이미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단순히 생계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서 나의 꿈을 실현해보고 한번 싶은 것입니다. 그 꿈이 무엇이냐 하면 무엇이든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을 격려하는 이 세상의 많은 글들이 뭐냐 하면 ‘이 세상의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서 그 결과를 보고 네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 정말 좋은 것이다.’ 그래서 ‘생각대로 T?’ 하여튼 기가 막히게 현대인의 코드를 잡아내는 것입니다.
에이브러햄 매슬로우 라는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의 책속에서 인간에게 있는 인간 각 개인에게 충족되어야할 다섯 가지 욕구의 단계를 이야기했습니다. 첫 번째가 생리적 욕구입니다. 오줌이 마려울 때 누고, 똥이 마려울 때 누고, 배고플 때 먹고, 추울 때 덮는 이런 등등의 생리적인 욕구입니다. 두 번째는 안전에 대한 욕구, 세 번째는 애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 자기를 사랑해주고 자기가 어디에 소속되고 싶은 것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남들한테 왕따 당하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사람들에게 존중히 여김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아무리 음식이 맛있어도 손님을 무시하는 식당에는 안갑니다. 왜? 오늘날 우리는 이제 그런 정도로 배고프지는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존경을 받고 절을 하는 것까지는 필요 없지만 나를 손님으로 대접해야하는데 들어갔는데 십 분을 기다려도 종업원이 안온다면 저는 조용히 일어나서 물 컵을 놓고 다른 식당으로 가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무엇이냐 하면 자아 존중의 욕구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가 있는데 이것까지 실현하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분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Self Actualization입니다. 자기실현입니다. 자아실현입니다. 뭐냐 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꿈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실현해보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우리의 꿈이라는 것은 항상 타인과 관계를 가진 꿈이었습니다. ‘내가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이바지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겠다.’ 아니면 옛날의 만화영화나 전설 따라 삼천리에 나오는 것처럼 내가 우리 아버지의 원한을 갚아야겠다고 짚신 신고 칼 한 자루를 메고 그 다음에 진흙에 난 범인의 발자국 하나 한지에 떠서 어디론가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실은 드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아니라 이웃과는 상관이 없고 상관이 없다는 것의 의미가 우주에 꿈을 실현한다는 뜻이 아니라 상관이 없다고는 했지만 그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정말 원하는 것, 그것을 하고 그래서 그것을 밖으로 이루어서 사람들이 그 성취를 부러워하거나 그 성취에 참여하게 하는 것 그것이 말하자면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그것이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돈을 벌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가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는 것입니다. 이런 욕구가 사실은 자아실현의 욕구인데 사실은 이런 자아실현의 욕구를 마음껏 해보고 죽은 사람들이 큰 나라의 왕들이었습니다. 그런 자아실현의 욕구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자아실현의 욕구들은 상당히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는 이런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신번영주의는 이러한 요소들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계형번영주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현대인들이 얼마나 자아 중심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인간은 사회의 제도와 관습 그리고 윤리의 틀 속에서 타인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신의 욕망과 생각을 실현하는 것을 적절히 억제함으로써 행복에 이루고 덕을 쌓을 수 있다고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규율할 절대가치를 다 부정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그것이 왜 나쁜데?’ 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나쁜데?’ 라는 말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깜짝 놀랄 사실이지만 어느 나라나 마약의 문제를 가지고 골몰하고 있지만 사실은 마약의 최대의 소비처중 하나가 미국입니다. 미국이 그렇게 엄청난 마약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헉슬리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이 약물을 통해서 인간이 쾌락을 느끼는 것이 왜 나쁘냐고 반문을 하면서 이것을 사상적으로 정당화해서 이데올로기화시켜서 사람들에게 약물복용을 통해 환각적인 상태에서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주장해서 이것들을 많은 젊은이들이 거기에 호응하면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묻는 것은 그것입니다. ‘그것이 왜 나쁘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내 돈을 주고 사서 약을 맞고 내가 황홀한 느낌을 받는데 그게 왜 나쁘냐?’ 고 묻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가치의 기준들 자체를 이미 자신들이 다 파괴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그것이 어떤 것도 악한 것이라고는 있을 수가 없고 선과 악의 판단 그 자체는 각자의 판단이고 각자가 느끼는 행복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근친결혼이 왜 나쁘냐?’ 지금 미국에서 발칵 뒤집혔습니다. 유치원 때부터 동성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것은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자고 하는 것입니다. 유치원 때부터 가르치자는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그것은 아니라고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미국법원이 지지해줄 것 같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로 가면 우리나라에서도 지금 동성연애에 대해서 상당히 너그러워집니다. 지난번에 무슨 그런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저는 좋아하지도 않아서 보지도 않았는데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애들 둘이 나와서 언약식을 하고 약혼식을 하고 했습니다. 김수현씨도 그 작품을 쓰고 그랬습니다. 그런 등등의 것들이 이제 상당히 번져가면서 사람들에게 천천히 아주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나라도 똑같이 문제가 될 것이고 지금 영국에서는 실제로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지금 열린 교회에 있는데 남자 두 사람이 와서 지금 주례를 서달라고 할 때 ‘저는 당신들 주례를 서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현행범으로 체포됩니다. 왜? 교회에 와서 결혼을 하겠다는 사람에게 주례를 서주게 되어있는데 남자와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주례를 서주지 않는 것은 이것은 법 위반입니다. 차별법입니다. 인간을 차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주의교회들은 이것을 비껴가기 위해서 교인들이 합의를 해서 정관을 만듭니다. ‘목사님은 우리가 고용했는데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동성연애를 반대하니까 우리의 허락이 없이 동성애자들을 주례를 서주면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서류를 만들어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해주고 싶은데 우리 교인들이 나를 고용한 우리 교인들이 해주지 말라고 그런다.’ 그러면 면책이 된다고 합니다. 이 정도는 보통입니다. 엄청난 이런 가치들이 무너지면서 이런 것들이 다 판단 자체가 다 사라져버려서 인간은 선악의 기준을 배격한 채 인간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행복해지는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스피노자의 범신론적인 사유가 오늘날 다시 각광을 받고 있는 것도 이런 문화적인 코드와 일치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신적 존재로 보기 위해서 개체적인 인간 안에 신적 보편이 있다고 보고 이 신적 보편을 토대로 우주적인 연결을 강조하면서 인간 존재가 신격화하고 인간 안에서 신이 인간 속으로 들어와 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아야지만 이게 이제 모든 가치를 제거하고 부술 수 있는 거절할 수 있는 인간의 작업들이 논리적인 타당성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오늘날 관심 있는 여러분들은 보셨을 것입니다. 마이클 샐던의 굉장히 똑똑한 분입니다. 27살에 하버드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최연소 교수입니다. 신칸트주의자이지만 칸트와 그 다음에 아까 책에 나온 정의에 대해서 우리나라에서 40만부이상 팔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강의들이 엄청나게 폭발적인 관심을 끄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그게 무엇 때문이냐 하면 이런 가치의 체계들을 다 부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까 사회가 굉장히 무정부적이 되고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1980년대 미국의 오렌지카운티에서 있었던 일인데 우리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해괴망측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는데 부부를 일주일에 한 번씩 바꾸기로 주민이 합의를 본 것입니다. 그것이 본격적인 스와핑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스와핑을 하는 사이트가 있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 스와핑을 하러 나갈 때는 남자 여자 둘이 나가서 우리 둘이 부부라고 그러는 것 가지고는 안 되고 주민등록을 떼어가서 두 사람이 부부라는 것을 확인해 주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여자나 사가지고 올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민등록증이나 호적등본을 가지고 떼어가서 두 사람을 대조해서 둘이 부부관계라는 것을 확인해야지만 멤버로 받아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와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악을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럽니다. ‘그게 왜 나쁜데?’ ‘정절이!’ ‘그게 뭔데?’ ‘왜 나쁜데?’ ‘한 여자가 한 남자와 부부…….’ ‘그게 뭔데?’ ‘그래도 가정을…….’ ‘그게 뭔데?’ 다 부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완전히 자율적인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어떻게 됩니까? 무정부적이 되는 것입니다.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이클 샐던이 이야기하는 정의의 법칙이 무엇입니까? 그게 뭐냐 하면 ‘그러면 자연법적으로 이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것은 부정하니까 없다고 치자. 그래도 가치의 기준이 있어야 된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모인 사람들이 합의를 보아라. 그러면 그것이 도덕이 되는 것이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군중이라는 사람이 제 정신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특히 미국처럼 아주 토론 문화가 발달하고 민주주의 훈련이 잘되고 그런 국가에서는 그래도 좀 낫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같이 후진국이어서 정치인들이나 사회운동가들에 의한 소위 상징적 조작이 먹혀들어가는 국가에서는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이론이 되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켰을 때에 아직까지도 정치지도자들 중에서 아직까지도 히틀러의 지지도를 능가한 사람이 없습니다. 93.4%의 지지를 얻었답니다. 거의 폭발적인 지지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면 일본은 대동아 전쟁을 일으킬 때 안 그랬습니까? 광기가 발동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박정희 독재 정권 때도 우리는 그랬습니다. 판단이 안섭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계속해서 우리보다 어린시대에 일어난 일이지만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항쟁을 말하자면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나라를 전복시키기 위한 폭동이라고 배워왔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아주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40만부를 팔아서 대박을 냈습니다. 그래서 출판사에서 ‘야 이 샐던의 책을 찍기만 하면 돈방석에 앉겠구나!’ 하고 쏟아놓았더니 파리 날리고 안 사가는 것입니다. 왜? 사간 사람들이 대부분은 읽지 않았고 읽은 사람들은 조금 읽어보니까 엄청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왜 부담스럽습니까? 책이 두꺼워서 부담스럽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합의를 하면 지켜야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공동체가 합의를 하면 나는 거기에 복종해야하는구나!’ 그 자체가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남이 그것을 지키며 사는 것은 기분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안 그러고 싶은 것입니다. 거기에 얽매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요새는 그 책이 더 이상 안 팔린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속에서 결국은 인간이라는 것은 기초를 이미 다 허물어버렸기 때문에 ‘왜 나쁜데?’ 라고 반문을 하면 대답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현대의 정신입니다. 이런 속에서 기독교가 고전적인 기독교의 개념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전부 옳고 너는 다 틀리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그게 기독교 아닙니까? 그러니까 ‘너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은 안 움직이고 제자리에 계시고 네가 멀리 떠났기 때문에 네가 회개하고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면서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너는 없다. 하나님과 이웃이 있을 뿐이다. 너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이웃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이 행복하시고 이웃이 행복하면 그 안에 네 행복이 있는 것이다.’ 라고 가르치는데 이것은 현대인의 코드하고는 180°비껴가는 것입니다. 가톨릭은 50년 전에 이런 세상이 올 줄을 정확히 예측한 것입니다. 그래서 1962년 바티칸 제 2차 공의회 때에 대대적인 방향수정을 하면서 종교다원주의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현대인의 코드에 맞게끔 기독교 신앙을 재해석해서 그 사람들은 성경하고 크게 얽매이지 않는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해서 현대인들을 움직이지 않고 기독교를 바꿔서 현대인들의 코드에 맞추어서 그래서 사람들이 저항감 없이 교회로 유입되어 들어올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찾아낸 것이 오늘날 가톨릭의 종교 다원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톨릭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개신교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분파들이 나뉘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의 분파입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한 테이야르 드 샤르댕 같은 사람들은 가톨릭 사제인데 가톨릭에서 거짓 선지라라로 막 비난을 퍼붓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까 이야기하는 이 세계 전체의 본질, 그 본질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다 조금씩 나누어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죽고 다 해체되면 본질로 돌아가고 스피노자의 그 본질은 다시 그리스도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굉장히 혼란스런 시대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Ⅳ. 결론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그것은 상관없이 여태까지 말씀드린 이런 것들이 전부다 현대의 사상을 형성하면서 기독교 속에 묻어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살다가 교회에 들어옵니다. 그러면 그 공기를 숨 쉬고 거기서 물을 먹고 그리고 살았던 것처럼 그렇게 문화를 통해서 현대의 사상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속에 스며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들이 그런 사상에 숨을 쉬고, 그런 사상에 접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기독교는 이런 점에 있어서 현대주의 사상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식적으로 알뿐만 아니라 체험적으로 그것을 확신하고 강력한 성경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부인하거나 타협하게 될 때 마지막에 우리의 신앙이 어떤 손상을 받고 어떤 결과를 가져 올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가 정확하게 분별해서 맞서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죽을 때도 내가 유언을 하고 죽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당신들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현대 상황을 무지하게 많이 공부하지 않아도 됩니다. 조금만 이런 강의를 잘 듣고, 눈여겨서 교리공부를 철저히 하고, 그러면서 현대사상들을 하나씩 하나씩 읽어 나가보면 얼마나 교묘하게 이 현대인들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지 심지어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영혼까지 갉아먹고 있는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껍데기는 교회를 나오는데 이 속은 완전히 세속적인 인간이 되어서 그 가치관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이 디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그리스도인의 이중성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예배대로 들이고 나가서 사는 것은 현대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복음의 정신으로 싸우고 변혁시키고 한줌의 누룩이 되어서 가루들을 부풀게 하는 그런 도구가 되어야 할 텐데 그런 순전한 누룩이 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강의를 마무리하자면 그래서 우리는 관상기도라는 이것들이 이런 것들이 오늘날 신학적인 문제점이 무엇인가는 다음시간에 하겠지만 이런 것들이, 왜 이렇게 해로운 것들이 우리에게 기독교 속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이런 운동이 펴졌을 때에 기도하지 않던 사람들이 오히려 이 운동이 퍼지니까 그런 기도를 하겠다고 그런 운동 속으로 빨려 들어오게 되는 것, 기도 그 자체를 원시적인 종교의 한 형태라고 주장하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그런 기도를 하자고 할 때에는 기도 자체가 원시적인 형태라고 거부하던 사람들이 오늘날 관상기도운동에는 적극 앞장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우리들은 이런 사상적인 고찰을 통해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운동들이 가져오게 될 파괴적인 결과에 대해서 우리는 굉장한 우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이 현대 사상에 이렇게 물들고 있고 이런 관상기도와 신비주의 운동들이 놀랍게 이런 문화적 코드와 일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확하게 사이클이 맞으면 엄청나게 빨려들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또 하나는 교회 안에서 이미 껍데기밖에 없이, 아는 것도 없이, 은혜의 힘도 없이, 윤리적인 결단도 없이 생활하고 있는 이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은 공허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속에 살아남아있는 자기 나름대로의 세상적 인본주의적인 본성들이 이런 코드가 딱 맞을 때 신앙적인 대치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문화적으로 이끌려서 자연스럽게 공감을 얻고 그리고 교회를 이탈해서 이런 신비주의운동에 빠지거나 관상주의운동에 빠지게 될 것은 아주 현저하게 많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결코 복음주의적인 영성과 양립 할 수 없는 이교적인 영성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관상기도가 신학적으로 무슨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를 다음시간에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