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 안에 있는 은혜와 죄 1
녹취자: 이경순
지난 시간에 강의한 요지는 인간의 마음 안에는 죄와 사랑이 함께 공존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신학적으로 신앙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교리문답에서 신앙의 자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신앙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물어볼 때 그것은 마음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자리가 마음인데 죄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죄의 자리도 마음입니다. 이것은 다음 학기에 해당되는데 인간의 영혼 마음 정신 육체 이런 관계에 대해서 또렷하게 알고 있어야 됩니다. 공부가 필요합니다. 인간의 육체는 무엇인가? 단순히 고기 덩어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육체라고 부르지만 죽어서 썩어가는 것을 보고 우리가 육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육체를 떠 올릴 때는 시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육체가 무슨 의미인가? 정신은 육체와 대조되는 개념인데 그러면 물질인 육체와 비물질인 정신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정신이 그렇게 연결된다면 영혼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리고 영혼과 정신 사이에서 마음의 위치는 어디인가? 마음은 영혼과 정신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으며 또 육체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육체로부터 영향을 받고 육체에 영향을 주기도 하는가?
마음이 육체의 영향을 줍니다. 수업시간에 취식하는 것은 졸음을 쫒는 용도로 취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너무 몸이 지치고 아무것도 할 기운이 없습니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데 ‘야, 네 남자친구 왔네.’ 그러면 알지도 못하는 힘이 확 납니다. 또 이런 것도 있습니다. ‘그 나쁜 놈이 왔네.’ 그러면 다시 힘이 납니다. 그것은 아까 난 힘하고는 다른 힘입니다. 복수하고자 하는 이런 힘들이 확 솟아나는 것입니다. 또 이런 것 어때요? ‘아 나는 왜 이렇게 안 돼 목회와 기도 너무 어려워 나는 공부에 소질이 없나봐’ 그러는데 ‘너 수석했대.’ 그러면 힘이 납니다. 그러니까 뭘 하나 먹지도 않았는데 힘이 납니다. 이렇게 마음과 육체가 얼마나 중요한 관계에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독일사람과 러시아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우울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날씨 관계입니다. 스페인 사람과 포르투갈 사람들은 생기발랄합니다. 항상 웃지 않는 한국 사람을 굉장히 적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생각 없는 사람처럼 다닙니다. 왜냐면 날씨가 굉장히 영향을 끼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 가려고 대충하고 봤는데 괜찮아 기분이 좋아요 그런데 아무래도 아닙니다. 그러면 기분이 우울해집니다. 옷을 입었는데 핏이 딱 맞고 왠지 괜찮은 것 같으면 그럼 오늘 발걸음도 가볍고 자신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은 설명을 못하지만 수없는 상호작용이 하루에도 수천 번씩 수 만 번 씩 일어나면서 인간이 이렇게 지탱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원하는 것을 가졌다고 난 행복하고 불행하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날씨부터 온도와 습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다 영향을 줍니다. 똑같은 음식을 먹는데 아 이것은 구내식당에서 먹던 거잖아 그러면서 먹는 것과 아 이거 시골에서 우리엄마가 해주시던 것인데 그러고 먹는 것은 객관적으로는 똑 같은 것인데 속에 마음에는 다른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만약에 죄가 살아있는 생물체라고 본다면 신앙을 살아있는 생물체라고 본다면 신앙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사랑인데 그럼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최종적으로는 어디를 차지해야합니까? 당연히 마음입니다. 마음이 로봇 태권브이에서 조종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아바타에 나오는 조종하는 그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나머지 모든 기관이 뭘 하고 싶어도 마음이 하기 싫어하면 못하는 것입니다. 뭘 하기 싫어도 마음이 하고 싶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은혜라고 우리들이 신학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은혜가 계속 머물고 싶어 하는 곳도 인간의 마음이고 죄가 머물고 싶은 곳도 마음입니다. 서로 그 사령탑을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한 내적싸움이 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아주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많이 감지를 하고 영적으로 거의 뛰어나지 않고 영적으로 아주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을 거의 감지를 못하는 상태에서 이 마음에서 쟁탈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부대가 있는데 최고사령관이 있는 사령부입니다. 여기서 작전부터 시작해서 레이더 통제 모두 이루어집니다. 저기서 열심히 총을 메고 툭툭 땅이나 차면서 보초서고 앉아 있습니다. 그동안에 들어와서 사령부를 점령하는 것입니다. 그럼 사령부에서 전화한통이면 다 나머지는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지킬만한 모든 것보다 무릇 너희 마음을 지켜라 그런 것입니다. 지킨다는 단어 요새 같은 것을 파쇄 할 때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고 여기는 결사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붙들고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주체성에 대해서 내가 여러 차례 이야기 한 것처럼 그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느 순간 어느 비극적인 순간 어느 희극적인 순간 어떤 위기를 만나더라도 자기의 마음에 대한 주제 권을 자기 자신이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놓는 순간에 삶 전체는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특히 타락 같은 것 보면 젊은이들이 정신에서 미끄러집니다. 결국은 자기 자신을 주체할 수 없게 됩니다. 그 주체하지 못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과 혼란의 연속입니다. 그런 정신상태 로는 현실을 대면할 수 있는 용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타락하는 것입니다. 성적인 타락 게임중독 마약 이런 것들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끊어버리지 못하고 계속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삶에 주체성이 없고 고기처럼 흐느적거리면서 남에 의해서 감정하나에 움직이면서 출렁거리면서 사는데 가치도 없고 그냥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짐승같이 될 수 있을까 하는데 그런 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지난주 강의의 결론 부분인데 그런 식으로 신자 안에는 죄와 은혜가 싸웁니다. 그래서 이 신자는 비록 절대적인 죄의 지배는 불가능하지만 상대적인 지배는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에 그러면 그 상대적인 지배가 극대화되면 절대적인 지배와 방불한 상황을 연출합니다. 그래서 신자가 거듭 났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신앙이 매우 나빠지고 은혜에서 멀어지면 불신자와 구별이 안 될 정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는 정도 구별되지 나머지는 망가진 사람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에 은혜아래 있는 신자의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원리도 돌아와서 다시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 필요하다. 은혜의 원리를 따라서 대적하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두 가지가 대조되는데 구원 받고 죄의 절대적인 지배를 벗어났지만 상대적인 지배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고 이것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발전될 수도 있고 아니면 후퇴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은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죄가 나에 대해서 주인 노릇 할 수 없다. 죄가 나를 노예로 삼을 수 없다 그 점에 있어서는 올 레이디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죄의 영향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닙니다. 그 죄는 여전히 우리를 공격하고 우리 안에 남아서 자기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합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아직 내가 이 구원이 완전히 완성 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구원이고 이 구원은 아직 구원입니다. 이때는 죄와 모든 것으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완벽한 상태가 됩니다. 우리는 현재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 나라와 같은 개념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이 됩니다.
이 세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때에나 보게 될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침투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온 세상과 앞으로 올 세상 사이가 중첩되는 가운데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마귀에 사로잡히고 힘겨운 삶을 살았었는데 내가 예수를 믿으니까 물리쳤습니다. 염려와 근심 혹은 사람에 대한 절절한 미움이 밀려와서 내가 노예가 될 것 같은데 거기서 나를 지키면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런 것들은 여기에서나 맛볼 수 있는 것을 이미 댕겨주시는 것입니다. 미래에 이룰 수 있는 말할 수 없는 기쁨 이런 것들을 당겨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오시면서 이미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던 마귀의 세력들이 여기서 다 궤멸이 되고 여기서 싸움이 결정적으로 이미 끝난 것입니다.
고질라 라는 영화를 비유하자면 팔 한번 휘두르면 빌딩이 무너질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의 머리를 깨뜨려서 머리가 박살이 나고 골이 쏟아지고 등뼈가 다 부러지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창자가 나오고 힘 있던 팔다리는 아작이 나서 길거리에 쓰러져서 겨우 한 시간에 3-4센티씩 이동할 수 있을 정도의 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 일이 여기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 영향력을 어기에서 행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자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그냥 자기를 방탕한 마음에 맡기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구원을 받은 유익이 거의 안 나타날 정도로 짐승과 방불한 삶을 신자가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볼 수 있는 한때는 왜 그렇게 신실하고 훌륭한 사람들이었는데 왜 그렇게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죄를 짓는가 하는 것에 대한 신학적인 답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 설명을 오늘 공부에서 더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수업에서 다 못하겠지만 정신 바짝 차리셔서 이해를 하시고 단순히 시험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신앙생활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제가 간증이 있습니다. 교회를 93년도 12월12일 날 개척을 했고 그때 저는 안양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천안대학교로 청빙을 받아서 학교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간지 1년 만에 하나님이 특별히 시키셔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7명의 교인과 함께 지하에 방을 얻고 교회를 시작을 했습니다. 저는 그때 목회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이미 그때 제가 주님을 깊이 만났고 설교에 어느 정도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설교를 하면 엄청나게 많이 모였습니다. 7명이서 12월에 시작을 했는데 넷 째주 지나고 1월 첫 주가 되었는데 35명이 모였습니다. 아 성공 하는구나 그리고 1년 열심히 하면 그래도300명이야 모이겠지 생각을 하고 설교를 했는데 정말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예배시간마다 사람들이 펑펑 울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저는 바빴습니다. 그 때 사명이었기 때문에 1년에 자가운전해서 5만5천키 로를 뛰면서 집회를 다녔습니다. 제주도부터 시작해서 동해안 맨 끝 고성까지 저녁에 충청도에서 집회하고 새벽에 다시 올라와서 양평에서 집회하고 그럴 정도로 엄청나게 다녔습니다. 그때는 사명이었습니다.
불타는 사명감으로 다녔는데 1년을 했는데 그렇게 은혜를 부어주셨는데 교인이 한 50명 모였습니다. 그래서 저한테는 굉장히 실망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어느 날 침체가 찾아왔습니다. ‘아 나는 아무것도 안 돼, 나는 좋은 교수도 될 수 없고 더더군다나 좋은 목사는 내 분량이 아닌가보다.’ 하고 낙심을 하고 있는데 그 때 몸도 아파서 한 삼일동안 집에 누워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하나님이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은 아닌데 내 마음에 ‘너는 왜 그렇게 마음이 낙심된 상태로 있냐? 나의 종 존 오웬이 있지 아니하느냐?’ 나도 모르게 무엇에 홀린 듯한 마음으로 일어서서 내 서재에 있던 존 오웬의 전집을 16권짜리를 보았습니다. 사 놓은 지가 6개월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6권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아닌데 무척 어려웠습니다. 이유가 우리로 말하자면 옛날 영어라 용비어천가나 월인천강지곡 정도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책이 1600년도의 영어입니다. 그래서 단어를 찾아도 단어집에 안 나옵니다. 그리고 단어가 나오는데 그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책들을 읽을 때에는 뉴 잉글리시 딕셔너리 옥스퍼드라고 10권으로 된 영어 사전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단어를 찾으면 8세기에는 무슨 뜻 10세기에는 무슨 뜻 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영문학 하는 사람은 알 것입니다. 그것은 기본입니다. 의미가 말도 안 되는 의미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그중에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대화란 뜻의 영어, conversation이 있습니다. 이것이 16세기로 넘어가면 이것이 대화가 아니라 ‘행동거지’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모르면 청교도 책의 제목도 번역을 못합니다. ‘대화의 기술’이라는 것이 대화에 대한 가르침인가보다 싶어서 펴보면 대화의 이야기는 거의 안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거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것이 대표적인 단어입니다. 어쨌든 이런 단어가 수두룩한 것입니다. 그래도 한 때 영어를 했는데 여기서 물러날 수 없지 하고 읽었습니다.
그때에 우리 집이 지금은 팔아서 건축헌금 했는데 산 아래 연립주택이 있었습니다. 진짜 별로 안 좋은 점도 있고 습기도 찾지만 그러나 창문을 열면 산자락이 떨어지는 좋은 곳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이불을 대고 이러고 희망이 없이 있다가 그 책을 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꼼꼼하게 읽었는지 15페이지를 읽는데 점심시간 빼고 10시부터 6시까지 7곱 시간 걸렸습니다. 그 대신 꼼꼼하게 읽어서 완벽하게 메모까지 하면서 이해를 했습니다. 15페이지를 그렇게 오래 읽어보긴 처음이었습니다. 빨리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주 쯤 그 때 쓴 책을 한권씩 드리겠습니다. <존 오웬의 신학>이라는 책입니다. 여러분들이 읽는다면 커다란 도전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래도 신학교 선생이었고 내가 공부를 안 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충격의 연속이었습니다. 마치 걸어가다가 끊임없이 펀치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어서 숨이 멎을 정도였습니다. 모두 읽고 우리 집사람한테 “여보, 나는 목사이고 신학교 선생이었는데 그리스도인으로도 잘 못살 은 것 같아. 난 이런 걸 한 번도 몰랐어.” 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의 그 논문이 60페이지정도 약간 안 되는 것이었는데 제목이 <죄죽임>(mortification)입니다. 아마 처음 들어볼 겁니다. 직역을 하면 신자 안에 있는 죄 죽임입니다. ‘모르티’는 죽음입니다. ‘피케이트’는 ‘하게 하는 것’ 즉 ‘죽게 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말하면 “put to death” 죽음 앞에 두는 것이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killing과 같은 의미와 다릅니다. 반대말이 있는데 “vivification”입니다. vivify는 ‘put to life’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mortification of sin”을 직역하면 신자 안에 있는 죄의 죽임이고, “vivification of grace”는 신자 안에 있는 은혜의 살림이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개는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죄 죽임에 대해 절반정도 나가보도록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지난번에 우리가 sin의 의미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sin이 있고 영어에 crime이 있다고 했습니다. sin하고 crime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sin은 내적인 것이고 crime은 외적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sin은 바깥으로 드러나서 법상으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 정도는 crime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crime은 형법적으로 저촉이 되는 것입니다. 법률에 저촉되는 것일 때는 crime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유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sin은 뿌리입니다. 이것은 보다 내면적이고 근본적이고 뿌리가 되는 성향으로서의 죄입니다. crime은 외적이고 파생적이고 결과적인 행위와 마음의 죄입니다. 특히 행위의 죄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그림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열매들이 맺는데 이것이 crime이라면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뿌리를 sin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crime의 경우에는 대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이 사람 것을 훔쳤으면 (법의 규정이 없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이 없습니다. 물론 반분위기를 흐렸다는 책임은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법이 규정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노트북을 훔쳐간 것은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을 책임 있다고 규정하는 것이 나라의 규범입니다. 말도 안 되지만 만약 법에 이런 것 정도 훔쳐가는 것은 큰 문제도 되지 않고, 그냥 수단껏 살면 된다고 되어 있다면 다른 사람의 물건을 아무리 훔쳐가도 법원이 나를 죄인으로 판단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사람이 숨 쉬고 있는 공기를 내가 마셨다고 해서 나를 횡령죄로 고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가지고 가면 아무리 싼 휴대폰이라도 절도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 crime의 대상은 특정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sin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죄와 벌>에서는 라스콜니코프가 돈 많은 전당포 노파를 죽였기 때문에 노파가 crime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 책임을 노파에 대해서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sin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 근원을 모릅니다. 근원을 가지고 있는 한 끊임없이 발생하는데 그것이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속에 어마어마한 뿌리가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를 안 믿더라도 무엇인가 종교나 종교심리학적인 견해를 갖기 전에는 이런 사실에 대해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sin이 문제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sin의 대상이 하나님God 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 사람들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은 sin에 대해서 책임질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책임질 대상이 없으면 처리할 의무도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사회의 법이라고 하는 것은 (법의 규정 안에 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상의 부분에 대해서는 그냥 양심에 속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은 왜 네가 이런 사상 혹은 저런 사상을 가졌느냐에 대해 판단하지 않고 단순히 드러난 증거를 가지고 재판을 해서 사회에 나쁜 영향을 준만큼 공정하게 벌을 주고, 이는 법원이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하든지 낮추려고 하는 사람이 변호사들이고, 그것을 어떻게든지 높여서 다시는 이런 범죄가 반복되지 않게 하려는 자가 검사입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사람은 판사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변질되기 시작하니까 사회가 개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직업이 아닙니다. 검찰개혁 해야 된다고 하는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조국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난 반대이고, 공수처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도 반대입니다. 공수처 가지고 있는 나라가 이 세상에서 중국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검사들이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 소신 것 할 수 있어야 되고, 예산도 마찬가지로 법무부에서 할당해서 주는 것이 아니고 국회에서 예산 통과되고 나면 자기네 독자적으로 쓰고, 중앙정부 눈치 안 보게 해주고 충분히 생활보장 해주고, 업자들하고 몰려다니면서 술 먹고 하는 것 한번 걸리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완전히 매장시키고, 나아가 변호사 근처도 못 가게하고, 부정으로 딱 걸리면 일수불퇴로 영원히 실업자로 살게 하든지 가서 노동이나 하던지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 버려야합니다. 그 대신 충분히 대우해주고 존경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라다운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전관예우 같은 것 두면 안 됩니다. 그래서 아예 서울에서 재판하던 사람은 제주도로 보내버리든지 거기서 2년 이상 못 있게 하고 하든지 해야 합니다. 소위 이야기 하는 향판 같은 제도를 완벽하게 없애고 그런 것들이 만약에 적발이 되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도록 만들어야합니다. 사회의 기강을 잡아야 됩니다.
저는 매일 매일 분노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어떻게 이 꼴밖에 안되는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학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때 만 해도 공부 잘하면 그래도 길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과외 하는 애들도 많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생활수준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기껏해야 단과반 끊고 다닐 정도였는데 지금은 살기가 좋아졌습니다. 스카이 캐슬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옛날 대통령 한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한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큰 생각 없이 제시한 듯 보이지만 말입니다. 그냥 무조건 성적으로 뽑을게 아니라 성적이 조금 떨어져도 다른 면에서 우수한 학생들에게 입학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얼마나 달콤합니까? 그때 생각했던 것은 힘없고 시골에서 자라고 훌륭한 선생님을 서울 학생들처럼 못 만나서 학습이 떨어지는데 아주 창의성이 있고 신실하고 사회봉사도 잘하고 이런 애들도 좋은 대학을 입학하기를 꿈을 꾼 것입니다. 학종은 그렇게 시작되었는데 가난한 집 애들의 엄마 아빠는 학종이 뭔지도 모르고 지냅니다. 그러나 강남에서는 그 얘기 나오자마자 학종 서비스 산업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때 부터 서울대 코스 학종에 이런 것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는 상상도 못하는 정보입니다. 대학교에 다 연결해주고, 실험실에 넣어주고, 가서 몇 번 들여다보고, 제1 저자에 논문이 올라가고, 한번 참석할 때마다 최소한 오백만원 이상 천만 원 가까이 건네주고, -그것도 아무나 가서 오백만원 천만 원 줘도 해주지도 않아요- 누구한테 연결해서 그 사람한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말하자면 둘이 서로 같이 상부상조하는 그런 차원에서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외국에 가서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을 수 있는지 등등해서 마치 스카이 캐슬 선생들과 같은 사람들이 쫙 짜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돈 있는 사람들은 그 제도를 100퍼센트 활용해서 어마어마한 이익을 보고, 나머지 사람들은 아예 점점 더 정정당당하게 시험을 볼 기회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식으로 비판을 했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결국은 학교 와서 다 자고 학원가서 공부하지 않느냐 그러는 겁니다. 시험성적을 낮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때 교육방송에서 나온 교재와 교과서를 중심으로 내서 만점짜리가 한 50명 나오면 어떻습니까? 무슨 문제가 됩니까? 학원에 가서 고액과외를 안하면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가 서너 문제씩 툭툭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돈 많은 애들 먹여 살리는 것입니다. 외국의 대학에서는 그렇게 사람의 피를 말리지 않습니다. 일단 될 만한 애들을 들여보내고 일단 들어와서 공부를 가르치면서 안 되는 애들은 솎아내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실화입니다. 한 애가 친구를 만나려고 하버드 대학에 갔습니다.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갈 데가 없어서 어느 복도에 서있는데 그 앞에 입학 사무처라고 써 붙어 있는 것입니다. 계속 안가고 있으니까 어떤 직원이 문을 열더랍니다. 안경 낀 할머니입니다. “얘, 너 이리와 봐.” 하고 부른 것입니다. 들어갔더니 그 할머니가 “너 우리학교 오려고 왔니?” 그래서 “아니에요. 저는 고등학교 때 공부도 잘 못해서 여기 학교 올 실력도 안 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는 집도 가난해요” 그러니까 “공부는 네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가 테스트하면 되고, 돈이 없으면 하버드 대학 우리 돈 많아서 너 공부시킬 수 있어.” 그러더니 할머니가 “그래도 모르니까 너 한번 입학원서 내 봐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얘가 황당해서 원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집안 식구들한테 이야기도안하고 경영학과 원서를 써서 제출했습니다. 면담을 하게 된 것입니다. 몇 가지 테스트를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수학을 물어본다든지 미적분이나 그런 것을 묻지는 않았습니다. 형들은 다 공부 잘해서 예일대 가고 그랬는데 자기는 공부를 못해서 대학을 갈만한 데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물어본 게 너 왜 경영학을 하려고 하냐였습니다. 자기는 진짜 경영을 잘해서 돈을 벌어보고 싶다고 했답니다. 그러니까 너 지금 뭐하고 있냐고 묻더랍니다. 그랬더니 자신은 지금 피자집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데 앞으로의 꿈은 미국 최고의 피자 체인점을 만드는 것이라고, 아무도 넘나 들어보지 못한 아주 고급의 영역으로 피자를 확장해서 세계적인 피자 메이커를 만들고 싶다고 대답했답니다. 그런데 결과는 합격했습니다. 거짓말 같죠? 붙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대신 “너 명심해라. 돈 없다니까 돈도 주겠는데 공부 못하면 너는 아웃이다.” 그런데 일단 들어가니까 또 따라 가겠더랍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 같은 사람을 서울대 법대에 넣어주면 못 따라갈 것 같죠? 난 이 나이라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자기도 모르는 굉장히 큰 가능성이 있습니다. 부딪히고 살면 그 세계가 그런가보다 하고 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버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습니다. 학교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얘 꿈이 이루어지면 하버드는 대박이다 얼마나 돈이 많으면 그러겠습니까? 걔보다 훨씬 공부 잘하는 중상위권의 사촌들은 못 들어가고 건들거리고 다니다가 친구 만나러 갔다가 들어간 것입니다.
제가 얘기하는 요지는 그렇게 학생을 뽑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학생을 뽑을 수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시스템이 깨끗하고 속임수가 없어야 됩니다. 봉투 받았다고 학종 잘 써주고 이러는 선생들은 선생도 아닙니다. 그런 시스템이 되어 있을 때 지금 하는 체제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학원이 엄청나게 뜰 것이라고 하는데 제 얘기는 대입 시험 문제를 쉽게 내라고 하고 싶습니다. 한 50명쯤 만점 나오라 그런 겁니다. 한 100명이 나온들 뭔 상관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 후배 때도 보면 만점 나오는 사람 거의 없고 1년에 한 명 두 명 세 명 이렇게 나옵니다. 아니 한 백 명 나온들 무슨 상관입니까? 학원 필요 없게 하는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육방송 보고 수많은 인강 설치하고 학교에서 교육 잘하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누구든지 겨루면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를 만들어야지 지들 올라가고 부러뜨리면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게 다 죄가 집단적으로 작용하면서 그런 사회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배려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들이 죄 라고 하는 말이 아주 모호합니다. 그래서 잘 들어야 합니다. 죄라는 것이 모호합니다. 예를 들어서 남의 것을 훔쳤습니다. 그러면 죄졌다고 이야기합니다. 때렸습니다. 죄를 졌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여자에 대해서 안 좋은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면 죄를 졌다고 합니다. 이럴 경우에 죄라는 의미는 행동으로 드러난 크라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막 혼용해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돈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행위나 마음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행위가 없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사람이 황제의 방을 청소하는 청소부입니다. 황제인 내가 우연히 내 방을 들어갔더니 청소를 하고 있는 겁니다. 쓰레기통을 보면서 “에이, 먹기는 뭘 이렇게 많이 처먹었어.”하고 혼자 중얼거린 거린 겁니다. 그런데 황제인 내가 뒤에서 들은 것입니다. 만약에 황제인 내가 그 방에 안 들어갔다면 이런 의미의 죄가 성립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알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조그맣게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네 죄를 알렸다?” 그게 1번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게 심판이라는 용어로도 사용이 됩니다. ‘죄로 정하셨다. 이러이러한 행동을 죄로 정하셨다’ 그것은 심판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도 죄라는 것입니다. “네가 나쁜 짓 하더니 벌 받았다”고 그렇게도 얘기하지만 “너 그거 죄 받은 거야”라고 얘기 하기도 합니다. 심판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하는 것입니다. 어렵습니다. 그러면 이런 의미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결국은 어떤 의미에서 사용 되냐면 이 죄가 마음에 있는 성향, 그것도 죄를 지향하는 성향입니다. 지향이라는 것은 의지를 가지고 그쪽 방향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죄를 지향하는 성향입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한참 어렸을 때에 기독교에서는 타락의 대명사가 술 마시고 담배 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렸을 때 복음성가에 ‘술 마시고 장구치고 죄만 짓다가 오늘 밤에 죽으면 어찌하리오. 유황불이 펄펄 끓는 지옥으로 이를 갈며 슬피 울며 끌려가겠네.’라는 엄청 유행하던 복음성가가 있었습니다. 모태신앙이라 술을 입에도 못 댔습니다.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술을 아주 안 마실수 없이 강권해서 좀 먹어봤습니다. 전혀 맛있지 않았습니다. 처음 보는 맛이었습니다. 두 번째 또 그럴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제 자기를 음주가로 알고 계속 권하기 때문에 조금씩 마시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술이 무슨 맛인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생각이 나는 단계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내가 선택을 합니다. 그래서 마셔보는 겁니다. 아주 강하게 끌리지는 않지만 그 일을 계속 반복을 합니다. 그러면 드디어 내 몸이 술의 맛을 더 깊이 알게 되고 그때 비로소 발견하는 것은 소주와 막걸리와 포도주와 백포도주 적포도주 샴페인 등등이 맛이 다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담에 중국산, 켈리포니아산, 프랑스와인과 이런 것들이 어떻게 다르다는 것의 차이를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점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담에는 술 없이 살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맨 처음에는 남이 나에게 주었는데 그 담에는 내가 선택을 하고 그 담에는 내가 선택을 안 해도 매일 밤 술을 안마시면 잘 수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울 할 때도 제일 먼저 술이 생각나고, 기쁠 때도 술이 생각나고, 반가운 사람 만나도 술이 생각나고, 보기 싫은 사람 만나도 술이 생각나고, 그래서 결국은 술에 인 박이게 되는 것입니다. 인이 딱 박히게 됩니다. 박혔을 때 인간의 마음 안에 술을 간절히 원하고 잡아 땅기는 힘이 발생합니다. 이걸 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죄 죽임이라고 이야기 할 때에 힘입니다. 포스가 작용합니다. 이런 힘으로서의 죄를 다루는 방법입니다. 그럼 이런 문제가 나올 수가 있습니다. 죄라는 용어가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3가지 용례를 들고 상세히 설명하시오 그러면 진술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공부를 어디 가서 돈 주고 못합니다. 학원 없습니다. 그리고 철학자들이 하는 이야기하는 너무 어렵고 복잡합니다. 철학자는 그런데서 희열을 느끼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다 알아듣는 강의는 철학자에게 자존심 상하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유혹을 받을 때가 있으니 말입니다. “내가 다 깨달았다”라고 한다면 자존심이 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는 하나님을 가르치는 곳이니까 저도 그런 사람들 만나면 그렇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는 아주 쉽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여러분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을 믿어요? 안 믿어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집안을 깨끗하게 해놓지 않으면 못 견디는 형입니까? 아니면 약간 지저분해도 그냥 괜찮은 편입니까? 우리 딸도 많이 소소합니다. 거긴 어때요? 저는 깨끗하지 않으면 못 참는 성격입니다. 어질러 놓고 놀 땐 어질러 놓아도 마지막에는 깨끗하게 싹 치워놓아야 하고, 일에서 떠나고 들어왔을 때에는 모든 것이 다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성향 자체가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타고 날 수도 있고 (후천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타고난 본성, 교육, 환경입니다. 밑변인 본성은 안 변합니다. 대신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환경 속에 사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저분해도 잘 사는 사람들은 아무렇게 그 게 눈에 안 들어옵니다. 그런데 병리학적으로 보면 그런 지저분한 환경 속에서 수많은 균들이 서식하고 수많은 나노 먼지들이 있어서 그것을 흡입하게 되니 사실은 이런 삶의 태도가 객관적으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게 아니라 피지컬한 측면에서 볼 때엔 굉장히 많은 결과들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내가 신학을 공부하고 나이도 많으니 너희 모두는 나를 본받아 청결하고 단정한 삶을 살아라, 그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치우고 사는 삶이 그렇지 않은 삶보다 훨씬 더 낫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나이 들면 지저분 환경에서 살면 폐렴을 달고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진화 심리학에서 여자는 똑같은 외모이고 똑같은 조건이면 깔끔하고 깨끗한 남자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여자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건강한 후세를 출산할 수 있는 조건의 배우자를 선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깨끗하기만 할뿐 나머지 볼게 없는 사람은 다릅니다. 어째든 이런 식으로 되는 것입니다.
여기 타고난 천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아주 독득한 성품을 부여하시는데 인간의 성품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보편적 인간성이 있고 거기에 더하여 개별적 인간성이 있습니다. 보편성 인간성이란 인간이면 빼놓지 않고 모두 다 가지고 있는 성품입니다. 예를 들자면 불쌍하게 여길 줄 알고, 그릇된 것 보다는 올바른 것을 더 좋아하는 것 등입니다. (그러나 그 본성도 왜곡될 수가 있으니, 그 사람이 사는 환경이 어떠냐에 따라 인간 본성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옛날에 어느 회사가 스웨터 공장을 중국에 세웠는데 그 제품들은 모두 수출품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6개월이 지나니까 그곳 온 동네 사람이 자기네 회사에서 만든 스웨터를 입고 다니는 겁니다. 공장 직원들이 훔쳐다가 돈 받고 판 것입니다. 아니면 밤에 창고에 들어와서 훔쳐간 것입니다. 그 행위를 두고 중국 인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 줄 아십니까? ‘모두 우리 것인데 같이 쓴들 뭐가 그렇게 문제가 되겠어!’였습니다. 공산주의 사고방식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남의 물건을 훔쳐가는 것에 대한 마음의 저항이 약화될까요? 강화될까요? 아주 약화된 것입니다.
만약 성적으로 아주 문란한 사회가 있다고 칩시다. 그럼 성적인 문제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안 된다 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에서 사는가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를 들자면 에스키모인들에게는 이상한 전통이 –지금도 이어오는지 모르겠지만 1900년도 초에 선교사님들이 선교를 할 때까지도 있었음- 있었는데, 집에 손님이 오시면 아내를 깨끗이 고래 기름을 발라서 그에게 성 노리개로 대접하는 것이 최고의 대접이었고, 그것을 거절하는 것은 자기 집안에 대한 엄청난 모독이었답니다. 그런 것을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지만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내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자고, 내가 다른 사람의 아내와 자고 하는 것에 대한 도덕관념이 높아질까요? 낮아질까요? 낮아집니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어떤 결론을 얻습니까? 우리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원래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가 되는 것은 결국 마지막에 우리자신을 위해서도 너무 중요한 것이란 사실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올바르게 살자고 해도 사회의 환경이 그런 것을 용납하는 환경 쪽으로 기울어져버리게 되면 우리의 외침은 비탈에서 외치는 아주 가냘픈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렁찬 소리가 안 되는 것입니다. 법에 봐라 못하게 되어 있지 않느냐 그렇게 얘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사회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되는 이야기가 여기에 나옵니다.
교육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에 의해서 이것들은 다양한 헤아릴 수 없는 삼각형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성이 두 가지인데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보편성을 주십니다. 그런가하면 개별적인 사람에게 독특한 본성을 주십니다. 그래서 지문을 찍으면 모두가 똑같지 않은 것처럼 각 사람마다 다른 본성을 주셔야지만 다른 사람이 될 수 가 있습니다. 다른 본성을 안주시면 그야말로 기계에서 찍어낸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외모만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난 강남에 가서 느꼈습니다. 여자들이 비슷비슷한 사람이 많아요. 대부분 원판 아닙니다. 어떤 시절에 유행하는 그 마스크 형으로 똑같이 주문 성형한 것입니다. 고양이처럼 턱을 뾰족하게 하고 양악수술도 해서 만드는데 정말 비슷한 사람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래는 다른 얼굴을 주셨는데 마찬가지로 똑같이 인간에게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용모도 주셔야지만 그러나 당연히 다른 본성을 주셔야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세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데 똑같은 사람만 필요하겠습니까? 아니면 다양한 사람이 필요할까요? 당연히 다양한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주도면밀해서 이상적으로 A=B, B=C, 그러므로 A=C라고 뭔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가 하면, 아주 확실하지 않아도 어느 한 순간에 직관적으로 이거다, 하고 밀어붙일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이들이 같이 있어야만 서로 도움을 받으면서 사회를 건설해 갑니다. 관심사가 과학에만 아주 사람 발달한 사람이 있고, 예술에 심취한 사람이 있고, 식생활에 있어서 발달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다못해 헤어스타일 하나에 꽂혀서 그것을 너무 잘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모든 자들이 있어야만 문화가 발전합니다. 그러니까 요지는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개별적 인간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열을 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으로 주신 보편적 본성이 있고 한 사람을 서로 다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주신 개별적 본성이 있습니다. 그 개별적 본성은 우열의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보다 우월하다거나 아니면 관찰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논리를 세우는 사람보다 열등하다거나 그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사람들을 무지개 빛깔처럼 사용해서 하나님은 서로서로를 그 다른 사람들 때문에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학교를 오다 보니까 “다른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포스터가 있었는데 그것이 저의 지론입니다. “다른다움” 아름다움입니다. “너와 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럼 다시 들어가서 개별적인 인간성의 우열을 따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냐면 이 인간이 처음에 태어날 때는 다르게 태어납니다. 남성과 여성을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죄를 짓기 전에도 아담과 하와는 달랐습니다. 혹시 그런 책 보셨나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나름대로 통찰력이 있습니다. 깊은 신학은 없지만 통찰력은 있습니다. 뭐냐면 남자는 끊임없이 (정복하려는 성향을 지닌다고 합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주신 명령이고, 그 다음에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나오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정복하라’는 것은 남성성이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이라 남자에게 주신 성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도전하는 성향입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이미 있는 것을 질서롭게 만들어서 더 예쁘게 만드는 것이라 여자의 관심사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남자는 끊임없이 어떻게 집을 살까를 고민한다면 여자는 어떤 식으로 그 집을 가꾸며 살아갈까에 관심을 더 많이 갖는 것입니다. 남자는 평수에 관심이 있지만 일반적인 여자들이라면 꽃밭이 어디에 있는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집에서 뭘 누리고 얼마나 큰집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게 남자의 관심이고, 여자의 관심은 그 집에서 우리가 어떻게 관계를 가지고 살 것인가가 관심사입니다. 둘이 그것을 끊임없이 대화를 하면서 끌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안 맞을 때 대화가 안 되는 것이며, 서로 이해를 못하는 적대적인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가 안 들어왔으면 아담과 하와, 그 둘 사이에 태어난 가인과 아벨, 셋, - 딸도 하나 태어났다고 칩시다. 그 아이 이름은 릴리라고 지읍시다- 이 여섯 사람 모두에게 공통된 인간의 본성을 주셨을 것이고, 하와와 딸에게는 여자의 공통된 본성, 아담과 아들들에게는 공통된 남성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릴리는 엄마인 하와 이후에 태어날 여자들 가운데 누구도 갖지 않은 독특한 어떤 본성을 가져야지만 그가 릴리가 될 수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여기 은호 학생이 있는데, 은호다움이 있으니까 은호이지 은호다움이 없다면 그는 은호가 아닙니다. 그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여태까지 지구상에 살았다고 믿어지는 천억 인구를 찾아봐도 거기에는 은호다움이 없는 겁니다. 이 사람에게만 은호다움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은호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됩니까?
그렇다면 내가 나다워지는 길은 은호다움을 잘 가꾸고, 아직 내가 발견하지 못하는 은호다움을 계속 끌어내서 그것을 확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호다움을 찾기 위해서 여성다움을 파괴한다든지 사람다움을 포기한다든지 하게 된다면 그렇게 찾은 은호다움은 결국 은호답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강의할 때 제일 짜증나는 것이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생기발랄하게 반응을 보이세요. 한 문장으로 다시 요약합니다. 윤단비가 은호가 아니라 윤단비인 이유는 은호에게는 없는 단비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단비다움은 아무에게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단비는 개별자로서 윤단비인 동시에 여성에 속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여기에 여성다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남성에게는 안 주신 것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여성인 동시에 더 넓게 보면 인간입니다. 인간으로서의 모든 인간이라면 다 가질 보편성을 주시고, 여성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을 보편적인 여성 본성을 주시고, 그 위에 윤단비면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을 그 본성을 주신 것입니다. 비슷한 사람은 찾을 수 있을 수 모릅니다. 그러나 똑같은(just same) 사람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발생의 오류입니다. 윤단비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많을 경우에 윤단비를 창조하신 것은 발생의 오류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되려면 윤단비는 윤단비다운 사람, 곧 나 다운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여성다워야 하고, 그 다음에는 사람다워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죄가 들어온 다음에 인간에게 일어난 문제입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서 윤단비답다는 것은 그거 하나만 놓고 보면 윤단비다와진다는 것은 좋은 건가요? 나쁜 건가요? 윤단비가 윤단비다워지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윤단비의 가장 큰 인생의 보람은 윤단비로 사는 사람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은호로 살거나 남준으로 살면 안 됩니다. 살수도 없는 삶이거니와 그것은 분량이 아닙니다. 윤단비로서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생각의 오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윤단비답다는 것을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에 윤단비다워야지 윤단비다워야지 이렇게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주신 여성다움을 파기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윤단비가 되는 것만큼 여성의 본성 중에 하나님이 꼭 주셔서 여성답게 하신 것을 파괴해야 되는 것입니다. 더 확장해서 그러면 윤단비다워졌다고 생각을 했는데 생각의 오류 때문에 진짜 윤단비답다고 생각한 모습이 원래의 하나님의 생각과 윤단비가 생각하는 것이 차이가 납니다. 그러면 그것을 자기 생각대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여성다움을 파괴해야 됩니다. 두 번째로 여성다워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 여성다운 게 하나님이 생각하신 것과 기준이 다릅니다. 그럴 때는 사람다움을 파기하지 않고는 자기가 생각하는 여성다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윤단비답기 위해서 여성다움을 파괴하고 윤단비 답기 위해서 사람다움을 파기하게 되면 그러면 그것은 결국은 윤단비다움을 파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래의 하나님이 윤단비를 창조하실 때에 윤단비다움과 윤단비의 여성다움과 윤단비의 사람다움, 이 세 가지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윤단비가 되면 사람이 잘 안된다든지 사람이 되면 여성이 될 수 없다든지 이런 식의 모순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자기다운 자기가 되려고 애쓰다가 오히려 자신을 잃어버리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확실하게 이해되지요. 그러면 여기에 죄라는 것이 들어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만약에 죄가 들어오지 않으면 이 사람에게는 아주 논리적인 것을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꼼꼼히 해야지 직성이 풀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아주 과감하고 도전적입니다. 이 사람이 막 나가려고하는데 이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심사숙고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계산만 하지 앞으로 못 나가는데 이 사람은 추진력을 줍니다. 그렇게 되는데 이제 죄가 들어오면 모든 죄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 인간에게 주신 독특하고 고유한 본성이 전부다 나쁜 쪽으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생각만 많고 말 많고 비판만 많이 하고 자기는 아무것도 결정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막무가내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 꼭 해야 됩니다. 여기는 뭔가 신중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 때문에 공동체가가 가려고 하는데 다 발목을 잡고 못 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중함이었는데 죄가 들어오니까 말하자면 우유부단함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결국은 하나님이 주신 빛나는 모든 성품들이 죄의 영향을 받으면서 다 나쁜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해를 하면 안 됩니다.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여성으로서의 본성이 밥 짓고 애들 기르고 기저귀나 빠는 것이고, 남자는 나가서 돈 벌고 회식하고 주식투자하고 열심히 가정을 보호하는 것이구나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회의 맥락에 따라 사람들은 자기 입장에서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규정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조선시대는 어떤 여성상이 있었냐면 칠거지악이란 것을 만들어서 절대 투기할 수 없고, 애 못나면 떠나야 되는 식의 도덕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하게 남성이 그런 여자가 사는 세상에서 살기가 좋았기 때문에 우월한 힘으로 도덕을 그런 식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따지면 페미니즘에서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성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든 겁니다. 물론 말을 할 때는 기울어진 공평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남성과 여성의 성별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두 사람에게 인간으로서의 공통적인 본성을 주셨지만 여성으로서는 여성다운 본성을 주셨을 것이고 남성은 남성다운 본성을 주셨습니다. 더 표현을 간결하게하면 여성이면 여성의 본성을 주셨고 남성에게는 남성을 주신 것처럼 둘이 구별된다고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그것을 뭐라고 규정하느냐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에는 남자가 결혼해서 부엌을 들어가면 부모님에게 매우 혼났습니다. 도덕적으로 거의 금기시 되어있는 일이었습니다. 요즘은 제가 어떻게 가르치냐면 둘이 같이 직장 다니면서 결혼하게 될 때 너희 둘이 행복해 지는 길은 자매가 남성적이 되는 것보다는 형제가 여성적이 되는 것이 화목하게 사는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밥도 하고 빨래도 하라고 합니다. 자는 페미니스트는 아닙니다. 성평등주의자이고 그런 차별이 일어나는 사회와 교회 현실은 저를 분노케 합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사회적 젠더에 의해서 두 성 사이에 어떻게 줄을 그을 것이냐를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이것이 법이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여성다운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상정은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물에는 물다움을 주셨을 것이고 인간은 인간다움을 주셨을 것이고 남자에게는 남성다움을 주셨을 것입니다. ‘다움’이 없다면 그 사물이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나의 강의를 그렇게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디서 또 이상한 소리해서 내가 비난받게 하지 마세요. 저는 그런 뜻으로 이야기 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여성다움이라고 할 때 ‘아, 저 목사님은 다소곳하고 단정한 것을 여성이라고 생각하는구나’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갖기를 기대하셨던 어떤 본성을 인간에게 독특하게 주셨으니까 여성이 남성과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독특한 본성을 주셨을 때는 구별을 의도하신 것이고 만약에 구별을 의도하지 않으셨다면 독특한 본성을 주셨을 리가 없습니다. 윤단비를 윤단비로 안 만드실 것이었으면 윤단비의 본성을 주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런 것들이 다 빛나고 아름다웠을 텐데 죄가 들어오면서 그것들이 다 오염이 되면서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이기적인 자기사랑만이 남게 됩니다. 이것이 결국은 죄의 정체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난 자기사랑이라고 하는 거기에 결탁되어서 이 모든 아름다웠을 본성들, 서로서로에게 다른 본성이었기 때문에 서로서로에게 도움을 줌으로서 밤하늘의 저마다 다른 색깔로 빛남으로써 아름다움을 발했을 본성들이 갈등의 원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른다움’이 모든 집합의 아름다움을 창출할 것이었는데 이것이 죄에 물들이면서 그것은 갈등의 원인이 되고 비하의 원인이 되고 숭상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다움’을 참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그리고 ‘다른다움’을 각기 다르게 만드셨기 때문에 ‘다른다움’을 주셨는데 그것을 우열관계라고 생각하게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엄마가 사랑이 많으니까 딸이 셋이 있는데 다 예쁩니다. 그런데 밖에 나가면 둘째딸만 대시가 들어오고 나머지 두 딸에게는 아무한테도 전화도 안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 딸이 다 다른데 엄마는 사랑을 가지니까 서로 다른 것이 우열이 아니라 다 사랑스럽게 느껴지는데 정욕을 가진 남자에게는 둘째달만 보이고 첫째와 셋째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다움’이 원래 있는 ‘다른다움’과 자기가 설정한 ‘다른다움’을 구별해야합니다. 이러한 논리가 굉장히 공허한 것 같지만 공허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런 작용들이 여러분 속에 일어나면서 여러분들이 오류에 빠지기도 하고 진실로 돌아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보편적 본성이든 개별적 본성이든지 간에 이것은 자연적 본성입니다. 자연(自然)이라고 하는 것은 한자로는 스스로 그러하다 입니다. 이 자연이 중국철학에서 보면 두 가지 자연이 있습니다. 그 두 가지 자연중 하나는 인간 밖에 있는 자연인이고 하나는 인간 안에 있는 자연입니다. 자연은 이유를 물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것이 그러한가? 그냥 그러니까 그러하다 동북아 철학에서는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신의 한수입니다. 스스로 自에다 그러할 然입니다. 밖에 있는 자연은 우리가 알고 있는 펼쳐진 땅, 달, 별, 작게는 나무, 흐르는 물, 물의 요소, 물의 성질 이 모든 것들이 자연입니다. 왜 그런지 물을 수가 없습니다. 동북아 철학에서는 관심사가 그게 아닙니다. 물이 무슨 분자로 되었는가? 그게 아니라 자연은 그러하다 입니다. 성철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고 말씀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은 몇 시간의 강의를 요구하는 엄청난 논제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삿갓 쓴 도사의 웃기는 이야기 같지만 심오한 진리가 이 안에 있습니다. 여기의 산과 여기의 산이 다르고 이 물과 저 물이 완전히 다른 물입니다. 왜냐면 이 산은 인식된 산, 인식된 물입니다. 인간은 산을 보면서 수없는 생각을 합니다. 물을 보면서 인간은 수없는 물에 대한 생각을 가집니다. 그리고 당연히 목마른 사람은 물을 보면서 ‘아 마시면 되겠구나’ 생각할 것이고, 공장을 짓는 사람은 ‘공장용수로 쓰면 되겠구나’ 할 겁니다. 또 산을 보면서 ‘아, 관광객이 많이 모이겠구나.’ 아니면 ‘참 예쁘다’와 같이 별생각 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산과 물은 일치가 안 됩니다. 사람마다 보는 산이 다르고 보는 물이 다릅니다. 그런데 성철스님 이야기는 그래봤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산과 물은 실재하는 물입니다. 그리고 실재하는 사물로서의 산입니다. 인간이 이미 의미 부여를 초월해서, 예를 들자면 앞에 나오는 산과 물이 단비가 생각하는 단비다움이라면 뒤에 나오는 산과 물은 하나님이 지정하시는 산과 단비다움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두 개가 일치할 수가 있을까 없을까? 일치할 수가 없습니다. 일치할 수 있다면 이런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두 가지의 인식론적이고 실재적인 모순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혼란을 느끼면서 사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의 실존이 이 두 개의 명제사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심오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적인 입장으로 해석한다면 날 보고 이걸 해석하라면 이 산이 비쳐진 산은 원래 있는 산이어야 하는데 이것을 산으로 못 보게 하는 수많은 요소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감각과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뒤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죄와 욕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에 의해서 참 산을 못보고 잘못된 산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와 성령에 의해서 참된 사랑에 의해서 깎여져나가 자기 사랑으로부터 돌이킬 때 비로소 인간은 보다 더 이산과 이 산이 더욱 가깝게 되는 변화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오류를 행할 가능성이 작아진다, 라는 것입니다. 듣고 보니까 굉장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에 의하면 다른 종교에서 발견되는 진리도 원래 하나님 안에 있던 것인데 사람들이 갖다가 사용을 한 것입니다. 그것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그 진리를 꺼내다가 싹 씻어서 제자리에다 갖다 놔둘 때 하나님의 말씀이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향이란 것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셨는데 맨 처음 경향을 주시고 이 경향은 영혼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에게 당연히 그 영혼은 모든 인간이 다 똑같은 영혼이 아닙니다. 그러면 똑같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찍어 나온 로봇같이 됩니다. 영혼이라는 본질은 다르지 않고 다 똑같습니다. 영혼 안에 하나님이 서로 다른 경향을 주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성향을 주셨을 뿐 아니라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의 경향 남성이기 때문에 남성의 경향을 가지고 있어서 두 사람은 남녀가 구별되고 서로 달라 보이는 두 사람의 상호 협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정복되고 다스려질 수 있었고 선하고 아름답게끔 가꾸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그래서 창조하실 때는 하나님이 혼자 창조하셨지만 창조하신 세계를 가꾸고 다스리는데 있어서는 여성이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보면 고위직에 오르거나 이러는 것은 여성이 거의 없습니다. 노르웨이 같은 나라는 무조건 52대 48입니다. 모든 공직을 그 비율로 유지해야 합니다. 총신대 이사가 100명이면 남성 52명 여성 48명 국회의원 정수가 200명이면 남자 52곱하기 2 여자 48곱하기 2 이렇게 나가야 됩니다. 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성비에 따라서 법률이 그렇게 정한 것입니다. 그것을 완벽하게 적용할 수 있는가는 또 사회의 문제이겠지만은 그러나 어쨌든 그렇게 여성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면 당연히 여성들의 능력이 신장됩니다. 그리고 다 할 수 있습니다.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교수도 할 수 있고 하다못해 전투기조종사도 할 수 있습니다. 여성 버스운전사 우리시대에는 불가능하다는 직업이었는데 지금 여성 운전자가 고속도로에서 보니까 24톤 30톤짜리 트럭에서 미니스커트 입은 여성 운전사가 트럭에서 내리는 것입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진짜로 짐을 잔뜩 싣고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회를 주면 다 하는 것입니다.
14세기-15세기 르네상스 시대 때, 13세기, 특히 피렌체에서 28명 천재 예술가가 나옵니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나부치에, 부르네스키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28명이 그 짧은 시기에 폭죽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그래서 인류문화 사회의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여성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 여성은 없을까요? 왜 그런 천재들의 반열에 여성들은 못 들었을까요? 아니 책임지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기회를 안 준 것입니다.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회가 주면 내 생각에는 52대 48의 비율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정과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남성도 마찬가지고, 특히 여성도 마찬가지만 올바르지 않은 강요된 여성다움에 대해서 항거할 수 있어야 됩니다. 특히 남성들의 편익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강요되는 그런 희생을 목적으로 하는 여성다움에 같은 것에 대해서 항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혼할 때 그런 고루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하고는 시집가지마세요. 차라리 혼자 사세요. 인간으로서 인간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 존엄과 자유의 가치가 삶보다 훨씬 더 고급의 가치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해야 합니다. 물론 신앙이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사고방식과 아무상관이 없는 남자들 무지하게 많습니다. 오히려 더 그런 사람이 기독교에 많습니다.
여기에 영혼과 육체가 있습니다. 육체는 습관을 갖게 됩니다. 습관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영혼과 육체 사이에 마음이 있습니다. 하트의 지적인 작용을 마인드(mind)라고 번역을 합니다. 이 마인드가 번역하기에 굉장히 어려운 단어입니다. 어떨 때는 지성으로 번역을 해야 되지만 지성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마인드는 인텔리전스(intelligence)하고는 또 다릅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정신이라고 해석 하는데 정신은 또 스피릿(spirit)과 또 다릅니다. 단어들이 어떻게 구별된 의미들을 가지고 있는지 꼼꼼히 알고 이런 논의를 하지 않으면 실타래처럼 엉키게 됩니다. 그래서 mind의 제일 일반적인 번역이 ‘생각’입니다. 사고하는 생각의 작용입니다. think하고는 또 다릅니다. 지성이라고 번역되는 경우도 있는데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각이 가장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마인드하면 딱 떠오르는 영혼의 기능은 어떤 사물을 인지하고 이해하는 것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성향이 있는데 이 경향이 tendency입니다. 마음 안에서는 이것이 여러 가지로 표현 되는데 일반적으로 성향(disposition)으로 작용을 합니다. 이 디스포지션은 마음 안에 형성된 어느 방향의 힘입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 했듯이 내가 술을 먹어보지 않았을 때에는 술을 좋아함 이라는 힘이 내안에 없습니다. 오히려 또 이럴 수 있습니다. 술을 한번 먹었는데 어마어마하게 토하고 병원에 실려 갔다고 하면 이후에는 술에 대해서 중립적이 아니라 술에 대한 증오하는 감정이 생깁니다. 그렇게 해서 이 안에 생겨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디스포지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영혼 안에서 경향성이고, 그 사랑은 마음 안에서 디스포지션으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사람들하고 말을 섞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을 섞고 싶은 사람이 눈에 띱니다. 기본적으로 여기서 마음이 그에게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계속 이야기하고 교제를 나누다 보면 그를 못 만나서 얘기를 못하는 날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빠뜨린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미 마음속에 디스포지션이 형성된 것입니다.
탄수화물 안 먹으면 심각하게 몸에 문제가 생기고 그래서 지방, 단백질, 탄수화물을 골고루 먹어야 합니다. 안 먹으면 몸에 중대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세 개를 골고루 먹어야 되는데 탄수화물만 유독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루라도 안 먹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점심 때 국수를 세 그릇 먹고, 저녁 때 짜장면을 세 그릇씩 먹고, 아침에도 수제비나 빵을 먹어야 되고, 그런 사람에게는 탄수화물인 밀가루에 대한 중독(addiction)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디스포지션입니다. 육체하고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음식에 대해서 디스포지션을 가지면 그것은 육체에 영향을 줍니다. 많이 먹는 성향을 가지면 배가 나옵니다. 영향을 줍니다. 당연히 특정한 탄수화물을 잡아 땅기면 육체에 영향을 줍니다. 육체가 거기에 맞게 금 변화되어 가면 육체는 그 요소를 다시 부릅니다. 그래서 지방질을 좋아하면 육체에 살이 붙고 살은 지방을 원합니다. 도저히 그 굴레를 못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운명처럼 매여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그랬었습니다. 밤에 잘 때 배가 아주 부르지 않으면 잠이 안 왔습니다. 제가 몸무게가 지금보다 20킬로그램이 더 나갔습니다. 90킬로그램 이었습니다. 지금은 69킬로그램 입니다. 그때는 배가 부르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는 겁니다. 지금은 요만큼만 음식이 들어가도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뭐가 변한 거예요 디스포지션이 변한 겁니다. 이렇게 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오늘 했다가 내일 그렇게 되는 법은 없습니다. 별짓을 다해 봤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tendency, disposition, habit이 전부다 하나로 엮어져서 우리의 영혼과 마음 몸 전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행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우리는 이 지도를 못 그립니다. 분석을 안 합니다. 그리고는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전자기기의 매뉴얼을 잘 읽어보면 되는데 이렇게 해서 들어오면 들어오고 말면 말고 그 다음날도 그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사는 게 재미가 하나도 없고 너무 고달프기만 한 것입니다. 잘 될 때는 깔깔대고 웃지만 (못될 때에는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에 의하면 인생의 99퍼센트는 비극이라고 했습니다. 나머지 1퍼센트 가지고 웃고 까불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의미를 발견하긴 어렵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겁니다. 이게 학문입니까 ? 인생을 위한 공부입니다 이거 없이는 인생을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그렇게 힘겹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지식이 없고 그렇게 살고 싶으면 그렇게 사세요. 여러분 묻고 싶겠지요. 교수님이 이런 지식을 어디서 습득했는지? 수많은 책과 저의 온 생애, 그리고 부단한 신앙생활과 몸부림치는 자기에 대한 성찰에서 구축해놓은 것입니다. 가서 모든 책을 뒤져도 인생을 이런 식으로 설명한 책은 없습니다.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최고냐? 아니에요 그런 뜻 아닙니다. 마지막 우리의 기준은 성경입니다. 아무리 기발 나도 성경하고 안 맞으면 쓰레기입니다. 성경을 중심에 놓고 이런 식으로 펼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의 화두를 더 던지고 오늘의 수업을 마감하겠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영혼에 하나님이 tendency를 주셨습니다. 그럼 나중에 마음에는 다시 disposition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이 tendency 속에는 인간의 보편적인 인간성도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보편적 본성이 이렇게 되어서 여기에 디스포지션으로 작용을 합니다. 이게 하나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보편적 인간본성입니다. 그 다음에 당연히 두 번째는 성으로서의 본성입니다. 그담에 세 번째는 개별자로서의 본성이 흐릅니다. 그렇다고 세 가닥이란 뜻이 아니라 종류가 세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나갑니다. 본성이 이런 식으로 지나갑니다. 이 얘기는 이 안에서 작용을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어떤 상황이 마음에 뚝 떨어지면 그것을 인간 보편적 본성과 어울리면 이 사람이 좋아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상황이 떨어져 행동을 결정할 때 저렇게 불쌍한 사람이 있는데 도와주는 게 보편적 본성입니까? 한 번 더 짓밟아 버리는 게 인간의 보편적 본성입니까? 전자입니다. 이게 다른 영향을 미치는 나쁜 죄의 영향이 없으면 항상 그렇게 할 거라는 겁니다.
그 때에 이것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사랑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그렇게 말할 겁니다. 모든 인류가 모든 인류의 구성원을 향해서 그렇게 말할 겁니다. 그들이 행복해지는 것이 자신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2번은 성으로서의 본성입니다. 여성으로서의 본성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보편적으로 인간에게 주신 여성의 본성에 맞는 일이면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본성 쪽으로 갈 것이고, 안 맞는 일이면 싫어하게 될 겁니다. 이것도 누가 성차별이라고 그럴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닭이 있습니다. 원래 도계장에서 잡아야 되는데 잡을 수도 없고 온 가족은 배고픕니다. 물론 엄마가 와서 목을 자르고 다리두개 잘라서 요리를 할 수도 있지만 그런데 대부분 확률적으로 남자가 그것을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끔찍한 것을 보고 행하는 그것이 원래주신 여성성에 덜 맞는다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닭이 그게 문제냐고 나는 소도 때려잡을 수도 있다고 망치 들고 곡괭이 들고 나타나는 여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난 그걸 즐긴다.” 그런 여자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서태후 같은 사람이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확실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그것이 어울립니다. 어울리면 가는 거고 안 어울리면 튀는 것입니다. 그담에 한 개별성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도덕적인 문제가 결부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죄가 없었으니까 도덕적인 문제가 결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를 들으면 윤단비의 본성을 주셨어요. 그럼 윤단비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무슨 행동을 해야 합니다. 윤단비는 윤단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윤단비다움이 뭐냐고 설명해보라고하면 절대 다 못합니다. 그런데 집단적으로 윤단비다움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주어지면 그런 식으로 처리하는 것은 윤단비다움이 아니지 나는 싫어 이야기 하는 겁니다. 어, 나하고 딱 맞아 그럼 그런 식으로 처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이 두 가지는 모든 인간에게 여성에게 그담에 이것은 개별자에게 어울리는 것이 되어서 이것 때문에 서로 인간이 공통된 것과 남녀성이 서로 구별된 것과 그 담에 개별자라는 것이 다른 개별자와 달라서 복제될 수 없는 그런 개별자라는 이유 때문에 독특한 것 때문에 온 세계가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수많은 종류의 꽃밭에 눈앞에 이 끝부터 저 끝까지 쫙 펼쳐져서 웅장함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이게 아니고 죄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다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인간 본성을 마음에서 이런 식으로 작용하게 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휘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휘어지게 만드는 여성다움도 이런 식으로 휘어지게 만들고 윤단비 다움에 대한 그것도 윤단비가 잘못이해를 해서 이것을 이렇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여기서 수많은 악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다움이 아름다움의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움 추함의 원인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못견뎌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이 그 사람다운 것을 서로 용납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과도한 자기사랑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죄 죽임과 무슨 관계가 되느냐는 다음시간에 강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