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 안에 있는 은혜와 죄 2
녹취자 : 오희열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매우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나바시스와 카타바시스의 이야기까지 하면서 진리를 만난 인간의 마지막 운명은 결국 그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질문은 왜 그럴까 입니다. 지난 시간에 아나바시스와 카타바시스를 했습니다. 맞습니까? 잘 모르십니까?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이야기하면서 설명했습니다. 지지난 시간에 했습니까? 벽의 그림자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그림자만 보다가 뒤에 있는 그림자의 모형을 보고, 거기서 빛줄기를 따라서 동굴 밖으로 나갔는데 거기서 진짜 실체를 보고 감동을 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안 했습니까?
지난 시간에 설명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편적인 본성과 개별적인 본성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인간에게는 인간의 본성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본성일 것입니다. 그 인간 중에서 여성이 있다면 여성이기 때문에 갖게 되는 공통적인 본성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82년생 김지영”의 구도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성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을 통해서 “여자의 자리는 여기다.”라고 강요하는 의미에서의 본성이 아니라,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 있기 때문에 동물과 구별됩니다. 여성이라면 여성의 공통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구별됩니다. 당연히 남성도 남성으로서의 본성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범위가 안쪽으로 들어오면서 그 범위가 좁아지면서 갖게 되는 공통본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다 들어오고 나면 개별자라는 한 사람이 남게 됩니다. 이 사람이 “윤단비”라고 합시다. “윤단비”는 전 세계에 하나가 아닙니다. 저런 이름은 많습니다. “윤쓴비”라고 이름을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개 “단비”입니다. 우리 딸은 “이슬”입니다.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윤담비”를 열 명을 줄을 세워 놓아도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그들이 똑같은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이름은 그냥 불리는 것이고, 2005년 3월 4일에 태어난, 하나밖에 없는 개별자로서 이 사람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인간을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인간다운 본성을 주시지 않았다면 인간과 동물이 구별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만약 여성과 남성에게 독특한 공통본성을 주시지 않았다면 성의 혼란이 생길 것입니다. 나 개인에게 독특한 것을 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전체 속의 하나일 뿐이지 내가 독특하게 나 일수는 없습니다. 이런 본성을 영혼과 관련시키면 영혼이 가지고 있는 경향성이고 경향성이 인간의 마음에 내려와서 성향으로 작용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한 사람도 똑같은 사람이 없이 그렇게 다양한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서 서로 다른 모습이 됩니다.
문제는, 이런 서로 다른 본성 속에 죄가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 속에 죄가 스며들게 되면, 원래 인간에게 주신 본성이 비틀어져서 아주 비인간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분명히 인간의 본성을 주셨는데 비인간적으로 살아갑니다. 여성의 본성을 주셨는데 여성답게 살지 않습니다. 남성도 마찬가집니다. 개인에게 독특한 본성을 주셨고 그것은 모두 좋은 것인데 죄가 스며들어감으로써, 예를 들어 차분한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 죄가 들어가면 우유부단하거나 게으른 사람이 됩니다. 추진력 있는 사람에게 죄가 들어가면 독단이나 오만,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됩니다.
여기를 주목하십시오. 주목하지 않는 강의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강의가 집중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조용히 나가셔도 점수를 깎지 않겠습니다. 출석만 부르고 나가시면 됩니다. 이것은 내가 한 권의 책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걸고 하는 것입니다. 내 수업의 목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방향을 전환시키는 것이 내 수업의 목표입니다. 나는 여기를 전쟁터에 나가는 마음으로, 불타는 심정으로 왔습니다. 선물도 필요 없고 존경할 필요도 없습니다. 받고 싶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비참한 사람을 보면 불쌍하게 느끼는 본성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가면 이 본성이 무너지면서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남편을 살해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아이를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본성이 죄에 오염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이미 설명했습니다. 죄는 세 가지 범주로 사용된다는 것을 지난 시간 필기한 것을 보면 나옵니다. 저지른 악이고 성향이고 심판입니다. “너 그러다가 죄 받을 줄 알아라” 이것이 세 번째 의미입니다. 인간의 마음의 구조 속에서 죄를 이야기할 때는 죄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게 하는 성향입니다. 여기 인간의 영혼이 있고 이 영혼은 모든 힘과 경향성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이 경향성들이 각각 모두 다릅니다. 이것들이 죄에 오염되면서 경향성들을 바꿔놓습니다. 그렇게 바뀐 것이 마음이라는 구조 속에 투영되어 결국 행동으로 나오게 됩니다. 마음과 영혼, 이 두 가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마음은 감추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속에 있는 대로 행동과 표정이 나오기 때문에 이것을 잘 관찰하면 이것을 읽을 수 있고 이것을 읽으면 이 사람의 영혼의 상태가 어떤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연애를 한다면, 저 형제의 마음이 변했다는 것을, “나 오늘부터 마음이 변할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도 오히려, “너 마음이 변한 것 같아.”, “아니야. 난 안 변했어.” 라고 하지만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세한 행동에서 숨길 수 없이 나타납니다. 숨길 수 없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과 미움은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온 얼굴과 몸짓이 뿜어냅니다. 개들도 아무 소리 안 해도 딱 쳐다보기만 해도 꼬리를 흔들거나 꼬리를 내립니다. 표정만보고도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압니다. 이런 원리입니다.
오늘 플라톤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렇게 본성이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살아있으면 참된 인간이 됩니다. 진정한 여성이 되고 혹은 진정한 남성이 됩니다. 그리고 나 개별적인 인간에게 주신 본성이 있습니다. 나다운 나가 되는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로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지 내가 이 사람으로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의 인생은 이 사람이 살기 위해서 태어났고 윤단비는 윤단비의 인생을 살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지 다른 누구의 인생을 살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잘 산다는 것은 한 인간으로 점점 더 온전해지고 나로서 점점 더 나다워지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비교를 합니다. 열등감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도 여러분 나이 때, 청소년 때 계속 열등감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신학공부를 하면서도, 만 서른두 살이 되어 교수가 되었을 때도 여전히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유학도 가지 않고 교수가 되었는데도 항상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앙에 있어서 깊은 의미를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열등감은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데서 생겨납니다. 그 비교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는 네 인생을 사는 것이고 나는 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신발가게와 짬뽕가게가 나란히 있는데 짬뽕집 주인이 짬뽕을 만들다가 뜬금없이,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신발을 잘 만들까? 아, 나는 평생 한 개도 못 만들었는데…” 하면서 짬뽕 국물 끓이는 것에 짜증이 나면 말이 되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비교하면 안 됩니다. 비교하는 대부분은 비교해봐야 극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쟤는 어떻게 금 수저를 물고 저렇게 좋은 집에서 태어났지?” 백 번을 투덜거려봐야 자기 엄마는 금 수저를 못 물려줍니다. 이미 흙 수저를 물고 태어났습니다. “쟤는 어떻게 저렇게 공부를 잘하지?” 이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기는 못하는데 말입니다. “쟤는 어쩜 신경질 나게 저렇게 예쁘게 생겼어?” 그래봐야 돌아오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나를 찾는 데는 한 개도 도움이 안 됩니다. sns에 올려서 이 호텔에도 가고 숙박비가 100만원이라고 영수증까지 찍어 올리고, 일식집에 네 명이 가서 먹고 140만원이 나온 영수증을 올리고 처음에 물잔 나오는 것부터 쭉 찍어서 올립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허해서 그렇습니다. 사는 게 너무 허해서 그러는 병적인 증상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비교는 합니다. 그런데 그 비교를, 남에게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보면서 “저렇게 하면 참 좋겠다. 나도 저만큼은 못하지만 나도 저렇게 부지런히 살고 싶다. 나도 저렇게 어학을 열정적으로 마스터해서 2년 후에는 독일어와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내 의견을 발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구글 번역기 없이 독일 여행을 가고 싶다.”이런 결심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비교할 때는 그런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고 자기 자신과 비교해야 합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성”이라는 행위입니다. ‘작년에는 내가 참 잘 살았고 은혜에 충만했는데 올해는 왜 이럴까?” 하며 반성하는 것입니다. “어제에 비하면 내가 오늘은 좀 나아진 것 같아. 정말 근사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책을 쓸 때 어느 정도 열심히 공부했는지 아십니까?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먹는 것을 좋아했지만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먹는 것이 아니라 맛있으면 많이 먹는 정도였습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몸무게가 20kg 더 나갔습니다. 그때 입던 바지와 요즘 입던 바지를 대 보면 초등학생 바지와 아버지 바지처럼 보입니다. 그때 엄청나게 공부하고 기도도 많이 할 때였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와서 열심히 공부하다가 교역자들이 모두 퇴근하고 직원들도 다 퇴근하고 밤 12시쯤 내려옵니다. 더 공부하고 싶어도 다음날 새벽기도를 가야하니까 불을 다 끄고 공부하던 내용을 접고 나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 아무도 없는 길에 바람이 쏴아 하고 붑니다. “흐읍, 하!” 하면 어제보다 내가 한 뼘쯤 자란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작년의 나를 생각하면 타일러주고 싶어집니다. “네가 그랬니? 그러는 게 아니었어.” 이것이 자신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반성이라는 행위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나로서 살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아무렇게나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어제의 나와 비교하면서 내가 더 온전해졌는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식에 있어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때의 그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루 종일 공부하고 밤중에 내려올 때 “흐읍~ 하~”…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본래적으로 부여하신 본성은 모두 좋은 것이고 꼭 있어야 하는 것인데 문제는 죄가 들어가서 좋은 것을 모두 나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죄를 제거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우리에게 그 죄를 제거해 주십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칭의”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던 죄를 하나님께서 제거하십니다. 더 이상 그 죄가 우리의 모든 이 본성을 거의 폭군과 같은 방식으로 지배하던 것을 종식시키십니다. 이것을 결국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제거하시는 일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새 생명의 원리를 심으십니다. 이것은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껏 없었던 새로운 생명을 우리에게 심으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 생명은 모태로부터 태어나면서 받았습니다. 육체의 생명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두 생명이 모두 필요합니다. 그런데 영혼은 죽은 상태에서 태어납니다. 육체의 죽음은 숨도 쉬지 못하고 물질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영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있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여기 책상 위에 사과가 있다.”, “우리 가운데 사랑이 있다.” 이때에 “있다”라는 의미는 1번과 2번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똑같이 “있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그 의미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릅니다. 여기 사과가 있는 것은 색깔, 크기, 모양, 무게, 부피를 가진 사물로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사과이고 그 밖은 사과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확실히 사랑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런 식으로 크기, 모양, 길이, 높이, 이런 것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어가 다르기 때문에 존재하는 양상이 다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이 죽었다”는 의미는 “육체가 죽었다”와는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죽었다.” 그리고 “정치가 죽었다.” 똑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릅니다. 영혼이 죽었다고 할 때도 사람들은 육체가 죽은(kill)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정치가 죽었다”고 할 때처럼 자기의 고유한 기능을 잘 발휘하지 못하고 힘이 아주 약화되어 있고 영혼의 고유한 특성대로 기능하지 못할 때 “영혼이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혹은 “잠들었다”고도 합니다.
그렇게 새 생명의 원리가 심겨집니다. 죄를 용서하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생명을 주십니다. 이 생명은 조건적입니다. 믿음과 순종, 말씀을 아는 지식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면 이 새 생명은 점점 더 풍성해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으면 영적 생명은 쇠퇴됩니다.
예를 들어, 육체의 생명이 있지만 이렇게 활발하게 다니면서 강의를 하는 것, 럭비공을 가지고 운동장을 누비는 10대 후반의 살아있는 것과 병실에 누워 호흡기에 연명하며 “띠띠띠…”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있는 것은 정도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로 높은 수준의 생명을 누리느냐 하는 것은 조건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셨지만 얼마나 믿음으로 살고 순종하고 기도하고 말씀 속에 사느냐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은 무엇입니까? “생명”은 간단하게 말하면 “사랑”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견딜 수 없는 현실을 견뎌낼 수 있도록 힘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화입니다. Sanctification 인데, 이것은 “거룩하게 하다”입니다. 이것이 즉각적인 구원이라면 구원받은 사람이 점점 더 새 생명의 원리가 풍성해져서 하나님이 부여하신 순수한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옛날 그리스 시대부터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의미, 행복, 선을 찾았습니다. 한 인간이 여기 있습니다. 이 인간이 삶의 가치는 두 가지입니다. 이 인간이 모든 타자들, 사회와 관계를 맺으면서 이 사람이 그런 관계를 맺지 않을 때보다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그 인생의 가치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다 필요 없습니다.
이 글자가 무엇입니까? “허도광년”(虛度光年)입니다. 이런 시가 한 2년 전에 인터넷에 도배가 되어 수많은 젊은이들이 여기에 빠져들었습니다. 이 시를 제가 가지고 있지만 전문을 읽어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내용을 대충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광년”은 세월입니다. “허도”는 허송한다는 뜻입니다. 즉 “허송세월”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허송세월하고 싶다. 이 복잡한 일상을 떠나서 사랑하는 나의 그이와 함께 하루 종일 호수 속을 헤엄치는 금붕어를 보고 싶다. 나는 세월을 허송하고 싶다. 나는 호숫가에 부는 바람, 은빛 물결을 보고 싶다. 나는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허송세월하고 싶다.” 가슴에 와 닿습니까? 중국이라는 사회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한 경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에서 배급으로 살던 시대는 끝이 나고 이제는 돈이 없으면 굶어 죽어야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끼에 250만 원짜리 밥을 먹고 다른 어떤 사람은 한 달 동안 불판을 닦으며 고기를 구워도 겨우 30-40만원 밖에 벌지 못한다고 합니다. 영화 한편을 보려면 거기도 약 6천 원 정도 드는데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복잡한 삶을 다 버리고 도시를 떠나서 사랑하는 사람과 단 둘이 그렇게 허송세월하며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저 시를 볼 때 가슴이 저리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한국의 젊은이들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정치? 관심 없습니다. 뭐 하고 싶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저 푸른 초원 위에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다 골치 아픕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그런 것은 인생이 아닙니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40대 시청률 1위입니다. 나도 한 때는 좋아했던 적이 있는데 그런 삶은 너무 의미가 없습니다.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돌아와야겠다고 하면 괜찮은데 말입니다.
두 번째로는 자기 자신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생의 가치요 보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치인으로 등장해서 폭풍 같은 인기를 받습니다.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유명해지기도 하고 좋은 일도 했습니다. 혜택을 받은 사람도 많습니다. 나중에 까보고 나니까 “이게 인간인가?” 하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정치인이 있습니다. “이게 제대로 된 인간인가?”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인생을 실패한 것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자신은 사회에 이바지하고, 자신은 그 모든 일어나는 삶의 상황들을 통해서 점점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그 본성을 회복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입니다. 이것이 유교사상에서는 이렇게 표현됩니다.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물으면 조선시대의 선비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고 답합니다. “수”는 닦는다는 뜻입니다. “기”는 자기 자신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닦는다는 것입니다. 유교에는 우리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죄의 개념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를 충분히 수양하고 선한 마음을 가지려고 하면 보다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뒤가 아니라 앞에 먼저 나옵니다. 이것에 첫 번째 목표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것이 1번이고 이것이 2번입니다. 사람됨의 결과로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치인”입니다. “치”는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사람을 다스릴 수 없고 높은 자리에 있어야만 “너는 이렇게 해라, 너는 이렇게 해라”, “혼난다!”, “저 놈을 당장 하옥시켜라!”하는데 이것을 “치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여기서 “인”은 이웃입니다. 이 이웃을 “치”, 다스린다는 것은 당연히 여기에 목표가 있습니다. 인간이 참된 인간성을 갖지 못해서 날뛰다보니 자신의 자리에 있지 못합니다. 아이인데 아이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다른 자리에 가 있고, 엄마인데 엄마의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학생인데 학생의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리에서 이탈한 사람들을 정돈해주는데 이것을 “치인”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갈고 닦아서 순전한 사람이 되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각기 사람들이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저 사람을 자꾸 괴롭히면 저 사람은 편안할 수 없습니다. 괴롭히는 사람은 편할지 모르지만 당하는 사람은 편안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놈!” 하고 혼을 내서 법으로 제 자리로 돌아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제 자리에 돌아갔을 때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안정하다고 본 것입니다. 유교의 이상도 이 두 가지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때, 사람들의 사상이 인간의 자의식에 대해 눈뜨기 시작하면서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르네”, 다시 태어나다는 뜻인데 인간에 대한 이해가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르네상스 운동이라는 것을 문예부흥운동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말의 번역이 맞지 않는 것이고 르네상스 운동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 운동입니다. 로마교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인간관은 폭력과 폭압으로 이루어집니다. 인간은 로마의 거대한 체제 유지를 위한 부속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리는 그들과 상관이 없습니다. 진리는 사제들이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라틴어로 성경을 보고 라틴어로 설교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라틴어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엇인가?”, “원래 우리 인간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하며 시작한 것이 호메로스의 책을 읽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동양의 공자나 맹자 같이 많은 가르침을 주는 사람들의 책을 읽듯이, 영국 사람들이 셰익스피어 전집을 읽으면서 인생이 무엇인지를 생각한 것처럼 그의 책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와 같은 것을 원판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에 대해서 조상들이 얼마나 놀라운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르네상스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그 문제를 도입하면서, “그러면 과연 성경은 우리에게 진짜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조사를 해보자.” 해서 크리스천이나 넌크리스천 할 것 없이 원어를 공부해서 –라틴어도 번역한 것에 불과하니까-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아람어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서 직접 배우는 인간에 대한 이해는 가톨릭에서 가르치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는 너무 달랐던 것입니다. 교회, 하나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그들의 독단적인 생각인지 점검하기 위해 1세기 기독교의 흔적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 속사도들, 교부들의 작품들, 이후의 변증가들의 작품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그것들은 원전으로 읽으면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정말 순수한 신앙이었는데 로마교회라는 틀 속에 들어오면서 세속권력과 야합하고 커다란 방향의 전환을 하게 된 것을 보고 고민한 것이 기독교 인문주의 운동이 되고 종교개혁자들은 예외 없이 이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아니면 인간에 대한 참된 이해에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세계사에 한 획을 긋는 종교개혁운동을 준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속에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결국 복음이고 신자들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지만 우리의 죄가 “0”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모두 다 사해지고 죄의 지배가 무너졌지만 비유를 하자면, 고질라가 있어서 온 나라를 지배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에게 철퇴를 맞고 두개골이 부서지고 등뼈가 다 부러지고 그렇게 위협하던 팔, 다리가 전부 박살이 나서 드러누워 피를 흘리면서도 조금씩 기어가고 있는 그런 상태가 된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신자라고 할지라도 죄가 남아있습니다. 그 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한 방법이 “Mortification”입니다.
이제 약속대로 플라톤의 동굴의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동굴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이렇게 앉아서 벽을 보고 있습니다. 벽에 그림자 연극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열심히 관찰하면서 저 그림자는 뭘 의미하는 것이고 저 그림자는 다음에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외우면서 그 사람의 능력이 결정됩니다. 그것을 잘 알아 맞추면 돈도 벌고 예쁜 여자에게 장가도 가고 높은 자리에도 오릅니다. 그러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게 뭘까? 도대체 저런 변화무쌍한 형상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하고 고개를 돌리게 됩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고개를 돌렸더니 충격적인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알고 보니 여기에 다양한 형상이 있고 그 뒤에 등불이 있어서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다시 그림자를 보기 위해 이쪽으로 가겠습니까, 아니면 그 형상을 만들어내는 그 원인이 되는 곳으로 가겠습니까? 그는 원인을 보았기 때문에 그림자는 더 이상 신비롭지도 않고 관측할 가치도 없습니다. 빛을 비추는 곳을 갔더니 등불이 있었습니다. 플라톤을 연구하는 철학자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무엇이? 무엇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뒤를 보게 만들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교육”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나는 신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이 사람 자신 안에 있는 어떤 본성을 이끄는, 진리가 이 사람을 잡아당기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등불을 본 그는 거기 있는 형상들을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새도 있고 나무도 있고 별 형상이 다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이건 또 뭔가?”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희미하게 한 줄기 빛이 들어옵니다. 생전 본 적이 없는 계단 비슷한 곳이 나타납니다. 그곳을 따라 올라갑니다. 올라가서 보니 동굴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고 동굴 속에서는 본적이 없었던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나무와 숲, 새들과 시냇물, 뛰어다니는 동물들, 모두 방금 동굴 안에서 철판 쪼가리 같은 형상으로 본 것들이었습니다. 여기 태양이 있고 태양이 빛을 쏟아내니까 다 볼 수 가 있었습니다. 짐승들과 풀들과 수많은 사물들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이 사람은 엄청난 행복을 느낍니다. “아! 이것은 어마어마한 행복이구나!” 깊은 행복을 경험합니다. 엄청난 행복에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이제 어디에 살아야겠습니까? 바깥에 살겠습니까? 동굴에 살겠습니까? 바깥에 살아야 하는데 바깥에 살지 않습니다. 잠시 그 화려한 광경을 보면서 가슴이 뛰고 눈물이 쏟아지고 태어나서 한 번도 도달한 적이 없는 어마어마한 희열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 운명이 주어집니다. 숙명이 주어집니다. “아낭케”. 이것은 “필연”입니다. A가 B가 될 수밖에 없는 필연, 운명입니다. “너와 나의 만남은 운명이야.”합니다. 좋아할 때는 그런 느낌이 들기 마련입니다. 사랑이 식으면 “너와 내가 만난 것은 실수였어.”하게 됩니다. 이런 운명이 그에게 주어집니다. 그는 어디에 가서 살겠습니까? 진리를 발견하고 올라간 것을 “아나바시스”라고 합니다. “아나”는 “올라간다”이고 “바시스”는 “바이노”, “걸어간다”는 뜻에서 옵니다.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진리를 찾아서 상승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실체를 본 것입니다. 여기서는 어마어마한 신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그 사랑을 경험한 즉시 운명, 숙명을 느낍니다. 숙명을 느끼고 나면, 자신은 여기가 너무 좋지만 다시 내려옵니다. 그것이 바로 “카타바시스”입니다. 하강합니다. 그의 운명은, 돌아와서 만난 사람들에게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이 뒤에는 그림자를 만드는 기계가 있고 더 위로 올라가면 너희들이 그림자로만 보았던 것들의 진짜 찬란하고 완전한 세계가 있어!” 말하게 됩니다.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동굴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알았고 바깥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경험했기 때문에 자신은 바깥에 있는 것이 좋지만 눈물을 흘리며 “카타바시스”하는 것입니다. 그의 마지막 운명은 동굴 속의 사람들에게 바깥세상의 위대함을 증언하다가 살해당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이 모세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쨌든 계시가 없이 기독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사상에 이렇게 가까이 간 사람은 플라톤입니다. 플라톤은 거의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The philosopher 라고 할 때 그 사람은 단 한 사람 플라톤이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엄청난 사유를 펼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국가론”에 나온 내용입니다. 한 번 읽어보십시오. 영국에서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읽는 책입니다.
이것을 기독교 맥락으로 경험하면 사도바울의 경험과 똑같습니다. 이것을 보다가 “이게 뭘까?” 생각을 하고 나중에 올라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행복한데 숙명을 부여받습니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소명”이라고 합니다. “소명”은 진리와 사랑 때문에 생겨납니다. 자신은 여기에 있는 것이 너무 좋지만 “카타바시스”를 합니다. 내가 매주 화요일에 “카타바시스”하는 마음으로 강의에 오는 것입니다. 내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서 책을 보고 쉬고, 이 강의에 오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놀겠습니까? 글도 쓰고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동굴 속에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인정하지 않는 눈빛을 하십니까? 사실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동굴입니다. 이렇게 와서 내가 보고 온 바깥의 세계를 증언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꾸 나를 순교시키려고 합니다. 벌떡벌떡 일어나서 가고 졸고 있고, 전부 다 나에게 돌을 던지는 것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이야깁니다. “아이씨, 기도나 가르치지 무슨 잡소리가 저렇게 많아?” 전부 다 돌을 던지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맞아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모두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이 가운데 어떤 사람은 아주 소수이지만 내 이야기를 듣고 뒤를 돌아봅니다. 그걸 보고 똑같은 길을 갑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죽은 후에 다른 사람이 다시 내려와서 또 전하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사도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아낭케, 숙명을 부여받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하나님의 강제력입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네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사랑이 가져다주는 아낭케, 숙명입니다. 결국은 와서 순교합니다. 자신이 순교하면 끝이 나고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그 순교하는 광경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듣고, 이제 이것을 보지 않겠다고 하고 뒤로 걸어 올라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환희와 희열을 느낍니다. 사도바울이 뒤를 이어서 내려와서 죽는 것입니다. 죽으면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었는데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올라갑니다. 마지막에 기독교의 이상은, 이제 더 이상 내려갈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제 텍스트로 돌아가서 33쪽을 보겠습니다. 나중에 하나씩 보시면서 이해하시면 좋습니다.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죄의 형이상학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죄라는 것은 존재하는 경향성입니다. 경향성은 어떤 사물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성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을 뜻합니다. 죄의 가장 근본적인 근원을 인간의 영혼에서 찾는 것입니다.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게 영혼은 있습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영혼과 육체는 두 가지 구성요소이지만 육체는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영혼이 거하는 집입니다. 그 집 안에서 영혼이 살아 있음으로써 그 집이 집다운 집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상의 문제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것이 영혼이고 육체는 그냥 영혼이 거하는 도구라고 해버리면 인간의 육체 자체를 경시하는 생각이 일어나게 되고 심지어 남을 착취하고 괴롭게 하는 데에 정당한 이론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현대의 개혁신학자들은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영혼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까지 모두 포괄한다고 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이고 이 형상을 사용하여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육체이기 때문에 존엄성이 육체에까지 확대되어야 한다고 해석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많은 논의가 있지만 그것을 따질 시간이 없으니 내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있는데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우리의 영혼이고 영혼의 생명은 우리 하나님이시니라.” 육체가 영혼과 함께 있음으로써 인간의 삶을 사는 일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영혼에 죄라고 하는 것의 본질은 영혼에 있는 경향성입니다. 경향성이라는 것은 어느 한쪽으로 가고자하는 성향입니다. 예를 들어, 물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둥근 물체에 힘을 주면 굴러간다, 강한 물체와 덜 강한 물체가 강한 충격으로 만나면 그 충격이 약한 물체가 감내할 수 있는 한계를 지나칠 때 파괴된다, 이런 것들이 경향성입니다. 유리는 떨어뜨리면 깨지는 속성이 있지만 이런 것은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습니다. 속에 있는 경향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혼의 경향성이 인간의 마음으로 투영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육체는 영혼과 직접 연결된다기보다는 마음을 통해서 육체와 연결되어서 인간이 많은 일을 하게 됩니다. 이 성향이 마음에 투영될 때 인간은 알고 느끼고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지, 정, 의의 행위를 합니다. 이 경향이 마음속에 투영되면서 어떤 방향성을 갖데 됩니다.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는데 대부분 “성향”이라고 합니다. 성향, 지향성 등 표현들이 있는데 교육학이나 철학에서 이런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지향성”은 의지를 가지고 어느 한쪽 방향으로 작용하는 성격을 가리킵니다. “성향”은 성품 안에 깃들여 있는 방향입니다. 이 경향성이 마음 안에서는 성향이 됩니다. 이 성향에 반대되는 행동들을 할 때 인간은 고통을 느끼고, 성향에 맞아 떨어지는 일을 할 때 인간은 아주 자연스러움을 느낍니다. 우리 속담에, “참새가 방앗간 앞을 그냥 지나가랴.” 합니다. 만화방에 가는 사람, 게임방에 가는 사람, 쇼핑가는 사람 등등을 그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참새”가 사람이라면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랴”는 참새 자신이 낱알을 좋아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방앗간 앞에는 낱알들이 많이 흩어져 있으니까 거기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또 다른 본성에 속하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경향성이고 이 죄는 인간 안에서 성향으로 작용합니다. 이 성향은 하나님께 대한 “적의”입니다. 하나님을 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할 때 적의를 느끼는 것처럼 상대방을 파괴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적의는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반감과 대적입니다. 반감은 정서적인 것이고 대적은 의지적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죄가 가지고 있는 성격인데, 그 대상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원수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고양이와 쥐를 무슨 관계라고 합니까? 천적이라고 합니다. 태어나서 바깥 사물을 알지 못하는 죄를 유리 박스에 넣고 태어나서 아무것도 본 것이 없는, 눈도 뜨지 못한 고양이 새끼를 함께 넣어 두고 키웁니다. 마지막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잡아먹겠습니까, 사이좋게 지내는 친구가 되겠습니까? 잠깐 동안은 사이가 좋습니다. 그런데 고양이가 쥐를 해칠 능력을 갖추게 되면 쥐를 먹지는 않더라도 죽입니다. 쥐에 대한 고양이의 적의는 학습된 것이 아니라 DNA 속에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학습된 것이 아니라 DNA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하나님께 대들어서 하나님을 해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럴 수는 있습니다. 태어났는데 (외부) 조건이 그런 것을 많이 보게 된다면 발현이 훨씬 빠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학자들이 실험한 결과입니다. 그런 것이 천적입니다. 학습이 되지 않아서 서로 좋게 지낸다고 한다면 그것은 천적관계가 아닙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께 대해 천적관계로 태어납니다.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대적하면서 태어나니까 사람 안에 있는 본성 속의 죄가 제거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철학이나 도덕이나 윤리 등을 통해서 억제될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 가니까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다니는데) 너무 가여웠습니다. 마치 북한의 학생들을 보는 줄 알았습니다. XL 사이즈의 교복을 사서 입고 다닙니다. 커다란 세일러 칼라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고 마치 조선시대처럼 하고 다닙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도 항의하지 않습니다. 만약 한국에서 그렇게 입힌다고 하면 데모하고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저는 옛날부터 교복폐지주의자였습니다. 인간성을 억압하는 것입니다. 무슨 교복입니까? 자기가 입고 싶은 대로 입으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남학생들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반바지를 입되 제발 다리에 털만 안 보이게 하고 다니라는 것입니다. 자유를 방해하자는 것이 아니라 온갖 냄새가 납니다. 불쾌감을 줍니다. 그것은 안 되니까 가리고 다니라는 것입니다. 양말을 신고 말고는 자기 맘이지만 그렇게 (털을 내놓고) 슬리퍼를 신고 맨발로 오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자유입니다. 빨강머리를 하든 노랑머리를 하든지 상관없습니다. 티끌만큼도 걸리적거리지 않습니다. 화장을 하든지 말든지, 뭘 하든지 상관없습니다. 자유입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할 수 있으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게 해서 죄가 여기에서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성향을 작용해서 마음에서 떠오르는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한마디 하면, “어쩜 저렇게 똑똑하니?”, “그렇게 따뜻하게 해 줘서 고마워.”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 이야기하거나 누가 그 말에 칭찬을 해도, “에이, 몰라서 그래. 얼마나 나쁜 놈인데, 어쩌다 한 번 잘했을 거야. 얼마나 잘하나 두고 보자.”합니다. 이게 적의입니다. 행동으로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적의와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은 미워하는 것이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고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미워하는 것입니까?
요즘 청소년들은, 자신의 부모님이 얼마나 희생을 해가며 기르는데도 엄마 아빠에게 욕을 하고 얼굴도 안 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하려는 것을 못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나님께 적의를 가진 것만큼 사랑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기”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사랑으로 삶을 구현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관측대상은 이것입니다. 마음에 죄가 이렇게 흐르고 있으면 무엇을 생각하든지 항상 이 죄가 영향을 줍니다 .무엇을 느끼든지 죄가 영향을 줍니다. 무엇을 판단하고 결정하든지 죄가 영향을 줍니다. 이런 구조가 되면서 결국 인간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뒤로 넘어가서, “작용하는 성향으로서의 죄”가 나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둘째로, 작용하는 성향으로서의 죄이다. 존 오웬은 죄의 작용의 본질을 마음의 성향이라고 본다. 이러한 죄의 성향은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죄의 작용하는 성향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적의(敵意, enmity)이다. 그리고 이 적의는 다시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반감(aversion)이고 다른 하나는 대적(opposition)이다. 그리고 이 죄는 인간의 영혼과 마음 안에서 속임(deceit)과 강압(force)이라는 두 가지 수단을 가지고 역사한다.
그래서 죄가 있음으로 인간은 자꾸 속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의 죄는 속일 때,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감춥니다. 유흥비가 모자랍니다. 너무 하고 싶습니다. 돈을 훔칩니다. 돈을 훔치면 발각된 것이고 발각되면 경찰에서 조사가 들어가고 기소가 될 것입니다. 감옥을 가야합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이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감춰버립니다. 그래서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죄가 속입니다. 속일 뿐만 아니라 죄가 강압을 합니다. 한잔 술은 자기가 선택해서 마십니다. 술을 많이 마시고 인이 박히게 되면 자기가 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술이 자기를 선택하게 됩니다. 술 없이는 살 수 없이 됩니다.
여러분은 마약을 해 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마약보다 가벼운 것은 마리화나입니다. 대마초 피우는 것입니다. 대마초를 피우면 아주 몽롱한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데 미다졸람 같은 것을 맞아서 잠들기 직전의 상태까지 가는 것입니다. 아주 황홀한 순간에 도달하게 됩니다. 생각하는 것이 모두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현실이 물결칩니다. 그렇게 한번하고 취하고 재밌어서 두 번째로 하고 세 번째로 합니다. 다섯 번에서 열 번 정도를 하고 나면 마리화나 없이는 살 수가 없게 됩니다. 저녁이면 꼭 혼자서, 마리화나 할 때 듣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대마초를 피우면서 몽롱한 정신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보다 더 강력한 자극을 원하게 되고 마약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코카인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더 강한 LSD로 가는데 이것은 코카인의 백배입니다. 코카인은 담배의 200배입니다. 그정도 되면 더 이상 끊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게임 중독을 아실 것입니다. 게임중독이 지옥과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중독의 문제는 현실을 직면할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하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퇴보시킵니다. 중독에 빠지면 현실이 없습니다. 그에게 현실이라는 것은 탈현실이 현실입니다. 당연히 그런 사람은 현실에서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현실 속에서 힘을 내어 살아도 잘 안 될 수 있는데 수시로 현실에서 이탈합니다. 여기서 공부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면, 책상에 바짝 붙어 앉아서 강의를 들으며 필기를 하고 무슨 소린지 모르는 것은 마치고 교수가 나갈 때 따라와서 물어봐도 A+를 맞을 가능성이 아주 낮은데, 수시로 이 공부가 싫어서 계속 바같으로 나가고 늦게 오고 대리출석 한다면 결국 그 사람은 이 강의실이라는 현실을 점점 더 감당할 수 없게 되고 마지막에 평가는 말도 안 되는 점수가 나오게 됩니다. 혹시 교수는 그 학생이 출석한 것으로 속았다고 해도 시험을 보면 말도 안 되는 점수가 나오게 됩니다. 그것은 미친 짓입니다. 그런 오락에 빠지고 알콜에 중독되는 것과 마약은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아주 가깝습니다. 한 번에 마약으로 가기도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제 이야기가 웃긴다고 할 수도 있지만 호주에 가보면 화장실에 “마약에 쓴 주사기는 여기에 버리지 말고 저쪽 다른 곳에 버리시오.”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엄청나게 마약이 번지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마약 허브가 되고 있습니다. 처벌이 너무 물러서 그렇습니다. 한번 걸리면 사형으로 가야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망가뜨립니다.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게 힘이 있습니다. 일단 죄를 짓고 그것이 내 속에서 성향을 형성하게 되면 강력한 힘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주변에도 이성간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청소년기에 그랬던 사람은 마지막에 늙을 때까지도 그렇습니다. 바람기를 확인한 남자와는 절대 맺어지면 안 됩니다. 못 끊습니다. “사랑해주면 되겠지.” 하겠지만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률적으로 매우 낮습니다. 그런 과거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하도록 두고 자기는 그래도 순전한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결혼 생활에 성공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중요한 팁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디 가서 듣겠습니까?
이러한 죄는 다음 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인간의 마음 안에서 역사한다. “인간의 마음 안에서 역사하는 죄의 세 가지 특성을 설명하라.” 이런 식으로 시험에 나올 수도 있습니다. 미친 기운입니다. 미쳤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out of reason, 미쳤다는 것은 이성에 어긋났다는 것입니다. 이성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하면 이런 일이 생기고 저렇게 하면 저런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성의 논리가 있는데 그것을 벗어나는 것, 그것이 광기, 미친 기운입니다. 요즘 문학 같은 곳에서는 이 광기를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사드 같은 사람 이후로 인간의 광기에도 인간다운 면모가 있다고 보고 광기를 해석합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음악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니지만 음악을 잘 하는 사람인데 똘끼가 있는 사람에게는 뭔가 아우라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죄에는 그런 똘끼, 광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죄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해 보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미친 기운이 들어가서 작용을 합니다.
두 번째는 냉철함입니다. 선한 일을 위해서는 용기를 내지 못하지만 죄를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용기를 냅니다. 세 번째는 담대함입니다. 하나의 무모함이라고 말할 수 있고 미친 기운과 통하는 것입니다. 저도 20대 때에는 오토바이를 즐겼습니다. 좁을 골목에서 180도 턴을 할 줄 압니다. 과속으로 달려가다가 오토바이를 쓰러뜨리면서 한 쪽 발을 땅에 내리고 엑셀을 확 당기면 앞바퀴를 축으로 해서 뒷바퀴가 8자를 그리면서 돕니다. 똑바로 가다가 오토바이가 쓰러지면서 방향을 바꾸어 달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했습니다. 지금도 하고 싶습니다. 아직 미친 기운이 있는 것입니다. 한 10여 년 전쯤에 650cc자리 오토바이를 판다는 광고를 보고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아내에게 “여보, 이걸 타고 싶은데 안 될까?” 했더니, “당신이 이걸 타고 다니면 교인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내가 안 들키면 되잖아.” 들키지 않을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 지하에 세워두고 라이드복이 있습니다. 헬멧도 있고 가죽옷을 입고 올라가면 누군지 어떻게 알아보겠습니까? 택배기사인줄 알 것입니다.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어떤 여자 오토바이 라이더가 있었는데 시속 270km까지 달렸습니다. 체감속도는 시속 350km입니다. 넘어지면 끝납니다. 눈 뜨면 다른 세상입니다. 무모함입니다. 고등학교 여자 아이들이 헬멧도 안 쓰고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앉아서 자유로를 질주합니다. 경찰이 잡을 수가 없습니다. 잡을 때 오토바이가 넘어집니다. 어떤 기자가 끝까지 따라가서 그 아이들이 쉴 때 인터뷰를 했습니다. “위험하지 않습니까?” 했더니 그 중에 중학교 여자 아이가 “기자님, 놀다가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대요.” 죽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모함입니다. 담대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우리에게 담대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도 우리에게 그런 담대함을 줍니다.
존 오웬의 성화론의 강조점은 이러한 죄의 역사하는 작용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다룰 수가 없다.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두 개의 자아를 발견한 것입니다. 한 편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죄를 짓고 싶어 하는 자아를 발견하는데 이것을 자기가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Oh miserable that I am, 오호 비천한 사람, 나여,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리요” 하고 울부짖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구원받기 전의 모습이 아니라 구원받은 후의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목을 쥐어뜯으면서 “저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하던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없었다면 생각 없이 살아온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결국 구원받을 때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그 이후의 인생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내가 매일 기도하라, 매일 성경 읽고 교회 가서 은혜 받고 절대 오락이나 유흥에 빠지지 말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소비”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소비에 빠지면 젊은 사람의 날개가 꺾이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육체의 힘이 너무 퇴화됩니다. 그것을 보존해야 합니다. 뛰어서 집에 가면 다음날 힘들어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교통수단을 타고 가면서 에너지를 보존하려는 것이 인간의 대책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 치우쳐서 호사스럽게 나아가서 탐욕으로 변질되면 안 됩니다. 나이 들면 음식도 좋은 것을 먹고 너무 많이 먹지 말아야 하고 잠도 아무대서나 자지 말고 좀 편안한 곳에서 자서 에너지를 절약해야 합니다. 그런 날이 옵니다. 젊었을 때는 그런 것에 지나쳐서 쾌락을 느끼면 안 됩니다. 일부러 그러실 필요는 없지만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지금 가치를 정립하는 일을 방해받지 않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나이에 돈쓰는 재미나 알고 맛집이나 알아보고 다니고 명품이나 구하러 다니고 알바해서 좋은 화장품이나 하나 손에 넣으려고 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자체가 죄는 아니라도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타락한 인간은 물론이고 중생한 신자라고 할지라도 죄의 강력한 작용과 역사를 스스로 처리할 수 없다고 본다. 신자는 비록 구원받고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죄를 다룸에 있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구원의 과정 뿐 아니라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인생의 모든 과정을 하나님을 인정하는 과정으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이 모든 투쟁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한 가지 회복하고자 하는 경륜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의존 안에서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화될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게 되면 이러한 사랑의 교통 안에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가장 훌륭한 존재가 되고 거기 합당한 작용을 하게 되어 그의 모든 삶이 덕스러울 수 있는 마음이 된다.
어떤 여성이 있습니다. 나이가 차면 연애를 하고 싶어집니다. 마땅한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자신에게 대쉬하는 사람은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대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싱글로 지냈습니다. 어떤 사람이 대쉬를 해서 만났는데 너무 좋습니다.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 순간 그 여자에게 이 세상에서 남자는 없어집니다. 사람과 한 남자만 남습니다. 나머지 남자는 남자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런 느낌이 들지 않고 여기도 남자, 저기도 남자, 그러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격하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아직까지 잘 못해본 것 같습니다. 환승 연애하는 사람들은 사랑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환승 연애가 뭔지 아십니까? 조건이 더 좋은 상대가 나타나면 갈아타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변한 것이 아니라 사랑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면 나머지는 그냥 다 사람이고 물질일 뿐이지 사랑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어떻게 찢어집니까? 어떤 남성이 있는데 한 여성에게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지극 정성으로 잘 해줍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저 형제의 삶은 저 자매를 위한 삶이라고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주는 자매가 또 하나 더 있습니다. 용납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셋은 아니고 딱 하나 더 있습니다.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됩니다. 심리적으로 나에게 그렇게 잘 해줘서 하나도 아쉬운 것이 없는데 이 남자가 다른 한 여자에게 그렇게 잘 해주는 것을 안 된다고 주장하고 더 이상 그가 가지고 오는 선물이 더럽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쪼개진 사랑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안 받으면 안 받았지 쪼개진 사랑은 받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가 않다면 그 여자도 어떤 조건 때문에 그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지 진짜 사랑 때문에 그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불분리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분할 불가능합니다. 쪼개질 수 있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을 하나님에게 적용해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 보시기에 잘 합니다.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고 주님을 위해서 선교도 떠나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다른 곳에 또 하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 사랑이 불결해보이겠습니까, 순결해 보이겠습니까? 여러분도 그런 사랑이 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더더욱 싫은 것입니다. 원리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 것이냐, 자기를 사랑하며 행복이라고 느끼면서 불행하게 살 것이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죄의 본질에 대한 역설적 기능, 34페이지입니다. 이것은 복잡한 이야기인데 쉽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죄의 역설적 기능, 죄 자체는 하나님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고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만드시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죄를 짓거나 가지도록 조장하신 적도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이 죄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사람은 죄인이 되고 이 사람의 마음 안에는 죄가 있어서 이것이 성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신자 안에서 사랑을 받음으로 세력을 키워갑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그러면 어떻게 선택을 해서 죄가 생겨나게 되는 지를 질문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합니다. 선과 악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합니다. 만약에 절대자가 존재한다고 할 때에 “존재하다”에 사용된 희랍어는 ‘에이나이’인데 분사형입니다. 영어로 being입니다. 이것을 철학적 설명으로 “일자”라고 합니다. “일자”는 모든 세계를 포괄하고 있는 절대자입니다. 그것은 둘 일 수 없습니다. 둘이라면 둘 중에 아무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절대자는 둘일 수 없고 하나입니다. 하나의 절대자를 가리켜서 “일자”라고 하는데 존재론적으로 보면 모든 눈에 보이는 사물들이 있지만 이것들은 모두 “일자” 안에 있는 “일자”를 반영한 것이라고 봅니다. 철학 용어입니다. 그 “일자”는 당연히 선입니다. 그런데 왜 악이 생겨나는지 고민한 것입니다.
“privatio”는 “결핍”이라는 뜻이고 “boni”는 “선”이라는 말의 소격입니다. 그래서 “선의 결핍”이 악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악이라는 것은 실체가 아니다. 선은 실체지만 악은 그 실체에 기생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질병입니다. 건강한 몸은 선이고 상처가 나서 곪는 것은 악입니다. 상처가 나서 곪는 것은 허공에 상처가 나서 곪는 것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몸이 있어야만 달라붙어서 그 몸을 파괴하면서 건강을 결핍시키고 병들고 곪고 상처가 되어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어거스틴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만약 상처가 실체라면 우리가 모두 치료하고 난 후에는 그 상처는 어디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몸이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선함을 되찾으면 상처 발견할 수 없이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해석합니다. 어거스틴이 저 이론은 1600년에 세웠지만 아직까지도 저 이론은 탄탄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항의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 이론보다 탄탄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악은 선에 기생하면서 있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설명하자면, 은혜에 기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 은혜가 이만큼 사라지면 A상태일 때의 영혼과 마음이고, 결함이 있는 B상태일 때 작용하는 것이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당연히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이렇게 은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은혜가 없게 된 것을 죄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는 은혜의 결핍(privatio gratiae)입니다. 은혜의 결핍은 사랑의 결핍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 속에 있지 못한 것만큼 실제로 죄가 역사해서 작용하는 것인데 죄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이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고 나면 그 죄가 어딘가로 이동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바이러스처럼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집니다. 사람이 아예 죽어버리고 나면 죄는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이 죽는 것과 없어져버립니다. 더 이상 붙어서 영향을 끼칠 인자, 몸이 없어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어마어마한 죄를 짓고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 앞에 쌍욕을 하고 죽었다고 하면, 그가 죽기 직전까지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던 강력한 죄의 성향을 보여준 것인데 그가 죽으면 죄는 어디로 갑니까? 죄는 인간의 영혼에 붙어서 작용하기 때문에 영혼 자체가 사라져버리고 나면 죄는 거기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듭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가 있는데 하나님이 만들고 싶으셨던 사회는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라고 고백하며 사는 사회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거기서 인간이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러한 모습들은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계신 것과 똑같은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본래의 아름다움을 인간의 관계의 아름다움이 본 따서 이것이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인간에게서 보고 싶어 하셨던 아름다움 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다 깨어졌습니다. 사랑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사랑의 총량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사랑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서로 연결되어 사람들이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것은 원천입니다. 집에 PC, 전기 다리미, 헤어 드라이어 등등 온갖 것이 있는데 전원을 꺼버리고 나면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서 이 모든 것들이 끊어졌습니다. 끊어지고 나니까 이 사람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버립니다. 그러면 저 사람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저 사람도 하고 싶은 대로 해버립니다. 그러면 충돌이 일어납니다. 만일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힘이 세다면 거기에 굴복하고, 굴복하지 않으면 죽던지 사라지던지 하게 합니다. 살기 위해서 굴복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엄청난 넓이의 자기 사랑의 질서를 펼쳤던 사람들이 황제입니다. 황제는 까불면 다 죽여 버립니다. 수십만이라도 상관없이 싹 쓸어버립니다.
지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대책 없이 죄가 들어오게 하셨을까? 당신이 만들지 않으셨다고 하지만 죄가 들어오면 당신의 의도가 깨지는데 어떤 대책을 가지고 계실까? 결론만 먼저 이야기하면, 죄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아니지만, 인간에 의해 죄가 들어왔지만 결론적으로 죄가 안 들어온 것보다 들어온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하게 드러나게 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조금만 설명하겠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달았던 모든 사람들은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돈을 주고 받고 보물을 주고 해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죄를 통해서 용서를 받음으로 깨닫게 됩니다. 용서를 받았다는 것은 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이런 것은 지금 세상보다 좋아졌겠지만,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과학은 엄청나게 발달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아담처럼 발가벗고 뛰어다니면서 과일이나 따먹으며 지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나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버리시는 사랑은 몰랐을 것입니다. 가슴 저미는 사랑, 이런 것은 인간이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가 들어옴으로써 그 죄 때문에 얼마나 인간이 비참해지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인간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질문: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죄가 필요해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죄가 있기 때문에 사용하셔서 영광을 드러냈다는 것입니까?
답변: 그게 아니라 인간은 죄를 지었고 죄를 지을 때는 그렇게 하려는 원대한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했기 때문에 죄를 짓고 하나님께 굴복하기 보다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인간의 선택으로 나쁜 것을 저질렀기 때문에 나쁜 것이 영원히 나쁜 것으로 남는 세상밖에 대안이 없다면 결국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서 당신의 의도가 꺾인 피해자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면 하나님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에 대한 생각을 뛰어넘는 커다란 지혜의 그림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심으로써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용서할 이유가 없는 비천한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절절한 사랑을 깨달으면서 인간을 죄가 들어오지 않았던 것 보다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더 절절한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 와 닿으라고 남녀의 비유를 듭니다. 너무나 사랑했던 남녀가 부모의 반대가 심해서 헤어집니다. 그러다가 다시 만나게 되어 좋아하게 될 때는 그 사랑이 이루어질 확률이 매우 매우 높아집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과 헤어진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는 이 사람과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그의 인생에 있어서 크고 중요한 것인지를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둘이 서로 사귀는데 진전이 없을 때는 한번 헤어지십시오. 그렇게 헤어질 수 있으면 별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감격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다면 정말 사랑한 것입니다. 잃어버리는 것을 경험해보면 원래 있던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됩니다. 별로 동의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랑이라도 해봐야 뭔가 느끼실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죄는 역설적으로, 죄 자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망가뜨리기 위해서 태어났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그 죄를 사용해서 당신의 영광을 더 찬란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이 대낮에 불꽃놀이를 한다고 하면 그게 재밌겠습니까? 재미없습니다. 보이지를 않습니다. 소리는 나고 불꽃이 조금은 보일 것입니다. 저 위에서는 연기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져서 이 앞에 마당에서 한 발을 쏴 올려서 저 꼭대기에 작렬하듯이 퍼지면 아름답습니다. 밤하늘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만든 상황은 어두움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축포입니다. 찬란하게 빛이 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세상이 타락한 것이 잘 살지 못하는 원인이 아니라 아름답게 빛나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아멘?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을 욕하면서 살면 무슨 진전이 있겠습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