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Ⅰ. 본문해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이 기도하신 한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주기도문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단서가 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도 주기도문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산상수훈의 맥락에서 내용만 실려 있습니다. 그 문맥에서 예수님은 외식하지 말 것, 은밀한 중에 하나님을 찾을 것, 중언부언하지 말 것을 가르치시면서 주기도문의 내용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천국 백성들의 기도의 패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누가는 기본적으로 역사서술가였습니다. 상세한 필치로 어떻게 주기도문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은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뵈옵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준 것 같이 자신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이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는 것은 흔한 풍습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주시기를 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백성의 삶이 어떻게 기도 속에 집약되어야 하는지를 주기도문을 통해 가르쳐주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과 같이 예배가 끝날 때 모임이 흩어질 때 외우는 의식용으로 가르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책 ‘기도에 이르는 쉬운 길’(A simple way to pray)에서 지상 최대의 순교자는 주기도문이라고 갈파하였습니다. 그만큼 주기도문의 뜻이 왜곡되고 무시당한 채 중얼거려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모든 생애를 집약하는 렌즈가 됩니다. 주기도문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신약성경을 보고, 신약성경을 통해서 성경 전체를 보고, 그 렌즈를 통해서 세계와 인간의 역사를 바라볼 때 하나님 나라의 올바른 관점이 되는 것입니다. 저의 관심사는 주기도문의 내용 자체가 아닙니다. 주기도문이 생겨나게 된 배경을 담고 있는 1절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7년 전, 제가 젊은 교수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오후에 산 아래 있는 교수실에서 누가복음 11장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1절 한 절을 세 시간동안 읽었습니다. 저의 생애에 잊혀지지 않는 커다란 도전을 받았고, 그 깨달음들이 오늘날까지 저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때 깨달은 방대한 내용을 오늘 여러분에게 모두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짧은 시간에 집약해서 최소한의 가르침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Ⅱ. 예수님의 기도 생활
1절에서 소개되는 예수님의 기도생활은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요소를 가르쳐줍니다.
A. 기도의 주체이신 예수님
첫째는 예수께서 기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주체가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기도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과 신성의 교리, 성육신의 신학적인 의미에 착념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참 사람인 동시에 참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이 공재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케노시스(kenosis)의 이론을 주장하는 케노틱 이단들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라는 빌립보서 2장 6-7절의 기독론을 주석학적인 본론의 토대로 놓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실 때 신성을 모두 다 버리고 인성으로 오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의 본성을 가지신 동시에 참 사람의 본성을 가지셨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사람에게 다가오시기 위해 하나님이시기만 해서는 안 되고,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인간이시기만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분의 인격은 하나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인격과 인간의 성품으로 하나이지만 예수님은 신의 인격인 동시에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당시에 취하신 인성은 인격 없이 취하신 인성입니다. 이것을 신학용어로 ‘안휘포스타시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인격 없이 인성을 취하셔야 했는데 인성을 취하지 않고는 죽으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실 때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셔야 했고 동시에 참 사람을 보여주셔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여주셔야 했고, 또 한편으로는 인간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참 인간의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본보기는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기대하셨을 참된 인간의 본보기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역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타난 참된 인간을 본받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안에 전지전능한 신의 성품과 한계가 있는 인간의 성품을 함께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필요하실 때는 전지하고 전능하신 모습이 나타나지만 어떤 때는 스스로 인간의 연약함에 제약을 받으시며 모르시는 것도 있고 능력도 모자랄 때도 있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두 가지의 상반된 성경의 묘사는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양성교리의 신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 8절에는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없는 분인데 학습을 받으셨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운 것입니다. 죄는 없지만 한계가 있는 인성을 가지신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 가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은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사랑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에 처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도울 수 있었던 것은 그 과정이 사랑의 근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성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기도하셔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었지만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스스로 하나님 앞에 많은 시간을 기도하고 응답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아가야 할 인간의 본분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중요한 기도가 있을 때마다 구속사의 중요한 맥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공관복음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면이 17번 나오는데 누가복음에는 무려 10회나 등장합니다. 그만큼 누가는 기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간절히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나는 과연 기도하는 사람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중보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이 언급합니다. 신학적으로 ‘중보기도’라는 표현은 옳은 표현이 아닙니다. ‘중보’라는 말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는 ‘섬김기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경과 교회의 역사는 남을 위하여 대신 기도해주었던 기도의 위대한 능력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기도로 빌어준다고 할지라도 나 자신이 기도해야할 의무가 감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를 받는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자신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해볼 때 예수께서 기도하셨다는 표현은 우리에게 “당신도 예수님처럼 당신의 기도생활에 있어서 주체가 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져줍니다. 남의 기도에 근근이 목숨을 연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수많은 응답과 간증들을 창출하는 개척적인 삶을 살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B. 환경을 뛰어넘는 기도생활
두 번째는 환경을 뛰어넘는 기도생활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나옵니다. 이 구절이 희랍어 성경에는 ‘엔토포티니’라고 되어있는데 직역을 하면 ‘어떤 한 장소에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기도하신 장면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 곳에 정착한 삶을 사신 분이 아니었기 때문에서 성경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14장 23절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곳이 ‘산’이라고 나타나고, 마가복음 1장 35절에는 ‘광야’에서 기도하셨다고 나타나고, 누가복은 3장 21절에는 ‘강’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가 일정한 거처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셔서 복음을 전했던 생애였음을 보여줍니다.
(찬양)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자의 신앙생활은 고국의 동포들이 응원하는 홈그라운드에서 펼치는 경기가 아닙니다.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의 어둠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 우리를 에워싸여 있고, 좌우에는 죄악 된 세상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부패한 나 자신의 본성이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한가하다고 기도를 많이 한 것도 아니고 바쁘다고 기도를 못한 것도 아닙니다.
교수가 되고나서 몇 년 동안 저는 어느 때보다 바쁜 인생을 살고 있었고 건강도 좋지 않아서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제 생애를 돌아보면 그 때가 목회를 하고 있는 지금보다 훨씬 더 기도를 많이 하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에 세 시간에서 네 시간을 기도에 헌신했습니다. 화장실에 앉으면 코피가 한 컵씩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들을 이기면서 기도할 뿐 아니라 공부하고, 공부할 뿐 아니라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환경이 우리를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의 힘이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기 때문에 환경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도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환경에 쉽게 굴복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환경을 끊임없이 거스르고 도전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요즘은 거의 기도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20년이 지나가면 은혜의 수단으로서 기도의 효용성에 대해 도전을 받는 교회생활이 계속 될지 심각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비롯한 현대문명의 이기에 빠집니다. 어느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너무 사용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져 불편하고, 너무 즐겨 사용하다보면 노예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하루 중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쓸모없는 일에 흘려보내고 경건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하고 기도라는 하나의 관점에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저는 가정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대학을 못 나오고 야간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학교를 설립하신 분이 우리나라 최초의 구약학자 중 한 분인 김치선 박사였습니다. 그분은 6.25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제가 뵙지는 못했지만 그분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깊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학교 안에 사택이 있었는데 사모님이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돌아오지를 않았답니다. 야간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강의가 끝날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걱정이 되어서 밖에 나가서 기다려보고 그래도 오지 않아서 예배당에 가보니까 강대에 엎드려서 기도를 하시고 계시더랍니다. 강의를 끝내고 오시다가 학생들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손에는 하얀 분필가루가 묻어 있는 상태로 피곤에 지쳐서 저녁 내내 기도하시다가 잠이 드셨습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젊은 시절, 신학교에서 교수로 지낼 때 늘 그분을 생각하며 ‘기도를 많이 하는 교수가 되자.’라고 결심했습니다.
C. 기도를 마치고 안식하심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라고 나옵니다. 저는 그 당시 이 구절을 희랍어 성경으로 읽다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감동을 받고 많이 울었습니다. 그중에 한 단어가 ‘마치시매’라는 단어입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에파우사토’라고 나오는데, 이 단어의 동치어는 히브리어의 ‘사바트’입니다. ‘사바트’는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 2:1)라고 할 때 ‘쉬시다’, 혹은 ‘안식하다’라고 번역된 단어입니다. 여기서 ‘안식일’이라는 영어 단어 'Sabbath day'가 나오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히브리어 ‘사바트’는 ‘안식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히브리서에서 두 개의 단어로 발전하게 되는데 ‘카타파오시스’(κατάπαυσις)와 ‘사바티스모스’(σαββατισμός)입니다. 두 가지 모두 안식인데 ‘사바티스모스’가 대체적으로 육체의 안식을 가리킨다면, ‘카타파오시스’는 구속을 통한 영혼의 안식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성도들의 위대한 안식의 전망을 바라보면서 발전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 나오는 ‘에파우사토’라는 단어를 정확하게 번역하면, ‘마치고’가 아니라 ‘예수께서 어떤 장소에서 기도하시고 안식하시매’, 혹은 ‘쉬시매, 휴식하시매’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기에 육체의 힘이 그렇게 소진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육체가 소진되셨을까요? 육체의 소진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심령을 다 쏟아서 기도했다면 육체의 소진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장시간의 기도에서 오는 육체의 피곤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기도를 마치고 쉬시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종종 짧은 기도이지만 하늘의 위대한 능력을 불러내린 기도를 언급합니다. 여호수아가 하늘에 있는 달과 해를 멈추게 한 사건이나 사도들이 명령함으로 귀신들을 내어 쫓는 일이나 예수님이 풍랑 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신 사건들은 모두 변형된 형태의 기도입니다. 자연이 움직인다고 할 때는 하나님이 원인이 되셔야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런 기도를 흉내를 내보지만 응답이 되지 않습니다. 무시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짧은 기도로 하늘의 위대한 능력을 불러냈던 주체는 장시간 기도에 헌신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간에 강력한 기도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길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적으로 긴 기도가 기도의 깊이를 보장하지는 않지만 마음을 쏟아 붓는 깊은 기도는 반드시 긴 시간을 요구합니다. 결국 얼마나 오래 기도를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기도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쏟아 붓는 간절한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도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들을 이 세상에 펼치시며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을 그분에게 전해주는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Ⅲ. 적용과 결론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인생의 문제에 에워싸여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특히 신학교 졸업반, 각 학과의 졸업반에 있는 분들은 더욱 기도를 많이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 예수님의 기도의 모본을 가슴에 새기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이 하나님의 면전에 홀로 서서 마음을 쏟아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