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기도 4
녹취자 : 오희열
이미 공부했지만 도덕적 질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깔끔하게 정리하고 진행하겠습니다. 미학적 질서, 역학적 질서, 도덕적 질서인데, 사실 이 도덕적 질서에 해당하는 것은 지성을 가진 피조물에게만 해당됩니다. 인간, 마귀, 천사,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도덕적인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본성상으로 볼 때는 피조물이 아니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점에서 도덕적 질서에 포함됩니다. 도덕이라는 것은 아까 설명했듯이 “도”와 “덕”이 함께 만나는 것입니다. “도덕적”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도”에 대해서 알고 있고 내 마음이 거기에 합치되었을 때를 말합니다. 알기만 하고 합치되지 않으면 모르고 합치되지 않은 것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에 자신의 마음을 일치시키며 사는 것, 그것이 도덕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I am the way.”, “나는 곧 길이요” 이것은 중국어에서 이야기하는 “타오”,“도”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류들에게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모든 규범들이 성경에 나오고 구약에서 그것을 최대한 요약할 때 십계명이 되는 것이고, 그 십계명을 행하는 삶을 어떤 사람이 살 수 있는가에 하는 사람됨에 대한 도덕의 원칙이 팔복에 나옵니다. 산상수훈은 십계명의 확대판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십계명은 율법으로 주어졌는데 산상수훈은 복음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그런 높은 이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그 표준을 따라 살려고 하는 것이 신약시대의 윤리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12명을 낳았습니다. 이렇게 아이를 낳았을 때 여러분은 아이들에 대해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어떤 것을 바라겠습니까?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 보십시오.
학생 : 저는 아이가 공부를 아주 잘 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 그것은 모든 부모가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물어보는 것은 그 열두 명이 모인 사회가 어떤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공부만 그냥 각자 잘 하면 됩니까?
학생 : 그 아이들끼리 서로 협력하고 서로 사이좋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 그게 공부 잘 하는 것보다 위입니까, 아래입니까?
학생 : 위입니다.
목사님 : 그렇습니다. 너무 좋은 대답입니다.
아이를 열두 명을 낳아도 부모의 마음속에는 이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함께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하는 이상이 있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좀 추상적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좀 불공평한 것이, 여러분의 부모님들은 여러분의 형제들을 똑같이 예뻐합니까? 우리 아버지는 내 동생을 더 예뻐했습니다. 우리 엄마는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고, 할머니는 나를 예뻐하셨습니다. 큰 고모는 셋째를 예뻐하셨고, 둘째 고모는 나를 좋아했습니다. 사람마다 다 달랐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있냐고 하는 새끼손가락이 더 아프고 엄지손가락이 덜 아픕니다. 깨물어보십시오. 거짓말입니다. 우리 교회 비서실에 있는 자매도 딸에게 전화가 오면, “응, 그래~”하는데 아들에게 전화 오면 “그래, 그런데? 왜? 뭐야? 어떻게 하라고?”합니다.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열두 명을 낳았을 때 그 열두 명의 아이들이 서로를 너무 자신처럼 사랑하며 어떤 질서를 이루어가리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실 때에도 그런 질서를 원하신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랑의 질서입니다. 사랑 그 자체가 질서입니다. 사랑에 빠졌는데 보고 싶다는 애인의 문자를 받으면 중간고사도 팽개치고 아빠 심부름도 팽개치고 달려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애인을 사랑하는 질서가 제일 상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 그 자체가 질서를 매깁니다. 제일 꼭대기에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사실 대표자로 말한 것이기 때문에 둘이 함께 고백한 것입니다. 이 말은 “너는 나의 분신이다.”라는 뜻입니다.
자동차가 충돌할 때 운전석에 탄 사람과 조수석에 탄 사람 중 누가 죽을 확률이 높은 지 아십니까? 조수석이 높습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내 애인이 조수석에 탔어도 앞에서 트럭이 달려올 때는 나를 중심으로 핸들을 돌립니다. 그래서 인간이 어떤 특별한 도덕을 의식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둘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가인이 태어났을 때도 엄마 아빠가 똑같이,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이야기했을 것이고 동생이 태어났을 때 형도 그렇게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는 모든 사람이 서로를 향해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며 사랑하는 세계가 되기를 원하셨고, 그것을 실제로 몸소 실천해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질서가 질서있게 이루어지는데 그 질서의 맨 꼭대기에 하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입니다. 서로서로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던 사람이 실망시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 그 사람을 사랑하던 동기가 그 사람 때문이라면 낙심하고 좌절하지만 하나님 때문에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낙심시키지 않으시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으로 그것을 극복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시려고 했던 도덕적인 질서입니다.
이런 질서를 하나님이 제일 먼저 인간의 마음속에 주셨습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는데 도덕법칙에 어긋나게 행했을 때는 밤에 잠자리가 편치 못한 것입니다.
오래 전에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범인이 잡히지 않고 살다가 암에 걸려 죽기 전에 경찰에 자수해서 자신과 누구와 누구와 누구가 이렇게 저렇게 해서 살인했다고 자백을 하고 이틀 뒤에 죽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자백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죽기 이틀 전까지 괴로움을 느끼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이것을 “양심신성설”이라고 합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목소리다.”라는 뜻입니다. 양심 그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만드셔서 하나는 돌 판에 새기시고 또 하나의 복사판은 인간의 마음 속에 새기신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십계명에 나온 모든 계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도덕의 원칙이 되었습니다.
칸트도 그런 도덕의 원칙, 산상수훈의 원칙, 그것을 인류 도덕의 최고의 이상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 도덕의 질서가 잡힐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악한 사람은 그런 도덕 질서가 매우 불편하겠지만 선하게 살려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회가 너무 편안한 사회가 됩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이 세우시려는 도덕의 질서인데 그 도덕을 좌우하는 것은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험하게 싸우며, 사람들을 헐뜯고, 폭력을 행하고, 심지어 정의의 이름으로 죽이기까지 하는데 그렇게 고집하는 질서는 도덕적일지는 모르지만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질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전 세계의 인류들이 서로서로 도덕적인 관계를 가지고 그 전체가 서로 사랑으로 묶여져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도덕사회가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류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내가 살아있는 것이 티끌만큼이라도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이롭게 하는 삶을 사는 모본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을 편 나누기보다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서 그들을 진리로 이끌기 원하셨습니다. 불신자들이나 심지어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조차도 서로 편을 가르고 대적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 속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런 잘못된 도덕적 질서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수기치인(”, 유교에서는 이것이 모토입니다. 학문을 하는 이유가 학문을 해서 출세하고 돈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문을 하는 이유는 수, 기, 치, 인을 하는 것입니다. 수, 갈고 닦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자기 자신입니다.. “수”가 필요한 이유는 산에서 뚝 잘라서 뜯어낸 바위 같은 존재인데 그것을 끊임없이 깎고 다듬어서 조형물을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수양하고 사람을 다스리는 것인 학문의 목적입니다. 사람을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권한이 주어져야 합니다. 그 권한은 벼슬을 통해서 받는데 벼슬을 받은 사람의 이상은 치인입니다.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갈고 닦으며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인데, 다스린다는 개념은 위에서 높은 계급에서 사람들을 지휘하고 형벌을 주며 다스린다는 뜻이 아니라 이 말과 같은 것입니다. “수기안인(脩己安人)” 자기를 갈고 닦은 후에 사람들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치”가 그런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기 있는데 이 사람의 본분이 A입니다. 그런데 그 본분에서 이탈합니다. 어떻게 됩니까? 무질서해집니다. 수기안인, 편안할 안입니다. 지난번에 서울대 이야기를 했는데 A라는 직분이 주어졌습니다. 수학교수입니다. 그런데 성추행을 합니다. 자기 본분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들, C, D, E, 이런 사람들이 계속 괴롭힘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사람을 제 자리에 갖다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안인”입니다. 그것을 위해 공부하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선비가 된다고 할 때, 열다섯 살 쯤에 선비의 길로 들어서고 결혼하고 상투를 틀게 되면 제일 먼저 결심하는 것이 목숨을 내 놓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여러분 “사도”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세자가 맘에 안 드니까 없애버리고 싶어서 신하에게 “그 아이 좀 정리해라.”했더니, “왕이여 그것은 인간이 할 도리가 아닙니다.”하고 집에 가서 목 매달아 죽어버립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왕과 한판 떠야 하는데 마지막에 남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일가족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뿐입니다, 그 당시에는 자살이 그냥 자살이 아니라 메시지입니다. 지금의 자살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선비는 선비가 되는 순간에 먹과 칼을 함께 놓고 선비가 되는 것입니다. 금방 죽을 줄 알면서도 유생들이 모두 경복궁에 몰려와서 임금 앞에 엎드려서 물러가지 않습니다. 때려 죽여도 안 물러갑니다. 왕이 안 되겠으니까, 다른 신하에게 “네가 세자 좀 정리해라.” 했더니, “왕이여 그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닙니다.”하고 또 죽어버립니다. 또 다른 신하에게 이야기했더니, “왕이여 그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하고 죽어버립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조선시대에 흐르고 있는 선비의 정신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돈 받고 간신질하는 날라리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도덕적인 질서에 대해서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최근에 한 방송에서 이완용의 일대기에 대해서 나왔는데 걸레 같은 삶은 산 것입니다. 나라를 팔고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면 산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덕적 질서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모두 수기치인, 수기안인을 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수기가 안 된 사람들이 치인을 하겠다고 할 때, 정치는 아주 더럽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가 승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돈 떼먹은 사람이 돈 먹은 사람을 감시하는 직분을 맡을 때, 불의한 방법으로 권력을 얻은 사람이 정의를 담당하는 부서의 책임자가 될 때 우리는 동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추행을 일삼는 사람이 여성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을 때, 공부는 절대 안 하고 무식하기 짝이 없는데 문교부 장관이 됐을 때 동의할 수 있겠습니다.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모든 사람들이 사회를 우습게 여기고 질서를 무시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좋아하는 아무 자리나 찾아가고 사회의 질서는 무너집니다. 한 사회의 행복이 사람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그런 시대에 살면 분통이 터집니다.
조국사태나 그런 일들에 대해서 분노하는 이유는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르지만 어쨌든지 간에 불공정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그런 것이 가장 싫습니다. 여기 여섯 명이 저와 밥을 먹었다면 그냥 뽑기 한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여섯 명을 뽑은 것입니까? 공정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도덕적인 사회입니다. 그런 질서를 꿈꾸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 때 현실적으로 그런 질서를 만나지 못합니다. 똑같이 학력고사를 보자고 하면, 어떻게 똑같이 라는 말이 됩니까? 강남 학생들은 한 달 과외비로 500만원을 쓴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평촌 변두리에 사는 학생들은 50만원도 못 씁니다. 더 가난한 아이들은 아이패드 살 돈도 없습니다. 그런데 시험만 본다고 해서 공정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결국 서울대 학생들을 조사해보면 55%가 강남이 집입니다. 그 학생들 중에서 미래에 정치 지도자들이 나오고 사회의 지도층들이 나옵니다. 그런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돼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법을 만들겠습니까, 부자를 위한 법을 만들겠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근본으로 그런 사회를 고쳐야 합니다.
몇 년 전에 이코노미스트지에 미국의 부자들이 어떻게 대대로 잘 사는 지에 대해서 대대적인 리포트가 나왔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 번째는 수준이 다른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돈을 들이는 것입니다. 요즘은 잘 모르겠는데 한참 과외가 성행할 때 한 달에 2천만 원짜리 교외가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고액과외를 하는 형제가 있었는데 일주일에 세 번 정도 가서 한 과목을 가르치는데 한 달에 400만원이었습니다. 그런 과외선생을 다섯 명 쓰면 2천만 원입니다. 두 번째는 국회에 로비해서 부자들에게 유리한 법안을 통과시키고 가난한 사람에게 유리한 법안은 통과시키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총기협회입니다. 로비가 어마어마하게 심해서 절대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부를 대물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인”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안인”을 하는 것이 공부하는 목적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까 설명했듯이 많이 배우고 인간이 안 된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어떤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자신을 묶으려는 노력이 없이 객관적으로 공부만 하니까 쉽게 말해서 “지식 기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액연봉을 받고 의사가 되기도 하지만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말도 못합니다. 여기서 이야기를 꺼내기도 싫을 정도입니다. 어떤 의사들은 자기가 의사라는 본인확인을 하고 한 사이트에 들어가서 자신이 간호사를 어떻게 추행했는지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지식은 굉장히 높은데 한 마디로 도덕적 질서에 대한 개념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며 나간다고 하면 사회는 희망이 없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그리스도인은 인류에 남은 마지막 희망인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높은 도덕적 수준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그것이 도덕적 질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자연적 질서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도덕적 질서의 아름다움을 보고 싶으신 것입니다. “형제가 함께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하는, 그런 아름다운 모본을 사회를 통해 미리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데 그것이 결국 교회를 통해 먼저 그 맛을 보여주시고 그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됨으로써 온 세계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질서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덕적 질서의 요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만 더 그림같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세계 최고의 심포니 교향악단이 있는데 런던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 뉴욕 필하모닉, 네 개가 있는데 이번에 런던 필하모닉이 온다고 합니다. 이번에 큰 맘 먹고 가보려고 티켓팅을 했습니다. 2초 만에 매진되었습니다. 심지어 비서를 PC방에 보내서 고성능 PC로 했는데도 못 끊었습니다. 그렇게 비싼데 그렇게 가기가 힘듭니다. 그 심포니를 보면 이쪽부터 시작해서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 베이스 순으로 쭉 악기가 배치됩니다. 저쪽 끝 베이스에는 부우~ 부우~ 소리가 납니다. 이쪽에서는 끼이 끼이~ 하는 소리가 납니다. 바이올린 같은 것은 소프라노 쪽 가까이에 있습니다. 클라리넷이나 플롯같은 것은 메조 소프라노 쪽에 있습니다. 똑같은 악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휘자에 의해서 연주를 하면 서너 명이 모여서 연주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아주 아름다운 하모니가 울려 퍼집니다. 그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세상의 정욕, 성욕, 물질, 거짓말, 이런 것들을 심각하게 다루는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려는 세계를 끊임없이 훼방놓고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서 며칠에 걸려서 그림을 그려 대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조카가 와서 낙서를 해서 고칠 수가 없어지면 그때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의 그 도덕적 질서를 무너뜨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더 하면 할 이야기가 많은데 넘어가고 4페이지 3번으로 가겠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다룹니다. 아까 영광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의존이 나옵니다. 영어로는 dependence입니다. 의지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인간이 여기에 있으면 인간이 하나님을 깊이 의존하고 있을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의존미입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 계심으로써 아름답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독립미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제일 먼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은 모든 것 위에 뛰어납니다. 그런데 인간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살한 돼지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견생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개,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었다고 해서 “살토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먹을 것도 있고 마실 것도 있고 심지어는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는데도 자기가 그 사랑을 못 느낄 때는 극단의 외로움을 느끼며 죽습니다. 웃기는 것이, 인간이 독립의 감정을 갖게 되었을 때 이 독립이 소외로 바뀌게 되면 인간은 그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서 자살하게 됩니다. 우리가 “고독사”라고 하는데 사실 그 말은 틀렸습니다. 고독사가 아니라 “고립사”입니다. 완전히 고립된 가운데 죽어가는 것입니다.
기계를 보면, 기계가 단순할수록 기술자가 필요합니까? 필요 없습니다. 기계가 매우 복잡하며 복잡할수록 기술자가 필요합니다. 아무나 못 만집니다. 끄고 켜기만 하는 것은 나도 만질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처음 알았는데 우리 교회에서는 설교 한 편을 하고 몇 주가 지나면 한글자막, 중국어 자막, 일본어 자막, 영어 자막까지 달려서 선택해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작업 과정이 약 30개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합니다. 매우 복잡합니다. 그런 복잡한 기계는 평범한 사람이 손대지 못하고 잘못 손댔다가는 다 망가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술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단순한 기계가 아닙니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을 기계처럼 생각하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인간을 동물처럼 생각했습니다. 누구 이후로? 찰스 다윈 이후로. 그러다가 나중에 보니까 인간이 기계에 가깝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계 중에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아주 일부분입니다. 어떻게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서로 연관되는지 아주 기초적인 수준밖에 밝혀지지 않아서 심지어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생명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통일된 정의가 없습니다. 죽음의 기준도 무엇을 기준으로 죽었다고 말할 것인가? 사람이 확실히 죽었는데 심장 재세동기를 써서 전기충격을 주면 다시 살아납니다. 완전히 죽어서 호흡도 하지 않고 심장도 멈췄습니다. 뇌 활동도 당연히 멈췄는데 전기 충격을 주면 어떤 사람은 죽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깨어납니다. 죽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은 그렇게 복잡한 존재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사귀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요즘 결혼을 하지 않는 풍조가 있는데 결혼을 하지 않는 첫 번째 이유가 돈이 많이 들어서, 집이 없어서 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입니다. 그러면 왜 결혼을 못 할 것 같습니까? 사람을 만나는 게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에너지가 어마어마하게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무 에너지가 안 들고 너무나 좋기만 하다는 사람은 생각이 없거나, 생각이 백지상태거나 사람을 대하는 기술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커버하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전자인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사물이 고등하면 고등할수록 모든 아랫것들을 지배할 수는 있는데 그런 능력을 많이 가지만 가질수록 자기 자신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호로비츠라는 피아노 연주가를 아십니까? 러시아 사람인데 이미 돌아가신 분입니다. 호로비츠의 피아노 연주는 대단합니다. 집에 돌아가시면서 찾아서 들어보십시오. 특히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같은 것을 들어보면 거의 신의 경지에 이릅니다. 이 사람의 성경이 하도 괴팍해서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아내는, “아버지는 거의 나를 미칠 지경으로 몰고 갔고 내 남편은 나를 완전히 미치게 만들어버렸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루빈스타인과 함께 당시 쌍벽을 이루던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천재는 매우 정신세계가 특별해서 평범한 사람은 이해를 잘 못합니다. 그런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은 대부분 돌아버리거나 인생의 최후를 비참하게 마감합니다. 결국 인간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가? 18세기 미국의 신학자요 철학자요 교육학자요 문학가인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 조그만 소책자를 하나 쓰기도 했는데, 일평생 내가 배우는 분입니다. 700페이지짜리 책을 스물여섯 권정도 남겼는데 스물네 권을 20년에 걸쳐서 다 독파했습니다. 기록하십시오. 이 분은 “하나님은 당신을 의존하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최고의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했습니다. 어마어마한 교회당 건물을 때려짓고 기념탑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하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은 최고의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의존의 마음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말씀을 깨닫지 않을 수 없고 거룩하게 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심경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돌아보면 신앙생활하면서 너무너무 행복했던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이상하게 눈물이 가장 많았던 때입니다. 그때 심정이 어떤 심정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하던 때입니다. 주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에 내가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때인 것입니다. 기록하십시오. 최고의 거룩함의 감정은 의존의 감정이고 최고의 세속적인 감정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는 감정이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반드시 넘어뜨려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 보게 하십니다. 천천히 걸어가다가 넘어지면 조금 다치지만 100m 달리기 하듯이 미친 듯 달리다가 넘어지면 어디가 부러집니다.
B번으로 가서, 하나님은 창조에 있어서도 인간을 의존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없던 존재인데 하나님이 만드셔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창조하신 것입니다. 모든 창조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창조에 있어서만 하나님을 의존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구속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의존하게 하신 것입니다. 구속이라는 것은, 우리를 죄 가운데서 속량해내시는 것입니다.
이 구속이라는 단어의 유래는 로마시대로 돌아가면 노예제도가 있었고 노예시장이 있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 우시장이 있듯이 노예시장이 있어서 노예들을 쭉 놓고 남자들은 웃통을 벗겨놓습니다. 주인이 와서 “이 노예를 팔려고 내놓습니다.”하며 일가족 네 명을 보여줍니다. 아빠 노예를 채찍으로 때리는데 그걸 맞고 아픈 척 하면 안 됩니다. 상품가치가 떨어집니다. 채찍에 맞아서 붉게 핏자국이 나는데도 아픈 척 하지 않고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펄쩍펄쩍 뛰어야 합니다. 그걸 보고 살 사람은 ‘이 노예는 웬만큼 맞아서는 끄떡없는 체력을 가지고 있구나.’하고 값을 주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예를 살 사람이 아빠, 엄마, 아이 둘, 이렇게 노예 가족 네 사람을 다 사가야 하는데 그 중에 아빠 엄마 노예 둘만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암수를 데려가야 자식을 낳고 노예가 낳은 자식은 주인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생식을 위해서 이렇게만 사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 노예는 일도 못하고 주인이 양육해야 하니까 시간도 들어가고 돈도 든다는 겁니다. 둘만 팔려면 팔고 아니면 말라고 하니까 파는 사람은 돈이 급해서 그렇게라도 팔겠다고 합니다. 아이 노예 둘은 울고불고 난리가 납니다. 아빠 엄마와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때 저 멀리서 훌륭한 마차를 타고 가던 한 사람이 그 광경을 보고 자기 시종에게 그 노예 가족 넷의 가격을 알아보고 오라고 지시합니다. 알아온 가격을 듣고 자신이 사겠다고 합니다. 그 노예 가족은 헤어지지 않게 되었으니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 노예 가족은 그 집에 가서 착한 주인에게 철저하게 충성을 맹세하려고 하는데 주인은 하룻저녁을 재우더니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노예가족에게 증서 하나를 써 줍니다. 노예 각자의 이름을 쓰고 이 노예는 우리 집의 노예였지만 해방시켜준다고 쓰고 주인의 인장을 찍어줍니다. 그것을 간직하라고 주면서 너희는 영원히 자유라고 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속입니다. 이것이 구속이고 이때 주인은 손해를 보면서 돈을 지불해야하는 그것을 속전이라고 합니다. 돈 전입니다. 속량하기 위해 지불한 돈입니다. 속전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노예상태로부터 해방된 네 식구가 어쨌든 구속을 받았습니다. 전적으로 누구 덕분입니까? 주인 덕분입니다. 자신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뭔가를 한 일이 있습니까? 100% 이 주인의 자비에 의해서 자신은 구속받은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면 구속, 속전, 속량, 속함, 이런 단어가 그런가보다 생각되지만 노예제도가 있던 시대에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묘사로 그 사람의 가슴속을 절절히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비싼 돈을 주고 노예를 사서 자기 집에 재우고 깨끗한 옷을 갈아입히고 그 다음날 내 보낼 때도 그냥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다시 노예가 되지 않도록 돈까지 주고 심지어는 땅까지 떼어주면서 여기서 뭐라도 해먹고 살라고 해 주는 것은 엄청난 희생을 하는 것입니다. 이 구속을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전적으로 주인의 자비에 덕을 입은 것이 됩니다. 창조에 있어서 피조물이 창조에 보탠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창조하신 것처럼 구속도 일방적으로 구속되었으니 창조된 사물로서 하나님은 나를 지으셨고 나는 지은 바 되었다는 이 위치를 지킬 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의존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속에 있어서도 똑같은 스토리가 됩니다. 구속에 있어서 나를 구원해주신 분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의문이 하나 떠오릅니다.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경륜은 이렇게 씁니다. “經綸” 이것은 옷감 같은 것을 말합니다. 경이라는 것은 경로, 이런 뜻인데 이 두 개가 합쳐져서 하나님의 아주 높은 뜻을 가진 계획을 말합니다. 이 경륜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도 있지만 살아봐야지만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있는 것입니다. 10년 전에는 여러분이 여기 와서 이런 수업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을 것입니다. 1년 전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와 있습니다. 이렇게 두루마리가 되어 있어서 여기까지는 글씨가 보이는데 이것이 펼쳐지면 펼쳐질수록 더 많은 글씨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시간과 공간의 두루마리가 펼쳐지면서 하나님의 계획들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게 됩니다. 이것을 두고도 사람들의 말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이 타락하게 내버려두셨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을 때 손모가지를 부러뜨려버리든지, 그게 너무 가엾으면 발로차서 선악과를 땅에 묻어버리셨다면 죄를 안 지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 여러분 본인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학생 :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그 자유의지를 침범하지 않고, 기계로 보지 않고 하나의 피조물로 보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 그 다음 옆에 사람.
학생 : 인간이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 좋은 답변입니다. 100% 맞지는 않지만 95% 다가갔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을 때는 하나님의 무슨 뜻을 드러내려고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났더니 하나님이 그 죄 지은 것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경륜을 펼쳐 보이시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옴으로 세상이 망가져버렸습니다. 자연계도 저주를 받고 인간도 타락한 본성을 지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유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을 때 은혜를 깊이 경험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받을 수 없는 느낌입니다. 결코 알 수 없는 사랑입니다. 또 하나는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결코 드러나지 않았을 텐데 죄가 들어옴으로써 세상이 아주 캄캄한 세상이 된 것입니다. 이 캄캄한 것을 배경으로 해서 찬란한 별빛처럼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나는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불꽃놀이를 대낮에 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캄캄해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리고 캄캄해지면 쏘는 것입니다. 롯데타워에서 10분 불꽃놀이 했는데 60억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소중한 불꽃이니까 밤하늘을 배경으로 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당신의 영광이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 앞에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불꽃처럼 드러나게 하셨는데 그 중에 가장 빛나는 별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찬란한 경륜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을 구원해나가시는 과정 자체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펼쳐 보이시는 과정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런 구속의 전 과정을 통해서 마지막에 깨닫게 되는 것은, 지킬 수 있는 아무리 훌륭한 율법을 주셨어도 우리가 그것을 지킴으로써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두 번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만 사랑할 때, 두 번째는 자기가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뼈저리게 회개할 때입니다. 이때가 인간의 영혼이 가장 아름답게 되는 때입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하나님에 대한 의존입니다. 상대적인 의존이 아니라 절대적인 의존인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환승연애라고 하는데, 환승할 때는 한 사람과의 관계가 완전히 끝난 다음에 1년이든 6개월이든 있다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연해하는 것은 환승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환승은 아직 이 사람과 과제하며 가고 있는데 양다리를 걸쳐서 더 좋은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때다!”싶을 때 오른 발을 꽉 잡고 왼발을 떼어 저쪽 열차로 건너 타는 것을 환승연애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더럽고 치사한 이유가, 사랑하지만 의존의 감정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용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평생 그렇게 삽니다. 그런 것은 쓰레기 같은 마음입니다. 의존이 없이 사랑이라는 감정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존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의존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를 하고 오늘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두 며느리가 있는데 큰 며느리는 너무 너무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희생적입니다. 자기가 해야할 의무를 최선을 다해서 하고 마지막에 큰일을 다 치루고는 졸도해서 병원에 실려가 링거를 맞아야 깨어날 정도로 집안일을 위해서 충실한 사람입니다. 어머니를 의존하는 것조차 너무 미안해서 자신이 온 몸을 바쳐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둘째 며느리는 개념이 없어서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어머니, 내일 우리 집에 좀 오세요.”, “왜?”, “모레가 아범 생일이잖아요.”, “아니, 네 아범 생일을 네가 챙기면 되지 내가 왜 가니?”, “아니 어머니, 내가 이제 시집와서 전도 부칠 줄 모르고 국도 끓일 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해요? 어머니 좀 와주세요. 오실 걸로 믿어요!” 하고 전화를 끊어버립니다. 어머니는 열 받습니다. “기껏 시집와서 자기 신랑 생일은 자기가 챙겨주면 되지, 다 차려놓고 나를 오라고 하면 모르겠지만 와서 밥순이 하라고 나를 불러? 저런 형편없이 배우지도 못한 저런 게 굴러 들어왔나?”합니다. 그런 생활이 한 3년 정도 되풀이 됩니다. 퀴즈는 이것입니다. 그 시어머니는 첫 번째 며느리를 사랑할까 두 번째 며느리를 사랑할까?
학생 : 두 번째 며느리입니다.
목사님 : 왜?
학생 : 더 정이 들어서입니다.
목사님 : 왜 정이 들었습니까?
학생 : 의존을 해서입니다.
목사님 : 그렇습니다. 의존입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는데 어떤 사람이 교수가 되는지 아십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렇게 교수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1등, 2등하고 외국 나갔다가 온 사람들이 교수가 된 것이 아닙니다. 교수님에게 늘 물어보는 사람, 그리고 그 대답을 기뻐하는 사람, 시키는 대로 공부하는 사람, 그리고 또 물어보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교수가 될 기회가 더 많이 주어졌습니다. 왜?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의존하면 귀찮습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몇 번 자살하고 싶었는데 영화가 너무 재밌어서 못 죽었습니다. 3학년 때 뉴욕타임지, 워싱턴 포스트, 런던 타임즈를 다 읽었습니다. 사전을 가끔 찾아보긴 했지만 올려놓으면 그냥 읽었습니다. 영어만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수학은 죽어도 싫었습니다. 수학은 오히려 나중에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 선생님이 밤늦게까지 공부하는데 그 선생님을 따라가서 영자신문 펼쳐놓고 밤중에 퇴근하는데 이것 좀 봐달라고, 이렇게 이렇게 해석하는데 그게 맞느냐고 물어봅니다. 자습시간 다 끝나서 밤중인데 보안등 아래에서 그걸 켜놓고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늦었으니까 내일 학교 와서 쉬는 시간에 날 찾아와라. 또 가르쳐줄게.” 하십니다. 그 선생님 지금 80이 넘으셨는데 나를 아직도 최고의 제자로 생각하십니다. 날 보고 “남준아, 너는 딴 거 하지 말고 영문과 교수를 해라. 교수의 기회가 안 되면 고등학교 선생으로 와라. 여기 중동고등학교도 할만하다.” 그분은 단국대학에서 은퇴교수를 하셨습니다. 그렇게 예뻐하셨습니다. 동창회가 모두 모였는데 강연 제목이 “김남준 목사와 자신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의존의 감정이 사랑을 부른 것입니다.
자매들이 형제를 좋아할 때가 되면 자꾸 의존하려고 합니다. 다 알면서도 “이 숙제 어떻게 해야 되요?” 물어봅니다. “이거 무거운 걸 들고 가야 하는데...” 하면, 마음이 없으면 “그냥 힘 좀 쓰세요. 힘 뒀다 뭐해요.”하는데, 마음에 들면 그 의존을 받아줍니다. 그러면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없이 아무것도 못하겠다고 오리발 내밉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내가 살 수 없습니다.”합니다.
대학에 있을 때 일입니다. 예쁘장한 자매 하나가 있었는데 한 형제를 그 자매가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 형제가 창가에 앉아있는데 너무 멋있게 보였습니다. “형제님, 이 가을에 내가 읽을만한 좋은 문학작품 하나 소개해주세요.”했는데, 그 형제는 이 자매가 별로였는지, “이현세씨의 외인구단을 한 번 읽어보시지요.”했습니다. 여러분은 모르실 것입니다. 당시 유명한 만화책이었습니다. 자매가 도서관에서 외인구단을 찾는데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만화책이었습니다. 나한테 와서는 그 형제 괘씸하다고 욕을 했습니다.
의존의 감정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도 형제들이나 자매들이나 의존의 감정을 받아들이면 결국 사랑으로 갈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의존의 감정을 어디까지 받아줄 것인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의존해도 탈이 없는 것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의존할 때는 인간이 나약해지지만 하나님을 의존할 때는 한없이 강해집니다. 왜? 하나님이 최고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의존할 때 오히려 강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기도와 맥이 같이 흐르는 것입니다. 기도가 가장 잘 될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의존의 감정으로 충만해져 있을 때, 그때 기도가 가장 잘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는 감정이 강할 때, 그때는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전 과정, 내가 태어나고 사람이 되어가는 모든 과정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의 감정을 가질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