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기도(202210.04._총신대 학부생 수업6)
신앙과 기도 5
녹취자: 김정호/이솔
신앙과 기도(2022.10.04._총신대 학부생 수업6)
여러분 중간고사 예상 문제는 받으셨죠?
신앙과 기도(2022.10.04._총신대 학부생 수업5)
학생 : 오늘 이렇게 게시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랬어요? 그러면 여기에 시험 문제가 나왔습니다. 칠판에 쓰면 또 시간 갈 것 같으니까 조교가 카톡단체방에 올려주십시오. 그리고 예상 문제는 드렸으니까 그것을 가지고 집에서 열심히 잘 연습하십시오. 일곱 문제인데 그 중에서 여섯 문제가 나옵니다. 성화와 기도는 괄호 넣기 아홉 문제, 사지선다형 한 문제로 10문제가 나옵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책을 읽었는가 하는 게 중요하니까 ( )란 본성에서 죄의 불결함을 제거하시는 거룩한 성령의 작용이다. 그러면 성화 이렇게 써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서 글자 수까지 딱 동그라미를 딱 쳤습니다. 이렇게 친절한 교수가 어디 있습니까? 글자 수까지 똑같이 두 글자 들어갈 때는 세 글자 안 쓰도록 두 글자만 썼습니다. 그래서 한 번 천천히 읽고 오고 줄 치면서 읽고 그 다음에 두 번째 줄 친 거 한 번 더 읽고 오면 거의 다 맞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되는데 그건 제 생각입니다. 골탕 먹이려고 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일곱 문제는 집에 가셔서 그냥 논술처럼 쓰십시오. 그거를 잘 써서 이렇게 파일에다가 모아놓으십시오. 그래서 교회에서 특강이 있을 때 그거 하나 딱 뽑아가지고 가면 아주 훌륭한 강의가 됩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신대원 때 쓴 레포트를 몇 년 전까지도 그렇게 강의를 했습니다. 제가 신대학원 다닐 때 1학년 1학기 한 학기를 마치고 그때 저는 다 타이프쳐서 냈습니다. 레포트를 얼마나 냈나 그랬더니 A4용지 470매를 레포트로 냈습니다. 신대원 1학년 1학기 때인데 그게 6학기가 쌓였으니까 얼만큼 됐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열심히 했으니까 냈습니다. 우리 친구들은 그렇게 안 냈습니다. 열심히 해 두면 나중에 굉장히 좋습니다.
자 오늘은 의미심장한 시간입니다.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를 여러분들이 듣고 오셨죠? 안 들었으면 정직하게 손을 들 때 ‘제가 안 들었습니다’ 그냥 깨끗하게 승복하지 절대로 안 들은 것을 들은 것처럼 그렇게 꾸며 내서 말하지는 마십시오. 시간 없으니까. 이상윤 학생 첫 번째 발표자. 그다음 발표자 그쪽 창가에 있는 학생. 그다음 발표자 뒤에 앉아 있는 순서대로 발표하겠습니다.
이상윤 학생 (09:20∼11:45)
네 잘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현진 학생 (12:07∼13:37)
유준하 학생 (13:59∼15:36)
이동훈 학생 (15:59∼17:15)
다음 정인웅 학생 발표를 들어보겠습니다. 정인웅 학생 : 못 들었습니다. 못 들었어요? 왜? 그렇게 바빴어요? 집에 가서 들으세요.
김성은 학생 (17:50∼19:22)
이승준 학생 (19:37∼22:30)
정아론 학생 (22:49∼24:55)
김시나 학생 (25:10∼27:03)
여러분이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들으려고 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들이 오늘의 강론을 다시 한 번 집에 가서 들으시면 조금 더 다르게 느껴질 거다 이렇게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왜 예수를 믿는데 신통치 않게 살고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행복을 못 느끼는지 아십니까?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너무 쉽게 믿어서 그렇습니다. 쉽게 무슨 뜻이냐면 여러분들이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많은 고민을 하고 고뇌를 하다가 결정을 내리면 그만큼 확신이 커집니다. 그 대신 결정할 때는 고민만 하다가 아무거나 골라잡은 것은 안 되고 고민을 하다가 이 이상의 것은 없다고 생각을 하고 ‘이게 최선입니까?’라고 물으면 ‘예’라고 말할 수 있게 선택을 한 사람의 경우에는 쉽게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런데 쉽게 얘기하면 예수를 믿는데 너무 가볍고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설교는 제 피와 살을 갈아 넣은 설교입니다. 최소한 50년 이상의 세월을 갈아 넣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생에 대한 깊은 진지한 고민 심지어 죽음을 꿈꿔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제가 그 설교를 하기 전에 8개월 동안을 프리드리히 니체와 함께 지냈습니다. 20대 때 나의 최애 저자 중 한 사람이었고 10대 후반에. 저는 뭐 고등학교 다닐 때 영어 빼놓고 다 때려치우고 그냥 책이나 읽었습니다. 근데 그때 읽고 지금 와서 읽으니까 이제 그때는 너무 어렸습니다. 지금 와서 읽어보니까 이제 많은 부분들이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니체와 함께 8개월을 지내면서 기독교 안에서 답을 내려주지 못했던 것들을 기독교에 대한 극도의 반감을 가지고 있는 니체가 우리에게 답을 주는 면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저의 논리를 강화해서 이제 그 설교를 한 것입니다. 말이 되겠어요? 주일날 낮 예배인데 2시간 16분 23초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갔는데 그다음 날 편지 한 통을 전해 받았습니다. 어느 자매가 쓴 편지였습니다. 목사님 지난주에 설교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한 사람을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6개월 동안 자살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고 실행할 시간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설교를 듣고 제가 살아야 되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쉽게 믿는 것입니다.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게 젊어서 그렇게 살면 나이가 들어서 그대로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감당할 수 없는 게 되는 것입니다.
돈스파이크 사건 아십니까? 그렇게 음악을 작곡하고 요리를 해가지고 아마 떼돈을 벌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결혼도 했죠? 그런데 결국은 마약을 했죠? 왜 그래요? 왜 마약을 해요? 저 사람들은 매우 특수하게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입니다. 내가 늘 얘기하지만 순수한 사람이 되십시오. 근데 순진하면서 순수한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알면서 악에 가까이 가지 않는 그런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런데 그거 왜 그런 겁니까? 결국은 지금 이야기하는 인생에 대한 답을 못 내는 것입니다. 그럴 때 결국 그런 식으로 자신의 인생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간신히 노동이나 해가지고 겨우겨우 밥을 벌어먹고 살면 그렇게 덜 불행해집니다. 그런데 돈과 명예를 얻고 지위를 얻게 되면 그다음에는 그것을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생의 무게들이 그대로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의미를 모르면서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이 아니면 인생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아까 소확행을 이야기했습니다. 이게 뭐냐면 ‘작다’라는 뜻이고 ‘확실하다’ 뜻입니다. 이거는 ‘행복’이라는 뜻인데 이게 재밌는 게 한자로 이렇게 씁니다. 이게 바로 말하면 幸福입니다. 幸이라는 게 뭐냐 하면 ‘어쩌다’ 이런 뜻입니다. 어쩌다. 그러니까 중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 행복에 대한 생각이 당연하게 내가 찾아서 우리 모든 사람이 누려야 된다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찾아온 좋은 상태. 그게 행복입니다.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 “눈 뜨세요. 지금 졸음이 뭡니까. 인생의 그 벼랑 끝에서 밧줄을 타고 있는데...” 그런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행복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보이는가 하는 걸 얘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불행할 때 ‘why me?’ 그러잖아요. 영어권에 있는 사람들이 잘하는 말인데 나는 묻는 것입니다. ‘why not you?’ 왜 니가 아니냐? 옆에 있는 사람은 암으로 죽었습니다. 근데 다른 사람이 암에 걸렸을 때는 ‘why you?’ 이렇게 안 묻습니다. 그렇게 묻는 사람은 없습니다. 근데 자기가 암에 걸리면 ‘why me?’ 아니 네 사람 중 한 사람이 암으로 죽는데 ‘why not you?’ 왜 넌 아니냐? 언제든지 우리에게 이런 날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34분에 한 사람씩 자살을 합니다. ‘why not you?’ 지금 강의 시작하고 34분이 지났잖아요. 강의 시작하는 동안 한 사람은 자살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사람은 자살한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이 지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약을 까든지 칼을 갈든지 줄을 걸든지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기차에 뛰어들든지 물에 빠지든지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why not you?’ 남에게 일어나는 모든 행복한 일은 나에게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why not you?’ 그럼 어떻게 됩니까? 이것은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거고 그다음에 이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확실한 것이 찾아온다고 하는 것은 고통입니다. 이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근데 이 고통을 자기가 얼마나 느끼느냐 고통은 객관적이지만 통증은 주관적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다리 하나 잘려서 못 쓰는 사람이 나 인생 다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손발 두 개 잘린 사람이 보면 저렇게 하더라도 목발을 짚으며 걸을 수 있다면 정말 감사하겠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코마 상태에 들어가서 19년 만에 깨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19세에 코마 상태에 들어가서 38세에 깨어난 미국 사람이 있습니다. 근데 코마 상태에 들어간 사람은 그 속에서 의식이 있다고 합니다. 코마 속에 들어갔는데.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와가지고 저거 호흡기 빼버리지. 죽게 두지 왜 저거를 여태까지 저렇게 저 사람 괴롭히냐고 했는지가 누군지가 다 기억이 난다고 합니다. 함부로 병원에 가서 얘기하면 안 됩니다. 다 기억했는데 그 사람은 이 코마 상태에서만 깨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졸지 마요. 졸면 저 뒤에서 서서 강의 들으세요. 교회에서 3천 명이 설교를 들어도 조는 사람 없어요”
그러면 결국 통증 문제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자기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지금 메타버스 등등 이야기 나오잖아요. 소확행하고 같이 설명을 하겠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작다, 확실하다, 행복이다 이것입니다. 행복은 이렇게 확실하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그렇게 확실하게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게 뭐냐 하면 돈 많은 사람들은 소확행이라는 말을 안 씁니다. 이게 뭐냐면 대확행이 전제되지 않으면 이 자체가 허무한 짓입니다. 그러니까 제 얘기가 무엇이냐면 따뜻한 한 잔의 커피 그리고 오랜만에 친구와 찾아간 맛집, 한 달 동안 알바해서 간 좋은 호텔의 테라스에서 마시는 한 잔의 와인. 그런 게 죄라고 하는 뜻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계속 이것이나 찾으면서 살면 이것은 언제 찾냐 이 얘기입니다. 이게 마취제 역할을 자꾸 한다는 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알코올 없으면 생활을 못합니다. 점심에 또 한 잔 먹어야 됩니다. 오후에 화나면 한 잔 또 먹어야 됩니다. 계속 정신이 알딸딸한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루 종일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느냐는 얘기입니다.
이게 뭐냐면 이것을 안 찾아가도 안 찾아가도 아침부터 밤까지 여러분들이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있습니까? 이런 설교나 들으니까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고 이것도 숙제나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2배속으로 틀어놓고 딴 짓 하면서 들으면 그 들은 것도 아닙니다. 듣긴 뭘 듣습니까? 그러니까 결국에 책 한 권도 읽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책 한 권조차 읽어낼 수 있는 문해력이 안 되는 것입니다. 고민을 해본 사람들이 문학 작품도 읽고 철학 작품도 읽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이 무엇인가라는 이 질문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잘 되고 신날 때는 이렇게 생각 안 합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사랑하는 어머니가 갑자기 덜컥 암 4기라고 하고 돌아가십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내 친구 한 명이 그냥 그 자리에서 즉사를 해버렸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서 공주처럼 학교생활을 했는데 그 집안이 쫄딱 망하고 식당에 가서 접시를 닦아야지만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상황으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도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모든 사람이 다 한 번쯤은 ‘인생이란 무엇인가’ 아니면 혹시 ‘드럽게 허무하구나 아 이거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리고 ‘내가 이렇게 공부를 해가지고 뭐 좋은 데 취직했다고 치자 그럼 그게 뭐냐.’
어떤 사람은 외국에 가서 공부를 열심히 해가지고 학위를 받아가지고 막 교수를 취업할 꿈에 부풀어 있는데 기차를 타고 가서 역에 들어오는데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될 텐데 어디까지 왔나 그러고 고개를 내밀다가 전신주에 부딪혀가지고 죽어버리고 즉사를 해버렸습니다. 근데 무슨 전신주를 또 그렇게 기차 가까이에 또 세워놨어요. 옛날얘긴데 그 자리에서 골이 깨져가지고 죽어버렸습니다. 박사를 받고 오자마자 그건 또 뭐냐 이것입니다. ‘아 이거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직시하면서 이 허무한 게 인생의 본질이냐 그러면 이것을 뛰어넘는 길은 무엇이냐 이것을 생각을 해도 답을 찾을까 말까인데 생각은 여기서 단절됩니다. 단절되는 것을 촉진하는 게 뭐냐 하면 소확행 따위나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은 TV 프로그램 만들려고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는데 소소한 곳에서 만족을 느끼는 느낌 이거 자체를 내가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당연히 사람이니까. 살아가는 것이. 어제 휴일이잖아요. 그래서 어렵게 예약을 해가지고 엘리자벳을 보고 왔습니다. 뭔지 모르죠? 뮤지컬.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연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천백만 명이 봤다고 합니다. 봤어요. 행복했어요. 근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런 시간을 갖는다는 게 잘못된다는 게 아니라 이게 뭐냐 하면 인생이 무엇인가를 이렇게 고민하게 만드는 게 이 자체가 너무나 두렵기 때문에 이쪽으로 도피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메타버스 이야기 나오고 그 다음에 가상현실 이야기 나오잖아요. 나중에는 어떻게 되냐면 장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꿈에 내가 나비가 되어서 호를 날아다녔다. 아 근데 꿈을 깼다. 도대체 내가 원래 나비였는데 사람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냐 사람인데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는데 도대체 나의 현실이 나비임이냐 사람임이냐. 그걸 어떻게 구분할 거냐 그런 고민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근데 그런 가상현실과 메타버스 등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수록 결국은 현실이라고 하는 것. 내가 직접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맞이하게 되는 이 현실이라는 것을 대면할 수 있는 그런 힘을 잃어버립니다. 이것은 엄청난 정신의 힘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왜? 이 현실을 해석해야 됩니다. 여기에서 의미를 찾고 이 의미를 자신에게 적용해서 나라고 하는 사람은 과연 이 의미에 맞게 살고 있느냐고 하는 걸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지독한 자기비판이 이루어지고 그러면서 무엇인가 더 나은 가치를 향해 찾아가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고도의 정신적인 수련을 통하지 않으면 이런 질긴 사유들을 계속해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 됐어 술이나 먹으러 가자’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톡톡톡톡톡톡톡톡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상현실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흥행할 사업이 있습니다. 이게 뭐냐면 마약과 포르노, 가상현실 이런 세계입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그 잠재력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돈스파이크는 1천 회분의 마약을 보관했다고 하는데 옛날에 우리나라가 마약 청정국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마약을 너무 손쉽게 구하는 것입니다. 그거 얼마 되지도 않는데 몇만 원이면 그냥 1회분 구입할 수 있을 정도가 되고 호주에 가보니까 아예 그냥 공중화장실에 써놨습니다. ‘마약을 하고 난 주사기는 쓰레기통에 버리지 말고 이쪽 한곳에 모아두시오.’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그게 전 세계적인 행태입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 현실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이 없으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 속에서 또 얻어집니다. 그리고 그 현실은 결국 그 행복만이 이 허무를 극복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결국은 철저한 정신의 사유.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주체적인 사유가 없이는 결코 이러한 것들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냥 그런 것입니다. 돈 많은 남자나 하나 물어가지고 그 돈 같이 좀 나눠 쓰면서 산다고 한다든지 아니면 뭐 얼굴 예쁜 여자 만나서 그냥 좀 살다가 싫으면 또 관두어 버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오늘날 세상이 돌아가는 이거잖아요. 그리고 미친 듯이 사람들이 돈을 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고 어떤 면에서 자기가 진짜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들을 파악할 수 있는 정신적인 훈련이 안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는 자기가 입고 있는 명품 옷이나 그런 것들로 판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얘기하는 게 아무거나 입고 다니고 미에 대한 아무 생각이 없이 살아가자 그런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옷 하나를 사건 뭘 하나를 사건 자기가 가장 만족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옷차림이 풍경이 되게 할 수 있는 그런 패션과 모든 스타일을 가지고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은 어떤 생의 욕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결국 살기를 포기한 여자들은 얼굴에 나타납니다. 화장도 안 하고 자신의 뷰티에 대한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그냥 의욕에 넘치는 사람은 남자들의 신체와 정신의 힘으로 나타나고 여자들은 정신의 힘과 미용으로 나타납니다. 살고자 하는 그런 것들이 활력이 자신을 활기차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게 의욕이 없는 것입니다. 생의 욕구가. 생의 욕구가 없는 사람이 행복을 찾아갈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이것입니다.
혹시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책을 읽어보신 분, 손 들어보세요. 이해는 합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얼마 두껍지도 않고 재밌습니다. 재밌는데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하늘과 대지 사이에 이렇게 인간이 있습니다. 조르바 같은 인물은 완전히 대지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거기서 나라고 나오는 사람은 하늘에 대한 확신도 없고 대지에 대한 확신도 없는 사람입니다. 멈칫 멈칫 하는 사이에 나라는 사람은 많은 즐거움의 기회들을 박탈당합니다. 근데 조르바는 아예 하늘을 향해 멈칫거리는 게 없습니다. 대지의 모든 즐거움들을 자기가 순간순간 누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마지막에는 멈칫거리고 있는 이 사람보다는 이 사람이 행복하게 살다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관적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사실 이 조르바의 이야기에 전체적으로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무슨 얘기냐 하면 오늘날 우리들은 이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나’라고 하는 사람과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뭐냐면 하늘을 향해서도 행복하지 않고 땅을 향해서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게 뭐냐면 얼치기입니다. 그렇다고 윤리적이지도 않고 또 마음 놓고 비윤리적일 수도 없는, 그래서 수시로 위선을 해야 하는, 스스로 위선을 떨면서도 순간순간 진실해져야 될 필요성은 또 느끼는, 그렇지만 감히 진실을 선택할 용기는 없는 그러한 어정쩡한 얼치기 같은 존재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결국 신이 있다고 해도 이 사람은 손해고 신이 없다고 하면 더 손해입니다. 그게 여기서 그리고 있는 것이 결국은 조르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나라고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무슨 이야기를 이 첫 번째 각론 속에서 하려고 한 것이냐면 이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운명 같은 것은 뭐냐면 그냥 확실하게 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하늘과 대지 사이에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끊임없이 천상의 것들에 대해서 그 의미를 찾고 그 속에서 대지를 살아가고 있는 삶에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근거가 없이 살려고 하니까 삶에 일관성이 없는 것입니다.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근거가 뭐냐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뭘 깨달았다고 그랬는데 부분적으로 깨달았습니다. 근데 뭐냐면 중요한 것은 이 바탕이 뭐냐고 지금 묻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서 있는 이 바탕이 오늘 보강 시간에 해결해야 할 우리가 중요한 천지 창조 목적이 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근데 그게 이 바탕에 있는 이 근거가 무엇입니까? 이게 나로 하여금 나를 살고 있는 삶의 근거라는 게 무엇입니까?
이게 그것을 헤겔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봤냐면 얘는 중요한 건 뭐냐면 세계라는 것입니다. 너는 세계의 일부다. 이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세 개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정, 정, 반 이렇게 해서 합이 되고 합이 다시 반을 부르고 반이 정이 되고 이게 반을 부르고 했는데 여기에서 이렇게 이어지는 이것을 가리켜서 벨트 가이스트라. 세 개 정신이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존재는 무엇이냐 너는 세계의 일부다. 이게 전체의 일부이기 때문에 너의 가치는 전체 속에서 발견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근데 그런가 하면 이제 사르트르 같은 혹은 하이데거 같은 어떤 실존주의자들에 의하면 이런 ‘근거 자체를 묻지 마라.’ ‘너는 그냥 던져진 존재다.’ ‘이런 근거 따위는 없다.’ 그리고 ‘목표 그런 것도 없다.’ 그래서 뭐냐? 이렇게 라스물라레.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잉여의 존재다.’ ‘그래서 굳이 없어도 되는데 태어난 게 인간이다.’ 그럼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너는 완전한 자유다.’ ‘근데 그 자유는 무시무시한 자유다.’ ‘그리고 그냥 인간의 허무에 대해서 묻지 말고 살아가라.’ 그래서 결국 뭐냐?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얘기가 나온 것입니다. 본질이 뭐냐? ‘이따위 묻지 마라. 이런 건 없다.’ ‘그리고 실존. 지금 현재 여기에 있는 현 사실성. 이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근데 이런 사람들에게는 결국 제일 좋은 건 뭐겠어요? 소확행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르트르가 시몬 드 보부아르와 60년 년대에 유명한 계약 결혼을 하잖아요. 그래서 둘이 서로 평생 동안 계약 기간이 지속됩니다. 근데 둘 다 그 결혼 생활에 충실했느냐? 그런 의무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르트는 자기 여제자랑, 시몬 드 보부아르는 자기 남제자랑 끊임없이 놀아납니다. 그리고 좋은 것입니다. 그것이 던져진 존재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뭐냐? 매터리얼리스트들입니다. 유물론자들. 그런 사람들이 볼 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정신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런 상상을 하는데 이건 물질이 투영된 결과이기 때문에 의미 없다는 것입니다. 묻는 것입니다. 근데 문제는 뭐냐면 이것으로서 인생의 답을 내릴 수 있느냐? 확고한 이 근거를 이야기할 수 있느냐? 실존주의자들의 경우에는 이것입니다. 그림을 그리자면 이런 식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있습니다. 여기 인생입니다. 여기서 태어나서 여기서 죽는 것입니다. birth, death. 그러면 이 이전에는 뭐냐? 이 통을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돼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birth, death. 여기는 몰라. 여기는 몰라. 이게 뭔지 알아야지만 죽음의 의미를 찾고 영원이 뭔지 알지만은, 삶의 의미를 찾아야지만 출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어떤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항구적으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계속되는 어떤 의미가 있을 때 이 사람이 진짜 의미 있는 어떤 한 존재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근데 이걸 다 끊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냥 현재만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근데 그러면서 절대로 어떤 허무도 느끼지 않는다면 괜찮습니다. 죽을 때 허무를 느낍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면서 마지막에 자기 자신이 행복하냐?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도대체 무엇을 여기에서 답을 찾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그거 하나 가지고는 안 되고. 이제 다음 시간에 ‘나는 왜 외로운가’ 그걸 여러분들이 듣고 오세요. ‘나는 왜 외로운가’ 그 다음 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뭐냐면 그럼 어떻게 되냐? 조르바처럼 살아서도 안 되고 저건 아니고 그러면 결국은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됩니다. 그게 뭐냐면 대지는 이 근거에 대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대지는 근거에 대해서 말해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자신의 고백록에서 유명한 얘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공기가 소리쳤다고 합니다. ‘나 공기는 하나님이 아니다.’ ‘아마시메네스가 틀렸다.’ ‘물이 나에게 소리친다.’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탈레스가 틀렸다.’ 그러면서 당시 이워니와 학파에서 이야기하던 우주의 근거가 무엇인가 하면 물, 흙, 공기 그다음에 더움, 차가운 등등 열 이런 것들이 다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는 한 요소는 될 수 있지만 이 자체가 근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물질과 자연, 육체 속에서는 이 근거가 마련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 인간은 하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 대한 생각으로 땅의 기초를 놓고, 다음에는 자기 자신이 수도사처럼 그렇게 살아가거나, 오늘날 교회에서 여러분들이 볼 때 예수쟁이라 그러는 사람들을 보면 수도사처럼 삽니다. 술을 안 먹습니다. 그리고 뭐 성적으로 타락한 짓 안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돈을 뺏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근데 뭐냐면 경건하진 않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어느 숙대 교수 한 사람이 기독교가 한창 강남에서 붐을 일으켰을 때 강남 여자들이 돈 벌면 춤바람이 나든지 교회 바람이 나든지 둘 중에 하나인데 그래도 사회적으로 볼 때 춤바람이 나는 것보다는 교회 바람이 나는 게 좀 낫다고 비하해서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근데 결국 뭘 얘기해주냐면 땅에 있는 것을 가지고는 이 삶의 근거를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교회 기독교 신앙은 이 근거를 마련한 다음에는 이 위에 살아가는 사람이 자기가 이 하늘에 있는 사람처럼 살아가면 안 됩니다. 땅 위에 있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why not you?’ 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게 땅을 사랑하는 사람의 운명입니다.
그리고 이 속에서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사람이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근데 이 감각을 무시하면서도 사실은 뒤에서 호박씨 까듯이 자기 다 세상 즐거움 맛보면서 교회 와서 안 그런 척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정당하게 육체가 감각을 통하여 얻는 행복을 멸시하거나 그렇게 하지 말고 살아가면서 삶의 토대는 하늘을 통해 마련하지만 자기가 대지 위에 사는 유한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순간순간 맞이하게 되는 즐겁고 기쁜 일들을 자신이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면서삶의 원동력으로 삼아서 하늘과 대지 사이의 균형을 이루어가는 삶을 사는데 어떤 도움을 받는 그런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화와 예술 그리고 이러한 현대의 미술이나 예술에 대해서 눈을 뜨고 그것들을 감상하고 느끼고 즐거워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거기에는 양날의 칼과 같아서 그 자체에 몰입해서 결국 하늘의 관심을 끊어내는 이런 위험성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어떤 경건 생활의 실천을 통해서 이 기반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용기 있고 자신 있게 여기에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아직까지도 피하고 해결할 수 없는 이 허무와 고통. 이것들은 수수께끼와 환영의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목동이 뱀을 삼키는 비유 나오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피할 수 없는 허무와 고통들은 적절하게 자기 자신이 현실적으로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증을 줄이는 연습들을 해 나가야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가치에 휘둘리지 아니하고 하늘을 믿는 사람으로서 대지 위에 굳게 서 있는 사람으로서 사는 순간 동안에 아우라 있는 삶을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감히 자신의 존엄성과 존귀함에 대해서 해칠 수 없는 그런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설명을 듣고 다시 한 번 들어가서 읽어보시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좀 질책해야 됩니다. 나는 왜 힘들게 인생을 살면서도 고민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 고민은 물거품처럼 떠올랐다가는 몇 시간도 지나기 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자기 자신이 인생관을 심화하는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질문이 있으면 한, 두 가지 받겠습니다. 큰 소리로 질문하십시오.
질문자 : 기독교가 제시하는 삶의 가치와 의미의 정답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말고 교수님께서 살아가면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때 찾은 결론과 의미가 무엇입니까?
내가 묻고 싶었어요. 언제 예수 믿었어요? 언제 예수 믿기 시작했어요?
질문자 : 고등학교 때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예수 믿었어요?
질문자 : 아닙니다.
그럼 왜 믿었어요?
질문자 : 제가 삶을 살아가면서 제 힘으로 살면 실패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본인이 행복하려고 예수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안 믿어도 충분히 내가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예수 안 믿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믿습니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건 뭐냐면 두 발을 땅에도 딛지 못했으면서 하늘을 휘젓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자기 대지 위에 서 있지도 못하면서 무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위선과 거짓에 에워 쌓여 있고 무지와 어둠 속에 있으면서 무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예수 믿은 게 아닙니다. 나는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한 때에도 무신론이 나를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무신론을 결심했고 돌아왔을 때에도 무신론이 나를 행복할 수 없다고 배반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교로 귀의했고. 행복하려고 예수를 믿은 거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믿은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믿고 보니까 결국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이 아니면 행복한 사람이 없더라. 그리고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이 아니더라.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답이 없이 그렇게 허무하게 그 인생을 사는 것은 종교적으로도 거짓된 것입니다. 하나 이야기하고 한 15분 쉬겠습니다.
한 20년 전 일입니다. 영국에 로이 클레멘스라는 유능한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영국에서 천 명이 넘는 교회를 목회했습니다. 그러니까 영국에서 천 명이 모인다고 하면 우리나라에서 한 1만 명 정도 모일 확률 정도 됩니다. 어마어마합니다. 그리고 아주 공부도 잘했습니다. 많은 책을 써서 영국 교인들을 감화를 시켰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사라졌습니다. 더 경악스러운 건 뭐냐면 편지를 하나 놓고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가 뭐냐면 내 인생에서 가장 미친 짓은 결혼한 것이다. 두 번째 미친 짓은 내가 목회자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정부와 함께 도망갔습니다. 근데 그 정부가 남자였습니다. 그럼 도대체 이게 뭐가 어떻게 된 거냐? 대학교 때 게이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깊이 회개하고 개인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은혜를 많이 받고 신학교에 가서 목회자가 됐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했습니다. 목회를 크게 일구었습니다. 게이병이 도진 겁니다. 그리고 그 남자와 함께 도망갔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그 후의 소식을 모르겠습니다. 영국교회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뭘 보여줬냐면 마지막으로 잘 들으십시오. 인생의 의미는 감히 나는 찾았다고 완료형으로 이야기할 수 있냐? 찾은 그것을 끊임없이 자기의 것으로 만들면서 살아가는 매일 매일의 삶이 없으면 찾았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찾았다고 하는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걸 누가 얘기했죠? 사도 바울입니다. 마지막에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 내가 이미 찾았다함도 아니요. 이미 내가 도달했다 함도 아니라. 그리고 더 황당한 얘기도 하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후 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매일 매일 나를 쳐서 복종시킨다. 이것이 뭐냐면 신앙이 가지고 있는, 철학이 가지고 있는 현재성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삶의 일체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쓰세요.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갈 때 모든 아는 것을 자신의 삶 전체와 치열하게 연결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삶 전체와 치열하게 연결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하늘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조금. 그러면 그것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대지 위에 살고 있는 나에게 적용해서 이 지식이 나의 삶에 던져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자신의 삶 전체를 이렇게 묶어야 됩니다. 거기서 자신의 삶 전체를 매달고 살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나 혼자밖에 없다.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 두 사람만 더 받겠습니다.
질문자 : 대지에 있는 문화를 즐겨야 하는가? 대지의 것으로 인해서 하늘의 것을 바라보지 못할 위험이 있다면 어떻게 아이들한테 가르쳐야 할까요?
똑같은 얘기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것을 발견하면 끊임없이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고 거기에 자신의 삶을 걸어내야 하는 것처럼 똑같이 그렇게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근데 문제는 뭐냐면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최고의 스승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어거스틴의 경우 그분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사실은 어거스틴의 금욕주의에 대해서는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철저한 금욕. 사실은 아주 심한 금욕주의자들보다는 사실 어거스틴은 좀 나은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굉장히 휴머니스트였습니다. 예를 들면 모든 걸 다 버리고 수도사로 들어왔다 칩시다. 모두 똑같이 대우해 주는 것이 수도의 정신에 맞겠어요? 아니면 차별 대우를 하는 게 맞겠어요? 근데 어거스틴은 똑같이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너무 가난한데 다 세상 버리고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한 나라의 말하자면 공작의 자제였습니다. 돈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당연히 수도사가 될 때 자기 유산을 다 기부했겠죠. 근데 한 사람에게는 그냥 평범한 방을 주고 이 사람에게는 침대도 좀 좋은 걸 주고 모포도 좀 더 좋은 걸 주고 베개도 좀 쿠션이 좋은 걸 줬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하는 얘기가 뭐냐면 ‘가난한 사람이 수도사가 되기 위해 뚝 떨어진 것에 비해서 저 공작의 자녀였던 남자가 수도사가 된 것은 이 사람과는 비교되지 않는 추락이기 때문에 이 사람의 딱딱한 침대보다 이 사람의 푹신한 침대가 더 고통스럽다.’
별로 감동이 안 됩니까? 그리고 또 수도사면 모두 다 똑같은 걸 먹는 게 맞아요? 아니면 너는 잘 먹고 너는 좀 후진 걸 먹는 게 맞아요? 공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이 너무 아프면 아무도 주지 말고 얘만 고깃국 끓여주는 휴머니스트였습니다. 이런 게 마음에 듭니다. 근데 근본적으로는 금욕주의자였습니다. 당시 스토아 철학의 영향이나 이런 것들을 강하게 받으면서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으면서 금욕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했던 까리따스의 측면에서 보면 굉장히 순결하고 아름다운 면이 있지만 여전히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어떤 위엄이나 반감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근데 진정한 아름다움은 이 세계 모든 것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 있는 문화를 맛보고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근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문화와 아름다운 것들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기억하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실제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어떤 음식을 먹다가 맛있는 것이 느껴지면 음식도 이렇게 맛있는데 하나님은 얼마나 선하신 분이신가 느끼라는 겁니다. 근데 지금은 그게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로서 소화 기능이 작동되고 메타버스를 비롯해서 가상현실에 빠지는 이유가 결국 현실을 잊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사는 자신을 감당하지 못해서 도피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토탈리콜 1’이 처음 나온 게 93년경이고, 2000년대에 ‘토탈리콜2’가 나왔습니다. 그건 굉장히 선구자적인 작품입니다. 사실 ‘토탈리콜 1’을 보고 2편을 봐야 합니다. 기억 안 나요? 그 미남 배우 나오는 거 있잖아요. 재밌어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가서 보세요. 근데 ‘토탈리콜 1’을 보고 2편을 보세요. 결국 뭐냐면 인간이 누군가 하는 것들이 고민이 되는 겁니다. 뭐냐면 자기 아내인 줄 알고 막 그냥 살았는데 누군가 목적을 위해서 뇌에서 빼가지고 칩을 심어버린 겁니다. 자기를 감시하고 죽이기 위해서 온 요원인데 그냥 어려서 젊을 때부터 만나서 여태까지 결혼하고 산 아내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마지막에 주인공도 울부짖으면서 몸부림을 치는 게 뭐냐 하면 ‘who am I?’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철학적인 질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에 대한 답변을 이게 해주는 겁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who am I?’라는 사실이 답변이 될 수 있느냐? no. 그건 불가능합니다. 나는 총신 학생이고 그것은 ‘who am I’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한 엄마의 세 딸 중 하나이고 그 답이 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여권을 가지고 있고, 스물다섯 살이고. 내년이면 스물여섯 살이 됩니다. 그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총신대학교 20학번이고 그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 도대체 who am I? 난 누구냐?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지만 what should I do? 내가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인가? ‘what can I for my meaning of myself?’ ‘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이런 거 가지고 고민해 나갈 수 있는 겁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대답을 찾아나가는 것 없이는 단 한걸음에 인생의 진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젊은 사람이 늙어가고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거나 부자가 쫄딱 망하거나 그리고 얌전한 사람이 우악스러워지거나 우악스러운 사람이 고분고분한 사람이 되어갈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그게 삶이 한 양상이지 그게 삶의 본질에 접근이 한 겁니까? 아무것도 변한 게 없습니다. 물을 끓였더니 수증기가 됐습니다. 얼렸더니 돌 같은 얼음이 됐습니다. 그래서 H2O의 본질이 바뀌었습니까? 똑같은 것이 돌고 있는 겁니다. 그럼 결국 이것을 가지고는 인생의 고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 10시 25분인데 40분까지 쉬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신앙과 기도 7
녹취자: 이 솔
우리 지난 시간에 보충 수업을 통해서 4페이지에 3번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4페이지에 4번 구속 사역과 인간의 의존에 대해서 마지막 부분까지 빨리 정리를 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결국은 창조라고 하는 것이 기초가 되지 않은 것이 사실 그 아까 이야기하고 바로 연결이 됩니다. 여기 내가 있는데 결국은 who am i 라고 묻습니다. 내가 누구냐 하고 묻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연관 짓는 중요한 게 창조입니다. 창조. 그다음에 두 번째가 결국은 구속입니다. 마지막으로 연결 짓는 것이 종말입니다. 이것은 한 인간의 과거와 그 다음에 현재,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해줄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렇지요? 내가 만약에 동물처럼 외딴 섬에서 혼자 버려져서 그래서 갓난아이로 생전에 남았다 라면 이런 의미 같은 거를 아마 묻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미는 사실은 사회 속에서 이 의미를 끊임없이 묻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회의를 느낄 때가 언제입니까?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회의를 느낄 때가 언제야? 살아서 뭐 하나 그런 걸 언제 언제 느껴요?
학생: 매일 느껴요.
매일 느껴요? 매일 어떤 순간에 느껴요?
학생: 지금도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느끼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고 싶어요? 의미에 대한 물음은 관계 속에서 관계 속에서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에서 어떤 유의미를 찾아내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관계를 묻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걸 찾아내면서 결국은 관계 속에서 의미를 묻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결국은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끊임없이 투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결국은 사회적인 것을 그래서 결국은 이러한 내가 누구냐 라고 하는 이런 질문은 그 다음에 뭐냐면 이거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에 이걸 토대로 하고 있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나라고 하는 것은 나라는 개별자이기 이전에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 것입니다. 인간 그 인간인데 이게 나라고 하는 이 의미는 인간이라는 의미와 결코 불가분의 관계 불가분의 관계가 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인간을 기초로 나라는 존재를 생각하게 되고 나라는 존재의 사유가 없으면 인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인간이 그냥 인간만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세계 속에 있습니다. 세계 속에. 세계가 인간하고 관계가 없습니다. 왜 관계가 없습니까? 플로리다에서 태풍이 일어나서 뭐 70 몇 명이 죽었어요. 그리고 자연의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세계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자연에 대해서. 왜? 인간의 삶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물음은 인간에 대한 물음, 세계에 대한 물음 등등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쓰세요. 기록하세요. ‘스투디오 에르고스.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공부하기 위해 태어났다.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 일반과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 일반과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나에 대해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는 집에서 제사 지내시는 분 없죠? 옛날에 제사 지낼 때 보면 제사 날이면 상을 이렇게 차려놓고 음식이 여기 다 있는데 여기에다 신위를 모십니다. 신위를 모시는데 “학생 부군 김공 현시 신위” 이것은 학생 부군 학생인 남자 그다음 김공 김씨 집안의 이름은 외자에 현 신위 그의 신 앞에 이렇게 방을 써서 여기다 붙이고 거기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럼 이게 뭘까? 이게. 학생 부근이라는 게 뭘까? 벼슬을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벼슬을 한 사람은 어떻게 할까? 벼슬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자면 찬성공 김공 누구누구 찬성이라는 벼슬을 지낸 것입니다. 이조판서 이조판서 김공현 시위 이조 판서를 지냈던 아무 아무개의 신 앞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 학생 부군은 벼슬 못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농부도 학생 부군이고 과거에 떨어진 사람도 학생 부군입니다. 구십까지 살았는데 그냥 관직이 없이 죽은 사람 모두 학생 부군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입니까? 그냥 배우다가 죽은 사람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모든 인간을 학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부터? 언제부터 학생의 신분이 시작될까? 태어날 때부터 학생 신분입니다. 끝나는 것은 죽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평생 학생 부군입니다. 그게 이제 이것을 교육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강의로 돌아옵니다. 창조에 대해서는 지금 지난 시간에 이제 여러 가지 도덕적 질서 역학적 질서 미학적 질서 등을 보면서 그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 질서 속에서 우리들은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는 그 창조의 원리를 따라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건강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왜? 우리는 흙으로부터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구속입니다. 이제 구속은 이것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인간은 그 존재 자체를 철저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의존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구속입니다. 구속. 구속은 결국은 뭐냐 하면 인간이 결국은 맨 처음에 태어날 때 사실은 이 사람으로 창조되었을 그 자체에 하나님이 인간으로 태어날 때부터 주님이 주신 두 가지 중요한 선물이 있습니다. 지식과 사랑입니다. 그래서 특히 이 지식과 사랑은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나는 이제 원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모르 오리키나리스. 원래의 사랑을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타락으로 이걸 잃어버립니다.
그다음서부터 지금 고민하고 있는 who am i의 문제가 시작이 됩니다. who am i. 자기라는 것이 누구일까 하는 것에 대한 질문들이 무수하게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뭘 잃어버렸을 때 그렇게 생각하느냐? 결국은 이 아모르 오리키나리스 원애를 잃어버렸을 때 이게 문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밤새도록 이야기를 해도 결국 자기가 누구인지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거는 그리스 철학자들도 해명을 하기를 포기한 것이고 근대 철학이 포기한 것입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찾아냈다는 것은 ‘신을 찾았다’라고 하는 말하고 똑같은 겁니다. 철학은 결국 제공을 못 해줍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좋겠느냐라는 이야기는 수없이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이 문제는 철저하게 나는 내가 누구인가라는 이 문제 위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기반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거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마지막에 도달하는 결론은 결국은 이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세상은 이런 질문을 못하도록 인간을 정신적인 불구로 만드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가는 나라가 지옥입니다. 생각 없는 사람들이 가는 것입니다. 지옥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기 사람이 있는데 이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요.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에 대한 정체성이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who am i 라고 하는 것이 어떤 물질적인 본질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자기가 어떤 누구와 관계를 갖고 있느냐 하는 관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됩니다. 그래서 뒤로 가세요. 어거스틴이 자기의 고백록에서 정체성에 대해서 방황을 하다가 마지막에 이런 답을 찾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누구시길래 저더러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나이까? 사랑하지 아니하면 큰 벌을 내리실 것처럼 위협하면서까지 왜 저더러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시나이까? 이 질문을 들으면서 똑같이 어거스틴 같은 의문이 생기잖아요? 하나님이 혼자 있기에 너무 외로우신 분이면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자족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런데 왜 사랑하라고 명하실까? 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 한번 들어봅시다.
우리 하은빈 뒤에 있는 학생들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왜 그러실 것 같아요? 왜 하나님이 사랑을 하고 명령을 하실 것 같아요? 어거스틴의 질문에 대해서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외롭지 않으신 하나님이 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고 사랑 안 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하시면서 사랑하라 그러시는 이유가 뭐였습니까?
학생: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받는 우리들도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셔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도돌이표입니다. 왜 사랑하라고 그러셨냐 그랬더니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그러셨다. 또 그 옆에.
학생: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약간 비슷하게 갔어요. 그 다음에 여기보다 조금 진전됐습니다. 그다음에.
학생: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고, 그것이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이고,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기 때문에.
조금 더 근접했습니다. 그다음 마지막으로.
학생: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음을 알고 저희한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해서 사랑하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매우 가까이 다가갔어요. 결론은 인간은 who am i 라고 물을 때 이 질문에 대한 탐구가 마치 이 지우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발기발기 뜯어서 성분 검사를 하는 방식으로 대답해야 할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자신 하나님이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만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언제 예수 믿었어요?
학생: 모태 신앙이었어요.
모태 뭘 못해? 기도 못해? 회개 못해? 그런데 언제 예수를 믿게 되었든지 간에 우리는 처음에는 그때부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예수를 믿고 나오면 그전부터 사랑하셨다는 사실이 느껴지고 더 생각해보면 영원히 전부터 사랑하셨다는 걸 느낍니다. 이게 사도 바울이 똑같이 했던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 사랑받은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겁니다. 알고 보니까 영원 전부터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에게 현재, 미래, 과거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이렇게 who am i 라는 이 질문은 이런 물질의 본질을 파헤치는 방식으로 대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때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정동으로 느낍니다. 이러면서 결국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서 충분합니다. 영혼에 대해서 몰라도 내가 하나님 앞에 사랑받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통해서.
이 비슷한 효과가 어디에 나타나냐면, 아리따운 여성이 그냥 순수하게 살았어요. 이런 수업이라도 들었으면 인생에 대해서 좀 정신을 차렸으면 안 그랬을 텐데 공부도 안하고 탱탱하게 놀다가 별로 의문도 제기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 톰 크루즈 같은 남학생을 만났습니다. 키도 크고 능력도 있고 뿅 하고 갔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살아가도 됩니다. 자기 인생을 왜 사는지도 몰랐고 사람들이 주위에서 참 착하다, 예쁘다, 그러는데 별로 보람을 못 느꼈습니다. 이 사람은 너무나 많이 사랑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로소 자신이 ‘내가 이렇게 소중한 존재였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매일매일이 신나고 즐겁습니다. 맨날 신나고 즐거워요.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소중하고 즐거우니까 자기가 말할 수 없이 심쿵, 행복합니다. ‘야 이게 행복이 먼 게 아니라 이게 가깝구나.’ 이 사람한테 소확행이 필요 없습니다. 이미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소확행 필요 없습니다. 쓰레기통 옆에 둘이 앉아서 얼굴만 봐도 심쿵, 행복입니다. 굳이 고든램지 버거집에 안 가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똑같은 여자가 또 하나 있습니다. 이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어떻게 되겠어요? 아 사실은 뭐 아무 가치 없는 존재로 똑 떨어지는 것입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아무도 생각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사랑하지만 세계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라고 하는 것이 기껏해서 이 사람하고 결혼해서 어디다 집을 사서 이 비싼 아파트를 어떻게 할부금을 갚으면서 살까 이런 생각밖에는 세계에 대해서 하는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는 다른 것입니다. 이게 한 번도 안 써본 비유인데 여기서 지금 즉석에서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 자신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게 똑같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이 안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심쿵을 느낍니다. 잘 들으세요. 이 남자는 세계의 의미를 규정해 주지는 못합니다. 무슨 얘긴지 알죠? 그냥 둘이 사랑하는 것이지 세계에 대한 의미를 규정해 주지 못합니다. 기껏 규정해준다는 게 그 남자하고 계속해서 어떻게 행복하게 살 것이냐? 이거에 한정된 세계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 전체는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하나님으로 소중하다고 그랬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바꿔보면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이것은 이 남자를 사랑하면서 사랑해서 뿅 하고 가는 것은 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안 가르쳐주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 결국 하나님 때문에 존재하는 세계와 이 인류의 모든 것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거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누군가의 불쌍한 영혼을 보면서 눈물을 흘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해되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 사랑을 받음으로 자기가 소중하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이거는 이걸로 끝나지만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정동으로 알게 되면 그러면 이 세계의 의미와 모든 인간의 가치와 일고의 행복과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갖는 의미를 여기서 총체적으로 파악을 하게 됩니다. 총체적으로. 그러면서 생겨나는 게 뭐냐면 세계관입니다. 세계관. 이게 인생관. 이게 어떻게 아주 매우 독특한 인생관과 세계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대지 위에 살고 있고 대지에 있는 것들을 숨 쉬고 대지 위에 있는 것들을 즐거워하지만 그러나 이 대지에 있는 것들로부터 언제든지 떠나도 그것으로부터 버림을 받아도 내가 버려도 아무 상관이 없는 대지 위에 살면서 사실은 하늘의 의미에 묶여 있는 사람입니다. 그 대지 위를 살아가지만 자기를 묶고 있는 것이 대지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천상의 의미에 묶여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대지와 결별해도 그 결별은 시간 안에 묶인 것이고 그 결별해도 의미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사랑이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한 인간으로서 사멸할 존재이면서도 불멸할 인간처럼 살아가는 하나의 비결입니다. 그런 것들이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냐 하면 결국은 구속을 통해서 이게 가능해집니다. 구속을 통해서.
하나님이 모든 선의 근원입니다. 보음은 선이고 보니 다스는 선함입니다. 선함. 그러니까 하나님 자신이 선이신데 그 선으로부터 보니 다스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 좋음입니다. 좋음이 그 관계 속에서 구현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어때 정말 선한 사람이지. 선한 그 사람은 참 선해. 이게 보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선한데? 아 글쎄 내가 아침을 못 먹고 학교에 왔는데 친절하게도 크리스피 도넛 하나와 따뜻한 커피를 주면서 ‘배고프지?’라고 나에게 물었어. 나한테만 그러면 이상한 마음을 품었을 텐데 만나는 어려운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해 라고 할 때 그 보니 다스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은 그 보니 다스를 끊임없이 세계에 행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해는 정해진 시간에 뜨고 정해진 시간에 지고 모든 우주의 질서와 균형 비를 내리는 것부터 시작을 해서 모든 인간이 생장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까지 하나님이 그렇게 지켜주시는 선하심이 나타나는 겁니다. 왜 고통의 문제는 어떻게 풀 것이냐 그건 또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것입니다.
두 번째가 그런 것을 결국은 우리가 타락했기 때문에 끊어버린 것인데 그거를 우리에게 다시 되돌려주십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그것을 다시 복구할 수가 없습니다. 죄를 지을 능력은 있는데 그 지은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신문고을 이용하면서 내가 인간의 네 가지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했죠. 그렇죠? 그래서 포세데 카레. 그 다음에 논 논 포스 논 백카레. 그다음에 세 번째가 그다음에 포스의 논 빽카레. 마지막에 논 포스의 빽카레. 그러니까 이렇게 결국은 마지막에 결국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보니 다스를 내가 못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러한 것을 많이 누리면 그것으로서 타락의 기회를 삼고 못 누리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미워하면서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속을 주십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선함을 다시 알고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구속받은 사람들이 그래서 다시 누리게 되는 복이 하나님의 선하심이입니다. 그걸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오브가 그 선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을 우리에게 나눠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프로가 그것들이 우리 자신이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선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웃사이더 얼스 그리고 인 어스 하나님 우리 바깥에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 안에 있는 그것이 다시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접붙이셔서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 덕분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한순간도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것은 누구 때문에 죄를 짓는 게 아니라 우리의 악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고 선을 행하는 것은 내 안에 주신 보니 다스 때문에 내가 선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선 내 자신을 변명할 수 없고 선을 행한 것에 대해서 나 자신을 내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죄를 지을지라도 선을 향할지라도 계속해서 증진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의존입니다. 그래서 이 의존이 결국은 구속을 통해서도 계속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결국은 구속 받은 자들이 총체적으로 사실 의지하게 됩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이렇게 who am i에 대한 답을 찾았어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입니까? 하나님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사랑은 신실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감정이 다르고 저녁 때 감정이 다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으로는 사랑하는데 한편으로는 세상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을 배반하면서까지 라도 자신의 즐거움을 누려보려고 하는 마음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쾌락을 쫓기에는 재빠르지만 하나님을 찾기에는 모든 것을 싫증내하는 그런 존재가 인간입니다다. 결국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밖에 세계를 볼 때도 자기 안에 있는 세계를 볼 때도 그다음에 사람 인류를 바라보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볼 때에도 결국은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결국은 우리의 신앙의 깊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의존의 깊이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5번. 그다음에 이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의존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들이 흔히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라는 말씀. 거룩하심. 이것만 하면 오늘 수업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홀링네스’ 홀링네스는 그리스어로는 ‘하기오스’. ‘거룩하다, 거룩한’ 이런 뜻입니다. 그다음에 히브리어는 ‘카도 쉬’ 필기체 여러분 안 배우셨죠. 카도 쉬 에요. 카도 쉬 혹은 이렇게도 쓰고 이렇게도 씁니다. 거룩하다, 이것을 쉽게 생각하면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반대편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사실 이것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초월성입니다. 초월성. 이것을 존재적 초월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아주 쉽게 설명할게요. 존재적 초월성은 한 인간이 하나님의 홀리리스를 느낍니다. 느낄 때 첫 번째 드는 감정이 하나님은 무한대에 있고 자신은 영으로 수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특히 존재에 있어서 무한하고 그 다음에 자신은 존재에 있어서 유한한 존재라는 걸 느낍니다. 그러니까 수학에서 배웠지만 이쪽에다가 만약에 무한을 놓게 되잖아요. 그러면 여기에 엑스에 아무리 큰 숫자를 대입해도 이거는 영으로 수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무한이니까 이 무한 자체는 한정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한정이 안 되니까 이게 일이나 천이나 백만이나 아니면 천억을 여기다 집어넣는다고 하더라도 이 무한 앞에서는 이것은 없는 것과 거의 같은 것이다. 그것을 느끼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런데 존재적인 초월성을 느끼면서 자신의 이게 존재와 생 자체가 생명 그 자체가 이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한없이 미약하다는 걸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느끼는 것이 미천입니다. 미천. 자기가 미천하다라고 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모든 자신의 인생의 생사 여부와 생존의 자체가 하나님에게 달렸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여기서 막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는 모기 한 마리가 있어가지고 딱 쳐서 잡았습니다. 불교에서 그 모기가 태어나려면 진짜 억겁의 세월이 흘러야 태어나는 것입니다. 죽였습니다. 그것으로 모기의 생애는 끝난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 걸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박수 한 번 칠 때 박테리아가 700만 마리가 죽는다고 합니다. 손바닥에서. 그러면 결국 그 무수한 사람이 죽고 가글 한 번에 수백만 마리의 이 세균들이 바깥으로 토해지면서 이제 생이 생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 그런 의미를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사람이 700만 명이 70명이 죽었다. 그럴 때 우리는 굉장한 충격을 느끼고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라는 고민을 합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마지막에 느끼는 게 인간이 철저하게 생명과 존재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왜?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 미천한 존재는 사실 배우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여기는 이것도 하나님의 홀리데스인데 이건 뭐냐면 도덕입니다. 도덕. 그래서 내가 하나님 모를 때에도 내가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랑이 전혀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사랑하는 거니까 사랑했어요. 내가 엄마도 사랑하고 우리 애들도 사랑하고 뭐 등등등등등등 하다못해 개 한 마리라도 내가 좋아했겠지.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는 순간에 그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고 그 도덕은 완전한 것이고 자신의 것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느끼는데 이 두 가지가 너무 격차가 나기 때문에 자신이 아주 비참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느끼는것입니다. 여기 미천이라고 해서 미천한 존재라는 사실을 느낍니다. 슬프도록 슬픔이 아니라 이 비에 이렇게 그 낮을 비자입니다. 이게 얼른 한없이 낮은 그런 아주 추루하기 짝이 없는 그런 더러운 존재.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들을 내세울 수 없는 그런 것들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랑으로서, 사랑해서는 행복할 수 없겠구나.’라는 사실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을 보면서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감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개를 합쳐서 우리들이 거룩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서. 그래서 결국은 이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경험은 자신으로 하여금 미천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존재적으로 의존하게 만들고 자기가 비천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도덕적으로 의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의존의 문제를 결국 사랑 안에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