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Ⅲ
(1997-199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마음을 정하라 (시108:1~2) 1998.2.8 주일오후 1
2. 메마른 삶에서 벗어나라(삿15:18-19) 1998.2.15 주일오후 17
3. 말씀의 감화와 기도의 열렬함(느9:3) 1998.2.22 주일오후 30
4. 겸비함과 기도(대하7:14) 1998.3.1 주일오후 41
5. 믿음으로 역사 하는 기도(막11:24) 1998.3.15 주일오후 59
6. 기도와 능력(막9:29) 1998.3.29 주일오후 74
7. 기도와 끈기(눅18:7) 1998.4.5 주일오후 86
8. 기도와 참회(눅18:13-14) 1998.4.12 주일오후 94
9. 환경을 이기는 기도①(막1:35) 1998.4.19 주일오후 107
10. 환경을 이기는 기도②(막1:36~37) 1998.4.27 주일오후 119
1. 마음을 정하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108:1~2)
직장을 다니고 있을 때였습니다. 직장이 명동 쪽에 있었기 때문에 그 쪽엘 가다보면 호텔이 많이 있었습니다. 롯데호텔, 반도조선호텔, 프라자호텔, 프레지던트호텔, 뭐 다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만, 하여튼 그 쪽에 그렇게 많습니다. 하루는 출근을 하는데, 외국사람이 죠깅을 하는 모양이에요. 죠깅을 하려면 덕수궁에서 한다든지 남산을 죠깅하든지... 아침 출근할 때 전철에서 사람들이 새까맣게 올라와서 소공동 그 골목으로 걸어내려 오는데 거기를 죠깅 하는 거예요. 또 죠깅을 하려면 무슨 츄리닝을 입고한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좀 근사한걸 입고 죠깅을 하면 되는데 남사스러워서 볼 수가 없어요. 이 팬티 바람에, 팬티이긴 한데 옆이 틑어진 것 보니까 그게 아마 운동팬티인 모양이에요. 그런데 운동팬티나 그냥 팬티나 마찬가지더라구요. 마치 코끼리 엉덩이에 뭐 걸쳐놓은 것처럼 엉덩이는 이런 사람이, 키가 크고 뚱뚱한 사람이, 런닝은 젖가슴이 다나오는 것을 걸치고 뛰는데, 물론 남자예요. 그렇게 하고 뛰는데 그게 뭐 어울립니까? 사람들 넥타이 매고 아침에 출근하느라고 바빠서 전철에서 올라와서 허겁지겁 내려가는데 그것을 비집으면서 그냥 뛰는 겁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하고 쫓아가 봤어요. 물론 가는 길이니까 같이 쫓아갔지요. 이 사람이 프라자호텔에서 나오더니, 소공동 골목으로 나가서, 남대문 시장 앞으로 돌아서 한바퀴를 도는 모양이라... 그게 죠깅이 되겠어요? -그래서 그 때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 일 때문에 그 때 제가 아직 신학도 안하던 어린 시절이었는데 착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예요. 그 청년이. 그 청년이 접니다.- 그런데 이제 외국사람하고 한 번 만나서 얘기를 했어요. 그 얘기를 했어요. 저렇게 하고 뛰는데, 저게 꼭 그렇게 새벽에 남사스럽게 그러고 뛰어다녀야 되냐고 얘길 했더니 그 사람 얘기가 재미있어요. 그렇게 안 하면 큰일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기름진 음식을 먹으니까 매일매일 저렇게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저렇게 뛰지 않으면 자기의 건강을 지탱하지 못하기 때문에 출장을 가도, 밥은 한끼 굶어도, 저건 꼭 해야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육체를 지키기 위해서도 저렇게 열심히 뛰어다니고 밥은 굶어도 그것은 해야되겠다고 저러는데, 우리는 자신의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제가 있던 교회, 그 목사님.. 요새 귀가 간지러우실 거예요. 하도 그 목사님 얘길 해서 천국에 계실텐데... 그 분이 이제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이렇게 오시는데 빨간 츄리닝을 입고 노인네 한 분이 뛰어 오시더랍니다. 그냥 지나갔으면 불상사가 안 일어났는데 지나가면서 “아이고, 이거 목사님 아니십니까?” 하고 인사를 했어요. 거기는 그래도 태능도 있고 숲도 있고 하니까 제법 죠깅을 할 만한 어울리는 코스였지요. 그래서 “장로님 아니십니까? 어디 갔다 오시는 길이십니까?” 그랬더니 “건강을 위해서 새벽에 이렇게 죠깅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니, 장로님 그러면 새벽기도는 어떻하시구요?” 그러니까 “새벽기도 뭐 꼭 새벽에 해야 됩니까?” 그러시더래요. 그래서 그 목사님 그냥 지나갈 분이 아니지, “에이, 여보시오, 새벽마다 그럴 바에야 시온산에나 올라가시오” 그리고 돌아왔대요.
여러분! 오늘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립니까? 저는 오늘서부터 시편 108편 말씀을 가지고 몇 주에 걸쳐서 여러분들에게 기도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기도에 대해서 설교를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자체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회개해야됩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많이 하고 계시다는 느낌이 들면, 왜 기도에 대해서 또 설교를 하겠습니까? 왠지 기도에 대해서 설교를 해야되겠다고 느끼게 된 것은 여러분에게 있어서 기도의 생활이 새롭게 더 한층 강화되어야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오늘 읽은 108편 1절과 2절은 사실 기도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는 내용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다윗의 시가 이렇게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새벽을 깨우리로다’ 라고 하는 넓게 알려진 성경구절을 가지고 기도시리즈를 시작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분! 우리가 먼저 기도하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수없이 기도해야한다는 이야기는 들었고, 또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설교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도의 중요성, 기도의 필요성에 대해서 우리들이 충분히 동의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우리들이 기도를 해야되겠다고 각오를 하고 기도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1월에 신년 사경회 할 때 새벽 기도하면 이게 새벽예배로 모였는지, 수요예배로 모였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황홀했었습니다. 그런데 좀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필연적으로 기도의 열기가 식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기도를 쉽게 좀 쉬느냐, 그 이유는 죽 떠먹은 자리에 표 안 난다고 말이죠, 무슨 소린지 알지요? 밥은 퍼먹으면 누가 와서 퍼먹었구나 하고 표가 나는데 죽은 떠먹으면 푹 파진데 죽이 도로 메꿔 주니까 표가 안난다 이 얘기입니다. 죽 떠먹은 자리에 표가 안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생활 하루를 쉬어도 뭐 별로 그렇게 크게 갑자기 사고가 났다든지 기도를 하루 쉬었기 때문에 발목이 부러졌다든지 뭐 그런 일들이 안 일어나니까 그저 한번 두번 세번 빼먹게 되고, 그 다음에는 기도가 바닥까지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가 바닥까지 내려가면 은혜가 식고, 은혜도 식고 기도가 바닥까지 내려가게 되면, 그 다음엔 이제 그 사람의 본성이 드러나는 거지요. 은혜의 물에 묻혀있던 본성이 드러나면서 그게 이젠 신앙생활의 가시가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의 영을 잃어버리고 사니까 신앙 생활을 하면서 적당한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경고하시고, 우리에게 일러주셔도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간파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적용하며 살아가지 못하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면서 은혜를 많이 받는다고 하더라도 은혜 받는 시간은 1시간 내지 2시간이고 살아야 할 시간은 일주일에 168시간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따로 갖고 있지 않으면은 안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교훈 하시고, 또 기도를 전혀 잃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속에 은혜와 감화를 주셔서 기도할 새 힘을 주시면, 우리들이 그 불씨를 가지고 우리들은 일주일동안 개인적인 예배,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런 신앙 생활을 충실하게 잘 해 나가야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이 온전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는가하면 다시 뒤로 물러가고, 뒤로 물러났는가하면 더 뒤로 물러나가고, 이러한 잘못된 신앙 생활에 반복적인 실패 속에서 우리가 결국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 가지고는 우리가 살아 갈 수 없구나, 그 정도만 가지고 안 되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것은 뒤로 물러간 것이 잘못이고 다음에는 물러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서 발견하려고 함으로써 두 번 범죄하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린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했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그들 나름대로 훌륭한 교회를 가졌고 좋은 예배를 드렸습니다. 말씀에 대한 뛰어난 지식이 있었고,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그러한 신앙생활의 표준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달랐던 삶 중의 하나는 그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매일매일 주님의 얼굴을 뵈옵는 지성소 속으로 들어감의 그런 거룩한 감화와 변화가 없는 기도생활 없이는 우리의 굳은 패역은 점점 더 굳어질 것이며, 우리의 예배생활도 예배드릴 때에는 잠시 깨어나는 것 같다가 예배가 끝나고 나면 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드는 그런 삶이 될 것입니다. 잠시는 무엇이 일어나는 것 같고, 잠시는 무엇이 깨어나는 것 같지만, 그러나 마치 깊이 잠들어 있는 공룡이 옆에 와서 누가 찌르면은 비시시 눈을 떴다가 다시 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드는, 마치 잠자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실패하기로 운명되어진 사람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삶에 변화가 일어나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1시간도, 단 하루도 우리의 신앙에 옷깃을 여미지 않는 시간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매일 깨어서 아버지 앞에 기도하고, 주님 앞에 매달리고, 하늘로부터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빛을 주시고, 말씀을 읽을 때 깨달음을 주시고, 우리가 어려운 상황을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위로부터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기도의 능력에 대한 체험 없이는 우리는 어디서도 승리하는 삶을 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삶은 장난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장난이 아닙니다. 단지 감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이 기독교인의 삶은 철저하게 현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도하지 않으면서 세계 선교한다고 하는 사람들. 인정해주지 말아야합니다. 여름에 그 흔한 전도여행 한번 못 갔다 왔으면서도 선교사가 되어 뛰어나가겠다고 하는 사람, 우리는 발목을 걸어서 넘어뜨려야 합니다. 선교비, 대주지 말아야합니다. 교회의 중직이라고 말하면서 기도회에도 안나오고 예배에도 곶감 빼먹듯이 빼먹는 사람들은 교회의 중직으로 인정해 주어서는 안됩니다. 교사이면서도 영혼을 사랑해서 눈물을 흘리는 기도가 없고, 그들을 심방하고 찾아다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실천이 없는 사람들은 교사로 인정하지 말아야합니다. 이처럼 많은 기독교인의 삶이 현장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외식이 무성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현장은 외식을 깨뜨리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실천하는 그 자리에는 외식이 설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실한 것이, 제일 시험을 당하는 곳이 바로 현장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서 많이 말할 수 있습니까? 기도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습니까? 그럼 얼마나 신령한 기도를 하는지 한번 해보십시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기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 우리는 인정해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에서 외식이 무성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예화) 본인이 집회한 교회에서 교인이 2천명씩 모여도 부흥회를 하겠다고 포스터를 부치면 오백 명 밖에 안나오니까 담임 목사님이 그 전날 교인들에게 부흥회를 알리는 설교를 하시며 이번 집회에 참석할 사람들 일어나라고 했더니 장로님 한 분이 일어나시니까 다른 교인들 이 다 일어났다. 끝나고 나서 장로님들이 사람입장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의미로 “목사님, 다음부터 그런 것 하지 마십시오.” 했다는 이야기.
우리 한국 교회는 이래서 안됩니다. 실천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와서는 말하자면 거들먹거리는 것부터 배우려고 하고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라나는 세대에게 성인들의 세대가 인정을 못 받는 것입니다. 왜 교회 빠집니까? 기도, 더 열심히 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인으로써 살아가야 할 의미를, 의무를 열심히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그 곳에 진실밖에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누가 그러더래요. 6․25때 자기가 얼마나 잘 싸웠는지 군대 갔다온 그 사람은 돌아가셨을 거예요. 벌써 할아버지가 되어서 6․25때 얼마나 잘 싸웠는지 그 때 다 참전한 사람들이니까 이야기들을 하는 거예요. 자기가 총 들고 나타나면 괴뢰군 20명이 절도를 했다하는데, 벌써 들어봐야 뻥까는 소리인지 다 알지요. 서로 다 아는데, 바로 그 순간에 막사 같은데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요. 갑자기 두두두두하는 총소리가 들리더니, 커다란 유리창이 있었는데 드르륵 깨지더래요. 그러니까 제일 많이 뻥 떨던 사람이 담요 쳐들더랍니다. 총알 날아온 것 막는다고 말이예요. 아마 무기사고가 있었던 모양이예요. 그런 일 흔히 있으니까, 막 총을 갈기니까, 유리창을 깨뜨리면서 날아 들어오니까... 아니, 뭐 비오듯 쏟아지는 총알 속을 헤맸다는 사람이 그까짓 총 몇 발에 담요를 쳐들고 거기 숨는다고...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삶이예요. 말씀드리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 안 하는 사람은 그 대가를 삶 속에서 실패로 물려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 번 자기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알고, 내 패역을 고치려고 해도, 계속해서 고쳐지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비유를 들어 우리 속에 패역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면 그 패역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은 X-레이 와 같은 것입니다. 결국은 수술을 받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하잖아요. 말씀을 많이 깨달아도 그 깨달은 말씀을 계속 붙들고 자기의 패역하고 부패한 심령을 도려내는 각오로 기도에 헌신된 삶을 살지 아니하면, 많이 깨달아도 그 깨달음이 그를 진정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변화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깨우치심이 어떻게 자신의 기도 속에서 힘을 발휘하는가를 경험할 때에 그 말씀에 붙잡힌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많이 애씀에도 불구하고 매우 적게 거두어들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계획을 세우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심포지움을 하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많은 훈련을 받아도 지극히 적은 열매밖에는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고, 그 말씀을 누차 듣고 깨달아도 하나님 앞에서 삶이 정말 변화되는 거룩의 기쁨과 은혜들이 우리 속에서 매우 적게 밖에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단호하게 말하건 데, 기도생활의 부족 때문인 것입니다.
자, 여러분.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을 수종드는 일들을 교회 처음 나오는 사람들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는 이제 나와서 집사도 되고, 재직도 하고, 교사도 하고, 성가대도 거치고, 다양한 교회의 봉사들을 하다가 보면은 이제는 어떻게 교회의 일을 돌봐야 되고, 또 어떻게 교회를 섬겨야 할지 이런 감각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배운 것은 잘 잊어버려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좋은 교회에서 올바른 신앙의 도리를 배우면서, 말하자면 사람이 뭔가 반듯하게 사람들과의 관계도 바르게 맺으면서 교회를 섬긴 사람들은 어디다 내놓아도 섬김의 모양들이 반듯합니다. 예의가 있고, 열심이 있으면서도 그 열심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고통이나 상처를 주지 않는 그런 규범이 있다, 이런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훈련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번 받은 훈련은 낯설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대가라는 사람이 있을 수 없고, 노장이라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깊은 기도 속으로 많이 들어갔다 할지라도 예전에 깊은 기도로 들어갔다고 해서 요즘도 깊이 들어간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기도에 있어서 굉장히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갔어도, 여러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서 기도의 영을 유지하지 못하면 단숨에 여러분들은 기도의 세계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처럼 되고 기도밖에 없는 것이 이 기도의 놀라운 신비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거의 기도하지 않으면서 신앙생활을 해나간다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참된 도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심령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인식하고, 그 분 앞에 우리의 마음이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고 겸비해지는 그런 마음에서부터 우리의 모든 신앙은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교만해 질 수밖에 없고, 늘 자기를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리석고 부패한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대면함 없이 어떻게 영혼의 때를 벗길 수 있겠으며, 하나님을 대면하는 기도 앞에 서지 아니하고 우리의 영혼 속에 계속해서 끼어드는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 말미암는 각질과 마음의 부패를 어떻게 떨어버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매일매일 정결하게 되어질 청소를 원하고, 그렇게 우리의 영혼을 정결케 하는 보혈의 피는 하늘의 은혜로부터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우리의 더러운 것들을 정결한 샘에서 씻어내는 것도 기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따라서 살도록 노력하며 그렇게 살수 있는 힘을 구하는 역동적인 기도생활 없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승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말하라고 하면 쉼 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내보내면서 사람들에 관해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면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은 복잡하게 했지만 떠들기는 잘 떠들어도 기도할 때 떠드는 것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말하기를 ‘기도는 내 은사가 아닌가봐...’ 그런게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기도를 안 하니까 못하는 거지, 그런게 어디 있습니까?
기도는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신 매우 특별한 은사가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신앙을 이어가는 젖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생활을 하는데, 요즈음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자신의 머리 속에 계속 쌓이면 우리를 교만하게 합니다. 이게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머리 속에서만 쌓이지 않고 기도하면 기도를 통해서 이것이 우리의 핏속을 통해 용해되어 우리의 몸 속을 돌아다니며 흐릅니다. 그 때에 우리의 신앙생활의 진정한 활력과 능력이 솟아 나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저는 이번 주서부터 시작을 해서 기도에 대해서 계속해서 여러 주 동안 계속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도의 첫 시간으로 기도의 준비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실 오늘, 이 다윗이 쓰고 있는 이 시는 우리에게 기도보다도 찬양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으니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얼마나 좋습니까?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찬양하리로다’ 즉 무슨 말씀인고 하니, 다윗이 이제 어떠한 상황 속에 있었는데 갑자기 하나님을 찬양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생활을 가만히 보았을 때, 이렇게 인도자가 나와서 몇 장 부릅시다해서 부르는 찬송 빼놓고, 라디오나 카세트에 흘러나오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따라 부르는 찬송 빼놓고, 말하자면 자신 속에서 진정으로 솟아올라서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이유가 있어서 자신 속에서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솟아 나오는 그런 찬양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살아있는 적이 얼마나 됩니까? 그런데 다윗에게서 그런 마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내가 찬송하리로다’-마음속에서 찬양이 솟아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솟아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도는 결국, 사람이 육체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오면은 기도할 때마다 왠지 유난을 떠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기도를 가만히 하면 되지, 왜 흔들어요? ‘달달달달달달...’ 도대체 시끄러워서 기도를 할 수가 없어요. 그런가하면 또 기도는 안하고 기도하라고 그랬더니 계속 몇 시간씩 찬송만 부르고 해서 사람 기도 헷갈리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아니, 기도를 하면 방언기도가 나오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방언은 좀 하더라도 자기가 기도하는 것이 좋아야지, 방언의 의미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새벽서부터 나와 가지고 따따뚜따다... 그게 뭡니까? 기도한 겁니까? 마음에 무슨 열매를 맺겠느냐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얼 기도했는지도 몰라요. 방언기도를 해도 좀 생각이 있게 해야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말할 때는 이렇게 얘기를 해도 기도할 때는 가다듬고 거룩하게 해야 한다고만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이렇게 육체를 하려고 하는 것을 벗어버리고 기도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관건은 외부로 나타나는 육체의 이런 모습이 아니라, 먼저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변화가 먼저 선행 되어야지만 진정한 의미의 기도가 시작될 수 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마음을 먼저 하나님 앞에 바치고 나면 그 다음에 기도에 필요한 여러 가지 준비들이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먼저 하나님을 향해서 바쳐질 때 우리의 기도는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로 매달리는 기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기도가 마음에 작용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우리들이 제일 먼저 깨달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분들의 마음이 기도하기로 확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설교를 듣거나 은혜를 받으면서도 혹 이런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 제가 뭘 합니까? 주님이 기도시키시면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사람은 기도를 한번도 안 시키십니다. 그래서 일주일동안 그냥 덜렁거리고 살다가 다시 또 맨몸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비무장이예요. “하나님 빈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빈 마음인데, 좋은 의미에서 빈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 다 털어먹었습니다.” 그것하고 비슷하다는 얘깁니다.
사실 빈 마음으로 나온 사람들은 비무장은 아니예요. 빈 마음으로 나왔지만 그러나 죄와 더불어 싸워서 투쟁하면서, 피 묻은 전투복 입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았던 그런 과거가 있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빈 마음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빈 마음과 비무장으로 나온 것이 어떻게 같은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주님이 나를 기도시키신다. 그리고 내가 어찌할 수 없도록 기도로 나를 데려가신다-라고 하는 것은 기도를 안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기도를, 그래도 조금 하는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해야지만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선 중요한 것은 여러분 자신이 기도하지 않고 살아갈 때에 여러분 자신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건조하고 패배로 얼룩진 삶인가 하는 것에 먼저 눈떠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기도에 필요한 고통을 거절하고 그리고 그 기도의 수고를 지불하지 않고 안일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맛보는 여러분들의 영혼과 그리고 여러분들의 삶의 손해, 여러분들의 실패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맛보야하는, 하나님이 경험하셔야하는, 하나님의 이름의 모독, 하나님의 명예에 대한 먹칠함, 이런 것들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인가를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없음으로 말미암아 손에 넣을 수 있는 많은 축복들이 바라만 보고 그저 눈물만 흘려야 하는 소망 사항으로 바뀌게 된 이유도 여러분들이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바라고 원하는 것은 있지만 기도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능히 손에 얻을 수 있는 약속 있는 많은 것들이 이상향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바라보고 그저 눈물만 흘려야하는 그러한 대상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이 우리 속에 실현되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는 커다란 문제는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그리고 기도하지 않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매일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이유는 간단한데, 기도를 못하는 이유는 너무 너무 많습니다.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 사랑하고 순종하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한테 왜 기도하냐고 물어보면은 잘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이유를 잘 대지 못합니다. 자기가 왜 기도하는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왜 기도를 못하냐고 물어보면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왜 기도 못하세요?, 왜 기도 못해? 왜 기도 못하죠?” 물어보면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대답을 합니다. “어휴, 제가요, 애들이 너무 많아서 애들 거느리다보면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목사님! 기도가 뭡니까? 숨 쉴 시간도 없습니다.” 직장가면 눈치보느냐고 정신없습니다. 직장 때문에, 심지어는 깡드쉬 때문입니다. IMF 때문에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IMF 때문에 기도할 수 없다는 사람부터 시작을 해서 별의별 사람들이 다 나옵니다. 다 이유가 됩니다. 너무 피곤해서, 너무 좋아서, 별의별 얘기가 다 나옵니다. 그 많은 이야기를 한 마디로 딱 간추려서 이야기하면 ‘마음이 없어서’ 그 얘기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마음이 어디를 향하여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움직이게끔 되어있고, 재편되게끔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아주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단순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너무 기분 나쁜 예는 안 들도록 하겠습니다.
아직도 차가 꽤 탈만한데 어느 날 친구가 멋있는 차를 하나 몰고 왔습니다. 부-웅 하고 몰고와서 옛날에는 창문을 막 돌려야지만 내려갔는데 돌리지도 않는데 유리창이 저절로 내려가면서 손을 막 흔드는 거예요. ‘아니! 저런 일이 조선에 있을 수가?’ “이게 뭐냐?” “아, 이게 요새 새로 나온 차인데 좋은 차다.” 이렇게 탁 보니까 모든 게 다 다른 거예요. 앉아 보는 거예요. “야, 이거 좋다 이게 뭐냐?, 야 그거 미제가죽이야? 야 좋다, 이거 차 얼마나 넓으냐? 야 좋다, 이건 어떻게 하는 거냐?,” “야 이건 말이지...” 그러면서 설명을 해줍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 차 타니까 왜 이렇게 후져 보이는지, 모르겠어요. 소리는 유난히 더 나고, 막 돌려야 유리창이 내려가고, 기름은 거의 맞먹는데 달리는 것은 매연만 풀풀나고... 그러면서 차를 탈 때마다 느꼈던 편안한 감정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젠 자기도 가졌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 차 하나 가졌으면 하는 그런 느낌이 드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족시켜줄 때까지 안달을 하면서, 이 속에서 조릅니다. 그러면서 이제 조금 있다가 보니까, 그 다음엔 가졌으면 했다가도 ‘애이, 말도 안돼. 내 봉급에 그 비싼 차를 사서 아이.구 그러면 결국은 봉급 타서 거기다 다 집어넣어야 되는데 우리 식구는 뭐 먹고사나.. 매연 먹고 살 수도 없고’ 그러고는 체념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머리 속에서는 떠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지나갈 때마다 그런 차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차만 보입니다. 그러면서 이젠 불가능해 보이던 것이 길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여기서 대출을 하고 저기서 돈을 꾸고, 저당을 잡히고, 뭘 하고, 뭘 하고, 나면 아- 2백 만원이 모자라는구나. 이거는 카드로 끊고, 누구에게 빌리고, 이러면 되는구나..’ 그렇게 해 가지고 요즘 말하는 파산자들이 나오는 겁니다.
마음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그 마음이 다른 것들과 타협하기를 싫어합니다. 이 세상에서 멈추기 어려운 것이 있는데, 말하자면 낭떠러지에서 굴러 내리는 돌맹이를 멈추는 것과 인간의 내면(마음)속에서 굴러 내리는 마음 - 그 자체를 멈추는 것이 힘든 것입니다. 어떻게 멈추겠습니까?
요즈음은 차가 하도 좋아서 그런 일은 없지만 강원도 같은 곳에 가보면 급정거하도록 모래벽을 쌓아 놓은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거 왜 그렇습니까? 승용차에선 그런 일이 안 일어나지만 커다란 트럭 같은 것은 가끔 브레이크를 콱 밟으면 유압이 팍 터지면서 기름이 쫙 빠져나가면서 브레이크가 망가집니다. 그러면 산으로 막 내리닫습니다.-남태령에서 한번 중립에다 놓고 엔진은 끄지는 않았지만 중립에다 놓고 팔 다 내려놓고 굴러가게끔 내버려둬 보니까 98㎞가 나오더라구요. 아무것도 안 건드렸는데 그냥 치달아 내려가는 겁니다. 무엇으로 그것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98㎞로 내려가는 것을 밟으면 차는 그냥 돌아버립니다. 무언가 마음속에 하고 싶다는 것이 자리 잡으면 브레이크를 밟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기도해야 되겠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 그리고 기도해야지만 신앙생활을 승리함으로 이끌어 갈 수 있겠다 라는 그 기도에 대한 생각이 우리의 마음 전체를 지배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뭐, 여러 얘기 할 것 없습니다. 여러분! 아니 애 없이 사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계속 살아봐도 지금 우리를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거치적거리는 삶의 장애물들은 죽을 때까지 풀려나지 않는 것들뿐입니다. 그럼 언제 기도하시겠습니까? 정년 퇴직하고 하시겠습니까? 명퇴하고 하시겠습니까? 언제하시겠습니까?
아이들 때문에 못한다고 할 때, 얼만큼 되면 하겠습니까? 어렸을 때는 기저귀 갈아 끼우느냐고 시간이 없지만 자라고 나면 공부 봐줘야하고 좀 더 자라고 나면, 시집, 장가 보내기 위해서 돈버느냐고 정신이 없고 시집장가 보내고 나면 손자들 봐주는냐고 더 시간이 없습니다. 결국은 그렇게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요인은 무덤에 갈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건강이 나빠서 못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얼만큼 건강해지면 기도할 만한 육체의 여력이 남아있을까요? 언제 그런 때가 생기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도와주지 않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기도하라고 휴가 떼어주지 않습니다.
결국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기도할 수 없는 이유들로 둘러 쌓여 있을 때 주님을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내가지고 주를 따라가리이다 라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 안믿었으면 무엇하러 새벽에 나와서 기도합니까? 집에서 잠자고 있지. 수요일엔 또 무엇하러 나옵니까? 가서 비디오나 보고 화투나 치고 놀다가 자면 되지... 왜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믿고 신앙생활 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이 영생과 소망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그런 것도 기꺼이 감사함으로 감당 할 수 있으리라고 하는 신앙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받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친히 우리에게 그런 모본을 보여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마음과 각오를 가지고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사람에 대해서 나옵니다. 다윗도 누구 못지 않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도 누구 못지 않은 기도의 사람이었고, 여호수아도 누구 못지 않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자기의 기도생활을 도와주리라는 기대를 가졌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과 싸우고 세상과 더불어 싸우고 환경과 더불어 싸우면서 결국은 기도의 세계를 지키고 건설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세상도 감당 할 수 없는 성도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먼저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오늘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음을 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기도하게 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도와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도움을 여러분들의 영적인 무감각과 그리고 여러분들의 죄 때문에 쉽게 느끼지 못할 때도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여러분들의 기도를 도와주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기도하려고 마음먹을 때는 기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지속적인 기도생활을 위해서, 지금의 기도하지 않은 생활, 피상적인 기도생활에 대해서 종지부를 찍고 돌이켜 살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을 정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뜻을 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다니엘과 세 친구가 바벨론으로 끌려갔을 때 만났던 제일 처음의 시험을 기억하실 겁니다. 비록 포로로 끌려온 처지였지만 그들은 영재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선대하여 잘 길러서 자신들의 나라를 위한 훌륭한 두뇌들로 쓰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포로로 끌려온 다른 사람들에게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 영광스런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왕의 상에서 나오는 음식으로 먹고 마시게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할아버지 상에서만 밥을 먹어도 어린아이 적에 황홀한데 하물며 할아버지도 아니고 진주 음식, 다시 말하면 왕에게 차릴 때에 같이 차린 그 음식을 공급받게 되었을 때의 그 영화는 얼마나 놀라운 영화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거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율법에 금한 음식도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그들이 늘 제사를 드리던 상에서 먹어야 되는 상황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범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때에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니엘이 제일 먼저 한 것은, 1장에서 보면 뜻을 정하고 왕의 진미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는 먼저 뜻을 세웠습니다. 기도로 매달리고 하기 이전에 제일 먼저 한 것은 뜻을 세운 것입니다. 나머지는 그 뜻을 세우고 바깥에서 풀어간 것입니다. ‘이것은 세워졌다, 움직일 수 없다’ -그리고 나머지 것들을 풀어간 것입니다.
‘내 뜻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뜻은 이것이다’ 라고 정해놓고 이것은 흔들 수 없다 그 대신 다른 것들은 한번 최대한 양보하면서 풀어가고자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길이 열렸습니까? 막혔습니까? 왕의 상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정치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당신의 백성들이 뜻을 세울 때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세운 그 뜻을 꺾을 때 하나님은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뜻을 세우는 일들이 먼저 필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자, 여러분! 여러분들이 기도 할 수 없는 이유를 스스로 찾으려고 애를 쓰는 한 무궁무진하게 기도 못 할 이유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결국은 여러분들이 주위에서 주워 모으고 있는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도저히 기도할 수 없었다 라고 하는 것은, 일평생 흙이 불을 덮기까지 한번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결국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위해서는 뜻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기도하리라!’ 그것이 뜻을 세운 것입니다. 나머지는 기도하기를 방해하는 것들을 치워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잠을 줄여야겠다면 양보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덜 먹어야겠다면 덜 먹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포기해야 한다면 포기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어떻게 희생 없이 얻어질 수 있겠으며 값비싼 것이 어떻게 투자하는 것 없이 획득되어 질 수 있겠습니까? 당연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기도생활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먼저 뜻을 세우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을 보십시오. 그는 먼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마음이 되기 전에 그는 먼저 마음을 정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마음은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다고 그렇게 작정을 한 것입니다. 기도에 관련 시켜서 말하자면 이제 나는 기도하며 살기로 작정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맛볼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내가 희생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를 향해 마음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기도할 수 없는 상황이 기도할 수 있는 상황으로 바꿔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찬양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찬양할 마음이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기도를 못한다고 하는 것은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맞는 말은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바쁩니까? 정말 가치 있는 것 때문에 바쁩니까? 기도보다도 더 소중한 일 때문에 바쁩니까? 하나님을 만나 뵙는 것보다도 더 바쁜 일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만 TV앞에서는 30분, 1시간이 바람처럼 흘러가고 가치도 없는 신문, 잡지 조각 붙들고 앉아서 코를 박으면서 열심히 들여다보고 시간이 가는 것 보면 20분~30분 그냥 흘러지나가지 않습니까? 별로 가치도 없는 대화를 사람들과 나누고 이야기를 하면서 보내는 시간들을 모아본다면 여러분들은 과연 하나님 앞에서 시간이 없기 때문에 기도를 못한다고 핑계 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의 컨디션만 해도 그렇습니다. 저는 최근에도 그랬고 늘 그렇습니다만, 어떨 때 과로하고 새벽에 일어나면 헛구역질이 막 쏟아져 나옵니다. 꼭 아이 가진 자매들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나는 아이는 한번도 가져보지는 않았지만 그거 이해합니다. ‘이렇게 헛구역질하겠구나.’... 소원이 있다면 누워서 그냥 서너 시간 자보는 게 소원입니다. 하지만 요즘 얼마나 말씀들을 사모하는지 아침에 교회당에 와서 기다리는 지체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나옵니다.
나올 때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설교만 딱하고, 주기도문만 해라. 즉시 돌아온다.’ 그런데 참 이상하단 말입니다. 교회에 와서 헛구역질 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일단 일어나서 나오면 죽을 것 같더니 또 살아나집니다. 오히려 올라와서 눈을 부비면서 헛구역질하면서 나왔는데도 성경 한 절 읽고 설교를 쭉 하고 나면, 은혜가 됩니다. 그리고 구역질은 사라지고 이제는 기도할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우리 자신을 이기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어떻게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서 우리가 하고 싶은 것 포기하는 일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희생하는 것들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고, 밤에 퇴근할 때 들러서 기도하고 - 요새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기도합니까? 기도하니까 하는 것이겠죠. 그렇지만 왜 나는 못하는데 그 사람들은 합니까? 힘이 안 들고 따뜻한 방이 싫고 그래서가 아닙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추울 때 바람이라도 막 불고 그럴 때, 그 때 새벽에 일어나 보십시오. 그 때는 비나 펑펑 쏟아졌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래도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어떻게 가나, 그러고 그냥 자면 양심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비는 안 오고.. 아, 그거 말이 되잖습니까? 비가 억수같이 퍼부으면 못나오지 어떻게 합니까? 교역자는 나오지만 다른 사람은 비가 천태 같이 쏟아지는데 새벽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환경은 우릴 도와주지 않습니다. 특히 기도생활에 있어서는 절대 기대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말입니다. 환경을 영원히 기도 생활의 친구로 삼지 마십시오. 그것은 훼방꾼이지 친구가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환경도 믿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은 마음을 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참 좋아하십니다. 뜻을 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기도하리라. 마음을 정하고 나면, 기도할 길이 열리게 됩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제가 이전에 청년들 가르치고 그럴 때도 말입니다, 은혜가 안 들어가면 “목사님, 지금 정신이 있습니까? 새벽에 나오면 우리 아버지한테 맞아죽어요.” 그러길래 그 자매의 아버지가 엄청 무서운지 알았습니다. ‘야 살인나겠구나. 그거 맞아 죽으면 어떡하냐, 알았다.’ 그런데 후에 은혜를 받으니까 그 먼데서 그렇게 새벽기도를 여기까지 나와야 되니, 넉넉하지 않은데도 택시를 타고서라도 나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말한다면 “야! 하나님이 어디든지 살아 계시는데 그 새벽에 그 먼데서 돈도 몇 푼 못 받으면서 택시 타고 교회와야 되냐? 옛날엔 맞아죽는다고 하더니 너네 아버지 요새는 기력이 없냐?”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안 맞아 죽습니다. 안 맞아 죽더라도, 다른 것 하는 것은 부모에게 불순종도 잘하면서 그런 건(기도하지 않는 것) 왜 그렇게 순종을 잘합니까? 왜?! 순종해야 될 외면적인 이유와 기도하기에는 너무 약한 자신의 마음이 함께 합동 작전을 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불가능해 보였던 상황인데도 은혜를 받으면 기도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마음에 사무치게 되면 다른 것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왜?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
그 기도가 노동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낮에, 하루종일 하나님 생각하면서 사느냐고 살았지만 그러나 은혜가 메마른 자신의 마음이 퇴근길에 교회 들러서 조용히 무릎 꿇을 때, 자신의 영혼이 쉼을 얻는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쉼과 위로와 자비를 기도 속에서 체험하면서 사니까 그 시간이 하나님 앞에 아깝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여러분들 VIP이십니까? 여러분 기도 시간을 아껴서 그걸 모아서 어디다가 쓰려고 합니까? 얼마나 잘 사시려고 기도시간, 예배시간을 닥닥 긁어모으십니까? 그것으로 무엇을 이루려고 합니까? 절약된 기도 시간과 아끼고 아껴서 쌓아올린 인생의 탑들을 가만 내버려두신다면 난 차라리 그 하나님을 안 믿을 겁니다. 그러면 시간 바쳐 기도하고 예배드린 사람들은 너무 억울하잖습니까?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은혜로 살겠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매달린 사람들은 하나님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기도시간 아끼고 예배시간 아껴서 닥닥 긁어 모아서 이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하나님께도 칭찬 받는다면 하나님의 성품에 너무 어울리지 않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대적은 환경이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마음에 대한 최고의 처방은 마음이 움직이도록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스스로를 타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얘야 기도해야 하느니라. 기도 안 하면 넌 죽은 목숨이다. 이 만큼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주님이 이만큼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은 이제 너로 하여금 기도하라고 권면함이니, 너는 여기 순종해야한다.”
보십시오. 우리에게 무엇이 우리 스스로를 이기고 지탱시킬 만한 선한 것이 있습니까? 그저 우리의 자랑이라면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 이름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밖에 우리의 자랑거리가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내놓을 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 편에 서기를 원하고 주님이 우리를 당신의 백성 삼으셔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 이외에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가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의 그 특권들은 우리에게 얼마나 철저하게 사장되어 있습니까? 예수를 믿고 십년, 이십년이 지나면서도 10분이상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0분은 그냥 두고 언제 하나님 앞에 기도했는지 그것조차 잊어먹고, 식기도 이외에는 기도가 무언지도 모르는 생활을 해나가면서도 그 속에서 생명을 바란다면 잘못된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는 어렵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환경에 의해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러한 갈대와 같은 인생이 아니라 환경을 거스리고 상황을 이기면서 제압하며 하나님 앞에 믿음을 좇아 사는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마음을 정하고 기도하시기를 결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렇게 뜻을 정해보는 것은 얼마나 좋습니까? -매일 새벽기도를 나오겠다, 아니면 하나님 앞에 매일 저녁 퇴근할 때는 교회 들러서 기도하겠다, 교회가 너무 멀면 근처에 있는 새벽기도를 나가겠다, 그것도 힘들면 점심시간에 기도하겠다- 뜻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마음을 기도하며 살아야겠다고 정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하루에 한 시간 이상은 기도해야 되겠다 정하는 것입니다. 벅차면 30분 이상씩 기도해야되겠다 정하는 것입니다. 혹은 기도할 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매일매일 이 기도는 최소한 반복해야 되겠다. 그 마음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정하고 마음을 확정하면 기도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열린다는 사실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인은 우리에게 새벽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그러면 이게 무슨 뜻입니까? 비파와 수금이 걸려 있는데 비파와 수금을 보고 ‘깰지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시적인 표현이지만 ‘새벽에 내가 너를 칠테니 소리를 좀 잘 내라’ 그 뜻입니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조용히 잠자고 있던 비파와 수금이 이른 새벽 시인이 연주하는 가락을 타고 하나님을 향한 고아한 선율을 울려 퍼뜨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찬양의 꽃다발이 향기 되어 올라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시간을 새벽으로 택했을까요? “새벽” 이라고만 그러지 않았으면 부담이 안 갔을 텐데, ‘꼭두’라는 말은 안 붙었지만 이건 어두운 새벽이 분명한데 이 사람은 왜 새벽에 이걸 하겠다고 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부담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도 새벽을 깨우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새벽에 일어나야 새벽을 깨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오늘 이 시인 좀 보십시오. - 비파와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 다시 말하면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이 거룩한 찬양을 드리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환경과 상관없이 내 마음먹은 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리라는 결의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마음을 정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새벽이 나를 깨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새벽을 깨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새벽을 깨워서 내가 환경이 어떠하든지 내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 마음을 정했으니 환경과 상관없이 상황과는 구애받지 않고 내가 내 마음먹은 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살리라’고 하는 이 사실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생활도 필요합니다. 어디에선가 신학생들을 만났습니다. 만나서 여러 시간 함께 토론도 하고 이야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관심을 갖는 것이 “영적인 부흥은 오는 겁니까? 안 오는 겁니까?” 질문 자체가 수준이 다릅니다. 또 예를 들자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만 이 캄캄한 시대에 불꽃처럼 될 수 있겠습니까?” 질문이 여러분들이 하는 수준하고는 틀립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을 다 받은 후에 답하기 전에 내가 한번 물어볼테니 대답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합니까?” 라고 물어보니까 최고 많이 하는 사람이 1시간이예요. 나머지는 30분, 20분이요. “그 많은 질문에 대답을 해도 그렇게 기도 안 해가지고 어디 불꽃이 되겠느냐?” 되게 자존심 상했을 것입니다. 상하는 김에 더 팍 상하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면서 부흥 어쩌구, 조국의 영광 어쩌구, 그러는건 호기심이지 전부다 신앙이 아니다” 라고 했더니 그래서 그런지 그 다음서부터는 연락도 없습니다.
거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는 피흘려야 합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은 비용이 안듭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께 모두 하나님을 반역하는 시대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거기에는 피흘리는 삶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려고 하는 나태하고 게으른 삶을 미워하는 일없고, 두둔하는 일로 가득 찬 신앙생활을 해서는 여러분들이 결코 그 나태와 안일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각오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못한 이유는 다양해도 기도하지 못한 결과는 똑같습니다. 그것은 패배, 생명의 사라짐, 은혜의 상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 형식적인 신앙이 되는 것, 이런 고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도를 위해서 그 기도 속에서 즐거움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보면서 먼저 기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우리의 목표가 되도록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실패하고 있는 신앙생활, 열매가 매우 적은 우리의 신앙생활, 이런 것들을 우리는 환경과 여건에서 자꾸 찾으면서 변명을 늘어놓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희가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피 흘리셨으나 우리는 그래도 기도의 땀과 눈물이라도 흘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렇게 매달리면서 우리의 연약한 신앙생활의 무릎을 곧게 일으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음을 정했습니다. 새벽을 깨울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으로 가득 찬 심령이 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승리, 어디로부터 일어납니까? 새벽에 일어났을 때 좀 더 자자, 좀 더 눕자, 손을 모으고 좀 더 자자하면 궁핍이 군사와 같이 쳐들어와서 우리를 모두 다 털어 가고 망하게 되어 버린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새벽기도 나온다고 우리를 핍박하고 우리를 두들겨 패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있고 나오면 기도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너무나 힘이 부족할 때 목회자가 기도해 주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기도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나와서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다고 눈물 흘리는 것을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인간이 포기한 시점에서 하나님이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그가 기도로 하나님을 인정할 때 하나님이 그런 일들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무거운 근심과 무거운 죄악들이 짖눌러서 영적인 기력을 모두 앗아가려고 할 때 그런 멍에를 끊어버리는 것도 역시 말씀을 듣고, 붙들려 그 말씀에 의해 지속적으로 주장 받는 신앙생활을 하게 해달라고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 기도 속에서 이런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기도 속에서 지체를 위해 중보 기도 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그리고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패역한 심령을 가지고 살아가므로 우리의 인생을 끊임없이 찌르는 우리의 가족과 우리의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응답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깨달아도 행치를 못하고, 깨달아도 늘 더 이상 심령의 변화 일어나지 않고 있는 우리 자신이 아버지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움직이게 만들어 주시고,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날쌘 검과 같이 우리 속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찔러 쪼개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많은 환경과 어려움 속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할 때에도 기도의 세계로 나아오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항로를 보여주십니다. 어두운 밤길에서 우리의 손에 가만히 인생의 나침반을 쥐어 주신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도무지 알 수 없던 때에 우린 기도를 통해서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고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기도의 강력한 동기를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난관과 어려움이 있을 때에 타협하고 신앙을 양보할 준비가 되어있던 그런 변절하기 쉬운 사람들이 강한 사람이 되고 견고한 기도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믿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셨고, 나를 도와주시리라고 말씀하셨으니 나는 감히 이 세상과 맞서고 내 앞에 보이는, 눈에 보이는 것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증거로 삼으며 걸어갈 수 있는 담대한 힘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 기도 속에서 공급받는 혜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더욱이 교회 가까이 사시는 분들! 교회 가까이라 함은 전철을 타고 새벽기도 나올 정도 되는 모든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함입니다. 가까운데 있는 사람, 그러니까 저 뒤에 있는 자매는 ‘아휴, 살았다’... 그런데 전철이 한 코스잖아요? 15분이면 오는 것 내가 다 아는데 왜, 안 와요? 일부러 6시 15분 기도회 만들었잖아요. “하나님,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매순간순간 주여 우리를 도우시옵소서!” 이런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메마른 삶에서 벗어나라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니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삿 15:18-19)
성경 속에서 이 삼손만큼 해학적인 인물도 없을 것입니다. 삼손은 힘이 유난히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문맥에서는 삼손이 블레셋에게 공격을 당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제 결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동족 유다 사람들이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긴 것입니다.(? 문맥 상 데릴라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으므로, 그 내용을 삭제하고 정정함) 그렇게 결박당해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보면 이 삼손에게 하나님의 강한 신이 임하시면서 그 얽매였던 줄을 끊어버리고 블레셋 군인들과 싸우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구약 역사에서 블레셋만큼 독특한 민족이 없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살았던 민족인지 모릅니다. 아주 강한 민족이었습니다. 기마 민족이었고, 직업 자체가 약탈을 해서 먹고사는 종족이었습니다. 블레셋이 아래에서 위로 자주 침공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당나귀의 턱뼈-썩은 턱뼈가 아니고 새 턱뼈-를 가지고 블레셋 백성들을 1,000명을 때려죽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어서 알뿐이지만 어쨌든 확실한 것은 이 사람이 엄청난 용사이었고, 엄청난 힘을 지닌, 그러면서도 무술의 달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창과 칼과 방패로 덤벼드는 많은 사람들을 쳐서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삼손이 이런 놀라운 역사들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1,000명이 그 턱뼈에 맞아서 죽었을 테니까 한 방에 한 명씩 죽였다고 해도 천 번을 춤을 추었어야만 천 명이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한 방 맞는다고 쉽게 죽겠습니까? 우리가 그 장면을 보지 못했지만 우리가 비디오로 본다면 아마 그 광경은 전쟁하는 장면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춤추는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머리 맞아 죽은 자, 엉덩이 맞아 죽은 자, 뒤통수 맞아 죽은 자 할 것 없이 전부다 그 턱뼈에 맞아서 골병들어 죽은 시체가 1,000 구나 깔려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관심은 일 천명을 죽였고 일 만 명을 죽였고 하는 거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일입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일어났던 일을 적고 있는 데 우리의 관심은 그것입니다. 18절부터 다시 한 번 봐야되겠습니다.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하나님이 레히의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삿 15:18-19중반)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뭐 패잔병들이 도망가는 남아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싸움이 끝났으니까 이제 그 턱뼈를 집어던지고 풀석 주저앉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목말라 죽게된 상황을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1,000 명을 쳐죽일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한 영력을 발휘했던 사람인데, 그거 목마른 것 좀 참지 뭘 그것을 가지고 털석 주저앉아서 그렇게 낙담하듯이 하는 것입니까? 턱뼈도 내던지고 그럴 수 있습니까? 집에 가서 그렇게 하더라도 1,000 명이나 쳐죽였으면 좀 용사답게 의연하게 그럴 수 있어야 되잖습니까?
이 장면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시사하는 바가 참 큽니다. 우리의 신앙 속에는 이런 용사와 같은 강함과 갈대와 같은 연약함의 양면성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기가 한없이 강하기만 한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만큼 바보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가끔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강해보이는 사람, 그리고 또 강하지도 않으면서 괜히 깡다구가 있는 사람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집에 가서는 혼자 베개에다 얼굴 묻고 우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런 양면성을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에게서도 이런 것을 보는 것이죠. 이런 강함과 이런 약함의 차이는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 삼손은 나귀 턱뼈 하나를 가지고 1,000 명을 때려죽였지만 여러분들은 그렇게까지는 못 했겠지만 여러분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주먹을 불끈 쥐고 ‘내가 이 험한 세상에서 참 믿음으로 살고 죄와 더불어 싸워야 되겠다.’ 이렇게 각오하고 또 그렇게 각오했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면 우리는 생각할 수 없었던 놀라운 승리들을 거둡니다. 별로 가슴에 와 닿지 않나 봅니다. 늘 패배만 하십니까? 우리는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그 승리를 보면서 ‘야! 정말 주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구나!’그것을 느끼게 만들어 주시지 않습니까? 살아오면서 그런 생각이 안 드십니까?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이 들습니다. ‘야, 어떻게 그런 세월을 참으면서 살았나!’ 또 이런 생각이 들때도 있어요. ‘야, 그런 불 같은 연단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나를 다시 한번 세워주시면 그때처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혹은 대적하는 자들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고통받으면서도 승리한 기억이 있을 때에는 그런 생각이 들죠. ‘요즘 내가 다시 사람들에게 그런 비난을 받고 오해를 받는다면 그때처럼 온유해 질 수 있겠는가? 내 신앙은 정말 성장하고 있는 것인가? 내 인격은 정말 더 온전해져가고 있는 것인가?’ 그런 반성을 하게 하는 때가 있습니다.
어느 때인가 저는 조용기 목사님이 ‘11시에 만납시다’라는 인터뷰에 나온 것을 눈여겨 봤습니다. 거기 초대한 사람 중에는 목사가 별로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인터뷰를 하는가? 어떻게 다른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보았습니다. 또 모르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 안에 방송국이 생겨서 저를 인터뷰할지도 말이죠?
제가 그분의 설교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분이 늘 강조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 그 분이 제일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히브리서 11장 1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그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그런 주제의 설교를 잘 하시는 분이 여의도순복음교회 건축을 하다가 달러가 평가절하되면서 굉장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이제 골조를 세워놓아서 빨리 지어야만 되는데 돈을 제공하지 못하니까 녹이 스는 거예요. 이제 문제가 생기잖아요. 잘못하면 골조자체를 갈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분이 피 눈물나는 고생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했습니까?”라고 물으니, 그 교회 꼭대기에 몇 번이나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그 철골꼭대기에는 왜 올라갔습니까?”하고 또 물어보니, 거기서 죽어버리려고 몇 번이나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늘 믿음에 대해서 설교하는 그런 강한 사람 이면에-그 때도 분명히 펄펄 뛰면서 믿음에 대서 설교하셨을 텐데-워낙 돈에 몰리고 죽게 생겼으니까 거기 올라가서 “하나님, 이제 내 생명이 족합니다.”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렇게 생각하니까 “하나님의 은혜였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참 마음에 따스하게 많이 와 닿아서 좋았습니다. 이와 같이 아주 강한 사람 이면에 반드시 연약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 강한 우리 자신을 보며 또 한편으로는 한없이 약한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약한 사람 속에서도 우리는 강함을 봅니다.
저는 가끔 이런 사람을 봅니다. 마음에 정함이 없고 그리고 뭔가 안개 낀 것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호수 위에 안개가 끼였으면 좋은 데 평지 위에 안개가 끼었으니 길을 분별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늘 흔들리기를 잘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 속에서도 강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봅니다. 그리고 온 천하에 영권을 한 손에 움켜쥐고 살아가는 것처럼 큰소리치는 사람들도 깊은 밤이면 홀로 울어야 하는 그런 연약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연약함과 강함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요? 결국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붙들고 계실 때는 강해지고 주님이 놓으시면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뭘 모르시는 것 같아요. 저는 하나님이 잡을 때 약해지고 하나님이 놔주시기만 하면 강해집니다.” 잘 못된 것들을 향하여서는 그렇습니다.하나님이 놓아주시면 술도 잘 먹고, 노래방에도 잘 가고, 나쁜 짓도 많이 합니다. 제철 만난 파리 떼처럼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약해집니다.
그러나긍정적인 능력의 면에서 주님의 손에 붙잡혔을 때 참 강해집니다. 그리고주님의 손에 우리가 강하게 붙잡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주님의 손에 강하게 붙잡혀 살 때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아니, 아무리 두려워봐야 죽기 밖에 더하겠습니까? 그러면 주와 함께 영원히 있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 배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힘이 모두 어디서 오냐하면 주님의 손에 붙잡힌 신앙의 상태, 거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주님이 우리를 붙잡으시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 일어납니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매일 어떻게 꼬투리를 잡아서 우리를 비비꼴 것인가를 노리고 있는 사람, 그래서 우리가 인격이 있긴 있어서 참긴 참지만 오장육부를 다 뒤집어 놓는 사람, 복음을 안 들으려면 말지 말은 계속 하라고 하면서 우리 속을 뒤집는 사람, 그런 것들 밖에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잡아주시면, 우리 입에서 말이 나갈 때, 그 말이 때로는 불이 되게 만드시고, 때로는 날카로운 칼이 되게 만드시고, 때로는 봄바람 같이 꽃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되게 하셔서 얼었던 마음을 막 녹이게 됩입니다.
겨울에 그 꽝꽝 얼어붙은 얼음이 어떻게 녹습니까? 불길이 와서 녹입니까? 아닙니다. 봄바람이 불어오면서 강물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녹습니다. 이와 같이 때로는 우리를 그렇게 사용하셔서 사람들에게 역사하십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아주시면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까? 기도할 때 우리를 붙잡으시면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할 때, 우리의 혼신의 힘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러면서 우리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로 빨려 올라갈 것 같은 놀라운 은혜가 일어나고, 나의 중보 기도하는 것이 지금 중보 기도를 받는 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하는 것이 느껴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도 속에서 붙잡아 주실 때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주님의 교회에서 충성할 때 주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재산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자랑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건물이나 땅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없어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가장 커다란 자산은 사람입니다. 사람!
그런데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뭐합니까?마치 알도 못낳은 파괴닭(?)처럼 말이죠. 비비꼬고, 주일이면 말입니다. 병든 병아리 오뉴월에 날개를 늘어뜨리고 맥없이 졸고 있는 것 같이 그런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모였으면 그것이 어떻게 교회의 자랑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랑이 아닙니다.
봄에 병아리를 사서 길러보십시오. 병아리 사다놓으면 벌써 이것이 계속 살 병아리인지 죽을 병아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두 가지를 보면 아는 데, 날개와 등을 보면 알아요. 죽을 아리는 날개가 죽 늘어집니다. 그리고 눈이 게슴츠레합니다. 예배시간에 와서 어깨를 죽 늘어뜨리고 눈이 게슴츠레한 병든 병아리 같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병든 병아리를 사진을 하나 찍어서 늘 가지고 다니십시오. ‘이게 혹시 내가 아닌가?’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의 사람이 어떻게 자랑일 수 있습니까?
교회가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들, 그런 목회자, 그런 일꾼, 그런 성도들, 또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새신자들이 있는 교회, 그런 교회가 하나님 앞에 정말 복이 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바로 하나님이 이렇게 이 사람을 붙들어주시니까 또한 여호와의 신이 임하니까 이 얽어맨 밧줄들이 불에 탄 삼줄과 같이 끊어지는 역사가 일어났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놀라운 힘을 주신 것입니다.
이 삼손이 전쟁을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삼손에게 임하셔서 그로 하여금 이 싸움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능력의 손에 붙잡혔을 때 그리고 그렇게 붙잡힌 성도들로 가득 찬 교회가 놀라운 능력을 발휘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손에 붙잡힙니까? 문제는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손 즉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들이 될 때 그때는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강하고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복음 전파의 역사를 사도행전부터 한 번 보십시오. 도대체 아무리 눈을 씻고 살펴봐도 그러한 놀라운 일들을 일으켜서 짧은 시간 안에 세계를 뒤집어 놓을 만한 재능이나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개입해주시지 않을 때에도 역시 이런 놀라운 방식으로 세상을 순식간에 하나님으로 뒤엎어 놓을 수 있는 그런 어떤인간적인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단 말입니까? 학문적으로나 숫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그들을 사로잡으시니까 평범한 그들이 사자와 같이 용기 있는 사람들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이 세상에서 흘러가는 세속주의의 파도의 거품과 같이 파도 위에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인생으로 삶을 마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위대한 믿음의 증인들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들을 붙잡은 하나님의 손이 그런 놀라운 변화와 역사를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주의 손에 강하게 붙잡혀서 내가 온전히 주님에 의해서 소유되고 우리 또한 주님을 온전히 소유하는 그런 삶, 그래서 나와 주님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어서 주님이 내 안에서 나를 통해서 사시고 싶은 삶을 마음껏 사시며 나 또한 주님을 위해서 살아드리는 그런 삶을 삽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그분 자신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이 되게 하시려고 오늘도 우리를 도우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 왜 여기 이렇게 모였습니까? 이 청명하고 좋은 주일 날 오후에 왜 여기 모였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여러분은 저보고 “당신은 거기 왜 있소?”라고 물어보실 것입니다. 왜 우리가 여기 있습니까? 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들을 하나라도 더 깨닫고 그리고 오전에 은혜 받았어도 또 은혜 받고 싶어하고, 지난 주 은혜 받았어도 오늘 또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싶어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계속 온전해지는 삶을 살고 싶어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온전히 하나님의 진리에 붙잡혀서 우리 스스로는 살 수 없는 삶을 살고 싶어서입니다. 여러분들이 인간적으로 살 수 있는 삶, 그것만 산다고 해봅시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인생은 지리멸렬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실패를 숙명처럼 생각하고 그리고 목표도 없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유리 방황하는 인생이 되지 않겠습니까? 목표를 또 알면 뭐합니까? 어느 길로 가고 싶어도 뭐 길을 알아야 가지 않습니까? 또 길을 알면 뭐합니까? 걸어갈 힘이 있어야 걸어가지 않습니까?
마라톤 선수가 중간에 왜 포기합니까? 아니 길을 몰라서 그렇습니까? 몇 달 전부터 가서 거기서 수없이 뛰고 연습을 해서 길을 잘 아는데, 42.195㎞을 달려가야 된다는 것을 몰라서 그렇습니까? 몰라서가 아닙니다. 알아도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단 말입니다. 왜입니까? 달릴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살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어서 여기 온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삶을한 번 살아보고 싶어서 여기 온 겁니다.
그래서 우리 같이 미물의 찌끼와 다름없고 만물의 찌끼와 다름없는 우리와 같은 인생들을, 우리 스스로 꿈꾸고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삶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살 수 있는 삶 그 이상의 삶을 하나님께 살아서,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에 만 분의 일이나마 보답하고, 우리로 말미암아 좋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우리들이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평범하게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특별한 삶을 살아드리기 위해서는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으시는 은혜에 장악되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좋은 단어가 하나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장악되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장악된 삶을 살 때에 그 때에 우리는 우리가 도저히 살 수 없는 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그분의 손에 붙들렸을 때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약해질 때는 어떻습니까? 당연하죠. 하나님이 손을 놓으시니까 약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삼손을 보시기 바랍니다. 전쟁이 있고 목표가 있을 때에 불붙는 것처럼 싸웠습니다. 그런데 몸과 마음과 모든 생각이 오직 이 전쟁에서 이겨야 되겠다는 생각 하나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강하게 붙잡으셨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육체적인 한계를 딛고 그리고 삼손 스스로는 살 수 없었던 놀라운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붙잡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턱뼈도 내려놓고 심리적인 긴장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가장 자연스러운 욕망이 솟아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냐하면 이렇게 자기가 비참하게 목말라서 죽을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강한 능력으로 상상할 수 없는 영력을 발휘하며 그렇게 살아간, 혁혁한 승리의 전적이 잇는 사람도 때로는 이렇게 주저앉아야 되는 깊은 목마름과 침체에 빠질 때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생활은 안전이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은 늘 하나님 앞에 점검 받고 매일매일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의 부으심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장악된 마음, 그리고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에 의해서 이렇게 쓸어 만져지는 일들이 매일매일 일어나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전에 아무리 많은 영력과 신앙의 경험, 놀라운 체험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에 이긴 전적이나 과거에 우리들이 승리한 옛 추억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오늘 주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했던 것처럼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고 고백하면서 날마다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성실하신 은혜,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새롭게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기사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아, 이렇게 사자와 같이 용맹스럽던 사람도 한 순간에 턱뼈를 던져버리고 주저앉다시피 낙담하며 이렇게 목말라서 자기 육신 하나를 스스로 가누지를 못하는 이러한 한계에 다다를 때가 있구나!’ 여러분들은 바로 이 점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 혹시 이전에 능력 있고 충만했던 신앙생활들을 회상하면 회상할수록 오늘의 여러분들의 삶의 나약함, 영적인 생활의 피폐함, 건조하기 짝이 없는 여러분들의 은혜 생활에 대해서 스스로 깊은 반성을 하게 하고는 있지 않습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삼손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한없이 약해지는 상태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런 상황에서 이 삼손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건 간단합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의 손이 우묵한 곳을 터치셔서 거기서 갈라지면서 물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을 먹고 이제 정신이 회복되고 영혼이 소생되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샘을 이름을 붙였는데, ‘엔학코레’라고 했습니다. ‘엔’은 샘물이라는 뜻이고 ‘하’는 영어의 정관사 ‘the’입니다. ‘코레’는 ‘부르짖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엔락코레’는 ‘그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샘’과 ‘부르짖는다는 것이 무슨 관계에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이 삼손이 많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도 주저앉아버릴 정도로 핍절하게 되어서 그 자신의 육체가 깊은 목마름과 한계를 느꼈을 때에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삼손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부르짖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샘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놀라운 신앙의 교훈 하나를 배우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한 때는 승리하고 이겼지만 그리고 늘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생활을 했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에 그런 감사와 은혜가 모두 사라져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이 신앙생활이 충만해지면 액체가 많아집니다. 액체가! 우선 침을 많이 흘리게 됩니다. 이해가 갑니까? 무슨 침을 흘리게 되냐하면 은혜를 많이 받으면 신앙이 좋은 성도들과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을 보면 부러워서 침을 흘리게 됩니다. 잡아먹고 싶어서 침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야야 정말 좋다. 야 저 사람은 하늘에서 내려왔나 땅에서 솟아났나? 벽에서 튀어나왔나? 만져보니 인간은 틀림없는 데 족탈불급-발벗고 쫓아가도 안되겠구나!” 그런 것을 보면서 침을 흘립니다. 은혜 안 받았을 때는 그런 거 안 좋아해요.
어느 정신나간 신학생이 동료들끼리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옆에서 들었습니다. 자매를 소개해달라고 하는데 그 하는 말이 “야! 그런데 너무 신앙 좋은 자매는 난 싫어.” 그러는 거예요. 그 학생도 어디서 목회할 지는 모르지만 그 교인들은 참 불행할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다른 학생이 물으니까 너무 신앙 좋으면 꽉 막혀서 재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것은 처음에는 신앙이 좀 오락가락 하다가 연애하면 연애할수록 신앙이 점점 좋아져서 목회할 때 최고도로 다다르면 그게 제일 좋은 것이랍니다. 그게 자기 시간표대로 됩니까? 참 영리합니다.
그런데 이제 침이 나오게 됩니다. 옛날에는 억지로 교회에 끌려나오다시피 해서 나왔는데, 그저 ‘내 평생 소원 이것 뿐 오직 빨리 끝나고 집에 가는 것!’밖에는 없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내 평생 소원 이것 뿐 갈비탕 3인분!’ 그것 밖에는 없습니다. 신앙 밖에 있을 때에는 다른 것을 보고 침을 흘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누가 옷을 사 입었데!’ 침을 줄줄 흘립니다. 누가 뭐 하나 들고 오면 만져보면서 “아유, 넌 좋겠다.” 이러던 사람이 변화되면은 액체가 많아집니다. 무슨 침이 줄줄 흘리면서 “어떻게 저렇게 신앙 생활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 말씀대로 살 수 있을까?”라고 그럽니다.
두 번째는 뭐가 많아지겠습니까? 눈물이 많아집니다. 흔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눈물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정서가 풍부해집니다. 그건 분명해요. 영적인 침체에 걸려 있는 사람은 근엄합니다. 우스워도 웃지 않고, 슬퍼도 울지도 않고 그저 교회만 오면 근엄합니다. 일자로 굳게 다문 그 믿음직한 입술, 살며시 내려깐 그 눈, 그리고 간간히 겸손하게 떨어뜨리는 고개, 그것이 바로 무지무각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만 나가면 생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말도 많아지고 울고 웃습니다. 그런 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이제 교회에 오면 웃으면은 얼마나 조그만 우스운 얘기를 하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틀니가 빠지도록 웃어요. 조금만 슬픈 이야기를 하면 눈물이 흐릅니다. 이러한 은혜 받은 신앙생활을 하니까 우스우면 우스워서 눈물이 나고 슬프면 슬퍼서 눈물이 나고, 그러면서 이 눈물이 흐르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 눈물이 흐르고 은혜를 받다 보니까 또 뭐가 나옵니까?
땀이 많이 나옵니다. 코도 나오지만 땀을 흘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제 눈물로 감화를 받았으니까 그렇게 은혜를 받고 나면 무슨 일을 하든 은혜 안 받은 사람하고 틀립니다. 하다못해 마당을 쓸어도 은혜 안 받은 사람은 설렁설렁하는데 은혜 받은 사람은 깨끗이 씁니다. 왜 그렀습니까? 범사에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땀을 흘리면서 주를 위해서 봉사합니다. 그러다 급기야는 이제 피를 흘릴 각오까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따라서, 신앙의 참된 도리를 따라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의 제물로 요구할 때 기꺼이 그렇게 살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이처럼 촉촉한 것이 좋은 것입니다. 촉촉한 신앙생활 얼마나 좋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우리의 살아있는 신앙생활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우리들의 신앙생활, 우리의 예배생활, 우리의 기도생활, 우리의 순종하는 모든 삶이 바로 이렇게 땀과 눈물과 피, 이런 것들이 있는 액체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봐도 바로 그런 생애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모든 것이 없어지게 됩니다.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됩니다. 액체가 사라지게 됩니다. 부러워하는 것도 없고 신앙적인 영역에서 사모하는 것도 없고, 그리움이 빚어내는 눈물도 없고 참회의 눈물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 무엇인가 감동을 받는 눈물도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나아가서는 주님을 위해서 땀을 흘릴 일도 없고, 땀을 흘릴 리도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또 피를 흘릴 리는 더더욱 망막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 참 건조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건조한 신앙생활을 해나갈 때 마치 이 신앙이라는 것을 기계에 비유하면 기계에 기름을 안치고 막 돌리면 요란한 소리가 나다가 결국은 눌러 붙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열이 발생해서 그 열 때문에 쇠가 늘어지면서 늘어 붙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렇게 촉촉한 신앙생활, 이런 것들이 늘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일에 와서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아가려고 애를 쓰죠. 교회에 와서 또 배웁니다. 배우는 것과 함께 우리의 신앙의 각 부분에 기름을 치고 갑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렇게 알기는 알아도 행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행할 힘을 얻게 됩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 육체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 순종해보려고 하면 살을 깎아내는 것처럼 힘들었습니다.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이 십일조를 낼 때 얼마나 살점을 떼어내는 것 같이 아프잖습니까? 해봐서 알시겠지만, 아까워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헌금을 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게되면 이제 깨닫게 됩니다. ‘아, 이게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가!’ 그러나 주일에 은혜를 받지 못하면서 무미건조한 생활을 계속하다보면 돈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한 시간이면 얼만데, 가게를 열었으면 직장에 가서 근무를 했으면 얼마를 버는 건데!’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런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집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아보십시오. 얼마나 놀랍습니까? 헌금은 더 그럽습니다. 이건 정말 은혜입니다.
조지 위필드의 생애를 읽어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여러분, 피뢰침을 발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벤쟈민 프랭클린입니다. 그 사람운 원래 인쇄업자였습니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돈을 짭짤하게 버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벤쟈민 플랭크린이 어느날 소식을 들으니까 위필드 씨가 또 온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오시면 너무 좋아, 왜냐면 은혜를 받으니까!’ 그 은혜를 그리워한 나머지 좋은데, 나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올 때마다 돈을 싹싹 긁어가는 것입니다. 위필드 목사는 영국에다가 고아원을 지어놨는데 돈이 수월찮게 들어가니까-그 때 영국보다는 미국이 살기 좋았나 보죠-미국에 건너와서는 돈을 싹싹 긁어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벤쟈민 플랭클린이 어느날 보니까 또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렐루야! 위필드 목사님이 오시는구나, 이번에는 은혜를 받아야지.’ 그러다가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또 오는 구나......’ 아직 위필드는 미국에 도착도 안 했는데 플랭크린은 이미 결심을 합니다. ‘이번 집회에서는 죽어도 헌금을 안 하겠다.’
그리고는 돈주머니를 차고 갑니다. 그리고나서 설교를 하기를 시작합니다. 설교가 계속 불을 붙이면서 달려갑니다. ‘주여, 도와 주시옵소서. 주님, 내 마음은 정했어요. 변치말게 하소서.’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돈주머니가 스르르 열렸답니다. 그리고나서 설교가 정점을 향해서 막 치달으면서 이제 은혜가 막 쏟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잔돈만 다 바치겠습니다.’ 계속 쏟아져 나옵니다. ‘하나님, 은화만 바치겠습니다.’ 마지막에 “여러분, 어찌하시렵니까?”라고 위필트가 외쳤더니, 그가 고백하기를 ‘나는 나도 모르게 어느새 돈주머니 채 들고 앞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가져다 다 털어넣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우리의 생활이 촉촉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촉촉해질 때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일을 지키고 우리가 번 돈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우리의 재능과 우리의 시간을 드려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깝지 않게 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참 신기합니다. 은혜 받지 않는 사람은 자기 신앙의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는데 그 이상의 일을 하려고 하면은 반드시 부작용이 그만큼 일어납니다. 반드시 일어납니다.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이 헌금을 할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조금 헌금하고 큰 시험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 받은 사람은 이상한 것이 은혜 받고 우리 심령이 눈물과 그리고 땀과 피로 촉촉해지면 그러면 하나님 앞에 넘치도록 바치고 주님을 넘치도록 섬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렇게 섬긴 것이 다시 우리에게 액체를 더해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앞에 피땀 들여서 섬기고 사랑하니까 그 교회가 더 사랑스러워지고 그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고 싶고,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희생을 하고 피를 흘리니까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소중하고 값지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바치면 바칠수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이러한 액체의 은혜를 주신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은혜도 바로 그런 은혜 아닙니까? 강물 같이 흐르는 기쁨! 하나님께서 건조하고 메마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의 심령에 샘을 터쳐서 성령의 생수가 우리에게 쏟아져 나오게 하실 때 우리의 심령이 그 은혜의 강물에 깊이 잠기게 될 때, 그 때 우리는 행복하고 환희에 넘치는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지 않습니까?
이제껏 신앙생활하고 살아와도 내 체면, 내 의지, 내 생각가지고 몸부림쳐 왔지만 그러나 마지막에 만들어 놓은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마지 못해서 끌려오는 체면 값하고 이름 값하는 이런 신앙생활이었는데 하나님이 우리 옆에 생명의 생수의 샘을 터트리셔서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실 때, 그 때에 우리는 은혜 받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주님 앞에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몰랐던 충만한 은혜와 기쁨 속에서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주신 것들을 진실하게 붙들고, 하나님 때문에 위로를 받고, 고난이 오면 그 고난 때문에 생수의 샘을 더 그리워하고, 그래서 그 생수의 샘을 마심으로, 고난을 받으며 하나님 앞에서 지나갈 때 그런 은혜의 샘이 계속 솟아남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 고난이 우리에게 상처가 되거나 패역을 만들지 않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혜의 그런 성령의 샘물이 우리에게 해독의 작용을 계속하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조금만 괴로우면 견딜 수 없고, 누구든지 잡아죽이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은혜의 생수가 우리의 심령 속에서 솟아나오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못살겠다고 아우성칠 때도 의연하게 “인생이 그런거지요. 뭘 그러십니까? 찬송가에도 있잖아요.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인생에서 갑갑하고 어려운 때가 찾아올 때, 고통이 찾아올 때 어떻게 이깁니까? 은혜의 샘물이 속에서 늘 솟아나오는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이지. 그러니까 우리의 소망이 이 세상에 없는 거지.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이 세상과 찰떡 궁합이 되어 살 수 있다면 우리가 세상 사람이지 어떻게 하늘나라 사람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한 은혜를 부어주시면 부어주실수록 우리는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감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세상에 대한 많은 바람들을 포기합니다.
괴로움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그곳을 언제나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촉촉하게 젖는 신앙 생활을 하는 거예요. 보십시오. 우리의 신앙생활에 필요합니다. 이렇게 촉촉이 젖어있는 성도들은 참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가르치기도 쉽습니다. 그렇게 촉촉하게 젖어있는 성도들에게 가서 “형제, 그렇게 살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눈물이 주르륵 흐르면서 “하나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바삭 눈물이 말라 있는 사람에게 “형제, 그렇게 살아서 되겠어?”그러면, “그러면 그럼 나보고 어쩌란 말이요?”라고 말하며 완전히 깡패로 돌변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촉촉이 젖은 신앙 생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일들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의 샘을 터트리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런 것들이 없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 은혜의 샘이 예배 시간에도 터져야 합니다. 물론 기도의 시간에도 터져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집에 돌아가서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을 때도 터져야 합니다.
무릎을 꿇고 새벽에 나와서 혼자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도 하나님이 터트려주셔야 합니다. 새벽기도 못나와서 밤기도하는 사람은 그 사람도 터져야 합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 은혜의 샘으로 여러분들이 적셔지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런 신앙생활을 해야지만 우리가 비로소 이기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해야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까? ‘엔학코레’, 샘은 샘인데 목마른 자의 샘도 아니고, 주저앉은 자의 샘도 아니고, 능력있었던 자의 샘 도 아니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렸었던 과거가 있는 자의 샘도 아니고 ‘지금 부르짖고 있는 자의 샘’입니다.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기막힌 진리를 보여주십니까? 사실 아침의 주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과 하나님의 치료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기간에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 걸렸습니다. 그렇죠? 그러더니 오늘 오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건조하고 목마른 신앙생활을 하는 그 이유가 뭔지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심방할 때 “요즘 너무 어렵죠? 요즘 기도 안 하니까 어렵죠?”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본인이 “기도를 안해서 힘들어요.” 그렇게 말해도 “그럼요. 요사이 처한 환경이 참 어렵지요.”라고 말하면서 공감대를 형서합니다. 또 그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 “요즘 어렵죠?”라고 묻습니다. “IMF시대에 진짜 미치고 환장할 지경으로 고달픈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는데 IMF가 무엇의 약자냐고 물으니까 아이 미치고 환장하겠네 그래요. 그러면서 모든 곤고함의 원인은 무능한 김영삼 정부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대답이 성경적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환경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곤고한 이유를 많이 댑니다. 우리는 인사말로 그렇게 주고받고 합니다. 그렇죠? 건강이 약해지거나 집안에 커다란 후거(?)의 염려나 혹은 우리가 직장생활을 하거나 하는데서 어려움을 만나거나 할 때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일 뿐입니다. 내면의 이유는 바로 우리가 기도 안 하기 때문입니다. 왜 아멘 안하십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환경으로 계속 핑계를 대고 이유를 댑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환경은 죽을 때까지 우리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우리편이 아닙니다. 내 편이 아닙니다. 여러분, 적군이 변심해서 여러분의 품에 미사일 , 원자탄 모두 들고 귀순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환경은 우리편이 아닙니다. 환경은 언제나 우리가 극복하고 이기고 싸워야 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내가 곤고한 것은 IMF 사태, 아니면 고통받는 인간관계, 그리고 상한 마음, 상처, 이런 것들 때문에 내가 목마르고 핍절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아, 기도하지 않았구나’라고 깨달아야 합니다. 이걸 만약에 인정하지 않으면 성경을 거짓말로 만드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쓰여져 있는 히 11장을 보십시오. 저는 11장을 볼 때마다 가슴이 뜁니다. 왜냐면 이 사람들은 환경이 도와주기를 거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더 재미있는 것이 환경이 도와줄 것을 생각지도 않고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그들은 오직 믿음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들은 이렇게 환경이 도와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이기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신앙의 비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기도하지 못할 이유는 너무나 많습니다. 일평생 기도하지 못한 이유를 대지 않기도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대나 안 대나 못한 건 마찬가지고, 대나 못 대나 그것은 상관없이 우리 모두 기도하면 이처럼 촉촉이 젖어오는 샘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기도가 사라지고 나면 우리의 삶은 건조해지게 됩니다.
어렸을 때의 추억입니다만 국민학교 때 저희 동네에 밤나무골에 옹담샘이라고 있었습니다. 아침이면 세수하러 가기도 하고 개 오줌 누이려고 데려가기도 했는데 밤나무골을 죽 지나서 올라가다 보면 옹달샘이 두 개가 있습니다. 깨끗한 물이 흘러내려 옵니다. 내려오다가 몇 해가 지나고 궁금해서 그 다음에 올라가 보니까 물이 다 말랐습니다. 그 때의 그 어린 심정에도 참 이상합니다. 물이 계속 펑펑 솟아날 때는 진짜 방금 마셔도 괜찮을 것 같은 신선하고 깨끗함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물이 더 이상 솟아나지 않거나 혹은 물이 마르기 시작해서 이끼가 끼기 시작하고 벌레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그것까지 말라버리면 흙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 때에 그 샘을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매우 슬픈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런 비슷한 느낌을 못 가져봤습니까? 우물, 옛날에 맑은 물을 많이 길어먹던 그 어린 시절의 물을 청년이 된 다음에 갔는데 그 우물이 못쓰게 되어 먹지 못하는 물로 되어 있고 이끼들이 잔뜩 끼어 있거나 돌맹이들을 던져도 땅바닥에 돌 떨어지는 소리가 날 때 여러분, 뭐 그렇게 슬픈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하나님이 늘 이런 은혜의 샘을 우리에게 주셔야 됩니다. 이 일을 위해서 기도를 쉬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이 아니라 오늘, 어제가 아니라 오늘, 작년이 아니라 올해 그리고 지금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는 삶을 살고, 이런 은혜의 샘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 살면서 곤고하고 지쳤을 때에 ‘하나님!’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우리가 그런 은혜의 샘에서 생수를 마시는 것 같은 그런 변화가 우리에게 찾아와야지만 우리가 다시 은혜의 물을 마신 후에 죄악된 세상에 나아가서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고 믿음의 삶을 사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엔학코레의 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부르짖는 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간구하는 자, 주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부르짖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에는 우리나라에도 물이 많았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은 지하수를 탐색하여 펌프를 설치해주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 다닙니다. 사용자가 돈을 주면 그 사람들은 물이 어디에 있는 지 첨단 장비로 정확하게 탐지해줍니다. 어느 정도 정확한가 하면 얼마나 많은 물이 있으며 퍼내면은 어느 정도 지반에서 유입되는 지까지 계산을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한 번 해주고 나서 엄청난 액수의 돈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공장을 지어놓고도 용수가 그렇게 올라오지 않으면 공장이 망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그건 굉장히 중요한 작업입니다. 옛날에 어디 그랬습니까? 장비는 무슨 장비입니까? “펌프 어디다 박을 까?”그러면, 버드나무 꺾어서 “여기다 박으면 되겠네!”라고 합니다. 그런데, 박기만 하면 물이 펑펑 쏟아져 나옵니다. 지금은 어디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 기도의 약속은 어떻습니까? 박으면 물이 쏟아져 나오던 옛날처럼 기도하면 하나님이 이런 은혜의 샘을 여러분에게 터트려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약속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그리고 어느 때에든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고 주님 앞에 부르짖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메마른 삶을 은혜의 강물로 적혀주시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로 여러분들의 심령을 적게 만들어 주셔서, 험악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문제보다 큰 하나님의 해결을 보여주시고, 고통보다 훨씬 큰 위로를 주시고, 어려움보다 훨씬 큰 하나님의 축복을 보여주셔서 그런 풍성한 삶을 살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이렇게 부르짖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말씀의 감화와 기도의 열렬함
“이날에 낮 사분지 일은 그 처소에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핵을 낭독하고 낮 사분지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느9:3)
몇 주전서부터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제 이 느헤미야9장 3절을 가지고 기도와 말씀과의 관계에 대해서 그래서 우리들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기도를 하자 기도를 해야 한다. 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는 것이죠. 어 기도를 잘 하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물론 기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전 목사는 이런 유명한 말씀을 남겼습니다. “여러분 기도해야 합니다. 할 수 없습니까. 그러면 당신이 기도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잘 되십니까? 기도가 더 잘되기 위해서라도 여러분들은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 이 말을 바꿨지만 결국은 잘 되도 기도해야 되고 안 되도 더 열심히 기도해야 된다. 근데 사실은 기도가 잘되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기도를 많이 하고 있는데도 기도가 막 나오는데 사실 기도를 꼭해야 될 사람들은 기도가 안 나온단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첫 시간에 마음을 정하는 것 그리고 둘째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부르짖는 자에게 샘을 주셔서 영혼의 곤고함을 면하게 하신다. 그런 말씀을 드렸는데 몰아서 그러는게 아니라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이 기도가 안 될 때 그때는 사실 기도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기도에 있어서 고통은 오직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기도가 잘되는 고통이고 하나는 안 되는 고통입니다. 그러면 안 되는 고통은 자주 체험 하나가 알겠는데 생소하죠 잘되는 고통은 뭐냐하면 목사님 뭐 기도가 어떻게 잘되는데 고통이 있습니까? 고통이 있어요 그거는 아주 깊은 단계에 들어가면 고통이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깊은 기도의 영속으로 들어가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하나님 자신의 탄식하고 아파하는 마음을 기도하는 우리 자신에게 전수 시켜 주신다고 그러니까 나는 죄를 안 졌는데 죄지은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그 사람은 자기를 죄를 지었으면서도 죄지은 영혼에게 얼마나 심각하고 아픈 고통이 임하는지 모르는데 기도하는 나는 느끼는 거예요 어떤 때는 얄미운 때도 있죠 자기가 죄를 지었는데 자기는 좋다고 돌아다니고 중보기도하는 내게 고통이 임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하시는 거예요 이러한 축복은 기도가 아주 잘 되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지 안 되는 사람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런 고통이 찾아올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고통이 있는데 기도가 안 되는 거예요 아버지까지는 저절로 생각이 나는데 “하나님 아버지....”생각이 안나요 옆의 사람이 기도하면 가만히 들어보는 거예요 그러다 한마디 따라해 보고 그러다가 기도의 문이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 견디다 못해 일어날 때 그 허무함 이런 건 참 잘 아시겠죠 여러분들이 그 허무함 그리고 일종의 꼭 하나님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자기자신을 포함해서 대상을 알 수 없는 그런 어떤 배신감 같은 거 그 다음에 기도할 용기를 일어 버리는 주저하는 듯한 느낌 그렇게 기도하려고 애를 썼는데 기도가 안되고 나면은 그 다음에 우리 속에서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거봐 넌 안돼.. 넌 안돼...넌 가망 없어! 봐라 하나님도 너 싫어하시지 않냐? 응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는데 너 퇴근까지 하고 얼른 집에 가서 쉬어야 하는데 두 코스나 갈아타고 여기 와 가지고 컴컴한 교회당에 들어와서 너 한시간 반 동안이나 엎드려 있는데 니가 얻은 게 뭐 있냐? 다음부터 오지 마라 ...”이런 속삭임이 우리에게 들리는 것 같다고 그러면서 기도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럴 때 그런 경우 없는 분만 아멘해 보세요 어 다 있군요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해요? 누가 여러분 보고 자기의 영혼의 상태가 그렇다고 말할 때 여러분들은 뭐하고 충고해 주겠어요 어떻게 충고를 해 주어야 되겠어요? ‘내가 지금 이렇게 괴로운데 그러면 난 어떻게 해야 되나 ’ 뭐라 충고해 주겠어요 그럴 때 혹시 여러분 이렇게 충고해 주겠어요 "계속 기도해 쥐뿔이나 얼마나 했다고 해봐 계속 해봐!“ 말 하기는 쉬운데 본인으로서는 그게 굉장히 어렵단 말이죠 이런 경우는 있어요 어 기도를 하다가 그렇게 갑자기 기도가 깊이 막혀 오는 경험할 때가 있거든요 그 때 기도의 영이 무디어지게 될 때에 그 때 물론 이런 경우는 있어요 특별한 죄가 생각나면 회개를 하겠는데 하여튼 특별한 죄도 생각이 안나요 그냥 자기도 모르는 그 어떤 이유 때문에 기도가 갑갑하고 막혀있고 이 심령이 기도의 생활자체가 밑바닥을 드러내는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할 때 있죠 그땐 제가 사용하는 방법인데 날을 잡아요 날을 잡아서 교회 나와서 될 때까지 하고 들어오는 거예요 오늘은 내가 될 때까지 기도하고 간다. 그러면 세시간 내시간 다섯시간 혹은 여섯 시간 걸릴 수 있어요 그러면 씨름하다 보면은 어느 순간에 경우에 따라서는 좀 졸 수도 있습니다. 기도가 잘될 때에야 여러분 눈물 흘리면서 조는 사람 봤습니까? 그런 없습니다. 아무리 졸라고 그래도 졸음이 안 옵니다. 다 기도가 세게 나올 때는 졸려고 이러고 오늘은 조는 것처럼 기도하다가 가야되겠다. 해도 하나님이 딱 깨우셔서 우리를 기도하게 하시면 졸음이고 피로로 뭐고 다 사라집니다. 그러고 우리가 깨어 있는 영으로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만드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도가 잘 안되고 할 때 졸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안되지만 현실적으로 졸 수도 있잖아요 가끔은 닫힌 교회 가보면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엎드려서 기도하는 거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주여~~~“그러는데 저쪽 뒤에서 ”드러렁~~~~“그러다가 깨어나요 그러고 나면 체험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다리가 막 저립니다. 쥐가 나죠 그때 일어나지 마세요 또 버티는 것입니다. ”주여~~~“될 때까지 그러다 보면은 어느 순간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녹아 내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고 기도속으로 속 들어가게 됩니다. 근데 이제 그런 어려움이 뭐냐하면은 워낙 오랜 시간이 걸릴 때가 많기 때문에 기도가 불이 붙기 시작하면은 체력이 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효력을 못 볼 때가 많죠 그렇게 열립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기도의 영을 회복하기도 합니다. 근데 대부분 기도가 안 되는 경우에 그것이 무엇 때문인고 하니 두 가지 이유인데 하나는 마음이 기도를 향해 준비되어있지 않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 문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이 예레미야서에는 에스라의 부흥회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본토로 돌아온 호에 다시 이방 사람들과 결혼을 하고 타락하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에스라가 슬퍼하면서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여서 집회를 하는 것입니다. 근데 여기 보니까 그 완악하고 딱딱하게 굳어졌던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자복하는 얘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죄의 자복은 결국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체가 하나님께 하는 회개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나는 이러한 죄를 범했습니다. 이런 나쁜 짓을 했고 내 생활은 이러이러한 점에서 아주 나쁜 신앙 생활 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마음이 열리면서 자기의 죄에 대한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자복입니다. 근데 언제 이게 나오고 시작했는지 아세요? 언제? 낮 시간의 사 분의 일 동안 율법을 에스라가 낭독해줄 때 사람사람이 그 율법의 말씀을 깨닫기 시작하자 기도가 터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 생활이 메말라 있는 사람은 100% 말씀의 세계가 메말라 있는 사람이에요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으면서 늘 하나님 앞에 말씀속에서 은혜를 받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순간 순간 어떻게 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감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예배를 들이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이 만져주시는 말씀의 은혜가 살아 있는 사람들은 기도가 이렇게 바닥을 들어내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불붙일려고 머리를 드밀고 머리악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시골에서 불붙일 때 보면 커다란 이렇게 굵은 통나무도 걸처놓면 불이 붙습니다. 그러나 통나무를 산에서 베다가 척척 싸놓고서 성냥을 그대면서 불을 붙일려고 그래 보세요 자기가 무슨 성냥팔이 소녀에요 계속 붙여봐요 그게 붙나? 성냥통을 수십통을 갔다 그어대도 타지 않습니다왜 그렇게 해요? 불 붙히려면 우선 종이를 모으로 가나다란 나뭇가지를 모으고 불을 붙여야지 좀더 큰나무 좀더 큰 나무 장작 이렇게 놓고 그 다음에 쪼갠 통나무 큰것들 놓고 커다란 등걸나무를 올려 놓으면 불이 붙잖아요 기도라고 하는 것은 첫시간에도 말씀 드렸지만은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마음 자체가 하나님을 원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데 그 바닥에서 뭐가 나오겠느냐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 일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기도의 불이 붙여지고 기도의 불이 붙여지면 말씀의 은혜가 가속화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가지가 함께 순환 관계에 놓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둘중의 하나만 매우 잘하고 하나는 아예 은혜가 없는 사람들 쉽게 얘기 하면 나는 말씀에는 놀라운 은혜가 있는데 기도는 거의 안한다. 그 사람이 연구하는 보는 성경이 제대로 된 성경일 수가 없고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풀어내는 성경 그사람이 성경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 정상적인 기독교에 대한 지식일수 없단 말입니다. 왜? 말씀의 영과 기도의 영은 함께 흐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하신분은 성령이시죠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 앞에 간절히 간구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인 성령께서 신자들의 마음에 오셔서 기도할수 있도록 감화시키시고 변화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힘을 주시느 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서 불이 생기게 된다구요 그래서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여 삼창하고 그 고레고레 소리를 지르면 뭐가 될 것 처럼 그런 육신적인 기운가지고 기도의 문제를 해결할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때론 그렇게 하다가 기도가 트여서 되는 경우도 있지만 트여서 되면 간절하게 매달리는게 불쌍해서 하나님이 열어주신 거지 그런 육체의 뭐 그렇게 기도만 하면은 옆의 사람들을 한없이 불안하게 하는 사람들 있죠 책상을 덜덜덜덜...... 다리를 벌벌벌 떨고 누구를 칠라고 주먹은 처들고 그러면 안되요 중요한 것은 깨달을때에 우리의 마음에서 감화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냐면 말이죠 자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실때에 그때 말씀을 깨닫게 하시면 우리에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깨닫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감화가 있습니다. ”감화“라고 하는 뜻은 성경속에담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과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말씀과 관련된 자신의 삶을 보는 마음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바로 그런것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한번 찾아 보겠습니다. 8장8절을 보겠습니다. 아주 정확한 성경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한 것을 깨닫게 함에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 지라“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것은 율법을 그냥 낭독하고, 줄줄줄 성경읽기를 한 것이 아니라 낭독한 다음에 해석을 해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죽 읽음 다음에 율법에 통달한 학사 에스라가 율법을 죽 해설해준 것입니다. 해설해 준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뻔한 내용입니다. 여기보면 율법의 말씀을 읽은 후에 그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상황속에 그 율법이 적용되면 어떠한 삵을 살라고 율법이 말하는지 그것을 해석해 준 것입니다.에스라 자신이 바로 이런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에스라서에 보면은 에스라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한 학자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아주 익숙하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에 익숙하다고 하는 것은 아닥사스다 왕에 의해서 인정 받을 정도로 율법에 익숙한 학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율법에 익숙했을 뿐만 아니라 기도에도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9장과 10장에 보면은 에스라가 민족이 범죄하였을 때에 성전에 앞에 엎드리어서 애통하며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봅니다. 그는 말씀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함께 기도에 대한 강한 강력한 기도의 세계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기도의 사람이 성경을 읽으니까 읽고 나서 그 성경을 해석을 하니까 성경속에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마음이 학사 에스라 해석하는 순간에 말씀속에 담겨 졌던 하나님의 마음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율법을 읽으면서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에스라가 율법을 읽고 율법을 해설해 주니까 (? 잠시끊어 진 것 같아요^^)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지고 나니까 그 하나님의 마음이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잘못된 삶 자신들의 부패한 삶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도록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와 자신들이 살아가고 바의 차이를 보게 하시고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회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령이 터지면서 감화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기도에서 엎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다가 얻게된 놀라운 감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화가 일어나게 되니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기도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쏟아져 나온 기도 가운데 가장 커다란 기도가 무슨 문제이었냐 하면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자복하는 회개의 기도 이었습니다.
왜냐하면은 말씀의 통해 깨달은 가장 커다란 것이 자신들이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어서 돌아올 수 상황에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이제 모든 원수들 가운데 그들을 보호해 주시고 성을 다시 성전을 다시 지을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자도 보내 주시고 돕는 사람들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이 감동과 은혜를 입어서 주의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하는 하나님을 열망하나에 감동을 받아서 칠십년 가까이 살아왔던 많은 생활의 터전을 버리고 나쁜 이방인들의 칼날과 창날이 번뜩이고 있는 고국으로 돌아 왔는데도 그런 놀라운 은혜를 입었는데도 처음의 그 결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다시 우상을 섬기고 이방여인들에게 장가들고 이방여인들에게 자기 자식을 내어주는 이런 율법으로부터 벗어난 이방의 여인들을 처로 취하고 거기서 혼열족을 낳는 율법의 미워하고 있는 불순종과 죄악을 자신의 정욕을 쫓아서 행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것을 전에는 못 보았는데 말씀의 깨닫고 나니까 그 말씀이 자기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처지에 있는가 하는 것을 확 보게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터져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 기도가 여러분들 나는 말씀 생활은 정상인데 기도가 너무 약하다 하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말씀이 여러분들 속에서 제대로 심기고만 있다면 여러분들은 기도하지 아니하고는 베길수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기도를 하지 아니하면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았다고 생각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참된 감동 여러분들의 마음 깊은곳 영혼 깊은 밑바닥까지 흔든 하나님의 감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감동시킨 사람들은 그 말씀을 쫓아서 살기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어가게 만드는 것이 영원히 이 두가지가 무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는 말씀에 있고 그리고 그것에 그 말씀을 쫓아서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삶 이 두가지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승리로 이끌어 가는 수레바퀴의 두 쪽입니다. 누구도 이것 없이는 이 험하고 죄로 가득찬 세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도 승리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모든 신앙의 가르침은 거짓입니다. 나는 부흥한 모든 교회들의 부흥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부흥이 참된 부흥인지를 알아볼수 있는 시금석이 있습니다. 그 두 수레바퀴가 잘 굴러가는 교회인가? 어느 교회는 바르게 하기 때문에 부흥하는 교회도 있지만 어느 교회는 바르게 할려고 애를 쓰기 때문데 부흥이 안되는 교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겉 보습이 안닙니다. 속에서 진정한 부흥의 원동력 두 바퀴가 휼륭하게 굴러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굴러가지 않고 있다면 눈에 보이는 그 모든 부흥은 부흥이 아닙니다. 그리고 굴러가고 있다면 지금은 부흥하고 있지 않아 보여도 그들은 참된 부흥을 찾기 때문에 세상적인 부흥이 지연 되는 것 뿐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두 수레바퀴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감화가 있는 그 곳에는 반드시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서 9장 3절 같이 읽어 봅시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릎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 비장한 기도를 하겠다고 결심하는 겁니다. 어떤 일이 이었습니까? 2절을 보십시다.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만에 마치리라 한 것이라 “그러니까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릎쓰며 아버지 앞에 기도하기로 결심하기 전에 어떤일이 일어 났습니까?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하나님의 역사의 말씀을 깨닫는 일들이 일어 났습니다. 다니엘이 마음이 뜨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9장에서는 보통때 뜨거운 마음이 아니라 그 조국을 향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마음이 훨훨 불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 났습니다. 국사가 다 망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하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요새는 회사만 들어가고 말단 공무원만 되도 기도해야지 하면은 ”아 너무 바빠서요 ~~“하는 세상인데 이사람은 한 나라의 제사장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보통 기도가 아니라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릎쓰고 여호와 하나님께 금식하여 부르짓어 기도하고 간구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무슨 일로 이렇게 다니엘의 마음이 기도해야 되겠다는 처절한 마음이 용광로 처럼 불붙기 시작했습니까? 왜 이런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까?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깨달은 것입니다. ”아 칠십년이면은 포로 기간을 마치는 구나 !“육십칠년이 지난 때 이었습니다. ” 아 ! 이제 역사의 깜깜한 밤이 이제 끝나 가는 구나 ! 백성들이 치를 떨며 고생하며 이민족에게 고통을 받던 때가 끝나고 여호와의 영광의 큰 일들이 이제 일어나는 때이구나 “ 그랬더니 평소에도 나라를 사랑했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불붙는 사랑이 다시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을 평소에도 믿었지만 그 하나님에 대한 더 신뢰가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을 원래 사랑했지만 그러나 이 말씀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 밖에 소망이 없다는 생각이 이 다니엘의 마음에 불꽃처럼 타 올랐습니다. 그랬더니 불꽃처럼 기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말씀의 세계를 집어 던지고 포기하면 기도의 세계도 함께 던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와 같습니다. 기다란 막대기에다가 기다란 실을 잇고 거기에 돌맹이를 달았습니다. 그리고 바다에다가 돌맹이를 던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돌맹이만 던진다고 생각했는데 잠깐 있다가 보니까 돌맹이를 휘던지면서 돌맹이가 휙따라 내려가더니 그 다음에는 막대기 까지 가지고 바다속으로 함께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감화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앞에 열렬하게 기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이라도 열렬하고 뜨겁게 기도하고 싶으시면 하나님앞에 매달리십시오 뭐라고 매달리야면 하나님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감화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죄인의 돌같은 마음은 말씀의 망치로 깨뜨리시고차가운 나의 어름장과 같은 마음을 주님의 말씀의 불로 뜨겁게 녹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의 감화가 있을 때 (중간에 끊겼당) 여기도 우리들이 조금 생각해야 될 것은 있습니다. 이런게 있는데도 기도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그으름 때문입니다.
오늘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불이 붙습니다. 그러나 내일 기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는 이야기가 ”아무래도 말씀의 감화가 짧았나봐“ 근데 그럴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충분히 우리에게 감동을 주셔서 기도하게 하실 때 성경을 읽든지 경건 서적을 읽든지 혹은 말씀을 듣든지 감동을 받아서 우리의 마음속에 불붙을 때 그 때에는 그런때가 항상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이 불붙고 하나님의 감화가 일어나고 정말 그렇게 살지 못했던 날들이 서러워서 흐느끼는 일들이 항상 있느냐 말입니다.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그런 말씀을 향한 강한 마음이 우리에게 쏟아 나지 않습니까? 그때에 그것이 기도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영적인 게으름과 나태 때문입니다. 깨달았는데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유를 하자면 하나님의 가르처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달으면은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곡갱이 들고 목마르다고 헐덕 거리면서 샘을 팔려고 하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얘 얘 거기 아무리 파도 돌밖에 안 나온다. 돌이 돌파면 모하겠느냐? 여기 여기 내가 여기가 물을 묻어 놨다. “한개만 파면은 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파야지 물이 나옵니다. 요셉의 창고에 있는 먹지 않아도 베부릅니까? 가서 뚤어야지 되지 않습니까? 파야지 나오지 않습니까? 만약에 기도가 저절로 되는 것이라면 뭐하러 기도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항상 기도하라! 낙망하지 말고 기도하라! 기도에 힘쓰라!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기도하라! 그런 말씀을 우리에게 뭐하러 주셨겠습니까? 성경은 마치 오히려 기도가 우리가 하면 되고 안하면 안되는 것처럼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감화 그것으로 기도하게 되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기도하기 위해서 그 기도의 세계를 파고 들어가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고 노력해야 되는 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은 그런 깊은 감화와 감동을 경험했어도 기도하지 않으니까 다음에 오면은 감화가 안 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게으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계속해서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기도하면 기도하게 하실 때 그런 감화를 주실 때 하나님 앞에 부지런히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면서 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기도하고 싶을 때만 하면 여러분 기도하다가 갈 일이 별루 없습니다. 왜? 기도하고 싶을 때가 별루 없으니까! 뛰어가면 걸어가라 그러고 걸으면 서있으라고 그러고 서 있으면 앉으라 그러고 앉으면 누으라 그러고 누으면 범죄하라 그러고 범죄하면 거기서 죽어 버리라고 그럽니다. 이것이 우리 육체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쫓아가서 언제 그것을 믿고 언제 그것대로 살아 간다고 해서 그것에 순종한다고 해서 우리가 기도 될 것이니냐? 새벽기도 나올 때 물론 은혜 받으면 ” 아 새벽기도 나오게 하신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피곤을 이기고도 새벽기도 걸어가게 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 근데 솔직히 그럴때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럴때도 물론 있지만 ” 아후 새벽기도 하루만 쉬었으면....“ 그럴때도 물론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미국으로 휴가를 가신 예화 --그놈의 새벽기도는 여기까지 쫓아 왔냐?)
자기를 부인하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인간들인데 저절로 기도하고 싶어 지겠습니까? 우리는 말이죠 가만히 내버려 두면 우리의 내면속에서 부패와 죄악이 자라서 하나님 안찾고 하나님의 얼굴을 열심히 구하지 않고 제멋대로 게으르게 사람입니다. 어떻하면 영적인 생활에 게으름을 피울까 그거 궁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을때만 기도회 나오면 안되고 기도하기 싫을 때도 나와야 합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나오기 싫을때면 이찬송라도 부르세요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
우리 놀려고 이세상에 보냄 받은거 아니지 않습니까? 쉬게 할려고 우리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해주신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세상은 그렇게 달콤한것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부인하면서 나와야 합니다. 왜 그래야 됩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가 있으면서도 기도로 이어지지 않는 사람은 핑계거리가 없습니다. 영적인 게으르름이 그 감화를 기도의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신앙생활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좀 강단이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늦게 까지 필요없는 일하다가 자고 해가 중천에 떴을때야 일어나는 사람이 어떻게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솔직히 말해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말했지만 ”모든 사람이 새벽에 아침시간에 일어나서 기도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다“ 본인도 아침 시간에 약했나 봅니다. 근데 사실 교회 역사를 잘 살펴보면 부인할 수 없는 일은 하나 있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교회 역사를 보면 대부분의 영적인 사람들이 새벽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런거 같습니까? 그러나 저는 새벽시간에 무슨 신비한 힘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은 새벽시도가 나오지만 밤중에 여호와의 집에 서있는 사람들도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닌데 그러나 이제 그 걸출한 기도의 사람들은 아침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침의 기도에 실패하면 기도에 성공하기를 힘들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걸출한 사람들은 기도하고 침대에 왔다 갔다 한 사람들이 아니라 폭포수 같이 쏟아지는 수많은 일과 속에서 시달리면서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단 우리들이 아침시간을 기도시간에서 놓쳐 버리고 나면은 그리고 나면 오늘날과 같이 바쁜 시대에는 피곤에 쩔어서 이부자리위에 엎어질때까지 생활의 시케줄이 우리를 나주지를 않습니다. 집요하게 붙들고 밤늦은 시간까지 우리를 세상살이에서 벗어나질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요한 새벽시간에 나오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새벽에 나와 가지고 인사도 잘 하지 않습니다. 첫 입술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입니다. 첨와서 주님앞에 기도로 문을 열고 그리고 하루를 이길수 있는 영적인 자원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게으름이 있는 사람들은 말씀의 감화가 있어도 그런 삶을 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지런해져야 합니다. 몸이 아프신 분들을 제외하고 6시간 이상 자면 범죄라! 그렇게 게으르게 해가지고 어떻게 예수를 믿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안 믿는 사람들은 영혼의 평화가 있고 심령의 평강이 넘치는 대신 육신은 좀더 고달픈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직접 나가서 나 오늘 3시에 조퇴 해야 되겠다고 사장이 너 조퇴하냐고 하나까 어 요즘 영력이 딸려서 직장 생활을 못하겠다고 나 기도하러 가야겠다고 하면은 바로 짤립니다. 거기가서는 교회 핑계되면 안됩니다. 직장에서 교회 주보 만들고 그러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신앙 생활을 해 나가면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해 나가기 위해서는 안 믿는 사람보다 덜목고 덜입고 덜잘 각오를 해야 합니다. 안그러면 우리들이 이세상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 있겠십니까?
그래서 직장 다니면 직장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직장 생활에 관심이 없습니다. 메일 이런거나 좋아하고 신우회나 조직할려고 하고 말이죠 신우회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신우회 조직하는 사람들이 누구냐면은 메일 아침마다 지각하는 사람들이 신우회 다 모입니다. 점심시간에 늦게 들어오는 사람 신우회 모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손가락질을 받고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대에는 안 믿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외에 추가적인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 똑바로 믿기 위해서 자고 싶을 때 어떻게 잘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잠이 쏟아져도 눈 비비고 나와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십자가 짐같은 고생입니다. 고생스럽게 나오면 하나님이 고생만 실컷하게 하다가 돌려 보내십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나온 사람들한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공해로 쪄든속에서 말이지 거기서 이불속에서 1시간 더자는 것 보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신령한 천국의 은혜로 1시간 젖음으로써 힘있는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었는데도 안믿는 사람보다 덜 먹고 덜 자고 덜 놀았는데도 더 즐겁고 더 기쁘고 더 힘차고 활기찬 인생을 살아야지만 된다 말입니다. 볼 때 예수 믿는 사람들속에 에너지가 넘처야 되지 않습니까? 근데 교회가서 뭐 할 때만 에너지가 넘치지 직장에 가서는 내평생 소원이것뿐 빨리 끝내고 가는 것 그러니 복음이 전해지겠냐는 말이죠 게으름이 이런 삶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능력있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거룩한 감화가 역사해야지만 기도의 뜨거움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두 번재 이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거기에 감화를 입어야지만 기도하는 또하나의 이유는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역사가 일어 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방법이 어떻게 됐냐면은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하고 그 율법을 죽 해석해 주면서 그 에스라가 그 시대를 바라보면서 고통하고 아파하던 그 하나님의 말씀을 해설해 주기 시작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앞에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게 됐습니다. 그 기도가 바로 하나님의 바로 그시점에서 그민족이 하기를 원했던 기도입니다. (앞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야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기도회 안해서 되겠느냐 야 아들아 다 모여라 다들 모여서 기도해야 되지 않겠느냐 일단 모임 사람들이 뭘 기도할까 생각함 기도제목 많음 줄줄이 기도제목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마음은 자기의 죄를 회복하고 자복하는 기도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원하시는 (?) 바로 그 기도를 핵심적인 기도로 들어갈수 있었던 것입니다. 뭐 중간 거치고 생각을 골돌히 하고 다수결로 해서 정한 것이 아니라 단숨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핵심적인 기도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그것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예화 아버지 주머니에서 돈 훔치고 도망간 이야기.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근심, 자식의 돌아옴, 자식과의 이야기 깊은 숲 속에서의 대화 아빠 나 돈 좀 줘요”
그러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하는 기도는 경우에 따라서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 슬프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사람이 하나님이 보실 때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근데 사람 성품이 정말 개판이구나.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얘야 넌 언제 사람 될래........ 넌 참 돌 자체구나 ” 그래서 하나님이 마음 아파시고 근심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하면 제가 속 사람이 아름답게 변해서 온유하고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사랑이 넘치고 그러면서도 담대함을 잃지 않는 그런 겸손한 신앙의 인격이 될까 생각하는데 어느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와 이제 무슨일이 일어나나 보구나 하는데 “주여 주시옵소서 나를 고쳐 주시옵소서 주여 칼날로 나를 고치시 옵소서 내 뼈를 고치시 옵소서 ”뭐가 이상해요 알고 보니까 성형수술 할돈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고칠려고 하는데 자기는 얼굴 고칠 돈을 달라고 기도한다고 생각해 봐요 이거 코메디 아닙니까? 열심히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면은 최악의 코메디가 되는 것입니다. 막 기도하면서 땀이 피방을 같이 떨어졌다고 봐요 .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하는 기도의 열심은 이처럼 코메디처럼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는 그렇게 비지땀을 흘리면서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미친것입니다. 왜냐 기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트렉으로 들어서야지만 추진력이 생깁니다. 내가 막 하고 싶은데 그 기도에 들어서서 막 해봐요 하나님이 안 밀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갈려고 막 발동 걸어봐요 하나님이 잡아 댕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원하지도 않았는데도 기도가 트랙에 들어서면은 이 기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면 기도에 힘을 밀어 넣어 십니다. 그래서 기도가 쏟아져 나오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해산의 고통을 가지고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기도는 열정적일수록 코메디 같은 기도고 오히려 하나님을 화나게 만드는 기도가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듯이 모든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그런 코메디가 연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영적으로는 공황을 맞이 해서 거덜 났을 때에는 눈물 한방울 안흘리던 사람들이 돈줄 끊어 지니까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하고 나라의 경제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고 .. 기도 한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감각이 어디에 가있냐는 말입니다. 그런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정말 코메디 같은 거란 말입니다.
신앙적으로 거덜이 나서 공황이 들려 닥처셔 알거지가 되고 모두가 깡통을 차게 되었을 때는 눈물 한방울 안 흘리던 사람들이 지금 우리 깡통 차게 되었어요 다 먹고 살잖아요 그런데 옛날처럼 더 잘먹고 살지 못하니까 불편한 것입니다. 눈물 흘리고 하나님 앞에 도와 달라고 매달리니 이게 코메디가 아니고 뭐냐 이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할 수 있습니까 지금 하나님이 너무나 너무나 기도하기를 원하시는데 여러분 기도 안 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너무나 그 기도를 하기를 원하시는데 열심히 기도하면서도 핵심적인 기도는 피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 바뀌질 않습니다. 변하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열정과 내가 가지고 있는 기도의 간절함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후원을 받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의 감화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무슨 문제가 나오냐 하면은 말씀의 감화가 필요한 이유는 뭐냐 하면은 이 말씀의 감화가 있어야지만 숲속에 가서 아버지 앞에 깊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농담할려고 간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기의 돈이 필요해서 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마음이 그에게 부어지지 않고 아버지의 마음을 그가 이해하지 못하니까 아버지가 원하는 것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전혀 다른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핵심적인 문제를 비껴 간단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의 감화가 없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쓸데없는 편견이나 잘못된 생각 같은 것이 돌덩이처럼 굳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끔 아주 매우 잘못된 지체들이 교회를 찾습니다. 그때 나는 말합니다.“넌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도하지 마라 ” 왜? 기도하면 할수록 잘못되고 많이 하면 큰일나고 그런 사람이 금시기도 까지 하면은 진짜 큰일 납니다. 하나님은 들어 주신적도 없는데 내가 했다 이거지요 기도하까 내 이 잘못된 생각이 맞더라 이거지 그러고 우기면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잘못 기도한 사람이 이세상에 자기 말구 누가 있겠습니까? “기도하지 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까지. 깨달으면 기도의 제목을 마음속에서 떠올리지 말고 말씀의 감화를 받으면서 그 속에서 기도의 제목을 찾아라 그러면 하나님이 알게 하실 것이다.”
요즘은 하나님이 우리의 교회에 어떤 것들을 기도하도록 하나님이 시키고 계십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곳에는 올바른 기도의 제목을 찾는 일들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그렇게 때문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보다 급선무는 말씀의 감화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 지를 깨닫는 일들입니다. 그럴 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의 제목을 찾고 나면 그러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면 영적인 게으름을 극복하게 되고 기도하게 되면 삶 속에서 전에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었던 계명에서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순종을 하고 돌아오면 기도에 불이 붙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 오늘 말씀을 들었더니 “너희는 거룩하게 살아라“ 하는 말씀을 하나님이 주셨어요 은혜를 받았어요 영적으로 게으르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했어요 ”하나님 그렇습니다. 제 생활의 영적인 모든 무기력의 원인은 제 생활의 거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거룩을 나의 거짓 죄악 불결 더러움 이런 것들이 나의 삶속에서 거룩을 몰아내고 이 악한 것들이 진쳤습니다. 나의 삶 전체가 오물 투성이 삶이었습니다. 주여 눈물을 흘리고 회개 하오니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고 회개를 했는데 삶으로 실천하자니 용기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불결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돌아 오니까 다시 돌아와도 하나님 앞에 지난 주일날 내 가슴에 선명하게 다가 왔던 기도의 제목들이 해결도 되지 않았는데 내 마음속에 기도로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기도의 제목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의 감화 기도의 능력의 회복 순종하는 삶 그리고 순종하는 삶에서 비롯되는 기도의 담대함 이것이 함께 굴러 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거룩하게 살라는 계명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불결의 덩어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려고 애를 섰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마찰이 생겨났습니다. 고난도 받게 되고 사람들에게 오해도 받게 되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래도 신앙의 정절을 지키면서 깨끗하게 살아야 되겠다고 몸부림 첬습니다. 그리고 다 교회당에 들어오니까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찬송을 부르는데 눈물이 막 쏟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약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은혜를 주셨는데도 저는 이렇게 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주일 동안 깨달았습니다. 주님 권세 많으시지요 예수여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나는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줄을 압니다.” 그러니까 힘이 없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동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힘이 없는 것이 하나님 안에 있는 능력을 찬송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의 감화가 우리들에게 끊임없는 기도의 부흥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순종하는 삶이 창출되고 순종하니까 고난을 살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작은 돌맹이 하나에도 걸려서 못올라가던 이 수레가 그 큰 튼튼한 수레바퀴가 모터를 달고 돌아가니까 언덕도 넘어가고 산도 넘어가고 골짜기도 통과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말씀의 감화를 깊이 받아야 합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부어주시는시간에는 기도의 간절한게 다르게 다가 옵니다.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감화를 주실 때 그때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니까 우리는 기도의 영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 앞에 이런 말씀의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우리에게 감화를 주실 때 게으르지 않고 기도에 힘쓸것이라는 결심도 아울러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처서 기도에 복종시키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겸비함과 기도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 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7:14)
지난 시간에 주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기도 중에서 무엇이었습니까? 충분히 잊어버리셨습니까? 기도는 기도인데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였습니다.
자, 오늘 질문을 하나 하고 그리고 그 다음 주제로 넘어가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가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감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기도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했습니까? 바로 ‘영적인 게으름’입니다.
색다른 마음으로 한마디 기도하는 것은 깨닫지 못한 마음으로 일 만 마디를 횡설수설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해야 되겠다.’ 결심하는 사람들은 제일 먼저 기도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면 자기가 서 있는 위치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 내가 여기 있었구나.’ 하는 그 위치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깨닫고 나면, 하나님 앞에 말씀으로 말미암은 영적인 감화가 올 때에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기도의 세계 속에서 불가항력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강력하게 사로잡으셔서 기도를 퍼 붇게 하시는 그런 경험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사로잡으시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굴복한 사람들을 사로잡으시는 것입니다.
기도 안하려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로잡으셔서 기도를 강력하게 하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데 가끔 사람들이 그런 간증을 합니다. 그것은 자기를 사로잡은 그 하나님의 기도의 손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에 그것을 상세하게 말하다가보니까 자기는 마치 기도할 마음이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지, 그건 하나에 이야기가 그런 것이지 실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은 동시에 하나님을 붙잡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붙잡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기도생활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에 감화를 받으면 반드시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은 다음에는 항상 기도제목이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아! 이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겠구나.’ 그리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야 됩니다. 감화를 받으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영적인 게으름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종하지 않고 게으름 가운데서 기도하지 않으면 지금 계속되고 있는 말씀에 의한 감화도 조만간 에 사라질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법칙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기도와 겸비함’에 대해서 오늘 생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우리들이 기도에 응답 받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우리의 기도의 태도가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겸비함에 기초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겸비함, 겸손하게 낮아지는 것, 이것은 기도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생활에 있어서 근본이 되는 초석인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도 마찬가지고 베드로 사도도 역시 동일하게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들은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 할 때에 조카 롯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린 것을 보십시오. 창세기 18장 27절에서 그는 “티끌과 같은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나이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소돔과 고모라 성, 그 심판이 가까운 그 성에서 죽어갈지 모르는 조카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그는 자신이 티끌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기도가 하늘에 거룩한 향취에 휩싸이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자가 땅에 티끌에 구르는 일들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자의 무릎에 땅에 티끌이 묻고 땅에 흙이 묻을 때, 그의 기도는 천국의 거룩한 향취에 에워싸인 기도가 되어서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던 천사들이 잊지 않고 방문했던 곳, 하나님의 은혜가 그냥 지나가지 아니하고 늘 찾아왔던 곳은 어디입니까? 재를 무릎 쓰고,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옷을 찢으면서 기도하는 겸비함이 있는 그곳에는 항상 하나님에 은혜가, 하나님에 치료하는 사자가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 앞에 겸비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태도가, 기도하는 기도자의 마음 자체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겸비하게 낮아지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는 마치 하나님 앞에 배부른 흥정을 하는 것과 같은 기도가 될 것입니다. 유창하게 기도를 하고 ‘하나님, 내 기도제목은 이런 것입니다. 이 정도면 이제 알아들으셨습니까? 한번 해결을 해보십시오. 나는 당신이 내 기도제목을 들어주시는지 못 들어주시는지, 하실 수 있는지 없는지, 나는 당신이 내 기도제목을 들어주시는지 못 들어주시는지, 하실 수 있는지 없는지 나는 한번 당신을 감시하겠습니다.’ 이런 식에 배부른 흥정과 같은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겸비함, 겸손함은 진실과 통하는 것입니다. 모든 허위와 거짓을 벗어버리고 진실에 속한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낮아지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그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아름다운 기도가 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설교와 설교자가 그러하듯이, 예배와 예배자가 그러하듯이, 기도와 기도 자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그런 관계입니다. 사람이 천박하고 경박하면, 그의 기도도 그렇게 경박하고 경솔한 기도가 될 것입니다. 사람이 진지하면, 기도도 진지할 것이고, 사람이 변덕이 많으면 기도도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불같으면, 기도도 불같을 것이며, 그의 성품이 의로우면, 죄악을 차마 묻어두지 못하는 의로운 의를 구하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릴 것입니다. 사람이 사랑으로 가득하면,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람들을 세워주는 기도로 자기에 기도 자리를 눈물로 적실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의 변화는 기도 자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겸비해진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하찮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한 일, 자기 자신이 하고있는 일, 심지어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있는 것까지도 하찮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무시하고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무가치하고 죄로 가득 찬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모습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모습을 인해서 아파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들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변화되지 않는 모습과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자신의 존재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죄악 됨과, 자신의 태만함과, 자신의 무지와, 자기의 무능력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슬퍼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 매우 고통 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변화를 갈망하고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새롭게 되기를 사모하는 것도 겸비한 사람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모습에 만족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깎고 다듬기보다는 자신으로 만족하고, 그리고 얼마 되지 않은 자신이 이룬 성취들이 마치 자기를 통해 이루어진 것처럼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건강한 기도의 세계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겸비한 사람이 아니면 깨트려진 심령이 될 수 없고, 깨어진 마음이 아니면 상한 심령이 될 수가 없습니다. 상한 심령이 되지 않은 심령들이 여호와의 보좌 앞에서 자신이 물같이 녹아 내리는 거룩한 은혜에 겸비함을 경험할 수가 없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은 역대 하 7장 14절입니다. 이 구절은 구약 이스라엘에 온 역사, 나아가서 회와 개인에 신앙에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신앙에 회복에 한 법칙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악한 길을 떠나고, 겸비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그때, 하나님이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리고 이 땅을 고치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 약속에 의해서 죄악으로 치닫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의 회복, 그리고 참다운 믿음의 회복,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를 수시로 경험하면서 치유, 변화, 새로워지는 은혜들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겸비해지기 위해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겸비와 악한 길을 떠나는 것’에 상관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악한 길을 떠나는 것, 그것이 없이는 우리는 겸비해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그의 마음이 어떠하고 그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악한 길에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더군다나 악한 길에서 쉽게 돌아서지 않는 것은 교만한 사람에 표본입니다. 악한 길에서 있으면서도 그 길이 악한 길인지를 알면서도 돌이키지 아니하는 것은 우선 악한 자를 벌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자를 멸하시고 악한 자를 징벌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권세를 하찮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악한 길에 있으면서도 그는 자신에 그 악한 길에 서 있는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를 모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해 드리고 있는 악한 길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하찮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때우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낮게 평가하고 자신은 존귀하게 평가하는 교만한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그림에서 본 풍자. 어느 사람이 막 눈물을 흘리고 두손을 들고 “주여, 나에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 다음에는 손을 흔들면서 “오! 주여 나를 다 드립니다. 나를 써주소서. 나 를 보내소서”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야, 우선 거기서 좀 나와서 이야기하자.” 그 리고 그 다음 그림을 보여주는데 죄의 웅덩이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죄악에 웅덩이에 있는데 거기서 “나를 받으소서, 나를 써주소서, 나를 다 드립니다.” 그것을 갖다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죄의 덩어리를 “나를 받으소서” “너 받아서 뭐 하겠니” 하늘 나라에 쓰레기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타락한 그리스도인의 심리 자체가 죄악 속에 들어갈수록 경우에 따라서는 더 자기를 바치겠다는 고백이 풍부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양심이 자기가 서 있는 자리가 옳지 않다는 것을 무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증거하기 때문에 그런 부담에서부터 떨쳐지는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 나를 드립니다. 내 인생, 내가 여기 있사오니” 그렇게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면서 적어도 “나는, 내 자신은 하나님 앞에 다 드린다”라는 고백으로 죄악에 길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합리화하고 보상하려고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있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나를 받으소서” “널 받아다가 뭐 하니” “나를 써주소서” “큰일난다. 널 써서 어떻게 하겠니. 우선 거기서 나와라. 널 써주고 받아주고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우선 나와라.”
여러분, 오늘 왜 결혼하지 않은 자매들이 눈에 잘 안보이나? 저쪽에 많이 있구나. 자, 우리 탁 털어놓고 이야기해봅시다. “신앙만 좋으면 결혼한다”라는 그것은 괜히 남들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지, 전도사님께 내가 그랬습니다. “전도사님은 자매가 신앙만 좋으면 되지?” 그랬더니 아주 씩씩하게 “아닙니다.” 전도사까지 그렇게 말하는데 그 밑에서 배우는 교인들이 다 그렇겠지. 어떻습니까? 자매들은?
생각해보십시오. 기왕이면 교제를 하고 결혼하려고 하는 형제가 얼굴이 잘 생겨야지 좋지 않겠습니까? 아닙니까? 아니, 결혼하신 분은 대답하지 마시고 결혼 안 한 사람이 대답을 해야지. 그렇지요? 아니, 물론 신앙은 없고 얼굴만 기생 오라버니 같아서야 안 되겠지만, 똑같이 신앙이 좋은데 돈도 똑같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얼굴이 죄송하게 생긴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아주 진짜 깎아 만든 석고상 같이 반듯합니다. 그러면 누가 좋겠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대답 안 하면 오늘 안 끝날 것입니다. 누가 좋겠습니까? 대답을 해보십시오.
결혼 안 한 사람은 누구나 다 자격이 있습니다.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전자를 원한다면 제가 소개시켜줄 수 있습니다.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지요. 얼굴도 예쁘게 생기고 그 다음에 까만 연미복을 입고 진짜 예쁘게 생겼다고 칩시다. 그런데 계속 말하는 겁니다. “자매, 사랑해. 난 자매 밖에 없어. 결혼하면 우리는 행복하게 살 거야.” 그런데 그 사람이 허리쯤 차는 똥통에 빠져있습니다. 그걸 어떡할 것입니까? 뭐라고 말해요. “야, 사랑도 좋지만 우선 나와라. 목욕부터 하고 그리고 사랑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그래도 물에다 씻어놓으면 좀 쓸만한 것 같으니까 일단 우선 씻고 이야기하자.” 그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말, 많은 헌신을 맹세합니다. 그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선 지속적인 악에 자리에서 나와야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악한 길’이라는 것은 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한번 스쳐 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 걸어온 길입니다. 죄악에 길입니다. 오래 동안 습관적으로 반복된 가운데 자신의 삶에 일부분인 것처럼 떨어질 수 없도록 그렇게 자신의 인생과 연관된 그 자리에서 나와야된다. 악한 길을 떠나라. 그래야만 그 다음에 비로소 기도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회개의 경험들을 자꾸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회개의 경험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악한 길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돌아왔을 때, 우리는 급격하게 우리가 가난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왜 죄를 버렸는데 마음이 가난하고 겸비해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죄는 우리에게 번뇌와 고통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평화와 보호도 가져다줍니다. 그렇지요. 무엇인가 범죄하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동안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범죄를 하고 나면 즉시 평화가 밀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늘 말씀드리는 신앙생활에서 항복으로 말미암아 찾아오는 평화인 것입니다. 직장생활에서 늘 불신자들이 가득 찬 생활 속에서 참다운 신앙생활, 신앙 인답게 직장생활을 하려고 애를 쓰는 한 직장생활에 어떤 점에서 평화를 찾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아예 포기하고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묻으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을 감추고 대충 살아야 되겠다 라고 마음먹으면 평화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평화가 없지만 한쪽이 항복하고 나면 축포가 터지고, 비둘기들이 날고, 꽃 풍선이 하늘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길에서 떠나면 오래도록 걸어와서 평안을 주었던 그 길에서 ‘이 길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깊이 깨닫고 돌이킬 때, 그때에 인간은 한없이 두렵고 외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죄악은 마치 오래 동안 신고 다녔던 신발과 같이 우리를 편하게 만들어줍니다.
제 이 구두 얼마나 닿았는지 구두 뒤축 이 두꺼운 게 닿아서 붙어 가지고 두 번을 갈았습니다. 그래도 바꿀 생각을 안 합니다. 돈이 없어서 구두 살 돈이 없어서 구두를 못 사는 게 아닙니다. 집에 어디 뒤져보면 구두 티켓도 하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 삽니다. 왜냐하면 새것을 사도 이렇게 편하지 않습니다. 그냥 신고 다닙니다. 구두 주걱이 없어도 밟으면 들어가고 빼면 나오고 이게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적당히 흠집이 나 있기 때문에 이게 어디 가서 부딪혀도 부담이 없고 목욕탕에서 벗어나도, 누가 훔쳐가도 부담이 전혀 없는 그런 신발입니다. 상표까지 너덜너덜하게 다 지워질 정도로 신었으니까 훔쳐가서 슬리퍼 신고 집으로 돌아와도 하나도 눈물 흘릴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편한 게 죄입니다. 그렇게 오래 동안 신고 온 신발 하나 바꾸는 것도 힘이 드는데 악의 길입니다. 이건 오래 동안 걸어 온 길입니다. 거기서 돌이킬 때 얼마나 커다란 외로움과, 그 다음에 죄는 적당히 우리를 보호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십시오. 편안한 사람이 둘입니다. 하늘의 거룩한 은혜에 휩싸여서 편안한 사람이 있고, 영적인 게으름에 있기 때문에 편안해서 안락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일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살았으나 이미 죽은 자다” 여기서 ‘일락’이라고 하는 것은 막 쾌락을 즐기려고 기를 쓰고, 노래방을 다니고, 술을 퍼마시고, 단란 주점에 출입을 하고 무슨 그런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없는 삶, 깨어있는 긴장이 없는 신앙생활, 이 모든 것들이 일락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려는 자기부인이 없는 삶, 그리고 자기를 이기고자하는 거룩한 결의가 없는 삶, 기도하기를 싫어하는 자신을 끊임없이 쳐서 기도하게 하는 자기부인이 없는 삶, 이런 삶이 모두 악의 길에 서 있는 삶이고 일락을 좋아하는 자기 삶입니다. 이런 속에서는 경건한 영성이 깃들 수가 없습니다.
그 악의 길, 오래 동안 걸어가던 길, 거기에서 돌이켜 설 때에 우리는 갑자기 외톨이가 된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죄가 가져다주는 독특한 평화가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악한 길에서 떠날 때 상대적으로 주님을 더 의뢰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죄도 믿었습니다. 죄가 가져다주는 평화도 적당히 즐겼습니다. 이제는 자기가 죄를 버렸고 죄가 자기를 버렸습니다. 버림받았습니다. 자기도 죄를 버렸습니다. 이제는 죄, 악한 길과 원수 맺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올 때 이제는 하나님을 향해 절박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우리가 기도 생활에 이런 마음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주 나를 박대해도 전 갈 때가 많습니다. 한번 주님한테 비벼보지만 하나님이 날 버리셔도 나 잘 나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식으로 배부른 흥정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 세상이 주는 축복보다 더 많은 것 줄 자신이 있습니까?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해주시면 내가 주님을 믿어드리겠습니다.’ 이런 식의 사행심어린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겸비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악한 길에서 먼저 돌이켜 서야지 만 겸비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한 길을 걸으면서 우리의 자랑도 그 악한 길에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부요 하게 해서 하나님만 붙잡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많은 잘못된 것들, 그릇된 사랑, 그릇된 요소, 그리고 그릇된 선택 이런 것들이 모두 죄악 된 세상에 있습니다. 악한 길에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돌이킨다’라는 것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죄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죄가 결국은 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인데 죄의 길에 들어서서 악한 길로 계속해서 걸어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고 거기로부터 돌아서라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이렇게 반창고처럼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죄가 한번에 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 악의 길에 걸어간 것은 근본적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악에 대한 깊은 사랑’입니다. 인생에 대한 잘못된 목표입니다. 인생에 대한 잘못된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말 것들을 사랑하고 사랑할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죄가 원인이 되어서 그 악한 길속에 지속적으로 서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뜯어고친다’는 이야기는 삶 전체가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여러분, 왜 직장을 오래 동안 다니던 사람들이 실직을 했을 때, 나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 사람들이 정치를 못하니까 경제가 어려워졌다’고 하는데 경제가 어려워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막 죽어 가는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니까 사람들이 막 목을 매고 죽는 것입니다. 그 상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정에 가서 딸이 보는 자리에서 “아빠, 그러면 안돼” 뿌리치면서 아파트에서 뛰어내려서 거기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 딸이 그 자리에서 다 본 것입니다. 그 아이가 아주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고쳐지기 전에는 결국은 그 광경 자체가 일평생 그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를 보는 사람과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집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까짓 것 살기 위해서 직장 다니는 것이지 직장 다니기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직장을 그만둘 때 사람들이 그렇게 투신 자살하고, 약을 먹고, 아니면 그냥 길거리에 차에 뛰어들어서 죽어버리는 극단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결국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자기의 사랑과 생각, 자기가 이제껏 인생에 가지고 있는 계획도 계속 걸어왔던 그 자리에서 그를 이렇게 강제로 떼어 났을 때 그것을 떼어놓으면 그 다음에는 사랑이나 모든 것들이 다시 정립이 되어서 새로운 인생을 걸어갈 수 있는 것들이 사상적으로 준비가 되어야 되는데 그런 게 준비가 안 된 사람은 그 자리에서 뜯어다가 다른 길에다 놓는 것입니다. 걸어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지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악한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이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서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더군다나 이것이 우발적인 죄, 이런 것들은 그래도 비교적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하는 ‘악한 길’ 이것은 쭉 오래된 오래 걸어왔던 길입니다. 인생 그 자체입니다. 거기로부터 돌이켜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이켜서고 겸비해지고 하나님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이 듣고 이 땅을 고치신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시면 이 땅을 고치신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스라엘이 그 긴 역사에서 몇 번이나 그 땅이 고쳐지는 것을 경험했습니까? 몇 번이나 경험됐습니까? 구약 전체를 통 털어서 9-10번 정도 밖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교회 시대로 들어와서 생각을 해보십시오. 정말 여러분들은 한 나라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겸비한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의 거룩한 부흥이 그 교회를 에워싸고 그 교회를 통해서 온 땅을 치유하고 고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여러분들은 보았습니까? 매우 희귀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몇 백년 만에 그런 일이 한번 일어나면 우리는 온통 예전에 가졌던 기독교 신앙에 전체를 다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커다란 충격을 경험합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만큼 악한 길에서 돌이켜 서기가 힘들다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발로 걸어가던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것은 발목을 잘라내는 것만큼 힘들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사랑이 있고, 거기에 인생에 계획이 있고, 거기에 꿈이 있고, 거기 습관이 있고, 거기에 자신의 인격이 자신에 걸어가는 악한 길과 함께 부착되어 있습니다. 떼어놓을 수 없게끔 자기를 형성해주는 길이 죄악의 길입니다.
죄악의 길을 걸어간 사람은 그가 걸어가서 죄악의 길이 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죄악의 길이 그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그는 신토불이가 된 것입니다. 악한 길과 악한 사람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떼어놓을 수 없는 신토불이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 사람을 뜯어다가 악한 길에서 떠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 박혀있는 패역과 악한 것이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절망만 해서는 안 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를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악한 길, 그 악한 길에서 맛보는 형통함 때문에 하나님께로 기울어져야 할 마음이 얼마나 자주 세상을 향해 기울어져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그 참 사랑과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참된 계획과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목 매이는 긍휼을 우리들이 이해했다면 우리는 그 악한 길을 보다 더 훌륭한 계획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음을 깨달아야합니다. 그래서 신토불이처럼 악한 길과 악한 사람이 하나 되어버린 그것을 끊어버릴 수 있는 결단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한없이 낮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세상의 길, 악한 길을 걸어가면서 우리의 인생에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우리의 인생에 진정한 보호자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절대 의존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모든 역사는 이런 신앙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절대 의존적인 신앙, 하나님이 없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 그렇게 겸비하게 된 마음, 그 마음이 기도로 가득 찰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통해서 역사 하시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일 먼저 악한 길에서 떠나야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지적 받고 있는 죄가 있을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지적 받고 있는 악한 길이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면 순간순간 떠오르고 말씀을 회피하려고 하면 회피하려고 할수록 점점 크게 다가오고 있는 여러분만에 독특한 악한 길이 있을 것입니다. 그 패역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버려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더 깊이 눌러붙기 전에 지금이 가장 떠나기 쉬운 때입니다.
처음 깨달았을 그때가 가장 떠나기 쉬운 때입니다. 그리고 그 처음 깨달았을 그때가 바로 거기로부터 떠날 수 있는 준비가 가장 잘 되어있는 때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알기만 하고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이 말씀에 많은 감화를 받는다고 할 지라도 그것은 결코 능력 있는 기도의 생활로 이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픔을 감수해야합니다. 홀로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러나 거기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악한 길을 떠난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마음을 열고 주님이 우리에게 이제껏 가르쳐주셨던 신앙의 지식들을 활용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주님의 성품이 어떻습니까? 그가 어떤 분이십니까?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이 이제껏 까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던 악한 길에서 돌이켜 서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로 돌아설 때, 어쩌면 그는 잠시 잠깐동안 오래 동안 정들고 신토불이처럼 자기와 분리될 수 없었던 악한 길에서 떨어져 나온 커다란 두려움에 휩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렇게 당신을 위해서 가증하고 거짓되고 악한 길을 걸어가던 자리에서 돌이켜서는 사람을 홀로 버려 두시는 하나님이라고 여러분들은 배웠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서 선한 결심을 하고 악한 길이 가져다주는 모든 안락함과 안일함을 잘라버리고 고난으로 가득 찬의에 길로 들어섰을 때 “그래 들어섰으니까 고생 실컷 해봐라” 하고 버려 두시는 하나님이라고 여러분 배우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의로우심 사이에서 혼돈을 느낍니다. 많은 지각 있는 선조 들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잘못 깨달을까봐 노심초사한 흔적이 역력히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길에서 돌이켜서 떠날 때 우리는 평소에 우리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고가 의심될 정도로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아! 이렇게 신토불이가 될 정도로 악한 길에서 잔뼈가 굵은 나 같은 인생도 지난 인생에 죄 가를 묻지 아니하시고 불붙는 긍휼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구나’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하는 그런 놀라운 역사가 언제 일어납니까? 악한 길에서 떠날 때, 그때 겸비해지게 되고 그렇게 겸비해질 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임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무가치한 존재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을 때 하나님은 비로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안에서 존귀한 존재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일 먼저 악한 길에서 떠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존 라일’은 말했습니다. “죄는 기도를 죽이고 기도는 죄를 죽인다”고 말입니다. 악한 길에서 떠나서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는 급속하게 성장할 것이고, 우리를 악한 길속에서 번영을 꿈꾸며 살게 만들었던 죄는 급격히 죽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기도에 게으르면 우리의 성결에 영은 급속히 메마르기 시작할 것이고, 그리고 악한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죄악 된 성향은 우리 속에서 가시덤불처럼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일 먼저 겸비해지기 위해서 악한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삶에 진정한 개혁 없이 기도의 개혁을 꿈꾸는 것은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삶에 진정한 변화 없이 우리의 기도만 바꾸려는 것은 그것은 종교적인 노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관심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능력 없는 삶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덧입기를 원합니다. 우리들이 깨어있는 기도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의 깊이를 알고 그의 법도를 배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배우고, 익히고, 깨닫기를 원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마지막에 이 모든 것들은 식물의 뿌리와 같아서 줄기와 같고, 잎과 같고, 꽃과 같아서 마지막에 원하는 것은 아름다운 열매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열매, 그것을 위해서 뿌리가 있고, 줄기가 있고, 잎이 있고, 꽃이 피는 것처럼 우리의 기도도 우리의 모든 지식도 마지막에는 결국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되게 하려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악한 길은 삶에 관련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돌이켜 서지 아니하면 우리는 결코 죄가 우리를 보호해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떠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것과 같은 그런 겸비한 상태로 들어갈 수가 없다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람들은 이제 이런 의문을 갖습니다. 그렇게 상한 마음이 되고 겸비한 마음이 되는 게 내가 하는 것이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가. 누가 주시는 것 같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니까 어떤 사람은 목사님이 준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주는 게 아닙니다. 내가 줄 수 있으면 다 나눠주지. 우선 내가 많이 갖겠습니다. 다 나눠주지. 그럼 누가 주시는 것 같습니까? 삼총사, 누가 주시는 것 같아요. 도움이 안 되네. 누가 주시는 것 같아요. 그렇게 겸비하고 깨어진 마음을 내가 스스로 가집니까? 하나님이 주십니까? 여기에 대한 답을 오늘 우리들이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이나 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과 겸비하게 되는 것이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십니다. 정말 하나님이 겸비한 마음을 주십니다. 보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자. 이게 무슨 뜻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이런 의미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깊이 자기가 가난해지고 겸비해져서 자기가 막 깨어지는 사람들은 대게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옛날에 깨어졌던 사람들이 또 깨어지는 것입니다. 깨진 바가지가 잘 깨진다는 말이 있듯이 뭐 그런 말은 없지만 하여튼 그건 확실합니다. 한번도 깨어져 본적이 없는 사람이 깨어지는 것, 그것은 정말 보배로운 일이기는 한데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물론 깨어지기는 깨어집니다. 그런데 깨어진 사람들이 잘 깨어집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깨어지는 달란트를 받아서 그런 게 아니라 그게 뭐 달란트 이겠어요. 그렇게 깨어지는 이유는 무엇이냐. 금이 갔기 때문에 깨지는 것이 아니라 금이 가요. 금이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번 깨진 것이 계속 금이 가서 툭 건드리면 깨지고, 툭 건드리면 깨지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늘 깨진 마음이 될 것이 아닙니까? 금이 갔으니까. 건드리면 깨지고.
여러분, 은혜 받은 사람이 강팍해지는 것 보셨습니까? 이것은 은혜 안 받은 사람이 돌이라면 이것은 돌 중에서 ‘짱 돌’입니다. 완전히 진짜 망치를 내리쳐서 불이 번쩍거려도 안 깨집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 강팍해지면 무섭습니다. 불신자보다도 더 무섭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진 바가지가 또 깨집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맺혔기 때문에 깨진 것이 아니라 그 깨지는 것이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이전에 하나님에 얼굴 앞에 서는 그런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맛보았기 때문에 어느 순간 마음이 변하고 상황이 달라져서 하나님에 거룩한 영광에 얼굴빛 앞에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딱 깨닫게 되면 그 얼굴빛에서 소외된 가운데 캄캄한 죄악의 길에서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두 사이에 비교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겸비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정답이 나왔습니다. 겸비하게 하시는 분은 누구시냐. 우리의 심령이 깨어진 심령이 되게 하고, 상한 심령이 되게 하시는 것은 물론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상한 심령이 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영광에 얼굴빛 앞에서 살아가는 삶과, 주님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삶 사이에 축복과 비참함을 비교하려고 할 때 우리는 가난한 마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이 생겨나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겸비하게 만들어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비해지기 위해서는 무얼 하면 겸비해지겠습니까? 구약의 백성들처럼 한번 재 만들어놓고 거기 한번 앉아볼까요? 베 사다가 베옷을 입고 찢어져도 좋은 폐품 옷 입고 한번 찢어볼까요?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겸비해집니까? 그래서 겸비해질 것 같았으면 매주 옷 한 벌씩 버려도 우리는 옷만 찢으면서 겸비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겸비해지는 것은 그런 외부적인 조건들 때문에 겸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생각해야합니다. 악한 길에서 패역을 고치지 아니하고 지속적으로 여러분들을 향해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애써서 외면하면서 그렇게 평안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할 때에 그런 편안하고 안락한 신앙생활 속에서 희생되고 있는 여러분들에 영원에 기쁨, 영원에 진정한 생명,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살아가는 참된 즐거움,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빛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만이 맛볼 수 있는 거룩의 기쁨들을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전에 하나님 앞에 누렸던 처음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살아갔던 그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들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안일하게 살아가고 주님이 지속적으로 나를 향해 악한 길에서 떠나도록 지적해주시는 것들을 외면하기 때문에 그런 기쁨과 그런 은혜를 잃어버리고 살아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인생에 시련 속에서 비참하도록 짓밟히며 지며 실패를 운명으로 삼고 그 운명에 코 꾀어서 신앙도 모두 팽개치고 그렇게 세상을 향해 아부하며 살아보지만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것은 다 뚫어진 전대에 쏟아진 동전 몇 닢 밖에는 남은 것이 없는 실패한 인생을 그렇게 살아가는 것, 자기 것이라고 움켜지고 돈을 사랑해보지만 마지막에는 건강도 잃고, 자기 몸도 잃고, 돈도 잃고, 가득 쌓인 것은 죄 짐 밖에 남은 것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를 생각합니다. 그가 돼지우리간에서 결정적으로 돌이키게 된 이유는 오직 두 가지 때문 이였습니다. 거기서 쥐엄 열매라도 배부르게 먹고싶어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쥐엄 열매를 찾았고 그것을 달라고 했지만 그것조차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가난한 결핍 속에서 그가 단지 그 결핍만 봤더라면 그는 아마 거기에서 한을 품고 그 결핍 속에서 죽어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결핍 속에서 생각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풍족한 품 군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집에 있는 부요 함과 아버지 집을 떠난 이 실패 속에서의 궁핍함이 비교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전에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할 수 없었던 많은 이유들이 이제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한 사람이 악한 길에서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반드시 있습니다. 없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데도 분명히 이유가 있고 하나님을 거슬리고 불순종하는데도 반드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까닭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때때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고 악한 길에 서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는지를 생각해야됩니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우리의 궁핍한 영혼과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그분의 영광스러운 얼굴빛 앞에서 우리들이 살았더라면 우리가 얼마나 부요 한 것들을 많이 누리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지 에 대해서 비교의식을 가져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 앞에 깊이 통회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지금 있는 처지가 워낙 궁핍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에 얼굴빛 앞에서 맛보는 그 영광스러운 기쁨과 큰 은혜에 대한 사모함 때문에 이전에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악한 길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던 우리의 모든 그럴싸한 이유들을 모두 패기 처분하고 이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돌아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만 하면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의식하고 겸비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살아가지 않고 있습니까? ‘주님의 얼굴을 구한다’고 하는 이 의미는 존재자체가 ‘하나님의 면전에 선다’라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 얼굴을 돌이키시는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눈을 악인들에게 고정시키기 위해서 당신의 얼굴을 돌이키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추며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여 드시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죄에 대해서 말하되 둘러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피할 자리는 남겨두고 죄에 대해서 말하도록 그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읽어도 자기가 피할 자리는 마련해놓고 성경에 진리를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한풀 접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신앙에 회복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최고의 소망은 우리들이 있는 모습 그대로 벌거벗은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옳든 그르든 이제는 우리의 합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든지 나는 그 하나님이나를 판단하실 때 ‘주는 의로우시고 그의 판단은 정직 하시다.’ 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각오와 준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축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 존재 자체가 주님의 거룩한 얼굴빛 앞에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죄는 죄대로 드러나고 선한 것은 선한 것들로 드러나고 비참하고 미련한 것은 미련한 것들로 드러나서 형벌과 징벌을 통해서라도 하나님 앞에 새로운 관계를 가진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주시는 축복은 구해도 얼굴을 구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든 모습, 악한 길과 신토불이가 되어버린 자신의 모든 존재 자체를 그 분의 얼굴빛 앞에 드러내 놓는다는 것은 이제 주님이 우리를 판단하시는 데로 받아들이고 산다라는 거룩한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이 쉽게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시는 간증이 우리들에게 매우 희소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 행복한 것, 주님이 거기 존재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 한없이 기쁜 것,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여러 가지 이유나 끄나풀 때문에 주님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관계는 우리들이 주님 자신을 알고 하나님의 등뒤에서 살아가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고통과 하나님의 얼굴빛 앞에서 살아가는 인생에 진정한 행복에 차이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지를 깨닫고 그래서 주님의 눈빛 앞에서 살아가고 싶은 이런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하나님 자신의 얼굴을 구하는 그런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한번이라도 좋으니 정직하게 저에게 깨닫도록 저에게 말씀해주옵소서. 주님, 내 마음이 아프더라도 저에게 정직하게 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이런 기도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보여주시는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고치고 새로워지는 삶을 살겠나이다. 하는 이런 진실한 고백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 없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겸비해지는 삶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악한 길에서 돌이켜 서게 될 때 우리는 겸비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한없이 겸비해진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기뻐하실 때 우리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기도가 주님을 기쁘시게 할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런 것들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겸비해지는 것,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무가치하게 생각하고 자기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며 자기의 삶 속에 오히려 자기 존재 속에 깊이 뿌리 박혀있는 그런 죄악성들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고쳐주시고 치유해주시는 거룩한 은혜를 사모하며 주 앞에 나아가는 이런 사람들에 겸비한 기도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가장 커다란 적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부요 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도록 우리를 단련시켜주고 우리를 계속 그렇게 가르쳐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깨어진 마음 없이도 신앙생활을 하고 상한 심령 없이도 하나님 앞에 나아옵니다. 더 가공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넉넉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재앙인 것입니다. 깨어진 신앙에 우선적 특징은 ‘깨어진 심령’입니다. 겸비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다고 믿는 그런 마음, 자신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만한 아무 자격이 없고 나의 진정한 자랑이 주님 자신뿐이라고 하는 진정한 사랑의 고백,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삼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모본을 배우게 됩니다. 그분, 전능하신 하나님 이셨습니다. 창조주 이셨고 온 땅과 하늘에 뛰어난 지존하신 하나님의 아들 이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기도하시는 광경을 기록한 구절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사도들을 세우시기 전에 밤이 맞도록 아버지 앞에 기도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에 모습이나 마지막 잡히시기 전 날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시던 주님에 기도를 생각합니다. 죽음이라는 잔을 앞에 놓으시고 “나의 뜻대로 말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후에 이 땅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그리고 이 땅에 세워지는 교회들을 위해서 아버지 앞에 목놓아 기도하시던 그 모습 속에서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권능을 읽어낼 수가 없습니다.
거기서 죽은 자를 살리고 풍랑 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오병이어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시던 그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놀라운 위엄과 권세를 읽을 수가 없습니다. 권세와 능력은 간 곳이 없고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는, 땅에 엎드리는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땅에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던 그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깨어있어 달라”고 간청하시면서 하나님 앞에 홀로 매달리는 그 모습 속에서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연약하기 그지없는 한없이 겸비해지신 인간 예수를 읽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도 기도 속에서 경험되어야 할 온갖 고난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친히 티끌과 같아지는 경험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이 땅에 구속의 사역을 위해서 아버지 앞에 기도하시고 자기가 떠나가고 나면 이제 이 땅에 홀로 남게될 교회와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실 때 주님의 마음은 부요 한 마음이 아니라 이 백성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전능하신 보호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그는 자기의 권능과 기적을 기도 속에서 믿으신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부탁했습니다. 이방인들의 선교의 아버지요 헌신과 정결과 그리고 복음 전파에 열정에 있어서 타에 추종을 부러워하는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삶을 살았던 바울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과 작별하면서 그는 말했습니다.“내가 너희를 그 은혜와 말씀께 부탁하노니” 라고 말했습니다. “주와 및 그 말씀께 부탁하노니”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자신의 권능과 그 놀라운 권세를 모두 감추고 기도할 때마다 자신들은 티끌과 동일하게 되어진 것을 봅니다. 사도들도 그러했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까지 그러하였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에 엎드리셨습니다. 그분이 비천하게 낮아지신 그 겸비함을 우리는 기도 속에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자라서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높은 자리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나님에 은혜가 흘러들어 오기에는 우리들이 너무 높은 자리, 교만한 생각과 그리고 자신을 매우 귀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매우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이러한 교만한 착각들이 우리에게로 밀려오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차단해버리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권세 있고 능력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실 수 있었던 것은 틀림없이 그분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렸을 때 한없이 겸비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났을 때 권세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셨을 것입니다. 핍박을 받으셨으나 비굴해지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나약해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모든 강인함과 그런 모든 삶에 대한 의연함, 대적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평화와 기쁨을 잃지 않으셨던 그분의 거룩한 삶은 틀림없이 그 비밀이 하나님과 홀로 있는 시간에 한없이 겸비해지셨기 때문입니다. 그 겸비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그 속에서 그분은 세상을 담대하게 이길 수 있고 대적하는 자들에게 온유함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거룩한 은혜들을 공급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분의 영광스러운 사역에 깊은 자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자원이 있는지 우리는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 하지 않기 때문에 잃어버리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비하기 때문에 우리의 많은 기도는 이 땅에서는 무수히 올라가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잡동사니 취급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개봉되지도 않은 채 쓰레기통에 던져지는 우편물과 같이 우리의 의식적이고 죽어있는 기도가 복귀가 되어서 우리의 삶에 경건과 거룩한 영성을 모두 파괴하고 우리의 신앙생활 자체를 건조하게 만들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드셨던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던 세리와 바리새인의 비유는 우리에게 이러한 진리에 대해서 더 깊은 감동을 받도록 만들어줍니다. 바리새인은 늘 기도하는 사람 이였습니다. 세리는 아마 늘 기도하는 사람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은 늘 기도하는 사람 이였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그 기도는 유창해져야 하지를 않습니까?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감사의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나를 이 세리와 같이 않게 해주시고 그는 근본적으로 벌써 기도의 시작서부터 하나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악한 삶을 살았다고 믿어지는 세리를 바라보며 부요 한 마음, 교만한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도덕적인 분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저보다 훨씬 나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좌 앞에 나아갈 때는 그런 인간의 쓰레기와 같은 의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도움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그리고 우리 앞에 거치는 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깨트려진 마음을 가지고 나오기를 원하시지 우리가 그런 부요 한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나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관심은 이레에 두 번 금식하거나, 아니면 악한 자 보다 훨씬 경건하게 살았던 삶이 하나님이 받으시고 싶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치될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해 갈망을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세리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그는 당시에 유행하던 기도의 격식을 깨트렸습니다. 그 당시의 기도는 하늘을 우러러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 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었습니다. 죄의식이 그의 마음을 눌렀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찌할 수 없어서 가슴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회개할 때 우리는 가슴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워지는 것을 육체적으로 느낍니다. 그때 가슴을 두드리는 것은 우리의 가슴부분에 통증을 덜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는 가슴을 두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는 격식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진심이 그것을 시켰던 것입니다.
그의 온 시야에는 오로지 두 가지 그림밖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거룩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과 그 은혜로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비참하게 죄악 덩어리로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 밖에는 들어오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보다 더 악한 세리가 있었거나 자기보다 선한 바리새인이 있었거나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 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주님의 얼굴을 주목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주님에게는 깨트려진 마음, 상한 심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기서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얻고 내려왔습니다. 바리새인이 받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이 세리는 받고 내려온 것입니다. 그의 죄악 된 삶이 그런 것을 가능하게 만들은 것이 아니라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하나님을 향해 고정된 심령이 하나님 앞에 그의 삶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도록, 믿음이라고 인정해주시도록 하나님이 그를 받아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오늘날 필요한 것은 이런 것입니다. 형식적인 많은 기도생활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도무지 점점 돌덩이와 같이 굳어지고 깨트려지지를 않습니다. 깨트려지지 않으면 완악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이 흘러 들어가서 우리의 마음이 녹아지지 않으면 반드시 우리 속에 패역이 쌓여 가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이 겸비해지지 않으면 단지 겸비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교만이 굳어져 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단지 기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도 안 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굳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삶, 기도하는 모습, 기도하는 영성을 회복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아니하면 결국은 기도할 수 없게 되는 상황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복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기도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기도는 우리의 영혼에 각질을 제거하는 칼이요.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패역을 고치는 양 약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우리의 심령 속에 흘러들어 갈 때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패역이 녹아지는 것들을 경험합니다. 마음속에 깊이 맺혔던 힘줄들이 온유하고 부드러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패역과 그리고 모든 죄의 길에서 돌이킬 수 있는 원동력을 기도를 통해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기도하지 않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불편한 것이 아니라 이것은 우리가 악을 향해 치달아가고 죄를 향하여 관용해지는 대신에 하나님의 거룩과 의를 용납할 수 없는 그런 패역한 삶으로 나아가는 지름길 인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기도하지 아니하면 언젠가는 기도할 수 없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기도의 영을 주장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도의 영이 우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우리의 심령을 우리가 주장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심령이 우리의 인생을 장악하는 것입니다. 완악하고 하나님을 등진 심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에 인생이 그 어떤 것이 이 세상에서 빚어 나갈지 에 대해서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겸비해지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영혼은 주님 자신을 향한 필요에 눈뜨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에 말씀의 젖을 목마르게 사모할 것이며 어린 아이가 그 젖을 사모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피골이 상접했던 우리의 속 사람은 다시 살이 붙기 시작하고 뼈가 튼튼해지기 시작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운명처럼 받아들였던 수많은 실패들이 사실은 그럴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지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승리할 것이고 늘 패배하던 자리에서 일어서서 하나님에 거룩한 이름을 찬송하는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변화시켜줄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잊지 말고 하나님 앞에 기억해야합니다. 우리는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낮아지는 연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고 우리의 마음에 달콤한 위로를 주어서 결국은 우리를 빈사 상태로 몰고 가는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골라 읽고, 골라 들으려는 바보와 같은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심각한 경과와 진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노출되기를 원하는 그런 사모함 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겸비해지기만 하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할 것이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그리워할 것입니다. 겸비한 사람,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고 악의 길에서부터 도 내동댕이쳐 진 것 같은 외로운 사람에게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악의 길에서 버림을 받고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죄가 가져다주는 평안과 위로를 모두 잃어버린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은 주님이 오셔서 만져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만져주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얼마나 주님 앞에 사랑 받는 존재인지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언제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깨닫게 만들어주지만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바다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피상적으로 알게된 성경을 더 깊이 깨닫게 하고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참다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더 깊이 눈뜨도록 만들어주는 놀라운 일들을 기도가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합니다. 그리고 이런 많은 기도는 겸비하게 낮아진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물은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르지만 기도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향하여 흐릅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기도는 깨끗한 기도가 아니라 이 땅에서 진토에 뒹군 기도를 좋아하십니다.
겸비의 티끌을 묻힌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그 기도에다 하늘나라에 거룩한 향수를 부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에 보좌 앞에 올라가는 기도는 모두 이렇게 자신이 겸비한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거룩한 기도인 것입니다. 이런 거룩한 기도가 우리 가운데 회복되지 않으면 신앙생활에서 승리라는 것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영원히 바라만 보다가 즐거워하는 죽어야하는 비현실적인 것들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에 승리는 기도해야합니다.
나는 끝으로 ‘스펄전’ 목사의 말을 여러분에게 인용하고 싶습니다. “기도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그때가 바로 기도해야할 때입니다. 기도할 수 없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더 기도해야됩니다.” 라고 말입니다.
5. 믿음으로 역사 하는 기도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11:24)
우리가 기도에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에 힘이 없는, 심지어는 기도를 잘 하지 않는 가장 커다란 원인은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 것,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하나님 앞에 구하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라고 믿는 이 믿음, 이것은 우리의 모든 신앙 생활의 토대인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 자체가 가능하지가 않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우리의 생활도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단순하게 믿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계산하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사실이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단순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신앙 생활의 기초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각양 좋은 은사도 믿음을 통해서 옵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성화 시키는 것도 결국은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사는 것, 그래서 나의 생각과 나의 의지는 너무나 분명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이 더 확실하고 하나님의 생각이 더 완전하다라고 하는 단순한 믿음 때문에 자기의 의지와 생각을 말씀에 복종시키는 단순한 믿음, 기도하면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응답해주시고 또한 하나님은 그 기도를 통해서 내게 당신의 기뻐하시는 바를 보이실 것이라고 하는 어린 아이와 같이 단순한 신앙심, 이런 것들이 없이는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아무 좋은 것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늘 흔들리고 그렇게 이 세상의 인연을 끊지못하고, 끊임없이 세상의 버림을 받으면서도 그렇게 끊지 못하고 사는 이유도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복잡하고 눈에 보이는 것 이외에 아무 것에도 마음을 주거나 단순하게 믿지 않으려고 하는 잘못된 불신앙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구습, 옛 생활 습관에서 끊지 못하는 것도 결국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우리의 모든 신앙 생활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좋은 은사도 믿음을 통해 오고 모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도 믿음을 통해서 옵니다.
믿음이 없이는 회개도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받아 주시고 내가 나의 죄를 자복하고 토설하고 회개하면 나를 용서해 주시고 새롭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를 불러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한 믿음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 할 수 없고 또 하나님 앞에 사죄의 은혜를 구하며 회개할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신앙 생활의 전적인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 우리의 신앙생활은 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승복을 강조하는 것도 결국은 이 믿음의 문제입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체험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더 많이 깊이 알고 그 지식이 온전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은 결국 이 믿음을 역사하기 위해서이고 또 믿음을 통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잘 알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다음에는 ‘내가 이렇게 나의 죄를 다 토설하면 하나님이 나를 가만 두시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기에게 그렇게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지식을 낳고 지식은 또다른 믿음을 낳습니다. 이렇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신앙생활의 토대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합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짤막하게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상 주시고 자기를 참고 추구하는 자들에게 대답하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단순한 믿음이 우리의 전 신앙생활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분명히 손해나는 일인데도 “아멘”하면서 순종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결국 믿음이 우리들에게 그렇게 시키는 것입니다. 신앙심이 무엇입니까? 이 믿음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의 토대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끝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은혜 많이 받았는데 뒤로 물러가서 침윤에 빠지는 것도 결국은 알고 보면 단순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핑계는 많이 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뒤로 물러가 침윤에 빠지는 것도 결국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실 것이며 구하는 자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라고 하는 단순한 믿음, 이것이 없기 때문에 뒤로 물러가서 침윤에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기사는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그런데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저주하셨고 그 다음날 제자들이 가보니 뿌리로부터 그 나무가 모두 말라버린 것을 발견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 정말 주님이 저주하신 무화과가 완전히 말라버렸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뭐가 놀랄 일이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믿기만 하면 명하는 대로 그렇게 된다. 그래서 무엇을 구하든지 구하는 바는 이미 이룬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의 믿음대로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명백하게 역사 하는 기도 그 뒤편에는 반드시 역사 하는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믿음이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의 토대가 됩니다. 토대가 될 뿐만 아니라 이 믿음이 있어야지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아멘”하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이 약속한 것은 이루어 주시고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그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고 하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순종하며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항상 믿음의 길에 한발은 들여놓으면서도 한발은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 역사 하는 믿음을 볼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없는 곳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해서 당신의 살아 계신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해서,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을 통해서, 당신의 일들을 이루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인생,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은 여러분을 자랑하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랑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나더니 복을 받았더라 그런데 그 사람은 원래 똑똑하고 돈이 많더라’해서 영광 받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 결국은 ‘예수를 믿고 잘 신앙 생활 했더니 하나님이 복을 주셨더라. 사면초가에 둘러 싸여서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었는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에게 하나님이 역사 하셨더라’하는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이 얼마나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신 지를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이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논리를 초월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인간의 생각과 사고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이 일을 기뻐하신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이렇게 기도하고 믿으면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리라는 약속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 일이 이루어 질 줄로 믿는다’고 하는 단순한 믿음, 논리적으로 설명해달라고 요구하면, ‘너는 그런 것을 들을 필요가 없다. 왜냐면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문제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당신을 믿는다는 것을 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라고 하는 단순한 믿음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무너트릴 때 역사 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리고 성을 너희는 돌아라” 그때 그들은 여리고성을 파괴할 폭탄을 찾기 위해서 특공대를 조직한다거나 안에 침투해서 성을 지키는 사람들을 살해하는 테러단을 조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리고 성을 뛰어넘기 위해서 높은 사다리를 만들거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몰래가서 땅굴을 파는 일들을 계획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이 하라고 명령하신 일을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들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하루 이틀 삼일 사일 날짜가 계속 가도 여리고 성은 든든히 서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실망하지 않고 그대로 행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이 이루어질 것이며,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들에 대해서 “아멘”할 때 어린 아이와 같은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역사하고 말리라’고 하는 신앙이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버팀 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들을 무너뜨리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순종을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순종을 못하니까 그가 비록 나와서 늘 기도하는 모습을 하고 있고, 하나님 앞에 뭔가 동일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수많은 날 동안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기도 자체가 역사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기도가 역사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어떤 때 동일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오래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입에서 나오고 마음으로는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아예 한풀 접어놓고 하는 기도, 그러니까 기도를 하고 나도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도 별로 없고 어느 날 이루어지면 심장마비 일으키고 마는 기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모여서 베드로를 돌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로데라는 아이가 실제로 베드로가 돌아왔음을 알리자 믿지를 않았습니다. 잔뜩 기도해놓고 응답 받게되니 응답될 리가 없다고 믿지를 않는 것입니다. “주여 만나주시옵소서” 해놓고 만나려고 주님이 오셔서 “만나자” 하시니 “주님, 놀리지 마십시오. 주님이 저를 만나주실 리가 있습니까?” 하는 것처럼 안될 것을 굳게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예화)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후의 두 가지 반응.
그들의 말은 현실을 파악하는데 있어서는 똑같았는데 그들의 보고가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와 틀린 점은 “우리가 보기에 그 땅은 나쁜 땅이더라”라고 말한 것이 거짓이었습니다. 포도송이 하나를 두 남자가 꿸 채에 꿰어서 들고가니 얼마나 기름진 땅입니까? 지금도 에스골 골짜기에 가면 포도송이 한 개에 4.5㎏에서 6㎏까지 나가는 포도송이가 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는 더했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믿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반드시 얻어야 되겠다는 열망에 불탑니다. 즉 믿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 없이는 못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고 주앞에 기뻐할 때 하나님이 어떤 놀라운 능력을 주시는지 약속을 제시하면, ‘기도하면 저런 능력을 주시는데 내가 그것 없이 여태까지 살았구나. 하나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마고 약속한 저런 놀라운 능력 없이는 내 인생이 어떻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인생이 이것은 아닙니다. 주시옵소서’하면서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능력과 그 큰 은혜를 불붙는 마음으로 사모합니다. 그래서 그것 없이 살아가는 생활에 적응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것 없이 살아가는 생활에 적응 할 수 없습니다. 그것 없이 사는 것이 이상한 것이고 그것 없이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이러고도 살아야 되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냥 이렇게 교회에 나와서 졸면서 예배드리고 돈 몇 푼 내고 돌아갔다가 일 생기면 빠지고, 목회자가 전화해서 빨리 나오라고 하면 인심쓰듯 얼굴 한 번 보여주는 것이 신앙생활인줄 알았는데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나니까 ‘이것이 신앙생활이 아니구나. 저 사람이 감격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왜 내마음 속에는 없을까? 은혜를 받고나면 솜사탕 위를 걷는 것 같다는데 왜 나는 교회에 왔다 돌아갈 때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울까? 왜 나는 교회 들어서자마자 돌아가고 싶은 마음 뿐일까?’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깊어지면 그 다음에는 ‘나는 아직 많이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런 하늘의 신령한 은혜, 그런 영적인 세력들을 통제하고 움직일 수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권세가 나의 영적인 삶 속에 있을 때, 그 생활이 얼마나 화려한 신앙생활이 될 것인가. 내가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구나’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생깁니다. ‘그것 없이 내가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기도합니다.
(예화) 세계적으로 훌륭한 신학교가 있는 도시 치고 죽어있는 교회로 가득 차지 않은 도시가 없다는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다 자기가 최고인줄 알기 때문이다.
단순한 믿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열렬한 사모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사모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기 생활에 대한 부인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반대입니다. 기름진 땅을 보면서 악한 땅이라고 말한 그들의 문제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저 아낙 자손과 거인과 같은 인간들과 더불어서 싸워서 생존해 남아야지 그 땅이 자기네 땅이 되는데 ‘곡괭이 자루와 같은 것으로 미사일을 어떻게 이기느냐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까 그 다음에 든 생각은 우리들이 지금 살아있는 것도 괜찮고 살만하다는 것으로 어떻게 하든지 자기 자신을 설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저까짓꺼‘하는 것입니다.
(예화) 여우와 포도송이 우화.
우리가 믿음이 없으니까 그런 식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의 생각은 이 열 명의 가지고 있는 생각의 허를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들 이야기가 맞다. 그 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크고 우리보다 훨씬 강력하고 요새도 튼튼하고 우리가 메뚜기 같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 바로 이것입니다. 앞부분은 믿음이 없는 사람도 다 가질 수 있는 생각인데 뒤에 나오는 다른 전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어차피 우리의 싸움은 우리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잘 보여준 사람이 다윗입니다. 골리앗과 더불어 싸우려고 섰을 때, 골리앗은 싸움터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 노장이었고 다윗은 전쟁터에서 전쟁을 해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목동으로서 양을 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서 섰습니다. 9척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사람이 창을 들고 거기에 서있었습니다. 그리고 싸움 상대로 다윗이 갑옷도 입지 않은 채 물매돌만 들고 걸어나오는 것을 보면서 이 골리앗이 얼마나 웃었겠습니까? ‘너 미쳤구나 소몰러 나오냐, 양치러 나오냐’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계산상으로 계산을 해보면 계산이 되지 않습니다.
(예화) 지금도 이라크지방에서 물맷돌이 유행이다.-50m 앞에 세워둔 담배를 6-7살짜리 아이가 물 맷돌로 넘어뜨린다.
그러나 다윗이 물맷돌을 던지자 물매가 쏜살같이 날아가서 투구 사이 이마에 맞았습니다. 딱 소리와 함께 골리앗이 퍽하며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다윗이 다가가서 칼로 목을 따고 무거운 목을 높이 쳐들었습니다.
물론 평소에 물매돌을 던졌던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가 의지했던 것은 자기가 던지는 물매돌 실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것입니다. 던지고 나면 정확히 이마에 맞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눈 감고 던진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정확하게 허점을 찌르려고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 나는 내 기술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하면서 믿음으로 던졌더니 그 믿음이 역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할례 받은 자들을 욕하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분노한 것이 아니라 모두 쥐죽은듯이 듣고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었더라면 다윗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그 골리앗의 모욕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 네가 그렇게 욕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더럽힘을 받는 것이냐? 이스라엘 사람들을 네가 욕한다 해도 우리만 그렇지 않으면 됐지 무슨 소용이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니까 정말 거꾸러트리기 전에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차피 내 기술과 내 방법으로는 거꾸러트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그렇게 거꾸러트릴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보고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런 식으로 역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자기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에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 믿음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 오늘도 제가 밥 잘 먹을 줄 믿습니다” 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은 자신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 거기서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런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큰 문제를 놓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입으로는 “주여 믿습니다”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안될 꺼야’ 이렇게 입과 이중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살아서 좋은 일 볼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매우 불쾌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믿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지칠 줄 모르는 갈망을 갖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아예 소망하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트려지면 주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밀려와서 우리가 새 사람되고 천국의 생명의 은혜로 충만한 가운데 믿음 생활을 해서, 거룩한 환희와 기쁨이 있는 신앙생활을 해서,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깨달음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거야. 그것이 나는 필요해. 주님 그것을 주시옵소서’ 하며 갑자기 그러한 것이있다고 생각하니 하나님 앞에 마음이 불붙는 것같아지며 그것을 갖고 싶어 정신을 못 차리게 됩니다.
(예화) 방위 시절 도서관에 배치되어 ‘대한민국 병역 법전’을 보다가 거기에 해당되는 것을 안 후 마음이 불붙고 계속 그 생각에 사로잡혔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인가 약속을 발견했을 때 믿음은 ‘그것이 바로 내 것이다’하는 확신이 생깁니다. 그래서 그것 없이 여태껏 살았던 것은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지 알고 나니까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역사 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런 것이고 하나님이 이런 약속을 주셨다고 이야기하고 “여러분 회개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강물처럼 밀려옵니다. 뉘우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보십시오. 이제 귀신을 제압하고 악한 영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놀라운 영권을 주십니다. 여러분의 삶에 거룩한 순결을 주시고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를 주십니다”하면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정말입니까?”합니다. 다시 “그럼요 믿어보십시오. 하나님이 한 번 역사 하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하면 “냅둬. 이대로 살다 죽을 끼여”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더 놀라운 약속이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그것이 자기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접어놓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가르쳐서 하나님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들의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을 따라 살지 아니하는 삶, 불신앙의 사람들, 하나님 원망하며 사는 사람들, 쓰레기와 같은 인생들, 거품과 같은 신앙을 가진 인간들, 하나님의 나라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인생들이라고 하나님은 보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사랑타령이나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믿음이 있는 곳에 역사 합니다.
기도할 때에 바로 이러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라만 보고 즐거워한다는 것과 그것이 내것이 될 것이다라고 믿는 그 믿음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예화) 사법고시에 붙은 사람의 합격수기-그 내용은 신령하고 거룩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피 눈물나게 걸어온 길이기에 사람의 마음에 불을 붙이는 힘이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보면서 ‘나도 한 번 해볼까’하는 사람과 정말 그런 사람들의 뒤를 걸어가기 위해서 피나게 공부하는 것은 별개입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과 실제로 자기가 공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이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시는 많은 것을 제시 받을 때마다 “누구는 믿음으로 기도했더니 하나님 앞에 그런 놀라운 성령의 은혜를 받았데”하면 ‘안될 꺼야. 아닐 꺼야’ ‘성령 받았다는 사람이 뭐 그래’하면서 뭔가 깍아내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 없이 살아가는 이 인생도 제법 살만하다’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문제이니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맨날 그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이런 마음으로 기도하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는 역사 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다가 종종 범죄하고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보다도 더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은 고도로 믿음이 없는 생활 속에서 곁만 번드르르한 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도 나옵니다. 탕자는 부모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그 앞에서 재산 반을 달라고 합니다. 즉 부모를 죽은 것으로 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산을 다 허비하고 돌아와서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습니다. 나를 이제 아들로 보지 마시고 품꾼의 하나로 여겨주십시오. 나는 아버지 집이 그립습니다’는 마음으로 나오니까 아버지가 기뻐하면서 그 아들 용서하고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어땠습니까?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는데 동생이 그렇게 돌아오자 동생에 대한 기쁨은 없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평생동안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를 섬기고 아버지를 위해서 일한 나에게는 아무 것도 안 잡아주더니 동생을 위해서는 살찐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하며 아버지에게 대듭니다. 결국 아버지와의 관계를 즐기면서 살지 못했던 사실상의 집 떠나지 않은 탕자입니다. 그런데 집 떠난 탕자가 차라리 집 안 떠난 탕자보다 훨씬 낫다는 이야깁니다. 겉만 번드르 하고 실패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신앙생활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 죄에 굴레, 그 무능력의 굴레, 그 지리멸렬한 신앙생활의 그 굴레, 연기 나는 것같은 질식할 것같은 신앙생활에 익숙해져서 살아가는 것을 믿음 생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가 뭔가에 의해서 요동하지 않고 꾸준히 신앙생활 하는 것은 자기 영성이 매우 깊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는 바보 같은 생각들이 바로 믿음 없음의 근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에 대해서 왜 탐내지 않습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주고 계신 수많은 약속들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얼마나 이해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놀라운 약속과 여러분들을 위기 가운데서 건져낼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약속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마음 뛰지 않습니까? 무능력한 생활을 일시에 타개하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성경이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있으면 여러분들은 그것이 무엇인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실직하고 갈 곳 없어서 매일같이 베개를 베고 방에 누워 있어야 하는 사람에게 어느 날 취직자리가 있다고 할 때 그 사람들은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것입니다. 아마 양말도 신지 않은 채 뛰어나갈지도 모릅니다.
무슨 약속이 있든지 무슨 약속이 있고 무슨 축복에 대한 약속이 우리에게 있을지라도 그 약속은 믿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인데 믿음 없이 살기로 뜻을 세우고 결심했기에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눈을 지긋이 감고 떡 버티고 앉아서 “하나님, 날 무너뜨려 보십시오” 하니 죽음이 깃들인 적막한 신앙생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아서 무슨 예수 믿는다고 합니까?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살려고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예배드리고 십일조도 내고 수요일에 나오라면 수요일에 나오고 금요일에는 금요기도 나오고 합니까? 겨우 그런 삶을 살려고 운명에 복종하고 팔자에 매이고 자신의 그 가난하고 비참한 신앙적인 형편에 적응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그렇게 피눈물나는 사연을 안고 여태까지 주님 만나고 여기까지 걸어왔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렇게 초라해질 수밖에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힘없고 슬픈 모습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믿음 없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도 않고 약속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바라지도 못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험 같은 것은 아예 해볼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님 이렇게 곤고한 가운데 어떻게 사십니까? 결단하셔야 되겠습니다”하면 “예, 하긴 해야지요.” “제가 도와 드릴 테니까 함께 사십일 기도하십시다” 하면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사십일 기도 끝난 다음에 하나님이 놀랍게 응답해주시는 것들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 지겨운 사십일, 추운 교회당에 무릎 꿇어야 하는 것, 배고픈 것, 피곤한 것만 떠오릅니다. 그러니 믿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부흥회’하면 ‘부흥회를 통해서 만나주실 하나님, 그 만난 이후에 펼쳐질 나의 그 모험적인 삶,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 이런 것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또 집에 열두시 돼서 들어가겠다’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런 화상들인 우리를 내려다보실 때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기도하는 대신 염려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머리 의지하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 오래 했다고 해서 배우는 것은 인내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인내도 거룩한 인내가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는 인내입니다. 망가진 것에 복종하면서 살아가는 불신앙적인 인내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계속 그렇게 살 것이라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좋은 믿음대로 역사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너희가 구한다면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너희들이 믿어야 한다” 그것이 이루어 진다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역사할 때는 환경이 변하지 않아도 속으로부터 벅찬 신뢰가 솟아나는 것이 있어서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해 주실 것이다’는 깊은 확신이 기쁨과 함께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주여,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해결해 주시옵소서.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하며 목이 아프도록 기도하는데, 속에서 메아리치기를 ‘믿긴 뭘믿어’합니다. 자기 속에 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삶의 토대가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으면 하나님께로 받은 줄로 알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뒤에 용서의 문제가 나옵니다. 같은 맥락에서 같이 나옵니다. “기도하다가 네게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러니까 확신의 토대가 삶의 토대와 얼마나 연관되어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들 대학 붙을 줄 믿습니다” “사업이 잘 될 줄 믿습니다” “IMF 때문에 받은 타격을 회복할 줄 믿습니다” 그렇게 아무리 믿는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기도를 해도 믿어지지 않을 때는 여러분의 삶의 자리를 점검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써 주시옵소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옵소서. 나를 만나주시옵소서”하면 하나님이 “일단 거기서 나와서 이야기하자” 하시는데, 죄의 시궁창에 들어가서 “주여 나를 사용해 주시옵소서, 정결케 해 주시옵소서. 나는 믿나이다. 주님 찬송하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하는 것입니다.
능치 못할 일 주께 없으니
나의 인생을 주께 맡기고
나의 모든 짐 대신 지시는
능력 있는 그 팔 의지해
자기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의 전적인 전환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기도의 응답이 희귀한 것을 보면 무엇을 알 수 있느냐면 첫째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지만 그 사람이 기도 응답 받아봐야 사는 것이 변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삶의 가치가 돈 좋아하고 돈 가지고 호의호식하면서 잘먹고 잘 살다 죽고 싶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셔서 돈을 주시면 그렇게 살다 죽는 것이지 무슨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도 앞에 서서 전적인 무능을 느끼는 것입니다. 기도는 도트는 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유능하고 잘난 그리스도인이라도 어느 한 순간 기도 앞에 섰을 때는 ‘내가 이런 사람인가? 내가 이렇게 기도를 못할 수 있는가? 내가 수십년 기도생활을 해왔는데...’하는 상황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기도다운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근본적으로 가치관이 바뀌고 변혁이 되어야 합니다. 여전히 삶의 목표와 인생에 대한 모든 것들이 바뀌지 않았는데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듣고 살아가도 그렇게 고통스러운데 왜 그것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생각을 갖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예화) 안산에서 목회 하시는 목사님의 이야기-하나님께 은혜를 받기 전에는 인간이 이렇게 안 바뀌는 줄 몰랐다는 이야기. 껍질만 바꿔 입는 것이다.
그러니 기도의 능력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까? 믿을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내 인생을 주께 맡기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맡기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위탁이 안됐는데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것도 사행심입니다. “주님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 몇 번 하다가 안되면 “거봐 안되지 괜히 기도는 무슨 기도, 냅둬 이대로 살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낚싯밥을 던지는 것입니까?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제가 교회 잘 나가 드립니다. 기도하라 했으니 제가 기도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주님, 상황을 바꿔 주십시오”하면 주님은 “너나 바뀌어라”할 것입니다.
그나마도 하나님이 그렇게 뭔가 달라고 그럴 때 조금씩 모이를 주시면 그래도 하나님 뜻대로 살려는 것처럼 합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생각이 다른데 있으시기에 방향을 트시면 자지러지며“하나님이 나에게 그러실 수가. 내 허락도 안 받고 딴 쪽으로 역사 하시다니 합니다. 그러니 무슨 변화가 오겠습니까? 소용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계획의 장단에 하나님이 춤추시는 시절은 오지 않습니다. ‘믿습니다’를 백번 해봐야 하나님은 춤 안주십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을 향해 가지고 계신 계획의 가락이 무엇인가를 보고 여러분들의 가야할 길을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에서 기도의 능력이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간구할 수 있는 능력이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 속에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능력 가지고 뭘 하시겠습니까? 부모가 돈 모아서 뭐하겠습니까? 자식들 잘 되게 교육시키고 자식들에게 나눠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뀌고 생각도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하든지 돈 있는 아버지 앞에 와서 알랑거려 돈이나 울겨다가 방탕하게 살 생각을 하면서 명절 때 되면 마음에도 없는 고기 근이나 생선 몇 도막 사들고 와서 알랑알랑 거렸었는데 사람이 바뀌어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물질을 줘도 그것을 관리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근본적으로 변화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내 인생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 마음대로 나를 사용해 주시옵소서. 내 인생이 주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행복하고 불행한 것도 주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완전히 맡긴 삶, 그런 삶 사는 사람이 주일에 장사하려고 주일에 교회 빠지고 몇푼되지 않는 십일조나마 뒷주머니에 챙겨보려고 ‘신약성경에 십일조 내라는 곳이 있나’하며 쓸데없는 것에 열심을 내고 어디서 이상한 이야기나 주워 들어서 자기의 신앙이나 합리화 시키려고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근본적으로 자신이 변화되어야 되겠다는 소망을 함께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기도할 수도 없고 그들이 기도하는 그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더니 뿌리부터 말라버리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무화과나무를 향해서 화풀이 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입이 무성하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뿌리부터 마르는 역사를 보면서 이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깃들이어 있는 하나님의 신성을 다시 보게되었습니다. 믿음이 역사할 때에 어떤 놀라운 일들을 이룰 수 있는지, 예수님께서 그 권세의 교제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놀라운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그 기적들을 믿음으로 행하셨지만 자기의 먹고 쓸 것을 위해서 기적을 행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관심은 당신이 이 세상에 살면서 잘먹고 잘사는데 계획이 있으셨던 것이 아니라 삶 자체, 목표 자체가 주님을 향해서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나셨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자신의 삶과 죽음과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고 의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믿었고 믿을 때에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역사 하셨던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러한 믿음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신뢰가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하며 내미는 손을 치실 때에는 뭔가 사연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있으면 손을 내밀다 얻어맞아도 상처를 안 받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내가 달라고 하는데 주시기는커녕 손바닥을 때리시는 것을 보니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 구하나보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굳게 믿고 기도해서 응답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응답이 어떤 종류로 역사 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신뢰가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 좋은 것이 뭔지는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내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한가지는 성경처럼 드러난 뜻입니다.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감추어진 뜻도 있습니다. 감추인 뜻은 그 때는 모르는 뜻입니다. 살면서 “하나님, 왜 내 기도를 안 들어주시고 이렇게 고생을 시키십니까?” 하는데 나중에 보니 못된 인간이 고난을 통해서 제대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이는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됩니다. 삶 전체의 기반이 모두 흔들리고 무너지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인격적인 신뢰가 없는데 무슨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사랑합니다”하며 선물을 하는데 ‘이것만 갖고 도망가는 게 아닐까’ 생각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믿음이 없으면 인격적인 관계, 신뢰가 있는 사랑의 관계, 이런 모든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믿음을 가지고 ‘이루어 질 것이다’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면 그 기도가 능력 있게 역사하고 응답된다는 이야기인데, 사실 그렇게 하나님이 역사 하실 것을 굳게 믿는 마음은 또한 기도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나서 보면 내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듣고나서 마지막에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할까’가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은 다음에는 반드시 기도해야 할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뭘 기도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살아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바는 내가 살아야 할 바이고 살아야 할 바는 기도할 바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러면 이상하게 우리 속에서 믿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가 도끼질 당하는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리되고 나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 그렇게 될 줄을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이끌어 주실 줄 나는 믿습니다” 이런 마음, 이런 믿음이 목청에서가 아니라 배 밑창에서부터 계속 솟아오는 것입니다. 눈에는 응답될 리가 없다고 계속 비치고 실망되지만 눈을 감고 간절히 기도할 때는 배 밑창에서 들려오는 확신이 우리를 주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여도 나는 믿음으로 이 길을 걸어간다’ 하며 이것이 몇 번 되풀이 되다가 나중에는 믿음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희망적인 전망이 보이지 않는데도 눈을 감고 기도하면 눈에 보이는 상황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하신다. 그리고 이 암담하고 캄캄한 상황, 사람들이 모두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던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누이들이 뛰어와서 주님께 말하기를 “나사로가 죽었습니다”해도 예수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딴 일을 보셨습니다. 그 때 그들이 예수님께 기도한 것들은 거절당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사흘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았고 부탁했던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서 나사로가 생명을 찾게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두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까이 가셨습니다. 벌써 썩어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먼저 드리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하시니 나사로가 일어나 수의를 입은 채 걸어나왔습니다. 이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에수님의 놀라운 권세를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 우리에게 역사해 주시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우리의 믿음 없음을 인하여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험적인 기도생활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모험적인 기도생활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감히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가 곰곰이 생각하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일인가 굳게 생각하고 뜻을 세운 다음에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통해서 역사 하시고 많은 영광을 보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정말 기적과 같은 기도의 응답 속에서 일생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역사해서 사자의 굴속에서 사자의 입을 봉하기도 했고 불 가운데를 지나기도 했고 물 가운데를 지나기도 했습니다. 칼날을 피하기도 했고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기도 했고 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들려 올라가기도 했으며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모두 믿음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우리 기도를 능력 있게 하고 역사 하게 하는데, 또 역시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은 계속 우리 속에서 쉬지 않고 불붙어 역사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 그런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들이 간직하면서 사는 그런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신뢰하면서 기도하기 위해서는 순례자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기도할 때 자기 방식대로 응답되어야지만 그것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그 이외에는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순례자적인 사고와 생각은 사랑을 이 세상에 두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대부분 세상적인 일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건강하고 하나님 축복이 함께 하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는 것도 사실 세상적인 기도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먹고 입고 쓸 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그것도 세상적인 것입니다.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하지만 죽고나서 천국에 올라가면 이제 새로운 가족이 형성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이 이 세상의 것들을 위해서 집요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신입니다. 정신이 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작별한 상태에서 순례자적인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한번 이렇게 해보십시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 좀 어때’ 하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보십시오. ‘좀 가난하면 어때’ ‘어려우면 어때’ ‘눈물 좀 흘리면 어때. 믿음으로 내가 살고 어차피 하나님이 나를 이런 절망의 구덩이 가운데서 병들어 썩은 나사로의 육체와 같은 병들어 있는 영혼을 하나님이 건져 주셔서 나를 이만큼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셨는데 이제 아무러면 어때. 하나님 내가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지만 그러나 이렇게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더 많이 누리고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이 내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님이 너무나 잘 아시지 않습니까?’하며 하나님 앞에 순례자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기도 하나하나가 이어지고 이 기도 하나하나가 응답되는 전 과정을 통해서 결국은 우리의 인생이 잠시 머물 이 세상에 모든 꿈과 모든 사랑을 묻을 인생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주님을 뵈옵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앞에 서기에 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그런 과정 속에서 나오는 수많은 기도 제목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고 주님 앞에 흠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만 행복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 하나님의 가족들도 좀 변화시켜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일평생 여러분의 가족들이 여러분의 신앙을 연단 하는 도구나 되어서 살다가, 여러분 겸손케 하다가 가시로 끝난다면, 불구덩이 속에 던져지는 것밖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잠시 우리들이 박해를 받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신을 받아도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저 영혼들을 건져주시고 고쳐주시고 새롭게 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잠시 머무는 인생에 소망이 있지 아니하고 영원한 나라에 더 큰 희망이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사실 세상에 대한 사랑을 정리하고 나면 우리의 기도 제목은 놀랍게 바뀌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은 놀랍게 변화되고 새로워지게 됩니다.
(예화) 큰 사업을 하다가 다 망해 외국에 가서 바닥부터 살게 된 사람의 이야기-다 잃어버려 도 하나님을 찾았다.
그것이 이제 사람이 되기 시작하는 징조인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 없어도 이것만 잘되면 살 것 같았는데 나중에 깨닫고 나니 “다 잃어버리면 어떻습니까? 거기는 예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지금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이 있습니다”
잠시 머물다 지나고 나면 우리의 인생은 휘장이 드리워지고 관객도 사라지고 무대의 불도 꺼지면 우리 모두 인생의 무대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 때 우리를 하나님 앞에 변호해 주실 분이 예수 그리스도 밖에 누가 있겠습니까? 믿음도 성취되고 소망도 이루어집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그분과의 관계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일생을 진실하게 주님 의지하면서 다 살다가 마지막에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인생, 그런 인생으로 살다가 죽어서야 되겠습니까? 주님과 만난 사연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아름답고 혹은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수많은 사연을 안고, 인생의 곤고한 길에서 만난 주님, 행복과 환희 속에서 함께 하셨던 주님, 멋모르고 잘못된 길로 걸어갈 때 야단 맞은 이야기,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망신당한 이야기, 우리가 살아온 신앙의 길을 돌아보면 짐승 같았던 때도 많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 사람만큼만 되라 하도록 우리를 높여주시고 세워주시고 우리를 칭찬해주신 기억도 우리는 기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모든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하신 것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생명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제껏 까지 부르셨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예수의 생명이 우리에게 없으면, 예수의 생명을 담보로 하고 신앙을 팔고 믿음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뭘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 밖에 아직까지도 그렇게 좋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그리스도를 떠나십시오. 언제든지 애굽으로 돌아가십시오. 몇 발짝 떼어놓지 않아서 돌아갈 수 없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가져도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믿음대로 살 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순례자가 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 연연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번 담대하게 이런 기도를 한 번 따라해 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 저를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해주시려고 너무나 많이 신경 쓰지 마시옵소서. 제가 아무렇게나 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 당신 자신의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나를 사용해 주시옵소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곳에 있으면 나도 기쁘고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곳에 있으면 나도 영광이 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귀여워 하시겠습니까? ‘네가 어떻게 이렇게 바뀌다니 정말 놀랍다’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이 모든 것을 더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께 감동을 드리는 인생을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기도가 하나님께 저절로 감동이 됩니다.
그 사람 자체가 기쁨이요 사람 자체가 감동 자체인데 그 입에서 뭐가 흘러나와도 그 기도는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사람 자체가 기쁨이고 사람 자체가 보배로운 사람, 말을 해도 어쩜 그렇게 예쁜 말만 골라서 하는 지 말을 해도 귀엽고 입을 움직여도 그 입이 귀엽습니다. 존재 자체가 괴롭고 부담되고 존재 자체가 성가신 사람들은 말을 번드르르하게 하면 “말만”, 말을 못하면 “말도” 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우리의 기도생활의 비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좀 돌이킬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더 한 번 세상 의지하면서 기도 안하고 살아 보렵니까? 그럴 바에는 아예 피 터지게 한 번 살아보십시오. 화끈하게 “주님 가만 내버려 두십시오. 내가 얼마나 잘 사는지 한 번 보십시오”하며 살든지, 자신 없으면 “손들고 옵니다. 주님, 주밖에 이 땅에서 내가 사모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감동 그 자체의 인생을 한 번 살아봅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주실 때,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얼마나 커다란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이렇게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일평생을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6.기도와 능력
“이르시되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9:29)
이 장면은 예수님이 안계신 동안에 제자들이 귀신들려 찾아 온 아이를 만나게 됩니다. 그 부모가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제자들이 내쫓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내어 쫓으셨고 제자들이 하도 이상해서 “예수님 우리는 못 내쫓았는데 예수님은 내쫓으셨습니까?”라고 물었고 예수님은 “기도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스토리는 간단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즉각적으로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시기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누가복음 9장에서, 혹은 같은 사건입니다만 마태복음 10장에서 모든 병든것과 그리고 귀신들린 자들을 고칠수 있는 권세를 주신 사건이 나타납니다. 그런 권세를 받았는데도 어떻게 이때에 와서 귀신들린 것을 못 내 쫓는냐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뒤로 가면 또 귀신들린자들을 고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의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우선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은 기도와 관련되어 두가지를 보여줍니다. 첫째는 능력의 근원이 기도에 있다는 사실과 둘째로 그런 능력을 가져오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기도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제자들이 이전에 그렇게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든것과 약한 것들을 고치고 귀신을 제압할 수 있는 놀라운 권세를 하나님께로 부터 받았고 제자들은 실제로 이것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귀신이 쫓겨 나가고 병든자들이 고침을 받고 죽은자들이 살아나는 그런 놀라운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와서는 어린아이이기는 하지만 귀신들린 아이를 내어쫓지 못해서 망신을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이유는 도대체 무엇때문입니까? 이것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기도와 능력의 상관관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성령의 놀라운 능력이 기도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 다 아는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 우리가 건강하고 활기있는 기도의 영을 유지하면 유지할수록 그 능력은 더욱 더 충만해지고 그 활기있고 충만한 능력을 잃어버리면 잃어버릴수록 그 능력은 점점 쇠약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능력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건강하고 정결하고 열심있는 영적인 삶을 수행 해 나가느냐에 따라서 이 능력이 수시로 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증거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기도외에는 이런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다시말하면 기도를 통해서만 이런 종류의 귀신이 나간다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kaind'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귀신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가지 종류의 귀신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들이 똑같이 예수님을 믿는 신자이지만 영적으로 매우 강한 사람이 있고 또 영적으로 매우 약한 사람이 있고, 신앙이 아주 깊고 얕은 사람이 있듯이 귀신들도 다양하게 등급이 있어서 어떤 귀신들은 매우 강력하고 어떤 귀신들은 강력하지 못한 다양한 귀신들이 있다는 것을 성경이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누가복음9장이나 마태복음 10장에서 그렇게 사도로 부름을 받으면서 예수님께 큰 영적인 권세를 받았는데 그 권세를 모두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귀신을 내어쫓고 그리고 병든자도 고쳤습니다.
그러나 다른 귀신들은 다 내어쫓았는데 이 어린아이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은 매우 강력한 그런 수준을 가지고 있는 그런 귀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귀신을 제자들은 내쫓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내쫓으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주님이 우리에게 영적인 능력을 주셔도 그 능력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기도생활을 열심히 해 나가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 수시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처음에 주신 그 능력이었다라고 하면 아마 능히 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속에 명백하게 제자들이 기도를 게을리 하였다는 사실은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라고 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위한 기도생활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즉 그들의 나약해진 영적인 능력에는 그들의 나태해진 기도생활이 있었기 때문에 기도생활을 새롭게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새삼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신 것은 ‘너희들도 더 많이 기도해서 능력을 유지하면 이런 귀신을 내어쫓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싸움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나약한 평화주의자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와 및 다른 서신들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영적인 전쟁입니다. ‘깨어라 근신하라’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 이때에 하나님 앞에 깨어서 사는 것만이, 전쟁에 나간 군인과 같은 심정을 가지고 사는 것만이 너희가 참 신앙을 유지하는 길이다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들과 악한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영적인 싸움이 도사리고 있는 영역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의 경험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신앙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부딪히게 되는 이 싸움을 제압할 수 있는 권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라고 말할 때 이 씨름은 고대에서 격투기를 말합니다. 두 사람이 올라가서 한사람이 죽을 때까지 때리는 그런 씨름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신사적으로 다리를 걸거나 미는 것이 아니라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밟고 해서 죽이는 그런 죽기까지 싸우는 싸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그런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게으르기 때문에 아무 의식이 없습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전쟁이요 영적인 싸움이라고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피나는 싸움과 인내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신앙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은 그들 속에서 전쟁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이 늘 택하는 것은 평화로운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평화라고 하는 것이 죄와 싸워서 이겨야만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죄에 굴복해도 평화가 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인의 심리학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나쁜 일을 통해 돈을 얻고 싶고 이익을 얻고 쾌락을 찾고 싶다고 마음을 먹게 되면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 마음은 안달을 하게 됩니다. 내 욕망을 채우고 내 욕구를 채우고 필요한 것을 얻을 때까지는 내 자신의 욕망이 나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런 싸움은 한쪽에서 양심의 소리가 들려올 때 더 치열해집니다. 그 소리가 솟아오르면 솟아오를 수록 더 치열한 싸움이 일어나며 평화가 사라집니다.
이런 삶에 대해 사도 바울은 자기 마음속에서 두 법이 싸운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법대로 살려고 하고 하나는 육체의 욕망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 사이에서 견디다 못해 울부짖는 소리가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라 것입니다. 그런 갈등을 보여줍니다. 그러다가 그런 속에서 평화를 얻는 길은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완전히 죄를 이겨버리든지 아니면 그 죄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죄에 굴복하고 항복해서 그렇게 행동으로 자기가 원하던 것들을 얻고 쾌락을 충족하고 범죄를 하고 나면 평화가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평안 뒤에는 반드시 더 깊은 죄의 어두움이 밀려오고 더 무거운 죄의 무게가 우리를 짓누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심령을 찌르는 것입니다. 죄가 누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렇게 되고 나면 그것이 진정한 평화라고 할 수 있습니까?
진정한 평화는 그 죄와 더불어 싸우면서, 우리를 향해 도전하는 영적인 세력과 싸워서 그것을 완전히 제압했을 때에도 평화가 옵니다. 이 평화에는 어둠이 뒤 따라 오는 것이 아니라 빛이 따라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신앙적인 깊은 고통을 받고 어려움 속에 있을 때에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깊이 싸워서 자신의 신앙에 그런 잘못된 것들과 더불어 싸우고 승리하고 난 후에는 반드시 놀라운 깨달음이 뒤따라옵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생각이 깊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특별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권으로 무장시키시는 방법이 마귀와 싸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에 이미 하늘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칭찬의 목소리까지 들려주셨는데 그 사랑하는 아들을 예수님께서 어디로 내보내셨습니까? 광야로 내보내셔서 예수님께서 하게 하신 것은 바로 마귀와 싸우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귀와의 싸움에 직면해서 시험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와의 싸움이 끝난 후에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지셔서 갈릴리로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자녀들을 강하게 하시기 위하여 마귀의 도전을 받게 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도전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결코 귀신들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귀신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나니까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 지신 것이지 만약 졌다면, 그럴 리도 없겠지만 예수님이 졌다면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헤쳐나가면서 살기 위해서 무엇인가 우리 속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착하게 잘 살아야겠다는 소원을 갖는 갸륵함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마음만 그렇게 먹으면 무엇합니까? 그 마음이 잘 유지됩니까?
신앙생활 하면서 자신이 미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나의 신앙적인 양심은 이렇게 살라고 말하는데 내 육신이 그것을 따라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미워진 때가 없다고 한다면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또 매일 미워하고만 있다면 그것 역시 참된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없습니다. 또 한 없이 자신이 대견스러워도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얼마나 형편없이 살면 자신이 대견스럽게 생각이 되겠습니까? 갸륵한 소원을 가져도 어떤 때는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중고등학교 때까지 교회에서 신앙적으로 잘 가르쳐 놓으면 대학교가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어버립니다. 한때는 새벽기도도 나오고 예배 때 ‘아멘’ 하면서 눈물도 글썽이고 성경공부도 했던 학생들이 말입니다. 그것뿐입니까? 대학교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이 변해야 하고 하나님 나라가 와야하고, 청지기처럼 물질을 써야하고, 좋은 말은 다 하면서 막상 취직이 돼서 사회로 나가면 추억이여 안녕하면서 잊어버립니다. 과거에 정결했던 삶, 조국교회에 대한 꿈, 이런 것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일주일 동안 찌들은 얼굴로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우거지상으로 예배를 견디면서 지내다가 좀더 지나서 아이라도 하나 낳으면 유아실에서 아이나 어르면서 과자부스러기나 주워 먹는 그런 신앙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한때는 역발산 기계 새와 같은 신앙을 꿈꾸던 사람이 막판에 가서는 이빨도 빠지고 발톱도 빠진 삐쩍 마른 호랑이와 같이 살아가는 역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수 없이 보게됩니다. 그들이 정보가 없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은혜 받는다 하면 항상 뒤에 섭니다. 왜냐하면 다 안다는 것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사실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들의 궁극적인 이유는 능력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의 삶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의 연륜이 깊어져 가면 갈수록 더 늠름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비비 꼬여서 처음에는 호랑이 같았는데 막판에는 호랑이랑 고양이랑 접붙여 놓은 것 같이 애완동물 비슷하게 되어버려서 상황과 환경이 주는 비스킷을 받아먹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연약하고 야성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의 삶이 결국 그 근본적 원인은 영적인 능력을 잃어버린 삶에 있습니다. 뭔가 부지런히 애를 쓰는데 소득이 별로 없습니다. 복음사역에 열매가 없고 사람도 안 모이고, 모인다 해도 변화가 없습니다. 능력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승리라고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6-7년쯤 전에 에베소서 6장을 보면서 매우 놀랐습니다. 에베소서 6장은 5장에서부터 여러 관계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윤리적인 권면을 하고 있는 장입니다. 5장에서는 교회와 성도, 신랑과 신부, 6장에서는 자녀와 부모, 부모와 자녀, 고용주와 근로자,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종말로...’라는 말로 시작을 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하여져야 할 필요성을 말하고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의 현실이 처절한 영적인 싸움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면이 영적 전쟁의 도입부가 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고 근로자가 고용주에게 충성을 다하고 고용주가 근로자에게 그들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는 의무를 다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온전히 살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인격만이 아니라 마귀가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부부사이에 이간질을 하고 부모와 자식간에 원수지게 만들고 동기간에 이를 갈게 만드는 그런 미움과 원망이라는 복수의 관계의 한 복판에는 문제가 있는 것 같고 사건이 있는 것 같지만 배후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극단적이 되게 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새롭게 바꾸고자 할 때 물론 우리의 결심이 필요합니다. 뜻을 세우지 않고 어떻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까? 뜻을 세우고 자기의 결심을 굳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홀로 자신의 신앙을 굳게 지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결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은 매우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놀라운 능력과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와 함께 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앙생활을 승리로 이끌어 갈 수 있도록 그렇게 권능을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의 신앙의 삶에 있어서 승리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능력은 단지 귀신을 내어쫓는 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모든 일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심지어 우리의 육체의 연약함까지도 강하게 하십니다. 성령의 놀라운 능력은 우리에게 새 힘을 주고 그리고 용기를 줍니다. 좌절한 마음을 일으켜 희망을 갖게 만들어 주고 어둠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참 빛과 그 능력을 깨닫고 체험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적으로 풍성하게 만드는 그 궁극적인 힘은 바로 우리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서 부어지는 생명의 능력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전력을 받아서 움직이는 그런 존재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어지는 영적인 능력 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승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범사에 우리에게 유익이 될 뿐 아니라 범사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놀라운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 영적인 사람이 되지 않으면 영적인 삶도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 그 거룩한 능력이 부은 바 되어서 그 능력의 원천을 소유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된 습관을 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결심, 우리의 삶을 고치고자하는 피나는 노력으로도 안되던 것이 성령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을 우리는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예)화투를 너무 좋아하던 사람이 손을 자르고 몇 년 뒤에 그 팔에 갈고리하고 다시 화투하는 이 야기-목사님이 담배를 좋아했는데 은혜 받고 끊게 된 이야기)
성령의 능력은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에 놀라운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에 원천이 될 뿐만 아니라 결국은 교회를 결박하고 사람들을 결박하고 있는 악한 죄악의 그 원흉이 되고 있는 그 마귀의 사슬들을 끊어주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 R..A. 토레이 목사님이 집회가 끝나고 나면 개인적으로 예수를 영접하는 시간들을 갖게 했 는데 구원 상담자들이 포기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영접한 경우)
이러한 성령의 능력이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닙니까? 부흥의 역사에 보면 영국에서 어느 날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부흥을 경험하고 자기가 옛날의 자신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 보이고 안타까운 마음 생겨서 설교집을 사람들에게 읽어주었는데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모여들었습니다. 거기서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뒤집어지는 일들이 일어났는데 무려 2년 동안이나 계속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성령의 능력은 이처럼 우리 개인의 삶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도 변화시키고 그들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교회라는 곳이 죽어도 안 변하는 곳 같지만 그러나 어떻게 보면 굉장히 쉽게 변하는 것도 바로 교회입니다. 가끔 집회를 나가면 요지부동하던 교회가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면 집회를 계속하면서 교회가 껍질을 깨면서 다시 태어나는 것 같은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해주시면 말입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권능과 성령의 능력은 사람만 변화시킬 뿐 아니라 교회도 놀랍게 변화시킵니다. 어둠에 굳게 갇혀 있던 가정에 도저히 복음이 들어갈 가능성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가정에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합니다. 사람들이 바뀌고 구원받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역사하셔서 하는 것입니다.
(예)나동환 형제 아버님 이야기 이러한 놀라운 변화는 인간의 생각이나 말이 주는 것이 아니라 말 씀을 들을 때 성령이 함께 하시므로 이전에 어둠이 물러나고 예전에 편견과 생활의 방식들이 쫓겨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하나님의 영적인 권능이 교회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교회, 영적인 권능과 역사가 나타나는 간증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가득 모인 그런 교회,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고 그 진리가 그 어두운 마음에 비칠 때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흉악한 죄인들도 고치고 실패한 사람들도 고치고 주정뱅이도 고치고 마약중독자도 고치고 하나님 앞에 소망이 없는 ?들도 고침을 받고 거듭나고 변화됩니다,. 문제는 말만 많고 인간의 재주만 많고 방법과 프로그램만이 많지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놀라운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시급한 문제가 아니고 무엇이겠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을 근본적으로 고치고 사람을 바꾸는 모든 힘들이 이런 하나님의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을 소유하지 않은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하나님을 위해서 거의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한다고 해도 그것은 매우 적은 일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서 그렇게 사람들이 놀랍게 변화되고 새롭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설처럼 듣고 박수 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바로 그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이 이랬다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놀라운 권세, 이런 것들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날 때 그 때 주님이 살아 계신 놀라운 증거들이 나타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겉만 번드르르 하고 뱀 껍질처럼 예쁘장하고 속은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것도 결국 죄를 책망하고 인간을 거듭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그에게 경험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 앞에 정말 하나님 백성다운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고치고 세상을 바꾸는 모든 일들이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능력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물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숙명론에 빠져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이 부흥을 주시기도 하고 거두어 가시기도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사를 주시기도 하시고 다시 가져가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라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얼마나 그 능력을 사모하는가 입니다.
이에 대해 본문은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들이 계속 기도했더라면 그 능력을 유지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지금 너희가 내어쫓지 못한 귀신을 내어쫓을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부담을 줍니다. 그것은 “나는 원래 그런 방면에 은사가 없고 원래 나는 영적인 능력이 없는 사람이고 나는 다른 방면에 재주가 있다”라는 변명이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놀라운 능력은 기도를 통해서 오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명백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러한 능력을 사모합니까?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땀 흘리고 고생하는 것에 십분의 일만이라도 드려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내 인생에 있어서 불행과 사역에 있어서 건널 수 없는 장애물들을 제거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한다면 우리의 해결은 훨씬 빠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기도”는 다른 복음서에 있는 병행 구절을 가지고 어떤 사본에서는 ‘기도와 금식’이라고 주)를 달고 있다고 합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기도는 일반적으로 “하나님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일상적인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능력은 집중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금식 기도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힘이 바로 집중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분명한 깨달음이 있는 가운데서 시작되고 목표가 있는 금식 기도이어야 합니다. 금식하면 답답함이 좀 나아질까 해서 하는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에스더가 기도 한 것처럼 분명한 기도의 좌표, 분명한 목표가 있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집중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금식 기도는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많이 기도하지 못하도록 하는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금식 기도의 놀라운 힘은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 기도하는 그 기간에는 낮에도 아침에 기도하던 그 영이 계속 이어집니다. 아침에 기도했던 집중된 기도의 제목들이 마음과 의식을 떠나지 않습니다. 다양한 것들을 생각하고 거기에 탐닉하고 빠질만한 육체의 기운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식 기도는 그런 면에서 집중에 놀라운 효과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능력 주시기를 바란다’는 말과 ‘그것을 간절히 사모한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런 능력을 주셨으면 좋을텐데 주님 하늘을 열고 신령한 능력을 부어 보시옵소서 내가 싫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내 주머니에 주님의 능력을 한번 슬쩍 집어넣어 주십시오. 제가 그저 못 이기는 체하고 받겠습니다.” 이런 태도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요구를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소중한 것은 매우 소중하게 얻어지도록 합니다. 귀중한 것은 매우 힘겹게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14k보다 순금이 더 비싼 이유-만드는 과정이 훨씬 복잡하고 고통스럽고 양이 적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소중한 것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그러한 놀라운 능력이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근본을 이루고 매우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실 때에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에게 주시지 않고 ‘이런 것이 있단다.’ 보여주시면서 놀리시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중한 것들을 얻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사람이 너무나 소수이기 때문에 극소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자유함과 능력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건 하나를 갖고자 하는 소유욕을 가져도 모든 것이 그것에 집중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빛나게 해줄 뿐 아니라 삶 자체를 승리로 이끌어 가게 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성공한 삶의 비결이라고 할 수 있는 열쇠와 같은 이 능력을 아무에게나 주시겠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나 주신다고 하면 이 교회는 어마어마한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마음도 순결하지 않은 사람에게 병 고치는 능력을 주셨다면, 물질에 대한 탐욕과 결별하지 못한 사람에게 예언의 능력을 주셨다면, 그것으로 돈벌이에 사용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은 집중된 기도를 통과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부어주십니다. 왜냐하면 집중된 기도를 하는 동안 자기가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아, 나는 쓰레기와 같은 인간이구나’ 생각하게 되면서 변화되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신 다음에 거기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변화되고 하나님 앞에 집중된 기도를 통해서 삶도 하나님께 집중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성령의 능력을 소유해서 죄인들의 심령에 말씀의 칼을 꼽고 그들을 변화시키고 피 흘리게 만들었던 그런 변화의 놀라운 권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으면서 복음을 사역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투철하게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집중된 마음입니다. 마음에 정함이 없는 사람이 성령의 능력에 불타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은 정함이 없고 마음의 소원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에게는 부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해 고정된 심령,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어찌하든지 이 지푸라기와 같은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고정된 마음, 그렇게 내 인생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내 영생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다면 나는 아무래도 좋다는 하나님을 향해 집중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기도가 하나님의 놀라운 힘과 능력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고 또 그 사람의 중심을 보니까 정말 당신을 위해서 살 것 같은 사람이 있을 때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성령의 능력이 필요한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은 무엇 하나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변화되어서 우리의 속사람이 진정으로 새롭게 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능력주시는 것으로 무엇하겠습니까? 권능 주시면 그것으로 무엇할 것입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서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집중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권능을 주신다는 사실은 다 아는데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집중해서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기도가 집중이 안될까요? 삶의 촛점과 기도의 촛점은 같습니다. 삶의 촛점이 너무 많으니까 기도에 있어서도 촛점이 분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살아갈 때는 하나님이 촛점이 아니고 이기는 신앙생활이 촛점이 아닙니다. 죄를 이기고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인생의 촛점이 아닙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는 그렇게 기도해야 능력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는 합니다. 삶의 촛점은 이쪽이고 기도의 촛점은 저쪽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기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삶의 촛점이 기도의 촛점과 일치할 때 기도의 능력이 발휘됩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성령의 능력을 위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주신다는 단순한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삶이 그 기도에 어울리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집중하는 기도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까지나 기도가 먼저냐 삶이 먼저냐 하는 이 쓸 데 없는 논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디부터 시작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삶의 변화는 기도를 몰고 오고 기도의 변화는 삶의 변화를 몰고 오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부터라도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 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내가 기도하고 있는 이 기도의 제목이 나의 마음 속에 계속 살아 있을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이런 능력 없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가난하고 비참한 삶, 그리고 내가 여기서 이런 고리를 끊고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와 성령의 놀라운 은혜로 내가 새로워지고 새 사람이 되지 않으면 나의 이 지루할 정도로 답답한 신앙생활의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고 나는 새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 해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로 살려서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에 지고 죄에 눌리고 유혹에 지는 것을 계속해서 하나님의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방종한 삶을 살고 그러면서 껍질만 번드르르한 뱀과 같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 해 보십시오. 마음에 독을 품고 그리고 영혼에 변화되지 않은 그 사악한 욕망을 그대로 품은 채 거짓된 신앙 생활을 이어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우리 인생이 마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좋으신 하나님을 한번도 섬겨본 적이 없고 한번도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행복해져보고 자유로워져보고 승리해본 적도 없는 인생을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단언합니다. 그 사람은 불신자보다도 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가서 방종한 육체의 쾌락에 빠지자니 신앙이 옷자락을 붙들고 신앙대로 살자니 세상과 맺은 인연이 너무 깊습니다.
계속해서 이런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 능력을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기도에 자신을 바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이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참된 신자인가 거짓된 신자인가, 알곡인가 쭉정이 인가,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자기의 재주로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삶 자체가 아버지 앞에 변화되기 위해서는 새롭게 아버지 앞에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매달렸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애처로울 정도로 한가지 기도 제목으로 매달려 보신 적이 있습니까? 주님이 이제 비로소 기도를 듣기 시작하고 그의 기도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할 때 이미 기도는 끝나버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는 하지만 응답은 기대조차 하지 않는 이런 거짓된 믿음의 기도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을 얻는 이 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열렬하고 활기찬 기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부어주시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목마름으로 가득찬 기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하고 하나님께서 목마른 자들에게 능력을 부으셔서 새사람 만드는 것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기도의 형식은 있지만 기도에 마음을 싣지 않고 기도에 집중된 삶을 아버지 앞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기도의 형식이 아예 없는 사람들보다는 낫지만 그러나 결국은 궁극적인 승리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소중한 것은 귀하게 주어지는 법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지금도 우리가 그런 목마름으로 아버지 앞에 매달리기를 기다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기도하고 삶의 촛점이 하나 되어서 자신의 인생 속에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깨닫고 그런 능력을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지금도 찾으시고 또 찾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람들, 열심이 삶의 촛점과 기도의 촛점이 성령의 능력에 맞춰져 있어서 그것 하나를 얻기 위해서 몸부림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마침내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시고 남이 흔히 받지 못한 놀라운 성령의 능력이 부은 바 되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이 허락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매달리고 찾는 사람들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약속은 있으나 약속을 진짜 받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약속을 붙들고 분투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삶에 촛점으로 모으고 하나님 앞에 살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입니다. 자나깨나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하나의 제목 그것을 붙들고 주께서 그 일들을 이루실 때까지 집요하게 매달리며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매달리고 고통을 받는 것이 차라리 응답 받지 못해서 눌리면서 사는 것보다는 훨씬 자유하다는 확신 속에서 하나님이 이루실 약속들을 굳게 붙들고 매달리는 신앙생활 이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필수적인 신앙생활인지 모릅니다.
우리 중에 이런 삶을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런 마음으로 매달리고 추구하고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을 누구든지 찾고싶어 하십니다. 사면을 두루 보아도 무지무각하고 모두 냉담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기고 승리해서 결국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우리의 이름을 빛내기를 사모하기 보다는 이 세상의 성공과 이세상의 부를 꿈꾸고 이 세상에서 소금이 되기보다는 설탕이 되기를 즐거워하는 그런 사람들, 하나님께는 버림을 받아도 세상에게는 사랑을 받아야한다는 바보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와서 이따금 잃어버렸던 기도의 제목을 회상하듯이 ‘능력을 주시옵소서’라고 염불처럼 되뇌이는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의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사셨던 삶의 방식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런 진리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인생의 목표는 다양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오실 때부터 오직 그분의 인생의 목표는 하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아야하고 십자가를 짐으로 내 백성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그 하나의 촛점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새벽마다 빈 들에 나가셔서 그리고 산상에 오르셔서 혹은 강변에서 아버지께 기도하신 공통된 기도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아버지께 매달려 기도할 때 예수님의 마음을 공통적으로 움직이던 것들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바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분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면 그분의 기도가 무엇이었는지 분명해집니다. 말 따로 삶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도 따로 맘 따로 돌아가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분의 기도에는 항상 번뜩이는 칼이 있었고 그분의 기도 속에는 힘이 있었고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놀라운 능력을 받고 나타나신 후에는 본문에서와 같이 귀신들려서 사람을 어눌하게 만드는 벙어리 만드는 악한 귀신도 예수를 인정하지 물러나지 않을 수 없는 권세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교회가 고쳐져야 하고 교회가 고쳐진다는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이 바뀌고 변화된다는 의미를 빼놓고 바뀌는 교회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고쳐지기 위해서는 고쳐진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같은 세상이 되어진다면 그 세상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겠습니까? 교회와 같은 세상, 교회 속에서 볼 수 있는 악과 더러움이 하나님 앞에 변화된 세상에도 똑같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어떻게 복음화가 될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 교회보다는 나은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고쳐진 세상을 위해서 고쳐진 교회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고쳐짐을 위해서는 인간적인 사소한 노력을 가지고는 이 대세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원수가 몰려오는 것이 사소할 때는 우리의 힘으로 대적할 수 있지만 그러나 원수의 몰려오는 것이 성난 파도와 같을 때는 거기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교회를 세워주실 수 있는 분은 능력의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놀라운 권세와 영적인 권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통해 오는 나라인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문제들도 성령이 우리를 다스리시면 고쳐집니다. 질병과 같이 깊이 박혀 있는 패역한 요소들도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잘 박힌 못과 같이 박혀진 거짓된 가치관과 사악한 욕망들과 죄의 뿌리들을 주께서 칼로 찍어 도려내실 때에는 새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고 다 싸안고 거기에서 무슨 능력 있는 신앙생활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해야 합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고 눈물 흘리는 것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러서 세워주신 것은 감격하게 하기 위해 세워주신 것이 아니라 살게 하시려고 세워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천국에 데려가시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시는 것이 주님께는 더 중요한 목표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는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합니다. 예전에 실패하고 예전에 넘어졌던 모든 경험들을 가지고 오늘 우리의 삶을 결정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전에 넘어지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나의 연약함 그리고 예전 접어두었던 잘못된 나의 모든 삶, 이것을 부인해야 합니다. 나의 삶 속에는 이런 것이 일어날 수 없고 이런 연약한 것들이 나의 삶을 지배해선 안된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를 만져주셔서 그래서 내게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수치를 벗어버리게 하는 성령의 놀라운 권능을 주시도로 주님이 보실 때 애처로워 보일 정도로 매달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절박하게 주님 앞에 성령의 능력과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는 원동력을 구하면서 주님께 매달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부르짖음을, 이런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가득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입니다.
7.기도와 끈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아니하겠느냐”(눅18:7)
누가복음 18장에는 기도에 관한 교훈이 많이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익숙한 불의한 재판장과 억울한 과부에서 나오는 비유에서 그 비유의 목적 자체를 예수님이 처음에 아예 못 박고 있습니다. 즉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위함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주님이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은 항상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과 낙망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교훈이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련있는 붙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항상 기도하면서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 비유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부정적으로 주님이 1절에서 하신 말씀에서 우리의 기도 생활에서의 한 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낙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낙망은 믿음이 없어서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지 못하는 데서 오는 낙망입니다. 이것은 희망이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불 신앙이 들어왔기 때문에 나타난 낙망입니다.
우리는 두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눈이고 또 하나는 영혼의 눈입니다. 육체의 눈은 사물을 보고 판단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눈도 사물을 보고 판단을 합니다. 눈이 두 개가 다 떠져 있을 때에는 두 눈이 또 서로 정확한 것을 보는데 한 눈이 감겨 있을 때는 온전한 것을 보지 못합니다. 영의 눈이 떠 있을 때에는 육신의 눈이 상황을 보고 저런 환경은 견딜 수 있다든지 저런 파도는 넘을 수 없는 것이다 든지의 감각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육신의 눈이 보면서 어려운 때가 오는구나 고통의 때가 오는구나 라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을 보고 우리의 영의 눈이 감겨있으면 본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기가 죽고 낙심을 하고 낙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낙망한다는 것은 소망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는 힘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소망은 하나님이 내게 응답해 주실 것이며 내가 그 응답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라는 확신이 기도에 있어서 소망입니다. 그러나 영의 눈이 감겨 있고 영이 죽어 있는 상태에는 그 보는 것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낄낄 거리고 나쁜 일이 있으면 통곡하고 한숨 쉬고 낙심할 일이 있으면 낙심하는 것은 자연인의 삶이지 하나님을 믿는 천국 백성들의 삶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의 눈이 살아있을 때에는 우리의 육신이 보는 것으로 우리의 마음은 낙심하려고 하지만 우리의 영의 눈이 해석을 해줍니다. 큰 풍파 속에서 이제 도울 사람이 없고 끝이 낫구나 주저 앉게 되는 상황에서 영의 눈이 새롭게 해석을 해줍니다. 돕는 자가 없고 앞을 보고 뒤를 봐도 도망갈 길이 없는데
큰 풍파 일어나는 것 세상 줄 끊음일세
주께서 오라 하시면 나 본향 찾아가리
아무도 돕는 자가 없구나 내 인생에 왜 이런 시련이 생길까 아 이것은 세상 줄을 끊으라는 것이구나 누구도 나를 도울 사람이 없고 내 마음을 위로 할 자가 없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이구나 라는 등의 해석을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으로 낙심 되는 것이 믿음의 눈으로 해석을 해서 이제 의미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전에도 이런 시험 속에서 크게 환란을 만나고 고통스러워서 죽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환란이 나를 죽인 것이 아니라 절망이 나를 죽였구나 낙망한 것이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키에르케르고는 사망에 이르는 유일한 병이 절망이라고 말하면서 그 참된 희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커다란 좌절과 쓰러질 수박에 없는데 믿음의 눈으로 보면 역시 하나님이 이 큰 풍파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깨어서 살아야 이런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도 낙망하는 이유는 이런 속 사람의 눈이 감긴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 앞에 기도는 계속 하는데 사실은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모습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모습을 유지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도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모습은 있어도 이 속에서 믿음으로 역사 하는 영의 눈에 보이는 것을 새롭게 해석해서 우리 마음에 전해주는 깨어있는 기능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되면 기도하는 폼은 있어도 눈에 들어오는 것을 가지고 판단을 하고 보이는 것으로 좌절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놀아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환경에 의해서 놀아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낙심하는 신앙 생활 속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환경을 보고 쉽게 낙담하는 사람은 대개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고는 낙담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치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것들에 예민한 사람이 영의 것들에 대해서는 아주 흐릿한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정결케 되지 않으면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는 돈줄을 죄이셔도 우리가 바로 서지 않으면 하나님이 다른 줄을 죄이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믿음의 눈에 민감하게 살 때는 육신의 눈에 의해서 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고통을 받을 때는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지 탐구해야 합니다. 외로울 때 외로움을 느끼고 고통스러울 때 아파 하는 것은 짐승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고통 속에서 고통의 의미를 찾고 외로울 때 그 외로움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항상 우리가 기도하면서도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기도의 불을 끄는 사단의 확실한 방법은 낙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낙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 배신감을 느끼게 만들어서 하나님과우리 사이가 기도를 통해서 더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되고 돈독한 관계가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더 많은 의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에 마귀가 와서 예수님께 한 말이 ‘네가 말이 만일 하나 님의 아들이어든.....’이었습니다. 사실 마귀가 와서 그리스도께 다가와서 허물어 뜨릴려는 간괴한 방법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었습니다. 이런 것은 가정법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그런 식으로 다가와서 하나님과 아들과의 관계를 의심하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세례 받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낙망하는 것은 이렇게 영적인 손해가 많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결론 부분에서 예수님은 ‘하물며 하나님께서’ 라고 말하시면서 우선 기도에 있어서 열쇠를 가지고 있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기도하면서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는 힘도 능력도 있으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든지 안 들어주시든지는 하나님의 자유이십니다. 기도에 있어서 응답의 전권을 가진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이지만 우리의 기도에 도장을 찍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주님의 손을 끌어다가 도장을 찍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이지만 우 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기도응답에 공식이 있을 수 없고 기도가 자동판매기와 같은 기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봅니다. 가끔 돈을 집어넣고 즐기는 오락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공식을 만들어 놓고 우리가 그렇게 하면 기도 응답이 나오는 것은 이 아닙니다. 만약 철야 기도 30번하면 한 가지 기도를 들어준다면 우리는 기를 쓰고 그런 식의 기도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런 공식이 있으면 얼마나 편리하겠습니까? 죄를 지어도 새벽기도 7번만 나오면 없이 해 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기독교 신앙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되는 기도는 한번만으로도 되는 것이 있지만 안 되는 것은 평생을 해도 안 되는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기도의 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기도에 있어서 원리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떻게 하면 응답을 받아낼 수 있다는 것을 공식을 새우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결국 기도 자체를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도의 초점과 우리의 삶이 하나님 한 분에게 모아져야지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리차드 백스터가 교인들 앞에 글을 쓰면서 우리는 무엇이나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가 질문을 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설명에 기도하는 것은 분명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얻는 방법이고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가능한 모든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이지만 모든 것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해서는 안돼 라든지 이런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라는 것은 삶이 하나님 앞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때 그런 것들이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 기도는 내가 할 수는 있지만 옳은 기도가 아니다 라는 것을 알 수가 잇는 것입니다. 나이 40에 구역장을 맡은 사람이 충성스럽게 구역원을 섬겨야지 더 예뻐지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은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삶의 초점이 하나님께 있으면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무엇을 기도하지 말아야 할 지에 대해서 혼란에 빠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혼란에 빠지는 것은 삶의 초점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 증거입니다. 문제는 삶이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때 분명하게 무엇을 기도해야 하고 무엇을 기도하지 말아야 할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도 응답을 기쁨으로 받기 위해서는 인생이 주권을 가지고 있는 그 분을 기쁨으로 받아들여 삶과 기도 사이에 일치감이 있어야 기도하면서도 낙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하다가 낙심하고 낙망합니다. 그렇게 낙심하는 이유는 기도를 응답하는 하나님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을 통해서 얻어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집착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낙망하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그렇게 기도하였는데 하나님이 안들어주셨다고 낙망하는 기도를 보는데 이런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끔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어서 간절이 기도하였는데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 사람의 초점과 삶의 초점이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다면 안 이루어진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 그 사람에게 믿어집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그렇게 많이 기도하는데 얻지 못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훨씬 더 돈독해 지고 견고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하나님 앞에 기도 하면서 낙망하고 좌절하는 것은 내 방식으로 응답해주시는 한도 내에서만 내가 하나님을 높일 수 있고 찬송할 수 있다라는 생각이 그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들면서 내린 결론이 기도에 있어서 주권을 가진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기도에 있어서 초점과 삶에 있어서 하나되는 것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인가 우리가 기도해도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그것은 이루어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최선의 것을 우리에게 주기 위함임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주권자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의미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경품이 아닙니다. 뽑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 같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병을 고침 받기고 하고 깊은 고통 속에서 벗어나기도 합니다. 용서를 받기도 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도 하지만 거시적인 면에서 보면 이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 가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기도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기도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하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람이 삶의 동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면 그의 기도 제목은 이미 정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정화되지 않은 것이 있더라도 기도하면 곧 정화됩니다. 무엇인가 이루어져가도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초점과 맞지 않을 때는 이루어지는 것 자체가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신다는 생각이 안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 기도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기도하면서 이런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기도하여도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은 내가 옳은 삶을 하나님 앞에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기도는 팔꺽기가 아닙니다. 세게 밀어버린다고 하나님이 항복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아집을 버리고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담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아집이 우리에게 가득 있어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을 부어주셔서도 내 죄와 아집과 편견의 채에 다 걸러서 퍼내 버리던 마음이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녹아지고 모두 부서져서 언제든지 주님이 우리에게 마음을 부으실 때 우리를 안에서 빚으실 때 주님의 손끝에서 놀아나는 마음이 되는 것이 주님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입니다. 삶은 다 팽개치고 기도만 세게 해서 뭔가를 얻어내고자 그리고 얻어내고 나면 기도하는 고통은 잠시이고 기도 응답에서 오는 이익은 영원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사행심을 가지고 기도를 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기도하지 못하는지 보십시오. 이유는 삶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이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고 주님을 위해 살도록 구원받은 우리의 처지가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거룩한 그리움이 가득할 때는 여러분의 기도의 문은 열립니다. 가슴속에 부흥이 일어나면 그는 기도에 대해서 누가 가르쳐 주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그의 마음속에서 기도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에 목마르지 않는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마음껏 맛보는 거룩한 기쁨이 없는 사람이 기도할 때에만 우리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평상시에는 우리의 사고가 영적이지 않습니다. 밥벌이하고 돈벌고 열심히 세상살이에 파묻혀 살아갑니다. 신앙은 휴업중이고 하나님의 관계는 휴강중입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면서 개시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떠나가면서 패업할 개시가 삶에 계속되니까 삶과 기도가 연장선상에서 안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삶과 기도가 수준이 틀릴 때 평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상층부와 평준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층부와 평준하가 일어납니다. 하향 평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이 하나님 앞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정말 내가 살아가는 인생이 불꽃 같은 눈으로 지켜보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길을 따라서 걸어가는 삶인가 그리고 내가 주님이 원하고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있는가라고 생각하고 내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라는 생각하기 전에 내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입니다. 그런 반성과 그런 기도에 대한 생각만이 삶을 바꿀 수가 있고 삶을 개혁해 줄 수가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도록 촉구를 받으면서도 사람들이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삶이 하나님을 떠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인 그 사람들로 하여금 가슴을 찢고 기도하도록 만들어주는 교회가 위대한 교회입니다. 우리의 삶과 기도의 초점이 하나님을 향해 회귀하여야 합니다.
두 번째는 택하신 자들이라는 설명을 붙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의 택했다는 뜻은 한가지가 아니지만 여기서는 관계로 불러들이는 택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관계 없던 사람들을 택하셔서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내 백성이라는 당신과의 관계를 위해 서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불신자들은 할 수 없습니다. 그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거듭나고 구원을 받으면 이 거듭남과 구원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가져왔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할 때에는 이 관계가 우리 안에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런 관계가 성령의 충만함이 사라지면 희미해지집니다. 생생한 하나님의과의 관계를 갖게 될 때에는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은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런 확신을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속에서 갖게 됩니다.
기도할 때 여러분들은 이런 확신이 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낳으시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다해 주시고 우리를 향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 데까지 모두 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그 기도 속에서 먼저 주고받는 거래의 관계가 아니라 주님의 택하신 자들이 나도 주를 알고 주님도 나를 아는 것이 자식과 부모의 관계와 같은 것을 깨닫는 것이 우리가 기도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커다란 유익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이 관계에 대한 확신 이 분명합니다. 내가 기도를 하면 주님이 내 기도를 들으실 것이고 주님은 나의 아버지이고 나는 그 자녀라는 사실이 분명하고 충만해 집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사라들은 이 관계가 늘 의심이 갑니다. 구원의 확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늘 나와 함께 계셔서 동행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렇게 택함을 받은 사실만으로는 기도의 응답에 있어서 최종적인 보증이 되지는 않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성경은 택함 받은 자 앞에 수식을 하는데 밤낮 부르짖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도에 있어서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같지만 밤낮 부르짖는 자들은 더 생생한 관계를 붙들고 살 수가 잇습니다. 감격과 사랑이 있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소망과 하나님의 기쁨이 그의 기쁨이 되고 그분의 영광이 자기에게도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영예가 그에게도 영예가 됩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이 즐겁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즐겁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이 그의 인생의 커다란 밑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밤낮 부르짖는 택한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밤낮 부르짖는 것은 밤에는 철야기도를 하고 낮에는 교회에서 기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보다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을 자신의 목마름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호소하는 관경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간절할 뿐 아니라 오랫동안 계속되는 기도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이 기도제목을 주실 때는 부르짖게 하십니다. 간절하게 부르짖게 하셔서 삶 자체가 변하고 인간 자체가 독성이 빠져나가서 새 사람되게 만들어 주십니다. 밤낮 부르짖는 기도 제목은 초점이 하나입니다. 우선적인 기도제목이 됩니다. 분명한 것은 가장 하나님께서 기도하게 하시고 싶어하는 기도 제목을 가지고 불붙게 하실 때에 우리는 다른 기도 제목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상한 기도 제목만을 가지고 사람을 고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생한 기도제목을 가지고도 고상한 사람들로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그 기도가 무엇을 위한 기도인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 수준은 사람의 수준에 따라서도 다릅니다. 수준에 낮은 기도제목을 가지고 열렬히 기도한 대표적인 사람이 한나입니다. 그녀의 기도제목은 어떻게 보면 세상적인 기도제목이었지만 그 기도 제목이 밤낮 부르짖는 기도 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도 사용하셔서 아들을 주시고 바뀐 것은 아들 하나가 그 집안에 새로 태어난 것만이 아니라 이 한나가 부흥을 경험하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젓을 뗐다고 하니까 아직 아주 어린 아이였을 때였고 또 많은 아이 중에 하나가 아니라 오직 하나였던 아이였습니다. 그 어머니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절절하였겠습니까? 그녀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아들을 달라고 술에 취한 여자처럼 몸부림치는 기도하던 기간이 없었다면 예전의 신앙으로는 그 앙증스러운 그 아들을 하나님 앞에 바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성전에 아직 엄마라는 말도 못하는 어린 아들을 놓고 아마 울면서 그 길을 내려왔을 것입니다. 사람이 바뀐 것입니다. 자식을 얻고 싶다는 기도 속에서는 주님이 자신의 인생의 전부가 되고 주님이 자신의 삶의 초점이 된 것입니다. 기도 제목없이 이런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까? 잘 나가고 아무런 잘못되는 일이 없고 황홀경에 사는 사람 중에 몇 사람이나 주님 없이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는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까? 이 기도제목 앞에 서면 주님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이런 처절한 마음, 여기에 매달리는 동안에 하나님이 한나를 바꾼 것처럼 우리도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떼어서 성소에 두고 돌아오는 이 여인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전에 답답해서 성전에 올라가던 여인이 아닙니다. 그저 고상한 기도 제목은 아니었습니다. 보통 여자들이 갖는 평범한 기도 제목이었지만 생명을 걸고 목을 걸었습니다. 그것이 수준 낮은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를 하였지만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에 믿음으로 산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를 하면 기도의 제목이 여러분에게 그렇게 떠올라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배짱을 부리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하나님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몸부림을 하지 않고 밤낮 기도하기는 커녕 자기가 택함을 받았다는 헛된 자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불가항력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특권이 있고 우리가 몸부림치면서 하나님 앞에 얻어야 할 은혜과 특권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에서 맛보는 축복은 모두가 같은 정도가 아닙니다. 그에게 너무 중요한 기도 제목이지만 그 기도 제목이 그에게 그렇게 취급되지 않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걸었다고 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노는 것처럼 기도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응답이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심은 응답이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그 응답의 과정에서 우리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동역자들과도 이야기를 해보고 집회 나가서 교회에 중직자들이 이야기는 것을 들어보면 금방 표가 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주님의 성품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할 때에도 마음에서 길어 올려지는 고백이란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겉멋만 가지고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단지 입술로 하는 지는 금방 느껴집니다. 우리에게도 그런데 순전하고 완전한 영이신 하나님은 얼마나 잘 아시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밤낮 간절히 부르짖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발가벗고 홀로 선 것과 같은 긴장을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느끼게 만들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겨우 걸음마 수준의 성도에게 온 세계를 위해 통곡하라는 것은 너무 수준이 먼 이아기입니다. 그려나 무슨 기도제목이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반드시 내 생애 가운데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라면 여러분들은 한나와 같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미친 것 같이 기도하여야 하지 않겟습니까? 고민하면서 쏟은 에너지의 10분의 1만이라도 기도하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걱정하는 우선 순위가 기도의 우선 순위와 다른 것은 왜 입니까? 얼마나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문제가 있으면서도 기도하지 않는지 보여줍니다.
그래서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할 때 사실은 기도가 응답된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람됨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것입니다. 아들 하나 달라고 매달릴 때는 코 흘리게 같았는데 이제는 하나님 앞에 한 아들을 바치고 눈물을 쏟으며 돌아갈 때는 하나님이 그의 삶 자체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기도의 응답은 삶을 하나님 앞에 열납 되게 만들고 참된 삶은 그가 부르짖는 기도가 하나님 앞에 열납되게 만듭니다.
시골 강원도 같은 곳에서 폐광산들이 많습니다. 어느 굴은 800미터나 된다고 합니다. 그 곳에서 자란 어린아이가 꿈이 있었는데 돈을 벌어서 그 금이 묻혓다는 전설이 있는 광산을 다시 파는 것입니다. 어른이 된 그 아이가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오랜 세월동안 파 들어갔는데 동업자들도 다 떠나가고 자기도 거의 빈털터리가 되어서 마지막으로 굴을 파 들어가는 데 이제는 희망은 없다라고 생각하고 이 일을 포기하고 싶은 어느 날 굴 저쪽에서 누가 소리를 쳐서 가 보는데 고갱이가 묻혀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여러 사람들이 힘껏 빼보니까 고객이 자루 끝에 금이 묻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전의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는 길에 고갱이로 찍고 그냥 잘 안 빠지니까 포기하고 돌아선 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오래 부르짖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비결입니다. 물론 짧은 시간에 간단간단 하게 기도해서 응답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을 여러분을 인생을 우울하게 하고 여러분을 주눅들게 하는 기도의 제목은 어제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도 기도하고 있고 우선 순위 1번이지만 응답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 제목을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할 더 많은 땀과 눈물과 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기도를 거기서 그치는 것은 마치 고갱이를 꼽고 힘들다고 돌아서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오늘 성경은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라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너무나 간절하고 그것을 이루고 싶은 욕구가 너무나 간절한 나머지 그것이 한처럼 맺혔습니까? 너무나 간절하고 절박하고 너무나 오랫동안 부르짖었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상처가 되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고 그 기도제목을 생각하면 여러분들은 주님과의 관계를 붙들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합니까? 주님 보시에게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배부른 소리처럼 들리는 것이 아니라 저 기도제목을 내가 들어주지 않으면 저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고 느낄 정도로 여러분의 마음에 절박하게 다가옵니까? 이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고 기도 해도 마음 깊은 곳에 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허공을 처며 우리는 부르짖는 소리는 우렁차도 하나님의 보좌에는 적막이 깃드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너희는 기도하라 낙망하지 말고 밤낮 부리짖으며 내가 능력이 없거나 사랑이 없어서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기도하라 너희는 내가 변해서 기도를 들어주기를 바라지만은 나는 네가 변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너희의 기도가 내게 원한처럼 비치도록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기도의 제목이 중요합니까? 이 기도 제목에 인생을 걸 정도로 간절합니까? 그 기도가 원한 맺힌 것같이 절절한 사연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나아갑니까? 주님은 인자가 올 때에 믿는 자를 몇이나 보겠느냐고 말합니다. 이런 기도 제목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주님의 손에 걸고 주님께 집중한 삶을 사는 사람을 믿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주님이 올 때 사람들의 삶의 초점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과의 관계에 목매이는 사람이 적고 주님의 기도에 한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예언이 이루어지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응답 받지 못한 것을 불평하기 전에 그 기도 제목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상함이 되고 한이 되도록 하나님께 비칠 정도로 간절히 부르짖어서 주의 신령한 응답을 바라는 여러분들 되길 바랍니다.
8. 기도와 참회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13-14)
지난 시간에는 ‘기도와 끈기’에 대해서였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기도와 참회’에 대해서 오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을 읽어보면 이 기도에 대해서 과연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려고 이 비유를 드셨는지 좀 의문이 가는 그런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그 불의 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는 그냥 끈덕지게 그 재판장에게 매달렸더니 응답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매달리면 하나님이 너희를 가만히 내버려두시겠느냐. 그래서 기도에 있어서 끈기를 가르쳤다는 것은 의심 할 여지가 없는데, 그러면서 주님 하신 말씀이 “그러나 하나님께서 밤 낯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기도를 오래 참으시겠느냐. 그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그건 누가 봐도 이해가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론 부분이 이해가 가는데, 우리가 읽은 부분에는 뭐가 나오는가 하면 마치 기도가 아니라 어떤 겸손한 생활에 대해서 이렇게 교훈 하시려고 하는 것처럼 결론이 그렇게 납니다. 뭐라고 나는가 하면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 앞에 가면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더 의롭다 여김을 받고 돌아갔느니라” 이렇게 나옵니다. 그 사실은 결론 부분을 보면 사실은 기도에 대한 교훈이라기보다는 ‘낮아짐’에 대한 교훈이고, 그 앞부분을 보면 어떻게 하면 주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가. 이런 교훈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이 18장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분명히 기도에 관한 교훈이라 이렇게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주님께서 비유를 통해서 마지막 내리신 결론,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스스로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것이 만약에 일반적인 신앙생활에 교훈이 아니라 기도에 관한 교훈이라 할 것 같으면, 그러면 낮아지고 높아지는 것과 기도생활이 어떻게 연결이 되며,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또 참회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답을 얻어야지 만, 우리는 결국 이 교훈이 ‘기도’에 관한 교훈이다.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자, 그럼 이제 하나씩 문제를 풀어봅시다. “주께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오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하나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낮아진 자의 기도를 잘 들으신다. 그런 뜻입니다. 이 기도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응답되어야지 만 이 기도가 결국은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자체도 아름답지만 그러나 기도가 진짜 영광스럽기 위해서는 비유를 하자면,
여러분, 요즘에 보면 꽃가게에 가면 군자란이 있습니다. 아시지요? 난인데 약간 굵으면서 쭉 올라옵니다. 그런데 거기에 꽃이 활짝 핍니다. 주황색 꽃이 아주 아름답게 핍니다. 오래가지는 않는데 활짝 핍니다. 화분을 고를 때, 꽃이 핀 화분과 꽃이 안 핀 화분은 값이 천지차이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군자란에 꽃이 피니까 아름다운 것이지 꽃 안 피면 파 심어놓은 것이나 난을 심어놓은 것이나, 글쎄 어떤 사람한테는 차이가 날지는 모르지만, 나는 냄새 빼놓고는 별로 차이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꽃이 그 위에 매달리면 그 화분 전체가 고결해 보이고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고싶은 그런 마음을 갖게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도 훌륭하지만 기도의 응답은 아름답게 피어난 난초 위에 맺힌 아름다운 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 기도에 대한 간증을 할 때 마음이 불붙지 않습니까? “와! 그때 왕년이기는 하지만 내가기도 열심히 했지” 대게 왕년에 기도 많이 한 일 이야기하는 사람이 금년에 어떻습니까? 금년에 신통한 게 없는 사람입니다. “왕년에 기도 열심히 했지. 금식도 하고” 누구는 그랬습니다. 그저 금식을 밥먹듯 하고, 철야를 잠자듯 했다고 합니다.(웃음) “사흘 걸이로 철야를 하고, 그저 금식을 밥먹듯 하고 그렇게 기도를 했지” “어 그때 어땠냐”고 하니 “마음이 녹는 것 같았지” “어 그래서 어땠냐”고. “기도를 하니까 기도가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는 것 같았지” “어 그래서 어떻게 하냐”고. “기도를 하고 나니까 마음이 시원하더라”고 “어 그래서 어떻게 됐냐 응답을 받았냐”고 “아니 응답은 못 받았어”
그것이 무슨 영광입니까. 혼자 열낸 것인지. 성령에 붙잡혀 기도한 것인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말발이 세워질려면 그러면 분명하게 증거가 있어야된다는 것입니다. 왜 아멘을 안 합니까? 뭐가 있어야 됩니까? 증거가. “기도를 간절히 했는데 그런데 가슴이 녹는 것 같고 하늘을 향해 기도의 향불이 타오르듯이 올라갔는데” “그래 어떻게 됐는데” “아! 그런데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응답을 해주신 거야” 할렐루야!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러니까 나 좀 봐 형편없던 사람이 변해서 그래도 덜 형편없는 사람이 됐잖아” “이만한 사람이 됐잖아. 이 모두 하나님이 내게 역사 하신 은혜가 아니고 뭐겠어” 이게 바로 증거가 있는 신앙생활이요 믿음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TV에서 가끔 건강 강좌를 하러 나온 사람이 비실비실 하게 생겨서 진짜 황달 들기 직전에 든 사람이 가끔 나와서 어떻게 부지런히 침이 마르도록 건강을 이렇게 챙겨야 된다고 열나게 선전을 합니다. 그런데 말발이 안 섭니다. 어떤 의사 한 사람이 새로운 건강 학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게 뭐냐고 하니까 모르모트를 가지고 실험을 해봤더니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이전에는 뭘 먹어야한다. 뭘 먹어야한다. 암에 안 걸리려면 항암 식품이 있는 식품을 많이 먹어야된다. 하면서 그때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 사람이 와서 고구마가 좋다고 하니까 가락 동 시장에 고구마 값이 폭등을 하고, 고기는 안 좋은 것이다 그러니까 갈비 집이 문닫는 사태가 속출하고, 어느 갈비 집은 하도 안되어서 사장이 기둥에다가 목매어서 자살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새로운 건강법을 만들어내는데 그게 무엇이냐 하면 모르모트를 가지고 실험을 해보니까 새끼를 낳아서 다 분산을 시키고 가족들이 흩어지니까 이 모르모트들이 병이 잘 걸리는데 암을 집어놓고도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서로 화기애애하게 살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주니까 암 세포도 억제되더라. 그러면서 이제 자기가 새로운 발견을 쭉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주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나운서가 참 짓궂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 강사는 A+ 강사였는데, “그런데 선생님! 예 최근에 듣기에는 선생님은 이혼하기 위해서 별거 중이시라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 말 한마디로 그분의 모든 신뢰가 졸지에 다 무너진 것 이였습니다.
그렇게 미워하고 서로 갈라서면 건강에 해롭고, 잘 살 사람도 금방 암에 걸려 죽어버린다면서 그러면 자기는 왜 사랑을 안하고, 그렇게 별거를 하고, 이혼을 하려고 애를 쓰는가. 이야기입니다. 그 지점에서 이 사람은 할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게 바로 증거가 없는 인생살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똑같은 것입니다. 아니 왕년에 아무리 기도하면서 끝 발 날렸으면 뭐 합니까? 응답을 받았어야지. 그러면 여러분들은 머리가 좋으시니까 금방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반대의 이유는 없을까요?” 무슨 말이냐 하면 기도는 거의 안 했는데 응답에 놀라운 체험을 가지고있는 사람, 이런 상상을 하는 사람들이 대게 신앙생활을 못하는 사람들이 쓸데없는 상상을 합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학교에서 상상력과 추리력이 뛰어나지만, 못하는 학생들은 추리력 상상력 대신 공상이 뛰어납니다. 말씀을 묵상해야지 진리를 가지고 공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응답을 주신 것을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이 세상에 있겠느냐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뉴욕에 갔다 온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업이 위기에 몰려 다 쫄딱 망하게 되었는데 복권이나 하나사자. 그리고 복권 사 가지고 목사님께 가서 축도를 받았더니 졸지에 600만 불인가 당첨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덧붙였습니다. 그런 영력이 저한테는 없으니까 나한테는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목사님이 그 절박한 위기 상황 속에서 자기에게 손을 얹고 간절히 눈물로 기도해주었으니까 그 다음날 그 복권이 당첨이 되었을 때, 당장 ‘하나님의 역사다’ 이렇게 생각했지 신앙 없이 기도 안 하고 살다 복권 당첨되면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보고 계시는데도 뭐라고 그러냐 하면 ‘야! 재수 끝내주는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축복해주셔도 주님이 내게 축복해주셨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야! 재수 참 좋구나 역시 잘될 사람은 진짜 넘어져도 어떻게 된다고 하는데 어찌 되었던 참 좋은 것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게 바로 자기의 사고방식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진짜 주셔도 하나님께로 왔다고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대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안 돌립니다. 왜 대답을 안 합니까? 그렇지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안 돌립니다. 해봐서 알지 않습니까? 기도 안 하는 사람들은 일이 잘되면 전혀 그것이 하나님 때문이라고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말 우리들이 이 기도를 통해서 응답을 받는 것은 화초에 있어서 화려한 꽃과 같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가 피를 말리면서 아버지 앞에 매달린 그 기도가 아주 장엄한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아야되겠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응답을 받겠는가. 끈기도 있고 물론 모든 게 다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오늘 보십시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고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지 기도할 때에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고, 뒹굴고, 혈서를 쓰는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 겸비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응답을 받는다. 그런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저는 주위에서 인격이 깊고, 고매한 그리스도인들을 많지는 않지만 종종 만납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과 많이 대화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은 그래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가장 축복하시는 것은 주님을 많이 닮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하면 할수록 사람들의 인격이 깊이 고매해지고, 천박하고 즉흥적인 사람들이 신중하고 인격이 깊이가 있어집니다. 초등학교를 안 나와도 정말 그런 인격적인 깊이를 갖게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세계 속에서 살면서 그 기도자체가 하나님 앞에 한없이 낮아지는 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이 기도의 영에 흡수를 받아서 자신의 삶 자체가 기도하는 정신으로 새롭게 만들어져서 그래서 겸비한 태도가 삶에 모든 부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의 영속에 사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줄을 알고, 하나님 앞에 겸비해지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한 교훈을 주시면서 '높아지는 것과 낮아지는 것, 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인간은 결국은 혼자 힘으로는 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인가 믿지 않고는 살 수 없게끔 되어있습니다. 무언가를 믿어야 되게끔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미아리에 한번 가보셨지요? 고개 넘어서 돈암 동쪽으로 내려오다가 보면 애기 보살서부터 시작해서 처녀 도사, 총각 도사, 무슨 산이 그렇게 많은지 지리산에서부터 시작해서 무슨 백운산, 계룡산, 계룡산이 제일 많습니다. 그런데 도봉산은 없습니다. 10년 수도부터 시작을 해 가지고 18년, 뻥쳐서 30년까지 쭉 간판을 붙였는데, 그곳에서 1년 동안에 오고가는 복채가 몇조랍니다. 어마어마합니다. 왜 그러냐하면 기본적으로 한번 점치고 얼마 하는 게 아니라 이제 이게 맛이 들리고 단골이 되어 그 사람들에게 꽉 잡히게되면 액수가 올라가는 것입니다. “2000만 원 짜리 굿을 하시오. 3000만 원 짜리 굿을 하시오” 이런 식으로 한없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한참 선거가 있을 때는 딱 만나서 한번 “출마해, 하지마, 어느 방향으로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데 1200만 원까지 받았다고 하니까 해 볼만하지요?
그런 사람들이 거기에 있는데 드나드는 사람들이 여러분들보다 공부를 못했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들보다 신앙이 없을 것 같습니까? 물론 신앙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보다 공부를 못했을 것 같습니까? 아이큐가 낮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보다 사회적인 지위가 우스운 사람들일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렌저 승용차가 그 밑에 즐비하게 서 있습니다. 이게 바로 인간입니다. 정상적인 인간이 이렇게 되 먹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제가 시편 23편을 강해하면서 여러분들 중에 그 설교를 직접 들으신 분은 여기 몇 분 안되지만, 왜 하나님이 우리를 다른 동물에다가 비교하지를 않고 그 많은 동물 중에서 하필이면 양에다 비유하셨는지에 대해서 소상하게 설명을 드렸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양에다 비유하셨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기본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자는 날카로운 이빨과 빠른 다리가 있습니다. 얼룩말은 이빨은 없지만 부지런히 도망갈 수 있는 강력한 다리가 있고, 화가 나면 차버릴 수 있는 뒷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는 날아갈 수 있는 날개가 있고, 카멜레온은 적으로부터 자신을 은폐할 수 있는 보호색을 자기가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하다가하다가 안 되는 스컹크는 방귀라도 뀌면서 자기를 보호합니다.
양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뿔이 있지만 사슴이라든지 아니면 염소처럼 났으면 죽더라도 받아보고 죽는데 비비 말려 가지고 찐빵처럼 여기 딱 붙어있습니다.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냐는 것입니다. 이빨은 양을 잡아서 입을 짝 벌려서 보면 사람 이빨하고 똑같습니다. 어금니부터 시작해서 똑같습니다. 초식동물입니다. 그래서 그냥 질겅질겅 껌 씹기에 좋은 이빨이지 누구 물어뜯기에는 되지도 않는 그런 이빨입니다. 다리는 짧아 가지고 살은 또 오지게 쪄서 도망도 못 가는 그런 피조물이 바로 양입니다.
거기에다가 주님이 우리를 비유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애들아 내가 너희를 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창조주인 내가 너희들을 만들어놓을 때에 너희 혼자서는 살 수 없도록 내가 만들어놓았다” 이게 주님이 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저 혼자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형벌 받아야 할 마땅한 교만은 하나님 없이도 자기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교만입니다. 그 교만이 있는 한 그는 하나님 앞에 불행한 인생의 길에서 돌이켜 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귀에는 하나님의 진리도 들리지 않고 어떻게 해야지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그런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 아니면 자신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닌데, 그들이 정말 기도하겠냐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주 없이 살 수 없네 415장을 골백번 부르는 사람도 기도를 안 하는데 주 없이 잘사네잘사네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왜 기도하겠습니까? 시간낭비. 그 머리를 처박고 그렇게 매달려서 기도할 바에 그 시간에 가서 다만 몇 푼이라도 돈을 벌어서 먹고사는 게 백 번 이득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는가.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도움 없이 “나 혼자 잘살아 볼 꺼야” 그리고 마구 인생을 사는 일은 가능한가.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날도 이 세상에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안 돌아오는 것이고, 오늘날 이렇게 예배드리고 예수 믿으면서도 그렇게 기도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주님 앞에 기도 안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신문 보는 것만큼도 성경 안 읽고 TV보는 것만큼도 기도 안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되는지 여러분 한번 상상력을 발휘해서 생각을 해보십시오. 개는 누가 길러야합니까? 개는 사람이 길러야하지를 않습니까? 개가 혼자 돌아다니면 어떻게 되나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게 정말 개꼴이 아닙니까?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재수 없이 “개 사료” 그러고 돌아다니는 사람한테 한번 걸렸다 하면 그건 끝난 것입니다. 다음날에는 식탁으로 올라옵니다. 저야 잘 안 먹지만, 당장 식탁으로 올라옵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동물입니다.
그러니 주님 없이 살 수 없도록 만들어졌는데, 주님의 인도와 보호가 싫다고 하니 사는 게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서 교만하게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두 글자로 줄이면 ‘개꼴’ 개꼴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거룩한 성도의 삶,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을 기억하는 삶, 이것은 다 방언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그저 생긴 데로 살다가 ‘냅둬 이렇게 살다가 콱 죽어 버릴 꺼야’ 그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해주시고, 또 우리가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죽어도 부인할 수가 없는데, 왜 우리가 그렇게 참 무지막지하게 그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서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거절하고 막 가는 인생으로 살아서 고통과 불행을 한 몸으로 받으면서 그렇게 고달픈 인생 길을 걸어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 응답 받는 사람이 되려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범사에 여러분, 하나님 없이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의식을 가져야됩니다. “어! 그거 돈 가지면 돼” “어! 그거 우리 친척 중에 누가 있는데 그 빽이면 돼”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을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 오늘도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저는 주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내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옵시고 주님, 저는 너무나 연약합니다” “예수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한 순간이라도 주님이나를 놓으시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고백이 범사에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존재 자체가 사랑스러우면 물질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아니 사람이 좋고 사람을 생각할수록 그 존재, “어머 제가 저기에 있다니” 그 존재자체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픈데, 아 그까지 것, 뭐 돈 그까지 것 돈, 명예, 형통함 그런 것, 하나님이 팔 짧아서 못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려고 마음만 먹으면, 졸지에 우리의 인생에 상황을 격변의 길로 인도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 막으시는 길을 계속 걸어가려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뜻이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데 훨씬 괜찮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이 삶에 태도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들은 기도할 수 없습니다. ‘나는 잘살 수 있어’ ‘그래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은 난 바라지도 않아. 하나님이 훼방만 놓지 않으시면 나도 잘 나갈텐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왜 기도합니까? 왜 하나님 앞에 매달리겠습니까? 왜 매달릴 때 가슴이 녹아지는 것 같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심령이 불붙는 것 갔겠습니까? 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하실 까? 저렇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아파하지 않으실 까? 이런 식으로 노심초사하면서 인생을 왜 살겠냐는 것입니다. 자기 즐거워하면서 살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기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립니다만, 기도와 삶은 서로 유통하는 것입니다. 사는 것만큼만 기도하고, 기도하는 것만큼만 삽니다. 삶을 능가하는 기도도 없고, 기도를 능가하는 삶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엇에 관한 교훈에 접근하든지 결국 성경은 우리 자신이 통째로 바뀌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통째로 바뀌기를 간절히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낮아져서 그런 삶을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겸비하게 살아가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놀랍게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은 그러나 현실은 가끔 일어납니다. 시험 시간에 보고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많이 보고 쓰는 과목이 히브리어입니다. 그건 왜냐하면 그것은 한 시간 하고 와서 시험을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또 컷닝을 해도 금방 붙잡히는 게 그 시험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어차피 그릴 수밖에 없는데 몰라서는 봐도 똑바로 못 그립니다. 그래서 잔뜩 그려놓고 보면 누구 것을 보고 그렸는지 연구실에서 시험지만 넘겨보면 금방 압니다. “18번, 19번 다음 시간에 내 방으로 오시오. 와서 18번은 왜 19번 것을 보고 그렸소. 그리려면 똑바로 그리지 왜 이렇게 삐뚜르 그렸소” 이야기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적을 했을 때 두 가지 태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수님, 이렇게 라도 해야 되지를 않겠습니까?” 그러니 몇 가지형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심지어는 “교수님은 학교 다닐 때 커닝 안 했습니까?” 그런 정신병자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컷닝 했더라면 어떻게 할 뻔했습니까? 평소에 잘 살아야합니다. 내가 평소에 잘 살았는데 아니 이 녀석이 그 야단을 치니까 가만히 있더니 큰 소리로 “교수님은 학교 다닐 때 커닝 한 적이 없냐고” 그래서 눈 똑바로 뜨고 그랬습니다. “없다” 그랬습니다. “내가 10년 가까이 신학교를 다녔어도 난 없다” “정말 없습니까?” “없다” “하늘에 맹세할 수가 있습니까?” 이게 도대체 누가 누구를 심문을 하는지. 정신병자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컷닝을 지적했더니, 어느 학생이 눈물을 흘리면서 일대기를 주저리는 것입니다. “아! 우리 집 사람이 가난한 집에 시집을 와서” 자기가 컷닝 한 것 하고 집사람이 가난한 집에 시집온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래서 저를 뒷받침하려고 무슨 인쇄소 공장에 다니고” 아니 그 것하고 그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러니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그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그거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고 차마 이 목회자의 마음에 그렇게 되겠습니까? 가만히 듣고 보니까 말이 안 되는데, 계속 듣다가 보니까 말이 되었습니다. 내가 눈물이 났습니다. 결론은 무엇이냐 하면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렇게 보고 쓴 게 잘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수님, 제게도 이렇게 눈물나는 사연이 있습니다. 그저 처분만 바라겠습니다. 전 굳이 봐달라는 이야기 안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눈물 흘리는데 거 참 안들은 것보다 못했습니다. 자 잘못했지만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며 잘못했다는데 그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때는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아까 같은 그 녀석 같은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때 “그럴 수는 없지” 이렇게 말을 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참회하는 자에게는 너그럽고, 겸비한 자에게는 너그러우시지만 교만한 자에게는 아주 엄격하십니다. 그걸 기억을 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자체가 정말 겸비 그 자체가 되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낮아지고 또 낮아져서 그래서 주님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다라고 하는 의식, 그래서 마치 자기 자신이 신앙을 가지고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마치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상한 갈대를 붙들고 걸어가는 것처럼, 꺼질 것 같은 심지를 붙들고 가는 것처럼 하나님이나를 보호해주시지 않으면, 정말 내 인생이 정말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겠는가. 이것을 깊이 느끼는 사람들, 그래서 낮아진 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삶이 깃들여있는 기도, 이것을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낮아진 사람을 칭찬하시면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 앞부분에는 도대체 어떻게 연결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예수님의 진단이 나옵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의롭다함을 얻고 내려갔느니라” 그것입니다. 도대체 이것은 또 무슨 이야기인가. 두 사람이 나오는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 이였습니다. 그야말로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 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가 참 멋있습니다. “하나님, 저기 서있는 세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난 감사합니다. 저런 쓰레기 같은 인간같이 나를 만들어주시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하나님, 나 얼마나 그럴듯하게 사는 것 다 보셨지요? 이렇게 살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십일조에서 감사하고, 금식해서 감사하다는데 누가 돌덩이를 던지겠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리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가슴을 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언어는 속에는 많은데 언어를 표현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가슴을 치거나 배를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 앞에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것밖에는 생각이 안 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자기가 지은 죄를 생각하려니까 그건 자기의 기억에도 다 입력이 안 될 정도로 너무나 많고, 자기도 한번 흉내내서 나는 이것도 했습니다. 하고 해보는데 동족을 등쳐먹은 것밖에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주님, 조금 등쳤습니다” 이렇게 기도 할 수도 없고,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기도를 하려고 생각을 하다가 결국은 무너트려 버리고 “하나님, 내 마음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수없이 많은데 뭘 해야할지 모르겠나이다. 그저 내가 아는 것은 하나님, 다 아시지요? 나 좀 불쌍히 여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는데 아! 그 사람이 아까 폼잡고 기도한 사람보다 의롭다함을 받고 내려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기도 응답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야고보서 5장을 금방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오지 않기를 기도한즉 3년6개월 동안 비가 안 오고, 다시 기도하니까 3년6개월만에 비가 내렸습니다. 이스라엘에 비가 내리지 않을 때, 엘리야 한 사람밖에 기도한 사람이 없다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비.비.비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도시 생활에서 별로 실감이 안 납니다. 쉽게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3년6개월 동안 월급이 안 나왔는데 월급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교회 다니는 사람인데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는 오늘 날 셀러리맨들에 월급과 같은 것 이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비가 3년6개월 동안 안 오는데 곡식이 하나도 없고 초근모피로(?) 연명을 하고 짐승과 인간이 막 쓰러져 가는데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야훼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데 엘리야 밖에 기도 안 했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엘리야만 열심히 기도하고 다른 사람들은 껌 씹으면서 기도했다고 상상하는 것도, 그것은 독단적인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정성껏 옛날 사람들이 기우제를 지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생사가 걸리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렸어도 성경은 말하기를 이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셔서 하늘을 닫고, 기도를 들으셔서 문을 열었다. 어떤 주석가는 그래서 ‘엘리야는 하늘의 문을 닫고는 열쇠를 집어넣었다가 3년6개월만에 꺼내서 다시 연 사람이다’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럼 왜 그랬느냐. 성경은 말하기를“의인의 기도는 역사 하는 힘이 많으니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 엘리야가 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 이였기 때문에 한번 기도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때 거지들로 모여서 그냥 주여! 하고 부르짖는 것도 좋지만, 문제는 그 모인 사람들이 정말 거룩한 성도들인가. 때 거지들인가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때 거지들이 모인 기도는 거지같은 기도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모인 기도는 거룩한 기도가 됩니다. 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의 간구 하는 기도는 역사 하는 힘이 많아서 그래서 국가의 위기를 바꿔놓기도 하고, 그리고 교회의 어려움을 기회로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변화되지 않는 돌덩이와 같은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 간구 할 때, 주님은 하늘로부터 성령을 보내셔서 감화를 시키셔서 그 영혼에 새로운 은혜, 말씀을 부어서 변화된 사람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법정도 포기하고, 자기 부모도 포기하고, 모두 포기하고 끝내고 손 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고치신다는 말입니다. 중보 기도를 통해서 사람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고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그런 하나님이신 데, 그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도는 그렇게 역사 하는 힘이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주일 예배에 기도가 도무지 맥이 없고, 오락가락하고, 그저 기도 한번 하다가 TV 한 장면 스쳐가고, 신문 한 장면 스쳐가고, 외상 값 장부 지나가고 왜 이렇습니까? 삶에 초점이 그저 분명하지가 않고, 외상값 장부도 쫓아가고 TV도 쫓아가고, 영화도 쫓아가고, 신문도 쫓아가고 이런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그 초점이 그대로 예배시간에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책이 우리에게 떠올라야 할 때, 장부책이 떠오르고 이런 것 저런 것 떠올라서 한 다리씩 다 끼어 놓으려 고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 왜 삶이 분명한 초점이 없는데 초점이 없는 삶을 살다가 불의 한 삶을 살다가 와서 예배드리는 순간에 초점이 분명한 기도를 하려고 하니까 지어내기 전에는 안 나오고, 그것도 사실 지어내는 것도 비슷하게 살아야만 그것도 지어내는 것이지 그것을 지어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음악실기 시험을 보는데, 뭐 어떻게 사기 쳐서 들어가려고 해도 뭐 도. 레. 미. 파라도 좀 칠 줄을 알아야 들어가지, 전혀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는 삶을 살던 사람들이 그것을 흉내낼 수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사실입니다.
의로워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삶 자체가 정결하고 죄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자신에 대해 충만해지는 것, 의로운 삶입니다. 물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비교적 의인이 있고, 그 다음에 죄인이 있습니다. 비교적 마음이 훨씬 깨끗하고, 삶이 정결한 사람이 있을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상대적으로 어떤 사람은 더 더럽고 부패하지만, 그러나 어떤 사람은 비교적 정결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너무나 휘기 합니다.
또 하나 의로워지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참회의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지난날에 죄를 말갛게 하나님 앞에 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정결하게 된 사람들을 상대해주시는 것입니다. 의인의 기도는 역사 하는 힘이 많으니라 고 야고보 선생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그 도입부분에 무엇이라고 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너희가 죄가 있으면 서로 고하라” 그렇게 되면 의인이 될텐데, 그렇게 되면 그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다. 예를 들어볼까. 그러면서 엘리야를 예를 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살려고 애를 쓰지만, 기도 없이 삶, 그거 하나가지고 하나님 앞에 흠 없고, 정말 정결한 의인이 된다는 것은 그건 거짓말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돼 먹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 사경회 기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믿지 마라. 누구를 믿지 말라고 했습니까? 여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으면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데 그렇게 정결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차선책으로 뭐가 나오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죄짓고 우리의 영혼이 더러워지지만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겸비한 마음으로 나와서 깊이 참회하면서 우리의 영혼에 묻은 더러운 죄들을 그리스도의 보혈에 피로 씻어내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로 태우고, 회개의 눈물로 씻어서, 그래서 정결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의인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세리가 의로운 일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뭐 의로운 일을 했습니까? 의로운 일 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지금 하나님의 성전에 와 있다는 것뿐인데, 이것도 사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는 화나는 일이 아닙니까? 자기가 누구라고 이 거룩한 성전에 죄 밖에는 지은 것이 없는 녀석이 여기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폼을 잡는 것인데 하나님이 얼마나 진노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도덕적으로 살아온 사람도 하나님이 불결하다고 바리새인을 향해서 말씀하실 정도에 그런 불쾌함을 가지고 계시는데, 이건 아예 실제로 바닥을 기는 인생을 살던 사람이 거기 서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모욕이겠냐는 것입니다. 죄인이 거룩한 곳이 잘못서면 죽는 것입니다. 아십니까? 죄인이 거룩한 곳에 잘못서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죄는 많이 지었지만, 참회를 통해서 정결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사람들보기에 얼마나 불공평해 보이겠습니까? 그 술 먹고, 바람피고, 도둑질하고, 사람 찔러 죽이고, 온갖 나쁜 짓 하는 사람은 여기에 오고, 매일 교회 나와서 봉사하고, 그리고 주일이면 주일날 와서 봉사하고, 십일조하고 물론 더 낸 적도 없지만 덜 낸 적도 없이 그 십 원 짜리 하나까지도 정확하게 세어서, 지폐를 가위로 잘라서까지 정확하게 봉투에 넣어서 그냥 들 내고 이렇게 하고 살았는데 다 보더니 ‘에이 임마’ 그리고 ‘야 넌 참 의롭다’ 이러고 하나님이 보내셨으니 이게 유대인들에 사고방식에 이해가 가겠냐는 것입니다. 인간 같지도 않고, 저주받아 마땅해서 지옥에 땔감이나 불쏘시개나 될까 말까한 이 인간을 하나님이 “넌 의롭다” 그러면서 의롭게 살다 온 사람들은 “넌 불의 하다” 이게 사람들에게 이해가 가겠습니까? 이해가 가거나 말거나 우리는 상관없어.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망이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 앞에 우리의 인생이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사는 인생임을 다시 한번 기도의 교훈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은 삶 자체는 죄악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습니다. 삶 자체가 죄악 자체였고 악 밖에는 행한 것이 없었는데, 그런데 그가 하나님 앞에 와서 참회하지 않았더라면 바리새인보다 더 책망을 받고 더 저주를 받았을 것입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이 죄인이 바리새인보다 낫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간증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못된 죄를 많이 지었는지 자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진정으로 자랑해야 할 것은 옛날에 죄 지은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거기서 막 거품을 물고 불붙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거기에 불붙으면 안 되고, 얼마나 자기가 분명하게 참회했는가. 거기에 불이 붙어야합니다. 참회 부분에서는 흐리멍덩하고, 옛날에 내가 잘 나갈 때 얼마나 내가 막가파로 살았는지.... 그 동안에 자기는, 크리스챤의 람보가 되는 것 같은 기분에 빠지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데 있어서 나만큼 한 사람이 있으면 따라와 보라고 해’ 그것이 무슨 자랑입니까?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까?
이 사람이 지금 옳다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죄 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보 같은 사람들이 가끔 말합니다. “목사님, 다 집어쳐 버릴까봐요 목사님, 한번 타락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주님의 사랑을 더 알 수 있을 것인데” 착각도 유만부득이지 뭐 한 게 있어야지 집어 치워버리죠. 뭐 한 게 있어야지 집어치우지. 그 주일 날 한번 나오는 것, 집어치우거나 말거나. 아이고, 뭐 한 게 있어야지 집어치우지 뭘 했는가. 전도사님들 심방 시킨 것 외에 한 것이 없는데 뭐 했냐는 것입니다. 집어치운다고 하는데 그거 집어치운다고 하면 전도사님들도 좋으시지. 그런데다가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정말 한 것이 있어야지 집어치울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자기가 이 사람을 보십시오. 이 사람은 지금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격을 맛본 것이 아니라, 참회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격을 맛본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사람이 성경을 보면서 기껏 하는 이야기가 “저는 이 성경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 뭐냐고” 그랬더니 “이 세리는 정말 죄가 많았기 때문에 참회를 했고, 바리새인은 죄가 없었기 때문에 참회를 못한 것입니다” ‘엘본. 그랬습니다. 엘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잘 나왔다‘ 어떻게 성경을 보면서 이 세상에 유사이래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이 성경을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지.
여러분, 세리가 죄가 많았기 때문에 자기 눈에 죄가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불결한 인간인지 알고, 참회하게 되니까 그 죄가 점점 실감나게 절망적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저 주일이나 지키고, 헌금이나 좀 하고, 거들먹거리면서 사느라고 이게 인생에 전부요 신앙생활에 전부인줄 아는 교만한 그 마음이 밑바닥에 그럴듯한 종교생활에 깔려있는 그 똥내 나고 더러운 그 죄악의 실체를 아예 볼 수 없도록 만들어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교만함이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눈을 스스로 잃어버리게 만든 것입니다. 보지 못한 게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참회하는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깨끗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도록 만들어주는 놀라운 힘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높은 산만 뛰어올라간다고 해서 기도의 영력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경건한 영력은 깨끗한 삶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고, 정결한 마음, 정결한 삶, 정결한 심령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이 폼잡고 기도하는 많은 훌륭한 기도의 제목들을 들으면서 주님은 고통 하실 것이고, 마귀는 신이 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진심이 담겨지지 않은 기도, 교만한 마음을 물리치지 않은 기도생활자체를 가장 고통스럽고 가증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창하고, 청산유수와 같은 기도가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고, 그 참회하는 마음으로 겸비하게 낮아져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의 기도가 어눌해도 하늘에 능력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입만 열면 따발총 같이 그냥 자기도 모르게 기도하는 사람들, 부러워하고 그 앞에 기죽으면 바보입니다. 여러분, 금고를 여는 열쇠는 반짝거리는 금으로 만든 열쇠로 여는 것이 아니라 녹슬어도 거기에 딱 맞는 열쇠가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쪽 금고는 안 그런가보죠? 그렇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인가 하면, 오늘 성경은 낮아지는 마음, 참회를 통해서 정결해진 의로운 심령,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정결한 마음을 가져보십시오. 기도 응답 속에서 살아간다라고 하는 것은 정말 스릴에 넘치는 인생이 아닙니까?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일을 믿고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이 내 앞에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나는 도저히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루어지는 일을 보면서 아! 하나님은 살아 계시구나.
여러분, 시편에서 시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 하나님은 살아 계시도다. 생존하시는 하나님, 살아 계시는 여호와, 살아 계시는 주님 그게 장난이 아닙니다. 여러분, 지난 한 주간 동안 사시면서 그런 생각을 얼마나 하셨습니까? 아! 하나님은 살아 계시구나. 할렐루야. 이게 똑같이 감격을 해야지 박자가 맞는 것인데, “아! 하나님 살아 계시는구나.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야, 하나님 살아 계셔 너 알아? 하나님 살아 계셔. 너 알지? 알긴 뭘 알아. 하나님은 살아 계셔. 정말 살아 계셔. 내 마음에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이 놀라운 감격을 야 나는 네가 아무리 그렇다고 말해도 넌 나만큼 못 느끼는 것 같아” 그게 시인들이 써 내려간 것입니다. 이게 후렴이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세줄 쓰다가 한 줄씩 집어넣어라. 이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가슴에 그냥 벅차오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역사 하는 하나님
우리 찬양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아! 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본다. 아!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이런 것 없이 살아가는 무딘 마음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결심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기도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아무리 멋있고 그럴듯한 신앙생활을 해도 그것은 폼생 폼사입니다. 폼에 살고, 폼에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마귀는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기도하지 아니하면 우습게 보고, 가장 어린아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기도하면 두려워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 거의 기도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번 오늘 주신 말씀을 붙들고 주일 동안 여러분, 씨름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불결과 죄악을 정결하게 씻어내십시오. 여러분은 의로운 심령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겸비한 자라고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평소에 무엇을 기도해야하고 어떻게 살아야할지가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모두 보기에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 저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저를 위해서 역사 하시므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사람, 시련을 축복으로 바꾼 사람 이런 칭찬을 받아서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인생을 볼 때 ‘저렇게 기도하며 살고싶어’ 이렇게 사모하는 그러한 사모함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주님의 도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환경을 이기는 기도①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지난 시간에는 기도와 끈기에 대해서 말씀드렸으며, 오늘 이 시간에는 상황을 뛰어넘는 기도, 환경을 뛰어넘는 기도에 대하여 몇 시간에 걸쳐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실 기도시리즈를 시작할 때에는 이렇게 많이 하려고 생각하지 안 했는데, 기도시리즈를 많이 나가도 기도에 반응이 시원하게 안 일어나는 것 같아서 기도로 뜨거워질 때까지 기도할 때까지 간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상황을 뛰어넘는 기도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에(한 6년 정도 지났을까...) 마가복음을 보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이렇게 예수님이 기도생활이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부분도 흔치 않다는 것입니다. 1장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 다음에 이 일이 같은 날인지 떨어진 날인지 모르겠으나, 제 생각에는 같은 날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뒤에 보면은 ‘저물어 해질 때에’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쓰는 사람이 앞에 있는 시간을 고려해서 쓴 것을 보면 연장된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말씀을 힘껏 전하시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시고, 그 다음에 귀신을 내어쫓으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심방을 가십니다. 그래서 심방을 가셔서 심방에서 또 병자를 고치시고, 그 가정에 기쁨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렇게 섬기다가 보니 저물어 해질 때가 되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퇴근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숙소에 가셨는데, 숙소에 수많은 각색 병든 사람들이 수용소같이 다 집합해 있었습니다. 한번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십시오. 발목 짚은 사람, 발목 부러진 사람, 앉은뱅이, 들것에 실려온 중풍병자, 똥오줌 받아내는 환자, 정신이상자, 하여튼 온갖 고침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가득 모였습니다. 그 사람들을 하나, 하나, 주님이 다 고치셨습니다. 방안에 벌렁 누우셔서, “자! 이제 밖에 있는 사람 다 나아라. 아멘.”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만약에 그렇게 하셨다면, 그것은 종으로서 오신 생애가 아니라 상전으로 오신 생애였습니다.
우리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자기가 제일 믿음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자기는 아무 것도 안하고 드러누워서 뒹굴뒹굴하는 태도로, 그러한 사람이 기도를 가슴이 오그라질 것 같이 그렇게 합니까? “주여~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할렐루야~.” 자기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고, 그렇게 안타까워하면서 한순간 한순간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려는 사람은 ‘믿음이 없어서 그런 사람이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그렇게 고쳐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온 사람들 중에서 다 고친 다음에 딱 오후 6시가 되니까 “얘들아. 여기까지 만이다. 그 다음에는 내일 와라. 내 근무시간은 6시까지다.”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표 나눠 줄 테니까 순서대로 내일 다시 오면 고쳐주마.”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하나하나 다 치료하고 고쳐서 그래서 바른 말씀으로 가르쳐서 돌려보내신 것이지요. 대강 시간이 언제쯤 되었겠습니까? 성경에 분명히 나오지는 않지만, 밤 깊어야지 겨우 마쳤을 것이고, 어쩌면은 새벽녘이 다 되어서 마쳤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성경은 그 다음날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 나아가서 기도하셨다.” 그러한 기록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매 순간 순간 하나님 앞에 기도로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를 보더라도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환경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할 수 있도록 열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서부터 기도에 있어서는 환경의 도움을 받아서 기도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는 환경의 도움을 받아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을 받아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자꾸 기도에 있어서 환경을 계속 탓하면서 환경의 핑계를 대는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움직여 주시는 은혜로 기도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환경으로 기도하려는 마음으로 기도하려는 사람인데, 솔직히 말해서 환경이 우리에게 얼마나 기도하도록 밀어주겠습니까?
같이 학교를 다니다가 지금은 캐나다에서 목회를 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같이 학교를 다니는데, 가정을 가지고 있으니 틈틈이 아르바이트 비슷한 일을 해야지만 먹고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바쁜 시간을 보냈겠습니까? 그게 보통 힘든 것이 아니지요. 그러니 매일 수업 끝나거나 시간이 있을 때는 둘이 처지가 같으니 마주앉아서 “우리는 언제나 좀 공부를 실컷 해보나.” 했지요. 그러다 그 형제가 어느 날 만면에 웃음이 가득해서 왔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밥줄을 놓도록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직장 그만두고 공부만 하도록 해 주셨다는 것이지요.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6개월 지나더니, 그 친구가 “나 아무래도 다시 일해야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텔레비 프로밖에 더 늘어나는 것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시간이 없고 안타까울 때는 계속 하나님 앞에 기도하려고 하는데 기도시간이 안 나고, 그래서 마음이 조바심이 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는 절박한 마음이 들지만, 모든 것이 넉넉해서 부족한 것이 없으면, 그렇게 하나님들 향해서 간절히 찾지 않습니다. 물론 바쁘고 복잡한 생활은 하는 사람이 저절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오늘 우리는 환경과 상황의 핑계를 대고 있는 사람들에게 오늘 예수님의 이 새벽기도 장면은 우리에게 커다란 쐐기를 박는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밤늦도록 병자를 고치셨으니 이 제자들이 “예수님. 거 우리가 있는다고 뭐 도움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건넌방에 가서 자겠습니다. 예수님 혼자 알아서 잘 끝내고 다 정리하고 들어오십시오.” 하고 가서 잤을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가서 자고 싶어도, 하물며 세숫대야라도 들고 다녀야지 그래도 체면이 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분명히 제자들도 밤늦게까지 예수님과 함께 병든 자를 고치는 사역에 수종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새벽 미명에 나오셨는데, 아마 한참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열심히 찾아다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와서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보십시오. 틀림없이 그날 새벽에 예수님께서는 피로에 지친 몸으로 잠들어 있는 제자들이 깰 새라 발꿈치를 드시고, 그리고 조용히 숙소를 빠져 나오셔서 아직도 캄캄한 어두움이 가시지 않는 때에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셔서 거기서 무릎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자, 조금 이상한 생각이 안 드십니까? 여러분, 능력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늘 저렇게 매달려 기도한다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겠고, 죄가 많은 사람이 저렇게 매달려 기도한다면 죄가 많으니까 그 죄가 씻김 받기 위해서라도 늘 하나님을 찾아야 되리라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죄도 없으시고, 관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며, 능력으로 말하자면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불러 내리실 수 있으리 만치 권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지금 기도하실 수 있는 상황에서 기도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상담하고 이야기 하다가 “제가 지금 기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야기지 어떻게 하면 기도할 상황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에 사는 동안에 세상이 뭐가 우리가 기도하는 게 좋다고 우리에게 기도할 상황을 만들어 주겠습니까? 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 다니느라 기도할 시간이 안 되고, 시집․장가가고 나면은 재미가 있어서 기도할 상황이 안 됩니다. 아이들 낳고 나면 아이를 기르느라 기도할 상황이 안 되고 직장에 나오면 돈 버느라고 기도할 상황이 안 됩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상황 자체가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만한 상황에 떠밀려서 지금 빈들이나,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서 아버지 앞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줍니까? 처음부터 기도생활은 환경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단호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간에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여튼 기도하면은 살고, 안 하면 죽는다 이러한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면은, 역시 하나님밖에 의지할 분이 없으니까 그렇겠지..... 예수님은 능력도 있고, 권능도 있고, 지식도 있고, 그 분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기도하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던져주는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이러한 기도생활은 한편으로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 없으신 데도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받으신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시면서 사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에게 후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는 주님의 기도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기도 속에서 사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도 기도하시면서 사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기도의 본을 보여주시고 싶으셨으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이 땅에 사시면서 간절한 기도로 사심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삶이 정말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능력 많으신 예수님, 그리고 모든 것을 알고, 그리고 순결하고, 거룩함에 있어서 거룩하고 흠 없으시던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 속에서 사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의뢰하는 법을 보여주셨다면 죄가 많고, 예수님보다 불완전한 우리는 얼마나 더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면 살아야 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가난한 삶, 그 밑바닥에는 반드시 기도하기를 싫어하는 우리의 영적인 나태함과 게으름이 있고, 그 게으름의 밑바닥을 파 들어가 보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너무나 힘겨워하는 자기 중심적인 죄악된 본성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기도하신 것은, 첫째로 우리에게 당신의 모본을 보여주신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이러한 헌신적인 기도생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기도 속에서 살아야 될 모본을 보이신 동시에,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심으로 말미암아서 결국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모든 힘의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이 헌신적인 기도생활을 통해서 “얘들아, 내가 비록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 능력이 내 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셔야지만, 그 능력으로 고난도 당하고, 너희도 섬기고 나중에 십자가도 섬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숨쉬는 동안에 언제나 기도하셨고, 마지막 죽으시는 그 순간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는 기도로서 생애를 마치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 생애는 기도하는 예수님의 이 사역은 결코 이 세상에서 마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계속됩니다. 교회마다 이렇게 다음 주 설교를 써 붙이는 교회가 있지 않습니까?
(예화) 미국의 어느 보수적이 교인들이 성경적으로 사는 그러한 신앙의 신념이 뛰어난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써 붙인 설교 제목 하나가 교인들에게 커다란 소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제목이 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끝나지 않은 사역.” 그랬습니다. 똑똑하고 성경공부 많이 한 교인들이 다 궁시렁거렸습니다. “아니, 우리 목사님은 예수님의 속죄의 완전성도 모르시나봐. 교리책에 다 나오는데 말이지. 예수님이 분명히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도다 그리고 돌아가셨는데,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은 사역이 있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혹시 우리 목사님이 망발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설교하기 전에 목사님에게 찾아와서 물어보았답니다. “목사님. 저 설교 제목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아무 문제가 없으니 이따가 설교시간에 들어와서 들어보십시오.” 들어봤더니 목사님의 요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사역이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사역이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기도하기 싫은 사람이 천국에 가면 얼마나 지겹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기도 안하고 뺀질뺀질하게 사는데, 천국에 가면 계속 기도해야 하는데 분명히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주여 저는 천국이 적성에 안 맞습니다.” 지옥에서는 기도를 안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또 거기에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웃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천국을 그리워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요즘 천국에 대한 그리움이 성도들에게 있습니까? 여기서는 찬양하기도 싫은데, 찬양 부르는 것이라고는 예배시간에 몇 곡 부르는 것이 전부인데, 거기가면 매일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그렇게 말합디다. “먹는 것은 잘해요. 목사님!” (생명나무 실과 먹는 것?!!) 아니 그렇게 찬양하기 싫어하고, 예배하기 싫어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그러나 천국은 그것만하는 곳인데 말입니다. 천국이라고 매일 놀고 고기 구워 먹는 곳인 줄 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도 일하는 곳입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지금도 천국을 가기를 원하는 것은 쉬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천국 가기를 원하는 것은, 천국 가서 어느 한 구석에 살아도 나를 들여보내 준다면 거기서 우리 좋으신 예수님, 하나님의 이름을 맘껏 찬송하고 싶어서 저는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살면서 그렇게 기도하기 싫고, 기도하기 싫다는 것은 주님과 마주보기 싫다는 것과 똑같은 것 아닙니까? 목사님과 얘기하기 싫다는 것은 말하지 않고 얼굴만 마주보고 있자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나는 당신 보기 싫습니다.” 하는 것을 부드럽게 표현한 것 아닙니까? 얘기하기 싫다는 사람에게 말하지 말고 쳐다보고만 있자는 얘기냐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천국은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나
그 때는 주를 맞대고 보리
하나님 나를 알고 계시듯
우리도 주를 알리
맞대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기 싫어하던 예수님을 맞대고 보는 것이 고문이지 축복이겠습니까? 그러니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천국에 가겠습니까? 결국 지금서부터 천국에 가는 적성에 맞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생활을 늘 하며, 그 기도생활 속에서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 부터만 온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수가 없다.” 우리는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당신 스스로 기도하는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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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제가 육군 사관학교 방위로 근무했습니다. 그날 버스가 늦게 와서, 도시락을 싸 들고 막 뛰었는데, 헌병이 “너 이놈의 자식들 거기서.”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는 헌병 밥이었 습니다. 딱 서 있는데 이런 막대기 같은 것을 들고 푹푹 찌르면서 “너희들 별 넷이야.” 하 였습니다. “아닙니다.”, “너는 별 넷이야?” “아닙니다.”, “너는?”, “아닙니다.” “야! 별 셋짜 리 교장님이 조금 아까 들어 가셨는데, 너희들이 이제 들어와서 별 넷이냐?”
예수님보다 여러분이 높습니까?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 하나님이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기도 속에서 사셨는데, 여러분들이 기도를 안 하면, 천사가 와서 기도 안 하는 빤질빤질한 우리를 보고 그럴 것이 아니겠습니까? “야!(배를 쿡 찌르면서) 너 예수님보다 높아!”, “아닙니다.” 그럴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아까 그 헌병이 그것만 물어본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머리통을 툭 때리면서 하는 이야기가 “그러면 별 셋도 안 되면서, 별 셋보다 늦게 출발하면 돼. 별 셋보다 빨리 와야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토끼뜀을 뛰고, 운동장을 돌고... 예수님보다 안 높습니다. 주님! 주님은 높으시고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어느 시골교회에서 은혜 받은 할머니 같이 “전봇대보다 높으신 하나님. 뚱딴지같은 날 돌보사.”라고 고백한 것처럼 말입니다.
(예화) 우리 교회에 계시던 목사님이 전깃불도 안 들어오는 어느 시골에 부흥회를 가셨는데, 이 할머니가 은혜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높다고 표현을 해야 하겠는데, 시골에서는 높은 것을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높은 것이 하나 생각났는데, 그것이 며칠 전에 세워진 전봇대였습니다. 이 할머니가 그 전봇대를 쳐다보고 눈을 깜박거리면서 ‘세상에 막대기보다 긴 저것을 어떻게 만들었을까?’그리고 계속 고민을 했었는데, 기도시간에 딱 생각이 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미천하다는 것을 표현해야 하겠는데, 도저히 생각이 안 나다가 한 가지, 뜬 물을 부어주면 기다렸다가 먹으면 되는 것을 막 먹겠다고 뜬 물을 뒤집어쓰면서 머리를 들이밀고 그것을 보면서 돼지라고 하기에도 너무 점잖아서 ‘뚱딴지(똥돼지)’라고 한 것입니다. “전봇대처럼 높으신 하나님, 뚱딴지같은 날 돌아보사.” 그런 의식이 생겼으면 그 다음에는 기도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주님 주님은 높으신 데, 저는 쓰레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높기만 하고, 의지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신기한 공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으면 있을수록 기도를 많이 하고, 기도를 안 하면 안 할수록 하나님을 더 의지하지 않습니다. 다시 풀어서 말하면 부흥회를 하면 꼭 은혜 안 받아도 되는 사람들은 오고, 기도회를 하면 꼭 기도해야 할 사람들은 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시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지만, 문제는 이제 신앙생활이 바닥까지 내려가서 진짜 아무 것도 안 남은 사람(바닥까지 가서 완전히 오그라 붙은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일으켜 세워주시지 않으면 안됨에도 불구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놓인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무슨 배짱입니까? 그러나 정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사람들. 충만한 능력과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더 하나님 아니면 살 수 없을 것처럼 하나님께 메어 달립니다. 그러니 신앙에 있어서도 “빈익빈 부익부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있는 사람들은 자꾸 더 받으나, 없는 사람들은 계속 바닥까지 내려가다가 결국 마지막에 하나님이 한번 혼을 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까지 내려가 그 때에야 비로소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의뢰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이 연약한 사람들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도와주시려고 할 때, 신경쓰지 말고 내버려두라고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이 됐다고 할 때에도 하나님께 메어 달리며 간청으로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른 삶,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는 삶,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그리워하는 삶, 하나님과의 만남에 목말라 하는 삶. 모든 것들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목말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금식하며 하나님 만나고 싶어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결국 예수님이 보여 주신 바와 같이 기도라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과 그 은혜를 힘입어서 살아가는 것과 동시에 우리가 이러한 간절함 속에서 하나님 앞에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시는데 대해서 우리에게 반응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 평가를 올바르게 내려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데, “내 영혼아, 내 영혼아. 괜찮다. 괜찮다. 네가 바쁘니까 그렇지 시간만 나면 기도 많이 한다.”하고,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 가서 “괜찮다. 괜찮다. 기도가 시간의 문제냐? 양보다 질의 문제지.”라고 아는 범합니다. 그러나 양은 어디 있고, 질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자신을 잘못 판단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기도하지 않는 자신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도록 스스로 평가하고 촉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뉴욕에 집회를 간지 둘째 날이었는데 막 결혼한 신학생 신혼부부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가 와서 저에게 협박 비슷하게, 자기 소개를 하고 자기를 위해서 기도할 것을 약속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했더니 “일평생을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전 처음 본 사람이 와서 자기가 일평생 기도하는데 함께 기도해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이를 딱 물면서 기도해주셔야 한다고 할 때에 그 다음 대답은 쉽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날 저녁에 또 안 가고 기다리면서, 자신 부부를 위해서 안수기도를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 나간 다음에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또 남았습니다.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 전에는 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곤고한데다 갈망이 남아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날 새벽 2시까 지 서로 간증을 하면서 남았는데, 그래도 기도를 해달라고 하자 옆에 있던 전도사님이 “야, 축복기도는 많이 받는다고 좋은 게 아니야. 목사님도 좀 생각을 해라.”라고 충고를 한 마디 하였습니다.
신앙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래도 기도 안 하는 것에 대해서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나 막판에 그 고비가 넘어가 버리면 될 대로 되라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도 안 하는 것이 전혀 마음에 고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를 안 하는 것이 깊은 고통으로 다가올 때는 그나마 은혜가 그의 무든 심령을 자극할 때 기도 안 하는 것이 아픔으로 다가오고 목마름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부터도 멀어지고 더 깊이 들어가 버리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신자가 멀어질 때 기도의 영을 상실해 버릴 때, 매일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삶을 아예 포기해 버릴 때 무엇이 일어나겠습니까? 기도만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영 대신에 사악한 인간의 욕심과 죄악에 다스림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방안의 창문을 확 열어서 방안이 시원한 공기로 가득 차면 방안의 더러운 냄새가 다 빠져나갈 것이고, 꼭 닫아 두면 그 더러운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오면 죄가 물러 나가고, 하나님의 은혜와 기도의 영이 빠져나가면 그 자리에는 인간의 더러운 죄와 불경건이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방문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리를 잡고 꽈리를 틀어서 자리를 차지합니다. 불경건한 생각이 행동을 낳고, 행동이 반복되면서 습관을 낳고, 습관이 계속되면서 인격을 형성해서 그 사람 자신의 일부가 되어 버립니다. 그것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기도의 영 속에서 깨어서 살면서 그러한 것들로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낳고, 그 사랑이 행동을 불러오고 주님을 섬기를 충성된 삶을 생산해서 주님만 섬기고 사랑하는 그러한 인격이 베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기도생활 없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이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신앙생활에 비결을 아셨고, 또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싶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새벽 오히려 미명에 홀로 걸어서 나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여기에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선 시간의 문제입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이것은 아직 어두움이 도망가지 못한 이른 새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 하나를 가지고 어떠한 교리를 만든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기도생활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새벽에 시간을 놓치게 되면은 거의 시간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바쁘지 않은 삶을 살고 그저 한가한 사람을 사는 사람이면, 새벽에 시간을 놓쳤을 때 낮에 나와서 기도하면 되고 낮에 못하면 밤에 기도해도 되겠지만, 예수님의 생애를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이 왜 새벽에 이렇게 기도하셨는가를 깊이 생각 하다가 큰 은혜를 받았는데 결론은 아무 뜻도 없다는 것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새벽에 이렇게 기도하셨던 것이 어떤 심오한 뜻이 있느냐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물론 마음이 평정된 상태에서 기도할 때 기가 잘 뻗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악몽에 시달린 사람은 예외가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사실 논리가 약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새벽기도가 의미하는 바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낮에는 하나님을 섬기고 영혼들을 섬겨야 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복음서를 보면 몇 군데에 그런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러 가시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좇아 다니는 이야기가 몇 번이나 나오고 여기에서도 또 나옵니다. 찾아다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렇게 일이 좇아 다니고, 사람들이 좇아 다니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꾸 도피하신 것입니다. 그 시간이 바로 이 새벽의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벽을 절대적으로 강조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경험은 이 새벽의 시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이 새벽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종들을 만나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신령한 사람들은 많은 사람이 새벽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새벽에 워낙 약했던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그러한 분 중에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꼭 새벽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 분이 새벽에 약했던 모양이지만, 당신이 새벽의 깊은 묘미를 느낀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어느 시간이든지 가장 좋은 시간이 좋은 시간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역사를 읽어보면 항상 하나님과 긴밀한 교제를 나누었던 사람들은 새벽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 이야기는 새벽이라는 그 시간에 중심을 두고 그 외에는 가짜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새벽에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나아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많이 만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낮에 시간을 내서 기도를 하는 것도 특별히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주님이 아니면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일찍 일어난다는 아예 자리에 누울 때부터 생각이 성별 되는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새벽에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했는지 보십시오. 홍해가 갈라진 것도 새벽이었으며,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도 새벽이었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나사 실패한 베드로는 회복시켜 주신 것도 새벽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분명히 주님의 재림도 새벽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새벽에 커다란 역사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낮에도 일어났지만 이제 새벽에 깊은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늘 새벽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존 칼빈, 조셉 얼라인 등... 신령한 은혜로 충만히 채워져서 정서 자체가 성별 되고 구별되어진 가운데 하루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일하기 위해서, 성별 되게 일하기 위해 선별된 태도로 그 일 위에 임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가장 세속적인 일도 가장 성스럽게 할 수 있고 가장 성스러운 일도 가장 세속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무엇에 의해서 구별되는가 하면 사람이 어떠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새벽의 시간에 깊이 기도해서 삶의 동기가 정화되고, 눈앞에 하루 동안에 나타날지도 모르는 수많은 유혹과 도전의 요소들을 영적인 시각에서 분별하고 해석해서 시험에 들지 않고 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신앙적인 분별력과 ,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정서가 동기가 되어서 삶을 움직일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 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루의 생활을 승리로 이끄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특별히 이 정서의 문제는 우리에게 특별히 도전을 줍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되돌이켜 보십시오. 눈을 딱 뜨자마자 여러분의 뇌리에 스치는 생각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어머, 곗돈.” 그것이 먼저 떠오릅니까? “어 오늘은 꾼 돈 갚아야 하는데..” 등등 눈을 딱 떴을 때, “오 주님. 우리에게 새 아침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눈을 뜨자마자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로 젖는 사람은 여러분들 가운데 매우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아침에 세탁될 필요가 있고 신령한 하늘의 은혜로운 영으로 충만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의 생활을 이기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근심과 걱정이 있고 악몽에까지 눌려서 정신이 혼동된 상태였는데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새벽의 시간에 아버지 앞에 기도하고,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신령한 은혜를 부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녹이셔서 거룩한 정서를 우리에게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룩한 쪽으로 생각할 수 있고 신령한 방향에서 모든 인간사를 해석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서,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감정 없이는 누구도 세상의 유혹을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바람 피우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바람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을 느껴야 할 관계 속에서 사랑을 못 느끼는 것이 더욱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깊은 사랑을 느끼는 것이 우리의 승리하는 생활의 요체이고, 중심이 됩니다. 그러나 그 감정이, 정서가 너무나 쉽게 고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충만하지 않은 사람이 영적인 식의 사고방식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누군가가 대적하고 헐뜯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의 정서가 그를 깊이 사로잡고 있으면 “하나님. 저 사람을 통해서 저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려고 합니까? 비난받을 때에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였다고 한 모세의 본을 배우게 하시고, 온유한 자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주님. 제가 온유함으로 저를 정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의 정서가 들어 있을 때에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머리가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해석입니까? 그러나 이게 고갈되면 “아침부터 되게 재수 없네. 얼굴도 못 생긴 게 나타나서는 긁고 있어. 한번 붙어 볼텨. 저녁때 가서 회개하면 되지. 내가 평소에도 불만이 많았어.”, “예수 믿는 사람이 그래도 그렇지...”, “그런 말하지마. 싸울 때는 주님도 잠깐 기다리시는 거야.” 정서의 통제가 안 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새벽에 나와서 쭉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하나님. 제가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주만 바라봅니다.” 그렇게 나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하루를 잘 승리하겠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을 푹푹 긁으며 이제 회개할 제목을 실컷 만드는 사람보다 얼마나 더 하루를 승리로 이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새벽의 미명의 시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기도의 영은 가만 내버려두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고갈이 되어 버립니다. 예금 통장에 돈 넣어놓고, 이체 빠져나가고 가끔 카드로 빼 쓰고 하면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쭉 빠져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주님이 우리에게 기도의 영을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말 놀랍게 부어 주십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더 놀라운 기도의 영을 어쩌면 그렇게 신속하게 까먹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기도의 영은 우리에게 있어서 너무나 예민한 부분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이렇게 간직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데, 자기 부인도 없고 특별히 노력하는 삶도 없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은 다 털어먹고 바닥까지 내려가서 기도 없이 목숨만 부지하고 사는 것이 영적인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녀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깊이 깨닫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위해서 자신과 더불어 분투하는 고통이 이렇게 기도하지 않음으로 기도의 영을 다 잃고 고생하는 것보다 훨씬 행복한 희생이라는 생각이 들 때에,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낮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을 간절히 구하며, 매달릴 때에 조금씩 철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것은 숙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숙련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기도의 대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순간이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행하고 근심하는 듯한 삶을 살면, 기도의 영이 우리에게서 송두리째 날라가 버립니다. 요즘은 은혜를 많이 받고, 어깨를 들먹거리면서 기도하고, 기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을 보면 걱정이 앞서곤 합니다. “털어먹지 말아야 할텐데.” 그것이 아무리 귀하다는 것을 일러주어도 고개만 끄덕이지만, 고갈되어 버리고 나면 그것이 그렇게 쉽게 회복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조금 잘못 미끄러졌을 때, 금새 아버지 앞에 금식하고 울고 매달리면서 회복하면 되는데, 그저 그저 살다가 이판사판으로 갈 때까지 가서 겸손함을 가장한 게으름으로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해 버리는 그러한 상황이 되고 나면은 자신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추억에 잠기는 것입니다. 눈물 없기 기도할 수 없었던 그 시절, 지체의 이름만 불러도 그 지체의 아픔이 내게 전해지던 시절이 있었는데... 하는 추억이 쭉 떠오르면서 그 부요한 기도생활과 자신의 이 깊이 하나님 앞에 깨뜨려 져서 망가져 버린 기도생활이 비교가 되어서 떠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깨닫기를 “내가 자신을 바쳐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큰 죄였는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깊이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주님, 금도 필요 없습니다. 돈도 필요 없습니다. 주님, 기도만 할 수 있으면 저는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 어떠한 환경이든지 나에게 기도의 문을 열어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금과 은은 쉽게 주실 지 모르지만, 기도의 영은 쉽게 주시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이 똑바로 변해야 합니다. 얼마나 그 문제에 있어서는 예민하신 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별된 시간을 분명히 갖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이유도 있을 수 없고, 비용 없이는 시간을 떼어서 아버지 앞에 기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두 번째는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셨다.”고 했는데, 이것이 희랍어 원문에는 “고독한 장소”로 나와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기도의 시간도 중요하지만 “방해받지 않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방해받지 않는 마음” 기도시간은 정해지고 새벽마다 나와도 새벽마다 나오는 것이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이유는 몸은 새벽에 나왔는데 혼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온갖 잡동사니를 다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걱정, 근심, 신경 쓰는 것 모두 팔짱끼고 들어와서,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라고 하면서 회사생각, 돈 생각 등등이 떠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간은 구별이 되었는데, 도대체 이 사람의 마음을 고적한 마음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기도가 간절히 올라갈 수가 없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조그만 아이들 모형비행기가 태엽을 잔뜩 감아서 올라가려고 하는데, 그 밑에다 주렁주렁 뭔가를 매달면 올라가겠느냐는 것입니다. 안 올라갑니다. 다른 기차나, 화물을 탈 때는 짐을 별로 신경을 안 쓰는데, 왜 비행기를 탈 때에는 그렇게 까다롭게 자꾸 얘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아무리 큰 비행기라도 300톤이 넘으면 못 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엔진을 돌리고 난리를 피워도 뜨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겁게 실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의 은혜도 아버지 앞에서 훨훨 날아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르는 기도가 되려면은 무거운 것이 매달리지 말아야 하지 않습니까? 근심과 걱정과 염려와 온갖 잡동사니 다 매달려서는 기도가 되겠습니까? 똑같은 이야기이지만, 근심 없는 사람이 없고 예수님의 생애도 신령한 것이었지만 근심에서 떠날 수 없는 생애를 예수님께서 사셨기에 예수님의 생애를 바로 그러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근심이 떠나지 않는 생애를 사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신령한 염려는 기도가 날라 가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를 않고 있습니다. 속되고 세속적인 염려만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방해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너무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경건한 괴로움에 휩싸이는 것은, 기도의 날개가 올라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바람을 받쳐 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근심에 비해 자기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무거운 바윗덩어리가 되어서 기도를 뜨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신령한 염려, 거룩한 것을 향한 근심.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을 향한 근심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혹은 신령한 일에 대해서 잘못된 방법으로 염려할 때, 기도가 잠시 방해를 받기는 하지만 그러나 깨닫고 나면 오히려 더 큰 추진력을 발휘해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이 돌보고 계신 영혼이 많이 있을텐데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망부석 서로 쳐다보듯이, 겨우 서로 살아있는지를 확인하는 관계에서 서로를 향한 가슴으로부터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 영혼을 향한 근심과 걱정이 끊임없이 있을 때, 그것이 불이 되어 타올라서, 우리에게 게솔린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우리의 기도를 올라가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나아올 때에 속되고 이기심에 가득찬 염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는데서 오는 그런 사악한 근심들을 함께 몰고 들어오면 우리의 기도의 자리가 한적한 곳, 고적한 곳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러한 고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많이 번잡한 일 속에서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아니라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응시하고 그리고 주님과 홀로 대면할 수 있는 조용한 마음의 상태가 되어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우리가 아는 사람을 만나 반가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만나서 깜짝 놀라게 되고 다음을 기약하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일반적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영적인 회복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주님이 나를 어떻게 해 주시겠지.’ 해 주시긴 해 주시지만 그런 식으로 놀러가며 하나님을 만나는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깊이 자기가 깨뜨려지고, 마음의 준비를 갖추게 하신 후에 주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면, 기도에 있어서는 이러한 원칙이 얼마나 잘 적용되겠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떠한 사람들은 새벽마다, 밤마다, 또는 낮에 교회에 와서, 아니면 집에서 기도를 하지만 뭔가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고, 뭔가 기도생활에 의해서 기도의 영이 자신에게 충전되는 일들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비유로 말하면 컴퓨터를 쓰거나, 면도기를 하거나, 다 떨어지면 콘센트에 꽂아두면 잠시 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충전이 됩니다. 그러나 계속 꽂아 놓았는데도 슈- 하면서 안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이 일어나면 뭔가 그 구조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기도시간 정해놓고 채워지지 않으면 그 때에는 무조건 계속 하면 되겠지라고 하지 말고, 이것이 어디서부터 문제가 있는 것인지, 왜 전기를 꽂아도 충전이 안 되는지 어디가 망가졌는가를 생각해 보고 고쳐야 되지 않습니까? 조금만 고치면 될 것을 안 고치고 계속해서 기다리다가 결국 기껏해야 한다는 말이 “하나님께 그렇게 매달렸는데 돌아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기계가 망가졌는데, 거기에 아무리 전기를 꽂는다고 아무리 갖다가 꽂는다고 그게 충전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돌아보고 새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돌아보고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더듬어 가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멀어진 삶으로 하나님 앞에 마주 대면할 때에, 왜 우리를 돌아보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로 깊이 채워주시는 것을 믿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깊이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이 장면은 결국 시간도 정해지고, 장소도 정해지고, 마음에 상태도 정해졌습니다. 이제는 “기도하시더니” 예수님께서 계속 기도하시는 장면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문제는 시간이 정해지고 마음이 다 갖춰졌어도, 마음속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는 생각이 기도는 아닙니다. 기도는 입을 열어서 하나님 앞에 소리를 안 내더라도 하나님 앞에 언어화해서 아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이지 기도는 아닙니다. 생각이 머릿속에서 돌고 있는 것을 우리 의식 속에서 언어화해 하나님 앞에 고백함으로, 그 머릿속에서 있는 그 생각과 사상이 우리 자신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수단일 수 있는 것은 이렇게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놀랍게 바꾸시고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 앞에 깊이 매달려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결국은 자신의 영적인 때를 벗어버리고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해진 삶을 살도록 아버지 앞에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법은 엄격합니다. 기도하는 자는 생명이 있는 삶을 누릴 것이요. 기도하기 싫어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점점 멀어질 것입니다.
10.환경을 이기는 기도②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막 1:36~37)
복음서를 살펴 볼 때에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서 쉬시고, 안식하시는 장면들이 쉽게 눈에 띄지를 않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생애는 아주(특별히 공생애에 들어서신) 긴박감에 넘치고, 긴장과 아주 선명한 핍박과 도전으로 가득 찬 그러한 생애를 사신 것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이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장면을 보면서 우리들이 환경을 뛰어넘는 기도생활을 해야 한다, 기도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기도는 두 가지 싸움을 이겨야지만 풍성한 기도생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내 안에 있는 것과의 싸움이요. 또 한 가지는 내 밖에 있는 것들과의 싸움입니다. 안으로는 무지와 게으름과 나태, 거룩한 삶을 살기 싫어하는 본성,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려는 죄된 습성이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고, 그리고 밖으로는 끊임없이 우리의 기도생활을 위협해 오는 많은 일들과 많은 환경들, 이런 것들이 우리들이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이 첫 번째 것에 대해서 말씀 드렸다면, 오늘 이시간에는 특별히 환경의 문제와 관련지어서 이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마치셨을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장면이 성경에 몇 번나옵니다. 눅11장에도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니, 바로 앞에 제자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근처에서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나자 이제 용건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의 기도생활은 역시 제자들보다 훨씬 부지런한 가운데 이루어 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눅11장이나, 오늘의 본문을 보고 느끼는 인상은 제자들이 깨고 나니까 예수님이 없어졌더라 하는 스타일인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눈을 떠 예수님이 안 계신 것을 보고 찾다가 보니까 예수님을 만난 이러한 느낌을 우리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무리한 억측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기도생활을 계속 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육체적인 한계, 자신의 정신적인 한계와 더불어서 싸우는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 없이는 우리는 결코 기도의 영을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계속해서 이 하나님 앞에서 이 기도의 불꽃을 유지하면서 사는데는 엄청난 비용이 듭니다. 올림픽 때 성화가 활활 타오르지 않습니까? 그 불은 가스로 피운다고 합니다. 밤하늘에 타오르는 그 불꽃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가스가 들까?’라고 생각했는데, 하루에 33만원 정도의 가스비가 나왔답니다. 열흘이면 3천 3백만원이고, 이십일이면 6천 6백만원인 것입니다. 얼마나 큰 돈입니까? 집 한 채와 맞먹습니다. 그만큼 성화의 불꽃 하나를 계속 유지하는 데도 비용이 들어가는데, 하물며 기도의 불꽃을 유지하는데에 비용이 안 들어갈 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실험을 해 보니까 불꽃을 유지하면서 사는데는 엄청난 비용이 많이 듭니다.” 그 비용이라는 것이 새벽잠도 못 자야 하지요. 필요하면 밤에도 자지 말고 엎드려서 기도해야 하지요. 그 재미있는 텔레비 연속극도 보지 말아야지요. 거기다가 그것만 가지고 해결이 되는 게 아니라 기도를 잘 하려면 삶의 초점이 기도와 똑같아 져야 한다니까 이제는 기도하는 시간만이 문제가 아니라 삶도 거기다 초점을 맞춰야 함으로 잡지나 오면서 낄낄거리다가 갑자기 눈감고 기도가 쏟아 질 리가 있겠습니까? 삼류잡지나 보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부르는데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녹아 내리면서 “하나님. 이 땅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안 오는 것입니까?” 이렇게 기도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면 오히려 큰일 날 것입니다. 그런 삼류잡지가 이제 없어질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점점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불꽃과 같은 기도의 영을 유지하고 살기 위해서는 삶 전체를 요구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삶 전체를 하나님이 요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실 지 모릅니다. “목사님, 그게 그렇게 비용이 많이 드는데, 꼭 그렇게 해서 그 불꽃을 간직해야 합니까? 또 그런 불꽃을 간직하기에 그런 많은 비용을 들여야 할 정도로 그것이 가치있는 일입니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질문은 쓸데 없는것입니다. 왜냐하면은 그러한 기도의 불꽃이 살아있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그 편이 되어주시는 사람. 그를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복 주시려고 작정하신 사람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기에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대가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귀히 여기셔서 그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하실 수 있게끔 해 주신다는데 그거보다도 더 큰 보상,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을 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기도의 불꽃을 유지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데 이렇게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외면적인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그 안에 기도의 불꽃조차 함께 살아있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교회에서 여러 가지 직책을 맡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물질과 시간을 바쳐서 봉사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그러나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도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을 수 없는 가슴의 불꽃을 간직했기 때문에 주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은 그 보다 훨씬 소수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는 많은 약속,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많은 축복들은 이러한 기도의 세계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는 그 사람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삶을 사는 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특별히 지켜주시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고, 하나님이 마음에 합하다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하시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위대한 생애를 살아갈 지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예수님 자신도 이러한 기도의 불꽃을 유지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당신의 능력 갖고 살지 않게 하시고 기도 속에서 살게 하셔서 결국은 이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을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예수님처럼 기도하면서 살아야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본보기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그렇게 대가를 지불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비유 가운데, 밭을 산 사람의 비유를 기억합니다. 밭을 갈다가 보니까 커다란 보물이 나왔습니다. 만약 그것을 덜렁 들고 동네에 가서 큰 소리를 치면 그것은 자기 것이 될 리가 없습니다. 자기는 그 밭을 갈아서 품삯을 받거나 소작을 해서 사는 사람이고 그 땅은 땅 주인의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그냥 묻어두고,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긁어모아서 다 빚을 내어서라고 돈을 모아 그 주인에게 가서 흥정을 하고 그 땅을 샀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도에 있어서도 똑같은 것이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도가 가지고 있는 축복과 놀라운 특권에 대해서 눈뜨면 눈뜰수록, 우리는 그 기도를 무엇이라도 주고 사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러한 기도가 가지고 있는 그 놀라운 축복과 특권에 대해서 눈뜨지 못할 때에는 우리는 계속해서 환경의 핑계를 대고 여건과 상황을 핑계로 대면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를 합리화시키기에 여념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들은 더 많이 실패하고, 열심히 애쓰지만 지극히 적은 것 밖에는 거두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바라보아야 하는 삷입니다. 왜 그렇게 진지하게 열심히 애를 쓰는데 열매가 적을까? 왜 내가 가르치는 영혼들은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는데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것일까? 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도 말씀을 통해서 영혼들이 바뀌고 고쳐지는 능력이 지극히 작게 나타나거나,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고통스러운 문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분명한 응답도 없이 이렇게 오랜 세원 동안 숙명처럼 지고 살아야 되는가? 어느새 나의 생활이 실패와 빗나간 패배로 연속되는데도 아예 패배하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살아가는 이런 믿음이 없는 삶에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우리들이 조금만 더 정신을 차리고 물어본다면 그 심장부에는 바로 허물어진 하나님과의 기도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골방은 있지만 언제 들어갔는지, 기둥은 다 무너지고, 석가래도 주저앉아서 거미줄이 잔뜩 기어있지 않으면, 바퀴벌레들이 기어다니는 그런 처지이고, 골방이 말끔히 치워졌다고 하더라도 늘 하나님 앞에 홀로 기도하는 기도의 골방이 아니라 세상의 염려와 근심을 송두리채 끌고 들어가서 함께 더불어서 씨름해서, 결국 하나님 앞에 홀로 앉아 기도하는 시간은 오히려 갖지 못하는 형식적이고, 하나님 앞에 홀로 드려지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못하고있기 때문에 그런 실패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되돌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항상 실패한 곳에는 바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산이 무너져서 사태가 날 때, 산에 사는 사람들은 산사태나 눈사태 같은 것들이 일어나기 전에 밤새도록 산이 운다는 표현을 씁니다. 우~ㅇ ~우~ㅇ 그러면서 운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결국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제 실패를 만나서 좌초하고 와르르 무너져 내려 버리기 전에 먼저 소리가 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은 반듯하게 계속되고 있는 교회생활은 아닙니다. 저는 사실 전혀 기도 응답도 없이 캄캄한 절벽 속에서 해메면서도 몇 달 동안 새벽기도를 다녀본 적도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겉에 모습. 교회 출석하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하는 것들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상당히 파괴되었어도 예전과 다름없이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모습 말고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생기고 나면, 제일 먼저 문제가 되는 징표가 예민하게 나타나는 것이 기도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기도가 잘 안 되고, 싫어지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과 마주하기에 면목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그러한 의미인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깨끗하면 왜 하나님을 만나기 싫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면 거기에는 축복이 있고, 칭찬이 있고, 하나님의 인정해 주시는 것이 있는데 왜 그러냐는 것입니다.
애들이 학교갔다 와서 자꾸 시험지를 가방 속에 감추고 엄마 도장 찾으러 다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100점 맞아서 그러는 아이는 없습니다. 벌써 100점 맞았으면, 저쪽 골목에서부터 시험지를 들고 옵니다. “엄마”하고 부르면, “그래 방배동 만세다.”하고 환호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한 30점쯤 빨간줄이 죽죽 간 시험지를 받으면 계속 모으는 것입니다. 도장 찾을 기회를 찾으면서, 또 정 안되면 도장을 파서 찍어서 가던가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마주 앉아서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하고 대면하는 기도가 안 된다는 이야기는 면목이 없는 인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삶의 시험지를 보니 자신이 자신의 점수를 더 잘 알기에, 하나님께서 100점이라고 하실 때에 90점 밖에 안 된다고 겸손할 수는 있지만 저는 빵 먹은 0점입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내가 이렇게 하시면 싫어하시는지 몰랐다고 하지만 그것은 말이고, 우리는 다 꾀가 말짱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꾀가 말짱한 애들입니다. 그 중에서 오래 믿은 애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말짱한데 “너는 그렇게 밖에 동생들을 못 가르치냐?”고 책망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자신의 삶의 시험지를 보니 30점밖에 못 맞았는데 그것을 들고 가서 “하나님 아버지. 그래도 동그라미가 나오죠?” 이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자기가 벌써 체면이 안 선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나 좀 만나자.” 하셔도 딴 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 살아가면서 내가 착하게 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의 관심의 초점이 하나님께서 향해져 있으면 얼마나 하나님을 뵙고 싶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제가 목회를 하다가 보니 여러 가지 일들을 보게 됩니다.
(예화) 어떤 아내는 남편이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3년만에 돌아오는데, 온 지 24시간도 안 되서 바가지를 긁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인가가 있었습니다. 왜? 남편은 목 메이게 아내 를 보고 싶어했는데, 제발 오지 말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당신이 보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향해서 우리들이 한 사람의 신부와 같이 정결하게 살고 삶의 초점이 하나님을 향해서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으면, 주님을 만나는 것이 왜 싫겠습니까? 주님 앞에 나아와서 내가 고통스러우면, 내가 고통스럽게 때문에 하나님께 호소하고 내가 기쁘면 기쁘기 때문에 하나님께 찬송하고, 내 마음이 너무나 감격에 벅차면 그 감격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러한 삶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뵈옵고, 그 기쁨 때문에 하나님께 받는 인정과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에 삶에 그러한 정신이 투영되고 그러한 정신으로 살다가 왔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 일주일동안 정말 잘 말씀대로 살아서 주일날 주신 말씀을 붙잡고 승리해서 정말 곳곳에서 내가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가정과 나를 힘들에 만들던 문제들이 피를 흘리며 거꾸러지고 나의 영혼을 노리던 마귀들이 거침없이 목이 잘려서 나뒹굴어지는 그런 승리의 현장을 경험한 사람들은 주일날만 오기를 너무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일날 가서 하나님께(다 아시는 일이지만) 이 승리를 보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시험지를 내어 보이며, “이런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일주일을 살았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승리하며 그렇게 살기 위해서....
사실 승리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봉주가 2등을 했다는데 그냥 주어진 것이겠습니다. 우리 같으면 42km가 아니라 4.2km만 뛰어도 졸도할 일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피를 말리는 것과 같은 죽음과 더불어 싸우는 그러한 고통이 있고 나서야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승리하는 사람들에게 순간 순간 위로와 능력을 주시지만 그러나 그러한 승리를 하는데는 반드시 많은 희생과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승리를 쟁취한 사람들에게는 항상 감격의 눈물이 있습니다. 그 감격의 눈물을 현재적인 기쁨일 뿐만 아니라 과거의 그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지불했던 희생과 고난에 대한 생각도 함께 그러한 눈물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과 승리, 희생과 영광을 이처럼 함께 한 인격 안에서 존재하면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의 관계의 놀라운 변화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감격이 있기 위해서 그러한 승리의 생활이 필요한데 결국 이러한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결국은 우리가 살아있는 기도의 영 없이는 우리는 그렇게 이기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매 주일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에서 모이는 가장 커다란 이유 가운데 하나는 기도할 수 있는 불꽃을 받아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기도의 불꽃을 붙여 줄 수 없을 때는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가 전체적으로 회개하고 바뀌어야 할 문제입니다. 자꾸 들이대는데 어디다가 그러는지 봤더니 “불”이라고 써진데다가 계속 들이밀고 있어셔는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항상 교회에서는 영적인 눈으로 보면은 두 가지가 제일 중요합니다. 샘솟듯 솟아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꺼질 줄 모르고 불타오르는 기도의 불꽃이 이 교회 속에서 같이 공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쪽에서는 샘솟듯 진리의 샘물이 쏟아져 나와 언제든지 갈한 목을 시원하게 축이고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고, 기도의 불을 붙여서 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지혜로운 사람은 기도의 불꽃을 이렇게 받아서 가면 가슴에다 꼭 묻고 가서 바람이 불면 꺼질 새라 가지고 가서 그 다음 주일에 와서 교회에 조금 보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보같은 사람들은 받아 가지고 들고 뛰는 것입니다. 그러니 꺼지고 맙니다. 겨우 남의 것을 받아서 갔는데 말입니다. 주일날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불씨입니다.
벡스터가 자신의 교인들에게 권면한 것과 같이 그걸 가지고 그 감동과 기도와 회개가 마르지 않도록 가자마자 저녁에는 설교를 끊임없이 묵상하면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돌아가서는 집에서 설교정리를 하거나 설교 본문을 펴놓고 적용점들을 찾아보고 정리를 하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날 밤, 잠이 들고 그 다음날 아침부터는 계속해서 기도하고 실천하고 순종하면서 살아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려고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입니다. 은혜받았으니 ‘막 뛰어간다는 것’은 막 살아버린다는 것입니다. 기도 될 테면 되라는 식으로 살다가 다시 나와서 “하나님 다 날려 버렸습니다.”하는 삶을 반복하다보니, 그 다음부터는 자신의 마음도 점점 침체되고 딱딱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죄는 쌓여가고 하나님의 은혜는 메말라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직면하는 문제들이 내면의 어려움도 있지만, 외면의 어려움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의 샘물이 솟아나고 우리 안에 기도의 불꽃이 살아있을 때에는 환경을 어느 정도 이깁니다. 완전히 이긴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이깁니다. 슬픈 일이 일어나도 주님이 주시는 위로가 크기 때문에, 그 슬픔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슬픔에 완전히 짓눌려서 그렇게 인사불성이 되지는 않는다는 거입니다. 실망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실망되는 일이 일어나지만 그러나 기도가 살아있고, 말씀이 살아 있으니 소망의 불꽃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실망되는 일이 일어나도 실망되는 일이 전혀 영향을 안 준다고는 할 수 없지만, 털썩 주저앉아서 다 집어칠까봐하는(대게 한 것도 없는 사람들이 그러지만) 식의 자포자기의 단계로까지 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환경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끊임없이 우리들을 괴롭히고 우리들로 하여금 신앙생활하도록 잘 길을 열어주는 환경도 주님이 특별히 섭리하시면 주어질 수 있지만, 굉장히 많은 경우에 우리의 신앙에 거치는 돌이 되고 우리로 하여금 인내를 시험하고 우리로 하여금 순종을 시험하고 우리로 하여금 결단하지 않을 수 없도록 상황은 우리를 자꾸 몰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도는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대로 이렇게 습관적으로 계속 떠내려가는 식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습관이 들기 가장 어려운 것이 기도하는 습관을 붙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어려움이 있는데, 인간이란 존재는 천성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 다음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즐겨 서지 않으려고 하는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힘들고 두 번째 힘든 것은 그런 은혜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는 너무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습관적으로 기도한다고 했을 때에 그것은 자칫하면 껍데기만 남고 내용은 사라져 가기 쉬운 그러한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면에서도 습관적이 된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 동시에 굉장히 힘든 문제들을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는 것은 습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심지어는 교회 봉사를 하는 것도 습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많은 신앙의 행동들이 습관이 될 수 있고, 습관이 되어도 습관이 되지 않고 결단을 가지고 행하는 것과 남보기에는 적게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떠밀려서 하는 기도와 하나님을 정말 추구하는 마음으로 그 은혜에 젖어서 하는 기도는 전혀 같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여섯 시간, 일곱 시간을 기도해도 흡족하지 않을 때가 있는가 하면, 한 두 시간 기도했는데도, 영혼이 천국의 이슬로 흠뻑 젖어 오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도 사실 단순히 시간문제로만 말하기에는 어려운 면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물 속에 배추를 집어넣었는데, 소금을 풀지 않은 물 속에서는 시드는 법이 없습니다. 그 물을 먹고 오히려 싱싱하게 살아나든지 썩어 버리든지 합니다. 그러나 소금을 푼 물에는 한 번 잠갔다가 꺼내기만 해도 그 다음날 숨이 팍 죽어서 아주 부들부들해 집니다. 마찬가지로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환경이라는 것이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이런 식으로 우리들에게 도전을 해서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기도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누구를 생각해야 하냐면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이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그 기도하는 시간에도 사람들은 그 곳까지 찾아왔습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같아서는 그저 기도할 때만큼은 좀 제자들이 “안된다. 우리 예수님 기도하시니, 이 때는 하늘의 하나님과 함께 대화하시고 거기로부터 능력을 공급받는 시간이니, 애들아 우리가 그 분이 돌아오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자.”고 하면서 사람들이 “당신들은 귀신도 못 내쫓지 않습니까?” 하더라도 “그래. 우리는 면목이 없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기도하셔야 된다.”라고 성숙한 사람들이었다면 여기까지 찾아 오셨겠습니까? 그렇게 성숙한 사람들이었다면 그 사람들도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이 미성숙했다는 것 외에도,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어디나 죄인들이 있었고, 치료받기를 원하는 병자들이 있었고 천국의 복음을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어하는 갈망하는 구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늘 예수님 곁에 있으셨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참 사랑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느 때는 스케줄이 너무 많아서 싹싹 빌면서 사정을 해도 변하지 않아서 ‘아1 나는 왜 이럴까?’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며칠 전 미국에 갔는데, 웨스터민스터 출신들이 실력은 있는데 목회에서는 많이 성공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웨스터민스터 출신 하나가 필라델피아에 개척을 했는데 삼천명이 모인다는 것입니다. 그 학교 60년 사에 최초로 일어난 일입니다. 미국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나니 한국에서 변화되지 않던 2세들이 그 교회에 가서 막 뒤집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일체 그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 속에 꽁꽁 숨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오는 길에 ‘그 사람은 그렇게도 사는데, 나는 왜 이러고 살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보다 더 못난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살까? 이것이 총체적인 교만의 소산이 아닌가?’ 비행기 타고 오면서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제 내 앞에 주어진 여러 가지 사역들을 생각하는 방법들이 두 가지가 있구나. 그 중 한 가지는 아까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교회를 주셨으니 이 교회에다가 내가 내 자신을 묻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전심을 다해 목양을 하고 이 일을 위해서 수고하면서 하나님이 도대체 이렇게 어렵고 고통하는 시대에 여기저기서 병든 심령을 가진 사람들과 방황하는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이 한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오라고 하는데,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이면 가서 그것을 위해서 내가 보냄을 받았다 생각하고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기쁘게 수종을 드는 방법이 있고, 일에 끌려 다니는 방법과 사명을 감당하려고 다니는 방법이 있는데 나는 굉장히 많은 경우에 전자가 아니었는가?’하는 반성을 새롭게 해 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면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귀찮게 했습니까? 벳세다 광야에서 며칠동안 먹지도 못한 불쌍한 인생들을 보시니, 예수님께서 그냥 돌려 보내셨습니까? “얘들아 너희가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되겠다.” 하셨더니 머리 좋은 그 친구는 “예수님. 이 사람들 다 먹여 살릴려면은 200데나리온(천만원에 해당)어치는 컵라면을 사야지 먹일 수 있겠습니다.”라는 말이나 늘어놓는데, 천만원이 없는 것은 예수님도 잘 알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주셔서 다 먹이셨습니다. 그랬더니 기껏 먹고 나서 힘이 나니까 오히려 감사하며 기도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힘이 뻣쳐서 “잡아라. 저 예수를 우리의 임금 삼자.”그러면서 덤벼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무지목매한 인생들에게 정말 주님이 시달리는 인생을 사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시달리는 인생을 사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생애를 한번도 그런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은 생애를 사셨습니다. 사람을 거절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은 사람을 통해서 자기에게 부여해 주시는 영혼을 위한 사명을 예수님께서 저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점이 굉장히 큰 도전이 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어떻게 우리가 본 받아 볼 수 있겠는데, 그 다음 장면에서는 우리와 예수님이 현격한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이시고 그 많은 사명에 둘러 싸이시면서도 예수님은 당신의 기도를 그러한 여건들로 말미암아서 방해받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에 나아가서 새벽 미명의 시간에서부터 결국은 사람들이 동네 사람들과 함께 찾아나서야 할 정도가 될 정도 되려면 환희 밝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출근시간이 지난 시간이 되었어야 가능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의 기도가 얼마나 장시간의 기도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새벽 미명에서부터 아침햇살이 찬란하게 퍼지고 사람들이 아침밥을 먹고 돌아다니고 활동할 때까지 그렇게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조금 하면 일이 방해를 받고, 일을 좀 하면 기도가 방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기도가 일을 방해하지 않고 일이 기도를 방해하지 않는 그러한 생애를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늘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늘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렇게 사람을 사랑하시고 일들을 감당하시면서도 오히려 그 일을 미워하거나, 사람을 미워하지 아니하시고 그 일과 자신의 사명, 영혼들을 섬기는 것, 그 사람들 자체를 깊이 사랑하시면서도 말하자면 자신의 기도의 영이 그런 사람들이나 혹은 그러한 일들에 의해서 치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놀라운 신성 때문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실한 기도생활 때문이었다는 것을 누가 부인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피흘려 죽으셨지만 우리는 죄와 더불어 싸우는 시늉은 하지만, 피흘리기까지는 싸우려고 하지 아니하고, 우리도 기도하려고 애를 쓰지만 주님이 분투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분투하지 않는 그러한 나태한 모습을 우리는 환경을 탓으로 돌리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모습들을 보시면서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 지에 대해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미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당신의 은혜를 보이시고, 그리고 자신을 전심으로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그런 사람들을 간절히 찾으시는 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진실하시기 때문에 진실한 사람들을 만나 주시고, 하나님의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에 그런 간절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지나쳐 버리시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죄가 많고 허물이 많고 실패의 실패를 거듭한 일생일지라도 간절히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이 기울어지고 그 하나님을 향하여 매달리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놀랍게 만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이 지상에서 이렇게 하나님만 찾으면서 사는 일들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친히 경험하시고 그런 기도의 불꽃을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 당신이 치르신 희생과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을 아셨기 때문에, 또한 우리들 중에 누군가 그런 불꽃을 유지하며 주님을 찾는 목소리를 들으시면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의 삶 자체를 이미 그 기도의 불꽃 속에서 보시고, 인정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삶을 능가하는 기도도 없고, 기도를 넘어서는 삶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경박하면 기도도 경박하고, 삶의 대해서 정말 교만하면, 기도도 교만하게 합니다. 그러나 삶이 눈물겨운 삶이면 그는 울면서 매달릴 것이고, 그의 삶이 환희에 넘치면 기도도 역시 거룩한 기쁨에 넘치는 외치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여전히 환경과 더불어서 싸우는 당신의 자녀들을 도우시고 붙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시고 그 사람들이 들고 온 수많은 일들에 둘러싸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일, 당신의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기도의 영을 질식시키는 데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더 풍성하고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그 만남이 가져다주는 사역을 녹여버릴 수 있을 정도의 기도의 세계를 유지하며 살아가셨던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고 있는 일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어디에 있습니까? 만약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오해이지 성경의 가르침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 가운데 주님이 하고 있는 일보다 귀한 일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이 하고 계신 귀한 일들에도 불구하고, 귀한 사람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기도의 세계를 누구도 방해할 수 없게끔 바리케이트를 치셨습니다. 이른 새벽이라는 시간으로 바리케이트를 치시고, 한적한 곳이라는 말씀으로 바리케이트를 치시고, 긴 시간 통곡과 눈물로 벽을 쌓으시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기도하는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그 분의 불꽃과 같은 생애가 불꽃과 같은 기도 생활에 힘입은 것이라고 말해도 전혀 무리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처럼 기도하기 전에는 주님의 마음을 아는 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처럼 기도하기 전에는 주님이 어떠한 마음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고난과 위기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당신이 택한 사람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사랑하셨는지도 우리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에 대한 태만 속에서 우리의 영은 쇠약해져 가고 하나님이 우리의 가슴속에 새겨 놓으셨던 당신의 선명한 사랑들의 흔적은 식어가고 흐려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새겨놓으신 사랑의 흔적들이 희미해져가기 시작할 때 세상은 우리에게 더 다른 흔적들을 새겨 넣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인상보다는 세상으로부터 받는 인상을 더 깊이 간직하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인상이 우리에게 무슨 삶을 가르쳐 줍니까?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곳이 한군데 있습니다. 양재동 꽃 판매하는데 일년에 두어 번 가는데, 왠지 모르게 바빠서 자주 가지 못합니다. 언젠가 가을인가로 기억이 되는데 한 번은 거기 가서 국화부터 시작해서 난까지 가득 펴 있습니다. 그런데 딱 돌아오고 나서 며칠동안 눈만 감으면 꽃밭이 우거진 그런 곳이 계속 아른거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오늘도 그 생각을 하면서 그런 마음을 느꼈습니다. ‘역시 사람이 좋은 것을 보고 살아야 겠구나.’ 꽃만 보고 왔는데도 계속 머리와 마음속에서 그 아름다운 꽃이 계속 많이 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교회 다니는 자매들이 “목사님, 우리도 꽃이잖아요.” 하겠지요. 그런데.... 살로된 꽃 말고 진짜 꽃은 더 깊은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선하게 눈에 어려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신령한 비젼을 가지고 살아가면 그 기도에 나타났던 그 신령한 비젼들이 우리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지게 될 때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계속 그 천국의 향취를 느끼면서 거기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이기는 자들에게 베풀어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 십자가를 지고 승리한 자들에게 주시는 그 놀라운 상급. 고난과 시련 속에서 순결을 저버리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그 크고 아름다운 상급. 이런 것들에 대한 인상이 새겨진 사람들은 가슴에 깊이 그런 것들이 새겨졌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서 꽃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는 것처럼 그러한 신령한 비젼에 대한 생각이 떠나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문이 닫혀 보십시오. 기도라고 하는 것은 꼭 천국에 아름다운 정원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문과 같은 것입니다. 기도가 딱 끊어졌는데, 사람이 거룩하고 신령한 생각으로 꽉 차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코메디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이 영안이 멀게 되면 마지막에 육신의 두 눈은 배로 밝아지게 됩니다. 전에는 관심도 없던 그 귀걸이, 옷 그런 생각들과 사모함으로 가득찹니다. 그러나 신령한 눈이 확 뜨이면 천국의 아름다운 것들이 가슴에 막 새겨지기 시작할 때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예쁜 옷, 좋은 화장품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은혜받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어머, 세상에 저 분은 어쩜 저렇게 은혜를 많이 받았을까? 어떻게 하면 나도 저렇게 은혜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가서 겸손히 무릎을 꿇고 겸손히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도록 열어주는 창문이 무엇이냐 하면은 기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결국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시면 서도 그렇게 환경을 이기는 기도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삶을 하나님 앞에 사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유명해 지지도 않았습니다만, 종종 조금 유명해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 자체를 아주 귀찮게 생각을 하고 또 심지어는 미워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봅니다. 더 슬픈 것은 그러면서 그것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사는 경건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오류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저 자신이 순간순간 경험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자기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 우리의 소명, 우리의 사명이 우리를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일이 우리를 죽인 것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찔러 죽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직장을 다녀야 하지 않습니까? 그 일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는데 말입니다. 교회를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하다 못해서 지게를 지는 사람은 지게를 져야 합니다. 그 것이 자기의 해야할 일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이 승진도 못하고 바닥에서 기고, 불성실하고, 퇴근만 열심히 하고, 직장 나와서 주보 만들고, 심방전화하고 그렇게 해서 직장이 되겠습니까? 제가 그래서 당부하는 것 중에 하나가 직장 나가서 교회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는 자기에게 열심히 월급준 사람에게 충성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승진도 좀 빨리 하고, 정직해서 모범이 되고 그러한 생애를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러한 삶을 살려고 하니, 결국은 나와서 하는 이야기를 직장생활이 바빠서 기도를 못 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 생활이 도저히 정확하게 말해서, 그 생활을 해 가지고는 도저히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에는 집어치워야지, 뭐하려고 죽기까지 붙들고 있습니까? 밥 벌어먹고 살려고 태어난 사람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라면 우리도 가야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두 거룩한 백수가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거룩한 백수들이 교회에 모여 있으면, 그것이 어떻게 교회입니까? 소금창고가 되겠지요. 무슨 빛입니까? 조명 기구상이지요. 그러니 가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주께 하듯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 기도 생활이 변화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계속해서 ‘내가 기도생활 못하는 것은 직장생활 때문이야.’라고 하지만, 그것은 직장생활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기도생활이 무너졌기 때문에 기도세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일의 강도가 높으면 강도만큼 더 높은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경건한 삶을 위해서 자신을 투자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물론 죄와 더불어 싸웁니다. 그러나 죄와 더불어 싸우는데, 주님이 총칼을 들고 죄와 더불어 싸우셨다면 우리는 한참 쳐다보다 두 대 때리는 동안에 일곱, 여덟 대 늑신나게 얻어맞고 피흘리고 “해도 안 된다.”고만 합니다. 해도 안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한 배부른 주먹질을 가지고 이기겠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기도가 메마르는 것은 우리가 기도생활이 환경 때문에 메마르는 것이라고 얘기를 하면, 그것이 바로 마귀가 원하는 정답입니다. “너는 문제가 없는데, 환경에만 문제가 있다.” 그런 사람은 환경이 열려서 한가로워지면 드러누워서 한가하게 TV보고 잡지보는 것 외에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분투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모두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어떤 삶의 강도를 가지고 그걸 짊어지고 기도하시는지 다 알고 계신다는 겁니다. 노는 사람이 아니라, 무거운 삶의 강도를 짊어지고 몸부림치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한 시간을 기도할 때에, 20분을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농축시켜 주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확실히 체험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도 있고, 마음 자체가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한 것입니다. 며칠 기도원에나 올라가고 싶은데 삶이 그것을 허락치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매달릴 때, 우리는 더 절박한 마음으로 매달리기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환경이라고 하지만, 환경과 바쁜 삶 속에서 토막 시간이 얼마나 많이 나는지 모릅니다. 큰 시간을 뚝 떼어도 문제가 안 될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토막 시간들이 얼마나 많이 나는지 모릅니다. 한시간, 두시간 아버지 앞에 기도할 수 없다면 30분 매달리면서 더 농축된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사시면서 불꽃같은 기도의 영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체험하면서 사셨습니다. 푹 주무시고 싶으셔도 오늘 본문과 같이 새벽 미명에 일어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고 있었어도 그 분은 조용한 새벽이슬을 맞아 가시면서 빈들이나, 혹은 한적한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새벽을 시작하셨습니다. 거기에 고통이 따르지 않았다면 새개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친히 그런 고난을 경험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기도할 수 없을 것 같은 환경 속에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당신은 넘치도록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요구하시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엊그제 어느 교회에 갔는데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목사님. 요즘 교인들 어쩌면 좋습니까?”, “왜 그럽니까?”, “『전도하라. 전도하라.』고 하면 그러면 전도 특강 듣는 것으로 때우고, 또 가정이 『화목하라. 화목하라. 죽어지내라.』하면은 가정세미나 하는 것으로 때우고, 『전도하라. 전도하라.』고 하면 전도 잘하는 사람 이야기 듣는 것으로 때웁니다.”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에 관한 책으로 때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계속에서 다른 사람 밥을 먹여주는 것 뿐 자신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야. 기도 많이 해야 한데. 하나님이 우리를 복주신데. 우리는 연약하지만 환경에 시달려도 기도만 진실하게 하면 하나님이 다 환경을 고려하시고 우리에게 응답해 주신데.” 모두 다 “데”자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데, 누가 그러데”하면서 “데”자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간증이 자신 안에서 일어날 때, 그것이 진실한 간증이 되는 것이지 “데”자로 끝났는데,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러한 오류 속에 빠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계속 여러분들이 기도의 불이 붙을 때까지 이 기도시리즈를 할 것입니다. 여러분 .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말 환경에 핑계 대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결심하고 우리는 그 기도를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기도하는데, 제자들이 나아와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찾습니다. 주님을 찾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왜 예수님을 찾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들도 많이 있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제자들도 많이 있고, 또 유능하게 성경을 가르쳐 주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텐데 왜 예수님을 찾았을까요? 이렇게 물으니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야, 예수님이 당회장이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건 요즘 교인들에게나 그렇지, 예수님께서 당회장이시기 때문에 찾아다닌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만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다닌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예수님께서 정말 끊임없이 기도하셨으니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권능을 유지하시고 사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즘에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나라 특히 그런데, 누가 새로운 목소리를 낸다고 하면, 다른말로 해서 ‘누가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나 보다.’ ‘누구네 교회가 어떻게 부흥한다더라.’ 하면 막 한국교회 수많은 교회에서 빨대를 들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스에다 꽂듯이 꽂아서 ‘네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한 번 빨아 먹어보자.’하는 것입니다. 쫙 빨고 딱 비면은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교회에서 위대한 인물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무언가 성숙하도록 내버려두지를 않는 것입니다. 떡잎부터 달라붙어서 뜯어먹느라 정신이 없는 것입니다. 뭔가 길러주고 하는 것이 아니기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앞 장면에서 보면 저녁 늦게까지 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을 볼 때, 밤새도록 사람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찾았겠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문제에 때로는 지혜가 필요하고, 때로는 능력이 필요하고, 때로는 가르침이 필요한 많은 문제들을 사람들이 안고 있을 때에 누군가 적절한 답을 주고 해결을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그러한 능력이 깃들였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매일매일 고달프고, 혹독한 일과 속에서도 살인적인 일과 속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하는 기도세계 속에서 매일매일 거룩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계시의 정신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일들이 예수님께 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디서든지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고, 그들이 문제를 가지고 나올 때 주님은 풀지 못하고 해결하시지 못할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 아니면은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 아니면 해결될 수 없는 문제는, 뒤집어 말하면 우리 아니면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시는 그 크고 놀라운 축복의 특권들을 보여주고, 보여주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기도 속에서 살아야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제 이 기도에 대한 설교만을 들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 깊이 결단해야 합니다. 무너진 기도의 시간들을 회복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시간을 정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도 정하고, 얼마만큼 기도해야겠다고 원칙도 정해야 합니다. 매일 지킬 수는 없겠지만,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자신이 마련한 그 정해진 기준에 부합하면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를 스스로 묶어두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결국은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때에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에는 이러한 기도의 흔적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빈들에서나, 광야 한적한 곳에서 이른 새벽 미명부터 찬란한 아침해가 밝아 올 때까지 기도하시면서 그 기도의 습관 속에서 굳어진 그 다리의 굳은 살과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하시던 그 경건한 신앙의 특성들과 영적인 면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거침없이 나타났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나, 십자가에서 남기신 일곱마디의 유언 중 대부분은 주님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하나님을 향해서 토해놓는 기도였습니다. 기도의 영 속에서 사셨기 때문에, 기도 속에서 일생을 마치실 수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교제 속에 들어가게 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약속이며, 또 이렇게 기도가 우리 속에서 살아날 때에 우리 속에 죄는 뿌리 뽑히게 되고 우리의 힘으로 다다를 수 없었던 거룩한 생활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우리의 마음과 하나님 앞에서 패역해서 고치지 않으려는 우리의 사악한 본성들이 이러한 깊은 기도의 눈물 속에서 녹아지고 고쳐지는 것입니다. 우리만 고칠 뿐만 아니라 도저히 인간의 계산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우리 앞에 놓인 환경의 장벽들을 허물어 버립니다. 도저히 구제불능이고 고칠 수 없는 사람들을 바꾸어 놓고, 고치는 놀라운 역사가 이 기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언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두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환경이 우리를 자유 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때에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환경이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준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바친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고난을 받을 때에 믿음을 지키다가, 평화로울 때 물러가서 침륜에 빠진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바라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새롭게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실패했던 관전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환경이 우리의 기도를 실패하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의 게으름이 우리의 기도의 생활을 모두 황폐화 시켰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을 모두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주어진 환경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낮에 기도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새벽을 택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동네에서 기도하는 것을 환경이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을 택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깊이 결심하고 기도의 삶을 살아가고, 오늘 받은 기도의 은혜의 불꽃을 잘 간직하고, 기도 속에서 승리하다가 다시 만나야 합니다.
기도Ⅲ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