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Ⅳ
(199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기도와 가정생활(벧전3:7) 1998.5.3 주일오후 1
2. 깨어진 마음과 기도(행9:11) 1998.5.10 주일오후 20
3. 고난과 기도(시116:3-5) 1998.5.17 주일오후 31
4. 교회의 위기와 기도(행4:31) 1998.5.24 주일오후 45
5. 기도와 견고함(단1:8) 1998.5.31 주일오후 63
6. 기도와 견고한 마음(사26:3) 1998.6.7 주일오후 72
7. 마지막 때엔 기도로 삽니다.(벧전4:7) 1998.6.14 주일오S후 81
8. 기도와 하나님의 사랑(시116:1-2) 1998.6.21 주일오후 85
9. 삶의 개혁 없이 기도의 회복은 없다(사58:8-9) 1998.6.28 주일오후 95
10. 기도의 사람이 기도하는 집을 만든다(사56:7) 1998.7.5 주일오후 104
1.기도와 가정생활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리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7)
지난 시간에 우리가 기도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두시간에 걸쳐서 환경을 극복하는 기도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지 안았습니까? 특별히 지난 시간에는 우리들이 생각해 볼 때에 예수님이 문제가 많은 세상에서 그렇게 그 문제 해결의 능력을 고스란히 소유하시면서 사실 수 있었던 중요한 비결이 바로 한적한 곳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기도의 세계를 잃지 안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그런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을 하는 그런 역사를 이루었다는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오늘은 말이죠 기도의 대해서 뭘 할까? 이렇게 일주일 내내 고민을 하다가 가정의 달과 절묘하게 조화된 길이 있을 텐데 하다가 이제 제가 이 본문을 가지고 오늘 설교하도록 그렇게 마음에 결심을 했습니다.
사실 전 설교 할 때 집사람만 없으면은 아주 자유한 가운데 자신 있게 설교 할 것 같은데 하필이면 맨 앞에 앉어서 설교하고 가면 저녁때 내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 근데 그건 참 정직하지 안 은거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못 된 것은 고치고 해야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이 아니냐! 그런 겁니다.
여기서는 이제 그 우리들이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환경을 극복해 보려고 노력을 하고 애를 많이 써도 사실 기도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인고 하니 모든 것이 다 정상이라도 말이죠. 뭔가 근본적인 결함이 있으면 제대로 작동을 안 하는 게 이게 인간사의 이치입니다.
누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술을 먹고 운전을 하는데 경찰이 막 오면서 서라고 마이크에다 대고 “정지하시오. 정지하시오!” 그러드래요. 그래서 “야 ,경찰한테 걸렸구나. 안 되겠다.” 그러고 그냥 막 밟았답니다. 그런데 경찰이 오토바이를 타고 쫓아오는데 얼마나 빠른지 계속 창가로 쫓아오더라는 것입니다. 창가로 ‘야! 이거 봐라 그래서 술김에 한번 그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그리고 그냥 막 밟았는데 속도기를 보니까 180, 190으로 올라갔는데도 무슨 오토바이가 그런 오토바이가 있는지 계속 창문 옆으로 쫓아오더라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차가 진창에 빠졌더래요. 진창에 빠져서 계속 밟으니까 바퀴만 계속 돌아가는데 이 술 먹은 사람이 생각하기에 이게 120, 150 막 올라간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경찰은 창가에서 문을 뚜드리고 있는 건데 자~ 차도 좋고 쿠션도 좋고 기아도 넣겠다 기름도 많겠다. 엑셀도 말 잘 듣겠다. 속도기도 돌아가겠다. 안 뿔어진 다리 있겠다. 그냥 막 딥다 밟았어요. 모든 게 다 정상입니다. 그런데 바퀴가 진흙 구덩이에 빠졌으니까 모든 건 정상인데 안 간다 이 얘기죠.
우리의 기도생활이 혹시 진흙창에 빠진 바퀴처럼 딥다 밟아도 그냥 돌아가기는 돌아가는데 왠지 더 이상 진전을 안 하는 것 같고 열심히 목놓아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목만 아프고 마음속에 믿음이 생기는데 내 기도는 절대 안 들어주실 것 같다는 그런 믿음이 생기는 그런 좌절스러운 기도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기름, 더 열심히 밟는 것, 또 더 좋은 운전기술, 그게 아니예요
뭐가 필요해요? 가마니 한 장이 딱 필요해요. 가마니가 왜 필요하냐? 가마니를 가지고 차 속에 기어 들어가서 차 키로 차를 올린 다음에 그 진흙창 밑바닥에다가 가마니를 한 장 딱 깔면 그 다음에 밟으면 그렇게 세게 안 밟아도 붕 밟으면 차가 탁 올라옵니다. 올라만 오면은 누가 그것을 잡겠어요. 경찰이 아무리 오토바이를 잘 타도 190킬로로 달려가는데 부딪칠지는 모르지만 누가 그 걸을 잡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을 정상궤도에 올려놓고 그 다음에 거기서 기아를 넣고 그 다음에 엑셀을 넣고 밟으면 그러면은 그 유명한 경주용 자동차처럼 말이죠 그냥 도로를 질주하면서 달릴 수가 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기도 생활의 진전이 없는 분들은 한번 그냥 엑셀을 밟은 데로 자기를 내 몰지 말고 한번쯤은 이거 내가 수렁에 빠진 게 아닌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오늘 기도생활의 수렁하나를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결국은 뭐냐 하면은 가정생활의 문제라는 것 이예요. 이게 기도생활의 있어서 결정적인 웅덩이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이죠 사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미루어 볼 때 베드로가 결혼을 한 사람이라고 보지 않습니까? 카톨릭에서는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장모도 나오고 그 다음에 게바가 아내 된 자매를 데리고 다녔다고 나오기 때문에 결혼했던 사람이었으니까 어떤 의미에서 이 사람은 생생한 간증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독신으로 살던 바울이 사실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물론 성경이니까 우리는 받아들이긴 했겠지만 그러나 더 피부에 와닿는 결혼생활을 실지로 경험한 베드로가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는지 모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말이죠. 우리에게 결국 이 교회와 가정이라고 하는 우리의 삶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 두개를 주셨습니다. 가정과 교회라고 하는 기본적인 삶의 단위 두개를 주셨는데 결국 이 두 개는 모두 건강해야 됩니다. 모두 건강해야 되고 또 이 두 개중 어느 한 개가 심히 병들었는데 나머지 영역에서의 삶이 건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부부가 말이죠 부부가 사이 좋고 금술 좋게 잘 지낸다고 해서 두 사람이 다 교회에서 신앙생활 잘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생활이 무너져 버리고 제대로 목양을 받지 안고 그렇게 신앙적인 삶이 무너져 버리면 그 금술 좋은 부부생활 결국은 언젠간 반드시 깨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그거 가만 내버려두시겠는가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보시기에는 주님이 세우신 두 부부가 “하나님 없이도 우리는 이렇게 행복하게 잘 삽니다.”그럴 때 그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하나님이 버려 두시겠느냐 그거죠.
하나님 보실 때에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주님을 우리의 가족을 통해서 가정생활을 통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께 기쁨을 돌려 드리는 이 전체적인 거룩한 삶에 대한 공통점이 있을 때에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그 하나님 공경하고 하나님 사랑하는 것은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그저 두 부부가 이 세상에서 신나게 행복하게 그저 잉꼬 부부처럼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한다 다시 태어날 일 없어요. 환생하지 안 는다고. 부활하는데 그때는 시집가고 장가도 안 가잖아요? 다시 태어날 일도 없어요.
하여튼 웃기더라고요. 제가 두란노 온누리 교회 가서 설교를 마쳤는데 웬 청년이 은혜를 많이 받은 모양 이예요. 그것까지는 좋아요. 한참 걸어나오더니 드릴 말씀이 있대요. 그래서 뭐냐고 그러니까 꼭 이 말씀은 하고 싶었대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환생한 줄 알았데. 그래서 제가 한참 쳐다만 봤어요. 예수 믿는 사람이 어디 또 웬 환생 이예요?
그러니까 다시 태어날 일도 없는데 그러한 말을 지어내느라고 그렇게 복잡하게 시간 낭비하지 말고 말이죠. 이 세상에서 두 사람이 아무리 금술 좋고 사랑하며 살아도 그 두 사람의 결합이 하나님을 위한 결합이 아니면 하나님 보시기에 전부다 죄인들이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말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세속적인 일 이예요. 소돔과 고모라 성에 있는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를 못했어요. 왜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왜 그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그렇게 노아가 외쳤는데도 결국은 그 경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무엇 때문 이예요.
세 가지 때문인데 두 가지는 똑같은 얘기예요.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는 일 때문 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을 높이며 사는 결혼일 때 그 결혼이 성스러운 결혼이지 그런 개념이 없어져 버리면은 그러면 이 세상에서 다 자기의 정욕을 쫓아서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는 그런 것의 지나기 안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삶의 영역이 분리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건강한 교회, 건강한 가정, 하나님의 나라 같은 교회, 그 다음에 교회와 같은 가정, 이게 두 개가 아름다운 원이 그려질 때에, 그리고 양쪽에서 다 건강한 삶을 살아갈 때에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정말 제대로 된 신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업적을 이루고 그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아내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한 인생이 아닙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아내도 자기가 아무리 인생을 고달프고 고난의 세월을 살아왔고 가시밭길을 걸어왔다고 하더라고 그게 결국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얘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봐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는 정말 그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그 사람 어떠냐고 물어 보면은 형편없고 신통치 안다고 좀더 가까이 물어보면은 뭐 별로 그렇게 큰 특징이 없다고 근데 자꾸 가까이 가고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사람이 정말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고 진실한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아주 정직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이 계속 드러나게 되면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도 바뀌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그 반대의 사람이 되면은 불행한 거예요. 그리스도인이 되도 먼데서 이야기할 때는 그 사람 대단하고 뭐 그 사람 멋있다고 이야기를 해도 계속해서 걸어 들어 가 보면 걸어 들어 갈수록 아 그 사람 신통치 안다고 겉만 화려하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계속 들어가다가 마지막에 자기 부인한테 물어보면은 “아, 저 사람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 난 찬송할 수 없다. 하나님이 왜 저런 사람 만나게 해주는 알 수 없다”고, 그나마 남편한테 물어보니까 “성경에 헤어지지 말라는 말만 없었으면 벌써 헤어 졌을 텐데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은 저 여자다.”라고 하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결혼생활과 교회생활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실제로 두 부부가 아주 잉꼬 같은데 결국 신앙생활이 무너지면서 그 가정이 그냥 순식간에 전부다 박살이 나는 것을 참 많이 봤습니다. 근데 반대도 봤어요. 완전히 이거는 가망이 없이 깨트려져버린 가정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 하나님이 말이 예요. 먼저 한 사람을 불러서 대부분이 부인들을 먼저 부르시더라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변화를 주시면 그가 이전에 그렇게 고통 하던 가정을 끌어안고 치유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그런 과정을 참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말이죠 이 가정과 교회가 이렇게 중요한 삶의 영역이고 양쪽에서 우리 모두 승리해야 된다 이런 말씀인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아까로 돌아가서 그렇게 수렁에 빠진 차와 같은 기도생활의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늘 빠지는 수렁이 무엇인지 알아야 겠습니다. 늘 빠지기 쉬운 수렁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부부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이제 남편에게 권하고 있지만 두 개예요. 뭐냐하면 여기 기도가 막히지 안게 하려 함이라 이 뜻을 간단히 요약하면 너희에게 아내가 있는데 그 아내를 참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연약한 그릇을 다룰 때는 살살 다루잖아요. 프라스틱 바가지 같은 것은 연약한 그릇이 아니라 강한 그릇입니다. 화나면 집어 던지고 발로 차도 끄떡없습니다. 그냥 물에 한번 흔들어서 또 쓰고 그러면 됩니다.
그러나 도자기 같은 거 이런 것은 그렇게 집어 던지면은 다 깨지고 박살이 납니다. 살 살 살 살 다루어야 합니다. 이처럼 아내가 이렇게 연약한 그릇이니까 설 것이 할 때 바가지 같은 것은 집어넣고 막 돌려도 되고 심하면 세탁기에 집어넣고 돌려도 되지만 그러나 이 도자기는 그렇게 하면 안 되요 살 살 딱아야 되지요. 그것도 이빨 빠지고 여기저기 깨지고 금 간 거야 하다가 망가지면 버릴 수 있겠지만 값지고 귀하게 조각이 세겨진 그런 귀한 도자기를 누가 막 굴리겠습니까? 살 살 닦아서 놓을 때도 살살 놓는 것처럼 너희들에 아내를 그렇게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그렇게 사랑해라 그러면은 너희기도가 안 막힌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고 포악하게 하고 그래서 트러블이 생기고 그러면은 기도가 안 된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여성분들이 기가 살아야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왜 그 앞에 보면 똑같은 얘기가 또 나와요 그게 뭐냐하면 남자들의 경우에는 그렇게 아내들을 사랑하지 않고 마구 다루어서 포악하게 하므로서 기도가 막히지만 그러나 기도가 막힌다는 이 이야기는 앞 절과 양쪽에 다 걸린다는 이야기지 꼭 남성들에게만 기도가 막히겠느냐 말이죠.
여성분들은 아무렇게나 살고 아내는 남편에게 아무렇게나 해도 기도가 안 막힌다면 거짓말이잖아요. 남자들의 함정은 부인에게 포악하게 해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가 막히지만 아내들의 경우에는 남편을 하나님이 그 가정의 가장으로 세웠는데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그렇게 온전히 순복하지 안으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은 트러블이 생기고 거기에서 기도가 막히는 일들이 일어난다 이 얘기예요.
어쩌든지 간에 어느 경우든지 결국은 문제가 일어나게 되면은 기도가 막히게 되는데 남자에게서는 가장 잘 걸리는 덫이 아내에게 막대해서 상처를 주어서 기도가 막히게 되고 여성들의 경우에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려는 자세가 결핍되기 때문에 결국은 트러블이 생겨서 기도가 막히게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균형을 잡는다고 양쪽이야기만 하면 초점이 흐려지니까 일단 오늘은 남성들이 불리하지만 할 수 없이 이제 여성 쪽의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생활의 원리는 무엇이냐면은 남성은 그 가정의 보호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정의 구성원들을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보호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매우 특별한 때 남편이 깊이 병들어 다든지 파상을 했다든지 인생의 외 예 적인 경우를 만나면은 그렇게 정신적인 울타리 역할, 혹은 경제적인 울타리의 역할, 육체적인 보호막의 구실을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시적인 일이고 늘 있어야될 일은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좋은 보호자로서 그렇게 가정을 다스려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다음에 온 땅을 다스리도록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때 다스린다는 말씀이 ‘라다’ 라는 히브리말인데 이 뜻은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임금하면 그냥 이리 올지어다 사라질지어다 맨 날 찌어다 만 하는 임금들이 텔레비전에서도 보고 또 소설 같은데서 읽지만 그러나 진짜 좋은 임금은 선한 관리자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그 나라 풀 포기 하나 들꽃 하나도 깊이 사랑하면서 선량한 관리자로서 그 자기가 다스리는 땅에서 자신의 섬김을 통해서 온 백성이 평화를 누리며 살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선한 임금의 말하자면은 통치방식입니다.
하나님이 가장에게 분명한 주권을 주셨습니다. 이 주권은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인데 아내에게서는 아내와 모든 가족들이 주안에서 그 남편을 통해서 주어지는 영역에 순종하고 복종하며 살도록 하나님이 불러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에게 권위를 주셔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가족들을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다스리시는 것처럼 다스리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름을 받은 사람이 올바르게 그 권위를 행사해서 온 가족이 그렇게 복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가정의 모든 문제는 정상적으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기둥이 하나 딱 서야 되요. 기둥이 뭐냐면 예수 잘 믿는 남편 그 사람이 서야 된다 이말 이예요. 예수 잘 믿는 경건한 아버지가 있어야된다 이 말입니다. 그게 결국은 가정이 하나님 앞에서는 길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텐트를 칠 때에 제일 먼저 어떻게 칩니까 ? 우선 가운데 다가 큰 막대기를 세워놓고 그 다음에 사방에서 잡아당기면서 말뚝을 박아서 텐트를 칩니다. 물론 가운데 말뚝 없이도 칠 수 있는 방법은 있어요. 서서 들어갈 텐트를 기어 들어가게 되고 공중에 매달려야할 텐트를 이불처럼 덮고 자면은 되요. 그러니 그것이 정상적인 텐트 생활이겠느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우리 사회를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전해 보면 알지만 제일 가슴에 돌덩이 같은 사람이 누구냐면 이 땅의 아버지들 이예요. 세상의 IMF 한파에는 고개를 숙여도 하나님 앞에는 고개를 숙일지 모르는 이 돌멩이와 같은 가슴을 가지고 있는 이 말하자면 남성들 변화되지 안으니까 가정이 이렇게 일그러지는 모습들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최근에는 미국에서 아버지들이 회개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프라미스키퍼 운동’이라고 나오잖아요. 저는 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어떤 성질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자기가 아버지인 것들을 아버지 앞에 회개하는 거잖아요. ‘하나님 우리가 아버지입니까? 우리가 이 가정을 어떻게 했습니까?’ 그러고 회개하는 장면들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중심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내들을 통해서 남편들을 어떻게 전도해 보려고 뷔페 집에다가 상도 차려놓고 한번 꼬셔 보기도 하고 별것 다 합디다. 그래서 여의치 안잖아요. 청교도들은 교육의 원리가 간단해요. 아내들을 통해서 남편을 교회에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남편을 장악해서 남편을 통해서 자기의 가정을 교육하도록 만드는 것 이예요. 이게 말하자면 가정생활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정을 이끌어 나가야 할 이 남성에게 결국은 깊은 기도 속에서 그 가정을 이끌어 나가지 않으면 꼭 기도하지 안고 목회 하는 것과 똑같다 이야기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한가지 깊이 깨달은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가정 생활과 똑같아요. 남편이 밖에 나가서 아무리 유명하고, 회사에서 인정을 받고 승진을 하고, 막 두 단계 세 단계 뛰어 올라 갔더라도 가정에 와서 남편으로서 자기 할 일을 잘하지 못하면은 남편으로서 인정을 잘 못 받듯이 목회자도 똑같다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밖에 나가서 뭘 아무리 많이 해도 돌아와서 교인들이 좋다고 하지 않으면은 좋은 교회가 될 수 없고 좋은 목회자가 될 수 없어요.
똑 같습니다.. 자기가 가장이면 그러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정말 옳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우선적인 영역이 둘 있어요. 하나는 교회고 하나는 가정 이예요. 교회에서도 차라리 돌멩이가 변하여 나무가 되는 것이 낫지 ‘저 사람 변할 리가 없다.’ 이렇게 내 놓고 가정에서도 ‘우리 남편은 못 말려.’ 그렇게 내 놓은 사람이 사회에서 아무리 깃발을 날리는 들 이 사람 인생이 성공했다고 말 할 수 있느냐 말이죠.
제가 그 사람 깊이는 모르지만 그리스도 인이라는 사실은 압니다. 이명박씨가 자기 자서전에서 그러더라구요. 나는 죽어라하고 일했고 성공했지만 성공한 곳에서나 실패한 곳에서나 언제나 우리의 가족이 거기에 함께 있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가족을 모두 팽개치고 혼자 줄달음질쳐서 정상에 올라간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데요. 그래서 그것 읽으면서 저는 참 부끄럽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 바쁜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계속 국제전화 해서 “야! 어제 숙제가 뭐래며? 그거 했냐?” 그런 것까지 다 챙겨요. 아이들한테 그러고 사니까 자기의 일이 모두 끝났어도 여전히 자신은 공허하거나 외로워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언제나 자신은 가족과 함께 걸어온 길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끝나고 정리가 됐어도 자신의 가족들은 자신의 옆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거예요.
이게 성공한 사람의 진정한 삶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들을 남성들이 얼마나 쉽게 짓밟고 있는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마치 이제 가정은 자신의 어떤 성공이나 자신이 무엇인가 추구하는 것들에 대한 발판 정도로만 생각하고 도약을 해보려고 하니까 계속 식구들은 거기에 밟히는 것이죠. 그러나 그렇게 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생활하고 깊이 연관된 거라는 거예요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결국은 부부간의 문제가 생길 때 결국은 그 기도는 정상적인 기도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그 기도가 될 수 없고 기도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 막혀 버린다 라는 사실 인 겁니다.
우리들이 지금 경험하기는 힘들겠지만 옛날에 연통에다가 이렇게 길게 되어 있는 난로에 나무나 특별히 톱밥 난로를 때 보면 아주 실감나게 느끼게 됩니다. 이거는 정말 신기해요. 왜냐하면 톱밥 난로가 말이죠. 그게 밑에서 바람을 집어넣는 것도 아니고 무슨 전동장치가 그런 것도 없고 그냥 톱밥 집어넣고 밑에다가 불만 지핀 거예요. 근데 얼마나 이 밑에서 바람이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이렇게 나요. 그러면서 빨려 들어가는데 톱밥이 얼마나 시뻘겋게 타들어 가는지 속에다가 이렇게 생긴 기구를 놔요. 그러면 이것이 바람구멍이 돼서 이 위에다가 이제 톱밥을 덮는 거거든요 이게 한 겨울 때고 나면은 손가락 보다 훨씬 굵은 걸루 만들어서 놨는데 이게 엿가락처럼 다 늘어납니다.
그래서 이게 이년 쓰면 못써요. 바꿔야 됩니다. 녹아버리는 거예요 그 안에서 쇠가 그렇게 연기하나 안 나고 그냥 빨려 들어갑니다. 여기다가 톱밥 난로 두 개만 놓으면 후끈 후끈 합니다. 공해도 없고 말이죠. 그런데 그게 가끔 어떤 때는 말이죠. 잘못하면 완전히 너구리잡이 입니다. 불때면 말이죠 이게 무슨 작심을 했는지 이게 그냥 위에서부터 바람이 거꾸로 들어와 가지고 밑으로 연기를 만들어 가지고 막 내 보내는데 아주 질색을 했어요.
제가 처음 다니던 교회에서 그 톱밥난로를 땠는데 하여튼 정말 곤욕이었어요. 그래서 어떤 때는 톱밥 난로를 때면서 기도를 해요. 주님! 이번에는 공기가 잘 통하게 해달라고. 거꾸로 내려와요. 근데 그걸 나중에 알았어요. 그게 뭐냐하면 톱밥 난로를 때기 전에는 신문지 같은 데다가 불을 붙여서 연통을 따뜻하게 만든 다음에 불을 붙여 야지만 쭉 타고 올라가는데 말하자면 공기가 차가운 공기가 무거우니까 위에서 주저앉잖아요. 뜨거운 공기가 올라가니까 찬 공기가 더운 공기를 밀어 내버리니까 연기가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그거를 알았나?
결국은 뭐냐면 공기 구멍은 분명히 뻥 뚫어져 있어서 하늘이 보여도 차가운 공기가 위에서 차고 내려오니까 사실상은 뚫어진 것 같은데 사실상은 더운 공기를 향해서는 굴뚝 자체가 막힌 거예요. 맨날 와서 엎드려 기도해요. 맨 날 와서 기도하고 뭐 새벽기도도 나오고 금요 기도도 나오고 수요기도도 나오고 뭐 밤에 잘 때 베게에 머리를 뭍고 기도하고 이렇게 기도를 하는데 늘 기도하는 것 같은데 그러나 그 기도의 능력 속에서 살아가고 승리하는 것이 그 남성의 삶 속에서 잘 드러나지 안 는다 말이죠.
결국은 무엇 때문이냐면 막혀 있는 것 이예요. 불을 때면은 굴뚝이 열려 있으면 훅~하고 빨려 들어가면서 무서운 기세로 빨려 들어가요. 굴뚝을 막 몇 높이씩 쌓아놨는데도 거 보면은 시뻘건 불꽃이 막 하늘로 기어올라가잖아요. 그게 무슨 전동장치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그 굴뚝 자체의 힘으로 빨려 올라가는 거예요.
기도가 근본적으로 물론 얼마나 많이 하느냐도 중요하고 얼마나 간절히 하느냐도 중요하고 얼마나 정확하게 기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거보다도 중요한 거는 정말 그 기도가 하나님께로 빨려 올라가는 기도냐 그것이 중요하지 안 습니까? 정말 기도할 때에 그냥 한 움큼 잡어 넣으면 확 타서 시뻘건 불꽃이 되어서 굴뚝 밖으로 튀어 나가는 것 같은 그러한 빨려 들어감이 있는 기도 생활이라면 정말 얼마나 하나님 앞에 충만한 생활을 하겠는가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요즘에 기도하면서 드는 생각이 그거예요. 뭐냐하면 글을 쓰고 목회하고 뭐하고 뭐하고 하다보면 결국은 절대적인 기도 생활이 부족하고 기도 시간만 부족한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가 부족해요. 근데 이 모든 비능률을 타개 할 수 있는 방법은 뭐냐면 그 시간에 하나님이 크게 축복해 주시는 거예요. 그것 밖에는 대책이 없어요. 왜? 누구한테나 다 스물 네 시간인데 그 축복하지 안고는 남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없잖아요?
무슨 얘기냐 하면 글을 쓸 때에도 그냥 끙끙 매는 시간은 없어져 버리고 필을 딱 들고 그저 백지를 탁 펴면 쫘르르 쏟아져서 다시 써도 좋을 수 없는 글이 쏟아져 나오고 심방을 하면 두 번 갈 필요 없이 한번에 그냥 딱 끝이 나는 그런 심방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 다음에 또 교회에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정확한 지혜를 주시고 정확한 판단을 하게 끔 해주셔서 한 일이 다시 돌아오고 다시 돌아오고 이런 반복 속에서 소비되는 것이 없고 말씀을 읽어도 그냥 읽으면서 멍하니 한시간 두시간을 읽어도 뭔 뜻인지 가슴에 다가오는 것이 없게 하지 마시고 삼십분을 딱 읽어도 하늘을 열고 축복해 주셔서 그냥 읽는 사람의 가슴속에 확 꽂히도록 은혜를 주셔서 한시간만 성경을 읽고 나도 그냥 20-30 편 설교가 나올 정도로 주님이 축복을 해 주시는 것, 그리고 기도 생활에 있어서도 3시간, 4시간, 5시간, 6시간 엎드려 있는 가운데 4시간 정도는 들어가느라고 끙끙거리고 나머지는 나오느라고 끙끙거리지는 않겠지만 이러면서 보내는 쓸데없는 시간들을 모두 줄여주셔서 기도 할 때 하나님하고 부르면 그냥 빨려 올라가는 그런 기도세계를 지니는 것이야말로 짧은 시간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도 정말 훌륭하게 산 것이다라는 그런 생각을 해요.
제가 이런 것을 스펄전의 그 전기를 보면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굉장히 존경하거든요.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었어요. 언제나 그런 영감의 넘치는 설교를 해서 나이 스무 살이 일만 이 천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그 당시에 목회를 했다고 그러니까 전설적인 인물이거든요.
근데 전기를 보다가 보니까 일주일의 산 생활의 프로그램이 나오는데 충격의 충격을 더 받은 거예요. 기도 시간이 한시간 반 밖에 안 되요. 그래서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저는 그 사람을 너무나 존경하고 감탄했기 때문에 이 사람의 기도시간은 평균 그래도 아침 여섯시서부터 한 오후 세시까지 했겠다 저는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요. 근데 매일 매일 한 시간 반정도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물론 일상적인 기도 생활이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더 기도를 했겠지요.
그러면은 어떻게 한 것이냐 막 고민을 하다가 내린 결론이 있었어요. 뭐였냐면 이것이 거짓이 없는 진실한 기록이라면 그러면 이 사람은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기도가 아닌 세계에서 하루종일 살다가 새벽기도 나와야지만 기도 속으로 들어가는데 이런 사람은 정말 기도와 삶 자체가 화통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것이 제가 내린 결론 이예요. 그러니까 정말 매주 살아가는 것이 목요일 날인가 무슨 날 오후에 네 시서부터 저녁때까지 건강을 위해서 산책하는 것 그것 딱 빼놓고는 모두 짜져 있었어요. 그렇게 타이트한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살았어요. 그러니까 그가 쉰 세 살인가에 죽었는데 이백 네 권의 책을 남기고 그 큰 교회를 목회 하다가 죽었어요. 그래서 계산을 해 보니까 사 십 년 동안 글을 썼다고 하더라도 매년 여섯 권 이상 글을 쓰고 죽은 것 이예요. 사십 년 동안 쓸 수가 없죠. 열 일곱 살 때부터 목회를 했으니까 하튼 그런 인생을 산 것입니다.
결국은 말이죠 우리가 누구이든지 간에 이런 원리는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에는 반드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이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함정이 있다 말이죠 이게 바로 무슨 함정이냐 하면 부부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성경이 딱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동거하라, 하나는 귀하게 여기라 입니다. ‘동거하라’ 무슨 이야기냐면 헤어지지 말아라 그런 얘기 예요. 그러면 이렇게 말 할 거예요. “우리가 언제 헤어졌습니까? 한 지붕 밑에서 사는데...” 근데 여러분, 그냥 같은 방만 쓰고 산다고 그래서 그게 사실 동거가 아니 예요. 따로 떨어져 있지만 같이 사는 것 같은 부부가 있고 그러나 같이 사는 것 같으나 떨어진 부부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화를 나누어야지만 부부가 하나가 된다고 하니까 수펴에 같이 일하는 부부가 하는 말이 우리가 대화를 얼마나 많이 하는데 무슨 대화를 나누냐고 물었더니 “영수증 받았어? 세금 냈어? 돈 받았어? 그 사람 외상값 줬어?” 우리는 입이 닳도록 하루종일 얘기를 한다고 그러는데 그것은 대화가 아니 예요. 이야기지 대화를 시작하려면 적어도 “여보, 요즘 사는 게 왜 이렇게 허무한지 모르겠어.” 그러고 뚜껑을 여는 게 대화란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대화를 얼마나 합니까? 자식에 관한 이야기, 일상생활에 관한 이야기, 바지 구멍 뚫어졌으니까 꿰매어 놓으라는 이야기, 이런 것 빼고 나면 몇 가지나 남는 것이 있습니까? 결국 동거한다라는 이 말은 물론 장소 적인 동거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고 봐요. 기도하기 위해서 그것도 합의 하에 분방 하는 거지만 그러나 그 이외의 경우에는 모두 함께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대학원 다니는 학생들에게 웬만하면 기숙사에서 자지말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그럽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 남편을 한국에다가 내버려두고 혹은 부인을 내버려다 두고 그러고 이년씩 삼 년 씩 심지어는 긴 사람은 오 년 씩 외국에 나가서 유학을 하고 제가 아는 그리스도인부부 하나는 결혼을 하자마자 한 사람은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한 사람은 일본으로 유학을 갔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왜 결혼을 했냐? 각자 살지.” 방학 때 만난데. 아이고 그렇게 중요한 일이 있는 사람들이 뭐하러 결혼을 합니까? 이런 것들은 모두 결국은 부부관계의 결합을 약화시켜서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한 저항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그런 역할들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거한다라고 하는 의미는 장소 적으로도 함께 사는 것이지만 더 중요한 의미는 인격적이고 영적인 결합이 이루어지는 부부 사이에 관계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장 마음에 안타까운 일이 있고 답답한 일이 있을 때에 그것을 여러분들이 정직하게 털어놓고 그 고민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의 일 순위가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지 안으면 그것은 정상적인 결혼 생활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 말하자면 남편은 아내와 더불어서 동거하라는 명령을 아내가 아니라 남편에게 두고 있는 점을 한번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편이 가정을 떠나도 가정이 무너지지 안 지만 아내가 가정을 떠나면 그 가정은 설 수 없다 바로 그런 원리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남편에게는 그렇게 동거할 때 정신적으로든지 육체적으로든지 동거해야할 의무에서 자주 이탈될 수 있는 많은 요소를 환경 적으로나 본성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서 동거하는 삶 장소 적인 동거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결합된 삶을 이어가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아내들이 잘 감당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들이 이 의무를 준수하고 이행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며 남편들은 정신 차리고 자기가 그렇게 아내와 더불어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동거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을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라고 깊이 인식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 야지만 우리가 시험에 들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기도의 세계가 파탄 나는 그런 일들을 막을 수가 있다 그런 이야기인 것입니다.
사실 정말 말이죠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어떤 의미에서 신앙생활과 그 가정생활이 어떻게 그렇게 부조화할 수 있을까 하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용조 목사님께서 언제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대체 제자 훈련도 공부 같이 하고 그렇게 좋아 보이는데 근데 가끔 깨트려 진다는 거예요. 그럴 때 참 한심한 생각이든데요. 여태까지 그렇게 열심히 믿는 게 도대체 뭔가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무엇 때문이냐면 아무리 겉모습으로 열심 있는 신앙생활의 모습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신적인 결합이 깨트려지면 안 되는 거예요. 왜 예수님께서도 그렇고 오늘 사도도 그렇고 동거하라 방을 나누지 말고 같이 사용하면서 그렇게 동거를 하라는 것을 계속 강조하는 이유는 결국 무엇 때문이냐면 그저 싫으나 좋으나 둘이 붙어서 살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인격적인 결합은 해이해지게 되기 때문에 그러니까 항상 인격적인 결합을 유지하면서 살도록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더 큰 강조점은 인격적인 결합 이예요. 그래서 그런 인격적인 결합을 늘 유지하면서 사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런 관계가 될 때 에 그때에야 비로소 말하자면 건강한 영적인 삶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여기서 지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관계들이 인격적인 결합을 해 나가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두 번째로 이제 마지막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그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받을 자로 알아서 자기의 아내를 귀하게 여기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성은 특별히 하나님의 의해서 창조 될 때에 그렇게 육체적으로는 연약하게 끔 창조되었습니다. 물론 요즘도 보면 남자인 저도 못하는 보디빌딩 같은 것을 해 가지고 알통 근육이 막 나와 가지고 한번 걸리면 죽을 것 같은 그런 우람한 여성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원래 하나님의 질서는 남성에게는 강직하고 강력함이라면 여성들의 경우라면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부드러움과 섬세함으로서 여성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조 될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 여성들이 말하자면은 부부 관계 속에서 남성의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자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메튜 헨리라고 하는 목사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여성을 만드시되 머리의 뼈로 취하거나 혹은 엉덩이 뼈나 발바닥 뼈로 취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여성을 만드시되 남성을 지배하도록 머리에서 취하시거나 짓밟히도록 발바닥에서 취하신 것이 아니라 보호받으실 수 있도록 팔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 사랑 받을 수 있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서 갈비뼈를 취해서 여성을 빚으셨다.’ 이런 말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창조의 질서란 말이죠. 그렇게 연약하게 빚어진 그릇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 생활이 막히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시기든지 포악하게 살아온 것에 대해서 깊이 참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신앙적으로 올바로 사용하는 대신에 가정 속에서 아내를 짓밟고 포악하게 하고 자녀들을 폭압한 이러한 것으로부터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 돌이켜야지만 우리가 건강한 영적인 삶을 우리들이 누려갈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 보면 우리가 그러한 일을 행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말이나 우리의 행동으로 그렇게 폭압적으로 군림하려고 하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정당한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말하자면 개인 자신의 정욕이라든지 개인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억압하고 폭압을 행사하고 자녀들에게도 포악하고 이렇게 그러한 삶을 이어가서 결국은 우리가 잘 유지하며 세우고 가꾸도록 만들어준 가정을 스스로 밟고 돌아다니면서 짓밟아 그저 유린 시켜버리는 그런 삶을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가정을 돌보시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으로 세워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이시지만 성경을 통해서 보십시오. 그 아버지는 포악하고 군대 장교 같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쓸 때 실제로 미국에 어느 성경은 그래요 ‘하나님’, 괄호하고 'Father and Mother' 이렇게 나와요. 하나님! 기분 내키는 대로 읽으라 얘기죠. 하나님 어머니 읽든지 하나님 아버지 읽든지 하나님 엄마 아빠 읽든지 맘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지로 그래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들의 전통적인 사회에서 그저 근엄하게 수염 기르고 담뱃대 물고 빨 뿌리 하나가지고 온 집안을 지휘하던 그런 폭압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성경서는 발견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자꾸 마음이 끌리는 거예요. 왜 거룩한 하나님의 여성성에 대해서 마음이 끌리는 거예요. 우리가 이런 맘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가지고 가정을 다스려 나가고 그리고 가정의 어떠한 회개할 악이나 혹은 성경 적으로 잘못된 것들이 뿌리 박히지 못하도록 우리는 단호하게 하나님이 주신 가장의 권한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 사람의 가정이 무너져 버리면 그 사람의 인생도 하나님 앞에 칭찬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정말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그 가정을 잘 돌보고 필요할 때는 용단을 내리고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가정의 구성원을 끊어내는 일이 있더라도 그런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하나는 말이죠 주님이 주신 그러한 모든 권위 이런 것들을 정말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도록 주님과 같이 그런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의 권한들을 잘 사용하는 그런 인자한 아버지, 그리고 인자한 그런 남편과 가장 이런 위치가 되어져야지만 하나님이 주신 목적들을 우리가정들을 통해서 그대로 구현되어 진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들이 깊이 생각하면서 가정을 이끌어가고 가정을 다스려 갈 때에 거기에서 정말 건강한 가정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보십시오. 가장들이 기도를 합니까? 막힌다고 얘기를 했지만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성경을 읽는 기독교인 가정가운데 아내에게 막대했기 때문에 기도가 꽉 막히는 것을 경험하고 ‘아, 갑갑해.’ 몸부림치는 가정이 얼마나 될지 저는 의심스럽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그런 영적인 삶이 안 돼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가장의 놀라운 권위가 모두 짓밟히고 무너지고 왜곡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아내가 가정을 쥐고 막 흔들고 자식들이 막 반기를 들고일어나서 아버지를 발로 밟아서 꺽으려고 하고 말이지요. 이런 왜곡된 가정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세상에서 또 어떻게 가르칩니까? 요즘 세상에서 ‘아버지에게 순종한다..’ 저는 텔레비전 보면서 제일 역겨운 것이 그거예요. 저는 뭐 엄청난 경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코미디에 그 노인들 등장 시켜서 바보 만드는 것 있죠. 그거 왜 하는 거예요? 의미가 뭐예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가정의 질서가 모두 무너져 가는데 코미디에 나오는 할아버지는 뭐 하는 사람입니까? 모두 주책 떨고 푼수하고 그러구 웬 또 할머니가 나와 가지고 구미호처럼 물구나무를 몇 번씩하고 도대체 이것을 해서 뭘 하겠다고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밖에 나가서 부모에게 순종하라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라 이런 식으로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예요. “네가 정말 똑똑한 놈이라면 아버지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이기 때문에 가정에 들어왔을 때에 깊이 가장이 굳게 서 있는 모습을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자식들만 이런 교육을 받는 줄 아십니까? 아내는 어떻습니까? 요즘 유명하고 날린다 그런 여자들은 뭐예요. 가만히 남편을 섬기고 그런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나는 이렇게 살 수 없다. 내 인생은 뭐냐 ?나는 밥만 먹으면 사는 줄 아냐?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그러고 튀쳐 나왔더니 뭔가 되더라.” 이게 지금 여러분의 아내들을 향해서 이 세상이 자꾸 주입시키는 사상들입니다. 그런 사상을 먹고 그런 영향을 받으면서 사는 가정의 구성원들이 있을 때에 남편이 거기 딱 서 있는 모습이 도저히 승복할 수 없고 존경할 수 없고 신앙적으로 동의 할 수 없고 영적인 삶이라고는 거의 없고 기도가 막힌다 그래도 뭐 뚫리는게 뭔지 모르니까. 막힌게 무언지 모르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뚫려 봤어야지 막히는게 뭔지 알잖아요. 그런 정도로 한심한 영적인 삶을 이어가는 가장들이 어떻게 가정을 하나님의 교회답게 세워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이 이 시대의 가장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분명히 경고하시고 하나님이 한번 혼내 실거예요. 땅이 패괴해지는 책임은 둘 이예요. 하나는 이 땅의 부름 받은 목회자들이고 두 번째는 바로 가장인 여러분들입니다. 주님이 왜 옛날의 경건한 성도들이 자녀 태어나는 것을 교회에서 기뻐했습니까?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가난하던 시절에도 자녀 태어나는 것을 그렇게 축복으로 알고 온 성도들이 축복해 주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애 낳느라 고생했다’ 그게 아니고 ‘너네 부대에 부대원이 많아졌다.’ 그것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소대가 되고 중대가 되면 뭐 합니까? 전부다 고무신 거꾸로 신는 군대의 대대대고 연대대대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죠.
적어도 경건한 성도들의 가정에서는 경건한 자녀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생물학적 선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었던 거예요. 제가 생물학적 선교라고 하면 막 웃잖아요. 꿈꾸었던 거예요. 불경건한 백성들보다 경건한 백성들이 더 많이 아이를 낳아서 더 경건한 신앙으로 무장시키면은 세상은 바뀔 것이라고 하는 그 신념이 있었다라는 것이죠.
근데 사실이예요. 그렇지 안아요? 뭘 보고 아이들이 자라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내들이 뭘 보고 배우겠느냐 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내의 신앙이 나빠서 괴로워하고 몸부림치는 가장이 많아요? 아니면은 우리 남편 고쳐달라고 눈물 흐리는 아내가 더 많은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물론 그저 우리들이 생긴 대로 살자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 그렇지만 절대적인 다수가 가정이 가장자체가 아예 기본적인 신앙 자체가 없기 때문에 이 가정을 벌어 먹여 살려야 되겠다 라는 의무감만 있을 뿐 이 가정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으로 내가 이끌어 가야하고 그런 가정의 목회자로 내가 책임을 받고 부름을 받았다 라고 하는 의식이 없는 거라 얘기죠. 그래봐야 그의 인생은 결국은 식구들 밥 벌어 먹여 주고 죽은 인생밖에 더 되냐는 얘기입니다. 그럴 수 없다는 얘기죠.
오늘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도 바로 그거 아닙니까? ‘너희가 가정으로 부름을 받았으면 너희 아내는 연약한 그릇이다. 그러니까 연약한 그릇처럼 다루어라 그리고 그렇게 해서 부부의 대의를 실천하는 것이 그것이 너의 기도가 막히지 안는 법이다.’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가장의 기도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 기도가 다 똑 같애요? 아니예요. 자기 몫에 태어진 기도가 있어요. 자 여러분이 열심히 기도한다고 칩시다. 성도님들이 열심히 기도하니까 저는 일년 정도만 좀 쉬어야 되겠습니다. 그러고 맨날 제가 가방이나 메고 여행이나 다니고 그러면 그래도 목사님이 기도 안해도 우리 기도가 합쳐지면 목사님 기도보다 훨씬 훌륭하기 때문에 우리교회 잘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중보 기도라고 하는 것은 기도해야할 그 당사자가 자기의 몫의 태인 기도를 감당하고 있을 때에 폭발적인 힘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잖아요?
물론 여러분이 기도 한 분 안하고 나 혼자 기도한다면 힘겨울 거예요. 내가 열심히 기도하고 여러분들이 기도하면은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나잖아요. 당연하잖아요. 가장은 가장의 몫의 맡겨진 기도의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땅에 있는 모든 가장들이 이러한 깊은 가장으로서의 엄청난 사명에서 눈뜨기 전에는 결코 가정이 정상화 될 수 없고 생각합니다.
이제 언젠가 때가 되면은 여러분들 우리 가장들 성경공부를 할겁니다. 그건 이미 벌써 일년 전서부터 계획했습니다. 가장이 돌아가서 여기서 가르쳐 준 것을 가지고 가족들을 예배에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전통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가장의 권위였습니다. 그리고 가장만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었습니다. 그 제사 드릴 때 누가 최고입니까? 손이 많아도 누가 최고 예요? 종손 아니면 그러면 전부다 엑스트라예요.
우리 아버지가 그것 가르쳐 주시고 싶어 가지고 술 따르는 것 가르쳐 주고 싶어 가지고 청동 황서 과일은 어디다 놓고 생선은 놓을 때 머리는 이쪽으로 가고 맨 날 얘기해 주셔도 나는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저는 예수님 믿었으니까 지금은 저희 아버님 예수 믿으시니까 제사 안드리죠.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거기서 말이죠 많은 사람이 모이고 자기보다 학력이 높은 사람이 수 없이 많아도 제일 중요한 사람은 누구예요? 종손이예요. 종손이 거기에서 모든 제사를 집행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 안에서 진정한 종손은 누구예요? 가장이란 말이죠.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보세요. 제가 목회자입니다.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가장은 가정교회의 목회자입니다. 인정하고 싶든 안하고 싶든 그건 소용이 없어요. 여러분들이 저를 납치해 왔든 뭐 제가 제 발로 걸어왔든 이 교회에 와서 제가 목회자로서 부름을 받았는데 제가 목회 안하고 맨날 돌아다니고 여러분들 어떻게 살든지 말든지 ‘제가 싫다는데 저를 데리고 와서 이러느냐, 나는 이 교회 목사가 아니다.’ 아무리 그래 봐야 하나님이 저를 이곳에 보내셨는데 그렇게 돌아다니고 하다가 교인들이 다 여기저기서 쓰러지고 타락하고 죄가 들어오고 교회가 무너지고 그럴 때에 목회자인 내가 하나님 앞에 뼈가 성하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뼈다귀도 못 추린다고 한번 생각해 보라구요. 그건 인생자체가 파산한 거예요.
가장들에게 가정을 그렇게 목회 하도록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자녀들에게는 그렇게 순종을 가리키고 교양을 가르치고 그렇게 교훈 하도록 가르쳤고 아내는 그렇게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사람으로 여겨서 그 아내를 보호하고 그렇게 돌보아서 그 아내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남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주의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하나님이 목회자로 거기에 세워 주신 거예요.
목회는 안 하고 돈만 버는 거예요. 열심히 되겠느냐 말이죠. 목회를 해야지 목회를 안하는 동안에 밖에서 합리주의 사상이라는 이리가 와서 채가고 진화론이 채 가고 세상의 세속주의가 채가고 향락 주의가 채가고 그러면서 갈기갈기 찢어져서 걸어 들어오는데 밥 먹고 살찐 것만 대단하게 생각해서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 맡은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도 그러한 가장으로서 한 가정을 이끌어 가는 원리 중에 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너의 아내는 연약한 그릇이다. 네가 보호하도록 내가 너를 그 가정에 보냈고 그리고 그 가정 안에 구성원으로 아내를 두었다.”
또 하나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말이죠.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라는 것을 기억을 하라는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받는다. 그 무슨 이야기이냐면 물론 우리는 말이죠. 구원은 개인적인 거예요. 부부가 같이 살다가 한사람은 천당 가고 한 사람은 지옥 갈 수도 있어요. 물론 이예요. 그러나 여러분 같이 주를 믿는 가정이다 이렇게 볼 때에 결국 말이죠. 두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을 때에 그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될 수 있는 것 아니예요? 그래서 일단 그렇게 하나가 되고 나면 그러면 각자 구원을 받는 것이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이두 공동체는 떨어질f래야 떨어질 수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목회자가 진실하면 시간이 걸려도 교인들 진실해 집니다. 목회자가 열정적이면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교인들도 열정적이게 됩니다. 목회자의 사고가 세속적이면 처음에는 진실한 것 같지만은 결국은 교인도 다 배워 간단 말이죠. 마찬가지로 그렇게 목회자와 교인들이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처럼 아내와 남편도 그렇게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어서 결국은 마지막날의 주님이 심판하실 때에 함께 나아가서 한 가정을 함께 섬겨온 당사자들로서 하나님 앞에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는다 이 얘기 예요.
그러니까 그 관계는 이 세상에서만 계속 되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계속 되는 관계예요. 그러나 물론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는 서로 바가지 긁을 일도 없고 서로 싸울 일도 없고 서로 패권 다툼할 일도 없지요. 그 나라는 완성된 나라이니까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성도 대 성도로서의 관계는 계속되고 저 사람이 내 아내였다는 사실까지 다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이거죠 그렇게 함께 생명의 유업을 받을 자인데 그렇다면 너희가 그 마지막날에 계속될 예수 그리스도와의 그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너희들이 아내와의 관계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지 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결국은 나오는 이야기는 무엇인고 하니 마음을 주는 거예요. 마음을 심리적으로 보면은 말이죠 뒤가 켕기고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 아내에게 죽어 라고 잘해주는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열고 마음을 주는 관계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 밖에 할 수 없는 결혼에 당신이 나의 당사자가 되었는데 당신이 있음으로 내가 행복하고 당신이 없다면 내 인생 은 매우 허전하고 그리고 황량한 벌판에 나 혼자 서 있는 것과 같은 그런 모습일 것이다. 당신도 온전하지 않고 나도 온전하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어찌하든지 우리의 이 부족한 모습이 변화되어서 더 온전해 질 수 있도록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치는 겨울날에는 양떼들이 서로 목을 어긋 맞추면서 그렇게 지내듯이 그렇게 서로 위로하고 보듬으면서 지내고 그리고 평화로운 때가 오면은 함께 평화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가는, 그러한 마음과 마음이 서로 열납되어서 그래서 그 존재를 귀하게 여기는 그 처지가 된 거잖아요.
연약한 그릇으로 알라고 말했지만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동정심에서 나온 그런 불쌍히 여기는 사랑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과 대등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 앞에 인생을 살고 난 후에 유업을 받을 그리고 이 땅을 함께 살아가는 신앙의 동지로서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음을 열고 마음과 교통하는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관계가 정말 되어야지만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귀하게 여기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단지 입을 옷이나 먹을 것을 사주는 그런 것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것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정말 저 사람의 인생과 내 인생이 어떻게 결탁되어있으며 저 사람의 인생자체가 없을 때 내 인생이 얼마나 황량하겠는가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내가 온전하게 되고 나로 말미암아 그가 온전하게 되는 그런 유일한 절대 의존적인 그런 관계로 하나님이 두 부부를 기대면서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그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말이죠. 누구도 그런 식으로 의존하면서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안습니다. 그러나 부부사이에는 그런 것들이 허락된단 말이죠. 그러한 관계를 짓밟고 포악하고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그저 가정의 대의를 짓밟은 채 마구 살아가는 그런 가장들이 기도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 이예요. 그래서 오늘날 많은 가장들이 건전하고 뜨거운 기도의 세계를 유지하며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물론 영적인 수준에 부족도 있을 수 있겠지만 물론 뛰어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과 함께 또 생각하지 안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이처럼 자기에게 주신 그 가정 속에서 이렇게 기도 생활 자체가 쉽게 병들 수 있는 이런 수렁을 너무나 하찮게 생각하고 생각 없이 하나님 앞에 마구 범죄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만한 은혜가 주어져서 기도 할 마음이 생기고 기도할 능력이 생기면 이런 식으로 덜컹 하고 수렁에 빠지니까 한번에 다 날아가 버리고 그리고 는 다시 회복하지 못하고 회복하면 다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어떤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을 쫓고 말하자면 지식을 쫓아서 너희 아내와 동거하라고 그랬습니다. 지식을 따르는 신앙생활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실패 위에 실패를 계속하면서 그렇게 마치 자신의 신앙 생활 그 자체가 수렁에 빠져 있는 신앙생활인 것 같은 그러한 신앙생활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질서 자체가 가정에 없으니까 말하자면 남편들에 입장에서는 그래요 질서 자체가 무너져 버리니까 아내가 남편을 존경하려고 그래도 도대체 존경 할 수가 없어요. 왜? 하는 행동이 존경스러워야지 존경이 우러나오지 남편이 무슨 계급장도 아닌데 그 앞에 무슨 거수경례 할 일이 있습니까? 어떻게 존경이 생겨나느냔 말이죠. 자녀들이 봐도 부모에게 순종하고 싶은데 뭐냐면 앞에 볼 때는 순종할 마음이 생기는데 자녀들은 부모 앞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부모 뒤에서 배운다고 뒷모습을 보면서 배우는 거예요. 그러니 가정이 정상적으로 돌아 갈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내면의 세계와 밖에서의 삶이 일치된 정직하고 투명한 삶을 살고 모자라면 모자라는 데로 가족들에게 용서와 이해를 구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가장으로서의 대의를 걸어가야지만 그 가정이 정말 정상적이고 온전한 가정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마구 짓밟으면서 살아가는 그런 가정, 그렇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쫓아서 아내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면서 그렇게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귀하게 여기면서 살아가라고 주님께서 명령하고 계신데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막 밟고 지나가면서 사는 거예요. 그러면서 무슨 거기에 진정한 영성 진정한 아름다움 그런 신앙생활이 깃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국은 모든 위치가 그러하듯이 신앙생활이나 가정생활이나 기초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좀 단단하게 서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원칙 자체가 무너져 버리니까 그 다음에는 영적인 생활의 발돋움을 할래야 할 수 없게끔 되고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가정이 신앙의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계속 신앙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은 그러한 위기감과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계속 기도하는데도 기도에 있어서 말하자면 깊은 함정을 느끼고 수렁과 같은 그런 무기력을 느낀다면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가정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무를 가장으로서의 우리의 의무를 신실하게 이행하고 가족의 영혼을 마치 후일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서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그러한 영혼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목회자의 심정으로 그렇게 가정을 돌봐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도 놀랍게 변할 거예요. 왜 그렇게 하다가 보면은 목회자가 얼마나 고달픈 사람인지를 이해할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주일 낮 예배만 달랑 나오고 보따리 싸 가지고 코도 안 보이는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거예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정예배를 드려야 되겠는데 큰놈은 학교 간다고 도망가고 작은 놈은 연애한다고 도망가고 막내 놈은 아프다고 드러눕고 부인은 “내가 예배는 다 드리겠는데 당신 설교 안한다고 그러면 예배드릴께.” 이러면 뭐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 앞에 정말 그렇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몇 일 전에 리차드 백스터의 글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있는데 부임을 해서 갔어요. 거기서 오래 목회를 하셨는데 거기 가서 부임해 갈 때는 그 가정 중에서 교회에 잘 출석한 가정이 얼마 되지 안을 정도였는데 그분이 사역을 끝낼 때쯤에는 뭐라고 기록을 해 놓았느냐면 온 동네에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된 거예요. 그러고 하는 얘기가 뭐냐하면 내가 맨 처음에 왔을 때에는 가정에서 매일 기도하는 가정이 거의 없었지만 그들은 매일 기도를 했던 모양 이예요. 누가 그 기도회를 인도했겠어요. 가장이 인도를 했겠지만 그 목회지에서 사역을 끝낼 때쯤에는 한 두 가정을 제외해 놓고는 모든 가정이 저녁마다 모여서 기도회를 했대요. 그게 바로 한 동리가 천국처럼 변한 것 아닙니까?
정말 우리는 언제나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오늘 아침 설교와 관련지어서 자식과 부모간에 그런 깊은 마음이 오가고 그리고 부부간에 그렇게 깊은 사랑과 그런 은혜가 서로 오가고 그리고 그 슬하에서 부모에게 감동을 받으면서 부모의 모습을 본 받은 자녀들이 있고 그래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온 가족이 함께 교회 생활하면서 정말 주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축복이 있고 그것이 바로 천국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는 것입니다.
가정이 행복하면 천국의 모습이 될 수 있지만 지지고 볶고 싸우고 집어 던지면 거기가 바로 지옥입니다. 지옥이 어떤가 묻지 마십시오. 부부싸움 대판하고 콱 죽어버리고 싶을 때 지옥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막히지 안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가정을 잘 돌보고 특별히 연약한 여성들을 따뜻하게 잘 해 줍시다.
제가 가장들에게 권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냐 저를 포함해서 많이는 되지 말고 조금 약간은 여성화되는 것이 가정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저도 한번 그것 한번 해 볼까? 목사님이 어느 날 교회를 가시는데 그 교회에서 가정이 맨 날 가정이 지지고 싸우고 누구네 집에 가스 폭발했다고 그래서 가보면은 가스 폭발 한 것이 아니라 소파를 갔다가 큰 유리창에다가 집어 던지니까 펑하고 터지니까 빌라 사람들이 다 뛰어 나와 가지고 “저 집이 예수 믿으니까 가스 폭발했는데도 죽은 사람은 없어요.”
목사님이 어느 날 죽어라고 부부 싸움하는 두 사람을 불러놓고 칼 한 자루 씩 다 나누어 줬어요. 그러니까 이 두 사람 눈이 뚱구래져 가지고 ‘야! 드디어 이 목사가 본색을 드러내는 구나 일본에서 공부를 많이 했다더니 할복을 배웠구나 우리보고 죽으라는 구나.’ 칼을 하나씩 다 나누어주더니 그 다음에 가방을 꺼내더니 어디서 갖고 왔는지 오이를 하나씩 꺼내 드래요. 오이를 또 다 나눠 주드래요. 냉수 먹고 속 차리라는 소리는 들었는데 이거 오이 먹고 뭘 하라는 것일까? 왜 목사님이 오이하고 칼을 나누어주었을까요? 집에 가서 아내들에게 물어보십시오. 다 짤라서 지지고 볶고 싸우던 사람들 둘이 앉아서 한 사람은 앉고 부인은 무릎 베고 누워서 그걸 짤라서 얼굴에다가 다 붙이고 소감을 써 가지고 오래요. 근데 정말 그렇게 말씀을 들어도 안 깨지던 사람들이 그 오이에 깨졌데요.
남편이 맨날 주먹이 번쩍 번쩍 별들이 오가던 그 손이 말하자면 살살 오이를 져며서 그 손으로 발라주더니 물론 그것이 얼굴에 붙일 때에 이 손이 언제 다시 날라 올까 하는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일단 말이죠. 그렇게 하면서 그 목사님이 그러더라구요. 지금도 가방에다가 대 심방 때 오이를 넣고 다닌데요. 그래서 싸우는 집에 가서는 칼하고 오이하고 주면서 이것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니까 서로 붙여주고 여기다가 소감을 써 가지고 와라.
여러분 웃으며 지나가는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는 이러한 말하자면 고달픈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우리에게 휴식이 필요하지 안습니까? 우리 안에 삶 남편의 삶 모두 그렇지만 얼마나 우리가 휴식이 많이 필요한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부부에 관계가 그렇게 말하자면 배에 있어서는 나루터와 같이 나그네에 있어서는 잠시 걸터앉는 바람 잘 부는 그런 벤츠와 같이 그런 관계가 되어서 서로에게 쉼을 줄 수 있고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되어서 서로 이 고달프고 바람이 많은 이 세상에 사슴처럼 그렇게 기대면서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는 사람들이 되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이 잘 들어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었으니 여러분도 그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2.깨어진 마음과 기도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작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행9 :11)
오늘 9 장은 사도 바울이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을 간증하고 있는 그런 장면입니다. 뭐 알다시피 바울은 아직 주님을 만나기 전에 유대 교회에 대한 뛰어난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유대교회 입장에서 보면 당시에 누룩처럼 번져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들에 이 종교적인 확산은 실로 참 기가 막힌 노릇이었습니다. 자기네들의 관점에서 보면은 황당하기 이를 때 없는 도를 전파해서 얼마 전에 죄지은 자로서 십자가에 못 박아 사형시킨 그 사람이 살아났다 하고 유포를 하면서 그러면서 그에 도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다고 하니 가반이었고 더더욱 그 도를 가르침을 받으면서 사람들이 뒤집어지고 회개하고 그래서 그 도의 청종 할 뿐 아니라 많은 능력과 기사와 이적이 나타나서 점 점 더 예수를 믿는 도에 혹하는 자가 많다 는 소식이 들려 왔으니 유대교의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던 사울의 눈에는 그야말로 황당한 일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대 제사장에게 가서 공문을 청했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구속영장정도의 것이 아니었겠느냐 정도로 봅니다. 그래서 이제 다메섹에 있는 이 기독교인들을 잡아갈 그런 목적으로 이제 길을 떠났습니다. 다메섹 가까이 갔을 때에 큰 빛을 만나고 그리고 이제 거기서 거꾸러지는 그런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바울과 같이 이런 놀라운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안습니다. 이것을 모두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은 그러나 유사한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급격한 체험을 주시는 사람들은 대개 어떤 사람들이냐면 말이죠.
도저히 정상적인 방법으로 설득을 해서는 하나님 앞에 돌아올 가능성이 별로 없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회심시켜서 사용하시려고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대개 이렇게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극적인 회심을 못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컴푸렉스에 걸려서 말이죠. 아 나는 빛도 못 받는데 나도 한번 거꾸러져 봤으면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어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느냐가 아니라 지금 어떻게 믿느냐 입니다. 제가 기독 신학교에 있을 때에 뜨거운 사람들도 많이 들어오고 또 이상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때 아직 그 학교에 안 갔을 때 였을 겁니다.
강의를 나갔는데 나이든 학생들이 꽤 많았어요. 근데 그렇게 앞자리에 앉어서 진짜 빨려들 듯이 강의를 듣는 그 학생이 하나 있었어요. 그 학교에서 뭐든지 강의를 해달라고 그랬으니까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했죠. 그래서 신앙 부흥에 대해서 제가 강의를 하겠다 그러고 가서 그저 교과목을 초월해서 네시간 부흥회를 했으니까 뭐 나야 한 학기 하면 그만이지 그러고 이제 구약에 나타난 부흥들을 살펴보면서 이제 그렇게 열 강의를 했었는데 사람도 강의실 숫자가 아니라 부흥회 숫자만큼 모였어요. 선택과목이었는데 300명씩 400명씩 강의실 들어왔어요. 사람이 가득 차니까 강의실 같지 안고 진짜 부흥회장 같더라구요 그래서 이제 열심히 했는데 아주 빨려 들어갈 듯이 들었어요.
근데 강의를 끝내고 나오는데 강의를 하고 나면은 피곤하니까 저는 누가 쫓아와서 얘기하는 것이 싫어요. 근데 쫓아오더니 목사님 점심을 사드리겠데요. 그래서 싫다고 그랬어요. 왜 그러냐면 두 가지 이유인데 학생들이 사준 음식 자꾸 먹는 게 안 좋은 것 같고 그래서가 아니라 얼굴을 보니까 밥 얻고 먹고 싶은 생각이 안나요. 얼굴에 칼자국이 쫙 나있어요. 그래서 두 번을 거절했는데 기어코 점심을 한번만 살수 있게 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두 번까지는 피했는데 어떻게 도리가 없어서 내키지 않는데 할 수 없이 이제 가서 초밥 집에서 초밥을 하나 시켜놓고 앉았는데 야 이 사람 벌써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오는 거예요.
칼자국이 만화에 나오는 사람처럼 쫙 자기가 목사래요. 그래서 아 그러냐고 그래서 한참 김밥을 먹는데 그때 한참 폭력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을 때 예요. 그 사람이 묻는데 “목사님 혹시 서방파 두목이라고 김태촌 이라고 아십니까?” 그래서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신문에서는 봤죠. 안다고 그랬죠. “목사님 사실은 걔가 제 밑에서 놀던 애입니다.” ‘야, 거봐. 내가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쩐지 이상하다 그랬어요. 칼자국이 쫙 다섯 개쯤 초밥을 먹었을 때 그 얘기가 나왔거든요. 딱 멈췄어요. 야 저는 순간적으로 이 사람이 혹시 학점을 줄 겁니까? 안 줄 겁니까? 그러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의 간증을 들으면서 저는 꼭 사도 바울이 생각나더라구요 뭐냐하면 그 쉽게 이야기하면은 걔를 데리고 있었는데 걔가 너무 커서 반기를 든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 사람이 저기 호남 쪽 이었잖아요. 결국은 거기서 세력 싸움에서 밀린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말하자면은 은퇴를 한 거죠. 근데 이 친구는 거기서 정치적 세력의 등을 업고 서울까지 상경을 한 거예요. 그래 결국은 그렇게 까불다가 사형언도 받았잖아요.
근데 자기가 하는 얘기가 그 얘기 예요. 그러고 나서 자기가 얼마나 그 폭력 소굴에서 몸담고 살다가 막판에 그 완전히 떨거지가 되어서 말하자면 쫓겨났으니 얼마나 비참하겠느냐면서 자기가 얼마나 왕년에 화려하게 살았는지를 이야기하는데 주머니에 천만 원 정도는 늘 있어 다는 거예요. 근데 그 연말이 되었는데 그 때부터 저는 빠찡꼬가 슬래프 머신이 뭐가 문제가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았어요. 그 걸을 거기가 돈줄이랍니다. 그래가지고 그 업자들이 연말에 모이는데 거기에 가서 돈을 쫘아악 긁어 가지고 술을 잔뜩 먹고 차를 타고 오는데 그렇게 느껴보지 못했는데 말하자면은 마음이 괴롭더라는 거지요. 그렇게 마음이 막 괴로우면서 이상하게 교회를 가고 싶더래요. 술이 만취를 했는데 근데 교회를 가는데 술을 그렇게 먹고 교회에 가서 뭔 기도를 하겠어요?
그런데 교회당에 가서 교회 문을 딱 여는데 갑자기 문을 열자마자 자기가 그 자리에서 절도를 하다시피 한 거예요. 갑자기 문을 열자마자 뭐가 팍 하고 자기에게 부딪치더니 그 다음에 하튼 온 몸에서 피가 쏟아지기 시작하더래요. 입 코 귀 할 것 없이 막 피가 쏟아지기 시작하더래요. 거기서 말하자면 이 사람이 완전히 뒤집어진 거예요. 새로운 사실하나를 깨달았어요. 뭐냐면 아 만취한 상태에서도 주님을 만날 수 있구나 하튼 그래서 완전히 거꾸러진 거예요. 그런 사람은 신사적으로 이야기해서 예수 믿겠어요. 뭐 인격적인 승복이 어쩌고 뭐 얘기해 봐야 너무나 마음이 강팍하게 굳어서 그런 이야기가 뿌려지지가 안는 거예요. 단숨에.
먼저 사도 바울도 보세요. 주님이 먼저 말로 “얘야! 인간은 죄인인데 너 사영리 들어봤니?” 그러면서 그리면서 말씀하시지를 안고 요놈 맛 좀 봐라! 펑 하고 빛을 본 거예요. 완전 거기에서 눈이 멀면서 고꾸러져 버린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 만난 것을 너무 자랑하지 마요. 얼마나 사람이 못되먹었으면 하나님이 우선 본때를 보이고 그 다음에 말씀하시겠어요. 우리 같은 사람은 얼마나 좋은 사람 이예요. 교만하면 안되겠지만 은 말로 하면 듣잖아요. “얘야 너 사영리 아니?” “예 압니다.” “너 사람이 죄인인데 믿니?” “예.” 아 이렇게 해서 주님 믿게 됐으니 얼마나 감사해요?
그 걸을 또 자기네 자랑인줄 알고 맨 날 돌아다니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말로 해서 안 돼서 우선 한 대 먹이고 돌아온 사람이라고 말이야. 너무 자랑할 것 없어요. 근데 이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거든요. 다 이유 없는 일은 없어요. 어머니가 그렇게 일평생 그 아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했답니다. 그러니 경건한 어머니가 맨 날 회칼 들고 설치는 자기 아들 볼 때 그것도 어렸을 때 그러면은 쬐끔 귀여운 측면이 있어요. 근데 머리 허 해 가지고 말이야 회칼 들고 그게 뭡니까? 여러분 절대 그러지 마세요. 그 어머니가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그 아들을 위해서 기도 한 거예요.
그 기도가 꽉 차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이 안되겠구나 맛 좀 봐라 말로 해서 안되니까 하나님이 놀라운 능력으로 완전히 거꾸러트린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폭력배 조직 속에서 그러고 살아왔는데 겁나는 게 뭐 있겠어요. 근데 이상하잖아요. 교회 문을 탁 여는데 뭐가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힘이 확 밀어닥치더니 퍽 하면서 고개를 들어보니까 막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돼서 쏟아지는 거예요. 뭐 이렇게 찢어져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막 입 코 귀에서 그 피가 막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각혈을 하듯이 그러니 늘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단숨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얼마나 무서웠겠느냐는 말이죠. 그러니까 막 거기서 사람이 막 확 주눅이 든 거죠. 그때에 이제 주님이 누구 이신가를 알게 되는 거죠. 그렇게 나쁜 짓하고 다니면서도 어머니한테 늘 다녔을 것 아니 예요. 그러니까 참 신앙에서도 시각이 중요한 거예요.
바울이 바로 꼭 그런 과정을 거친 거예요. 누가 바울을 위해서 기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내가 보기에는 스데반의 기도도 여기에 커다란 한몫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어쩌튼 이 사람이 만난 것을 보십시오 그냥 걸어가는데 누군 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빛이 확 나타난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거꾸러진 거예요. 그래서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그리고 이제는 총기에 빛나던 그 눈이 완전히 실명을 해서 도저히 알아볼 수도 없고 방향도 알 수 없고 이제는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지만 일어서서 걸음을 옮겨 놓 수 있는 이런 처지가 된 거예요.
그때 주님이 물으시잖아요. “사울아! 사울아!” “뉘시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런데 이게 간증이 세 번 나오는데 조금씩 틀려요. 그런데 스토리를 역으면 그렇다 그거죠. 그러니까 여기서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못 만나게 하는 가장 커다란 것은 뭐냐면 결국 우리 자신의 아집과 그리고 내 멋대로 살려고 하는 속성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비참하고 그리고 얼마나 건조하고 얼마나 그 쓸쓸한 인생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여기서 깊이 깨트려 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까 이제 그가 엄청난 생각에 충격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몰랐던 사실하나를 알게 되었는데 그 새롭게 알게된 사실 하나 때문에 이전에 자기가 갖고 있었던 모든 신앙관 인생관 모든 것들이 지금 혼란의 상태에 접어들게 된 거예요. 왜? 나사렛 예수는 나사렛에서 태어난 선지자도 못되고 그저 이단의 괴수 인줄 알았단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예수의 미쳐서 돌아다니던 모든 인간들이 정말 정신병자 인줄 알았단 말이죠.
그들을 불쌍하게 보고 그 도를 전파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정신병자 같이 바보고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아주 사악한 잔꾀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그런 못된 인간이었다고 그렇게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랬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그 사람들의 생각이 옳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거예요. 이것은 단순히 할렐루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란 말이죠. 자기가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고 받아들일 수 없고 받아들 일려고 생각 해 본적도 없었던 새로운 사실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것이 기존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종교관이나 인생관과 충돌을 안 일으키면 문제가 안 되는데 충돌을 일으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여태까지 그 많은 공부를 하고 그 많은 신학공부를 하고 그 많은 말씀을 배우고 사람들에게 확신 있게 가르쳤는데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에 확 그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면서 밀려오는 그 진리의 스펙트럼을 받으면서 자기가 완전히 깨트려 진 거예요. 이거는 단순히 할렐루야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 예요. 그런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을 때에 어떤 일들이 생깁니까? 저는 실제로 영혼들을 섬기면서 그런 것을 많이 봤어요. 하나님을 깊이 만나서 시간이 흐르면은 사람들이 막 기쁨에 넘치고 은혜로 충만해 지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기쁨과 은혜로 충만해 지기 전에 하나님을 딱 만났을 때 잠깐동안 인간들은 폭탄에 맞은 것처럼 비슷하게 됩니다. 그래 갖고 방향감각이 없고 얼이 다 빠져서 멍한 사람처럼 변합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알게되고 하나님을 알게 된 이 사실이 자신의 인생에 엄청난 충격으로다가 온 것입니다. 그렇게 잠시 멍한 그런 상태가 될 적이 있단 말이죠. 그게 무엇이냐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제일 먼저 깨트려지는 것이 일이고 깨트려진 그 위에 새롭게 우리의 신앙의 집이 지어지는데 깨어지고 아직 신앙의 집이 세워지지 안은 상태의 그 모습이 바로 그런 것이란 말이죠.
비유를 하자면 판자촌을 뜯어고치고 재개발을 해서 아파트를 짓는데 이젠 올망졸망하던 판자 집을 전부다 부셔 가지고 널비하게 만들어 놓은 그런 상태입니다. 그래서 포크레인이 와서 쫙 걷어가고 이제 횡 한 공간만 남아있는 상태가 된 거예요.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상태가 된 거예요. 그렇게 놀라운 충격적인 주님과의 만남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주님이 오래도록 사울에게 와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오늘부터 창세기 공부하자 그래놓고 처음부터 가르쳐준 것 아니거든요.
몇 말씀만 하고 주님은 가셨습니다. “내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러면서 “주여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 몇 마디 말씀을 나누신 다음에 주님은 가셨습니다. 그때 이 사울은 어떤 심정이었겠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아직 눈도 뜰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별생각이 다 지나갔겠죠. 아 그래 내가 그렇게 나쁜 짓 했더니 결국은 그 예수님이라고 한 그분이 나를 벌하셨구나? 결국은 눈도 못 뜨고 이렇게 장님으로 살다가 죽겠구나! 그러면 내가 뭘 믿어야 하는가! 그러면 도대체 이전에 내가 배운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예수님을 인정하면 나의 신앙관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나는 이제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 되나! 돌아가야 되나 어떻게 되나? 은퇴해야 되나 뭘 해야 되나! 그렇게 많은 자신을 추수 릴 수 없을 정도로 그런 많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에 사울이 뭘 하고 있었습니까? 그는 즉시 기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기도하면서 무엇을 기도했는지는 우리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아마 스펄전 같은 사람들은 이제 그 사람이 무엇을 간절히 구체적인 제목을 가지고 기도했을 거라는 데에서 회의적 이예요. 아마 그저 넋 나간 사람들처럼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어쩌튼 뭔지 모르지만 잘못했다고 말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저 눈물로 기도하며 그렇게 사흘이라고 하는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는 분명히 그렇게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 앞에 많은 말이나 현란한 수식어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안아도 주님이 어떤 기도를 들으시는지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들으시는 기도는 현란한 수식어구나 많은 성경지식으로 기도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언젠가 어느 신학교의 채플 실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앞에 웬 한 학생이 와서 기도를 하는데 어떻게 수선스럽게 기도를 하는지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요. 난 누구하고 얘기하는 줄 알았어요. 이사야 몇 장 몇 절에 보면은 이렇게 되 있습니다. 설교하는지 알았어요. 그랬더니 그게 기도예요. 하나님 몇 장 몇 절에는 이렇게 되어있고 하나님이 왜 모르시겠어요. 하나님께서 쓰셨는데 저보다 더 잘 아시지.
근데 가끔 장수 틀린 것도 나오더라고 마치 하나님 앞에 말하자면 옛날에 써주신 문서 갖고 와서 들이대면서 주님을 막 다그치는 것처럼 몇 장 몇 절 계속 코너로 몬다고 주님이 겁내실 분도 아닌데 왜 그렇게 어수선스럽게 기도하는지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저는 알 수가 없어요. 어쩌튼 간에 그렇게 수선스럽게 기도 하냐 말이죠. 그렇게 현란한 성경지식과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하나님 앞에 잘 끼워 맞추는 기도 그것이 주님을 감동시킨 것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 논리적으로 합니다. “주님! 이것 이렇게 되는 것 맞지 안습니까? 그러면 이것 이렇게 될 것 아닙니까? 이렇게 된다면 저렇게 될 것이고 저렇게 돼서 그렇게 되니 지금 주님 뭘 하고 계십니까?” 그러니 무슨 예수님을 무슨 피고석에 세워놓고 검사가 신문을 하는 것도 아니고 취재 실에서 마치 주님을 다그치는 것같이 왜 그렇게 기도하는지 저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많은 언어가 없어도 하나님이 정말 기쁘게 받으시는 기도는 바울과 같이 이렇게 폭탄 맞은 자의 마음이 되어서 자기의 기존의 사고방식이나 하나님을 잘못 알았던 모든 지나간 날의 편견으로 가득 찬 자신의 사고가 깨트려 졌을 때에 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언어를 적절하게 찾지 못해서 바울이 한숨을 쉬었다고 할지라도 그 한숨은 하늘로 올라가서 천국의 거문고를 움직여서 거문고를 두드려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기도의 곡절을 만들었을 것이며 그가 언어를 찾지 못해 중얼대며 흘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기를 바라면서 흘리는 그 눈물은 천사들의 병의 담겨서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드려졌을 것입니다. 깨트려진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그 기도를 화려한 수식어구가 붙은 언어의 기도보다 훨씬 더 기쁘게 받으신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심령의 관계는 마치 향유와 옥합의 관계와 같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주님께 큰 감동을 드리는 기도가 되고 우리의 부르짖는 그 기도가 주님의 마음에 커다란 감화를 불러일으키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그 기도가 우리의 입술과 혀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기도가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키는 기도는 깨트려진 마음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도인 것입니다.
마치 향유가 옥합이 깨트려 짐으로 말미암아 그 향유가 온 집안을 가득히 향기로 채우듯이 그렇게 단단한 자아가 깨트려 지고 이전에 하나님 없이 대충 살아왔던 옛 삶에 대한 깊은 회개가 우리의 심령을 깨트릴 때에 거기에서 진실한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가 비록 언어를 찾지 못하는 기도라고 할지라도 그 기도는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입니다. 사실 기도의 깊은 경지에 도달했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기도의 가장 깊은 경지에서는 언어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비춰오는 거룩한 영광의 빛으로 비침 바 되어 거기로부터 영광의 힘을 덧입고 거기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경험하고 그리고 거기서 영혼의 새롭게 살아나는 소생을 경험하게 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말과 헤아릴 수 없는 좋은 언어로 수많은 시간을 기도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깨어진 마음으로 기도한 적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많은 인생을 기도의 시간으로 보내지만 그러나 정말 깨트려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우리의 기도가 비록 언어를 찾지 못하고 우리의 한숨이 유창한 언어를 대신한다고 할지라도 그 한숨소리가 하나님나라의 악기들을 연주하여서 주님의 귀에 아름다운 기도소리가 들리게 만들어주는 그러한 놀라운 힘이 어디서 오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는 기도만이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힘은 육체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의 영혼이 철저하게 부서지고 깨트려 져서 하나님 그 분 앞에서 매달리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바울과 같이 이렇게 바울의 오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기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바울이 그렇게 틀림없이 상한 마음으로 깨트려진 마음 이제 자신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지 알 수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이전에 자기가 잘못됐다는 것은 알았지만 주님이 잠깐 만나고 가셨기 때문에 이제 자신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붙들어야 될지도 제대로 알 수 가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를 시켜서 이제 이 사울을 찾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를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중에 있는 사람들을 이처럼 찾으십니다. 이것도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역사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나니아가 바로 다메섹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핍박하고 박해하여 옥에 가두기 위해서 달려가던 그 사람이 자기에게 핍박받을 그 사람의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이 섭리가 얼마나 오묘한 섭리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사울과 만나 주셨을 때에 그는 자기가 무너지는 그런 커다란 자기 깨어짐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기도하고 그가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리고 그가 아버지 앞에 기도 할 때에 이후처럼 유창하게 기도할 수 없었고 그는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눈물과 한숨으로 기도의 언어를 대신하며 지금 방금 자신에게 일어난 이 엄청난 일 아직까지도 눈을 뜰 수 없는 자신의 이 망막한 사정을 인해서 한숨을 쉬고 눈물로 주님 앞에 아뤼었을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들으시고 그를 기도하는 자로 여기셔서 아나니아를 그에게 보내셨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나니아는 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환상 중에 다시 말하면 이상 중에 주님의 진실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영적으로 깊은 교재를 하나님과 갖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기억해 보십시오. 두 사람 다 기도하던 가운데 만났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각기 이방 선교의 역사의 새장을 여는 주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오늘 여기서도 기도하던 사울을 하나님과의 깊은 교재 속에 살아가는 아나니가 만나서 그에게 도움을 주도록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합쳐져서 이제 바울로 이어지는 선교의 시대의 새장이 열립니다.
이전까지는 베드로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은 구장 이후서부터는 사울의 이야기로 이제 무대가 넘어 가게 됩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에서 새로운 터닝 포인트를 마련하실 적마다 반드시 기도의 사람들을 세우시고 그 기도의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놀라운 역사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여러분들이 무엇을 해야될지 이제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바울이 되기 전 사울이나 아나니아나 내놓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무명의 두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선교의 새 시대를 여시지 안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이 세상에 학식이 많고 현란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많은 재물과 그리고 종교 적인 명분이 있는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렇게 기도하는 중에 있는 사람들을 찾으셔서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우리들의 가슴을 벅차게 하는 우리의 인생의 새로운 소명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 같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도구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부르셔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셨을 때에 그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들의 소원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이제껏 까지는 내 뜻 이루기 위해서 일평생을 살았지 만은 이후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뜻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우리를 사용해 주시는 것이 우리의 진실한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역사의 커다란 일들을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이 사울이 이렇게 깨트려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기도하는 아나니아를 통해서 이 두 사람이 엮어져서 하나님의 기한 역사를 이루어 가는 귀한 광경을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기도하는 사람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분류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러면은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쓰시려고 하는 것일까요? 기도하는 사람도 그냥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깨트려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일들을 이루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기도하는 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더욱이 깨트려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 할 수 있는 기도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만을 온전히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만 온전히 바라보기 때문에 깨트려진 마음이 된 사람들, 거룩한 하나님에 대한 주시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드러난 자기의 죄악 된 모습 때문에 상하고 아픈 마음이 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온전히 자기에게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만약에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 할 때에 그럴 일도 없지만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들을 각여로 임명하겠습니까? 유능한데 제멋대로 나가는 사람을 쓰겠습니까? 아니면 무능한데 지 멋대로 나가는 사람을 쓰겠습니까? 둘 다 안 쓰지요. 여러분들이 써야 될 사람이 누구냐 하면 유능하면서도 자기의 뜻을 잘 분간해서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쓸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유능하면서도 자기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굿이 아주 유능하면서도 자기에게 불순종하는 사람을 쓸 것 이냐 약간 덜 유능하면서도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을 쓸 것이냐는 말 할 때 두말 할 필요도 없이 후자의 사람을 세워서 잘 가르쳐서 나라를 이끌어 가는 것이 훨씬 이 나라를 바르게 이끌어 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능력 인간의 방법 사람의 뛰어난 재주도 하나님의 도구가 되지 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뛰어나게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 받쳐진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행하도록 명령하시든지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는 그런 상한 심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깨트려진 마음을 가지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런 사람과 가까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돌아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이렇게 순종의 의지를 가지고 기도해야만 하나님이 쓰신다는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사울이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찾아오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 놀라운 역사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트려진 사람들은 자기를 신뢰하지 안는 사람들입니다. 깨트려진 사람들은 이미 자기에게 철저하게 실망한 사람들입니다. 자기에게 철저하게 실망하고 자기에게 철저하게 좌절했기 때문에 하나님만 붙들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모든 소망이 하나님을 향해서 고정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놀라운 뜻들을 이루십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도구로 하여 크고 놀라운 일들을 이룬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자신을 향해 철저히 실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룬 후에도 그 모든 일들을 이루신 하나님을 자랑하지 그 일에 도구로 사용된 자기를 자랑하지 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큰 뜻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사울이 경험했던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짧은 시간을 기도해도 이렇게 상하고 깨트려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그러한 복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능력이 없고 힘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도 많지 안기 때문에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유능한 머리로 할 수 있는 일도 한정되어있습니다. 기술로 할 수 있는 일도 한정되어 있고 바쁜 인생을 살다보면 시간을 받쳐서 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참 적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 앞에 이렇게 깨트려진 마음으로 기도해서 기도하는 우리를 보실 때 주님의 마음에 긍휼과 동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만 자기 스스로는 못 하지만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그의 섬김은 하나님의 나라에 역사를 일으키고 그래서 선교의 지도를 바꾸고 교회의 영적인 상태의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고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올 수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기도는 결국 마음에 일이요 기도는 결국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활동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어떤 상태가 되었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상태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기도하느냐 그것보다도 훨씬더 중요한 것입니다. 서너 시간을 기도해도 만족하지 안을 때가 있는가 하면 삼십분이나 한 시간밖에 기도 안 했는데도 영혼의 만족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도 가운데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상한 마음의 위로를 주실 때에 그 위로는 단지 위로가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하는 하나님의 표징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상한 상태에서 깨트려진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은 주님께 기도의 응답을 받으면 받을수록 결국은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도우심과 그의 긍휼이 여기시는 그 사랑과 자비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되고 그래서 더 많이 깨트려 지고 상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완고하고 고집으로 가득찬 죄인들입니다.
하늘에 신령한 것을 위해서 살기보다는 땅에 있는 속된 것들을 위해서 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보물을 쌓기보다는 이 세상에 우리의 보물을 쌓고 하나님보다 그 보물을 의지하며 살려고 하는 인간들이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매일 하나님 앞에 우리가 적나라하게 하나님 한 분 앞에서 우리가 서는 일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기쁘게 여기시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놀라운 증거들이 나의 영혼과 삶 속에 나타날 때에 우리는 인생의 위기도 능히 이길 수 있고 시련도 지날 수 있지만은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잃어버리고 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수시로 상기하고 깨닫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심으로 내가 있고 주님이 계시지 아니하시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서 매 순간 인생을 살아갈 때에 주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상한 마음과 깨트려진 감정은 사도 바울처럼 일종의 절망의 깊이 직면한 그러한 마음의 상태입니다. 자신의 죄악 된 성향을 보면서 절망을 느끼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면서 도저히 그 사랑에 부합하는 인생을 살만한 어떤 선한 것도 자신 속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데서 오는 깊은 절망감입니다. 절망 없이는 누구도 깨어진 마음이 될 수 없고 절망하지 안고는 누구도 상한 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이렇게 절망하고 상한 마음 깨트려진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 할 때에 그 기도는 형식적인 수많은 기도 행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기도가 이룰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일들을 이룹니다.
어떤 의미에서 바울은 그동안 고집을 쓰며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하나님을 거스리며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자기의 종교적인 고집대로 걸어가다가 주님을 만나고 거꾸러진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 표징은 들러 났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베풀 것이라는 표징은 아직 드러나지 안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기도 속에서 새롭게 알려주시지 안습니까?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내가 네게 나타난 일과 장차 네게 나타날 일에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거룩함을 입은 우리들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기 위해서 너를 세웠다고 하는 거룩한 소명이 주어진 것도 결국은 그렇게 모두 깨트려진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기도했을 때에 그러한 웅장한 소명이 바울에게 주어져서 절망이 희망의 장소로 바뀌게 되었고 좌절이 오히려 소명을 받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으로 쓰시기 위해서 이렇게 철저하고 자기를 부서뜨리는 그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의 직면하게 하셔서 그로 하여금 기도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상하고 깨트려진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우리 주위에 있는 환경과 여건을 놀랍도록 바꾸어 놓습니다. 도저히 난공 불락의 성처럼 여겨지던 상황들을 이렇게 깨트려진 마음으로 기도 할 때에 고치시고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메여 달려 기도 할 때에 하나님아버지께서 놀랍게 고치시고 바꾸시는 기한 역사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당신의 놀라운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정말 능력 있는 기도를 위해서는 능력 있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능력 없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위대한 기도를 위해서는 위대한 마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비참하리 만치 낮아진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늘의 권능을 불러오는 기도를 위해서는 강력한 마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참히 부서진 마음 그래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그런 마음 하나님밖에 바라볼 리가 없고 하나님의 도우심 밖에는 소망할 것이 없는 그런 깊은 몸부림의 마음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구약에 선지자 가운데 요나를 기억할 것입니다. 불순종하여서 그는 주님의 명령을 쫓아서 니느웨로 가는 대신에 다시스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을 때에 그는 정말 순풍에 돛달고 그렇게 배가 정말 고요하게 항진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배에 타자마자 뒤집어지고 난리를 쳤다면 표 파는 사람이 폭격에 맞았다면은 어떻게 가서 표를 살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고 배를 탔는데 배가 잔잔한 바다로 향했습니다.
이게 결국은 무엇인고 하니 제 생각에는 태풍의 눈 같아요. 태풍의 눈, 태풍의 눈이 작게는 오십 키로 멀게는 한 오백 키로 정도 되는 것이 눈이 생기는데 거기는 믿을 수 없으리 만치 조용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배가 떠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눈이 점 점 점 점 이동을 하면서 살인적인 폭풍이 불어닥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요나 선지자가 불순종가운데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는 것을 조용히 보시면서 그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나나 지켜보셨습니다. 그러나 다 물 건너 간 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폭풍을 바다 위에 불러 일으켰습니다. 폭풍을 대작하였다고 하였는데 히브리 성경에는 하나님이 큰바람을 발사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요나가 탄 배를 향해서 뿅 하고 발사 하셨습니다.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결국은 요나는 물바다 속에 던져졌습니다. 아마 그것으로서 요나는 내 한 많은 인생이 여기서 끝나지는구나 아 애달프도다 첨벙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을 남겨두고 죽지도 못합니다. 어떻게 맘대로 죽을 수 있겠습니까? 그 목숨이 정말 그래서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습니다.
요나가 그 풍랑 속에서 하나님 앞에 깊이 깨닫고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서 거기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장에 나오는 요나의 기도를 보면 정말 요나가 이런 수준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아름다운 기도의 문장들이 이어집니다. 그렇게 배속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간절히 기도했더니 상황은 바뀌고 요나는 폭풍 이는 바다가 아니라 모래가 있는 그 바닷가에 토해 졌습니다. 물고기가 만약에 토할 때 암초 가 잔뜩 있는 바다 위에다 탁 하고 토했으면 내진탕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안았습니다. 해변에 토해 놓았습니다. 안전하게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안게 그는 깨어났고 그의 선교상황은 놀랍게 변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실패한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 앞에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도 깨어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므로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게 되지 안습니까? 이처럼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끄게 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불러일으키며 냉 냉하던 하나님의 마음에 자기를 향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불러 일으켜서 기대를 입게 하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상한 마음으로 깨트려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위대한 능력은 위대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비천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깨트려져서 아무것도 자기를 믿을 것이 없는 마음 거기에서 오히려 위대한 기도 믿을만한 위대한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3.고난과 기도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시116:3-5)
116편을 누가 지었는지 표제에는 안 나오는데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시의 저자가 다윗이었을 것이라고 대부분 확신을 합니다. 왜냐하면 쓰는 어휘나 그리고 그 분위기가 너무 다윗이 다른 시편에서 보여주고 있는 표현과 같은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고백이라든지 진실한 기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찬송 이런 것들이 다윗의 시속에 나오는 전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여겨집니다. 사실 다윗이 이 시를 썼든지 다른 사람이 썼던지 우리는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하나는 누가 썼던지 이 시편은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 오늘 우리들이 읽은 삼절과 사절 오 절을 통해서 기도의 관한 말할 수 없는 교훈을 성경에 담고 있다는 것이 이제 우리가 중요한 것이죠. 사실 인간이 이렇게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만나는 것은 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인간은 참 속으면서 사는 거지요. 앞으로는 좀 나아지겠지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좋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이 지상에서의 삶이 유한하고 슬픔으로 가득 찬 삶이라고 하는 것 근본적으로 이 세상은 그렇게 죄악 된 세상이고 슬픔과 근심이 있는 세상이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껍질을 깨고 저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기 시작한단 말이죠. 그런 세상을 지나가면서 우리에게 많은 어려움이 닥치는데 종류도 참 여러 가지입니다. 그리고 근심하는 여러 가지 사연 이유도 정말 여러 가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도 고민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돈은 많은데 마음에 물질이 아닌 다른 것들 때문에 아파하고 고통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업이 잘 안돼서 고생하는 사람도 있고 사업은 잘되는데 자기 육신의 병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골몰하고 고통 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양한 이유와 다양한 그 원인 때문에 사람들은 고통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저 늘 있고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상적인 고통들은 그저 우리가 삶의 뿌리조차 흔들리는 그런 위기는 만나지 않습니다.
어려우면 또 어려움이 오나보다 그러면서 살아가죠. 그러나 종종 우리의 삶을 뿌리 채 흔드는 커다란 어려움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이 시를 만약에 다윗이 썼다고 한다면 다윗은 일생을 지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하나님께부터 주어지는 축복을 많이 누린 사람이었지만 역시 인생의 위기도 많이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인생을 뿌리 채 뒤흔드는 커다란 인생의 위기와 어려움이 왔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사람이 급하고 뭔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상식적인 생각을 못하게 됩니다.
지난번에 속초 거진 쪽에 집회를 갔는데 뭐 차가 무섭게 달리는 길입니다. 오죽했으면 그 도로 위에다가 무인속도 측정기를 쭉 달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속초가면 그 위쪽으로 막 달리면은 달릴 때마다 한방씩 계속 찍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 정신없이 달리는 길이죠. 차가 승용차인데 말이죠. 차를 그렇게 빨리 달리는 길이면 구석에다가 가지런히 세워놓으면 차들이 이렇게 피해 가잖아요? 다른 차들은 가지런히 있는데 뭔 급한 일이 있는지 차를 길거리에다가 대각선으로 박아놓고 그리고 어디로 운전수가 뛰어간 모양 이예요.
차가 이렇게 휘어졌는데 가다가보니 갑자기 도로 한복판에 차가 떡 나타나는데 번호 판을 보니까 이 팔 사 팔 이예요. 그러니까 이판사판으로 딱 세워 놓은 거예요. 그런 차는 공사팔이가 와서 받으면 딱 맞겠어요. 그러면 ‘이판사판 공사판’이 되잖아요. 어쩌든 거기다가 차를 세워두면 되겠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아이구 저 차는 번호 값을 하는구나.’
뭔가 사람이 급한 일이 있으면 이렇게 정상적인 생각이나 사고가 아주 평범한 사고를 안 낸단 말이죠. 그리고 커다란 혼란이 다가 오는 거예요.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때로는 큰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때 뭘 깨닫야 하면 ‘야 내 믿음이라는 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런 거를 깨닫게 될 때 있잖아요? 그렇죠?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어요. ‘야 나는 진짜 믿음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야, 어려움이 생기니까 하나님 의지하는 구나.’ 아, 정말 어쩜 그렇게 기특한지 자기머리를 스스로 쓰다듬어 주면서 기특하다 이 생각할 때 있잖아요.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전자의 경우가 많아요.
인생의 그런 커다란 어려움이 안 일어날 때에는 조목조목 아는 것도 참 많고 신앙지식도 가지런해요. 그래서 누가 어려움에 빠져 있으면 “야! 너 그렇게 살면 되냐?” 훈수도 잘 두고 충고도 잘 하던 사람들이 자기가 인생의 커다란 어려움을 만나고 환란과 슬픔이 겹치기로 겹치게 되면 가지런하던 사고들이 모두 흐트러지고 허둥대게 된단 말이죠. 그래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고 무기력해지기보다는 조바심을 냅니다. 그래서 막 조바심만 내게 되면 사람들은 급한 성격이 되요. 급하게 되면 이제 자신의 사고 속에 온통 혼란이 일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 때에는 모든 것이 가지런했었는데 큰 시련과 풍랑이 일어나고 슬픔이 닥치게 되니까 그 시련과 슬픔의 파도를 보면서 이제 마음이 살란 하여지고 기존의 자신의 신앙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 가게 만들었던 가지런했던 신앙의 지식들의 커다란 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커다란 혼란과 어려움이 일어나게 될 때에 그때에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허둥대면서 이제 여러 가지 행동들을 하게 되는데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 신앙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점 점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들어가는 잘못된 수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커다란 소용돌이를 치면서 심연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바보 같은 삶을 살게 된다라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정말 당신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근데 그 시험은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그 시험을 통해서 두 가지 유익을 주시려고 함인데 하나는 그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주님 앞에 인정받는 믿음이 되기를 원하시는 측면이 있고 또 하나는 시험을 통해서 네 자신이 분수를 알아라 하고 하나님이 한번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시련을 만나고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말하자면 커다란 시련 속에서 그렇게 자신이 무너져 가는 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스스로 여태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가지고 왔던 은근한 자만심 가식 그리고 자기가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붙들고 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자기의 인생을 붙잡아 주기에 충분하지 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심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바다에는 큰 배 작은 배 많은 배들이 떠있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갔을 때에도 제가 그랬습니다. 거기 큰 배를 하고 있는 선장이 집사님이신데 근데 참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말이죠 참 그렇더라구요. 이제 와 가서 열심히 말씀을 들으면서 새 사람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분인데 그분이 하시는 얘기가 그 사람은 바닷가에 수 십 년을 살면서도 바닷가에를 나가보지를 안았데요. 그 얘기는 부모가 엄청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초등학교 정도만 되도 바다에 가서 뭘 주서와야 먹고사는데 바닷가에 나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잘 살았다는 거죠.
얼마나 고기를 잘 잡고 부자가 됐는지 한없이 잘 되어 가는 거죠. 그러던 어느 날 출 어를 했는데 말이죠. 고기 배가 얼마나 고기를 잡았는지 만선의 깃발을 날리며 돌아오는데 고기를 너무너무 많이 잡은 바람에 고기를 너무 많은 실어서 배가 뒤집어 졌대요. 그래가지고 결국은 아홉 명이 자기 배에서 죽었답니다. 그러니 선주인 자신이 책임을 져야 되잖아요. 그러면서 이제 이 세상에서 잘 나가던 것이 정말 잘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정말 돌아와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믿는 것과 이젠 인격적인 승복에 대해서 쭉 설교를 하니까 그 부인되시는 분이 그래요. 목사님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실패한 케이스라는 거지요. 고기를 많이 잡아서 성공하는 것 같았지만 그 성공이 뼈아픈 인생의 실패와 아픔을 안겨 주었던 것입니다. 고기를 반만 잡았으면 그렇게 배가 뒤집어지지 안고 사람들이 안 죽고 자기 가산을 처분해서 보상을 해주지 안아도 됐을 거라는 거지요. 그런데 그런 슬픔이 닥치는 거예요. 인생의 암초와 같이 이런 고통과 슬픔은 어디서든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인생의 본질을 보면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다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묻어두었다가 어려움이 생기면은 한번 꺼내서 들여다보고 들여다 본 다음에 어려움이 끝나고 나면 도로 장롱 속에 쳐 박아 놓아야할 그런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시련과 큰 풍랑과 고난을 만나게 하시고 환란 속에서 슬픔을 당하게 하셔서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앙이 밑바닥까지 내려갔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고 또 우리가 그런 환란과 많은 어려움 속에서 얼마나 믿음으로 평소에 살지 안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줄 때에는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하던 많은 사람들이 환란과 커다란 어려움이 오게 되면 즉시 자신이 얼마나 믿음으로 살아가지 안는 사람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어려움과 시련이 올 때에 그들이 보여주는 혼란과 무질서는 바로 이런 것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환란과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그런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결국은 환란과 고난이 가져다준 상황에 메여서 노예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결국은 그러한 슬픔과 환란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성경을 통해서 이 시인이 그러한 환란 그런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란과 슬픔을 당할 그 때에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부르짖기를 여호와여 내 영혼을 구원하소서 하였도다. 그는 환란을 당하였을 때 어떻게 해야 될지를 잘 안 사람이었습니다.
환란을 당하였을 때에 허둥지둥 대고 환란과 슬픔 속에 있을 때에 과도한 슬픔으로 큰 고민에 잠기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환란과 시련이 올 때에는 우리는 잠잠히 환란과 시련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인생의 이는 모든 바람과 파도가 결국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란과 시련을 당할 때에 오로지 우리의 소망이 하나님뿐이시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을 이렇게 살면서 신앙생활 하는 모습을 보면 말이죠. 두 가지입니다. 둘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평소에도 믿음으로 사는 것 같고 환란을 만났을 때도 믿음으로 살면 그건 백 점이죠. 그러나 어떤 사람은 평소는 믿음으로 사는 것 같은데 환란이 닥치고 어려움이 오면 그가 믿음으로 살지 안 는 것이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느껴지긴 하는데 환란이나 어려움이 왔을 때는 즉각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정말 복된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시련과 환란이 우리에게 닥치고 커다란 고통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그 기회를 우리의 영혼을 세탁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고여있는 물에 빨래를 하는 것보다는 비누를 뭍히고 방망이로 뚜드려서 세차게 흘러가는 물에다가 흔드는 것이 빨래를 더 깨끗케 하듯이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평안한때에 아버지 앞에 우리자신을 정결케 하지 못한 우리의 삶과 여러 부분들을 환란과 시련 혹은 죽음이 임박한 질병같은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더 많이 자신을 정결케 할 기회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환란과 시련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대한 배신감을 가지게 만들어주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대해서 과도하게 걸었던 기대와 세상에 대한 과도한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줍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실체를 보게 만들고 부름 받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사람들인지를 환란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여러모로 환란과 시련은 우리에게 고통스러움을 가져다 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환란과 시련은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보고 주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그 환란과 시련은 우리의 영혼을 정결케 하는 하나님의 훌륭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환란과 시련을 통해서 교만하던 사람들이 아버지 앞에 겸비해지게 되었고 그런 하나님의 겸손케 하시는 은혜 앞에서 제왕들은 면류관을 벗고 장군들은 투구와 칼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되는 역사가 일어았습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과 그 은혜를 알기 전에 먼저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초라한 존재이고 환란과 시련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바보와 같은 존재인가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환란과 시련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교만하고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요즘 타이테익이라는 영화가 나와서 한참 인기를 끌고 있잖아요. 근데 어느 잡지에 보니까 타이테익 호에서 그 여러 가지 유물들이 발견이 되었는데 그 유물들 속에는 한 여행객이 쓴 일기가 나왔어요. 그 첫 번째 배를 타고 그러니까 그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첨단 기술이 만들어낸 배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어마어마한 배를 처음 타고 일기에다가 이렇게 썼답니다.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과연 이 배를 침몰시키실 수 있을까? 근데 그 날 밤에 침몰했어요.
인생이 얼마나 웃겨요? 아마 그 사람 때문에 침몰했나봐요. 아니, 어떻게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 하나님 보시기에야 위에서 가랑잎 하나가 떠다니는 거나 타이테익 호가 떠다니는 거나 그게 다 그놈이 그놈 아니 예요? ‘타이타닉’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희랍 신화에 나오는 엄청나게 큰 거인의 이름 이예요. 거인과 같은 배라 그랬는데 얼음조각 하나의 부딪치니까 바스러지고 말잖아요.
뭘 몰라도 너무 몰라요. 어떻게 그 말을 쓸 수가 있어요. 아마 그 사람도 바다에 죽었겠죠. 마지막에 그가 죽으면서 뭐라고 그랬겠어요. 아 하나님은 하실 수 있구나 하고 죽었겠죠. 똑같은 인생들이 그래요. 똑같은 우주인들을 공중으로 내 쏘았는데 소련사람들은 최초로 우주를 여행하고 돌아왔는데 뭐라고 대답했냐 면 하나님의 아무대도 안 계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크리스챤들이 우주 여행을 하고 와서는 하는 말이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찬송했습니다.
똑같은 세상을 보고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교만한 사람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커다란 환란과 시련이 올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겸손해 지는 기회로 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을 얼마나 대충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 잃어버린 유산이 하나있다면 그것은 자기를 꼼꼼하게 살피는 자기 성찰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하면 또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 하면 무엇인가 좀 조용히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걷어붙이고 맨 날 종아리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는 그리스도인밖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의 영혼의 상태는 너무나 무시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유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저는 의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신체를 보면은 너무나 신비하고 오묘하지 안 습니까? 인간의 핏줄을 봐도 그렇고 심장을 봐도 그렇고 모든 것이 그렇게 오묘합니다. 그렇게 오묘한 것이 인간인데 육체를 보고도 사람들은 너무 감탄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결국 그렇게 유사이레로 인간들이 사람을 해부해놓고 끈임 없이 연구 했지만 인체에 대해서는 안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그런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은 세상 끝날 까지도 인간은 인간자신을 연구를 통해서 어떤 신체라고 하는 것을 정말 규명할 수가 없잖아요. 심지어는 무엇이 죽은 것이냐 에서도 의사들 사이에서도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죽음도 합의를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죽은 거냐 ? 다 각기 틀리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생명이 무엇이냐 인간의 신체가 어떤 것이냐 그것을 정말 다 알 수가 없잖습니까? 그러나 육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영혼은 섬세한 것입니다. 그렇게 영혼은 섬세하기 때문에 그렇게 오묘한 그 영혼이 말이죠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를 만들면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고 승리한 삶을 살아가게 하기도 하고 모두 망가지고 부서져서 우리로 하여금 속되고 방종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게끔 만들기도 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가 이렇게 획일적으로 딱 구분되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선한 것만 믿지 안는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악한 역할만 그렇게 영혼이 하지를 안 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영혼 갈피갈피에 끼어있는 그런 모든 죄악의 때와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무지와 죄들이 영혼 각 기관의 미쳐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마음에는 거룩한 삶을 원하는데 패역 한 삶을 살게 하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어 눈물을 흘리면서도 삶으로 하나님앞에 칼 들고 대드는 그런 삶을 살게끔 만든다는 거지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꼼꼼히 살펴야 하는데 이렇게 살필 수 있는 기회가 너무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큰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살피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환란과 시련이 오게 되었을 때에 복된 성도들은 그 기회를 통해서 자기의 병든 영혼을 고치는 훌륭한 기회로 삼습니다. 질병이나 환란이나 시련이 왔을 때에 그렇게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워하는 영혼들은 환란과 시련 속에서 자신을 철저하게 살피는 그런 일들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왜 그러면 그런 일들을 아니할 수가 없느냐 환란 속에서 복 받을 만한 사람들은 기도하거든요. 오늘 시인처럼 환란과 슬픔이 미치는 그 날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부르짖었다 그러지 안았습니까?
그렇게 여호와 앞에 간절히 부르짖고 기도할 때에 결국은 그 영혼의 상태가 어떠냐에 따라서 그 기도는 능력 있는 기도가 되어서 자기를 어려움과 시련가운데서 건져내실 하나님께 호소해서 하늘의 놀라운 힘과 능력을 불러 낼 수도 있습니다. 부르짖고 기도해도 하나님의 보좌에 정막이 깃들 수 있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아직 언어가 없는데도 하나님의 크신 도움을 이 땅에 불러 내릴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런 차이는 무엇이 만들어 내느냐 하면 정결한 영혼 그리고 깨끗한 심령 그리고 환란을 통해서 자신의 그런 불결한 부분들을 보고 자신을 정화시킨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고난 속에서 이렇게 부르짖을 때에 기도의 놀라운 능력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환란을 통해서 아버지 앞에 기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그 환란을 통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들여다보게 되고 자신의 영혼은 그렇게 내버려둬도 괜찮은가에 대해서 진짜 진지하고 깊이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환란과 어려움을 만나도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안는 사람은 아직 환란 속에서 덜 정신을 차린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환란이 다가오면은 그 환란을 통해서 자기를 정결케 합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아들이 한 분 계시만 그러나 정결케 하지 안아도 될 아들이 예수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끊임없이 당신의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도 때로는 시련과 고통의 바람을 허락하셔서 환란을 당하게 하시고 슬픔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환란과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많이 당할 때에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병원에서 예방 주사를 맞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더 패역 하고 더 굽어진 삶 살지 못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먼저 환란을 주고 시련을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잘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살피게 하시려고 시련과 어려움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환란과 시련 속에 있는 사람들이 아버지 앞에 간절히 환란에 어울리는 기도들 아버지 앞에서 못하는 것은 자신을 정결케 하고 자신을 살피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환란과 원하지 안는 어려움이 겹쳐서 겹쳐서 일어날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말 의사 앞에 서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영혼을 성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런 큰 시련을 만나고 원하지 않는 환란을 당하여 내 마음이 슬픔에 잠겼을 때에 내 신앙은 하나님 앞에 열 열이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렇게 열 열이 기도해야 될 때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고 하나님께 여쭐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이 환란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을 진지하게 살피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피도록 만드시는 그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실천하지 못한 무지와 나태한 부주의하고 무지하고 태만한 그러한 우리의 반응이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란과 많은 시련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부지런히 성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전에 나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자꾸 가로막고 그리고 기도의 영을 훼방하였던 내 자신의 잘못된 패역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올바르게 반응하지 못하는 불구가 된 나의 마음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 고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기도의 능력은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 속에 있는 티끌하나라도 덜어내야되겠다 라고 하는 진지한 탐구의 정신을 가진 사람의 영혼 안에서만 불붙은 기도의 능력이 유지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삶에 대해서 공을 많이 들이십시오.
그것이 기도의 영을 유지하는 길입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에 대해서 공을 많이 들이고 여러분들의 영혼을 아무렇게나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결코 그렇게 해서는 환란 속에서 우리 자신이 아버지 앞에 부르짖는 기도의 영을 가진 사람으로 나아올 수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이 고통을 받을 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고통에 이골나는 사람들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만드신 것 아닙니다. 얻어맞고 두들겨 터지면서도 이를 악물고 참는 인내를 길러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하자면 고난과 시련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모든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하는 사실은 선한 부모들이 자식을 길러보면서 모두 깨닫는 것입니다. 자녀를 때리고 웃음이 가득한 그 얼굴에 눈물이 흐르게 할 때에는 반드시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통을 부모가 참으면서도 자녀를 때리고 징계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자녀를 향하여 기대하는 바가 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환란을 당했을 때에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잠깐 지나가는 일이다. 마치 하나님이 나를 계속 보살펴 주시다가 잠깐 쉬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그렇게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려운 일들이 계속 일어날 때 에 우리는 또한 과도한 슬픔에 잠겨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두 가지 태도 모두 하나님이 원하시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원하지 않는 큰 환란과 시련을 당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의 질병이나 혹은 나의 건강이나 혹은 우리의 생활 속에 밀려들어온 이런 커다란 시련을 축복으로 바꾸실 때까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우리자신을 성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메티유 헬리라고 하는 주석 가는 목회하면서 병자를 위한 기도를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는 가자마자 하나님 병마에 고통하고 있습니다. 고쳐주시옵소서. 믿습니다. 메티유 헬리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이 형제가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 형제를 이 질병으로부터 벗어나 건강하게 해 주시되 육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해져 가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진정으로 병들었던 영혼이 함께 회복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 앞에 그 영혼이 치료받는 것처럼 그의 비례해서 그의 육신도 건강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잖습니까? 의사 선생님들이 잔뜩 모여 있는 수련회에 가서 제가 그런 도전을 했어요. 어떤 의미에서 당신들이 환자만 잘 고치면 당신들은 어떤 의미에서 불법에 동참하는 사람들이다. 황당해 하더라구요. 왜 그러냐 죽을 사람 죄 가운데 살다가 죽을 사람이 빨리 죽으면 죄가 그것으로 끝나는데 다 죽어 가는 죄인을 다 살려 놓고 나니까 잘 죄짓지 않느냐 그러니까 뭘 말하고 싶으냐하면 다 죽을상이 되어서 병원에 들어온 사람이 메튜 gps리 목사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의술로 그를 온전하게 해주는 과정을 통해서 사람도 새로운 사람 만들어 주는 그런 일도 하면 얼마나 죄 가운데 살던 사람이 그냥 죽어버리면 더 이상 죄는 안 짓겠지만 옛날에 하나님께서 손해 입힌 것 언제 보상을 하겠어요.
그러니까 여태까지 그러고 산 사람이 이번에는 다 죽을상으로 왔다가 다 치료를 받고 건강해 져서 이전에는 나를 위해 일했으나 이제는 한번 이 건강한 몸으로 주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으로 몸과 영혼을 모두 고쳤을 때에 당신들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을 받아지겠느냐 그랬더니 그때서야 황당해 하던 사람들이 아멘 그러더라구요. 그래 당연하지 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시련과 깊은 환란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손 하나만 끄떡해도 그것도 필요 없어요. 그냥 주님이 눈짓만 해도 우리의 고통스러운 환경과 상황은 물러갈 수 있고 우리들이 사랑하던 사람을 죽은 사람도 하나님이 다시 살려내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 환란과 많은 고난 앞에서 하나님 앞에 변화되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으로 깊어지게 만드는 학교요 멀어졌던 예수 그리스도와 더 가깝게 만들어 주는 연애소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면회실에서 소원했던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고 하나님과 더불어 만납니다. 그분 없이도 능히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성령님을 만나게 되고 그래서 우리가 고난의 면회소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이 닥칠 때일수록 우리는 가벼운 기쁨으로 고난의 슬픔을 몰아 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과도한 슬픔으로 너무 깊은 슬픔에 잠기는 것도 옳지 안 지만 경박한 기쁨으로 모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깨닫기 위해서 주시는 그런 고난과 어려움의 때를 생각 없이 흘려보내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올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말 자신을 성찰해야 됩니다. 특별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성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인간은 자신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자기를 자신의 눈앞에 세울 때 자기를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하나님 앞에 세울 때에 자기를 가장 잘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자기밖에는 이 세상에 의인이 없는 것처럼 알고 율법의 의로는 감히 흠 없다고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자기를 들여다봄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니까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많지는 안지만 제 주위에는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기도를 많이 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가다듬어서 주님보시기에 아름답게 만들려고 한다고 치면 얼마나 많은 희생과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지 모른다고 하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닮는 길이 참 얼마나 어려운 길인가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대충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야 그런 고민을 할 필요 없지만 주님을 닮기를 원하고 주님처럼 생각하고 주님처럼 그렇게 거룩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손톱만큼 닮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고난을 필요로 하는 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가본 적이 없지만 요즘은 남자 성형수술이 그렇게 유행한다고 그럽디다. 그래서 이제는 잘 생긴 남자들이 다시 보여요. 저건 또 얼마를 발랐나 특별히 슬픈 이야기는 얼굴이 늙어 보이니까 명퇴 우선순위가 자꾸 올라간답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이 들면 피부가 늘어지는 그런 것들을 제거를 하고 해서 뭔가 젊음이 있는 얼굴로 그것도 뭔가 어디 미남 대회 나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명퇴 좀 늦게 하려고 그러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얼마나 마음이 찡 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들이 가서 의사한테 선생님 제가 여기가 조끔 광대뼈가 튀어나왔는데 그저 많이도 말고 한 일 쎈치 정도만 내려갔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간단하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요?
이게 밀가루 반죽 같으면 야 살짝 누루면 되겠지만 이게 그렇게 되겠어요. 이거는 이제 자기말로는 일 쎈치만 살짝 내려가면 된다고 그렇지만 틀림없이 살 갂아 내고 톱 갖고 와 가지고 얼굴뼈를 드르르륵 톱으로 짤라 내야 될 겁니다. 그러고 나서 살을 붙여야 된다 말이죠. 조금 변하는 것 그리고 조금 모습이 변하게 그렇게 많은 고통을 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자신을 부지런히 성찰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성찰을 통해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옛날에 오래도록 내가 가지고 있었던 패역한 삶을 고난을 통해서 고치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칼이 되어서 우리의 결점과 약점을 저절로 고쳐주면 우리는 두 눈 찔끔 감고 그냥 참고만 있으면 시간이 흐르고 나면 우리는 저절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고난조차도 고난 그 자체가 우리를 그렇게 치료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당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해 집니까? 죽을 고생한 사람들이 그럼 모두다 예수 닮았겠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을 고생하며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인성이 구겨지고 신앙심들이 파괴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자체를 통해서 우리를 다듬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에 대해서 경건하게 반응을 해야 지만 우리가 변화되는 겁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하는데 이를 악물고 참는다든지 팔자를 한탄하고 원망한들 우리가 바뀌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할 때에 더욱더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기도하면서 그 고난이 우리에 인성을 우리의 영혼 속에 패역한 본성을 씻는 대신 그 고난의 칼을 통해서 우리들이 다듬어 지고 갂여 지고 더 온전해져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사람되어야 되지 안겠습니까?
목회를 한 다음에 소설을 읽을 기회가 없었지만은 옛날에 변화되기 전에 소설을 좀 꽤나 읽었죠. 지금은 제목도 기억나지 안은 어느 소설에서 죽어라하고 주인공 자매가 열심히 쫓아 다녀요. 주인공 형제가 죽어도 싫대요. 어느 날 대 놓고 눈물을 흘리며서 부르짖는 거예요. 내가 어디가 싫으냐 말해라! 싫은 부분은 짤라낼 용의도 있고 좋아하는 부분은 붙일 용의도 있다. 이게 진짜 사랑에 매달리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신앙의 자리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윌리암 로라고 하는 영국의 비국교도의 경건한 목사 한사람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신앙의 근본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유일의 목표이거늘 많은 사람들은 처음서부터 그런 목표를 가지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삶이 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도대체 우리 신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이면 이 신앙이 무슨 신앙입니까?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고 우리가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신앙을 통해서 구현되지 안으면 신앙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요. 주님을 위한 것이고 우리의 신앙은 우리를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몸을 버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기 위한 믿음이요.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기를 원하는 그 마지막은 우리의 만족을 위함이 아니요 결코 하나님의 은혜 없이 하나님께 만족을 드릴 수 없는 우리자신을 바꾸고 고치고 다듬어서 우리를 위해 구속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만족시켜 드릴 수 있는 그런 사람되게 하려고 우리자신을 버려두지 아니하고 은혜의 복종시키고 믿음으로 살려고 하고 진리 말씀을 배우려고 하고 기도하기 싫은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끔 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신앙의 근본 도리인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 만족하실 수 있도록 우리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의 도의 근본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경외하며 살기 위해서는 우리들 속에 들어와 있는 모든 더러운 것들을 하나님 앞에서 고난을 통해서 우리자신을 성찰하면서 다듬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우리는 이 고난 속에서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께만 기울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더욱 철저하게 하나님 없이 우리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고난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그저 자신이 온전케 되기를 원하는 사모함 때문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고난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당하게 되는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아픔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이렇게 자신은 고난과 시련과 슬픔 속에서 아파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온전하지 못한 막대 먹은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를 쏟으시고 물을 흘리시면서 까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받쳤는데 우리는 단지 그런 식으로 우리의 인생을 성찰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추며 사는 것은 너무나 불편하고 귀찮은 일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생긴 대로 막 살겠다고 버티는 우리 인생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막되 먹은 존재인가 하는 것을 기도 속에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환란을 만났을 때에 우리들이 기도를 해보면 처음에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서럽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하나님! 저는 왜 이렇게 큰 풍랑을 만납니까? 하나님 저는 어떻게 합니까? 그러고 기도하다가 깊이 기도에 들어가게 되면 그 다음에 뭘 깨닫느냐면 사실은 이 환란 속에서 진정으로 위로 받아야할 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 이렇게 나는 외부적으로 찾아오는 이러한 고통도 이렇게 괴로워하고 환란과 시련을 통해서 많이도 아니고 조끔 나를 바꾸시려고 하는 그 하나님의 의도를 순종하는 데도 이렇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경직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변하지 안는 나를 보시면서 얼마나 아파하시겠는가 하는 것을 고난 속에서 깊이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고난과 슬픔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매달렸고 그때의 오직 하나의 목표는 주님이 능력 주셔서 이 고난 물리치는 것 밖에는 없었는데 나중에 깨닫게 되는 것은 결국은 고난이 관심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향해서 얼마나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내가 온전해 지기를 원하고 계시는지를 거기서 깊이 깊이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 앞에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기도하지 안고는 고난 속에서 우리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신령해 질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어려움을 만나고 고난을 만나면 오직 생각은 동물적인 감각 딱 하나입니다. 무엇이냐면 빨리 피해야 된다. 빨리 도망가야 되고 빨리 물러가야 된다는 것 그것 하나입니다.
그리고 슈퍼맨을 부르듯이 하나님을 불러들이지 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다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깊은 심정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성령과 함께 기도하는 데까지 깊이 나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그 깊은 영적인 교재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부어지고 그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흘러 들어가서 주님과 우리의 마음사이에 일치가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때 때로 환란을 만나고 어려움을 만나서 그것이 가져다주는 아픔과 쓰라림 때문에 하나님 앞에 메 달려 기도한 적은 있지만 그러나 어떤 때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매달려 기도했는데 언제 그 환란이 물러간지도 모르게 그저 물러가 버리고 내가 문제라고 생각했던 많은 문제들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해결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기도하는 가운데 관심의 초점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고난이 초점이었기 때문에 기도조차도 그 고난을 물리치는 일개 방편에 지나지 안았지만 그런 속에서 깊은 기도 속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향한 마음과 자신의 불순종하며 사는 그 방종한 모습을 보면서 아파하시는 것을 깨달으며 그러면서 이제는 그 기도 제목보다 더 큰 기도제목을 환란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부지런히 자기를 살피며 자기를 깨트려지는데 열중하다보면 어느 날 눈뜨게 되면 환란은 물러가고 커다란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찼던 자신의 인생의 너름 뜰 위에 찬란한 햇살이 뜨는 것을 발견할 수 있잖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삶을 하나님 앞에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시인이 이렇게 말하지 안 습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구하기를 여호와여 내 영혼을 구하소서 즉 주님이 아니면은 죽을 것과 같다고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기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영원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목숨이라고 번역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목숨을 구하소서 라는 이 번역이 더 정확한 번역이겠죠.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목숨이 달린 일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환란을 만났을 때에 어려운 일들이 여러분들에게 일어날 때 그때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영혼을 살리는 일이고 죽을 목숨을 살리는 일입니다. 파산할 수 있는 사람을 다시 일어나게 만들고 죄 가운데 영원히 침륜에 빠진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만듭니다. 배도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을 돌이켜서 회개함으로 성도의 길을 걸어가게 만드는 놀라운 일들도 모두 환란 속에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 할 때에 일어나는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때는 일반적인 기도를 해서는 안됩니다. 특별한 때는 특별히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움이 특별한 때는 특별히 기도하고 특별히 자기를 살피며 하나님 앞에 매 달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환란이 한번 지나가고 시련이 한번 지나가서 남긴 것은 고통과 슬픔과 상처를 남긴 것이 아니라 환란의 많은 비바람이 지나가면서 마지막에 우리에게 커다란 보석과 같은 그런 성숙과 온전함을 남겨줄 수 있는 그런 은혜로 우리들이 들어가야 되지 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시인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 기도를 통해서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인자하시도다 하는 이 고백을 하나님 앞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깊이 환란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면 우리는 그 환란 속에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 평범한 때에 쉽게 파악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압도하시는 성품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환란이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고 기도하기만 하면 그 환란과 많은 시련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가르켜 주는 큰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 이예요. 낙심하지마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셔 라고 말할 때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서 감동적일 수도 있고 그렇치 안을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잖아요.
어떤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 찾아와서 너무 염려하지 마라 하나님은 참 사랑이시느니라 이렇게 말할 때에 그것이 가슴에 와 닿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자기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난 속에서 맛보아 안 사람 그런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이 선하시다라는 사실을 진술 할 때에 많은 사람들 속에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복음은 이런 식으로 전해져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신의 인격 속에서 묻어 나오는 진리의 말씀이 전해질 때에는 말이 어눌하고 순서가 좀 틀려도 사람들 마음 깊은 곳을 침투하고 들어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성문을 대포는 못 뚫고 가고 창칼은 못 뚫고 지나가도 조용히 스며드는 연기나 물밑으로 흐르는 물은 얼마든지 성문을 통과 할 수 있는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자신의 인격 속에 묻어 나오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조용히 증거 할 때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까? 왜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은혜로우시고 의로우시며 인자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어떤 사람들이 환란 속에서 체험하게 됩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거듭되는 환란과 시련 속에서 자신을 깊이 살피며 하나님 앞에 메 달린 사람들만이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게 얼마나 이상합니까?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왜 성도가 평화로울 때 깨닫지를 못하고 환란의 비바람과 시련의 폭풍이 불 때에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습니까?
보십시오. 인간에게 다가오는 시련의 기회는 하나님의 능력을 배우는 기회이고 누구도 의지할 수 없이 외로운 들판에서는 것과 같은 처절한 고독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축복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도장이 되는 것입니다. 환란과 시련 속에서 상처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위기적인 상황은 사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에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이 큰지를 배우는 한 학교일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인생의 행과 불행 우리의 신앙의 성패가 시련과 환란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평화로운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믿음에 달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평안한 때에도 믿음의 길을 걷지 못하며 파산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러나 어떤 때는 정말 고난과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하나님만 의뢰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기 때문에 거기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성품에 아름다우심을 노래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든 사람이 보기에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하고 쓰린 가슴을 부여안고 뒹굴어야 할 그 시련과 고통의 때에 고요히 눈을 들어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과 그의 자비로우심을 찬송할 때 우리의 삶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드러내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라도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때가 원수들을 비방하는 때가 아니라 원수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하나님 앞에 탄복하는 때가 되도록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입니다. 이제껏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살아왔습니다. 산전 수전 다 겪으면서 이렇게 믿음생활 해왔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작은 산 밖에는 넘지를 못했고 어떤 사람들은 맹수가 우글거리는 험산 준령을 넘어서 왔을 수도 있습니다. 평지를 걸었던 큰산을 넘든 작은 언덕을 지났든 맹수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벌판을 지났던 어떤 길을 지나왔던 간에 우리들이 이렇게 살아있고 오늘도 우리가 이 인생의 구간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하는 것은 분명히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제껏도 주님의 은혜로 살았으니 앞으로도 주님의 은혜로 살 것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사간에 우리의 고락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리고 어찌하든지 우리는 시련이든지 고난이든지 슬픔이든지 혹은 평화로운 때든지 모든 삶의 과정을 통해서 어찌하면 우리가 정말 주님보시기에 더 깨끗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서 정말 주님이 우리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그러한 삶을 사는 그런 사랑 받는 존재들이 될까? 이것을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목표요 고난을 당한 성도들이 기억해야할 요점이라고 생각합니다.
4.교회의 위기와 기도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31)
베드로와 요한이 놀라운 신유의 역사를 행하고 그렇게 병든자를 고치게 되자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잡아다가 박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사도들이 당한 첫 번째 박해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성령의 강력한 능력이 부은바 된 교회였다고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과 같은 두 지도자가 관화에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교회의 성도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염려를 많이 했겠습니까? 혹시 사랑하는 지도자들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어떻게 됐는가! 어떤 모함과 그리고 누명을 쓰고 또 합당하지 안는 죄목으로 정죄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면서 노심초사했을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붙잡혀간 그 신문의 현장에서는 아주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무엇인고 하니 이제 너는 다시는 이 도를 전파하지 말아라 이것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봤으면 그들이 그 증거를 받아들여야 옳은데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이 택했던 방법은 다시는 그런 거 말하지 말라 그런 협박을 가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다시는 그 도를 전하지 말라 라고 할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유명한 말을 한 마디 남깁니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이 옳겠느냐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겠느냐? 우리는 우리가 보고들은 것을 전파하지 안을 수 없다.”라고 하는 전도자로서의 유명한 고백을 남기게 됩니다.
그들은 결국 협박을 받고 풀려나게 되었지만 그러나 이 사건은 어리디 어린 예루살렘 교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비로소 그들이 성령의 은혜로 무엇인가가 유대인들이 동의하지 안던 그런 새로운 복음에 본질에 대해서 눈뜨게 되었는데 그 복음은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던 복음이었는데 그 복음에 붙잡히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정치적인 세력들이 이 문제를 정치화해서 그래서 조직적으로 그들이 전파하고 싶어하는 신앙의 도리를 반대하고 그 도를 계속 전파할 때에는 언제든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사도들과 기독교인들을 박해 할 것이라고 하는 정식적인 선전포고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들을 당했을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이 어린 교회들 이런 환란이나 커다란 어려움을 별로 격어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사도들은 사람들로 배척
당하고 대적을 당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또 자신들도 그런 일에 동참하던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예수님이 함께 하셨잖아요. 지금은 예수님도 없고 그리고 성령님이 오셨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아직은 그분이 어떤 분이 신지 이해도 어리고 그런데 성령이 오시고 나니까 뭔가 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슴속에서 외치지 안으면 안 되는 불같은 메시지와 그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였고 그리스도 예수의 피 묻은 복음이었습니다. 그것의 대한 간절한 억누룰수 없는 소망을 갖게 되고 그리고 또 그 성령 감림 사건을 통해서 이 사도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모든 불행의 본질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속에서 오랬동안 오해와 무지에 늪에 빠져서 참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던 자신들의 신앙을 깨닫게 되었고 이제 이러한 무지와 어두움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모르고 그분이 십자기에 못 박혀 죽으신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죄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그 불행한 인생들을 건져내야 되겠다 라고 하는 소명감에 불타고 있는 이 교회에 정식적인 선전포고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런 핍박의 경험이 없는 이 예루살렘의 어린 교회는 정식적으로 다시는 이런 도를 전파하면 가만두지 안겠다 라고 하는 보복의 의사를 분명히 하고 핍박의 의사 표명이 분명히 담긴 이 조직적인 선전포고에 직면하면서 그들은 큰 두려움을 느꼈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더욱이 그러한 정식적인 선전포고는 단지 유대인들 중에 이름이 없는 몇 사람들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교회 원로들이라고 할 수 있는 제사장들과 왜 제사장들이라고 말하냐면 제사장이 한 둘이 아니고 그리고 또 대제사장들 경우에도 날마다 사람들이 바뀌니까 전직 제사장들도 다 대제사장이라고 불렀어요. 그러니까 그 많은 대제사장들과 그리고 백성들 장로들 정치적인 실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이름으로 교회를 향해서 분명하게 표명한 선전포고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위기를 깊이 당하게 되었을 때에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을 갖게 됩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굉장히 무서워요.
한번은 주일학교를 하는데 교회가 주택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한가운데 있어요. 그런데 지금처럼 건축을 돈을 많이 들여서 방음도 하고, 사실 요세는 건축 자제가 잘 나와서 여기서 막 들이 부수고 난리를 치면서 부흥회를 해도 사실 옆집에서 안 들리게 돈만 들이면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옛날에 뭐 그런 것 있습니까? 그냥 브로크 쌓고 벽 발라가지고 교회생활 하는덴데 아무리 조용히 해도 밖으로 막 들리잖아요. 그런데 여름성경학교 할 땐데 아이들이 가득 모였었습니다. 제가 신학교 들어가기 전이었거든요. 막 밤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는데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막 회개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도 울고 아이들도 울고 소리가 나니까 그냥 문을 똑 똑 뚜드려서 좀 조용히 해 주시겠습니까? 계속 그러면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그러면은 알았다고 말로 하면 되는데 그 회개하고 숙연한데 교회당 문도 철문이었으면 괜찮으데 나무로 해가지고 유리창 박은 거였는데 웬 사람이 구두 발로 뻥 차니까 문이 그냥 유리가 깨트려지지 안았는데 진동을 하면서 쾅하는 소리가 났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막 회개를 하다가 주눅이 들어 가지고 회개가 딱 그쳤어요. 뒤에서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욕을 막 하면서 이 교회 때문에 나 신경쇠약 걸렸다면서 약값 물어 놓으라고 소리소리 지리고 다 때려부순다고 난리를 치는데 그때 목사님이 있든지 장로님이 있든지 선생님들 중에 나 동 환 이처럼 한 주먹 하는 형제가 있든지 아니면 아무리 맞아도 끄떡없는 형제가 있던지 그러면 좀 난데 저는 사실 그런 무대뽀 같은 사람들하고 상대해볼 기회가 없었거든요? 완전히 성난 코뿔소예요. 길기리 뛰면서 책상을 발로 차고 난리예요. 그런데 나중에 교회에 계신 어른들한테 말씀드리니까 늘 있는 일이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런데 저는 한번도 못 봤어요. 다 불질러버리겠다고 소리소리 지르는데 무섭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한 거예요. 당시 교회라고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봐요. 복음을 전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는 했지만 그러나 유대교 전체의 세력에 비하면은 극소수에 불과 했어요. 그런 사람들이 정식적인 선전포고를 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한 깊은 위기 상황가운데서 말이죠. 정말 교회가 받았던 충격 그 어린 교회가 당하여야 했던 놀라움 이런 것들은 정말 이루어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박해를 받아도 안 받는 것은 아니지만은 사실 박해라고 말하기에는 주님 앞에 너무 죄송하지요. 박해라고 그래봐야 사실 부모한테 왜 그렇게 교회 가서 사냐고 박아지 긁히는 것 그런 정도인데 사실 바가지는 박가지고 박해는 박해거든요. 그것도 박해에 들어가죠 박해에 들어가면 박가지만 당하는게 아니라 박가지로 한 대 맞아야 그게 박해 아니예요. 사실 그런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지금도 없지는 안 지만은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박해에 대해서 사실 실감을 못 느낍니다. 그러면 생명 걸고 교회 나오는 사람 몇 사람이나 되겠어요.
이럴 때 신앙은 말이죠. 자칫 하면은 병들기 쉽다 이런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참 순수한 신앙은 박해와 핍박 속에서 커요.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사생결단하고 박해를 하면 져버리든지 아니면은 사생결단보다 더 무섭게 예수를 믿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지만 신앙을 유지하거든요. 그렇기 위해서는 사생결단하고 주님을 믿으려고 그러는데 사실 웬만하면 다 버린다구요. 6 .25 이야기만 나오면 우리 할머니는 우리할아버지가 지도력이 없어서 온 식구가 고생한 이야기를 늘 하십니다. 죽어라고 피난을 가보면 벌써 공산군은 저 멀리 가있데요.
그런 얘기를 하시면서 피난을 가려고 하는데 지게에다가 짐을 다 싣는데 요강까지 싣고 갔데요. 한참 가다가 피난 가는데 요강까지 가지고 가야되나 그것은 몇 칠을 걸어간 다음에야 생각이 났데요. 전쟁이 나서 생명을 걸게 되면은 웬만한 것은 다 버려요. 무슨 요강을 왜 가지고 가요. 아무데나 누면 되지 전쟁 난 판에 무슨 딱지 띨 사람도 없는데 무슨 요강을 들고 갑니까? 전쟁이 나면은 다 필요 없어요. 다 모든 것 버립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 목사님이 빌라에 사는데 불이 났거든요? 불이 막 나니까 사람들이 난리잖아요. 텔레비전 꺼내와라 뭐 꺼내와라 그 목사님이 참 지혜로와요. 막 보따리를 싸고 있는 식구들한테 냅둬! 다 타게 내버려둬 그리고 도장두개하고 통장 들고 성경 찬송 들고 가방하나에 넣어서 들고 내려 왔대요.
그게 지혜로운 것 아니예요. 전쟁과 같이 생명을 걸게 되면은 웬만한 것 다 버려 둡니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인생의 수많은 고민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고민이 많은지 알아요? 주님이 정말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상황에 서고 우리가 죽느냐 사느냐하는 기로에 섰을 때에 우리의 대부분의 고민은 다 쓸데없고 너무 사치스러운 고민 이예요. 그렇잖아요. 죽음의 현장에 직면해서 살것이냐 죽을 것이냐 하는 위기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기도 제목을 한번 보세요. 사는 것 이외에 아무 기도 제목이 없어요. 당뇨병이 그렇게 무서운 건지 저는 잘 몰랐습니다. 당뇨병은 연세가 많이 드신 분들이 걸리는 병인 줄 알았는데 열 여덜살 먹은 아이가 당뇨가 걸렸는데 완전히 할머니 같이 되더라구요. 결국은 죽었는데 말이죠. 병원에 가서 다른 사람 신방 갔다가 기도를 해달라고 그래서 기도를 해주면서 뭘 원합니까? 대답이 아주 간단해요. 선생님 저는 살고 싶어요. 그렇게 간단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그런 깊은 위기에 이제는 그렇게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정치 세력, 종교계, 이러한 전체적인 계층들로부터 정식적인 선전포고를 받았을 때에 이 어린 교회의 가슴이 얼마나 콩 뛰듯 팥 뛰듯 했겠습니까? 그럴 때 여러분 이 교회가 사도들이 돌아와서 그렇게 선전포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사도들이 그 이야기를 전해 주었을 때 이 성도들의 마음속에 다가온 것은 두 사람이 믿음을 지키면서 거기에서 의연히 견뎠다기 보다는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받았다는 사실이 훨씬 무게 있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위기에 쳐 했을 때의 이 교회가 어떻게 대처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 우리 모두 대표단을 구성합시다. 그래서 유대교와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방법을 모색해 봅시다. 유대교에 줄을 댈 수 있는 사람이 누구요? 누구 친척들 중에 대제사장하고 아는 사람 없습니까?” 이런 식으로 하면서 줄을 댔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에게 신학적으로 유대교를 자극하지 안을 수 있고 그러면서 종교간의 화해와 일치를 모색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 위원회를 구성합시다. 위기에 처했을 때에 그런 식으로 이 문제를 풀었습니까? 아니면은 우리가 이렇게 유대교와 부딪쳐서 살아 남을 수가 없으니 우리 교회를 딴 데로 옮깁시다. 이런 제안을 했습니까? 그들은 전혀 그런 세상 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안았습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그러한 자신들의 방법이나 화해의 길을 모색하기보다는 그들은 즉시 교회가 그 큰 위기에 처한 것을 알고 감당할 수 없는 선전포고를 받은 그 위기를 느끼면서 그들이 했던 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놀라운 비결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개인이나 똑 같애요. 한 사람이 큰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서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서 예수의 사무친 정신을 가지고 어찌하든지 나의 인생이 주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도구로써 살아가고 싶다라고 하는 빛깔 짙은 고백이 그의 영혼 속에서 흘러나오기까지 그는 고난을 겪지 안고는 그런 사람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래요.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잖아요.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들은 설교를 하거나 성경을 이야기하거나 간증을 할 때 항상 자기가 말하는 거하고 그 사람의 마음하고 딱 하나가 돼서 흘러 나와요. 그래서 들어보면 성경이 얘길하는건지 저 사람이 얘길하는건지 구분이 안가요. 무슨 뜻이냐하면 자기만 딴 곳에 있으면서 성경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성경에서 나오는 그 진리를 말함에 있어서 자신이 그것을 충분히 인격적으로 소화해서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 말하는 것이 느껴진다 말이죠. 고난 없이는 그런 일이 불가능합니다. 누구도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느 청교도가 말하지 안았습니까? 이 세상에는 죄 없는 한 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슬픔을 당하지 아니하였던 하나님의 아들은 한 명도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웠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조차도 고난을 통해서 비로소 정말 온전한 순종의 도리를 배워 나가셨습니다. 그러면 본성 상 하나님을 등지기 좋아하고 예수의 정신으로 살기보다는 자기 마음대로 살기 좋아하는 이 인생들이 고난 없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성도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마음을 받쳐서 하나님 앞에 정말 기도하는 그러한 기도의 사람으로 일평생 살아가고 있다면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 그는 실로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그렇게 하나님 아니면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주님의 손에 붙들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어 그렇구나 내가 주님의 신실한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은 내가 아직 고난을 덜 받았기 때문이구나 그러므로 나의 나된 것은 고난 없기 때문이라 그러니 내가 고난을 억지로 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고난을 안 주신 분은 주님이시니 내가 이렇게 대충 살아가는 것도 결국은 주님이 주시는 평탄한 환경 때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은 맞는 답 이예요. 틀린 답 이예요. 예 틀린 답 이예요.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기도의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고난을 당해도 기도의 사람이 되기는커녕 고난을 통해서 더 돌멩이처럼 단단해 져서 그래서 마음이 쇳덩어리처럼 굳어지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나 경건한 반응 고난에 대한 성도다운 믿음에 반응은 반드시 그를 기도의 사람으로 만드는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면서 우리가 온전해 지듯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어려움과 시련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교회는 거목과 같이 클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가끔 제주도나 혹은 남산이나 이런데 가보면은 식물원이 있습니다. 유리장에 가둬 놓고 난로를 많이 때서 바나나 나무도 키우고 야자나무도 키우고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 나무들은 문 활짝 열어놓고 햇빛 들어오게 하면은 모두 말라 죽어버립니다. 그만큼 견딜 수 있는 야성이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정말 그런 온상에서는 거목이 자랄 수 없습니다. 귀한 화초는 자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거목은 그런데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그 언덕에서 그래서 바람과 눈비를 맞으면서 수많은 세월을 굳굳이 이겨낸 나무만이 거목처럼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도 마찬가지로 다루십니다. 한 교회가 거목과 같이 뿌리를 내린 나무와 같은 교회가 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도 많은 위기와 어려움을 만나게 하십니다. 인간이 잘못해서 어려움을 만날 때도 있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특별한 예정 가운데서 그는 교회를 연단 하실 적도 있습니다.
위기를 보내시거나 시련을 보내시거나 뜻하지 않은 커다란 일 앞에 교회를 직면하게 하셔서 도저히 이제껏 평상적으로 교회를 운영해 왔던 것 가지고는 되지 않는 그러한 커다란 문제 앞에 놓이게끔 만드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교회로 하여금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래서 그 교회가 전심으로 기도하게 하심으로 그 교회를 온전하고 능력 있는 교회로 바꾸어 가시는 것입니다. 개인에 있어서나 교회에 있어서나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교회 오래 다닌 신앙의 경륜은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진리를 위해서 자신을 지키도록 기도로 분투하는 삶을 살았다면 그 신앙의 경력은 호락호락 우습게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처음 신앙생활 시작하는 사람은 당장의 그 사람처럼 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처럼 큰 위기를 만나게 되었을 때에 그 들은 세상 적인 방법으로 그런 어려움 들을 극복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들이 결심한 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사도의 소식과 보고를 듣자 마자 그들은 즉시 가난하고 상한 마음으로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이 박해의 상황 앞에서 하나님 앞에 의존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문제 앞에서 먼저 하나님이 천지의 대 주제이신 것을 스스로 상기했습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은 정말 크고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이 핍박의 칼날은 무섭기 그지없지만 그러나 번뜩이는 핍박에 칼날 위에 존재하는 이 위대한 창공을 지으시고 이 위대한 땅과 이 온 하늘을 창조하신 분이 바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신가 하는 이 사실을 상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천지의 대 주제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의 능력을 기억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그 주님의 주권 안에 있음을 고백하며 아버지 앞에 간구하고 매 달렸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더 커다란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핍박의 칼날을 꺽을 수 있는 더 많은 힘이 필요했습니다. 자신들을 향하여 도전하고 협박한 그 모든 정치적인 세력을 멸할 수 있는 더 큰 능력과 더 위대한 권능이 그들에게 필요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치스러운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고 고민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위기 앞에 놓였고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과 힘이 아니면 자신들을 그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게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그 위대한 능력의 하나님을 묵상하며 그 위대한 창조 주 하나님의 권능으로 위협받고 있는 작은 공동체의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기를 간구하고 아버지 앞에 기도했습니다. 눈을 조용히 감고 얼마 되지 않은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커다랗고 충격적인 선전포고 앞에서 그 교회를 향한 모든 주권이 하나님 아버지께 있음을 고백하며 창조주 위대한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그 광경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은 졸다 깨다 기도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지 안았습니다. 대부분의 오늘날 우리들이 하고 있는 기도제목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사치스러운 기도의 제목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이제 피어나기 시작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기도했을 까요. 아마 그들은 장난하듯 기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과 같은 이 복음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는 이 위대한 능력의 복음이 자신들을 통해서 만 천하에 전파되어 주님이 당부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회복을 이루느냐 아니면 여기서 이제 작은 교회로서 이 압박과 핍박에 굴하여 보느냐 하는 그러한 커다란 두려움이 엄습하였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 교회 문닫으면 저 교회 가지? 이 교회 다니다 이사가면 딴 교회가지 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모든 사람들이 주일날 모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부모와 친척과 그리고 토지와 집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혹은 자신 홀로 그렇게 교회에 와서 함께 공동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그들의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우리도 이런 마음으로 교회를 바라 볼 때에 그때 비로소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마음이 생겨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이 교회는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느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이 교회는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여러분의 인생의 어느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이 교회를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여러분은 이 교회가 여러분의 인생 중에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오늘과 같은 시대에는 마치 교회를 자기가 다니는 헬스클럽과 같다거나 동우인의 모임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오늘 보십시오.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교회를 향한 마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교회가 문닫으면 자신의인생도 끝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그 교회를 향한 말 할 수 없는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위기에 처한 이 교회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분명히 그 기도회는 열 열한 기도회였을 것입니다. 누가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기도하라고 요구하거나 북을 치지 않았어도 모든 형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은 가슴을 찢으며 통곡하는 마음으로 위기에 처한 이 어린 교회를 천지의 대 주제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살려 주시고 보호해 달라고 애원하였을 것입니다. 저는 본문을 대할 때마다 그런 그림이 떠오릅니다.
이제 건물도 제대로 가지지 안은 이 사랑하는 성도들이 공동 생활하는 곳에서 분명히 이 기도는 이루어 졌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겠지만 그러나 그들은 정치적으로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들이고 그들 가운데 누구도 지금 교회가 직면한 이 위기를 인간의 제주나 가지고 있는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가지고 풀 수 있는 대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모든 사도들에게나 모든 교인들에게나 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 유일한 대안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기도했겠습니까? 분명히 그들은 모여서 울부짖으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누가 인도하는 사람이 따로 없었어도 일체 하게 그들 안에 함께 계신 성령님께서 동일한 기도제목을 주셨을 것이고 그야말로 마음과 뜻을 같이하여 한 마음으로 전심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울부짖는 함성은 아름다운 메아리가 되어서 폭포수와 같이 그런 물소리를 내었을 것이고 그 아름다운 부르짖는 혼신의 힘을 다하는 마음과 온 영혼의 기도는 거대한 연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교회를 꿈꾸고 그리워합니다. 교회 앞에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써있지만 그러나 도대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까? 이 교회가 맘에 안 들면 저 교회로 가고 저 교회가 맘에 더 들면 이 교회를 버릴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정처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저는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 한국 교회는 너무나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 한국 교회가 얼마나 기도 많이 하는지를 미국이나 영국의 교회와 비교하고 독일 교회와 비교하는 것은 마치 암 환자 말기의 사람들과 그리고 병들어서 피골이 상접한 자신과 비교하며 위로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영국이나 미국의 교회들 중에서도 살아있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압니까? 그들이 염두 해 두고 비교하며 우쭐해 하는 교회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성령이 떠나가신 그런 교회들입니다. 왜 우리가 할 일이 없어서 그런 교회들과 우리들의 교회를 비교하고 그런 교회들의 시대와 조국교회를 비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사자처럼 살았던 수많은 기라성과 같은 성도들이 주님을 섬기던 영광스러운 교회를 우리의 교회와 비교하지 아니하고 왜 그렇게 주님이 이미 버리고 폐기 처분 직전에 놓여있는 병든 교회들과 우리조국의 교회를 비교하느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놀라운 은총을 보이시고 그 복음에 능력으로 하나님의 교회에 불을 붙이던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전심으로 모여 아버지 앞에 기도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교회에 모여서 기도하던 성도들이 전쟁의 판도를 바꾸고 선교의 지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복음으로 한 도시를 돌아오게 만들었고 병들고 부도덕과 타락으로 죽어가고 있는 그 도시에 생명의 강물이 흐르게끔 만들어 주는 놀라운 기도의 역사가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기도 할 때에 거기서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왜 그런 영광스러운 교회들과 비교하지 아니하고 이미 성령이 떠나시고 폐기처분 직전에 놓여있는 그런 교회들과 비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소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 것에 있어서는 있는 것이 족한 줄을 알고 나보다 훨씬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살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풍족할 때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음식이 남을 때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적하는 마음이 있어야 경건의 도움이 되고 경건이 도움이 되어야만 그 도움으로 헌신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안습니까? 그러나 영적인 일에 있어서는 우리는 그런 유의 겸손을 발휘해서는 안됩니다. 영적인 삶에 있어서는 우리가 높은 이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이 시대의 평균적인 그리스도인들보다 조끔은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으로 저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마치 둘 중에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생각해야 됩니다. 리차드 백스터가 쓴 책 가운데 성도로써의 삶이냐 아니면 야만인으로서의 삶이냐 짐승과 같이 살 것이냐 거룩한 무리답게 살 것이냐 그래서 정말 앞서서 살았던 거룩하고 경건한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모든 구원의 은혜와 축복들을 향해서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송하고 면목이 없는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을 가리켜서 거목이 되기를 꿈꾸는 묘목이라고 불렀습니다. 본인들이야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적어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묘목처럼 살다가 묘목 이상의 삶을 바라지 안고 죽어갑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안는 오합지졸들로 살다가 인생을 마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어떤 은혜를 주셨는데 우리가 그런 식의 삶을 살수 있겠습니까?
왜 우리의 교회를 그렇게 폐기 처분 직전에 놓여 있는 그런 교회들과 비교를 하겠느냐 말이죠. 정말 외국에 몇 번 이렇게 나가면서 교회들의 실상을 보면서 정말 그 말이 적합한 것 같아요. 폐기 처분 직전에 놓인 교회들이라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것 참 장로교라고 자랑하고 뭐 감리교라고 자랑하면 뭐해요. 사람하나 없는데 교회를 유지할 수가 없어서 한국인 교회에다가 오후 시간에 파트 타임으로 빌려 주었더니 자기네 교회 세배 네 배 모여 가지고 주인하고 객하고 바뀌게 생겼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아니 그것 뭣하러 한 교회에서 두 교회가 삽니까? 그냥 합쳐버리지?” 아 그러고 영어 통역하면 되잖아요. 누가 그렇게 하면서 교회라고 하는 보람을 그저 큰 교회당 한국인에게 빌려주는 것을 보람으로 삼는 그러한 교회 정말 죄송한 이야기입니다만 폐기처분에 있는 교회 모습들 아니예요? 왜 우리가 그런 교회들하고 비교를 해야 되겠느냐는 말이죠. 조국 교회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항상 믿음에 거인과 같이 살았던 사람과 비교를 해야 되요. 참 비참하고 천국 가면 만날지 말지 커트라인선상에서 오락가락하는 사람들하고 비교를 해서 난 니 보다 낫다. 그때 하나님은 “얘들아, 도토리 키 재기란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이 교회는 이처럼 위기를 만났을 때에 하나님 앞에 장엄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일주일 전에 미리 선포된 것도 아니고 당의 의결을 거친 것도 아니고 포스타를 붙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즉시 그 어려운 위기를 만났을 때에 이 교회는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장엄한 함성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이 얘기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냐 하면 두 가지 일들이 일어났는데 하나는 성령의 강력한 임하심이 있었던 거예요.
솔직히 교회에 힘이 뭡니까? 교회가 무슨 힘이 있어요. 사람들이 와서 시비걸고 핍박하면 그대로 당했지 무슨 힘이 있어요. 옛날의 제가 섬기던 교회는 장로님 한 분이 있었는데 그분은 돈이 있는 분 이예요. 가끔 교회에 패거리들이 와 가지고 까불면 장로님이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고 딱 버티면은 꼼짝도 못해요. 그래서 이상한 사람들이 오면은 빨리 장로님을 부르는 거예요. 한번 받으면은 꼼짝을 못한다고 사실 교회의 진정한 힘은 그런 힘이 아니라 영적인 힘 이예요.
여기서 조끔 넘어가면은 바로 뭐가 나오냐하면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다음 장에 나오잖아요. 땅값을 감추고 속이는 그 사람들이 사도가 명하니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죽어버려서 실려 나갔습니다. 두 사람이 잠깐 사이에 실려 나가는 그 광경을 보면서 얼마나 사람들이 큰 두려움을 느꼈겠습니까? 아! 하나님의 교회는 이렇게 순결해야 하는 것이구나 속이거나 거짓말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진노하시는 구나 하는 것을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잖아요. 그런 것들을 무엇이 가져다 줍니까? 성령의 능력이 가져다 준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위기에 처한 교회를 향한 대안은 성령이 그 능력을 부어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이 놀라운 그런 능력을 부어주시니까 사도행전 뒤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요. 막 핍박을 합니다. 그래도 소용이 없어요. 역사가 일어나니까 핍박하던 대 제사장들이 무릎을 꿇고 와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계하고 장로들이 회개하고 유대인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세상나라를 지배해 가는 거란 말이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논쟁을 하거나 말싸움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영혼을 굴복시킬 수 있는 큰 능력이 교회를 뒤덮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시는 하나님의 최고의 자산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이 교회에 주시는 최고의 축복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날 많은 교회들이 아이엠 에프 시대를 만나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라고 난리입니다. 선교사 한 사람이 저 한테 그런 말을 했어요. 목사님 요새는 한국에서 전화 소리만 들리면 오금이 절인데요.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십중팔구는 선교비를 끊는다는 얘기라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문제는 돈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이 교회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변화되고 하나님 앞에 놀랍게 새로워져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주님의 살아 계신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붙잡힌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하나님이 뭐 하실 일이 없으셔서 얘야! 선교비 끊어라 이유는 아이엠 에프 때문에 너희에게 돈을 더 줄 수가 없다 하나님 이렇게 말씀하시지 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고 성령으로 감동시키시면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저는 말이죠 이 IMF 시대에 한국교회가 한번 세계 교회역사에 유래 없는 일을 남겼으면 좋겠어요. 아이엠 에프 시대를 만나서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마게도니아처럼 되어서 그렇게 환란을 많이 만나고 가난해 졌는데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가 더 풍성하게 부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선교사들이 파송 되고 더 많은 선교의 지원을 할 수 있었다라고 하는 그런 역사를 남기면 이다음에 우리의 후손들이 얼마나 이런 고난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겠느냐 말이죠. 적어도 우리조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었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있는데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없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는데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바랍니다. 어떻게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목 메이는 마음으로 온 성도들이 기도 했더니 하나님이 대안을 주셨습니다. 성령의 놀라운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성도들이 충만한 권능으로 말씀을 사도들이 선포하면 거기서 말하자면 적군의 진지에 포격이 날아가서 완전히 부서져 버리고 초토화되고 나면 성도들이 와르르 달려가서 영혼들 하나하나를 복음을 전해서 건져내는 이러한 초토화 작전에 원동력이 여기서 성령을 부어주시니까 생겨난 거예요. 그렇게 성령의 놀라운 은혜로 대안을 해 주신 거예요. 교회가 고민하는 문제가 얼마나 많아요. 그러나 대안은 하나예요. 성령의 능력이 위에 물 붓듯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아니고 닫힌 교회의 얘기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비비꼬인 사람들이 있어요 삐딱해 가지고 쓴 뿌리 같은 사람들이 있어 가지고 교회에 회의 만 하면 아무튼 사람들 마음 오장 육보를 뒤집어놓는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대안이 뭐예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쫓아낼까?' 그런 생각을 해요. 이런 생각이 대안이 되겠어요? 자기네 교회 싫은 사람 딴 교회 왜 보내? 그 교회가면 또 그럴 것 아니예요. 그 교회 가서 대안은 무엇 이예요? 성령의 능력이 오셔서 그 사람 완전히 뒤집어서 새 사람 만드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한번 꽉 변화되면 얼마나 순수한지 몰라요.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이렇게 계산을 많이 해요. 완전히 막가는 사람들이 한번 왕창 변화되면 그 다음엔 순수하고 정직해요. 아주 깨끗해요. 진짜 하나님 앞에 변화된 사람처럼 살아간단 말이죠. 뿐만 아니죠. 그 이외에도 교회가 만날 수 있는 어려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왠지 성도들이 마음이 하나 안되고 구역예배 모이면 늘 잡담이나 하고 구설수나 만들고 이 사람 저 사람 교대로 올려놓으면서 공과 책은 밀어 놓고 난도질이나 하는 재미로 매주 구역 예배 모이던 분위기가 바뀌는 이유는 무엇 이예요. 성령이 오시는 거예요.
구역 예배할 때 왈칵 뒤집어져 가지고 통회 자복의 역사가 쏟아지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그러면 구역장이 그러겠죠. 목사님! 목사님도 그런 것 잘 못하시는 그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해요.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저는 심방을 하면서 그런 것 여러 번 경험했어요. 그냥 가서 간단하게 몇 마디 권면해 주려고 갔는데 권면해 주고 나면 기도하라 성령님이 그러시면 우리 같이 기도합시다. 막 기도하는데 동네 사람들이 와 가지고 왜 이렇게 시끄럽게 울고불고 기도 하냐고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구역예배에서도 사람을 뒤집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런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구역을 인도하고 기도회를 하고 뭘 해야 될 것 아니겠어요. 그런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대한 기대를 가져야 됩니다.
성령님이 오셔야지 만이 문제가 있는 교회에 유일한 대안입니다. 목회자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변화되어서 새 사람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명절이나 무슨 때에 뭐 사 가지고 오는 것이 목회자의 영광이 전혀 아니 예요. 더 큰 영광은 여러분들이 정말 변화되어서 하나님 앞에 새 사람 되는 것이 목회자의 면류관이요. 교회의 영광입니다. 교회의 자랑은 이처럼 성령이 임하시므로 자랑거리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지 않고 교회에 자랑거리가 생긴다면 쓸데없는 자랑이 생겨납니다. “야! 우리 땅 샀다. 우리교회 오르간 독일에서 들여왔는데 10 억이다.” 맨 그런 것 밖에 자랑할 것이 없어요. “우리 목사님 미국에서 무슨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번에 우리 부 목사님이 키가 1m 80이고 옛날에 미스터 코리아 나갔었다.” 맨 이런 것 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면 말이죠. 성령이 임하시면 거기에서 온갖 신령한 자랑거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핍박을 이기고 가난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돌덩어리 같이 도저히 변화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교회에 능력이 함께 할 때 그 순수한 돌이 깨어져서 정말 하나님 앞에 그 복음에 감격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에 자랑거리가 아니냐 라는 말이죠. 이 모든 자랑거리는 성령의 교회에 임하시지 아니하고는 생겨나지 않는 거예요. 근데 이것을 하나님의 교회에 부어주신 거예요. 얼마나 놀라워요. 하나님이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하게끔 만들어 나가시는 놀라운 역사를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제 한동안은 안 그랬거든요. 이제는 돌아다니면 계속 땅만 보여요. 저게 몇 평이나 될까? 얼마나 갈려나 참 개 눈에 뭐 밖에 안 보인다고 맨 날 다니면 그것만 보여요 건물도 한참 봤었는데 건물을 포기하니까 자꾸 땅만 보여요. 사실 뭐가 있어야 지만 뭘 해보든지 하겠는데 막막하지요. 그런데 교회를 많이 건축한 건축회사의 아주 신실한 사장님이 계셨어요. 장로님 이셨는데 그 분 기도원에서 만났는데 말이죠. 그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일평생 잊혀질 수 없는 큰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제가 가만히 있지 말이야 사람이 교만해서..
전도사적 이야기인데 돈도 없이 무모하게 교회를 짓는 교회에 신앙 없음에 대해서 뭐 그렇게 실란 하게 비난하지 안고 맘에 안 든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죠. 그런데 그 장로님이 아주 권위 있게 말씀을 하시는데 사실 저는 전도사 때 교회를 지어 봤겠습니까? 그런데 그분은 수없이 교회를 지으셨던 분이셨으니까 잘 알아서 인지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말씀 하시더라구요. 사실 그런 게 아닙니다. 자기가 수 없이 많은 교회를 건축하였지만 어느 교회는 교회 건축하는데 이 십억이 드는데 이 십억을 다 모아서 통장에 현찰로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그 건축 위원들이 가 가지고 벽돌이 일억 원어치 들어간다고 해서 일억 원어치 달라고 그랬더니 벽돌공장 직원이 일어서지도 않더래요.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어차피 외상으로 달라고 그럴 것 뻔한데 교회처럼 힘들게 하는 데는 처음 봤다고 그러더래요. 그래가지고 이 사람이 당신 말 다 했어? 품속에서 백 만원 짜리 백장을 그 보는 앞에서 깔았데요. 그랬더니 이 사람이 갑자기 두 손을 모으더니 죄송하다고 그러더래요.
그렇게 건축을 시작했는데도 결국은 교회가 갈라지는 교회가 있고 십 원도 없이 시작했는데 교회가 지으면서 성도들의 마음속에 성전도 함께 지어서 그렇게 눈물로 입당 예배를 드리는 그런 감격적인 교회도 봐 다는 거예요. 거기서 아 역시 상식을 깨는 신앙의 원리가 있구나 신앙의 원리는 상식을 깨는구나 야 역시 돈 문제만은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런 교회 공통점이 무엇 이예요. 건축을 하면서 은혜가 떨어지고 고통을 받는데 이 교회는 말이죠.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데 이런 교회는 성령의 능력이 그 교회에 함께 하시는 거예요. 더 많은 사람들이 변해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해요. 사람들이 왜 개척교회에 왜 안 오냐? 교회 지을지 모르기 때문에 안 온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평면적인 생각이고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함께 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내가 주님의 참 사랑을 알았는데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되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십시오. 교회가 당하는 위기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다양하고 가지 수를 헤아릴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 모든 위기와 어려움의 대한 유일한 대안은 성령의 능력이 그 위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위기에 처한 교회와 함께 해줄 때에 이들은 자신들이 상상도 못했던 방법으로 자기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의 역사를 본 겁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두 번째로 하나님이 주신 것은 무엇이냐면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용기와 담력을 교회와 모든 성도들에게 물 붓듯 부어 주신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기도는 했지만 이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받아들이면서 교인과 그리고 거기에 모인 많은 지체들은 잠시 위기를 느끼고 위축되는 것을 느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부어지시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나니까 그런 두려움이 하나님께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담대함이 생겨나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담대함이 그들을 지배해서 그래! 우리는 이제 이전보다도 더 큰 목소리로 더 뜨거운 마음으로 더 많은 곳을 다니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피묻은 그리스도의 예수의 복음, 우리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예수그리스도의 피묻은 복음을 외치는 일에 매진하자! 그러고 처음에는 몇 사람들이 나와서 예수 믿으라고 이러던게 핍박을 가해서 꽝하고 터뜨리니까 뻥 터지면서 그냥 복음에 사무친 사람들이 온 예루살렘에 흩어져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죽든지 살든지 담대히 외치는 이러한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위기를 얼마나 놀랍게 하나님이 바꾸어 주셨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서 그 놀라운 은혜로 구원을 입어서 이렇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교회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연약한 모든 옛 생활을 벗어버리고 사자와 같이 담대한 마음으로 살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말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마지막으로 어떨 때 하나님이 이 두 가지 축복을 그렇게 놀랍게 부어 주셨습니까? 빌기를 다하매 무슨 뜻입니까? 기도하기를 모두 다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의 큰 능력이 임하고 그리고 권능이 임하고 담대한 복음의 확신들이 다시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하니까? 빌기를 다하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교회가 이런 특별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위기를 주실 때에는 위기와 함께 무엇도 주시냐면 빈 잔도 함께 주십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자 너희의 기도의 땀을 담아라 주십니다. 거기에 기도의 잔을 채우는데 여러분 얼마나 기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는데 이 교회를 기도하는 집이 되게끔 만들어 주는 일에 여러분 얼마나 자신을 보태고 있습니까? 주일날 와서 예배 달랑 드리고 그리고 가는 것으로 여러분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기도생활이라고 해봐야 조끔만 어려움이 일어나고 환경이 바뀌면 후두둑 끊어져 버리는 실낱같은 기도생활로 그리스도인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실핏줄만 가지고 인간이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힘찬 박동소리가 있고 그리고 그 박동과 함께 밀려나가는 동맥이 있어야 할 것이고 그리고 그리로 공급되어 들어오는 정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실핏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실핏줄만 가지고 어떻게 살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막 경렬하게 운동을 하고 나면 핏줄이 팍팍팍 터지는데 왜? 운동양의 비해서 핏줄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얼마나 유약한 삶을 살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중에 하루에 한시간씩 이상 기도하는 성도들이 몇 명이나 됩니까? 더군다나 그 기도의 시간은 정말 하나님 앞에 받쳐진 친밀한 기도의 시간이 되고 있습니까? 그렇게 기도하지 안고도 여러분도 감히 승리한 우리들 사이에 동참하기를 원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라 라는 조그한 책을 냈을 때에 어느 신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아주 탁월한 여학생 이였습니다. 아줌마인데 그 책을 쓰고 나서 편지를 보냈는데 그런 얘기를 해요. 시를 적어서 보냈는데 다는 기억이 나지 안지만 이런 얘기가 나와요. 교수님 저는 강남에 있는 큰 교회를 다니고 있는 한 사람의 성도입니다. 그러나 저는 요새 목이 메여서 교회를 쳐다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도하지 안는 교회를 얼마나 슬퍼하고 계시는지 제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마다 대문 앞에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쓰여 있지만 저녁때가 되면 성도들의 발걸음은 끊어지고 굳게 잠긴 미제 열쇄와 경비병들의 호루라기 소리만이 그 큰 교회당의 적막을 깨우고 있습니다.
정말 제가 대단하다고 그랬습니다. 야 얼음이 물에서 나왔을 때물보다 차구나 어쩜 그렇게 예리하게 절절히절절히 그 시대의 교회에 대해서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헤어졌지만 어디에선가 분명히 기도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리라 저는 믿어 의심치 아니합니다. 여러분 지겹도록 기도 안 합니다. 한국교회, 그리고 기도한다는 현장에 가보면은 맨 풍선 부풀리기 북 뚜드리고 말이죠. 감정 막 살려서 기도 크게 하면 크게 하고 작게 하면 작게 하는 거지만 자기 중심을 하나님께 다 받치는 인격적인 기도가 돼야 되잖아요. 그 바람잡이 식으로 말이죠. 마치 어느 날 와서 와 르르르 때우는 그런 식의 기도를 해야 되겠느냐 말이죠.
오늘 낮에도 잠깐 스펄전의 관한 이야기를 읽었는데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펄전이 다섯 여섯 시간 기도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그랬죠. 그렇게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정도 그것도 적은 것은 아니지만 기도하면서도 남에게는 없는 그런 탁월한 열매를 누리고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서 스펄전 가까이에서 본 어떤 사람이 이런 증언을 남겼습니다. 그분은 엄밀한 의미에서 기도하는 시간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기도의 영속에서 사셨다. 그런 고백을 했어요. 야유회에 한번 나갔는데 동역자들이 야 정말 좋다 하고 있을 때에 스펄전 목사님은 감격에 벅찬 얼굴로 양손을 들고 말했답니다.
여러분 이 아름다운 자연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우리같이 기도합시다. 그러니까 기도생활이 칸막이가 되지 않았다 이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칸막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칸막이도 좀 제대로 된 칸막이면 말을 안 해요. 기도가 이쪽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삶이 기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의만 쌓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정말 우리는 기도 안 하기로 뜻을 세운 사람들처럼 기도 안 합니다.
정말 한국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기도 가운데 진리를 잘못 알았기 때문에 쓸데없는 기도 빼버리고 기도는 하나 마음에 없는 기도 빼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안는 것들을 구하는 기도 빼버리고 그리고 괜히 말로만 하는 기도 빼버리고 다 빼버리고 나면은 도대체 얼마나 기도가 남을지 저는 의문이 갑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정말 하나님 앞에 빌기를 다했을 때에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어요. 다 했을 때에 무슨 뜻입니까? 누가 기도회 끝내자고 종을 치고 나니까 이런 역사가 임한 게 아니라 주님의 마음에 그래 이런 위기 속에 내가 너희에게 이런 기도의 잔을 주었는데 너희들이 기도의 눈물로 기도의 잔을 채웠구나 그래 너희들은 이제 다 빌었다 그랬을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쏟아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꿈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인생의 참된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시집가고 장가가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승진하고 먹고살고 좋은 집 살고 넓은 땅 마련하는데 여러분들의 꿈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꿈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몸담게 하신 이 교회에 우리의 모든 꿈이 묻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와 함께 아파하고 이 교회와 함께 울고 이 교회와 함께 기도하며 이 교회와 함께 복음을 전하며 이 교회에서 주님을 섬김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 내가 가장 유능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확신을 가진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그 전에서 늘 기도하기를 힘썼던 것도 바로 이런 확신과 이런 신념과 이런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기도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건축을 할 때에 큰돈을 내는 것은 기본적으로 마음만 가지고는 안되고 돈이 있어야 합니다. 없으면 마음이 아무리 있어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가난한 사람도 할 수 있고 부요한 사람도 할 수 있고 건강한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이 골목 저 골목 누비면서 복음을 전하고 핍박을 받는 것은 건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건강하지 안는 사람도 누워서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집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드는데 있어서 주님이 어떤 자격 여건을 주셨습니까? 여러분 방금 믿은 사람은 교사로 세울 수가 없습니다. 방금 믿은 사람을 교회에 중직이 되게 할 수 없고 믿은 지 얼마 안된 사람을 신학교 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기도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빈부나 귀천이 없이 누구든지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당신의 교회를 향한 그 영광을 보여 주시고 그리고 위기에 처한 조국의 교회에 이러한 충만한 영적인 능력과 복음의 담대함으로 되 갚아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하는데는 빈부나 귀천이나 학식이나 신앙의 연조 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이 기도의 게으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결국은 기도의 게으르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보다는 세상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고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재물과 보물을 모으고 지위를 위해서 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그 모습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자로서의 거듭난 삶을 요구하고 계시지 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누군가는 빌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기도해야 하고 누군가는 간구 해서 그 기도로 말미암는 고난의 잔을 채울 때에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그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하나님이 어떤 의미에서는 한편으로는 마음 아파 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로 말미암아 다시 얻게될 당신의 백성들을 보시면서 얼마나 즐거워 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아들이 아버지 앞에 드리는 그 보혈의 피를 받으시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아들이 흘리는 눈물의 기도를 열납 하신 후에야 비로소 보혈을 받으셨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빌기를 다하지 아니하고는 항상 교회는 불에 타다 남은 나무 동강과 같은 그러한 교회가 되어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임하셔서 뭐가 되는 것 같다가는 물 건너가고 교인들이 변할 것 같다가는 다시 옛 삶으로 돌아가고 뭔가 역사가 일어날 것 같은 긴장이 있다가는 이전 보다더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되는 것은 모두 누군가가 기도의 잔을 채우지 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교회의 가장 큰 재산은 지위가 많고 지휘가 높고 돈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많은 것이 교회의 자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은 당신이 하실 일들을 누구를 통해서라도 해 나가십니다. 또 안 하시면 안 하시는 대로 사는 거지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교회의 가장 커다란 재산은 교회의 대처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재산은 교회를 위해서 사무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시야를 가지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 교회가 어떠한 영적인 상태를 가지고 있으며 그 속에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 들려주시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다수가 아니라 이렇게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울부짖는 그 마음으로 이 교회를 향해 빌기를 다하매 라고 하는 주님의 평가가 주어지기까지 눈물과 기도의 땀을 보태는 그런 성도들로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삶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정말 기도하는 집이 될 수 있는 그런 특징을 가질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우리는 빌기를 다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모두 가득 찼다고 인정해 주실 수 있는 그러한 기도가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지 안겠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것을 생각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기도하시라고 하는 이 명령 우리가 도외시하며 살 수 없는 성도들입니다. 주님이 몸소 그렇게 기도와 십자가의 사건이 떼어놓을 수 없는 사건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놓고 기도하시며 그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을 하셨고 기도 속에서 그 십자가를 기꺼이 받으셨으며 기도 속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기도 속에서 매 달리시고 기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의 헌신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복잡한 생활 환경이나 여유 없는 직장 생활 때문은 아닙니다. 정말 우리들이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그런 것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도 돌아보면 몇몇 특별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가장 바쁠 때 기도생활을 풍성하게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요새 기도 제목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옛날에 내가 만족스러웠던 기도의 생활로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 저의 빼놓지 안은 기도 제목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여 달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 십자가에 정신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말로 하지만은 기도 속에서 그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 의지가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에 쉽게 환경에 굴복하고 육체의 굴복하는 삶을 살면서 귀한 기도의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그러는 사이에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라고 하는 간판에 빛이 바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빌기를 다 할 때에 이 교회에 부어 주실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과 복음의 장엄한 능력 그것을 통해서 구원받고 그것을 통해서 변화될 고쳐질 이 세상을 향한 위대한 전망들을 보면서 우리의 기도를 위한 헌신과 우리의 기도를 위한 희생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자기를 버리고 부인하는 마음으로 기도의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렇게 깊이 기도하며 기도의 세계 속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를 위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기도 속에서 아주 드넓은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제 거기에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의 그 넓은 은혜의 세계를 보면서 그 속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하나님의 교회가 주님의 나라와 성도들에게 기여하는 교회가 될 수 있을 지에 대해서 꿈과 사랑을 나누어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십자가에 정신으로 기도하기를 명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를 볼 때마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많이 좀 생겨났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특별한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의 강권하심에 붙들려서 자신의 기도를 위해 온전히 사용하고 싶어하는 그런 사람 그렇게 해서 자기를 모두 받쳐서 아버지 앞에 매 달리는 삶을 살고 싶어하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또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비록 높은 지위와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위치는 없어도 그들이 주님을 향해서 기도한 그 모든 기도의 헌신들과 무릎이 약대 다리처럼 굳어지도록 하나님을 찾으며 매 달렸던 그 모든 기도의 헌신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 없이 살아가고 있고 더욱이 기도라고 해도 모두자기 자신의 먹고 입는 문제 이외에는 더 이상 기도하지 안는 이러한 성도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성도들이라고 말 할 수 있으며 어떻게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안 성도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커다란 바램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메 달리고 얼마나 주님을 향하여 부르짖었는지 주님이 흐느끼며 기도하는 여러분들을 찾아오셔서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제는 됐다. 이제는 너희의 빌기를 그치라! 이제는 너희의 기도의 잔이 찼고 내가 위대한 일을 행할 차례니라. 말씀해 주실 때까지 그치지 아니하겠다고 각오하며 주님 앞에 거듭 무릎을 꿇고 아버지 앞에 주님의 이름을 부를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는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의 복음이 우리의 울타리를 넘기를 원하시고 주님이 아니면은 고쳐질 수 없는 이 병든 세상과 주님이 아니면은 치료 될 수 없는 망가진 인간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이 세상에 소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끼리 여기서 먹고 마시고 즐기려고 이 교회를 세운 것도 아니고 주님이 여러분들을 좋은 설교 듣고 은혜로운 예배드리게 하시려고 이 교회에 모아 주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험하고 그리고 비 진리가 가득 차고 그리고 태만하고 형식적인 신앙이 가득 찬 곳에서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을 쫓아 살려고 하는 성도들을 여러분 곁에 주시고 하나님께서 주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 교회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인도하셔서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우리를 서로 만나게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함이 아니요 또한 아직까지도 우리 밖에 있는 수많은 양떼들을 위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내게는 우리 밖에 양떼들이 있어서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저희와 한 무리가 되게 하여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땅을 고치고 병든 영혼들을 고쳐 내기 위해서 우리들은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성령의 권능과 그리고 복음 전도를 위한 불붙는 마음과 말하고 증거하지 아니하고 는 백일 수 없는 복음에 대한 체험이 필요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입술의 말이 아니라 삶으로 고백하지 안들 수 없는 그리스도의 정신의 사무치는 삶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것들로 충만해 지는 교회가 되어지지 아니하고는 우리는 노도와 같이 넘실거리는 세상에 이 교회가 아무것도 도와줄 힘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아름다운 축복은 오로지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손길로부터만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든 우리를 방해하는 여건과 싸우고 우리 안에 다른 것들로는 헌신해도 기도로 헌신하지 안으려고 하는 우리자신과 더불어 싸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의 안일과 그리고 육체가 편안하기를 원하는 모든 육체의 요구를 거절하며 하나님 앞에 더욱더 모이기를 힘쓰고 부르짖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가 정말 얼마나 하나님 앞에 깨어있는지를 알자면 그것은 주일예배가 아니라 금요 예배를 보면은 알 수 있고 새벽기도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시간들을 보며 여러분의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파장처럼 모였다가 흩어지는 기도회 감동도 없고 부르짖는 소리도 없는 그러한 사람들의 기도회가 교회의 중심부에 있는 한 그 교회는 하나님 앞에 깨어있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도의 역사가 망하면 지금은 흥하는 것 같지만 언젠가는 망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교회를 주님이 바라보실 때에 열린 교회 말씀하실 때에 아 그래 그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지 라는 그 인상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여러분은 얼마나 보태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교회는 거처 가는 신앙생활의 한 주막과 같은 곳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또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래서 급기야는 이런 일들이 폭발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하나님을 만나는 부흥의 놀라운 역사를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핵 폭발적인 도구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받치는 기도 생활의 헌신하고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모든 유익을 버리고 이렇게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본 받으면서 그 분의 정신으로 우리들은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이 고난과 슬픔을 많이 당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당신을 핍박한 우리를 향해 상처받지 안으신 채 온유하고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운명하셨습니다. 그분이 그런 생애를 사실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기도의 생애를 사셔서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친밀함과 은혜가 이 세상에 있는 고난과 박해로 말미암아 받는 상처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그런 생애를 사셨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능력을 의지하시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기보다는 하나님이 자기를 붙드심으로서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남김없이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그 십자가의 정신으로 기도하는 생애를 사신 것이 우리 주님의 생애의 발자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런 놀라운 사랑과 십자가를 위해서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남김없이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이 우리에게 더 주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주님이 주셨고 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주시도록 약속을 하시고 당신의 은혜로운 보배의 창고를 열어놓으셨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은 그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도록 주님이 허락 하셨고 이 은혜로운 축복을 위해서 주님은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도 기도하시면서 자신의 인생을 마치셨습니다. 공생애를 기도로 시작하시던 그분이 자신의 공생애를 기도로 마치시고 그리고 지금도 그분은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분투하며 사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사실은 결국 기도하는 사람이외에는 주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없고 기도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주님의 계획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말하는 것도 중요하고 많은 지체들 앞에서 내가 만난 하나님을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더 많은 시간을 우리는 연약한 지체들과 교회를 위해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일에 보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빌기를 다하매 라고 주님이 인정해 주시기까지 우리의 연약한 기도생활을 복종시키고 우리가 보다 헌신된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매달려서 결국은 우리의 흘리는 기도의 눈물과 부르짖는 우리의 목소리와 아버지 앞에 간구 하기 위해 씨름하기 위해 흘린 땀 한 방울 한 방울 한마디 한마디가 결국은 주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는데 요긴 나게 쓰여질 수 있도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 먼저 기도로 주님 앞에 받치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5.기도와 견고함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krl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단1:8)
다니엘은 영화의 주인공 같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특별히 바벨론에 끌려가서 그가 경험한 놀라운 경험들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다니엘의 시대와 같이 절망적인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떻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영광스러운 신앙생활인지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나라가 망한 것은 다니엘 1장의 무대보다도 20년 후의 일이지만 이때가 주전 650년경이었는데 이때부터 철저한 내정간섭과 함께 사실상의 속국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아직 왕이 있는 상태에서 다시 쳐들어 와서 기병들을 빼앗아가고 좋은 사람들을 뽑아가서 유다 나라의 왕권을 약화시키고 그들을 인질과 볼모로 삼아서 마지막에는 애국심을 그들에게서 빼어내고 대신 자신의 나라를 위해 충성하고 봉사하는 사람을 만들려고 다니엘과 세 친구가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바벨론에 가자마자 제일 먼저 당한 시험을 심각하면서도 재미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왕이 이 아이들을 잘 먹여서 기르라는 특별한 명령을 내리게 된데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왕의 상에서 나오는 산의진미로 이들을 먹이고 3년간 잘 가르쳐서 나라를 위해 기여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당시의 굶주리는 비참한 유다의 상황으로 볼 때는 행운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누가 여러분들에게 왕이 먹는 화려한 식탁에서 함께 먹도록 요구받는다면 영화 중에 영화입니다. 그러나 이 소년들이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행운과 같이 찾아온 세상의 영화가 커다란 고통거리며 번민의 제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을 가진 사람의 모습니다. 여러분은 이세상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부귀와 영화, 그러한 세상적인 즐거움이 찾아올 때 여러분들은 신앙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고통과 괴로움이 되어 본적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들이 깊은 어려움에 봉착하였을 때 어떻게 대처하였는가입니다. 다니엘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은 그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를 환관장에게 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물론 그전에 하나님 앞에 당연히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런 고민을 하고 이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이 임금의 상에서 나오는 음식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두 가지의 가능성을 봅니다. 이 왕이 먹기 전에 왕보다 높다고 여기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나온 음식이었다는 점에서 불결한 것이었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가증하게 여기는 짐승으로 요리한 음식을 이들은 먹었을 것이고 이런 것들이 왕의 상에 올라왔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도 그 음식을 먹는 것은 자신을 더럽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 다니엘이 이 모든 일을 하기 전에 뜻을 정하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뜻을 세운 것입니다. 이 뜻은 죄 때문에 나라가 비참하게 멸망하는 것과 수많은 가족들이 죄 때문에 이산 가족이 되는 것도 경험하였고 이러한 죄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있으니 우리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단순한 결심이었습니다. 그렇게 뜻을 세웠다는 것은 그 뜻을 펼쳐나가는 여러 가지 방법들과 타협을 하고 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 있지만 그러나 양보할 수 없는 선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양보할 수 없는 그 선이 내가 여기에 와서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범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그 범죄를 피할 수 있다면 그렇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범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을 해보겠지만 그러나 결국은 조화를 찾을 수 없을 때에는 언제든지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자기의 자리에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뜻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니엘서를 읽으면서 다니엘은 보통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뛰어나고 깊은 영적인 세계를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예레미야의 서책을 보면서 이스라엘의 포로기한이 70년이라는 것을 포로 생활 67년에 깨달았습니다. 조국의 광복을 꿈꾸면서 역사에 대한 찬란한 전망을 발견한 사람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꾼 꿈을 그 꿈이 무엇이며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특별히 주었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다니엘이 얼마나 영적으로 깊은 기도의 세계를 유지하였겠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를 계속 읽으면서 우리가 받는 인상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6장에는 기도하면 죽인다는 조서를 알면서도 전에 하던 방식대로 예루살렘을 향해서 하나님께 하루에 3번씩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9장의 놀라운 부흥에 전망도 사실은 다니엘이 그처럼 깊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더 깊고 오묘한 역사의 비밀과 마지막 때의 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깊은 기도 속에서 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9장에서도 간절히 역사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려는 것은 견고한 삶과 기도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입니다. 다니엘은 이 신앙 생활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여러 왕들을 섬기는 변화 속에서 살면서도 한결같이 하나님이 그를 높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열심히 자기의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관리로서 나라와 백성들이 잘 살게 다스리고 많은 서류를 결제하고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일을 하였지만 하나님을 섬긴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지 고급 관리로서 부귀와 영화를 단지 누린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의 생애를 통해서 볼 때 겉으로는 바쁘게 정사를 돌보는 격동기 속에 살았지만 그것은 기 사람의 외면적인 모습이고 내면적으로 그런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섬긴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견고함이 있었고 요동함이 없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영성이 더 깊어진 사람이었습니다. 나이가 들며 세월이 흘러가서 바벨론의 생활이 수십 년이 지나도 더 신령한 세계가 열린 사람이었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왕국을 바라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신령한 세계를 소유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기도는 익숙해지는 것이 없습니다. 아이들 가르치는 것도 숙달이 되고 설교도 숙달이 되지만 기도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어제까지 청산유수 같은 사람도 자신의 영혼을 잘못 관리하면 오늘은 절벽 앞에 서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저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은 어린 아이 같은 간절함과 진실함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더 깊이 있는 기도세계를 갖는 사람이 다니엘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나이가 많이 들어서 직장에서도 더 이상 필요가 없다고 그러고 나를 필요로 하는 데가 별로 없어집니다. 손자 애들도 냄새 난다고 가까이 오기 싫어합니다. 여러분은 그 노년기에 무엇을 하시렵니까? 깊이 연로해졌을 때 기도 자체를 사명으로 여기고 살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먹어가고 세월이 흘러가면 마음이 기도할 수 있는 어린아이가 같이 되어지지 않고 더 신령해지는 것이 아니라 각질이 생기고 굳어져서 더 세속적이 되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신령하던 목회자들이 나이 먹어서 세속화 되는 일은 있어도 젊었을 형편없던 사람들이 나이가 먹어서 고상해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오죽하였으면 스펄전은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그렇게 하나님을 추구하고 살지 않으면 나중에는 나에게 설교를 부탁하는 교회가 어디 없나 어디를 가서 할 일이 없나하고 생각하는 그런 말년을 보내게 된다고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영혼을 살리고 교회를 키우는 재미로 목회를 하는 거이 아니라 늘 교인들이 나를 언제 나가라고 하면 어쩌나 라는 불안 속에서 말년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깊이를 더하는 영적인 생활의 놀라운 진보를 가져왔기 때문에 이 다니엘은 깜깜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를 발견한 것입니다. 사실은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70년간 이방인에 의해 다스림을 받았으면 끝난 것이 아닙니까? 태어나지도 않은 애가 이제는 70의 노인이 된 세월입니다. 조국에 대한 기억을 가진 사람은 거의 다 죽은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절망 속에서 하나님은 유독 다니엘에게 포로시대가 곧 끝날 것과 이스라엘을 사용하셔서 얼마나 역사 속에서 놀라운 일을 행할 것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다니엘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오늘 1장 8절에서 답이 나옵니다. 뜻을 정하였습니다. 뜻을 정하는 그 삶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살았습니다. 한나라의 관리로 살아가면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털어서 먼지가 안 나는 사람이었습니다. 겉과 속이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삶을 살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문제와 충돌이 된 때에는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사명감에 살았던 그 높은 명예와 지위를 버릴 준비를 하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의 법령으로도 하늘을 향해 열려있는 다니엘의 기도를 막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다니엘이 그때 기도를 열심히 한 것이 아니라 한 번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운 것입니다. 그것은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고 이 자리에 내가 서 있어야 된다는 확신이 있으면 요지부동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축복해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서에는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사람을 평강에 평강으로 인도하시는데 이는 저가 주를 의뢰함이라고 나옵니다. 의로함이라는 히브리어 본문이 왜냐하면 그 속에 하나님을 의뢰함이 있게 때문이라고 나옵니다. 견고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동치는 삶 가지고는 깊은 기도 속으로 못 들어갑니다. 뜻을 정해야 합니다. 부는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 같은 그런 마음, 뜻의 정함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기도만 다니엘같이 형통한 삶을 살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식과 생각과 많은 경험들은 잡다하게 머리 속에 많이 있어도 무슨 뜻을 세워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더 화나는 것은 뜻을 세우고 실패하면서도 어쩜 그렇게 자신에게 대해서 분노할 줄을 모르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에 뜻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그 뜻이 무언가에 의해 꺾이면 내가 왜 그것에 의해 뜻을 꺾고 굴복하였을까 라고 자신에 대해 분노해야 합니다. 단지 연약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마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난 것을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그 하나님을 섬기기를 삶에 의해서 입증이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분노는 다른 사람이 하고 자신은 괜찮다고 위로하니 무슨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무엇인가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 살아야 될 삶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씀하시는가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러면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것을 알았으면 뜻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는 다른 것들은 양보해도 그 뜻을 세우는 것을 최고로 생각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뜻을 세우고 결심을 하고 살아야 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패역을 깨달아도 그것은 너무나 든든하여 무너지지도 않고 사랑하여 버리지도 않는 삶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선한 일을 위해 뜻을 세운 것은 아주 쉽게 무너집니다. 그런 신앙 생활의 모습이 실제의 삶 속에는 요동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무엇을 하면 뿌리를 뽑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식 집에 가면 칼로 횟감을 요리하는 사람에게 하루는 물어보니까 이 칼로 한 점의 고기를 써는데 3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3년이 걸려야지만 비로소 칼을 들고 도마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에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한다고 합니다. 생선 한 토막 써는 자격을 얻기 위해서도 그 굿은 일을 3-4년 하는데 무엇을 하면 뜻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벽 기도를 해야겠다고 맘을 먹으면 6개월이나 1년은 집중적으로 해야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2일 나오고 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뜻을 세우면 뜻을 세울 때부터 곧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작심삼일일 것이라고 맘을 먹고 계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언제나 요동하는 생활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금을 깨려고도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파야 하는데 여기서 한 삽 저기서 한 삽 캐면서 돌아다니면 언제 금을 캘 수 있겠습니까? 토요일 강단을 위한 기도를 하려고 결심을 하였으면 2-3년은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주님을 위해 처음 결심을 할 때는 그 마음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되다는 것도 저는 압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진실만으로 통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힘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진실되게 눈물을 흘리며 읽었더니 마귀가 무서워서 도망갔다더라는 이야기를 읽어 본 적이 있습니까? 진실된 것도 좋지만 그 위에 강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뜻을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칙은 뜻을 세우는데 그 뜻을 무너뜨리지 않고 사는 방법은 그 뜻을 무너뜨리는 려는 요소보다 훨씬 강한 이 집착을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뜻을 세우면서 사는 길은 고달픕니다. 자신과 환경과 싸우며 악마의 손톱자국을 얼굴에 받으며 사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양보하면 나도 함께 무너지는 것이다라는 강한 집착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삶이 뭔가 하나님 앞에 결심하면 집요하게 그것을 붙들면서 살아가는데 요구하는 희생을 지불하지 않는 것입니다. 조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겠다고 결심하면 다른 사람이 편하게 자고 쉴 때 무릎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먹고 즐기며 살 때 그는 금식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 돈 많이 모으고 세상적으로 잘 나갈 때 그것들을 포기해야합니다. 그래야지 뜻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품에도 안기고 하나님 품에도 안기고 세상의 좋은 것도 한 손에 넣고 하늘나라도 한 손에 넣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좋을 것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였습니다. 주님도 앞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시면서 잠시의 고난을 개의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우리의 삶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어떤 때는 격동적으로 벅차서 뭔가 세상을 삼길 것 같고 내 인생 모두 하나님 드릴 것도 같은데 어떤 때 보면은 하나님을 완전히 등지고 살아갑니다. 그런 정함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기도의 진수를 맛볼 수 없습니다. 그는 계속 그렇게 실패하는 삶을 수행할 뿐이지 승리의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유는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으로 인하여 할 수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을 종합해서 말하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워주실 때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울만하니까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려면 깊이 매달려서 이것이 최고의 가치이고 내가 모든 것을 실패해도 하나님 앞에 주님이 기뻐하셔서 세운 이것을 이루리라는 강한 집착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충성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날마다 목회 하는 것이 즐거워서 그 즐거움 때문에 목회 하였다면 그것이 무슨 짐이 되겠습니까?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고 맥이 다 빠지는 적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그곳에 있으라고 하였기 때문에 거기서 승리하려고 애쓰는 삶이 견고한 삶입니다.
다니엘이 그것을 결심한 것입니다. 나라가 죄 때문에 망하였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그렇게 결심만 하면 하나님이 출세도 시켜주고 죄도 안 짓게 승리만 하고 좋은 길로 나가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실제로 다니엘의 생애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만은 않았습니다. 수시로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수시로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박해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양보할 수 없는 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삶이 그렇게 확정되었으니 깊은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놀라운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일도 하나님이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냄비처럼 끊는 사람은 많지만 견고하게 주님이 나를 여기에 세워주셨으니 하는 생각에 주님 앞에서 뜻을 세우고 사는 사람, 그 뜻이 주님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비바람이 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고난이 오는 것을 기이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가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 사는 이런 고난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깊은 기도의 세계를 쟁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호위호식하고 아무런 마음의 근심이 없으면서 깊은 기도의 세계를 누린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기도의 사람들은 근심에 매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고난이 없어서가 아니라 깊은 기도 속에서 고난과 변화무쌍한 삶에 커다란 어려움을 능가하는 평강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뜻을 세우지 못하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고 세운 뜻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평강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평강이 있으면 자기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습니다. 고난이 몰려오고 시련이 와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기 때문에 내 영혼이 평안하다고 찬송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자리가 어렵지 않습니다. 마음이 뜻을 정하지 못하니까 마음이 환경을 따라 요동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희생이 적을까라는 계산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힘이 없어서 연약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전심으로 사랑하며 살려고 하는 마음이 결핍된 것입니다. 연약한 것은 뜻을 지키면서 살려고 하는데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내할 수 있는 환경보다 더 큰 고통이 몰려올 때 그때 하나님이 그 인생이 얼마나 연약한지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 경험한 좌절과 대충 눈치를 보면서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는 사람이 겪는 좌절은 종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전자의 좌절은 그 좌절을 통해서 오히려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야 마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오면 그 어려움 속에서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을 더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좌절은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실패 속에서 경험하는 좌절입니다. 그런 식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아무 것도 배우는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하나 한다고 하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정하였으면 혼신의 힘을 다해 그 일을 위해 부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세움 받은 자라리라고 생각이 들면 그 곳에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 붙는 사람이 합니다. 누군가는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시니까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선교의 역사도 그런 진리를 보여줍니다. 이리 저리 요동치는 삶을 사니까 도저히 기도의 진전도 없고 기도도 자체가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해야 되나 이런 생각만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사람은 아무 것도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런 깊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고난이 와도 시련이 와도 내가 이것을 양보할 수 없다는 신앙을 뜻을 지키며 그것을 파수하려는 결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는 어려워서 기도를 못하고 평안하고 따뜻할 때는 그것이 주는 즐거움을 버릴 수가 없어서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이 너무 많아서 기도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유혹이 너무 달콤해서 기도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마음이 아파서 기도를 못하지만 어떤 사람은 너무나 힘이 나서 좋아서 기도 못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오면 고난의 아픔이 너무 커서 기도를 못하고 그러면서 고난만 좀 없어지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하지만 고난이 지나고 따뜻함과 평안함이 오면 그 평안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매달릴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언제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녹아져서 주님만 바라보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상황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나라가 평안하고 안전하고 승승가도를 달릴 때에도 기도하였고 지금처럼 핍박의 위기 가운데서도 기도하였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정치적인 칼날아 번뜩이는 때에도 기도하였습니다. 환경이 그를 기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뜻을 세운 삶, 요동하지 않는 신앙 생활이 그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투쟁의 정신을 가지지 않으면 결코 진전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인들은 하나님이 철모 씌워 완전 무장시켜 주었더니 다 벗어버리고 파자마 바람으로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의사도 없고 생각도 없고 계획도 없이 전투하는 삶을 위해서 뜻을 세울 각오도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매일 실탄을 공급받으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런 상황입니다. 다니엘이 삶을 먼저 깨끗이 정리하고 단순하게 정리하니까 이런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뜻이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것은 내가 포로로 끌려왔지만 뜻이 있어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나쁜 놈들에게 포로로 끌려올 바에야 죽는 것이 낮다고 약을 먹고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이스라엘 회복의 위대한 역사를 읽어낸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인도해 가실지, 어떻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포로의 상황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실지 자신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여러 가지 가능성을 다 버리고 죄 때문에 나라가 망하였으니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고 우리는 주님만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승승장구 승진을 하여도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 사람을 안일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돈이 생기는 것은 재앙입니다. 꿈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에 그렇게 간단하게 뜻을 세운 것입니다. 물론 다니엘 앞에 있는 인생은 여러 갈래의 것이었습니다. 재상이 될 수도 있어서 중간 관리가 될 수도 있었고 마지막까지 포로로 남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는 어디서 어떤 삶을 들 살든지 뜻을 정한다 죄를 짓을 수 없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삶을 단순하고 간단하게 하니까 무엇을 하든지 기도하든지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하나의 라인을 타고 흘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살고 싶고 이방의 땅에서 주님을 높이고 살아가야겠다는 것입니다. 그 꿈을 가지고 있으니까 어떻게 역사를 이끌어 가실지를 다니엘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많은 사람들이 새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계획을 하나님이 보여주고 싶을 때 교회가 아무렇게나 되든지 나는 상관없다 내 관심은 승진하고 돈 많이 벌고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이 뜻을 보여주시면 그 사람은 나는 그것에는 관심도 없다 나와는 상관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기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생활 방식 자체가 신령해야 합니다. 하나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점에서 뜻을 정하고 인생을 결정한 사람은 기도는 많아도 기도 제목은 단순한 것입니다. 결국은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세상에 살아서 주님을 섬기고 나의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높아질 수 있을까가 그 사람의 기도의 중심입니다. 뜻을 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도 제목 자체가 혼란스럽습니다. 그 사람은 약도 구하고 칼도 구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고 정돈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은 하나님을 위해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정리가 안된 사람은 기도 제목이 정리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월은 계속 흘러가고 사람은 그 하나님의 말씀에도 만성이 되어갑니다.
뜻을 세워야 합니다. 질주하는 여러분들이 인생의 길이 잘못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멈추는 장치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쉽게 멈추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뜻을 세운 것입니다. 다니엘이 뜻을 세웠다는 것은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 뜻은 성취되어야하고 이것이 성취되지 않으면 내 목숨도 내 놓겠다는 결단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결단을 가지고 자신의 뜻을 세워 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무엇인가 자기분야 한가지씩 하는 사람들은 뜻을 세운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흔들리고 저렇게 흔들리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입어서 여기까지 걸어왔고 주님의 놀라운 풍성한 삶에 대한 약속이 있고 기도의 삶에 대한 약속이 있는데도 내 인생은 도무지 변화되지 않을까 내 영적인 상태는 왜 변화되지 않는 것일까 라는 고민을 가져야 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갈망을 지닌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마음만 바꾸고 싶은 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자하는 것을 방해하는 옛 삶에 대한 미움과 분노를 지니고 삶과 자신의 기도와 마음이 함께 가는 것이지 마음과 삶은 버려 두고 기도 하나만을 잘해보는 길은 없을까라는 생각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월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이루어질지 안 이루어질지는 나를 한번 힘껏 드려 봐야 아는 것입니다. 피리를 만들어서 이것이 소리가 잘 나는지 안 나는지는 한번 불어봐야 아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힘껏 다 드려서 자기 안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요소를 제거해 버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변화가 없고 우리의 기도 생활이 정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매일매일 지나는 동안 궁극적으로 여러분을 변화시키는 드는 비용은 점점 이자가 불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램프에 불을 끌려고 해도 금방 불을 끈 램프는 다시 불을 붙이려면 그 근처에 불을 가까이만 가져가도 불이 붙습니다. 그러나 차가운 밖에 오래둔 램프에 불을 붙이려면 성냥을 몇 개를 그어야만 겨우 불이 붙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뜨거운 기도생활을 유지하면서 삶 자체도 하나님 앞에 드린 삶은 어떤 유혹이나 삶에 절망이 왔을 때 마음이 조금 상하고 어려움이 와도 즉시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면 즉시 우리의 마음에 불이 붙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간이 없이 즉 기도하지 못하고 자꾸 세울만 흐르는 경우는 다릅니다. 그런때에는 우리의 마음은 점점 차갑게 식어 가는 것입니다. 타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신앙생활에 아무 도움이 안됩니다.
뜻을 세우면 하나님이 돌아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가끔 신용이 없는 사람이 폼을 잡으면서 뜻을 세웠다고 하면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선한 결심을 하면 주님은 우리를 냉소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해서 주님을 뜻대로 살아야지 결심을 하면 하나님의 친밀함이 밀려옵니다. 주님을 위해서 이 신앙을 지키면서 살아야지 결심을 하면 멀어졌던 여호와의 친밀함이 우리의 가슴에 밀려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냉소하지 않습니다. 3번 4번 같은 결심을 하여도 기대를 걸고 지켜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냉소하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가 선한 것을 위해 깊이 결심을 하면 주님 입장에서는 도와주실 용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없습니까? 전도를 한다고 잡아갑니까? 철야를 한다고 무어라고 그럽니까? 기도할 데가 없습니까? 언제든지 오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더 깊이 공부할 여건이 모두 되어 있는데 뜻을 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번 읽어야 한다든지 새벽기도를 해야겠다 든지 하루에 한시간은 기도를 하여야 겠다든지 아니면 전도를 하여야 겠다 든지 봉사를 해야 겠다 든지 그런 뭔가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고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와서 뜻을 세우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지 않는 이유는 그 뜻을 세우면 그 뜻을 이루려면 비용이 들어가고 못 이루면 양심에 가책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람이 불면 바람대로 구름이 흘러가면 그런 대로 여기저기 떠돌아 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슨 선한 것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수많은 크리스찬은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성도다운 삶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결심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면 자기의 힘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움을 절박하게 구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버려두지 않는 것입니다. 절박한 기도를 한 만큼 절박한 목표가 없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절박한 기도가 없으니 삶도 절박하지 않고 거룩한 긴장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가려는 뜻을 세운 사람들이 분명히 깨닫는 사실은 자신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하면서 주님의 도움을 필수적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님을 위해 올바르게 살면 주님이 여호와는 내 편이시고 나를 돕는 자라는 사실과 주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는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라는 담대함이 생깁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파괴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6.기도와 견고한 마음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26:3)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것 중 하나는 환경에 의해서 쉽게 요동하지 않는 평화로운 마음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여호와의 평강입니다. 그의 평강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가 환경에 의해서 요동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살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주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서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더 행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인간의 행복이 단지 물질적인 것이나 풍요나 지위가 높아지거나 집이 넓은 것에 진정한 행복이 있지 않다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이런 것에 가치를 두고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런 가치가 다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를 좇아서 살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어디서든지 믿음이라는 가치를 붙들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도 내가 예수를 잘 믿고 믿음으로 살면 이제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 힘을 통해서 환경을 극복하고 그 신앙으로 절망에서 희망을 갖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어려운 때에 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평화로운 마음입니다. 평화로운 삶입니다. 평화로운 심령의 상태입니다. 환경이 이렇게 흔들리고 저렇게 흔들릴 때 사람은 환경 하나에 울고 웃고 지냅니다. 그것이 사실은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는 인간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종종 비행기가 추락하고 큰 사고가 났다는 말을 들으면 사고 대책 본부에서 사망자 명단이 발표되는데 그 이름 하나하나 보도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졸도하기도 하고 안도의 쉼을 쉬기도 합니다.
주식 투자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신문을 보고 주가에 의해서 하루의 기분이 좌우됩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 이 세상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환경에 의해 얼마나 잘 흔들리는 것인지를 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어떤 때는 희망을 갖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낙망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성경의 선지자들도 희망을 갖다가 낙망하고 또 소망을 갖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이런 그림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이란 바람에 부는 갈대와 같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조금만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면 커다란 근심과 번민에 휩싸입니다. 그리고 또한 조금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이 되면 뛸 듯이 기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 마음이 없으면 만사가 우리의 뜻대로 안 될 때는 근심하느라고 주님을 믿을 여유가 없고 일이 잘 되어 가면 그것이 신나서 마음을 쓰느라고 주님을 바라볼 수 없는 것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결국 이런 세상 사람들의 모습들에서 이런 것으로부터 진실한 신자를 구별시켜주는 모습은 의연함입니다. 커다란 시련이 와도 움직이지 않는 그런 생활이 얼마나 우리에게는 소중한지 모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간절히 필요한 것은 이런 의연함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그렇게 살면 주위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가장이란 사람이 매일 근심만 하고 담배를 피워대고 매일 술로 산다면 가족들이 무슨 소망으로 살겠습니까? 그러나 한 사람이 이런 외풍, 인생의 다양한 풍랑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게 살면 얼마나 크다란 안심이 되고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가끔 동료 교역자들을 만나면 제가 이런 충고를 합니다. 교회에 어려움이 왔을 때 아무 문제없다고 말을 하라고 충고합니다. 사람들이 와서 왜 문제가 없냐고 반문하고 이런 악한 상황인데 어떻게 하여야 하냐고 물어도 그 때 당신이 더 큰 소리도로 아무 문제없다고 말하라고 충고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평화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보여줍니다. 인간의 마음이 평안히 되기 위해서는 죄에 지든지 하나님의 은혜에서 살든지 둘 중의 하나에 의해서 입니다. 무슨 말이입니까? 악인의 마음의 특징은 평화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무엇인가를 죄를 짓고 악한 일을 할 때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이 있는 사람은 아직까지 은혜의 기운이 조금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이 정신차리면 하나님께로 속히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가 아주 메말라 있는 사람들은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면서도 자신 속에 이상야릇한 평화가 찾아오고 믿는 것이 생깁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크게 손보시기 전에는 새 사람이 될 가능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그릇된 길을 걸어가면서 뭔가 평화를 잃어버린 것 같고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는 그런 반성의 마음이 들 때 그 때가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올 때입니다. 돌아가기만 하면 그런 불안과 갈등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진정한 평화를 주고 진정한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니까 갈등이 있을 때 여러분들은 자신의 신앙의 아궁이가 아직 따뜻한 때이구나 하나님이 불만 넣어주면 금새 불이 일어날텐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지금이 주님을 잘 믿어야 될 때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럼 어떤 사람들은 저는 편하기만 합니다. 주일을 빠져도 기도를 안 해도 갈등이 없이 평안한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 마디로 말해서 큰일날 사람입니다. 그 평강은 하나님의 평강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의 욕심대로 살아가는데서 비롯되는 평가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해서 참고 있는 때까지는 평안하지만 하나님이 그 참음을 멈출 때 인내가 끝나면 그 평강은 깨뜨려지고 단단한 불 신앙의 껍질을 둘러싸인 여러분의 벌고 벗은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주님은 우리와 화목한 가운데서 살아가기를 원하였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평화는 죄 가운데 살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하고 가고 싶은 불순종한 길을 걸어가는 가운데서 마음이 딱딱해지는 데서 오는 평화를 얻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범죄 하려고 할 때에는 그것을 실현에 옮기기 전까지는 우리 안에서 갈등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범죄 하고자 하는 그 욕망이 억제되는 것이고 아직 내 안에 은혜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자기 안에 죄에 대한 소원이 사라지지 않으면 자기 안에 갈등이 더욱 일어나고 그 갈등이 점점 커지면 견딜 수가 없어지다가 범죄 하게 되면 순간적으로 후회와 슬픔을 동반한 평화가 밀려옵니다. 이런 평화는 마약과 같습니다. 금새 사라지고 또 다시 죄에 대한 소원을 갖고 욕망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또 드는 것입니다. 절제는 하면 할수록 절제력이 늘어나고 절제하지 않으면 절제력이 사라지고 범죄로 일관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범죄가 가져다주는 작은 평화를 얻기 위해 하나님이 주는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마지막은 그런 갈등도 사라지고 거짓된 평화 속에서 잠시는 사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평강은 여러분들이 잘 아는 살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에서 비롯되는 평강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살롬은 깨트려지지 않은 온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 있는 그 상태에서 손상 당하지 않는 온전한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입니다. 이런 온전한 평화는 하나님과의 화해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깨닫는 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진정으로 화목한 삶을 살아야지 비로소 진정한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삶 속에 찾아오는 것이지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평화가 위협받고 갈등과 고통의 연속이며 그런 평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삶도 굴곡이 심하고 일관성이 없으며 사람들과 충돌하기 잘 하고 어그러진 삶을 살아갑니다. 삶 속에서 포악하고 분내고 오래 참지 못하는 세속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모욕을 받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죄가 쌓이면서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은혜를 말리면서 우리의 평강을 더 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해야하는 것이 있어야 인생의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하나님이 죄인들을 향한 진노와 이 죄인들이 자신에게 대한 하나님의 그 진노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능력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과 이제는 하나님 앞에 범죄해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훼방하였던 자신의 죄를 청산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시고 유일한 길인 그 깨어진 하나님과의 우리 사이에 관계를 온전히 치유하기 위해 오셨고 자신의 생애를 화목재물로 바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 십자가가 단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십자가는 언제나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해 화목 재물로 죽으셨는데 이제는 너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느냐 이것입니다. 그럼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의 의미를 알고 죄 없는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것이 하나님의 참사랑인 줄 아는 사람은 마땅히 이제는 주님이 그리스도의 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그 화목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된 행실을 죽이기 위해 우리가 그토록 애쓰는 것도 우리의 죄된 생활과 하나님과의 평화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그 죄에서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과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평강이 없다는 것은 결코 충돌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범죄 하면 반드시 우리의 영혼은 죽고 하나님과의 화해는 깨트려집니다. 이 화해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큰 산 가까이 살거나 깊은 바다 까까이 사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그는 자연의 큰 힘을 하는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을 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코 평화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돈을 많이 벌고 사업이 잘나가고 직 장에서 승진을 하고 세상 사람이 부러워하는 온갖 좋은 일이 다 일어난다고 하더라고 그것이 우리를 평화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잠시 우리를 잊게 만들어주는 마취제와 같습니다.
영국 사람 속담에 1년을 행복하려면 집을 사고 1달을 행복하려면 말을 사고 1일이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고 1주일이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진짜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런 불안을 잊게 만드는 진통제와 같은 것입니다. 영원하고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영원하고 완전한 것은 하나님과의 화해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없이는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인의 마음에는 평화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걸어가면서 그림자를 피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리고는 인간은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세상에서 우리는 미친 듯이 어디론가 곤두박질하는 것 같은 향락주의와 쾌락주의를 봅니다. 그런 삶 속에 사람들이 매몰되는 것도 평화를 얻기 위한 한 몸부림입니다. 하나님과 깨트려진 관계 속에서의 불안과 외로움을 견딜 수가 없어서 이런 불안과 초조를 감출 수 없을까 생각하면서 그들은 마취제와 같은 향락을 찾아낸 것입니다. 병적인 증세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계산 없이는 우리의 인생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건 하나로 기뻐서 펄펄 뛰다가도 어떤 작은 어려움이나 힘든 일이 생기면 이 세상 살기 싫어지고 뒤집어지는 이런 요동치는 삶이 행복한 삶일 수가 없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눈에 보이고 잠시 있다 사라지는 환경이나 물질이나 사람이 가져다주는 행복의 한계를 깊이 인정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런 관계 속에서 살 때 진정으로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는 이 세상의 환경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의 인생 전체가 행복해질 수 있다라는 생각은 옛사람의 생각인 줄 알고 거기에서 떠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족하는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통해서 해서 무엇인가 이루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살아가게 할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자리에서 발전을 꿈꾸고 미래를 꿈꿉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진정한 힘이 오늘보다 내일은 더 잘먹고 더 집을 늘리고 더 승진을 해야겠다는 그런 소망 하나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 살았으나 사실은 죽은 자와 같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물론 꿈꿉니다.
각자의 환경에서 맡겨진 대로 형통한 신앙 생활을 꿈꿉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접어놓고는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어떻게 외면하고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으면 왜 우리가 그 화목을 깨트려 그 화목을 잃어버렸는지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다시금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는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회에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화목하지 않으면 주님이 나를 축복해주시지 않을 것이며 그런 주님의 축복 없이는 진정으로 이 세상에서 행복해질 수 없다 라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이 많은 지 알아야 합니다.
제가 교수로 있을 때 잘못한 학생들을 교수실로 부를 때가 있습니다. 그런 학생들이 물을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소리를 지르며 너를 위해 추천서를 쓴 목사님이 누구냐 말하고 전화번호 대라고 하면 말하면 어떤 사람은 진짜 번호를 서 놓고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성향의 사람은 불러다 놓고 차를 타주면서 소리를 지르지 않고 따뜻하게 대해 줍니다. 이 학생은 이미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는 상태인데 제가 교회 섬기랴 신학 공부하랴 고달프지? 하고 말하면 눈물을 주르륵 흐립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다 다르게 다룹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과 화목을 깨트려서 자기 멋대로 살아가면 어느 날 그 달리는 차를 굴려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시지 않는 적이 더 많습니다. 우리 스스로 깊이 깨닫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찾기를 원해야 합니다. 우리가 멸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아니라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꾸 생각나게 만듭니다. 좁게 좁게 인도하셔서 결국은 막다른 골목으로데려가십니다. 그리고는 지그시 누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화목을 회복하셔서 평강을 주실 때 마지막 받아내고 싶은 것이 항복입니다. 조건 없는 항복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를 때려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잘못하였다고 울면 죄악 된 우리의 마음도 풀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순종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도저히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토로하고 이 인생의 풍랑과 고통이 나의 죄 때문이었고 하나님이 이 풍랑을 통해서 결국은 나를 하나님께로 돌이키셨다고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면 그가 아무리 지속적인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서 하나님을 거역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분노의 마음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집회를 나가보면 젊은이가 회개하는 것도 아름답지만 노인들이 회개를 하는 것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굳어진 사상과 아집, 가치관의 인생으로 살아온 사람, 오랫동안 복음의 빛을 모르고 자기 멋대로 살아서 죄의 껍질도 두껍고 뻔뻔스럽게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누가 충고를 하여도 받아들이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이제껏 자기 방식대로의 삶을 바꾼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우리는 굳어지고 굳어지는데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는 수십 년간 불순종과 죄악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 지으면서 살아온 사람은 수십 년이지만 회개한 시간은 한 두 시간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면 수십년 간의 당신을 등지고 살아온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고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어느 집회에서 머리가 하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그렇게 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하기만 하면 우리의 지난 수많은 세월 동안의 죄에 대해 용서하시고 우리를 향한 진노의 마음을 사랑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산가족이 90먹은 노모가 70먹은 아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흐리는 광경을 본적이 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인생의 경험을 많이 쌓고 많은 고생을 하고 살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아주 작은 어린아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어린아이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기뻐하시면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복한 사람들에게 평강이 밀려옵니다. 큰일이 났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의뢰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데 그런 일이 무슨 상관이냐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특권입니다. 그래서 청교도인들이 쓸데없는 일에 안달하고 조급심을 내는 것을 많이 경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참다운 평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고 이런 마음 상태로는 누구를 대해서도 온유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나면 우리에게 밀려오는 것이 근원을 알 수 없는 평가입니다. 톨스토이의 참회록에 결론을 자기는 넓은 터전에 서 있고 기둥도 없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이며 공중에 붕 떠 있는데 아무리 구르고 뛰어도 안전하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의 구원을 받았던 톨스토이가 하나님 앞에 느꼈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깊이 회개한 다음 주님 앞에 온 시름들은 이 평강이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는 다 설명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던 불순종한 삶에서 돌이켜서 하나님께 돌아서면 커다란 풍파가 밀고 비바람이 불어도 요동하지 않는 담대함이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인생이 어려움을 통해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평강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마지막장을 보면서 바울이 폭풍을 만나 배가 파산한 가운데 군인과 모든 선원이 두려워하는 가운데 포승에 묶여 있는 바울이 너희는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너희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내게 말씀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한 사람이 주님과의 관계에서 평강을 누리고 살면 하나님이 놀라운 수많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는 것입니다.그런 사람이 내 주위에 있고 내 가족 중에 있고 우리 교회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깊은 도전과 평화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큰 풍랑이 일어나서 어쩔 줄 몰라할 때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주님의 마음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이런 고통이 많은 세상에서 길잡이의 역할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잃어버렸던 평강을 되찾은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보십시오. 글을 쓰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염려가 없고 마음이 평화로우면 뭐든지 잘됩니다. 그러나 평강이 깨어지면 올바른 판단력들도 잃어버리고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화목한 관계 속에서 평화를 누린 사람들에게 단지 평강만을 누리게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화목한 평강의 통로를 통해서 지혜를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영적인 힘을 주시고 믿음과 용기와 환경을 해쳐나갈 수 있는 담대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없이는 우리가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오늘 이시간 다짐을 합니다. 우리에게도 평강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화목에서 비롯되는 평강이 필요합니다. 라고 다짐하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이 이러한 평강을 어떤 사람에게 주시는지 말하고있습니다. 성경은 심지가 견고한 사람에게 라고 말합니다. 심지라는 것은 마음의 견고한 뜻이 굳게 심겨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어떤 특정한 뜻에 굳게 심겨진 사람에게 평강을 주시고 하나님과의 화해로 말미암는 평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견고함과 기도에 대해서 말하면서 여기서도 같은 말이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되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서 평화를 누리기 원하시지만 그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심지가 견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이 고정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으려면 안 믿고 믿으려면 믿은 것처럼 믿어봐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올바른 것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한 1년이라도 열심히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려면 정성된 마음으로 설교를 잘 듣는다든지 마음을 정함이 없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견고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해 주실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평강이 없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자기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니까 너무나 쉽게 깨트려지고 화해된 가운데 무기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것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런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평강이 귀한 줄 알았으면 그 평강을 지키기 위해서 싸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용기가 바로 기도의 생활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제는 듣는 것만으로는 그만두고 실제로 기도하여야 겠다는 결단과 결심이 생겨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결단하고 뜻을 세우기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그 뜻을 세운 다음에 성취하지 못한 후 변명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지 않고는 마음이 견고한 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심지가 견고하다고 하는데 한번 심겨진 적이 있어야 견고한지 그렇지 아니한지 아는 것입니다. 늘 왔다갔다하고 바람에 부는 갈대같이 흔들리기만 하였는데 어디 심겨진 것이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심겨진 적이 없으니까 마음의 견고함도 없고 견고함이 없으니까 지킬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뜻을 하나님 앞에 세우십시오. 인간은 너무나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뜻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믿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한달 동안 물어볼 테니까 한 달 내에 응답해 주시라고 그렇지 않으면 이제 내 갈 길로 가겠다라는 담대함으로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도생활에 복을 주시고 변화를 주시려면 이제껏 까지 기도하지 않는 생활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요동하는 신앙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시고 내가 기도하오니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응답해 달라고 목 타는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을 지키지 위해서 하나님 앞에 씨름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키고 결심할 수 있는 수준의 기도생활을 결심한 다음에는 그 이행하고 한 기 위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아버지 앞에 매달릴 때 거기에 우리의 마음이 심기고 그것을 지키려는 것이 하나님 앞에 평강을 얻기 위한 조건이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정함이 없는 사람이 평화에 넘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세상에 아부하면서 살아볼까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볼까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살아볼까 저기에 가서 점을 한번 봐 볼까 오락가락 하는 사람이 평강을 지닐 수가 있냐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 되었으니 비파야 깰지어라 수금아 깨질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내 마음이 확정되었으니 이제는 살든지 죽든지 이길 밖에 없다는 마음을 하나님 앞에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근심하고 염려하고 인생 길에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노력에 10분의 1만 기도하는데 짜서 바쳐도 위대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힘쓰기보다는 하나님 등뒤에서 고민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마음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결국은 아무리 오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한번 하나님 앞에 확정하고 끝을 보는 싸움이 없이 지리멸렬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슨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특별한 일이 있으면 특별한 기도가 필요하다고 하나님 앞에 생각을 바꿔야합니다. 주님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는 특별한데 내 기도는 이 너무나 일반적이구나라고 생각하고 특별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뜻을 세우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우리의 마음을 지킬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길이 쉬운 길이면 모든 사람이 기도의 대가가 되고 기도의 간증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될 것입니다. 많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여도 기도의 간증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말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고 듣고 침흘리는 사람은 정해져 있습니다. 쉬운 길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고 마음을 지키면서 순전하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매달리는 기도의 투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이 계속되는 가운데 우리의 신앙은 자꾸 허물어지고 우리의 옛 사람이 다시 기승을 부리고 일어나 우리의 삶을 황폐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으로 죄가 물러나고 마귀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 없이는 자기가 다 안다고 하여도 죄가 죽지 않는 것입니다. 모르고 암에 걸리고 죽는 것이나 암이 자기 몸에서 자라는 것을 알고 죽는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사실 모르고 죽는 사람이 더 편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모든 우리의 영혼을 파고 들어가서 우리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머리 속에만 빙빙 도는 것입니다.
예수님 주위만 돌고 한번도 주님과 부딪힌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한번 부딪쳐서 깨트려지져 하나님 앞에 엎드려져서 주님의 사랑 없이 살 수 없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주님께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주님의 사랑 앞에 나올 때 진정한 평강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뜻을 세워서 이제까지의 삶에 대해서 제동을 걸 수 있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도 생활에 대해서도 깊이 후회하면서 이렇게 사는 것이 축복이 있는 생활인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라는 각성 아래에서 그 삶을 벗어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해 뜻을 세워야 합니다. 매 주일마다 돌아갈 때는 그래 이렇게 살면 안되지 기도해야지 하고 생각하고 다음 주일날 나올 때는 주님 내가 기도를 못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잘하겠습니다. 하고 또 돌아가서 못하고 오는 생활만 반복되는 것입니다.
결심을 하면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고 힘을 들여 노력할 각오를 하고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심지가 견고하다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마음을 먹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전도라든지 기도해야겠다든지 성수 주일을 하여야겠다든지 결심을 하여야 마음을 지키든 말든 일이 있는 것입니다. 뜻을 하나님 앞에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난한 영적인 삶을 보고 실패가 반복되는 신앙 생활을 보고 이것이 아니다라고 생각이 들면 이제 이 시점에서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시는지 내가 이렇게 기도 없이 살아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리고 하나님 실패로 일관된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내가 이제는 마음을 어디에 고정하고 살아야 하는가 생각하고 정해졌으면 그 마음이 자신에게 떠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사는 이러한 원칙을 누구나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마음에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셨으면 이제는 깨닫는 것에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야겠다고 약속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뜻을 세운 후에는 심지가 견고하도록 그 마음을 지키고 또 지켜서 거룩한 하나님과의 깨트려진 화목의 길로 나갈 수 있는 기도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7. 마지막 때엔 기도로 삽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
우리가 늘 마지막 때가 가까워 왔다 이렇게 말합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워 왔다. 우리는 윤리에 있어서도 평상시에 통하는 윤리하고 조금 다를 때가 있다 이 얘기입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어떤 사건이 있었는가 하니 큰배가 가다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나서 침몰하면서 작은 배에 사람들이 탔습니다. 탔는데 한 12명 정도가 타고 그 탄 사람들이 파도를 헤치면서 결국은 살아 남았는데 선장도 아니고 그 배를 탄 사람인데, 아주 바다에 대해서 조에가 깊은 사람인데 그 사람이 거기서 2사람인가를 권총으로 쏴서 죽인 것을 가지고 이제 그것이 유죄냐 무죄냐 문제를 가지고 따지는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 면은 엄청나게 파도가 치면서 그러는데 그 사람들이 그 배에서 이 사람은 배에 조에가 있고 바다에 조에가 있으니까 자기가 생각하는 데로 해야지 만 이 조그만 배가 그래도 살아 남겠는데 사람들이 거기서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다가 도저히 안되겠으니까 2사람을 쏴서 죽인 것입니다.
그걸 가지고 이것이 유죄냐 무죄냐가 나오는 것인데 만약에 정상적인 상황 아래서 자기에게 총격도 과하지 않은 사람을 쏴서 죽었더라면 아마 사형에 처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는 이야기의 마지막은 6개월의 형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그러니까 무얼 보여주느냐 면은 우리가 비상시기에 처했을 때는 쪼금 다른 윤리들이 적용이 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들이 배고플 때는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에 위기가 오게되면 배고픈 데고 굶어야 되고 졸려도 철야해야 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워 왔다는 것은 신자들이 매우 특별하게 자신을 위해서 투자하지 아니하면은 곤 고할 수밖에 없고 패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왔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끊임없이 마지막 때가 되면은 신자는 매우 특별한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것을 가르쳐서 오늘을 3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고 기도하라 이 이야기입니다.
정신을 차려야 할 필요는 왜 정신을 차려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면은 마지막 때가 되면은 우선 거짓 교훈들이 도처에 유행하고 됩니다. 여러분 끊임없이 아침 신문마다 묻어 들어오는 수많은 찌라시 들을 발견할 겁니다. 거기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황당무계한 거짓말이 많이 쓰여 있습니다. “원가 이하로 폭탄 세일입니다.” 그 다음 날은 무슨 종이가 들어오나 했더니 “더 이상의 세일은 없습니다.” 아니면 “공장 완전 제고 처분 옷 한 벌에 백원” 이런 광고도 들어옵니다. 그런 것은 조금 나은데 어떤 것은 “우리학원에만 다니시면 저절로 영어가 됩니다.” 이런 광고는 순 거짓말이거든요. 그렇게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지막 때가 되면은 그런 게 유행한다는 것입니다. 뭐냐하면은 “지름길이 있습니다.” “아주 쉽게 예수를 믿는 지름길이 있습니다.” “여기만 오면은 뭐가 탁 열립니다.” “좋은 일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꾸 사람들을 설득하고 꼬이는 것입니다. 이런 때가 되기 때문에 마지막 때에는 정신 차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때가 되면은 모든 사람들이 쾌락을 사랑하는 때가 온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쾌락을 사랑하고 육신에 빠져 사는 때가 온다 이 말입니다. 어저께 밤에 제가 여기 왔다가 새벽 두 시에 집으로 돌아가서 세상에 새벽 두 시인데 다 불이 커져 있었습니다. 뭐 하느라 그러는 것입니까? 텔레비전 보느냐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좀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을 가지고 한번 텔레비전 끄는 용기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진 것을 벌써 알았습니다. 골목을 쭉 걸어가는데 불은 환하게 켜졌는데 소리가 안납니다. 뭐 졌구나 지나가다 텔레비전 아나운서 소리가 막 흥분해야 되는데 흥분이 안됩니다. 저기 골목으로 올라가는데 어두움 속에서 누가 행길에 나와 가지고 소리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아이시 열 받네” 아 졌구나! 이렇게 사람들이 말하자면은 중요하지 않은 일 육신에 관한 영광 이런 일이 아주 골몰하고 미친 듯이 몰려다니는 일이 나온단 말입니다.
여러분 진짜 돈 벌고 싶으면 내가 하나 가르쳐 주고 싶은 것 하나 있습니다.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돈을 억수로 버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톱스타가 되는 것입니다. 돈을 막 법니다. 왜냐 하면은 마지막이 될수록 사람들은 물론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 인물에도 가능하냐고 묻겠지만 어찌하든지 간에 마지막 때에는 그러한 쓸데없는 인간을 우상으로 높이는 그런 일들 세상 적인 즐거움에 자기를 탐닉하는 일들로 인기를 끕니다. 그렇게 때문에 마지막 때에는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이런 거짓교훈 쾌락을 사랑하는 풍조 안일한 신앙생활 이런 것에 매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을 차려야 된다 이런 얘기지요. 정신을 차린다는 이야기는 무슨 뜻이냐 하면 신앙의 이치와 인생의 도리를 냉정한 마음으로 다시 생각한다. 그런 뜻입니다. 내가 이렇게 계속 믿어도 되겠는가? 정말 내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그런 것을 한번쯤은 물어 봐야 된다 이 얘기입니다. 그래야 지만 하나님 앞에서 정말 마지막 때를 이길 수 있는 신자가 된다 이런 얘기입니다. 아멘을 하십시오.
두 번째는 “근신하고” 그랬습니다. 이 근신한다는 것은 삼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은 할 수 있지만은 그러나 삼가 한다 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가 행하여야 할 불량을 스스로 알고 거기를 넘어 서지 않고 부수를 지키는 그런 삶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야지 만 그래야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삶으로 부르실 때 기민하게 반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군대 가면은 5분 기동대라고 있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옛날에는 기동 타격대라고 했는데 그곳은 5분만에 어떻게 해서든 현장에 출동을 하는 것예요. 어떻게 합니까? 그 기동대에 착출이 되면은 밤에 잘 때 다 옷 입고 군화 신고 올라가서 잡니다. 그리고 “따르릉” 비상벨이 울면 총하고 철모만 탁 들고 그리고 앞에 시동 걸어놓은 트럭으로 올라 타는 것입니다. 진짜 순식간에 탑니다. 이것이 근신하는 삶입니다.
지금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지만 꼭 무슨 일이 벌어진 것처럼 사는 삶, 그것이란 말입니다. 주님은 아직 안 오셨습니다. 주 언제 오실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곧 오시는 것처럼 사는 삶 이것이 바로 근신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방종하고 그저 우리 멋대로 살아가는 그러한 삶이 되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단정한 그런 삶이 돼야 됩니다. 말하자면은 영적인 전쟁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싸울 사람의 내면의 모습이 공주병 걸린 사람처럼 그저 질질 늘어지는 그런 몇 겹의 드레스를 입은 그런 신앙생활 마음가짐이어서는 안 된다 이것입니다. 언제든지 주님이 부르시면 즉시 뛰어 올라가서 구원의 방주를 탈수 있는 그러한 말하자면은 준비된 삶을 갖추고 살아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게 근신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그런 얘기를 합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런 말은 많이 할수록 참 좋습니다. ( ? )것은 많이 할수록 좋습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사람들은 요즘에 IMF가지고 별 얘기 다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 때가 되면은 그런 식의 삶을 살아야 된다 이 말입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런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삶을 단정히 하는 것 이것이 근신하는 삶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그러고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 이유는 무엇 때문이야 하면은 마지막 때에는 특별히 사람들이 기도하기 어려운 때를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나 많이 쓸데없는 것들에 빼앗기는 것이 마지막 세상입니다. 멸망당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 모든 역사가 그러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하기 전에 사람들이 많이 하는 일은 말하자면은 방탕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 간 것 아닙니까? 그 사람들이 하나님과 신령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고 마음이 그런 것에 다 빼앗긴 삶을 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면서 결국은 멸망을 마지 하게 될 때에도 그 많은 사람이 모두 모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될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이 관심을 갖지 않는 쓸데없는 일에 관심을 소비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베끼고 그러면 무엇을 합니까? 마음은 다른데 가있고 쓸데없는데 있는데 그러면 그들이 마음을 그렇게 빼앗기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베스비오스 화산이 폭발해서 폼페이가 다 화산재에 묻어 버린 그 역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멸망을 당할 때 얼마나 타락했는지 우리는 역사의 자료를 보면서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마지막 때가 그런 때기 때문에 눈을 들고 사면을 돌아보아도 자신으로 하여금 기도하며 살도록 경건을 자극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는 힘들고 자기처럼 방종하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도록 자기를 자극해 주는 사람들은 많이 만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 열심히 나와야 된다 이 얘기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 때에 정말 그렇게 살아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 할 수 없습니다. 진짜 생사를 걸지 않으면은 여러분들은 기도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걸지 않으면은 기도의 불꽃을 유지하면서 산다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마지막 때에는 더 그런 일들을 만나게 된다 이 얘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정말 정신 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이제껏 정신없이 살아온 날도 너무나 후회가 되고 이제껏 하나님 앞에 정말 근신하지 않고 방종하며 살아온 것도 하나님 앞에 너무나 죄송한데 이제 깨달은 오늘날에도 우리들이 그렇게 살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정말 희망이 있겠는가 이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변화 시켜 주실 때 우리들이 잘 순종해서 그렇게 주님 앞에 기도하며 마지막 때를 이기는 거룩한 성도들이 됐으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영광이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런 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8.기도와 하나님의 사랑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116:1-2)
오늘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기도와 사랑의 관계입니다. 기도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다보면 가끔 한순간 시선이 마주쳤을 뿐인데 그 시선 하나에 사랑에 빠져서 홍역을 하듯이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물론 젊은 사람들에게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나이가 많이 든 사람에게도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하는 형제 자매들을 불러서 "이 결혼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웃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이 어리니까 그런 이야기가 우습게 들리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정직한 고백을 보면 한사람과 결혼해서 열렬히 사랑하고 ‘나는 당신밖에 없고 당신은 나밖에 없는’ 그런 인생을 살다 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결혼의 바다를 한참 헤엄치고 나면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첫 만남에서 그 이야기를 꼭 해줍니다. "매우 특별한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처음이자 마지막 결혼이라고 생각해라" 고 합니다. 지금은 그것이 농담처럼 들리지만 먼 훗날 이 사람과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겹고 새로운 사랑을 꿈꿀 때 그의 의식 속에 맴도는 종소리와 같이 남아서 그 사람들을 깨우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순간의 시선에 사로잡혀서 홍역에 빠지듯이 정신 못 차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주소도 모르는데 한번 본 그 사람에게 빠져서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화: 미국에 갔을 때 중학교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과 결혼한 사람을 만난 이야기)
이렇게 사람들의 사랑은 의외적이고 폭풍과 같이 단숨에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사랑도 그럴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도 하나님이 안중에 없었는데 오늘 폭풍과 같은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예수에 미쳐버리는 경우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에 속하고 상당히 많은 대부분의 사람의 경우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괜찮은데’ ‘아니야’ 하며 몇 번을 재다가 만나고 사건이 생기고 추억이 쌓이고 하며 사랑이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폭풍과 같은 사랑으로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사랑도 있지만 보다 더 일반적인 많은 경우에는 서서히 사연이 쌓여져 가는 것입니다.
(예화: 주위에 결혼 이야기만 하면 소름 돋아하는 자매들이 있었는데 결국 어느 한 사람에게 마 음을 열고 시집을 간다-얼마나 많은 자기 무너짐의 과정이 필요 하겠 는가)
사랑은 망치로 집을 부수듯이 그렇게 들어와서는 안됩니다. 천천히 밀려오는 바닷물에 아이들이 쌓아놓은 모래성이 서서히 무너지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가 무너져 나가면서 사랑이라는 바닷물을 향해서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런 일반적이고 인격적인 과정을 거쳐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과 성도인 우리들 사이에 있는 사랑의 경험도 그런 식으로 촉진되어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보다도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도 버릴 수 있고 자기 가정도 버릴 수 있고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러야 하지만, 그런 사랑이 아니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은 단계의 승화된 사랑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주님을 덜 사랑하는 자신의 삶이 옳다거나 정상적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것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는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자기 속에 있는 작은사랑을 끊임없이 발전시켜가야 되는 것입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그렇게 작은사랑들을 가지고 조금씩 조금씩 주님을 향해서 더 많이 더 많이 나의 삶을 의탁하고 나의 삶을 드리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에 대해서 감화를 받기 전에는 그가 정말 좋은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강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억지로 예수 믿게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화: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예배를 드리려면 내 배를 드려라’ 하던 사람이 부흥사에게 혼이 나고 예수 믿겠다고 했으나 결국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
신앙은 그런 식으로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잘 안 하면 매를 때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상 개입이지 매 때려서 교회 다니던 아이에게 마지막에 무엇이 남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교회 나가면 잘했다고 돈 주십니까? 돈 바라고 교회 나가던 아이들이 나중에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잘하면 돈 주고 못하면 돈 깎는 것을 통해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신앙 생활도 똑같은 것입니다. 강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격적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신뢰 속에서 이루어져 가는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그런 관계가 필요합니다. 물론 교회에 나올 때는 사람들에게 속아서 나오기도 하고 억지로 끌려서 나오기도 하고 혹시 여기에 나오면 자기 팔러 다니는 물건을 하나 팔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나올 수도 있고 젊은 처녀 총각들은 물이 좋다고 생각해서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올 때는 그런 동기에 의해서 왔다고 하더라도 그 물보다 더 좋은 물을 먹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성령의 물을 먹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게 될 때에 어떤 동기로 나왔던지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의 과정을 통해서 사랑이 깊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은 든든히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적었을 때에는 자기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 중에 작은 부분 밖에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나 내 입맛에 맞고 달 때만 용납할 수 있었는데 사랑이 깊어지니까 이제는 자기가 고통을 받으면서 오히려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방법을 배우게 되고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 깊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없이는, 우리가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승복하는 그런 신앙생활 없이는, 우리는 주님을 향한 사랑을 발전시켜갈 수 없고 깊이를 더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이 깊어진다고 하는 것은 단지 교회에 열심히 나온다든지 예전보다 교회에 돈을 더 많이 낸다든지 아니면 직분이 더 높아졌다든지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도 그 범주에 포함될 수 있지만 핵심적인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이 깊어졌다는 의미는 예전보다 주님을 훨씬 더 사랑했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더 돈독한 관계를 갖게 되었고, 그렇게 인격적으로 사랑하시는 주님이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인생을 향해 품고 계신 뜻이 무엇인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전에는 내 뜻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내 인생을 향해 품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좇아서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개념, 주님을 믿는 것이 보다 인격적이 되었다고 하는 이 개념은 언제나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늘 움직이는 개념입니다. 그렇게 인격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의 깊이를 더해 가고 은혜를 더해 가는 신앙생활의 놀라운 진전이 결국은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사랑이 무엇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속 촉진됩니까? 그것이 기도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오늘 시인이 “주께서 내 음성과 간구를 들으심으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기도에 관한 두 가지 체험이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끔 만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 체험 중 하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한 체험이고, 또 하나는 그 간구하고 기도하는 바에 대하여 응답을 받은 체험이 자기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점점 더했다는 이야깁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생활의 첫걸음을 들여놓으면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잘 기초가 놓아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안될 때가 많습니다. 그것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는데 하나는 신앙의 첫발을 들여놓거나 새로 신앙생활을 시작하려고 하는 신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 위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을 하찮게 여기는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고, 또 하나는 교회 적으로 신자들이 들어왔을 때 무엇보다도 그를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 위에 세워서 진실한 신자로 양육해야 되겠다는 결심이 약하거나, 결심이 있어도 그럴 수 있는 능력이 교회에 모자라기 때문에 그런 허점들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 한 권 다 읽고 성경 공부 한 코스 떼고 나서야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구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으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이루어 주실까 안 이루어 주실까’ 반쯤 의심하면서 기도했는데 그 기도들이 자꾸 응답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체험을 하면서 ‘아,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구나’하며 신기하게 됩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누구에게 소원을 빌어본 적이 없습니다. 거의 기도에 대한 경험이 없이 기독교 신앙에 들어오게 됩니다. 말씀대로 살아야지 만 복 받는다고 하는 것이 처음 믿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이야깁니다. ‘뭐가 말씀인가’하는 문제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직 많이 깨닫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든지 기도하면 된다니까-믿음으로 기도하면 주님이 뭐든지 들어주신다는 것이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기도하고 간구 했더니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기도 응답을 통해서 더 확실하게 우리의 마음속에서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기초가 많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그나마 부인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 응답입니다.
이것은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이 필요합니다”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 응답을 받으면서 우리의 신앙이 커온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신자가 누구를 향해서든지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그 분은 정말 우리의 주님이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작은 목소리로라도 고백 할 수 있게 되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기도 응답의 경험을 가진 사람입니다. 비록 기도 응답 자체가 모든 사람에게 충격을 줄만큼 엄청난 것-예를 들어서 기도를 세게 했더니 복권이 맞았다든지, 앞산이 날아갔다든지-이 아닐 지라도 말입니다.
(예화: 어느 할머니가 산을 넘어서 교회 다니기가 너무 힘들어서 산이 옮겨지기를 기도했더니 재개발 사업으로 그 산을 밀어버렸다는 이야기)
하나님 앞에서 이런 저런 기도 응답을 체험하면서 우리가 주님 사랑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주님 사랑하는 마음을 점점 더 가지면서 우리가 신앙생활 합니다. 그런 것들 속에서 우리 주님을 향한 사랑이 조금씩 쌓여 오면서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시인도 주님을 사랑하게 된 동기를 어린아이처럼 아주 단순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기도했고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 응답하셨기 때문에 나는 주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이 나온 것입니다. 뒤집으면 ‘내가 기도하지 않고 생활 속에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체험이 고갈되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게된다’고 하는 자연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살아있는 기도응답의 경험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심장에는 항상 확신이 있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신념이 있고 그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순결한 욕망이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기도하면 내일 응답해주시고 지금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셔서 당신이 살아 계시고 내 인생에 손을 내밀어서 간섭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데 어떻게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감격하면서도 동시에 정말 그 하나님 앞에 한치의 어김도 없이 순종하면서 바르게 살아야겠다고 하는 결심을 그 기도 응답 속에서 날마다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고상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높은 영성의 특성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그가 무엇을 기도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고상한 것, 자기에게는 마음에도 별로 없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가장 간절히 기도해야할 제목은 여러분들이 가슴에 와 닿는 가장 실제적이면서도 하나님의 도움이 절박하게 필요한 바로 그 문제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 하여야 할 가장 현실적인 제목들입니다.
‘혹시 이런 제목을 가지고 기도한다고 남들이 나를 우습게 생각하면 어떻게 하나’하는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화: 늘 변비 때문에 기도하는 한 그리스도인의 기도제목-배변이 안되면 몸에 열꽃같은 것들 이 돋기 시작하면서 독소가 몸밖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듯이 그 문제를 구하면서 살아간다)
상관없는 사람은 웃지만 그 사람은 이 문제에 있어서 이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못 받으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의 영성이 매우 저급하고 수준이 낮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가장 자신에게 심각하되 현실적으로 와서 부딪히고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해결될 수 없는 기도 제목이 바로 지금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할 제목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주 의지해서 사는 백성들이고 그것을 기도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기도할 것이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버리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무슨 동기로 교회를 나오게 되었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어떤 신앙생활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몇 년 동안을 자나깨나 어떻게 살아야지 만 인생이 고상하며 어떻게 해야지 만 이 우주의 목적이 성취될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을 하다가 자기 발로 교회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는데 요즘 교회에 안나온다면 무슨 말발이 서겠습니까? 그러나 친구가 교회에 한번만 나오면 여자 친구 소개시켜준다고 하는 것에 마음이 있어서 따라왔다가 회심하고 지금은 여자 친구와는 상관없이 교회에 잘나오는 형제가 있다면 어떤 사람이 훌륭합니까?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차원 높은 기도를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했고, 남들이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운 기도이지만 그 기도를 통해서 날마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살아 계시다는 간증을 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훨씬 아름답고 고결한 간증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날마다 우리에게 불붙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날마다 우리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변화들이 일어나야지 만 우리의 신앙 생활 속에서 향기가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가서에서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의 봉한 샘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동산이 있는데 그야말로 비원입니다. ‘Secret Garden'입니다. 아무나 못 들어오는 산입니다. 다 잠겨있습니다. 그 잠긴 것을 간신히 풀고 가보니 샘이 있는데 봉해져 있고 그것을 열고 들어가 보니 덮었습니다. 그리고 맑은 샘이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동산의 주인에게만 허락된 샘물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맑은 순결한 샘물이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비밀은 다른 비밀이 아니라 기쁨의 비밀이고 기쁨의 비밀은 사랑의 비밀입니다. 사랑의 기쁨이 사라지고 나면 슬픔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날마다 신앙생활 하게 만들어주는 놀라운 힘의 비결이 ‘오늘도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가만히 안 두실 거야’하는 두려움이어서는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들에게 있을 때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우리 속에 촉진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삶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3시간이나 5시간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자기의 그 부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이고, 용량 자체가 작다면 할 수 없이 자기 용량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용량이 큰 사람도 한번에 기도의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한번에 그렇게 위대한 용사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 하나님 앞에 주님의 도움이 없이 살아가려고 하는,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되고, 그의 신앙이 얼마든지 기도의 깊이가 어느 정도이든지 주님의 도우심이 절박하게 필요한 가장 작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작은 시간이라도 엎드리고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리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밥을 먹을 수 없고 우유를 먹는다지만 15살이나 20살이 되어 가지고도 이유식을 먹으면서 살수 있겠습니까? 죽습니다. 그것을 먹고는 그 체력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는 어린아이만큼의 분량이고 나이가 들면 나이 든 만큼의 분량이 있듯이 기도의 세계도 똑같습니다.
결론은 기도하는 사람은 응답을 받게 되고 기도를 통해서 응답을 받은 경험들이 우리에게 축적될 때 우리는 주님이 살아 계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날마다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갖게되는 것은 그 자체가 그의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부흥입니다. 그것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갖지 못합니다. ‘절대적’이라는 단어에 유의하십시오. 지난 수요일에 제가 절대적인 사랑과 상대적인 사랑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든 비유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다가 잃어버린 어린 아이 하나와 금 덩어리를 가져다 놓고 엄마에게 선택하라고 할 때 ‘금 덩어리가 조금 크면 내가 금 덩어리를 가져갈텐데’한다면 그것은 상대적인 사랑입니다. ‘금이 아니라 다이아몬드라고 하여도 내게는 필요 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이 아이밖에 없다’ 하는 것이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그런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확신 없이는 우리들이 주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의 문제는 사랑의 문제로 귀착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살지 못하는 것도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가끔은 필요한 인생의 모험, 신앙의 모험을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의심하면 그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화: 일제시대 때 한상도 목사님이 목회 하던 교회에서 한 교사가 학교에서 주일을 못 지키게 방해하는데 어떻게 살아야지 만 믿음으로 사는 것인지를 질문했다-‘그나라와 의를 구 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주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를 알 것이라고 목사님께서 대답하셨다)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신뢰라고 하는 것도 사랑의 토대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이 다 주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는 지켜주실 것이다’ ‘독점적으로 나만 하나님께서 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는 신뢰하는 마음, 믿어도 좋은 이런 마음도 결국은 그러한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사랑에 의해서 매일매일 확인되어지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맡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리석은 것 같아도 한없이 지혜로운 존재입니다. 재고 또 재고 하기 전까지는 인간이 자기의 것을 맡기지 않습니다. 길을 지나가다가 누가 다가와서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빌려주겠습니까? 하물며 인생을 하나님 앞에 맡기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분명한 지식과 분명한 사랑의 확신이 없이 그 분 앞에 인생을 맡겼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입니다.
주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주님 없이 혼자서 씩씩하게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주체성이 강하고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보다 죄를 짓고 주저앉아서 질질 우는 사람들을 훨씬 좋아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적어도 자기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박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기까지 많은 사랑의 경험 없이는 자신의 인생을 의탁하며 하나님 앞에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실제적으로는 그런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만 순종하며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서도 순종 안 할 수는 있는데 그러나 사랑하지 않고 순종할 수는 더더욱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순종에 의해서 입증되고 순종은 사랑에 의해서 촉진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기도하는 관계 속에서 계속 촉진되어나가는 것입니다.
확신하기는 여러분들이 얼마간 계속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면 ‘하나님’을 부를 때 그 이름이 한없이 이방스러워 보이고 낯설어 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친근하게 들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줄 때 마음이 늘 뛰는 이러한 아름다운 감동과 감화는 기도 속에서 살아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이런 사랑도 없고 메마른 가슴이 되는데다가 하나님 없이 살아가도록 우리를 유혹하는 죄의 잔뿌리들은 길같이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계속 촉진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가끔은 영적인 관리를 잘 못하거나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별로 사랑하시지 않는 것 같아’라는 하나님을 향한 소외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죄 때문일 수도 있고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소외감을 가질 때 마귀는 역사하기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소외감의 반 정도는 하나님을 향한 불신을 내포하기 때문에 그 불신의 마음을 발판으로 삼아 우리에게 들어와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지 못하도록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위험에 떨어지지 않는 가장 큰 비결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떤 때에 경험하게 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어느 날 복권을 당첨하게 해 주시거나 다른 사람은 모두 실직을 하는데 자기는 승진을 하는 기적적인 역사 속에서만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까? 부부가 함께 살아가면서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하게 됩니까?
(예화: 어느 날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부인이 치솔을 같이 안 쓰려고 하면 남편의 사랑이 식 은 것이라는 잡지의 내용을 보고 칫솔 통 앞에서 울었다는 이야기)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얄팍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신뢰하는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올바른 지식에 기초해서 올바른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마귀가 그러한 소외된 감정이나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발판으로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유린하려고 할 때 우리는 단숨에 퇴치해 버릴 수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주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그 기도 제목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기도에 응답해주실 것이고 응답해 주신다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각기 수준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랑에 더 큰사랑이, 더 큰 인격적인 승복이, 더 깊은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인 감화가 차곡차곡 쌓여 가면서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승복된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기도하는 삶은 기도 생활을 더 촉진한다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주님이 내 음성을 들으시므로 내가 기도하리라”는 결심이 나옵니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음으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라”하였습니다. 아직 살지 않은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는 많은 인생의 시기를 향해서 주님이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도 기도하며 살 것이라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오늘 기도하면서 살면 앞으로도 기도하는 삶을 이어갈 수 있고 오늘 기도 안하고 기도에 대한 간증과 체험이 마르면 앞으로는 더 기도 안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예화: 양자강이 유실됐다는 이야기- 하류로 갈수록 물이 보태져서 하류로 갈수록 큰 강을 이루 면서 바다 속으로 흘러들어야지 만 국토가 살찌는데, 상류에서는 소리를 내며 흐르던 물 이 중.하류로 내려가면서 흐르던 물이 없어지고 무수천이 계속되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 생활을 계속 열심히 하면 응답의 경험이 쌓여가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응답하신다는 경험이 있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니까 자기 수준에서 그래도 순종하면서 살고, 삶을 기뻐하시니까 기도의 응답이 촉진되고, 응답이 촉진되니까 기도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깨닫게 되고,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자꾸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물이 점점 많아지는 개울과 같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개울 하나가 마르지 않는 강을 이루면서 바다로 흘러 들어갈 때 그 강 하나를 끼고 일년이면 수십만 명이 먹고 살 수 있는 쌀이 나오고 농토가 생기고 밭이 생기고 공장지대가 들어서서 사람이 살만한 비옥한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흘러가다 마르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으니까 순종하는 삶을 살 힘이 없고 죄 가운데 빠져 있으니까 하나님 앞에 삶이 방종하고 방종하니까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싫어하니까 기도할 리 없고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가 없고 기도의 능력조차 믿지 않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점점 더 메말라가서 마지막에는 기도하는 형식조차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할 기본적인 외모조차도 아예 무시해버리는 삶을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살아가니까 그 사람이 예수를 믿어도, 분명히 형식적으로는 하천이 흘러가게 되어있는데 주위에 있는 수많은 밭과 논에는 물이 들어가지 않아서 결국은 황폐한 땅이 되어버리고 기르던 채소들도 모두 다 죽고 많은 곡식을 내던 비옥한 땅들은 허허벌판과 같은 황무지로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일들이 결국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 나타날 미래의 일들이 미리 그림으로 보여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오늘 이야기하는 것은 ‘주께서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으므로 -응답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나는 앞으로도 일평생 기도하면서 살 것이다’는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닥치고 어려움이 닥칠 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고난을 통해서 겸손해지며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지만, 고난을 당하면서도 기도하지 않으면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 밖에는 남는 것이 없고, 형통할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겸손을 배우게 되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배우게 되지만 형통할 때 하나님 의지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방종 하는 것 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많은 기회들을 자신의 근신하고 깨어있지 않은 삶을 통해서 헛되게 흘려 보내버린 많은 실패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너무나 많이 봅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되풀이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간직되어있고 오늘도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신다고 하는 따뜻한 간증을 여러분들의 마음에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기도하며 살아야 될 것이며, 여러분들의 마음이 식어지고 매우 차가워졌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마음이 다시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따뜻하게 데워질 수 있도록 놓친 기도의 영을 붙들고 그 끈을 붙들며 살기를 하나님 앞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기도의 시간 뿐 아니라 매우 적은 기도의 시간이라도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가장 간절하게 생각하고 있는 기도의 제목들을 하나님 앞에 간구 하면서 주님이 여러분들의 크고 작은 기도의 제목에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간증을 쌓아가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의 승리에 대한 보증이 될 뿐 아니라 내일의 신앙생활에 대한 보증도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만큼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9.삶의 개혁 없이 기도의 회복은 없다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58:8-9)
우리가 기도할 때에 최대의 목표는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응답해주시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세상에서 기도하며 사는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힘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기도 속에 자기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할 때, 그것이 응답되지 않으면 그 기도하는 것만큼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이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산에 잠깐 오르거나 명승지에 가면 돌로 만든 우상 앞에서 끊임없이 비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허망함을 느낍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리 청산 유수와 같이 기도하고 우리의 기도가 정말 명문으로 기록될만한 기도라고 할지라도 기도의 영광은 기도 자체의 내용이나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응답을 받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응답되면 그 기도는 모든 가치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최고의 가치는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가치는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기도하면서 가치를 다른 것에 설정한다면 그것은 외식과 통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가끔 우리가 공적인 기도를 합니다. 구역예배 시간에 기도를 한다든지 아니면 대 예배시간에 기도한다든지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들이 항상 기억해야 될 것은 ‘내가 지금 앉아있는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서만 기도한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 이외에 다른 것에 만일 가치를 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매우 부끄러운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가끔 기도하면서, 자기의 기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싶어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것은 눈만 감았다 뿐이지 연설입니다. 하나님을 빙자해서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를 해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 버려야겠다’는 것은 설교자에게 맡기고 자기는 기도만 열심히 하면 됩니다. 그런 무모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 잘못된 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내가 여기 있다”고 말씀하시고 간구 할 때 하나님이 응답해주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놀라운 희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응답해주시는 묘미를 모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고 그 응답으로 매일매일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 “너희가 간구하면 내가 응답하겠고 부르짖으면 내가 여기 있다고 말씀하시리라”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이것은 건강이나 물질이나 사업의 번영이나 똑똑한 자녀나 가문의 영광 등과는 비교가 안됩니다. 왜냐하면 기도 응답의 놀라운 특권을 주시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예화: 두드리면 무엇이든지 나오는 방망이 이야기-돈과 방망이 중 무엇을 갖겠느냐고한다면 무 엇을 갖겠는가?)
유치한 비유일지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께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는 것이 너무나 희귀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화: 양어장이나 낚시터에 있는 고기는 먹이를 던지면 모이고 자연에 있는 고기는 먹이를 던 지면 도망간다-그런 식으로 먹이를 얻어먹은 적이 없기 때문)
기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면서 응답을 계속 받으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해 가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지금 기도하는 것이 내 인생을 어떻게 할 지는 모르지만 -징검다리 하나 하나를 건너면서 결국 강 건너편으로 가듯이- 기도 응답 받고 순종하고 살았는데 나중에 뒤를 돌아다보니 기도한 것이 하나 하나 징검다리가 되어서 자신의 인생이 신비할 정도로 놀랍게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태도로 우리를 인도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고 기도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이 아직 살지 않은 내 인생을 향해서 “네 인생을 너 가고 싶은 대로 한번 그려봐라. 네가 살고 싶어하는 최상의 인생을 한번 줄을 그어봐라 그러면 내가 그곳으로 데려가겠다”고 우리에게 위임해주셨다고 하더라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최상의 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런 간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주님의 응답을 받으며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에게 기도제목인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제 기도제목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가 있는데 언제나 기도하면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했답니다. 그는 이미 터득한 것입니다.
최선의 상황에 내가 놓여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기도할 수 없고 하나님이 응답해주시지 않으면 곧 최악의 상황에 떨어질 것이라는 것과 내가 최악의 상황에 놓여있어도 기도할 수 있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그 최악의 상황이 곧 최선의 상황이 되리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경과 여건이 자신의 신앙생활이나 인생을 붙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과의 기도의 관계가 자기 인생을 붙들어 준다고 하는 신념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기도가 안됩니까? 그러면 기도하십시오. 왜냐하면 기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됩니까? 그러면 기도하십시오. 왜냐하면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될 때는 기도가 되니까 해야하고 기도가 안될 때는 안되니까 기도를 해야한다는 말입니다. 내버려둔다고 해서 저절로 기도되는 법은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절대 유일의 최고의 재산입니다.
우리가 죄 죽임의 교리를 계속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 죽임의 교리를 그렇게 열심히 배우는 것은 그런 죄 죽임의 생활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응답 받는 기도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기도가 어떤 기도입니까?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의 그 기도를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십니다.
(예화: 싫어하는 사람이 선물을 하면 괴롭다)
물론 내용에도 달려있겠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의 기도가 엉뚱한 내용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대체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통스러워하시는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은 사람의 기도입니다.
말씀을 들으며 변화를 많이 받은 사람은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도록 말만 하면 좋은 이야기를 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이야기만 합니다. 그런데 말씀도 잘 안 듣고 일관성도 없고 기도도 안 하고 계속 퉁기기만 하는 사람들은 입만 열면 심각해질수록 엉뚱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화: 신학교에 있을 때 수업시간에 늘 딴 짓 하는 한 학생이 자기와 김 교수가 사상이 같다며 돌아다녔다. 졸업 후 원숭이를 훈련시켜서 복음을 전하는데 이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항상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생각이 나옵니다. 기도에 있어서 응답이 최고의 가치라고 오늘 말씀드렸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응답해주시기만 하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주여”하면 됩니다. 주님을 불러도 응답이 없으니까 문제입니다. 첫째는 주님을 안 부르는 것이 문제이고 두 번 째는 주님을 불러도 대답 없는 메아리만 치니까 문제입니다.
"주여" 부를 때 "내가 여기 있다. 무엇이든지 말해라. 내가 시행하리라"하시며 하나님이 대기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신자가 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이기는 비결 아닙니까?
운명에 매여 살고 팔자에 매여 사는 것이 인생이라면 우리 인생이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에 가서 어려움 속에서 오래 참는 것이나 좀 배웠다면 누가 복음의 능력을 인정해 주겠습니까?
우리는 단지 참는 것을 배울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처지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고 개선하고 변혁시키는 능력을 기도를 통해서 공급받으면서 살아야지 만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기도의 능력, 이러한 응답의 특권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기 전에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끔 돌아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하는 것도 보셨고 절기를 지키는 것도 보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 쓸데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종교적인 겉모양은 그런 금식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내면의 세계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겉모습은 하나님 앞에 그럴 듯한 모습이 되었지만 내면의 세계는 도무지 하나님을 향해서 집중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식의 삶을 살다가 보니까 겉모습과 속 모습 자체가 완전히 분리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가장 슬퍼하신다는 것입니다. 정말 자기가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이미 자기가 정죄 당하고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이라고 말할 때 ‘나를 두고 하는 이야기구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겉모습이 그럴듯하고 죄를 완전히 죽이지 않아서 속이 썩어있는 사람, 그래서 고백과 삶이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죄인을 말할 때 ‘나를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회개할 기회도 잃어버리고 바르게 살 기회도 잃어버립니다. 아무 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을 가진 것과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끔 교인들이나 교역자들 중 완전히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는 착실한 신자 같고 하나님의 말씀에 잘 집중해서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집에만 가면 부인을 때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체구나 외모를 보면 선비 타입이고 오히려 교회에서는 공처가인 것 같은 인상을 주는데 집에만 가면 눈빛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와서 살면 해결 될 것입니다.
쓸데없는 세상 오락에 빠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도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반성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예화: 십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 목사님이 잠깐씩 없어지는데 알고 보니 성인 오락에 빠졌었더 라 는 한 사모님의 눈물 젖은 전화 내용)
겉으로 나타난 모습과 실제의 삶이 그렇게 엄청나게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삶을 살면 안됩니다. 조금씩 무엇을 즐기는 것은 괜찮습니다만 빠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죄가 안 되는 객관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미친 듯이 취미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입니다. 모두 영성을 갉아먹는 것입니다.
(예화: 책상 앞에 ‘오락은 하지 않는다’는 결심을 써 붙인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
여러분 중에 밤늦게 까지 통신 방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식으로 하면 여러분들의 기도의 영이 다 고사되고 맙니다. 저는 컴퓨터를 배우면서 워드프로세서와 통신만 배웠습니다. 나머지는 가르쳐 준다고 해도 싫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배우면 재미있어서 자꾸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형제들을 불러서 도움을 받습니다. 빠지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조금씩 윤활유처럼 하는 것은 좋지만 그런 식으로 빠져들어 가면 안됩니다. 모든 취미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평소 살아가는 삶의 시선의 초점이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는데서 나오는 것이지, 어느 날 갑자기 손들고 고래고래 소리지른다고 해서 영적인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삶이 유리된 채로 살면서 기도할 때 주님의 응답을 기대하는 것은 슈퍼맨을 부리려고 하는 심리이지 정상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태도가 아닙니다.
여기서 선지자가 이야기하는 결론은 “삶이 변혁되어야지 만 너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고 그래야 지만 너희의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한 구조입니다. 일주일동안 삶을 그런 식으로 사니 기도가 깊어질 리가 있습니까?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응답 받는 재미를 모르니까 더욱 기도를 안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안 하니까 점점 죄가 자라고 죄가 자라니까 점점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에는 안 해서 못했는데 이제는 하려고 해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간단합니다. 하나님 의지하며 살지 않으면 자기 의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의지해야만 살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 안 의지하면 자기가 알아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선택하는 것이 -다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삶, 죄에 완전히 물들어 있는 삶의 선택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택이겠습니까?
삶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거미가 꽁무니에서 토해내는 거미줄과 같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토해 놓아야지 만 집을 짓는데, 잘못 토해놓으면 거기에 자신이 엉켜버리는 것입니다.
기도의 문이 막히고 하나님께 응답 받을 수 있는 길들이 모두 막혀버리니까 삶에 일관성이 없고 아무렇게나 쏟아져 나오는 삶을 통한 죄악들이 그 자신이 완전히 얽어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을 구속하고 영혼을 구속하고 때를 묻히고 더러워져서 결국은 기도할 수 없는 쓸모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를 향해서 겨냥하고 있는 훌륭한 목표가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너희들이 금식하려고 애쓰고 절기를 지키려고 애쓰지 말고, 올바른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 삶을 개혁해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희를 기뻐하실 것이고 너희를 기뻐하시면 하나님이 너희의 기도를 응답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거나 교회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사람들은 한가지 문제를 놓고 “주님 이랬으면 좋겠는데요”하면 하나님이 턱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문제가 있는 것을 다 해결해 놓고 지나가시니까 좇아만 가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의 사람들이 분투하고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싸웠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 그래서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자체를 하나님이 매우 기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이 기도하기도 전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미리 작정하시고 하나님이 다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그런 것을 체험하신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필요한 줄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미리 우리를 위해 필요한 것을 예비하시면서 길을 열어 가시는 것입니다.
(예화: 새벽 기도회를 인도해야 되는데 5분전에 일어나 “주님 저를 도와주셔야 합니다”하고 기도하고 사당동부터 광화문까지 늦지 않고 도착하게 된 이야기)
앞서 행하신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인생살이는 급한데 자꾸 막히면 조바심을 하면서 기다립니다. 해결이 안되니까 신호위반하고 차선위반하고 옆 골목으로 들어가다가 차가 밀립니다. 그리고 빠른 길로 가려고 질러 가다가 쓰레기 차 만납니다. 도움이 안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열어주시면 대로로 가는 것입니다. 정석을 따라 말씀을 좇아서 가는 것입니다. 요령 피우고 타협을 해서 들어갔는데 더 큰 차를 만나고 결국은 신호등을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열어주시면 “주여”하면 “내가 여기 있다”하시며 빨간 불이 파란 불로 열리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삶의 개혁이 있으면 이런 기도는 간증 거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로 산다”는 간증과 고백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주님이 응답하시고 “내기 여기에 있다”고 말씀해주시는 이 감격적인 음성을 기도 속에서 늘 들으면서 살기 위해서는 삶을 변혁시키는 데에 투자를 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단히 우리의 삶을 바꾸고 우리의 신앙의 자세를 개혁하는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 새로워진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늘 하나님이 앞서 행하시고 우리를 마음에 합하게 여겨주시는 그런 삶의 변혁을 이루었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늘 기도 응답을 받으면서 산 사람들이었는데, 그 사람들은 모두 단지 기도만 많이 한 사람들이 아니라 삶이 하나님 앞에 변화된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거룩한 기도를 하는 것이지 짐승과 같이 사는 사람들이 거룩한 기도를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마치 하나님 앞에 부르짖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삶이 올바른 위치에 놓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에 관한 많은 지식들을 관념으로 대치시키는 연습을 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비유하신 다음에 “너희도 가서 그렇게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가서 그렇게 행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 앞에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지 만 우리의 삶이 변혁되는 것이지 아무 일을 안 해도 삶이 변혁되겠습니까?
(예화: 살이 찐 사람과 살을 뺀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왔는데 살이 찐 사람이 살을 뺀 사람을 존 경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신앙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많이 하고 ‘정말 하나님께 기도 할 때마다 내가 여기 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참 좋겠다’ ‘주님이 응답해주시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아무리 많이 해도 상상만 하는 사람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과 실제로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희망하는 것과 실제로 살고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교회 수련회의 설교를 마치고 나니 그 교회 목사님께서 “설교자가 감격하는 하나 님이 당신들의 하나님인줄 아느냐”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 그런 하나님이 계시구나’하고 감격한 것이, 설교한 사람이 만난 하나님이지 자기가 만난 하나님이냐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말씀을 들은 이 순간부터 자기가 변화된 삶을 살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지 만 그것이 결국은 자기도 하나님을 만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은 보고 있는 것이지 자기가 전쟁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똑같은 원리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받아야할 많은 의무들을 단지 우리들이 관념으로 바꾸는 연습을 하면서 살아서는 우리는 결국 앉은뱅이 신자의 처지를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구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았더니 복을 받았더라’ ‘내가 그렇게 충성스럽게 산 사람을 흠모하고 있으니 나는 그래도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 아닐까’ 그렇기 느끼는 것만 다르지 나머지는 다 같습니다. 전도하라고 하면 전도에 관한 책을 읽고,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에 관한 설교 듣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하면 프란시스의 생애를 읽으면서 감동을 받고, 하는 것이 하나님 보기에는 다 장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도하라고 하면 가서 전도를 해야지 무디에 관한 책을 읽고 감격하는 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자기도 무디와 같은 전기를 쓸 수 있을 정도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고 순교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쳐다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경건 서적은 반찬과 비슷합니다. 성경은 맨밥이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좋은 경건 서적은 읽고 나면 자꾸 책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대해서 궁금해지고 성경을 읽고 싶어지고 성경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디를 읽고 감화를 받은 다음에는 눈물을 흘리고 자기도 떨치고 일어나서 무디처럼 살아야 합니다. 기도의 사람들의 생애를 읽고 난 다음에는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깨닫고 기도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책을 4권을 사서 4번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1년에 한 번 정도는 정기적으로 읽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읽으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반응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놀리는 것입니다. 성경을 희롱하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고, 가장 좋은 의무를 모두 개념화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기도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지금 20주 째 설교를 듣고 있는데, 듣고 나서 기도에 관한 생각은 많이 정리했다고 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새벽기도 안나오던 사람은 나와야 합니다. 밤 기도 안나오는 사람은 못나오면 동네 교회에 가서라도 기도하고 아니면 아이들 내보내고 빈방에서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우리의 굽은 삶을 변혁시키고 개혁시키고 새롭게 만드는 촉진제가 되지 계속해서 듣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삶을 개혁이 안됩니다.
그러니까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여전히 하나님 앞에 기도해도 응답은 없고 기도에 대한 많은 정보는 알았지만 하나님 앞에 기도해도 한번도 하나님이 내가 여기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하고 아무리 불러도 하나님께로부터 대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생활의 변혁이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하게 삶의 현장과 함께 씨름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도의 영성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삶에 대해서 그렇게 정직한 마음으로 변화를 갈망하는 마음 없이 그냥 막 살았는데도 기도가 되었다면 그것은 성령이 열어주신 기도가 아닙니다.
단지 기도 속에서 놀라운 경험만을 좇아가고 신비한 체험만을 좇아가는데, 그런 체험들이 정상적인가를 보기 위해서는 그런 체험을 하고 난 다음에 그 사람에게 바뀐 것이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예전에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최대 가치였는데 기도 속에서 만난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고, 정말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체험이면 그 사람은 그런 체험을 하고 난 다음에는 행복하지 않고 불행해도 좋으니 주님처럼 거룩한 삶을 살고 싶다는 소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삶을 통해서 기도가 개혁되고 기도를 통해서 삶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 기도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가상 현실이고 사이버 공간일 뿐입니다. 현실도피의 공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그런 가상적인 현실에서 우리들이 그런 감정적인 배설작용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가상 현실이나 가상 공간이 아니라 역사 공간, 역사 현실 속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여기서 고난을 당하시고 여기서 수치와 멸시와 천대와 욕을 당하시면서 결국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서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러한 고난을 통해서 진정한 구속의 은혜를 입은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 삶의 현실에서 씨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의 참사랑을 깨닫게 되었으면 이전에는 하나님 앞에 불쾌하게 여겨지던 여러분들의 삶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삶을 보고 여러분 속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이 인정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삶으로 돌아서야 하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바뀌어진 삶을 살 때에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의 약속에 한 걸음 더 훨씬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10.기도의 사람이 기도하는 집을 만든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56:7)
오늘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하신 말씀에 기초해서 기도생활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교회가 바로 서는데 도움이 되는지,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이 구약 성경에서 읽었기 때문에 잘 안다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해져있는 성경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비둘기 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다 엎으시면서 주신 말씀이 바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였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하신 그 문맥에 의해서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래 이 말씀을 스스로 생각해내신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다른 모든 교훈이 그러하듯이 익숙해지셨던 구약의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인용되었을 때에 그것은 이사야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인용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말씀을 바르게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이사야 선지자가 무슨 말을 하다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고 말하게 되었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지 만 이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우리가 거기에서 어떤 교훈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될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56장에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한 이 예언은 이사야서 전체의 문맥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서는 66장으로 되어있는데, 자르면 39장까지가 전반부이고 40장부터 66장까지가 후반부입니다. 공교롭게도 1장부터 39장까지는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예언을 담고 있는데 구약의 내용과 매우 흡사하고 구약 성경책의 권수와 일치합니다. 40장은 시작되자마자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 내 백성에게 정다이 말하라”하면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무대가 되고있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부터 시작해서 나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예수님에 앞서서 세례요한이 올 것을 예고하는 전망인데, 신약성경이 시작할 때에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모든 것으로 볼 때에 40장으로 시작되는 후반부의 첫 장이 신약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적인 회복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66장까지 신약성경의 권수와 일치하는 27장을 담고 있습니다.
56장은 40장에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예언이 나오고 42장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목적이 43장까지 계속 되다가 53장에 와서 결국 메시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완전히 구속하셔서 이제는 이 땅의 나라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영적 왕국을 만들어 가신 구속의 비밀을 보이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회복을 말씀하시다가 56장에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소개하고 있는 이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56장에서 읽은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놀라운 축복이 가까워 왔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단일민족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착각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나올 때부터 많은 족속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지파별로 족속별로 나누어져있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지파와 족속이라고 하는 것은 혈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서 신앙고백을 하고 할례를 받고 들어온 백성들이 배속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섞여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흑인도 있었고 가나안의 원주민도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은 일단 한번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신앙을 고백하고 할례를 받고 들어오게 되면 그들은 모두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취급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 공동체 자체가 완벽한 복음적인 공동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셨는데 항상 신앙생활 속에서는 하나님의 생각만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가 가르쳐준 사고방식과 그 시대에 유행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꾸 신앙의 세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혼란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문제에 대해서 완전히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예화: ‘미션’이라는 영화에서 과라니족을 선교하고 있기 때문에 그 땅을 선교하고 있는 선교 사들에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인디언에게도 하나님이 영혼을 주셨겠느 냐’고 묻는 장면)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는 그런 식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 속에 이방인들과 고자들이 있었습니다. 고자는 남자의 생식기에 손상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콤플렉스를 많이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신체적으로 온전하지 못하고 핏줄이 이방인인데, 신앙 때문에 여기에 들어와서 하나님 믿는 이스라엘 백성 중 한 무리가 되어서 여기서 살기는 하는데, 내가 정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부족함은 없는가’ ‘정말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백성으로 쳐줄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 굉장히 불안한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서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너희들이 이방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불안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너희들이 그렇게 고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육체적인 결함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그쳐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였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육체적이고 원인적인 특성들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영적인 특성들에 대해서 눈을 뜨고 그것들을 향하여 주목하고 그것들을 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혈통이 이방인이요, 또 육체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하시는 이 때에는 이러한 외면적인 것들이 아니라 내면이 중하고 그가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았고 태생이 어떠한지가 문제가 아니라, 혈통이나 족벌이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그가 얼마나 내면적으로 하나님의 이런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받은 만큼 변화된 사람, 변화된 신념을 가진 사람이 되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겉 사람으로 할례를 받은 그 사람들이 진정한 할례당이 아니요 마음에 진정으로 할례된 그 사람들이 참 할례당이라”고 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항상 신앙의 외형에 만족해서는 안되고 신앙의 내면적인 특성을 진실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종일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런 식으로 훈련시켜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하나님께서 이렇게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 세계를 강조하시고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아니라 내면에 있는 세계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내면의 세계를 고치시려고 할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자신의 문제의 본질을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거부하고 외면적인 삶으로 만족하는 형식적인 신앙으로 흘러가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징벌하셨기 때문에 결국은 포로로 끌려가게 하시고 결국은 망하게 하셔서 큰 징벌을 당하게 하시는데, 그런 때가 모두 지나가고 이제는 하나님이 그들을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는 때가 올 것이며 번제와 희생이 나의 단에서 드려질 때 내가 그것을 기꺼이 받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인도하여 성산에 이르게 하여 그들이 기도할 때 그 기도를 기쁘게 받으실 것이고 그들이 드리는 허물과 제물을 기쁨으로 하나님이 열납하시겠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장엄한 회복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회복시키고자 하실 때에는 반드시 교회에 놀라운 변화가 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놀라운 변화가 어떻게 오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새롭게 하시기 전에 먼저 교회 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많은 무리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성산을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찾아오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서 갖는 관심은 하나님 자신을 향하여 갖는 관심과 매우 일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을 향해서 회복된 신앙을 갖게되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와의 관계를 새롭게 해주시는 역사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나라가 현재 어떠하고 앞으로 그 나라가 어떠할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교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과 같이 하나님의 교회에 형식적인 신자들이 가득 차고 하나님 앞에 냉담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하나님 앞에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과의 기도의 세계를 거의 잃어버린 사람들이 교회에 가득 차는 나라는 미래에 전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한 나라에 살면서도 이 세상 사람들이 갖는 것과는 다른 소망을 갖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도 아니고, 많은 재물을 소유한 나라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언젠가 갈라진 이 나라가 반드시 하나가 되기를 원하고, 이처럼 어려운 때를 만나서 고통하고 수많은 동포들이 실업자로 거리로 내몰리는 이 때가 속히 종식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실제로 이 일을 위해서 협력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광은 단지 이러한 세상의 나라의 번영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경건한 백성들의 간절한 소망과 영광은 단지 세상 나라가 번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나라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인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종일관 세상을 바라봄에 있어서 이런 시야를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이런 시각을 유지하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이 어려운 때를 당한 것을 몇 사람의 책임으로 돌리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 문제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공무원들이 나라가 주는 월급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멍청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런 일들이 일어났고 우리는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연일 신문지상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어제까지 아빠의 월급봉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대 여섯 명의 식구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거리로 뛰쳐나오는 이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환경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좀더 새로운 시야를 가지고 이런 현실들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국가적으로 어려운 사태를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바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왜 하나님 앞에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이 시대 교회의 어떤 점들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어려움과 고통을 보내시는 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런 고통 속에서 고통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단지 ‘우리 스스로 실수를 해서 이와 같은 일을 만났으니 우리의 힘으로 무너진 상황을 재건하자’고 한다면 결국은 하나님 없이 살자고 구호를 외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사람대로의 사고방식으로 접근 할 것입니다. 경제학자들은 열심히 공부를 하고 판단을 하고 면밀히 상황을 분석하고 대책을 세울 것이고 외교관들은 더욱 더 외교를 열심히 해서 돈도 꿔오고 채무상환도 연기해서 국가적인 어려움을 면하게 할 것이고 정치가들은 정치가들대로 사회 각계각층에 타협하면서 새로운 구조조정을 통해서 세상이 바뀌는 물꼬를 터 보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모두 이렇게 애를 쓰지만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것 자체가 이 민족을 살리지 않을 것이라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 이 모든 역사를 움직이는 손은 하나님의 장중에 있고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은 그리스도인들 아니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단지 고통밖에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정말 소명 없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구속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 해오면서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에서 가지고 있었던 신앙적인 시야들을, 우리들이 가지고 우리 인생을 보았던 그런 시야들을 오늘날 우리의 사명과 역사를 보는데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시야를 가져 왔습니까? 여러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똑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한 부모로부터 출생을 했고 교육을 받았고 인생의 굽이굽이 시련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성장했고 한 가정을 이루거나 직장생활을 하고있거나 혹은 학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보통사람들이 만나는 다양한 사건을 다 만났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항상 해석의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가정에 왜 이런 어려움이 일어났을까?’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내가 어려운 직장생활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변화를 기도했더니 직장을 옮기게 하시고 새로운 생활의 무대를 주셨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무슨 뜻이 계셔서 저를 이 직장에 파송하셨습니까? 하나님, 월급 받아먹게 하기 위해서, 돈 조금 더 주시려고 저를 이 직장으로 부르시지 않으신 것이라는 사실을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내 인생에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며 살고 싶습니다” 어려움을 만났지만 우리는 그 어려움의 이유가 되는 상황과 싸우기 보다 우리 인생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가 어려움과 고통을 만나게 된 상황을 하나님께 설명 드리면서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 모습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개인의 삶, 개인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이런 시각으로 인생을 보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훈련들이 상당히 되어있는데, 역사와 상황을 바라보면서는 도무지 이런 훈련이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문제들을 위해서 늘 간구하고 기도하면서 이 나라와 국가의 문제들은 신앙적인 시야로 바라보면서 옳게 기도하지를 못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깨닫는 바가 적기 때문에 기도도 매우 적을 것이고 기도가 매우 적으니까 간구하는 바도 매우 희미하고 초점도 흐릿해서 응답을 해주셔도 응답이 왔는지 안 왔는지 희미한 그런 기도생활을 해나가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간에 이러한 전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축복을 다시 베풀기 시작하실 때에 그 때 교회에 놀라운 변화가 오는데 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성산으로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형통하고 잘 될 때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방종하게 살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부요한 때에 하나님을 공경하고 주님을 경외하는 삶보다는 자기를 위하고 유혹에 빠져있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런 삶들이 우리 속에서 너무 만연하게 되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징벌하시고, 징벌하시기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대속의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하려고 하지 않고 열심히 벌어서 먹고 사는 일에 자신을 모두 매몰시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제 백성들을 회복시키시고 나라들을 새롭게 하실 때에는 교회에 변화가 오는데 그 때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인생의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는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국가 상황이 일어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귀의하고 있다는 보고를 전해오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에서의 문제는 이렇게 많이 들어오는 사람들이 사실은 이 어려운 때에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불쌍한 내 백성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면서 하도 곤고하고 괴로우니까 교회로 들어오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든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서 성산에 올라오는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믿지 않던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며 살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이제는 하나님께로 진정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의 도리로 자기를 회복시키고 싶은 소원과 그런 간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떠날 수가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깊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생명을 잃어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촉구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에 부응하는 기도생활을 해나가지 못하게 하는 가장 커다란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 스스로 깨닫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는 것으로만 만족할 수 없고 하나님의 교회와 멀리 떨어졌던 우리의 마음과 삶이 교회를 중심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이 교회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생각날 때마다 가끔 찾던 사람들이 무시로 교회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렇게 교회로 돌아오게 되는 교회적인 모습들이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회복되어질 때, 이 민족은 소망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들어오고 나서 얼마 안되었지만 우리는 어려운 시기마다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 남아있어서 많이 기도했습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그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세월을 보냈지만, 소수의 뜻 있는 사람들은 국가의 위기가 올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제 주위에서도 국가의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마다 저항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힘에 붙들려서 금식하고 기도하던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종들의 간구하며 부르짖는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이만큼까지 데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백성들을 징계하시는 방법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지금 견딜만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잠들어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빛으로 살지 못한 세상 백성들과 모두 섞여서 동질성을 잃어버리고 살아간 이 모든 잘못된 교회의 모습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만약에 전쟁으로 심판하셨다면 우리는 오늘 모여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이 시련은 많은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주고 있지만 민족적으로 교회적으로 보면 아직은 희망이 있는 시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때에 더더욱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들이 다시 한번 성산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하나님 앞에 회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까지든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에 의해서도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장승처럼 버티고 있는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요동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진노는 쌓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이 때의 어려움을 알고, 이 어려운 때를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을 알고, 많은 사람들이 이 어려움 속에서 고민하고 절망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가족들과 함께 동반 자살을 하는 비극적인 일들이 되풀이되는 속에, 저항도 못하고 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그 때에,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가 진정으로 살 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벧엘로 올라가서 우리의 인생의 주관자가 되시고 교회의 주관자이시며 이 세상 이 민족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한다는 인식을 분명히 가지고 성산으로 나아가는 신앙이 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시련은 이기기에는 너무나 쉬운 시련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돈만 다시 벌면 해결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중국에 대해서든지 미국에 대해서든지 흥분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미국에 집회 갈 때마다 땅을 밟으며 언제나 느끼는 느낌이 하나 있는데, 남미와의 비교입니다. 이를 비교한 어떤 사람의 해석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청교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앙의 자리만 지킬 수 있다면 굶주림과 고난이 와도 좋다며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갔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금도 아니고 은도 아니고 아름다운 지하자원이나 석유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아니하고 우리가 원하고 우리들이 성경적이라고 믿는 형태로 그렇게 하나님께 예배할 수만 있다면 만족하다고 생각하고 건너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을 찾아서 건너온 것입니다. 신앙을 찾아 건너왔는데 한참 살고 보니 땅에서 별것이 다 나온 것입니다. 지하자원 중 굉장히 많은 품목들의 1위를 그 나라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적은 돈을 주고 알라스카를 샀는데 천연자원이 많은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미로 건너간 사람들은 신앙을 찾아 간 것이 아니라 금을 캐러 갔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난을 면하지 못하고 삽니다. 신앙을 찾아 간 사람들은 신앙과 함께 많은 번영을 손에 넣게 되었고 돈을 찾아 간 사람들은 신앙도 없고 망하게 된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명백히 말씀하시고 있는 원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세상의 물질을 좇아서 사는 인생처럼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 없습니다. 원래 돈이라고 하는 것은 안개와 같이 사라지는 것이고 뜬구름과 같이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쪽 주머니에 있지만 내일은 저쪽 주머니로 가고 거기 아직 있는 줄 알고 좇아가서 만져보면 딴 데로 갔습니다. 이것이 돈입니다. 돈은 한 주인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물건이 아닙니다. 할 수만 있으면 새 사람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그런 물질을 좇아서 살면 결국은 지조가 있고 정함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면서도 항상 이러한 원리를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어려움에 우리를 두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기 위해서 세우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어려운 때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주님과의 관계를 정말 새롭게 해서 오히려 경제적이 어려움 때문에 교회도 수많은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를 걸러내고 청결하고 청교도적인 신앙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 하는 그런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키시고 그들을 다시금 축복으로 인도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교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성산으로 올라가는 성도들의 무리인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성산으로 올라가야 될 때가 아닙니까? 우리가 눈에 보이는 교회에는 이미 올라와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한 교회 속에도 우리가 함께 들어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며 목회자 앞에 나아왔지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는 사람들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지런히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잘못 살았던 우리들의 삶들을 뉘우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성산으로 올라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이처럼 예배하고 하나님께 나아올 때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깊이 깨닫고 이전에 몰랐던 자신의 신앙의 경박함을 인하여 깊이 애통해 하고 아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하나님을 붙드는 신자들이 늘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신앙을 미워하고 가증한 신앙생활들을 청산하고 싶어하고 예전의 자기와 같이 형식적이고 깡통에 불과한 신앙생활 하던 많은 사람들을 보며 가슴아파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 바로 성산으로 올라가는 성도들이 교회 안에 새롭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모든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 중에서 대단히 커다란 착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해야할 그 곳에서 기도할 때에 가장 훌륭하게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있기를 원하는 그 자리로 돌아갔을 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거기에서 놀라운 기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서있는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리가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결코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도 제풀에 지치고야 말 것입니다.
그래서 늘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당신을 향하여 기도하려고 하는 백성들에게 이처럼 기도와 그들의 삶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성산으로 올라가는 성도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앞에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며 아버지 앞에 돌아가야 할 자리를 깨닫고 거기로 돌라가서 기도할 때, 그 기도가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성산으로 나아올 때, 그 무리들이 기도하는 그 기도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포로로 끌려갔을 때에 그렇게 기도를 들으시지 않던 그 하나님이 오히려 포로로 끌려갈 지경이 되어서도, 또 포로로 끌려간 후에도 상황 자체가 고통으로 가득한 역사가 전개되어도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던 하나님이, 하나님이 가기 원하던 그 자리로 돌아가서 간절히 기도할 때에 주님께서 놀랍게 역사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순종하는 사람은 능력 있는 기도생활을 거의 할 수 없습니다만, 만일 그 사람이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지 정상적인 기도의 세계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도에 있어서 매우 무기력한 사람들은 삶의 불순종으로 습관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자기가 마땅히 서있어야 할 자리에 서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 기도 속에 놀라운 파괴적인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파괴적인 기도의 힘을 통해서 창조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배우는 교훈은 우리들이 영적인 성산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사람들을 미워하고 살인한 피묻은 손은 정결케 한 후에 올라가야 할 것이고 죄로 더러워진 예복은 벗어버리고 새로운 옷을 입고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처럼 깊이 깨닫고 이 삶을 떨쳐버려야지만 비로소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내 집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나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왜냐하면 나의 집은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모든 사람이 기도하는 주체이냐 아니면 모든 사람이 기도를 받는 백성이냐는 것입니다. 저는 후자의 해석을 훨씬 좋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을 모든 백성들을 위해서, 모든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집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한 민족을 향해서 은혜를 베푸시고 은총을 다시 회복하실 때가 되면 교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교회가 기도하는 집으로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집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되겠습니까? 교회당 앞에 크게 네온사인을 걸어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혹은 자신 교회 나름대로의 표어를 써 붙인 교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답답하니까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외치고 있는 구호가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교회 안에 있는 백성들이 그 집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한 교회의 교인이 된 의미가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섬김을 하는 것으로 만족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은 목회자 앞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한 교회에 출석해서 한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요구하고 계시는 지 압니까? 여러분이 교회당에 나와서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있는 것을 목회자나 교회를 향해서 적선하고 있는 것과 같은 태도를 가질 지 모르지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교회에서 귀빈 취급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귀찮은 빈대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작고 초라한 교회에 나와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대단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영광으로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매일 뵈옵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포도원에 심긴 바 된 포도나무 가지니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와 신과 공평의 열매를 맺도록 하나님이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과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교회에 나왔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여러분들이 어떻게 이 교회가 하나님 앞에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나타나도록 도울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교회가 하나님 앞에 모든 구원받을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집이 되도록 얼마나 돕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의 집이 기도하는 집이었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 때문에 노는 집이 되거나 태만한 사람들이 모인 집이 되거나 부도덕한 집이 되도록 여러분들이 스스로 기도의 집이라고 하는 이름을 허물고 있지는 않은 지 여러분들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이 집이, 하나님의 교회가 이처럼 기도하는 집이 되기 위해서는 조건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 혼자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혼자 교회를 기도하는 집으로 만드시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집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성도들이 그 교회에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 교회가 무슨 목회 철학을 가지고 있고 무슨 아름다운 사상을 가지고 있고 또 세상에 내놓을만한 좋은 것을 그 교회가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되는 비결은 사람의 방법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들이 모인 그 집이 기도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인생을 다 살고 난 다음에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헤아림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헤아림을 받을 때에 우리는 아마 커다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들은 상당히 하나님 앞에서 사소하게 취급을 받고 있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했던 문제들이 굉장히 중차대한 문제로 떠올라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인생을 헤아림을 받게끔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복음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그 사랑을 알지 않는 것은 주님의 그 사랑에 대한 눈물이 교회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갈망하고 몸부림치며 “예수여,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세상 사람들이 몸부림치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우리 인생의 참된 주인이 없습니다” 라는 빛깔 짙은 사랑의 고백이 교회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인간의 잔재주와 그 시대 시대마다 인간의 재치와 방법을 가지고 나타난 사람들이었지만 역사를 흐느껴 울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한 사람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고 그 사람들 뒤에는 기도하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최고의 수준은 아주 깨끗하고 아주 도덕적이고 아주 불붙은 사람이 되는 것, 그래서 제법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세상의 욕망도 없고 자기가 이 세상에서 좋은 명예와 재산을 누리면서 살 의향도 없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장 최고의 삶은 -최고의 삶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장 평범하고 고유한 삶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간직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오실 때에 제일 한심한 일이 주님은 흐느껴 우시는데 좋다고 낄낄대며 살아가는 것, 주님은 말할 수 없이 기뻐하시는데 쓸데없는 비관주의에 잠겨있는 것, 주님은 지금 깊이 아파하고 계신데 아무 근거도 없는 희망을 가지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 이런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사람은 당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나약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과 사정을 알아주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심정으로 당신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부은 바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마음, 이 정신, 이 은혜, 이 참된 영성 없이는 이 세상에서 들풀과 같이 살았다가 단지 사라지는 그런 존재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들풀도 먹이시고 공중에 나는 새도 기르십니다. 그러나 잠시 피었다 지는 들풀, 공중에 날다가 이름도 알지 못하는 것에 떨어져서 스스로 흙으로 돌아가는 새와 그 풀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무엇을 나타내고 무엇을 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죽겠다고 하는 이 소망은 하나님 앞에 정말 진실하게 살다가 죽겠다라고 하는 소망이라기 보다는 타협하며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를 당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을 박해할 필요도 없는, 대결도 없고 평화만 있는 그런 삶을 살다가 이 세상을 마치겠다는 것과 동의어인 것입니다. 이러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예화: 주일 오후마다 늘 오시던 칠순이 넘으신 권사님이 다니엘서 9장을 다 들으신후 눈물이 글썽이며 역사에 기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고 싶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마음을 안 사람들은 우리만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한 사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나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 창조되었고 교회도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오늘 이와 같은 때에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훼방하며 다니고 있는 길거리의 수많은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 신지조차 모르는 북녘의 모든 동포들도 사실은 그분의 손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며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한 백성들이 아닙니까?
그들의 인생의 참된 본분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전할 수 있겠으며, 그들이 참된 인생의 본분을 깨닫지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아파하고 그 아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에게 나아가서 참다운 그리스도 예수의 때묻지 않은 복음을 전해서 그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참사람을 알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제는 말과 재주의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의 이 뜨거운 마음을 나누어 가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잘 숙달된 언어로 이말 저말 끌어댈 수 있는 말재간이 뛰어난 전도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말하다 울어버릴 수 있는 전도자들이 필요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받을 때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핏자국을 생각하며 고난받을 수 있는 그러한 수고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모여서 그 집이 비로소 기도의 집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왜 여러분들의 기도의 생활은 그렇게 초라합니까?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환경이나 여건이나 어려움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도하면
귀를 기울이사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다네
깊은 웅덩이와 시름에 건져주시고
나의 발을 사슴이 산을 디디고 지나가는 것처럼 건지셔서 그렇게 높은 곳을 다니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는 이론과 논리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실천하는 삶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할 때 우리는 그 신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전수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일반적인 기도생활을 회복하지 않고는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없고, 기도하지 않는 성도들은 기도하는 교회의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예화: 무거운 짐을 여럿이 함께 들어보면 그 사람의 성실함과 야비함이 다 드러난다-힘을 쓰지 않고 드는 시늉만 하는 경우)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는 성도들은 띄워올려야할 기도의 비행기에 줄 타고 매달리는 사람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여러분들이 아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먼저 기도의 생활을 회복하지 않고는 우리가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없고 우리가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없다면 하나님의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예화: 초창기에 다니던 교회에서 기도만 하면 교회에 대해서 안 좋은 그림을 보여 주 셨다- 어 떤 이가 기도하는데 온 교회에 굵은 거미줄이 가득해서 아무리 애써도 끊어지 지 않는 환상을 보았다는 이야기)
저는 그 때 자신이나 근근히 꾸려가며 은혜 생활을 했지 교회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사명을 주신 것을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한 교회가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는 건강한 은혜에 넘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그 교회에서 자기의 진액을 짜서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산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복 주십니다. 그렇게 산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무론 대소하고 상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열린교회에서 얼마동안 신앙생활 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이름 모르게 눈물 뿌리며 기도하고 수고한 그 모든 것은 목회자는 다 기억하지 못해도, 그리고 알아도 갚아줄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다 헤아리시고 기억하시며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기도생활을 회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이겨야 합니다. 제가 늘 말하듯이 새벽시간에 새벽기도 안 나오고 푹 자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나오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결심하지 않아도 잠은 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결심하지 않으면 깰 리가 없습니다. 기도 안하고 사는 것은 결단할 필요가 없지만 기도하면서 사는 것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자주 결단하고 하나님 앞에 살려고 몸부림쳤던 성도들과 대충 가는 대로 막 살았던 사람들이 똑같이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복될 것이고 그들이 주를 섬길 때 하나님이 그들을 특별히 돌보실 것입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뿐만 아니라 현재적으로 모이기를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집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드는데 얼마나 기여하는 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때문에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이 교회가 기도하는 것이 특징이 되는 집이 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얼마나 기여했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이 일을 위해서 얼마나 기여하셨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나 가진 재물 없고 많이 아는 것이 없고 남다른 뛰어난 체력이 없어도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고 나 때문에 조금이라도 보태어서 이 집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봉사이고 그것이라도 해야되겠다는 마음을 여러분들이 가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이 집이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나 같은 죄인을 살려 어둠 속에서 빛으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앞으로도 더 큰 놀라운 역사를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당신 앞에서 세워달라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Ⅳ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