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로 역경을 이기며
(200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겸비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눅18:9-14) 2007.2.25 주일오전 1
2. 기도의 모본을 보이신 예수님(눅11:1) 2007.3.4 주일오전 10
3. 말씀으로 기도의 영을 회복하라(느9:3) 2007.3.11 주일오전 21
4. 마음이 괴로운 자의 기도(삼상1:10-11) 2007.3.18 주일오전 33
5.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예수님(히5:7) 2007.3.25 주일오전 43
6. 겟세마네의 기도(눅22:42-43) 2007.4.1 주일오전 52
1. 겸비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눅 18:9-14)
오늘부터 7주 정도 기도로 시련을 이기는 것에 대해서 연속으로 설교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소년이 있었는데 할아버지로부터 전설 같은 이야기를 계속 들었습니다. 그 전설에 의하면 동네 저 멀리 뒤편에 보이는 험하고 큰 산에는 황금이 많이 묻혀있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그 전설을 믿고 여러 사람이 금광을 개발하기 위해 도전했지만 실패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전설은 틀림없이 사실이어서 거기 엄청난 큰 금이 묻혀있다고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린 아이는 할아버지의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꿈을 꾸었습니다. 자신이 돈을 많이 벌면 이 금광 사업에 도전을 해서 일확천금을 해 큰 부자가 되면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일생을 살고 싶다는 아주 귀한 뜻을 품은 소년이 되었습니다. 그가 마음먹은 대로 상당한 재산가가 되었을 때에 어릴 적 꿈을 따라서 그 동리로 들어와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그 광산을 다시 일으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무리 파도 금은 보이지 않고 돈은 계속 들어갔습니다. 결국 함께 동업하던 사람들도 실망을 하여 서서히 떠나고 자신이 모은 꽤 되는 재산도 그 끝없는 금광 개발에 쏟아 부으면서 그는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같이 있었지만 다 떠나고 이제 마지막까지 그와 생사를 같이 하는 몇 명의 동지들과 함께 힘없이 다시 금광을 캐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어느 날 갱도에서 소리치는 고함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엇인가 그들이 발견을 한 것입니다. 내려가 보니까 자루는 다 썩고 쇠도 다 녹슨 곡괭이 자루 하나가 그 갱도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예전에 금광을 하던 사람들이 거기까지 파 들어갔는데 지각의 변동이 일어나면서 산이 주저앉아 그 갱도를 몇 십 년 전에 이미 다 막아버린 겁니다. 자신들이 많은 돈을 들여 새로 갱도를 뚫었지만 사실은 예전에 그 사람들이 파 내려갔던 거기까지 겨우 오게 된 것입니다. 신기해서 그것을 빼 보려고 했지만 뽑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예전에 파 들어갔던 사람들이 거기까지 파고 들어가서 곡괭이를 힘껏 내려쳤는데 그 곡괭이가 벽에 꽂히고 나서 빠지지 않으니까 그냥 떠나버리고 세월이 지나자 그 갱도는 묻혀 버린 것입니다. 온 힘을 다해서 그 갱도에 꽂힌 곡괭이를 뽑아보니 노란 금이 나왔습니다. 말하자면 노다지를 발견한 것입니다. 거기까지 캐 들어갔지만 막상 금맥에 곡괭이를 꽂았을 때에는 그 곡괭이가 더 이상 빠지지 않자 거기서 포기했는데 결국 금은 그 포기한 지점에서 멈추지 않고 더 캐 들어가려고 했던 사람에 의해서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생활은 마치 금광을 캐는 것과 같습니다. 거기에 모든 신앙의 비밀이 묻혀있고 그 기도 속에 이루어지는 응답 안에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수많은 계획들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흥미진진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의 비밀들,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뜻들을 모르는 채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재미 하나도 없는 신앙생활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인내와 끈기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기도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소수입니까?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기도의 재미, 기도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령한 기쁨을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일 텐데 왜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기도하기를 원하실까? 그것도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기를 원하실까? 의문이 듭니다. 이에 대해서 요한 칼빈은 자기의 책 속에서 말하기를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 온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고 둘째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끊임없이 의지하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기도하게 하십니다.”
I. 본문의 배경
오늘 성경에 보면 이러한 기도의 문을 여는 비결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올라갔는데 한 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입고 성전에서 내려왔고 한 사람은 유창하게 기도했지만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붙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비유 속에서 내리신 예수님의 결론이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겠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에 있어서 겸비하게 낮아지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주십니다.
이 기도는 우리의 혈과 육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하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은 기도하는 것이 매우 쉽고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은 사람은 기도하는 일이 매우 어렵습니다.
한 사람의 존재의 아름다움은 그 사람의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고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은 그 영혼의 효과로 말미암아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그 아름다운 마음은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며 겸비한 마음, 그 마음이 바로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II. 겸비함과 기도응답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관한 교훈을 가르쳐주실 때에 하나님 앞에 마음을 겸비하게 낮춘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시는지 스스로 낮아진 사람을 기도 속에서 어떻게 높여주시는 지를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외국의 집회에 갔을 때 그런 이야기를 목사님이 저에게 직접 들려주셨습니다. 자기의 교인 중 한 사람이 있는데 이민 와서 이 사업 저 사업했지만 다 실패하고 빚을 많이 지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가정에도 어려운 분란이 있게 되고 백방으로 자기를 스스로 건져보려고 애를 썼지만 길이 없더랍니다. 절망이 확 밀려오면서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자살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죽을까? 생각하다가 강의 높은 다리에서 강으로 뛰어내려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죽으러 강의 다리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인생 살기 싫어 자살하더라도 목사님께 기도는 받아보고 죽자.’하면서 목사님 생각이 간절하게 나더랍니다. 평소에 친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목사님 사택을 찾아갔습니다. 평일에 교회도 아닌 사택을 밤늦게 찾아갔으니 목사님께서 놀랐습니다. 목사님께 자신의 사정이야기를 하고 정말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하면서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목사님이 거실에서 무릎을 꿇은 그를 위하여 마음을 실어서 간절히 기도해 주었답니다. 돌아와서 기도도 받았으니 내일은 죽자 하고 집에 오는 길에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무엇인가 잡히더랍니다. 얼마 전에 사 놓은 복권이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별 기대감도 없이 복권을 맞혀 보았더니 100만$에 당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10만$은 십일조하고 10만$은 목사님께 선한 일에 쓰시라고 드리고 나머지로 빚을 갚고 그러고도 남아서 새 출발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늘 저녁에 나에게 기도 받으러 오라는 뜻이 아닙니다. 난 그런 은사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당첨된 그 순간 100만$을 먼저 느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지금 이 인생의 시점에서 자살 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 구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간섭하신 겁니다. 그러면서 당첨이 되었는데 기쁜 것이 아니라 두렵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똑같은 일이 일어나도 어떤 사람은 그 모든 일의 의미를 하나님과 관계에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상관없이 그 문제를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눈물로 자신의 인생은 벼랑 끝에 왔고 이제는 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라고 그 전날 스스로 기도할 수 없으니까 목사님을 통해서라도 간절한 기도를 받고 나니까 그 기도 받은 후에 일어난 그 꿈같은 놀라운 일이 닥쳤을 때 기쁨보다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간섭하시는구나.’ 그가 만약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마음이 아니었더라면 ‘야,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재수 좋다.’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라는 겁니다. 똑같은 사건인데,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비한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절실하게 중요한 마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땅 끝에서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 제일 먼저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의 심령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은 하나님 앞에 겸비한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인격이 고매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고매한 인격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는 것과 수시로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도 연약한 인간, 우리와 같은 혈기, 정욕, 모든 부패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시때때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 앞에 자기를 한없이 스스로 낮아져서 ‘주님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없고 분초라도 주님이 나를 지켜주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는 고백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공통점입니다.
III. 주님을 의뢰하는 겸비함으로
이 세상에 수많은 짐승들이 있지만 주님이 우리를 양에 비교하셨습니다. 그것도 어린 양에 자주 비교하셨습니다. 모든 짐승들이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보호 기능들을 각각 가지고 있지만 양은 그것이 없습니다. 인간은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당신에게만 있는 영혼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삼라만상을 지배하면서 살 수 있게 하나님이 그들을 위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그들을 양에 비유하신 이유는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지만 ‘네가 참으로 사람으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너는 나를 의지해야 하느니라.’ 이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양에 비유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낮아진 마음이 되어서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라고 하는 이 마음의 고백이 있는 삶을 살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이 마음은 교회를 오래 다닌다고 해서 생기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 마음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지하는 겸비한 마음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끊임없는 약함, 죄, 불결, 끊임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자기를 의지하던 마음은 점점 죽고 자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실망하면서 자기를 붙들어 주시는 예수님의 능력 있는 그 팔을 의지할 수 없는 마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그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욕심을 따라 살기 때문에 마음이 강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서 쉽게 휘거나 꺾기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기 쉽습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그 마음을 물같이 녹아내리게 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에게 시련도 주시고 역경도 주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과 모든 능력, 자원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영육 간에 어려움을 허락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형벌하시거나 책망하시기 위해서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직접적으로 어루만지셔서 우리의 마음을 녹이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때때로 이런 깊은 시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런 깊은 시련과 어려움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장 가까웠던 때가 언제였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에는 우리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회상해 보십시오.
물론 그렇게 하나님과 깊이 가까웠을 때 우리가 가난하고 병들었을 때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물질의 염려는 없고 아무런 이 세상의 환경으로는 조금도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좋은 환경 속에 있을 때였을 수도 있습니다. 환경과는 상관이 없이 우리의 마음에는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그 마음은 ‘자기를 의지할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나 혼자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는 주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잘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에 주님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고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도움과 자비하신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살아갈 수가 없는 약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주님의 손을 꼭 붙들고 의지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었어도 우리는 그것을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고 무릎을 꿇으면 우리의 마음의 샘에서는 기도가 계속 흘렀습니다. 이 쓸모없는 인간이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도저히 주님이 원하시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십자가 앞에서 매일 울게 했습니다. 그 은혜가 감사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자리에 섰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도중에 이것을 포기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무릎을 꿇고 이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할 당위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사이에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새 생명주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깊이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은 물같이 녹고 급기야 우리의 마음은 부드러운 진흙 같아져서 주님이 무슨 말씀으로 우리를 빚으시든지 ‘아멘, 부족한 주의 종이오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고백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 마음은 목사라고 해서 저절로 갖게 되는 마음이 아니고 주일마다 기도하러 올라오는 장로가 되었다고 해서 그 마음이 저절로 그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많이 배웠다고 해서 있는 그 마음이 아닙니다. 이 마음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겸비하게 된, 낮아지게 된, 주님 앞에 엎드러지게 된 그 마음입니다. 주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목회란 무엇일까? 마음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
신앙생활이란 무엇일까? 한편으로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 은혜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그 큰 은혜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연약하고 불결한 나 자신에 대한 슬픔 때문에 눈물이 마음에 꽉 찬 것, 건들기만 해도 눈물이 확 쏟아질 것처럼 눈물이 가득 찬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주님을 의지하는 성도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그 마음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그 큰 은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에 전율하며 그 십자가 앞에 깊이 엎드러졌을 때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녹였지요? 그 십자가의 사랑 앞에 우리의 마음이 깊이 녹을 때, 그때 우리는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중이었습니다. 마음에 주님을 의지하는 눈물이 가득 찼을 때 우리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십자가에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가슴에 밀려들었습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 흘리시는 우리의 죄 값인가]
티끌만큼도 나를 의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를 의지할 수 없으니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나보다 못한 세상을 의지하겠습니까? 나보다 못한 사람을 의지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깊이 의지했습니다.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이 녹아내리며 주님을 깊이 의지하면서 주님이 나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나는 아무 희망도 없고 숨조차 쉴 수 없는 그런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주님 앞에 눈물로 기도할 때 주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는 생각할 때 아무 가치도 없고 쓰레기 같은 이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의 사랑 때문에 나를 아직까지도 긍휼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흐르는 눈물을 닦고 나면 가슴 속에서는 오직 한 가지의 소원이 생겼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 쓸데없고 더럽기 짝이 없는 인간을 이렇게 주님이 사랑하시니까 이제 나는 주님의 것이야 나는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야’ 그러며 하나님께 자기를 다 바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그런 마음속에는 주님께 불순종하며 살아야겠다는 티끌 같은 마음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겸비하게 낮출 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싶은 것입니다.
Ⅳ. 겸비함과 의로움
오늘 보십시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관습은 손을 들고 하늘을 우러르며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불의하지도 않고 토색하지도 않고 간음을 하지도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십일조를 주님 앞에 드리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바로 그때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손을 들기는커녕 그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얼굴을 들어 하늘을 우러르기는커녕 고개를 숙인 채 땅을 쳐다보며 하나님 앞에 흐느끼는 기도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리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인간도 아니었습니다. 오늘로 말하자면 친일파 앞잡이 개들이었습니다. 지역을 할당하고 세금을 매기면 일정액은 로마로 보내고 나머지는 거두어서 자기가 갖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고 동족의 피를 빨아 먹는 유대인들인 이 세리에 대해서 얼마나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겠습니까? 이 세리는 하나님 앞에 불의하지 않은 적도 없고 토색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십일조를 드린 적도 없고 이레 두 번 금식 기도한 적은 더더욱 없었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내 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실재로 의로운 것으로 따지자면 이 바리새인은 이 세리와는 비교될 수 없이 탁월한 의로운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하나님이 그 탁월한 의를 행한 바리새인은 거절하시고 그렇게 동족의 피를 빨아먹으며 악을 행하며 살았던 이 세리를 더 의로운 사람으로 여기시고 그를 높이셨다고 결론 내려주셨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두 개의 “의”의 대비를 보게 됩니다. 원래 이 의라고 하는 말은 법정적인 용어입니다. 죄가 있는 줄 알고 불렀는데 사실을 조사해보니까 잘못한 것이 없을 때 ‘이 사람은 정당하다.’ 라고 판결을 내려주게 되면 그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의”에는 두 가지 의가 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서 얻게 되는 율법적인 의와 복음을 믿음으로서 얻게 되는 복음적인 의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람은 복음적인 의는 없고 율법적인 의만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율법적인 의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토색이나 불의, 간음은 안 했을지 모르지만 다른 율법의 계명을 하나도 어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레에 두 번씩 기도하고 십일조를 드렸지만 다른 율법도 모두 지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전에 올라갔을 때 자기가 지킨 것만 생각나서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 율법적인 의는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는 세리보다 그를 의롭게 만들었지만 그를 하나님 앞에 정당한 사람이라고 세워질 수 있는 의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아무런 율법의 의가 없었습니다. 살아온 지난날은 불의하고 토색을 한 날이었고 십일조도 바치지 않고 금식도 하지 않은 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는 율법의 의를 능가하는 또 다른 의를 받게 하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존의 믿음, 주님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매우 더러운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만이 나를 용서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용서를 받기를 원합니다.’ 이 믿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깊이 믿고 내가 그 예수의 보혈로 인해 깨끗이 씻김을 받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 이것이 바로 복음적인 의를 얻게 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리는 바리새인이 유창하게 자기의 잘한 일들을 하나님 앞에 고할 때 오히려 기도소리가 이 세리의 가슴에는 못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의 살아온 인생은 토색하고 불의하고 간음하고 십일조도 못 바치고 하나님 앞에 정말 아무런 내세울 것이 없는 그런 금식도 하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오직 내가 주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은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나에게 은혜를 주셔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용서하시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가슴을 치며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가슴을 치는 이유는 마음을 모아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다 보면 폐가 오므라드는 것 같은 호흡의 곤란을 느낍니다. 두들기면 통증이 완화됩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바리새인은 유창한 기도를 드렸지만 기도드릴 때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대견한 자기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리가 죄인으로서 가슴을 두드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떠오르는 모습은 정말 비참하고 내세울 것이 없는 하나님 은혜의 도움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 비참한 자기의 모습과 자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거룩하신 하나님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눈물만 흘리며 하나님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나는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고 눈 먼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봅시다. 언제입니까? 언제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까?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벌레만도 못한 더러운 죄인이고 내게 일어난 이 많은 시련도 결국은 내 마음이 강퍅하니까 하나님이 내 마음 녹이시기 위해서 주신 은혜의 시련입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인생을 살다가 보면 고비를 만나게 됩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영적인 혹은 육적인 한계 상황에 오게 될 때가 있습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에 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가 어떻게 그 한계를 극복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녹이시기 위해서 주시는 시련에는 피할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에 피할 길이 보이면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겠습니까? 깊은 시련의 계곡에서 우리는 처음에는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의 재주와 방법으로 자신의 이 모든 시련과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모든 지혜와 자신의 자원을 동원합니다. 그것이 쓸모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에 집을 떠나 허랑방탕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이 탕자가 자기의 두고 온 집을 생각하듯이 이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기억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오래 동안 잊혀졌던 주님과의 관계로 돌아가게 됩니다. 불같은 시련, 끊임없이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에워쌌던 거짓된 깨닫고 보니까 내가 당하게 된 모든 시련과 영혼의 고통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온 교만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세상을 향한 미움, 사람을 향한 원망, 자신의 처지에 대한 모든 비관이 사라지고 오직 마음의 시선이 모두 모아져서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란 마음이 생깁니다. 그때에 우리의 마음은 온전히 모아져서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고 주님 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다.’라고 하는 처절한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어린 아이가 그 엄마의 손을 꼭 붙들고 놓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꼭 붙들고 주님을 처절하게 의지합니다. 그때 깨닫게 됩니다. 내가 세상도 사랑하고 사람도 의지했지만 내 친구들은 다 나를 떠났고 마지막에 이 불쌍한 인생 곁에 남으신 분이 어머니 같은 하나님, 아버지 같은 하나님, 하나님 한 분만 내 인생의 동반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그런 마음이었던 때가 언제입니까? 정말 그렇게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구원의 문을 두드리고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거미줄 같은 믿음이지만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할 때, 세상이 우리를 가만 둔 적이 있습니까?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이지만 주님께로부터 받은 십자가의 사랑, 하나님께로 받은 구원의 놀라운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교회의 한 모퉁이라도 섬기고자 했을 때 세상이 우리를 가만두던가요? 끊임없이 우리를 그 사명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서 이 세상 온갖 시험이 내 마음을 흔들고 원수들이 안팎에 소리 지르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우리가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사람보고 주님 섬긴 적이 없습니다. 주님을 계속 의지했습니다. 나의 가는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같이 나아오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사람에게 당한 설움을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에서 아프게 다 쏟아놓고는 상처보다 더 큰 위로를 받아서 그 휘장을 걸어 나왔습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사명을 사랑하면서 살았습니다. 지금도 있습니까? 그렇게 낮아져서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내 인생의 가장 곤고한 인생의 길에서 나를 만나주셨던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그 은혜를 구하는 겸비함이 아직도 우리에게 있습니까? 현란한 재주, 많은 물질, 사람을 감동시킬 재능이나 기술이 없어도 우리 모두가 겸비한 사람들이 되어서 주님의 은혜, 그 은혜가 나의 메마른 영혼을 가득 덮도록, 그 은혜가 메마른 교회를 가득 적시도록, 그 은혜가 척박한 조국의 교회를 두루 적시도록 기도한다면 어린아이 같이 약한 신자를 들어서 장군처럼 용맹스러웠던 수많은 이 세상의 사람들이 이룰 수 없었던 위대한 일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낮아집시다. 겸비해집시다.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많은 시련과 아픔들을 소화하며 그 풍랑을 인해 시련을 인해 주님 앞에 낮아지는 사람들이 됩시다. 빈 손들고 십자가 앞에 나가 주님을 꼭 붙들고 우리 주님이 육체에 계실 때 하늘 아버지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어린아이처럼 일생을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얼만 남지 않은 인생의 길에서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깊이 의지하며 살아서 주님의 큰 은혜를 입는 기도의 세계의 새 문을 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기도의 모본을 보이신 예수님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I.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의 별명은 기도의 복음서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서 전체에서 기도에 관한 이야기가 51번 나오는데 그 중에 한권인 누가복음에만 22번이나 기도에 관한 기사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누가복음 11장은 어떻게 해서 주기도문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기록들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본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라고 말입니다. 제일 먼저 기도하신 분의 이름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해서 기도하는데 예수님은 능력이 무한하신 분이였습니다. 우리는 하잘것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기도하지만 예수님은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신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우리는 늘 죄를 짓기 때문에 그 죄를 용서받고 새 출발하기 위해서 기도하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실 뿐만 아니라 지으실 가능성조차도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오늘 깊이 간절히 기도하신 기록들이 여기에도 등장하고 다른 곳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II. 몸소 기도하심
기도자로서의 예수님의 이름이 거명되는 것은 예수님이 몸소 기도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실 이유가 없는 분이었는데도 몸소 기도하셨을까? 여기에 바로 성육신의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성육신이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늘나라에 계실 때만 하나님이셨을 뿐만 아니라 연약한 사람의 이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에도 그 분의 본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성육신을 통해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자 스스로 하나님이신데도 하나님의 본성을 인간의 본성 아래 감추시고 연약한 인간이 짊어져야 하는 모든 한계들을 스스로 기쁨으로 취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한 사도 바울의 진술의 내용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죄를 제외한 연약한 점들을 그대로 담당하시고 그것들이 가져다주는 한계로 인해 고통을 느끼시면서도 그것을 극복하는 이 기도의 삶을 보여주셨으니 이것이 바로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이라’ 한 사도 바울의 위대한 빌립보서의 기독론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몸소 기도하셨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기도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처지에 있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그런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그대로 짊어지시고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에게 기도의 모본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에 일어나게 될 구원받는 모든 인간 속에서 경험되는 그리스도 사랑의 비밀들과 아주 훌륭한 짝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어느 스승을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분의 행동이나 언행들을 닮게 됩니다.
우리가 회심한다고 하는 것은 예전에는 나를 비롯하여 세상을 사랑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이 이제는 살게 하시고 싶으셨던 그런 인생을 살아갈 소원을 품게 됩니다. 그런 모본을 완벽하게 보여주신 본보기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든지 회심하여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자비를 경험하게 나면 즉시 예수님처럼 살고자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참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모본을 보여주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기도의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변화되고 하나님의 큰 사랑 앞에서 용서를 받고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그 기도의 모습을 본받고자 하는 선한 소원을 품게 됩니다.
예수님이 몸소 기도하신 것은 우리에게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고 사명을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 모든 아름다운 능력이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렇게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아주 기쁘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연약한 점들을 기꺼이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서의 성품은 인간으로서의 성품에 감춰져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육신의 눈만으로는 예수님을 뵈면서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오기 7-8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여호와 외에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손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우리의 눈앞에 자라기를 연한 순과 같아서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도 없고 아름다운 것도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성품이 아니라 사람의 성품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그대로 담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예수님께 배울 것이 별로 없을 것입니까?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파도가 치면 파도가 미는 대로 그렇게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깊고 진실한 기도의 세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 안에 있는 많은 고통과 죄들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준 본분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본분을 따라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그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아무 능력이 없고 모든 좋은 능력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만 온다는 사실을 뼈 절이게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의 연약함을 모두 짊어지시고 우리와 똑같은 육체의 조건 속에서 그렇게 기도의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중보의 기도 능력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드리셨던 그 중보기도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 힘이 있는지 여러분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드리는 기도, 남을 위해서 드리는 이 기도는 사실 중보의 기도라기보다는 섬김의 기도겠죠? 남을 대신한 섬김의 기도도 대단히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섬김 기도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그것이 본인 스스로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감소시키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우리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 스스로를 바쳐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어렸을 때 여섯 살 나이쯤 되었을 때 지 엄마가 “이거 뭐도 없고 뭐도 없고 다 떨어져서 걱정이다.” 그러면 “엄마 우리 은행가자” “왜?” “은행엔 단추만 누르면 막 돈이 나오잖아” 어렸을 때 엄마 따라 은행을 가보면 카드를 집어넣고 단추를 누르니까 만 원짜리가 막 쏟아지는 거야. 우리 엄마 참 이상하다. 단추만 누르면 돈이 떨어지는데 왜 돈이 없다고 집에서 궁상을 떨까? 그랬겠지요.
몸소 자기가 스스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통장에 있는 모든 능력과 자원을 빌어서 쓸 수 있는 세계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큰 믿음을 갖게 되는 이유가 수시로 그 하나님의 통장에서 그 모든 자원들을 빼서 자기 것처럼 활용해서 많이 남겨 하나님께 돌려드린 경험이 있기 때문에 담대하고 큰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아까 회심한 어린아이에게 ‘안 믿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것 어렵지 않겠어요?’ 아마 취재한 기자는 이런 답을 기대했을 겁니다. ‘그런 것은 굉장히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제가 십자가 지는 마음으로 이기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지? 그것은 자기 수준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매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름 빼고 그대들의 이름을 거기에 집어 넣어보세요. 자기 이름을 집어넣고 내가 그렇게 기도해야 된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III. 환경에 영향 받지 않는 기도
두 번째는 예수님이 환경을 이기신 기도생활을 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희랍어 성경에는 이 부분이 τόπῳ τινι 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어떤 곳에서 영어로 말하자면 certain place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일정한 주거지가 없는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한 고백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깊이 찌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 들 곳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수님의 생애는 동가숙서가식하는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정말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병든 자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가서 고쳐주셨고 무지한 자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가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가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사셨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가기 싫어하는 사마리아까지도 가셔서 죄인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종교지도자들이 있는 예루살렘에서는 박해가 가득했지만 그곳도 가셨습니다. 촌동리 나사렛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시고 갈릴리 지방은 그분이 단골로 다니시던 사역지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가 너무나 다양하게 나온다는 사실을 보고 우리는 깜짝 놀랍니다. 어떤 곳에서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예수님이 강에서 기도하셨다고 나옵니다. 또 어떤 곳에서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예수님이 빈들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 어떤 곳에서는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 어떤 곳에서는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그냥 산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가 얼마나 변화무쌍한 생애였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장소가 이렇게 다양하게 등장하는 것은 예수님이 환경에 의해서 흔들리지 아니하고 올곧게 기도에 자기의 몸을 바치신 헌신의 삶을 사셨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 해 전에 이 본문을 보면서 왜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시간이 새벽 미명이라고 많이 나올까? 궁금했습니다. 여러 날 동안 이것을 깨닫게 해 달라고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예수님의 그 행동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새벽 미명은 곤한 새벽잠의 시간이고 깊은 밤은 그 시간 기도하면 우리의 피곤한 육체가 반항하는 시간 아닙니까? 그런데 왜 머리 맑은 아침시간, 잘 육체적으로 공급하고 새 힘이 있는 낮 시간을 거부하고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기도하셔서 이렇게 힘든 선례를 남겨 놓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고달픈 양심의 가책 속에 살아가게 하실까?
어느 목사님이 장로님들과 함께 미국의 선교여행을 갔는데 교회들을 돌아보다가 호텔에서 곤하게 자는데 새벽 4시30분에 장로님이 깨우더랍니다. “담임 목사님 새벽 기도 가셔야지요?” 그랬더니 담임 목사님이 벌떡 일어나 문을 열면서 “그놈의 새벽기도가 여기까지 따라 왔단 말이야?”
왜 그렇게 예수님은 따라 하기 힘든 선례를 남기셨을까? 분명히 거기에는 심오한 뜻이 있을 것이라고 집요하게 사색을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느 날 무릎을 치면서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힘든 새벽 미명에 기도하신 거기에는 어떠한 심오한 뜻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무 뜻도 없습니다. 새벽에 무슨 기가 모여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새벽의 시간에 영험함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마음을 모아 혼신의 힘을 다 할 수 있는 그 시간이 모두 영험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왜 새벽에 기도하셨을까? 그것은 아주 간단한 대답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낮에는 예수님의 섬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낮에는 기도하심으로써 그들을 향한 섬김을 희생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새벽 미명 그 시간에는 예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잠자는 시간이었고 깊은 밤도 쉬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이 깨어있는 낮 동안에 섬기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들이 푹 쉬어서 자기를 찾아 올 수 없는 그 시간에 헌신하셨던 것입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캠벨 모르건 목사님은 로이든 존스 목사님이 웨스터민스터 챔플에 담임 목사로 오기 전에 그 교회를 섬겼던 담임 목사였습니다. 탁월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는 아주 깊이 있는 설교자였습니다. 사모님과 함께 어느 교회 방문해서 설교를 듣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때 설교를 다 듣고 나서 사모님이 말했답니다. “여보, 저 젊은 목사의 설교는 나무랄 데가 없는데 이상하게 가슴에 와 닿지를 않아.” 그랬더랍니다.
어느 목사님이 목회를 하고 10년이 되었는데 예배가 끝나는 날이면 아내가 항상 뒷방에 가서 항아리 하나를 열어 보더라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봐도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하도 궁금해서 아내가 없을 때 뒷방에 가서 그 항아리를 열어 보니까 돈 100만원하고 계란 세 개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그랬더니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이 목회를 시작하고 나서 예배 시간에 설교할 때마다 은혜가 안 될 때는 항상 계란을 하나씩 집어넣었습니다.” 남편이 생각하니까 10년을 설교했으면 최소한 4,000번 5,000번 6,000번을 설교했을 텐데 계란이 세 개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내 설교에 은혜를 받았냐고 하니까 아내가 그냥 웃기만 하더랍니다. “옆에 있는 100만원은 무엇이냐?”고 했더니 계란 팔아 모은 돈이라고 합니다.
Dr. 캠벨 목사님 사모님이 캠벨 목사님과 함께 다시 여러 해 후에 그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똑같이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사모님이 깜짝 놀라면서 “여보, 저 목사는 우리가 여러 해 전에 만났던 그 젊은 목사가 아니야.”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100만원에 계란 3개가 들어가게 만들었던 그 목회자 같은 사람에게 어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 사람이 그렇게 살아있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뉴질랜드에 가면 그 나라에 사는 독특한 국조처럼 여기는 새가 있는데 키위라는 새입니다. 이 새는 칠면조보다는 조금 크고 타조보다는 작은 큰 칠면조만한 새입니다. 원래 이 새는 하늘을 날아다니던 새였습니다. 그런데 뉴질랜드는 거기서 가장 가까운 육지가 2.000km 떨어져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키위 새가 날아서 거기에 왔는데 먹을 것이 지천으로 늘어져 있고 자기를 해칠 사람도 없고 천적도 없는 것입니다. 날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걸어 다니면 지천에 먹을 것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사는 동안에 키위 새가 점점 몸집이 커져서 몸집은 점점 불어나고 다리는 굵어졌는데 깃털은 병아리처럼 줄어들었습니다. 결국은 날아다닐 수 없는 새가 되었습니다. 후에 사람이 거기에 살기 시작하면서 폴리네시아 계통의 사람들이 뗏목을 타고 떠 내려와서 거기에 정착했다고 여겨집니다. 사람들이 와서 보니까 아주 먹음직스럽게 새가 있어서 잡으려고 하는데 날지를 못합니다. 돌멩이를 던져서 머리를 맞춰서 잡거나 창을 던져서 잡거나 활을 쏴서 잡거나 심지어는 달리기를 하고 가서 목을 부러뜨려서 잡거나 해서 키위 새들이 그 후에 모두 거기 사는 토인들에 의해서 잡혀 먹힙니다. 만약에 키위 새를 위협하는 어떤 맹수들이 있어서 먹이를 주워 먹다 깜짝 놀라서 며칠에 한 번이라도 도망을 가야 될 힘든 환경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키위 새의 역사는 그렇게 슬프게 막을 내리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는 많은 이유를 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어려움이 아니라 사실은 믿음의 눈을 가지고 보면 그것이 기도해야 할 이유이지 않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근심 걱정 때문에 기도할 수 없다면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있으니까 기도해야 되지 않습니까? 취업이 안 되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은 반대입니다. 취업도 안 되고 어려움이 많으니까 지금이야말로 기도할 때라는 이야기입니다. 영적인 상태가 안 좋기 때문에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은 영혼의 상태가 그렇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찰스 하돈 스펄젼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기도할 수 있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당신이 기도할 수 없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당신이 기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는 신기하게 예수님의 하루 동안의 행적이 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박해를 받으시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심방하시고 밤늦게 돌아오셨는데 숙소에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각색 병에 들린 병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얘들아, 난 피곤하다. 근무시간 끝났으니 내일 만나자.” 그러시지를 않고 성경에 보니까 그들을 위해 일일이 기도하시고 고쳐 주셨다고 했습니다. 새벽 한 2시쯤이나 돼서 예수님의 사역이 끝이 났을 지도 모릅니다. 그 다음 성경 구절이 저의 가슴을 깊이 때렸습니다. 그 이튿날이었습니다. “새벽 미명에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 나가 기도하시니라.” 말입니다.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하셨네. 주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환경이 있을 때 그것을 극복하면서 싸우는 것은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천국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죄 많은 이 세상은 우리에게 있어서 주님께 기도하고 신실하게 살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닙니다.
축구 경기를 하면 상대방 선수 나라에 가서 하는 경기를 away경기라고 하고 자기네 나라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하는 경기를 home경기라고 합니다. 운동선수에게 직접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남미는 아주 다혈질적입니다. 여러 해 전에 월드컵에서 자살골을 넣은 선수 한사람이 그 이튿날 축구 열광팬에 의해서 암살당한 적도 있습니다. 그럴 정도로 심한 나라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가서 경기 하면 내가 볼을 잘 몰고 상대방 문전으로 달려가면 야유와 함성이 들리고 골을 넣으면 급기야 욕설이 들리고 방석을 집어 던지고 술병을 집어 던지고 난동을 부립니다. 이것이 away경기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신실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앙생활은 home경기가 아니라 away경기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바로 그런 신앙생활의 국면을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환경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려고 할 때 누가 우리를 도와줍니까? 우리 안에 있는 죄 된 본성이 기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이 세상에 모든 더러운 육체에 속한 욕망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자극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할 수 없는 수많은 이유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시로 이런 것들을 떨쳐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을 앙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기 위해서는 그런 몸부림이 필요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기도할 수 없도록 환경이 나를 압박하고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것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기도해야 할 동기를 갖게 됩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환경을 극복해야 합니다. 젊었을 때는 열정은 있는데 새벽잠이 많습니다. 장년들은 주일에 와서 은혜를 받으면서 기도해야지 밤에 잠이 들면 새벽에 새벽기도를 나옵니다. 그런데 청년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도전을 받고 가도 새벽에는 잠이 꿀같이 밀려와서 이기지를 못합니다. 그런 자기 자신과 싸우고 투쟁하고 몸부림을 칠 때에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많은 고통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 세상에 온갖 시험이 내 마음을 흔들고 악한 원수들이 안팎에 가득할 때 우리는 홀로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것을 극복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영광이 아니라 고난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때 그렇게 고난을 받으시며 일생을 사셨으니 그 고난 때문에 이렇게 은혜를 입은 내가 이 작은 섬김이라도 예수를 위한 고난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힘든 육체의 한계, 정신의 끝없는 괴로움, 마음의 그윽한 이 고통을 극복하면서 기도의 보좌로 나아가려고 할 때에 그 속에서 막 갈등과 고통이 느껴집니다. 그때에 뜨거운 갈등과 고통 속에서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때에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고통이 예수님의 고통화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 거꾸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의 경험이 지금 2000년 후에 살고 있는 내 속에서 실재화(actualize)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내 안에 있는 모든 악한 것들이 죽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자기 깨어짐입니다.
진리의 학교에도 어느 정도는 졸업식이 있습니다. 왜? 성경이 필요 없는 때가 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필요 없습니다.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이 말했던 순종의 학교, 예수 믿는 순간 그리스도인은 순종의 학교에 입학하고 순종을 배웁니다. 그것도 어느 정도는 졸업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불순종 할 수 없는 사람이 되니까. 그러나 기도의 학교는 끝이 없습니다. 천국은 놀러 가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러 가는 것입니다. 거기서도 영원무궁토록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극복, 환경의 모든 어려움을 핑계대지 말고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그 영화를 다 보지는 못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서편제라는 영화를 몇 백만이 보았다고 해서 한번 지나가는 길에 슬쩍 보았는데 한 장면이 들어와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오정애는 창을 하고 어떤 남자는 거기서 북을 치고 저자거리에서 사람들에게 공연을 했습니다. 저녁 때 여인숙에 들어와서 그 스승이 오정애에게 말했습니다. “야, 이년아 노래만 하면 그게 다 소리인 줄 아니? 네 년이 소리를 하려면 네 년에 가슴에 한이 맺혀야 하는 거야.” 장단을 두드렸던 그 북쟁이에게 작대기로 등 잔등을 후려치면서 선생은 말했습니다. “야, 이놈아 두드리기만 하면 장단인 줄 아느냐? 네 놈에 가슴에 한이 맺혀야 장단이 나오는 거야.”라고 말입니다.
하늘을 여는 그 간절한 기도, 영혼의 어두움에 움막을 찢고 찬란한 햇살을 불러 모으는 진지하고 절박한 기도, 심령을 가르고 흘러나오는 그 피어린 기도, 그 모든 기도는 기도할 수 없게 하는 것들과의 투쟁을 통해서 강해진 힘이 그것입니다. 환경을 극복하고 이겨서 꼭 기도에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Ⅳ. 장시간의 기도
세 번째는 기도시간의 길이입니다.
오늘 성경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라고 했는데 이 단어가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희랍어로 έπαύσατο 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의 히브리어 동치어가 있으니 שָׁבַת 라는 말을 희랍어로 옮기면 에파우사토가 됩니다. 이 히브리어 샤바트가 첫 번째로 쓰인 것이 창세기 1장입니다. 예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다라고 되어 있을 때 이 쉬셨다는 단어가 샤바트입니다. 따라서 이 에파우사토는 끝났다는 의미도 되지만 쉬었다라는 의미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쉬셨다란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의 시간적인 길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뒤 문맥을 보면 이런 그림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전날 아주 곤하게 제자들과 함께 사역을 하셨는데 이튿날 새벽에 제자들은 아직 퍼질러 잘 때 예수님은 조용히 일어나서 기도하러 나가신 것입니다. ‘그 따위 정신 상태로 무엇을 하겠느냐? 모두 일어나라.’ 그러신 것도 아니고 조용히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제자들이 깰 새라 걸어 나가시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사람들이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외딴 곳을 찾으셔서 그 어둔 밤중과 같은 미명의 시간부터 혼신의 힘을 쏟아 부어 기도를 하셨습니다. 해가 어스름히 떠서 제자들이 눈을 떴을 때 예수님은 사라지고 없고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예수님을 찾으니까 저기서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셨는데 그 기도에는 다른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을 진지함과 열정, 거룩함이 깃들여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기도하다가 눈뜨다 하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요? 그러다 예수님이 기도를 하시고 쉬실 때에 나아가서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장시간 동안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실은 기도에 있어서는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깊이가 문제가 됩니다. 마치 수면과 같은 것이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많이 드러누워 있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잠들었느냐가 그 수면이 가져다주는 효과와 관련되지 않습니까? 기도도 마찬가지로 깊은 기도는 반드시 시간을 동반하고 시간이 길어야지만 깊은 기도가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목표는 오래 하는 것이 목표일 수 없고 깊이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우리들이 간단하게 공중전화로 통화하는 것을 가리켜서 대화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대화는 서로를 교감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의 길이를 갖는 것을 가리켜서 대화를 한다라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짧은 기도인데 큰 능력을 경험했던 예들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께서 병든 자에게 명령하시는 것 같은 것도 기도의 변형된 형태입니다. 사도들이 귀신들린 자들을 나오라고 외친 것도 이런 모든 것도 기도의 한 형태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들 자신 안에 귀신을 나가게 하는 어떤 힘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 이렇게 권위 있게 외치면 역사가 일어나는구나.’ 그리고 자기도 한번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응답되는 적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개망신 당하는 사람이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데 스게와의 아들들이었습니다. 보니까 사도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그러니까 귀신 들린 사람들이 나가고 병든 자가 일어나고 하는 거예요. 이들도 ‘내가 바울이 명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나가라’ 그랬더니 귀신들렸던 사람 속에서 귀신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달려들어서 옷을 벗기고 행패를 부리면서 그들이 하는 말이 재미있어요. ‘예수도 나도 알고 바울도 내가 아는데 넌 웬 놈이냐?’ 그러면서 봉변을 당하게 만들었습니다. 개망신을 당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보며 두려워 떨면서 회개하게 된 것이 에베소 지방에 부흥이었고 에베소 교회가 바로 그런 부흥을 통해서 생겨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집에 가서 한번 따라 해 보세요. 되나? 안 됩니다.
가나안 정복의 영웅 여호수아가 경험했던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과 전쟁을 하게 되었고 승승장구하여 그들을 추격하게 되었는데 어두움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만약 어두움이 깔리면 지형에 익숙한 가나안 원주민들을 숨을 것이고 자기들을 그 사람들을 찾아낼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할 수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달리며 기도합니다. 태양도 달도 거기에 멎을지어다. 낮의 길이가 길어지면서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써 내려가게 됩니다.
짧은 기도로 큰 능력을 불러올 수 있는 사람은 대부분 오랜 세월동안 긴 기도 속에서 일생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속에서 영성이 이루어지고 자신의 온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바쳐지는 가운데 영혼이 강건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놀라운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도를 많이 할 때도 있고 조금 할 때도 있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할 때에는 기도를 길게 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많이 한 것이 아니라 기도에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있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기도 할 수 있었던 것이고 기도시간이 짧을 때에는 그런 친밀함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기도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과 관계되는데 시간이 절대적인 것일 수 있어요?
우리 속의 경험은 시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시간은 물리적으로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경험적으로도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여러분들에게 물리적인 시간이 왜 절대적이 아닌지를 여러분들에게 논증해 보여주고 싶어요. 증명이 됩니다. 이 시간은 물리시간이 아니니까 경험적으로도 사실이 아닙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내 놓으면서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같은 50kg의 물체가 있습니다. 한 물체는 예쁜 애인이고 한 물체는 돌멩이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의 무릎에 올려놓고 한 시간을 지냈다고 칩시다. 그 시간의 길이가 같겠습니까?” 역시 일생을 바람피우면서 산 과학자다운 위트였습니다. 어떻게 같겠습니까? 50kg짜리 애인을 무릎에 올려놓은 한 시간과 정부미 50kg를 올려놓은 것이 어떻게 똑같겠습니까?
길게 하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랑의 감미로움이 있으니까 기도할 때 그 시간이 한없이 즐거운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들으니까 집사님이 기도를 많이 한답니다. 8시간씩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물어보았습니다. “아니 그렇게 8시간씩 기도할 것이 있습니까?” “사실은 그렇게 안 됩니다. 4시간만 열심히 기도하면 거의 다 기도합니다.” “나머지 4시간은 무엇합니까?” “나머지 4시간은 무엇 하나구요? 목사님, 4시간 동안은 기도하고 나머지 4시간은 나는 하나님 쳐다보고 하나님은 나 쳐다보시고 우리 둘이 그렇게 있다 보면 4시간은 금방 갑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시간의 비밀이에요. 깊이 기도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Ⅴ. 기도의 감화
마지막 네 번째는 기도에 있어서의 감화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나가서 그랬어요. “예수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옵소서.” 난 목사가 되었지만 “왜 우리 교회에 왔습니까?” “목사님께 말씀을 배우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런 사람은 만났지만 기도를 배우고 싶습니다. 란 사람은 못 만났습니다. 기도는 원래 배우는 것입니다. 말씀보다도 더 많이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하나님께 온전히 매달려 기도했더니 예수님이 의도하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감화를 불러 일으켜서 저분처럼 기도하고 싶다라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내가 오늘 2부 시간에 장년들에게 도전했습니다. 여러분 기도하십니까? 어린이 회심 집회를 두 번째로 지난주에 했습니다. 지난여름에는 오랜 동안 준비하면서 했지만 이번에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다들 제대로 될까? 애들이 모일까? 예상을 깨고 620명, 후에 온 사람들까지 치면 650명이 되는 학생들, 6살부터 13살까지 가득 모여서, 입추의 여지없이 모여 진지하게 매달려서 주님 말씀을 들으며 회심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왜 그래요? 부모들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교역자들도 물론 기도했습니다.
장년들에게 도전했습니다. 기도하십니까? 당신들이 이렇게 살면 먼 훗날 30-40년 쯤 지난 다음에 여러분들의 아들, 딸이 여러분들을 생각하며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요?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그렇게 찬송할 수 있을까요? 라고 말입니다.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던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기도의 본을 보이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편으로 우리가 어려울 때마다 기도학교의 학생으로서 주님에게서 그 모본을 배우며 우리들이 모든 괴로움과 시련을 이기고 기도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기도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기도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는 기도할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지만 영적인 눈을 가지고 보면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 안에 회심치 못한 지체들, 아직까지도 절반이상 텅 비어있는 이 예배당, 바깥에서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하나님 모르는 채 방황하고 있는 그 인생의 비참함들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도제목이 있는지 모릅니다. 결혼, 취업, 가정의 문제 모든 것들, 우리의 영혼의 변화, 우리의 섬김, 사명, 세계 선교와 이 지구의 평화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끝도 없는 기도의 수많은 제목들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이것들이 대부분 우리에 의해서 버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땀을 흘리고 기도한다면 거기에는 놀라운 이 하나님의 나라를 아름답게 만드는 나무들이 자라고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될 텐데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마음을 새롭게 추스르고 용기를 얻으십시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새벽을 깨워보십시오. 어두운 밤에 교회당에 들러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으고 간절히 눈물을 흘려 보십시오. 고민으로 지새웠던 수많은 날의 문제들이 여러분들 앞에 아름다운 해결로 다가올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말씀으로 기도의 영을 회복하라
“이 날에 낮 사분지 일은 그 처소에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지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느 9:3)
우리가 몇 주째 기도생활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말씀에 관한 지식은 우리들이 한번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을 잘 정리 해 놓으면 좀처럼 우리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닫고 교리를 많이 공부해서 이 지식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습득한 사람들은 진보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면 생각이 잘 정리가 되고 신앙의 묘리가 보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기도는 어떤 때는 기도가 잘 되어서 마음에서 콸콸 폭포수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그렇게 흘러 내려가는 때가 있는가 하면 분명히 그때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배웠고 교리도 많이 공부했고 교회에서 직분도 더 많이 받아서 지도자가 되었는데도 역시 기도가 안 될 때가 있다는 점에서 기도는 항상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I. 기도의 고통
기도생활과 관련해서 우리의 고통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기도가 잘 되는 고통과 기도가 잘 안 되는 고통입니다. 기도가 잘 되는데 왜 고통스럽습니까? 라고 여러분들은 물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기도의 진수를 경험한 사람들은 기도가 잘 되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기도가 조금 잘 되면 기분이 좋지만 기도가 정말 잘 되면 그것은 고통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기도하셨던 모습에 대해서 히브리서 5장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하나님의 들으심을 입었느니라.”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에 대한 히브리서의 묘사는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가 예수님의 기도생활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세상에 존재했던 사람 가운데 예수님처럼 막힘이 없는 기도 속에서 사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기도가 잘 되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경험하신 분이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그런 기도의 경험을 여러분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기도가 잘 되고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갈 때에는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육신 속에 들어오셔서 당신이 대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기도가 끝나면 빠져 나가시는 것 같은 그런 기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온전히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어서 주님이 아파하시는 것을 내 것인 것처럼 아파하고 주님이 안타까워하는 것을 내가 주님인 것처럼 안타까워하면서 혼연일체가 된 가운데 기도하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성령 안에서의 기도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바로 이런 기도의 진수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는 것, 여기에서 기도의 위대한 능력과 힘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는 깊은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고통이야말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기도가 잘 되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많이 생겨나게 된다면 그것을 통해 교회는 위대한 항해를 계속하게 됩니다. 이런 기도의 섬김이 집약될 때에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얼어붙은 지체들의 마음이 봄 햇빛에 눈이 녹듯이 녹아내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던 동토의 땅에 복음의 불길이 지펴질 것이고 죄악과 완고함으로 빗장처럼 가로질렀던 이방인들의 마음에도 깨뜨려져서 하나님의 복음이 스며들어 가게 됩니다. 교회를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대적들이 바로 이런 기도의 고통 속에서 무너지게 되고 하나님의 이 은혜가 강물처럼 흘러 수많은 메마른 땅을 적시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에 기도라고 하는 은혜의 방편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에게 훨씬 익숙한 고통은 기도가 안 되는 고통일 것입니다. 기도가 안 되는 것도 아주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들이 기도의 의무에서 멀어지는 단계, 죄가 기도의 샘을 막는 단계가 4단계가 있습니다.
처음 단계는 열렬히 기도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있는데 이런 상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쌀자루에 쌀이 가득 있을 때는 후크로 콱 찌르면 쌀이 쏟아져 나오듯이 그렇게 기도할 수 있도록 충만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멀어지는 겁니다. 멀어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살이가 바빠서, 딴 데 정신이 팔려서 등등.
두 번째 단계가 지나게 되면 스스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기도하는 그 시간을 얼마든지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 그런 시간을 잘 선택하지 않게 됩니다.
세 번째 단계에 가면 기도를 잘 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네 번째 단계에 가면 기도의 의무조차 무시하게 됩니다.
기도가 안 되는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그래도 기도를 해 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때 고통을 느낍니다. 아예 기도의 의무를 무시해 버리고 아예 안 해버리면 기도가 안 되는 것이 왜 고통인지도 잘 경험을 못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조금 남아있던 은혜마저도 다 빠져 나가면서 마른 뼈와 같은 사람이 되어갑니다. 마음은 딱딱하게 굳어지고 심령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다 사라지고 그래서 강퍅한 마음이 되어 버립니다. 이 세상의 유혹에는 아주 민감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이게 바로 굳어진 마음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기도를 하려고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기도가 안 되는 고통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너무 곤고하고 힘이 들어서 기도를 해야지 그러고 새벽에 추운데 일찍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앉았는데 옆에 있는 지체들은 설교가 끝나고 나니까 막 열렬히 기도를 합니다. 막 뜨겁게 소리 내며 기도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흐느끼면서 우는 사람, 어떤 사람은 기도하다 통곡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가슴을 치면서 울컥울컥 하나님 앞에 눈물을 쏟으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한참하고 나서 얼마나 기쁜지 그렇게 눈물 흘리며 기도하더니 이번에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그런데 나는 엎드렸는데 전혀 기도할 수 없고 ‘아버지’하고 이름을 부르는데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고 커다란 벽이 나를 가로막고 있는 것 같은 것을 느낍니다. 한 1시간 기도하려고 애를 쓰는데 기도가 하나도 되지 않고 출근시간이 되어서 할 수 없이 차가운 마음으로 다시 그 기도했던 자리에서 일어서서 예배당을 빠져나갈 때의 마음은 경험했던 사람들만 아는 고통입니다. 기도가 안 되는 고통입니다.
왜 이렇게 기도가 안 될까?
기도라고 하는 것은 원래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이 하나 되었을 때 가장 잘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합일의 상태가 가장 잘 됩니다. 그럼 언제 또 하나님과 합일이 이루어지냐면 영혼이 영혼일 때입니다. 영혼이 영혼이 아닐 때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영혼의 찌끼 같은 것들이 달라붙으면 영혼의 순수함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도록 작용을 합니다. 영혼이 찌끼 같은 것들이 많이 묻어서 이 세상의 욕망, 더러움, 탐욕 이런 것들이 달라붙게 되면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는 엔진과 같은데 다른 방향으로 막 갑니다. 이런 것들을 회개와 말씀의 은혜로 깨끗이 떨어내면 영혼이 순수한 상태가 됩니다. 그때에 영혼이 참 영혼의 상태가 되고 하나님과의 합일이 일어납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 속에서 가장 잘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 내가 사랑을 많이 받고 내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하는 관계에서는 기도가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어디서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기도가 시작됩니다. 이런 사랑의 관계가 끊어지면 새벽기도에 나와서 무릎을 꿇어서 정식 기도의 자리에 들어갔는데도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II. 에스라의 부흥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에스라라는 지도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시작했던 부흥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경회를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 시대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이라고 하는 나라, 역사적으로 바벨로니아라고 하는 나라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나라가 완전히 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주전 약 600년경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놀랍게도 이들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70년 될 때에 너희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70년 후에 왕의 칙령이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칙령이 떨어집니다. 바벨론 시대에 제국들을 종교적인 융화정책으로 통치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였는데 어쨌든 돌아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토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간다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나라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회복이었습니다. 돌아가면 예루살렘이고 그 중심에 성전이 있고 성전을 다시 재건하고 거기서 다시 제사를 드리게 되는데 그것은 다시 하나님과 막혔던 관계가 열려지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영적인 관계의 새로운 재수립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거기를 누가 갈 것이냐? 그런데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떠나서 70년이면 약 2대 길게 잡으면 3대씩이나 살았는데 그 나라에서 나름대로 기반을 잡고 자손들과 함께 살았었는데 그것을 뿌리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데 예루살렘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느냐면 빈 땅과 옛 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민족들이 살고 있는 곳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안정되었던 삶의 기반을 뿌리치는 모험을 하지 않으면 못 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의 감화를 입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났는데 처음에는 그렇게 뜨거운 감격으로 올라와서 성전을 짓고 예배하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삶이 평안해지니까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타락 중에 제일 큰 것이 첩을 거느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방 여인들을 첩으로 거느리고 거기에서 자손들까지 낳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에스라가 들었을 때에 깊이 마음 아파하면서 제일 먼저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통회하고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대신 하나님 앞에 섬김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백성들을 모두 모았습니다. 무슨 일을 했나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잘못했을 때에 모세는 칼을 가지고 그 백성들을 죽였습니다. 그것을 보며 백성들이 두려워하게 되었는데 이 에스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힌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죄를 지은 자들을 찾아내서 몇 사람의 목을 치고 피를 흘리게 해서 백성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모아놓고 율법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를 가르치는 율법을 낭독했습니다. 낭독했을 뿐만 아니라 그 율법을 잘 풀어서 해석을 해서 백성들의 마음속에 깨달음을 주도록 노력을 했습니다. 왜 첩을 얻었느냐? 왜 이방인과 교접하여 아이를 낳았느냐?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죽 읽고 그 말씀을 잘 해석하여 백성들에게 들려주었더니 그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움직이면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드디어 백성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III. 신앙의 두 수레바퀴 :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성경은 기도하려는 사람에게 이 기도와 함께 우리의 신앙생활이 굴러가게 만드는 두 수레바퀴와 같은 은혜의 수단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말씀과 기도, 이 두 개가 함께 갑니다.
아무리 훌륭한 마차라고 할지라도 바퀴가 하나밖에 없다면 차라리 짐을 메고 가는 것이 낫지 그 수레를 사용해서 짐을 옮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원리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다가가고 주님이 내게 맡겨 주신 이 세상에서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모든 일에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와 기도의 은혜 이 두 가지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래서 기도를 거의 안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의 감화가 거의 끊어진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들은, 특히 우리 열린교회 같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목사님 안 그런 것 같습니다. 제 주위에 보면 말씀을 열심히 듣고 교리적으로도 잘 정리되어서 교리반도 하고 성화반도 하고 책도 많이 읽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데 그 사람은 기도는 안 하던데요?”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개념적으로 아는 것이지 말씀이 실제로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경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열심히 필기하고 책을 읽는다고 껍죽거리고 그래도 기도는 거의 안 하는 것은 호기심, 개념적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지 이 말씀이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의 진정한 효능, 우리의 영혼을 고치고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말씀의 효능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잘 이해되어서 깨달아질 뿐만 아니라 이것을 깊이 숙고하고 이 말씀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깊이 생각하고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일까? 또 하나는 이것이 나의 실제적인 삶과 어떻게 연관이 될까를 계속 생각하는 가운데 이 두 가지, 숙고와 적용이라는 활동을 통해서 여기에 이해된 하나님의 말씀이 깔때기를 통해서 마음속으로 내려갑니다. 말씀의 뜨거운 것이 마음속으로 내려가서 마음을 녹이고 변화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변화가 일어날 때에 바로 그 영혼의 움직임이 마음을 통해서 언어로 하나님 앞에 토해내어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말씀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갇혀있고 내려가지 않는 것은 이런 것과 똑같습니다. 저도 경험한 것입니다. 여름에 바짝 가물어서 먼지가 퍽퍽 납니다. 그런 때에 땅을 파는 것은 힘듭니다. 땅은 축축이 젖어 있어야지만 삽을 집어넣고 군화발로 밟으면 삽이 들어가는데 몇 달 동안 가물어서 딱딱해졌습니다. 갑자기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면서 ‘쏴아’하고 소나기가 막 쏟아집니다. 한 10분 쏟아지고 나니까 진창이 되고 도로 위에 물이 콸콸 흐릅니다. 이상하게 그치고 햇빛이 나서 땅을 보니 질척질척합니다. 땅 파기 좋겠구나 생각하고 곡괭이를 들어서 쾅하고 내려치니까 먼지가 퍽 납니다. 한 5cm 정도만 물로 흠뻑 젖어있고 그 밑에는 아직 스며들지가 않았습니다. 말씀에 뭔가를 깨달은 것 같고 은혜를 받은 것 같아도 머리에서만 그런 것입니다. 눈물이 찔끔 납니다. 깔때기를 타고 이 속으로 스며들지를 않습니다. 나중엔 예배 끝나면 내가 왜 눈물을 흘렸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다 받은 다음에는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이것을 숙고라고 합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 적용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항상 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려옵니다. 죽 내려와서 마음을 움직입니다. 마음이 움직이면서 마음의 불순물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영혼을 움직이면서 영혼의 찌꺼기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그러면서 순수한 마음과 영혼이 됩니다. 그때에 기도가 막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이 에스라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제일 처음에 많은 백성들을 데리고 떠나는데 막막합니다. 군대라 있는 것도 아니고 왕의 칙서 하나 받고 떠나는데 제국은 넓고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시기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지나서 그 먼 길을 가야 되는데 어린 아이들이 그 먼 길을 견딜 수 있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아하와 강가에서 그는 백성들 모두 모아놓고 금식을 선포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자. 금식 하면서 우리에게 평안한 길을 열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 사람은 왕인 아닥사스다에게 조차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은 진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동시에 이 사람은 그 감화 속에서 살던 사람이었고 항상 하나님 앞에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모두 타락했다는 이야기가 들리자 그는 칼을 빼들고 악을 행한 자들을 죽이려고 달려간 것이 아니라 성전으로 갔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엎드려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맨 처음에 지나가던 사람이 ‘우리 지도자가 왜 저렇게 울고 있지?’ 지도자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눈물만 흘렸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그것을 보고 자기들의 죄 때문에 저렇게 슬피 운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린 아이로부터 어른까지 하나 둘씩 모여 거기에 엎드려서 예정에도 없었던 성전 문 앞에서의 기도회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정말 어두운 역사를 기도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말씀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내가 예레미야의 서책을 읽으며 깨달은 것이 있는데 70년이 되면 황무한 이 땅을 하나님께서 다시 고치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 온전히 매달려 기도하였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죽여 버린다는 왕의 조서에 어인이 찍힌 줄 알고도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난 창문을 열고 전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깊은 기도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 중에 말씀의 사람이 아닌 사람이 있습니까?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하더라도 영혼의 상태가 나빠져서 기도를 못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없는 사람이 열렬한 기도 속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수레처럼 힘차게 굴러 갑니다. 하나님이 그 수레에 사명도 싣고 우리 목적도 싣고 교회의 갈 길도 싣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가족들 영혼들을 위한 소명까지 다 실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두 개의 바퀴가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항상 열린 기도의 문 속에서 사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마음은 진리의 말씀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디서든지 입을 열면 폭포수와 같이 진리의 말씀이 쏟아져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 말씀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만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그 말씀을 따라서 그 말씀을 사랑하며 말씀과 함께 사셨습니다. 거기에서 모든 기도의 힘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기도가 잘 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언제였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던 때, 하나님께 순종하던 때, 말씀의 은혜를 받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순종하며 살던 때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던 신앙의 때 아니었습니까? 기도가 잘 될 수 있었습니다. 말씀의 때였습니다. 말씀의 은혜를 흠뻑 받고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고 감사하고 눈물이 막 쏟아질 때 그 말씀이 강론이 끝나고 드리는 기도는 마치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 같지 않았습니까?
Ⅳ. 말씀의 감화는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을 부른다
말씀의 감화가 끊임없이 있을 때 우리의 기도가 이렇게 간절해지고 말씀이 이런 뜨거운 감화가 있을 때 우리의 심령이 기도의 날개를 달게 됩니다. 훨훨 날게 됩니다. 한번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 주위에는 기도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우리가 기도가 잘 된다고 하더라도 두루 적시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기도가 잘 될 때는 육체의 게으름 때문에 기도 안하고 육체가 게으르지 않을 때는 영혼의 싫증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에 실패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13년 동안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해왔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전할지 모르지만 13년 동안 전해왔습니다. 그동안에 여러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깊은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계기는 너무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에 실패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가정불화 때문에 어떤 사람은 자녀들 때문에 어떤 사람은 건강 때문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악 때문에 여러 가지 다양한 환경이 계기가 되어서 마음이 가난해지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미끄러질 때는 항상 똑같습니다. 기도의 향불이 먼저 꺼집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 많은 말씀의 빛을 접어버리고 침륜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정말 하나님 한분을 앙망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신앙생활을 잘 못한다는 이런 핑계는 하나님 앞에서는 선한 핑계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과 기도의 세계는 항상 같이 가는 것입니다. 말씀의 감화가 기도의 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 감화라고 하는 것은 은혜의 감화입니다. 은혜의 감화라고 하는 것 자체가 바로 사랑의 감화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기도가 제일 잘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우리의 기도는 시간을 초월하게 됩니다. 한없이 기도가 쏟아져 나옵니다.
사실은 기도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사랑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우리들이 항상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면 제일 좋을 텐데 그 사랑을 수시로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합니다. 은혜는 다시 그런 사랑의 감화로 우리를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항상 이 세상이 다 시시하게 보이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이슬같은 목숨보다 주를 더 사랑하는가]
이슬 같은 이 세상, 분토와 같은 이 땅, 영원한 분깃이 없는 이 세상에서 나는 나그네다. 내가 사랑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다.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니까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감화는 그런 기도를 불러일으킵니다.
보세요. 한 사람이 그런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유행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1920, 30년대에 신문에서 계속 사회계몽 운동 펼친 것이 축첩제 타도였습니다. 돈 있고 양반인 사람들은 첩을 얼마나 거느리고 있느냐가 권위의 상징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보편화 된 속에서는 사람들이 가책을 잘 안 느낍니다. 그렇게 살아왔던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으니까 한 순간에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이 세상이 모두 괜찮다고 말해도 하나님의 율법을 읽어주는데 율법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이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가 목숨을 걸고 그 편안한 모든 바벨론에서의 삶을 뿌리치고 이 고토를 향해 돌아올 때 우리 마음에 이런 생활을 희망해서 왔는가? 아니다. 이곳에서 성전을 짓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기 위해서 이곳에 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그 사명으로부터 떠나고 우리는 이제 이렇게 성전도 짓다가 말고 우리의 마음이 부패해서 이렇게 죄에 빠졌구나.’ 그것을 한순간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가 그들에게 비추니까 ‘아 그거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말씀의 깨달음이 있어서 늘 감화를 받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는 사람의 기도는 그런 것 없이 불 때면서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하고는 차원이 틀립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유일한 책입니다.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깊이 감화를 받게 되면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 성경을 사랑하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무엇이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지위가 높아지면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힘세면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배 나오면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오직 하나, 돈 없고 가난하고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품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끊임없는 감동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다 보면 한 3년 실컷 먹으면 배가 부릅니다. 그러면 싫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음에는 만나를 보고 감격했지만 매일 먹다 맛대가리 없는 만나밖에 없다 말인가? 고기를 달라고 했던 것처럼 마음에 변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순결한 영혼이 상태가 되면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섞인 영혼이 되면 섞인 것을 사랑하고 더러움으로 꽉 차게 되면 오물과 같은 세상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때에 마음이 편안한 것입니다. 돼지를 깨끗이 씻겨서 향수까지 뿌려서 초현대식 아파트 침대에 모셔 놓으면 돼지에게는 거기가 지옥입니다. 걔네들은 똥도 좀 있고 거기에 드러누웠다 일어났다 하고 파리하고도 싸우고 뜸물 먹으려고 여물통에 갔다가 확 머리에도 쏟아지고 그래야지만 살맛이 나는 얘들입니다. 속의 성향대로 살게 되는 겁니다.
말씀의 감화를 받아야 합니다. 가끔 보면 이런 말씀의 감화가 거의 없이 열렬히 의지적으로 기도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기도가 좀 된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아주 황당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그런 사람 없습니다. 전에는 나 찾아와서 “목사님 상담 안하면 당장 죽어 버리겠습니다.” 하고 공갈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죽는다고 하니 만납니다. 만나면 시작부터 황당합니다. 들을 마음은 없고 그냥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제가 꿈을 꾸었는데요. 하얀 눈밭이 있고 나무가 두 그루 서 있는데 각각 두 나무에 한쪽에는 한 마리의 새가 옆에는 두 마리의 새가 남아 있는데 그 새가 한 마리는 날아가고 한 마리는 남았습니다. 다시 내려오니까 도랑이 나오는데 거기에 물이 졸졸 흐르는데 이상하게 여기는 눈밭인데 저쪽에는 잔디밭이에요. 뭔가 심오한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맞다, 개가 거기 없디?” 하도 답답해서 제가 그랬습니다. “얘야, 그대가 숨 쉬는 것만 진실이고 나머지는 다 쓸데없는 것이니 쓸어버려라.” 그리고는 이상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많이 받은 사람은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런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늘 말씀하시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데 성경 담쌓고 그냥 불 때는 그렇습니다.
어느 가정주부가 불파입니다. 성경 제쳐놓고 그냥 불 때러 다닙니다. 시장을 볼 때도 주님이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남편이 그것을 보면서 늘 근심합니다. 안 믿는 사람입니다. 잔뜩 사 가지고 와서 주님이 인도하셔서 응답해 주시는 대로 쇼핑을 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막 뒤지더니 잡채를 휙 집어 던지면서 ‘니네 하나님은 잡채에 간장 들어가는 것도 모르냐?’
하나님의 말씀을 재껴 놓은 영적 생활을 모방하는 모든 것들은 처음에는 무엇인가 되는 것 같은데 나중에는 항상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마련입니다. 영적 자만심 같은 것들이 생겨납니다.
Ⅴ. 말씀의 감화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하게 한다
하나님 말씀의 감화를 받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따라서 할 수 있게끔 이렇게 움직입니다. 마음과 모든 것들이 움직이게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이번에 어린이 회심 집회를 했습니다. 일주일 내내 그 아이들 생각하면서 마음에 은혜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학생들이 간절하게 간증을 합니다. 한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변화가 있느냐고 하니 회심하고 나니까 내가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내 기도를 다 들으신다는 확신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안 그랬냐고 하니까 옛날에는 그런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하게 합니다.
작년에도 우리 자모들이 은혜를 받았던 것이 무엇이냐면 자녀들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를 안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자녀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은 것은 아주 큰 죄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눈에서 지금 어린 자녀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기도와 상관없이 눈물을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저렇게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일 때에 우리가 조금만 마음을 모으고 아이에게 본을 보이면서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저렇게 변화됩니다. 그러면 저 아이들은 저렇게 한번 회심한 아이들이 영원히 은혜 가운데 사나? 자기네들도 그렇게 못 살잖아요? 그 대신 차이는 회심 하지 못한 아이들은 곤고함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회심하면 얘가 유치부 아이라도 은혜가 떨어지면 곤고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빠가 장난감 사 주고 엄마가 먹을 것을 사 주어도 달래지지 않은 영혼의 곤고함이 있습니다. 그때에 이런 기회가 있게 되면 아이들이 회개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회개가 죄 많은 아이들이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해 본 아이들이 회개를 합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깨뜨려지는 사람은 옛날에 깨뜨려졌던 사람들이 또 깨뜨려지지 한 번도 안 깨뜨려졌던 사람들이 깨뜨려지는 경우가 드뭅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하면서 다시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이 다시 자기를 사랑해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그것을 예전보다 더 생생하게 느끼게 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 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성화의 길을 아이들이 가는 것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그러면 아이들이 그런 속에서 삐뚤게 나가다가 다시 회개하고 나가다가 돌아오고 나가다가 돌아오고 이렇게 구심점이 있어 이러고 사는 아이들과 아예 회심한 적이 없어서 말 갈대, 소 갈대 가는 아이들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내가 늘 이야기합니다. 그러다가 대학 들어가고 부모 통제를 벗어나면 교회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다 엉뚱하게 나중에 불교 믿는 자매 데리고 와서 ‘결혼하겠습니다.’ ‘너 이러면 안 된다’ 그러면 ‘목사님 주례 안 받고 우리 교수 주례 받겠습니다. 엄마 아빠 믿는 하나님 나에게 너무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러고 나갑니다. 그럼 눈물 흘립니다. 그 눈물을 그때 흘리지 말고 앞에 흘렸으면 훨씬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전을 하니까 가만히 보니 아무리 자기 자식 편을 들고 생각을 해봐도 회심하지 않은 것이 너무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의무감이었는데 나와서 기도하다 보니 우리 아이가 정말 회심해야 되겠습니다. 막 회심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가 이 회심하지 않은 아이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내가 회심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기도할 때 있잖아요? 큰 어려운 일이 있어 그것을 위해서 목숨을 막 기도했는데 한참 기도하다 보니까 그 기도는 안 하고 딴 기도로 계속 가는데 그 기도는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응답이 되었습니다. 이 기도는 하고 있는데도 아직 응답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들을 보면서도 가장 가슴 아프고 답답할 때가 어떤 때입니까? 부모의 마음을 몰라줄 때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깊이 이해할 때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는 우리로 하여금 바른 기도를 하게 해 줍니다.
기도가 어떤 사람이 그림을 그렸는데 예수님을 눕혀놓고 팔을 꺾는 것입니다. 믿습니다. 아멘. 계속해요. 아멘. 믿습니다. 팔을 꺾으니까 예수님이 항복 항복 그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복종된 믿음이어야지 예수님의 팔을 꺾는 것 같은 믿음, 마치 믿습니다. 라고 하면 예수님이 꼼짝 못하는 것처럼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습니까? 내가 혈기를 가지고 열렬히 기도해도 사실은 그것은 내 영혼을 정화시킬 수 없는 기도입니다. 그것이 바로 얍복강가에서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고집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환도뼈를 치니까 그때서야 주저앉으면서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해주시고 그에게 새로운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자기 깨뜨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여자의 몸에서 아이가 나오는 것을 보면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 아이가 크게 태어나는 아이는 중국에서는 8.0 몇kg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백일 된 아이만큼 먹는다고 합니다. 그 정도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라도 우리가 보통 보면 우리 아들도 4.2kg으로 태어났습니다. 크게 태어났습니다. 더 크게 태어나는 사람은 4.8kg까지도 낳습니다. 그런 아이가 어떻게 엄마의 조그만 몸에서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사실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 나오게 하는 것도 아이를 낳을 때가 되면 자기가 힘을 준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나올 때가 아이가 거꾸로 내려가서 머리를 치받치면서 내려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자의 몸에서 온 기관이 힘을 합쳐서 반사적으로 울컥울컥 작동하면서 온 몸의 근육이 수축되어서 아이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가 계속 반사적인 힘에 의해서 밀려내어지면서 몸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가 나오는데 그렇게 아이가 나올 때가 되면 반사적으로 작동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기도를 할 때는 하나님이 기도를 자꾸 막으십니다. 그래서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일 경우에는 하나님 자신, 우리 안에 있는 영이신 성령하나님이 이 기도가 되도록 확확 밀어주시는 겁니다. 그런 확확 밀어주시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냥 이렇게 아무렇게나 사는 삶 이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모아지고 마음이 정결해진 상태가 되었을 때 성령의 움직이는 역사에 민감한 사람이 됩니다. 오늘 아침에 A라는 기도제목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막 기도하다 보니 전혀 다른 제목으로 가서 그것을 위해 막 기도하게 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회심할 그때 즈음이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기도회를 하는데, 요즘은 안 그러는데 옛날에 청량리역 앞에 대왕코너라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불이 대왕처럼 자주 났고 사람도 많이 죽었습니다. 이 애가 철야기도회에 나가서 취직도 안 되고 그러니까 일감이라도 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하는데 갑자기 누나 생각이 나서 누나를 위해서 기도를 하는데 누나가 막 괴로워하는 모습이 떠오르더랍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교회가 무엇을 기도합시다. 하는데 다 따라하지 않고 누나기도만 열심히 하는데 누나는 대왕코너 불날 때 나이트클럽 바로 거기에 있었답니다. 그 누나가 간신히 그 불길 속에서 살아났다는 간증을 하더라구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이기 때문에 그 시간에 그 기도를 하게끔 그 사람의 영혼을 움직여서 기도가 쏟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인가 하는 이것들을 하나님이 말씀의 감화를 통해서 인도하십니다.
기도가 안 될 때에는 우선은 말씀의 은혜를 받고 마음의 강퍅함을 버리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마음을 잘 다스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나라도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지고 은혜를 받게 되면 마음에 눈물이 고이고 기도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때 기도가 납니다. 처음에 그 기도는 장시간동안 폭포수처럼 쏟아 붓는 그런 기도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을 피울 때도 그렇잖아요? 시골에서 아궁이에 불을 피울 때도 장작을 쌓아놓고 성냥을 수십 개를 그어대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만큼 솔가지 쌓아놓고 불을 붙이고 조금 더 큰 가지 조금 더 큰 가지 나중에 젖은 장작까지 올려놓으면 불이 활활 붙어 솥에 물을 끓이면서 아궁이 속에 불이 빨려 들어갑니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렇게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았으면 말하자면 솔가지에 불을 붙인 것과 같습니다. 바람이 오면 막아주고 불면서 일주일을 지내다 오고 말씀을 그 위에 놓아야 되는데 이 불을 가지고 저기 얼음판 위에 털썩 올려놓고 일주일 동안 뛰어 놀다 옵니다. 그러니까 똑같습니다. 불을 땔 때 마른 장작을 놓고 그냥 처음 불을 지피는 것이 쉬워요? 반쯤 시커멓게 타던 장작을 모아놓고 불을 붙이는 것이 쉬워요? 당연히 타다 남은 장작은 안탑니다. 반은 숯이기 때문에 불을 아무리 붙여도 불이 잘 붙질 않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 되는 겁니다.
뭔가 말씀의 은혜를 받긴 받았는데 그것으로 계속 불타지 못하고 숯처럼 시커멓게 된 마음, 다시 불을 붙이기가 너무 힘들어집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은 그 마음을 잘 지키고 간직해서 기도의 의무를 실천해야 합니다. 기도하라 그러면 기도에 관해서 책을 읽습니다. 그것도 좋은데 그것으로 마음을 뜨겁게 해서 기도를 해야 하는데 안 합니다. 시간이 계속 흘러가면 다시 그 마음은 식어버리고 다시 원래의 상태대로 나쁘게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를 받고는 기도를 실천해야 합니다. 미루지 말고 이번 주부터 뜻을 정하고 마음을 새롭게 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영혼이 곤고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 이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새벽기도 가지고 모자를 것 같으면 새벽기도, 낮기도, 밤기도 그것도 모자라면 금식하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아서 간절히 기도해서 이것을 회복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리고 하나님 앞에 뜨겁게 기도의 향연을 올리실 때 그 순간을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누구겠습니까? 하나님만큼 여러분들이 기도의 세계 속에서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 이야기는 무슨 뜻이죠? 여러분들이 다시 기도의 세계를 회복하려고만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시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은혜를 따뜻하게 받고 이 기도의 은혜를 회복하는 여러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4. 마음이 괴로운 자의 기도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 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 하겠나이다”(삼상 1:10-11)
인간에게 있어서 고통의 문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인간은 바로 그 고통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지 않을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누구든지 이런 고통을 경험해 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고통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고통스런 상황은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생각을 주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I. 본문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는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 이렇게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불쌍한 한 여자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가나라고 하는 남편을 가진 한나라는 여인이었습니다. 다복한 가정에 시집와서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살고 있는 모자랄 것이 없는 그런 행복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한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브닌나라는 첩이 들어오게 되었고 어쩐 일인지 브닌나는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들이라는 단어가 히브리말로 벤(בֵּן) 이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들이 ‘벤허’라는 영화에서 보는 바와 같은 그‘벤’이 바로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아들이라는 벤 이라는 명사는 바나(בָּנָה)라는 동사에서 왔는데 바나는 ‘집을 세우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 시집가서 여자가 아이를 낳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집을 세우게 된다는 히브리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입니다. 첩은 들어와서 아이를 낳고 자신의 집을 세웠는데 이 여자,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는 한나라는 여인은 아이를 낳지 못해서 자신의 집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결국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브닌나의 분노는 한나를 향한 질투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첩에게 끊임없이 학대를 당하고 고통을 받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II. 하나님이 막으실 때에
오늘 성경은 바로 이런 고통의 문제를 지니고 있었던 이 한나란 여인의 고통의 근원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라”(삼상1:5하) 즉, 하나님이 막으셨기 때문에 한나에게 아이를 낳지 못하는 문제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하나님은 막으시지 않는데 우리가 좀 더 노력하지 않고 우리가 좀 더 지혜를 쓰지 않고 우리가 좀 더 자원을 투자해서 분발하지 않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우리의 태도만 고치면 됩니다. 열심히 하나님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하면 그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못하게 막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많은 자원을 쏟아 붓고 우리가 아무리 많이 애를 쓰고 아무리 많이 분발하고 아무리 많이 노력해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에 아무리 많이 노력을 하고 애를 써도 성취되지 못하는 어떤 일들은 아마 하나님이 지금 막고 계시는 일일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바로 막으시는 그 문제를 통해서 우리를 당신 앞으로 부르신다는 message입니다. ‘너는 내 앞에 서라’ ‘너는 벧엘로 올라와서 나와 대면하자’ ‘너는 십자가 앞에 나와서 나와 만나자’ 이런 message입니다.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문제도 그런 문제였습니다. 다복한 가정에 태어났으니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 한나의 처지가 엘가나를 비롯한 온 가족에게 얼마나 큰 근심거리였겠습니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불임 clinic에 안 가 봤을 리가 없겠죠? 산부인과 의사는 물론이고 한의사를 찾아가서 보약도 지어 먹고 아이를 낳게 하는 많은 민간요법도 실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막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위에 설상가상으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도 억울한데 첩으로 들어온 여자가 심히 자기를 구박하고 박해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런 속에서 한나를 에워싸고 있는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틀림없이 그 첩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남편의 우유부단함도 이 여자에게는 원망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많은 문제들이 이 한나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나가 바로 하나님이 막으시기 때문에 자기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아주 지혜로운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III. 하나님께로만 나아가라
이제 모든 환경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집을 찾았습니다. 당시에는 성막이었습니다. 그 성막을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대면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문제보다 훨씬 큰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1.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
한나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지극히 개인적인 고통을 경험했고 어떻게 보면 가장 세속적인 기도제목이었지만 그것을 가장 영적인 기도제목으로 승화시킨 사람이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 앞에 올라갔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해 괴로워하고 번민하는 이 한나에게 지극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엘가나는 위로했습니다.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해 여보 괜찮아 나는 당신이 아이 없어도 괜찮아 난 당신을 사랑해.” 이런 마음으로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더 낫지 아니하냐?(삼상1:8) 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한나의 마음은 그것을 통해서 위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올라가지 않을 때까지는 문제가 여러 개인 줄 알았습니다. 남편 엘가나와의 서먹한 관계, 가문에 대한 깊은 미안한 마음, 브닌나와의 깨어진 관계, 그 사람으로부터 오는 분노, 그 아이가 낳은 자식들을 자기 친자식처럼 사랑해주지 못하는 가책 등등 많은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한나가 그 모든 것들을 접고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시작하니까 문제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2. 문제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하나님은 이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그것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을까? 그랬다면 사무엘이 태어나지도 말고 이 기도가 응답되지도 말았어야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태어났고 이스라엘 역사의 새장을 여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 인생의 갈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지혜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지혜가 어떤 것이었을까요? 아마 성경에서 한나처럼 복된 여인이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다복한 여인이었습니다. 변함없이 남편의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물질도 넉넉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 한나에게 이러한 고통, 하나님이 막으시는 고통의 문제가 없었더라면 한나가 여기 이름을 올릴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들 쑥쑥 낳고 잘 먹고 잘 살다가 구약 속에 스쳐갔던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한 가정으로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구약시대에 가장 중요한 인물 하나를 꼽으라면 모세이고 둘을 꼽으라면 모세와 다윗이고 셋을 꼽으라면 모세와 다윗과 사무엘입니다. 모세는 왕 없이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던 신정시대의 율법수여자였고 다윗은 하나님이 왕으로 세워 나라를 다스리던 때에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왕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 표본으로서의 인물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이 신정시대와 왕정시대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큰 인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의 수문과 같은 존재, 신정시대에서 왕정시대로 흘러나가는 수문과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이 사무엘입니다. 가나안 정착하고 나서 왕이 없던 시대에 사사가 통치하게 되고 사사시대 마지막에 사무엘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게 되고 그 인물에 의해서 사사시대를 모두 마감하고 왕정시대에 첫 기틀을 마련하는 수문과 같은 역할을 이 사무엘이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위대한 인물을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위대한 인물은 하나님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태어나게 하시지만 반드시 그 인물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을 준비하셔서 그 인물을 만드십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만남이 몇 개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모와의 만남, 두 번째는 남편이나 아내와의 만남이고 그 이전에 좋은 스승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Ⅳ. 하나님에게만 쏟아놓으라
이렇게 하나님이 막으시는 지극히 고통스러운 역경을 통해서 이 한나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삶의 모든 기대를 접고 오직 하나님 앞에 자기를 다 쏟아 부으며 매달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했습니다. 그 후에 사무엘을 잉태하게 하시고 그 어머니의 하나님만을 향하는 절실한 마음에 영향을 받으며 그 태내에서 자라게 하시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젖 뗄 때까지 그 경건하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어머니의 영향을 물려받으며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탁월한 영향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이 아이를 바친 후에도 어머니는 수시로 이 아이를 만났을 것이고 이때에 미친 그 신앙의 감화는 우리가 아는 사무엘이 되게 하였습니다. 스승 엘리는 부패한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그런 영향을 사무엘에게 미치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 앞에만 나아가는 법을 한나는 터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오래된 인생의 문제, 모든 자원을 동원하고 마음을 끓이고 원망하고 시기하고 괴로워하고 모든 것을 다 해봐도 이루어지지 않는 인생의 문제, 그 앞에서 여러분들이 받는 message는 무엇이지요? 어떤 message들을 받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막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들이 인간의 모든 방법을 포기하고 자신의 재능과 자원, 다른 사람들의 도움, 이런 모든 것들로 문제를 해결해 보는 것으로 문제를 처리하고 하나님과는 대면하려고 하지 않는 여러분들의 방식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갈 길을 막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생의 길에 가시밭길을 두고 주님의 쓰시려는 사람의 가는 길을 막으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형벌 가운데 제일 무서운 형벌이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간섭하시는 한 여전히 희망은 있는 것입니다. 간섭하시는 한 여전히 하나님이 그 사람을 포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포기하시지 않으면 않을수록 여러분들은 더 고통스러워 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고통을 가중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돌아오게 하심입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간 이 한나가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가 한 일은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쏟아놓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다 쏟아놓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의 마음을 쏟아놓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한나의 마음이었습니다.
1. 하나님만이 가장 잘 아십니다.
우리가 어떤 고통스러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여기에 우리들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이 크게 둘로 나누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마음 깊이 받아들여서 자기가 삭히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분노로서 바깥으로 표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게 친구가 있었습니다. 오래 동안 사귀었던 친구인데 결혼도 못하고 결국은 암으로 죽었습니다. 제가 직장생활을 하고 얼마 안 되었는데 가정이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책임감이 없는 아버지와 이 세상을 잘 모르는 어머니 사이에서 굉장히 힘들어 했습니다. 어느 날 전화가 와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남준아 큰일났다.” “왜?” “빚쟁이들이 우리보고 나가라고 하는데 일주일 후에 나가면 갈 곳이 없다.” 제가 직장에서 대출을 내서 월세 방을 마련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전에도 그랬지만 특별히 그 후에 저를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했습니다. 어머니가 암이라는 판정을 받았는데 그 받기 얼마 전에 제가 그 분을 모시고 한의원에 갔습니다. 나이 많은 목사님이신 그 의사가 진맥을 하며 하는 말이 “여보쇼, 뭐 그렇게 마음에 한이 많소? 다 훌훌 털어버려야지 당신 몸도 건강해지지. 그것을 품고 있으니까 이것이 마음에 쌓여서 당신 몸을 망가뜨리는 겁니다.”
우리가 삭힌다고 말하지만 삭혀지지 않습니다. 정리되지 못한 분노와 미움, 원망, 시기의 감정들은 우리의 마음 안에 그대로 남아서 우리의 온 몸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은 생각이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좀 멍한 사람들이 잘 살구요. 뭔가 생각을 골똘히 하고 뭔가 하나를 품으면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들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물론 생각 없이 백치같이 튼튼하게 백 살만 살면 그것이 인생의 행복이냐고 물으면 가치관이 다르지만 어쨌든 그렇다는 것입니다. 가슴에 품으면 몸은 형편없이 망가지는 겁니다. 또 하나는 바깥으로 표출하는 것입니다. 이 한나는 그런 것을 밖으로 표출하지도 못하는 주변 없는 여자였습니다. 밖으로 표출하는 사람들은 훨씬 낫습니다. 화 잘 내는 사람들은 우울증 같은 것 안 걸립니다. 걸릴 새가 없습니다. 폭발을 해 버리므로. 남편이 바가지 던질 때 도자기 던지는 여자들은 절대로 정신 문제없습니다. 이것을 보는 아이는 상처를 받으며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밖으로 표출하면 다른 문제를 파생시킵니다. 이것은 ‘해결의 길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 건널 수 없는 고통의 강을 만났을 때에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갈 길이 없습니다. 고통하면서 심한 정신병과 이런 많은 질병들을 얻으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인생의 갈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특권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쏟아놓는 것입니다.
마음을 쏟아놓는 이 한나의 기도에 두 특징이 있었습니다.
2.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기도하라
첫 번째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드리는 간구였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오래도록 기도하며 입술은 움직이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더라.’(삼상1:12-13) 이것이 한나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중에 우상에게 기도하거나 조상에게 기도하거나 아니면 나무 막대기인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이고 하나님을 향한 기도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 모든 기도가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기도가 없는데 그러면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기도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 없이 기도해서 하나님 앞에까지 배달되지 않는 기도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많이 기도생활 해 왔다고 할지라도 내 기도의 모든 향연이 오늘 하나님께 올라가고 있으며 하나님이 나의 기도의 향연을 맡으시고 나를 흠향하도다. 마치 홍수 후에 노아가 드린 제사에 그 향기로운 제사의 냄새를 맡으시고 노아를 받으신 것처럼 그래서 이 땅에 다시는 그런 재앙을 주시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무지개의 하나님처럼, 우리가 그렇게 기도의 향연이 하나님께 올라가므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하는 연합의 감정이 있는 기도가 있는 때가 얼마나 드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난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가 주님 앞에 몇 번이나 우리의 마음을 다 쏟아놓았습니까? 우리의 꿈도 눈물도 막으시는 하나님의 길 앞에서 느낀 우리의 좌절과 고통과 분노도 주님 앞에 모두 쏟아놓으므로 우리 자신을 드렸던 때가 몇 분이나 되었습니까?
한나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자기 기도를 다 올렸습니다. 모든 기도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닙니다. 한나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 그 모습을 보니까 미친 사람 같아서 영안이 흐려진 이 엘리 제사장은 네가 낮부터 술을 먹었나 보구나 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때 한나는 말했습니다.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 토하는 것입니다. 실성한 여자처럼 깊은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게 되자 눈물도 마르고 부르짖음도 그쳤습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다 쏟아져 들어갔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 마음을 쏟아 붓는 이 기도야말로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이고 기도의 정수입니다. 이 기도의 경지를 맛보기 전까지는 누구도 기도했다고 감히 말할 수가 없는 그 진수가 마음을 쏟는 기도이고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예수님의 기도를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엎드리자마자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나요? 아닙니다. 간절히 매달리며 세 번이나 기도하시고 마지막에는 땀에 피가 배어서 쏟아질 때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한 10일 정도만 금식하고 소변을 누면 피가 섞여 나옵니다. 사람에 따라서. 예수님이 그 땀방울에 피가 섞여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예수님에게 인간으로서 더 이상 기력이 없을 그때쯤 되어서 천사를 보내어 예수님의 기도를 돕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쏟는 1분의 기도는 전혀 마음을 쏟지 않는 1년의 기도보다도 하나님을 움직이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편지가 옵니다. 편지가 수없이 오는데 미국에서 오는 speed post가 있습니다. ups 같은 것을 해서 48시간 되기 전에 오는데 모두 최선 편으로 달려옵니다. 차를 타다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직원들이 그것을 들고 2층으로 뛰면서 김남준 목사를 찾습니다. 그 편지 먼저 보겠어요? 아니면 어디서 보냈는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인쇄물 더미를 먼저 찾아보겠어요? 무엇을 먼저 보겠어요? 미국 어디어디에서 온 목사님을 향한 편지입니다. 36시간 만에 날아왔습니다. 어느 것을 먼저 보겠어요?
마음을 다 쏟아 붓는 편지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특급 우편입니다. 매일 인쇄물만 발송하니까 그 천사들이 다 정리해서 주님 앞에 보내기 전에 쓰레기통에 넣어버립니다. 바쁘신 하나님이 읽으실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쓰레기 같은 우편물 1년 보내는 것보다 특급우편으로 한 번 보낸 것이 더 강력한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쏟아 붓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왜 하나님이 그렇게 마음을 다 쏟아 놓는 이 기도를 특급 배달된 기도처럼 여기실까? 하는 해답을 찾게 됩니다.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과 영혼이 움직이는 도구일 뿐입니다. 이 마음이 어떠하냐에 의해서 그 사람의 인생은 갈 길이 결정이 됩니다. 마음의 본질적인 부분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먹는 것 좋아하다 놀러가는 것 좋아하는 것으로 이 취미로 갔다 저 취미로 가는 것은 바뀔 수 있지만 그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본질은 둘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사느냐 자기 마음대로 사느냐 입니다. 이것은 그렇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쏟아놓아져야지만 바뀝니다. 마음을 다 쏟아놓으면 피고름이 나옵니다. 피고름이 쏟아져 나오듯이 나 중심으로 살려는 상처와 욕심과 원망과 이런 모든 것들이 마음을 쏟아 붓는 성령 안에서의 기도를 통해서 짜 지듯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쏟아 놓는 기도는 반드시 참회가 없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불결하고 더러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보는데 무슨 수로 참회를 안 합니까? 거기서 마음을 쏟아 놓으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이 고름들이 다 짜내어 지는 것입니다.
한나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마음을 다 쏟아놓기까지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남편에 대한 섭섭함, 가문에 대한 미안함, 브닌나에 대한 원망 수많은 문제들이 있었는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마음을 쏟아놓고 나니까 쏟아놓을 그 때는 문제가 오직 하나입니다. 나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내 인생의 모두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 앞에서 나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그렇게 보니까 나는 너무 더러운 인간이다. 하나님 앞에 다 쏟아 부으면서 그때에 이 속에 있는 더러움의 찌끼들이 다 쏟아져 나갑니다. 충분히 쏟아져 나가고 나면 하나님의 것이 들어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마음을 쏟고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를 괴롭히던 문제들이 그 순간에 해결이 됩니까? 그럴 때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게 안 됩니다. 자기가 그렇게 피고름 같은 더러운 것들이 다 짜내어지고 나면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 들어옵니다. 평강이 밀려옵니다. 미운 사람도 없고 원망하고 싶은 사람도 없고 모두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만이 자기를 꽉 채웁니다. 예전에는 낙심하고 실망하고 좌절하고 심지어 이제는 하나님도 나를 버리셨구나. 그러니까 나를 이 고통 속에 버려두시는 거야. 나는 아마 지난날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벌 받고 있는 거야. 이제 나는 아무 희망도 없어. 이 세상에서 절대적으로 나 혼자 밖에 없는 외톨이가 되었어. 그런 마음밖에 없었는데 마음을 다 쏟아놓고 하나님 앞에 진액을 짜서 기도하고 나니까 하나님의 생명이 밀려옵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그 후에도 그런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가까운 경험을 이야기하면 제 자랑이 될 것 같아서 먼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제가 대학 학부 2학년 쯤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저에게 갈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message는 간단했습니다. “너는 내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사람으로 불렀으니 그렇게 알아라.” 그때 나는 정말 아무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연약한 그리 유능하지도 못한 그저 가난한 신학생에 불과했습니다. 별로 좋은 학교도 아니고 야간 신학교를 다니면서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그런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믿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계속 믿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부터 제 인생의 고통은 시작되었습니다. 공부를 해야겠는데 정말 시간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면서 이제는 공부에 전념해야지 하고 사표를 냈더니 직장이 빼앗아 갔던 모든 시간을 교회가 가져가더군요. 목사님이 별로 나를 사랑하시지도 않으면서 얼마나 부려 먹으시는지 일복이 터지다 터져 버렸습니다. 들어보실래요? 주일학교, 고등부, 청년부 지도자였고 구역 4구역, 장년 성경공부 모임 2개 낮에는 목사님 심방 따라 다니고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서 교회 불을 피고 새벽예배를 매일 준비해야 하고 교회 청소하고 심지어는 겨울에 수도 얼지 않게 보호하는 역할까지...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최선을 다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새벽기도 끝나고 한1시간 기도한 다음에 단 걸음으로 달려 나가면 청량리에서 용인가는 school bus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타고 학교에 도착하면 수업 시작하기 꼭 30분 전이었습니다. chapel실에 들어가면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한두 명, 서너 명, 들어가면서 눈물이 막 쏟아집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주님은 나를 쓰시겠다고 하는데 나는 나를 준비할 수가 없어. 어떻게 해야 해. 의자에 앉으면 막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공부를 하려고 하면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이 눈에 들어오고 회심하지 못한 영혼을 위해 하려면 밀린 책들이 눈에 들어오고 후에 학생들에게 바르게 가르치지 못해 하나님께 욕 돌리는 모습이 들어와서 적은 사례비로 고통 하는 아내의 모습이 밀려들어와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러면서 앉으면 말을 이을 수 없이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놓아 언어는 없고 통곡만 있었습니다.
3. 영혼의 통곡, 간절한 기도
한나의 두 번째 특징이 바로 통곡하는 기도였습니다. 자기를 다 쏟아 부으며 기도드렸습니다.
그런다고 무슨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교회의 일이 줄어들겠습니까?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데 어느 날 목사님이 불러서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너무 많은 일로 자기를 소진하는구나. 그러지 말아라하고 일을 줄여주었겠습니까? 마지막 사표내고 나올 때까지 더 많이 더 많이 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30분을 울면서 쏟아냅니다. 더 기도하고 싶은데 수업 종이 울립니다. 그러면 펑펑 울면서 가방을 들고 일어납니다. 신기하게 눈물은 계속 흐르는데 이제는 그 눈물이 고통의 눈물이 아니라 은혜의 눈물입니다.
[주께서 내 길 예비 하시네 주께서 내 길 예비 하시네 오늘 하루하루를 주를 위해 살리라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텅 빈 chapel실을 빠져 나오다가 다시 바닥에 엎드려서 통곡 할 때가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때마다 눈물을 씻고 예배실 문밖을 빠져나가면 아침 바람이 확 불면서 하나님의 생명이 스며들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과 같이 나아오리라’ “아들아” 어제도 기도하는데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너를 아노라”
이 세상의 헛된 것들로 채워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왕이신 주님이 우리 마음에 좌정하시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통곡하며 기도하는 성도의 마음은 가장 순결한 마음입니다. 그 영혼의 몸부림이 모든 찌끼를 털어내고 순결하도록 정화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의 문제가 아무리 크고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일을 못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여러분들이 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막으실 때 하나님 앞에 나가 마음을 쏟아 붓는 것, 그분의 임재 앞에서 기도하는 것, 그분 앞에 통곡하며 기도해 여러분 안에 있는 더러운 마음의 피고름을 쏟아내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 채우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매달릴 때까지 여러분의 인생 문제를 막으시는 것입니다.
한나가 이렇게 매달려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그 태를 여셨습니다. 하나님이 닫으신 문은 열 사람이 없고 하나님이 여신 문은 닫을 사람이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해 주시겠다는데 누가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의 태를 열어 아이를 갖게 해 주셨습니다.
Ⅴ. 기도의 결과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참 놀라운 것이 이 여자가 하나님 앞에 그 괴로운 마음을 토하여 기도할 때 이 여자의 마음에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겠죠? 그래서 그는 서원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주의 여종을 불쌍히 여기셔서 아이를 주시면 이 아이를 오직 평생에 하나님께 드리고 아이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삭도는 머리 깎는 칼입니다. 이 삭도를 대지 않는다는 것은 머리를 자르지 않는 다는 뜻인데 이것은 바로 민수기에 나오는 나실인의 서원입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바쳐진 선지자나 제사장이었는데 이런 사람들은, 특별하게 서원된 나실인은 포도주를 먹지 않고 포도씨도 먹지 않고 부모가 죽어도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바쳐진 사람입니다. 그 의미가 바로 나실인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길을 막으셨지만 그 응답을 통해서 한나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기회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매달려야 할 기도제목의 성취를 통해 하나님께 어떤 영광을 돌려 드리겠습니까? 이 한나는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젖 뗄 때에 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하나님의 집에 바쳤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아침에도 이 본문 읽으면서 가슴이 아렸습니다. 아이를 가져본 여성은 알 것입니다. 아이가 갓 태어나서 그 젖을 먹고 점점 자라 젖 뗄 때쯤 되었으니까 돌은 좀 넘었겠지요? 그 아이가 젖을 먹고 무릎으로 아장아장 기고 젖을 먹을 때는 엄마의 눈을 맞추고 웃기 시작하고 무릎을 기어오르며 엄마의 품을 헤쳐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따로 서기를 하고 뒤뚱뒤뚱 걷기 시작하며 두 주먹을 쥐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주먹을 쥐고 엄마를 보며 웃기 시작합니다. 엄마들은 아이에게 빨려 들어갑니다. 그때 그 아이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가능했겠습니까? 그러면 다시 아들 없는 여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이 슬퍼하지 않고 하나님의 집에서 내려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의 인생의 분깃이신 하나님 자신을 다시 만났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하나님 집에 바쳐졌으나 돌아오는 길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더 감동을 주는 것은 무엇이냐면 이 정도로만 끝났어도 감동인데 그게 아닙니다. 이 한나가 하나님 앞에 사무엘을 바쳤을 때까지 또 다른 아이가 없었습니다. 바칠 때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쳤을 때보다 훨씬 더 절실했을 겁니다. 엘가나에게는 애가 여럿이었지만 한나에게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 아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이를 하나님 앞에 드리면 자기는 다시 아이 없는 그 여인이 되는데도 하나님께 이 아이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후에 세 아들과 두 딸을 주셨습니다.(삼상2:21) 다섯 명의 자녀와 함께 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고치시기 위해서 “네가 사랑하는 것을 내려놓아라. 나 아닌 것에 대한 애착을 버려라. 네가 아직까지도 포기하지 못하는 그것을 버려라.” 할 때 이것을 버리면 이제 나는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될 것 같지만 하나님은 절대 그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을 내려놓고 나면 하나님은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셔서 위로를 삼으며 살아가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 밖에 없는 이 아이를 하나님 앞에 서원한대로 드렸더니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은 여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최대의 하나님의 종이 되었고 바침 때문에 다섯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게 되었고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하게 되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자기 것을 움켜쥐고 있다가 하나님도 잃어버리고 그것도 잃어버리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결단하십시오.
우리 하나님 앞에 이제껏 넘지 못했던 우리의 인생의 벽, 우리가 이제껏 건널 수 없었던 신앙의 강을 건넙시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아버지 집으로 올라갑시다. 이 여자처럼 마음을 다 쏟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응답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5.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예수님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I. 본문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대제사장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은 죄인들을 위해서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들이 있었고 그 제사장 중에 단 한명 대제사장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한사람의 제사장이었습니다. 1년 한차례 대제사장이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알현하고 그분의 임재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위해 대신 기도하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기 전에 그 자신의 죄를 위해 먼저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했으니 이는 자기도 대제사장이지만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면 잠시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막혔던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다시 소통시키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제사장의 제사는 언제나 임시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모든 대제사장의 임시적인 제사 말고 영원히 단번에 자기의 몸을 드려 하나님 앞에 바치는 헌신의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도록 죄 없으신 자기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으니 그분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도 바로 그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죽으심과 속죄의 사역을 힘입어 아버지 앞에 올리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어떠하였는지 그 생애의 특징이 하나님 앞에 어떤 기도를 드리는 삶이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므로 메마른 우리의 기도생활에 단비를 내려주시고 계십니다.
II.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아들이라도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성경은 예수님이 육체에 계실 때 그때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분은 크게 둘로 나누어지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맛보시는 그 죽음과 거기서 부활하셔서 영광스러운 몸으로 바뀌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우리를 다스리시는 승귀의 신분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은 둘로 나누입니다. 높아지시기 전에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늘에 계셨고 하늘에 계셨을 때에 그분은 아버지와 동등한 영광을 가지신 동일 본질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성령 성부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는 성삼위 중 제이위의 하나님이셨으며 성부 성자 성령 삼위를 이루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를 그 모든 형벌 받을 죄에서 구원하시도록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영원히 변하지 아니하는 불변하심인데 불변하시는 하나님이 가변적인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영존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썩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인간의 부패할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본성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순종을 배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은 “아들이시라도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워”(8절)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셨지만 흠 없고 모자란 것이 없는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서 예수님은 인간의 처지에 대한 보다 체험적인 이해를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이셨을 그때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모자랐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죄인들인 이 인간이 어떻게 비참하며 불완전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죄가 없는 가운데서도 경험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하나님 편으로 보내심을 받았지만 인간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인간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가실 수 있는 체험적인 중보자가 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가난한 요셉의 집안에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 구유에 누이신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원수들의 창칼의 위협을 받으며 별이 빛나는 밤에 이 세상에 태어나셨고 그분이 누우신 것은 마구간이었습니다. 그 후에 거친 강보에 싸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친 고난과 결핍 속에서 일생을 지내셨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집안의 한 아들로 태어나 그 모든 결핍과 가난으로 얼룩진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 속에서 병든 자와 버림받은 자들의 친구요 이웃이 되어 주셨습니다. 일평생 주림과 가난함 목마름에 복속되신 생애를 사셨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모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온전히 순종하는 한 희생제사의 제물로 성장해 가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굳이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험적으로 배우셔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렇게 하므로 예수님은 온전한 제물이 되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는 하나님으로서만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잘 알고 이해하는 죄는 없으시지만 죄인의 슬픔과 고통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채 살아가는 인간의 외로움에 대해서 모두 아시는 분으로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 모든 결핍 속에서 인간과 똑같은 고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둘째로 성경은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함이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시자마자 어린 아이의 몸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33년 동안 인간의 몸으로 성숙하시고 그래서 죄인들의 슬픔과 고통을 죄는 없으시지만 모두 경험하시고 죄인이 하나님 앞에 용서받는 그 일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일인지를 죄인들 속에서 모두 경험하신 후에 자기 몸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린 인간의 그 죄는 죽음으로라야 속할 수 있었는데 그 죽음은 모든 더러운 죄인들의 죽음으로는 속해질 수 없고 흠 없는 제물인 죄 없는 인간의 죽음을 필요로 했습니다. 육신의 방식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죄를 지니고 태어나기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생식이 아닌 성령으로 잉태하게 하셔서 마리아의 몸에 창조하시고 죄 없으신 그 몸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육체를 입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였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없는 희생을 통해 자기에게 은총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믿으며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신앙이 아닐까요? 바로 그런 신앙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육체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 모든 권한을 연약한 한 인간의 육체에 그 무한한 하나님의 전능하신 신의 성품을 감추시고 그 고난을 다 당하시면서 순종의 길을 걸아가심으로 이후로 당신을 믿고 따를 우리 모든 사람의 신앙의 본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작은 고난 때문에 불순종의 길을 가고 아주 사소한 어려움 때문에 우리가 걸어가야 할 순종의 길을 포기합니다. 힘들다는 이유, 어렵다는 이유 때문에 사명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배반합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의 생애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III. 심한 통곡과 눈물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신 삶의 방식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분의 생애는 크고 무한한 섬김의 생애였습니다. 그런 삶을 살게 만들어 주었던 원동력을 가리켜서 오늘 예수님의 지상생애의 기도생활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지상의 생애는 자기를 다 드리신 생애였고 우리 인간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할 모본을 보이신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모든 생애는 예수님의 기도생활로 집약이 됩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광야 40일의 기도에서 이미 예고되었고 예수님의 전 생애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올리셨던 그 큰 통곡의 기도 속에서 집약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올리셨던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의 기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드렸던 가상 기도 가운데서 더욱 초점을 구성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생애는 통곡과 눈물이 있는 기도의 삶을 핵으로 파문처럼 번져간 생애였습니다. 그분의 모든 능력에 찬 섬김과 긍휼과 연민에 가득 찬 봉사,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한 지사충성의 모든 삶의 파문은 바로 이렇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를 올렸던 예수님의 영적 생활을 중심축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원리를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원을 넓게 그리며 더 많이 더 넓게 하나님을 섬기기를 애쓰지만 우리의 기도생활이 그 핵을 이루고 있습니까? 거기에서 이글거리는 사랑의 불, 거기에서 비춰오는 진리의 빛이 파문이 되어서 우리의 섬김을 우리 밖으로 교회로 세상으로 열방으로 파동 치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 예수님의 지상생애의 기도가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였을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기도하는 이유는 대부분 우리의 무능 때문입니다. 우리가 능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무능을 깨달을 때 하나님 앞에 통곡하게 됩니다. 또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기 때문에 우리가 올바른 말씀의 빛으로 돌아오면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신 분이고 능력의 끝이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또한 그분은 죄와 허물이 전혀 없으시고 죄를 지을 가능성조차도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1. 우리를 위해 탄원하시는 기도
그러면 그분이 무엇 때문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겟세마네에서 올리신 그 간절한 기도가 십자가를 모면하게 해 달라는 세 번의 기도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잠시 드리고 끝난 기도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기도는 통곡과 눈물이 없이 기도할 수 없었던 그 이유는 이 땅에 있는 우리같이 불쌍한 영혼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당신 자신 안에 있는 죄인 것처럼 통회하셨으며 우리 안에 있는 무능력과 비참을 마치 당신 자신이 담당해야 하는 책임인 것처럼 그 모든 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으니 이는 예수님이 우리와 중보자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할 때에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아름다울 때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가 흉악한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우리가 악인이었을 때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는 친구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밖에 모르며 살았을 때에는 우리의 아픔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상에서 우리밖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을 때에는 우리가 아프면 통곡했습니다. 그러다가 십자가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인간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벌레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렇게 죽었습니다. 십자가를 볼 때 우리가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을 사랑하는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우리는 이 허무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보게 되었습니다. 죄 없는 그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죄인처럼 죽고 속박 받은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죽음에 속박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한 죄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주님 안에 있는 통곡의 기도를 배우게 되었고 탐욕으로 이글거리던 우리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마음에 있는 기도제목 때문에 울었습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영혼들 때문에 울었고 주님이 사랑하시는 교회 때문에 통곡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열방을 인해 가슴을 치고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그렇게 바라시는데도 인간의 불순종과 악함 때문에 오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인해서 슬피 울었습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십자가의 그 사랑을 알 때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부어져서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했고 우리는 우리가 있는 처소에서 간구와 소원을 올렸었습니다. 그러나 그 뜨거웠던 마음의 사랑은 점점 식고 우리의 심령은 화석처럼 변해갔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 대신 세상에 대한 욕망의 눈빛이 이글거리고 우리의 가슴속에는 주님을 위한 통곡대신 나 자신의 값싼 설움으로 가득 차 상처 난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글거리는 탐욕의 눈과 마음의 설움으로는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육체에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이 지상에 사셨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능력 많으신 그분이, 죄라곤 추호도 없으신 그분이 모든 지혜에 뛰어난 그분이 그렇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생활을 하심으로 이 땅에서 자신을 이기고 하나님을 섬기실 수 있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그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까? 주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는 교만의 죄이고 기도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 교만의 죄의 발로입니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모든 사람의 마음은 깨어진 마음이고 상한 심령입니다. 여러분들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 가장 아름다웠을 때 영혼이 가장 힘을 가지고 우리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었을 때 여러분들이 어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눈물이 있는 기도생활을 드리고 항상 가슴에 눈물을 간직한 착한 성도로 살았었습니다. 여기에 와서 주님을 처음 만나던 그 감격이 있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예배다 끝나도 자리를 뜰 수 없었던 그 눈물의 시간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새벽에 주님 앞에 울며 찬송가를 흠뻑 적시던 그 눈물의 기도의 시간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아픔은 간곳이 없고 교회 구석구석에서 느껴지는 예수님의 아픔, 지체들의 고통 때문에 예수님을 대신해서 울며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여러분은 주님 앞에 사랑받는 자녀였고 비록 가진 것 없고 높은 지위와 권세가 없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만한 비전이 없어도 신자 되기 원한다는 한마디의 고백 속에 보이지 않는 우리 예수를 향한 모든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이 마음의 굳어짐과 강퍅함은 얼마나 그 하나님 앞에 죄송한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목사가 되었으면 무엇 합니까? 장로가 되었으면 어디다 씁니까? 차라리 평신도이던 시절에 이름도 없는 가장 어린 신자였던 시절에 마음에 통곡이 있었고 심령에 눈물이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이미 이러한 심한 통곡과 눈물이 사라진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한 기독교, 세사의 번영을 위해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외에는 안중에 없는 자기중심적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마음속에 이루어진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울어야 할 세상은 넓고 눈물 흘려주어야 할 영혼은 많은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뛰어난 수사학적인 기교와 웅변이 있는 능숙한 기도소리를 들으시고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고 이 땅에 가장 어린 소자라도 죄인 중의 괴수와 같고 모든 인간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가슴에서 깊이 탄식하는 흐느낌, 눈물과 통곡이 있는 울부짖음의 간구, 그렇게 눈물로 흠뻑 젖은 마음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이름 없는 어린 아이 같은 성도의 기도에 귀를 기울입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눈물에 젖지 않았는데 우리의 심령이 통곡에 물들지 않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주님 앞에 자기를 드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전 생애는 이렇게 이 땅에 슬픔을 보면서 한이 맺히신 것 같은 생애였습니다. 죄 없으면서도 죄인들을 위해 통곡하셨고 허물이 없으셨음에도 주님을 거절하는 이 세상을 위해서 우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빈들에서 강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며 기도하셨을 때 우리 보기에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가장 연약한 한 성도에 불과하신 분이었습니다. 정말 우리가 기도생활을 알기는 아는 사람들입니까?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그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내 마음을 날마다 버리는 것, 그래서 내가 살고 싶은 것을 포기하고 내 마음에 예수와 살고 싶어 하는 그 삶을 살아가는 것, 어찌하든지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함이 신앙생활입니다.
2. 세상과 맞서는 기도
예수님이 이렇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것은 또한 세상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도와주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분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성도로 부름 받은 소명을 따라 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세상은 나그네 길일뿐입니다. 이 세상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기도에 헌신하려고 하면 우리의 육체가 반항하고 조금만 주님을 위해 마음을 바치려고 하면 우리의 마음이 요동쳐 우리의 마음을 갈갈이 찢어 주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때로는 우리 안에 사랑하는 것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찢기고 때로는 우리의 미움 때문에 우리 마음이 찢어져서 단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를 에워싼 수많은 환경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염려와 근심을 안겨줍니다. 환경을 보면서 기도에 격려를 받을 때가 얼마나 드뭅니까? 오히려 끊임없이 우리를 에워쌉니다. 우리의 끊임없는 양심의 가책들은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소망이 없고 우리의 간구는 주님 앞에 열납 되지 않을 것이라고 송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완전한 육체를 가지고 불완전한 영혼으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성도의 실존입니다.
죄는 없으신 예수님이셨지만 이미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그 모든 이 세상과 육체의 반란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래도 그분은 자기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 모두 바치며 기도 속에서 그 모든 한계를 극복하시면서 결국은 자기의 사명을 올곧게 완수하셨습니다.
아직도 죄 많은 이 세상의 환경의 번영에 여러분들이 기대를 걸고 계십니까? 부자가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개선될 것이라고 믿으십니까? 지위가 올라가면 주님과 화목하게 될 것이라고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조금만 셈이 피고 형편이 나아지면 신앙도 저절로 좋아질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부패는 뼈 속 깊이 배어있고 기도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 아니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 모든 것과 결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 많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바치며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예수의 본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Ⅳ. 전능하신 하나님께
이어서 성경은 그렇게 육체에 계실 때에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믿었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자기를 능히 죽음에서 구원하실 이에게” 기도하신 예수님의 마음속에 하나님은 자기를 능히 죽음에서 구원하실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게 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이것이 사명이기 때문에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몸 버리고 피 흘려 죽이시지만 하나님은 죽음의 능력보다 위대한 힘으로 자기를 그 모든 죽음에서 건져내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게 하실 것임을 믿으셨던 것입니다.
기도의 진수는 간절함에 있습니다. 그 기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간절한 기도야말로 주님을 만나게 해 주는 기도이고 하늘의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리는 기도이고 우리의 얽매인 영혼과 육체의 환경에 사슬을 끊는 능력이 바로 그 간절함에서 나옵니다. 번지르한 말과 신학적으로 정돈이 된 수많은 아름다운 미사여구에 의해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시는 것이 아니라 간절함, 올바르게 살아온 사람들의 건성으로 드리는 기도보다는 죄 가운데 있었던 악한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에 더 빨리 귀를 기울이시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눈물과 통곡으로 하나님 앞에 올리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 간절함이 기도의 진수입니다. 그러나 그 간절함도 기도하는 사람 속에 한 가지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건져내실 수 있는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시라는 믿음입니다. 이제껏 까지 응답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도해도 앞으로도 응답될 수 없을 것이라는 은근한 불신, 나의 인생에 오래 동안 나를 가로막았던 절벽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 실패의 절벽은 운명처럼 나를 따라 다닐 것이라고 하는 포기, 믿음으로 도전하기 보다는 실패에 익숙해지기를 먼저 배우는 불신앙을 가지고는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먼저 믿음을 가지십시오. 이제껏 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던 그 위대한 일들도 이번의 기도로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내가 올바른 기도의 자리, 기도자의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면 반드시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갖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성경에 나타난 위대한 모든 일들은 바로 믿음과 함께 역사한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홍해의 물이 갈라지고 그 사이로 백성들이 건너고 하늘에서 불이 내리고 원수와 대적들을 사르고 이방의 군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던 이 모든 기적과 같은 일 이면에는 모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을 굳게 믿는 믿음이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던 사람들이 꿈꾸는 것 같은 기도의 응답을 경험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전적인 의존이며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시간을 초월해서 이미 내 앞에 이루어진 일처럼 받아들이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바로 이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잠시 자기를 위하여 다가오고 있는 부끄러운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를 기꺼이 감당하셨으니 이는 자신은 죽어도 하나님이 자기를 그 죽음에서 건져내실 수 있을 것이라는 부활의 믿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운명에 매여 사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Ⅴ.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
오늘 성경은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입었느니라.” 예수님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지만 하나님이 응답하신 이유는 그 기도의 태도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삶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명의 자리를 팽개치고 자기 편한 길을 걸어간 사람들의 부르짖는 기도는 코메디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준 영혼들을 팽개치고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는 기도는 감상입니다.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본연의 의무를 팽개친 채 자기만 살겠다고 부르짖는 그 기도가 과연 경외하는 자의 기도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토레이 목사님의 일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 한 성도가 있었는데 남편이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이 여성도는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이 그래도 이루어주신다는 성경말씀을 붙들고 열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죽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찾아왔습니다. “나는 이제껏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았는데 적어도 한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입니까?”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것 거짓말이기 때문에 내 남편이 죽었습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자매님이 틀렸습니다. 거기 나오는 ‘너희는’ 자매님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앞의 성경구절을 읽어보니까 이런 구절이 나왔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계명을 지킬 텐데 바로 그렇게 계명을 지키고 나를 사랑하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들어 줄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평생을 농땡이 치다가 남편 죽겠으니까 와서 안 믿어지는 것을 믿어진다고 쌍시옷을 내면서 미리 감사헌금|까지 하면서 그렇게 남편의 생명을 위해 기도한 그것이 정말 자기를 꺾은 기도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간절함도 물론 보시지만 눈물 흘리는 통곡의 기도가 주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드리는 기도일 때 그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주님이 주신 그 자리에서 순종하면서 드린 한권의 눈물을 흘린 기도는 주님이 주신 순종의 자리에서 이탈하여 고함치며 부르짖는 수만 마디의 기도보다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자 하는 그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화산처럼 솟아오를 때 우리의 기도가 심한 통곡과 눈물을 동반하며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올 때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어디든지 주님이 세워주신 교회 한 모퉁이를 예수께서 나에게 세워주신 하나밖에 없는 내 자리라고 알고 알아주는 사람 없고 위로해주는 사람 없어도 묵묵히 주님을 섬기고 있었을 때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섬기고자 하나 능력이 너무 없기 때문에 눈물이 났고 주님을 위해서 잘 봉사하고자 하나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통곡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안팎으로 우겨 싼 이 모든 시험 속에서 주님의 은혜가 필요했고 그래서 우리는 분초라도 하나님이 나를 붙잡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천하고 더러운 죄인들임을 깨달으며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러한 순종하는 삶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짧았으나 능력이 있었고 우리의 간구는 여러 가지 많은 부족한 것이 있었지만 언젠가는 주님의 마음을 울릴 수가 있었습니다.
기도응답 되기를 사모하는 여러분
이번 한 주간 간절히 기도하며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세요. 거기가 눈물이 나도 제일 쉬운 자리입니다. 거기가 쓴 물을 머금고 고통스러워도 거기가 가장 기도가 잘 되는 곳입니다. 저도 여러분들과 같이 수없는 주님 만난 후에 수없는 고난의 파도를 넘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도 그 파도를 넘고 있습니다. 교회를 섬기면서 아무 희망이 없다고 생각될 때 안팎의 원수들이 우겨 싸고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땐 더 이상 이 사명의 자리에서 부르심을 감당해 나갈 힘이 이제는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 될 그때마다 제가 부르던 찬송이 이었습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지치고 피곤한 이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주님도 때로는 이 세상에서 울기도 하셨고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셨지.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그 주님이 그렇게 걸어가신 이 세상의 길을 내가 어떻게 노래하고 즐거워하며만 걸어갈 수 있겠는가? 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기도에서 주님의 그 기도의 위대한 능력의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통곡과 눈물이 있는 기도, 죽음과 같은 고통, 살을 에이는 것 같은 고난 속에서도 자기의 사명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경외하는 삶, 이것을 배우게 됩니다. 여러분이 아무쪼록 이 예수의 본을 나와 함께 따르며 생명 있는 동안에 이 기도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6. 겟세마네의 기도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눅 22:42-43)
I. 본문 배경
사람들은 흔히 예수님의 고난하면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고 피 흘리는 육체의 고난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이 당하신 영혼의 고통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잡히시던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 홀로 올라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광경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고난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지만 그러나 영혼의 고난은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예수님을 엄습했고 그 고난을 홀로 한 몸에 모두 받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의 이 고난의 기도를 통해서 예수 고난의 의미를 새기고 또 그 고난의 때를 기도로 이기신 예수님의 모범을 가슴에 새기고자 합니다.
II. 감당하기 어려운 쓴 잔
예수님은 이 기도를 드리실 때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치열한 영적인 사투를 벌이실 때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고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지 않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지실 십자가를 앞두고 하나님 앞에 기도로 씨름하셨습니다.
1.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우리가 여기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한 구절 등장합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여기에서 이 잔은 고난의 잔, 즉 십자가 죽음의 잔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높아지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마실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어 보셨습니다. 이처럼 이 잔은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셨구나. 아마 예수님도 죽기는 싫으셨나 보구나 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해석할 수 있는 성질의 구절이 아닙니다. 이구절의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단순히 우리 인간의 지평에서만 생각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성육신의 사실에 비추어 이 구절을 해석해야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가르치신 교훈은 하나님을 위해서 죽는 것에 대해서 많이 가르치셨습니다. “너희가 목숨을 잃으면 얻을 것이요”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거니와 썩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느니라.” 이렇게 우리에게 가르치신 예수님이 죽음이 두려워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온유하지만 전투적인 생애를 살아오신 예수님의 일생에 비추어 볼 때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목숨이 아까워서 이렇게 비겁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을 것이라고 그렇게 믿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예수님의 성육신과 관련하여 이해하여야 합니다.
2. 죽음보다 더 큰 고통
예수님은 그 본체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하나님 되신 신성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때에는 인성 밑에 감추셨습니다. 스스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죄는 없으셨지만 인간의 한계를 지신 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셨을 때에는 모든 것을 다 아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실 때에는 하나님이 언제 이 세상을 심판하실 지 스스로 모르는 분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성육신의 비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실 때에는 모든 것을 다 아셨으나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실 때에는 예수님이 모르시는 것도 있었습니다. 생명이신 그 분이 죽임을 당하는 경험 같은 것,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셨겠지만 더 큰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으셨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약점은 가지고 있었지만 죄와 부패성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면 인간이 지은 모든 죄를 짊어지고 그 죄와 부패의 결과인 모든 죄를 당신 자신이 짊어져야 했습니다. 이것은 이 분이 하나님이시지만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순결하신 그분이 죄를 짊어지시고 온전하신 그분이 인간의 불의를 담당하셔서 실제로 하나님 앞에 죄 있는 자가 된다는 이것은 예수님에게 너무나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이제까지 하나님과 떨어져 본 적이 없이 동행하신 분이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기 전에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셨고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으로 교통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실 때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셨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있었지만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29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아버지가 나와 항상 함께 하시도다’ 하고 고백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떨어져 본 적이 없으신 하나님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잠시 후면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그 좋으신 하나님 앞에 진노를 당하셔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신 그분이지만 경험해보신 적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생명이신 그분에게는 가당치 않는 일이었고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III.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기도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렇게 하지 않고도 내 백성이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죄와 욕심에 사로잡혀 자기 고집을 굽히지 않는 인간의 탐욕적인 기도와는 다른 종류의 기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러나’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1. “그러나”의 기도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러나의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하나도 없으시고 순결하신 분이셨지만 인간의 죄를 다 짊어지고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을 그 끔찍한 고난이 눈앞에 다가오자 할 수만 있으면 이 경험을 피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이 너무 소중했기 때문에 드린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이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당신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께 드리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셔서 형벌을 받으시는 것 이외에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시고 예수님은 다시 기도를 바꾸셨으니 그것이 바로 ‘그러나’의 기도였습니다.
2. 그대에게 십자가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처럼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꺾어 하나님이 기뻐하는 기도에 자기를 복종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죄와 욕심에 의해서 수시로 흔들리는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자기를 꺾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속에서 무릎을 꿇어야 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착실합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서 주일이면 꼭 가족과 함께 나와 예배드리고 헌금도 거르지 않고 어느 정도 교회 봉사하고 사람들 눈에 날만한 잘못된 행동이나 부도덕한 일 같은 것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사람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하는 간증이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만났다든지 놀라운 기도의 응답이 있다든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진 기쁨이 있다든지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보면 그 사람만 못한 것 같습니다. 언젠가 교회 나오나보다 했더니 미끄러져서 안 나온다고 하고 언젠가는 교회를 섬긴다고 떠들썩하게 하더니 떠났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언젠가는 새벽기도까지 나오고 유별을 떨더니 구역예배도 안 나오고 시들먹합니다. 아무리 봐도 이 사람이 죄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 이 사람하고 이야기하면 그래도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하는 경험이 있습니다. 간증이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사람들은 궁금해 합니다.
그 중요한 차이는 자기 꺾임입니다. 후자의 사람은 제멋대로 사는 것 같고 미끄러지는 것 같지만 인생의 어느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꺾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의 뜻은 이렇지만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자기를 꺾는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가 밀려드는 겁니다. 완고하고 밋밋하고 굳세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하나님과의 만남의 감격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Ⅳ. 복종의 삶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나으며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도다.’ 여기서 ‘듣는다’ 이 말은 대개 히브리어에서 샤마베콜(שָׁמַע בְּקוּל) 이라는 낱말을 연결합니다. ‘샤마’는 듣다 이고 ‘콜’은 목소리입니다. 수양의 기름을, 제사를 하나님 목소리 청종하는 것보다 좋아하시겠나이까? 그 앞에 붙어있는 전치사 ‘베’는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목소리 속으로 파고들어서 그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기울여서 그 하나님의 목소리 뒤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의 몸을 불태워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1. 성화와 복종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은 효도와 같습니다. 의무감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생활비 들고 찾아가는 것이 효도가 아닙니다. 효도는 부모의 마음에 귀를 대고 그 마음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자신의 마음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읽고 이해해드리는 것, 그 마음이 자기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오는 것, 부모를 섬기는 것을 진정한 인격적인 효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냥 의무를 행하는 그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귀를 기울여 예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속에 스며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이 마음은 공장과 같습니다. 어떤 빵을 맛있게 만드는 공장이 있다고 칩시다. 그 공장은 좋은 재료를 사용해서 우수한 기술로 빵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기 때문에 빵을 한 모양으로 안 만들고 달모양, 별모양, 잉어모양, 국화모양 여러 가지 모양의 틀에다가 빵을 구웠습니다. 모양은 달라도 맛은 다 뛰어납니다. 왜냐하면 좋은 공장이기 때문에 좋은 빵이 나옵니다. 우리의 마음이 바로 그런 공장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의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흘러 들어가서 예수의 마음으로 가득히 변화되면 그 행동을 직장에서 달모양으로 찍어내든지 집안에서 별모양으로 찍어내든지 교회에서 꽃모양으로 찍어내든지 동네에서 잉어모양으로 찍어내든지 그 맛은 다 같습니다. 예수의 맛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이런 것에 관심이 있습니까? ‘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물려받고 말씀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목소리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전수받아서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면서 내가 살아야 되겠다.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전 21살에 회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많이 받아서 교회 일도 하고 목사님 도와서 심방도 하였습니다. 22살 때 어떤 사람이 절 보더니(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이었는데) “당신은 이다음에 목회자가 되면 참 좋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속으로 ‘너나 해라. 내가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세상에 38,000개의 직업이 있다던데 이렇게 교회 와서 봉사하면 내가 무엇 때문에 교인들 코 묻은 돈을 먹고 살겠느냐? 너나 해라.’ 그러면서 4-5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어느 해인가 교회에서 목사님이 여름성경학교를 나에게 총책임을 맡겼습니다. 교역자도 없고 선생도 없고 해 본적도 없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직장을 다니면서 일주일을 금식을 했습니다. 직장에 가서 하루 종일 일하고 금식한 티를 내지 않고 교회에 와서는 밤새워 기도하고 이튿날 다시 세수를 하고 출근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일주일 동안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5일째 되던 날 강대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내 마음에 들려왔습니다. “얘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 막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달라고 하셔도 드릴 수 있겠는데 그것만은 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런 어느 순간에 예수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 스며들었습니다. ‘아, 그렇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그렇게 천대를 받으셨기 때문에 이 복음이 나에게까지 이르렀지.’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주님 앞에 나 자신을 드리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나님, 이제 제 인생은 주님의 것입니다. 제가 주님이 쓰시면 제 자신을 드리겠습니다. 섬으로 보내시면 섬으로 가고 시골 오지로 보내시면 거기에 가서 가능하면 독신으로 내가 가난한 주민들과 함께 살다가 죽겠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하늘 문이 확 열리면서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가 밀물처럼 밀려들었습니다.
자기를 꺾는 것이야말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으로 섬기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것입니다.
2. “아멘”의 생애
예수님의 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별명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멘이요 충성된 증인이시오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예수님의 별명은 ‘아멘’이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구원받을 내 백성을 위하여 이 슬픔이 많은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가거라 하셨을 때 예수님은 “아멘”하셨습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궁핍 속에서 일생을 사셔야 되셨을 때도 그분은 “아멘”하셨습니다. 수많은 원수들에게 박해를 받으시면서도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시며 핍박을 당하셨을 때에도 그분은 “아멘”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당신에게 있는 모든 것들을 주님의 양떼를 위해 내어주시고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차마 보실 수 없어서 하나 밖에 없는 자기의 옥체를 십자가에 깨뜨리실 때도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아멘”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이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것도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아멘의 소명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던 것입니다. 이른 새벽 미명에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벌판에서 통곡과 눈물과 기도하신 예수님의 그 기도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아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하늘에서 높임을 받으시는 아버지의 이름에 대해 이 세상의 많은 인간들이 아멘하지 않는 것 때문에 통곡하시고 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이 아멘이었습니다.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하셨네 나 주님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우리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다. 우리가 꺾여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너무나 하기를 원하지만 주님이 싫어하시기 때문에 하는 것을 포기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너무나 싫은데 예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나를 꺾고 고난을 받으며 그것을 행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일찍이 다윗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천천의 수양이나 황소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상한 심령이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 자기의 뜻을 꺾는 자기 꺾임, 불순종하며 살 때가 없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고난 앞에서 주님도 자신을 꺾고 나를 위한 화목의 제물이 되셨으니 이번에는 제 차례입니다. 라고 자기 마음의 목을 분질러 본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에서 자아를 꺾은 사람, 교만한 자아의 목을 꺾고 자기의 마음을 제물로 드리면 기도하기 전에도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우리 마음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아멘의 생애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디가시든지 늘 동행해주셨던 것입니다.
3. 한 사람의 복종으로
고난 주간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 중에 예수님 때문에 바쳐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를 꺾고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살며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자기를 세우고 불순종하니까 죄와 죽음이 가득하게 이 세상에 들어왔고 한 사람이 자기를 꺾고 순종하므로 자기를 바치니까 이번에는 생명이 밀려들어와서 의가 왕노릇하게 되었습니다.
변화되지 않는 우리의 가정, 변화되지 않는 나의 사업의 터, 변화되지 않는 나의 가족들 하나님이 바로 목을 꺾은 나 자신을 제물로 원하신다는 생각해보신 적 없습니까?
예수님이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매달려 기도하신 것은 이튿날 져야 할 십자가가 당신의 사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꺾임이 없는 사명의 일터는 모두 건조하고 생명의 기운이 없습니다. 사명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 행복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고 그러십시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당신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사명이었기 때문에 이 십자가에서 피땀을 흘리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각기 사명의 자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고 우리에게는 또 다른 우리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이 고난의 잔을 피할 수 있다면 왜 나만 이 자리에 서서 이 고통 언제 끝날지도 모를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때로는 멸시와 핍박, 오해와 비난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제자들조차 잠든 겟세마네 동산에서 혼자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나를 위해 그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을 꺾으시고 피 흘려 기도하시므로 내가 생명을 얻었으니 이번에는 내가 죽을 차례입니다. 라고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2000년 전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의 의미가 오늘 내 마음에 다시 살아나서 나 자신을 꺾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자기를 꺾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 꺾임이 없이 드리는 많은 기도와 제사는 하나님 앞에 중심을 드리지 않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나를 먼저 그 십자가 앞에서 깊이 분지르는 것입니다. 이제껏 까지 목을 치켜들고 하나님보다 위에서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보려고 했던 자아의 목을 분지르고 하나님 앞에 죽여서 꺾어서 주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의 강물이 폭포처럼 흘러 들어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옮기게 해달라고 기도하실 때는 예수님 홀로 기도하셨지만 그러나 고백하며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실 때는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예수의 기도를 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땀과 피를 다 쏟으며 그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튿날 짊어지게 될 그 모든 십자가를 영적으로 지시고 승리 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Ⅴ. 결론과 적용
그래서 이 고난의 주간에 우리가 부활을 꿈꿉니다. 죽었던 우리의 영혼은 살아나기를 원하고 잠들었던 우리의 신앙은 다시 깨어나기를 원하고 죽은 자와 같았던 나의 환경들은 부활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활 이전에 먼저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 고난의 주간에 자기를 꺾는 것이 아플 때마다 자기를 꺾는 것이 고통스러울 때마다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아프게 자신을 꺾으셨겠구나 생각하고 날 위해 죽으신 그분이 당신을 꺾으셨으니 나도 그 사랑으로 주님 앞에 나를 꺾습니다. 이 고백을 드릴 때 여러분들은 이전의 고난의 주간에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의 큰 생명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넘쳐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기도로 역경을 이기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