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로 환경을 이기라
(200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기도로 열린 하늘 문(눅3:21-22) 2007.9.23 주일오전 1
2. 환경을 이기는 기도생활(막1:35) 2007.9.30 주일오전 11
3. 특별한 기도가 필요한 때에(눅6:12) 2007.10.7 주일오전 23
4. 기도와 변화(눅9:28-29) 2007.10.14 주일오전 31
5. 예수님의 중보기도(눅22:32) 2007.10.21 주일오전 40
6. 습관을 좇아 기도함(눅22:39) 2007.10.28 주일오전 48
7. 간절한 기도의 회복(눅22:44) 2007.11.4 주일오전 57
8. 십자가에서 남긴 첫째 기도(눅23:34) 2007.11.11 주일오전 67
9. 십자가에서 남기 둘째 기도(마27:45-46) 2007.11.18 주일오전 72
10. 십자가에서 남기 셋째 기도(눅23:44-46) 2007.11.25 주일오전 78
1.기도로 열린 하늘 문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눅3:21)
예수님의 공적인 생애는 세례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 문답을 했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세례란 무엇이뇨?” 물으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대답해야 했습니다. “세례는 죄 씻음의 표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니 씻으실 필요가 없었고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니 자신과 하나 되실 수 없는 분이었으니 명백하게 예수님은 세례 받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지만 예수님이 받으신 이 세례는 의미가 우리의 세례와는 다르다고 말해야 합니다.
I. 세례 받으심의 의미
예수님의 세례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메시야로서의 공적인 취임을 알리는 표였다라는 것입니다. 죄를 씻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메시야로서 공적으로 이 일을 위해 취임하신다는 것을 하나님이 이 세례의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임재 하셨으니 성자는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은 강림하시며 성부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앞에 나오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는 말씀이 관계를 인치는 것이라면 뒤에 나오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예수님이 하시려는 사역을 인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의 백성인 우리들과 하나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오신 분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하나님이 되심으로서 만은 인간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위해서는 사람의 몸을 입으셔야 했고 동시에 제사장들은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지만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특이한 제사장이셨습니다.
제사장은 소명은 하늘로부터 임하나 이스라엘의 형제들 중 한사람이 선택되어 하나님 앞에 대제사장으로서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인물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런 속죄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한 인간과 같은 분이 되셔야 했고 그것을 모든 인간 가운데 알게 하시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의 문이 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그 사건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의미 때문에만 하늘의 문이 열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에 대해서 관심이 많던 누가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놓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 장면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 문이 열렸지만 누가에게는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하늘의 문이 열렸던 것입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이 부분이 수동태로 나오는데 이것은 신약에 새로이 등장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에스겔이 30년 4월5일에 그발강에 섰을 때 하늘이 열렸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도 히브리어로 수동태 동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 나오는 모든 하늘이 열리는 표현을 따라서 묘사한 수동태라는 것입니다. 즉, 닫혔던 하늘이 열린 것은 하늘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 하늘을 열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 하늘의 문이 때로는 역사 속에서 굳게 닫혀 있을 때가 있습니다.
II. 하늘 문이 닫히면
이렇게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늘의 문이 닫혀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첫째로 계시의 빛이 그칩니다. 성경을 기록한 마지막 선지자는 말라기였습니다. 그 선지자 이후로 400년 동안 기록 선지자의 예언이 사라집니다. 하늘로부터 계시의 빛이 멎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에 구약과 신약 사이에 중간사 시대가 있고 바벨론의 포로시대 그 이후에 유대교라고 하는 종교의 이상한 괴물이 태어납니다. 하늘이 닫히고 계시의 빛이 사라졌을 때 일어난 현상이었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도 똑같습니다. 우리 어차피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가면 살아집니다. 문제는 살아있는 모든 것이 산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문이 굳게 닫힌 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의 빛을 통해 전달되는 그 모든 따뜻한 하나님 사랑의 온기도 느낄 수 없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저는 과일하고 생수를 참 좋아합니다. 질이 좋은 물을 마시거나 좋은 과일을 먹을 때 굉장히 행복합니다. 올해 과일은 정말 아닙니다. 왜냐하면 비가 많이 와서 물기를 빨아들여서 과일은 큽니다. 그런데 햇빛이 적어서 단맛이 배이지 못했습니다. 라이나 마리아 릴케가 이런 시를 노래했습니다. ‘주여 이틀만 더 남국에 햇빛을 주셔서 이 포도들을 영글게 해 주옵소서’ 라고 말이지요. 저는 젊었을 때 먹골 근처에서 살았습니다. 가을이면 청년들하고 같이 배 밭에도 가곤 했습니다. 요즘에는 그런 낭만이 다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똑같은 배를 생산해 내는데 길 이쪽에 있는 집의 배 맛과 불과 골목길 한 10m 건너편에 있는 다른 집 배 맛이 틀립니다. 아무데나 배를 심어도 그 맛이 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도 한국 배하면 supermarket에서도 최고 인기이고 비쌉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미국에서 심어보려고, 심으면 한국 사람들이 배를 좋아하니까 역수출을 할 수도 있잖아요. 농산물의 생산가는 우리나라가 미국을 따라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 실패했습니다. 배가 얼마나 달고 맛있는지 배 하나를 배 밭에서 깎으면 손을 씻지 않고 배길 수가 없습니다. 설탕덩어리가 되어 손에 다 달라붙습니다. 그렇게 맛있는 배를 가꾸기 위해서 농부가 무엇을 했을까요? 설탕을 뿌리에다 들어부었을까요? 나무에다 꿀을 발랐을까요? 남국의 햇빛을 이틀 더 받았을 뿐입니다.
가끔 사람들이 나에게 때로는 진심으로 때로는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냥 사세요.” 그냥 살면 참된 신자가 됩니다. 무엇을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없는 그늘아래서 참된 신자가 되는 길이라고 쓰여 진 책 수 백 권을 탐독해도 참된 신자 안 됩니다. 그런 것을 몰라도 열린 하늘아래서 찬란한 말씀의 빛, 은혜의 빛이 자기를 비추게 허락을 하세요. 그러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농익어서 하나님 등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판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이 영근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 문이 닫히면 이런 계시의 빛, 은혜의 빛이 사라집니다. 태양이 하는 일이 무엇 있습니까? 빛을 쭉 비추는 것입니다. 하나입니다. 복숭아용 태양, 사과용 햇빛, 배용 광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비추는 것입니다. 만물의 생명이 삽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빛, 은혜의 광채도 그러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한다고 여러분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기독교 신앙은 벼락을 맞아야 시작이 됩니다. 이것은 나의 구도의 경험이고 목회의 경험입니다. 얼르고 타이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번쩍 하는 벼락과 같은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받을 때 지성에 가장 강력한 충격이 오는 것입니다. 영혼이 변화됩니다. 그것은 누구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은 그런 것 없이 예수쟁이를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몸은 고달프고 얼르고 타이르고...안 됩니다. 벼락을 맞아야 됩니다. 더군다나 이런 경험 없이 목회를 하겠다는 사람이 나오니까 더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하늘이 닫혔을 때는 이런 계시의 빛이 멎습니다.
하늘의 문이 닫히면 기도의 문도 닫힙니다. 부르짖으며 기도해도 하나님이 듣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닫힌 하늘 아래 사는 신자의 비극이고 인간의 불행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우리를 이 세상에 그냥 살게 하지 우리의 인생이 어느 방향을 향해 가야할 지를 가르쳐 주지는 못합니다.
최근에 리차드 도킨슨이라는 지성인이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의 목표는 모든 이 책을 읽는 사람을 무신론자 만드는 것입니다. 내리는 결론이 ‘종교라는 이름 아래 행해진 인류의 이 죄악사, 인간의 유전자와 모든 세포들은 신을 의지할 수 없다’라고 판단할 때 사랑의 유전자 같은 것들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끼리 너무나 사이좋게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 책을 읽고 무신론으로 바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인간이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사이좋게 사는 인간들이 어디로 가야할 지를 알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는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창조하신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행복해보려고 하는 모든 것들이 결국은 하나님 안에 있는 목표를 하나님 바깥에서 찾으려는 시도들입니다. 우리들이 외도라는 말을 씁니다. 외도는 밖으로 난 길입니다. 똑바른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가정 밖에서 얻어 보려고 할 때 그것이 외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하나님 바깥에서 찾아보려고 할 때 이것이 외도가 됩니다. 모든 삶의 외도는 영혼의 외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마음은 거칠어지고 충동에 복속됩니다. 욕망을 따라 출렁이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없는 삶입니다. 정말 하나님 없는 삶을 사는 인간이 사실 자기의 온 마음을 다 바쳐서 흉내 내는 것은 하나님의 있는 그것을 찾아보려고 흉내 내는 것입니다. 열렬하게 타락하는 죄인들은 한편으로는 열렬하게 하나님을 찾는 이 허무한 마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헤르만 바빙크라는 신학자가 ‘인간은 불가해한 존재입니다. 한편으로는 치열하게 하나님을 찾으며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치열하게 버립니다.’
그런데 하늘 문이 닫히면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그릇된 모습을 스스로 성찰할 수 없습니다. 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자기반성의 능력은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반성의 정체는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자기를 객관적으로 못 볼수록 동물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됩니다. 객관적으로 보게 만드는 놀라운 힘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이성의 빛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진리의 빛에서 오는 힘입니다. 기도는 바로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해 주는 놀라운 자원입니다. 하늘 문이 닫히면 불가능해지게 됩니다. 처음에는 기도가 하기 싫어서 버렸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기도가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기 싫어서 안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할 수 없어서 못합니다.
제가 참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물론 나쁘지만 옛날에는 더 나빴습니다. 부모로부터 제가 물려받은 것은 건강하나였습니다. 눈이 나쁘긴 했지만 건강했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부터 이해 못하는 사람이 네 종류가 있었습니다. 머리 벗겨진 사람, 배 나오는 사람, 허리 아프다고 하는 사람, 돈 못 버는 사람, 이 네 종류는 나에게 늘 불가사의였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배가 나오는가? 인간이 어떻게 똑바로 서서 발가락이 안 보일 수 있을까? 허리는 왜 아픈가? 인생을 바쁘게 살게 되면 그렇게 바쁘게 살 때는 시간이 총알같이 흘러가지만 그 시간이 흘러가고 난 다음에 과거를 회상할 때는 그 짧았던 과거가 아주 길게 회상됩니다. 그 이유는 사건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의 삶이 그랬습니다. 요즘은 100명만 되도 부목사님을 쓰지만 저는 450명이 될 때까지 부목사님 안 썼습니다. 1100명 될 때까지 등록 심방을 제가 했습니다. 그리고 900명 정도 될 때까지 청년들도 등록하면 제가 심방했습니다. 그때 일이었습니다. 그때는 교역자도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새벽기도 안 나오면 뻔히 다 보였고 그때는 지금보다 눈이 좋았으니까 금방 알았습니다. 설교가 끝났는데 목사인지 전도사인지 누가 안 나왔습니다. 방송실에 전화를 걸어서 아무개 목사 새벽예배 안 나왔는데 무슨 일인지 전화하라고 했습니다. 아파서 안 나왔다는 보고 왔습니다. 전화를 받았으면 오다가 쓰러져도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숨을 헐떡이며 뛰어왔습니다. 저는 그것도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어떻게 젊은 교역자가 성도들은 새벽에 나와 기도를 하는데 두 다리 뻗고 잠을 잘까? 어느 세미나에 가서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엄청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러겠지요? “목사님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사십니까?” 바로 그때입니다. 지금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짐을 지고 살았습니다. 오후 예배 끝나면 어떤 날은 교회 마당에 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타고 가서 집회하고 오면 밤 11시, 씻고 어쩌고 하면 12시 전에는 자본 적이 없습니다. 나도 인간이니까 주일 새벽부터 시작해서 밤까지 집회를 하고 어떤 날은 서재에 앉아서 집필을 새벽까지 했으니 새벽에 일어날 수 있습니까? 온 몸이 뻐개지는 것처럼 아픕니다. 그러면 이불을 박차면서 충성! 하고 일어났습니다. 월요일도 저는 교역자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십니까?’ 대단히 답변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지금은 많이 변했군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한 번도 새벽기도 시간에 잠들어 본 적은 없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에는 기도원에 있든지 지방에 있든지 사택에 있든지 심지어는 외국에 가서 낮잠을 자다가도 깹니다. 그러면 왜 옛날처럼 안 하느냐? 밤중에 다른 교회 집회를 갔다 오거나 수요예배에 힘을 쏟아 설교하거나 금요 기도회가 길어지거나 하면 다음날 아침에 너무 힘듭니다. 특히 월요일에는 두통이 일어납니다. 제가 아주 운이 좋으면 밤중에 한번 깨고 그렇지 않으면 보통 2-3번 깹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안 깨는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두통이 그냥 온 몸이 부서지는 그런 피곤이 아니라 아주 불길한 느낌의 두통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10년 내내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몸이 막 부서져도 충성하고 이불 박차고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입니다. 몸만 피곤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두통이 와도 아주 기분 나쁜 불길한 두통이 옵니다. 똑바로 누워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렇게 연약한 존재입니다. 내가 그렇게 사니까 부교역자도 내 삶을 따라 합니다. 오늘 새벽에도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설교할 것을 단풍나무아래서 묵상하면서 면도칼로 가슴을 도리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내가 옛날에 이해했다고 믿었던 성경구절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제야 겨우 이해가 됩니다. 인생이 한 40정도에서 누구나 끝난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육체의 자원이 소진되기 전에 불꽃처럼 확 살라서 인생을 끝낸다면 얼마나 깔끔하겠습니까? 그것을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나는 저들에게 더 좋은 본을 보여 주고 싶은데 목회자가 눈물을 쏟으면 교인은 땀을 흘리고 피를 쏟으면 겨우 눈물을 흘립니다. 반대로 목회가가 뛰어가면 교인은 걸어오지만 힘이 들어서 걸으면 교인은 앉아서 쉽니다. 목회자가 앉아서 쉬면 교인은 눕습니다. 목회자가 허리가 너무 아파서 누우면 교인은 거기서 깊은 잠이 듭니다. 어저께도 어느 원로 목사님이 전화하셔서 “김목사, 너무 쏟아 붓지 말거라. 오래 못한다. 천천히 해라.” 당신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건강이 안 좋으시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조절이 안 됩니다. 면도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것같이 아픕니다. 나는 저 사람들에게 더 좋은 본을 보여 주고 싶은데 육체의 힘이 따라 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제 이 세월 속에서 완전성을 잃고 부패해 가는 것이 인간의 육신인데 세월이 지날수록 나의 외침과 실제적인 삶 사이의 괴리는 더 심해지지 않을까?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그때마다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하늘 문이 닫히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늘 문이 닫힐 때는 하나님이 비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물질적인 궁핍 속에서 사는 것도 그렇습니다. 때로는 찬란한 계시의 빛, 은혜의 빛이 비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특별한 계획이 있기 때문에 고난에 결핍으로 가득 찬 길을 걷게 하십니다. 거기에서 주님만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연단하실 때가 있습니다. 더 많은 경우에는 궁핍한 삶을 닫힌 하늘을 보여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궁핍이 군사처럼 밀려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갈 상상을 하면서 아버지를 만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슴에 되 뇌이고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그는 큰 궁핍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그것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스스로 내렸습니다. 하나님 없이 번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수중에 있는 사랑하는 자녀들은 하나님이 하늘 문을 닫으시면 번영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잠시입니다. 사람들은 그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서 신앙을 팝니다. 얼마 남지도 않은 신앙을 팝니다. 결국은 그것이 자신의 궁핍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하늘의 문이 닫히게 되면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모든 자애로운 삶은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은혜를 부어주면 충분히 용서하며 사랑할 수 있는 사람도 은혜가 사라지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교회 마당에 있으면 엄마들이 아이를 야단치는 것을 보면 보입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를 받는 자매들은 아이를 야단쳐도 부작용이 잘 안 납니다. 책망의 깊이보다는 사랑의 깊이가 훨씬 깊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사랑이라는 진통제 먼저 맞고 책망이라는 칼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런 하늘의 자원이 그치게 되면 아이를 책망 할 때 진통제 없이 칼을 대는 것처럼 자기편에서는 아이를 올바르게 키우겠다고 하는 것이지만 칼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이들 심성을 파괴하거나 마냥 자비로워서 내버려 두면 방종한 아이들이 되어 버립니다. 하늘의 자원이 그치게 되니까 사람과의 관계가 파괴됩니다. 다 깨뜨려집니다. 찢어지고 미워하고 분열하면서 미친 듯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III. 하늘 문이 열리면
그러나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열고 열린 문에서 찬란한 하늘의 은혜, 그 빛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할 때는 닫혔을 때 생겨났던 모든 문제들이 근원부터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어둠속에 사로잡혔던 영혼에 계시의 빛이 비치자 지성은 자유를 얻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 담긴 삼위의 거룩한 성품이 전달되어 들어옵니다. 마음은 그 진리의 빛으로 떠는 것입니다. 찬란한 은혜의 빛, 그 계시의 빛이 들어옵니다. 거기서 영혼은 자유를 얻게 됩니다.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언제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이름이 그리움이 됩니다. 언제나 마음은 가득 담은 물 봉지 같이 누르기만 하면 탁 터져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영혼의 상태가 될 때 그는 열려진 하늘 아래 있습니다. 어디서나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오, 주님 사랑하는 아버지, 나는 한시도 주님의 도움이 없이 살 수 없는 아주 미천한 티끌입니다. 오, 주님 나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거기가 어디이든지 간에 열려진 하늘 문으로 나의 마음이 비상하는 것입니다. 확 올라가는 것입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찬양이 끝나고 나면 그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 소망이 없는 이 세상에 계속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하나님이 하늘의 위로를 부어주십니다. 예전의 한숨이 변하여 노래가 되게 하시고 이전의 어둠 속을 걷던 그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게 하십니다. 하늘 문이 열릴 때 그런 기도의 창을 통해서 곤고한 우리의 영혼은 하늘을 향해 매 순간 불살라지고 하늘을 통해서는 나에게는 아직 없는 그 생명과 사랑이 물 붓듯 부어지는 것입니다.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입니다.
나는 무기들 중에 참 신기한 것이 공중 급유기입니다. 공중 급유하는 광경을 다큐멘타리에서 보았는데 최고 시속 3,200km 부산까지 불과 4분에 날아갈 수 있는 비행기가 공중에 계속 날면서 기름을 넣는다는 것이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공중 급유기를 구입하기 위해 열을 냅니다. 그 이유는 작전 반경을 두 배를 넓힐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전투기 연료통은 5드럼 반 정도 들어갑니다. 공중에 뜨면 최대 속력을 내면서 과격하게 운전을 하면서 공중전을 할 때는 30분밖에 쓰지 못하고 정규적인 속도로 날아가면 1시간 20분 정도 비행을 합니다. 얼마나 짧은 시간이에요. 워낙 속도가 빠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 문이 열리면 기도할 수 있습니다.
IV. 기도할 때 열리는 하늘 문
기도할 수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습니다. 기도할 수만 있으면 마음먹은 대로 일이 되지 않아도 우리는 그 기도 속에서 주님 손을 붙들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인도를 따라 갑니다. 가는 길 멀고 험하고 앞에는 아무것도 안 보여도 상관없습니다. 다섯 손가락에 주님이 굳게 잡은 손의 감촉만 있으면 어디를 가도 괜찮습니다. 그 열린 기도의 문을 통해서 하늘의 은혜가 부어집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하늘이 열리면서 내려오는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보이는 형체였습니다. 평화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동시에 사람들과의 평화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확장시킴으로서 하나님 자신을 구현하도록 만드는 놀라운 힘은 성령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열려진 하늘의 문에서 하늘을 향해 부어진 솟아오르는 기도와 거기를 향해서 부어지는 그 은혜를 통해서 우리들이 그런 새로운 힘을 얻으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어려운 일이 많아서 너무 힘들 때 부르던 찬송이 있었습니다. [뜻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그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학교에서 기도하고 내려오는 길에 이 찬송을 부르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그래 맞다. 힘이 없어서 무릎을 꿇는 것, 상황에 굴복하며 사는 것, 그것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해 약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며 당신을 향해 자비를 구하는 자에게 거절치 않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만 약해지자. 아멘’
하늘의 문이 열리고 기도할 수 있으면 이런 용기가 솟아오릅니다. 하나님은 이 열려진 하늘 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내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십니다. 하나님 사랑의 힘이 없으면 무수히 상처를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 자리에서 그 무수한 상처를 받는 대신에 오히려 자신을 상처 준 사람들의 상처를 싸매어 주는 사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늘의 문이 열리면 열릴수록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로 이 사랑을 뻗으려 하고 하늘의 문이 닫히면 닫힐수록 우리의 관심사는 나 자신에게로 오그라듭니다.
하늘의 문이 열리면 열릴수록 우리의 관심사는 내 밖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이 생명을 나누어 주고 싶어 하고 하늘의 문이 닫힐수록 우리의 관심사는 우리의 추한 육신으로 집중이 됩니다. 그래서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상처를 받을 때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전쟁터에서 화살이 날라온다고 울면 그것이 군인인가? 세상이 그런 세상인데, 그런 세상을 알고 태어났어야 합니다. 이제라도 안 늦었으니 배우세요. 상처와 고통이 있으면 세상이 그런 것이란 것을 아세요. 거기에서 하늘을 향해 열린 그 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아마 이 세상에 태어났던 인간 중에 가장 많은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아마 예수님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에게서 상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원수들이 그를 채찍질하고 그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는데도 육신은 상처 낼 수 있었지만 예수님의 영혼은 상처 낼 수 없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자기를 못 박은 군인들을 위해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저들이 자기의 한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한 일이니까) 하나님이 용서해 달라고 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닮게 하고 싶으신 삶입니다. 이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숙제가 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그 하늘의 문이 어떻게 열리는가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기도할 때 열렸습니다. 이 하늘의 문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대중적인 집회, 열렬한 찬양, 무엇인지도 모르고 주절거리고 떠드는 그 해괴한 방언의 기도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죄밖에 지은 것이 없는 더러운 한 인간이 기도하러 예배당에 올라갔습니다. 다른 많은 동시대의 사람들은 기도할 때 팔을 벌리고 하늘을 우러르며 아름다운 목소리와 미사여구로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격식을 따르는 것조차도 양심이 허락을 하지 않을 정도로 죄인 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자신만만하게 하늘을 향해 팔을 펼 때 그는 오히려 가슴을 두드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경건하게 기도할 때 격식을 깨뜨리며 고개를 떨어뜨렸습니다. 억누를 수 없는 슬픔 속에서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무너지는 마음의 자책감 때문에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계속 울었을 것입니다.
제가 설교 사역을 하는 중 어느 지체의 회심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지체를 보면서 회심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은혜가 부어지니까 어떤 사람은 방언을 하고 어떤 사람은 너무 신비로운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한 지체가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쩜 유창한 언어로 기도하는데 말을 잇지 못하고 계속 무릎 꿇고 울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기계로 하늘 문을 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늘 문을 연다는 것은 곧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연다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하늘은 우리의 영혼 안에서 인식되는 하늘이기 때문입니다. 그 위대한 힘은 진실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향한 비상한 집중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껍질을 다 벗긴 솔직함이 아니고는 영혼과 정신의 그런 집중은 불가능해집니다. 내가 여기 어떤 사람에게 속이는 것이 있으면 내가 사람인데도 그 사람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습니다. 정신이 집중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정직하게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면 주님의 두 눈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향해 정신을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이 사람입니다.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아버지라고도 부르지 못합니다. 나는 죄인이옵나이다. 그러고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얼마나 여기가 아팠으면 가슴을 치겠습니까? 슬픔의 감정이 격해지면 배가 수축이 됩니다. 통증이 오므로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두들기게 됩니다. 하늘의 문을 열었습니다. 너는 저 세리보다 훨씬 의롭다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 의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가 아니라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그 사람에게 덧입히시는 공로적인 의,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착하게 순종하면서 살면 자비로우신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 날마다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지만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반역하는 삶을 살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을 만나느냐의 차이지, 어디서 만나는 가에도 차이가 없습니다. 결국은 자기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대도 닫혀 진 하늘은 내버려두고 그 아래서 피곤하게 살아가는 부질없는 인간의 그 수많은 삶을 우리는 봅니다. 그 얼마나 어리석은 삶입니까?
구약에서 다니엘은 바벨론의 재상이었습니다. 황제 다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예루살렘을 향해 난 창문을 열고 하루에 3번씩 전에 행하던 그대로 기도했습니다. 보이는 위대한 권력을 가진 왕의 총애를 입는 대신 대주재이시고 창조의 주님이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은총을 입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의 선택은 옳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Ⅴ. 결론과 적용
우리의 기도의 문을 막는 것이 환란입니까? 시련입니까? 가난입니까? 핍박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기도의 문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마음으로 하늘을 향해 마음을 닫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닫으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열 때도 하늘의 문은 그 열쇠가 그대들의 마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어디서든지 어떤 죄를 지었든지 어떠한 이유 때문에 곤고하게 살든지 하나님 수중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혼자 스스로 잘 살아서 주님의 은혜가 필요 없는 때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은총을 구하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비는 것입니다. 마음을 모아서 지금의 나의 상태, 영혼 안에 있는 이 움직임, 마음을 오가는 변화,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성향들을 그대로 읽으면서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도우십니다. 그것이 은혜의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하늘의 닫힌 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행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그 진리를 알고 사랑하고 거기에 자신을 합치시키려는 간절함이 없는 사람의 모든 사람의 삶, 사역은 모두 바람과 같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주님을 향해 온전히 마음을 집중하고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리는 것입니다. 은혜와 사랑을 간절히 구하며 주님의 은총을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 믿음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왕국을 바치는 것도 은혜의 물에 씻겨 지지도 않은 자신의 청춘을 바치는 것도 좋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당신 자신을 찾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구하는 것, 당신 자신에 목마르는 것, 우리가 당신에게 알려진 것처럼 또한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 그래서 자신을 그 하나님의 뜻에 합치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서 이제는 나의 자아가 싫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누림으로서 하나님도 기쁘게 해 드리고 싶고 그 안에서 나도 기뻐하고 싶은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당신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찾으십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여러분들에게 호소하고 싶습니다. 생각 없이 교회 나오지 말고 단 한번이라도 진지해져 보세요. 내가 여기 있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무엇이고 여기에 있으므로 말미암아 바라지 않으면 안 되는 그 필연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숙고하세요. 깊이 생각하세요. 하나님 앞에 진실해지세요.
거짓의 너울을 다 벗고 체면의 껍질을 벗기고 하나님 앞에 태어나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서, 나는 당신의 눈앞에서 숨길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은혜와 긍휼의 목마름의 영혼이오니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늘의 문을 활짝 여셔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 마음에 기쁨이 되게 하시고 거기에 그 은혜의 빛과 필요한 모든 것을 부으셔서 나의 일생이 예수 전달하는 삶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그 생명과 사랑을 이 창조 세계에 구현하는 하나님의 통로가 되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2.환경을 이기는 기도생활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의 생애에 사건 한 토막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I.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안식을 맞아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는데 아마 상당한 시간의 강론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깊은 감동을 받고 유대인,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가르쳐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권세 있는 새 교훈이었다고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듣고 이해를 했으니까 그런 것들을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귀신들린 사람 하나가 소란을 피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들린 사람을 그 귀신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려서 누워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거기를 심방 가셨습니다.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자기의 숙소로 돌아오셨습니다. 모든 기록이 다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숙소로 돌아온 시간은 저녁 늦은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돌아와 보니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님 오시기를 기다리며 장사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의 고쳐주심을 바라는 연고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나 너무 피곤하고 근무시간이 끝났으니까 돌아가라.’ 아니면 ‘너희 모두 한꺼번에 나을지어다.’ 이렇게 하지 않으시고 애정과 사랑을 가지시고 하나하나 일일이 고쳐주셨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아마도 하나님 앞에 기도도 해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늘 그러셨듯이 예수님의 관심사는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영혼이 잘 되는 비결,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사람들을 섬기며 살아가야 될 지 인생을 사는 도리에 대해서도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일일이 그 일을 하셨으니 아마 이 모든 치료가 끝난 시간은 깊은 밤이었든지 심하면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날 안식 후 첫날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여러분들이 본문을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아가사 한적한 곳에 가사 기도하시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목적은 우리에게 참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의 모델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생을 걸어가는 길에 북두칠성과 같은 존재입니다. 누구도 그분을 따라 한다고 해서 그분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나 그분을 북두칠성으로 삼고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모든 섬김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감동을 주는 장면, 그리스도 예수의 도성인신(道成人神)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한 아름다운 극치를 여기 이 예수님의 기도 모습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기도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II. 새벽 미명에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는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이 최소한 3가지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시간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대해서 말하기를 “새벽 오히려 미명에” 시간적으로는 새벽이지만 사실상은 밤인 시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5시 이전 정도가 될 것입니다. 아직 캄캄한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왜 예수님은 이렇게 힘든 시간을 기도로 택하셨을까? 그래서 우리가 따라 하기 힘든 거추장스런 모범을 남기셨을까? 이 시간이 주는 어떤 신비적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기 보다는 현실적으로 예수님이 이 시간을 택하셨다고 생각됩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기도시간이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였다면 병자들은 언제 예수님께 병 고치러가고 예수님이 말씀을 들고 광야에 나가도 말씀을 들으려는 사람들은 집에 들어가고 없을 텐데 누구에게 말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희생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잠자느냐고 나에게 나올 수 없는 시간, 내가 너희에게 덜 필요한 그 시간에 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너희들이 필요한 시간에 기도하기 위해서 너희들을 섬기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적인 수준이 어린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이 섬기는 것을 방해하고, 섬기는 것이 분주해서 기도를 방해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수준이 높아지면 기도는 섬기는 것 때문에 날개를 달고 섬기는 것은 기도 때문에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본의 극치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시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날만 예수님이 새벽에 나오신 것이 아니라 이 새벽 미명의 시간과 깊은 밤의 시간은 예수님이 기도하시기 위하여 따로 떼어놓으신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시간이 언제냐고 물어보면 늘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은 그 사람이 거의 기도 안하는 사람이거나 혹은 너무 영적인 수준이 뛰어나서 모든 삶 속에 기도의 영이 배어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물질세계와 죄에 얽매이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항상 교통하면서 사는 그런 수준의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도시간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같은 탁월한 사도도 하루에 세 번씩 기도의 시간을 정하고 올라갔습니다. 다니엘 같이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난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씩 정해진 시간에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기도시간이 언제입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시간이 언제인지 말해보십시오. 단호하게 저의 기도시간은 새벽 6시부터 7시입니다. 저의 기도시간은 10시부터 11시 밤에 합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 시간에는 제가 항상 하나님과 대화하고 있을 것입니다.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시간에 말뚝을 박아야 합니다. 형식이 없으면 내용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내용이 워낙 넘치면 형식을 초월하지만 내용도 별로 없는 사람이 형식을 접어버리면 그나마 티끌만큼 남아있는 내용도 다 부패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형식이 중요합니다. 거기에서 의무가 나오는 것이고 자기 규범이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기 훈련(self-discipline)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것이 있습니까? 그렇게 정해진 것이 없으니까 기도를 못 했다고 하는 가책이 무슨 사건이 생겨서 가책을 받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삶에 신앙의 진전이 있을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까 매일매일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모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시간과 모든 것을 초월해서 수시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삶 속에서의 기도는 부수적인 것입니다. 원칙적으로는 기둥과 같이 개인기도, 하나님 앞에 홀로 매달려 마음을 쏟으며 기도하는 그 시간이 확정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둥이 되어 수시로 하는 기도의 텐트를 치게 됩니다. 텐트를 칠 때 제일 먼저 가운데 뽈대 부터 세웁니다. 그 다음에 텐트를 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따로 떼어 놓은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흔히들 그럽니다. “목사님, 요새 회사가 얼마나 바쁜지요?” “사업이 너무 바빠서요?” “가정에 우환이 겹쳐서요.” 참 말 아닙니다. 연애 해 보았지요? 시간이 없어 연애편지 못 쓴 적 있나요? 그것은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너무 바빠서 너무 보고 싶은 애인이 보낸 편지를 못 뜯어본 사람 있습니까? 사연이 너무 길어서 다음에 읽으려고 접어둔 사람이 있다면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은 반드시 합니다. 하기 싫으니까 안 합니다. 하고 싶더라도 온전히 하고 싶지 않으니까 안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다거나 바쁘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도피처입니다. 그 사람에게 시간을 충분히 주면 기도할 수 있을까요?
[18C의 전설적인 설교자 존 웨슬레의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이 능력 있는 섬김의 비결은 무릎으로 기도하며 통곡했던 예화]
기도는 하나님과 연애하는 자의 밀어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기도가 너무 어렵습니다. 잘하면 가식적인 편지이고 못하면 아예 한마디도 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연애가 없으니까 밀어가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기껏 하는 소리가 밀어를 쏟아낼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직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연애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밀어가 가슴속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밀어는 사랑해야지만 생겨납니다. 누구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은 사랑할 때 이 속에서 생겨나고 자연 발생적입니다. 문장이 필요 없습니다. 속에서 계속 솟아납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인지 모르는데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이 45분만 자면 충분하다고 합니다. 45-90분 정도의 잠을 자면 충분한데 그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보통 사람이 8시간을 누워 잠을 잔다고 합니다.
밀어가 없는 한 시간을 엎드려 있는 것보다는 앉자마자 가슴이 쏟아지면서 밀어가 쏟아져 나오는 15분의 초월적 사랑의 기도 중 어느 것이 더 우리를 움직이는 힘이 있겠습니까? 그것도 시간이 안 납니까? 가치 없는 일에 몰두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면 이것이 얼마나 쓸모없는 일인가 하는 것을 다 알게 됩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초월적인 사랑 속에서 기도의 호황을 누렸던 때가 89-90년 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최악의 환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교수로 들어가서 초년에 한 주일에 20시간을 강의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advanced course를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한 교회의 전도사로서 온 힘을 다하여 영혼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토요일엔 학생들 데리고 전도하러 안양역으로 내려왔습니다. 화장실에 앉으면 피를 한 컵씩 쏟았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호황을 누리면서 그 고통스런 시기를 지냈습니다. 왜? 기도하러 교회가면, 학교에서 무릎을 꿇으면 준비할 시간이 필요 없었습니다. 쏟아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너무 멀어서 새벽기도 못 갔습니다. 그 대신 그 시간에 일어나서 문 잠그고 제 방에서 기도했습니다. 생명의 교제를 누리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기도할 수 없는 사람에게 환경이 시원하게 열리면 대부분의 사람이 더 많이 미끄러집니다.
제가 야간 신학대학을 다니면서 공부했습니다.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면 밤 10시10분입니다. 친구가 둘이 있었는데 셋이서 항상 chapel실에 들어가 기도를 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빨리 가서 전철을 타려고 하므로 15분이면 다 빠져나갑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두 친구 중 한 친구와 나는 매일 울었습니다. 왜냐면 우리 둘은 직장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무역회사 부장이었고 나는 우체국장이었습니다. 앉으면 가슴에 응어리가 집니다. 그렇게 눈물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훌쩍거리면서 계단을 내려오면서 “하나님이 언제 우리의 이 짐을 벗겨주실까?” 라고 말했습니다. 얼마 있다가 그 친구가 오더니 뛸 듯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드디어 길을 열어 주셔서 공부만 하도록 직장을 그만두게 하셨다고 좋아합니다. 정말 축하한다고 말하고 ‘나에게는 왜 안 벗겨 주실까?’ 그랬더니 언제부터인지 학교 끝나고 chapel실에 들어가도 이 친구가 울지 않는 것입니다. 1년 쯤 지났을 그때쯤 이야기합니다. 다시 직장을 잡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벗겨달라고 통사정할 때는 언제이고 다시 직장을 잡았냐?” 고 하니까 6개월까지는 참 좋았는데 6개월 후부터는 TV보는 시간이 얼마나 늘었는지 3개 방송사 프로그램을 다 꿰고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그렇게 약한 존재입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중요한 것은 마음이지 환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금은 영향을 주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이 환경이 정말 우리에게 고통을 적절히 줄 그때 그 고통이 우리에게는 견디기 힘들지만 이 고통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은 사는 것입니다. 땀을 많이 흘리면 몸에 좋다는 것은 다 압니다. 의학적으로 사우나에서 흘리는 땀과 운동장에서 뛰면서 흘리는 땀의 성분은 다릅니다. 한쪽은 거의 물이지만 한쪽에는 온갖 중금속과 노폐물들이 섞여 거의 오줌 수준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이 기도하기 어려운 환경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참으로 하나님을 원하는 가 시험하시고 그 환경을 유지하게 하셔서 거기에서 몸부림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있는 찌끼들을 쏟아내게 합니다. 사실은 기도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큰 선물입니다. 우리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선물입니다. 그러면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입니다.
III. 환경과 기도
두 번째로 보면 마음이라는 요소가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그랬습니다. ‘한적한 곳’ 희랍어 성경에는 고독한 장소, 외로운 장소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향해 막힘이 없는 눈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군중 속에 휩싸여 있어도 “아버지”하고 부르면 하나님과 통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이런 고독한 장소가 예수님에게 필요합니까? 예수님은 그런 장소를 찾으셨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진짜 자신의 삶에 있어서 근간이 되는 기도는 이 고독한 장소에서 드리기를 고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저기서 장소를 옮겨 다니며 숙박을 하셨어도 예수님의 기도 장소는 항상 빈들, 광야, 한적한 곳, 산, 감람산 이런 기도의 장소가 등장합니다. 이것이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 안에서 영혼과 육체, 자연적 질서와 도덕적 질서가 만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마음 안에서 divinity와 humanity가 만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성품과 하나님의 성품이 만나는 곳입니다. 그것이 마음밖에는 없습니다. 영혼 안에서는 humanity가 만나지 않고 육체 안에서는 divinity가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 안에서는 신성, 하나님의 성품과 인간의 성품이 만납니다.
제 책이 점자로 몇 권이 번역 되었습니다. 참 중요한 사역입니다. 앞을 못 보는 분들은 점자로 읽습니다. 점자로 읽는 사람들의 손가락을 보면 매일 고운 sand paper에다 지문이 다 벗겨지기까지 각질을 깎아냅니다. 어린아이 살같이 말랑말랑하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고 이 손으로 노동을 해서 굳은살이 생긴다면 못 읽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바로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들의 두 손가락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전 세계의 도시 가운데 제가 가 본 수 십 개의 도시 가운데 서울만큼 밝은 도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토론토 하나 정도는 비길 만합니다. 그러나 다른 도시는 어림없습니다. 한국의 서울처럼 전기를 무진장으로 쓰는 불야성의 도시는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밤늦게까지 근무시간이 연장되고 삶의 행동반경들이 밤까지 치고 들어오게 됩니다. 늦게 퇴근합니다. 별 일이 없어도 집에 늦게 들어옵니다. 씻고는 침대에 눕거나 소파에 누워서 TV를 켭니다. 들여다보다가 피곤해서 잠이 듭니다. 잠들기 전에 마음속에 온갖 쓸데없는 이 세상의 영상들이 꽉 찬 가운데 잠이 듭니다. 거기가 하나님의 품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품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잠이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저녁에 온갖 음식을 다 먹고 조용히 이불을 덮고 누워 자는 것과 똑같습니다. 뱃속에 음식물이 잔뜩 들어갔는데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자면 두 가지 어려움이 겹칩니다. 운동을 해야 내려가는데 몸이 안 움직여주고 위는 지금 자기가 잘 시간이라고 생각해서 일을 안 하려고 합니다. 음식이 들어와서 할 수 없이 하기 싫은 야근을 해야 됩니다. 하다 보니 일을 다 못합니다. 안에서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부패한 것이 창자를 타고 핏줄 속으로 가스가 들어갑니다. 장탁은 뇌탁입니다. 장이 탁하면 뇌가 탁해집니다. 탁한 가스가 핏줄을 타고 돌다가 머리에서 모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스 먹은 것처럼 머리가 띵합니다. 우울하고 기분 나쁘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육체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정신도 그런 것입니다. 마음속에다 오만 쓸데없는 영상, 이 속에서 우리가 잠든 동안에도 정신작용을 하는데 좋을 수가 없습니다. 영상이 많이 남아서 상상력을 움직일 정도가 되면 안 됩니다. 컴퓨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그렇게 채우면 안 됩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새벽기도라도 하겠다고 나왔는데 이상하게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정말 미묘한 것이라고 하는 이유는 기도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서 신성(divinity)과 인간성(humanity)이 만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관리해야 합니다.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정결한 맘 그곳에서 신령한 빛 비치오니 그보다 더 원하는 것 정결한 맘 주옵소서]
그런데 그렇게 와서 기도를 못하고 돌아가도 바로 그 기도가 안 되는 것이 소득입니다. 내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향해 돌아앉으셨다는 거절감 앞에서 자기의 마음이 그릇 되었다는 것, 기도하기 전까지 살아왔던 삶이 하나님 앞에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과 존재가 안 받아들여지고 있다’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중요한 본질적인 것을 밀쳐놓고 사는 것입니다. 불문에 붙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냐? 그런 것 지금 묻지 마라 바쁘다’ 밀쳐놓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다음에 모든 일들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하여 우리에게 교훈을 하시는 중에 특별히 종말과 관련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들이 술 취함과 방탕함과 생활의 염려로 너희 마음이 굳어지지 않게 하라.”(눅21:34) 마음의 생활의 염려를 짊어진 것을 술 취함과 방탕함과 거의 같은 수준에 놓고 우리의 마음을 굳어지게 만드는 죄악 된 요소로 제시합니다. 생활의 염려라는 것은 초점이 하나님께 꽂히지 않은 자기의 육신을 위한 많은 염려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염려들이 마음을 무디어지게 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나는 특별히 죄도 없는데 나는 왜 이렇게 기도가 안 될까?’ 라고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생활의 염려와 근심들이 여러분 마음을 가득 채운 것입니다. 하나님 계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이라는 것 자체의 본질이 욕망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정신적인 반응입니다. 욕망의 불을 끄지 않는 한 그 근심과 염려라는 연기는 계속 나는 것입니다. 연기를 제거하려고 하는데 제거가 됩니까? 안 됩니다. 욕망의 불을 꺼야 됩니다. 더러운 근심과 걱정의 염려도 꺼지는 것입니다. 올바른 욕망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커다란 죄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냥 특별한 초점도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슨 문제가 나오냐면 주님이 만약에 오늘 이 시간에 오셔서 여러분 모두를 일으켜 세우시고 한사람씩 앞으로 불러내셨습니다. “너 나 불렀지?” “네” “내가 너 무슨 소원을 들어주랴? 한 가지만 이야기해라. 내가 너한테 그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늘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파서 이 속에 마음의 병이 된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냐 말해보라” 그것을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들 가운데 몇이나 될까요? 이러지 않을까요? “얘야, 내가 너에게 무슨 소원을 들어주랴? 네가 항상 마음에 남아있어서 마음의 병이 된 기도제목을 하나만 이야기해 봐라. 내가 무엇이든지 들어주마.” 그러면 우리 이러지 않을까요? “저, 그게 뭐더라. 그게 뭐냐면요. 잠간만요. 생각해보고요. 그게 뭐더라. 뭐가 있었는데” 이러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뜻일까요? 삶의 초점이 없는 것입니다. 삶의 초점이 있는 사람은 오직 그것 하나입니다.
젊었을 때 저는 야구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어느 야구 선수의 일화를 들으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멀쩡한 손을 2cm를 찢었습니다.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왜 찢었냐면 공을 던지려는데 더 찢어져야 공을 잘 던지겠다는 것입니다. 성형수술을 했습니다. 오직 목표는 공을 잘 던져서 상대방을 이기는 것입니다. 손을 찢어 특수 손을 만들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셋째 손가락과 넷째 손가락을 가르실 수 있어요? 주님의 어떤 선한 목적을 위해서 성형수술 할 수 있어요? 더 잘하기 위해서. 그 사람이 우리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목표가 너무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창조의 목적을 이야기하고 말할 수 있으면 무엇 합니까? 그렇게 살지 않는데.
건강이 안 좋아져서 진찰을 받고 싶어 어느 병원을 갔습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 병원장이 쓴 책이 옆에 있어 꺼내 읽었습니다. 책 제목이 ‘스트레스는 아름답다.’ 무슨 말인가? 스트레스는 모든 병의 원인입니다. 인간이 도덕적 질서와 자연적 질서 사이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의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늘 의사선생님 눈치가 보이는데 여태까지는 그렇게 큰 실수를 안 했다고 누가 위로를 해주는데 앞으로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신학과 철학 쪽에서 인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의학에서 어느 정도 동의해 줄지 모르지만 마음이 바로 divinity와 humanity가 만나는 곳이라면 이 마음은 또한 영혼과 육체가 만나는 곳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육체와 영혼은 contact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서 육체와 영혼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 울림을 통해서 마음의 작용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stress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확’ 하고 고통이 와서 평소에 없던 엄청난 긴장을 불러일으키거나 마음을 찢어놓는 것 같은 그런 고통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마음 자체가 육체와 만나고 있고 영혼과 만나고 있기 때문에 마음에서 어떤 상상이나 고통스런 환경을 통해서 그런 생각들이 마음에 어마어마한 찢는 것과 같은 고통을 가져다주면 이것은 영혼에도 전달이 되고 육체에도 전달이 됩니다. 그런 엄청난 고통과 긴장이 육체에 전달될 때 암세포에게는 굉장히 좋은 여건이라고 의사들이 말합니다. 막 생성이 됩니다. 확 생겨납니다. 그런 설명을 그 책에서 하는 것을 보면서 굉장히 절망스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목회자의 삶은 얼마나 긴장이 많은가... 제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살아오면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tension 속에서 살았습니다. 첫 번째 학교에서 교수생활 5년 할 때에는 5년 동안 흘린 눈물이 개척교회 13년 한 눈물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강의 끝나고 나면 출석부 들고 밖에 가다가 담벼락 아래 앉아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목사가 될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들이 이런 영혼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누가 이들을 도울 것인가? 그렇게 엄청난 tension을 느끼면서 긴 세월을 살아왔는데 그렇다면 내 몸이야말로 암이 발생하기에 너무 좋은 조건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 다음 설명이 저의 지성의 뒤통수를 때렸습니다.
의사가 말하기를 스트레스가 마음에 느껴지는데, 마음에 느껴지는 스트레스의 방향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육체에 다르게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그 사람의 이론이 맞는지 아직까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믿고 싶습니다.
마음에 스트레스가 확 주어질 때 이것이 악한 욕망과 인간의 세속적인 것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일 경우의 긴장은 종류가 다른 긴장으로 육체에 전달되어 암세포의 형성에 도움을 주고, 하나님의 나라 주의 영광 이런 것들에 대한 이웃의 행복,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녕 이런 것들을 위한 깊은 희생적인 스트레스일 경우의 긴장은 신호가 다르게 육체에 전달된다는 것이 이론입니다. 그 의사가 반문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를 ‘애통하는 자는 암에 걸릴 것이니’ 라고 바꾸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스트레스인 줄 아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그 정도는 헤아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어떤 형언할 수 없는 희열 같은 것이 밀려왔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러면서 뜬금없이 그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나를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으리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열 받아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사람 봤습니까? 회심하지 못한 자의 영혼을 끌어안고 너무 아프다가 절명했다는 사람 들어본 적 있습니까? 이런 생각들이 막 꼬리를 물고 달리는 것입니다. 어떤 학문의 영역과 상관없이 휘달리는 하나의 진리에 지평을 발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세밀하신 하나님이시구나. 정말 놀랍구나. 그런데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사우나에 들어가서 뜨거운 건지 운동을 해서 뜨거운 건지를 알아서 물만 토해낼 지 노폐물까지 토해낼 지를 몸이 안다면 하나님 때문에 아파하고 고통 하는 것을 몸이 안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자기를 내신 창조주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은 온 세계에 가득합니다.
오히려 마음은 기도의 날개를 달아줍니다. 교회를 향한 염려에 날개를 달아줍니다. 영혼을 향한 근심에 날개를 달아줍니다. 여러분 가운데 영리한 어떤 분은 이렇게 반문 할 것입니다. 내 주위에 보면 처음에는 그렇게 교회를 염려했는데 결국은 쌈질하고 마음 다 찢어지고 시험에 든 사람도 있는데요. 그것은 성령으로 시작했는데 육체로 마쳐서 그렇습니다.
항공모함을 신문이나 TV에서 본 적 있지요? 신기하지 않아요? 우리가 비행기를 타면 끝도 보이지 않는 활주로를 길게 달려야 겨우 비행기가 뜨는데 항공모함의 활주로는 270-330m의 길이인데 어떻게 쇳덩어리인 그 비행기가 엄청난 폭탄까지 달고 가뿐하게 뜹니까? 궁금하지 않나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는 눈빛입니다. 두 가지 방법으로 항공모함이 이것을 해결 합니다. 비행기가 출격할 때 항공모함은 같은 방향으로 전속력으로 항해를 합니다. 실재적인 거리를 늘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비행기가 구동을 하면서 뜰 때 배 밑창에서 바람 대포를 쏘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불어서 공중으로 날려 보내는 것입니다. 그때에 발사되는 바람 대포의 속도가 시속 300km정도의 어마어마한 강풍입니다. 확 불어서 이륙하려는 비행기를 공중으로 확 들어서 날리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경건한 염려는 기도를 하늘로 비상시키는 바람 폭탄입니다. 바람 대포와 같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염려하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져 눈물이 그렁그렁한 사람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 그 대포에 한번 맞으면 하늘을 향해서 올라갑니다. 쏟아지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위한 눈물로 마음이 쓰리고 경건한 스트레스 속에 애통하는 사람이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때는 그 염려와 근심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마음을 토하며 하늘을 향해 비상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너 무슨 소원 들어주랴? 할 때 머리를 극적 거리는 사람이 될 테야 아니면 주께서 나의 마음을 아시나이다라는 사람이 될 테야.’ 그래서 마음이 중요합니다. 신자의 또 다른 이름은 마음지킴이입니다. 이 마음 안에서 하나님과 내가 만나는 것입니다. 기도의 문이 닫히고 하늘 문이 닫혔다고 하는데 하늘 어디에 문이 있습니까? 마음에 있는 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거절하신다고 하는데 어디서 하나님이 거절하십니까? 마음입니다.
참된 신자 안에는 참된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어려울 때마다 내가 마음을 방탕하게 굴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술 먹고 마약하고 담배피고 바람피고 하는 것이 방탕이 아닙니다. 마음을 주인이신 하나님께 바치지 않는 것, 온갖 더러운 것이 마음을 지나가도록 방치하는 것, 이것이 바로 방탕입니다.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씻어 내야 합니다. 그 마음은 바깥에 있는 것으로 씻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마음으로 마음을 씻어내십니다. 진리에 의해 영향 받은 그 마음의 작용을 통해서 옳지 않고 방종한 마음을 털어내십니다. 마음 자체가 순일성(순전하고 하나인 성질)을 갖게 만들어줍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씻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될 수 없습니다. 선지자가 말했습니다. 표범이, 흑인이 비누로 무엇으로 그것을 씻어낼 수 있겠는가? 씻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 마음을 깨끗이 씻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기초로 씻는 것입니다.
[망치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그렇게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도록 그 공로를 이루셨고 그것을 토대로 진실한 참회에 의해서 마음이 씻겨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깨끗이 씻겨주십니다. 어제까지 돼지우리에 뒹굴던 것 같은 마음이었는데도 주님이 씻어 주실 때 다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쏟아져 나옵니다. 막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런 마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한적한 장소를 찾으심으로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 기도하라.”(마6:6) 깨끗이 닦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만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무릎 앞에서 사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 행복에 대해서 영원히 문외한일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의 무릎 앞에서 사는 행복 그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IV. 십자가 지는 정신으로
세 번째 ‘예수께서 기도하시더니’ 실천입니다.
우리는 도전 받았다는 것을 전쟁에서 대단한 노획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 엄청 도전 받았어.’ 그러면 듣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존경에 찬 시선으로 쳐다봅니다. 도전을 받았구나. 우리는 얼마나 못 되었으면 도전도 못 받을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도전받은 것 이야기하지 말고 실천해서 변화된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사랑해요. 전도합시다하면 강사 불러다가 전도세미나하고 도전받고 문 닫습니다. 기도해야지하면 기도세미나해서 도전받고 문 닫습니다. ‘어제 기도에 관해서 너무너무 도전받았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enjoy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말씀의 맛을 아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지적 쾌락입니다. 우리 영혼의 독소가 얼마나 되고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에 관해 아는 지식 사이에 넘나들 수 없는 구렁을 파는 지에 대해서는 논쟁할 시간이 없습니다. 문제는 행동하는 것입니다. 실천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깊이 도전을 받았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소유한 진리가 아니고 제가 소유한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이것을 나침반 삼아서 여러분들이 직접 기도하러 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기독교의 모든 진리는 몸소 실천하는 가운데 들을 때는 개념적으로만 떠오르던 것들이 구체적인 형체를 가지고 자신의 마음 안에 박히게 됩니다. 신앙관을 형성하게 됩니다.
젊었을 때는 몸에 힘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밤샌 적 많습니다. 그럴 수 있는 체력이 있을 때에는 마음이 반항하는 것입니다. 나이 먹고 철이 들어서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 있으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육체가 버티면서 반항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우리 인생은 속히 흘러가서 부질없는 삶을 만들어 냅니다. 그 속에 가치도 없는 것들의 정신과 지력, 마음을 쏟으면서 살아가는 인생의 허무함, 어떻게 이루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목표도 없이 방향도 없이 그때마다 내가 스스로 묻는 것이 있습니다. 행복하신가요?
기도의 실재적인 실천이 필요합니다. Tape만 듣고 있지 말고, 책만 보고 있지 말고, 모여서 공과공부만 하지 말고, 덮고 교회당으로 오든지 들판으로 나오든지 골방으로 가든지 무릎을 꿇으라는 것입니다. 그 세계가 어떠한지 맛을 보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차갑게 거절당하면서 난 잘못 살았구나. 가책을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일까요? 그런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개념이 아니라 실재로 행동하는 것, 실행하는 것, 온 마음을 다해서 실재로 순종하는 것, 마음과 육체의 모든 작용을 모아서 그 일의 성취를 위해서 쏟아 붓는 것, 실행(execute)이 필요합니다. 거기에서 기도의 진수를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은 지금도 사면을 두루 살피시며 이렇게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찾는 사람들을 당신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열리는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 자비와 사랑을 어디에서 경험했나요? 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의 장면을 수 십 번도 더 읽었습니다. 그 참회도 결국은 기도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너무나 자신이 비참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도하러 한적한 곳으로 갑니다. 그때에 폰티치아누스라는 사람이 와서 안토니오스 수도사의 탁월한 경건의 삶, 자기를 통째로 바친 초월적 헌신의 삶에 대해서, 무욕의 삶에 대해서 가르쳐 줍니다. 그때까지 아우구스티누스는 방탕에서 발을 끊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들으면서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고백을 통해 나를 내 앞에 세우셨고 내 앞에서 나는 더러운 몰골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나는 변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서 기도합니다. 눈물의 폭포수가 쏟아집니다. “하나님 왜 오늘이 아닙니까? 왜 또 내일이어야 됩니까? 내가 이 세상을 끊고 하나님만 전심으로 사랑하는 그 온전한 삶이 왜 내일이어야 됩니까?”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한 사람의 회심의 순간이었습니다.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는 우리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나의 성품이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일을 마음 안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도저히 결별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욕망과 결별하게 만들어 주시고 내 입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본성의 놀라운 변화도 하나님이 그 마음 안에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큰 능력으로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말 안 듣는 육체를 극복해야 됩니다. 제가 몇 해 전에 스스로 예화를 만들어 비유를 든 적이 있습니다. 기도는 영혼과 육체 사이에 대화가 먼저 성립합니다. 새벽에 일어나 영혼이 육체에게 말합니다. “교회가자.” “난 너무 힘들어.” 이렇게 이야기할 때 “많이?” 이렇게 물어보면 그 날은 끝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품에 안기면서 “나 좀 어떻게 해 줘?” 그런데 “새벽기도 가자” “나 힘들어?” “빨리 못 일어나?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생각해 봐. 맞고 갈래? 그냥 갈래?” 그러면 그 날은 성공한 것입니다.
스펄젼은 일평생을 (한동안 제가 그분을 참 흠모했습니다. 그분의 설교집을 공들여서 사 모았습니다.) 어마어마한 헌신을 했습니다. 목회 중에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우울증 속에서 사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육체의 건강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감동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죽도록 주님을 위해서 섬기십시오. 그러다가 막상 죽을 지경이 되면 살려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 육체와의 싸움은 정말 어려운 싸움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초월적 사랑으로 차 있을 때에만 영혼이 육체의 편이 안 되지 그렇지 못하면 영혼과 마음은 육체와 같은 패거리가 됩니다. 항상 인간의 육신의 질서와 거슬리는 일입니다.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그때 필요한 것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기도하기 힘들고 어렵고 내가 고통 받는다고 느낄 때마다 희생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희생해 본 적 있습니까? 나는 너무 하기 싫고 고통스러운데 주님이 그 일을 기뻐하신다는 이유 단 하나 때문에만 나를 꺾고 순종해 본 적 있습니까? 나에게 명백하게 해가 되고 고통이 되는데 그분께 유익이 되기 때문에 나를 포기해 본 적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따르는 삶입니다. 기도하기 힘들고 여건이 어렵다고 생각될 그때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그 사랑이 확 밀려옵니다. 우리 마음에 밀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우리 주님을 최고의 것으로 만듭니다. 그분을 위해서 내가 닳아 없어지는 것, 그 좋으신 분을 위해서 악한 내가 멸하게 되는 것, 이것을 기쁨으로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십자가의 현재적인 체험 속에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그렇게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실행하기 어려울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주님도 그날 새벽기도 너무 힘드셨죠?’ 나와 똑같은 육체를 가지고 주님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실행하셨고 나는 온갖 핑계로 지쳐버리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멸시와 욕을 당하신 예수님의 지상의 생애를 생각하면 떨치고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은혜의 힘을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의 양쪽에 공급되는 힘입니다. 놀라운 힘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3.특별한 기도가 필요한 때에
“이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6:12)
I. 본문 해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 도움 없이도 살 수 있을 만한 때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특별히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시기들이 있습니다. 그때에는 절대로 일상적인 태도로 임해서는 우리 인생의 문제들이 풀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통찰에 있어서 뛰어난 분이셨습니다. 나다나엘을 보면서 “네 마음에 간사함이 없구나.”라고 해서 나다나엘이 깜짝 놀랄 정도의 통찰력을 가지고 계셨고 속내를 털어놓은 적도 없는데 물 한잔 얻어 마시려고 대화를 하시다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우물가의 그 여인이 남편이 다섯 있었다고 하는 사실도 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세우기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셨습니다. 그 놀라운 통찰력으로 꿰뚫어보셔서 그냥 임명하시면 되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특별한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셨을까 이런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창조의 질서는 밤이 되면 자고 배가 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쉬는 것입니다. 특별한 기도가 필요한 때에는 졸음이 오면 뺨을 때리며 기도해야 되고 배가 고픈데도 금식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애 전체가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이른 새벽과 깊은 밤에 시간을 떼어 간절히 기도하시면서 그 기도의 영 안에서 섬기면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게으름 때문에 우리의 영혼을 묵살하거나 영혼의 요구는 있지만 육체가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그 영혼 안에 싫증이 없으시던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며 매달리면서 하나님 앞에 사셨습니다. 그랬는데도 예수님에게 특별한 기도가 필요하시던 때가 있었습니다.
열두 사도를 세우시는 그 일은 신약교회의 초석을 놓는 일이었습니다. 구약의 열두 지파는 신약의 열두 사도로 세워지고 그 위에 성령을 물 붓듯 부어주시므로 말미암아 영원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질 작정이었습니다. 이 중차대한 일은 그런 점에서 우주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특별히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II.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가 필요한 때
우리도 인생을 살다가 보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특별한 시기를 만나게 됩니다.
첫째는 환경의 어려움입니다. 잘 움직이던 내 주변의 질서들이 막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부모님의 사업이 넘어지고 형제들에게 고통이 일어나고 어머님의 건강에 위협이 오고하는 출렁거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섭리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깨우시는데 사용하시는 아주 보편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삶에 이러한 풍랑이 일어나고 환경의 어려움이 발생 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찾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런 환경의 어려움을 주시기도 합니다. 마음이 은혜로부터 아주 멀어지면 이런 환경의 어려움이 생겨도 신령한 방향으로 사고할 줄 모릅니다. 상황과 씨름을 하느냐고 상황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면서 풀지 못합니다. 실타래처럼 엉켜서 자신의 영혼과 육체의 힘을 소진하며 침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환경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상하게 마음과 영혼에 깊은 침체가 오면서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곤궁한 영적 어려움을 만나기도 합니다. 잘 굴러가는 것이 굴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잘 굴러가면서 속으로 굴러가지 않는 그것이 더 큰 위기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술을 먹고 운전하는데 경찰차가 따라와서 도망을 갔답니다. 경찰차가 운전석 옆으로 계속 쫓아와서 걸리면 큰일 나겠다고 생각하고 180km로 막 달렸는데도 따라와서 문을 두드리며 면허증을 보자고 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자동차가 진흙에 빠져서 바퀴만 180km로 돌아가고 있었답니다.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 때가 바로 특별한 때입니다. 이런 특별한 때에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특별한 반응을 기대하시면서 이 상황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때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일반적인 반응으로 대한다면 하나님에게는 매우 불쾌하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들이 회장이라고 합시다. 큰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을 얼마나 잘 뽑았는지 rule을 어기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 시간되면 출퇴근하고 자기 일 잘하고 회사가 잘 굴러갑니다. 가는 곳마다 직원 자랑을 합니다. 속 썩이는 사람 하나 없고 정말 우리는 사람 잘 뽑았다고...그런데 위기가 왔습니다. 회사가 곤경에 처하기 시작합니다. 결국은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사무실에 야전침대 놓고 새우처럼 구부리고 자고 밥 먹으러 갈 마음의 여유도 없어서 양은 냄비에다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도산할 회사를 살려보려고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직원들에게 다 알렸습니다. 그런데 직원들이 평소 하던 대로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회장님 제가 사장인데 사무실 가구가 다 낡았습니다. 새 것 사주십시오.’ ‘회장님 제가 전무입니다. 이번에 미국 출장 갈 때 예전에 하던 대로 일등석을 타고 가겠습니다.’ 직원들이 와서 ‘회장님 저 이번에 휴가 남은 25일 다 쓰겠습니다.’ 평상시에 그러면 아무 문제도 안 됩니다. 회사가 그런 도산의 위기를 만나서 회장이 집에 못 들어가고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면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그러면 여러분들이 회장이라면 배신감을 느끼지 않겠어요? 주님의 마음도 그런 마음입니다. 이것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의 매우 중요한 이 시기가 하나님이 특별히 기도하라고 하는 시기인 것을 아시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셨던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사람이 진실성이 적어 보이고 건들건들해서 ‘어떻게 구도의 길을 가겠나?’ 그런 생각이 들고 육신이 많이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바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말 조신합니다. 학교에서 바른생활 하는 학생처럼 목회자가 ‘하지 말라.’ 하면 ‘네’하고 안 합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이 사람은 아닙니다. 계속 인생의 삐딱선을 타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평상시에 껄렁껄렁 하고 육이 살아있는 것 같아도 그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를 꺾고 순종하고, 조신한 사람은 작은 일에는 하나님 말 잘 듣는 것 같아도 중요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제 마음대로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인생이 꼬이는 것입니다.
고속도로 탈 때 잘 봐야 합니다. 판단을 잘못해서 갈래길이 나오는데 뒤에서 빵빵거리고 150-160km로 휙휙 지나갑니다. 무서워서 들어섰습니다. 10m 가다보니 저쪽에 표지판이 보이는데 다른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돌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음 inter change까지 30km가 되든 50km가 되든지 가야합니다. 처음에는 잘못된 길인 줄 모르고 들어섰는데 알면서도 계속 가야 됩니다. 알면서도 계속 가야됩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저는 고속도로 타면서 인생에 대해서 참 많이 생각합니다.
정말 복된 사람들은 평소에 껄렁껄렁하고 사는 것 같이 보여도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 앞에 자기를 꺾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작은 실수는 하는데 큰 실수는 안 합니다. 조신해 보이던 성도들이 어느 한순간에 자기를 꺾지 않아서 돌이키기 힘든 고속도로로 들어서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고쳐지기가 어렵습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꺾음이 무엇인지 아세요?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는 기도입니다. 가끔 인생에 있어서 귀로에 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이 아닌 선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 선택하고 찾아와서 면담을 하자고 합니다. 아니라고 말려도 고집을 씁니다. 그러면 ‘경솔하게 결정하지 말고 3일 금식이라도 하고 결정을 해봐라’ 그렇게 말할 때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못 만났습니다. 이미 마음속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III.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 기도하심
하나님이 특별한 상황을 허락하시는 것은 일상적인 것을 계속 하라고 특별한 상황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특별히 매달려서 특별히 자신의 신앙의 한계를 뛰어넘도록 특별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도록 아버지가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수준 높은 초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예수님이 바로 사도들을 선택하셔야 하는 이 상황에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특별한 상황을 만나서 하신 일은 바로 특별한 기도를 드리신 일이었습니다.
첫째로 산에서 드리신 기도였습니다.
산 자체에 심오한 영험성을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깊은 밤, 그것도 산으로 기도하러 가시 것은 환경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세속과 구별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혹을 받으실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깊은 밤에 산을 선택하셨습니다. 지금 저는 산으로 올라가자는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기도제목이 있다고 하면서 교회 안 나오고 산으로 올라가는데 진정한 세속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 사는 동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옛날의 수도사들이 평범한 사람은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은 그 산꼭대기에 집을 짓고 절벽과 같은 곳에서 은둔 생활을 했지만 수도원이 세속화 되었던 이유는 속세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속세는 여러분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물리적인 환경은 단지 정신적이고 영적인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마음이 구별된 가운데 하나님 앞에 드려져야 됩니다. 하나님만을 응시하는 가운데 세속으로부터 떠난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진중하게 드리며 간절히 기도하는 그 곳에서 기도의 열렬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마음은 전혀 뜨겁지 않은데 육체를 뜨겁게 달구면 마음도 끌어 올려 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기도에 대한 초보적인 생각입니다. 마음에 아주 뜨거운 열렬함은 육체적인 기도의 열렬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뜨거움이 다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에서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기도하기 위해서 마음이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외로움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고독은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항해하고자 하는 방향과 같은 쪽으로 부는 바람과 같습니다. 그 배를 더 빨리 가게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분주함 속에서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깊은 기도에 자기 자신을 바칠 수 없는 것입니다. 외로워야 됩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타는 듯한 열심으로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광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의 광야에서 그 고독한 세월을 보내는 가운데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 타지 않는 불꽃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그 완악한 백성들을 광야 교회의 목회자로서 인도하면서 온갖 시련과 고생을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앞두고 참회하기 위해서 회막을 세웠을 때 진중에 있는 그 회막을 광야로 삼아서 모세마저도 돌아가 버린 그 깊은 밤에 자기를 온전히 헌신하며 민족과 교회를 위해 자신의 마음을 잘게 부으며 기도의 기름을 짰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받으며 도망 다니던 그곳이 바로 광야가 아니었습니까?
400년 만에 하늘이 열리고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오던 그때에 말씀을 받고 예수 오시는 앞길을 내던 사람, 세례요한이 말씀이 임한 곳도 바로 광야였습니다.
예수님마저도 이 규칙을 따르셨으니 공생애 들어서기 전에 세례를 통해 성령을 충만히 받으시고 광야에서 40일을 기도하셨습니다.
사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꺾어진 다음에 제일 먼저 갔던 곳이 아라비아의 광야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증거를 위하여 갇힌바 된 사도 요한이 절해고도의 섬에서 사랑하는 교회와 가족들을 모두 떠나 유배생활을 할 때 거기를 광야 삼아서 마지막 날에 되어 질 그리스도 왕국의 영광스러움을 목격하였습니다.
팔레스타인의 광야는 히브리말로 미드바르(מִדְבָּר)라고 합니다. 어근이 다바르(דָּבָר)에서 왔습니다. 다바르는 말씀입니다. 무엇인가 두 개가 유사성이 있는 느낌을 받지 않아요?
팔레스타인의 광야는 꽃피고 나무 수풀이 우거지고 개울이 흐르는 정취가 좋은 곳이 아닙니다. 모래 바람 날리는 황량한 광야, 낮에는 뜨거운 햇빛이 내려쬐지만 밤에는 모닥불을 피워서 추위를 이겨야 하는 곳이 바로 팔레스타인의 광야입니다.
광야가 지시하는 이 말은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마음의 상태입니다. 마음의 눈을 들어서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과의 대면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비로소 ‘내가 이전에는 하나님을 말로만 들었거니와 이제야 내가 주를 뵈옵게 되었나이다.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 자 가운데 있으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도다.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깊은 고독의 시간 없이 사는 것은 인간의 삶을 동물 수준의 삶으로 낮추는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독이란 틀 속에서 우리 자신을 가장 잘 객관화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빈센트 반 고호는 “우리는 혼자 있을 때 우리 자신을 가장 잘 봅니다. 둘이 있으면 나는 나 자신을 반밖에 보지 못합니다. 무수한 사람 속에 있으면 나는 거의 나를 보지 못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런 말이 아주 더 큰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도피하신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깊은 산속에서 사시거나 수도사적인 생애를 사셨던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즐겨 찾으셨던 곳은 죄인들이 득실거리던 예루살렘 거리, 흉악한 종교 지도자들이 있는 회당이었습니다. 그분의 친구는 세리요, 창기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넉넉히 그곳에 계시면서도 예수님은 당신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나누어 주시는 통로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비밀이 바로 이 고독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완전하지 않은 우리에게는 이 고독한 순간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방해받지 않는 자기만의 기도시간 속박 받지 않는 장소에 있어서 거기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아무도 없고 그분과만 만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특별한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세속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해서 당신 앞에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 깊은 고독 속에서 우리 마음에 맺혔던 모든 어리석음 상들이 씻겨 나가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에서 비치는 그 은혜의 빛에 우리 자신을 노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생명입니다. 땅에 있는 수많은 동물들이 태양을 만져 본적도 없고 수많은 식물들이 태양 가까이 가본 적도 없건만 그늘에 숨지 않고 나와 있기만 하면 눈으로 볼 수 없는 태양에서 비치는 그 찬란한 빛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식물들과 동물들이 살게 되는 것이니 빛은 그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기도의 초보의 수준은 기도하지 않을 수없는 제목이 있어서 매달리는 것이지만 더 깊은 경지는 그 찬란한 하나님의 임재 광채 앞에 자기를 노출하는 것입니다. 위선과 거짓의 껍질을 벗고 찬란한 그분의 영적인 빛 앞에 자기를 노출하는 것입니다. 그 빛을 흠뻑 받으면 영혼 안에 생명이 일어납니다. 이런 고독한 시간이 여러분에게 필요합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시간입니다.
오늘 성경은 밤이 맟도록 기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늘 밤이 맟도록 기도하신 분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육체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새벽과 깊은 밤에 기도하셨지만 한밤중에는 주무셨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아주 특별한 때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올인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달렸습니다. 일상적인 기도로 지리멸렬하게 계속하다가 어느 한 순간에 일사각오의 정신을 가지면 기도의 수준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교회에 어느 자매가 보따리를 싸들고 왔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 부모님이 예수님 믿기를 제가 이렇게 긴 세월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기도하다 죽든지 우리 부모님이 예수를 믿고 살든지 둘 중에 하나 끝을 봐야 되겠습니다.” 오래 안갑니다. 그런 각오로 매달리니까 5년씩 지지부진하던 복음화가 일시에 이루어집니다. 정말 놀랍게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모시고 왔는데 오신 그날 회심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시면서 그것이 채워질 때까지 기다리신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당신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1930년대 한국에 최원초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공산군이 쳐 들어왔을 때 순교하셨습니다. 피난을 안 가고 교회당에 엎드려서 기도하고 계시는데 뒤에서 대검이 장착된 총으로 쑤셔서 죽였습니다. 참 훌륭하신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분이 부흥회를 나가십니다. 집회는 참 보람은 있는데 무한정의 체력을 요구합니다. 한번 갔다 오면 체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듭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1시간 내지 50분 정도 설교하고 오전에 한 90분, 하나님이 확 열어주시면 어떤 때는 2시간 정도 설교하고 저녁때도 2시간씩 한참 많이 할 때는 5시간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그 체력의 소모가 얼마나 하겠습니까? 일제시대에 그분들은 일사각오의 신앙을 가지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때는 오후에 집회를 한 번 더 하고 남은 시간에는 전도를 다녔습니다. 아주 철인들이었습니다. 담임목사도 얼마나 쉬고 싶겠습니까? 저녁 집회가 끝나고 “목사님 숙소로 가시지요?” 하는데 목사님이 반응을 안 보입니다. “먼저들 들어가서 쉬십시오. 이 집회가 매번 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여기 와서 은혜를 못 끼치고 가면 이 교회가 얼마나 낭패겠습니까? 나 여기서 그냥 엎드려서 기도하다가 내일 새벽 기도 인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담임목사가 양심에 털이 나지 않는 한 자기 교회 위해서 기도하고 밤을 새우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집에 들어가겠습니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자기 교회를 위해서 은혜를 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목사님 마음이 녹으니까 할 수 없이 못가고 앉아서 곁다리로 밤을 새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큰일 난 사람들은 장로입니다. 하늘같은 강사님과 담임목사가 앉아서 밤을 새우고 우는데 장로들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장로들도 함께 앉아 자동으로 철야가 되었습니다. 집사들은 또 곤란해졌습니다. 연로하신 장로님들이 교회를 위해 엎드려서 기도하는데 젊은 집사가 집에 가서 잘 수 있습니까? 다는 안 남아도 듬성듬성 남아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사람들만 은혜를 받으면 교회는 됩니다. 하나님이 어루만지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날 집회가 틀려집니다. 당연합니다. 성도들이 아침에 나와서 어제 밤에 강사목사님과 담임목사님과 장로님들이 밤새 교회 위해 기도했다고 하며 집사들도 각성이 일어납니다. 메시지가 웬만큼 받쳐주면 이미 마음이 다 녹아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특별한 때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날마다 밤이 맟도록 기도하시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때니까 예수님이 특별히 기도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원없이 그 산에서 온 밤을 새우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당신을 다 짜서 바치신 노역의 연대기였습니다. 휴식과 안락함이 없는 그런 환경 속에서 자기를 다 바치며 지사 헌신의 삶을 사셨습니다.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세계를 알기 전까지는 십자가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정수가 바로 주님 앞에 자기를 짜서 드린 기도의 생애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나무에 박히신 그 십자가의 고난은 기도 속에서 주님 앞에 자기를 꺾고 바치신 그 모든 기도의 자연스런 열매였습니다.
우리의 삶이 지리멸렬하다고 생각될 때 없습니까? 싸우기는 싸우는데 이길 의욕도 없고 완전히 이것을 꺾을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 절실하게 매달려 구할 마음도 없고 주님을 향해 신발을 거꾸로 신고 주님을 버리고 싶은 의도도 없습니다. 살기 싫은 부부가 애들 생각해서 할 수 없이 사는 것처럼 신앙생활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특별한 때는 특별한 기도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마음에 그렇게 해야지’ 하고 결심만 해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기뻐하시는 것이 느껴질 것입니다. 결심만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느껴지고 자기 마음이 하나님께 부쩍 다가가는 것이 경험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제가 금년에 입원했습니다. 입원하기 전에 스케줄이 달력에 새까맣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입원하세요.” 하는 그 순간 안 가도 되었습니다. 스케줄이 다 지워졌습니다.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서 못 일어나는데...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꼭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 일 안 일어났습니다. 내가 스케줄 안 지켜서 죽은 사람 없고 어느 단체, 교회 무너지는 것 없고 저도 이렇게 살아서 있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스케줄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일시에 하얗게 지워질 수도 있는 거구나.’ 문제는 우리가 지워져야 할 이유에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에 못 지우는 것이지 가치를 두면 지워 줄 수 있습니다. 갑자기 시간이 많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시간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병상에 누워있는데 시간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생이 이런 것이구나.
우리 교회 성도들은 육체가 아프면 나처럼 이렇게 즉각 입원 하고 스케줄을 하얗게 지워버리지만 영혼은 육체보다 훨씬 중요한데 그 중요성을 알고 스케줄을 하얗게 지우고 주님의 손길로 ‘내 영혼을 고쳐주시옵소서.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나의 영혼을 씻어 주시도록 병든 나의 영혼을 주의 은혜로 고쳐주시도록 이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나이다.’ 하고 자기의 일정을 지우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될까?
IV. 예수님께서 드리신 기도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렇게 간절히 온 밤을 새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왜? 특별한 때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남김없이 이루셨습니다. 약한 자들 같았지만 그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가장 약한 자가 자신의 약함을 알고 가장 절실하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원수가 얼마나 많이 내 앞에 있느냐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커다란 어려움과 난관이 내 앞에 있느냐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것은 내 능력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편인가? 감히 내가 “여호와는 내 편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내가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방백을 의지하는 것보다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낫도다. 내가 주님을 의지하니 주님이 나를 지키실 것이라.” 이런 고백을 내가 할 수 있느냐?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돈이나 명예, 물질이나 힘에 넘치는 헌신 같은 것들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꺾고 자기를 온전히 쏟아 붓는 기도 속에서 이런 변화가 마음과 영혼 안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Ⅴ. 결론과 적용
하나님을 향해 목마른 사람들, 은혜를 인하여 그리워하는 사람들, 주님을 만나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고 싶은 사람들, 지금도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메마른 땅을 걸어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그들 앞에 생수를 내십니다. 은혜의 샘을 터치십니다. 그래서 그 영혼을 살아나게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특별한 시기에 특별히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이렇게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기도와 변화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 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9:28-29)
I. 변화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승천하시기까지 예수님에게 일어난 5가지의 위대한 일은 탄생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었습니다. 그 4가지에 하나를 보태면 변화산에서 용모가 변화하신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변화산에서 용모가 바뀌신 이 사건은 구속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 용모가 찬란한 모습으로 바뀌심으로써 거기서 율법의 수여자였던 모세와 능력의 종이었던 엘리야, 이렇게 삼자가 만나 인간의 구속에 대해서 담화를 나누시는 이 장면은 결국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성취될 인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렇게 의미 있고 중요한 변화의 경험을 이 산에서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산을 변화산이라고 부릅니다.
II. 영적 세계를 맛보는 길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경험하신 의미 있는 이 사건은 최소한 다음 3가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이 변화산에서 영계를 경험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이 변화산의 사건을 통해 영적인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영적인 분이셨고 당신 자신이 영적인 세계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최고로 영적인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셨을 때에는 스스로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는 인간의 본성을 입으셔서 모든 것을 다 아는 신의 본성을 감추셨습니다. 다 아실 수도 있었고 스스로 다 모르실 수도 있었습니다. 육신을 입은 예수님으로서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영적인 세계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변화산의 사건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아직 경험한 적이 없었던 영적인 세계를 새롭게 경험하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근본은 바로 이렇게 육신과 자연에 속했던 인간이 신령하고 초자연적인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회심을 통해서 육신의 감각과 육체로 밖에는 볼 수 없었던 세계를 영적으로, 초자연적인 은혜의 경험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세계와 영적인 비밀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판에 박힌 교회생활, 덧없이 어떤 습관에 이끌려서 교회에 출석하는 의무적인 성수주일의 삶, 이런 것들은 기독교 신앙의 껍질일 수는 있지만 진수일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진수는 육신의 안목과 육체의 감각으로는 볼 수 없는 영혼만으로 볼 수 있는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이성으로 추론하고 감각으로 알 수 있는 이 세계를 뛰어넘는 신령하고 초자연적인 빛으로 영원한 세계에 대해서 보고 경험하게 되는 것을 만약 영혼의 상승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영원한 세계의 초자연적인 빛을 향하여 상승한 영혼은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기쁨을 발견하게 되며 그렇게 상승한 영혼은 이어서 하강하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에 대해서 관상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에 만약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상승하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는 창조의 비밀들을 터득하고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이 임재 해 계신 이 만물의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상승한 영혼으로부터 하강하면서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 자신을 알고 하나님 때문에 자기 자신을 알며 하나님 때문에 세계의 만물을 알게 되는 지혜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교회 오래 나오고 그가 아무리 교회에서 봉사한다고 할지라도 이런 신령하고 초자연적인 세계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신자일 수가 없습니다.
중생과 회심은 바로 자연적인 인간의 지성에 이런 초자연적이고 신령한 빛이 비취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신의 추론과 이성의 생각으로는 알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인간의 이성 너머에 있는 그 놀라운 세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손에서 손으로 쥐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로서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고 경험한 사람들끼리만 통할 수 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영적인 변화라는 것이 있습니까? 어제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진리의 빛으로 말미암는 전율하는 행복을 느껴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조차도 이 땅의 번영을 위한 이용도구로 사용하려는 속된 무리들이 이 기독교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결국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의 도, 우주의 목적, 창조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야 할 인간의 참된 덕의 정체들이 숨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보여주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는 보다 더 높고 신령한 세계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보이는 모든 세계는 보이지 않는 그 신령한 빛으로 해석될 때에 비로소 우리가 질서를 따라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서 살아가도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삶이 폐기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가 만약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얻었으면 너희는 위에 것을 바라라. 땅에 것을 바라지 말고 위에 것을 바라라.”(골3:1-2) 우리에게 간곡히 경고하였습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도 모르시는 영적인 세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변화산의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은 예전에 알지 못했던 깊고 오묘한 영혼의 세계를 체험하셨습니다. 거기서 구약 율법의 수여자였던 모세와 하나님 능력의 종의 대표였던 엘리야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을 성취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령의 강력한 능력을 이 땅에 불러올 것을 두 분과 대화하심으로 예표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영적인 세계를 새롭게 아는 비밀들이 어떻게 경험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신비한 경험을 찾아서 산에 올라간 때문도 아니었고 변화되기 위해서 산에 올라간 것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신 목적은 언제나 한가지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잠시 후 있을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기도하시기 위해서 산을 오르셨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곳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온전히 쏟아 붓는 깊은 기도 속에서 예전에 보지 못했던 영적인 세계를 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박약한 영성과 교회의 세속화는 개혁을 잘못해설하기 보다는 신령한 세계에 눈뜨지 못한 장님들이 교회에 점점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신령한 세계에 눈뜨지 못하면 속스런 이 세상을 사랑할 뿐이고 영혼의 아름다움과 가치에 대해서 욕망을 갖지 않으면 육신의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욕망을 갖게 되는 것이 인간의 천성입니다.
깊은 기도는 예전에 알지 못했던 영적인 세계를 보도록 만들어줍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간절한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교역을 맡기어도 이런 기도의 세계가 없으면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없지만 비록 어린 영혼들 몇을 돌보는 교사라 할지라도 이렇게 가슴이 녹는 기도의 세계를 갖고 있으면 예전에 알지 못했던 신비한 영적인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 모든 언어들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그 영적인 경험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교회에서 인턴쉽을 했습니다. 기수가 마치고 수련회를 갔는데 밤늦도록 둘러앉아서 각자 간증을 하는 가운데 어느 한 학생이 하는 간증에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마치 저의 전도사 시절을 보는 것 같아서 귀담아서 그 간증을 들었습니다. 신학교 들어가서 처음 전도사 생활을 하려고 교회에 지원을 했는데 아주 큰 교회에 합격을 했습니다. 어느 부서를 주려나 기다렸는데 부서가 없다고 했답니다. 교역자는 되었는데 부서가 없습니다. 스스로 개척을 해서 부서를 만들라고 했다고 합니다. 목회의 경험이 많은 목사들도 교회를 개척하면 사람을 모으지 못하여 문을 닫는 판에 이제 신학교 1학년이 어디에 가서 그것을 할 수 있습니까? 가만히 보니 앞의 선배들이 들어왔다가 2-6개월 하다 사표를 내고 나간 자리였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마음에 각오를 하고 두 달을 집에 들어가지 않고 교회에서 철야를 하여 10kg이 빠졌다고 합니다. 학교 갔다 오면 부지런히 전도를 나갔습니다. 결국은 그 난관을 극복했답니다. 몇 번을 뛰쳐나가고 싶었는데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유혹을 이기고 고통을 감당하여 6개월 만에 60-70명이 모이는 부서가 맨 땅에서 개척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 하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저는 그 6개월 동안의 연단을 통해서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을 위해 충성 하는 것이 무엇인지, 영혼을 붙들고 마음이 녹아내리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듣고 그 진리를 안다고 할지라도 영적인 세계는 인간의 지혜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령한 눈으로 보게 해 주는 것입니다. 신령한 눈은 마음의 욕망이 깨뜨려지고 성령에 의해 변화되어야만 떠지는 눈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설교는 즐겨 듣지만 마음이 녹는 기도생활이 없는 성도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말씀을 통해 누리는 그 즐거움은 하나님의 진리를 enjoy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리를 enjoy하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진리에 의해 마음이 녹고 자신이 깨뜨려져서 그 진리에 합치하는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그렇게 기도생활 없이 하나님 말씀을 아는 지식만 자라가게 되면 그 지식은 개념의 지식이 되고 그의 영혼을 전혀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신령한 세계에 대해 말을 들을 뿐 자신이 직접 그 신령한 세계를 맛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세계를 보고 영혼이 상승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든지 간에 영혼을 바꾸어 놓는 놀라운 힘은 그 기도의 태도입니다. 그 태도가 하나님을 향해 영혼의 시선을 고정하고 마음이 물같이 녹아 주님의 보좌를 향해 액체와 같이 쏟아질 때 그는 예전에 보지 못했던 영혼의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고 거기에서 비취는 초자연적이고 신령한 빛으로 말미암아 영혼은 상승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절반은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절반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기도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신앙은 앉은뱅이 신앙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목을 만들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교회에 심으셨는데 하나님을 만난 경험도 있고 체험도 있어서 교회라는 동산에 심겨졌는데 여러분들이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영적인 난장이가 되어서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거목이 아니라 분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이 기도하는 것을 신앙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마음이 녹아내리듯이 하나님 앞에 기도 속에 자기를 몰입하는 것은 비범한 몇 사람들이나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이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쏟아 붓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시는 끝에 예전에 보지 못한 영혼의 세계를 보셨습니다. 고난을 이기고 십자가를 질 그 위대한 순간을 맞이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큰 위로와 능력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받은 사명이 있어서 꿋꿋이 그 자리에 서 있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결코 평탄한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짐을 지고 걸으셨던 예수님의 생애가 평탄한 생애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일평생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따라 자신의 사명을 쫓아 살고자 하는 성도들 주위에는 핍박과 시련이 있습니다. 친구들은 얼마 없어도 원수와 대적들은 많고 자기를 비방하는 자, 수시로 와서 자기의 가슴을 찌르며 모함하는 자들,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수많은 난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면서도 벌판을 지나는 것 같은 외로운 길을 걷습니다. 그렇게 걷는 사람의 얼굴에는 악마의 손톱자국이 가득합니다. 그렇게 믿음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좋은 음식이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값비싼 의복이나 큰 집이 그를 위로할 수 있을까요? 높은 지위나 헛된 인간들의 박수소리가 그를 위로할 수 있을까요? 위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미천하기 이를데없는 자신에게 또 한 꺼풀 세계를 열어주셔서 예전에 보지 못한 영적인 세계를 발견하게 해 주실 때 우리는 그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의 달콤함과 그 찬란한 영광에 전율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매일매일 맛보는 영적인 세계의 비밀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난쟁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계속하겠습니까? 사람에 의하여 억지로 이끌리는 교회생활, 누군가가 끊임없이 돌봐주지 않으면 늙어도 도저히 혼자 설 수 없는 분재와 같은 신앙생활, 묘목처럼 자라지는 않고 늙어만 가는 이 비참한 신앙생활을 언제까지 계속하겠습니까? 간절한 기도, 마음을 녹이는 진실한 기도는 예전에 보지 못했던 영적인 세계를 보아 여러분들을 성숙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III. 변화에의 통로
두 번째로는 용모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은 이 변화산에서 찬란하고 눈부신 모습으로 변모하셨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변모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경험하게 될 그 육체의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 변화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이기고 인류의 모든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면 하나님이 어떠한 썩지 않을 몸을 예수께 입혀 주실 지를 미리 경험하게 하시므로 하나님을 위해 양떼를 위해 십자가를 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다시 입히실 영광스런 육신의 몸이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목마름에 종속되는 지금 가지고 있는 이 육체와는 비교될 수 없는 영광스런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셨습니다.
보십시오. 오래 교회에 다녔다고 하지만 인격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가 전하는 많은 말은 오히려 그의 추루한 인격 때문에 하나님을 증거 하는 일에 해가 되고 그가 티내는 교회생활은 인격이 따라 오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욕 먹이는 삶이 됩니다. 이러한 모든 비참한 형태는 인격의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어도 뼈 속까지 스며들어서 우리의 인격을 바꾸어 놓는 것은 말씀에 화합하는 자기를 쏟는 기도 없이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많이 깨닫는다고 할지라도 그 진리의 말씀 앞에 참회하는 영혼과 뉘우치는 정신,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토설하는 겸비함, 그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녹는 이러한 헌신적인 기도의 경험 없이는 그 사람의 본성까지 변화시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만나도 머리로 만나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가슴으로 예수님을 만나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눈으로 신비한 현상들을 보는데 멈추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만나되 뼈 속까지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핏줄까지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의 심장 곳곳에 우리의 뼈 사이사이마다 갈피갈피 그리스도 예수가 배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예수를 믿는 것이고 그러한 변화에 의해서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어도 우리가 예수님의 자녀인 것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습니다.
로마의 금속 위에 가이사의 얼굴이 찍혔을 때에 돈이 되었던 것처럼 죄인의 얼굴 위에 예수의 형상이 찍힐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됩니다. 굴러다니면 한조각의 금속에 지나지 않지만 형상이 찍혔기 때문에 값비싼 화폐로 통용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의 형상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최고의 섬김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들에게 참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그의 인격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격의 일천함과 부족에 대해서 뉘우치는 마음이 없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성도들에게는 항상 자신이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 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그 큰 십자가의 사랑, 이후로도 베풀어주시는 그 끝없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이것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참회의 눈물이 있습니까? 아쉬움의 눈물이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인 것이 싫어지면 싫어질수록 하나님이 좋아질 것이고 우리가 우리인 것에 만족하면 만족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전에 사랑하던 우리를 지금은 미워하고 오히려 사랑하는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도 사랑하고 나도 하나님께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이 참다운 예수의 희생정신을 아는 신자의 마음이 아닐까요?
아침 일찍 마당에 내려와서 설교 원고를 읽으면서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하나님, 난 아직도 나입니다. 왜 나는 또 다른 내가 되지 못하고 지금의 나입니까? 내가 언제까지 지금의 나이어야 합니까? 나도 내가 싫은데 여전히 내가 바로 나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언제나 죄악 되고 쓰레기 같은 인간인 나도 내가 싫은데 완전하신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내가 얼마나 지겹겠습니까?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주님을 닮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하나님 죄송합니다. 내가 나 이어서 정말 미안합니다. 주님은 일찍이 내가 나이지 않기 위해서 당신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아낌없이 자기를 버리셨는데도 주님이 미워하신 내가 좋아서 나는 나이고 주님이 좋아하시는 내가 싫어서 나는 아직까지 나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도 하나님 눈앞에 지겨운 내가 나인데도 나는 나와 친밀히 지내니 이것이 하나님 앞에 통탄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까지 우리 안에 성령으로 탄식하게 하시고 하늘을 열어 은혜를 주시고 교회를 통해 내가 알지 못하는 진리의 세계를 보이셨는데도 나는 지겹도록 나를 사랑하고 하나님께 미움을 받으면서도 나는 나에 집착하니 나의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바로 옛날에 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도 가슴 아픈 사연 속에서 이혼하고 믿음 생활하는 자매를 만나서 권했습니다. ‘돌아가라. 너만 죽으면 되지 않니? 너 없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니?’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주셨는데 변화되지 않는 우리의 인격 때문에 분노하고 혈기부리고 탐욕하고 다른 사람을 헐뜯고 결국은 그것은 모두 주님의 교회를 아프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용모가 변화될 욕망을 가지고 산에 올라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도하시러 올라갔습니다. 아마 그곳에서 평소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의 거룩함을 위해서 그 나라를 위해 그 뜻을 위해 일용할 양식을 위해 죄지은 자들을 용서해주기 위해 권세와 영광과 무한한 능력을 위해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거기서 혼신의 힘을 다 쏟아 아버지가 자신 안에 있는 것처럼 자신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의 별명은 액체였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눈물을, 영혼들을 위해 땀을, 우리 죄인들을 위해 피를 흘려주시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그렇게 액체를 쏟아 붓는 기도 속에서 찬란한 모습으로 변화되셨습니다.
아, 지겹기 짝이 없습니다. 나는 왜 나일까요? 나도 내가 이렇게 지겨운데 완전하신 하나님은 나를 보시며 얼마나 혐오스러울까?
IV. 관계의 확증
세 번째로 예수님은 그곳에서 관계의 인침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렇게 변화되셨을 때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으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저희 말을 들을지어다.”(눅21:35) 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사건에서 두 번 있었는데 첫 번째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똑같은 음성이 열린 하늘로부터 들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마는 어느 그리스도인은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기쁨이 없는 사람들 입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우리들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사랑은 관계의 행복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들은 자신이 그 아버지의 아들인 것이 행복하고 아버지와 이 세상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즐겁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종종 사랑은 사랑할 대상이 떠나가도 사랑은 남아서 아픔이 되기도 합니다.
이 관계의 인침은 회심하는 그때에 가장 분명하게 생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생 한번 있으면 되는 인침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하는 도중 우리는 확신이 약해질 수 있고 관계가 약해질 수 있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흐려질 수 있는 요소와 부패성을 우리 안에 충분히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관계를 인 쳐서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고 나는 그분께 사랑을 받으며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그분이 기뻐하신다고 하는 인침이 지속적으로 필요합니다. 실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발전은 이런 인침의 반복을 통하여 발생한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을 정도로 이 성령의 관계에 대한 인치심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관계의 인침이 바로 기도하는 가운데 나타난 것입니다. 요단강에서도 세례를 받을 때에 이런 인침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며 기도하실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인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간절히 기도하는 자들, 중심을 쏟아 부어서 나는 없고 내 안에 주님만 계신 것처럼 녹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인치심을 보입니다.
방금 일어난 일들에 대한 간증은 교만이 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옛날을 회고하는 간증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찬송을 동반합니다. 전도사 때였습니다. 영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동역자들도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모이면 우리는 곤고한 영혼들을 위해서 울었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영혼들의 그 고통을 느끼며 아버지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부르짖는 기도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마치 골짜기에서 사냥꾼의 총을 맞고 쓰러져 신음하는 짐승들의 신음소리처럼 우리는 종종 그렇게 영혼들을 위해서 울었습니다. 그때 선명하게 들은 주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울지 마라. 얘들아 울지 마라. 내가 너의 마음을 안다. 얘들아 울지 마라. 내가 너희 마음을 안다.’ 그리고 그것은 오랫동안 우리 마음에 쌓여있던 그 고통을 일시에 치료하는 하나님의 위로의 음성이었습니다. 관계의 인침은 항상 우리에게 놀라운 위로를 가져다줍니다. 결핍과 고통, 핍박과 시련, 모함과 시련 속에서 고통하고 외로워 두려움 속에서 떨릴 때 내가 너를 아노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보다도 더 큰 위로가 되는 인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고난과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
인침은 언제나 우리에게 이런 담대함을 줍니다. ‘사람이 우리에게 어찌 하리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라 하나님은 나의 분깃이나이다. 땅에는 소망이 없나이다.’라고 고백을 하게 만들어줍니다. 이러한 놀라운 인침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골난 것처럼 교회에 오고 화난 것처럼 교회를 떠납니다. 살기 싫은 부부가 애들 때문에 할 수 없이 사는 것 같은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계속합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피조물들에게 흘려보내고 상호 교통할 그 신적인 생명과 사랑도 그들에게 나누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생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육신의 편안함과 안일함에 그 끈끈이에 달라붙어 마치 껌이 여성들의 치마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그런 완고한 삶을 사시겠습니까?
Ⅴ. 결론과 적용
특별히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과 양들의 신령한 사무를 총찰할 책임을 맡은 장로들은 이점에 있어서 대오 각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대들은 영적인 인물들입니다. 교회 기둥들로 세우셨습니다. 여러분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으면 삼지 사방에 흩어져 있는 양떼들의 영혼에서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까? 명예나 감투, 세상에서 받는 대접 이런 것들을 위해서 목회자로 장로로 권사로 안수집사로 세워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아서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죽어도 산 자처럼 죽는 자가 있는가 하면 살아 있어도 죽은 자처럼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산 자처럼 말합니다.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었으나 그의 피는 외치고 있습니다. 무기력하기 그지없는 교회생활! 여러분들의 인생에 무슨 낙이 있을 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이외에 우리 행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대들은 흉악한 죄인들이었으나 여기에서 주님을 처음 만나고 회심할 때에는 모두 어린아이같이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지위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떨쳐버리고 이 교회 한 구석에서 나 같은 죄인 건져주신 주님의 은혜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울고 내 뜻이라면 모든지 버리고 싶었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생명도 드리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때에 기도하지 말고 기도할 수 있을 때에 기도하고 깊이 이렇게 주님의 인치심을 받아 하늘의 행복을 마음에 간직한 채 인격적이고 자발적인 신앙 생활하는 여러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5.예수님의 중보기도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2)
I. 본문 배경
다툼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누가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냐고 다투게 되었습니다. 아마 지금도 다투게 될 것이고 앞으로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 거기에서 높은 벼슬하게 될 사람이 누구냐고 다투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영적인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내가 기도하였노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누가 높으냐고 다투던 그때에는 바로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 마지막 만찬을 다락방에서 하시며 잠시 후에 지게 될 십자가의 고난을 지시하시면서 예수님이 “이는 너희를 위해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 피니라” 하시며 잔을 나누어 주시고 “너희를 위하여 찢기는바 나의 살”이라고 말씀하시며 떡을 떼어주시던 바로 그때 즈음이었습니다.
II. 영적 실재를 보여주심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조차도 여기에 가담해서 서로 자신의 높음을 다투는 광경을 보시면서 제자들을 대표하여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노니”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이 견고한 것이 아니라 곧 떨어질 수도 있어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어떤 것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때로는 견고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시인도 말하기를 “형통한 날에는 나의 견고함이 장구하리라 생각하였나이다.” 라고 반성하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주위에서 믿음이 굳세 보이는 사람, 좀처럼 흔들리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우리는 그의 믿음이 정말 훌륭하고 든든하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훌륭하고 든든한 믿음처럼 보여도 사실은 하나님이 그를 은혜로 붙들고 계신 동안에만 든든한 것이지 하나님이 그 손을 놓으시면 그 든든해 보이는 믿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종종 우리는 믿음이 좋았던 사람, 혹은 목회자의 실수를 보면서 낙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믿음이 든든해 보이고 훌륭해 보여도 그 사람을 보고 있는 동안에는 낙심하고 실망합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깨닫게 됩니다.
III. 예수님의 중보기도
베드로조차도 이렇게 밀 까부르듯 하려고 키질을 당하면서 사단에 의해서 청구 받았지만 결국은 아주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중보기도 때문이었습니다.
A. 견고한 믿음을 위해 기도함
예수님은 육신의 몸에 병든 사람을 고칠 때 어떻게 고치셨는지 생각해 보세요. “일어나 걸을지어다.” 앉은뱅이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귀신 들린 자에게는 “나갈지어다.”라고 명령하셨고 눈 먼 자에게는 “눈을 뜨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게 명령하시면 육체의 질병은 말끔히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혼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거룩해져라. 순종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라. 사랑하지 않고 못 배기는 사람이 되어라. 아멘” 그렇게 되면 즉시 거룩해지고 온전해지고 미워하려고 해도 미워할 수 없게 사랑만 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가진 사람이 되도록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위해 일생을 기도하신 장면을 보면 그분은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안 들고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교인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두고 가는 제자들과 구원받아야 할 이 세상에 아직 남아있는 당신의 양떼들을 위해서 땀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영혼들을 세우는 이 일은 명령하는 영적인 권위로 된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는 간절한 기도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B. 예수님의 기도의 섬김 : 중보기도로 견고해지는 믿음
실재로 저는 회심한 이후 이제껏 거의 쉬지 않고 영혼을 돌보아 왔습니다. 때로는 교사로 때로는 한 부서로 맡은 전도사로 때로는 사경회의 강사로 이제는 한 교회의 목회자로 말입니다. 정말 사랑하고 희생하며 시간도 많이 내어서 공을 들여 영혼을 위해 온 마음으로 섬기는데도 이상하게 섬김이 허공에 흩어지는 것 같고 영혼들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게으를 때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모든 것을 바쳐서 애를 쓰는데도 영혼을 획득하고 변화시켜주시는 그 어떤 작용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오히려 영혼들을 돌보던 손길을 거두고 조용히 홀로 물러가서 그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며 간절히 기도할 때 내가 사랑해 줄때는 변하지 않던 영혼이 내가 잠시 물러나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 영혼이 변화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에게 하나님에 관해 많이 이야기해 줄때는 안 변하던 사람이 그에게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 그 사람이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중보기도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중보기도의 능력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장로교는 역사적으로 16C에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나는 종교개혁을 통해 형성된 교회의 정치체제입니다. 그러한 교회의 성경적인 정치체제가 서기 위해서는 거기에 아주 중대한 종교개혁이 있었습니다. 그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던 고난의 설교자 존 낙스라고 하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담대한 신앙을 소유한 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카톨릭과 종교개혁 사이를 오가며 신앙의 지조를 상실해버린 당시 여왕 앞에서 그는 담대하게 그를 마담이라고 부르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충고할 정도의 담대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교회 역사속에서 우리에게 전해내려 오기는 그 사람이 했던 유명한 기도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흔히 알기로 그는 기도하기를 “스코틀랜드를 내게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했다고 전해 내려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기도는 존 낙스 자신의 기도가 아니라 그를 위하여 살인적으로 기도해 주던 장인인 존 웰치의 기도였습니다. 그는 하루에 삼 천 명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기도할 때마다 “이 스코틀랜드를 우리 사위에게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저에게 죽음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고 그 목숨을 건 기도 때문에 스코틀랜드는 요한 낙스를 도구로 하는 하나님의 큰 능력을 힘입어 장로교로 다시 태어났던 것입니다. 구교의 핍박이 있을 때에 그 작은 땅덩이에서 삼 만 명의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위하여 비는 기도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함께 잠을 자던 아내가 어느 순간에 남편이 침대에서 없어진 것을 보고 눈을 떠보니 남편은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짐승 우는 소리를 내며 하나님 앞에 고통 가운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빨리 잠을 청하라는 아내의 말에 존 웰치는 말했습니다. “여보, 내가 매일 기도하는 사람이 3,000명인데 그들의 얼굴이 어른 거려서 내가 잠을 잘 수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몇 명의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까? 10명입니까? 20명입니까? 50명입니까?
교회에서 많은 섬김의 기회를 제공해도 어떤 일은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지만 자격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교회를 섬기고 싶어도 영어나 중국어에 능통하지 못하면 동시통역을 도울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든지 담임 목사의 연구에 도움을 주고 싶어도 외국어에 능통하지 못하면 번역을 부탁하는 섬김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함께 목회하면서 약 3,000번의 설교를 했고 그것은 원고지 18만매 내지 20만매의 분량입니다. 그것들이 놀랍게 모두 풀려서 텍스트와 되어 있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발가락 사이에 카세트 테잎을 끼고 손가락에 관절염이 생기도록까지 봉사를 해서 그 모든 설교를 다 풀어놓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읽는 책들이 나오고 성경공부 교재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들처럼 본받아 섬기고 싶어도 타이프를 치지 못하면 녹취 헌신을 할 수 없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높은 아파트 오르내리면서 전도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아도 관절염이 심해지면 도저히 그 섬김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교회를 봉사하고 싶어도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상냥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새가족위원 할 수 없습니다. 새가족위원 세워놓았다가 처음 온 사람하고 싸움이나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차위원들은 성품이 온유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차 대겠다고 하는 사람과 싸우고 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처럼 교회에서 하는 어떤 일들은 조금씩은 차이가 있지만 다 뭐가 그래도 하다못해 교회 와서 쓰레질을 하려고 해도 교회까지 걸어 나올 수 있는 육체의 건강은 있어야 합니다. 교회 와서 전도지 한 장 만들려고 해도 한글은 알아야 하고 눈이 보여야 합니다.
기도는 살아만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숨만 쉬면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서 불치의 병을 앓고 죽어가고 있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인근의 교회 성도가 그 자매를 찾아가서 예수님의 사랑은 전해 주었습니다. 그 복음을 듣고 이 어린 소녀가 깊이 회심했습니다. 그런데 불치의 병에 걸려서 용변을 받아내는 신세니까 교회 출석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은 6개월인가를 살고 그 자매는 세상을 떴습니다. 그날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했고 장례식에 교회 교우들이 모두 와서 가족을 위로하고 함께 예배를 드려 주었습니다. 그때 그 어머니가 쪽지 한 장을 예배 드려주고 있는 목회자에게 내밀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딸 베개 속에서 나왔습니다.” 동네 사람들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그 쪽지에 적혀 있는 명단이 최근에 그 교회 와서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들의 명단과 일치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그 크신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구원을 받았는데 몸이 아파서 교회 갈 수도 없고 더더군다나 섬기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습니다. 그때 이 어린 자매 마음속에 ‘내가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여기 누워있어도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기도했습니다. 내 마음속에 넘치는 이 예수님의 사랑, 우리 동네 사람들도 알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름을 적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는 그가 교회에 나갔는지 예수 믿었는지도 몰랐지만 그가 그렇게 간절히 비는 기도의 명단을 따라서 왠지 그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교회 교인들이 복음을 전할 때 따라 나갔습니다. 그리고 거듭나고 주님의 자녀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재능이 필요한 것은 재능 있는 사람보고 하라고 그럽시다. 우리가 재능이 없다면 말입니다. 가방 끈이 길어야지만 할 수 있는 일은 공부 많이 한 사람보고 하라고 그럽시다. 우리는 공부 못했으니까요. 팔다리 힘이 왕성해야지 할 수 있는 일은 건강하게 움직일 수 사람들에게 하도록 맡깁시다. 왜? 우리는 육체가 썩음썩음해서 교회까지 걸어 나갈 수도 없을 테니까 말이지요. 그래도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그렇게 섬기는 사람들을 위해서 빌어주는 것, 그리고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그들이 울 수 없을 때 대신 울어주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를 때 우리들이 대신 사랑해 주는 것,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감히 기도는 ‘나에게 너무나 높은 수준의 사역이고 커다란 재능과 학식, 육체의 강한 힘을 필요로 하는 사역이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동참할 자격이 없습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말했습니다. ‘산 자는 누구나 기도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쥐꼬리만큼 교회를 섬기면서 불평은 개꼬리만큼 합니다. 영혼을 섬긴답시고 쬐금 섬기다가는 변화되지 않으면 인간이 워낙 강퍅해서 변화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네 마음이 워낙 강퍅해서 결국은 사단에게 까불림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까? 어떻게 예수님을 자기들을 사랑해주시고 마지막에는 자기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주신 예수님을 수제자라고 하는 인간이 세 번이나 그것도 저주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예수님은 인간이 배은망덕하다는 이유 때문에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서 하나님이신데도 사람처럼 능력의 종이신 데도 가장 연약한 신자인 것처럼 눈물로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구역의 식구들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더 많이 기도했다면 여러분들의 회심하지 않은 자녀를 위해서 회심 집회하는 한 주간만 기도하지 않고 날마다 간절히 눈물로 기도했다면 교회 나오지 않는 여러분들의 남편을 위해서 그것이 여러분의 잘못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이 죄송한 마음으로 자기의 영혼을 위해 울지 못하는 남편을 위해 대신 울어주었더라면 지금쯤은 그들의 강퍅함 때문에 변화되지 않았다고 믿었던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 옆자리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며 예배의 감격에 빠졌을 것입니다.
C. 타인을 위해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 : 사랑 없음
그러면 이렇게 중보기도는 아주 놀라운 힘을 가지고 예수님의 생애 속에 역사했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동일한 능력이 역사할 것을 믿는다면 우리들이 왜 그렇게 기도의 동심원, 누구를 위해 기도하는 범위가 한없이 좁아져서 마지막에는 기껏해야 자기 자신위해서 기도할 수밖에 없고 결국은 그것도 마지막에는 자기 육체밖에는 위해서 기도할 것이 없는 그러한 처지로 떨어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기심 때문입니다. 사랑 없음입니다.
자기 사랑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은혜가 고갈되어 버린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이 부음 바 되어서 은혜가 넘치게 되면 기도의 동심원이 계속 확장됩니다. 나밖에 모르고 내 가족밖에, 교회 와서도 내 구역밖에 모르던 사람들의 기도가 펼쳐지고 펼쳐져서 이 땅에 있는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한 기도가 그 속에서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어떤 공식이 성립 하냐하면 성도의 마음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 크기만큼 기도의 동심원을 확장한다는 공식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으면 본받을수록 그 기도의 제목은 심지어 우리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의 원수들까지를 포함하게 됩니다. 그를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결국 기도를 강하게 움직이는 힘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성도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이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 사랑의 감화가 이 안에서 일어나게 될 때 그는 사랑이 없을 때는 관계가 없어보이던 수많은 사람이 자신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모든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복이 나의 중요한 관심사로 떠오르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되 그들의 영혼이 자신의 영혼인 것처럼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의 심령이 자신의 심령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토하게 됩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내가 마음이 아프고 그들이 범죄 했는데 이상하게 내가 떨립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해 달라고 빌게 됩니다.
D. 예수님의 중보기도 사역의 계승
교회가 인간들만 모인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입니까? 가정이 식구들이 모여서 밥만 먹고 잠만 자고 나간다고 가정일 수 없는 것처럼 교회는 한 사람한 사람 속에 사랑의 교통이 이루어짐으로서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런 속에서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을 살아도 단 한사람의 연약한 지체도 가슴에 품고 기도하지 못하는 그것은 고사하고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조차도 거의 기도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어떻게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의 연합은 영적인 것이며 신비한 것이고 그런 성도의 실재적인 연합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성도들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교통 안에서 온 성도들을 가슴에 품고 함께 사랑하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도 누군가로부터 조국교회에서 일어난 매우 안 좋은 소식을 몇 가지 들었습니다. 제가 그래서 타일렀습니다. 그 교회에 그렇게 어려운 일이 있으니 그대는 기도할 때마다 그 두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거라고 말입니다. 우리들이 교회에서 무슨 잘못된 일들이 일어나고 어느 교회에 무슨 어려움이 생겼다더라. 추문이 있다더라 할 때 얼마나 삽시간에 그 소식이 퍼지고 하나님의 명예를 실추하는지는 너무나 잘 알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소문을 내기 위해서 입을 벌리고 떠드는 것만큼 하나님 앞에서 그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이요, 나도 그 교회의 일부라는 생각을 가지고 아파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합니까?
가끔 제 방에는 교회에서 뿌린 투서 같은 것들이 들어옵니다. 우리 교회 장로들이 이러이런 엉텅리 들입니다. 우리 담임 목사님에게 이런 비리들이 있습니다. 날라 옵니다. 미친 사람들입니다. 그것 만들 시간이 있으면 엎드려서 기도를 하지...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모교회에서 일어난 비리를 온 조국 교회에 알려서 어떻게 해 달라는 것입니까? 심지어는 신학교에서도 이런 것들이 날라 옵니다. 거의 정신이상자들입니다. 나는 그 사람들이 그렇게 교회를 개혁하고 변혁시키기 위해서 열을 올리는 대신 정말 예수의 몸에 대한 사랑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정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지체들에 대해서 헐뜯고 그의 결함을 사람들에게 퍼뜨리고 안 좋은 어떤 일들의 소문을 내어서 파다하게 만들고 그렇게 말을 할 때 우리들이 얼마나 신명나게 그 짓을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과연 다른 지체들을 헐뜯고 이런저런 불미스런 일들을 많은 사람에게 전할 때 그렇게 흥분하는 것만큼 그 모든 잘못 때문에 아파하시는 하나님 마음 때문에 모든 성도들이 떠나간 교회 한 구석에서 홀로 가슴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그런 기도의 세계는 있는지 한번 물어보십시오. 그래서 결국은 우리는 아주 참을 수 없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의 끊임없는 중보의 기도와 지체들이 너를 위해 비는 그 수많은 섬김의 기도 때문에 연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여기 있다.”라고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의 사역은 종료되었지만 여러분들이 비는 기도의 사역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여러분들은 누구를 가슴에 품고 기도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것이 그를 위해서 내가 빌 때에 마음이 주님처럼 아프고 그렇게 간절한 마음이 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자녀입니까? 남편입니까? 구원받지 못한 부모입니까? 교회에서 맡겨주신 지체입니까? 아니면 회심하지 못한 이웃들입니까?
저는 오늘날 이런 상상을 하면서 스스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 주님이 바로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너, 소원이 무엇이냐? 매일 내가 하늘에 있을 때에 네가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에 예수님만 만나면 이것 꼭 해달라고 해야지 하는 것 있니? 무슨 소원을 들어주랴?” 라고 말할 때 성도들 중 몇 사람이나 자신만만하게 “예수님, 저에게는 너무나 오래된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그것만 들어주시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과연 몇 사람이나 그 기도제목을 예수님께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혹시 이러지 않을까요? “무슨 기도를 들어주랴? 한 가지만 말해라.” “예...저...또...그게 있었는데 그게 무엇이더라? 하루만 생각해 보면 안돼요?” 이것은 기도제목이 아니라 소원입니다. 희망사항입니다. 평소에 기도하던 기도제목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목사님, 저에게는 그런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나의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누르면 아픈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손들어 보십시오. 있습니까? 주님 앞에 기도할 때 “언제까지니까? 하나님, 언제까지 내가 매일 이렇게 비는 기도에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오랫동안 기도한 나머지 이 기도제목이 응답되지 않는 것이 원한처럼 되었습니다.” 불의한 재판장 앞에 나와 억울한 과부가 매일 눈물로 호소했던 것 같은 그런 오래된, 그러나 새록새록 기도할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살아나는 그런 기도제목이 있기는 있습니까?
은혜를 받아서 기도의 동심원이 클 때에는 기도할 시간이 모자라구요, 은혜가 떨어져서 동심원이 작아지면 일을 하기에 시간이 모자랍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할 때에는 아무리 해도 기도시간이 모자라고 사랑이 식을 때에는 아무리 세상에 살아도 바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죄송한 것입니다.
IV.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 : 사명의 자리로 돌아감
기도해야 합니다. 분초마다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우리가 많이 땀 흘리며 섬겨도 만약에 우리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기도가 없다면 사람이 쌓은 바벨탑이지 하나님이 세운 교회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쏟지 않으면 안 될 아픔을 주십니다. 그런데 왜 내가 아는 많은 목사님들은 열린교회와 나를 그렇게 부러워해요? 이번 노회 때도 어느 목사님이 “목사님은 얼마나 행복하시겠습니까?” “왜요?” “목사님이 개척하시고 장로님도 저렇게 순종하시고 성도들도 저렇게 복종하고 그러니 목사님은 매일매일 사는 것이 행복이겠습니다.” “당신은 청교도를 연구한다는 사람이 그렇게 바보 같은 말을 합니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종들에게 아픔을 거두어 가시는 적이 있느냐?” 목회자의 설교와 기도는 기쁨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 속에 배인 핏물을 머금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 속에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제 이 교회 모두 여러분들이 봉사하지 않으면 누구도 섬길 사람이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제가 은퇴하는 날까지 사람을 사서 교회를 청소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더러우면 제가 청소하고 제가 힘이 없으면 휴지 떨어지고 변기 청소 안 된 곳에서 그냥 예배드리겠습니다.
그 모든 섬김의 무릎을 꿇는 기도가 배어있지 않다면 그 모든 섬김은 분주한 세상의 일일뿐입니다. 교회에서의 모든 섬김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의 기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Ⅴ. 결론과 적용
어느 교회에서 주일날 새벽에 있었던 일입니다. 목사님이 새벽에 일찍 교회당에 나가 기도를 하는데 누가 먼저 와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가난하던 시절에 날이 추워서 더운 물 나오는 교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꽝꽝 얼어붙은 걸레 하나를 손에 들고 자매가 엎드려 간절히 기도했더랍니다. ‘제가 이제 이 걸레로 말씀을 전할 강단을 청소하는데 이것을 청소할 때 강대에 붙어있던 먼지가 깨끗이 씻기는 것처럼 내 마음의 때도 벗겨지게 하시고 여기에서 목사님이 말씀을 전할 때 성도들의 영혼이 청소되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섬김입니다. 강단을 청소하는 일에 기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기도가 필요하려면 엄청난 선교의 프르젝트를 세운다든지 전도 집회를 크게 계획한다든지 교회가 땅을 산다든지 하는 정도는 기도가 필요하지만 교회 강단에 먼지를 닦는 일에 기도가 필요할 것이라고 믿는 성도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날 거기에서 엎드려서 기도하고 있던 그 어린 자매의 태도가 훨씬 성경적입니다.
기도합시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서 헌신합시다.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이 이제 하나님의 일을 맡고 있다면 그 섬김이 기도의 수면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기도의 깊이 그 섬김이 잠길 수 있도록 온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십시오.
6.습관을 좇아 기도함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눅22:39)
I. 본문 배경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감람산에 가셨는데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땀이 피가 되어 흐르도록 하셨던 겟세마네 기도의 경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특별한 기도였고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가장 처절한 기도였지만 그 기도는 매일매일 실천하는 습관을 타고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기도의 습관을 가지고 계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II. 경건한 습관이 주는 유익
습관이라고 하는 것은 나쁜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 습관적인 교회 출석, 습관적인 예배 생활, 습관적인 봉사 이런 것들은 모두 마음이 전심으로 실리지 않은 몸만 움직이는 그러한 섬김과 실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습관은 실천하는 습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습관으로서 그 행위 속에 깃들어야 할 정신과 내용을 상실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좋은 내용을 담는 그릇과 같습니다. 아주 귀한 물건일수록 단단하고 보기 좋은 용기에 담듯이 우리의 영적인 생활의 훌륭한 내용들은 아주 견고한 의무와 실천의 껍데기에 쌓여있을 때에 쉽게 부패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몸에 배인 기도의 습관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습관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이 따라오기만 한다면 우리 경건에 매우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몸을 건강하게 할 만한 어떤 습관과 성향들이 몸에 배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살아가는 삶 자체가 건강을 촉진하는 방식이 되고 건강하고 활기찬 육체를 가지게 됩니다.
저는 동료 목사님들을 만나보면 머리가 하얗습니다. 전 아직까지도 염색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그 이유는 김을 아주 좋아합니다. 따뜻한 밥과 맛있게 구운 김만 있으면 다른 반찬 필요 없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김을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김을 매우 좋아하고 식탁에 김이 없으면 다른 반찬 아무리 많아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요번에는 못 가져갔지만 기도원에 갈 때 김을 가져갑니다. 큰 것 10장이 들어있는 것을 한 끼에 다 먹습니다. 김을 보면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해서 우리 할머니가 김대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김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딴 김을 묻힌 것, 파래, 다시마 튀긴 것 등 1, 2년이 아니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올라온 것입니다. 10년 전인데 흰머리가 조금 나기 시작하는데 거기서 멈췄습니다. 더 이상 진전이 안 됩니다. 이러다 어느 날 흰머리가 되어 나타날 테지만 말입니다. 노력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식탁에 앉으면 김부터 찾기 시작합니다. 10장은 먹어야 기분이 좋습니다. 어떤 때는 식사시간이 아닌데도 김을 꺼내서 소금을 털면서 먹습니다. 먹는 방법도 많이 개발했습니다. 물에 적셔 먹으면 소금을 완전히 제거하면서 한꺼번에 많이 먹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김을 좋아합니다. 성향입니다. 제가 세상에 제일 싫어하는 음식이 브르컬리였습니다. 어느 교수님을 만나러 미군부대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는데 교수님이 브르컬리를 많이 먹으라고 하시면서 비타민A덩어리이며 최고의 항암식품이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브르컬리를 먹기 시작했는데 먹기 싫어요. 늘 싫지만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며 먹었습니다. 지금은 브르컬리를 보면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여전히 특별한 맛은 없지만 먹는 성향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운전 습관이 나쁘면 시간의 문제이지 언젠가는 사고를 냅니다. 식생활의 습관이 좋으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계속 밥을 먹고 생활하면서 몸이 좋아집니다. 히포크라테스가 황제에게 “폐하, 음식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은 의사도 고치지 못합니다.”고 했습니다. 그럴 정도로 습관이 아주 중요합니다. 육체적인 건강을 위해서도 습관이 커다란 역할을 한다면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는 우리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는 얼마나 중요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육체는 원래 영적인 일을 싫어합니다.
III. 습관을 좇아 기도함 : 일정한 기도생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물어보십시오. 마음 편하게 친구들과 어울려서 노닥거리고 밥 먹고 음료수 마시면서 떠들고 노래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까? 대답해 보세요. 물론 그럴 때 있습니다. 쓸데없는 세상 이야기 친구들과 어울려서 노닥거리면 무엇 하냐?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을 때는 은혜의 때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의 반복은 말이 되고, 말의 반복은 행동을, 행동의 반복은 습관을, 습관의 반복은 그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내가 의지를 발동해서 하나하나 행동을 하다보니까 습관이 생겼는데 습관이 생긴 다음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나를 거기로 데려갑니다. 그것이 습관입니다. 교회에 온 것이 습관이 된 사람들, 나쁘게 보면 그 습관 때문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만 교회 오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은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유혹받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습관은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습관적으로 나오는데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육체와 영혼의 관계입니다. 결국 기도라고 하는 것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오랫동안 우리의 삶속에서 유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게으르고 나태하게 살기 위해서는 노력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성결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기 위해서는 노력을 많이 하고 분투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기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도를 실천하지 못 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를 많이 댑니다. 바쁘고 누가 마음을 상하게 하고 고통이 있고 고난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의 과거를 돌아보면 우리가 편안할 때라고 해서 기도를 많이 한 것도 아니고 고난이 오는 때라고 해서 기도를 열렬히 한 것도 아닙니다.
언제 열심히 했느냐?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있을 때, 그때에 평안하면 환경이 편안하기 때문에, 고난과 어려움이 있으면 그랬기 때문에 주님 밖에는 피할 때가 없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렇죠? 고난과 어려움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성향이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IV. 습관을 좇아 기도하려면 : 정한 기도시간과 장소
기도의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그 사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장소입니다. 습관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는 생애 딱 한번 드렸던 기도였습니다. 그렇게 처절한 기도는, 그러나 기도하러 나아간 것은 처음이 아니라 늘 하시던 습관을 따라서 가신 것입니다.
기도의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기도하러 나왔다가 기도를 못하고 가도 유익이 있습니다. 와서 습관이 되어 늘 기도하러 나오는데 기도하러 나와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는데 기도가 안 됩니다. 차가운 거절감만 하나님 앞에 느껴집니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엎드렸다 일어나는 그 마음의 공허함과 번민은 기도하러 올 때보다도 훨씬 복잡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신자는 자기를 반성하게 됩니다. ‘내 안에 무엇이 있을까? 하나님께서 나를 안 기뻐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이렇게 기도할 때에 자유롭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지 못하는 내 영혼의 어떤 죄가 있을까?’를 고민하게 합니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을 하면서도 자기가 잘못 살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때로는 봉사하면서도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 살고 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사업을 하거나 직장을 다니면서도 잘 모릅니다. 심지어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정신 차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예배당에 와서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잠을 청한다면 예배를 수없이 드린 들 그가 하나님 앞에 잘못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기도는 그것을 깨닫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왜? 안됩니다. 그러면 양심이 나에게 소리칩니다. ‘봐라. 네가 그 따위로 살고 여기 와서 기도하니 하나님이 들어주실 리가 있냐? 마음에 숨겨진 죄가 있지? 토해내기 전에 하나님이 안 들어주셔!’ 이런 양심의 외침이 들립니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각을 하게 됩니다. 습관의 틀이 아예 없으면 하면하고 말면 말고 그렇게 됩니다.
기도를 허무는 죄의 역사가 차례차례 진전이 됩니다. 처음에는 기도가 잘 준비되지 못하도록 우리 마음을 흩어놓습니다. 기도가 잘 준비되었을 때는 기도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마치 쌀자루에 후크를 집어넣으면 쌀이 확 쏟아지듯이 기도가 쏟아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하도록 죄가 우리의 마음을 허물어버립니다. 분명히 상황은 기도할 상황인데 기도가 확 쏟아져 나오지 않습니다. 언어만 가슴속에서 뱅글뱅글 돌고 기도해야 될 텐데 하는 생각만 돕니다. 그러나 죄는 그 정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한 번 더 진전합니다. 기도의 열렬함을 앗아갑니다. 전에는 그러다가도 기도하면 열렬하게 기도할 수 있었는데 그런 열렬함을 앗아가 버립니다. 그러나 죄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형식을 포기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습관조차도 버리도록 만들어줍니다. 어느 단계까지는 기도가 안 되면서도 새벽기도 계속 나오는데 그 시간이 더 지나고 나면 기도의 의무 그 자체를 무시해 버립니다.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더 갑니다. 기도를 안 해도 되는 핑계들을 수없이 만들어서 자기를 합리화시키고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그런 식으로 죄는 기도를 허물어뜨립니다. 허물어진 것이 세워지려면 거꾸로 와야 합니다. 먼저 생각 속에서 기도하지 않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서 다시 그 의무를 회복해서 형식을 만들어야 합니다. 기도가 안 되어서 기도를 안 하는데 사람들은 핑계를 댑니다. 바빠서 안 한다고 하는데 절대로 바빠서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기 싫으니까 안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고 싶은 것은 반드시 합니다. 안 하는 것입니다.
제가 묻고 싶은 이것입니다. 언제쯤 기도를 할 수 있게 될까요? 하나님을 떠나고 의무도 포기하고 되는 대로 사는데 언제쯤 열렬하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기도의 자리로 돌아오게 될까요? 영영 안 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신자들 가운데는 일평생을 살면서도 마음을 다 쏟아서 거의 기도한 없이 회심 못한 채 일생을 마치는 사람 많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않다면 언제쯤 기도할 날이 올까요? 가장 예측하기 쉬운 것이 큰 환난을 만나서 박살이 날 때입니다. 하나님을 안 찾을 수 없는 완전한 궁지로 몰렸을 때, 그때는 기도할 수 있겠죠? 그때를 기다리는 것입니까? 잘못된 것이라는 겁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해야 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전도를 어떤 사람은 잘 하는데 나는 달란트가 모자라서 그런 것을 못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달란트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입니다. 어떤 때는 기도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와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기도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고 어떤 때는 2시간 동안 엎드렸는데 아무 말도 잇지 못하다가 결국은 무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할 때도 있습니다.
기도는 잘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시간을 정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하는 것은 의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하나님을 막 보는 것입니다. 그 의무는 약속, 관계를 갖는 사이에서의 마지막 약속입니다. 그것을 깨면 그 다음에는 죄가 봇물처럼 밀려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Ⅴ. 예수님의 기도습관
일정한 규칙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일정한 규칙이 있는지 묻고 싶어요. 가장 좋은 것은 평생에 새벽기도가 배는 것입니다. 새벽에 벌떡 일어나서 교회로 달려와서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아니라면 여러분 나름대로 무슨 기도의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어떤 기도의 습관을 가지고 계십니까?
저는 직장 다닐 때 교회에서 전도사로 봉사하면서 사찰 일까지 같이 보았습니다.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서 5시에 새벽 기도하는데 조금 기도하다 보면 직장 출근시간이 늦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새벽기도시간에는 간단하게 하고 직장을 길이 막히기 전에 일찍 도착해서 내 책상에 가서 서류를 다 꺼내놓고 책상을 말끔하게 치운 다음에 근무시간까지 1시간20분 이상 남아있으니까 조용한 회의실에 들어가서 40-50분 정도 기도하고 성경을 꺼내서 20분 읽고 다시 기도하고 업무 개시 시간 15분쯤 전에 내 자리로 돌아와서 조용히 하루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한 동안 그렇게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자동적으로 움직입니다. 빨리 직장을 가서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학교에서 야간에 수업이 끝나고 나면 항상 채플실에 들러서 기도하고 가는 것을 습관으로 삼았습니다. 끝나면 학생들은 버스를 타기 위해 한꺼번에 밀려 나가지만 저는 조용히 채플실로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규칙적으로 기도생활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규칙을 정해 놓으면 우리들이 연약할 때 그 규칙이 우리를 굉장히 힘 있게 붙들어 줍니다.
제가 외국에 가면 굉장히 힘든 것이 있는데 5시30분이 되면 잠이 깨는 것입니다. 낮잠을 자다가도 그 시간이 되면 잠이 깹니다. 거기 시간으로 아침이 되면 또 깹니다. 낮잠을 자다가도 눈이 떠져서 한국 시간을 보면 5시30분입니다. 장구한 세월이 흐르면서 몸에 밴 것입니다. 어디에 가서 잠을 자든지 그 시간에 안 깨는 적은 거의 없습니다. 습관이 몸속에 형성된 것입니다. 저는 원래 저녁형 인간이었습니다. 밤에는 무지한 버틸 수 있습니다. 새벽에는 정말 일어나기 힘든 체질이었는데 오랜 세월 지나면서 바뀌는 것입니다. 몸에 습관이 붙는다는 것은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새벽에 안 깨는데 어떻게 새벽기도를 나옵니까? 일단 깨야지 나오든지 말든지 하지요. 그런 습관이 붙도록 시간과 장소를 정하라는 것입니다. 새벽에 모두 나와서 새벽기도를 드리면 매일 춤추면서 다니겠습니다. 그것은 그만두고 장로님, 권사님, 안수집사, 서리집사 이분들까지 만이라도 새벽기도를 하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안 되면 동네 가서 기도하라고 했더니 동네 가면 새벽기도 설교가 수준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지하실에다가 기도실을 만들어 놓든지 베란다에다가 기도실을 만들어 놓든지 방 하나를 정하든지 단칸방이라서 그것도 못하겠다고 하면 한구석에 앉아서 기도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실천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그런 점에서 끊임없이 다투는 것입니다. “육체가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해서 영혼이 모두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자로서 눈에 보이는 육체의 게으름은 그 사람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보이지 않는 싫증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면 싫증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수많은 내적인 언어들이 이 안에 생겨나게 됩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해서 말하고 싶어집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으니까 그것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섬김으로 나타납니다. 이 안에서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나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결국은 인간의 영혼 안에 일어나고 있는 은혜의 작용은 큰 저수지의 물과 같아서 수로를 따라 흘러 두루 넓은 삶의 논밭을 적시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만나는 우주 공간의 유일한 지점이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의 영혼을 통해서 우리의 육적인 인간의 성품이 육체를 통해서 마음이라는 막 안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울기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방향이 정해지게 됩니다.
제가 언젠가는 은퇴를 하게 될 때 유언처럼 남기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절대 목회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마세요. 결국 자신의 영혼에 칼질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잘 해주라는 뜻이 아니라 아프게 하지 마세요. 똑같은 목사인데 교회가 부흥하고 뻗어나가는 교회 목회자들의 놀라운 공통점이 있습니다. 목회자 안에 있는 무제한의 헌신의 마음입니다. 최근에 내가 아는 목사님도 십 몇 년 만에 처음 안식휴가 6개월을 간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어떤 사람은 무제한의 헌신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다 찾아 먹어.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어.’라고 합니까? 두 번째 사람은 처음 목회 시작할 때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명을 주셔서 거기에 있지만 사람들하고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상처를 많이 받아서 목회자가 마음을 닫은 것입니다. ‘나,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하지만 무제한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어떤 목회의 현장에 복을 내릴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개척한 교회도 아니고 청빙을 받아 갔는데 교회가 당회나 모든 집사님이나 이런 분들이 자기를 믿어주고 사랑해서 소신껏 만들어주지 않고 시시때때로 딴지를 걸고 사례금 가지고 다투고 보기 험한 과정을 거치면서 개중에는 반기를 드는 사람도 나옵니다. 이런 속에서 찢길 대로 다 찢기면서 그런 반응이 나옵니다.
우리의 육체는 하고 싶은 대로 내 버려두면 마지막에 우리 영혼을 ‘네가 하나님 되라’는 것으로 데려갑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시도들이 자신 안에 없으면 자신의 영혼이 죽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성립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약 60조개의 세포로 되어 있습니다. 어마어마합니다. 이 세포들이 60조개나 되니까 생겨나는 것도 순식간에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도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1초에도 수없이 우리의 몸에서 세포가 죽고 다시 살아나고 새끼 치는 과정이 생겨납니다. 비근한 예로 오늘 저녁 때 헛헛해서 삼겹살 상추 콜라 케잌까지 실컷 먹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붓습니다. 그런데 부은 것이 아니라 살이 찐 것입니다. 살이 찌면 세포수가 간밤에 확 늘어난 것입니다. 배가 불룩 나오고 핏줄도 따라서 늘어납니다. 하루 밤 사이에 생겨난 것입니다. 몇 끼 금식을 하면 쫙 빠져나갑니다. 세포가 없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60조개의 전구가 반짝거리듯이 죽는 세포 살아나는 세포 또 다시 죽는 세포 새끼 치는 세포들이 깜빡거리면서 우리의 몸이 유지하며 가는 것입니다. 우주 공간에 있는 수많은 별들이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6,000개인데 얼마나 많은 별들이 하늘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별은 불붙은 기체덩어리 항성입니다. 우리가 속한 태양계 안에만 약 1천억 개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끝에서 끝까지는 약 10-20만 광년이라고 봅니다. 그런 별들의 덩어리가 우주 공간에 얼마나 있을까?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 덩어리들이 1천억 개쯤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별들이 끊임없이 폭발하면서 새로운 별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별들이 폭발하면서 사라집니다. 이쪽에서 폭발하고 사라지는 그것이 새로운 별들을 형성하는 하나의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별들이 폭발하고 사라지는 그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기에 가스들을 모이게 만들어서 또 다른 별을 형성하게 만듭니다. 우주 공간에 있는 수많은 별들도 폭발하고 사라져서 죽음으로서 또 다른 별들을 생성시킵니다. 그 똑같은 우주의 광경이 우리의 몸속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생물학자들에게 왜 어떤 세포는 죽고 어떤 세포는 새끼를 치느냐고 했더니 인간의 뇌 속에서 명령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너 죽어라. 넌 살아라.’ 한다는 것입니다. 나뭇잎이 왜 떨어지느냐면 나무가 명령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내 양분을 원하면 감당할 수 없으니까 떨어져라하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신화적인 이야기입니다. 생물학 안에서는 무슨 힘이 세포들을 죽게 하고 죽은 세포들이 다시 세포들을 살게 하는지 밝혀낼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생명이라고 봅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그 물질 안에 내재해 계시기 때문에 그런 효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관계를 끊으시면 모든 작용이 멈추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세포가 있는데 세포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액체 같은 상태에서 동글동글한 세포들이 60조개가 엮어져 있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이 세포가 죽습니다. 세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없어지는 것이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처럼 되어 있는 세포덩어리가 죽으면서 에너지를 발생합니다. 화학에너지라고 합니다. 에너지가 탕하고 영향을 미치면 다른 세포에 영향을 주어 그 에너지의 힘을 받아서 또 다른 세포를 만들기도 하고 에너지의 힘을 받아서 세포 안에서 공장을 돌리면서 단백질이나 이런 양분을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기고 죽고 새끼도 치고 이러면서 우리의 몸이 살아있게 됩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하냐면 암이 무엇인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암은 너무 세포가 안 죽기 때문에 생겨나는 병입니다. 세포가 형성되면 죽는 것이 있어야 그 속에서 신진대사가 일어나는데 이 암 덩어리는 아무도 안 죽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입니다. 죽지는 않고 세포 덩어리가 계속 커지는 것입니다. 엄청난 양분이 필요한 것입니다. 핏줄을 빨아들이고 양분을 빨아들입니다. 암에 걸리면 힘이 없어집니다. 세포가 양분을 다 소모해 버립니다. 양분을 공급 받으니까 더 힘을 얻습니다. 더 커집니다. 암이 들어오게 되면 기존에 있는 세포들이 화학작용을 일으켜서 망가지면서 동글동글 단단하던 세포막이 흐느적거리면서 물처럼 흐르게 됩니다. 이것이 암의 전이입니다.
교회도 나라도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 온 식구들이 살겠다고 개떡같이 날쳐도 누군가 예수 믿는 한 식구가 있어 잘 죽으면 가정은 시간의 문제이지 언젠가는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너마저도 살겠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결국은 가족 전체가 암 덩어리가 되어 결국은 죽는 것입니다. 살겠다고 암세포가 온 몸에 퍼져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함께 죽어버립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는 반드시 쓴 뿌리들이 있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없을 수가 없습니다. 본인들은 자기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잘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 상처받은 사람이야.’ 사실은 상처받은 사람이 아니라 ‘나 쓴 뿌리야.’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 쓴 뿌리가 있어 그것을 발견하고 ‘저 자식이 여기가 어디라고 까불어?’ 하며 혈기가 확 솟는 것입니다. 자기가 달라붙으면서 하나의 암세포가 되는 것입니다. 저쪽에서 보면서 잘 들하고 있네. 둘이 저렇게 대판거리 싸우고 서로 미워하는 것 봐. 둘 다 미친놈 아냐? 자기도 그 순간에 탁 달라붙는 암세포가 되는 것입니다. 한 줄씩 달라붙으면서 교회 속에 확 퍼지면서 암 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회 안에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 계속 되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쪽에서 쓴 뿌리들이 ‘나 상처받은 사람이야. 건드리지마 죽어.’ 저 인간이 여기에 있는 것도 저 인간 옆에 나를 두신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십니다. 자기가 죽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 사람의 죄가 자기의 죄인 것처럼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나는 그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 고통스러울 때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희생과 고난을 생각하면서 자기가 깨뜨려지는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암세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더욱 더 생명이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목회자는 더 기도하게 됩니다. 그 못된 인간 때문에 구역장은 매일 새벽 기도합니다. 그 못된 인간 때문에 장로는 매일 하나님 앞에 마음을 졸이면서 교회를 위해서 빌게 됩니다. 그 못된 인간 때문에 목회자는 자기의 죄처럼 끌어안고 겸손하게 됩니다. 그러면 암세포 같은 그 인간이 교회 전체에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원기 왕성해지겠죠? ‘ 아, 나 생명주는 존재라고나 말을 할까?’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교회는 그 사람 때문에 생명을 얻지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도가 문제가 됩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결혼 주례하면서 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죽어라. 죽는 연습부터 먼저 해라. 결혼하는 것 좋아하지 말고’ 누군가 죽어야 우리 가족도 삽니다. 우리의 영혼 속으로 들어오면 우리의 몸도 많은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무엇인가 그 모든 것들을 향해서 죽을 때 그것 자체가 사는 방법입니다.
사도 바울의 그 방법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2:21) 자기가 그렇게 죽는 그것이 자기가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Ⅵ. 결론과 적용
오늘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가정에 암 덩어리가 아닌가? 암 덩어리는 아니더라도 아빠가 시작한 암 덩어리에 달라붙은 새끼 암 덩어리는 아닌가? 내가 교회의 암 덩어리는 아닌가? 나로부터 시작되진 않았지만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암 덩어리 앞에서 자기를 죽일 줄을 몰라서 나도 결국은 나도 모르게 거기에 달라붙은 암 덩어리가 된 것이 아닌가?
인간이 암에 걸리면 언젠가 살기 위해서 칼을 대고 떼어 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도려내십니다. 그때 그런 사람들에게는 불행한 날이 됩니다. 그 모든 고통을 교회가 함께 하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교만해집니까? 무엇 때문에 자기를 꺾을 줄 모릅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시간이 없습니다. 기도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 속에서 자기 주제를 파악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거기서 자기를 꺾는 연습들을 하게 될 때 삶속에서 자기를 꺾을 수 있게 됩니다. 교회에서 은혜 받은 사람과 사악한 인간이 싸우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사악한 인간은 성령도 이깁니다. 그 자리에서 요절을 내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셔서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기고만장해서 그렇게 악하게 행동합니다. 결국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은 사람,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늘 집니다. 멸시를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짓밟힙니다. 그랬다고 해서 이겼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언젠가는 도려내십시다.
신자의 강퍅한 마음이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지 않는 것도 결국은 일정한 기도의 규칙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속에서 기도를 끊임없이 실천할 때 자기의 마음의 강퍅함을 알게 되고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고 자기를 고쳐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깨뜨려지고 변화되어 여러분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을 살아나게 하는 생명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기도해야 합니다.
7.간절한 기도의 회복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I. 본문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올렸던 기도의 광경입니다. 지난주에 예수님은 습관을 좇아서 감람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지만 거기서 올린 그 기도는 결코 습관적인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이 기도에서 자기를 모두 쏟아 붓고 이기심으로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주님께로부터 받게 되셨던 것입니다. 그럼 그 동산에서 드린 예수님의 이 기도는 어떤 태도를 드리신 기도였습니까?
II.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두 가지로 이야기하는데 힘써 애쓰신 기도였고 더욱 간절히 드리신 기도였다고 합니다. 힘써 애쓰신 것이 육체와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 간절히 기도하신 것은 영혼의 우선적으로 관여된 기도의 태도입니다.
A. ‘힘쓰고 애써’ : 육체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영혼에 굴복함
여기에 나온 힘쓰고 애써 기도하셨다고 되어있는 이 부분을 희랍어 성경에서는 씨름 속으로 들어가 기도하셨다는 표현을 씁니다. 영어의 고뇌를 뜻하는 agony 라는 단어가 바로 이 희랍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온 육체의 힘을 다해 아버지 앞에 기도하신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슬리려고 하는 우리의 죄 된 마음의 종인 육체를 어거하는 것처럼 그렇게 육체와 씨름하신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는 없으셨지만 인간과 똑같이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3번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곧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셨고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육체의 모든 생각이나 뜻을 영혼에 온전히 복종시켜서 십자가에서 이길 영혼과 마음의 준비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큰 고난은 나무에 못 박히시기 전 이미 그 동산에 엎드려 기도하실 그때에 그분의 영혼 속으로 스며들어왔던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영에 의해 온전히 정복된 상태가 될 때에 기도생활이 불붙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달려가면 걸어가고 싶고 걸어가면 서자고 조르고 서면 앉자고 앉으면 눕자고 보채는 것이 우리의 육체의 속성입니다. 만약에 영으로서 그 육체를 지배하고 다스려 영혼이 원하는 대로 육체를 어거할 수 없다면 우리의 기도생활은 처음부터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영의 소욕은 육체를 거슬리고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을 거슬린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육체는 끊임없이 영혼 안에 있는 부패한 사랑과 부패한 성품과 손잡고 게으름에 빠지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때에 영으로서 육체를 눌러 하나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에 불붙으면 육체는 영혼에게 꼼짝도 못합니다. 그러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싫증이 나게 되면 육체는 싫증난 영혼을 향하여 휴식이라는 카드를 내미는 것입니다. 이제는 쉬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쉬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의무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우리의 삶은 급속히 해체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으로서 우리의 육체를 단단히 어거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그 영혼이 은혜를 갈망할 때에 우리의 육체는 우리의 영혼이 원하는 대로 끌려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들을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다니엘은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음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 앞에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요즘은 누가 잡아가나요? 아니죠? 그럼 무엇입니까? 육체가 약해서 입니까? 영혼은 불타고 있는데 육체가 약합니까? 육체가 영혼에 의해서 강하게 통섭될 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로 자신을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의 육체는 육신의 성품의 말을 듣습니까? 신령한 성품의 말을 듣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예수님은 자기의 육체의 힘을 다 쏟아 부어 기도하셨습니다. 영혼의 열렬한 요구에 육체가 굴복된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렇게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땀이 피 방울처럼 되었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땀이 쏟아질 때 그 떨어지는 모습이 피 떨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실재로 땀에 섞인 피가 쏟아진 것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한 주간을 금식 기도하였습니다. 힘을 쏟아 부어서 기도원에 가서 한 주간을 금식하는데 마지막 날 소변에 붉은 피가 함께 섞여서 쏟아졌습니다. 금식을 풀고 밥을 먹기 시작하니까 멎었습니다. 나는 이 생각이 의학적으로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 사건을 통해서 제가 터득한 것은 육체가 온 힘을 쏟아 하나님 앞에 기도하거나 모두 힘들게 자기 자신을 쏟아 부을 때 땀이나 오줌에 피가 배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 육체를 다 쏟아 기도하시면서 그 땀에 피가 가득 배어 흘렀던 것입니다.
B. ‘더욱 간절히 기도하더니’ : 기도의 장애와 극복
예수님의 기도는 더욱 간절히 기도하신 간구였습니다. 여기 ‘간절히’ 라고 하는 말은 희랍어로 ‘쭉 뻗은’ 그런 의미입니다. 같은 의미의 기도가 사도행전 12장 5절에서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하나님께 간절히 빌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서서 손으로 쏘는 활만 알고 있지만 역사를 보면 발로 쏘는 화살이 있었습니다. 손으로 쏘는 화살보다 훨씬 크고 시위도 길어서 하늘을 향해 두 발을 뻗치고 활을 잡아당기고 상체를 구푸려 뒤고 누우면서 시위를 잡아 당겨서 하늘을 향해 쏘는 것입니다. 정확도야 손으로 쏘는 화살에 미치지 못하겠지만 훨씬 더 멀리 나가고 파괴력이 있는 활이었습니다.
고대의 교부는 이 기도를 하늘을 향해 성도들이 쏘아 올리는 화살에 비유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노래했습니다. “쏘자. 쏘자. 기도의 화살을 쏘자. 오늘도 기도의 화살을 쏘자. 새들이 날아다니는 첫 번째 하늘을 지나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있는 두 번째 하늘을 뚫고 하나님이 계신 삼 층천에 이르기까지 오늘도 쏘자. 쏘자. 기도의 화살을 쏘자.” 그들의 생각에 간절하지 못한 기도는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늘에서 떨어지고 그래도 조금 간절한 기도는 악마가 있는 이 층천까지는 올라가지만 거기에서 방패로 쳐서 떨어뜨려 버리고 오직 간절한 힘 있는 기도야말로 첫 번째 하늘을 뚫고 두 번째 하늘을 지나 삼 층천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어떻습니까? 과연 성도들이 기도할 때 간절함으로 두 번째 하늘을 뚫고 삼 층천에까지 이르는 기도의 간절함이 있습니까? 아니 그것은 그만 두고 혹시 그 기도가 첫 번째 하늘은커녕 교회 지붕을 올라가다 천정에서 떨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 한 번 더 양보해서 활이 있기는 있습니까? 정말 기도 안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사랑이 없지요?
오늘 예수님은 자기의 육체의 힘을 쏟아 부어 기도할 때 많은 방해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예수님 육체의 힘이 떨어지셨겠지요? 그 앞의 구절에 보면 힘이 떨어졌을 때 천사들이 와서 도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데리고 간 제자들이 엎드리어 퍼질러 자는 모습을 보면서도 기도에 방해가 되셨겠지요? 이 모든 것들을 물리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더욱 더 간절히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도 하나님 앞에 간절하고 자신을 쏟아 붓는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쏟아 부어 간절한 기도 그 열렬한 기도를 드리고 싶은데 우리는 잘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지 이것이 가능할까요?
III. 기도의 간절함을 유지
오늘 저는 성경에 입각해서 여러분들에게 세 가지 비결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A. 마음을 모아 기도함
마음을 모으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늘 은혜를 받아도 기도생활로 이어지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생각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생각지킴 없이는 마음지킴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스스로 떠오르기도 하지만 눈에 보고 만져지는 수많은 감각적인 사물들과의 접촉 속에서 그것들이 포착되고 우리의 마음의 생각으로 떠돌기 시작합니다. 그것들이 마음이라고 하는 곳에서 마구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줄기가 아무리 크더라도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이 비에 어마어마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온 산에 비가 내리면 이 비가 파여진 계곡을 따라서 모이기 시작하고 내려진 비는 힘이 없지만 계곡에 모인 그 빗물은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며 휘 달아가고 자동차만한 바위덩어리를 굴리고 전봇대만한 나무들을 꺾으며 급기야는 산을 무너뜨리기도 하면서 휘 달려가고 이 나무토막들을 밀고 가서 다리를 끊어 놓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이 비가 얼마나 놀라운 힘이 있는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는 이처럼 끊임없이 생각의 비가 내립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계곡이 있습니다. 그 계곡으로 비처럼 내린 생각들이 모이고 모인 생각들이 달음칠치기 시작하면 무서운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 계곡이 창조 목적을 향하여 흐르는 계곡이라면 접촉하고 만나는 그 수많은 생각들이 선을 향해 달음질 칠 것이고 그것은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 안에 있는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골짜기의 방향이 창조 목적을 거슬리는 악을 향하고 있다면 여러분 마음에 떨어지는 생각에 많은 빗줄기들은 한 계곡으로 모아져서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하면서 하나님을 거슬리는 불순종의 삶을 이룩해내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에 어떻게 해서 그런 골짜기들이 생기고 생긴 골짜기들은 어떻게 창조 목적을 따라서 혹은 거슬려서 우리 삶을 이끌고 가는지를 설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설교의 목표하고는 빗나가기 때문입니다. 다음 기회에 해 드리겠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 마음에 이런 생각들이 많이 무질서하게 굴러다닌다면 우리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뿌려진 생각들은 모두 구슬처럼 굴러다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모판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이제 이것들은 보다 더 뿌리 깊은 생각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은 생각들을 마음의 마당에서 쓸어내는 일들을 매일 하는 것도 모자라고 매 순간해야 합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풍경이 포장하지 않은 마당, 아침에 싸리 빗자루로 깨끗이 쓸어놓은 그 마당을 이른 새벽에 밟는 것입니다. 굉장히 좋아합니다. 저는 중동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옆에 비원이 있었습니다. 일 년에 한두 번 백일장을 합니다. 다른 학생들은 9시에 오는데 저는 일곱 시쯤 일찍 갑니다. 가면 이상하게 그때는 표 받는 사람도 없이 문을 삐꼼하게 열어 놓습니다. 입장료는 학교에서 단체로 내니까 들어갑니다. 요즘은 그렇게 못 들어간다고 합니다. 비원을 깨끗하게 청소 해 놓았습니다. 내가 첫 사람입니다. 새벽에 그 공기를 마시면서 회심하기 전이니까 명상에 잠겨서 찬찬히 걸어갑니다. 생애에 있어서 오래도록 잊어지지 않는 행복한 순간들입니다. 어느 한구석에 앉아서 조용히 책을 읽기 시작합니다. 지금도 그 풍경이 눈에 선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원하십니다. 마당에 쓰레기도 있고 먹다 토한 것도 있는 그런 마음을 빗자루로 쓸어낼 때, 그때에 깨끗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떠돌면서 하나님께 집중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옛날에 제가 알고 있는 학원 선생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이분은 생물을 전공했는데 과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실험을 많이 했습니다. 결혼도 안 한 노총각이었습니다. 옥상에서 항상 혼자 라면을 끓여 먹습니다. 유리를 붙여서 볼록 거울을 만들어 모은 햇빛을 양은 냄비에 닿게 하여 물을 넣어 끓으면 라면을 끓입니다. 이름 하여 태양열 라면이라고 합니다. 거짓말 같잖아요. 장난감도 없던 초등학교 시절에 아이들이 심심찮게 가지고 다니던 것은 할아버지의 다리 부러진 돋보기였습니다. 수업을 끝내고 쉬는 시간에 추운 겨울에 따뜻한 창가에서 엎드려서 자면 손등에다 돋보기를 비치면 조금 있다가 “아 뜨거워 누구야?” 그러면 아이들이 의자 사이를 잡으려고 뛰어다니며 놀았습니다. 역사에 보면 아르키메데스라고 하는 수학자가 적군이 쳐 들어왔을 때에 거울과 반사경, 렌즈를 이용하여 정박하여 있는 적의 함선을 불태웠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과장되었겠지만 그런 기록이 나옵니다. 내리 쬔 햇볕이 그런 힘이 있다고 믿어지지 않지만 작은 렌즈로 집약하면 종이를 태우고 심지어는 옷감도 태웁니다. 그런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하나님 앞에 모으면 거기에서 시간과 공간이 가져다주는 많은 제약을 뛰어 넘어서 영원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차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쓰레기 같은 생각들이 얼마나 굴러다니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기껏 자랑하는 것이 ‘나는 죄지은 것이 없다.’고 합니다. 죄지은 것이 없어도 기도 안 될 때 많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 물론 기도가 안 되지만 죄지은 것이 없는 데도 기도 안 될 때 많습니다.
죄는 근본적으로 기도를 방해하지만 실제적으로 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실천적인 의미에서는 분산된 생각입니다. 흩어 진 마음이 기도를 방해하는 실제적인 요인이 됩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며 마음의 초점이 하나님께 모아진 삶을 살던 사람들은 기도가 잘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던 초점과 기도할 때 초점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살 때에는 그런 초점이 필요 없습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돌아다니고 싶을 때 돌아다니고 그러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은 분산이 됩니다. 그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기도하는데 몸은 나와 있지만 생각은 오만천지 찢겨져서 마음이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아무리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애꿎은 교회 의자 두드려도 기도되지 않습니다.
생각을 잘 지키고 수시로 그것을 쓸어버려야 합니다. 쓸어버리는 방법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B.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함
진실해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솔직해진다는 것과 진실해진다는 것을 혼돈합니다. 솔직해지는 것은 진실해지기 위해서 꼭 필요하지만 솔직한 것이 곧 진실은 아닙니다.
예수 잘 믿는 집안에서 아들을 장가보내는데 부모도 예수 잘 믿는 집안의 처자를 데려다가 결혼을 시켰습니다. 얌전하고 잘 사나보다 했는데 왠지 부부 사이가 별로 안 좋습니다. 그런가보다 했는데 어느 날 며느리가 시어머님에게 할 이야기가 했다고 합니다. 며느리 하는 말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이혼하겠다고 합니다. 시어머님은 믿는 사람이 이혼은 안 된다고 했더니 며느리는 이혼을 해야겠다고 합니다. 아이는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어머님이 키우라고 해서 싫다고 했더니 고아원에 보내라고 했답니다. 실화입니다. 솔직하지요? 친구에게 “너 어제 적금 탔지?” “응” “내가 너무 어려워서 그 돈이 너무 탐이 났거든? 너희 집에 그것 훔치러 가려고 했어. 그런데 네가 반항할 것 같았어. 그러면 죽여 버리려고도 생각했거든” 솔직해요? 안 솔직해요? 진실합니까? 아버지가 있는데 돈이 많습니다. 백억은 가지고 있습니다. 엄청난 구두쇠 입니다. 외아들인 자기에게 십 원도 안 줍니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가서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도 생각했습니다. 오늘 아버지가 죽으면 이 재산 전부 내 것이 될 텐데...고혈압이 도지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나가시다가 차에 쳐서 돌아가시든지 다른 사람은 뇌출혈로도 잘 쓰러지던데 우리 아버지는 왜 이렇게 질긴가? 생각했어요. 제 마음에 정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솔직하지요? 진실합니까?
아무리 솔직해도 진실한 것이 없으면 그것은 막 되먹은 것입니다. 진실이라는 말의 형이상학적인 정의는 인간의 마음이 끊임없이 진리에 합치하려고 노력을 한 결과 하나님의 은혜로 생겨나는 성향입니다.
‘어머니 애를 고아원 보내더라도 저는 사랑하는 사람 찾아가야 되겠거든요.’ 이것은 솔직하지만 ‘그런 마음이 어제 밤까지 들었어요. 어머니 그런데 오늘 가만히 생각하니까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 안에 새로 생긴 그 애인을 좇아갈까? 가정을 지킬까? 갈등하는 마음이 내 안에 있는데 그래도 제가 어떻게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있겠어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이것은 진실하지요? 차이는 진리의 요소가 들어간 것입니다. 자기가 이런 마음이 들었는데 진리의 표준이 있어서 합치할 지 안 할지는 모르지만 다시 합치하려고 하는 것이 생겨납니다. ‘아버지 오늘 아침에 죽어버리면 이 재산은 내 재산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여기까지는 솔직 일 뿐입니다. ‘그저께까지 그랬는데 어제 열린 교회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였는지 설교 제목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였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시는 말씀이 자식에게는 아버지가 살아계신 자체가 최고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아버지, 제가 이렇게 나쁜 놈입니다.’ 진실합니다. 달라진 것은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 또 있을지 모르지만 그 순간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진리가 있습니다. 거기에 자기를 합치시키려고 하는 것이 있는 겁니다. 여기에서 기도의 힘이 나옵니다.
여러분 어떤 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큰 죄를 진 것은 없지만 분명히 하나님이 안 기뻐하는 생활인데 한 번 내가 처음 회심할 때처럼 펑펑 울면서 내 마음을 다 토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 있지요? 그런데 잘 안되지요? 안 되는 이유가 마음을 모으지 않기 때문이고 진실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어도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진실해지면 그 진실해지고자 하는 성향은 결국은 그를 참회로 데리고 갑니다. 그 표준이 있는데 하나님 앞에 은혜를 달라고 매달려 기도하면 우리가 그 표준으로 돌아가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데 우리가 안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힘으로는 못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아이들이 친구들하고 놀다가 장난감을 빼앗겼을 때만 왜 그렇게 울면서 엄마를 찾습니까? 형이 빼앗은 장난감을 자기 힘으로는 빼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참회가 생겨납니다.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았다면 진실해 지는 가운데서 그렇게 올바르게 살게 한 그 힘이 자기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랑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 진실해지면 잘 살았으면 잘 산대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못 살았으면 못 산대로 하나님의 은총을 갈망하게 됩니다.
진실해지지 않으니까 참회도 안 되고 감사도 안 됩니다. 마음에는 온갖 생각들이 쓰레기를 버린 것처럼 너저분하게 있는데 가끔은 기도합니다. 기도를 하기는 합니다. 심지어는 새벽기도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그 기도시간에 그것을 쓸어버리지도 못한 채 일어납니다. 다음에 기도하러 올 때는 더 많은 쓰레기들이 널려있습니다. 한 번도 마음을 쏟고 기도하기는커녕 쓰레기조차도 치워 본 적이 없습니다. 남이 볼 때는 예수에 미친 것 같지만 자기가 예수에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자기도 압니다. 거기에서 모든 허위의 삶이 나옵니다. 그런 사람들은 진실해질 수 없습니다.
진실해지는 것만큼 기도의 깊이가 더 해집니다. 이런 것 없이 괜히 교회 와서 소리 지릅니다. 밖에다 소리 지르지 말고 마음의 쓰레기가 있는 자신에게 소리를 질러야 합니다. 가끔 보면 우리 교회 교인들은 아닐 것입니다. 교양의 문제인데 남의 교회 왔으면 경건하게 기도하다 돌아가지 않고 소리소리 지르고 살아있는 기도가 아닌 자기도 뜻도 모르는 말도 안 되는 방언을 쏟아놓고 소중한 기도시간을 다 흘려보내고 돌아갑니다.
기도의 간절함은 사람의 육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은혜의 소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열렬히 기도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열렬히 기도할 수 있는 은혜의 힘을 주시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힘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도 교회에 기도하러 나왔다가 열렬히 하는 사람은 보았어도 기도시간에 노래방 가 있는 사람이 열렬히 기도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성령은 사람의 의지의 성향을 따라서 조화를 이루며 역사합니다.
제가 600명 정도 모이는 교회 전도사로 있었습니다. 예배시간이면 삼분의 이가 잡니다. 대단합니다. 기도하러 올라가신 장로님도 주무셨어요. 그런데 특별새벽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새벽예배에 나가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교인이 450명이 모였습니다. 저 멀리 천안에서 새벽 3시에 출발해서 5시 새벽기도에 도착했습니다. 30분 예배가 끝나고 나서 불을 끄고 기도시간이 되었습니다. 잠간 기도했는데 주위가 조용합니다. 눈을 떠 보니 15분 지났는데 아무도 없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성령 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디까지이고 성령의 은혜가 아니면 될 수 없는 일이 어디까지인가 하는 그 차이를 깨달았습니다.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것은 계획을 세우고 다구치고 호소하면 모입니다. 그런데 열렬하게 주님을 찾게 만드는 것은 그것으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진실해져야 됩니다.
말이 많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문제는 진실해져야 합니다. 마음을 떠도는 수많은 생각의 쓰레기들을 쓸어버리고 하나님께 고정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진실해지는 겁니다. 진실해지면, 우리가 만약에 죄악 가운데 살았다면 거기서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녹이십니다.
[예수 예수 예수 내 마음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마음을 녹이셨네]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청교도 시대 때 일입니다. 목사님들이 모여 기도회를 했습니다. 사회자가 말했습니다. ‘이제 어느 목사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기다려도 목사님 입에서 기도가 안 나옵니다. 조금 있더니 아주 깊은 고통 속에서 탄식하면서 ‘오, 주님’ 그 순간에 성령이 강하게 임하는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언어보다도 중요한 것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함입니다.
요즘은 제가 너무 바빠서 못하는데 예배시간에 대표 기도자들이 기도하면 은혜를 많이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항상 간사를 통하여 기도한 사람에게 전화를 해서 격려를 했습니다. “오늘 집사님 기도하실 때 목사님이 은혜를 많이 받으셨답니다.” 그 기도는 긴 기도도, 유창한 기도도 아닙니다. 써 가지고 와서 절제 속에서 그 기도를 읽는 데도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녹아드는 것입니다. 요즘도 가끔 그런 기도를 만납니다. 그 힘이 무엇이냐면 목소리의 크기나 기도문의 화려함 분량, 길이,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에 대한 유창한 지식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끔 사람들은 기도하다가 성경구절 가지고 기도를 많이 합니다. 하나님을 코너로 몰고 성경으로 하나님 목에 칼을 들이댑니다. 이런 사람은 바보입니다. 기도는 무한히 거룩하고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큰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사랑으로 엎드리는 것입니다. ‘죄인은 고개를 들라.’ 주님의 음성이 들릴 때까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경외심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실해지게 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어루만지십니다.
[주여 진실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 하루 순간을 주가 주신 힘으로 승리하기 원하네 주여 나를 진실하게 하소서]
며칠 전에 교계 신문을 보니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인터뷰를 했습니다. “생의 좌우명이 무엇입니까?” “바위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홍수가 나서 흙탕물이 계곡에 흐르면 바위가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홍수는 영원히 나지 않고 언젠가 그 물이 빠지고 나면 그 계곡에 바위가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데 진실은 힘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닫혔던 기도의 문도 열릴 수 있습니다.
C.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함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려고 해도 우리의 삶의 상황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그 자체가 시련입니다. 순조로운 상황을 만나면 교만해져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질 위험성이 있으니 그것도 시련입니다. 궁핍과 고통을 만나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여유를 잃어버리게 되니 그것도 시련입니다. 순경이든 역경이든 결국 사람으로 인생을 사는 것 그 자체가 시련이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일평생을 살면 언제 그러지 않은 날이 있겠습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그때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합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고난의 밤이 깊어가고 있을 때 제자들마저 당신을 배신하고 도망치던 그 고난의 순간에도 예수님이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때 나로 하여금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기도하지 못하게 했던 그 여건들은 오히려 그 속에서 예수님을 더 뜨겁게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죽으셨는데 그 2,000년 전에 죽은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영적인 상호교통을 통해서 나의 심령 속에 실재적으로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 예수의 죽음이 바로 내 옛 성품 안에 살아나는 원망하기 좋아하고 미워하고 탐욕하고 정욕대로 살고 싶어 하는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나의 옛 성품이 확 죽는 것을 봅니다. 언제나 나의 육체를 불의로 끌어가고 불순종과 짝하게 만들던 나의 옛 본성이 십자가의 죽음에 침투 당하면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 세상의 사물들에 눈이 어두워서, 자기 사랑 때문에 눈멀어서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을 뵈옵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이 예수 그리스도 죽음 속에서 죽음과 함께 내 속에서 떠오르게 됩니다.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 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IV. 간절히 기도하는 자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
기도하기 전까지는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끓이며 고통을 받았는데 이것들이 예수의 죽음에 의해서 다 끊어지고 세상과의 상호교통이 끊어지면서 오히려 주님과의 교통이 살아납니다. 그때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은혜를 부어줍니다. 그렇게 죄 가운데 오래 살고 그렇게 오랜 세월을 기도하지 못했는데 하늘이 열리면서 기도의 은혜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과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은 단절하는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에 빠져서 휘감기게 되면 아내도 싫고 남편도 야속하고 부모하고도 인연을 끊고 싶고 자식도 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자기 사랑에 휘감기게 되면 뜨겁게 사랑해야 할 사람들부터 멀어지고 싶습니다. 상처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품고 자기 사랑에 뭉쳐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런 진실한 가운데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영혼 속에 내리기 시작하면 생명과 사랑이 넘칩니다. 이 사랑은 교통하는 사랑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면 사람들과 단절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랑이 꽉 차서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 보고 ‘섬기세요.’ ‘봉사하세요.’ ‘희생하세요.’ 그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자체가 벌써 신앙이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내 속에 들어오면 교통하는 사랑입니다.
Ⅴ. 결론과 적용
그 사랑을 모르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랑의 궁핍함 때문에 슬퍼지고 내 안에 생명이 넘쳐나면 생명이 없는 사람 때문에 내가 생명이 없는 사람처럼 아파하게 됩니다. 그 정신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통해서 흘러갑니다. 그런 생명과 사랑이 바로 기도를 통해서 하늘로부터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예수님도 그렇게 기도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해야 되겠어요? 안 해야 되겠어요?
8.십자가에서 남긴 첫째 기도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23:34상)
I. 본문 배경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 방울이 되어 떨어지기까지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이어서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병정들에게 체포되어 끌려 가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모든 체포와 심문의 과정을 거쳐서 사형언도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9시부터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고 거기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 대부분이 예수님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였습니다. 오늘 이 기도는 십자가에 매달려 올리신 첫 번째 간구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기도하실 때 남기신 기도의 내용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채 기도하셨다는 그 사실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II. 십자가 형벌
오늘 십자가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이 간구의 모습은 두 가지 점에서 우리 마음속에 잊어지지 않는 감화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도할 수 없는 환경인데 예수님은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 형벌은 로마인들이 변방의 야만인이던 시절에 만들어낸 인류 최악의 사형방법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산 채로 큰 못을 양손과 다리에 박아 나무에 높이 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몸의 무게로 인해서 손바닥을 뚫고 들어간 그 못은 늘어진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 손의 뼈를 부서뜨리고 살을 찢으면서 피가 흐르게 만듭니다. 죽기 직전까지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도록 한다는 점에서 최악의 살인방법이었습니다.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드셨고 그 마지막 만찬의 의미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아마 예수님은 목이 메어 그 식사를 다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윽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기도의 사투를 벌이셨습니다. 자기를 다 쏟아 부은 처절한 헌신 속에서 온 몸과 마음을 바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의 배반으로 체포되셨을 때에 그가 아끼던 모든 제자는 도망가 버렸고 예수님은 홀몸이 되셨습니다. 나무에 높이 매달려 지금은 형벌을 받고 계십니다.
십자가를 지는 죄인들에게 사전에 치러야 할 두 가지 의식이 있었으니 채찍에 심히 맞는 것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사형언도를 받으신 후 브라이도리온이라고 하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으로 끌려가셨습니다. 거기에서 옷을 모두 벗기시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온 몸은 피로 물들고 간악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머리에 거친 가시면류관을 눌러 씌워 예수의 얼굴에 피가 흐르게 하였습니다. 홍포를 걸쳐 벗은 몸으로 끌려나오셨습니다. 규례에 따라서 또, 한 가지 당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 올라가는 길에 들어서셨습니다.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후 예수님은 손과 발에 못 박히시고 나무에 매달리셨습니다.
III. 십자가에서 남긴 첫 기도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가르치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며 죄인들을 섬기신 것이었습니다. 섬기시던 손에 못 박고 사랑하던 예수님의 심장을 창으로 찔렀습니다. 예수님이 나무에 높이 매달리셨을 때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고 한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으리만치 예수님은 깊이 고통을 당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A. 기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도함
이것이 과연 기도를 할 수 있는 상황입니까? 형편이 어느 정도 되어야지 기도를 하는 것이지 나무에 매달려 온 몸이 찢기고 머리에는 가시면류관, 그로 말미암아 찢어져서 이마로부터 흘러내리는 끊임없는 피 줄기, 뜨거운 햇볕아래 타는 목마름, 예수님을 저주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 과연 예수님이 기도하실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 속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주님이 하신 일은 자기를 모함한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이 고통 가운데 억울하게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께 불평을 하거나 돈 몇 푼에 자기를 팔아버린 제자의 배신을 나무라시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 모든 고통을 한 몸에 짊어지고 하늘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기도하지 않는 우리의 태만을 기도하기 어려운 환경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는 것처럼 피해자인 것처럼 스스로 내세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으면 핑계거리가 많지만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우리는 할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환경의 핑계를 대는 우리의 태만한 태도가 부끄럽지 않습니까? 좋은 신자는 똑바로 잘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늘 자신의 잘못된 삶을 반성하고 참회하는 사람입니다. 나쁜 신자의 얼굴은 언제나 말라있지만 좋은 신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의 뺨에는 언제나 눈물이 흐르고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여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은 그렇게 가슴에 가득 찬 성도의 눈물의 호수를 타고 그 수면으로 떨리며 우리에게 전달되어 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환경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온 몸과 살을 찢으시는 것처럼 어려운 환경입니까? 그보다도 더 심한 환경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결국 환경 앞에 우리들이 항복하고 마는 것입니까? 우리보다 더 잘나고 평안한 환경에 있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마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뵈오면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살을 에는 것 같은 고통, 눈을 감으면 뜨고 싶지 않을 것 같은 견디기 어려운 시련 속에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매달리다가 하나님이 그 기도가 불쌍해서 좋은 환경을 열어주면 이번에는 태만에 빠져서 기도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습성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그 고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도저히 기도할 수 없는 그 나무에 매달려서 영혼까지 넘나드는 그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은 그 환경을 극복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그것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 이후에 받을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염려하시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결국은 환경이 너무 어려워서 기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십자가가 사라졌기 때문에 기도할 수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 깊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십시오. 그분이 나무에 매달린 채 머리에 흐르는 뜨거운 피 줄기, 가시면류관, 그 심한 채찍에 맞으면서도 기도를 올리셨던 것을 기억하면 우리 삶이 너무나 태만하고 안일함에 길들여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환경을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하나님과 친밀함
예수님이 보여주신 고난 속에서의 친밀함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간구하셨습니다. 이 단어는 희랍어로 파테르(πάτερ)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다름이 아닌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부르는 아버지에 대한 호칭이었습니다. 지금 비록 당신 자신의 죄가 아닌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대신 십자가를 지셨지만 예수님으로서는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처음 받아보는 하나님의 진노였습니다.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께 진노를 받는 것은 경험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 친밀함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자기의 죄를 인하여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우리 모든 형벌 받을 인류들의 죄를 대신하셔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결국은 환경은 살을 찢는 것처럼 어려운 고통의 환경이었지만 예수님의 마음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환경으로서는 도저히 기도하실 수 없는 그때에 간구와 소원을 올리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기도하는 사람의 내면의 세계였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특별히 부름 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난과 시련을 친구처럼 여기며 일생을 살았습니다. 진리를 따라 산 사람들은 거짓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박해를 받았으며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경건치 못한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거치는 돌이 되었습니다. 사명을 따라 살고자 하는 불굴의 사람들은 언제나 이 세상의 유혹을 받았고 사명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이 세상의 저항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주님의 사람들에게 고통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 고통과 괴로움들을 이겼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가장 곤고하고 죽음을 넘나드는 위기의 순간에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라고 노래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이 세상의 물질이었습니까? 높은 지위였습니까? 힘이었습니까? 그런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환경을 이기는 불굴의 믿음으로 하나님을 노래하며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을 지나게 만들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 가운데 요한 크리소스톰이라고 하는 아주 훌륭한 교부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암투사라고 하는 절제의 미인이었습니다. 20살에 남편과 사별하여 유복자를 낳았습니다. 수많은 귀족들의 추파와 유혹이 있었지만 이 암투사는 아이 하나를 낳아 기르면서 일생을 하나님 의지하며 수절하였습니다. 그 어머니 밑에서 한 시대의 훌륭한 말씀의 종이 나왔으니 그 사람이 요한 크리소스톰이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능하였던지 사람들이 그 사람을 황금의 입이라고 별명을 지어 주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귀족들이 그런 훌륭한 주의 종의 설교를 저 촌놈들이 듣다니 우리가 모셔와야지 요청을 했지만 명예와 권세를 싫어하는 경건한 크리소스톰은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결국은 납치하다시피 콘스탄티노플에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귀족들이 자신의 선택이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오자마자 그는 화려한 성전에 매달린 수많은 금부치들을 뜯어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정절, 신실한 믿음과 진실한 생활을 외쳤습니다. 사치와 방탕한 삶을 질타하는 그의 설교는 당시의 황후 유독시아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고 귀족들의 모함으로 결국 그는 유배를 가게 되었고 물을 주지 않고 광야를 걷게 하는 잔인한 방법으로 그를 죽였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외친다는 이유 때문에 온 몸을 찢는 것 같은 핍박과 고난이 있을 때 그는 십자가에서 진리 때문에 고난을 당하신 예수를 생각하며 고난을 이겼습니다. 그때 남긴 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세상아, 네가 나를 버리려느냐? 나도 너를 버리노라.”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난 관계 없도다 그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 뿐이라]
주님을 친근히 하는 사람,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 주님의 마음이 내 안에 내 마음이 주님 안으로 상호 교통하는 사람, 그래서 언제나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라고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결국은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여러분들은 지금도 여러분들 인생의 문제가 돈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여러분들 인생의 문제가 높은 지위를 얻지 못한데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직도 여러분들의 영혼의 자유가 없는 것이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보십시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가시면류관 하나 달랑 쓰신 채 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렇게 제자들을 사랑했지만 그놈들은 모두 당신을 버린 배신자들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그 수많은 군중들 속에는 팔복산에서 그의 감미로운 설교를 들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벳새다 광야에서 나누어주시던 기적의 떡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이 병 고쳐주시던 인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이러한 것들을 깊이 생각하였더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으로 원한에 사무쳐서 십자가에서 눈을 감으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면서도 오히려 형벌을 받고 있는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기 때문에 심판을 받을 그 아래 있는 수많은 죄인을 위해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습니다. 그런 용기와 여유가 어디에서 났습니까? 높은 지위나 편안한 환경에서 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친밀함, 거기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9.십자가에서 남긴 둘째 기도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5-46)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지만 늘 잊지 쉽고 자기 사랑에 매어 사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교회는 이렇게 일 년에 한 번씩 감사절을 정해서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옛날은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추수는 다음해 한 해 동안 살아갈 양식을 거두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생명의 다름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을 따라서 우리도 추수감사절에 일 년 동안의 우리 삶을 돌아보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할 제목이 많이 있지만 그 많은 감사의 제목들은 하나의 초점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와 하나님의 혜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많은 물질들, 정신의 건강들, 우리의 생업에 복을 주셔서 먹고 입고 사람답게 살게 하신 모든 은혜, 우리는 또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니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데려가지 않고 내 옆에 놓아두시고 가슴 아프게 헤어지는 대신 서로 기대며 살게 하신 인간관계의 은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받은 그 은혜는 실로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이제껏 산 것뿐 아니라 지금 살아있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좋은 것이 다 그분의 은혜,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밖으로 그려진 많은 외연의 원이고 중심을 향하여 들어오게 되면 거기에는 우리를 이 모든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그것이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가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 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I. 십자가에서 남긴 둘째기도의 바른 이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두 번째 기도가 실려 있습니다. 그 기도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는 기도였으니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기도였습니다. 완벽한 히브리어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기도하셨습니다.
A. 판이해 보이는 두 기도 장면
고난을 받고 계셨지만 온화한 마음으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들을 위해 비시던 첫 번째 기도 ‘저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저희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던 기도와는 좀 다른 기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채 깊은 고통을 당하시며 인간의 몸으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며 기도하시는 이 모습을 보십시오. 십자가에 매달려 뜨거운 태양 빛 아래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피로 물든 얼굴로 온 몸을 벗기시고 채찍에 맞으신 채로 못 박힌 손발 주님 앞에 기도하고 계시는 이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B. 십자가에서 탄식하며 기도하신 이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한 분이셨고 본체상 하나님이셨으며 위격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셨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인 사람의 몸을 입으신 그것이 영이신 하나님과 사이에 막힘을 가져오지 않으셨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성령 안에서 태어나시고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점점 더 사랑스러워 가셨으며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서신 이후에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가 항상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람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때에는 하나님 아버지와 단절을 경험하시며 순간적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버림을 받은 것 같은 깊은 영육의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에 생겨난 결과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짊어지신 우리의 모든 죄에서 진노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느껴야 했던 단절감이었습니다.
은혜는 끊임없이 교통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총이며 죄는 끊임없이 단절하여 마지막에는 자기 한 사람만을 고립시키는 그런 단절적인 사랑입니다. 이러한 고통 가운데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서서히 죽어가고 계셨으니 당신이 형벌을 당하신 것은 우리로 하나님 앞에 형벌을 당하지 않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II. 예수님의 중보기도 세계가 주는 교훈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간절히 부르짖으시는 이 광경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A. 타인을 위한 기도로 경험하는 은혜
하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매달린 이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남을 위해 하는 그 기도의 중요성을 배우게 됩니다.
사람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은 오직 우리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남의 죄를 사해주는 십자가는 오직 예수의 십자가이외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십자가에 사랑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으로서는 하나님과 늘 통하시고 한없는 사랑을 무한하게 받으실 수 있는 아름다운 분이셨지만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니까 하나님은 그 아들을 향해 진노를 퍼부으셨고 죄를 향한 그 진노는 예수님에게 커다란 고통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남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지만 사람을 향한 사랑의 최고의 정점은 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영혼보다 하나님을 닮은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던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영혼을 사랑하게 되고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해본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의 영혼을 깊이 사랑해 본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만이 영혼을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B. 예수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
오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힌 채 피를 흘리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계십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 기도는 죄인인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남을 위한 십자가였고 죄인들을 위해서 대신 못 박히신 십자가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 때문에 우리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고 한 해가 저물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밖에는 할 수 없는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며 아버지 앞에 기도하셨던 것을 본받으면서 우리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영혼을 가지고 있지만 그 영혼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고통 받으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그 마음은 예수님처럼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의 효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이 사랑을 깊이 깨닫고 예수님이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처럼 여러분들도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빌 때에 그때에 정말 하나님의 참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C. 예수님과 동일한 정신으로 기도함
또 한 가지 사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기도하시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외치신 것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야 할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영혼 안에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가지셨고 하나님 자신이셨기 때문에 창조된 모든 세계도 자신으로 말미암아 지어진 세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하나님의 성품을 비우시고 자기가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희생하고 내려놓았습니다. 모든 것을 가지신 부요한 분이셨지만 가난한 인간을 부요하게 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희생하고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 당신 자신은 가난해지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주님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까?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일평생을 사시면서 누구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주었습니까? 누구의 의복이나 물질을 취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는 그야말로 당신 자신을 죄인들을 위해 모두 내어주실 희생의 생애였고 죄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신 헌신의 생애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시는 이것은 바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스스로 버림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셨지만 죽어있는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서 생명이신 당신 자신의 몸을 하나님을 위하여 죽음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런 철저한 헌신의 삶, 그렇게 자기를 버리는 희생의 삶을 살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으니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 자체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자기를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모든 가치는 지나가는 세상이나 소멸할 인간의 육체의 목숨에 있지 않고 불변하시는 하나님과 그 영광에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사람이며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죽었으나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주린 자들은 먹이시고 헐벗은 자들은 입히시고 병든 자들은 치료하시고 무지한 자들은 가르치시고 외로운 자들은 위하여 친구가 되어 주셨지만 그 아름다운 섬김으로도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실 수는 없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버림 받은 것 같은 영혼들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고백할 수 없는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은 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당신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버림을 받으심으로서 구원하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올린 두 번째 기도는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누구로 생각해야 되는지를 가르쳐주고 또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 버림 받으시는 것 같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고 믿음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인생의 불평과 불만이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찬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고난당하신 그리스도 고난의 죽음을 알고 나면 우리의 이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놀라운 은혜를 이 십자가 앞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주님이 버림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다시 거둔 바 되었던 것처럼 주님이 모욕과 멸시를 당하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 다시 귀한 존재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가 끊임없이 자기를 버리며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따를 때 우리도 또한 예수와 함께 살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이 십자가의 정신으로 잘 죽고 잘 깨뜨려지기를 원하십니다. 거기에서 주님이 사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 중에 정말로 살아있는 것은 잘 죽는 것입니다.
돌멩이 하나는 결코 속에 있는 것들이 죽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고체성을 가지고 오랜 세월동안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것은 돌멩이처럼 오래 이 세상에 있지는 못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죽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수많은 별들은 마지막에 자기의 생명을 다 끝내고 죽을 때 커다란 폭발과 함께 우주 속에서 흩어져 버립니다. 그 폭발과 함께 별들은 산산이 흩어지고 그 중의 대부분은 원소가 되어서 보이지 않는 물질 이전의 상태로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때에 일어나는 커다란 폭풍을 가리켜 별 폭풍이라고 부릅니다. 이 폭풍은 주변에 떠있던 많은 물질들을 한 곳으로 모으는 역할을 하고 한 곳으로 모아진 원소와 물질들은 휘돌면서 핵반응을 일으켜서 폭발을 일으키고 이 폭발 속에서 별들을 생성합니다. 그러니까 별은 폭발과 함께 사라지고 폭발과 함께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죽는 별이 있어야 생겨나는 별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60조개의 세포로 되어있는 우리의 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모르지만 명령을 받고 세포가 죽는다고 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명령을 뇌 속에서 내린다고 판단합니다. ‘너는 죽어라’ 하고 명령을 내리면 세포들이 어느 한순간에 죽습니다. 죽으면서 화학 에너지를 발산하고 그 에너지는 옆에 있는 세포에 전달되어서 이 세포로 하여금 생명의 작용을 하게 하는데 꼭 필요한 에너지로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사라진 세포는 원소가 되어서 우리의 몸에 떠돌거나 물질적인 찌꺼기들은 땀이나 소변을 통해 몸 밖으로 배출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온 몸에서 서로서로 교대로 일어납니다. 그래서 어떻게 역설적으로 정의를 해보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죽지 않는 것들로 몸이 꽉 찰 때 그것이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살아있어야 죽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고 죽는 것을 통하여 우리의 몸이 사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세포 중에서 이렇게 죽기를 거절하고 한 곳에 모이는 세포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암이라고 합니다. 이 세포들이 뭉치고 뭉치기 때문에 아무도 죽으려고 하지 않고 뭉치기 때문에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하게 되고 몸의 양분을 한 곳으로 빨아들여서 무서운 속도로 죽지 않는 세포들이 만들어집니다. 결국은 죽지 않는 세포 때문에 우리의 몸 전체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자신들도 죽게 되는 것이 암의 말로입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이신 예수님 한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니까 우리 모든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몸 전체가 죽고 사는 세포들의 명령을 통하여 살아있는 사람의 몸으로 유지가 되듯이 우리가 잘 죽을 때 내 안에 그리스도는 사십니다. 자아가 잘 죽을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사십니다. 내가 잘 죽을 때 교회에는 생명이 넘치게 되고 내가 잘 죽을 때 내가 살아서는 결코 살 수 없었던 영혼들이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우리의 집안에서도 내가 잘 죽을 때 우리의 가족들이 살아나게 되고 희망이 없는 남편이 아내인 나의 죽음을 통해, 남편인 나의 죽음을 통해 아내가 살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이 큰 고난은 바로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렇게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살리시고 구원해준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가장 중요한 명령은 무엇이겠습니까?
디트리히 본 헤퍼라고 하는 신학자는 자신의 글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를 적은 복음서를 정직하게 살피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가자 우리 모두 함께 죽자”라고 말입니다.
[멸시와 유혹 가시관 쓰셨네]
III. 결론과 적용
주님 한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더니 하늘은 열리고 그 은혜는 우리에게 밀려와 구원받은 성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살아서 기동하며 미력이나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든 우리의 삶의 기반, 모든 섬김의 기반은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감격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십자가에서 주님의 고난으로 이루신 이 큰 사랑을 기억하면서 일생 빚진 자로 감사하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뒤따르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0.십자가에서 남긴 셋째 기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中)
오늘은 시리즈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I. 본문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남기신 첫 번째 말씀이 그러했듯이 이 마지막 말씀도 하나님 아버지께 올리신 기도였습니다. 첫 번째 기도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들을 위한 기도였지만 이 마지막 기도는 당신 자신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하나님 앞에 드리심으로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죽으시는 기도가 드려지기 전 성전에서는 휘장이 찢어지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드리워져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12평의 성소와 6평의 지성소 사이를 가로지르는 이 휘장은 양쪽에 황소가 잡아당기며 반대편으로 달려도 찢어지지 않는 아주 질긴 천으로 된 휘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람이 이것을 찢었을 리는 없고 분명히 이는 하나님이 위로부터 아래로 이 휘장을 직접 찢어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었습니다. 즉, 제사장 밖에는 들어갈 수 없는 성소와 일 년에 한차례 대제사장 밖에는 들어갈 수 없는 지성소, 하나님을 대면하는 그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구별이 철폐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을 제사장이라고 불렀으니 그 찢으신 휘장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피 공로를 의지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보좌 앞에서 주님과 대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누구의 힘을 빌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공로를 의지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으며 그 분께 도움을 구할 수 있고 죄를 지은 사람들은 용서를 구할 수 있고 주님의 은혜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능력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놀라운 일이 언제 일어났는지 오늘 성경은 보도합니다.
휘장이 찢어져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구별이 철폐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순간도 아니었고 양손과 발에 못 박히는 그 순간도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십자가에서 기도하시는 순간도 아니었고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그 순간에 동시에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남긴 마지막 기도와 관련하여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두 가지로 새겨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II.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말씀 : 마지막 기도
우선 첫째는 예수님이 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하신 일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는 일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기도하시는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마지막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시작은 능력 있는 복음 선포 사역을 갈릴리에서 시작하시므로 시작됩니다. 그때 많은 사람은 권세 있는 그 예수님의 말씀 선포에 놀랐고 이후로 예수님의 말씀 사역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 사역이 있기 이전 예수님의 40일 동안 광야의 기도의 시간이 있었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들어가기 전에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비시던 기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통해서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임하여 예수님을 한량없이 충만하게 채우시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애는 기도로 문을 열어서 기도로 문을 닫으신 생애였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 사람의 몸을 입고 종의 형체를 가져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로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진노를 받으시므로 우리에게는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으니 바로 하나님이 그 한 몸에 진노를 받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처음부터 사시기 위해 오신 생애가 아니라 죽으시기 위해 오신 생애였고 죽으시기 위해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다.
또 하나 예수님이 사람의 옷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는 우리에게 참으로 인간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몸을 입으셔야 했고 죄는 없으셨지만 인간의 육체가 가지고 있는 똑같은 연약함을 스스로 취하셔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애 사는 날 동안에 우리에게 아주 생생하도록 천사가 우리에게 보여주었더라면 감동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사니까...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감동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참 사람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하셨네 나 주님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아주 생생하게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생애는 당신은 없으신 생애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다가는 교만해질 때가 있어도 성경에서 발견되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는 그 순간에 어떤 선을 행한 사람도 자신이 선하다고 말할 수 없고 어떻게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은 사람도 자신의 희생이 크다고 말할 수 없도록 우리의 입을 그 모본으로 막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일생을 사시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가장 탁월한 모본이 무릎으로 사신 생애의 모본이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지 않으셨다면 그렇게 기도하셨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그분의 기도에는 땀이 있었고 그분의 간구에는 눈물이 있었고 그분의 중보 하는 부르짖음에는 피가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굳이 당신 스스로는 그렇게 기도하셔야 될 필요가 없는 하나님이신 그 분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내려오셔서 그 고단한 생애 가운데 기도의 삶을 사셨을까요? 우리에게 본을 끼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보고 당신 따라하라고, 그래서 이른 새벽, 깊은 밤, 육체의 편안함을 멀리하고 분투하시면서 기도의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속에 그 예수의 정신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의 정신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정신이고 사람의 정신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 속으로 오그라드는 정신입니다. 자기 사랑은 단절하는 사랑이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교통하는 사랑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도 만나고 많은 하나님의 일도 하고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고 때로는 언덕을 올라가고 때로는 계곡을 내려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부당한 사랑 때문에 우리의 영혼에 무게가 되어서 우리를 한없이 끌어내리는 우리의 육체를 향한 사랑도 결국 언젠가는 끝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믿음 생활의 결국입니다. 사도베드로가 말하기를 “믿음의 결국은 곧 영혼이 구원을 받음”(벧전1:9)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결국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다 바치신 후에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더 드릴 기도가 없이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후에는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어떤 모습으로 눈을 감을까요? 아니면 지극한 평안 가운데 미끄러지듯이 주님의 그 임재 앞으로 들어가듯이 그렇게 우리의 인생을 주님과의 교제 속에서 마름하게 될까요?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생애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로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 특별히 결심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일평생 살아온 삶이 하나님 아버지를 끊임없이 의지하며 살아온 삶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는 사실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어떤 의미에서는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을지를 살아있는 이 순간에 우리들이 연습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예수님이 기도로 당신의 지상의 생애에 문을 닫으시기까지 일평생 살아오셨던 그 헌신의 삶, 희생의 삶, 무엇보다도 연약한 육신을 입으시고 당신의 육체로는 능히 감당할 수 없는 고단한 노역의 연대기 속에서 일생을 사시면서 시시 때때로 마음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던 지상의 생애를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때에는 대견스럽기도 하고 환경을 볼 때에는 우리 스스로를 위로할 때도 있지만 주님의 생애를 묵상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께 더 많이 매달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 자녀의 본분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슬프게 해도 눈물은 하나님 앞에서 흘리고 세상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어도 아프다는 이야기는 주님께만 하는 그런 삶, 행복할 때에도 그 기쁨 때문에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고 슬플 때에도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러는 삶을 살아야 할 필요를 여기에서 깊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 순간 우리의 인생이 마지막인 것처럼 주님은 마지막 순간에 한번 드리셨지만 우리는 매일 이렇게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순전한 영혼으로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기도의 끈을 놓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III.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제목 : 하나님과의 연합
둘째로는 예수님이 당신의 생애 전체를 걸쳐서 꿈꾸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를 이 기도가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연합이었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실 때 예수님 마음에 있던 그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였습니까? 손이 달리고 발이 있는 아버지가 아니라 친히 그 하나님이 순결하신 영이심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분이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영이신 하나님의 손에 부탁될 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의미이고 삼위 하나님 속으로 우리들이 연합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부주의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영혼은 하나님의 일부이기 때문에 죽은 후에는 그 영혼이 하나님과 합쳐져서 한 하나님이 된다는 어리석은 교리를 따르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갔을 때 하나님과 아주 특별한 연합을 누리며 성삼위 하나님이 지복에 우리들이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의지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인 우리들이 죽어서 하나님 아버지와 이룰 이 완전한 연합 속으로 돌아 갈 맛보기를 우리들에게 이 세상에서도 경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있는 동안에 그리스도 예수와 누리는 실제적인 연합의 삶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끊임없이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작용으로 정결해 질수록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연합을 이루시는 것이 실재의 삶 속에서 경험되고 그 그리스도 예수와의 친밀한 교통 속에서 삼위 하나님의 지복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신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자신 안에 있는 이 완전한 연합입니다.
그런 연합의 탁월한 기쁨과 행복의 희미한 모상이 부부의 결합입니다. 사랑에 빠진 남녀가 결혼식을 하고 많은 사람의 축하 속에서 부부가 됩니다. 생애에서 가장 기쁜 날이겠죠? 사연이 있는 사람이 아닌 한, 가장 행복한 날이겠죠? 그렇게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주는 달콤한 꿈이 바로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있는 실재적인 연합의 모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희미한 모상입니다. 신혼여행 가서부터 싸웁니다. 결혼식장에서 싸우는 사람도 보았습니까? 부조금 때문에 다 희미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는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주님이 그렇게 함께 하십니다. 그 결합, 그것이 신자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최고의 행복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육체로 말하자면 나무에 매달리셨고 손과 발에 못 박히셔서 온 몸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죽음을 향해 소멸되어 가고 계셨습니다. 그분에게도 그 죽음은 두려운 것이 없고 경험한 적이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생명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의 완전한 연합의 소망, 거기에서 일어나는 완전한 기쁨이 고난을 능가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친근한 호칭으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33년을 사시고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앞에 부탁하는 기도를 올리시고 운명하셨지만 우리는 예수님보다는 더 많이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남아있는 그날도 결국은 매 순간 이 기도의 반복, 주님께로부터 와서 육체와 만나 잠시 이 땅에 머물지만 그러나 결국은 육체와도 결별해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영혼이라고 하는 자기 인식 속에서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본래 왔던 그 고향의 소리가 들리면 그렇게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은 세상의 조잡스런 노래에는 기뻐할 줄 몰라도 하늘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가락, 그 가락에 기뻐합니다. 땅의 양식은 영혼에 낯설어도 그 영원한 세계 안에서 누리던 지복의 진리, 그것을 맛보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은 깨어나고 우리의 영혼은 말할 수 없이 기뻐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영혼이 온 고향이 어디인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연합을 꿈꾸며 우리 안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자기의 내면의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싶으면 자신의 내면 속으로 깊이 귀를 기울여서 외면당하고 있던 자신의 영혼의 음성, 육체의 외침 거기에 귀를 막고 영혼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영혼과 대화를 한 후에 그의 소원은 언제나 한 가지입니다. 우리 주님과 연합되는 것, 그리스도와 상호교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 그 은혜 안에서 진리의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을 누리는 것, 그것이 영혼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그 일은 여러분들의 마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신자의 참된 행복은 매순간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많이 사랑하게 되면 상처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하면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섬세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이 더 많이 상처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세심한 분이시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한 사람을 상처주시기 않기 위해서 세밀하게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비로소 그 하나님이 얼마나 섬세하신 분이신지를 깨닫게 됩니다. 때때로는 하나님을 우리 엄마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아버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섬세합니다. 가슴이 시릴 정도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십니다. [우리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세심한 주님의 손길을 보면서 사랑이 곧 친절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항상 이런 하나님의 세심하심을 경험합니다. 주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받은 수많은 상처와 외로움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 때문에 고쳐지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인간의 희망인 것입니다.
Ⅳ. 마지막을 준비하는 삶
오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그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누릴 영원한 행복을 꿈꾸며 사명을 따라 자신의 생애에 마침표를 찍으셨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주님이 내게 가라고 그러시는 길을 걸어가는 그것은 항상 즐겁고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육신의 정으로는 가기 싫고, 거기 있기 싫고, 거기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꿈꾸는 것입니다.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 그 소망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마땅히 가야할 길과 갈 수 있는 우리의 능력사이에서 느끼는 큰 격차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앞에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도 마음속으로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무엇을 명하시든지 할 수 없는 일은 내가 할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싶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이 할 수 있는 힘을 주실 때까지 못하지만 이미 주신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했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제게 주옵소서.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내게 명령하시옵소서. 명하시는 바를 내게 주옵소서. 원하시는 바를 내게 명하시옵소서. 내가 순종하겠나이다.’라고 말입니다.
Ⅴ. 결론과 적용
하나님은 어떤 사람과 동행하실까요? 주님처럼 순전한 생애를 산 사람과만 동행하신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 아름다운 생애의 마지막을 보면서 배울 것이 별로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만한 사람들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피할 바위며 산성이요 요새가 되십니다. 당신에게 피하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가슴을 열고 그들의 도피처가 되십니다. 우리는 매 순간 주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겨납니다. 자신이 넘어졌던 다시 그리스도를 붙들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어려워도 힘이 많이 들어도 주님을 깊이 의지하며 주님의 손을 꼭 잡고 숨질 때까지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기도로 환경을 이기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