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감사의 제사
너희가 여호와께 감사 희생을 드리거든 너희가 열납되도록 드릴지며 (레 22:29)
녹취자: 홍성림
I. 본문해설
구약에 보면 특별히 감사의 제사가 나옵니다. 속죄받기 위한 목적의 제사도 있고 또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하며 드리는 제사도 있고 또 하나님 앞에 헌신을 다짐하며 드리는 제사도 있고 다양한 제사들이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감사의 제사는 특이합니다. 그래서 감사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이 제사는 속죄나 혹은 하나님의 어떤 요구조건이 있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바 은혜를 회고하며 주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데 그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Ⅲ. 본문설교
A. 회고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제사
우리들이 성경적으로 보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회고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제사입니다. 그래서 참된 성화 생활, 그리고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모든 섬김의 생활의 유일한 기초가 바로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셨다는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섬기면서 살아가고, 주님이 받으심직한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가야 하는 소명의 기초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소명을 새롭게 다짐할 때마다 회고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애굽 종 되었던 집에서 자기들을 건져주신 하나님의 그 큰 능력이었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만나를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하는 그 많은 광야의 여정에 대한 회고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해 내신 위대한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이후에는, 모세 시대에는 아직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지지 못 했기 때문에 찬송 제목이 안 됐지만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는 그 땅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회상하며 하나님 앞에 모든 율법을 지킬 동기로 삼았던 것처럼 신약의 언약 백성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이 그 모든 섬김과 봉사의 모본이 되고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한 3주 전인가 바로 이 자리에서 같은 시찰회에서 지독하게 분쟁을 겪고 있는 어느 한 교회의 분쟁을 조정한 적이 있습니다. 서로 소송을 하고 원수처럼 싸우고, 그렇게 2년 정도의 시간이 흘러 담임 목사님도 퇴직하시고 그러면서도 아직까지 교회가 서로를 원수처럼 미워하고 교인이 두 패로 나뉘어져서 재개발하는 문제 때문에 시끄러운 교회인데 타협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2시간 반 만에 하나님이 책망도 하시고 만져주셔서 2년 만에 최초로 다섯 개 항목에 합의를 하고 2주 후에 다시 두 번째 모임을 갖는다고 합니다.
결국 모든 분쟁을 끌고 들어가 보면 각기 자신들이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마지막까지 끌고 들어가 보면 결국 다 자기 이익과 관련된 문제를 갖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재개발을 하면서, 큰 지역을 재개발하는데 이 지역은 전부 다 재개발하기로 주민들이 동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사업 시행자가 보상을 해주면서 하나씩 내보내는데, 동네에도 상가들이 모여 있는 땅이 있고 소외된 곳이 있습니다. 어차피 재개발하는 사람은 다 허물어 버리고 똑같이 집을 지으니까 이 땅이나 저 땅이나 마찬가지인데, 상가 쪽에 있던 사람들은 더 받고 싶어서 버티고 도장을 안 찍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의를 이미 해준 사람들은 마지막 저 사람들까지 모두 동의를 하게 해야지만 잔금을 받을 수 있고, 동의를 안 해준 사람들은 끝까지 버텨야지만 자신들이 돈을 더 받을 수 있는데, 누구도 그런 이유 때문에 다툰다고는 말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옮기는 문제를 갖고 한 쪽에서는 빨리 타협을 해서 교회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싶어 하고, 한 쪽에서는 끝까지 교회를 붙들고 있어야지만 자신들도 입지가 있을 테니까 버티고 하면서 아주 피나게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혼을 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생각지 못 한 전격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자신들이 너무나 교회만을 위해서 그런다고 눈물로 호소를 하니까 제가 양측에다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당신들이 그렇게 교회를 염려하고 사랑해서 지금 갈등하는 것입니까? 한사코 자신들은 오직 교회 때문이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전격적으로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면 양 쪽이 모두 돈을 포기하면 믿어주겠다고 했습니다. 동의자 측은 만약 동의가 속히 되면 받기로 한 모든 끝전을 교회에 헌금하고, 미동의한 측은 돈 때문이 아니라니까 끝까지 버텨서 만약 추가 협상을 통해서 추가적으로 돈을 더 받아내면 더 받아낸 돈 만큼은 안 가져가겠다고 각서를 쓰라고 했습니다. 썼을까요, 안 썼을까요? 아무도 그렇게 제안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을 것입니다. 다 내면 믿겠다고 했습니다. 아니라고 했습니다.
B. 감사 제사의 조건 : 희생 (죽음)
오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데 조건이 무엇이냐면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희생이 없는 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팁입니다. 아랫 사람 실컷 부리고 나서 미안하니까 5천 원짜리, 만 원 짜리 한 장 주는 것은 희생을 동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손해는 있겠지만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분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는 팁이 아닙니다. "주님, 한 해 동안 저 위해 정말 애 많이 쓰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드리는 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희생입니다.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희생이 무엇입니까? 동물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동물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는 것입니까? 동물을 고달프게 몇 시간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희생은 죽임입니다. 피흘림이 있어야지만 그것이 희생입니다. 구약에서의 희생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재물이 바쳐지기 위해서 먼 길을 걸어왔다, 그런데 죽진 않았다, 이것이 희생이다,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고 사역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생이 모두 헌신이 아닙니다.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고생한 것이 다 헌신한 것이 아닙니다.
(예화) 예전에 박기찬 목사님이 담임 목사님으로 계실 때 일주일에 한 번씩 교역자 회의를 하시는데, 한국 교회의 순교자들 사진을 쭉 갖다 놓고 한 사람 한 사람씩, 한 주에 한 명씩, 그 중 상당수는 당신이 아시는 사람이니까 한 명씩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 얼마나 엄숙한 시간인데, 한 번은 순교자 해설을 하는데 온 교역자들이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목사님이 "이 분이 참 일제시대 때 고생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훌륭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고생하다 죽었는지, 순교했는지는 주님 나라 가봐야 압니다. 죽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랬더니 막 웃었습니다. 그러니까 고생한 것이 다 주님을 위한 헌신이 아니고 죽은 것이 다 순교가 아닙니다. 오락가락 하다가 이중첩자처럼 몰려서 죽은 사람을 우리가 순교자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감사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라야 하는데 그것은 죽음입니다. 얼마나 많이 주님을 위해 자기가 죽었는지, 예전에는 애꿎은 짐승을 죽여서 제사를 드렸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물로 삼아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희생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가장 향기로운 제사는 목회자 자신의 자기 죽음입니다. 그것이 가장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여러분들이 돌보고 있는 목장이 잘 안 되는 것을 갖고 여러분들이 직원들을 데리고 일하면서 무엇인가 잘 안 되는 것 같을 때, 새로운 계획을 계속 세우고 화만 내지 말고 지도자로서 자기 죽음이 있는지를 깊이 성찰하는 것이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것이 결국은 주님이 동기가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목회 사역의 과거를 돌아보면 우리에게 기쁨을 주었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지만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진정한 감사는 반드시 그 안에 희생의 죽음이 뒤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것입니다.
C. 좋은 지도자의 조건 : 희생
또 한 가지 우리가 여기서 지적해야 될 사실은 이러한 희생이 자신에게는 매우 엄격하고 때로는 무자비해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비심으로 행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 보면 희생제사의 이야기가 나오다가 갑자기 바로 뒤에 보면 양이나 염소가 나거든 7일 동안 어미와 같이 있게 해라, 8일 이후로는 여호와께 화제로 예물을 드리면 열납되리라, 그러니까 곧 죽여서 하나님 앞에 바쳐진 제물도 7일 동안은 그 새끼가 어미와 함께 있게 하는 자연의 미물들에 대한 자비심까지 하나님이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되게 사는 사람이,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조심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거칠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고 아주 거칠어지고 독선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편으로는 주님을 위해 달려가야 할 길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한 길로 가는 추진력과 그러면서도 사람들에게 거칠게 대하지 않는 목회의 기술, 처세의 기술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쁜 지도자는 사람들을 그릇된 방향으로 악하게 이끌고 그보다 좀 덜 나쁜 사람은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들과 함께 야합해서 지도자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함께 논다고 한다면, 좋은 지도자는 백성들이 어떠하든지 자신은 가야 할 분명한 길로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더 좋은 지도자는 나를 따르라 하고 앞으로 달려갔는데 마지막에 가 보니까 자기 밖에 없는 지도자가 좋은 지도자가 아니라 사람들을 다 일깨워서 함께 데려가는 지도자가 좋은 지도자입니다.
일인백보는 불여 백인일보라. 혼자서 백 발짝을 달려가는 것 보다 백 사람이 함께 손을 맞잡고 한 발짝을 떼어놓을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라는 말입니다. 그런 배려가 있을 때, 그런 속에서 드리는 희생이 하나님 앞에 정말 아름다운 희생이 되는 것입니다.
벌써 5년 정도 지난 일입니다만,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라는 책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꽤 두꺼운 책인데 모두 읽었는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19세기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극지 탐험에 도전을 했습니다. 영국인인 이 섀클턴도 부하 대원들을 이끌고 극지를 탐험하게 되었습니다. 배는 좌초되었고 바다에 갇힌 신세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살아날 가능성은 0%였습니다. 무전도, 무엇으로도 외부 세계와 통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배에 있는 작은 구명정 보트를 갖고 연락이 닿을 수 있는 곳으로 항해를 해야 하는데 1,200㎞였습니다.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모험을 건 항해였습니다. 겨우 컴퍼스와 삼각자 몇 개를 갖고 해도를 그리면서 여행을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대원들은 펭귄을 잡아먹으면서, 불도 없어서 펭귄의 언 고기를 씹어 먹으면서 생존을 하는데 섀클턴의 위대함이 어디에서 드러났냐면 굉장한 모험을 건 긴 항해였기에 사실 자기 말을 잘 듣는 대원들을 데리고 가도 성공할까 말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가 힘들어도 남아있으면 문제를 일으킬 만한 못된 대원들을 모두 차출해서 자기가 데려가고 그 기지에는 말하자면 순종적이고 협조를 잘 하는 대원들만 남겨 놓습니다. 그리고 두 달 반 정도를 항해해서 1,200㎞를 가게 됩니다. 풍랑과 온갖 죽을 고생을 하면서 마지막에 도착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말하자면 지도자의 모습이었습니다.
Ⅲ. 맺음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희생을 주님께 드릴 때 이렇게 우리가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는 희생을 동반하고, 인자한 자비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면서 그렇게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희생으로 드리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우리들은 감사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그 은혜와 사랑에 깊이 감사하며, 그러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이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