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하는 기도생활
(2009년 설교모음)
승리하는 기도생활 1 (09/6/14,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2 (09/6/21,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3 (09/6/28, 주일오전예배)
설교기간|2009년
승리하는 기도생활 4 (09/7/05, 주일오전예배)
편집내용|녹취원본
승리하는 기도생활 5 (09/7/12, 주일오전예배)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승리하는 기도생활 6 (09/7/19,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7 (09/7/26, 주일오전예배)
1. 기도로 깨어 있으라(눅21:36) 2009.6.14 주일오전 1
2. 예수님의 새벽기도(막1:35) 2009.6.21 주일오전 12
승리하는 기도생활 8 (09/8/02, 주일오전예배)
3. 기도로 훈련하심(눅18:1-7) 2009.6.28 주일오전 22
4. 기도와 기도자 (눅18:9-14) 2009.7.5 주일오전 33
승리하는 기도생활 9 (09/8/09, 주일오전예배)
5. 기도가 막힐 때(막11:25) 2009.7.12 주일오전 44
6. 공동체적 기도생활(행12:5) 2009.7.19 주일오전 54
승리하는 기도생활 10 (09/8/23, 주일오전예배)
7. 양떼를 위한 기도 1(빌1:9-11) 2009.7.26 주일오전 63
8. 양떼를 위한 기도 2(빌1:9-11) 2009.8.2 주일오전 78
승리하는 기도생활 11 (09/9/06, 주일오전예배)
9. 기도와 결단(에4:16) 2009.8.9 주일오전 89
승리하는 기도생활 12 (09/9/27, 주일오전예배)
10. 말씀을 여실 때(계5:1-5) 2009.8.23 주일오전 99
11. 골방의 기도(마6:6-7) 2009.9.6 주일오전 110
승리하는 기도생활 13 (09/10/04, 주일오전예배)
12. 시험의 때와 기도(눅22:46) 2009.9.27 주일오전 121
13. 진실한 삶 없이 기도는 없다(잠28:9) 2009.10.4 주일오전 132
승리하는 기도생활 14 (09/10/11, 주일오전예배)
14. 영혼의 어둠을 헤치고(시119:18) 2009.10.11 주일오전 142
15. 기도를 통해 빛으로 나아옴(시119:19) 2009.10.18 주일오전 152
승리하는 기도생활 1
승리하는 기도생활 1 (09/6/14,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2 (09/6/21,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3 (09/6/28,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4 (09/7/05,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5 (09/7/12,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6 (09/7/19,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7 (09/7/26,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8 (09/8/02,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9 (09/8/09,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0 (09/8/23,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1 (09/9/06,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2 (09/9/27,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3 (09/10/04,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4 (09/10/11,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5 (09/10/18,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 2009.6.14
기도로 깨어 있으라
눅 21:36
I. 본문해설
II. 환경과 신앙
A. 경고하신 “이 모든 일들”
B. 기도 없는 현대 신앙
III. 깨어있다는 의미
A. 환경을 앎
B. 자신을 앎
IV. 기도로 깨어있음
A. 자기신뢰의 포기
B. 충심적 의존
IV. 결론 : 종말을 바라는 삶
승리하는 기도생활 2 2009.6.21
예수님의 새벽기도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I. 본문해설
II. 예수님의 새벽기도
A. 교제로서의 기도
B. 흔들리지 않는 규범
C. 치열한 삶
III. 결론 : 기도로 나아감
승리하는 기도생활 3 2009.6.28
기도로 훈련하심
눅 18:1-7
I. 본문해설
II. 기도 생활의 방해물
A. 자주 그침
B. 쉽게 낙심함
III.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기도함
IV. 원한을 풀어주시는 하나님
V. 결론 : 하나님께 집중하라
승리하는 기도생활 4 2009.07.05
기도와 기도자
눅18:9-14
I. 본문해설
II. 바리새인과 세리
A. 이 비유를 주신 목적
1. 기도하게 하시기 위함
2. 낙심치 않는 실천과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
B. 기도하기 전에 사람이 됨
1. 많이 기도해도 응답 없는 경우도 있음
2. 기도의 열렬함:
a. 일시적 열렬함: 자기결심이나 정신의 힘으로 가능
b. 지속적 열렬함: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없이 불가능
3. 사람의 변화가 기도를 변화시킴
III. 기도와 기도자
A. 기도에 있어서 차별의 경험
1. 하나님의 일반적 사랑과 개별적 사랑
2. 기도는 인격적 사귐의 열매
-이방인들의 기도관과 다름
-기도관은 신관과 관계됨
B. 사람됨을 넘어서지 못하는 기도
1. 기도내용보다 기도하는 사람이 더 중요함
2. 하나님 앞에서 기도에 적합한 사람이 되어야 함
3. 비유의 결론은 기도가 아닌 의(義)임
VI. 결론: 겸비의 영으로 기도하라
승리하는 기도생활 5 2009.07.12
기도가 막힐 때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막 11:25)
I. 본문해설
II. 기도가 막힐 때
A. 영적 교통으로서의 기도
B. 기도와 하나님의 지혜
III. 미워하는 마음과 기도
A. 기도와 성도의 사랑
B. 은혜와 성도의 기도
IV. 기도의 문을 여는 용서
V. 결론: 기도의 세계를 지키는 길
승리하는 기도생활 6 2009.07.19
공동체적 기도생활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행 12:5)
I. 본문해설
II. 기도생활과 공동체의 삶
III. 공동체적 기도의 능력
A. 구체적으로 기도함
B. 간절히 기도함: 엑크테노스()
C. 임재 안에서 기도함
IV. 결론: 지체로서 기도하라
승리하는 기도생활 7 2009.07.26
양떼를 위한 기도 1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빌 1:9-10)
I. 본문해설
II. 양떼를 위한 기도
A. 지성 : 선한 것을 분별
B. 성품 : 흠 없고 진실
C. 생활 : 의의 열매
III. 결론 : 하나님께 영광
승리하는 기도생활 8 2009.08.02
양떼를 위한 기도 2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 1:9-11)
I. 본문해설
II. 양떼를 위한 기도
A. 풍성한 사랑
B. 지식과 총명 안에서
III. 결론 : 영적으로 자라가라
승리하는 기도생활 9 2009.08.09
기도와 결단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I. 본문의 배경
II. 하나님의 섭리와 위기
A. 인간의 연약함
B. 위기를 사용하시는 하나님
C. 기도와 집중
III. 결단하게 하시는 은혜
IV. 결단 : 결단과 기도
승리하는 기도생활 10 2009.08.23
말씀을 여실 때
계 5:1-5
I. 본문의 배경
II. 통곡하는 노(老)사도
A. 주어진 사명(1:19)
B. 봉인된 책(5:1)
C. 통곡하는 노(老)사도
III. 말씀을 여실 때
A. 말씀의 주인, 다윗의 뿌리
B. 빛을 구하는 기도
IV. 결론
승리하는 기도생활 11 2009.09.06
골방의 기도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6-7).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이는 그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기 때문이라”(마 6:6-7, KJV)
I. 본문해설
II. 기도의 오류
A. 외식하는 기도
1. 기도의 빗나간 목적
2. 중언부언하는 기도
B. 기도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
III. 경건의 능력과 개인기도 생활
A. 기도와 은밀함
1. 골방
2. 문을 닫고
B. 은밀함과 집중
IV. 결단 : 개인기도의 부흥이 필요함
승리하는 기도생활 12 2009.09.27
시험의 때와 기도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눅 22:46).
I. 본문의 배경
II. 시험이란 무엇인가?
A. 시험의 정의
B. 시험: ‘당함’과 ‘듦’
C. 시험의 때가 있음
III. 시험의 때에 기도의 유익
A. 생각을 새롭게 함: 자신과 환경을 봄
B. 정서를 새롭게 함: 말씀의 미각을 줌
C. 의지를 새롭게 함: 순종의 능력을 줌
IV. 결론: 기도로 나아감
승리하는 기도생활 12 2009.09.27
시험의 때와 기도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눅 22:46).
I. 본문의 배경
II. 시험이란 무엇인가?
A. 시험의 정의
B. 시험: ‘당함’과 ‘듦’
C. 시험의 때가 있음
III. 시험의 때에 기도의 유익
A. 생각을 새롭게 함: 자신과 환경을 봄
B. 정서를 새롭게 함: 말씀의 미각을 줌
C. 의지를 새롭게 함: 순종의 능력을 줌
IV. 결론: 기도로 나아감
승리하는 기도생활 14 2009.10.11
영혼의 어둠을 헤치고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I. 본문해설
II. 어둠 속에서 몸부림치십니까?
III. 영혼의 어둠
A. 객관적 어둠
B. 주관적 어둠
IV. 결론: 빛을 구하라
승리하는 기도생활 15 2009.10.18
기도를 통해 빛으로 나아옴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시 119:19)
I. 본문해설
II. 두 어둠들에서 벗어남
A. 객관적 어둠: 지식
B. 주관적 어둠: 성령
III. 왜 기도하여야 하는가?
A. 땅에서 객(客)이 됨
B. 어둠 속에 숨는 계명들
C. 빛을 주시는 주권
IV. 결론: 빛으로 나아오라
승리하는 기도생활 1
승리하는 기도생활 1 (09/6/14,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2 (09/6/21,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3 (09/6/28,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4 (09/7/05,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5 (09/7/12,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6 (09/7/19, 주일오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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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기도생활 15 (09/10/18,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
승리하는 기도생활 1 (09/6/14,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2 (09/6/21,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3 (09/6/28,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4 (09/7/05,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5 (09/7/12,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6 (09/7/19,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7 (09/7/26,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8 (09/8/02,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9 (09/8/09,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0 (09/8/23,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1 (09/9/06, 주일오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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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기도생활 13 (09/10/04,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4 (09/10/11,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5 (09/10/18, 주일오전예배)
1.기도로 깨어 있으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 36).
Ⅰ. 본문해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가 될 때에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신앙생활 해야 될 것인가를 교훈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마음이 방탕해지고 술 취함과 생활의 번잡한 염려로 인하여 마음이 둔하여질 터인데, 이렇게 마음이 둔하여지게 되면 마지막 종말이 다가와도 그것을 알지 못한 채 그날은 덫과 같이 그에게 임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 성도들의 지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Ⅱ. 환경과 신앙
여기에서 우리는 날들이라고 표시된 이 시대의 환경과 신앙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환경과 신앙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A. 경고하신 “이 모든 일들”
예수님이 경고하신 “이 모든 일” 이라고 하신 것은 이중적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대변되는 마지막 날에 있을 큰 환난을 가리킵니다. 국지적으로는 이것이 70년에 있었던 로마제국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신 말씀이셨지만, 우주적으로는 마지막 때에 이 모든 세계가 커다란 환난을 만나게 되고 교회가 큰 핍박을 만나게 되는 가운데 신앙생활이 어려워질 것을 예수님께서 미리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과연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이 모든 세계를 보십시오. 오늘날은 거대한 배교가 이루어지고 있는 때이고 사람들은 각기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고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한 방면으로는 이러한 마지막 날이 올 때에 우리 안에서 일어나게 될 믿음생활을 올바르게 하지 못하는 방해요인들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나타납니다. 이 모든 일들은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는 신앙생활을 잘 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이 세상에 내몰리는 우리의 치열한 경쟁의 현실들, 그리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시대정신에 휘돌리면서 우리가 이 거대한 물결에 이탈되지 않기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이 피곤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의 삶,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영혼이 진지하게 하나님을 응시하며 주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기도하는 이 고전적인 신앙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B. 기도 없는 현대 신앙
오늘날은 기도 없는 신앙의 시대입니다. 기도가 없는 현대의 신앙은 더욱 오늘날 교회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각자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이 시대의 정신이 얼마나 견고하고 강력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이 시대의 정신의 특징은 철저한 자기중심성입니다. 자기 자신이 모든 우주의 중심이라고 보고 그리고 자신만이 이 모든 가치를 판단하는 궁극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러한 부동의 자아가 중심이 되고 그 자아의 중심 성을 허락하는 한계 안에서 신앙과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요체가 무엇입니까? 기독교 신앙의 요체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데서 자신의 모든 불행과 비극의 원인을 발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죠. 마치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처럼 어느 날 궁핍하여 주려 죽을 수밖에 없는 영혼과 육체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풍요로웠던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이 이 모든 불행의 근본원인이었다고 생각하고 “일어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자.” 라고 결단을 내리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물론 인간에게 이렇게 스스로 돌이킬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로 그들을 돌이키시긴 하지만 이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돌아간 그곳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께 부종하며 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의 정신성은 강력한 자기중심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회심의 교리 같은 것, 돌이킴의 교리 같은 것들은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에 매우 낯선 것입니다. 그들의 판단에 따르면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것은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죠. 이제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바꿔야 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태도를 바꾸어야 할 때라고 보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려야 할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죠. 예전과 같이 높은 곳에 계셔서 우리 인간을 타락한 자라고 부르고 당신께로 부르시는 이런 고전적인 방식의 인간관을 가지고 접근하지 마시고 이제는 하나님이 인간이 중심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고 당신이 계신 보좌를 버리고 인간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시고 인간을 그 중심에서 그대로 인정하면서 인간의 필요를 채우심으로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시는 것, 이것이 하나님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이런 오만방자한 신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이미 구라파로부터 동양에 이르기까지 견고하게 굳어져 있어서 철옹성과 같이 움직이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에 화란에서 집회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목적은 화란에 있는 어느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는 외국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외국에 나가서 열흘 이상 있어본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외국에서 유학을 한 적은 더더욱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언어가 그렇게 썩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간에 열심히 노력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학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평신도니까 복잡한 신학적인 내용에 대해서 잘 모르겠지만 이제 최근 한 3, 4년 사이에 저에게 신학적인 중대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설교하거나 지녔던 신앙의 확신들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무엇인가 보강하고 새롭게 할 수 있는 적절한 자극을 최근에 신학으로부터 물려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칼빈 이후로 이어지는 2세대, 3세대들의 신학자들의 저작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학교 다닐 때에는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소위 ‘슐레이마허테제’ 라고 하는 테제 밑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 테제를 따르면 종교개혁 이후의 사람들은 종교개혁자들이 쌓아놓은 훌륭한 이 초 자연주의적이고 하나님 의존주의적인 신학을 심하게 훼손했고 이상주의로 흘러가버렸다는 이런 테제였습니다. 150년 동안이나 견고하게 유지되어 오던 이 테제의 틀이 70년대부터 서서히 부서지기 시작했고 잘못 오해했던 많은 부분들이 이제 학자들을 통해서 새롭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물들을 한 최근 3년 전에 접하면서 저 자신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고 그러느라고 사실은 저는 후속편들의 책들을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테제들을 세우는 학자들에 따르면 칼빈과 이후의 신학자들은 칼빈과의 단절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성도 있다고 주장을 하면서 오히려 칼빈이 물려준 훌륭한 종교개혁의 이상들을 앞 세대는 철저하게 체계를 세우지 못했지만 후세의 사람들은 이제 기독교를 적절하게 더 변증하고 탄탄한 기독교 신학의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그렇게 방법론적으로 이성주의를 사용을 해서 오히려 더 풍성한 유산들을 남겼다는 테제였습니다. 그리고 실제 그 세계에 몇 년 들어가 보고 나니까 그 테제가 예전에 150년 동안 지배해오던 ‘슐라이마허테제’ 보다는 훨씬 더 훌륭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러면서 이제 개신교회 교부들에 대한 연구를 시작을 하게 되었고 아직까지 그 방대한 문헌 중에 일부만을 살피고 있는 처지입니다. 그 세계적인 학자들이 모여서 세미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난생 처음 그 학회에 가서 분위기를 좀 보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갔습니다. 있으면서 이제 다행히 거기에서 발표대회가 이루어졌는데 첫날은 아침 11시부터 밤 10시 반 까지, 둘째 날은 8시 반부터 9시까지 강행군이 이루어졌습니다. 간간이 잠깐 식사시간을 제외하고 ,둘째 날에 전시회를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딱딱한 조그만 의자에 앉아서 그거를 하루에 열 시간씩 그렇게 강의를 들어야 했습니다. 뭐 잘 들리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들었고 다행인 것은 이십여 명의 사람이 발표를 했는데 제가 대부분 저자들의 책을 읽거나 그들이 발표하려는 인물들에 대해서 자료를 읽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논지를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세계적인 학자들을 몇 사람 만나서 대화하는 가운데 화란 신학자 한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의 책을 최근에 제가 한권을 읽었기 때문에 가서 제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우연히 그 사람을 보고 싶었는데 식당에서 앉아서 서로가 자기를 소개하는데 바로 그 사람이에요. 그래서 너무 반가워서 “내가 당신을 정말 보고 싶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다.” 그러고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한 두 시간의 대화로 속이 풀리지 않아서 이제 그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하고 그 다음날 다시 만나서 점심을 먹으면서 남들 전시회 가는 동안에 세 시간 동안을 철학과 신학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 사람의 책을 읽은 소감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당신은 내가 보니까 보헤티우스를 전공하고 좋아하는 사람 같다.”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사람은 시인했습니다. 자신은 보헤티우스를 매우 좋아하고 그리고 연구를 했노라고 말했습니다. 이 보헤티우스는 종교개혁 이후에 살았던 2세대의 신학자입니다. 화란의 레이든 대학에서 가르쳤던 사람이고 제가 깊이 존경하는 인물 중에 하나입니다. 이 사람은 그야말로 굉장한 사람입니다. 이 정신의 크기가 엄청난 사람입니다. 고대와 중세의 모든 신학과 철학에 달통한 사람이었고 그 위에 칼빈에게서 비롯되는 개혁신앙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 앞선 세대들이 이룩해놓지 못했던 그 거친 신학들을 정교하게 유산으로 남기는 작업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대개 이런 정치한 이론에 뛰어난 신학자들이 경건에는 낯설기 쉬운데 이 사람은 철저한 경건주의 자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복음의 가르침대로 그대로 따라 살자는 엄격주의를 제창했고, 그리고 수업이 끝난 다음에는 학생들을 소그룹으로 모아서 성경을 가르치고 예수의 말씀대로 살게 하는 훈련을 철저하게 시켰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백년 뒤에 소위 얘기하는 경건주의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 사람이 바로 제 2의 종교개혁을 ‘나드레레뽀르마띠에’ 라고 하는 운동을 화란에서 일으키는 중심인물이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깊이 존경합니다. 그리고 철저한 신본주의자였죠. 그 사람에 대해서 대화를 많이 나누다가 제가 결정적으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하나 물어봅시다. 만약에 당신이 그렇게 존경하는 보헤티우스가 다시 살아난다면 당신 화란 사람들은 그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고 열렬히 따르겠습니까?” 그랬더니 이 사람이 “absolutely not”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내가 얘기했습니다. 그보다 모순이 어디 있느냐? 당신들은 지금 보헤티우스처럼 잘 깨닫고 잘 가르치면 그게 교회가 본질로 돌아가는 거라고 알려주기 위해서 이런 세미나를 열었는데, 그런데 지금 그렇게 배워서 그 사람처럼 가르쳐봤자 이 사람들이 절대 듣지 않을 거라고 확신을 한다면 우리가 이것을 배워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 보헤티우스처럼 가르치고 보헤티우스처럼 믿는 것은 보헤티우스의 지식을 공부하면 되겠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이 증거 하는 진리를 싫어하는 너희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서 그 하나님의 사람이 외치는 진리 앞에서 “아멘” 하게 하는 그 변화는 어떻게 오는 것이냐? “I don`t know” 거기에서 깊이 깨달았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학문의 한계이구나. 결국 이것은 학자들이 대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오히려 학문에 있어서는 그 사람들만 못하지만 우리가 그 모든 가르침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우리 자신 안에 적용하고 그것을 잘 일깨워서 그래서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말씀을 녹여내고 그것을 영혼들에게 전파하고 또 여러분들처럼 방방곡곡을 다니며 영혼을 사랑하는 눈물로 이 복음을 떠먹이는 가운데 성령의 역사로만 일어날 수 있는 이 참 다운 변화, 이것이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령의 강력한 역사 없이는 자기중심성으로부터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아무리 많은 지식으로 신학을 많이 공부하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여러분들을 기도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강한 역사로 자기가 중심 되었던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깨뜨려지고 하나님께로 회귀하게 되는 강력한 신앙의 변화만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자신을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존재로 보고 그래서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인간의 처지라는 사실을 알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로 기도의 샘이 솟습니다. 여기에서 바로 은혜의 샘이 솟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절대의존의 믿음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시대가 올 거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에 이러한 시험의 덫에 걸리지 말도록 우리를 깨어 있으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Ⅲ. 깨어있다는 의미
그러면 도대체 이 깨어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기도를 잃어버린 현대 신앙에 물들지 않고 이렇게 깨어 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 일 텐데 도대체 이 깨어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최소한 두 가지에 대헤서 깨어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A. 환경을 앎
첫 째는 환경을 아는 것입니다. 즉 환경에 대해서 깨어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모든 존재는 환경에 반응하면서 살아가게 되어있는 존재에요. 이것은 우리의 육체도 마찬가지에요. 러시아에서 선교하고 있는 형제 이야기를 들으니까 영하 20도가 넘는데, 우리 같으면 거의 외출도 못할 텐데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워가지고 나온답니다. 이십도, 이십오도. 원래 그렇게 기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거기에 적응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하질 않으면 이 아이들이 그 기후의 악조건 속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는 거지요. 거기에 아이들이 단련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러한 환경은 우리의 몸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도 영향을 많이 미칩니다. 여러분들이 은혜 생활을 잘 하다가 미끄러질 때가 있었죠. 그때 보면 물론 근본적으로는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미끄러지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때를 잘 더듬어보면 마음이 그렇게 잘 미끄러지게 하는 환경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환경의 도움을 받으면서 마음이 잘 미끄러진 거죠. 아주 쉽게 얘기하면 마음 자체가 무게를 가지고 있어서 미끄러지는데 환경이 거기에 기름을 친 거죠. 그러니까 미끄럼틀에서 미끄러지는 것처럼 쭉 미끄러지는 거죠. 반대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은혜를 회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던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회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던 기억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은혜를 회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간 것은 결국 마음이 하나님 앞에 자유를 얻으며 하나님을 향한 거죠. 그렇지만 마음이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데 있어서 많은 환경들을 사용하셔서 기가 막히게 그 환경이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이 환경에 영향을 주면서 이 모든 것들이 협력하여 여러분들을 회복으로 데려갔던 것이죠. 마음이 가난해진다는 의미, 여러분들은 알고 있죠? 희랍어 성경에 ‘푸토코스’ 라고 되어 있는 심령의 가난함은 파산선고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밖에는 의지할 수 없는 절실한 마음으로 모든 기대와 세상에서 오는 도움을 거절하고 하나님 한 분만 붙들게 되는 마음의 상태는 항상 여러분들은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깨어있다.’ 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환경이 자신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환경의 어떤 변화는 하나님이 그 변화를 통해서 나의 신앙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이런 것들에 대한 메시지를 채득해 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깨어있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B. 자신을 앎
그러나 깨어있다는 의미는 또한 자신에 대한 앎을 포함합니다. 이 환경은 대부분 자신과 밀접한 연결을 이루게 되죠.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성향과 기질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믿고 따라가게 하는데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자기의 마음의 기질과 성향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잘 알아야지만 환경을 아는 지식과 함께 그 두 가지를 잘 견주면서 피할 것은 피하고 맞서 싸울 것은 싸울 수 있는 믿음의 지혜가 생겨나게 되는 거죠.
여러해 전에 외국에 나갈 기회가 있었고 후배 목사님의 집에서 며칠 신세를 질 일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자기 공부방을 내어주면서 불편하지만 며칠 여기서 묶으라고 그랬습니다. 가는 날은 너무 피곤해서 골아 떨어졌고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한 다음에 책상에서 책을 좀 보려고 했는데 책상에 이만한 모니터가 하나 있었어요. 그리고 거기에 노란 포스트잇 딱지가 하나 붙어 있었어요. 그래서 뭔가 하고 보니 ‘하지 말자. 하지 말자. 게임은 절대 하지 말자.’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명색이 목사고 애들을 둘을 데리고 있는 아버진데 그게 얼마나 유혹에 쉽게 빠지면 목사가 거기에 포스트잇을 붙여놓고 ‘하지 말자. 하지 말자. 게임만은 절대 하지 말자.’ 그렇게 써 놨겠어요? 그렇게 하지 말자고 끊임없이 다짐이 필요했던 것을 보면 얼마나 하고 싶고 또 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나는 나의 기질을 너무 잘 압니다. 호기심이 많고 무엇인가 하나 꽂히게 되면 깊이 빨려가는 기질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옳게 작동할 때에는 아주 유익한 것이지만 옳지 않게 작동할 때에는 심심치 않은 손해를 나 자신에게 가져오게 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컴퓨터입니다. 아마 잘은 모르지만 나도 게임에 빠지게 되면 누구만큼 깊이 빠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아예 가까이 가질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절대 믿을 리가 없겠지만 나는 아직까지 디지털 카메라를 찍는 방법을 모릅니다. 가끔 찍어보면 내가 찍은 것은 어디로 다 가버렸어요. 그래서 그 다음서부터는 하도 신경 쓰여서 안 쓰고 디지털 카메라를 한 3, 4년 전에 샀는데 한 번도 제가 그걸 가지고 나가서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사진은 친절하게도 다른 사람에 의해 찍혀서 나한테 보내어진 것입니다. 더욱이 그렇게 찍어진 사진을 컴퓨터에다 보내는 방법이 있다는데, 사실 제가 미디어 사역을 지휘하고 이것저것 까다롭게 요구를 해도 뭘 알고 내가 하라는 게 아닙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그 디지털 카메라에서 어떻게 사진을 받아서 컴퓨터에다 어떻게 저장을 한다고 그러는데 그렇게 해가지고 그걸 보내기도 한다는데 그게 어떻게 하는 건지 난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도 바보가 아닌데 한 삼십분 배우면 그거 못하겠습니까? 나보다도 더 노인네들도 나한테 다 보내는데? 그렇지만 안 배웁니다. 왜냐하면 그거 배워서 자꾸 신경 쓰면 거기에 혹시라도 거기에 꽂히게 되면 얼마나 그게 안 좋겠습니까? 그래서 안 하고 더군다나 게임은 아예 가까이 가지도 않고 해 본 적도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나는 나 자신을 잘 아는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옛날에 젊었을 때 신학교에 처음 부임했을 때의 일인데, 한 학기가 끝나고 나면 교수들이 퇴수 회를 갑니다. 그럼 거기서 다음 학기도 의논하고 신간표도 짜고 그렇게 헐렁하게 보내다가 호텔에서 하룻밤 온천도 하고 오는 거죠. 우리는 신학과 교수들이니까 그저 뭐 회의 끝나고 나면 어디 갈 데도 없고 그저 자면, 또 일반학과 교수들은 노래방에도 가고 그럽니다. 그러고는 이제 밤늦게 어느 한 방에 사람들이 가득 모입니다. 그때 말은 “놀면 뭐 하냐?” 그러면서 모이는데 화투를 치는 거예요. 그런데 참 놀랍게 갈 때마다 돈을 싹 따는 사람은 우리 과에 있는 어느 목사님이에요. 그러고는 그 목사님이 어떻게 목사가 평신도 집사들 돈을 다 따가지고 그냥 갈 수가 있겠냐고 그러면서 택시라도 타고 가라고 조금씩 다 나누어 주고 그러는 것을 봤습니다. 결국은 자신의 성향이 그런 투전이나 화투 같은 것을 좋아하면 그와 유사한 환경이 발생하기만 하면 착 달라붙듯 붙는 것이죠. 자기에게 어떤 성향과 기질이 있어서 성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을 미리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피하도록 자신을 아는 것, 이게 깨어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이렇게 환경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잘 알고 자신에 대한 지식을 가지면서 온전히 포기할 것은 포기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죠. 이건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종종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에는 청산유수같이 훈계를 해주는데 얼마 후 자신이 똑같은 상황이 처해 있을 때에는 어떻게 헤어 나와야 될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운 경험을 하신 적이 있죠. 바로 이것이 시험에 있어서 주관성과 객관성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흔히 시험이라고 하면 우리는 침체에 깊이 빠진 것을 가리키죠. 종종 성도들이 편지나 혹은 상담을 하면서 “제가 시험에 들었습니다. 아무개가 시험에 들었습니다.” 하고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시험에 든 것이 아니라 타락에 빠진 거죠. 똥통에 풍덩 빠져서 가끔 고개를 벌떡벌떡 드는 게 그게 어떻게 시험입니까? 완전히 죄에 빠져 버린 거죠.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거기에 빠질까 말까 하면서 뒤뚱뒤뚱하는 게 시험이죠.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시험에 대해서 우리의 상식을 깨뜨리는 새로운 성경적인 정의를 제시합니다. 두 번을 반복할 테니까 기록을 하든지 마음에 새기든지 둘 중에 하나 하십시오. 시험이란 신자의 몸과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모든 상태에 있는 것 그것을 가리킨다. 시험에 들었다고 하는 것은 신자의 몸과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모든 상태에 있는 것 이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시험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청교도들이 최고로 쳤던 신자의 은혜의 상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명령을 대기하는 상태입니다. 즉 하나님이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기쁘게 복종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은혜의 상태, 이것을 최고의 은혜의 상태라고 보았던 거죠. 이것이 바로 복종대기의 상태, 혹은 명령대기의 상태의 경건인 것입니다. 환경과 자신을 알면 좋은데 이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자신이 직접 자신을 들여다보거나 자신이 환경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참된 빛을 환경과 자신에게 비추어 주실 때에 그때에 환경의 의미를 올바로 새기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은 구약에서 애굽을 그 가뭄의 재앙에서 건져냈던 요셉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요셉은 후일 자기의 형들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이 출세라고 하는 환경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정확한 해석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애굽의 총리로 세우신 것은 만민의 목숨을 보전하고 당신들의 생명을 보전하시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요셉은 하나님이 자기를 국무총리로 만들어서 갑자기 큰 권력을 쥔 귀한 통치자의 권력을 주셨는데 이 의미는 자기가 그 자리에서 대접을 받고 호의호식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갈 만민의 목숨을 보전하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자신들의 가족의 생명을 지켜주는 데에 이 환경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적시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진리의 참된 빛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앎을 갖게 만들어줍니다. 여러분들이 진리의 밝은 빛이 지성 속에 비추지 않으면 여러분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진리의 빛에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되면, 갑자기 여러분들은 여러분에게서 나와서 여러분 자신을 남처럼 바라보게 되는 객관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빛을 받았을 때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 진리의 참된 빛은 하나인줄 알았던 자기 자신이 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모두 감싸 안고 사랑하던 자기 자신 중에는 사랑해서는 안 될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엄격하게 발견하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사랑할 것은 사랑하고 미워할 것은 미워하게 만들어주는데 이 역할을 진리의 빛이 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살아있는 기도생활은 이 진리의 참된 빛이 있을 때 올바르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열렬히만 기도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찬란한 이 진리의 빛이 비출 때 자기 중심 성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가 있는 것이죠. 이렇게 진리의 참된 빛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 무조건 우리 편이 되지 않고, 우리가 버려야 할 것과 취하여야 할 것을 우리 자신에서 발견하게 만들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은 자아를 미워하고 정죄하는 일을 해냄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참된 빛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되, 우리가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아울러 공정하게 사랑하기는커녕 오히려 어둠 속에서 육체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 진리의 빛 아래서 환경과 자신을 올바로 아는 이것이 바로 깨어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Ⅳ. 기도로 깨어있음
이러한 깨어있음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항상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이 오늘 지적해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로 깨어있으라고 하는 말씀의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빛을 받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열렬한 기도 생활 속에 담겨질 때에 그 깨달음은 증진되고 우리 안에서 유지됩니다. 여러분들은 시골생활을 경험해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아궁이가 두 개 있는데 이쪽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활활 타올라요. 그때에 이글거리고 타오르는 나무토막 하나를 이제 차가운 아궁이로 옮겨 넣어서 여기에서도 불을 지피려고 합니다. 이 아궁이 속에서는 펄펄 타오르는 장작을 꺼내서 차가운 아궁이에 옮기자마자 불씨가 되기는커녕 갑자기 불이 꺼지고 까맣게 사위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장작에 붙은 불꽃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함께 타오르는 아궁이는 기도생활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기도의 열기가 있는 아궁이 속에 담겨진 하나의 이 타오르는 장작불은 아주 뜨겁고 훌륭하게 타오르지만, 기도가 없는 신앙생활은 때때로 어떤 깨달음이 강력히 있는 것 같아도 그것은 한순간에 지성 속에 맺히는 인상으로 끝나고 마음까지 다다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말씀의 깨달음이 있으면서도 성화에 진전이 없는 것은 바로 이런 기도생활의 결핍에서 오는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생활은 열렬하게 지속적으로 이어가야지만 하나님 앞에서 받은바 은혜의 말씀의 깨달음들이 이 진리 안에서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A. 자기 신뢰의 포기
이러한 기도는 자기 신뢰의 포기입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자아가 살아서 예전에 회심과 함께 버렸던 자기중심성, 자신은 움직일 수 없는 부동의 존재이고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나를 위해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이 무엄한 자기중심성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열렬한 기도 속에서는 이러한 자기신뢰를 포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은 가운데 환경을 알고 자신을 알게 되면 그는 전혀 자기를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커다란 잘못으로 인하여 은혜에서 미끄러지고 난 다음에는 자기를 원망하게 됩니다. ‘내가 너를 전심으로 믿고 따랐더니 결국은 커다란 미끄러짐이었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진 것이 아니었느냐?’ 이렇게 자기를 비난하게 되는 것이죠. 진리의 빛이 비출 때 자기신뢰를 끊임없이 포기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지만 열렬한 기도가 있을 때에는 실제로 자기신뢰를 포기하고 버리게 되는 것이죠.
B. 충심적 의존
이렇게 끊임없이 자기를 포기하고 버리게 되는 속에서 그는 충심적인 의존을 배우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다른 곳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 먼저 당신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신자의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고 싶어 하시죠. 이러한 충심의 의존, 이것을 통해서 중심은 하나님이시고 자신은 끊임없이 욕망을 따라 떠도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구심점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한 순간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깨달으면서 그는 이 열렬한 기도 속에서 열렬히 기도해야할 이유를 현실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에 대한 신뢰는 깨뜨려지게 되고 자기를 미워하게 되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소중함을 발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기도로 깨어 있다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엄밀하게 말하면 죄가 없으신 분이었고 모든 능력을 한량없이 받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에 바로 우리에게 어떻게 하나님을 찾고 믿어야 될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 스스로 모든 일들을 직접 행사하지 않으시고 기도라는 방법을 통해서, 아들로서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는 모범을 우리에게 보이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존하시고 자 충족하신 그분이 사람의 형상을 입으신 동안에는 자신에게 모자람이 있는 것처럼, 스스로 충족하신 분이 아니신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의 경향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기도생활을 통해 나타났던 것입니다. 아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정처 없는 일생을 사셨습니다. 고단한 사역이 그분으로 하여금 편안한 휴식처를 정해진 곳에 갖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생애는 동가식서가숙 하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가 여러 가지로 등장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산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고, 어떤 곳에서는 동산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고, 어떤 곳에서는 강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고, 어떤 곳에서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기도의 장소가 다양한 것은 그분이 얼마나 기도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사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범사에 충심 적으로 그분을 의존하는 마음의 경향을 당신의 기도 속에서 드러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충심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연습을 실행하시게 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일생을 사시면서 눈물과 기도로 당신의 생애를 이어가셨고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원하는 것을 받으시면서 아들의 마음은 더 더욱더 하나님을 향한 성숙한 의존과 순종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과 당신 사이에 있는 사랑을 촉진한 아주 중요한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여주셨던 하나님 아버지와의 그 깊고 오묘한 친밀함, 그 한 가운데는 바로 이런 기도생활이 있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이 기도생활의 모본을 충심으로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과도한 노역과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바쳐야 하는 불굴의 헌신 속에서 사셔야 하는 그러한 온전한 희생의 시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열심 으로 자기를 깨뜨리며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쏟아 부으시는 그런 헌신의 삶을 사셨고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섬기시는 그 섬김 때문에 자신의 기도가 방해되지 않으셨습니다.
문제는 무엇이 중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제가 2년 전에 허리가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책을 찾으러 서재에 들어갔는데 계속 안 좋던 허리가 갑자기 통증이 심해지면서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일어날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쩔쩔 매고 있는데 비서실의 자매가 들어왔어요. 그래서 나를 좀 일으켜달라고 그랬지만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은 직원들이 와서 나를 일으켜서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얼마나 할 일이 많은지 새까맣게 깔린 거예요. 일정이 빽빽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다 안 해도 되는 거더라고요. 병원에 입원하고 나니까 그냥 한 마디씩만 하면 되요.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못 가십니다. 그 집회는 취소되었습니다.” 쭉 연락하니까 끝이에요. 그거를 꼭 해야 되는 줄 알고 허리가 부러지도록 그거를 하는 거예요.
결국은 우리의 판단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가 달린 거예요. 주님과의 관계가 두 번째 문제고, 중요한 것은 나중 문제고, 급한 것부터 하고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면 영원히 우리는 기도할 수 있을 만큼 한가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나머지 것들은 대부분 안 해도 되는 일들이에요. 스펄젼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기도가 잘 되십니까? 그러면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잘 안 됩니까? 그러면 당장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이죠. 우선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하루의 일과를 돌아보면서 피할 수 없이 하나님을 위해 해야 할 것이 아닌 것을 찾아내십시오. 그리고 욕심을 비우십시오. 만약에 여러분의 마음이 세속적인 즐거움에 빠져있고 몸에 치장하는 장신구나 예쁜 옷, 이런 것들에 빼앗긴 나머지 하나님을 조용히 묵상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면 여러분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을 앙망하고 바라볼 시간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가치 없는 것들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 한 분을 지성 속에서 응시하여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마음을 낮추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침묵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갖는 것입니다. 기도가 안 되면 예배당에 나와서 조용히 눈을 감고 찬송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의 모든 마음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말씀을 읽으면서 그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깊이 스며들 수 있도록 말씀에 여유를 주십시오. 그리고 말씀이 충분히 내 마음에 움직일 수 있도록 말씀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의 마음을 거기에 복종시키십시오. 성경에게 빨리 말하라고 때리지 말고 오히려 여러분들의 마음을 때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 스며들 수 있도록 여유를 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기적으로 시간을 정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멀리 떠나 얼마나 건조한 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 은혜의 단비를 내려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마음의 샘을 터뜨려 기도하도록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Ⅴ. 결론 : 종말을 바라는 삶
결국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종말을 바라는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자 앞에 서도록 깨어서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충고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우주적인 종말이 먼저 올 지, 아니면 개인적인 종말이 먼저 와서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두 날이 모두 가까운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끝없이 바람에 떠밀리듯이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굳게 의지하고 하나님과 생명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지옥이 많이 있습니다. 새벽기도를 나가야 할 시간에 따뜻한 아랫목이 지옥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열심을 다하지 않고 되는 일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일들이 치열한 분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깊이 자기를 돌아보십시오. 더욱이 여러분들은 젊은 사람들입니다. 가정에 매이지도 않지 않습니까? 밤늦게 기도하고 들어간들 누가 뭐라고 하겠으며 교회에서 철야한들 막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몸도 마음도 젊으니 하루쯤 쭈그리고 밤을 새워도 이튿날 아침 목욕 한번 하고 나면 새 힘이 솟는데, 이런 건강도 여러분들의 것이 아닙니다. 철야 한 번 하면 일주일씩 머리에 안개가 낀 것 같은 혼란스러운 때가 여러분들에게도 옵니다. 그날이 오기 전에 여러분, 하나님 앞에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젊은 날에 여러분들이 기도해야 할 제목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영혼은 물론 여러분들이 돌보고 있는 지체들,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 그리고 결혼의 문제, 그리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장래의 문제, 진로의 문제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다. 기도에 마음을 쏟을수록 기도의 지경은 넓어지고 더 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떠오르지만 ,기도하지 않을수록 이 모든 것들은 수채 구멍으로 빠져나간 것처럼 그렇게 바짝 마르고 기도해야 될 아무 이유가 없는 것 같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게으르지 마십시오. 이것은 커다란 죄악입니다. 육체의 잠이 육체의 죽음에 비견되듯이, 영적으로 기도하지 않고 잠들어 있는 것은 결국은 죽음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있으라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생명을 주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죽음과 방불한 삶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때를 바라보면서 종말론적인 긴장 속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세우고 다시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녁에 다시 한 번 결단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기만 해도 하나님께서는 벌써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느껴질 것입니다. 떨치고 일어나십시오. 어제와 다른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숨 쉬고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기도할 수 있고, 말씀의 영향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 수 있는 이 오늘은 바로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 아닙니까? 그들에겐 허락지 않았던 내일을 여러분들에게는 허락되어서 오늘 살아가고 있으니 이미 그렇게 자기 자신을 드리지 못하고 죽어간 다른 사람들의 몫까지 살아도 시원치 않은데,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깨어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깊이 회개하고 자기의 마음을 채찍질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승리하는 기도생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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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예수님의 새벽기도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 35)
Ⅰ. 본문해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의 어느 날 새벽기도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는 날 동안 우리 평범한 사람들과 꼭 같이 하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간구와 소원을 올리는 기도생활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생활은 특별히 늘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 속에서 사신 생애였지만 시간적인 규범으로 보자면 새벽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리시는 것을 일생동안 삶의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깊은 밤도 그분이 하나님 앞에 드린 시간이었습니다.
Ⅱ. 예수님의 새벽기도
그러면 예수님의 이 새벽기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예수님을 우리들이 생각할 때에 아무리 생각해도 그분에게는 기도생활이 필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이셨고 오신 후에도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몸으로 오셨지만 그분은 참 하나님이셨고 동시에 참 사람이셨습니다. 참 사람으로서의 인성과 하나님으로서의 신성, 이 두 가지의 본성을 가지고 계셨지만 인격은 하나였습니다. 그 인격은 사람의 인격이 아닌 하나님의 인격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인가 필요한 것을 느낀다면 하나님이실 수가 없죠.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신 분이고 스스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예수님도 가지고 계셨다고 생각할 때에 예수님은 전혀 기도할 필요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 세상사는 날 동안 기도의 생애를 사신 것은 그분의 자기를 낮추는 겸손 때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이신 그분이 당신의 하나님의 성품을 사람의 성품 아래 감추시고 스스로 그것을 행사하시는 대신 사람처럼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기도생활은 바로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인간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되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친히 보여주신 모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에 이 기도생활에 헌신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 하나님이면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의존하여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지극히 연약한 인간의 모습에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어 바치셨습니다. 이럼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지상생애를 통해서 우리 인간이 마땅히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되는지를 그분의 기도생활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도생활은 우리의 전반적인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의존의 마음이 넘치는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사랑이요, 사랑은 곧 하나님께 자기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A. 교제로서의 기도
이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린 이 기도생활은 교제로서의 기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기도의 모본을 통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 속에서 이 지상의 생애를 붙들고 계셨는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함께 영적으로 교제하심으로 예수님은 이 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가르치도록 거기에 필요한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매일매일 공급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나라이 임하옵시고, 또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과 죄의 용서를 위해서 기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고 붙들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만드셨습니다. 육체는 흙으로부터 왔기에 이 땅의 자원으로 생명을 유지하게 하셨습니다.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그 영혼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그분께로 부어지는 신적인 생명의 도움을 받아서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셔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그 생명을 힘입어 살게 하셨던 것이죠. 그러므로 이 기도는 하나님과의 이런 영적인 의존관계를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표상이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 기도생활은 우리가 필요한 어떤 것들을 얻어내는 수단이기 이전에 우리의 영혼의 생명을 풍부히 받아 누리며 살게 하는 교제의 통로가 되는 것이죠.
오늘날은 거의 기도하지 않는 교인들이 많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는 이런 일들이 점점 일반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믿지만, 교회에는 다니지만, 예수 믿는 사람의 진정한 표라고 할 수 있는 복음적인 경건에 대해서는 낯선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애통할 만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신앙의 비밀은 곧 경건의 비밀이고 경건의 비밀의 진수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속에서 경험됩니다. 말씀은 우리를 깨달아 우리로 하여금 가야할 길을 알게 하지만, 기도는 아는 그 길대로 갈 수 있는 하늘의 능력을 우리에게 공급하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의 많은 기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수많은 청구서를 주님 앞에 가지고 와서 낭독하고 그리고 기도의 문을 닫아버리는 일방통행식의 통보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히려 성경적인 기도생활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충분히 바침으로 주님이 충분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허락하는 거죠. 어렸을 때는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기도지만, 성숙한 기도는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더 많이 알게 도와달라는 기도로 이어지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건조하고 메마른 기도생활은 육욕에 가득 찬, 패배한 생활의 내면적인 특성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생활은 늘 메마르기 마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애 전체 동안에 이런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 속에서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삶은 언제나 하늘의 능력을 덧입고 있었고, 그래서 그분의 성품은 그의 모든 섬김 속에서 아름답게 빛났습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종종 한순간의 짧은 기도로 위대한 하늘의 능력을 불러 내린 기도의 용사들을 만납니다. 여호수아와 모세, 그리고 다윗과 같은 사람들, 수많은 선지자들과 바울이나 사도요한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짧은 기도로 큰 능력을 불러 내렸던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평소에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산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기도를 흉내 내 보지만 짧은 시간에 강력한 믿음을 갖고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의 차이입니다. 능력 있고 힘 있는 기도는 평소에 주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이러한 평소의 교제의 깊이 없이 자기가 필요한 어느 시간에 짧은 기도로 큰 능력을, 위대한 인물들처럼 불러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만용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평소에 주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이 신앙생활이야말로 능력 있는 기도생활의 밑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즘 여러분들의 교제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의 교제의 생활, 우리 주님과의 은밀한 교제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혹시 주님과 만나는 시간도, 장소도 모두 잊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발달한 문명 속에서 우리는, 지극히 발달한 교통수단과 통신수단, 그리고 눈과 귀를 가득 채우는 이 모든 메스미디어들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께 진정으로 간절히 간구하고 의지하며 사는 이런 일은 우리에게 점점 더 잊혀져가는 일들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우 메마르고 건조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힘 있는 기도생활의 밑바탕은 하나님과의 깊고 진실한 교제예요. 기도 속에서 어떤 이상한 감정이나 신비한 현상을 추구하려고 하지 마세요. 가장 신비한 것의 최고는 기도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그리고 주님이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그 뜻대로 살고자 하는 선한 의지의 용솟음치는 감화예요. 이것이 있으면 그 이상의 신비가 필요 없어요. 그럴 정도로 아름다운 거죠. 그런 주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마주 앉아있으면 한 시간이 짧지만 빚쟁이하고 마주 앉아있으면 5분이 한 시간 같죠. 결국은 주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그 모습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도에 비례하는 거죠.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옆에 누가 같이 끼어들어서 만나는 게 싫어요. 사랑할수록 둘이서만 만나는 것이 아니면 만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죠. 여러분들의 교제 생활은 어떻습니까? 주님과만 대면합니까? 세상의 근심과 염려와 욕망도 함께 동석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교제의 생활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드리는 교제 속으로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B. 흔들리지 않는 규범
예수님의 이 새벽기도는 흔들리지 않는 규범을 또한 보여줍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기도의 시간은 규칙적이었습니다. 새벽의 시간과 깊은 밤이 그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새벽시간에 기도하기로 뜻을 정하셨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규범이죠. 가끔 우리는 “당신의 기도시간이 언제입니까?” 라고 물어봅니다. 그때 “저는 특별한 기도시간이 없습니다. 늘 기도합니다.” 이 사람은 두 종류 중의 하나입니다. 너무 심오한 기도의 세계를 가져서 24시간 기도의 영 속에서 사는 사람이거나 (그런 사람은 거의 없음) 아니면 거의 기도하지 않거나 입니다. 예수님도 기도의 시간에 대한 규범을 가지고 계셨어요. 그것은 당신 스스로 정하신 규범이겠죠. 그래서 새벽시간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규범은 무엇입니까?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 많은 분들은 언제 기도해야 되겠다고 뜻을 안 세운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심정은 잘 압니다. 왜냐하면 안 세우면 가책이 적지만 규범을 세우고 나면 가책을 계속 받아야 되기 때문이죠. 이 개인이 세우는 규범과 은혜생활에는 아주 미묘한 관계가 있습니다. 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을 때에는 개인이 세우는 이 규범, 교회로부터 부여받는 규범을 지키는 것이 참 기쁩니다. “야, 오늘 주일이야. 야, 벌써 수요예배 시간이네. 새벽기도 가야지.” 이렇게 규범을 준수하며 사는 것이 아주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규범을 따라 살 때에 우리의 은혜생활은 증진이 됩니다. 그래서 규범이 있다는 것이 참 편하고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치 행 길을 안전하게 운행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차선이 그려져 있고 정확한 신호등이 설치된 것과 꼭 같이 말이죠. 그러나 은혜가 떨어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게 됩니다. 그때 이 규범은 아주 귀찮고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 규범을 마음속으로 없애버리는 것이죠. 실제로 우리는 대책 없이 규범을 세웠다가 낭패를 당하는 경우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말하자면 부도수표를 남발하는 거죠. 이 수표는 대개 송구영신예배 때 많이 씁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성경 몇 장 읽겠습니다, 싸인 하고 지장 찍고. 새벽기도는 꼭 나오겠습니다, 싸인 하고 지장 찍고. 전도는 어떻게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배우겠습니다. 수없이 찍고 유월쯤 되면 이제 부도수표가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하나씩 둘씩 돌아오기 시작할 때에 갚을 능력이 있게끔 돌아오면 삶을 개선하는데, 한꺼번에 막 날아와서 도저히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벌렁 드러누워서 ‘배 째라.’ 하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결국은 규범의 토대가 무너져 버리게 되는데 그 다음에 남는 것은 흐느적거리는 삶 밖에 없습니다. 규범을 어겼다는 가책도 사라졌지만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영혼의 자유함도 상실해 버렸습니다. 어쩜 이렇게 내 사정을 잘 아시는지······.
우리는 흔히 기도생활에 있어서 우리의 환경이 기도하기에 매우 어렵다고 그렇게 변명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왕년도 좋고 내년도 좋으니 언제 환경이 우리를 신앙생활하게 도와주는 것 봤습니까? 시련이 올 때는 힘들고 어려워서 기도하기 힘들게 했고, 평탄하고 좋은 환경이 오면 우리를 부패시켜서 기도하지 못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영원히 이 환경은 우리 편이 아니에요. 어느 때 쯤 되면 이 환경이 여러분들의 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우리의 신앙생활 그 자체는 하나님 앞에 싸우는 영적인 전투의 삶이에요. 그래서 끊임없는 시련과 고난이 올 때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기도하러 나가고, 평탄할 때는 평탄 중에 우리가 부패하지 않기 위해서 매달린다고 반대로 해석을 해야지만 이 기도생활을 이어갈 수 있지, 좋은 환경이 오길 기다린다고 해서 그렇게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죠.
몇 달 전에 자꾸 어지러워요. 넘어질 정도로 어지러워요. 그래서 큰 병이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어서 병원을 갔더니 뭐 사진도 많이 찍고 한 달을 다녔어요. 그랬더니 하는 얘기가 뇌졸중의 소견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진을 찍어보자는 거예요. 그래서 사진을 수십 장을 찍었어요. 그러더니 의사가 마지막 날 판독을 해주는데 “목사님은 여러 가지 점에서 뇌졸중의 소견이 있어서 우리가 수십 장의 사진을 찍었는데 놀랍게도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연세에 비해서 아주 깨끗하고 맑은 뇌를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숨을 놨죠. 그러면서 사진을 일일이 보여줘요. 내가 생각해도 잘 모르지만 그림이 괜찮더라고요. 그런데도 계속 어지러워요. “뇌도 말고 깨끗하다는데 왜 그렇게 나는 어지럽고 어떤 때는 벽을 짚어야 될 정도로 어지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 이유는 하납니다. 목사님이 쓰는 정신의 힘을 육체가 감당을 못하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그게 감당이 되는데, 정신은 젊었을 때보다 더 많이 쓰는데 육체의 힘은 약해지니까 감당이 안 됩니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정신 쓸 일을 많이 줄이시든지 운동을 많이 하셔서 몸을 강하게 하셔서 떠받치시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둘 다 잘 못하고 있죠.
이게 무슨 뜻이냐면 우리의 기도생활은 결국은 육체에 대한 희생이 없이는 안 되는 거예요. 새벽에 자는 게 좋지, 새벽에 그 밤중에 기어 일어나서 바지 끼워 입고 세수 안 한 얼굴로 교회 나오는 것이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퇴근해서 얼른 집에 들어가서 씻고 파자마 바람으로 벌렁 누워서 뉴스나 보고 텔레비전 보는 게 좋지, 추운 겨울에 와 가지고 훌쩍 거리고 우는 게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내가 좋은 것은 다른 사람도 좋고 다른 사람이 싫은 것은 나도 싫은 거예요. 그게 육체에요.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육체와 영혼의 대화를 수시로 경험하는 거죠. 새벽에 일어나서 영혼이 육체에게 말합니다. “새벽기도 가야지? 종 울렸어.” 그럴 때에 육체가 “아우, 되게 힘드네.” “많이?” 그러면 그날은 그냥 자는 거예요. 그런데 “종 울렸어.” 영혼이 육체에게 이야기할 때에 육체가 “아우, 너무 힘들어.” 그럴 때에 “맞고 일어날래? 그냥 일어날래?”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특히 육체가 건강한 젊은 사람들은 기도 안 하면 회초리로 맞아야 되요. 왜냐하면 그렇게 자기의 정신을 통제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요구대로 살아갈 수 있는 육체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에요. 시간이 더 지나면 정신은 살아있고 하나님 앞에 많이 헌신 되었는데 육체가 이것을 감당하지 못해요. 그래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 하도다, 그 얘기는 젊었을 때는 절대 하면 안 돼요. 주님도 육신으로는 사람의 몸을 가지셨어요. 그분도 늦잠 자는 것이 더 편하셨고 그분도 금식하며 주리는 것은 육체의 본성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셨어요. 그래도 그렇게 사셨죠.
규범이 있습니까? 뜻을 세웠습니까? 뜻이 있습니까? 무엇입니까? 어떤 것입니까? 어떻게, 언제, 무엇을 뜻을 세웠습니까?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며 살면 안 됩니다. 주님이 어떻게 우리를 구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는데 우리가 그렇게 생각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뜻을 세우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내일 말고 오늘 예배시간에 일어나기 전에 뜻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기도생활의 뜻을 말입니다.
C. 치열한 삶
마지막 세 번째는 치열한 삶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35절 그 앞에 21절부터 34절까지의 모든 기록이 하루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는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처럼 회당에 들어가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가르치시는 것이 큰 권세로 나타났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도 서기관들이 가르치는 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회중이 알 수 있었으니 상당한 시간동안 그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귀신 들린 자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제압하시고 귀신을 꾸짖어 내어 쫓으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경련을 일으키며 소리를 지르며 나오고 많은 사람이 거기서도 예수님의 권세 있는 교훈에 놀랐으니 귀신을 내어 쫓으셨을 뿐 아니라 또 어떤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그들에게 주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심방 가셨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드러누우신 것을 보며 그를 치료해 주셨으니 어찌 치료만 해 주셨겠습니까? 적절한 위로의 말씀으로 그를 돌보아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숙소에 돌아오셨을 때에는 저물어 해질 때였고 이 숙소에는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 각색 병든 자들이 가득 모여서 예수님이 치료해 주심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근무 시간은 끝났으니 돌아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일일이 모두 그들을 고치셨고 아마 그날 밤 늦게까지 “너희들이 병 나았음을 받았으면 이렇게 믿고 살아라.” 교훈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35절에 새 날이 되었습니다. 새벽 미명에 예수님이 홀로 가신 것이 나오고,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틀림없이 밤늦게 까지 제자들과 함께 사역하시고 제자들은 피곤하여 골아 떨어져 있을 때 예수님은 홀로 조용히 기도하러 이 새벽의 시간에 나오셨을 것입니다. 죄는 없으셨지만 우리와 한결같은 육체를 가지셨으니 예수님의 육체는 매우 피곤하고 힘드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눈은 붉게 충혈 되시고 너무 고단한 일과로 입술은 부르트시고 혓바늘은 돋아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그 새벽의 시간에 아직 어두울 때 일어나셨으니, 그러니 아마 서너 시간이나 주무셨을까요? 그리고 한적한 곳, 벌판으로 가셔서 자신을 다 하나님 앞에 바치는 기도 속에 자기를 헌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기도장소가 정해져 있지를 않고 여러 곳이 등장을 합니다. 기도시간은 규범으로 정해놓으셨지만 장소는 그러실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병들고 무지하고 상처받고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예수님이 찾아가셔서 고치고 위로하고 살리셔야 되는 예수님이셨기 때문이죠. 그래서 성경에 보면 어느 곳에서는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고, 어느 곳에서는 산에서 기도하셨다고, 어느 곳에서는 강에서, 어느 곳에서는 광야에서, 또 어느 곳에서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얼마나 예수님의 생활이 바쁘고 일정한 장소에 매이지 않는 여행하시는 삶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여행하게 되면 제일 어려운 점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기도의 환경이 변한다는 것이죠. 시차도 바뀌고 방도 혼자 쓰지 못할 때가 있고, 주변을 돌아보아도 마음 놓고 하나님 앞에 매달릴 장소를 찾기 힘든 것이죠. 예수님이 바로 그런 생애를 사시면서도 어디서든지 하나님 앞에 교제의 세계를 상실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능력의 넘치는 삶의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수님처럼 마음을 쏟는 기도생활을 하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도생활 속에서 맛보는 영혼의 희열을 알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런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있어도 삶이 하나님을 향해 올바르고 열렬하지 않으면 이런 열렬한 기도가 불가능해지는 것이죠. 오늘날 여러분들이 이런 교제의 기도 속에 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실은 환경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치열한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어느 신학교 졸업반 학생이 수요예배 시간에 와서 저를 좀 만나달라고 그래요. 그래서 만났습니다. 뭘 상담하려고 하나 그랬더니 이 학생이 질문하기를 “저, 질문이 있는데요.” “뭡니까?” “설교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설교를 잘하려면 잘하는 사람한테 가서 물어봐야지, 이제 지하실 교회나 하고 있는 사람한테 뭘 물어봅니까? 다음 남은 질문은 뭡니까?” 그랬더니 “기도를 열렬히 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그대에게 열렬한 기도가 필요합니까?” 하고 물었어요. “열렬히 살아야지 열렬한 기도가 필요하지, 그대가 열렬히 산다면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열렬히 기도할 테고, 그리고 열렬히 기도하지 않고도 열렬한 삶을 산다면 그것은 육체의 열렬함입니다.” 심히 슬픈 기색으로 돌아갔고, 6개월 후에 테이프도 듣고 책도 읽고 해서 자기가 많이 변화되었노라고 나타났습니다. 저는 한 20년 전에 예수님의 새벽기도를 추적하면서 도대체 왜 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셨을까? 왜냐하면 새벽기도가 되게 힘들게 느껴지던 때였습니다. 우리는 밤 체질이에요. 밤이 될수록 정신이 집중 되요. 그런데 이 새벽기도는 정말 우리 같은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는 기도예요. 왜 예수님이 하필이면 이렇게 잘못 모본을 보이셔서 많은 사람을 고달프게 하실까? 여기에는 분명히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 열흘 동안을 열심히 생각하고 탐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발견을 하나 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예수님이 다른 시간이 아닌 이 새벽의 시간에 기도한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결론이에요. 새벽시간이 신비하거나 새벽시간이 밤보다 거룩하거나 그래서가 아니라 이유는 오직 하나, 낮에 기도하고 계시면 그 수많은 병든 사람, 진리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 그리고 상처받은 사람은 누가 돌보겠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대학에서 선생으로 있을 때의 일인데, 난 항상 신학과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기독교 교육과라고 여학생이 많은 과가 있어요. 거기서 한 시간 강의를 해 줄 수 있겠느냐고 그래서 “그럽시다.” 하고 갔죠. 그래서 이제 첫 시간인데, 신학개론이란 과목이었어요. 그래서 신학개론이란 어떤 학문이고 무엇을 공부해야 되는지를 첫 시간에 설명하면서 읽어야 될 책들을 설명해 주었어요. 그런데 저 뒤에서 야유 비슷하게 나오는 거예요. “에이, 씨, 크크크크” 하면서요. 내가 한 시간 동안에 한 60권 정도를 소개해 주었거든요. 다른 학생들은 안 그랬는데, 제가 그때는 젊고 혈기 방자할 때니까 그걸 예쁘게 봤겠습니까? 그래서 하여튼 반 쯤 들었다 놨어요. 그리고도 성이 안 풀려가지고 니들이 얼마나 후진 학교에 입학했는지 아냐고 말이죠. 그리고 “남들이 걸어갈 때 너희들은 뛰어도 시원치 않은데, 내가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60권의 책을 좋은 책이라고 소개해 준 것 때문에 나한테 야유를 해?” 그리고는 박살을 내 버렸어요. 그러니 학기 초에 그랬으니 한 학기 동안 사이가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항상 들어가면 이만큼 폭탄 맞은 것처럼 안 앉아. 그래도 기도 많이 할 땐데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어요. 그래서 빨리 빨리 끝내고 일부러 한 세 시간 남겼어요. 그리고는 이제 좀 부드럽게 이렇게 했어요. 그리고 무조건 대열을 무시하고 빽빽하게 모여라, 모여서 공부는 다 했으니까 마태복음에서부터 모든 구절은 아니고 중요한 구절을 “네가 한번 읽어볼래?” 하고 설명을 해 주었어요. 그러다가 여기에 오게 되었어요. 그래서 내가 설명했어요. “예수님은 그 전날 밤 그렇게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으시고, 심방을 하시고, 마지막엔 병자를 고치고 제자들도 일어나지 못하는 새벽 어두운 시간에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기도하셨단다. 예수님이 그렇게 간절하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를 쏟으시면서 까지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열렬하게 치열한 삶을 사셨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히브리서 5장에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고 했다.” 그리고 쭉 설명했는데 영적인 은혜가 있었어요. 그리고 수업 끝나는 시간이 되었어요. 그래서 “자, 우리 저 자매가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랬더니 일어나서 기도를 하는데 기도를 안 해요. 조금 있더니 훌쩍 거리고 울기 시작해요. 드디어 입이 열리고 기도가 나왔어요. “예수님, 너무 많이 자서 죄송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그래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습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을 힘입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것처럼 힘든 것이기에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이에요.
Ⅲ. 결론 : 기도로 나아감
자, 여러분들의 삶은 어떠합니까? 치열하고 정신없이 살지만 하나님 없는 삶은 아닙니까? 경쟁에 이기기 위한 치열한 삶, 내일을 위해 부를 쌓기 위해 경쟁하는 삶, 남들보다 더 높아지기 위해서 몸부림 치는 그 이상의 것이 아닌 그런 삶이 아닙니까? 우리는 결국 희망의 방황을 끝내고 돌아올 때에 항상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결국은 나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구나. 나 혼자 이길 수 있는 길이 아니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치열한 삶을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기도생활은 언제나 새벽에 불꽃처럼 타올랐고 그런 기도생활 속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와 교제하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기도의 불길은 당신이 못 박혀 죽으시는 십자가에서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 공생애를 시작할 때에 강에서 기도하신 것으로 시작하신 것처럼 또한 당신의 생애를 마치실 때도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 속에서 눈을 감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처지에 있든지, 누구이든지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을 헤쳐 보면 그렇게 주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아왔던 날들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채워지기 전까지 이 세상의 삶은 목마른 사람이 설탕물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끊임없는 갈증과 목마름이 꼬리를 물고, 끝없이 마시지만 그러나 진정한 갈증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설탕물과 같은 이 세상으로 해갈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은혜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십시오. 거기서 주님을 만나십시오. 주님께 온전히 엎드려 주님을 의지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지푸라기 같은 인간이라고 고백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다시 그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승리하는 기도생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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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도로 훈련하심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 1~7).
Ⅰ. 본문해설
누가복음 18장은 기도의 장이라고 불리 웁니다. 특별히 전반부에 나오는 두 개의 기도에 관한 비유는 오랫동안 우리 그리스도인의 입에 회자되는 내용입니다. 9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은 자기를 의롭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실패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우리가 읽은 1절부터 7절까지는 우리의 기도생활이 어떠해야 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한 보다 더 중요하고 기본적인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Ⅱ. 기도생활의 방해물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기도생활의 근간이 되는, 가장 중요한 기도생활의 두 방해물을 보게 됩니다. 기도생활의 두 방해물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1절의 말씀을 따르면 자주 그치는 것과 쉽게 낙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항상 기도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지만 우리의 기도는 쉽게 꺾어지고 끊어진다는 것이죠. 그리고 내적으로 계속 기도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올라야 하는데 그 불이 낙심에 의해서 쉽게 꺼지는 것, 이것이 기도생활의 두 가지 가장 중요한 방해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우리가 항상 기도하지 못하고 우리의 기도생활이 단속적이 되는, 자주 그치는 것은 만약에 이것이 내적 요인이라고 한다면, 우리 자신에 달린 내적 원인이라고 한다면, 낙심을 함으로 기도의 열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외적인 요인과도 관련이 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생활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대적인 이 두 가지의 기도의 나태함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A. 자주 그침
예수님께서는 여러 곳에서 우리가 항상 기도하여야 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환경과 상황을 이기며 하나님 앞에 언제나 열렬하고 살아있는 기도로 나아가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승리하는 생활의 기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었으니, 이것은 문자적으로 표현한다면 계속 기도하는 그 일이 끊어지지 않게끔, 마치 타오르는 불길이 사위지 않도록 계속 장작을 집어넣어 불길을 계속 일어나게 하는 것처럼 그렇게 기도생활의 열기를 끄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혀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기도에 관한 설교를 듣거나 책을 읽으며 기도에 관한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될 때에 여러분은 기도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또 그 결심이 있으면 그 기도를 실천하죠. 문제는 그것이 끈기 있게 계속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없고 쉽게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도생활의 문제인 것이죠.
자! 화살과 활의 비유를 가지고 생각해보시죠. 여러분들은 어렸을 때 아이들이 대나무 가지에다 실을 묶고 젓가락 같은 작은 것을 화살이라고 하며 그것을 가지고 놀던 경험들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쏘면 발 앞에 떨어질지언정 아이들이 그것을 들고 자기들이 무슨 고대의 병사가 된 것처럼 기뻐하고 놀던 경험들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장난감 활 말고 진짜 활이 있습니다. 그 활은 고대의 우리나라가 아주 질이 좋은 활을 만들기로 유명한 나라입니다. 보통 여러분들이 국궁이라고 불리는 이 활이 얼마나 나갈까 하고 궁금하지만, 그러나 이 화살의 길이는 굉장히 멀리 나갑니다. 이 화살이 보통 중국 사람들이 만들어 우리나라를 공격하곤 했던 그 화살의 사정거리는 330m에서 350m 정도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옛날에 안시성의 전투 같은데서 적은 병력을 가지고 그렇게 엄청난 외적들을 무찌르던 역사를 알고 계십니다. 그 역사를 보면 그 큰 전쟁에서의 승리비결이 활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시성 전투에서 사용했던 활을 분석한 결과 적의 화살은 350m정도 날아오는데, 아군의 화살은 430m내지 450m까지 날아갔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길이는 0,5km나 되는 거리이니 엄청난 거리이죠. 그렇게 먼 거리를 날아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 들어오는 출입구에서 인덕원 까지가 900m이니까 화살 두 번을 쏘면 인덕원 사거리까지 날아갈 정도였으니까 얼마나 멀리까지 날아가는 활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러니까 아군이 아직 적군의 사정거리에 들어오기도 전에 적군은 아군으로부터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을 맞게 되어 있으니 전쟁이 그만큼 유리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이런 활 말고 더 역사를 거슬러 가보면 발로 쏘는 화살이 있었습니다. 즉 정상적으로 어깨로 겨누고 쏘는 활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며 훨씬 더 큰 활과 화살로 두 발로 하늘을 뻗쳐 활대를 밀고 두 팔로 화살을 잡아당겨 하늘로 쏘아 올리는 것이죠. 이 화살은 거리에 있어서도 멀리 갈 뿐만 아니라 더욱 더 무거운 화살, 그래서 웬만한 방패도 뚫을 수 있을 정도의 관통력이 있는, 살상력이 강한 화살을 원거리로 날려 보내는데 사용하거나 거기에 집단이나 혹은 화약을 매달아서 원거리에 있는 적의 진지를 불태우는데 유용한 화살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활과 화살, 멀리 나가고 치명적인 활과 화살은 그 힘이 꺾이지 않고 힘차게 멀리 날아가는데 그 능력이 있는 것이죠.
여러분들의 기도생활은 어떻습니까? 하기는 하지만 애들의 장난감 활 같아서 발 앞에 뚝 떨어지는 그런 종류의 화살입니까? 아니면 두 발 사이에 활대를 밀고 날려 보내어 웬만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공기를 가르며 한없이 창공을 갈라 목표물에 떨어지는 그런 종류의 기도생활입니까? 새벽기도는 나오지만 그 많은 시간을 잠과 졸음 사이에서 기도의 뚜껑을 덮는 것은 전자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기도시간에 혼신의 힘을 다할 때에 마음이 그 기도제목을 향하여 불타오르고,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하나님의 그 뜻을 기도를 통해 이루는 그 일에 매진하고자 하는 전존재적인 불타는 것 같은 마음, 이런 것들은 바로 후자의 기도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간절한 기도생활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단절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육체의 게으름과 영혼의 싫증 때문인 것입니다. 육체는 수동적이어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심이 있을 때에는 이 육체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훌륭하게 수종을 듭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하나님을 향한 싫증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의 육체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당한 것을 요구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의 끊임없는 실천을 가로막는 커다란 방해물이 되는 것이죠. 이러한 육체의 게으름을 극복하는 방법은 이 육체를 끊임없이 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의 성향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사람은 이렇게 정신과 영혼의 영향력으로 육체를 통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육체가 원하는 소원대로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쉬고 싶을 때 쉬고, 행동하고 싶을 때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행동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육체를 쳐서 복종시킨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때 사용된 희랍어 단어는 복종시킨다고 하는 이 단어는 ‘둘라고고’라고 하는 단어인데, ‘둘로스’라는 노예와 ‘아고’ 라고 하는 이끌어가다 라는 말의 합성어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전에는 노예가 아니었던 사람이 전쟁에 지거나 빚에 팔려 노예가 되었을 때 옷은 노예 옷을 입었지만 그 마음은 결코 노예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자유민으로, 그리고 자기네 나라의 귀족으로 살았기 때문에 노예의 마음과 정신이 배어있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에겐 노예에 합당한 교육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데려다가 교육을 시켜서 노예의 차림새에 합당한 마음과 정신을 지니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게 바로 노예로 훈련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훈련의 방법은 이제 자유민, 적국의 귀족으로 지냈던 모든 자기를 스스로 주인 삼은 삶의 마음자세를 바꿔 놓는 것이죠. 이것은 바로 쳐서 복종시키는 것으로 시작이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들이 육체의 게으름과 타협하여 그 육체가 여러분들의 정신과 영혼을 끌고 다닌다면 여러분들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죽을 때까지 계속 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런 사람들이 열렬한 기도생활을 항상 힘쓰며 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육체의 소욕을 이기는 영혼의 힘, 성령의 은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날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을 보는 일에는 매우 어둡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삶이 얼마나 자주 게으름에 빠져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주님을 섬기되 모두 쓰고 남은 시간으로, 주님을 위해 봉사하되 모두 놀고 남은 힘으로 봉사하려고 하면서 힘이 없다고 고백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육체의 게으름은 여러분들의 영원하고 은밀한 대적이고 거룩한 삶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끝까지 싸워야 할, 숨 거두는 순간까지 다투어야 할 여러분들의 대적이고 기도에 있어서 이것은 정확히 사실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영혼입니다. 이 영혼의 싫증 때문에 기도생활이 방해를 받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새벽에 기도를 가야겠는데, 아침에 일어납니다. 밤늦게까지 TV를 보고 혹은 일에 시달려서 힘이 듭니다. 그때 영혼이 깨웁니다. “자, 종이 울리는구나. 새벽기도를 가자.” 영혼이 이렇게 육체를 향하여 말할 때 육체가 “나 너무 힘들어.” 하고 반응을 합니다. 그때 영혼이 “많이?” 그렇게 물으면 못하는 거죠. 오히려 “맞을래? 맞고 갈래, 그냥 갈래? 예수님이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넌 그것도 못 참니? 사지가 멀쩡하고 큰 병에 걸리지 않았는데 이겨야지. 힘 내.” 이렇게 해야지 기도가 된다는 거죠. 궁금한 것은 육체의 게으름은 게으른 성향으로부터 나온다고 할 때, 그러면 영혼이 이런 열렬함을 잃어버리는 싫증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입니까? 싫증은 변화 없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으면 싫증이 계속 되는 것이죠. 그 싫증은 결국 좋아하던 것에서 느끼던 기쁨과 행복이 서서히 사라지고 감퇴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향한 싫증을 마음에 간직하고는 하나님 앞에 열렬하고 지속적인 기도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주 옛날의 증기기관차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증기기관차는 앞부분에 커다란 석탄 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석탄을 많이 싣고 출발을 하고 앞부분에서 화차가 있고, 그 화차의 펄펄 타오르는 불길 속에 석탄을 집어넣는 화부들이 있습니다. 목적지가 거의 도달해서 속도를 줄이고 싶을 때는 불을 서서히 끄고 힘차게 달려야 할 때는 더욱 더 석탄을 집어넣어서 활활 타오르게 하면 이것이 물을 끓이고 증기의 강력한 힘이 터빈을 돌리고 그래서 이 힘을 기차 바퀴에 전달해 주는 것이죠. 칙칙 폭폭 이라는 이야기가 결국은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죠. 의성어예요. 그래서 칙칙 폭폭 하면서 기차가 힘차게 달립니다. 기차가 힘차게 달리기 위해서는 기차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뛰고 달리고 아무리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화차의 불길이 뜨겁게 타올라야 하는 것이죠. 인간이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에 불 탈 때 그의 기도생활은 환경을 이기는 놀라운 기도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달려가는 증기기관차의 빠른 속도는 불 붓는 화차에 달렸지만, 어떠한 환경의 변화에도 굴복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 열심 있는 기도생활을 위해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싫증이 깃들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속에 지루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성품과 그 성품이 어떻게 우리 인간을 위해 역사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그러한 선명한 하나님의 새로운 지식이 우리의 마음속에 역사할 때 우리의 마음은 뜨거워지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의 마음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데서 이루어지고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한곳에 모두 집약시켜놓은 엑기스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성경의 진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본성과 자연 만물 속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직접 보고 하나님을 알기에는 너무나 희미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성경의 진리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게 될 때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싫증으로부터 벗어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새롭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의 영혼은 열렬함을 지니게 되고 이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되는 깨달음들이 우리의 마음에 불을 지르게 될 때에 마치 화차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모든 객차를 움직이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을 기도에 적합하도록 움직이는 것입니다.
가끔 상담을 하다보면 죽어도 기도가 안 된다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저는 종종 기도하려고 애를 쓰지 말고 오히려 마음을 따뜻이 덥히도록 힘을 쓰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함께 모여서 박수를 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써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은 진정한 뜨거워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역동적인 신앙을 갖길 원하지만 우리의 육체적인 역동성이 영혼의 역동성을 불러오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쓸모없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 이상한 행동으로 자기의 앉은 자리를 두드리거나 의자를 흔들거나 하는 이상한 행동들, 그리고 의식적으로 자기가 방언을 하려고 노력을 하면서 그것으로 기도의 시간을 모두 채우는 것, 이러한 모든 외적인 행동들을 통해서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깊은 기도로 들어가게 하는 요인은 오직 하나예요. 정신이 하나님께 집중된 가운데 성령의 도움을 받아 그분 자신의 성품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성령의 은혜 안에서 그분과의 깊은 영교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참된 성경의 진리와 지식을 터널로 삼아서 그렇게 하나님과의 진정한 영적 교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새벽기도 때도 보면 자신도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말로 그렇게 고래고래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의 기도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좋은 것 아닙니다. 기도할 때마다 ‘주여’를 세 번 부르자, 열 번 부르자고 건의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도 모두 육적인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집중이야 말로 기도의 비결인 것이죠.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에게 말합니다. “기도를 하려고 애를 쓰지 말고 마음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집중하고 그 말씀이 너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도록 기도하라.” 그렇게 너의 마음을 열면 하나님 앞에 기도가 되기 시작하는데 한 번에 불이 떨어지듯이 열렬히 되는 기적적인 변화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게 활활 타오르는 불이 아니라 작은 나뭇가지를 벌판에 놓고 불을 피우는 것처럼 작게 불이 붙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때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손으로 잘 가리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 마음을 환경으로부터 잘 지키고, 담겨진 말씀의 불꽃이 잘 타오르도록 ‘후, 후, 후’ 이렇게 계속 불어주는 거예요. 그때 작고 하찮아 보이는 그 불길이 서서히 타올라 얼마 되지 않아서 마음 전체를 열렬한 기도로 태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항상 기도하라는 그리스도의 분부를 거행할 수 있는 것이죠.
B. 쉽게 낙심함
두 번째 기도생활의 방해물은 쉽게 낙심하는 것입니다. 자주 그치는 것이 인간 자기 자신에게 있는 요인이라면, 낙심하는 것은 환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은 환경과 끊임없는 접촉 속에서 하나님 앞에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이 있을 때 우리는 환경에 의해서 영향을 받되 무생물처럼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환경을 보되 생명이 없는 거울에 사물이 비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환경을 알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그 환경이 비치면 우리의 마음은 그 환경을 우리 속에서 해석해내는 창조적인 작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비치는 환경이 동일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그 비치는 것이 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게 되는 것이죠. 마음이 슬픈 사람에게는 옆에 있는 사람이 노래하는 것이 자기를 조롱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마음에 기쁨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 노래가 잔치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아침마다 소리 내는 새지만 마음이 우울하고 슬픔에 잠겨 있을 때에는 그 소리가 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쁘고 행복감에 빠져 있을 때에는 그 새의 소리하는 것이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잘 하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우리 자신의 마음을 아무렇게나 방치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지켜서 그 기도하기에 적합한 마음의 틀들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내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잠시 지나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영혼의 아름다움의 본질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한 의지의 크기예요. 그래서 이런 공식이 성립하는 것이죠. 인간의 아름다움은 본질적으로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한 사람의 존재의 가치는 그 사람이 지닌 선한 의지의 크기라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신다고 할 때에 그 중심이 영혼의 아름다움과 그가 가진 선한 의지의 크기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바라보시는 척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쉽게 낙심하고 마음이 침체에 빠지게 될 때에 이것들을 극복하는 일이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쉽게 낙심하는 마음을 가지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변함없는 기도생활의 굳건함을 유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상하기 쉬운 음식물과 같아서 적극적으로 그 음식을 부패시켜 버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대기 중에 방치해 두면 상하고 부패하여 못 먹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음식을 뜨거운 열로 덥혀 놓거나 혹은 끓이거나 혹은 소금에 절이거나 혹은 냉장고에 보관하거나 혹은 바짝 말리는 이런 모든 일들은 음식을 부패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인간의 다양한 지혜입니다. 만약에 음식을 이렇게 부패로부터 보호하는 지혜를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다면 부패하기 쉬운 여러분들의 마음을 보호하여 기도에 이바지할 마음으로 간직하는 비결은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마음을 지키는 것, 마음을 기도에 적합하도록 유지하는 것, 내가 이 일을 하고 이렇게 행동하게 될 때에 다음 시간에 기도하게 될 때에 이 행동은 나의 마음에 어떤 영향력을 줄까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생각 없이 몸에 해로운 음식이든 좋은 음식이든 아무렇게나 먹고 마시는 짐승과 같은 태도로 자신의 영혼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마치 우리의 살이 아니라 푸주간의 고기처럼 다루는 사람들에게서 열렬함이 유지되는 기도를 계속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죠. 결국 기도생활에 있어서 이러한 쉽게 낙심하는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지키려는 의지의 분발과 이러한 인간의 의지의 분발을 도우시는 은혜의 작용에 의해서 극복될 수가 있는 것이죠. 결국은 우리의 이 모든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열렬해질 수 있고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그 기도는 간절해질 수 있지, 그것을 결코 넘어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미묘하게 한 도시에 있는 재판관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이웃에 대한 존중하는 사랑은 경건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예수님 당시의 이 이스라엘의 신앙의 기준으로 볼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정 반대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나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 원한 맺힌 과부가 있었고 자신은 이렇게 고통을 받는데 원수는 번영을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회적 약자인 이 과부는 자기가 원한이 맺히도록 원수에게서 당한 이 한을 자신의 힘으로는 풀 수가 없었습니다. 법에 호소했는데 이 법을 맡은 사람이 바로 재판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쉴 새 없이 그에게 나아가 오직 길은 그 사람밖에 없다, 나는 스스로 이 원한을 해결할 수 없고 원수를 정의의 이름으로 징벌할 능력이 없으니 이 재판관을 의지할 마음 밖에 없다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재판관 앞에 나아가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때에 이 재판관은 이 여자의 문제를 이 여자를 위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의지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자기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도 없는 인간 말 종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한 가지 일 때문에 이 문제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여자는 정확하게 자신의 원한을 풀기를 바라고 원수를 갚기를 원하는데, 만약에 내가 이 일을 거절한다든지 혹은 잘못 처결한다면 이 여자는 끊임없이 간청할 터인데 이 일로 인해서 자기가 받을 고통의 크기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문제를 적절히 처결하기로 다짐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하필이면 이 비유를 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법을 맡아가지고 있는 사람이 만약에 끊임없는 탄원으로 그를 괴롭게 하기만 해도 올바른 것을 얻어낼 수 있거든, 하물며 이 모든 세상 만물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너희의 아버지시라면, 어찌 너희가 하나님께 올바르게 기도할 때 그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 더욱이 그 하나님은 재판장과는 달리 너희를 진심으로 사랑하시고 너희와 언약을 맺으셨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너희들이 밤낮으로 간절히 부르짖는데 그 하나님이 너희의 원한에 대해서 풀어주시지 않겠느냐 하고 하나님 성품을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Ⅲ.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기도함
결국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안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어떻게 나타난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나와의 관계는 아니더라도 우리 인간들과 맺으신 관계 속에서 알게 되는 것이죠. 성경이 우리의 기도에 불을 붙이는 이유는 성경이 주의 깊게 읽고 묵상하면 거기에는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만나 주셨는지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 그런 사람들을 향한 약속의 말씀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직접 볼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에서 어떤 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어떻게 역사할지를 예상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에 불을 붙이게 되는 것이죠.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의 이익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느 요일만 되면 로또 복권 당첨된다고 텔레비전에 앉아 있거나 혹은 일간 스포츠 신문을 부지런히 뒤집니다. 저는 한 번도 그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복권을 산 적이 없기 때문에 맞을 기대를 안 가지고 있지요. 이익과 관련이 된 일에 대해서는 온갖 마음을 모읍니다. 지금도 신문을 보면 ‘아깝다.’라는 생각이 드는 게, 그 몇 장 안 되는 신문의 두 페이진가 세 페이지를 주식 가격으로 가득 깨알 같은 글씨로 채우잖아요. 나는 읽지도 않는데 괜히 신문 살 때에 나는 그 요금을 내는 거죠. 그래서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진짜 주식에 투자하는 사람은 일면을 먼저 보는 게 아니라 주식 면을 제일 먼저 보죠. 이익과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기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다루시는 성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기도는 촉진되게 되는 것이죠. 결국 한 사람의 기도의 열렬함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크기에 비례하고,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현재적으로 그의 마음속으로 경험되어지는 그 작용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증진에 따라서 이 기도가 계속 되는 것이죠. 한때는 목숨을 걸고 기도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 기도를 그치고 태만한 삶을 살아갑니다. 기도시간은 그에게 있어서 회피하고 싶은 의무이고 다양한 핑계들로 하나님 앞에 매달릴 기회들을 회피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그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더 이상 자라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순간 하나님을 많이 알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더 이상 알지 않는 그런 신앙생활보다는 조금씩이라도 하나님을 계속 알아가는 꾸준한 신앙이 그의 기도생활을 꺾어지지 않도록 유지시키는 훌륭한 비결인 것입니다. 교회가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 중, 뜨겁고 열렬한 기도생활에 자기를 헌신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초 신자 아니면 새 가족들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신앙의 경륜과 깊이에 있어서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은 사람과 비교될 수 없고 우리 교회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우리 교회를 십여 년 씩 다닌 사람들은 설교를 들어도 몇 천 편씩 들었고 테이프와 책을 읽었어도 그 양에 있어서는 오늘 처음 교회를 옮긴 사람과 비교가 되질 않아요. 그런데도 어떤 때는 새로운 사람들이 더 열렬히 기도합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이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자의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과거의 일이고 오늘 내 마음속에 현재적으로 타오르지를 않아요. 그런데 새로 믿은 사람들은 지식의 분량은 작아도 작은 지식의 분량이 현재적으로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으니까 열렬한 기도생활에 자기를 헌신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기도생활은 계속 타오르는 그런 신앙생활이어야지, 지푸라기를 태우는 불과 같은 신앙생활이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에요.
Ⅳ. 원한을 풀어주시는 하나님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원한을 풀어주시는 하나님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하필이면 이 원한은 좋은 것이 아니고 이렇게 맺힌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다가 굳이 원한 맺힌 것과 연관을 지어서 우리에게 기도의 교훈을 주고 계실까요? 이것은 원한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작용의 어떤 점들이 기도의 특성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핵심적인 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이 원한을 예로 드셨던 것입니다.
원한 맺힌 마음의 특징은 원수를 향한 집중입니다. 여러분들은 종종 사극에서 부모를 죽인 철 천지 원수를 찾아 나서기 위해 장시간을 산속에서 수도 생활을 끝내고 칼 한 자루, 짚신 하나를 싣고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원수를 찾아 길을 떠나는 주인공의 이야기들을 보고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자, 이렇게 자신의 집안에 철 천지 원수, 엄밀하게 말하면 자기의 철 천지 원한을 갚기 위해서 길을 떠나는 이 사람에게 소원이 무엇일까요? 원수를 죽이고 원수의 돈을 뺏어서 큰 부자가 되는 것, 아닙니다. 원수를 죽이고 나서는 아주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것도 아닙니다. 원수를 죽인 후에는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그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오직 마음에 있는 소원 하나는 원수를 죽이는 것, 그래서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도록 그 존재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집중의 마음이 가져다준 효과입니다. 기도가 바로 이러한 마음의 집중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쳐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자, 오늘 여러분 마음에 손을 얹고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주님이 나타나셔서 “얘야, 많이는 안 되고 단 한 가지 네 소원을 들어주겠다. 여태까지 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마음에 맺혔던 소원이 있으면 하나 말해 봐라. 내가 들어주마.” 라고 할 때에 과연 “이것입니다.” 라고 즉시 울면서 주님께 말씀드릴 수 있는 사람이 여러분들 중에 몇 명이나 될까요? 원한이 있습니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가져가시고 나의 생명이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성취되지 않으면 안 되는 절실한 기도의 제목,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내 마음에 맺히고 맺혀 있어서 이것이 응답되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도 없을 것 같은 원한과 같은 기도의 제목, 그것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있습니까? 혹시 이러지 않을까요? “네 마음에 맺힌 간절한 기도, 무엇이든 한 가지만 말해보라. 소원을 들어주마.” 할 때 여러분들 이러지 않을까요? “에, 또, 뭐더라, 있었는데. 뭐라고 그럴까? 하나를 어디다 쓸까? 뭐를 달라고 그러면 좋을까? 예수님, 한 며칠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서편제라는 영화가 오래 전에 있었습니다. 장터에서 “이년아, 입만 벌리면 소리인 줄 아느냐? 소리라고 하는 것은 네년의 가슴속에 한이 맺혀야만 소리가 되는 거야.” 그리고 후려쳤습니다. 세상의 예술도 이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을 향한 그 기도가 힘 있고 하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원한이 맺혀야 되는 것입니다. 그 원한이 있습니까? 그 원한이 변화되지 않는 나 자신을 보면서 견딜 수 없고 나를 변화시키시든지 나를 죽이시든지 하는 개인 성화의 원한이든지, 구원받지 못한 우리 가족을 언제까지 이렇게 버려두시겠습니까? 벌써 아버지가 주님을 모르는 채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저의 원한 맺힌 기도입니다. 하든지 내가 돌보는 영혼들이 저렇게 변화되지 않는데 변화된 영혼들을 보고 이 세상에서 나를 기쁘게 하시든지, 아니면 변화된 영혼들을 보기 전에 저를 데려가시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하십시오. 그런 절실함이든지. 목회자라면 이 교회를 주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로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든지, 아니면 나를 죽이시든지 하든지, 그런 게 있느냐는 얘기에요. 물에 물 탄 것같이, 술에 술 탄 것같이 말이에요. 예배를 드리면 공연 같고, 기도를 드리면 염불 같고, 성경을 읽으면 소설을 읽는 것 같고, 봉사를 하면 노는 것 같고, 이 무슨 신앙생활이냔 말이에요. 결국 그러한 신앙의 태도가 결국 그런 맥없는 기도생활을 양산해 내고 있지 않습니까?
Ⅴ. 결론 : 하나님께 집중하라
신앙의 모든 신비는 하나님을 향한 집중입니다. 그 속에서 그 모든 거룩한 효과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바로 거기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런 원한이 우리의 마음속에 간절히 맺혀있는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 예배가 원한이 맺힌 것 같은 예배생활입니까? 무슨 원한이 맺힌 사람들이 예배 시작하고 20분이 지났는데도 미안한 기색도 없이 들어섭니까? 배교에 가까운 예배를 청산하자는 설교를 들은 지 8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게 무슨 예배입니까?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난다면 그것이 이적이 아닙니까? 정직한 심령으로 여러분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대한 집중이 없는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조롱입니다. 하나님께 향한 집중이 없는 모든 봉사는 저 좋아서 하는 취미생활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집중이 없는 예배의 참석은 자기의 양심을 달래기 위한 것이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원한처럼 맺힌 간절한 기도, 우리 주님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고 죄를 지으실 가능성도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기도는 언제나 원한이 맺힌 것 같은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육체에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삶은 기도를 능가할 수 없고 기도는 삶의 테두리 안에 갇히게 마련입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를 여러분처럼 드리는 사람들이 넓은 의미의 예배에서 승리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에서 그렇게 실패하고 원한도 없이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성공할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집중이 없는 신앙생활은 결국 무기력한 기도생활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우리의 흐트러지고 방만했던 마음을 한곳에 모으도록 우리에게 기도제목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제목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신 생애를 살면서 자신을 기도에 온전히 쏟으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조금만 눈을 감고 여러분 주위를 묵상해 보십시오. 기도의 제목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여러분들의 헌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보십시오. 그런데도 나태하기 짝이 없는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기도의 영의 불을 끄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도의 불기운이 모두 합쳐진 것이 교회 전체의 기도의 불꽃입니다. 여러분들은 거기에 보태는 사람들입니까? 물 뿌리는 사람들입니까? 더군다나 교회에서 쉼 없는 분쟁이나 만들어내고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 교회의 타오르는 불에 물을 끼얹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다 회개하여야 할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각성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 순간, 이렇게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헌신을 본받아,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리는 은혜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육체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는 성경의 교훈을 중히 여기고 성령의 은혜를 따라 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승리하는 기도생활 1
승리하는 기도생활 1 (09/6/14, 주일오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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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기도생활 4 (09/7/05,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5 (09/7/12, 주일오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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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기도생활 7 (09/7/26,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8 (09/8/02,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9 (09/8/09,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0 (09/8/23,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1 (09/9/06, 주일오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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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기도생활 14 (09/10/11,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5 (09/10/18, 주일오전예배)
4.기도와 기도자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 9-14).
Ⅰ.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지난주에 이어서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교훈의 말씀입니다.
Ⅱ. 바리새인과 새리
오늘 여기에는 바리새인과 새리가 등장합니다. 이 바리새인과 새리는 각각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고, 그러나 한 사람의 기도는 거절당하고 또 한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졌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와 기도자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 그 자체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올바른 기도가 되고 하나님 앞에 효용이 있는 기도가 될 지에 대해서 많이 탐구하려고 합니다마는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가 기도자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새리를 우리들이 생각해 봅시다.
A. 이 비유를 주신 목적
먼저 주님이 이 비유를 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과부의 열렬한 간청을 통해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지만, 이 가르침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또’ 라는 말로 이어집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앞에 나온 비유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않는 기도의 외적인 태도를 우리에게 주로 보여줌으로써 낙심하지 않는 기도의 실천에 대해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다면,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새리와 바리새인의 비유는 기도하기 전에 우리들이 먼저 기도에 적합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한 비유입니다. 즉 이 두 개의 비유는 껍질과 속과 같아서 기도의 태도와 자세를 보여주는 동시에 오늘 우리들이 살필 이 세리와 바리새인의 비유를 통해서는 어떻게 그렇게 열렬하고 간절한 기도를 이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B. 기도하기 전에 사람이 됨
우리는 흔히 기도하기 전에 먼저 기도에 적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이 가볍게 넘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열렬히, 많이 기도하도록 예수님께 분부를 받지만, 그러나 많이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경우는 우리에게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또 열렬히 기도하도록 가르치지만, 그러나 열렬히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는 기도는 많이 있습니다. 이 기도의 열렬함은 일시적인 열렬함과 지속적인 열렬함으로 나누어집니다. 일시적인 열렬함은 우리들이 성령의 특별한 도움이 없이 우리들의 의지와 정신의 힘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렇게 생겨나는 열렬함은 대부분 그 기원을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에게 두고 있습니다. 이런 열렬함은 일시적인 경우에 그칩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열렬한 기도생활을 이어가게 만드는 지속적인 열렬함은 하나님이 열렬하게끔 그 사람을 만들어주시지 않으면 지속될 수가 없는 것이죠.
아마 여러분들도 흔히 너무나 자신의 기도생활이 형편이 없다는 자각을 하게 되고 열심히 기도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어느 한 순간은 여러분들이 스스로의 정신의 힘으로 뜨겁고 열렬히 기도할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분들이 시작한 열렬함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불붙여지지 않을 때 목으로는 아프게 기도해도 마음은 건조해지기 시작하여 결국은 그 열렬함을 그치고야 마는 경험을 여러분들은 자주 했을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습관적으로 태도가 잘못 되어서 늘 열렬하게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의 열렬함이지 영혼의 뜨거움은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의 열렬함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시고 감화하시는 일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은 기도 그 자체만을 바꾸려고 하지, 기도하는 사람 그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성경에서 응답받는 기도의 중요한 조건을 믿음으로 제시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믿고 의심하지 않는 자는 받을 것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이러한 약속의 말씀은 믿음이 기도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믿음으로 기도한 사람들이 받은 응답을 열거하며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믿어도 응답이 안 될 때가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솔직히 시인해야 합니다. 믿기만 하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굳게 믿어도 그 기도가 항상 응답되는 것은 아니죠.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고 하는 이 마음의 작용 뿐 아니라 그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가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참으로 믿는 사람이면 그 사람이 그 믿음 때문에 변화되었을 것이고, 기도가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열렬한 기도로 이어진다면 기도 그 자체 때문에 열렬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있는 기도의 뿌리인 성령의 은혜와 역사에 의해서 그 사람이 열렬한 기도를 지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열렬하고 뜨거운 기도를 계속 할 수 있을 때 그 사람 자신이 이미 하나님 앞에 변화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도가 변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 자신이 하나님 앞에 변화되어가고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Ⅲ. 기도와 기도자
여기에서 우리는 단순한 기도의 내용이 아니라 기도와 기도 자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A. 기도에 있어서 차별의 경험
이러한 기도와 기도자의 관계는 기도에 있어서 차별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들이 느끼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현실적으로 어떤 때에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잘 응답되고, 같은 내용을 기도했는데도 하나님께 응답되지 않는 것을 경험합니다. 다른 사람의 기도는 잘 들어주시는 것 같은데, 나는 더 많이 믿고 더 열렬히 기도하려고 애를 쓰는데도 이상하게 하나님은 나의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일에 있어서는 매우 인색하시다는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여러 곳에서 바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과의 사귐, 하나님과의 사랑의 사귐의 열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죠.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반적 사랑과 개별적 사랑이라는 교리를 만나게 되는 것이죠.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 독생자를 주셨고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 것이죠. 여기에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피조세계를 가리킨 다기 보다는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이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모두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는 사랑으로 우리 안에 있는 형상을 당신 자신의 모습으로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할 때부터도 지혜와 그 무한한 사랑하심으로 창조하신 것처럼, 또한 지금도 그 모든 인간들을 뜨겁게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비할 수 없이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고, 이 사랑이 바로 사도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노래했던 바로 그 사랑,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던 바로 그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선언했습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 세상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바로 경점인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는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도 하나님께 그런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어야 될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불신 상태에 있는 모든 이웃들도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아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이교도들과 우상숭배자들도 넓은 의미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이렇게 무한한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같은 정도로 하나님의 이 일반적인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 받는 사랑은 차별이 없을지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그 사랑의 현재적인 경험의 깊이는 차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많이 받고 있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 하나님의 사랑에서 소외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철저하게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는 그 관계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은혜와 의무라는 말로 요약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별적인 사랑 속에서 우리들이 충만함을 느껴지게 될 때에 기도는 더 깊어지게 되고 기도의 응답은 훨씬 더 현실적인 것이 되어 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사람인데도 내가 풍부한 기도의 응답 속에 살아오던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그렇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솔직하게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도는 결국 인격적인 사귐의 열매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이 부탁하면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을 어떤 사람이 부탁하면 들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것은 누가 부탁해도 들어줄 수 없는 것이 있지만,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일지라도 그 사람과의 친소관계에 의해서 들어줄 수도 있고 들어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어떤 사람이 했을 때는 용납해줄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의 행동일 경우에는 불쾌해하고 용납해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과의 사귐의 정도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인격적인 사귐의 법칙은 어느 정도 사실로 적용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개별적인 하나님의 사랑 속에 거하게 되면 기도의 응답은 매우 잦아지게 되는 것이죠. 그리하여 이런 하나님의 사랑 속에 거하는 사람들은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이 간증거리이고, 이런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도응답 받은 것이 신기한 간증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응답해주시지 않는 것이 일상적인 경험이었는데 어쩌다가 한번 사소한 응답을 받고나면 그것은 오랫동안 두고두고 울궈먹을 수 있는 간증거리가 되지만, 늘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특별한 간증의 제목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좋으신 하나님을 친밀하게 느끼는 것이야말로 그 모든 기도의 내용보다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관건이 기도보다 기도 자인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와 기도자의 관계는 설교와 설교자의 관계와 아주 유사한 것입니다. 설교자가 설교자로 준비되면, 설교자로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손에 들려진 준비된 원고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 설교를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은 말하기에 적합한 원고를 준비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신앙생활하면서 설교자들에게 그런 설교 들어본 적이 없습니까? 설교가 너무 훌륭하고 정말 은혜가 되기는 하는데 저 사람 설교 같지는 않다. 라고 하는 느낌, 그런 거 들어본 적 없습니까? 저는 기도 속에서 그런 걸 많이 경험합니다. 특별히 대표기도 할 때 그 기도는 너무 은혜롭고 바른 기도인데 저 사람 속에서 우러나왔을 거라고 믿어지지 않는 기도를 가끔 예배시간에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죠? 기도의 내용이 어떠해야 훌륭한지에 대한 지식은 있는데 자신의 삶이나 존재가 그 기도를 따라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 기도는 평소의 삶과 관심사를 반영하지 못하고 기도시간에만 기억되고 기도시간이 끝나고 나면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잊혀지는 기도문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기도와 기도자의 격차가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기도는 인격적인 사귐의 열매이기 때문에 인격적인 사귐의 사랑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도가 매우 쉽고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이런 인격적인 사귐 속에 멀어질 때에 거기로부터 멀어질 때에 이 기도는 그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어려운 기도가 되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면 주니미과의 풍족한 인격적인 사귐 속에 들어있는 이 사랑의 연합된 시기가 얼마나 드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기도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그 사랑은 어떤 식으로든지 고백되어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죠.
기도는 인격적인 사귐의 열매라고 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기도관과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관이 어떻게 현저히 다른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이방인들의 기도관은 이러한 인격적인 사귐으로부터 나오는 열매라는 관념이 거의 없습니다. 다만 형식적이고 반복적인 이 종교적인 행동이 그 자체 안에서 어떤 힘을 가지고 있어서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는 힘을 움직여 놓는다고 하는 것이 관점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치성과 정성이라는 개념은 등장하지만 사귐이라는 개념은 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터주 대감 앞에 건물을 지을 때마다 고사를 지내지만, 그렇게 고사를 지내는 사람이 터주 대감을 사랑한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터주 대감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 고사를 지낸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사람의 운명을 가르쳐준다고 자부하는 무당과 신접한 사람이 있고,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예전에 그런 사람에게 가서 여러분들의 운명을 알아보려고 하는 시도를 해 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훌륭하게 맞췄다고 해서 여러분 중에 그 사람을 존경하거나 사랑하게 된 사람이 있습니까? 또 그런 관계를 지속적으로 갖고 마음과 자신의 모든 생각을 그에게 일치시키고 싶은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점쟁이는 점집에서만 만나고 싶지, 다른 곳에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방인들의 기도는 자기에게 요구사항이 있을 때 그 신에게 기도하고 싶을 따름이지, 그 기도를 들어주는 그 신 이상의 신과는 만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이런 식으로 기도에 접근하게 되면 우리는 결코 기도에 응답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예로 예수님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충고하셨습니다. 문자적으로 이것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같은 말을 반복해서 기도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입니까? 그렇다면 모일 때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은 도대체 어떤 것이죠? 여러분! 또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같은 기도의 제목으로 반복해서 간구하심으로 스스로 중언부언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이 중언부언은 바로 이방인들의 기도의 태도를 염두에 두고 비교하신 것이에요. 그들은 같은 말을 반복해서 신에게 올리며 자신의 마음은 그 기도의 내용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상태이죠. 그래서 자신의 비는 그 행위 자체가 어떤 힘과 법칙이 되어서 신을 바꿔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런 것은 하나님의 올바른 관념에 매우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기도할 때에 그 기도의 내용에 부착됨이 없이 그렇게 형식적으로만 떠들지 말라고 하는 그런 뜻인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러한 충고를 통해서 기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 거룩하심의 빛 앞에서 우리의 존재의 어떠함을 성찰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바꾸는 것이 먼저이지 하나님을 바꾸는 것이 먼저가 아니고, 우리를 고치는 것이 먼저이지 우리의 기도를 정교하게 고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먼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소설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느 형식적인 신자가 하나님께 매일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부르짖었습니다. 주위를 살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기도를 듣고 있으면 그렇게 기도하고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끝마치고 집에 들어가서 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시 많은 사람들이 기도시간에 나왔기에 손을 높이 들고 거룩하게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나님” 하늘 문이 드르륵 열렸습니다. 그리고 예기치 않은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 내가 여기 있다. 네가 나를 찾았느냐?” 심장마비로 죽어버렸답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한 깊은 인식, 그리고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확고한 지식, 거기에 기초해서 그 빛 앞에서 자기의 존재와 상태가 어떠한지를 깨닫는 그 깨달음은 제일 먼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들은 기도의 풍부함을 누리며 살 때에 시작하는 기도의 대부분이 돈을 주십시오, 시간을 주십시오, 명예를 주십시오, 일군을 주십시오, 이런 기도가 아니라 나 자신을 변화시켜 달라는 기도로 대부분이 채워졌던 기도를 하게 될 겁니다. 필요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하러 나아갔다가 기도가 깊어지면서 자기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러 왔는지는 잊어버리고 오히려 주님 앞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되고 자기를 고쳐 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 자신의 경험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때의 그 기도가 어떤 기도였습니까?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B. 사람됨을 넘어서지 못하는 기도
결국 이 기도는 사람됨을 넘어서지 못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이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그 기도의 내용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그 기도하는 사람이 그 기도의 내용에 합당하지 않을 때 그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현저한 조롱이 되는 것입니다. 이엔 바운즈 목사는 “한 사람의 사람됨은 그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의 그 사람됨이다.” 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의 사람됨은 기도를 넘어설 수 없고, 또 그 기도는 그 사람 안에 갇혀서 기도하는 것만큼만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인 것만큼만 그렇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자신을 바꾸려고 하는 의도가 없이 기도를 통해서 마치 하나님의 팔을 비트는 것처럼 세고 열렬한 기도는 주님을 정신 차리게 만들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엄하기 짝이 없는 기도에 대한 생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여러분들의 열심이나 소리 지르는 고함에 의해서 깜짝 놀라거나, 혹은 팔이 꺾여서 땅을 치면서 여러분들에게 그 정도면 내가 들어 줄 거야, 라고 항복을 하는 레슬링선수처럼 하나님을 다루는 것은 매우 위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인 것입니다. 우린 어디서도 그와 같은 인본주의적인 가르침을 기도와 관련해서 성경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을 보십시오. 절대적인 의미에서 바리새인은 정말로 새리 보다 의로운 삶을 산 사람입니다. 새리는 실제로 바리새인보다 나쁜 짓을 한 나쁜 놈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렇게 올바르게 살아온 바리새인은 하나님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 이었습니다마는 온갖 악을 저지르고 동족을 늑탈한 이 못된 새리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고 그 기도에 응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차이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기도문의 열렬함 때문이었습니까? 유창함과 시간의 길이로 말하자면 바리새인이 더 길고 유창했습니다. 격식을 따르는 것으로 말하자면 바리새인의 하늘을 향한 그 기도가 훨씬 그 당시로서는 경건한 태도였고, 고개를 떨구고 가슴을 치는 이 새리의 기도는 격식을 깨뜨리는 기도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흐느껴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슴을 친 이 동작은 하나님 앞에 보이기 위한 거룩한 동작 이었다기 보다는 자기가 깨뜨려지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통회할 때 느끼는 신체적인 현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너무 간절하게 집중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빛 앞에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 느낄 수가 있었고 이렇게 더러운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자체를 자신이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매달리는 것 이외에는 자신이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통을 느끼고 있었고 그 고통은 그의 폐를 응축되게 만들고 모세혈관을 조여 왔습니다. 그 통증이 그의 가슴속에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치게 되었고 이러한 충격은 그의 혈관을 확장시켜 그로 하여금 가슴이 응축되는 그 고통을 경감시켜 주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 속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가슴을 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자신 안에서는 하나님께 용납될만한 어떤 좋은 것을 추호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온전히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무엇을 원하였을까요? 그가 무엇을 원했을까요? 중요한 것은 그가 물질이나 돈이나 더 많은 자랑이나 명예나 더 좋은 상태를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바뀌기를 바랐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고 악한 인간이었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기에는 불결한 인간이었는데 자신의 힘으로는 이것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돈은 자기의 힘으로 어느 정도 벌 수 있었지만, 자기를 고치는 일은 자신의 힘으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 앞에 열납 될 수 없는 자신을 용납되게 만드는 이 힘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이것을 요구할 수 있는 어떠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희망은 그분의 자비와 긍휼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죄인도 용납하시고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한 가닥의 기대를 걸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배우고 그분의 탁월한 거룩함과 그의 가슴 저리는 사랑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자기반성이 없는 인간들이 어떤 욕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세속적인 사람들이 응답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응답을 통해서 온 것이 아니라 그냥 세상 살아가는 이치 속에서 저절로 일어난 것이에요. 대부분이에요. 더욱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도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시도를 동시에 하고 있을 때, 그때 그것은 하나님이 정말 그를 사랑하시는 표시로 주시는 진실한 기도의 응답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것입니까? 여러분은 그런 경험 없습니까? 기도하면 그 일이 이루어지기는 하는데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느껴지지 않던 경우 말입니다.
어느 성도가 그런 간증을 했습니다.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믿었답니다. 그 증거가 기도하면 항상 그 일이 이루어지더라는 거지요.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믿었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접하면서 자기가 응답이라고 믿었던 많은 기도생활에 대해서 중대한 회의가 생겼다는 거죠. 그게 뭐냐면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서 오는 것이냐는 거죠. 믿음이 떨어졌기 때문입니까? 그게 아니죠. 이 사람이 말씀의 빛이 들어가면서 의문을 제기한 것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기도하면 어떤 일들이 이루어주는데, 이게 만약 진정한 응답이라면 그것을 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마음은 내게 왜 안 느껴지는 것일까라는 것이에요.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저희가 원하는 것은 주셨을지라도 저희의 영혼은 파리하게 하셨느니라.” 이렇게요.
자, 배고파서 만나를 주셨고 만나를 먹다 물리니까 고기 달라고 울었습니다. 그래서 배 터지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기를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파리한 채로 그냥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물을 움직이는 섭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아주 무한한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이 무엇을 기도해서 얻는 그것은 나 하나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을 맺고 하나님이 섭리하셔야 할 수 많은 사람들과 관계가 있는 것이죠.
보디발의 집에 그렇게 많은 복을 내리신 것은 보디발과 하나님은 아무 관계가 없었지만 그러나 거기에서 종살이하는 요셉의 앞길을 섭리하기 위해서라고 할 때 누가 그 사실을 그 당시에 믿는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우리는 기도할지라도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 속에서 깊은 교제를 느끼는 이것은 기도의 내용보다 우리 자신의 변화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Ⅳ. 결론 : 겸비의 영으로 기도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자신의 기도가 자신 속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러한 기도를 드리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고쳐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고쳐가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이 변화에 있어서는 변화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시고 또 그런 사람들을 주도적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깨닫고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세워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가 끊임없이 필요함을 깨닫고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로 훈련시키시는 모든 과정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변화시키는 과정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내가 이 기도를 하기에 적합한 기도자인지를 되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신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주님과의 보다 더 깊은 인격적인 사귐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방해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이 거룩한 사람이 되어 갈 때에 우리의 사람됨은 우리의 기도를 바꿔 놓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어떻게 보면 무모한 약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덧붙이셨습니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내가 이루리라.”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의 기도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그 사람을 바꿔놓지 못하지만 변화된 사람은 기도의 내용을 고칩니다. 그래서 지극히 세속적인 이유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가 주님을 만나고 나서 기도의 제목이 바뀌어버리고 오히려 맨 처음 기도했던 기도의 제목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라는 고백으로 끝내는 경우를 우리들이 얼마나 많이 보게 됩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때때로 고난을 만납니다. 그 고난 뒤에는 도구로 사용되었던 사람들이 있고,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찌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이 고통을 물러가게 해 주시고 나를 찌르는 저 사람들을 하나님이 정리해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그러나 많이 기도하면서 그 찌르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집중하다 보면 그 집중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앞에 드러난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문제는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원수도 아닌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 속에 얼마나 많은 감정의 찌끼들이 있는지를 배우게 되고 이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불결한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고 악을 행하던 사람들보다 사실은 자기 안에 더 많은 악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에 우리는 이제 이 문제가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신앙의 문제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거룩함을 경험할수록 우리의 죄악 됨을 발견하게 되고, 죄악 됨을 바로 발견하게 될수록 그 거룩의 빛 앞에서 하나님의 치료를 받는 것 이외에 참된 소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더욱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꾸어진 기도 자가 되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에서 은혜의 사모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오늘부터 당장 실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예배 끝난 후에 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좋고 교회 나오셔도 괜찮습니다. 어디서든 한 곳에서 무릎을 꿇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 마음 안에, 여러분 가까이에 계신지,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인격적인 사귐의 교제 속에 들어가 있는지를 점검해 보십시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들이 스스로 자신을 신중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의 결과를 가로막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귐의 뿌리가 든든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기도생활이 거의 열매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을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누구도 가르쳐 줄 수 없는 은혜의 세계 속에서, 누구도 돕는 사람 없이, 여러분 홀로 오직 주님 한 분만을 바라보면서, 그래서 여러분들이 죄를 짓고 악을 행하고 주님과의 그런 깊은 사귐으로 들어갈 만한 자격이 없을 때일수록 여러분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을 그치고, 여러분들을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의 그 보혈을 힘입어 우리 주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여러분들의 몸부림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이 드디어 변화되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들은 변화된 기도 자가 되어 변화된 기도를 하나님께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풍성한 기도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나를 위해 기도하고, 교회와 이웃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도구들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그는 아무 곳에 없어도 어디에나 있는 사람이고,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어도 모든 것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기도 세계 없이 껍질로 살아가는 사람들,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승리하는 기도생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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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기도가 막힐 때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막 11; 25).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기도에 관해서 말씀해 주실 때에 기도생활에 있어서 우리의 기도가 막힐 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부분적으로 가르쳐주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어느 문맥에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좀 더 감동이 됩니다. 앞부분에서는 예수님이 기도에 있어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희가 만약에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우라 한다 할지라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죠.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기도라기보다는 명령을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의 변형된 형태의 기도이죠. 이러한 믿음이 기도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강조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믿음에 대해서 강조하시다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가 막힐 때 어떻게 되는가? 어떤 요인으로 인해서 우리의 기도가 막힐 때가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의 기도가 막히는 원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죄가 있을 때, 또 가정생활에 있어서 부부간에 화목이 깨뜨려질 때, 성령을 근심케 하는 일들을 계속 하고 있을 때, 이러한 모든 때에 우리의 기도는 수시로 막히게 되는 거죠.
A. 영적 교통으로서의 기도
여기에서 우리들이 우리의 기도생활이 영적 교통으로서의 기도생활이라는 측면을 깊이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우리들은 흔히 기도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간절히 빌면 하나님은 그것을 주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마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기도는 그것보다는 훨씬 폭넓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예수님 당시에 이방의 신들에게 비는 사람들의 간구하는 행위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생활과의 극명한 차이가 나타나게 되는 거죠. 이방인들이 자기의 신께 비는 것은 단지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을 간절히 신들에게 청구하면, 신들을 졸라서 신들로부터 그것을 얻어내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면 이 사람들은 그 신을 자기의 요구를 들어주었다는 점에서 신들을 공경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식의 관계는 일종의 신과의 거래관계입니다. 이게 이방 사람들이 기도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관념이었어요. 정성을 들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빌고 간구하는 행위의 진실성을 나타내는 것이지, 이렇게 빌고 간구하는 관계가 주고받는 거래의 행위를 능가하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기독교에서 하나님께 비는 이 기도의 행위는 그러한 주술적인 의미에서의 청구행위가 아니라 기도는 그보다 훨씬 더 먼저 있어야 되는 어떤 관계를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먼저 형성되어야 하는 그 관계가 영적 교통으로서의 기도입니다. 즉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관계가 있고, 그 하나님이 영이시고 우리가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영과 영혼 사이에 관계가 이루어지고, 그 교통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의 그 기도가 반영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할 뿐만 아니라 또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서 가족관계안에서 하나님과 영적 교통을 이루는 것이에요. 그 안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런 영적 교통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물론 이 세상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본다면 이 기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하나님께 비는 행위가 진정한 기도의 행위에요. 이러한 기도의 영적 교통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하고 교제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이러한 영적 교통이 풍부하게 이루어져 있으면 기도생활이 힘차고 생기 있게 되고, 영적 교통에 막힘이 있게 되면 이러한 기도생활이 활발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B. 기도와 하나님의 지혜
여기에서 우리들은 기도와 하나님의 지혜의 관계를 보게 되는 것이죠. 즉 기도하는 우리는 어떤 다급함이나 안타까운 사연이 있어서 그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요량으로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행위를 하게 되죠.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의 행위를 통해서 당신과 우리 사이에 있는 영적이고 인격적인 교통을 더 돈독하게 하는 기회로 사용하시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는 우리의 기도가 풍부해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는 하나님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을 마음이 우리 속에 충만해지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되고, 이렇게 기도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영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점검하게 되죠. 그래서 인간이 다급하고 어려운 일이 생긴다고 해서 절대 기도 많이 하는 법이 아니고 문제가 없다고 해서 기도를 안 하는 법이 아닙니다. 문제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냐가 문제지, 하나님이 기도할 마음과 은혜를 주시면 하나님이 새로운 문제들이 자신에게 있는 것을 발견하게 해주십니다.
자, 보십시오. 우리가 은혜가 식고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면 우리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기준 자체가 나예요. 내가 배불리 먹고 마음 편하고 직장에서 모든 것이 잘 되 가고 사업이 잘 되고 하면 난 특별히 기도제목이 없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면 이 기도의 문제라고 하는 중심이 하나님께로 옮겨가요. 그래서 하나님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기도의 제목이에요. 그러니 내가 만족스러울 때는 내 기준으로 볼 때는 문제가 없을 수 있지만, 하나님에게 문제가 없을 때가 어디에 있겠어요?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그 인간 자체가 하나님께는 문제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형통케 해 주셔서 그것 때문에 기도 제목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인간의 마음 보, 그 자체가 하나님에게 문제에요. 그런 것들을 하나님과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문제를 보게 해 주시는 거죠. 그래서 기도는 안 하면 안 할수록 할 게 없고, 은혜를 많이 받아서 하면 할수록 기도는 한이 없이 솟아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기도를 안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늘 자기가 기도를 별로 못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이게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우리가 이런저런 일을 하고 사업을 하고 밥을 먹고 이 세상에서 즐겁게 사는 동안에도 우리는 수시로 자기를 반성하게 되죠. 그렇지만 기도하는 시간만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그 시간만큼 우리 자신을 적나라하게 발견하게 되는 때는 많지 않습니다. 특별히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쏟아 붓는 그것이 기도거든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댐에 물이 가득 고여 있다가 비가 이렇게 많이 쏟아질 양이면 수문을 할 수 없이 열지 않습니까? 수문을 확 열고 그 물이 쏟아져 내려오게 됩니다. 그때에 그 넓은 호수에 고여 있던 모든 물은 열려있는 문 하나를 향해서 모두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 온 호수의 물이 그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거기로 빨려 들어가듯이 그 물들이 몰려들면서 엄청나게 한 시간에 수천 톤의 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똑같이 우리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고, 마음을 그렇게 쏟아 부으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 기도가 정말 하나님 앞에 이르는 기도죠.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그렇게 쏟아지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냐에 달려있는 것이죠. 기도할 때 마음이 물처럼 녹기 싫은 사람이 어디에 있고, 기도할 때 피가 심장에 펌프질하는 것처럼 쏟아 부어지는 그런 종류의 기도를 하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이 평소에 하나님을 향하여 있지 않은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성경 지식은 어차피 우리의 지성 속에 쌓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영적 교통이 막혀도 지식 그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어느 한 순간 폭포수처럼 쏟아지다가도 우리와 하나님의 영적 교통이 막히게 되면 언제 기도한지 모를 정도로 완벽하게 하얗게 잊혀 집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기도의 세계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죠. 이게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에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지금 나를 어떻게 여기고 계시는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죠. 이게 바로 우리의 기도생활에 관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III. 미워하는 마음과 기도
그러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기도하다가 막히는 때가 있다. 그때에는 누구에게 혐의가 있던지 그 사람을 용서 하여라.” 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미워하는 마음과 기도와의 관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기도에 있어서 믿음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죠. 믿음이 없는 기도는 영혼이 없는 사람의 몸과 같아서 진정한 기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러 곳에서 기도할 때의 이 믿음을 아주 강조했고 당신 자신이 바로 이러한 믿음 속에서 사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기도가 역사하지 못할 때가 있음을 우리에게 암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기도생활에 있어서 믿음과 같이 커다란 조건에 의해서도 기도가 형통하게 되지 않고 막히게 되는 것이 무엇이냐? 이게 바로 미워하는 마음이에요.
A. 기도와 성도의 사랑
여기에서 우리들은 기도와 성도의 사랑의 새로운 관계를 보게 되는 것이죠.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이것은 아마도 성전에 올라가서 드리는 기도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새리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 서서 기도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개인적인 기도생활 중에서도 특별히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 의식적인 기도를 가리킨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우리말에서는 좀 어려운 번역이 되어 버렸습니다마는 희랍어 성경에 보면 이런 의미입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너희가 아무에게나 대하여 거스르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거든······.” 그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여기에서 혐의라고 하는 것은 뭔가 범죄 했을 때에 의심되는 것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런 뜻은 아니에요. 여기에서 관심은 기도하는 나 이던지, 내가 마음에 품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이던지 둘 중에 누가 잘못했느냐 그 문제가 아니라 너희가 기도할 때에 누군가가 너의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다면 즉시 용서해라, 그 뜻이에요. 그게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일 수도 있고, 내가 잘못한 것일 수도 있고, 또 누구도 잘못하지도 않았지만 오해가 생겨서 거슬리는 수도 있고, 또 그 사람도 좀 잘못했고 이 사람도 좀 잘못해서 서로 마음에 거슬리는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미워하는 감정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것이 기도하다가 만약에 생각이 난다면 즉시 그를 용서 하여라, 이 얘기예요. 용서하라는 이야기는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누구의 죄를 용서 한다 기 보다는 그렇게 마음에 거슬리는 것, 그것을 가지고 있지말고 그것을 용서를 통해서 풀어버려서 그 사람과 너 사이에 막힘이 없게 하라, 그렇게 해야지만 하나님께서 너희의 허물도 용서해 줄 것이다.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자기가 옳았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자기가 틀렸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어쨌든 하나님 앞에 허물이 있으면 기도가 막히는데, 그 사람과 너 사이에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이 너의 기도를 막으신다는 뜻이에요.
여기에서 우리들은 기도와 성도가 사랑하며 사는 것이 어떻게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창조하실 때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옆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우애하며 그렇게 서로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원하셨고 아래로는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인간들이 하나님과 함께 가족관계를 이루면서 이 땅에 주신 모든 피조물들의 세계를 질서 있게 다스리고 통치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이 더욱 더 충만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죠. 기도는 하나님이 이렇게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방편이에요. 그러니까 그 방편을 인간이 잘 사용해서 자기의 속을 차리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기도의 방편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주신 수단이 기도인 거죠. 그러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열심히 기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신과 사고, 마음의 경향과 틀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계획과 목적에 부합하지 않을 때에는 그 기도를 열렬하게 지속할 수가 없는 것이고, 또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된 속에서도 열렬히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르짖을지라도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는 경고를 여러 차례에 걸쳐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열렬해지는 기도는 하나님 앞에 열납 되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가 우리의 기도생활을 돌아보면 우리가 많이 기도하고 풍부한 기도의 영속에서 살았을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경험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바로 하나님 사랑의 품 안에서 태어나는 아이와 같아요. 그래서 아이들이 부모의 사랑 속에서 태어나서 부모의 사랑 안에서 자라는 것처럼, 기도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영적인 사랑의 교통의 관계 속에서 풍성하게 자라는 것이죠.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확장하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 사랑은 끊임없이 안으로 안으로 오그라들지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밖으로 밖으로 끊임없이 확장되어 가는 것이죠. 그래서 성도의 마음이 기도하기에 가장 적합한 심령이 되어 있을 그때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많이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성도들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을 때에요. 그래서 진심으로 그 성도들을 사랑하고, 성도들을 존중하고, 성도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거죠. 이때에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두 이루어지지만, 이루어지는 모든 뜻들은 성도의 기도를 사용해서 이루십니다. 기차는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해서 기차가 공중으로도 달리고 물속으로도 달리고 기차가 바다도 건넙니다. 그런데 그 기차가 달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레일이에요. 기차 레일이 올바르게 깔리기만 하면 그 위로 모든 기차는 힘차게 달립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루셔야할 모든 뜻들은 거침없이 이루어지고 불가능한 일이 없이 성취되지만, 그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기도라고 하는 방편을 통해서 이루어가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서 당신의 성도들의 기도를 사용하시는 거죠. 그래서 사실은 우리가 기도하다가 기도가 어려워지는 가장 큰 이유는 기도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려워요.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의 부패한 본성 때문에, 그리고 끊임없이 다가오는 이 세상의 감각적인 표상들 때문에. 그것이 끊임없이 흔들어놓는 우리의 마음, 육신의 정욕,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충동이 일어나면서 우리들이 기도생활에 합당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요동하면서 방해를 받는 거죠.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기도는 우리의 모든 삶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기도 하나만을 아무리 잘하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 됩니다. 기도 그 자체의 뿌리는 삶이요, 사람됨이기 때문에 사람이 바뀌고 삶이 고쳐지는 것만큼만 기도가 되고 또 거꾸로 기도를 해야지만 사람도 바뀌고 삶도 바뀌지, 그 어느 날 사람이 기계 부속도 아니고, 어느 날 드라이버하고 펜치를 가지고 와서 사람 머리 뚜껑을 열고 뭘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결국 기도와 삶은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사는 것만큼만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하는 것만큼만 하나님 앞에서 살 수가 있는 것이죠. 이것은 예배와 여러분들의 삶의 관계와 아주 흡사한 거죠. 여러분들이 일주일 동안 살았던 삶은 오늘 여러분들이 예배드리는 수준이에요.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렇게 예배를 드리면서 시간에 대한 의식도 없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깨닫는 마음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의지를 읽을 수 없고, 또 읽었다 한들 거기에 굴복할 수 없고, 그렇게 된다면 그것이 일주일동안 여러분들의 삶이 그렇게 완고하고 하나님하고 상관이 없던 삶임을 입증하는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 일주일 동안 살 여러분들의 삶이 이미 오늘 예배 속에서 생생하게 재연되는 거죠. 여러분들이 예배시간에 지루한 마음을 갖고 졸고 끝나는 시간을 기다린다면 일주일 동안 하나님 지긋지긋하게 여기면서 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배를 위해서 우리의 삶이 바뀌어야 하고 삶을 위해선 예배가 고쳐져야 하는 거죠. 하나님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자기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죄 짓고 악하게 행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때에도,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때리고 치셨으나 결국은 우리를 미워해서 때리고 치신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때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우리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우리를 고치기 위하여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때려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치셨던 것이죠. 결국은 마지막에는 사랑이 그렇게 하게 하신 겁니다. 나만 그렇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미워하고 있고 지금 기도하려고 하는데 내 마음에 거슬리는 그 사람도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큼 하나님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며 결국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인데, 내가 하나님을 용납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진 채,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온 마음을 다하여 간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쏟아 부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있기 때문에 기도가 안 된다 기 보다는 엄밀하게 말하면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기도에 적합하도록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만 쏟아 부어지지 않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성도가 하나님 앞에 기도 할 때에 이 마음이 하나님과 지체들과 나아가서는 이 세상에 있는 이웃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는 것은 기도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일이에요.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되면 시적인 언어가 많아집니다. 똑같이 누군가를 미워할 때도 언어가 많아집니다. 그래서 소설 한 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에 빠지게 되면 누구나 다 시인이 됩니다. 사랑하게 될 때에 솟아오르게 되는 언어는 논리가 없는 시적인 언어이지만, 누군가를 미워하게 될 때에 솟아오르는 언어는 풍부하긴 한데 모두 논리적인 언어입니다.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하겠지? 그럼 난 이렇게 말할 거야. 그럼 그 사람이 또 이렇게 반론하겠지? 그럼 너는 왜 그랬냐고 옛날 얘기를 할 거야.’ 그러면서 밤새도록 둘이 내 안에서 언쟁을 합니다. 이게 극도에 달하면 화병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둘이서 치고받고 싸우면 열 받아서 뇌졸중 같은 것으로 쓰러지는 거예요. 하나의 마음이 두 개의 대화를 감당할 수 없을 때 이런 정신현상까지 나타나는 거예요. 이것도 가만히 보면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가르쳐 주죠. 사랑할 때 솟아나는 언어는 시적인 언어고, 미워할 때에 솟아나는 언어는 논리에요. 그래서 참 놀라운 게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이해 못 할게 없어요. 이해하는 방식이 뭐냐면 논리 때문에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 게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게 사랑이에요. 부부사이에 “내가 뭘 잘못 했는데? 너는 잘한 게 뭐 있어. 한번 대 봐.” 이런 대화가 오고가기 시작하면 사랑이 자꾸 고갈되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냥 믿고 살아야지. 하나님도 모두 이해되어서 하나님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 같은 것은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 사랑할 때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풍부한 세계를 지니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사랑해야 합니다. 가족을 두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고, 남편과 아내 사이에 아주 독한 마음을 품고 미워하고 마음속으로 그렇게 서로를 마음에서 접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겠어요? 그 마음이 그 마음인데. 그래서 더욱이 이러한 관계가 성도들 간의 관계일 때는 더욱 심각하죠.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한 지체로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인데, 그 몸을 이루는 지체들끼리 서로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마음에 거치는 것이 있고, 심지어는 죄를 짓고 하게 되면 안 되죠. 얼마 전에 교회 안에서 서로 돈 빌리고 하는 것에 대해서 한 번 혼났죠? 그러고 나서는 없어진 것 같아요. 이제는. 또 들리면 그때는 핵폭탄을 쏠 거예요. 그게 뭐에요? 그렇게 돈 거래를 하고 그렇게 해서 결국은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고 미워하고 막 갈등을 하고. 결국은 너나 할 것 없이 기도의 세계가 다 허물어져 버리고 교회 전체가 기도의 통로가 막히게 되는 거죠. 이게 얼마나 사단의 훌륭한 궤계이겠어요? 한 사람을 데리고 가서 살인을 하라, 도둑질 하라, 더 큰 죄를 지으라, 이것은 성도가 쉽게 굴복을 안 하지만 마음속에서 속삭여요. “야, 그 사람은 너를 계속 괴롭게 하는데 너 한번 생각해 봐라.”
한국 교회에서 유명한 목사님이 있는데, 아직까지 현직에 계시고 큰 교회를 담임하고 계신 목사님인데 그분이 한 번 그런 말씀을 하세요. 토요일 날은 설교준비를 하는 시간인데, 그분도 좀 바쁘겠어요? 교인이 몇 만 명씩 되니까. 그러니까 당신의 방에서 문을 잠그고 설교준비를 하는데 꼭 토요일 날 성도한테 전화가 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전화를 받는데 “목사님, 저 아무개 집사입니다. 목사님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네, 괜찮습니다.” “목사님, 제가 너무너무 마음이 아파서 전화를 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아무개 집사, 아무개 권사, 아무개 성도 있잖아요. 그 사람들 억수로 목사님 갈구데요.” 항상 그런 전화가 토요일 날 온대요. 그러면 이제 전화를 내려놓고 요동이 친대요. 아까 얘기한 대화가 오고가는 거죠. ‘내가 목회할 때 뭘 잘못했어? 지들은 십일조도 안 하고.’ 막 그런대요. 그러면 가족들이 저쪽에 앉아서 모두 목사님 설교준비 잘 하라고 기도한대요. 통성기도로. 내가 나중에 지혜가 생겼어요. 무슨 전화든지 토요일 날은 연결하지 마라. 결국은 기도도 마음으로 하는 것인데, 마음이 그렇게 요동칠 때 무슨 기도를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거죠.
B. 은혜와 성도의 기도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의 기도는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사실 어떻게 보면 사실일 수 있잖아요. 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결점, 나를 향해 품은 안 좋은 감정, 배타적인 마음, 이런 것들 사실일 수 있잖아요. 그런데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좋은 사람이 되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에요.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태어났고 여러분들의 가족을 비롯해서 교회에, 그리고 이 세상에 얼마나 여러분들과 연관된 사람이 많은지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여러분 때문에 말할 수 없이 행복해 하는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있습니까? 있으면 한 번 큰 소리로 “아멘” 해 보세요. 없잖아요. 거 봐요. 여러분, 여러분 자신도 누군가에게 완전한 만족을 준 적이 없어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최선을 다해 산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어 놓으셨지만 이 사람이 자신들끼리는 살 수가 없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이 사랑을 힘입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다가 보면 자기가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잘 들으세요. 십만 명을 먹여 살리는 사람은 그렇게 돈을 버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인지는 몰라도, 한 사람이라도 사랑하려는 사람은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절실하게 알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이렇게 기도의 문이 막힐 때마다 결국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자기가 사랑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 나에겐 사랑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고 영적인 군사로서 목숨까지 버리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 목숨을 버리는 게 낫지,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은 한 번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에요.” 왜냐하면 죽는 것은 살기를 거부하고 한 번에 죽는 거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매일 죽는 일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거죠.
주님의 은혜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줘요. 주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아요. 자기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압니다. 자기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고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이 세상에 자기의 아들을 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와 사랑을 알지 못하는 무지막지한 죄인이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이에요. 그거를 누군가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과정을 통해서 터득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자신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의 은혜만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고백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향해 열렬히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이 뜨거운 사랑의 용광로가 되어서 지체들의 잘못을 녹이고, 가족들의 잘못을 녹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과실을 용서하면서 자기 안에서 이것들을 녹여내는 거죠. 하나님의 은혜가 그런 일을 하게 되는 거죠.
IV. 기도의 문을 여는 용서
결국 기도의 문을 여는 용서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땅에서 매이는 사람들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기도의 문을 여는 용서가 필요해요. 마음 깊은 곳에서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우리의 기도는 끊임없는 기도의 모양을 가져도 그 속에서 기도의 향연이 피어오르지 못해요. 누군가 누가 잘못 했든지 그건 상관이 없고 누군가와 거리끼는 것이 있고 거슬리는 것이 있어서 마음에 끊임없는 미움과 그 사람을 마주치기 싫은 그런 원망을 우리의 마음속에 실어 온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진심으로 용서하고 서로를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기도할 수 있도록 은혜의 문을 열어주시는 거죠.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활짝 열린 기도의 문 속에서 주님과 교통하며 하늘에 있는 모든 것들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이루어야 할 뜻들이 얼마나 많이 있겠어요? 그 뜻들을 이루시는데 우리의 기도를 사용하고 싶어 하십니다. 힘차게 달려가야 우리의 기도의 열차가 장애물을 만나서 연기만 내뿜고 앞으로 가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향해서나 우리를 위해서나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어요? 그러므로 종종 우리는 달려가던 우리의 인생길을 멈추고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지 돌아봐야 합니다.
V. 결론 : 기도의 세계를 지키는 일
마음속에서 누군가를 깊이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을 때에 우리의 기도는 수시로 막히게 됩니다. 이때 여러분들은 마음깊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인지 생각하고,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을 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사랑을 아주 진한 핏빛으로 느낀 것처럼 또한 여러분들이 가장 싫어하는 그 사람도 예수님이 위하여 생명을 버리신 바로 그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하고 순종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속으로 그를 깊이 용서하십시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고 그에게 ~이 변상하십시오. 그리고 변상할 능력이 없다면 당장 변상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용서를 빌고 언약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의 모든 짐들을 털어버리십시오.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용납하십시오. 그러면 막혔던 기도의 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기도 속에서, 당신 자신이 위하여 생명을 버리신 것처럼 그렇게 여러분들이 예수를 위해 자기를 드리며 기도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6.공동체적 기도생활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행 12:5).
I. 본문해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교회의 공동체적인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가르쳐줍니다. 이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에 솟발과(?) 같은 중요한 세 영적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바로 그 세 사람이었습니다. 헤롯 임금은 본래 신앙이 없는 사람이었고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야고보를 체포했고 그리고 처형했습니다. 결과는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환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야고보보다 좀 더 큰 지도자인 베드로를 체포하고 그리고 그도 죽이려고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제 교회는 이 끔찍한 소식을 접하고 한편으로는 야고보를 잃은 슬픔을 누르고 또 한편으로는 교회에 남은 지도자인 베드로도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큰 위협 속에서 교회가 함께 기도하고 있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왜 그렇게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야고보를 아무 속절없이 한 번의 죽임을 당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내버려두시고 베드로는 그렇게 기적적인 방법으로 천사를 통해 구원하셔서 교회로 돌아가게 하셨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모두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야고보는 옥에 갇혔을 때 기도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죽었고 베드로는 위해서 기도해준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성경 해석도 전부를 동의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계획 속에서 일어났고 그 결과 한사람은 죽었고 한사람은 풀려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베드로가 옥에서 풀려난 것과 교회가 간절히 기도한 것 사이에 관계가 있는 것으로 오늘 성경이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II. 기도생활과 공동체의 삶
여기서 우리는 기도생활과 공동체의 삶의 관계를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을 때 우리는 구원은 개인적인 사건일지 모르지만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모든 삶의 상태는 공동체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머리가 되신다고 할 때 이것은 세 국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그리스도는 유기체적인 생명의 머리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떨어져 나온 영혼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영적으로 접붙여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내려오는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살기를 마치 접붙여진 가지가 원 둥치에서 진액을 먹으며 꽃피고 열매를 맺는 것과 같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개인적인 구원도 이렇게 공동체적인 지표 속에서 유기체적인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국면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머리가 되시고 우리가 그분께 접붙여질 때 이것은 유기체적인 통치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국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연으로 예수를 만났든지 간에 구원받은 후에는 우리가 한 교회의 일원이 되고 그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의 또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보이는 교회의 공동체의 지평 속에서 구현해가며 믿음생활을 해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때 그는 자신의 모든 인생을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바치기로 작정했고 주님의 통치를 받는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기로 다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그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는 교회생활의 질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의 계획이 보이는 교회의 질서를 통해서 실현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고 주관적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는 매일매일 감화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이 본문과 관련된 공동체의 삶으로서의 기도생활은 이런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에 세 번째 국면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공동체적 섬김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많은 일들을 하심으로서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는 우리가 계승할 수 없는 사역이 있고 계승할 있는 사역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물로 자기를 드리신 것이라든지 중보의 행위는 우리가 계승할 수 없는 사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복음을 전하시고 그리고 가르치시고 영혼들을 사랑하셨던 이런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에 의해 계승될 수 있는 사역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교회로 하여금 당신이 하시던 그 일을 뒤잇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이 살았으면 계속 하셨을 그 일들에 참여하게 하기 위하여 당신 안에서 교회를 선택하고 부르셨으며 당신이 그 섬김을 총지휘하시기 위해 친히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III. 공동체적 기도의 능력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영혼들을 섬기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왕으로서,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의 성직을 감당하시면서 능력 있게 그 일을 수행하신 그 이면에는 기도의 생활이 있었습니다. 그 기도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를 맺으시고 거기로부터 충만한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으시면서 참 사람이심에도 불구하고 참 사람됨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렇게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삶을 살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그에게 접붙여진 모든 교회가 그와 함께 유기체적인 섬김의 공동체로 봉사하며 살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예수님이 당신의 성육신 안에서 기도하셨던 것처럼 동일하게 또한 당신의 교회인 이 복음적인 기독교 교회 안에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의 분신인 것처럼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한마음을 품고 기도하는 공동체적 기도의 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어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속에서 하나님께서 야고보는 죽게 내버려두시고 베드로는 기적적으로 살려주셨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 한 가지는 있습니다. 이렇게 야고보가 죽고 베드로가 곧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이 사실은 교회로 하여금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으게 만들어주었고 이런 교회의 공동체적 결속과 이런 연합의 정신에서 우러나온 공동체적 기도의 능력에 대한 경험은 이후 신약교회의 발전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이미 이전에도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예루살렘 교회는 커다란 핍박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 함께 모여 온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기 시작했고 이때 공동체적으로 한마음이 되는 것을 경험하였을 때 성령의 강림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찢기고 나누어지는 교회의 모습 속에서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또 하나는 이제 커다란 핍박에 직면하여 사도들이 매를 맞고 문초를 당할 때 교회는 이 어려운 소식을 들으면서 한마음으로 기도했고 그 일치된 공동체의 기도 속에서 성령의 강한 역사가 부어져 그들을 담대하고 또 능력 있는 공동체로 무장시키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이 12장 뒤편에 보면 바로 이제 안디옥 교회에 의해서 바나바와 바울이 선교사로 파송되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도 교회는 한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주신다는 사도행전의 10장의 놀라운 이방선교의 장이 열리는 순간에도 고넬료와 베드로가 기도 속에서 함께 만남으로 한 공동체적인 기도의 결속을 통해서 역사에 새로운 장이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그 기도 속에서 큰 능력이 나타날 때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따라 교회가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오늘날 교회가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 때문에 서로 의견이 갈리고 나누고 찢고 싸우는 이 불필요한 소모전, 오늘날에 국회에서 보는 것과 같은 이런 가치 없는 소모전에 자기를 허비하는 대신 온전히 모아져서 한마음으로 가치 있는 일들을 위해 기도한다면 교회는 작아도 훨씬 능력 있게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에 맡기신 사역들을 훌륭하게 수행해나가게 될 것이고 우리는 보다 더 충성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A. 구체적으로 기도함
그러면 이런 공동체의 기도의 능력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적어도 이런 공동체적인 능력을 가져오게 한 세 가지 요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그들의 구체적으로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더라” 고 말입니다. 이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가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은 단 하나 하나님께서 이 베드로를 옥에서 풀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기도는 개인적인 기도들은 참 구체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아들 대학 잘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으로는 성이 풀리지 않아서 대학 이름과 학과까지 대고 심지어는 수능점수까지 매기면서 하나님 앞에 이 점수를 맡고 이 대학에 이렇게 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딸을 그저 좋은 데 시집가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는 부모 아무도 없습니다. 키는 얼마 이상이고 신앙은 좋고 돈도 많고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도합니다. 자기 아들이 장가갈 때 예수만 믿으면 그저 성질이 어떻든지 그저 배운 게 있든지 없든지 괜찮습니다. 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비록 예수를 믿어도 이런 사람이어야지 되겠습니다. 저런 사람이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기도합니다. 자기가 몸이 아플 때도 그 기도는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하나님, 그냥 건강주십시오. 그렇게 기도안 하고 신경통 낫게 해주십시오. 협심증 고쳐주십시오. 심지어는 감기 떨어지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도합니다. 그런데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할 때는 두루뭉술합니다. 우리 교회 북주십시오. 어떻게 응답된 것을 확인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지체들 강건하게 해주십시오. 무엇을? 무엇을 강건하게 해달라는 것인지, 뭐 육체의 힘을 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무슨 강건을 달라는 것인지. 이게 사랑할수록 기도의 자세를 구체적이 되고 관심에서 멀어질수록 추상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안 부르고 머릿속으로 이 사람, 저 사람 수십 명 얼굴을 떠올리며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인 저를 위해 기도할 때도 분명하게 목사님 강건하게 해주십시오. 무엇을? 충분히 강건할 때도 많습니다. 기도하려면 허리를 아프게 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고 우리 목사님 말씀 충만하게 해주십시오. 그게 무엇인데? 어떻게 응답을 확인을 할 것인지, 충만한지 고갈되었는지 어떻게 확인할 것인지, 그러지 말고 다음 주에 설교에 능력을 주십시오. 이렇게 분명하게. 사랑하면 기도가 그렇게 구체적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수련회를 떠나도 애정이 없는 사람은 매일 기도하는 게 사고 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니, 사고가 그렇게 무서우면 가지말지. 사고 안 나고 돌아오는 게 무슨 목표입니까? 은혜를 받고 영혼들이 변화를 받아야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이게 공동체를 위한 기도는 우리의 교회에 은혜가 충만하게 해주십시오. 어떻게? 뭐가 은혜 충만인데. 우리 목사님 편안하게 목회하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말고 속 썩이는 누구, 누구 변화시켜주십시오. 차라리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우리의 기도는 두루뭉술합니다. 여기를 보십시오. 두루뭉술했습니까? 이들은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결사대를 조직하거나 사제단을 만들어서 헤롯과 협상을 벌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세계평화가 아닙니다. 헤롯에게 복수해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비는 기도는 오직 하나 베드로를 건져주십시오. 그 구체적인 기도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교회를 위한 공동체적인 기도가 능력 있게 나타나기 위해서는 베드로의 자세와 제목들이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 우리 구역장들에게 복 주십시오. 아무개 구역장, 변화되게 해주십시오. 아무개 구역장은 가르치는 것을 잘 못 가르치는데 능력을 주십시오. 아무개 구역장은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더해주십시오. 이렇게 구체적으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는 그 기도에 응답을 확인하게 되고 그 기도에 능력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B. 간절히 기도함 : 엑크테노스()
두 번째는 이들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그랬습니다. 이 “간절히”란 기도가 희랍어 성경에는 ‘에크테노스’ 라고 나오는데 여기에서 ‘익스텐션’이라는 영어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은 ‘쭉 뻗어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야구를 참 좋아했습니다. 그 야구를 예를 들면 참 이해가 될 것입니다. 투수가 공을 던질 때 딱! 소리가 나면서 공이 하늘높이 솟아오릅니다. 그러면 막 수많은 관중들이 박수를 칩니다. 와! 그러는데 그다음에 높이 솟았는데 이상하게 힘이 없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플레이 아웃,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공은 딱! 치니까 하늘높이 솟았는데 떨어지지 않고 포물선을 그리면서 쭉 뻗어나갑니다. 그래서 야구를 오래 한 사람들은 눈감고도 딱! 하고 맞는 소리만 들어도 그 소리를 들으면서 공이 뻗어나갈 공인지 올라가다가 떨어질 공인지 잘 안다고 합니다.
우리 기도가 열렬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사실이지만 열렬한 모든 기도가 간절한 기도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할 때 열렬하려고 애쓰지 말고 간절히 기도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러면 간절한 기도가 열렬해지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봅시다. 어느 순간에 기도생활을 하지 않고 있다가 어떤 말씀을 듣고 나니까 확! 깨달음이 오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면서 확! 솟구칩니다. 그래서 그냥 울고, 불고, 하면서 손을 들고 막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은 새벽기도를 안 나오고 퍼질러 잡니다. ((?) 뒷면인데 잘린 것 같습니다.)
이제 딱! 하고 소리를 내면서 하늘높이 올라가지만 뻗어나가는 힘이 없는 주저하는 기도입니다. 개인적인 기도생활에서는 거의 열렬함이 없고 함께 기도할 때만 습관적으로 손짓발짓 하면서 그렇게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영적인 열렬함이 아니라 육적인 열렬함이 아닙니다. 에크테노스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가 기도하는 숫자를 보고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한마음이 되었는지 그들의 기도 속에 에크테노스라고 하는 것이 있는지 이것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그리고 그 기도가 뻗어나가는 그 기도가 될 때 그 기도는 강한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한순간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자책감속에 몸부림칠 때 그는 불현 듯 열렬해진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열렬함은 있지만 뻗어나가는 지속적인 간절함은 결핍되었기 때문에 그 기도는 능력 있는 기도로 나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교회가 한사람, 한사람이 이렇게 주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으로 절실하게 자신의 마음을 기도에 헌신할 때 이것이 하나, 하나 엮어져서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만들고 이렇게 기도할 때 교회의 이 기도는 아주 강하고 큰 힘을 가진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 초대교회의 교부들과 성도들은 이 기도를 공중을 향해 쏘아 올리는 화살로 비유했습니다. 힘이 없는 기도는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늘에서 올라가다가 떨어지고, 조금 힘이 있는 기도는 그 하늘을 뚫고 이층 하늘까지 올라가다가 악한 영들이 내려치면 화살이 부러지고 땅바닥에 떨어진다고 믿었고, 가장 높은 수준의 기도는 새들이 날아가는 하늘을 지나 이층 천에 공중권세 잡은 자들의 하늘을 꿰뚫고 그들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히며 삼층 천에 계신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는 기도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기도의 힘을 결정하는 것이 간절함입니다. 뻗어나가는 간절함과 지속성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간절함과 지속적인 기도 속에서 공동체는 열렬한 기도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이 한번 눈을 들어서 교회의 공동체를 돌아보십시오. 많은 지체들이 열심히 일하지만 그러나 별로 남는 것이 없는 사역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혈을 기울였는데 열매가 적을 때 섬기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였지만 마음이 나뉘고 하나 되지 못하고 분쟁과 그리고 다툼이 가득할 때, 우리는 여기에서 비로소 마음이 하나 되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쭉 뻗어나가는 에크테노스의 기도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 이외에 다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한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할 수 있어야 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매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교회의 공동체적인 기도의 능력은 상승하게 되는 것이고 이런 절실한 공동체적인 기도의 그 능력 안에서 교회는 비로소 강한 능력을 가지고 머리되신 주님의 분부를 따라서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하며 이 세상과 교회와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서 공동체적인 기도의 제목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 시간에 여러분들이 뉴스를 보고 있습니다만 이것을 제작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여러분 아십니까? 몇 번을 그만 두려고 했을 정도로 힘든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많은 시간들, 지체들이 섬기고 봉사하고 교회에 많은 자원을 가지고 만듭니다. 여러분들이 이 뉴스를 보는 것은 9시 MBC나 KBS를 보는 마음으로 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교회의 기도제목이 무엇이고, 공동체의 구석구석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담임목사가 무슨 사역을 하고 있는지를 보고 기도하라고 카메라를 메고 광주니 대전이니 따라가면서 그것을 찍는 것입니다. 아무 목적이 없습니다. 내가 외부에 그게 알려져서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관심도 없고 성도들에게 그것을 보여주어서 기도하게 하기 위해서 삼척이니 전북이니 전라남도니 무슨 섬이니 멀다 않고 따라가서 이것을 알려주어야 성도들이 기도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충분히 예배 속에 한 순서가 된다고 나는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마음을 모아서 간절히 기도할 때 공동체의 기도는 능력 있게 되고 그 능력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가는 길을 가로막는 많은 것들을 무너트리며 우리들이 앞으로, 앞으로 전진 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강한 능력과 은혜로 우리들을 연단하시고 이끌며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교회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성도들에게 잘 알려주고 성도들은 그 소식 속에서 자기가 지금 헌신해야 할 공동체적인 기도의 제목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거기에 자기를 쏟아 부으며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영혼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많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권사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어야 합니다. 많이 기도하는 분들이 장로가 되고 많이 기도하는 청년들이 신학교에 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공동체적인 기도의 능력을 드러나게 하셔서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
C. 임재 안에서 기도함
마지막 세 번째는, 임재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은 “그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기도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지 그러면 기도할 때 하나님 말고 이방신에게 비는 사람이 있는가 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어떤 기도든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리적인 것이고 실제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그분의 진정한 임재 속에서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눈뜨는 순간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합니다. 시장에 가서 물건을 흥정하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슈퍼집 주인과 주고받는 이야기, 그리고 아파트 경비원들의 잔소리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말의 전달 속에서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말의 전달을 대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장에 가서 물건을 깎고 그리고 슈퍼에 가서 주인과 이야기할 때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아파트 경비원이 우리에게 주차를 똑바로 하라고 할 때 주께 하듯이 우리에게 말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그 모든 것들은 말의 전달이고 의사소통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이런 기도를 이런 차원에서 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고 하는 것은 의사소통과 전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보입니까? 하나님이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는 귀머거리십니까?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도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당신의 성품에 맞는 기도입니다. 당신과의 인격적인 교통과 그 충만한 교제 안에서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달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당신에게 전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기도는 임재 안에서 드리는 기도이고 이 임재 안에서 우리들이 기도할 때 이 기도는 능력 있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기도를 슈퍼집 주인하고 나누는 말의 전달 이상을 능가하지 못하고 아파트 경비원들과 주고받는 이야기를 능가하지 못하는 그런 일상의 말의 전달이 될 때 그 안에서 우리들이 무슨 능력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중얼거리기는 하지만 그것은 혼자서 부르짖는 기도일 뿐이고 거기에는 어떤 간절함도 그리고 어떤 절박함도 어떤 구체성도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이방인들이 중얼거리듯이 그저 중언부언하면서 그저 뇌까리는 말의 유형일 뿐입니다. 거기에 무슨 생명이 있겠으며 더욱이 거기에서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악한 자들의 능력을 파하는 어떤 권세와 힘을 어떻게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많은 기도는 허비된 시간으로 나타나고 우리의 많은 기도생활은 모양은 가지고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힘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도 없고 열정도 없는 이런 껍데기밖에 없는 기도 속에서 우리는 사단을 대적할 수 있는 어떤 능력도 가지지 못한 채 그렇게 자기 자신을 운명에 내어맡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동안에 교회에 몸담고 있으나 교회와 함께 한 몸이 되어서 그리스도를 섬기기는커녕 끊임없이 주님을 섬기고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나기를 원하는 교회에 견디기 힘든 짐이 되는 역할밖에는 하는 것이 없는 이런 부끄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안에서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 안에서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충만한 사귐속 에서의 기도이며 이 충만한 영의 임재 안에서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하게 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기도를 함께 공유하며 주님의 마음으로 간구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 각자가 주님을 만난 계기와 그리고 살아가는 삶의 목표는 다를지라도 그들이 모두 한 성령 안에서 통합을 이루며 하나님 앞에 그 임재 안에서 기도하고 간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그들은 각각 수많은 다양한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임재 안에서 만나는 한 예수 안에서 한 하나님 안에서 그들은 모두 한 하나님의 마음을 우선적으로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모인 교회도 부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게 영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큰 빌딩을 가지고 아름다운 교회의 건물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자랑거리일 수 없습니다.
어느 교회에 갔더니 장로님이 열심히 자기네 교회의 저금통장에 돈이 얼마나 많은지를 부동산까지 하나, 하나 들면서 총액수까지 알려주는데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아니, 어떻게 장로까지 되어서 저럴까? 우리의 진정한 자랑은 우리 교회가 얼마나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예수의 마음을 품고 함께 기도할 수 있는지 입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그들이 흩어져서도 결국은 남이 보든지 보지 않든지 주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갈 것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가운데 주님을 아는 지식들은 삶의 지평 속에서 펼쳐지면서 그들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IV. 결론 : 지체로서 기도하라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의 교회에 주님이 머리이신데 지금 주님이 성육신하셔서 우리 가운데 계셨더라면 이른 새벽마다 깊은 밤마다 우리 교회를 위해 무슨 제목으로 기도하실까? 헤아리고 그리고 그 공동체의 기도제목을 우선적으로 마음에 품으라고 권면하고 싶습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온 신명을 다해 간절히 매달리면서 주님의 교회 안에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여름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십시오. 어린영혼들이 변화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기도하십시오. 자녀들의 회심을 위해 여러분 자신의 영혼의 변화를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하십시오.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 속에 있을 수 있도록 그렇게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승리하는 기도생활 1
승리하는 기도생활 1 (09/6/14, 주일오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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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기도생활 4 (09/7/05, 주일오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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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기도생활 7 (09/7/26, 주일오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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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기도생활 15 (09/10/18, 주일오전예배)
7.양떼를 위한 기도 1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 1:9-11).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고 옥에 갇혔을 때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목회자에게 교인들이 늘 있지만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마다 마음에 근심함으로 기도하게 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에 감사함으로 기도하게 하는 사람이 있듯이 바울이 많은 교회와 관련을 맺고 있었지만 어떤 교회는 마음에 근심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기도할 때 마음속에서 간절함을 솟아나게 하는 그런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를 향한 사도바울의 목회자로서의 사랑이 1장 앞부분부터 진하게 묻어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면서 고백을 한 후에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이 빌립보 교회를 향한 쉬지 않는 간절한 기도가 무엇인지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듯이 우리는 기도생활 자체를 개인적인 군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라고 하는 행위 자체가 내가 원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얻는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도는 그렇게 우리들이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하면 얻게 되도록 만들어놓으신 수단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기도라고 하는 수단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믿게 하신 이유는 기도라고 하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이 신앙행위에 의해서 인간의 영혼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가장 많이 의존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생각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까지 당신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가운데 창조목적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기도라고 하는 은혜의 수단을 통해 당신을 믿고 따르고 섬기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분명히 이 기도는 우리가 개인적인 모든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훌륭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라고 못 박으며 우리가 범사에 우리의 필요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개개인의 기도생활이 살아있지 않는 교회는 교회 전체적으로 기도가 살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교회에 나오든지 집에서 생활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그런 기도 속에서 살아야하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우리가 아무리 정미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할지라도 기도의 은혜를 배우도록 만들어주지 못한다면 배운 많은 지식들을 그들이 견고하게 붙들고 살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열린 뉴스를 통해서 세 학생의 인터뷰를 봤습니다. 학생들을 보면 신앙이 깊이 들어가 있는 흔적이 여러분의 간증 속에서 느껴집니다. 불과 초등학교 몇 학년 학생들인데 그게 바로 그 아이의 경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그 기도생활 속에서 누리는 기쁨과 그 모든 간구를 하나님 앞에 하면서 필요한 것들을 얻고 생활하는 하나님 의존적인 생활을 아이들이 기도 속에서 경험하며 살아갈 때 그때 아이들은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고 하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충분히 인정하는 가운데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런 기도를 공동체적으로 묶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도를 개인적으로 하고 개인적으로 자기 필요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기도에 있어서 초보적인 형태입니다. 기도가 어느 정도 성숙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이 기도가 개인적인 기도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기도가 여러분들에게 매우 중요한 기도의 제목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들 마음속에 있다는 아주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은 자기를 중심으로 안으로 오그라드는 사랑이지만 하나님 사랑은 밖으로, 밖으로 퍼져가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이 승리하는 기도생활이 나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차원에 있어서도 절실하게 필요하고 하나님은 교회에 그것을 분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II. 양떼를 위한 기도
사도 바울의 기도는 양떼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양떼를 위한 기도는 사도 바울이 목회자로서 양떼들을 위해 기도하는 전용의 기도라기보다는 교회가 멀리는 사도와 선지자들, 목사와 교사들뿐만 아니라 교회의 각양 은사를 따라서 주신 모든 일꾼들이 이 기도 속에서 실 줄과 날줄처럼 엮어져서 그래서 쉽게 찢어지고 뜯어지지 않는 단단한 영적인 조직체를 이루어나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물망처럼 교회를 함께 묶어주는 기도의 연결입니다. 이런 기도의 연결은 개인의 기도의 제목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보다 중요하게 교회가 하나님이 세우신 본래적인 뜻들을 드러내는데 이바지할 수 있도록 그렇게 단호한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내가 기도하노라”고 했던 이 기도는 사도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함께 기도에 동참하여야 할 기도의 제목인 것입니다. 그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를 두 시간에게 걸쳐서 여러분들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우선 이제 이런 간절한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는 것이 이 양떼를 위한 기도의 핵심입니다.
여기에서 최소한 세 가지를 아주 분명하게 우리에게 제시하는데 이것이 바로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교회의 지체들을 위해 절실하게 기도하여야 할 제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와 그리고 목회를 돕는 모든 일꾼들은 물론이거니와 영혼을 직접 섬기는 모든 교사들은 더욱 해당되고 이렇게 해당되지 않는 모든 성도들까지도 바로 이 세 가지를 위해서 전심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교회는 공동체적으로 승리하는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놓으신 궁극적인 목적과 밀접히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A. 지성 : 선한 것을 분별
첫째는 선한 것을 분별하는 지성의 성숙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경에 보면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라고 되어 있는데 희랍어 성경에는 좀 다르게 나옵니다. 어떻게 나오는가 하면 “그 다른 것들을 너희가 시험하여 판단하며” 라고 나옵니다. 흙을 가짜로 만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흙은 어디 가든지 구할 수 있는 값싼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짜 공기를 만들어서 팔았다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만들지 않습니다. 가짜 종이를 만들었다는 사람도 우리는 만나지 못합니다. 모두 값싼 것이기 때문입니다. 잡초를 인조로 만들었다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값비싼 것은 위조품이 많습니다. 보석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많은 보석은 그것이 진짜 보석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가격이기 때문에 비슷하게 만들어서 보석을 가지려고 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사람들이 번쩍이면서 돈 없이도 그렇게 다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는 그 모든 보석보다도 훨씬 더 값어치 있고 훌륭한 것이기 때문에 인류 역사이래로 언제나 소중한 것을 본떠서 가짜로 만들려는 시도들이 언제든지 있었습니다. 공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수요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아니 그까짓 것 진리를 믿고 살려면 그렇게 살고 말려면 집어치울 것이지 왜 굳이 가짜를 하나.’ 그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손에 있는 그 가짜 반지는 왜 한 것입니까? 플라스틱으로 한 가짜 진주 목걸이는 왜 하고 다니십니까? 그리고 생긴 대로 하고 살면 되지 왜 얼굴에 바르고 그리고 다닙니까? 그게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진리를 원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진리는 너무 버겁고 힘들어서 좀 쉬운 진리를 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원하기는 원하는데 가혹하게 나를 바꾸라고 하고 고치라고 하고 깨지라고 하고 하는 그런 기독교 말고 나는 그저 가만히 있으면 그저 주님이 오셔서 나에게 당신이 맞추시는 그런 종류의 변형된 진리를 붙들고 사는 것이 원인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 몇 군데 생겼다고 하는데 수동체육관이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원래 헬스클럽에 가면 무거운 바벨을 들고 아령을 땀을 흘리며 하고 줄넘기를 하고 이러면서 건강을 다지는데 그런데 이게 대부분의 사람이 공감하는 것이지만 그거 너무 힘듭니다. 그러니까 어느 체육관에서 뭘 만들었는가 하면 독일과 유럽에서 기구를 사다가 여러 가지 기구가 있는데 거기에 올라가서 팔다리를 묶고 가만히 있으면 기계가 막 운동을 해줍니다. 그런데 그게 효과가 있는가 하는데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에 쓰는가 하면 독일이나 유럽에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인들의 재활 치료에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니는 사람이 인터뷰를 했는데 확실히 효과는 별로 없는데 아주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게 그래도 몸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자기는 헬스클럽에 끊어놓고 잘 안 다니는데 이것은 석 달이나 하고 있으니까 와서 그냥 묶고 가만히 있으면 그냥 막 움직이면서 그렇게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기독교를 원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마이클 호튼이라고 하는 미국에 신학자가 쓴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중에서 이제 특별히 조엘 오스틴에 관련된 부분을 제가 읽어봤는데 평소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데 그분이 통렬하게 지적하는 게 그것입니다. 이제 결국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기독교로 변형을 시키다보니까 형태는 여러 가지여도 핵심은 예수만 빼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만 빠지면 하여튼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다른 종교와도 별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기독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은 그게 과연 기독교일까?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에 자기가 주인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죽음은 너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얘기해주고, 너는 죄악덩어리라고 얘기해주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이라고 얘기해주는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의 의는 너희는 구원받을 수 있는 의가 하나도 없고 그분의 것을 받아야 한다고 얘기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우리는 뭐냐고 묻습니다. 너희들은 그대로 살아있으면 하나님께 굉장히 고통을 주는 존재들이다. 이게 현대인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주인삼고 살아가기를 좋아하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현대의 정신에 근본적으로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을 거스르지 않던 시대가 언제 있었습니까? 어느 시대에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기독교의 복음을 그렇게 좋아하던 때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는 그런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것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른 것들 속에서 무엇이 올바르고 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분별하기 위해서는 냉철한 지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삶은 앎의 기반 위에서 그리고 모든 앎은 반드시 삶으로 열매 맺어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앎에 기초하지 않는 삶, 그리고 삶에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 앎, 이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 앞에 헛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을 아는 기독교 신앙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의 교리요, 체계입니다.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독교 신앙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의 교리요, 체계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근본입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끊임없는 변화가 없이는 그의 신앙에는 진전과 승리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전에는 생각 없이 살았던 사람 같아도 우리 모두 예전에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나름대로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 나름대로의 삶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은 어린아이까지도 철학자다.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고집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나오다가 잘 못 봤는지 밥상에 무릎을 탁 부딪쳐 피가 났습니다. 저녁때 상처를 만지다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걸어가는 게 아무 힘이 없는 것 같은데 누가 힘이 들었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어쩜 부딪히니까 찢어지면서 피가 흐르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게 우리가 뭐가 대단한 고집이 있고 내가 철학이 있고 그냥 하루, 하루 벌어먹고 사는 것이지 무슨 인생관이 있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가만히 혼자 살아갈 때는 아무 힘이 없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말씀하고 딱 부딪히면 상처가 나고 피가 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강하고 완고한 고집이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가 그리스도 없는 삶은 그리스도가 없는 삶이 아니라 예수 대신 다른 사상을 붙들고 살았던 삶입니다. 이게 바로 다른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붙들고 살다가 마지막에 우리가 얻은 것은 망가진 영혼과 깨트려진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의지하며 살았던 우리의 삶을 후회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다른 많은 것들이 참된 것이라고 나를 속였던 것을 깨닫고 나의 판단을 접고 그리스도 예수의 진리를 붙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요, 이것이 바로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트니스는 자기의 ‘기독교 교양론’이라고 하는 책 속에서 이교도의 지성과 기독교적 지성의 분명한 차이를 비교하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이교도의 지성은 완고한 지성이고 기독교의 지성은 유순한 지성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교도의 지성은 자기가 무엇을 판단하고 옳다고 믿었으면 이것을 절대적인 원칙으로 붙들고 가는 완고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지성은 다릅니다. 이것이 진리라고 믿었을 때는 그것을 굳게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진리의 빛이 비추어서 그 삶이 그게 아니고 네가 믿는 그 내용이 그것이 아니라고 비추어줄 때 진리만은 언제든지 나의 지성을 고치고 변화시키고 또 나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하는 유순함을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 가지고 있는 지성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의심할 수 없이 믿고 있는 성경이 성경적이라고 믿는 진리들은 우리는 굳게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진리가 필요 없는 그런 종류의 독단적이고 완고한 지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더 많은 진리의 빛을 필요로 하는 지성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의 빛의 비췸을 받았을 때 우리는 틀림없이 그 빛을 보면서 참된 것이 아닌 요소들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버리고 온전하지만 그러나 끊임없이 보다 더 온전해져가기를 바라는 확신하지만 이 확신이 점점 더 검증되어 보다 더 완전한 확신으로 나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아름다운 지식이지만 이 지식이 더욱더 밝은 빛으로 더러운 것들을 가려내고 더 아름다워지기를 사모하는 자기를 그리스도께로 굴복시켜서 많은 빛을 내게 주셨으나 나는 아직도 어둠이 내 안에 남아있사오니 주의 기이한 법을 내게 알게 하셔서 그 법에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하는 자기를 굴복시키고 복종시키는 유순한 지성이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이렇게 말합니다. 야, 그까짓 것 무엇을 믿는가. 그거 가지고 머리 터지게 싸울 이유가 뭐가 있는가. 삶이 중요하지 그까짓 것 뭘 믿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이제는 우리가 교리보다는 삶이고 그리고 우리가 믿는 신앙의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의생활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기독교 역사 이래 전형적인 사탄의 사탕발림이었습니다. 이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여러분들이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17세기에 이제 소위 이야기하는 개혁과 정통주의의 시대가 그 황금기를 달립니다. 존 오웬이 바로 그때 태어났던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리고 18세기에는 여러분들이 아는 계몽주의 시대가 열립니다. 계몽주의 정신은 인간의 인성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 모든 것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충분히 그 객관적으로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성주의가 번지면서 성경이 다 난도질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으로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사람들이 꾸미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참된 기독교는 이런 신비의 껍질을 다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벗겨낸 후에야 그 진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결과 19세기에 어떤 일들이 일어난 줄 아십니까? 유럽을 중심으로 한 이 모든 교회 속에서 그 계몽주의 물결이 이성주의의 물결이 밀어닥치면서 모든 설교단이 다 타락했습니다. 어느 자료에 보니까 하루에 6백 교회씩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타락해서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그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죽은 자에게는 지옥과 천국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모두 촌스럽고 사람들의 마음을 거스르고 오히려 마음을 닫게 해서 오히려 예수를 못 믿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설교자들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 계몽주의 시대에 현대인들을 가슴에 품으며 교회가 가야된다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것들을 우리들이 진리라고 믿을지라도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접어두고 그리고 현대인의 이성에 부합하는 설교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설교단이 변했는지 아십니까? 주일날 설교되었던 설교가 부활절 날에는 생매장당하는 것에 위험, 또 어떤 주일에는 예수는 과연 독신이었을까? 그리고 심지어는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문화의 즐거움, 짐승은 우리에 가두어 기르는 것보다 방목하는 것이 더 좋다. 지금 말씀드린 것이 모두 주일날 설교 제목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느 설교 문에 보면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 그런 것도 나옵니다. 미친 것입니다. 그것을 들으면서 사람들이 교회에 좋다고 끄덕거리고 오고 심지어는 예방주사를 맞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것도 주일날 설교였습니다.
마지막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결국 세속에 물결이 교회에 확 덮어서 망해버린 것입니다. 그때 망한 유럽의 교회들이 아직까지도 못 일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다른 것을 따라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다른 것에 대해서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짜 다른 것이 흉내 내고자 하는 참된 것에 대한 애정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그러나 여러분들이 진리의 맞을 알고 진리를 정말 사랑하게 될 때 눈을 부릅뜨고 다른 점이 없는가 하고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 다른 것이 미워서가 아니라 진리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믿는 사람이 진리를 믿어야 할 영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진리가 아닌 것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한 이주 동안 열심히 공사를 해서 저 위에 작은 공원을 만들었는데 벌써 애들이 올라와서 거기서 뛰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하여튼 아주 안전하게 애들이 절대 안 떨어지게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조금 덜 끝났는데 어째든 그렇게 했는데 사실 사택에 살 때부터 계속 어린애가 미끄러질 위험이 있고 항상 불안했습니다. 물이 배수가 잘 안되어서 그래서 그때 공사를 할까 하다가 내 마음에 남보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뒤에 공원을 근사하게 만들면 담임목사 사택 앞마당 같을 것 같아 별로 덕이 안 될 것 같아서 이제는 만들어놓아서 내가 거기에 가서 앉을 시간이 없으니까 그냥 만들었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존 오웬 공원으로 이름 짓고 그래서 얼핏 생각에 사람을 너무 높이는 게 아닌가, 했는데 사실 사람을 높인다기보다는 우리는 그분도 티끌 같은 인간에 불과했고 타락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다만 우리는 존 오웬을 높이거나 그분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쓰신 하나님은 교회에 너희가 진리를 어떻게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진리를 위해서 어떻게 분투하며 사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인가? 그것을 하나님이 오웬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웬이 아니라 오웬을 붙드셨던 하나님,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 위인전을 많이 읽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위인전을 많이 읽으면서 자라야 합니다. 요즘 위인전 자체가 출판이 잘 안 됩니다. 안 팔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네가 위인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웃기는 것입니다. 무슨 위인이야. 위룰 가졌으니 위인이지.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스승이 없는 사람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독교 신앙이 스승이 없는 신앙은 마치 제조일자와 회사가 표시되지 않은 구멍가게에서 파는 식품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면 항상 제가 물어보는 게 당신 스승은 누구입니까? 살아있는 사람들 중에 별 볼일 있는 사람이 없어서요. 죽은 사람들 중에 대라. 나 같은 사람 있잖아요. 나 같은 사람은 존 오웬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오늘 아침에도 올라가보니까 내가 내 인생에 있어서 만약에 존 오웬 목사님을 못 만났더라면 어쩌면 지금쯤 나도 그렇게 인본주의적인 목회를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참 많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뭐 이 학교 저 학교 끌어들이고 심리치료 무슨 치유학교부터 시작해서 마케팅 교회부터 해서 아마 그러고 있고 아마 자칫 잘못해서 눈이 멀었으면 나도 교회 앞에다가 이제 3천명 돌파하고 5천명을 향해 그랬을 가능성이 있고 5명 전도하면 디오스 냉장고 하나씩 준다고 아마 그랬을 가능성도 있고 또 누가 하는 것처럼 교회 앞마당에 승용차 한 대 갖다 놓고 50명 전도하면 이 승용차 준다고, 진짜 그런 교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눈으로 직접 확인했는데 우리 교회는 천명이 전도해오면 아파트 한 채를 드립니다. 제가 그 전도지를 직접 봤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집이 없으신 분은 생각이 달라지시겠지만 그러니 그게 어떻게 되겠습니까. 심지어 교회에 보험 모집인처럼 사람들을 모아놓고 한명 등록시키는데 그것을 한 달 동안 합계를 내서 곱하기해서 뭐 월급을 준다고 하니 우리가 어디까지 가야지 되겠습니까? 아마 그렇게까지는 안 갔을지라도 비슷하게 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내가 오웬 목사님을 통해서 배운 게 무엇인가 하면 어떤 참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여튼 집요할 정도로 아닌 것을 가려냅니다. 그래서 설교하면서 1, A, A의 1, 1의 다시 AA의 1, 1의 또 AA의 동그라미, 이거 그분에게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자기 깨어짐인가 그 책을 써서 그분도 공부를 많이 하시는 분인데 읽고 뭐 좀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가 있으면 좀 해달라고 했더니 한참 읽고 나서 하는 말이 목사님 나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왜요? 목사님 글은 정글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너무나 재미있는 게 이런 것에 여러분들이 익숙해지다 보니까 불평이 들려오는데 돌이킴의 책에 1과만 1A 1A, 이렇게 나가고 2과서부터는 이렇게 그냥 쓱 이야기처럼 나가니까 자기네들이 거기다 번호를 붙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것을 참으로 엄격하게 가려내려고 하는 것은 아닌 것이 미워서가 아니라 참된 것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 너그러워질 수 있는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위해서 혼신을 다해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사랑하는 세대들 앞에 다른 것들이 얼마나 많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그래도 고전적인 신앙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들도 다른 것에 흔들리는데 이제 자라나는 세대들은 얼마나 다른 것에 흔들리겠습니까? 그들이 그 다른 모든 것에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살기 위해서는 그들이 철저한 지식으로 지성적으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그들은 잘 믿어야 하고 일단 믿었으면 믿은 그것이 왜 그렇게 복된 진리인줄 설명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교육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교리를 배우는 이유는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잘 믿기 위해서고 우리가 믿는 것은 이해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또 믿는 것입니다. 믿고 아멘 하고 아멘, 한 것이 왜 진리인줄 부지런히 탐구하는 가운데 우리의 모든 거룩한 생활에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삶은 앎의 기반위에 모든 앎은 반드시 우리의 삶으로 뻗어 나오도록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B. 성품 : 흠 없고 진실
두 번째는 진실하고 흠 없는 성품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또, 또 라고 하는 말은 자기가 기도하는데 이것이 1번 2번 3번의 기도제목이 아니라 똑같이 이것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이것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이것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가 하며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마치 내용이 진실하여 흠이 없다고 그랬으니까 때나 잘못된 것이 묻어 있지 않은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같이 묘사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래서 어느 영어 성경에서는 이것을 ‘Pure’ ‘순결한’ 이라고 번역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희랍어 성경에 보면 정확하게 여기에 ‘허물없이’ 라고 하는 이 말이 원래 무슨 뜻인가 하면 ‘거스름이 없이’ 그런 뜻입니다.
자, 우리가 한번 하나님 앞에 허물을 갖게 되는 원인들을 생각해봅시다. 자, 이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의지는 가지고 있는데 지식이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그러고 했는데 사실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적이 있는 그런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는 또 무엇인가 하면 이럴 수 있습니다. 올바른 것이 무엇이라고 하는 것도 알았고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살고자 하는 마음에 소원도 있는데 힘이 워낙 없어서 잘못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의지를 벗어나서 행한 것은 아니지만 힘이 워낙 없어서 그렇게 알면서도 진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그렇게 못하게 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를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거스름입니다. 잘못된 앎과 잘못된 생활에 대한 고집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도 자기를 고집하며 그렇게 살아서 주님을 거스르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없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영혼을 위한 기도의 제목이었던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모두 오류가 없는 사람이 없고 은혜를 받았어도 자기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인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남아있는 자신의 편견과 오류의 성격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라면 이것은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단순한 연약함이 아니라 어떤 확신이나 의지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그것을 거스를 때 이것은 사실은 배교에 가까운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자, 한번 여러분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도 중요한 것이 있고 조금 덜 중요한 것이 있을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보십시다. 이런 것일 것입니다. “너희는 서로 화목하라.” 그 계명이 중요하겠습니까? “살인하지 말라.” 그 계명이 더 중요하겠습니까? 물론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살인한 사람이 화목했기 때문에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계명이다 중요한 계명이지만 그 중요도에 있어서는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되실 것입니다. 그렇게 차이를 각각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도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계명에 중요한 것과 작은 것이 이렇게 있는데 자,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두 가지를 거슬렸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중요한 계명을 거슬렸고 또 그 사람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인생관이 있을 것인데 생활의 원칙, 예를 들면 빌린 돈을 꼭 갚아야 된다. 아니면 약속시간은 절대로 지켜야 된다. 그런 것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가지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중요한 하나님의 계명을 거슬렸을 때 더 분노하게 됩니까, 여러분들의 인생관을 거슬렸을 때 더 분노하게 됩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아, 사람이 죽일 뻔 했데. 왜 그렇게 싸운데. 그 정도인데,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돈을 빌려가서 약속을 어겼습니다. 특히 인간이 나는 그런 식으로 안 살았어, 그러면서 하나님의 중요한 계명을 어겼을 때는 화나지 않던 마음이 솟구치면서 이것은 단순히 돈을 못 받는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도 안 지키고 인간이라고 할 수 있나 하면서 확!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하나님의 계명 속에는 약속을 잘 지키는 것도 포함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약속시간을 잘 지키라는 것은 저 아래야. 그런데 자기가 이것을 뒤집어서 자신의 인생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개입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바로 옛날에 여러분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삶입니다. 자기가 옳은 줄 알고 그렇게 살던 삶이 여러분들을 하나님과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그런 것이 없게 되기를 원한다. 이게 간절한 기도의 제목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게 애들에게 자기 인생관을 넣어주려고 그러지 마십시오. 자기는 아버지에게 무슨 인생관을 물려받았고 그러면서 우리 어떤 성공한 부자, 기업과 출세한 사람을 보면 나를 바꾼 한마디의 말, 해놓고 굉장히 그런 어록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너무 감동받지 마십시오. 그런 것도 감동을 많이 받는 사람이 말씀은 감동을 잘 안 받습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시간에 늘 얘기했지만 어렸을 때 아이들이 학교에만 가면 아빠 우리 집 가호를 써오래. 없다고 그래라. 그래도 한번 써오래. 태멘이라고 써가라. 태멘이 뭔지 아십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할 때 그 태, 계시록의 맨 마지막에 멘입니다. 그게 뭐가 그런 게 있습니까. 가끔 나에게 목회철학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데 없습니다. 무슨 목회철학입니까. 모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렇게 우리들이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도전도 받고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도 바꿀 수 없는 그런 종류의 확신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거스름이 없는 삶을 살아라. 그것입니다.
그리고는 ‘진실하여’ 그랬는데 이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인 진리에 주관적인 자기를 끊임없이 합치시킴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마음과 정신의 특성입니다. 인격적 특성입니다. 객관적인 진리를 알고 이해를 했어도 그 다음에 그러면 그 진리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가? 하고 그 진리에 비추어서 자기를 깎고 변화시켜서 그 진리에 맞추시는 성령의 작용에 화합하지 않는 사람은 진리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그는 진실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식이 많은 것과 진실해지는 것이 관련(?)아주 적은데 진실한 인품을 가진 사람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많은 진리를 알아도 전자의 사람은 자기를 꺾어 거기에 합치시키는 성령의 작용에 화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사람은 비록 그가 가진 진리의 양은 적어도 그 중요한 진리에 자기를 온전히 합치시키고자 하는 자기 적용에 실천을 가지고 있을 때 그는 비로소 아, 이렇게 사는 것이구나. 하는 이 진리를 가슴에 확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제 많이 없어졌는데 옛날에는 그 해안선들을 군인들이 다 지켰습니다. 그러니 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켰겠습니까. 그래서 가끔 거기서 사고가 나고 그러는 것을 우리가 신문지상을 통해서 봤습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 한분이 군대생활을 동해에서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바로 갔는데 선배들이 하는 이야기가 야, 다음 주에 네가 당번이다. 그래서 그게 뭡니까? 그러니까 선배들이 돌아가면서 우리의 고추장과 김치를 해결한다. 방법은 뭡니까? 그랬더니 동리에 밤중에 가서 살짝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를 믿는 청년이니까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군인들이 밤중에 큰 통을 들고 가서 고추장을 퍼오다가 장독을 깨트리고 막 이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성이 자자한데 그런데 거기서 난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못하면 이제 기합과 구타가 기다릴 것입니다. 옛날이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군대를 왔는데 정말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내가 어떻게 해야지 이 위기를 넘길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더랍니다. 너 내일 가져와 알았지,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반드시 조달하겠습니다. 그런데 방법은 제가 알아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랬더니 야, 임마, 훔치지 않고 어디서 가져와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이제 간 것입니다. 그래서 문을 두들겨 아주머니, 어디어디서 살다가 입대해 여기에 처음 왔는데 고추장하고 김치가 없어서 늘 저렇게 애를 쓰는데 저에게 구해오라고 하는데 저는 집도 알지 못하고 어디에 갈 때도 없는데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아주머니께서 활짝 웃으면서 그래. 손을 잡으면서 얼마나 고생이 많니. 어머니는 어디에 계시느냐고 물어보시면서 우리 아들도 군대를 갔는데 그러시면서 퍼주시더랍니다. 그렇게 얻어온 김치와 고추장이 훨씬 더 양이 많고 양질의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청년이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현실과 타협하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진짜 그렇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을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상상할 수 없이, 그렇게 하면 될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그 앞에 있는 선임 군인들이 한명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밤에 가서 샙쳐와야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독채 들고 오다가 돌부리에 넘어져서 먹지도 못하고 깨트리고 그래서 동리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이게 하나님의 진리대로 살고자 하면 그렇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계시적인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구나.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위로 얻겠네. 아멘. 해보지도 않고, 해 봤습니까? 해봤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모르시고, 현실은 여러분보다 더 잘 압니다. 내가 공부하느라고 바빠도 신문을 4장을 보는 사람입니다. 하나에 5분씩, 훤히 알고 직장생활도 코피 나게 해보고 다 해봤습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가 진실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만 저의 생애에 있어서도 성경을 열면 하나님이 이게 금싸라기처럼 진리의 말씀이 다 풀어주신 특별한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였는가 하면 하나님이 이미 주신 말씀에 나를 합치시키려고 노력하고 못했을 때 눈물 흘리며 회개하고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찬송했을 때 그때 하나님이 계속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미끄러지기 시작합니다. 예배 시간에 문은 자꾸 일분씩 당겨져서 문은 닫고 지겨워, 문밖에서 예배를 드릴 수는 없고 빨리 가야되겠는데 차는 또 왜 이렇게 주차할 때가 없는 것이야. 그리고 투덜대고 들어옵니다. 어차피 그렇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니까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그런 의지를 다 내려 보십니다. 그래서 주신 말씀에 자기를 합치하려는 진실해지고자 하는 노력이 있을 때는 하나님이 계속 말씀을 주십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가슴 속으로 대답해보십시오. 목사님, 저 이상하게 요즘 성경을 읽으면 졸음이 오고 책을 읽어도 심드렁하고 설교를 들으면 그저 따분하고 손들어보십시오. 마음속으로 들어보십시오. 높이 들어보십시오. 진짜 드는 것 좀 봐. 마음속으로 하라니까. 졸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마음속으로 높이 들라고 높이,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깨우소서, 오늘 티끌 같은 말씀 하나 붙들고 아, 그래.
주님의 뜻대로 나 항상 살리라
일주일동안 그렇게 살다가 와보십시오. 그러면 다음 주일날 하나님이 말씀을 막 부어주실 것입니다. 아멘, 이렇게 하면서 우리의 성품이 점점 거스름이 없는 진실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사업을 많이 해서 돈 벌어야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공부를 잘해서 인류대학을 들어가고 높은 지위에 올라야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 생각해보십시오. 독수리는 높이 날아야 기품이 있지만 원숭이가 높이 올라가면 밑에서 쳐다보는 사람이 곤란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십니까? 오히려 하나님은 당신 닮은 흠 없고 진실한 성품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유명하지 않고 TV에 자주 나오지 않고 신문에 자주 얼굴을 비추지 않아도 하나님의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보이지만 그것은 오해하기 아주 쉬운 그러나 거룩한 인격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과 이렇게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어린아이 하나, 하나가 그렇게 학교에 가서 초등학교 1,2학년 친구들이 그 애를 보면서 제는 우리와 달라. 왜 다른가? 했더니 제가 말하는데 자기 안에 예수님이 계시데. 그게 하나님께 훌륭하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모든 성도들이 변화되어 열렬히 기도함으로 교회 전체가 승리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C. 생활 : 의의 열매
마지막은 생활에 있어서 의의 열매가 맺는 것입니다. 이 ‘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올바른 것입니다. 그 올바름의 기준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지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향하고 있을까요? 자, 비가 강원도에 많이 오고 있는데 어느 비는 산위에 떨어지고, 어느 비는 길바닥에 떨어지고, 어느 비는 논에 떨어지고, 어느 비는 밭에 떨어지고, 어느 비는 지붕에 떨어집니다. 그래도 그 비는 모두 땅바닥에 모여서 작은 도랑을 타고 흐르고 개울로 모이고 개울로 모인 것은 커다란 강가로 모여서 그래서 바다를 향해서 흘러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크고 작은 계명들이 많이 있는데 그 계명들이 결국은 마지막으로 우리를 모두 그 계명에 순종하여서 궁극적으로 데려가려는 목적이 하나님께 있으십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천지창조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지으신 궁극적인 그 목적으로 우리를 데려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크고 작은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저도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어느 강사가 와서 나를 공부를 잘했다고 추켜세우는데 저 그렇게 공부 못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 그때는 그래도 했지만 그 전에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들어가서 굉장히 이상한 게 무엇인가 하면 1학년 때 시험을 봤는데 거의 빵점을 봐서 집으로 왔습니다. 왜 그랬나 했는데 그게 오, 엑스 문제였는데 다 거꾸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마음에 시험지를 받았는데 아니, 이런 당연한 것을 선생님이 물어볼 리가 있나. 여긴 분명히 뭔가 속임수가 있다. 그렇게 해서 맞는 것은 다 엑스로 하고 틀린 것은 다 맞는 것으로 다 정반대로 했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 게 무엇인가 하면 선생님이 길거리 음식을 사먹지 말라 큰일 난다. 그런데 할머니가 날 데리고 가서 사먹지 말라는 음식을 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선생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길거리 음식을 사먹지 말라고 그러는데 우리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가서 사주시는데... 그러니까 그 선생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그게 길거리 음식이지만 할머니가 사주시는 음식을 된다고 그러셨습니다. 이게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니, 그게 왜 그럴까? 도대체 이유가 뭘까? 그런데 그 정답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이 아, 원래 길거리 음식이 못 먹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에 음식 중에는 위생관리가 안된 음식들이 많기 때문에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면 애들이 도대체 먹으라는 이야기인지 먹지 말라는 이야기인지 머리가 너무 복잡해지니까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은 먹지 말라고 얘기하는 것이구나. 그리고 부모님이 사주신 것은 먹으라고 한 이유는 비록 길거리 음식이라고 할지라도 어른이 사주실 때는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판단하고 사먹을 것이다. 그것을 저학년 때는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위생이니, 무슨 영양이니, 식품 위생법이니 모르는 것입니다. 후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천지창조의 목적,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가르치려고 애를 쓰지만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아, 그래서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우리 같은 인간에게 영혼을 주시고 이렇게 만드셨구나. 아멘.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애들을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이해하는 애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간증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애가 학교에 가서 어느 애에게 우리 교회에 가자고 그러니까 내가 왜 너희 교회를 가야지 되니. 너는 예수를 믿어야지 돼. 나는 여태껏 예수를 안 믿고 살았는데 왜 예수를 믿어야 되니. 너와 나는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야지 돼. 그래서 부모가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애를 불러서 그게 무엇이냐고 물으니까 완벽하게 창조의 목적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른보다 오히려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단순하게 아멘! 하는 특성이 아이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더 많기 때문에,
III. 결론 : 하나님께 영광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계명을 주셔서 그 하나님의 사랑하기 때문에 그 계명을 지키며 살려고 하면 결과적으로 삶 전체가 엮어져서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의의 생활입니다. 그 의는 하나님의 의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신 목적, 그 안에서 인간이 가장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그 계획에 부합할 수 있는 삶이요 생활입니다. 그래서 머리 좋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단순히 믿기만 해도 이렇게 의의 열매를 많이 맺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교회를 위해 모든 지체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야 될 것이 우리 성도들이 모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기반 위에서 바로 이런 의의 생활의 열매를 많이 맺어서 사람들에게 과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정말 행복하고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사는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이것을 위해서 교회는 전심으로 기도해야 하고 교회에 있는 모든 기능들은 궁극적으로 이 열매를 맺어서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이 일들을 위하여 교회 안에서 다른 지체를 위해 기도합니다. 옆으로 뻗어나가고 앞뒤로 뻗어나갑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또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교회는 마치 옷감을 짜듯이 그런 기도로 단단하게 엮어져서 그래서 그 기도 안에서 연약한 성도들이 힘을 얻고 연약한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이 자리를 빌어서 정말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면 새신자 양육교사들입니다. 함께 와서 공부를 하자고 그래도 환경이 안 되거나 열심히 적은 사람들, 그리고 아직까지 진리가 뭔지 몰라서 혼탁하면서도 열심히 배울 기회는 없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 하나 찾아가서 밥 사주고, 심방하고, 책 사주고, 테입 사주고 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깨닫게 해서 그래서 양육하는 사람들, 정말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잘 믿는 사람들끼리 돌격 앞으로! 하면 다 갈지 모르지만 나머지는 다 누워있는데 전쟁터를 보십시오. 그 진격 앞으로! 하면서도 부상병들 한 사람이라도 데리고 가려고 그 총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데도 다리 끊어진 전우들을 끌어안고 그리고 갑니다. 그게 바로 전쟁입니다. 그게 바로 교회의 모습입니다. 돌격 앞으로 하면서 막 깃발 들고 가보니까 목회자 혼자만 있고 장로 몇 사람만 있고 아무도 없습니다. 그게 무슨 교회이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을 하나, 하나 돌보면서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도저히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사람들이 열매를 맺도록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교회는 전심으로 기도하고 그래서 지체들 하나가 미끄러지면 마치 자신이 미끄러진 것처럼 아파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이 안에서 참된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삼겹줄처럼 엮어지면서 이 세상과 더불어 싸울 수 있는 강력한 영적인 진리의 공동체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들은 전심으로 기도하고 이 일을 위해서 우리들이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승리하는 기도생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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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양떼를 위한 기도 2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 1:9-11).
I. 본문해설
얼마 전에 러시아에서 깜짝 놀랄만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도시에 있는 어느 빈민 아파트였는데 아이가 하나 빈집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나이는 한 5세쯤 되었는데 이 아이가 전혀 말을 못하고 네 발로 걷고 네 발로 뛰면서 짐승 우는 소리를 내는 동물 같은 아이가 발견되었습니다. 정글북에 나오는 모그린 소년 이야기인데 밀림도 아니고 정글도 아닌 도시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경찰이 무슨 사건인지 조사를 해봤더니 추정하기를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부모가 이 아이를 버렸고 버린 이 아이를 개가 길렀답니다. 러시아 개는 아주 종자가 큽니다. 이 개가 아이를 자기 새끼로 생각하고 젖을 먹여서 기르고 이 아이는 5살이 될 때까지 개가 제 어미인줄 알고 그렇게 자랐던 것입니다. 그러니 영혼을 가지고 주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교육받고 지속적으로 정신적이고 인격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헌신적으로 살아가는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바와 같이 목회자로서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는 세 가지였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지성적으로 성숙해서 다른 많은 것들 속에서 참되고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 그리고 성품이 진실하고 거스름이 없는 성품이 되는 것과 삶에 있어서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었습니다.
70년 후반 80년 대 그리고 90년대까지 몰아닥친 한국교회에 커다란 세속화는 교회의 양적성장의 추구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그런 교회들 중에는 진심으로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의 성장을 도모했던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상당히 많은 수의 교회들이 이제 자본주의적인 방식에 따라서 교회의 성장을 꿈꾸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에 세상의 회사를 경영하고 사업을 해나가는 경영과 마케팅의 원리를 도입하게 만들었습니다. 교회가 지혜롭게 충성된 사람들에 의해서 보다 더 효율적으로 변모해가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일 수 없습니다. 문제는 진정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영적인 실제를 교회가 가지지 못한 가운데 그 없는 것들을 대신하는 방법으로서 이런 방법론들이 추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교회는 성장하는 것을 모토로 삼으면서 지금은 좀 뜸해졌습니다만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수십 대의 버스를 대여해서 온 서울 시내를 누비며 자신의 교인들을 실어 나르는 일들을 하게 된 것도 바로 8-90년대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교회는 서로를 그리스도 예수안의 지체로 여기기 보다는 오히려 똑같은 상품을 파는 경쟁가게인 것처럼 생각해서 교회가 서로서로 커지는 경쟁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서 교회는 두 가지를 완벽하게 잃어버렸습니다. 그 하나는 누구 교인인가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 째로 누가 교인인가 하는 문제는 이제 한 사람이 교회를 다니는 것은 교인이 되기 위한 준비일 뿐이고 진정으로 그가 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의 죄를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회심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요구를 충족시키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교인들을 교회에 모으기 위해서는 이런 높은 기준을 제시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일단 교회에 모두 모아놓고 나면 그들이 변화 받을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는 정 반대로 나타났으니 그렇게 회심하지 않은 교인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회심하고 변화되는 것보다는 기존에 있었던 교회의 수준을 더 떨어트리는 일에 이바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2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국교회에서는 회개하라는 성토, 그리고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아주 끔찍한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필요하다는 사상이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이런 현상 속에서 괄목할만한 일이 일어난 놀라운 변화는 이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따라는 생활에 있어서 참된 경건의 비밀을 잊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비밀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서 주님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는 경건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사라지면서 성도들은 경건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로 붐비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점점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서부터 이제 이 세속적인 정신은 교회 안에 깊이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참된 교회의 모습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나라는 주님께로부터 죄를 짓고 떠난 이후로부터 더 크게 더 강하게 세력을 형성하고 더 많은 숫자를 만들어서 자신들의 생각과 세력을 보편화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교회의 가치는 그런 세력이나 숫자나 규모가 아니라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과 경건함이 이것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누구이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이 사는 도리를 배웠던 것처럼 또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 앞에 사는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미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자신의 강력한 소망을 세 가지로 피력했으니 첫째는 그들의 지성이 성숙해서 모든 다른 것들 가운데 참되고 선한 것을 분별해내는 것과 성품에 있어서 인격적인 성숙을 이룸으로 진실하고 허물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과 생활에 있어서 성숙하여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녀들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계획이고 또 더 멀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며 우리를 구속하신 그 계획을 따라 사는 것이 창조의 목적을 완수하는 일이고 인간은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들이 모든 성도들에게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가 정말 구원받은 성도라면 누가 자신의 지성이 성숙해지는 것을 싫어 하는 사람이 있으며 그가 진정으로 예수 믿는 교인이라면 그들 중 누가 진실하게 싫어하고 허물없이 하나님 앞에 신자가 되기를 마다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가 자신의 삶에 정욕의 열매만 가득하고 의의 열매는 없는 삶이 되어서 주님께 욕을 돌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누를 끼치는 존재이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바라는 모든 것이 소원이 아니요, 소원하는 모든 것이 그가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 중 누가 공부 잘 하는 학생이 되기를 마다하겠습니까? 사업하는 사람이 성공을 싫어하겠습니까.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 출세를 싫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런 생각과 소원을 가지고 있어도 구체적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소원과 생각을 위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꿈에 대해서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사행심이고 요행심일 뿐입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구체적으로 그렇게 하나님이 구원하신 계획대로 사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일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를 믿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기 전보다 우울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그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기쁜 소식이고 그리고 언제나 마음에 솟아나는 생수이지만 그것대로 살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그 진리의 빛은 쓰라린 고통입니다.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 앞에 끊임없이 붙어있는 금연의 표지판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사도는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이 구절에서 신자로서 그렇게 지성과 성품과 그리고 생활의 성숙을 이루어가 자기를 구원하신 목적대로 사는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사도는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사도 바울의 목회자로서의 개인적인 기도가 아니라 영혼들을 돌보는 어머니로서의 교회가 모든 성도들과 함께 공동체적 봉헌 안에서 하나님께 올려야 할 기도입니다.
II. 양떼를 위한 기도
그는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입니다. 이것이 양떼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는 첫 번째로 풍성한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성의 성숙을 이루고, 그리고 생활의 성숙을 이루고, 성품의 성숙을 이루어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가장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나아가게 만들어주는 그 근원적인 하늘의 자원이 바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A. 풍성한 사랑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많은 문제들을 만납니다. 신앙생활을 하기 전에만 인생의 문제를 만난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심지어는 변화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다양한 삶의 문제에 부딪힙니다. 그게 세상살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속에서 가끔 착각을 합니다. 우리 인생의 곤고함과 불행이 물질의 부족, 사람관계의 파탄, 그리고 또한 가족관계, 혹은 지식의 부족, 세상의 악함 이런 것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도구가 되는 것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악한 환경과 고통은 우리 안에 죄를 쑤셔놓지 못합니다. 죄는 우리 자신이 마음 안에서 선택하고 사랑하는데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바로 우리들이 매일매일 하나님을 버리고 이 세상을 택하는 사랑이 없음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가 많은 것 같아도 더듬어가고 더듬어 가면 이 문제와 저 문제가 전혀 다른 것 같아도 더듬어가고 더듬어 올라가면 맨 꼭대기에는 언제나 하나의 원천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음입니다.
예전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그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모하였을 때는 그 사랑이 자기 안에 넘쳤을 때는 능히 극복하며 살던 것들을 이제는 넘어지는 도구가 되고 예전에는 그 속에서도 시련 가운데 감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는데 이제는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찬 원망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못합니다. 주여, 주여 부르는 사람들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참된 애정이 없는데 어떻게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철저히 자아에 붙잡힌 존재입니다. 자기를 신처럼 섬기며 살아가는 것이 자기의 본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결코 깨트려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너의 사랑을 그랬을 때 이 사랑을 희랍어 성경에서 아가페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정에서 우러나오는 사랑,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부어지는 하늘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대로 살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지성과 우리의 성품과 생활의 성숙을 이루어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면서 우리도 그 안에서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도대체 여러분들의 생활 가운데 언제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회개한 날이 있습니까? 항상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우리의 관점에서 봅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찬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는 잃어버리고 자기 힘으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교회생활은 하나의 껍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문제의 근본일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문제의 근본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주님의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하고 풍성하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고난과 시련이 와도 우리는 그, 안에서 감사했습니다. 유혹이 와도 우리는 능히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도 용서할 수 있었고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을 바라보며 눈물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회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죄에 대해서 뉘우치는 것인데 그 죄의 뿌리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했기 때문에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모든 문제가 마지막에 가면 사랑하니까, 왜 사람들이 죄를 짓습니까?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왜 한때는 사명감에 넘쳐서 충성하던 사람이 변질합니까? 그리고 왜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많이 헌신하는 것은 너무나 손해나는 희생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 그런 생각 안 했는데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서 그것을 버리고 자기를 사랑하게 되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돌이켜야 하지만 돌이킨 곳에서 물러나면 그는 자기는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힘이 필요하지만 힘을 놓아버리면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성입니다. 결국은 많은 삶의 문제가 궁극적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은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식은 것이 신앙의 제일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이 문제가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그리고 중차대한 문제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면 좋지만 그저 그것은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또 내 인생에 있어서 어떤 특별한 때에 그렇게 되는 것이고 그저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환난과 시련 때문도 아니고, 육신의 괴로움 때문도 아니고 어느 한순간에 주님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다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셨는데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어떻게 이렇게 초라할까? 생각하며 진지하게 눈물을 펑펑 쏟으며 기도해본 적이 언제입니까? 이 사랑이 없이는 결코 지성이 성숙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금싸라기처럼 내리고 그것이 가슴에 박히면서 말씀 하나 하나가 여러분들 마음에 커다란 감동을 주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돈이 많을 때였습니까? 좋은 화장품 바르고 얼굴이 예뻐졌을 때였습니까? 배부르고 육신에 병이 없을 때였습니까? 휴가를 즐길 때였습니까? 돈을 많이 벌 때였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때였습니다. 가시밭길길 같은 거친 인생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상처를 받고 인격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품이 갈기갈기 찢어져 거칠어진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 주님의 은혜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앓이라
그 주님을 아는 지식의 빛이 들어오면서 은혜 받은 것은 불과 몇 년, 몇 달 이었고 상처받은 것은 수십 년의 세월이었는데도 놀랍게 그 은혜 위에서 우리의 인격은 변해갔습니다. 무질서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 방탕한 생활들은 단정해지고 그리고 정말 죄인이고 막되어먹은 인간이었던 그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서 생활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게 바로 신자의 변화입니다. 아무리 많이 자라는 나무도 뿌리가 잘려서 물을 흡수하지 못하면 그 나무 크기와는 상관이 없이 곧 말라 쓰러집니다. 똑같이 여러분들이 예수를 오래 믿은 것은 큰 나무가 된 것이라고 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뿌리에 물이라고 한다면 뿌리에 물이 마르면 여러분들이 오래 예수를 믿어서 큰 나무가 되면 더 크게 쓰러집니다. 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쓰러집니다.
우리 교회에는 오래 예수를 믿으셨지만 그렇게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한결 같이 은혜를 받으면서도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연세가 많이 드신 교인들이 있습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항상 예전에 생각하기를 그런 신앙생활은 없다. 그것은 성경에서 그림으로 그려질 뿐이지 실제로 그런 삶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그런 삶을 사는 성도들을 매일 매일 봅니다. 그분들이 그런 것을 합니다. 한때는 이 교회에 와서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펑펑 울고 그리고 나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말로 이 교회에 뼈를 묻겠다고 하는데 그 뼈를 자꾸 묻어서 뭐하는지 납골당으로나 가시지. 이 교회에 안 묻어도 괜찮습니다. 나도 안 묻으려니까. 그랬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서 말라깽이처럼 마른 뼈처럼 되어버립니다. 말하자면 예전에 바다를 헤엄쳐 날쌔게 다니던 명태가 북어가 되어버린 그리고 그 실에 꿰어서 매달려있는 것처럼 바짝 마른 상태로 살아갑니다.
오래된 성도의 두 종류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 사람은 끊임없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오래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말라깽이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운명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절대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북어같이 살아가는 오래된 신자는 동물처럼 늙어가는 중이고, 은혜 가운데 잘 성장하고 있는 성도는 나무처럼 늙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아무리 많이 부어졌어도 그것은 부어진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출렁이는 물과 같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받은 사람답게 그 언약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원리를 따라서 살아야지만 이 내적인 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안에서 풍만한 상태를 자기 안에서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스스로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이들이 아프고 열이 나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서랍에 넣어두었던 체온계를 꺼내 아이의 옆구리에 끼는 일을 먼저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눈으로 혹은 손으로 식별하기 어려웠던 분명한 증거가 체온계 속에 나타납니다. 36,5부가 되어야 하는데 38도 39도가 올라가게 될 때 여러분은 그 체온계를 보면서 이 아이가 여전히 죽지 않고 있어도 위험한 상태로 가고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병원으로 뛰지 않습니까? 그렇게 수시로 영적인 체온계를 여러분들의 심장에 꽂아볼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얼마나 쓸데없는 기도들로 가득 차 있고 본질적인 것들은 밀친 그런 잡다한 것들로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이 교리를 배우고 그리고 또 엄격한 신앙생활 속에서 여러분들이 타락한 적이 없다고 해도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좀 깨끗한 쓰레기일 뿐이지 모두 쓰레기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이런 시대 속에는 자기가 사랑을 못 받고 있다는 것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은 있어도 자기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는 것 때문에 고민하거나 회개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게 가장 본질적인 문제인데, 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오늘 사도의 표현에 의하면 점점 더 풍성해져야지만 분별하고 흠 없이 되고 의의 열매가 가득한 생활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맨 처음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 앞에서 회심하는 그 순간 우리의 인생의 목적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 없었습니다. 그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심장이 사랑을 잴 수 있는 체온계를 꽂는다면 어떻게 수은주가 움직일지 생각해보십시오. 얼음장 같이 차가운 가슴을 안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가능하기나 합니까? 오래 예수를 믿은 사람일수록 죄에 빠지기 쉬운 이유가 이것입니다. 신앙의 형식은 오래 되었기 때문에 반듯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거기에 어울리도록 주님을 더욱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고도의 위선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 믿은 사람이 위선에 빠지고 외식의 죄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 믿은 사람들, 자칭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빠지는 죄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해놓으신 거룩한 계획대로 이 빌립보 교회들이 살기 위해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너희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타난 아버지의 사랑이 끝없이 큰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끊임없이 본받고 은혜의 감화를 통해서 그 사랑이 증진되는 가운데 예전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더 사랑하게 되는 그런 생활을 꿈꾸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바라보았던 진정한 성화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믿지 않았으니 오늘 저녁이라도 시작해서 한 주간 동안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무릎을 꿇고 가슴에 손을 얹고 이 질문에 대답해보십시오. 내가 주님을 풍성한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제일 먼저 이것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 대부분의 성도들은 첫사랑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 주님과의 첫사랑의 때를 잊어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에게 주신 넉넉한 환경이나 좋은 유익들 때문에 우리들이 그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보다 훨씬 고난과 시련으로 가득 찬 시기였고 아는 것도 지금보다 훨씬 미치지 못하는 미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순수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이 벌래 같은 날 위해 큰해 받으셨나
영혼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는 이유도 그들도 마땅히 사랑해야 할 하나님 대신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맡겨주신 작은 일에 자기를 다 쏟으며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일이 아무리 작아도 그 일과 관계를 맺고 계신 분이 무한히 크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주님께 나아갔고 그럴 때마다 우리의 온갖 연약함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 같은 우리들을 사랑으로 대해주셨습니다. 허물은 용서해주시고 마음은 바꾸어주시고 우리의 어두운 지성은 밝혀주시면서 우리는 주님의 손에 이끌려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에는 눈물이 있었고, 우리의 기도는 참회가 있었고, 우리의 삶에는 거룩함이 있었고, 그리고 우리의 교제 속에는 희생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매순간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으로 돌아가려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는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멈춘다는 것은 식는다는 것이고 사랑이 남아있는 한 사람이 사랑하는 대상이 끊임없이 붙어 있으려고 하고 그 관계에 있어서 발전하려고 합니다. 이게 사랑의 속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미지의 세계의 모험이요 도전인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인생의 다양한 문제들이 하나의 근원이 맞닿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풍성한 사랑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어린아이처럼 참회의 눈물을 흘렸으면 좋겠습니다.
B. 지식과 총명 안에서
그러면 이 사랑은 어떻게 풍성해질 수 있겠는가? 오늘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하사” 되어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총명’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이 희랍어가 ‘아이스시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여기서 ‘에스타틱스’라고 하는 미학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총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통찰해서 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할 때 왜 아름다운지 설명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똑같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우리들이 직시하면서 하나님이 왜 아름다우신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진리가 아름답고, 하나님의 속성이 나타나니 아름답고, 하나님의 성품이 예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공부를 통해서 얻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아이처럼 순전한 마음으로 믿는데서 발생하는 통찰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이 이론적인 교리에 대한 깨달음이라면 이 총명은 믿음을 통한 직관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우리의 마음에 계속 생겨나게 될 때 이것은 사랑을 끊임없이 점점 더 불러일으키는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이 이것을 놓고 아주 좋은 비유를 들어주셨습니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사랑의 감정이 불길이라면 지식과 총명은 그 불 속에 던져지는 장작이라고 말입니다. 쌓아놓은 장작은 저절로 불을 일으킬 수 없듯이 교리적인 지식이나 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어떤 믿음 그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바로 그 지식과 그런 총명의 내용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이 성령의 역사와 말씀을 문에 여닫는 경첩에 비유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과 믿음의 통찰, 성경적인 통찰을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이지 이것 없이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우리는 신뢰할 수도 없고 신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오히려 이런 식의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생각을 사단적인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성령은 이처럼 총명과 지식으로 밝혀지는 성경진리와 더불어 짝을 이루며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비를 찾아야 하고 여기에서 성령의 역사를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길이 어느 한순간에 뜨겁게 타오른다고 할지라도 연료가 들어가지 않으면 그 불길은 사위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자연적인 재료로 불을 지를 수 있는 불 중 가장 강력한 불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푸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을철에 시골에서 지푸라기를 태워보십시오. 그 불길의 기세는 어마어마합니다. 그래서 그 지푸라기를 대량으로 태우는 옆에서는 불 바람이 붑니다. 그러나 그것은 몇 분을 가지 못합니다. 빨리 타버리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장작은 집어넣으면 집어넣을수록 힘찬 그 불길이 계속 타오르는 것입니다. 죄가 여러분들을 침륜에 빠지게 만들 때 제일 먼저 화살을 겨눈다면 안 보이게 숨어서 유혹과 시험의 화살을 여러분의 몸을 향해 겨눌 때 여러분들은 마귀가 여러분들의 심장을 겨눌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일먼저 마귀가 겨누는 부분은 여러분의 머리입니다. 머리에 화살을 쏘는데 이 화살은 머리구멍을 뚫고 지나가는 화살이 아니라 이 화살은 혼미한 안개를 피어 올려 여러분들의 정신을 어둡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예배 시간에 조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그 조는 광경이 보기 싫거나 아니면 내가 불쾌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 졸고 있는 것은 결국은 그의 지성이 죄에 심각하게 감염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죄에 감염이 잠시 후에는 심장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식히는 것입니다. 그게 배로 내려가서 욕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게 팔다리로 내려가서 불순종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름수련회를 두고 도대체 사경회 끝난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또 뭘 해야지 되는가? 고민하는데 정리된 생각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수련회에 꼭 와야지 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제일 먼저 여러분들의 머리를 쪼개겠습니다. 그래서 벌려놓고 여러분들이 위에서 한번 자신의 머리통을 보십시오. 도대체 내 머리 속에 무슨 안개가 끼었기에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아름답고 달콤하게 느끼던 그것을 지금은 못보고 있을까? 머리부터 쪼개고 그 다음에 톱을 대서 갈비뼈 중간을 갈라 확 뜯어서 심장을 보아야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 심장 속에 들어갔기에 사랑의 온도계를 꽂았더니 온도계가 얼어버리나. 그리고 밑에 배를 가르고 내려가서 창자를 들 처내야 합니다. 도대체 여러분들의 뱃속에 꿈틀거리고 있는 그 불길한 욕망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그 다음에 무릎 관절까지 찢어내어서 도대체 뭐가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렇게 씩씩하고 완고하게 불순종의 길을 향해 달음박질치게 만드는가. 그것을 한번 봐야 합니다. 수련회 가는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한 것인가. 지금, 모집하는데 방해가 되는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의 세계는 지극히 일부분이고 여러분들은 꽤 많이 말씀을 알고 은혜의 세계를 섭렵한 것 같지만 그러나 비유하자면 태백산맥 중에서 어느 한 동산을 오르고 있는 중입니다.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까? 나는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팔을 꼬고 지긋이 눈을 감고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 속에서 불이 납니다. 그래서 제가 예배 시간에 가끔 이렇게 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저는 낫습니다. 윗필드 목사님은 이렇게 한 게 아니라 조는 사람에게 내려갔다고 합니다. 당신이 나 윗필드가 말하면 그래도 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네가 잘 수 있는가. 그래서 나도 한번 다음 주부터 내려 가보려고 합니다.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가문의 망신이니까. 녹화까지 다 될 것입니다. 내려가서 조는 이유를 한번 말해보라고, 해서 끊임없이 지식의 빛이 들어와야 됩니다.
내가 존 오웬의 공원을 만들면서 제가 다시 감사했던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나도 내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는 나를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러면서 그 빛을 받아서 내 안에 있는 혼란스러운 나를 보게 해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오래 예수를 믿을수록 더 많은 지식과 총명의 빛이 부어져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사랑이 감정은 논리를 추방 하고 그리고 논리의 지식은 사랑의 불을 끈다고 생각하지만 성령의 진리는 정 반대로 말합니다. 너희 마음 안에 사랑이 있을지라도 지식과 총명이 없다면 너희의 사랑은 곧 식을 것이요, 너희의 사랑이 작은 것 같아도 끊임없는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총명의 빛이 주어진다면 그것을 연료로 하여 너희 안에 사랑이 타오를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III. 결론 : 영적으로 자라가라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십시오. 여러분들의 인생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아도 변화 받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가장 나쁜 일이 가장 좋은 일의 수단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여러분들은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계기가 필요합니다. 마음을 다하십시오. 성품을 다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새롭게 만나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승리하는 기도생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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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기도와 결단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Ⅰ.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지금으로부터 약 삼천 년 전의 일을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천 오백 년 전 정도의 일을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나라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한 후 세계의 판도는 바벨론 이후 메세와 바사로 넘어가게 되고, 지금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바사 왕국의 아하수에로 왕 시대 때에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사는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배운 페르시아라고 하는 나라였고 여기에 나오는 아하수에로 왕은 여러분들이 세계사에서 배운 그 유명한 임금, 퀘세르세스의 이야기를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여기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포로로 끌려와서 이제 약 120년 여 간의 세월이 흐르면서 남의 나라 땅에서 자리를 잡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모르드개라고 하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 사람에게는 사촌이지만 나이차이가 많아서인지 딸처럼 돌보며 기르던 에스더라는 여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후에 이 아이가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로 간택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큰 위기를 만나게 되었는데, 하만이라고 하는 바사 왕국의 2인자가 유대민족을 모두 죽이기로 왕에게까지 허락을 받아놓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 끔찍한 살육의 계획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만이 권세를 잡고 바사의 큰 지위를 누리고 있을 때에 하잘것없는 모르드개가 왕궁에서 그에게 존경을 표하지 않는다는 시비가 발단이 되어서 유대민족 전체에 대한 미움으로 이어졌고 결국은 그 민족을 모두 도륙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에 모르드개는 이러한 끔찍한 위기를 에스더에게 고하고, 그 이야기를 들은 에스더가 기도하기로 결단하는 장면이 보도된 것입니다.
에스더는 왕후니까 왕에게 가서 이러이러한 부당한 일들이 일어나서 유대민족이 멸망당하게 되었으니 우리 민족을 살려 주시옵소서 하고 부탁하면 되었지만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고, 두 번째는 나라의 중대한 규례가 있었는데 그것은 비록 왕후라 할지라도 임금이 부르지 않은 상태에서 임금의 궁을 찾으면 죽임을 당하는 규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외가 있었으니 만약에 그렇게 예고 없이 자기를 찾아온 사람에게 왕이 왕의 지휘봉이라고 할 수 있는 금 홀을 내밀면 그가 목숨을 부지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부부사이가 뭐 그러냐 그러지만 그러나 그 당시에 바사의 왕은 그냥 평범한 왕이 아니라 신격화된 존재였기 때문에 우리들이 흔히 상정하는 그런 종류의 부부일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커다란 위기를 만났을 때에 하나님이 어떻게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기 가운데서 건져내시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고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기도와 결단의 관계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Ⅱ. 하나님의 섭리와 위기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언약 백성들인데도 이렇게 모두 도륙당할 끔찍한 위기를 만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의 위기의 문제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A. 인간의 연약함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연약함을 보충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로 우리 인간들을 다루십니다. 맨 처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구원 받았을 때, 우리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이며 이제 주님께만 순종하고 하나님께만 우리의 마음을 바치겠노라고 그렇게 깊이 작정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가운데에 그 처음 회심할 때의 마음을 시종일관 유지하고 사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만 사랑하겠다고 결심한 것도 진심이요, 또 그 은혜에서 미끄러져서 하나님만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것도 진심이니 이것이 바로 인간의 연약함인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연약함은 한 개인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공동체로 불러주신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성은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함으로 이루어질 영적인 공동체성의 예표가 되는 것이죠. 지금 이스라엘 민족이 몰살당할 위기에 몰려있게 된 것은 하나님이 바로 이러한 연약함을 다루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비록 그가 모르드개에게서 좋은 신앙의 교육을 받고 독실한 믿음으로 아하수에로의 왕후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에스더 역시 타락한 인간일 뿐이었습니다. 온 몸을 값비싼 비단으로 휘감고, 제국에서 보기 드문 보석으로 치장하고, 눈길 하나면 달려와 자기를 섬겨줄 수많은 시종들을 거느리고, 사람의 눈에 가득 넣어도 다 차지 않을 제국의 영광과 사치를 한 몸으로 누리고 있었던 에스더였는데, 그의 마음에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면 거짓말 아니겠습니까? 비록 한때에는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왕후의 자리에 올라, 나의 이 왕후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요 하나님이 나를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소명과 관련되어 있다고 고백을 했을지라도 그 고백이 시종일관 에스더의 마음속에서 유지되었을 가능성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이 주신 이 위기는 개인적으로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마음을 특별히 뒤흔들어 놓아 자기의 신앙적 정체성을 확인하게 하는 놀라운 기회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편안한 가운데 있고 주님이 복을 주시면 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떠날 유전자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종종 이렇게 인생의 위기를 주심으로 자기의 정체성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자기의 진정한 본향이 이 세상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아주 중요한 계기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에스더의 개인적인 위기는 하나님이 그의 신앙을 개인적으로 다루실 뿐만 아니라 언약백성인 유다민족 전체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공동체적인 섭리와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하나님이 이제 이 이방의 땅에 남겨놓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래의 신약시대에 진입하면서 선교의 씨앗들이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신앙을 돈독히 하고 메시야가 오실 구속의 역사를 대를 잇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었습니다. 비록 예수님 오시기 전 구약시대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종종 역사의 위기를 주셔서 그 위기 속에서 그들이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결단하고 돌아오는 기회를 여러 차례 마련하셔서 하나님의 공동체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하나님의 언약 적 갱신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진작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말아 이 세상 나라 백성과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많은 문제를 개인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 받은 구원은 개인적인 구원인 동시에 그 구원과 함께 우리는, 함께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인바 되어서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개인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섭리 속에서의 위기가 교회 속에서 일어나는 위기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두 가지 관계를 되돌아보도록 만들어줍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옳은지를 살피도록 우리에게 반성을 촉구하고 돌이키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는 많은 위기는 교회와의 관계가 바른지를 돌아보도록 만들어주는 훌륭한 자극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은 반드시 보이지 않는 교회의 공동체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보이는 교회의 지체들에 대한 사랑에 의해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이 두 관계 모두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의 위기를 통해서 깨닫게 만드시는 중요한 수단들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교회에서 경험되는 많은 공동체적 위기들이 거꾸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생각나게 만들어주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공동체가 직면하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의 위기를 통해 나 자신의 신앙과 마음의 상태를 보게 만들어주시고 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죠.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복음과 더불어 역사하여 놀라운 복음 전파의 진군을 이루던 때에 초대교회의 그 강력한 행진이 멈추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었습니다. 주님께 바치기 위해 자기의 소유를 판 돈 얼마를 감춘 그러한 부정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임을 당하고 시체가 실려 가는 그 광경을 통해서 모든 예루살렘 교회의 지체들은 공동체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 위기를 만난 공동체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그들은 각기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순전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죽임을 당했어도 남아있는 공동체의 가족들은 순결한 신앙으로 다시금 정결케 되고, 그러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성령의 능력과 함께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게 되어 초대교회의 승리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또 나와 교회, 교회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이러한 커다란 위기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각자 각자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의 선생으로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저도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었습니다. 교회가 굉장히 영적으로 혼란스럽고 어지럽고 목회자와 장로님들이 서로 다투고 하는 복잡한 과정이었다고 해요. 그러다가 기도원을 가기 위해서 교인들이 버스를 타고 가는데, 그 봉고가 가다가 사고가 났어요. 그래서 얘기를 들으니까 탱크가 봉고 옆을 지나가는데 빨리 가지도 않고 천천히 가는데 탱크가 슬금슬금 와서 그 봉고를 밟아 버렸대요. 그래서 사람이 한 명인가 두 명이 죽었어요. 그래서 교회가 발칵 뒤집혔어요. 또 그 죽은 사람을 장례 지내기 위해서 버스가 가는데 또 사고가 나서 또 사람이 다친 거예요. 같은 일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중요한 메시지가 있는 것이죠.
B. 위기를 사용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 개인도 연약하고 공동체도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연약함을 다루시는 방법으로 위기를 사용하십니다. 가장 좋은 신앙생활은 간증할게 없는 신앙생활입니다. 우리 간증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제가 요한복음을 읽다 은혜를 많이 받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은 간증에 안 붙여줘요. 그래도 간증이 되려면 뭐 간암 4기쯤 갔다가 튀어나오던지, 아니면 거의 죽었다가 살아나던지, 아니면 주위에서 가족들 중에 누가 죽든지, 사업이 쫄딱 망하든지, 하여튼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야지만 그게 간증거리가 되는 거죠. 그러나 사실 간증 중에서 가장 위대한 간증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위기가 오기 전에 그 말씀을 통해서 내가 내 인생의 길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이킨 것이죠. 그것보다도 더 커다란 간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그런 간증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열일곱 살에 이미 사생아를 낳고 방탕한 삶을 살았지만, 그래서 마음에 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었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어떻게 때려 하나님께도 돌이키게 되었는지를 간증하는 일에 자신의 고백록의 상당부분을 할애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목자와 양의 관계이고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관계가 인격적인 관계가 되기를 원하는 거죠. 개 패듯 팬다는 말은 있지만 양 패듯 팬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만큼 짐승들을 다룸에 있어서 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이 우리가 양을 다루는 방법과 유사하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거죠. 그것이 바로 인격적인 관계에요. 인격적인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필요한데 서로 사랑을 해야지만 인격적인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판기에서 돈을 집어넣고 음료수 하나를 꺼내 먹을 때 우리는 그 자판기를 설치한 사람하고 우리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 같은 것을 기대하지도 않고 그 설치한 사람이 남잔지 여잔지, 못생겼는지 잘생겼는지 상관없습니다. 기대하는 것이 어차피 사랑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인격적인 관계가 되어서 서로 영향을 받으려면 기본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들만 부모와 인격적인 과계가 형성이 되는 거지, 부모를 자기 어른 될 때까지 돈 대주는 물주로 생각하는 녀석들에게는 부모와의 인격적인 관계 같은 것은 존재할 수가 없는 거죠. 또 하나는 뭐냐면 인격적인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대화를 통해서 말이 어느 정도 되어야지만 인격적인 관계가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런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우리를 도덕적으로 설득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따라서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시죠. 하나님의 말씀을 펴면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펴면 하나님의 말씀이 거기에 담겨있기 때문이죠. 예배시간에 나오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다 더 이해하기 쉽게 들려주는 것이니 이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경건서적을 읽을 때도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듣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과의 교재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시지만 우리 귀에 말씀이 언제나 들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시지만 우리는 듣지 못하기에 때로는 하나님이 환경을 통해서도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고난과 인생의 큰 절대 절명의 위기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환경과 상황의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가 너무 깨닫지 못하면 꿈을 통해서라도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주어 우리로 하여금 각성을 하게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죠.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이렇게 객관적인데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 역성을 든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을 비틀고 꺾어서라도 우리 편을 들고 우리를 두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잘 전달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이외에는 기도가 잘 될 때가 없는 것이죠. 우리의 기도는 사랑이랑라고 하는 인격적인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께 잘 전달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뜨거워진 마음은 기도라고 하는 불을 피우기에 적합한 아궁이가 된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하지도 않고 마음에 하나님의 인격적인 말씀도 들리지 않는 영적인 무감각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의 인생에 위기를 주시고 또 교회에도 위기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특별히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시는 것이죠.
오늘 이 에스더는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입은 사람이었고, 당시 최고의 제국에서 최고의 영광을 누리며 왕의 사랑을 받던 여자였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아무것도 부러워할 것이 없는 호강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목적은 단지 그 수산 궁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왕의 총애를 받는 한 여자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누리도로 주신 것이죠. 그러나 너무 많이 누리기 때문에 그것들을 주셔서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큰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잊어버리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많은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인생의 위기를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우리들이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고 흔들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자리로 돌아가기를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그렇게 하는 것보다도 더 훌륭하게 하나님에 의해서 그 마음이 움직인다면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이렇게 쓰라리고 커다란 위기를 주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가 정말 무력하고 힘이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마음을 쥐어뜯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왜 하나님이 커다란 환난을 주셔서 똑같은 것들을 주셔야 합니까? 늘 자기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효도하지 못한다고 가책하는 자식에게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효도하라고 강요할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자신에게로 향할 마음의 여유와 능력을 잃어버리고 우리의 심정이 분산될 때에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인생에 누구의 도움도 바랄 수 없는 위기를 허락하심으로 우리의 때가 위기인 것을 알게 하시고 우리의 영혼이 위험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크게 쓰셨던 사람 가운데에 이런 위기를 만나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지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인생의 꾀를 더 많이 신뢰했습니다. 마지막 아내를 빼앗길 위기에까지 놓이게 되자 그는 비로소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고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이 그 아내를 그의 품으로 돌려보내시지 않으셨습니까? 야곱은 비록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이었지만, 자기 꾀로 인생을 산 본보기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끊임없이 낮추시고 그 마음을 깎으시고 연단하시기 위해 불같은 시련의 날들을 통과하고 그리고 가시밭길을 걷는 것 같은 배신과 고통의 길을 걷게 한 후에야 비로소 그는 하나님 앞에 연단된 사람으로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순전한 사람이었지만 많은 고난과 시련을 당하고 난 후에야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위기를 주셔서, 혹은 공동체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신앙을 향한 위대한 돌이킴의 기회로 삼아주셨던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사람도 없고, 무엇인가 자기의 신앙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온전해져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인간도 없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이 모든 것이 ‘했으면’ 으로 가정해서 마지막 ‘할 텐데’ 라고 하는 가상으로 끝이 나는 거죠.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은 언제나 가정에서 시작해서 가정으로 끝나고 우리의 마음을 겉돌아 한 번도 우리들이 바라는 그 일을 위해 하나님 앞에 마음을 집중하고 기도하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C. 기도와 집중
고등학교 다닐 때 저에게 잠깐 과외를 가르쳐주던 늙은 총각이 한 분 계셨는데, 40이 넘도록 장가를 못 갔는데 성격도 독특했어요. 이 양반이 겨울이면 옥상에 올라가서 라면을 끓여먹는데, 옥상에 양은 냄비를 걸어놓고 라면을 끓이는데 태양열로 끓여먹는 거예요. 자기가 집열판을 만들어서 빛을 반사시키는데 그 추운 날인데 집열판을 통과해서 빛이 들어오면 라면 한 개 정도 끓일 수 있는 물이 펼 펄 끓어요. 참 신기합니다. 만약에 그 집열판이 없이 찬물을 놓고 올려놓는다면 살얼음이 얼 텐데 태양열이 집약이 되니까 끓는 거죠. 겨울에 날이 추워서 아이들이 처마 끝에 달린 고드름 아래서 추위를 피하고 눈싸움을 하던 손을 호호 불지만, 돋보기 하나를 가지고 햇빛을 모으면 옷을 태우고 종이에 불을 붙일 수 있을 정도까지 그렇게 강한 열을 냅니다. 우리들이 집중되지 않은 상태에서 5년 동안 기도했다고 하더라도 그 기도한 기간의 길이는 의미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집중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을 떠돌던 거품처럼 떠돌면서 기도하던 몇 년 동안 기도해도 응답이 없었는데, 불과 몇 분 몇 시간동안 온 마음을 모으고 자신을 태울 듯이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할 때 주님의 놀라운 응답이 주어지고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는 놀라운 기도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도 바로 이 집중의 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부담을 안 가지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누가 “나는 하나님 앞에 구김이 없는 이 시대 최고의 신자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바보 같은 사람입니까? 누가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언제든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질서로부터 멀리 떠나있으면서 그것을 스스로 잘못됐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것을 모두 느끼면서 살아도 그렇게 잘못된 것을 본격적으로 해결해 보려고 목숨을 거는 사람도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집중하지 않는 우리들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때로는 눈 뜰 수 없는 시련과 환난을 허락하시기도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환난이 꼬리를 물고 시련이 위기가 되어서 우리를 벼랑 앞에 세울 때, 하나님 앞에 마음이 굳어지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낙심합니다. ‘아! 내가 이전에 행한 악 때문에 하나님 앞에 벌을 받는구나. 아, 하나님은 이제 나에게 드디어 복수하시는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죠.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실 때에 때로는 우리를 때리고 치시지만 그것은 복수의 감정으로 우리에게 앙갚음을 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보면 요새 자꾸 애들 때리지 말고 야단치지 말라고 그러는데, 여러분 가만히 우리 주위를 돌아보고 과거를 돌아보면 쥐어 패고 길렀다고 해서 효자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애들 안 때리고 길렀다고 해서 모두 효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 반대로 뒤집어서 때리면서 길렀다고 해서 걔들이 모두 불효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또 놔서 대충 길렀다고 해서 걔들이 모두 막된 애들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뭡니까? 각자 교육의 철학이 있겠죠. 부모니까. 그래서 ‘나는 애들을 때리면서 기르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잇겠죠. 특히 여자애들 같은 경우에는.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또 다르게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어떤 집안에서는 애들을 징계하고 때리며 길렀기 때문에 애들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든 가정도 있겠지만, 또 어떤 가정은 그랬기 때문에 애들이 망가지기도 합니다. 그럼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문제는 이것이에요. 부모가 자식을 때리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때릴 때에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느냐는 거죠.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게, 하여튼 고등학교 때 우리는 무지하게 때렸습니다. 지금 아마 그렇게 때리면 전부 다 학교에 불을 지르든지 교육청에 신고를 하든지 난리가 났을 거예요. 그런데 엄청 때렸습니다. 특히 우리 학교는. 때리는데 그냥 때리는 게 아니라 몽둥이로 때립니다. 매년 목공소에다가 애들 때리는 몽둥이를 주문을 합니다. 그 모양도 아주 독특해요. 각이 없이 아이들을 잘 때릴 수 있도록 그렇게 하고 이제 그 아이들을 때리는데 정말 무섭게 때려요. 그런데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아이들을 후려치는데 진짜 한 번 맞고 가면 그 다음 며칠 동안 잠자다 오줌을 쌀 정도로 그렇게 때립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만의 현상이 아니라 어디가든지 늘 보는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 한 분이 계셨는데 애들이 뭘 잘못했어요. 그랬더니 막 때리는 거예요. 그 60명을 다 때리는 거예요. 기운도 좋으셔요. 그 때리는 것은 내 마음에 전혀 상처가 안 되었는데 중간 쯤 때린 다음에 한 한 마디는 40년 가까이 흘렀는데도 안 지워져요. “내가 너희를 잘 되라고 때리는 줄 아냐? 내가 너무 화가 나서 때린다.” 그게 말이 되요? 선생이. 자기 마음에 화가 나서 때려도 빈 말이라도 “내가 화가 나서 때리는 줄 아냐? 너희들 잘 되라고 그러지.” 한 선생님은 동경제대를 나온 수학선생이었는데 아주 많은 학생들이 존경하는 선생님이에요. 잘못하면 엎어놓고 힘차게 다섯 대를 때려요. 항상 때린 다음엔 빙긋이 웃으면서 “나도 힘이 많이 듭니다. 나한테 맞은 사람은 고기 사 오십시오.” 늘 존댓말을 하셨어요. 사랑으로 때리는 것은 괜찮아요. 그게 자녀들이 다 알아요. 그런데 부모들이 파르르 하는 이 분노의 감정으로 아이를 때릴 때 그게 살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마음속에 꽂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세요. 우리가 말해도 알아들을 수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난을 주십니까?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으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길을 가르쳐주시면 주님의 뜻을 따르겠노라고 고백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짓밟으십니까? 우리가 인생의 위기를 만나고 환난을 만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복수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벌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때리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때리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때리시는 거예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고백록에서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내 마음을 때려주셨으므로 나는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제가 15년 동안 수련회,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늘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수련회를 하는 이유는 수련회가 필요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렇게 될 가능성은 영원히 없기 때문에 그냥 하는 거죠. 주일예배가 늘 사경회 같은 교회, 여름 수련회를 따로 갈 필요 없는 수요예배, 금요 기도회. 그럼 되잖아요. 그런데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이 분산되고 흩어져요.
III. 결단하게 하시는 은혜
여기에 에스더가 하나님을 향해 결단을 내리면서 자신도 금식하고 민족도 금식기도로 초청해요. 우리는 흔히 이 금식기도는 하나님의 긍휼을 얻기 위함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가 밥 몇 끼 못 먹어서 배 꺼진 것 보고, 그래도 충분히 꺼지지 않잖아요. 워낙 평소에 많이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요새 너무 비만에 시달려서 몇 끼 굶어도 표도 안 납니다. 그걸 보고 하나님이 정말 불쌍하다, 이렇게 생각하실 걸 기대한다면 우리는 외식주의자들이죠. 우리는 오히려 이 금식의 의의를 ‘집중’에서 발견하게 되는 거죠. 왜 금식이 놀라운 집중을 가져다주는지를 잠깐만 설명을 드립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향하지 못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의 육신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입의 맛과 살에 스치는 모든 감각들을 통해서 수많은 사물의 물상들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게 되요. 이 들어오게 되는 것도 우리의 육체가 음식을 공급받아 원기가 있을 때에 되는 거죠. 그래서 잘 못 먹으면 눈이 흐려지지 않아요? 눈이 뭐가 낀 것처럼 희미해지고 잘 안 보이는 거죠. 피곤해도 눈이 잘 안 보여요. 몸이 아프면 그렇게 맛있던 고깃국도 맛없는 국물로 느껴지지 않아요? 그렇게 맛있던 고기도 마치 나무껍질 삶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고기나 나물이나 다름이 없이 느껴지잖아요.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의 육체가 건강을 유지하고 있을 때 정상적인 감각이 살아나는 거죠. 그러면 그것은 빨아들이는 놀라운 힘이 있는 거죠. 또 하나는 뭐냐면 육신의 건강이 살아있을 때, 이것들이 들어올 때 정동이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아름다운 것을 보면 ‘아, 가고 싶다. 언제 시간을 내지? 돈은 어디서 마련하지?’ 생각이 들지만 한 열흘 쯤 굶은 다음에 예쁜 스위스 경치를 보여줄 때 당장 달려가고 싶다는 그런 생각은 안 납니다. 왜냐하면 그걸 보고 정동을 일으킬 기운이 없는 거죠. 여러분, 40일 금식기도하면서 누군가를 죽으라고 미워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정동이 일어나질 않아요. 육체에 힘이 없어서. 그래서 금식은 이렇게 사물의 물상이 우리에게 많은 인상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고 또 한 편으로 그것들이 들어온다고 할지라도 과격하게 일어나는 우리의 정동을 억제해 주는 거죠. 그 금식이 우리의 정욕을 사라지게 하거나 우리의 감각기관을 퇴화하게 하지는 못해요. 영적인 것이 아니에요. 육체가 영혼을 주장하지 못해요. 다만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영혼이 주님을 바라보기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잠시 죽이는 역할을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거죠. 이런 집중된 기도가 이 이스라엘의 위기 속에서 필요한 기도라고 하는 것을 에스더가 알았기 때문에 뛰어난 결단으로 이것을 제안하는 거죠. 하나님이 나를 이때를 위하여 이 자리에 세우셨기 때문이라는 결단이죠. 매 순간 크고 작은 결단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필요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지나치게 침체되었을 때에, 신앙에서 뒤로 물러나 말씀이 희미해지고 우리의 기도도 허공을 치는 것같이 그렇게 혼란스러울 때 우리에게는 고도의 집중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만 집중하겠노라, 그분께만 매달리겠노라, 내 인생의 모든 희망을 그분께만 발견하겠노라고 그분께만 집중하게 만들어주는, 집중하도록 자신의 마음을 세우는 결단을 하게 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결단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 중 누구도 결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결단하기를 선택하는 사람에게만 결단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편에서 보면 우리가 결단한 것이지만 저편에서 보면 먼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때려주셨기 때문에 결단하게 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IV. 결론 : 결단과 기도
성경을 보십시오. 잠시 전에 언급한 신앙의 위인들을 비롯한 신약의 많은 인물들, 한 결 같이 우리와 같이 연약하고 미끄러지고 침체에 빠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외쳤던 세례요한도 한때는 영적인 침체에 빠져서 오신 그이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인지 의심하는 지경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와 꼭 같이 연약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놀랍게 이런 신앙의 위기 앞에서 결단하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집중하며 매달리고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부르심에 자기를 집중시키는 놀라운 결단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의 모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드러내는 도구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은 바로 이렇게 연약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결단하게 하시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들이 이렇게 흐트러진 여러분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모으고 인생의 위기 속에서, 다양하게 만난 시련 속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부르신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이 강력한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불러 주권적으로 당신의 자녀 삼으신 사람들인 것입니다. 미끄러져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고 물러가 침륜에 빠져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많은 시간들이 흘렀지만 신앙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지 않았습니까? 지금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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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말씀을 여실 때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 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계 5:1-5).
Ⅰ.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 앞에 펼쳐진 이 책은 요한 계시록입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일 뿐만 아니라 신구약 성경의 최종 자리에 위치해 있는 책입니다. 이 계시의 말씀으로서 모든 기록된 계시가 끝나는 역할을 하는 그 계시이기도 합니다. 이 편지는 사도 요한이 쓴 서신서입니다. 그는 말년의 때에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아 ‘밧모’ 라고 하는 외로운 섬에 홀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노구를 이끌고 밧모 섬에서 유배를 하고 있는 이 사도에게서 유일한 위로는 거기서 우리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요한 계시록은 마지막에 될 위대한 일들에 대한 계시가 담겨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맨 앞부분에는 일곱 교회에 대한 우리 주님의 평가가 등장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어떤 사람들은 일곱 교회 자체가 교회 역사의 일곱 시대와 관련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즉 맨 처음 등장하는 에베소 교회는 사도와 그 이후의 시대를 가리키고, 마지막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이 오시기 직전 말세 때의 교회를 가리킨다는 해석이죠. 그러나 보다 더 설득력 있는 해석은 일곱 교회는 소아시아 지방의 실제 교회였지만 그 일곱 교회가 주님께 지적받고 있는 좋은 상태와 나쁜 상태는 이후에 지구상에 존재할 모든 교회의 좋은 상태와 나쁜 상태를 반영하고, 이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판단과 평가는 또한 후대의 교회들이 거울삼아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를 스스로 주님 앞에 가꾸고 세워야할 지침이라고 해석하는 것이죠. 저는 이 두 번째 해석을 훨씬 더 합당하게 여겨서 택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계시가 2장서부터 3장까지 계속 드러나고, 4장서부터 계시의 말씀들이 계속 주어졌습니다.
Ⅱ. 통곡하는 노(老)사도
그런데 오늘 무슨 일인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일곱 교회에 전달하기로 소명을 받은 사도가 통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왜 이 노(老)사도는 밧모의 외로운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이렇게 크게 통곡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 등장하는 장로라고 하는 이 사람은 지상에 있는 교회에서의 장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올리워진 성도 중의 하나라고 해석을 합니다. 뒤에 보면 네 생물과 장로들이 나오는데, 네 생물은 이 모든 피조세계를 대표하는 주님의 피조물의 대표적인 묘사요, 장로는 선택받고 구원받은 무리를 가리키고, 어린 양이 그 사이에 있다고 하는 것은 역시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노 사도가 바로 이 장로 중 하나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는 크게 울었습니다. 이가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되어 있는데, 희랍어 성경에 보면 흐느껴 운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어서 우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동양의 문맥에서는 나이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 앞에서 우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젊은 사람이 부모 앞에 술을 마실 때에 돌아서서 음복을 하듯이, 또한 나이 많은 아버지들은 슬픈 일이 있어서 눈물을 흘릴 때 자식의 눈에 띄지 않도록 돌아서서 우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도가 이렇게 통곡하며 울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제일 먼저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A. 주어진 사명 (1:19)
그의 사명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네 오른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복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이롭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고 하였습니다. 곧 사도 요한에게 주어진 사명은 지금 있는 일과 마지막에 되어 질 위대한 일들, 교회의 목회자와 교회에 관한 비밀들을 이제 주님께로부터 계시 받아서 일곱 교회에 편지함으로써 일곱 교회를 깨닫고 깨우칠 뿐 아니라, 이후에 지상에 존재하게 될 수많은 교회들을 이 교훈을 통해서 일깨우라는 사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요한이 이 요한 계시록을 쓸 때의 나이가 95세를 넘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99세 때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95세쯤에 이 요한 계시록을 썼고 99세경에 죽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자! 나이가 90이 넘으면 이미 은퇴를 했어도 몇 번 했을 나이입니다. 자기의 몸도 가누기 쉽지 않은 이 노년의 연세에 주님께서는 새로운 사명을 사도 요한에게 주셨습니다. 열두 명의 사도 중 자연적인 수(壽)를 모두 누린 유일한 사람이라고 기억되는 이 노 사도에게 주어진 사명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이제 내가 현직에서 은퇴하고 나이도 많으니 그냥 교회나 다니다가 목사님 장례식이나 받으면서 죽으면 그걸로 끝이지.’ 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또 어떤 분들은 ‘내가 진작 젊어서 주님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같이 늙은 사람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무슨 사명이나 있을까? 그것은 나이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지.’ 라고 말합니다. 혹은 또 다른 이유로 ‘내가 이렇게 배우지 못했는데 나 같은 무지 랭이 에게 무슨 사명이 있겠어. 그저 주님이 주신 은혜나 받으면서 빗나가지 말고 살면 주님도 만족하시겠지’ 라고 말입니다. ‘내가 돈이 많고 재력이 있다면 하나님이 날 통해 이루실 일이 있겠지만, 돈도 없고 몸도 병들었는데 내게 무슨 사명이 있겠어?’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사도 요한이 이 ‘밧모’ 라고 하는 섬에서 외롭게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절해고도의 외로운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노구를 이끌고 지낼 때에 그에게 하나님이 이처럼 중차대한 사명을 주시고 이후의 교회들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큰 진리를 이 노년의 노 사도에게 맡기시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이 사람만큼 커다란 사명을, 미래에 대해 위대한 일의 계시를 알리도록 맡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의 부르심에는 후회도 없고 또 주님의 부르심은 사람의 지혜의 부르심과는 상합하지 않을 적이 많은 것입니다. 쓰임 받을 만 할 때에는 하나님이 쓰시지 않은 사람이 있었으니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가 아니겠습니까? 젊고 기억력이 총명하고 애굽의 모든 문물과 학식에 통달하고 이스라엘을 위한 열정도 있었지만, 주님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80세가 넘어 늙은이가 되었을 때에 이제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이런 부르심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던 나이에 주님은 불타는 가시나무 떨기 사이에서 그를 만나시고 그를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열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자기에게 주신 은혜의 비밀이 무엇이고,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지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목표 없는 경주에 헌신하는 달음박질하는 선수와 같습니다. 목표가 없는데 그에게 어떻게 최선을 다할 것을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렇게 현저하게 달라서 하나님은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도, 때가 다 지난 것 같은 사람도 이렇게 부르셔서 당신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B. 봉인된 책(5:1)
이 노 사도가 받은 사명은 바로 마지막에 될 위대한 계시를 일곱 교회에 전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스스로 상상하고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주님이 계시해주셔야만 알 수 있고 전달해 줄 수 있는 그러한 계시였습니다. 이제 보좌에 앉으신 이 오른손에 책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두루마리의 형태로 된 책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마지막에 될 위대한 일의 계시가 담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것을 천사가 받아서 풀어주어 자신에게 알려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마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누가 이 책을 펴며 이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는 외침이 울려 퍼졌을 때에 하늘 위에서나 땅 위에서나 땅 아래서나 그것을 펴거나 볼 이가 없다는 사실을 이 사도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이 봉인은 대부분 왕이나 지체가 높은 사람이 보내는 개인적인 두루마리 서찰이나 공문서에 찍힌 봉인이었습니다. 이것은 뗄 수 없도록 봉인이 되고, 이 봉인을 받는 사람이 봉인이 인봉된 것을 확인하고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그것을 받아서 그것을 뗄 자격이 있는 사람만 그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에 왕이 그런 서찰을 보냈는데 받은 사람이 봉인이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면 왕의 명령이 누군가에게 누설되었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 봉인을 해체한 사람은 왕명을 거역한 사람이 되어서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봉인된 이 계시의 책을 보면서 그는 크게 절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은 교회의 현재 상태에 대한 우리 주님의 판단을 알리고 마지막에 될 위대한 일들에 대한 계시를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계시의 책은 봉인되어 있었고, 자신뿐만 아니라 하늘 위에서나 땅 위에서나 땅 아래 있는 어떠한 인물도 그 인봉된 책을 풀 수 있는 권한이 없었습니다.
C. 통곡하는 노(老)사도
이 인봉된 책 앞에서 노 사도는 어찌했습니까? 그는 오늘 성경에 의해서 묘사되기를 “크게 울었더니······.” 했습니다. 노 사도가 통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평생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만을 위해 살아온 이 노 사도에게 자신이 목회하던 교회의 성도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또 두고 온 가족들과 혈육들은 얼마나 그리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던 이 노 사도가 주님의 계시의 책을 볼 수 없다는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 노 사도는 크게 울었습니다. 울었다는 이 말은 흐느껴 울거나 그냥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라 억제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통곡하며 우는 것을 가리킵니다. 크게 울었다고 되어 있는 이 희랍어 단어 ‘폴뉴’ 라는 단어는 ‘많이’ 라고도 해석될 수 있으니, 아마 큰 소리로 많이 통곡하였다고 여겨집니다. 이 노 사도에게 하나님의 계시의 책을 열 사람이 없다는 것은 큰 고통이었고 그래서 이 노 사도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아픔 속에서 통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울부짖는 노 사도의 고통스런 탄식과 울음은 바로 뼈 속 깊은 곳에서 사무쳐 나오는 전 존재적인 슬픔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떨어져 외로운 섬에 있는 고독도 이길 수 있고, 그토록 보고 싶은 사랑하는 성도들을 만나지 못하며 홀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며 주일을 지켜야 하는 목회자의 외로움도 견딜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계시의 책이 닫혀져 있는 것은 참을 수 없이 괴로운 일이었기에 이 늙은 노 사도와는 어울리지 않게 백발을 휘날리며 그는 통곡하고 어린아이처럼 울었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 이었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이 이 책의 인봉을 풀어주시지 않는 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 곧 일곱별과 일곱 교회에 대하여 현재의 상태와 미래의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알려줄 자신의 이 위대한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큰 슬픔 속에 울었고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성도로서 일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환난도 만나고 시련도 만납니다. 때로는 너무 사랑하는 정든 지체들을 삶과 죽음 사이의 강을 떠나 먼저 주님께로 보낼 때에도 우리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인정의 정이라 눈물을 흘리고 아파하기 마련입니다. 시시때때로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신앙을 기리기 때문에 때로는 눈물 골짜기를 지나며, 때로는 폭풍과 흑암 사이를 헤치고 항해하며 우리는 때로는 외로움 속에, 때로는 두려움 속에, 때로는 아픔 속에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곤 합니다. 그때에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참 훌륭한 신앙이고 칼빈 선생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주님이 주신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죽이는 삶입니다. 이 모든 고통의 경험, 거기에서 눈물을 흘리고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체험들은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 대해서는 죽고 주님을 향해서는 살게 하는 하나님의 훌륭한 은혜의 방편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통곡하는 이 노 사도 앞에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금치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노 사도가 사랑하는 가족들, 두고 온 교회의 성도들 때문에 울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지만 오늘 사도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통곡의 이유는 대부분 우리들이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계시의 책을 볼 수 없다는 그 사실 때문에 흐느끼며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때가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더 많이 깨닫지 못해서 나는 어둠 가운데 있는 영혼이요, 나의 지성은 눈 감긴 지성이라, 내 자신의 힘으로는 이 인봉된 계시의 책을 펼 수가 없기에 오직 주님 앞에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매달리며 나의 눈을 열어 주님의 기이한 법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하늘의 창을 열어 더 찬란한 진리의 빛을 내 어두운 영혼에 밝히시옵소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너무 무지한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래서 나의 무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거룩한 보혈로 구원해주신 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못하면 어떡할까 염려가 되어서 주님 앞에 매달려 울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해 달라고 통곡해 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의 밝은 깨달음 아래서 일 년 동안 노예로 지내는 것이 주님의 진리에 대한 빛이 없이 큰 나라를 다스리는 왕궁에서 왕으로 지내는 것보다 훨씬 내가 원하는 바라고 우리들이 고백해 본 적이 있습니까? 지천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여기저기에 진리의 말씀이 있어도 그것을 조금도 고마워하거나, 이것이 나의 마음에 없다는 것 때문에 안타까워하지 않는 이러한 신앙의 모습이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까?
1611년에 영국에서 ‘King James Version' 이라고 하는 역사상 가장 정확한 영어로 된 번역 성경이 출간되었을 때에 그 최초의 판매가격이 인플레이션으로 계산을 할 때에 현재의 가격으로 4억 6천만 원이었다고 합니다. 성경 한 권에. 그러나 이제는 설렁탕 한 그릇 값이면 구할 수 있는 책들이 서점마다 즐비하고 서점에는 사서 펴기만 하면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는 책들이 그득합니다. 북녘에 있는 동포들은 성경이 없어서 극동방송국과 아세아 방송국에서 불러주는 성경을 새벽마다 몽당연필로 노트에 받아 적어서 그것을 들고 지하교회에 모인다고 합니다. 그것도 사기 싫은 사람들을 위해서 도서관에 펼쳐서 읽기만 하면 들어올 계시의 빛이 가득 한 책들이 겹겹이 쌓여있는데도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통곡이 없지 않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믿는 사람을 보겠느냐고 말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
무엇 때문 입니까? 말은 많고 외치는 소리는 많지만, 그것이 그 사람을 녹인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길을 잃고 헤매고 목말라 기갈하고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 이 노 사도는 통곡하고 있습니다. 인생사는 것이 괴로워서 기도하면서 울어본 적이 있고, 야심찬 사업의 계획을 앞두고 기도해 본 적은 있지만, “하나님, 내가 원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내 인생의 모든 고통은 주님을 모르는 무지 때문이고 내가 좀 더 좋은 신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진리의 빛이 내 마음에 없기 때문입니다.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과 같사오니 주님, 내게 무엇을 주시려거든 당신 자신의 진리의 빛을 주옵소서.” 라고 통곡하며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어느 선교사님이 중국을 가셨습니다. 가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모인 중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내가 가서 무슨 말씀을 전해주면 좋겠느냐?” 물었더니 주최 측에서 하는 말이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그런데 길게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이 선교사님이 가서 여섯 시간 사십분을 설교를 했답니다. 열한시에 시작을 해서 그 다음날 여섯시에 끝났답니다. 나는 다섯 시간 사십분을 연속으로 설교한 적이 있거든요. 그게 기록인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기록을 깼어요.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목마른 성도들을 우리 주님이 하늘에서 내려다보실 때 얼마나 가엾고 사랑스러우실까요? 목자 없는 양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면서도 주님의 돌봄을 말씀 안에서 찾으려고 하는 이름 모를 성도들의 그 마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그 마음은 우리 주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예쁜 마음이겠습니까? 은혜의 물에 잠긴 성도는 교만할 수 없고,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는 이 은혜의 물에 잠길 수 있는 성도가 없는 것입니다. 겸손은 흉내는 낼 수 있지만, 흉내는 겸손을 향기나지 않는 종이로 접은 꽃이요. 진정한 겸손은 진리의 말씀 속에 자기를 담가 주님의 위대하심과 그 위엄과 그 자비의 무한하심을 깨달은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덕성인 것입니다.
Ⅲ. 말씀을 여실 때
사도는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통곡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말씀을 여실 때가 왔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냥 처음부터 “이렇게 이렇게 말씀이 열리노라.” 고 해 주시지, 사도가 그 많은 시간을 통곡과 눈물 속에 그렇게 울고 난 후에 주님이 장로 중 하나를 통해서 이 사도를 위로하셨을까? 장로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고 하였습니다.
A. 말씀의 주인, 다윗의 뿌리
여기에서 우리는 말씀의 주인이신 다윗의 뿌리를 만나게 됩니다. 말씀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창조 시에도 하나님의 말씀이셨고 그래서 하나님 아들이신 성자는 성부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오셨지만, 그 성자의 나오심은 하나님 안에 있는 그 놀라운 지혜와 하나님 안에 있는 큰 지식의 반영이었어요.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오셨으나 그 아버지와 같은 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위격은 달라 아버지와 교통하시지만 신적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한 그 아들이 성자로 불리시고, 그 성자는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리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성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친히 보내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듣기만 하던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게끔, 간접적으로만 교통하던 하나님과의 사귐을 성육신 안에서 직접적으로 보고 만지고 들을 수 있게끔 교통함으로써 보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하신 인격 안에서 보이지 않는 상위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신 하나님이시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말씀이셨고 오신 후에도 말씀이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진리의 말씀이신 그분이 사람들에게 그 진리의 무지 속에서 진리의 빛을 보게 해 주셨고, 그 인격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들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게 해주심으로 모든 무지한 자들의 눈을 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게 해주셨으니 이것이 곧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영생에 이르는 지식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별명은 다윗의 뿌리라고 오늘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해가 좀 되기 어려운 표현이죠. 왜냐하면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보다 천 년이나 앞선 조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으로 말하자면 일천 년이나 앞선 이 조상이 일천 년 후에 태어날 그리스도 예수가 그 조상의 뿌리가 된다고 하니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그러나 여기에는 구원사적인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설명을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구약에 하나님이 허락하셨던 다윗왕국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나라였습니다. 그 영광과 그 위엄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 다윗왕국은 사실은 이미 이전에 있었고 다윗시대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있어서 다윗왕국이 사라진 뒤에도 오히려 영원히 지속될 또 다른 나라를 뿌리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니 보이는 다윗의 아름다운 왕국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교회의 한 표징이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이지만, 이 보이지 않는 교회의 머리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셨던 것은 영원 전부터였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혈통으로는 다윗의 후손이었으나 영적으로 보면 바로 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모든 왕국의 뿌리가 되는 것이죠. 그 뿌리 안에서 그 뿌리를 보여주도록 나타났던 찬란한 왕국은 소멸되고 소멸된 그 왕국 안에서 다시 꽃피는 아름다운 나라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요, 하나님의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다윗의 뿌리로 묘사되고 있고 그분이 바로 이 말씀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 보면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주시는 권세를 갖게 되는 그 근거가 죽임을 당하는 어린 양이기 때문이라는 묘사가 나옵니다. 이것은 구속사적으로 아주 의미심장한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아버지의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시고 구속을 완성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또 다른 새로운 의미에서 말씀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주인이 되시는 방식이 이제 자기를 대신해서 자기를 증거 할 보혜사 성령이 오심으로써 그 모든 진리와 진리의 의미를 우리 성도들에게 보여주고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분신의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할은 바로 이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이 복음과 계시의 말씀에 의미를 밝히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그 주인에 대해 증거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할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보냄을 받은 이유였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시대에는 제사학파를 비롯한 가톨릭 신자들, 그리고 많은 이단들이 이 성경의 기본적인 원리를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직통으로 계시를 받고 그리고 자기의 마음속에 은밀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님의 성경책과 동일한 권위에 두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앙의 기준들은 무너지고 교회는 무질서하게 되었고 사단은 바로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많은 신자들을 오류로 몰아넣었습니다. 교회는 다시 어둠과 혼란이 불어오게 되었고 하나님의 계시의 책들은 무시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고 그것을 통해 진리를 깨닫는 모든 일들은 초보적인 신학의 대명사가 되었고 누구든지 관상기도니, 내면의 빛이니, 광명이니 하면서 이 성령에 의한 주관적인 체험을 우위에 두는 어리석은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교회를 더럽히고 참된 기독교 신앙을 사악하게 만드는 모든 원흉이라고 생각한 종교개혁자들이 이 모든 것들을 단칼에 쓸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랫동안 중세의 미신 속에서 묻혔던 성령에 관한 중요한 교리들을 복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당신 자신에 대해 증거 하게 하시는 객관적인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교리였던 것입니다. 미신적으로 받아들이던 모든 외경과 위경들을 쓸어내 버리고, 오직 66권의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정한 주님의 계시라고 믿었고, 성령의 위대한 역사는 바로 이 말씀을 열어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그들의 심령 속에 불어넣어주는 것이 성령의 역할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는 성령을 통해 일어나고, 성령의 위대한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과 짝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경첩과 같이, 마치 두 개의 쇠붙이가 하나의 심지를 중심으로 함께 도는 것처럼, 말씀을 떠난 성령의 역사는 신뢰할 수 없고 성령의 역사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지식일 뿐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비한 경건을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말씀을 굳게 붙들었고 말씀을 탐구하면 탐구할수록 인간의 이 모든 능력을 넘어서는 성령의 강한 빛줄기, 우리 인간 지성에 벼락을 내리고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선한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를 목마르게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 위대한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광을 되찾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오늘날 이단 사설들이 가득 하고 계시의 말씀을 떠난 인간의 주관적인 체험과 이 모든 신사도운동들의 궤계는 하나님 나라에 명백하게 반역하는 더러운 것들입니다. 이런 꼬임에 빠지는 어리석은 신자는 진리의 말씀을 모르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미끄러져가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들이요, 그들은 결코 구원받을 백성들이 아닌 것입니다.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는 양을 안다고 했습니다. 진리의 말씀의 맛을 모르고 이단의 사설의 꼬임을 받아 자기의 주관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높이는 성도들이 어찌 구원받은 무리들이 있을 수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이 모든 하나님의 위대한 성령의 역사는 진리의 말씀과 함께 다윗의 뿌리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열어주심을 통해 일어나거늘, 도대체 오늘날에 어느 교인이 진리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 이 노 사도처럼 통곡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해결사처럼 생각하고 자기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르는 심부름센터처럼 여기는 이 모든 형통주의의 복음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헤아릴 수 없는 신학적인 혼란들이 이 개혁사상을 침해하고 교회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 많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부화뇌동하고 심지어는 목회자들까지도 선량한 신학적인 판단을 잃어버린 채 혼돈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고통 하는 더 많은 성도들이 있는데, 외치는 자는 많지만 생명수가 말랐기에 길을 잃은 많은 사람, 지금도 빛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B. 빛을 구하는 기도
교회가, 성도가 일생동안 하여야 할 기도를 줄이고 줄이고 줄인다면 오직 둘 밖에 없습니다. 진리의 찬란한 빛과 이 빛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강한 역사, 이 두 가지 이외에는 사실 나머지는 모두 부차적인 기도의 제목들인 것입니다. 빛을 구하는 기도, 드리고 있습니까? 정상적으로 교회에서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다면, 회심을 하여 신자가 되든지 아니면 그 진리가 미워서 뛰쳐나가든지 둘 중의 하나여야 합니다. 그래서 루터가 자신의 제자인 멜랑히톤(Melanchton)에게 충고했습니다. “그대는 설교할 때에 회중들이 그대의 설교를 듣고 화가 나던지 그대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화가 나던지 둘 중의 하나를 하라.”고 말입니다. 이 말을 충고하자면 진리를 올바르게 설교하기 때문에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너한테 화를 내던지, 그렇게 못한 자신 때문에 네가 네 자신에게 화가 나던지 둘 중의 하나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뜨뜻미지근한 모든 신앙생활, 이렇게 교회 다니노라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오겠지 하는 교회생활, 다 쓰레기입니다. 좋은 게 안 일어납니다.
신앙의 길을 달려갈 때도 있고 걸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 진리의 말씀에 깊이 착념하고 이 계시에 붙들려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용감하게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진리의 빛을 깨닫도록 기도하고, 그 말씀에 깨우침이 있는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멈추기만 하면 즉시 영혼의 물러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의 관록 같은 것들은 믿음의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붙들고 계시는 동안에만 주님의 사람이지, 놓으시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Ⅵ. 결론
7월 한 달 동안에 23명의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중에 30%는 졸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죽은 사람들입니다. 교통 전문가가 하는 이야기가 운전수가 운전을 할 때 전방만 똑바로 보고 운전을 해도 대형 사고는 안 난다고 합니다. 그래봐야 옆에서 부딪히거나 미끄러지는 정도지, 그런데 전방의 주의의무를 태만하게 하면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다가 앞에 있는 차를 들이박고 죽는 거예요. 저기에 가면 경원대라고 성남에 큰 대학이 있는데, 그 학교의 소유주도 총알택시타고 가다가 택시 운전수가 졸면서 앞에 서 있는 택시를 그게 달려가는 택시인줄 알고 들이받아서 즉사했어요. 제가 전도사로 있을 때 교인 하나는 오빠가 탱크로리를 모는 운전수였습니다. 무슨 차하고 부딪혀서 그 탱크로리 운전수가 죽겠어요? 그런데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즉사했습니다. 졸다가 중앙선을 넘었는데 마주오던 차가 하필이면 똑같은 탱크로리였어요. 부딪혀서 죽은 거예요. 아예 교회 안 다니고 세상으로 나가 버리는 것이 고속도로를 이탈해서 시궁창에 빠진 거라면, 교회 출석 안 하고 개기는 것이 갓길에 차를 정차한 것이라면, 교회 나오면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말씀의 은혜를 구하지 않는 것은 졸면서 고속도로를 운전하는 거예요. 차라리 갓길에 세워두는 것이 나아요. 빛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보셨습니까? 주님,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붙잡히지 말고 불변하도록 있는 그 진리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살기 위하여 간절하게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단 하루라도, 아니 단 한 순간이라도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마음을 다 비우고 “오직 내 영혼이 당신의 진리의 빛을 구합니다. 나의 눈을 열어 주님의 기이한 법을 보게 해 주십시오. 내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진리의 말씀을 통해 나에게 보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할 때에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기도인 것입니다.
사도는 외로운 섬에 홀로 굶주리며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 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가족도 있고, 교회도 있고, 사랑하는 지체들도 있고, 내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들도 있고, 진리의 말씀과 수많은 책들과 접하면 만질 수 있는 수많은 말씀의 매체들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이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크게 울었는데,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이렇게 울지 않습니다. 더 많이, 더 많이, 더 많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우리의 탐욕을 채울 수 있겠습니까? 성도의 소명은 많아 보이지만, 마지막으로 집약하고 집약하면 오직 하나입니다. 내 주 되신 주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진리를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비록 이 세상에서 높은 권세나 아름다운 집이 없어도 이 땅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이 더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사람의 지위나 소유의 크기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붙들고 있는 진리의 빛의 크기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을 새롭게 하고, 내가 내기할 수 있습니다. 다음 주에 담임 목사 한 주 없는 동안에 생각을 좀 하시고 한 두 주 동안 간절히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기도의 제목들을 이제 밀쳐버립니다. 그것들은 두 번째, 세 번째 기도의 제목입니다. 처음 기도의 제목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 나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진리의 빛으로 나의 어두운 마음을 가득 채우시고 그 사랑으로 내 마음을 뜨겁게 하셔서 진리를 바라보고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나에게 행복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한다면 여러분들이 드리는 예배가 바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열어달라는 기도로 승리하는 생활을 하기 바랍니다.
승리하는 기도생활 1
승리하는 기도생활 1 (09/6/14,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2 (09/6/21,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3 (09/6/28,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4 (09/7/05,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5 (09/7/12,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6 (09/7/19,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7 (09/7/26,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8 (09/8/02,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9 (09/8/09,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0 (09/8/23,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1 (09/9/06,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2 (09/9/27,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3 (09/10/04,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4 (09/10/11,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5 (09/10/18, 주일오전예배)
11.골방의 기도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중 생각 하느니라”(마 6: 6-7)
Ⅰ.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산상수훈 속에 들어있는 본문입니다. 5장부터 시작된 산상수훈은 천국백성들이 누구이며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한 우리 주님의 가르침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특별히 이 6장에서는 예수님이 외식에 대해서 경고하시는 가운데 천국백성들의 삶이 어떠해야할지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 외식의 문제를 거론하시면서 예수님은 두 가지 외식의 영향이 미치고 있었던 우리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구제하는 생활과 기도하는 생활, 이 둘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생활 속에도 이러한 외식하는 요소들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외식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높은 평가를 받을 목적으로 짐짓 선행을 보이도록 행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누가 기도에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높은 평가를 받을 목적을 가지고 기도하는 척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셔야 했던 시대를 생각해보면 이 질문은 금방 해소가 됩니다. 그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이 있었고, 바리새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 어귀에서 두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에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띌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며 기도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새리의 기도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날은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높이 손을 들고 기도함으로 자기를 기도 많이 하는 종교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외식의 요소는 오히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속에 깊이 들어올 수 있다는 점에서 이천 년 전에 주신 주님의 경고가 우리에게는 새로운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Ⅱ. 기도의 오류
A. 외식하는 기도
예수님은 먼저 기도생활의 오류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외식하는 기도였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인간과 특별히 언약백성이 하나님과 만나는 교제입니다. 보이지 않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적인 교통의 수단이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필요한 것들을 아뢰고 또 기도 속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들을 받는 시간이 기도의 시간이기 때문에 언약백성으로서의 독특한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이 기도생활 속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신약에서뿐만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도 많이 강조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분량은 신약의 성도들만 같지 못하였지만 기도를 통해서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고 그 성품 의 빛 아래서 또한 분량만큼 또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에도 탁월한 기도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기도의 경륜 때문이었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통이고 그 하나님의 지도를 받는 것이거늘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기도생활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자 했으니 기도의 빗나간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외식하는 기도의 대표적인 사례를 한 가지 우리에게 제시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중언부언하는 기도였습니다. 원래 이 중언부언한다고 하는 말은 같은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성경에는 같은 기도를 여러 번 되풀이했는데도 하나님께 오히려 인정을 받은 기도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시고,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기도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드리셨지만 하나님은 이 기도를 중언부언하는 기도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들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장에게 호소하는 과부의 간절한 기도는 되풀이되었던 기도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단의 가시라고 이름 지어진, 그 무엇인지 모를 질병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수차례 기도하였습니다. 어느 것도 중언부언하는 기도라고 평가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중언부언하는 기도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말이 반복되지 않더라도 오히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의 모든 기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고 영혼의 시선이 하나님한테 꽂히지 않은 가운데 뜻 없이 겉으로만 언어를 만들어내는 이 모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기도는 모두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이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빠지기 쉬운 또 다른 개인적인 외식이 되는 것입니다.
B. 기도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
이런 주님의 지적을 보여주면서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예로 예수님은 이 이방인들의 기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은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하였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자기의 신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지만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죠.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신들의 생각은 아주 일천한 것이었습니다. 깨우쳐주지 않으면 신들이 다 알지 못하고, 또 알려주었다고 할지라도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여러 번 되풀이해서 말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또 여러 번 되풀이해서 마음이 동한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자신들을 도와줄 어떤 의지가 발동되기 위해서는 더 많이 반복해서 말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깊이 바치는 그런 종류의 기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렇게 외우기만 하면 그 자체가 신들을 자극하는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을 비롯한, 기도에 있어서 당시에 오류에 빠졌던 사람들은 이러한 이방인들이 이방의 신들에 대해서 갖는 잘못된 관념을 그대로 가지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빠졌던 커다란 오류였던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무엇인가 인간에 의해서 배워야 할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전에 주님은 이미 우리가 기도해야 될 것을 알고 계신 분이시고 또 우리가 언제 기도할 것이라는 것까지도 이미 파악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만약에 인간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무엇인가 모르는 것을 새롭게 깨우쳐 주어야 할 것이 있다고 하면 그분을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당신이 이미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실까요? 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서 한두 번 기도해서는 들어주시지 아니하시고 여러 번 간절히 기도한 후에야, 때로는 가혹하리만치 오랫동안 자기의 마음을 단련하여 하나님 앞에 매달린 후에야 겨우 들어주시는 것은 또한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어떤 경륜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기 원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두 가지,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하는 확신을 갖게 하시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 기도함으로써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을 정결케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기도를 우리가 드리기를 기뻐하신다고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바쳐 기도하는 간절한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몸 밖에 있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부여하시기 위해서 우리로 그렇게 매달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 시골에서 자라면서 대장간을 늘 보았습니다. 대장간에서는 장날이면 팔 물건들을 그 전날부터 열심히 만듭니다. 그래서 낫, 칼, 호미 같은 것들을 만들어서 장날에 나온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았습니다. 칼은 처음부터 칼로 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쓸모없어 보이는 쇳조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시커먼 쇳조각을 칼로 만들기 위해서는 불이 필요합니다. 풀무에 불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합니다. 그래서 대장간에는 언제나 풍구가 있습니다. 당신에는 전동이 없었기 때문에 열심히 돌리면 거센 바람이 일어나면서 그 풍구를 통해 바람이 공급되고 시뻘건 콜타르가 뜨거운 불길을 내며 타오릅니다. 대장장이는 그 속에 쇳조각을 깊이 묻어놓습니다. 시꺼먼 쇠는 점점 붉은 빛을 띠기 시작하고 드디어 정점에 이르렀을 때에는 하얀 빛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때에 그 새빨갛게 단 쇳덩어리를 이 대장장이는 집게로 끄집어내서 모루 위에 올려놓고 우람한 체격으로 빠른 동작을 사용해서 쇠를 급히 두드리기 시작합니다. 달아있을 동안에 쇠를 두드리면 이 쇠는 망치질 한 번에 쫙쫙 펴지면서 쓸모없어 보이던 쇳덩어리가 아주 날카롭고 쓸모 있는 칼로 변모되어 갑니다. 한 번에 모두 할 수 없기 때문에, 쇠가 식으면 펴지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만들다 만 칼을 석탄 속에 집어넣고 불을 피웁니다. 다시 시뻘겋게 달아올랐을 때 두드리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두세 번을 불길과 망치질 사이를 오가고 나면 아무 상관이 없던 쇳덩어리가 아주 쓸모 있는 칼로 변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 했지만, 오랫동안 신앙생활 한다고 해서 많이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충분히 다루어질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깊이 녹아졌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효과적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이죠. 비유를 하자면 타오르는 불길 옆에 쇳덩어리를 두어서 아무리 뜨끈뜨끈해졌다 할지라도 그 뜨끈뜨끈해졌다는 사실이 쓸모없는 쇳덩어리를 쓸모 있는 칼로 바꿀 수 있도록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물론 은혜도 받고 말씀의 깨달음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여러분들을 다 바꾸어 놓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마음이 그렇게 빨간 쇳덩어리처럼 하나님 앞에 단련되어서,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여러분들이 그 말씀에 의해서 여러분들의 성품이 펴지고 쓸모없던 쇳조각이 변하여 쓸모 있는 칼로 변화는 것처럼 그렇게 변하는 시기는 얼마나 짧은 기간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5년, 10년, 20년, 30년을 예수 믿었어도 이렇게 마음이 하나님 앞에 녹아져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불길 옆에 뜨뜻하게 놓이긴 했지만, 한 번도 망치질을 받아서 쓸모 있는 칼로 변모되어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오랜 신앙생활의 경륜을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의 마음이 단 쇠 같이 되어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두드리실 때에 여러분들의 마음이 변화되어서 여러분들의 마음이 달구어지는 일에 더 많이 관심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목적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여야지만 겨우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오늘날 받고 누리는 많은 것들은 대부분 우리가 달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주신 것들입니다. 필요한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당신께로 향하게 하시고 집중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단 쇠와 같이 만드시고 더 달구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쉽게 빚어지는 사람들이 되도록 변화시키시기 위해서 응답의 때를 연장시키십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보다도 우리의 기도의 제목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도를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는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어서 우리의 기도 제목보다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직시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간절한 기도의 제목을 통해서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하나님과의 나와의 관계가 어떠함을 확인하게 되고, 또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 사람인지를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거짓과 더러움의 찌끼가 있다는 것도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서 알게 되고 그것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떨쳐 버리려고 순전한 삶을 위해 몸부림치는 것도 바로 그런 간절한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입니다. 마치 열심히 운동할 때에 우리가 땀을 흘리고 그 땀에서 중금속과 노폐물들이 쏟아져 나와요. 똑같은 땀인데, 싸우면서 흘리는 땀은 그냥 맹물이래요. 그런데 운동하고 노동하는 땀 속에서는 중금속과 노폐물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운동을 하면서 흘리는 땀은 거의 오줌과 같고 사우나에서 종일 흘리는 땀은 맹물과 같은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마음을 쏟고 기도할 때에는, 그 기도의 땀방울 속에서 우리 마음속에 붙은 더러운 욕망과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는 불손종의 찌꺼기들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기도의 제목을 주시는 거죠. 그래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도록 그들을 격려하시는 거예요. 이러한 기도의 실천이 경건의 능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부인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Ⅲ. 경건의 능력과 개인 기도생활
여기서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은 경건의 능력과 개인 기도생활이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의 기도뿐만 아니라 성경에 의해서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의 기도생활이 강조되는 것을 봅니다. 우주적인 교회는 하나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우주적인 교회의 일원으로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렇게 보이는 한 교회의 한 지체들로서 보이는 교회를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구역의 식구들이기 때문에 함께 모여 기도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기도할 마음이 없을 때에도 우리가 구역장이기 때문에, 섬기는 일꾼이기 때문에 자기의 지체들과 함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때도 있습니다. 교회 전체는 아니더라도 주님이 자신들에게 맡겨준 개별적인 일들 안에서, 다른 지체들과 함께 같은 일로 섬기면서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그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서 교회는 지체됨의 의식을 더욱 더 발전시키게 되고 아름다운 훈련의 기회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지체들이 함께 손에 손을 잡고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함으로써 그 지체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더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이루어가게 되고 그리고 그 기도의 관계를 통해서 서로의 사랑이 흐르고 물질이 흐르고 또 지식도 함께 흘러서 내가 많은 것을 다른 지체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다른 지체들이 나를 통하여 섬김을 받게 되고, 내가 또 도움을 받는 이러한 나눔과 용서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함께 드리는 이 공동체의 기도는 아주 중요한 기도이고, 성경에서 교회가 이렇게 공동체적 기도로 기도의 불길을 모았을 때 그곳에 하나님은 임재 하셔서 거룩한 부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끝날 까지 유효한 하나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교회는 함께 모여서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A. 기도의 은밀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공동체의 기도에 대한 강조가 개인 기도의 필요성을 약화시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기도와 은밀함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함께 드리는 공동체의 기도는 은밀 하려야 은밀할 수 없습니다. 이미 내가 기도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고, 함께 공동체가 모여 기도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은밀한 기도가 아니라 드러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개인 기도생활에 있어서는 충분히 자기를 은닉할 수 있는 은폐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보아주기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너는 기도할 때에 숨으라.” 고 말씀하신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받는 평판이나 사람들로부터 받는 좋은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 한 분 만을 의지하는 그런 은밀함이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중요한 조건이라는 것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이 일에 관해서 예수님은 골방을 말씀하셨습니다. 골방은 가족들이 일상적으로 거주하는 집이 아닙니다. 골방은 처음부터 만들어질 때 그렇게 일상적으로 생활하기 위해서 만든 방이 아닙니다. 필요 없는 물건들을 치워두거나 혹은 사람이 있는 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을 목적으로 일시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만든 방입니다. 남의 집에 가서 집을 구경할 때 거실이나 안방, 건넌방은 본다고 할지라도 창고 문부터 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렇게 은폐되어 있는 공간인 골방을 기도의 장소로 추천하셨습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골방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개인기도에 있어서 은밀성을 주님이 강조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골방은 진짜 골방이 아니라 오히려 새벽 미명에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빈들과 벌판을 찾아 기도하신 기도생활이었습니다. 한적한 곳을 찾아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깊은 밤 기도도 예수님의 골방에서 드리는 기도였죠. 예수님의 생애에 예수님은 많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셨고 그들이 있는 앞에서 그들을 위해 빌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많은 시간을 개인기도 속에 바치셨습니다. 새벽 미명에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그 시간에 한적한 곳에 나아가, 혹은 빈들에 나아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으며 간구하셨고 깊은 밤에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개인 기도생활이, 은밀한 기도생활이 우리의 모든 경건의 능력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교회 생활 속에서 이런저런 기도모임에 많이 참석하고 늘 분주하게 지냈지만 마음에는 공허함이 깃드는 것을 경험했던 적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개인 기도생활의 현저한 부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골방이라고 하는 것은 지정된 장소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은폐된 공간입니다. 이것을 굳이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문자 그대로의 골방이라기보다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개인 기도하도록 하나님과 약속된 장소와 시간입니다. “언제가 기도하는 시간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자기는 특별한 기도의 시간이 따로 없습니다. 늘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라고 말하면 이 사람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워낙 깊은 기도 속에 살기 때문에 모든 삶 전체가 기도의 영에 의해 압도된 사람이든지, 아니면 두 번째로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를 보면 예수님의 모든 삶 속에는 기도의 영이 배어 있었습니다. 언제 입을 열어도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하셨지만, 예수님은 보다 많은 시간을 개인의 기도 속에 바치셨고 예수님에게조차도 정해진 기도의 시간과 공간이 있었습니다. 같은 공간은 아니지만 빈들, 한적한 곳, 이런 곳으로 명명되어지는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은폐된 그런 공간을 찾으시고 그 공간을 당신 자신을 위한 기도의 골방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무너진 기도생활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시간과 장소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 공간과 장소, 시간을 지키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기도의 골방을 갖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골방으로 들어가는 것은 고사하고 이런 골방조차 없다면 그는 거의 기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한 시간이 위대하겠습니까? 주님이 외면하신 백 시간이 위대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지혜를 열어주신 사람의 한 번의 섬김이 더 큰 효과가 나타나겠습니까? 하나님의 지혜로 열어주시지 않은 백 시간의 섬김이 더 훌륭한 효과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당신도 찾으시고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심으로서 그 은혜를 주고 받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만드십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아직까지도 정해진 기도의 공간과 시간이 확정되어 있지 않다면 깊이 자신을 반성하고 나머지 시간들이 기도하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일들인지를 되물어야 합니다. 어느 시간이든지, 어느 장소이든지 관계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장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놓기 적합한 그 시간과 장소를 정하심으로 골방을 가지십시오. 그것이 바로 승리하는 기도생활에 있어서 비결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나는 정해진 기도의 장소도 있고 시간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말씀하시는 기도의 골방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 골방에 늘 들어가지만 왠지 나의 기도는 충분히 하나님께 은밀하게 쏟아 부어지지 않습니다. 아무에게도 보일 마음으로 외식하며 기도한 적은 없지만 진실하게 기도하는 사람에게만 느껴지는 기도의 은밀함과 깊이가 없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 주님의 충고에 눈길을 주어보십시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마음으로 하는 하나님을 향한 섬김입니다. 마음으로 하는 기도지만, 마음으로 하는 모든 기도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기도가 아니고, 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기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마음에서 하는 기도가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생각과 말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행동과 감각들도 마음에서 해석되고 발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없는 행동도 사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죠. 모든 것이 마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기도를 강조하시는 이유는 그 마음 전체가 다른 것들을 향해서는 닫힌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갔다 할지라도 문이 활짝 열려서 세상의 근심과 염려, 유혹과 자랑, 이 모든 것들이 함께 들어와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해서 은밀히 드리는 기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문을 닫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새벽기도를 나오고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드린다고 할지라도 마음이 하나님께 집중되지 못하고 모든 이 세상의 우수사려를 함께 가지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공간적으로는 골방에 있지만 마음으로는 골방에 있는 기도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B. 은밀함과 집중
예수님께서 이처럼 문이 닫힌 골방을 강조하신 것은 기도의 은밀함과 집중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방사람들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처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므로 하나님을 법칙처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장 사악하게 여기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인데,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는 것은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을 향한 집중은 은밀함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무엇에도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함,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의 중심이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점령되지 않으려고 하는 배타적인 독점성, 이런 것들에 의해서 기도가 하나님을 향해 집중될 때에 그때의 그 기도는 마치 렌즈를 통해서 모아진 햇빛처럼 강력한 빛을 발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없었던 교통들을 도입하는 놀라운 힘이 됩니다. 우리의 집중이 그러한 위대한 위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하나님은 당신을 향해 집중된 마음을 순결한 마음으로 보시고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껍질뿐인 신앙생활을 해 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몸으로는 많은 일들을 섬기고 입으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지만 그러나 그 사람들을 이끌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 그 사람들에 관해서 간구하는 기도의 시간은 현저히 적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저런 일들로 분주하게 지냅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우리는 무한 경쟁 사회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경쟁사회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할 수 있으면 우리는 이 경쟁에서도 패배하지 않고 이기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겨우 이 경쟁자에게 치이고 저 경쟁자에게 치여서 밥이나 먹고 사는 사업가가 되지 말고 유능해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서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만약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겨우 졸업하는 학생들이 아니라 남들 위에 뛰어나서 그 지식으로 나라와 이 사회에 이바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을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마음을 쏟아야 합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우리가 경쟁사회 속에서 우리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애쓰는 동안에 우리는 기도하기에는 너무나 바쁘고 주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그분 한분만을 바라보기에는 의지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얼마나 우리에게 커다란 영적인 손해인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없이 몸부림친 일 년의 시간보다는 주님과 동행한 하루가 더 많은 일들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멀리 떠나, 심지어는 나 자신의 시선으로부터도 멀리 떠나 홀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 한 분만을 앙망하며 그분만을 전심으로 바랐던 시간들은 얼마나 짧은 시간들이었는지 기억해보십시오. 그래서 “기도하는 순간 나의 마음이 하나님께 확정되었고 확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내 안에 충만히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라고 하는 일치의 상태가 얼마나 드문 경험이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개인 기도생활에 진지하게 몰두하지 못하는 동안에 우리의 경건의 능력은 흐려집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에 물질들에 대한 욕망으로 불타게 되고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헛된 것들을 따라 다니며 영혼과 정신이 피곤함을 면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새롭게 하셨던 영적인 총명들은 흐려지기 시작하고 우리의 정서는 정욕에 물들고 우리의 의지는 선한 일을 위해서는 지극히 게으르고 악한 일을 위해서는 매우 빠르지 않습니까? 순간순간 일어나는 분노들을 삭힐 수가 없어서 우리들은 이러한 분노 속에서 매일매일 시간들을 허비하고 하나님 앞에 주님이 주신 귀한 은혜들을 우리의 욕망과 헛된 분노들로 소멸하여 급기야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슬프게 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저게 어리석은 행동들을 하는 것을 보면서 단 10분 만이라도 무릎을 꿇고 하나님 한분만을 응시한다면 자기가 한 행동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고 얼마나 바르지 못한 것임을 금 새 알 수 있을 텐데 그들은 결코 무릎 꿇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게 겉으로는 무릎을 꿇고, 겉으로는 눈을 감고, 겉으로는 기도하고,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풀무 속에 들어간 쇳덩어리처럼 자기가 녹아져본 경험이 없고 또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지금은 식었기 때문에 그렇게 어리석은 행동들을 하면서도 자신을 반성할 줄 모르는 것이죠.
Ⅳ. 결론 : 개인의 부흥이 필요함
주님을 섬기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이런 저런 일로 바쁘게 주님을 섬기며 사는 사람들이죠. 개중에는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성도들은 열심히 주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여러분, 언제나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건강이 있고 주님이 쓰실만한 때에만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그러니 섬길 수 있을 때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특권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 때문에 우리들이 개인 기도생활을 진지하고 헌신된 마음으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커다란 영적인 손해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결코 알 수 없는 놀라운 세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인데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는가 하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하나님 앞에 소망을 갖도록 만들어주십니다. 한숨을 쉬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주님을 찬송하게 만들어주시고 이것은 잃어버렸으나 잃어버린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 하나님은 저것으로 채워주시고 그래서 우리에게 임한 악을 선으로 바꿔 놓으시는 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이 개인 기도생활이 현저히 부족합니다. 여러분, 주위를 보십시오. 한때에는 이 교회에서 생애 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 지금은 뒤로 많이 물러난 사람들의 특징을 살펴보십시오. 다른 것 보지 마시고 그 사람의 개인 기도생활이 예전과 비교해서 어떤지를 살펴보십시오. 마음이 녹는 기도, 언제든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 한분 품으로 깊이 들어가던 절절한 기도의 생활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9일 동안에 수십 군데의 종교개혁의 유적지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감동이 밀려오지 않는 장소는 없었습니다. 사실 굉장히 고단했습니다. 5500km 정도를 여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곳도 감동이 밀려오지 않는 곳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많이 눈물이 쏟아진 곳은 제네바에서 칼빈이 목회하던 교회에 들어섰을 때였습니다. 그분이 설교하던 설교단도 그대로 놓여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칼빈은 신학적인 독창성에 있어서는 마르틴 루터에 미치지 못하고, 전투적인 삶에서 보면 가톨릭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쯔빙글리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을 폭넓게 끌어안고 목회자적인 심성으로 목회를 하던 면에 있어서는 스트라스부르크의 마틴 부처만 못하였습니다. 불같은 열정과 영적인 능력에 있어서는 기흄 파렐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칼빈은 제네바에서의 그 목회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은 그런 자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개혁운동에 가담하기 보다는 오히려 조용한 곳에서 쉬면서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개혁신앙을 일깨워 주고 싶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룻밤만 머물기로 작정을 하고 제네바에 들렀을 때에 그는 이미 기독교 강요 초판을 쓴 이후였습니다. 그 기독교 강요 초판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빛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가톨릭이 잘못 되었다는 것은 알지만,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 가를 최초로 구체적으로 요약해서 정리해 놓은 책을 이 젊은 신학자, 칼빈이 정리해서 썼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룻밤만 묶고 가려고 제네바에 들렀을 때 그가 기흄 파렐을 만납니다. 그리고 제네바의 상황을 설명하며 이 개혁운동에 참여하자고 그를 설득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기에게는 휴식이 필요하고 글을 쓰려고 한다고 말하였고 그러자 파렐은 불같이 화를 내었습니다. 나이도 칼빈 보다는 훨씬 연배였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쉰다고요?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죽기 전에는 쉰다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쉬기를 원한다면 나는 당신의 휴식에 저주가 내리기를 기도합니다.” 했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그 영적인 능력에 압도되어서 펑펑 울며 “주님께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작정한 후에 한번 쫓겨나고 두 번째 초청된 이후로 일평생을 그 제네바 교회에서 목회하다가 운명하였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선비였고 그렇게 수만 명의 사람들을 목회하면서 제네바 시 의회와 싸우고, 자유사상가들과 집요하게 싸우고 비겁한 논쟁자들에게 모함을 받으면서 그것을 변증하고 헤쳐 나가면서 싸우는 그러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더 많이 기도하도록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는 설교자, 신학자, 목회자로 알려져 있지만 기도하는 사람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가 판단한 한도 안에 있어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쓴 기도에 관한 많은 교훈과 설교, 주석, 기독교 강요의 내용들은 깊은 기도 속에서 산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기도의 심층적인 문제들까지 기록해내고 있습니다. 저는 그 교회당에 잠시 앉으면서 눈물이 한없이 쏟아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일들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신학적인 거대함에 있어서는 마르틴 루터만 못하고, 전사적인 삶에 있어서는 순교했던 쯔빙글리만 못하고, 목회의 능력에 있어서는 마틴 부처와 같이 전문적인 목회적 소양이 없었던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평생 자신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았지만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이기에 감당을 해야 했던 그 많은 고난의 사람, 서른한 가지의 질병에 시달리던 그 사람이 수많은 대적 자들에게 모함을 당하고, 한때는 자기가 사랑하고 거두어주던 사람에 의해서 배신을 당하면서 죽음의 위협까지 경험해야 했던 그 끔찍한 환경 속에서 오로지 주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안식의 때를 기다리면서 기도로 위로를 삼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입니다.
일평생을 투쟁하며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살았던 마르틴 루터가 마지막에 육십이 훨씬 넘은 나이에 죽기 직전에 하나님 앞에 드렸던 마지막 기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이스레벤에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가 자란 고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고향에 돌아가서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고 숨지기 이틀 전까지 예배당에 나가서 열렬하게 설교하였다고 합니다. 이 불가능함 같은 삶을 살았던 많은 개혁자들의 이면 속에는 남다른 사상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남다른 기도가 있었습니다.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를 쏟아 붓는 간절한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질그릇처럼 약했고 지푸라기처럼 가냘팠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붙드셨습니다. 사실 루터는 정말 전사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는커녕 매순간 죽고 싶어 했던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강인한 교황도 무서워하지 않고 세상의 제후도 두려워하지 않던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를 외친 그 강한 사람이 마지막에 남긴 말이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내 고향 아이스레벤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공동체의 기도가 힘 있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모인 그 사람이 개인의 기도에 헌신하던 사람들이 모여야지만 공동체의 기도에도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들은 개인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덜 중요한 시간들을 과감하게 빼버리고 기도의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하고 힘닿는 대로 한적한 곳을 찾아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놓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미끄러진 사람들은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총명이 흐려진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조명의 빛을 주시고, 말씀의 은혜에 싫증난 사람들에게는 다시 말씀의 미각을 회복시켜 주셔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승리하는 기도생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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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험의 때와 기도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눅 22:46)
Ⅰ.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문맥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직전에 있었던 최후의 만찬 이후의 기록들입니다. 자기의 때가 가까운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식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유월절 저녁식사를 하시면서 주님은 그 자리에서 많은 강론을 베푸셨고, 자기가 모든 사람을 위해 대속 물로 죽어야 함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그 밤에 누가 제일 높은지에 대해서 서로 다투고 주님의 나라가 오실 때에 자신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오르겠다고 다투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으로 나아가셨고, 거기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둔 마지막 유언과 같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셨던 것입니다. 진액을 쏟아 붓는 기도 속에서 예수님의 땀에는 피가 가득 배었고,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 핏방울이 온 몸에서 떨어졌습니다. 얼마나 기도하셨는지 예수님께서는 혼신을 다해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잠깐 가보셨습니다. 그들은 슬픔 속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재촉하셨던 것입니다. 때는 깊은 밤, 아마 새벽으로 다가가고 있는 시간 이었을 텐데, 예수님이 평소에는 제자들보고 매일 그러시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때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깨우시며 일어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타이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2천년의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서 오늘 우리의 귀에 생생히 들립니다. 왜냐하면 이전의 제자들이 빠졌던 이 깊은 태만의 잠은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계속 되고 있으며, 제자들이 들었던 이 시험도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시험이고, 하나님 앞에 시험에 맞이할 때에 기도해야 하는 것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Ⅱ. 시험이란 무엇인가?
A. 시험의 정의
시험의 정의는 어떤 것일까요?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죄에 지고 유혹에 넘어져서 엎드려진 상태가 시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순종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져 영혼이 신음하는 상태를 가리켜 우리는 시험이라고 말하고 있죠. 그러나 성경적인 기준으로 보면 이것은 시험이 아니라 이미 시험에 지나쳐 악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매일 기도하도록 가르쳐주신 주기도문 속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라.” 그러시면서 주신 기도 가운데 하나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 예수님의 의견에 의하면 우리가 시험에 들게 되면 그 마지막 결말은 악에 빠지는 것이라는 것이죠. 시험은 아직까지 중립상태가 어느 정도는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시험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매우 태만하게 하고 나태하게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시험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우고, 그 시험의 여러 측면들에 대해서, 그리고 시험 속에서 기도하여야 할 필요에 대해서 우리들이 생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시험의 정의는 그런 것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시험의 참된 뜻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모든 마음과 영혼의 상태를 총칭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기에 부적합하거나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은 모든 마음과 영혼의 상태가 시험의 상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험을 정의하고 나면 우리들이 얼마나 많이 깨어있어야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에 잘 출석하고 봉사하고 매일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깨어있는 생활의 일부는 될 수 있지만, 그 자체로서 그가 시험의 상태에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이렇게 시험의 상태에 있지 아니하고 주님이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든지, 우리가 성경을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되든지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그러한 상태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게 사는 현실적인 상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B. 시험 : ‘당함’과 ‘듦’
흔히 사람들은 시험을 당하는 것과 드는 것 사이의 차이를 말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시험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여러 번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험이요, 하나는 악마에게로부터 오는 시험이라고 말입니다. 또는 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시험이고 또 하나는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시험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대표적으로 들기를 “네 아들을 나에게 제사로 바쳐라.” 하는 하나님의 아브라함에게 한 명령은 전자에 해당하고, 우리야의 아내를 만나서 접하게 된 상황은 후자의 시험을 뜻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조금만 성경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반성해본다면 이러한 구분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위험한 구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시험은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시험과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시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하나라고 설명을 해야 하는데, 이것은 어떻게 우리에게 이해될 수 있을까요? 제가 아직 전도사였을 때, 같은 교회에 학교 선생을 하고 있는 젊은 형제가 있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치면서 생활하면 어려울 것이 없는데,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향해 뜻을 품고 신학교를 가고 싶어 했습니다.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혜가 크기 때문에 이 세상에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많은 사람들, 그리고 많은 영혼들에게 이 말씀을 전하며 예수의 사랑을 가르치고 싶다는 것이죠. 그렇게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전화가 왔어요. “전도사님, 좀 만날 수 있습니까?” 그래서 학교에 오면 연구실에서 만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와서 하는 말이 “ 저 어젯밤에 밤새도록 기도원에서 기도하고 새벽에 학교에 내려와서 강의를 하고 지금 퇴근하는 길입니다.” “아, 그러세요?” 난 당연히 소명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러 갔는지 알았어요. 그랬더니 이 형제 하는 이야기가 이거예요. 항상 자기는 주님께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고 신학을 공부해서 더 열렬히 주님을 위해서 선교사로, 목회자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자꾸 반대해서 기도 중이었는데 어제는 갑자기 한순간 정욕이 확 일어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정신을 차릴 수 없이 정욕이 일어나서 집에다가 못 들어갈 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산에 올라가서 밤새도록 기도를 했답니다. 그러면서 깨닫는 것은 뭐냐면 내 마음 속에는 주님을 위해 한 생명을 바치고 싶은 마음도 진심이고 한 순간에 정욕이 확 일어나서 육욕의 삶을 살고 싶은 것도 진심인데, 밤새도록 기도하고 나니까 자신의 처지가 너무 불쌍하더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주 없이 살 수 없네. 내 주는 아신다.
내 영의 깊은 간구 마음의 소원을
주 밖에 나의 맘을 뉘 알아 주리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대요. 자기가 이렇게 부패한 인간인 걸 깨닫고 나니까 오직 주님만을 의지할 마음이 생겨나더라는 거지요. 분명히 시작할 때는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시험으로 시작이 되었는데, 결과는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결과를 가져왔죠? 그러니까 기원 자체가 마귀에게 있다, 하나님에게 있다 고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거죠. 칼빈 선생도 기독교 강요에서 자신들이 시험에 들거나 죄를 지을 때 마귀 때문에 이렇게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어요. 존 오웬 목사님은 이런 혼란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해 주었어요. “시험이 이런 종류의 시험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그 시험을 받아들이는 신자의 내면의 상태에 적용되는 방향에 따라서 이런 시험의 결과를 가져 오기도 하고 저런 시험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것이죠.
모세를 기억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을 두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시내산에 올라 기도할 때에 그 기도는 목숨을 건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십계명 돌 판을 받아 가지고 시내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자신은 목숨을 걸고 이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이 바보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과 함께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었습니다. 자! 이 시험은 모세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욕망 때문에 발생하는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시험이에요, 아니면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시험이에요? 당연히 자기가 잘못한 게 없이 일어난 시험이니 후자에 해당할 것 아니에요? 그런데 거기서 그 시험의 상황을 잘못 적용하니까 하나님이 주신 그 십계명 돌 판을 던져 깨뜨리는 혈기를 부리며 신성모독의 죄를 짓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어떠한 시험이 원천과 마지막 결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시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같은 시험도 다른 결과를 맺을 수가 있는 것이에요. 이것이 우리들이 시험에 대해서 가져야 할 성경적인 견해라는 것이죠.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간단하게 정리하기를 “누구든지 시험에 들 때에 하나님께 시험 받는다고 말하지 마라. 각기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 미혹에 드는 것이니······.” 라고 하셨습니다.
C. 시험의 때가 있음
우리의 인생 전체가 늘 이런 시험에 도전을 받는 연속이지만 특별한 시험의 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 나라가 전쟁을 할 때 언제나 총성이 들리지만 결전의 때가 있는 것처럼 늘 우리는 시험과 직면하고 이것과 싸우는 영적인 전투의 삶을 살아가지만, 이 전투가 아주 치열하게 벌어지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마귀의 시험을 받지 않으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광야에서 기도하시던 때는 집중적인 시험의 화살이 날아왔습니다. 예수님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도록 유혹의 화살을 날렸고, 하나님을 시험해 보도록 유혹을 날렸고,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떡을 의지하는 기적을 베풀어 보라고 꼬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대속을 이루실 때쯤은 이 화살이 더 교묘하고 본질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한 사람에게는 예수 팔 생각을 넣어주고, 그리하여 그 제자에 의해서 예수님은 팔려갔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에도 이러한 특별한 시험의 때가 있습니다. 이때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다른 때보다 더 큰 영적인 손해를 입게 되고 때로는 회복하기 매우 어려운 커다란 영혼의 상처를 입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는 경고 없이 오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너무 눈멀고 귀 어두워 주님의 경고하시는 음성을 듣지 못할 뿐입니다. 어떠한 시험의 때가 온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기도하기만 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은혜 언약 안에 있는 두 가지 큰 특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은혜 언약 안에서 신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첫 번째 약속은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입니다. 우리들이 비록 불순종하고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주 앞에 뉘우치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토대로 우리를 용납하고 받아주시며 언약 안에서 새 삶을 살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이죠. 또 하나는 무한한 은혜의 약속인데,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간구하면, 그는 힘이 없어도 하나님이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무한한 축복 중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간구하기만 하면 능력이 모자라서, 힘이 부족해서 순종하지 못했노라고 말할 수 없도록 무한정의 은혜의 자원을 신자의 마음속에 공급해 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똑같이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기도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일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음을 쏟아 붓는 열렬한 기도의 생활은 시험의 상태에 들지 않는 가장 중요한 비결입니다.
Ⅲ. 시험의 때에 기도의 유익
A. 생각을 새롭게 함 : 자신과 환경을 봄
시험의 때에 기도의 유익은 이렇게 세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첫 째는 생각을 새롭게 만들어줍니다. 죄가 우리를 공격할 때에는 심장부터 찌르거나 창자부터 공격해오는 것이 아니라, 죄가 들어올 때는 제일 먼저 머리부터 공격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제일 먼저 우리들을 죄와 불순종에 빠지게 하기 위해서는 감시탑의 초병들이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이죠. 생각이 온 영혼의 사령탑이며 초소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시험에 들게 되면 제일 먼저 생각이 가지런하고 질서 있던 것들이 힘을 잃고 흐트러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생각의 끈이 늦추어질 때 정서에는 금방 이상이 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지기 전, 우리의 머리에 한 바가지의 찬물을 확 쏟아 부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나는 지성의 각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각성을 동반하지 않은 은혜는 신뢰하지 마십시오. 대부분 성령으로 말미암는 은혜가 아니라 인간이 자가발전 적으로 솟구쳐 만들어낸 감정의 소산입니다. 절대로 어떤 기도나 집회나 모든 일에 있어서 감정 자체를 공격해서 그것을 고양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이단적인 기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디에 집회 같은데 가서 그렇게 벌벌 떨면서 뜨거워지려고 하는 모든 것들은 전부다 잘못된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방법은 지성으로 말씀을 깨닫고 생각에 변화가 오면서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 의지 전체가 갱신되고 쇄신되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 대한 사랑 없이,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 무엇인가 영적인 것들을 체험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영혼은 처음에는 열렬한 신앙 인 것 같지만 나중에는 굴비처럼 꿰어서 결국은 사악한 곳으로 던져지는 것이에요. 이 설교를 하는 이 순간도 이런 어리석음에 빠져있는 조국 교회의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쓰레기 같은 책들과 거짓말 같은 집회 속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면서, 진리를 외칠 때 잠들었던 사람들이 거기서 주님을 만났다고 하는데, 신뢰할 수 없는 종교적인 경험들이에요.
이렇게 시험 속에서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우리의 생각을 정렬해 주시고, 정돈된 생각 안에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내 영혼의 상태를 남이 보듯이 정확하게 보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환경을 바라볼 때도 그 환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도구로 내 영혼에 유익을 주는지, 또 죄의 도구로 나를 불결하게 만드는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성의 명정함을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이에요. 기도의 모양만을 가지고는 이러한 효과에 도달할 수 없어요. 여러분도 아마 시험해 봤을 거예요. 밤중에 목욕탕을 가면 물이 가득 있는데서 물을 빼잖아요. 난 늦게 갔기 때문에 더 목욕을 하고 싶은데 물을 빼요. 할 수 없지요. 그런데 그 구멍을 열고 물을 뺄 때 잘못해서 거기를 디디면 발가락 다쳐요. 발이 확 그 물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다고요. 왜냐하면 많은 물의 수압이 누르면서 구멍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물이 그리로 달려와서 확 빨려 내려가는 거예요. 구멍이 큰 수영장 같은 데는 아주 위험해요. 큰일 나요.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그런 것이 필요한 거죠. 우리 몸의 신체적 구조를 보세요. 여러분이 부주의해서 어디에 걸려서 확 살이 찢어지고 상처가 나기 시작하잖아요. 그러면 온 몸은 피와 림프 동원령을 내려요. 그래서 각 몸에 있는 피가 긴급히 출동해서 상처 난 곳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균의 침투를 막아주고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딱지가 앉으면서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거예요. 우리의 몸에 어떤 음식물이 들어왔는데 이것이 속에서 부패하거나 잘못된 음식이에요. 그래서 이 장 자체가 이것을 자기의 힘으로 해독해서 소화시킬 능력이 없어요. 그때에 머리에 SOS를 치는 거예요. 그러면 머리가 상태를 빨리 파악을 해서 온 몸에 수분 동원령을 내려요. 온 몸에 있는 물기란 물기는 긴급히 창자로 공수가 되어서 확 쏟아내어 버리는 것이죠. 이걸 설사라고 부르죠.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이 정돈되는 이 시험의 상태에서의 쇄신도 건성으로 드리는 기도 속에서는 아무 소용없어요. 아무 효과를 발휘할 수 없어요. 마음을 마치 목욕탕의 많은 물이 작은 구멍으로 빠져가는 것처럼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 한 분께 집중이 되어서 확 쏟아질 때, 그때 우리의 이 흐트러진 생각들이 깨끗이 확 정리가 되는 거예요. 은혜를 받고나면 항상 안개 속에서 나온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새로워진 우리의 생각이 기도의 은혜를 통해서 발생하는 거죠.
B. 정서를 새롭게 함 : 말씀의 미각을 줌
여기에 멈추지 않고 시험의 때에 기도를 하게 되면 우리의 정서를 새롭게 만들어주십니다. 지난 시간에 설교하다가 비유가 생각이 났는데 들어봐요. 바이올린이 있잖아요. 바이올린의 튜닝을 잘 하면 줄이 팽팽한 가운데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요. 그런데 줄이 풀어져요. 그래서 줄이 질서 있는 똑바른 상태에 있지 않고 풀어진 상태에서 연주를 하게 되면 튜닝이 안 된 소리가 쏟아져 나와요. 여기에서 질서 있게 잘 팽팽하게 붙들어 매어진 줄을 지성의 정렬이라고 본다면, 켜는 이 활은 만나는 수많은 상황이고, 통 속에 울려 퍼지는 가락은 정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정신이 올바르게 정돈되어 있는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튜닝 하는 게 뭐냐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튜닝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지가 튜닝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마다의 가락이 나오는 거죠.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할 때 튜닝을 하는데 절대 음이 주어지고 그것에 맞춰서 튜닝을 해야지, 자기가 각각 다른 위치에서 기준 음을 잡고 튜닝을 하면 혼자 할 때는 되겠지만 여러 사람들이 모아놓고 치면 얼마나 시끄러운 소리가 나겠어요? 우리의 영혼도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추석 때가 오니까 이제 고기 한번 먹어 보려나? 그중에서도 한우고기가 맛있다고 그러잖아요. 한우 중에서도 제일 맛있는 부분이 어떤 부분이냐면 소가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근육들이에요.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근육들은 되게 싸요. 엉덩이 살 이런 것들은 맛이 없어요. 그런데 안심, 아무리 힘써도 안심을 움직일 수는 없어요. 한번 움직여 봐요. 등심, 움직일 수 있어요. 갈비 살을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 한번 손들어보세요.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그 살을 놓고 보면 그 살 사이사이에 기름이 정교하게 끼어 있어요. 살과 기름을 완전히 구분할 수 있도록 큰 덩어리가 낀 것은 맛이 없고, 구분할 수 없게끔 사이사이에 마블링 된 것이 진짜 맛있는 고기란 말이죠. 여러분, 우리의 근육이 하나의 살덩어리로 되어 있는 것 같지만 현미경으로 잘 들여다보면 근육 하나하나가 주머니 속에 들어있어요. 그걸 싸고 있는 하나하나의 단위가 마치 오렌지의 쌕쌕 처럼 그렇게 막으로 싸고 있어요. 그 싸고 있는 막을 근막이라고 하고, 근막에 싸인 작은 단위의 수많은 근육들이 함께 모여서 우리의 근육질을 형성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운동을 안 하고 가만히 있게 되면 그 사이사이에 기름이 끼기 시작하는 거예요. 어디에 기름이 기름대로 있고 살은 살대로 있으면 톡 도려내면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의 마음속에 이런 것들이 막 섞여 있는 거예요. 죄와 나 자신의 자연적인 본성이 세미하게 섞여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살코기의 조직들을 우리의 자연 본성이라고 말한다면, 그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기름들은 죄와 하나님을 향한 불경건한 욕망과 정욕, 이런 것들이 거기에 끼어 있는 거죠. 그게 절대로 빠져 나오지 않습니다. 고기야 그렇게 살 옆에 기름, 기름 옆에 살, 이렇게 되었을 때에 최상의 고기라고 치지만, 여러분들의 거듭난 심령이 그런 식으로 되어 있을 때, 여러분들은 굉장히 안 좋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그건 간단합니다. 끊임없이 운동을 해서 운동에너지로 태워 버리면 그 기름들은 빠져 나가고 살만 남는 거예요. 그러면 기도도 똑같은 거예요. 그렇게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물같이 자기의 마음을 쏟아 붓도록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이 반복적인 실천을 통해서 이 죄의 정욕적인 요소들이 우리의 본성 사이사이에 마블링 되었던 것들이 빠져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기도하는 힘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 속에서 함께 하시는 성령의 작용에 의해서 이것들이 빠져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은 우리를 순결하게 하시는 힘이고, 우리를 사랑으로 가득 차게 만드는 그 힘이에요. 그걸 은혜의 작용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래서 그게 빠져 나가는 거예요. 그때에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세상에 헛된 것들에 대한 사랑과 육욕의 기쁨에 대한 소망들이 사라지고 주님의 은혜와 순전한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속이 채워지게 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그러한 즉각적인 복종의 마음이 우리 속에 가득 채워지게 되는 거예요.
최고의 영성은 명령을 기다리는 영성이에요. 이 영성의 높은 단계는 신비한 경험을 하고 남이 못 본 것을 보고 이러는 것이 아니에요. 이 영성의 높은 단계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와의 연합 속에서 무엇을 하나님이 명령하시든지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기대가 되고 마음에 기쁨이 된 상태, 이것이 최고의 영적인 상태에요. 그래서 영국의 청교도들이 최고의 영성을 명령을 기다리는 경건이라고 고백했던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에요. 기도는 이렇게 우리의 정서를 새롭게 해주고 우리로 하여금 말씀의 미각을 회복하도록 만들어 주는 거죠. 신자가 은혜에서 멀어지면 설교가 다 그 소리가 그 소리 같고 성경을 읽어보면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잔소리 책 같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나 은혜를 받고 나면 아침마다 매일 만나는 성경말씀이 완전히 다른 색깔로 다가오는 거예요. 저녁노을이 지는 서쪽 하늘을 매일매일 바라보세요. 창조 이래로 단 하루도 똑같은 날이 없어요. 그런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그 아름다운 색깔이 전혀 다르게 매 순간 다가오는 거예요. 성경의 진리의 깊이 때문이기도 하고, 어떤 상황에서 성경을 읽느냐에 따라 적실성이 각각 다른 층 차로 우리에게 느껴지기 때문에 이런 다양한 변화가 있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남이 보기에는 그 사람의 인생에 무슨 변화가 하나도 안 일어난 것 같아요. 직장 다니는 사람은 계속 직장 다니고, 직장 구하는 사람은 계속 열렬히 직장 구하는 상태에 있고 그냥 그렇게 되어 있어도, 이렇게 정서를 기도 속에서 새롭게 하고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하나님의 말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도록 미각을 불러일으켜 주는 거예요. 그때 남이 보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삶을 사는 것 같아도 그는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이렇게 고백하는 거예요.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시험의 때에 기도는 이렇게 우리의 정서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주는 겁니다. 우리 장로님이 하는 한의원에 갔더니 거기다 현판을 하나 걸어 놨어요. ‘사람의 몸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질병에 가깝다.’ 나는 그 간판을 떼고 다시 붙이고 싶었어요. ‘신자의 영혼은 은혜로부터 멀어질수록 죄악에 가깝다.’ 중국의 한의원에 갔더니 현판이 하나 붙어있는데 붓글씨를 아주 멋있게 썼어요. ‘삼(三)지(指)영(永)추(秋)’ 이 추는 한자에서 영원, 세월을 뜻해요. 그러니까 손가락 세 개는 영원하다는 뜻이에요. 무슨 뜻이겠어요? 서양 의학이 들어오고 칼 가지고 머리의 뚜껑을 열어서 고친다고 해도 동양의학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삼지가 영추한 거예요. 맥을 보는 이 세 손, 이것은 영원하다는 거예요. 한의학의 우선성을 얘기하고 있거든요. 그 간판도 떼고 싶었어요. 이 약은 영추하다. ‘이약영추’ 그 이 약은 다름이 아닌 신약과 구약, 인간의 삶의 상황이 아무리 바뀌어도 그 인간의 영혼을 진단하고 치료하고 고치는 모든 명약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사상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 그것밖에 없는 거예요.
C. 의지를 새롭게 함
기도 속에서 이렇게 정서가 새로워지고 나면,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만들어주십니다. 이게 바로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거예요. 모든 힘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주님이 시험 가운데서 기도하면 우리의 지성과 정서를 새롭게 하시면서 또한 우리의 의지에 새 힘을 주세요. 이 힘은 없던 의지를 하나님이 새로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던 우리의 의지의 방향을 악한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해 돌리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시험 속에서 기도하고 있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에요. 교회를 개척하고 얼마 안 되었는데, 그때는 교회가 교인도 얼마 안 되고 돈도 없으니까 이렇게 전도지를 만들 생각은 꿈도 못 꾸고 그냥 컴퓨터로 대충 쳐서 프린트해서 문방구에 가서 복사해 가지고 잘라서 동네 다니면서 전도했어요. 그런데 그 촌스러운 전도지를 들고 어떤 사람이 교회에 와서 등록을 했어요. 그래서 그때는 교회에 등록하면 내가 한 사람 한 사람 다 심방을 할 때였거든요. 1100명까지 그렇게 했어요. 심방가면 제일 먼저 묻는 게 있어요. “그래, 어떻게 열린 교회에 등록하게 되었습니까?” 그러니까 그 자매가 대답을 하는 거예요. “전도지를 한 장 받았습니다. 그저 촌스런 하얀 종이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나 그 길을 알 수 없고, 그 길을 알았으나 그 뜻대로 살 수 없는 사람들.” 딱 읽는데 갑자기 눈물이 확 쏟아지면서 자기가 그렇게 불쌍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는 거죠. 성령의 역사죠. 그래요. 예전에는 우리가 몰랐다고 핑계할 수 있어요. 그런데 다 알아도 그렇게 살 수 없을 때가 있어요, 그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공급해주시는 힘이에요. 이 힘은 은혜의 능력이에요. 은혜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힘이에요. 이 힘을 채찍과 주먹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감화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불러일으켜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시험의 때에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불순종으로 미끄러져 창조의 위기에 놓인 신자들을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회복하고 순종하며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새롭게 부어주시는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부르시는 것이에요.
IV. 결론 : 기도로 나아감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중에는 이런 시험의 상태, 혹은 이미 이 시험을 지나쳐서 깊숙이 들어간 사람들도 있을 것이에요. 그러나 기도해야 합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이죠? 언젠가는 기도가 안 될 때도 있을 거라는 거죠. “기도가 안 되십니까? 그러면 더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내버려두면 언제쯤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어렸을 때 대체로 어른들 말을 잘 듣는 순종적인 어린이였어요. 우리 할머니도 뭘 시키면 제가 곧잘 심부름을 했는데, 할머니가 시키는 것 중에서 제일 하기 싫은 것이 있었어요. 가을이 되면 이불을 빨아서 겨울을 대비해서 바느질을 하십니다. “남준아, 이리 와라. 우리 실 감자.”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어요. 싫어요. 진짜. 그때도 돈을 많이 주면 실이 단정하게 감긴 실이 없지 않았어요. 그런데 비싸니까 대개 시장에 가면 타래로 되어있는 실이 있어요. 그런데 이게 공장에서 나왔을 때야 가지런히 나왔겠죠. 그런데 시장에서 안 팔리니까 이리 치고 저리 치고 엉킨 거예요. 그게 싸단 말이에요. 꼭 그걸 사가지고 오셔요. 그래서 실 감자 그러시면 마음속으로 궁시렁 거리면서 실을 이렇게 붙들고 있어요. 요즘 같으면 텔레비전이라도 보면서 붙들고 있겠는데 아무것도 없고 그것도 밤중에 마주 보고 이러고 할머니는 실패를 감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많아요. 한 타랜데. 나 같으면 확 잘라 버리겠는데. 자르면 그걸 계속 이어야 하는데 그러면 그게 바늘구멍에 안 들어가잖아요. 그러니까 할머니가 감으시다가 안 되면 할머니는 실을 푸시면서 실패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막 돌려서 그렇게 푸는 거예요. “할머니, 그거 끊어버려.” 그러면 “얘야, 이게 다 풀면 풀린단다. 공장에서 나올 때는 다 한 가닥으로 나온 거야.” 그리고 풀어요. 장구한 시간이 걸려서 결국은 그걸 풀어서 감고나면 내 임무가 끝나요. 그러면 할머니가 어디다가 숨겨 놓으셨는지 아무리 찾으려도 찾지 못했던 엿도 갖다 주시고 감도 갖다 주시고 그러셨어요. 어린 나이지만 그걸 보면서, 후일 그때 일을 생각하면서 많은 교훈을 받게 되요. 우리의 인생에 무엇이 엉킨 것 같아서 한 번에 큰 칼로 잘라버려야 될 것 같은 그런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무엇인가를 올바로 알고 내리는 결단은 자기도 살리고 남도 살리지만, 지식이 없이 휘두르는 결단은 자기도 죽이고 남도 죽여요. 그게 만용이란 말이지요. 인생이 어렵고 꼬이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마다 할머니가 실패를 돌리던 것을 가만히 기억하면서 귓가에 쟁쟁 들리는 “얘야, 이게 원래 공장에서 나올 때는 한 줄이었단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그것처럼 아름다운 말이 어디 있어요? 우리의 인생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그것은 원래 한 줄이었어요. 우리의 불순종과 죄가 그것을 꼬이게 만든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지식도 없이 칼을 휘둘러 자기와 남을 다치지 말고 그것을 풀어야 해요. 천천히. 그래서 야고보 선생이 시험에 들었을 때는 무엇을 달라고 구하라고 그랬어요? 돈 달라고? 시집보내 달라고? 아니에요. 상태가 좋아질 때 시집을 가야지, 시험에 들었을 때 시집을 가면 신랑이 너무 십자가가 많잖아요. 뭘 달라고 그랬어요? 지혜를 구하라고. 꾸짖지 않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 갚아 주시리라. 하나님 앞에 간절히 지혜를 구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놀랍게 지혜를 주세요.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종류가 다른 시험이긴 했지만 예수님도 친히 시험을 당하셨기 때문에 시험 중에 있는 자들의 마음을 잘 아십니다. 그리고 시시 때때로 그들을 붙들어 그 시험의 파도, 시련의 폭풍을 뚫고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할 때까지 그 큰 능력의 손으로 여러분들을 붙들어 주고 싶어 하시는 거죠. 남아있는 우리의 날들이 얼마 안 되어, 모두 상태가 좋은 상태에서 순종하며 살아도 티끌 같은 날들일 뿐이고, 지나온 날들은 이미 가버렸고 너무나 많은 시간들을 무지와 불순종 속에서 보냈어요. 그러면 남은 인생의 날이라도 순전하게 하나님 사랑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혼란을 느끼지 말고, 더 이상 피하지 말고 정직하게 “하나님, 내가 시험의 상태입니다. 혹은 그 상태를 지나 악에 기울었습니다. 내 영혼이 미끄러져 갑니다. 나를 건져 주시옵소서.” 기도하고 새롭게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승리하는 기도생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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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진실한 삶 없이 기도는 없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可憎)하니라”(잠 28:9).
Ⅰ.본문해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율법을 향한 인간의 태도와 기도생활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즉 한 사람의 율법에 대한 태도는 그의 기도생활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볼 때 율법에 대한 사람의 태도는 곧 하나님을 향한 그의 태도와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율법을 사랑하고 지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그 율법을 무시하고, 율법을 알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더욱 율법을 지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Ⅱ. 무기력한 기도
우리들은 모두 충만한 가운데 활기차고 능력 있는 기도생활을 이어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충천하는 화염과 같이 하늘을 향해 타오르고, 우리의 내면의 세계에 끓어오르는 용광로처럼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과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우리 주변의 환경이 우리의 무릎 꿇는 기도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더 많은 사람들은 무기력한 기도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기도를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기도에 독특하게 깃들여야 할 활기와 생명력, 강한 솟구치는 영적인 힘 같은 것들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전쟁하기 싫고 도망가고 싶은 병사가 아무렇게나 쏜 화살처럼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지 못한 채 뚝뚝 떨어지는 화살처럼 그렇게 기도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무기력한 기도생활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크게 이런 무기력한 기도생활의 원인을 내적인 원인과 외적인 원인으로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A. 내적인 원인 : 융성한 죄
내적인 원인은 우리의 마음안의 융성한 죄입니다. 죄의 이 정체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적으로 생각하는 의도입니다. 그래서 죄는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죄는 하나님을 향해 반감을 품고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대적하고자 하는데, 이러한 성향이 마음과 생활, 취향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죠. 은혜에서 멀어지면 유행가 가락이 달콤하게 들리고, 은혜에서 멀어지면 오랫동안 회심하기 전에 빠졌던 옛 기질들, 더럽고 야비한 습성들이 다시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회심하기 전 노름 좋아하던 사람들이 은혜 떨어져 보십시오. 다시 화투에 손을 대고 노름판에 기웃거리기 시작합니다. 회심하기 전에 돈을 사랑해서 돈이면 무슨 짓이든 하던 사람들도 은혜가 떨어지면 무슨 인륜이고 신앙의 원칙이고 사람 사는 도리 같은 것 없이 그렇게 황폐하고 야비하게 돈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심하기 전에 거짓말 잘 하고 진실함이 없었던 사람들은 은혜가 떨어져 보십시오. 그러면 숨소리 빼 놓고 모두 거짓말입니다. 그런 삶을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속에서 무언가 소화가 잘 안 되면 밖으로 오바이트해 내듯이 그렇게 솟구치는 거짓과 악들이 입을 통해서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면의 세계의 이러한 융성한 죄는 하나님을 향한 대적과 반감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싫어하는 마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인 죄는 행위로 충분히 표현되었을 수도 있고 아직 표현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조치 없이 내버려두면 그것은 반드시 외적으로, 잘못된 삶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골에서 씨암탉을 잡아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지금도 생생합니다. 닭을 한 마리 잡았는데 배를 갈라놓으니까 배에 계란 알갱이들이 가득 해요. 그런데 그게 꼭 포도송이 같이 생겼어요. 위에는 작은 것들이 수십 개 달렸고 아래는 점점 큰 것들이 달리는데, 어떤 때 금방 알을 낳을 닭을 잡으면 속에 하얀 계란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말랑말랑해요. 그게 하루 이틀 사이에 굳어지면서 하나씩 빠져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십 개의 작은 계란이 그 속에서 대기 중이에요.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하나씩 하나씩 계속 성숙하면서 그렇게 쏟아져 나오는 것이에요. 제가 왜 여러분들을 죄인이라고 보면서 매일 설교하는지 아십니까? 내가 죽고 나면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유전자 자체가 아주 악하고 못된 죄인이에요. 저나 여러분이나 다 마찬가지에요. 그렇기 때문에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에요. 여러분!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시간마다 깨뜨려지고,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고 돌아서도 일주일이면 다시 그 유전자가 놀랍게 복구되어 돌아오는데, 여러분들이 몇 주만 은혜 못 받고, 몇 달만 은혜 못 받고 주변에서 빙빙 돌아봐요. 멀끔하게 양복입고 머리 빗고 교회 나오면 집사님, 장로님 하고 나오면 다들 그럴 듯하게 보지요. 그러나 그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하나님은 아시잖아요. 그리고 자기도 어느 정도는 알잖아요. 하나님 다음으론 자기가 알잖아요. 내적으로 그런 융성한 죄가 자기 안에 있게 될 때에 그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는 입에 거품을 물고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려 놓으면 묵묵부답이에요. 한 마디도 영혼으로 말할 수 없는 사람 이예요. 자신의 상태를 확인해 보라는 얘기에요. 시험을 해 보란 얘기에요. 남들이 보기엔 그럴듯하죠. 바람을 피웠어요, 노름을 했어요? 세금이야 가끔 떼어먹겠지만. 남의 돈을 훔쳤어요? 그럴듯하죠. 예수님이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무덤이라고 했어요. 겉에는 회칠을 해서 허연데 속엔 뼈가 썩고 있는 거예요. 죄 사랑하기를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은 기도할 수 없어요. 하나님에 관해서 말할 때에는 침이 튈지 모르지만,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과 독대해서 말할 때에는 입안에 거미줄이 끼는 거예요.
신앙은 한 분 하나님의 눈길 앞에서 사는 거예요.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교회와 가정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반영된 것이에요.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과 놀지 마요. 그 사람들과 오래 놀면 자신도 기도 안 하는 사람이 되요. 기도 안 하는 교인들은 나쁜 교인이에요. 지금 안 나쁘면 잠시 후면 나빠져요. 왜? 그 속에 그런 유전자가 너나 할 것 없이 들어 있는 거예요. 훌륭한 신앙생활하고 있는 사람, 너무 추앙하지 마세요. 이런 내적인 원인, 융성한 죄는 기도를 무기력하게 합니다.
B. 외적인 원인 : 불법한 삶
또 하나의 원인은 외적인 원인이죠. 이것은 불법한 삶이에요. 이 불법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살아야 할 규칙을 마구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생활이에요. 그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기도가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물론 어떤 규칙을 외면적으로 철저히 지킨다고 해서 내적으로 충만한 기도생활을 해 나가는 것은 아니에요. 몇 년 전에 가난한 사람들의 영원한 어머니라고 불리던 테레사 수녀가, 수십 년 전에 사역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돌아가셨죠.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죠. 그분이 자기의 신부에게 말년에 보낸 편지가 공개 되었어요. 그 편지 속에서 그는 말했습니다.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데 나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영혼의 깊은 어두움이 너무나 오랫동안 나를 부르고 있습니다.” 라고 말이에요. 외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칭찬 받을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저절로 활기찬 생활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에요. 기도생활은 그렇게 해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감각이 남아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양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어느 정도는 하나님의 질서를 지키는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의 삶이 단정하고 규모 있고 모범적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영적인 생기가 없어요. 우리들이 이러한 본성 속에서 터득한 도덕주의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복음 안에서 깨뜨려진 살아있는 영혼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윤리적인 삶과는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에요. 비유를 하자면, 거룩한 생활로서의 윤리는 자라나는 나무로부터 자연스럽게 맺히는 열매라면, 후자, 인간의 양심과 본성에서 맺혀지는 도덕적인 생활은 나무에 플라스틱 과일을 매단 것과 유사하다는 말이에요. 내적인 원인과 외적인 원인은 나누어지기는 하지만 분리될 수는 없어요. 그래서 결국 그러한 예외적인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은 깊이 관찰해보면 결국은 하나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마음의 융성한 죄는 마음을 지배하고 결국은 행동으로 산출되기 마련이고 그러한 행동으로 산출된 죄는 근본 그 정체 자체가 하나님의 질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질서이기 때문에 그 질서를 따라서 자기가 삶으로 구현해 나가는 거죠. 그러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계명의 가르침과는 전면적으로 상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종일관 일관성이 있으신 전체적인 우주적 질서의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은 오늘 내가 좋아하던 것을 내일은 싫어할 수 있고, 어제 선택한 그것을 오늘은 후회할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죄라는 것 자체가 이러한 모순과 불규칙성으로 가득 찬 즉흥적인 특성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이러한 내면의 세계가 삶 속에 나타나게 될 때에 당장 그것을 산출하게 될 때는 기쁘지만, 산출한 그 결과들은 끊임없이 자기들을 얽어매는 무서운 족쇄가 되는 것이에요.
최근에 나는 노름 때문에 인생이 망가진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잠깐 봤어요. 400억대의 회사를 가지고 있는 아주 유망한 중소기업의 사장이었는데, 우연히 가까운 사람이 상을 당해서 강원도를 갔다가 시간이 나니까 친구들하고 구경삼아서 강원 랜드를 갔대요. 장난삼아서 해봤는데 그날 저녁에 700만원을 땄어요.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한번 뜻을 세우고 가봤어요. 2000만원을 잃었어요. 자수성가한 사람의 단점은 뭐냐면 손해보고 못 배기는 독기가 있어요. 이게 긍정적으로 발휘할 때에는 어떤 사업에 승부사 기질로 작용을 해서 성공으로 데려가지만 악한 데 꽂히게 되면 인생을 망치기가 딱 맞아요. ‘2000만원을 벌려면 어떻게 애를 써야 되는데’ 이 생각에 본전을 만회하겠다고 한 거죠. 그 다음에는 그 본전을 만회하겠다고 애를 쓰다가 결국은 400억의 재산을 모두 날려버렸어요. 그리고는 패가망신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내면의 세계에 있는 죄는 결국은 불법한 삶으로 산출하려고 해요.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으로부터 내 삶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과 영혼에 큰 병이 들어있는 상태라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에 어느 날 여러분들이 갑자기 토할 것 같아서 울컥했는데 신물이 나올 줄 알았더니 피가 한 사발 쏟아졌다고 생각하면 “어이구, 피가 나오나?” 그리고 물로 깨끗이 씻어내고 그냥 잠들진 않을 것입니다. 울컥 해서 피가 쏟아질 정도면 뭔가 커다란 질병이 이 속에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피부에 병이 생기면 여러분들이 작은 것들은 연고를 바르고 낫지만, 뿌리 깊이 박혀서 도무지 치료가 되지 않을 때에는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는 온 몸 전체를 통해서 약을 치료하고 겉을 치료하는 이중적인 치료를 해야 합니다. 똑같습니다. 불법하고 하나님 계명과는 상관없이 나 좋을 대로 살아가는 그 생활은 결국 그 안에 그리스도는 없고 죄가 융성한 것을 보여주고, 그러한 삶 속에서도 자기의 생활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것은 결국은 명백히 하나님을 전면적으로 무시하는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우리의 마음의 죄에서 불법한 삶으로, 삶을 통해서 더욱 융성해지는 죄가 우리 안에서 활동하게 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기도에 힘쓰고,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정확하게 나 자신의 모습이 정확하게 어떠한지를 살피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내가 변화되고 깨뜨려질 때에 나는 기도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고, 기도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만큼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어떠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도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고 자기의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무서워할 뿐이지, 하나님은 우습게 보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당장은 융성한 풀과 같고 식물과 같아도 본질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뿌리가 잘린 사람들입니다. 악인의 번성함은 벤 풀과 같습니다. 그 벤 풀은 아침에 베어놓으면 이슬을 머금으며 베어지지 않은 풀과 똑같이 무성하지만 햇빛이 나는 오후가 되면 그것들은 모두 검불이 되고 삼일 후면 허공에 흩어져 버립니다. 뿌리가 박힌 풀은 더욱더 무성하게 자라지만 벤 풀들은 아주 실같이 가느다란 지푸라기가 되어서 허공중에 날려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런 악인들의 최후인 것입니다.
Ⅲ. 기도 : 절대의존의 축소모형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하라고 그러십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이실 수 있겠으며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없이 아신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잘 아신다면 기도해야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큰 소리로 잠자고 있는 하나님을 깨우는 것처럼 그렇게 부르짖는 것도 기도에 있어서 올바른 태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귀가 먹지도 않으시고 눈이 멀지도 않으시고 여러분들이 소리쳐 외쳐도 들리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져 계신 분도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여러분 자신보다 더 가까이 계신 분이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기도 그 자체가 절대의존의 축소모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으로 이 놀라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어마어마한 크기를 가진 큰 우주입니다. 이 우주 안에 수많은 피조물들이 담겨 있습니다. 담겨져 있는 수많은 피조물들이 하늘을 휘돌며 나고, 흘러가고, 지고, 소멸되고, 또 다시 태어나는 그런 순환의 과정을 되풀이합니다. 과학자들은 이 온 우주가 일천억 개 내지 이천억 개의 별이 모인 은하계이고, 이 은하계가 다시 일천억 개 쯤 모인 곳이 우주라고 생각합니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150억 광년, 혹은 어떤 사람은 250억 광년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엄청난 규모가 우주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할 일이 없어서 과학자들의 말이 맞다고 치고 2000억 개의 별 곱하기 1000억 개의 은하, 그걸 전자계산기로 두드리려고 하니까 그걸 받아들이는 전자계산기가 없어요. 그리고 합해 놓은 다음에 손으로 숫자를 그리면서 계산을 하고, 하나의 별이 40억년 내지 70억년 정도의 수명으로 소멸한다고 보고, 도대체 이 온 우주에는 일초에 몇 개의 별들이 태어나고 사라지나 계산해보니까 일초에 약 40개가 사라지고 40개가 태어나는 숫자가 거의 나와요. 나는 이것이 과학적으로 정확한 수치인지 확언하지는 못하겠어요. 그러나 과학자들도 아마 확증하지 못할 거예요. 별마다 나이가 각각 틀리니까. 그러나 평균적으로 40억 년에서 70억 년 정도 살다가 태양과 같은 별이 폭발을 하면서 사라져 버리고, 그 폭발과 함께 또 다른 별들이 태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이런 어마어마한 크기의 우주도 사실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지만 이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법칙만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게 아니라 이 피조세계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피조세계 속에 계심으로 이 모든 피조만물들이 당신을 의지하도록 그렇게 경륜하셨던 것이죠. 그래서 이 모든 우주의 아름다움, 피조세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은 의존의 아름다움이에요. 그런 의존의 아름다움 때문에 결국은 이 세계가 놀라운 조화와 질서를 드러내는 것이죠. 이렇게 하나님을 의존함으로써 피조 모든 만물들은 미학적으로는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윤리적으로는 선을 보여줍니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실들이 있지만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임으로써 이 우주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선한 것인지를 보이려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은하계 안에는 100억 개 내지 2000억 개의 별들이 모여 있고, 이 끝에서 저 끝가지의 거리는 빛으로 약 20만 광년 정도 달려야 될 길이입니다.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떠있지만, 그 별 중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빛의 속도로 4년을 달려야지만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태양 하나를 주위로 아홉 개, 어떤 과학자들은 여덟 개라고 말하지만 그 여덟 개의 작은 별들이 돌고 있는데, 이 별은 태양계 안에서나 볼 수 있는 행성들이에요. 밤하늘에 볼 수 있는 별들은 이렇게 지구나 달 같이 주위를 도는 행성이 아니라 태양처럼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는, 불타고 있는 가스 덩어리인 항성이에요. 이 항성만 우리 은하계 안에 1000억 개나 2000억 개가 있다고 하니, 태양 주위에 여덟 개의 행성들이 돌고 있는 것을 평균으로 쳐서 다른 별들도 그렇다고 추정하면 우리 은하계 안에 약 8000억 개 내지 1조 6000억 개의 별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별들은 놀라운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놀라운 의존의 질서를 이 태양계 안에서 보여주는데, 태양을 중앙에 놓고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명왕성, 해왕성 이런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다음에 목성입니다. 이 목성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목성은 지구의 크기의 약 80배나 되는 엄청나게 큰 별입니다. 그리고 이 별이 지구와 같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목성이 사과만 하다면, 우리 지구는 콩알만 하다고 생각하면 되요. 그런데 과학자들이 기이한 상상을 했습니다. 만약에 이 목성이 없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두 가지 상황이 벌어지는데, 하나는 지구가 이 궤도로 돌지 않고 결국 이탈을 해서 우주의 미아가 되어 버린다는 거죠. 이 배열이 있기 때문에 규칙적으로 도는 거예요. 두 번째는 목성이 없으면 지구는 오래전에 이미 인류가 살 수 없는 땅이 되었을 거란 거죠. 왜냐하면 우주에서는 소낙비 쏟아지듯이 수많은 우주의 파편들이 날아와요. 그런데 놀랍게도 호위무사처럼 지구를 감싸며 목성이 돌면서 그 어마어마한 체구로 온갖 파편을 다 맞아요.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에 목성에 우주에서 날아온 커다란 파편이 부딪히는 광경이 허블 망원경에 잡혔습니다. 쾅 하고 부딪혀서 폭발이 일어났는데, 솟아오른 불기둥만 1950km 였습니다. 그 높이로 불꽃이 치솟은 거예요. 그런 돌덩어리를 지구가 맞았다면 완전히 박살이 나 버리는 거죠. 과학자들은 10km크기의 돌멩이만 지구에 충돌하면 인류는 완전히 멸망한다고 봅니다. 부딪히면서 생겨난 폭발 때문에 핵겨울이 찾아온답니다. 그래서 그 많은 공룡들이 그렇게 해서 멸망하는 빙하기를 맞았을 거라고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거죠. 어쨌든 이렇게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이 모든 우주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가운데서 안정과 평화를 찾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 생명이 없는 돌덩어리 같은 우주의 천체들도 이렇게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그 질서를 따라 아름다움을 드러낸다면 하나님을 가장 닮은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얼마나 하나님을 더 많이 의존해야 할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아래로는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잘 아는 가운데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하는 그 안에서 영광을 받기로 작정하신 것이죠. 그러한 우주의 모든 질서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하며 그의 품에 기대어 있는 것 같은 그 의존하는 사랑의 모형이 가장 작게 축소가 되어서 인간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기도 속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영혼의 절대적인 의존의 경험이에요. 이것이 가장 아름답게 핵심적으로 농축된 모습이 바로 기도라고 하는 은혜의 수단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고 난 후에 이 모든 우주적인 모형들을 인간 속에 놀랍게 넣으신 것이죠. 그러니까 기도에 대한 강조, 인간이 하나님께 자기를 낮추며 간절히 탄원하는 관계는 타락한 후의 모습이에요. 타락 전에 기도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이 기도의 우주적인 의존의 아름다움으로서의 축소적인 형태, 이 놀라운 아름다움은 결국은 인간의 타락을 배경으로 들어오게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실 때에도 하나님이 아무렇게나 구원하시고 바로 창조의 상태로 돌려놓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의존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은 충분히 이길 수 있도록 도우시고, 죄의 정신에 따라서 독립하며 사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고통을 겪고 독립의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어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이 기도 속에서 우주적인 질서 속에서의 아름다움을 또 다른 우주인 우리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이루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A. 율법과 순종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절대적인 의존의 모습을 율법을 향한 인간의 태도에서 발견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과 순종의 관계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귀를 돌이키고’ 라고 했는데, 이 귀가 히브리어 성경에는 단수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들을 때에 항상 그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귓바퀴를 크게 해서 그 사람의 작은 소리라도 듣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귀 기울이는 경청의 모습이 아닙니까? 이렇게 하질 않고, 의도적으로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이독경(牛耳讀經)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우이독경은 못 알아들어서 안 들리는 건데, 이것은 의지적으로 안 들으려고 뜻을 세우는 것입니다. 가끔 하나님의 말씀이 안 들린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안 들리는 것이 아니라 안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자모 실 에서도 마당에서 뛰다 넘어진 아이의 눈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요. 왜? 사랑하는 마음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만약에 어떤 언약 백성이 의지적으로 귀를 돌이키고 하나님의 율법에 마음을 쏟아 경청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가증하다는 것입니다. 가증(加增)하다는 이 단어가 공교롭게도 히브리어로 ‘토에바’입니다. 토해봐. 얼마나 더러워요. 역겹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귀를 기울이는 마음과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을 하나로 보시는 거예요. 율법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그 율법대로 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아이들이 숙제할 의지가 없을 때는 종례시간에 선생님이 숙제 내 줄때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숙제할 의지가 있는 학생은 못 알아들었으면, 강의를 마친 선생님을 따라가서 숙제가 뭐냐고 재차 물어봅니다. 이처럼 율법에 대한 경청의 태도는 그의 내면 속에 있는 순종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것은 곧 의존의 마음을 입증하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만약에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의 거울 앞에 자기를 비춰보고, 거기에서 판단되는 자신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판단하시는 하나님은 옳고 나는 잘못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 생활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의 기도는 열렬할수록 하나님 앞에는 토할 것같이 가증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세 가지 용도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첫째는 당시의 시민생활을 규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는 결국은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서 예수님을 의지하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용도는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에 그 기준으로서 우리에게 규범 삼아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은혜를 계속 주셔도 우리는 그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율법이 기준이 되어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는지, 그것을 통해서 나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헤아리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일렬로 놓는다고 할 때 수학적인 직선에 일렬로 배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동그라미를 그릴 때 머릿속에 있는 동그라미는 대충 그려진 일그러진 동그라미가 아닙니다. 완전한 동그라미를 머릿속에 그리고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립니다. 결코 머릿속에 있는 그 동그라미를 똑같이 그려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머릿속에 있는 동그라미에 대한 인식을 놓치지 않을수록 그 그림은 동그라미에 가깝게 되는 것이죠. 율법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바로 그러한 목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생애 적으로 주님을 만난 적이 있다면, 여러분들이 생애 적으로 주님을 만난 것을 너무 오래 기억하지 말고 율법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내가 권사가 되었으니, 내가 집사가 되었으니, 내가 신자가 되었으니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 것일까? 내가 구역장이니, 내가 장로이니, 교구역자이니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 것일까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동그라미 삼아서 머릿속에 넣고 자신의 삶을 거기에 그려가야 되는 것입니다.‘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든지 나는 내 원하는 대로 살 거야.’ 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반성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짐승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라는 이름을 가졌을 뿐이지, 속에는 야수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반듯한 모습으로 교회에 나온다는 것 뿐 이지 결코 기도하지 못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시험해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앞에 율법을 따라 살려고 하는 생활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열렬한 기도를 꿈꾸는 것은 천박한 신비주의인 것입니다. 결코 기독교 신앙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굿판에서 무당이 여러분들을 위해 굿을 올리면서 누구의 도덕생활을 문제 삼는 그런 무당이나 점쟁이를 본 적이 있습니까?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 순간에 자기의 신에게 아부를 잘 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마음이 뜨거워지기만 하면 그 신들은 무엇이든지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고도의 도덕성을 가진 거룩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삶이 너절하면 기도는 하나님 앞에 역겨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삶에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기도에 마음을 쏟는다는 것은 코미디입니다. 절대 기도할 수 없습니다.
B. 은혜와 기도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삶의 표준이 아주 높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은혜와 기도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신앙이 흐트러져서 아무렇게나 생활하고 기도도 안 하고 하면 하나님이 야단도 안치십니다. 하나님 앞에 야단맞는 건 놀라운 특권입니다. 오늘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너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 내가 너에게 베풀어준 은혜가 얼마나 큰데. 나는 너를 슬퍼하노라. 네 마음을 바꾸어라.’ 이렇게 책망을 받았다면 여러분들은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성령이 그 사람 안에 역사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은혜에 넘칠수록 하나님이 매일 야단을 치세요. 그래서 은혜 가운데 있을 때마다 목매어서 그렇게 우는 거예요. 언젠가 은혜가 내 마음에 가득 했을 때 기도만 하면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데,
나는 내가 나인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너무 죄송합니다. 하나님은 은혜 가운데 있을 때 매일 야단치세요. 그리고 회초리도 맞아요.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모자란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요. 그러니까 모자란 인간이 내 힘으론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게 되는 거예요.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이 모습 이대로 받아달라는 게 무서운 얘기에요. 은혜 안에 있어서 자기가 얼마나 나쁜 인간인지 깨달으면서 기도하면 눈물의 기도가 되지만, 기도 안 하고 자기 멋대로 생활의 표준도 없이 살던 사람이 어느 날 예배 시간에 와서 이 노래 부르면 배 째라는 거예요. ‘그래 나 이것 밖에 안 됩니다. 받으려면 받고 말려면 말고. 이만큼 바치는 것만도 황송하게 생각하셔야죠, 하나님.’ 그런 찬송 불러도 눈물도 없고 감동도 없어요. 그러나 정말 우리의 마음속에 이 표준대로 살기에 너무 죄송하기 때문에,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예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내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 죄송하다고 느껴질 때 내 존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분 바르고 하나님 앞에 가면 예쁘다고 그러겠어요? 예쁘다고 그러면 온갖 화장품 다 바르죠. 파마로 머리를 볶는다면 하나님이 예쁘다고 그러겠어요? 그러면 더 보글보글 라면 머리 하겠죠. 살점이라도 떼서 하나님 마음에 든다고 하면 살점 떼겠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잖아요. 완전히 엎드려져서, 은혜는 나에게 있는 것에 주님의 좋은 것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없는 것을 주님이 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은혜를 내게 주님이 주셔야 할 의무는 없어요. 정당한 권리로 주님 앞에 가는 것이 아니에요. 부복하여서 주님 앞에 “은혜가 필요합니다.” 간절히 구하면서 그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가 안 되는 사람들 보고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기도가 안 될 때는 기도하려고 힘을 써라. 그렇지만 기도하려고 힘을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라.” 그리고 내 사정을 알아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면 기도의 문이 안 열려요. 그러지 말고 나 같은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떨까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데, 그 심정을 전달해주는 통로가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IV. 결론 : 삶을 능가하는 기도는 없다
말씀에 온전히 귀를 기울일 때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세요. 그러면서 기도만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의 삶을 고치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치는 거예요. 그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을 따라서 하나님이 마음을 움직이도록 때려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삶을 능가하는 기도는 없습니다. 기도를 능가하는 생활도 없습니다. 사는 것만큼만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하는 것만큼만 살 수 있습니다. 삶은 기도에 묶이고 기도는 삶 안에 갇히게 마련입니다. 한 사람의 사람됨은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 때에 그 사람의 가치가 입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유능한 언변으로 사람을 굴복시킬 수가 있고 능수능란한 거짓말로 사람을 속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사람됨은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의 그 사람됨입니다. 그 사람됨을 능가할 수도 없고 모자랄 수도 없습니다. 오늘 예배가 끝나고 모두 즉시 시험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마음으로 무릎을 꿇어 보십시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어떤 존재인지 들여다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삶을 향해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진실한 삶 없이는 기도는 없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기도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삶을 개혁하여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승리하는 기도생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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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영혼의 어둠을 헤치고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奇異)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 : 18)
Ⅰ.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시는 모든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다윗의 시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 119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시를 통해서 시인은 자신의 신앙과 인생의 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영혼을 어떻게 깨우고 소생시키셨는지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 119편은 단지 한 사람의 간증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또 이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며 사는 성도의 참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백성들과 외인들의 결정적인 차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복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아름다움과 그 진리의 달콤함을 모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자신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진리를 소유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언약의 백성들에게는 이 진리가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 진리의 말씀이 한 사람의 마음을 녹여 주님의 사랑으로 화합하게 만들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그 구속의 연합을 공고하고 생명력 있게 하는지를 체험으로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Ⅱ. 어둠속에서 몸부림치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은 어둠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세계를 먼저 보십시오. 그들이야말로 어둠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지 않습니까? 발달한 물질의 문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그들은 이전 세계의 이들이 누리지 못한 최고의 물질적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의 삶엔 어둠이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태어는 났지만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어둠과, 살아가기는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살아가야 할지는 알지 못하는 이러한 어둠이 가득한 가운데 누구도 알 수 없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인류의 문명은 흘러가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인간들의 삶으로 내려와 봐도 이런 어둠이 가득한 것은 사실입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과학이 발달해서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생겼지만, 이런 교만한 마음은 더욱더 사람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영혼의 어둠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고, 지식은 늘어나고 있지만 그 지식을 창조의 목적대로 사용할 수 있는 지혜는 현저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이런 어둠속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행복을 찾지만 참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면서 자신들을 점점 더 고통의 미궁 속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오늘날 새롭게 발견되는 모든 악과 죄, 날마다 새롭게 발견되는 인간의 허탄함과 거기에 몰두하는 인간의 삶은 바로 이러한 어둠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리를 모르고 진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이 모든 사상에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로써 어둠속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이러한 이방 사람들이 어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야 하는 언약백성들, 복음의 진리를 한때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깊은 어둠속에서 살아가고 있어,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다른 것이라고는 주일날 교회 나오는 것뿐이고, 나머지에 있어서는 모든 생각과 가치관이 어둠속에 있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런 속에서 그리스도인들도 예외 없이 자기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애쓰고 신앙의 도움을 받아서 이것들을 이루어보려고 하지만, 어둠속에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어둠속에서 사는 많은 날 동안은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살 수 없고, 고로 어둠속에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이라고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환경을 개선하고 우리의 삶을 바꿔보고자 노력을 하고 이것을 위해서 보다 더 많은 이 땅의 자원들을 구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삶의 양상일 뿐입니다. 어떤 배가 예쁜 페인트칠을 하고 그 배안에 황금과 보석을 많이 싣는다고 해서 배가 가는 방향이 결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최고급 좋은 모터를 달고 출력을 세 배로 높였다고 해서 그 배가 잘못 가던 방향을 세 배나 똑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양상에 속하는 것과 본질에 속하는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구하는 대부분의 많은 것들은 하나님 앞에 먼저 구하여야 할 것들이 아니고, 먼저 구하면 그 결과로서 따라올 것들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의 기도생활과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그 가르침에 전면적으로 위배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함으로 마음이 어두워진 사람들에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당신을 의지하고 신뢰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많은 우리의 관심사를 들에 핀 백합화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보다는 솔로몬의 입은 그 영광을 더 많이 구하고, 우리는 생명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히려 조금도 우리를 살아있게 할 수 없는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을 썩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못하게 하는 일에 우리 스스로 앞잡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는 얼마나 커다란 차이가 있는 삶의 방향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의 인생의 길이는 곧 그가 하나님 앞에 산 인생의 길이가 아닙니다. 새털같이 많은 날들이 주어졌어도 그가 주님을 위해 산 날은 그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산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Ⅲ. 영혼의 어둠
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오류에 빠지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잘못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복음을 맛본 사람들조차 이런 오류에 떨어진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어둠 때문인 것입니다. 이 영혼의 어둠 때문에 그들은 어둠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무지하고 몽매한 삶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밝히 진리를 보여주시고 십자가에서 이것들을 확증해 나타내 알려주셨고, 우리에게 그 모든 어둠을 뿌리치고 극복할 수 있는 복음의 광채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어둠속에 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 아름다움 앞으로 나오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왔으되 사람들이 그 빛을 싫어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어둠의 일을 사랑했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관심사는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근본적으로 접근하는 일에 쏟아 부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위해서 우리의 영혼, 우리의 이 마음 안에 있는 어둠이 물러가도록 노력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오늘 이 시인이 고백하는 것처럼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라고 하였으니 그는 모종의 보지 못하는 어둠속에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어둠은 따라서 객관적인 어둠과 주관적인 어둠으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설교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커다란 빛을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어둠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객관적인 어둠이고 또 하나는 주관적인 어둠입니다. 객관적인 어둠은 정신의 어둠이고, 주관적인 어둠은 영혼의 어둠입니다. 이 두 어둠은 구분은 되지만 떨어질 수 없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동맥과 실핏줄처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이러한 객관적인 어둠과 주관적 어둠은 아주 중요한 연관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A. 객관적 어둠
이 객관적인 어둠은 정신의 어둠이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지성이 눈을 감고 있는데서 비롯되는 어둠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어둠은 상대적인 어둠입니다. 얼마든지 정신이 진리를 밝히 알면 물러갈 수 있는 쉬운 어둠입니다. 이런 어둠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추는 것을 가리켜서, 깨어지는 것을 가리켜서 시편 119편 105절에서는 ‘빛’이라고 묘사하고 있고, 또 시편 19편 8절 같은 데서는 이런 말씀을 깨닫고 지식으로 밝아지는 것을 ‘눈을 밝게 하는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 같은 데서는 이것을 ‘등불’이라고까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어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어둠인 것입니다. 이 어둠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어둠이므로 알게 되면 쉽게 물러가는 어둠인 것입니다.
회심을 하고 그 이듬해 쯤 되었을 때에 저는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도의 제목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하늘 가까운데서 기도하면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실 것 같은 마음에 삼각산에 있는 기도원을 자주 오르내렸습니다. 나라에서 불법건축물이라고 일곱 번을 허물어 버렸는데 여덟 번째 끈기 있게 기도원을 세우고, 그게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운영하는 기도원이었습니다. 얼마나 높은 꼭대기에 있는지 맑은 날이면 인천 앞바다가 보이고, 저쪽으로는 불암산 육군사관학교까지 보이는 높은 곳이었습니다. 낮에는 일을 보고 밤중에 거기를 올랐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청년들이나 목사님하고 같이 산에 올랐는데, 그날은 왠지 하나님과 독대하고 싶은 어린 마음에 홀로 올랐습니다. 도착해보니 이제 캄캄하게 어두워졌는데, 문방구에 가서 후레쉬를 하나 달라고 했더니 후레쉬는 없고 초등학생들이 공작시간에 쓰는 조그만 꼬마전구는 있대요. 그거라도 하나 달라고 해서 그걸 가지고 이제 산에 올랐습니다. 캄캄한 그믐밤에다가 칼바람이 부는 아주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두려운 마음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찬송을 부르며 올라갔습니다. 거기로 올라가 보신 분들은 기억을 하겠지만, 좋은 길이 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거기는 사람이 다닐 일이 없는 산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아주 등산이나 하는 사람들이나 다니는, 그것도 드물게 다니는 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소로(小路)였습니다. 삼분의 일 쯤 산에 올라갔을 때에 조그만 라이트가 껌벅껌벅 하더니 꺼져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달빛 하나 없는 칠 흙 같은 어둠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위로 보면 기도원 불빛이 아득히 보이고 아래로 보면 동네 불빛이 보이는데, 내려갈 길도 못 찾겠고 올라갈 길도 못 찾겠어요. 또 내려가면 하나님 앞에 결심한 것을 위반하는 것이고, 내려간들 통금인데 어디서 무엇을 하겠는가? 해서 올라갈 수밖에 없었는데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거기에서 대개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까지 빨리 가면 한 시간 이십분, 쉬엄쉬엄 가면 두 시간 걸리는 거리였는데, 제가 삼분의 일 지점에서부터 세 시간 반을 산속에서 헤매었습니다. 그때 나는 빛의 고마움을 아주 깊이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올바르게 살고자 해도 지식이 없으면 올바르게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잘하고 싶어도, 잘할 힘이 우리에게 남아있다 할지라도 무지하면 그 잘하고자 하는 힘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파푸아뉴기니아에 있는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들어 보낸 필름을 보면서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한 어린 아이가 열병에 걸려서 신열을 하고 아이가 벌벌 떨면서 앓고 있었습니다. 원인은 더러운 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거기서 고기를 잡아먹고, 그 물을 떠먹고, 거기다 소변도 보고, 오물도 갖다가 버렸습니다. 이 물로 인해서 생기는 질병인데,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엄마가 눈물을 흘리면서 그 동네에 살고 있는 무당을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무당이 무슨 방울을 흔들면서 기도를 하더니 이 아이를 데리고 빨리 뛰라는 겁니다. 그래서 강가인지 바닷가인지 가서 그 모래사장에서 아이를 거꾸로 들고 입을 벌리고 모래를 입에다가 막 쳐 넣는 거예요. 신열을 나게 하는 귀신이 아이의 입을 열고 모래를 쑤셔 넣으면 도망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이 어미의 마음은 그렇게 미개한 문명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나 좋은 문명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 아이를 살리고자 하는 어미의 마음에 무슨 가식이 있고 거짓이 있겠습니까? 아이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심장도 도려내어 줄 그런 사랑을 가진 부모였지만, 무지하기 때문에 신열을 앓던 그 아이의 입을 벌려 모래를 쑤셔 넣고 결국 그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장례식을 지내는 광경까지 필름에 담았습니다. 이게 바로 무지인 것입니다. 이러한 지적인 어둠이 사람에게 가득 하게 되면, 그는 그 마음속에, 혹은 어떤 힘이나 바르게 하고자 하는 선한 의지가 남아있다 할지라도 그의 인생은 올바르게 될 수도 없고 선하게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는 사람들이고 성경책은 구시대의 유물이요, 한 종파의 종교서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고 믿고, 이 성경은 우리의 눈을 밝게 하여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고 또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으면 무엇 합니까? 실제로 여러분 속에 지성 속에 어둠이 가득 하기 때문에 의사를 부르고 아이를 위생적인 환경으로 옮기고 아이에게 올바르게 치료해 주어야 할 상태인데도, 그 아이를 데리고 강가로 뛰어서 그 아이를 거꾸로 매달고 입에다가 모래를 쑤셔 넣어서 죽여 버리는, 그리고 괴로워서 펑펑 우는 그 어머니 같은 마음인데, 어떻게 여러분들에게 그러한 기본적인 신앙의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저녁에도 산상에 올라가서 여러분들에게 현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철저히 진리는 버리고 비 진리에 현혹되어 있는지를 보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이 진리를 통해 날마다 생각을 정돈하고 지식의 새로운 말씀으로 마음속에 있는 이 객관적인 어둠, 지성의 눈멂을 사라지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은 제쳐두고 더러운 이단사설에 빠지거나, 혹은 이단사설까지는 아니더라도 명백한 기독교의 신앙의 정신이 아닌, 이교의 사상에 물든 더러운 것들에 빠져서 인생을 허비하고 거기에 헌신하고 있는 이 불쌍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교회에 가득 하다고 하는 것은 “이 마지막 시대에 어디서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 고 하신 주님의 탄식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기독교는 철저히 세상의 함정에 빠지고, 무지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은 눈먼 자들의 가르침을 따라 줄줄이 엮어져서 진리를 외면하고 비 진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고, 그 부끄러움을 스스로 자랑을 삼으며 살아가고 있으니, 교회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를 바라보시는 그 마음은 어떠하시겠습니까? 진리를 드러내야 할 교회가 스스로 진리를 버리고 거짓된 사상과 이단사설, 그리고 세속주의에 물들어 살아가는 이 모습, 그리고 그 속에서 더럽혀지고 있는 자신의 영혼에 일어나는 재앙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러분 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부끄럽고 가증한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상식을 위로 놓고, 하나님의 말씀의 체계보다는 자기의 즉각적인 생각이 그 모든 것들을 뛰어 넘는다고 생각하는 가증한 교만은 바로 뱀을 통하여 아담과 하와가 받았던 바로 그 미혹의 교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볼 수 있는 두 눈을 주신 것은 일차적으로 성경을 읽으라고 주신 것이에요. 뚫려진 귀는 세상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먼저 들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을 경청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두 눈은 죄악에 발 빠른 사람들이 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입은 온갖 더러운 언어와 말들을 토해 놓음으로 하나님의 교회와 이 세상을 더럽히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깨달은바 진리의 말씀을 무지한 사람들에게 나누라고 주신 것이고 그를 깨운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속된 일에는 자기의 마음을 남김없이 쏟아 부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어두워진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일에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과연 진리가 있기는 있습니까? 그리고 그 진리가 여러분들의 삶의 기준이기는 한 것입니까? 용서받을 수 없는 교만의 죄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진리위에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도 자신의 판단을 받기 전에는 진리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은 자기를 하나님이 계셔야 될 자리에다가 두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런 객관적인 어둠이 가득 하기 때문에 교회는 어찌하든지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기 위하여 애를 씁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의 일이 바쁘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며 자신을 눈멀게 하는 이 무지로부터 벗어나고자 정신의 밝음을 위하여 애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쁘기는 하지만 급한 일은 급한 일일 뿐이고, 중요한 일은 급한 일보다 더 큰 일입니다. 일평생 사는 동안에 여러분들이 바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급한 일에 쫒기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언제쯤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할 수 있는 한가로운 때가 올 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어렸을 때는 세상에 발고 재미나고 좋은 친구들이 많이 있어서 그럴 시간이 없고, 좀 나이가 든 다음에는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에 빠져서 그 일에 몰두할 시간이 없고, 몇 년 지나고 애들이라도 쏟아 놓게 되면 이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시간이 없고, 자라면 열심히 벌어서 이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서 그럴 시간이 없고, 이 아이들을 시집 장가라도 보내놓으면 그 다음엔 모두 한가로워졌나 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아이들을 쏟아 놓아서 그 손자손녀들을 돌보느라고 정신이 없고, 이 아이들을 좀 길러 놓으면 이제 이 아이들이 점점 자라서 이제는 더 많은 종류의 헌신을 가족들에게 요구합니다. 그래서 요즘 어린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할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아요. 왜? 학교 데려다 주는 것도 할머니·할아버지, 데리고 오고 유치원에 보내고 학원에 보내고. 모든 것들을 이렇게 합니다. 이제 그 아이들이 다 커서 이제는 훨훨 날아가서 더 이상 자기의 도움이 필요 없을 때 이제 드디어 한가로운 때가 왔습니다. 그런데 치매기가 오기 시작합니다. 뭘 배우겠습니까? 그 맑고 좋았던 정신은 세상일에 다 쏟아 부어버리고 너무나 바빠서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었던 때가 지나고 이제 드디어 한가로운 때가 왔는데,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런 객관적인 어둠이 가득 합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마음으로 눈물이 비같이 흐릅니다. 이 어둠에 쌓인 교회들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B. 주관적 어둠
또 하나는 주관적인 어둠입니다. 이 어둠은 상대적인 어둠이 아닌 절대적인 어둠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이 어둠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치적으로 정신이 깨달아 알아도 밝아질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어둠입니다. 이 어둠은 부패한 본성과 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도입되는 주관적인 어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치에 합당한 지식의 전달은 객관적 어둠을 물러가게 하지만, 이 주관적 어둠은 그런 이치에 합당한 깨우침으로서 만은 물리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강력한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물러갈 수 있는 어둠입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는 성경 진리의 일반적인 규칙들을 깨달아 그 이치를 터득하게 되는 것도 성령의 작용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성령의 작용이고 오늘 말씀드리는 이 주관적 어둠은 영혼의 어둠으로써 이것은 성령의 특별한 역사에 의해서만 물러가는 어둠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물질을 이 땅에 쌓아두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하늘에 그 보물을 쌓아두라.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 유명한 등불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고, 만약에 그 마음의 등불이 어두워지면 무엇으로 밝게 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보다 재물에 대한 사랑이 영혼의 눈을 어둡게 한다는 것을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일어나는 반인륜 적이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 결국은 궁극적으로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을까? 하고 캐 들어가면 마지막에 나오는 결론은 자기의 이익에 눈이 먼 영혼의 어둠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호기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학교공부 하듯이 배우는 것만 가지고는 빛 가운데로 나올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에요. 나는 열린 교회를 하면서 말씀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설교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이 교회로 교회를 옮기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 눈에는 그들의 영혼의 상태가 보입니다. 정말 이 말씀이 그렇게 스며들어서 저의 정신을 깨울 뿐만 아니라 영혼의 어둠을 물러가게 하는 성령의 역사로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이 예배당에 노트를 들고 와서 열심히 설교를 적는 사람들을 마음으로 그렇게 기뻐하지 않습니다. 물론 중요한 내용들을 일시적으로 메모하는 것은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치 강의를 듣는 것처럼 온통 가득히 노트필기를 하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그 영혼에까지 들어간 사람일까요? 정말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실로 주님을 만난다면, 그런 능력이 설교 속에 깃들어 있다면 과연 그가 평안한 마음으로 객관적인 심정으로 끝까지 설교를 옮겨 적을 수가 있을까요?
스코트랜드의 종교개혁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John Knox의 일대기에 나오는 예화입니다. 그는 말년에 종교개혁을 위해서 크게 헌신하였고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인생의 말년이 되었을 때에 모진 고문과 피비린내 나는 박해의 세월을 지낸 끝에 온 몸이 매우 연약해져 있었다고 합니다. 혼자 힘으로 강대에 올라 성경을 펴고 설교할 수가 없어서 시종들이 그를 부축하여 설교단에 올려놓았습니다. 올려놓으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말씀을 펼치고 그 강대에 힘이 없어서 기대어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은 다니엘서를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삼십분 정도 온화한 목소리로 다니엘서를 주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녹음기가 없었기 때문에 재주 있는 필사(筆寫)자들이 종교개혁자들의 모든 설교들을 받아 적었습니다. 속기로 말이죠. 그래서 이 속기사도 열심히 John knox의 설교를 받아 적었습니다. 삼십분 동안 온화한 본문의 해석이 끝난 후 그것을 실제의 삶에 적용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노인네라고는 믿어지지 않고, 힘이 없어 강대에 기대선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사자와 같은 열정으로 토해내기 시작했고 그것을 받아쓰던 필사자는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서 두려움에 떨면서 더 이상 연필을 잡을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를, 마치 세상의 학원에서 이 세상의 학문을 배우듯이 그렇게 한 권 한 권 정복하고, 그렇게 쌓여지는 지식으로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며 살아가고 있는 신자들 가운데 맑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더불어 언쟁하고 논쟁하여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지식에 있어서 뛰어나지 못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의 삶은 썩은 삶입니다. 사람은 아는 것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품은 선한 의지대로 사는 것입니다. 선한 의지가 그 마음속에 있을 때에 그가 비로소 아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들려진 정확한 지도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어차피 갈 의지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지도를 가지고 돌아다니며 자기도 가지 않을 지도를 보여주면서 내 지도가 가장 정확하다, 내 지도는 테두리를 금박으로 둘렀다, 내 지도는 총 천연색이다, 내 지도는 어느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라고 으스대며 그 지도와는 정 반대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썩어빠진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가련한 존재입니까? 언젠가 주님 앞에 심판을 받을 때 그는 그 손에 들려진 좋은 지도 때문에 변명할 수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주관적인 어둠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이 주관적인 어둠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에 의해서만 물러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의 눈의 상태를 진리의 말씀으로 옳게 점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선천적으로도 눈이 나쁘고 후천적으로도 눈이 좋아질 만한 아무런 환경 속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에 눈은 극도로 나빠졌고 마지막으로 시력검사 할 때 -17diopter였습니다. 여러분들이 믿어지지 않겠지만 제가 차를 몰고 혼자 가다가 (그때는 운전해주는 사람도 없었죠.) 밤에 길이 안 보여서 인도로 뛰어든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성남에서는 삼거리 사이에다 섬처럼 만들어놓은 보행자 일단 정지용 그곳을 보이지 않아서 그걸 밟고 뛰어올라갔습니다. 다행히 사람은 없었습니다마는 차는 크게 부서졌고 저는 핸들을 놓치고 몸이 핸들에 고꾸라지는 그런 끔찍한 경험까지 했습니다. 신호등은 항상 여섯 개로 보였고, 신호등을 보고 건너는 것이 아니라 앞차를 보고 건너서 앞차가 위반을 하면 따라 위반을 하다가 딱지를 뗀 적도 있습니다. 밤중에는 이런 일들이 더 심해지고, 그리고 태어나서 한 번도 달에 토끼가 있는 것을 못 봤습니다. 그 일화는 수도 없습니다. 심방 가서 식사할 때 떨어진 상추를 하나 집어먹었는데 휴지였어요. 사무실에 있을 때 우리 집사람이 들어왔는데 안경을 벗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들어오신 분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로, 어디서 오셨습니까?” 라고 말이죠. “집안 일로 가정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너무 안타까워서 수술을 해서 어떻게 눈이 밝아질 길이 없나 하고 어느 의사를 찾았습니다. 하도 강남에서 유명하다고 하는 의사여서 내 힘으로는 어떻게 진찰도 못 받을 것 같아서 아는 사람에게 청탁을 넣어서 그 사람의 인도로 그렇게 해서 갔더니 진짜 사람들이 많더군요.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편의를 보아서 나를 진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늙어보이지도 않는 중년의 의사가 나를 잘 관찰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의외로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더 이상 잘 보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너무 단호해서 잘 한번 봐 달라고, 눈이 아프니까 사는 게 너무 불편하니까 상황을 개선할 방법이 없겠느냐고 그랬더니 저에게 무슨 자료를 보여주면서 “보십시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선생님은 시신경 자체가 대부분 다 죽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수술을 해서 시력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제가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누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틀린 진단입니다.” 처음에는 단호한 것이 신뢰가 됐는데 그 다음에는 무슨 저주하는 것처럼 들렸어요. 그래서 내가 시력을 회복하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가고 싶었던 것이 그 병원이에요. 그래서 내가 “당신이 죽었다던 시신경으로 내가 보고 있습니다.” 라고 말이지요. 여러분 인생의 최고의 재앙은 그런 어둠 속에서 사는 거예요. 자기는 그런 어둠속에 살아도 올바른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교회와 영적인 인도자를 만나면 좀 나아요. 그런데 저도 못 보고 또 만나기를 그런 사람을 만나면 소경이 둘이 손잡고 어둠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거지요. 수술을 하고 두 눈을 뜨게 된 날, 나는 이 세상에 있는 빛깔과 선, 면, 이것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하는 것을 처음 느꼈습니다.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것도 보였지만, 눈이 어두웠기 때문에 보이지 않던 추한 것들도 보였습니다. 교회 들어왔을 때 제일 먼저 느낀 것은 교회가 편의점같이 너무 밝다는 것, 그리고 여러분들이 주름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객관적인 어둠과 주관적인 어둠을 비유로 하자면, 시력이 없어서 눈앞을 못 보는 장님은 주관적 어둠 때문에 어두운 사람이고, 객관적인 어둠은 눈이 멀지 않아서 충분히 볼 시력을 가지고 있는데 동굴 속에 갇혀서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 사람, 즉 볼 수 있는 시신경이 있어서 시력은 다 있고 눈도 멀쩡한데 어둠속에 있는 사람은 정신과 마음이 올바로 깨닫고 나면, 어둠이 물러갑니다. 그러나 시신경이 죽어서 시력 자체가 없는 사람은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그 눈을 뜰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순간에 이런 고백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Was blind but now I see
전에는 눈멀었으나 이제는 보게 되었습니다. 라고요. 주관적인 어둠이 물러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보게 된 경험을 노래한 것이죠? 그러나 이 주관적인 어둠은 일정한 상태로 그냥 물러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밝아질 수도 있고 다시 어두워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주님의 말씀에 더 가까이 하고 그 말씀에 의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여러분들의 마음이 쇄신되고 갱신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정결해지고 죄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멀어져 십자가를 붙들게 될 때에 그만큼 그의 영혼의 어둠은 물러가고 진리의 빛이 그의 영혼을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그가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래서 무지로 말미암아 생겨난 이 정신의 어둠이 물러가도록 지성적 노력을 한다면 그는 정말 밝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의 많은 문제는 힘과 자원의 문제인 것 같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눈이 밝아지고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성령의 은혜로 충만한 가운데 모든 세상의 욕심과 이기적인 욕망으로부터 멀어져 그 진리의 빛을 따라 살려고 할 때에, 그때에 여러분들은 밝은 사람들이 됩니다. 진리의 맛을 알고 그 진리 때문에 행복해하고 그 진리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감으로 어두움을 헤치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IV. 결론 : 빛을 구하라
그러므로 이 객관적인 어둠을 물리치는 것과 주관적인 어둠을 벗어나는 것은 구분될 수는 있지만, 나누어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관적인 어둠을 물러나게 하는 성령의 역사는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리고 깨달아질 때에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혼의 참된 빛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정신으로 진리의 말씀을 잘 깨닫기 위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우리의 온 심령으로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 강한 은혜로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이 영혼의 사슬과 같은 어둠을 물리쳐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의존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참된 영혼의 아름다운 광채와 빛은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참회하며 녹아내리는 신자의 마음 안에 빛으로 들어옵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되, 그것을 자신의 지력으로 이치를 깨닫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지 않고, 성령의 도구일 뿐이고 이 성령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 강한 깨달음과 역사를 불러일으킬 때에만 나는 이 어둠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곤고해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은 대부분 양상에서 오는 문제들입니다. 하나님의 더 큰 관심사는 여러분들이 이런 양상 속에서 때로는 순경(順境) 속에서, 때로는 역경(逆境)속에서, 때로는 고난과 때로는 시련 속에서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빛 안에서 살고, 그 빛 안에서 사는 참된 행복을 어두운 이 세상을 비치는 등불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어둡다면 어떻게 여러분 자신이 빛으로 나타날 수 있겠으며, 여러분들이 빛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이 만나 예수 그리스도는 도대체 여러분들에게 어떤 섬김을 받으시겠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해서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을 이 빛으로 나아가는 기회로 삼고 하나님 앞에 이 두 어두움에서 여러분들을 해방시켜 달라고 오늘부터라도 전심으로 매달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승리하는 기도생활 1
승리하는 기도생활 1 (09/6/14,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2 (09/6/21, 주일오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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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기도생활 4 (09/7/05, 주일오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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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기도생활 7 (09/7/26,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8 (09/8/02,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9 (09/8/09,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0 (09/8/23, 주일오전예배)
승리하는 기도생활 11 (09/9/06, 주일오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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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기도생활 15 (09/10/18, 주일오전예배)
15.기도를 통해 빛으로 나아옴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시 119 : 19).
Ⅰ. 본문해설
지난주에 이어서 시인은 어떻게 우리가 기도를 통해 이 모든 어두움들을 물리치고 빛으로 나아와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전적으로 주님의 은총에 의해 눈을 뜨고 빛을 볼 수 잇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진리에 대한 깨달음으로 어둠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만들어줍니다.
Ⅱ. 두 어둠들에서 벗어남
A. 객관적 어둠 : 지식
시인은 이어지는 기도 속에서 두 어둠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두 어둠중 객관적인 어둠을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이 객관적인 어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아는 올바른 지식을 갖는 것입니다. 이 객관적인 어둠은 정신의 어둠으로서 빛을 비춰주기만 하면 볼 수 있는 그런 어둠입니다. 성경을 탐구하고 깨닫는 것은 상당부분이 우리의 이성의 활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더 많이 배우는 사람이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도록 부지런히 배우고, 읽고, 묵상하고, 순종하고, 그리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것을 통해서 나를 알고, 또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올바로 알아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근본이고 또 모든 인간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과 지식의 함양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생사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그 진리의 빛 아래서 보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살아가는 인생의 모든 과정을 통해서 이미 배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깨달아서 더욱더 기록된 성경말씀을 배울 필요를 느끼게 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물 속에 나타난 신묘한 아름다움과 조화를 발견하면서 우리는 온 땅과 만물 위에 홀로 뛰어나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희미하게나마 보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해석하도록 만들고, 자연의 모든 세계에 나타난 감추어진 아름다움을 보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삶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을 더 많이 배우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갈 때에도 그 성경을 생각하고 끊임없이 그 기록된 진리로 돌아가는 것이 신자의 삶이고 행복이에요. 그래서 신자로 부름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읽고, 깨닫고, 묵상하고, 실천하고 거기에 자신을 적용시킴으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배우는 모든 것이 넓은 의미에서는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안 되는 일이지만,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사실과 사실들을 이해하는 데는 우리의 이성의 많은 능력이 좌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믿으려 하지 않고 성경을 배우려는 지식이 뛰어난 사람보다는 지식이 뛰어나지 못해도 잘 믿으려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더 많은 이해를 갖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같은 수준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이성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객관적인 어둠에서 더 많이 벗어날 수 있습니다.
B. 주관적 어둠 : 성령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이 객관적인 어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객관적인 어둠은 성경을 지성으로 잘 공부함으로써 물러갈 수 있는 어둠이지만, 우리에게 더 무서운 어둠은 주관적인 어둠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부패한 본성과 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도입되는 어둠입니다. 이것은 학식이 낮고 이성의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들에게만 오는 어둠이 아니라, 때로는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아주 탁월하고 높은 사람에게도 찾아오는 어둠입니다. 왜냐하면 부패한 본성은 이 세상에서 영리하고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접근하지 못하고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만 접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부패한 본성으로 죄를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는 이런 주관적인 어둠이 도입되어 그의 판단을 흐리고 영혼을 흑암 속에서 살아가게 만듭니다. 영혼이 이런 어둠 속에 있고 지성조차도, 정신조차도 이 어둠 속에 있을 때 그는 마음껏 어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흑암의 자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가장 큰 의무는 바로 이 두 가지 어둠을 물리치기 위해 매일매일 힘쓰는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자신의 전집 제 1권에서 우리에게 충고하기를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으뜸가는 의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더 많이 생각하고 마음에 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중대한 모독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마음에 가득 담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 주셨고, 그 성경 계시에는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하나님 보여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가장 잘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성경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는 성경의 주인공이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진리에 대해서는 사랑이 없다고 느끼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라기보다는 곧 있다가 사라질 천박한 연애감정인 것입니다. 그러한 일시적인 들뜬 연애의 감정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까리따스”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은 오래 참지도 못하고, 온유하지도 않고, 시기하지 않는 일을 하지도 못하고, 인내하고 견디지도 못합니다. 아침구름처럼 오전에는 있다가 오후에는 사라지는 아주 천박한 종교적 연애감정일 뿐입니다. 사랑은 보다 견고하고 온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만큼 성경을 사랑할 수 있고, 그리스도를 마음에 담은 것만큼 그는 영혼이 주관적인 어둠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으로 배우는 것만으로 만족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결코 참된 자유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이런 경험을 틀림없이 했을 것입니다. 예전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게 되었고, 지금도 성경을 읽고 있고 또 배우고 있어서 지식적으로는 자기가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데 마음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관적인 어둠을 물리치는 일 없이 객관적인 지식만을 습득하려고 할 때 일어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의무가 우리에게 있어서 중심에 오는 의무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매일매일 자신이 스스로 학생이라고 생각하고 주님의 말씀을 매일매일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몇 주 전 월요일 날 우리들이 개혁파 정통주의 칼빈 세미나를 했습니다. 그중 어느 교수님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연세도 있으신데 교회에 왜 그 등산 가방을 메고 나타나십니까?” “잘 안 어울립니까?” 그랬더니 “심히 안 어울립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이 등산 가방을 들고 나타나는 것은 사실은 이게 등산 가방이 아니라 책가방입니다. 내가 이 가방을 메고 예배당에 오르는 것은 나 자신을 끊임없이 교육시키기 위함입니다. 목사도 사람이기 때문에 설교를 해서 많은 성도들이 회심을 하고 은혜를 받는 날이면 가슴이 뿌듯해지고 자기도 이제 설교에 있어서 무엇인가 눈을 뜨고 어느 정도 이제 언덕에 올라섰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사실 아닙니까? 그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성도들을 뒤로하고 다시 검은 가방을 메고 내려오면서 ‘아하, 참 그렇구나. 나는 대가가 아니라 학생일 뿐이지. 아까도 공부하다가 가방을 메고 들어왔고 이제 설교가 끝났으니 나는 이 가방을 메고 학생으로서 공부하러 돌아간다.’ 하는 마음입니다. 아마 매우 특별한 심경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은퇴하는 날까지 제가 이 가방을 메고 다닐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 목사 안수 받는 강도사 두 사람이 한 삼십 년 쯤 되도 결코 찢어지지 않을 가죽으로 된 것을 하나 사다 주었어요. 좀 크기는 한데, 그런데 큰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더 많이 책을 넣고 다니라는. 매일매일 나를 겸손하게 하는 요소가 되요. ‘아, 그렇구나. 나는 대가가 아니고 배우는 학생일 뿐이다.’ 책이 새로 들어올 때마다 깊이 낙심해요. 왜냐하면 새 책이 들어와서 신이 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중요한 지식이 있는데, 내가 아는 것은 얼마나 부분적이고 한계가 있는가? 그래서 이제는 내 지식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에 기쁨을 느끼기 보다는 오히려 나의 지식의 어둠을 밝혀주는 빛들이 나에게 기쁨을 주어요. 가르치는 일에 대해서 세월이 흐르고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나만의 고백이 아닐 것입니다.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터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우리 Puritan Library에는 신자로서 참된 삶을 살기 위해 꼭 읽어야할 엄선된 책들이 가득해요. 오늘 끝나고 가서 거기를 한 번 걸어보면서 여러분들이 처음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 읽은 책들만 숫자를 헤아려 봐요. 열권도 안 읽은 사람들이 수두룩해요. 그러면 성경만 읽느라고 여러분들이 책을 못 읽었나? 그럼 성경 66권을 펼쳐놓고 한번 얼마나 읽었는지 생각을 해보세요. 일간스포츠 읽은 시간이 많은지, 태어나서 성경 읽은 시간이 많은지 생각해 보세요. 그것이 신자로서 가장 중요한 의무에요. 그렇게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갈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충분하지가 않아서 우리는 매일 오직 성령님이 아니시면 물리칠 수 없는 우리의 영혼의 어둠을 물러가게 해 달라고, 많은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없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탄식하며 기도하는 것이죠. 거기서 우리는 우리가 아무리 많이 배우고 익힐 지라도 우리의 영혼의 어둠을 물러가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기 때문에 진리를 배우면 배울수록 교만해지기는커녕 우리 안에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영혼의 어둠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란하게 빛나는 진리에 대한 불타는 탐구의 정신과, 자기 안에서 영혼의 어둠을 도입하게 해주는 부패한 본성· 죄에 대한 사랑과 싸우는 분투하는 기도의 눈물은 우리를 이 두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빛으로 나아가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Ⅱ. 왜 기도하여야 하는가?
그러면 오늘 이 시인이 지난주에 이어서 그렇게 하나님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간절히 탄식하며 기도하고 있는데, 그는 왜 기도하는 것일까요?
A. 땅에서 객(客)이 됨
오늘 시인은 주님 앞에 말합니다.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나에게서 숨기지 마옵소서.” 라고 말합니다. 제일 먼저 그는 자신이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진리의 빛을 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땅에서 객이 되었다고 고백을 하는데, 히브리 성경에 보면 땅이 그냥 땅이 아니라 ‘바 아레쯔’ 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정관사가 붙어있는 ‘그 땅’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정관사로 한정지어서 그 땅이라고 말한 그 땅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바로 모든 땅을 가리킨다고 보다는 자기가 나그네요, 객이라고 취급받는 이 죄 많은 세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객이 되었다고 할 때 이 객(客)은 히브리말로 ‘게르’ 인데, ‘구르’ 라고 하는 동사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구르’는 나그네로서 유숙을 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나그네를 ‘게르’라고 부르는데, 공교롭게도 몽골어의 ‘게르’가 바로 유목할 때에 치는 텐트를 가리켜요. 그래서 결국은 이 언어가 고대로 올라갈수록 하나였다고 하는 사실이 입증이 됩니다. 아무튼 그가 진리의 빛을 간절히 구하며, 이 두 어둠으로부터 벗어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유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라고 하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주님을 만나고 특별히 선택을 받았던 언약의 조상들은 자기를 이 세상에서 나그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은 말하기를 “그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라 일컬음을 받을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예전에는 갖지 않았던 또 다른 본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라 일컬음을 받기를 마다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일평생 자기를 나그네라고 자처하였고, 하나님의 사람 야곱은 바로 앞에 섰을 때에 자신의 일백삼십 년 살아온 길이 나그네 길이었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부귀와 모든 낙을 한 몸에 누리고 제왕의 지위를 차지하였던 시인 다윗도 자기를 이 세상에서 객(客)이었다고 오늘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모를 때에는 이 세상이 우리의 고향이었고, 우리는 거기서 태어나서 거기서 살다가 거기서 죽고, 그 품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도 몰랐고, 진리도 몰랐고, 우리 자신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진리의 화육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의 찬란한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 인간이 얼마나 죄인이고, 하나님이 어떻게 거룩하신 분인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악 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 어떻게 자신을 버려 참된 중보자가 되셨는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이 세상이 우리의 참된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의 몸은 흙으로 이 세상에서 지어졌고 부모의 피와 살을 받아왔지만, 우리의 영혼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거기가 우리의 본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서부터 우리는 종종 은혜가 떨어져서 세상을 사랑하는 적은 있지만, 그러난 이 세상에서 완전한 행복과 안식은 결코 누릴 수 없는 거듭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목마르고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 잠시 마시는 한 모금의 설탕물은 일시적으로는 그 목을 시원케 할지 모르지만 마시고 난 후에는 예전보다 더 큰 갈증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잠시 세상을 사랑해도 그 세상 속에서 영원한 쉼을 누릴 수는 없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나그네의 인생길에서 유일한 희망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나그네는 주막에서 영원히 살 사람처럼 거기에 거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해 지는 시간이면 주막에서 망향가를 부르며 자신이 돌아갈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칩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 가장 큰 문제점은 이 세상 밖에는 없는 사람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최고로 생각하고 이 세상에서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 오늘날 신앙의 문제인 것입니다. 세상을 그런 식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올바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 나라가 아닌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사랑에 사무칠 때 어떤 면에서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 미련이 없을 때에 이 세상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데, 우리의 모든 마음과 사랑이 세상의 번영과 이 세상 속에서의 안락과 이 세상 속의 기쁨에 묶여있기 때문에 우리는 공정하고 올바르게 이 세상을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오늘날 신앙과 자아 사이에서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갈 길을 정하지 못하는 박쥐와 같은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정과 행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진리로 돌아가기 까지는 어디에서도 안식을 찾을 수 없게끔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시인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같이 되었기 때문에 주님이 자신을 선대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그네 길과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무엇을 통해서 보여주십니까? 우리의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비록 이 세상의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외 없이 성경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그것을 믿는 신앙을 통해서 획득되는 지식인 것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 사랑하고 의지하고 그 말씀을 붙들며 살아가는, 그 진리를 사랑하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 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나그네 되었다는 사실을 알 때마다 우리는 진리의 품으로 도망치고 그 속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안식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이 우리와 완전히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연인처럼 생각하며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때 성도는 세상에 살고 있으나 영원을 잇대어 사는 삶을 살 수 있고, 이 진리의 밝은 빛이 어둠을 물리치는 동안에만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균형 있게 사랑해서 주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이바지하며 살게 되는 것이에요.
오늘도 이 세상의 인간사에서 상처받고 쓰라린 고통을 느끼는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상처보다 더 큰 위로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는 있습니다.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생각하네.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새 생명 주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 만 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버린 것 같고, 때로는 나의 양심까지 나를 송사하여 고발할 지라도 그 많은 고통 속에서 주님의 말씀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오는 천의 위로를 거절하고 오히려 자신의 영혼을 비추는 한 줄기 빛을 사모하여 마음을 다스리며 성경을 펼치고 진리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그 큰 고난 속에서도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며 버리지 않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통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의 나그네 된 길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다고 그렇게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나그네와 같은 길에서 주님의 율례는 그의 노래가 되었고, 슬픔과 고난, 시련과 아픔은 모두 자기를 하나님의 말씀의 항구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풍랑이 되었고 파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겪는 모든 시련, 이 세상에서 마음 둘 곳이 없는 외로움과 버림받은 그런 방기감(放棄感), 그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때리시고 어루만지시는 위로의 손길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의 삶의 환경, 마음의 정황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그 말씀 안에서 지혜와 용기와 위로를 얻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어둠 속에 숨는 계명들
시인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야 하는 두 번째 이유를 어둠 속에 숨는 계명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의 계명을 나에게 숨기지 마옵소서.” 히브리 성경에는 이 계명이 복수로 나옵니다. “당신의 계명을 나로부터 숨기지 말아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어떤 생각이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가는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다시 떠오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에 그 기억을 다시 되새기는 이도 나이고, 그 기억을 희미하게 잊어버리는 것도 나인데, 가만히 생각하고 있으면 내가 잊어버렸다가 기억했다가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라고 하는 이 수면위에 어떤 사실들이 떠올랐다가는 가라앉고 떠올랐다가는 가라앉아서 잊어버리는 주체인 나에게 기억이 달린 것이 아니라 기억의 대상인 어떤 사실들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심리적인 현상이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시인은 주님께서 당신의 계명을 자기에게서 보여주었다가 숨겼다 하시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이 숨기시고 감추신다기 보다는 자신이 어둠의 일을 사랑하고 정신의 게으름으로 열렬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망각의 현상입니다. 이렇게 이전에 깨달았던 진리들도 망각 속에서 잊혀지고, 예전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하나님의 말씀도 어느 순간에 시간이 흐르고 나면 지성의 창고에 기억은 되지만 더 이상 내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시체처럼 차가운 지식으로 누워있게 되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매일 새로운 사실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깨달아진 지식들이 마음속에 시체처럼 차갑게 누워있지 말고 끊임없이 살아서 내 마음속에 작용하도록 다시 회상시키고 불러일으키는 일들이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다시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읽고 있습니다. 스물다섯 번을 읽었고 스물여섯 번이 거의 끝나갑니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도덕적 통치”를 열네 번째 읽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목사님 머리에서 나왔는데 그렇게 읽는 유익이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얘기했습니다. “유익이 있습니다. 읽으면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은 없지만, 내 마음에 시체처럼 드러누웠던 지식이 내 마음 속에서 다시 깨어나기 때문에 나는 그 말씀에 의해서 나를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하고 구원받은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날마다 되새기게 됩니다. 이것은 새로운 지식을 내가 섭취하는 과정이 아니라 내 지식이 지성의 창고에서 시체처럼 죽어있지 않도록 내 마음에 계속 활동하게 하는 작업입니다. 당신도 그렇게 하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생활은 우리의 지성의 창고 속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죽은 지식이 얼마나 많은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지금 활동하고 있는 지식이 어떤 지식이고 얼마나 활발하게 여러 개가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그것에 의해서 우리의 성화의 열매들이 맺히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머릿속에 온갖 교리를 꿰뚫고 헤아릴 수 없는 수십만의 병사처럼 지식의 시체들이 누워있는 그 사람보다는 오늘 방금 설교를 통해 두세 가지를 받았는데 이것이 마음속에 울고 웃고 분노하고 열정이 있게 만들어주며 움직이는 지식이 있는 그 사람이 훨씬 열매를 많이 맺으면서 산단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배우고 그것 때문에 교만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을 세상 지식의 차원하고 무슨 차이가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교만해질 수가 있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이렇게 우리의 어둠속에 수시로 숨는 것 같이 느껴지는 이 계명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C. 빛을 주시는 주권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빛을 주시는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통해 이 빛으로 나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최고의 보상은 이 세상에서의 번영이 아니에요. 만약에 그런 획일적인 공식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주님께 저주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가장 탁월한 보상은 남이 알지 못하는 진리의 세계를 알게 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그에게 보여 주셔서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그 뜻이 무엇임을 깨닫게 해주시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무엇임을 깨달아 알아서 인간의 본분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은 이미 진리를 많이 깨달은 사람의 눈도 어둡게 하실 수 있고, 일생을 어둠속에서 살아왔던 사람인데 하나님 앞에 찬란한 계시의 빛을 받아 깨닫게 만들어주실 수도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오랜 생활 믿음 생활 하면서 기도해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온 맘을 다해 간절히 간구할 때 우리들이 얼마나 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오늘 시인처럼 자신 안에 있는,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어둠을 성령께서 물리쳐 주시도록, 자기 밖에 있는 지성의 눈 먼 상태를 하나님께서 밝히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진리를 아는 지식을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한 적이 있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빛을 구하는 기도를 아버지께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영혼과 지성과 삶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실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극한 어둠과 고난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찬란한 계시와 섭리를 보게 될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 큰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경 요한계시록 5장을 펼쳐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제 5장, 신약성경 404쪽입니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그랬습니다. 이 글을 쓸 때에 요한의 나이는 95세 쯤 된 나이였습니다. 이제 백발의 노 사도가 밧모라는 섬에 귀양살이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사명을 받았는데,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의 계시를 보여 줄테니 그것을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계시의 책이 내려왔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기를 이 세상 누구도 이 책을 펴거나 인을 떼기에 마땅한 자가 없다는 뜻으로 천사가 외쳤을 때, 이 늙은 사도 요한은 오늘 크게 울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이 ‘울다’라는 말이 흐느끼거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방성대곡한다는 표현으로 나와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료 사도들이 여기저기서 고난을 받고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이렇게 울지는 않았는데, 밧모라는 섬에 절해고도의 외로운 섬에 사랑하는 성도들과 가족들과 단절되어 내침을 당했을 때도 이렇게 울지 않았는데, 이 외로운 섬에서 계시의 말씀을 누군가가 펼쳐줄 사람이 없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백발의 노 사도는 그 바닷가에서 통곡을 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묵상해보십시오. 밀려오는 밧모 섬의 그 파도소리와 백세 가까이 되는 이 노인의 통곡하는 울음소리가 함께 어우러지는 그 소리의 향연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그의 가슴에 찢어지는 고통을 반영하는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가 진리가 없어서 우리의 영혼이 어둠에 붙잡혀있고, 우리의 지성이 눈 먼 어둠 때문에 우리들이 이렇게 방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도처럼 주님의 말씀 하나를 깨닫게 해달라고 목 놓아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한없는 죄로 여기고, 나의 무지를 한탄하고, 무지하면서도 여전히 부패성을 가지고 죄를 사랑하고 또 다른 어둠을 도입하고 있는 자신을 원망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이제는 정말 마지막 시대입니다. 이제는 자기의 성공과 행복 이외에는 아무것도 신경을 쓰지 않는 시대입니다. 삼십 년 전만 해도 부흥회를 한다고 하면 삼백 명 모이는 교회는 오백 명, 이백 명 모이는 교회는 사백 명 , 온 인근의 교회들까지 함께 모여서 앉을 의자가 없어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심지어는 강대상까지 올라오고, 심지어는 신발들을 치우고 그 댓돌위에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IV. 결론 : 빛으로 나아오라
이미 돌아가셨습니다마는 설교에 꽤 영향을 끼치던 목사님이 계셨어요. 목사님이 하루는 교인들에게 “그대들 집에 내 설교 테이프 있지?” 모든 교인들이 “네” 그랬어요. “다음 무슨 요일 날 교회 올 때에 모두 가져 오너라.” 그래서 이제 많이 가지고 가면 칭찬할 줄 알고 박스 박스에 가방 가방에 들고 왔는데 이만 개더래요. 그거를 교회 마당에 모두 쌓아놓았어요. 그리고 목사님이 친히 석유 한 통을 모두 붓고 불을 질러 버렸어요. “이 놈의 설교 테이프가 너희들 신앙을 망치고 있다.” 확 불 질러 버렸어요. 실화예요. 이런 영혼의 어둠을 물러나게 하기 위해서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인터넷은 얼마나 고마운 것입니까? 오늘 이 시간에도 외국에서, 아주 오지에서 도저히 이 예배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이 접속해서 함께 예배드리고 있어요. 한번 설교하면 우리 모이는 교인보다 열 배의 사람들이 접속을 해서 말씀의 유익을 얻어요. 그러니 그렇게 하면서 인터넷에서 예배를 드리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에게 이 인터넷은 얼마나 고마운 것입니까? 그러나 여러분들에게는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 막히는 길에 왜 고집을 부리고 교회를 가야 해요? 하루만 기다리면 인터넷에 올라오고 편안하게 파자마 바람으로 소파에 기대거나 누워서 들을 수가 있는데, 왜 그런 희생을 치러야 되느냐? 그래서 요즘 내 심정이 인터넷 컴퓨터와 테이프를 모두 쌓아놓고 불을 확 질러버리고 싶은 심정이에요. 그래서 한번 설교하면 영원히, 딱 한 개의 테이프에만 남고 허공중에 흩어져 버리도록, 그리고 그것은 나 혼자 가지고 있기. 절반도 안 나옵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저보고 부흥회를 해달라고 하면서 목을 매요. 주일날 와 달라고. 왜? 평일 날 하면 들어야 될 인간은 다 도망간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주일 날 해달라는 거예요. 우리가 이런 시대에 살고 있어요.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이 가까워 올수록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미 주님께서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모이지 않을 것을 알고 내다보며 하신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진리로부터 멀어지고 공동체로부터 멀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들은 마음에 깊이 뜻을 세우고 이렇게 하나님의 진리의 빛으로 기도를 통해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승리하는 기도생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