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2009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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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 (2009/1/21 수요예배)
1. 지혜를 구함(왕상3:5-13) 2009.1.21 수요예배 1
2. 하나님이 중심된 기도(잠30:7-9) 2009.2.15 주일오후 11
3. 믿음을 구하라(막9:23-24) 2009.2.22 주일오후 19
4. 순종하는 기도(삿6:36-40) 2009.3.15 주일오후 25
5. 하나님의 뜻대로(마26:39) 2009.3.22 주일오후 30
6. 꺾이지 않는 열망(행4:31) 2009.6.14 주일오후 34
7. 상한 심령의 기도(시51:17) 2009.6.21 주일오후 38
8.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기도(눅3:21-22) 2009.6.28 주일오후 42
9.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마6:33) 2009.7.12 주일오후 46
10. 마음이 하나되는 기도(행1:14) 2009.7.19 주일오후 53
11. 말씀으로 깨달은 기도(단9:2-3) 2009.8.16 주일오후 62
12. 영혼, 삶, 기도(요15:7) 2009.8.23 주일오후 66
13. 기도자의 삶을 기뻐하실 때(요일3:22) 2009.9.6 주일오후 71
14. 가장 아름다운 기도(시119:73) 2009.10.4 주일오후 78
15. 기도가 방해 받을 때(눅18:38-39) 2009.11.1 주일오후 83
16.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기도(행10:2) 2009.11.8 주일오후 88
1.지혜를 구함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 3:5-13).
I. 본문해설
솔로몬이 왕이 된 직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여기에는 우리들이 기억하고 있는 솔로몬이 일 천번의 번제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기뻐하실 때 그것은 크게 세 가지 요소로 나뉩니다. 우선 첫째는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쁘신 사람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기도하는 자세가 하나님께 합당해야 하구요, 세 번째는 기도하는 그 내용이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할 때 이렇게 세 가지가 일체가 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기도에 기뻐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II.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오늘 이 솔로몬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를 드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의 기도를 기뻐하실 만한 세 가지 이유가 여기에 나오는데
A. 헌신으로 준비함(4절)
우선 첫째는 헌신으로 준비된 기도였습니다. 그가 아직 성전이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산당에서 하나님 앞에 일천 번의 번제를 드렸습니다. 예전에는 거기에서 우상을 섬기던 그런 곳이었을텐데 거기서 우리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기를 일천 번의 번제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 제사 하였던 것이죠.
어느 교회를 가보니까 헌금 봉투에 일천 번제 그러고 봉투가 나오는데 보는 순간 가슴이 답답했어요. 천 번을 헌금해야 하는데 그러면 그냥 한 번에 해버리지 그걸 무슨 천 번씩 나누어서 그건 사실 구약에 나오는 이 솔로몬이 들으면 좀 갑갑해야 할 이야기죠. 구약에 나오는 이 솔로몬의 일천 번의 제사의 의미는 그런 식으로 우리가 본받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드리는 헌금인데 일만 제를 드리면 누가 뭐라 그러겠습니까? 굳이 그거를 회수를 세면서 봉투에 번호까지 쓰면서 그렇게 천번을 드리는 것이 이 솔로몬의 제사의 오늘날의 적용이라고 볼 수 없는 거죠.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2 (2009/2/15 주일오후예배)
원래 이 번제는 그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방식에 의한 분류예요. 그러니까 번제는 태우는 거고, 전제는 뿌리는 거고, 요제는 흔드는 거고, 소제는 뭐 곡식을 드리는 거고, 이런 식으로 되는건데데 또 목적에 따라서는 달라요. 죄를 속하기 위해서 성물에 대한 죄를 속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헌신을 다짐하기 위해서 등등의 목적에 따른 분류와 방식에 따른 분류가 있는 거예요. 이 번제는 1차적으로 짐승을 다 태워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한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였어요.
그러니까 솔로몬은 왕이 된 후에 하나님 앞에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먼저 이 솔로몬은 왕이 되어서 자기가 무엇을 누릴까를 생각하기에 앞서서 제일 먼저 자신을 하나님 앞에 마음의 중심까지 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러한 신앙적인 결심을 가지고 이 기도를 준비하였는데 그 준비의 방식이 번제였으니 이는 바로 자기를 하나님 앞에 다 태워서 드리는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헌신으로 준비한 것이 일천번제로 나타났으니 아마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이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 당시 제사는 짐승을 잡아서 죽여서 드리는 제사였으니 아마 하루 종일 드린다고 하더라도 그 제사의 수요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고 이것이 천번을 드려지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날 동안 왕으로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이 일에 자기를 온전히 바쳐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많이 시험해 본 일입니다마는 교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죠. 그래서 가끔은 눈보라가 치고 비가 주적주적 오는 날 새벽에 일어나면서 따뜻한 아랫목에서 고민을 하죠. 자 나갈 것이냐, 아니면 그냥 잘 것이냐, 새벽기도를 가야되는데 몸도 안 아픈데 자야되겠다는 생각은 안하는데 타협점을 찾죠. 따뜻한 데서 무릎을 꿇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기도를 하자 이렇게 타협을 하죠. 어디든지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신데 놀랍게 그날 기도는 기도하다가 잠이 들거나 아니면 분명히 무릎을 꿇고 기도했는데 눈을 뜨고 보니까 두 다리 쭉 뻗고 엎드려진 채로 발견되기가 십상이죠. 그러나 새벽에 날이 추울 때 비가 추적추적 내릴 때 어쨋든 음산하고 하여튼 왜 그런지 목사님도 안 나올것만 같은 때 그런 때 걸어 나와서 조용히 교회당에서 자리를 잡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언제나 하나님이 ‘너왔니?’ 하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은 친밀함이 있단 말이예요. 그래서 하나님 어디에나 계시지만 그러나 왜 그런 차이가 나겠어요? 위급하면 하나님이 이불속에서 무릎을 꿇은게 아니라 변솟 간에서 일보면서 하는 기도도 하나님이 안들어 주시겠어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헌신으로 준비하는 그 기도에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죠.
옛날에 결혼하기 전에 총각때 주님을 믿고 한창 열심이 뻗쳤을 때 일이었어요. 그 아무데서나 기도를 하면 되는데 삼각산 꼭대기까지 올라갔어요. 꽤 한참 다녔어요. 1시간 40분을 쉬지 않고 걸어야지만 그 꼭대기까지 올라갑니다. 얼마나 높은지 거기에 올라가면 낮에 인천 앞바다부터 시작해서 태릉 불암산까지 한 눈에 보여요. 날이 맑으면, 겨울이야 엄청나게 추운데 그런데 아주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제목이 있었어요. 21살때 22살때 그때 일이었는데 회심하고 얼마 안되서 교회가 조그마니까 같이 갈 사람도 없고 혼자 그냥 올라갔어요. 올라가는데 쬐그만 손전등을 하나 가지고 올라갔는데 딱 그믐이었어요. 1/3을 올라갔는데 길이 이렇게 보이는 길이 아니라 이렇게 아주 샛길이예요. 후레쉬가 딱 떨어지는거예요. 캄캄한데 1m 앞이 안보이는 거죠. 거기서 서서 내려갈 것이냐 올라갈 것이냐 망설였어요.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니 올라갈 때는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그러면서 올라와 놓고 뭐, 후레쉬 하나 떨어졌다고 다시 내려가냐, 다시 올라가자. 올라가는데 길을 찾을 수가 있어야죠. 산속에서 길을 잃었어요. 한참 걸어가다 보면 절벽이 나오고 한참 걸어가다 보면 휙하고 하얀 도포자락이 보이는데 얼음벽이예요. 그래서 3시간 40분 만에 그 꼭대기까지 결국은 올라갔어요. 완전히 가서 분식집에서 라면하나 먹고 거길 올라갔는데 완전히 탈진이 됐잖아요. 신기한 게 그 회심한지 1년도 안됐는데 올라가자마자 무릎을 탁 꿇으니까 기도가 확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그 바위 위에서. 그래서 그랬드니 원장이라는 양반이 그러는 거예요.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기 혼자, 지금은 없어졌어요. 정부에서 도 철거해서 종을 땅에 뭍고 없어졌는데, 우리 기도원은 올라오는 동안에 2/3 은혜를 받고 무릎을 꿇고 1/3 받고 그 다음에 내려가면 된다는 거예요. 왜? 올라오는 길이 하도 험하고 힘들고 밤이면 무서워서 올라오는 성도가 주님만 바라보고 올라온다는 거예요. 사실 맞아요. 지금은 올라가라 하면 못 올라갈꺼예요. 하나님이 이 솔로몬이 헌신으로 하나님 앞에 준비했더니 하나님 앞에 주님이 기뻐해 주시는 기도가 되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기도에는 나름대로 희생이 필요하고 결단이 필요해요. 누구든지 기도하는 것 보다는 자는 게 좋고, 말씀을 탐구하는 것보다는 노는 게 좋고, 성화를 위해서 자기를 끊임없이 죽이기보다는 자기 기를 살리고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헌신으로 준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였던 것입니다.
B. 은혜를 감사함(6절)
두 번째는 이 솔로몬의 기도는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넘친 기도였습니다.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이 솔로몬에게 아주 놀라운 영광을 후에 더해주시죠. 그래서 아마 아버지 다윗도 누리지 못했을 그런 놀라운 영광을 누리는 거죠. 말하자면 이 사람은 자수성가한 사람이 아니라 재벌 2세 같은 사람이었어요. 아버지는 신앙심이 너무 좋아서 모아 놓기만 했지 쓰질 못했어요. 아들이 그 영화를 다 누렸잖아요. 그랬는데 처음 시작은 그렇게 자신만만하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뭐라 그랬느냐면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아버지 때부터 일어난 일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스스로 고백하기를 뭐라그러냐면 두 가지, 세 가지의 고백이었습니다. 종은 작은 아이입니다 두 번째는 출입할 줄 모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 큰 백성을 다스릴 능력이 내게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어디에서 나오냐하면 자기가 스스로 낮아지는 겸비한 마음에서부터 이런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불평하는 것은 교만과 밀접하게 통해요. 여러분, 여러분 생애에서 가장 겸손해 질 때가 언제였던거 같아요? 회심할 때 그때,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3 (2009/2/22 주일오후예배)
“이 벌레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고백했어요. 그리스도 예수가 아주 탁월하게 보이고 자신은 아주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것이 이게 회심의 경험이에요. 그럼 그때 누가 예수 믿으려면 겸손해지라고 가르쳐줬어요? 전혀 아니예요. 마지막에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한 없이 한없이 낮아지고 겸비해지는 거예요. 그렇게 낮아지는 비결이 뭐냐하면 도덕적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경험이예요. 하나님이 정말 온땅과 만물위에 가장 뛰어나시고 그리고 탁월하신 분이라는 사실, 그것이 성육신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그 속에서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거예요. 두 가지 방식으로 깨닫게 되는 거예요. 첫째가 뭐냐하면 하나님의 존재의 위대하심 앞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뜬금없이 어저께인가 백제 왜 미륵사지 석탑에서 1370년 묵은 사리함이 나오고 500가지의 유물과 기록이 발견되면서 삼국유사에 나왔던 서동요가 그게 결국은 사실이 아니고 그게 선화 공주의 러브스토리가 그게 이제 허구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면서 신문에 크게 났잖아요. 사진을 유심히 보면서 1370년, 1370년 인간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쇠덩어리 하나도 1370년을 가는데,
몇 해 전에 동해에서는 큰 거북하나를 횟집에 있는 사람이 잡았어요, 바다에서. 근데 글쎄 어느 학자가 이야기 한 게 아니니까 난 신빙은 안 가는데 그 사람들 이야기가 그 거북은 800살쯤 되었을거라 그랬대요. 실제로 거북이 800년을 사나? 살아요? 어떤 사람은 산다고도 그러던데 난 생물학을 그쪽 방면에서 정확하게 안 배워서 잘 모르겠는데 800년까지는 그만두구라도 몇백년은 사는 모양이야. 그러니까 몇백년이라고 그러잖아요. 이렇게 생각하면서 야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가? 이게 시간 안에 있다 사라지는 것이 하찮다라고 하는 것이 존재가 하찮다는 거하고 아주 유사한 거예요. 근데 하나님 앞에서 보면 하루살이는 하루를 못살고 몇 시간을 살다가 간대요, 몇시간. 그러니까 하루살이는 내일이라는 것, 그런 걸 생각하면 참 썰렁한거죠. 내일 만나자. 매미는 8년 동안 땅에 뭍혀있다가 올라와서 한달을 살고 죽는다고 하니 그러니까 내년 봄에 만나자 무슨 소린지 모르죠. 인간이 그렇게 존재에 있어서 하찮다는 것을 이 세상의 유구한 물질이나 다른 생명을 보면서도 느끼는데 불변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인간은 자기 자신이 존재에 있어서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죠. 그게 바로 자기가 겸비해지는 첫 번째 거룩의 요인이고, 거룩함의 요인이고
또 하나는 뭐냐하면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전자가 존재론적인 위대함이라고 말한다면 후자는 도덕적인 완전함이에요. 그래서 나도 사랑이 있고 나도 뭐, 하나님 닮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완전하심은 나와 비교할 수 없다라는 인식을 갖게 될 때 하나님 앞에 자기가 정말 더러운 죄인이라는 자각을 갖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다 실패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그래서 많은 고기가 잡히게 되었을 때 한번도 예수님이 넌 더러운 놈이다 말씀 안하셨거든요. 갑자기 두려워하면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느끼니까 자기가 정말 더러운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된 것이예요. 그렇게 해서 된거거든요. 그러면서 자기가 낮아진 거예요.
오늘 이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그걸 느낀거 아니예요. 정말 자기가 하찮은 인간이구나, 정말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구나 하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그런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게 된 거죠. ‘종은 작은 아이라’ 잘 나오는 표현이거든요. 예레미야도 똑같이 내가 작은 아이라, 어린 아이라 이랬거든요. 요건 뭐냐하면 애기 같아서 그래서 판단력도 없고, 힘이 없다 그 뜻이에요. 자기를 그렇게 고백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가 필요하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전적인 도움이 필요한 거죠.
‘출입할 줄 모르고’ 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걸 문자 그대로 이야기 하면 집에서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얘기하는 거 아니예요. 그렇죠? 그런데 이게 그런 뜻이 아니라 좀 깊은 뜻이 있어요. 이게 뭐냐하면 저의 판단에는 이 같은 기록들을 구약에서 여러 구절 살펴볼 때, 이게 단순히 집에서 들락달락 하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뵈옵는 것은 입(入), 그리고 하나님 면전을 떠나서 가는 것은 출(出)이야, 입(入) 할 때는 하나님의 예배하는 것에 대한 것이 주가 되고, 떠나갈 때는 사명을 향해가는 것이 주가 되는 거예요. 그런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하나님을 어떻게 경배하는 것과 어떻게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과 그리고 나가서 하나님의 뜻대로 어떻게 하나님을 수종드는 것, 이거를 잘 모르는 거, 그걸 가르쳐서 ‘출입할 줄 모르오니’ 이런 표현을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다윗이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잖아요.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4 (2009/3/15 주일오후예배)
왕이 되었으면 이제 ‘아이고, 내 밑에 졸병이 참 많네’ 이런 생각을 할텐데, 그런데 그런 생각은 대게 졸병들이 하지 별 단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군대 갔다 와서 야 그래 인제 너 겨우 이병이냐 그렇게 물어볼 때 그래두요 제 밑에 얼마나 많은데요, 이런 거는 대게 짝대기 하나, 두개, 세개, 단 애들이 그러지 별자리만 달아도 그렇게 얘기 안합니다. 별이 하나가 뭡니까 그래도 서너개 다시지 제 밑에도 쫄병이 많습니다. 장군이 어디서 챙피해서 그런 얘기 하겠어요? 이 솔로몬은 백성들의 수요가 많았는데 잠언에 보면 임금의 영광은 백성의 수가 많은 것이라 그랬어요. 그러면 그거를 영광스러워하고 아~ 가슴이 설레야 할 텐데 근심하기 시작한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어리석어서 이 백성을 다스릴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거예요. 이제껏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와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이 일을 감당하기에 하찮은 인간인가 하는 것을 고백했을 때 어떤 마음이 들까요. 은혜에 대한 감사와 자기의 하찮은 고백이 충만할 때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그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던 것입니다.
C. 사명을 위해 기도함(7-9절)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5 (2009/3/22 주일오후예배)
세 번째는 하나님이 이 사람의 기도를 기뻐하신 이유는 이 사람이 구한 기도의 제목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이죠. 그래서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였거든요. 이 지혜는 무엇입니까? 위로는 하나님을 알아보고, 옆으로는, 아래로는 자기가 통치할 백성을 알고, 또 내면적으로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아서 그래서 이성의 참된 판단으로 하나님의 믿는 신앙에 입각해서 백성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이예요. 이게 지혜예요. 이 지식이 없어도 지식이 좀 부족해도 지혜가 많을 수 있구요, 지식은 많아도 지혜가 현저히 부족할 수 있습니다.
자,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러 와서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마찬가지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지 않은 것, 이것은 놀라운 지혜예요.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지혜가 많은 것이 아니예요. 이것은 판단력이에요. 그럼 보십시요. 이렇게 교회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지 않는 것, 이게 덕의 기본이에요. 방지일 목사님이라고 아시죠. 박윤성 목사님 친구구요, 지금 104살 이신가 그래요. 아직 살아 계신데. 어저께 신문에 인터뷰를 하셨어요. ‘한국교회에 아쉬운 점이 뭡니까?’ 그랬더니 그 중에 하나 이야기 하는게 바로 이거였어요. 당신이 젊었을 때 평양에 있을 때에는 그렇게 교회가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뜨거웠는데도 그때도 소리 내어서 열심히 교회가 기도했다는 거예요. 근데 결코 나의 소리내는 기도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소리를 내어 기도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무슨 얘기를 하냐하면 그때는 그렇게 교인들이 교회 생활을 오래하지 않아도 덕을 세울 줄 알았는데 지금은 너무나 저밖에 모르는 교인들이 교회에서 양산되고 있어서 교회의 덕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교회에서 아이들도 어른도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나 때문에 불편을 끼치지 않는 것이 이것이 덕의 근원이 되야 되거든요.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6 (2009/6/14 주일오후예배)
새벽에 나오면서도 마음이 상하는 게 새벽에 어떤 때는 여기에 식당에 식품 가지러 들어오고, 열린 공간에도 들어오고, 교회에 무슨 특별한 일 때문에도 들어오고 차가 꽤 많이 들어와요. 근데 어떤 때는 못 나가고 못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적어도 새벽기도 하러 올 때에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믿음과 기도로 살려는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 일거 아니 거예요. 차 4대가 정문을 딱 막고 있는 거예요. 들어오는 사람들이 이러고 차 사이를 빠져서 걸어 들어와야 되요. 이것은 우리들이 잘못하고 있는 거라는 거죠. 그러면 조금 자신이 불편해도 성도들이 편하고 다른 사람들이 유익할 것이다, 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되겠다 그러면 좀 불편한 곳에 차를 대고라도 한 20m걸어 올 수 있는 그런 아량을 가져야 되잖아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오래도록 기도하면 누가 방해를 하겠어요? 그런거 거든요.
하나님 앞에 이 지혜는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지혜, 그리고 사람을 지배하는 지혜, 이게 아니라 오늘 이 사람이 구한 기도는 공의를 판단하는 지혜였어요. 그래서 재판을 위한 지혜를 하나님 앞에 구하였던 것이고, 그래서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할 때 너무 자기의 유익을 너무 앞세워요. 근데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기도의 원리와는 정 반대예요. 물론 무엇이든지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것이 오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주님 앞에 진심으로 구할 때는 그 구하는 그 마음은 하나님 앞에 감합할 만한 마음이예요. 그러나 문제는 그 사람이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죠. 거의 기도하지 않는다, 중심이 없는 사람이고 얼음판에 서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는 중심이 자기에게 서 있는 사람은 여전히 자기가 모든 삶의 입각점이 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자신이 입각점이 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은 자아가 중심이 되고 있다는 거거든요.
그러나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필요한 것을 먼저 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솔로몬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왕을 시켜주셨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부도 구하지 않고, 그리고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하는 장수도 구하지 않고, 심지어는 원수들을 멸망시켜 달라고도 기도하지 않고, 지혜를 구하였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마음에는 큰 기쁨이었던 거죠. 왜냐하면 그 지혜가 어떤 것이었어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거든요. 그걸 하나님 앞에 구하는 거죠.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7 (2009/6/21 주일오후예배)
우리가 이번 사경회에서 그런 것 배웠잖아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하신 일을 뒤이어서 계승하며 가는데 여기에는 자원이 필요해요. 그게 뭐냐하면 이 지상의 자원과 하늘의 자원이 모두 필요해요. 둘 중의 하나만이 아니라 둘 다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늘의 자원은 하나님이 주실 때 무엇인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무엇이든지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고난과 어려움과 고통과 시련이 항상 뒤따르게 마련이에요. 만약에 그런 게 없으면 그게 주님의 일이 아니죠.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한다고 그러고 가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일하시면서 얼마나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셨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사명을 가지고 이 길을 갈 때 고난과 어려움 오는 것 자체가 그게 주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 어려움들을 무엇으로 이겨요? 이게 우리의 육신의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 이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에요. 끊임없이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것을 힘입어서 그래서 용서하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견디고, 인내하고, 분투하고, 굴복하지 아니하고, 용기를 내고, 담대하고 이렇게 오래참음으로 걸어갈 수 있는 것이란 말이죠.
그 뿐만이 아니죠. 이 지상의 자원도 필요하죠. 하나님이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랫동안 주님을 섬기고 난 사람의 고백이 우리가 섬긴것이 우리의 지상의 자원으로 섬긴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섬겼다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오늘 이 솔로몬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되었을 때 그의 관심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왕이라는 사명을 주셨는데 이 왕의 사명은 재판을 통해 나라의 질서를 잡고 이 백성을 어거하고 인도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하기 위한 선택된 백성인데 내가 과연 바로 그 지도자의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구한 게 지혜였어요. 그래서 하나님 나에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 지혜를 구하는 목적 자체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사명을 이루기 원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것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었던 것이죠.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8 (2009/6/28 주일오후예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죠.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가지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잖아요. 바로 그런 고백을 이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나에게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도구를 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신 것이죠.
어젠가 어제 아니고 한 2~3일 됐어요. 누가 요만한 쪽지를 하나 써서 사택에 보냈어요. 자기 전에 침대 맡에 있어서 이렇게 읽어봤는데 누가 쓰는 잘 모르겠는데 이렇게 썼는데 그런 얘기를 했어요. 자기가 은혜받고 회심한 이야기를 쭉 쓰면서 눈에 띄는 구절이 그거예요. 나는 뭐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목사님이 설교 속에서 절대로 응답되지 않을 리가 없는 기도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게 나의 죄를 보여주시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응답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확실히 응답되겠죠. 죄를 보여달라 는 거는 뭐때문에 죄를 사랑해서 보여 달라는게 아니라 그렇죠.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바로 그걸 위해서 하나님 앞에 보여 달라는 기도잖아요. 그렇잖아요. 놀랍게 들어주십니다. 영혼들을 가르칠 때, ‘하나님 이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들어주실까요? 안 들어주실까요? 확실하죠. ‘하나님 말씀을 탐구할 때 지혜를 주시옵소서’ 들어주시죠. 확실히 들어주시죠.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 그 일을 잘 섬겨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것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세요.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9 (2009/7/12 주일오후예배)
그러면 왜 영혼을 섬기는데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말씀을 탐구하는데도 여전히 지혜가 모자라고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충성된 마음이 부족합니까? 이거는 하나님이 안 주셔서가 아니라 자신이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구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구하면 반드시 주셔요. 반드시 주셔요. 그래서 우리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주님이 기뻐하신 기도는 내 이 깊은 속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그 기도에 힘을, 성령께서 힘을 실어주시는 것이 느껴지는 거예요. 확~ 확~ 하나님이 힘을 실어주시는 거죠. 느껴지는 거죠. 나는 남자라서 잘 모르지만 여성들 이야기 간증을 들으면 애기가 어떻게, 그렇게 커다란 애기가 나오나 그러는데 힘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를 막 바깥으로 밀어낸다는 거예요. 똑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를 하게 되면 성령께서 그 기도에 힘을 실어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 기도가 하늘을 향해 힘있게 솟아 오르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솔로몬이 바로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드린 거예요. 그래서 출발 자체를 나의 필요, 불편함, 고통 여기에서 출발하지 말고, 주님이 날 세워주신 자리가 어디인가 생각해 보는 거죠. 많은 물질로 섬겨야 될 자리구나, 하나님 나에게 그것을 주십시요, 나에게는 정말 건강이 필요한 자리구나, 하나님 내가 건강하게 교회에서 화장실 청소라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요. 그 사람이 그거를 하고 있다고 해요. 하나님 나에게 아주 복잡한 교회 일을 해 나가야 돼, 하나님 나에게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지혜를 주십시요, 간절히 기도할 때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명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그런 응답을 내려 주시는 것이예요. 기도해보세요.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III. 응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0 (2009/7/19 주일오후예배)
이렇게 솔로몬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유가 뭐냐하면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맞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맞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맞았다. 여러분 교회 안에 성도가 많이 있어도 우리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려고 노력하지만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의 교제는 우리에게 참 기쁨을 주잖아요. 그죠? 이 세상에서 성도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 가운데 하나가 뭐냐하면 성도들의 교제예요. 그래서 제가 몇 번에 걸쳐서 그런 정말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위협받는 것을 보면서 제가 여러분들을 조금 야단을 쳤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계신거예요. 성도들 속에서 누려지는 속에서 성도의 아름다운 교통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누리는 그 관계와 비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활짝 열린 사람들은 놀랍게 성도를 향해서도 마음을 열어요. 그래서 자기를 개방하고 교통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이 바로 그렇게 솔로몬과 교통하실 때에 솔로몬이 구하는 그것이 주님의 마음에 있는 것, 다시 말해서 솔로몬이 그것을 구하고 싶어서 간절해지길 원하셨던 바로 그것을 하나님 앞에 구하게 된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솔로몬의 기도를 아주 기뻐하시면서 두 가지를 주셨는데,
A. 간구한 바를 주심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1 (2009/8/16 주일오후예배)
첫째는 간구한 바를 주시는 거죠. 지혜를 간절히 구했는데 하나님께서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네게 줄 것이다’ 이것은 지혜를 구했는데 지혜와 함께 총명한 마음도 주셨어요. 구약에 나오는 이 총명한 마음은 어떤 마음이냐 하면 지혜와는 조금 구별됩니다. 지혜 자체가 능력의 기저(基底)라면 이 총명한 마음은 그 지혜를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순전하고 명정한 마음으로서 진리가 그 마음속에 작용하기에 적합한 그런 마음의 질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지혜뿐만 아니라 맑고 명정한 마음으로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순수한 마음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거죠.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순수한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 작용의 결과예요.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무엇인가를 아주 분명하게 깨닫고 은혜를 확 받으면 어떤 느낌이 먼저 들어요? 가슴에 불을 지른 거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아니라 머리에 얼음물을 확 끼얹은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요. 아니? 아이 참, 제가 한 20년, 20년은 안 됐구나, 한 18년 전에 어느 교회 청년부 수련회를 갔어요. 근데 하여튼 그때 은혜 받은 초창기였으니까 하여튼 집회 가면 그때 뭐 체력도 내가 생각해도 정말 지금 생각해 보면 부러울 정도로 좋았구요. 그래서 충청도나 전라도에서 밤에 11시에 마치고 밤새도록 차타고 올라와서 새벽 5시에는 양평에서 집회를 하고 그랬으니까, 근데 막 말씀에 은혜를 하나님께서 주시는데 이제 애들 수련회에 올려 보냈으니까 엄마들이 이제 애들이 보고 싶고 궁금하니까 먹을 거 싸들고 애들 수련회 잘하고 있는지 기도원에 올라온 거야, 야 그래 좀 은혜 좀 받았냐? 이게 무슨 뜻이예요? ‘야 좀 마음이 뜨거워지디?’ 그 뜻이잖아요. 딸래미가 ‘엄마, 은혜가 문제가 아니야’, 그게 뭐야, 하나님의 말씀의 강한 깨달음이 우리에게 올 때 가슴에 불이 먼저 질러지는 게 아니라, 머리에 얼음물을 한 양동이(바께쓰)로 확 끼어 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돼요? 아주 명정하고 총명한, 혼탁하고 막 이러던 게 싹 지나가면서 명정한 마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올바른 판단력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지혜지만 판단한 바를 사용해서 행동으로 나오게 하는 것은 마음이 하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이제 이것도 가만히 보세요 지혜는 누가 주셨어요? 사용한 사람은 누구예요? 솔로몬이죠. 그래서 결국은 나중에 이 사람이 망조가 들면서 은혜에서 멀어질 때에는 지혜가 좀 적었다면 저렇게 불행해지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지혜는 하나님이 주셨는데 총명한 마음이 아니예요. 부패한 마음이예요. 그래서 머리 좋은 사람들이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면 기하급수적으로 꼬여 그래서 결국은 자기 머리로도 못 푸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인생 살다가 머리 쥐어뜯는 사람들은 머리 좋은 사람들이에요. 머리 나쁜 사람은 뜯을 머리도 없어요. 이렇게 되는 거죠. 하나님이 총명까지 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2 (2009/8/23 주일오후예배)
아주 명정하고 오늘 저녁에도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야 이때, 솔로몬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왕이 된거는 그거는 아무것도 아니고 말로만 들었던 이 이전에는 솔로몬이 깊이 하나님을 못 만나잖아요. 이 정도의 깊이는 이게 처음이거든요. 아버지께로 말로만 들었던 그 위대하신 하나님 , 거룩하신 하나님, 비록 꿈이긴 하지만 자기에게 나타나셔서 그래서 ‘내가 너에게 지혜도 주고 총명한 마음도 주마’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정말 그게 꿈인 것이 너무 아쉬웠을 거예요. 야 이게 생시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꿈인 것이 아쉬울 정도로, 그러나 이 솔로몬에게는 굉장한 순간이었을 거예요. 아마 가슴에서는 이런 찬양이 터져 나왔을 거예요.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3 (2009/9/06 주일오후예배)
가슴이 콱 차오르는 왕이 된 것보다 더 큰 기쁨,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 놀라운 은사를 주셔서 약속하신 거죠. 너무 놀라운 구하는 바가 하나님의 마음에 정확히 맞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놀랍게 주시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이 그 위에 더 주신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네가 부를 구해야 되는데 부도 구하지 않고, 영광을 구해야 하는데 영광도 구하지 않고, 그랬으니까 그것은 ‘너에게 내가 사은품으로 주마’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에 이 사람이 ‘하나님 나의 생전에 왕창 땅덩어리를 주시옵소서’ 기도했더라면 하나님이 주셨을지는 모르지만 마음까지 주시지는 않으셨겠죠. 근데 이 기도하는 이것이 너무 당신의 마음에 맞으니까 주시는 거죠. 이런 것들을 보면 예수님이 그 나라와 그의를 구하거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이 약속하시잖아요. 하나님께서 더해주시는 거죠.
B. 더 큰 약속과 의무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4 (2009/10/04 주일오후예배)
그리고 하나님이 더 놀라운 약속을 하시는데 이거는 누구에게도 안하신 약속이예요 ‘네 평생에 열왕 중에서’ 앞에 있었던 사람들은 물론 뒤에 올 사람들이겠죠. 그죠? ‘너와 같은 자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내가 너를 매우 특별하게 함께 해주겠노라’ 근데 의무가 있어요. 이게 뭐냐하면 네 아버지 다윗의 길로 행하거라 그래서 이 다윗은 이후 모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산 사람의 길의 대명사가 되는 거예요. 반대는 여로보함의 길이예요.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함의 길, ‘니가 만약에 네 아비 다윗의 길로 행하면 네 길로 행하며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네 날을 길게 하리라’ 결국 뭐냐하면 순종하는 삶이예요.
우리가 왕년에 신앙생활 하면서 3~4번쯤 은혜 안받아본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제가 삼각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도 응답받은 이야기를 했지만 그런 간증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것이 다 지나간 옛 추억이 되고 그리고 계속 우려먹는 낡은 간증집이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결국 순종하는 삶이 없기 때문이에요. 순종하는 삶이. 그래서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들과 충성되게 살고 사명을 따라서 충성되게 살고 순종하는 사람, 그 사람을 앞에 언제나 기도 속에서 독대하는 길을 열어 놓으시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무릎을 꿇었을 때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 아무도 듣지 못하는 주님의 귀에다 대고 마음의 중심을 쏟아놓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주님과 그 마음이 통할 수 있는 사람, 그 쏟아내는 기도 속에서 주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의 손을 붙들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죠. 폭풍과 시련에 흑암이 있을 지라도 거기서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셔서 그래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위대하고 놀라운 힘을 보여주는 거죠. 그게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예요.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5 (2009/11/01 주일오후예배)
IV. 결론
요즘 여러분 환경 문제에 대해서 많이 뉴스에 보면서 북극에 얼음이 막 녹고 막 이래서 걱정이 된다는 이런 얘기 많이 듣잖아요. 이런 소식을 들었을 때 슬며시 미소를 짓는 사람이 있어요. 누구냐면 배를 만드는 사람이예요. 옛날에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바다였는데 얼음이 녹으면서 얼음의 두께가 얇아지는 거야. 그러면 배가 들어가서 고기도 잡을 수 있고, 그 다음에 유전 개발도 할 수 있고, 광물도 캘 수 있는 거죠. 그런 배를 가르켜서 쇠빙선이라고 불러요. 전 세계에서 이 쇠빙선을 가장 잘 만드는 나라가 우리나라예요. 근데 이 쇠빙선이 어떤 정도의 능력이 있냐면 두께 1 m의 얼음을 깨면서 한 시간에 5,5km를 달려요. 만약에 배가 쫙 달려가면서 얼음을 부수면서 가는데 얼음이 너무 두꺼워서 얼음을 못 부수면 이 배가 놀랍게 아주 균형을 이루면서 작동을 해서 고래처럼 얼음위로 올라가서 주저 앉아 버려요. 그러면 얼음을 1m 가 훨씬 넘는 얼음을 똑바로 부딪쳐서 안 깨지는 것은 기계가 이렇게 배를 들어서 얼음위에다 올려놔요. 이게 균형이 정확히 맞아야지 잘못 맞으면 뒤집어질 거 아니예요. 딱 올라와서 얼음을 밟으면서 이러면서 배가 한 시간에 5.5km를 달리는 거예요. 10시간만 달리면 한 60km를 쭉 달려서 도저히 달릴 수 있는 그 얼음 천지를 들어가는 거죠.
그 소식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얼음이 우리를 에워싼 것 같은 그런 난관들이 많잖아요. 거저 되는 일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고 난관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인생사를 살펴봐도 하나님 일 아니라도 난관과 어려움은 곳곳에 봉착해 있어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자, 어떤 사람의 기도는 돛단배야, 그래서 믿음으로 얼음에 꽝 부딪쳐보니까 믿음이라고 하면 안되지, 하여튼 인간의 욕심으로 한번 부딪쳐 봤더니 얼음에 배가 부딪쳐서 뱃머리가 박살이 나는 배가 있는가 하면, 어떤 배는 힘차게 달려가서 이게 1m면 조그만 애들 킨데 그런 두꺼운 얼음이 부부부부 마치 천이 찢어지듯이 파쇠되면서 그 큰 배가 유유히 항해를 하는 거예요. 우리의 기도가 만약에 우리를 에워싼 이런 비, 얼음과 같은 두꺼운 얼음과 같은 많은 역경들을 힘차게 도저히 아무도 갈 수 없다고 하는 그곳에 길을 그냥 만들면서 가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쇄빙선은 항해로가 따로 없고 그냥 그게 지나가면 뱃길이 되는 거예요. 그 얼음을 부수고 가는 그 길을 작은 배들이 따라 온다는 거예요. 툭 깨면서 지나가서.
만약에 우리의 신앙과 기도의 세계가 그런 배와 같다면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아멘’을 좀 해보시지. 얼마나 좋을까? ‘아멘’. 그래서 맨날 그 얼음을 두드리면서 아이씨 이 얼음 때문에 아무것도 안돼, 아무것도 안돼, 그러다가 그 배에 한번 탁 올라가서 두두두두두 깨면서 내가 가면 내가 주님의 손을 붙들고 가면 곧 길이 되고 그 길이, 그 길을 열고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아우구스티누스 선생이 말했듯이 이제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주저앉았던 사람이 불현듯 일어나서 우리의 뒤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도록 그렇게 새롭게 인생을 개척하며 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리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1
<sample>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 (2009/1/21 수요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2 (2009/2/15 주일오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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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0 (2009/7/19 주일오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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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6 (2009/11/08 주일오후예배)
2.하나님이 중심된 기도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7-9).
잠언은 대부분이 솔로몬이 쓴 지혜서인데 오늘 이 기도를 보니까 사실 왕으로써는 할 수 없는 기도입니다. 왕이 먹고 살게만 해 달라고 기도하면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 기도는 같은 잠언이지만 지혜자가 솔로몬이 아니라 아굴의 잠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 기도속에서 하나님 앞에 두가지 일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단서를 달았는데 나의 죽기전에 그렇게 되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단서를 달았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실현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그런 뜻도 아니고 또 하나는 이 기도는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꼭 응답해 주셔야만 하는 기도였습니다. 죽은 이후에는 이 기도가 필요 없으니 죽은 후에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먹고 마시고 배부르고 그러질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두가지 일을 구하였는데 그 두가지 라는 것이 바로 허탄과 거짓을 내게서 멀리 하게 해 주시고 가난하게도 말고 부하게도 말고 그저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여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는 사실 여러 가지인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명확하게 자신의 영혼을 위한 기도와 육체를 위한 기도, 영적 삶을 위한 기도와 육체적인 삶을 위한 기도로 정확하게 나뉘어 집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그리고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며 살았던 인생이기에 남다른 신앙의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영혼과 육체의 조화속에서 이루어진 삶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런 지혜를 얻기까지 하나님 앞에 영적 생활을 한 사람이었지만 인간의 삶은 영적생활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생활도 반드시 신앙생활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함께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영혼을 위해서는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마지막 때에 될 위대한 일들을 계시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여기에 오늘 우리들이 읽은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장면과 하나님이 상을 베푸시는 장면이 한꺼번에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면서 살았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그리고 당신을 섬기면서 살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각기 그 행한바에 따라 상을 주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여기에서 허탄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의미가 없이 공허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렇게 말은 많지만 실속이 없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공허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허영이나 사치 같은 것도 사실 가만히 보면 열매를 맺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허영과 사치속에서 잠시 만족을 느낄뿐이지 그걸로 인해서 자신의 영혼이나 물질 생활에 커다란 유익이 돌아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끔 보면 결혼식을 호화롭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들은 늘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상류층 생활을 모르니까 그렇다면 너희들이 사는 세계와 틀리다 이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겠습니다만 그것은 아무 유익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한번 예식하고 사라지는 결혼식인데 그렇게 아주 호화롭게 하고 시집 장가 간 뒤에 별로 쓰지도 않을 그런 물건들을 그렇게 호사스럽게 장만하고 믿는 사람끼리 혼인을 하면서도 그런것을 끊지 못하는 것을 보면 슬픕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유별을 떨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육적인 삶을 살 때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주는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우리는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배운 우리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을 고집해도 괜챦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것들이 다 허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허탄은 마음과 정신에 관계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무엇인가 올바른 가치 기준에 입각하지 않으니까 이 기준 저 기준에 휘둘리면서 그렇게 허망하게 살아가는 것과 그리고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게 해 주십시오 하는 것이 첫 번째 기도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을 위한 기도라고 제가 분류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 입니다. 이 허탄한 삶 그리고 거짓말의 삶은 결국은 근본적으로 마음의 올곧음을 상실한 삶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해 전에 성화와 올곧음이라는 시리즈를 배우면서 마음의 올곧음은 영혼의 순결한 상태와 관계가 있다고 여러분들은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건강한 영혼 거기에서 올곧은 마음이 나오고 올곧은 마음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의 심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없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마음의 올곧음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고집이 센 사람도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도 올곧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올곧음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고 소 심줄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끊어지지 않고 어느 한쪽으로 방향이 잡혀서 누가 뭐라든지 간에 소 심줄처럼 안 끊어지는것 그런것을 우리들이 올곧음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올곧음 이라고 하는 것은 선한 방향으로 초점이 맞추어져서 하나님 사랑이라는 마음 안에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롭게 생겨난 본성중 하나입니다. 그런 올곧음이 있을 때 삶은 다양한 행동을 해도 올곧음 하나에 모두 이어지는 같은 행동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다. 글을 쓰고 강연을 하고 말을 하고 노래를 하고 해도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공산주의적으로 그것들을 풀어 냅니다. 그러나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본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 사상에서 그 사상과 어울리는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똑같이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올곧을 때에 그때 모든 삶에 생활의 양태는 달라도 그것은 모두 왜 그렇게 행하여야 되는지에 대한 일관된 연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의 올곧음입니다. 거기에서 정직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이리저리 맺히고 진실의 가치를 아주 하챦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미 그 마음의 경향성 자체에 올곧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여러분들을 사랑한다고 해도 믿어서는 안되고 여러분들을 존경한다고 해도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마음의 정함이 없기 때문에 언제 요동칠지 모르는 감정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러한 것이 결국은 영혼과 마음의 건강한 상태를 반영하는것 아닙니까? 그것을 이 시인은 특별히 관심이 이 세상을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사는 지혜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에 가득찬 허영과 헛된것에 대한 사랑 그리고 마음에 올곧음이 없는 끊임없는 요동침 이러한 것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지혜롭게 살지 못하는 궁극적인 뿌리라고 보고 그 뿌리를 대표하는 표현이 허탄과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멀리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두가지 의미인데 하나는 이러한 유혹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달라는 것이고 내 마음의 성향 자체가 변화되어서 이러한 것과는 거리가 먼 심성과 영혼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위해 할 수 있는 선한 일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악한 일들은 우리가 직접 행하는 일들이지만 우리의 영혼을 바꾸어 놓는 영혼의 성향을 고치는 선하고 좋은 일은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의 힘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기도중에서 가장 선행되어야 할 기도는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위한 기도입니다. 요즘 마음지킴을 배우면서 아마 여러분들은 마음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국은 마음입니다. 목회해온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큰 시험을 정말 은헤롭게 극복한 사람이 그것보다 적은 시험에 넘어져서 신앙을 팽개치고 침윤에 빠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어려운 시험에서 합격하고 나면 그 보다 쉬운 시험은 잘 이길 것이다 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운전면허 시험을 보는데 세 번을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개인택시 기사였다고 합니다. 면허 취소가 돼서 하는데 우리는 이해가 안 갔습니다. 택시 운전수 더군다나 개인택시 운전수 인데 어떻게 떨어질 수 있는가? 몇 년을 운전을 했는데... 그런데 마지막에 떨어 졌는데 백점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속도가 너무 빨리 들어와서 불합격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세상에서도 그것이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비교적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은 쉬운 시험 잘 통과합니다. 그렇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안 그렀습니다. 왜냐하면 시험을 이기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힘으로 이기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올바르고 영혼이 건강할때는 이겼던 시험을 그렇지 못할 때에는 그것보다 훨씬 작은 시험도 주저 앉고 미끄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 지혜자는 알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일평생에 하나님이 내게 해주셔야 할 일이 있는데 하나님이 나의 영혼과 마음을 건강하고 올곧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사는 것도 이렇게 보면 시련을 만나고 견디기 힘든 고통을 많이 겪을때 비로서 그 사람의 마음이 들어 납니다. 그래서 이 마음과 정신의 크기가 크고 아주 올바르면 시련을 많이 당해도 그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무엇을 얻게 되는가 하면 오히려 자신이 더 강하고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소해해 내니까... 그런데 그 사람보다 훨씬 평탄한 인생의 길을 걸어도 마음이 건강하고 영혼이 올바르지 아니하게 되면 작은 시험에도 요동치는 정신과 자기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생 자체가 무너지고 신앙에서 미끄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굴 이라는 사람이 몇 살에 이 잠언을 썻는지는 누구도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쓸 정도이니까 인생을 어느 정도 달관했을것 아닙니까? 중학생이 쓰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지혜를 갖게 될 때에는 수 많은 사람들의 삶을 관찰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른들 중에도 인생을 깊이 생각하고 자녀나 후배들에게 인생은 이런 것이다 라고 교훈 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진 어른들은 공통점이 뭐냐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깨닫고 도전 받거나 반성하고 자기를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많이 거치면서 특별히 사상이나 철학 그리고 윤리를 공부하지 않아도 사람 사는 이치나 도리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학식이 거의 없어도 그런 자기 주관이 뚜렸한 노인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그런 자신들의 원칙을 따라 살아가는 지혜들을 많은 사람들과의 접촉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지혜자가 긴 인생을 살면서 부자도 만나 보았을 것이고 가난한 사람도 만나 보았을 것이고 솔로몬과 같은 위대한 왕도 보았을 것이고 그리고 양반의 집에서 걸레질이나 하고 소똥 치는 머슴들도 만났을 것입니다. 그때 그가 깨닫게 된 것은 인생 살기 전에 하나님 앞에 응답 받아야 할 일이 있는데 영혼과 마음의 건강함, 올곧음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시련이 와도 고통스럽지만 이겨 냅니다. 그것 때문에 인간이 망가지지 않습니다. 그냥 고생할 뿐이지 완전히 망가지지 않습니다.
(에화) 자동차로 말하자면 몰고 다니는데 가끔 가다가 교회 버스 찌그려 먹고 오는 것을 보면 아주 굉장히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연단을 많이 해서 이제는 좀 면역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운전하지 왜 그랬을까? 누가 그랬을까? 한번 찿아 볼까? 그랬는데 그 차에 탄 사람이 안 다쳤으면 됐지 이런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되게 까지 실로 긴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차를 타고 다니면서 우리들이 이렇게 부딪히고 접촉사고 나고 할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쾅하고 부딪혔을때 “사장님 제가 배달을 가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래” 그때에 이제 이 사장의 마음이 들어나는 것입니다. “그 트럭 새로 산 것인데 많이 찌그러졌어?” 그럼 안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어느 목사님이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무지 세게 달려가서 앞차를, 좋은차를 쾅하고 박은 것입니다. 어쨎든 차를 폐차할 정도까지는 안되었지만 앞에 본네트부터 시작을 해서 라지에이터까지 갈아야 할 정도로 푹 찌그러지니까 앞에 차도 꽤 좋은 차 였는데 트렁크가 쑥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큰일 났다 했는데 문이 탁 열리는데 시커먼 흑인이 덩치 큰, 영화에나 나오는 사람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인상을 확 쓰는데 엄청나게 골이 난 얼굴로 오는 것입니다. 자기는 왜소한 한국인입니다. 자기 혼자 밖에 없습니다. “아! 큰일 났구나!” 그리고 나오지도 못하고 차에 앉아 있는데 다가 오더랍니다. 문을 열었더니 “다치신데는 없으세요?” 라고 물어 보더랍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고가 나도 사장이 정말 직원을 염려하는 사람이면 새로 산 차를 타고 나가서 사고가 났다고 전화가 와도 “그래 어디 다친데는 없고?” 그렇게 물어 보아야 그것이 진짜 사장이지 새로 뽑은 차인데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도 이렇게 저렇게 부딪힐때가 있습니다. 원래 인생 사는것 자체가 끊임없는 시련의 연속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영혼만, 마음만 건강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건강하고 올바른 마음이 허탄한 것을 찿지 않고 정직하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의 올곧음과 영혼이 건강함은 결국 신앙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신앙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가 이 기도를 내가 두가지를 주께 구하였사오니 죽기전에 주시옵소서 했으니 이 기도가 어느날 일주일만 기도하면 되는 기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살았을때 이 지혜자가 거의 매일 하던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주기도문처럼 매일 하는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구할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자기 사업의 번창, 육신의 건강, 자녀들이 잘 되는 것, 전토에 전토를 잊고 가옥에 가옥을 이어서 재산을 늘려가는 일, 이 세상에서의 명예 얼마나 기도 제목들이 많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그 복잡한 기도를 밀치고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올렸던 기도가 자기 영혼의 건강함과 마음의 올곧음을 하나님 앞에 기도했고 이것은 자기가 의지 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응답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하고 은혜가 필요한 기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 기도를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예화) 저도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는데 사실 목사님들이 사찰 때문에 속을 많이 썩습니다. 우리교회에 사찰이 없으니까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광경을 보면서 나는 목회 하면 절대 사찰을 쓰지 않는다. 내가 용역회사에 사람을 빌려 쓰는 한이 있어도 사찰은 안 쓴다 해서 15년 동안 그것을 지켜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이 사찰 때문에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으면 언제나 똑같이 되풀이 하는 레파토리가 있습니다. 이름은 잊어 버렸습니다. 아무개 교회에 이름이 무슨무슨 사찰이 있는데 그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입니다. 그래서 “왜요?” 했더니 이 사찰이 교회에 들어 왔는데 교회가 그 후에 계속 부흥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커졌는데 사찰들은 교회가 그렇게 커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청소할 공간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랬는데 그 사찰이 아무 기술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와서 쓰레질이나 하고 했는데 대게 그런 경우는 자기가 기술이 없으면 목사님 망가 졌으니까 기술자를 부르십시다 하고 대게 일을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은 하나하나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그러더랍니다. “목사님 유리로 조그만 방 하나만 만들어 주십시오?” “아니 유리로 뭐하러 방을 만들게?” 그러니까 겨울에 꽂꽂이를 하는데 우리 교회는 우리 성도 한분이 이렇게 정성스럽게 꽂꽂이를 하는데 대단히 경비가 많이 들어가는 꽂꽂이입니다. 굉장히 돈이 많이 들어 갑니다. 특히 겨울에는 말도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 교회에서는 교회 돈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님 그렇게 하시지 마시고 유리로 된 방을 조그맣게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 그랬더니 이 양반이 거기에다 연탄을 피우면서 화분을 가꾸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꽂꽂이를 안 하고 화분을 가져다 올려 놓고 몇 주 있으면 겨울이 이니까 상태가 안 좋아 지니까 가서 물 주고 비료 주고 책을 펴서 어떻게 원예를 하는지 배워서 다 죽어 가는 꽃도 살려서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년 내내 새로운 꽃이 올라 오면서도 그 꽃은 계속 화원에 들어 갔다 나왔다 하면서 화분 몇 개만 사주면 일년내내 돌리면서 꽃을 보는 것입니다. 어느날은 목사님 용접기 하나만 사 주십시오. 그러더니 용접기를 사더니 철제 의자 망가져서 버리려고 하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가져다가 날 잡아서 땜질을 한 다음에 페인트를 깨끗이 칠해서 다 가져다 버리려고 내 놓은 의자를 하나씩 하나씩 고쳐서 교회에서 다시 쓰게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올곧은 마음이 있고 하나님 앞에 마음이 망가지고 찌그러지지 않으면 어려움을 만나고 시련을 당해도 그것 때문에 인생이 망가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바다에 배가 항해를 하면 언제나 맑은 날만 있겠습니까? 바람도 불고 폭풍도 만납니다. 그리고 흔들리는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뒤집히지만 않으면 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똑같습니다. 우리들이 뒤집히지 말아야 될 것은 우리의 올곧음과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입니다. 사업에 위기가 좀 있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내 영혼이 살아 있고 내 마음이 올곧음을 유지하면 하나님이 나를 돌아 보실 것이고 가정에 어려움이 있어도 인생이 뿌리채 흔들리는 것처럼 낙심하지 마십시오. 인생은 원래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치이기도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풍랑과 비바람을 많이 맞습니다. 산에 있는 나무에게 물어 보십시오? 멋있게 생긴 나무에게 맑은 날만 있었지 하면 따귀 맞습니다. 어떻게 산에 맑은 날만 있겠습니까? 눈보라, 비바람 그리고 한발고 재해 그리고 폭우에 시달리면서도 어떤 나무는 그렇게 올곧게 잘 자란 것입니다. 어려움을 만나도 제일 선행 되어야 할 기도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맑은 영혼과 온전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내가 시련을 만나고 환란을 만나고 내적인 수많은 갈등이 있고 고통이 있어도 내가 이것은 양보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 이것을 지켜주시옵소서 이 시인이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이것이 인생의 행복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 기도를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이렇게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하면 기도가 응답될때에 아는 것이 아니라 기도 하는 그 시간에 하나님이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기뻐하신다는 것을 기도 하는 내가 끊임없이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졸립다가도 정신이 나고 지쳤다가도 기도하고 나면 힘이 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육신의 생활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특이한 기도입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여기까지는 우리가 충분히 동의가 됩니다. 그런데 두 번째는 동의가 안됩니다. 부하게도 하지 마십시오. 부자도 되게 하지 마십시오. 보면서 우리 이런 생각이 듭니다. 믿음도 쪼잔하기는... 아니 한번 확 부어 달라고 해서 하나님을 위해 멋있게 쓰면서 한번 살아 보지 에이 통도 작기는... 이래서 주의 일을 하겠어?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렇게 지혜자가 되어서 우리에게 잠언을 남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인생의 영고성쇠를 보았겠습니까? 인간은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한국과 미국은 비행기로 열세시간을 타고 가야할 정도로 떨어진 나라고 사고방식이나 생김새나 밥 먹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비슷한 것이 없을 정도로 틀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벼락부자된 사람은 그 나라나 이 나라나 불행해 진다는 것입니다. 요즘도 정말 걱정되는 것이 뭐냐면 지금 불경기가 되어 멈추었지만 한때 신도시 개발한다고 하고 수없이 전국을 파해쳤습니다. 심지어 운하를 만든다고 했을때 땅값이 엄청 오르고 했는데 그 보상금들이 어마어마 합니다. 그러면 똥지게 지고 다니면서 논밭에 거름이나 주던 사람들이 여기 평촌도 개발되면서 그런 사람들이 수없이 생겼습니다. 졸지에 하루 아침에 이백억, 삼백억 심지어는 육백억, 칠백억의 갑부가 되는 것입니다. 조상대대로 물려 받은 땅에서 파밭이나 매고 호박밭이나 매고 하던 사람들이 졸지에 그런 부자가 된 것입니다. 행복할 것 같죠? 한 사람도 행복해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몇해전에 텔레비전에 생생하게 그것을 추적했습니다. 보상금 받은 사람들 로또해서 대박 맞은 사람들 추적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다 불행해 집니다. 우리들이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까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잘 아셨으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 구멍을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다 라고 말씀 하셨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가끔 아주 돈이 많으면서도 마음이 깨끗하고 하나님께만 헌신된 기도에 늘 눈물이 있는 그런 청결한 마음을 가진 부자들을 생각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만났습니까? 여러분도 안 그러지 않습니까? 물론 부자도 아니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지혜자는 자기를 빨리 알아 차린 것입니다. 나는 어마어마한 권력과 헤아릴 수 없는 부를 하나님이 주시면 일체의 순결함과 청결함으로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살면서 그 물질을 다만 흘려 보내는 통로로서만 살 수 있다 자기는 그런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치감치 알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분량을 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모두 이 사람의 기도를 되풀이 하지 않으면 좋은 신자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제가 사업하는 사람에게 신방하러 갔을 때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밥은 먹고 삽니다. 그것이 짜증나는 것입니다. 아니 자기가 벌어서 자기 밥이나 먹고 살면 십일조는 누가 합니까? 교회 헌금은 누가 하겠습니까? 그러지 말고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꿈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훌륭한 꿈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나는 생각이 조금 틀립니다. 돈을 벌 생각을 하지 말고 벌 계획을 잘 세우는 것은 나중이고 마음속으로 돈을 쓸 계획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돈을 벌면 이렇게 써봐야겠다. 그리고 그렇게 돈을 쓰고 싶다는 열망을 벌고 싶다는 마음보다 더 강하게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미리 마련한 수로가 되어서 물이 차면 이미 수로가 마련이 되었기 때문에 확 쏟아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수로가 마련이 안되면 물이 활칵 넘치게 되면 밭이고 논이고 집이고 아무데나 막 흘러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욕입니다. 욕망입니다. 십일조 해본 사람 모두 경험하지만 연봉 이천만원일때는 십일조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대단한 결심을 안해도 그저 아멘 하면 합니다. 그러나 연봉 이억이 되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억도 만만하면 십억되면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매월 천만원을 내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마음은 정말 간사한 것입니다. 저는 학교에 있으면서 그래도 왕년에 신학교를 세운 사람들은 지금에 와서는 그 사람들 욕하고 어쩌구 저쩌구 남들이 그래도 그 사람들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때 하나님 만나고 헌신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렇게해서 자기 문전옥답 팔거나 혹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재산인데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재산 정리해서 신학교를 세웁니다. 그러면 그것은 자기가 돈을 집어 넣을 수 있지만 꺼내 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학교 법입니다. 그렇게해서 학교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교에서 마지막에 터지는 부패는 대게 그렇게 한때는 희생했던 사람이 학교 돈에 손을 대는 것입니다. 학교는 돈만 손에 안대면 사고 날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사고가 나도 그것은 법적으로 거의 문제가 안되는 사소한 사고입니다. 대부분의 문제는 학원사태 터졌다, 수사를 받는다더라, 이사장의 목이 날라 갔다더라, 기소 되었다더라 뭡니까? 아무것도 아니고 결국은 불법한 돈에 손을 대고 욕심을 부리게 되면 그렇게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은 누구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을 보고 쪼잔하다 믿음도 적기는 나 같으면 부어 주시옵소서 주를 위해 쓰겠나이다 하겠는데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은 나 보다 더 분수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구했습니다. 그 기준이 무엇인가 하면 양식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로 배부르게 하지 마시옵소서 여기서 배부르다는 것은 진짜 배 부른것이 아니라 돈이 남아서 허욕을 만족시키며 산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내가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때는 번영하던 때에 하나님을 잊어 버렸습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개척교회 할 때 어렵게 살면서 눈물 흘리고 철야기도하고 풀빵이라도 팔아서 돈을 모으고 코 묻은 돈 다림이로 데려서 십일조 내고 이러던 사람들이 돈 벌고 먹고 살만해 지면 신앙에 미끌어 져서 그런 하나님이 심히 어려움속에서 자기를 돕던 그런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이 똑같은 것입니다. 중국이 요즘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진짜 어려운것이 보일 정도인데 그런데 한때 잘 나갔습니다. 지금도 잘 나가는 사람은 잘 나갑니다. 사람들이 어리저리해서 사업에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뭐냐면 큰 집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하는 일이 좋은 차를 사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마누라 갈아 치는 것입니다. 거의 공식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자랑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난했을 때 처음 인연을 맺고 산 사람을 조강지처라고 하는데 그것이 뭐냐면 거친 밥을 먹으면서 함께 고생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잘 되었으면 자기 혼자 잘 되었겠습니까? 같이 거친 밥을 먹으면서 그렇게 일구어 낸 그런 가정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가난함에 대한 기억을 잊어 버리고 나면 인간이 허탄한 것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할 가능성이 신자인 인간에게도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처음부터 나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는 이야기가 나를 가난하게도 하지 마십시요 내가 가난하면 혹 다른 사람의 것을 도적질하고 그러한 나의 행실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이런 부분을 읽을 때 짜증이 납니다. 아니 사람이 왜 그렇게 믿음이 없어? 믿음으로 사는 자는 예수 믿는 자는 받은 증거가 많은데 가난해 지면 내가 도적질 할지도 몰라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나? 내가 입에 풀칠을 못해서 거미가 쓸어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신앙의 정조를 지킬 것입니다 이런 정도는 되야지 여기에 한줄이라도 써서 솔로몬 뒤에다 붙이지 이런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자격고 없이 쓰고 말이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깨달은 자기 자신의 모습이고 수 많은 사람을 통해서 본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화) 어느 대학에서 교목을 하던 목사님이 계셨는데 교수들 중에서 기독교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가진 교수들이 많더랍니다. 어느날 공개석상에서 질문을 하더랍니다. “목사님!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리에게 설교를 하시는데 목사님이 하도 그래서 제가 집에 가서 성경이 무엇인가 하고 들여다 보았더니 세상에 추접스럽기 짝이 없는 책입니다.” 다들 “왜요?” 하니까 “아니 거기 보니까 자기 동생 죽이는 이야기도 나오고 조금 더 넘기니까 자기 아버지가 딸하고 동침하는 이야기도 나오고 하는데 이것이 만약에 현대 글씨로 썻으면 아마 오래전에 도서출판 금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목사님이 “교수님! 그것이 당신 인생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것이 우리 이야기입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이 잠언을 지은 지혜자는 알았습니다. 지금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내 안에 있는 뿌리는 언제든지 부패할 수 있는 뿌리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기의 분수를 알고 하나님 가난하면 저도 미끌어질 수 있습니다 제발 그렇게 하지 말아 주십시요 하고 하나님 앞에 평범한 삶을 구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눈길을 끄는 것은 영혼을 위한 기도이든지 부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이든지 가난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이든지 모두 그 기도의 중심에 누가 계십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 버리면 어떻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면 어떻하겠습니까? 하나님께 죄를 진다면 어떻하겠습니까?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게 하면 어떻게하겠습니까? 결국은 이 사람이 자신의 영혼과 육체의 모든 것을 구하는 이 기도의 제목은 한가지 궁극적인 목적을 위한 기도였는데 내가 이 땅에 이렇게 살아 있는 동안에 내가 산 것이 좋으신 하나님의 이름에 누가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노심초사 하는 염려이고 보니 부하게 살든지 가난하게 살든지 인간의 생활의 양태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고 어떤 환경에서든지 그 하나님을 내가 마음껏 사랑하고 주님앞에 건강한 영혼과 올곧은 마음을 가지고 살수만 있다면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인하여 기뻐하실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충분히 만족합니다. 그러니 이 기도가 우리에게는 믿음이 없는 기도 같아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정말 하나님 앞에 기쁜 기도 였습니다. 육신의 것을 구하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영의 것을 구하면서도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했으니 이 사람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 이겠습니까? 한 사람의 사람됨과 그의 기도는 항상 일치를 이룹니다. 잠시는 이것이 어긋나는 것 같아도 결국 기도하는것 처럼 살고 결국은 사는 것처럼 기도가 되어 버리고 말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잠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것은 결국 평행을 이룹니다. 사는것 만큼 기도하고 기도하는것 만큼 살게 되어서 잠시 흔들린 것처럼 보이던 것들이 균형을 이루고 기도는 그 사람의 인격안에 그리고 그 사람은 그 기도안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오후에도 이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로 주님께 인정 받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1
<sample>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 (2009/1/21 수요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2 (2009/2/15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3 (2009/2/22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4 (2009/3/15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5 (2009/3/22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6 (2009/6/14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7 (2009/6/2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8 (2009/6/28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9 (2009/7/12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0 (2009/7/19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1 (2009/8/16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2 (2009/8/23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3 (2009/9/06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4 (2009/10/04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5 (2009/11/0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6 (2009/11/08 주일오후예배)
3.믿음을 구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막 9:23-24).
같은 고통이라도 사랑을 많이 하면 자기가 당하는 고통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당하는 고통을 보는 것이 훨씬 큰 고통입니다. 어느 의과대학에 가서 말씀을 전하다가 의사 선생님들하고 이야기가 하다가 나온 이야기 인데 수술할 때 개복수술은 큰 대 수술입니다. 심지어 두개골을 드러내고 수술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가족들의 경우에는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하니까 “가족은 저희들이 수술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친절한 친구나 동료에게 맡긴다고 합니다. 수술을 할 때에는 아주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환자를 대하면서 수술을 하여야 하는데 가족의 경우에는 감정이 개입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범한 사실이지만 의사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부모가 되어서 아이들이 대책 없이 아플때 아마 부모라면 누구든지 내가 대신 아팠으면 하고 한번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그것은 자기 배 아파서 난 자식이 아닙니다.
(예화) 옛날에 제가 섬기던 교회가 있었는데 거기에 목사님 아들이 예배에 나왔는데 학생이었는데 아이의 태도가 이상합니다. 그래서 하루는 붙들고 깊이 이야기를 했더니 병원에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병원에 다니냐고 하니까 고막이 터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보니 부모 몰래 병원을 다니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의료보험은 있었나 모르겠는데 어쨎든 병원을 다녔습니다. 학생이 돈도 없는데 병원을 다니려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나중에 꼬치꼬치 캐물어 보니까 공부 안 한다고 목사님이 화김에 확 내려 쳤는데 뺨을 친다는 것이 귀에 맞은 것입니다. 그래서 뻥하고 터진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저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되고 제대로 치료하여야 할 것 같아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 뭐 화나는 일 있었습니까?” “왜요?” “목사님 아무개 아들 때리셨다면서요?” 한숨을 푹 쉬면서 “그 놈의 자식이 공부를 도통 안해서 한차례 때렸습니다” “목사님 고막이 터졌습니다” 하니까 깜짝 놀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깊이 침통한 표정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해 드렸는데 목사님이 제가 의사도 아닌데 물어 보는 것입니다. “저의 고막을 떼어서 그 아이한테 붙이면 안될까요?” 아주 심각하게 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저는 전공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했는데 고막은 잘 났습니다. 치료하면 금방 생겨납니다. 그런데 그때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굉장히 비감해 하시면서 “전도사님! 제 고막을 뜯어서 우리 아들에게 이식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것은 의사한테 물어 보아야지 저한테 물어 보면 뭐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내가 느낀것이 뭐냐면 그것이 자식 기르는 부모의 심정이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도 보면 귀신들린 자식 하나를 데리고 왔는데 그동안 고통 받은 것을 이야기 하자면 한도 없이 끝도 없이 아비가 자식 때문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하루 이틀 당한것이 아니라 아주 어렸을때부터 이런 일들을 당했고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이렇게 큰 고통을 당했으니 그 부모의 마음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비감하고 가난한 마음이 되어서 주님께 갔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우리 아이가 이렇게 귀신이 들리고 해서 이렇게 고통을 받으니까 고쳐 주십시오 했더니 제자들이 시도는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어쨎든 별로 성과를 못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 앞에 나아와서 예수님 이 아이를 고쳐 주십시오. 제자들에게 부탁했는데 결국은 못 고쳤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언제부터 그랬냐? 아주 어릴때부터 고통을 받았습니다 하면서 하는 말이 이 아이가 오랬동안 귀신에게 고통을 받고 불과 물에 던져져서 목숨의 위협도 느꼈지만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도와 주십시오 그렇게 예수님께 간청을 드렸습니다. 사실 이것이 믿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어떤 믿음이 있습니까? ‘그러나’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병은 절망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는 이 문제를 해결할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나’의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의 믿음을 가지고 나아 왔으니까 믿음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특별한 종류의 신앙이었습니다. 자기 자식이 아니었더라면 자기가 불쌍하다고 생각했으리라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 비참한 지경에서 자신은 정말 비참한 사람이라고 깨닫고 우리 주님의 긍휼을 의지했으니까 이것도 믿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도와 달라고 빌었습니다. 도와 달라고 부탁하면 예수님이 도와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것도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이같이 말하는 이 사람을 심히 책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그러면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이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올 때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예수님이 충분히 이 아이를 고칠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비참한 상황에 처한 자신들을 용납해 주시고 불쌍히 여길 것이라는 능력과 사랑에 대한 믿음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다그치듯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하고 그의 고백을 지적하셨습니다. 네가 나에게 할 수 있거든 이라고 말했는데 할 수 있거든이 도대체 무엇이냐? 그러면 나 예수가 이 귀신들린 자를 내어 쫒을 수 있는 능력이 모자란다고 의심하는 것이냐? 아니면 능력은 있어도 우리같은 인간들에게 우리같이 비천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능력을 행하실 리가 없다고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냐? 무엇이냐? 어찌하여 할 수 있거든이 되냐? 할 수 있으시오니 이렇게 이렇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 했어야지 옳지 않느냐 하면서 채근하셨습니다. 이것은 아까 말씀 드린바와 같이 믿음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이 아이 아버지가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신을 전적으로 믿고 구원에 이르기까지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온전한 믿음을 이 사람에게 요구하셨습니다. 그때 아주 훌륭한 기도가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면 먼저 고백이 나옵니다. 내가 믿나이다. 그는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그는 고백하기를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라고 예수님께 빌었습니다. 아비의 이러한 고백은 앞서 말씀드린 23절에 대한 저의 해석을 뒷받침 해주는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믿었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우리가 비참하다는 것, 우리 아들이 절망 적인 상태에 있다는 것, 예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실 것이라는 것, 예수님이 고쳐주실 것이라는 것을 내가 믿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는 이 믿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저에게 더 많은 믿음을 필요로 하시는데 그것은 어떻게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큰 믿음을 가져서 예수님이 보실 때 내가 이스라엘중 너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느니라 이런 칭찬을 받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내가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라고 예수님께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의 간청을 들으셔서 그 아이를 고쳐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기뻐하는 기도를 할 때에 당신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도를 통해서 당신 자신을 의지하는 훈련을 많이 시키십니다. 똑같은 일이 이루어져도 기도 안하다가 이루어지면 재수가 좋았다고 자기도 모르게 말이 나오고 만약에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사람은 그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재수가 좋아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 능력과 사랑으로 그 일을 이루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은 자기의 유명한 기도에 관하여 라고 하는 글 속에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인데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실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두가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인데 하나는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과 모든 기도의 응답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게 훈련시키시기 위하여 기도라는 은혜의 수단을 만드신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기도는 하나님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수단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들을 훈련시키시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아주 신앙이 어렸고 진리에 대한 지식이 아주 현저히 부족할때는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을 좋아하는 마음은 있는데 무엇을 행해야지만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하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럴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기도를 통해서 훈련시키십니다. 비록 그 기도의 제목이 주기도문에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처음 세 번째 기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이루어진 것처럼 혹은 여러분들이 신앙의 지식이 많이 들어 간 다음에 하나님 저는 죄와 악함이 가득차 있습니다. 성화의 길을 가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 은혜로 나를 변화시켜주시옵소서 가난하게 살아도 좋으니 참된 신자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는 상당한 진리의 빛이 들어오고 나서야 깨닫고 그 기도 제목이 소중하다 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에화) 우리 교회에 교역자 한사람이 있었는데 신학대학원 시험을 보았습니다. 목사고시를 볼때 면접을 선배 목사님들이 노회에서 면접시험을 봅니다. 열린교회 강도사가 시험을 다 합격하고 마지막 목사가 되기위해 면접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 자네의 비젼은 무엇인가?” 그랬더니 “참된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 라고 하니까 목사님이 아주 한심하다는듯이 “목사되라고 안수 주려고 하는데 자꾸 신자가 된다고 그래!” 옆에 사람이 그 말을 못 알아 듣고 또 물어 보았습니다. “비젼이 무엇입니까?” 하니까 처음에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목사 안수를 받는데 당신 앞으로 소원의 뭐냐? 참된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 둘이서 이상한 사람이 하나 들어 왔네... 아니 목회를 하라고 안수를 주겠다는데 자꾸 신자가 된데...
상당한 진리의 빛이 들어와야지만 자기의 기도제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진리의 빛을 많이 받기 전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때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 모르고 기도하는데도 우리가 그 기도를 놓고 하나님 앞에 목숨을 놓고 기도할때는 하나님이 그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때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끊임없이 훈련시키시면서 기도의 응답을 더디하십니다. 그러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다 항복하고 그리고 주님 앞에 매달릴때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어 주심으로 아직 진리의 빛이 많이 없기 때문에 높고 고상한 기도의 제목은 없어도 마음이 어떻게 녹아야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가 하는 것을 직감적으로 경험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만 달그락 달그락 굴리고 성경공부 하면서도 한번도 안 깨진 사람보다는 성경공부 조금 덜해도 한번 훅 깨져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부서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사람이 사실은 진리에 대한 참된 지식은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 자체가 실천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의 덩어리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수준 높은 기도를 못하지만 그렇게 생생하게 하나님 앞에 자기가 물 같이 마음이 녹아 내리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것을 배우게 될 때 그때 깊이 깨뜨려지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정도의 수준의 사람이었습니다. 깊은 신앙이 본래 있었던것 같지는 않고 자식 때문에 너무 마음이 아프고 견디기 힘들도록 고통을 당하니까 이 아이의 문제는 이제 이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아비인 자신의 인생의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들고 예수님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사람에게는 내 아이를 낳게 하고 싶다는 소원이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믿음이 소원보다 커야지만 믿음의 위대한 역사들이 일어나는데 소원이 믿음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마음에는 자식을 낳게 하고자 하는 아비의 소원은 나무랄데없이 꽉 차고 절실한데 예수님 한분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능력이 있고 그분이 나를 불쌍히 여길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갈망과 같은 충만한 믿음은 모잘랐습니다. 예수님은 고쳐주시려고 작정하셨지만 할수 있거든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냐? 너는 나를 향한 전적인 믿음이 부족하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아닙니다 예수님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것을 인정합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십시요. 없는 믿음을 어떻게 합니까?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아주 노골적이고 직선적인 기도입니다. 아닙니다 주님이 모르셔서 그렇지 사실 뒤져 보십시요. 조금 믿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 안하고 아닙니다 믿음이 없습니다. 도와주십시요. 사람을 이렇게 지도하면 학생들을 지도하든지, 교역자를 지도하든지, 교인들을 지도하든지 할 때 여러분들이 잘 알아 두십시요. 목회자나 누가 이렇게 지도를 하면 그것을 일단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잘 받아 들여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더 많은 충고를 하고 싶은 마음들을 사람들이 거두는 것입니다. 옛날에도 있었던 일인데 충고를 했습니다. 진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러이러한 것들은 네가 잘못된 것 같다 했더니 목사님이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 내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니까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비밀이 있겠지 하고 내가 잘못 생각했나... 서너시간 대화를 하는데 계속 목사님이 잘 모르셔서 그러는데 계속 잘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야단을 쳤습니다. 그럼 내가 아는 것이 뭐냐? 네가 계속 모른다고 하는데 그럼 나는 다 모르고 너는 다 안다는 것인데 그런것이 어디 있느냐?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러니까 오히려 누군가에게 선한 충고를 할 때 그 사람이 맞습니다. 그런데 제 힘으로도 어떻게 잘 되지 않습니다. 저를 좀 더 지켜보아 주십시요 라든지 저에게 갈 길을 가르쳐 주십시요 하는것이 진실한 것 아닙니까? 이 사람에게 그런 진실함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있기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족하시다면 인정하겠습니다. 나의 믿음이 없는 것을 도와 주시옵소서. 그렇게 주님앞에 비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기도의 방향이 올바르기만 하면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잘 믿지 않았는데도 막상 기도를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놀랍게 기도할 힘을 주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다. 어떤 기도는 이것을 기도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잘 모르고 기도할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고 그리고 그 일을 하는데 아무리 그 일을 하려고 해 봐도 나에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지혜나 능력이나 물질이나 시간이나 이런것들이 현저히 부족하거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대부분 많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러므로 하면서 물러 갑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돈도 없고 그 일을 위해서는 나에게 지혜가 있어야 하는데 나에게는 지혜도 없고 이렇게 하면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실 그가 그 일을 할 수 있었다면 자신의 힘으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일인데 자기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부족하다 라고 느낄 때 그때 나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러한 것이 부족합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요 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매우 기뻐하십니다. 정말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이라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절실하게 어느 일을 행하는데 누군가가 비록 능력은 없고 재주는 모자라지만 충심으로 여러분 일을 돕고자 하면서 여러분들에게 빌기를 내가 돕고 싶은데 지혜가 부족하고 능력이 부족하니 무엇이든지 나에게 할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 주십시요. 그러면 내가 당신의 뜻대로 봉사하겠습니다. 얼마나 훌륭합니까? 주님이 그런 기도를 기뻐하시는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능력과 재주가 많아서 훌륭하게 준비된 사람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좀 부족해도 예수님의 뜻을 잘 받들 수 있는 사람을 찿으시고 또 많은 것을 위해서 빌고 자신의 훌륭한 인생의 계획을 가진 사람보다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찌 살아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주님이 나를 가르쳐 주십옵소서 라고 어리석게 주님께 매달리는 사람의 기도에 더 쉽게 응답해 주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사람은 꼭 필요한 것이 믿음이었는데 믿음이 없지는 않았는데 주님을 충분히 만족시켜드릴만한 믿음이 그에게는 충분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간절히 매달리며 주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충만한 믿음이 있는 것인데 나도 믿고 싶은데 그 믿음은 내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다시말해서 믿음을 주시는 분이 주님이시니 나에게 신앙을 주시옵소서 라고 빌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사람의 믿음을 인정하시듯이 이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고통스럽던 자신의 아들의 병이 깨끗이 나음을 받는 역사가 일어 났습니다. 이것은 결국은 예수님이 믿음이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는 이 기도조차도 예수님이 믿음으로 보신 것이 아닐까요? 훌륭한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며 예수님께 독립하는 사람 보다는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예수님은 더 기쁘게 받으셨던 것입니다. 사람을 통해서 지적을 받거나, 말씀을 통해서 지적을 받을때 우리는 충분히 낙심할 수 있습니다. 아무개는 참 훌륭한 믿음인데 난 정말 믿음이 없구나 아무개는 무슨 일만 맡겨 놓기만 하면 저렇게 훌륭하게 해 내서 주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는데 나는 정말 믿음이 없구나, 능력이 없구나, 사실입니다. 그런데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덜 의지하는 사람 보다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 나에게는 사명은 맡겨 주셨지만 나에게는 그것을 감당할 만한 지혜도 부족하고 능력도 모자랍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주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라고 비는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더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결론을 내립시다.
우리는 종종 주님이 우리에게 사명은 맡겨 주셨는데 재능은 덜 주셨다고 그래서 결국은 주님이 우리를 고르신 것이 실수하신 것이라고 혹은 주님이 우리에게 할 일은 주셨지만 지혜는 현저히 부족하니 이것은 틀림없이 주님이 알고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아니라 사람이 잘 몰라서 우리에게 맡긴것이라고 생각하며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이 모두 누군가에게 사명을 맡겨 주셨을때 이런것 쯤이야 내가 상식으로도 해결할 수 있지 하나님이 이렇게 맡겨 주신다면 어느 누가 이 사명을 감당하게 도와 달라고 눈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어린 아이처럼 주님이 나를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항상 객관적으로 우리 능력보다 훨씬 커 보이는 일을 우리에게 맡겨 주십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는 능력이 훨씬 큰데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조그만 일을 맡겨주셨구나 라고 판단한다면 실수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보다 더 큰 일을 맡겨 주셔서 그 앞에서 우리 자신이 아주 작고 초라해서 주님의 도우심의 은혜가 아니면 내가 그 일도 감당할 수 없는 아주 미천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주의 일을 하면서 이런 생각이 없다면 주님의 일을 얏잡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까짓 구역장 나에게 교구를 맡겨 줘봐 내가 못하나 그렇게 생각하면 자기 일을 얏잡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역장 하는 것이 교회에 출석해서 구역원들 왔는지 안 왔는지 체크하는 것이 전부라면 그 일보다는 능력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영혼 한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그랬던 것처럼 낮아져 발을 씻기고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로 기도하고 그들이 참 하나님을 알아 가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생하며 섬기는 것이 참된 섬기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누가 감히 하나의 구역이나 한 학급의 어린이 대여섯명을 맡겨 주었을때 나는 충분히 이 사명을 감당하겠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온전함의 표준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면 누가 얼만큼 봉사하고 난 후에 나는 달려 갈 길을 다 달려 갔고 누구를 이 자리에 세워 놓으셔도 내가 한 것 만큼은 주님을 위해 충성 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의 섬김이나 사명을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우스워보이기도 하고 매순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큰 일을 하는 사람도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가 하면 아주 작은 일을 맡겨도 이 일에 자신은 전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 큰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맡기신 일이 여러분들보다 크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아이의 아비는 믿음이 필요해서 믿음을 구했습니다. 이 아이의 아비는 믿음이 모자라는 것을 알자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고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족을 발견합니까?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 기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아무튼 주님의 뜻을 감당하려고 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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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순종하는 기도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취하여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여 내게 진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나로 다시 한번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이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삿 6:36-40).
이스라엘의 인근에 있는 족속중 미디안 족속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미디안 족속에게 붙이셔서 7년동안이나 지배를 받게 하셨습니다. 이 사사기의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4단계의 절차를 가지고 순환을 하는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패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징계하시면 회개하고 그러면 다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이러한 반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미디안 족속에게 이렇게 지배를 받게 된 것도 오늘 성경 6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하면서 '또' 라는 단어가 붙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여러번 계속된 불순종 가운데 한 시기였다는 사실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제 당신이 쓰실 일꾼 기드온을 사사로 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황당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너는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것이 아니냐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해 내라 하고 하나님이 이렇게 명령을 하셨을 때에 기드온은 하늘이 캄캄하고 막막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같이 부족한 인간이 이 엄청난 일을 감당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문맥으로 볼 때에 이 기드온은 이스라엘 나라에서 누구든지 알아 줄 만한 유명한 장수나 이런 인물로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습니까? 보십시요 나의 집은 므낫세의 지파중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서 제일 작은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가난하고 상한 마음으로 나는 그 엄청난 사명에 적합하지 않은 인간이니까 헤아려 달라고 하나님 앞에 탄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내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사람 치듯 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와 함께 해 줄테니 너는 가거라 라고 명령을 내리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면서 이 기드온이 드디어 그 유명한 기드온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미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그리고 미디안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낼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약속을 하십니다.
그런데 신자의 마음속에는 믿음이 있는 곳에는 의심이 전혀 없고 의심이 있는 곳에는 믿음이 전혀 없는 그런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중생에는 분량과 단계가 없지만 믿음에는 크기와 분량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가지가 항상 섞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생생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소명을 받아 사사로 일을 하다가도 어느 한 순간에 의심이 드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을 이루시려는 것일까? 눈으로 아무리 계산을 해보고 인생을 살아온 경험으로 판단해 보아도 이렇게 견고하게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이 엄청난 미디안의 세력에서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해 내겠다고 해 주시는 것인지 아무런 예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아주 충만했더라면 증거가 필요 없이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것 자체가 최고의 증거다 아멘 이렇게 하면서 할텐데 믿음이 흐려지게 되니까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까? 인간적으로 생각해 볼 때 도저히 나는 함께 나를 따를 군사도 없고 무기나 모든 것들로 볼 때 칠년동안이나 지배를 했던 미디안을 때려 눕히고 이스라엘을 건져낸다는 것이 쉬운것이 아니다 하는 의심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이 기드온을 왕 삼아서 죽도록 충성하겠노라고 구름떼처럼 모이는 것도 아닌 상황인데 마음속에서 어느 한 순간에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오늘 이 기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다른데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의 출발은 사실 하나님께 대한 큰 믿음이 없는데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명백하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함께 해 주겠다고 하셨는데도 기드온은 어느 한 순간에 그것을 온전히 믿을 수가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실에 대해서 무슨뜻인가 하면 한번만 믿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이루어질때까지 지속적으로 믿어야 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약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이 기드온의 기도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기도였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무엇인가 하면 구체적인 기도였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내가 미디안 백성들이 지배하는 이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 내라고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는데 정말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라는 구체성이 있는 기도였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의 응답을 경험한 사례들을 보면 대게 기도가 아주 분명하고 구체적이고 단선적인 기도들이 응답의 간증이 많습니다. 기도하는 내용이나 목표 자체가 흐릿하고 아주 많은 초점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마음 자체도 그 많은 초점을 다 수습하지 못한체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이 응답을 해 주셔도 자기가 한 기도 자체의 내용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응답이 됐는지 안됐는지도 확인이 안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대게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어떤 일을 꼭 하시고자 하실 때에는 우리에게 그 기도가 첫 번째 기도의 제목이 되도록 떠오르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선순위에서 그것을 일번으로 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아주 놀랍게 응답해 주시고 응답해 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 모두를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주께 구하면 주님이 주신다는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 훈련의 목적은 우리 주님을 생사간에 더 많이 의지하며 살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기드온의 기도는 여러 가지 기도 제목을 가지고 나간것이 아니라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한다고 하셨는데 참말 입니까? 그렇다면 나에게 응답해 주십시요? 표징을 보여 주십시요? 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 사람의 기도 특징은 응답에 있어서 표징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표징이 뭐냐면 타작마당에다가 양털을 가져다 놓고 그 당시에 양털이 하도 많으니까 양털 날리는것 가죽 하나 찢어서 가져다 놓으면 되는데 그리고 밤이면 이슬이 내리는데 이슬이 주변 땅에는 없고 그리고 양털에만 있게 해 주십시요 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밤에 양털을 내다 놓으면 원래 자연적으로 물건이 있는 양털에 이슬이 뭉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변이 마르는 것은 몰라도 똑같이 이슬이 내려도 땅에는 흙이니까 이슬이 스며 듭니다. 그러니까 자연적으로도 마른 땅은 아니지만 마른 땅처럼 되기 쉽고 어떤 털 같은 것은 이슬이 내리면 털이 그 이슬을 흡수하지 않으니까 이슬이 계속 거기에 맻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우리가 밤중에 시골에서 밖에 나가서 잠을 잔다든지 하면 멍석이나 이런데 이슬이 많이 맺히는 것이 아니라 비닐이나 이런데 이슬이 많이 맺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털을 가져다 놓으니까 이슬이 많이 맺힌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기도할 때 제일 먼저 자연적인 것을 먼저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까 또다시 마음속에 이것이 혹시 자연적으로 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다시 한번 기도하는데 이번에는 주위의 모든 흙은 젖고 이 털은 마르게 해 주십시요. 이런 예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일어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것을 들어 주십니다. 그것이 표징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면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런식으로 기도하는 자체가 하나님을 조롱하고 우롱하는것 또는 여기 표현처럼 시험하는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집요하게 표징을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좋게 여기시기도 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의 기도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런 경험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33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범죄를 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시면서 올라가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약속한대로 가나안 땅을 주겠다 그러나 내가 너희와 함께 하지는 않겠다 이때에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들었던 모세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즉각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뜻인가 하면 아무리 우리가 올라가서 이길 수 있게 해 주시고 온갖 축복을 주신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전하고 영원한 기업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청하게 됩니다. 그리고 회막에 들어가서 경건한 자들과 함께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이제 내가 네 마음을 편하게 해주겠다 내가 너희와 함께 올라가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됐지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데 그랬더니 모세가 거기에서 물러서지 않고 하나님 나에게 증거를 보여 주십시요. 표징을 보여 주십시요. 그러면서 기도하는것이 내가 어떻게 하나님이 나에게 은총을 베푸실지 그 표징을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하나님을 이것을 당신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의심으로 여기기 보다는 그렇게 되기를 절실하게 바라는 일종의 믿음과 열심히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슨 목사님도 이 부분을 해설하면서 모세의 행동을 칭찬하십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거기에 아주 기쁘게 응답하시면서 내가 네 앞에 선한 형상을 지나가게 할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보고 살 사람이 없는데 너는 나의 임재의 형상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라고 하면서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바로 기드온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해 주십시요 시험하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요 한번만 더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해 주십시요 라고 하면서 절실하게 표징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기쁘시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아주 절실한 기도는 이런 자세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에게 확신이 옵니다. 평안이 밀려 옵니다. 하나님이 해 주시겠구나! 아멘. 그때 거기서 물러서지 않고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 일이 이루어질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에게 먼저 은총의 표징을 보여 주시옵소서. 엘리야 선지자가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는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할 때 손바닥만한 구름으로 표징을 보여 주셨던 것처럼 나에게 표징을 보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를 당차게 하나님 앞에 그 기도를 끌고 나갈 때 하나님이 그것을 믿음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이 기드온의 기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로 이것보다도 더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순종하고자 하는 기도였습니다. 기드온이 잠시 믿음이 연약하여지기는 했지만 이 기도를 드리면서 그의 마음속에 있는 일관된 의지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하나님이 나같은 연약한 사람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해 내고자 하신다면 나는 순종하리라 하는 아주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기도하는 바에 대하여 순종하고 나아가서 자기가 기도하는 바를 위해서 헌신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기도는 아주 무기력한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전 목회하고 처음으로 교회를 사가지고 이리 온다고 하니까 지금이야 15년 지나면서 산전수전 겪으면서 자신감도 생겼지만 그때는 처음 경험인데 얼마나 긴장이 되었겠습니까? 그래서 비행기 타고 미국에 가다가 거기에 쭈구리고 앉아서 기도하고 하나님 도와 달라고 하면 막막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도와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것을 성도들 앞에서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고 하면 따라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모였을때는 큰소리를 쳐도 혼자 있을때는 이것 어떻게 되나 많은 사람들 데리고 엄동설한에 길거리로 나가야 하나 또 한쪽으로는 계속 이메일 보내면서 목사님도 그렇게 헌금 내 놓으라고 강조할 줄 몰랐다 배신감을 느꼈다 하고 하여튼 짜증나게 하는 일들이 계속 일어 났습니다. 그래서 어떻합니까? 그런데 그때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로는 헌신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실 것입니다. 정말 무리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것 힘들지 않을까? 믿음으로 하면 하나님이 도와 주십니다. 그래서 늘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던 사람들이 헌금을 얼마나 했는지 보았습니다. 별로 안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제가 평범하게 깨달은 진리가 있습니다. 자기가 어떤 일들을 위해서 기도 할 때 절실하게 기도하고 나아가서 기꺼이 헌신하는 마음이 없는 기도는 무기력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무기력한 기도를 드리면서도 비용이 들지 않는 수표, 하나님이 도와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남이 하겠죠 그것하고 똑같은 것이라는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실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남이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겠죠 그렇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교회를 지어 보지 않았더라면 깨달을 수 없는 놀라운 진리, 성도들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놀라운 비밀들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도와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돕는 사람들만 그렇게 말을 해라. 자기는 헌금을 안하면서 그러면 제가 도와 드릴 것입니다 그것은 희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도와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희생이 없습니다. 주님이 자기 쫄병도 아니고 자꾸 주님만 시킵니까? 자기가 좀 하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종하려는 의지가 없는 기도는 어떤식의 기도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런점에서 이 기드온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주 신기한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도 가만히 보면 이렇게 현저하게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일에 많이 헌신된 사람들, 이상하게 그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어떤 일에 대해서 보여주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인도하시고 그 사람을 사용하셔서 역사하게 하시고 아주 놀랍게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 기꺼이 순종하려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려고 하는 내용에 대해서 기꺼이 순종하려는 마음 그 일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을 때 하나님이 놀랍게 그 기도를 기뻐하셔서 간증을 남길 수 있는 은혜의 경험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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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4 (2009/10/04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5 (2009/11/0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6 (2009/11/08 주일오후예배)
5.하나님의 뜻대로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26:39).
기도 속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기도하는것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곳에서 받으시는 영광보다도 신자의 마음안에서 신자가 당신을 의지하는 가운데 가장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깊이 의존하는 사람입니다. 그속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렇게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하는 것이고 그가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는 모든 것들도 사실은 거기에서부터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 섬기는 것은 뿌리가 잘린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봉사하고 주님을 위해서 힘에 지나도록 수고하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섬김의 뿌리가 어떤것인지를 확인하는 일이 꼭 필요한 이유도 그것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순간에 말씀에 깊은 깨우침이 있어서 나를 객관적으로 돌아 볼때에는 예전에 나도 인정할 수 없었던 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런것 때문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데 기도는 바로 그 모습으로 돌아가는 마음과 정신의 운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기도가 잘 될 때에는 언제인가 하면 문제가 많이 있을 때 기도가 잘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가 많아도 정신이 복잡하면 고민만 많이 할 뿐이지 기도는 안 됩니다. 슬픈일을 만나면 많이 울지만 이상하게 눈물이 쏟아지는 기회를 타서 기도하려고 하면 이상하게 눈물이 그쳐버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니까 슬퍼서 우는 그 마음과 하나님 앞에 우는 그 마음은 근원이 다른데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동일한 근원이라면 기도할 때 찬송 부르지 말고 비극적인 멜로 드라마를 한편 보고 눈물이 촉촉이 맺혔을때 기도회를 시작하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두 정서가 완전히 근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기도가 가장 잘 될 때에는 슬픈일을 만나고, 고난이 있고, 시련이 있고 이럴때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평탄할 때 잘되느냐 그런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기도 안하는 사람은 시련이 오고 어려움이 많을 때에는 너무 괴로워서 기도할 수가 없다고 하고 평탄하고 모든 문제가 없으면 안락해서 기도의 제목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얻어 맞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기도가 언제 잘 되었는지를 돌아보면 마음으로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고 있을 때 그때가 기도가 잘 되던 때 였습니다. 그때에는 기도의 영이 넘치면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 만날 시간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마치 기도의 영이 충만해지면 솟아오르는 물을 손으로 막을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과의 만남이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토막시간이 났는데도 그때 주님을 부르면 짧은 시간에 깊은 주님과의 사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축복들은 주님을 많이 의지할 때에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는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입니다. 칼빈주의 신앙에 가장 중요한 특징이 하나님 주권사상입니다. 모든 일의 주권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인간은 그 하나님의 주권에 깊이 굴복하고 승복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대로 행하신 일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 하는 사상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상은 하나님을 깊이 의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기가막힌 사상이지만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짜증나는 운명론 같은 사상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칼빈주의자는 진짜로 칼빈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칼빈주의자의 주권사상을 흉내는 낼 수 있지만 마음 깊은곳에서 받아 들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사실상 마지막 기도를 드리시는 장면입니다. 이후에 기도를 드리시는데 체포되셔서 십자가에서 드리시는 기도이니까 자유로운 몸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이 순간이 마지막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의 몸을 가지셨으니 시장하면 배 고프셨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셨고,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때에는 마음이 아프셨고 그리고 당신이 사랑하던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면 예수님도 이별의 아픔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예수님이 참 사랑이 아니십니까? 그러니 예수님은 처음부터 죽기위해 이 세상에 내려 오셨고 그래서 십자가에서 당신이 죽으셔야지만 우리의 죄가 구속받게끔 되어 있는 것을 주님도 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죽으시는 죽음의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가 멸할 수 없는 생명이시기 때문에 죽어야 할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사람의 몸으로 죽는 것이 무엇인지는 예수님이 경험을 못해 보셨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이 큰 죽음은 단지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고 그리고 고통속에서 숨이 끊어져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상의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예수님이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라고 하는 것을 단지 십자가에서 숨이 끊어지는 것을 두고 하신 기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모독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땅에 계실 때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의 목숨을 마음대로 멸할 수 있는 이 세상의 권력자들 보다 영원히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가르치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예수님이 이 십자가의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두려웠던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진노를 받는 것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있겠습니까?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옵소서. 여러곳에서 예수님은 이 잔을 당신 자신의 죽음에 비유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고 죽는 그 죽음을 뜻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예수님이셨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는 형벌이 어떤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아셨을 것이고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이 누구보다도 더 많이 이 십자가에서 당해야 하는 하나님의 이 진노를 감당하는 십자가의 형벌을 두려워 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악하고 죄 많은 인간들은 하나님을 오늘날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해도 농담처럼 여기고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특성 자체가 인간을 대담하게 만들고 광기에 사로잡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순결한 예수님은 죽는 것은 무섭지 않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한번도 거리감이 없었던 사랑의 하나님께 창조주의 위대한 능력을 퍼부어지는 무서운 진노를 감당하는 것이 예수님도 육신을 입은 상태에서 두려우셨습니다. 그래서 그 방법은 모르지만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세 번이나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기도에 목숨을 걸지는 않으셨습니다.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그렇게 혼신의 힘을 쏟으며 기도하셨지만 예수님은 그 혼신의 힘을 이 잔이 지나가게 하는데에 쏟으셨다기 보다는 그 다음의 기도에 쏟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는 것이 예수님이 드리신 기도였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것을 적용해 봅시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것을 정당하게 두려워 하셨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드리셨지만 우리는 판단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모르지만 인생을 살고 보면 그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다면 내 인생이 참 안 좋은 쪽으로 풀렸을 것이다 라는 그런 기도들을 많이 발견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매우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 비행기를 타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는데 응답이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행기는 사고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극단적인 예 이지만 우리의 인생 속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만약에 기도를 우리가 입을 열자마자 모든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면 확실히 불행해 질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하는 것은 옳은것과 그른것, 정욕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와 신앙으로부터 비롯된 기도, 믿음으로 한 기도와 의심으로 한 기도와 나를 위한 기도와 주님을 위한 기도, 성경에 부합하는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내용들이 반복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신앙의 고매함은 그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내용이 정말 자신이 없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집중되어 있는 사람이면 그는 고매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단 기도가 진심으로 드리는 기도일 때 한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어떤 구체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나에게 이러이러한 것이 필요 합니다. 이러이러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해결해 주십시오. 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깊은 무게의 중심은 거기에만 실리지 말고 마지막에 보태어 지는 기도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여기에 기도의 무게가 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들이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지만 만약에 나의 기도가 내가 가진 욕심과 어리석음 때문에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데 방해가 되는 기도 라고 한다면 주님이 나의 뜻을 꺽으셔서라도 주님의 뜻을 성취해 주옵소서 라는 이 기도를 간절히 드릴 수 있을 때 사실 기도속에서 자신이 하나님을 의존하는 사람임을 온전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기도의 내용이기전에 사람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일 때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시선을 끌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믿으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전심으로 바라는 사람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고 그리고 그런 사람이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이 좋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마음껏 펼치실 수 있는 통로가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때 이 기도는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느끼는 행복과 희열은 드디어 얻어 내었다 라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도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돌보시는 구나 나의 인생사가 주님의 마음에도 관심사 이구나 라고 하는 사랑의 소속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을 많이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무엇을 기도하든지 마음 깊이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것이 가장 최상의 기도의 응답이라는것을 믿고 그렇게 여러분 기도의 이 제목을 보태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도가 하나 하나 응답되어 가는 과정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져 가는 과정과 완전히 일치할 때 여러분들은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섬기는 사람들이 어느때 보다도 많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경회를 앞두고 기도하러 기도원에 들어가 준비할 때가 많지만 어떤때는 좀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잠자기가 기도원보다 편한 곳에서 말씀을 준비할 때도 있습니다. 요즘은 바빠서 못가지만... 그런데 어떻게 하든지간에 말씀을 준비하는 가운데 성도들이 기도하고 안하는 것이 기가막히게 느껴집니다. 정말 느껴집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어느해인가 하나님이 서서히 서서히 무엇을 전할까 이것을 해볼까 저것을 해볼까 그러다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날 아침에 하늘을 열고 막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느껴집니다. 성도들이 엄청 기도하는 구나... 공간을 초월해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 하나하나가 우리의 마음속에는 기억되지 않지만 주님의 마음에는 여러분들이 골방에서 무릎을 꿇어도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얼마나 큰 방편이 되겠습니까?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돈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허리를 굽히고 봉사하는것은 허리라도 튼튼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어려운 일이 있어서 돕는다고 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젊고 머리가 빨리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머리도 안 돌아가면서 슬리퍼 끌듯이 옆에서 하면 젊은 사람들이 일하는데 짜증이 납니다. 모든 것이 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그것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심지어 어눌해 져도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기도이니까 기도는 할 수 있고 허리가 아파서 구들장을 짊어지고 누워 있어도 전도하러는 못가도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교회에 못나가도 기도는 할 수 있고 병상에 아파서 누워 있어도 교회에 나와 예배는 못 드려도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찿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이 하신바와 같이 이렇게 당신 자신은 하나님의 형벌을 받는 것은 두려웠지만 결국은 피하게 해 달라는 것에 목숨을 건 것이 아니라 아버지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나의 뜻이 아버지의 뜻을 방해하지 말게 해달라는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 했더니 주님이 기도한 그 이상의 것을 이루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도 이렇게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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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4 (2009/10/04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5 (2009/11/0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6 (2009/11/08 주일오후예배)
6.꺽이지 않는 열망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31).
그 기도 자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도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으십니다. 또 하나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기도를 드린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사랑 받는 사람이 아니면 그 기도도 하나님이 쉽게 응답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기도 같아도 그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그 기도를 하는 동기는 각각 다를수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개인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기도가 있듯이 공동체에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있고 기뻐하시지 않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스코트랜드에 갔다 왔는데 영국 윗 지방입니다. 그런데 스코드랜드면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16세기에 존 낙스라는 사람이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곳입니다. 이분의 스승이 조지 위셔트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카톨릭 교회인 영국 국교의 주교를 지내던 사람인데 대륙에서 건너온 개혁신학을 접하고 나서 결연히 개혁신학으로 돌아 선 것입니다. 그랬는데 물론 그 전에는 해밀톤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개혁신학을 받아 들이다가 위셔트라는 후계자에게 넘어가고 그 사람이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박해를 받아서 화형을 당합니다. 그래서 이 스승을 영향을 받고 존 낙스라는 사람이 개혁신학에 심취하게 되고 아주 굉장히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당시 스코트랜드 지방에 여왕이 메리에라는 여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일만명의 군대보다 존 낙스가 설교하는것을 더 무서워 했을 정도로 그렇게 비범한 설교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고 제가 읽은 전기에 의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종교개혁을 하다가 프랑스가 쳐들어 옵니다. 그래서 폭격을 하고 거기에서 체포가 됩니다. 그래서 7년동안을 노에 살이를 합니다. 밴허에 보면 배 밑창에서 노 젖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적인 능력속에서 7년만에 다시 스코트랜드로 돌아 오고 개혁의 불을 지피게 됩니다. 이 사람이 개혁을 일으킬 때 카톨릭 신학을 가질까 개혁신학을 가질까 하면서 오락가락하며 있던 여왕이 메리라는 사람인데 이 여왕을 폐하라고 안 부르고 마담이라고 그것은 우리말로 아줌마입니다. 간이 배 밖에 나온 사람입니다. 그렇게 설교를 하고 그러면 이 여왕은 펑펑 울면서 잘못했다고 하고 아무튼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카톨릭과 개혁신학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메리 여왕에게 그렇게 설교하던 사람이었고 그렇게해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됩니다. 거기에서 보니까 영국에서는 가장 큰 카톨릭 교회일것 같습니다. 다 부서져서 터만 남았는데 가도 가도 예배당이 끝이 없습니다. 어마어마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부서지고 돌무덤만 남았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양반이 이것을 다 때려 부셔서, 카톨릭 성당을 때려 부셔서 거기서 돌맹이를 빼서 개혁교회를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는 천주교도들도 와서 묵상에 잠기고 가는 역사의 현장이고 개신교도들도 와서 묵상에 잠기고 가는 현장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지금도 철저하게 그 사람들이 가졌던 유산들이 보존되어 있고 밑의 잉글랜드에서는 청교도라고 부르는데 스코트랜드는 잉글랜드를 따라 가는 것을 싫어해서 영국하고 우리나라하고 축구를 한다고 하면 스코트랜드 사람은 우리나라를 응원하고 영국이 지면 그렇게 기뻐 한다고 합니다. 그런 나라인데 그렇게 개혁운동을 펼쳐 나갔는데 자신들은 언약도라고 자신들을 다시 칭했습니다. 그래서 카비네티어라고 하는데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매우 특별한 백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지켜 간다 하고 수 많은 사람이 순교 합니다. 2만명이 순교를 합니다. 그렇게 엄청난 피를 흘리면서 신앙을 지켜 나가는데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 신앙을 올바로 지켰던 교회들이 오늘날에 자꾸 쪼개지는 것입니다. 분열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보니까 아주 중요한 개혁파 신앙을 가지고 있는 교단이 또 찢어지려고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찢어지는 이유가 뭐냐고 했더니 예배 시간에 악기를 쓸거냐 말것이냐 물론 이제 당시의 문맥으로 보면 그것이 굉장히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그것이 그렇게 교단을 찢어 놓을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복음성가중에서는 물론 별로 안 좋은 것도 많습니다. 사실은 기독교의 복음이 아니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을 담고 있는 복음성가도 많습니다. 여러분도 가끔 부르던데 이번에 그 교회에 가서 신랄하게 비판을 했는데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하면서 이것 뿐입니다 하는데 이것뿐이면 어떻합니까? 그것이 결국은 무엇을 보여 주는가 하면 오늘날의 현대인들의 심리가 몰입되어 가고 자기가 감동만 받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것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고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고 그 사랑을 느끼면 내가 이렇게 이렇게 거룩하게 살겠습니다 하면 되는데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그것 뿐입니다 하고 끝납니다. 이것이 뭡니까?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오늘날 현대 사상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몰입하고 거기에 필이 꽂혀 들어 감으로서 충분한 그런 현대 정신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것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진지한 생각이 없이 만들어 진 것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교회에서 불리어지느냐 안 불리어지느냐에 따라서 의견이 많이 나뉠수 있지만 그것이 교단을 다시 찢어 놓을 정도로 교회를 갈라 놓을 정도로 그렇게 엄청난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교회의 신앙의 문제를 다룰 때 항상 이런 지혜를 가졌습니다. 우리가 지금 논의 하고 있는 것이 근본적인 조항인가 비근본적인 조항인가 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조항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다든지 아니면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얻어 진다든지 종말이 반드시 있다든지 이런 것이면 확실하게 근본적인 조항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갈라지면 이단이 되든지 하는 것이지만 세례를 할 때 사람을 물속에 풍덩 담가 버릴 것인가 아니면 물을 뿌릴 것인가 그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에 있어서 타락전 선택설이냐 타락후 선택설이냐 종말에 있어서 후천년설이냐 전천년설이냐 이런것을 가지고 교단을 나누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것은 비 근본 조항이니까 우리는 물로 뿌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너는 풍덩 담가야지만 옳다고 생각이 드냐 이점에 있어서 우리는 견해가 다르다 우리는 이것이 옳다고 믿는다 너는 그렇게 믿느냐 그럼 너는 그렇게 믿어라 이 부분에 있어 우리가 각기 다르게 생각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예수 안에서 형제다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교회가 갈라지는데 음악을 쓸까 쓰지 말까 하는 것을 가지고 교회가 갈라진다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 말고도 급한 기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여기 보십시요? 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었습니다. 빌기를 다해매 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모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었다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끝났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인곳이 진동하면서 기도하던 모든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역사가 일어 났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빌은 것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빌었습니까? 그 앞의 29절을 보십시요.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발단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외쳤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다가 붙잡혀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것을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협박을 했더니 하는 말이 하나님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겠느냐 굴복을 안 하니까 사람들을 협박을 하고 그리고 놓아 주었단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왔을 때 교회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드디어 본격적인 박해가 오는 구나 할 때 그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 빌기를 하나님 우리는 그래도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이 일들에 우리는 헌신 해야 되겠습니다 우리에게 맡겨 주신 본래의 사명을 이렇게 권세 가진 사람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핍박한다고 해서 그치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였겠습니까? 안 기뻐 하시는 기도 였겠습니까? 음악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을 가지고 기도하지 말고 그 냉담하게 돌아 선 영국 사람들의 차가운 마음이 뜨거운 은혜로 녹아져서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하는 것이 더 급하지 음악을 쓸거냐 말거냐 악기를 쓸거냐 말 것이냐 그것을 가지고 하고 있냐는 것입니다. 각자 각 교회가 알아서 담임목사 책임하에 결정한다 그러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쓰고 싶은 교회는 쓰고 쓰기 싫은 교회는 안 쓰고 하면 이것 보다 우리는 더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영혼과 부흥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간절히 교회가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는데 모인곳이 진동을 하면서 이 진동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권능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땅이 진동하는 역사가 구약에도 나오고 신약에도 나오는 것입니다. 옥에 갇혔을 때 바울과 신라에게도 이 터가 흔들리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권능의 상징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 주심으로 너희가 지금은 너희가 더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고 있으나 내가 권능으로 내가 함께 하마 이것을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두려움에 쌓여 있던 이 사람들이 이 기도를 통해서 성령이 충만해 지는 역사가 일어 났습니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교회적으로 기뻐하시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도 기도하다 보면 처음에는 자기 마음에 전혀 없는 기도였는데 막상 시작을 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기도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입니다. 공동체적으로 모여서 기도할 때 처음에는 사람들의 마음에 잘 와 닿지 않는 기도인데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사람들이 모두 마음이 하나로 모아 지면서 하나님 앞에 뜨겁게 올라 가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 기도가 결국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이기 때문에 이렇게 뜨겁게 올라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 하시기 때문에 이렇게 은헤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어떤 기도는 하나님 앞에 기도 했더니 안 좋아 하는 기도도 있고 옳은줄 알고 기도 했더니 사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 때도 있지만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열심을 주시고 복음을 전할 일꾼들을 보내 주시고 그들에게 헌신된 마음을 주셔셔 자신의 영혼을 위해 수고하는 것처럼 남의 영혼을 위하여 복음을 위해 헌신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는 기도는 어떤 순간에 어떻게 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수 없는 기도입니다. 그런 기도의 일치를 이루게 되었을 때 그들은 오히려 커다란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 같으면 이러지 않겠습니까? 자! 드디어 로마정부로부터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 되었다. 우리는 이제 대책 위원회를 만들자! 그래도 어떻게 하면 로마정부를 좀 달래고 그럴 수 있는 길이 없나 의논해 보자. 혹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없냐? 줄이 닿을데가 없냐? 그렇게 찿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 이 복음을 전파하는 명령이니 담대히 이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을 오히려 하나님께 구하는 기회로 삼자 그리고 대책위원회도 구성하지 않고 로마 정부에 교섭단을 보내지도 않고 오로지 교회에 모여서 간절히 기도했더니 오히려 하나님이 그 핍박 받는 사건을 계기로 해서 온 성도들에게 충만한 은헤를 부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충만한 성령이 부어지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더라 했습니다. 상황이 바뀌었습니까? 무슨 상황이 바뀝니까? 사도들을 핍박하고 지금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려고 하는 혈기등등한 위협이 있었지만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지게 되니까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큰 힘입니다. 존 낙스가 개혁을 일으키던 그 성터에 가 보니까 땅굴이 하나 있습니다. 땅굴이 허리가 아프도록 꾸부려야지만 들어가는 땅굴인데 입장료를 받았습니다. 꽤 비쌌습니다. 그래도 들어 갔는데 그 땅굴이 18세기에 영국의 언약도들을 잡아 가두는 거기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습니다. 공기하나 통하지 않는 캄캄한 땅굴에 물도 없었을텐데 축축한 곳에 수 없이 때려 집어 넣고 문을 쾅하고 닫고 캄캄한 어둠속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이 가득할 때 한번만 내가 내 신앙을 버립니다 포기합니다 라고 공헌하며 살 수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그속에 갇혀서 죽어 간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이들 위에 강하게 역사하니까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할수록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주시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기도는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환경과 상황을 능가 합니다. 사람이 보기에 그 환경을 도저히 넘어 설 수 없을것 같은데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그것을 넘어 서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들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기도를 드림으로 오히려 위기를 통해서 더 충만한 하나님의 능력을 힘 입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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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4 (2009/10/04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5 (2009/11/0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6 (2009/11/08 주일오후예배)
7.상한 심령의 기도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 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기뻐하신다 라고 할때 성경은 그것을 두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우선 첫째는 무엇인가 하면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그때 그 기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솔로몬의 기도 아닙니까? 솔로몬이 하나님앞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천번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이 무엇을 구하냐 하셨을때 이 솔로몬은 그 무엇보다도 나라를 하나님 마음에 맞게 잘 다스릴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 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귀와 영화와 이런것을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한것을 하나님이 칭찬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내용의 기도일 때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만을 말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 그 자신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야지만 그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재물과 헌재자가 따로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신약에서 기도하는 내용과 기도자가 나뉠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것처럼 하나님 앞에 좋은 사람이 좋은 기도를 드리지 하나님 앞에 악한 사람에게서 내용만 좋은 기도가 나온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은 둘이라고 말하지만 그 둘은 하나일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 생활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은 무엇을 기도해야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드실지 몰라서 기도를 못한다기 보다는 내가 그 기도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 더 현실적인 문제가 아닐까요?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가장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기뻐하실까요? 안 기뻐하실까요? 기뻐히시죠. 그러면 그 기도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영혼을 향한 사랑이 있을 때에는 그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해도 나옵니다. 자기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고 영혼에 대한 연민이 있을 때에는 그 사람이 비록 내 구역이 아니고 내 가족이 아니고 내 교구가 아니더라도 간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이 내 마음속에서 식어지게 되면 그 사람이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내 가족인데도 인간적으로는 그렇게 생각이 되는데 실제 기도할 때 그 영혼에 대한 연민이 내 마음속에서 솟아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사실은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지 폭포수처럼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데 다른일이 바빠서 기도를 안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떤 생각에 이르게 되는가 하면 우리가 기도 생활을 지속함에 있어서 기도 내용을 관리하는 것 보다 더 힘든것은 기도하는 자기 자신이 적합하도록 계속 남아 있도록 관리하는 그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우리에게 신자가 기도의 은혜에서 멀어지는 4단게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가 무엇인가 하면 기도의 준비를 갖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땜의 수문을 확 열면 물이 꾸물꾸물 거리고 한참 서 있다가 의논하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뚜껑이 열리자 마자 확하고 쏟아져 나와서 뚜껑을 열던 사람을 떠내려 보낼 정도로 쏟아지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차 있을 때에는 기도의 영이 꽉 차 있어서 그래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확하고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신체를 만드실 때 우리의 몸이 외부의 물체와 부딪혀서 찢어지거나 하면 제일 먼저 어떻게 되게끔 하셨습니까? 피가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그 피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굉장히 좋은 것이랍니다. 왜냐하면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옴으로서 다른 것들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막아주고 피에 있는 균과 더불어 싸우는 물질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외부로부터의 침투를 막는 것입니다. 똑같이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기도의 은혜로 가득차 있으면 우리가 상황이 바뀔때마다 기도가 필요한 시간이 되면 한편으로는 간구가 튀어 나오게 되고 감사가 튀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필요는 간구로 그 다음에 충분한 것은 감사로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끊임없이 바깥으로 활동하며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상태 입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능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은혜에서 멀어지게 되면 기도하기를 내키지 않아 하는 것이 두번째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필요성이 있는 상황이 계속 벌어지는데 이 속에서 기도가 확 쏟아져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번째 단계입니다. 세번째 단계에서는 기도의 모양은 가지고 있는데 능력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적인 기도 모임에도 나오고 기도의 모양은 있는데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냥 중얼중얼 한다든지 깊이 기도하다가 푹 잔다든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번째 단계는 기도해야 할 규범 자체를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의무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4단계를 거쳐서 기도가 파괴되고 나면 성벽 허물어진 성처럼 우리는 외부의 적들에게 노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기도의 내용을 관리하는것 보다도 더 힘든것은 그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지켜 나가는 것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따로 떨어진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삶과 함께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열렬히 간구한 내용들을 보면 대부분 그렇게 살고 있는 것들 입니다. 전도하는 사람들이 전도할 능력이 없다고 그래서 전도할 힘을 달라고 기도하지 화투치는 사람들이 끝나고 그런 기도를 하지는 않습니다. 화투치는 사람 돈 따게 해 달라고 기도 합니까? 그건 또 적합한 기도 제목이 아니죠? 하나님 저는 너무 무지 합니다. 더 많은 말씀의 빛을 제게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계속 탐구하는 사람이 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살도록 도와 주십시요. 저의 삶은 너무 세속적입니다. 이런 사람은 격렬하게 사는 사람들이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저의 생활이 너무 나태합니다. 불꽃처럼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요. 제가 너무 많이 잠을 잡니다.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낭비하지 않는 사람이 그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됨과 기도함이 처음에는 이것이 수평을 이루지 못해도 시간이 지나면 삶이 기도를 못 쫒아 가면 삶이 주저 앉든지 아니면 삶이 기도를 못 쫒아 갈 정도로 뛰어나면 기도가 쫒아 오든지 결국은 이것이 수평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에서 중요한 하나의 비밀이 있습니다. 살아야 할 삶이 있는데 그 삶을 살아할 능력이 없을때가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살아야 할 삶은 있는데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이 없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때 이것을 해쳐 나오는 비결이 무엇인가 하면 살 수는 없지만 살도록 하나님이 분부하시는 삶에 대해서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도전을 하면서 그 대신에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죠?
(예화) 지난번 올림픽때 자메이카 어느 선수가 세계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9초60에 100미터를 끊었습니다. 불과 몇십년 전만해도 하나님은 10초 안에 못 들어 오도록 인간을 만드셨다 이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뚫고 나가서 9초8, 9초7, 9초6인가 까지 내려 갔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사람이 조만간에 신기록을 경신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친구가 딴청하고 뛰었습니다. 전광판에 자기가 몇초나 뛰었나 쳐다 보면서 뛰었습니다. 더 최선을 다 했으면 더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1미터 90몇센티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적인 힘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보고 뛰는데도 그렇게 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목표를 세워놓고 그 사람이 그렇게 최선을 다 하니까 9초7, 9초6 이렇게 돌파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으로서는 상상이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100미터에 몇초쯤 나올것 같습니까? 그 사람은 9초6에 뛰었는데 우리 평범한 사람이 뛰면 18초 나옵니다. 물론 12초에도 뛸 수 있습니다. 50미터로 자르면... 그래도 제가 한창 고등학교 다닐 때, 잘 뛸 때 14초2까지 뛰었습니다. 그 당시에 14초2면 별로 느린것 아니었습니다. 물론 13초에 뛰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특별한 아이들이고... 그런데 지금 뛰면 20초에 뛰려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들어 보십시요.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100미터 달리기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내가 심장이 팍하고 터질지라도 이것을 뛰고 죽는다면 여한이 없다 하고 순교의 정신으로 뛴다고 할 때 비슷하게 가겠습니까? 순교가 아니라 별것을 다 해도 되는것은 되는 것이고 안 되는 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아야지 하고 목표를 정해 놓았는데 은혜가 없고 신앙이 가라 앉아 있고 모자라는데 그것을 정해 놓았다고 뛸 수 있겠습니까? 못 뜁니다. 못 뛸지 알면서도 정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냐면 달려 보는 것입니다. 목표를 해 놓고 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길이 두가지입니다. 주저 앉든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 하든지... 둘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평생에 유명한 기도를 합니다. 그 사람이 굉장히 방탕한 사람이었던것 여러분들 아시지요? 방탕한 천재였습니다. 17살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 죄의 길에서 돌이키기 위해서 애를 쓰는데 언뜻언뜻 양심의 가책이 오는데 돌이킬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은혜론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 이것은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이구나!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펠라디우스라는 사람과 치열한 논쟁을 벌입니다. 펠라디우스는 무슨 소리냐 인간이 하나님이 구원하시기에 적합하리만큼 착하게 살 수가 있다 라는 것이 펠라디우스의 주장이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절대 인간은 그렇게 살 수 없다 그리고 성경을 가지고 논쟁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명한 펠라디우스와의 자유의지 논쟁입니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직 건재하기 때문에 마음을 안 먹어서 그렇지 마음을 먹고 끊임없이 노력을 하면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하기까지 인간은 거룩해질 수 있고 선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에게 그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완전한 전신마비에 걸린 사람이 달리기를 하려 하는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의지가 강하고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을 먹는다 할지라도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의지의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으로 하여금 그 희망이 없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될 수 있고 살아 갈 수 있느냐 그 원동력을 하나님의 은혜에서 답을 찿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명령하시는 바를 나에게 주소서 그리고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명령하시옵소서.' 앞의 것이 은혜를 달라는 것이고 뒤의 것이 가야 할 의무를 달라는 것입니다. 감동적이죠? 명하는 바를 주소서 그리고 원하는 바를 명하시옵소서. 그런데 오늘 시인은 자기의 경험속에서 바로 그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범죄한 후에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 예전에 드렸을때는 하나님이 아주 즐겁게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제사를 받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깨닫게 되었습니다. 재물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재물을 바치는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제사는 나 자신이 변하는 것이다 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악된 심령이 아니라 상한 심령, 나 중심으로 자아가 뭉쳐진 심령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깨뜨려진 심령 그것을 여기에서 통회하는 마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이 히브리 말로 원래 레브 다께 라는 단어인데 이것이 뭐냐면 고기 같은 것들이 칼이나 도끼 같은 것들에 짓이겨진 형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두나 이런것을 만들 때 고기를 다지지 않습니까? 그 고기를 다지면 어떻게 됩니까? 고기가 그냥 있을때는 자기 형태를 고집합니다. 그래서 삶으면 퍼집니다. 그런데 다지면 원하는 대로 주무를 수 있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하나님이 어루만지실 때 형태가 하나님에 의해서 빚어지고 변화 될 수 있는 마음이 되는 것 그러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릴 때 하나님이 그 기도를 기뻐 하신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운동을 한다고 할 때 이제 무슨 운동이든지 간에 달리기는 기본입니다. 그것을 기초 체력이라고 합니다. 제가 아는 학생 가운데 하나가 탁구 선수 였는데 탁구공이 5그람입니다. 그런데 그 5그람짜리 공으로 탁구를 치기 위해서 하루에 20킬로미터씩 로드웍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초적인 체력입니다. 똑같이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든지 간에 그 기도할 수 있는 기본적인 영의 기초체력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옳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 보실때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기도의 기초체력입니다. 그것이 되어 있으면 어떤 기도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로 바꾸어서 하나님앞에 드릴 수 있는 힘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는 하나님을 바꾸어 놓으려고 덤비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변화되려고 엎드리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바뀌게 되고 우리의 심령에는 변화되어서 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신앙생활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위한 기초체력을 튼튼하게 해서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만한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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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6 (2009/11/08 주일오후예배)
8.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기도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3:21-22).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때에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임하셨다는 이야기는 우리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세례를 받으실때에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임하신 상황이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상황이었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간구합니다. 오늘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네 개의 복음서 모두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에 성령이 임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 하셨다는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그러니까 다른사람에게는 간과되었던것이 특별히 기도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던 이 누가에게는 아주 분명하게 비친것입니다. 그래서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고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임하시는 장면이 연출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생애의 맨 처음, 공생애의 맨 처음을 이렇게 기도로 문을 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을 때 하나님은 이 기도를 기뻐하시는 증거를 여러 가지로 보여 주셨습니다.
네 가지가 나오는데 첫째는 하늘이 열린 사건이었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이야기는,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이 성경에도 여러번 나오는데 구약에서는 대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주어지거나 하나님의 큰 능력이 부어질 때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수동태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하늘을 여실 때 그 하늘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보여주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리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혀 있었던 많은 닫혀 있었던 것들이 열리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닫혀 있었던 것들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 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트이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랬동안 하나님과 막힌 관계속에서 살다가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감격적인 용서와 은혜의 경험을 대게 기도속에서 하셨던 것들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늘의 문을 여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엘리아는 3년6개월동안 비가 오지 않았을 때에 기도하자 하늘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간구하고 기도하실 때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열어 주셨으니 여러분들도 이렇게 기도속에서 하늘의 문이 열리는 은혜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두번째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분 위에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성령이 오시지만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성령이 오신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성령의 오심과는 다르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경험하는 성령의 오심은 성령님의 작용이, 영적인 작용이 우리에게 아주 활발해지는 것이라면 이것은 성령님이 우리와는 비교되지 않는 아주 직접적인 방식으로 예수님에게 임재하셨던 것인데 많은 신학자들은 이것을 예수님이 예수님에게 꼭 한번 일어난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기도할때에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이후에 예수님의 성령의 역사가 사도행전에 와서 교회에 똑같이 나타나게 되는데 성령은 성령이고 기도는 기도이지만 이 하나님의 성령은 기도속에서 기도를 수단으로 활용하여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교회를 힘차게 움직이던 하나님의 세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말씀과 기도와 성령이었습니다. 이 세가지가 따로 떨어지지 않고 말씀의 깨달음이 있는 곳에 오늘 설교처럼 기도가 나오고 그 속에서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이 기도하는 사람 마음 안에 역사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통합된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이고 교회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있고 혹은 하나님이 어떤분이신지를 아는 새로운 지식의 증가가 있고 교회가 간절히 기도할 때 거기에 하나님의 성령이 부어지시는 경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하셨다가 성령이 임하셨던 것처럼 교회의 시작도 모여서 기도하다가 성령이 임하십니다. 멈추는것 같지만 모여서 기도하면 다시 성령이 임하시고 하면서 성령과 기도가 떼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삶에 대해서 아무리 많이 외쳐도 깨닫는 말씀의 지식과 그 지식을 기초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기도의 실천이 없으면 대게 그런것이 있다 라는 이야기지 자기 자신속에는 경험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처럼 기도는 성령이 충만하게 우리에게 역사하시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 충만한 성령의 은혜의 임재하심과 임하심이 우리로 하여금 무기력한 삶을 떨치고 생기와 능력으로 충만한 생명의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니 여러분들도 기도해서 이런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것은 청교도들에 의하면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하나님이 인쳐 주시는 역사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하실 그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들과 하나님 사이가 아무런 격의가 없이 아주 친밀한 교제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전에는 때묻고 죄짓고 결점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 내가 사랑받고 있다 그리고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이것을 충만하게 느끼면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의 행복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 우리들의 기도속에서 경험되어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그래서 과거에 지은 많은 죄가 있고 기도하지 않을 때는 끊임없는 양심의 가책속에서 살지만 주님앞에 기도가 살아 있을 때에는 오히려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다시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잘못된 과거를 통해서 훨씬 두드러지고 찬란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훨씬 큰 것입니다. 스스로를 의롭다고 믿고 자기 자신을 옳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격이 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격이라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 충만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할 때 이렇게 자기의 허물과 부족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번째로는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라고 했는데 이것은 청교도들에 따르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려고 하는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인침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에 다른곳에는 안 나오는데 마태복음 한군데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세례를 받을때에 세례요한과 잠깐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 세례를 받아야 되겠다 그러자 세례요한이 펄쩍 뛰는 것입니다. 이 세례는 죄 씻음의 표입니다. 흠 없는 어린 양을 세례요한도 알고 있었는데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함께 받으신다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거꾸로 오히려 말하기를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겠는데 어떻게 당신에게 내가 세례를 베풀수 있겠습니까 그럴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라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래서 당신 자신이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세례 받는 것이 가당치 않았지만 당신이 세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는데 적합하다 이렇게 생각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기의 이익을 생각하기 보다는 당신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더 많이 염두해 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일들을 많이 결정합니다. 또 자신의 감정을 표하기도 하고 주장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위하여 라고 하는 토씨를 붙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누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나님의 일은 명목이고 사실은 내가 이득을 챙기려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께서는 누가 어떤 중심으로 당신을 섬기고 일하는지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분명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당신의 이익과 당신의 좋은것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에 당신이 세례 받는것에 적합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부끄러울지도 모를 그런 세례를 당신 스스로 자취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예수님이 죄 씻음의 표로 받는 그 세례에 예수님이 참여 하셨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세가지로 답할 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무엇인가 하면 세례의 중요성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대대로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이 세례가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죄 씻음의 표요 정화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이 세례를 통해서 이제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에는 우리 모든 인간들이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연합을 이루기 때문에 이 세례가 예수님이 매우 중요하다 라고 하는 것을 교회에 인식시키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이 세례를 받으시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비록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세례를 받으심으로서 당신도 똑같은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와 한 형제 되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와 자신을 동등하게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 앞에 당신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리시기 위해서 당신의 백성과 하나 되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속죄의 교리에서 내포적대신 이라고 있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우리인데 우리를 예수님이 다 끌어 안고 당신이 대신 형벌을 당하심으로서 당신이 당하신 형벌을 우리 모두가 당한것처럼 우리 모두에게 그 덕을 미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내포적대신의 속죄 혹은 희생이라고 배우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내포적대신이 되려면 속죄하려는 예수님과 속죄를 내포적 대신으로 덕 입는 인간 사이에 하나됨이 이루어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사장은 하나님을 향하여 이 땅에 있는 백성들을 섬기는 자 이지만 백성들 중에 택하여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똑같은 이스라엘 백성의 택함을 입어서 제사장이 된 것처럼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이셨지만 인성으로는 인간과 똑같은 몸을 취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당신 스스로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비록 죄는 없으셨지만 세례를 받으심으로서 죄인들에게는 죄 씻음의 표 였지만 예수님은 공적인 메시아로서 취임하는 절차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이제 너의 죄가 씻기어졌다 라는 음성이 들린것이 아니라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노라 너를 내가 기뻐하노라 라고 하는 응답이 들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례는 하나님 앞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으로 메시아가 당신 자신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보증을 받고 당신 자신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어쨎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으시며 기도를 받으실때에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나는 너를 기뻐하노라 하고 예수께 대해서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이 강변에서 그렇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무슨 기도를 하셨는지 여기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예수님이 그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때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실 때 그 기도가 무슨 기도였겠습니까? 이제 당신 자신은 사적인 생애로 분리 되어서 공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자신을 바치는 시간이 되었는데 이때 그의 기도는 당신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이땅에 있는 죄인들을 위하여 성취하여야 할 구속 사역 이외에 무엇을 위해 기도했겠습니까? 당신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이렇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고 내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리고 예수님이 하시려는 그 일을 온전히 기뻐하시는 그런 징표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처럼 완전한 우리들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주님 앞에 더 많이 기도해야 하고 기도할 때 이렇게 하늘이 열리고 주님의 인정을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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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6 (2009/11/08 주일오후예배)
9.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여기서도 오늘 아침 설교에서 언급한 그런 내용들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곳에서 이방인들이 기도하는것과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들이 기도해야 될 것들을 대조해서 말씀하셨고 바리새인들이 하는 기도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에게서 배운 기도가 아니라 이방인들의 기도하는 관습속에서 배워 온 것이라는 것을 여러번 지적하셨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기도에 있어서 외식의 문제였습니다. 길거리에 서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하지 말거라 또 중언부언하면서 기도하는 것도 이방인들의 기도하는 풍습이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이제 구하는 대상에 대해서 이방인과 대조를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당시의 하나님의 자녀라고 스스로 자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껍질은 하나님을 믿는 여호와의 종교를 가지고 있어도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얼마나 광범위하게 이방의 사상에 물들어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만 그랬겠습니까? 모든것이 물 들면 전체적으로 물 드는 것이지 기도만 그랬겠습니까? 그 기도가 예수님께 문제가 되었으니까 예수님께 노출이 되었지 다른 모든 방면에 있어서도 그렇게 이방인들의 생각에 젖어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이 껍질로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열심히 살아간다고 되어 있지만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얼마나 이방적인 사상에 의해서 오염된 가운데 우리들이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며칠전에 인덕원에 차를 타고 가다가 신호대기로 잠시 섰는데 옆에 봉고 버스가 하나 와서 섰는데 교회 버스 였습니다. 우연히 쳐다 보았는데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나는 교회 였습니다. 어떻게 교회 이름을 지어도 그렇게 짓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해석이야 예수님을 잘 믿어서 은혜 받으니까 신난다 그러지만 사실 누가 은혜 받았을 때 신난다는 표현을 씁니까?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무슨 신바람 건강법이 어쩌구 저쩌구 하니까 어디서 생각도 없이 따다가 교회 이름을 덜컥 붙이고 그냥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은 얼마나 이방 사상에 물들어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당신의 꿈에 우리 교회가 날개를 달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달아 주는지 제가 묻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내용들이 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형식은 기독교적인 형식을 가지고 있어도 이 안에 파고 들어오고 있는 내용들이 전부 다 이방사상들이 스며 들어와서 침투해 있는 것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런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를 타고 이어져 들어 오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 예리한 시각을 가지지 않으면 이것이 왜 이런식으로 변질되어 가는지를 정확하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물들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의문을 가져 보면 의문이 되는 것이 참 많지 않습니까? 우리 어렸을 때에는 그래도 선하게 기준 같은 것들이 서 있었습니다. 물론 어른들이 그것을 다 지키며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명절 같은 때에 친척집에 가서 세배를 하면 세배돈도 안 주는 사람들이 머리는 많이 쓰다듬었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쓰다 듬으면서 너 이 다음에 훌륭한 사람들이 되어야 된다 라고 했습니다. 이 다음에 착한 사람이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착한 사람이라기보다는 훌륭한 사람... 너는 이 다음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된다 물론 훌륭한 이라는 그 말 속에는 먹고, 입고, 쓰고 하는 그런것에 대한 궁색함을 면하여야 한다는 것이 들어가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그런 궁핍함으로부터 벗어 난나는 것은 틀림없이 들어가 있지만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로 인해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고 참된 것을 구현하고 하나님이 없는 사람도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혹시 여러분 자녀 머리 쓰다듬으면서 너는 이 다음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된다 이렇게 해 보신 분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부모로부터 그렇게 머리 쓰다듬음을 당하면서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여러분들은 왜 안 합니까? 의식을 가지고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이 시대에 살면서 서서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설득되어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결국은 그런것들이 자기 자신을 변해간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떤 생각을 하셔야 하는가 하면 항상 마음속에 나도 굉장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속적인 존재가 되었다 라는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의해 그것이 다듬어 져야 합니다.
최근에 데이비드 웨일즈라고 하는 사람의 5부작을 읽고 있는데 굉장합니다. 그런데 정신이 번쩍 날 정도로 여러분들이 작년 9월에 비가 쏟아 지는 날 광림 수도원에 올라 갔을 때 들으시면서 충격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제가 3년 연구한 것입니다. 그것이 한두권 책을 읽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 제가 준비한 것은 몇 주 안되지만 그런 생각이 형성되기 위해서 책 20권 가져다 놓고 생각했나보다 그런것이 아니라 내가 고민이 되고 질문이 떠 올라야지 답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신앙생활하면서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질문하는 수준이 그 사람의 신앙 수준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비록 허황되어 보여도 질문을 올바로 하면 그 사람은 그것을 계속 고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답을 찿아 갑니다. 그런데 그 질문이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도 한번 해보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이런 말을 나는 안하는가? 내 손자들에게 이런것을 안 하는가? 그런것에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하면서 3년여 동안에 그 책들을 읽고 고민하지 않았다면 전혀 나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질문들이 그렇게 크게 들려오기 시작하면서 고민하는데 누가 가르쳐 주겠습니까? 이상하게 그런것을 고민하는데 누가 정답이다 하고 가르쳐 주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책을 읽으면서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아! 이것이 이렇게 되는 것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때 발표한 것이 2시간 20분정도 발표 했지만 저는 눈이 확 열리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철학과 역사가 들어가 있으니까 예배 시간에 설교하기에는 부적합하지만 그런것들은 설교시간에 녹아 있는 것입니다.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 눈을 열어 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번에도 데이비드 월즈를 읽으면서 미국에 있는 신학자인데 얼마나 우리들이 철저히 속으면서 그렇게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들어 보셨을 텐데 프란시스 쉐퍼라고 있습니다. 도서관에도 그 분 책이 꽤 있는데 가서 한번 읽어 보십시요. 저는 오래전인데 20년전쯤에 그분의 책을 읽으면서 온 몸에 비늘이 돋는 것 같은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후로 작년에 발표한 내용들을 보면서 이것이 같은 연결선상에 있구나 하는것을 통해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스며들어 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괜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나는 교회 아니면 무슨 신바람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하고 이렇게 기적을 안 믿으려고 하는 시대인데 이상하게도 한쪽에서는 신비주의 운동한다고 은사체험 강조하고 예언을 하고 사람을 쓰러 뜨리고 하는 것이 강남에 있는 지성인들에게, 인텔리들에게 그렇게 인기를 끌고 수요일날, 토요일날 모이면 3,000명씩 4,000명씩 모인다는 것이 왜 그런지 여러분들은 이해가 되지 않지만 같은 맥락 속에서 일목요연하게 하나의 줄기를 타고 흐르는 풍조입니다. 예수님 시대때에도 기도에 관해서 세속주의와 사상들 이교회 사상들이 교묘하게 들어 오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찿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뒤집어서 저렇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 못 만나는 것입니다. 기도도 하나님은 이렇게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무엇이든지 지껄이기만 하면 다 기도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지정하신 지식과 방법을 따라서 당신에게 접근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저런 방법을 사용해서 접근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 못 만나는 것입니다. 이방의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술을 길게 늘어 뜨리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하는 이방인들의 풍습을 본 받아서 사람을 의식해서 기도했는데 그중에 단 한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만났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의 잘못된 세속주의적인 사고방식이 그 사람과 그 시대 전체를 엉뚱한 길로 몰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때 일수록 우리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진정하게 가르치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 기도하며 된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무엇이 참된 기도인가? 그리고 참되지 않은 기도는 어떤식으로 잘못되어졌는가 하는 것을 보면서 올바른 것을 찿아 가야지 무조건 하면 된다는 식으로 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구하는 내용이 무엇인가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 세가지입니다. 이 세가지만이 아니라 사실 이것은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이 세가지의 간구의 제목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는가 하면 이방인들의 기도는 자기 중심적이다 이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방 종교에서의 기도의 개념은 이방신에게 그냥 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심이 자기인지 그 신 인지 이런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주 고도의 도덕성을 가진 기독교 같은 종교에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심이 자기라는 사실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많은데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먹고 자고 입고가 해결 되었으니까 그 다음것에 대한 욕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밖에 있는 욕망을 계속 펼쳐서 저 밖에서부터 벗겨 나가고 마지막에 남는 것이 뭐냐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것이 남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중심적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중심성이 깨뜨려지지 않은 가운데 기도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무조건 나쁘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이 기도가 무조건 나쁘다면 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때 너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 그렇게 가르치셨습니까? 이방인들의 기도라면... 그러니까 여기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런 기도는 할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여기에 뭐라고 했습니까? 우선 순위가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것을 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너희는 먼저... 그러니까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라 기도하라 그렇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 하라고 가르쳐 주셨는데 그 순서가 뒤에 오는 것입니다. 그 앞에는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세개의 기도가 먼저 오고 그 뒤에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 구절을 극단적으로 해석해서 나는 평생 가족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해서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나 자신의 생활을 위해서 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자랑하는데 그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 왔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신학적인 균형을 잃고 성경 한 구절을 보면서 엉뚱하게 꽂히면 항상 문제를 만들어 낸 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정말 가난하게 살아 보셨습니까? 진짜로 한끼를 하나님 의지 하면서 살지 않으면 끼니가 간데 없는 생활을 해 보신적이 있습니까? 저는 그런 생활을 해 보았습니다. 그때 일용할 양식이 내 앞에 있다 라고 하는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첫번째 주기도문 강해 할 때 제가 그랬습니다. 우리가 이 기도를 정말 가난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기도 하기만 하면 식탁 앞에서 하루에 세번씩 임재와 만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곤궁한 세상에서 이렇게 육신의 영양을 공급할 수 있는 식탁을 받은 이 자체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다 하는 생각을 할때 거기에서 자기의 육신을 이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나의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실까 하는 그 하나님의 자비로운 임재를 만난다고 제가 14년전에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 놀라운 은혜의 수단으로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것이 없이 살아온 것에 대해서 무엇이 자랑할 것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요. 이방인들의 기도나 우리 믿는 사람의 기도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중심성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고 이러한 일용할 양식이 이제 예수님 시대에는 굶주리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문자적인 의미로 사람들이 받아 들여 졌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세월이 지나면서 일용할 양식의 범위는 점점 넓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틴루터 같은 분이 지혜롭게 해석을 했습니다. 여기서 일용할 양식이라고 하는 것은 빵 한덩어리 포도주 한잔,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환경과 교육 받을 수 있는 여건 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 대신에 다이아몬드 반지는 안 들어간다 라고 했습니다. 사치품은 안 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의 삶에 있어서 모든 문제를 주님앞에 의지하면서 그렇게 살아 가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모든것 하나 주어졌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감사하고 모든것이 주님께로부터 왔다고 그렇게 기뻐하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 하나님 중심성이 이방인들의 기도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무엇을 입고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먹을까에 대해서 기도해도 괜챦다가 아니라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능력있는 남편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안 한다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사회적인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아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자녀도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는데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하면 먼저 구해야 할 것이 있다 먼저 구해야 할 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라는 뜻입니다. 그이 나라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 아닙니까?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무슨 개념입니까? 통치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지배권이 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화) 북한에 갔을때도 느꼈는데 갔더니 마침 거기에 미국에서 온 사람, 영국에서 온 사람등 많은 사람들이 호텔에 와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나름대로 거기에서 비지니스도 하고 구호활동도 하고 하는데 국력을 놓고 보면 북한 같은 나라 천개를 모은 들 미국만 하겠습니까? 국제적인 힘으로 한다면... 그렇지 않겠습니까? 돈을 가지고 있는 재산이나 국민들의 능력이나 모든면에서 볼때 수백개를 모아 놓아도 안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단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나라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자 두명이 납북되었는데 힐러리 국무장관이 간접적으로 잘못했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까? 전에는 무조건 석방하라고 난리를 치다가 분명하게 북한 법을 위배 했다는 것을 아니까 법에 따라 선처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것은 우리가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 나라 안에서는 그 나라가 최고의 법 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 모든것들이 합리적이고 일반적이지 않을 때 그곳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굉장한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것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통치의 무서움입니다. 그 나라의 주인은 그 나라의 주권을 가진 주권자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이 꼭 그런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고 사람들이 거기에 복종해서 그 뜻대로 살아가는 나라 입니다. 그 나라가 속히 이루어지기를 절실하게 바란다 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그것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주님을 믿고 신앙을 고백하면 이제 그 나라 안에서 왕의 통치를 아주 즐겁게 받으며 왕의 뜻에 따라 살겠다 라고 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살면 그 안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왕이 아무리 인자하고 온유하다고 할지라도 그 왕의 통치에 굴복하지 않고 항거 하면서 살면 끊임없이 쫒기고 고통을 받습니다. 너희가 민주주의 국가이고 국민에게 아무리 따뜻하게 대해주는 나라라 할지라도 자기가 현행법을 어기고 도망다니면 이 나라 전체가 불안의 도가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런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우리들이 대충 아는데 뒤에 나오는 의를 구하라는 말이 이제 궁금합니다.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의지 입니다. 의라는 것은 올바름이기는 한데 결국은 하나님의 의지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지라는 것은 결국은 무엇입니까? 내 나라는 이랬으면 좋겠다. 내 백성은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 내 백성은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내 백성은 나를 이렇게 믿었으면 좋겠다. 내 백성은 나를 이렇게 섬기면 좋겠는데 라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이 의지는 모든 방면에 다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물론이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심지어는 사람과 피조물과의 관계 이 모든것 속에서 하나님의 의지는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 의지를 따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해야 할 기도는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가 온전히 실현되고 하나님의 의지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면서 사는것처럼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는 그것이 우리가 먼저 기도해야할 가장 급한 기도 제목이라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가 이런 종류의 기도가 먼저 하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아까 이야기한 자기 중심의 인생인 자기를 중심으로 자신을 주인 삼으며 살아가는 그 사람의 인생이 변화 되어서 하나님 중심으로 회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중생과 회심의 필요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이런 문제와 관련이 되어서 정리 하기 힘들 정도로 수 많은 정보가 머리속에서 쏟아 집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들이 여태까지는 성경과 교리를 열심히 공부 했는데 제가 정리를 하는 중입니다. 정리를 하면서 내년 부터는 세상에 대하여 많이 가르쳐 주어야 겠다 그래서 어떻게 역사가 흘러서 지난 가을에 여러분들이 들었던 그 내용은 철학속에서 사상속에서 이루어진 일이고 그것은 뼈대이고 그것은 총사령부이고 총사령부에서 파생된 수 많은 군인들이 사상뿐만이 아니라 문화, 예술, 학문, 오락, 종교 그 다음에 문화, 스포츠, 정치, 경제 이런 모든 방면에 쫙 깔려서 일사불란하게 제가 가르쳐 드린 한가지 사상에 의해서 연대해서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나면 충격을 받습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들이 에워싸여 있고 이때 우리들이 교회의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쩜 교회의 변화되는 코드가 그러한 세계의 구령과 그 세계의 구도와 얼마나 놀랍게 일치를 하는지 왜냐하면 교회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한 시대속에서 살아 남아야 하니까 살아 남으려고 목표를 하다 보면 그러면 그 구도에 살아 남는 교회만이 환영을 받고 모이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섬찟할 정도로 무섭게 정교한 계획을 가지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20년, 30년후의 교회가 훤히 보입니다. 놀랍습니다 여러분! 30년후에 살아 있을 분이 꽤 있을 것입니다. 30년후에 보시면 오늘 내가 설교할때 왜 그렇게 김목사가 심각하게 마치 믿음이 없는 사람인것처럼 30년후에는 너무나 심각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자라나는 세대에게 이렇게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들이 말하자면 우리의 생사가 달린 문제 입니다. 자라나는 세대에 대해서... 그렇지만 더 기대를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래도 예수를 믿는척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잘 믿는 여러분들이 표가 안나지만 이제 완전히 어두워지고 나면 저 아이들이 진짜 불꽃이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정말 하나님 밖에 의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바꿀 수가 없습니다. 전도지 들고 아파트를 누벼보면 저의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것이 입증 됩니다. 옛날과는 20년전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것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 이것에 무슨 관심이 있습니까? 문제는 종교의 껍질을 가지고 그 종교가 나에게 도움이 됩니까? 위로가 됩니까? 내 정신을 편안하게 해 줍니까? 이런식으로 접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것도 옛날에 성경에서 나오는 고전적인 의미에서는 은혜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은 하나닝의 나라에 복종하고 그의 의지를 실현하도록 그 힘을 공급받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아니라 자기만족 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집회 같은데 가서 눈을 감고 몰아의 경지에 들어가서 찬양 하는 사람들을 보면 무섭습니다. 저것이 진짜 성경이 그리고 있는 은혜속으로 들어가는 것일까? 무섭습니다. 그렇다고 찬양 부르는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찬양팀이 상처 받을까 겁이 납니다. 그래서 제가 이 기회를 빌어 찬양팀에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몰입의 경지에 몰아 넣기 위해서 찬양하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몰입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 앞에 완전히 부복된 가운데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는 그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가야 합니다. 몰입의 경지, 눈을 감고... 대게 그런 사람들 설교 시작하면 자지 않습니까? 충분히 몰입했는데 어디를 또 들어가겠습니까? 그러니까 가장 좋은 방편 속에도 이런 것들이 안개처럼 스며들어서 그들을 변질 시키는 것입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신나는 교회가 도대체 뭡니까? 저는 너무 마음이 찢어지는것처럼 아파서 몇일 동안 어떻게 저럴수 있을까? 사람들은 세상과 똑같아지면 교회의 부흥이 올것으로 생각하지만 역사적으로 그랬던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예수 믿을때 교회에 가면 나하고 틀린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교회에 나왔지 나 같이 똑같은 인간들이 거기에 득실거린다고 하면 갔겠습니까 안 갔지... 절로 도망갔지... 당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충심으로 그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의지가 실현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소수인것 같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다수 입니다. 그들에게 승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항상 대중적이고 많은 수가 그렇게 한다는것 때문에 거기에서 정당성을 찿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다 틀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아 한 사람이 맞고 다 틀렸습니다. 그런때가 있었습니다. 왕까지도 속임을 당하는... 그러면서 하나님은 어느 시대이건 당신의 남자들을 믿게 하셔서 이렇게 진실한 마음으로 그 나라와 의를 구하게 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그 심함 폭풍과 유혹속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그렇게 주님의 손에 붙들려 서 있는 것입니다. 잠 자는 다수가 되지 말고 서말의 가루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한줌의 누룩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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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6 (2009/11/08 주일오후예배)
10.마음이 하나되는 기도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1:14).
오전의 설교와 연장선상에서 보자면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위대한 일들을 행하실때에는 항상 공동체적인 기도를 사용하셨습니다. 선교의 위대한 역사를 열 때에도 공동체적인 기도로 문을 여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교회 부흥의 많은 역사들 1930년대 아프리카 콩고, 1904년대에 웨일즈의 부흥, 1906년도의 인도의 부흥, 1907년도의 평양의 대부흥 이 모든 역사를 추적해 보면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뭐냐면 어느 순간에 교회가 모든 성도들의 개인의 형편과 처지가 다른데도 그 다양성과는 상관이 없이 한마음이 되어 기도하는 놀라운 공동체적인 기도가 부흥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1907년 평양의 대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시발은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교회가 많이 나뉘어져 있고 분열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유가 무엇때문이었는가 하면 당시 일제 압제하에 있었는데 1905년도에 한일합방이 이루어지고 일제의 본격적인 강점이 이루어 진 시기입니다. 이때 정치적으로는 미국과 일본 사이에는 까스라테프트 밀약이라는 것이 체결이 되어서 필리핀은 미국이 지배권을 갖는 것을 일본이 양해하고 조선은 일본이 지배의 우선권을 같는 것을 미국도 양해하다 이렇게 끔찍한 협정을 맺은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이제 일본은 국제적으로 거칠것이 없이 한국 침탈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하면서 강점이 이루어지고 있을때 이미 애국지사들은 일본의 이러한 야망을 눈치 챘습니다. 그래서 일본에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들을 불어 넣게 되었고 그들중 다수가 개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안에서는 일본이 이렇게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으니까 여기에 맞서 적극적으로 투쟁해야 한다는 사람과 그래서는 안된다는 사람들로 주장이 나뉘어져 있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하는 사람들의 편에 선교사들이 많이 서게 되었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자신들의 안전도 있고 국가의 정책이 있으니까 터 놓고 일본에 저항하라고 선동하기가 쉽지 않아서 선교사들을 원망하는 목소리들이 교회에 상당히 있게 되었습니다. 이래서 선교사와 교인들 사이에 예전에 없던 갈들이 생겨나게 되고 많은 문제들이 야기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속에서 이제 문제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교회의 형편이라고 하는것이 당시 대부분 교회들이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는데 이것이 선교사들의 신뢰성에 금이 가고 나니까 교회는 거침없이 계속 심적으로 갈라지고 쪼개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선교사 한 사람이 이 교인들에게 설교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설교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고린도전서 12장을 설교하면서 연사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한 지체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연합하여야 한다는 설교를 하면서 자기가 사냥 나갔던 경험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 당시에 선교사들에게 한국은 그야말로 세계에서 오지중에 오지 였습니다. 문화생활을 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선교사들이 여우 사냥도 재미로 나가고 총기를 가지고 그렇게 사냥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 저희 아버님도 총을 좋아 하셔서 사냥을 하셨는데 그 당시에 총기 오발 사고가 납니다. 그래서 쾅하고 쏘면 총알이 나가지 않고 약실에서 터져 파편이 튀어 날라 가는 것입니다. 저희 아버님도 한번 파편이 튀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이제 손가락을 때린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가 나서 피가 났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손가락은 몸에서 먼 줄 알았는데 손가락이 끊어지고 피가 쏟아지기 시작하니까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온 몸이 아프고 손가락이 아프기 전에는 머리는 머리대로 생각하고 눈은 눈대로 아프기 시작하는데 이제 아픈 손가락으로 모든 신경이 집중하더라 라는 간증을 했습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교인들에게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불러 일으키는 폭발적인 설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반목하고 미워 하던것을 철저히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교회가 한마음으로 부흥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의 역사를 움직이는 큰 사건 뒤에는 이렇게 개인의 기도 제목을 제쳐놓고 공동체가 한마음이 되어서 기도하는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기도를 함께 하는 것 보다는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이 훨씬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그 일들을 뒤 있게 하셔서 성령을 보내십니다. 이 성령님이 오셔서 각 사람들에게 지적으로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들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고 그리고 의지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주셔서 그 능력안에서 예수님이 하시던 사역을 계승하면서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으로서 이 세상과 하나님과 교회를 섬겨 가도록 그렇게 경륜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임하시는 이 사건은 이미 예수님께서 미리 예고 하신바와 같이 내가 가면 너희에게 보혜사를 보낼것이라고 한 이 약속의 실현이니까 엄밀한 의미에서는 이 성령이 오심으로서 진정한 신약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가운데 이제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절대로 회복될 수 없었던 하나님을 향한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을 회복하게 됨으로 진리와 성령에 붙잡힌 경건한 사람들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연합이 바로 교회의 연합입니다. 그런점에서 볼때 이 성령의 강림 사건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 사건과 연장선상에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열매가 되는 사건이 바로 이것이 성령강림 사건이고 이 성령강림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 각 사람안에 오시는 이 성령님의 내주 하심이 바로 마지막날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히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유업에 보증이 되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알로 있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의 놀라운 복입니다.
(예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시겠으면 지금은 다 잊혀졌지만 옛날에는 엿장수들이 다녔습니다. 그래서 엿장수들이 가위를 짤랑짤랑하면서 다니면 아이들이 뛰쳐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아이들보고 고물을 가져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리 오너라 하면서 엿을 조그맣게 잘라서 감질나게 하나씩 입에 넣어 줍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이것을 먹고 눈이 고물을 찿는 눈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 세수대야도 들고 나오고 할머니 고무신도 들고 나오고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부지께도 들고 나오고 해서 저녁에는 엿을 조금 바꾸어 먹고 해서 많이 얻어 맞는 것입니다. 내 신는 고무신을 가져다 버렸다 하고... 그때 보여주는 그 맛보기가 바로 이와같은 고물을 가져오면 먹음직 스럽지 않습니까? 엿판에 시루떡 같이 기다랗게 되어 있어서 뚝뚝 잘라 주는데 고물을 많이 가져오고 마음에 들면 두껍게 자르고 그렇지 않으면 얇게 자르고 거기에서 엿장수 마음대로 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잘라 주는데 그것이 동질의 것입니다.
똑같이 우리 안에 지금 성령님이 오셔서 이렇게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축복은 약속의 보존을 먼저 받은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님이 오셔서 그리스도를 말미암는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져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는 훌륭한 본보기를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는데 이 성령의 강림은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고 그리스도의 초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그 다음에 승천, 성령강림, 재림 이 다섯가지 사건이 구속사적으로 연속선상에 있는 사건입니다. 그렇게 크고 아마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과 대별되는 이 어마어마한 사건이 도입될 때 그때에도 어김없이 하나님께서 공동체적인 기도로 교회를 하나되게 묶으시면서 그것을 성령이 오시는 중요한 계기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했기 때문에 성령이 오셨다기 보다는 이미 성령을 보낼 작정이었지만 교회로 하여금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기도하게 하신것에 대한 응답으로 최고의 좋은 선물인 성령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이후에 우리 교회가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성령도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좋은것도 그 이하의 것들은 말할 나위도 없이 우리에게 주실것이다 라는 확신을 갖게끔 그렇게 훈련 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띄는것은 무엇인가 하면 전혀 기도에 힘썻다고 했는데 전혀 기도에 힘쓰기 전에 마음을 같이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목록을 보면 같이 있기가 굉장히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명단을 13절에 보면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셀롯인 시몬이 나옵니다. 셀롯은 우리로 말하자면 극렬한 좌파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 극렬한 사람으로 시작해서 직업과 나이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고 심지어 그 당시에 남자와 여자가 합쳐 지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여자들이 모였고 또 거기에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도 모였습니다. 사람의 색깔이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었다 라는 것을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그랬기때문에 전혀 기도에 힘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공동체 전체가 전혀 기도에 힘쓰는 것은 마치 우리가 전혀 기도에 힘쓰는것의 확대판으로 보시면 됩니다. 우리가 전혀 기도에 힘쓰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이야기 하면 근심이 많기 때문에, 죄가 있기 때문에, 환경이 어려워서,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부부의 갈등들이 있어서등 수없이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설명이고 왜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쏟아 부어지지 못합니까? 라고 할때 정답은 마음이 나뉘어지기 때문입니다. 근심, 걱정, 유혹, 시련, 고난 이런것들은 마음을 나누는 한 재료와 계기는 되지만 그 자체 때문에 기도를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혹 받으실 때 오히려 더 많이 기도하셨고 고난 오실 때 오히려 아버지와 더 친밀해 지내셨으니까 사실 고난이나 유혹 이런 것들이 우리의 기도를 가로 막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죠?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우리의 마음에 많은 나뉨이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나누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 한 발이 묶여 있다고 생각하니까 나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요. 우리들이 이 세상속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열심을 품고 일을 하고 흥미 있는 것에 빠지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향하기는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아주 많이 나뉘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자체가 하나가 안되는데 우리도 우리 마음 하나를 모으는것이 어려운데 공동체 전체가 그것 하나를 모으는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 이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지난 학기에 마음지킴의 교리를 배웠지만 마음지킴의 교리는 결국 생각 지킴의 교리 입니다. 생각에서부터 미끌어 지면서 마음이 찢어지고 나뉘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감정은 이 마음을 찢어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이 이 모든 마음을 하나되게 만들어 줍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공동체적으로 함께 공유될 때 많은 당연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이룰 수 있지만 만약에 하나님 사랑안에서 자신의 마음의 감정의 모든 체계들을 통활해서 하나로 모아지는 마치 빗물이 많이 쏟아져도 그 쏟아진 물들이 옥상에서 모아지면서 한쪽 구멍을 향해 흘러 내려가는것처럼 그렇게 동일하게 우리의 마음도 많은 사연이 있지만 결국은 주님께 은혜를 받는 가운데 하나님 한분께 쏟아져 가는 것처럼 그런 마음의 집중이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있을 때 그것이 합쳐 져야지만 교회의 전체적인 마음이 하나 됨으로 가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됨이 그 하나됨이 아닙니다. 놀러 가자, 먹자, 마시자 이렇게 하면서 한 마음이 되는 그것이 진정한 한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화) 얼마전에도 제가 아는 목사님이 오셔서 좀처럼 우리 교회 이야기를 밖에 가서 하지도 않고 남의 교회 이야기 듣는 것도 관심이 없는데 당신이 요즘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쭉 토로해 놓았습니다. 저도 사실 그 교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꺼번에 교인 26명을 출교 시켰다고 합니다. 그것이 피 바다 입니다. 출교라고 하는 것이 보통 죄를 짖지 않고는 출교될 수 없는 것인데 교인이 많기는 하지만 2,000명 모이는 교인 중에서 26명을 출교라고 하는 극단적인 권징을 그것도 노회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해서 내렸으니까 교회에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왜 그런일이 있는가 하면 자세한것은 알고 싶지 않은데 교회에서 사람들이 불만을 느꼈는지 어쨎는지 근거도 없는 소문을 만들어 내어 마치 노동조합이 데모를 하듯이 교회에서 똑같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들이 전부 다 오래동안 교회 역사가 깊어지면 그런 단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데모한 사람들이 장로에 또 그 친척 권사에 친구 아들등 이렇게 엮기고 엮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회에서 항복을 한 것입니다. 우리 손으로 치리 못한다. 노회에서 와서 합동 조사반이 전부 조사해서 노회 차원에서 치리를 했는데 교회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것입니다. 그 사연이야 제가 관심을 가질게 없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교회가 악한일을 위해서 한마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고 교회가 선한 일을 마음에 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각각 자기를 내세우면서 나뉘어 지는 것은 하나님이 더 싫어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은퇴하신 어느 목사님께 직접 들었습니다. 제가 건너 들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허튼 이야기를 하시지는 않았지만 자기 노회에 있는 교회 이야기를 하면서 교회는 회의 때문에 망한다고 하시면서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주일날 오후 2시에 모여 재직회를 하는데 싸움이 벌어 졌다는 것입니다. 구제를 담당하는 쪽에서 경로당인지 무슨 불우 노인들을 돕겠다고 했더니 한쪽에서 건축을 해야 되는데 돈이 모아야지 쓸데 없는데 일을 벌려서 교회 돈을 낭비하면 교회는 누구 돈으로 지으라는 말이냐고 했더니 또 한쪽에서는 예수님도 이 땅에 있을 때에는 가난한 사람을 도우고 먹이셨는데 교회건축이면 다냐면서 싸우고 했습니다. 결국 2시간 반을 회의를 해서 결국은 불우한 노인들을 돕기로 결정이 났다고 합니다. 그것으로 끝날 줄 알았더니 그래서 결국은 불우한 노인들을 돕는데 그래봐야 쌀 10가마로 떡을 해서 돌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끝냈으면 됐는데 그 떡을 무슨 떡으로 할 것인가를 또 1시간 반 동안 토론을 해서 마지막에는 그 떡의 이름까지 재직회 회의록에 올리고 바람떡 4가마, 절편 4가마 이렇게 해서... 그러니까 우리는 그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실화입니다. 물론 그 교회는 그렇게 큰 교회는 아니지만 당회를 하는데 당회에서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봉사부에서 교회 식당에서 일하는 목사님들이 냉장고가 너무 조금해서 음식이 계속 쉬니까 냉장고를 사 달라고 하는데 그것을 사 달라고 했으면 거기에 부장이나 누가 있으면 결제하고 의논해서 사면 되는데 당회의 허락도 안 맞고 어떻게 사느냐 해서 당회의 안건이 올라 왔는데 당회원중 양쪽으로 문을 여는 것을 사자는 사람이 절반이고 그것은 너무 비싸니까 한쪽만 열리는 것을 사자고 하면서 1시간 반동안을 싸우고 마지막에는 결국은 다음에 다시 만나서 의논하기로 하고 그리고 결론을 못내고 흩어 졌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양쪽문파, 한쪽문파해서 장로들이 나뉘어 져서 그렇게 언쟁을 하고 했으니 이것이 도대체 주일날 그렇게 은혜받고 모여서 뭐하는 것입니까? 장로들이 넉넉히 돈이 없어서 그러면 내가 하나 사 놓겠소 할 능력이 안 되면 양쪽문이 좋을지, 한쪽문이 좋을지 쓰는 사람에게 결정하게 하고 양쪽문 사는것이 너무 비싸면 올해는 안 되겠으니 몇달 참아라 하든지 아니면 그냥 조금 힘들더라도 양쪽문을 사주고 몇년 더 버티든지 그렇게 하지 그것을 양쪽문파 한쪽문파해서 나뉘고 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과 싸우고 욕하다가도 선술집에서 대포한잔 먹으면 형님 동생 하고 헤어지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꼬장이 보통이 아닙니다. 그것을 가슴에 묻어 두는 것입니다. 어느 은퇴하신 우리 교회에도 자주 오시는 목사님이 자기가 사랑하는 후배가 있는데 어느날 교회를 가게 되었다고 해서 잘됐네 했는데 김목사님 잘 된것이 뭡니까? 그 교회 가지 말아야 하는데... 왜요? 했더니 박씨하고 홍씨하고 대판 싸우는 교회 입니다. 그래요? 그래도 옛날이야기지 이제는 그 사람들 다 늙어서 장로도 은퇴하고 권사도 은퇴하고... 그럼 됐네요 했더니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김목사님 왜 이렇게 순진하세요? 자손들이 있쟎아요... 아주 심각하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대를 물려가며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은혜를 온전히 힘을 합해서 세상을 향해 흘러가도 될까 말까 한데 그렇게 모여서 온 마음으로 기도해도 될까 말까 인데 그것을 가지고 양쪽문파 한쪽문파 나뉘고 그리고 바람떡파 절편파 나뉘어서 그것이 그렇게 해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솔직히 이야기 해서 목사님들을 만나 이야기 하면 위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들리는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 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상상도 안되는... 아직 우리는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것이 양쪽문 한쪽문 가지고 싸운적이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들을때 한 30%는 안 믿어지고 70%는 믿어지는데 그렇게 하고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이 확 밀려 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그속에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너무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을 위해서 싸울때에는 선선히 양보를 하고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그래도 하나 되지 않는 마음을 나누고 찢고 또 찢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입만 열면 교회의 욕, 입만 열면 교인의 욕 이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우리는 거의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좋은 이야기 있으면 자랑하는 것이 되고 나쁜 이야기 있으면 누워서 침뱉기지 자기 세끼 사고 치는 이야기 해봐야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습니까? 무슨 위로가 있습니까? 주님이 이 세상에 있는 교회을 내려다 보실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그 시간에 바람떡 절편 놓고 2시간반을 싸울때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시간에 모여 지역 전도를 위해 간구한다면 아마 놀라운 일이 일어 날 것이고 오히려 두 떡을 놓고 싸우는 우리를 변화시켜 달라고 눈물로 기도하면 아마 더 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는 은혜도 별로 못받는 주제에 은혜를 가치없는 일에 모두 소진하고 꽁한 마음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교회를 떠날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주님은 마눌히 여기시는 분이 아니시고 각 사람의 중심을 한번에 내려다 보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적용하자면 먼저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우리의 기도를 자꾸 방해하는 삶입니다. 생활에 대한 염려, 돈에 대한 생각, 인간관계의 나뉨, 찢어짐, 고통, 불만 이 많은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자꾸 찢어 놓고 갈라 놓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의 욕망이 점점 많아지니까 이런 것이 더 많아 지는 것입니다. 1,800년대 중반에 미국 사람들이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꼭 있어야 된다는 것이 19가지 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백년이 좀더 지나서 1,980년대에 와서는 그것이 236가지로 늘어 났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더 많이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 잘 들었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부모님 살아 계시고 사랑하는 형제들이 있고 밥 먹고 살고 그러면 됐지, 건강하고 그러면 됐지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유산만 많이 남겨 주고 가면... 자식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건강하고 돈만 있으면 살만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욕망이 늘어가니까 19가지가 인생에 꼭 필요하지 나머지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하던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던 시절은 지나가고 이제는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을 누려도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너무 없다 라고 생각하고 가난하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찌그러진 존재라고 생각하고 살아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누리는 물질 생활이 7세기에 왕족들이 누리던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중산층이 살아 가는데 우리가 이런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계속 욕망들로 인해 찢어지고 나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할 때 기도가 잘 되는 이유가 사랑이 그 모든것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데에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사랑하는것 같아도 세상은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는 감정도 몰입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에 불과한 것이고 결국 마지막에 사랑하는 것은 자기자신인데 자기자신도 자기를 어떻게 해 주어야지 진정으로 행복해 질 지 아는 존재이면 인간은 하나님 안 믿어도 됩니다. 그것을 인간이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퀴즈 하나 낼게 들어 보십시요. 한 인간에게 원하는 모든것을 다 해준다고 하면 그 사람이 행복해 지겠습니까 불행해지겠습니까? 필연적으로 불행해 집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에게 진정으로 필요한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속에서 인간의 마음은 수없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마음이 하나로 합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한 마음으로 묶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성도들이 각각 자기의 출신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고 나이도 같지 않지만 모두 모였을때 한마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들의 마음 하나 하나가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고미영인가 하는 사람이 히말라야 등반하다가 결국은 1,500미터 아래로 굴러 떨어져 절명했습니다. 그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아렸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산을 정복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산은 신이 자기의 품에 안기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굉장히 겸손한 이야기 입니다. 그렇게 도전하고 산을 오를 때에는 참 아름답고 계속 도전해서 성취했으면 좋겠다 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렇게 떨어져서 죽은 시체를 보니까 마음이 너무 아프고 안좋습니다. 몇일동안 머리에서 계속 그치지 않습니다. 부모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이 산을 오른다고 할 때 사람마다 산을 각각 어떤 사람은 완만한 길로 어떤 사람은 수직의 빙벽을 타고 어떤 사람은 능선을 돌아서 어떤 사람은 얼음 빙벽을 찍으며 오르지만 마지막에 오르고자 하는 목표는 모두 정상입니다. 어느쪽으로 오르던지 마지막에 모두 정상에서 만나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다양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깍아지른 빙벽을 아이젠으로 찍으면서 오르는 사람의 모습과 마음은 돌맹이 바위를 자일을 타고 올라가는 사람의 마음하고 다른 것입니다. 걸어서 걸어서 먼 길이지만 돌아서 바이킹처럼 오르는 사람의 마음은 그 두사람 하고 틀릴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마지막에 그들이 모두 하나의 봉우리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각각 주님을 찿고 매달리고 주님을 만나게 된 계기는 각각 다르고 또 우리들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모양, 빈부의 차이, 관심사 각각 동일하지 않아도 마음을 하나 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을 향하는 각자 각자의 집중된 시선이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성도들을 한마음을 묶어서 그래서 그 마음을 하나 되게 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가 마음을 사로잡아 그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작용이 성도들에게 없을 때에 그렇게 될 때에는 결코 교회가 한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그 마음을 하나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영적으로 뛰어난 교회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많이 모이고 건물이 높은 교회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뛰어난 교회는 주님의 생각에 예민하고 주님의 마음을 잘 느끼고 주님의 의지에 순종적인 교회가 영적으로 뛰어난 교회입니다.
그럼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가 다양한 마음인데도 그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게 만들어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만들어 주는 그 은혜의 통로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은혜 받기만 하면 빈부의 격차, 성별의 격차, 학력의 격차와 상관없이 한 형제가 되도록 만들어 주고 한 마음을 품고 함께 기도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교회는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런속에서 교회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그들 모두가 하나의 마음으로 묶어질 때 쏟아지는 작은 빗방울은 하챦은 것 같지만 그것이 모여서 하나의 수로로 흘러 들어 갈 때 사람도 빨아 드릴것 같은 엄청난 기세로 쓸려 내려가는것과 같지 않습니까? 부산에 비가 많이 왔다고 해서 신문을 보았는데 이것이 신문이 아니면 믿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멀쩡히 사는 동네 골목으로 토사가 쓰러져 나오고 강처럼 물이 흐르면서 언덕에 주차했던 차들이 함께 물에 떠 내려와서 동네 어귀에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이것이 사실은 신문이니까 믿지 누가 와서 해 주는 이야기라면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내리는 비는 하챦지만 그것들이 모일 때 어마어마한 위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강릉에서 몇년전에 정말 하늘이 뚫린적이 있습니다. 하루에 1,000미리미터가 내린적이 있습니다. 이틀 사이에 1미터 가까이 비가 왔는데 어마어마 합니다. 강원도 지방에 내린 비로인해 그 피해를 복구하는데 5년 가까이 걸렸습니다.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100미리미터가 내린다고 하면 10센티미터인데 발목도 안 빠질 정도의 물이지 않습니까? 하챦게 생각하지만 이것이 공평하게 똑같이 있으면 두렵지 않지만 이 물은 한곳으로 모입니다. 모일때 어마어마한 양이 되어서 그 물들이 휩쓸리면서 커다란 수로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까?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마음을 모으고 주님앞에 기도하는 것은 작은 힘밖에 없을지 모르지만 그 마음들이 하나되어 모아져서 공동체적으로 모아져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의 제목으로 집중될 때에 그 기도는 어마어마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도속에서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라크에서 전쟁을 할때 보면 믿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스텔스 전투기 이런것들은 정말 꿈의 전투기라고 하고 폭탄을 실어 날라서 투하해서 떨어뜨리는 비행기는 한대당 가격이 1조, 2조원이고 비싼것은 2조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초현대식 비행기 입니다. 20키로미터까지 들어 오도록 레이다에 탐지가 안 되는데 한시간에 보통 2,000킬로미터가 넘도록 비행을 하니까 20키로미터 밖에서 탐지를 했더라도 탐지 되었으면 이미 머리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보인다고 합니다. 스텔스 라는 것이 결국은 눈에 보이지 않는 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비행기는 공중에 날아 다니다가 떨어 지려면, 몇십억짜리 미사일을 맞고 떨어 졌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미사일을 방해하는 장치까지도 완벽하게 갖추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가 날아 가다가 미사일이 날아 오면 미사일이 날아 오는 것을 감지해서 가짜 폭탄을 쏩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열과 소음이 나면서 비행기가 다른쪽에 있는지 알고 유도탄들이 다른쪽으로 착각을 해서 유도탄을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방폭장치까지 다 되어 있는데도 놀랍게 그 비행기가 이라크에서 총에 맞고 떨어졌습니다. 그것이 안 믿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관총 같은것을 맞고 떨어지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입니다. 저는 군대도 옳게 못 갔다 왔으니까 할 이야기는 별로 없는데 그래도 병기나 이런것을 공부 하는것을 아주 좋아 합니다. 공부하다 머리 아플때 가끔 보는데 예전에는 보면 그래서 군대에 들어가면 병사들에게 비행기를 만났을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훈련시켰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비행기를 향한 사격 훈련입니다. 쪼그려 앉은 자세에세 혼자 쏴서는 맞을 가능성이 없고 수백명이 지휘관의 구령에 맞추어 쏘는 것입니다. 그것을 화망구성이라고 합니다. 비행기가 날아가면 비행기 앞의 어느정도 거리에다 수백명이 쏘는 것입니다. 그러면 화망이 구성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총알이 수천발이 날아가는 것입니다. 비행기에서는 그것이 다 보이지 않습니다. 지나가다가 몇개만 맞으면 비행기 날개는 전부 기름통입니다. 몇발만 제대로 맞으면 미사일로도 격추 못 시키던 비행기를 격추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도 안되게 스텔스 전폭기 같은 것들이 아랍 사람들의 기관총에 맞고 떨어져서 올라가서 기관총 들고 사진 찍은것도 보도사진에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기도는 힘이 없는것 같아도 공동체적으로 화망을 구성하듯이 기도를 모아서 그렇게 확 쏠때 그때 하나님의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 납니다. 우리는 잘 몰라도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셔서 그래서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도 우리가 잘 모르던 때에도 하나님께서 그런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기도가 가져다 주는 유익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할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사태 때문에 한국의 교회들이 고통을 많이 받고 여러사람이 거기에서 순교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납치됐던 한시간 반전에 우리가 그 지점을 통과한것 아십니까? 더 재미있는 일은 청년부가 갔었는데 가다가 처음 출발할때부터 차가 이상한 차를 가지고 출발을 해서 덜덜거리고 차가 그렇게 망가지고 했다고 합니다. 차가 망가졌으면 경험이 많은 사람들 같으면 조용히 기도를 해야되지 않습니까? 위기상황이니까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는데 차가 여기에 망가졌는데 저기 벌판에 나가서 모여 앉아서 벌떼처럼 기도를 했는데 알고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한 지역입니다. 그것이 만약 현지인의 눈에 띄었으면 무슨일이 일어 났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그렇게 지혜가 모자랐어도 본교에 남아 있는 성도들이 열심히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열렬히 기도하는 동안에 아무도 안 온것입니다. 큰 소리로 기도했는데... 죽으려고 순교하려고 작정을 한 것입니다. 그 시간에 하나님이 마음을 움직이셔서 아무도 그것도 대낮에... 이렇게 하나님은 한사람 한사람은 약한것 같아도 공동체의 기도속에서 마음이 하나로 모아질때 기도가 끌어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공동체의 생활을 다룰때에는 푸주간의 고기처럼 다루면 안되고 우리 장기를 다루듯 다루어야 합니다. 그까짓것 한점 그것은 푸줏간에서 하는 이야기고 배 갈라 놓은 사람에게 그렇게 이야기 하면 안됩니다. 그 한점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데 그래서 교회에서 서로 미워하는 마음이 들고 원망하는 마음이 들고 누가 누구에게 악한 이야기를 옮기고 하는 것이 교회의 영적인 생활을 허무러뜨리는 중요한 이유가 되는 까닭이 바로 이렇게 한마음으로 하나님앞에 집중된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린교회 세워지고나서 아마 십자가 다음으로 많이 설교한 것이 기도이고 기도 다음으로 많이 설교한 것이 말씀이고 말씀 다음으로 많이 설교한것이 미움과 용서 라는 주제 였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연합을 허물어 뜨리면서 용서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모여 앉아서 양쪽문파, 한쪽문파 냉장고 가지고 싸워서 마지막에 무엇을 얻는것이 있습니까? 한쪽파가 승리했으면 냉장고 사는데 한 50만원 절약이 되었겠네요... 그 50만원 절약하는것은 좋은데 마음이 찢어진것은 어디에서 꿰매겠습니까?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교회는 본질적이지 않은 일들로 마음이 갈라지고 찢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먼저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하나되게 하십시요. 그리고 교회에 마음을 하나되게 하십시요.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공동체적인 기도에 참여 하십시요.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통해서 놀라운 역사 여러분들이 감히 꿈꾸지 못했던 역사들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기도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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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6 (2009/11/08 주일오후예배)
11.말씀으로 깨달은 기도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단 9:2-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기도하는 태도가 아무리 열렬하고 뜨겁고 단호하다고 할지라도 그 기도를 통하여 구하는 바가 하나님의 마음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면 오히려 그 열렬함은 무지한 때씀이 되고 결단은 어리석은 혹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여러곳에서 참된 성도의 기도생활이 하나님의 말씀과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유다나라의 젊은이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기원전 약 605년경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비참했지만 이들은 왕궁에서 왕을 섬길 수 있을 정도로 용모가 준수하고 학문이 출중한 총명한 젊은이들 이었습니다. 비록 그 삶은 왕궁에서 왕 가까이에 살고 왕궁에서 좋은 대접을 누리는 것이었지만 그 나라는 자기 나라를 멸망시킨 적국이고 자기가 일평생 섬기어야 하는 그 왕은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고 성전을 파괴한 장본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단지 왕궁에서 왕을 섬기는것 만으로 이 다니엘이 불행하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이유때문인지 다니엘서에는 그의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안 나옵니다. 아마 가까이에서 왕을 모시기 위해 내시들처럼 거시를 당했거나 혹은 그런일이 없었어도 하나님을 향한 매우 특별한 열심속에서 결혼과 가정을 이룰 꿈을 접었을지도 모릅니다. 언약백성이 불순종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나라가 망했는데 내가 어떻게 안락한 가정생활을 누릴 수 있으랴 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명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아뭏든 이 사람은 이방의 땅에 끌려와서 이렇게 겉으로는 고관의 지위를 누리는 것 같았으나 그는 정말 슬픈 인생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학문을 가졌을 뿐 아니라 인간성도 아주 좋아서 그리고 업무처리 능력도 뛰어나서 왕이 바뀌고 나라가 변했는데도 여전히 그 왕국에 꼭 필요한 일꾼이었습니다. 느브갓넬왕에서 벨사살에서 다리오로 이렇게 이제 나라가 변하고 왕들이 바뀌는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나라에서 중요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라는 망했고 백성들은 모두 흩어졌습니다. 성전은 파괴되었고 이제 여호와를 믿는 종교는 그야말로 커다란 손상을 입게 되어서 그 상황속에서 그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신학적인 혼란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버리시는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의 말씀들은 거짓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이 다니엘도 정도는 틀리지만 똑같은 신학적인 혼란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니엘 장은 예전에도 제가 전체를 설교한 적이 있었지만 이 9장은 구약의 기도문 중에서 아주 위대한 장입니다. 썩어질 이 세상 나라 넘어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왕국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을 위해 빌었던 부흥의 기도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부흥은 지교회를 크게 만들고 그리고 자신들의 만족을 위한 부흥을 구하는 중이지만 이 사람의 부흥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부흥 이었습니다. 그런 장엄한 기도를 온 몸으로 피를 토하듯 기도하고 있습니다. 9장의 이때가 대게 학자들은 유다 나라가 망한지 약 63년에서 67년정도 세월이 흘렀을 때 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다니엘은 이미 늙은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백발이 성성했을 노인네가 이제 엎드려서 거의 통곡하는 마음으로 황무해진 이스라엘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빛을 황폐한 성소에 비추고 온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당신의 위엄을 펼치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사람의 기도만이 바벨론 포로시대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가장 정확한 기도였을 것입니다. 이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하는 증거는 역사속에서 이 사람이 빌었던 기도의 제목들이 응답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기적적인 귀환입니다. 다니엘이 이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길면 7년 짧으면 3년안에 첫번째 포로 귀환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제 본국으로 돌아 오는데 모든 사람이 광복을 얻은것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이 고레스에 종교 관용 정책에 의해서 본국으로 돌아 오게 되고 아뭏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격은 에스라서에 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다니엘이 드린 기도를 기쁘게 여기셨고 다니엘은 하나님이 그 백성들이 기도하기를 원하셨던 기도였기 때문에 은혜를 주셔서 마음이 물같이 녹아 내리는 가운데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데도 계속 기도를 하면 힘이 들고 처음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열렬히 매달리지만 그 기도가 진지해 지면 진지해질수록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기도의 제목은 우리에게도 사라집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처음에는 내 생각에 그 기도가 좋은 기도가 아닌것 같아도 일단 기도하기 시작하면 산에서 불이 나듯이 처음에는 가랑잎을 태우는 것처럼 작은 불이었다가 우리 자신 전체를 불태우듯이 그렇게 열렬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힘쓸때에 그런 기도가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니엘의 이 기도는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요. 여러분 어떤 기도를 하고 싶으십니까? 처음에는 비록 하기 힘들어도 하다가 보니 결국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일어나고 내게도 기도하는 중에 커다란 은혜의 회복이 있는 그런 기도를 해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쓸모 없는 기도를 하시겠습니까? 요즘 다시 금을 캐는 광산업이 강원도와 이쪽 지방에서 활기를 띄고 있다고 합니다. 금값이 워낙 치솟으니까 이제는 수지타산이 안 맞던 광산이 다시 문을 연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금광을 해서 때돈을 벌어 보겠다는 꿈을 가진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틀림없이 거기에 금이 있는 줄 알고 숱하게 돈을 쓸어 부어서 광구를 개발했다가 결국은 폐가망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한번에 금광을 발견해서 거부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기도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기도를 미리 발견할 수 있다면 아마 우리의 기도는 얼마나 경제적이 될까요? 우리가 기도도 별로 안하지만 그나마 기도한 시간중에 헛다리 짚은 기도 빼고 또 제대로 짚었는데 열렬히 기도하지 않은 것 삭제하고 또 열렬히 기도했지만 정욕으로 기도한 것 빼고 이렇게 다 제외하고 나면 진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 제목을 가지고 마음을 다해서 열렬히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때까지 지속적으로 기도해서 결국은 기도의 응답으로 기도라는 나무에 꽃이 핀것까지 계산 한다면 우리가 기도한 시간은 아마 겸손하리만치 짧은 시간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하면 기도하는 열렬한 마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깨달은 마음입니다. 깨달은 마음으로 기도하는 한 마디의 기도는 깨닫지 못하고 천방지축으로 쏟아 놓는 의미없는 수천마디의 말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다니엘이 입증해 줍니다. 무엇이죠? 아마 다니엘도 한 나라의 정사를 맡은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었으니 기도 제목이 많았을 것입니다. 소소하고 또 그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 결코 작지 않은 기도제목들이 아주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예레미아서일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때 그는 늘 대하던 하나님의 말씀이었는데 전광석화와 같이 다가오는 한줄기 강렬한 빛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예레미아 선지자가 예루살렘 성전의 황폐함이 얼만큼 계속 될 것인지를 예언한 내용을 발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예루살렘의 황무함은 70년으로 기록이 되어 있었고 아마 그는 즉시 손을 꼽으며 어린시절 자기가 포로로 잡혀온 때부터 헤아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60여년이 훨씬 넘었고 이제 짧으면 3년 길면 7년 정도만 있으면 이 포로생활이 끝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예고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다니엘의 마음 속에서는 화산이 터지듯이 폭발하며 어떤 기도의 제목이 벼락과 같이 그의 마음에서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화산과 같이 폭발하듯이 벼락과 같은 섬광을 발하며 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도는 평소에 그가 계획했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아마 매일 저녁마다 하는 일반적인 나라를 위한 기도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계획이 없이 폭발하듯이 화산처럼 가슴에 터지며 쏟아지는 기도의 내용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을 위한 기도였고 예루살렘 영광의 복원을 위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가 늙은 노구를 이끌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절하게 몸부림치며 이 기도를 하고 있을 그때에 하나님의 음성까지 들렸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즉시 천사를 통하여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 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은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안에 있는 무지와 혹은 죄의 영향때문에 또 우리가 원하는 바와 하나님이 원하는 바의 불일치 때문에 하나님 마음을 반영하지 못하는 기도생활을 할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될때 그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우리에게 우리 주님의 마음을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기도제목과 주님이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기도의 제목이 일치되는것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경험은 바로 마음이 주님과 하나되는 은혜의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들어 주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시각에서 우리를 바라보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간절히 따라서 기도 하다보면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기도의 제목들은 어느새 이미 이루어진것을 발견하게 되고 또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기도의 제목이 우리 인생의 문제의 본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바를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는데 이것이 가장 완전한 기도생활이고 또 이렇게 안하면 기도 할 수 없다고 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이러한 기도생활이야말로 우리를 넘치는 경건으로 인도하는 아름다운 기도생활인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바를 장황하게 늘어 놓고 잠자는 하나님 깨우는 것처럼 하나님을 자신에게 끌어 들이는 것 그런 기도보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명령에 따르려는 복종의 자세를 가지고 주님의 말씀속에서 제시되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 기도를 따라가는 그 기도생활 이야말로 성격적이고 칼빈주의적인 기도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입고 먹고 마실까 늘 근심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뜨려진 마음이 되십시요. 그러면 언제나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기도하기를 원하는 제목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우리들이 마음을 모으로 기도할 때 머리로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가슴을 움직이고 우리의 배에 내려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한 사람은 그렇게 기도한대로 살 수 있는 은혜의 능력도 공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렇게 성도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기도가 잘 되지 않는 것은 여러 원인이 있지만 비유를 하자면 아궁이에 습기가 가득차면 불이 안 붙는 것처럼 혹은 날이 너무 추워서 아궁이가 어름장같이 식으면 성령으로 아무리 불을 켜도 찬 바람에 불이 꺼지고 불 쏘시게 조차 불이 붙지 않는 것처럼 기도는 우리의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안 될 때에는 기도를 하려고 노력을 하지 말고 먼저 마음을 따뜻하게 하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따뜻함은 어떤 따뜻함이어야 하는가 하면우리야 시사문제를 가지고 사람들하고 토론을 벌여도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습니다. 내 집의 물건이 다른집보다 잘 팔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으면 장사꾼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들은 이렇게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뜨거움은 기도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에 방해가 됩니다. 기도할 때에 따뜻할 필요가 있는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따뜻함 입니다. 기도할 때에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기 때문에 경건 서적을 읽든지 아니면 설교를 듣든지 아니면 성경을 읽든지 혹은 그런 대화를 나누든지간에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은 영향으로 우리의 마음이 따뜻해질 때 그 따뜻함은 우리가 기도할 때 필요한 따뜻함과 일치 하는 따뜻함 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 없을때 혹은 기도하기 싫을 때에도 책을 읽거나 아니면 거룩한 교제를 나누거나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이 뜨거워질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싶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때에 차디차고 습기 찬 아궁이와 같은 우리의 마음이 따뜻하게 덮어지고 그때 불을 붙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궁이에 불을 붙이거나 난로에 불을 붙일때 쉽게 불을 붙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먼저 불을 붙이려고 장작을 가져다 놓고 밑에 신문지를 계속 집어 넣어도 불이 안 붙습니다. 그럴때에는 어떻게 하냐면 신문지나 이런것들을 집어 넣고 불을 붙입니다. 그런데 불을 붙일때 나무에 불을 붙이려는 마음이 아니라 연통을 따뜻하게 데우기 위해서 불을 확 붙이는 것입니다. 지푸라기나 이런것을 집어 넣고... 한번 훅 태우고 나면 제법 미지근해 집니다. 그때 장작을 올려 놓고 불을 붙이면 불이 잘 붙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말씀에 의해 깨달아 지고 그 깨달음에 의해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의 기도 입니다. 기도의 필요성이 증대될 수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은 마음이 되어야 할 필요성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은 마음, 그 말씀의 은혜로 데펴진 마음으로 더 많은 기도를 해서 여러분도 살고 더 많은 사람들을 살게 하는 교회의 아주 소중한 지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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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영혼, 삶, 기도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제일 눈에 잘 띄게 마련입니다. 성경을 읽을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7절을 한번 눈여겨 보십시요. 어느 구절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제일 먼저 다가오는지 3개의 문절을 낼 터이니까 그 번호를 불러 보십시요. 1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2번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3번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루어지리라 몇 번이 마음에 다가 옵니까? 역시 여러분들도 예외가 아니시군요. 어느 여자 청년이 결혼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형제들을 볼 때 집안이나 학벌이나 외모같은 것을 보는데 저는 결혼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가문은 상관이 없구요 학벌도 저는 따지지 않습니다. 그냥 변호사나 의사면 괜챦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제일 먼저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마음에 제일 먼저 다가오기 마련이고 그것에 의해서 모든 정보를 해석하게 되는데 심리적으로 그것은 아주 심해서 때로는 다른것들을 왜곡하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여러분들은 자신만만하게 3번이 가장 눈에 들어온다고 말씀하셨지만 7절을 맨 정신으로 잘 읽어 보면 사실 세 번째것은 결론이지 그것이 맨 처음에 나오는 서두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뜻인가 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이것은 말씀하시는 예수님속에 자신감 같은 것들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어떤 종류의 자신감이실까요?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해보아라. 설마 네가 나쁜것을 기도하겠느냐? 그런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지 않습니까?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더 이상의 조건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또 3번 문제를 놓고 우리들이 보자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이루리라 이 세단어 중에서 가슴에 제일 빨리 다가오는 것이 몇 번 입니까? 1번 무엇이든지 2번 구하라 3번 이루리라 1번 아닙니까 무엇이든지... 무엇이든지간에...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되는 거구나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은 7절 앞절에 신비한 은혜가 다 숨겨져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이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해석이 빠졌습니다만 희랍어 성경에는 동사가 인칭속에 포함이 되니까 당연히 여기에 너희가 라는 대명사가 빠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너희가 라는 말을 한정하고 있는 어구가 둘이 있는데 내 안에 거하는 너희, 내말이 그 안에 있는 너희 이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구절은 아주 신비한 것입니다. 특히 내안에, 내가 그리스도이시니까 소위 희랍어로 말하면 앤크리스토 사상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 라는 그리스도라는 말 앞에 붙어 있는 앤 이라고 하는 희랍어 단어 영어로 말하면 in christ가 되겠지요. in이라는 전치사가 의미하는 것은 아주 신비한 것입니다. 또 하나 신비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거하고 라고 하는 단어도 신비한 것입니다. 자 이제 하나씩 해설을 해 보겠습니다.
우선 이제 이렇게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데 그럴 자격이 있는 너희는 어떤 너희인가 하면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너희 그리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사람안에 거하는 너희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전자와 후자를 굳이 나누자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라고하는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영적관계를 가르킨다면 후반부에 나오는 내 말이 너 안에 거하면 이라고 하면 후반부는 그 사람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의지의 크기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첫 번부를 보면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이 거하고 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아주 많이 쓰신 단어입니다. 이 거하고 라는 이 단어는 머무른다는 희랍어 뜻인데 이 단어의 배경이 희브리어로 넘어 가면 어느 집에서 눌러 앉아서 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단어가 시편 1편에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라고 할 때 그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집을 짖고 야샤브라는 단어인데 집을 짖고 거주하는 것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아주 심오한 단어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죄 가운데 거하면 하는 것도 역시 뭐냐면 잠시 죄를 짖고 슬퍼하고 후회하고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 죄속에 깊이 들어가서 그 속에 고착되어 있는 것인데 그 가운데 사람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뒤집어서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요. 넓은 의미에서는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접붙여진 모든 구원받은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고 계십니까?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마치 제자들이라고 할지라도 당신안에 거하실 수도 당신안에 거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처럼 가정법적으로 너희가 내 안에 거한다면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신자들이 예수안에서 구속을 받고 예수 안에서 심적 생명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그 예수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 기도와 관련시켜 보자면 이것은 주님과의 매우 개별적인 영적인 관계에서 그 주님안에 생명적인 교제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러한 영혼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는 정도가 항상 같습니까? 우리가 언제는 예수님 안에 안 있은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안에 있는 정도는 성화와 관련시켜 이야기할 때 언급할때는 현저히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백한 고백에 따르면 죄죽임이 충분히 이루어진 은혜 가운데 있는 상태에 대해서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내가 산것이 아니오 라고 말하면서 거꾸로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사실은 그 언급이 똑같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 것이다 라고 하는 언급은 똑같이 뒤집어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살아 있는 것이다 라는 것고 똑같은 언급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나의 내면의 세계에서 본 것인가 아니면 밖에서 그리스도 편에서 본 것인가 그리스도 편에서 보았을 때에는 사도바울이 그리스도 당신 안에 계시겠지 어떻게 당신이 사도바울 속에 들어가 계시겠습니까? 관점의 차이입니다.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든지 바울의 고백을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안에 계시든지 이것은 실제적인 성도의 연합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경험적으로 돌아가 봅시다. 여러분들의 늘 주님안에 있었지만 예수님안에 실제적인 연합을 충만히 누리면서 계셨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예수 안에 계셨을 때가 있습니다. 언제든지 예수 안에 있지 않은 적은 없었는데 이 실제적인 연합이 아주 고도로 누려 짐으로서 그래서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안에 있는 것을 실제적인 성화의 삶속에서 아주 높은 정도로 경험 하던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특별한 사랑의 때라고 부를 수도 있고 인격적인 관계에서 본다면 특별한 사랑의 때라고 부를 수 있고 정동 측면에서 본다면 수시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느끼는 마음이 우리에게 전수 되어 내려오던 그래서 슬플 때 그 광경을 보고 아파하고 감사할 때 그 광경을 보고 기뻐하고 그 분을 향한 찬송이 있고 한 그런 정동의 상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영적인 민감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측면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그런 영혼의 상태입니다. 영국 청교도들이 최고의 성화의 상태라고 생각한 것은 명령을 기다리는 영성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나에게 지시하셨으면 참 좋겠다 그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영혼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쨎든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연합의 상태에 너희가 있고 그때가 바로 주님을 가장 사랑하던 때입니다. 만약에 너희가 그렇게 주님과의 실제적인 연합의 상태에 있고 그 다음에는 무엇인가 하면 내 말이 너희안에 거하면 했는데 내 말은 무슨 뜻인가요? 예수님의 계명을 가르킵니다. 왜냐하면 14장부터 계속해서 예수님의 관심이 계명과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영적 관계를 연결시키면서 담화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이 말은 계명입니다. 14장을 찿아 보십시요. 14장 21절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여기에서 예수님이 내 말이 너희안에 거하면 이것은 일반적인 말이 아니라 계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에 나오는 조건이 실제적인 연합에서의 최고의 사랑의 상태를 지향하고 있다면 후반부에 나오는 두 번째 조건은 그리스도 예수의 계명이 그의 마음을 주장하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의 자신감 같은 것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결국 무엇인가 하면 기도가 한 사람이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의 관계에 있어서 삶의 초점이 예수님께 꽃혀 있고 두 번째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주신 계명을 따라 살려는 의지의 크기가 내 안에 큰 상태가 될 때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고 아무리 예수님께서 허락해 주셔도 이미 자신이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대로 살고자 하는 커다란 의지가 마음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구하면 그것에 이바지하는 쪽으로 구하지 반대로 가게끔 구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다. 아이들이 정신을 차리고 큰 깨달음이 있어서 내가 이제 공부해야지 사람이 되겠구나 그래야 훌륭한 사람이 되겠구나 이것이 부모가 때리고 협박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깨우쳐서 자기 인생의 길에 대해서... 그래서 자기가 알아서 열심히 공부 하는데 너무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여러분들 자녀들하고는 상관이 없겠지만... 너무 열심히 공부를 해서 건강이 염려될 정도입니다. "텔레비전 좀 보고 해라" "아니에요 공부해야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야! 그러지 말고 여기서 이것 먹고 이번 여름에 휴가라도 가서 머리 좀 식히자" "엄마! 대학가면 시간 많아요" 이렇게 열심히 공부 한다고 칩시다. 그런 아이에게 어느날 "야! 네가 그렇게 공부하는것 보니까 아빠가 참 딱하다. 그리고 대견하다. 너 원하는 것 뭐든지 한번 구해봐라" 하고 "아빠가 뭐든지 들어 줄게" 그럴때 영악하게도 "아빠가 뭐든지 들어 줄거야?" "그래" "아빠 나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분식집에 취직이라도 하면 안되요?" 이렇게 말할 리가 있습니까? 언제 교회 자매들하고 만났는데 같이 식사를 하는데 그랬습니다. "어떤 음식들을 자매들은 좋아해요?" 라고 물어 보았더니 "목사님! 우리가 하지 않은 밥은 뭐든지 다 맛있어요?" 얼마나 밥하기 싫으면 그렇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말만 그렇게 하겠죠? 살림 하는 것을 마치 오락하는것처럼 재미있게 여기는 자매들도 많지는 않지만 종종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릇을 사 모으고 맛있는 요리를 해서 식구들을 즐겁게 해 주고 집안을 꾸미고 하는 것에 꽂혀서 행복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을 모두 가족을 위한 헌신적인사랑이라고 장황하게 묘사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쨎든 성향이 그래서 그렇게 곰살맞게 집안을 깨끗이 치우고 하는것에 보람을 느끼면서 친구도 없이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보다 더 재미 있으니까... 그렇다고 칩시다. 그것을 시아버지가 기특해서 너 시집와서 고생만하고 뒤치다꺼리만 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을 했는데 넌 어쩜 그렇게 가족을 사랑하고 그렇게 집안일에 열심을 내고 하면서 보람을 찿고 사니... 내가 보니까 너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내가 뭐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 주마 할 때 그 며느리가 아버지 정말 모든 것을 들어 주시겠어요 그럼 정말 들어주고 말고 그럴때에 저 그럼 이혼하게 해 주실래요 이러겠습니까? 그것은 감정적으로 안된다는 것이 너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무엇이든지라고 자신있게 붙이는 것입니다. 아레이 토레이 목사님의 일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이 어느날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우리가 주님을 잘 믿으면 하나님이 그 믿음을 기뻐하셔서 모든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것을 강조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자매에게 남편이 있었는데 시름시름 앓았습니다. 믿으면 된다고 해서 자매가 열심히 믿었습니다. 굳게 믿고 또 잘 안 믿어질 때 감사헌금까지 하지 않습니까? 이루어질것을 믿고 감사헌금을 합니다. 그런데도 남편이 결국 죽었습니다. 죽고 나서 이 자매가 목사님에게 와서 따졌습니다. 성경에 많은 구절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내가 할 말은 없지만 한구절은 내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입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니까 요한복음 14장 여러분도 한번 찿아 보십시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요한복음 14장 14절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뭐냐 했더니 읽었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1절에 보니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래서 믿었고 근심하지 말라고 해서 근심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해서 구했고 그것도 또 주님 이름으로 구하라 해서 구했는데 결국은 안 이루어 졌으니 이 구절은 확실히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이 아닌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목사님이 다시한번 읽어 보십시요 그랬습니다. 그래서 다시 읽었습니다. 내 이름으로 그러니까 영어 성경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거기에서 나오는 너희속에 자매는 안 들어가기 때문에 응답이 안 된 것입니다. 그 자매가 너무 황당해서 어떻게 그런 성경이 있을 수 있습니까? 했더니 15절을 더 읽어 보십시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5절의 너희와 14절의 너희가 똑같은 너희이니라. 그 해석을 우리들이 100% 받아 들이냐 마느냐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겠지만 확실한것 하나는 우리의 기도의 능력이 우리들이 원론적으로는 믿어야 한다 굳게 믿고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또 열렬해야 한다 계속 부르짖는 자는 하나님도 감당 못하신다 이런식의 초등학교적인 공식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이 어느정도 사실일지 모르지만 더 깊은 단계에 가면 결국 그 기도하는 사람이 누군가 하는 문제와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순수한 생활의 동기를 가진 사람일 때 그 기도는 오히려 큰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삶이 계명에서 훨씬 이탈하고 마음속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관심 밖인 사람이 어느 한 순간에 열렬함을 더하고 굳센 믿음을 갖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체면에 가까운 암시를 자신에게 걸어 믿으라고 명령한다고 할지라도 그 기도는 전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능력있는 기도라고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외적인 특성으로 드러나는 열렬함은 어느 정도 내적인 열렬함을 가늠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똑같이 일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간절한 기도, 주님을 확실이 믿는 기도, 그리고 끈기 있는 기도 이 모든 것들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모든 강조는 하나의 토대 위에 이루어지는 강조이니 그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그 사람의 사람됨과 삶 그리고 기도 이 세가지가 일치를 이루고 있는 사람인 경우에 그 열렬함과 끈질긴 지속성 그 다음에 주님을 향한 믿음 이 모든 것들은 빛나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더 큰 기도의 능력을 불러오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기도속에서 하나님이 차별대우 하신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가 고백은 안 하지만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이 차별에 대한 느낌은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의식 속에서도 느껴질 수 있지만 똑같은 자기자신에게서 느껴질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많던 때가 있었고 그 다음에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흩어진것처럼 드문때도 있습니다. 그 모든때의 특징들을 살펴 보면 단순히 많이 믿었느냐 오래 기도했느냐 여러번 기도 했느냐의 문제 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열렬한 기도, 환경에 쉽게 꺽어지지 않는 진실한 기도, 그리고 지속적인 기도 주님을 확실하게 믿는 신앙에 입각한 기도 이 모든 것들은 정말 마르지 않는 기도의 능력의 원천이고 언제든지 우리들이 잊지 말고 굳게 붙들어야할 기도의 빛나는 덕목들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사람됨이 주님과의 영적인 교제의 연합이 그리고 주님과 주님의 계명이 그 사람의 마음안에 있어 삶의 동기가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되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는 그 모든 아름다운 기도의 덕목들이 아름답게 그 사람안에서 유익을 끼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자체에 대해 고민하는것 보다 더 많이 우리는 삶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고 또 삶에 대해서 고민할 때 우리 자신의 의지의 크기로 우리가 기도에 합당할 만큼 우리 자신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기도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하게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주님과의 실제적인 연합에 있어서 성화의 진전을 이루고 주님의 계명을 이루며 사는 것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기쁨이 되도록 그렇게 삶을 기도에 일치 시켜서 풍성한 응답의 아름다운 경험들이 여러분들의 삶을 빛나게 하기를 그래서 결국은 그 삶의 열매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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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기도자의 삶을 기뻐하실 때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기도하는 사람의 다급한 마음은 언제나 응답의 욕구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도 이러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기도를 하면서 응답 받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야말로 외식하는 기도자요 중언부언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곳에서 기도가 응답되어지기 위한 기도의 방식에 대해서 많이 가르쳐 줍니다. 기도를 할 때에 의심하면서 기도하는 것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원인이 됩니다. 또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열렬함이 없으면 그것도 응답 받는 기도로서의 요건을 갖추지 못합니다. 또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성경의 정신을 따라서 옳은 것을 구하지 않으면 믿고 또 열렬하게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응답의 요건이 될 수 없습니다.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게 되면 그 기도하는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응답받을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부부간에 불화하고 싸우게 되면 기도가 막힌다고 했으니 아무리 훌륭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있어도 이런 경우에는 실제적으로 기도를 위해 마음을 쏟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관심 자체가 어떻게 하면 이 기도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 져야지만 응답될 수 있을까 그래서 한때 우리 소나무 뽑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원에 올라가서 소나무를 뽑으면 된다 더라 그래서 교인들과 전도사때 갔었는데 식목일에 심어 놓은 묘목을 붙들고 애꿋은 그것을 흔든다고 해서 기도가 응답될 리가 없습니다. 어느 기도원에 가니까 그 자리에서 기도하며 응답이 잘 된다고 해서 응답방이라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는 경쟁이 치열합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신앙에 있어 어느 한쪽면만을 유별나게 강조하게 되고 균형을 잃게 되면 가장 좋은 신앙의 실천속에서도 미신적인 요소가 들어오기 마련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읽은 이 본문은 이렇게 기도에 있어서 효과적으로 응답 받는 기도의 요령을 찿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을 주는 구절입니다. 다시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라는 말이 빠졌지요?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라고 했습니다. 이는 받는 이유를 설명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간절히 기도했다든지 열렬히 기도했다든지 금식을 했다든지 하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주님으로부터 받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우리는 누구입니까? 그렇게 기도하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첫째는 계명을 지키는 사람, 성경에 보면 계명이 복수로 나옵니다. 계명들을 지키는 사람... 그리고 두 번째는 그의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사람 이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지키며 살도록 주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우리가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감옥에 들락 거리면서 사회에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 부모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본인이 그런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녀들은 그런 길을 걷게 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육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이 되지 않습니까? 어린아이때부터 시작이 되는데 이제 너댓살된 아이라고 칩시다. 이제 한창 교육이 중요할 때입니다. 우리는 교육을 너무 늦게 시작을 합니다. 프랑스 같은 나라는 2년 6개월이 되면 의무적으로 유치원에 들어가야 합니다. 나라에서 돈을 다 대 줍니다. 그러니까 우리로 따지자면 세살반에서부터 의무교육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때 나이가 교육에 있어 가장 흡수력이 빠른 나이입니다. 그때의 가치기준, 시민생활에 있어 기본적인 감각같은 것들을 심어 주는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우리는 너무 늦습니다. 열심이 있는 사람들은 더 빨리 시키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돈이 들어가서 문제이지만... 그래서 의무교육의 시기를 훨씬 더 앞당겨야 합니다. 우리 나이로 세살정도만 되면 우리나라가 좀더 돈을 벌고 있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세금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해서 세살정도부터 의무교육을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만이라도 아쉬운대로 의무교육을 시켜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선생님들 밑에서... 그런데 어쨎든 교육을 시키지 않습니까? 서너살밖에 안되는 아이에게 엄마의 마음속에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이것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도 이 아이가 알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에 그것을 못 알아 들으니까 그것은 나중에서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에게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전체적인 설명을 해도 아이들이 못 알아 듣습니다. 그러니까 훔치면 안되, 친구하고 싸우면 안되, 남의 것 가져가면 안되 하면서 아이에게 아주 명료하게 지키면서 살수 있는 규칙들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인생을 살면서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참으로 보람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가치란 무엇인가? 선악이란 무엇인가? 이런것들을 많이 고민하던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고 성경의 이치를 빨리 터득하게 되면 예수 믿은지 얼마 안되었는데 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는가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빨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참된 인간이 되는 비결이구나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우리들을 구원하시는구나 하는 이해가 빨리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사도바울이 그렇게 예수 믿은지 얼마 안 되었는데 그렇게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훌륭한 기독교의 진리의 내용들을 체계적인 글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를 믿은후에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예수 믿기 전에 한 공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가서 발견한 것인데 놀라운 사실인데 기독교 강요라는 그 불후의 명절을 칼빈이 썼을 때 회심한지 2년밖에 안된 때 였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새가족반 시절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만약에 칼빈처럼 회심을 했다고 한들 그것을 쓸 수가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그가 공부했던 장소를 모두 돌아 보았습니다. 아주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 대학원시절 17명중 2등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그 기록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더 감격적인 것은 피터 롬바르디라고 하는 사람이 9세기경 사람이라고 생각 되는데 서방신학자 가운데 조직신학을 조직적으로 기술한 최초의 인물입니다. 그분의 책이 오늘날 우리에게 기독교 강요처럼 그렇게 교과서 처럼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명제집이라고 하는데 그 책을 가지고 철학적 신학인데 그것을 공부하면서 그 책 옆에다가 펜으로 깨알같이 자기가 공부한 내용들을 적어 놓은 것이 거기 있었습니다. 굉장히 감격적이었습니다. 그것을 제가 가지고 있거든요... 롬바르디의 명제집을... 그것을 사진 찍었습니다. 굉장히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고 그 지식의 분량이 굉장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카톨릭에 있는 사람하고 논쟁을 해서 결코 지지 않습니다. 그런 철통같은 학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깊이 만났을 때에 카톨릭이 잘못된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선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는데 어느 하나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성경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려고 했던 참된 기독교 신앙과 카톨릭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신앙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는 그러는 것입니다. 로마교회만이 참 교회이고 나머지는 전부 구원받지 못한 족속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논쟁을 하면서 그 위대한 교부 빠스엘 그리고 크리소스톤, 그레고리 같은 그런 훌륭한 동방교회의 위대한 인물들이 구원을 못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말이나 됩니까? 그러면서 교황이라고 하는 것은 교인들이 선출한 대표자일 뿐이지 하나님이 보내주신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머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공박을 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머리는 그리스도 예수 뿐이라는 것을... 그런 탄탄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을 때 완전히 새롭게 깨어나는 사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그 순간부터 철저하게 끊임없이 공부하고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세계의 비밀들을 터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느낀것이 성지순례도 우리가 꼭 가야되겠지만 성지순례를 저는 안가 보았습니다. 곧 가겠죠 그런데 성지순례도 우리 교회에서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렇게 은혜가 된다고 합니다. 성지순례를 못 가보아서 모르지만 교회의 일꾼들이 동남아 돌아 다니면서 뜨거운 바닷가에서 살 끄스르지 말고 이런데에 와서 이렇게 보면서 낮에는 돌아보고 저녁에는 호텔에 모여서 집회하고 기도회하고 이렇게 하면서 2주만 하고 오면 새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진짜입니다. 우리 이것은 사는것도 아닙니다. 완전히 목숨을 걸고 진리를 위해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끔찍 합니다. 핍박이 한창 있었던 이태리나 프랑스 이런데 가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였던 형틀 같은것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습니다. 그런속에서도 장열하게 내일 죽어가면서도 오늘 그리스도를 찬송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런 믿음으로 우리들이 살아야 되는데 문제는 그것입니다. 한순간에 이렇게 예수를 믿는 순간에 그런 놀라운 확신이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려고 했던 궁극적인 이유, 주님이 예수를 믿으므로 우리가 훌륭한 사람 되게 하시려는 계획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 그것을 예수 믿고 그 순간에 확 깨달으면서 칼빈처럼 그렇게 다가 오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저 같은 경우도 끊임없이 배우면서 왔는데도 예수 믿고 훨씬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야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데 오죽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계명은 그런 지식이 없어도 성경을 읽으면 수만가지의 계명이 이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바로 그것입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 말고 거짓말 하지 마, 군것질 많이 하면 안되 이런것들입니다. 큰 그림이 무엇인지 몰라도 그것 하나 하나를 확인하고 부모 말씀에 잘 순종하면 아이들이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듯이 신앙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계명을 잘 지키면서 사는 것 그것은 확식이 없다고 투덜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 그 말을 왜 못 알아 듣겠습니까? 아이들이... 사탕 너무 많이 먹으면 이빨 썩는다 그러지마 왜 못 알아 듣겠습니까? 계명은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계명은 이해 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지키기가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필요 합니까? 그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은혜가 없을 때에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계명을 은혜는 그 계명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니까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아야지,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야지 하는 사람에게만 은혜의 필요성이 느껴지지 그 경계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은혜는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싸우기 싫어 하는 군인에게 쥐어 주는 최신 무기와 같이 탈영할 날만 기다리는데 묵직한 무기를 들려 주는데 얼마나 부담스럽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과 기도생활은 끊을 수 없이 밀접한 관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러면 기도에 있어서 사람을 차별대우 하시냐 물론입니다. 그것은 너무 물론입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다 넓은 의미에서는 구원 받은 백성을 사랑하시고 또 심지어는 구원받지 못한 인류들 까지도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 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우리 안에 들지 않은 내 양이 있어서 그들도 인도 하여 우리안에 들어야 할 터인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사랑은 동일한 사랑이고 어떻게 보면 길 잃은 양에 대한 목자의 애착이 이미 있는 양떼들 보다 훨씬 더 클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누가 복음 15장의 가르침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제적인 기도생활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교통에 있어서 이 교통의 친밀함은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 실제적인 연합이 결국은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그 실제적인 연합이 결국은 사랑인 것입니다.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할 때 실제적인 연합들은 증진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비추어 보아도 어떨때는 하나님이 기도에 잘 응답해 주시고 어떤때는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린아이와 같이 다루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계명들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우리의 삶을 향하여 이렇게 살아라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지시사항들입니다. 그것을 잘 지키고 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 자체에 공을 들이는 것 만큼 기도자가 되기 위한 삶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의존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에 그러한 삶이 밑바탕이 되는 사람이 기도 시간에 자기를 쏟아 부으며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할 때 그 계명을 따라 살 수 있는 은혜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느것이 먼저라고 할수 없고 어디에서부터 시작해도 마찬가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생활이 풍부해지기 위해서는 오늘도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아야 되겠구나 내 힘으로 살 수 없다 하나님 나에게 은혜를 부어 주십시요. 순종하면서 살아 가면 기도가 변하는 것입니다. 삶이 일주일동안 다르면 그 다음주 예배는 특별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주에 예배가 특별하면 그 다음주의 삶이 특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이것을 적용해 보십시요.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여러분의 기도는 날개를 달 수 있습니다. 계명대로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그의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계명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이 안 기뻐 하신다는 것입니까? 아니죠? 우리가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이 기뻐 하십니다. 그러면 계명을 지킨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기뻐하심을 행함이라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것이 아디아포라와 관련된 것입니다. 아디아포라 라고 하는 것은 무슨뜻인가 하면 아무래도 좋다 그런 뜻입니다. 아디아 포라 그것을 희랍어로 아무래도 좋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의 많은 부분에서 옳다 그르다 라고 하는 정확한 판단이 서 있는 영역도 많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영역이 우리에게 자유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유로운 영역에 있어서 주님이 중심이 되지 않는다면 계명을 지키는 삶 그 자체가 외적인 계명의 준수이지 내적인 계명의 준수일 수 없는 것입니다. 자 아이다포라의 예를 들어 볼까요? 많지요. 우리는 자신의 인생관을 다른 사람에게 너무 많이 강요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잘 보십시요. 제가 가끔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사람을 볼 때 화가 납니까 내 인생관과 어긋나는 사람을 볼 때 더 화가 납니까? 전자 입니까 후자 입니까? 그것 굉장히 이상합니다. 자기가 뭔데... 자기 인생관이 뭐길래? 죄인일 뿐인데 그죠? 그런데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것은 화가 안 나는데 내 신조가 시간을 지키는 것인데 시간을 어겼을 때에는 뿔따구가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을 아주 하챦게 보는 것입니다. 이런것들은 어떤 것입니까? 매우 잘못되고 자기의 인생관을 하나님 위에 놓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많은 영역이 아디아포라입니다. 아디아포아의 예를 들어 볼까요? 머리를 기를 것인가 단정하게 짧게 자를 것인가? 다이어트를 해서 살을 뺄 것인가 그냥 살을 찌울 것인가?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낼 것인가 공립학교에 보낼 것인가? 제도권 학교 보낼까 대안학교 보낼까? 아이들 시집 장가를 대학 마치자 마자 보낼까 아니면 30 넘어 까지 돈 벌게 하고 보낼까? 시집 장가 갈 때 돈을 보태어 줄까 자기들보고 벌어서 가라고 할까? 전원에 집을 지을까 도시에서 살까? 사업을 계속 할까 직장생활을 계속 할까? 이런것이 다 아이다포라입니다. 그런 아디아포라의 영역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의 인생관의 잣대를 가지고 아주 날카롭게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유해도 괜챦다 주신 영역은 나도 자유할 수 있고 저 사람도 자유를 누리도록 허락해 주는 것이 사랑의 원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먹는데에 절약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장품에 돈을 팍팍 쓰는 사람이 있고 옷에 절약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먹는것에 신경을 더 많이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아디아포라입니다. 누가 그것을 정할 수 없습니다. 또 여자들이 목걸이나 반지나 이런것들을 하고 다니는 것 그것도 획일적으로 규칙할 수 없습니다. 아디아포라에 속합니다. 매끼칠한 싸구려를 메고 다닐것인지 그런것 열개 살돈을 모아서 진짜를 하나 차고 다닐 것인지... 아니면 일체 안 하고 다닐 것인지... 그것은 아디아포라입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자유를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아디아포라의 영역에서 그 아디아포라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완전한 자유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를 누림에 있어서 한 원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무슨뜻인가 하면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자유하지만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것이라고 하는 이유 때문에 이 자유를 이렇게 사용하지 않고 저렇게 사용하거나 이 자유를 이렇게 사용하는 대신 저렇게 포기하고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까지 침범하면 하나님이 벌 주시나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담배는 성경후에 나왔는데 피지 말라는 명령이 없는데 그것이 죄인가요 이렇게 묻는 사람은 하나님이 화내시기 직전까지 가보고 싶은 사람입니다.동기 자체가... 그것도 사실 아디아포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실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주어진 영역에서도 기준을 마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자녀를 공립학교 보낼 수도 있고 사립학교 보낼 수도 있지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유이니까 내 맘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어진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겠습니까? 간절히 기도해서 어떤 사람은 사립학교에 응답받고 보내고 어떤 사람은 공립학교에 보냅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제도권 학교에 보내고 어떤 사람은 대안학교에 보내고 어떤 사람은 둘다 포기하고 홈스쿨을 합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을 기뻐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저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행해도 죄가 아니고 저것을 행해도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죄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것이 하나님께 가장 기쁨을 드릴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누구를 제일 우선으로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구하든지 응답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들이 어려운 것은 기도하는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기도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또 기도가 없이는 그 기도에 적합한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언제쯤 내버려 두면 정말 기도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가능성이 있습니까? 개꼬리 삼년을 묵어도 황모가 안됩니다. 황모가 무엇인가 하면 붓으로 쓸때에 사슴털이 있다고 합니다. 나도 잘 모르는데 그것이 그렇게 최고의 붓의 재료라고 합니다. 그런데 개꼬리를 삼년을 묻어 둔 들 그것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면서 점점 기도자 답게 되어 가고 기도자 답게 되어 가면서 우리의 기도도 기도다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성경에 보면 계명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명이 무엇인가 하면 두가지 인데 예수님을 믿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그분을 곧게 믿게 되면 그분을 신뢰하고 믿게 되면 그 다음에 무엇을 믿겠습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깊이 신뢰하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믿어 집니까?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이 믿어 질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갖게 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들이 수 많은 계명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배운것도 계명입니다. 그 계명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계명은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며 사는 살이 분리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번째가 무엇인가 하면 그 예수님의 계명이 무슨 계명이었습니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예수님의 계명이었습니다. 그래서 한사람이 은혜에 깊이 붙들리게 될 때 그의 기도생활은 대부분 이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한 기도로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마음이 생겨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의 유익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할 마음이 생겨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이 안들어 주실 리가 있겠습니다. 거기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 계명속에 모두 가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율법사가 계명중 제일 큰 것이 무엇입니까? 그럴 때 예수님이 일리 있는 이야기를 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하셨는가 하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림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율법과 선지서의 근본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나뉘어진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계명에 순종하며 살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고 믿음 생활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아침의 설교처럼 개인 기도생활에 깊이 힘쓰고 그리고 오늘 오후의 설교처럼 삶에 있어서 온전해 지려고 애를 씀으로 주님께 드리는 기도속에서 풍부한 응답을 경험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도구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트랙터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미국에게 일본이 전쟁을 해서 진 세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는 원자폭탄 때문이고 두 번째는 레이더 때문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트랙터 때문에 졌다고 합니다. 첫 번째 두 번째는 우리들이 잘 아는 것인데 트랙터 때문에 졌다는 것은 깜짝 놀라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이 비행장을 폭격을 하면 일본은 그것을 복구 하는데 3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군이 미군 비행장을 폭격하면 복구하는데 3개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트랙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누구든지 살아가지 않습니다. 삽으로 곡갱이로 섬기는 사람이 있고 트랙터로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땀을 흘리고 맨주먹 불끈 쥐고 싸우는 것이야 훌륭한 것이지만 수백명이 곡갱이질을 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트랙터로 확 밀어 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몇 년전에 북한에 갔을 때 너무 너무 마음이 아팠던 광경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병실에 전차가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전차길을 없애는 모양 이었습니다. 무슨일인지 모르지만... 우리 같으면 그것을 그냥 묻어 버리지 않겠습니까? 쇠가 얼마나 간다고... 내 생각에는 그냥 묻어 버릴것 같습니다. 아마 자르고 하는 인건비가 더 들어 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 쇠가 아까워서 그것을 꺼내는데 우리 같으면 두두두두둑 하는것 20대, 100대 가지고 하면 일주일이면 해 치우지 않습니까? 수천명의 중학생이 동원이 되어서 주먹 만한 망치를 가지고 그 쇠를 꺼내는 것입니다. 콩크리트 아스팔트 도로를 깨뜨려서... 아스팔트도 아니고 시멘트 도로입니다. 그것을 두드려서 그것도 써 붙여 놓았습니다. 우리는 돌격한다. 무슨학교 몇학년 몇반 그리고 구간을 정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 아이들이 공부도 못하고 새까맣게 마른 아이들이 주먹 만한 망치를 가지고 그것을 꺼내는데 정말 화가 났습니다. 길거리에 그 흔한 포크레인이 한대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살 때 항상 내 영혼이 날마다 주님 만나서 신령한 능력을 은혜를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며 사는 것은 트랙터로 포크레인을 일하는 것이라면 그것 없이 인간의 자원만을 가지고 섬기는 것은 곡갱이로 부삽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언제해서 그 많은 사명을 밭을 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거기에 없어도 주님이 역사 하셔서 사람을 움직이시고 사람을 바꾸시는 큰 기도의 응답이 교회에 따라 다니고 우리의 섬김속에서 동행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 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풍부한 응답 속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1
<sample>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 (2009/1/21 수요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2 (2009/2/15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3 (2009/2/22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4 (2009/3/15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5 (2009/3/22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6 (2009/6/14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7 (2009/6/2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8 (2009/6/28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9 (2009/7/12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0 (2009/7/19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1 (2009/8/16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2 (2009/8/23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3 (2009/9/06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4 (2009/10/04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5 (2009/11/0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6 (2009/11/08 주일오후예배)
14.가장 아름다운 기도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나로 깨닫게 하사 주의 계명을 배우게 하소서"(시119:73).
기도 가운데는 하나님이 하나님이 안 기뻐 하시는 기도도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보면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돈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 하려다가 하나님께 책망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기도 가운데는 아무리 열렬히 기도 하려고 하고 진심을 담아도 기도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아닌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시인이 올려 드리는 기도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 응답되지 않을 리가 없는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그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의 계명들을 배우게 해 달라는 기도 였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는 마치 시편 119편 앞 부분에 나오는 눈을 열어 주의 법에 기이한 것을 보게 해 주옵소서 라고 하는 이 시인의 기도를 생각나게 만들어 주지 않습니까? 이 기도를 드리기 전에 시인은 먼저 이상하게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일을 먼저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라고 말하는데 히브리 성경에 보니까 이 부분은 주의 손이 나를 만드시고 빚으셨나이다 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아마 이 시인도 하나님이 맨 처음의 사람을 흙으로 빚으사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은 것을 기억하면서 이 시를 노래 했던것 같습니다. 최초의 사람인 하나님이 흙을 빚으셔서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만드셨지만 자신은 최초의 사람이 아니라 모친의 태로부터 빚어진 사람이지만 살과 뼈는 부모로부터 받았으나 사실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손이 장부를 지으시고 그리고 모든 폐부를 갖추어 사람의 형체를 만드시고 빚으시는 것이 마치 흙으로 사람을 빚어 첫 번째 인간을 지으시는 것 처럼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셔서 그렇게 사람을 만드신 것처럼 자기를 창조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해 달라는 기도를 올리기 전에 자기의 근본에 대해서 고백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 자신의 뿌리가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본분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를 빚으시고 그리고 자기를 만드신 것을 회고하고 그렇게 또 고백을 함으로서 창조주와 자신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어려운 이유는 여전히 우리 안에는 자기를 자신의 인생에 주인 삼으려는 그 죄의 유전자가 골수 깊이 사무쳐서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힘들게 하는 것이지 무엇이 우리 신앙생활이 힘들겠습니까? 자기가 좋아하고 기뻐하는 일을 고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없습니다. 기타를 배우면서 손가락이 부르트고 컴퓨터 앞에 매달려 밤새 게임을 하느라 눈이 새빨게져도 그것이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골수 깊이 사무쳐 그분이 우리 마음의 즐거움이 된다면 우리가 즐거워 하는 그분을 위해서 희생하고 고생하는 것은 달콤한 시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교통이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 하심으로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고 또 그렇게 창조한 인간이 타락했을 때 구속해 주심으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에 나의 인생에 마땅한 본분은 그 하나님이 나를 창조 하시고 구속하시면서 까지도 원래의 창조 목적대로 살고 싶어 하시는 그 마음을 헤아려 드리고 그 뜻에 순복하며 사는 그것이 인생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칼빈 선생은 하나님이 우리 같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는 형상을 회복시키시는 것은 더 커다란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맨 처음 지으신 그 목적대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돌보고 가꾸면서 자신뿐만 아니라 이 모든 인간들과 피조물들의 세계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보여주는 피조물들이 되게끔 이바지 하는 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자기가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는데 문제는 비록 하나님 앞에 구원 받은 백성이지만, 하나님의 자녀 이지만 여전히 영혼의 어두움과 그리고 지성의 무지, 의지의 완고함이 남아서 그 창조의 목적을 한번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계속 가슴에 간직하고 사는 일도 어렵고 또 그것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사물처럼 한 순간에 인상이 아니라 그것이 체계적으로 마음속에 사상이 되어서 그래서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목적 하나에 이바지 하도록 그렇게 살아 가는 그것은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것입니다. 악기를 잘 다루는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그 악기에 맞춥니다. 그런것입니다. 틀립니다. 살아가는 삶이 관심사와 초점이 다릅니다. 그것을 못하는 사람과 잘하는 사람은 관심사가 다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 있는 것이 아주 놀랍게 여기에 보면 나로 깨닫게 하사 그리고 두 번째는 주의 계명을 배우게 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배우고 깨닫게 해 주시고 또 배우게 해 달라는 기도이지 않습니까? 이 두 단어가 다른 단어가 쓰여졌는데 앞에 나오는 깨닫게 해 주십시요 라는 말에는 히브리말에 빈 이라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빈이라는 동사가 무슨 뜻인가 하면 탁 하고 판독을 하는 것입니다.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 판단력 그것이 빈입니다. 뒤에 나오는 배우게 하소서 라는 단어는 라마드인데 이것은 그야말로 잘 하는 사람에게 이치를 하나씩 하나씩 깨우쳐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다 라고 하는 것은 이 두가지가 합쳐진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냐 하면 하나하나 사람이 가르쳐 주어서 1+1은 2이고 2+3은 5이고 이렇게 하나하나 구원론은 이것 그 다음에 종말론은 이것 하나하나 교리문답을 외우고 하는 것은 라마드입니다.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바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한순간에 밝은 빛이 들어오면서 전혀 깨달아 지지 않던 어떤 말씀이 논리는 없지만 빛이 들어오면서 아 그것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될 때 그것을 믿고자 하는 성향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쏟구치면서 말씀을 꽉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여러분 수준에서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대표로 여러분이 나가고 저쪽 과학자들 중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둘이 나와서 여기에서 둘이 논쟁을 하면 여러분 이길 자신이 있습니까? 절대 이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라마드를 통해서 라마드의 방식으로 하나님이 왜 없는지를 배워 온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한 순간에 번쩍하는 성향의 빛이 확 비치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멘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논리를 초월해서 아멘하고 믿는 믿음이 성경을 통해 생겨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확신은 여러분들이 강하지만 논리적으로 저 사람들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아주 훌륭한 지식을 얻는 수단 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도 안되는 이야기 같지만 대부분의 과학 논문들은 영감에서 시작이 된다고 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어느 순간에 번뜩하고 떠 오르면서 이것일 것이야 라고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것을 놓고 왜 그럴 수 밖에 없는지를 연구해 가면서 결국 논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딱 두가지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뉴톤의 사과나무의 경험을 생각해 보십시요. 누구든지 다 떨어지는 사과 수 없이 보았고 뉴튼이 떨어지는 사과 발견할 때에는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부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어느 한 순간에 이것이 무엇인가 잡아 당기고 있다 라는 느낌이 확 하고 스쳐지나가는 것입니다. 그 순간을 증명해 보라고 하면 증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음처럼 붙들고 증명해 가는 것이 인력의 법칙입니다. 한 사람만 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인쉬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표를 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일 것이라고 처음 생각한 것이 열여섯입니다. 그때 논리적으로 생각했겠습니까? 어느 한 순간에 그럴 것이다 하는 영감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결국은 증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운 공식은 그가 죽은 훨씬 후에 우주를 관측하는 관찰자들에 의해서 입증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잘 들어 보십시요. 일반적인 학문의 세계에서도 그런 빛이 있다면 일반 지식의 세계가 아닌 특별한 지식의 세계, 만질 수 도 없고 형체도 없고 흔적도 남기지 않는 그런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된 지식에 있어서는 이러한 지식의 세계가 훨씬 많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으면서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항상 이성적으로 벽돌 쌓듯이 하나하나 쌓아 가는것에 만족하지 말고 선생님이 잘 가르쳐 주고 목사님이 잘 가르쳐 주는 그것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배우면서 매 순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이 말씀의 뜻을 내 마음속에 선명하게 분별하게 해 주시는, 판단하게 해 주시는 깨닫게 해 주시는 이 빈의 역사가 일어 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날마다 듣던 하나님의 말씀속에 아주 놀라운 뜻이 들어 있다는 것 그리고 도저히 이성으로는 증명하지 못해도 그 높은 세계에서는 그것이 참 진리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강한 믿음이 빛과 함께 우리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강하게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시인이 얼마나 탁월한 말씀의 세계가 특히 인간에게 어떻게 깨달아 지는지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가에 하는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습만을 통해서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빛이 확 하고 우리속에 비칠 때 그 빛이 아무데나 허공을 비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비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건전한 신비주의 제도를 거하는 창입니다. 그들도 번쩍하는 빛을 이야기 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상상과 아무것이나 비추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오류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지성으로 성경을 대할 때 그 빛을 확 비추어서 그래서 이 말씀의 의미를 원래 있는 이 뜻을 깨달아 믿게 만들어 주는 그러한 것이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깨달음입니다. 그때 그 깨달음을 통해서 그런한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봇물처럼 확하고 말씀을 깨달은 사람의 마음속으로 밀려 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매일 공책 가져다 놓고 성경 공부해도 마음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그런 종류의 깨달음이 없는 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공부를 많이 하면서 말씀을 많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다른 교만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만 이 말씀의 빛을 비추어 하나님의 마음이 봇물처럼 내 마음에 밀려 들어 나를 통치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경의 역사다 이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깊이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이 시를 쓸때쯤에는 산전수전을 다 겪고 수 없는 하나님의 광채속에서 진리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이건만 여전히 하나님 앞에 더 많은 빛을 진리의 빛을 달라고 그래서 깨닫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주의 계명을 배우게 하옵소서 히브리 성경에는 복수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계명이 아니라 지키면서 살아야 할 많은 계명들을 할 수 있으면 모두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께 배우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배우다 라고 씌여진 라마드는 학생이 선생님에게서 공부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번쩍하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깨닫게 되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모으면서 이렇게 온전하게 건축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면서 보면 매일 좋은 지식, 나쁜 지식, 교회에 다니면서 온갖 지식을 다 주워 모았는데 쌓아 올려 지지, 건축되지 않는 사람들을 여러분들이 보죠? 아주 혼란 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올바르게 배우게 되면 그 배운 지식들의 옥석을 가려내게 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이것은 옛날에 잘못 알았었구나? 그리고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류를 행할 가능성이 많아 지는 것입니다. 잘못된 지식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특히 약이나 인체의 건강에 관한 잘못된 정보는 사람을 죽게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텔레비전에 보니까 안궁우황이라는 약이 있습니다. 우황이 다 우황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경끼해서 숨이 넘어 갈 때 딱 3일의 한도 내에서 복용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약속에 주토 또는 주사라고 하는 독약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참 신기한 것이 몸에 해로운 독약은 몸에 이롭습니다. 몸에 아주 이로운 것은 몸에 해롭습니다. 이것이 양쪽 극단이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약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져다 육개월동안 아이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완전히 식물인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소송하라고 난리인데 그러니까 약사나 의사에게 100% 믿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 약의 지식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의료분쟁나고 이러는것 보면 대게 어떤 약을 10mg만 처방해야 하는데 의사가 다른 생각하다가 20mg이라고 써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한번 먹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3개월씩 6개월씩 장기복용하는 약이라면 그것이 몸에 치명적인 해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지식은 그렇게 우리의 몸에 대한 잘못된 지식은 몸을 망가뜨리고 진리에 대한 잘못된 지식은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삶 자체를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이단 같은데 빠졌다가 완전히 파산하는 사람들의 경우가 그런것 아닙니까? 지금도 너무 많습니다. 불건전한 것들이... 거기에 휩쓸려 들어가서 그 아무것도 아닌것에 휩쓸려 가면서 그렇게 인생을 그렇게 더러운 일에 쑤셔 넣듯이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신자로 태어나서 마지막에 죽는 날까지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씩 하나씩 배워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씩 하나씩 배워가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배우면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더 많은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이 말씀속에서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 말씀을 하나하나 배워 가면서 지식의 진보를 이루어서 제대로 된 신앙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요. 돈이 없어서, 사업이 어려워서, 건강이 힘들어서, 마음이 힘들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적은 많이 있지만 말씀을 잘 깨닫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절실하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나라 최초로 신구약의 모든 주석을 쓰신 돌아가신 박윤선 목사님이 주석을 쓰시면서 항상 기도방을 사택에 만들어 놓고 주석을 쓰다가 이해가 안되면 그 방에 들어가서 엎드려 무릎을 꿇고 하나님 도와 주십시요 나는 잘 모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시옵소서. 그집 아이들이 그것을 보고 따라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말씀을 깨닫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드려 진다면 나머지 문제들은 사실은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저절로 해결될 문제입니다. 우리 인생에 달라 붙어 있던 수 많은 별개의 문제인것 처럼 보이던 수 많은 문제들이 하나님 앞에 말씀대로 살려고 뜻을 세우고 기도하고 나니까 나머지는 문제가 아닌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것은 응답되지 않을 리가 없는 가장 확실한 기도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고 그리고 깨달은 진리들을 하나씩 하나씩 조직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기를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확 쏟아져 받은 그 좋은 보석과 구슬들을 하나씩 하나씩 꿰는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그 속에서 진리를 말미암는 참된 기쁨을 얻으면서 사는 것을 행복으로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신자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행복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하여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그 사람들은 잃을 것이 없는 완전한 행복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은혜 안에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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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 (2009/1/21 수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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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5 (2009/11/0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신 기도 16 (2009/11/08 주일오후예배)
15.기도가 방해 받을 때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눅 18::38-39).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없고 남이 동정심으로 던져주는 물질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참한 사람들입니다. 걸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여기에 보면 한 거지가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면서 살아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지가 그냥 밥을 빌어 먹는것도 비참한데 신체에 장애까지 있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마 매일 길가에 앉아 구걸을 했다고 하지만 그 정해진 길가에 앉기까지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지만 거기에 앉아서 구걸해서 밥이라도 빌어 먹는 사람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이런사람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그 사람의 삶이 바뀔수가 있겠습니까? 그가 비록 눈 멀고 빌어 먹는 신세이지만 생각이 없는 사람일 리가 있겠습니까? 그는 아마 오늘도 길가에 앉아서 밥을 빌어 먹었지만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예전에 없이 많은 사람이 자기 앞에 있는 이 길 위를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경이 사람들에게 이것이 무슨일이냐?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나느냐? 무슨 일이 있냐? 그리고 물었더니 뜻밖에 그 유명한 나사렛 예수께서 여기를 지나시느니라 이런 대답이었습니다. 이 거지는 예전에도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것 같습니다. 틀림없이 아마 이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많은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자비롭게 그들을 대해 주신다는 소식이 그에게 새롭게 다가 왔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지나 신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예수님이 바로 그 앞에 계신것도 아니고 또 그 뒤에 오시는 것인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소경은 큰 소리로 외쳐서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쳤습니다. 성경 본문 전체를 읽어 보면 예수님을 만나서 대화 하기 까지 그가 외친것은 오직 같은 말,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이 한마디 뿐이었습니다. 성경에 제자들이 시끄럽다 잠잠하라 이렇게 제지한 것으로 보아서 이 소경은 한번만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치고 그친것이 아니라 쉼없이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쳤던것 같습니다. 자기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사실 이 기도속에 간구하는 이 소경의, 이 거지의 처절한 자기 인식이 묻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불쌍한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불행한 사람인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불쌍하다고 동정해주어봐야 던져 주는 동전 몇푼에 먹을 것 한덩어리 였습니다. 이것은 인생에 있어서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몇푼 깡통에 돈을 받아 그것으로 먹을 것을 좀 사서 집에서 하루 저녁 따뜻하게 밥을 먹는다 하더라도 내일 아침이면 어제 직면했던 그 문제에 똑같이 직면해야 하는 그런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예수가 지나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이제껏 살아 오기를 사람들로부터 불쌍히 여기며 살아 왔던 이 사람이 사람이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것으로는 충분히 해결이 안되고 이 사람이 이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서서 라고 하는 처절한 부르짖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함으로서 자신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많은 문제는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있고 사람들이 우리들을 도와주어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결되는 문제들은 대부분 근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이 우리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입니다. 이 소경이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겨 달라는 이 야기는 예수님께 최초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동냥을 하는 사람들이 수 없이 하는 이야기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사람들의 자비심을 호소하며 동냥을 하면서 일평생 살아 왔지만 예수님께 부르짖으며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이 부르짖음은 아주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이 사람이 예수께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르짖을 때 예수님께서 던져 주시는 동냥을 바랬기 때문에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치지 않았던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 뒤편에 예수님이 멈추어서서 무엇을 원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때 이 거지의 대답은 명료 했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딱 하나 였습니다. 보고 싶고, 돈도 좀 주고, 옷도 좀 사 주시고 취업도 좀 시켜 주시고... 딱 하나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 자기 자신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예수께 가지고 나아가서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쌍히 여겨 달라는 이것은 어느 저녁때 때까리가 없어서 불쌍합니다 나는 외로워서 불쌍합니다 이것이 아니라 나는 내 힘으로 내 인생을 살아갈 수 없는 이러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이런 인생이 싫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라고 간절히 외쳤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자세가 필요 합니다. 만약에 우리의 기도가 우리 인생에 근본적인 문제에 집중하는 기도라면 아마 우리의 인생은 굉장히 많이 바뀔 것입니다. 여러분 경험해 보셨지만 사람은 기도의 주인입니다. 사람이 진실하면 절대 그 사람은 기도를 장난처럼 하지 않습니다. 진실하게 합니다. 사람이 열정적이면 기도도 간절하고 열정적입니다. 사람이 기도의 주인입니다. 그렇지만 기도를 하면 그 기도가 사람을 빚어 갑니다. 기도에는 그런 놀라운 효과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요. 처음에는 그 기도가 자기의 마음에 아주 깊이 와 닿지 않아도 주님 내가 충성스럽게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요 그렇게 계속 기도하면 그 기도를 건성으로가 아니라 매번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마음으로 기도하려고 하면 덜 충성스럽던 사람이 그 기도의 실천과정을 통해서 충성스러운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 나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변화 시키면서 흘러 나옵니다. 그래서 기도는 마음에 워낙 간절함이 있으면 큰 소리로 부르짖을 수도 있고 그때는 옆에 사람도 배려해야 겠지만 부르짖을 수도 있고 눈물 흘릴 수 도 있고 혹은 한나 처럼 입만 뻥끗 거리면서 기도할 수 도 있습니다. 누가 그 기도의 형태를 따라서 깊이가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종류는 다양해도 그 모든 기도의 진정한 힘은 마음의 얼마나 깊은 곳에서 충심으로 흘러 나오는 기도인가 거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마음 밑바닥에서 흘러 나오는 기도는 마음의 주인인 그 사람을 바꾸어 놓는 아주 놀라운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이 거지가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절히 탄원할 때 이 사람은 돈을 바라고 떡 한덩이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 예수님이 아니시면 해결해 주실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와서 주님께 간절히 매달리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기도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모든 방면에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아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우리의 들이는 여러 가지 작은 기도의 제목들이 그것이 최종적으로 무엇을 위한 기도인가에 연결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많은 기도들은 결국 커다란 목적이 없이 우리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필요에 따르는 기도에 불과하지 않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작은 기도의 제목과 근본적이고 큰 기도의 제목은 나무에 매달린 가지와 열매와 같습니다.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살고 본질적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운 삶이 둥지라면 거기에서 나오는 많은 작은 기도 제목들은 나뭇가지이고 그 기도의 응답은 거기에 맺힌 열매라고 비유하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열매는 가지에 가지는 몸통에 붙어 있을 때에 그 생명이 유지되는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크고 작은 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결국은 하나님에 의해서 응답되면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분명할 때 이 기도 제목들의 크고 작은 성취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도에 커다란 방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면 제자들이 오늘 분명히 말하는데 외쳐 다윗의 자손이 예수여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앞서 가는 자들이 저들을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앞서 갔던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닐까요? 또 뭐 제자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앞서 갈 만 하니까 예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복음전도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앞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렇게 가던 사람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큰 소리로 반복해서 외칠 때 제재를 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기도에 방해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함을 유지하면서 기도 하려고 할 때 이런 방해는 우리 안에서도 일어 나고 우리 밖에서도 일어 납니다. 우리 밖에서 일어나는 것은 환경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고 우리 안에서는 분주한 마음, 죄 지은 마음, 염려로 인해 갈라진 마음 그리고 정욕에 집중하는 하나님을 회피하는 마음 이 모든 것들이 기도에 전심으로 쏟아 붓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집중해야 하는데 이렇게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밖의 환경으로부터도 오고 우리 자신의 내면의 세계로부터도 옵니다. 이때 여기에서 우리들의 믿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간절함이 워낙 강하면 장애가 생겼을 때에 오히려 더 그 장애를 뛰어넘기 위해서 열정적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에 있어서만 그런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정도나 기도나 섬김이나 모든 것에 있어서 동일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초대 교회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왜 이단의 사상을 전하느냐고 불러다가 혼을 내고 그리고 두들겨 맞았습니다. 이렇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겠느냐 사람인 너희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옳겠느냐 하고 반역했습니다. 핍박이 오자 복음을 전하겠다는 마음은 제자들 마음속에 더 강렬히 타 올랐던 것입니다. 마치 기름으로 불 붙은 현장에 물을 확 끼얹으면 그 물 때문에 불길이 더 커칠게 솓아 오르는 것처럼 그렇게 마음에 열정이 있으면 간절함이 있으면 이런 장애를 뛰어 넘는 열렬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생활뿐만이 아니라 섬김에 있어서 복음전도에 있어서 모든 생활에 있어서 이렇게 우리에게 장애 요인을 나타나는 많은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섬기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을 멈추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하 장애물들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기도의 영, 은혜의 영이 얼만큼인지를 재어 보고 연약함을 알아 주님께 더 매달리라고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계곡에서 흐르는 물은 그 소리가 아주 아름답습니다. 어느 계곡에서도 같은 소리가 나는 법이 없습니다. 만약에 이리저리 튀어 나온 돌맹이와 깍여진 돌맹이가 없다면 그런 아름다운 소리가 나겠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기도속에도 이런 장애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는 것 조차도 주님을 의존하는 은혜 없이는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항상 이러한 장애가 나타나게 마련이고 이 장애를 뛰어 넘는 것 없이는 우리가 좀처럼 아름다운 응답의 열매를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러한 장애를 뛰어 넘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고쳐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꾸짖어서 잠잠하라고 했을 때 이 사람들이 결코 젊쟎게 소경님 소란스러우니 목소리를 좀 낮추어 주십시오 하고 예의 바르게 했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꾸짖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 사람이 잘못한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를 만났고 그 예수께 도움을 청하는 간절한 울부짖음이었을 뿐인데 책망을 받았고 그리고 잠잠하라고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장애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더욱 심하게 더욱 소리를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이 사람의 살아 있는 믿음을 크게 칭찬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굴복하고 억제를 당했을 상황에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실 분이 예수 그리스도 한분 뿐이시고 한번 지나가고 나면 다시 그 분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언제일지 모르겠다는 절대 절명의 마음으로 그분께 간절히 장애를 만났을 때에 더욱 심하게 소리를 지르며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것입니까? 우리들이 기도하고자 하는 결심을 하고 어려움이 생겼을 때에 쉽게 쉽게 접었던 많은 날들이 우리에게 부끄러움으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기도할 때 우리편 들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이렇게 육신이 힘이 듭니까?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려고 결심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염려할 일들이 생겨 나고 마음이 갈리고 상한 일들이 도처에서 발생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안 일어나는 때는 우리의 일생을 사는 동안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늘 일어나는 일 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환경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열렬한 뜨거움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의 기도가 멈추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음악가 가운데 드보르작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기차를 타고 가는데 기차가 칙칙폭폭 칙칙폭폭 가니까 달칵달칵하고 소리가 나지 않습니까? 장단을 맞추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벌떡 일어 나더니 소리를 지르면서 젊쟎은 음악가가 기관실로 달려 가면서 빨리 차를 멈추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놀래서 기관차를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내려다 보니까 불과 몇미터 앞에 기차길이 끊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혼란스러운 세상이었니까 별 사람들이 다 있었습니다. 끊어져 있었습니다. 옛날에 기차길 잘라 가는 도둑들도 있었습니다. 황당한 도둑이죠? 정말입니다. 전선을 끊어가고... 이북에 갔을때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전선을 그렇게 끊어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걸리면 사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끊고 저 쪽에서 감아서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옛날에 많이 있었던 도둑들입니다. 그래서 전기가 오르고 하는데... 그런데 똑같은 기관차 이야기 또 하나가 있습니다. 동구권이 공산화 될 때의 일이 었습니다. 하도 오래되서 나라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데 폴란드하고 연결이 된 나라인데 기차가 달리는 것입니다. 기차가 달리는데 이 나라에서 저 나라를 못 가게 국경이 워낙 넓으니까 담을 쌓을 수 없으니까 기차길을 끊어 가지고 이렇게 올려 놓았습니다. 그러면 그곳을 기차가 올라 가면 탈선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알고 저 멀리서 보면서 기차길이 위로 올라 갔구나 하고 탈주를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자유를 너무 그리워 하는 사람들이 기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사실을 강도도 아니고 기차를 탈취할 수 없으니까 가서 열차를 타고 기관차 운전하는 사람을 포섭했는데 작전을 짰는데 뭐냐면 이 기차에 사람을 많이 싣고 가속도가 많이 되게 하여서 멀리서부터 최고의 속도로 달리면 이 기차길 올라 온 것을 피면서 저쪽 선로에 닿아서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실화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기관차를 몰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차에 탄 사람들은 내려야 할 역이 여기인데 안 서고 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웅성웅성하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그때 이제 이 사람이 이야기 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나라를 탈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신들이 내리면 기차가 가벼워져서 넘을 수 없지만 안 내리고 우리와 생사를 같이 하면 어쩌면 이 철길을 넘어서 우리들이 탈출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난리가 난 것입니다. 우리는 내려야 겠다 싫다... 전력으로 달렸는데 결국은 기차가 이겼습니다. 달리면서 기차 철로를 펴면서 건너편의 철길에 닿아서 결국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탈출하게 된 실화가 있습니다. 우리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기도에 무게가 없고 열정도 없다면 속도도 없고 탄 사람도 없이 텅빈 기차라면 조금만 철길이 휘면 만약에 빈차로 몰고 갔으면 100% 뒤집힙니다. 그러나 만약에 거기에 기도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고 무게가 있고 달려가는 속도가 있다면 왠만한 장애를 극복하고 뛰어넘어가는 그런 능력이 기도속에서 나타 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기도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끈질기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드디어 예수님께 결국은 이 걸인의 외침이 들렸고 예수님이 이 걸인을 불러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랬더니 예수님이 보기를 원하나이다 간절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나이다 하면서 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쫒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평생 길바닥에 앉아서 동냥이나 하면서 살았을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쫒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 얼마나 커다란 변화 입니까? 기도는 이처럼 망막하고 아무 희망이 없었던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는 위대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간증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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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기도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 10:2).
이 사도행전 10장은 구속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장입니다. 왜냐하면 9장까지는 복음이 유대민족들에게만 전해졌는데 10장에서 일어나는 어느 한 사건을 계기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후에 일어났던 똑 같은 일이 이방인들에게도 차별없이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커다란 편견에서 벗어나게 되는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두가지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력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우선 첫째는 신학적 편견이었는데 이것은 나사렛에서 온 젊은이가 결코 메시아일 수 없다 라고 하는 사상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따르던 제자들, 복음을 받아 들인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깨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을 보면서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가 깨닫는 가운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무에 매달려 저주를 받았다고 믿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살아나게 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구원자 였다 라는 사상을 깨닫게 되면서 복음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도다 라는 복음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걷혀지지 않고 있는 또 하나의 편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심리적인 편견이었습니다. 이 편견은 민족주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 민족이 우리는 매우 특별한 하나님의 선민이고 나머지 민족들은 전부 다 개와 같고 이방인과 같다 라고 하는 사상입니다. 그런 사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 가니까 그것은 사실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먼곳에 섬겨 나가시지 않으셨지만 각종 이방인들까지 만나고 세리와 창기들까지 접촉하시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복음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실텐데 그러면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런 심리적인 편견이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속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공동체들 조차도 이러한 심리적인 편견을 강력하게 가지고 있었는데 사실 베드로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10장에서 깨뜨리십니다. 그런데 질서 있게 하나님이 저 교회에 있는 이름 없는 신자에게 먼저 알게 하시지 않고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를 직접 깨뜨리셔서 하나님의 뜻이 심리적인 편견에서 벗어 나는 것이다 라는 것을 알려 주셨는데 이렇게 베드로를 깨뜨리는 도구로 사용된 사람이 고넬료입니다. 이 사람은 직업이 이탈리아 라는 군대의 백부장입니다. 요즘으로 따지자면 군대의 대위나 소령쯤 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부자이고 높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이방인 이었는데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방인들중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 중에도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는데 복음의 깊은 도리에 대하여서는 아직 깨닫지를 못한 그런 사람이었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 집에 와서 사경회를 할 때 온 집안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복음을 들으면서 결국은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하는 이방인의 첫 번째 열매가 되는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장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이 새로운 시대를 여실 때 항상 하나님은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새로운 시대를 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보면 하나님이 누구를 사용하셨는가 하면 고넬료와 베드로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두사람이 왜 하나님께 그렇게 사용이 되었느냐 베드로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중에 머리 제자 였으니까 하나님이 사용하셨다 하면 되는데 그러면 고넬료는 천부장도 아니고 만부장도 아니고 무슨 우두머리도 아니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인데 이 사람을 왜 사용하셨을까 라는 의문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면 하나님이 역사가 바뀔때마다 사용 하시는 사람들이 겉 모습을 보면 여러 종류가 있을 것입니다. 정치인도 사용하시고 종교인도 사용하시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기도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보면 제일 먼저 무슨일이 생기는가 하면 고넬료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 되었다 그런데 지금 사람을 보내서 욥바로 가게 하고 거기에 베드로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가죽 만드는 사람인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에 거하는데 해변에 있는 집이다. 빨리 그 사람을 청해서 오게 하라 이것을 기도속에서 계시를 받았고 그 다음에 베드로를 부르러 사람들이 가까이 갔을 때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큰 보자기를 네 귀를 묶고 땅에 내렸는데 그 보자기에 온갖 땅에 내발 가진 짐승과 기는것, 공중에 나는 것 이런것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율법상 속하고 깨끗하지 않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먹으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율법에 깨끗하지 않은 물건인데 내가 어떻게 여태까지 먹지 않았고 지금도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왜 속되다고 하는냐? 세 번 일은 일이 있은 후에 그것이 하늘로 올라 갔습니다. 무슨 뜻인지 의문을 품는데 그 일도 기도속에서 일어 났습니다. 그리고나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나와서 자초지종을 설명할 때 그때 베드로가 비로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설득된 것이 아니라 아! 내게 일어난 그 일이 바로 그것이었구나! 그것을 깨달으면서 이제 베드로가 그 마지막 남은 심리적인 편견을 깨뜨리고... 골수 유대인 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뜨리고 그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할 때 놀랍게도 유대인들이 모여서 말씀을 들을 때 임하였던 것고 똑 같은 성령이 똑같이 임해서 그들 모두를 충만하게 해 주시는 것을 경험 합니다. 그것을 깊이 경험하면서 완전히 이 사람의 눈이 열리면서 신학적 편견이 깨뜨려져 예수가 메시아 이신것을 깨달은 것이 심리적인 편견이 깨뜨려져 결국 메시아는 유대인이 메시아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메시아이고 이방인들도 이제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이 바로 이런식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구나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사용하셔서 자기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형극 보셨습니까? 요즘 인형극이 매우 발달해서 우리가 옛날에 보았던것 하고 완전히 틀립니다. 특수효과까지 집어 넣어서... 그래서 보면 까만 박스에서 인형들이 움직이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위에서 여러명이 끈을 들고 움직이면 팔도 움직이고 입도 막 움직이고 발도 막 움직이고 이러는 것처럼 겉으로 볼 때에는 저 사람이 일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줄을 사용하셔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하시고 어름처럼 얼었던 사람의 마음을 녹이기도 하시고 또 때로는 하나님께서 막으셨던 인생의 길도 열어 주시고 환경도 바꾸시고 많은 일들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일을 하실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쨎든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주목해 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사람의 기도를 왜 그렇게 기뻐하셨을까? 사실 여기에 보면 무엇을 기도했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하나님이 기도속에서 이 사람이 무엇을 위해 기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기도를 매우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근거가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신 이유 몇가지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옵니다. 우선 첫째는 그 사람이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이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그 사람의 내적인 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외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을 향해서 들어나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의 마음의 질입니다. 그것이 말과 마음과 행동 이 세가지로 밖으로 표출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렇게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경건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데서 오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마음의 특징들입니다. 이것을 소유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삶은 아무렇게나 살고 기도만 열렬하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열심을 보며 기도를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떼어 놓을 수 없이 삶과 기도는 놀라운 일치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하나님께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기도를 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번에는 이 사람이 주님이 보실 때 경건한 사람이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이 자기를 죽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았을지 생각해 보십시요. 그래서 이 경건은 하루아침에 생겨 나는 것이 아닙니다. 시작은 회심과 함께 시작되지만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자라면서 그러면서 경견의 특징들을 갖게 되는 것이니 여러분 자신이 기도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바 그 사람이 경건하면 그 마음의 울림통에서 울려 퍼지는 기도도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사람의 신앙의 영향력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했습니다. 예수 열심히 믿어도 집안에서 아무 설득력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주일날 교회 가는 것 빼고는 나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생활을 하는 그런 세상사람 같은 교인 이것은 거룩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직장에서도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는 선교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온 집이라고 했으니 가족들은 물론이고 또 그 집안에서 수종드는 노예들에 이르끼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신앙이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의 영향력 때문에 자신만이 아니라 그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경외의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이 경외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떠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두려워 떨면서도 그에게로 이끌리는 말할 수 없는 사람의 이끌림을 함께 가르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우습게 보거나 방종하지 않고 주님을 두려워 한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 앞에 율법적인 자세를 가지고 사람으로부터 멀어진 종과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도 아닌 경외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런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을 아울러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유독 사용하셔서 그이 기도를 들어 주셔서 이방 선교의 새 장을 기도속에서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백성을 많이 구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의 백부장이 어느 정도 부를 누리며 살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쨎든 나름대로 사회에서 자기 이름값을 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세상의 권력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여유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때 이 사람은 백성을 많이 구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많은 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구제하던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된 이 사람의 생활을 보게 됩니다. 야고보 선생은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참다운 경건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사람은 신행이 일치되고 언행이 합일을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을 긍휼히 여기며 많이 베풀던 구제의 사람이었습니다. 정욕과 욕망이 세상에 묶여 있는 사람은 왠만하면 남을 위해서 물질로 희생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로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누구나 많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께 속하고 꿈이 하늘나라에 있는 사람들은 보배가 거기에 있기에 그 마음을 따라서 사람들에게 구제합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들에게 많이 베풀어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꾸어 주는 것이요 또 하늘나라를 위해 썩지 아니하는 상급을 쌓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신행이 일치된 희생이 있는 생활을 하는 고로 하나님이 이의 기도를 들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똑같이 옳은 기도를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의 기도를 더 기쁘게 받으십니다.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하던 이 고넬료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었는데 오늘 굳이 부사 하나를 덛붙입니다. 그것은 항상 기도하더니 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만 했다라는 의미이기 보다는 또 그랬을리는 없습니다. 백부장으로 나라를 위해 많은 임무를 감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항상 기도했다는 이야기는 그의 마음의 늘 기도의 영안에서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의 통치를 그리워하는 심령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을이 되면 벼를 말려서 털어 버립니다. 그리고 찧으면 쌀이 되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겨울이 가까워 오면 그것을 한가마 사서 아랫목에 놓으면 권위가 섰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동지쌀을 사서 먹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재미 있는 것이 처음 쌀을 들여 왔을 때에는 쌀가게에서.. 그러기 보니 쌀가게가 없어 졌습니다. 그죠? 옛날에는 쌀가게가 꼭 있었는데... 이번에 캄보디아에 가서 들은 이야기 인데 얼마나 쌀이 많은지 우리가 뭐든지 아낌없이 쓰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거기에 속담이 있는데 쌀 쓰듯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쨎든 쌀가마에 쌀을 가득 담고 쌓아 놓았을 때 쌀의 질이 어떤가 하고 호크로 찔러 보지 않습니까? 확 찌르면 쌀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 쌀을 이렇게 보면서 좋은 쌀이 구나 나쁜 쌀이구나 판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반가마짜리 쌀에는 이것을 꽂아도 쌀이 안 나옵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하면 항상 기도하였더니 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어느 상황에서 언제든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도록 기도의 영으로 이 사람이 가득 차 있는 상태를 이 사람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모이지 말라고 했는데 제일 찜찜 했던것이 중보기도 모임입니다. 환란이 오면 기도하는 사람들이 더 열심히 기도를 해야 하는데 도망을 가 버리면 도대체 이것을 누가 하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랬습니다. 아픈 사람들만 나오지 말라 하고 그리고 건강한 사람들은 위원장을 중심으로 모여서 열심히 기도를 하자고 하자 그렇게 기도를 해야지 다 도망가도 기도 하는 사람들은 도망가지 말아야지 아픈 사람들은 도망 간 것이 아니라 집에서 기도하고... 성한 사람은 나와서 기도를 해야지... 그래서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라 사실 내가 그것을 지시 하지 않았는데 아침에 광고가 나왔습니다. 위원장에게 문자를 돌리라 해서 아픈 사람은 오지 말고 집에서 기도하고 그리고 아프지 않은 사람들은 모여서 더 열심히 기도를 해라 그래야지만 더 큰 환란의 때도 오는데 그 정도 가지고 건강한 사람들이 도망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기도가 마음에 꽉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상황이 기도해라 하고 누르면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고넬료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사람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즐겨 사용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의 마지막 질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실까요?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그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셔도 기도하는 사람은 순종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도 성질 못된 사람이 있습니다. 성질 못된 사람은 이것 좀 하세요 하면 또는 부모가 자식에게 너 이것 좀 해라 하면 성질이 못된 사람은 은혜를 받아도 왜 내가 해야 해요? 왜 나만 시켜요 나만 힘들게... 그런데 기도 안 하는 사람은 그냥 그것으로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 하는 사람은 집에 가서 기도를 해서 마음속에서 깨달음이 오는 것입니다. 네가 엄마에게 그러면 되냐? 네가 목회자에게 그러면 되겠냐? 네가 네 자식에게 그러면 되겠냐? 그것은 너의 못된 성질머리 아니냐?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하고 그 다음날 새벽에 다시 기도를 해보면 더 크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뭘 물어 보냐? 잘못된 것이지... 그러면 그 다음에 연락해서 엄마 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뭐야? 아니면 목사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애들아 아빠가 어제는 잘못 생각한 것 같다.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언제든지 고쳐질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본성적으로 아무리 착해도 한번 아닌 것은 끝까지 완고한 고집 속에서 아니다 하고 못 박고 기도의 세계가 없으니까 그것이 교정되거나 바뀔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한번 마음에 꽂히면 그대로 죽든지 사라지든지 계속 가는 것입니다. 독일 장교하고 프랑스 장교하고 서로 자기 부하가 말 잘 듣는다고 서로 다투었는데 독일 장교가 이겼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가! 하고 프랑스 장교하고 계속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제자리에 서! 이렇게 하고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앞으로 가! 하고 계속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계속 하는데 절벽이 나오는데 하나 둘씩 계속 내려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어리석음으로 명령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교만한 자들은 자기의 생각으로 하나님께 강요해서 때로는 하나님을 협박까지 해서 하나님이 이 기도를 안 들어 주시면 저의 신앙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협박까지 해서 그래서 자기의 요구 사항을 관철시키려고 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언제든지 하나님에 의해서 꺽일 준비가 된 사람, 변화될 준비가 된 사람 이런 사람들이 항상 기도이 영으로 꽉 차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이 사람을 사용하셔서 기도속에서 이방인 선교의 첫 열매가 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백명의 군대를 거느리면서 사람들을 멸시 하면서 살았더라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 사람이었지만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의 사람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이 사람을 사용하셔서 이방인 선교의 위대한 첫 위대한 이삭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끝날까지 이 사람의 이름이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방인중의 한 사람으로서 이 고넬료의 신앙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지위에 있어서는 기왕에 일등을 못한 것을 어떻합니까? 재산을 모으는데 있어서는 앞으로는 모르지만 아직은 일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앞으로 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등의 기도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1